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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화 아무 대가 없이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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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걸. 이용한다고?

〈당연하지. 〉

= 으음.

〈왜, 싫어? 설마 지금 저 녀석을 동정하는 거냐? 〉

주저하는 마음을 아이작이 빠르게 읽고 황당함을 표했다.

그러나 잠깐 피어올랐던 감정은 브로디 발도프라는 이름의 늑대를 향한 게 아니다.

그건는 마음을 아이작이 빠르게

읽고 황당함을 표했다.

그러나 잠깐 피어올랐던 감정은 브로디 발도프라는 이름의 늑대를 향한 게 아니다.

그건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발아래에 짓밟혀 꿈틀대면서도, 애타게 누군가를 찾으려는 늑대의 모습에서 낯익은 내가 투영됐다.

= 동정은 무슨.

그건 오히려 자조에 가깝다.

동정은 이미 천 명을 죽이고 와서 느낄 만한 감정이 아니기도 하고.

문제는 내가 루멘 발도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한 번의 짧은 만남.

사실 그게 전부다.

= 그 녀석,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살아 있는지조차.

그나마 레드 플레이크 소속인 것 정도만 안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라. 그냥 시키는 대로 말하면 돼. 〉포스 실드의 중량에 짓눌려 있는 브로디 발도프가 나를 올려 보며 힘겹게 말했다.

"루멘은. 어디 있는 거냐? 아는 척만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아이작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

"흥. 푸른 늑대의 혈인이 제대로 발현된 아이지 않나."

= 푸른 늑대의 혈인이 뭐냐?

〈뜨지 않는 달의 가호마저 받는 터무니없는 능력이지. 하나둘이 아니니. 〉= 뜨지 않는 달의 가호?

〈일단 말이나 제대로 전해. 〉

나는 핀잔을 받고 말을 이었다.

"그 어미가 죽은 뒤에, 유일하게 남은 너희 종족의 희망이겠지?"

"r

브로디 발도프의 눈빛이 가파르게 흔들렸다.

"뭐야, 너희들은 그 아이가 푸른 늑대의 혈인을 갖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나?"

"크르르."

녀석이 한층 더 움찔거렸다.

"쫓아오는 건 알고 있었어. 사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어."

"우습게. 여기는 거냐.

아이작의 말대로 손을 내저으며 계속 말했다.

"너희들 심각한 멸종 위기잖아? 내 손으로 종족 차원의 종지부를 찍고 싶지는 않아. 자연은 반드시 보호해야 하거든."

= 너, 그런 것도 신경 썼냐?

〈가만히 신경 쓰는 척 좀 해라. 늑대들은 자연 보호 주의자들이야. 앞으로 계속 써먹을 녀석이니까, 호감을 좀 사 두라고. 〉저렇게 흉폭하게 생긴 녀석들이 자연 보호라니, 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크르르.

브로디 발도프는 한층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며 물었다.

"푸른 늑대에 대해. 뭔가 알고 있나?"

"잘 알지. 굳이 인간이 아니라도, 유전병으로 쇠퇴해 가던 너희들의 마지막 희망이 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 아쉽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칠 일을 사는 은빛 늑대에 대해서 도 알고 있지. 웬만하면 너보다 잘 알지 않을까? 숲의 종족이여."

그 말까지 들은 브로디 발도프는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힘을 뺀다고 도망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사 그렇더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 파지직.

뇌전을 홀리고 있는 칼을 팔에서 빼내자 녀석의 인상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칼을 빼자마자 조금씩 실시간으로 아물어 가는 상처를 보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어울프가 입을 열었다.

"너는. 확실히 우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군. 어쨌건.

그가 말을 이었다.

"루멘에 대해. 말해라. 알려만 주면 뭐든 하겠다고. 약속하마."

"좋은 태도야. 일단 푸르손과의 계약을 파기해라."

갑작스러운 진행이었다.

= 그걸 꼭 해야 되는 거냐?

〈당연한 소리. 마왕들은 계약자를 통해 보고 들을 수 있다. 멍청한 곰 새끼가 찢어진 눈으로 날 홈쳐보는 건 절대 사양이다. 〉마왕들이 계약자를 통해서 보고 들 을 수 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 그럼 말파스도.!

아이작과 내 행동을 언제든 지켜볼 수 있다는 건가.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우리는 유리한 계약을 맺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떠돌이 늑대는 제대로 계약을 맺었을 리가 없거든. 〉의외로 브로디 발도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뜻. 대로. 하지만. 마왕과의 계약을. 내 마음대로 파기할 수 있을지는. 크르르.

"다른 계약으로 덮어씌우면 된다. 지금 바로 말파스와 계약을 다시 진행하도록 하자."

아이작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

주면서 나도 궁금해졌다.

= 그렇게 간단히 마왕에서 다른 마왕으로 갈아탈 수 있는 거냐?

〈당연히 나니까 가능하다. 마왕과 직계약을 맺은 대제사장인 나 정도 되니까 이런 권능을 가진 거다. 〉= 흠,

"된다면. 상관없다. 루멘에 대한 정보만 들을 수 있다면.

잠시 후 아이작의 몸에서 희미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이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고 생각해라. 실이 풀려나가는 것처럼.

아이작은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이 웨어울프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아이작이 만들어 낸 바람이 몸에 스며들어 가자, 늑대의 온몸에서 검은 핏방울이 배어나왔다.

"크으윽.

어마어마한 고통을 근성 하나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기운이 원래 있던 기운을 여기저기 흘려보내고 몰아내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말파스가 새로운 계약자의 자질에 높은 만족도를 표합니다.]

[말파스의 행복도가 올랐습니다.]

[마왕의 가호가 강해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말파스가 보고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 울컥!

웨어울프의 입에서 새까만 피가 토해졌다. 발작적으로 버티고 있던 마지막 기운이 피와 함께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계약자를 빼앗긴 마왕, 푸르손이 당신에게 분노합니다.]

[푸르손이 후일을 기약합니다.]

이건 또 뭔가.

마왕에게 후일을 기약당했다. 좀. 많이 찜껍하다.

= 너도 보이냐?

〈응? 뭐가 보인다는 거냐? 〉

역시 아이작은 볼 수 없다.

이런 메시지를 보는 건 나뿐이다.

며칠 전, 푸르손의 제단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창.

기준이 뭔지 알 수 없었다.

강림하지 못한 마왕들은 계약자를 통해서만 듣고 볼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하피와 뱀을 죽였을 때 아무 메시지도 나타나지 않은 건 어째서인지 궁금해진다.

[푸르손이 후일을 기약.]

메시지를 끌어서 치워 버렸다.

일단 당장은 눈에 띄는 이득도, 불이익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이나 마왕이라는 것들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를 관찰하고,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내가 이 정도라면.

아이작은 얼마나 많은 신격들에게 원한을 샀을까.

분노한다는 상태 창만 못 보고서 살았을 따름이지.

"기분은 좀 어떤가."

나는 웨어울프를 보고 물었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깨끗한. 느낌이다."

〈유통업자를 훨씬 덜 거친 거다.

훨씬 깔끔한 직계약이지. 후후. 〉

= 그런데 루멘 발도프의 정보는 어떻게 알려 주려고?

〈나한테 다 생각이 있다. 넌 신경 쓰지 말고 시키는 대로 계속해서 말이나 해라. 〉

"이미 짐작했겠지만, 나도 마왕의 제사장이다. 역시 인간의 박멸을 목 표로 하고 있지."

아이작이 인간의 박멸을 목표로 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말을 이어갔다.

"좀 험악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네가 찾는 늑대는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 위치는. 앞으로 네가 하는 거 봐서 알려 주마."

"크르르.

웨어울프는 무척 신경 쓰인다는 듯 아이작을 흘끗 살폈다.

"그런데. 저건. 어디서 주워 온 인형인가. 몹시 부정한 기운이 느껴진다.

늑대 녀석들은 후각뿐만 아니라 감도 예민한 것 같다.

〈쯧쯧. 은혜도 모르는 강아지가. 곰 새끼한테 벗어나게 해 줬더니. 〉

"뭐,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 갖고 다니는 거다."

대충 얼버무린 뒤 말을 이었다.

"일단 전쟁에 대해 아는 정보를 다 늘어놓아 봐라."

브로디 발도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둘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신장만 3미터가 넘는 근육 덩어리 웨어울프가 다소곳이 앉아 하나둘 이야기를 해 주는 모습이 어딘가 기괴하게 느껴졌지만, 들을 만한 정보가 많았다.

녀석이 다소곳하게 변한 뒤로는, 아이작은 뒤로 빠져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황실은. 이쪽은 그저 전선만 유지하고 있다."

여기저기를 빠르게 오갔었는지, 웨어울프가 흙바닥에 슥숙 그리는 지도는 꽤 정밀했다.

"연합 인간. 과의 전선은 계속. 교착되어 있는 상태다."

그리고 2년째 엠버에 발이 묶여

있다는 이야기까지.

큰 그림은 아이작이 말한 대로다.

"우리나. 다른 마왕의 세력도. 전쟁을 오래 끌면서 인간의 피를 홀리게 하려고 했다."

양측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독을 타고, 빼앗고, 마을에 불을 지른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서로를 증오하도록 부추긴다.

하지만 어미가 조금 미묘했다.

"하려고 했는데?"

웨어울프는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능가했다."

〈큭큭큭. 〉

"무슨 소리냐?"

"인간의 목적은 '싸움'이 아닌 것 같았다. 제대로 된 전투는 오히려 우발적으로 일어나더군. 계획적인 진군은. 주로 무력한 자들을 향해 이뤄졌다. 양측의 군대는 서로와 싸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싸우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 〉

아이작은 웨어울프의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고 계속 웃어 댔다.

〈싸움 따위를 누가 하고 싶어 해? 뭐든지 저지를 수 있는, 살아 있는 고기를 찾고 싶어 하지! 〉

"마지막 주민까지. 모조리 살해당한 뒤에야. 군대가 본 격 적 으로 부딪칠 거라고 생각된다.

아직도. 약탈될 마을들은 많이 남았다."

〈여유가 있으면 절대 바로 죽이지 않아. 소, 돼지를 죽이는 거야 고기 때문이지만, 인간을 죽이는 건 오직 재미 때문이거든. 그 황홀한 맛을 절대 잊을 수가 없지. 다들 정말로 돌아 버린다니까? 〉전쟁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일을 킥킥거리며 주워 삼기는 아이작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겼다.

까마귀와 늑대의 의견은 같다.

전선은 교착 상태.

전쟁이 오래갈 거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기억하는 역사와 꼭 다른 것도 아니다.

10년.

압도적인 차이가 나면 10년이나 전쟁이 지속될 수가 없다.

제국과 연합은 아슬아슬하게 밀고 당기다가, 제국이 이겼지만 결국 상처뿐인 승리였다는 건가.

그 틈을 타서 마왕이 성공적으로 강림할 수 있었고.

물론.

전쟁의 행보니 마왕이니 하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막을 세세히 알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다.

중요한 건 딱 하나.

단 하루라도 빨리 레이 루비아를 구출하는 거다.

"아쥬라의 마법사들은?"

"그들이. 참여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북쪽에 있는 아쥬라의 탑.

탑을 지키는 마법사들을 어떻게 끌어내느냐가 문제다.

아무리 강해진다 해도, 탑주급 마법사 여럿과 부딪치는 건 역시 무리다.

이들이 전쟁에 뛰어들어야 힘의 공백이 생긴다.

"제국군 대부분의 전력은 엠버에 있다고 했는데, 지금 엠버 상태가 어떤지 자세히 알고 있나?"

웨어울프가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는. 모른다."

그는 사슴 아에자르에게 들었다며 아는 걸 전부 털어놓았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들은 것보다 자세한 정보는 없다.

"그곳도. 소모전이다. 전선이. 묶여 있다. 딱히 우리가. 손쓰고 어쩌고 할 것도 없는 상태다."

엠버의 개개인들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첨언이 이어졌다.

기스-제-라이라는 존재 단 하나만 봐도 짐작할 만하다.

그녀는 이미 죽었지만.

엠버의 3강이라고 했으니, 최소 그녀 정도의 존재가 엠버에 둘은 더 있다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묘하다.

압도하지 못하는 상태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건가?

얘기를 듣고 나니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다.

핵심 전력이 빠져 있는 때.

내가 연합을 도와서 전선을 위로 밀어 올려야 한다.

= 아이작.

〈패잔병들이 하는 강간이 얼마나 절박한지 알고 있냐? 그건 말하자면 생존 욕구에 가까운 거야. 공포와 각성 상태에서 이뤄지는. 〉〈어, 왜? 요 강아지는 이미 나긋나긋 해져서 재미도 없어. 보기와는 다르게 너무 순종이었다니까. 〉= .아쥬라의 마법사들 말이다.

〈개들이 왜? 〉

= 제국의 유지를 원하겠지? 〈그거야 당연히. 너 설마. 〉녀석은 거기까지만 말해도 곧바로 알아들은 듯했다.

= 적어도 수도까지 전선을 끌고 올라가면, 마법사들도 탑에서 튀어나올 가능성이 높겠지.

〈. 〉

= 그때 루비아를 구하러 간다면 승산이 제일 높은 게 아닐까?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생각했다. 루비아를 구하려면 아무래도 이게 맞는 거 같은데.

한참 동안.

아이작은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245화 아무 대가 없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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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침묵 뒤.

〈. 네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

까마귀가 나를 대견한 듯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네가 한 생각이 맞는 거냐?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기분 탓일까.

흡족한 녀석의 어조.

그 아래, 희미하게 뿌려진 불안과 불쾌가 느껴진다.

첫 번째 생에서 아이작에게 연속 두 번이나 뒤통수를 맞지 않았다면 이런 느낌은 아예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위화감의 뿌리를 고민했다. 뭐가 문제일까.

자신이 최대한 강해지는 것보다, 루비아를 구하는 방향으로 직진하려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도 모른다.

전선을 유지하면서, 인간의 피를 최대한 말파스에게 바치는 식으로 가지 않는 게 싫은지도 모른다.

혹은.

인간들이 서로를 유린하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품건, 내 의도대로 움직이면 그만이다.

〈쉬운 길은 아니다. 전선 유지에 관여하고 있는 세력들이 많거든.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네가 전선을 한쪽으로 올리기 시작하면, 수상한 존재를 의식하는 자들이 널 찾아내기 시작할 거다. 〉다른 마왕의 추종자들이나.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변수들도 많겠지.

〈하지만 양측 전력이 엠버에 묶여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행동인 건 맞다. 움직이려면. 지금이지. 〉= 그런가.

위화감은. 역시 착각이었나.

정작 그의 선선한 동의를 얻으니 묘한 기분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할 생각이지만. 저지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다.

나는 웨어울프를 불렀다.

"브로디 발도프."

"이야기. 해라."

"이 전선을 위쪽으로 밀고 올라갈 생각이다. 제대로 도와준다면 루멘 발도프에 대한 정보를 주지."

생각해 보면, 루멘 발도프는 엠버에

기반을 두고 있는 레드 플레이크의 멤버다.

독립된 암살 집단이긴 하지만.

교단 차원에서 엠버메어를 위해 싸우고 있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엠버메어의 멸망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녀석이 레드 플레이크 소속이라고 빠르면 빠르게 말할수록, 브로디는 살아 있는 루멘과 조우할 확률이 높아진다.

뒤집어 말하면.

내가 그 말을 하지 않고 여기서 시간을 끌수록, 녀석은 시체가 된 루멘과 마주할 확률이 높아진다.

사실 시체도 찾지 못하겠지.

발목을 기어오르는 열은 죄책감이 간지러웠다.

죄의식이라는 건 제멋대로 생기고 흐르고 이런저런 곡조에 소음처럼 아무렇게나 붙는다.

전장에서 인간 천 명을 죽일 때도 들지 않던 무질서한 죄책감을 잠시 바라보다 곧 구겨서 내던졌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편이 어울린다.

집중해야 하는 건 실험체로 갇혀 있는 루비아를 구하는 것뿐이다.

웨어울프가 가볍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전선을. 어디까지 밀고 올라간다는 거지?"

아이작과도 여기에 관해서 이미 대화했지만, 역시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이다.

기왕 아쥬라의 탑까지 연합군이 밀고 올라간다면 좋겠지만, 역시 그건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다.

"수도다. 제국 수도까지 전선이 밀리면, 그때 루멘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네게 주지."

"제국. 수도. 알았다."

웨어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문득 아이작을 수상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저 까마귀는. 기계 장치 속에 뭔가가 깃들어 있는 것인가? 아주 오래된. 강한 힘이 느껴진다. 브로디 발도프.

우락부락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야생적이고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천부적인 전투 감각에다, 주술의 냄새까지 맡는 힘이라니 녀석이 꽤 다르게 보인다.

크크. w

ㅇ ? ?

늑대가 가볍게 킁킁거리며 주위를 돌자, 아이작은 불쾌하다는 듯이 파드득 위로 날아올랐다.

〈야! 냄새 맡지 마! 〉

"혼자서 허공을 날아오르다니 마치 진짜 새 같군. 킁킁.

〈이 야생동물 같으니! 〉

가장 높은 나뭇가지 위로 도망간 아이작을 흘끗 바라본 뒤 늑대에게 말했다.

"뭐, 애완동물 비슷한 거다."

〈.흥. 재한테 부담스러우니까 좀 꺼지라고 해. 그리고 크기 좀 줄여 보라고 말해 봐. 〉= 크기라고? 그런 것도 마음대로 줄일 수 있나?

〈당연하지. 만월도 아닌데 지금 모습이 강제되는 것도 아닐 거다.

웨어울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모습이나 완전한 늑대 형태, 그중 어느 쪽으로도 변할 수 있. 어야 한다. 〉나는 아이작의 말을 듣고 브로디 발도프를 아래위로 훌어보았다.

신장 3미터가 훌쩍 넘는 눈앞의 거대한 폭력 덩어리가 평범한 인간 이나, 혹은 밤톨이 같은 야생 늑대 모습으로 변한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 흐음. 주위에 인간도 없는데 굳이 변할 필요가 있을까.

〈얼른 시켜. 어느 정도 변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

"흠.

일단 아이작의 말을 따라 변신을 부탁하자, 브로디 발도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르르. 어렵지. 않다.

- 우드득!

- 우드드득.!

놀라운 광경이었다.

3미터가 넘는 덩치가 천천히 수축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드시 물리적 변화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탈을 쓴 달의 마법에 가깝게 느껴졌다.

"이제 인간 형태다."

"?"

정말?"

"더 필요한가?"

말은 훨씬 더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지만.

날카롭고 거대한 이빨과 흉악한 붉은 눈빛은 그대로다.

몸 곳곳에도 회색 털이 무성하게 덮여 있다.

얼굴에도 잔뜩 붙어 있는 것 같은 무지막지한 근육과, 2미터를 훌쩍 넘는 신장.

휘두르면 나무도 간단히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두껍고 커다란 손. 억지로 인간이라고 본다면.

인간이라고 그럭저럭 우겨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영 아슬아슬한 경계에 걸쳐 있다. 녀석은 팔목에 털이 돋은 두꺼운 양손을 슬쩍 펼쳐 보더니 말했다.

"크르르. 인간의 형태로 변하면

전투력이 많이 떨어진다."

""? 그러냐."

아무래도 둘 다 틀린 것 같다만. 별로 인간으로 보이지도.

전투력이 전혀 떨어져 보이지도 않지만.

아이작이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을 걸었다.

〈비교적인 거다. 어쨌건 이 정도 차이라면. 루멘 발도프라는 놈이 두려워지는군. 〉= 갑자기 왜?

〈성문에서 만났던 때, 그 녀석이 완전한 인간 형태였던 걸 기억해 봐라. 널 죽이려고 할 때도, 소년 형태에서 힘을 개방한 게 그 정도였다. 〉= 흐음.

아이작과의 대화에 빠져 있을 때.

'인간'으로 변한 브로디 발도프가 나를 보고 말했다.

"패배자가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우습지만.

녀석의 시선은 내 허리춤을 향해

있었다.

확실히 말은 한층 더 자연스럽군.

"뭐지?"

"네 검 말이다. 너 정도면. 훨씬 좋은 칼을 써야 하지 않나?"

허리춤에는 반쯤 부러진 장검이 대충 걸쳐져 있었다.

옳은 말이었다.

그라스미어의 대검이 있었더라면.

화염이나 산성처럼 속성력을 띤 검기를 불어넣어도 부담 없이 버틸 정도라면, 브로디와의 싸음은 훨씬 쉽게 흘러갔을 것이다.

〈흥. 아까까지 그렇게 싸웠으면서 왜 갑자기 챙겨 주는 척은. 〉- 딱!

아이작이 못마땅하다는 듯 부리를 꽉 물었지만.

반박은 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맞는 말이다.

"그러긴 해야 할 텐데. 어디 좋은 칼이라도 알고 있나?"

기대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던진 질문이었다.

그 물음에 녀석은 의외로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사실. 이 산맥에는 드워프 마을이 있다. 그들이라면 네 실력에 맞는 칼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다."

드워프라.

"하지만 만들어 줄까?"

가능보다도, 의지의 문제겠지.

드워프. 배금주의의 장인匠人들.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탓에, 가장 먼저 끝장난 종족들이다.

"드워프들은 제 이익에 귀신같이 밝은 종족이지."

"그런가? 제작의 대가로 지불할 만한 건.

아이작이 가진 보석을 쓰면 되나 싶을 때였다.

"당신이 전선을 밀어 올릴 거라면 드워프들에게도 굉장한 이득이다. 전선이 이 근처에서 머물러 봐야, 자신들이 숨은 장소가 들킬 위험만 점점 올라갈 뿐이니까."

"그런가."

"인간에게 항상 쫓기는 그들이지. 인간 사냥에 쓴다면 좋은 무기를 안 줄 것 같진 않은데.

〈드워프들이 그런 것들은 아니다. 맨손으로 싸우는 저놈이야 무기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좋은 인상만 가질 수도 있겠지. 위치나 정확히 말하라고 해라. 〉동부 산맥의 드워프들이라면.

들은 게 좀 있다.

"위치는.

아이작과 브로디를 번갈아 보며, 부러진 칼로 흙바닥에 숙숙 지도를 그려 보였다.

"이 즈음 아닌가?"

그라스미어의 수석 대장장이가,

드워프들이 살고 있을 장소라면서 알려 준 곳을 가리켰다.

"거기를. 알고 있군."

웨어울프의 미간이 좁혀졌다.

드워프가 동부 산맥에 있다는 건 내게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다.

