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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일찍 잤더니 이른 시간에 눈이 뜨였다.

덕분에 와 달라던 시간인 10시보다 30분 정도 일찍 올 수 있었다.

넓은 주차장에 아무 곳에나 주차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눈앞의 헌터관리부 건물을 바라본다.

뭐랄까, 보고 있으니 한 가지 감상이 떠올랐다.

"…깔끔하네."

도희와 태천이가 말했던 대로였다.

뭐,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서울에서 이전한 지 이제 9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10년도 채 안 됐는데 더러워지는 게 더 힘들 거다.

관리하지 않는 곳이라면 또 모를까.

그런 감상을 하고 있는데 주차장으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익숙한 외형의 차였다.

나흘 동안 타고 다녔던 경차.

옆면에 EV 표시가 쓰인 전기차.

바로 한진환의 차였다.

"오."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차 옆에 차를 주차했다.

차에서 바로 내리며 말했다.

"빨리 왔네?"

"눈이 떠져서요."

"뭐야, 오늘 알레딩 밀러 만난다고 긴장한 거냐?"

"설마요. 수학여행 전날의 초등학생도 아닌데."

"그치? 네가 이런 거로 긴장할 놈은 아니지."

아침 일찍 일어난 건 긴장 때문이 아니라 어젯밤 빠르게 잔 덕분이다.

몸의 피로도 딱히 없었다.

나흘 동안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길드들을 없애긴 했지만,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다.

전투다운 전투를 한 것도 다졸 길드의 공우재와 싸웠을 때뿐이었다.

전국 각지의 길드들을 없애는 것보다도 조수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더 괴로웠다.

세계적인 록스타들이 공연 자체보다 이동하는 게 더 피곤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게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그렇다고 운전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자."

"네."

한진환과 함께 건물로 들어갔다.

앞서 걷는 그는 건물 내부가 익숙한 듯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은 누군가 우리 이름을 불렀을 때 멈췄다.

"한진환 헌터님! 백도운 헌터님!"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였다.

하지만 한진환은 아는 얼굴인 듯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장관 비서라고 가르쳐 줬다.

안내인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더니, 장관 비서가 그 안내인이었던 모양이다.

장관 비서는 우리 앞으로 달려와 상체를 푹 숙였다.

"안녕하세요, 한진환 헌터님, 백도운 헌터님. 황정희 장관님의 비서 '신정호'입니다. 일찍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찍은 무슨. 그냥 시간 맞춰서 온 건데, 뭐. 안 그래?"

"그렇죠."

와 달라고 한 시간에서 30분 정도 이르게 도착했을 뿐이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일이 아니었다.

물론, 비서가 그리 말한 것도 이해는 갔다.

헌터는 제멋대로 사는 놈들이 아주 많다.

따라서 약속 시각에 제때 맞춰 오는 놈들이 별로 없었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지각하기도 한다.

그래놓고선 '불만 있으면 다른 헌터로 대체하든가'라며 배 째라는 식으로 나가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런 몰상식한 놈들을 아주 많이 봐 왔을 테니 겨우 이런 일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거겠지.

비서는 빙긋 웃고는 두 손을 뒤쪽으로 뻗었다.

"장관님께서는 현재 장관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해."

"네!"

비서의 안내를 받고 간 곳은 본관 건물 4층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장관실과 이어지는 방이 나타났다.

장관의 비서들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서가 양해를 구했다.

앉아 있던 다른 비서가 수화기를 들어 올린다.

나와 한진환이 왔다는 것을 장관에게 전하려는 거다.

수화기가 내려지자마자 장관실 문이 열렸다.

안쪽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연 것이다.

배 사무관이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그녀는 한진환에게 인사를 건네고, 내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그런 후 문을 붙잡은 채로 몸을 살짝 돌렸다.

우린 그녀가 문을 붙잡아 주는 동안 안으로 들어갔다.

스마트폰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헌터부 장관씩이나 되는 양반이니 무례하게 행동해서 좋을 것은 없겠지.

"어서 오게."

황정희 헌터부 장관.

그가 일어나서 우리를 맞이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헌터들에게 역대 헌터부 장관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양반이다.

헌터의 편의를 잘 봐준다는 평이 있었지, 아마?

아무튼, TV에서나 가끔 보던 양반을 눈앞에서 보다니….

나도 참 출세했다.

이게 다 새싹이 덕분이다.

"오랜만이군, 진환."

"그러게요. 한, 1년 만이죠?"

"그쯤 된 것 같군. 그동안 자네 어디에 있었나?"

"놀고 있었죠, 뭐."

놀고 있었다.

그 말에 황 장관이 한진환을 가만 바라봤다.

말 그대로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환에게는 세상 대부분의 일이 노는 것이었다.

A+급 협회 퀘스트인 두 손가락 프로젝트도 노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리라.

내게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한진환에게는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장관은 한진환과 악수한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처음 보는 거지?"

"네."

"황정희네. 며칠 동안 잘 부탁하네."

"백도운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래. 어, 일단 앉지. 서서 얘기하기도 그러니."

그 말에 우린 바로 자리에 앉았다.

황 장관이 상석, 한진환과 내가 오른쪽, 배 사무관이 왼쪽에 앉았다.

자리에 앉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신 비서가 들어왔다.

우리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놓고는 곧바로 장관실에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대화가 진행됐다.

한진환이 질문을 던져 시작됐다.

"오늘 언제쯤 출발합니까?"

"오후 3시쯤?"

"뭐야, 그럼 2시쯤 오라고 하지 왜 지금 오라고 했습니까?"

"볼 일이 많아서 그런데,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나?"

그리 말하면서 장관은 날 쳐다봤다.

한진환의 왜 지금 오라고 했냐는 질문은 깔끔히 무시했다.

이유는 뻔하다.

헌터 중에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한진환은 그 헌터들의 정점에 있었다.

지금까지 봐 온 결과 한진환은 아주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물이었고.

말하진 않지만 배 사무관도 그리 생각하는 듯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약속 시각은 일부러 아침 일찍 정한 것이리라.

"네. 상관없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

"근데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오늘부터 맡은 임무가 장관님 경호인데요."

"괜찮네. 건물 내에만 있을 거거든. 두 사람에겐 이곳에서 나간 이후의 경호를 부탁하고 싶네."

"나간 이후?"

"아, 자넨 모르나?"

"장관님."

"…뭐, 그런 게 있네."

"...?"

배 사무관이 부르자 황 장관은 입을 다물었다.

설명해 줄 수 없다는 듯한 태도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줄 수 없는 기밀 사항 같은 거겠지.

뭐, 그래도 연상 가는 것은 있었다.

방주 보육원처럼 장관을 중심으로 보호 결계 같은 게 쳐져 있을 거다.

건물 내에만 있을 거라서 괜찮다는 걸 보면 건물 안에 있을 때 마법적인 보호를 받는 것이리라.

그런 점에선 방주 보육원과는 결이 달랐다.

보육원은 아주머니의 마나를 매개체 삼아 보육원 전체를 바깥에서부터 보호했다.

아주머니가 그곳에 있는 한 보육원은 안전하다.

물론, 도희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나 결계를 깨뜨릴 정도의 강한 공격을 퍼붓는다면 얘긴 달라지겠지만….

한국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2시쯤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이야. 그러니 두 사람은 그때까지 대기해 줬으면 하네."

"…그 전까진 자유롭게 활동해도 좋다. 그렇게 이해해도 되는 거죠?"

"그래, 맞아. 다만, 건물 바깥으로 나가진 말아 주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 정도야…. 그치?"

"네. 어차피 전 스마트폰만 있으면 돼서요."

"음? 스마트폰?"

황 장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뭔가 기억난 듯 "아!"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보고받은 적 있는 것 같군. 스마트폰 게임 중독자라지?"

"...."

"…아.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백도운 하면 스마트폰 게임 중독자, 스마트폰 게임 중독자 하면 백도운이다.

다만, 그 게임이 평범한 게임이 아닐 뿐.

"그렇게까지 재미있어 할 정도면 유명하겠군?"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 주변에선 저밖에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네요. 다운로드 수도 100 정도밖에 되지 않고요."

"응? 그런가?"

"네. 망겜 중의 망겜이라고 할 수 있죠."

정확히 망한 것은 위그드라실이라는 다른 차원이었지만.

황 장관이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였다.

"뭐, 게임이야 하는 사람이 재미있으면 그만이긴 하지."

"동의합니다."

"혹시 어떤 게임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웬 나무 키우는 게임이라고 들었던 것 같기는 한데…."

[세계수 어린나무가 자신은 '웬 나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관리인에게 '세계수'라고 똑바로 소개해 주길 요구합니다.]

그 정도야….

어차피 게임 얘기라고 생각할 거다.

"평범한 나무는 아니고, 세계수입니다."

"세계수?"

"네. 저는 세계수를 키우고 있습니다."

[관리인이 "세계수를 키우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에 따라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갑자기?

제98화

"여기 있어도 되고, 다른 곳을 둘러봐도 좋네."

그리 말한 후 황 장관은 배 사무관과 떠났다.

장관실에 덩그러니 남은 나와 한진환은 바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나는 [세계수 키우기]를 하기 위해서였고, 그는 통화하기 위함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 쪽으로 걸어갔다.

"아, 형님. 방금 장관 만났어요."

형님이라고 하는 걸 보니 상대는 최희석인 모양이다.

아마 지금까지의 일을 협회에 보고하는 의미도 포함된 것 같다.

그는 방금 황 장관과 나눴던 대화를 일일이 말했다.

굳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 일정을 설명받았을 뿐이다.

톡, 토톡.

소파에 등을 기대며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검지와 중지가 빠르게 교차했다.

내 시선은 스마트폰을 향하지 않았다.

시야 한 편을 가리고 떠 있는 퀘스트 알림창을 바라봤다.

[관리인이 "세계수를 키우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에 따라 전대 세계수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

세계수를 키운다고 말했을 뿐인데 퀘스트가 발생할 줄은 몰랐다.

이런 퀘스트 발동 요건이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지금에 와서 발동한다는 게 웃기다.

새싹이를 키운 지도 거의 1달이 다 되어 가는데 말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세계수를 키운다고 말한 적이 없었던가?

도희와 태천이에게는 말했었던 것 같은….

"아."

생각해 보니 두 사람에게도 세계수를 키운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스마트폰에 세계수가 자라났어."

딱 그렇게만 말했었다.

게임 이름이 [세계수 키우기]인 것을 알고 있으니 내가 세계수를 키워 냈다는 것 자체는 알고 있을 거다.

앞으로 세계수를 성장시킬 거라는 것도.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 내가 입 밖으로 직접 말한 적은 없었다.

[B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 '관리인의 길(초급)'이 발생했습니다.]

[퀘스트 내용 - 따스한 손길 10000번 쓰기(435/10000)]

[A등급 이상의 비료 1번 주기(0/1)]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36/1000)]

[세계수의 뿌리 1000번 쓰기(0/1000)]

[성공 보상 – 전대 세계수의 수액]

깨야 하는 조건이 많다.

보통 한 가지 조건만 해결하면 됐는데, 이번엔 네 가지나 되었다.

다행인 것은 어려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횟수가 좀 이상하다.

따스한 손길은 지금도 화면을 두드리고 있으니 올라가는 게 당연했다.

방금 435번이었던 횟수는 벌써 548번이 돼 있었다.

이 순간에도 빠르게 550, 551, 552 오르고 있다.

이런 속도라면 1만 번쯤은 오늘 안에라도 끝낼 수 있을 거다.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38/1000)]

이상한 건 알테라-쇼넴이었다.

나는 한 번도 알테라-쇼넴을 쓴 적이 없었는데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이건 아마도… 성역에 있는 엘프들 덕분인 거 같다.

화면을 바라봤다.

새싹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알테라-쇼넴을 쓰는 늙은 엘프가 보인다.

SD 캐릭터로 보이는 엘프들은 다들 비슷한 외형이었지만, 머리카락 길이가 다르다거나 수염이 자랐다거나 하는 식으로 달라서 한 명씩 구분할 수 있었다.

흰 수염이 풍성하게 자란 늙은 엘프는 레디투스가 분명했다.

그의 뒤에는 일렬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엘프들이 보였다.

금발이 가장 빛나는 외형을 지닌 레지나는 보이지 않았다.

인원 자체도 12명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알테라-쇼넴을 쓰기 위한 쓰레기 따위를 찾고자 동료들과 성역 바깥으로 나선 듯하다.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다.

성역 바깥은 황폐하고 파괴되어 쓰레기 같은 것들이 아주 많았으니까.

쓰레기 탐색보다 마족의 군세에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더 힘들 테지.

"엘프들이 찾아와 줘서 다행이지…."

그들이 성역을 찾아와 주지 않았더라면 이번 퀘스트는 해결하지 못했을 거다.

알테라-쇼넴의 존재조차 몰랐을 테니까.

관리인의 교본 3권째를 얻어서 어찌어찌 알았다고 해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따스한 손길 만 번보다 알테라-쇼넴 천 번이 훨씬 더 수고스럽고 오래 걸릴 테니까.

"방금 뭐라고 했냐? 엘프?"

통화를 끝낸 한진환이 걸어오며 물었다.

내가 중얼거린 것을 들은 모양이다.

맞은편 소파에 앉는 그에게 대답했다.

"게임 얘기예요."

"게임? 아. 네가 하고 있다는 거?"

"네."

스마트폰을 들어 화면을 보여 줬다.

한진환은 고개를 내밀어 화면을 들여다봤다.

어린나무와 엘프들을 보고는 짧게 감탄사를 흘린다.

입꼬리도 살짝 올라간다.

귀여운 걸 본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미소였다.

"오…. 생긴 거 아기자기하니 귀엽네. 생긴 거 보면 인기 많을 거 같은데?"

"이번에 업데이트된 거예요. 그전에는 이런 거 없었어요."

"그랬구만. 이 캐릭터들은 엘프지?"

그러면서 손을 내뻗는다.

이런. 안 되지.

앞으로 내민 스마트폰을 거둔다.

손이 화면에 닿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번개의 마나가 화면을 통해 새싹이에게 전달될 테니까.

예전에 도희가 화면을 건드렸을 때도 마나가 옮겨졌었다.

한진환도 그럴 것이 분명하니 손가락이 화면에 직접 닿는 것은 피해야 했다.

[세계수 키우기]가 평범한 스마트폰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지도 모른다.

"치사하긴."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얼버무렸다.

한진환도 피식 웃은 후 물었다.

"대기 시간 동안 뭐 할 거냐?"

"우선… 밥 먹어야죠?"

물론, 같이 먹을 사람은 한진환이 아니다.

성역에서 열심히 알테라-쇼넴을 쓰고 있는 엘프들이다.

며칠 동안 들르지 못할 것도 생각해서 며칠 분량의 음식을 갖다 줄 생각이다.

같이 먹자고 하면 거절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한진환은 다행히 밥 생각이 없는지 딴소리를 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음.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까, 얼마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황 장관은 건물 안에 있어 달라고 했었다.

아무리 자유시간이라고 해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피해야 할 듯하다.

이 안에도 편의점이나 마트 같은 것은 있었으니 문제는 없었다.

충분히 음식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밥 먹고 나서 몸이나 좀 풀까?"

"몸이요?"

"정확히는, 실험을 좀 하고 싶네?"

"실험이라면…?"

"내 전력을 네가 버틸 수 있는지 없는지."

"…갑자기요?"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일이란 게 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어떻게 될지 모를 일.

한진환이 전력을 내야 하는 일.

두 정보를 취합하면 하나의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알레딩 밀러와 싸워야 하는 상황.

그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물론, 그의 말마따나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게 하죠."

"좋아. 그럼 밥 먹고 지하 1층으로 와. 거기 전체가 훈련장 겸 대련장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한진환이 장관실을 빠져나갔다.

아마 바로 지하 1층에 가려는 듯했다.

나도 내 할 일 하러 가야겠다.

우선… 마트에 가서 육류 위주로 음식을 사야겠다.

***

짐을 양손에 한가득 짊어지고 성역에 들어왔다.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울지도 모르기 때문에 냉동 음식을 주로 구매했다.

성역에는 여러 고기를 구워 먹었던 불판 따위들이 구비돼 있었다.

재료만 있다면 내가 없어도 알아서 요리해 먹을 수 있을 거다.

신선함을 유지하는 마법도 쓸 줄 알았으니, 신선도에 관해서도 걱정할 필요 없었다.

나를 발견한 엘프들이 인사를 해왔다.

"오! 안녕하세요!"

"관리인님! 오셨습니까!"

엘프들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힘이 넘쳐 보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덕분인 것 같다.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 나갔으니 건강함을 되찾은 것이다.

활력이 넘치는 그들을 보니 내가 다 흐뭇하다.

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한 파트리아가 다가왔다.

"오늘도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프 중 날 직접 맞이하는 건 언제나 레지나나 파트리아였다.

다른 엘프들과도 친해지긴 했지만, 날 직접 상대하는 건 늘 그 두 엘프였다.

아무래도 장로나 여왕같이 자격을 따지는 듯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거 안 따져도 상관없었지만….

엘프들은 그들 나름대로 규율 같은 게 있을 것이었다.

내가 함부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레지나 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보죠?"

"네. 위그드라실에 계십니다."

"고생이 많네요."

"마음 같아선 제가 나가고 싶습니다만, 열쇠를 다룰 수가 없는지라…."

"어, 그런 거였어요?"

나는 파트리아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 레지나가 배려해 주는 건 줄로만 알았다.

열쇠를 다룰 수 없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게 아닌 모양이다.

"사실, 그분께서 주신 열쇠는 주인을 선택합니다."

"주인을요?"

"네. 아쉽게도 저와 다른 이들로서는 열쇠를 다루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파트리아는 고개를 돌려 숲길을 바라봤다.

레지나의 안내를 받았었던, 위그드라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오로지 레지나 님만이 다룰 수 있었지요."

"...."

즉, 성역과 위그드라실을 왕래할 수 있는 건 레지나뿐이라는 소리다.

