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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92

정착자 (3)

"···그러고 보니, 내가 전에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지? 허헛, 그때는 농담이라 여기는 것 같더니만."

잠시 몸을 굳혔던 체하이는 곧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금방 여유를 되찾은 그의 얼굴에는 과거를 추억하는 옅은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함부로 남에게 해서. 하지만 맹세컨대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닙니다. 이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요. 어쩌면 불사왕을 상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으음? 불사왕이라···."

"제가 말을 꺼낸 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체하이. 부디 솔직히 답해주십시오."

그 진심이 가득 담긴 지오스의 말에 체하이의 시선이 다시 응접실 안의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지금은 이렇게 애들이나 돌보며 조용히 살고 있다지만, 한때는 그도 피 튀기는 전장에서 나름의 명성도 쌓았던 몸이었으니.

당연히 저들에게서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강자의 기세를 읽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불사왕을 맞상대하기 위해 결성된 결사대··· 라고 했지.'

요새 명성이 자자한 주신교단의 성자부터 시작해, 아이들의 정서에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험상궂은 야만인, 보육원에서 머리가 좀 굵은 애들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어린 소녀, 그리고···.

그의 시선이 잠깐 헤스페론에게 머물렀다.

자신이 뭔가 착각한 게 있나 싶어서.

'···삼류 마법사? 아니, 그럴 리가. 그럼 기운을 속인 암살자인가? 과연, 그쪽이 더 설득력이 있겠군. 대단한 실력이야.'

하지만 그렇게 그가 혼자 납득하려던 와중.

그 시선을 느낀 헤스페론이 씨익 미소 지으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답하기 좀 힘드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제 소개부터 다시 해볼까요? 전 지구의 한국에서 온 각성자, 하승훈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재차 자기소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우테리카에선 헤스페론이란 이름을 쓸 생각이지만 말이죠. 아니면 그냥 헤론이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이곳에 온 지는 이제 두 달이 조금 넘은 것 같네요. 하하핫!"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체하이는 눈만 끔벅거리다 다시 응접실에 자리한 이들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용사 일행들.

"하아—."

아무래도 더는 내뺄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국? 한국이라··· 그래,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군. 한국산 자동차가 썩 괜찮다고 했던가?"

실상 자신의 출신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그에 지오스는 눈을 빛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다 그가 있는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였다.

"역시, 체하이 당신도 헤론과 같은 차원 출신이셨군요."

"그래. 저 친구도 알려나 모르겠는데, 난 에티오피아에서 왔지."

"아! 압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죠? 소말리아 옆에 있는."

"오? 견문이 넓군. 그 썩을 것들 이름도 오랜만에 들으니 반가운 것이··· 참 미묘한 기분이야."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 자리한 에티오피아.

한국과는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나라였으나, 그래도 나름의 수교도 있는 만큼 완전히 생소한 나라도 아니었다.

커피의 원산지로 유명해 사람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편이기도 했으니.

"···이곳에 온 지는. 글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만."

그리고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뭔가를 고민하며 수염을 쓰다듬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일단 30년은 훨씬 넘은 것 같군. 40년까진 안 됐겠지만."

"···그렇습니까, 상당히 길군요."

지오스는 그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으나.

그를 제외한 이 자리의 나머지 이세계인들에게 그건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호오, 30년 이상이라?'

사실 전송된 세계에 어느 정도 적응만 할 수만 있다면 그곳에 오래 머무를수록 이득인 건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당장 체하이의 경우처럼 30년을 머무른다 해도 지구에선 3년 남짓이 지날 뿐이고, 아예 눌러살기로 했을 땐 지구의 시간을 따르는 노화로 수명이 열 배는 늘어나지 않겠는가?

거기다 이세계에서만 주어지는 성장 보정까지 더하면 작정하고 몇십 년 동안 수련만 하다 괴물이 되어 귀환하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만약 도중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 전에 도망쳐 올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지구에는 20년 이상 머물다 왔다는 사람이 없지.'

알려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여태까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저기, 체하이 씨? 일단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죠."

헤스페론은 하얗게 샌 수염과 함께 주름이 접히기 시작한— 명백히 노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흑인 사내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지금, 시스템을 사용하실 수 있으신가요?"

"크흠, 알고 있었나 보군. ···사용할 수 없게 된 지 제법 되었지."

바로 이게 정도 이상으로 이세계에 오래 머문 이들을 '정착자'라고 부르는 이유였다.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으니 카르마 상점도 열 수 없고, 자연스레 더 이상 지구로 돌아가지 못해 평생 이세계에서 살아가야 했으니까.

"음, 진짜였나 보군요. 일단 지구에도 알음알음 알려진 게 있긴 해서 말이죠. 물론 전부 간접적으로 전해진 것뿐이라 진위 파악이 힘들어 신뢰도는 높지 않지만요."

그래서 당사자를 직접 대면한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보를 습득할 좋은 기회였다.

그를 찾아온 대외적인 이유가 불사왕을 상대하는 데 유용한 수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면.

본심은 정착자를 통해서 시스템과 각성자에 대한 좀 더 다양한 정보를 얻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던 정보야말로 최고의 무기다. 내가 가진 것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하물며 자신은 시스템에서도 여러모로 이레귤러라 할 수 있는 존재이지 않나.

그런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남들보다 더욱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체하이 님, 실례지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쩌면 사소한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헤론 님께는 물론 저희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원활한 정보 수집을 위해 이 자리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성자, 하인리히가 직접 그에게 부탁의 말을 꺼냈다.

거기에 지오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합세해 연신 그를 종용한 결과···.

"허허, 뭐 이제 와선 다 지난 일이니 상관없긴 한데. 이게 뭐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결국 체하이도 두 손을 들고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가벼운 헛기침을 시작으로, 이내 자신의 과거부터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크흠, 저 헤론이란 친구는 알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살던 고향은 그리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네."

과거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치안을 자랑했던 한국마저 개판이 된 상황이었다.

아프리카에 소재한 에티오피아의 사정은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정부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급급했으며, 자연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자연스레 온갖 범죄 조직들이 우후죽순 일어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체하이 또한 그 과정에서 가족을 잃고 천애고아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건 그곳에선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불행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난장판 속에서 어린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은 한정되어 있었지."

그가 선택한 방법은, 원수나 다름없는 범죄 조직의 심부름꾼이 되어 그들의 자비를 구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십여 년간 오로지 생존만을 바라보며 그 조직의 일원이 되어갔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일상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는데···.

스물이 조금 넘은 나이에 시스템의 선택을 받아 각성하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후후후, 그런데 하필 새로 얻은 능력이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들더군."

말을 잇던 체하이가 가만히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각성한 고유스킬은 「위상굴절」.

국소 부위의 공간을 비틀어 조작할 수 있는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더는 뒤가 없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24시간을 매우 알뜰살뜰하게 사용했다.

자신이 몸담았던 범죄 조직의 간부들을 깔끔하게 날려버리는 것으로.

지방 군벌에 가까웠던 그 조직에는 총은 물론 폭탄도 상당수 보관되어 있었는데, 체하이의 능력은 그것들을 빼돌려 테러에 이용하는 데에 최적이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세간에서 '전송 전 각성 테러'라 불리는 행위였다.

"뭐, 그땐 숙련도도 낮고 시간도 모자라서 내 위에 있던 몇몇 놈들을 없애는 정도에 그쳤지만. 이후엔 혼란스러운 틈에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가 곧 아우테리카로 몸을 피할 수 있게 되었지."

사실 그는 이미 그 시점부터 다시 지구로 돌아가는 것은 포기한 상태였다.

이제는 설령 돌아가더라도 남은 조직 놈들에게 보복당할 뿐이었으니까.

이후 이 세계에서 용병이 된 그는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애초에 돌아갈 생각이 없던 만큼 카르마는 모으는 족족 자신을 강화하는 데에 투자했고, 그렇게 그는 십 년이 훌쩍 넘어서도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마을에 들렀다가 지금 마누라와 눈이 맞았지. 어차피 그동안 모아둔 돈도 충분했으니 결혼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 없었고 말이야."

"엇? 체하이 씨 결혼하셨었어요?"

"그럼 내가 이 나이까지 혼자 살았겠나?"

놀란 듯 되묻는 헤스페론에게 그가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오스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낮게 읊조렸다.

"···저와도 이 마을에서 만났었죠. 그땐 제 또래인 줄 알았었는데 말입니다."

"허허허, 그 후 몇 년간은 지오스 네가 오히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었지? 흐음, 그러고 보니 그 얘길 해야겠군."

낮게 웃음을 흘리며 턱수염을 쓰다듬던 체하이가 다시 시선을 헤스페론에게 돌리며,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나직이 말을 이었다.

"아마 아우테리카에 온 지 20년 정도가 지났을 때일 거야. 어느 날,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 당장 지구로 귀환하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애초에 돌아갈 생각은 고사하고 보유한 카르마도 없던 그는 그 본능을 억지로 무시했다.

그리고.

"이후 얼마 있지 않아···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

또한 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사라진 직후, 그에게 급속도로 노화가 찾아왔던 것이다.

마치 그동안 유예 받았던 세월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처럼.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이십 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던 그는, 이후 약 일 년 만에 실제보다 오히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중년의 모습이 되었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다행히 다른 능력들과 스테이터스는 여전히 남아있었네. 나는 홀린 듯 고유스킬을 파고들기 시작했지. 나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스템이 강제로 사라진 상실감이 생각보다 크더군."

하지만.

다시 그렇게 10여 년.

그가 이세계로 전송된 지 30년이 넘었을 때—.

그는, 각성자로서의 모든 능력을 잃게 되었다.

고유스킬인 「위상굴절」은 물론, 자잘하게 모아왔던 다른 스킬들과 카르마를 투자해 강화했던 스테이터스까지 전부.

"······."

"······."

거기까지 말한 체하이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가 입을 다물자, 한순간에 찾아온 정적에 응접실 내부는 옅은 숨소리들만이 낮게 울렸다.

'시스템과 상점은 물론이고 노화의 제약도 없어진 데다, 나중엔 스킬과 스테이터스까지?'

이정도면 그가 따로 말하지만 않았을 뿐, 이세계에서의 '성장 보정'마저 잃었다고 봐야 했다.

각성자로서의 혜택은 모조리 사라지고, 말 그대로 이 세계에 정착한··· 원주민 그 자체가 되어버린 상황.

'설마, 카르마를 강제로 회수한 건가?'

일반적으론 카르마 상점의 '귀환'으로 지구에 돌아오면서 시스템과 상점을 반납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킬과 스테이터스마저 초기화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과연, 이게 귀환자와 정착자의 차이인가. 좋은 정보를 얻었어.'

이건 지구에선 듣도 보도 못한 정보였다.

그렇게 쏠쏠한 소득에 만족한 헤스페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그래도 얻은 게 아예 없진 않지."

어느새 감았던 눈을 뜬 체하이가 이쪽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이어서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린 그는.

그대로 허공을 향해 그것을 휘둘렀다.

짜악—

"으헉?"

그와 동시에, 헤스페론이 등짝을 부여잡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미 지오스를 통해서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던 수법.

그가 말했던 고유스킬, 「위상굴절」이 틀림없었다.

"···방금, 능력이 사라지셨다고···?"

"물론, 고유스킬이 사라지긴 했지. 이건 그걸 연구해서 오러 운용법과 엮은 내 비전이고."

물론 「위상굴절」을 가지고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해지긴 했으나, 그 효용성은 이미 지오스가 몇 번이나 증명한 적이 있는 고절한 기술이었다.

초월에도 이르지 못한 순수한 오러 사용자가 공간을 넘어선 공격을 할 수 있게 만들 정도이지 않은가.

'설마 그게 자신의 고유스킬을 분석해서 만들어낸 것이었다니···.'

"자네, 고유스킬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지?"

"네, 네···."

"내가 삼십 년이 넘게 능력을 사용하며, 그리고 시스템이 사라지고 십년 이상을 미친 듯이 파고들면서 느낀 게 있지."

그의 대단함을 접한 직후여서인지, 그 한마디 한마디에서 전보다 더한 무게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헤스페론은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건 응접실 한쪽 의자에 앉아있던 이세아 또한 마찬가지.

그녀는 아닌 척 하면서도 열심히 귀를 쫑긋거리며 한 마디라도 놓칠까 열심히 집중하고 있었다.

"고유스킬이라는 건 그저 무작위로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야. 어떤 식으로든 그 당사자와 깊은 관계가 있어. 그게 정확히 어떤 식인지 아무도··· 심지어 본인마저 모른 다는 게 문제지."

그렇게 말을 마친 그는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멋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진 능력이 다르니 얼마나 도움이 될 진 모르겠다만. 일단 기본적인 노하우들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도록 하지. 아마 썩 나쁘진 않을 거야. 허허헛."

자신만만한 웃음을 터트리는 체하이.

어쩐지 그의 등 뒤에서, 하인리히에게서도 본 적 없는 수준의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지 고작 하루.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보유할 수 있는 아바타의 개체수가 증가합니다."

카르마 상점을 통하지 않고 고유스킬이 성장한 시간이었다.

#193

정착자 (4)

아우테리카는 마법을 비롯해 온갖 환상적인 요소가 가득한 판타지 세계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서양의 중세 시대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도 마법이나 오러 등의 신비는 나름대로 고급 지식에 속했기에 평범한 백성들이 접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

운 좋게 뛰어난 재능이 발견되어 누군가의 제자로 들어가거나, 아예 목숨 걸고 칼밥을 먹지 않는 한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환경이었으니 당연히 치안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거기다 맹수조차 피하는 몬스터들이 산야를 활보하기까지 하니 그 위험성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하물며 대륙에 '광기'까지 퍼진 지금이라면?

이 세상에서 예상치 못한 변을 당해 목숨을 잃는 것은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또 그렇게 발생한 죽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비극이 있었으니.

바로, 보호자를 잃고 방치된 아이들이 앞으론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안타깝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대륙 곳곳에서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는 일일 터.

하지만 그런 사정도 여기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야! 그거 내 꺼야! 이리 줘!"

"에베베베~ 나 잡아 봐라~!"

"얘들아, 조심해야지! 그러다 다쳐!"

시끌벅적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체하이의 보육원.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으나, 이곳에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여 있는 안뜰의 테라스 한편에서.

"언니, 언니는 도시에서 왔다면서요?"

"와! 도시는 얼마나 커요? 사람들도 많아요? 얼마 전에 우리 마을에서 축제가 있었는데요, 사람이 엄청 많았어요. 그것보다 많아요?"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어린 소녀들에게 둘러싸인 이세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방문한 외지인 중엔 그녀가 가장 어려 보였던지라 아이들에게도 더 편하게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오오!"

"와아아—!"

"후우, 후우— 나 했다? 진짜 했다고! 자, 다음은 누구 차례야?"

안뜰에 옹기종기 모인 남자아이들의 환호성 사이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의기양양한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빌리 아냐? 분명 그랬던 것 같은···."

"무슨 소리야? 네 차례잖아, 한스! 설마 겁먹은 거야?"

"우우~ 한스는 겁쟁이래요!"