슬라임도 예전에 그라스미어의 대검을 감정하며 해 준 말이 있다.

제대로 가공되지 않은 희귀 광석으로 제련된 검이라며.

동부 산맥에 사는, 고위 등급의 드워프 장인들 정도나 되어야 녹인 광석으로 검을 재구성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언제고 그쪽에 가실 일 있을 때, 꼭 한번 수소문해 보셨으면 좋겠습 니다. 이런 희귀한 금속이라면, 서로 다뤄 보겠다고 앞다뤄 손을 내밀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라스미어에서 수석 대장장이도 다루는 걸 실패했던 재질이다.

하지만 대검이 결계에 다 융해된 지금은 쓸모없는 이야기.

어쨌거나 새삼 스스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결계에 갇혀 있던 건지 실감이 난다.

슬라임조차 손댈 수 없을 정도의 희귀 광석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녹여 버린 결계.

그런 결계를 발휘한 녀석은 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아니다. 그렇게 찾기 쉬운 곳에 있지 않았어. 〉

아이작의 말이 상념을 깨트렸다. 그 뒤를 브로디가 이었다.

"사실, 그게.

웨어울프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거기 살던 자들은 모두 당했소.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납치되거나 살해당했지."

"그럴 수가.

"정확히 위치를 알고 공격받은 것 같더군. 믿어서는 안 될 자들에게 정보를 노출한 건지도 모르지."

그라스미어의 대장장이가 드워프 위치 정보를 유출한 걸까?

어째서.

생각이 꼬리를 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

그라스미어의 영주위位를 이었을, 챈들러 남작은 애벌레에 잡아먹혀버렸겠지.

챈들러를 잡아먹은 애벌레가 수석 대장장이에게 드워프들의 위치를 요청했다면.

선뜻 알려 줬을 거다.

그 뒤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브로디가 말을 이었다.

"내가 소개하려는 자들은 그곳에 살던 자들은 아니라오. 지하로. 지하로 한참을 들어간 곳에 살고 있지. 보통 생각하는 드워프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종족이지만. 도움은 더 될 거요."

아이작이 위에서 눈을 반짝였다.

〈호오. 냄새만 맡는 줄 알았더니 재밌는 인맥도 있군. 핀스히에들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 〉= 그게 뭐냐?

〈인간을 피하고. 광석을 구하기 위해 지하로 오래 파고든 나머지 마기魔氣에 침식된 드워프들이다. 하지만 놈이 드워프라고 할 정도면 2차 변형은 시작되지 않은 단계. 초입의 녀석들이겠군. 큰 기대는 안 하지만. 재밌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 보자.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가 볼 텐가."

브로디 발도프가 내게 물었다.

"물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일 필요는 없다.

동부 산맥 지하의 드워프들.

그들의 위치를 알아 두면 나중에 계속 써먹을 수 있을 게 분명하다.

- 크르르르_

브로디 발도프는 내 의견도 묻지 않고 다시 거대한 웨어울프 형태로 변했다.

"크르르르. 인간. 싫다. 형태 좋아하지 않는다.

드문드문 끊기며, 훨씬 더 낮아진 톤의 목소리가 주위의 공기를 가득 메웠다.

"어, 그래.

별로 인간도 아니라니까.

"크르르. 안내하겠다."

246화 아무 대가 없이 (10)

***************************************************

어두운 숲길을 달렸다.

거대한 야수의 냄새를 맡았는지 밤의 숲속에는 짐승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브로디 발도프는 두 발로, 때로는 네 발로 숲을 달렸다.

나뭇잎에 배인 냄새로도 방향을 식별하는지 단 한 번도 주저하지 않고 달렸다.

- 팟!

딛는 장소마다 흙이 사방으로 맹렬히 튀었다.

신장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몸으로 숲을 찢을 둣 달렸지만, 온 사방에 빼곡한 나무를 한 그루도 부러뜨리지 않았다.

계속 웨어울프를 따라갔다.

숲이 점점 빼곡해지고, 점점 더 어두워졌다.

세 시간 정도를 달렸을 때였다. 청아한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르르. 거의 다 왔다."

웨어울프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는 협곡 더 깊은 곳을 향했다. 아직 인간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장소인 것 같았다.

천천히 속도를 줄여 걷자 산 위를 일직선으로 날던 아이작이 아래로 직하해 들어왔다.

- 째애액!

마치 한 줄기 거미줄을 타고 내려온 듯 깔끔한 움직임으로 녀석은 가볍게 착공(着空) 했다.

2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는지

전에 봤을 때보다 비행이 익숙해진 모양새였다.

"여기다."

녀석은 거대한 나무뿌리 근처에 있는 두 개의 바위틈을 가리켰다.

인간 아이 한 명이 억지로 들어갈 정도의 틈이었다.

양옆으로 벌리는 장치라도 있나 살폈지만 그런 건 없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계도 없군. 영 부실하게 숨어 있잖아? 핀스히에들은 이런 식으로 숨지 않을 텐데. 그것들은 아닌가 보군. 흥흥. 〉나는 아이작의 말을 대충 넘기며, 웨어울프와 작은 바위 틈 사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는.

바위 틈 앞에 네 발로 선 녀석이 작은 늑대로 변했다.

조금 전까지의 모습과 비교해서 작다뿐이지, 실제로는 어깨 높이만 1미터를 훌쩍 넘기는 커다란 녀석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틈 안으로 들어갈 정도는 되었다.

녀석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젖혀 나를 바라봤다.

까맣고 동그란 코가 어쩐지 신경 쓰였다.

"컹컹!"

작게 짖은 녀석이 틈 안으로 슬쩍 들어갔다.

〈따라가 보자. 〉

"ㅇ"

ㅍ.?

[골격변용(#格變容)을 사용합니다!]

- 우둑! 우두둑!

〈뼈의 군주〉에 내재된 부가 스킬. 몸의 뼈 곳곳이 스스로를 조금씩 맞춰 가기 시작했다.

〈물러 터졌군. 이런 걸로 인간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이라면 멀었다, 멀었어. 〉아이작은 뒤에서 중얼중얼 대며, 묘기하듯 통로를 비행해 따라왔다.

인간이 발견하기는 확실히 어려운 장소에 있었다.

들어오기도 곤란한 크기다.

=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나는 만난 적도 없는 드워프들을 괜히 변호했다.

웬만한 인간이라면 짙은 폐쇄감과 희박한 공기에 들어오기를 꺼릴 확률이 높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둡고 좁은 미로.

이렇게 깊은 곳에 숨어 있다면,

쫓아오는 쪽이 심각한 질환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당하지 않기 위해 숨고 도망가는 쪽보다 쫓는 가해자를 탓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나는 결계나 함정 따위라곤 없는 좁고 긴 미로를 걸으며, 약자들의 평화를 옹호했다.

〈쯧쯧. 세상 전체가 다 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지. 〉〈물론 전부 적은 아니지. 우리 둘 사이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서 손해 볼 거 없잖아? 〉어쨌거나.

이쪽에 전선이 고착되면, 발견될 가능성은 분명 있겠지.

계속 지하로 내려가자 앞쪽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폐쇄감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 띠링!

[드워프의 은신체 [던전 랭크: E+]

[적정 레벨: 15~25]

[뒤로 걸으면서도 클리어할 수 있는 수준의 던전입니다.]

[보너스 던전!]

- 진행 도중 양질의 아이템들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커다란 가방을 준비하세요!

허공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역시 던전 취급인가.

랭크는 약간 더 높았지만 고블린

부락 때와 같다.

[던전에 입장합니다.]

천장이 점점 높아져 대강 3미터 정도를 유지했다.

천연 동굴의 느낌을 주던 통로에 인공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었다.

"컹컹!"

앞서가던 브로디가 인간 형태로 변해 일어섰다.

- 우두둑!

나도 골격 변용을 풀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차피 큰 변화도 주지 않았지만, 살짝 개운한 기분이었다.

"안쪽으로 더 가야 하나?"

"그렇소."

브로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는 문지기나 기계장치 같은 것도 없었다.

하긴, 오는 길이 몇 갈래로 계속 갈라지긴 했었다.

그 미로를 뚫고서 여기에 도달할 정도라면, 드워프들이 아무리 준비해 봐야 쉽게 짓밟을 수 있는 힘을 가졌을 거다.

어차피 약자의 평화라는 건 운에 기대기 마련이다.

던전 창을 보자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이 떠올랐다.

애초에 브로디 발도프와 마주치게 된 계기도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

걸어가는 김에 인간 형태로 변한 녀석에게 물었다.

"혹시, 고블린 마법사에 대해서 알고 있나?"

워낙 정신없이 일이 흘러가서 좀 늦게 물어본 감이 있다.

브로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블린. 마법사라.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걸."

〈거짓말은 아니군. 〉

어느새 어깨 위에 앉은 아이작이 첨언했다.

나는 긴 통로를 걸어가며 별 기대 없이 물었다.

"산맥에 고블린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혹시 남쪽 부락을 착각한 게 아닌가?"

남쪽 고블린 부락이라면.

하나 아는 게 있다.

바로 머드캐시의 이야기를 해 준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이다.

"좀 더 얘기해 줘."

"벌써 이 년이나 된 일이군. 옛 동료 가운데 하나가 남쪽에 있는 고블린들을 구한 일이 있었다."

"혹시 혈석을 채취당하는.

"아, 비슷한 거 같은데."

브로디가 고개를 돌려서 내 쪽을 바라봤다.

"옛 동료라는 게. 혹시 슬라임을 말하는 거냐."

인간으로 변신한 브로디의 짙은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뭐?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냥.

어떻게 알기는.

나에게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을 구해 달라고 말한 게 슬라임이다. 의뢰자는 눈치로 보아 슬라임 그 자신이었다.

내가 없었다면 스스로 고블린들을 구해 줬겠지.

내가 살해한 네크론의 무리들은, 칼에 목이 잘리는 대신, 온몸이 강산에 녹아내려 죽었을 거다.

하얀 연기를 유언처럼 이리저리

피어 올리면서.

흡고블린 직스키세스 붐텅.

그는 이번에 슬라임에게 마법사 머드캐쉬 이야기를 했을 거고.

그의 아티팩트는 이미 슬라임이 챙기지 않았을까?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그래도 녀석들의 고통이 지속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희미한 가뿐함과 안도감이 흘러갔다.

"슬라임은. 어떻게 지내지?"

"아는 사이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속이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 녀석을 다 아는군. 날 만나기 전에 대체 뭘 하고 다닌 거냐? 〉

"그는.

잠시 머뭇거리던 브로디가 말을 이었다.

"독립했다. 한참 지났지."

이건 생각 못 한 대답인데.

"독립?"

"그렇다. 전쟁 초기에 이탈했지. 전쟁이라는 걸 실제로 보니 견디기 어렵다면서 도망쳤다. 아에자르가 내게 수색을 부탁했지만. 나도 못 찾았지."

의외였다.

인간을 충분히 본 결과, 아무래도 멸망시켜야 되겠다고 말한 녀석의 선택치고는 마음이 많이 약하다.

역시 인간 보육원에서 정이 들어 버렸던 걸까.

"솔직히 많이 기대던 동료인데. 나도 많이 아쉬웠다. 말도 안 하고 서운하게 가 버려서.

웨어울프와 슬라임.

친구로 지내기에 딱히 어울린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어쨌건 추적 능력이 무척 뛰어나 보이는 이 녀석도 못 찾을 정도로 꼭꼭 숨었다면, 슬라임과의 만남은 일단 어렵다고 봐야 한다.

아이작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울려 퍼졌다.

〈어쨌거나 재 좀 봐라. 왜 갑자기 널 보는 눈빛이 달라졌냐? 〉눈빛?

나는 고개를 돌렸다.

브로디 발도프.

야수 냄새를 풀풀 풍기는 거한의

눈에 상당한 신뢰가 담겨 있다. 갑작스럽고.

뭔가 좀. 럽럽하다.

"역시 정보력이 대단하군. 그러니 루멘의 위치도 확실히 알겠지."

호감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같은 메시지가 지금 당장이라도 허공에 떠오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슬라임과 아는 사이라고 한 말도 한몫한 걸까.

"뭐, 그렇지.

대충 얼버무리고 녀석을 가만히 따라갔다.

그는 내 앞에서 한 번씩 돌아보며

이런저런 말들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를 처음 발견했을 때 말인데. 이런 협곡을 정찰할 때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뼈를 스스로 움직이는 걸 봤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내가 받은 달의 축복 같은 경우에는.

"조금 전 보여 준 늑대 형태로는 야수들과 어느 정도 소통이 되지. 구체적인 대화는 어려워도 느낌은 확실히 와 닿는다고 할까. 그런데 유독 어려운 녀석이 회색 곰들이야. 녀석들의 성격장애에 대해 설명해 주자면.

= …얘 어떡하지?

아이작은 제 일이 아니라고 전혀 알 바 아니라는 기색이다.

〈잘 들어 둬라. 다 경험에서 나온 좋은 얘기들이잖아? 〉= 이 새끼가.

드워프들은 언제 나오는 걸까.

조금 버겁다.

솔직히 이자와 루멘 말고는 만난

상대도 거의 없지만.

머릿속에 담고 있던 웨어울프의 이미지가 무너진다.

부서지는 달빛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는, 메마른 고독의 표상 같은 걸 상상했었는데.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도 괜찮은 건가.

굳이 따지면 유익하다고 할 만한 이야기들이긴 하다.

확실히 정보는 되지만.

"좀 빨리 걸을 수 없나?"

밖에서처럼 달리자고 제안했지만, 브로디 발도프는 드워프들이 놀랄 거라면서 천천히 가자고 했다.

그사이에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조는 인간들을 존중했지. 인간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영역을 지켜 줄 거라고 잘못 생각한 거야. 하지만.

내용 없는 말이면 그만 닥치라고 해 주기라도 할 텐데.

알아 두면 혹시라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을 묘하게 풍겨, 듣게 만드는 장광설이 었다.

한 시간 정도를 주욱 더 내려갔을 때였다.

앞에서 반가운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두 명의 생명체.

"곧 만나게 될 거네."

〈고작해야 이 정도 깊이에 사는 놈들이라면 워브리어(語)는 준비하지 않아도 되겠군. 〉= 그게 뭐냐?

〈지하의 드워프들이 쓰는 언어다. 광석만 캐며 살면 지하 생물들과 친해지고, 점점 그들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지. 잊혀진 언어다. 〉아이작은 딱히 더 언급할 필요는 없다는 듯 말을 얼버무렸다.

앞으로 한참 더 나아가자 허공에 뜬 푸르스름한 불빛이 보였다.

나름 문지기 같은 품새의 드워프 두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드워프의 표상인 땅딸막한 키와 다부진 체구.

오랫동안 지하 생활을 한 탓인지 창백한 피부에 푸른 눈동자.

가슴팍까지 덮는 곱슬곱슬한 검은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재미없군. 그냥 호미그들이 숨에어 간 거잖아? 〉

= 호미그?

〈땅 위에 사는 드워프들의 가장 흔한 성씨 가운데 하나다. 호미그, 티랄릭, 럼덜밀. 숫자도 다 줄어서 별 의미는 없겠지만. 〉

"형제들, 내가 왔다."

"아, 자네 왔는가.? 요즘 자주 오는군그래."

"내가 밖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면 모두들 깜짝 놀랄 거요."

드워프들은 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껄껄 웃으면서 반가워했다.

"어이쿠! 이미 놀랐다네. 자세한 말은 안 해 줘도 괜찮겠어. 뒤쪽에 있는 언데드는 또 누구인가?"

"이쪽이 쓸 만한 장비들을 받고 싶은데. 인간들을 청소하는 일에 사용할 거라고."

"호오, 그럼 당연히 도와줘야지."

아이작은 드워프들의 모습을 보고 완전히 흥미를 잃었고.

나는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숨어 사는 드워프들은 웨어울프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브로디 발도프가 예전에 드워프 마을 하나를 학살과 약탈에서 구해준 적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여기 있다네."

드워프들은 갑옷과 세 자루 칼을 선선히 내주었다.

'검기.'

- 우우옹!

불어넣는 순간 이 칼은 검기 최대 출력에도 쉽게 버틸 거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흠잡을 데 없는 마스터피스.

그렇지만 그라스미어의 대검 쪽이 확실히 더 거칠고 부담 없이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느낌이었다.

["? 제대로 가공되지 않은 프리모파이트 원석으로 제작한 검입니다. 녹인 뒤 마력석만 재구성한다면, 가치가 폭증할지도 모르겠군요.]

대검을 감정한 슬라임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이야기를 꺼내자 세 드워프들은 모두 눈을 빛내며 하나같이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꼭 한 번 도전해 보고 싶군."

"하지만 프리모파이트라면. 우리 실력으로는 조수나 서야 할 거야."

"일단 맡기게. 부락 차원이라면 충분히 처리해 줄 수 있다네. 일단 가져오기만 해. 그 칼, 지금 어디 있는 거지?"

결계에 녹아 없어졌다고 해 봤자 믿을 리가 없었다.

상황이 되면 가져오겠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들은 작업은 그냥 해 주겠다며 부담 없이 가져오라고 몇 번이고 거듭 말했다.

갑옷과 세 자루 칼을 받을 때도.

어떤 보석이나 금화도 내어 놓지 않았다.

내가 전선을 근처에서 머무르게 하지 않을 거라는 불확실한 약속.

그것 하나로 드워프들은 아낌없이 호의를 베푼 것이다.

〈…이게 뭐람. 〉

아이작은 뭔가 영 불만스러운 듯 툴툴거렸다.

= 다 잘된 거 아니냐?

〈비상식적이다. 순수한 호의라니 어처구니가 없군. 뭔가. 안쪽에 있는 괴물이라도 죽여 달라는 게 상식적 이잖아. 〉

"그럼. 잘 부탁한다네!"

드워프들은 고맙다는 듯한 얼굴로 우리를 배웅했다.

"힘내라고!"

재물에 대한 집착도, 딱히 나를 이용하려는 기색도 없었다.

[당신에 대한 은신 드워프 부락의 평판도가 증가합니다.]

[전선이 올라가는 게 확인될 경우, 은신 드워프 부락은 당신에게 추가적인 보상을 제공할 것입니다.]

= 가끔은 저런 녀석들이 있어도 괜찮겠지.

나를 기사로 생각하고 구덩이에

빠트려 불태워 죽이려고 한 도망 농민을 생각했다.

감독관 사칭에 속아 주는 척하며 수십명의 동료가 있는 장소까지 나를 유인한 네크론 신사회 멤버를 떠올렸다.

감각을 차단하는 가루를 건네며 〈불〉로부터의 보호제라고 설명하던 노인을 기억한다.

루비아를 쫓던 현상금 사냥꾼들, 거미줄에 걸어 놓은 레나를 만지작거리던 모험가들과 소아 매춘을 위해 보육원을 운영하던 남녀들은 모두 머릿속에 생생하다.

하지만 세계가 아이작의 생각대로

반드시 그런 식으로만 되어 있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세계의 반대항으로 루비아를 떠올리면서, 나는 시나리오 창을 습관처럼 다시 한 번 열었다.

- 띠링!

[S급 시나리오, '레이 루비아'가 진행 중입니다!]

[동화율이 75% 이하입니다.]

[세부 퀘스트: 영주 루비아]

[루비아를 에라스트 영주로 등극시키십시오.]

[통치 레벨을 10까지 올리세요.]

[보상: ???]

상태창은 변하지 않았다.

그대로 미 클리어 상태를 유지 중.

지금 어떤 상태인 건지,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 방법 따위는 없다.

247화 아무 대가 없이 (11)

***************************************************

카린 크렉소르는 전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전투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전사戰史나 전략론에 관한 책은 고작해야 총론 두어 권밖에 읽어 보지 않았으며, 검은 무기가 아닌 예장으로 훨씬 익숙했다.

그러나 그녀가 최고 참전위원으로 부대를 장악할 수 있었던 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지휘소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옷깃에 하나의 별을 달고 있는, 50대 초반 남자의 양팔을 덮은 건 두께 8센티에 달하는 거대한 장갑.

평상복을 입고 흰 소매를 가볍게 걷어 올린 카린 크렉소르의 얇고 긴 팔을, 수수깡처럼 단번에 부숴 버리고 절규를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는 자동 흉기였다.

개조에 개조를 거듭한 기계갑주.

커스텀 강화의 극치를 거듭해 온, 노장老將이 제 몸의 일부라 우기는 병기학의 진수.

"의원! 이러실 수는 없는 겁니다!"

카린은 눈앞에서 고함치는 남자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기는 전장.

저 남자가 30년을 넘게 준비해 온 장소다.

그런데도 이렇게 허술하다니. 양심도, 능력도.

심지어.

노회한 맛조차도 없다.

허세와 고함으로 헤쳐 나올 만큼 그의 삶은 만만했던 것이다.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얼굴을 상기시키는 여단장을 보고 카린은 허탈한 웃음마저 날 지경이었다.

"제 군수참모를 저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체포하시다니요! 적을 코앞에 둔 이 중요한 시기에!"

"증거 인멸의 염려가 농후한 탓에 긴급 체포했습니다."

"중거 인멸이라니!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여단장이 말을 막 이어 가려는 순간이었다.

"아니, 아셔야 합니다."

카린은 서류를 던졌다.

"이게 뭔.

여단장은 장갑을 착용하지 않은 다른 쪽 팔로 서류를 주워 들었다.

60에 가까운 나이에 술과 흡연을 즐기면서도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근육은, 틀림없는 부스터 Visage 의 흔적이다.

'약한 인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라는 프레이즈로 신체의 기계화를 최대한 지양하는 크렉소르 가문의 - 실은 신체를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서민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

차녀로서가 아니라도, 카린은 강화 신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손댈 곳 없는 완벽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크흠.?"

이런 상황에서도 서류를 주우며, 그녀의 길고 매끈한 다리를 슬며시 훑던 여단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최대한 알기 쉽게 정리한 건데, 보고도 모르시겠나요? 이거 감이 너무 떨어지시는 거 같네. 혐의 대부분이 여단장과 연결됩니다."

"의원! 그런 말도 안 되는!"

"6페이지. 철인 정비대금 숫자가 완전히 이상하잖아."

갑작스런 반말을 들은 여단장의 이마에 핏줄이 선다.

"반응성 기어 같은 핵심 부품까지 가지고 장난을 쳐?"

의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굴렀던 세월만 5년이 넘는다.

기껏해야 내부 감찰이나 받아 본 기갑 여단은 네 시간이면 영혼까지 탈탈 털 수 있다.

