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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사각형의 방은 완벽한 좌우대칭이었다.

책들이 잔뜩 꽂힌 두 개의 책장.

실험에 쓰일 셀 수 없이 많은 각종 도구.

도구들이 정돈된 네 개의 책상.

그것들은 판을 찍은 듯이 완전히 똑같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유일하게 하나인 것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사각형의 책상과 책상 정중앙에 서 있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었다.

긴 더벅머리를 한 갈래로 대충 묶은 듯한 그녀는 보라색 액체가 끓고 있는 플라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글부글, 푸쉭…!

그녀가 지켜보던 플라스크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와 함께 보라색 액체는 순식간에 빛깔을 잃는다.

색이 전부 사라져서는 투명한 액체만이 끓어올랐다.

"하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쉰다.

검은 뿔테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는다.

액체를 끓어오르게 하던 푸른 불도 훅 꺼 버린다.

"역시 불순물이 너무 많아…."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그녀의 혼잣말을 파묻어 버렸다.

사각형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온 건 정장을 입은 남자다.

소위 꽃미남이라고 불릴 정도로 말끔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문을 열자마자 말했다. 얼굴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유혜주 있어? 아, 있네."

남자는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유혜주라고 불린 여자.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앞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이미 곱슬한 더벅머리에 컬이 더 추가됐다.

"응? 뭐야. 또 실패했나 보지?"

"...."

유혜주는 남자를 노려봤다.

"실패"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담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뚜벅뚜벅 걸어가 연구실 가운데 준비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느긋한 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앉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여전히 갑갑한 장소야."

"공우재…. 당신 여긴 왜 온 거야?"

검은 뿔테 안경을 다시 쓰며 묻는다.

질문이 던져졌지만, 공우재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주변만 돌아봤다.

그녀는 공우재를 쳐다보다가 이내 주먹으로 책상을 쿵 내리쳤다.

"빌어먹을! 앉으면 되잖아, 앉으면!"

그리 말하고 나서야 공우재는 유혜주를 쳐다봤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쉰 후 그에게로 걸어갔다.

정확히는 그가 앉은 소파 바로 맞은편이다.

노려보면서 쏘아붙이듯 말했다.

"개새끼. 나 강박증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공우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소파에 등을 기댄다.

그 모습은 유혜주가 한숨을 내쉬게 하기에 충분했다.

"용건이나 말하고 가. 나 바빠."

"쉬어 가면서 하지 그래. 어차피 방금도 또 실패한 거 같은데."

"또… 실패…."

유혜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꽉 쥔 주먹을 붉은 기가 사라져 하얗게 변했다.

"공우재."

"응?"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자꾸 내 신경 건드리면 우리 계약 끝나는 거야."

"저런. 그건 안 되지."

안 된다는 말엔 당황스러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감정뿐이다.

계약 끝낼 거라는 말은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

공우재는 품에서 마법 주머니를 꺼냈다.

이어 마법 주머니 속에서 사각 유리병을 빼냈다.

유리병에는 보라색 가루가 담겨 있었다.

"네가 찾던 거."

"뭐? 그 말은…!"

"그래.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도 100%짜리 바이올렛 파우더야."

"드디어…!"

유혜주는 공우재를 향해 팔을 뻗었다.

마치 성물을 들어 올리는 성직자처럼 소중하게 유리병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건네받자마자 유리병을 이리저리 살폈다.

소중한 물건을 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그녀에게 유리병에 담긴 브이피는 소중한 물건이 아니다.

구하기 힘든 귀한 실험물이었을 뿐.

"굉장해…. 역시 당신이야. 기버를 거절하고 다졸에 오길 잘했다니깐?"

"기버는-"

우웅.

"…실례."

공우재는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선 그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호오?"

"왜. 무슨 일 생겼어?"

"서울에서 브이피를 유통하던 놈들이 당했다는군."

"아, 그래?"

그리 말하는 유혜주의 눈은 유리병에만 향했다.

시선은 전혀 그를 향하지 않았고, 목소리도 음의 높낮이가 단조로웠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무관심이었다.

공우재는 예의상의 질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난 이만 올라가 보도록 하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마음대로 하셔. 아. 맞다."

"...?"

"오늘 이후로 몇 달 동안 내려오지 마. 방해받기 싫으니까."

