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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화 아무 대가 없이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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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하늘에 비릿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남자가 비단옷을 입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이 허공에 천천히 떠다닌다.

'마법. 사?'

하지만 두 남자의 용모는, 오랜 세월에 걸쳐 비의를 연구해 왔다고 볼 수 없을 만큼 젊었다.

스물다섯 정도라고 하면 적당할 나이일까.

둘의 모습은 꽤나 대조적이다.

한 명은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라 봐도 좋을 법한 몹시 넓은 어깨와 탄탄하게 균형 잡힌 체구.

그 허리에 마치 칼처럼 지팡이를 늘어뜨려 차고 있었다.

왼쪽의, 다른 한 명.

그 역시 새하얀 피부와 흑채처럼 검고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을 가졌다.

분명히 육체적 활기의 최고점을 구가하는, 젊은이의 그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선명한 대조가 존재했다.

'만들어진 둣' 깔끔한 최고의 몸을 갖고도, 그 안에 흐르고 있는 것의 본령을 반영하듯이, 왼쪽의 남자는 어딘가 뒤틀리고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나하나로 보면 미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지만, 얼굴에 자리한 그늘과 뒤틀림을 보면 말 한 마디 섞고 싶지 않은 분위기를 뿜어내는 인간이었다.

짧은 적발의 남자는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아래를 바라봤다.

"화살 따위가 몸에 박히다니.

한심하고 초라하구나. 마법사라는 이름이 아까운 것들이야."

"킥킥킥킥킥.

기껏 아름다운 체형을 구부정하게 일그러뜨린 장발의 남자는 전장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졸아들어 있다, 실로 그런 표현이 적확했다.

그 안의 영혼이 졸아들어 있기에 저런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 저벅.

마치 그런 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단단한 평지를 걷는 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걸어간다.

날개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아이작에게 들은 바가 있다.

비행은, 마력 소모가 극히 심하다.

방패를 주워 포스 실드를 씌우는 것과는 천양지차의 효율이다.

세계의 관념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이며, 그만큼 마력을 감당하는 자는 극히 드물기에.

선대의 연구가 차곡차곡 쌓여서,

그 편의와 형태를 빌려 볼 수 있는 마력 구체화의 전형(오스노브)조차 확립되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개인의 역량.

매 순간 수십 명을 태울 수 있는 화염마법을 최대로 시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그 사실은 연합군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허공에 뜬 두 명의 젊은이가 동료들보다 늦게 도착한 낙오자라고 느끼는 걸까.

곳곳의 연합군 장교들은, 허공에 떠 있는 두 명의 마법사를 그다지 경외하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교환 비율이긴 했지만, 아쥬라에서 온 마법사 수십 명의 온몸을 화살로 꿰뚫고, 그 머리를 방금 터트려 죽인 참이다.

이것도 작은 반복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패잔병이다! 사격해라!"

장교들은 허공을 향해 단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사격 지시를 내렸다.

"네 친구들은 이미 다 뒈졌다고! 저 낙오병들도 죽여 줘라!"

그 지시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지시를 해야 옳을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지시를 전달할 만큼 연합군 수뇌부와 가까이 있지도 않다.

- 턱!

- 티티턱!

- 티티티티틱.!

일제히 시위를 놓는 소리와 함께 수천 발의 화살이 허공을 덮었다.

어디를 어떻게 나는 새라고 해도 꿰뚫릴 수밖에 없을 무수한 화살 장막이 전면을 향해 드리워졌다.

해가, 잠시 가려졌다.

그때, 청량한 바람에 낯선 광기가 덧씌워졌다.

부드러운 공기의 매질이 완전히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쳐라."

어깨가 딱 벌어진 남자가 허리에 차고 있던 길다란 지팡이를 강하게 휘 저었다.

- 파아아아악!

바람의 파도가 허공을 새까맣게 뒤덮는 화살비를 뒤집었다.

수천 발의 화살이 강제로 머리를

뒤집어 연합군을 향해 쏟아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방패! 방패!"

"방패를 올려라!"

- 터터터터턱!

단 한 사람에게 휘말린 화살비가 군대를 유린했다.

수천 발의 화살은 방패 사이로 파고들거나 노출된 발등을 찍었다.

얇은 방패는 그대로 관통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몸 전체를 가릴 만한 큰 방패가 없는 부대는 목이 뚫리고 심장이 뚫려 즉사.

그 자체로는 어떤 살상력도 없는 바람이, 단지 한 번 분 것만으로도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터무니없는 광경을 속절없이 바라봤다.

"기본도 안 된 버러지들 같으니. 저들끼리 해보라고 보냈더니 고작. 눈앞에서 벌어진 터무니없는 광경을 속절없이 바라봤다.

"기본도 안 된 버러지들 같으니. 저들끼리 해보라고 보냈더니 고작 2만 명도 못 죽이고 끝나 버렸군. 마법사라고 불리는 자라면, 적어도 정예병 천 명은 당해 내야 하거늘."

"흐흐흐. 그래도 내 탑 애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다고."

"꽁무니 빼는 것들을 키워 낸 게 자랑이냐."

"키우기는. 그냥 심부름꾼들이지. 그리고, 마법사의 기본은 잘 튀는 거잖아? 당연한 거 아니야?"

"그만 닥치고 슬슬 시작하지."

지금까지의 대화는, 최대한으로 발휘한 '탐지' 스킬에 잡혔던 것.

10만 명의 인간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던 것에 대비해.

- 자- 여러분! 거 굵지도 않은 화살 좀 박혔다고 신음 소리 그만 내시고 집중!

음성 증폭 마법인 걸까.

아니, 그것보다는 상위의 술수.

한 명 한 명의 귓가에서 똑똑하게 말하는 듯이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닿는 느낌.

킥킥거리는 숨결까지 생생히 잡아, 청자의 불쾌감은 극대화된다.

- 앞뒤! 좌우! 지금껏 생사고락을 함께한 여러분의 소중한 동료들이 선보이는 대집단 자해극! 모두의 성원에 힘입어, 10만 표 조기 매진!

아직 저 마법사의 의도를 파악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직감이 뛰어난 인간들은 벌써 무언가 흠칫하고 있었다.

기괴하게도 저 광담狂談이 마법의 영창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마디 한 마디가 뱉어질 때마다 주위의 마력이 변해 가고 있었다.

영창으로써 '전형'을 지나, 멋대로 그것을 지어낼 수 있는 경지라는 건지도 모른다.

공기를 구성하는 입자가, 매질이, 흔들린다.

- 여러분이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지옥 같은 고통! 자, 깊이 내쉬고, 마셔요!

- 휘이이이이익!

방패와 갑옷, 도검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의 몸이 들썩일 정도로 강한 돌풍.

거기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입자의 백색 가루가 퍼지기 시작했다.

무수한 백색의 가루가 분화하고, 분화하며 처음으로 덮친 범위는.

약 2천 명 정도.

그중에는 무심코 구부정한 흑발 남자의 지시에 따라 숨을 들이쉰 자들도 있었다.

반발심으로 숨을 참거나, 수상한 가루를 경계해 급히 수건으로 입을 막은 영리한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끄아아아아아!"

모두가 목구멍을 뜯어질 듯 잔뜩 부풀리며 비명을 질렀다.

전위 2천의 인간이, 일제히.

칼로 피부를 긁어냈다.

드러난 근육을 마구 찔렀다.

몇 번이고 내리쳐 제 뼈를 자르고 맨손으로 잡아 뜯었다.

물렁물렁한 부위부터 자기 자신을 발작적으로 분해해 갔다.

몸에 있는 모든 종류의 통각을, 한순간이라도 빨리 없애려는 듯한 몸부림이다.

- 우드득! 빠직!

연합군의 승리에 큰 축을 담당한 철인들은, 그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철갑도 백색 가루가 안쪽에 닿는 걸 막아 주지 못했는지 광기에 젖어서 날뛰기 시작했다.

수천 킬로그램을 가볍게 뛰어넘는 강철 기계에 깔린 인간들은 뼈가 바스러지고 내장이 터져 사방으로 튀었다.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의 두피를 칼날로 그어 대고, 팔다리의 피부를 발라내는 자들이 대체 어떤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인가.

그야말로 지옥 끝으로 치닫는, 흉악한 기분이라는 거야 둘도 없이 명확하겠지만.

근처까지 날아온 백색 가루가 얼음

송곳에 숭숭 뚫렸던 갑옷 안으로 들어갔지만, 나에게는 물론 어떤 효과도 없다.

뒤로 슬쩍 피했던 내가 우스워질 정도의 무반응.

하지만 군중에게 끼치는 효과는 절대적이다.

한차례의 살포.

그걸로 2천, 4천, 결국은 1만이 죽었다.

하늘에 고고히 떠 있는 학살자는 실험의 훌륭한 성과에 감탄이라도 한 건지, 둘도 없이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아하하하하! 장엄한 단체 자살! 작은 마을들에 풀어놓는 것과는 스케일 자체가 달라!

눈으로, 귀로, 코로 스며든 백색 가루에 발광하는 사람들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하지만 그런 광소에 한 줌 신경 쓸 여력도 없이, 연합군 병사들은 바지런하게 모든 신경을 물어뜯는 고통에 저며지고 있었다.

?- 절반 정도는 남겨 주기로 할까?

여기서 다 죽으면 단체 풍장이야. 그럼 곤란하잖아? 제국은 엄격히 풍장을 금지하고 있다고. 으하하하!

- 네가 대체 언제부터 법 같은 걸 신경 쓰고 있었느냐.

- 뭐야! 나는 안 지켜도 저 아래 여러분들은 꼭 잘 지켜 줘야지!

- 간만의 외출이 지나치게 즐거워 보이는군, '무죄'의 탑주 엘란드. 그렇게 좋으면 마탑에 처박혀 있기 보다, 처음부터 수도에 파견이라도 나오지 그랬나?

- 하하하, 틀리다고. 수도에서는 이런 대실험을 할 수가 없잖아? 전쟁이란 게 이렇게 즐거운 건지 몰랐다고.

음성 전달 마법을 굳이 해제하지 않고 나누는 역겨운 광담.

백색 가루가 퍼지지 않은 지역의 병사들에게 향하는, 또 다른 부류의 예비 가학이다.

경악에 잠긴 병사들에게 구부정한 남자는 허리춤에서 또 다른 자루하나를 풀었다.

- 아쉽게도 양이 부족했습니다만, 이번에는 꽤 넉넉히 준비했습니다! 이것이 저 '무죄'의 탑주 엘란드가 20년 동안 연구 제작한 광란포자, 이스카리옷! 여러분의 신경을 기분 좋게 찢어드립니다!

- 휘이이이이잉!

돌풍이 알뜰하게 백색 가루를 실어 날랐다.

녀석들을 위로 올려다봤다.

땅에서의 거리는 약 50미터.

뛰어서 칼을 휘두를 수는 없다.

줄곧 허공에 떠 있으면서도, 힘이 부족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화살은 말할 것도 없이 무효.

터무니없는 범위로 퍼지는 백색 가루 전체를 실드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숨을 쉰다면 당할 수밖에 없다.

11만의 병사 중에서 이미 3만에 가까운 인간이 죽거나, 미친 채로 죽어 가고 있다.

전위는 이미 괴멸.

버텨 낼 자신은 없다.

몸을 숨긴 채 도망가야 하나?

혹은 시시각각 전멸하는 연합군을 돕기라도 해야 할까.

하지만 어떻게?

지상에서 50미터나 위로 떠 있는 마법사들에게 칼은 닿지 않는다.

"도. 도. 도망쳐! 도망쳐라!"

상대가 얼마나 강하던지, 적어도 땅에 발만 닿는다면 무모한 돌격을 해 볼 수 있다.

일생에 걸쳐 스스로를 얽매 온 제정신을 성공적으로 내버린다면, 사람은 바윗덩어리나 고철 더미에도 돌격은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적은 하늘에 있다. 용맹스러운 자신을 죽여 달라고 돌격하는 것마저 불가능하다. 살해당하는 것도, 부딪쳐 깨지는 것도 철저히 적의 의중에 달렸다.

"도망. 도망. 쳐.

어떤 장교도 그 말을 한 병사를 질책하지 못했다.

오히려 하늘에 오연히 체류하는 그들의 적이, 남은 8만의 병사들을 향해 킥킥거리며 말했다.

- 어이! 그게 무슨 아쉬운 말이야!

이제부터 시작이잖아. 내 귀여운 손님들아. 그럼, 다음 선물을 드리겠 습니다! 이번에는 세 배!

강한 돌풍에 섞인 빼곡한 백색의 가루가.

마법사가 손에 든 자루에서 탈탈 털려 나와 퍼져 가고 있었다.

"퇴각! 퇴각!"

서로를 밟고 밟아 가며 연합군은 일제히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 가운데 바람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258화 아무 대가 없이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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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바다 위에서 제정신으로 서 있는 것은 오직 나 혼자.

- 휘이이이잉!

나는 하얀 가루를 날리는 바람을 반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 와중에도 만 명은 되어 보이는 인간들이 고통에 물어뜯겨 비명을 지른다.

상상할 수 없는 환각에 사로잡혀 자기를 찌르고, 상대를 찔러 가며 벌벌 떨며 발악한다.

고통의 최대화를 철저히 목표한 대량 살상 무기.

이것이. 마법사라는 건가?

마법사는 이렇게까지 터무니없는 존재여도 좋은 것인가?

[질풍 Lv. 5를....]

'마법 장전, 더블 캐스팅

[질풍 Lv. 5를 발동합니다!]

스무명의 마법사에게 흡수해서 레벨 5로 올라간 바람 마법에 다시 한 번 구조를 겹쳐 올린다.

이미 자연스러워진 이중영창.

마력 소모가 몹시 크다는 단점이 있지만 높은 지혜 수치 덕분인지 오히려 여유가 느껴진다.

거듭된 정수 흡수로 희귀 등급에 달한 질풍 마법은, 기존에 구축된 바람을 탐욕스레 타고 올라 폭풍에 가깝게 진화한다.

- 휘이이이이잉!

전장 전체를 뒤집을 능력은 없다. 하지만 한 점에 집중한다면.

- 피이이익!

허공에 떠 있는 두 명의 마법사를 노리고, 죽음의 가루를 가득 안은 풍창風槍이 날카롭게 던져졌다.

- 히에에에엑!

가루가 위쪽으로 올라오려 하자, 두 마법사가 깜짝 놀라며 뒤로 한참을 물러갔다.

고통 속에 죽은 수만 명의 시체 위에 내가 서 있었고, 두 마법사는 허공에 떠서 나를 노려봤다.

하얀 가루를 뿌리던 흑발 남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눈빛만으로 나를 찢어발길 기세.

음성마법이 시전되는 상태에서, 꼴사나운 비명을 수만 명에게 모두 들려줘 버린 것이다.

"이. 이이이.

생각보다도 더 분노하고 있다.

안전한 곳에서 킥킥거리며,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이 상황을 통제하던 절대적 입장이 흔들려서일까.

"호오. 전사가 있었나."

바람만 쏘아 내던 다른 마법사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백색 가루도, 그걸 나르던 바람도 모두 멈췄다. 두 마법사의 시선은 내게 집중됐다.

바람에 거꾸로 걸어 나간 건 역시 자살에 가까운 행동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번 생에 그렇게 큰 미련은 없다.

이들과 한번 전신전령으로 싸워

본다면.

내 실력을 가늠할 수 있겠지.

발을 돌려 도망간다 해도, 어차피 저들에게 발각당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쓰러지면 최소한 4만 명의 시체 위에 함께 쓰러지는 것.

적어도 외로울 일은 없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흑발의 남자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탐색(시력의 헌신)."

"속박(돌의 농도)."

"약화(취약점의 순도)."

말이 되지 않는 기괴한 글자들이 허공에 떠오르며 나를 구속했다.

장난처 럼 흩뿌려지는 삼중영창.

이 세계는, 나보다 저 구부정한 남자의 호소를 훨씬 잘 들어주는 모양이다.

"터져라."

- 콰광! 콰광! 콰광!

짧은 적발의 남자가 부린 바람이, 내 근처로 모두 몰려들어 갑옷을 타고 흘러내리듯 폭발했다.

'포스 실드. 더블 캐스팅.

드워프가 제작한 풀 플레이트에 두 겹으로 포스 실드를 두른다. 호화로울 정도의 방어.

하지만.

"계속 터져라."

- 콰과과과과과광!

조금의 성의도 없는 언령言雲에,

나를 둘러싼 마력은 지독할 정도로 폭발을 거듭한다.

속박을 건 채로, 사방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폭발인 탓에 날아갈 곳도 없다.

발이 묶인 채로, 사방에서 치열히 공격을 당하는 형태.

한 번 한 번의 폭발이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다.

성급한 돌격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다.

어차피 이번 생은 끝.

다음 생을 준비해야 한다.

시작하는 곳은 에라스트.

검주는 아직 무리겠지만, 그곳의 유령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레이 커크를 살해하면 나타나는 '내사과장'을 처리하고, 루비아를 정말 에라스트의 영주로 앉혀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걸 여기서 판단해야 한다.

나는 허공에 뜬 인간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는. 아쥬라의 탑주들이냐?"

"그렇다."

내 주위에 폭발을 일으키고 있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무죄'의 탑주 엘란드.

나는 '천둥'의 탑주 화인 알 굴."

"너희에게 물어볼 게 있다."

"얼마든지."

녀석이 슬며시 폭파를 느슨하게 풀어 줬을 때였다.

[투창 Lv. 3을 발동합니다!]

- 째애앵!

나는 구부정한 자세의 남자에게 냅다 창을 내던졌다.

최대한의 힘을 던져진 창은 수십

미터의 거리가 없는 것처럼 날아갔다.

"이런!"

- 까앙!

하지만 꼿꼿한 남자가 지팡이를 마치 검처럼 휘둘러 창의 가운데를 힘껏 쳐냈고, 창은 빙그르 돌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져 땅에 꽂혔다.

애초에 투창이 목적은 아니었다.

'포스 실드. 더블 캐스팅

나는 갑옷에서 완전 해제한 포스 실드를 허공에 계단처럼 전개해서 앞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질주.'

- 팟!

잿빛 기사의 결계에 갇혀 있을 때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놀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원론적으로, 누구나 계단 두 개만 있으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놈들에게 도전한 것은 아니다.

[해당 행위를 '곡예'로 판정.]

[체술 Lv. 7이 보정됩니다.]

[아드리안 무투武圖 Lv. 2가 추가 보정 됩니다.]

[특전: 암흑 발동.]

- 공격력이 35% 증가합니다.

[검기 Lv.3 최대출력!]

[산성 Lv.5.]

[기합 Lv. 3"?.]

[공격력이.]

'발도.' 가볍게 쳐진 기본 실드를 향해, 모든 스킬을 중첩한 일섬-閑.

- 화악!

걸렸. 나?

묵직한 감각과 함께 새빨간 피가

허공에 솟구쳤다.

"끄아아아악!"

- 툭.

아쉽게도.

걸려든 건 구부정한 남자의 한쪽 다리뿐이다.

"흑, 끄흐흑. 히힉. 헤헤헤. 으하하하하.!"

목을 노려 칼을 휘둘렀지만 힘껏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니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다.

- 과과광!

맑게 갠 하늘에서 천둥과 함께 무거운 벼락이 떨어졌다.

내가 아니라 아래를 노리는 공격.

강렬한 벼락에 포스 실드는 즉시 흩어졌고, 나는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시체로 가득한 땅으로 다시 추락했다.

떨어진 즉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마법사들은 허공 100미터.

칼로 벤 순간, 붉은 머리 남자가 구부정한 남자의 뒷덜미를 낚아채 위로 올린 모양이었다.

- 휘이이잉.!

붉은 머리 남자는 이미 바람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다.

준비는 만반.

이제 녀석들에게 도달할 방법은 없다. 끝인가.

- 콰광!

주위의 마력장을 적에게 완벽하게 장악당한 상태.

더 이상 쉴드를 만들어 낼 수조차 없다.

- 콰광! 콰광! 까강!

드워프가 만들어 준 갑옷이 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하얀 뼈가 드러났다.

"호오.

연합군에 의해 발각되어 버릴지도 모르지만, 이미 제정신을 가지고 이쪽을 볼 정도의 녀석은 없다.