품목을 모르고, 그냥 숫자만 봐도 죄다 안 맞는 것투성이.

"적이. 적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지금 한가하게 숫자 놀음을 하고 있을 때요? 내가 3년 동안 어떻게 키워 온 부대인데.!"

"3년 동안 등쳐 먹어 온 부대겠지. 이 시간부로 여단장의 모든 직무를 정지한다."

헌병이 여단장을 둘러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야! 어디 손을 대! 너희는 왜 가만히 있어? 미쳤어?"

하지만 주위를 둘러싼 다른 참모들은 묵묵부답이다.

"그게.

이미 다들 이쪽으로 넘어온 지가 언젠데.

보고 하나 제대로 못 받고 있었던 한심한 녀석이다.

그제야 분위기를 약간이나마 읽고 목소리를 조금 가라앉힌다.

"지금 적을 코앞에 두고 아군끼리 이래서 되겠어? 좀 오해가 있던 거 같은데.

카린은 여단장을 무시한 채 팔짱을 끼고 40대 초반의 성마른 인상의 남자를 바라봤다.

"정보참모, 계속 보고하세요."

이제 저런 하잘것없는 놈은 신경

쓰지 말고, 라는 뉘앙스가 진하게 담겨 있는 지시였다.

실제로 그러했다.

전령들이 보고하는 상황은 진부한 방산 비리 따위보다는 훨씬 놀라운 것들이었다.

가볍게 헛기침을 한 영관이 계속 보고를 이어 갔다.

"예. 제국군 8중대, 7중대의 전멸 추가로 확인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보고드린 바와 취합하면.

"뭐? 전멸? 너, 무슨 소리야? 나한테는 한 마디 보고도 없었으면서.!"

-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_

여단장의 목소리는 지형도 위쪽 나무판 뒤집히는 소리에 간단하게 묻히고 있었다.

"현재, 필나스 지역에서 제국군의 저지선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만 끌고 나가요. 여죄 자백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 알죠? 말 그대로 전쟁 중인데 피곤하게 굴지 말고 다 불고 선처받읍시다."

밖으로 끌려 나간 여단장에게서 곧

시선을 돌린 카린 크렉소르는 상황판을 가만히 응시했다.

"누가 한 짓일까요? 우리 쪽 대의에 감동한 아쥬라의 마법사가 아래로 내려오기라도 했나? 전쟁 전문가 분들의 식견이 필요한데."

"그쪽 정보는 제한됩니다. 다만 증거를 재구성해 본 결과. 주로 검을 쓰는 상대로 판단됩니다."

"빙결 마법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그게. 일단 다음 사진 보시 겠습니다."

정보참모가 상황판을 넘겼다.

그림이라고 보기엔 몹시 정밀한 관조들이 그곳에 나타나 있다.

약 5시간이 걸리는 '촬영'.

자유 연합 내부에서도 범용화되지 않은 고급 기술이다.

사진을 목격한 시민도 열 명 가운데 하나 정도.

전령들도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사진을 찍는다.

"〈첫 번째 전멸〉입니다. 철인의 허리 부분에서, 두께 .센티미터 철판을 뚫고 들어간 흔적입니다."

"으음.

"검주급이란 말인가?"

"제국 4대 검주는 모두 다 엠버에 투입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들이 미쳤다고 자국 측 요충지를 파괴하고 다닐 리도 없을 테고."

"이 정도 레벨의 검기에 마법사가 함께 움직이다니.!"

지휘소 구석에서 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신께서 우리 연합을 돕고 계신 건 아닐까요?"

카린이 피식 웃으며 다른 사진을 가리켰다.

"신앙심이라면 제국 쪽이 훨씬 더 독실해요. 우릴 돕는다면 차라리 악마겠죠."

말을 뱉는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그 악마의 손을 잡는 건 자기여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니다.

몸 전체가 거대한 발톱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긴 사진을 보고 좌중이 웅성거렸다.

시체들은 대부분 깔끔하게 목이 베여 죽거나 얼어붙어 있었지만.

외곽에는 너덜너덜할 정도로 찢긴 시체들이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의원님, 일단 본대에 보고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내용이 없는데 뭘 보고합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보고해요?"

"파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정도로라도.

"아니요."

카린 크렉소르가 단호히 말했다.

"보고는 없습니다. 전멸한 적군의 흔적을 찾아서 계속 전진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전부.

여자는 상황판을 가리키며 일부러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실적으로 가져갑니다."

"후우."

카린 크렉소르는 소파에 푹 몸을 묻었다.

긴 칼을 허리에 찬 채로 문 옆에 시립한 푸른 머리칼의 여자를 아래 위로 가만히 훑어 내렸다.

카린의 눈이 훤히 드러난 여자의 우아하고 가느다란 목선에 멈췄다.

"보좌관, 머리 길러 볼 생각은?"

"시야를 가려서 곤란합니다."

"흐응. 어울릴 텐데."

문 옆에 시립한 여자는 대답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혹적인 분위기의 흑발의 미녀는 다리를 꼰 채로, 동성의 보좌관을 유혹하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선, 아무렇게나 노출시키고 다니면 너무 위험하다니까. 나만 봐야 하는데."

대답은 없었다.

보좌관은 처음처럼 입을 다문 채, 칼을 쥔 손을 슬쩍 늘어뜨리고만 있었다.

"알았어. 이제 진지한 상담이니까 들어 줄래?"

일직선으로 다물고 있던 보좌관의 입이 가볍게 열렸다.

"말씀하십시오."

키는 175 정도의 장신.

소파에 몸을 묻고 있는 카린보다 10센티 정도 더 크다.

카린 크렉사르가 칠흑과 진흥으로 칠해 낸 미인이라면, 그녀는 차가운 청옥으로 조각한 듯한 인상이었다.

"여단장 말이야, 의외로 난동 안 부리고 순응하던데?"

"의원의 암살이 현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제로. 한 줌의 이성이라도 남았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 녀석은, 네 존재를 몰랐잖아? 그래도 제로라고 말할 수 있어?"

"부대 장악에 성공하셨으니까요. 다른 자들이 막았을 겁니다."

"뭐, 어차피 나한테 장악당한 게 아니라 가문한테 눌린 거잖아?"

"이럴 때 침묵은 독인걸?."

"모두 의원님의 덕망입니다."

연극을 하듯 말하는 부관을 보고 카린이 킥킥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손을 저을 때마다 길고 부드러운 흑발이 살랑거렸다.

"그만. 그만해."

루이 클로드.

순수한 그녀의 심복.

가문에서 받은 게 아니다.

보육원에서 혼자 일곱 명과 싸워 모두를 쓰러트린 빛나는 재능을, 지나가던 길에 목격하고 홀린 듯 용돈을 모아 사들인 부하다.

벌써 20년도 훌쩍 지난 일.

"아, 아까 회의 내용 들었지?"

"예. 전부 아군의 실적으로 가져 간다고.

"연막용으로 헛소리 좀 한 거야. 꿍꿍이 하나를 내밀어야 다른 걸 숨길 수 있으니까."

"뭘 하시려는 겁니까."

"그 '정체불명의 천사님' 말인데. 찾아 줬으면 해. 조건은 얼마든지 맞춰 줄 테니까, 혹시 말이 통하면 내 편으로 섭외해 줘."

"제가. 말입니까?"

살짝 흔들리는 부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목표를 위해서는.

연합의 애국자.

가문의 심복이 아닌 자기 자신의 세력이 꼭 필요하다.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그녀를 위해 움직여 줄 존재.

눈앞의 부관과 같은 인간이.

단순히 가문의 한 목록을 채우는 의원으로 끝날 생각은 없다.

격전지, 엠버메어에 양측 주력의 발이 묶인 상태.

본토에 남아 봐야 극적인주력의 발이 묶인 상태.

본토에 남아 봐야 극적인 변화도 없기에 던져 본 승부수가 놀랍게도 조금씩 먹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 저것들을 어떻게 믿겠어. 장비나 팔아먹는 것들인데. 지금은 대충 눌러 놨지만, 믿고 시킬 수가 있어야지. 이미 장녀랑 차남 쪽에 줄 댄 것들도 많을 거고."

"부탁 좀 할게. 성공하면 제대로

그림 될 거 같은데 말이야. 고독한 전장의 지배자를 감복시킨 명장, 뭐 이런 거 말이지."

"알겠습니다."

짧은 비명이 흘렀다.

- 철픽.

제대로 나지도 않는 비명 소리, 피 뿜는 소리보다 인간의 목 베인 시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컸다.

[경험치가 3 올랐습니다!]

해가 뜰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 피잉!

눈먼 화살이 시체에 박혀 파르르 떤다.

등에 화살이 박힌 시체를 적당히 던지고 패닉에 빠진 궁수의 목을 베었다.

목에 대진 가죽 보호대가 단숨에 베어져 나가며 그 사이로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경험치가.]

'탐지.' 사냥은 끝났다.

반경 100미터에 살아 있는 인간은 이제 아무도 없다.

놓친 녀석은 열 명 정도.

눈치가 빨라 빠르게 말을 타는 데 성공하거나 부하들을 먼저 제물로 바치는 데 성공한 지휘관급이다. 하지만 쫓지 않는다.

- 끄아아아아악!

내가 사냥한 인간들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다.

- 촤악!

피가 뿌려진다.

나보다 훨씬 더 과격하고, 훨씬 인간을 증오하는 사냥꾼이 도망간 것들을 처리한다.

수년 전에는 이곳에서 인간들이 늑대를 사냥했다.

지금 강한 인간들은 모두 한 섬에 몰려가 있고, 복수를 잊지 않은 한 늑대가 피를 뿌리며 어둠 속을 돌아 다니고 있다.

살육을 반복해도 인간이 말하는 쾌감 따위는 없다.

도망자 정리는 브로디 발도프에게 맡겨 두고, 광역 흡수를 시작했다.

전장을 반쯤 먹어 치웠을 때.

[지혜 스탯이 100이 되었습니다!]

[해당 스탯의 효율이 추가로 10% 증가합니다!]

이제 한 단계의 마무리다.

그와 동시에.

서로 옮겨붙고, 사선으로 흐르고, 여기저기 스미던 연초록빛이 모두 사라진다.

원래 그런 건 없었던 것처럼 다시 숲속을 어둠이 기워 놓는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스댓은 모두 100을 달성했다.

모두 10% 상승이 적용된 숫자가 허공에 반짝인다.

신경 쓰고 있던 정수 흡수 스킬은 이제 경험치가 오르지 않았다.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가 내게 준 능력의 끝인지도 모른다.

[말파스가 당신의 능력치를 보고 균형 감각을 느껍니다.]

말파스의 가호는 그사이 레벨이 한 단계 올랐다.

놈이 강림하라고 내 손으로 직접 제물을 잔뜩 바친 탓이다.

레벨이 오르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메시지가 자주 떠오르는 게 상당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효과는 몹시 강력하다.

[특전: 암흑]

[특전 레벨: 幻

- 공격력이 35% 상승합니다.

- 방어력이 50% 상승합니다.

- '까마귀의 날개': 이동 속도가 25% 상승합니다.

'까마귀의 눈': 다른 마왕들의 힘을 섬기는 자를 분별할 수 있게 해 줍 니다. 현혹에 저항합니다.

'눈'의 효과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공격력이나 방어력, 이동 속도의 상승만 해도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칼집에 칼을 꽂아 넣었다.

드워프 부락에서 얻은 세 자루의 칼엔 아직 흠집도 나지 않았다.

다시 회귀를 해도, 말파스와 쌓은 관계가 그대로 유지될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 파득! 파드득!

힘겨운 날갯짓 소리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주운, 귀중품을 가득 담은 주머니를 발톱에 매달고 있는 까마귀다.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는데. 〉

까마귀 인형이 눈을 굴리며 나를 바라본다.

"입질?"

〈그래. 입질.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널 찾으려 들기 시작할 거야. 〉

"놈들도 죽여야 되나."

아이작이 부리를 옆으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이긴 뭘 죽여? 피땀 흘리면서 일했으면 만나서 정산받아야지. 〉

"정. 산.?"

〈지금까지 죽어라 싸워 준 대가를 받아야 될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남 좋은 일을 해 줬는데, 아무것도 안 받으면. 시장 파괴라고, 친구. 〉대가라.

그들에게서 뭘 얻어 낼 수 있을까.

"혹시 루-륨을 말하는 건가."

〈그렇지! 일단 그걸 제대로 받아 내야지. 이제 생각이 좀 돌아가나 보네. 그리고 널 제일 먼저 찾을 정도로 유능한 녀석이면, 딴것도 지불할 수 있지. 이를테면. 〉그때 였다.

- 쿵! 쿵! 쿵!

남쪽에서.

여기로 빠르게 다가오는 묵직한 울림이 느껴졌다.

248화 아무 대가 없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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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다가오는 묵직한 울림이 느껴졌다.

지축을 흔드는 발소리.

아이작은 아직 알지 못한다.

느끼는 것은 나 하나.

'탐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스킬을 활성화시킨다.

- 저벅.

마치 그에 맞추듯, 격하게 내딛던 걸음이 차분해진다.

한순간의 변화.

변화의 경계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제국군의 야전 기지였던 영역.

모든 상황을 알고 달려온 게 아닌 이상, 사방에 깔린 시체들을 보면 걸음을 멈칫하는 게 당연하다. 탐지를 '활성' 상태로 전환시키면, 내 영역이 터무니없이 넓어진다.

소리에 집중한다면, 수백 미터나 떨어진 거리에서의 소리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석양 속에서, 낙엽이 제 그림자에 늘려 떨어지는 소리.

발자국 찍히기 싫은 눈송이들이 애써 인적 드문 장소에 떨어지려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

주의하지 않은 인간의 대화 소리 정도는 당연하다.

"이 언제 이런 세력을 키웠지?"

"를 활용한 건가?"

아직 완벽히 들릴 정도의 거리는 아니지만.

거리도 문제지만, 낯선 단어들이 섞여 있는 탓에 도청盜聽과 이해에 조금 누락이 생긴다.

- 저벅. 저벅. 저벅.

거리가 가까워진다.

대화 속에는, 묘하게 삐걱거리는 쇳소리의 울림이 섞여 있다.

그걸 확연히 느낄 정도로 상대가 가까워지자 내용이 한층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멍청한 여단장 놈. 진작 우리 쪽에 줄을 댔으면 좋았을 텐데."

"장군이 아니라 하사로서 용맹을 떨쳐야 적합한 놈이었지요. 무능한 늙은이가.

- 저벅.

조용하지만, 주위를 살피며 땅을 디디는 중량이 확연히 느껴진다.

절대 인간의 무게는 아니다.

거대한 쇠기둥의 무게감.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연합의 철인이라는 병기들.

하지만 전에 본 개체보다도 더욱

크고 무거운 듯하다.

아이작의 말대로, 연합군이 나와 거래하러 오는 것일까?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잘린 상처 라니. 유압식 기어가 달린 코빈 블레이드라도 사용한 걸까요?"

"흥. 여기는 제국이다. 그 지역에 왔으면 거기 맞게 생각을 해야지."

- 꾸드득!

철제 방패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야들야들한 인간의 몸으로, 이런

힘을 가진 우리와 대적할 수 있는 근본이 바로 오러라는 거다. 상위 기사들 중에 심심치 않게 보이지."

"호오.

"그래 봐야, 검주급이 아니라면 우리들에게 저항할 수 없겠지만. 오러니 뭐니 지껄여도, 쇠주먹에 한 대 맞으면 인간의 몸 따위 그냥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거든."

잔학함을 품은 낮은 웃음소리가 진동판을 타고 울린다.

"과연 그런 거군요. 카린 의원은, 제국군 기사단 오러 유저들이 배신 하게 설득이라도 한 걸까요?"

"흥. 의원이 뭐냐? 그냥 계집이지.

박아 달라고 엉덩이라도 살살 흔들 었나 보지. 이 정도 짓을 벌이려면 한두 명이 아니었을 텐데 얼마나 많은 놈이 사용한 거야?"

"오래 가문에서 지내다 보니 그냥 말버릇이 되어서 말입니다. 저번에 보니 확실히 혀는 잘 놀리더군요."

"뭐야, 경험해 봤어?"

"의회의 연설 이야기입니다만. 어차피 그쪽으로도 혀를 잘 쓰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하. 하-

장비를 통해 진동되는 웃음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나를 제국 기사단으로 생각하는 걸까?

카린 의원이라는 건 누구지?

어쨌거나, 녀석들이 이번의 거래 상대다.

이제 거리는 삼백 미터.

슬슬 그쪽으로 걸어 나갔다.

멀리서 날 발견해 주면 좋겠는데.

〈뭐야? 오냐? 〉

내 움직임을 읽은 아이작이 말을 걸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보통이지. 〉

당연하다는 둣, 거만하게 어깨를 으쪽하는 까마귀 인형을 흘끗 보고 다시 걸어 나갔다.

이번 생의 아이작이 한 조언들은 옳고 정확했다.

메달에 봉인되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황당해하던 과거의 아이작과, 말하는 그대로 상황이 펼쳐지는 지금의 녀석은 재미있는 비교 대상이었다.

역시, 삶의 반을 전쟁을 치르며 살아온 인간이라는 걸까.

- 저벅. 저벅

슬슬 녀석에게도 보이는 영역까지 철인들이 다가오고 있다.

〈여기 잘 보게 손이라도 흔들어 주라고. 〉

"ㅇ."

*균".?

〈모두 네 팬들일 텐데, 너무 숨어 있는 거 아니야? 〉 또다시 한 번.

아이작의 조언에 정확히 들어맞는 상황이다.

정확한 조언에 대한 보답이라고 치고

휘휘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저깁니다!"

"찾았다!"

녀석들은 나를 보고 무척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상당한 상위 개체인 것 같은데. 저 정도 되는 것들을 전선에 투입하지 않고 뭘 했던 거야? 〉

"상위 개체?"

〈그래. 달빛 지대에서 벤 것보다 훨씬 제대로 장비를 갖췄잖아? 〉확실히 그랬다.

크기만 커다랗지, 팔에 이어 붙인 조잡한 날 덩어리를 무기라고 갖고 있던 녀석과 다르다.

- 쿵! 쿵! 쿵!

다가오는 세 구의 거체는 하나하나를 무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착실한 장비를 갖고 있다.

선두에 선 철인의 손에 들린 건, 자루까지 쇠로 된 거대한 언월도.

길고 육중한 검은 칼날이 제대로

예기를 발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

- 퍼억! 퍼엉!

한 번 내딛는 발에, 깔끔히 죽인 시체들이 터져 사방으로 비산하고, 태워 놓은 물자의 잿더미가 허공에 새까닿게 휘날린다.

이건 접근이라기보다.

"전원, 5방향에서 돌격!"

"오러 유저는 오랜만에 상대해 봅니다."

"무리는 어디 놔두고 혼자 있는 걸까요?"

"멍청하게 손이나 흔들고 있군. 카린 그년과의 연락책이겠지. 일단 잡아 조져!"

왜 대화가 저런 식으로 전개되는 거지? 순식간에 눈앞까지 덮쳐 온 선두의 철인이 긴 언월도를 위에서 내려친다.

- 쉐에엑!

빠르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내려치기.

4미터가 넘는 몸체에 잡힌 거대한 언월도가 달인의 일격을 재현하면, 공기는 비명을 내지른다.

- 쎄앵!

동시에, 횡에서 베어 오는 도刀. 아무렇지 않게 도, 라고 말해도 칼날 길이는 작은 건물의 기둥을 넘어선다.

단조롭지만, 그걸로 충분하기에 완성된 합격술.

한 번에 인간 다섯은 벨 것 같은

강력한 공격이 두 각도를 동시에 점유하며 짓쳐 들었다.

- 파드득!

등 뒤에서, 까마귀의 신경질적인 파공성이 미약하게 울린다.

〈이 새끼들이. 감히 내 예측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 〉- 파파팟!

아이작이 철인들의 코앞에 환한 빛을 터트렸다.

"뭐, 뭐야?"

두 녀석이 잠시 움찔한 사이 슬쩍 몸을 했다.

휘둘러 오는 칼을 곧장 받아치지 않은 건 오랜만이지만, 워낙 예상 밖의 전개라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처리하고 마법사를 찾자!"

- 스숙.

가운데 있는 철인은, 양손에 쥔 언월도 자루를 달인의 솜씨로 자유 자재로 조절하며 또다시 위에서 내리쳐 온다.

뒤로 피해도, 자루 길이를 곧바로 늘여 놓치지 않을 기세.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암흑.'

검은 기운이 칼에서 폭주한다.

[공격력이 35% 상승합니다.]

적의 상단세.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거대한 칼날에 달려들듯 뛰어올랐다.

- 번쩍!

어둡고 차가운 섬광이 반짝인다. 정면을 스쳐 지나가며 사선을 긋는 올려 베기.

뭔가, 약간 걸리적거렸다.

웬만한 강도로는 이런 느낌조차 주지 못했을 텐데.

"으. 으어어?"

칼날과 함께 목이 베어진 거대한 기계 안쪽.

훤하게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며 비명을 지르는 인간이 있었다. 잡아끌어 이야기를 들어 볼까 했지만, 이마 위쪽이 스르르 흘러내리며 붉은 내부를 보인다.

뜨거운 뇌수가 가늘게 새어 나오며 대화의 단절을 고했다.

한 명은 즉사.

"듀얼 장갑에 보호되는 내부가.! 코빈 블레이드가 베어져 버렸어!"

"거, 검주.! 제국의 검주다!"

진짜 검주들을 만나면 거품 물고 자살하겠군. 애마 후작이나 소녀 공작 같은 놈들은 다 엠버에 발이 묶여 있는 건가.

그래도, 눈앞의 녀석들도 상당히 강한 듯하다.

수없이 많은 갑옷과 인간을 베어 오면서도, 단 한 번의 흠집도 나지 않던 드워프제 칼날이 이가 약간 나가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피로도가 쌓여 온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세 자루 송곳니 가운데 하나가 고통을 호소하면 다른 걸로 바꿔 주는 게 장비에 대한 예의다.

다른 칼을 뽑아 들고,

[검기 Lv.3 최대 출력.]

무기를 소중하게.

거대한 칼날에 그대로 부딪치는 일은 좋지 않다.

왼쪽에서 다시 휘둘러 오는 검을 비스듬히 피해, 장갑이 얇은 팔의 관절 부분을 베어 나갔다.

- 번쩍!

두른 것은 최대 출력의 암흑 검기. 어떤 걸리적거림도 느끼지 않으며, 곡선의 섬광은 일 합에 그어진다.

- 쿠궁!