"글쎄? 확답은 못 해 주겠는걸."

유혜주가 유리병에서 시선을 떼고 공우재를 올려다봤다.

책상을 쿵 내려칠 때의 날카로운 눈빛이 또다시 그를 향했다.

그는 피식 웃은 뒤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아. 지금 내가 저놈 신경 쓸 때가 아니지…!"

그러고는 유혜주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줄곧 해 왔던 실험을 위해서 책상으로 달려갔다.

"이것만 있으면… 그걸 제거할 수 있어!"

제89화

"여기야."

한진환이 차를 몰고 온 곳은 강남 양재였다.

방향으로 봐선 경부고속도로를 타려는 듯하다.

아마 부산의 기버를 큰 목표로 삼은 것 같다.

물론, 내려가는 동안 겸사겸사 다른 지역의 길드들도 없앨 생각일 거다.

전국의 마약 유통 길드를 전부 없애는 게 이번 퀘스트의 목표였으니까.

조수석에서 내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는 헌터 랭킹 1위라는 위명에 어울리지 않는 작고 귀여운 차를 타고 다녔다.

옆면에 'EV' 표시가 그려져 있는 경차다.

"뭘 그렇게 봐?"

"이거요."

EV 표시를 가리켰다.

그걸 보고는 그가 킥킥 웃었다.

웃기는….

"양심이 있긴 한 겁니까?"

번개의 마나를 소유한 사람이 전기 에너지로 굴러가는 차를 몬다.

과연 그 전기 에너지는 어디서 얻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답을 구할 수 있었다.

한진환이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양심이 있으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재밌지?"

"재미있긴 한데, 이거 법적으로 문제 되는 거 아니에요?"

"자, 실없는 소린 그만하고."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말을 돌린다.

그 모습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문제가 되는구만, 이거.

뭐,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해도 이런 일을 그에게 따질 사람은 없겠지.

이런 일로 랭킹 1위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을 테니까.

"아까 강남에선 네가 다 처리했으니까…."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건물을 바라본다.

4층짜리 건물은 외견으로는 평범한 제약 회사 같다.

물론 평범한 제약 회사는 아니다.

저 건물에서 만들어지는 건 마약이었으니까.

그것도 일반 마약은 비교할 수도 없이 환각성이 강력한 능력자용 마약.

"이번엔 내 차례인가?"

한진환이 나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잔뜩 묻어나 있다.

"내 실력을 확인하고 싶다, 라…. 그 말을 들은 건 8년 전 중국에서 만난 영감탱이 이후 처음이야."

"영감탱이?"

"있어. 신선인 척하는 능구렁이 영감탱이."

신선인 척하는 능구렁이 영감….

누굴 말하는 건지 알겠다.

리롄제.

중국의 S급 헌터를 말하는 게 분명하다.

누가 A+급 헌터 아니랄까 봐 말하는 사람도 남다르다.

"확인할 수 있으면 한번 해 봐."

"...!"

뒤돌아서는 한진환의 몸이 하얗게 변한다.

순식간에 온몸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온 거다.

내가 광합성 모드를 썼을 때처럼.

마치 하트 브레이크라도 쓴 것처럼.

그 때문에 그는 검기를 두른 무기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진환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허…."

대신,

우르르… 꽝!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번개가 연달아 치는 소리만 연달아서 들려왔다.

뒤늦게 그 소리가 눈앞의 4층 건물에서 들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한진환은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속도….

그 속도는 곧 위력으로 치환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남자다.

괜히 '뇌제'라는 멋들어진 별명이 붙은 게 아니다.

"저게 시스템이 바뀐 이유…."

원래 헌터 등급은 A급 S급밖에 없었다.

한진환은 A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했지만, 그렇다고 S급이라고 칭하기엔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시스템이 바뀌어야 했다.

헌터 한 명을 위해 세계 최초로 'A+'라는 등급이 만들어진 것이다.

"백도운!"

한진환이 나를 불렀다.

그는 옥상에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분도 채 걸리지 않고 한 길드가 전멸한 거다.

"어때? 그 눈으로, 내 실력 확인했어?"

그렇게 묻고는 씩 웃는다.

힘을 쓰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장난기가 잔뜩 묻어난 얼굴이다.

확인했냐고?

했고말고.

"덕분에요."

그 실력을 볼 순 없었지만 확인할 수는 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했다.

