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조롱박 형제
“형, 이대로는 안 돼. 한영서 씨를 부르는 게 어때?”
“안 돼.”
시혁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지훈은 포기하지 않고 거듭 제안했다.
“형, 민우는 어린애지, 형의 부하 직원이 아니야. 애한테 너무 엄격하게 구는 거 아니야? 좀 봐주면 어때. 제멋대로 굴지 않는 애가 어디 있다고.”
“내가 내 아이를 교육하는 방식이야. 네가 끼어들 일 아니다.”
시혁의 얼굴은 서릿발이 날리는 듯 서늘했다. 아이에게 절대로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나쁜 습관을 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시혁과 민우 사이에 끼어 제대로 난처해진 지훈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만약 이 상황을 부모님께 알린다면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 이 문제의 근원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자신이 민우를 데리고 호텔에 간 것까지 다 밝혀질 테니 말이다.
이내 지훈은 시혁이 민우를 잡으러 간 틈을 타 얼른 그의 핸드폰을 뒤졌다.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오직 한영서 뿐이었다.
* * *
같은 시간, 영서는 집에서 극본을 읽으며 누군가와 컴퓨터로 채팅을 하고 있었다.
데빌킹: 한영서, 너 닉네임 좀 바꾸면 안 되냐? 보는 사람의 입장은 전혀 고려 안 해? 다른 사람의 눈도 좀 배려해 달라고!
외로운상실: 그럼 데빌킹은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지은 닉네임이야? 왜 나한테만 그래?
데빌킹: 참나, 나 다음 달에 돌아가. 공항으로 마중 나와.
외로운상실: 안 가, 시간 없어.
데빌킹: 나 좀 데리러 오라니까!
외로운상실: 시간 없다니까!
데빌킹: 진짜 안 올 거야?
외로운상실: 상대방이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고 엿을 날립니다.
데빌킹: 상대방이 던진 엿을 받아먹습니다.
외로운상실: 이가 다 썩습니다.
데빌킹: 젠장, 한 마디를 안 지려고 하네! 더럽다, 더러워.
외로운상실: 먼저 더럽게 군 건 너지. 더 이상 낭비할 시간 없어. 나 이제 대본 봐야 해.
데빌킹: 서브 여주라면서 볼 게 뭐 얼마나 많다고! 그래도 한때나마 감정을 나눴던 사이인데 이렇게 매정하게 굴 거야?
외로운상실: 나랑 감정을 나눈 사람은 트럭으로도 차고 넘쳐. 넌 몇 번째더라?
데빌킹: 야 한영서, 너 딱 기다려!
영서는 컴퓨터를 꺼버리고 극본에 집중했다. 그런데 곧 핸드폰이 울리고 낯선 번호가 떠올랐다. 제작진 번호인가 싶었던 영서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한영서 씨. 살려주세요!
“당신은⋯⋯.”
- 유지훈입니다. 제발 부탁인데 빨리 플래티넘빌로 좀 와 주세요! 꼬맹이한테 일이 좀 생겼습니다!
“네? 아이가 왜요?”
영서는 순간 심장이 졸아드는 것을 느꼈다.
- 어쨌든 지금 무지 급한 상황이니까 최대한 빨리⋯⋯. 형, 형! 진정 좀 하고! 아직 어린 애잖아⋯⋯. 꼬맹아, 그건 망가뜨리면 안 돼⋯⋯! 아휴⋯⋯.”
지훈의 목소리는 상당히 심각했고, 핸드폰 너머로 물건이 쓰러지는 소리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덩달아 긴장한 영서는 얼른 옷을 입으며 답했다.
“지금 갈게요!”
영서는 민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알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민우는 영서의 마음에 콕 틀어박혀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영서의 집에서 플래티넘빌까지는 꽤 멀어 택시를 타더라도 적어도 40분은 걸릴 것 같았다. 그 시간에 무슨 일이 더 일어나기라도 할까 불안해졌다.
이내 차고에서 오토바이를 끌고 나온 영서는 플래티넘빌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원래라면 40분이 족히 걸릴 그곳까지 단 25분 만에 도착했다.
