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증명의 서(3) >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중급 악마들이 끊임없이 날아든다.
"오늘 네 놈들을 제물 삼아 이곳에 지옥도를 펼쳐주겠노라!"
"진정한 마계의 저력을 보여주지!"
검을 쥐고 있는 악마, 기다란 손톱을 휘두르는 악마, 거대한 사신의 낫을 들고 있는 악마 등등.
중급 악마의 검은 날개로 하늘이 까맣게 메워질 정도였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몸에서 흘러나온 뇌전의 스파크가 창날에 모이며, 강렬한 빛을 내뿜는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기에 어마어마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그 재수 없는 가면을 박살 내 주지!"
몰려드는 녀석들을 향해 창을 내리쳤다.
'잘 가라.'
아무런 기교도 부리지 않았다.
아니, 부릴 필요가 없었다.
그냥.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내려치기 하나면 충분했다.
"······!"
"······!"
굉음과 동시에 강렬한 빛이 번쩍! 하자, 내게 덤벼들던 중급 악마들의 몸이 잘게 터져 나갔다.
후두두두두둑―
찢기거나 조각난 살점들, 그리고 핏물로 이루어진 소나기가 내 몸을 두들겼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
무시무시한 위력.
'미친.'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다이아 등급 스킬······.'
희열감에, 온몸이 잘게 떨릴 정도.
그 압도적인 위용에 대규모로 밀려 들어오던 악마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으으······!"
"괴, 괴물이다······!"
이제 막 전투가 시작됐는데, 벌써부터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내 시선을 받은 녀석들이 벌벌 떨었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말도 안 돼!"
"미, 미친!"
"중급 악마들을 저렇게 간단히 죽인다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후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 전부 <코드 제로>를 경험한 상태.
당시 중급 악마들을 상대하며 치를 떨던 플레이어가 많았을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
격렬한 전투가 펼쳐져야 할 전장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 틈에 나는 곧바로 스킬창을 열었다.
[<스킬:폭뢰(爆雷) >]
[패시브]
[마력에 벼락의 기운이 깃듭니다.]
[벼락의 힘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관통합니다.]
내용은 무척 간단했다.
마력에 벼락의 기운이 깃든다는 것.
'미쳤네.'
스킬을 사용해 보기 전이라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대단한 스킬을 얻었어.'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휘두르는 모든 공격에 벽력이 발동한다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설마 성장형 스킬일 줄이야.'
사실 뇌정雷精을 얻었을 때만 해도, 플래티넘 등급치고는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했었다.
뇌신 강림이라는 2차 연계 스킬이 가능한 뇌룡의 포효.
다양한 플레이를 가능하게 하는 유틸리티 스킬인 그림자 표식.
내 테크닉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 준 천뢰십보까지.
모두 플래티넘 등급에 걸맞은 효과들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와 반면에 뇌정은.
'스텟을 올려주는 것도, 휘하 옵션도 없었지.'
아주 강한 뇌전의 힘이 깃든다는 것뿐.
딱 한 줄 쓰여있는 걸 보고서 힘이 빠질 정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조건부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스킬이었을 줄이야.
'4중첩된 뇌전이 업그레이드 커트라인을 건드린 모양이군.'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뇌전은 네 개다.
첫 번째는 지금 들고 있는 창, 벽력섬전에 깃든 뇌전.
두 번째는 천뢰십보에 들어있는 뇌전.
그리고 뇌신 강림을 발동시켰을 때 발동되는 '강한' 뇌전.
마지막으로, 뇌정이 가지고 있는 '아주 강한' 뇌전까지.
'왜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가 싶었는데.'
숨겨진 히든 옵션이 존재했던 것이다.
[공헌도 순위]
[1위. '탐리엘' 1,808,700점]
[2위. '졸본' 1,794,100점]
[3위. '미드가르드' 1,786,800점]
[4위. '발리노르' 1,770,900점]
[5위. '웨스테로스' 1,759,400점]
[6위. '알프하임' 1,748,600점]
[12위. '지구' 51,600점]
[현재 생존 플레이어 수 : 822명]
현재 공헌도 순위는 지구가 꼴찌.
다른 성계처럼 점수를 계산하면 공헌도 172만 점을 획득했다.
1위인 탐리엘의 180만 점에 비하면 8만 점이나 부족한 상황.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우승 경쟁이 무의미하게 됐어.'
이미 이번 경기의 승패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차피 2차전 승리는 지구가 가져가게 될 것이다.
'제대로 놀아볼까.'
꽈광!
섬전을 사용하자, 한줄기 벼락과 함께 내 몸이 중급 악마들 사이로 순간 이동했다.
"헉!"
"조, 조심······!"
그리고는 적들 사이를 파고들며 창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공헌도 500점을 획득······.]
떨어져 나온 살점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내 몸을 적셨다.
창은 베거나 찌르는 무기.
그럼에도 적들을 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으아아악!"
"살려 줘어어!"
거의 녹아내리는 수준이었으니까.
'재밌어.'
이게 바로 초월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등급의 스킬.
나는 피의 각성이 발동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시가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ㄷㄷㄷㄷㄷㄷ 뭐임? 지금까지 전혀 눈에 띄지 않던 번호인데, 갑자기 지랄발광이네;;
└아 씨발 장난하냐? 이딴 걸 성계 대항전이라고 내놓은거임? ㅈ같네 진짜;
└도대체 무슨 스킬을 업그레이드해 준 거냐? 1경기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건 진짜 선 넘었잖아ㅡㅡ
└내가 봤을 땐 이거 후폭풍이 심할듯. 게임 메이커가 자기도 지구에 베팅하고 경기 조작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임.
└갑자기 ㅈㄴ 허탈하다.. 진짜 많이 기대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스킬 업그레이드가 다이아몬드 등급까지 가능한 거였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씨발 진짜 개빡치네
└더 이상 안 본다. 걍 때려 쳐라 ㅅㅂ
└"운영자" 상위 리그 관리 위원회 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플레이어 '렌' 에게 <1티어 스킬 → 플래티넘> 업그레이드권 3개를 제공했습니다.
└"운영자" <다이아몬드 등급 스킬 업그레이드>는 사실이 아님을, 주최 측 책임자의 신성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시청해 주신 관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뭐야, 저게 다이아 등급이 아니라고?
└플래 등급 세 개인데 어떻게 저런 화력이 나옴? 말이 안 되는데?
└왜 말이 안 됨? 그냥 지금까지 렌이 실력을 숨겨온 걸 수도 있지 ㅋㅋ
└"운영자" 3경기부턴 밸런스 조정을 약속드리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게임 메이커도 당황한 거 봨ㅋㅋㅋ 저렇게 많이 올리는 거 처음 봄 ㅋㅋㅋㅋ
꽈아아아아아앙!
악마들을 도륙하고 다니길 한참.
"모두 흩어져! 녀석을 맞상대하지 마라!"
"주변의 다른 녀석들부터 정리해!"
어느 순간부터인가, 악마들이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한 번의 공격을 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다 보니, 무의미한 싸움이라는 걸 깨닫고 전략을 변경한 것이다.
'나야 좋지.'
띠링!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89/100)]
피의 각성 스텍이 벌써 89 포인트까지 차오른 상황.
나는 근처에서 불을 뿜는 마기포탑을 향해 내달렸다.
시가지까지 침투한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첨탑 근처에 세워져 있는 포탑이었다.
'생명체만 아니면 된다는 거지?'
마기포탑 바로 앞에 도착한 나는 전력으로 창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강렬한 빛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창을 휘두를 때마다 뇌전 플라즈마가 사방을 휩쓸었다.
'생각보다 단단하네.'
폭뢰 스킬을 활성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기포탑은 멀쩡했다.
아래가 조금 찌그러졌을 뿐.
'뭐, 상관없지.'
한 번으로 안 부서진다? 그럼 부서질 때까지 두들기면 된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어차피 마기포탑은 근접 사격이 불가능하니까.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띠링!
[<5 >가 <마기포탑 >을 파괴했습니다.]
[공헌도 50,000점을 획득했습니다.]
"포, 포탑이 고작 여섯 번 만에······!"
"씨발! 도대체 저런 새끼를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이대로 아타신 거점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바알님은 어디에 계시는 거지?"
"일단 모두 뒤로······끄아아악!"
주위를 둘러보자, 시가지의 악마들이 대부분 정리되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여전히 격전을 치르고 있어야 했지만, 내가 돌아다니면서 중급 악마들을 집중적으로 죽여놨기 때문이었다.
'이젠 경기가 무의미해졌는데?'
[공헌도 순위]
[1위. '탐리엘' 3,617,400점]
[2위. '졸본' 3,588,200점]
[3위. '미드가르드' 3,593,600점]
[4위. '발리노르' 3,564,800점]
[5위. '무림' 3,518,800점]
[6위. '알프하임' 3,509,400점]
[12위. '지구' 567,600점]
[현재 생존 플레이어 수 : 697명]
순위창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는 현재 12위.
마법사가 많아, 1위를 하고 있는 탐리엘과는 300만 점 이상 벌어져 있다.
하지만 이번 경기는 공헌도 / n으로 순위를 정하는 방식.
다른 성계처럼 점수를 계산하면?
1위. '지구' 18,920,000점
2위. '탐리엘' 3,617,400점
3위. '졸본' 3,588,200점
4위. '미드가르드' 3,593,600점
5위. '발리노르' 3,564,800점
6위. '무림' 3,518,800점
점수를 많이 주는 포탑과 중급 악마들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더니, 넘어설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벌어졌다.
'변수는 아예 사라졌어.'
여기서 만약,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저 점수 차를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우승은 확정이군.'
이걸로 지구는 2승째.
남은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열한 성계가 경쟁을 펼친다는 걸 감안했을 때, 2승 이상 차지하는 성계가 나올 확률은 높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남은 세 경기에서 내가 가만히 있을 것도 아니고.