"아, 아니야! 그냥 깜빡한 것뿐이라고! 가면 될 거 아냐?"

한스라 불린 열 살 남짓한 소년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한 손에 육포 조각을 쥔 채 정원수가 울창하게 자라난 구석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치 위험 지역을 탐사하기라도 하듯 조심스러운 걸음걸이가 이어진 끝에···.

"으와아악—!"

겨우 목표를 완수한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친구들을 향해 내달렸다.

괴물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사색이 된 채로.

그렇게 소년이 다녀간 정원 구석의 그늘진 곳.

"흐음! 훌륭한 전사의 자질이 보이는 아이들이로군."

우물우물—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할리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입 안에 들어온 육포를 씹었다.

방금 한스라는 소년이 넣어주고 간 육포를.

지금 소년들이 하고 있는 건 일종의 담력 놀이였다.

아무리 그가 최대한 기세를 죽인 상태였다지만, 세포 깊숙이 스며들어 은연중에 새어 나오는 광포함은 여전히 어린아이들이 마주하긴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구석에 숨어있던 참이었는데, 그걸 또 굳이 찾아와서 놀잇거리로 삼아버리다니···.

"크하하핫! 자신의 나약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강해지는 지름길이지! 스스로 공포를 이겨내는 법을 배웠으니, 너흰 앞으로 좋은 전사가 될 수 있을 거다! 하핫핫!"

그 대견함에 할리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그건 그의 입장에서였고, 밖에 있는 아이들에겐 음침한 나무 그늘 사이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일 뿐이었다.

그에 다음 순번이었던 아이가 울상을 지었지만··· 그 또한 강해지기 위한 시련이라 봐야겠지.

또 이렇게 보육원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건 그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이미 아이들과 안면이 있던 지오스는 이제 제법 성장해 바깥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아이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하인리히는 마치 토템처럼 영유아들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스페론은···.

"자, 이거부터 들고 하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일대일로 체하이에게 강의를 받던 그는 간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온 부인을 향해 인사하며 냉큼 그것을 받았다.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부드러운 눈매를 한 중년 여성.

그녀가 바로 체하이의 아내이며 이 보육원의 안주인이자 이곳 모든 아이의 어머니인 사람이었다.

'이분도 대단한 분이란 말이지.'

사실 돈이야 체하이가 용병 일을 하며 모아둔 것과 지오스가 지원해 준 게 많다고 하니 큰 문제는 아닐 터이나, 이 많은 아이를 돌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20년간 싫은 소리는커녕 오히려 매일 같이 솔선해서 아이들을 챙겨왔다고 하니···.

과연 체하이가 결혼 하나는 잘했다고 생각될 정도의 성품이었다.

"크흠, 그럼 잠시 쉬었다 하도록 하지. 난 잠시 애들 좀 보러 갔다 올 테니 편히 쉬고 있으라고."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잠시 여유가 나자, 체하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를 내버려 두고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헤스페론을 교육하는 동안엔 그가 아이들을 돌볼 수 없는 만큼, 다른 일행들이 그 역할을 대신 맡아주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계속해오던 일을 남에게만 맡겨두기엔 조금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흐음, 고유스킬이라."

방 안에 혼자 남은 헤스페론이 음료를 홀짝이며 조금 전에 떠올랐던 시스템 문구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카르마 없이 「아바타」 스킬이 성장한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군. 확실히 최근엔 그냥 주어진 걸 사용하기만 했을 뿐 별다른 고민이 없긴 했지.'

고유스킬을 강화하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깊은 고찰과 꾸준한 숙련을 통한 점진적인 성장, 그리고 카르마 상점을 이용해 단번에 진화시키는 것.

지금까지 그는 압도적인 카르마 수급을 바탕으로 후자의 방법에만 집중해 왔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고유스킬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며 강화의 조건을 달성한 듯싶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시스템 문구가 떠오를 정도로 스킬이 성장했던 게, 할리의 신체 개조가 끝난 직후가 마지막이었던가?'

그 후로도 자잘하게 효율이 상승하거나 아바타 간 정신력 배분이 자유로워지는 등의 개선은 있었으나, 이렇게 시스템이 공언해 줄 정도의 강화가 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휴버트를 만들고 상인으로 키우기 시작했으니, 상당히 오래전이네.'

다른 각성자라면 포인트를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자연스럽게 스킬에 대해 파고들고 성장하기를 반복했을 텐데, 카르마가 풍족했던 그는 그저 그 편리함에 매몰되어 버린 것이다.

스킬에 대한 고찰 없이 그저 상점을 통한 강화에 의지했을 뿐.

'그렇다고 쓸 수 있는 패를 일부러 사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겠지만. 뭐, 앞으로 좀 더 신경 쓰면 되겠지. 노력하는 부르주아가 되도록 하자.'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고,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된 것 아니겠는가?

체하이가 알려준 노하우는 기발하다고 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 혼자였다면 생각해내지 못했을 부분을 세밀하게 짚고 넘어갔다.

마법이나 신성력 등을 사용할 때의 감각이 아닌, 내면에 깃들어 스킬을 발동하도록 돕는 특별한 무언가.

그것을 좀 더 확실하게 자각하고, 능력 발동의 메커니즘을 파악해 더욱 효율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그 가르침의 골자였다.

애초에 서로 가진 능력 자체가 다른 만큼 특정한 기교보다는 조언에 가까운 수준이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그의 생각을 크게 바꿔놓기엔 충분했다.

'일단 이것만으로도 이득이지. 고유스킬의 다음 강화 포인트가 무려 120만이었으니.'

물론 그게 카르마를 투자해 강화했을 때의 효과와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아바타의 개체수가 늘었다는 것 자체만 해도 큰 소득이었다.

사실 지금도 충분히 많은 감이 있었으나···.

'다다익선이라— 있으면 다 어디든 쓸 일이 있겠지.'

턱을 쓰다듬던 그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체하이의 가르침은 고유스킬에 대한 조언에서 그치지 않았다.

헤스페론의 「아바타 클라우드」를 보고 자신과 비슷한 공간 계통 고유스킬이라 생각했는지, 그의 「위상굴절」을 이용해 만들었던 비전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던 것.

이왕 시작한 거 아예 완전히 다 퍼주기로 마음먹었는지, 그야말로 아낌없이 베푸는 스승 그 자체였다.

물론 그 기술은 그가 직접 오러를 사용하는 기술로 재구성했던지라, 마법사인 헤스페론이 직접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근간이 되는 원리만큼은 충분히 다른 분야에도 응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니.

'이렇게 높은 수준의 이론을 혼자서···.'

과연 시스템이 사라진 이후 그가 얼마나 고유스킬에 매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걸 억지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제약이 생기고, 이전에 가지고 있던 범용성과 자유로움이 완전히 '기술'이라는 틀에 얽매여 버리긴 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문제겠지.

'혹시 이거 할리의 「생체 오러」로는 사용할 수 없을까?'

몬스터들이 가진 생체력을 가공해 만든 「생체 오러」는 일반적인 오러와 성질만 비슷할 뿐, 작용 기작은 전혀 다른 기운이었으나.

그래도 그와 가장 유사한 에너지인 만큼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다른 일행들이 사용하는 것도 허락받았으니, 지금 다 못 배우더라도 언제든 지오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이론을 정립한 건 체하이였지만, 그것을 전수받아 무수한 실전으로 기술을 더욱 가다듬었을 지오스의 숙련도도 그리 부족하진 않을 터였다.

그렇게 헤스페론이 지금까지 얻은 것과 앞으로 얻을 것 등을 생각하며 고민에 빠져 있던 순간.

"수고했어요, 헤론."

"아, 스승님."

안뜰에 있던 이세아가 문을 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과연 그녀도 뭔가 소득이 있긴 했던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대마법사인 그녀의 감각과 사고능력은 범인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안뜰에서 아이들과 대화하는 와중, 이 방 안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전부 듣고 머릿속에 정리하는 것 정돈 일도 아니라는 소리.

"과연 연륜은 무시할 수 없네요. 저도 라일리랑 머리를 맞대고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녀의 자조 섞인 말에 헤스페론은 슬쩍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자기는 깊은 고뇌는커녕 그저 탐스럽게 열린 결실을 탐닉하기에 바빴으니까.

"···그런데 스승님? 스승님은 언제 밝히실···."

"크흠, 흠!"

헤스페론의 질문을 끊어내는 이세아의 헛기침.

그녀가 가능했던 것처럼, 다른 이들도 마음만 먹는다면 이 방의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있을 터였다.

평소처럼 방음 결계를 치기 위해 남의 집에서 멋대로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참, 이제 슬슬 밝힐 법도 하지 않나.'

헤스페론은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슬쩍 외면하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이제 파티에게만은 자기도 이세계인이라는 사실을 밝힐 법도 한데, 그녀는 여전히 다른 이들에겐 그것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사실 그와 관련해서 한 번 넌지시 물어본 적도 있긴 했는데···.

그때 돌아온 대답이 참 어이가 없었다.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건 또 뭐야.'

헤스페론이 등장한 직후 바로 말을 꺼냈다면 모를까, 그로부터도 상당히 시간이 지난 지금 와선 뒤늦게 밝히기 민망하다는 것.

그렇게 어영부영하다 보니 지금까지 와 버렸다는데, 물론 그녀도 줄곧 감출 생각은 없으니 조만간 기회를 봐서 말을 꺼내겠다고만 할 뿐이었다.

'···뭐, 진짜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겠지. 그건 대충 둘러댄 걸 테고.'

애초에 이곳에 머문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라일리 황녀를 제외한 모두에게 줄곧 비밀로 감춰왔던 일이었으니.

이제 와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들에게 털어놓기엔 본능적인 저항감이 있는 게 당연하다.

'쉽게 말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지.'

헤스페론이야 라일리의 중재가 있었던 데다, 먼저 자신의 정체를 밝힌 입장이었으니 예외였고 말이다.

'그래 봐야 이미 일행 중엔 지오스 빼곤 다 아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아니, 사실 단순히 아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이 가진 비밀에 비하면 그녀의 비밀은 귀여울 뿐.

실상 지오스를 제외한 모두가 이세계인이라는··· 그 충격적인 진실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 전전긍긍하는 그녀가 귀엽긴 했지만, 헤스페론은 별다른 말 없이 웃기만 할 뿐 따로 뭐라 하지는 않았다.

이 작은 스승이 혼자 고민하고 고뇌하는 걸 보는 게 재밌었으니까.

그렇게 헤스페론과 용사 파티가 지오스의 고향 마을에 도착하고, 지구 출신의 정착자 체하이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성취를 얻었을 때는.

이미 2차 대륙 정상 회의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194

백색 거인 (1)

사실 지오스를 따라 이 시골 영지까지 오면서도 어쩌면 이게 헛걸음일지 모른단 각오 또한 하고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파티의 일정을 조율하는 거야 일도 아니니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긴 했으나, 달랑 지오스의 증언 한 마디만으로 상대를 지구인이라 확신하기엔 근거가 부족하지 않겠는가?

그저 정말로 각성자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또 약간이라도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만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확이 컸어.'

진짜 지구 출신의 정착자인 체하이를 만난 것은 물론, 그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고급 정보마저 흔쾌히 제공해 주었다.

심지어 그에게 따로 가르침까지 받아 고유스킬까지 성장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덕분에 예상보다 오래 머무르게 되었지.'

하지만 하인리히를 비롯한 용사 파티가 언제까지고 이런 시골 벽지에 박혀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이렇게 길게 시간을 뺀 것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럼 다음에 봬요, 지오스 아저씨!"

"언니! 조심히 가세요!"

"안녀엉~!"

일행이 언덕 위의 별장과 체하이의 보육원을 오가며 생활한 지 불과 며칠이건만, 그 사이에 상당히 정이 들었는지 아이들은 문 앞까지 우르르 몰려나와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솔직히 지오스를 제외하곤 지금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 그런 아주 잠깐의 인연일 뿐이었으나···.

씩씩한 목소리로 손을 흔드는 아이들의 얼굴엔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구김살 없이 밝은 기색만이 역력했다.

'다들 강하네. ···나보다 낫군.'

성인들도 버티기 힘든 이 모진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저 웃음 뒤에 가려진 상처가 얼마나 될지 그는 감히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아마 그 상처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 준 몇몇 어른들과 언제나 곁에 있어 준 친구들이 함께이기에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거겠지.

일행은 아이들과 짧은 작별 인사를 마치고 보육원을 나섰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겨 이동하던 도중, 배웅을 위해 잠시 그들과 동행하던 체하이가 하인리히에게 다가왔다.

"제 나름대로 돕겠다고 열심히 하긴 했는데. 어떻게, 힘이 되었는지는 모르겠군요. 괜히 바쁘신 분들 시간만 쓸데없이 잡아먹은 건 아닐지."

"무슨 말씀을.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들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체하이 님께선 지금처럼 이곳을 지켜 주십시오. 아이들이야말로 세상의 미래가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일이지요."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미소와 함께 악수하는 두 사람.

이어서 다른 이들과도 짧은 몇 마디씩을 나눈 체하이가 마지막으로 남은 이에게로 향했다.

"지오스."

그의 나직한 부름에 지오스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육원에 있는 동안 좀 나아졌나 싶더니, 그곳을 떠나온 그의 표정은 어느새 다시 음울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제 그만 편해지는 게 어떠냐? 언제까지고 그렇게 과거에 얽매여 있어봤자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저는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날, 제 세상은 이미 끝났으니까요."

"···안나와 니아도 네가 이러는 걸 바라진 않을 거다."

"글쎄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미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이상 그런 가정도 전부 무의미할 뿐.

그는 주변에서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저 평소처럼 공허한 시선으로 허공만 바라보았다.

"하아—."

그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체하이는 결국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자신도 지오스와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 뻔하니, 말하는 스스로도 설득력이 없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마침내 공간이동을 준비하기에 적합한 장소인 언덕 위의 저택에 도착해 곧바로 뒤뜰에 마법진을 준비했다.

"이 마법진, 요즘 하도 자주 사용했더니 이젠 눈 감고도 그릴 수 있겠네요. 저는 원소계··· 그중에서도 빙계 마법이 주력이었는데. 이젠 공간계로 전공을 바꿔야 할까 봐요."

"그만큼 스승님이 다재다능하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참에 다른 계통도 모조리 섭렵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마침 제가 관심 있는 학파가 있는데, 어떻게 같이···."

"흐음···."

이세아가 아공간 마도구에서 꺼낸 재료들로 마법진을 설치하며 툴툴거리자, 옆에 있던 헤스페론이 냉큼 그녀에게 헛바람을 주입했다.

아무리 그가 한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계통을 익힐 때도 그녀와 머리를 맞댈 수 있다면 효율이 더욱 증가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역시 대단하네.'

요즘 워낙 일상이나 다름없어 쉬워 보일 뿐이지, 사실 공간이동은 어지간한 실력과 준비 없이는 시도할 수조차 없는 고위 마법이었다.

마탑에서조차 커다란 시설과 많은 재료들, 여러 마법사의 협력에 힘입어서야 겨우 시도하는 것이니 말 다 했지.