굳이 더 포함하자면 그녀와 접촉한 이들 정도?

하지만 리더인 레지나와 장로인 파트리아 둘 다 자리를 비울 수는 없을 것이다.

관리자가 없어지면 제멋대로 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아무리 12명밖에 되지 않는 적은 인원이라고 해도.

외적으로 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파트리아 님."

"네."

"급한 일이 생겨서 동물들을 구해 오는 건 며칠 걸릴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부담 갖지 말아 주십시오."

"같은 이유로, 성역에 며칠 못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여러모로 부탁하는 처지로서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엇보다… 성역 바깥에서도 온종일 세계수 님을 관리하신다는 것을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걸 보니 내가 따스한 손길로 새싹이에게 마나를 전달하는 걸 알고 있는 눈치다.

직접 본 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아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파트리아를 쳐다보는데, 그는 웃기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포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날 바라본다.

뭐야, 새싹이한테 들었나?

***

성역에서 빠져나와 바로 지하 1층으로 향했다.

지하 1층엔 복도에서부터 사람들로 득시글했다.

훈련장이나 대련장이나, 오는 사람만 오는 곳이다.

헬스장에 나갔을 때 매일 보는 얼굴만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여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이유는 뻔했다.

한진환.

내 예상대로 그가 대련장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좌하고 앉아 눈을 감은 채로.

"하, 포스 봐라."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멋있네."

"나도 언젠간…."

"그런데 훈련장도 아니고 왜 대련장? 상대될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해?"

그를 구경하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구경꾼들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게서 다가오지 말라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단순히 대련장 타임란에 '한진환 대 백도운'이라고 쓰여 있어서다.

자유 대련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대련이니 다가가지 않는 거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백도운이 누구야?"

"몰라."

"들어본 거 같긴 한데…."

"아. 기억났다!"

"누군데?"

"그, 왜, 있잖아. 그… 김무연 죽인 놈!"

"아, 아아!"

오. 나에게 붙은 꼬리표가 달라졌다.

원래는 백도희 오빠나 이태천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날 안 좋게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선 친구 잘 만난 낙하산이나 여동생 등골 브레이커 정도로 불렸고.

그런데… 이제는 김무연 죽인 놈으로 불렸다.

확실히 김무연이 A급 헌터로서 이름이 높았던 만큼 나도 유명해진 것 같다.

그래 봐야 누군가를 죽인 놈이라는 점에서 악명이라는 것은 똑같았다.

"실례합니다."

"아, 밀지 좀- 앗! 백도운!"

어깨를 툭 치자 상대방이 신경질적으로 날 돌아봤다.

나를 알아봤는지 끝까지 신경질을 부리지는 않았다.

대신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줬다.

한 명이 비켜 주자 옆에 있던 다른 이들도 비켜섰다.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대련장에 올라섰을 때, 한진환이 눈을 떴다.

"왔어?"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니, 나도 밥 먹고 방금 왔어."

밥 먹자는 말 안 하길래 안 먹을 줄 알았더니?

아마도 곧 대련할 사람이랑 함께 밥 먹기가 조금 그랬나 보다.

그가 정좌를 풀고 일어나며 물었다.

"준비 필요해?"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

"네."

한진환이 오른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다 접은 후 시작하겠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약지를 접는다.

중지를 접고, 마지막으로 검지를 접는 순간,

꽝!

천장에서 내 몸을 향해 벼락이 떨어졌다.

제99화

한진환이 마지막으로 검지를 접는 순간,

꽝!

천장에서 내 몸을 향해 벼락이 떨어졌다.

나무껍질은 순식간에 그 쓸모를 잃고 깨져 버렸다.

이어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떨어진 것이 벼락이 아니라 수백 톤에 달하는 고철덩이 같았다.

벼락 맞으면 원래 이런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고통이 뒤따라 느껴졌다.

꼴사납게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데 비명을 질러댈 수는 없었다.

꾹 참았다.

"오. 안 쓰러지네."

"…너무 아파서 그런가. 아픈 게 안 느껴지는데요?"

"그래? 그럼 한 방 더."

꽝!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내가 이미 벼락에 맞았다는 것을 인지했다.

누군가 한 번 참은 고통은 또 참을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직접 겪어 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그건 개소리다.

한 번 참든 두 번 참든 고통은 고통이었다.

고통스러워서 입에서 신음이 나오려고 하는데,

[광합성 에너지(리히텐베르크) 36%]

알림창이 떠올랐다.

빠른 속도로 차오른 퍼센티지가 눈에 띈다.

퍼센티지는 나흘 동안 한진환과 함께하면서 21%까지 차올랐었다.

그런데 그게 방금 두 번 맞았을 뿐인데 15%가 차올랐다.

"하. 하하, 하하하하!"

그걸 보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꽝!

그 웃음을 지워 버리겠다는 듯 한진환이 또다시 벼락을 떨어뜨렸다.

이번엔 피해 냈다.

당연히 벼락을 보고 피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떨어뜨리겠거니 예상하고 피한 거다.

그런 만큼 완벽하게 피해 내지는 못했다.

벼락은 내 오른팔을 맞췄다.

그 한 방에 오른 팔뚝이 떨어져 나갔다.

"...!"

그 순간, 한진환이 멈춰 섰다.

오른 팔뚝이 떨어져 나간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이번 대련은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실험 같은 것이었다.

생사결이 아니었으니 떨어져 나간 오른팔을 보고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던 이들이 "오른팔이!", "힐러, 힐러 불러와!"하고 외치는 것도 마땅했다.

그러므로 그 순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내가 가지치기를 한 게 몇 번인가?

오른팔이 떨어지는 건 내게 일상다반사다.

이런 일로 이제 와서 당황하지 않는다.

[광합성 에너지(리히텐베르크) 51%]

차오른 퍼센티지를 흘깃 보면서 왼손을 들어 올렸다.

"아르카!"

쾅!

왼손에서부터 아르카가 쏘아졌다.

그러나 그는 번개의 마나 소유자였다.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진환은 내 오른팔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 움직였는데도 그에게 쇄도하는 아르카를 손쉽게 피했다.

우르르 꽝!

그러고는 다시 벼락을 떨어뜨렸다.

이번 벼락은 지금까지 쓴 세 방보다 소리가 훨씬 컸다.

소리가 큰 만큼 더 빨랐고, 위력도 더욱 강했다.

그 증거로 퍼센티지도 훨씬 말이 올랐다.

[광합성 에너지(리히텐베르크) 71%]

한 번에 20%가 오른 것이다.

나쁘지 않은 속도였다.

이렇게 버티면 금방 100%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광합성 모드를 쓰면 지금보다도 반응할 수 있으리라.

물론, 모드를 써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김무연과 싸울 때도 광합성 모드를 썼지만 혼자서는 무리였다.

그때보다 더 강해지긴 했지만, 눈앞의 상대는 더욱 강했다.

그 때문에 반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도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아르카가 오른손으로 되돌아왔다.

한진환이 완전히 회복된 오른손과 그 손에 들린 아르카를 보며 씩 웃었다.

"이제 좀 제대로 해 볼까?"

"…기대하던 바입니다."

"그렇게 나와야지. 그럼-"

"대련 멈춰!"

한진환의 목소리를 끊는 배 사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귓속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부터 들려왔다.

나와 한진환은 동시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구경꾼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곳에 배 사무관이 서 있었다.

커다란 두 눈에 불꽃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녀의 옆으로 귀를 막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배 사무관은 우리의 시선이 모이자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제대로 하긴 뭘 제대로 해요!"

그 말에도 한진환은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무시하고 강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도 따라서 반응하기 위해 아르카를 높이 쳐들었다.

"어어? 그만두라니까!"

또다시 배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무슨 사람 목소리가 저렇게 큰 걸까.

"일하러 안 갈 거예요? 프로답지 못하게?"

프로답지 못하게.

그 말이 나오자 한진환의 입가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정색한 건 아니다.

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까와는 달리 힘이 없는 미소다.

흥이 전부 식어 버린 듯하다.

"…쩝. 저 말도 맞는 말이긴 하지."

그리 말하면서 한진환은 자세를 풀었다.

풀썩.

나는 아르카를 품에 안으며 주저앉았다.

멀쩡한 듯 버티고 서 있었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다치고 회복하는 일을 반복하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대련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충분한 이득이 있었다.

[광합성 에너지(리히텐베르크) 71%]

히히. 거의 다 찼다.

***

배 사무관과 함께 장관실로 돌아갔다.

시침이 어느새 2시를 가리키려 하고 있었다.

들어서자 황 장관이 큭큭 웃으며 우릴 맞이했다.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나?

"한바탕했다면서?"

재미있는 일이 나와 한진환의 대련이었던 모양이다.

한진환이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았고, 배 사무관은 맞은편에 앉았다.

"알고 있었습니까?"

"건물 전체가 두 사람 얘기로 시끌시끌한데 어떻게 몰라?"

"아…."

"큭큭, 그래서? 만족할 만큼 싸웠나?"

"아뇨. 수현이가 막는 바람에 중간에 그만뒀습니다."

"공적인 자리입니다, 한진환 헌터님."

배 사무관이 차갑게 말했다.

수현이라고 하는 걸 보니, 내 생각보단 둘 사이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한진환만 친근하게 대하는 걸지도.

황 장관이 날 바라봤다.

"중간에 그만뒀다니… 자네도 아쉽겠구만?"

아쉽겠다?

아니, 그렇지 않다.

배 사무관이 대련을 말려 줘서 다행이었다.

대련장에서 나는 광합성 모드를 쓰려고 했었다.

문제는 그걸 쓰고 나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거다.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몸이 돼서 절전 기능을 사용해야 했다.

쓰지 않을 수도 있기는 했지만, 깨어 있어 봤자 그 상태로는 다른 사람을 지켜 낼 수 없다.

그걸 썼으면 지금쯤 골골대고 있거나 기절해 있었을 거다.

정말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아뇨, 원래 목적은 이뤘으니 상관없습니다."

"원래 목적?"

"제가 한 선배 공격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지 알아보는 거였습니다."

"아하. 그렇군. 진환, 어떨 것 같나?"

황 장관이 한진환에게 물었다.

배 사무관도 궁금한 듯 한진환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력을 내도 문제없을 것 같던데요?"

그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한진환의 말에 놀란 것 같다.

그럴 수밖에.

그는 힘을 내면 낼수록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해서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정부나 협회 그리고 길드에 적을 두지 않고 솔로 헌터로 활동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게 정말인가? 립서비스 아니고?"

"이런 거로 립서비스 해서 뭐합니까?"

"허…."

황 장관이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나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나를 한진환이 전력을 내도 괜찮을 수준의 헌터일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것 같다.

"과연, 사람들이 자네에 대해서도 떠들던 이유가 있었군…."

"저요? 저에 대해 떠든다고요?"

"진환도 진환이지만, 지금 자네가 엄청나다는 말도 자자해."

"…왜죠? 맞은 기억밖에 없는데."

뭐가 엄청나다는 걸까.

대련하는 동안 공격 한 번 성공 못 하고 벼락을 얻어맞기만 했는데.

나무껍질은 소용이 없었다.

자동으로 다시 발동됐지만, 벼락에 맞을 때마다 파괴됐었다.

한진환의 벼락이 새싹이의 껍질보다 훨씬 강하다는 소리다.

"벼락에 아무리 맞아도 멀쩡했다면서?"

"멀쩡하지는 않았죠. 재생한 거니까."

"그 재생했다는 거. 그게 중요한 거야. 진환의 번개엔 재생을 억누르는 효과가 있거든."

"…그랬습니까?"

그런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소린 들은 적 없었다.

한진환을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황 장관이 말을 이었다.

"재생 스킬 있다고 괜찮으면, 진환이 괜히 혼자 다니겠나."

"아, 그러네요."

"자네 오른 팔뚝이 날아갔는데 막 웃었다지?"

"웃기는 했습니다만…."

"그 모습 보고 소름 돋았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몇몇은 자넬 무서워하던데."

"…그렇습니까."

"자, 자. 그런 얼굴 하지 말게. 진환의 공격에 맞고 지금 그렇게 멀쩡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자넨 그 실력을 입증한 셈이니."

"장관님."

배 사무관이 황 장관을 부른다.

나를 향하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을 때, 그녀는 손목의 시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시계는 2시 1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황 장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이런 얘기를 재미있게 떠들 때가 아니었지."

"이제 출발하는 겁니까?"

"맞아, 공항으로 출발하려고 두 사람을 부른 거였네."

그리 말하면서 황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곧바로 일어났다.

알레딩 밀러를 태운 비행기는 저녁 5시쯤 도착할 예정이었다.

슬슬 출발하면 적당할 것이다.

"자, 출발해-"

노랫소리가 황 장관의 말을 막았다.

그 노래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부터 들려왔다.

전화가 온 것이다.

황 장관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나 지금 급하니까… 뭐?"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들으면 안 될 것을 들은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대체 뭘 들었기에 저러는 걸까?

"그게 정말이야? 확실해? 하…. 알았어. 일단 끊어."

황 장관은 전화를 끊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건다.

배 사무관이 그를 재촉하려는 듯 나서지만, 그가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바쁜 상황인 걸 알면서도 그녀를 막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는지 황 장관이 입을 열었다.

"아, 여보세요? 대통령님. 저 황정희 장관입니다."

오? 대통령?

지금 통화하는 사람이 대통령이라고?

배 사무관도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중국이 조사팀을 보냈답니다."

엥? 중국?

갑자기 중국이 왜 나와?

"그리고… 조사팀에 리롄제와 그의 수제자가 포함돼 있답니다."

"뭐? 그 영감탱이가?"

"조용히…!"

한진환이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었지만, 소리가 제법 컸기 때문에 배 사무관이 그를 제지했다.

그도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다물고 다시 황 장관을 바라봤다.

리롄제….

그는 중국의 S급 헌터다.

나이가 90이 넘어 현재 현존하는 S급 헌터 중 나이가 가장 많기도 하다.

"네, 네. 방금 중국에서 통보해 왔다고 합니다."

연락도 아니고 통보라니….

중국답다면 중국다운 행동이었다.

황 장관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게… 미국에서 밀러가 오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그녀 때… 라고?

"네. 그녀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에서도 리롄제를 보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견제하기 위해서라니….

밀러는 그냥 마법사로서 호기심 차원에서 오는 거였다.

그걸 굳이 견제할 필요까지 있을까?

중국도 따로 연구팀을 보내는 정도면 딱 적당했을 거다.

마법사도 아닌 리롄제를 보낼 필요는 없었으리라.

"...."

그나저나, 일이 참 이상하게 됐다.

알레딩 밀러. 리롄제.

한국에 S급 헌터가 두 명이나 오게 됐다니.

이러다 러시아에서도 보내는 거 아닌지 몰라.

...에이, 설마?

제100화

"아니요, 제가 나가겠습니다."

황 장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통화 상대는 보고 있지도 않을 텐데 앞에 있는 것처럼 공손하다.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도희와 통화하는 나 같다.

제멋대로 친근함이 느껴질 정도다.

"지금 대통령님께서 나가겠다고 하시면 미국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네.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그쪽에선 그리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황 장관의 말이 옳다.

현재 한국은 미국 조사팀을 맞이하러 장관이 나가겠다고 한 상황이다.

대통령이 오늘 미국 조사팀을 만난다고 해도 미국 측에서는 기분 나빠할 수 있다.

중국의 행보에 따라서 맞이하는 사람이 변경된 것이니까.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말이다.

꼬투리를 잡으려면 끝이 없는 법이다.

애초에 작은 꼬투리도 잡지 못하도록 행동하는 게 가장 좋다.

"네, 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황 장관이 스마트폰에 귀를 갖다 댄 채로 멈췄다.

통화가 완전히 끊기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스마트폰에서 사람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됐을 때, 그가 한숨을 "흐아하아아!" 내쉬었다.

그런 후 우리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방금 통화로 알았겠지?"

"네."

"덕분에요."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대답했다.

그는 통화할 때 일부러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다.

통화 상대에게 말하면서 우리에게도 전달한 거다.

중국이 조사팀을 보냈다.

조사팀에 리롄제와 그의 수제자가 소속돼 있다.

그 두 가지 정보를.

"배 사무관. 경호 인력을 늘려야 할 것 같으니 알아보도록 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니, 마인 길드에도 연락해보고."

"마인…을요?"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어쩔 수 없어. 아이가이온이랑 일대는 경호 의뢰 거부했다면서."

"…네. 지금 바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부탁해."

배 사무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가려고 돌아서는데, 그녀의 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아, 죄송합…!"

그녀는 당황하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무음 상태로 변경한 걸 깜빡한 모양이다.

하긴, 우리랑 같이 장관실에 들어왔으니 스마트폰을 조작할 시간은 없었다.

"...?"

어라, 뭔가 좀 이상하다.

배 사무관이 스마트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다.

충격을 받은 사람 같아 보였다.

어디에서 연락이 왔기에 저러는 걸까.

"…배 사무관?"

그녀는 화면을 몇 초간 바라보다

천천히 우리를 돌아봤다.

"왜 그러나?"

"저, 그게…."

황 장관의 질문에도 말끝을 흐린다.

그러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한 듯 화면을 내밀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러시아 대사관]

라는 여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러시아.

그곳은 나머지 S급 헌터 '막심 스미르노프'가 있는 나라다.

화면을 본 우리는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너 나 할 것 없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연락이 올 줄이야.

바보 아냐?

"러시아 대사관이라…."

한진환이 중얼거릴 때 배 사무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러시아 말이 유려하게 흘러나왔다.

러시아 말도 할 줄 아나 보다.

대화를 이어나가던 배 사무관이 황 장관을 쳐다봤다.

통화 상대를 바꾸기 위함이리라.

황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고, 배 사무관은 러시아 말로 뭐라고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곧 장관님께 전화 갈 겁니다."

"그래."

대답하자마자 책상 위의 전화기가 울렸다.

황 장관은 한숨을 짧게 내쉰 후 전화를 받았다.

그도 배 사무관처럼 러시아 말로 대화를 나눴다.