"어어! 길 막지 마!"
"하, 누가 할 소리를!"
시가지의 악마들이 모두 정리되자, 플레이어들이 중앙의 첨탑을 향해 돌진했다.
어차피 이번 경기에서 승리를 챙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MVP 경쟁이라도 이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마성석을 부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면에선 조금 곤란하네.'
1경기, 그리고 2경기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플레이어를 꼽자면, 단연 내가 선정될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선입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스킬 업그레이드 특전을 받은 거 때문에 평가절하당하겠지.'
특히 지금처럼 상식 외의 활약을 벌이면 스킬빨이라는 색안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대기실로 돌아가면 커뮤니티 반응부터 살펴야겠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띠링!
[<99 >가 <마성석 >을 파괴했습니다.]
[2경기 <불꽃의 나라>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공헌도를 계산합니다.]
[공헌도 순위]
[1위. '지구' 189,233점]
[2위. '탐리엘' 36,174점]
[3위. '졸본' 35,882점]
[4위. '미드가르드' 35,936점]
[5위. '발리노르' 35,648점]
[6위. '무림' 35,188점]
[7위. '알프하임' ······.]
저 멀리, 첨탑 위로 바글바글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잠시 숨 돌리고 있는 사이에 마성석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승리 조건 : <각 성계 공헌도 합계 n>으로 공헌도가 가장 높은 성계]
['지구' 승리!]
[2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축하합니다!]
곳곳이 무너져 내려, 흉측한 모습의 건물들.
살점이 찢어져 군데군데 팔다리 같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는 시가지.
코끝을 찌르는 혈향과 어마어마한 열기 속에서.
'돌아가자.'
포근한 빛이 나를 감쌌다.
파바바밧!
[<스킬:뇌신 강림>을 비활성화합니다.]
[<스킬:폭뢰 >가 <스킬:뇌정 >으로 퇴화됩니다.]
'후우. 일단 커뮤······어?'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눈을 치켜떴다.
온통 새하얀 6평짜리 작은 방 안.
대기실 한켠에 놓인 소파.
"오랜만이군요."
그곳에 누군가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순백의 갑옷과, 그 뒤로 펼쳐진 열 쌍의 날개.
위로 땋아 올린 금빛 머리칼.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에, 강인한 눈매.
"안녕하십니까, 미카엘 님."
나는 무덤덤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반면에 속으로는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지?'
다이아몬드급 스킬을 얻었다는 것 때문에 흥분해 있던 마음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녀는 상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
거기다 현재 진행 중인 성계 대항전을 주최한 존재다.
이런 식으로 만남을 가져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설마 특전 때문에 온 건가?'
그게 아니면 이렇게 날 만나러 올 이유가 없었다.
"2경기는 잘 봤습니다. 무척 대단하시더군요. 굳이 특전 같은 건 필요 없을 정도로 말이죠."
내 예상대로 특전을 꺼내든 미카엘.
'침착하자.'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내 물음에 미카엘이 꼬았던 다리를 풀며 피식 웃었다.
"오프 더 레코드. 가능할까요?"
여기서 나눈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길 바란다는 뜻이다.
"예."
나는 미카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겠습니다. 현재 관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더군요."
"그렇습니까."
"네, 너무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셔서 말이죠. 그래서 말인데, 스킬 업그레이드 세 개에서 한 개로 줄이고 싶습니다."
'역시.'
내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
특전을 자르겠다는 것.
"대신."
"······?"
"성계 대항전이 끝나고, 원하는 스킬 한 개를 영구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주겠습니다."
"······!"
'뭐?'
미카엘의 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 169화. 증명의 서(3) > 끝
< 170화. 증명의 서(4) >
"성계 대항전이 끝나고, 원하는 스킬 한 개를 영구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주겠습니다."
소파에 앉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미카엘.
그녀에게서 여유가 느껴졌다.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모습.
'이번에도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거지.'
"업그레이드되는 스킬을 세 개에서 한 개로 줄이는 대신, 성계 대항전이 끝나면 한 개를 영구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준다. 정리하자면 이런 내용이군요."
"맞습니다."
"혹시 플래티넘 등급 스킬도 가능합니까?"
내 물음에 미카엘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건 제 권한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대신에 여러 가지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혜택이라면?"
"관객들께는 특전을 아예 회수했다고 발표할 겁니다. 남은 세 경기 동안 스킬 한 개를 업그레이드 해주겠다는 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죠."
'뭐?'
미카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스킬 한 개 업그레이드하는 건 비밀로 하자고?
도대체 왜?
"그래서 오프 더 레코드였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어 렌이 자진해서 특전을 반납했다고 발표하겠습니다."
"······!"
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너무 나한테 유리해.'
스킬 한 개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는 것.
그리고 관객들에겐 모든 특전을 반납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순수 기량만으로 싸운다고 발표한다는 것.
미카엘로선 굳이 나한테 그런 혜택을 줄 필요가 없다.
'왜지?'
그래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겁니까?"
"호의······?"
"누가 봐도 제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인데요."
내 물음에 의아해하던 미카엘이, 이어지는 말에 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밤하늘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죠? 저는 저 빛나는 별들 때문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런데 별이 빛나지 않고, 우주가 빛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게 그저 하얗게만 보이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그게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성계 대항전을 흥행시키기 위해선, 플레이어가 빛나야 한다는 것.
'그랬군.'
미카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는 알았다.
성계 대항전의 흥행을 위해선 스타 플레이어가 나와야 한다는 거겠지.
'이걸 받아? 말아?'
그때부터 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안에 대한 득실을 따져야 할 차례.
'우승은 확정이라고 봐도 되겠지.'
이미 2승을 따냈다.
거기다 4경기엔 일대일 결투가 예정되어 있다.
주소월, 아시카가와 싸우며 최상위 랭커들의 수준도 대충 파악했고.
'충분히 가능해.'
성계 대항전 특전이 없어도 상위 리그 랭커들을 상대하는 건 충분할 것이다.
특전을 반납하는 건 문제 없음.
거기다 미카엘의 제안 덕분에 한 가지 고민도 해결되었다.
'안 그래도 고결한 수정을 어떻게 얻어야 하나 했는데.'
뇌신을 뇌정으로 업그레이드할 수만 있다면, 다이아몬드 등급의 스킬을 하나 얻는 셈.
이 제안에서 내가 손해 볼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MVP 경쟁도 훨씬 수월해지겠지.'
상황도 너무 좋았다.
내가 직접 특전을 반납했다고 하면, 신들의 반응도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다.
손해를 보는 대신 더 재미있는 게임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런 상태에서 내가 또 학살하고 다니면, MVP는 무조건 내 몫이 될 것이고.
"이런 제안을 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겠군요. 알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카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안을 받아줘서 고맙군요. 쉴 시간을 오래 뺏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미카엘.
그녀가 허공에 대고 검지를 몇 번 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오른팔을 젓자, 방 한 켠에 게이트 한 개가 만들어졌다.
쑤아아아아앙―!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크기.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던 미카엘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아, 혹시 2경기에서 보였던 압도적인 위용의 스킬을 업그레이드하진 않겠죠?"
"물론입니다. 관객들은 제가 특전을 반납한 줄 알 테니까요."
내 대답에 살포시 미소 짓는 미카엘.
"그럼, 건투를 빌죠."
그리고는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순간, 대기실에 정적이 흘렀다.
띠링!
[<성계 대항전 특전>이 변경되었습니다.]
[<성계 대항전 특전>]
[성계 대항전 진행 중에 한해서, 플레이어 '렌'이 보유 중인 스킬 중 한 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킵니다.]
[특전을 적용할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1. 마력 상쇄]
[2. 명경지수]
[3. 뇌신雷身]
눈앞에 나타난 창.
'후우.'
나는 망설임 없이 2번을 클릭했다.
마력 상쇄와 뇌신은 충분히 실험한 상황.
게다가 뇌신의 경우엔, 적용해선 안 된다고 미카엘이 따로 말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2번 밖에 없었다.
'가면의 부작용을 해결해 줄 수 있느냐 없느냐를 체크해야 해.'
블라디미르 가면이 없어도 나는 충분히 강해진 상태.
성계 대항전을 우승으로 이끌고, MVP까지 따내면 고위 리그로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고위 리그에서 내가, 가면 없이도 버틸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거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가면은 현재, 누가 뭐라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무기였다.
뇌정을 폭뢰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선 뇌신 강림을 발동시켜야 했으니까.
가면의 체력 흡수 옵션이 없는 한,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킬:명경지수 >가 <스킬:열반 >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스킬 선택을 마친 나는, 소파에 앉아 커뮤니티를 열었다.
대기실 안에서 해야 할 일은 끝.
남은 시간 동안 신들의 반응을 체크할 생각이었다.
―플레이어 렌, 관객들을 위해 성계 대항전 특전을 반납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어어? 이제 먹을 거 나온다고?
―1경기와 2경기를 승리로 가져간 렌. "아직 우승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지금부턴 내 실력으로 도전하겠다."
커뮤니티로 들어가니, 이미 오피셜이 등장해 있었다.
방금 전, 미카엘이 허공을 보며 뭔가를 누르는 것 같더라니, 내 확답을 듣자마자 올린 모양이었다.
'내가 받아들일 걸 이미 알고 있었군.'
미리 준비해놓지 않고서야, 바로 올릴 수 없었을 테니까.
미카엘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느낌이었다.
뭐, 성계 대항전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이거지! 믿고 있었다구, 렌! 너밖에 없다!