그만큼 그걸 단독으로 시행할 수 있는 이세아가 대단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한스야 무려 불사왕이기까지 한 몸이었으니 당연히 예외였고.

그리고 공간이동 준비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가주님께서 언제든 돌아와 쉬실 수 있도록, 철저히 대비하여 항상 완벽한 상태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기억해 주시길."

요깃거리를 포장해 가져온 저택의 관리자 올리버가 지오스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 또한 체하이처럼 걱정되는 마음은 같았지만, 고용된 입장이었기에 감히 주제넘게 나서지 못하고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돌려 말하고 있었다.

정말 힘들 땐 언제든 이곳··· '집'으로 돌아오라고.

"···그래. 잘 부탁하지."

물론 지오스는 그것에 이전처럼 무미건조한 대답만을 내놓을 뿐이었다.

"준비 끝났어요. 모두 이쪽으로 모이세요."

이제 이 마을에서 할 일은 다 했으니, 더는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체하이와 올리버에게 인사한 일행이 이세아의 곁을 둘러싸며 전송을 기다렸다.

"그럼 출발하도록 할게요. 이미 다들 잘 아시겠지만 항마력을 조절해서 마법에 저항하지 않도록···."

그러나.

그녀가 미처 마법을 발동하기도 전에.

찌지지직—!

어지간하면 평생 한 번 듣기도 힘든 이질적인 소리가.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소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음···?"

"······!"

그 심상치 않은 현상에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신경이 한껏 날카로워졌다.

이건 이세아의 공간이동 마법이 일으킨 현상이 아니었으니.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일행들과 그들을 배웅하던 체하이의 고개가 옆쪽으로 휙 돌아갔다.

이미 그들이 지나왔던 마을 방향으로.

"잠깐···!"

"저거 설마?!"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향한 마을 외곽부에서는.

허공에 발생한 거대한 균열과 함께, 그 안에서 튀어나온 새하얀 '손'이 서서히 그 틈새를 벌리고 있었다.

마치 닫힌 문을 억지로 비집고 나오려는 듯이.

몇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 균열의 크기에 걸맞게 밖으로 나오고 있는 존재도 정말 엄청나게 컸다는 것과···.

"안 돼!"

그 균열이 열린 곳 근방에 체하이의 보육원이 있다는 것이었다.

***

그 존재는 손뿐만 아니라 전신이 전부 물감이라도 뒤집어쓴 듯한 흰색이었다.

그것은 기어이 두 손으로 균열을 찢어내며 한쪽 다리를 뻗어 바깥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쿠우웅—!

고작 그 한 걸음에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닥에 다섯 개의 발가락이 찍힌 깊은 발자국이 새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두 발은 물론 몸 전체를 균열 밖으로 꺼낸 그 존재가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직후—.

[———!]

그 존재에게서 퍼져 나온 억눌린 듯한 기성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마치 고래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그 묵직한 울림에는 언어가 아님에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짙은 '환희'가 어려 있었다.

만약 저것에게 조금만 더 배려심이 있었다면, 어쩌면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을지도 모를 뚜렷한 감정.

쿠구구궁—!

하지만 그 기쁨에 함께 동조해 주기엔 청자들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 압도적인 거체에서 배려 없이 뿜어진 파괴적인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음파에까지 실려 사방을 거칠게 휘저었으니까.

휘청거리던 나무의 뿌리가 뽑혀 쓰러지고, 돌멩이들이 미친 듯이 사방으로 튀기며, 온갖 구조물이 부서져 내렸다.

사물들의 피해가 그 정도인데, 살아있는 존재가 그 파동을 직격으로 맞았다간 어떤 꼴이 될지 뻔했다.

그리고 바로 지척에 있던 마을은···.

"으윽, 귀야··· 갑자기 이게 무슨···."

"으아앙—! 엄마아!"

"히익? 뭐, 뭐야! 저 괴물은!"

다행히 굉음에 의한 소란과 기물 파손만 있을 뿐, 당장은 그리 큰 인명피해가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아슬아슬했다···."

이세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이번에 황실에서 선물 받은 지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어느새 마을 전체를 뒤덮은 푸른빛이 흉악한 에너지의 격류를 막아내며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하필 순간이동을 준비하던 도중이라 대응이 살짝 늦긴 했어도, 그녀는 명색이 마법의 극의에 이른 대마법사였다.

이상을 감지한 즉시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고, 준비하던 마법을 취소하는 동시에 새로운 마법을 구축해 발동하기까지가 고작 십여 초.

하지만 마을 전체를, 그것도 본인이 있는 곳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장소를 이 짧은 시간에 전부 커버하는 건 그녀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상대가 작정하고 쏟아낸 공격이 아니라, 그저 의도치 않은 여파에 불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저건 대체 뭐지···?"

이세아는 급조한 탓에 연신 흔들리는 결계를 재차 수복하며, 원근감을 무시하는 듯한 그 커다랗고 새하얀 존재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30미터를 넘어서는 덩치의 전형적인 인간형 거인.

특이한 점이라면 얼굴에 있는 눈과 귀, 콧구멍과 입의 일곱 구멍을 전부 검은색의 무언가로 꿰매고 있다는 점일까.

[———!]

그때, 거인이 다시 목구멍에서 기묘한 울림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번엔 전과는 달리 기쁨이 아닌 짜증이란 감정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용사 하인리히, 야만 전사 할리, 창기사 지오스.

어느새 거인의 앞에 도착한 용사 파티 전위 삼인방이 놈의 시선을 끌어 마을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연신 공격을 퍼붓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체하이 님은··· 곧바로 보육원으로 향했나.'

이세아가 반응한 것과 거의 동시에 다른 이들도 곧바로 할 일을 찾아 움직였던 것이다.

"···나도 마법의 효율을 위해선 조금만 더 가까이 가야겠지."

"옙!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스승님! 저만 믿으십쇼!"

아직 무능한 헤스페론만 빼고.

***

극한으로 단련된 하인리히의 몸속으로 성검기와 뒤섞인 신성력이 타고 흘렀다.

뿌드득—

평소에도 「대축복 : 빛의 기사」와 「축복 : 강체」로 강화되어있던 육신이 다시 한번 한계를 넘어서며 그에게 초인적인 힘을 불어넣었다.

그는 그 상태로 바람같이 내달려 거인의 발과 무릎, 허벅지를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축복 : 광검」이 「축복 : 증량」의 영향을 받아 한층 거세게 타오르고, 그것은 그대로 「축복 : 성검」에 담겨 거인의 심장부를 꿰뚫었다.

「로지아 성투법」과 「무도의 길」의 인도를 받아 매우 치명적인 궤적을 그리며.

촤아악—!

[———?!]

갈라진 거인의 몸에서 튀어나오는 새하얀 피.

하지만 놈의 덩치가 워낙 크고 몸뚱이가 단단해 심장을 제대로 파괴하지 못했다.

보기완 다르게 상당히 민첩해 살짝 빗나가기도 했고.

꿈틀꿈틀—

'···그 와중에 재생까지.'

사뿐하게 땅에 내려선 하인리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놈의 벌어진 상처가 연신 꿈틀거리며 느리지만 꾸준하게 봉합되고 있었다.

회복력 억제는 온갖 기괴한 마물들을 사냥해 온 성검의 기본적인 능력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검에 당하고도 저만한 재생력이라면, 하인즈 2세나 할리가 가진 「초재생」조차 넘어선다는 뜻인데···.

여러모로 상궤를 벗어난 괴물이었다.

'뭐지? 이 괴물은? 저놈이 나온 균열은 틀림없이 심연의 상흔일 텐데.'

이 거인은 나체의 인간형이라지만 생식기를 비롯해 성별을 특정할 그 어떤 특징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비롯한 털 한 오라기도 없이, 그저 하얀 지점토로 대충 빚어놓은 것 같은 인간의 형상.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 탓에, 얼굴의 칠공을 꿰맨 검은 철사 같은 것이 더욱 도드라져서 기괴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놈도 불사의 군대처럼 심연의 경계에 표류하던 놈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껏 잠잠하다가 갑자기 등장한 게 석연치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에 깃든 광기의 농도가 상당하군. 이 정도면··· 광룡이었던 헤라토스와 비슷한 것 같은데?'

심연의 상흔에서 튀어나온, 몸에 짙은 광기를 품은 존재라면.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괴물인가.'

하인리히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찬가지로 거인 또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하인리히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이젠 짜증을 넘어선 분노를 물씬 풍기면서.

"성자님! 더 이상 이곳에서 싸웠다간 위험합니다! 보육원이 근처에 있어요! 이제 어느 정도 주의는 끈 것 같으니 뒤쪽으로 유도를···!"

그때, 연신 창끝을 찔러 놈의 시선을 끌던 지오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근방에 다가온 이세아가 거인의 견제를 돕는 동시에 보호 결계의 유지 보수는 물론, 마법으로 주민들의 피난까지 보조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최소 30미터 이상의 압도적인 체구에서 오는 물리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재앙이었다.

최대한 놈의 시선을 끌며 싸운 지금도 마을이 난장판이 된 것은 물론이고, 미처 막지 못한 희생까지 있었으니···.

'까놓고 말해 저놈은 발이 미끄러져서 넘어지는 것조차 이쪽엔 치명적인 공격이지.'

그래서 지금은 넘어뜨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놈이 저항하지 못하게 단번에 숨통을 끊을 수 있다면야 또 어떻게든 수를 낼 수 있을 테지만.

"알겠습니다! 마침 놈이 저에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으니, 이대로 천천히 뒤로 물러나서 마을 밖으로···!"

지오스에게 대답하던 하인리히가 갑자기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함에 말을 멈췄다.

거인이 보인 이상 행동 때문에.

'아니, 잠깐. 설마···!'

분노에 찬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던 거인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가를 뒤틀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꿰맨 검은 철사 때문에 그로테스크해 보일 뿐이었으나—.

그건 어떻게 봐도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이 물씬 느껴지는 함박웃음이었다.

'지능이···!'

그리고.

백색 거인의 고개가.

'우리 대화를 알아들었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던 보육원 쪽으로 향했다.

#195

백색 거인 (2)

푸화악!

깊게 새겨진 상처를 통해 흰색 물감과도 같은 피가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원래대로 붉은색 피였다면 끔찍한 장면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 색상이 워낙 이질적이어서인지 딱히 잔인하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마치 자체 모자이크가 된 장면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지금은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지만!'

빙글 회전하며 거인의 반항적인 손짓을 회피한 하인리히가 원심력을 담아 거대한 빛의 검을 휘둘렀다.

아까 공격한 곳과 같은 자리.

놈의 아킬레스건이었다.

[———!]

그와 동시에 반대편 발목에는 할리와 지오스의 협공이 가해졌고, 이어서 발현된 이세아의 중력 마법이 놈의 움직임을 억제했다.

거인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마주한 직후.

하인리히를 비롯한 용사 파티 전원은 다소 위험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놈의 발목을 잡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지금까지처럼 안정적으로만 상대하기엔··· 조금 전에 녀석이 보인 반응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렇게 이 하얀 거인을 상대하다 보니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확실히 놈은 몸집이 크고 단단한 피부와 압도적인 재생력을 가져 상대하기 까다롭긴 했으나,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잡을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덩치에 비해 제법 민첩하긴 하다만 이쪽을 따라올 수준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딱히 특별한 공격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놈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 무식한 육체뿐.

'그런데 그 몸뚱이 자체가 너무 압도적이라 문제야.'

막대한 신성력에 성검의 힘까지 빌린 공격은 확실히 저 거인에게도 유의미한 타격을 주고 있었다.

그저 놈의 생명력이 워낙 방대하기에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그러나 그 막대한 생명력 때문에 놈을 끝장내지 못하고 있는 동안, 마을의 피해도 조금씩 누적되고 있었다.

평화로웠던 마을이 점차 파괴되며 여파에 휩쓸린 사람과 가축들의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메아리쳤다.

["성자님! 놈이 다시 빠져나가려 합니다! 큭, 아직 사람들이 다 피하지 못했는데!"]

["중력으로 억누르는 것도 이제 한계에요! 체급 차이 때문에 범위를 전부 통제할 수 없어서···. 재발동을 위해선 최소 5분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이쪽도 좀 더 공부해 두는 건데!"]

덩치가 큰 만큼 체중도 무거운 거인에게 중력 마법은 효율이 좋은 제어기였다.

아마 그게 없었으면 이미 한참 전에 돌파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을 터.

하지만 놈의 강대한 육체 능력과 저항력 때문에 그것도 이제 한계에 부닥친 모양이었다.

'온전히 전투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면, 시간만 여유로웠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고전하고는 있으나, 정면으로 다시 맞붙는다면 확실하게 놈을 사냥할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하인리히의 신장이 놈의 손바닥 정도에 불과하다 해도, 「축복 : 증량」까지 사용한 광검의 최대 길이는 3미터가 훌쩍 넘어간다.

그 정도면 저 거인에게도 단검이나 마찬가지인 길이였으니 살상력은 충분하다는 소리.

또 할리의 전투 도끼는 놈의 손가락 정돈 충분히 끊어버릴 수 있는 초대형 병기고, 지오스의 창격은 송곳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놈의 육체 능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으면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이지 않았을까?

'···사실 이 정도 체급 차이에서 저런 덩치를 잠시나마 붙잡아 뒀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무시하고 지나가려 할 때마다 다리가 썰려 나가니 놈도 어쩔 수 없기야 했겠지만.

'···한 번이라도 뚫리면 마을에서 대참사가 벌어질 거다. 정말 방법이 없··· 음? 저건?'

그때 문득, '할리'의 시선에 하나의 현상이 들어왔다.

그들과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재생되고 있는 거인의 상처.

[———!]

하인리히가 남긴 성검의 상흔은 기껏해야 봉합 단계에 들어선 것이 대부분인 반면, 지오스가 뚫어놓은 구멍들은 얼마 있지도 않아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수복되고 있었다.

예상외였던 것은 할리가 남긴 흔적들이었는데···.

'잠깐, 그러고 보니.'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좀 전에 자신이 끊어놓았었던 거대한 새끼발가락의 단면을 노려보았다.

그것의 재생 속도는 대충 하인리히와 지오스의 중간 정도 수준인 것 같았다.

또한, 할리의 눈에는 그 원인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그렇군. 하긴, 저놈도 광기의 숙주였지. 그렇다면···.'

그의 공격에 담겨 있던 광기와 거인의 몸에 깃든 광기의 주도권 싸움이 바로 그것.

물론 공격에 실린 양은 놈의 몸속에 있는 총량보다 턱없이 부족해서 그리 효과가 좋지는 못했지만···.

사실 그에게 그런 것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마침내 돌파구가 보이는 듯해, 서서히 입꼬리가 올라간 할리의 얼굴에 흉포한 웃음이 머물렀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입장이었으니.

"큭, 안 돼!"

"···마법 내성이 너무 강해서 막을 수가···!"

마침내 돌파구를 발견한 백색 거인이 한쪽을 바라보며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

백색 거인이 등장한 직후.

쿠구구궁—!

마을 외곽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지진이라도 난 듯이 계속해서 땅이 흔들렸다.

"으아아! 저게 대체 뭐야!"

"꺄아악—!"

