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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화 생매장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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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빈 애슈턴.

그 말을 들은 이보트 후작이 매우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색으로 따진다면 느슨하고 흐트러진 노란색이었던 후작은 날카로운 칼날이 가진 차가운 회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절로 경계심이 일어났다. 지금껏 캐빈 애슈턴이라는 단어에 유의미한 반응을 보이는 자는 단 하나였다.

수도를 구경한다고 훌쩍 떠나 버린 아이 작.

그리고 이제는 이보트 후작까지 둘이다.

아이작의 사례로 미루어 본다면, 이보트 후작이 평범한 녀석이 아닌것은 분명하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살폈다.

몸에 지닌 날붙이는 없다.

호신용 칼조차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건가.

그렇다고 칼이 필요 없는 경지는 아닌 것 같은데.

레안드로 후작이나, 이제 이름을 알게 된 '소녀 공작' 타르티에 같은 검주들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없다.

숨긴 지팡이도 없었다.

기스-제-라이가 살해했던 마법사두 명을 떠올렸다.

그들과도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마법사라고 보기도 힘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나 정말 많은 걸 겪었구나.

검주劍主들과는 직접 칼을 맞대고 싸우다 몇 번이고 살해당했다.

마법사들이 전력으로 싸우다 죽는 장면을 거듭해서 봤다.

그들의 분위기를 읽어 낼 정도로 경험을 쌓은 것이다.

어쨌건, 캐빈 애슈턴이 언급될 때 이보트 후작이 순간적으로 일으킨기세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칼 앞에서 쓰러지더라도.

베어도 벤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을 듯했다.

그건 상대가 내재한 무형의 어떤 자부심이나 기품 같은 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날카롭게 일어난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곧 사그라졌다.

"허허.

후작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나도 칼자루를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뭔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제압하려고 했지만, 그는 앉은 의자에서 처음부터 아예일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하핫. 무슨 일? 아무것도 아니다.

그라티아 영애, 티 파티는 즐길만하셨나?"

"이보트 영애께서 작은 부분까지 세심히 배려해 주신 덕분에, 무척즐길 수 있었습니다."

루비아도 티를 내지 않고 정중히 대답했다.

= 너도 방금 느꼈지?

〈??? 네. 캐빈 애슈턴과 대체 무슨관계일까요? 〉

후작은 친근한 표정을 지으면서 루비아에게 말했다.

"그. 책은 물론 찾아서 빌려드릴테지만, 내 한 가지 부탁이 있네.

곧 저녁 식사가 준비될 텐데, 함께 드시고 가지 않겠나?"

위험할지도 모른다.

루비아의 정체를 시험하려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 어쩔 거지?

〈으음. 여기서 저녁을 거절하면 절 수상하게 볼 것 같은데요. 일단맡겨 주세요. 〉그녀를 믿고 따라가기로 했다.

일단 내가 옆에 붙어 있는 상황.

신변에 위협이 발생하면 나타나서 해결해 줄 수도 있다.

설마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독살 같은 짓을 하지는 않겠지.

'캐빈 애슈턴'에 대해 무언가 말을 내뱉는 대신, 이보트 후작은 루비아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좁네만. 가족들끼리 식사하는 곳일세. 부디 즐겨 주게."

중후하고 거대한 저택이라 식당도 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에 기껏해야 열 명 정도가 식사하면 고작일 것 같았다.

하지만 식당에 메이드 한 명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셋이 식사하기는 충분히 넓었다.

"영애의 식사량은 모르지만."

후작은 어뮤즈먼트로 나온 카나페하나를 집으며 농담을 건넸다.

"부족함은 없게 준비했으니 느긋하게 즐겨 주시오."

허언은 아니었다.

주방에서 식사가 만들어질 때마다 접시를 들고 온 메이드가 식사를 하나씩 소개했는데, 슬쩍 듣기에도 값비싼 요리들이었다.

"푸아그라 테린입니다."

긴 사탕 껍데기처럼 만든 종이가 툭 풀어졌다.

식사하는 표정을 보니 독이 든 것 같지는 않다.

수프도 평범하지 않았다.

"섞어 드시면 됩니다."

메이드가 트러플을 눈앞에서 갈아계란으로 살짝 코팅된 스프 위에 백백하게 떨어트렸다.

하나씩 나오는 전채와 식사에는 정성이 매우 들어가 있었다.

= 어때?

〈후우.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네요. 긴장하고 있으면서 티를 안 내기가 쉽지 않아요. 〉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 먹는 것 같은데.

=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음. 그건 아니에요. 〉

후작은 식사 내내 캐빈 애슈턴에 대해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요리는 입에 맞으신가? 내 슬쩍듣기로. 어머님께서 요리에 무척조예가 깊다고 하던데."

"아하하핫.

루비아는 갑자기 조금 과장되게 웃었다.

조금은 버릇없어 보일 정도였다.

후작은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능청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지?"

"용서하십시오, 각하. 저희 모친의 요리 솜씨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서 그렇습니다."

"특별하게 뛰어나다고 들었다만.

제대로 수업을 받았다고.

"각하, 제 부친의 수첩 첫 장에 쓰여있는 말이 있습니다. 〈주의: 앤이 요리하는 상황을 절대 만들지 마라.

내가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

"허허. 그럼 내가 들은 소문이 좀왜곡되었던 모양이야."

= 지금 너를 떠본 건가?

〈맞아요. 앤이라는 분은 참혹한 요리 솜씨와, 어마어마한 요리에의 욕구로 가득한 백작 부인이에요. 〉루비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의 비슷한 함정 질문이 이어의식하고 듣거나, 중간중간 루비아가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함정인 줄도 모르고 넘겼을 화제들이었다.

공부하겠다더니, 정말 그라티아가문 본인도 이렇게 자세히 자신에 대해 알기 어려울 것 같았다.

저런 것까지 아나 싶을 정도로.

= 고생하는군.

〈아니에요. 아까 티 파티에서는 공부한 걸 전혀 쓸 수가 없어서, 조금 허무했는걸요. 지금 제대로 쓰고 있네요. 〉루비아는 한 번도 당황하지 않고 후작과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왜 이보트 후작은 캐빈 애슈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그걸 다시 숨기려 할까.

아이작이 곁에 있었다면 정답을 알려 줬을지 모른다.

최소한 녀석에게 물어보기라도

하고 싶은데.

아이작은.

대체 어디를 간 건지, 며칠 동안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떠날 때 기약도 없이 수도 관광을 하겠다고 했을 뿐.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어디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릴 아예 버리고 간 거라면.

개운한 기분이 들어야 할 텐데,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나는 괜히 목을 한 바퀴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작은 어디에도 없었다.

흑돼지 어깨 등심을 구워 낸 메인요리에 이어, 디저트로 사과 칵테일과 딸기 파르페가 나왔다.

"식사 무척 즐거웠네. 다음에 또초대할 수 있으면 좋겠군."

"정말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꼭그럴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아, 맞다. 아버지, 책은요?"

"물론 생각하고 있어. 전집으로 스무 권짜리를 먼저 내어드리지.

마차를 준비해서 따로 배달해 줄 거야."

스무 권!

아이작의 행방에 대해 고민하던 생각마저 멀리 날아갈 정도였다.

애슈턴의 저작 스무 권이라니!

그런 게 이보트 가문에 있었다는 말인가?

"와.

루비아도 놀랐는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엄청난행운을 만난 느낌이다.

무척 수완 좋아 보이던, 진네이 유베조차 한 권밖에 구하지 못한 책이다.

지금까지 읽은 것도 여덟 권밖에 되지 않는다.

별별 재주를 다 부리던 보육원의 슬라임에게도 세 권밖에 없었다.

그런데 스무 권을 전집으로 내어주는 스케일이라니. 이것이 개국 공신 가문의 저력이라는 것일까?

루비아는 후작에게 거듭해서 감사인사를 건넸다.

= 스무 권이라니.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정말 잘됐네요! 〉

캐빈 애슈턴의 책 스무 권을 읽을 생각으로 두근거렸다.

적어도 지혜가 20은 오를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스킬을 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를 읽었을 때.

캐빈 애슈턴의 히든 피스를 접했다면서 지혜가 무려 10이나 상승한 데다가, 통찰 (E마이너) 이라는 특전까지 얻었던 적이 있다.

스무 권이다.

그러면 그중에 한 권 정도는.

- 다그닥.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바깥으로 마차가 저택을 출발했다.

루비아의 마차 뒤로 전집을 실은 마차 한 대가 따라갔다.

그리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다섯명이 슬쩍 저택을 빠져나오는 게 느껴졌다.

미행.

후작이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다.

꺾이는 골목을 따라서 걸어오는 녀석도 있었고, 지붕 위를 움직여날아오는 녀석도 있었다.

팔짱을 끼고 대로를 걸어오다가, 흩어져 다시 분장을 바꾸고 마차 뒤를 밟았다.

물론 내 탐지 능력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유령들과 몇 번이고 부딪쳐 봤던 내 입장에서는, 그냥 따라오니까신경 쓰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일단 루비아에게 말하지는 않고 그들을 파악하며 걸었다.

'탐지.'

[심안心眼(C+) 적용 중.]

다섯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루비아의 마차를 따라온다.

특별한 살의 따위는 없어 보였다.

이보트 후작가에서 나온 것들.

당장 붙잡아 죽이거나 고문하기도 애매하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모르는 척루비아에게는 전혀 티 내지 않았다.

녀석들은 각자 숙소 주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안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어디를 하나 부러뜨려 줬을 텐데.

나는 짐꾼들이 들고 온 스무 권의 두꺼운 책을 바라봤다.

빈 책장에 차곡차곡 정리된 책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책들은 접하지도 못했겠지."

"도움이 되어 기뻐요! 저도 같이 읽어도 될까요?"

당연한 이야기다.

고개를 끄덕인 뒤 책을 펼쳤다.

〈제국사 편력 - 캐빈 애슈턴〉

제국 초창기부터의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책이었다.

물론 그저 단순한 기록의 배열은 아니었고, 야사野史 하나하나마다 작가의 생각을 달아 각각의 행동을 평해 놓은 책이었다.

- 스륵.

제국 초기부터 존재했던 가문들의 역사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한 책이었다.

애슈턴 가문과 이보트 가문.

눈에 띄는 점은.

〈???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이보트가家는 건국 초기부터 애슈턴가에 대해 항상적대심과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저자인 캐빈 애슈턴은 자기 가문얼굴에 금칠을 하며, 그와 동시에 이보트 가문을 지독할 정도로 깎아내리고 있었다.

"저속하고. 게으르면서. 한심한 것들이라니. 평가가 너무한데요?

그런 말까지 들을 가문은 아닌 것 같았는걸요."

"으음."

"게다가 이런 책을 직접 보존하고 있다니 신기하네요. 그냥 수집욕때문일까요?"

루비아가 짚은 포인트가 묘하게 느껴졌다.

〈최고 공신 가문인 애슈턴가家는 거의 대가 끊길 지경에 이르렸다.

이 비극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전모가 밝혀진 바는 없다. 하지만 그 뒤에 이보트 가문이 있으리라는사실. 적어도 이보트 가문이 몹시기뻐하리라는 건 명백하다. 〉

"아니, 이걸 왜 남 핑계를 대지."

이런 서술 때문이라면.

이보트 후작의 반응도 이상한 건 아니다.

일단 나도 캐빈 애슈턴에게 묘한 도움을 받는 처지니, 그의 적이면 나도 이보트의 적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읽어 갔다.

- 스르록.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바티엔느가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대부분 성정이 과격하며,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지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였다.

〈. 검투사나 하다가 비명에 가면 딱 좋을 혈통이다. 〉이보트와 바티엔느.

그 두 가문 외에 별다른 악담은 없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다.

특히나 책을 쓴 '필체'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유려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묘한 위화감이 척추로 스멀스멀 천천히 기어올랐다.

뭔가 달랐다.

한 줄 한 줄을 읽을 때마다 알 수 없이 럽텁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은 뒤책을 덮었을 때였다.

- 탁.

조용한 숙소에 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해골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혜가 오르지도 않았고, 특전이 생겼다는 메시지도 없었다.

한 권만 읽어서는 아닐 텐데.

지금까지 읽은 것도 절반 이상이 시리즈물.

〈캐빈 애슈턴의 업적 - 17〉같은 것들을 단권으로 읽었을 때도 분명바로 지혜가 올랐으니까.

결론은 간단했다.

나는 루비아를 보며 말했다.

"이거. 가짜다."

231화 생매장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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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아가 나를 갸웃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가짜. 라고요?"

"일단 끝까지 확인해 보고."

문체는 몹시 흡사하다.

그의 책 여덟 권을 정독한 내가 봐도 속을 정도니까.

하지만.

지혜가 오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앉은 자리에서 다른 책을 읽어 봤지만 마찬가지다.

아무런 메시지도 뜨지 않았다.

지혜가 올라간 탓인지, 책을 읽는 속도가 더 빨라졌기 때문에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한자리에서 책 네 권을

더 읽었다.

- 털썩.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그것도 가짜인가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책을 읽던 루비아가 물었다.

"아마."

물론 '캐빈 애슈턴'이 쓴 책이라고 해서 전부 지혜가 올라야 한다는 법은 없다.

지금까지 봐 왔던 책들이 오히려예외적인 경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이론적인 이야기일뿐이다.

책을 읽어 보니 기묘한 위화감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마치 친숙한 누군가를, 흉내 내는 타자를 보는 듯한 위화감.

"제가 도움이 못 되어 버렸네요.

죄송해요.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루비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낙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뭐. 가짜라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니에요. 전에 진짜 책을 읽을 때랑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어요.

분명히 알아보시는 거겠죠.

슬퍼하며 축 쳐져 있는 루비아를 그럴 거 없다면서 위로했다.

가서 확 뒤엎을까 싶은 생각마저떠오른다.

숙소 주변에 붙은 다섯이나 되는 미행을 붙이고, 빌려준 책도 전부 다 가짜라니.

나는 고민에 잠겼다.

놈들은 '캐빈 애슈턴'의 이름으로, 이보트 가문의 욕이 쓰인 책들을 우리에게 빌려줬다.

이게 가짜 책이라면.

진짜 책에는 이보트 가문에 대해 뭐라고 적혀 있을까.

후작은 분명 캐빈 애슈턴에 대해 단서를 갖고 있을 거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름에 표정이 일그러졌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할지가 문제.

중요 작전을 코앞에 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시기다.

다짜고짜 잠입해서 아는 걸 전부 말하라며 고문하기도 곤란하다.

캐빈 애슈턴.

캐빈 애슈턴.

나만큼 그 이름에 집착하는 다른 한 녀석을 안다.

아이작이다.

놈에게 상담하고 싶은데, 대체 딱필요한 지금 어디를 간 걸까?

대신 루비아와 이런저런 추측을 이어 나가 보려 할 때였다.

- 똑똑.

복도로 똑바로 걸어온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라티에 영애께 전할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라고?"

문을 열자 낯선 인간이 밀랍으로 봉한 편지 봉투를 건넸다.

"어디서 온 거지?"

"시셀 리드바렌 영애께서 보내신서신입니다. 좋은 밤 되시길."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편지예요?"

"응. 잠시만."

- 투툭.

편지를 뜯었다.

탈탈 털며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독 따위는 들어 있지 않았다.

막 쓴 편지였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이리저리 풍겨 댔다.

"읽어라."

속지를 루비아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편지를 한 줄 한 줄 읽었다.

"음. 먼저 일찍 떠나게 되어서 아쉬웠습니다. 수도 상황에 대해서 궁금하신 건 없으신지요? 그라티에 영애와 좀 더 내밀한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오늘 밤이라도 좋습니다.

언제든 내방 환영합니다. 시셀.

리드바렌 드림. 저한테 왜 이런 걸 보냈을까요?"

루비아가 편지 안에 든 초대장을 손으로 흔들었다.

살짝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인기 많은데. 티 파티에서 뭔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줬나 보지?"

나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별 눈치가 없어도, 최소한 그녀가 거기서 만만치 않게 보였다는 것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멍하던 루비아의 얼굴이 살며시발갛게 물들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이상하네요.

이분은 이보트 영애와 무척이나 적대적인 것처럼 보였는데. 혹시한 명이라도 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걸까요?"

"어쩔 건가."

"글쎄요. 고민이네요. 결정하시는 대로 할게요."

"내가?"

"네! 책임 떠넘기기예요."

그녀가 쿡쿡 웃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말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현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봤다.

루비아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다.

이보트 영애의 티 파티에 참석해놓고 그 최측근처럼 굴었었는데, 갑자기 적대자 리드바렌 측 초청에 응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어쩔까.

나는 남은 열다섯 권의 책을 쑥훑어봤다.

"읽을 책도 남았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전부 다 가짜였던 거죠?"

"그래."

루비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그녀의 목소리에 미안함이 짙게 배어 나온다.

"아니, 네가 그런 반응 보일 건전혀 없는데."

루비아의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자 한층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보트 이 새끼가.

어떻게 한 권이 진짜가 없나.

그 딸은 루비아를 보자마자 바로 이용해 먹을 생각부터 떠올리고.

적극적으로 장단을 맞춰 줬는데, 아비가 고맙다면서 빌려준 책은 한 권도 빠짐없이 전부 다 가짜다.

망할 놈들.

"나쁜 녀석들이네요. 정말 여기로 한번 가 볼까요?"

내 분위기를 읽은 걸까.

루비아가 초대장을 흔든다.

"그러지. 목적은?"

"이보트 후작에 대해 한번 물어보려고요."

좋은 생각이다.

애슈턴도 애슈턴이지만, 이보트후작이 궁금해진다.

애슈턴의 이름을 말했을 때 놈이 보인 민감한 반응을 생각한다면, 녀석이 이 책을 가짜인 줄 모르고 우리에게 줬을 가능성은 적다.

미행하는 녀석들이 보라는 듯이 대놓고 리드바렌 백작가를 향했다.

혹시 저쪽에서 무력을 쓴다 해도, 루비아 정도는 데리고 가볍게 빠져나올 수 있다.

저택 크기는 비슷했다.

그러나 이보트 후작가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백백하게 깔린 무장경비병들이 눈에 띄었다.

담장 부근에 설치된 각종 트랩이, 탐지 영역 안에 빼곡히 느껴졌다.

"도둑 들 일이 많나 보군."

"가장 부유한 가문 중에 하나라고해요. 종교재판관을 맡은 것도.

물욕에 가장 덜 휩쓸리려면, 이미가진 돈이 많아야 한다는 이유라고 들었어요."

얼핏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웃기는 논리였다.

정문 앞쪽에는 뇌물이라도 대려하는지, 몇몇 마차들이 길게 줄을 늘이고 서 있었다.

"너는 정문으로 가라."

"해골님은요?"

"안쪽을 좀 살피지."

적지敵地라면 적지다.

언제든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인지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 훌쩍!

담을 넘었다.

빼곡히 깔린 트랩 위치가 한눈에 훤히 읽힌다. 탐지 스킬을 최대로 발휘한다. 걸리적거릴 만한 녀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질주.'

- 팟!

아예 빠르게 여기저기 다녀도 될 정도다.

농락하듯이 바로 뒤에서 다녀도 눈치채는 인간 하나 없었다.

'전부 허수아비인가.'

초대장을 보여 주고, 당당히 저택안으로 들어오는 루비아를 보면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강자들이 모이는 제국 수도.

게다가 여긴, 얼핏 봐도 '실세'인귀족의 저택이다.

기사단을 데려왔나 싶을 정도로, 저택 앞뒤를 빼곡히 지키는 병력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내 존재를 눈치라도 챈 녀석은 단한 명도 없다.

역시 '유령'들의 존재는 이상하다.

에라스트는 더욱 그렇다.

그곳에 머물러 있던 '내사과장'의 존재는 터무니없다.

단순히 내가 약하고, 이 세상이 강자로 가득한 것만은 아니다.

뭔가.

뭔가 왜곡되어 있다.

살해당하기 전 내사과장과 섞은 대화를 떠올렸다.

〈. 너희 같은 강자들이 왜 이런시골에 와 있는 거냐. 〉〈상부 지침이라고. 황실 비역에서 내려오는 지침. 〉〈국장 후보자들은 에라스트에서 필히 1년씩 근무해라. 수상한 게 등장하면 깔끔히 정리해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 '유령 내사과'가 출동한다면, 이런 백작가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깔끔히 정리된다.

힘의 분배가.

뒤틀려 있다.

리드바렌 백작의 저택은 무언가를 흉내 낸 복제품처럼 보인다.

제대로 된 힘은 은밀한 극소수에 집중되어 있고, 이 귀족들은 마치 깃털 장식처럼 보인다.

차라리 경비병 하나 두지 않았던 이보트 후작이 일으킨 기운이 훨씬 '진짜' 같았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루비아는 정문에서 두 집사에게 안내 받았다.

"어머. 와 주셨군요! 정말 현명한 선택을 하셨어요."

리드바렌 영애가 루비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현명한 선택이라.

무슨 이야기를 할 건지 벌써부터 짐작이 된다.

속이 과하게 들여다보이는 타입의 인간 소녀다.

응접실에 들어선 시셀 리드바텐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

"이보트 가문은 망했어요."

"망했. 다구요?"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진한 척이 여기서도 제법이다.

"네. 찻잔 그릇이나 정원 꾸미기 같은 거에나 신경 쓰고 있어서야 귀족이라고 할 수 있나요?"

우스꽝스러운 헛기침 몇 번을 한 소녀가 말을 이었다.

"개국공신 가문이라고 해도 별수없지요. 어린애들은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지만. 글쎄요.

정문에 줄 선 마차들 보셨죠?"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라티에 영애는 수도가 처음이시잖아요. 그러니까 당신께는 제가 기회를 드리고 싶었어요. 제대로 편을 선택할 기회를 말이죠."

시셀이 씩 웃었다.

"무조건 줄을 잘 서야죠. 그래야 인생이 잘 풀려요."

시셀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순간루비아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마도 '줄을 잘못 선' 에라스트가신들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 재수 없는 꼬맹이로군.