└와 ㅆㅂ;; 방금 전까지 렌 욕하던 애들 당장 ㅈ잡고 대가리 박아라 ㅡㅡ 어딜 감히 렌님을 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미쳤다 와 ㅋㅋㅋㅋ 웃음밖에 안 나옴 ㅋㅋㅋㅋ 얜 진짜 대인배다 ㄹㅇ 저런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ㄷㄷ 넌 인정한다 진짜ㅋ
└어휴;; 이미 두 경기 가져가놓고 저런 소릴 하면 뭐함? 그럴 거면 처음부터 받질 말았어야지ㅋ 이제 와서 착한 척 오지네 ㅋㅋ
└윗댓 / 환자분! 약 드실 시간이 지났잖아요!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시고 어서 약부터 드세요!
└개소리를 ㅈㄴ 신박하게 늘어놨네 ㅋㅋ 이미 받기로 한걸 렌이 뭐 하러 반납함? 성계 대항전을 렌이 개최했나? 오히려 지금이라도 내려놓는다는 게 대단한 거지 ㅋㅋㅋㅋㅋ
└ㅇㅈㅇㅈ 두 경기를 지구가 가져가긴 했지만 아직 세 경기가 남았음 ㅎ 근데도 반납했다? 자신 있다는 거지~ 나 이런 거 없어도 우승할 자신 있다! 이런 패기 넘치는 모습 보면 감탄밖에 안 나옴 ㅋㅋㅋㅋ
└지금이 기회야! 무림 가즈아아아아악!!!
└솔직히 렌한테 특전 없으면 할만하지 ㅎ 쿠 훌린 있으니까 일단 4경기에서 미드가르드가 1승 챙길 수 있음. 3경기랑 5경기 중에 하나 가져가고, 나머지 경기에서 지구가 승리 없으면 연장전까지 갈 수 있음 ㅋㅋㅋ 결과는 아모른직다!
'반응도 나쁘지 않네.'
커뮤니티 창을 체크한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의 반응이 호의적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1경기와 2경기의 승리를, 특전 덕분에 챙겼다고 페널티를 받진 않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나머지 경기에서 랭커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그러면 MVP는 내 차지가 될 것이다.
띠링!
[잠시 후 3경기, <악마 사냥>이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한동안 소파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경기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겠군.'
그리고는 가볍게 관절을 돌려 몸을 풀며, 방 한 켠에 생성된 문으로 향했다.
띠링!
[<가상 마계>에 입장하셨습니다.]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목걸이:몽환의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5% 상승합니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숨막히는 마기에, 머리가 찌르르 울렸다.
현재 위치는 숲속.
특이한 게 있다면, 달빛에 비친 나무, 흙, 길가에 피어난 풀잎이 모두 까맸다.
띠링!
[달빛의 힘으로 인해 <몽환의 달빛>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1분당 체력과 마력이 1%씩 회복됩니다.]
[<스킬:열반 >이 활성화됩니다.]
[정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90%]
[<스킬:열반 >이 정신 이상 기운을 상쇄합니다.]
숨 쉬는 게 한결 편해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옅은 보름달이 까만 숲속을 옅게 비추었다.
숲속에서 느껴지는 생명체는 없음.
주변에는 1,102명의 플레이어가 모여 있다.
내 머리 위에 달린 넘버는······.
'1번?'
1이라는 숫자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생각하면, 어지간하면 잊을 수 없는 번호.
MVP 경쟁에서 날 밀어주려는 미카엘의 속뜻이 보였다.
띠링!
[지금부터 3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3경기 : 악마 사냥(개인 PvP)]
[게임명 : 대척자]
[맵 : 가상 마계(중)]
[관객 수 : 9,186,663명]
[승리 조건 : 가장 많은 킬 수를 올린 플레이어]
[스타팅 포인트를 향해 악마들이 끊임없이 몰려올 예정입니다.]
[가장 많은 킬 수를 올린 플레이어의 성계가 승리를 가져가게 됩니다.]
[중급 악마는 3킬로 계산합니다.]
[현재 생존자 수 : 1,103명]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나쁘지 않은데?'
미션창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경기는 사냥.
피의 각성 스텍을 발동시키기에 아주 좋은 미션이었다.
거기다 보름달까지 떠 있어서 열반 스킬이 발동된 상황.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제발 부작용이 없었으면 좋겠군.'
나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가면의 부재가 크게 느껴질 테니까.
만약 블라디미르 가면의 부작용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고위 리그에서 버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창을 고쳐잡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우, 스읍, 후우. 스읍, 후우."
플레이어들이 숨을 짧게 끊어 쉬며,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경기 시작!]
"천계의 개들을 죽여라!"
"우와아아아아아!"
경기 시작 콜과 동시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숲속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악마들이 튀어나왔다.
"······.?"
"뭐, 뭐야!"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플레이어들이 당황했다.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야.'
분명 초감각에 걸려드는 것도 없었고, 마력장으로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시작 콜과 동시에, 악마들이 뿅! 하고 나타났다.
한마디로.
'소환된 거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경기 종료 시각이 적혀있지 않은 걸 보니,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이 전멸할 때까지 악마들이 소환되는 시스템인 모양이었다.
챙! 채챙! 콰과과과광! 푹! 푹! 푹! 챙!
그리고 시작된 전투.
고요하던 숲속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펼쳐졌다.
검을 찔러넣는 플레이어, 날갯짓하며 허공에서 포효하는 악마, 영창을 시작하는 마법사들까지.
'제법이네.'
그들 중에서 제법 눈에 띄는 존재들이 있었다.
좁은 공간.
마력장의 영역이 이곳을 모두 커버할 수 있을 정도라, 그들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눈에 띄는 넘버는 17번, 99번, 196번, 444번 등등.
대략 열 명 정도의 플레이어들이 악마들을 휩쓸었다.
'녀석들이 랭커겠지.'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정면으로 달려 나갔다.
이제 슬슬.
[<스킬:뇌룡의 포효>가 활성화됩니다.]
[<스킬:천뢰십보 >가 활성화됩니다.]
사냥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시작해 볼까.'
콰지지지지지지직!
창을 고쳐잡은 나는 곧바로 악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하급 악마와 중급 악마의 비율은 대략 9대 1 정도.
공성전과 달리, 이 정도 비율 만으로도 플레이어들은 쩔쩔매고 있었다.
확실히 약자들만 상대하느냐, 아니면 중간중간 자기보다 강자들을 상대하느냐에 따라서 전투의 수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피의 각성>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13/100)]
좁은 공간에서 수천 명이 전투를 펼치고 있다 보니,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지고 살점이 날아다녔다.
서걱! 서걱! 서걱!
나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벗어나, 최전방에서 악마들을 휩쓸었다.
"앗! 삐―!"
"1번이 삐―다!"
"삐―!"
주변에서 삐삐-거리는 플레이어들.
'뭐야?'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꾸욱 참았다.
창을 쓰고 있는 데다가, 뇌전의 임팩트까지 있으니 나라는 걸 금방 알아본 모양.
주변 플레이어들의 외침에 무수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리고.
"흥! 특전만 없으면 별것도 아닌 녀석이!"
"이번 경기의 승리는 우리 삐― 것이다!"
챙! 서걱! 서걱! 챙! 챙! 서걱!
'호오.'
내가 처음에 눈여겨봤던 열 명의 플레이어들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나한테서 경쟁 심리를 느끼곤, 분발하려는 것 같았다.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30/100)]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인데.'
최상위 랭커들이 내게서 승부욕을 불태운다.
반면에 난 여유롭기 그지없다.
마치 상위 리그의 최강자가 된 기분.
"푸하하하! 특전이 없으니 별거 아니군!"
"자진해서 특전을 반납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랭커들이 사냥 속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푹! 푹! 푹! 푹! 푹!
그리고 뒤쪽에선 내가 잡던 악마들에게 화살이 날아들었다.
3경기마저 지구가 승리하면, 우승 성계가 정해지는 상황.
팀킬은 불가능하니, 킬딸이라도 해서 나를 견제하려는 것이다.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67/100)]
'재밌겠는데.'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번 경기에서 난 피의 각성을 발동시킬 생각이었으니까.
피의 흡수? 피의 강화? 피의 회복?
뭐가 강화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서걱! 서걱! 서걱!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테니까.
그리고.
띠링!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100/100)]
[<피의 각성>이 발동합니다.]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 170화. 증명의 서(4) > 끝
< 171화. 증명의 서(5) >
"1구역이 비었다. 어서 악마를 소환해!"
"맵 로딩이 안 되는데? 4경기 맵 담당자가 누구야!"
"미르엘 님! 여기, 요청하신 서류입니다!"
성계 대항전 진행으로 분주한 미카엘의 집무실.
'휴우, 도대체 왜 맨날 이런 순간에만 찾아오는 거지?'
파사엘은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한 손님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덟 쌍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기분 나쁠 때 보이는 버릇.
"고생이 많다, 미카엘. 밸런스 문제로 방금 전까지 시끄러웠는데, 금세 잠재웠더군. 한낱 플레이어가 그런 결정을 했을 리 없을 터. 아마 그대의 숨은 노고 덕분이겠지?"
"아닙니다, 오딘 님."
불청객, 오딘의 말에 미카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상위 리그의 재도약은 시간 문제더군.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수고 많았다."
상석에 앉아, 여유롭게 등을 기대는 오딘.
파사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욱! 하고 올라왔다.
순간 불경한 생각이 들 정도.
'참자, 참자.'
이런 초대형 이벤트가 진행될 때는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중요한 순간에, 총책임자를 붙잡아 놓고 저런 여유로운 모습이라니.
'후우.'
참자.
"아, 이번 성계 대항전을 개최하기 위해 팀 투지의 팜에 직접 방문했다고 들었는데."
"예,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이 직접 나와 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때 렌도 직접 만났겠지?"
오딘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미카엘.
그 모습에 파사엘은 의아했다.
정말 궁금한 일이 생겼을 때, 미카엘은 몸짓을 보이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로 뒤에 나올 이야기를 기다릴 뿐.