"괴물이다! 다들 도망쳐!"

당연히 인근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소동의 근원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아우성을 칠 수밖에 없었다.

자원이 없는 대신 근처에 이렇다 할 몬스터 서식지도 없어 평화로운 것만이 유일한 장점인 동네였건만.

지금은 평소의 그런 일상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마을 전체가 아수라장이었다.

하긴, 무려 건물 10층짜리 크기의 괴물이 바로 지척에서 날뛰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일.

그나마 그 거인이 나타난 게 마을 외곽이었던 데다, 등장과 동시에 용사 파티가 움직여 대응했기에 지금 이 정도로 그쳤다고 볼 수 있었다.

"으아앙—!"

"딸꾹, 딸꾹. 으··· 엄마···."

"흐이이— 괴, 괴물이···!"

그리고 혼란에 빠진 것은 이곳, 체하이의 보육원도 마찬가지였으니.

이세아의 마력 방벽이 적대적인 에너지를 막아 주어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하나, 지근거리에서 거대한 괴물이 날뛰는 상황인데 패닉에 빠지는 게 당연했다.

"얘들아! 진정하고, 침착하게 대피하도록 하자. 토마스, 샐리? 아이들 인솔하는 것 좀 도와주렴!"

"네··· 네, 엄마! 후우— 빌리, 한스! 구석에서 궁상떨지 말고 이쪽으로 와! 호버, 네가 문 앞에서 나가는 인원 체크해. 난 빠진 애들이 없는지 다시 한번 둘러볼 테니."

"···다들 엄마 말씀 들었지? 가넷이랑 사라는 나랑 같이 유아실로 가서 아이들부터 데려오자. 나머지는 애들 울지 않게 잘 달래고 있어."

하지만 그들은 곧 보육원의 어머니인 체하이의 아내, 밀레나의 주도로 차근차근 혼란을 수습하고 대피를 준비했다.

보육원 내에서도 곧 독립을 앞둔 성숙한 아이들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머리가 굵은 아이들이 저보다 어린아이들을 챙기자, 그들은 언제 우왕좌왕했었냐는 듯 빠르게 채비를 마치고 보육원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 때를 맞춰.

"밀레나! 애들은? 모두 무사한가?!"

손님들을 배웅하러 나갔던 체하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보육원에 도착했다.

그는 바글바글한 아이들을 가볍게 둘러본 후,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후우, 다행···은 아닌가. 그래도 준비는 다 된 것 같으니 바로 이동하자. 최대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쿠구구궁—

그 순간 격전지에서 다시 진동과 폭음이 터져 나왔다.

건물 안에 있을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 충격에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던 아이들의 동요가 더욱 커졌다.

더 이상 지체해 봐야 좋을 것도 없는 상황.

체하이는 서둘러 보육원 가족들을 이끌고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동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는 다시 상황을 살피기 위해 거인이 있는 방향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 첨탑처럼 솟아오른 덩치의 행동을 보고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루트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는데···.

"······?!"

순간 느껴진 오한에 그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썅,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이어서 침을 꿀꺽 삼킨 그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을 내뱉었다.

어지간하면 아이들 앞에선 고운 말만 쓰고 싶었으나, 지금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은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고개를 돌려 거인을 바라본 순간, 용사 일행과 한창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쪽으로 얼굴을 향한 놈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쳐 버리지 않았는가?

아니, 사실 놈의 두 눈은 여전히 무언가에 꿰매진 상태였으니 시선이 마주쳤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으나···.

지금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리라.

그래··· 놈이 마치 뭔가가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 기괴하게 일그러뜨린 얼굴로.

보육원의 아이들을 쭉 훑으며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체하이가 잠시 굳어있던 짧은 유예도 잠시.

[———!]

사방을 뒤흔드는 무거운 울림과 함께, 압도적인 거체가 그들을 향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들었다.

다리 길이가 차원이 다른 만큼, 놈이 작정하고 덤벼들자 보육원을 떠나 피신 중인 일행 앞까지 다가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젠장···!"

콰아앙—!

그들이 있는 곳에서, 마치 폭발과도 같이 굉음이 터져 나왔다.

***

콰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흙먼지와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지금까지 발생했던 것들과 차원이 다른 규모의 그 지진은 근방의 모든 건물을 무너뜨린 건 물론, 인근의 땅에 거미줄 같은 균열을 무수히 발생시켰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마치 작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게 아닐까 싶은 충격적인 파괴의 현장.

"크윽— 이게 무슨···?"

그리고 바로 코앞에서 터진 어마어마한 충격에 감았던 눈을 뜬 체하이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들 일행을 감싼 은은한 푸른빛과, 그 너머에서 어지러이 흩날리는 뿌연 흙먼지였는데···.

이건 분명 충격파로부터 마을을 지켜주었던 보호 결계였다.

"후우, 그래도 이번엔 미리 준비해서 그런지 좀 여유로운 편이었네요. 물론 저런 걸 직격으로 맞았다간 결계고 뭐고 한순간에 짜부라졌겠지만."

그때, 한동안 같이 지내며 익숙해진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과연 결사대의 마법사인 이세아가 지팡이를 내밀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 구해주셔서 감사···."

"아직 끝이 아니에요. 일단 아이들부터 챙겨서 물러나죠."

"아! 아이들! 아이들은 무사합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결계는 특히 더 신경 썼으니까."

그렇게 말한 그녀는 한 번 더 지팡이를 흔들어 뒤쪽에 기절해 있던 아이들을 일제히 마법으로 들어 올렸다.

이런 간단한 부양 및 운송 마법은 그 수가 몇십이 되건 그녀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부인분이랑 애들은 일부러 재웠어요. 괜히 이런 데 가까이 있다간 트라우마만 될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저도 심장이 떨어질 뻔했는데···. 그런데 아까 그건 설마?"

무언가를 예감한 그는 이세아를 따라 황급히 뒤로 물러나면서도 연신 뒤쪽을 힐긋거렸다.

서서히 가라앉는 흙먼지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어슴푸레하게 비치고 있었다.

자신의 키를 훌쩍 넘어서는 크기면서도 바위같이 둥그런 것.

바로 바닥에 엎어진 거인의 머리통이었다.

[———!]

충격에 잠시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분노에 찬 기성을 사방에 퍼트리는 거대한 머리.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들썩거리는 그 모습을 보아하니, 확실히 고작 저걸로 끝은 아닌 듯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설마 했는데 진짜로···.

"허, 참. 고작 넘어진 정도로 이만한 파괴력이라니."

당연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만든 장본인은 전신이 온통 하얀··· 아니, 이제는 흙먼지로 뒤덮인 갈색 거인 본인이었다.

그 결과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했으나, 사실 그 과정은 그리 대단하다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맹렬하게 달려오다가, 그 기세 그대로 바닥에 격렬하게 다이빙했을 뿐이니까.

[———!]

"크흐하핫! 이야— 엄청난 소리였는데! 쪽팔릴 텐데, 잠시 누워있으라고 친구! 으하핫!"

물론 거인이 바보라서 그냥 혼자 넘어진 건 아니었다.

놈이 방심한 사이 슬쩍 발을 걸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도록 개입한 범인이 따로 있긴 했으니.

"···할리?"

그리고 그 또한 체하이에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지오스의 동료인, 애들이 무서워하던 험상궂은 남부 전사이지 않았나.

그런데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보이는 실루엣이 뭔가 이상했다.

바닥에 엎드려 꿈틀거리는, 자신의 키보다 두 배는 될 법한 커다란 머리통은 틀림없이 거인의 것일진대.

그 머리통을 바닥에 처박고서 의자처럼 깔고 앉은, 그 크기에 뒤지지 않는 저 집채만 한 덩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와, 저도 저 모습은 처음 보는데. 저게 용인이라는 건가 보네요. ···뭔가 생각하던 것과는 좀 다른 것 같기도?"

이윽고 흙먼지가 완전히 걷히고,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자.

체하이와 마찬가지로 이세아도 옆에서 감탄을 토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발달한 근육과 갑옷처럼 전신을 뒤덮은 윤기 나는 검붉은 비늘.

커다랗게 찢어진 입안을 빼곡하게 채운 이빨과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발톱.

랜턴이라도 켠 듯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적색과 녹색의 안광.

머리에 돋아난 뿔과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핏빛 기운까지.

이젠 그 어디에서도 인간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육체변이」로 그 덩치를 4미터가 넘게 키우고, 그동안 「돌연변이」로 끌어모은 모든 우성 유전 정보를 발현한 궁극의 진화 생명체.

속칭 '완전체 할리'였다.

#196

백색 거인 (3)

[———!!]

거인의 분노와 살의가 가득 담긴 음파가 묵직하게 퍼져나가며 사방을 뒤흔들었다.

쿠르르릉—! 콰드득! 콰앙—!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신 들썩거리는 몸부림에 땅이 부서져 내리며 발생하는 지진까지.

"크하핫! 이놈 이거, 아직도 팔팔하구만!"

할리는 10톤에 달하는 자신의 몸으로 놈의 머리통을 깔고 앉은 채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전력으로 「보석안 : 강압」을 사용해 놈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면서.

물론 10층 건물만 한 크기의, 이 수백 톤짜리 거대한 몸뚱이를 완전히 억누르는 것은 아무리 그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놈의 육체가 인간형인 이상, 몸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과정은 뻔하지 않겠는가?

'나도 인간의 신체 구조엔 제법 빠삭한 편이니까.'

직접 자신의 몸을 개조하며 본의 아니게 인체 해부학에도 해박해진 그에게, 거인이 일어나기 위한 동작만을 집중적으로 방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커서 오래 유지하긴 힘들 것 같긴 한데. 일단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었으니 됐어.'

거기다 「보석안 : 강압」의 발동에 '광기'를 섞은 생체력을 사용했더니, 과연 생각했던 대로 거인에게 더 뛰어난 효율을 보이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놈을 잡아두는 데에 더 많은 힘이 소모되었을 터.

쿠구구구—

하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어이쿠! 이 친구 성미가 급하구만! 좀 더 누워있어도 되는데 말이지!"

마침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거인이 조금씩 상체를 일으키자.

자신의 압도적인 질량으로 놈의 뒤통수를 누르고 있던 할리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후우웅—!

완전체로 변신한 지금의 할리와도 엇비슷한 크기의 하얀 손이 거센 파공음을 내며 그에게 날아들었다.

"엇차!"

물론 그런 단조로운 공격을 허용할 리 없는 할리는 가볍게 그 손짓을 피하며 바닥으로 몸을 피했다.

그래도 그가 시간을 벌어준 틈에 이세아가 직접 나서서 사람들을 피신시킨 덕분인지, 이제 근방에는 할리 자신과···.

"흐음,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습니다만. 내장을 아무리 파괴해 봤자 별 효과가 없군요. 그래도 설마 심장을 부숴도 멀쩡할 줄이야."

"큭, 제 공격은 통하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열심히 거인의 몸통을 난도질하던 하인리히와 지오스 만이 남아있었다.

"크핫! 역시 머리를 노려야 하나 본데? 아까 위에 올라탄 채로 계속 부숴보려 했는데, 워낙 단단한데다 광기가 그득그득 들어차 있어서 바로는 안 될 것 같더군. 그렇게 방비가 단단한 곳이 약점 아니겠어?"

할리가 그 육중한 몸을 움직여 동료들의 곁에 서며 태연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하인리히와 지오스도 제법 장신인 편이었으나, 그의 옆에서는 어른과 아이로 보일 만큼 극심한 신장 차이가 있었다.

···그래봐야 저 거인 앞에서는 거기서 거기였지만.

그들의 앞에는 어느새 완전히 몸을 일으킨 백색 거인이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걸 바로 앞에서 올려다보자니 온통 하늘이 가려져 사방에 그림자가 드리울 지경이었다.

[——?! ——!]

'음, 역시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한껏 부풀어 오른 광활한 근육과 연신 꿈틀거리는 목울대에서 흘러나오는 거센 울림.

또 이젠 처음 쫓았던 보육원 일행은 안중에도 없는 듯, 놈의 고개는 용사 파티··· 정확히는 하인리히와 할리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런 거인의 심정을 반영하듯.

휘익—! 콰아앙!

어느새 높이 올라간 손이 벼락처럼 내리쳐지며 그들이 있던 곳 근방을 통째로 뭉개버렸다.

물론 그런 단조로운 공격에 당할 일행이 아니었으니, 전투는 다시 이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거인, 확실히 지능이 뛰어나긴 한데···. 그걸 효율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이성적이진 않군. 하긴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괴물이니 당연한 건가.'

무슨 수를 썼는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 것은 물론, 그 대화에서 정보를 추려내 그들의 약점이 될 만한 대상을 정확히 특정했다.

심지어 이후엔 그걸 역으로 이용해 전투에서 상당한 이득을 보는 영악한 면모를 보이지 않았나.

'결국 진짜 마을로 달려든 건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었지만.'

무릇 인질이란 살아있을 때 가치가 있는 법이었다.

정말로 죽여 버린다면 대적자의 분노만 자극할 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아니 잠깐, 정말 남는 게 없을까?'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상대는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괴물이다.

그런 놈의 행동 양식을 일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만약 그렇다면, 놈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특정 대상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 그것을 본 누군가는 분노할 것이다.

또 슬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절망하는 이와 세상을 비관하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쳐버리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하나같이 부정적인 감정들뿐이지.'

그리고 심연의 존재에게 그런 마이너스 감정은 단순히 힘이 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의 격을 올려줄 수 있는··· 악업(惡業)을 흡수해 강해질 수 있는 수단.'

그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스도 마찬가지니까.'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 줄여서 한스.

역대 불사왕들은 세상을 죽음으로 물들이겠다는 사명에 집어삼켜져 매번 대륙을 침공해왔다.

한스는 「마인드 허브」 덕분에 그 충동을 차단할 수 있었으나, 그 강제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몇 차례나 파편을 접하며 간접적으로 느끼기도 했을뿐더러, 전대 불사왕의 사념이 남겨준 정보를 접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전대의 악업이 이어진 게 바로 지금의 한스지.'

불사왕은 대를 이어 계승될 때, 전대가 쌓은 악업의 일부를 이어받아 더욱 강해진다.

물론 심연에서 꺼낸 죽음의 결정체인 만큼 처음부터 강하기도 했을 터.

당대 최고의 마법사였던 초대는 아무리 무방비한 상황을 노렸다고는 하지만 무려 대륙의 절반을 불태워 버렸고.

우연히 심장을 손에 넣은 삼류 흑마법사인 2대는 이미 충분히 대비가 끝난 대륙의 서쪽을 멸망시켰으니 말이다.

'물론 이 거인에게 대를 이어 악업을 전달할 능력이 있어 보이진 않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백색 거인 또한 불사왕과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강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제2의 불사왕을 만들 속셈인가?'

검을 휘두르던 하인리히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지금 일어난 현상이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닐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경계에 표류하던 존재도 아니고, 심연의 밑바닥에 있어야 할 괴물이 갑자기 상흔을 찢고 튀어나왔다.

심지어 그 몸에는 상당량의 광기까지 품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이 일을 벌인 자의 정체는 뻔하지 않겠는가?

