#201
2차 대륙 정상 회의 (2)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 원래는 용병이라지? 내 비밀리에 의뢰를 하나 하고 싶네만."
자신의 거처로 할리를 데려온 대주술사 모르나가 그에게 마실 것을 내어주며 꺼낸 첫마디였다.
"뭐, 나야 조건만 맞는다면 얼마든 환영이지!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는데, 일단 그거 먼저 물어도 되겠소?"
"끄끄끌— 물론, 얼마든지."
그의 시선이 구석 자리에 앉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젊은 여성에게로 향했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육중한 근육 덩어리가 한껏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건만, 그녀는 마치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시선이 미묘하게 엇나가 있었다.
"···저 아가씨는 저기서 뭘 하는 거요? 주술사라 귀신이라도 보는 건가?"
"아아— 저 아이는 내 보좌관인데, 그냥 혼자 어제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뿐이라네. 신경 쓰지 마시게나. 끄끅끅끅!"
"거참, 알 수 없는 양반이로구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에게 의뢰를 제안하는 저의가 뭐요?"
그는 모르나에게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미 그녀가 할리를 추천했었다는 것과 남부의 상황까지 다 알고 있는 마당인데 이제 와서 의뢰라니, 영 구린 냄새가 나지 않는가.
"끄흠··· 주술사라는 존재는 말일세, 이성이 중시되는 마법사와는 달리 감성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지."
"허어— 그래서?"
"단적으로 말해, 나 정도 되는 주술사는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것도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뜻일세. 자네의 몸에 남은 이런저런 흔적들은 물론, 인연과 운명 등의 추상적인 개념까지."
자신의 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할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과거사는 '할리의 대모험'을 통해 주변인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한데다, 요즘 워낙 설치고 다닌 터라 딱히 이제 와 숨길 일도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자네를 결사대에 추천했던 것도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네. 어차피 그건 당사자가 원치 않는다면 거절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니었겠나?"
"거참,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날 만날 필요가 있었소? 아니, 애초에 1차 회의 때는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말았던 거 같은데?"
"···끄흐흘, 그게 그리 간단한 상황이 아니었단 말이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모르나가 씁쓸하게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자네를 보고자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네. 툴크 왕국에서의 활약상을 들었을 때부터 느낌이 딱 왔거든. 자네야말로 지금 칼코스가 처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예컨대 그저 '대주술사로서의 직감'일 뿐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할리를 직접 마주한 순간 그 직감은 확신이 되었고, 기회를 노리다가 지금에서야 접촉하게 되었다며 말을 덧붙였다.
'칼코스의 문제라는 건 쿠데타를 말하는 거겠지? 아무래도 이 노인은 그쪽과는 반대 입장인가 보군.'
그의 예상대로 의뢰 내용은 대륙 남부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그 주모자를 처치하는 것이었으며.
그에 대한 보수가 바로 대주술사로서 해줄 수 있는 주술 전반과 그 외의 도움이었다.
"일단 자네의 관심을 끌려고 투왕 이야길 꺼내긴 했네만, 사실 그건 그리 추천하지 않네. 대전사의 각인까지 새겼으면 각인을 새기는 조건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그에 합당한 업 말이군! 대전사가 되는 게 오우거를 단신으로 처리하는 거였지?"
"끄끅끅··· 오우거라, 그야말로 최소한의 기준이군. 물론 지금의 자네라면 그 이상이더라도 쉽게 해내겠지만 말일세."
작게 실소하던 모르나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자네의 몸에 흐르는 생명력은 투왕의 각인을 새기기엔 충분해. 솔직히 용인이라는 걸 감안해도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긴 하지만···. 허 참,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괴물이 되었군. 그동안 뭐 몸에 좋은 거라도 주워 먹었나?"
그녀가 대주술사가 되어 접한 문헌에는 용인에 대한 정보도 남아 있었다.
그것에 따르면 그들은 인간보다 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 강함의 원천은 타고난 마력에 대한 재능이지 할리처럼 무식한 생체력이 아니었다.
"···뭐 그건 넘어가더라도, 시술받는 당사자에게 가해지는 부하도 상상 이상이라고 하네. 전승으로는 대전사의 각인을 새길 때보다 백배는 더 고통스러웠다고 하더군. 수백 년 전의 마지막 투왕이 직접 남긴 기록이니 믿을 만할 걸세. 끄끅끅."
하지만 그 말에도 할리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무안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아까 얘기했던 합당한 업이지. 투왕의 각인은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 부작용 정도로 끝나지 않아.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죽어버릴 테니까."
"거 아까부터 말을 빙빙 돌리는데, 뜸 좀 그만 들이쇼! 나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끄잉, 거 노인네의 즐거움을 뺏어가는구만."
잠시 툴툴거리던 모르나는 할리의 눈총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만, 그녀가 말한 업의 조건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시련이었다.
"···바로 성체 이상의 드래곤을 직접 사냥하는 것일세! 그것도 그냥 다수의 싸움에 끼는 것 정도론 안 돼. 치명상을 입히는 건 기본이고 자네의 손으로 그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까지 만족해야 업으로 인정되지!"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말이다.
"물론 자네가 용인이고 요즘 드래곤은 찾아보기도 힘든 만큼, 비슷한 급의 상대면 무엇이든 상관없···."
"아, 뭐. 그건 됐고! 어쨌든 해 줄 수는 있다는 거지?"
"···엉? 그거야 그렇네만···.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업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아니, 잠깐."
묘하게 자신만만한 할리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잇던 그녀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기묘한 귀기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아니 이건 또 뭐야?"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용인이라기에 용의 업이 끼어있어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건 그냥 용이 아니라 용살(龍殺)이잖아?"
"허? 그걸 알아본다고?"
과연 대주술사라고 해야 할까.
그에게 처음 각인을 새겨주었던 주술사 노파는 오우거 부산물을 보고서도 반신반의했건만, 모르나는 그저 집중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조건을 만족했는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용인이 용을 죽였다고? 그것도 이 정도 수준이면 그냥 성체 드래곤이 아니구만? 치명타는 물론 숨통을 끊은 것도 맞고. ···자넨 대체 정체가 뭔가?"
시종일관 뭔가 달관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도 이번엔 진심으로 당황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였다.
'그때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광룡 헤라토스와의 싸움에서 놈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심장은 물론 드래곤 하트까지 죄다 뜯어먹었던 할리였다.
필요한 조건을 만족한 것도 당연한 일.
"크하핫—! 그거야 뭐 어찌 되든 좋은 일 아닌가! 어쨌든 이걸로 대충 서로 원하는 바를 알았으니, 좀 더 자세한 이야길 해 보자고!"
때마침 그도 부족 연맹의 상황을 보고 어떻게 개입할지 벼르던 참이었다.
평소 남부 야만 전사를 표방하고 있던 만큼 조만간 방문할 생각이기도 했고.
그러니 이참에 칼코스의 고위직인 모르나에게 정보를 얻어 남부에 카르마 빨대를 꽂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아 참, 노인장. 선금은 별도인 거 알지?"
물론, 계산은 확실히 하고 나서.
***
대주술사 모르나는 이런 복잡한 방법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처럼 대신전 내부에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행적이 실시간으로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독재가 문제 되어 축출되었던 전대 대족장이 부족 연맹을 집어삼키는 중이란 말이지? 그것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그녀의 이야길 들어보니 그 수준도 범상치 않았다.
각 부족의 족장들에게서 인질과 약점을 잡은 건 물론, 정신 제압까지 동원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니···.
'아무리 족장을 비롯한 고위층들만을 노렸다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했다는 건 확실히 보통이 아니군.'
그 와중에 대주술사인 모르나도 가족과 제자가 인질로 잡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그녀가 부족 연맹의 대표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 제압이 통하지 않은 고위층 중에선 그녀가 가장 협조적이어서라고.
'보좌관이 따로 감시자로 붙긴 했지만 말이지. 그나저나 그렇게까지 한다는 건, 놈들에게 확실히 켕길만한 뭔가가 있다는 소리겠지?'
회의 장소는 주신교단의 성지 한복판이자 성자와 성녀가 함께 있는 대신전이었고, 참가자들 중에는 대마법사들을 포함해 여러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이들도 많았다.
당연히 무언가 문제 있는 이라면 꺼려질 수밖에 없는 환경.
그 와중에 모르나가 교단이 아닌 할리를 선택한 것은 본인의 말대로 '대주술사의 감'인지 뭔지가 단단히 한몫한 것일 터였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주술사들의 존재 때문에 주신교단의 영향이 크지 않은 남부인데, 지금처럼 대륙이 멸망의 기로에 선 상황이면 큰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겠지.
'그런 면에서 그 할머니가 의뢰 상대를 잘 찾아오긴 했어.'
내부자의 도움으로 정보 문제도 해결된 이상, 이제 그에겐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지만··· 사실 남이 만들어 놓은 판을 박살 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전 대족장 발테온.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혼란을 틈타 온갖 더러운 수작을 부리며 야욕을 부리는 자. 대놓고 냄새가 나는군.'
···그것이 할리가 직접 움직인 것이든.
'그러고 보니 시아나가 그랬었지. 남부에 숨어있는 간부가 심연의 문을 열었다고.'
때마침, 부득이하게, 매우 우연찮게도— 불사왕이 직접 움직인 것이든 말이다.
'잡았다, 요놈.'
길게 찢어진 할리의 입가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사납게 번뜩였다.
***
웅성웅성—
거대한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무리를 짓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친근한 듯 다른 무리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경계하며 교류를 피하기도 하고, 본심을 숨긴 채 웃으면서 상대의 약점을 찾거나 허세를 부리며 자신을 부풀리는 등.
말 그대로 복잡한 현 세계정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때···.
덜컹—
커다란 문이 열리며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회의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은 이들.
그 선두에는 황금을 실로 뽑은 듯한 찬란한 금발과 보석처럼 빛나는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황녀님. 좋은 아침입니다."
"역시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이거 눈이 부실 지경인데요? 허허허!"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슬금슬금 그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미 요 며칠간 꾸준히 인사하며 나름의 친분을 다지기도 했으나, 그건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강자와 '남들보다 더' 친해 보이는 것이었으니,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야말로 대륙 최강국인 아제리온 제국, 그곳의 현 1순위 황위 계승권자인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이었으니까.
"모두 반갑습니다. 논의할 게 많아 늦게까지 늘어질 수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다들 잠은 잘 주무셨는지 모르겠군요."
"하하하! 물론이지요! 제가 체력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황녀님께선 괜찮으십니까? 나중에 피곤해지시면 제가 교단 측에 휴식 시간이라도 요청하도록 하지요."
슬쩍 옆에 따라붙으며 듣기 좋은 말만 반복하는 이들.
그들도 각자가 온 곳에서는 최고위층에 속하는 이들인 만큼 노골적으로 굽실거리진 않았으나, 차기 황제라는 이름값은 평소 그들의 높은 콧대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했다.
라일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도 사무적으로, 그렇다고 너무 차갑지도 않게 그들을 대했다.
기회주의자들을 다독여 제 편으로 만드는 것은 그녀가 요 몇 년간 숨 쉬듯 해왔던 일이지 않은가.
타국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그리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속으로는 각자의 꿍꿍이를 품고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던 대회의장에.
덜컹—
다시 한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엇?"
"저들은···."
그리고 그 소리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이들은 제국 측 사절단이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게,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번진 반응에 언제 화목한 분위기가 흘렀냐는 듯, 곧 싸늘한 정적이 감돌기 시작한 대회의장.
저벅저벅—
그 침묵 속에서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는 무리의 발자국 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하나같이 어두운 복장을 한 채 내부로 들어서는 그들의 선두에는, 어둠을 실로 뽑은 듯한 칠흑 같은 흑발과 보석처럼 빛나는 핏빛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남성이 있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위압적인 존재감을 흘리면서.
꿀꺽—
"······."
"으음, 과연···"
그의 뒤편에서 열을 맞춰 선 채 따라오는 이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긴 마찬가지.
그들이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왠지 모를 싸늘한 한기와 함께 은은한 피비린내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군. 저들이.'
사람들의 중심에 있던 라일리 황녀가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빛냈다.
그래, 저들이야말로 새로운 변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탈리아 왕국의 사절단이자 뱀파이어 클랜 연합, 하이브리드의 뱀파이어들이었으니까.
어둠 속에 숨어 살던 그들이 마침내 빛의 상징인 주신교단의 심장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202
2차 대륙 정상 회의 (3)
싸늘해졌던 대회의장의 분위기는 탈리아 왕국 사절단이 한쪽 구석에 착석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크흠, 그래서 말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다시 하나둘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군중들.
다들 뱀파이어의··· 강자의 청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고 있었기에 대놓고 그들에 대해 떠들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은 각자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연신 구석을 힐끔거렸다.
'탈리아 왕국의 새로운 지배자, 하인즈 하이브리드 2세. 브로코슬락 클랜 출신의 뱀파이어로서 성혈의 위(位)에 오른 자.'
이곳의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각국을 대표하는 이들인 만큼 이미 충분한 정보를 숙지한 상태였다.
당연히 하나의 왕국을 집어삼킨 뱀파이어 집단에 관해선 물론이고, 그 수장인 하인즈에 대해서도 알 만큼 알고 있을 수밖에.
물론 아까의 경직되었던 분위기는 미리 상대를 알고 있다고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뱀파이어란 타인의 피를 갈취하며 생을 이어가는 포식자였으니.
그런 상대에 대한 꺼림칙한 감정에 더해, 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세가 본능을 자극함으로써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라···.
스윽—
"음? 프리스틴 자작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황녀님."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 이세아가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던 라일리 황녀의 뒤편으로 바짝 다가붙었다.
그에 라일리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자리를 지켰다.
여전히 뱀파이어들··· 정확히는 하인즈 2세를 경계하면서.