고위급 공무원 정도 되면 원래 다른 나라 말도 잘하는 모양이다.

물끄러미 한진환을 바라봤다.

설마….

"혹시 무슨 말 하는 건지 알겠습니까?"

"…알겠냐?"

한진환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안도감이 들었다.

난 그 안도감을 참지 않고 드러냈다.

"휴, 다행이다."

"뭐가?"

"난 또 나만 러시아 말 못 하는 줄 알았죠,"

"우리가 정상이고, 저 사람들이 비정상인 거야."

"그렇죠?"

러시아 말을 못 하는 나와 한진환은 배 사무관을 바라봤다.

러시아 말을 할 줄 아는 그녀에게 설명을 듣기 위해서다.

황 장관이 어떤 단어를 말했을 때,

"...!"

배 사무관의 눈이 커지고 입이 헤 벌어졌다.

그 얼굴을 보고 우리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의 S급 헌터가 오고 있고, 중국이 S급 헌터를 보냈다.

그런 상황에 나머지 S급 헌터가 있는 러시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뻔하다.

러시아는 던전 조사팀과 함께 S급 헌터를 보냈을 것이다.

막심 스미르노프를….

"да, рад встрече."

다, 랏 브스뜨레체…?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를 말을 하고는 황 장관은 전화를 끊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바로 통화를 끝낸 걸 봐서 인사말 같은 것이었으리라 유추할 뿐이다.

황 장관이 등받이에 드러눕듯 등을 기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 탓에 살짝 붉어진 얼굴은 주름 몇 줄이 늘어난 듯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왜요, 러시아놈들이 뭐랍니까?"

한진환이 묻자 황 장관은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 가지 않느냐고 묻는 듯하다.

그의 생각대로 짐작이야 됐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확실하게 듣고 싶은 것이다.

나도, 한진환도.

"…두 사람이 짐작한 게 맞아."

"그렇다면…."

"그래. 스미르노프가 온다는군. 러시아 연구팀과 함께."

"이야…."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전 세계 네 명밖에 없는 S급 헌터 중 세 명이 한국에 모이게 된 거, 네요?"

"그렇지."

"흥미진진한걸요?"

"그러게나 말이다."

나와 한진환은 씩 웃었다.

황 장관과 배 사무관은 우릴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들은 즐겁나? 난 지금 끔찍한데."

"이건 악몽이에요. 악몽…."

"뭘 또 그렇게까지 표현합니까."

한진환은 킥킥 웃었지만, 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갔다.

내가 그들 모두를 끌어들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밀러와 중국의 리롄제, 러시아의 스미르노프까지도.

가지치기를 썼을 때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커진 건지, 원…."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

황 장관이 말을 받았다.

"화염산 던전이 원래대로 되돌아왔을 때…. 전 세계에서 연구팀을 보낼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었지."

"저도 그랬습니다."

배 사무관이 바로 긍정했다.

던전의 회복은 세계 최초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전 세계 연구팀이 한국에 와서 연구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히 일어날 일이다.

하지만 S급 헌터 세 명이 오는 상황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일이 이 정도로 커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때, 귓가에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한 번 들었었던 노래였다.

황 장관의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던 노래다.

"...."

황 장관은 받기 버튼은 누르지 않고 스마트폰을 노려봤다.

받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럴 법도 하다.

오늘 그의 전화기는 그칠 줄을 모르고 울려 댔다.

내가 본 것만 해도 벌써 세 번째다.

전화기는 내가 보지 못했을 때도 저렇게 울려 댔을 것이다.

아마도 현재 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그이지 않을까.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뭐야?"

거친 목소리로 묻는다.

나 힘드니까 용건만 말해라.

내 귀에는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 지금… 부터… 연락…!

스마트폰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다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왜?"

황 장관이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두 눈썹이 달라붙을 정도로 좁혀진 얼굴로 자세히 설명해 보라는 듯 다그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통화 상대가 말하는 것이 썩 좋은 내용은 아닐 것 같다.

연락해 왔다는 누군가가 바라지 않던 사람인 모양이다.

잠시간 대화를 나누다가 황 장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알겠으니까 끊어."

- …십시오!

"...."

전화를 끊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배 사무관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후우우우."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니라 한숨이었다.

배 사무관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장관님?"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는군."

"미국이요? 무슨 일로요?"

"...."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뭐길래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무슨 일로 연락을 했을까.

아.

혹시 이건가?

"도착 날짜를 늦추기라도 하겠답니까?"

중얼거리듯 물었다.

황 장관은 나를 쳐다봤다.

가만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

"...설마, 맞습니까?"

"하아아아…."

또다시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니라 깊은 한숨이다.

한숨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히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물어본 것이 맞는 모양이다.

미국이 도착 날짜를 변경했다?

그 의도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국도 중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S급 헌터가 포함된 연구팀을 한국에 보냈다는 정보를 받았을 테니까.

"…뻔해도 너무 뻔하네요."

"후우, 동감이네…."

그러니까, 이건 기 싸움 같은 거다.

우리가 마지막에 입국할 테니 너희가 먼저 입국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유치한 기 싸움의 승자는 미국이 될 터였다.

언제나 그랬듯.

세계 최강국이니까.

"이러다 에디탓 그위친도 오는 거 아니야?"

한진환이 대수롭지 않게 툭 한 마디 내뱉었다.

에디탓 그위친.

미국의 또 다른 S급 헌터의 이름이다.

황 장관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설마. 그렇게까지 바보겠나?"

그가 웃은 건 중국이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이후 처음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듯한 태도다.

그런데….

"...."

"...."

나와 배 사무관은 그 태도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에디탓 그위친이 오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또다시 노랫소리가 울렸다.

황 장관의 스마트폰에서.

"…씨발."

스마트폰을 보자마자 황 장관이 욕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한진환을 노려봤다.

마치 전화가 온 이유가 그에게 있다고 따지는 듯했다.

억울해진 한진환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또 뭐야!"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는 바람에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제 목만 벅벅 긁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미국? 또 왜. 날짜 변경했으면 됐지 또 무슨 소릴 하려고…."

- …! …가 온답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온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일지는 굉장히 뻔했다.

방금 한진환이 농담조로 던졌던 이름의 주인일 터였다.

황 장관이 가만히 있다가, 손을 들어 주름진 이마를 짚었다.

- …님? 장관님?

"…듣고 있어. 그래. 들었다고. 알겠으니까 끊어…."

장관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간으로 치면 30분 정도 됐을까?

그 짧은 시간 안에 황 장관은 폭삭 늙어 버렸다.

"에디탓 그위친이 온다는군…."

"...."

다시 정리하자면….

이로써 한국에 S급 헌터 전원이 모이게 되었다.

한진환까지 합쳐 세계에서 가장 강한 헌터 5명이 모이게 된 것이다.

세계사에 남을 일이 일어나 버린 거다.

그 일을 바로 눈앞에서 본 나는,

"거, 기 싸움 지랄 맞게 하네."

그런 감상평을 남겼다.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들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약소국의 설움인 건가.

제101화

흑염소를 키우는 목장에 왔다.

서울에서 다시 강원도로 온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세계수 퀘스트의 조건인 동물들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앞에 있는 근육질 남자에게 노란색 지폐 뭉치를 건넸다.

흑염소 목장 주인이 건네받은 지폐를 센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네, 확인됐습니다."

익숙한 듯 지폐를 능숙하게 센 목장 주인이 빙긋 웃는다.

주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값을 치르고 산 어린 흑염소 무리를 바라봤다.

새끼 흑염소의 검은 사각형 눈동자가 날 마주 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한 마리가 메에 울었다.

목장 주인이 질문을 툭 던졌다.

"근데 대체 뭐 할 생각입니까?"

"네?"

"당신이지요? 오늘 새벽부터 목장 들르면서 닭이니 돼지니 구매한 사람."

"어라?"

그의 예상대로다.

난 이곳 목장 지역에서 흑염소만을 구매한 게 아니다.

새벽부터 여러 목장을 들러 짝수로 동물들을 구매했다.

수컷 암컷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지금 당신 인근 목장주들한테 뜨거운 감자예요."

"내가요?"

"네. 어떤 동물이든 넉넉히 사 가는 큰손이라고."

넉넉히 사긴 했다.

짝수를 맞춰서 6마리에서 10마리 정도씩 샀다.

그런데… 동물 사는 게 사람 시선을 끄는 일이었던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모습을 본 목장 주인이 피식 웃는다.

"신기해서 그럽니다."

"뭐가요?"

"그렇게 사 간 동물이 수십 마리일 텐데 도통 보이질 않잖습니까."

그러면서 목장 주인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내 뒤를 봤다.

내 뒤에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주차된 검은 세단뿐이었다.

당연히 검은 세단에는 동물들을 태울 자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늘 산 동물들을 전부 태우려면 가장 큰 수송 트럭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한 겁니까? 마법 주머니에는 생명체를 넣을 수 없을 텐데요."

그의 말마따나 마법 주머니에 들어가는 건 생명이 없는 것들뿐이다.

오래된 백골이라든가 몬스터 사체 같은….

아무리 온갖 것을 담을 수 있는 마법 주머니라고 해도 생명체를 넣을 수 없었다.

내가 오늘 산 동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성역에 있었다.

사는 족족 성역에 집어넣었다.

지금쯤 엘프들이 열심히 목장을 만들고 있을 거다.

"목장이라도 차릴 생각입니까?"

대답하지 않자 목장 주인이 다시 한번 물었다.

목장이라도 차릴 생각이냐고?

바로 맞췄는걸.

뭐, 차리는 건 내가 아니고 성역에 있는 엘프들이었지만.

"비슷합니다."

"그렇게 많이 살 거라면…."

"...?"

"그냥 이곳을 사실 생각은 없습니까? 저렴하게 넘길 용의가 있는데요."

"이곳을 말입니까?"

목장 주인의 말에 고개를 돌려 목장을 바라봤다.

흑염소들이 넓은 초원을 내버려 두고 한곳에 모여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목장 주인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아마도 제 주인 가까이에 있고 싶은 듯했다.

저렴하게 넘길 용의가 있다는 사람치고는 흑염소들과 사이가 좋아 보인다.

뭉쳐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는 목장 주인의 시선도 이유 모를 아련함 같은 것이 담겨 있다.

"…근처에 B등급 게이트가 새로 나타났습니다."

"게이트가요?"

"네. 도청에서 관리해 주고 있긴 합니다만…."

"그럼 문제없는 거 아닙니까?"

게이트가 A등급이었다면 모를까.

B등급 정도라면 도청에서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다.

목장 주인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반복적인 끄덕임에는 힘이 없다.

그는 힘없는 끄덕임만큼이나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관리만 해 준다면 문제는 없지요."

"무슨 일 있습니까?"

"전 원래 경상도에서 목장을 했습니다."

"경상도에서요? 그런데 왜 강원도까지…. 설마…?"

"네. 맞습니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 한순간에 목장을 잃었습니다."

"...."

"보험을 들어 놓아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린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목장만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마 그의 시선 끝엔 새롭게 나타났다는 B등급 게이트가 있지 않을까.

지역을 옮겨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게이트가 나타났다.

그것만큼 힘이 빠지는 일이 또 있을까.

"…저도 이 넓은 장소는 필요가 없어서요."

"그렇습니까…."

목장 주인이 쓰게 웃는다.

동물들로 목장을 만들려는 곳은 성역이었다.

엘프들이 이곳으로 건너올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럴 수 없었으므로 내게 이런 목장은 필요가 없었다.

안타깝긴 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강원도청이 제대로 게이트를 관리해 주길 바랄 수밖에.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네. 괜한 소리 한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 아이들…. 잘 부탁합니다."

"네. 수고하세요."

인사를 나눈 후 목장 주인과 헤어졌다.

흑염소 여섯 마리를 이끌고 걷는데,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잘 부탁한다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잘 키워 봐야 이 아이들은 엘프들의 식사가 될 운명이었다.

가축의 끝이 다 그런 거긴 한데….

메에에.

흠…. 먹을 때 감사한 마음이라도 담아야겠군.

검은 세단으로 돌아가는 동안 어린 흑염소들은 나를 잘 쫓아왔다.

주인을 떠나는데도 잘 따라와 줘서 다행이다.

그때, 알림 창이 떠올랐다.

[세계수 어린나무가 호기심이 담긴 시선을 느꼈습니다.]

새싹이가 보낸 메시지다.

호기심이 담긴 시선이라….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뻔하다.

목장 주인이 날 쳐다보고 있는 거다.

말했던 대로, 내가 흑염소를 끌고 어떻게 돌아갈지 궁금한 마음이리라.

저렇게 궁금해하는 걸 보니 직접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직접 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차 앞에 서서 돌아보니 역시나 목장 주인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

그에게 씩 웃어 준 후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 속에서는 SD 캐릭터 외형의 엘프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엘프들은 목장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알테라-쇼넴을 쓰는 이는 없었다.

레지나도 성역을 떠나 위그드라실로 건너가지 않고 다른 엘프들과 함께 목장을 만들었다.

"자, 염소들아. 여기 봐."

오른 검지에 따스한 손길을 쓰며 앞으로 내밀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흑염소의 이마에 갖다 댄 후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했다.

그러자 이마를 두드린 흑염소에서부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사라졌을 땐 흑염소도 사라진 상태였다.

새싹이에게 비료를 건네줄 때와 같은 행동이다.

그렇게 지구에서 사라진 흑염소는 화면에 캐릭터처럼 나타났고, 어리둥절한 듯 좌우를 연신 돌아봤다.

반면 새롭게 나타난 흑염소를 본 엘프들은 밝게 웃었다.

엘프들의 얼굴은 마치 (^-^) 이모티콘 같았다.

"흐흐, 귀여워라…."

나머지 흑염소들도 빨리 보내 줘야겠다.

눈앞에 남은 다섯 마리 흑염소를 바라봤다.

메에에!

어린 흑염소들이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동료를 사라지게 한 내가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동료를 없애 버렸으니 흑염소들에게 나는 도살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자…, 괜찮아. 조금만 참아. 금방 네 친구 만나러 가게 해 줄게."

내 말을 들은 흑염소들은 더 날뛰기 시작했다.

메에, 메에!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표정이 좋지 못했던 것일 수도….

흑염소들은 도망치고 싶은 듯했지만, 밧줄로 묶여 있어 그럴 수 없었다.

붙잡고 있던 밧줄을 잡아당기며 빙긋 웃어 주었다.

그러고는 검지를 들어 올린다.

"괜찮아, 괜찮아. 이리 와, 흑염소야."

메에!

흑염소들은 진정할 생각을 않고 울부짖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녀석들의 이마를 따스하게 두드려 준 것이다.

불쌍하다고 시간을 끌어 봤자 힘든 것은 흑염소들이었다.

자, 어서 네 친구 만나러 가렴!

메에에에에!

***

귀를 후볐다.

아직도 귓가에 흑염소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뭐, 비슷하긴 한가?

엘프들이 키워서 맛있게 요리해 먹긴 할 테니.

"가만 보자. 지금까지 산 게 뭐 뭐였더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열쇠를 돌렸다.

차는 시동이 걸리며 미세하게 진동했다.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가며 오늘 산 동물들을 셌다.

"닭 열두 마리, 돼지 여덟 마리, 소 네 마리, 흑염소 여섯 마리…."

지금까지 산 동물은 총 네 종류 서른 마리다.

한 종류만 더 사서 성역으로 보내고 다녀와야겠다.

오늘치 식량 갖다 줄 겸 퀘스트를 완료할 양이 되는지 물어볼 겸.

"마지막으로 뭘 사서 보내는 게 좋으려나…."

중얼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멍하니 있자 나무 푯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을 가리키는 푯말에는 익숙한 동물이 쓰여 있다.

[양 목장]

"…오."

양이 좋겠다.

여섯 마리 정도 구매하면 딱 좋을 것 같다.

결정한 나는 바로 출발했다.

바로 옆에 목장이 있는 찻길은 험해서 속도를 함부로 올릴 수 없었다.

그래도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운전하는 동안 푸른 초원이 눈에 들어와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으니까.

B등급 게이트가 생겨 불안함을 품고 있는 목장 지역이었지만, 이렇게 달리는 동안에는 평화로워 보이기만 했다.

어제는 미국이니 중국이니 러시아니 난리였는데….

아니, 정말로 난리가 나기는 했다.

미국이 날짜를 변경하자 중국과 러시아도 날짜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푸흐흐…."

입가의 미소가 웃음이 되었다.

어제 세 나라가 저지른 멍청한 짓이 생각나서다.

그들은 기 싸움을 하겠답시고 입국 날짜를 계속 변경했다.

네가 먼저 입국하라고, 내가 마지막으로 입국하겠다고.

그리 말하는 것처럼 날짜를 엎치락뒤치락 바꿔 댄 것이다.

그 결과, 입국 날짜는 말도 안 되게 밀려나 버렸다.

어느 정도였냐면….

***

"19일? 그러니까, 일주일 후?"

미국이 변경한 입국 날짜를 들은 한진환이 되물었다.

배 사무관은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황 장관은 입을 열 힘도 없는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죽은 슬라임처럼 흐물흐물 녹아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세 나라에 시달렸으니 이해는 되었다.

옆에서 듣고 있기만 했던 나도 맷돌 손잡이를 잃어버린 기분인데, 본인은 오죽할까.

"후우우."

한진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통화해 봐도 되겠습니까?"

이러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나 보다.

그 말에 늘어져 있던 황 장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통화?"

"네. 이대로 세 나라가 꼴값 떠는 걸 계속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럼 통화 상대는-"

"당연히 지인들이죠."

"...."

황 장관은 입을 다물었다.

배 사무관도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한진환과 황 장관을 쳐다봤다.

지인들.

그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알레딩 밀러, 리롄제, 막심 스미르노프.

각국의 S급 헌터들을 뜻하는 것이다.

황 장관이 몸을 고쳐 앉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정중한 태도로 한진환에게 고개를 숙인다.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황 장관도 그가 나서는 게 나으리라 판단한 듯하다.

옳은 판단이었다.