거대한 팔이 떨어진다.

- 촤악!

안쪽에 연결되어 거체를 조종하던 팔이 피보라를 쁨는다.

서큐버스님이 들려준 이야기 중,

태양을 피하고 피를 마시는 종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렇게 피를 낭비한다면, 그들이 아까워할 것 같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든다.

끄으으으. r

신음 같지도 않은 신음을 홀리며 두 번째 조종사도 즉사.

하나 남은 상황.

인간을 열 명씩 꿰뚫을 것 같은 긴 창을 들고, 녀석이 주춤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귀하는. 귀하는 누구시오?"

이쪽도 처음부터 평화로운 거래가

목적이다.

칼을 슬쩍 내리고 대화에 응했다.

"누구로 알고 공격한 거냐?"

녀석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 그게. 제국을 버리고서 저희 쪽에 오시는 줄 알고. 이게, 이게 혹시 다 연합군을 돕기 위해 혼자. 하신 일입니까?"

이제야 좀 말이 통하나.

"그렇다. 왜 날 공격했지?"

- 퍼버버버버병!

"문답무용!"

접근한 철인이, 한쪽 팔꿈치에서 폭탄을 쏟아 냈다.

"죽어! 죽어라!"

'암흑.'

[방어력이 50% 상승합니다!]

이 편리만큼은, 버리기 힘들다.

'결빙.'

어마어마한 불꽃의 폭발은, 이미 상당수 얼어붙어 있다.

팔꿈치에서 쏟아진 폭탄의 잔해가 하얗게 얼어붙어 바닥으로 사르르 멸 어진다.

"자살. 시도였나?"

끝까지 하나는 살려 두려 했지만,

죽기를 작정한 행동들에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다.

그대로 칼을 들어 겨드랑이 관절 부분을 뚫었다. 칼끝에 말랑말랑한 인간의 두개골이 쪼개지는 선명한 감각이 느껴졌다.

? 1스르/릉,

철판에서 칼을 빼냈다.

무기를 소중히.

두 번째부터 신경 써 쓴 덕인지, 새로 꺼내 쓴 때문인지, 날의 이는 나가지 않았다.

칼을 빼는 것과 동시에, 조종사를 잃은 철인은 그대로 시체 더미 위에 무너졌다.

아이작은 깊은 충격을 받은 듯이 욕설처럼 내뱉었다.

〈이건 무슨 미친 패거리야? 〉

"너도 의외인 상황인가?"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이 새끼들, 왜 아무런 배경지식도 안 주고 다 뒈지고 지랄이야? 〉그때 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구경을 해 버렸군요."

숲속에서, 나조차 '탐지'하고 있지 못하던 인간의 모습이 슬며시 나타 났다.

회색 망토로 머리까지 덮은 인간 이었는데, 숲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났다고 말해도 믿을 정도였다.

세 기의 거대 철인이 달려올 때는 전혀 느끼지 않던 위기감이 척추를 타고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껏 내가 존재를 느끼지 못한 자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황실의 유령.

기어코 그들이 날 쫓아온 건가?

- 달그락.

이 전장에서, 처음으로 칼자루에 한 손을 더 얹는다.

겨눔, 중단.

어떻게든 공격해 들어갈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지 방어할 수 있는 자세다.

거리는 스무 걸음.

경치를 바라보듯이 상대의 전체를 겨눴을 때였다.

숲에 선 채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인간이 슬쩍 망토를 벗어 보이며 말했다.

249화 아무 대가 없이 (13)

***************************************************

"연합군 기갑여단 참전 의원 카린 크렉소르의 보좌관, 루이 클로드라고 합니다."

"현재. 전선의 지배자인 귀공과 가장 가까운 부대입니다. 저 셋을 잠시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침묵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푸른 단발의 여자는 칼을 쥔 나와 쓰러진 철인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감지하지 못했다.

보여졌다.

어떤 의도로 나를 보고 있었는지, 어떤 능력의 상대일지 모른다.

검주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때가 떠오른다.

게다가.

여태까지의 누구와도 느낌이 다른 인간이다.

태도와 어법은 나무랄 데 없이 깍듯하다.

그러나 가만 볼수록 어떤 열기도, 습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가늠할 수 없는 데가 있다.

내가 검기를 누그러뜨리지 않자,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느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투 의지는 전혀 없습니다만. 지금까지의 전장들을 보고, 방금 싸움까지 흠쳐본 결과. 싸워도 제가 상대는 안 될 겁니다. 혹시 이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여자는 회색망토를 들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미묘하다.

상대의 존재를 언제부터 감지하기 시작했더라?

그녀가 앞에 '나타나서'가 아니라 걸어 나와 '망토를 벗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났다고 느낄 만큼 존재감을 못 느끼다가, 갑작스레 시야에 들어와 당황했다.

그녀가 망토를 벗었을 때 확연히 존재감이 느껴졌다.

〈상당한 품목이군. 수백 년 동안 기술이라는 게 영 퇴화한 것만은 아니었나. 어떻게 귀한 걸 가지고 있다니. 크렉소르 가문인 데다가 이 정도 수완이라. 거래의 가치는 충분하겠어. 〉아이작은 어쩐지 조금 가라앉아 있는 투로 말했다.

- 알고 있는 장치냐?

〈자신의 존재를 주위와 동화시켜 숨겨 주는 장치. 철인 따위에게 적용되는 과학과는 격을 달리하는 옛 '유산'의 열화판. 복제품이다. 하지만 카피를 생산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거야. 어설프게 베끼려고 해도 상당한 이해가 필요 하다고? 〉- 어려운. 건가?

〈마도와 공학을 깊이 탐구한 끝에 힘겹게 따라할 수 있는 물건이지. '진짜' 유산이라면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겠지만, 흐음. 지금 네 녀석 감지는 복제품으로도 속일 수 있는 모양이다. 〉나보다 전투력 자체는 약했지만, 감지되지 않던 황실 유령들은.

저런 걸 단체로 가지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따로 망토를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궁금한 건 많지만, 일단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내가 허락해 주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굳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됐다. 녀석들이나 확인해 봐라."

- 끼기긱.

여자는 부서진 철인의 접합부를 간단히 뜯어냈다.

마치 노련한 정비사가 행하는 둣 자연스러운 분절.

몇 차례의 손짓에, 원래 떨어져 있던 것처럼 따로 놓이는 부품들은 어쩐지 함께 붙어 있을 때보다도 정연해 보였다.

〈상당한 실력이군.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저런 처리라. 〉정연하지 않은 것은 피와 뇌수를 흘리며 눈을 부릅뜬 시체들의 표정 뿐이었다.

단발의 여자는 이미 거대한 강철 기계 세 구의 해체를 모두 마치고 뭔가를 손에 들었다.

익숙한 은빛 액체가 출렁거리는 반투명한 플라스크.

긴 주둥이가 서넛 달려 있는 묘한 유리병은 여자의 주먹보다 크기가 작았다.

그나마 유리병 전체 삼 분의 일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

"루-륨 회수인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 생각보다 적은데?

〈웬만한 녀석들은 있는 걸 대부분 그대로 쓴다고. 사치스럽게 '소모'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기존의 규격대로 사용, 무리하지 않으면 이 은빛 마력액은 줄어들지 않는다.

〈아마 무리하는 법도 몰랐겠지. 〉

아이작이 해체된 세 구의 철인을 훌어보며 말했다.

루-륨은, 변혁의 질료로 쓰일 때 비로소 기화한다.

플라스크에 남겨진 액체.

죽음과 마주친 순간에조차 이들은 변혁을 이뤄내지 못했다.

마지막 한 호흡도, 선명하게 난 기존의 길을 따라갔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 황실이 가지고 있는 루-륨은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 아닌가 싶었다.

플라스크를 닫아 품에 넣은 여자는 마지막으로 철인 안쪽에 붙은 작은 휘장을 가볍게 뜯어내 손에 쥐고 흔 들었다.

날개를 편 올빼미가 나무를 활짝 감싸는 검은 문장이었다.

〈이거 상황이 너무 전형적인데? 〉

뭐가 전형적이냐고 묻기도 전에, 루이라는 이름의 여자도 입을 열었다.

"저희 의원님이 공을 세우는 걸 시기하는 무리가 실례를 저지른 것 같군요. 이들은 저희 자유연합. 크렉소르 가문의 가드들입니다."

"네 주인도 크렉소르 가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하나로 뭉치기에는

너무 강한 가문이라서 말입니다."

아이작 말대로, 전형적인 내분이라는 얘기.

죄송하다기엔 전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사과였지만.

지금은 사과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용건은 뭐지?"

이미 상대도 나도 알고 있다.

애초에 기다리던 녀석들이었고, 심지어 엉뚱한 것들에게 손 흔드는 모습까지 보여 버렸다.

"손을 잡고 싶습니다."

어차피 예정된 말이다.

"제국군을 치는 게 목적이라면,

저희가 더 효율적으로, 더 편하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모든 걸 지원 하겠습니다."

그때.

멀리서 브로디 발도프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도망가는 자들을 모두 사냥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잠깐. 금방 돌아오지."

〈야! 어디 가! 같이 가! 〉

'질주.'

곧 루이 클로드의 시야를 벗어나, 달려오는 웨어울프를 막아섰다.

"크르르. 무슨 일이. 있나.?"

내장을 끊어낸 손발톱에 말라붙지 않은 피가 흥건하다.

'인간' 형태일 때 지겨울 정도로 말이 많은 브로디 발도프는, 신장 3미터가 넘는 웨어울프로 변하면 그 자리를 충격적인 폭력으로 메워 버린다.

물론 폭력의 대상은 한 종種.

인간이 모두 사라져 주기만 하면 안온한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듯, 늑대는 그들을 향해 몸을 던지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

일방적인 계약으로 묶인 사이이긴 하지만.

미리 말은 해 줘야겠지.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제국을 치기 위해, 연합의 군대와 잠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정도만 말했다.

"크르르. 인간 냄새. 싫지만.

싫다는 건가?

"난 네게 이미 한 번 살해당했던 몸이다. 인간의 영역 한가운데. 네가 나를 사지로 끌어가더라도. 싫다고 할 수는. 없다."

의외로 흥분하지는 않는다.

"루멘. 정보만 준다면.

그토록 싫어하는 인간의 야영지에 함께 들어가도 참을 정도로.

루멘 발도프의 정보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순간 잊고 있었다.

나는 이 늑대인간을 이용하면서, 얼마 안 되는 알고 있는 정보나마 숨기고 있다.

〈뭘 하나 했더니, 이렇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어? 〉

아이작의 말에 섞인 낮은 조소가 느껴진다. 어차피 처음부터 속이고 있었으면서, 라는 말이 선명하게 환청처럼 울린다.

내가 걷는 게 어떤 길인지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어떤 기준도 없이 수많은 인간을 학살하며, 그 피를 마왕의 강림에 제사 지내고 있다.

누군가의 강렬한 마음을 속여서 이용하는 것 정도는 이미 새빨간 양손에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크르르.

흉포한 울음이 낮게 울려 퍼졌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데도, 브로디 발도프는 아이작를 볼 때마다 매번 새롭게 경계한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인간들의 구역에 가도 되는 건가? 투구. 벗으면.

"그건 괜찮다. 나름 방법이 있다."

굳이 투구를 벗어 마스커레이드를 보여 주지는 않았다.

스킬 지속 시간은 고작 10분. 재사용은 6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도 쓸 일이 많을 거라 짐작 할 수 있다.

"넌 기척이 느껴질 정도에만 숨어

있어라. 지금처럼 전선을 올리는 것만 도와주면 된다."

"알았다.

다시 돌아오자, 루이 클로드라는 여자는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긴장을 해서 굳은 게 아니다.

오히려 그쪽이 더 편해 보인달까. 아무리 봐도, 인간보다는 바닥에 누운 철인 쪽에 가까워 보인다.

"다시 얘기를 해 보지. 뭘 줄 수 있지?"

단도진입적으로 물었다.

"세부 조건은 제 주인이 말씀하실

겁니다. 하지만. 어떤 조건이라도 좋다고 확언받고 왔습니다."

방금 전, 얼마 안 되는 루-륨을 소중히 회수하는 모습을 보았다.

대량의 루-륨은 받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받을 수 있는 대가가 그것 뿐만은 아니다.

"가자. 그럼 네 주인과 얘기하지."

망설이지 않고 던진 제안에 푸른 단발의 여자는 멈칫했다.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느껴지는 열기.

"왜 놀라지? 네 주인과 얘기해야 진도가 나간다는 거 아닌가?"

"네. 지휘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열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주종 관계, 사실 그렇고 그런 주종 관계 아니야? 상대방 그림도 막 그려지려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저 녀석, 왜 내가 정작 의원과 만난다니까 놀랐지?

〈눈치는 좀 늘었네. 생각해 봐라. 이렇게 험악한 짓을 하고 다니는 수라 나찰, 귀신을 아무 보호막도 없이 사랑하는 주인과 만나게 하고 싶겠어? 그만큼 너랑 손잡는 일이 절실하다 던가. 아니면. 〉= 아니면?

〈뭐, 글쎄. 〉

아이작이 말을 얼버무렸다.

산 위쪽 요충지에서 내려오면서 보아서 그런지, 한 시간 정도 걷자 멀리 포진한 군대가 보였다.

/刀C ㅈㅈ 刀炎. \

\ 乂, ,乂 ./

뭘 생각하는 건지, 웃기게도 혀 차는 소리를 짧게 흉내낸 아이작은 다시 침묵했다.

계속 걸어갔다.

숲을 베고 군대가 세운 야영지에 가까이 오자, 멀리 있는 브로디의 기척이 한층 신경 쓰였다.

으르렁대면서 인간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리해서 데려오지 않은 게 역시

잘한 선택이다.

보초를 통과해 들어가며 야영지 안쪽을 여기저기 살폈다.

병력은 약 5천 정도로 보인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간간이 인간들 가운데 몸에 기계장치를 달고 있는 자들을 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의 공터에는, 연합군이 가진 무력의 상징인 강철 기계들이 우뚝 서 있다.

이곳이 함정이라면 어떨까.

하지만 아이작의 말대로 몸 하나 정도는 언제든 빼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붙는다.

굳이 변수라고 말할 만한 것은, 지금 눈앞에서 나를 인도하는 루이 클로드라는 이름의 인간이지만.

〈과연 개판이야. 형태부터 전부 틀려 먹었어. 참호를 이따위로 구축할 거면 세우지를 말든가. 〉아이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태도로 주위를 휘휘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 뭐가 마음에 안 드냐?

〈너가 해라. 〉

= 뭘?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날개로 태잉올 휘감은 올빼미가 있는 막사에 도착했다.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양손에 스파이크가 박힌 모닝스타를 들고 있었는데,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어 몇 개가 부착된 모닝스타는 양팔과 아예 연결되어 있었다.

전투용 의수義手로 보였다. 날카로운 눈빛의 병사는 루이를 보고 즉시 옆으로 길을 비켰다.

"으음. 이쪽입니다."

루이는 조금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쪽에 서 있던 검은 머리카락의 인간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정중한 말씨에 걸맞지 않게 꽤나 굳어 있던 안내자와는 딴판으로, 진심 어린 환대의 웃음이었다.

"카린 크렉소르라고 합니다."

흑발 흑안의 미녀는 내 정체도,

어떤 것조차 묻지 않고 양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회의용 원탁으로 안내했다.

"그런가. 여기까지 나를 들인 걸 보면. 어지간히 뒤를 쫓고 있었나 보군."

"맞습니다. 뵐 날만 기다렸지요."

막사 안에는 아무도 없다.

의원이라고 했던 눈앞의 여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방비하다.

목을 내놓고 있다고 봐도 좋다.

어디를 어떻게 해도 지금 간단히 즉사시킬 수 있는 순간 투성이다.

"방금 백여 명의 인간을 죽이고,

방화까지 저지른 나다. 널 살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나?"

장식 하나 없는 새까만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는, 흑요석이 떠오르는 두 눈을 자신감 넘치게 빛내며 말했다.

"그럼 그게 제 운수라는 거겠죠? 하지만 저에게 그렇게 죽을 운명 따위는 없습니다."

여자는 수련의 흔적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검지를 펴고, 머리 위를 가리키며 이어 단언했다.

"운명이, 저를, 각광합니다."

살기 따위는 조금도 없다.

무력이라고는 전무한 상대.

하지만 어쩐지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여자가 쓰는 단어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지휘소의 방비가 지나치게 허술하다는 생각도, 뭘 뜯어내야 할까 싶은 생각도.

확신에 찬 자장평場에 휘말려서 하류로 쓸려간다.

〈개소리. 〉

아이작의 냉소에 찬 소리가 쓸려가는 하류를 얼어붙인다.

〈제까짓 게 감히 무슨 자신감으로 누구 앞에서 세상의 주인공인 척 지껄인단 말이냐? 〉갑작스러운 아이작의 일갈.

나를 놓고 두고 벌이는 두 녀석의 황당한 기 싸움에 좀 멍해져 있던 탓일까.

문득 내 눈앞에 떠오른, 배경과 간신히 구분될 정도로 몹시 희미한 메시지가 우연처럼 눈에 들어왔다.

[감정 중.]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시나리오 활성이 불가능합니다.]

250화 아무 대가 없이 (14)

***************************************************

또렷한 글자는 아니다.

환영인가 싶을 정도로 희미하게 배경에 녹아든 글자.

카린과 아이작의 기묘한 대치에 조금 당황해, 멍하니 허공을 보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거다.

뭘 감정 중이라는 걸까?

지금까지 시나리오라는 게 생겼던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루비아가 나를 일으켰을 때 처음 시나리오가 열렸다.

두 번째는, 레나에게 필요를 느껴 동료로 삼기를 고민했을 때다.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시나리오 활성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기스-제-라이.

그녀가 나에게 일방적인 호감을 가지고 납치했을 때도 마찬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는 같은 내용이 떴다.

시나리오.

자동으로, 만나는 모든 상대마다 이런 게 감정되는 걸까?

그럴 리 없다.

회귀를 시작하고 만난 자들 중에, 시나리오에 관련된 창이 떴던 건 몹시 소수.

상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누군가가 판단하고 있다는 걸까.

하지만 아이작은, 오랫동안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이 뜨지 않는다.

이 시나리오라는 게 어떤 의지를 갖고 있는 건지, 상태창이라는 게 누구의 장난인지는 모른다.

잠시 고민하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지금 루비아를 찾는 건 시나리오 메시지 때문만은 아니니까.

〈건방지긴. 〉

웃기지도 않다는 듯이 아이작이 말을 홀린다.

그를 이 정도로 동요하게 만든 것 하나로도, 눈앞의 인간은 그럭저럭 재능 있는 인간일 거라는 역설적인 생각이 든다.

한 번도 뭔가를 제대로 이뤄 보지 못한 인간들이 뿜어내는 패배감과 정반대의 기운.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느껴진다.

손을 잡으면, 나 역시 그 운명에 연결될 것 같은 인상.

연출이라기보다는-

보통 저런 걸 보고 카리스마라고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곧 익숙한 허무감이 나를 덮쳐 왔다.

제국군과의 전쟁은 내가 좀 도와준 다고 해도, 마왕들이 강림하면 어차피 다진 고기가 될 거다.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가 피범벅이 되어 허공에 걸린 모습이 떠오른다.

어쨌건, 지금은 그냥 뜯어낼 수 있는 걸 뜯어낼 상대일 뿐이다.

옆에 선 루이 클로드에게 약간의 보고를 추가로 받고, 흑발 여자는 말을 이어 나갔다.

"정체도, 이유도 묻지 않겠습니다. 제국군 궤멸을 원하신다면, 저희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모든 걸 지원 하겠습니다."

명쾌하고, 단도직입적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 이쪽의 심리를 꿰뚫기라도 한 걸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뭐, 좋다. 일단 너희가 갖고 있는 최대한의 루-륨을 원한다. 얼마나 가지고 있지?"

"마도공학의 액체 말씀이십니까? 모두 긁어모으면 아마도 두 병은 나올 겁니다."

"두 병 안 됩니다."

푸른 단발의 여자가 끼어들었다.

"그것뿐인가?"

아까의 모습에서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듣고 보니 더 한숨이 나는 수준이다.

게다가 전부 연합군 주요 전력에 활용되고 있겠지.

"그럼 지금은 관두지. 대신 제국 도시를 함락할 때 나오는 루-륨이 있다면 내가 갖는다."

"물론입니다."

〈후후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 하고 냉큼 허락하는군. 〉아이작의 말이 맞다.

수도까지 밀고 올라가서, 황실의 비역에 들어가면 루-륨 한두 병이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나냐우의 작전조차, 황실 비역에 숨겨져 있는 루-륨 일부를 꺼내는 것뿐이었다.

일단 제국 수도를 점령하게 되면, 철저한 수색이 이뤄질 터.

아무리 다른 곳에 빼돌리고 소모했 어도 어마어마한 루-륨이 남아 있을 것이다.

고작해야 연합의 철인들에서 긁어 모으는 차원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 더."

"네, 말씀하세요."

"여자 하나를. 잘 돌봐 줬으면

하는데."

"여자 한 명이요?"

상대의 눈빛이 바뀐다.

물론 루비아를 마법사들의 탑에서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구해 낸 루비아가 어떤 꼴일지. 어떤 치료가 필요할지도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

그렇지만 구출 뒤의 계획은 미리 세워 두고 싶었다.

엠버의 싸움이 어떻게 결판날지는 모르지만.

내 개입으로 역사가 변해, 연합이 승리한다면 눈앞의 여자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될 거다.

얼마나 평온이 지속될지는 몰라도 루비아가 잠시나마 인간 세계에서 잘 적응하며 살게 해 주겠지.

루비아를 나와 함께, 음지에서만 지내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마왕 강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 따로 빼내면 되는 일이고.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죠? 바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한 기세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때가 되면 직접 소개해 주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분은 제 명예를 걸고 보호하겠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묘한 호의가 묻어난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걸까.

그때 였다.

〈아주 낭만파들이야?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게 남았다고 해라.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 뭘 달라고 하려고?

〈그건. 〉

이어서 녀석이 속삭이는 이야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심인가?

그걸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시키는 대로 해라. 최단시간에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게 최고다. 〉

"으흠."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슬쩍 주위의 상황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군의 지휘권을 내게 넘겨라."

먼저 반응한 건 루이 클로드였다. 그녀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언제든 빠르게 칼이 뻗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설명을 조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기본도 안 되어 있어. 제국군이 허수아비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이미 궤멸이다."