설령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강해. 초격은··· 막을 수 있을까? 대신전의 결계도 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그래도 시간만 끌면 이후엔 교단에서 나설 테니 그 방향으로 대비를···.'
저들에게 생각이 있다면 교단의 심장부에서 문제를 일으킬 리가 없겠으나, 원래 마법사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준비하는 자였다.
또 얼마 전엔 자신이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일리가 불사왕에게 납치당하는 불상사가 있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매사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그때,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던 하인즈의 눈길이 슬쩍 이쪽으로 향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는 듯 금방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그 짧은 순간 이세아의 머릿속엔 온갖 종류의 마법이 구조를 이뤘다 해체되길 반복했다.
'···칫, 놀라게 하고 있어.'
그 찰나의 시선이 지나간 후.
그녀는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도 경계를 늦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극의를 넘어서며 트인 직감이 저 상대에게선 잠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는 그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강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었다.
"끄흐흘—. 과연 대단하구만."
뒤쪽에 예의 그 감시역인 보좌관을 달고 있는 칼코스의 대주술사 모르나부터 시작해서.
"흐음··· 이거 흥미롭군. 이만한 존재감이라. 역시 명성대로야."
이젠 문헌으로만 남은 성혈의 등장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빛내는 마탑 연맹의 맹주에.
"정말, 이쪽 대륙은 하나같이 만만한 게 없군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라포리 님."
"하하하··· 저야 그간 교단과 대화를 한 게 전부이지 않겠습니까. 저보다야 앞으로 고생하실 리디아 님이 더 걱정이지요."
에나멜 대륙에서 건너온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들과.
"킁! 이거 영 찝찝한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와일드 랜드의 수인 대표 라이오넬 등.
그 외에도 각국 사절단의 호위로 온 강자들은 하나같이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마치 폭탄이라도 보는 것처럼 뱀파이어 무리를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하인즈는···.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는데, 이건 생각 이상이네. 역시 기세는 조금 감출 걸 그랬나?'
그런 태평한 생각을 이어가며 진중한 표정으로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기선제압을 위해 일부러 존재감을 과시하긴 했는데 너무 과했었나 싶어서.
아는 얼굴이 보여 별생각 없이 이세아에게 시선을 향했다가,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활성화되는 그녀의 의념에 그도 서둘러 눈길을 피해줘야 했을 정도였으니.
정말 그가 어지간히 위협적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쯧, 무슨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이쪽을 힐끔거리기나 하고. 감히 하이 로드님께 하는 짓들이 무례하기 그지없군요."
"뱀파이어가 이렇게 양지에 나와 성지에서의 행사에 참여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니 그럴 만도 하지. 특히 하이 로드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성혈이시지 않은가?"
"그건 그렇긴 하지만 말이죠···."
그들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한 병풍 겸 수행인으로 따라온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이 혀를 차며 투덜거리자, 마찬가지로 보좌관으로 따라온 뮬로가 그녀를 타일렀다.
아무리 하인즈 2세가 성혈이라지만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선 진혈급에 해당하는 강자도 몇몇은 이곳에 동행할 필요가 있었다.
뮬로는 정보를 담당하는 만큼 이런저런 일로 쓸모가 많을 것 같아 데려왔고, 무투파인 프리지아는 최근 반란 모의자들을 쓸어버린 직후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기에 적당히 집어 왔다.
'내가 일하는데 밑에서 노는 꼴은 못 보지. 또 프리지아는 한때 귀족 영애 행세를 하며 지냈으니 대외 활동에도 익숙할 테고.'
정작 당사자들은 개국공신인 브로코슬락 출신을 총애한다며 오히려 기뻐했지만.
그래도 서로 만족한다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물론 명색이 국가를 대표하는 사절단이니만큼, 이 자리엔 실질적으로 실무를 볼 이들도 같이 따라온 상태였다.
"아, 교단 측이 입장하는군요. 이제 회의를 시작하려나 봅니다. 그럼 중앙 원탁까지 모시겠습니다, 하이 로드. 함께 가시죠."
1차 회의 때엔 대표로 참석했었던 브라이트 공작.
전보다 훨씬 젊어진 듯 팽팽한 피부를 가진 그가 하인즈에게 공손히 고개 숙이며 한 손을 대회의실 중앙으로 뻗었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단번에 순혈의 뱀파이어가 된 그는 회의의 실무 책임자로 2차 회의에도 함께하는 중이었다.
"흐음, 그럼 가볼까."
그렇게 하인즈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각자 무리를 지은 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각 세력의 대표들이 하나둘 중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탐색하는 듯 경계하는 듯한 시선들이 순식간에 사방을 오갔지만.
다행히 큰 소란 없이 모두 각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한창 바쁘실 터인 지금, 이렇게 시간을 내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회의장의 안으로 들어선 리에스타와 하인리히, 코델리아 추기경이 중앙에 둥그렇게 둘러진 테이블의 빈 곳에 나란히 앉은 직후.
"그럼, 2차 대륙 정상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1차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코델리아 추기경의 짧은 인사말과 함께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하인즈는 가만히 팔짱만 끼고 있었다.
아직까진 딱히 그가 나설만한 일이 없었으니.
회의의 진행은 1차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체적인 주제는 이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든 힘을 모아 위기를 헤쳐 나가자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첫 번째로 이전에 논의되었던 대륙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창설되었고, 교단과 마탑 등의 공조를 통해 즉각 어디든 파병할 수 있는 체계도 다졌다.
그렇게 결정된 그들의 첫 파병지는 수도만 남아 근근이 버티고 있는 로한 공국.
그렇지 않아도 힘든 상황이었던 그들은 얼마 전에 출몰한 백색 거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이젠 추가적인 지원이 없다면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마저 힘들 지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러분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 결정에 데니스 로한 대공자가 해쓱한 얼굴로 애써 미소 지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젠 국토를 수복하는 건 어림도 없어진 만큼, 연합군의 목적은 단순히 로한의 난민들이 무사히 제국으로 피신할 수 있게 돕는 게 전부였지만···.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런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다음으로 논의된 화제는 바로 그 '백색 거인'에 대해서였다.
"이번에 저희 공화국에서도 그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최대한 빨리 대응해 토벌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민간은 물론 수많은 장병의 희생이 있었지요."
그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발언한 중년 여인, 제피아 공화국의 부통령 케일라 맥클레어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얼마 전에 발생한 참사에 상당히 골머리를 썩여야 했는지, 거칠어진 손으로 연신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성자님께선 불사왕의 공격 목표를 미리 예지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 거인의 출몰을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것만 사전에 파악할 수 있으면 앞으로의 피해를 훨씬 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아직 제가 많이 부족한지라 예지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지 않습니다. 심연의 상흔을 넘어 침략해 오는 거인은 아직 제 역량 밖이라고밖에 말씀드릴 수 없군요."
"그렇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괜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성자님. 그걸 예지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실 텐데, 괜한 투정으로 심려를 끼쳐드렸군요."
그 말을 끝으로 케일라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하인리히도 마주 고개를 숙이며 내심 고민에 빠졌다.
'최소한 놈의 등장 직후에 곧바로 그 사실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용사 파티가 직접 나설 수도 있을 텐데.'
그가 미리 '예지'할 수 없는 사건에 용사 파티가 빠르게 개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문제가 발생하고 그 사실이 교단에 전해진 후, 그걸 다시 교단에게서 전달받은 하인리히가 이세아를 통해 목적지의 좌표를 산출해 이동할 시간이면···.
'운이 좋다면 늦지 않게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운에 기대느니 차라리 각국이 최선을 다해 대응하는 게 훨씬 더 빠르지.'
이건 그에게도··· 정확히는 할리에게도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색 거인을 직접 처리할 수 있으면 놈의 핵도 추가로 섭취할 수 있을 텐데, 그만한 기회를 놓치는 것도 영 아까운···.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상념을 끊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여러 시행착오 끝에 최근에서야 가능하게 된 수단이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미리 예지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놈이 지상으로 넘어오기 위해 심연의 상흔을 통로로 이용하는 순간—."
바로 그의 옆에 앉아있던 주신교단의 성녀, 리에스타였다.
"그 순간을, 제가 포착할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한순간 밝은 이채가 감돌았다.
그 눈을 보는 순간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리에스타한테 그런 능력이 있었지.'
엄청나게 광범위한, 마(魔)를 추적하는 축복.
한때 그걸 피하겠다고 한스가 온갖 생고생을 했었다.
덕분에 지금은 거의 완벽한 은폐 능력을 얻어 지구에서도 쏠쏠하게 써먹고 있다지만.
'그런데 세상에 퍼진 광기 때문에 그걸 사용하는 데에도 상당한 제약이 생겼다고 하지 않았나?'
거기다 거인은 신성력에 대한 저항력도 강해서 쉽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그간 그녀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오! 과연 성녀님이십니다!"
"확실히,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보단 훨씬 더 피해를 줄일 수 있겠군요."
"그럼 가장 효과적으로 거인에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고 그 희소식에 다른 이들도 모두 기뻐하고 있을 때, 하인리히는 아까 하던 생각을 마저 이어서 하고 있었다.
'어라? 이렇게 되면 정말로 거인이 등장하기 직전에 곧바로 알 수 있잖아?'
그것도 놈이 등장하는 정확한 좌표까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경우에 그걸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한 가지 문제가 선결되어야 했는데.
생각 끝에 어느 한 결론에 도달한 하인리히가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리에스타를 바라보자.
마침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성자님? 저도 성자님과 함께 행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사람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직접 위험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말을 담담하게 내뱉는 성녀.
이미 성자가 이끄는 결사대에 성녀까지 참가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교단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의 말을 들은 하인리히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조금 뜬금없는 것이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행정 업무가 하기 싫었나 보구나.'
물론 불현듯 떠오른 것일 뿐이니,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약간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203
2차 대륙 정상 회의 (4)
이온 대륙 서북부에 위치한 툴크 왕국.
샤아아—
어느 도시 한복판에서 제법 넓은 영역에 반짝이는 빛 가루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별세계라도 된다는 듯 은은하게 빛나는 하늘과 반투명하게 아른거리는 건물들, 그리고 규모에 맞지 않게 인기척 하나 없는 거리.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경관은 마치 환상 속의 나라라도 되는 것처럼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이 빛의 도시엔 마냥 감탄에 젖을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콰아아앙!
쿠웅—!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도시를 때려 부수고 있는 커다랗고 새하얀 이웃이 있다는 점이었다.
[———!]
거인을 중심으로 기이한 울림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소리를 내지르기 위해 필요한 코와 입이 전부 틀어 막혀 있었으나, 놈은 그 억눌린 소리에 담긴 파괴적인 에너지만으로도 주변에 심각한 피해를 줄 능력이 있었다.
물론, 이 공간 안에서—.
"이제 끝내도록 하지요. 할리 님, 부탁합니다!"
"으하하하! 이제 그만 얌전히 누워라!"
그것에 영향을 받을 만큼 나약한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
그리고 이미 상당한 전투를 거치며 다리가 너덜너덜해진 백색 거인은, 자기 무릎 어림까지 오는 덩치가 전력을 다해 들이박으며 사용한 다리 후리기를 버틸 재간이 없었다.
쿠우우웅—!
어마어마한 소음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진 커다란 거인.
그 충격에 주변에 널려있던 반투명한 건물들이 일제히 흩어지긴 했으나, 그것에 신경 쓰는 일행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바닥에 쓰러진 거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목이 잘린 채 머리가 쪼개지는 신세가 되었고.
까드득!
그 머릿속에서 나온 주먹만 한 핵은 할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신기하네요.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말이죠."
핵이 사라진 거대한 백색 거인의 사체가 말단에서부터 서서히 부스러지고 있을 때.
하나둘 집결하기 시작한 일행들과 함께 할리에게 다가오던 리에스타 성녀가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심연의 광기를 통제하고 있군요. 종족 특성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요?"
"으음, 글쎄올시다? 그냥 되던데 말이오! 으하하핫!"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웃기만 하는 그를 지그시 응시했지만, 겨우 그런 식으로 할리의 비밀을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뭐,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되는 거겠죠. 주신께서 용인하셨으면 뭔가 이유가 있는 걸 테고!"
결국 아쉽다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고개를 저으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이르게 끝났군요. 성녀님의 결계 덕분에 민간의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었고 말이죠. 도시 안에서의 싸움이라 상당히 곤란했는데 말입니다."
"아, 성자님. 저보다야 저런 커다란 거인을 쓰러뜨린 여러분이 더 대단하죠! 저야 그저 약간의 도움만 드렸을 뿐인걸요?"
"애초에 놈의 등장을 곧바로 알아채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성녀님 덕분이지 않습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늦어서 거인이 이만한 도시에서 날뛰기 시작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할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여는 하인리히의 말대로.
한창 정상 회의에 참여하던 그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때마침 리에스타의 감지 능력이 발동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것도 운이 좋게도 이틀 차 회의가 막 마무리되어 해산 선언이 나온 직후.
거기다 출몰 지역 또한 신전의 게이트를 통해 곧바로 이동할 수 있는 도시였다.
'덕분에 성녀의 첫 데뷔전 한 번 제대로 치렀지.'
거인의 탐색부터 시작해서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싸울 수 있게 해주는 격리 공간 형성, 전투에 참여하는 이들을 보조하는 온갖 종류의 버프까지.
그야말로 과연 성녀라고 할 수 있는 고위 성법의 향연이었다.
'그렇다고 도시의 피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들이 사전에 신호를 감지하고 곧바로 움직였다 하나, 파티의 소집과 이동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막지 못한 희생이 발생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물론 그것도 원래 예상되던 피해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그럼 이만 돌아가 볼까요? 내일 회의를 위해선 빨리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죠. 이런 싸움은 처음이다 보니 정신이 없었네요."