현재 상황에서는 정부 고위급 인사인 황 장관보다 한진환이 더 나았다.

각국의 S급 헌터들과 지인이라고 부를 만큼 친분이 있었으니까.

나라를 대표하는 연구팀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결정권자는 그들일 터였다.

배 사무관이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한진환에게 물었다.

"어디에 먼저 전화 연락할 생각이죠? 역시 미국?"

"아니."

"그럼 중국이에요?"

"거기도, 아니…."

"예? 그럼 러시아? 왜 거기를 먼저…?"

"...."

한진환은 스마트폰을 조작하느라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황 장관과 배 사무관은 대답해 주길 기다리며 그를 쳐다봤다.

이 사람들 정말 모르는 건가?

"…한 선배는 어디랑 먼저 통화할 생각이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린가?"

"동시에 통화할 생각이죠."

"동시? 세 나라랑?"

"네."

"아니, 어째서요? 우선 한나라씩 얘기해 보는 게 좋을 텐데요."

"그야…."

머리를 긁적이며 한진환을 바라봤다.

그는 열심히 어플을 조작하고 있었다.

왓쳐 링커.

화면에 영상 통화를 위한 어플이 떠 있었다.

"귀찮으니까요."

"뭐…?"

"나라면 그렇게 할 겁니다."

동시에 통화하면 한 번에 끝낼 수 있다.

그런 일을 뭐 하러 세 번에 나눠서 한단 말인가?

시간 낭비도 그런 시간 낭비가 없다.

"바로, 맞췄어…."

한진환이 그리 말하면서 스마트폰을 내려놓는다.

화면에서부터 빛이 쏘아졌고, 세 개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홀로그램 아래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데도 익숙한 얼굴들이 떠올랐다.

세 명의 S급 헌터들이다.

제102화

홀로그램 화면에 세 명의 S급 헌터가 떠올랐다.

왼쪽부터 막심 스미르노프, 알레딩 밀러, 리롄제다.

다들 비슷하게 접속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알레딩 밀러였다.

금색 눈동자가 눈에 띄는 흑인 마법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마법을 다루는 그녀는 한진환을 보자마자 밝게 웃었다.

"Hello, Han."

"반가워, 밀러."

한진환도 밝게 웃으며 인사에 화답했다.

그 모습을 보니 두 사람은 사이가 좋은 듯했다.

이어서 러시아의 막심 스미르노프가 떠올랐다.

방금 밀러를 봤기 때문인지 흰 피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얼굴은 홀로그램 화질이 별로 깨끗하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잘생겼다.

길거리에 세워 두면 지나가는 여자가 한 번씩은 돌아보지 않을까 싶다.

뭐, 내 기준으로는 태천이가 조금 더 잘생겼다.

팔이 안쪽으로 굽은 것일 수도 있지만, 원래 외모란 게 제 눈에 안경이지 않은가.

"...."

"여전히 무뚝뚝하네."

스미르노프는 인사말을 전하는 대신 고개만 숙였다.

여전하다는 걸 보면 원체 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인가 보다.

'폭군'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으면서 내성적인 걸까…?

마지막으로 리롄제가 접속했다.

흰 눈썹이 길게 자라 두 눈을 가린 얼굴은 무협 영화에서 보던 도사 같았다.

'선인'이나 '신선'으로 불리길 바란다더니….

리롄제는 헐헐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애송이."

"8년 만에 만났는데 또 애송이야? 영감탱이도 여전하네."

"네놈도 버릇없는 점이 변함없구나."

오. 놀라운걸.

리롄제는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

그것도 아주 유창한 실력을 갖췄다.

외국인이 다른 나라 말을 할 때 흔히 나오는 멈칫거림이 전혀 없었고 발음도 정확했다.

각자 인사를 나눈 후 한진환은 고개를 돌렸다.

내 쪽은 아니다.

반대편에 서 있는 배 사무관 쪽이다.

"...?"

배 사무관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왜 보고 있는지 모르겠는 듯하다.

나도 그가 왜 화면 속 세 사람이 아니라 그녀를 보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뭐해, 통역 안 해?"

"아… 네! 하, 하겠-"

"통역 안 해도 괜찮아, 한."

홀로그램 화면에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산 사람처럼 유려한 한국말이었다.

한진환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밀러? 한국말 배웠어?"

"아니, 새로운 마법을 배웠지."

"새로운 마법?"

"동시통역 마법이야. 내 시야에 들어온 사람들은 통역 없이도 대화할 수 있어."

그게 말이 되나…?

마법에 대해선 잘 모른다.

모르지만 그녀가 말한 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안다.

밀러는 지금 비행기에 탑승해 있었으니까.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다는 소리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마법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고.

시야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거리와 상관없이 마법을 통하게 할 수 있다니….

…꿀꺽.

작게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 사무관이다.

그녀는 놀란 토끼처럼 눈이 휘둥그레져서 침을 삼켰다.

침 넘기는 소리에 당황한 듯 목을 감싸 쥐었다.

"…과연 대단하군. 덕분에 편해졌어."

"별말씀을."

"한국말 잘하던데, 뭐."

"그렇지 않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한번 해야 해서 힘든-"

"언제까지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어 댈 건가."

조용히 있던 스미르노프가 리롄제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리롄제의 흰 눈썹이 움찔했다.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아마 그의 홀로그램 화면에선 오른쪽에 스미르노프가 있는 것 같다.

"말버릇이 아주 고얀 놈이로고…."

"...."

리롄제와 스미르노프가 서로를 빤히 쳐다본다.

바로 옆에 있었으면 마나라도 내뿜었을 것 같다.

각자 비행기에 탑승한 채라서 그런 짓은 하지 않았지만.

짝.

한진환이 손뼉을 쳐서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그만들 해. 지금 화를 내고 싶은 사람은 나니까."

"음? 무슨 일 있나, 애송이?"

"이 능구렁이 영감탱이 또 모르는 척하네. 지금 당신들 나라에서 입국 순서로 싸우고 있는 거 몰라?"

"헐헐헐."

"이런. 오해하지 말아 줘, 한. 난 그런 거 상관없다고 분명하게 말했어. 지금 당장이라도 입국해서 그곳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

"...."

역시.

세 사람 다 지금 상황에 관해 아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연구팀이라고 해도 S급 헌터가 함께하는 한 리더는 연구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다.

그게 S급 헌터라는 것이다.

한진환이 말했다.

"밀러. 그렇다면 미국이 내일쯤 입국해 주면 안 될까?"

"한, 미안해. 그건 안 돼."

"어째서?"

"나한테 권한이 없거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S급 헌터인 그녀한테 권한이 없다?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지만, 밀러는 분명히 "권한이 없거든"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다.

"한 선배. 미국 결정권자는 에디탓 그위친일 겁니다."

"그위친?"

"오. 그 말이 맞아. 그위친과 함께하는 거라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결정권을 넘길 거야."

그리 말하며 어깨를 으쓱인다.

마법사답지 않은 넓은 어깨가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온다.

B급 이상 되면 마법사들도 육체 훈련을 시작한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라나 뭐라나.

하지만… 밀러의 어깨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해 보였다.

마법사의 어깨가 아니라 전사의 어깨 같다.

그녀는 키도 180cm 이상이라 나보다도 크다.

큰 키에 딱 벌어진 어깨의 소유자인 것이다. 부럽게.

밀러가 계속 말했다.

"난 그가 오면 함께 입국할 계획이야."

"언제 오는데?"

"우리가 처음 변경한 날짜 기억해?"

"어, 15일?"

"맞아."

"…그럼 이렇게 하지. 15일에 세 나라 모두 입국하는 거야."

한진환이 제안했다.

제안이 끝나자마자 밀러는 동의했다.

"아까도 말했지? 우린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라고. 두 나라가 오해하는 바람에 불타오르긴 했지만."

"…좋아. 당신들은?"

한진환이 양옆에 있는 스미르노프와 리롄제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삼자가 중재해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

그 정도면 명분이 된다.

어차피 입국 날짜를 변경했던 것은 기 싸움을 하기 위해서일 뿐이었으니까.

"동의하지."

"아무래도 상관없다."

"잘 생각했어들."

한진환이 빙긋 웃었다.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황 장관과 배 사무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날짜가 결정됐으니, 이제 순서가 남았다.

한진환이 미소를 유지한 채 질문을 던졌다.

"입국 순서는 어떻게 할래?"

"...."

"...."

"...."

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밀러는 미소지었고, 리롄제는 시선을 슬쩍 피했으며, 스미르노프는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이 사람들이 정말….

리롄제와 스미르노프는 그렇다 치고, 밀러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한진환도 그리 생각했는지 밀러를 쳐다본다.

시선이 닿자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뭐… 15일 6시쯤 입국할 거니까…."

말끝을 흐린다.

그 말이 내게는 "입국 시간을 말했으니 그다음은 너희 알아서 해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런 거 상관없다고 말해 놓고선….

뭐, 그녀도 미국인이니까 미국 정부의 뜻을 따라 주고 싶은 걸 거다.

리롄제와 스미르노프도 그럴 테지.

"러시아가 7시, 중국이 8시에 입국하면 되겠군."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지."

리롄제와 스미르노프가 서로를 쳐다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까처럼 주먹이라도 한 대 날릴 것처럼 노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입국 시간을 말한 밀러는 제삼자처럼 한 발자국 물러나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진환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한국도 좀 생각해 주지 그래."

"그게 무슨 소리냐, 애송이."

"S급 헌터 네 명이 한 곳에 전부 모이는 일이요. 행사도 진행될 거니 밤늦게 오는 건 좀 피해 줘. 내 부탁할게."

"...."

"...."

두 사람은 다시 생각에 빠졌다.

아쉽게도 아까처럼 금방 끝나지는 않았다.

1분, 5분, 고민이 계속됐다.

잠자코 기다리던 한진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길게 들이마신 호흡은 더욱 길게 내뱉어졌다.

아, 나는 저런 얼굴을 잘 안다.

앞으로 큰 사고를 저지르기로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렇다.

나와 태천이가 자주 짓곤 했던 얼굴이다.

그가 사고를 치기 전에 손을 뻗어 어깨를 붙들었다.

"선배, 진정해요."

"...음."

"내가 발언해도 될까요?"

그리 묻자 한진환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까 파르르 떨렸던 입꼬리는 히죽 올라갔다.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기대하는 사람 같다.

반면, 황 장관과 배 사무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물론 한진환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자리를 비켜 준다.

그러자 S급 헌터 세 명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오….

"…제안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놈이 뭔데 제안을 하지?"

"해 보게."

"감사합니다."

스미르노프는 따졌지만, 리롄제는 빙긋 웃으며 허락했다.

그 웃음을 마주 봐서일까?

한진환이 '능구렁이 영감탱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듯하다.

리롄제의 미소에는 진실이 담기지 않았다.

스미르노프처럼 말하고 싶지만, 아닌 척 점잖게 허락을 해 준 거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가?

"세 나라가 동시 입국하는 건 어떨까요?"

"호오?"

"...."

다행이다.

두 사람의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다.

리롄제가 하얗게 자란 긴 수염을 쓸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렇습니까?"

"한 가지 질문이 있네. 정치적으로 문제는 없겠나?"

"어…."

질문을 받는 나는 바로 배 사무관을 쳐다봤다.

나로서는 이 제안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지금 이 순간에 그런 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황 장관과 배 사무관이다.

둘 중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배 사무관이었고.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네, 괜찮습니다."

"흠. 확실한 건가? 이 일로 문제가 생긴다면 나도 자네도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은데."

확실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이긴 하는데, 나도 잘 모르는 문제라는 게 문제다.

그때 배 사무관이 스마트폰을 내게 내밀었다.

홀로그램 화면에선 보이지 않는 각도로.

[영국에서 그런 적 있음.]

[미국이랑 중국이 동시 입국, 장관급 둘이서 마중 나감.]

오. 센스 있는걸.

"네. 영국에서 선례가 있었으니, 확실합니다."

리롄제가 날 지그시 바라본다.

길게 자란 눈썹 때문에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날 훑어보는 것은 확실했다.

"중국은 자네의 제안에 동의하겠네."

"감사합니다."

"헐헐헐…."

리롄제는 웃으면서 등을 등받이에 기댔다.

그가 제안에 동의했으니, 이제 남은 건 스미르노프 하나다.

스미르노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네놈은 뭐냐?"

뜬금없는 질문을 해 왔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누군지가 중요한가?

질문에나 대답할 것이지….

뭐, 그래도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해 줘야겠지.

"백도운."

"처음 듣는 이름이군. 러시아는 네놈의 제안을-"

"잠깐만요!"

밀러가 끼어들었다.

스미르노프가 눈을 찌푸렸으나, 밀러는 그를 보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을 쳐다봤다.

"방금 백이라고 했나요?"

"네. 그랬는데요."

"틀렸다면 미안해요. 혹시, 하얀 성녀와 연관이 있나요…?"

"…제 동생입니다."

"오! 당신이 그녀의 오빠였군요! 그녀가 쓰는 마법을 본 적이 있어요. 나조차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한 마법을 썼죠."

신비한 마법….

그녀의 말대로 도희의 마법은 신비한 점이 많았다.

대표적인 특징이 살인을 저지르거나 다치게 하면 페널티를 받는다는 점이다.

도희가 터득하기 전까진 그런 마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듣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하네요…."

닮긴 뭐가 닮아.

도희는 오빠인 내가 봐도 예쁘게 생겼다.

그 얼굴과 내가 닮았다고 한다면, 그건 도희를 모욕하는 거다.

리롄제가 수염을 쓸며 말했다.

"하얀 성녀라면… 나도 들어 본 적 있군. 그녀가 속한 길드의 마스터가 제법 강하다지?"

"태천이를 압니까?"

"제자 놈한테 들었네. 한번 싸워 보고 싶은 놈이라고 했지."

"그렇군요…."

"너. 이태천의 친구인가?"

스미르노프가 물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표정이 바뀌었기 때문인가?

왠지 목소리도 한층 밝아진 것 같다.

"그런데?"

"…되었다."

갑자기 되긴 뭐가 돼?

"네가 하얀 성녀의 오빠이고, 천공의 기사의 절친한 친구라면…. 너는 내게 제안할 자격이 충분하다."

"뭐…?"

"러시아는 나 막심 다닐로비치 스미르노프의 이름으로 네 제안을 받아들인다."

얘 왜 이래?

제103화

세 나라의 입국 날짜와 시간이 정해졌다.

15일 화요일 오후 6시.

나와 한진환의 경호 의뢰도 자연스럽게 그 날짜로 밀려났다.

사흘의 자유시간이 생긴 것이다.

아침 일찍 강원도의 목장 지역에 올 수 있게 된 이유다.

'동물 구해 오기' 퀘스트를 깨기 위해 마지막으로 양을 구매해야겠다.

우웅.

운전대 위에 올려놓았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관성적으로 운전하던 것을 멈추고 손을 뻗는다.

길목엔 오고 가는 차가 없어 아무렇게나 댈 수 있었다.

진동은 손으로 집어 들 때까지 이어졌다.

[발신자 – 지상욱, 김재식]

수차례 진동해서 전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보내와서 진동이 여러 번 울린 모양이다.

지상욱이 보낸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둘 중에 먼저 보내와서다.

[도운 형님, 지금 TV 보셨습니까?]

[사흘 후에 S급 헌터가 온답니다!]

[그것도 4명 전부요!]

원래는 비밀리에 진행하려던 일이 대대적인 행사로 변경됐다.

당연했다.

전 세계에 네 명뿐인 S급 헌터가 한 나라에 전부 모이게 된 거다.

내가 대통령이라도 국가적인 행사로 크게 진행할 거다.

이어 김재식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

[형! 대박! 완전 대박!]

[15일에 S급 헌터 전원이 한국에 온대요!]

[4명 전부 다요!]

[그, 뭐지, 그거, 화염산 던전 때문이래요!]

역시나 똑같은 얘기다.

비슷한 시간에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온 걸 보니, 방금 엠바고가 풀린 모양이다.

[알고 있어. 기대되네.]

둘에게는 대충 답장을 보냈다.

메시지를 보내온 듯 또다시 진동이 울려 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운전대 위에 놓고 다시 차를 몰았다.

입국 날짜가 변경되면서 생긴 자유 시간 동안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퀘스트를 깨는 것 정도…?

[퀘스트 목록]

[A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 마족의 권속과 싸워 승리하기.]

[B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 관리인의 길(초급).]

[E등급 세계수 퀘스트, 동물 구해 오기.]

등급별로 정리된 목록을 확인했다.

현재 내가 깰 수 있을 만한 퀘스트는 동물 구해 오기와 관리인의 길이다.

동물 구해 오기는 오늘 안으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정확히 하려면 양을 구매한 후 성역에 들어가서 확인해 봐야겠지만.

관리인의 길은….

[퀘스트 내용 - 따스한 손길 10000번 쓰기(10000/10000)]

[A등급 이상의 비료 1번 주기(0/1)]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216/1000)]

[세계수의 뿌리 1000번 쓰기(0/1000)]

[성공 보상 – 전대 세계수의 수액]

…시간이 더 필요했다.

따스한 손길은 벌써 다 끝냈지만, 나머지 조건들은 아직이었다.

동물 구해 오기 퀘스트를 끝낸 후 무주 개미굴 던전을 들러야 할 것 같다.

청소도 할 겸 세계수의 뿌리 조건도 진행할 겸 A등급 이상의 비료도 제작할 겸.

그나마 알테라-쇼넴이 엘프들과 함께 진행하는 거라 다행이다.

혼자 1000번 쓸 생각을 하니….

어휴, 상상만 했는데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오."

몇 분을 달렸을까.

울타리 안에 구름처럼 모인 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들의 존재를 확인해서인지 귓가에 양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잠시 후 양 목장을 관리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 분명한 건물 앞에 차를 댔다.

차에서 내리자 울타리 속 양들이 호기심을 느낀 듯 내게 몰려들었다.

물론, 얼마 못 가 울타리에 대가리를 박고는 멈춰 섰다.

날 환영해 주는 것 같은 모습이 참 귀여웠다.