저 남자가 바로 15년 동안 한 나라에서 1위로 군림하고 있는 헌터였다.

두근두근한걸?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해 볼까?"

한진환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탁….

빠직!

갑자기 그의 몸에서부터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자신의 힘을 미처 추스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주변으로 뿜어진 번개 줄기 중 하나가 내 뺨을 때렸다.

"...!"

"이런, 괜찮아?"

그것 때문에 세계수의 나무껍질이 발동됐다.

파스스…!

안타깝게도, 나무껍질은 그것을 전부 버티지 못했다.

나무껍질이 겨우 추스르지 못한 마나에 의해 허무하게 깨진 것이다.

"…괜찮습니다."

걱정스럽게 묻는 그에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느낀 고통은 왠지 색달랐다.

가지치기에 의한 것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다.

"어차피 회복되니까요."

"오. 꼭 나무 같네…? 능력과 관련돼 있나 보지?"

고통을 참아 내며 눈을 뜬다.

"뭘 또 그렇게 노골적으로 떠 보는… 어라?"

"...?"

시야에 홀로그램 창이 떠 있다.

[광합성 에너지 12%]

갑자기 이게 왜 떠?

퍼센티지는 또 왜 이러고.

하루에 1%씩 오를까 말까 했던 거였는데?

설마… 한진환의 번개에 닿아서?

"이봐, 왜 그래?"

한진환이 내 어깨를 붙잡는다.

빠직!

그저 손을 올렸을 뿐인데, 어깨 부분의 옷이 타 버렸다.

당연히 나무껍질도 바로 발동됐다.

이번엔 깨지지 않았다.

대신 하얗게 빛이 내뿜어졌다.

이 빛 뭔데?

"이거… 설마 정전기입니까?"

"미안해서 어쩌냐? 내가 힘을 쓰고 나면 이래."

"괜찮습니다, 비싼 옷도 아닌데. 좀, 불편하겠습니다?"

"불편하지. 혼자 다니는 이유가 다 있는 거라고."

"하긴, 이래서야 혼자 다닐 수밖에… 어라?"

"아까부터 왜 그래?"

[광합성 에너지 13%]

방금 정전기 때문일까?

에너지가 1% 더 차올라 있었다.

번개의 마나가 몸에 닿을 때 에너지가 차는 게 확실하다.

어째서?

빛의 마나라면 모를까.

번개의 마나가 광합성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궁금증이 내 검지를 절로 움직였다.

홀로그램 창을 클릭하자 새로운 창이 떠오른다.

[광합성 에너지(리히텐베르크)]

리히텐베르크?

이게 뭔 소리야?

***

유혜주는 플라스크를 바라봤다.

그 속에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보랏빛 액체가 있었다.

불순물이 전혀 없기 때문일까?

저번과 똑같은 방법으로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데도 액체는 그 빛깔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대로였다.

"역시 문제는 불순물이었어…."

끼익.

문 열리는 소리에 유혜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흘 전에 왔었으면서 또 뭐야?"

"나도 반가워."

"…앞으로 몇 달 정도는 발도 들이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신경질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우재는 소파에 가 앉는다.

등을 기대고 탁자 위에 두 발까지 올리는 여유작작한 태도.

그 모습을 본 유혜주는,

"개새끼…!"

분개하며 소파로 가 앉았다.

그녀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러면 이럴수록 연구 결과만 늦게 나온다는 거, 확실히 알아 두는 게 좋을 거야…."

"…서울."

"뭐?"

"대전, 대구, 부산."

"...찍고?"

그 말에 공우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유혜주를 쳐다봤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는 여유로운 태도는 여전했지만,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얼굴에서 느긋함이 지워졌다.

대신 황당함이 떠올랐다.

"뭐. 그 노래 부르려던 거 아니었어?"

"그럴 리 있겠어?"

"아, 그럼 뭔데!"

유혜주는 공우재처럼 소파에 등을 기댔다.

소파 사이에 놓인 탁자에는 네 개의 발이 올려졌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본다.

질문하지만, 질문 속엔 궁금함이 담겨 있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공우재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다음으로 경상도, 전라도."

"...? 갑자기 지역 얘기는 왜 하는 건데. 지도라도 갖다 줘?"

