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0화. 한영서, 우리의 앞날은 창창해

10화. 한영서, 우리의 앞날은 창창해

“그렇습니다.”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차라리 민우가 절 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올게요!”

영서가 난색을 표하자, 시혁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나 많아집니다. 특히나 밤에 무슨 돌발 상황이라도 생겼을 때 한영서씨가 또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건 너무 위험해요. 제 입장에서 툭하면 아이를 데리고 한영서씨를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고요. 무리한 부탁이라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민우의 아빠로써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서의 머리도 덩달아 아파왔다. 시혁이 권력과 힘으로 협박을 해온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자리를 떴겠지만, 그는 높은 지위를 갖추고도 이렇게 애절하게 부탁을 해왔다. 특히 그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거절의 말을 내뱉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이때 곁에 있던 지훈은 감탄의 눈으로 시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형이 이렇게 고도의 수단을 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시혁은 약점을 유리하게 승화시켜 한영서를 붙잡을 최고의 기회를 만들어 냈다. 아이의 존재는 시혁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쾅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던 등이 쓰러졌다. 그러자 놀란 민우가 겁에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이어, 민우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튀어나와 영서의 다리에 매달렸다. 두려움에 잠식된 아이의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저미게 했다. 영서를 보고 나서야 민우의 눈에서 공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왜 일어났어? 착하지, 누나 여기 있어. 걱정 마, 걱정 마⋯⋯.”

민우는 보드랍고 작은 손을 영서의 목에 꼭 감고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민우의 몸에서 살며시 풍겨오는 우유 단내를 맡으며 영서는 생각에 잠겼다. 이내 영서의 심경이 퍽 복잡해졌다.

‘분명 난 어린애를 싫어하는데, 어째서 이 아이는 싫지 않을까⋯⋯.’

* * *

자장가를 한 번 더 불러주며 민우를 재운 영서가 조심스레 방 밖으로 나왔다.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던 아래층 거실은 벌써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과연 대유그룹의 고용인들이라 그런지 일 처리가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또한 그들은 영서의 등장에 모두 궁금하고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단 한 번도 시선을 힐긋거리거나 따로 말을 걸어오는 일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본분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영서가 방에서 나온 이후로, 시혁은 잠자코 영서만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어떤 압박도 주지 않았지만, 영서는 괜히 머뭇거려졌다. 이내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던 민우를 떠올린 영서가 결국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일단 도와드릴게요. 아이가 절 구해준 데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감사합니다.”

“아이가 언제라도 깰 것 같은 걸 보니, 오늘 저녁 돌아가는 건 어렵겠네요. 하지만 집에 있는 짐이라도 조금 가져와야 할 것 같은데⋯⋯.”

“걱정 마세요.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할 테니까요.”

시혁은 곧장 집사를 시켜 영서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다. 둘을 말없이 지켜보던 지훈이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렇게 동거를?’

“볼일 남았어?”

“이만 가볼게!”

이내 다가온 시혁의 따가운 시선에 지훈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한영서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자신의 형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는 이제야 시혁이 그동안 여자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저 봉인을 해제하지 않고 있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지훈이 떠나고, 시혁은 영서를 민우의 침실 옆방으로 안내했다.

“앞으로는 여기에서 지내세요. 특별히 꾸미고 싶은 스타일이 있다면 사람을 시켜 새롭게 인테리어 하겠습니다.”

영서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며칠 머물다 갈 건데요, 뭐. 괜찮습니다!”

“인테리어 바꾸는 것쯤은 별 거 아닙니다.”

이내, 시혁이 집사에게 열쇠 한 꾸러미를 받아 곧장 영서에게 건넸다.

“이건 이 집 안의 열쇠입니다. 어디든 마음대로 돌아다니셔도 됩니다. 대문은 비밀번호로 열리는데, 비밀번호는 591414입니다. 이 열쇠는 다락방 열쇠니까 특히 잘 지니고 있으세요. 민우가 열쇠를 들고 그 방에 숨는 걸 지나치게 좋아하거든요. 이 열쇠는⋯⋯.”

집 안의 비밀 금고 열쇠까지 넘기려 하는 통에 영서가 얼른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 잠깐, 잠깐만요⋯⋯! 유시혁씨, 너무 방심하시는 거 아니에요? 제가 유시혁씨 집에 있는 것들을 몰래 가지고 나가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뭐가 필요하신가요? 뭐든 가지고 가실 수 있도록 해두겠습니다.”

시혁은 진지했다. 얼굴이나 말투, 그 어디에서도 웃음기라곤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크흠.”

영서는 시혁의 말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황급히 변명했다.

“그냥 농담 한번 해봤어요. 농담이에요…….”

시혁은 열쇠를 주는 것에 맛 들인 것 같아 보였다. 이내 그는 또 다른 열쇠 하나를 영서에게 건넸다.

“이 동네는 택시 잡기가 힘듭니다. 일하러 갈 때 불편하면, 이 차를 쓰도록 해요.”