나는 어린 양들을 향해 두 팔을 자애롭게 벌렸다.

"어린 양들아, 나와 함께 좋은 곳으로 가자꾸나."

***

양 여섯 마리를 보낸 후 성역에 들어왔다.

이만하면 충분할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앗, 관리인님!"

"관리인님!"

"오셨습니까!"

세 명의 엘프들이 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중에 레지나가 있었다.

가장 먼저 날 본 그녀가 빠르게 걸어와 허리를 숙였다.

허리가 몇십 년 전에 있었다던 폴더폰처럼 반으로 접혔다.

"감사해요! 관리인님 덕분에 목장을 만들 충분한 동물들이 모였어요!"

"아니, 이러지 마세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걸요."

사실이다.

구매한 동물을 성역으로 보낸 게 전부였으니 일한 것 같지도 않았다.

크게 반올림해서 1억 원이라는 돈이 깨지기도 했지만, 그 돈도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다.

이번 퀘스트의 보상이 세계수의 나뭇잎이었으니까.

포션을 만들어 팔면 받을 수 있는 돈이 최소 몇 배에 달한다.

짝.

허리를 다시 편 레지나가 손뼉을 쳤다.

"참, 관리인님도 궁금하시죠?"

"네? 뭐가요?"

"목장이요!"

그러더니 레지나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어어 하며 레지나에게 이끌렸다.

1분 정도 달렸을 때 파트리아를 포함한 9명의 엘프가 보였다.

그들은 나무 울타리 안에서 3명씩 나뉘어 내가 보냈던 동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엘프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파트리아를 부른다.

"장로님!"

"파트리아 님!"

"으음, 왜들 그러나?"

흑염소를 쓰다듬던 파트리아가 고개를 돌린다.

그러다 날 보고는 바로 울타리를 빠져나왔다.

레지나는 내 손목을 붙잡았던 손을 자기 뒤로 숨겼다.

쳐다보자 아하하 웃고는 다른 엘프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뭐지…?

곧 파트리아가 내 앞에 섰다.

"…관리인님, 오셨습니까."

"아, 안녕하세요. 파트리아 님…."

입으로는 인사하면서, 두 눈으로는 주변을 돌아봤다.

엘프들의 목장은 하루도 채 안 됐는데 벌써 구색이 갖춰져 있었다.

각 동물이 나무 울타리로 분류된 채 넓게 퍼져서 자기들끼리 뛰어놀았다.

이렇게 보니, 강원도의 목장 지역이 작게 모여 있는 느낌도 든다.

"어떻습니까? 저희가 만든 목장이."

"훌륭하네요.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제대로 된 목장이 만들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전부 관리인님께서 동물들을 보내 주신 덕분이지요."

파트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러지 말라며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동물을 구해 오는 거야 목장을 만드는 일에 비하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나한테 저렇게 제대로 된 목장을 만들라고 한다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포기할 자신이 있다.

차라리 동물을 더 사 오고 말지.

"장로님! 여기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금방 가겠네! 관리인님…."

"아, 전 신경 쓰지 말고 가 보세요. 저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럼…."

파트리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곤 자신을 부른 엘프에게 걸어갔다.

젊은 엘프는 가는 통나무를 허리에 낀 채로 뭐라고 말했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손짓을 통해 울타리를 어떤 식으로 설치할지 물어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충 보기에는 투박해 보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만드는 방식이 있나 보다.

곧 파트리아가 손짓했다.

엘프는 통나무를 세로로 눕힌 후 양쪽 바위에 푹푹 박아 넣었다.

그러자,

[퀘스트 알림!]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세계수 관리인이 엘프들의 목장에 필요한 각종 동물을 구해 왔다.]

[E등급 세계수 퀘스트 동물 구해 오기 성공!]

[성공 보상으로 어린 세계수의 나뭇잎을 얻을 수 있다.]

[받기 (YES/NO)]

오.

내가 직접 목장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성공 보상으로 어린 세계수의 나뭇잎을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 받았던 세계수 나뭇잎은 전대 세계수의 것이었다.

이번에 받는 건 어린 세계수의 나뭇잎이다.

즉, 새싹이의 나뭇잎이다.

"기대되는걸?"

바로 YES 버튼을 눌렀다.

쏴아아….

뒤에서부터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웬 파도 소리인가 싶어 뒤를 돌아봤다.

"새싹아?"

소리는 새싹이에게서 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새싹이가 몸을 떨어 대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이파리들이 좌우로 나부끼면서 파도 소리를 만들어 낸 거였다.

커졌다가 작아지는 소리와 함께 이파리들이 후두두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던 그것들은 방향을 바꾸고는 내 손으로 날아왔다.

"오…."

입에서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오른손에 차곡차곡 쌓이는 나뭇잎들을 보니 신기했다.

그런 감탄을 내뱉은 것은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와아!"

"세계수 님께서 이파리를…!"

"저 모습! 저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줄이야!"

"오오!"

엘프들에게도 감탄스러운 모습인 듯했다.

그들은 나와 내 손바닥에 차곡차곡 쌓인 나뭇잎을 바라봤다.

몇몇은 감탄을 넘어 감동한 듯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파트리아도 그런 쪽이었다.

그는 눈물을 닦고자 눈을 톡톡 두드렸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전대 세계수와 전대 관리인도 방금처럼 나뭇잎을 받곤 했었으리라.

나는 손에 쌓인 나뭇잎을 내려다봤다.

손바닥 크기의 나뭇잎은 총 5장이었다.

새싹이의 따스한 마나가 느껴진다.

세계수의 마나가 담겨 있기 때문-.

"…어라? 잠깐만."

나와 새싹이는 한 몸이다.

새싹이의 나뭇잎 개수가 내 마나의 양이란 거다.

그런데 방금 5장 정도의 나뭇잎이 떨어져나왔다.

1장에 5만씩 늘어났으니….

반대의 경우 단순 계산으로도 25만의 마나가 줄어들어야 했다.

"캐릭터 창!"

다급하게 캐릭터 창을 열었다.

곧바로 마나 창을 확인한다.

[캐릭터 창]

[MP – 210만260]

"210만…."

마나는 그대로였다.

나뭇잎이 떨어져 나왔는데도 변함이 없었다.

내 예상과 달라서 다행이었다.

다행이긴 한데, 왜 달라지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나뭇잎의 수가 줄어들었는데도 그대로인 걸 보면 마나의 총량과 상관이 없는 걸까?

흠, 전대 관리인이라도 있으면 물어보고 싶다.

"아."

전대 관리인은 없어도 물어볼 만한 사람은 있었다.

아니, 물어볼 만한 엘프들이라고 해야겠지.

그들 말로 엘프는 세계수의 아이였다.

이 일에 관해서도 분명 알고 있을 터.

나는 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시는 레지나를 불렀다.

그녀가 양을 보곤 침을 삼킨 후 내 앞으로 걸어왔다.

"...."

"무슨 일이세요, 관리인님?"

"물어볼 게 있어서요."

"앗, 뭐든 물어보세요!"

"방금 제가 새싹이한테 나뭇잎을 받은 거 보셨죠?"

"새싹이…."

"네?"

"…아, 네! 봤어요. 세계수 님이 관리인님께 나뭇잎 주시는 거."

"그런데 제 마나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라서요."

"네?"

레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다.

흠.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러니까… 그동안 나뭇잎이 자라날 때마다 마나가 늘어났거든요?"

"네. 저희도 그래요."

"방금은 나뭇잎이 떨어졌고요. 그럼, 마나가 줄어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아, 아아!"

짝!

레지나가 손뼉을 친다.

얼마나 크게 쳤는지 금빛의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흔들릴 정도다.

"맞다. 관리인님은 전대 관리인님께 설명을 듣지 못하셨으니 모르시겠네요. 세계수 님의 성장과 나뭇잎 개수는 상관이 없어요."

"엥? 뭐라고요?"

"나뭇잎이 자라는 건 세계수 님이 성장한 데 따른 부산물 같은 거예요."

"...?"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난 이제까지 새싹이의 성장 지표가 나뭇잎 개수인 줄 알았는데?

새롭게 이파리가 자라날 때마다 얼마나 뿌듯했다고….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지나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쉽게 예를 들자면…. 으음…. 아! 그래요. 머리카락!"

"머리카락이요?"

"네. 인간 중에선 다 큰 어른인데도 머리카락이 없기도 하잖아요?"

"...."

"세계수 님도 마찬가지예요. 나뭇잎이 떨어진다고 성장한 게 어디 가진 않아요."

자신의 설명이 뿌듯했던 걸까.

레지나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살살 흔들리며 눈부시게 빛났다.

하긴, 천천히 생각해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새싹에서 어린나무가 됐을 때 나뭇잎은 몇십 장이 확 늘어났었다.

나뭇잎이 성장의 척도라면 갑자기 그만큼이나 늘어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카락에 비유할 줄은 몰랐는걸.

"친절하게 설명해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또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뭐든지 가르쳐드릴게요!"

그러면서 레지나는 다짐하듯 주먹을 불끈 쥔다.

풍성한 금빛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나며 찰랑거렸다.

제104화

성역에서 나온 후 곧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무주 개미굴로 출발하기 전에 먼저 들를 곳이 있었다.

바로 수정 공방이다.

어린 세계수의 나뭇잎도 얻었겠다, 새 힐링 포션 제작을 맡기기 위해서다.

또 들른 김에 코인시던스 후 빌딩으로 이사할 생각이 있는지도 물어볼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사에 응해 줬으면 좋겠다.

이동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웅, 우웅.

가산 디지털 단지 끝에 다다랐을 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여러 번 울렸지만, 규칙적이지는 않다.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를 보낸 게 분명했다.

먼저 수정 공방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댄 후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새싹이가 스쳐 지나가듯 보인 다음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메시지를 보낸 건 지상욱이었다.

[형님, 소식 들으셨어요?]

"또 무슨 소식?"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메시지를 읽었다.

[15일 밤 여의도에 있는 '63빌딩'에서 만찬회 열린답니다.]

"들었다 뿐이겠니?"

만찬회를 결정할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한진환 옆에서.

홀로그램 속 S급 헌터들을 마주 보면서.

[친구랑 구경하러 가기로 했는데, 형님도 같이 가실래요?]

"구경이라…."

와 봐야 건물 입장하는 모습밖엔 볼 수 없을 거다.

연말 시상식 때 연예인이 입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그래도 두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는 S급 헌터를 직접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심지어 1명이 아니라 S급 헌터 전원이었으니 구경하러 갈 생각을 하는 건 아주 당연했다.

아마 만찬 회장 앞은 지상욱과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로 득시글거릴 거다.

[형님도 같이 가실래요?]

지상욱이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같이 가겠느냐고?

그곳에 가긴 갈 거다.

지상욱처럼 순전히 구경하러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만찬회에 참석하게 될 예정이었다.

도희의 오빠이자 태천이의 친구인 손님으로서.

원래는 대통령의 경호원으로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동생과 친구가 손님으로 올 자리에 내가 경호원으로 있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한진환의 말 덕분이었다.

"…상황이 되면 거기서 보자."

기밀이었으므로 말을 숨긴 채 답장을 보냈다.

지상욱은 [알겠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메시지를 확인한 후 창을 껐다.

바로 [세계수 키우기]가 떠올랐고, 새싹이와 엘프들이 보였다.

목장을 만든 그들은 다시 알테라-쇼넴을 써서 새싹이를 가꿨다

덕분에 관리인의 길 퀘스트는 진척이 있었다.

200대였던 횟수가 300대로 증가한 것이다.

[B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 관리인의 길(초급)]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312/1000)]

화면을 두드리며 차에서 내렸다.

새싹이도 강원도 목장 지역에서 출발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떨어졌던 곳에서 이파리가 다시 자라난 거다.

새로 자란 이파리들은 은은하게 빛났다.

나뭇잎 개수는 성장의 척도가 아니라더니, 그 말마따나 빈 곳이 없었다.

그럼 더 얻을 수도 있지 않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났다.

알림 메시지가 떠오르며 수정 공방으로 걸어가는 시야를 가렸다.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이 원한다면 나뭇잎을 더 주겠다고 전합니다.]

[다만, 현재 상태에서 나뭇잎을 관리인에게 더 건네면 그만큼 성장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그래도 나뭇잎을 받겠느냐고 질문합니다.]

[어린 세계수잎을 받는다 (YES/NO)]

"아, 그럼 됐어."

바로 NO를 선택했다.

나뭇잎 개수가 성장의 척도는 아니라지만 영향은 받긴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굳이 받을 필요는 없었다.

현재로서 나뭇잎은 쓸 곳이라고는 포션을 만드는 것뿐이다.

나로서는 포션보다 새싹이가 빨리 성장하는 게 더 좋다.

새싹이가 성장해야 내가 더 강해지니까.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판단을 지지합니다.]

새싹이도 나와 같이 생각한 모양이다.

화면을 두드리면서 공방 앞으로 걸어갔다.

민트색 현관문 옆에 놓인 벨을 누른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다고 해도 신경을 잡아끌 정도로 큰 벨 소리가 들려왔다.

벨은 아직 때 묻지 않았고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주인이 주인인지라 고장이 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 누구… 아, 도운 씨!

"안녕하세요."

- 이 밤에 여길 찾아왔다는 건 혹시….

"예상하신 대로, 포션 만들러 왔습니다."

- 오! 바로 열어 드릴게요!

그 말과 함께 몇 초 후 민트색 현관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

깨끗했던 공방은 다시 온갖 잡동사니로 어지러워져 있었다.

청소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걸까….

이 정도면 일부러 더럽히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젠 인정해야겠다.

나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사는 놈은 아니지만, 홍수정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것을.

다시 더러워진 복도를 살펴보며 걷는데 홍수정이 빠르게 걸어왔다.

총총걸음에선 부푼 기대감이 느껴졌다.

"도운 씨!"

"안녕하-"

"어서 와요! 오늘은 어떤 걸 가져왔나요!"

내 앞으로 걸어온 홍수정이 인사말도 끊고 질문했다.

풍겨오는 분위기를 통해 기대감이 얼마나 지대한지 알 수 있었다.

한껏 올라간 눈썹과 살짝 벌어진 입도 그녀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갖고 온 건 또 세계수의 나뭇잎이었으니까.

"…나뭇잎이죠, 뭐."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는 내 생각과 달리 실망하지 않았다.

벌써 세 번째 갖고 오는 거였는데도, 그녀는 쾌재를 불렀다.

또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지 내게 두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뭇잎을 건네달란 뜻이다.

인벤토리에 넣어 뒀던 새싹이의 잎을 꺼내 바로 건넸다.

"엇…?"

홍수정은 나뭇잎을 보고는 당황했다.

지금까지 봤던 것들과 명백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힐링 포션이 된 침엽수, 마나 포션이 된 활엽수.

그것들은 대단히 컸다.

침엽수는 길이가 내 키만 했었고, 활엽수는 편의점 앞에 흔히 있는 파라솔만 했었다.

하지만 방금 인벤토리에서 꺼낸 나뭇잎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더 컸다.

"작네요…?"

그리 물으면서 물끄러미 날 바라본다.

성인 남성의 손바닥보다도 큰 나뭇잎이었다.

평범한 나무의 잎이라면 작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으리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그러자 나보다도 새싹이가 오히려 발끈했다.

[어린나무는 작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토라질 거라고 전합니다.]

[또 관리인이 어서 따스한 손길을 써 주기를 요구합니다.]

귀엽기는….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했다.

화면 속 어린나무는 은은한 빛을 흩뿌리며 마나를 받아들였다.

홍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작아도 세계수 잎은 세계수 잎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홍수정은 감정을 시작했다.

평소처럼 나뭇잎을 흔들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러다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으응…?"

"왜 그래요?"

"그게…."

그녀는 말끝을 줄이곤 다시 감정을 이어 나갔다.

다섯 장의 나뭇잎을 부채처럼 흔들고 거기에서 풍기는 향을 맡았다.

곧 감정을 끝낸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품질이 좋은걸요?"

"그런가요?"

"네. 크기가 작아서 걱정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기우였어요! 크기가 작아도 세계수 잎은 세계수 잎이란 거죠. 대단해요!"

"그러니까?"

"이 잎들로도 충분히 상급 포션을 만들 수 있어요! 크기가 작아서 양은 더 적겠지만요."

그럴 거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나뭇잎이다.

5장이라고는 해도 파라솔을 활짝 펼친 것만 같았던 나뭇잎에 비하면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다.

포션으로 제작했을 때 나오는 양도 훨씬 적은 게 당연하다.

[어린나무는 오늘따라 눈앞의 인간 여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중요한 건, 상급 포션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이파리는 새싹이가 성장할수록 커질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포션으로 만들 수 있는 양도 자연히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

홍수정이 주의를 끌었다.

바라보자 말을 이어 나간다.

"저번 것과 성질이 달라요."

"성질이라면…?"

"이거 활엽수잖아요."

"네, 어떻게 봐도 활엽수죠."

"저번에 가져온 건 체력보다 마나를 더 회복시켜 줬죠. 하지만 이건 체력을 더 회복시켜 줘요."

홍수정이 이파리를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손바닥 같은 나뭇잎 다섯 장이 앞뒤로 움직인다.

전대 세계수 나뭇잎의 경우 체력을 더 회복시켜 주는 건 활엽수가 아니라 침엽수였다.

새싹이의 나뭇잎이 그것과 똑같은 역할을 한다면….

"…잘됐네요?"

"엄청 잘됐죠! 정부에서 또 포션 제작을 부탁했거든요. 특히 힐링 포션 쪽."

"여전한가 봅니다?"

"아뇨, 더 심해졌어요."

"더?"

이미 A급 헌터들이 힐링 포션과 마나 포션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그보다 더 심한 상황이 될 수 있을까.

"이젠 다른 포션들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고 있어요."

"힐링 포션이랑 마나 포션 말고요?"

"네. 힘 버프 포션, 민첩 버프 포션, 방어력 버프 포션, 심지어 게이트용 독기 정화 마스크에 필요한 재료까지도요."

음. 더 심해질 수가 있네?