모두 필사적으로 도주할 뿐.

거리도, 방향도, 정신도 나를 보고 있을 만한 것은 아니다.

"기괴한 존재로다. 리치도 아니고, 죽음의 기사도 아니고. 인간들과 함께 싸운다니?"

- 뿌드득!

금이 간 뼈 곳곳이 부러진다.

체력 수치가 내려간다는 상태창이 연달아 눈앞에 떠오른다.

끝은 결국 시간문제.

- 콰광!

폭발과 함께 갈비뼈 두 개가 다시 부러진다.

허공이 폭발하고, 제 주인을 벤 주위의 무기들은 춤을 추다 바닥에 꽂힌다.

쇄골에도, 골반에도 쩍쩍 실금이 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져갈까."

"내 다리를 가져간 놈이야. 내게 넘기라고."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는 다리로 생색내지 마라."

"대가를 치르면 되잖아."

"뭘로?"

"뭐든지. 데려가서 몇십 년이고 실험체로 사용해 봐야겠어."

팔뼈도, 다리뼈도 단 한 치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땅으로 내려온 붉은 머리 남자가, 지팡이에 마력을 실어 내 목뼈를 잡아 들려 할 때였다.

거부감에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대부분의 뼈가 부서진 상태였다.

손짓은 마치 첫 번째 생의 어설픈 스킬들처럼 허공을 갈랐다.

붉은 머리 남자는 지팡이에 힘을 실어 내 두개골을 겨냥했다.

"한 대 맞고 가야겠군."

- 부응!

강한 타격 마법을 실은 지팡이가 머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순간.

- 펑!

〈천둥〉의 탑주 화인 알 굴은 강한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물러섰다.

"마. 말도 안돼.

"뭐야? 왜 그래? 웬 헛짓이야."

"때릴 수가. 때릴 수가 없다."

"뭔 헛소리야? 백 년 넘게 살더니 노망이 들었나. 아무것도 없잖아?"

"아니. 안 된다."

"장난치는 거 아니야?"

마법 병기 이스카리옷의 개발자, 〈무죄〉의 탑주 엘란드는 공중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탑주는 완전히 무력해진 내 앞에 서서, 지팡이를 들고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 ?부.

내리치던 지팡이가 허공에서 다시 위로 올라갔다.

"뭐야, 이계?"

마치 실 달린 장난감 인형을 누가 조종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인형 자리에 아쥬라의 탑주가 들어간다면.

대체 누가 그런 자들을 인형처럼 조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였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질 둣, 아름다운 미성美聲이 텅 빈 허공에 또렷이 울려 퍼졌다.

"안 그래도 머리 나쁜 녀석이다. 거기서 더 때리면 지금 누구더러 그걸 감당하라고 하느냐?"

"뭔. 크헉!"

낯선 목소리의 등장에 허공으로 솟구치려 했던 두 남자가 곧바로 땅 아래로 처박혔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숲 쪽을 향해

탑주들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로 거의 동시에 말했다.

"혹시. '뱀'이십니까?"

숲속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경멸이 가득 들어찼다.

"서클의 말석도 못 들어갈 것들이 탑주라니. 무능한 탓에 뱀 새끼의 힘까지 빌리려 하는 거냐?"

"무슨.!"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난 두 명의 탑주가 이를 악물고 제 지팡이를 앞으로 겨눴다.

그 끝에는 그 어떤 까마득히 높은 기준이라도 우습게 충족할 것 같은 흑발 흑안의 미남이 서 있었다.

가만히 숨만 들이쉬어도 주위를 어지럽게 만들 만한 미남이 앞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무죄의 탑주 엘란드는 그 표정을 보자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신은 지금 당장 자살해야 하는 죄를 지은 게 아닐까?

"저. 뭐 때문에.?"

"홀리지 마! 매료다!"

하지만 엘란드는 이미 동료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미남은 그걸 왜 모르냐는 둣이 짜증을 냈다.

"머리색이 나랑 같잖아."

- 화르르!

엘란드의 긴 검은 머리에 새까만 불꽃이 피어올랐다.

"흐. 흐거헉!"

엘란드는 어찌나 놀랐는지 항상 구부정한 허리마저 쭉 펴고 머리에 붙은 불을 황급히 꼈다.

하지만 이미 홀랑 다 타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힘을 합쳐라! 저게 신이든 뭐든 죽여 버린다!"

정신을 차린 두 탑주가 지팡이를 맞대는 순간, 착 가라앉은 표정의 미남자는 간단히 맺은 수인만으로 그 마력을 흩어 버렸다.

"말도 안 돼.

"놀아 줄 수도 있지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나를 제약한 여신들을 원망해라."

- 푹!

미남자는 마탑주들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아기에게서 사탕 빼앗는 것보다

쉽게 지팡이 둘을 빼앗아 든 뒤, 두 마법사의 두개골에 서로 교차해 꽂아 넣었다.

아쥬라의 이름 높은 마탑주 둘은 선 채로 눈을 뜨고 죽었다.

미남자는 지팡이를 뽑았다.

누렇게 흐르는 뇌수를 획 바닥에 뿌려 내고 계속 쓰러져 있던 나를 보고 말했다.

"시간 없다. 11만 명 다 죽었으면 더 오래 현신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중간에 끼어들었어? 쯧쯧쯧."

의식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정말? 나 본 적 없다고? 천천히 다시 한 번 봐라."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였다.

수많은 자의 철천지 원수일 것 같았고, 원수를 죽이겠다며 칼을 품고 간 협객이 그 기운에 홀려서 충성을 맹세할 것 같았다.

"너는.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분명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주 흐릿하게.

마치 꿈속에서처럼 본 적이 있는 녀석이다.

"말파스와의. 계약.

내 손목을 잡고 까마귀에게 인도했던 남자다.

"이제야 알아보니 서운한데."

259화 아무 대가 없이 (23)

***************************************************

까마귀 인형 안에 갇혀 있어야 할 아이작이 인간의 형태로 내 앞에 현신해 있다.

여신의 저주를 받아서 힘이 봉인 되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이작이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엇다.

지금까지 온갖 것을 겪으면서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탑주 두 명을 한순간에

간단히 살해하다니.

이게 녀석의 진짜 힘이란 말인가? 쓰러진 채 녀석을 멍하니 보면서 물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 거지?"

아이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피식 웃으며 내 몸에 손을 댔다. 녀석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홀러나오더니 갈라졌던 몸 곳곳이 다시 붙기 시작했다.

[황혼의 축복] - 오늘 하루가 지날 동안 행운 수치가 상승합니다.

[계절풍의 선물] - 풍향이 한동안 당신에게 호의적으로 변합니다.

[평온한 환상] - 모든 정신 지배 로부터 5의 저항을 얻습니다.

[제마의 검] - 마법사에게 가하는 데미지가 중가합니다.

[그림자 차폐] - 전투 중에 적이 당신을 놓칠 확률이 증가합니다.

몸에 활기가 돌았다.

"탑을 떠난 거미들에게 당하다니, 한참 멀었어. 그래도 포스 실드를 활용한 공격은 제법이었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곧바로 그런 생각을 한 거냐?"

사실은 2년 동안 결계 안에 갇혀 있으면서 할 게 없어서 연구하던 거였다.

물론 그 이야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죽은 탑주 두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11만을 단 두 명이서 학살할 수 있을 것 같던 괴물들은 아이작에게 머리가 뻥 뚫려 즉사했다. 녀석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글쎄. 주인공이 힘 좀 숨기는 게

이상하냐?"

"농담은 그만둬라. 인간 병사들을 제물로 바쳐서 힘을 얻은 건가."

아이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식. 내가 인간 3만을 제물로 바쳤다고 해도, 내 힘을 잠시나마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로 되지 않는다."

"다 죽였어야 한다는 소리냐."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늘었겠지. 하지만 11만을 바쳤다고 해도, 보조재일 뿐이다. 힘을 더 얻기는 했지만. 공양과 주술은 다르다."

"무슨 말이지?"

- 쩌적.! 쩌어적.!

아이작의 몸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말파스의 힘으로 갈라지는 몸을 감쌌다.

그 기운이 잠시 몸의 파괴를 억제 하기 시작했지만, 다시 찢어지듯 피부 곳곳이 갈라지며 투명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술이 끌어다 쓰는 힘은 인과. 마력이나 신력과 달리 우열 관계가 반드시 확립된 것이 아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 파직.! 파지직.!

수십 년을 가뭄에 노출된 논처럼 쩍쩍 갈라지는 육체는 피 한 방울 새어 나오지 않고,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듯 그저 투명하게 비쳤다.

"말할 힘이 남았으면, 네 몸부터 어떻게 해 봐라!"

루비아를 죽이고 나를 기만했지만 몸이 터져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최후의 유언이라도

남기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 몫으로 지불하는 것은 객관이 아닌 주관의 영역. 나는 산 제물로 백만을 바치는 것보다. 스스로를 희생하는 게 훨씬 더 큰 인과율을 당길 수 있게 되어 있다."

"희생이라고?"

"내가 너를 위해. 수백 년 동안 참아 온 삶을 이번 생에 아무 대가 없이 희생했다는 거다. 터무니없는 그 인과가. 내가 잠시 이런 힘을 발휘하게 만들 수 있었지."

- 쩌엉!

아이작이 말파스의 힘으로 억지로 굳히고 있던 기운이 흩어지듯 깨져 버렸다.

- 쩌엉! 쩌엉! 쩌엉!

몸을 이루는 힘의 반 정도가 이미 파편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버렸다.

"대체. 왜? 뭘 위해서?"

- 퍼엉!

아이작의 얼굴의 반이 날아갔다. 애초에 피와 살로 만든 현신現身이 아니었던 둣, 뇌수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입이 반쯤 날아간 아이작의 뜻이 머리속으로 직접 전달됐다.

〈만약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우리 좀 더 서로 솔직해지자고. 〉아이작은 남은 한 손으로 내 칼을 세운 뒤, 그 위에 엎어지면서 몸을 보호하던 기운을 풀었다.

- 광!

[말파스의 대제사장 살해]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사전에 치밀하게 설정된 인과에 의해 마왕의 저주가 당신을 향하지 않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 무슨?

아이작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칼날에는 항상 함께하던 까마귀 인형이 뚫린 채 매달려 있었다.

"솔직해지자니. 그게 무슨.

칼에 뚫린 까마귀 인형을 멍하니 바라봤다.

뚫린 인형에서 은빛 액체가 칼을 타고 주르륵 홀러내렸다.

드디어 초록빛이 사라진 아이작과 두 탑주의 시체가 발치에 놓여 있었다. 흡수한 스킬들이 빼곡이 표시된 상태창을 바라봤다.

천둥의 탑주에게 흡수한 스킬들이 먼저 위에 떠 있다.

[뇌전 Lv.5(new!)]

[특성: 마비 (new!)]

- 뇌전을 맞은 대상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특성: 확산(new!)]

- 주변으로 조금 더 원활히 전격이 뻗어 나갑니다.

[특성: 연쇄(new!)]

- 뇌전은 적을 옮겨 다닐 때마다 위력의 폭이 감소합니다. 하지만 이 특성은 감소폭을 줄여 줍니다.

[특성: 마력 파괴 (new!)]

- 뇌전에 적중당한 적이 마법사일 경우, 마력을 태우며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스킬 레벨 업으로 인해 단순히 그 위력만 올라간 것이 아니다.

온갖 특성이 붙었다.

마법으로 적 하나가 죽을 때마다 번개 폭파가 일어나거나, 뇌전이 적중할 때마다 내 체력이 회복되는 둥의 터무니없는 스킬도 있었지만 에픽 단계라 흡수는 불가능했다.

정수 흡수 스킬 경험치는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3단계에서 끝인지도 모른다.

[마법 간파 Lv.3(new!)]

- 숨겨진 마법의 힘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 현 단계에서는 속성 파악까지만 가능합니다.

[중첩 증폭 Lv.2(new!)]

- 같은 마법을 중첩할 경우 위력이 1.5배 증가합니다.

이중영창과 함께 사용한다면 몹시 유용할 것 같은 스킬이다.

[마력 왜곡 Lv.1(newl)]

- 당신에게 적대하는 미법이 다시 한 번 마법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 마법 공격이 일정 확률로 무효화 되거나, 마법 공격으로부터 받는 피해가 감소합니다.

- 레벨이 올라갈수록 무효화 확률과 피해 감소 확률이 증가합니다.

이 정도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마법사를 자처해도 될 수준이다.

게다가 무죄의 탑주에게서 흡수한 능력도 만만치 않다.

[마도 화학 Lv.3(new!)]

- 물질의 근본적인 요소를 추출, 변형, 결합하는 것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독안■眼: Lv.3(new!)]

- 모든 재료에서 유독 성분을 쉽게 판별할 수 있게 됩니다.

[식물 재료 채집 Lv.2(new!)]

- 나무, 풀 등에서 필요한 물질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할 경우, 〈접붙이기〉를 통해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동물 재료 채집 Lv.1(new!)]

- 짐승이나 새, 물고기 따위에서 필요한 물질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을 올릴 경우 체계적인 〈학대〉를 통해서 추출되는 성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균류 채집 Lv.Knew!)]

- 버섯, 이끼와 같은 균류에게서 필요한 물질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을 올릴 경우 식물이나 동물에 해당 균을〈배양〉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재료 제작 Lv.Knew!)]

- 각종 재료에서 채집한 성분의 형태를 안정, 변환시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할 경우〈영약〉제작이 가능해집니다.

영약의 극치라면, 후작이 가지고 있던 엘릭서 같은 물건이겠지. 하지만 일단 내가 흡수한 스킬로 쓸 수 있는 건 독 종류인 듯하다. 흡수한 건 독안毒眼의 권능.

약효를 알아보는 건 없다.

일단 재료가 뭔지 알아보고 나야 추출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독만 있어도 준수하다.

푸르손의 추종자인 뱀에게 이미 세 가지 독 스킬을 흡수하기는 했다. 하지만 모두 힘을 소모해야 하는 액티브 스킬.

무죄의 탑주에게 흡수한 능력을 사용한다면, 녀석이 11만 군대를 상대로 보인 것 같은 간편한 대량 학살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단순히 살해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 습득한 화학 지식은 나에게 이것들이 인간을 미치게 할 수도, 환각을 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가루를 배양할 수도 있다.

아직은 한참 먼 이야기지만.

다음은, 아이작이다.

[주술 지식 Lv.5](new!)

- 다음 개념을 이해합니다.

- 응보(초급), 징크스, 악의(초급), 원념(초급), 빙의, 죄의 증거, 망상.

[결계 지식 Lv.5](new!)

- 다음 개념을 이해합니다.

- 이중결계, 결계압축, 결계침식, 결계해방, 허위모사.

[전술(지상) Lv.9](new!)

- 우회기동, 포위섬멸, 기마 돌격, 사선 대형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아집니다.

- 타오니어 원형진: 기마궁수의 일격일탈-擊-脫을 익혔습니다.

- 코드토커의 금언: 철인 운용의 편대전술을 익혔습니다.

- 네오 피델리티: 각개격파의 황금률을 익혔습니다.

놀라운 지식들이 속속들이 나에게 동화되고 있었다.

스스로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지식들.

차분히 정리하는 데만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아이작에게서 흡수할 수 있었던 스킬은" 지식 외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이작에게 스킬을 흡수하려 할 때를 회상했다.

[주況: 기울어진 인과]

- 당신이라면 상대를 저주할 때, 무덤 두 개를 파 둬야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당신은 멀껑하게 잘지낼 거고, 상대는 무덤도 없이 비참하게 객사할 테니까요.

- 인과의 운동장을 상대 쪽으로 완전히 기울입니다. 저주는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설명만 놓고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흡수가 저지된다는 말과 함께 빛을 몸 안으로 빨아들일 수 없었다.

모두들 지나치게, 등급이 높다.

[주況: 동족혐오]

- 상대에게서 자신과 같은 부분을 깎아 낼 때까지, 인과의 실을 한층 더 쉽게 당길 수 있게 됩니다.

뭔지 알 수 없는 다른 것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빛은 내 몸 근처에 머물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에픽 등급입니다. 이 권능을 흡수할 수 없습니다.]

[영혼 귀속입니다. 이 권능을.]

[영혼 귀속입니다. 이 권능을.]

[측정할 수 없는 등급입니다.]

사실상 지식 외의 '힘'을 제대로 빼먹을 수 있던 건 탑주 두 명.

어쨌거나, 이 정도라면-

새롭게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인 느낌이다.

남은 건 하나.

나는 까마귀 인형에서 흘러나왔던 은빛 액체를 바라봤다.

거꾸로 세워 놓은 상태라, 아직은 루-륨이 흘러나오지 않고 아이작 안에 담겨 있다.

이걸 흡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다음 생'의 아이작은, 분명히 큰 영향을 받게 될 거다.

레나는 내가 회귀하기 전에 루-륨 여덟 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과거까지 개변.

마지막에 봤을 때의 신분인 T&T 지부장을 훌쩍 뛰어넘는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세계 변혁의 질료.

이 까마귀 인형에 담긴 루-륨을 모두 흡수하느냐, 보존하냐에 따라 아이작의 다음 생은.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나는 결정을 내렸다.

- 쉬이이이이이익!

은은한 은빛이 내게 스며들면서 허공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종족 판명.]

[보유 스킬 판명.]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다음 직업이 추가 해제됩니다.]

- 리치 Lich.

260화 너희는 모래처럼 (1)

***************************************************

당황스러웠다.

마법과 관련된 전직이 생길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칼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황실의 비역에서 루-륨을 찾아서 전직하더라도, 기사 따위로 전직할 생각이었는데 리치라니.

생각해 보면, 방금 전 어마어마한 마법사 스킬을 흡수한 덕에 전직 가능 직업이 추가 해제된 듯하다.

일단 리치 전직의 장점을 차분히 살펴보기로 했다.

[리치 Lich(희귀)]

그에게 죽음은 입는 옷이고 항상 두르는 띠와 같습니다. 그의 발은 악한 일을 저지르려고 치달으며, 손은 사특한 계교를 꾸미고, 입은 정의를 비웃습니다.

- 리치는 강한 마법사가 인간성을 이끼처럼 지워 버리고 오직 힘만을 쫓을 때 나타나는 한 형태입니다. 자신을 리치로 만드는 데는 최소한 천 명 이상의 제물이 필요합니다. 조금 고전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냉기 마법을 원한다면 리치는 몹시 탁월한 선택입니다.

- 종족, 스킬 수치, 지혜 수치가 충족되어 전직이 해제되었습니다.

그 아래로 빼곡하게 직업 특전이 나타났다.

[특전: 전직 시 자동 취득합니다.]

- 1. 타락

선업을 가진 상대를 지정합니다. 해당 상대의 성향이 악으로 기울어질 경우 [타락] 판정이 주어집니다. 성공적으로 타락시킬 경우 상대는 당신에게 철저히 종속됩니다.

- 1. 강탈

손이 닿는 대상에게서 강제로 생명력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냉기 속성에 저항이 없는 상대는 저절로 마비될 수 있습니다.

- 1. 고통

당신은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대신 당신의 제물들이 강한 고통을 느끼는 만큼, 당신의 지혜 수치는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 1. 파열

상대를 아래에서 위로 관통하는 뼈를 소환합니다. 관통이 완벽하게 이루 어질 경우, 일시적으로 다음 마법의 치명타 확률이 상승합니다.

- 1. 냉기

당신은 그 존재만으로도 주위를 서늘하게 만듭니다. 당신 주위에 냉기 파장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얼어붙은 상대는 당신에게서 추가 피해를 받게 됩니다.

[페널티: 해당 직업을 유지하는 동안 지속됩니다.]

- 1. 선업을 쌓은 인간을 하루에 하나씩 희생시켜야 합니다. 희생시 키지 않을 경우 체력이 영구적으로 하락합니다.]

시스템이라는 게 우습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리치는 마법사가 인간을 버리고 되는 직업이다. 인간을 버렸는데, 직업 설명은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 중심적이다.

누구더러 보라고 하는 건지 싶은 묘한 기분이 든다.

어쨌건 리치는 직관적으로 슬쩍 봐도 준수한 직업이다.

그야말로 인간이 규정한 악.

격퇴해야 할 사도邪道의 무리.

그런 환상을 모아 놓은 것 같은

직업이다.