그런데도 저런 행동을 보인다는 건.
'렌이 언급되는 걸 불편해하시는 건가?'
항상 곁에서 미카엘을 보좌하는 파사엘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미카엘은, 렌에 관련된 얘기가 나오지 않길 바란다는 걸.
"예, 직접 만났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미카엘이 곧바로 용건을 물었다.
집무실에 있는 모든 천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
바쁘니 용건을 얘기하고 얼른 가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딘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여유롭게 홀짝였다.
"렌을 직접 봤을 때 감상을 물어도 되겠나?"
"음······. 크게 기억나는 건 없었습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나쁘지 않다?
파사엘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1급 치천사, 미카엘.
그리고 2급 지천사 파사엘.
천계 전체로 보자면 대단한 존재는 아니지만, 일개 플레이어에겐 까마득할 정도로 높은, 지고지순한 존재들.
'그런데도 렌은 전혀 위축된 것 같지 않았어.'
처음 만났을 땐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성계 대항전이 언급되자마자 공손한 모습으로 돌변하고.
이후 조건을 듣더니, 또다시 분위기가 달라졌다.
거기다 추가 조건을 언급할 때의 배짱이란.
'인생 2회차라도 되는 줄 알았지.'
그 모습이 파사엘에겐 무척 인상 깊었다.
그리고 미카엘 또한 비슷한 감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얘기한다는 건.
'오딘 님을 경계 중이신 건가, 미카엘 님이? 도대체 왜?'
파사엘은 바쁜 상황이 끝나면 그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았다라······."
길게 흘러내린 수염을 쓸어내리며 읊조리는 오딘.
모두가 입을 닫자, 미카엘과 파사엘, 오딘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어어! 3구역 악마의 숫자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여유 악마는 몇 마리 남았지?"
"이제 만 마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 더 찍어 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악마가 끊겨선 안 돼!"
그 탓에 주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천사들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한동안 말문을 아끼던 오딘이 다시 입을 연 건 1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가면."
"······."
"그 가면에선 무언가 느껴지는 게 없던가."
"없었습니다."
오딘의 물음에 즉답하는 미카엘.
그러자 오딘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음, 심판자의 눈을 가지고 있는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아, 참. 이번 성계 대항전이 끝나고, MVP는 그냥 발표만으로 끝난다지? 그러지 말고, MVP에 한해선 주신들이 직접 수여하는 게 어떻겠는가?"
"주신님들이 직접?"
미카엘의 물음에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도약을 위한 초대형 이벤트. 이럴 때 주신들이 직접 MVP를 수여한다면, 분위기를 크게 바꿀 수 있을 테지. 보기 좋은 게 먹기도 좋다고 하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
오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는 미카엘.
그 모습에 오딘과 파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는 네 존재밖에 없는 1급 치천사.
그 사대천사의 수장, 미카엘.
그래서 주신급 예우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게 실제로 주신들과 동급이란 소리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미카엘이 보이는 반응은 파사엘의 입장에선 무척 의외였다.
'오늘따라 왜 그러시지?'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례하신 분은 아닌데.
하나 남은 오딘의 눈매가 싸늘하게 변했다.
"이유는?"
오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거운 존재감이 집무실 안을 찍어 눌렀다.
그럼에도 미카엘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지시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
"······!"
미카엘의 말에 오딘과 파사엘이 흠칫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초월자.
모든 이 위에 홀로 계시는 분.
그분의 지시라면 그 어느 누구도 토를 달아선 안 된다.
"······그렇군. 바쁜데 시간을 오래 뺏어서 미안하구나. 그럼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지금까지 여유로움 속에 속내를 숨기고 있던 오딘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외의 대답에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원래는 배웅해 드려야 마땅하나, 상황이 허락해 주지 않음을 용서하시길."
미카엘이 주변을 눈짓하며 말하자, 오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길 바라겠노라."
그리고는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휴우."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파사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킬 수 순위]
[1위. <17 > ― 154킬]
[2위. <196 > ― 153킬]
[3위. <444 > ― 153킬]
[4위. <1,101 > ― 151킬]
[5위. <99 > ― 149킬]
.
.
[109위. <1 > ― 100킬]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무기가 부딪힐 때마다 잘게 깨진 마력의 빛무리가 흩날리며 사방을 비췄다.
쇳소리, 서로에게 내뿜는 살기, 비명, 찢겨나간 살점들, 마법이 터지며 울리는 굉음.
그 모든 게 버무려지며 거대한 광기를 만들어냈다.
살육이 만들어낸 지옥도.
'이번엔 뭐가 각성될까.'
그 속에서 나는 다음에 나올 상태창을 기다렸다.
띠링!
[<피의 각성>이 <섬전 >을 강화시켰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섬전 > 능력의 쿨타임이 90% 감소합니다.]
이번에 각성된 능력은 섬······전······?
'뭐야?'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가면에 딸린 능력만 업그레이드 되는 게 아니었어?'
나는 서둘러 <피의 각성> 설명창을 열었다.
[<피의 각성> ― 보유하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를 무작위로 강화시킨다. 강화 수치는 랜덤이다.(발동 조건이 존재합니다.)]
[<피의 각성> 발동 조건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1포인트씩 상승한다.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포인트 상승이 초기화된다. 100포인트를 채울 경우 <피의 각성>이 발동되며, 유지 시간은 24시간이다. {재사용 대기 시간 : 24시간(발동이 종료된 이후부터 재사용 대기 시간이 계산된다.)}]
[<피의 각성>은 발동시킬수록 각성의 효과가 점점 커집니다.]
설명을 본 나는 눈을 치켜떴다.
보유하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를 무작위로 강화시킨다.
그 어디에도 가면의 능력 중에서라고 쓰여 있는 곳이 없었다.
'미친.'
순간 소름이 돋았다.
가면의 능력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면, 활용 범위가 무궁무진해질 테니까.
가장 대표적으로.
'벽력이 강화될 수도 있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중,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는 능력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벽력이다.
벽력의 발동 확률은 0.5%.
뇌신강림까지 활성화하면 1%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뇌신강림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벽력이 강화된다면?
'폭뢰보다 더 사기겠는데?'
벽력이 발동되면 근력 혹은 민첩 스텟이 50% 상승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이아몬드 등급 스킬인 폭뢰보다 더 사기라고 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긴박하게 흘러가는 전장 속에서,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피의 각성에 대한 고찰은 이걸로 끝.
이제 남은 건, 부작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체크할 시간이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여전히 들리는 가면의 목소리.
'소리가 많이 작아졌어.'
다만 이전과 달리,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손발을 움직여봐도 크게 걸리는 게 없고, 정신도 멀쩡하다.
그 외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딱 한 가지.
"크하하하하하! 제법 잘 버티는구나!"
"흥! 구현된 존재 주제에, 재수 없게 말하는 건 여전하네!"
주변에서 싸우는 플레이어와 악마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어서 저 목에 창날을 박아넣고 싶다.
피가 흩뿌려지고, 비명을 내지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
살인 충동에, 손발이 움찔움찔거렸다.
'후우. 제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충동을 억제했다.
이 정도라면 열반이 활성화되어 있을 땐 피의 각성을 발동시켜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명경지수 상황에선 쉽지 않겠지만.'
이걸로 피의 각성 테스트는 끝.
'사냥 시간이군.'
나는 바닥을 박차며, 악마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띠링!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앙!
벼락이 터지며 악마들 한가운데로 순간 이동한 나는, 크게 창을 휘둘렀다.
"······!"
"······!"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눈을 치켜뜨는 악마들.
호흡이 짧게 끊어지고, 동공이 확장된다.
손톱, 검, 사신의 낫 등 다양한 무기가 급하게 궤도를 바꾼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내 창보다 빠를 수 없었다.
띠링!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
단숨에 세 마리의 악마를 처치한 나는 근처의 다른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모두 조심해라! 특이한 능력을 사용······ 끄으윽!"
그러고는 6초가 지나자마자 또다시 섬전을 사용해 순간 이동했다.
서걱! 서걱! 서걱!
순간 이동, 학살, 순간 이동, 학살······.
그렇게 한동안 사냥하다 보니, 킬 수가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킬 수 순위]
[1위. <17 > ― 596킬]
[2위. <196 > ― 584킬]
[3위. <444 > ― 583킬]
[4위. <1,101 > ― 581킬]
[5위. <99 > ― 564킬]
[6위. <1 > ― 563킬]
109위였던 순위가 어느새 6위까지 상승해 있었다.
'미쳤는데?'
피의 각성으로 인해 현재 섬전의 쿨타임은 6초.
1분에 10번을 사용할 수 있고, 한 번 사용하는데 1포인트의 마력이 필요하다.
현재 내 마력 스텟이 279.
몽환의 달빛이 1분에 1%씩 회복시켜준다.
1분 회복량은 2에서 3포인트.
그렇게 단순 계산하면.
'37분 동안은 마음 놓고 쓸 수 있겠군.'
마력이 다 떨어질 때 쯤엔, 다른 플레이어들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킬 수가 쌓일 것이다.
꽈앙! 서걱! 서걱! 서걱!
"이런 미친!"
"저걸 도대체 어떻게 상대를······!"
순간 이동으로 나타날 때마다 악마들이 경악했다.
내 움직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
'진짜 사기네.'
만약 내가 악마들 입장이어도 미치고 팔짝 뛰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창날이 뻗어온다.
어떻게든 막아내고 공격을 휘두르려고 하면 이미 사라져 있다.
만약 그런 상황에 직면했다면, 나는 앞뒤 재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도저히 죽일 방법이 없었으니까.
"씨발! 특전 회수한 거 맞아?"
"저런 식으로 블링크를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젠장, 젠장! 이미 상위 리그에서 놀 수준이 아니었어······!"