한숨이 절로 길게 내쉬어지는 상황이다.

홍수정이 말을 이었다.

"정부랑 협회도 구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긴 한데… 아마 힘들 거예요."

"왜요?"

"이젠 우리나라를 넘어 아시아권의 다른 나라도 다 이 모양이니까요."

"아…. 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그것까지는 저도 잘…."

"흐음…."

잠깐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포션 메이커로서 이쪽 세계의 전문가인 홍수정도 모르는 일이다.

나라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힐링 포션 제작을 부탁합니다."

대화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알 수 없는 일을 계속 생각해 봐야 시간 낭비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손에 들린 다섯 장의 나뭇잎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흐음, 이번엔 무슨 맛이 나올지 기대되네요."

"확실히…."

전대 세계수의 잎이 아니라 새싹이의 잎이었다.

성질이 다른 것을 보면 분명 맛도 다를 거다.

"정부는 다음 포션은 호불호가 심하지 않은 맛으로 제작해 주길 바랐어요. 세계수 잎의 본연의 맛을 피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탁해 온 거면 들어주는 게 좋겠죠. 민트초코 맛은 좀 심하긴 했으니까…."

"…저도 솔x눈 맛은 선 넘었다고 생각해요."

그리 말하면서 나를 쳐다본다.

왜일까.

우리가 서로 마주 보는 시선에서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참. 공방 이사할 생각 없습니까?"

"네? 이사요?"

"제가 21층짜리 빌딩의 주인이 됐거든요."

"우와! 그게 정말이에요?"

"네. 재이네 대장간도 그곳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원래 목적은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서지만.

걱정할지도 모르니 설명은 다음에 해야겠다.

유재이가 직접 할지도 모를 일이고.

"어, 그럼 제가 거기로 옮기면 재이랑 이웃사촌 되는 거네요?"

"그렇게 되겠죠?"

"갈래요, 완전 갈래요! 언제쯤 이사하면 돼요?"

"음, 안전이 보장돼야 하니까…."

그러려면 우선 도희에게 결계 마법을 부탁해야 했다.

도희도 도희 일이 있으니, 이번에 일 끝나면 말해봐야겠군.

"이번 달 중순 좀 넘어서 진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재이한테도 말해야지, 힛."

홍수정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스마트폰은 주황색 케이스가 눈에 띄었다.

아.

그녀가 완전히 유재이와 대화하는데 빠져 들기 전에 부탁할 게 있었다.

"한 가지 더 부탁할 게 있습니다."

"부탁할 거요?"

"쓰레기를 좀 얻어갈 수 있을까요?"

"네에? 쓰레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빙긋 웃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녀의 공방은 청소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알테라-쇼넴을 쓰기에 아주 알맞아 보이는 쓰레기들이.

제105화

"아르카."

쓰레기를 챙기고 나오자마자 바로 아르카를 꺼냈다.

앞에 검은 로브를 두른 존재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께에 달린 버섯 모양의 브로치가 특히 눈에 띈다.

이정근 정수리에 기생 버섯을 자라나게 한 놈이 분명했다.

반쯤 가린 얼굴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입이 보였다.

그 입이 벌어졌다.

"안녕하세요?"

"...."

미소 지은 입으로 부드러운 인사를 건네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빤히 쳐다봤다.

놈에게서는 날 공격할 의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새싹이는 무언가를 느낀 듯 메시지를 보내왔다.

[세계수 어린나무가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이상함?

뭐가 이상하다는 걸까.

[어린나무는 눈앞의 상대에게서 혐오스러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정말로 이상했다.

혐오스러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새싹이는 크라우드에게서 공통으로 느끼던 기운을 느꼈다.

혐오라는 감정을 끌어올리는 께름칙함을.

저번에 마주쳤을 땐 그것을 확실히 느꼈었다.

그랬던 게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놈인 척하는 다른 놈일지도 모른다.

"저기요? 도운 씨? 헬로? 듣고 계세요?"

"...."

놈은 손바닥을 들어 보이더니 마구 흔들어 댔다.

인사에 대답하지 않는 내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

저 얼빠진 행동을 보아하니 다른 놈 같지는 않은데….

"…여긴 웬일이냐."

"아, 드디어 대답하셨네요. 무기 꺼내시고는 빤히 쳐다봐서 걱정했잖아요. 나 죽이려는 줄 알고."

걱정했다는 놈치고는 멀거니 서 있는 모습이 느긋해 보였다.

주의를 끌기 위해 두 손을 흔들던 모습에서도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마치 내 앞에 나서는 일이 전혀 위험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자신감일까, 오만일까.

일단 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건드려 볼까.

"또 인사하러 왔냐? 박우현."

"아뇨, 오늘은 도운 씨가-!"

입이 멈췄다.

미소는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좀 마음에 드는 얼굴을 하는군.

"방금, 방금 뭐라고 했어요?"

"또 인사하러 왔냐고."

"아뇨! 그다음에요!"

"뭐. 박우현?"

"당신이 어떻게 그 이름을…."

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도중에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지만, 뭘 중얼거리고 싶었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거죠?'

그리 묻고 싶었을 테지.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정근과 그의 부하 놈들 정수리에 붙어있던 기생 버섯의 이름이었으니까.

그게 놈의 이름이지 않을까 싶어서 불러 본 거였다.

반응을 보니 잭팟인 것 같긴 한데….

"…난, 도운 씨가 걱정돼서 경고하러 왔어요."

오. 말을 돌려?

"...."

"...."

흠. 안 되겠군.

박우현.

그 이름으로는 놈에게서 다른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뭐, 입가에 짓고 있던 미소도 사라졌으니 됐나.

걱정돼서 경고해 주러 왔다는데, 얘기나 한번 들어 보자.

나는 아르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걱정됐다고."

"…네."

"네가, 나를?"

"그렇다니까요."

"말이 되냐?"

"정말이에요. 순수하게 걱정돼서 찾아온 거예요. 아무 꿍꿍이도 없이."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크라우드의 일원이 아무 꿍꿍이도 없이 나한테 왔을 리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붙잡은 다음 숨기고 있는 걸 토해 내게 하고 싶지만… 아마 그럴 수 없겠지.

놈의 움직임에선 위험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새싹이가 혐오스러운 기운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그 두 가지 정보는 한 가지 사실을 도출해 낸다.

눈앞에 있는 건 놈이 마법으로 만든 분신이라는 거.

놈은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내게 접근해 온 거다.

그러니 아르카를 꺼낸 나를 보고서도 느긋하게 있을 수 있었고.

"뭐, 좋아. 읊어 봐."

"여기, 수정 공방의 포션 메이커가 위험해요."

"홍수정이? 어째서?"

"크라우드가 노리고 있으니까요."

"너희가 홍수정을 왜 노려?"

그리 묻자 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개가 기울어지면서 얼굴을 가린 후드가 살짝 들쳐졌고, 덕분에 입만 보였던 얼굴이 광대 아랫부분까지 보였다.

광대 윗부분은 여전히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광대를 보고 하나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녀석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기껏해야 20대 초반일 거다.

겨우 그런 나이에 A등급 테러 조직의 일원이라….

얘도 제대로 된 삶은 산 놈은 아닌 것 같다.

"몰랐나 보네요?"

"뭐를?"

"도운 씨가 이곳의 포션 메이커랑 포션을 만들어서 팔았잖아요. 그거 때문에 위쪽 분들이 화를 잔뜩 냈거든요."

"화를 냈다고? 포션 제작한 게 너희랑 무슨 상관이라고…."

잠깐.

포션을 만들어 판매한 것 때문에 크라우드 위쪽 놈들이 화를 냈다…?

문득 머릿속에 그 이유가 떠올랐다.

"설마, 너희가…?"

"생각하신 대로예요. 짜잔. 한국의 포션 유통을 막은 건 크라우드였습니다."

"왜 그런 짓을… 아니."

"...."

"…바바?"

"역시 똑똑하시네요. 맞아요. 그게 잘 팔리도록 힐링 포션 유통을 금지한 거죠."

"...!"

헌터는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사냥해 돈을 벌어 먹고산다.

위험한 곳에 진입하는 만큼 힐링 포션은 필수 불가결한 아이템이고.

그런 힐링 포션을 구할 수 없게 된다면 헌터들은 어떻게 할까.

힐러를 구하거나 버프 포션을 찾아 나서게 될 거다.

그때 크라우드가 성능이 좋고 저렴하기까지 한 버프 포션을 판매한다면?

헌터들은 지상욱이 그랬던 것처럼 좋다고 사서 복용할 터.

심지어 마약도 세트로 판매했다고 하니….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는데."

"뭐죠?"

"너희 따위가 그럴 힘이 있긴 한가?"

김정철. 용두식. 벌 인간까지.

내가 만난 크라우드 녀석들은 별 볼 일 없는 놈들뿐이었다.

그런 놈들이 모여 봐야 포션의 유통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제가 속한 조직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는데도, 녀석은 웃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하하! 그 크라우드가 이런 말을 듣다니…. 그분께서 아시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

그분?

크라우드의 리더를 가리키는 건가?

"지금까지 만난 놈들 때문에 크라우드가 만만하게 보이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그건 한진환 때문이었다고 변명하고 싶네요."

"한진환? 여기서 그 양반이 왜 나와?"

"크라우드는 1년간 한진환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요. 도운 씨와 한진환…."

두 이름을 부르며 오른손과 왼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저울에 추를 올린 듯했다.

기운 것은 한진환의 이름이 올라간 왼손이었다.

"크라우드가 우선순위를 어디에 뒀을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죠?"

한진환은 황 장관의 질문에 놀고 있었다고 대답했었다.

그 놀잇거리가 아무래도 크라우드였던 모양이다.

1년 동안 놈들을 붙잡지 못했다는 소리기도 하다.

그 한진환이.

"그뿐만이 아니에요."

"...?"

"크라우드는 그쪽의 동생과 친구도 상대하고 있었어요."

"아…."

"또 당신 때문에 천칭 길드와도 척을 지게 됐죠."

"나 때문이라고 하지 말아 줄래? 너희가 멋대로 오해해서 서지혁한테 시비 건 거니까."

"하하, 맞아요. 그건 그 지네 새끼가 잘못한 거긴 해요."

"...."

그러니까, 크라우드는 지금 여러 적을 맞상대하고 있었다.

그 대상들이 하나 같이 굵직굵직한데도 지금까지 건재하다는 뜻이고.

김정철이나 용두식의 수준을 보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놈이 내 의문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여댔다.

"크라우드의 간부는 총 12명이에요. 그중 3명은 당신이 죽였지만….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죠. 그동안 한진환과 당신 친구가 죽인 간부는 두 자릿수가 넘어가니까."

"두 자릿수…?"

"즉, 크라우드의 간부는 허울 좋은 자리일 뿐이라는 거예요."

"...!"

"크라우드의 핵심 멤버는 4명. 나머지 8명은 그 4명의 수족일 뿐이에요.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당신이 비워 낸 네 자리, 지금쯤 다른 놈들로 채워졌을걸요?"

내가 죽인 놈들이 이름만 간부였다, 라….

듣고 보니 크라우드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정립해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진 퀘스트를 깨기 위한 사냥감에 불과했으니까.

…응? 잠깐.

"네 자리? 왜 네 자리지? 내가 죽인 건 3명인데."

"아. 한 자리는 나예요."

"...?"

"바눔을 보낸 게 나였거든요. 그 실패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죠."

"암살자를 보낸 게 너였다고…?"

"하하. 미안해요. 반성하고 있어요."

짧게 웃고는 두 손을 모은다.

공손히 내밀기까지 한다.

암살자를 보낸 주제에 뻔뻔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어린나무는 어처구니가 없음을 느낍니다.]

새싹이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싱글싱글 웃었다.

"…하나만 더 묻자."

"그러세요."

"넌 이걸 왜 나한테 다 가르쳐 주는 거냐."

"응? 이런. 저번에 말씀드렸었는데요. 흘려들었군요?"

내가 흘려들었다고?

이놈이 저번에 뭐라고 했었더라?

"난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백도운 씨."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아니, 근데 그걸 어떻게 믿냐고.

"설마 못 믿는 건가요?"

"너 같으면 너 같은 걸 믿을 수 있겠냐?"

"네. 나 같으면 나 같은 걸 믿을 거예요. 도운 씨를 향한 내 마음이 진실하다는 걸 아니까."

"하아아…."

목구멍에서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 아무리 진실하다고 해도 상대가 그걸 믿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심지어 놈은 크라우드였고 제 정체를 숨기고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름은 들켰지만, 그것도 스스로 밝힌 바는 아니었다.

그런 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놈이 어디 있겠는가.

"넌 대체 내가 왜 마음에 든 거냐?"

"네?"

"그렇잖아. 나를 싫어해야 정상 아니냐고. 동료를 죽인 데다가 간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원흉이니까."

"그건…."

"...?"

"비밀입니다!"

"비밀 같은 소리 하네…."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놈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두 손 모두 주먹을 꼭 쥐고는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힘내 주세요. 파이팅! 아자 아자! 할 수 있다, 백도운! 우윳빛깔 백도운!"

"...."

놈은 저번에 했던 말과 비슷한 응원을 보내왔다.

그 응원에서 열정이 느껴진다면 내가 이상한 거겠지….

후우.

이 미친놈은 이상한 약을 처먹어서 미친 걸까.

아니면 먹어야 하는 약을 안 먹어서 미친 걸까.

대체 왜 나를 응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싸우고 있는 게 지가 속한 조직이라는 걸 까먹기라도 한 듯하다.

"후우, 경고 알아들었으니 이만 가 봐."

"네? 벌써요?"

"…벌써는 무슨 벌써. 그럼 여기 계속 있을 거냐?"

"정보를 이렇게나 말해 줬는데, 너무 매몰찬 거 아니에요? 상처받게."

"진짜 매몰찬 게 뭔지 보여 줄까?"

그리 말하면서 오른손을 놈에게로 향했다.

다시 아르카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어린나무는 던질 준비가 됐다고 전합니다.]

과연 우리 새싹이다.

말하지 않아도 내 뜻을 바로 알아차린다.

놈이 고개를 저었다.

"야박하시긴. 가면 되잖아요, 가면."

대답하자마자 놈의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점점 작아져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데까지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마법으로 만들어 낸 분신이었다.

정확히 무슨 스킬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진짜가 아니었으니 새싹이가 혐오스러운 기운을 느끼지 못할 만도 했다.

"함정 같지는 않은데…."

나를 향한 정열적인 응원에선 진심마저 느껴졌었다.

그 모습이 순전히 연기에 불과하다면….

놈은 내 생각보다 더 무서운 놈일지도 모르겠다.

[어린나무는 진심을 알 수 없으므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합니다.]

"그래, 그게 좋을 것 같아."

뒤돌아서서 다시 공방의 벨을 눌렀다.

일단, 홍수정을 재이네 대장간에 데리고 가야겠다.

크라우드가 이곳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혼자 둘 수는 없었다.

- 도운 씨? 아직 안 갔어요?

홍수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가 주었으면 하는 데가 있어서요."

"지금요?"

"네."

"안, 안 돼요! 도운 씨는 재이가 있잖아요!"

"…네?"

뭐라는 거야?

제106화

"안녕하세요, 백도운 A급 헌터님."

A급 헌터….

이 얼마나 듣기 좋은 울림인가.

천천히 그 울림을 느껴보았다.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는 것도 깜빡 잊은 채로.

"백도운 님?"

"…아, 워프 게이트 이용하려고 왔습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화면을 두드렸다.

손끝에서 화면을 통해 마나가 전달되는 것이 느껴졌다.

"워프 게이트 이용을 원하시는 겁니까? 그럼 조금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기다려야 한다고요?"

"네, 현재 해외 워프 게이트 이용량이 많아 30분 정도 대기해 주셔야 합니다."

"해외 이용량이 많다고요?"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지는 말이었다.

워프 게이트는 이동하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가격이 비싸졌다.

국내 범위는 그리 비싸지 않지만, 해외에서 한국으로 오는 거라면 웬만한 B급 헌터 연봉은 써야 할 거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다면? A급 헌터 연봉 정도는 써야겠지.

그런 문제로 B급 이상의 마법사들은 워프 게이트보다 순간이동 마법을 더 애용하곤 한다.

S급 헌터들이 속한 각 나라의 연구팀이 괜히 비행기 타고 오는 게 아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워프 게이트를 통해 나라 간 이동을 하진 않을 것이다.

의문을 느끼는 날 보고는 협회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틀 후에 있을 일을 직접 보고 싶은 거죠."

"아."

이틀 후에 있을 일.

그말대로다.

그건 어지간한 일이 아니다.

4년에 한 번씩 오는 월드컵이나 올림픽보다도 큰일이다.

세계사 교과서에 남을 일이니까.

현존하는 S급 헌터 전원이 모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많은 돈을 써서라도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담고 싶으리라.

"돌아올 때는 버스 타야겠군요."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럼 워프 게이트 이용하시는 겁니까?"

"네. 목적지는 무주 개미굴 던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접수되셨습니다. 저쪽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탑승권을 건네받은 후 협회 직원이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대기실은 크지 않은데도 자리가 널렸다.

이곳으로 오는 사람은 많아도 떠나는 사람은 얼마 없는 것이다.

아무 데나 앉은 후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시 34분.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2시쯤 출발할 수 있을 듯하다.

원래는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했는데….

어젯밤 일 때문에 조금 피곤했던 것인지 늦잠을 자 버렸다.

어차피 늦어진 거 밥까지 먹고 왔더니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나는 화면을 두드리면서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수정 공방의 포션 메이커가 위험해요."

그 경고를 받자마자 홍수정을 재이네 대장간으로 데리고 갔었다.

이상한 오해를 해서 그걸 푸느라 출발이 늦어지긴 했지만, 밤의 도로는 텅텅 비어서 금방 도착했다.

대장간 앞에 도착하자 홍수정은 조수석에서 내려 아직 불이 켜진 건물 안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품에 자기 몸통만 한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로.

상급 힐링 포션을 만들기 위한 도구들이 담겨 있었다.