하지만 권능만큼은 당연히 몹시 매력적이다.

게다가 괄호 안에 있는 희귀 직업 이라는 말이 시선을 끈다.

검사나 기사, 사냥꾼 같은 것보다 숨겨진 힘이나 성장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이야기다.

매일 한 명씩 인간을 살해한다니 간단하지 않은 조건이지만, 기꺼이 선택할 가치가 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전직한다."

그때 였다.

- 띠링!

[루-륨이 부족합니다.]

또 이 현상인가.

생각해 보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저번과 같은 현상.

리치Lich라는 직업의 전직 권한이 풀린 것뿐.

정보가 들어온 것에 불과하다. 까마귀 인형에서 빼앗은 액체로 실제 전직은 할 수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듯 마법사의 지팡이 두 개를 차분히 챙겼다.

스무 개가 넘는 지팡이가 전장에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전부 하나씩 챙길 여유는 없었다.

두 탑주의 것이 압도적인 가치를 갖고 있겠지.

감정 스킬이 없는 탓에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부패의 줄기]

지팡이 옆에 새겨진 이름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소유자의 구부정한 자세만큼이나 이리저리 비뜰어진 녀석이다.

길이는 140센티미터 정도.

마치 나무의 뿌리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얽히고설켰다. 디자인이 아닌, 재료의 형태를 그대로 살린 것처럼 보였다. 재질을 알 수 없는 몇 개의 링이 중간중간에 끼워져 있었다.

- 스응.

가볍게 휘두르자 음침한 소리가 허 공에 울려 퍼졌다.

독이 나오는 장치라도 있나 싶어 이모저모로 뜯어보았지만, 특별히 여는 방법을 찾기는 힘들었다.

다음은 그보다 훨씬 더 긴, 160센티 미터에 달하는 지팡이였다.

검처럼 허리에 차고 있던 지팡이.

땅이었다면 바닥에 질질 끌려서 불편했겠지만, 지팡이의 소유자는 상공 50미터에 오연히 떠 있었기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다음은.

[달빛축성]

다른 탑주의 지팡이다.

곧게 뻗은 단순한 형태였다. 가죽 손잡이 위의 커다란 링은 레이피어 같은 느낌조차 풍겼다.

나무 안쪽의 특별한 금속은 굳이 탐지 스킬을 쓰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스릉.

천둥의 탑주가 뽑지도 못한 얇은 블레이드가 드러났다.

새로 드러난 칼날 아래의 삼각형 보석이 우아한 패턴을 만들었다. 은빛 칼날이 광원 없이도 스스로 빛나고 있다.

그리고 칼자루에는,

더듬더듬 읽을 수 있는 고대어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트로핀 나냐우에게 흡수한 Lv. 3의 고대어가 발휘됐다.

"린. 트. 부. 름?"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존재에게 들은 단어를 마주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

처음 죽어 가는 기스-제-라이에게 그 단어를 들었다.

이후 아이작이 해 준 설명으로, 가장 강한 용종種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용.

이미 멸망한 종족이라고 했다.

용의 거처에서 찾은 지팡이라도 되는 건지, 아니면 천둥의 탑주인 화인 알 굴이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모른다.

어쨌거나.

보관할 가치는 차고 넘친다.

지팡이 두 자루를 등에 묶었다.

부서진 까마귀를 바라봤다.

어둠보다 새까만 까마귀의 잔해가 햇볕에 짙게 말라 가고 있었다.

어둠의 향香이 짙어지는 착각마저 일어난다.

온갖 주술을 사용하고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조언을 하며, 처음부터 나를 속였던 까마귀는 거짓말처럼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특별해 보이는 재료도 없이, 그저 부서진 채 버려져야 할 쓰레기밖에 남지 않았다.

잠시 바스러진 날개를 바라보다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전직은 가능하다.

예전에 미뤄졌던 세 개의 선택이 자신을 선택하라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검사. 기사. 사냥꾼.

짧은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전직을 미루고, 루-륨을 흡수한 뒤 리치나 다른 직업으로의 전직을 하는 방안도 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경험해 보았지만 제국 수도는 마경 그 자체. 어디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니다.

일단 지금 이 순간 최선의 무장을 갖추고 나서 진입해야 한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허공에 떠오른 반투명한 메시지에 손을 뻗었다.

- 띠링!

[전직을 시작합니다.]

[선택한 직업: 해골 기사]

선택은 간단하다.

원거리 무기를 쓰는 것도 아니다. 결국 선택지는 검사와 기사 중에 하나로 좁혀진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강해지는 건, '선禪'이나 '깨달음' 따위의 특전을 가진 검사보다는 기사였다.

- 우드드득!

- 우득! 끄드드드득!

전신의 뼈가 부러지고, 뒤틀리고, 다시 한 번 맞춰지고 있었다.

척추부터 가슴우리, 팔다리 뼈대와

심지어 두개골까지 완전히 새롭게 구성되고 있었다.

- 끄드드드득! 빠직!

통각이라는 게 있는 녀석들이라면 수백 번은 넘게 기절했을 테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뼈가 꺾이고, 다시 구성되는데도 당연하게도 그냥 좀 개운한 느낌만 들고 말 뿐이다.

한참 뼈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동안 묵은 건지 회색이 된 햇가루가 아래로 부스스 흘러내렸을 때였다.

- 띠링!

[해골기사로 전직했습니다.]

[2차 직업입니다.]

[레벨 업 시 올라가는 스탯이 2로 증가합니다.]

[골격이 올바른 형태로 구성되며,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스킬: 지정 보호를 습득합니다.]

[특전: 무장을 습득합니다.]

[특전: 기동을 습득합니다.]

[특전: 전투 전문가를 습득합니다.]

"이건.

전체 능력치의 퍼센트 상승. 전직이라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엄청난 보상을 안겨 주고 있었다.

대체 지금까지도 전직을 안 하고 뭘 한 거지 싶은 생각마저 든다. 후회라고는 한 톨도 되지 않았다.

몸은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야말로 최적화된 느낌.

레벨 업을 했을 때 느끼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느낌이었다.

"?"이건가."

낯선 성취감이 가슴을 뻐근하게 메웠다.

기사로의 전직은 성취했다기보다 제시된 것에 가까웠지만, 존재의 절정에 이르는 것 같은 체험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진짜였다.

한순간의 폭발적인 스탯 상승에 의한- 새롭게 태어난 듯한 황홀함.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킬: 해골마 소환을 습득합니다.]

[현재 능력치를 환산 중.]

[영웅급 명마까지 가능합니다.]

[전설의 주인공인 설화급, 별도의 신격이 부여된 신화급을 제외하면 모든 말을 당신을 위해서 강제로 일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애초에 설화급, 신화급 말 따위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지금까지 본 가장 강한 말은. 레안드로 후작이 아꼈던 거만한 흑마 정도인가.

어쨌건, 지금은 아쉬운 대로 여기 있는 말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나는 수만 명의 시체가 깔려 있는

전장으로 걸어갔다.

눈을 뒤집고 입에 피거품을 물며 자해한 시체의 바다에 멀쩡히 죽은 말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단념하기는 싫다.

수도에 들어가기 전이라면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았다.

'질주.'

- 팟!

연합군의 시체를 아예 다 지나서, 아이작의 작전대로 제국군을 포위 섬멸한 붉은 여우 평원을 향했다.

2만 기병대의 총대장이 타던 녀석 이라면. 그럭저럭 쓸 만하겠지.

오스칼의 시체가 어디 있었는지는 기억난다.

"소환."

습득한 스킬은 직관적인 사용이 가능하다.

- 스스숙.

시체에서 피와 살점이 연기처럼 떨어져 나갔다.

뼈와 안장, 갑옷밖에 남지 않은

말이 푸른 눈빛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희귀 등급의 해골마를 소환하셨 습니다.]

[충성도: 낮음]

- 히히힝

썩 반가워하지는 않는 건가.

주인을 죽인 걸 알아보는 건지도 모른다.

그때 였다.

[해골마가 무의식적으로 다정했던 전 주인을 그리워합니다.]

[그와 비슷한 면모를 보여 준다면 해골마의 충성도는 더욱 올라갈 것입니다.]

오스칼과 비슷한 면모라.

외모를 흉내 낼 수는 없고.

근처에 놓인 긴 마상 랜스 하나를 주워서, 창날에 검기를 불어넣고 강가에 있는 바위에 던졌다.

두 다리로 서서 던지긴 했지만, 분명히 오스칼에게 흡수했던 마상창술의 응용.

창은 그대로 바위 안에 깊이 박혀 파르르 떨렸다.

이런 거라도 흉내 내 줘야지.

- 히힝!

막 일어난 해골마가 그걸 보고는, 내 쪽으로 다가와 올라타기 편한 자세를 취했다.

[해골마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낮음 - 보통]

괜찮은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대로 남아 있는 안장에 가볍게 올라탔다.

[특전: 조련(리가 적용됩니다.]

높은 승마 레벨에 이어, 특전까지 적용되자 녀석이 위에 올라탄 나를 한층 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충성도 상승 중.]

그 모든 걸 끝낼 때까지도 시체로 가득한 전장에는 까마귀 한 마리 맴돌지 않았다.

무죄의 탑주가 뿌린 백색 가루를 알아보는 건지도 모른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가볍게 말을 몰아 그대로 수도를 향해 움직였다.

건국된 이후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다는 제국의 수도.

발리스타나 투석기의 공격 따위는 웃으면서 튕겨 낼 정도로 단단하고 두꺼워 보였다.

도시 전체를 두른 성벽은 높이도 어마어마했다.

아직 1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도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문으로 들어가려 할 때와 성벽을 부수고 들어가려 할 때의 기분은 전혀 달랐다.

곧 거대한 성벽의 돌 하나하나가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글거리는 화염이 저 벽에 적중 한다면 어떨까.

튕겨 내는 보호 마법이라도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마법 간파 Lv. 3를 발동합니다!]

하지만, 거대한 도시 전체를 보호 마법으로 두르는 건 무리인 건지.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의외로 성벽에 걸린 마법은 없다. 성문도 마찬가지.

이대로 부숴도 좋을까, 생각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높은 벽 위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저기 부서진 허름한 갑옷을 얼기설기 꿰매 입은 기사였다.

'누구지?'

얼굴 전체를 덮은 투구를 쓴 탓에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딘가 눌어붙은 시선이 명확하지 않은 불안을 부추겼다.

그 시선은 침략자에 대한 적의로 일렁이지도 않았고, 공포를 담고 있지도 않았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담담하고 평온한 척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어딘가 미끈거렸고 비틀어져

있었다.

누더기 철갑을 입은 기사는 금방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수도 성벽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기괴한 일이다. 모두 어딘가로 도망갔는지도 모른다.

황실 비역만 알아보면 그만이긴 하지만.

성문에 점점 가까워졌을 때였다.

- 끼이이이익.

성문이 열렸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여기저기가 움푹 들어가, 녹여서 고철로 써도 될 만한 갑옷을 입고, 누렇게 바랜 투구를 쓴 기사들이 의욕 없이 걷는 말에 탄 채로 푹 고개를 숙이고 다가왔다.

허리에 찬 칼도 녹이 슬 대로 슬어 제대로 뭘 자르기나 할지 의문스런 것들이었다.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갑옷은 몹시 낡았다는 것 말고는 하나같이 모두 달랐다.

투구 역시 철저할 정도로 얼굴이 전혀 안 보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마찬가지다.

- 다그닥.

그럼에도 그들의 체격은 기묘할 정도로 동일해 보였다.

무엇보다, 의욕 따위는 없다는 듯 거의 절뚝거리다시피 발굽을 질질 끄는 검은 말들은-하나같이 완전히 동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가까워지자 기사를 태운 말들은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발작하듯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서른 마리 말은- 모두 방금 전 해골마를 일으키며 상상했던 대상.

레안드로 후작의 애마, 미유였다.

261화 너희는 모래처럼 (2)

***************************************************

저 말들은 다 뭐지?

당연하게도, 완전히 똑같이 생긴 말이 저렇게 많을 리가 없었다. 환각이거나, 아니면.

다가오는 말의 모습에서, 어딘가 끈적거리는 느낌이 났다.

깊고 어두운 곳에서 미끌거리는 비열한 악의와 가학심이 느껴졌다.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머릿속에 붉고 축축하게 질척이던 한 마디 말이 떠올랐다.

〈오셨. 습. 니까, 은. 공. 〉

그라스미어 남작, 챈들러를 잡아먹은 뒤 얼굴을 복사하던 애벌레의 모습이 겹쳐진다.

미유는 하나일 터.

시체 하나로 미유를 저렇게 많이 복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저 복제된 흑마 위에 올라타 있는 서른 명의 인간은-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하는 기분이었지만, 그 외에

다른 상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말 머리를 돌려 도망치는 게 옳은 선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니면 다시 언제, 이렇게 제국 수도가 '텅 비어' 있을까?

엠버메어가, 자유연합이.

자기희생이라는 터무니없는 인과로 잠시 강림한 아이작이 장애물들을 치워 주었다.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게 비극이든 희극이든, 무대의 막은 걷어내야 했다.

- 다그닥! 다그닥!

나는 둘러싸이지 않게 외곽으로 말을 몰았다.

아이작에게 전술 지식을 흡수하지 않았더라도 몰리면 불리하다는 건 기본이다.

하지만 전술 지식들은, 1 대 30의 싸움에 불과한데도 상황을 한층 더 입체적으로 느끼게 하고 있었다.

네오 피델리티의 각개 격파.

전투력은 어차피 적과 격돌하는 그 순간에만 중요하다.

기동성으로 1:1을 강요한다.

오른쪽 외곽,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는 녀석을 목표로 삼았다.

저 위에 있는 게 정말.

'포스 실드.'

앞이 아닌 바닥에 비스듬히 포스 실드를 세웠다.

- 히히힝!

제국군 기병대장, 오스칼의 말이 다시 한 번 전장을 누비겠다는 둣강하게 발굽을 내박찼다.

땅이 아닌 허공을 내디딘 덕분에, 흙먼지는 한 톨도 일지 않았지만 그 속도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희귀 등급에 달한 승마술.

조련(리의 특전.

창술 시현으로 인해 막 올라갔던 해골마의 충성도.

거기에,

[질풍 Lv. 5를.]

[이중영창.]

[질풍 Lv. 5를.]

[중첩 증폭 Lv. 2가 적용됩니다!]

탑주들에게 흡수한 스킬.

검기를 최대로 뽑아낸 칼을 마치 스태프처럼 사용해, 검기와 바람을 하나로 집중해 공격했다.

말 위에 있는 인간이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자라면, 구사일생조차 바랄 수 없는 상황.

이 일격에서 그 진위가 갈린다.

간절함이 담긴 탓일까.

모두 갓 얻은 스킬들만 사용해서, 초심자의 행운이 중첩으로 작용한 덕분일까.

오직 자신의 싸움만을 돕기 위해 일으킨 해골마에 대한 책임감이, 지금의 일격에 고요하게 집중하게 해 준 건지도 모른다.

겹쳐진 바람은 드워프가 벼려 낸 명검의 날을 타고.

칼끝 한 점으로 선명하게 쏘아져 나갔다.

칼이, 휘둘러졌다.

- 스숙!

마찰 소리는 크지 않았다.

만에 한 번이나 있을 법한 깔끔한

마치 원래 그쪽으로 불어야 할 바람이 분 것처럼 자연스럽지만, 더없이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당연하다는 둣 검기는 칼 길이를 벗어나 바람을 타고 늘어졌다.

지금까지 칼로 한 공격 중에 가장 완벽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스스로 '유령'이라 칭하는 황실의 수구들도 이 일격이면 곧바로 목이 날아가겠지.

그런 확신이 드는 공격이었다.

[완벽한 일격을 성공시켰습니다.]

[마법과 검술을 조화시켰습니다.]

[조화도 - 97% 이상.]

['스킬 조합' 특전이 생겼습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스킬 조합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게 됩니다.]

[레벨 - 1]

갑자기 떠오른 창을 얼떨떨하게 느끼는 순간,

- 파삿!

검기가 목표에 닿았다.

완벽하다고 평가된 공격은 상대의 목을 베어 내지 못했다.

간신히 눈구멍만 가리던 투구가 반으로 쪼개졌다.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자 왜 앞도 보이지 않을 만한 투구를 썼는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됐는4

그 얼굴은 완성되지 않았다. 여기저기가 끈적끈적하게 부풀어 오른 채,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는 얼굴을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_

투구가 벗겨진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벌린 입술 사이로 초록빛 점액이 끈적거리며 흘러나왔다. 입 사이로 보이는 붉은 혀가 중심을 못 잡고 촛불처럼 흔들거렸다.

입이 닫혔다.

꿀렁거리는 하얀 촛농은 눈에서도 흘러나왔다.

이런 꼴로 전락해, 의지의 편린이 내는 눈물인지도 모른다.

푸른 사자 기사단 총단장.

나를 죽음으로 두 번이나 몰아간 인간.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이다.

최악의 추론은 그대로 적중했다.

내가 기스-제-라이의 황제 암살에 끼어들지 않아도, 레안드로 후작이 죽는 미래는 변함없는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애벌레가 되어 있을 줄이야.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 철컥. 철컥. 철컥. 철컥.

투구가 벗겨진다.

한 명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이제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이.

어쩌면 이제 상대를 공포에 떨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듯이.

서른 명의 레안드로는 차례대로 투구를 벗어서 미유의 안장에 걸어 놓았다.

하나둘 투구가 벗겨질 때마다, 그만큼 절망과 기괴함이 더해졌다.

서로 다른 부분들이 끈적거리며 움직이는 레안드로 후작 서른 명이 나를 마주했다.

그 풍경이 상식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첫 번째 공격이 투구를 잘랐지만. 실제 레안드로라면 여유를 두고 간단히 피했을 거다.

원한다면 가볍게 칼로 쳐냈겠지.

분명히 본신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망설인 순간.

서른 기의 기병이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실력을 아무리 최소로 잡더라도, 포위되면 끝이다.

곧장 말 머리를 뒤로 돌렸다.

- 다그닥! 다그닥!

수만 마리 중에서 엄선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의 빠르기는 이쪽이. 미묘하게 느리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복제품은 높게 쳐 봐야 레안드로 후작의 반도 되지 않는 실력.

그의 말도 마찬가지일 터.

아끼는 걸 보긴 했지만, 역시나 보통 말이 아니었던 듯하다.

물론 지금은, 그런 놀란 마음은 접고 내가 탄 녀석에게 충실하자.

기수가 제 말을 최고라고 생각해 주지 않으면 말이 힘을 못 내는 게 당연하다.

'포스 실드.' - 히히히힘!

말발굽이 또다시 허공을 박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국군 기병대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마. 얼마나 긴 싸움이 될지 모른다.

- 히히힝!

오스칼의 해골마가 긴장이 된다는 듯이 울부짖는다.

[성공적인 교감 중.]

[해골마가 위기를 자각합니다.]

[주변 말들의 속도에 강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특성 해제: 경쟁심]

[자기보다 빠른 말을 발견할 경우, 해당 말이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속도가 10% 상승합니다!]

놀라운 녀석.

역시 희귀 등급의 명마라는 건가. 다행히도, 이제 속도가 맞춰졌다.

내 쪽이 더 빠를지도 몰랐다.

- 다그닥! 다그닥!

뒤로 후퇴하며, 외곽을 돌며 혼자 떨어진 녀석을 노렸다.

서른 명이나 되는 무리에 맞서서 싸우려면 짧은 거리를 가진 검으로 뛰어드는 건 무리다.

게다가 한 명 한 명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라면, 의지나 오기 따위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많은 마법사와, 두 마탑주도 괜히 흡수한 게 아니다.

가장 느슨해 보이는 녀석를 향해 칼날을 겨눴다.

물론 거리는 30미터 이상 떨어진 상태였다.

[뇌전 Lv.5.]

[이중영창.]

[뇌전 Lv.5.]

- 파직! 파지직!

중첩으로 위력이 증폭된 번개가 마른 허공을 깨물며 터져 나갔다. 천둥의 탑주에게 흡수한 스킬. 위력이 여간할 리 없다.

마비, 연쇄, 마력 파괴 특성까지 지닌 샛노란 채찍이 내려쳐질 때.

- 퍼엉!