아이작이 말하는 대로 야영지의 상황을 하나씩 지적하며 개선책을 옮었다.

관련된 지식이 없는 내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2년을 지휘관으로서 보낸 상대 입장에서 보기에는 다른 것 같았다.

의원은 어느새 중간에 이런저런 질문을 끼워 넣기 시작했고, 내가 유창하게 대답하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카린 크렉소르의 얼굴에서 나를

향한 존경과 감탄이 비춰졌다.

"참모들에게 조언도 듣지 못하고, 미처 생각도 못 하고 있던 부분이 많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지휘권을 정말 넘기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좋아요."

카린 크렉소르는 그런 터무니없는 요청을 어려울 것 없다는 둣,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고민이 지나치게 짧은 거 아닌가 싶었다.

설마 이런 요구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의원님, 진심이십니까?"

푸른 단발의 여자가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이지. 전술은 알지 못해도, 사람은 알아보는 게 내 재능인걸. 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게 통치의 기본이잖아?"

나를 보고 웃어 보인다.

왠만한 인간이면 충성 서약을 할 정도의 미소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것치곤.

인간이 아닌 것 자체는 알아보지 못하는군.

의원이 말을 이었다.

"그럼. 언제까지 드리면 되죠?"

두 녀석 다 할 말 없게 만든다.

"제국 수도를 공략할 때까지."

= 내가 전면에 나가는 건 아니지?

장난이 아니다.

마스커레이드 스킬이 있다 해도, 그 한계는 뚜렷하다.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지휘관이 된다고?

〈그거야 당연한 소리지. 얘도 다

알아듣고 하는 말이다. 〉

"네 입김이 미치는 부대가 근처에 얼마나 있지?"

"일단은.

카린 크렉소르가 천천히 상황도를 짚어 갔다.

"31연대, 14연대가.

세부 사항에 대한 얘기를 끝내고 막사를 나간 뒤, 은신 상태로 부대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 무슨 생각인 거냐?

〈나도 취미 좀 즐기면서 가자고. 〉

=취미.?

〈특기는 주술, 취미는 전술이라는 얘기다. 전장의 예술을 보여 주마. 〉연합군 부대를 보는 건 처음이다.

내가 겪어 온 건 제국군뿐.

곳곳에 배치된 기계 장치들이 꽤나 흥미롭게 보인다.

= 어떻게 의원이라는 것들이 군대 통제권을 갖고 있는 거지?

〈군대는 돈을 먹으니까. 그것도 엄청나게 먹고 생산하는 건 없는 필요악이다. 예산을 통제하는 자가 인맥을 심어 놓기가 쉽지. 〉〈아까 그 녀석이 속한 크렉소르 가문은 예산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사실상 장교들에게 급료를 주는 가문이지. 어느 정도, 사병화 되었다고 봐도 좋을지도. 〉지휘소에서 건네받은 부대 내역은 다음과 같았다.

철인 28기.

보병 4천.

기계화 보병 100.

기병 300.

사실상 강철의 거인들이 전투의 중심이 되고, 기병의 역할은 정찰정도에서 그친다.

보병은 그들을 받쳐 주는 역할.

= 기계화 보병이라는 건 뭐지?

〈신체에 기계 동력, 제어 장치를 구축한 녀석들이다. 〉= 왜 따로 빼지?

〈그야 보병 안에 넣고 일괄적으로 굴리기에는 전투력이 너무 뛰어난 탓이지. 〉아이작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들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해서 자신의 신체를 기계로 갈아 치운 자들이 아니다.

평화로운 시기에서도 극히 위험한 임무에 차출되어, 사선을 몇 번씩 넘어온 자들.

일반병과 비교되지 않는 압도적인 전투 경험과 센스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을 기계화 보병으로 만드는 비용은 국가, 즉 연합 의회의 예산 위원회에서 결정된다.

달리 말하자면-

〈크렉소르 가문에서 나온 돈이란 이야기다. 〉

나는 몸 여기저기서 차가운 빛을 내뿜는 무리들을 바라봤다.

커다란 공터에, 다섯 명이 느슨히 대기하고 있다.

'장착하고' 있는 신체들은 모두 다 다르다.

작전 중의 결손을 대체한 걸까.

팔 대신 철편, 손 대신 톱날.

뼈와 살이 있어야 할 곳에, 적을 찢는 날카로운 강철을 두른 자들.

일상생활에 지장에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저들의 '일상'은 아마도 다른 인간들과 좀 다르겠지.

= 저들이야말로, 이 부대에서 카린 크렉소르에게 충성도가 높을 거란 말인가?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크렉소르'만이다. 너를 공격 하려던 자들이 기억나지 않냐? 가장 위협적일 수 있는 것들이야. 물론 다른 '가문 후계자'들이 제거된다면 카린에게 충성하겠지만. 〉녀석이 딱, 부리를 부딪치며 말을 이었다.

〈능력을 보여 준다면 어떨지. 〉

"전리품이 너무 많아서. 다 주울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나는 언덕 위에 선 채 또 한 번의

승리를 내려다봤다.

크게 소리치는 피로 물든 기계화 보병의 뒤쪽으로, 밧줄에 묶인 채 끌려오는 제국군 포로들이 보였다.

동료들의 죽음이 거의 없었던 것 때문인지 연합군 병사들은 제국군 포로들을 그다지 혹독하게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다운 전투도 해 보지 못하고, 귀신에 홀린 듯이 패배한 그들을 동정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어쨌거나 포로들은 모두 아이작이 명령한 바에 따라 소중한 정보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으음. 〉

아이작의 지휘를 받고, 두 달이 지났을 때.

카린 크렉소르는 제국에 들어온 연합군 4개 사단과 16개 여단, 총 11만의 병력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터무니없는 전과를 보여 준 탓에, 참모진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의원들이, 전술적인 조언을 계속 요청해 온 탓이었다.

결과는 전선 전체의 연전연승.

"정말 대단하군."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그 자체보다도, 시체들에서 전리품을 빼앗는 데 항상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됐다.

카린은 모든 인맥과 역량을 당장 제공할 수 있는 루-륨을 습득하러 다니는 데 쓰는 듯했다.

혹시 내가 협조를 그만둘까 봐.

하지만 승리의 주역인 아이작은 의외로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 너무 저항이 없다. 〉

"네가 잘한 거 아닌가?"

허를 찔렸다거나, 포위당했다고 곧바로 두 손 들고 항복한 병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나름대로 한 명 한 명이 치열하게 이쪽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본 터.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이작이 항상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적군들은 뭔가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다. 장교들을 심문해 봐도 수뇌부에서 제대로 된 지휘를 못 받는 게 느껴져. 〉

"그래?"

〈올라올 테면 올라와 보라는. 왠지 그런 느낌이야. 제국 황제란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

"엠버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

〈그쪽은 아예 들어갈 수가 없는 상태인 것 같고. 〉

어쨌거나.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여기서.

"올라간다."

느긋하게 전진해도, 연합군 11만 병력이 제국 수도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사흘이다.

벌써 반이 넘게 온 거다.

이 속도라면.

루비아를 구하는 게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조금씩 들뜨는 감정을 억눌렀다. 이미 2년을 늦었으니까.

251화 아무 대가 없이 (15)

***************************************************

수도 방향으로 잘 깔린 가도 위를 걸었다.

행군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좁은 협곡을 지나가는 연합군에 불을 질러 방해하려는 소규모 부대도 있었지만, 미리 정찰하며 기름과 불씨 냄새를 맡은 브로디 발도프에 의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제국 수도 앞인 붉은 여우 평원.

황궁과 너무 가까워 황제의 정원 이라고도 불리는 곳.

여기만 점령하면 수도까지 바로 진격할 수 있다.

이 정도라면.

아쥬라의 마법사들도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리 없다.

이 싸움은 루비아를 구하기 위한 몹시 주요한 기점인 셈이다.

평원에는 제국군 보병 11만, 8개 사단이 참호를 파 놓고 연합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 위치는 여우의 코 부분.

기병 1만은 두 부대로 나눠져 그 양익에 배치된다.

볼 쪽, 평야의 양옆에 수심 깊은

강이 흐른다.

넓은 귀 부분에는 연합군 9만이 뒤늦게 자리를 잡아 갔다.

"도착이군."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브로디 발도프를 필두로 정찰조가 이미 상세하게 전해 온 바였다.

수많은 포로를 심문해서 얻어 낸 정보도 풍부하다.

두 지휘관에 의해 통솔되는 12만 병력.

지휘관 한 명은 리드바렌 후작.

이보트 같은 기존의 가문이 숙청된 뒤 한차례 작위 상승이 있었던 모양이다.

종교재판관이랬나?

시셀이라는 아이의 아비.

루비아를 악마숭배의 혐의로 넣은 녀석이라고 했었다.

따지고 보면 루비아를 마법사의 실험체로 만드는 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한 자다.

'사람, 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루비아가 떠오른다.

고작 그 정도의 별거 아닌 발언 때문에.

종교가 제물을 필요로 한다면, 누구보다 산 제물로 적합한 것은 저자일 터다.

여기서 마주치니 묘하다.

그 가문에게 복수할 기회 따위를 상상한 적은 없는데.

예상치 못한 선물이 입에 처박힌 기분이다.

나는 오랜 관습처럼 칼자루를 꾹 쥐었다.

다른 한 명은. 아네 달 오스칼. 오스칼 백작이다.

전원이 길이 4미터가 넘는 랜스를 사용하는 부대, 장창기병 헬타바샤연대를 이끄는 노장.

양익 1만 명 기병을 그와 부관이 각각 지휘한다.

〈창기병이라. 만 명 단위라니 볼만하겠군. 〉

"괜찮겠냐?"

〈설마 걱정하는 거냐? 앞일이나 생각해라. 여길 뚫는 데 성공하면 수도까지 탄탄대로야. 들어가면. 〉안다.

그런 만큼 꼭 이겨야 한다.

아이작을 믿지만 녀석의 작전이 꼭 들어맞아야 했다.

나도 뛰어들 생각이지만, 혼자서 수십만 단위의 대세를 뒤엎을 수는 없으니까.

- 똑똑.

흑발 흑안의 여자가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왔다.

연합의 의원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눈앞에 상자를 내려놨다.

"이게 뭐지?"

"지금까지 부서진 철인들에서 빼 모은 루-륨이에요. 다른 의원들을 어르고 달래서 모았어요. 수도에 들어가면 당연히 전력으로 수색해 드릴 거지만.

여자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먼저 조금이라도 안 드리면 제가 서운해서요."

찰랑거리는 반병의 은빛 마력액을 별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제국의 이름 높은 명장이셨겠죠? 정체를 숨기고서, 계급제의 폭압에 저항하고 계신.

"아닌데."

한 번에 잘랐지만 조금도 당황한 기색은 아니다.

두 달간 함께 지내 본 바, 그녀는 지나치게 친화력이 좋았다.

"그럼, 당신 같은 분을 몰라보고 중용하지 않았던 황실은 진심으로 아둔하네요. 저와 함께해 주신 걸 영광으로 생각해요."

"글쎄. 언제 적이 될지 모르지."

거칠게 쳐내도 사근사근한 기색이 전혀 줄어들지 않고,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다.

"전 당신을 절대 적대하지 않을

거예요. 부디, 당신이 저를 적으로 고르지 않으시길 바랄게요. 그래야 할 때가 되면 꼭 좀 알려 주세요. 제 처신을 바꿀 테니까."

어지간히도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작이 지금까지 올린 전과가 터무니없긴 하다.

내가 혼자 움직이던 때와 9만 명을 통솔하는 것.

전선이 움직이는 스케일이 후자가 말도 안 되게 다르고 빨랐다.

나는 의원이 가져온 루-륨 병을 옆에 놓아두며 말했다.

"작전이나 제대로 전달해 둬라.

반발이 만만찮을 테니까."

"물론이에요."

이 녀석은 곧 자유 연합의 전쟁 영웅이 될 거다.

인간들은 지금까지의 지휘를 모두 그녀가 했던 거라고 알겠지.

카린은 고마워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밖으로 나갔다.

'흡수.'

곧바로 병에 담긴 은빛 마력액이 흘러 들어왔다.

여전히 전직 요구량은 만족시키지 못한 상태.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지만.

황실의 비역이 눈앞이다.

10분의 1이라도 빼낼 수 있다면. 전직 따위는 몇 번이고 반4해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넉넉잡아도 세 달 치 식량이라. 원정치고는 너무 호화로운데?

제국군을 완벽하게 격파, 그들이 곳곳에 세운 보급 창고를 브로디 발도프가 전부 찾은 덕분이다.

웨어울프의 후각은 개의 수십 배.

9만이나 되는 연합 원정군은 보급 문제를 전혀 겪지 않고 풍족하게 지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r

저 아래에서 함성이 들려온다.

건너편의 절벽을 보는 아이작은 정작, 자신의 명령에 따라 보내진 오백 명 정도 되는 병사의 운명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5킬로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진지를 꾸린 뒤, 연합군은 카린의 지시에 따라 소규모 부대를 계속 내보내 적을 도발하고 있었다.

사정거리가 긴 발리스타를 끌고 와서

몇 발씩 쏘아 낸다.

불화살을 쏘아 대고, 바지를 까고 상대를 향해 길게 오줌을 싼다.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올라온 연합 군을 상대로 꼼짝하지 않으려는 제국군에게 가하는 모욕.

상대는 사기 관리 차원에서라도 도발 부대를 약간 상회하는 병력을 파견했고, 파견된 연합군은 맞서 싸우다 우스꽝스럽게도 셋에 둘은 패배했다.

패배의 빈도는 곧 다섯에 넷으로 늘어났다.

아무리 허용되지 않은 약탈이나 강간 등으로 군율을 어긴 병사들을 차출한 징계성 공격이라고 해도, 출전한 아군이 연패를 거듭한다.

제국군의 사기는 높아지고 연합군 내부에는 원망이 일었다.

〈물감들이 굳이 큰 그림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아이작이 작전의 의미를 공개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카린 크렉소르가 연합군 내부의 불만은 부드럽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보다도 훨씬 철저히 잘해 주는 탓에 일단 거기에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언덕 위에 서서 아이작과의 대화를 회상했다.

〈도박의 기본이 뭔지 아냐? 〉

"뭔데?"

〈상대를 판에 앉히는 거다. 일단 조금씩 잃어 줘야지. 자신감을 돋아 줘야. 판돈을 올려도 응한다. 〉잃어 주면서 판을 깐다는 이야기.

"먹힐까?"

〈1만의 창기병이다. 돌격하지 않을 리가 없다. 돌격하지 않는 쪽이 머저리라고. 〉이러다 다 와서 지는 거 아니냐는 불만이 생겨날 즈음이었다.

야간에 출진한 연합군 병사들이 조금씩 덜 돌아오기 시작했다.

밀명에 섞여 출진한 기계화 보병들이, 여우의 볼 부분에 하나둘씩 숨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몸 곳곳을 차가운 강철로 교체한 최정예 병사들이 강가 근처의 갈대 밭에 차곡차곡 깔리고 있었다.

〈제국군의 매복은 지금까지 전부 다 숲에서만 이뤄지더군. 평지에도 매복할 수 있다는 상상력이 너무 부족한 거지. 〉물론 거기 있다가 달려도 매복은 되지 않는다. 매복으로 기능하려면 적군이 나와야 한다.

아이작은 적이 군대를 진군시킬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양군, 대치. 나흘째 아침.

〈온다. 〉

제국군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진형을 유지한 채 기병과 보병이 동시에 거리를 좁혀 왔다. 소규모 싸옴의 연전연승으로 기세가 잔뜩 오른 게 느껴졌다.

녀석이 오늘이라더니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눈앞에서 작은 승리를 거듭하면 저 정도로 경계심이 마취되는 건가 싶었다.

어쨌거나.

드디어 시작인가.

전장이 소리를 낸다.

〈좋아. 놈들이 올가미에 걸렸어. 머리를 내민 거북이는 마땅히 구워 먹어야지. 〉내려가서 싸우지."

〈흐음, 혹시 여기서 나랑 구경할 생각은 없냐? 돌아가는 상황 하나 하나씩 설명하면서 맞춤형 교습을 해 줄 수도 있는데.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

빨리 루비아를 구하면 그만이다.

언덕 위에서 어울리지 않게 폼만 잡고 있는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수도를 포위하고 마법사들을 끌어내야 했다.

무엇보다, 팽팽하게 묶인 긴장을 칼이라도 휘두르며 풀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저기에- 루비아에게 죄를 덮어씌웠던 인간이 있다.

르노 리드바텐.

공동 지휘관이라고 했던가?

황실의 '진짜'에는 전혀 닿아 있지 않을 하찮은 녀석에 대한 차가운 멸시를,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격한 복수심이 누른다.

마음이 소음을 내며 끓어오르고 있다. 놓아 보낼 생각은 없다.

쿵! 쿵! 쿵!

제국군 보병이 차곡차곡 앞으로 나아갔다. 대열을 맞춘 수만 명의 발소리는 땅의 박동 같았다.

연합군 진형이, 초승달 모양으로 부풀어 있는 부분에 공격하게 유도 한다고 했던가?

일단은 아이작의 의도대로 되고 있는 것 같다.

'질주.'

더 이상 보지 않고 인간이 가장 많이 몰린 곳으로 몸을 던졌다.

- 뿌우우우우!

어디선가 들리는 나팔소리.

- 콰과과과과광!

평지에 잠복한 기계화 보병들이 몰래 매설한 폭탄이 터지는 소리.

땅 그 자체가 양익의 1만 기병을 향해 발밑에서 대포를 쏘는 장면이 연출될 터였다.

- 쾅! 콰광! 콰과과광!

아이작과 함께 있던 곳을 내려와 보병의 높이를 갖자 전략적인 시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어, 으, 어어.

적당히 싸우다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텐데.

앞으로 불룩 튀어나온 진형.

가운데 있는 늙은 남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다.

주위에서 소리쳐도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적인 청력 상실.

전쟁터의 인간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주위 녀석들은 딱히 나은 사정이 아니었다.

제국군의 첫 돌격을 받는 곳에는, 소모되어도 상관없는 자들을 배치 한다더니.

"멍청한 놈들! 대충 싸우다 뒤로 튀라는 명령도 못 수행하냐!"

지역대장의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명심해라! 양옆으로 도망가라! 뒤가 아니라 양옆이다!"

아이작의 지휘를 수행하고 있는

녀석을 흘끗 바라보고, 짓쳐 들고 있는 제국군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좀 날된다고 녀석이 계획한 대세에 별 영향은 없을 거다.

사방은 고함과 광기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제국군 보병은 상호 간격이 점점 좁아지며 칼도 제대로 못 휘두를 정도로 서로를 밀어 대고 있었다.

적군이 서로를 중앙으로 밀어 대, 간격과 대열을 무너뜨려서 군대가 아닌 군중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직 포위 단계는 아니겠지.

단순한 결과였지만, 군대에 대해

지극히 치밀한 통찰을 하고 있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작전이다.

제대로 병력과 병력이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제국군의 진형은 이미 망가진 듯했다.

총대장을 찾아 앞쪽으로 인간들을 계속 베어 나갔다.

피바람이 일어나자 보병들은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이미 그들은 자루에 완벽하게 갇혀 서로가 서로 에게 그물이 된 것 같았다.

백 명 정도는 죽인 것 같았는데 별로 나아간 기분도 들지 않았다.

- 팟!

뛰어올라 주위를 돌아보니 포위가 완성되는 것 같았다.

방패와 검을 든 제국군을 상대로, 진영 가운데 대기하고 있다 나타난 연합 장창병 부대가 일선에서 찔러 가며 안쪽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허물어진 제국군 보병을 유린하고 있을 때였다.

연합군 장창병의 조여 오는 벽을 향해, 부하를 밀어붙이는 발작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뚫어! 뚫으라니까! 이 오우거야!

너 따월 써먹어 준 나를 어떻게든 빠져나가게 하란 말이다!"

먼 거리임에도 유독 꽂힌다.

어디선가 들어 본 난폭하고 얇은 목소리.

문득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에 꽂혀 펄럭이는, 에라스트의 문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레이. 커크?"

잊었던 이름이 떠올랐다.

- 까앙!

놈의 앞에 억지로 떠밀린 거구의

기사가, 대검을 휘둘러서 혈로를 뚫는다.

- 서걱!

기사의 비범한 용맹이 빛을 발해, 몇 자루의 장창이 잘려 나간다.

멈칫하는 연합군 병사들의 머리를 향해 대검이 떨어지고, 두 병사의 몸이 으깨진다.

"저건.

하지만 이미 무리한 듯한 기사의 힘겨운 몸짓은, 곧바로 찔러 오는 2진의 장창을 검면으로 그저 막아내는 데 그친다.

다시 한 번 뒤로 칼을 끌어당겨, 재촉하는 '주군'을 위해 180도로 대검을 휘두르자 연합군 병사 셋이 뒤로 자빠지며 공백이 생겨난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을 끈 분투는 오래가지 못했다.

곳곳에 섞여 있는 연합군의 정예-기계화 보병들이 곧장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에 사방에서 가해지는, 몸 자체를 무기로 사용해 온 달인들의 합동 공격.

- 철컥! 퍼억!

그쪽으로 빠르게 다가가는 사이, 안쪽에 프레스 장치가 된 차크람이 기사의 목에 걸렸다.

단 한순간이었다.

둥근 투구를 쓴 기사의 목이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잘린 목이 길게 피를 흩날리며, 이미 붉게 칠해진 내 칼날 위에도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털썩.

익숙한 얼굴이 잘린 투구 속에서 굴러 나왔다.

"크리. 스티나?"

252화 아무 대가 없이 (16)

***************************************************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바라봤다. 강철 투구는 곧 수많은 병사들에게 밟히고, 머리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굴러가 보이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잘린 제국군 병사가 곧 크리스티나의 쓰러진 몸 위에서 도살당했다.

수많은 창이 뻗어 왔다. 그 위에 시체들이 쓰러졌다.

크리스티나가 대검을 휘둘러 만든

공터 따위는 순식간에 연합군 장창 부대로 뒤덮여 버렸다.

그런 뒤에야 생각이 미쳤다. 크리스티나가 왜 여기 있지?

이유는 곧 떠올랐다.

이번 생은 루비아를 구하고 나서 에라스트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내가 참가하지 않은 토너먼트에서 크리스티나가 우승한 뒤, 루비아의 삼촌에게 등용되었다는 거다.

레이 커크.

에라스트의 영주.

성품은 아무 꾸임 없이 추악함 그 자체지만, 적어도 강자를 등용하는 일말의 이기심은 있었다.