"그곳들에서 브이피와 바바를 유통하던 놈들이 전멸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고개가 내려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부산이 당했다고? 누구한테? 부산엔 기버 놈들이 있잖아?"

"정부."

"정부우?"

"그래. 하는 짓을 보면 마치 국내 마약 관련 조직들을 전부 소탕하려는 것 같아."

"…흥. 오바야. 그놈들이 그럴 수 있었으면 벌써 전부 잡아들였겠지. 무엇보다 여기엔."

"여기엔?"

유혜주는 공우재를 쳐다봤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공우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이 있잖아."

"오. 의왼데. 내 평가가 제법 높군?"

"당신, 내가 본 쓰레기 중에선 가장 강하거든."

"쓰레기라…."

"그 많은 쓰레기 중에서 왜 여기를 선택했겠어?"

그 질문을 받은 공우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빙빙 돌린다.

"이런 갑갑한 장소를 만드는 걸 허락해 줘서?"

"…당신이 있어서야. 보호받을 수 있을 거 같았거든."

"그 믿음을 지켜 주지 못해 아쉽군. 지금 상황은 나로서도 무리야."

"당신으로서도?"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면… 그래. 서지혁 정도는 돼야겠지."

"서지혁이라면…. 천칭?"

유혜주가 눈을 찌푸렸다.

천칭 길드의 서지혁은 A급 헌터 3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것으로 유명해진 남자다.

핵심은 'A급 헌터 3명을 쓰러뜨렸다'가 아니다.

A급 헌터 3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현재 상황은 그런 강자여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열악한 상황이라는 걸 의미했다.

"한진환이 나섰어."

"미친…!"

유혜주가 입을 떡 벌렸다.

그 모습을 보곤 공우재는 킥킥 웃었다.

"미친놈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써?"

"닭 노는 곳에 소가 들어왔으니까."

"소?"

그는 고개를 돌려 방 한가운데를 바라봤다.

실험이 한창 진행 중인 책상 한쪽에 바이올렛 파우더가 놓여 있었다.

"아…."

"바이올렛 파우더. 크라우드 놈들이 제작한 마약. 하지만… 그 정체는 능력자용 마약 같은 게 아니지."

"인간의 괴물화…."

"그래. 그런 걸 정부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지 않겠어?"

유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우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약 같은 게 나돌아다니는 걸 용인해 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정부가 언젠가 그것을 통제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그렇다고 설마 그 한진환이 나설 줄은 몰랐지만.

"…잠깐만. 근데 당신 왜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어?"

"여유? 아니, 이건 여유가 아니야. 자포자기지."

"자포자기라니…."

그런 사람치곤 얼굴이 웃고 있다.

손짓 발짓도 평소처럼 느릿느릿하다.

그 때문에 유혜주는 그가 자포자기한 게 아니라 여유롭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이 있는 사람처럼.

"한진환이 나섰어. 이건 도망치는가 치지 못하는가의 문제가 아니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지. 그래서."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뭐를?"

"네가 만들 새로운 약. 난 그 약에 모든 걸 걸기로 했어."

"...."

꽈앙!

"힉!"

"천둥…."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우재는 그 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금세 알아차렸다.

한진환이 이곳에 온 것이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길래 충청도로 갈 줄 알았더니. 바로 강원도라…? 그렇군."

"...?"

"목표는 너였어."

"나?"

"아마 네가 브이피를 제작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

"천재는 이래서 고달프다니까…."

유혜주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공우재도 마찬가지다.

공격을 받고 있다면, 조직의 리더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갔고, 문을 열기 전 브이피와 각종 실험도구를 챙기는 유혜주를 돌아봤다.

그녀가 책상 서랍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그러다 문득 공우재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뭘 보고 서 있어? 그건 1인용일 텐데."

"시간을 벌어 주겠다고? 악당한테도 의리는 있다, 이거야?"

"의리…. 낯선 단어네. 아까도 말했지? 네가 만들 약에 모든 걸 걸기로 했다고."

"그랬지."

"우리의 거래를 잊지 마, 유혜주."

"…걱정하지 마셔. 약속은 지킬 테니까."

"그거면 됐어. 아!"

"...?"

"한 가지 묻는다는 걸 깜빡했군."

"뭔-"

꽈앙!

또다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제멋대로 날뛰어 주시는데…."

"공우재."