거인의 침공은 시기를 가리지 않는 것은 물론, 그 출현 빈도도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이 모든 일에 나설 순 없는 만큼, 어쩔 수 없는 경우엔 각국의 정예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여건이 된다면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지.'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에도 그렇고, 거인의 핵을 회수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나마 불사왕이라도 잠잠해서 다행이긴 한데···. 왜일까요?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건. 마치, 뭔가 큰일이 벌어지기 전의 마지막 여유라도 되는 것 같은···."
"흐음, 불사왕은 대륙을 정벌하는 것도 일종의 놀이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유희의 일종이겠지요. 정상 회의든 뭐든, 할 수 있는 만큼 해서 최대한 발버둥 쳐 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런데 왠지 그게 전부가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죠? 후우— 회의 기간 중엔 참으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티온이랑 뮤가 보고 싶네요···."
익숙한 이름이었다.
언젠가 한 번 들어봤던 이름들인데···.
'아! 그 지렁이들. 아직도 살아있었나?'
하긴, 그렇게나 성녀의 축복을 받았는데 장수하는 게 당연할지도.
하인리히는 뭔가 불안하다는 듯 입술을 짓씹는 그녀를 달래며 다시 일행들과 함께 신전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서인가? 왠지 모르게 나도 불안해지는데. 아무래도 파티원을 좀 더 보강할 필요가 있겠어.'
물론 사실상 불사왕이 이쪽과 한편인 이상, 리에스타가 걱정하던 것처럼 심각한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 문제가 생겨도 다른 쪽에서 생기지 않을까?
예를 들어— 역천의 서약이라든지.
'그래, 다른 일이 많고 찾기 번거롭다는 핑계로 그 잔당들을 너무 오래 내버려 뒀어.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일단 놈들부터 뿌리 뽑고 봐야겠다.'
지금까지도 꾸준히 수색하고는 있었으나, 그간 하도 이 잡듯 잡았더니 놈들도 몸을 사리기 시작했는지 그 종적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뭔가 움직임이라도 있어야 덜미를 잡든 말든 할 텐데, 당장 눈에 띄는 녀석은 남부 쿠데타의 주동자 말고는 딱히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정상 회의가 끝나면 곧바로 남부를 탈탈 털어서 추가 정보를 얻어야겠다. 그러면서 할리의 의뢰도 해결하고.'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 나가다 보면 어떻게든 끝에 닿을 수 있겠지.
그렇게 성녀의 근심과 성자의 고민을 뒤로하고, 용사 파티는 남은 일들을 왕국군에게 일임하고 다시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귀환했다.
아직, 대륙 정상 회의는 한창 진행되는 도중이었으니까.
***
1차 때와 마찬가지로 회의는 며칠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사실 사안들이 워낙 중대하고 여러 세력이 얽힌 일이다 보니 이렇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또 안건 중엔 결사대의 인원 충원에 대한 것도 있었는데···.
하인리히가 이끄는 용사 파티가 워낙 순항하는 중이다 보니, 처음과는 다르게 이젠 다른 이들도 상당히 관심 있어 하는 모습을 보였다.
'흘러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별로 위험하지 않겠다고 판단했겠지. 이쪽이 하는 일에 비해 쉽게 명성을 얻는 것 같아 배가 아프기도 했을 테고.'
어쨌든 이쪽도 마침 바라던 바였으니 후보가 많으면 좋은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물망에 오른 것이 바로 라포리의 후임으로 같이 온 하이 엘프, 리디아 그랜우드.
그녀에 대해서는 같은 하이 엘프인 해리스를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엘프치곤 호전적인 그녀는 엘븐 킹덤에서 전투를 책임지는 '파수꾼'의 수장인 여전사였는데, 이번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할 다수의 파수꾼을 데리고 2차 회의에 참여한 상태였다.
'엘프 정령 궁수! 이 또한 로망이지. 해리스는 아직 성장 중이니 당장 써먹을 수 없어 아쉽기도 했는데.'
그리고 다른 후보로는 암살자 포지션에 적격인 진혈 이상의 뱀파이어를 하나 기용할까 싶었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탈리아 왕국은 이대로 둬도 괜찮은지요?"
하인리히가 채 생각을 마무리하기도 전, 회의장 한가운데에서 제피아 공화국의 부통령 케일라 맥클레어가 먼저 그 화제를 꺼내 들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짚고 일어난 그녀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대표들과 눈을 맞추었다.
"시민들의 생명력을 갈취해 영생을 얻는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나라라니. 그게 제대로 된 국가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왕국이고 공화국이고를 떠나서, 인간을 가축으로 삼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이들이 일부러 꺼내지 않은 말을 당당하게 내뱉으며 눈을 번뜩이는 케일라.
아무리 하인즈 2세가 첫날과 달리 일부러 기세를 죽인 상태라곤 하나, 그녀의 저 태도는 과하게 용감한 감이 있었다.
'음,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사전 조사 결과, 그녀는 오래전 뱀파이어임이 유력한 자에게 어린 아들을 잃은 과거가 있었다.
정확히는 아직 실종 상태였지만, 그만한 기간이 지났으면 사실상 사망이라도 봐도 무방했다.
'아마 동부에 소재한 오바이포 클랜의 소행이겠지.'
그러나 이쪽이 억울하다고 아들을 잃은 여인에게 클랜에 따른 구분을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일 터였다.
그녀에게 뱀파이어는 다 같은 뱀파이어로 보일 뿐일 테니.
'오히려 지금까지 참은 게 용하군.'
한 국가의 대표라는 책임감과 부통령이라는 위치가 그녀를 좀 더 신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섰다는 것은···.
"흠흠, 확실히 그렇지요. 솔직히 인접국인 입장에서도 걱정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그간의 세월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받아들이기엔 저항감이 있지요.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일정 기간은 뭔가 제재라도 하는 건 어떨지···."
"크흠, 동의합니다."
탈리아 왕국의 인접국인 3왕국의 대표들이 조심스럽게 케일라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
'과연, 정치적으로 접근했군.'
확실히 가장 합리적인 수단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뱀파이어는 오랜 세월 인류의 적이었으니.
게다가 제국의 대표인 라일리 황녀를 비롯한 다른 대표들도 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그에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마 뱀파이어들을 수용한 교단의 입장을 생각해 말을 아끼는 것뿐일 터.
"흐음? 제재라···."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하인즈의 반응은.
"그래,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던가."
뻔뻔하기까지 한 정면 돌파였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깍지를 끼며 차가운 미소를 짓는 하인즈 2세.
그의 몸에서 억눌러져 있던 서늘한 기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크흠."
그 반응은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대표들이 저마다 바쁘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렇게 찔러보면 그가 당황하는 모습이라도 보일 거라 예상했을지도.
애초에 교단이 탈리아 왕국의 뱀파이어들을 수용했던 것도 지금 상황에서 위험한 적을 더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즉, 날을 세우더라도 당장은 어림도 없다는 소리.
그들의 주장은 합당하긴 하나, 시기를 잘못 잡은 건 물론 현실성도 없었다.
거기다···.
"자자, 진정하시지요. 하인즈 님? 기세를 가라앉혀 주시겠습니까?"
"···흠. 그러지."
"지금 저희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힘을 합칠 수 있는데도 굳이 분란을 만드는 건 지금 사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교단의 성자와 한 편이었으니 오죽할까.
각국의 대표들은 은은한 아우라를 퍼뜨리며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하는 하인리히의 목소리에 하나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진정되는 와중, 이 일의 주동자였던 케일라 부통령은 언제 격한 반응을 보였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다시 자리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애초에 뭔가 일이 진전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푼 하인즈가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케일라 맥클레어. 씨앗을 뿌려두는 게 목적이었나.'
원래 파국이란 단번에 터져 나오는 게 아니라, 이전부터 쌓여온 분란과 불만이 쌓이고 쌓여 찾아오는 것이었다.
지금은 간단하게 봉합되긴 했으나, 이번에 있었던 갈등은 앞으로 두고두고 화합에 방해가 될 터.
어찌 보면 장기적인 큰 그림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선 별다른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에게 더욱 흥미가 생길 정도였다.
'과연, 제법 쓸 만하겠는데?'
지금이야 그녀가 모든 뱀파이어를 적대하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지만, 그거야 이쪽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문제 아니겠는가.
만약 그 분노를 제대로 된 방향, 오바이포 클랜으로 향하게 할 수만 있다면···.
'제피아 공화국에 숨어있는 오바이포를 치는 데에도 도움이 되겠지.'
또한 놈들만 정리할 수 있다면 실질적으로 아우테리카의 모든 뱀파이어들을 지배하게 되는 셈이었다.
몇몇 자잘한 군소 클랜들은 남아있을지 모르나, 최소한 90퍼센트 이상이 그의 휘하로 들어오게 되는 것.
'그리고 그때야말로 이 하인즈 2세가 진정한 흡혈왕이 되는··· 음?'
하지만 그렇게 그가 단꿈에 젖어있던 순간.
지구에서 예상치 못했던 변화가 감지되었다.
***
슬슬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시각.
[···이건, 뭐지?]
한창 일본 열도를 들쑤시는 중인 글로벌 스타, 한스는 오사카 시내로 진입하던 도중 느껴진 위화감에 허공에 멈춰 섰다.
'결계? 이면 세계인가? 아니, 뭔가 다른데. 이건··· 마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 같은···.'
공간 좌표가 엉클어져 제대로 된 위상을 잡을 수 없었고, 어떻게 간섭할 만한 결계의 외벽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이계의 환경.
한스의 두개골이 슬쩍 기울어졌다.
그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누군가가 설치한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고유스킬이라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으나, 그래도 썩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과연, 이 정도라면 다른 녀석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만도 하군."
그때.
마찬가지로 그가 인지하지 못했던 존재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나직이 울려 퍼졌다.
"설마 '세계의 죽음'을 몸속에 품는 미친 짓을 하는 이가 있을 줄이야."
한스는 슬쩍 뒤를 돌아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았다.
직접 보는 순간까지 흐릿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던 그 존재는, 한 번 인식이 되자 숨 막힐 듯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비록 육체는 죽어버린 것 같지만, 자아를 유지한 것만으로도 신기하군. 상당히 독특한 고유스킬을 가진 모양이야?"
아니, 다시 보니 역시 평범한 청년인 것 같았다.
···비범한 노인 같기도 하고.
어쩌면 유령이나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마음에 들어."
그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기쁘다는 듯 한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204
번천회주 (1)
'범상치 않은 놈이군.'
그것이 상대를 마주한 한스가 느낀 첫인상이었다.
'불사왕'을 온전히 계승해 격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그의 감지 능력은 가히 초월적인 수준까지 확장되었다.
이젠 단순 기감만으로도 서울 전역을 뒤덮을 수 있었고, 특정 대상에게 집중한다면 그 수준은 물론 성향과 능력까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감각.
그것이 격에 따른 관점의 가장 큰 변화였다.
'그런데, 저자는···.'
알 수 없다.
'한스로 이런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그 '알 수 없다'는 것이 한스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뭐냐? 네놈은.]
하지만 거물이라면 원래 언제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여유를 잃어선 안 되는 법.
그는 태연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기감을 펼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순식간에 분석했다.
'차원이 분리되며 좌표가 뒤틀렸다. 바깥으로 공간 이동하는 건 불가능. 마찬가지로 밖에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사실 지구에서의 활동 중 곤경에 처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대응에는 제법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영웅의 발자취」를 이용한 아바타의 추가 증원이나 「개체 투영」으로 한스로 변신한 본체의 난입 같은 것들.
하지만—.
"제법 분주해 보이는군. 이제 상황 파악은 다 끝났나?"
마치 친구에게 말을 걸듯 다정한 말투로 질문을 던지는 정체불명의 사내.
그의 말대로, 지금 이 공간에서는 그 어떤 방법도 사용할 수 없었다.
아우테리카의 본거지인 불사성과 일본의 번천회 간부가 사용했던 닫힌 세계도 나름 높은 수준의 술법이었는데···.
'이건 그것들과는 차원이 다르군. 이런 공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 그대로 존재하는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고유스킬이라지만 그 발동 원리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혹시 차원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이계전송진'을 사용한다면 어떨까 싶기도 했으나, 지금은 일단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아직 적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패부터 까발리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이거 참, 귀찮게 하는군. 역시 번천회인가? 질리지도 않고 또 찾아왔구나. 그때 박살 난 것만으론 부족했던 모양이야.]
일단은 정보 수집부터.
그는 상대를 도발하며 서서히 기세를 끌어올렸다.
고오오오—
한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새카만 기운이 연기가 퍼지듯 사방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세상의 밝기가 몇 단계는 내려가고, 삽시간에 떨어진 기온에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불사의 심장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흑마력은 물론, 그것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심연까지 해방되어 주변 공간을 좀먹었다.
"흐음."
과연 그 기운은 상대에게도 위협적이었는지,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경계하듯 슬쩍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의 태도에선 왠지 모를 여유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 심장···. 세계의 죽음을 직접 사용할 수 있게 돕는 매개체인가? 안정성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데. 아무나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군."
"오오오! 회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저건 굉장히 효율적인 에너지원이 될 겁니다! 캘리카스의 기술을 처음 접했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
그때, 갑작스러운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호들갑스러운 개입에 한스의 시선이 사내의 옆쪽으로 향했다.
"자고로 새로운 개념과 원리! 그 혁신이야말로 세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 아니겠습니까? 역시 차원에 따라 신비도 다양한 법이군요. 회주, 얼른 저걸 연구하게 해 주십시오! 저건 과연 제게 어떤 지식을 선물해 줄 지—!"
그곳엔 언제 나타났는지 후줄근한 중년의 서양인이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그에게로 향하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처음 등장한 녀석과는 달리, 그는 한스가 풍기는 공포의 아우라를 온전히 이겨내지 못한 듯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런 육체의 반응을 무시할 만큼 두 눈은 이미 무언가에 대한 욕망으로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이건 또 색다른 반응이네.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아니, 그보다 회주?'