〈확실히 그렇네요. 〉

남의 험담에 대해, 루비아치고는 드물게 빠른 동의다.

〈아는 게 있나 한번 떠보기만 해야 겠어요. 〉

그녀의 질문에, 시셀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털어놓았다.

루비아가 여기가지 온 이상.

분명히 자기편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보트 가문은 이미 황제 폐하의 눈 밖에 났어요. 전쟁 준비에 전혀협조하지 않고 있거든요."

"전쟁, 이요?"

"어휴. 정말 아무것도 모르셨구나.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들으세요.

하지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었다.

그동안 아이작이나 레나에게 계속정보를 얻은 까닭일까.

시셀이 대단한 듯 뱉어 내는 말은 시시한 가십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 별거 없군.

〈크게 기대는 안 했었지만, 정말 아는 게 없네요. 〉

이 정도라면 그냥 레나에게 따로 묻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루비아도 실망한 듯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어요. 그러면 전 이만.

"아니요. 지금 확실히 말을 하고 가셔 야죠."

소녀가 루비아를 막아섰다.

이건 또 새로운데.

루비아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정보만 듣고 가려고 하신건가요? 그건 정보상점에 가서 돈내고 사세요."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명백한데 왜 그냥 재 보는 것처럼 굴죠?"

= 치워 줄까?

〈아니에요. 얘긴 들어 볼게요. 〉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제가 이쪽을 선택한다고 해 보죠.

그럼 저에게는 좋은 게 뭐죠?"

"목숨을 부지하는 것과, 전쟁 후최고의 자리에 오를 우리 가문과 친분이 있다는 것. 충분한 대가 아닐까요?"

= 뭔 소리냐.

〈살려는 준다는 얘기네요. 〉

"그 대가로 제가 해야 하는 일은뭐죠?"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이보트가문에 좋지 않은 증언 하나를 해 주면되요."

어처구니없는 녀석이다.

리드바렌 백작이란 인간의 수완이 얼마나 좋을지는 몰라도, 그 딸은 엉망이었다.

"제가 거짓말은 잘 못해서요."

하고 싶지 않은 거짓말만이겠지.

그라티에 영애는 그렇게 능숙히 흉내내면서.

어쨌거나, 분명한 거절의 뜻이다.

"뭐라고요? 지금 리드바렌가를 우습게 보고 계시는 건가요?"

화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뭔가 소꿉놀이 같은 기분이 든다.

공간 전체에서 느껴지는 위화감.

= 얼른 나가자.

이런 '가짜'들의 장난에 어울려 줄생각은 없다.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빨리레나의 작전대로 루-륨을 탈취해야 할 것 같다.

"다음에 뵙죠."

"무슨.

- 딸랑!

"부르셨습니까?"

덩치 좋은 시녀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잡아."

이런 일에 익숙한 둣, 시녀들은 표정도 변하지 않고 움직였다.

도와주려고 한 순간.

- 콰득!

시녀들이 내미는 손을 루비아가 잡아서 옆으로 꺾었다.

"아아악!"

시녀 두 명이 순식간에 양옆으로 나뒹굴었다.

지금 뭘 본 거지?

232화 생매장 (12)

***************************************************

루비아가 누군가를 제압하는 건지금껏 처음 본다.

"이, 이게 무슨.!"

시셀 리드바랜이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루비아가 언제 이렇게 강해졌지?

놀라서 그녀의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8] (new!)

[체력: 13] (new!)

[힘: 12플러스9.3] (new!)

[민첩: 13] (new!)

[지혜: 19] (new!)

[호감도: 50] (new!)

- 루비아가 하는 생각은 당신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 당신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 관심이 크게 줄어든 상태입니다.

[특전] (new!)

- 스탯 공유: 줄곧 하나의 사령만 소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해당사령과의 관계가 매우 깊으므로, 가장 높은 스탯의 10%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 해당 스탯: 힘 (93)

당황스럽다.

루비아도 성장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전반적으로 스탯이 오른 건, 내가 사냥한 것들의 경험치가 그녀에게 흘러 들어간 탓 같다.

게다가 내 스탯 중에 가장 높은 스탯인 힘 스탯을 비록 10%라도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계속 성장하면, 루비아는 어쩌면 혼자서도 '첫 번째 밤'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갈게요."

루비아의 가녀린 뒷모습이 어쩐지 든든해 보인다.

그 순간 뒤에서 시셀이 외쳤다.

"가, 가드들을 불러.!"

[공포 Lv.1 스킬을 사용합니다!]

- 털썩.

정말 최대한 약하게 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셀과 두 시녀는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최대한 약하게, 가 이 정도인가.

지혜 스탯이 오르면서 이건 조금귀찮아진다.

아무래도 좀 더 섬세하고, 약하게 쓰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 어서 가자.

〈네! 〉

저런 모습이 된 게 좀 수상하긴하지만.

시녀들이 몰라도, 가드들이 하나둘몰려오면 루비아가 감당할 수 있을리 없다.

내가 안 보이게 끼어든다고 해도, 루비아가 가드들까지 모두 쳐내고 갔다는 건 역시 부자연스럽다.

시셀을 반쯤 기절시켜 놓은 덕에 길을 가로막는 자들은 없었다.

느긋하게 마차를 타고 돌아오며 루비아에게 물었다.

= 어이.

〈네? 〉

= 언제부터 힘을 숨기고 있었지?

루비아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저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제일 잘알고 계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일까.

당황하는 내 반응을 본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숨긴 건 없어요! 저도 이렇게 막수치가 '변한' 건 처음이에요. 함께 다닌 효과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일 잘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이런 오해가 있었나.

그녀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같다.

스킬 목록을 확인했다.

원래 있던 것들도 조금씩 레벨이 올라 있고, 심지어 새롭게 생겨난스킬까지 보인다.

그중에서도 두 가지가 특히 눈을 잡아끈다.

[사막 적응 Lv.1](new!)

- 해당 지형 (사막)에서.

붙는 설명은 나와 당연히 같다.

그녀와 함께 사막을 달린 추억이 스킬로 생성됐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다.

[평정 Lv.2](new!)

- 짧은 시간에 놀라운 일들을 너무많이 겪은 당신은, 이제 대부분의 상황에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태 이상 스킬에 미약한 확률로 저항합니다.

이건 심지어 레벨이 2나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가 지금당장 싸울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변화는 그 자체만으로 놀랍고 뿌듯했다.

처음에는 내가 입만 한 번 열어도 기절할 듯 놀라며 진흙 위에 넘어지던 그녀가, 이런 스킬까지 가져 버리다니.

장대비가 내리는 무덤가에 서서, 오들오들 떨며 나를 깨우던 어설픈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그녀가 변하고 있었다.

어서 에라스트의 영주로 만들어줘야 하는데.

이번 작전으로 조금이나마 거기 가까워질 수는 없을까.

레나에게 루-륨 열두 병을 줬던 결과에 대해 생각했다.

T&T 본부장이 되어 있었던 데다, 과거까지 바뀌어 있었다.

루비아에게도 그런 일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를 곰곰이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도착한 건 금방이었다.

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붙은 미행들과는 상대도안 되는 고도의 추적이었다.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루비아가 엮이게 할 생각은 없다.

"잠시만."

슬쩍 숙소를 빠져나갔다.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기척이 사라졌다.

오른쪽, 왼쪽.

아니, 바로 뒤다.

- 까앙!

누군지 확인할 생각으로 가볍게 휘두른 칼에, 십자 형태로 교차된단검이 부딪쳤다.

"너무 살살 내리쳐 준 거 아니야?

큰 걸 갖고 있으면 좀 더 화끈하게 쓰라고."

"누군지도 모르지 않나. 방금도 큰일날 뻔했군."

레나가 쿡쿡 웃었다.

"날 죽이면 큰일이라고 말해 주는거야? 그건 기쁜데."

"농담하지 마라."

- 톡톡.

레나는 단검을 벽에 부딪쳤다.

"농담이 아닌걸. 거짓말도 아냐."

"작전에 대해 말하러 온 건가.

혹시 일정 변경이라도?"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감이 좋네."

말을 돌리려고 한 소리가 어쩌다맞아떨어진 모양이다.

"당겨졌어. 오늘부터 일주일 뒤야.

내부자도 놀랄 만큼 급작스러웠어.

전쟁을 서두르는 모양이야."

왜 갑자기 서두르는 걸까.

혹시 내가 한 일의 결과일까 싶은 생각도 스쳤지만, 뚜렷한 인과가 있을 만한 일은 없었다.

과도한 생각이겠지.

"알았다."

"사홀 전에는 작전 장소에 대기해줬으면 해. 가능할까?"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동안 루비아를 보호해 줬으면 하는데."

나야 준비할 것도 없다.

하지만 작전 기간 동안 루비아와 떨어져 있는 게 무척 신경 쓰인다.

스탯이 오르긴 했지만, 고작해야 평범한 성인 남성 두 배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제대로 된 암살자가 붙으면 숨도 한 번 못 쉬고 죽을 거다.

게다가 아이작도 없으니.

잠시 멈칫한 레나가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가 보호를 맡을 거야. 최고급으로 붙일 테니아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물어볼 게 있는데.

"응, 듣고 있어."

레나가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초롱초롱한 그 눈에 어찐지 묘한 그늘이 져 있었다.

바빠서 피곤한가.

"아니, 됐다. 일단 작전이 끝난 뒤물어보도록 하지."

변경된 작전을 전달하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듯하다.

이보트 후작에 대해서 레나에게 캐물어 볼까 했지만,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으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달라고."

레나는 내게 작전을 다시 한 번간단히 상기시키고는, 밤을 향해걸어갔다.

다가올 때는 몰래 뒤를 잡으려고 하던 그녀는, 헤어질 때는 자기가 사라지는 걸 계속 알고 있으라는 듯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이제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 남겨진 뒤 레나의 펜던트를 다시 한 번 바라봤다.

계획은 변경되었지만, 펜던트의 반응은 그대로다.

위험하다는 반응은 없다.

크게 실패할 계획은 아니라는 말.

절대적으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게 사실이다.

펜던트를 다시 품에 넣고 그대로 숙소로 돌아갔다.

"며칠 내에. 잠깐 어디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거군요?"

나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서약서의 힘이 나를 얽어매고 있는 탓이다.

"아. 알았어요. 괜찮아요! 갈 때 이야기만 해 주세요."

작전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루비아를 아예 레나의 거점에 맡겨두고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어디서 붙인 건지는 몰라도 미행몇이 늘었지만, 레나의 거점으로 위치를 변경한 뒤에는 전부 알아서 사라져 있었다.

"잘 다녀오세요."

루비아는 나를 믿는 표정이다.

"예전처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예전처럼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혼란스럽다가, 곧 기억해 냈다.

그라스미어에서 유베에게 그녀를 맡기고, 아이작을 찾아갔던 때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기다린다니.

그렇게 말하면 죽으라고 해도 못죽는다.

"이거.

루비아는 나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게 뭐지?"

"손수건이에요. 심심해서 한번자수를 넣어 봤어요 처음 해 본 건데.

마음에 안 들면 가는 길에 버려주세요."

그녀가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게도, 특별한 기능은 없어 보이는 손수건이다.

하지만 버릴 생각은 없다.

잘 넣어진 건지 아닌지는 판단할수 없는 일이었지만, 보면 볼수록피식거리는 웃음이 나왔다.

언제 이런 걸 만들고 있었을까.

보라색과 파란색, 갈색 실이 하얀손수건 위에서 몇 종류의 꽃들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출전하는 기사님에게 손수건을 주는 전통이. 있거든요! 전 그냥전통에 충실해 본 거예요. 일단은 위장 신분이라도 제 호위 기사님이니까.

가만히 손수건을 바라보고 있으니 루비아가 당황하며 횡설수설한다.

평정 스킬로도 제어가 안 될 만큼당황한 것 같다.

"고맙게 받지."

나는 수건을 챙겨서 품에 넣었다.

그리고 비밀 통로를 따라 달려가 환풍구에 몸을 숨겼다.

하루가 지났다.

이 작전만 성공시키면 지금보다훨씬 강해지리라는 확신이 든다.

전직이라는 것도 해 보고, 유용한 스킬들을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만큼 행동의 폭도 넓어지겠지.

루-륨을 잔뜩 흡수하면, 그것의 또 다른 비밀을 알게 될 가능성도높다.

루비아를 에라스트 영주로 만드는 '시나리오 클리어'에도 한발 더가까워질 거고.

몸을 숨긴 채 이틀이 지났다.

작동하지 않는 환풍구는 조용하고 어둡다.

생각에 잠기기 좋은 환경이다.

루비아는 잘 지내고 있을까.

아이작은 어디 있는 걸까.

어느새인가, 다른 녀석들과 함께 있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어울리지 않게.

- 달그락.

사흘이 지났다.

레나가 말한 날이다.

탐지 스킬을 계속해서 최대한으로 작동시켰다.

다섯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이제 시작이군.'

멀리서, 비밀 통로를 통해 행렬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숫자는 서른 명 정도.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지, 기척을 숨기려는 기색은 보이지도 않는다.

운반하고 있는 건, 레나의 말대로 역시 거대한 금고 하나.

시기도.

물건도, 정보는 정확하다.

제대로 된 황실 내부자를 확보한 모양이다.

그게 누군지 조금 궁금해지지만.

일단 시작이다.

바닥에서 지나는 무게를 감지해, 자동으로 환풍구 뚜껑을 열어 주는 장치가 작동되면.

-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 치이이이익!

앞쪽 환풍구 십여 개가 한순간에 열리며 가스가 뿜어졌다.

- 으옷.

"숨 참아!"

몇몇이 바닥에 쓰러졌다.

- 파츠츠춧!

하지만 가운데 서 있던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반투명한 장막이 통로를 메우는 가스를 빠르게 밀어냈다.

"마스크 착용!"

저런 것도 가지고 다니나.

게다가 절반 이상은 숨을 참으며, 당황하면서도 큰 마스크를 꺼내서 착용했다.

그라스미어의 전당에 있던 까마귀마스크와 비슷한 역할을 해 주는 것 같았다.

과연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다.

슬슬 나가야 하나 싶을 때였다.

- 과과과과광!

위에서 전해지는 거대한 굉음이, 지하 통로 전체를 뒤흔들었다.

- 광!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갈색 하늘이 좁은 통로로 쏟아졌다.

233화 생매장 (13)

***************************************************

나는 그 순간, 루-륨 탈취 계획의 중심이 이름 모를 폭파 담당자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비명 소리도 마법도 마스크 위로 새어 나오는 가쁜 호흡도 전부 다어마어마한 토사에 묻혀 버렸다.

쏟아져 내리는 작은 산 분량의 흙을 아예 공백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의 소유자라면 몰라도, 마법사니 뭐니해도 이런 걸 막을 방법은 도저히 없어 보였다.

처음 몇 초간 막아 내던 반투명한 쉴드도 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좁아져 버렸다. 마법사도 자기 자신 정도만 간신히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스크를 쓴 채 묻힌 호위병들은 한층 더 힘겨워하며 허우적거렸다.

가득 메워진 토사 속에서, 아직제정신을 유지하는 녀석들이 뭔가 꿈틀거려 보려는 순간이었다.

- 꽈광!

다시 한 번 굉음이 터지며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안 나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파를 정확히 계산했는지, 2차붕괴는 내가 숨어 있는 환풍구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천장과 단단히 연결된 도르래를 잡고 매달렸다.

- 콰르르르르!

그동안 물길을 통제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폭발하며 몰아치는 강한 지하수에 호위 행렬은 그대로 쓸려흘려 가 버렸다.

십여 분이 지난 뒤.

바깥에는 괄괄 흐르는 물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제야 슬슬 밖으로 나와서 사건이 일어난 앞쪽을 돌아봤다.

비밀 통로의 천장도.

지하수가 흐르는 아래도 깔끔하게 통째로 날아가 있었다.

내가 한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저 아래서 콸콸 지하수가 흐르는 바닥을 바라봤지만, 워낙 단시간에 정신없이 휩쓸린 탓에 그 자리에서 버티는 녀석은 없는 것 같았다.

할 일도 없다.

이거 좀 민망한데.

일이 잘 풀려 다행이긴 하지만.

이대로 10%를 받아도 될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딱딱 잘 맞아떨어져 실행되는 계획이다.

이 정도 참여에 10%라면 솔직히 측정할 수도 없을 만큼 이득이다.

레나가 나를 억지로 끼워 주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보다는.

적어도 전투조가 대기하고 있는 곳에가 조금이나마 도와라도 줘야 할 것방해는 안 되겠지.

장소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일단 가 보자.

- 팟!

나는 다시 환풍구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무너져 내린 산이 눈에 들어왔다.

저 꼭대기에서 폭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정교하게 폭파를 계획한 녀석은 대체 누굴까.

이런 수준의 녀석까지 섭외하고, 루-륨 운반 정보를 변동 사항들도 실시간으로 알아첼 만큼의 중요한 황실 내부자를 끌어들이다니.

레나의 기획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외곽이라 그런 건지, 아직 근처에 누군가 몰려들지는 않은 상황이다.

레나가 가르쳐 준 장소로 향했다.

지하수에 휩쓸린 녀석들이 나오게 될 장소다.

그곳에서는 살육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 쾅!

나냐우가 발사하는 총탄이 마지막남은 마법사의 쉴드에 강한 충격을 가했다.

"끄윽."

얼굴에 십자 모양의 칼자국이 난 남자가 주먹을 쥐었다.

두 번째로 보는 얼굴이었다.

지난 생에 T&T 지부장에 올라선레나를 다들 가져가려고 다툴 때, 나냐우 파의 다른 고위 간부들에게 결투로 해결하자고 했던 녀석이다.

"어두운 밤의 은빛 주먹!"

녀석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마법사를 향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물에 휩쓸려 온 마법사가 쏘아 낸직경 1미터가 넘는 화염구가 푸른기운을 띤 남자의 주먹에 닿자 큰 폭발을 일으켰다.

멀리서도 열기가 느껴지는 강한 화염이 남자의 얼굴을 그대로 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자세를 낮추고 그대로 앞으로 전진했다.

마법사의 힘에 주위의 수풀들이 한순간에 전소되었지만, 정통으로 화염구를 맞은 남자는 오히려 머리칼이 좀 그을린 걸 빼면 멀쩡했다.

마스크를 쓴 유령의 시체를 밟고 몸을 튕긴 남자가 쉴드에 곧바로 주먹을 찔러 넣었다.

- 쾅!

더 이상 버틸 힘도 없는지 쉴드가 풀린 순간, 나냐우가 가볍게 낫을 휘둘러 마지막 남은 마법사의 목을 잘랐다.

"명성치고는 초라한 최후로군."

마법사 알로히스의 피는 자신이 까맣게 태운 땅 위에 흩뿌려졌다.

"어, 웬일로 여기까지 왔어? 당신덕분에 일은 잘 풀렸는데."

루-륨 금고 위에 걸터앉은 레나가 날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덕분이라니.

"혹시 내가 도와줄 건 없나 해서 왔지만. 없었던 것 같군."

"성실하네. 하지만 이쪽 멤버가 좀화려해서."

"같은 편인가?"

마법사와 싸우던 남자가 내 쪽을 돌아봤다.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아니라서 더 흥미롭군. 한번 싸워 보고 싶은데 괜찮나?"

- 콰드득.

남자가 주먹을 쥐었다.

"그만둬, 스티글리츠. 당신처럼 힘만 넘쳐 나는 바보는 아니거든."

"당신이 더 강할 거다."

나는 빨리 루-륨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남자를 보면서 손을 휘휘내저었다.

게다가 저런 강렬한 화염을 쉽게 주먹으로 터트릴 정도라면 실제로 싸워서 이길 자신도 전혀 없다.

"흠."

스티글리츠라고 불린 자는 주먹에 맺힌 기운을 풀고 양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나는 금고를 바라봤다.

인간 다섯 정도는 넉넉히 들어갈만한 크기의 원형이었다.

아예 뭔가 들어갈 틈새조차 없는 매끈한 금고지만 아무도 걱정하는 낌새는 없다.

내용물은 이미 확인되었고, 개봉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 같은 표정들이다.

- 터벅.

금고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루-륨인가?

가짜는 아니다.

안에 담긴 막대한 힘이 느껴졌다.

500리터의 루-륨.

굳이 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몸의 피를 루-륨으로 대체한

나냐우는,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50리터를 흡수한다면.

기대감에 젖어 있을 때였다.

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이송부터 하자고. 거기 힘넘치는 아저씨가 잠깐 들어 줄래?"

"맡겨라."

스티글리츠라고 불린 남자는 마치 칭찬을 들었다는 듯이 금고를 향해걸어갔다.

이 근방에서, 열기구를 통해 멀리운반하는 거였던가.

금고 위에 앉아 있는 레나가 폴짝아래로 뛰어내리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 이보트 후작과는 대체 무슨 관계야?"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반가운 질문이다.

이보트 후작에 대해서 내 쪽에서 레나에게 물으려고 했는데, 먼저 말을 꺼내 준 것이다.

한데 무슨 관계라니.

갑자기 왜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했다.

루비아와 있었던 일까지, 자세히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 우우우응!

"뭐지?"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나냐우였다.

그녀가 마법사의 목을 딴 거대한 낫을 고쳐 쥐었다.

허공이 뒤틀리며 쥐어짜졌다.

천처럼 찢겨진 공간 사이로 검은 빛이 새어 나왔다.

분명 겪은 적 있는 현상이다.

잔혹한 기시감이 사방을 조였다.

한곳을 향해, 빈 공간이 힘없이 일그러지며 까닿게 뭉쳐졌다.

그때와 똑같다.

아니, 그전보다 더 빠르다.

"도망가!"

제대로 된 생각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소리쳤다.

- 쨍그랑!

허공이 박살 났다.

새까만 균열에서 두 번째 보는 '그것'이 걸어 나왔다.

나는 나냐우를 바라보며 기괴한 위화감을 느꼈다.