허공을 가른 채찍은, 끈적거리는 애벌레 후작이 만든 푸른 기운에 그대로 튕겨 나갔다.

저건, 틀림없는- 레안드로 후작의 호신강기.

분명히 후작이 크라켄의 뱃속에서 썼던 푸른 강기였다.

비록 그때와 달리 색이 흐릿하긴 해도 전신은 제대로 감싸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스킬.

정수 흡수로도 빼앗을 수 없었던 고위 스킬이, 서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복제품에 의해 생생히 발현 되고 있었다.

황실의 애벌레라는 건 능력조차도 저 정도로 복제할 수 있는 건가?

물론 느긋하게 경악에 빠져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잠시 멈칫한 사이를 놓치지 않고 둘러싸려는 녀석들 사이로 빠르게 말을 달렸다.

- 다그닥! 다그닥!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복제품 서른 마리와의 추격전은 어느새 백색 가루에 발작한 집단 자해극의 현장까지 이어졌다.

시체들은 서로 뒤엉켜 질척하게 제 안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고통의 원인이 내부에 있기라도 한 둣, 다들 피부 안을 열어젖히기 위해 발작한 흔적들이 보였다.

철인에 밟혀 뼈마디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진 시체도 많았다.

그것만 놓고 보면 경쾌했던 말발굽 소리마저도 섬뜩하게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벌레가 꼬이거나 부패가 시작되는 흔적은 없다.

붉은 황혼과 대조적으로 공기가 서늘하게 식어 갔다. 부패에 하룻밤 유예가 주어진 것이다.

뒤를 돌아봤다.

정말 호신강기를 발휘한다면 이런 식으로 해서 승산은 없다. 한 번에 전부 상대할 수 없다면. 기동력을 분리해야 한다.

공격 목표를 바꿨다.

- 휘이이이잉!

두 줄기 차가운 바람이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바람이 지나는 반경 십여 미터 안의 시체들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냉기 폭풍.

반경을 줄여서. 날카롭게 만들어

쏘아 냈다.

가장 많이 썼던 공격 마법이었고, 그만큼 자신 있고 익숙했다.

타깃은, 일단 말 한 마리.

- 콰앙!

하지만 공격이 흑마에게 향하자, 주변의 두 복제품이 빠르게 말을 몰아 다가오더니 검기가 서린 칼로 마법을 쳐냈다.

흑마는 털 한 올 다치지 않았다. 얼음 바람이 지나며 얼린 시체들만 흑마의 말발굽에 바사삭 부서졌다.

인간을 공격하면 강기에 막히고, 말을 공격하면 주위에서 적극 달려와 지원한다.

그럼에도,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걸까.

- 히히힘!

하나에서 그치지 않았다.

열 마리의 흑마는 각성한 듯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붉게 물들였다.

- 퍽!

달려오는 흑마가 앞발로 얼어붙은 시체 조각을 걷어찼다.

빠르게 날아오는 조각이 쏘아 낸 화살 같았다.

흑마는 그런 발차기를 하면서도 조금도 달리기에 지장을 받지 않고 있었다.

괜한 자극만 해 버렸다.

새까만 갈기가 곤두서기 시작하며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 다그닥. 다그닥.

단 한 명도 탈락시키지 못한 채,

나는 열 명의 선두에게 포위당했다.

'망했구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열 명으로 만들어진 포위는 곧장 스물, 서른 명의 포위가 되었다.

포위망에 맞춰서 천천히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곧 서른한 기의 말이 제자리에 멈췄다.

기수와 말의 수준을 반영하는 듯 조금의 소음조차 나지 않았다.

레안드로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어딘가 물컹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262화 너희는 모래처럼 (3)

***************************************************

포위망은 완벽했다.

몇 합도 버티지 못하고 끝날 걸 각오했지만 녀석들은 동시에 달려들지 않았다.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후작의 얼굴 어딘가에 괴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희미하게 남은 인격의 편린이, 내게 동시에 달려드는 걸 억지로 막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녀석이 혼자서 앞으로 천천히 나왔다.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낡은 칼을 내리쳤다. 칼은 바람 가르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는데, 내리치는 속도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빨랐다.

피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칼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위로 올려쳐 막았다.

낡은 검으로 행하는 그저 한 번의 내려치기였는데 땅이 꺼질 것 같은 부담감이 느껴졌다.

공격해 들어오는 녀석은 단순히 말 위의 레안드로뿐이 아니었다.

녀석을 태우고 있는 커다란 검은 말은 제 무게까지 그대로 실어서, 칼의 움직임에 따라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 히히힝.!

타고 있는 희귀급 해골마도 힘을 냈지만, 어쩔 수 없이 휘청거리며 슬쩍 무릎을 꿇어야 했다.

녀석을 다독여 간신히 물러났다.

끈적거리는 후작에게 전투 의지가 없어 보이는 덕분에 그나마 뒤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길 수 있을까?

한 번의 격돌에서 회의가 들었다.

이길 수 없다.

결론은 사실 처음부터 내려져 있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이런 자가 서른이나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는 다른 이야기로 하고,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봉쇄되어 있다.

- 철퍽.

발굽에 밟히는 시체를 보며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고작 탑주 두 명이 11만의 군대를

농락할 수 있었던 건.

왜 이제야 떠올렸는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포스 실드.'

실드를 전개해서 밟으며 허공에 떠올랐다.

강제로 간격을 만든다.

- 히히힝!

[해골마가 하늘에 발을 디디면서

몹시 흥분합니다.]

[조련 특성이 발휘됩니다. 홍분한 해골마가 침착하게 허공을 달릴 수 있게 해 줍니다.]

[해골마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해골마의 경험치가 크게 상승했 습니다.]

됐다.

말발굽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디뎠다.

공중에서 일방적으로 마법 공격을 퍼붓는다면.

저런 것 서른이 모여 있더라도,

이 방법이라면

그리고,

- 히히히힘!

내가 전개한 실드 옆에 미유들이 신난다는 듯이 마구 뛰어올랐다.

"이런 미친.

이걸 느끼고 곧바로 뛰어올랐단 말인가?

계단처럼 차례로 전개한 실드를 귀신처럼 감지하고 뛰어올라 나를 쫓아왔다.

이게 가능한 건가 싶을 때였다.

미처 올라오지 못한 레안드로들이 전장에 깔린 수많은 무기를 하나씩 손에 쥐고 나를 향해 던졌다.

- 파츠옷!

창이나 칼을 던진다고는 믿을 수 없는 기괴한 파공성이 울려 퍼지며 다섯 자루가 넘는 무기가 일제히 날아왔다.

포스 실드가 장난처럼 부서졌다.

- 콰직!

- 빠각!

- 빠가각!

그리고 무기는 남은 힘으로 내가 일으킨 해골마를 공격했다.

실드를 다시 칠 힘도, 다른 곳으로 피하게 할 시간도 없었다.

비행 마법도 아니다.

마법사를 흉내 내어, 임기응변으로 실드를 밟은 것에 불과하다.

운신의 폭이 극단적으로 좁은 건 당연한 일.

땅을 향했다면, 자루가 안 보일 정도로 깊이 들어갔을 터무니없이 강렬한 투척의 향연.

그 흉악한 폭력에, 한때 제국군 기병대장을 태웠던 해골마는 몸의 반 이상이 가루처럼 부서져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 띠링!

내 기분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효과음과 함께,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해골마가 소멸되었습니다.]

[코어가 완전히 손상되었습니다.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축적한 충성도가 사라집니다.]

[해제된 특성이 사라집니다.]

상공 50미터.

실드를 밟고 한차례 도약했다.

- 째애앵!

무기들이 다시 한차례 거세게 날아 왔다.

이번에는 스무 자루.

해골마를 한 번에 소멸시킨 것의

무려 네 배다.

건방지게 하늘에서 노는 것만큼은 결코 용서치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 순간, 나를 따라온 놈과 칼을 맞부딪쳤다.

- 까앙!

'흡착.'

그리고,

〈바람 발톱〉

하피에게 흡수한 스킬이다.

공중에 머무르는 적에게 공격이 적중했을 때, 끌어당기는 능력.

[스킬 조합 특전이 발동합니다!]

['홉착' 스킬과 '바람 발톱' 스킬을 조합합니다.]

[허공에서 무기를 부딪칠 때, 서로 자리를 바골 수 있게 됩니다.]

칼이 레안드로를 내 쪽으로 끌어당

기며, 내 몸이 녀석이 있던 곳에 대신 위치했다. 해골마의 죽음에 자극받은 탓일까. 계산하지 못했던 절묘한 우연의 일치.

- 퍼벅!

- 퍼버벅!

나라도 반응하지 못했을 거다.

레안드로의 복제품은 호신강기를 제대로 끌어올리지도 못했다.

이미 던져 버린 창칼에 눈이, 끈이 달려 있을 리도 없다.

- 퍼버버버벅!

회수되지 못한 무수한 무기는 그대로 복제품의 전신을 꿰뚫었다.

함께 추락하며, 꿈틀대는 녀석의 두개골을 칼로 관통했다.

꿰뚫려 터진 부위에서 붉은 피도, 회백색 뇌수도 아닌 초록 점액이 뿜어졌다.

하지만 그 진한 초록색이 반드시 점액 때문만은 아니었다.

추락하는 레안드로의 복제품이, 익숙하고 맑은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중력 조작 Lv. 1을 발동합니다.]

또다시 날아오는 창칼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아래로 떨어졌지만, 생각과 다르게 더 날아오는 투척은 없었다.

대신 남은 스물아홉 가운데 다른 한 명이 천천히 땅에서 주운 칼을 뽑아 들었다.

칼 뽑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가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놈을 칼로 겨누며 슬쩍 포위망을 살폈다.

언제부터인지 스물아흡 복제품은 말에서 내린 상태였다.

내 말이 사라진 뒤에 훌쩍훌쩍 내리는 걸 본 것 같기도 했는데, 정확하지는 않았다.

슬쩍 옆을 바라봤다.

전신에서 초록빛을 내는 시체가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

터무니없이 보이더라도, 이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정수 흡수.'

한 손으로 정수를 빨아들이다가, 천천히 두 손을 모아 칼을 쥐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흡수는 유지되고 있다.

- 우우우웅.!

뭘 얻어 내려 하는 걸까.

이미 100에 달한 스탯은 더 이상 흡수할 수 없다.

남은 건 스킬.

결국 검술에 관련된 것일 텐데, 집중해서 흡수할 수 없는 탓인지 좀처럼 스킬이 뜨지 않고 있다.

기묘한 일이었다.

복제품 가운데 한 명이 기적처럼 허공에서 꿰뚫려 죽고, 바닥으로 몸을 던질 때 즉시 사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레안드로의 복제품들은 합공을 아직도 거부한 채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건 결투.

내가 결투를 원한다면 그에 맞게 대응해야 한다는 걸까.

지나칠 정도의 공명정대.

일대일 승부에 대한 집착.

사실은, 애초에 힘들게 외곽으로 돌 필요조차 없었다는 거다.

결투라는 사실을 인식시킨다면.

복제품들은, 결코 나를 한 번에 공격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애벌레에 먹혀 복제된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라는 인간의 자의식이 남아 몸부림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첨예한 자의식은, 그라스미어 남작 챈들러의 경우와 달리 완전히 먹히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느 쪽이 드문 경우일까.

당연히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레안드로 쪽이겠지.

수십 갈래로 찢겨진 몸이 먹혀서 복제되고 나서도, 자신의 원칙을 지킬 정도면 대체 얼마나 과잉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잠시 대치하던 상황에서 주위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붉은 황혼이 너무 빨리 사라지나 싶더니, 난데없이 먹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여름 날씨 치고도 심한 변덕이었다.

- 쏴? 아? 아아≪

다섯 걸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거센 비가 갑작스레 쏟아졌다.

표면이 굳은 피에 비가 쏟아졌다. 안쪽의 아직 말랑한 것들이 비와 함께 흘러내렸다.

체온을 앗아 가는 빗줄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인간이면 칼을 든 팔이 후들후들 멸릴 정도의 폭우였지만,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의 복제품들은 어디 이슬 한 방울 튀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태도였다.

허세가 아니었다.

애초에 비가 그들의 머리에 닿지 않고 살짝 위에서 튕겨 나갔다.

저 정도 수준의 호신강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발휘되는 것 같았다.

칼을 뽑아 내 앞에 다가온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지고 들어가는 기분이라 머리 위쪽에 실드를 발동했다.

- 투두두두둑.

실드가 투명한 우산처럼 빗방울을

모두 튕겨 냈다.

복제품들의 호신강기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였다.

앞에 있던 복제품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어떤 준비 동작도 없이 바로 칼을 휘둘렀다.

'포스 실드. 뇌전.'

[스킬 조합 특전이 발동합니다!]

['포스 실드' 스킬과 '뇌전' 스킬을 조합합니다.]

[번개 방패를 발동합니다!]

['대단히 유리한' 기후의 보정을 받았습니다.]

[위력이 50% 상승합니다!]

- 파지직!

번개 더미에 칼을 휘두른 꼴이 된 레안드로의 복제품이 아주 잠깐 균형을 잃었다.

놓치지 않고 곧바로 공격해 들어갔 지만, 복제품은 번개가 온몸에 흐르는 상태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공격을 막아 냈다.

복제품은 조금 전의 내 기술을 따라 하듯, 기를 운용해 칼을 칼로 붙잡았다.

나는 칼을 놓아 버렸다.

'발도.'

허리에서 다른 칼을 뽑아 그대로 복제품을 아래에서 위로 베었다.

지형 보정까지 받은 뇌전 검기가 그대로 어깨를 한 움큼 베어 냈다.

너덜거리는 레안드로의 어깨에서 탁한 빛깔의 초록 점액이 허공으로 터져 나갔다.

비명은 없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 놓인 것은 후작을 흉내 내는 꿈틀거리는 애벌레에 불과한데도, 마치 흥이 나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오십 합이 지났다.

진짜 레안드로와 이렇게 싸울 수 있다면 대체 얼마나 즐거울까 싶은 터무니없는 생각이 스쳐 갔다.

- 퍼걱!

암흑의 가호를 담은 칼이 후작의 배를 찔렀다.

싸움에 완전히 빠져들어 몇 합이 지난 건지 측정할 수도 없었다.

뇌전이 터져 나가며 복제품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미 열 군데가 넘는 자상을 입은 복제품은 뚫린 배로 울컥 점액을 쏟아 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철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초록색 빛이 허공으로 뿜어졌다.

[검기劍氣 Lv. 4를 흡수했습니다!]

쓰러트린 두 녀석에게서 초록빛 정수를 모조리 흡수한 뒤, 검기는 비로소 4레벨로 올랐다.

- 파츠춧!

번개가 맺혀 있는 탓만은 아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준의, 다른 소리를 내며 푸른 검기가 칼날 위에 피어올랐다.

- 저벅. 저벅.

빗속에서 다음 복제품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흥분했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이들 하나하나를 전부 다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싸움은 점점 더 쉬워지겠지.

혹시 서른 명을 전부 흡수하는 데 성공한다면.

애벌레에 먹힌 레안드로 후작이 나를 도와주는 건지도 모른다.

이건 마치, 후작이 나를 속성으로 훈련시켜 주는 느낌이다.

언제 이런 수준의 적들과 하나씩 차례대로 싸워 보겠는가.

강해져라.

강해져서,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황실을 대신 짓밟아 달라는 그런 의지.

아직 벌레에게 먹히지 않은 그런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응해 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다음 녀석과 싸우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을 때였다.

- 꾸드드득.

무언가 새겨지는 소리가 났다.

다가오는 복제품의 눈동자에 글자 같은 붉은 표식이 떠올랐다.

후작이 붉은 눈물을 홀렸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황실의 흑막에 협조적인 태도로

나가지 않아 살해당해, 그 드높은 실력과 긍지도 시체가 되어 기괴한 애벌레들에게 먹혀 복제된 제국의 검주는, 다시 한 번 어떤 의지에 강제당했다.

애벌레에 먹혀 수십 마리 단위로 복제된 상태에서도, 나 레안드로가 둘이 하나를 상대하는 일은 없다는 철저한 신념은, 눈동자에 떠오른 붉은 표식에 잔혹하게 으스러졌다.

"싫.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말을 중얼 거리던 애벌레의 대사와 달리.

이건 레안드로의 영혼이 울부짖는 단말마와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r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부스러질 듯한 낡은 칼이 검기를 띠고 날아왔다.

아래에서, 위에서, 옆에서.

스물여덟 방향에서 칼이 뻗었다.

피할 만큼 느리거나 쳐낼 만큼 약한 칼은 한 자루도 없었다.

복제된 상태에, 마지막 의지까지 강제로 꺾여 완전히 고기 인형으로 쓰는 까닭에, 레안드로 본신 검기의 반에도 못 미치는 칼날들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 파사삭!

먼지가 된 두개골과 함께 의식이 완전히 스러졌다.

263화 너희는 모래처럼 (4)

***************************************************

- 우르르릉! 쾅!

없던 골짜기가 만들어지고, 돌과 흙이 격류가 되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 위이이이잉! 위이잉!

굵은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마저 강한 바람에 묻혀 버린다. 번개가 간간히 하늘을 물어뜯는다.

세상이 온통 비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산을 호수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린다.

왜 이렇게까지 쏟아져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고인 웅덩이에 물결이 치고, 다시 물결이 치고, 조금 더 빨리 내리는 방울이 늦게 내리는 방울을 쳐서 허공에 파문을 만든다.

비도 서로 속도가 다르다.

- 쏴아아아.

이 정도의 폭우라면.

전장에 쓰러진 수만 명의 핏물도 씻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는 전장이 아니다.

- 달그락.

나는 좁은 관에 갇혀 있다.

아래도, 옆도 막힌 좁은 관이다.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더라도, 여기가 어디인지마저 잊어버릴 수는 없다.

오랜만에 누운 좁은 무덤.

저번 생의 수많은 일이 물소리 섞인 꿈결처럼 느껴졌다.

땅에 떨어져 부서지는 비가 기억 한 방울 한 방울 같았다.

연합군의 철인들이, 처음 목격한 기계화 보병들이, 제국군 기병대장 오스칼이, 네크론의 수하였던 르노 리드바렌이 땅에 닿아 부서졌다.

어떤 빗방울은 관에 닿았다.

연합군 지휘관 카린 크렉소르와 루이 클로드가, 다시 만난 진네이 유베와 수도의 보석상 블랙베리가 관 근처에 닿아 부서졌다.

갈비뼈에, 손뼈에, 어깨뼈에 닿아 부서지는 빗방울도 있었다. 내가 속였던 늑대인간 브로디 발도프가, 잿빛 기사에게 루-륨을 흡수당한 T&T의 시조 트로핀 나냐우가 뼈에 닿아 아프게 부서졌다.

부서지지 않는 빗방울도 있었다. 루비아와 레나, 아이작이 그랬다.

그리고 후작.

레안드로 후작은 복제됐던 마지막 모습처럼, 무수한 빗방울에 나눠져 나타났다.

몸에 닿아 흘러내리는 빗방울은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후작 최후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후작이 담긴 빗방울에 닿기 싫어 무심코 마법을 발동시켰다.

'포스 실드. 이중영창. 실드.' - 파밧! 파바바밧!

수많은 빗방울이 일제히 실드에 튕겨 나갔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돌아왔다.

세계는 다시 한 번 변주되었지만

나는 그대로. 특전도, 마법도 모두 남아 사용할 수 있다.

- 번쩍!

하늘을 깨무는 번개가 예전처럼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번개에 제대로 맞아도 위험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었고, 기묘한 친밀함마저 느껴진다.

천둥의 마탑주에게 뇌전 마법을 흡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번개 정도는 맞아도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기에 그런 건지도.

'상태창.'

허공에 반투명한 푸른 글자들이 떠올랐다.

[계승되었습니다.]

[68.94%.]

[동화율 70% 이하.]

[시나리오 변경이 반영됩니다.]

[상점 권한을 계산합니다.]

[보호가 해제됩니다.]

[견습생 우대:〈사망 기념관〉을 더 이상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다음 특전이 사라집니다.]

- 네크로멘서의 연인(Hero)

허공에 뜬〈네크로멘서의 연인〉 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어른거리다 연기처럼 스러졌다.

메시지가 계속 떠올랐다.