'역천의 서약. 심연에서 꺼낸 광기의 매개체를 가지고 있는 자. 놈이 뭔가 수작을 부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거인이 하필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도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리 이곳이 2대 불사왕과의 최후 격전지라 심연의 상흔이 많이 남은 레스크 왕국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지 않나.

'···성자인 하인리히를 노린 건가? 아니면 할리가 품은 광기에 이끌려 온 것일 수도 있겠군.'

어쩌면 정말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이젠 그 이유야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이놈이 더 성장하지 못하도록,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끝장내면 되겠지.'

성검을 휘두르는 하인리히와 날카로운 손톱으로 거인의 살을 헤집던 할리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제 저도 보조하겠습니다! 보육원 사람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모아 안전한 곳에 간이 결계까지 설치했으니, 이제 어지간하면 그들이 휩쓸릴 일은 없을 거예요."]

["좋군요. 이제 걱정할 것도 없으니, 놈을 확실하게 마무리해 볼까요?"]

때마침 자리를 비웠던 이세아가 돌아왔다는 의사가 전해졌다.

거인의 능력에 대해선 충분히 파악했고, 더는 신경 쓸만한 것도 없었다.

후웅— 쿠웅!

다시 할리를 노리고 내리찍어 오는 거대한 오른발.

하지만 그것이 바닥에 닿았을 땐, 이미 그가 거인의 뒤를 점한 뒤였다.

어찌나 빨리 움직였는지 이동 궤적에 따라 피어오른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

바닥에 엎드린 할리가 맹수처럼 몸을 웅크리며 입꼬리를 올려 흉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뿌드득! 끼기긱—!

극한으로 압축된 근육에서 금속성이 새어 나오고, 「광룡의 심장」이 쉴 새 없이 박동하며 전신으로 고밀도의 에너지가 휘몰아쳤다.

"크흐하핫! 일단···!"

각인과 생체 오러, 그리고 '광기'가 육체의 한계를 가볍게 무시하고 그의 몸을 강화하는 동시에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괴사하는 세포를 유지하는 것은 「초재생」의 몫.

"눈높이부터 맞추자고! 친구!"

언젠가 습득했던 변종 미노타우로스의 유전자가 섞인 대퇴근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바닥에 박아 넣은 두 손을 힘껏 잡아당기면서.

콰아앙—!

할리의 몸이 미사일처럼 쏘아졌다.

거인의 오른쪽 오금을 향해.

꾸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인의 다리가 들썩이며 몸이 휘청했다.

아무리 놈이 수백 톤에 달한다지만, 그 또한 그리 가벼운 체중이 아니었다.

그런 몸을 인체의 취약점에 미사일처럼 들이박았으니 이어진 결과야 뻔한 노릇.

놈이 잠깐 왼쪽 다리로 버티려 해보았으나···.

"흐읍!"

촤아악—

이미 잔뜩 칼집이 나 있던 데다, 때맞춰 그곳에 다시 검을 휘두른 하인리히로 인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결국 거인은 할리가 들이받은 옆쪽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에 놈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바닥을 짚으려던 순간.

"후우우—."

깊게 심호흡한 지오스가 창을 들어 올리며—.

찰나 만에, 허공을 향해 십수 번의 창격을 찔러 넣었다.

그동안 그의 공격은 채 몇 초 만에 아물 정도로 거인에게 큰 효과를 주지 못하고 있었으나.

콰아아앙—!

그것은 땅을 짚으려던 놈의 손목을 아작 내 바닥을 나뒹굴게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

대지가 비명을 지르고, 동시에 주변을 휩쓰는 막대한 충격파와 함께 거인이 기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멀쩡한 왼손으로 땅을 짚으며, 갓 재생되기 시작한 오른손으로 억지로 바닥을 밀어내 상체를 일으키려 할 때.

우우우웅—

마력이 공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재차 발동한 이세아의 중력 마법이 놈의 몸을 내리눌렀다.

그동안 길러온 팀워크와 의사 공유 마법을 통해 합을 맞춘 훌륭한 연계 공격이었다.

["저 거인 항마력이 높아서 오래는 못 버텨요!"]

["크하핫!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곧바로 다음 간다!"]

["···네? 좀 더 정확히 말해 주셔야 맞추죠!"]

그러나 나머지는 직접 몸으로 보여주겠다는 듯이 할리는 그저 내달릴 뿐이었으니.

그는 거인의 머리가 있는 곳까지 향한 후, 전력을 다해 위로 뛰어올랐다.

"으랏차차—!"

["아? 자, 잠깐만요! 지금 저 범위 안에 들어가면 할리 씨도···!"]

"으하하핫! 그게 내가 바라던 바라고!"

단단하게 움켜잡은 채 등 뒤로 넘긴 두 손과 활처럼 휜 허리.

그 상태로 허공에서 중력의 가속도를 받아 떨어져 내린 그는.

그대로 모든 체중을 실어 아래로 두 손을 내리꽂았다.

쿠우우웅!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재차 바닥에 처박힌 거대한 머리.

수십 톤의 망치가 머리를 후려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괜찮으세요?! 아무리 튼튼하다지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요!"]

["으음··· 조금 뻐근하긴 하구만."]

당연히 육탄 공세를 펼친 할리도 충격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두 손을 몇 번 털어댈 뿐, 이내 한 번 더 자신의 아래에 깔린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구도로군. 아주 그리운 광경이야! 자, 그럼 이제 이걸 부숴야 할 텐데."

그는 두 번째라 익숙하다는 듯 「보석안 : 강압」을 사용해 거인의 움직임을 방해하며 바닥을 툭툭 밟았다.

그 두개골이 어찌나 단단한지, 그의 '필살 그래비티 해머'에 직격당했음에도 조금 찌그러진 게 전부였다.

["···일단 목을 잘라보는 건 어떻습니까?"]

["오? 괜찮은 생각인데, 형씨!"]

["그럼 일단 제가 베어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역시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인지, 목을 베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물론 그래봐야 시간만 조금 더 걸릴 뿐.

도중에 기어코 속박에서 벗어난 거인이 한 차례 더 날뛰긴 했지만,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쓰러져 목이 베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 이건?'

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손에 쥔 할리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

아제리온 제국 서부 국경 지역.

"으아악!"

"뭐야 이 괴물은!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잡으라고!"

그곳에 한 주둔지에서는 말 그대로 대학살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미 사망한 정예병의 숫자만 수백에 이르고, 심지어 그중에는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마스터 급의 기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후퇴! 후퇴해! 이 사실을 군단에 알리는 게 먼저다!"

"아니, 저런 게 풀려나서 도시로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전부 몰살이라고!"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일단 주변에 경고하는 게 우선이야!"

결국 간부들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무리한 후퇴를 감행한 끝에, 이 정보를 전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부대원들의 90퍼센트 이상이 떼죽음 당하는 비극이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 참극을 만들어낸 장본인··· 시산혈해의 한가운데에 선 거대한 백색 거인은.

투둑— 툭!

그간 자신을 옥죄어왔던 답답한 봉인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혼자 환희에 젖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제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열린 것은 고작 한쪽 콧구멍을 막고 있던 봉인뿐.

[흐읍—]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에겐 커다란 기쁨이었다.

적어도 이젠, 이렇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으니까.

거인이 깊게 숨을 들이쉬기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빨려 들어가 그의 폐 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흐으—]

다시 한쪽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숨결에서.

화아악—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지독한 독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197

백색 거인 (4)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정체불명의 괴물.

과연 그 특이한 출신 탓인지 이 백색 거인의 두개골은 할리의 날카로운 이빨로도 쉽게 부술 수 없었다.

무엇이든 씹어 삼킬 수 있게 해주는 「폭식」 앞에서는 광룡의 비늘마저 한낱 유리 과자에 불과했거늘, 그게 이 머리통 앞에서는 영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 강도 자체도 용의 비늘보다 더 강한 편이긴 했으나, 그가 느끼기엔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뭔가 특별한 다른 힘으로 보호받는 느낌이었단 말이지. 축복이나 스킬 따위의··· 아니, 그보단 좀 더 상위의 권능이나 법칙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까?'

만약 「폭식」의 숙련도가 더 높았더라면 어찌어찌 수를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가능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선택한 수단이 바로 다른 부위보다는 질기지만 머리보단 약한 부위.

목을 먼저 자르자는 것이었고···.

그 방법은 아주 훌륭하게 들어맞았다.

그렇게 목을 베어낸 직후.

"쓰읍— 퉤, 이거 참 더럽게 맛없군."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와 용이라기보단 악마에 가까운 살벌한 외관.

그런 존재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입맛을 다시는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하물며 그 배경으로 집채만 한 머리통이 널브러져 있는 상태라면 오죽할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흉악하네요···."

"크하핫! 역시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후, 이놈 이거 덩치는 둘째 치고 생긴 건 또 어찌나 개성적인지. 역시 괴물은 괴물이구나 싶더라니까?"

하인리히의 연이은 칼질과 함께 열심히 거인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그 목을 끊어낸 일등 공신, 할리가 한 손으로 입가의 하얀 피를 스윽 훔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 아, 네! 그렇죠. 괴물···이요. 네."

그리고 줄곧 그를 바라보던 이세아는 그 타오르는 듯한 시선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동료를 생각해 애써 참는다는 듯이.

"···그런데, 그걸 꼭 먹어야 하는 겁니까? 아무리 봐도 건강에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만."

하지만 옆에서 바라보던 지오스는 생각이 다른지, 그녀가 억지로 삼켰던 질문을 태연하게 입 밖으로 꺼냈다.

평소 할리가 몬스터와 마석을 씹어 먹는 것 정도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저 거인은 등장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찝찝함 그 자체이지 않은가.

할리는 그의 의문에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확실히 이놈은 먹기에 좀 그렇긴 해. 별로 영양가도 없고!"

그의 「돌연변이」는 다른 생명체의 유전자를 수집해 자신을 진화시켜 나가는 특성이었고, 광룡과의 싸움에서도 큰 활약을 했던 「폭식」은 대상에 깃든 개성의 일부까지 뜯어 먹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런데···.

'이놈, 진짜 생명체이긴 한 건가?'

이 백색 거인에게서는 유전자나 개성은커녕, 그 살점에서 일반적인 열량조차도 얻을 수 없었다.

마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상처럼.

할리의 위장이라면 돌멩이를 씹어 먹어도 소화해서 에너지로 만들 수 있을 터인데, 확실히 이건 상궤를 벗어난 현상이었다.

"으하하! 아무래도 입안에 들어온 건 삼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군. 뭐, 탈만 나지 않으면 된 거지!"

말을 마친 그가 자연스럽게 아공간에서 고기를 꺼내 입에 물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꿈틀꿈틀—

거대한 하얀 머리는 목이 베였음에도 아직도 움찔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또 계속해서 재생을 시도하는지, 그 단면에서는 연신 하얀 생체 조직이 뻗어 나오는 중이었고.

그리고 하인리히는 그것들을 베면서 아까부터 놈을 분석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음, 역시 놈의 머릿속에 있는 핵을 파괴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생긴 것만 생명체일 뿐, 그 원리는 오히려 골렘에 가깝군요."

마침내 성검으로 머리통 이곳저곳을 찌르며 조사하던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결론을 내렸다.

"역시 그런가요? 흐음— 뭐, 어차피 이제 반항도 못 할 테니 그냥 한 곳을 계속 두들기면 되지 않을까요?"

"확실히 그런 거라면 제 창도 도움이 될 수 있겠군요. 적어도 놈이 곧바로 재생하지 못하도록 억제할 수는 있겠지요."

결국 머리를 파괴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상대가 저항할 수 없게 된 지금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말처럼 일점에 집중해 공격한다면 아무리 단단한 두개골이라도 그래 오래 버티지 못할 테고, 아니면 아예 할리가 목의 단면으로부터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게 잠깐만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이번 기회에,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요. 거인의 재생을 막는 건 할리 님만 계셔도 충분할 테니, 두 분은 피난 가신 마을 분들을 부탁드립니다."

"···음, 네. 성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성자님. 그럼 이곳은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일행에게 양해를 구한 하인리히는.

직접 거인의 머리 앞에 선 채, 두 손으로 성검을 단단하게 움켜쥐며 그 자리에서 크게 숨을 골랐다.

"후우—."

하인리히가 가진 힘의 근원인 신성력은 언데드나 흑마법사 등 사특한 기운을 다루는 이들에게 훨씬 강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가 가진 대부분의 축복도 마찬가지.

온갖 신성한 힘으로 가득 찬 그의 육체는 어떤 어둠도 범접하지 못하며, 손에 들린 빛의 검은 사악한 흑마력을 종잇장처럼 베어버린다.

그야말로 마(魔)를 척결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이자, 어둠에 속한 이들의 절대적인 천적이나 다름없었는데···.

'이 거인은 달랐단 말이지.'

틀림없이 심연에서 기어 나온 존재이건만, 놀라울 정도로 신성력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치 그냥 평범한 인간을 상대하는 것처럼.

'평범한 몬스터에게도 어느 정도의 추가 타격은 들어갈 텐데. 대체 이놈의 정체가 뭐지?'

평범한 생명체가 아니란 점도 그렇고, 이건 마치 용사와 교단에 대적하기 위해 일부러 약점을 없앤 존재 같지 않은가!

그 때문에 불사왕에게도 어느 정도 맞설 수 있는 하인리히가 이 거인을 상대로는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성기사로서는 이 세상의 정점인 그였지만, 순수한 무인으로서는 그에 합당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물론 자기 강화 효과는 그대로인 만큼 그렇게 많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으나, 그래도 '용사'란 명성에 걸맞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문제를 알고서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인위적인 정황이 발견되었는데 이번에 무사히 넘겼다고 다음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지 않나.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대로 가만히 있기엔 자존심 상한다고!'

일행들 앞에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불사왕의 유일한 대적자이면서 선택받은 대륙의 구원자로서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던 것.

휘익— 퍼억!

신성력이 타오르는 빛의 검이 거인의 머리를 후려치자, 긴 상처와 함께 하얀 피가 튀어 올랐다.

그러나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검이 두개골까지 닿긴 했으나 그것을 쪼개기엔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하인리히가 다시 검을 수습하자, 다른 부위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머리의 상처가 다시 수복되기 시작했다.

성검에 맞고도 이 정도라니, 특별한 공격 능력도 없는 주제에 정말 그 생명력 하나만큼은 끔찍하리만치 질기기 그지없었다.

'뭐, 좋아. 처음부터 그리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

다행히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그에게 주어진 상태였다.

'체하이와 지오스의 비기인 굴절창··· 공간을 뛰어넘어 원하는 곳을 타격하는 오러 운용의 극의. 공간에 간섭할 수 있는 기술인만큼 유용성은 물론 공격력 또한 차원이 다르다.'

만약 그것이 초월의 경지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면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섭리를 벗어나 스스로의 한계를 깬 개인만의 고유한 능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지.'

좀 많이 어렵고 복잡할 뿐 틀림없이 그저 단순한 기술이었다.

그것도 남에게 전수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일종의 학문이나 다름없던 것.