밤이기 때문일까?

뒤에서 보따리를 끌어안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야반도주하는 사람 같았다.

물론, 저렇게 사람들 이목을 잡아끌 정도로 요란스럽다는 점에서 실패한 야반도주였다.

드르륵!

홍수정이 대장간의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었다.

"재이야!"

"홍수정…?"

대장간에는 역시나 세 여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도 상체를 반쯤 들어 올린 채였는데, 아무래도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무슨 소린가 확인할 생각이었던 듯하다.

홍수정과 뒤이어 들어온 나를 본 심윤진이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마나가 흩어진다.

마법엔 문외한이어서 무슨 마법을 쓰려고 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예상하자면, 탐색 스킬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닐까.

"홍수정. 네가 여긴 웬일이야?"

"보고 싶었어!"

홍수정이 짐을 내려놓고는 유재이에게 달려가 안겼다.

유재이는 웬일로 온 거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홍수정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품에 안긴 홍수정을 내치지는 않았다.

천천히 오른팔을 올려 홍수정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친구 사이보다는 언니 동생 사이처럼 보였다.

김지연과 심윤진도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귀엽고 흐뭇한 것을 본 듯했다.

미닫이문을 닫고 그녀들 앞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왜 둘이 같이 오고."

"그게-"

"크라우드라는 조직이 나를 노리고 있대."

품에 안긴 홍수정이 말했다.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도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다.

오히려 놀란 건 다른 세 여자다.

특히, 절친한 친구인 유재이가 당황하며 나와 홍수정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크라우드가 왜 너를 노려?"

"나도 잘 몰라. 도운 씨가 내가 만든 포션 때문이라고 말해 주긴 했는데…."

"포션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날 바라본다.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이다.

나는 바로 박우현에게 들었던 정보를 얘기했다.

걱정할지도 모르니, 수정 공방 앞으로 찾아왔었다는 얘기는 뺐다.

얘기를 들은 김지연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그 포션을 만든 게 도운 씨였다니…."

"정확하게 만든 사람은 수정 씨죠. 난 재료를 갖다 줬을 뿐이고."

"도운 씨, 협회에 크라우드가 포션 유통을 막고 있다는 거 알렸어요?"

"네? 아뇨."

"왜요?"

"...."

왜냐고 물어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알리지 않은 데엔 이유가 없었으니까.

정확하게는, 알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질문을 받고 생각해 보니 이제야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포션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정부나 협회는 이 일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유재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아무 생각 없었지."

"음…. 지금 당장 협회에 알릴게."

"...."

세 여성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바로 최희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열댓 번 울렸을 때 그가 전화를 받았다.

- 도운?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마치 자다 막 일어난 사람처럼.

- 흠, 흠! 무슨 일이지?

"이런, 자고 있었습니까?"

- 아니, 아니야. 일하고 있었네. 요즘 잘 시간도 없이 바쁘군.

목소리는 자느라 잠긴 게 아니라 입을 열지 않아서 잠긴 거였나.

잘 시간도 없이 바쁘다는 것도 이해는 갔다.

최희석은 협회 소속 헌터였다.

그것도 가장 실력이 좋은 에이스 헌터로서 간부 자리에 있는.

따라서 이틀 후에 있을 일들을 준비하느라 바쁠 것이다.

바쁜 사람에게 신경 거리를 하나 더 얹어 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바로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래 주게.

"포션말입니다."

- 아, 자네도 A급 헌터가 됐지. 상급 포션을 구해 주길 바라나?

"...?"

이게 뭔 소리야.

그 포션 만든 사람이 난데 구해 주길 바라긴 뭘 바라?

포션을 제작한 사람이 나인 걸 모르나 보다.

하긴, 수정 공방에게 판매를 전부 맡겼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가?

"아뇨. 그건 필요 없습니다."

- 응? 그럼 왜….

"정확하게는 포션 유통에 관해 말하려고 했습니다."

- 포션 유통?

"요즘 유럽권에서 포션이랑 재료가 안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 음.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이 나왔다.

아마 협회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그 정보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이리라.

고개를 끄덕이며 우연히 알게 된 정보를 말했다.

"그걸 막은 게 크라우드입니다."

- ....

침묵이 흐른다.

10초 정도 흐른 후 그가 물었다.

- 그게 정말인가? 확실한 정보야?

"네."

- 허…. 놀랍군. 이걸, 이걸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가? 우린 지금까지 몰랐는데.

"크라우드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 뭐!

우렁찬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소리는 마치 공격처럼 느껴질 정도로 컸다.

귓속에 세계수의 나무껍질이 발동된 것 같은 건 그저 착각일까.

스마트폰을 반대쪽 귀에 갖다 댔다.

- 직접 들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곧바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묻고 싶은 건 수화기 너머의 최희석뿐만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도 의문이 담긴 얼굴로 날 쳐다봤다.

- 혹시 크라우드를 사로잡았나? 그렇다면 지금 당장 협회로 데리고 오게.

"으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니? 왜…. 아.

"최 선배?"

- …아무 말도 하지 말게. 나는 모르는 게 약일 것 같군.

"네?"

- 다만, 부탁이니 뒤처리 잘하게.

"뒤처리요?"

-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나조차도.

"...."

후….

분위기가 좀 이상하더라니.

뭔가 오해를 한 듯하다.

말하는 걸 보면, 마치 내가 고문을 하다가 죽이기라도 한 듯하다.

그냥 크라우드가 알아서 찾아와서 말해 준 거였는데….

뭐, 어쨌든 목적은 이뤘으니 넘어갈까.

"그럼, 전 전달 드렸으니 이만 끊도록 하겠습니다."

- 그래, 고맙네.

내가 전화를 끊기 전에 최희석이 먼저 끊었다.

지금 알게 된 정보를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전화를 끊자 [세계수 키우기]가 떠올랐다.

새싹이와 엘프들이 보였다. 엘프들은 새싹이 주변에 둘러앉아 쉬고 있었다.

화면을 두드리며 고개를 든다.

"죽였어?"

"아니. 놓쳤어."

정확하겐 놓친 것도 아니다.

쫓지도 않았으니까.

이렇다 할 탐지 스킬이 없는 나로서는 쫓을 수단도 없었다.

새싹이가 혐오스러운 기운을 느꼈다면 또 모르겠지만.

심윤진이 손을 들며 물었다.

"저, 수정… 씨?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네. 얼마든지요오."

유재이의 품에 안긴 홍수정은 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 홍수정을 안고 있는 유재이는 불편해 보였다.

홍수정을 떨쳐 내고 싶지만 억지로 떼어 내다 다칠까 봐 참는 것 같았다.

"뭐로 만들었기에 포션에서 그런 맛이 나요?"

"아, 그게…."

홍수정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포션의 재료가 세계수의 나뭇잎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함부로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차피 두 사람에게 홍수정의 보호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또 세계수의 솔방울을 거래할 때도 함께 있었다.

이미 내가 세계수 관련 아이템들을 구할 수 있는 걸 안다.

"세계수의 나뭇잎으로 만들었어요."

"...네?"

두 사람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시선이 홍수정에게서 내게로 옮겨진다.

포션을 만든 사람은 홍수정이라고 해도, 그 재료를 구해 온 사람은 나였으니까.

그 모습을 보고 유재이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네가?

"그래서 말인데, 수정 씨 경호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네!"

둘 중에 대답한 건 김지연이다.

심윤진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마법사이니만큼 세계수의 나뭇잎이라는 것에 많은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1명 늘었는데도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크라우드가 이곳을 공격하면 저흰 순간이동으로 바로 도망갈 거거든요."

아, 그렇군.

그런 거라면 보호 대상이 1명이든 2명이든 상관없을 거다.

순간이동 마법만 제대로 발동하면 되니까.

"그럼 며칠만 더 부탁합니다."

"아, 들었어요. 중순 좀 넘어서 이사할 듯하다고."

"네."

"재촉하려는 건 아닌데, 왜 중순 넘어서죠?"

"음. 이틀 후에 S급 헌터들 오는 거 알죠?"

"당연히 알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제가 거기 경호원으로 따라가게 됐어요. 한진환 선배 옆에서."

"...네?"

김지연은 또다시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이번엔 유재이와 홍수정도 마찬가지였다.

심윤진은 아직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도, 도운 씨가… 그 자리에…?"

"네. 그러니 그 일이 끝나면 이사하시죠."

"…그렇게 해요."

"괜찮지? 괜찮죠?"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저도요."

차례대로 묻자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대답했다.

유재이는 대답한 후 질문을 덧붙였다.

"근데 당신 예복은 있어?"

"어?"

"예복 말이야. 말하는 걸 보니 만찬 회장도 갈 거 같은데, 거기 입고 갈 옷은 있냐구."

"그냥 정장이면 되는 거 아니야?"

"…진심이야?"

그럼 거짓일까.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홍수정도 "도운 씨…."하고 중얼거렸고, 김지연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흠. 그냥 정장을 입고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그냥 정장이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 평범한 만찬회라면."

"...?"

"하지만 당신이 가는 곳은 전 세계 모든 방송국이 떠들어 댈 세기의 만찬회야. 그런 곳에 그냥 정장을 입고 가는 멍청이가 어딨어?"

"어디 있냐니. 여기 있잖아."

"후우…. 내가 어쩌다 저…."

유재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끝에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날 바라보는 얼굴이 아주 익숙했으므로 좋지 못한 말이라는 것만은 예상이 되었다.

도희가 나와 태천이를 향해 자주 짓곤 하던 얼굴….

그렇다.

한심스러워하는 얼굴이다.

제107화

대장간을 빠져나와 YD Taylor라는 곳으로 왔다.

맞춤 정장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다.

정오가 지난 시간인데도 불이 켜져 있었던 건, 일대 그룹 계열사이기 때문이다.

김지연이 우연후에게 연락했고, 그는 이곳으로 오라고 말했다.

내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인가 싶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다.

이 늦은 밤에 예복을 맞추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었다.

우연후의 오른팔인 오주한.

그가 복면을 쓴 채로 젊은 재단사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보자마자 떠오른 의문을 물었다.

"복면은 늘 쓰고 다니는 겁니까?"

"오, 도운 씨.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멍하니 서 있던 오주한이 날 바라봤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밤이라 길이 막히지 않더군요."

"복면은 늘 쓰고 다니는 편입니다. 씻을 때는 벗지만요."

"잘 때는요?"

"어, 쓰는 거 같은데요?"

"…왜요?"

"그게…."

"얼굴을 가리면 마음이 편해진다는군요."

오주한이 말끝을 흐리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우연후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는 대기석에 싱긋 웃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가왔다.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민다.

손을 맞잡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편의를 봐줘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별거 아닌데요. 어차피 저 녀석 예복도 맞추고 있었고요."

간단히 대답하고는 재단사에게 묻는다.

"이분 것까지, 이틀 안으로 제작되겠습니까?"

"가능합니다, 부회장님."

오주한의 몸 치수를 재던 재단사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목소리와 태도는 친절하고 얼굴은 자신만만하다.

충분히 제작할 수 있다는 뜻이 내비쳤다.

뭐, 설령 자신이 없더라도 제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질문을 던진 사람이 이곳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우연후니까.

"그렇다는군요."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고는 대기석을 가리켰다.

저곳에 앉자는 뜻이다.

우린 그곳으로 걸어갔다.

"조금 기다려야 할 겁니다. 밤이라 한 분밖에 안 불렀거든요."

"아, 당연히 기다려야죠."

"차 마시겠습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밤에 차나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와서."

우연후는 원래 앉아 있던 곳에 앉았고, 나는 그 옆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다시 멍하니 서서는 재단사에게 몸을 맡긴 오주한을 바라봤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으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것 같다.

꼭 예복을 맞춰야 하나?

재이네 대장간에서 내가 짓던 얼굴이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예복은 왜 맞추는 겁니까?"

"아, 만찬회에 가게 되섭니다. 전 그렇다 치고, 주한이는 그런 자리에 어울리는 옷이 없거든요."

아니, 지금 옷이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은데.

애초에 만찬회에 어울리려면 저 복면부터 벗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거봐, 새싹이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만찬회라면, 이틀 후에 있는 그걸 말하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어라? 두 사람이 만찬 회장에?

황 장관은 일대 길드가 경호를 거부했다고 했었는데….

상황이 바뀌었으니 맡기로 한 건가?

그렇다고 해도 조금 이상하다.

우연후는 누군가를 경호할 사람이 아니다. 다른 이들에게 경호 받을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의 행동은 곧 기업의 가치로 직결되니까.

"전 아버지 대신 가는 거고, 주한은 제 경호원으로 가게 됐습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우연후가 말했다.

우찬성 회장 대신 가는 거라면….

역시, 그는 경호원이 아니라 기업 총수로서 가는 거였다.

일대 그룹이라면 그런 자리에 초대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참, 지연이한테 들었습니다. 크라우드가 포션 유통을 막고 있었다고요?"

"네."

"고문해 알아냈다던데, 정말입니까?"

"고문이라니, 난 그런 거 한 적 없어요."

"아…. 그렇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그렇다 치자"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

최희석도 그렇고 우연후도 그렇고.

왜 다들 당연히 내가 고문했으리라 생각하는 걸까.

심지어는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대체 그들의 머릿속에 새겨진 내 이미지가 어떻길래…?

차분하게 고뇌하고 있는데, 재단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분 오십시오."

오주한이 어깨를 천천히 돌리며 다가왔다.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움직일 수 있는 게 좋은 듯했다.

가만히 서 있어서 몸이 찌뿌드드했던 거겠지.

"제 차례네요. 이만 실례."

"네."

자리에서 일어나 재단사 앞으로 걸어갔다.

재단사는 곧바로 내 몸의 치수를 쟀다.

그것이 새벽 2시를 조금 넘었을 때의 일이었다.

***

벽에 걸린 네모난 전자시계가 2시 8분을 나타냈을 때, 내 차례가 되었다.

협회 직원의 안내를 받아 워프 게이트에 섰다.

"움직이지 마세요."

직원은 내 왼손을 쳐다보며 말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던 것을 멈추란 뜻이었다.

직원이 말한 대로 하자, 3초 후 시야가 변했다.

나는 실내가 아니라 실외에 서 있었다.

단숨에 무주 개미굴 던전 관리소의 워프 게이트로 이동한 것이다.

또 시야에 게이트 앞에 서 있는 관리인 두 명이 보였다.

왜 저러고 서 있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을 때, 두 사람이 동시에 상체를 푹 숙였다. 우렁차게 인사까지 하면서.

"안녕하십니까!"

"환영합니다! 백도운 님!"

아무래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저번 김정철 사건 때문에 나한테 잘 보이고 싶은 것이리라.

개미굴 던전 독점권이 나한테 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거다.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곳 관리소에서 잘리게 될 테니까.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개미굴 던전으로 걸어갔다.

뒤에서부터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두 관리인이 내 앞에 서서 안내를 시작했다.

"이렇게 또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

관리소에서 던전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걸어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로, 안내를 받을 정도도 아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내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저번 일로 감사했다는 인사를 전했고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도 해왔다.

물론, 상대해 줬다간 귀찮아질 것 같아서 던전에 도착할 때까지 무시로 일관했다.

그랬는데도 그들은 끝까지 노력을 다했다.

던전으로 들어가는 나를 향해 우렁차게 인사한 것이다.

"다녀오십시오! 나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득템하시기 바랍니다!"

개미굴 던전에서 득템이라니.

놀리는 것도 아니고, 득템은 무슨 득템?

대왕 개미에게선 좋은 재료가 나오지 않는다.

나도 새싹이에게 줄 A+등급 비료를 구할 수 없었더라면 이런 곳의 독점권 따위 사지 않았을 거다.

인벤토리에서 발광석을 꺼내 주변을 밝혔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대왕 개미들 보인다. 녀석들은 나를 노리고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상대해 주기 위해 오른손을 내뻗는다.

"세계수의 뿌리!"

나무뿌리처럼 변한 오른손이 앞으로 쇄도했다.

다섯 가닥이 순식간에 대왕 개미들을 한 마리씩 감싼다.

덩치가 작은 녀석들은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었다.

한 번에 다섯 마리를 붙잡아 에너지를 흡수했다.

사실, 대왕 개미를 상대하는데 세계수의 뿌리를 쓸 필요는 없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세계수의 뿌리를 쓴 건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다.

내가 이곳에 온 건 비료를 얻기 위해서였지만,

[B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 관리인의 길(초급)]

[A등급 이상의 비료 1번 주기(0/1)]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384/1000)]

[세계수의 뿌리 1000번 쓰기(5/1000)]

1000번이나 써야 하는 세계수의 뿌리를 해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횟수를 빠르게 채우는 데엔 강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보다 약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훨씬 났다.

마족의 권속이 아닌 탓에 결실에 필요한 에너지를 모을 수 없는 점은 아쉬웠다.

그래도 한 번 쓸 때마다 여러 번을 채울 수 있었으니 퀘스트는 생각보다 금방 끝날 듯하다.

"세계수의 뿌리!"

스킬을 써가며 일자로 된 통로를 나아간다.

20번 정도 스킬을 사용했을까?

일자 통로가 끝나고 여러 갈래로 나뉘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김정철 일당과 한바탕 싸웠던 곳이었다.

계속 내질렀던 오른팔을 살살 돌리며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세계수의 뿌리 1000번 쓰기(97/1000)]

97마리?

이제 겨우 갈림길에 다다랐을 뿐인데….

역시 개미굴 던전답네.

대왕 개미 자체는 약하지만, 마릿수만큼은 다른 던전보다 훨씬 많이 출현했다.

사체 보관소는 다른 통로들을 다 돈 후 마지막에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마리라도 더 사체가 모일 수 있도록.

갉, 가갉!

가장 왼쪽에서 두 번째 통로에서 대왕 개미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바로 오른팔을 내뻗었다.

오른손 검지가 나무뿌리처럼 변해 대왕 개미를 감싼다.

온몸이 칭칭 감긴 대왕 개미는 갉아먹으려는 듯 주둥이를 벌렸다 닫았다 한다.