말할 것도 없이, 이 상황에서 회주가 누군지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군. 네가 번천회의 수장인가.]
그 물음에 종잡을 수 없는 기척의 사내··· 아니, 번천회주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내가 번천회의 주인이지. 하회탈 네가 사사건건 방해한 일을 지시한 장본인이고."
[호오? 그거참 안타깝구나.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 방해, 앞으로도 계속될 텐데. 크크큭—.]
"흐음, 역시 그런가."
한스의 그 뻔뻔한 말에도 회주는 여상한 태도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대답이 끝난 직후.
오싹—
한스는 갑작스레 자신의 영역을 파고드는 의념을 감지하고, 그 즉시 본능적으로 몸을 뒤쪽으로 물렸다.
콰드드득!
그와 동시에 살벌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가 조금 전까지 있던 장소.
그 공간이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구겨지듯 통째로 으스러져 있었다.
"역시 이걸 반응할 정도는 되는군. 잡으려면 조금 귀찮겠는데."
[크흐— 성격 한번 급하구나. 물론 나 또한 대화보단 폭력을 선호하지만 말이지!]
지이잉— 지잉! 지잉—!
한스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수십 개의 흑마법진이 전개되었다.
이미 이 공간의 대부분은 상대의 통제에 들어간 상태였지만, 심연이 영향을 끼치는 영역에서만큼은 그도 평상시와 비슷한 수준의 무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그럼 잠깐 실력 좀 볼까."
그리고 회주가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한스를 둘러싼 '세계'가 일제히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자신의 안에 들어온 병원균을 제거하려는 것처럼 그의 영역을 침식해 공간이 붕괴하길 반복한다.
그에 대응해 심연이 가득 담긴 흑마력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그와 충돌한 공간이 뒤틀리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까다로운데. 단순히 공간을 조작하는 수준이 아니야. 이건 마치, 하나의 세상과 싸우는 것 같군.'
당장은 대등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애초에 이곳은 상대의 홈그라운드.
어떤 수작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이렇게 정면으로 맞붙는 것 자체가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거기에 놈의 태도를 보아하니 딱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과연 세계의 죽음인가. 확실히 번거로운 힘이군."
"우호홋—! 대단하군요! 그런데 언데드는 안 꺼내는 건가? 본 드래곤! 본 드래곤을 보여주시죠! 다른 언데드가 있으면 그것도!"
아무리 봐도 저 여유로운 태도는 뭔가 비장의 수단을 숨기고 있는 모습이지 않은가.
회주 본인도 그렇고 그 옆의 미치광이 또한 자기들이 패배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했다.
'흐음, 어쩔까. 역시 이곳에서 곧바로 사생결단을 내는 것보단···.'
하지만 위기감이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지금은 일단 놈의 밑천을 최대한 털어먹고 적당히 몸을 빼는 게 좋겠다. 언데드도 일단은 아끼자.'
그 말로만 듣던 번천회주를 직접 대면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어차피 한스의 능력이야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황이었으니, 적당히 어울려주며 놈이 숨기고 있는 비장의 한 수까지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탐색전 이후의 작전상 후퇴는 아직 진 게 아니지!'
그에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유효한 만능 도주기, '소환 해제'가 있었으니까.
***
넓은 방 안 곳곳에 미로처럼 세워진 복잡한 만다라 패턴의 직물들.
채광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어두컴컴한 실내를 밝히는 다수의 촛불과, 곳곳에 장식된 온갖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제구(祭具)들까지.
후우—
그 음침하면서도 이국적인 공간의 중앙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보고하라."
동시에 나른하게 늘어지는 여성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예, 오라클. 우선 아프리카의 상황은 매우 순조롭습니다. 나이지리아와 이집트, 남아공 등 주요 국가의 잠식도 막바지 단계로···."
이후 한동안 전신을 검은 천으로 두른 수하의 보고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프리카에서 시작해서 남미의 순항을 거쳐, 북미와 유럽의 미약한 고전까지.
하아—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중앙의 좌식 소파에 기대앉은 갈색 피부의 여성은 듣는 둥 마는 둥 느긋하게 물담배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상황은 여전히 그리 좋지 않다고 합니다. 한국에서의 전면적 퇴각에 더해, 최근 일본까지 큰 타격을 입으며···."
"일본."
그러다 최근 관심을 두고 있던 지역에 대한 말이 나오자, 그녀는 수하의 말을 끊고서 나직이 읊조렸다.
"회주님은··· 일본에 가셨나?"
"그렇습니다. 닥터와 율령자를 대동하고 하회탈이란 귀환자를 잡으러 직접 행차하셨습니다."
"···하회탈이란 말이지."
그 말을 끝으로 지그시 눈을 감는 그녀의 이마에서, 물방울 모양의 붉은 보석이 촛불의 일렁이는 불빛을 받아 요사한 광채를 흘렸다.
"쯧, 한국은 유독 주의하며 진행하고 있었을 텐데. 역시 그런 걸로는 부족했나."
이내 눈을 뜬 그녀가 조용히 불평을 토하며 다시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중국과 일본에 적극적으로 손을 쓰면서도 인접국인 한국에서의 확장은 상당히 더딘 감이 있었는데, 그건 오래전부터 오라클의 의사가 반영된 방침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음에도 결국 일이 틀어져 버렸으니···.
'닥터 그 인간이 시끄럽게 떠들 것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프군.'
또 그 하회탈이란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격을 이뤄 한계를 넘어선 존재라 할지라도 같은 세계에 있는 이상 그녀의 통찰을 쉽게 벗어날 순 없을진대.
그자는 너무나도 쉽게 그녀의 눈길을 벗어나 커다란 일을 펑펑 터트리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존재가 제대로 확정되질 않아. ···하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 정도면 뭔가 비장의 수단이라도 있을 터.'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불확정 요소로 가득한 존재.
그녀가 가장 마주하기 꺼리는 유형이었다.
평소라면 상대에 대해 확실히 파악할 때까지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쪽을 택했을 테지만···.
'···이번엔 회주가 직접 나섰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오라클은 이어지는 부하의 보고를 들으며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그 머릿속에는 회주와 하회탈에 대한 생각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비록 당장은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상 지금 지구상에서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신이라도 직접 강림하지 않는 한은.
'궁금하네. 하회탈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도 그럴 것이—.
회주는 이미 몇 개나 되는 차원을 파멸로 이끈.
세상을 먹어 치우는 괴물 그 자체였으니까.
***
직선으로 뻗어 나가던 검은 섬광이 굴절된 공간에 휘어진다.
사방을 뒤덮은 지독한 저주가 단절된 공간에 갈 곳을 잃었다.
영혼조차 불사르는 지옥의 불길이 부서진 공간에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콰드득!
혼란스러운 전투의 소음 속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아깝군. 이걸로 확실히 끝내려 했는데. 아직도 여력을 감추고 있었나?"
번천회주가 아쉽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의 한 손에는 어느새 박살 난 채 검은 재가 되어 부스러지는 한스의 왼팔이 쥐어져 있었다.
'···곤란하군.'
한스는 막 새로 돋아난 왼팔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슬쩍 두개골을 기울였다.
정보를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너무 방심했는지, 하마터면 놈의 공격에 심장이 그대로 노출될 뻔했다.
'이쪽의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도 않는 데 반해서 놈의 공간 침식은 가성비가 너무 좋아.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선 에너지 효율이 상대도 되지 않겠는데.'
아무리 그의 마력이 무한에 가깝다지만 운용에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면 점점 그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추후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일 때도 큰 걸림돌이 되겠지.
'그래도 영 소득이 없는 건 아니군.'
한스는 재차 마력을 끌어올리며 마주한 상대, 번천회의 회주를 바라보았다.
[그래,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역시 네놈도 순수한 인간은 아니었구나.]
"영광인줄 알거라. 그리 자주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니까. 괜히 더 시간을 끄는 것보다 이쪽이 덜 피곤할 것 같고 말이지."
펄럭—
엄숙한 목소리와 함께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찬란한 노을빛 광채가 사위를 뒤덮었다.
그에 한스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심연이 녹아내리며, 공간 침식을 막기 위해 세웠던 방비에 숭숭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큭!'
콰득!
급하게 자리를 피했음에도 이번엔 오른쪽 발목이 날아갔다.
조금 전에 그의 왼팔을 가져갔던 연계 공격이자, 한스가 다루는 기운인 흑마력과 심연의 극상성에 위치한 힘.
신성력이었다.
'하필 상성이 최악이군. 그런데 저 녀석에겐 힘의 제약이 없는 것 같은데?'
신성력을 사용하는 모든 귀환자는 지구에서 그 힘이 약화된다.
그건 힘의 메커니즘상 어쩔 수 없는 일로, 자신 또한 하인리히를 통해 직접 겪어봤던 일이었다.
물론 한스의 심연 또한 비슷한 경우였고.
'···역시 저 외관과 연관이 있는 건가.'
펄럭—
그렇게 생각한 것과 동시에.
거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다시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성자인 하인리히가 아우테리카에서 사용하던 것을 훌쩍 넘어서는 출력의 막강한 신성력.
"피곤하니 빨리 끝내도록 할까."
놈의 뒤통수에서 비치는 후광과 그 등에서 양쪽으로 쭉 뻗은··· 길이만 3미터가 넘는 한 쌍의 거대한 날개.
번천회의 회주는.
'악의 조직의 수장이 천사라니··· 뭐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어딜 어떻게 봐도 천사 그 자체였다.
#205
번천회주 (2)
은은하면서도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만큼 매혹적인 절경이었으나, 정작 한스는 그것을 느긋하게 즐길 수 없었는데.
콰드드득!
그야 그 노을빛이 시시각각 그의 숨통을 조여 오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거 참, 아찔하군.'
그는 가볍게 턱뼈를 움직여 막 재생된 부분이 잘 맞물렸는지 확인하고 목 관절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불사의 심장」이 아니었으면 아무리 언데드라도 이미 한참 전에 소멸하고도 남았겠어.'
신성력을 이용한 공격에 턱 위쪽이 통째로 날아가면서 가면도 박살 나 버렸다.
그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해골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기운과 어우러져 이루 말할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다른 언데드는 끝까지 숨길 셈인가. 아직도 여유가 있나 보지? 아니면 뭔가 제한이라도 있나?"
[크크큭,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네놈이야말로 뭐라도 더 꺼내보는 게 어떠냐?]
허세를 부리기엔 상당히 낭패한 몰골이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한스는 처음처럼 당당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심장만 무사하다면 불사인 몸.
까짓 전신이 뜯겨나가든 박살 나든, 조금 상하는 정도야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푸흐, 자신만만하군."
그 반응에 빛이 반짝이는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에 떠 있던 회주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새하얗고 커다란 날개 한 쌍과 머리 뒤에서 비치는 찬란한 빛의 고리.
거기에 더해 어둠을 꿰뚫어 보듯 타오르는 안광과 전신을 타고 흐르는 신성한 아우라는, 누가 보더라도 악을 멸하는 정의로운 심판자가 강림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바로 앞에 온몸으로 사악한 기운을 흩뿌리는 해골 괴인, 한스가 대치까지 하고 있었으니···.
'음··· 역시,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이 나쁜 놈인 것 같은데.'
실상은 정반대이건만!
그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지금 이 구도는 스스로 봐도 변호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명확한 선과 악의 대립이었다.
그래도 지구에선 나름 다크 히어로 취급을 받는 몸이거늘.
"빨리 끝내려 했는데 계속 회복하니 영 번거롭구나. 좀 더 페이스를 높여 볼까."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회주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신성력이 거세게 피어오르고.
동시에 구겨진 공간이 해일처럼 사방에서 밀려들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한스는 여태 해왔던 대로 침착하게 공간을 다지고 활로를 모색했다.
이젠 공간 침식에도 신성력이 뒤섞여 대응하기 까다로웠지만, 그의 마법 수준도 낮은 게 아닌 만큼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시간이 제법 소요되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그가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불그스름한 신성력으로 빚어진 수백 개의 검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군.'
거기다 쉴 틈 없이 다시 재개된 공간 침식까지.
이런 상황이었으니 꾸준히 피해가 누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사왕이 되고서 이렇게까지 엉망이 된 건 처음인데.'
단순히 몸이 부서진 것이야 크게 상관없었으나, 반복해서 고농도의 신성력에 노출되어 기운 운용에 부담이 가중된 건 큰 문제였다.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조만간 심장을 지키는 데에도 한계가 찾아올 터.
'이만하면 지금 할 수 있는 만큼은 충분히 한 것 같네. 정말 안 되겠다 싶은 순간에 빠지도록 할까.'
아무래도 놈과 어울리는 건 적당히 하고 이제 슬슬 물러날 타이밍인 모양이었다.
***
쿠르르릉—
연신 굉음이 울려 퍼지는 공간의 한구석.
"흐음, 흐음! 과연, 이거 참 흥미롭군요!"
후줄근한 차림의 중년인, 닥터는 회주가 만들어 준 안전 공간 안에서 「진리의 눈」으로 열심히 한스를 관찰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크햐~ 하지만 아쉽습니다, 아쉬워! 좀 더 자세히 보려면 해부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사로잡기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 게 문제군요!"
다만 모든 기술과 신비의 구조를 파헤칠 수 있는 「진리의 눈」에도 한계는 있었다.
애초에 그는 이 능력을 연구에 특화된 방향으로만 발전시켰던지라, 이렇게 떨어진 거리에서 거친 에너지의 유동에 감싸인 상대로는 썩 만족스러운 분석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
즉, 그가 원하는 대로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 위해선 상대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것이 자발적이든, 다소 강압적이든.