내가 싸우는 걸 본 플레이어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악마들을 휩쓸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이번 경기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내 차지였다.
* * *
└미친..
└벼락이 지그재그로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네..ㅎ
└아니 ㅡㅡ 특전 회수한 거 맞음?
└맞을 듯.. 저 스킬 렌이 원래 가지고 있던 거임..
└와 씨발 그냥 혼자서 가지고 노는구나 ㅋㅋㅋㅋ 이젠 웃음밖에 안 나오네 ㅋㅋㅋㅋㅋㅋ
└이야ㅋㅋㅋ 상위 리그에서 이런 플레이를 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ㅋㅋㅋㅋ 쟨 그냥 고위 리그로 올려보내는 게 맞을 듯 ㅋㅋㅋㅋㅋㅋ
└성계 대항전이라고 쓰고, 렌의 놀이터라고 읽는다.
└하위 리그 본 신들은 다들 지구에 베팅했을 텐데 ㅋㅋㅋㅋㅋㅋ 렌은 하위 리그에서 열린 성계 대항전도 혼자서 싹 쓸고 다녔음 ㅎ
└지금까지 렌 까던 애들 다 대가리 박아라ㅡㅡ
< 171화. 증명의 서(5) > 끝
< 172화. 증명의 서(6) >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한줄기 벼락이 쉴 새 없이 이동했다.
꽝! 콰지지지직! 꽝! 콰지지직!
빛이 번쩍일 때마다 전기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긴다.
간간이 터지는 굉음에, 고막이 얼얼할 정도였다.
"헉, 미친!"
"끄아아아악!"
벼락이 지나간 자리엔 악마들의 시체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안우정은 경악했다.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 거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말도 안 돼!"
"특전을 반납했는데도 저 정도라고?"
새까만 막에 가려져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는다.
알 수 있는 건, 머리 위에 쓰여진 <1 >이라는 숫자와 창을 쓴다는 것뿐.
말 그대로 완전한 익명이 보장된 경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1번이 누구인지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안우정과 같은 지구 출신.
하위 리그에서 최강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젠장, 젠장!"
"악시덴 님! 어, 어떻게 해야······."
성계 대항전을 혼자 힘으로 우승시켰고.
"저런 스킬을 무한정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두 상관 말고 계속 공격하라!"
"이대로 계속 공격하는 건 피해만 늘어날 뿐입니다!"
지구 출신 중에서 최초로 상위 리그에 오른 인물.
"구현된 새끼들이 지랄을 하네!"
"씨발 새끼들. 죽어!"
그뿐만이 아니라, 상위 리그에 올라와서 참가했던 모든 경기에서 극찬받았고.
꽝! 콰지지지직! 꽝! 콰지지지지직!
고작 2년 만에 랭커 한 자리를 차지한 플레이어.
'렌······!'
하지만 안우정은 지금의 평가도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랭커의 반열에 묶어두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미 상위 리그에서 보일 수 있는 실력의 범주를 넘어섰어.'
고위 리그.
플레이어 렌은 어느새, 안우정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도대체 뭐가 달랐던 거지?'
그래서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팀의 주인, 루디악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덕분에,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매 경기에서 각종 보너스를 차지했으며, 플레잉 코치 시스템을 통해 포인트를 몰아받아서 스텟도 꽤 높다.
'왜 너는 그 자리에 있고······.'
아이템 또한 마찬가지.
자신은 태양신의 진노라는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아이템만 비교했을 땐, 안우정이 렌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왜 난 오를 수 없는 건데?'
안우정이 자신의 애검, 레바테인을 꾸욱 쥐었다.
노력?
노력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젠장······.'
무척 참담했다.
더 이상 뒤쫓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나도······ 나도 노력했다고······!'
안우정의 몸에서 푸른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화륵! 화르르륵! 쏴아아아아아아―
"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어어어!"
청염에 닿은 악마들의 몸이 녹아내렸다.
'태양만 떠 있었더라면.'
옅은 달빛이 지상에 내려앉았다.
하필 밤이라서 <태양신의 진노>에 딸린 옵션 대부분이 잠겨 있는 상황.
만약 옵션이 모두 활성화되어 있었으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꽝! 콰지지지직! 꽝! 콰지지지직!
"씨발! 고작 한 놈 때문에 열한 성계가 아무것도 못 하다니!"
그래봤자 렌과 같은 위용을 보이지 못했겠지만.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제발 좀 닥치라고!'
안우정은 태양신의 진노가 속삭이는 말에 신경질을 냈다.
현재 그는 무척 짜증 나 있었다.
코드 제로 경기에선 악마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실제로 상위 플레이어들을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상황.
렌뿐만 아니라, 다른 랭커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무척 불쾌했다.
'난 약하지 않아.'
83번이 부채를 휘두르자, 섬뜩한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951번의 검이 춤을 출 때마다, 악마 서너 명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637번이 창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악마들을 도륙했다.
그 모든 것들이.
'난······.'
질투가 났다.
'약하지 않아.'
화르르르르르르르륵!
안우정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청염이 뿜어져 나왔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 * *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꽝! 콰지지지지직!
'후우.'
한동안 악마들을 도륙하는 것에 집중하던 나는, 한숨 돌릴 겸 주변을 둘러보았다.
"낄낄! 광대 새끼들이 발악을 하는 구나!"
여전히 악마들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상황.
'제법 많이 죽었네.'
어느새 살아남은 플레이어의 숫자가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잠깐 쉬어야겠어.'
섬전 스킬을 사용해 플레이어들 사이로 스며든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력 회복 물약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남은 마력은 71%.
이 물약을 마시면 적어도 5% 정도는 회복이 될 것이다.
'확실히 몽환의 달빛이랑 거래하길 잘했어.'
생각 외로 쓸모가 많은 아이템이었다.
체력과 마력이 1분에 1%씩 회복되는 데다가, 스킬 추가 슬롯도 존재하고, 보름달에 한해서 스텟을 15%나 올려준다.
물론 달이 떠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긴 하지만.
[킬 수 순위]
[1위. <1 > ― 977킬]
[2위. <17 > ― 701킬]
[3위. <196 > ― 684킬]
[4위. <444 > ― 671킬]
[5위. <1,101 > ― 659킬]
[6위. <99 > ― 638킬]
'이걸로 지구 우승은 확정이네.'
킬 수를 체크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처럼만 계속 흘러가면, 3경기도 결국 지구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
2위와의 차이가 300킬 가까이 벌어졌다.
덕분에 1위를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콜로세움에선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져, 갑자기 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나가리지.'
이번 경기는 시간제한이 없는 미션.
죽기 직전까지 사냥만 하다가 끝나니까, 이론적으로는 1만킬 이상 차이가 벌어졌어도 뒤집힐 가능성이 존재한다.
실제로 그게 가능한지의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결국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다시 시작해 볼까.'
정신 없이 창을 휘두르느라 뻐근해진 어깨를 돌린 나는, 격전이 펼쳐지는 곳으로 향했다.
띠링!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앙!
그리고는 악마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한 뒤, 뇌전을 뿌리며 악마들을 도륙했다.
멈춰 있던 킬 수가 빠르게 상승했다.
현재 남은 체력은 93%.
뇌신 강림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체력 소모가 10배나 되는데도, 거의 풀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체력 소모보다 사냥 속도가 월등히 빠르다는 뜻.
띠링!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쯧, 애매한데.'
그래서 고민이 됐다.
미카엘에게 성계 대항전이 끝나자마자 스킬 한 개 업그레이드를 받기로 한 상황.
원래는 주저 없이 뇌신을 플래티넘 등급으로 올리려고 했다.
다이아몬드 등급의 스킬을 가질 기회였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생각보다 피의 각성이 너무 좋아.'
피의 흡수, 피의 강화, 피의 회복, 섬전, 벽력 등등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중 뭐가 됐든, 각성하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효율을 보일 것이다.
게다가 블라디미르 가면이 없으면 폭뢰를 쓰기가 쉽지 않기도 하고.
'한번 고민해 봐야겠는데?'
폭뢰는 뇌정, 뇌신 강림, 천뢰십보를 활성화시키고, 아세리안이 선물해 준 벽력섬전이란 창까지 들고 있어야 발동한다.
뇌정으로 업그레이드시켜도, 뇌신 강림으로 인해 소모될 체력을 감당해내지 못하면 폭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가면 없이 뇌신 강림의 체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명경지수를 강화하는 건 너무 아까운데.'
추가 스킬 슬롯은 밤에만 활성화된다.
결국 낮에는 피의 각성을 사용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가면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경기가 끝나고 실제 효율을 계산해봐야겠군.'
아무래도 이번 경기가 끝나고 대기실에서 생각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띠링!
[<피의 각성>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1,000/1,000)]
[2차 <피의 각성>이 발동합니다.]
'이게 뭐지?'
눈앞에 뜬 알림창에 순간 당황했다.
2차 피의 각성? 이런 게 있었나?
'아!'
순간 뇌리를 무언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코드 제로 경기에서 이성을 잃었을 때, 마치 수증기가 잔뜩 낀 유리창 너머로 본 것만 같은 희미한 기억이 있었다.
'1천 킬을 추가로 달성하면 2차 각성이 열리는 거였군.'
어쩐지 경기가 끝나고 스텟이 너무 많이 올라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2차 각성이 열리면서 효율이 더 상승했던 모양이었다.
띠링!
[2차 <피의 각성>이 <섬전 >을 강화시켰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섬전 > 능력의 효과가 1,000% 증가합니다.]
[<섬전 > 능력의 쿨 타임이 0.6초로 줄어듭니다.]
'뭐?'
눈을 번쩍 떴다.
0.6초?
이건 그냥······.
'계속 순간 이동하면서 싸우게 해준다는 거잖아?'