[이름: ]

[해골병사 Lv. 1(259)]

[체력: 121]

[힘: 121]

[민첩: 121]

[지혜: 121]

[보너스 스탯: 5]

[달성한 전직 -〈해골 기사〉]

[해골 기사의 모든 특전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 기동성

- 무장

- 전투 전문가

- 초급 지휘관

- 해골마 소환

- 지정 보호

해골 기사로의 전직은, 아이작이 까마귀에 모아 온 루-륨을 흡수해서 이루어졌다.

루-륨으로 인한 변화는 유지된다. 그런데 분명히 바꾼 직업이, 예전 처럼 해골병사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특전과 스킬은 그대로. 이득은 전부 가진 채, 다시 2차 전직의 기회가 주어졌다.

스킬창을 계속 확인했다.

[뇌전 Lv.5]

[다음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마비, 확산, 연쇄, 마력 파괴

[마법 간파 Lv.3]

[중첩 증폭 Lv.2]

[마력 왜곡 Lv.1]

[마도 화학 Lv.3]

[독안毒眼 Lv.3]

[식물 재료 채집 Lv.2]

탑주들에게 흡수한 스킬과 특성, 아이작에게 얻은 각종 전술, 주술 지식까지 당연한 듯 남아 있다.

〈리치〉로의 전직마저도 해제시킨 탁월한 권능들.

이대로 루-륨을 계속해서 모으면, 그쪽으로의 전직도 가능해지겠지.

해골 기사로 전직하며 얻은 스킬 경험치 2만도 그대로다.

스킬 경험치 2만.

안타깝게도 정수 흡수 스킬이나

검기 스킬에는 사용할 수 없다.

반복적으로 사용했을 때 경험치가 오르는 스킬에만 적용되는 듯하다.

스킬 목록을 쭉 바라봤다.

일단, 스킬들의 유용성을 하나씩 체감해 보고 나서 경험치 투자를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다음으로.

빼곡한 스킬과 특전, 압도적으로 오른 능력치.

하지만.

암흑 특전은 보이지 않는다.

말파스와의 계약은 끊어진 건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메시지가 계속 떴던 걸로 볼 때, 마왕과 계약 상태면 아무래도 나를 지켜볼 수 있는 것 같다.

까마귀의 가호가 놀라울 정도로 강하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관음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내가 싸울 때마다 마왕이 강해지는 것도 꺼림칙하다. 정확한 내용도 모르는 계약에 묶인 것보다 이쪽이 차라리 낫다.

- 투두두두둑.!

실드 위로 멀리 비가 튕겨진다.

후작의 모습은 더 이상 빗방울에 담겨 있지 않았지만, 굳이 마법을 해제하지는 않았다.

5레벨의 포스 실드.

무게를 싣는 것은 물론, 반탄력을 주는 것도 가능하다.

누운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처음의 나는 상상조차 못 할 힘을 가지고 있다.

검술은 물론.

이제 어딜 가서도 마법사로 나를 내세우기에 부족하지 않다.

높은 스탯 상승에다, 연구할수록

깊게 활용될 자잘한 스킬들까지.

예전보다 훨씬 입체적인 전투를 할 수 있다.

긴 삶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거듭 강해진 것이다.

게다가.

2차 전직의 공통 특전으로, 레벨 상승 시마다 스탯이 2씩 증가하는 건 여전하다.

성장 가능성까지 2배.

하지만 제국 황실에 저항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지금까지 별별 일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하지 못했다.

아쥬라의 탑주들에 이어, 후작을 복사한 애벌레 서른 마리가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올 줄은.

외모뿐만이 아니다.

본신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호신강기까지 뿜어내고 있다.

순수한 검기로만 보면 나보다 위.

어떻게 그런 것들이 나타난다는 말인가?

운이 따른 데다, 하나씩 상대해 그나마 둘이나 처리했다.

셋만 동시에 달려들었어도 손도 못 쓰고 당했겠지.

사실 두 마탑주조차도 내 힘으로

처리한 게 아니다.

자기희생이라는 황당한 인과로, 짧은 시간이나마 현신한 아이작이 살해해 준 것에 불과하다.

아이작.

잠시 고민에 빠진다.

그라스미어로 녀석부터 찾아가야 할까?

모든 걸 털어놓고, 물어 가면서 그의 의견대로 움직여야 할까?

하지만 아이작이 처음부터 나를 철저히 기만한 사실이 떠오르자, 울컥하는 마음이 밀려오다가 다시 슬며시 사라졌다.

대신 궁금중이 들었다.

대체 왜 나를 위해서 희생했을까?

'터무니없는 인과율'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내가 보아 온 아이작이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회귀한다는 걸 확신하고 모든 걸 걸기라도 한 걸까?

다음 생의 자신을 위해?

어쩌면 당시의 아이작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회귀한 이후의 내 분노를 사기는 싫었을 테니까.

임기응변이었던 건지도.

일단은 그를 만나러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일단 아이작과 함께하면 지나칠 정도로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

뻔뻔하게 행동하는 데다 나 정도는 금방 속여 넘길 수 있으니, 중심을 못 잡고 말려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첫 번째. 곧 일어나는 전쟁.

엠버, 제국, 연합의 강자들은 모두 초반부터 엠버에서 발이 묶인다.

그에 반해.

대다수의 인간은 긴 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벌인다.

아이작에게서 흡수한 풍부한 주술 지식 덕분일까.

그들이 공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압도적인 힘으로 한 번에 죽이면 공포와 절망밖에 뽑아낼 수 없다.

그 맛도 물론 좋지만 풍요로움이 부족하다.

엇비슷한 자들이 만드는 첨예한 싸움이라면.

흥분, 광란, 저항, 아쉬움, 기쁨, 초조, 긍지, 만족, 비통, 멸시 같은 압도적으로 풍부한 감정들이 계속 만들어진다.

질리지 않는 풍성한 만찬이다.

어쨌거나,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레안드로 후작은 살해당한다.

황실에서는 그를 명백한 걸림돌로 보고 있는 모양.

기스-제-라이의 암살에 관여해서, 근위기사단 이사밸을 잿빛 기사가 살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세 번째.

제국이 수도까지 밀리면 아쥬라의

탑주들이 등장하며, 그들은 '뱀'을 의식하고 있다.

네크론이 섬기는 마왕, 보티스와 높은 확률로 연관되어 있겠지.

네 번째.

제국군 총대장 르노 리드바텐은 마왕 보티스의 노예다.

종교재판관 르노 리드바렌.

루비아를 악마숭배자라고 몰아간 녀석은, 온몸의 뼈와 피, 내장이 검은 뱀으로 변해 뿜어지며 최후를 맞이했다.

열 번이 넘는 회귀 끝에, 결론이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인간 세계의 한 축, 제국.

그곳 황실은 마왕 보티스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고 있다.

혹은 완전히 결탁했거나.

결탁이라고 한다면 황실에 마왕과 격에 맞는 협상자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도달한다.

그게 누굴까.

그 정체를 알 수 없지만, 황실을 위협할 때마다 등장하는 잿빛 기사 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당장 황실 비역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천천히 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창을 모두 들여다보고, 지난 생까지 곰곰이 정리한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 쏴아아아.

조용하다.

아니, 물론 조용하지 않다.

누워 있기 불안할 정도로 천둥이 치고 폭풍이 울부짖는다.

그러니까.

당연히 들려야 할 소리, 예상했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언제나 듣던 어설픈 부름아

한참을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 달그락.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그녀가 사라져 버린 건가?

하지만 루-륨에 관련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레나에게 했던 것처럼 여덟 병을 건네는 것 같은 일도 없었다.

'처음'으로 돌아온 상황.

과거가 개변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쏴아아아.!

빗줄기를 맞으며, 가볍게 한 번에 몸을 튕겨 무덤 밖으로 나갔다.

264화 너희는 모래처럼 (5)

***************************************************

바람이 바람을 불렀다.

나뭇가지를 꺾을 만큼 세찼지만, 실드를 침범하지 못하고 양쪽으로 찢겼다.

나는 깜빡 잊은 물건을 확인하듯 묘비를 바라봤다.

역시 예전처럼 훼손되어 있어서 쓰인 이름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헐떡이는 바람이 묘비를 몇 번씩 휘감고 지나갔다.

혹시 무덤 주위가 특별한 곳인가

싶어 주위를 쭉 둘러봤다.

아이작에게 흡수한, 5레벨의 주술 지식으로 본다면 혹시 색다른 게 보일까 싶었다.

하지만 산, 물, 바위, 나무 같은 어느 걸 보더라도 특별한 법칙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명당도, 흉지凶地도 아닌 아무런 특징 없는 무연고 묘지다.

특별히 살殺이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법이나 천문, 음양도의 기원도 느껴지지 않는다.

묘할 정도로 무색무취.

[마법 간파 Lv. 3를 발동합니다!]

그 아이작이 내 진명을 찾다 갇힌 장소다.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하긴, 뭐가 있으면 아이작이 먼저 발견했겠지.

달빛 한 점 내리지 않는 수풀을

바라봤다.

두명의 인간 사냥꾼과 몇 번씩 싸웠던 장소. 망치와 석궁을 들고 오던 그 녀석들마저 없다.

추적이나 사냥의 흔적은 없다.

몸부림의 흔적도, 피 냄새나 체액 냄새도 나지 않는다.

모든 일이 끝난 뒤는 아니다.

혹시 너무 일찍 깨어났나 했지만, 천둥이 치는 패턴이나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모습, 흙들이 파헤쳐진 모습을 보면 일어난 시간은 그때 그대로다.

사라져 버린 건 루비아뿐.

그녀는 대체 무슨 일을 당했기에 여기서 사라져 버린 걸까?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 우르릉! 쾅!

번개가 쳤다. 몸 깊숙이 천둥이 울려 퍼졌다.

질척한 흙을 밟고 걸었다.

체중을 실어도 흙이 굳을 생각을 하지 않고, 아래로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 진흙이 빗물에 쓸려 내려왔고, 봉분을 쓸린 무덤이 다시 진흙 더미로 물컹하게 덮여 버리기도 했다.

안쪽에 누운 시체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이야기였다.

아니, 사실 찾아올 이 하나 없는 무연고 무덤이니 어차피 모두에게 상관없겠지.

루비아 같은 이를 빼면.

그녀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예 에라스트로 가서 확인해 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 투둑. 투둑. 투두둑-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 바람 소리, 벌레 소리도 아니었다.

거센 빗방울이 인공적인 물체에 튕겨지다 흘러내리는 소리.

'우. 산?'

그리고 다가오는 발걸음.

사냥꾼들일까?

곧바로 탐지 스킬을 활성화하자 인간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세 명의 인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 노인 한 명과, 낯선 여자의 목소리다.

"아가씨, 이게 옳은 선택일까요? 도움을 요청할 방법은 많습니다. 선대의 인맥만 해도.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사령술이라는 건.

회의적인 목소리들이었다.

그 둘 사이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요. 저는 확신해요."

수천 명의 외침 속에서도 단번에 구분해 낼 수 있는 목소리.

바로 옆에서 천둥이 쳐도 또렷이 알 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 아래에서,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다.

"만에 하나 전부 아가씨 말씀대로 된다고 한들. 해골병사 하나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말을 잇는다.

직접 봐야 확신하겠지만, 분명히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루비아는 아예 말을 딱 잘랐다.

"이 일에 관한 논쟁은 그만하죠. 원하면 다들 돌아가도 좋으니까."

"에이.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크흠! 저 또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걸고 모시고 있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할 거예요."

"예.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저희야 따라갑니다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지?

지금껏 루비아가 여기로 올 때는 힘겹게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비에 젖어 혼자 왔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힘든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다.

숨소리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고 수행까지 딸려 있다.

거리는 곧 가까워졌다.

- 투두두둑-

한 번도 본적 없는 광경이었다.

레이 루비아.

영지 에라스트의 정당한 계승자를 자처하는 그녀는, 커다란 우산이 받쳐진 채 두 수행원과 함께 내가 빠져나온 무덤으로 걸어왔다.

루비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똑바로 내 무덤을 보며 걸어왔다.

일 년에 한 번씩 참배하는 부모의 무덤이라도 저 정도로 똑바로 가기 쉽지 않겠지. 방향에는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 철벅.

진흙이 가볍게 튀었지만 루비아는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낡은 진회색 로브도 아닌, 어설픈 세미 드레스도 아닌 활동하기 편한 칠흑의 야회복을 갖춰 입은 채로, 레이 루비아는 내 무덤 옆에 섰다.

프레쳐를 말에서 떨어트려 죽인 비탈 즈음에 서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허리에 차고 있는 건 장난 같은 단검이 아니다.

제대로 장식된 세검.

뽑으면 무뢰한의 목 정도는 간단히 찌를 수 있는 수양이 쌓여 있음은 걸음걸이를 통해 이미 짐작된다.

혹시 사라져 버린 건 아닌가 싶어 그랬던 건지, 다시 보는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그렇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

일단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음. 아가씨? 여기가 맞습니까?"

- 회? 르르!

옆에서 따라오던 노인이 내 무덤 쪽으로 횃불을 들이댔다.

방금 내가 올라와, 텅 빈 무덤을 흔들리는 횃불이 불안하게 비췄다.

조금 더 누워 있었으면 루비아가 날 어떻게든 깨우려고 했을까.

방금까지만 해도 당당하던 표정의 루비아가, 비어 버린 무덤 안쪽을 바라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심한 동요였다.

"여기가 맞는데. 맞는데.

두 수행원은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여기 있어야 하는데.

꼭 같이 있어 줘야 하는데. 루비아의 어깨가 쳐졌다.

내가 저 무덤에 있는 걸 어떻게 확신한 거지 싶었다.

물론 수행원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그럼 이제 내려가시는 겁니까?"

루비아는 비를 맞으며 흠쁴 젖어, 비가 되어 버릴 것처럼 진흙 위를 걸었다.

"아가씨!"

수행원이 황급히 우산을 씌웠다.

"꿈에서. 분명히 계시가. 무덤으로 내려가려는 그녀를 옆의 수행원이 말렸다. 어차피 텅 비어 있는 무덤은 밖에서도 보일 텐데.

두고 보기 안타까운 모습이다.

꿈이라면- 짐작 가는 바는 있다. 레나 역시 그러했다.

호감도를 60까지 쌓고 동굴로 다시 회귀했을 때, 나는 레나에게 꿈의 형태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게 지금 루비아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걸까?

'상태창.' - 띠링!

눈앞의 푸른 창을 차분히 하나씩 읽어 내렸다.

[이름: 레이 루비아]

[호감도: 11]

[호감도 상한: 50] (플러스)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달성 호감도 (50) 에 따른 초기 보정이 이루어집니다.]

[혹독한 기다림 - 해당 캐릭터는

마지막까지 당신만을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초기 보정이 추가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가 지독하게 느껴진다. 나를 기다리다 죽은 루비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묵직하게 얼어 붙었다.

억지로 생각을 돌리며 루비아의 상태창을 계속 훌어봤다.

[군주 Lv.1] (플러스)

[사령술사 Lv.2] (플러스)

[사서 Lv.3] (플러스)

[체력: 12] (플러스)

[힘: 13] (플러스)

[민첩: 16] (플러스)

[지혜: 21] (플러스)

[다음 특성이 강화됩니다.]

- 언어 재능: 대부분의 언어를 매우 빠르게 익힙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도, 표본만 충분하다면 그 체계에 익숙해지는 재능입니다.

- 선의를 받는 자: 성향이 극악이 아니라면, 그녀를 적대하는 자들은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느껍니다. 중립을 선호하는 존재들도 그녀의 편을 들어 줄 확률이 높습니다.

- 이 특성은 용모가 아닌 존재의 근원적 분위기에 의한 것입니다. 이성과 동성, 종족을 가리지 않고 적용됩니다. 단, 그 용모에 대하여 집요한 훼손이나 변형이 이루어질 경우 상황에 따라 특성이 회수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섬뜩한 이야기다.

메시지들은 악의를 숨길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하다.

루비아의 상태창을 쭉 내렸다.

예전에 있던 스킬들은 모두 보존되고 새로 붙은 스킬들도 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를 2레벨의 검술 스킬까지 붙었다.

게다가 군주라는 직업.

어떤 걸 기준으로 저런 게 생긴 건지는 모르지만.

역시, 상황이 변했다.

- 쏴? 아? 아? 아? 아

텅 빈 무덤을 바라보는 루비아의 모습이 유난히 쓸쓸했다.

"아가씨, 이만 들어가시는 게. 옆에 선 여자가 말을 걸었다.

눈치가 빠르고 일을 잘할 듯한 샤프한 인상의 여자.

다른 쪽에 선 노인은 역시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총관 일리아르.

에라스트를 혼자서 함락했을 때, 루비아가 감옥에서 구출한 터프한 인간이다.

루비아의 달라진 능력치가 영향을

끼쳐, 주변 환경까지 바꿔 놓은 것 같았다.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인간들이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다.

지금이라도 나타나야 할까?

망설여졌다.

그녀는 나 때문에 지난 생에 악마 숭배자로 몰려 죽었다.

지금 곁에 있는 두 명은 그녀의 철저한 심복이겠지만, 작은 위험도 피하고 싶었다.

사령술을 쓴다고 왔지만, 텅 빈 무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성으로 돌아가는 것과 실제로 나를 만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평범한 인간들이 받아들이는 게 전혀 다를 터다.

쓸쓸한 표정을 짓는 루비아에게 노인도 말을 걸었다.

"성을 오래 비워 두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커크 놈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 할지 모르니까요."

"하아."

루비아가 작게 한숨지었다.

"좋아요. 돌아가요."

그녀가 터덜터덜 에라스트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멀쩡히 그곳에 살고 있는 건가. 하루만 슬쩍 빠져나온 모양새다.

지금 삼촌이라는 놈도 그 성 안에 머무르는 것 같은데.

혹시.

[탐지 Lv. 7를 활성화합니다!]

하지만 빗소리와 계곡물이 빠르게 불어나는 소리뿐, 루비아 일행을 쫓고 있는 인간들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은 이대로 안전한 것 같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밟으며 고민에 빠졌다.

여태까지 루비아가 나를 깨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설픈 사령술에 감응해서 무덤 속에 있던 내가 일어났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 일로 명확해진다.

루비아가 근처에 오기도 전 이미 깨어 있었다.

내가 일어난 것과 그녀의 존재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걸까?

상태창은 루비아가 내 마스터라고 설정되어 있고, 그에 따른 혜택도 크게 받았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녀를 마스터라고 인식한 덕분이었을까.

그녀가 나를 무덤에서 일으켰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런 힘이 작용한 건지도 모른다.

아이작을 마스터라고 생각하거나, 트로핀 나냐우를 마스터라고 생각 했으면 그게 적용되었을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축 쳐진 채 걷는 루비아를 보며 느껴지는 안타까움이 혼란을 묻어 버렸다.

지금이라도 나타나야 할까. 나를 기억하고 있냐고 말할까.

레나처럼 희미한 감정과 기억이 전해진 것이라면, 루비아는 나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전폭적으로 의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나름대로 무책임한 행동인 것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리적거리는 것들 전부를 해결해 줄 수 없다면 아예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혹독한 기다림 - 해당 캐릭터는 마지막까지 당신만을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초기 보정이 추가로.]

반투명한 푸른색 글자들이, 내가 드러나는 걸 몹시 망설이게 했다.

루비아에게 희망 따위를 던져 줄 생각은 없다.

줄 건 오로지 확실한 결과뿐.

일단 상황을 보기 위해, 그림자에 숨어 그들을 따라 내려갔다.

265화 너희는 모래처럼 (6)

***************************************************

일행 셋은 폭우가 내리는 산길을 걸어갔다.

예전에 봤던 루비아라면, 이런 험한 날씨에는 침대에 째근쎄근 잠들어 있는 모습이 어울린다.

다시 햇볕이 1 때까지 창문을 꼭 닫고, 하얀 침대 시트를 살짝 쥐는 행동이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미친 듯 비가 내리는 험한 산길을 가뿐가뿐 걷는 모습에서 제 삶을 짊어진 분위기가 느껴진다. 걸음걸이는 천둥에도,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규칙적이었다.

몇 번이고 넘어지던 인간인데. 뿌듯한 느낌이었다.