처음에 그 누구보다 빨리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던 그녀는, '그것'이 허공에서 나타나자마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조.?"

- 콰직!

나냐우의 등 뒤로 걸어간 '잿빛 기사'는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하는 그녀의 목을 뽑았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들어, 은빛 혈액을 자신의 입안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 촤아아악.

잿빛 기사의 벌린 입안으로 은빛혈액이 뿜어졌다.

목이 분리되고도 루-륨의 힘으로 죽지 않은 둣, 아니면 사후 경련을 일으키는 듯이 꿈틀거리며 트로핀 나냐우가 은빛 피를 뿜어 댔다.

그녀의 모습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한참 저 너머에 있었다.

- 와그작!

잿빛 기사는 나냐우의 몸에 묻은 루-륨 한 점까지 다 먹겠다는 듯 그녀의 다리를 찢은 뒤 아작아작알뜰하게 씹어 삼켰다.

어느새 잿빛 기사의 투구는 늑대머리처럼 긴 형태로 변해 있었다.

'먹이'다.

씹고 뜯고 마시는 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레나!"

멍하니 굳은 그녀를 흔들었다.

"저런. 저런 건. 정보. 저런 것에 대한 정보는. 없는데."

식사가 끝났다.

강제 최면에라도 걸린 둣, 사실과 꿈의 접면에서 멍하던 '전투조'들은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되찾는 것 같았다.

"모두 도망쳐요."

레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그 말을 듣지 못할 정도의 인간은 없지만, 남은 셋이 고개를 저었다.

"저 괴물이. 시조를."

"이대로 갈 수는 없지."

금고 근처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두 남자가 칼을 고쳐 쥐었다.

"후읍."

도복을 입은 스티글리츠의 몸으로 주변의 공기가 흘러들어 갔다.

"방해하지 마라."

숨을 크게 들이쉰 스티글리츠는 질문이나 기합 한 마디 없이 곧장 잿빛 기사를 향해 주먹을 질렀다.

지나치게 딩당한 그 태도에 순간적으로 이길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생각마저 들었다.

- 파앙!

멈춰 있던 공기가 터지면서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온몸을 훑었다.

기술 이름조차 외치지 않았지만, 방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운이 주먹에 뭉쳐 있었다.

저런 힘을 아래에서 사용했다면, 비밀 통로가 통째로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될 정도의 강력한 공격이었다.

잿빛 기사는 그 공격을 슬쩍 지나치며 한 손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 촤아아악!

대검이 스티글리츠의 팔을 그대로 자르고 지나갔다.

압축된 화염 폭발에 그을리지조차 않던 남자의 팔이 잘리면서 붉은 피가 허공에 뿜어졌다.

팔의 절단면과 몸통의 절단면에서 동시에 피가 뿜어져, 한순간 팔이 길게 늘어진 듯한 착시가 일었다.

잘린 팔에 모였던 짙푸른 기운이 두 번 깜빡이다 곧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하하하하하.!"

하지만 스티글리츠는 겁먹지 않고 미친 듯이 웃으며 하나 남은 팔로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 콰직!

잿빛 기사는 강하게 휘둘러 오는 스티글리츠의 주먹을 건틀렛으로 잡았다.

- 깡!

스티글리츠는 머리로 잿빛 기사의 투구를 박았다. 이마가 찢어져서 피가 났다. 아무런 효과는 없었다.

기사는 그런 스티글리츠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배에 그대로 칼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툭 털어 낸 뒤에 목을 잘랐다.

조금 전 나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인간은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

레나가 남은 인간들에게 또다시 외치려 할 때였다.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은 없다.

'질주.'

레나의 입을 막은 채 그녀를 안고 뒤로 달렸다.

그녀라도 구하는 게 급선무다.

다른 두 남자가 잿빛 기사를 향해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바닥에 널린 시체로 볼 때 그들이 해치운 유령이 한둘이 아니지만,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하지 못하고 몸이 절단되는 게 뒤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i7T0 公 tp ㅆ公 fC (ba 니 a) T T)? v.]

가깝다.

따돌릴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도망쳐라. 시간을 끌 테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읍!"

레나의 입을 막았다.

"나한테는 공격이 안 먹힌다."

이번에도 그럴지는 어떨지는 확신할수 없지만.

대답은 필요 없다.

레나를 멀리 던진 뒤, 사정거리 안에 상대가 들어왔다고 느껴지는 순간 뒤로 대검을 휘둘렀다.

- 까앙!

하지만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 났다.

스티글리츠의 팔을 자른 마검과, 내가 휘두른 그라스미어의 대검이 동시에 서로를 지나쳤다.

[참격 Lv. 2을 습득했습니다!]

[참격 Lv. 3을 습득했습니다!]

또 벌어진 현상.

잿빛 기사가 나를 바라봤다.

녀석의 전신 회로가 잠시 점멸을 반복했다.

속도도, 힘도 비교되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놈의 공격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공격을 받은 녀석은, 강한 불쾌감을 표하고 있다.

투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향이 있다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검기 Lv.3 최대줄력.]

[흡착吸着 Lv.5 발동!]

[산성 Lv.5.]

[냉기 폭풍 Lv. 1을 발동합니다!]

[너울거리는 불꽃.]

녀석의 공격은 내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내 공격은. 투과되면서도 분명히 데미지를 입힌다.

최대의 공격을 할 생각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최대한의 힘을 밀집해 대검을 휘둘렀다.

- 팟!

놈은 발을 디디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공중에 체류한 순간 등에 무수한 칼날로 만들어진 날개들이 돋아났다.

아래서 뭘 해 볼 수도 없을 정도의 속도로 잿빛 기사는 레나를 향해 몸을 쏘아 냈다.

- 서걱!

검은 섬광이 뻗었고, 레나의 몸이 반으로 터져 나갔다.

심장이 있는 왼쪽이 먼저 바닥에 떨어지며 철퍽 소리를 냈다.

절단면으로 붉은 내장이 아무렇게 튀어나온 오른쪽이 십 미터 앞에 떨어졌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작게 벌린 그녀의 입이 보였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세상이 흔들렸다.

레나가 내게 했던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는 뭔가에 홀린 둣, 반사적으로 그녀의 상태창을 열었다.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이름도, 호감도도, 시나리오 완료캐릭터라는 설명도 뜨지 않는다.

당연한 즉사였다.

[ai/in ? p 7? v k crcoar rj.!]

- 쌔앵!

비행 중인 잿빛 기사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게 던진 순간.

공간이 어둡고 축축한 부정형으로 뒤틀렸다.

상하좌우는 물론, 미래와 과거도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속에서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234화 생매장 (14)

***************************************************

'레나는.

의식이 돌아왔다.

하지만 조각조각 갈린 풍경을 보니, 내가 정말 정신을 차린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괴했다.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손은 전혀 엉뚱한 방향을 향했다.

오른쪽 같기도 했고, 왼쪽 같기도

했으며, 손이 거꾸로 팔 안쪽으로 말려드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방향이 낯설었다.

뒤틀어진 공간은 관습적인 방향 감각을 강렬히 거부하고 있었다.

'앞'과 '뒤'라는 개념이 서로를 오해 했다.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부서진 틈새들 사이에 엉망 으로 끼어 있었다.

몸이 산산이 조각나서, 서로 다른 곳에 있으며 방향을 느낀다면 이런 감각이지 않을까.

'레나.

내 무게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레나를 떠올렸다. 그녀가 죽는 모습으로 온 사방이 가득 메워졌다.

반으로 갈라져 아무렇게나 튀어 나왔던 붉은 내장들이 생생하다.

살짝 벌어졌던 입이 떠오른다.

마지막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잿빛 기사의 칼에 몸이 갈라지던 레나를 떠올리자 '앞'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발을 내디뎠다.

직각에 가깝게.

기괴한 각도로 허공을 디딘 듯한 감각이었다.

'뒤'도 '좌우'도 없는 전진.

한 번 디딘 자리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철저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성공한 계획이라고 생각 했는데, 기스-제-라이를 살해했던 잿빛 기사가 허공을 뚫고 나타나 모두를 죽여 버렸다.

도저히 누군지 알 수 없는 기사.

그는 대체 어디서, 그리고 어째서 튀어나온 것일까.

정체와 목적 어느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강자들을, 순식간에 살해하는 강함도 마찬가지다.

있을 수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될'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놈은 이번에도 나를 공격하지 못했다.

공격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스킬 레벨만 올랐을 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놈을 볼 때마다 이 견고한 세계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느낌이다.

일단. 레나의 시체를 수습하고

싶었다.

나는 계속 '앞'으로 향했다.

한참을 헤매다 보니 앞에 은은한 초록빛이 비쳐 오는 게 느껴졌다.

멍하니 그쪽을 향해 걸었다.

빛을 뿜으며 허공에 떠 있는 건 나냐우가 죽인 마법사의 시체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우우우우옹!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포스 실드 Lv. 1을 흡수합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강한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직접적인 물리 충격과 에너지 파장, 마법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유용한 스킬입니다.

스킬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방어 범위와 강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나냐우에게 목이 떨어진, 마법사 알로히스가 산사태를 막으려 할 때 보여 주었던 권능이다.

무려 산 하나 분량의 흙이 통로로 쏟아지는 바람에 빛을 바랬지만.

물리 공격뿐만 아니라, 마법까지

막을 수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 엄청난 스킬이다.

포스 실드를 두른 채라면, 갑옷 훼손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싸울 수 있을 거다.

[포스 실드 Lv. 2룰.]

[Lv. 3을 흡수합니다!]

실드를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조작 가능한 범위는 지혜 수치와 스킬 레벨에 비례합니다.

[? 七. 4를 흡수합니다!]

포스 실드에 중량을 실을 수 있게

됩니다. 무게 범위는 지혜 수치에 비례합니다.

"실드."

일렁거리는 반투명한 방패가 몸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몸 전체를 보호해 주는 타워 쉴드 정도의 크기였다.

마법사 알로히스가 만든 것처럼 전방위를 보호해 주려면 레벨이 좀 더 높아야 할 듯하다.

알로히스를 내려다봤지만, 화염 마법의 대가라는 녀석에게 의외로 더 뽑아낼건 없었다.

정수 흡수 스킬의 효율은 급격히 낮아지고 있었다.

- 퍽.

반투명한 쉴드를 방패처럼 움직여 툭, 치자 마법사의 시체가 저 멀리 날아갔다.

이런 식의 운용이라는 거군.

실드에 무게를 싣는다는 의미가 와닿았다.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 부응!

반투명한 실드를 생성하고 이리저리 허무하게 휘둘러도, 공간은 여전히 기괴하게 뒤틀려 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공간을 한참 걸었다.

또 다른 초록색 빛이 보인다. 시체다.

스티글리츠.

얼굴에 십자 모양 흉터가 새겨진 무투가.

그의 잘린 팔과 목은 몸통에서 두어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손을 들었다.

'앞'으로밖에 나아갈 수 없는 공간이다.

여기 두고 가면 다시 만날 기회 따위는 없다.

- 우우우우응.

초록색 빛이 몸에 홀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드리안 무투武閱 Lv.1(희귀)을

흡수했습니다!]

패시브 스킬입니다.

무기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효과가 부여됩니다.

공격력이 35% 상승합니다.

치명타 확률이 35% 상승합니다. 공격 속도가 30% 상승합니다.

패시브 격투기를 얻었다.

희귀 스킬이라는 메시지가 추가로 떠오른다.

고작 1레벨임에도 엄청난 증폭 효과다.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페널티가 크긴 하지만, 레벨을 높이다 보면 저기서 퍼센트가 점점 커지겠지.

충분히 성장시켜 볼 만한 스킬.

생각을 멍하니 홀려보내며 흡수를 계속했다.

[누적 타격 Lv. 1을 흡수했습니다!]

무기를 사용할 경우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너는 이미 죽어 있다.'

상대의 신체에 차근차근 타격을 쌓아 넣습니다. 상대는 막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지 몰라도, 마지막 순간에 손끝으로 톡 건드려도 몸이 부서져 내릴 상태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역시 맨손 스킬.

마지막 순간에 너는 이미 죽어 있다고 말하고 싶은 녀석이 좋아할 법한 스킬이다.

[기합 Lv. 1을 흡수했습니다!]

큰 소리를 내어 주변의 기운을 몸에 강하게 끌어모읍니다.

레벨에 따라 방어력과 공격력이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기합 Lv. 2를.]

[? 七. 3를 흡수했습니다!]

이제 소리는 생략해도 좋습니다.

다행히 이건 무기를 사용할 때도 적용되는 스킬이다.

나쁠 건 전혀 없고, 당연하게도 전투력에 커다란 도움이 될 거다.

[힘 1을 흡수했습니다!]

[힘 1을.]

[…흡수했습니다!]

'이걸로 끝인가.' 스티글리츠의 몸에서는 더 이상 초록색 빛이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힘 스탯은 98에 도달했다.

이 정도의 흡수량이면 후작에게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다.

상대가 이 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힘을 가진 젓빛 기사만 아니라면.

이 무투가는 그 누구를 상대로도 뒤지지 않고 당당히 겨뤘으리라. 나는 한참을 앞으로 걸어갔다.

아직 원근감도, 방향감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지만.

슬슬 '앞'으로 걸어가는 건 상당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속도를 냈다.

'질주.'

- 팟!

부서진 공간을 발이 빠르게 디뎌 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상처 하나 없는 나냐우의〈낫〉이 허공에 떠 있었다.

깨지거나 긁히지도 않았다.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한 탓이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잿빛 기사에 의해 아작아작 씹어 먹힌 나냐우의 잔해를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동맥이 흐르는 곳은 대부분 물어뜯겨 있었고, 강제로 뼈가 씹히고 '피'를 죄다 빨린 그녀는 난폭하게 도축된 고기의 모습이었다.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나냐우는 초록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반이 넘게 뜯겨서 너덜너덜해진 목에서 빛이 홀러 들어왔다.

루-륨을 모두 빨린 그녀지만 뿜는 빛은 그 누구보다 많았다.

나는 마치 의무처럼 그녀의 빛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지혜를 1 흡수했습니다.]

[민첩을 1 흡수했습니다.]

[민첩을.]

스탯 평균이 계속 올라간다.

[마도공학(희귀) Lv.1 을 흡수했 습니다!]

공학의 극은 마도와 닮아 있지요. 마도의 끝도 그러합니다. 그 둘의 결합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공학과 마도는 절대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 둘은 서로의 가장 좋은 보조자입니다.

- 서로의 힘을 증폭시키게 설계된 도구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마도공학.

〈사람의 흉내 내는 인형〉을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지식만 있고 실제로 쓸 수는 없는 Lv.0 이지만, 그때도 마도공학을 흡수했었는데.

지금처럼.

머릿속에 완전히 새겨지는 느낌은 아니었다.

품에서 '저격기'를 빼 들었다.

그라스미어의 전당에서 꺼내 왔고, 아이작의 말대로 몇 부분을 눌러 줄였던 물건.

〈타이탄 전용 저격기지. 〉

〈연합 의회 의원들이 파일럿으로

타고 다니는 거 말이야. 번외급 철인鐵人이라고 보면 된다. 〉아이작이 루-륨으로 작동한다고 말한 무기.

그 사용법이 기억처럼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홀러 들어왔다.

겉보기에는 그저 흔하고 차가운 쇠막대를 들어 앞을 겨눴다.

- 철컥, 철컥!

동그란 부분을 누르고, 가운데를 확 잡아당기자 잡기 좋은 손잡이와 트리거 역할의 스위치가 밖으로 툭튀어나왔다.

물론 이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루-륨이 없으니까.

마도공학의 지식이 홀러 들어오며 실험할 것도 없이 그걸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잡기 좋게 튀어나온 손잡이에는 일부러 휘갈겨 쓴 필기체로 다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권리 양도〉

무기의 이름인 것 같다.

마도 공학 스킬을 얻었지만, 무슨

센스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까지 알 수는 없다.

나는 흡수를 계속했다.

[고대어 Lv. 1을 흡수했습니다.]

[고대어 Lv. 3을.]

[룬어 Lv. 1을 흡수했습니다.]

[Lv.3.]

[골동주의 Lv.1(희귀)을 흡수했 습니다!]

유물과 유적에 대한 탐사 능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진품과 가품을 별다른 지식 없이 직관적으로 구별합니다. 유물이나 유적을 발견할 때마다 큰 폭으로 경험치가 올라갑니다.

흥미로운 스킬이다.

경험치가 올라서 나쁠 건 당연히 없다.

유물이나 유적 가운데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

흉측하게 뜯겨진 나냐우의 시체에 어떤 주관도 갖지 않은 채 흡수를 계속했다.

죽은 나냐우는 내게 감상 따위는 갖지 않는다.

나도 그래야 한다.

[사신의 낫 마스터리(희귀) Lv. 1을 흡수했습니다!]

낫은 무기로 쓰기에는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이고 어려운 무기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아니죠.

낫 사용과 관련된 모든 페널티가

사라집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들에게 약간의 추가 데미지를 가합니다.

나냐우가 계속해서 뿜어내던 빛은 이제 사라졌다.

고개를 위로 돌려, 그녀의 낫을 바라봤다.

- 파직!

낫을 쥐는 순간 강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사용자 정의 무기입니다.]

[사용 권한을 강제로 취득하시겠 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공학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소유권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건 안 된다.

방금 취득한 스킬, 〈골동주의〉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낫을 놓아둔 채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더 이상 빛은 없었다.

부서지고 왜곡된 공간밖에 보이지 않는다.

시간도 내게 등 돌려 앉은 것처럼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라앉고 떠오르면서 오직 알 수 있는 '앞'을 향해 질주했다.

235화 생매장(15)

***************************************************

잘게 나뉘고 부서진 폐곡선 같은 공간을 계속 달려갔다.

바닥에 있어야 할 것들이 공중에 떠서 돌아다니고, 시간도 엉망으로 왜곡되어 있다.

여기 던져진다면, 누구라도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한 묶음의 혼란을 겪게 될 법하다.

그러나 명확하게 포착되는 것도 있었다.

나 하나뿐만 아니라, 싸옴이 벌어

지던 주변 전체를 한꺼번에 결계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래 이 계획의 목적이던 루-륨 금고는 보이지 않았다.

잿빛 기사가 나타났던 건, 역시 그 금고를 탈취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계속 찾아도 나오지 않으면, 분명 놈이 다시 회수해 간 것이겠지.

레나의 시체는 어디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유품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가야 한다.

루비아를 구해야 한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다.

나냐우와 레나가 살해당했다.

하지만 슬픔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는 아니다.

계획이 완전히 망가졌으니 황실의 움직임이 있을 게 분명하다.

이미 난리가 터졌다.

발칙한 탈취 계획을 꾸민 자들을 향한 처절한 응징은 당연하겠지. T&T는 당연히 그 중심이고.

수도 한가운데, 레나의 거점에 숨은 루비아가 안전할 리 없다.

그녀를 지켜 줄 수 있는 건 지금 나밖에 없다.

루비아를 구출해서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고, 어떤 종류의 위험이든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

초조하다.

앞으로 한참을 가니 시체들이 더 보인다. 마스크를 쓴 녀석도 있고, 벗고 죽은 녀석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지워지고' 있었다.

부패하거나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 깨끗하게 투명해져 가는

것처럼 지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시체에서는 조금도 빛이 나지 않았다.

새로 발견된 시체들 중에 루-륨 호위대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잿빛 기사에게 달려들던 두 명의 검사도 있다.

무척 높은 수준으로 보였는데.

적어도 아예 초록색 빛이 비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자잘한 검술 스킬 정도는 분명히 흡수할 만한 상대일 텐데.

그렇다면.

시간이 문제다.

2레벨의 정수 흡수 스킬은.

죽은 지 7일 이내의 상대로부터만 정수 흡수가 가능하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고?

역시 공간과 함께, 시간도 완전히 왜곡되어 버린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일주일이 지났다는 건 좀 심한 것 같지만.

몹시 초조해졌다.

목이 잘리고 허리가 베인 시체들 사이에서 뒤늦게 레나를 찾았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레나.

하지만 그녀의 시체 역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허공이 그녀를 염습한다.

빠르게 앞으로 다가갔지만 이미 절반 이상 '사라진' 뒤였다.

내게 감아 오던 팔이 있던 자리를 잡았다.

텅 비어 있다.

다리도, 몸통도 빛 속에 매장되어 공기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뭔가 말하려 했던 둣, 살짝 입을

벌린 얼굴을 마지막으로.

레나는 모두 사라졌다.

이번 생에서, 정말 해 준 거라곤 아무것도 없음에도 나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호감을 표시하던 그녀는 죽었다.

T&T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걸 보고 뿌듯했는데.

그녀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

이건 바르지 않다.

레나가 내게 준 이름을 생각했다. 아메리 타트.

'당신과 함께 첫눈을'이라는 뜻의 꽃말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첫 단풍도 들기 전 칼에 베여 죽었다.

문득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에 시선을 내렸다.

내 팔뼈를 내려다보고, 발부터 다리까지 훑어봤다.

하얀 뼈가 보인다.

갑옷이 사라져 있었다.

검도, 레나의 펜던트도.

루비아가 건네줬던 작은 천도.

모두 사라져 있다.

오직 몸만 그대로 남아 '사라짐'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공간을 가두고, 안에 있는 것들을 소멸시키는 결계인 것 같았다.

내 안쪽의 루-륨 회로를 점검해 보기로 했다.

'격발.'

- 화르르!

[마법 장전.]

[더블 캐스팅.]

'질풍.' - 휘이이이잉!

몸과, 몸 안에 남아 있는 루-륨은 모두 그대로다.

손가락을 들었다.

'검기.'

[스킬 레벨이 부족합니다.]

[현재 구현이 불가능합니다.]

[특전: 검신일체劍身-體를 달성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역시 이건 안 된다.

- 팟!

앞으로 달려 나가며 마법을 마구 난사했다.

[격발의 플레어 Lv.1 발동!]

[냉기 폭풍 Lv.1 발동!]

[분출 매개체가 없습니다.]