그 결과로 기사는 여기서 죽어 간 것이다.

학대받으면서도 충성을 다한 제 기사를 잃은 에라스트의 영주는, 발작적으로 밀도가 더 높은 안으로 숨어들었다.

"벼, 병신 같은 오우거가! 등용해 줬더니 이런 거 하나 못 뚫고!"

지금의 나조차도, 뚫으려면 조금 번거로울 이런 포위망에 몸을 던진 제 기사에게 그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명예. 관용. 강건. 인내. 충성.

기사도라는 게 있다면 그걸 바칠 대상을 천 번은 잘못 골랐다.

극에 당한 충성의 낭비에, 그만 실소가 툭 터져 나올 정도였다.

"꺼져라."

공포 스킬로도 제어가 되지 않는 밀집 대형에, 십수 명을 베어 가며 도망가는 에라스트 영주의 근처로 걸어 들어갔다.

삶에 대한 집착으로 길길이 뛰며, 같은 편의 칼날에 거죽이 베이고 곳곳이 뚫린 놈을 쫓았다.

나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밀리고 밟혀 팔이 꺾이고 다리가 부러져 바닥을 기고 있었다.

주위로 공포 스킬을 쓰자 둘만의 좁은 공간이 생겨났다.

간단히 검집을 휘둘러서 멀쩡한 한쪽 팔을 부러뜨린 다음 물었다.

"루비아를 기억하나?"

끅끅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은인일지도 모른다.

놈이 루비아를 지독히도 궁지에 몬 덕에, 책만 읽던 영주의 딸이 무덤에서 해골병사를 일으키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으니까.

물론 놈이 보낸 사냥꾼들 때문에

몇 번이고 고생을 반복해야 한 건 불쾌한 요소다.

"루. 뭐? 끄흑, 그 개년이 무슨, 저, 정말 도망갔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유블람에까지 연락을 다 취해 놨는데.!"

한칼로 입을 꿰뚫었다. 검기에 이빨이 모조리 털려 나가며 부서진 유리처럼 떨어졌다.

"꿰엑! 꾸에에엑!"

주위가 지나치게 난잡했다.

별로 길게 상대할 기분마저 들지 않았다.

툭 걷어차자, 그가 멀리 튕겨 나며

마치 마지막 삶을 불태우는 것처럼 부러진 다리로 일어섰다. 그리고 소리쳤다.

"나, 나느은! 에라스트의 영주다! 모, 모두 나를, 끄흑, 보, 호하며 탈출하라!"

피거품이 입에서 튀었다.

- 퍼걱!

뒤로 도망가는 녀석을 어디선가 번개처럼 날아온 창이 꿰뚫었다.

창이 얼마나 강하게 날아왔던지 갑옷 앞뒤와 심장을 그대로 뚫고, 바닥에 박혀 한차례 들썩였다.

하늘을 본 채 꿰인 시체가 짓밟힌 개구리처럼 반동에 푸르르 떨리다 죽 처졌다.

화살처럼 날아온 창은 바깥에서 던져진 것이 아니었다.

"안쪽으로 도망치는 자는!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즉각 참수한다! 전 창기병! 전열을 정돈하고 다시 적을 향해 돌진하라!"

한 마디 한 마디가 병사의 심장을 터트릴 것 같은 절규가 되풀이되며 전선의 타개를 주문했다.

어느새 레이 커크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만큼 강한 호소력을 지닌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의 2차 우회기동에 안으로 말려든 기병대인가.

장렬한 목소리로 부르짖은 남자가 말 위에서 투구를 벗었다.

짧은 백발이 피바람에 흩날렸다.

"나 오스칼! 제국 백작이기 전에 적을 돌파하는 한 기의 창기병!"

- 째앵!

기병용 할버드가 주위의 연합군 세 명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잔상을 그리며 마치 공격 범위가 갑자기 늘어난 듯한 공격이었는데, 내측 다리를 꾹 밀며 흑마와 함께 움직인 절묘한 마술馬術이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최대 범위로 할버드를 강하게 휘둘렀고, 막아 내려던 장창 다섯 자루는 한 번에 잘렸다.

"추격! 적을 살려 보내지 마라!"

압도적으로 밀리는 전장 상황에도 불구하고, 백발의 남자는 기백으로 마치 제국군이 승기를 잡은 듯한 착각을 강요했다.

한 명의 기세에 늘린 수백 명의 장창병이 움찔 뒤로 물러난 탓에 기병대가 정말로 짧게 돌격할 만한 공격이 만들어졌다.

오스칼이라.

운이 좋다.

여기서 제국군 기병대 총대장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서른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할버드를 흘끗 바라봤다.

- 슈우우응!

검은 검기가 칼날을 타고 미친 둣 폭주했다.

'질주.'

- 팟!

나는 백발의 창기병이 만들어 낸 공간에 그대로 뛰어들었다.

검기를 압축한 칼을 곧바로 말에 탄 창기병을 향해 휘둘렀다.

- 까앙!

- 히히힝!

창기병은 간신히 한 합을 막았고,

말은 그대로 뒷다리가 꺾였다.

하지만 백발의 창기병은 다리로 말을 감싸고 다시 할버드를 강하게 휘둘렀고, 흑마가 다시 일어나며 그 공격에 탄력을 더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공격에 나는 두 다리를 땅에 버티고 선 채 칼을 올려쳤다.

- 챙강!

할버드가 부러져 나가며 창기병의 주름진 손아귀에서 피가 터졌다. 어지간히 악물었는지, 입가에서 피를 홀리는 창기병에게 뛰어올라 가슴에 칼을 박고 뺀 뒤 다시 목을 베었다.

"저, 적군 대장이 죽었다!"

"오, 오스칼 님!"

"으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수십 기의 기병이 돌진해 왔지만 방금 죽인 남자의 반의반도 따라가는 자는 없었다.

찔러 오는 헤비 랜스를 한 차례에 두셋씩 쪼개며 목을 날렸다.

이곳의 제국군 기병대가 살아 나갈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흡수.'

나는 푸른빛을 뿜어내는 오스칼의 시체에 손을 뻗었다.

괜찮은 환경에서라면, 장창기병 300으로 1만을 격파하는 일을 해낼 수도 있을 법한 녀석이다.

- 우우웅.

[마상 창술 Lv. 1을 습득!]

[마상 창술 Lv. 2를.]

[마상 창술 Lv. 3을 습득했습니다!]

- 카우치드 랜스(Couched Lance)를 터득했습니다.

- 2인 이상을 한 번에 관통할 경우 추가 경험치가 부여됩니다.

이어서.

승마 스킬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들린다.

웬만한 말보다야 내가 빠르지만, 나중에 명마를 만날 때를 생각하면 손해 따위는 전혀 없다.

생각보다도, 이것저것 흡수되는 스킬들이 많다.

대단한 녀석을 잡아 버린 듯하다.

[승마 Lv. 4를 습득했습니다!]

[승마 Lv. 5를 습득했습니다!]

[특전: 조련(리를 획득!]

- 승마 레벨 상승에 따라, 특전이 부여되었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탈 것' 이라고 인식되는 상대들을 순종시키는 능력.

- 당신이 탑승하는 말의 경험치가 빠르게 상승합니다.

묘한 능력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오스칼의 몸은 빛을 잃었다.

남은 적 지휘관은 르노 리드바렌 한 명인가?

주인 잃은 말들의 등을 디뎌 가며

전장을 살폈다.

뒤를 뚫어 도망가려는 적군의 중보 병단이 보인다.

아니, 원래는 기사였나?

말에서 내린 마흔 명 정도의 기사가, 다리에서 피를 흘리는 누군가를 감싸고 혈로를 뚫으려 든다.

보호받는 남자는 난전 중에 발사된 화살이 허벅지에 묘하게 꽂혀 말을 탈 수 없게 된 모양이다.

자신이 말에 못 탄다고, 주위의 기사들에게 명령해 말에서 내리게 만든 모양.

최후까지 기병으로 죽어 간 오스칼

백작과 비교되는 녀석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기병들도 저런 놈의 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을지도.

- 쾅!

말에서 내린 기병들은 철인들에게 완전히 진영이 무너지고 있었다.

헤비 랜스 대신 장검을 든 기병의 몸이 강철 기계에 밟혀 으깨졌다.

칼끝에 미약한 오러를 발휘하는 녀석도 간간히 있었지만, 칼로는 두꺼운 철판을 제대로 뚫지 못하고 반격하는 주먹에 맞아 피거품으로 변했다.

한 번에 두셋씩 죽어 가는 호위를 돌아보며, 가운데 있는 남자는 제 옆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붕어처럼 뻐끔대는 입을 멀리서 읽기는 곤란했다.

'탐지.'

[탐지 Lv. 7를 활성화합니다!]

"마법사님! 지금입니다! 지금 힘을

발휘해서 저희를! 아니, 저, 저라도 꼭 구해 주셔야 합니다!"

마법사?

얼마나 강한 상대일지 모른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도 힘을 쓰지 않은 게 묘하다.

스크롤과 만다라, 시약을 필요로 하는 수준이라면 크게 겁날 것도 없 지만.

남자는 가볍게 펄럭이는 로브만 걸치고 있다.

지팡이조차 어디 숨겼는지 보이지 않는다.

저런 복장이면 당장 다진 고기가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난무하는 창칼과 화살비, 철인들의 광란이 남자를 슬쩍슬쩍 비껴가는 듯했다.

쉴드에 부딪혀 튕긴 것도 아니고, 불꽃에 태워진 것도 아니다.

모든 공격이 조금씩 그를 피해서 빗나가고 있었다.

"대체 뭘 하시는 거요! 여기까지 나를 지키러 오신 거 아니오?"

로브를 쓴 남자는 질 나쁜 농담을 들었다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응? 아닌데. 당신 같은 인간이

구태여 살아 봐야 똥 만들기밖에 더

하겠소?"

"뭐! 뭐라고! 아니다. 내가 말을 잘못 들은 걸로 하겠다."

"그러시든지."

"제국 후작으로서 명령한다! 당장 포위망을 뚫어서 날 살려 내라!"

"말했지 않소. 당신 따위를 살려 봐야 대체 어디에 쓸데가 있소? 이 군대를 혼자 쓸어버리는 것도 무리고. 관찰이 끝났으니 나는 이만 가겠소. 그동안 함께한 정이 있으니 자살을 권하지."

"이, 이 새끼가 미친 건가! 나는 종교 재판관이다!"

공포와 분노로 인해 눈이 뒤집힌 리드바렌 후작은 마법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목으로 똑바로 날아간 칼은 기묘하게 휘청거리며 한참 상대의 몸을 벗어나 있었다.

막은 것도, 옆으로 튕겨 낸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엉뚱한 쪽으로 칼을 휘두른 듯한 결과였다.

"수고하시오. 자살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거요."

착각이었을까.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내 쪽에 흘끗 눈길을 주곤 전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 서걱!

칼이 갑옷을 반으로 갈랐다.

르노 리드바렌을 호위하던 마지막 기사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혼자 남은 녀석의 배을 밟고 서서 아래로 칼을 겨눴다.

"끅, 끄으으으.!"

리드바렌 후작은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둣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턱 밑에 바로 칼날을 들이댔다.

"레이 루비아를 기억하나?"

"루, 어? 뭐라고? 레이 루비아.

"네가 종교 재판에 넘긴 여자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나?"

기억에 잠긴 그의 눈빛이 한층 더 흐릿해졌다.

"그, 그런 사소한 것까지 전부 다 기억할 수는 없는데. 나, 나한테 투항하면 만남을 주선하지!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파멸로 몰고 간 여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무신경하게, 당연한 듯이 지속된 일이라 감정도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은 표정이다.

놈에게는 이런 일이, 기억 안 날 정도의 일상이라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고문이 기억을 도와줄지 모른다.

어쨌거나.

죽이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좀 더 물어볼 게 남았다.

"아까 같이 있던 남자는 누구지? 마법사인가? 아는 대로 말해라."

"그, 그는."

바로 그 순간.

르노 리드바렌 후작의 목덜미에, 새까만 점이 빠르게 뱀의 형상을 갖춰 가고 있었다.

253화 아무 대가 없이 (17)

***************************************************

뱀을 딱히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작은 비늘들이 조직적으로 엮여 현란한 색상으로 반짝이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하지만 아가리에 삼켜져, 통째로 형체가 뭉그러지며 삭아 가는 안쪽 사냥감들을 생각하면 묘하게 불안, 불쾌해지는 데가 있다.

리드바렌의 목을 뒤덮으며 일어난 뱀 문신은 그런 어슴푸레한 불쾌를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혐오스럽다. 뱀의 머리에 뿔이 생겼다.

긴 두 개의 어금니가 생겼다.

이 녀석의 정체는.

네크론 신사회.

즉, 16 마왕 보티스의 노예다.

종교 재판관이라던 녀석이 마왕의 종복이다.

농담치고는 꽤나 진부하다.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마법사가 네크론의 핵심이라도 되는 걸까?

거대해진 문신은 이번에는 놈의 목을 조르지도 않았다.

흡수되는 것처럼 빠르게 피부로 번지듯 스며들었다.

"끄, 히, 히이익!"

비명 소리가 배에서부터 거듭해서 올라왔다.

몸에 있는 모든 신경이 찢기는 듯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끄하아아아아악!"

기괴했다.

마치 무언가를 안에서 뿜어내야 할 것처럼, 종교 재판관은 온몸을 바르 르 떨었다.

"히끄육, 그그으웃!"

- 구드드득!

아무런 능력도 없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한 중년 남자의 몸이 갑자기 기괴하게 '열렸'다.

- 좌아악!

팔꿈치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하지만 그건 눈속임일 뿐이었다.

열린 팔꿈치에서 비틀어진 뼈와 근육 전부가, 수백 마리의 새까만 뱀이 되어 이쪽으로 쏘아졌다.

- 좌르르록!

소리가 더 늦을 정도의 빠르기.

'격발. 질풍.'

이제는 익숙해진 2중 영창으로, 칼을 휘둘렀다.

불과 바람으로 강화된 암흑검기가 종교 재판관의 몸에 잠들어 있었던 수백 마리의 뱀을 태우며 막았다.

검붉은 기운이 녀석의 몸을 뒤로 붕 띄웠고, 그 과정에서 인간 남자 였던- 것의 몸에 성한 구석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성대가 타 버린 상태에서 지르는 비명이었기 때문인지, 뭔가 울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거기까지였다.

본래의 '자아'가 있던 부분은 방금 완전히 무너져 버린 건지, 화염에 거의 녹아내린 흰자위가 새까맣게 물든 채 나를 노려봤다.

망가진 입가에 걸려 있는 건,

비뚜름한 웃음.

어느새 배에 조금씩 돋아난 검은 비늘로 흙바닥을 느릿하게 기며, '그것'은 주위를 맴돌았다.

뱀들을 사용한 첫 기습이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눈앞의 상대는 그건 단순한 인사였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좌절감이라고는 조금도 표시하지 않는다.

- 그극. 그그극_

양팔의 뼈와, 피와, 살이 뱀으로 변해 '사출'된 종교 재판관은 구겨진 몸을 기괴하게 비틀며 유희하듯이 바닥을 기었다.

그때마다 몸이 구겨지며 살점과

뼈가 사방에 흐트러진다.

몸 안에서 곧 다시 새까만 뱀의 무리가 쏟아져 사방으로 쇄도.

'산성.'

- 치이익!

'뇌격.'

이어 번개의 기운까지도 칼날에 불어넣어 베어 나갔다.

"히. 히이익.

퍼져 가는 경악이 사방을 차갑게 얼어붙인다.

낭비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 짓을 하는 누군가는, 철저히 자신의 노예 한 마리를 낭비하면서 상황을 즐기고 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다른 인간들은 연합군, 제국군을 막론하고 일제히 얼어붙어 몸을 사렸다.

눈앞에서 동족을 죽이고, 그 더운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는 광란조차 잠시 식어 버렸다.

팔다리는 모두 구겨지며 재료로 떨어져 나가, 몸뚱이만 남은 놈이 배와 등에 빼곡히 비늘이 돋은 채 내 쪽으로 꿈틀거리며 기어 왔다.

〈까마귀의. 진동이라. 하하.

어딜 기어 오느냐. 다 끝났다. 〉

성대가 다 타 버렸을 터다.

그러나 싁싁거리는 소리가 직접 머릿속에 전해지고 있었다.

보티스의 편린 같은 건가? 까마귀라니.

내가 가진 말파스의 힘을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냄새로구나. 내. 종복이. 될 기회를 주마. 〉냄새라니.

〈이미. 이미 승리했다. 영광에 늦게나마 끼어들게 해 주마. 나를 받아들여라. 〉이미 승리했다고? 무슨 말을 더 지껄이나 싶어 가만히 있었다.

〈그래. 좋다. 〉

- 화악!

무형의 검은 기운이 나를 감싸듯 리드바텐의 몸에서 뻗어 나오면서 그의 몸이 허물어졌다.

완전히 정지된 몸.

['까마귀의 눈'이 발동합니다.]

몸을 뒤로 빼며 연기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결빙. 암흑.'

냉기 마법과 마왕 말파스의 힘을 동시에 사용했다.

직감에 가까운 행동.

방금 떠오른 스킬의 효과인 건지,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게 '보였'다.

- 아사삭!

효과는 적중했다.

냉기에 순식간에 느려진 뱀 모양 연기를, 성질이 다른 암흑의 힘이 바사삭 부수고 있었다.

〈감히. 속임수를.! 〉

속임수라고?

가만히 있으면 승낙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건가.

얼어붙은 연기가 허공에 굳은 채 희미해져 간다.

〈내 간택을 막아 내다니. 흐흐. 그놈만큼. 멍청한.! 〉뭐 하자는 거지?

검은 연기가 시야에서 모조리 다

사라져 버렸을 때였다.

- 띠링!

[보티스의 구애를 몹시 강경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보티스의 편린에 미약하게나마

피해를 입혔습니다.]

[말파스가 당신을 총애합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다음 특전이 강화되었습니다.]

- 특전: 매료(Lv.1 ? Lv.2)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마왕 말파스는 내게 꽤 호의적이다.

직접 말을 섞어 본 적은 없지만, 꾸준히 뜨는 메시지가 내게 확신을 부여한다.

강화된 특전 내용을 확인했다.

매료 (Lv.2)

- Lv.1 의 모든 효과를 계승.

- 상대는 호감을 넘어 당신에게 경외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 뭔가를 시키지 않아도, 상대는 당신이 원하는 걸 미리 적극적으로 찾아서 행하고 싶어 합니다.

- 당신이 직접 지시를 내릴 때, 명령이 상대의 의지와 부합할 경우 피지시자의 잠재력이 발휘됩니다.

한층 역량이 발휘된다는 소린가. 좋은 특전이다.

가호의 이런 폭증도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간다.

사실 지금의 나 정도로 집중해서 제물을 바치고, 그 효과를 사실상 혼자서 먹는 경우는 드물다고 봐도 좋겠지.

게다가 말파스의 대제사장이라는 녀석이 주선한 계약이니까.

완전히 망가지고 불에 탄 남자의 시체를 바라보다, 반쯤 탄 수급을 잘라서 꽤나 담대해 보이는 연합군 병사에게 던져 줬다.

'매료.'

"제국군 총사령관의 목이다. 이제 전투는 끝났다."

"예!"

병사는 내 명령을 받았다는 것에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받은 목을 창끝에 꽂고,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대열에서 이탈해 앞으로 나가 소리쳤다.

마치 자신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듯한 태도로, 병사는 배에서 올라오는 웅흔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국군! 전원 항복해라! 너희의 총사령관은 죽었다! 자유 시민으로 살고 싶다면 항복해라!"

명령을 받은 게 너무나도 기쁜지, 병사는 손을 덜덜 떨면서 흥분에 젖은 눈으로 외쳤다.

- 히히힝!

심지어 주인을 잃은 제국 기병의

말에 가볍게 올라탄다.

승마 기술은 처음부터 있던 걸까. 저것도 매료 스킬의 효과라면 꽤 놀라운 일이다.

"싸움은 끝났다! 이 수급을 보라!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이름 모를 병사는 높은 위치에서 창을 흔들며 연달아 외쳤다.

슬슬 빠져도 괜찮겠지.

외곽에서 항복하는 자들,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몰살당하는 자들을 천천히 바라봤다.

여기서 지면 자신들의 사회처럼,

노예로 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당한 높이에 올라 정리되어 가는 전장을 바라볼 때였다.

멀리서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기 라도 했는지, 익숙한 까마귀가 크게 퍼덕거리면서 나에게 날아왔다.

〈멋지던데. 〉

= 그런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자부심을 가져 봐라. 네가 없었으면 저기서 인간 3만 명은 더 죽었을 거야. 〉=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쓰는군. 어쨌거나.

아이작의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지휘관을 빠르게 죽여서 항복을 유도하지 않았다면.

지금 북쪽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연합군 철인들이 밀집된 제국군을 절구에 담긴 곡식처럼 분쇄하느라 더 오래 끌었을 테니까.

녀석은 내 핀잔을 적당히 홀리며 말을 이었다.

〈흐흐흐.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기분이 어떠냐? 〉

= 다 네 덕분이지.

진심이었다.

아이작이 아니면 이런 상황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설사 가능했다고 해도,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

연합군의 전선 자체를 순식간에 제국 수도까지 끌어다 놓다니.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역량이다.

300년 전, 아이작의 행보가 제국 남부를 지배하는 것에서 그쳤던 이유가 문득 떠올랐다.

회전에서 패배해서가 아니다.

빛의 여신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했었나.

〈뭐. 그거야. 〉

녀석답지 않게, 머쑥한 둣 부리를 돌린다.

그리고 전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참 아쉽군. 여기가 여신의 영향 아래 있는 곳이라서 결계를 칠 수 없다는 게. 〉= 역시 인도주의적인 관점 따위가 아니군. 제단을 안 그리고 있던 게 이상하다 했다.

제국군이 지키고 있어서 애초에 시작하기도 힘들었겠지만.

〈그래. 제단만 그릴 수 있다면 다 말파스의 제물로 바치는 건데.

지금보다도 얻는 가호가 훨씬 더 강해졌을 거다. 굉장한 낭비라고. 기왕 죽을 거면, 제물로 바쳐지면 좀 좋을까? 네가 살해하는 효과도 여기서는 확 줄어든다고. 〉하긴, 언덕 위에서 돌아가는 꼴 구경이나 하자고 한 게 이상하다 싶었다.

내가 직접 살해한 만큼, 그에게도 마왕의 가호가 일정 비율로 들어갈 테니.