이 세계선에서는 루비아를 처음 보는 거지만, 저런 당당한 모습에 분명히 일조하긴 했지.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에라스트에는 세 번 방문했었다.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여기로 내려가는 건 두 번째.

처음은 레나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뒤, 무척 오래간만에 루비아와 조우했을 때였다.

뭐든지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고, 삼촌 무리를 모두 쓸어버리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었다.

그녀의 삼촌을 따르는 패거리는 즉시 정리했지만, 결국 숨어 있는 최정예 유령들에게 단 하루 만에 살해당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따라갔다.

- 쏴? 아아아.

에라스트 성문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루비아는 성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아, 오셨습니까."

그녀를 막아서며 도망치라고 했던 경비들.

- 끼이익.

그들이 바로 성문을 열었다.

상황이, 달라졌다.

레이 루비아는 평생 자란 성에서 도망치던 유배자가 아니다.

어쩌면 저들도 이미 루비아 편에

붙었는지 모른다.

끼어들 필요는 없다.

성문 안으로 들어오자 에라스트의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두 블록을 지나 광장에 이르렸다. 예전에 흉물스러운 처형대가 설치되어 있던 장소에, 지금은 좌판과 난전이 벌어져 있었다.

폭우에도 거둬들이지 않은 천막이 많았다. 처형대보다는 당연하게도 훨씬 활기가 도는 광경이었다.

두 번째 방문 때는 이즈음에서 루비아에게 화살이 날아왔었는데. 하지만 아까부터 활성화하고 있던 탐지 스킬에는 아무 위협도 잡히지 않는다.

루비아를 노리는 화살도, 사람도 없다.

망루 곳곳에 느껴지는 경비들이 그녀의 편인지도 모른다. 루비아는 가파른 내성 계단을 올라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일곱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합류하자 숫자는 열이 되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던 자들이 일제히 인사를 건넸다.

루비아는 돌바닥에 물기를 툭툭 털고 겉옷을 한쪽에 걸며 말했다.

"다들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정된 회의인 것 같았다.

나를 찾으러 산을 탄 뒤, 곧바로 이런 일정이라니.

분명 그렇게 막 굴러도 되는 체력 수치는 아니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루비아의 등장과 동시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몸이 미묘하게 긴장되었다.

확실히 그녀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전 백작의 딸이라서 보내는 존경이 아니다.

루비아 개인의 역량.

"영주님, 일단 오늘 저녁까지의 상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루비아가 손을 내저었다.

"그 호칭은 완전히 이긴 다음에 쓰도록 하죠."

몇몇이 작게 웃었다.

방에 모인 인간들 중 몇은 대충 기억난다. 루비아를 따르다 감옥에 갇혔던 자들.

외상 감옥에 갇혔던 총관 노인은

지금 루비아의 곁에 시립해 있고, 내성 망루에 설치되어 있던 적의 쇠뇌는 사라져 있다.

인간 사냥꾼에게 쫓기던 루비아는 에라스트의 안건들을 보고받으며 매끄럽게 회의를 이끈다.

벌써 자정에 가까워졌지만 그녀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구석에 있던 여자가 종이 한 장을 돌리며 말했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건입니다. 저번에 작위 계승자를 정해 달라고 황실에 요청한 건에 대해, 심사관 후보들을 추려 봤습니다."

모노클을 끼고 있는 여자가 하얀

종이를 들고 말을 이었다.

"일단, 이런 영지의 주인을 정할 정도라면 최소한 대상조의 관직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백작위를 정하는 일인 만큼 아무래도 후작 이상이 심사관이 되는 게 매끄럽습니다."

흡수한 지식을 되새겼다.

제국 법률에는 후계 분쟁이 있을 경우 황실에 그 심사를 회부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아무래도 그 이야기인 것 같았다.

심사 회부는 루비아 측에서 했던 모양이다.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삼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더라도, 황실과 어긋난다면 가차 없이 살해 당할 테니까.

황실의 인정을 받겠다는 거다.

하지만 과연, 황실이 그녀의 편을 들어줄까?

내가 지금껏 보아 온 제국 황실은 둘도 없는 마굴이다.

그녀의 삼촌 따위도 어차피 쓰고 버리는 패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한 제 노예를 영주로 앉힐 가능성이 클 텐데.

이야기가 이어졌다.

"제국 대상조는 모두 아홉뿐이고, 실무를 처리하는 분은 다섯 정도. 그중에 후작 이상은 셋입니다."

긴 목록을 슥숙 그은 총관이 말을 꺼냈다.

"이거,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구만. 혼자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그분이 올 거 같습니다."

"레안드로. 후작이겠죠?"

루비아의 물음에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본인이 검주니 호위를 붙일 필요도 없고, 기사단 관리도 부하에게 일임한다더군요."

레안드로 후작이라고?

순간, 생각이 막혔다.

정말 그놈이 에라스트로 온다는 말인가?

영주를 결정하러?

지독한 악연이구나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만났던 일들을 되짚어 보면 처음부터 놈은 여기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고, 나와 부딪치는 건 꽤나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손 놓고 볼 수만은 없는데.

"그럴 가능성은 높습니다만, 계속

끝까지 알아보겠습니다."

모노클을 쓴 여자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증거를 모으니, 레안드로 후작에게 어떻게 대응하느니 등의 논의가 활발히 벌어졌다.

정말 녀석이 온다면,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확률이 높다.

증거 채택도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겠지.

하지만 제국 수도에서 배운 적이 있다는 일리아르 총관은 레안드로 놈을 매우 좋게 보고 있었다.

"뇌물! 접대! 이런 게 아예 이빨도

안 들어가는 분입니다. 잔혹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법대로 하는 분입니다."

그놈이?

어이가 없어서 총관 노인을 빤히 쳐다봤다.

내 시선을 의식하기라도 했는지, 놈이 갑자기 헛기침을 한다.

착각에도 정도가 있지.

배 위에서 놈이 보인 모습은 그냥 미치광이다.

아이작이 침착하게 미친 거라면, 그놈은 그냥 미친 거다.

내 생각과는 별개로.

루비아는 계속 진행되는 회의를 부드럽게 잘 이끌었다.

예전에도 하루뿐이었지만, 그녀를 영주위에 올렸을 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는 했다.

약간의 초기 보정만으로, 그녀가 처한 위치가 이만큼 달라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도와준다면.'

루비아가 완전히 영주위를 가진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회의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여자에게 루비아가 말을 걸었다.

무덤까지 따라온 심복이었다.

"서기관도 퇴근하세요."

여자가 잠시 멈칫했다.

"그. 사령술은. 이제 다시 안 가시는 겁니까?"

루비아가 피곤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내가 뭐에 홀렸나 봐요. 혼자 갈 일 없으니 걱정 마요."

"알겠습니다."

여자가 물러갔다.

회의실 안에 혼자 남은 루비아는 연결된 안쪽 방에 들어갔다.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제한되어

있는 안전한 방이었다.

혼자 남은 걸 확인하고, 루비아는 사뿐사뿐 베란다로 나갔다.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넓은 처마 아래 있어서 크게 젖지는 않았다.

세월에 쉽게 남루해지지 않을 단단한 돌로 된 처마였다.

세찬 바람이 불었다.

루비아는 옷을 여몄다. 머리칼이 휘날리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빗줄기는 점점 얼어붙었다.

몇 번째로 만나는지 모를 소녀가 멍하니 차가운 새벽을 바라봤다.

사람들을 대하던 조금 전까지의

모습과 완연히 달랐다.

무덤에 왔을 때, 심복으로 보이는 둘과 함께일 때도 유지하던 당당한 태도는 사라진 채였다.

낮고, 작고, 어둡고, 자신을 애써 달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분명히. 분명히 약속했잖아요.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걸요."

그녀가 힘없이 벽에 몸을 기댔다.

칼과 석벽이 부딪쳤다. 짤랑, 하는 소리가 빗속에 떨궈지듯 묻혔다.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표정으로 루비아가 눈을 감았다.

상태창을 확인했다.

호감도는 11.

하지만 저 반응은 진짜였다.

반투명한 메시지들이 못 반영하는 것들도 있을지 모른다.

- 휘이이이잉!

슬쩍 마법으로 풍향을 바꿨다.

비가 처마 바깥으로 휘몰아쳤다. 루비아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저기. 계신. 거죠?"

애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마 뭘 느껴 버린 건가?

그럴 리는 없다.

〈은신 Lv. 6〉

기척을 지워 버리고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수준이다.

자취말소 특전까지 붙어 있는데 루비아에게 발각당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냥 우연.

단순한 혼잣말이겠지.

지금이라도 앞에 나타나고 싶은 마음을 치웠다.

완전히 상황을 정리하고, 확실히 도와줄 수 있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꽉 조인 생각이 끊어지면 곤란하다.

"착각이겠지.

루비아가 힘없이 베란다 안으로 들어갔다.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레이 루비아를 죽이고, 사냥하고, 고문하려는 위협들은 일단 이 방주위에는 없었다.

일단 다가오는 가장 큰 위협은? 레안드로 후작.

- 투두두둑.

두꺼운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루비아의 작은 숨소리와 섞인다.

폭우 속에 있으니 철퍽철퍽 말을 몰던 후작의 복제품들이 떠오른다.

어차피 그런 꼴을 당할 놈인데.

혹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을까?

흉악한 녀석이지만, 공동의 이해관계만 성립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아군일 텐데.

검주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황실에 깊숙하게 닿아 있는 데다 실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제국 최강의 무력 집단 중 하나인 푸른 사자 기사단의 전투원수로, 이름난 기사들의 전폭적인 추종도 받고 있겠지.

뭔가 수상한 게 걸리기만 하면, 파고들 수 있는 공식적인 직함도 갖고 있다.

그 녀석이 어차피 황실에게 살해

당한다는 걸 알려 주려면 뭘 증거로 제시해야 할까.

젓빛 기사에 대한 지식?

애벌레에 대한 지식?

하지만 그걸 레안드로 놈도 알고 있을까?

알아도 문제 삼을지 관심 없을지 모른다.

고민이 깊어졌다.

일단은.

[지정 보호를 발동합니다!]

[스킬 레벨: 1]

[1 시간 동안 〈레이 루비아〉에게 가해지는 타격을 대신 흡수합니다.]

[범위: lkm]

짧은 시간이고, 저 범위 안에서만 돌아다닐 생각은 없다.

하지만 기분 탓 때문에라도 스킬을 사용했다.

색색거리며 정신없이 자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바람만 불면 날아갈 듯 잎새처럼 잠들어 있다.

검술 스킬이 생겼지만, 꽉 잡으면 부러질 것처럼 희고 가는 팔목에 시선이 간다.

너무 피곤했던 걸까?

루비아는 베란다로 통하는 문도 닫지 않고 잠에 들어 있다.

이런 걸 보면 처음 만났던 때의 어설픈 모습이 떠오른다.

자기에게 빼앗을 게 뭐가 있냐고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

잠시 더 바라보다, 나가며 문을 닫고 내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 팟!

266화 너희는 모래처럼 (7)

***************************************************

- 쏴아아아.

차가운 빗방울이 허공에 남아 있는 마지막 온기를 쥐어짰다.

영지 에라스트.

예전에도 몇 번 방문한 곳이지만,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른다.

최정예 유령들이 머무는 도시다. 평범한 곳일 리는 없다. 마지막 하나까지 철저히 알아내야 한다.

성 주변을 차분히 돌아봤다.

하지만 주술 지식을 사용해 봐도, 특이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마법 간파를 사용해도 걸리는 건 없었다.

분명 뭐가 있을 텐데.

지식이나 스킬이 부족한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한층 더 조심 스러워졌다.

이곳저곳을 돌고 있을 때였다.

"형님, 나는 형님만 믿고 왔는데 여기 분위기가 영 이상하잖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다가갔다.

외성 첨탑 부근에서 남자 몇몇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익숙한 얼굴이다.

'오랜만. 인 것도 아닌가.'

레이 커크. 이제는 제법 친숙한 루비아의 삼촌이다.

큰 탁자 주위에 아무렇게나 앉은 녀석들은 그다지 상하 관계가 엄격 하지 않은 측근으로 보였다.

내성에 있지 못하고 루비아에게 여기까지 밀린 건가 싶어 생경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입니다, 경비대 정도는 커크 형님이 다 장악해 놨어야죠."

거리낌 없이 탓하는 말투.

어느 쪽이 우위인지 알기 어렵다.

"루비아 그년이 발톱을 키울 줄은 몰랐지. 어릴 때는 참 착했는데."

"착하게 만드는 거야 쉽죠."

마른 남자가 손을 쥐었다 펴면서 얇은 입술을 슬쩍 비틀었다.

"그건 제가 잘합니다."

"재판관이 우리가 해 온 일들을 가지고 시비를 걸면 어쩌지? 아예 이쪽 라인에서 이빨도 안 박히는 놈 이라면서?"

"걱정하지 마. 우리 라인이 어떤 라인인지 잊었냐."

측근들을 안심시키려는 삼촌 놈을 바라봤다.

루비아와 같은 피를 이은 탓인지, 잘 관리했다면 빼어났을 것 같은 외모가 살아온 세월에 묻혀 탁하게 죽어 있었다. 말없이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 비밀 부대. 지령 말이죠?"

"쉿! 죽고 싶냐? 언제 어디에서 듣고 있을지 몰라. 어쨌건 그렇게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애초에 나를 여기로 보낸 게 그분들이니."

비밀 부대.

유령을 말하는 것이겠지.

게다가 커크 놈을 여기 보낸 게 그들이라니.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새로운 정보였다.

그러나 에라스트에 있던 유령들은 내 난동 이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레이 커크를 버렸다.

결국 그 정도의 패.

"그래도 안쪽 성까지 내주고 꼴이 이게 뭐냐고요."

다른 인간이 창문 밖을 내다보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다른 놈들은 어디 갔어?"

"유블람에 재미 보러 갔죠. 거긴 여기랑 다르다니까요. 아스포데가 꽉 잡고 있어서.

잠시 그들을 바라봤다.

잔혹한 인상에 몸은 꽤 우락부락 하지만, 검기의 끝자락에조차 닿지 못하는 비루한 무리.

몰살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겠지.

하지만 그건 틀린 방법.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는 최정예 유령들이 있다. 개차반인 커크를 영주로 심기 위해 보낼 정도로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물론 탑주들까지 흡수한 지금이면 승산은 있다.

하지만, 뒤에 있는 소녀 공작은.

얼마나 강할지 상상도 안 간다. 그라스미어 지하에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당했다.

지금이야 몇 합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만, 그때 공작이 보인 힘이 전부라는 보장도 없고.

정확한 실력의 고하는 모르지만, 레안드로 후작마저 소녀 공작에게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금빛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끝에 머무르던, 아주 얇은 검기.

후작의 몸에 난 상처와 일치한다. 터무니없이 강해져서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에라스트에서는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현실과 마주해 버린 것이다.

후작이 도착하기까지 2주.

그가 루비아를 지지하는 판결을 내려 준다면, 루비아는 잡음 없이 이곳의 영주가 될 수 있을까?

탐지되지 않는 유령들의 존재가, 그들이 여기 있는 이유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신경 쓰였다.

아무 대책 없이 유령들을 자극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조심스럽다.

그렇더라도, 루비아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고 여기를 벗어날 생각은 없다.

유령이나 검주들에 대한 대비책은 세울 수 없어도, 레이 커크 따위의 무리를 막아 줄 방법은 많다.

곁에서 지정 보호를 계속해 준다면 좋겠지만 후작이 이리로 오는 이상 그럴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 팟!

첨탑에서 곧장 몸을 날려, 도시 밖으로 향했다.

첫 번째는 가볍게 돈부터.

냇가를 건너서 수풀로. 일부러 잡풀을 심어 놓아 유독 우거진 곳으로 향했다.

달빛 한 점 없지만 지금 수준에서 어둠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 팅.

역시 그대로였다.

가볍게 파낸 땅 안에는 족히 수천 로티는 될 만한 크기의 은괴들이 놓여 있다.

땅에서 은괴 세 덩이를 꺼내고, 다른 두 곳에 묻힌 것까지 모두 회수했다.

상인 연합의 카드 한 장도 역시 상자 안에 곱게 놓여 있다.

이게 다 사라진 걸 알면 경비대장 아스포데가 공황에 빠져서 발작을 하겠지.

놈을 그 전에 죽여 주는 거다. 자잘한 안전 측면에서.

유블람 경비대는 몰살해 봐야 별

반응도 없다는 걸 이미 확인했다. 문제가 된 건 에라스트에서 난동 부렸을 때뿐.

아스포데 무리의 몰살을 위해, 성안으로 침입해, 망루 쪽을 돌다 아래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벤슨 프레쳐가 여기 있었다.

인간 사냥꾼 벤슨 프레쳐.

루비아를 처음 죽인 망치잡이.

내 두개골을 몇 번이고 깨뜨린 그 망치를 오늘도 등에 메고 있다.

친숙함마저 느껴진다면 과장일까.

어딘가로 터덜터덜 걷는 녀석을 향해 마법을 조준했다.

- 파지직

마력이 좀 약한 거 같은데.

고작 3레벨 수준 뇌전만 일으키고 있는데 손뼈가 저릿저릿하다.

"후아암.

하품을 하는 순간 벌린 입을 향해 뇌전을 쏘아 냈다.

- 번쩍!

입으로 번개를 삼킨 그가 혀부터

구워지며 비명도 못 지르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 파직! 파지직!

빗물에 젖은 몸 여기저기로 강한 스파크가 일었다.

그대로 쓰러져서 빗물 구덩이에 얼굴을 파묻고 계속 몸을 떨었다.

"으브. 으브브."

아직 살아 있다.

꽤나 체력이 좋은 인간인 데다, 지팡이도 없이 맨손으로 발사했기 때문에 위력이 좀 약하기도 하다.

제대로 된 지팡이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응력이 뛰어난 매개에 마법을 응집시키는 건, 위력에 있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 같은데.

"흠.

어디서 지팡이를 구할지 고민하던 중에, 번개로 몸이 마비된 녀석이 큰 발작을 끝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흙탕물에 익사한 건가.

맑은 피가 흐르는 놈은 아닐 테니 그럭저럭 어울린다.

경비대 막사를 돌아다니며 얼굴을 아는 녀석들이 있나 확인했다.

안타깝지만, 아스포데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굳이 고문으로 행방을 알아내기도 귀찮다. 놈의 측근들은 내가 바로 뒤에 서 있을 때조차 전혀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굳이 하나씩 상대하기도 민망한 인간들이지만, 일단 두꺼운 막사 천을 죽죽 찢어 들었다.

"누. 누구야?"

그제야 뒤를 돌아보는 녀석들의 목에 천을 감고 대들보에 하나씩 걸어 줬다.

"끅. 끄옥!"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허공에서 사지를 버둥대는 놈들을 보며 고민 하다, 인신매매 장부를 찢은 종이에 숙숙 깃털펜으로 적었다.

- 레드 플레이크 다녀가다!

놈들의 가슴팍에 그걸 쓴 종이를 하나씩 꽂아 넣었다.

적절히 덮어씌운 것 같은 생각에 꽤 뿌듯해진다.

루멘 발도프나 별빛청여우 같은 녀석들이 있는 레드 플레이크라면, 이 정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가능하다.

게다가 레드 플레이크는 나름대로 정의 따위를 쫓는 무리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개연성도 있고.

고작 이 정도 녀석들이 죽었다고 간 크게 레드 플레이크를 들쑤실 놈들은 없겠지.

쑤셔지지도 않을 거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실력은, 종합적으로 검주에 준하거나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니까.

"으."

.?

그때 였다.

"으아악! 이게 뭐야!"

새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음이 맞아 어디를 다녀오는지, 프레쳐의 동료인 석궁수와 유블람 경비대장 아스포데가 안으로 들어온 뒤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야!"

"조용히 좀 해라."

하얗게 질려 있는 두 명의 혀에 펜을 박아 아래턱에 고정시켰다.

"엑.! 꿰엑.!"

여기서 처리하지 못한 이상 어디 다른 데 의뢰라도 할까 싶었는데, 마침 때맞춰 잘 들어와 줬다.

간만에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펜으로 뚫린 입에서 피가 솟았다. 벽에다 붉게 글씨를 쓸까 하다가, 그것도 번거로워서 그냥 죽이기로 했다.

스킬 실험이 적합하다.