[초당 체력이 0.489% 감소.]

하지만 화염과 냉기는 앞쪽으로 쏘아지다가, 손을 떠나는 순간 푹 하고 곧장 꺼져 버린다.

이래서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게 사라진다고 봐야 될 거 같다.

이건 정말 뭐 하는 공간일까.

여기서 벗어나려면.

자살이라도 해야 할까.

- 달그락.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루비아가 결계 밖에 있다.

그녀를 버리고 무책임하게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내 세계는 다시 되돌아가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세계선이 '남아' 버린다면.

남겨진 루비아는 내가 포기하고 나간 세계에서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죽을 때까지 내 구조를 기다리며, 언젠가는 올 거라고 믿으며 길고 긴 시간을 혼자서.

- 파앗!

나는 주먹으로 허공을 갈겼다.

모두 내가 만들어 낸 상황.

루비아 혼자 남겨지는 건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아드리안 무투武_ Lv. 1이 적용 됩니다.]

공격력이.

치명타 확률.

[기합 Lv. 3을 발동합니다!]

물론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결계를, 부숴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 달그락!

지친 채 공간 한쪽 틈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허공을 태우고. 얼리고. 지지고. 녹

이고. 당기고.

주먹질을 했다.

아무 효과는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만 번.

이만 번.

그 정도는 확실히 넘었다.

뒤로는 세지 않았다.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계속해서 공간을 찢기 위해 반복했다.

워낙 다양한 방식으로, 그야말로 녹초가 될 때까지 공격을 조합해 본 까닭일까.

- 띠링!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더블 캐스팅 Lv.2 -> Lv.3]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때의 페널티가 모두 사라집니다.

더블 캐스팅의 스킬 레벨이 또 한 단계 올라 있었다.

이것뿐만은 아니다.

'상태창.'

[질풍 Lv. 幻 [뇌격 Lv.2] [결빙 Lv. 幻

[아드리안 무투武關 Lv.2]

각종 마법에, 무기를 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사용한 무투 스킬도 레벨이 하나씩 오른 상태.

물론, 비틀어진 허공은 날 밖으로 내보내 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는 것 같다.

'집중.'

사실 이미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기합 Lv. 3을 발동했습니다!]

- 쉬이이익.!

주변의 기운이 서서히 주먹으로 흘러들어 왔다.

검기 정도는 아니지만 그냥 치는 것보다는 훨씬 강력하다.

- 파앙!

그때 였다.

- 지지직!

허공이 알이 깨지는 것처럼 쭉쭉 갈라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허공에 사막처럼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설마 무투 스킬이 Lv. 2로 올라서 내 주먹에 결계가 깨진 것일까?

- 지직! 지지직!

갈라진 허공으로 까마귀 부리가 나타났다.

〈넌 또 언제부터 권법가가 되기로 한 거냐? 〉

"아이. 작?"

〈멍청한 놈, 물을 필요도 없잖아. 나 아니면 누구라고? 나 지금 되게 힘들다. 쓸데없이 감동하지 말고 빨리 따라와라. 〉빛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녀석을 똑바로 보지 못할 정도로 기뻤다.

아이작에게 이런 감정을 갖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다 꺼진 희망의 불씨가 화르르 피어오른 기분이다.

"너.

하지만 자세히 녀석을 살펴보자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 파씩… 파지직

아이작의 몸 곳곳에, 까만 깃털이 듬성듬성 빠진 공간이 보였다.

진흙에 난 마차 바퀴 자국처럼, 뭔가 강한 압력이 지나간 자국도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의 부리에도 쩍쩍 금이 가 있었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였다.

바깥의 상황. 루비아. 시간은 대체 얼마나 지났는지도.

하지만 힘들어 보이는 녀석에게 그런 걸 하나씩 당장 따져 묻기는 곤란했다.

〈이제부터 정확히 내가 말하는 대로만 움직여라. 〉

"알았다."

〈뒤로 가라. 아니, 옆으로. 조금 더 오른쪽! 어. 거기야. 〉〈네 움직임에 맞춰 공간도 함께 일그러지는 결계다. 그 자리에서 좀 더 공간을 안정시킨 뒤에 다시 움직 인다. 왼쪽으로. 〉아이작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니 놀랍게도 '왼쪽'과 '오른쪽'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약간 간격을 두고! 야! 한 번에 조금씩 움직여야 돼.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열쇠가 떨어지니까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된다고! 〉열쇠니 뭐니 하는 말은 전혀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일단 아이작의 말에 따랐다.

〈공간의 모서리에 닿으면 안 돼. 반걸음마다 뭔가 조금씩 끌려오는 느낌에 집중해라. 느껴지지 않은 걸음 뒤에는 절대 움직이지 마! 〉집중 스킬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어려웠다.

그냥 '걷는 것'이 이렇게 고역으로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반걸음마다 정해I解를 전부 다 불러 주는데도 이 꼴이라니. 쯧. 〉

"미안하군."

〈흥! 안 어울리게 사과하지 마라. 사실 원래 어려운 거다. 자, 이제 조금씩 왼쪽, 아니 오른쪽으로 반걸 음씩 움직여라. 조금씩. 세계의 좌우가 거꾸로 뒤집어져 있다고 상상하면서. 〉- 드르륵.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작의 말대로 공간이 나에게 조금씩 끌려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잘하고 있다. 이제 위.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된다. 〉자연의 소리가 들려왔다.

물 흐르는 소리.

개구리 소리.

산새 우는 소리.

멀리서 늑대 짖는 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의 순서가 어떻게 되지? 〉

"물, 개구리, 산새, 늑대다."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개구리 소리가 들릴 때. 〉소리의 순서는 계속 달라졌다.

대체 어떤 원리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순서에 맞춰서 아 이작은 나에게 옆으로, 앞으로, 뒤로 움직이라고 말했다.

〈정보가 가려져 있을수록 왜곡이 쉽고 크기가 커지니까. 됐다. 〉- 스육!

마지막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갑자기 울창한 숲 한가운데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아우우우.!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결계에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생생한 진짜 소리였다.

"된. 건가? 여기는 어디지?"

- 파드득!

아이작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동부 산맥이다. 〉

"뭐라고?"

〈공간을 저장해 놨다가 섞는 기가 막힌 결계에 갇혀 있었던 거야. 〉빠르게 다시 주위를 돌아봤다. 아직-눈이 내린 기색은 없다.

낙엽도 전혀 들지 않았다.

아직 여름.

다행히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이 언제지? 가을은 안 된 것 같은데. 루비아는?"

〈. 〉

녀석은 어쩐지 쓸쓸한 느낌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가을 안 됐지. 벌써 두 번이나 지났으니까. 〉

236화 생매장 (16)

***************************************************

두 번의 가을.

그 사이에 벌써 2년이나 지났다는 말이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다.

나는 아이작을 바라봤다.

듬성듬성 빠진 털.

금이 가 버린 부리.

아이작의 몸이 무척이나 고단했던

세월을 증거한다.

2년이 아니라 20년의 흔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헤어지기 전에 잔뜩 걸치고 있던 치렁치렁한 장신구는 전부 다 어디 팔아먹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2년 후라면 린트부름의 이야기를 하며 일깨워야 할 기스-제-라이도 이미 죽은 상태다.

제국의 침략 전쟁도 이미 시작해 버렸을 거고.

그라스미어 영주인 첸들러 녀석은 애벌레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루비아는. 어떻게 됐지?"

이를 악물었다.

내가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사이에 2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기분 탓일지 몰라도, 이 세계는 루비아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다.

직접 만들었다며 건넨, 다른 것과 함께 삭아 없어져 버린 손수건이 떠오른다.

〈알고 싶은가? 〉

당연하다.

반드시 알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을 듣고 어떤 충격에 휩싸일지 몰랐다.

하지만 이건 좋고 싫음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나 힘겹던지 반드시 들어야 하는, 저버릴 수 없는 의무였다.

의무가 사슬처럼 나를 얽어댔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침묵했다.

아무 말 없는 짧은 시간이 두렵게 느껴졌다.

저 멀리 산새 울음이 불길한 괘종 소리처럼 들릴 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수도에 있는 T&T 거점들이 전부 다 털렸다. 〉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고, 트로핀 나냐우도 이미 살해당했다.

다 털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대부분이 살해당했고. 〉

- 우드득.

뼈밖에 남지 않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이번에도, 실패-

〈…루비아는 북쪽으로 끌려갔다. 〉

"끌려갔다고? 그럼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건가?"

〈그래. 보아우드에 갇힌 장난감을 금방 죽여 버릴 거라면 처음부터 데려가질 않았을 테니까. 〉

"보아. 우드라고?"

〈창백한 탑. 겨울요새라고 불리는 보아우드 연구소다. 〉연구소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어둡고 차가웠다.

진실을 듣기가 두려웠다.

〈루비아는 그곳에 실험체로 갇혀 있다. 일단 마법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테니 적어도 10년은 살아있을 거다. '살아'는. 〉아이작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걸 네가 아는 루비아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뼈마디가 뻣뻣해진다.

어둡고 차가운 긴장감이 뼈와 뼈 사이로 축축하게 들어찬다.

루비아가. 실험체라고?

수없이 떠오르는 싫은 상상들을 억지로 지우고 죽인다.

부정. 부정. 부정.

계속 생각을 억지로 지워 댄 탓에 머리가 멍해져 버린다.

아이작의 진술이 이어졌다.

〈너희들이 벌인 '그 일' 덕분에. 광범위한 숙청이 있었다. 이보트 후작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물론, 조금이라도 전쟁에 덜 적극적이던 녀석들은 다 쓸렸지. 〉

"이보트. 후작.?"

전혀 엉뚱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몰랐나? 그 녀석이 황실 내부의 정보를 빼내어 T&T에 전달했던 것 같던데.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녀석이 내부자였다니.

첫 만남 때, 캐빈 애슈턴이라는 이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애슈턴과는 어떤 관계일까.

가짜 책을 줬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같은 편이었다니.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루비아는 왜. 끌려간 거냐."

〈이보트 가문이 반역죄로 완전히 멸문滅門할 때, 루비아도 묶였다. 다른 녀석들은 싹 살해당했는데, 루비아는 묘한 몇몇 증언들 때문에 악마숭배자의 혐의가 있다며. 〉

"악마숭배라고?"

〈이보트 후작 영애의 티 파티에서 악마를 섬긴다는 발언을 했다던데. 자신을 지켜 주는 악마가 있다고.

네 이야기 아닌가? 〉

"루비아는 그런. 그따위 발언은 하지 않았어."

〈자극적인 이야기는 뭐든지 항상 부풀려지니까. 게다가 증언을 한 시셀이라는 아이가 종교재판관의 딸인 게 컸다. 〉루비아가 파티에서 했던 발언들이 떠올랐다.

인간이 아니라도 좋다고 했던 말. 그냥 안 보이면 초조하고, 뭔가 자기와 이어져 있는 것 같다고 한 이야기들.

나에 대해서 한 말 때문에 그녀가 실험체가 됐다고 생각하자 정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고작 그딴 거 때문에.

〈그에 더해 몇몇 이적異績에 대한 증언들까지 추가되며 마법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끌었지. 〉루비아가 행한 이적들.

그런 거라고 해 봐야 전부 다 내가 슬쩍 했던 일이거나, 나에 관련된 일들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특이한 걸 발견하면 실험부터 하고 싶어 하는 게 바로 마법사들이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심문 마법으로 증명됐고. 〉죽음은 적어도 출구다.

하지만 실험체라니.

이건 지나치다.

"루비아를. 왜 구하지 않았지? 이런 결계를 뚫고 날 구할 정도면, 루비아를. 구했어야지!"

터무니없는 억지.

말도 안 되는 비난이다.

아이작이 그녀를 구해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헛소리 말라며 차갑게 비웃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의외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착잡한 느낌으로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고민했다. 〉

"고민. 했다고?"

〈너를 구할지 그 아이를 구할지 고민했다. 둘 중 하나라도 구하러 움직이면, 저들은 내 존재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할 거다.

〉〈운신이 더 힘들어지겠지. 게다가 사용할 수 있는 힘에 한계가 있다. 이 결계를 뚫느라 내가 흡수했던 루-륨을 전부 다 써 버린 상태다. 내가 그 아이를 구했더라면, 너는 여기서 자기 자신조차 잊을 정도로 오랫동안 갇혀 있었을 거다. 〉아이작의 선택은 잘못되었다.

루비아를 구했어야 한다.

나는 그 안에서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다.

안에서 자살했어도 좋다.

나는 다시 시작했을 거고.

이 세계선의 루비아는 아이작에게 구출된 채로 살아갔겠지.

하지만 그걸 몰랐다고 아이작을 원망할 수는 없다.

내가 회귀한다는 사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아이작을 불신해서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구해야. 한다."

루비아를 구한다.

죽더라도, 그녀가 실험체로 잡힌 현실을 바꿔 놓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게 손수건을 건넸던 루비아'를 이 세계선에 이대로 놓고 도망갈 생각은 결코 없다.

아이작은 착잡한 듯 말했다.

〈포기해라. 〉

"그럴 수 없어. 네가 돕지 않아도 나 혼자 어떻게든 할 거다."

〈후. 〉

녀석이 양쪽으로 고개를 저었다.

〈못 한다. 모든 '탑' 근처에는 높은 수준의 왜곡이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다. 지금까지 어떤 마법사들을 보아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자들이 아쥬라에는 수백이나 상주하고 있다. 그리고 탑의 주인들은 네가 상상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을 거다. 〉아이작의 말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나는 내가 경험해 본 잣대 하나를 들이댔다.

"검주들과 비교하면 어떻지?"

〈마치 그들과 싸워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절대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텐데.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어쨌건, 지키는 싸움이냐 빼앗는 싸움이냐에 따라 다르다. 빼앗는 싸움일 때, 탑주들은 훨씬 어려운 상대지.

검주들의 준비와 탑주들의 준비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거든. 〉〈검주들의 준비는 스스로에 관한 것이지만, 탑주들의 준비는 공간과 인과에 관한 것이다.

아무렇게나 길을 걷다 싸운다면 분명히 검주의 손을 들어 줘야겠지. 하나 지키는 싸옴이라면 열이면 열. 백에 아흔 여덟은 탑주들이 이긴다. 〉가장 많이 마주쳤던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를 상상했다.

아이작의 말이 아득하게 들린다.

"그렇게까지 심한 차이가 난다는 거냐."

〈중립을 띠는 공간을 상상해라. 지금 네가 있는 이 숲 같은 곳이 어느 정도 그렇겠지. 〉

"그래서?"

〈여기에서 한쪽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중력과, 우연과, 마찰력을 떠올려 봐라. 아니, 떠올릴 수 있는 건 죄다 상상해라. 단순한 트랩의 차원이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

"그런 자들이 왜."

〈뭐? 말해 봐라. 〉

"왜 북쪽에만 머물러 있는 거지?"

순찰 중인 가짜 황제를 호위하다 기스-제-라이에게 죽은 마법사들.

루-륨 수송에 동참하다 나냐우와 스티글리츠에게 죽은 마법사들.

아이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녀석들은 탑주와는 비교할 수 없이 떨어지는 수준이다.

〈그물을 잘 치는 거미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법이다. 치면 칠수록 거기에 얽매이게 되겠지. 그물을 촘촘하고 섬세하게 칠 수 있을수록 더욱더 그렇다. 〉

"수도에 파견되거나 밖으로 돌아 다니지 않고, 아쥬라에 머무르는 녀석들이 '진짜'라는 거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설명했으니. '창백한 탑'을 공격하겠다는 어리광은 이제 슬슬 그만 부리도록 해라. 〉

"그럴 수는 없다."

〈뭐야? 이런 기초적인 말귀도 못 알아먹은 거냐? 너 같은 녀석이 열, 스물이 넘게 있어도 안 된다. 아니.

서른 넘게 있어도 아쥬라의 탑들을 공략할 수는 없어. 〉

"그 이상 강해지면 되겠지."

〈…어떻게? 〉

아이작이 황당하다는 듯 날 보고 물었다.

부리를 올려 날 보고 묻는 어조가 미묘하다.

그 아래에 옅게 깔린, 희미하게 들뜬 기색이 느껴진다.

2년.

아쥬라의 탑에 갇힌 루비아.

이건 녀석의 함정인지도 모른다.

나를 자극해서 어떤 비밀을 알아 내려는.

하지만 함정이라면 걸려 준다. 놈에게 이용당하지 않는 것보다, 루비아를 어떻게든 구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나는. 창천의 구멍을 본다."

〈. 〉

제발 더 말하라는 둣 녀석이 나를

간절히 노려봤다.

이제 와서 뻘 건 없었다.

"누군가를 죽이면 그 자체만으로 성장한다. 강한 녀석을 죽일수록, 더 많이 죽일수록 보상처럼 바로 분배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게 허공에 뜨지."

아이작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다.

"다른 노력은 필요 없다. 살해가 성장이다. 강한 자들의 시체에서는 힘 자체를 흡수할 수 있다. 모두 허공에 표시된다. 그게 네가 말한 창천의 구멍이라는 거겠지."

여전히 아이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부리조차 부딪치지 못한다.

이미 깨닫고 있었다.

나와, 이 세계의 다른 녀석들은 분명히 다르다.

아이작이나, 유령들이나, 마법사나 다른 기사들 누구와도 다르다.

그들은 결코 나와 같은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상태창을 보지 못하고, 이런 식의 조건을 적용받지 않는다.

이건 압도적인 특혜다.

활용 방법은 서서히 감이 잡히고

있다.

- 따악.

생각을 정리한 걸까.

아이작은 몹시 느릿하게 부리를 부딪쳤다. 그리고, 날개를 앞쪽으로 접고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여자애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겠냐? 〉답은 간단하다.

"물론이지."

아이작이 씩 웃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

237화 아무 대가 없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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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주 좋은 방법이 있지. 어쩌면 루비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쥬라의 탑에서 빼내 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 〉

"그 방법이 대체 뭐지?"

나는 녀석을 바라보고 절박하게 물었다.

아이작이 흐뭇하다는 듯 엉뚱한 소리를 했다.

〈탑에 갇힌 사령술사를 어떻게든 구하려는 해골병사라. 이거 정말 감동적인데. 〉

"대답해 줘."

〈순서를 좀 바꿔서 말해야겠군. 난입해라. 〉

"난입. 이라고?"

- 스옥.

아이작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땅바닥에 줄 몇 가닥을 숙숙 그었다.

〈군대의 이동을 계속 관측했다. 열흘 뒤 달빛지대 교차로에서 큰 회전이 벌어질 거다. 엠버를 치는 제국군의 뒤를 치기 위해, 연합의 철인 군단이 나타나지. 〉

"철인. 군단이라고?"

〈그렇다. 초반 격돌이 시작되고, 얽혀서 난투가 벌어질 때 슬며시 끼어들어라. 격전지 주변에 작은 숲이 있다.

안개가 낄 때쯤 싸움이 벌어 지니 숨어 있다 나오면 된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모조리 다 죽이는 거다. 이대로 부딪친다면 백중지세. 서로 자기들이 조금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밀어 붙이다가 서로 전멸에 가까운 꼴을 당하게 될 거야. 이왕 전멸하는 거, 네 영양분이 되게 만들어라. 〉- 숙. 스윽.

- 콰직.

아이작은 바닥에 놓은 나뭇가지 몇 개를 옮기고, 서로 겹치고, 다시 발로 짓밟아 짓이겼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게. 양쪽의 군대인가?"

〈응. 〉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 내가 한 것처럼, 서로 부딪칠 때 양쪽의 전력을 다 깎아 내면 된다. 〉

"네가 두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것처럼 거침없군. 지나친 자신감에 차 있는 거 아닌.

- 달그락.

나는 말을 멈춰야 했다. 아이작의 귀엽다는 둣이 태도가 역력히 느껴 졌다.

그 시선에는 나를 몹시 무안하게

만드는 수많은 체험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뒤늦게 상기했다.

눈앞의 우스꽝스런 이 까마귀가, 혼란기 제국의 절반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대체 자신의 교단과 함께 얼마나 많은 전장을 넘어왔을까.

나와 같이 단순한 소모품이 아닌, 전체를 조율하는 시선으로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르고 이겨 왔을까.

녀석이 군대를 돌렸던 건 전투에 패해서가 아니다.

여신들에게 저주받았기 때문.

실제 전투 실적으로 본다면, 오직 무패無敗를 이어 갔던 괴물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전술적인 관점에서라면,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을 상대는 아니겠지.

아이작은 피식 웃으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부 바쳐라. 〉

"바치라고?"

〈네가 죽이는 인간들의 피를 모두

말파스에게 바쳐라. 〉

아이작이 친절히 설명을 이었다.

레나와 함께했던 첫 번째 생.

푸르손의 추종자인 늙은 사슴이 했던 말이 겹쳐 떠올랐다.

'인간은 전쟁을 일으킬 걸세. 우린 거기서 흐르는 피를, 위대한 왕께 바치면 된다네.'

〈제사를 받은 말파스는 네게 힘을 빌려줄 거다. 이왕 악마라고 불릴 거라면 단순한 학살로는 아깝지. 인간의 생명은 자원이야.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어. 〉사슴 아에자르의 말이 이번에도 겹쳐 떠올랐다.

'함께하세. 자네도 힘을 가지게나. 세상을 뒤엎지는 못해도, 강림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힘 아닌가?'

그때는 거절했다.

패배할 광대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왕들이 패배하는 것도 어차피 십수 년 후의 일.

루비아를 구출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다.

"그럼. 마왕은 그 대가로 내게 뭘 요구하는 거지?"

〈응? 인간들의 피를 준다고 이미 말했잖아. 뭘 더 받아? 〉

"그걸로 끝인가? 또 다른 제약이 있을 것 같은데."

〈후후. 〉

아이작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어째서 악마 숭배를 금지한다고 생각하느냐? 〉

"바쳐야 하는 게 지나치게 많기 때문인가?"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달콤하기 때문이지. 〉〈악마라는 건 그냥 후발 주자에게 붙는 이름일 뿐이다.