〈빛을 담당하는 일리엔의 결계다. 요망한 년이지. 수도에 들어가면 일단 그년의 신전들부터 다 부수라 명령해라. 〉= 수도를 점령한 연합군에 그런. 일을 시키라는 건가?

〈당연하지. 저주도 나눠 먹어야 낫다고, 혼자 당하려니 영 기분이 더러워. 〉수도에도 무력 집단은 있다.

재의 수도회 같은 사제 집단은,

참전하지 않고 신전에 남아 있을 확률도 클 거다.

하지만 이 정도의 병력이 신전을 부순다면.

인간 상대에 그리 특화되지 못한 사제 무리는 어쩔 수 없이 당해 버리겠지.

몇 가지 궁금증이 있었지만, 일단 앞으로 가는 것이 급했다.

지금 당장 묻지 않아도 좋았다. 이제 수도까지 곧이다.

내 막사로 들어가자 연합군 의원 카린이 서 있었다.

홀로 선 그녀가 나를 빤한 눈으로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당신은 승전으로 한창 바쁠 때 아닌가."

"이걸 받아 주세요."

만들어진 전쟁 영웅은 내게 작은 벌레 모형을 건넸다.

"이건.

동그란 형태의 황금 벌레.

주먹만 한 크기의 녀석이다.

순금은 아니지만, 넓은 등껍질에 금박이 두껍게 입혀져 있다.

하지만 오히려 등껍질에 입혀진 황금이 위장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

섬뜩할 정도로 세밀하고 차가운 결을 더듬는 느낌이다.

이런 걸 어디서 느꼈더라?

손을 대고 집중한다.

- 끼긱.

아주 작은 진동.

바로 앞에 있음에도, 탐지 스킬이

없었다면 놓쳤을 법한 진동. 곧바로 활성화해 내부를 느낀다.

- 끽. 끼긱. 끼기긱. 끼기기긱…?

빠르다.

규칙적이다.

반복되지 않는다.

얼마나 복잡하고 큰 패턴을 가진 규칙인지 가늠할 수 없다.

안의 무언가가 흔들리고, 맞물려 서로 돌아간다.

한참을 집중한 순간.

어둠 속에서 울리던 수없이 많은 금속음이 떠올랐다.

별빛청여우와 동시에 제국의 어느 황야를 걷던 기억이 떠올랐다.

[B마이너14 지역. 보다시피 황량한 평야지만, 우리끼린 '붉은 늪'이라고 부르지. 이곳을 맴도는 기계 부유물 들이야.]

[훨씬 작고. 폭발하는 대신 전부 갉아먹거든? 돌이든 뼈든. 만나면 굉장히 힘들 거야.]

그 녀석들을 멀리서 탐지할 때와 비슷한 파장이다.

그냥 거기 있던 기계 부유물 중에 하나인 걸까?

하지만 있는 건 느낌뿐, 힌트가 너무 부족하다.

레드 플레이크의 별빛청여우.

그녀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엠버에서 싸우고 있겠지.

아니면, 기스-제-라이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휘말려서 그대로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

아이작이 말을 걸었다.

= 이거. 뭔지 알 것 같나?

녀석이 즉답으로 부정했다.

〈아니. 나도 알아보지 못하겠군. 굉장한 걸 받은 거 같은데. 〉솔직히 바로 인정하는 녀석.

동요를 곧바로 읽은 둣, 카린이

기쁜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건. 고대의 유산을 여는 열쇠 라고 해요. 진짜인지는 저도 모르겠 지만, 가문에서 대대로 소중하게 내려오는 보물 중 하나예요."

〈정말이겠는데? 〉

"3대조께서 평생 연합 전 국토를 뒤지셨지만 결국 '문'은 찾지 못하 셨어요. 저희 쪽에 없다면, 분명히 제국에 있지 않을까 해서 참전하며 갖고 온 거예요."

"그런 걸 줘도 되는 건가."

카린이 웃었다.

"처음에 영입을 시도할 때는 뭐든 해 드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여태 그랬으니까요. 돈, 지위, 만들어진 명예든. 멋진 여자라든지요."

〈재, 저거 지금 자기 얘기냐? 〉

"하지만 뭐에도 흥미가 없어 보이 셔서요. 혹시 이런 건 어떨까 싶어 가져왔는데, 다행히 관심을 끈 것 같네요!"

유산의 열쇠라.

암살교단의 소명수녀, 코드네임

별빛청여우.

그녀와의 대화를 다시 회상했다.

[1 만. 배?]

[지금까지 발견된 유산 중에 가장 강력한 파장보다, 수치가 1만 배 강하거든.]

게다가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던 탑승용 기계와 비교한다면 3만 배라고 했던가.

말보다 열 배는 빠르고, 날개를 펼쳐서 하늘을 활공하는 것도 가능 했던 녀석.

이게 정말 별빛청여우가 말했던 '유산'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놀라운 걸 손에 넣은 셈이다.

"고맙게 받아 두지."

그때 였다.

펄럭!

"의원님!"

막사 천이 거칠게 걷히며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첩보 활동까지도 담당하고 있는 푸른 머리칼의 호위였다.

카린 앞으로 다가가는 발걸음이 몹시 다급해 보였다.

"루이! 왔구나. 무슨 일이지?"

"아쥬라의 마법사들이 지금 수도 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뭐라고?"

"북쪽 탑에서 수십 명이 남하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고작 수십 명.

그 정도 숫자로 '남하'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자들이 다가온다.

하지만 긴장 따위는 조금도 되지

않는다.

드디어 된 건가.

수도 위협이 북쪽 탑의 놈들에게 자극을 가했다.

드디어 그놈들이 움직일 수준의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고 있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문제는 내가 아직 약하다는 것. 평범한 마법사들이라면 몰라도, 한 명의 탑주라도 내 검기로 쓰러트릴 수 있을까?

분명히, 성급하다.

하지만 더 이상 스탯 흡수가 되는

상황도 아니다.

그렇다고 수천을 더 죽이더라도, 여기서 레벨을 올리기는 어렵다.

말파스의 가호도 방금 전 한 단계 성장했다.

다른 마왕의 편린을 찾아 그들만 학살하는 쪽은 기약도 전혀 없고 현실성도 떨어진다.

무엇보다, 지금 아니면 아쥬라의 마탑들이 언제 비어 있을까.

5년 뒤?

10년 뒤?

가야 한다.

이 순간도 루비아는 고문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금이 최적이다.

"당장은 못 받겠군."

나는 '열쇠'를 그녀에게 돌려줬다. 앞으로의 일을 잘 부탁하며 주는 선물이 분명하다.

마법사들과의 가장 위험한 싸움에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면서 받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네.? 갑자기.

"혼자 여기서 빠지겠다. 지금은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카린의 안색이 파랗게 변한 순간. 아이작이 다급히 소리쳤다.

〈야! 잠깐 기다려 봐! 〉

254화 아무 대가 없이 (18)

***************************************************

다급한 말투였다.

손짓을 해서 막사 안의 두 인간을 잠시 밖으로 내보냈다.

카린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바로 깨끗이 지워졌다.

능력을 보여 준 이후로, 그녀는 내 앞에서 어떤 종류의 싫은 티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마음은 꼭 바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갖고 있던 유산의 '열쇠'는 그대로 테이블에 보란 듯이 놓아 두었다.

그 존재가 신경 쓰였다.

다시 가져가라는 말을 할 사이도 없이, 카린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옆의 호위는 처음에 카린의 그런 태도에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곤 했지만, 지금은 자신도 수긍하는 모습이다.

이런 태도의 변화는 다 아이작의

성과가 만들어 낸 거다.

그런 녀석이 다급히 하는 말이니 자세히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 무슨 일이지?

〈마탑에 가는 건 지금은 안 된다. 너는 아직 약하다. 〉문득 유치한 오기가 솟았다.

- 화아아아악!

막사 안의 공기가 칼 안으로 빨려 드는 것처럼 집중됐다.

새까만 기운이 맺힌 칼날 끝부터 바람과 화염이 서로를 칭칭 휘감아 내려갔다.

높은 지혜 수치는 마법 컨트롤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매질들이 더 말랑말랑하게 변하는 듯했다.

얼음이 불을 덮어 끄고, 샛노란 번개의 힘이 칼날 주위의 공기로 지직거리고 있었다.

이 칼에 베이는 그 순간에 목숨 다섯 개쯤은 단번에 날아갈 듯한 강렬한 모습.

물론 그런 걸 보여 주려고 하는 건 아니었다.

꽤 넓은 막사 안이지만, 원소의 힘은 단 한 톨도 안쪽을 어지르지 않는다.

주위에 얼음을 뿌리고, 난잡하게 번개가 뻗어 나가게 하는 건 쉽다. 단순히 불을 지르는 것 따위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네 종류의 현란한 변화를 보이며 마법을 내가 원하는 범위로 제어하는 통제력.

게다가 전부 1?? 을 찍은 스렛.

그 스텟을 전반적으로 중폭하고, 권능을 주는 말파스의 힘 덕분에 나는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

"놈들이 얼마나 강할지는 몰라도 승산이 없지 않을 텐데?"

그 말 대로다.

확률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저었다. 내 무력시위에 그다지 감명 받지는 않은 모양새다.

〈안 된다. 〉

"안". 된다고?"

〈황실 비역에 루-륨은 물론이고, 어떤 아티팩트들이 있을지 몰라. 네 모든 걱정을 해결할 단 하나의 열쇠가 있을지도. 이거야말로 지금 아니면 언제 확인해 보겠어? 〉〈봐봐. 마법사들이 궁극적으로 왜 황실에 복종하는지 그 비밀을 알고 싶지 않냐? 다른 거랑 비교할 수가 없는 중요한 문제야! 비역 출입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순간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나에게 뭔가를 팔아치우려는 듯한 장사꾼의 말투다.

어쨌건 나는 고집을 꺾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비역도 개죽음이 될지 모르지."

〈1차로 우리가 아니라 연합군이 들어가는 거잖아. 뭔가 이상한 게 있으면 수만 명의 인간 선발대들이 당하는 거지. 그 상황을 연구하기 위해서라도 여기 있어야지. 함정은 남이, 보물은 우리가. 좋잖아? 〉아이작이 말했다.

사실 이런 대답을 할 거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어느새 녀석의 논리에 꽤 적응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충분히 유혹적이지만, 다음 생에 해도 된다.

애초에 내게 '마지막 기회' 따위는 없으니까.

아이작은 문구를 잘못 골랐다.

"글쎄. 시간을 끌었다간 싸움이 끝나고 마법사들이 금세 북쪽으로 돌아갈지 모르지. 무조건 갈 거다."

탑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으면, 그 때 루-륨을 찾아도 늦지 않다.

아이작은 슬쩍 내 눈치를 본다. -퍼드득!

그러다 답답하다는 둣 막사 안을 여기저기 날며,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이작이 천천히 차분하게 음절을 끊어 말하기 시작했다.

〈내. 말을. 받아들여라. 〉

약간 나른해지는 기분이 들었을 때였다.

-띠링!

[당신은 매우 높은 지혜 수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 레벨의 같은 스킬을 사용한 경험이 있습니다. 높은 이해도를 보유합니다.]

[상태 이상: '최면'에 저항합니다.]

묘한 효과음이 울렸다.

동 레벨의 같은 스킬이라.

아이작이 내 몸에 빙의한 뒤 썼던 최면 스킬을 말하는 모양이다.

"뭐 하는 짓거리냐?"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통제하려고 한 건 명백하다.

방금은 가벼운 최면.

하지만 저번에 성공했듯이 아예 까마귀 인형을 버리고 내게 혼을 옮길지도 모른다.

물론 혼은 물과 같아, 옮길수록 그 절대치가 줄어든다고 했었나.

아이작도 인정한 이야기.

녀석의 입장에서도 위험은 있다. 게다가 저번처럼 잘될지 아닐지도 확실히 모르는 법이다.

녀석에게 마지막으로 몸을 빼앗길 때와 비교해 나는 훨씬 강해졌다.

지혜 수치가 기준이라면.

100이라는 수치는 꽤 압도적이다.

아무리 작은 까마귀 인형에 담겨 약해졌다고 한들, 전설적인 술사의 최면도 막아 낼 정도니까.

내 추궁에 아이작은 침묵하다가 입을 떼었다.

〈헌데 너 말이다. 지금 루비아를

위해 음직이는 거지? 〉

"그야. 물론."

당연한 소리다.

루비아가 아니면 뭘 위해 북쪽의 마탑 따위에 간단 말인가.

아이작은 고요하고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럼 갈 필요 없겠네. 루비아는 이미 죽었거든. 〉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죽었거든. 죽었거든. 죽었거든.

그 말이 메아리처럼 두개골에서 울려 퍼졌다.

잘 와 닿지 않았다.

단순한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정신이 드득대며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 그럴 리가 없다. 대체. 네가. 네가 어떻게 그걸 안다는 거야? 아이작, 너는 나랑 계속 같이 있었잖나."

농담에도 정도가 있지.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아이작은 무척이나 태연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널 만나기 전 일이야. 내가 확실히 죽였다니까? 〉그건 강렬한 선언도 아닌 단순한 서술이었다. 감정 따위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다. 어휘는 건조했고, 어조는 무심했다.

"죽였. 다고?"

아이작의 입에서 지금껏 한 번도 맡지 못했던 피 냄새가 났다.

지금껏 수만 명의 인간을 지휘로 죽여 온 녀석에게서 처음으로 맡는 피 냄새.

아이러니한 일이다.

〈구출은 무리였어. 올라가 당했을 일을 생각하면, 분명 나한테 고마워하고 있을 거다. 〉나는 한동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놀랄 일도 아니잖아?

모두 다 루비아와 너를 위해서 한 일이야.

속여 널 여기까지 데려 왔지만. 결국 너한테 좋은 일인걸, 이라며 이어지는 말들이 멍하게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녀석이 실제로 뱉고 있는 말인지, 환청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한데 모여 구더기처럼 우글거렸다.

아이작이 루비아를 죽였다.

그가 지금껏 나를 속여 왔다.

어느 쪽이 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일까. 마비된 것처럼 나는 멍하니 그 둘을 저울질했다.

사실 명백히 한쪽일지 모르지만, 정신의 저울눈 자체가 상하좌우로 미친 듯 돌아가고 있었다.

〈고통은 없었거든. 내 능력 알지?

잠드는 것처럼 편하게 보내 줬다. 〉

이 순간조차 자기 자랑을 하며, 이 정도면 이해해야 하지 않겠냐는 듯이, 묘하게 태도를 바꾸어 가는 그를 바라봤다.

〈간만에 전술에 너무 심취해 버린 데다, 적이 허수아비라서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올라와 버린 느낌은 좀 있지만. 일단 우리가 수도부터 점령해야 되는 이유를 알겠지? 자, 이제부터 움직이자고. 〉

"아. 이. 작.!"

검기도 없다.

마법도 씌우지 않았다.

좋은 타이밍을 노린 것도 아니다.

- 까앙!

그런 흐트러진 검격을 막는 건, 방금 몇 합에 쓰러트리고 온 제국 기병대장이라도 어렵지 않으리라.

오히려 녀석의 기백이라면 칼을 잘라 내고 단번에 반격을 해 대겠지.

아이작은 달리 놀라는 기색마저

없이, '깃털'을 움직여서 올려치는 칼을 막았다.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평범한 재질의 까마귀가 아닌 건 당연했지만, 드워프가 벼린 칼날의 일 검마저 깔끔히 막아 낸다.

잘리지 않는 강도만이 아니다.

아래에서 위라고 한들, 팔 전체를 써서 올려치는 검을 몇 배는 작은 까마귀가 가볍게 막아 낸다.

느껴지는 '완력.'

그동안 전선을 올라오며 강해진 존재가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제물을 바침으로서

정말 더 강해진 건 내 눈앞의 '대제사장'이었다는 명백한 진실이.

뒤늦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까앙!

위에서 아래로.

다른 칼을 휘둘렀다.

검기를 3레벨이나 달성한 자가 휘두른다고 보기는, 농담으로밖에 치부되지 않을 조악한 이도류.

상대를 베기보다, 울며 투정하는 듯한 검격은 역시 위로 든 까마귀의 다른 깃털에 칼날이 막혔다.

아이작은,

이 정도로 강해졌다는 건가.

나는 일그러진 정신을 가까스로 되잡고 말했다.

"너를. 너를 신뢰했다."

까마귀 인형의 무기질 눈이 잠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북쪽에 가 봐야 루비아 비슷한 것도 없어. 별 가치도 없는 시체는 몇 번 들여다보다 버린다. 키메라 같은 것도 기대하지 마. 〉

"너는. 너는.

분노가 치밀었다. 아이작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죽었다고 해도 사실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다 해도 죽었을지 모른다.

혼란스러웠다.

〈루비아가, 북쪽 늙은 거미들에게 끌려가면 무슨 꼴 당하는지 하나씩 죄다 말해 줄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루비아가 죽은 거라면.

그것도 아이작이 죽였던 거라면, 내가 여기까지 수천 명을 학살하며 올라올 필요는 전혀 없었다.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시체를 쌓으며 올라왔다.

베고, 베고, 베고.

팔자에도 없는, 연합군의 배후에 있는 전쟁 영웅 따위를 연극하면서 수많은 시체를 쌓아 올렸다.

아무런 악의도 없는 그 살해는, 모두 한 명을 구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교환비.

그런데- 아이작은 지극히 무거운,

절댓값에 가까운 한쪽을 전부 0으로 이미 만들어 버렸다.

뭐라고 생각하는 것도 허망했다.

막히고, 무겁고, 반대로 허공에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부터. 그를 신뢰하고 함께 따라온 자신이 한심해졌다.

"꺼져라."

충격을 억지로 밀어내려 애쓰며 한마디 말을 뱉었다.

〈이게 네가 화를 낼 일이야? 이해할 수 있잖. 〉

-부응!

무심코 검기를 실어 눈앞의 놈을 베었다.

정말 베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는 걱정이 실려 있는 탓일까.

검기는 날카로움을 잃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 까강!

내가 뿜어내던 힘보다- 훨씬 더 짙은 강렬한 무형의 어둠이 녀석의 부리에 맺혀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지만, 말파스의 힘으로 나를 공격하지 마라. 마왕의 가호는 상위의 계약자에게 어쩔 수 없이 먹혀. 피라미드 구조라는 거지. 〉이 순간에마저 훈수라니.

물론 제대로 검기를 일으킨다면 베지 못할 것 같지도 않았다.

실제로 녀석은 물리적인 충격은 조금 힘겨워하고 있는 느낌이니까.

아니면. 아직도 나를 회유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걸지도.

아직까지도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먹잇감이라 이건가.

"그냥 나도 죽었으면 됐을 거야. 다시 시작하는 편이 좋았을 거다."

불가항력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루비아가 죽었다고 말했다면.

이렇게 많은 피를 마왕 따위에게 바칠 일은 없었겠지.

아이작의 의도가 무엇인지.

선의로 루비아를 죽였는지.

아니면 나를 이용해 마왕을 강림시키려는 큰 그림이었는지.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결론은 하나다.

녀석과는 함께할 수 없다. 그때 였다.

〈뭐? 그게. 무슨. 소리냐? 〉

아이작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놈이 처음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검은 눈알이 빠르게 굴러간다.

〈다시. 시작? 그런 게. 가능. 하다고? 너. 너는.! 그때.)

"꺼져라."

〈어이, 진심이야? 나 없이 네가 어떻게.! 다시 시작한다는 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더 나눠 보자구, 이봐! 이 친구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항상 놈에게 휘말린 기분이었다.

모든 게 의심스럽다.

"지금 꺼지면, 지금까지.

나는 씹어 뱉듯이 말을 이었다.

"를 생각해 죽이지는 않겠다."

검기를 일으킨 채 진지하게 다시 칼을 겨눴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으면 이번엔 정말 벨 생각이었다.

〈. 알았다고. 〉

-파드득.

점차 멀어지는 까마귀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하니 겨눈 칼끝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드워프들이 날카롭게 벼린 명검은, 왠지 아무것도 벨 수 없을 정도로 무디고 무겁게 느껴지기만 했다.

255화 아무 대가 없이 (19)

***************************************************

한참 허망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막사가, 내가 핏물에 발을 깊이 담근 이 전장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이작이 떠나자 같은 공간이라도 전혀 다른 것 같았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떠날까, 싶을 때였다.

익숙한 기운이 빠르게 다가왔다.

- 펄럭!

건장한 그림자가 빠르게 막사를 열어젖혔다.

"정찰 다녀왔다."

인간형으로 변한 브로디 발도프.

대답하지 않자 녀석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나?"

신경 쓰지 말라고 하자 브로디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풀며 정찰 결과를 이야기했다.

"몇 마리의 패밀리어와 조우했다. 북쪽에서 마법사들이 빠르게 오고 있는 건 확실하다."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관심 없는 몇 가지를 더 전해 들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브로디 발도프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전선이 결국 여기까지 밀렸군. 약속대로. 루멘의 정보를 나에게 알려 주지 않겠나?"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끄덕였다.

"좋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상황에서 늑대인간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손에 어마어마한 피를 묻혔다.

물론 브로디 발도프 스스로, 인간 살해를 일종의 숙명처럼 여기는 것 같긴 했지만.

"루멘 발도프. 그는 지금 엠버에 있을 거다."

정확하지도 않은 추측을 전한다.

하지만 브로디의 얼굴에는 오히려 화색이 돌고 있었다.

"엠버메어?"

"그래. 암살교단 레드 플레이크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지. 그들을 수소문해 봐라."

암살집단을 찾으라는 이야기다.

몹시 막막한 이야기다.

어디서부터 찾으라는 건가?

게다가 엠버메어는 제국의 정예가 모두 몰려가 있어 지극히 위험한 상태.

하지만 브로디 발도프는 태연한 표정이다.

"고맙다."

그 감사가 몹시 의아했다.

"고맙. 다고?"

"원래부터 허세는 느꼈다."

"우리쯤 되면 반드시 실체 있는 냄새만 맡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른 녀석들의 기분이라든가 실력, 기억 같은 것마저 냄새의 감각으로 맡을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이어지는 긴 말들에 슬쩍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래도 네 말에 진실 한 조각은 묻어 있다고 봤지. 그 한 조각이 생각보다 괜찮은 정보군. 고맙다."

마음 어딘가를 커다란 웨어울프가 슬쩍 파고들어 오는 것 같았다.

조금 찡해졌다.

이 작고 볼품없는 정보를 가지고, 브로디는 지금껏 잔뜩 이용당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그럼 이만 가오."