나는 스킬 목록을 띄웠다.

푸르손 추종자인 뱀에게 흡수한 독 스킬들이 다.

액체 매개체가 있어야 그 효과를 발휘한다.

인간의 피는 물론 좋은 액체다.

[독: 둔한 눈물]

- 호흡 기관을 무력화시킴니다. 상대는 질식으로 사망합니다.

"눈물 좋아하나?"

양손에 잡힌 두 놈 모두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마지막 소원은 들어주고 싶다.

이건 관두고.

"꽃은?"

녀석들이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독: 불치의 꽃]

- 몸에 흐르는 피의 결정을 뾰족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혈관을 모두 찢어 버립니다.

[스킬을 작동합니다.]

- 스으으으,

녹색 빛이 피범벅이 된 펜을 타고 두 인간의 입으로 빠르게 퍼졌다.

??!"

비명의 이중창이 울려 퍼진다.

고통이 꽤 심한 둣, 피부로 피가 새어 나온다.

인간 고문용으로 그다지 적합한 스킬은 아닌 것 같다.

죽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만 중간에 효력을 멈출 수가 없다.

말 그대로〈불치〉.

이미 뾰족한 결정이 된 피를 녹일 방법은 없다.

'기능적이지 못한 스킬이군. 한참 뒤 축 늘어진 놈들을 바닥에 던져 두고 밖으로 나왔다.

일단 장비를 구할 필요가 있다.

유블람에 온 김이다.

대장장이 노인의 집을 방문해서 장비를 모조리 털었다.

저번 생에 드워프제 갑옷을 보고 왔지만 노인의 솜씨도 상당하다.

어두운 기억이 담긴 갑옷이기도 하다. - 달그락.

검은색 철통을 잡았다.

〈그라스미어의 불〉.

살아 꿈틀대는 불꽃을 뿜어내는 긴 관을 앞으로 조준하고, 수동식 펌프 손잡이를 살짝 쥐었다.

여기에 들어 있는 건, 내 마법으로 피울 수 있는 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끈질기고 지독한 업화.

마법과 기술이라.

어느 쪽도 배제하거나 허투루 여길 이유는 없다.

필요에 따라 선택하거나 조화하면 그만이다.

별빛청여우가 태워 줬던 풍뎅이도 〈기술〉의 영역.

유산이라고 했었나?

아직도 그 활공이 기억난다.

어떤 비행 마법이 그만큼 빠르게 날아갈 수 있을까.

- 철컥. 철컥.

아예 대장장이 집 안에서 갑옷을 입고. 가장 잘 만들어진 장비들도 회수했다.

바닥에 은괴 한 조각을 던져 놓고 그라스미어로 향했다.

이제 돈을 쓸 때다.

267화 너희는 모래처럼 (8)

***************************************************

날이 서서히 밝아온다.

하루 만에 그라스미어에 갔던 건 처음인가. 이중구조로 된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접근 금지〉

꽉 닫힌 성문.

한 번에 뛰어넘는 건 무리고.

[흡착吸着 Lv.5 발동!]

성벽에 붙어 가며 간단히 안으로 넘어갔다.

허공에 전개한 포스 실드를 밟아 올라가도 되지만 이쪽이 훨씬 더 안정적이다.

멋은 좀 부족하지만.

커다란 내성을 무심코 바라봤다.

그 지하는.

제국의 절반을 지배했던 주술사의 무덤이 있는 곳.

가지 않는다고 다짐하며,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찾아온 것은 상인.

진네이 유베의 그라스미어 거점, 〈붐비는 선인장〉으로 향했다.

이번 생은 녀석이 바토 시마라는 가명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찾아 들러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방문이다.

'탐지.'

일찌감치 깨어나 장부를 정리하는 녀석을 바라봤다.

- 털썩.

은괴들이 가득 든 묵직한 자루가, 고풍스러운 탁자 위에 올려졌다.

깜짝 놀란 진네이 유베가 장부를 품에 안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장부부터 보호하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말도 더듬지 않는 간담은 칭찬할 만하다.

"자루부터 확인하지."

"은괴입니까? 환산하면 4천 로티 정도 되겠군요. 저처럼 작은 상인에게 갑자기 이런 거래라니 조금 부담 스럽습니다만.

아마 그 정도일 거다.

탁자에 올리는 자루 소리를 듣고 단번에 알았다는 건가.

"뭘 사려고 하십니까?"

곧바로 거래 단계로 들어간다.

기척 없이 나타난 이상,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본 거겠지.

쓸데없이 뻗대지 않는다.

현명한 선택이다.

"에라스트의 작위 분쟁에 대해서 알고 있나?"

다른 안건이라도 걱정하던 걸까.

진네이 유베가 약간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나는 질질 끌지 않았다.

"좋아. 그 싸움에서 레이 루비아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줘."

인간들의 은화를 쓰는 방법이면, 나나 루비아보다 녀석이 훨씬 더 잘 알겠지.

유베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아는 분도 아닌 것 같은데, 저를 굉장히 믿으시는군요."

"싫은가?"

"아닙니다. 상인에게 높은 신용만큼 기쁜 건 없지요. 처음 하는 거래니 이만큼만 받겠습니다."

유베는 자루에 손을 뻗어 절반을 가져갔다.

상인이 가격을 책정하는데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다.

나머지 자루를 가져가며 유베에게 물었다.

"근처에 용병 같은 건 없나?"

유베에게 의뢰하는 것과 별도로, 루비아의 안전을 위해서 뭐라도 더 붙여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상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색을 표했다.

"있기는 한데. 제국 쪽은 실력

없는 녀석들뿐입니다. 실력 있는 용병의 70%는 중립국가 엠버메어, 30%는 연합에 있지요. 원하시면 제가 수도에서 찾아볼까요?"

"그 정도인가?"

"제국에서 실력이 있으면 기사를 꿈꾸니까요."

"일단 위치부터 말해라."

후작이 오기까지 2주.

수도에서 찾으면 늦는다.

레이 커크 주변에 있는 무리를 막아 낼 정도면 된다.

"여기.

유베가 툭 펼친 지도를 바라봤다.

그는 에라스트와 국경, 남쪽 해안 사이의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 멀지는 않지만.

아직 가 본 적 없는 곳.

지도의 위치를 보자 정말 기대가 사라졌지만, 한 번은 확인해 보기로 하고 돌아 나가려 할 때였다.

"존함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의뢰 결과는 어떻게 말씀드리죠?"

"필요 없다."

"그럼 이거라도.

유베는 또다시 상인 연합의 검은 카드를 건네다가 묻지도 않고 받는 내 반응을 보고 흠칫했다.

이 카드도 이미 여러 장 받아서 이젠 익숙한데, 지나치게 자연스레 받는 게 충격이었던 것 같다.

"역시. 아시는군요?"

"그렇긴 한데. 많으면 좋지."

벙해 있는 유베를 보고, 녀석을 만난 김에 상인 연합의 의도에 대해 물어볼까 싶었다. 호의로 강자들을 모으는 이유가 뭘까?

제국의 중심은 황실.

비밀스러운 의도와 목적이라면, 황실에 반하는 게 되지 않을까?

나와 같은 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찐다.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짧게 고민했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카드 다섯 장은 모으고 나야 말이 통하겠지.

첸들러의 부친인 전 그라스미어 영주도 완전한 회원권을 가지고, 높은 실적을 쌓은 뒤에야 '제안'을 들었다고 했다.

아직 회원권조차 없다.

지금은 어떤 협박을 한다고 해도 상인 연합의 숨겨진 의도를 듣지 못할 거다.

괜히 유베의 경계를 사고, 관계를 망치는 미련한 짓이 되겠지.

- 팟!

나는 유베가 알려 준 용병 길드로 향했다.

지도에 짚어 준 걸로 봐서 길드는 도시에서 좀 떨어져 있다.

슬라임이 운영하던 보육원 같은 식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다만 위치는 평야가 아닌 산속. 어제 내린 폭우로 질척한 산길을 걸어갔다.

아직 유베가 말해 줬던 위치까지 한참 남았는데, 희미한 인기척이 탐지됐다.

조심스레 접근했다.

- 부응! 부응!

기척은 점점 커졌다. 마치 누군가 산속에서 수련이라도 하는 듯한 소리였다.

- 째애앵!

바람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제법이다.

"흐아압!"

기합 소리까지 듣고, 몸을 숨긴 채 빠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 부응! 부응!

"여기 있었다니.

나는 불어난 계곡 근처에서 혼자 수련 중인 인간을 보고 작게 중얼 거렸다. 진흙투성이가 되어 이리저리 밟히던 잘린 목이 떠올랐다.

뒷모습이 근육으로 꽉 찬 여자가 한참 수련하다, 상의를 탈의한 채 폭포에 몸을 씻고 수련하기를 다시 반복했다.

유베가 말한 용병 길드까지 굳이 갈 필요도 없었다.

믿을 만한 인간.

아직 유령은 몰라도, 커크 무리 따위는 충분히 짓이길 만한 인재가 여기 있었다.

"하아.

그녀는 탈의한 제 가슴팍을 보고, 다시 갑옷과 가슴을 번갈아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잘 만든 몸인데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걸까.

역시, 검술 쪽이 고민이겠지.

- 저벅.

나는 대장장이 노인에게서 빼앗은 칼 두 자루를 든 채 무심코 그녀를 향해 나아갔다.

일부러 기척을 드러내자 그녀가 내 쪽을 바라보며 대검을 겨눴다. 무기를 소중히 다루는지, 평범한 강철 대검이었지만 날이 잘 살아 있었다.

"다가오지 마시오."

그라스미어에 있을 때, 하루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닌가?"

"도움. 이라니 무슨 말씀이오?"

- 쨍그랑.

칼 한 자루를 대충 던졌다.

유블람의 대장장이가 만든 검은 정확히 크리스티나 한 걸음 앞에 떨어졌다.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위치였다. 크리스티나가 화들짝 놀랐다.

"이런 훌륭한 검을 아무렇게나. 뭐 하자는 거요?"

"어차피 칼은 많다."

어깨를 으쑥하고 말을 이었다.

"가져도 좋다. 그걸 줍든, 아니면 손에 들고 있는 큰 걸 쓰든 맘대로 해라."

"갑자기 무슨.

크리스티나는 대검과 땅에 떨어진 장검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칼을 들면 이유는 나중에

고민해라. 간다."

- 쎄앵!

나는 곧바로 크리스티나의 머리, 배, 다리를 향해 칼을 찔렀다.

그녀는 대검의 넓은 면으로 칼을 간신히 막았지만 손목이 흔들리며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갔다.

"내가. 뭘 잘못했소?"

"그런 질문이 문제지."

산속에서 칼을 들고 공격해 오는 낯선 적을 마주하고도 제 잘못부터 찾고 있다.

크리스티나의 검술은 그 성격부터 극복해야 했다.

그녀가 뒤로 물러난 만큼 곧바로 다가가 목을 찔렀다.

급히 막아 냈지만, 대검의 운용이 불안해졌다.

몇 번 공방을 더 반복하자 그녀는 불어난 계곡물에 빠졌다.

강하게 쳐낸 크리스티나의 칼이 빙글빙글 날아가 폭포 아래 진흙에 처박혔다.

"대체 누구시오? 내가 졌.

나는 흙바닥에 박힌 대검을 다시 뽑아서 크리스티나에게 건넸다.

"다시."

크리스티나의 손바닥에 붉은 피가 터졌다. 그녀 자신의 행색보다도 소중히 여기던 강철 대검은 이미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었다.

다시 한 번 칼을 그녀의 급소로 날렸다.

- 까앙!

완전히 안전한 공격은 아니었다. 크리스티나가 방어를 포기하거나 역량을 발휘하지 않는 순간 충분히 그녀를 해칠 수 있는 공격이었다. 비슷한 실력의 검사와의 생사결. 나는 그걸 모의하며 크리스티나를 깨워 주고 싶었다.

- 퍽!

부츠를 신은 발에 강하게 손목을 걷어차인 그녀가 칼을 떨어트렸다.

"다섯 번 죽었다."

차가운 칼등을 그녀의 목에 댔다.

크리스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내 칼끝에 스스로 쇄골을 가져다 댔다.

근육 위에 방울방울 피가 맺혔다.

"으음?"

"다시. 합시다."

크리스티나는 내가 칼을 주워 주길 기다리지 않았다.

몸을 굴려 칼을 주웠다.

공격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어설프게 몸을 수그려, 가슴팍을 가리려던 자세도 완전히 버렸다.

하루가 지났을까?

이틀?

아니면 사흘?

그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 털썩.

몸 곳곳이 얇게 베인 크리스티나가 흙바닥에 쓰러졌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쓰러진 그녀의 몸 위로 폭포수가

어지럽게 튀었다.

"푸하.!"

정말 죽어 버린 건가 싶은 순간, 옆으로 몸을 돌리며 크리스티나가 거칠게 깊은 숨을 터트렸다.

"하아, 하아, 하아.

달라졌나.

"죽이시오."

"죽이라고? 내가? 널?"

홁바닥에 쓰러진 그녀가 긍정하듯 눈꺼풀을 내렸다가 올렸다.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 이니까. 이대로 죽여 주시오."

웃기는 소리였다.

크리스티나를 며칠 동안 훈련시킨 이유는 즐거운 죽음을 맞게 해 주기 위함이 아니다.

'확실히 많이 발전했군. 며칠 동안 붙잡고 있었더니. 그라스미어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낫다.'

그녀의 재능은 지금까지 보아 온 인간들 중에 최고 수준이다.

제대로 된 스승만 만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바닥에 은괴 한 덩이를 던졌다.

"여비다. 적당한 장비를 마련해서 에라스트로 가라."

"에라. 스트?"

"레이 루비아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를 도와라."

이 정도면 되겠지.

칼을 수납하고 뒤로 돌아갔다.

"이름. 당신의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오!"

대답하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크리스티나는 충성을 바칠 대상만 찾아다니고 있는 타입이다. 성품도 재능도 뛰어나다.

루비아의 안목은 훌륭하니 분명히 크리스티나를 받아 줄 거다.

호위 정도로 써 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모르는 일.

다시 내성에 있는 루비아의 방에 들어갔다. 남은 은괴를 전부 침대 옆에 놓고 종이에 글씨를 썼다.

〈은괴는 선물. 호위 기사 하나를 보내니 잘 받아 주길. 〉종이 아래 선대의 인연, 이라고 끄적거린 뒤 빈방을 나갔다.

근처 대회의실에서 안정된 톤의 루비아 목소리가 들린다.

잘하고 있군.

약간은 홀가분한 기분이다.

이 정도면 근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다.

자잘한 지원과 신변의 안전.

세 번째는. 정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남았다.

레안드로 후작을 루비아의 편으로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할 차례.

나는 북쪽을 바라봤다.

수도로 가서, 레나를 만나야 한다.

268화 너희는 모래처럼 (9)

***************************************************

북쪽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눈이 안개처럼 내렸다.

걸어도, 걸어도 눈 가운데였다.

도시〈아만〉이 가까워짐을 알리는 표지판이 갑자기 나타난 게 마치 거짓말 같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두 갈래 길에서 아만 방향을 택했다.

고위 암살자와 정보상들의 임시 평화지대.

〈등불〉달리아크가 있는 도시다.

내가 수도에서 레나와 만날 만한 접점은 T&T 근거지뿐.

만약 지난 생에 트로핀 나냐우가 루-륨을 모두 빼앗긴 탓에, T&T가 약해지거나 혹시라도 사라졌다면.

수도에 가 봤자 레나를 만나기는 어렵다.

애초에 그곳에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상황. T&T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는 필요하다. 일단 달리아크에 들르는 게 낫다.

레나의 상황이 변했는지 아닌지는, 달리아크에 가서 정보를 사 보면 확실히 알겠지.

혹시 T&T가 완전히 궤멸됐다면, 그곳에서 즉시 후작에 대한 정보를 구해야 한다.

은신 상태에서 간단히 아만으로 들어갔다.

처음 레나와 함께 왔을 때 사용한 그라스미어의 신분증도, 루비아와 함께 왔을 때 아이작이 발휘했던 최면술도 필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 장벽인 달리아크 결계도 간단히 돌파했다. 이미 아이작의 설명을 따라 넘어간 적이 있다.

주술 지식까지 갖춰진 상태였다. 두 번이나 돌파한 결계를 또다시 넘어가는 건 간단했다.

'이것도 점점 쉬워지는군.

이런 식이면, 머잖아 황실 비역도 돌파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곧 커다란 건물이 서른 채 넘게 이어진 여관 달리아크에 도착했다.

지금까지는 탄탄대로.

처음 왔을 때 나를 안내했던 하얀 가면을 쓴 여자와의 만남도,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인간들의 시선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흘끗거려도 이쪽에 뭐가 있는지 상상도 못 하는 듯한 인간들을 보면서 자유롭게 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이왕 발각되지 않은 거, 처음에 안내받은 것처럼 〈비회원〉구역이 아니라〈회원〉구역으로도 가 볼까 싶은 마음이 솟아났다.

무리 없이 잠입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당장은 루비아 시나리오 클리어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기에, 괜한 위험은 최소화하는 게 낫다. 원래 목표인 경매장을 향했다.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장막 반대편에서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한 분이군. 결계에 영향을 안

받은 걸 넘어서, 은급 감시자들의 이목까지도 돌리셨다니. 그래, 어떤 정보가 필요하시오?"

아직 은신은 풀지도 않은 상태.

"종족에 따른 가격 차등은 없소. 다만 귀하가 찾는 적절한 상품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군."

볼 때마다 느끼지만.

대단한 녀석이다.

순간 다른 무엇보다도 장막 너머 녀석의 정체가 궁금해졌지만, 물론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T&T 길드의 대략적인 현 상태. 또한 레안드로 후작에 관한 정보를 원한다."

"흐음. 두 가지라."

침묵하던 남자가 말을 이었다.

"좋소. 당장 살 수 있는 정보는 10세이론부터 40세이론까지요. 물론 경매에 참가해도 좋고."

기억을 더듬었다.

후작이 황실에 암살됐다는 정보는 80세 이론이다.

지금 들을 수 있는 건 그 정도의 고급 정보는 아니라는 거다.

놈이 맡은 임무나 다른 인간관계,

세력에 관한 정보 정도일까.

"일단 그럼.

그 순간.

터무니없는 실수를 깨달았다.

돈이 없었다.

사실 그동안은 돈이 필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레나와 다닐 때는 로티 한 닢까지 그녀가 과할 정도로 알뜰살뜰하게 챙겼고, 아이작은 반짝이는 것들을 내가 싸울 때조차 혼자 모아 갔다. 루비아도 은괴 따위를 주면 적절히 아껴 가며 지출했다.

내가 인간의 돈이라는 걸 이러쿵 저러쿵 의식할 건 없었다.

자잘하게 회수하는 일도 알아서, 쓰는 것도 과도하지 않게 나눠서 쓰는 동료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합리적으로 지출을 계획하면서, 대신 머리를 싸매 줄 동료가 없자 터무니없이 헤프게 돈을 써 버렸다.

"혹시 돈이. 없나?"

지나치게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아. 그게.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이건 안 되나?"

노인이 만든 무기들을 내보였다.

"현물은 안 받아서. 그렇게까지 특별한 무기도 아닌 거 같군. 그럼 이만 나가시오."

칼같이 자른 남자는 날 보고 뭔가 추가로 말하려다 멈칫했다.

"뭘 말하려는 거지?"

"흠. 아무것도 안 샀는데 말해 줄 필요는 없지. 그냥 나가시오."

한번 확 엎어 볼까 싶었지만.

레드 플레이크를 사칭하고 여기서 난동까지 부릴 만큼 앞뒤 가리지 않고 날될 생각은 없다.

달리아크는 중립지역.

평화를 강제하는 장소다.

저 장막 안에 있는 인간이 얼마나 강할지도 모르고, 녀석으로 끝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내 실력을 알고도 저런 태도다.

무엇보다도, 이건 당연히 돈을 안 가져온 내 잘못.

얌전히 돌아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미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정보상인을 보며 물었다.

"나한테 수배령이 발동됐나?"

"아.

놀라는 기색이다.

"달리아크 내에서의 무력 사용을 방관하는 건가? 평화지대라니 그저 말뿐이군."

남자가 한충 더 흠칫한다.