더 너그럽고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니, 애초에 해 먹던 것들의 질시를 받는 거지. 〉〈게다가 난 말파스의 제사장이야. 이 세계에서 나만큼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놈은 없어. 손해 보는 계약은 절대 맺지 않아. 〉아이작의 상태창은 확인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리고. 좀 더 확실한 경우를 상상해 볼까? 탑에 갇힌 루비아를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날개'를 가진 말파스다. 〉

'제사는 준비되어 있어. 공양받은 왕께서 강림하시면 인간은 끝일세.'

사슴 아에자르.

그의 기억을 떠올릴 때, 아이작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내 말파스가 다른 마왕들보다도 먼저 이 세계에 강림하게 되면. 〉녀석은 그 상상만으로도 무척이나 뿌듯한 것 같았다.

〈문제는 전부 간단히 해결이지. 탑 꼭대기에 갇힌 루비아도 쉽게 태우고 올 수 있어. 그녀는 너를 가장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다. 일단 강림만 된다면. 〉

"그게 그렇게 빠르게 되나?"

나는 미래를 안다.

마왕 강림까지는 앞으로 8년이다.

〈너랑 내가 빠르게 만들면 된다. 〉

〈기대되지 않나? 어떤 마왕이든 한번 강림하고 나면, 모든 종족이 거기 줄을 서기 바쁠 거다. 하지만 너는 선지자가 되는 거야! 그녀의 발톱 아래 고개 숙여 조아리는 게 아니라, 그녀를 강림시킨 자로서 등에 타고 윤기 나는 검은 깃털을 쥘 영광을 누리게 된다. 나와 함께 말이지. 〉물론 그런 영광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말대로 마왕급이 직접 도와준다면, 그게 루비아를 구하는 확실한 길임은 분명하다.

〈너라면 내가 그녀에게 자랑스레 소개해 줄 수 있지. 〉

"원래. 너도 '강림'을 준비하고 있었나?"

〈물론이지. 이 전장도, 그녀에게 주는 제사로 설계하려고 했는데. 말파스와 계약을 맺은 네가 직접 제물들을 죽이면, 그녀는 널 정말 사랑하게 될 거야. 아낌없이 힘을 퍼다 줄 거라고. 〉

"으음."

〈동정하는 거야? 어차피 마왕이 강림하면 다 죽을 인간들이야. 네 손에 죽어서 나쁠 건 전혀 없다고. 마왕 강림 전에 죽여 주는 게 훨씬 자비로운 일인데. 왜, 싫어? 〉동정은 하지 않는다.

그냥 '언젠가 질 것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기분이 묘할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미 내 몸에는 말파스의 인장이 있다.

그저 압도적이고 멀게만 느껴지던 마왕魔王들.

그중 하나와 가까워지는 경험도 굳이 나쁠 건 없으리라.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다.

길게 고민하고, 방법을 찾을 여유

따위는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루비아의 정신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을지 모른다.

"좋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계약하도록 하지."

〈현명한 결정이야! 〉

아이작은 무척 기뻐했다.

날개를 펼쳤다.

그러자, 바람이 일어났다.

- 휘이이잉.!

바닥에서 솟아난 어둠과 바람이 나를 감쌌다.

물리력은 없었지만, 여기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장막 건너에서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고 상상 해라. 실이 풀려나가는 것처럼. 〉흐린 경계가 느껴졌다.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장막 건너의 세계가 더 생생하게 와닿았다.

- 파지직.!

번개가 쳤다.

비바람이 거세게 울었다.

〈좋아. 계속 하늘을 나는 감각을 떠올려라. 혼자 나아? 갈 지평선을. 까마귀가 보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잿빛 하늘의 한끝을 검은 깃털로 덮고 있는 까마귀가 보였다.

= 말파스인가.

〈그녀가 너를 바라볼 거다. 너도 그녀를 계속해서 바라봐라. 계속. '의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까마귀 근처에 백금 귀걸이를 한 남자가 나타났다.

휘어진 링부터 사용된 보석까지, 열 손가락에 전부 다른 반지를 낀 남자가 내 손목을 잡고 까마귀를 향해 날았다.

= 아이. 작?

〈그래. 나다. 〉

저런 모습이었나.

조금 집중이 흐트러지자 녀석의 몸 절반이 연기처럼 흐려졌다.

〈시각화를 잘 유지하라고. 〉

하지만 크게 타박받지는 않았다.

어차피 아이작이 만들어 낸 환상. 나는 적당히 보조만 맞출 뿐이다.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미친 폭풍과 구부러진 기압을 뚫으며 까마귀와 나란히 날았다.

〈년 그냥 뜻만 전해라. 네 살해를 말파스에게 바치겠다고. 회로까지 이미 다 새겨져 있는 데다. 내가 중재하니 그거면 충분하다. 〉= 바친. 다.

한순간 바람이 벚었다.

아이작이 만들어 낸 검은 장막이 걷혔다.

녀석은 조금 지친 기색으로 옆에 있는 상태였다.

"어이. 괜찮은 거냐."

상처투성이 까마귀 인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친 기색과는 달리 녀석은 실실 웃는 어조였다.

〈후후. 이제 됐다. 자잘한 일이 남았는데 그건 내가 하면 되고. 축하한다. 〉

"뭘 축하한다는 거지?"

〈말파스가 널 특별히 좋게 봐준 모양이다. 무척 호의적으로 계약이 체결된 것 같다. 〉

"그게 무슨.

〈쉽게 말하면 인간 하나를 죽여도 둘을 죽인 것처럼 대가를 내린다는 말이지. 천천히 직접 느껴 보도록 해라. 〉마왕과의 계약.

아이작이 중간에서 알아서 했다고

말하기에 일단 납득했지만, 당장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지쳐 있는 아이작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몸 여러 군데 뚫린 상처가 새삼 시선에 들어왔다.

"고맙다."

〈당연. 응? 〉

"결계에서 날 구해 주지 않았나."

〈득큭. 아까는 루비아를 구하지 않았다고 징징거리더니. 나도 내 이득을 최대화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뿐이다. 〉

"그래도."

〈시끄러! 일단 달빛 지대로 가자. 제단을 만들어야 한다. 〉녀석이 말을 돌렸다.

아이작의 말을 따라, 회전이 벌어 진다는 달빛 지대 교차로를 향해 사흘을 꼬박 걸었다.

그들이 이곳을 싸음터로 정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 군대의 규모와 경로를 볼 때 틀림없다고 했다.

〈이곳밖에 없다. 〉

아이작이 부리를 들어서 사방을 길게 한 번 가리켰다.

나도 따라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은 조용한데 그래."

짙은 안개 사이로 내리는 빗방울 소리, 바스락거리는 늦여름 벌레들 울음소리만 무겁게 사방을 메웠다.

우는 벌레들 하나하나에겐 오늘이 생의 첫날이고 마지막 날일지도 몰랐다.

몇 개월 뒤면 마른 풀잎 사이로 다른 벌레들이 사각거리며 하루를 울다가 죽을 것이다.

난입과 학살의 현장으로는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여기도 내가 와 본 적이 있지. 그때보다 나무는 좀 줄었구나. 좋아. 군대가 오기 전 저 언덕에 숨어 있으면 된다. 끼어들기 가장 좋은 위치다. 〉

"제단을 그려야 하지 않나?"

나는 산속을 지나다 마주친 제국 레인저의 창을 획획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은 실쭉 웃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말했다.

〈웬 녀석들이 온갖 사방에 이미 다 새겨 놨다. 암석에 지하에 숲에 아주 난리를 쳐 놨네. 〉〈제사 바치는 상대를, 푸르손에서 말파스로 바꾸기만 하면 끝이다. 쉬엄쉬엄해도 되겠는데? 〉

238화 아무 대가 없이 (2)

***************************************************

〈여기다. 〉

아이작은 나를 데리고 달빛지대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제가 만든 제단처럼 민첩하게 표식들을 바로 바로 찾아냈다.

그가 가리킨 장소는 단 한 번도 허탕을 친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숨은 표식들이 아이작이 말한 곳만 가면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이걸 다 읽어 내는 거지?"

〈내가 좀 그렇다. 다음은. 〉

- 첨벙!

땅을 파헤치다가, 다음은 차가운 강물 아래로 들어갔다.

산길을 타고 내려오는 강바닥에도 문양이 새겨진 암석이 보였다.

아이작이 말한 부분을 긁어내고 다시 다른 문양을 새겼다.

바닥에 뭐가 새겨져 있건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강물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몇 번을 반복하고 밖으로 나가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다. 〉

"벌써 끝인가?"

물론 빨리 끝난다고 해서 불만이 있는 건 전혀 아니다.

다만 이 거대한 지역을, 고작 이 정도의 표식을 새겨서 말파스의 제단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좀처럼 와닿지 않았을 뿐이다.

〈왜, 일 좀 편하게 하면 안 돼? 〉

아이작이 툭툭 부리를 털었다.

〈이 세상이라는 건 최대한 편하게 살아야 되는 거라고. 아까 다 설명 했잖아. 이름만 바꾸면 돼. 푸르손 추종자들이 몇 개월 걸려서 힘들게 새겨 놨는데, 최대한으로 써먹어 줘야 예의지. 〉

"그런가."

〈일단 가만히 숨어 있어. 〉

그나저나.

이 제단을 만들어 준, T&T 내부 푸르손 추종자들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다.

아이작의 말대로라면 T&T는 이미 2년 전에 망한 상황이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은 분명 전쟁을 찬성했던 것 같으니, 나냐우 파와 별도로 황실의 토벌 대상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으니 이 정도로 큰 제단도 새길 수 있었겠지.

레나와 처음 만난 생애에서, 나를 압도하던 놈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녀석들 가운데 하나인 슬라임은 이미 한 번 이겨 본 상태.

지금은 그때보다도 강해졌으니, 예전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레나를 데리고 넉넉히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레나는 이미 죽은 상태다.

얕은 여름의 강은 침묵 없이 계속 졸졸 흘렀다.

푸르손 일당이 갑자기 나타나서 제단을 망쳐 놓은 책임을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비아에 대한 압도적인 걱정이 워낙 나를 짓누르는 탓인지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타나면 싸워 죽이면 그만이다. 오히려 내가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한번 실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제단을 망친 책임을 물으러 오는 푸르손의 추종자들은 없었다.

다른 곳에 제단을 만드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어이. 제단에 대해서 왜 이렇게 관심이 없냐? 마왕에 대해서 딱히 궁금한 거 없어? 뭔 의욕이 이렇게 없어? 〉가만히 있자 아이작이 나를 자꾸 쿡쿡 찔러 왔다.

"루비아를 구하는 일에 관계된

일인가?"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연관된 거 아니겠냐? 내 가르침만 들을 수 있다면 몸도 마음도 바칠 놈들이 고금을 통틀어 수두룩한데. 나한테 반응을 좀 해 보란 말이야. 〉

"가르쳐 주면 고맙겠군."

〈이거 완전. 〉

아이작은 투덜대면서도 이런저런 지식을 나에게 쏟아붓는 것처럼 전수했다.

〈회전이란 말이지. 〉

지휘관으로서 알아야 할 병종에 대한 것까지 가르쳤다.

"어차피 군대 따위를 운용할 일은 없을 텐데. 게다가 마법사나 검주 같은 존재들에 의해 한 번에 뒤집하는 게 회전 아닌가? 전술 따위를 뭐 하러."

- 깡!

아이작이 부리로 강하게 정강이를

쪼았다.

〈멍청한 소리. 단신으로 전세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인간은 백만 명 가운데 한 명 정도밖에 없다. 〉〈아쥬라에 처박힌 마법사들까지 합해서 그런 숫자야. 전쟁의 9할은 그런 녀석들 없이 벌어지고 있어. 〉

"…그런가."

일단 잠자코 강의를 듣기로 했다.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 쿠르릉. 쿵. 쿵. 철컥.

촉촉한 여름 들판을 짓밟는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는 자욱했지만 기계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몇 기가 어느 방향 으로 움직이는지 모두 다 느낄 수 있었다.

? 쿵. ^

열 기 정도의 직립 보행 기계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홀로 안개가 끼어 있지 않은 지역 이었다.

아래쪽에는 백에서 이백 정도로 이뤄진 부대들이 강과 작은 숲을 따라 길게 주둔했다.

도합 이천 정도.

나는 언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것들이. 철인인가?"

〈그렇다. 이 전장에서 가장 강한 녀석들이지. 네 개입이 없다면.

근소한 차이로 저 연합군이 이기는 이유가 될 거다. 〉기계들을 관찰하기 위해 조금 더 언덕에 가까이 갔다.

도합 열 기.

대략 3미터에서 4미터 정도 되는 높이의 인간형 기계들이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몸을 풀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철인'들은, 골렘이나 기계인형이라기보다 일종의 거대한 갑옷처럼 느껴졌다.

조종하는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손가락이나 다리, 팔의 움직임이 인간의 그것과 무척 닮아 있었다.

안에 있는 조종사의 존재가 몹시 생생하게 느껴졌다.

- 위이이잉.

열 기의 기계 인간들은 그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빠르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적어도 삼십 센티는 되어 보이는 두꺼운 철갑을 생각할 때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효율이었다.

꼭 이족 보행을 할 필요도 없이, 발아래에 달린 바퀴로 미끄러지는 이동까지 가능한 듯했다.

〈쯧쯧. 발전이라는 게 없다니. 〉

가볍게 몸을 푸는 기계들을 보고 아이작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 발전이라고?

〈마도학도 공학도 다 퇴화했다. 저딴 허접한 툴에다, 동력 엔진도 완전히 쓰레기 같은 걸 쓰다니. 〉= 위용은 제법 대단한데.

〈그보다 안에 있는 것들이 사실 더 문제다. 기껏 탑승했으면서도 조종을 저렇게밖에 못 하나. 〉꽤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듯한데 아이작은 혹평을 이어 갔다.

나는 칼을 쥐고 눈앞의 녀석들을 상대하는 상상을 했다.

일단 철갑 자체가 무척 두꺼웠다.

기사의 풀 플레이트 아머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평균적으로 삼십 센티.

적어도 백배에서 이백 배 정도는 두꺼워 보인다.

누르기만 해도 무게에 짓이겨져서 그대로 죽어 버릴 거 같은데.

쉽게 베어 낼 자신은 없다.

전장에서 저것들이 싸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군마를 타고 풀 플레이트를 입은 기사들이 나 같은 해골병사들에게 재앙이었다면, 이건 그 기사들에게 재앙일 거 같은데.

"대령! 안개 때문에 아래가 전혀 안 보이질 않나!"

다른 녀석들보다 1미터 정도 큰 가운데 있던 철인이 소리쳤다.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웅웅대며 울려 퍼졌다.

〈저게 음성진동판이다. 〉

아이작이 부리를 들어서 '철인'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엄청 구린 걸 쓰는군. 〉

옆에 있던 철인이 대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개 덕분에 적 기사단의 위력도 훨씬 줄어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고의 기술력으로 만든 철인이 열 기나 있으니 난전으로 돌입하면 승기는 압도적으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대령! 미리 날씨 파악을 했어야 한다고 문책하는 거요! 본 의원도 그런 기초적인 지식은 모두 알고 있다고."

〈잘들 논다. 일단 내버려 두고. 모이고 서로 싸울 때 쓸어 주자고. 〉연합군 지휘부를 그대로 놓아두고 아래로 내려왔다.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먼저 아래쪽의 연합군을 치우고, 제국군 정예들로 놈들을 포위하는 그림을 그릴 거다. 〉〈그냥 날 따라다니면 되겠지만. 일단 알려는 주는 거다. 〉안개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은신을 최대로 사용하면 대낮에도 들키지 않는다.

안개에 적당히 몸을 숨긴 채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창과 방패, 허리에 찬 장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관찰했다.

자세한 숫자가 잡혔다.

〈이게 언제적 160명이냐. 편제는 도무지 바1 생각을 안 하는군. 〉아이작이 옆에서 투덜거렸다.

말 그대로 한 부대는 160명 정도.

안개를 뚫고 하나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기초적인 훈련은 받았는지 열은 제대로 맞추고 있고 보급품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긴장했냐? 〉

= 글쎄.

〈저놈들 중에, 네 칼을 한 합이라도 받을 수 있는 녀석은 한둘이 고작일 거다. 〉 그런 긴장은 아니다.

묘하게 내 기억과 어긋나는 점이 느껴졌다.

10년에 걸친 전쟁은 결국 제국의 완승으로 끝난다.

그러나 여기는, 제국과 연합의 원 국경에서도 오히려 제국 쪽으로 꽤 들어온 지점이다.

애벌레.

유령.

황실의 저력과, 음침하고 치밀한 전쟁 준비를 여러 각도에서 접한 나는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밀집해서 서 있는 병사들을 다시 한 번 보며 지나갔다.

피로가 서려 있는 얼굴이 많았고,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공포가 눈에 꽉 들어찬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창을 앞으로 내지르고, 발굽에 짓밟히고, 그래도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좌우 앞뒤로 백백한 밀집 대형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대열은 이룬 이상 개성 같은 건 모조리 사라진다. 어떻게든 돌아갈 수밖에 없는 톱니바퀴가 된다.

나는 안개들 너머 낯선 얼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달빛지대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투두두두 빠르게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는 안개 지역에 접어들자 점차 느려졌다.

기병대의 숫자는 약 삼백 정도로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보병의 숫자는 약 일천 정도.

연합군 보병의 절반이다.

점점 느려지는군.

〈꼭. 〉

다가오는 기병들의 기색을 느끼는 내게 아이작이 말을 걸었다.

〈안개가 끼었다고 반드시 기병이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지휘관이 나 같은 자일 때는 더욱 그렇지. 〉또 자랑인가 싶었지만, 당장 딱히 할 일도 없어 적당히 들어주었다.

너 같은.?

〈지형을 전부 외우고, 적 보병의 움직임을 완벽히 예측하는 지휘관 말이다. 상대가 대비치 못한 측면 공격, 후면 돌격을 무한정 퍼부을 수 있거든. 〉나는 아이작을 무시했다.

다가오는 기병대의 모습에 좀 더 집중했다.

안개에 섞여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만드는 건 서로 다른 표정을 가진 하나하나의 인간과 말들이었다.

나는 내가 죽일 인간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말고삐를 느슨히 쥔 남자는 갈증 나는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말 머리를 나란히 하는 남자는 목욕이나 하고 싶다고 말을 받았다.

투구가 슬쩍 비뜰어진 남자는 푸, 하고 한숨만 쉬었다.

가까워지자 땀이 말라붙은 피부가 보였다.

어쨌거나 적을 죽이고 싶다거나,

영광을 누리고 싶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 인간은 의외로 드물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보병들은 더욱 그러했다.

가장 뚜렷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것은 피로감이었다.

행군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그들의 발에 채여 부서지는 흙덩이를 닮아 있었다.

은신 스킬을 최대한 발휘한 채로 곁에서 그들을 관찰했다.

하나하나의 사고와 감정이 나에게 던져지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삶의 기록을 나에게 통합한다.

이 인간들은 모두 나에게 하나의 사냥감.

허공에 뜬 푸른 창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경험치' 제공 무리다.

- 다그닥. 다그닥.

안갯속에 몸을 숨긴 채로 제국군 기병대의 옆을 따라갔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40기씩 일곱으로 나눈다. 적진을 정찰한 뒤.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다.

〈좀 지루해지겠군. 그래도 노출을 최소화시켜야 하니. 적어도 절반 정도는 죽은 다음에 뛰어들어라. 안전이 최고다. 한 시간은 지나고 나서. 〉아이작의 말이 왠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제국군에 섞여 걷는 전장이 왠지 익숙하다.

한 시간이라.

그 정도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우측에 가까이 있는 궁병 부대가 느껴진다.

70미터.

60?.

50.

'질풍.'

'더블 캐스팅 '질풍.,

- 휘이이이이잉!

"뭐, 뭐야?"

"웬 강풍이 갑자기.!"

"안개가 걷혔습니다!"

우측에 자리 잡은 연합군 궁수 부대와 제국군 기병대 사이의 안개가 반 이상 사라졌다.

적의 모습이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이는 상황.

- 피비비비빗!

무수한 화살들이 기병대 우측을 향해 날아온다.

갑자기 드러난 적을 향해 반쯤은 패닉에 빠져 쏘아 댄 화살.

유효 타격은 많지 않았다.

〈너 이 자식이.! 〉

아이작이 내가 한 짓을 보고 당황 한다.

"도, 돌격! 천우의 기회다!"

상황 파악이 느리지는 않다.

기병 지휘관은 반색을 하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

- 투두두두두두!

막 쪼개려던 기병이 한 덩어리가 되어 막 두 번째 사격을 준비하는 궁수 부대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제국군에게 그렇게 친절한 짓을 한 것만은 아니다.

궁병대의 좌측. 그리고 우측.

"궁병대를 보호하라!"

안갯속에 멍하니 앞만 보고 있던 창병 네 부대가 밀집 대형 방향을 옆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 투두두두!

나는 최후방 제국군 기병 하나를 살해한 뒤 말에 올라탔다.

〈야 이 새끼야.! 〉

= 따라올 거면 따라와라.

여기는 제단.

나는 첫 번째 제사를 조금 일찍 시작하기로 했다.

239화 아무 대가 없이 (3)

***************************************************

철판을 뚫고 칼로 4미터에 가까운 기계인형의 팔을 잘랐다.

- 쿵!

두꺼운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 끼기긱.

잘린 관절 안쪽에 있는 철갑을

뚫고 칼을 박아 넣었다.

"끄아아악!"

음성진동판을 통해 탁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이걸로 마지막이었다.

칼날을 꽂은 부위를 발로 밟고, 지렛대처럼 칼을 움직여서 철갑을 뜯어냈다.

반쯤 잘린 허리에서 흘러나오는 내장을 손에 쥐고, 눈을 커다랗게 부릅뜬 마지막 파일럿이 바깥으로 떨어졌다.

- 서걱!