'무기와 피격 지점 사이의 위상을 비틀어 공간의 연속성을 유지··· 이건 공간 마법에나 나올 법한 이론인데. 아무리 이미 가지고 있던 고유스킬을 분석한 결과라곤 하지만, 역시 대단한 양반이란 말이야.'

지난 며칠간 헤스페론이 체하이에게 이론을 전수받는 동안 하인리히도 태평하게 아이들만 돌보고 있던 건 아니었다.

이미 비기의 전수에 대해선 허락받았던 만큼, 그 또한 지오스와 꾸준하게 기술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저 나중에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을 미리 알아두자는 마음뿐이었는데···.

휘익— 퍼억!

생각해 보니 굳이 오러라는 조건을 맞출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 기술 또한 체하이가 자신의 고유스킬을 오러에 적합하게 변형한 것이지 않은가.

'그걸 나에게··· 하인리히가 쓸 수 있도록 다시 맞추면 될 뿐.'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인리히 또한 지구 출신의 각성자였다.

당연히 그의 성장은 단순히 재능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각성자 성장 보정, 아바타 성장 가속, 「대축복 : 빛의 기사」의 용사 성장 보정, 「로지아 성투법」과 「무도의 길」의 보조.

심지어 이론적인 면에서는 한스의 「사악한 지혜」와 「마도의 길」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생각이 닿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 그에겐 하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휘익— 퍼억!

급할 건 없었다.

거인은 이미 완전히 제압된 상태고, 그 재생은 할리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저건 지금 최고의 샌드백이지.'

성장 보정이란 수련을 할 때 쌓이는 업(業)을 좀 더 빨리, 그리고 많이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역기를 한 번 들어 올린 걸 두 번 든 것으로 쳐준다는 식으로.

카르마 상점을 통한 스테이터스 강화와는 별개로 성장에는 자연스럽게 합당한 업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조우한 고블린의 목을 날리는 것보다, 목숨을 걸고 드래곤에게 덤벼들어 칼질 한 번 하는 게 더욱 성장치가 큰 건 당연한 일.

'그렇다고 인위적인 상황을 이용하는 건 또 안 되지만.'

세계의 법칙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갑자기 나타난 거인과 맞서 싸웠고, 힘겹게 이 강적을 제압했다.

그리고 지금.

그 적을 확실히 끝장내기 위한 목적성을 품고.

그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 머리를 쪼개서— 그 핵을 꺼내기 위해서.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완전히 저물어 주변이 온통 어둠에 휩싸였다.

안전한 곳에 대피시켰던 마을 사람들을 다시 데려온 이세아가 그들을 위해 방한과 발화 등의 여러 마법으로 편의를 봐주고.

지오스가 이쪽의 상황을 살피러 몇 번이나 다녀갔을 때.

휘익— 쫘악—!

여태까지 났던 둔탁한 소리가 아닌, 무언가에 의해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간 수많은 칼질에 깊게 패었던 거인의 두개골이 그대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공간 베기」를 획득합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문구.

그에 무아지경에 빠져 오직 전심전력으로 검을 내려치는 데에만 전념하던 하인리히가 눈을 번뜩였다.

'···아깝다.'

다만 만족스러움에 앞서 떠오른 건 깊은 아쉬움이었으니—.

'조금만 더 갔으면 닿을 것 같았는데.'

이번 수련으로 공간에 간섭하는 검격인 「공간 베기」를 습득하긴 했으나, 무인으로서 초월의 벽에 닿는 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애초에 이것만으론 살짝 부족하기도 했고. 이번엔 실마리를 잡은 정도로 만족할까.'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하인리히는 슬쩍 허공에 「공간 베기」를 사용해 스멀스멀 회복하려던 두개골을 재차 동강 냈다.

이제 처음의 목표를 수행할 차례였다.

"오호! 이거 이거, 역시 생각했던 대로구만!"

쩍 갈라진 두개골 속에서 느껴지는 매우 익숙한 기운.

줄곧 옆에서 거인의 재생을 방해하며 고기를 흡입하던 할리가 날카롭게 변한 손을 그 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이윽고 밖으로 빼낸 그의 손아귀엔···.

'오, 이건?'

거인의 머리로부터 거미줄처럼 이어진 조직에 감싸인 채, 검붉은색으로 빛나는 주먹만 한 구슬.

그동안 본 적 없던 고순도의 '광기'의 결정이 들려있었다.

'헤라토스의 드래곤 하트를 봤을 때랑 비슷한 느낌인데? 역시 심연 출신이라 그런지 광기의 순도 자체는 이쪽이 더 높은 것 같고.'

할리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생산지가 심연이어서인지 아바타의 매개체로는 부적절했지만, 이것은 이것 자체로 그에게 영약이나 다름없었다.

"어허! 포기하고 이리 내놔라! 이제 이건 내 꺼다! 으하하핫!"

탐욕에 눈이 돌아간 할리는 날카롭게 변한 손톱을 휘둘러 결정에 매달린 하얀 조직들을 무참하게 찢어발기고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꿈틀거리던 거대한 하얀 머리가 축 늘어졌지만, 이제 더 이상 그건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망설일 필요 있나!'

저 백색 거인은 개털이었던지라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으나, 설마 이 영롱한 결정마저 그러지는 않을 터.

그는 그것을 냉큼 입안에 털어 넣었고.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거대화」를 획득합니다."

그렇게 또 한걸음 인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198

백색 거인 (5)

이제는 뱀파이어 클랜 연합 '하이브리드'의 치세에 들어간 탈리아 왕국.

곳곳에 세워진 헌혈소도 모두 정상 영업에 들어갔고, 백성들의 혼란도 서서히 진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추세였다.

이젠 오히려 전보다 더 살기 좋아졌다며 그들을 찬양하는 이들도 늘고 있었으니, 이 정도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이상이 이번 주 국내에서 있었던 사건·사고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국 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반동주의자의 시민 선동은 물론, 사회 기반 시설과 헌혈소를 노린 테러 시도, 거기다 반란 모의까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상황이었으니까.

거미줄처럼 깔아놓은 정보망에 걸리는 족족 사전에 때려잡곤 있다지만, 놈들의 수단도 점점 교묘해지고 있어 여러모로 귀찮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데 말이지.'

왕의 집무실에서 가만히 보고를 듣던 하인즈 2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흐음, 역시 그 배후는 주변 3왕국인가?"

"그렇습니다. 다만 놈들이 모든 증거를 파기하고 움직이고 있는지라 확실한 물증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이 로드."

그의 가벼운 한마디에 국내외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뮬로 브로코슬락이 송구하다는 듯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하인즈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한 사항이 나열된 보고서를 대충 훑어보았다.

'그래도 초기보단 많이 줄었군. 하긴 그만큼 때려잡았으니 수작을 부리는 놈들도 이대론 답이 없다고 느낀 거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이브리드의 탈리아 왕국 내 통제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췄으며 배신과 회유는 꿈도 꿀 수 없는, 군주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뱀파이어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깔려있었으니 당연한 일.

평범한 시민들을 이용해 흔들려는 시도도 한두 번이지, 매번 뭘 하기도 전에 박살 나 버리니 이제는 그에 동조할 만한 이들도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타국의 개입 때문에 혼란이 좀 길 뿐, 이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거다.'

그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주신교단과 성자가 그들을 용인했다고는 하나, 평생을 적이라 여겨왔던 뱀파이어가 이웃 나라를 집어삼킨 상황이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심지어 하이브리드는 지금도 계속 전 대륙에서 동족들을 끌어모으며 인원을 불리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방해해서라도 대응책을 마련할 시간을 벌고 싶었겠지.

'따지고 보면 그쪽 암흑가도 서서히 잠식해 가는 중이니 그들의 우려도 틀린 건 아니군.'

차갑게 조소한 하인즈가 들고 있던 보고서를 툭 내려놓았다.

지금은 세간의 시선 때문에 놈들의 수작에도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일단 암중에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애초에 어둠 속의 은밀한 암투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 뱀파이어의 주특기이지 않나.

"그건 그렇고."

그렇게 잠깐 말을 멈춘 그는 내려놓은 보고서 옆에 놓인 다른 서류를 집어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정보는··· 이제 막 들어온 건가?"

"예, 그렇습니다. 사실 그게 이번 보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소식을 처음 접한 직후, 사태의 위중함을 깨닫고 급히 수집해 정리한 최신 자료입니다."

뮬로는 그리 대답하며 자신만만하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대륙 곳곳에서 거대한 백색 거인이 출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크기는 어지간한 성벽을 우습게 상회할 정도이며, 힘과 재생력 또한···."

전부 하인즈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

하지만 이후 이어진 정보에는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는데—.

"현재까지 관측된 개체는 셋. 토벌된 개체는 둘입니다. 하나는 레스크 왕국에서 성자 하인리히가 이끄는 결사대에 의해 곧바로 처리되었고···."

이미 이 세상에 나타난 거인이 하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아제리온 제국 서부 국경 지대를 헤집고 다니다 군단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에게 사살되었습니다. 그 갑작스러운 난리 통에 군부대가 입은 피해가 너무 커서, 서쪽의 몬스터들을 막던 군단 전체가 휘청거릴 지경이라고 하더군요."

직접 그 괴물을 상대해 본 입장에서 그놈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다른 곳에서도 하나를 더 사냥했다니, 과연 그들의 저력 또한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제국인가. 피해는 컸던 것 같지만 어떻게든 자력으로 잡긴 했나 보네.'

다만 하인리히가 겪었던 거인과 두드러지는 차이가 하나 있었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부식시켰다고?"

"예, 그렇습니다. 유일하게 뚫린 한쪽 콧구멍으로 호흡하며 유독 가스를 뿜어냈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놈을 최초로 발견한 부대의 생존자들은 처음엔 그런 능력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었으니.

'···우려했던 대로 놈이 악업을 쌓아 더 강해졌다고 볼 수밖에 없겠군.'

확실히 백색 거인은 그 존재감에 비해 가진 능력이 빈약하단 느낌이 들긴 했다.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이긴 했으나, 능력의 방향성이 지나치게 생존력에만 치중되었던 것이다.

'그래, 확실히 그 검은 봉인이 꺼림칙하긴 했지. 그렇다면 심연에서 나오기 위해 일부러 능력을 봉인했다가 지상에서 악업을 쌓아 하나씩 봉인을 해제하는 방식인가?'

새로 전해 들은 소식에다 한스의 「불사의 심장」과 「금단의 지식」의 정보가 더해지자 빠르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백색 거인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건 아쉽긴 했지만, 그건 앞으로 차차 알아보면 될 터.

"그리고 토벌하지 못한 하나는···."

그렇게 하인즈가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뮬로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로한 공국 영토에 나타나 방위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 후. 뒤늦게 나타난 피레이 추기경을 비롯한 주신교단의 정예들과 싸우다 도주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놈이 산맥에서 밀려 나온 몬스터들을 이용해 방위군의 생존자들을 위협하는 바람에, 결국 교단 일행들도 거인을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확실히 몬스터와 거인은 같은 광기의 숙주지. 거기다 놈은 그걸 이용할 수 있는 지능도 있고.'

그 골치 아픈 상황에 하인즈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당장 나타난 거인만 셋인데, 그중 하나는 놓치기까지 했다.

그 도망친 놈이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되진 않을까?

심지어 거인들의 등장이 여기서 끝이란 보장도 없었다.

그렇게 나온 놈들이 이번처럼 도망이라도 가게 되면···.

"그렇게 도주한 거인은 북부 산맥 어딘가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이후의 행적을 알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들려온 뮬로의 뒷말에 하인즈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음? 로한 공국 방면의 북부 산맥이라 하면···.'

하지만 그때.

콰앙—!

집무실 문을 활짝 열며 당당하게 들어온 존재가 있었으니.

"하인즈! 다녀왔단다."

하이브리드의 또 다른 성혈, 브리키였다.

"어머, 뮬로도 있었구나? 로드··· 아니, 하이 로드? 소녀, 다녀왔답니다? 우후후—."

뮬로를 보고서야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능청을 떨며 그제야 예를 차리는 브리키.

그녀의 능력이라면 안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사전에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 테지만, 저런 모습을 보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니 이젠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까마득한 연장자이니 말이야. 거기다 훌륭한 노동 공급원이기도 하고.'

거기다 뮬로는 한때 그녀의 직속 부하이기도 했으니 이 정도야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었다.

"···하이 로드? 또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는데요. 저번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이건 어째서일까?"

"피가 부족한 거겠지. 미리 말해둘 테니 수용소에서 몇 명 골라가라. 그보다 용건은?"

역시나 예리한 브리키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하인즈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툴툴거리면서도 순순히 입을 열었는데—.

바로 아제리온 제국에 소재한 뱀파이어 클랜들을 정중하게 초대하는 작업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꼭꼭 숨어있는 이들까지 찾아내기엔 무리가 있었으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세력은 어떻게든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놓친 수는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북부는 난장판이니 지금까지 클랜이 남아있을 것 같지 않고, 남부 야만인들이 있는 곳은 우리가 지내기엔 영 까다로우니···. 이제 남은 건 동부의 제피아 공화국뿐이랍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어쨌든 이걸로 대충 현황 파악은 끝났다.

탈리아 왕국의 내부 상황부터 변수라 할 수 있는 백색 거인의 존재, 그리고 뱀파이어 일통의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동부의 오바이포 클랜까지.

'아무래도 이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선 좀 더 전면에 나설 필요가 있을 것 같군.'

마침 곧 2차 대륙 정상회의가 있었다.

당연히 탈리아 왕국 또한 당당하게 초정받은 상황.

"브리키, 뮬로."

"으음~?"

"네, 말씀하십시오. 하이 로드."

원래라면 이전처럼 브라이트 공작을 대리로 보낼 예정이었으나, 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번 회담은 하이브리드의 '신 탈리아 왕국' 체제가 자리 잡은 후 처음 있는 국제 행사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대리인을 보내는 건 영 모양이 빠지지 않겠는가?

"이번 대륙 정상 회의엔 내가 직접 참여하도록 하겠다. 너희들도 준비해 두도록."

"···네!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이 로드."

"으, 설마 나도 가야 하는 거야? 그래도 한 명은 거점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막 일을 마치고 돌아온 상황이라 어지간히 귀찮았는지 브리키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하인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브리키. 넌 이곳에 남도록."

"우후후— 그래, 이곳은 제게 맡기고 다녀오도록 하세요, 하이 로드!"

드디어 푹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자리를 비우기 전에 반드시 일거리를 잔뜩 안겨주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하인즈의 이름을 알릴 때도 됐지. 오바이포에게 경고와 과시도 할 겸.'

그렇게 제2차 대륙 정상 회의에는 다른 이들이 예상치 못했던 존재가 직접 참가하게 되었다.

신 탈리아 왕국의 지배자.

아우테리카 뱀파이어 클랜 연합의 하이 로드.

위대한 성혈의 뱀파이어.

흡혈왕, 하인즈 하이브리드 2세가.

***

북부 산맥 깊은 곳.

높고 거친 산세가 주변을 둘러싸 사시사철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음지(陰地)의 산.

쿠르릉—! 콰아앙!

그곳에서 거친 폭음과 함께.