- 파르륵!

뭔가 미안한 듯 접힌 종이 하나를 던진다.

"이게 뭐지?"

"2주 내에 재방문하면 정보료 50% 깎아드리겠소."

일단 종이째 챙겨 뒀다.

애초에 남자가 하려던 말이, 왠지 이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미 이야기는 끝났다.

어쨌거나. 밖에 있는 건.

그때와 같은 느낌.

이대로 나가면 예전과 같은 일을 당한다.

내 동선도, 여기 온 시간도 전혀 다르다.

하지만 같은 함정.

예언자 샤루니안의 능력이다.

저번에도 녀석의 예언으로 내가 여기 있던 타이밍에 맞춰 왔다.

어쨌거나.

언제까지 여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쉬이이이익.!

'마법장전.'

왼손에는 바람.

'이중영창.

오른손에는 얼음.

'질주.'

발아래 포스 실드를 띄우고, 막사 밖으로 몸을 솟구쳤다.

- 파박!

밖에 나가는 순간 땅 아래서 접촉 하는 것을 모두 마비시키는 강한 주술의 힘이 느껴졌다.

허공에 뜬 실드마저도 굳어 가서 재빠르게 다른 실드를 띄워 위를 밟았다.

내 목덜미를 잡기 위해 뻗어 오던

손이 발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안에서부터 모은 마법을 날렸다. 중첩된 냉기 폭풍이 터지며 골목 전체가 얼었다.

충격파로 몸이 한층 솟아올랐고, 회색 로브가 휘두른 낫은 한참 아래 에서 허공만 스쳤다.

입구 오른쪽에 있던 하얀 묘족은 벙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봤다.

가까스로 품에 손을 넣어 잡히는 부적 몇 개를 날렸지만 준비되지 않은 공격이라 피하기는 쉬웠다.

훌쩍 물러서 골목 담 위에 서자 묘족이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설마 보법 함정을 알아챈 거야? 너, 정말. 대단한 녀석이구나?"

묘족 옆에 서 있던 회색 로브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자."

"끄응. 포기하자고?"

"아무리 그 아이와 관련된 거라고 한들, 여긴 달리아크다. 더 이상의 소란은 어려워. 아쉽지만.

- 팟!

회색로브가 등을 돌렸다.

옆에 선 묘족도 어둠 속으로 빠져 나가려 할 때였다.

앞으로 한 발을 디디며 외쳤다.

"트로핀 나냐우!"

회색 로브가 발을 멈췄다. 그녀가 낫을 다시 들고 천천히 돌아섰다. 고급스럽게 낡은 회색 로브 사이로 긴 은발이 비춰졌다.

"나를. 아나?"

어딘가 오래된 느낌의 억양.

T&T의 시조 트로핀 나냐우.

그녀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예전에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우아하게 서 있었다.

안도감과 반가움이 느껴졌다.

잿빛 기사에게 루-륨이 모두 빨려 나갔지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 거다.

내가 여덟 병을 건넸던 레나 때와 완전히 다르다.

어쩌면, 내가 관여하는 루-륨만 세계를 변혁시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간다.

모든 존재가 루-륨에 개입할 때 세계선이 변한다면 내 삶이 항상 똑같이 시작할 리가 없으니까.

생각에 빠져 있을 때.

- 철컥.

나냐우가 긴 낫 손잡이를 가로로 잡아당겼다.

낫자루에 90도로 꺾인 손잡이가 뒤로 젖힌다.

낫 끝에서 쏘아질 것은 속도조차 측정할 수 없는 은빛 주화走火.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소란을 피울 수 없어 물러가는 거다. 끝까지 해볼 생각이면 물론 거절하지 않는다."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아직 그대로 온몸에 은빛 액체가 흐르고 있을 나냐우를 다시 한 번 훑어보며 말했다.

"너희, 애초에 날 납치해 가려고 한 거 아니냐? 지금 당장 순순히 따라가면 되잖아."

"뭐라고?"

말을 믿지 못하는 눈빛이다.

옆에 서 있던 묘족, 샤루니안도 예언자답지 않게 입을 떡 벌렸다.

이것까지는 예언 못 했나.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나온 경매장과, 멍해 있는 두 녀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대신. 돈 좀 있냐?"

"돈?"

나냐우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돈 있냐는 말을 처음 들어 본 듯한 표정이다.

그녀가 무심코 로브 여기저기를 뒤졌지만 나오는 건 은빛 탄환밖에 없었다.

"…이거 아마, 비쌀 텐데. 가격은 모르겠지만 아주 비쌀 거야."

저 탄환의 위력은 이미 내 눈으로

목격한 바 있다.

물론 귀하겠지.

하지만 나냐우의 특수 무기 외에 범용성은 전혀 없을 거다.

슬쩍 고개를 저었다.

"돈 있냐?"

나냐우가 옆을 바라봤다.

"아니? 하지만 난 복채를 받으면 되잖아. 돈이야 금방 생기거든?"

샤루니안이 푸른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를 내밀며 말했다.

허점을 찔리자 애써서 도도하게 보이려는 모습이었는데, 그 반대로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지금은?"

"없는데.

T&T의 최고위 간부 두 명이 은화 한 푼도 안 가지고 다닌단 말인가?

둘의 모습을 보자 내가 괜히 더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나지만, 저 녀석들도 보통이 아니다.

저렇게까지 주변머리가 없는 것도 신기하다.

규격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도 왜 푸르손 추종자들에게 내부에서 밀렸 는지 알 것 같다.

- 타닥. 타닥-

자신을 숨길 의향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듯한 신발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휴우. 저를 놓고 간다고 그렇게 우기더니. 무슨 소란이에요?"

흑적색 후드를 뒤로 확 젖힌 채 새로 나타난 인간이 중얼거렸다. 익숙한 얼굴이 드러난다.

그녀가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을 쥐었다 폈다.

방금 전까지 책상에라도 앉아서

일이라도 하다 온 분위기.

"어서 들어가! 위험해!"

"네가 여길 왜.! 우리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다급히 말하는 둘을 보고 레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상위 간부 셋이 여기 있는데 위험할 정도면 길드 문 닫아야죠."

"그래도. 내 주술 함정을 피한 녀석이야. 너는 다치면 안 되니까 어서 들어가라옹!"

새침한 척 말하던 묘족이 스르록 고양이로 변하며 레나 앞에 섰다.

고양이 모습일 때 최고 주술력을

발휘한다는 이유인 것 같았는데, 크지도 않은 고양이가 인간 앞에 서자 누가 누구를 보호한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레나가 앞에 선 고양이를 양손에 안아 들었다.

"니 아아아옹."

고양이는 그대로 만족스러운 듯한 울음소리를 냈다.

어처구니없는 녀석이다.

"당신.

레나가 말을 걸어오려 할 때.

'상태창.'

나는 조금 전 띄워 놓은 반투명한

글자들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완료한 시나리오입니다.]

[달성 호감도(70) 에 따른 보정이 반영되었습니다.]

[달성 레벨 (60) 에 따른 보정이 반영되었습니다.]

[클리어 보정 반영.]

[클리어 이후 추가 호감도를 지속 적립했습니다.]

[호감도가 추가 보정됩니다.]

[이름: 레나]

[호감도: 30]

호감도가. 올랐다고?

"당신, 생각한 것보다 대단하군요. 혹시 지금 정보를 사겠다고 T&T 간부들한테 돈 뜯는 건 아니죠?"

"으.

"제가 길드에 있는 한 그런 꼴은 못 봐요. 꼭 저기서 정보를 사이: 되는 건 아니겠죠?"

물론이다.

애초에 여기서 만날 줄 알았다면 수도에 갈 필요도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자 레나가 피식 웃었다.

"따라와요. 나도 당신에게.

나는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말을 끊어 냈다.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T&T 제3본부장 레나.

처음 사슴 아에자르의 자리였던 것을 차지한 인간 여자는, 상황을 이해 하려고 나를 바라보며 잠깐 눈을 깜빡거렸다.

레나를 보는 순간 정했다.

솔직하게 모두 털어놓기로.

그녀라면 충분히 신뢰할 만하지 않은가?

269화 너희는 모래처럼 (10)

***************************************************

"어떻게 알았죠?"

놀라는 기색이다.

"그걸 지금부터 말해 줘야지."

레나에게 안긴 채 나를 바라보는 샤루니안의 눈이 반짝인다.

옆에 서 있는 나냐우도 내가 무슨 말을 하나 듣고 싶은 기색이다.

이들에게는 사실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회귀를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다.

지금은 레나에게만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내가 입을 떼지 않자 레나가 슬쩍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단번에 내 의중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나냐우, 샤루니안. 잠시 둘이서만 대화했으면 해요."

"저 녀석과?"

트로핀 나냐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바닥에 내려진 샤루니안은 말도 안 된다는 둣 고개를 내저었다.

나냐우가 말을 이었다.

"위험해. 정체를 모르는 녀석이다. 무척 강하기도 하고."

나냐우에게 무척 강하다고 평가될 정도라니, 새삼 감개가 무량했다.

"샤루니안의 주술 함정을 간단히 예측하고, 갑자기 덮치는 내 손을 피했다. 그게 가능한 녀석은 길드 내에서도 한 손 안에 들어."

사실 이미 경험했던 함정이기에 피한 거지만, 모르는 입장에서는 저런 생각이 자연스럽다.

"제 결정이 틀린 적 있었나요?"

"안 돼. 너를 저런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어. 너는 길드의 최고 자원이다."

바닥에 놓아진 고양이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묶어도 좋다."

"뭐?"

나는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룬 수갑을 채워라. 처음 걸려던 주술도 그대로 걸려 주마."

칼을 아래로 내렸다.

"나를 납치하려 했던 건물로 바로 들어가도 좋다."

"그걸. 어떻게.?"

고양이가 엉덩이 부분에 꼬리를

바짝 붙였다.

"냐옹."

[점술이라도 즉석에서 저런 건 불가능해. 이건 궤를 벗어났다고!]

묘하게 의미가 전달되고 있었다.

"재밌네요. 그러면 된 거죠?"

냉큼 앞장섰다.

그 뒤를 나냐우와 고양이가 나를 감시하며 뒤따랐다.

골목길을 돌다 덩그러니 의자만 하나 놓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파갓.

룬 문자가 반짝이는 수갑이 양팔 뒤로 채워졌다.

초급 수준의 룬어 레벨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이어지며 하얀 번개가 튀었다.

양다리에도 같은 재질의 족갑이 채워졌다.

부드러운 털을 가진 흰 고양이가 살금살금 내 위로 올라와 전신을 톡톡 두드렸다.

아예 발을 땅에서 델 수 없었고,

주변에 뭐가 있는지 탐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완벽한 봉인이었다.

꽁꽁 결박당해 앉혀진 나를 보며 레나가 한쪽 입꼬리를 숙 올렸다. 맺힌 웃음이 묘하게 선명했다.

"이제 둘만 있을게요."

"흐음.

나냐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면 나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겠군. 가자고."

흰 고양이가 나를 보고, 바닥에 꼬리를 툭툭 치다 밖으로 나갔다.

항의라도 하고 싶은 건가.

제 영역을 내가 침범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됐죠?"

레나가 씩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둘만 남겨 놨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다들 아직 듣고 있는데."

레나의 표정이 묘하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참나.

감각마저 봉쇄된 상태.

하지만 느낄 필요도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밖에 나가서 잠시 소란을 피우고 온 레나가 다시 물었다.

"쫓아냈어요. 당신이 누군지 말해 봐요."

연극인지 진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굳이 더 끌지 않았다.

이번 생의 레나는 저번보다 내게 한층 더 호의적이다.

거기에 대해 저번 생처럼 '꿈'을 꾸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 꿈은. 꿈이 아니다."

그 한마디에 레나의 붉은 입술이 긴장으로 말랐다.

그녀는 태연한 척조차 하지 않고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전부 실재했던 '과거'다. 그리고 내가 그 과거를 변화시켰고."

레나에게 하나둘씩 설명했다.

동굴에서 만나고 검술을 가르쳐 줬을 때부터, 함께 여행한 순간과 그녀의 동생에 관한 이야기들까지 쏟아 냈다.

레나의 손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걸 모를 정도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말을 멈췄는데도,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휴우.

멈췄던 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한참 동안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뭔가에 집중하듯이 눈을 꼭 감으며 말했다.

"계속해 주세요. 기억이 채워지고 있으니까."

기억이 채워진다고?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의 밀도도, 호감도도 전부 다 올라간 건가.

집중하고 있는 그녀에게 '클리어' 이후의 생에 대해서 설명했다.

수도 내부의 비밀통로.

매장 작전과 그 실패까지.

"그러니 루-륨을 탈취할 생각은 접는 게 좋겠지."

"애초에 하지도 않은 생각이지만, 만약에 황실이 우리 쪽으로 통로를 뚫기 시작하면 상황이 분명 그렇게 굴러가긴 할 테니.

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조금은 진정된 듯했다.

"황실 내부의 주 정보원이 이보트 후작이라는 사실에, 스티글리츠의 존재까지 알고 있다니 당신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겠군요. 그럼.

품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얇은 금 속판을 꺼내 들었다.

- 파갓!

레나가 수갑과 족갑을 모두 풀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아니. 그럴 건 없는데.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암울한 삶이었다는 거잖아요?"

미묘하다.

레나는 저번 생과 달리 더 이상 나를 경계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미간을 좁혔다.

내 이야기로 기억을 맞추고 채워 가는 모습이었다.

이제 굳이 내가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레나는 질문을 이었다.

"그 뒤의 세계는 어떻게 되나요? 전쟁이라던가. 재밌는 거 있으면 알려 주세요."

날씨를 묻는 듯 태평한 어조.

받아들였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백히 필요 없었다.

대단한 개방성이다.

웬만한 녀석이라면, 머리를 며칠 싸매고 끙끙 앓아누워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고 머릿속에 떠도는 기억들은 무시할 수도 있는데.

"완전히. 받아들인 건가?"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여기까지 왜 왔겠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세상이라는 게, 별로 제대로 되어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무슨 일이 못 일어날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태도였다.

레나의 부탁대로 그녀가 죽은 뒤 전쟁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제국과 연합의 정예들은 모두 다 엠버메어에서 격돌을.

한참을 들은 레나는 꽤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굉장한 정보들이네요. 앞으로도 무척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내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집어넣는 레나를 보며 물었다.

"좀 이상한 게 있는데."

"뭐죠?"

"샤루니안. 예언의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나? 황실 루-륨을 탈취하는 작전에 그녀가 아무런 경고도 안 했었다고?"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까지 맞춘 예언가가, 라는 말이 생략된 것을 레나도 알아챈 듯하다.

"당신에 대해서는 내가 자세하게 이야기했으니까. 모르는 상대를 한 점술은 추상적인 결과밖에 낳을 수 없어요. 그래도.

살짝 침을 삼킨 레나가 말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길흉 정도는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젓빛 기사의 존재는 샤루니안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던 것 같아요."

트로핀 나냐우나 기스-제-라이도 살해한 존재다.

아예 힘을 측정할 수조차 없었다. 놈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상한 범위를 훌쩍 벗어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왜 그. 귀여운 아가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거죠?"

"아가씨. 라니?"

"마음 따듯한 아가씨 있잖아요. 계속 같이 다니던. 꿈속에서도 꽤 신경 쓰였는데."

놀랄 수밖에 없다.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훨씬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억도 감정도 훨씬 많은 파편이 남아 있는 모습.

클리어 이후에는 계속 호감도가 누적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 아가씨, 인간이면서도 당신을 무척 아끼는 것 같았는데. 재밌는 인간이었어요."

"사실 말하려고 했는데.

미묘하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며 레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에라스트 영주 분쟁에서 루비아라는 아가씨 편을 들어주고 싶다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관이 될 걸로 예상하는 후작을 섭외하길 원하시고."

"그렇지. 좀 부드럽게 흘러가면 좋겠는데.

"그런 양산형 쓰레기보다, 나랑 저번 생에 만난 분이 영주가 되는 편이 좋겠죠. 나중에 소개도 시켜 주시고. 하지만."

문득 레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지?"

"일단 전제가 틀렸어요. 레안드로 후작은 안 내려갈 거예요."

적잖이 놀랐다.

분쟁 중인 두 무리 모두 레안드로 후작이 내려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는데.

"정말인가?"

"네, 아까 말한 황실 내부자에게

입수한 정보예요."

이보트 후작에게 직접 나온 정보. 그 신빙성은 변방의 에라스트에서 떠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레나가 살짝 손을 쥐었다 편 뒤 말을 이었다.

"레안드로는 최근에 황실의 극비 도난 사건을 맡았어요."

도난 사건이라.

기억이 간질간질하다.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아직 뭘 도난당했는지는 우리 쪽 내부자도 알 수 없었어요. 아무튼 그게 해결되기 전까지 다른 일은 맡지 않을 거예요."

레나가 살며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사건이 끝난 뒤에는 서북쪽 바실리스크 토벌에 가기로 정해져 있어요. 비밀 사건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겠죠. 에라스트는 무리에요."

안도와 걱정이 교차했다.

레안드로 후작과 엮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절대로 루비아의 편을 들지 않을 녀석이 올 가능성에 대한 걱정.

"그럼. 누가 오는 거지?"

"사실 올 만한 후보라고 해 봐야 무척 적어요."

레나가 종이를 꺼냈다.

거기 몇 개의 이름들을 쭉 쓰고 내게 내밀었다.

모노클을 쓴 여자가 그어 버렸던 이름들.

레나는 내 쪽에 읽기 편하게 향한 이름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지우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다들 일정이 있어요. 일단 확인은 다 한 번씩 해봐야겠지만. 여기."

레나가 한 군데 펜을 멈췄다.

루비아의 부하인 모노클의 여자가 가차 없이 그었던 이름이다.

"비브리오 공작?"

두 번째 접하는 공작위의 인물.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명예 공작. 명예 대상조.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에요. 갑자기 나타나서, 황제가 내릴 수 있는 작위는 죄다 받았어요."

"으음."

"하지만 모두 명예직이라, 수당도 받지 못하고 보조 인력이나 영지도 없어요. 관사조차 주어지지 않죠."

후작에게 흡수한 제국법이 문득 떠올랐다. 명예직은 어떠한 땅의 보유도 금지된다. 영지를 지키는 병력의 보유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재판관으로 행차하는 건 가능하다는 이야기.

"활동이 없는 만큼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어요. 나이도 많이 들었고, 집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사생활도 조용하고요. 후작이 안 간다면 이 사람밖에 없는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같이 가요."

"같이. 가자고?"

"네, 제가 도와드릴게요."

같이 가서 도와준다니.

이제부터의 삶이 훨씬 편하리라고 느낄 수 있었다. 시나리오 클리어 이후 적립한 호감도가 계속 그대로 유지된다면.

회귀한 다음 레나부터 찾아가면 되는 게 아닌가?

T&T의 치밀하고 막강한 전력을 내 것처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이 가자는 말에는, 그 정도의 의미가 담겨 있다.

- 달그락.

고민하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거절.? 왜죠?"

순전히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다.

제국 수도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검주급 인간들이라면 내 존재를 간파하리라.

수상하게 여기고 따라붙겠지.

거기서 레나를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 앞에서 레나가 죽는 걸 두 번 다시 볼 수는 없다.

"나냐우는?"

"푸르손의 추종자들과 관련해서 해야 될 일이 있어요."

"나냐우랑 같이 다녀. 부탁이다."

그쪽이 훨씬 더 안전할 거다.

레나가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렸다.

"이거, 거미굴에서 저를 가둬 놨을 때가 떠오르는데요?"

"으음.

피식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요. 전생과 지금의 제가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솔직히 웬 인간이 와서 은혜를 갚으라고 했다면 저는 개소리 말라고 하면서 허벅지를 칼로 쑤셨겠죠

"다음 생의 저를 잘 부탁한다는 말 따위도 취향이 아니에요. 그냥, "

레나가 숨을 가다듬었다.

"뭐, 이 세상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지금은 당신이 좋아요. 마음에 드니까 돕겠다는 거죠. 그게 전부에요."

"도움을 받는 건 좋다. 하지만. 나는 잠시 망설이다 크게 외쳤다.

"트로핀 나냐우!"

언제부터 다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부른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얘 좀 데려가라."

270화 너희는 모래처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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