"역시 율령자, 당신의 도움이 있어야겠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그렇게 튀어나온 갑작스러운 결론에, 옆에서 조용히 하회탈을 노려보고 있던 율령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도 봐서 알겠지만, 저 스마일 마스크는 심장의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부활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심장을 부수면 귀한 샘플이 사라져 버리겠죠? 그건 세계적인 손실입니다! 용납할 수 없어요! 반드시 생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딱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왜 없습니까? 여기 이렇게 적임자가 떡하니 있는데!"
닥터가 흐뭇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에 율령자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물론 정신 제압을 비롯한 금제가 그의 전공이긴 했으나, 이미 하회탈을 상대로는 한 번 실패한 전적이 있지 않던가?
그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최대한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항변했다.
이 광인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명료하면서도 단호하게.
"아실 거라 생각하지만, 지금 제가 이 꼴이 된 건 하회탈과 정신세계에서 싸웠다가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입은 영체의 손상을 아직도 회복하지 못해 몸 상태도 최악이지요. 그건 제 몸을 진찰한 닥터가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그는 말을 이으면서 찌푸린 얼굴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실명한 눈엔 기계 의안을 달았고, 튼튼했던 두 다리는 앙상해져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데다, 내장 곳곳에도 결손이 생겨 지금도 간간이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런 몸 상태로 또다시 하회탈의 정신에 침입하라는 건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지 않나!
"음! 이해합니다! 이해하고말고요! 하지만 말입니다, 율령자.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당신이 나서야 하는 겁니다!"
다만 그 차분한 설명이 이 광인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그도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는데···.
"복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사내가, 악마와 같은 미소로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 파악한 걸로 대충 어떻게 하면 될지 감이 오거든요? 사실 미리 준비해둔 것도 있고 말이죠! 우햐햐햐!"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을 들은 율령자는 다시 한번 하회탈을 자세히 살펴보고—.
닥터가 건넨 물건을 받으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한창 싸움이 이어지던 와중.
"호오, 뭔가 수가 있는 건가?"
갑작스러운 회주의 혼잣말에 한스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자신에게 한 말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것도 괜찮겠지. 어디 한번 원하는 대로 해 봐라, 율령자."
하지만 상대는 그런 반응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한스는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가 누구에게 말을 했던 건지 알 수 있었는데.
스스슥—
아까 중년의 서양인이 끼어들었을 때처럼 전조도 없이 허공에서 한 삼십 대의 사내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지 휠체어를 탄 채로.
역시 회주가 공간에 뭔가 수작을 부린 듯, 이번에도 상대의 등장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건 덤이었다.
'···답답하군. 평소의 예민하던 감각이 막히니 장님이라도 된 것 같아. 그런데 율령자라?'
확실히 정보를 수집하며 이미 들어봤던 호칭이었다.
동아시아 전체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자라고 했었지.
'저자가 율령자? 특이한 눈이군. 기술 문명이 발달한 차원에서 온 귀환자인가? ···아니 가만, 이건 뭔가 익숙한 기척인···.'
그렇게 한스가 새로 등장한 인물을 보며 경계심을 끌어올리던 찰나.
그의 텅 빈 눈구멍과 새로 등장한 이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화아악—!
어느새 그는 어둠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이전에 한 번 만났던 존재를 다시 대면하게 되었다.
-오랜만이군, 하회탈. 그간 어지간히도 잘 지낸 것 같구나. 이쪽은 그날 이후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는데 말이지.
거칠게 뜯겨나가 흔적만 남은 다리와 몸 곳곳에 난 상처로 너덜너덜한, 녹색으로 빛나는 인간의 형체.
'누군가 했더니, 그때 그 변태였군.'
혈맹 강경파를 칠 때 번천회 끄나풀의 머릿속에 숨어서 이쪽을 훔쳐보던 놈이었다.
[크흐흣! 그래, 상당히 오랜만이구나. 그래도 어떻게 살아는 있었군?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어찌 보면 고마운 녀석이기도 했다.
저 녀석이 흘리고 간 영체의 파편을 수습한 덕분에 한스가 「마도의 길」을 얻고 한층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확실히 그 능력을 봤을 때 간부급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그때 그 녀석이 동아시아 지부장이었나.'
그때 '불사왕의 파편'에게서 간신히 도망치던 인상이 너무 강해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역시 그때도 보통은 아니었다.
파편을 역으로 이용하기 전까진 상당히 위험했던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또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쉽게 정신세계에 침투해 온 지금도 예사롭지 않긴 매한가지였다.
그의 정신 방벽을 뚫기 위해 상당히 과한 에너지를 쏟아부었는지, 바깥 시간은 거의 정지 수준으로 멈춘 데다 그나마도 오래 유지할 수 없어 보이긴 했지만.
[설마 그렇게 도망가 놓고 또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전에 당한 걸로는 부족했나?]
마침 그냥 내빼기에도 찝찝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도시락이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추가 성장도 하고 번천회의 고위 간부도 처리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에, 한스는 정신력을 한데 끌어모아 영체를 부풀리며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그땐 내면에 악마라도 봉인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런데 '세계의 죽음'이라···. 하긴, 크게 다를 것도 없겠군. 심지어 그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해지기도 했고.
그런데 그때, 율령자가 심연을 뭉쳐놓은 듯한 거구의 한스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조용히 감탄을 내뱉었다.
위험한 상황인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의 태도에서 위기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허! 역시 뭔가 믿는 게 있긴 한가 보군.]
그에 한스도 그에게 접근하던 것을 멈추고 서서히 내면에 깃든 죽음을 끌어올렸다.
전보다 훨씬 강해진 지금와선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지 않나.
물론 정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소환 해제를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겨우 말 몇 마디 나눴다고 벌써 한계가 오는군. 아무리 강제 개입이 힘들다곤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은데. 정말 어지간히도 괴물이구나, 하회탈.
그렇다고 저렇게 입만 나불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기도 뭐한 일.
한스는 곧바로 날카롭게 벼린 정신력에 죽음을 담아 놈의 영체를 공격했다.
-정면으로 싸워봤자 난 너를 이길 수 없겠지.
그러나 상대도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으니.
아무리 그가 온전치 못한 상태인데다 공격엔 죽음까지 실렸다고 하나, 굳건히 세워진 정신 방어막을 고작 몇 번 만에 부수기엔 무리였고···.
-확실히 닥터는 대단하단 말이야. 설마 정신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이런 기물까지 만들어뒀을 줄은.
놈은 자신의 몸속에서 꺼낸 구슬을 바라보며 감탄하듯 나직이 읊조렸다.
-어디, 넌 얼마나 버틸 수 있나 볼까?
직후, 율령자의 손에 들린 구슬에서 찬연한 녹광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파아아—
'한스'의 정신세계 깊은 곳, 가장 밑바닥까지 빼놓지 않고.
언젠가 정신세계에서의 싸움을 전쟁에 비유한 적이 있던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후 벌어진 상황을 비유하자면 간단히 정리할 수 있었다.
적군이 내부의 테러로 반란군 수용소의 문을 부쉈고.
내부에서 뛰쳐나온 그들에게 온갖 군수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
"···큭,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한스 쪽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황급히 「마인드 허브」를 굳건히 세우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미약한 두통에 가볍게 관자놀이를 주무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상황을 살폈다.
마치 폭탄 테러라도 하는 것처럼 급격히 폭증한 정보량에 순간 당황하긴 했으나, 어마어마한 카르마를 쏟아부은 내 고유스킬과 정신 능력치는 이 정도로 무너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간 쏟아부은 카르마가 얼만데!'
하지만 당장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 상태로 번천회의 회주와 마주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어쩌면 놈들이 노린 게 그것일지도.
"쯧, 여기까지만 할까. 뭔가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에 난 미련 없이 한스의 소환을 해제하고 다시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일단 한스의 정신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건 면했다지만, 한차례 큰 폭풍이 지나간 만큼 당분간은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한동안 아우테리카에 보내 불사성에서 정양을 좀 할 필요가 있을 터.
'그래도 일을 벌인 녀석도 온전치는 못할 테니까. 다음에 또 같은 짓을 벌이진 못하겠지.'
한스의 정신세계에 침입해 수작을 부린 율령자.
아마 테러를 시도하고 혼란이 인 순간에 빠져나가려 했던 것 같지만···.
그 테러는 반쪽짜리 성공이었던 만큼 당연히 놈도 온전히 빠져나가지 못했다.
질기게도 기어코 도망가는 데 성공하긴 했으나, 이번엔 구슬을 들고 있던 오른팔을 통째로 내려놓고 가야 했던 것이다.
아마 놈에게도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으리라.
'그 구슬, 확실히 범상치 않아 보이긴 했는데. 아우테리카에 가서 천천히 확인해 볼까?'
잠깐 일본에 남은 번천회 놈들에게 생각이 미치긴 했지만, 어차피 놈들을 상대하는 건 장기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겐 아직 시간이 많았으니 이번에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수단을 강구하면 되겠지.
그렇게 한스는 자양분이 될 율령자의 영체의 일부는 물론, 그가 남겨두고 간 수수께끼의 선물까지 가지고 이세계의 불사성으로 훌쩍 떠나갔다.
정작 그 번천회 간부진이 보일 황당한 반응 따윈 이미 안중에도 없는 채로.
#206
혼돈의 서막 (1)
이제는 싸늘한 침묵이 감돌고 있으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투의 소음으로 가득했던 공간 한복판에서.
"······."
한 사내가 천천히 특정 구간을 맴돌며 몇 차례고 반복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흐릿한 것 같으면서도 위압적인 듯도 하고, 어찌 보면 평범하게도 느껴지는 존재.
지구 최대의 비밀 조직인 번천회의 수장, 회주였다.
'모르겠군.'
그가 지금 살펴보는 자리는 하회탈이 마지막으로 서 있던 장소였다.
혹시 자신이 놓친 게 있나 싶어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봤지만, 역시 아무리 살펴봐도 뭔가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공간은 평소처럼 완벽했으며—.
그 어떠한 결점도,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한 건 그 부분이었다.
'존재가 지워지듯, 그냥 사라졌다. 어떤 전조도 없이.'
다양한 고유스킬을 감안하고 여러 가설을 세우긴 했으나, 무엇을 대입하더라도 납득이 가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선 차원을 뛰어넘는 게 필수인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일 리가 없지 않은가?
또 만약 정말 특출한 능력으로 이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치더라도, 최소한 그 자취만큼은 남아 있어야 했다.
지금처럼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귀신에게라도 홀린 것 같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미 발생한 이상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더불어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응책도 마련해야겠지.
"회주! 처치가 전부 끝났습니다!"
그렇게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그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닥터. 율령자의 상태는 어떤가?"
"우햐햣~ 일단 당장의 고비는 넘겼습니다. 역시 한 번 겪었던 일이라고 나름 피해를 줄이긴 한 것 같더군요! 이 친구가 의욕이 넘쳐 무리하는 면이 있어서 그렇지, 실력만큼은 괜찮지 않습니까?"
닥터는 슬쩍 고개를 돌려 기절한 채 쓰러진 율령자를 바라보며 뻔뻔한 말을 내뱉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선 자신이 먼저 상대를 충동질해 일을 종용했다는 생각은 깨끗하게 사라진 후였다.
"쓰읍, 그런데···."
응급처치를 위해 꺼낸 온갖 기계 장치와 마도구를 비롯해, 정체불명의 생체 조직과 약물들로 뒤덮인 율령자.
닥터는 그의 몸을 이리저리 몇 차례 뒤척거리며 살펴보곤, 이내 뭔가 못마땅하단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군요. 거 참, 빌린 물건을 아무 데다 흘리고 다니다니! 에잉~ 이거 이 친구 영 칠칠맞은 것이···. 이젠 구할 수도 없는 재료로 만든 물건인데 그걸 잃어버리나!"
심지어 임무를 수행하다 다친 사람을 타박하기까지.
일이라도 제대로 완수했으면 모를까, 그러지도 못하고 손실만 보았으니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로선 영 탐탁잖을 수밖에 없었다.
"흠, 그래도 쉽게 어쩔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니 하회탈을 잡으면 회수할 수 있겠죠. 다음번엔 놓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군요!"
어차피 처음부터 그를 잡아다 해부할 생각이 만만이었으니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푸힛~ 그나저나 이거 한방 먹었군요! 설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도 그 원리조차 파악하지 못할 줄이야? 피가 끓습니다! 우햐햣!"
회주는 평소처럼 광기에 찬 의욕을 불태우는 닥터를 슬쩍 쳐다보곤, 다시 바닥에 누운 율령자를 내려다보았다.
제약 때문에 직접 나선 것도 오랜만이었거늘, 모처럼 생긴 그 기회를 별다른 소득도 없이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아니, 소득은커녕 손실만 보지 않았던가?
'하회탈···.'
회주는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되뇌며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했다.
지금의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겠다고 다짐하며.
***
아우테리카 북부 산맥에 자리한 불사성.
사방에 온통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이곳은 불사의 군대의 중심 거점으로, 그간 한스가 모은 전력의 대부분이 모여 있는 마경(魔境)이었다.
물론 각 지역에서 수집한 악인들··· 흑마법사를 비롯한 지하조직의 일원까지 전부 이곳에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잡졸들은 소재지에 남겨뒀다가 인근에 공격이 필요할 때마다 소모품처럼 갖다 쓰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특정 수준 이상의 강자나 심연의 상흔에서 나온 불사의 군대 출신 등, 쓸모 있는 존재들은 어지간하면 불사성으로 불러들이는 게 한스의 방침이었다.
거기다 북부 산맥에서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몬스터들로 추가 언데드 공급 또한 끊이질 않고 있었으니.
아무리 그 중 상당수를 내륙에 파견하고 있다지만, 주변을 둘러싼 산이 통째로 언데드 군세에 의해 뒤덮인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성지 한가운데에 솟아난 성 내부.