지훈이 미리 보안 요원에게 언질을 해두었는지 영서는 이름을 대자마자 대문을 통과했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한 젊은 여자 고용인이 금세 다가와 영서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 * *
운전에 방해되지 않으려고 검은 가죽 재킷에 가죽 바지를 입은 영서는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며 헬멧과 장갑을 벗었다.
헬멧 아래 감춰져 있던 긴 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영서의 출현에 지훈은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유민우, 너 진짜 아빠가 못 혼낼 것 같아?”
거실 한쪽에서 시혁이 오갈 데 없이 구석으로 몰린 민우를 한 팔로 꽉 끌어안고 있었고, 민우는 그의 품 안에서 마구 버둥거리고 있었다. 마치 화가 잔뜩 난 작은 짐승이 팔을 미친 듯이 휘적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해요!”
영서가 얼른 달려가 민우를 빼앗듯 안아 들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안아 든 사람을 확인한 민우의 커다란 눈이 점점 붉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영서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꼭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귀엽기만 했던 민우가 겁에 질린 눈을 하고 몸을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자 영서는 너무나 마음이 아렸다.
분노한 영서는 시혁이 보스라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와다다다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유시혁씨, 저도 제가 이 일에 끼어들 입장이 아니라는 거 잘 알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네요. 당신의 교육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요. 사랑이 필요한 시기의 어린아이잖아요.
유시혁씨. 민우의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아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큰 충격을 받은 데다 엄마도 곁에 없는 아이라면 좀 더 인내심을 갖고 포용해줘야죠. 어쩜 이렇게 거칠게 굴 수가 있어요? 민우가 겁먹는 것도 안 보여요? 심지어 민우한테 손을 데려고까지 한 건가요?”
“제 잘못입니다.”
“⋯⋯.”
지훈은 속으로 난감한 웃음을 삼켰다. 자신의 형이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내가 교육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했을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한영서씨가 한마디 하니까 저렇게 잘 듣는단 말이야?’
민우는 영서 앞에서 주인을 본 새끼강아지처럼 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에게서 미친 새끼 사자의 모습을 보았던 두 남자는 순순히 영서에게 안긴 민우가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소파에 앉은 영서가 민우의 머리를 살살 쓸어주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지 않았나요?”
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요 꼬맹이가 한영서씨를 보고 싶다고 애원을 하는 데 형이 허락하지 않았던 거죠. 전화도 방해될까 싶어서 못하게 했고요. 그랬더니 얘는 막 온갖 군데를 뛰어다니면서 거실에 있는 것들을 전부 박살내고 난리, 형은 그런 나쁜 습관이 들면 안 된다고, 가만 안 두겠다고 난리. 결국에는 거실이 이 꼴이 났습니다.”
“겨우 저랑 만나지 못하게 하고, 연락 못 하게 했다는 것 때문에요?”
그 말에 영서는 의아해졌다.
‘유시혁이 민우가 나한테 의지한다는 말을 해 주긴 했었지만, 내 영향력이 그렇게나 크다고?’
“그럼 뭐겠어요? 자신의 영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경향이 있네요! 창고 안에 갇힌 날 기억하세요? 한영서씨가 기절해 쓰러져 있을 때 요 꼬맹이가 아무도 한영서씨 건들지 못하게 했단 말입니다! 결국 형이 직접 한영서씨를 안아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었죠.”
당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영서를 위해 지훈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 말에 영서는 무의식적으로 시혁을 힐긋 돌아보았다.
‘유시혁이 직접 나를 안아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고?’
“그뿐인 줄 아세요? 병원에 있을 때도 깨어나자마자 한영서씨를 찾더니 없으니까 죽은 줄 알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통에 하마터면 건물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니까요. 그러다 형이 와서 한영서씨가 남긴 쪽지를 보여주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고요.
어젯밤에는 한영서씨 보고 싶다고 단식 투쟁을 했는데, 오늘 밤에는 아까 한 전화 때문에 답지 않게 밥을 잔뜩 먹어버리는 바람에 만능 단식 투쟁이 먹히지 않게 되니까 이렇게 폭주한 거라고요⋯⋯.”
‘밥을 잔뜩 먹었다고? 오늘 저녁 전화로 편식하지 말고 밥 많이 먹으라고 해서? 그럼 이건 내 잘못인가?’