나는 다시 한 번 칼날을 철인의 가슴팍에 쑤셔 넣었다.

파일럿은 죽었어도, 동력 엔진은 가장 장갑이 두꺼운 부분에 있다.

- 파삭.

검기를 불어넣은 칼이 더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반으로 갈라졌다.

나는 칼을 놓아 버리고 맨손으로 철인의 장갑을 뜯어냈다.

뼈에도 금이 가 있었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흡수.'

- 우우우웅.!

부서진 엔진에서 루-륨이 흘러서 내게 들어왔다.

직업 설명창을 열었다.

[루-륨이 부족합니다.]

열 명의 철인에게서 루-륨을 모두 흡수했지만, 아직도 전직 요구량은 만족시키지 못했다.

- 달그락.

나는 방금 전 부서진 칼날 근처에 그대로 쓰러졌다.

서른 번째로 바꾼 무기인지, 마흔 번째로 바꾼 무기인지 알 수 없는 장검을 흘끗 바라보다 고개를 위로 들었다.

- 파드드득!

검은 까마귀 한 마리가 철인 밖으로 흘러나온 마지막 파일럿의 시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툭툭 눈알을 쪼는 시늉을 시작했다.

〈까악. 까악. 〉

"뭐 하는 짓이냐."

〈까마귀 울음소린데? 〉

까마■귀는 마지막 파일럿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제 부리로 두어 번 두드렸다.

〈순금이네. 〉

까마귀는 목걸이를 빼앗아 들어 제 목에 걸었다.

시체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좋아 보이는 게 있으면 곧바로 빼앗아 들었다.

녀석의 목에 걸린 장신구는 이제 다섯 개째였다.

나는 주위를 흘끗 둘러봤다.

잘리거나 뭉개진 시체들이 주변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지만, 까마귀는 한 마리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은 시체들이 먹기 좋게 썩지 않아서인지, 지금 허공을 배회하는 까마귀가 이곳을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저기 떨어진 내장과 분리되어 굴러다니는 머리들이 크게 볼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 파드득!

다시 날아온 까마귀가 살짝 금이 간 팔뼈에 내려앉았다.

〈양쪽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다 이렇게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녀석이 부리로 부서진 철인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대로 된 기체도 분명히 가지고 있을 테니까. 〉

"제대로 된 기체.?"

〈봐 봐. 동력 엔진에 루-륨도 거의 보급되지 않은 채거든. 진짜는 다 따로 있다는 소리지. 〉

"네가 타이탄이라고 말했던 것들 말이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 그때 그 기계 혹시. 〉

녀석이 뭘 말하는지 알고 있다.

"결계에서 사라졌다."

그라스미어 창고에서 가져왔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타이탄 저격기'의 모습이 떠오른다.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재료만 있으만 다시 만들 수 있으니까. 〉

"그런가."

〈그래도 확실히 대단하더군. 감을 이렇게 잘 잡을 줄은 몰랐는데. 양쪽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잘해 냈다. 감이 좋은데? 〉별로 그렇지도 않다.

아이작이 중간에 계속해서 조언해 주지 않았으면 처음 공격했던 대로 연합군만 전부 다 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녀석의 예상보다는 잘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Lv.41(239)] (new!) [체력: 86](new!) [힘: 97] (new!)

[민첩: 89] (new!) [지혜: 75] (new!)

직접 베어 넘긴 숫자는 네 자리에 가깝다.

천 명.

그 숫자의 인간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경험치는 대략 이 정도다.

이제 지금부터는 훨씬 더 더디게 올라가겠지.

중요한 건 따로 있다.

- 띠링!

['천 명 베기'를 달성했습니다.]

[모두 직접 도륙한 싱싱한 제물들 입니다.]

[말파스가 당신의 활약을 보며 진한 만족감에 젖어 있습니다.]

[말파스의 행복도가 10을 초과했습 니다.]

[특전: '암흑'을 획득했습니다.]

[특전: '매료'를 획득했습니다.]

나는 설명을 자세히 확인했다.

[특전: 암흑]

[특전 레벨: 1]

- 절반에 가까운 마왕들이 가지는 공통 특전입니다. 말파스의 암흑은 가볍고 날카로운 속성을 지닙니다.

- 마왕의 행복도가 유지되는 한, 당신은 아무 대가 없이 암暗 속성을 모든 공격에 부여할 수 있습니다.

- 공격력이 25% 상승합니다.

- 암년 속성 공격은 상대의 의지와 인지 능력을 감소시킴니다.

근처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칼 한 자루를 주워 들었다.

'암흑."

- 파지직!

칼끝에 어둠의 기운이 서린다.

- 끼긱!

검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쓰러진 철인의 가슴팍에 칼을 박아 버렸다.

그대로 부러져 나가야 할 칼날이 의외로 얕은 생채기를 내며 철판을 파고든다.

? y人 O O O ≪

게다가 주변을 타락시키는 듯한 검은 기운을 주위로 내뿜는다.

검기도 쓰지 않은 채 그냥 곧바로 내질렀는데도 이 정도다.

암흑 특전은 검기나, 다른 마법을 쓸 때와는 달리 나에게 가해지는 어떤 부담도 없었다.

힘의 출력을 내가 아닌 저13자가 감당하고 있는 느낌.

이게 마왕의 가호라는 거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당신은 암흑을 몸에 두를 수도 있습니다. 마왕의 행복도에 따라서 지원되는 방어력이 달라집니다.]

- 방어력이 40% 상승합니다.

- '까마귀의 날개': 이동 속도가 15% 상승합니다.

어마어마한 증가다.

게다가 이것들은 모두, 고작 특전 레벨 1에 불과하다.

계약 관계가 돈독해질수록 어떤 권능이 생겨날지 짐작하기 힘들다.

바알의 무수한 병사 하나로 있을 때에는 마왕과 이런 식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상상하지 못했다.

실제로 계약을 맺고 힘을 퍼주는 상대들은 이렇게 따로 있었다.

- 스으으_

나는 부서진 갑옷 주위에 암흑을 일으켰다.

역시 어떤 부담도 없다.

보이지 않는 날개라도 달린 듯이 몸이 무척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영구적인 이동 속도 15% 증가.

그 하나만으로도 말파스와 계약을 맺은 보람은 충분했다.

이어서.

[특전: 매료]

[특전 레벨: 1]

- 말파스 전용 특전입니다. 탁월한 존재감의 과시로 상대를 매료시킬 수 있습니다.

- 종족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전부 적용되는 권능입니다.

- 레벨이 올라갈 경우, 상대에게 영구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 범위 안에 있는 적의 전투력이

저하됩니다.

광범위 약화 스킬이다.

"매료."

- ㅿㅿㅿㅿ.

뼈에서 무형의 기운이 피어난다.

〈. 으응? 〉

아이작이 뭔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 멋진데? 〉

시동을 중지했다.

아이작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장난이다, 장난! 아무튼 제대로 못 할 줄 알았는데 여러모로 무척 인상적인걸. 〉

"…너도 뭔가 혜택을 받았나?"

〈그럼. 당연하지. 〉

아이작이 몹시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더 강해진 느낌이다.

부서진 곳은 어느새인가 완전히 매끈하게 고쳐져 있었고, 검은 깃 주위에는 은은한 검은 현기가 서려 있었다.

〈너 정도는 아니지만. 〉

내가 직접 천 명의 인간을 살해해 얻은 힘을 아이작도 중개자로 일정 부분 나눠 갖는 것 같았다.

녀석은 구체적으로 뭘 더 할 수 있게 됐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양쪽을 합하면 수천이 넘는 군대였다. 꼬여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대단하더군. 진심이다. 〉매료의 효과가 풀리지 않은 건가.

"제국군은 어디까지 진격했지?"

나는 말을 돌리며 천천히 시체의 바다를 걸어갔다.

묽은 묵처럼 굳은 인간들의 피가 발에 밟혀 철퍽거렸다.

〈말했잖아. 중립도시 엠버메어를 지금 한창 밀어붙이고 있지. 〉

"연합 쪽으로는 아직?"

〈오히려 이쪽으로 밀렸다니까. 〉

공격 순서는 역시 동일하다.

아이작은 내 생각이라도 읽은 둣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엠버로 갈 생각은 하지 마라. 〉

"어째서?"

〈강한 녀석들이 그 작은 섬 안에 전부 몰려 있거든.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기스-제-라이가 속한 암살교단, 레드 플레이크.

그 본거지도 엠버에 있다.

기스-제-라이 본인이나, 후작의

심장을 한 번 뜯어냈던 별빛청여우 같은 자들이 거주하는 곳.

하지만 지금 그 도시를 공격하는 자들은 그보다 더 강하다.

'수천 개의 자치령'을 몰살시키고 그 거대한 섬을 잿더미와 시체로만 전부 메워 버렸으니까.

확실히 지금 내 수준으로는, 거기 끼어들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당장 죽고 싶지 않다면.

〈시체에서 힘을 흡수할 수 있다고 했지?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이렇게 끊어 먹는 것부터 해라. 쉬운 것부터 해. 〉목이 베인 시체들은 아무런 말도 뱉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초록색 빛을 내뿜는 것도 있었다.

백 명 가운데 하나꼴.

나보다 훨씬 약해도, 낮은 확률로 정수를 흡수할 수 있는 모양이다.

'흡수.'

서른 명 정도의 자잘한 스킬들을 빨아들였을 때였다.

- 퍼드득! 퍼드드득!

조금 커다란 날갯소리가 빠르게 근처로 다가왔다.

〈즉즉즉. 〉

물론 아이작은 아니다.

- 퍼득! 퍼드득!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봤다. 울긋불긋한 날개를 펼치고 있는, 반은 독수리고 반은 인간인 녀석이 나를 보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 신성 모독이다!"

- 좌르록! 좌르르록!

그 바로 옆에는 몸 곳곳에 비늘이 빼곡히 돋아난 여자가, 십 미터에 가까운 길고 굵은 하반신을 땅에 비비며 나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감히.! 이런 미친 짓을.!"

검게 물든 눈동자.

〈킥킥. 〉

아이작이 유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즐거운 심정이 아니었다.

다시 보는 푸르손의 추종자들.

뱀과 하피 외에도, 근육을 부풀린 인간들이 스무 명도 넘게 안개를 뚫고 나타나고 있었다.

"이거 곤란한데."

처음에는 나타나면 싸워 죽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만이었다.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실험해 볼 좋은 대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커다란 뱀 하나만으로도 상당히 만만치 않은 압박감이 느껴진다. 경지가 올라가자 또 한 번 보이는 압박감이 있었다.

하피 하나 정도였다면 몰라도.

여기서 멀쩡히 나가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240화 아무 대가 없이 (4)

***************************************************

〈졸았냐? 〉

아이작이 갑작스럽게 물었다.

〈졸았잖아. 죽을까 봐. 〉

부정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끝날까 봐 두려워진 사실이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느꼈던 강렬한 압박감.

뭐가 뭔지 파악할 사이조차 없이 슬라임에게 두개골이 녹아서 죽은 일이 떠오른다.

이 세계의 루비아는 북쪽의 탑에 실험체로 갇혀 있다.

그녀를 구하지 못한 채 여기에서 무너지는 건 곤란하다.

아이작이 주위를 돌며 사방에서 킥킥거렸다.

〈고작 저런 것들을 마주치고 부담 느끼면서 엠버에 관심을 가지냐? 〉아이작은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거기서 노는 건, 이딴 작은 제단 멧는 거랑 비교도 안 된다고. 〉가겠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하지만 관심을 가진 건 사실이다.

정수를 빼앗을 수 있는 강자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을 테니.

아이작은 내 심리의 결을 빠르게 읽어 버리는 것 같다.

나는 파악하기 쉬운 타입일지도 모른다.

레나도, 루비아도 내 생각을 금방 파악했으니까.

- 휘익!

한 번 두꺼운 철판을 쑤셨던 칼은 멀리 던져 버린다.

주인 잃은 장검 한 자루를 새로 주웠다.

검은 기운이 검신에서 일렁이며 뿜어져 나왔다.

깊고 서늘한 어둠이 푸른 하늘을 천천히 물들이는 것 같았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은 인간의 피로 질퍽한 땅을 천천히 걸어왔다.

기껏 경직된 시체들이 발에 밟혀 자세를 바꾼다.

스물 정도의 녀석들이 포위망을 형성했다.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지 않으려면 빠르게 도망가야 하나?

이미 그러기도 늦어 보였지만.

- 퍼득!

울긋불긋한 날개를 가진 하피는 그냥 기동성만 뛰어난 건 아닌 것 같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나뭇가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하피의 팔뚝과 허벅지는 인간이 아니라 곰의 그것 처럼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감히. 제단을.

같은 말을 외치는 목소리도 점차 갈라졌다.

세로로 수축된 동공을 깜빡이며 상반신도 인간의 형태를 버린 뱀이 가까이 다가왔다. 뱀이 붉은 혀를 빠르게 날름거렸다.

오던 길에 잡아먹기라도 했는지, 입은 다물고 혀만 날름거렸는데도 인간의 피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전쟁이라 그런가? 어지간히 잘 먹고 다니는 거 같네. 〉아이작은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대비를 해 놓았는지도 모른다. 사막의 거북이, 와들루스 때처럼 결정적일 때 알아서 해결할 계획이 있을지도 모르지.

조금은 안심이 됐다.

그래도 도망은 가게 해 주겠지.

나무 위에 앉은 하피는 날카로운 발톱을 위협적으로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선택해라."

"뭘. 선택하라는 거지?"

"제단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든지, 아니면 으스러져 죽어라."

〈설마 제단을 그리는 능력도 없는 놈들인가? 〉

자신을 제국 3본부장이라고 말한 사슴 아에자르가 떠오른다.

어쩌면 녀석 정도만 이런 제단을 그릴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뿔은 안 잘리고 잘 있으려나.

"아에자르는 잘 있나? 브로디. 발도프는?"

브로디 발도프.

늑대인간의 이름이다.

회색빛 털 위로 짙게 피어오르던 새카만 아지랑이, 손톱과 이빨에 서린 누구보다 강렬한 검은 기운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 두 녀석이 가장 강해 보였다.

지금 나타난 무리에는 섞여 있지 않다.

슬라임도. 보이지 않고.

그나마 다행인가.

하피가 흠칫했다.

"네가 그들을 어떻게 아는 거지?"

지켜보던 뱀이 쩌억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하나가 칼 한 자루에 필적하는 커다란 독니가 드러났다.

저 녀석도, 전에는 보는 것만으로 몸이 굳는 느낌을 받았는데.

"현혹되지 마! 일단 놈의 뼈부터 다 으스러뜨려 놓고 생각하자!"

왠지 녀석 쪽이 더 긴장하고 있는 기분이다.

- 우지끈!

거대한 뱀이 아름드리나무들을 수수깡처럼 부러뜨리며 덮쳐 왔다.

활짝 벌린 끈적한 입에서 선홍색 피와 녹색 독액이 아래위로 주욱 늘어진다.

_ 스스스숙!

뱀이 주위를 빙빙 돌았다.

공격하기 위해 목을 슬쩍 움츠릴 때마다 그 움직임을 잡아서 칼을 겨눴다.

- 파밧!

나무 부스러기와 시체 파편들이 어지럽게 튀었지만 시야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뱀의 움직임이 그리 빠르지 않게 느껴졌다.

점점 오르던 회전 속도는, 슬슬 한계에 도달했는지 어느 순간인가 정체되어 있었다.

- 쉬쉿!

혀를 날름거리며 나무 뒤를 계속 돌았지만, 내가 계속해서 자세를 바꾸면서 견제하자 공격 타이밍을 전혀 못 잡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시시! 뭐 하는 거야?"

"닥쳐라.

- 퍼드득!

관전하던 하피의 등에서 커다란 날개가 다시 펼쳐졌다.

"에잇! 다들 덤벼!"

하피가 내 쪽을 향해 빠르고 낮게 날아오며 손톱을 휘둘렀다.

공격 경로를 예상해 거꾸로 칼을 강하게 휘둘렀다.

[참격 Lv.3 발동!]

[기합 Lv.3.]

[방어력과 공격력이.]

[사신의 낫 마스터리(희귀) Lv. 1이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들에게 추가 데미지를.]

전장에서 인간 천 명을 베며 스킬 중첩은 이미 자연스러워진 상태다.

- 툭.

"어어.?"

하피는 깔끔히 잘린 제 오른팔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끊어진 단면이 꿈틀거리며 세차게 피를 뿜어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회전하며 하피의 오른쪽 날개를 잘랐다.

커다란 날개가 아무 거리낌 없이 한 번에 잘렸다.

다시 한 발을 디뎌 녀석의 허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 서걱.

상황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그녀가 뒤로 급히 몸을 솟구쳤지만, 이미 허리는 칼에 반 이상 잘려 있었다.

"키, 키이이잇!"

하피는 고통과 충격에 싸인 표정으로 튀어나온 내장을 붙잡았다.

하지만 흘러나온 붉은 장기들은 엉망으로 엉키고 녹아내려 있었다. 베는 순간 집중해 발동한 흡수와 산성 스킬의 효과.

"고, 공.!"

- 서걱!

다시 두 발을 디뎌 녀석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빼지 않은 채 그대로 박아 두고, 근처에 있는 다른 장검을 잡았다.

삼천 명이 죽은 전장.

칼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피는 눈을 뜬 채 서서 죽었다. 잠시 동안 기괴한 고요가 흘렀다.

아이작은 우습다는 듯이 킬킬대며 말을 걸었다.

〈이제 감이 좀 잡히냐? 〉

〈대체 왜 재들한테 졸았던 건데? 네 마음대로 하면 돼! 〉=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너무 쉽게 물리치는 게 이상하다. 아이작의 결계일지도 모른다.

약화 결계라거나.

〈응? 뭔 소리야 대체? 아무것도 안 했는데? 〉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라거나. .아이작이 그럴 놈은 아닌데.

어쨌건, 이게 정말 저들이 지금 발휘할 수 있는 전력이라면.

먼저 쳐도 충분하다.

'질주.'

- 팟!

하피와 싸우며 질주 스킬을 아예 쓰지도 않았다는 게 새삼 우습게 느껴졌다.

주변을 포위한 푸르손 추종자들의 눈가 근육이 썰룩거렸다.

'나를. 놓쳤군.'

가볍게 칼을 휘둘러 한 명의 목을 한 번에 베어 냈다.

옆에 있던 세 명이 한 번에 창을 내질러 공격했지만 몸을 회전시켜 두 명의 팔을 잘랐다.

검은 피부의 오크는 빠르게 몸을 뒤로 랬지만 어깨에 칼이 반 이상 들어갔다.

"크아아앗!"

커다란 철제 방패를 앞장세우고 돌진하는 놈을 그대로 발로 찼다. 무투 스킬의 영향인지 녀석이 뒤로 이십 미터 넘게 날아가 나무에 부딪혔다.

이렇게 쉽다니.

그 순간 나무 위에서 거대한 뱀

머리가 떨어져 내렸다.

잠시 멈춘 순간을 노린 빠른 공격 이었지만 탐지 스킬에 전부 잡히고 있었다.

옆으로 슬쩍 몸을 빼며 창을 하나 집어 바닥에 거꾸로 꽂았다.

아래로 꽂힌 뱀의 머리가 창날에 쓸려 길게 비늘이 뜯겼다.

그대로 옆으로 몸을 돌려 강하게 칼을 내리쳤다.

통나무만 한 몸통에 손가락 한 마디 길이로 칼날이 비늘을 패며 초록색 피가 허공에 튀어 떨어졌다.

- 스스숙!

뱀은 비명도 지르지 않고, 다시 공격해 오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르게 달아났다.

"도망.?"

죽어 가는 동료들을 놓아두고 저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황스러웠다.

〈재 어디 가냐? 〉

빠르게 도망가던 뱀이 나무에서 떨어졌다.

고작 2미터 정도의 높이인데 수십 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것 같은 큰 충격음이 울렸다.

아시시라고 불린 뱀은 터무니없는 무게에 짓눌린 둣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꿈틀거렸다.

저번에 사도의 부스러기를 잠깐 붙잡았던 속박 주술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보다 상대가 약한지, 아니면 아이작이 강해졌는지 뱀의 반응은 훨씬 더 극적이었다.

묶인 게 아니라 바닥에 머리를 콱 박고 꼼짝을 하지 못했다.

나는 기절시킨 푸르손의 추종자, 검은 오크 둘을 끌고 간 뒤 뱀에게 물었다.

"T&T가 망하고. 너희는 어떻게 살아남았지? 뭘 하는 중이냐?"

"끗. 끄흐흑.

뱀이 눈을 깜빡였다.

세로로 수축되어 있던 눈동자가 스르르 풀렸다. 앞부분이 서서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인간 여자의 상반신으로 변했다.

목덜미에서 가슴 위쪽까지 방금

생겨난 긴 상처가 있었다.

뱀은 피 묻은 녹색 머리카락으로 가슴을 묘하게 부각시키며 말했다.

"그럼. 저를 살려 주실 건가요?"

"그럴지도."

"2년 전 사건 때문에, 원래 저희 제단이 부서졌어요. 그때 기반이 많이 약화됐죠."

"2년 전 사건이라면.

"루-륨 탈취 시도요. 황실이 정말 이것저것 지독하게 잡았거든요."

의외로 협조적이다.

= 아이작, 힘 좀 풀지.

〈킥킥. 정말이냐? 〉

= 정말.

푸르손의 추종자들.

그들의 행방에 대해 듣고 싶었다.

〈네가 원하면, 난 당연히 그렇게 해 줘야지. 〉

속박이 조금 풀린 듯 뱀이 여자의 몸을 한 상반신을 좀 더 세웠다.

"아앗. 정말 감사드려요."

"아에자르는?"

"그래서. 아에자르가 힘을 써서 여기에 제단을 만들었던 거예요. 지금도 혼자 전장에 제단을 만들러 다니고 있고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쩌면 슬라임에 관한 이야기도 자연스레 들을 수 있겠지.