수십의 데스나이트들이 도열해 있는 웅장한 대전에서—.
[왕이시여··· 오셨나이까···. 소녀, 올리비아··· 왕께 인사드리옵나이다···.]
해골과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왕좌에 앉은 한스가 여유롭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올리비아. 보아하니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구나.]
그의 겉모습은 언제 번천회주에게 당했냐는 듯, 그야말로 '불사왕'이란 이름에 걸맞은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체내엔 여전히 신성력의 잔향이 남은 데다 정신세계는 과부하가 걸려 그리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으나, 어차피 그런 문제는 시간만 있으면 충분히 해결되는 사소한 문제였다.
'지구와의 시차가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역시 이럴 땐 상당히 도움 된단 말이지. 언데드를 만들 때도 그렇고 말이야.'
그러다 보니 문득 드웰이 추가로 맡은 각성자 언데드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시차를 생각해 보면 이제 슬슬 살마 이후의 개체들도 완성할 때가 되었던 것.
번천회주와의 싸움에서 힘의 부족을 절실히 통감한 직후다 보니, 아바타의 성장과 별개로 가장 쉽고 빠르게 전력을 늘릴 수 있는 언데드에 좀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놈과의 싸움에선 최소한 살마급 언데드가 아니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번천회의 잡졸들을 상대하는 덴 도움이 되겠지.'
아마 이번 전투에서도 본 드래곤 헤라토스나 살마 같은 언데드들을 꺼내 들었다면 회주와도 좀 더 제대로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불사왕의 스펙이 워낙 뛰어나 종종 무시되는 사실이었지만, 일단 그는 후방에 특화된 흑마법사이자 네크로맨서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번엔 그것을 최대한 아끼고 직접 몸으로 때우는 것을 선택했다.
그 전력들은 좀 더 확실한 판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기 위해.
[···대륙 파견은 사전에 언질 주신 대로 차근차근 진행 중이옵니다···. 최근엔 대륙 정상 회의가 개최되며 조금 페이스를 늦춘 상황이지요···.]
그렇게 한스가 생각을 잇는 와중에도 올리비아의 보고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불사성 관리 총괄이자 정보 총 책임자이기도 한 만큼, 그가 귀환할 때마다 그간의 일들을 정리해 보고하는 것은 항상 하던 업무 중 하나였다.
'뭔가 특이한 사항은 딱히 없군. 하긴 하인리히와 하인즈 2세의 정보력도 만만치는 않으니까.'
불사성 내에서 있었던 일만 아니라면 어지간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는 말을 끊지 않고 느긋하게 턱을 괴며 다시 딴생각에 빠졌다.
멀티태스킹 정도야 이젠 숨 쉬듯 할 수 있는데다, 혹시 그가 모르던 정보가 튀어나올 수도 있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율령자에게 빼았··· 아니, 놈이 선물로 놓고 간 물건도 제대로 실험해 봐야 하는데 말이지.'
놈을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의 한스는 그 격이 다른 만큼, 영체의 팔 한 짝으로 극적인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기껏해야 정신계 흑마법을 사용할 때 추가적인 메리트가 생기는 정도가 전부.
물론 그것만으로도 금제나 기억을 읽는 작업이 더 수월해질 테니 제법 만족스러웠는데, 이번 선물의 진가는 놈이 정신세계에 놓고 간 구슬에 있었다.
'기본적인 효과는 정신계에서 발하는 능력을 추가로 증폭하는 것인데··· 그 수준이 심상치 않아. 직접 사용해 보지 않고선 한계를 측정할 수도 없을 정도니.'
역시 여러 세계의 문물을 쓸어 담는 놈들이다 보니 신기한 걸 많이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이런 물건은 어느 차원에서 나온 건지.
일단 현실이 아니라 정신세계에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대륙에 출몰한 백색 거인 중 하나를 사로잡아··· 드웰에게 조사를 맡겼나이다···.]
그렇게 한스가 구슬의 효용을 고민하고 있을 때.
올리비아가 흥미로운 사실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백색 거인을 생포했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로한 공국에서 한 마리가 산맥으로 도주했다고 했었지.'
지금 불사성 인근의 좁은 지역에 밀집한 불사의 군대는, 정면으로 무작정 돌격해도 나라 몇 개는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굳이 군대까지 나설 것도 없이 간부들만으로도 거인 하나를 생포하는 건 일도 아니었으리라.
[다만, 아직 놈의 입에서 쓸 만한 정보를 얻지는 못하였사온데···. 계속해서 왕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하옵니다···.]
[···말을 한다라? 그것도 나를 만나고 싶다고?]
이어진 그녀의 말도 그의 흥미를 사기에 충분했다.
처음부터 봉인이 풀려있던 한쪽 콧구멍과 생포 직후에 풀린 입, 그리고 최근에 뚫렸다는 귀 한 쪽.
그 거인의 머리가 분명한 의사를 반복적으로 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사왕, 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드웰이 실험과 병행해 여러 가지 방도를 시도하고 있사옵니다만···.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닌 모양인지··· 고문이나 정신계 마법, 그 무엇도 통하지 않는다 하옵니다···.]
[흐음.]
한스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왕좌에서 일어났다.
불사성의 실험실에 갇힌 채 대화를 요구하는 백색 거인.
그렇지 않아도 놈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느끼던 참이었는데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크흐흣— 흥미롭구나.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한번 들어보도록 할까.]
거인과 직접 대화까지 할 수 있는 기회라니, 이건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
드웰의 안내를 받은 한스가 백색 거인의 머리가 갇혀있다는 장소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후욱—
공간 전체에 자욱하게 깔린 보랏빛 운무였다.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것은 물론이고 마력이 약하다면 언데드마저 부식되어 버릴 만큼 지독한 독기였지만···.
[이런, 죄송합니다! 왕께서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환기해 놨을 텐데. 그동안 신경 쓰지 않다 보니 잊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눈곱만큼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거기다 언데드의 시야는 연막 같은 걸로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오죽했으면 드웰이 거인을 연구하면서도 그다지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까.
[딱히 상관없다. 그나저나··· 과연, 이놈인가.]
한스의 시선이 공간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진, 온갖 수단으로 구속된 거인의 머리로 향했다.
내부 전체에 피로 새겨진 흑마법진과 제단, 사악한 기운을 풀풀 풍기며 침처럼 머리 곳곳에 박혀있는 검은 말뚝, 그 전체를 둘둘 감싸고 있는 불길한 사슬 등.
크기만 4미터는 되어 보이는 그 새하얀 머리통과 어우러지는 붉은색과 검은색 장신구들은, 이 공간의 기괴함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오오— 죽음이여—. 생의 종장이자 궁극의 상실이여—.]
조용히 닫혀 있던 거인의 입이 열렸다.
뭔가 시구 같은 걸 읊으면서.
'···이놈, 뭐라는 거야?'
아니, 자신을 지칭하는 건 알겠다만.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너무···.
[크크큭— 그래, 이 몸이 바로 사자(死者)의 왕이자 죽음의 화신이니라. 심연의 하수인, 광기의 노예야. 네가 감히 나를 만나고자 청했다지?]
···너무나도 한스의 취향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대꾸에 내심 당황했으나,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꿋꿋하게 거인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최근엔 좀 잠잠한가 싶었는데, 저놈 때문에 또 스위치가 올라갔군. 다시 말투 교정하려면 한동안 고생 좀 하겠는데.'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모르는 거인은 재차 입을 열며 다시 자기 할 말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아아— 죽음이여, 정말 망각해 버렸구나—. 우리의 염원을— 우리의 주께서 내리신 사명을—!]
한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아니, 진짜 이놈 뭐라는 거야?'
그는 슬쩍 해골을 기울이며 거인의 머리통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같은 심연 출신인 건 알겠다.
대화를 요청했던 것도 뭔가 연이 있으니까 그랬던 거겠지.
'염원과 사명, 그리고 주?'
그런데 이건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죽음과 광기는 그냥 심연에 가라앉은 세상의 찌꺼기 같은 게 아니었나?'
전대 불사왕들이 남긴 정보에도 그에 대한 내용은 없었는데···.
[죽음이여—. 가장 오래된 부정(不淨)이자— 심연의 밑바닥에 고인 운명이여—.]
그렇게 그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투툭— 툭, 투툭!
거인의 말이 이어지며 놈의 오른쪽 눈을 봉인하고 있던 검은 철사가 서서히 끊어지기 시작했다.
'눈?'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한스는 순간적으로 거인을 구속한 흑마법진을 강화하며 자신의 주변에 단단한 방비를 둘렀다.
놈에게 적의는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취한 안전 조치였다.
[나— 주의 심부름꾼으로서— 그대에게 그분의 뜻을 전하노라—.]
그리고 마침내, 그 눈을 봉하고 있던 검은 철사가 완전히 끊어지고.
거인의 눈이 번쩍 뜨이며—.
그 안에 깃들어 있던 거대한 「심연의 눈」이 한스를 똑바로 직시했다.
'큭? 잠깐, 이건···!'
이어진 판단은 찰나.
퍼석—!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검은 빛줄기가 거인의 머리통에 커다란 구멍을 뚫으며 그대로 핵을 소멸시켰다.
하지만.
이미 심연의 개입은 그의 정신세계에 무언가를 불어 넣은 후였으니—.
한스의 내면에서 흘러넘친 무언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내 「마인드 허브」를 향해 빠른 속도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207
혼돈의 서막 (2)
라디오 대신 틀어진 TV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와장창—!
테이블에 놓여있던 집기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젠장! 갑자기 이건 무슨···!"
나는 버둥거리던 손으로 간신히 테이블을 잡아 몸을 기대며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깔끔하던 거실 바닥이 엉망이 되었으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심연의 정신 침식.
불사왕이 된 한스는 따로 뭘 하지 않더라도 정신 공격에 면역 수준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침식은 외부 공격이 아니었기에 그런 방어도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놈의 눈을 마주한 직후부터 한스의 심장에서··· 내면에서 심연이 동조하고 있어. 이 정도 반응은 파편을 흡수했을 때 이상이다.'
물론 자체 정신 방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막대한 카르마를 투자해 성장한 그의 정신 능력치에 다른 아바타들에게서 끌어올 수 있는 리소스까지 합하면, 문제가 생기는 게 이상할 정도의 초월적인 정신력을 가지게 되니까.
그걸로 날뛰는 침식을 적당히 억누르며 본체 쪽으로 역류하지 않도록 방향을 틀어버린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애초에 한스가 그 위험한 불사왕의 힘을 자기 멋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사기적인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던가.
"큭, 하필 지금!"
···그것이 평소였다면 말이다.
정신적 자원이야 차고 넘치고 있지만, 그걸 온전히 발휘하기엔 지금 한스의 내면이 너무 위태롭고 불안정했다.
'젠장, 억누를 수 없어. 하필 정신세계가 손상된 직후에!'
내면에서부터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이미 몇 번이나 겪었고 이후로도 꾸준히 차단하고 있던 마이너스 감정들이, 삽시간에 몇 배나 증폭되어 「마인드 허브」의 한계선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가다간 역류한다···!'
한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소환 해제?
아니, 그건 문제를 뒤로 미루는 행위다.
이미 한스의 내부에 폭탄이 깃든 상황이니, 이후 재소환하자마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그땐 '문제가 생긴 한스'가 무방비한 본체 바로 옆에 존재하게 되겠지.
'기운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해 사방에 위치가 노출되는 건 덤이고! 한스를 영원히 봉인할 게 아니라면 그건 최악의 선택이다.'
아무리 집에 결계가 설치되어 있다곤 하나, 당장 한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기운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터.
역시 이 문제는 아우테리카··· 그것도 불사성에 있는 지금 해결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다고 내 정신이 오염되면 본말전도니,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이미 한계선을 넘어선 침식이 「마인드 허브」의 경계를 두들기는 상황이었다.
나는 모든 아바타의 움직임을 일제히 멈추고 그 정신을 오롯이 한스에게 집중했다.
율령자에게 손상된 정신세계를 감싸 피해가 더 커지는 것을 방지했으며.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던 「명경지수」에 힘을 실어주었고.
「페르소나」를 제어하는 동시에 「마인드 허브」의 보안을 더욱 강화했다.
그 과정에서 역류하는 심연 속에 뭔가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지금은 그것에 신경을 분산할 일말의 여유도 없었다.
'이대로는 진짜 위험한데. 뭔가 타개책이···.'
하지만 그런 저항도 기껏해야 시간을 버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상황은 여전히 막막할 정도로 암담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돌파구를 찾고 있을 때.
'···잠깐, 저건?'
문득 율령자가 놓고 간 구슬이 한스 내면의 의식에서 감지되었다.
주변은 한창 격변이 휘몰아치고 있건만, 그것은 주위의 이상 따윈 상관없다는 듯 그저 고요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신계 능력 증폭. 그게 이런 일에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실상 이 사달이 난 것도 다 저 물건 때문이지 않은가?
지금 사태를 수습하는 데 도움만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가릴 틈이 없었다.
'어? 이거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그런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용한 그 물건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능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올바른 사용 방법이 아니어서인지 극적일 정도의 효과는 아니었으나, 최소한 역류를 막고 그 사이를 차단하는 데 도움을 줄 수준은 됐던 것이다.
'한스 내면에 부풀어 오른 심연을 정리하는 건 나중이다. 일단은 경계를 공고히 해서 역류를 막는 게 우선이야. 이것만 마무리하면···!'
이후 한동안 심연과의 지겨운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침식에 대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사실 실질적으로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정신세계에서 워낙 고단한 사투를 벌인 탓인지 마치 한참은 지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우—."
온몸이 나른하고 땀범벅이 되어 찝찝하다.
이런 기분이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의식을 외부로 돌릴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겠지.
'해냈다···.'
그래, 결국 성공한 것이다.