녀석이 고개를 한 번 돌려보더니 내게 말했다.

"함께해서, 사실 나쁘지 않았소. 언젠가 다시 한 번 보자고."

웨어울프는 마치 냄새라도 기억 하려는 것처럼, 내 쪽을 향해 코를 몇 번 킁킁거렸다.

- 펄럭!

곧 늑대는 밖으로 나갔다. 그마저 사라지자 막사 안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날아간 아이작을 생각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이용당했나 싶었지만, 아이작이 떠난 뒤에도 내가 가진 마왕의 힘은 여전하다. 마왕 말파스는 지금까지의 공물에 분명히 대가를 치러 준 거다.

탁자 위에 놓인 카린이 두고 간 열쇠를 바라봤다.

나중에라도 쓸 수 있겠지.

일단 루비아의 생사부터 조금 더 확인해 봐야겠다.

누군가의 말을 무턱대고 믿는 건 이제 질색이었다.

슬쩍 포로 수용소로 숨어들었다. 어디에 어떤 녀석들이 있는지는 대충 다 안다.

정보를 가지고 있을 만한 놈들을 찾아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르노 리드바렌.

보티스의 하수인인 종교 재판관.

그 녀석의 부하들이 목표였다. 은신으로 간수들을 가볍게 뚫고, 안에 묶여 있는 놈들을 심문했다.

공포 스킬을 사용해 심장이 및기 직전까지 몰아세우고, 풀어준 뒤 다시 몰아세우기를 반복했다.

루비아의 정보를 물었다.

몇 명인가가 기억하고 있었다.

놈들 입장에서는 정말 별거 아닌 정보였는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술술 불었다.

아무래도 루비아는, 인간 가운데 확연히 눈에 될 정도로 아름다운 모양이다.

아름다운 것은 짓밟는다.

하나씩 뜯어낸다.

악마숭배 혐의로 기소된 그녀에게,

그런 가학성을 발휘할 기회를 노린 자들이 많은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루비아는 호송 중에 사망했다.

"틀림없습니다! 아쥬라의 탑으로 데려가는 길에.

몇 차례에 걸친 교차 검증이었다.

루비아는 죽었다.

확실하다.

공포 때문에 오줌을 지리고 있는 인간들을 놓아두고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수도 함락에 참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우습다.

결국 아이작이 처음에 시킨 대로 해 버리는 거다.

물론 카린과 함께할 수는 없다. 나에게는 연합군 11만을 통솔할 전략 따위는 없다.

혼자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

몸을 숨기다, 연합군이 돌격하면 살해된 마법사들을 흡수한다는 게 기본 계획이었다.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다.

쉽게 강해질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레벨 업 속도도 이제 몹시 느리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이번 삶을 굳이 이어 나갈 의지는 없었다.

진군하는 11만 군대의 옆쪽에서 몸을 숨긴 채 천천히 따라 걸었다. 루비아는 죽었다.

아이작도, 브로디 발도프도 없다. 이제 정말 혼자다.

어차피 나는 오랫동안 혼자였다. 그동안이 너무 북적거렸던 거다.

애써 그렇게 생각해 보려 했지만 텅 빈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일부러 행군하는 병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날 막사에서 헤어진 후 카린의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을 풀어 찾는 것 같았지만, 그 정도도 못 피할 건 아니다.

여자는 그림자 전술가를 잃은 것치고는 그럭저럭 의연하게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편제가 조금 조정된 것 같았다. 거대한 발리스타와, 석궁병 부대를 앞에 내세우고 연합군이 전진했다.

저걸로 나타난 마법사들에게 일제 사격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걸로 대비가 충분할지는 나도, 아마 카린 자신도 알 수 없겠지.

여신의 힘이 미친다는 붉은 여우 평원을 지났다.

이어 11만 군대 앞에-스무 개의 작은 점이 나타났다.

"정지. r

"정지! 정지! 정지.!

펄럭이는 로브와 커다란 지팡이.

저 멀리서도, 마법사라고 외치는 듯한 복장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상대는 스무 명.

이쪽은 아예 보이지도 않을 만큼 많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잔뜩 긴장했는지, 몇몇 연합군 지휘관은 이마에 한 줄기 땀을 홀리고 있었다.

"사격!"

"쏴라!"

- 티디디디디디딕!

- 투두두두두두두두!

짧은 시간 안에 수천 발의 화살이

스무 명의 인간을 향해 쏟아졌다.

하찮은 인간의 근력 따위가 아닌 몇 차례 감은 기계 태엽의 힘으로 날아간 화살들이 섬뜩한 직선으로 적을 겨냥했다.

- 피이이이익!

- 푸슝! 푸슘! 푸슘!

각종 공성무기들까지, 아예 적이 있는 공간 자체를 갈아엎을 기세로 앞쪽의 마법사들을 꿰뚫고-- 쾅! 콰과광!

- 파바바바밧!

꿰뚫고, 그대로 지나갔다.

수천 발의 화살과 돌덩이가 아무것도 치지 못하고 땅에 박혔다.

"환영.?"

굳이 마법적인 지식이 아니라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감이 빠른 누군가는 벌써 알아차리기 시작할 때였다.

- 휘이이이잉!

군대의 좌익에서 강렬한 돌풍이 불 어왔다.

은폐장이라도 펼쳐져 있었는지 탐지 스킬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던 곳에서 마법사 열 명이 난데없이 솟아났다.

"화염 광란."

다섯 명의 마법사가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힌 지팡이 끝에서, 뜨거운 불꽃이 다른 다섯 명의 마법사가 만들어 내는 돌풍이 힘입어 군대를 덮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화염의 덩어리들이 넓게 퍼져 군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그건 쉽게 부스러지고, 작아지고 꺼져 버리는 불꽃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의 고통과 비명을 잡아먹고 제 덩어리를 점점 키우는 망령이 었다.

이글거리는 화염에 싸인 병사들의 몸이 양초처럼 녹아내렸고, 어떤 곳 에서는 몸이 안쪽에서부터 펑펑 터지는 자들도 있었다.

"살수! 살수차!"

- 좌아아악!

불이 붙어 너울거리는 병사들을

향해 살수차가 몇 대씩 동원되어 물줄기를 뿌렸다.

잘 준비된 모습이다.

가장 강한 공격마법은 불꽃 계열. 거기에 대항한다는 건가.

하지만 고작 열 명의 기습 공격에 이미 천 명 이상이 몸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 세 배 이상의 전열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온몸이 일그러져 섬뜩한 비명을 질러대는 병사들을 보니, 아이작이 있다면 어땠을까 싶다.

이런 공격은 어떻게 대처할까. 예방했을까?

아니면 아이작도 마법사의 기습은 어쩔 수 없었을까?

녀석의 생각을 억지로 지워냈다.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번쩍!

샛노란 전격이 허공을 깨물었다.

열 명의 마법사는 지팡이 끝에서 일제히 전격을 뿜어냈고, 살수차가 뿜어낸 물로 젖은 땅 위를 뇌전이 미친 듯 좌우 사방으로 내달렸다.

- 쿵! 쿵!

처음 마법사들을 보고 달려가던 두 철인이 감전되어 제자리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 뒤를 이어 시간 차이도 없이 수백의 인간이 일제히 쓰러졌다.

살수차를 운용하는 병사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제법 충실하게 방화복을 입고 있었지만, 정작 필요했던 건 방뇌복이었다.

연합군을 둘러싼 전장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곳곳에서 돌풍과 함께 불기둥이 솟았다.

"에비아 루미오 일럼, 룬 플래시-용암 채찍!"

- 치이익!

무거운 불덩어리가 파편처럼 튀며 거기에 맞은 인간들의 몸이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렸다.

어느새 내 근처에서도 두 명의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에게 살해당한 황실 마법사들에게 그리 뒤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 명은 공격을 전담하고, 다른 한 명은 전력으로 쉴드를 전개하고 있었다.

- 탕! 타당!

눈먼 화살 따위는 쉴드에 튕겨나 마법사를 다치게 하지 못했다.

불을 뿜고 번개를 뿜는 지팡이가 어딘가를 향할 때마다,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최소한 십수 번씩은 겹쳐 울렸다.

갑작스런 기습에 연합군은 아직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꼭두각시처럼 움직인 카린이 지금 몹시 당황하고 있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쉴드를 전개하는 마법사의 등 뒤로 조용히 들어갔다.

산발적으로 조를 이뤄 활동하는 두 명.

두 명 정도는 크게 주목받지 않고 잘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처음에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두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해 볼까.'

전력으로 검기를 끌어냈다.

굳이 밖으로 줄줄 흘리지 않은 채 차분히 칼 그 자체에 갈무리했다.

[특전: 암흑을 발동합니다.]

[공격력이 35% 상승합니다.]

[방어력이 50% 상승합니다.]

- 쿵!

가장 가까운 발리스타에서 발사된

쇠창이 쉴드를 가격했을 때, 바로 뒤에서 마법사를 대각선으로 내려 베었다.

약간이나마 신경이 분산된 사이에 가한 공격이 치명타.

마법사는 뛰지도 눕지도,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단 한 번에 쉴드가 깨져 나가며 그의 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바로 옆에 서 있는 다른 마법사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하는 사이에 칼을 옆으로 휘둘렀다.

어두운 섬광이 맑게 피어났다.

뒤로 몸을 뱉 사이도 없이 칼을

휘둘렀고, 깨끗이 절반으로 잘린 마법사의 허리 위가 아래로 스르르 흘러 떨어졌다.

발사되지 못하고 맺혀 있던 불꽃 마법이 지팡이에서 터졌다. 피해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

[화염 저항이 발동합니다!]

[지혜가 매우 높습니다.]

[화염 저항에 추가값이 큰 수치로 보정됩니다!]

마법사의 피도 불꽃도 그 자리에 툭툭 털어냈다.

"와아아아아!"

"그분이 오셨다!"

살아남은 주변의 연합군 병사들이 마치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듯이, 발작적으로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 존재를 보고 사기가 올랐다고 해야 하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저번 회전에서 지나치게 눈에 띈 듯하다.

적 지휘관 두 명을 혼자 베었으니 당연한 건가.

너무 시선을 끈다면 마법사들의

협공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조금 곤란해졌다.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초록색 빛을 한 손으로 흡수하며, 옆에 쓰러진 철인을 밟고 올라가 슬쩍 전장을 살폈다.

256화 아무 대가 없이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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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이 스쳐 지나가면서 한 번에 수십 명을 태웠다.

하얀 냉기가 병사들의 숨구멍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수백 수천을 쓸어버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지, 마법사들도 힘겨워 하고 있었다.

얼음과 불의 향연에 얼어붙었던 병사들도, 동료의 죽음을 넘어서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주제넘게 끼어든 마법사들을 넘어

서면 제국 수도는 함락되고 전쟁은 일단락된다.

그 도약이 병사들의 공포를 씻고 흥분 상태로 몰아넣었다.

나를 알아보고 상기된 표정으로 함성을 지르는 인간들도 있다.

첫 기습에서 일방적으로 휩쓸리고 있지만, 숫자가 이쪽이 압도적이다.

생명의 교환비는 터무니없지만, 전체적으로 혼전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상황이다.

그 사이를 내가 누비면 된다.

'질주.'

물론 나는 이제 이 싸움에 더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관성이다.

죽인다, 라는 관성.

흡수한다, 는 관성.

개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리는 것처럼 정도正道 외도外道 따위는 알 바 없이 눈앞의 큰 흐름에 몸을 맡긴다.

지금까지 허무하게 싸워 온 것도, 아이작에게 철저히 기만당한 것도 전부 잊고 싶었다.

마법사들의 관심이 내게 집중되면

곤란하겠지만.

다행히 워낙 전장이 넓은 탓에, 크게 이쪽에 시선이 쏠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음 타깃은.

허공을 관찰하기 위해 빙빙 도는 마법사들의 패밀리어가 보였다.

마법사들과 이어져 있는 매.

자신을 잃어버리고, 태어날 때는 없었던 목줄과 고삐에 감긴 채로 제 시야를 공유하는 비극에 처한 것들 이다.

새들은 온몸이 날개지만 인간의 조종을 받는 탓에 하늘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궤도를 절뚝인다.

"사격!"

제대로 교육을 받은 건지, 근처의 궁수들이 일제히 패밀리어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화살이란 화살은 공중의 과녁에 일제히 박혔다.

정신이 장악당한 채로 비뚜르게 날던 새가 온몸에 화살에 꽂힌 채 빙그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원래의 비행 실력대로라면 맞지 않았을까.

마지막 순간 매는 지배를 벗어난 듯이 눈을 한차례 반짝거린다.

화살에 빼곡이 꿰인 새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패밀리어가 죽는 순간 마법사도 약간의 타격을 받는다.

강가에 숨어 쿨럭거리는 기척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보라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말 한 마디 없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 서거걱!

미리 지팡이에 저장해 놓기라도 한 듯, 날카로운 얼음송곳 열 개가 허공에서 솟아나 나를 향해 날아 들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얇은 얼음송곳들은 드워프가 만든 갑옷 곳곳을 뚫고 들어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뼈와 뼈 사이로 허무하게 통과.

"어.? 어어. r

몸 곳곳, 특히 마법사의 개인적 취향인지 배 주위에 다섯 발이나 되는 얼음송곳을 꽂고도, 내장이 얼어붙지 않은 나를 보고 보라색 로브의 마법사는 경악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몸을 덜덜 떨며 나무에 등을 붙였다.

그대로 앞으로 뛰쳐나가 침엽수와 함께 목을 잘랐다.

잘린 침엽수는 비스듬히 옆으로 쓰러졌고, 통째로 잘려 나간 목에서 뿜어진 피가 날카로운 초록 잎들을 타고 흘렀다.

뼈에 맞은 두 개의 얼음송곳에서 뒤늦게 냉기가 전해졌다.

전장 위를 비행하는 새 몇 마리가

목줄이 풀려 하늘 저 멀리로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결빙 Lv. 3을 흡수.]

[질풍 Lv. 3을 흡수합니다!]

아까 두 명의 마법사를 죽인 뒤 경험치만 올랐던 스킬들이다.

방금 죽인 녀석을 기점으로 해서 레벨이 한 단계 올라갔다.

정수를 모두 흡수했을 때였다.

불바람이 점점 내 쪽으로 번지고 있었다.

아까처럼 불을 담당하는 인간과,

바람을 담당하는 인간이 함께 조를 이룬 것 같았다.

불길은 점점 범위를 넓혀 가면서 병사들을 덮치고 있었다.

근처에 마법사에게 대응할 만한 병력도 없이, 가운데 밀집해 끼어 있는 장창병 부대가 산 채로 불에 타들어 가며 울부짖고 있었다.

바닥을 구르고, 서로에게 수통을 부어 갔지만 역부족이었다.

활활 일어나는 불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두 마법사들은 불쾌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중얼거렸다.

"저놈이 미쳤구나."

"살살 해 줬더니 감히.

하지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말투 아래 희미하게 깔린 공포가 분명히 느껴졌다.

바람이 및었다.

- 후와아아악!

사람 머리만 한 불덩이 둘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수백 명을 뒤덮은 불길에 비하면 크기는 작았지만, 그만큼 압축된 강렬한 기운이 응집되어 있었다.

그대로 맞으면 쇳덩이라도 폭발을 일으키며 녹아 버릴 힘이었다.

"다들 비켜라."

적당히 몸 전체를 가릴 법한 방패 하나를 주웠다.

겉이 까맣게 그을렸지만 아직은 쓸 만한 녀석이었다.

[포스 실드 Lv. 4를 발동합니다!]

루-륨을 수송하던 마법사.

알로히스에게 흡수한 스킬이다.

이미 구현된 형形에 포스 실드를

덧씌워 발동하면, 그저, 아무것도 없을 때 구현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효율의 방어력을 보장한다.

이것도 아이작이 내게 가르쳐 준 방법이다.

〈마법은 세계를 구성하는 매질을 말랑한 상태로 만들고, 그걸 빚어 내는 일. 〉〈세계를 추상화하고, 다시 입맛에 맞게 구체화한다.

〉〈하지만 아케인 하트와 상상력을 동시에 갖춘 녀석은 무척 드물지. 그 탓에 전형(오스노브)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화염구라든가. 얼음미사일이라든가. 〉〈너는 특히 상상력이 부족하니까, 새로운 걸 하려고 하지 마라. 그냥 뭔가 덧씌울 걸 마련해라. 〉지금도 녀석이 떠오르는 게 몹시 우스웠다.

아무 대가 없이 이용당했다고만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희미하게 올라오는 미련을 옆으로 털어 냈다.

모서리만 금속판.

나무를 압축한 이후 코팅한 것에

불과한 방패 본체가,

- 콰광!

이글이글 타오르는 직경 1미터의 불덩어리를 간단히 쳐냈다.

튕겨진 불덩이가 허공으로 날아가 폭발했다.

밀집된 장창병 무리에 떨어졌다면 한순간에 쉰 명은 증발했을 법한 강렬한 폭발이었다.

화염구를 쏘아 낸 마법사들 역시 불티와 충격파에 뒷걸음질 쳤다.

- 펑!

또다시 나에게 날아오는 마법을 튕겨 냈다.

일렁이는 뜨거운 공기 속에 바로 앞으로 뛰어나가 마법사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이. 이이.!"

앞으로 뻗은 지팡이에서 불꽃이 폭발했다.

하지만 검기는 그 불꽃을 투과해 지나, 처음 얼음송곳을 시전했던 마법사의 배를 찔렀다.

마법사는 배에 칼이 박힌 채 털썩

무릎을 꿇고 몸을 경련했다.

옆에 있던 마법사가 이를 악물고 나를 향해 지팡이를 겨눴다.

"중력 강화."

- 쿠궁.

갑자기 몸을 무언가가 강렬하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발을 꽉 붙잡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억지로 발을 떼어 보려고 했지만 바로 되지는 않았다.

"제법이군."

내 두 발을 땅에 묶어 놓은 채, 자신은 뒤로 미끄러져 도망가려는 다른 마법사를 향해 허리를 힘껏 돌린 힘으로 칼을 내던졌다.

- 째애앵!

중력 마법의 힘은 내 하반신에만 작용했다.

칼은 도망가던 마법사에게 날아가 두개골을 그대로 꿰뚫고 한참을 더 날아갔다.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난 인간은 그대로 죽었다.

[중력 조작 Lv. 1을 흡수합니다.]

빛을 다 빨아들인 시체에서 손을 뗐다.

주위를 돌아봤다.

불길이 그치자 병사들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게 느껴졌다.

"전 방향에서 마법사를 쏴라!"

합성궁을 든 병사들이 재어 놓은 시위를 힘껏 당겼다.

이백 명의 병사가 한 명의 인간을 겨냥하는 모습만으로도 서늘함이 느껴졌다.

"발사!"

깃이 달린 빗줄기가 단 한 명에게 쏘아졌다.

- 슈슈숙!

- 슈숙!

퍼붓는 화살비에 부담을 느낀 듯 마법사들이 다시 뒤로 숨었다.

그저 운이 좋아서 아케인 하트를 타고났을 뿐인 인간들.

사선은 이미 몇 번이고 넘어서, 전투 경험이라면 그런 마법사들을 압도하는 기계화 보병들이 사냥을 시작했다.

설령 그 마법사가 상대라도, 언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직감으로 알고 있는 베테랑들은 산개했다.

지휘관의 명령 따위는 필요 없는 단독 행동.

몸이 불에 타고, 얼어붙고, 번개에 지져져서 실신하더라도.

몸 곳곳을 강철로 대체한 병사의 돌진은 로브 속 인간들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죽어라, 마법사!"

처음으로 연합군에 의해, 한 명의 마법사가 목숨을 잃었다.

잘린 팔꿈치에서 쏘아진 투창에 허벅지를 맞은 뒤, 회전 장치가 부착된 철퇴에 팔다리가, 두개골이 계속해서 반죽처럼 으깨어진다.

- 퍼버버벅!

화살에 화살이 겹쳐, 전신에 꽂힌 마법사가 퍼덕거리지도 못한 채로 숨이 끊어졌다.

죽은 마법사가 쓰러진 자리, 다시 한 번 수백 발의 살이 꽂혀 피에 젖은 땅 위에서 부르르 떤다.

마법사들이 진작 내려와, 군대와

함께 활약하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쥬라의 마법사들은 왜 군대와 함께 싸우지 않는 거지? 부대마다 한 명씩만 딸려도 훨씬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을 텐데. 〉〈아케인 하트를 갖고 태어난 놈은 자기가 선택된 인간이라는 사실에 쉽게 경도된다. 보조자로서의 자신 따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지. 〉매 순간마다 녀석이 떠오른다.

머리를 흔들어, 억지로 떨쳐내듯

싸옴에 집중했다.

둘, 넷, 여섯.

굳이 연합군을 도와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죽일 만한 가치가 있는 쪽이 아쥬라의 마법사들일 뿐이다.

일반병 1만을 죽여 봐야 빛 한 점 나오지 않으니까.

- 팟!

시체를 밟고, 중량을 실은 쉴드로 마법을 튕겨 내고, 화염에도 영향 따위는 받지 않은 상태로.

우측의 마법사 여덟을 베어 냈다.

내가 처음 그들이 기척을 죽인 걸 발견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도 내가 기척을 죽이고 접근하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 나타났던 마법사들 가운데 스무 명이 죽었다.

거기 맞선 연합군의 피해는 대략 1만 정도.

철인 한 기가, 마력을 소진하고 온몸이 화살에 꿰뚫린 마법사의 머리를 거대한 손으로 꽉 쥐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강렬하게 울려 퍼지며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 정도면. 별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이겼다!"

"마법사들을 이겼다!"

"아쥬라의 마법사들을 이겼다!"

"와아아아아!"

1만 대 20.

한 명이 오백을 살해했다.

그 가운데 내가 여덟을 죽였으니, 사실 교환 비율은 1 대 800이 훌쩍 넘는다.

그 교환비를 어떻게든 잊고 싶은 듯이 병사들은 동료의 시체 위에서 함성을 질러 댔다.

어쨌거나, 당장 수도를 지키러 온

아쥬라의 마법사들을 모두 죽였다.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거나 수도 따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본 마법사가 많았는지는 모른다.

추가적인 파견이 있을지 몰라도- 일단 수도 진입은 성공이다.

황실의 비역이란 곳은 뒤져 볼 수 있겠지.

최소한 눈앞에 있는 루-륨은 먹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 휘이이이

'하늘'에서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무심코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하는, 나른할 정도로 깨끗하고 부드러운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