물론 그럴 때마다 갉혀 나가는 건 놈의 주둥이였다.

곧 녀석의 몸부림이 멈췄다.

체내의 모든 에너지를 빼앗겨 죽은 것이다.

나무뿌리를 통해 전달된 에너지는 아주 미미했다.

E등급 몬스터였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이번에 세계수의 뿌리로 얻게 된 마나는 총 16입니다.]

[첫 번째 결실까지 앞으로 50% 남았습니다.]

난데없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그것도 첫 번째 결실에 관련한 메시지가.

겨우 16 얻었는데.

"이게 갑자기 왜 올라…?"

나무뿌리에서 원래대로 돌아온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한라산 게이트에서 B등급 몬스터인 레드 만티코어를 잡을 때 퍼센트는 오르지 않았었다.

그 탓에 마족의 권속의 에너지를 빼앗아야만 오르는 건 줄 알았다.

"캐릭터 창!"

결실 저장고 칸을 확인하기 위해 캐릭터 창을 열었다.

눈앞에 바로 캐릭터 창이 떠오른다.

다른 건 전부 차치하고, 가장 아래에 있는 결실 저장고 칸을 확인했다.

[결실 저장고 – 50% 이상]

"진짜 올랐잖아…?"

원래 결실 저장고는 40% 이상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게 지금은 십의 자릿수가 올라 50%가 되었다.

즉, 굳이 마족의 권속에게서 에너지를 빼앗지 않아도 저장 에너지가 올라간다는 거다.

"아니, 그럼 지금까지 크라우드 놈들한테 빼앗을 때만 메시지창이 떴던 건 뭔데?"

의문을 중얼거려보지만, 대답은 없다.

대왕 개미들이 갉갉거리며 다가오는 소리만 들려왔다.

곧바로 세계수의 뿌리를 써서 놈들에게서 에너지를 빼앗는다.

녀석들은 순식간에 눈에서 빛을 잃고 죽었다.

잠깐 가만히 기다려 보았지만, 역시 메시지창은 떠오르지 않았다.

"...."

일단, 결실 관련 메시지창이 떴을 때를 떠올려 봐야겠다.

지상욱, 이정근, 공우재, 그리고 방금.

시스템 창은 총 4번 떠올랐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랬었던 거로 기억한다.

지상욱 때.

[첫 번째 결실까지 앞으로 90% 남았습니다.]

이정근 때.

[첫 번째 결실까지 앞으로 80% 남았습니다.]

공우재 때.

[첫 번째 결실까지 앞으로 60%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방금.

[이번에 세계수의 뿌리로 얻게 된 마나는 총 80입니다.]

[첫 번째 결실까지 앞으로 50% 남았습니다.]

"…어?"

이거, 설마….

10% 단위로 시스템 창이 뜨는 건가?

정말로 그런 거라면….

평범하게 사냥으로 결실 에너지를 모을 수 있었던 거라면….

"...."

나는 죽어 있는 대왕 개미들을 바라봤다.

녀석들의 빛을 잃은 눈은 왠지 허망해 보였다.

그건 아마, 내가 허탈함을 느끼고 있어서 그리 보이는 것일 거다.

내가….

"내가 지금까지 삽질하고 있었구나…!"

백도운, 이 머리는 머리끈 걸이로 달고 다니는 새끼야!

제108화

[세계수 어린나무가 관리인을 안쓰러워합니다.]

[위로해 주기 위해 아침 이슬을 전송합니다.]

"...."

새싹이가 아침 이슬을 보내왔다.

스마트폰 화면 상단의 우편함에 1이 떠 있다.

그걸 보고 있어서일까.

왜인지 아침 이슬을 처음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강우혁이 내게 했던 아주 예의 바른 행동이 기억난 거다.

"아저씨한테 어떻게 형이라고 불러요? 그건 엄청 예의 없는 행동이에요! 난 예의 바른 아이구요. 그렇죠, 수녀님?"

"푸흐흡!"

머릿속에 우혁의 목소리가 울려댔다.

아주머니가 참지 못하고 터뜨려 버린 웃음과 함께.

후우…. 갑자기 이슬이가 무지하게 마시고 싶어졌다.

"…퀘스트나 깨자."

날 위로해 준 새싹이를 위해서도 힘을 내야겠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뱉은 뒤 왼쪽에서 두 번째 통로로 들어갔다.

발광석에 의해 밝아진 통로에는 대왕 개미들이 득시글거렸다.

나를 본 녀석들이 갉갉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꼭 저희끼리 의사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착각이다.

대왕 개미들이 주둥이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건 대화라기보다 일종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에 불과했다.

놈들은 혼자 있어도 갉갉거린다.

"세계수의 뿌리!"

나무뿌리로 변한 손은 곧바로 대왕 개미들의 에너지를 빼앗았다.

붙잡힌 녀석들은 주둥이로 공격하고 체내의 산성액도 뿌려 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자신들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을 깨달은 대왕 개미들은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그렇게 갈림길에서 나뉜 통로들을 전부 손쉽게 돌았다.

여왕개미의 방에 도달하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네 한 바퀴를 느긋하게 산책하는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동작 없이 그저 세계수의 뿌리를 연거푸 써 가며 꾸준하게 걸으면 됐기 때문이다.

저번에 왔을 때는 통로 하나 다 도는 데 몇 시간이 걸렸었는데….

갉갉! 가앍!

다른 대왕 개미들보다 네 배는 커다란 녀석이 커다란 주둥이를 맞부딪쳤다.

크기 때문인지 주둥이 부딪치는 소리가 다른 놈들보다 훨씬 더 컸다.

여왕개미는 거리낄 것 없이 분노를 표출했다.

던전 보스로서 독기를 마구 뿜어 낸 것이다.

개미굴의 주인으로서 침입자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졌다.

저번에 왔을 때도 봤었던 모습이다.

그때 여왕개미의 분노는 따스한 손길 한 방에 잠잠해졌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무뿌리가 빠르게 뻗어 나가 여왕개미의 몸통을 감쌌다.

검지와 중지가 여왕개미의 사로잡고 에너지를 빼앗았다.

여왕개미라고 해 봐야 다른 대왕 개미보다 더 큰 녀석일 뿐이다.

감히 세계수의 뿌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갉, 가앍….

거세게 발버둥 치던 여왕개미는 다른 녀석들처럼 곧 두 눈에 빛을 잃고 죽는다.

뿌리를 통해 흡수된 에너지도 그리 많지 않다.

다른 개미들보다는 많았지만, 지금껏 빼앗았던 다른 녀석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가장 적었던 지상욱과 비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양이다.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통로를 되돌아가는 동안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B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 관리인의 길(초급)]

[A등급 이상의 비료 1번 주기(0/1)]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396/1000)]

[세계수의 뿌리 1000번 쓰기(848/1000)]

"이제 152번만 더 사용하면 되는구나."

한 통로에서는 대왕 개미가 100~200마리가량 나왔었다.

잘하면, 시체 보관소로 향하는 통로를 도는 동안 세계수의 뿌리 1000번 쓰기를 충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그렇게 도달한 시체 보관소에서는 비료를 만들 수 있었다.

그것도 관리인의 길 퀘스트에 필요한 A등급 이상의 비료를.

세계수의 뿌리 횟수를 채우고 비료를 만들어 새싹이에게 주면, 이제 남은 퀘스트는 알테라-쇼넴을 쓰는 것뿐이다.

횟수가 얼마나 남았나 확인했다.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396/1000)]

내가 개미굴을 도는 동안 엘프들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384회에서 12회가 늘어나 396회가 됐다.

남은 횟수는 604회….

"오늘 퀘스트 다 깰 수 있을지도?"

허리춤에 찬 마법 주머니를 손으로 쥐어 보았다.

내용물이 가득 담겨 빵빵해진 그것은 마치 공을 쥔 듯했다.

인벤토리가 생긴 이후 나는 모든 아이템을 거기에 옮겼었다.

텅 비었던 마법 주머니가 이렇게 다시 차게 된 것은 모두 홍수정 덕분이다.

수정 공방을 어지럽혔던 각종 쓰레기를 모조리 쓸어 온 것이다.

빵빵해진 마법 주머니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양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많던 쓰레기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가져왔다. 남은 604회 정도는 충분히 채울 수 있으리라.

부족하면 관리인들에게 쓰레기 좀 달라고 하면 될 일이다.

여러 통로로 나뉘는 곳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내가 죽인 대왕 개미의 사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새 다른 살아 있는 녀석들이 시체 보관소로 옮긴 것이 분명했다.

사체 보관소로 향하는 통로를 마지막으로 돌기로 한 것도 그걸 위해서였다.

조금이라도 더 대왕 개미들의 사체가 모이도록….

[어린나무는 관리인에게 설렘을 전합니다.]

[관리인이 어서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푸흐흐…."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새싹이의 바람대로 해 줬다.

시체 보관소로 향하는 통로를 향해 들어간 것이다.

들어가자마자 두 종류의 대왕 개미들이 나를 반겼다.

날 향해 공격해 오는 대왕 개미들.

그리고 죽은 것들을 끌고 가는 대왕 개미들.

제자리에 섰다.

세계수의 뿌리를 써서 날 공격한 대왕 개미들을 사로잡았다.

"흐음…."

이놈들을 죽이면서 지나가기는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남게 될 사체들이 아까웠다.

써먹을 수 있는 것을 버려두고 가게 되는 거였으니까.

"그렇다고 다 죽인 후 옮길 수도 없는 노릇… 아."

눈에 세계수의 뿌리에 사로잡혀 에너지를 빼앗기는 대왕 개미들이 보였다.

이 얼마나 멍청한 고민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나는 머리를 머리끈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는 게 틀림없다.

죽인 후 세계수의 뿌리를 유지한 채 짊어지고 가면 될 일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로 고민한 자신이 한심스럽다.

[어린나무가 관리인을 안쓰러워합니다.]

"음…."

이런 거로 안쓰러워하지 말아 주라.

창피하단 말이야….

한숨을 내쉰 후 대왕 개미들을 쳐다봤다.

한 차례 날 공격했다가 손쉽게 죽은 것을 본 녀석들은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거리를 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쓸데없는 고민을 끝내 주고자 세계수의 뿌리를 썼다.

지금까지 거대한 몬스터로 변했던 권속 놈들의 몸도 들어 올렸던 세계수의 뿌리다.

대왕 개미 수십 마리쯤이야 거뜬히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네 개의 나무뿌리는 대왕 개미들을 칭칭 감고, 하나의 나무뿌리만 채찍처럼 휘둘러 대왕 개미들에게서 에너지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건 제법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사실 세계수의 뿌리는 여태껏 집중력 같은 게 필요한 스킬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지금 검지 하나만 따로 움직이려고 했을 때 깨달았다.

집중하지 않으면 나무뿌리로 변한 검지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또 대왕 개미들을 감싸 쥐고 있던 다른 네 손가락이 활짝 펼쳐지기도 했다.

"이런…."

내뻗고 꽉 쥔다.

지금까지는 그런 간단한 동작만 했을 뿐이라서 컨트롤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세계수의 뿌리를 유려하게 피해 낸 놈들이 없었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리라.

하나만으로도 이런데 다섯 개를 전부 따로따로 움직이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

적이 아니라 동료를 공격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능숙하게 다루려면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다시 팔을 뻗어 대왕 개미 사체들을 들어 올린다.

지금 당장 연습하기 위해서다.

나는 집중을 잃지 않기 위해 천천히 시체 보관소로 향했다.

"후우우…."

그 때문에, 시체 보관소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지금까지 다른 통로들을 도는 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조금이라도 딴생각을 하면 나무뿌리로 변한 손이 이상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원했던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휘둘러지거나 들고 있던 사체들을 떨구기 일쑤였다.

그래도 시체 보관소 앞까지 걸어오는 동안 처음보다는 나아졌다.

또,

[세계수의 뿌리 1000번 쓰기(1000/1000)]

세계수의 뿌리 조건도 해결했다.

이제 남은 건 썩은 내가 진동하는 시체 보관소로 들어가 비료를 만드는 거다.

아래로 향해 있는 구멍 앞에 선다.

구멍에 들고 온 대왕 개미의 사체들을 떨어뜨렸다.

그럴 때마다 구멍에서 사체 썩은 냄새와 눈에 보일 정도의 독기가 더 심하게 올라왔다.

저번에도 그랬듯 스킬 세계수의 관리인 덕분에 악취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또 두 번째라서 그런가.

거리낌 없이 바로 뛰어내려 갈 수 있었다.

타악….

두 발에 대왕 개미들의 사체가 밟혔다.

정확히는 대왕 개미의 사체들이 썩고 산성액에 녹아내리며 한 덩어리가 된 것들이다.

"어라…?"

그런데… 저번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발아래에 있는 덩어리의 크기가 저번에 왔을 때보다 작았다.

"보관소에 쌓인 대왕 개미들의 사체가 적어서… 그런 건가?"

생각해 보면, 저번에 왔을 때는 던전의 마나가 범람할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던전 마나가 범람하려면 한두 달 정도 더 걸려야 했다.

그때까지 시간이 남은 만큼 시체 보관소에 쌓인 사체도 적은 것이다.

뭐, 여전히 '거대한 독기 덩어리'이기는 했다.

[어린나무가 자기 주변의 흙을 관리인에게 전송합니다.]

새싹이가 독기 덩어리를 정화할 흙을 곧바로 보내왔다.

우편함이 아니라 내게 보낸 흙은 곧바로 스마트폰에서 뿜어져 나왔다.

인간 분수대가 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잘 버티고 서서 거대한 덩어리에 흙을 뿌렸다.

세계수의 마나를 머금은 흙이 뿌려질 때마다 부정한 기운과 악취가 점점 사라졌다.

시체 보관소를 가득 메웠던 거대한 독기 덩어리도 사라졌다.

덩어리가 사라지자 그 위에 있던 내 몸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균형을 잃지 않고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어린나무는 관리인에게 만족스러운 마음을 전합니다.]

발아래에는 동그란 덩어리가 놓여 있다.

내 주먹보다 작은 덩어리에서는 숲을 걷는 듯한 상쾌함이 뿜어져 나왔다.

새싹이에게 줄 비료가 만들어진 것이다.

톡, 톡.

곧바로 따스한 손길로 비료와 새싹이를 어루만졌다.

비료는 재이네 대장간에서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스마트폰을 향해 날아갔고, 퍽 소릴 내며 화면으로 들어갔다.

[어린나무가 A등급 비료를 얻었습니다!]

[관리인의 길 퀘스트의 A등급 이상의 비료 1번 주기 조건이 달성됐습니다.]

"응? A등급?"

왜 A+가 아니라 A야?

독기 덩어리가 작아서 그런가?

그렇다면….

B등급 비료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 고생해서 갖고 오길 잘했네…."

하마터면 퀘스트 조건을 달성하지 못할 뻔했다.

다음에 또 오면 되긴 했지만….

그러려면 최소한 2달은 기다려야 했다.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3달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손에 쥔 스마트폰에서 흰빛이 내뿜어졌다.

비료가 전부 전달된 거다.

흰빛이 사라지고, 곧 새싹이가 보였다.

"…오!"

새싹이의 모습은 방금까지와 달랐다.

제109화

"…오!"

새싹이의 모습은 방금까지와 달랐다.

기둥에서부터 나뭇가지 하나가 새로 자라나 있었다.

당연히 나뭇가지엔 나뭇잎도 자라났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큰 나뭇잎이 대략 열 장 정도 늘어났다.

나뭇잎이 늘었으니, 최대 마나량도 증가했을 터였다.

"캐릭터 창!"

눈앞에 푸르스름한 창이 떠오른다.

[백도운 – 세계수 관리인]

[타이틀 - 세계수의 동반자]

[HP – 100%]

[MP – 260만260]

[SP - ∞]

[상태 – ]

[결실 저장고 – 50% 이상]

"260만…."

유독 MP 칸이 눈에 띄었다.

아마 내 신경이 거기에 쏠려 있어서 그럴 거다.

"비료가… 대단하긴 대단하네."

새삼 비료의 힘이 놀라웠다.

저번에 주었을 땐 새싹에서 조금 더 자란 새싹으로 상태가 변했었다.

이번에도 비료를 주자마자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자라나는 등 외형이 눈에 띄게 변화했다. 50만의 마나가 증가하기도 했고.

키는 자라지 않고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새싹이가 더 성장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화면 속 엘프들의 모습이 바로 그 증거였다.

SD 캐릭터 형태의 엘프들은 지금 팔을 올렸다 내렸다 만세를 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얼굴은 (^0^) 이모티콘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너 나 할 것 없이 밝았다.

그들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행복한 감정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하하…."

나는 실실 웃으며 화면을 두드렸다.

그러면서 주변을 돌아봤다.

악취와 독기가 완전히 정화되어 사라진 시체 보관소가 눈에 들어왔다.

페브리즈를 뿌린 듯한 산뜻함이 느껴지는 시체 보관소….

이곳은 대왕 개미들이 죽으면 오게 되는 곳인 만큼 굉장히 넓었다.

수정 공방에서 쓸어온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꺼내 두기에 딱 알맞았다.

알테라-쇼넴을 쓰기에 아주 적절한 장소란 소리다.

그렇다.

A등급 이상의 비료 주기 조건을 달성했지만, 아직 개미굴 던전을 빠져나갈 때는 아니었다.

[B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 관리인의 길(초급)]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396/1000)]

마법 주머니를 뒤집은 후 두 손으로 탈탈 털었다.

여러 종류의 쓰레기들이 후두두 떨어졌다.

포션 메이커의 공방에서 가져온 것들인 만큼 쓰레기는 대부분 포션을 만들다 생긴 잔여물 같은 것들이었다.

못 쓰게 된 기계나 빈 플라스크 병, 읽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메모지들도 있었다.

"자, 그럼…. 아르카."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바라보며 아르카를 꺼냈다.

알테라-쇼넴.

그것을 쓰려면 우선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삽을 사 올 걸 그랬나…."

바로 쓰레기들을 묻어 버릴 구덩이를 파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