심연으로부터 촉발된 오염을 차단하고, 의식의 경계에 추가 방벽을 쌓아 그것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작업이.
찌잉—
그러나, 미처 그것에 안도하기도 전.
쿠당탕!
갑작스럽게 머리를 울리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던 나는 엉망이 된 바닥에 그대로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윽, 으극."
갑자기 발생한 사태에 무리해서일까?
본체로 역류해 오는 오염은 확실히 막아낼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가해진 정신적인 충격과 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사고를 이어가려 해도 머릿속의 흐름이 뚝뚝 끊겨 생각이 연결되지 않았다.
온통 꿈을 꾸는 듯 몽롱하고,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아 단편적인 생각만이 뇌리를 맴돌았다.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
하지만 그 단락들이 미처 제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나는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그로부터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엉망이 된 거실에 한 인영이 들어왔다.
가볍게 주변을 둘러본 그는 이내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바라보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그리고 거실에 들어온 그, '휴고'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한성현을 챙겨 침실에 눕혀두고 이리저리 상태를 체크했다.
'안전한 곳에서 아바타만 굴리다 보니 이런 상황은 생각도 못 했네. 정신에 무리가 가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데 말이지.'
이렇게 본체에 충격이 오는 상황 자체가 처음이다 보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상세를 살펴보니 그리 심각하진 않아, 이대로 며칠만 푹 쉬면 금방 털고 일어날 것 같았지만···.
'아니, 이거 그런 게 문제가 아니잖아?'
갑자기 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실상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후우, 침착하자. 일단 상황을 정리해 볼까.'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개성'이 약한 휴고는 모든 뒷정리를 마치고 평소처럼 안마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모든 사람에게는 크든 작든 각자 여러 가지 일면이 있었다.
그것은 상황이나 장소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대하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일터에 있을 때, 가족과 함께할 때, 취미생활을 할 때, 친구들과 만날 때···.
사회에선 누구보다 공명정대한 사람이 집안에서는 사소한 걸로도 화를 내는 폭군일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살해한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이 제 자식만큼은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장일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굳이 이중인격 따위의 틀로 나눌 필요도 없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의 발로.
'그리고 「페르소나」를 통해 아바타들에게 부여된 개성은 '한성현'이란 개인의 감정에서 비롯된 거지.'
각 아바타는 한성현이 가진 일면이자 심상의 투영이었다.
모두가 다른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틀림없이 그 본인이었고, 심지어 본체가 기절한 지금도 계속해서 기억을 공유하는 중이었다.
다만, 각자가 가진 개성에 따라 표출하는 바가 다를 뿐.
특히 그의 첫 번째 아바타인 한스는··· 그가 가진 모든 부정적인 일면을 담고 있는, 말하자면 감정의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가족을 잃은 슬픔, 세상에 대한 원망, 범인에 대한 분노, 미래에 대한 절망 등.
물론 평범한 존재가 그런 감정들만 가지고 있다면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었으나, 아바타인 한스는 그 경우가 달랐다.
'애초에 언데드라 궁합이 잘 맞기도 했고,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오히려 '불사왕의 심장'을 제어하는 데는 더욱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까.'
또 어차피 「마인드 허브」를 통해 아바타의 개성과는 별개로 그것을 객관적으로 통제할 수도 있었으니, 지금까지는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말이지.'
「아바타」의 주인이자 「마인드 허브」의 주체가 될 한성현이 건재했다면.
그리고 그 한스가 한창 심연의 침식에 오염된 직후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하하··· 이거 참."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던 휴고가 침을 꿀꺽 삼키곤, 이내 짧은 한숨 같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조졌네."
그 짧은 감상은 한스를 제외한 모든 아바타가 공통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
'쓸데없는 걱정을.'
내면에 차오른 심연을 억누른 한스가 속으로 짧게 읊조렸다.
아무리 역류를 막는 것에 주력하느라 고생했다지만, 한스라는 개체에 집중적으로 할당되었던 정신력 수치도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이번 일로 추가적인 심연의 오염이 발생한 건 어쩔 수 없으나, 그 정도야 이전에도 있었으니 별로 달라질 것도 없었고.
'이 몸은 죽음을 초월한 지배자이자 정명한 왕이니. 절대 누군가의 뜻대로 놀아나지 않는다.'
그것이 심연이든 거인의 뒤에 숨어있는 어떤 존재든 간에 말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드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이시여!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저 건방진 거인 놈을 좀 더 확실하게 봉해놨어야 하는데. 설마 저 상태에서도 왕께 수작을 부리려 할 줄이야!]
그 말에 주위를 살펴보니 역시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듯, 주변의 모습은 아까와도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괜찮으니 닥치고 있어라, 드웰. 이 몸이 생각할 게 있으니.]
[헙! 아···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한스는 거슬리게 옆에서 떠드는 그에게 싸늘한 한마디를 던지며, 다시 고개를 돌려 이마에 구멍이 뚫린 거인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핵이 파괴된 여파로 서서히 부스러지는 거대한 머리통.
'하! 사명? 주? 웃기는 소리.'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내심 비웃음을 흘렸다.
아직 이번에 얻은 정보를 전부 분석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황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죽음'도 '광기'도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게 설계된 모양이었으니.
아마 방금 거인의 수작 또한 그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불사왕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한 절차였을 터.
자신이 아바타가 아니었으면 정말 그놈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네놈이 뭐 하는 놈인지는 관심 없다. 그저 이 한니발 스트라우스의 앞길에 방해된다면 치워버릴 뿐. 그 역천의 서약 놈들처럼 말이지.'
처음부터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안방극장'을 통해 막대한 카르마를 수급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지구의 번천회를 말살하는 것.
그는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상대해 보니 그 번천회가 만만하지 않더란 말이지.'
거인의 머리를 바라보던 한스의 사고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러갔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론은 하나.
'역시, 더 많은 카르마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미적지근한 방법이 아닌, 좀 더 확실하게 카르마를 수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떠올린 적이 있지만, 자신은 절대 선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미 한참 전에 망가져 버린 한성현이란 인간은— 필요하다면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었다.
'당연한 일. 애초에 이 몸이 지금까지 죽인 게 몇 명인데.'
아무리 「마인드 허브」의 여과가 있다고 하나,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직간접적으로 죽인 사람의 수만 해도 까마득할 지경인데도, 그는 그동안 딱히 이렇다 할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이미 처음부터 정상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끝까지 민간의 피해를 줄이려고 들었던 것은··· 그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이자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스스로가 가진 아주 작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
'웃기는 일이지.'
그러나.
지금, 그 족쇄가 풀렸다.
'효율성을 개선할 필요가 있겠군.'
지금 그가 취하고 있는 방침은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었다.
안방극장, 좋다.
용사와 마왕의 대적, 훌륭하다.
그럼 지금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드느냐?
'아니, 그럴 리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소꿉놀이도 아니고, 찔끔찔끔 잔챙이들만 보내면서 장난이나 치고!
RPG 게임에서 차근차근 부하들을 던져줘 용사를 키우는 마왕조차 이렇게 어설픈 공세를 취하진 않았다.
보라! 지금 불사성에 바글바글 쌓여있는 전력들을.
오갈 데 없이 그저 쌓여만 가는 불사의 군대를.
이게 대체 무슨 낭비란 말인가?
역시, 지금의 방식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웰 맥케인.]
[예! 불사왕이시여! 드웰, 여기 대령했나이다!]
왕의 반응이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을까.
옆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죽이던 드웰이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한스는 바닥에 부복한 그를 잠시 응시하곤, 짧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간부들을 소집하라.]
[예! 곧바로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듯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사라지는 드웰.
그렇게 실험실에 혼자 남은 한스는 재가 되어 사라져 가는 거인의 머리를 다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그곳엔 불사성의 기본 인테리어인 검은 돌밖에 없었지만.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 나직이 속삭였다.
[이 몸은 한니발 스트라우스.]
한스··· 아니,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가.
[이 세상에 종언을 가져올 자이니라.]
본격적으로 대륙을 향해 검은 손길을 뻗기 시작했다.
#208
혼돈의 서막 (3)
언데드란 존재는 처음부터 세상에서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기본적으로 흉측한 그 외모는 둘째 치고, 죽은 시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는 것은 산 자들의 입장에서는 불쾌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또한 세상의 섭리를 거스른 언데드는 본능적으로 생을 갈망하기에, 생자를 마주하면 질투하는 걸 넘어서 증오하기까지에 이르니.
애초에 그들 사이에서 평화적인 공존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 북부 산맥 깊은 곳.
불사성 인근은 그런 언데드들이 어마어마하게 밀집한, 그야말로 '죽음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 압도적인 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기운에 산천초목은 이미 죄다 말라비틀어졌고, 주변 대기는 건장한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토하고 쓰러질 만큼 오염되어 있었다.
아마 이 광경을 마주한 이라면 그 누구라도 인세에 강림한 지옥을 꼽을 때 이곳을 선택하길 주저하지 않으리라.
덜그럭— 덜그럭!
[끼야아악—!]
까드득—!
그때, 바글바글하게 들어차 있던 언데드 무리가 좌우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유독 강한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는 두 존재가 불사성의 입구로 다가섰다.
[이게 얼마 만에 있는 왕의 호출인지 모르겠군. 서두르도록 하지.]
3미터가 넘는 덩치에 검은 갑옷으로 전신을 두른 지옥의 기사, 둠 나이트 드렉슬러와.
[···항상 몇몇 간부들만 부르시더니 이번엔 무슨 일이지?]
용의 두개골 형상을 한 투구에 골격 갑옷 등 온통 뼈로 이루어진 장비로 전신을 두른 용아병, 제너럴 스파르토이(General Spartoi) 트레브였다.
그들은 평소처럼 영역의 가장 바깥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다가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서둘러 복귀하는 중이었다.
심연의 경계에서 언데드들이 쏟아져 나온 후, 불사왕이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시작한 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불사의 군대는 대륙 서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흩어진 병력을 모으는 작업도 꾸준히 진행해 왔고, 그 덕에 이젠 생존한 대부분의 군단원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당연히 그중에는 일반적인 언데드들뿐만이 아니라 전대 불사왕 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고위 간부들도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두 존재 또한 그중 일부였고.
심지어 드래곤 하트까지 사용해 만들어진 용아병 트레브는 전투 서열 10위 내에 드는 최고위 간부로, 갑작스럽게 인간 사회 한복판에 떨어지고도 오랜 시간 대륙을 활보하다가 비교적 최근에 합류한 괴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장 뭔가 시작될 것 같아 상당히 기대했는데 말이지.'
불사성의 입구를 지나 대전으로 향하는 길.
트레브는 이미 몇 번이고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며 불만을 곱씹었다.
처음 불사왕이 부활해 북부 산맥에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그도 기뻐하며 한달음에 달려와 기꺼이 불사의 군대에 합류했다.
전대에 마무리하지 못한 대륙 정벌 계획에서 다시 한번 이 한 몸을 불사르기 위해서.
그런데···.
'이럴 거면 차라리 이곳에 오기 전이 더 나았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유독 살육에 대한 욕망이 강한 언데드였다.
그래서 경계에서 빠져나온 직후, 주변이 온통 적뿐인 환경에서도 꾸준히 인간들을 학살하며 치열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소꿉장난이지? 이 강대한 불사의 군대가 인간 세상과 전쟁을 하기는커녕 이런 산속에 처박혀 몬스터 사냥이나 하고 있다니!'
불사의 군대에 들어와 전쟁의 최선봉에 서서 마음껏 살육을 즐길 생각뿐이었던 그에게, 불사왕에게서 떨어진 '함부로 인간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다름없었다.
지금은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애써 갈증을 달래고 있었지만, 고작 이런 광기에 물든 마물들은 그의 욕망을 만족시켜줄 수 없었다.
'아아, 부족하다. 인간, 인간이 필요해! 그 비명과 피로 축제를 벌이고 싶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보내야 하는 거지···?'
용사와 했다던 3년의 유예에 대한 이야기는 그도 들었다.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소리였지만, 그래도 왕이 결정한 일이니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애써 납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래 놓고 어설픈 수준의 잡졸들만 보내는 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정말 대륙을 정벌할 생각은 있는 건가?'
거기다 대륙으로 파견 갈 병력을 선별할 때 자신을 보내 달라고 몇 번이나 청했건만 그것마저 묵살당했다.
그러면서 보내는 것은 숫자만 많은 쭉정이 언데드에,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알 수도 없는 모지리 흑마법사들뿐이었으니.
그로서는 지금 상황에 납득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도착했군.]
그렇게 트레브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욕구불만을 억누르며 불사왕의 본의에 대해 의심하던 와중.
끼이이—
옆에 있던 드렉슬러가 대전의 거대한 문을 여는 것을 보고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불만이 쌓여있더라도 감히 불사왕 앞에서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마지막인가.]
내부에는 이미 스물에 가까운 고위 간부들이 전부 모여 바닥에 부복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전(前) 불사의 군대 서열 50위 내에 있었으며, 수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왔던 인류 최악의 숙적들.
둘은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높은 곳에 자리한 빈 왕좌에 예를 표했다.
이 불사성은 오롯이 왕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으니,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저 자리에···.
[모두 모였나.]
···지금처럼, 나타날 수 있었으니까.
[그러하옵니다··· 왕이시여···. 왕의 부르심을 받고 전원···.]
[아아— 됐다. 다들 바쁠 텐데 용건만 간단히 하도록 하지.]
실상 정보부의 수장인 올리비아를 비롯한 몇몇 간부들을 제외하면 그다지 바쁠 것도 없었으나, 모두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여흥은 끝났노라.]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슬슬 장난하는 것도 지겨워진 참이니, 이제 이 대륙을··· 세계를 가져야겠다.]
여태까지 왕이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뜬금없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불사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굳이 이런 걸로 농담할 리도 없을 터.