그 말을 들은 영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

‘어째서…….’

자신은 이곳에 잠시 거주할 뿐인데, 어째서 스폰 받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

‘음, 아니지, 만약 스폰이라면 외부에 숨기는 게 맞지. 본인 소유의 주택이랑 열쇠, 심지어 자기 아들까지 나한테 맡길 수가 있겠어?’

그런데 왠지 신혼부부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이내 영서는 시혁과 처음 만났을 때, 시혁이 갑작스럽게 청혼한 모습이 뜬금없이 생각났다.

영서는 자신이 남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마치 고급 방화벽을 설치한 컴퓨터 시스템과 같아서 영서가 쉽게 간파할 수 없었다.

순간, 마음이 약해져 같이 살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잘한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한편 그날 밤, 민우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영서는 민우의 침대에서 민우와 함께 잠이 들었다.

* * *

깊은 밤.

누군가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이내 한 남자가 인기척을 숨기고 걸어 들어와, 영서와 민우가 자고 있는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어두컴컴한 방 안의 희미한 불빛 아래, 영서는 민우를 토닥이다 잠이 들었는지 민우의 몸에 손을 올리고 숨을 고르게 쉬며 자고 있었다.

영서의 눈썹은 부드러운 모양새였으며, 조금씩 달싹이는 입술은 여름날 열린, 바람에 흔들리는 싱그러운 앵두 같았다. 남자는 그 입술을 가만히 응시했다.

곧이어 영서 위로 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남자는 천천히 영서를 향해 다가갔다.

서로의 호흡을 숨길 수 없으며, 조금만 움직여도 곧 서로의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남자는 돌연 멈추었다. 그러곤 영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한영서, 우리의 앞날은 창창해.

* * *

둘째 날 아침.

영서는 자신이 잠자리를 가리는 편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녀는 이 낯선 집에서 꿈조차 꾸지 않고 너무도 잘 잤으며, 아침엔 저절로 눈이 떠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영서가 일어났을 때, 민우도 이미 일어나 있었다.

민우는 영서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책에 집중한 듯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영서는 민우가 날뛰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얌전한 아이라 생각했다.

“민우야, 좋은 아침-!”

영서는 이불을 끌어안고 앉아서 민우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민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곤 영서를 봤다. 비록 민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었지만, 영서는 민우의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아이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내 영서는 민우의 까치집 머리가 웃기고 귀엽다는 듯, 살포시 미소 지으며 손을 뻗어 민우의 머리를 정돈해주었다.

“오늘 이모님 일 안 하시는 날인가 보네. 오늘은 내가 하루 종일 너랑 놀아 줘야겠는 걸?”

영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민우였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에 티가 날 정도로 좋아하고 있었다.

민우가 살짝 웃자, 영서는 민우의 귀여움에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자 영서는 참지 못하고 민우의 찹쌀떡 같은 두 볼을 양손으로 주물주물 만지면서 말했다.

“민우야, 좀 많이 웃어 봐봐. 너 웃는 모습 정말 너무 귀엽다니까?”

* * *

영서가 샤워를 하고 밑으로 내려오니, 이미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은 영서는 시혁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집사나 다른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그와 함께 아침식사를 해야 한다고 미리 이야기하지 않은 걸 보면, 영서는 자신이 일어나기 전에 시혁이 일찌감치 회사에 출근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침을 먹은 후, 영서는 민우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만약 자신이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마저 들었다.

하지만 영서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영서는 아침 내내 소파에 누워 대본을 보았고, 민우는 그런 그녀의 옆에 엎드려서 탁자에 쌓여있는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가 영서와 민우에게 발소리를 죽인 채 다가와, 과자와 과일이 담긴 접시를 말없이 내려놓은 채 돌아갔다.

보아하니 민우는 평소에도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 * *

한편 구석 쪽에서는, 집사가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사는 영서가 꼬마 도련님, 민우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아침 내내 대본만 읽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민우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민우가 가끔 영서를 몰래 힐끔 쳐다보고, 영서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자 안심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집사는 아름다운 여인은 언제나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 영서를 봤을 때, 큰 도련님인 시혁이 그녀에게 홀린 것이 아닐까 하며 매우 불안했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속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에, 언뜻 봐선 자신의 본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도시에 있는 수많은 여자들이 시혁의 집에 있는 안방을 노리고 있었다. 즉, 무슨 수단이나 방법을 써서라도 민우의 새엄마가 되고 싶어 했다.

심지어 2년 전엔, 시혁의 옆자리를 노렸던 한 여자 때문에 끔찍한 사건마저 일어나 민우가 크게 다쳤었다.

이와 같은 일들로 인해 집사는 아직까진 영서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큰 도련님인 시혁이 영서를 매우 신임하는 데다, 둘째 도련님 지훈 역시 그녀를 저지하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꼬마 도련님 민우마저 그녀를 잘 따르는 모습을 보자, 집사는 마음이 매우 조마조마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