만약 상대방이 0.6초마다 순간 이동을 하면······.
'개사긴데?'
그런 생각을 하며, 무한 순간 이동을 사용해 보려고 할 때였다.
'윽!'
싸아아아아아아아아아―
"······?"
"······!"
내 몸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살기에 의아해하는 플레이어들.
그리고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 악마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순간 내 시야가 줌 인이 된 것처럼 한곳에 쏠렸다.
두근― 두근―
목동맥의 작은 울림, 격전을 펼치느라 흘리고 있는 피, 무기 사이사이에 껴 있는 살점 조각까지.
'아름다워.'
죽이고 싶다.
녀석들이 뿌리는 달콤한 피에 취하고 싶다.
'씨발.'
그런 생각들 때문에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잔뜩 분비된 도파민에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띠링!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
'침착하자.'
"스읍, 후우. 스읍, 후우."
나는 서둘러 심호흡했다.
산소가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약간 혼미하긴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마음을 다잡자, 정신 스텟 하락이 뚝- 하고 멈췄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90%]
'부작용이 이 정도 수준이었을 줄이야.'
나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현재 내 정신 스텟은 253포인트.
역천자와 최강의 성계 30%, 피의 강화 30%, 달의 메아리와 몽환의 달빛이 20%, 열반 스킬이 30%, 대천사의 눈물이 40%를 올려준다.
정신 스텟만 놓고 봤을 때는 어지간한 고위 플레이어들 못지않았다.
'부작용이 10분의 1로 줄어들었는데.'
게다가 지금은 열반 스킬까지 활성화 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열반 없이는 사용할 수가 없어.'
지금도 겨우 평정심을 유지 중인 상황.
명경지수였다면 그냥 이성을 잃고 날뛰었을 것이다.
정신력이 지금보다 더 높아진다고 해도 제어가 될 것 같진 않고.
'후우.'
가볍게 목을 돌렸다.
그리고는 어깨, 가슴, 등, 허벅지, 엉덩이 순으로 살짝살짝 몸을 풀었다.
몸 상태는 이상 없음.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제어 가능.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섬전.'
꽈앙!
2차 피의 각성 효과를 체크해 볼 때였다.
"······!"
서걱! 서걱! 서걱!
꽈앙!
서걱! 서걱! 서걱!
'미친.'
정신이 혼미했다.
'너무 빨라.'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장면이 휙휙 변한다.
내 의지대로 순간 이동을 하고 있음에도, 움직임을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무, 무슨!"
"말도 안 돼!"
장면이 바뀔 때마다 경악하는 악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사자인 나도 당황할 정도의 순간 이동.
그런 내 공격을 악마들이 대응할 수 있는 확률은.
"으으······."
서걱! 서걱! 서걱!
전혀 없었다.
그때부터 대학살이 펼쳐졌다.
[<섬전 >을 사용합니다.]
[<섬전 >을 사용합니다.]
[<섬전 >을 사용합니다.]
[<섬전 >을 사용······.]
'익숙해지니까 나쁘지 않은데?'
킬 수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씨발! 저게 말이 돼?"
"하······."
"저런 녀석이 왜 아직도 상위 리그에 있는 거지?"
내 움직임을 눈에 담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던 플레이어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띠링!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앙! 콰지지지지직!
전장이 빛으로 물들었다.
< 172화. 증명의 서(6) > 끝
< 173화. 증명의 서(7) >
└이야 ㅋㅋㅋㅋ 생각보다 상위 리그 수준이 높네 ㅋㅋㅋ 이 정도면 볼 만 한데?
└ㅇㅈㅇㅈ 고위나 초월만 보지 말고, 앞으로 간간이 상위 리그도 챙겨봐야겠음ㅎ
└1번 대박 ㄷㄷ 쟤가 걔지? 코드 제로 경기할 때 니플헤임 입구에서 휘젓던 애?
└ㅇㅇ 맞음. 플레이어 렌.
└ㅋㅋㅋㅋㅋ 성계 대항전 시작할 때만 해도 쿠 훌린이니 몽연이니 했는데 반전이네 ㅋㅋㅋㅋ 렌이 저렇게 강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ㅋㅋㅋㅋ
└더 대박인 건 지구 출신이라는 거임;; 가끔 환경에 상관없이 괴물이 등장하긴 하는데, 그런 괴물들을 가볍게 찍어 누르는, 더 어마어마한 괴물ㄷㄷ
└아 씨발 기분 더럽다. 배팅한 포인트 다 날렸네 ㅅㅂ.. 나도 지구에 좀 걸어볼걸..
└난 그냥 포기했다 ㅎ 포기하면 편하게 볼 수 있음ㅋㅋ 이런 경기를 또 언제 볼 줄 알고 마음 졸이면서 관람함? 그냥 포기하셈 ㅋㅋㅋㅋㅋ
└을지문덕, 몽연, 쿠 훌린 정도면 렌한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주소월이 4분 컷인가 5분 컷이었으니까, 한 6분 정도는 버티지 않을까 싶음.
└????????ㅋ 맵이랑 상성 같은 거 깡그리 무시하고 그냥 6분 박아버리네 ㅋㅋㅋㅋ 내 개인적으론 몽연 20분 / 쿠 훌린 18분 / 을지문덕 15분 예상함
└윗 댓 // 뭐라는 거야 ㅋㅋㅋㅋ 쿠 훌린 > 을지문덕 > 몽연 순서임 ㅋㅋㅋㅋㅋ
* * *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눈 앞의 장면이 바뀌었다.
"헉!"
내가 나타나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악마.
"혼자 죽을 거라고 생각······!"
어떻게든 날 죽이기 위해 발악하는 악마.
"일단 대피, 켁!"
날개를 편 채 도망치려는 악마 등등.
마치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고 있는 것처럼 장면이 뚝뚝 끊겼다.
서걱!
'너무 쉬워.'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악마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벼락이 지나간 자리에는 한 무더기 시체만이 남아있을 뿐.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군.'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천 킬 가까이 했는데, 지금까지 내 공격을 단 한 번이라도 막아내는 악마가 없는 상황.
아마 녀석들은 본인이 어떻게 죽는지도 제대로 모를 것이다.
내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이미 창날이 목을 베고 지나갔으니까.
반사 신경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애초에 반응할 수가 없는 공격이었다.
"이런 미친!"
"씨발······ 죽어!"
후웅! 후웅! 후웅!
그때부터 특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악마들이 허공에 대고 그냥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 그냥 얻어걸리라는 식의 공격이었다.
"죽으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
"오, 오지 마! 오지 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허공에다가 무기를 붕붕 휘두르는 악마들.
아마 그 모습을 멀리서 봤다면 웃음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단체로 미친 것처럼 보일 테니까.
'쯧.'
하지만 정작 그 상황에 직면하게 된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순간 이동은 양날의 검.
악마들이 내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 또한 상대가 휘두르는 공격에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재수가 없으면 눈먼 칼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달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초감각이 있어서 다행이야.'
조금이라도 그 확률을 줄여줄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나는 침착하게 악마들 사이를 휘저었다.
초감각과 마력장의 조합은 공간 전체를 읽어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어디에 있는 누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다.
서걱! 서걱! 서걱!
"제기랄! 저 괴물을 죽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 덕분에 우려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띠링!
[마력이 5% 남았습니다.]
'벌써 마력을 다 썼군.'
예상했던 것보다 마력이 훨씬 빨리 바닥났다는 것.
쿨타임이 6초일 때야 37분 동안은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꽈앙! 서걱!
"끄억!"
2차 각성으로 인해 0.6초까지 쿨타임이 줄어든 섬전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상황부터 정리해야겠어.'
나는 한숨 돌릴 겸, 플레이어들 사이로 순간 이동했다.
"휴우. 녀, 녀석이 뒤로 빠졌다!"
"살았어······!"
무자비한 학살이 끝난 듯 싶자, 악마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죽였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마력 회복 물약을 들이키며, 상태창을 체크했다.
[킬 수 순위]
[1위. <1 > ― 5,233킬]
[2위. <17 > ― 973킬]
[3위. <196 > ― 945킬]
[4위. <1,101 > ― 911킬]
[5위. <444 > ― 905킬]
[6위. <99 > ― 897킬]
'미친.'
킬 수를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잠깐 사이에······.
'내가 저만큼이나 죽였다고?'
킬 수가 어마어마하게 벌어져 있었다.
이제는 2위랑 무려 4천 킬이나 차이 나는 상황.
2위부터 6위까지 킬 수가 따닥따닥 붙어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얼마나 미친 스펙으로 휩쓸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3경기도 챙길 수 있겠어.'
킬 수 현황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지구의 우승은 거의 확정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거······ 성능이 너무 말도 안 되는데?'
업그레이드된 블라디미르 가면은 상상을 초월했다.
다이아몬드 등급인 <폭뢰 > 스킬과 비견될 정도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과연 신화 등급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
"돌격!"
"서둘러라! 저 괴물이 쉬는 틈에, 어떻게든 나머지 녀석들을 처리해야 한다!"
"끄아아아아악!"
"젠장, 끝이 없군!"
"애초에 다 죽을 때까지 소환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나불댈 시간에 검이나 휘둘러요!"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살아남은 플레이어의 숫자가 10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금방 다 죽겠군.'
슬슬 체력이 한계에 다다를 시간이긴 했다.
거기다 조금씩 중급 악마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
일부 몇 명은 쌩쌩한 걸로 보아 체력 회복 관련 스킬이 있는 것 같지만, 그 외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슬슬 움직여 볼까.'
어느 정도 휴식을 취했다고 판단한 나는, 섬전을 사용하며 사냥을 재개했다.
꽝! 꽝! 꽝! 꽝! 꽝!
빛이 번쩍이고, 시야가 바뀔 때마다 소름 끼치는 피륙음이 울려 퍼졌다.