마침내 그것을 깨달은 간부들의 기세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크흐흣— 물론, 이번엔 너희가 직접 나서게 될 거다.]
또 거기서 이어진 왕의 말에 부복해 있던 이들 중 몇몇의 몸이 크게 들썩였으니—.
'···내가 믿음이 부족했구나. 역시 왕께서는···!'
그것은, 트레브를 비롯한 여러 간부들이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한 마디였다.
***
목적 없이 수만 불어나고 있던 언데드들이 불사성의 고위 간부들에 의해 하나둘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처럼 이곳에 가만히 처박혀 있을 때라면 모를까, 본격적인 대륙 침공을 위해선 군대의 모습을 갖추는 게 효율적이었으니까.
그렇게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
'역시 3년의 유예라는 약속을 깨는 건 좋지 않겠지. 아깝군, 전면전만큼 카르마를 수급하기 좋은 것도 없을 터인데.'
불사왕 한니발은 느긋하게 왕좌에 앉아 일의 진행 상황을 살피며 이후의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어차피 이 몸에게 인간들의 평판 따윈 의미 없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긴 하나···.'
그의 목적은 정말로 대륙을 정벌하는 게 아니라, 효율적으로 카르마를 수급하는 것에 있지 않던가.
물론 이렇게 하다간 결과적으로 세상을 멸망시키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당장 진행하고 있는 '안방극장'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선 하인리히의 체면도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이미 그 3년의 유예는 하인리히의 업적이 된 상황. 여기서 이 몸이 그걸 어기게 되면 성자의 명예에 흠집이 생긴다.'
교단은 물론 다른 세력들도 앞으로 3년간은 전면전이 없을 거라는 성자의 확신을 믿고 일을 진행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 믿음이 깨져버린다면?
'하인리히는 신뢰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그건 이후 다른 일을 진행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겠지.'
그런 건 그로서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그 흠결은 장기적으로 카르마를 수급하는 데 방해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
'어차피 본체가 깨어나면 다시 기존 방침으로 돌아가게 될 터. 그럼 그 이후의 일도 생각해 두는 게 좋겠지.'
그는 초월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불사왕.
당연히 본인 스스로도 지금 평소와 다르게 과격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 정돈 자각하고 있었다.
전이었다면 본체의 제재가 있어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란 사실도.
'무른 생각이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옳다. 앞으로 약 한 달, 그 안에 일을 최대한 진척시켜 둬야겠군.'
말하자면 지금 한니발의 상태는 자제심이라는 브레이크가 망가진, 만취한 채로 고집을 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는 본체가 쓸데없는 감정에 영향을 받아 이성이 흐려진 상태라고 믿고 있었지만.
'방법이야 만들기 나름인 법. 약속한 건 전면적인 전쟁을 하지 않으리란 것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인리히와 약속한 것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더 많은 장소에, 더 많은 숫자를, 더 강한 정예로—.'
대륙 전역을 강습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생길 무고한 이들의 희생 따윈.
더 이상 그가 알 바 아니었다.
***
'큰일이군.'
인상을 찌푸린 하인리히가 미간을 주무르며 깊은 한숨을 토했다.
'한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체가 정신을 잃은 틈을 타 그야말로 제멋대로 폭주하고 있었다.
실상 한성현에게는 뇌가 여러 개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던지라 그가 잠들어있을 때도 무의식적인 통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사람이 숨을 쉴 때나 걸을 때, 그런 상황에서조차 일일이 몸을 자각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본체의 통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심연 침식의 여파로 한스의 자제심도 깔끔히 날아간 상태였다.
지금 하인리히가 그의 심리를 파악한 것처럼 한스도 다른 아바타들의 사고를 접하고 있을 텐데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며 일직선으로 달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민폐도 이런 민폐가 따로 없었다.
'전능하신 주신이시여. 이 역경을 헤쳐 나갈 길을 밝혀주시옵소서.'
그 골치 아픈 상황에 골머리를 싸매던 하인리히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렸다.
"···성자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그는 옆에서 들려온 코델리아 추기경의 걱정스러운 말을 듣고서야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런.'
이곳은 대륙 정상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대회의장.
그는 한참 회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혼자 한숨 쉬며 끙끙대다가 난데없이 기도까지 시작했던 것이다.
당연히 중앙 원형 테이블에 앉아있던 대표들의 시선도 아까부터 그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팔짱을 낀 채 마찬가지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하인즈 2세만 빼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그에 애써 웃으며 그들에게 사과를 건네려던 하인리히가 다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생각해 보니 현재의 이상 상황을 알리고 대응을 준비하는 데엔, 각 세력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지 않던가.
'대처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 그럼 이걸 긴급 안건으로··· 음?'
그렇게 테이블에 앉은 이들을 쭉 훑던 그의 시선에.
뭔가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리에스타 성녀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 이전 그녀와 백색 거인을 사냥한 직후 나눴던 대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때 분명··· 불사왕이 조용히 있는 게 뭔가 불안하다고 했었지. 앞으로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고.'
아무래도 리에스타는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이미 뭔가를 감지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주신과의 동조가 그보다 월등히 강한 그녀인 만큼 간접적으로 느껴진 게 있었을지도.
'···그런 게 있으면 좀 더 확실하게 계시를 내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왕이면 자신에게도 알려주시고 말이다.
'그건 아직 내 신앙이 부족한 게 원인일 테니 어쩔 수 없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하인리히는 다시 경건하게 두 손을 마주 잡고 주신께 짧은 기도를 드린 후.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주신께서 계시를 내려주셨습니다."
화악—
그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신성한 아우라와 함께.
숨 쉬듯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불사왕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습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아바타의 개성은 한성현이라는 개인의 일부가 표출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본체가 정신을 잃은 상태건 아니건 상관없이 유지되는 것이었으니.
'이 정도는 주신께서도 용납해 주시겠지. 통 큰 분이니까.'
그것이 설령 믿음과 신앙심이 뻥튀기된 하인리히라 할지라도,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이게 원래 그의 모습이었다.
#209
설상가상 (1)
성지 한가운데에 자리한 로셀리아 대신전은 아우테리카 최대 종교인 주신교단의 중심지로, 다른 지역에 있는 대신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교황과 성녀를 비롯한 다수의 수뇌부가 여기 머무는 건 물론, 취급하는 정치·행정·정보 등의 업무도 대륙적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거기다 외부로 파견 나가는 성기사단과 이단심문관의 본부까지 대부분 이곳에 위치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넓은 부지 한 편엔 외부에서 방문한 귀빈을 위한 숙소 건물들도 다수 준비되어 있었는데···.
"후우— 역시 지치네."
그중 한 곳, 아제리온 제국 사절단의 숙소에서.
막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라일리 황녀가 앓는 소리를 내며 집무실의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파묻었다.
점심 무렵에 시작된 회의가 늦은 밤이 되고서야 끝난 탓에 온몸이 노곤했지만, 오늘 갑자기 나온 안건이 워낙 시급한 사안이었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일리 황녀님? 체통을 지키시지요. 여긴 황녀궁이 아니랍니다?"
"으응? 에이, 상관없잖아. 어차피 여긴 우리밖에 없고.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편하게 하자고, 세아 언니."
그 모습을 본 이세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으나 라일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교단 측은 회의에 참여한 이들에게 독립된 숙소 건물을 한 채씩 내주었고, 그 덕에 각 사절단은 다른 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좀 더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거기다 그녀들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수행인들을 모두 해산시킨 상태.
그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엔 라일리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만 남아 있었으니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헤론도 있는데 너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좀···."
"음? 저 말입니까? 에이, 스승님. 뭘 새삼 이제 와서! 저도 불사성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줄곧 같이 있으면서 이미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지 말입니다? 저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이세아의 입에서 자신에 대한 말이 나오자 집무실까지 쫄래쫄래 따라왔던 헤스페론이 냉큼 끼어들었다.
왠지 모르게 아까부터 멍한 기색이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정신이 나간 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호오—? 그건 또 무슨 사이일까."
물론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이세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며 날카롭게 빛나고.
"아니··· 잠깐, 헤론! 못 볼 꼴은 또 뭐죠? 그 정돈 아니지 않나요? 그냥 환경이 열악해서 생긴 어쩔 수 없는 문제잖아요! ···그, 그리고 처한 상황이 상황이었고!"
라일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붉어진 얼굴로 분통을 토해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일었던 잠깐의 소란은 그리 오래 가지 않고 금방 진정되었다.
잠깐 숨도 돌릴 겸 잡담처럼 떠들긴 했으나, 그런 사소한 일에 더 신경 쓰기엔 그들 앞에 다가온 현실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불사의 군대의 대규모 강습···.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지금도 아슬아슬하지. 사방에서 날뛰는 몬스터들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백색 거인, 거기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불사의 군대의 습격까지. 그런데 그 습격이 더 거세진다면···."
사실 지금까진 불사왕이 강림한 것치곤 나름대로 선방하는 중이었다.
그의 등장 이후 발생한 인명피해는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었으나, 일단 로한 공국을 제외한 나라들은 존립이 위태로울 만큼의 피해를 보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성자 하인리히의 말대로 대규모 공습이 시작된다면, 아마 대부분의 국가가 지금의 사회를 유지하는 데 상당한 난관에 부닥치게 될 터였다.
어쩌면 휘청거리는 걸 넘어 로한 공국처럼 무너지는 나라가 생길지도 모르지.
'물론 아예 정권이 바뀌어 버린 탈리아 왕국은 예외로 두고.'
멍하니 그녀들의 대화를 듣던 헤스페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맹한 구석이 있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것이 유독 심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건 다 그의 사고 한편에서 이어지는 전에 없던 격렬한 토론이 그 원인이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곧 모든 준비가 끝나가는구나. 공격 시기는 언제로 잡는 게 효과적이라 보는가? 반대 의견은 받지 않겠다.
그 포문을 연 것은 지금 벌어진 모든 일의 원인.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였다.
-하인즈 2세 : 나는 부정적인 입장이다만, 정 공격해야 한다면 정상 회의가 끝난 이후가 좋을 듯하군. 너무 빨리 일이 터지면 이쪽이 준비하고 있던 계획이 흐트러진다.
-하인리히 : 아니, 역시 지금이라도 멈추는 게 옳아. 한스는 너무 급하게 움직이고 있어.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지 않나!
-할리 : 배고픈데 밥 먹고 하자! 이번 야식엔 고기 10인분을 추가해야겠다!
-휴버트 : 쯧, 어차피 무조건 강행할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최근 거슬리는 상인 연합이 있는데, 이참에 그것들을 정리하는 데 이용하는 게 효율적이라 생각한다.
-해리스 : 아··· 귀찮은데···. 역시 전부 그만두지 않을래···?
-하워드 : 아오, 저 답답한 놈! 진짜 할 거냐? 그럼 최소한 타라크 근처에서 일 터트리진 마라! 지금 한창 중요한 순간이니까. 오랫동안 공들였던 게 이제 곧 완성된다고!
-휴고 : 어우 씨, 정신이 없네. 한스야 제발!
···역시 다들 개성이 뚜렷한 만큼 각자 성향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이젠 그 폭주를 말리는 것도 포기했는지 몇몇 아바타들은 타협안까지 내놓고 있을 지경이었으니.
그야말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그지없는, 너무나도 '한성현'스럽기 그지없는 모습들이었다.
'내 몸이 깨어있을 때라면 굳이 이런 과정도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하나처럼 움직였을 텐데···. 역시 이건 좀 힘드네.'
머리가 잠든 상태로 팔다리만을 이용해 억지로 움직이려다 보니, 단순히 걷는 것만으로도 휘청거리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가고자 하는 바는 모두 같지만, 보폭도 무게 중심도 전부 제각각 따로 놀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헤스페론 : 진짜 안 하면 안 될까···? 에휴, 이젠 나도 모르겠다. 우리 적당히 하자, 적당히.
그렇게 그도 소심한 의견을 남기고 다시 시선을 앞의 여성들에게로 돌렸다.
그의 뇌 내 회의는 제법 길게 이어지고 있었으나, 그것이 현실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미미했기에 그들은 아직도 앞선 대화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래도 불사왕의 습격은 성자님께서 미리 예지할 수 있다 하셨으니까. 남은 건 각국에서 좀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을 거야.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을 빨리 확인해 봐야겠는데···."
"···라일리, 정말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 만약 내가 없을 때 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난 괜찮아. 사실 세아 언니가 더 걱정이지. 나야 여기서 돌아가면 황궁 안에만 틀어박혀서 보호받을 텐데 위험할 게 뭐 있겠어?"
이미 황위 계승도 굳히기 단계에 들어갔다.
그녀와 맞서던 정적들은 하나둘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황궁 마탑의 탑주인 로렌스 후작을 위시한 중립파는 이미 그녀를 지지하기로 한 상황.
적어도 황궁 내에서만큼은 안전이 보장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헤론도 있으니까 여차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때 무리한 것 때문에 아직 순간이동은 무리라고 하지만···. 무려 그 불사왕의 손에서 탈출한 능력자잖아?"
"으응? 아하하··· 이거 참 부담스럽네."
라일리가 그를 슬쩍 보며 말을 잇자 헤스페론이 멋쩍은 듯한 웃음을 흘렸다.
이세아도 그 시선을 따라 그를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아— 아직 헤론에게 가르칠 것도 많이 남았는데. 결사대로 활동하는 게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일이 연달아서···."
백색 거인의 출몰에 이어서 불사의 군대 시즌 2까지.
거기다 불사왕과의 싸움을 제대로 끝맺기 전까지는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설마 여기서 일이 더 커지진 않겠지?"
실소하듯 튀어나온 이세아의 한마디.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아주 놀랍게도 그녀의 한마디는 세상의 진리 하나를 꿰뚫고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것을.
그렇게 사흘이 더 지나고.
마침내 2차 대륙 정상 회의의 마지막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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