[———!]

마치 고래가 울부짖는 듯한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격렬한 소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자리엔···.

[주군께서 근방에 접근하는 모든 몬스터를 척결해 언데드로 만들라 명하셨다.]

데스나이트 로드 카람과.

[감히—! 그 더러운 발로 왕의 성역을 침범하려 하느냐—! 네놈에게 공포를 각인시켜주마—!]

드레드 팬텀 파고스.

[···이 고기, 맛없어···.]

구울 로드 피오나를 비롯해—.

아크리치치곤 전투력이 약했던 드웰과 달리 전형적인 전투형 흑마법사인 아크리치 켈리파와, 전신에 갑옷을 두른 3미터가 넘는 덩치의 둠 나이트 드렉슬러 등의···.

짧지 않은 시간동안 하나둘 합류한 새로운 간부급 언데드들 또한 여기에 바글바글했기 때문이었다.

[———!]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불사성의 영역에 발을 들였던 이 백색 거인은, 그야말로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전신이 토막 난 채 머리만 질질 끌려오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물론 놈의 한쪽 코에서 흘러나오는 부식 가스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겐 특별할 것도 없는 향수일 뿐이었다.

[모두 수고하셨사옵니다···. 이건 또 처음 보는 몬스터로군요···.]

[수고랄 것도 없었다, 올리비아. 그런데 이놈의 안에 있는 광기도 그렇고, 평범한 몬스터는 아닌 것 같아 일단 가져오긴 했다만. 이걸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흐음··· 확실히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니라 언데드화가 가능할지 모르겠사옵니다만···. 확실한 건 드웰을 불러 물어보는 게 좋겠지요···.]

그렇게 카람과 올리비아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투둑— 툭!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작은 소음에 그들의 시선이 옆쪽으로 돌아갔다.

소리의 근원지는 머리만 남은 백색 거인의 입가.

그 입을 꿰매고 있던 검은 철사 같은 것이 서서히 삭아서 사라지며 조금씩 그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흐음? 뭔가 한 수가 남은 건가? 귀찮게 하는군.]

스르릉—

그에 앞으로 나선 카람이 등에 메었던 커다란 양손검을 다시 뽑아 들며 검은 불꽃 같은 흑마력을 피워 올렸다.

그건 커다란 머리통을 구경하던 몇몇 간부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마침내 입가의 모든 봉인이 풀린 거인이 한 것은 뭔가 특별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저, 짧은 몇 마디만을 내뱉었을 뿐.

[모든 삶의 종착지—. 생의 숙명이자 종결점—.]

놈의 그 뜬금없는 소리에 불사의 군대 간부들은 슬쩍 자기들끼리 눈짓을 교환했다.

[···이건?]

[말을··· 하고 있사옵니다만···?]

하지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건 거인의 머리는 그저 혼잣말만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가장 오래된 부정(不淨)이자— 영원한 상실의 증거— 심연의 가장 밑바닥에 고인—.]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만 떠듬떠듬 잇는 거인의 머리.

[죽음을—.]

[혹시··· 죽여 달라는 말이신지요···? 원한다면 언제든 그리 해 드릴 수 있사옵니다만···.]

그 빙빙 돌리는 듯한 말에 올리비아가 짜증스럽게 놈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말이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듯, 그녀의 목으로 고밀도의 흑마력과 함께 서늘한 귀기(鬼氣)가 뭉치기 시작했다.

[불사왕— 불사왕을 만나게 해다오—.]

그러자 하얀 머리는 그제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흐음, 과연.]

다소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간부들 또한 전대 불사왕과도 함께한 이들인 만큼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광기'를 품고 있는 몬스터는 불사왕의 '죽음'처럼 심연과 뭔가 연관이 있는 놈인 모양이었다.

모든 상황을 납득한 카람이 자신의 검을 어깨에 걸치며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네 뜻은 잘 알았다.]

[그럼— 불사왕을—.]

[그런데 말이다.]

일순, 검은빛이 번뜩이고.

휘익— 푸화악—!

거대한 양손검이 거인의 얼굴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끄으으—?]

[네가 뭐라고 우리 주군을 오라 가라 한단 말이냐?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이거··· 상당히 훌륭한 샘플이 될 것 같사온데··· 왕께서 기뻐하시겠군요···. 드웰을 불러오겠사옵니다···.]

또한 그들은 현 불사왕인 한스와 함께하며, 그가 '광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당장 그들이 하는 일과도 광기에 찬 근방의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것이지 않았던가.

[걱정마라. 그래도 정보를 다 뱉을 때까지 죽게 하지는 않을 터이니. 주군께서 돌아오실 때까진 말이지.]

그렇게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열심히 거인의 머리와 잔해들을 수습했고.

불사성의 언데드 연구실에는 제 발로 굴러들어온 독특한 실험체 하나가 추가되었다.

정작 한스도 모르는 사이에.

#199

다가오는 손길

한국의 한 커뮤니티.

-이제 하회탈도 포기했는지 사진이나 동영상 찍히는 거 안 막는 거 같더라? 며칠 지났다고 갑자기 증거자료 겁나 쏟아지네ㅋㅋ 전부 일본에서 찍힌 거긴 하지만.

└그렇게 화려하게 데뷔해 놓고 이제 와서 숨기는 것도 웃기지. 근데 정작 그 본 드래곤은 왜 다시 안 꺼내냐고! 다시 보고 싶다고!

└하 형··· 언제 다시 한국 와···? 하 형 없으니까 밤길이 무서워ㅜㅜ

└그래도 하회탈 일본 갔다고 다시 하나둘 튀어나오던 빌런들이 요즘엔 금방 사라지던데? 드디어 가디언이 일하기 시작한 듯ㅋㅋ

하회탈이 규슈에서 본 드래곤을 공개하고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연히 그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인터넷에선 연일 화제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

물론 지금도 매일 같이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고는 있다지만, 그때의 충격은 고작 며칠이 지났다고 사그라질 만큼 약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뇌리에 그 존재감이 강렬하게 때려 박힌 건 물론, 무려 해외 토픽에도 오를 정도였지 않은가!

타국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인들이, 얼굴에 한국의 대표적인 가면을 쓰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하회탈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에서 저렇게 맘대로 설쳐도 됨?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나?

└팩트) 하회탈은 이미 한국에서도 맘대로 설친 범죄자다.

└근데 이거 따지고 보면 나라 망신 아님? 자국에서 잡지 못해서 놓친 범죄자가 국외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 이러면 우리나라 입장이 뭐가 되냐고;;

└뭐 어때, 일본에서도 그 범죄자를 못 잡고 있는데.

그의 과격한 행보에 불편함을 느낀 이들의 수도 그리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마음대로 심판을 남발하는 범죄자라는 것, 거기다 악명이 자자한 흑마력을 사용하는 네크로맨서라는 것이 드러난 마당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또 하회탈의 소식이 전해진 해외에서 보이는 반응도 대체로 그와 비슷했다.

어느 정도의 호기심과 함께 깔린 은근한 거부감.

그런 면에서, 현재 실시간으로 '정화 작업'이 진행 중인 일본 내의 여론은 이런저런 의견이 섞여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그 가면 쓴 다크 히어로가 어제 우리 동네에 다녀갔다. 오늘 보니까 거기 주변에 경찰들이 쫙 깔려있더라.

-그동안 경찰이건 가디언이건 신경도 쓰지 않던 놈들이라 무서워서 눈치만 보면서 살고 있었는데···. 이제 좀 마음 놓고 지내도 되려나?

하회탈의 방문 이후 따라올 변화에 은근한 기대감을 보이는 이부터.

-나 후쿠오카 사는데, 확실히 체감되긴 하더라. 물론 얼마 안 가서 잔챙이들이 빈자리에 들어앉긴 했지만.

-그래도 규모 면에서 차원이 달라서 전보다는 훨씬 나아. 이것도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내가 사는 곳도 그래. 새로 들어온 애들은 일단 사리는 면이 있기도 하고. 지금 이렇게 세가 꺾였을 때 이능국이 확실하게 대처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 무능한 놈들이 제대로 일을 하길 바라는 것보다 그 가면 히어로가 다시 오길 기도하는 게 더 빠르겠지?

이미 그가 다녀간 후의 결과에 은근한 만족감을 표시하는 사람.

-다들 저능아임? 한국인 범죄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본인들을 학살하고 있는데, 대체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냐?

└내 말이. 이능국은 뭐 하는 거냐? 빨리 그놈 안 잡고!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그런데 그 하회탈, 야쿠자 같은 범죄자들만 사냥한다는데?

└야쿠자는 일본인 아니냐? 잡아도 우리가 잡아야지 왜 한국 놈이 나서냐고! 이거 한국에 배상받아야 한다.

└이미 죄다 유착관계라 안 잡으니까 문제 아닐까?

국가 간의 감정에 무작정 거부감을 표현하는 유형과 그에 반론하는 이들까지.

아무래도 직접적인 당사자들이다 보니 다른 곳보다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관심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특정 조직으로 넘어가면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으니—.

바로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인 일본 내의 범죄 조직들과, 하회탈을 잡으려다 오히려 한방 먹고 물러섰던 번천회가 그 대표적인 이들이었다.

***

화려한 장식품이 가득한 중국 내의 한 숙소.

지잉— 징—

머릿속에서 작게 진동하는 기계음과 함께, 휠체어에 앉은 삼십 대의 사내가 마치 로봇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일정하게 눈을 움직였고.

그에 따라 세계 각지에서 수집되어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들이 고스란히 그의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정보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이 재미 삼아 분석해 인터넷에 올린 내용까지 철저히 검토해서 첨부한.

그야말로 지부의 총력을 기울인 정보수집의 결과물이었다.

"쯧."

하지만 집무실 모니터에 띄워진 보고서를 전부 읽어 내린 사내, 율령자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불만스러운 혓소리를 낼 뿐이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연신 눈 사이를 주무르면서.

"율령자~? 이거 참,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때 문득.

갑자기 들려온 경박한 목소리에 그의 몸이 움찔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이 방 안엔 자신 혼자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눈가를 주무르던 손을 내리며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닥터."

역시 그곳엔 산발한 회갈색 머리와 지저분한 수염의 익숙한 중년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그래, 새로 단 눈은 좀 괜찮습니까?"

"예, 덕분에."

"푸햐햣! 그렇죠, 제 덕분이죠! 그래서··· 더 실망이지 뭡니까?"

언제 신나게 웃어 재꼈냐는 듯 한순간에 정색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끝을 올리는 닥터.

언제나처럼 이리저리 널뛰는 그의 분위기에 율령자는 그저 고개만 숙여 보일 따름이었다.

"일본에서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아주 대차게 말아먹었다면서요?"

"···면목 없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본 드래곤이라니! 저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생각보다 더 재밌는 친구더란 말이죠? 파햐햐햣!"

그렇게 광증이라도 도진 듯 다시 웃음을 터트린 닥터는 이내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자신이 찾아온 본론을 꺼내 들었다.

"회주가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회주의 동향은 극비사항이었다.

물론 율령자도 번천회의 발원지인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부장인 데다, 주요 조직원들의 금제를 담당하는 만큼 절대 낮은 지위는 아니었다.

아마 그에게도 곧 소식이 전해졌겠지.

하지만 역시 회주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닥터보단 정보에 대한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회주도 그 본 드래곤을 보고 굉장히 흥미로워하더군요! 평소에도 원래 그런 특이한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 말씀은 설마···?"

"그렇습니다! 이참에 그 스마일 마스크를 한번 직접 보겠다고 하지 뭡니까? 물론 저도 한자리 낄 생각이고 말이지요! 프힛!"

"회주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오라클은···"

그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율령자가 다른 이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자, 실실거리며 웃던 닥터의 표정이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 듯이 팍 구겨졌다.

"···흥, 어쩐 일인지 여자도 이번엔 영 확신이 없더란 말이지요? 그러니 뭐 어쩌겠습니까?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수밖에!"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의기양양한 표정이 된 그는 으스대듯 말을 이었다.

"뭔 일만 하려 하면 시끄럽게 땍땍거리던 여자가 입을 다무니 속이 어찌나 시원하던지! 미래란 정해진 게 아닌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거지 않겠습니까? 회주도 참 그런 여자의 말에 너무 귀 기울이지 않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들은 가진 능력과 성향상 서로 대척점에 위치한 이들로, 서로 간에 굉장히 사이가 나빴다.

닥터가 회주의 오른팔이라면 그녀는 왼팔.

아마 그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그들이 이렇게 한 조직에 있는 일도 없었겠지.

"그럼 회주는 지금."

"우햐햣! 그 성격 알면서 뭘 물어봅니까?"

과연 그 말 대로.

뭔가를 예감한 율령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는···."

철컥—

그때, 닥터의 말을 끊듯 예고도 없이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다들 오랜만이군. 율령자, 몸은 좀 괜찮은가?"

낮은 목소리와 함께 주변에 기묘한 공기를 두른 한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얼핏 보면 평범한 것 같고, 다시 보면 숨 막힐 듯한 위압감을 풍기면서도, 제대로 보려고 하면 흐릿하게까지 느껴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존재.

"네, 걱정해 주신 덕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크~ 악마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딱 맞춰 왔군요, 회주!"

암중에서 전 세계의 이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국가적 범죄 조직, 번천회의 수장.

모종의 일로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던 그가 마침내 다시 중국 땅을 밟았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하회탈을 직접 잡기 위하여.

***

"귀가 왜 이렇게 간지럽지."

쿵—

평소대로 집안 체육관에서 루틴을 이어가던 나는 육중한 바벨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열심히 귀를 후볐다.

'씁, 누가 내 이야기라도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가 금방 사라졌다.

그런 걸로 따지자면 짚이는 바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당연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허리를 숙여 바벨을 집어 들었다.

"후읍—!"

아무래도 한스는 이래저래 욕먹는 포지션일 수밖에 없었다.

이세계에서야 따로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엔 어쩌다 보니 일본에서도 공개적으로 활동하게 되며 한창 말이 많이 나오는 시점이지 않나?

당연히 그런 여론의 추세는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론에 따라 행동 방침을 바꿀 생각은 없지만.'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일본을 뒤엎는 과정에서 번천회의 함정을 깨부쉈고, 역으로 놈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지금까지의 경험대로라면 당하고서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니, 아마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보복이 있을 터.

자신은 그저 그때를 대비하며 지금까지 하던 일들을 묵묵히 해 나가면 될 뿐이었다.

'놈들의 거점을 완전히 불태우는 작업을 말이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이 공들여 세웠을 탑을 무너뜨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첫 충돌 이후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다. 놈들에게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래도 설마 일본을 완전히 버릴 생각은 아닐 테니 그 기한이 그리 길지도 않을 거야.'

당연히 두 번째에는 좀 더 철저히 준비해서 오겠지만, 번천회가 어떤 준비를 해 오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젠 거리낌 없이 꺼내 쓸 수 있게 된 본 드래곤 헤라토스와, 새롭게 합류한 어비스 레버넌트 살마는 물론···.

'여차하면 그냥 튀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소환 해제라는 궁극의 도주기 또한 언제든 준비되어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지구는 됐고. 아우테리카 쪽 상황은 좀 복잡하지만··· 뭐, 이만하면 그럭저럭 순조로운 편이겠지.'