10%대까지 회복되었던 마력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하지만 나는 마력이 떨어진 것에 개의치 않았다.
펄럭! 펄럭! 펄럭!
"크흐흐! 살고 싶으냐? 그럼 재롱 한 번 부려보거라! 너희들은 광대가 아니더냐, 크하하하하!"
"구현된 새끼들 주제에 현실감 넘치네. 기분 더럽게! 끄아아아악!"
[현재 생존자 수 : 1명]
갈수록 중급 악마의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더니, 결국 10분을 채 못 버티고 모두 전멸한 것이다.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로는, 대규모로 몰려오는 중급 악마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스텟 차이가 너무 많이 났으니까.
'슬슬 경기를 끝내야겠군.'
이제 살아남은 플레이어는 나 하나뿐.
게임의 종료 조건은 전멸.
나는 악마들에게 죽기 위해, 창을 거두어들였다.
이미 1위가 확정된 이상, 굳이 무리해서 사냥할 필요가 없었다.
죽어야 한다는 건 좀 기분 더럽긴 했지만.
그때였다.
"이제 저 괴물만 남······!"
"녀석도 지쳤······!"
"어차피 독 안에 든 쥐······!"
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각종 무기를 들고 내게 달려들던 악마들이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몸을 덮고 있던 흑막 또한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띠링!
[유일하게 생존한 플레이어가 킬 수 1위를 달성 중입니다.]
[3경기 <대척자 >가 종료되었습니다.]
[킬 수 순위]
[1위. <1 > ― 5,986킬]
[2위. <17 > ― 1,077킬]
[3위. <196 > ― 1,031킬]
[4위. <1,101 > ― 1,001킬]
[5위. <444 > ― 984킬]
[6위. <99 > ― 897킬]
[승리 조건 : 가장 많은 킬 수를 올린 플레이어]
[플레이어 '렌'이 가장 많은 킬 수를 쌓았습니다!]
['지구' 승리!]
[3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축하합니다!]
나무도, 풀잎도, 땅도, 모든 것이 새까맣다.
"······."
무겁게 짓누르는 정적에, 직전까지 피에 잠겨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
'후우.'
숲속에 홀로 남게 된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팽팽하던 긴장감이 탁- 하고 풀렸다.
킬 수 1위를 하고 있는 데다가, 내가 유일한 생존자라 그냥 경기가 종료된 것이다.
'끝났다.'
순간 이동할 곳을 선정하고, 킬을 쓸어 담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거기다 마력 소모까지 극심했던 상황.
뒤늦은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조금이라도 쉬어야겠어.'
포근한 빛이 나를 감싸 안았다.
[현재 순위]
[1위 : 지구 / 3승]
[2위 : - / 0승]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피곤하군.'
그리고는 목을 뒤로 젖힌 채, 뻑뻑해진 두 눈을 감았다.
정신적 피로감이 상당하다 보니 진이 빠지는 기분.
하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네.'
경기 내용이라든가, 결과 측면에서 유의미한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중 나를 가장 만족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가면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는 것.
가면의 부작용 때문에 그동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드디어 해결법을 찾아낸 것이다.
'정말 다행이야.'
덕분에 고위 리그에 올라가서도 가면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가면의 성능을 제대로 체크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과연 신화 등급 아이템.'
생각보다 가면의 효과가 너무 뛰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피의 각성이 너무 사기였다.
다이아몬드 등급 스킬인, 폭뢰 못지않을 정도.
'명경지수랑 뇌신, 두 개 다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너무 아쉬웠다.
만약 두 개 다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면.
폭뢰와 피의 각성, 두 개를 모두 손에 쥘 수 있었다면.
'고위 리그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겠지.
직접 만나본 고위 플레이어들은 분명 뛰어난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닿을 수 없다는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초월 리그라면 모를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그나마 한 개라도 얻었으니까.
나머지 한 개는 이후에 어떻게든 고결한 수정을 얻을 기회가 올 것이다.
이걸로 3경기에 대한 고찰은 끝.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겠지.'
현 시간부로 지구의 우승이 확정됐다.
덕분에 성계 특전이 모든 스텟 +17%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확실해진 상황.
이제 남은 건 MVP밖에 없었다.
'반응이 다들 호의적이네.'
커뮤니티에 들어가, 신들의 댓글을 확인한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보나 칭찬 일색.
거기다 기존에는 누구 vs 누구 라는 구도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날 상대로 얼마나 버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띠링!
[잠시 후 4경기, <상위 리그 최강자>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알림창과 함께 경기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생겨났다.
어느새 쉴 시간이 모두 끝난 것이다.
'최강자 자리를 가지러 가볼까.'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숨을 내쉰 후,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이번 경기에서, 내가 상위 리그의 최강자임을 증명할 것이다.
띠링!
[지금부터 4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4경기 : 일대일(개인 PvP)]
[게임명 : 상위 리그 최강자]
[관객 수 : 9,220,891명]
[4경기 1라운드를 시작합니다.]
[맵 : 시가지형 투기장(소)]
[렌 vs 막시무스]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4층 높이의 폐건물들.
중천엔 태양이 걸려 있었다.
뜨거운 열기로 인해, 곳곳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저 녀석이 첫 번째 상대.'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갑옷을 착용한 기사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번 경기는 일대일로 치러지는 만큼, 굳이 흑막을 덮어씌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머리 위에는 <지구 >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4경기가 가장 중요해.'
이미 지구의 우승이 확정됐지만, 나는 이번 경기에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MVP를 노려야 했으니까.
'일대일만큼 돋보이는 경기가 없지.'
3경기에서 보여준 모습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상위 리그 최강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면 모를까.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이번엔 뭘 주려나.'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서 MVP를 차지했을 때 받은 건 그림자 표식.
무려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이다.
그래서 기대가 됐다.
'이번엔 더 대단한 게 나오겠지.'
상위 리그에서도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을 보기 어렵다는 걸 고려하면, 상위 성계 대항전에선 그보다 더 좋은 게 나올 거라는 건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뭐가 됐든, 지금보단 한 단계 더 진일보할 것이다.
[경기 시작!]
경기 시작 콜이 뜨는 동시에,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하얀 장막이 사라졌다.
'시작해 볼까.'
창을 고쳐 잡은 나는 곧바로 막시무스에게 돌진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 173화. 증명의 서(7) > 끝
< 174화. 증명의 서(8) >
깡! 깡!
"첫 상대부터 운이 좋지 않군. 내 이름은 막시무스. 멋진 싸움이 되길 바라오."
거리를 좁히자, 발리노르 성계의 막시무스가 방패에 검신을 두들기며 가볍게 눈인사했다.
가면 덕분에 날 알아본 모양.
앞선 경기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보였던 것 때문인지, 그의 눈에선 숨길 수 없는 경외심이 흘러나왔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막시무스 데메테르 마뉴스]
[성향 : 중용]
[근력 : 207(+?)] [민첩 : 194(+?)] [체력 : 198(+?)]
[정신 : 104(+?)] [지력 : 59(+?)] [마력 : 190(+?)]
[각성 능력 : <특급검방술 > <고급검술 > <특급방패술 > <고급마나운용 > <고급박투술 > <중급치료술 >]
[업적 특전 : 역전의 명장]
제법 준수한 스텟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면 할 만하겠는데?'
그럼에도 나는 인벤토리에 창을 집어넣고, 막시무스와 똑같이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다.
상대와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일명 미러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평범하게 해서는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없어.'
이 경기를 보고 있는 모든 신들은 이미 결과를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런 상태에서 내가 막시무스를 죽여봤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길 사람이 이겼구나, 그 정도의 반응 뿐.
그래서는 곤란하다.
'스토리를 만들어야 해.'
단순히 승패를 떠나서, 왜 이 경기를 봐야 하는지 이유를 만들어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내 경기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상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기로 쓰러트리는 거지.'
매 경기 내가 미러전을 펼친다면?
검객을 검으로 쓰러트리고, 궁수의 머리에 화살을 박아 넣는다면?
'제법 흥미를 끌 수 있을 거야.'
그것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스토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날 상대하는 막시무스의 입장은 다를 테지만.
"······뭐 하는 거지?"
검과 방패를 꺼내 들자, 예상대로 막시무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마 내가 녀석을 무시한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전사의 긍지를 존중해 줄 줄 모르는 미개한 놈이었군."
"······."
"비록 지금은 누구보다 높은 곳에 있지만, 그따위 행실로는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창을 들어라."
내게 검을 겨누며 으르렁거리는 막시무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막시무스의 마음에 공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절실함이 부족한 모양인데.'
나보다 강한 상대가 날 얕잡아 본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난 상대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것이다.
아니, 발을 핥을 수도 있다.
그 방심 덕분에 내가 죽을 확률이 아주 조금이라도 낮아질 테니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다.
"흥, 지금 그 선택. 후회하도록 만들어주지!"
내가 검과 방패를 든 채 가만히 바라보자, 막시무스가 고함을 지르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방패로 차징한 후에 검으로 빈틈을 찌르려는 모양세.
나는 방패를 내밀어, 가볍게 녀석을 밀어냈다.
챙! 콰직!
"헛!"
그러자 주춤하는 막시무스.
뇌전의 데미지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한 것이다.
'쉽게 끝나겠는데?'
나는 곧바로 녀석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캉! 콰지직!
방패로 크게 쳐내자, 방패를 든 막시무스의 왼 팔이 크게 꺾여나간다.
녀석의 경동맥, 왼쪽 어깨, 명치와 심장 등등 방패에 가려져 있던 급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근력 스텟에서 차이가 제법 심하다 보니, 허무하게 빈틈을 노출시킨 것.
"어딜!"
하지만 내 생각처럼 쉽게 끝나진 않았다.