지훈이 쏟아낸 정보가 너무나 많아서 영서는 그것을 소화하는데 한참의 시간을 들여야 했다. 이윽고 영서가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찹쌀떡, 아니 민우를 향해 물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물건들을 망가뜨린 거야?”
민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영서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이게 잘못된 거라는 건 알고 있지?”
민우가 이번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서는 시혁이 민우에게 왜 이렇게 엄하게 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집에서 지나치게 사랑만 받고 제멋대로 굴었던 아이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뜻만 고집하게 될 테니까. 영서가 엄격한 눈빛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건 잘못된 거야. 나쁜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앞으로는 이러면 안 돼, 알았지?”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민우를 보자, 시혁의 얼굴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민우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들면 곧장 단식에 들어가고, 방 안에 들어가 나오질 않거나, 심지어는 물건들을 부수며 어지럽히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그걸 고치기 위해 정신과 의사가 하라는 대로 전부 다 했었지만,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시혁의 부모님은 마음이 너무나 약해, 아이가 매번 난리를 피울 때마다 강하고 엄격한 태도로 다스리려 했다가도 그 자세를 반도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그 뜻에 따라주곤 했다.
보아하니, 영서가 민우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시혁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것 같았다. 물론 그래서 더 좋았지만.
민우는 고집이 굉장히 센 편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약속을 지켰다. 이번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민우를 잘 타이른 영서가 이제는 아이를 재우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음. 오늘은 새로운 노래를 불러줄까?”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무슨 노래를 불러줘야 하나⋯⋯ 아! 조롱박, 조롱박, 일곱 빛깔 조롱박, 바람이 불어도 무서워하지 않네, 라라라라⋯⋯.”
문틀에 기대어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지훈은 그 노래를 듣고 하마터면 그대로 미끄러질 뻔했다.
“우리 똑똑한 꼬맹이가 저런 유치한 노래를 좋아할 리가 있나!”
있었다. 민우는 분명 영서의 품에서 눈을 감고 그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더 놀라운 점은 그의 형 시혁 역시 그 노래에 푹 빠져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민우를 재운 영서가 허리를 쭉 피며 말했다.
“제가 아는 동요는 곧 바닥나겠어요.”
“동요만 부를 필요는 없어요. 다른 노래도 상관없을 걸요?”
“다른 노래요? 제가 아는 노래 중에 동요 말고 다른 노래들은 아이들한테 부적절한 것 같던데요.”
영서와 지훈의 대화를 듣던 시혁의 머릿속에 영서가 아이에게 제일 처음 불러주었던 구성진 유광비무(流光飛舞)가 떠올랐다.
“아하하, 정말요? 뭔데요? 저도 들어보고 싶은데!”
시혁이 흥분한 지훈을 살짝 흘겨보았고, 지훈은 곧 그 눈빛에 제압당했다.
“근처에 있었던 겁니까?”
다시 대화의 기회를 얻게 된 시혁이 영서에게 물었다. 근처에 있지 않고서야 영서가 이렇게 빨리 올 수는 없었다.
“아뇨, 집에 있었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왔거든요. 빠르죠?”
영서가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그제야 시혁은 그녀가 왜 그렇게 옷을 입은 건지 이해했다. 어제보다 더 감탄스러운 의상이었다. 어제는 보수적인 요정 같았다면 오늘은 자유롭고 거친 요정 같았다.
“위험할 텐데요.”
시혁이 썩 달갑지 않은 얼굴로 영서를 부른 지훈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괜찮아요. 제 오토바이는 굉장히 튼튼한 녀석이라. 민우도 괜찮아졌으니 이만 가볼게요!”
영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고 하품을 했다. 이윽고 떠날 준비를 하던 영서를 향해 시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한영서씨, 무리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화가 사그라지고 난 뒤, 원래처럼 얌전해진 영서가 예의 있게 답했다.
“말씀하세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들어드릴게요.”
대유그룹은 지하 세력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대마왕 유시혁의 한 마디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 시혁에게 무리한 부탁이 과연 무엇일까. 방 안에 누워있는 민우를 바라보던 시혁이 약간 묵직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의 상황은 한영서씨도 보셔서 알고 계시겠죠. 그러니 부디 한영서씨가 당분간 저희 집에서 지내주셨으면 합니다.”
영서의 큰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여기에서 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