쿵—

다시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벨이 바닥에 놓였다.

그렇게 훈련 세트를 끝마친 나는 어깨를 풀며 슬쩍 옆쪽을 바라보았다.

"후욱! 훅—! 훅!"

전신에서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과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은 거친 호흡.

그곳엔 어깨에 바벨을 걸친 채 스쿼트로 하체를 단련하는 가벼운 차림의 훤칠한 청년이 있었다.

'음, 역시 잘생겼군.'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 정체는 이번에 새로 생성할 수 있게 된 아바타, '휴고'였다.

언제나처럼 생성된 직후부터 극한의 하드 트레이닝 모드에 들어갔던 것.

다만 한 가지 특이한 부분이라면··· 이번엔 특별히 외모를 수정하지 않아, 초기에 만들었던 분신들처럼 이쪽과 똑같은 외모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커스터마이징」의 외모 수정은 나중에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

그런 휴고가 지금 맡고 있는 임무는 이런저런 잡일들과 함께,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 대역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걸로 최근 「개체 투영」을 사용해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생기는 공백을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

물론 그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터이나, 원래 만사가 불여튼튼인 법이었다.

'흠, 그보다···.'

어깨에 수건을 걸친 채 샤워실로 향하는 길.

나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이세계 쪽의 상황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잠깐 저쪽에 좀 더 집중해 볼까?'

아우테리카에서도 나름 의미 있는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으니까.

***

푸른빛이 소용돌이치는 게이트를 빠져나왔을 때.

하인리히가 가장 먼저 마주한 이는 그에게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서 오세요, 성자님.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주변의 빛을 산란시키는 밝은 은발과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

등장만으로도 주변이 밝아지는 후광을 두른, 리에스타 세인트 하티아누스 성녀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용사 일행을 반겼다.

"로셀리아 대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침내 하인리히가 긴 외유를 마치고, 2차 대륙 정상 회의의 참여를 위해 성지의 대신전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200

2차 대륙 정상 회의 (1)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그런데 이렇게 직접 환영까지 해주시다니, 굉장히 영광인데요?"

"후후훗, 뭘요. 그간 밖에서 고생하다 오신 여러분의 노고에 비하면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짓는 하인리히의 말에 마찬가지로 미소로 응대한 리에스타 성녀는, 이내 다른 일행들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간의 활약은 매번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만, 다들 무탈하신 모습을 보니 새삼 안심이 되는군요. 특히 얼마 전에 큰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지오스의 고향에서 있었던 백색 거인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었다.

놈이 심연의 상흔에서 나오는 순간이 포착된 만큼, 교단에서도 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으니.

"확실히 그땐 상당히 고생했습니다. 지금까지완 달리 심연을 직접 넘어온 괴물이라서인지 저도 미리 전조를 파악할 수 없더군요. 이것도 전부 아직 제가 많이 부족한 탓이겠죠."

"인간의 몸으로 주신의 뜻을 전부 헤아리기엔 무리가 있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때마침 성자님께서 그때 그 자리에 계셨다는 것만으로도 주신의 인도하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거인 중 하나는 제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준 끝에 사살되었고, 다른 하나는 로한 공국에 나타났다가 주신교단의 정예와 마주해 북부 산맥으로 쫓겨났다.

그런데 그만한 괴물을 제국보다 훨씬 국력이 약한 레스크 왕국의 남작령에서 막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만약 그 자리에 용사 파티가 없었다면, 무수한 죽음과 절망을 집어삼킨 놈이 어떤 괴물이 되었을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게 마주한 것이 정말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무언가에 이끌려 나타난 것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간 체하이에게 도움도 많이 받은 데다 아이들과도 정이 들어서인지 여러모로 신경 쓰인단 말이지. 거인과 가까이에 있던 보육원도 완전히 박살 나 버렸고.'

마침내 거인을 쓰러뜨린 직후.

용사 파티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놈이 마을에 난입했을 때 위험 범위에 남아있던 이들은 이세아가 최대한 수습해 피난시켰으나, 그녀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희생된 이들의 수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지인의 죽음에 슬퍼하는 주민들과 피난 도중 입은 상처로 끙끙 앓는 부상자들, 거기다 파괴된 터전에 망연자실 주저앉은 이들까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핵이 제거된 거인의 사체는 급속도로 부스러지기 시작하더니 몇 시간 만에 완전히 사라져, 마을 한복판을 점거한 수백 톤짜리 폐기물을 치워야 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저 압도적인 파괴의 흔적뿐.

그렇게 부상자를 치료하는 등 여러 후속 조치를 취하던 그들이 마음 편히 마을을 떠난 것은, 지오스가 적극적으로 나서 마을 재건을 지원하고 그 땅의 주인인 레가스 남작에게도 압력을 넣은 이후였다.

남작 입장에서야 어차피 신경 써야 하는 자기 영지에 백작씩이나 되는 고위 귀족이 복구를 돕겠다는데, 각별히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고.

"아! 제가 여러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다들 피곤하실 텐데. 이만 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녀님."

그렇게 성녀와 대화를 나누던 것도 잠시, 이제 슬슬 저녁 식사 시간도 끝나가고 있었기에 그들은 내일 다시 대화를 나누기로 하고 자리를 파했다.

"성자님, 성녀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죠, 헤론. 황녀님께 인사를 드리러."

"옙! 알겠습니다, 스승님. 모두 좋은 밤 되십시오!"

이제 회의의 시작 날까지 고작 이틀이었다.

지금이 저녁이었으니, 밤이 지나고 나면 고작 하루가 남은 시점.

당연히 참가국들은 모두 로셀리아 대신전에 도착한 상태였고, 그건 라일리 황녀가 대표로 있는 아제리온 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 저도 이만···."

지오스도 레스크 왕국의 사절단이 만나길 청했다는 이야길 전해 듣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실 그는 이제 왕국이고 귀족이고 아무런 미련이 없긴 했으나, 일단 작위를 가지고 있으면 편한 건 사실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왕국의 귀족으로서 건재해야 한창 환란을 겪은 체하이와 그 가족들의 뒷배가 되어주지 않겠는가.

"으하핫! 이거 오랜만에 대신전의 고기 맛을 볼 수 있겠구만! 그럼 식당 문 닫기 전에 나도 이만 가 보겠소!"

그리고 할리마저 신나는 발걸음으로 안내인을 따라 사라지자, 이제 이 자리에는 멀찍이 떨어진 수행 인원들을 제외하면 하인리히와 리에스타 둘만이 남게 되었다.

"그럼, 하인리히 님? 잠깐 제 집무실에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마침 좋은 차가 하나 들어왔는데, 향이 아주 좋답니다."

"음, 그럼 그럴까요. 그런데 리에스타 님은 쉬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사실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습니다만, 지금 굉장히 피곤해 보이십니다."

"···후후후, 회의가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쉴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다른 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면 이상이 없는지 몇 번이고 재차 점검해도 부족한데."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어째선지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라? 그럼 지금 그냥 차를 마시자는 게 아니라···.'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그가 저도 모르게 슬쩍 뒤로 한 발을 뺐을 때.

꽈악—

다시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돌아온 리에스타가 그의 팔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일단 준비를 끝마치긴 했는데, 이번엔 저 혼자 처리할 게 많아서인지 영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하인리히 님이 와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안광이 번뜩이는 성녀의 금빛 눈동자.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손아귀가 강하게 팔목을 조여 왔다.

"이제 여유 시간도 없는 만큼,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확실히 1차 회의 때는 하인리히와 성녀가 일을 분담하고, 바로 결정하기 힘든 부분은 서로 논의를 통해 처리했었다.

물론 그때도 추기경들을 비롯한 실무자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지금도 그들이 어련히 알아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줬겠냐마는···.

"도와··· 주실 거죠?"

이 과하게 책임감 넘치는 소녀는 그런 것만으론 영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보안 관련해서는 제가 한 번 더 확인할 생각이었으니까요. 원래 제가 하던 일이기도 했고."

그 비 맞은 고양이처럼 올려다보는 금빛 눈동자를 어찌 그냥 외면할 수 있을까.

전부터 자신과 비슷한 위치의 하인리히에게 은근히 의지하는 경향이 있던 그녀였으니, 이제 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1차 회의 때 한번 해봤던 일이기도 하니, 다시 확인하는 것 정도야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겠지.'

그러자 그의 승낙에 얼굴이 활짝 편 그녀가 한층 밝아진 기색으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하인리히 님은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어요! 자, 가죠! 마지막으로 점검할 게 많아요! 특히 이번엔 탈리아 왕국의 일도 있는 만큼,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마치 연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팔을 양손으로 단단히 틀어쥐고 자신의 집무실로 이끄는 리에스타 성녀.

'···정말 금방 끝나는 거 맞겠지?'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차가 아니라 커피를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

정상 회의의 개최까지 앞으로 하루.

아직 본격적인 회의가 열리지도 않았건만, 주최 측인 교단은 물론이고 참가 세력들도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위기 상황 때문에 모였다고는 하나, 이렇게 대륙의 주요 세력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그에 각계의 고위층들은 서로 간에 교류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건 물론, 앞으로의 방침을 점검하고 노선을 수정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쓰읍— 쩝."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런 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태평한 하루를 보내는 이도 있었으니.

"요즘은 아무리 먹어도 금방 배가 꺼진단 말이야. 역시 그것 때문인가?"

한 마리의 포식자처럼 어슬렁거리며 대신전의 복도를 거니는 커다란 덩치의 야만 전사, 할리였다.

전날 저녁 오랜만에 방문한 기념으로 제3 중앙 식당의 요리사들과 육즙 튀는 한판 승부를 벌인 후, 그는 마치 도장 깨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침부터 대신전 내의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기고 있었다.

규모가 큰 만큼 식당도 많았던지라 가능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제1 중앙 식당에서 만족스럽게 점심을 즐긴 후 식후 운동을 위해 훈련장에 가는 길이었다.

'그만큼 에너지 저장량이 늘었다는 거겠지. 하긴 「거대화」를 위해선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할 수밖에 없을 테니.'

백색 거인의 핵을 먹어 치운 후에 습득한 「거대화」.

막대한 '광기'와 함께 할리의 몸속에 자리 잡은 그 스킬은 이름대로 몸을 커다랗게 만드는 직관적인 능력이었다.

「육체변이」로 억지로 몸집을 부풀리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발동하긴 하나, 그래봐야 사용하는데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어느 쪽이든 매한가지였다.

'질량 보존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아직은 숙련도가 부족해 7미터 정도가 한계지만.'

그것이 스킬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밤중에 몰래 산에 들어가서 사용해본 결과였다.

또 얼마 있지 않아 급속도로 치밀어 오른 허기에 서둘러 스킬을 해제하고 꾸역꾸역 야식을 집어삼켜야 했다는 것도.

물론 7미터만 되어도 산의 폭군인 오우거조차 깔아볼 정도긴 했으나, 얼마 전 백색 거인을 마주한 입장에서는 영 성에 차지 않는 크기이기도 했다.

'뭐, 앞으로 숙련도가 올라가면 여기서 더 키울 수 있겠지. 그보다 거기서 패트릭을 딱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식당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용병 길드의 사무총장 패트릭.

그는 불사왕의 습격에서 사망한 전대 용병왕 칸블과 같은 파벌이었는데, 실각할 위기에 처하자 할리에게 접근해 먼저 제안한 바 있었다.

자신과 손을 잡고 용병왕의 자리를 노려보지 않겠느냐고.

이후 그가 요구한 것은 한 가지.

나머진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용병 길드의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명성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진 그것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지.'

무려 그 이름 높은 초대 용병왕과 같은— 용사의 동료로서 활약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도중에 그가 죽어버린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용병이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과였다.

그 때문인지 방금 마주한 패트릭의 표정도 굉장히 밝았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

'그런데.'

또 내심 신이 났는지, 그는 할리에게 먼저 악수를 청해 정중하게 인사하고서야 물러갔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할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육체의 근육량과 실제 가진 근력 사이의 괴리.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

혹시 이쪽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이나 마도구 때문일 수도 있으니 백퍼센트는 아니지만, 사실 이쯤 되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생각보다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이 많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군.'

사실 처음부터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과 빠른 성장을 가능하게 해 주는 추가 보정을 생각하면 그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정도 이상으로 크기 전에 낙오하거나 성장을 포기하고 안전만 추구하게 된다는 거겠지.

'어떤 고유스킬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한데. 행정 쪽으로 방향을 튼 걸 보니 전투계는 아닌가? 앤드류처럼 쓸 만한 보조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할리가 음흉한 생각을 하며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끄끅끅— 자네가 그 할리인가? 저번에도 본 적이 있긴 하네만,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군."

갑작스러운 낯선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응? 노인장은?"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 곳곳을 뒤덮은 화려한 문신.

이런저런 장식품이 매달린 나무 지팡이를 든 살짝 굽은 허리의 노파.

"끅끅, 그간 이쪽의 사정이 여의찮아서 말이지. 그래도 이번엔 이렇게 직접 대화할 수 있어서 다행이구만."

「칼코스식 전투 각인」의 원산지인 남부 칼코스 부족 연맹의 대표, 대주술사 모르나였다.

"그래 자네, 잠깐만 이 노인네에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무슨 용건이오, 노인장? 난 지금 좀 바쁜데!"

그는 겉으론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속으론 빠르게 상대를 분석했다.

그러고 보니 할리를 결사대에 추천했던 인물은 용병 길드의 사무총장인 패트릭뿐만이 아니었다.

부족 연맹의 대표인 저 노파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겉으로만 남부 전사를 표방하고 있을 뿐, 그곳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어떤 일면식도 없는 그를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남부 쪽에 접근할 생각이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나를 찾아왔단 말이지?'

남부에서 발발했다는 쿠데타와 지금 태연하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칼코스의 대표.

혹시 이 접근에 무언가 함정이 있는 게 아닐까···.

"자네 혹시 '투왕의 각인'에는 관심 없는가?"

···싶었지만, 역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정돈 상관없을 것 같았다.

잠깐 대화한다고 손해 보는 것도 없고, 설령 상대가 뭔가를 꾸미고 있더라도 그를 통해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뭔가 데자뷔가 느껴지는군.'

마침 조금 전에 만났던 패트릭도 처음엔 이렇게 접근하지 않았던가.

용병왕에 이어 투왕의 각인까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이들이 연달아 달콤한 제안을 내밀며 그를 홀리고 있었다.

"오! 그거 들어본 적 있지! 효과가 아주 끝내준다고 하던데?"

하지만 상남자 할리는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냉큼 미끼를 물었다.

심약한 이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이빨을 활짝 드러내는 환한 미소로.

'그게 각인 테크트리의 종결점이라고 했었지?'

요즘 용인이란 핑계로 워낙 인외(人外)의 힘을 남발하느라 그간 각인이 큰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다 막 습득한 「거대화」조차 온전히 수습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원래 쓸 수 있는 능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이게 쉽게 찾아오는 기회도 아닐 테고.'

원래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었다.

#201

2차 대륙 정상 회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