"브로디 발도프는. 자기 문제를 해결하러 다니고 있어요. 개인적인 신변에 관련된 건데.

"그게 뭐지?"

여자에게 한 발 더 다가간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까닿게 물들며, 다시 세로로 빠르게 수축했다.

- 카악!

여자의 입이 터무니없는 각도로 턱 끝까지 찢어졌다.

- 퀘!

뱀은 입에서 초록색 독을 뱉었다. 이때를 위해서 모아 왔는지 무척 진한 초록색이었다.

느리다.

뒤로 몸을 빼서 피한 뒤 자연스레 칼을 내리쳐 목을 잘라 버렸다.

잘린 머리가 저 혼자서 꿈틀대며 바닥에 피를 뿌리다 멈췄다.

- 치이익.

머리 부분의 피는 독성이 있는지 바닥을 녹이는 소리를 냈다.

뒤에서 독을 맞은 두 명의 오크는 바로 즉사한 상태였다.

아이작은 기껏 잡은 뱀이 죽은 게 조금도 아쉽지 않은 둣 킥킥거리며 즐거워했다.

〈캬. 아주 멋져! 어떻게 한 번에 인질 셋이 죽어 버렸냐? 응? 〉- 파득! 파드득!

아이작은 즐겁다는 듯 잘려 나간 뱀 머리를 들고 전장을 누볐다.

〈기념 비행이다! 〉

한 바퀴 돌고는 곧 하피 시체를

움켜쥐고 나무 위를 빙빙 돌았다. 붉은 내장과 피가 후드득 아래로 떨어졌다.

비행을 마친 녀석이 다시 근처로 돌아와 어깨를 발톱으로 토닥였다.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솔직히 별로 들을 것도 없었을 거야. 〉

"알았다. 그런데 역시 네가 뭘 했던 거냐? 적들을 쉽게 죽일 수 있도록.

〈하긴 뭘 해! 네가 쓸데없이 과한 걱정을 했을 뿐이잖아. 정말 별거 아닌 녀석들이었다고. 〉녀석의 말대로 걱정했는데.

아이작이 끼어든 건 마지막 순간뿐 이었다.

〈전부 네 힘으로 해치운 거야. 〉 정말일까.

처음 압박감을 느꼈던 건 예전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와 지금의 나 사이의 격차는 실로 아득하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검주 레안드로 후작도 두 번이나 흡수했고, 역대 최강의 네크로멘서인 기스-제-라이 역시 두 번이나 흡수한 데다가, T&T의 창립자 트로핀 나냐우도 흡수했다.

이 정도는 해야 될지도.

받자마자 사용해 봤던, 말파스의 축복도 상상보다 더 놀라운 효능을 발휘했다.

전투력 전체의 상승.

나를 집어서 한 단계 위에 가져다 놓아준 듯하다.

스탯도 결국 하나의 기본 요소일 뿐이라는 게 느껴진다.

강함에 영향을 주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다.

아이작이 어깨를 다시 쿡쿡 존다.

〈그거 안 하냐? 그거. 〉

"뭐?"

〈빨리 흡수해야 될 거 아니냐. 〉

"해야지."

목이 잘려 나간 뱀과, 반으로 잘린 하피에게서 미약하나마 초록빛이 쁨어지고 있다.

정수 흡수의 시간.

녀석들에게 손을 뻗었다.

- 띠링.!

연달아.

단정왕端正王, 푸르손의 교리를 흡수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영 쓸모없어 보이는 교리였지만. 레벨 3까지 흡수하자, 대분지에서 본 조각들의 의미가 깨우쳐졌다.

'그건 침윤浸潤. 마계에서 통치하는 영토를 뜻하는군.'

'과거, 현재, 미래. 보물이라는 뜻인가.

[?"교리 Lv. 4를 흡수했습니다!]

그 외의 스킬은 없었다.

교리만 잔뜩 흡수하고 시체에서 서서히 빛이 꺼진 탓에 허무함을 느낄 때였다.

- 띠링!

[스킬: 정수흡수 Lv. 2의 숙련도가 상한선에 도달했습니다.]

뭐라고?

[에픽 스킬 보유자의 숫자가 정상 범위(1)로 확인되었습니다.]

[진화 프로세스 완료.]

[승급을 허가합니다.]

241화 아무 대가 없이 (5)

***************************************************

[정수 흡수 Lv. 3을 습득합니다!]

에픽 스킬을, 숙련도만 올려 스킬 레벨을 상승시켰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황.

정수 흡수의 숙련도 같은 건 아예 떠올리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동안 초록빛이 뿜어지는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흡수한 보람이 느껴지는 듯하다.

두 자릿수를 죽고 다시 살아나며 정수 흡수를 거듭한 보람이 있다 특히.

잿빛 기사에게 살해당한 강자들을 흡수하며 스킬 숙련도가 급격하게 오른 듯하다.

정수 흡수가 1에서 2로 오르며, 흡수 스탯의 상한과 동시에 흡수 스킬의 격이 올라갔다.

이번에는 어떤 보상이 주어지려나 싶다.

아래로 시선을 내려 줄줄이 뜨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흡수 가능한 스탯 상한이 100으로 상승합니다!]

50에서 75로.

이제는 한 단계 올라가 100으로 뛰어 버렸다.

스킬 레벨이 올라간다고 했을 때 예상했던 결과지만, 직접 확인하니 또 다른 기분이 느껴진다.

계속 나타나는 메시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사망 3달 내의 상대로부터 정수 흡수가 가능해집니다.]

[약자들로부터 더 철저히 정수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흡수 하한선이 대폭 낮아집니다.]

철저한 정수 흡수?

흡수 하한선이 낮아진다고?

무슨 말인지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체들에서 초록색 빛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서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흡수한 시체들.

혹은 처음부터 빛이 나오지 않던 시체들.

전에는 상대가 '너무 약해서' 흡수할

수 없던 범위까지 추가 흡수가 가능해 진다는 이야기다.

한 명도 빠짐없이 3천 명에게서 쁨어지는, 전장에 가득 찬 초록색 빛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이걸 다 흡수한다면.

대체 얼마나 강해지라는 거지?

흡수 상한선은 지금 당장이라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범위 흡수가 가능해집니다.]

범위 흡수라.

어떤 능력일지 궁금할 것도 없이, 스킬 레벨이 올라가자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익숙하던 것처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 지정.

범위 흡수.

레벨 2 때는 하나하나를 대상으로 흡수해야 했던 정수를, 무려 수십 명에게서 동시에 뽑아낼 수 있다. 압도적인 효율.

- 달그락.

나는 손을 들었다.

주위를 가득 메운, 새로운 초록색 빛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 우우우우.!

에픽 스킬 보유자의 숫자가 정상 범위 (1)로 확인되었다는 말이 다시 한 번 마음이 찌른다.

확인할 것도 없이.

예상대로 기스-제-라이는 죽었다.

그녀가 죽은 지금, 이런 풍경은 이 세계에서 오직 나에게만 보이고 있겠지.

- 우우우!

[민첩이 0.013 상승합니다!]

[지혜가 0.009.]

스킬 레벨이 오르기 전에는 아무 빛을 내지 않던 주위의 시체들은, 소수점 단위로 흡수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빛은 미약하지만 흡수하는 대상은 수백, 수천.

십여 미터 정도의 반경.

그 안의 빛이 동시에 나에게 빨아 들여진다.

전장을 걸으며 기마대와 병사들의 스탯을 통째로 수십 명분씩 모두 빨아들였다.

소수점이 무수히 변경되었다.

전체 스탯 100까지 찍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다.

범위 흡수로 한차례 빨아들이자, 오직 두 구에 초록빛이 남는다.

목이 잘린 뱀과 몸이 반으로 잘린 하피다.

정수 흡수의 스킬 레벨이 오르기 전에는, 쓸모없게 푸르손의 교리만 내놓던 녀석들이었지만.

- 띠링!

[불치의 꽃 Lv. 1을 흡수했습니다!]

[희망 없는 포옹 Lv. 1을.]

[둔한 눈물 Lv. 1을.]

묘한 이름들이다.

적어도 푸르손의 교리 따위보다는 훨씬 더 좋을 것 같지만.

나는 아래에 뜨는 설명을 자세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모두 독 스킬의 종류들이다.

희귀도는 레어.

단순히 흡수가 가능하다 아니다를 넘어서, 정수 흡수의 효율이 크게 증가한 게 느껴진다.

[독: 불치의 꽃]

- 몸에 흐르는 피의 결정을 뾰족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혈관을 모두 찢어 버립니다.

이건 고통을 주는 데 초점을 맞춘 독이고.

[독: 희망없는 포옹]

- 상대의 신경을 녹이며 의존성

높은 금단 증상에 빠지게 합니다. 중독자는 점점 많은 독을 원하며, 한번 독을 접한 신경 조직은 다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신경을 직접 녹여 버리는 종류. 어디에 쓸모 있을지는 모르겠다.

[독: 둔한 눈물]

- 호홉 기관을 무력화시깁니다. 상대는 질식으로 사망합니다.

이건 빠른 살상이 목적.

한눈에 봐도 강렬한 스킬들이다.

문득, 아까 뱀이 나에게 뱉으려던 독이 생각난다.

이것들 중에 하나는 아니었겠지.

날 상대로 하기에는 아무 효과도 없을 테니까.

아마 산성 효과를 가진 독이었을 거라고 추정되는데.

난 이미 높은 레벨의 산성 스킬을 보유한 탓에 그건 못 흡수했던 것 같다.

다시 빛이 꺼진 뱀의 시체를 떠나 하피에게로 향했다.

범위 흡수로 소수점 단위 스탯은 빨아들일 수 있지만, 한 자릿수나 /,9A 흐스느 〈 ? s ㄱa I하는 것 같다.

예전처럼 하나씩 해야

시간은 역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몸이 절반으로 잘린 상태에서도, 스킬은 전수해 주는 녀석의 모습은 기괴하고 성실하게 느껴진다.

하피에게서 흡수한 스킬을 하나씩 확인했다.

[바람 발톱 Lv.1]

- 공중에 머무르는 적에게 공격이

적중했을 때, 당신을 향해 조금 더 끌어당기거나 추격할 수 있습니다. 날개 달린 것들도, 한 대 때리고 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도약 Lv.1]

될 수 있는 높이가 최대 15% 올라갑니다. 패시브 스킬입니다.

꽤 괜찮은 스킬들이다.

조합이 좋다.

하피는 근거라 타입이라 상대하기 편했지만, 하늘을 날면서 활이라도 쏘아 대면 몹시 귀찮을 게 뻔하다.

검기를 흉탄처럼 날릴 수 있는, 압도적 힘을 가지기 전에는 상당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스킬이라고 생각된다.

하피 시체에서 초록색 빛이 다시 사그라든다.

- 철픽.

작은 웅덩이를 향해 걸어갔다.

독을 시험해 보기 위해 물에 손을 넣고 스킬을 발동했다.

'불치의 꽃'을 발동하자 녹색 빛이 손 주위로 빠르게 퍼져 나간다.

봄이나 여름의 풀빛과는 달랐다. 어둡고, 적막하고, 마구 비뜰어진 녹색이다.

생명을 피우는 녹색이 아니다.

죽음의 혀로 핥아 삶을 깨트리고 바싹 그을리는 녹색이었다.

〈호오. 색깔 예쁜데? 그런 권능을 얻어낸 거냐?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독을 계속 시험했다.

'희망 없는 포옹'은 보라색.

'둔한 눈물'은 아무 색도 없다.

〈다들 액체를 매개로 해야 되는 것들이군. 〉

"그럼. 다른 건 뭘 매개로 할 수 있지?"

〈공기로 할 수 있는 게 살상력은 좀 더 낫겠지. 마시게 하는 것보다, 숨 쉬게 하는 게 쉽잖아? 〉

"…독에 대해 좀 알고 있나?"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의외였다.

독을 잘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작이 침묵하는 나를 가만히 보면서 느긋이 말을 이었다.

〈난 멀쩡한 상태에서 미치는 게 좋다고. 밖에서 추출한 걸로 망가뜨 리는 건 그다지 취향이 아니야. 뭐, 그 얘긴 됐고. 아무튼 나 좀 따라와 봐라. 〉- 파드득!

일단 묻지 않고 따라갔다.

정수 흡수 레벨이 오른 뒤.

전장 여기저기서 초록빛이 새롭게 반짝이는 탓에 어차피 돌아볼 생각 이었다.

'흡수.'

소수점 단위로 스탯이 올라간다는 메시지가 빼곡히 눈앞을 메웠다.

〈여기! 얼어붙은 애들 좀 다 강에

집어넣으라고. 〉

냉기 폭풍으로 얼린 뒤, 검격으로 한 번에 서른 명 정도를 부숴 버린 현장이다.

반으로 부서진 채, 아직 햇햇하게 얼어붙은 시체들을 바라봤다.

〈이거 너무 수상해. 지나친 관심거 리가 된다고. 〉

아이작의 말을 받아, 죽은 자들을 말없이 강으로 쓸어 넣었다.

〈다음은. 〉

서로 죽인 것들 사이로 내가 죽인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앞, 뒤, 옆모습들. 모두 내가 비어 버리게 만든 모습들이다.

다들 어딘가 억울한 표정을 하며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 같다.

혹은 삐밖에 남지 않은 주제에, 아직까지 아등바등 움직이는 나를 비웃는 표정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웠다.

저들에게 화해를 구할 여유 같은 건 없다.

시체들의 상처를 확인한다.

칼. 창. 도끼. 주먹.

전부 죽인 흔적들이 다르다.

아이작의 조언을 받아들여, 초반부터 적을 최대한 다르게 살해한 흔적들 이다.

〈이건 철인을 지나치게 깔끔하게 잘랐어. 좀 지저분하게. 그렇지. 잘하네. 〉여섯 시간 정도가 걸렸다. 푸르손 추종자들의 시체까지, 뭔가 끼어든 흔적을 조금이라도 지워야겠다는 아이작의 말을 따랐다.

슬슬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것들을 한 번에 죽인 탓인지, 꽤 장엄한 풍경에도 아무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하늘에서도 핏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 파드득!

전장을 빙빙 훌어보던 아이작이 위에서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이 정도면 됐다. 어차피 작정하고 찾으면 못 숨길 거고. 2주 정도는 이제 가만히 숨어 있거라. 〉

"2주씩 이나?"

〈아쉽지만, 이런 좋은 이벤트가 그렇게 자주 있는 건 아니라서. 〉이미 안에서 2년을 헛되이 보내 버렸다.

루비아가 갇혀 있는 걸 생각하면 조금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몸이 조급함과 허기로 찼다.

그 덕분인지, 머릿속에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는 저 멀리 점점 가파라져 가는 산기슭을 보며 물었다.

"여기가 동부 산맥이라고 했나?"

〈응. 그런데? 〉

"찾아야 할 녀석이 있다. 고블린 마법사 머드캐쉬라고. 2주 정도는 그 녀석을 찾아보고 싶다."

〈호오. 고블린 마법사라고? 〉

아이작이 눈을 반짝였다.

"이 시대에 딱 하나만 존재한다는 고블린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다.

홉고블린 직스키세스 붐텅.

심장과 뇌에서 혈석을 채취당하며 단체로 사육되다가, 나에게 구출된 고블린 부락의 족장 같은 녀석이 해 줬던 이야기다.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을 한 채로, 고맙다며 눈물짓던 붐텅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구해 주지 못했다.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결계에서 이 년이 지나 버린 이상 온갖 끔찍한 꼴은 다 봤겠지.

직스키세스 붐텅의 앳된 목소리가 어떤 참혹한 비명으로 변했을지 알 방법은 없다.

전장의 시체들 위에, 심장과 뇌가 쪼개진 고블린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환각이 비죽거렸다.

애써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하며,

붐텅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아이작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콕콕. 〉

이야기를 들은 아이작이 혼자서 웃기 시작했다.

"뭔가 짚이는 게 있냐?"

〈그거, 금화만 들어가는 건 절대 아닐 거다. 〉

녀석은 확신에 찬 말투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금화만 골라서 들어가게 하는 것 자체가 공간왜곡보다도 심지어 더 번거로운 일이야. 그따위 짓을 할 리가 없지. 〉아이작이 상식을 운운하니 뭔가가 무척 어긋나는 느낌이었지만, 일단 가만히 들어 보기로 했다.

〈게다가 무한의 공간이라는 건. 단적으로 말해서 불가능하다. 〉 〈그만큼 금화를 갖고 있는 놈이 없기에, 끊임없이 넣을 수 있다고 와전됐겠지. 부피만 큰 걸 넣으면 금방 안쪽이 차 버릴 거라고. 〉사실 기대했던 바다.

기스-제-라이가 죽을 때, 그녀의 유해를 넣어 둔 아공간처럼.

뭐든 넣을 수 있는 포켓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 들을 때부터 생각했었다.

위험한 곳에서는 루비아를 안에 넣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반가운 기분이 되어 아이작에게 물었다.

"그럼 대체 왜 금화만 무한하게

들어간다고 말한 거지?"

〈고블린들은 마법 같은 것보다야, 그저. 금화를 최고로 칠 테니까. 동족들에게 대단하게 보이고 싶었을 거다. 〉〈나도 한번 만들어 보려고 했지. 성과에 비해서 드는 노력이 너무 커서 단념했지만 말이야. 어쨌건 찾아볼 가치는 충분하다. 가자! 〉우리는 밤이 되기 전 산맥 초입에 도착했다.

〈찾다가 지치면 말해라. 인간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던전 몇 곳이 있거든. 사냥하자고. 〉문득 아이작의 화법이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마귀 인형에 오래 있다 보니, 거기에 동화되어 버린 것일까.

잠시 침묵하자 녀석이 나를 보고

말했다.

〈왜? 불만이야? 〉

지나가듯 그에게 물었다.

"너는 널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인간이냐? 아니면.

아이작은 날개를 한 번 툭 털더니 별 웃기는 질문을 다 듣겠다는 둣 대답했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

"생각해 본 적 없다니

〈내가 나인 건 당연한데 왜 굳이 뭐라고 틀을 만들어서 말할 필요가 있지? 〉아이작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 말했다.

〈이제 동부 산맥이다. 여긴 특히 고블린들이 많이 살았었고. 〉높게 솟은 바위 위.

울창한 숲이 눈 아래 사방에 넓게 펼쳐졌다.

아직 군대가 지나가지 않은 둣, 주변 환경이 그럭저럭 보존된 높은 장소였다.

〈그럼 그거 해 봐야지? 〉

"흐음. 음?

여기서 그 대사를 외치면, 고블린

마법사 머드캐시가 당장 나타나는 걸까.

너에게 소유권을 인정하며 마법 주머니를 준다고.

그렇게까지 잘 풀리지는 않아도, 일종의 시험 따위에 응하게 해 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 암호를 네가 어떻게 알고 있냐면서, 곧바로 마법으로 공격해 들어올지도 모른다.

잔뜩 긴장한 채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242화 아무 대가 없이 (6)

***************************************************

사흘째.

- 취이이익, 휙, 취익!

반향은 없다.

고요하다.

탐지 스킬에 잡히는 것도 없다.

호기롭게 탐험에 나서긴 했지만, 산맥은 넓고 내 발음이 정확하다는 보장은 전혀 없으니까.

"이대로 될까?"

〈안 되면 하지 말까? 〉

아이작은 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선택을 맡기면. 계속해서 해 나갈 수밖에 없다.

- 취이이익, 휙, 취익!

다시 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산을 걸었다.

[명상 Lv. 2를.]

[집중 Lv. 2를.]

두 스킬을 사용해서, 다음에 쓰는 스킬의 효과를 증폭시킨다.

'탐지.'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블린 마법사를 생각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과거 이 이야기를 들은 건 네크론 신사회에 의해, 심장에서 혈석을 채취당하는 고블린들을 구해 주고 난 뒤의 일이다.

슬라임의 의뢰에 의해서.

하지만 이번 생은 그쪽에 가지도 않았다.

아예 슬라임도 만난 적도 없고.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지금쯤은 다 죽거나, 아니면 아직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나 좋을 대로 생각하면, 붐텅이 해 준 머드캐쉬 이야기에서 그가 고통 받는 동족을 생각한다는 말은 전혀 없었다.

- 투두두두 ?

나뭇가지들이 빗방울을 받아치는 소리가 들렸다.

빗줄기는 곧바로 바닥에 디디지 못하고 몇 번씩 튕겨 흘러내렸다. 다시 밤이었다.

몇 번 고블린 소리를 내고 주위의 기척에 집중했다.

수 킬로미터를 뻗어 나가는 감각. 그때 였다.

커다란 그 원 끄트머리에,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뭔가가 잡혔다. 이리저리 헤매는 짐승이 아니다.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는 분명한, 이질적이고 강렬한 하나의 존재.

환청 이겠지만.

비를 뚫고 다가오는 낮은 발자국 소리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정말 녀석일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발걸음이 절로 조금씩 빨라졌다.

꼭 호의적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시험은 치르게 해 주지 않을까.

공간왜곡 아티팩트라는 건 분명 굉장한 쓸모가 있을 거다.

숨겨 놓고 절대 안 준다고 해도, 말을 섞어 보면 다음 생에 활용할 지식은 쌓이겠지.

심지어 머드캐쉬가 다짜고짜 나를 공격해 들어온다고 해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웬만한 아쥬라의 마법사들도 이미 몇 차례 흡수해 놓은 상태니까.

〈뭐라도 찾았나 보지? 〉

아이작이 나를 흘끗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숲에 들어오고 난 뒤, 아이작은 이 일은 나에게 맡기겠다는 것처럼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약간 설레 고개를 끄덕 였다.

탐지 스킬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만큼 아직 먼 거리지만.

무척 운이 좋다.

아직 광활한 동부 산맥의 십 분의 일도 채 돌아보지 않았는데.

어차피 끝없이 찾을 수는 없으니 이 주 정도만 투자해 보려 했는데, 고작 사흘째 발견한 것이다.

달빛이 내리는 산의 풍경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경계에 걸리는 기척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결계에 걸린 건 아니다.