오히려 뒷걸음질 치며 검을 쳐낸 막시무스가, 이를 앙다문 채 방패를 휘두르며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콰직! 콰지직!
검, 그리고 방패가 부딪힐 때마다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인내심이 제법이군.'
자기가 내뱉은 말이 있어서인지, 녀석은 뇌전 데미지를 무시한 채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펼쳐진 검과 방패의 초근거리 전투.
챙! 콰직! 챙! 카강! 콰지지직!
방패와 방패가 맞부딪히며 뇌전의 스파크가 터지고, 검이 서로의 심장과 목을 노리고 날아든다.
'쉽지 않네.'
무기를 다루는 기교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특급 검방술을 가지고 있는 막시무스.
반면에 내 경지는 최상급 검방술이다.
그럼에도 내가 밀리지 않은 채 공방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건, 스텟과 스킬의 우위, 그리고 초감각 덕분이었다.
"흐읍!"
방패로 내 시야를 가리면서, 사각으로 검이 쇄도한다.
초감각이 없었다면 막아내기 어려운 부위.
나는 스텝을 밟아, 뒤로 빠져나가며 녀석의 공격을 가볍게 무마했다.
그리고는 역으로 막시무스의 허벅지를 노리며 검을 뻗었다.
카아앙!
'방어를 뚫기가 쉽지 않겠군.'
방패 활용도가 뛰어나다 보니, 막시무스에겐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주창범의 상위 호환 버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까가가가강―!
"······!"
빈틈이 없다?
'힘으로 찍어 눌러서 만들면 그만이지.'
방패로 녀석의 방패를 치워낸 나는 재차 공격을 퍼부었다.
"흥!"
그러자 검을 방패처럼 사용하며 내 공격을 막아내는 막시무스.
방패를 검처럼 쓰고, 검을 방패처럼 쓴다.
한 손을 무력화시켜도, 다른 손이 유기적으로 빈틈을 메운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유효타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갉아먹어야겠군.'
검과 방패의 미러전.
필연적으로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관건은 누가 더 많은 데미지를 쌓느냐.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작부터 유리한 싸움을 펼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챙! 콰지직!
뇌전이 내부로 파고들어, 계속해서 데미지를 입힐 테니까.
"크윽."
내 예상대로 공방이 길어지자, 막시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교가 떨어지는데도, 내가 생각보다 잘 막아내고 있어서 당황한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배울 게 많은데?'
공세로 전환한 막시무스의 실력은 무척 훌륭했다.
녀석은 공격할 때도 검보다 방패를 더 많이 활용하는 스타일.
만약 방패 하나만 있었어도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부분은 나중에 주창범한테 알려줘야겠어.'
방패로 쉴 새 없이 압박해 들어오고, 검은 최소한의 상황에서만 사용한다.
마치 카운터를 꽂아 넣는 느낌.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위협적이었다.
숨겨둔 한 방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나도 쉽게 공격을 넣을 수가 없었달까.
'그래 봤자야.'
고기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젠장!"
막시무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마 미칠 지경일 것이다.
기교가 떨어지는 탓에 나는 주로 방어를, 그리고 막시무스는 어떻게든 그걸 뚫어내기 위해 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막시무스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어떻게든 내 방어를 뚫어내는 것뿐이다.
조금 더 대담하고 공격적으로 플레이해야 한달까.
하지만 녀석은 그게 되지 않았다.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간간이 터지는 벽력에 간담이 서늘할 테니까.
언제 이 무시무시한 스킬이 발동할지를 알 수가 없으니, 대담하게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크윽······ 제기랄!"
결국 뇌전의 데미지가 많이 쌓이면서 막시무스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슬슬 끝내야겠군.'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가 <스킬:뇌신 강림>으로 각성합니다.]
판단을 내린 나는 뇌신 강림을 발동시키며, 막시무스를 몰아붙였다.
한쪽은 필승 전략이 있고, 한쪽은 없는 상황.
이미 처음부터 승패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4경기 5라운드]
[생존자 : 69명(부전승 1명)]
[맵 : 아베플라토 대밀림(중)]
[렌 vs 오클리]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서 있는 나무들.
곳곳에서 벌레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습한 공기로 인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후우.'
어둠이 내려앉은 숲속 한가운데에 몸을 숨긴 나는, 신경을 곤두 세운 채 활대를 만지작거렸다.
쐐애애애액!
잠시 후 들려오는 옅은 파공음.
핑-! 핑-! 핑-! 핑-!
곧바로 대응 사격한 나는, 재빨리 뒤로 빠져 나갔다.
'이쯤이면 됐어.'
한동안 달려, 거리가 제법 벌어졌다고 판단한 나는 풀숲 사이로 숨어들었다.
5라운드의 상대는 궁수.
은·엄폐가 용이한 맵에서 싸우게 되다 보니, 몸을 숨긴 채 저격하는 식으로 싸움이 흘러갔다.
지금까지 서로가 주고받은 화살의 숫자는 100발 가량.
'이번 상대가 제일 까다롭네.'
2경기는 검객이었고, 3경기는 암살자, 4경기는 마법사였다.
검은 제법 잘 다루는 편이라 2경기는 쉽게 이겼고, 은신을 사용하는 암살자 역시 마찬가지.
초감각 앞에서 무력하게 죽어갔다.
마법은 내가 다룰 줄 모르다 보니, 4경기엔 어쩔 수 없이 창을 사용해서 단숨에 죽여버렸다.
한마디로 무난하게 경기가 흘러갔다고나 할까.
'맵 상성이라도 좋아서 다행이야.'
반면에 궁수와의 싸움은 쉽지 않았다.
만약 탁 트인 곳에서 싸웠다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상대는 활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만큼, 나보다 명중률이 훨씬 뛰어날 테니까.
반면에 지금처럼 저격 위주로 상대한다?
'그럼 나한테 더 유리하지.'
저격도 결국 은신해서 상대를 사냥하는 방식.
부족한 궁술을 조금이나마 메꿔줄 수 있다.
활 만으로 상대를 쓰러트리기 충분할 것이다.
숨 죽인 채, 다시 은밀하게 거리를 좁히길 5분 여.
'찾았다.'
숲 한쪽에서 누군가가 살금살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5라운드 상대, 오클리가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낮은 포복을 유지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
뿌드드득―
상대를 겨냥한 채 활시위를 당겼다.
녀석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하고, 은밀하게.
'더 가까이 와라.'
최대치로 활시위를 당긴 나는, 거리가 좁혀질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지금 거리에서도 내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맞출 자신은 있지만,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녀석이 피할 수도 있으니까.
앞선 저격들 모두 그렇게 해서 실패했고.
'조금만 더.'
그런데 거리가 줄어들면, 소리를 듣고 피할 시간도 짧아진다.
이번 만큼은 녀석도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핑!
녀석이 120미터 안쪽까지 들어온 상황.
한동안 녀석이 다가오길 기다리던 나는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놨다.
그리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만약 맞추지 못하면, 다시 은신한 뒤에 녀석을 저격해야 했으니까.
띠링!
[플레이어 '오클리'를 처치했습니다.]
[4경기 5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렌' 승리!]
[잠시 후 6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됐어!'
눈앞에 뜬 알림창을 본 나는 고개를 들어, 궁수가 있는 곳을 살폈다.
그러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마가 꿰뚫려 있는 오클리의 모습이 보였다.
무려 2시간 동안 펼쳐진 저격전.
결국 내가 녀석마저 미러전으로 쓰러트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음 경기장으로 이동할 게이트를 기다렸다.
'슬슬 랭커들을 만날 때가 됐는데.'
남은 인원은 35명.
이제부터 본선 경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띠링!
[4경기 6라운드 부전승 대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잠시 후 7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어?'
부전승?
눈앞에 뜬 알림창을 본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4경기에 참가하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1,103명.
2의 제곱수가 아니다 보니, 토너먼트 방식의 대전에선 부전승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경기 손해 봤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승하는 게 목표였다면 무척 반가울 소식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MVP 경쟁을 노리는 입장에서, 신들에게 자주 노출될수록 유리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쏴아아아아아―
그때, 하얀 빛이 포근하게 나를 감쌌다.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임팩트.
6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끝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신성력을 이용한 시간 왜곡을 한 모양이었다.
하얀빛이 절정에 이르며, 짧은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그리고.
[4경기 7라운드]
[생존자 : 18명(부전승 1명)]
[맵 : 안타레스 해협(중)]
[렌 vs 엔키두]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7라운드 경기장에 입장했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뭐야?'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
저 멀리, 육지가 보인다.
그사이에 펼쳐져 있는, 무수히 많은 나무 판자들과 박살 난 수십 척의 배.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수상전?'
이번 경기는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경기였다.
그것도, 위태위태하게 떠 있는 배의 잔해들을 밟으며 펼쳐지는.
저 멀리, 하얀 장막 안에 갇혀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이제야 랭커를 만났군.'
상반신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야생미 가득한 모습.
그 위에 드러난 우락부락한 몸과, 길게 흘러내린 수염.
손에는 징이 박힌 권갑拳甲을 끼고 있다.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엔키두.'
이번 경기의 상대는 바빌론 출신의 랭커, 엔키두였다.
'쯧, 미러전은 안 되겠는데.'
최근에 박투술을 집중적으로 훈련한 상황.
엔키두를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가지고 있는 권갑이 없었다.
애초에 중간중간 견제용으로 박투술을 배운 거였기도 하고.
'어쩔 수 없지.'
다른 무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경기 시작!]
경기 시작 콜과 동시에, 나는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이번에는 내 마음대로 무기를 고를 수 있는 상황.
'어떤 무기를 꺼낼까.'
최대한 잘 괴롭혀줄 수 있는 무기로 고를 생각이었다.
< 174화. 증명의 서(8) > 끝
< 175화. 증명의 서(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