풍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고, 아이작도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거리는 그대로.

머드캐쉬는 나와의 거리를 일부러 유지하고 있다.

- 팟!

조금 빨리도 걸어 보고, 뛰어도 봤지만 거리는 계속 상대의 뜻대로 조정되고 있었다.

고블린 다리가 짧다고, 일부러 배려해 살살 걸어 준 것도 아니다.

적당히 빠르게 뛰었는데도 거리는 여유롭게 유지되고 있다.

두 가지가 여기서 유추된다.

하나.

머드캐쉬는 이 거리에서도 나를 느낄 만큼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패밀리어 따위를 근처에 놓아둔

것인지도 모르고.

둘.

머드캐쉬는 나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느긋하게 걸으면 느리게, 빠르게 뛰면 거기 맞춰 상대가 움직인다. 어느새 숲의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고 녀석의 존재에만 탐지가 집중되고 있었다.

고블린 마법사 머드캐쉬.

이 녀석의 정체는 뭘까?

다시 밤이 되었다.

- 저박

이번에는 거리를 좁히려고 하지 않고 내 쪽에서 조금 벌려 보았다.

그러자 녀석도 천천히 나를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만하고, 꽤나 설레던 심경에 이제 희미한 불안이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으로 빨리 걸어도 거리는 그대로였다.

뛰어도 마찬가지였다.

추격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은신 스킬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서 레나마저 속일 수 있는 스킬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수 킬로나 떨어져 있는 머드캐쉬는 나를 제대로 쫓아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밤이 되었을 때였다.

이제는 내가 녀석을 쫓고 있는지 녀석에게 쫓기고 있는지가 혼란스러 워지고 있었다.

슬슬 어떻게 할지를 정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흠. 〉

아이작이 하늘을 흘끗 바라봤다.

점점 차오르는 상현上按을 끝에서 끝으로 한 번 차분히 훌어보더니 아이작이 내게 말했다.

〈그거, 거리를 유지하고 있냐?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아이작이 동부 산맥에 들어선 뒤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쫓아가야겠다.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상대를 따라잡아라. 나는. 위에서 알아서 가마. 〉그 정도까지?

- 파드득!

아이작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머드캐쉬가 호의를 갖고 있을지, 적의를 갖고 오고 있을지 모른다.

고블린 부족이 처참하게 죽은 걸 안다면, 그 원흉을 나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자기를 찾는 암호를 고문을 통해 알아냈다고 여길지도.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 달그락.

나는 전장에서 주운 장검을 고쳐 쥐었다.

두 자루를 줍고 한 자루는 등에 메어 놓은 상태였다.

어쨌건 만나 보자.

[질주 Lv. 7을 발동합니다!]

[500%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 24:59]

- 파앗!

빗줄기가 비명을 질러대며 갑옷 사이사이를 날카롭게 베어 왔다.

- 쎄애앵!

[질풍 Lv. 2를 발동합니다!]

2년 동안 결계 안에서, 맨몸으로 마법을 쓰는 법을 조금 더 터득한 상태.

바람을 뒤쪽에서 불게 해서 순간순간 앞으로 빠르게 치고 나갔다.

갑작스런 폭주에 상대도 당황해 빨리 거리를 벌렸지만, 어느 순간 속도가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한 장소에 머물러 있었다.

300미터.

200.

100.

50.

숲속에 솟아 있는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기척은 그 뒤에서 느껴졌다.

멀리서는 알지 못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작은 크기가 아닌 게 여실히 느껴졌다.

- 우드득.

나는 칼을 꽉 쥐고 다가갔다.

머드캐쉬가 여기 있다.

40미터.

다짜고짜 마법으로 덮쳐 올까?

30미터.

하지만 그럴 생각이었다면 거리를 벌린 상태에서 공격을 해야 옳다.

마법 공격을 퍼부을 생각이라면 이렇게 가까이 접근을 허용해서는 곤란하다.

20미터.

혹시 시험을 낼 생각일까?

10미터.

자기를 따라잡은 걸 시험이라고 하고 공간왜곡 주머니를 그냥 줄 가능성은 없을까?

그건 너무 갔나.

고블린 부족에 대해 물어 올까? 어쨌거나.

바위 앞으로 다가간 뒤, 사흘간 내던 소리를 다시 반복했다.

"취.

- 파꽈? 앙!

바위 뒤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순식간에 거리를 없앤 뒤 주먹으로 내 배를 쳤다.

바위 뒤에 숨어 있던 녀석이 내게 몸을 날리는 소리, 주먹을 날리는 소리, 갑옷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동시에 겹쳐 울렸다.

- 까강! 광! 쾅!

상대는 거대한 손으로 내 어깨를 꽉 잡은 뒤, 다른 주먹으로 배와 가슴과 얼굴을 연달아 타격했다.

미처 검기를 두르지 못하고 처음 내민 칼은 첫 일격에 수수깡처럼 부러져 날아갔다.

순식간에 몇 대를 맞았는지 셀 수 조차 없었다.

- 파광!

전장에서 주웠던 새 갑옷은 이미 상대의 악력과 주먹에 종이처럼 다 찢어져 버렸다.

두 팔을 들어서 간신히 쇄도하는 주먹을 막아 냈지만 이번에는 발과 무릎이 양쪽에서 폭풍처럼 휘어들어왔다.

일격에 쇠를 부러뜨리고 바위를 산산조각 낼 힘이었다.

몸이 잡힌 상태라 아예 맞아서 뒤 쪽으로 날아갈 수조차 없었다.

[주의! 체력이 80% 이하로 떨어졌 습니다!]

이대로라면 곤란하다.

'결빙. 더블 캐스팅. 뇌전.'

간신히 마법을 응축한 손을 들어 쇠기둥 같은 상대의 두꺼운 팔을 잡았다.

- 파지지직!

하얗게 얼어붙은 팔을 타고 노란 뇌전이 번쩍거렸다.

"크윽

그나마 타격을 받았는지.

얕은 신음을 뱉어 내며 팔에 힘을 푸는 녀석의 뺨을 다른 쪽 손으로 후려갈겼다.

'격발. 질풍.' - 화르르!

주먹을 매개체로 끌어낸 바람과 불길의 힘이,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상대의 몸을 뒤로 날리며 태웠다.

2년 동안 결계에 갇혀서 수련한 거라곤 맨주먹으로 마법을 쓰는 것밖에 없었다.

칼이라는 매개체를 갖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예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뒤로 나가떨어졌던 상대는 다시 튕기듯 일어나 발톱으로 나를 휩쓸어 왔다.

- 쌔애앵!

회색 번개 같은 움직임.

붉은 눈동자가 마주치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다.

두 번째 보는 녀석이다.

사슴 아에자르와 함께 있던 늑대.

당연히, 놈이 머드캐쉬의 변장일 가능성은 없다.

"역시. 강하군.

바위 뒤에서 튀어나온 웨어울프가 회색빛을 일렁이는 눈으로 날 보며 중얼거렸다.

3미터가 넘는 쇳덩이 같은 몸의 뒤에는 마치 그를 수호하는 것처럼 상현上按이 은은히 비치고 있었다.

"동료의. 복수를. 하러 왔다."

달빛이 그의 손톱에서 회색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243화 아무 대가 없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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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르록.

웨어울프의 발톱이 베고 지나간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눈앞에 보이는 절단면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검기로 날카롭게 베어 낸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발톱에 직접 닿지도 않은 부분인 것 같았는데.

놈의 앞발에 서린 회색빛 기운이 한층 더 신경 쓰였다.

- 과직.

웨어울프가 디딘 아름드리나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반쯤 꺾였다.

폭풍 같은 강렬한 도약으로 놈이 나를 덮쳐 왔다.

급히 발을 디뎌 옆으로 피했다.

- 쾅!

서 있던 위치의 나무 두 그루가 단번에 꺾여 나갈 때 부서진 칼을 옆으로 내질렀다.

- 크르르!

하지만 녀석은 검기가 서린 칼을 그대로 맨손으로 잡았다.

손에 힘을 줘, 순간적으로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입을 벌려 물어뜯으려 했다.

눈앞에서 덮쳐 오는 공격에 칼을 놓고 몸을 뒤로 젖혔다.

미끄러지듯 아래로 지나가며 허리

에서 한 자루 남은 다른 칼을 뽑아 늑대를 향해 휘둘렀다.

목표는 심장.

- 팟!

하지만 늑대는 제 공격이 실패하자 마자 허공을 향해 튀어 올랐고, 그 속도와 높이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높았다.

칼에 스친 다리에서 새빨간 피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칼 한 자루를 버리고 만든 상처치고는 얕다.

피의 양은 적지 않았지만 제대로 걸리는 느낌은 없다.

그라스미어에서 가져왔던 대검을 오래 사용하다 보니 그만 그 길이에 익숙해져 버렸다.

수준 차이가 크게 나는 인간 병사 들을 상대로 할 때는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 정도 속도를 내는 적 앞에서는 간격을 제대로 다시 잡아야 했다.

'집중.

피를 흘리는 녀석은 빼곡한 나무 사이로 숨어들어 갔다.

베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그동안

별생각 없이 지나왔던 나무들이 유독 우글우글하게 느껴졌다.

'추적.'

숲속에서도 녀석의 위치는 계속 빠르게 변했다.

상처를 입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속도였다.

오히려 어설프게 베어서 본능을 각성시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녀석은 빠르게 움직였다.

나무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아이작이 데려간 캐빈 애슈턴의 성지에서, 다크 엘프에게 숲 적응스킬을 흡수했었다.

하지만 발동되는 그 스킬이 숲은 상대의 영역이라고 경고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칼을 쥔 채 고요한 숲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섣불리 파고들지 않고 앞을 향해 녀석에게 물었다.

"왜 동료들과 함께 오지 않았던 거지?"

상당한 강자다.

함께 왔다면, 거기서 내가 위기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거냐?"

빼곡한 나무속에 숨은 늑대인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찐지 짙은 안개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싸움이 만든 공터에 있고, 늑대는 무성한 숲속에 있었지만 달빛이 녀석에게만 환히 비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으로 이어진 피는 흥건했지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역시 들지 않았다.

- 휘이아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자세를 살짝 틀 때 늑대가 뒤에서 뛰쳐나왔다.

몸을 돌려 칼을 휘둘렀다.

- 콰광!

발톱과 칼이 부딪쳤는데 기괴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 광!

회색빛 기운이 뭉친 발톱이 다시

검기 어린 칼에 적중했다.

무심코 늑대의 다리를 확인했다. 아까 베인 상처에서 흐르던 피는 이미 몇었고, 상처도 모두 아물어 있었다.

저 정도면 설원 트롤에 지지 않는 회복력이 었다.

물론 속도와 힘은 트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 콰앙!

녀석의 발톱이 깨져 나가고 끝에 쩍쩍 금이 가고 있었는데도, 그는 한순간에 연속 세 번을 칼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상처를 회복한다면.

지져 버리면 그만이다.

'산성.'

- 치이익!

놈과 마주 보며 녹색 검기로 앞을 휘몰아쳤을 때, 늑대인간은 다시 백백한 숲속으로 도망가 버렸다.

비슷한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다섯 번째는.

- 치이익!

내가 검기를 일으키자 놈은 잠시 싸우는 척만 하더니 다시 숲으로 빠져 도망갔다.

녀석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연달아 산성 검기를 일으킨 칼이 조금씩 부식되고 있었다.

전장에서 주운 칼을 내려다봤다. 제국 기병대 지휘관의 장검이다.

잘 버려진 칼이었고, 충분히 명검

소리를 들을 만했다.

하지만 늑대가 습격해 올 때마다 검기를 일으키면 내구도가 언제 다 닳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검기를 일으키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 번의 격돌에 칼이 부러 지게 하고 싶지 않다면.

결계 속에서 사라진 대검의 존재가 무척 다시 아쉽게 느껴졌다.

- 달그락.

나는 거추장스럽게 남은 갑옷을 뜯듯이 찢어 버리고 칼 한 자루에 집중했다.

녀석은 단순히 속도만 빠르거나 힘만 센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강요하는 전투 센스가 몹시 탁월하다는 게 느껴졌다.

- 부응!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싸우나? 늑대가 아니라 쥐새끼 같군."

- 쏴■아? 아"

대답은 없었다.

어설픈 도발 따위는 전혀 먹히지 않는 녀석이었다.

느껴지는 방향으로 일부러 팔을 늘어뜨리고 빈틈을 보였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았다.

부러진 발톱이라도 다듬은 뒤에 최적의 상태로 나타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탐지 거리 끝에서 조용히 나를 따라오고 있던 녀석.

유치한 도발에 넘어올 가능성은 역시 없다고 봐야 한다.

아예 몸을 나무에 기댔다.

조금 위험할 정도로 빈틈을 만든 자세였다.

하지만 한 번에 승부를 보려는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늑대인간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살짝 더 벌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무에 기대 가만히 서 있자, 느릿 하게 차 가는 달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레 정도면. 만월인가.

'서둘러라.'

문득 아이작이 달을 흘끗거리며 말하던 게 떠올랐다.

설마 그 이야기인가?

만월이 뜨는 밤, 늑대는 폭력으로 세상을 일그러뜨릴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리는 대신 적어도 두 배는 강해진다.

확실히 푸르손에 제단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늑대가 지금보다 더 강해 보였다.

그때도 보름달이었지.

붉은 달 아래 폭주하려는 녀석을 아에자르나 다른 놈들도 겁냈던 것 같은데.

애초에 나를 최대한 멀리서 몰래 미행하면서,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보름달만 기다리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빠르게 접근하니 어쩔 수 없이 지금 뛰쳐나온 거고.

머드캐쉬를 찾는답시고, 탐지를 최대한 활성화하지 않았다면 놈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당했겠지.

취이익거리면서 돌아다녔던 게 완전한 헛짓은 아니었을지도.

어쨌거나.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나다.

의도를 파악한 이상 거기 맞춰 줄 이유는 전혀 없다.

'추적.'

'질주.'

스킬을 최고 수준으로 발동하고 숲속을 빠르게 헤치고 들어갔다.

무리한 난입인 이상.

습격은 당연.

위쪽이 다.

10미터가 넘는 높은 나무 위에서 뚝 떨어지면서 공격하는 3미터짜리 늑대에게 칼을 들이댔다.

아까처럼 강하게 부딪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칼이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살짝 검기를 둘렀다.

'흡착.'

- 탁!

발톱과 부딪치는 순간에 스킬을 발동했다.

회색 기운이 서린 흉포한 발톱이 빨아들이듯 칼에 잡혔다.

붉게 달아오른 웨어울프의 눈빛이 흔들렸다.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달은 녀석이 곧바로 나를 패대기치고 도망가려 했지만, 눈을 똑바로 보면서 연계 스킬을 발동했다.

'공포.'

녀석은 아주 짧은 순간 멈칫했다.

높의 악령에게 공포를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짧은 찰나의 반응.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굳은 놈을 끌어당겨서 발로 턱을

올려 찼다.

- 빠악!

강렬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늑대 머리가 뒤로 재껴졌다.

인간이었으면 머리가 뜯겨서 나무 몇 개는 뚫고 날아갔을 텐데, 실로 경이로운 목 근육이었다.

타격을 받기는 한 건지, 녀석은 비틀거리면서 바닥을 굴러서 뒤로 도망가려고 했다.

녀석의 다리를 밟고 칼을 가슴에 찔러 넣었지만, 밟힌 다리가 힘을 - 퍽!

두꺼운 나무에 등이 부딪혀 주욱 아래로 미끄러졌다.

중량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쫓는 쪽은 나였고, 한자리에서 제대로 싸우면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칼은 이미 벌써부터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인적도 없는 빼곡한 숲속이다.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을 가능성은 없었다.

맨몸으로 부딪친다면

- 달그락.

승산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살짝 긁기는 했나.

칼끝에 막 묻은 늑대의 피를 툭 털어 냈을 때였다.

- 파드득!

위에서 날아오고 있던 아이작이 근처에 내려앉았다.

〈넌 진짜. 저놈이랑 대련이라도 해 주고 있는 거냐? 〉다짜고짜 잔뜩 비꼬는 어조였다.

= 대련이라니?

〈아니면 뭐, 재 놀리고 있냐? 〉

= .놀리다니. 그런 적 없는데.

아이작이 기가 차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장난해? 만월도 아닌데 뭘 이리 다 맞아 주고 있어? 〉= …그게, 그러니까.

〈계속 맨몸으로 푸르손의 가호에 부딪치다니! 그렇게까지 유리하게 계약을 체결해 줬는데, 말파스의 힘은 전부 어디에 팔아먹었어? 〉녀석이 뭘 말하려는지 안다.

'까마귀의 힘.'

부인할 수만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오랜만의 대결에 흥미를 가졌던 건지도 모른다.

2년 동안 결계에 갇혀 있었다. 나와서 처음 끼어든 전장.

서로 격돌하는 인간의 군대 3천 가운데, 내 칼을 두 번 받아 내던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무료한 학살 뒤.

달빛을 받은 웨어울프와의 싸움은 분명 나를 묘하게 고조시켰다. 추격과 추적.

서로 당장 보호해야 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의 자유로운 싸움.

어쩌면 이 싸움을 끌고 싶었던 건 웨어울프보다도 나였을지 모른다.

사실 말파스의 힘을 쓰는 데 약간 거부감도 있었다.

너무 달콤한 힘이다.

무엇보다 나를 '지켜보는' 녀석의 존재가 의식된다.

아직 쓰지 않은 기술들도 있다.

마왕의 힘을 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루비아는 갇혀서 실험체로 고통 받고 있다.

장난하고 있냐는 아이작의 말이 분명히 옳았다.

'암흑.'

[공격력이 25% 상승합니다.] [방어력이 40% 상승합니다.]

['까마귀의 날개': 이동 속도가

15% 상승합니다.]

즉시 솟아난 검은 기운이 칼날에 크게 일렁거렸다.

'참격.'

그어떤 준비 동작도 없이 칼을 앞으로 휘둘렀다.

새까만 기운이 칼과 몸을 감싸자

뒤로 몸을 돌렸다가 베는 따위의 동작이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 스르록.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나무 여덟 그루가 부러지는 소리조차도 없이 동시에 베여 나갔다.

감각의 확장.

훨씬 가벼운 몸이 숲속으로 튀어 나갔다.

의지만으로 발동되는 어둠의 힘은 정말 놀라웠다.

- 쎄앵!

다시 한 번 웨어울프가 몸 전체를 무게로 실어 공격해 들어왔다.

지금까지라면, 형편없이 튕겨 나가 나무들을 부수면서 한참 뒹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부딪쳤다.

'포스 실드.'

부딪치기 직전 일렁이는 반투명한 방패가 나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루-륨을 수송하는 알로히스라는 마법사에게 흡수한 스킬.

말파스의 힘이 여기까지 미치는지

실드 범위가 더 넓고 강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호하는 건, 웨어울프까지 포함하는 영역 자체.

- 콰앙!

주먹에 맞은 나와 함께, 공격을 가한 녀석까지 실드에 갇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크르르.?"

"이제 어디 못 가겠군."

- 퍼억!

나는 실드 안에 갇힌 놈의 얼굴을 무릎으로 찍고 칼을 팔에 박았다.

- 파직! 파지직!

팔에 가볍게 뇌전을 홀려서 제압한 뒤, 다른 쪽 팔은 그대로 잡아 꺾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실드에 중량을 실어 배를 짓누르자 녀석이 꼼짝 못 하며 괴로워했다.

포스 실드에 실을 수 있는 중량은 지혜 수치에 비례한다.

스탯을 올린 보람이 있다.

"크르르.!"

갑자기 오른 전투력에 당해 버린 늑대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졌다. 어서 죽여라."

녀석은 목을 겨눈 칼에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대신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으로 멍하니 푸른 달을 올려 보며 느긋이 중얼거렸다.

"시에라. 끝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 하다.

"브로디. 발도프는. 다시 달로

돌아간다."

나는 칼을 목에 겨눈 채 천천히 녀석을 내려다봤다.

곧바로 죽이지 않은 데는, 사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브로디 발도프.

얼마나 흔한 성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성의 늑대 하나가 떠오른다.

"혹시 루멘 발도프를 알고 있나?"

수도 성문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재밌어 보인다며, 다짜고짜 내게 아이작을 내놓으라 했던 소년.

기스-제-라이를 언급한 덕분에,

레드 플레이크라는 정체를 나에게 들켰던 녀석.

당장 공격해 들어오려던 그에게, 기스-제-라이와 별빛청여우를 팔아 자리를 모면했었는데.

놈에 대한 정보를 여기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 라고!"

브로디 발도프가 눈을 부릅떴다.

죽음을 앞에 두고 완전히 체념한 그에게서 갑자기 삶에 대한 집착과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 이름을 네가 아는 거냐."

"응?"

"어디. 냐? 어디서 그런 이름을 본. 거지? 죽이더라도 그건 말해 주고 죽여라!"

"그게.

어차피 죽일 거면, 루멘 발도프는 굉장히 잘 살고 있다고 알려 줘도 좋을지 모른다.

레드 플레이크라는 것까지 말해 줘도 좋을까.

막 입을 떼려 했을 때였다.

〈야, 그만! 〉

〈아무것도 말하지 마! 〉

= .루멘 발도프라면, 2년 전에 수도 성문에서 봤던 녀석 아니냐?

〈어. 아들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

= 아들. 이라고?

〈다른 종족이랑은 좀 다르지만. 웨어울프는 암컷이 극히 드물다.

암컷 개체 하나를 중심으로 일고여덟 마리 정도 늑대가 뭉쳐 단체 생활을 해. 그 무리의 아이. 라고 보면 된다. 손이 귀한 만큼 끔찍이 자손을 아끼지. 그러니까! 〉= 그러니까?

"크윽.

포스 실드의 중량에 짓눌려 있는 웨어울프가 힘겨운 듯 꿈틀거렸다. 아이작이 그를 흘끗 보고 말했다.

〈그 마음은 이용해 먹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