"아. 미안. 질문은 별거 아니야. 그저 궁금할 뿐. 나는, 재활용되는 쓰레기인가?"

"…미친놈."

유혜주는 얼굴을 찌푸렸다.

험상궂게 보일 정도로 찡그린 얼굴을 보며 공우재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저놈도 제정신은 아니라니까.

"다음 기회가 있길 바라."

"그 말을 듣고 싶었어."

"바이 바이."

나긋한 인사와 함께 스크롤을 찢는다.

스크롤에서는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고, 빛이 사라지면서 유혜주도 사라졌다.

그는 그녀가 떠난 자리를 멀거니 바라봤다.

"...."

끼이익.

문이 열렸다.

문을 연 건 공우재가 아니라 바깥의 사람이다.

공우재는 한진환이 문을 열었다고 판단해 방 안쪽으로 뛰었다.

뒤를 돌아보면서,

"이곳에 온 걸 환영…."

인사를 하려다가 멈췄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한진환이 아니었다.

호기심이 담긴 순진무구한 얼굴.

긴 머리카락을 대충 묶은 듯한 꽁지머리.

"…월광의 검사."

"오. 날 알아?"

"환영한다, 백도운."

"흠…. 네가 여기 주인이냐?"

도운이 방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돌아보며 묻는다.

공우재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내가 이곳의 주인이다."

"...."

그 대답에 도운은 주변을 돌아보던 것을 멈췄다.

눈이 공우재를 바라봤다.

이어 고개도 그를 향했다.

똑바로 바라보면서, 도운은 웃었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찾았다는 듯이.

제90화

"네가 여기 주인이냐?"

방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지하실에 있는 방은 실험실 같아 보였다.

플라스크나 비커 따위의 각종 실험 도구들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정돈된 모습으로.

홍수정의 수정 공방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 내가 이곳의 주인이다."

"...."

덤덤하게 대답한 공우재는 정장 외투를 벗었다.

외투를 옆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다.

그는 숄더 홀스터를 착용하고 있었다.

홀스터에는 단검 한 자루와 세 개의 약병들이 담겼다.

약병들이라….

음지에서 불법 약물을 제조하는 조직의 마스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네."

공우재는 거짓말이 아주 능숙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잘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 실험실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스타일이 너무 다르다.

깔끔하게 정돈된 것을 넘어서 오와 열을 맞춘 물건들.

그것들에서는 마치 훈련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갑갑함이 느껴졌다.

이곳의 주인이 강박증을 앓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너 아니잖아."

"내가 아니다…?"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내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거든."

"흠?"

손을 들어 공우재의 팔을 가리킨다.

흰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두 팔을.

공우재는 제 팔을 내려다봤다.

걷어 올린 소매는 각각 높이가 달랐다.

"이게 뭐 어떻다고 그러는 거지?"

"그걸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게 증거야."

"...?"

소매는 높이만 다른 게 아니다.

모양새도 왼팔 쪽이 더 단정하다.

오른팔 쪽은 제대로 접히지 않아 헝클어졌다.

좌우가 완전히 똑같지 않은 것을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그가 이런 완벽한 좌우대칭을 자랑하는 실험실의 주인이다?

그럴 리 없지.

이 실험실의 주인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다.

누구인지는 뻔하다.

유혜주는 강박증이 있었다.

"유혜주 지금 어디 있어?"

"...."

질문은 받은 공우재는 표정의 변화가 없다.

질문을 듣기 전과 똑같이 느긋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홀스터에서 약병을 꺼내는 오른손도 느릿느릿하다.

마치 바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처럼 여유로워 보인다.

그 태도는 내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듯했다.

병에 담긴 것을 다 마신 그가 빈 약병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투욱….

빈 약병이 바닥에 닿는다.

시선이 거기에 쏠린 순간,

공우재가 홀스터에서 단검을 꺼내 들고 달려들었다.

왼손에 들린 단검이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진다.

그 단검을,

"...!"

왼손 검지로 막았다.

나무껍질이 발동되어 공우재의 단검을 막아낸다.

그가 별다른 스킬을 쓰지 않은 한 나무껍질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이토록 쉽게 공격이 막힐 줄 몰랐을까?

공우재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처음으로 얼굴에서 느긋함과는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좀 마음에 드네.

오른발을 공우재의 턱을 향해 찼다.

부웅, 홱!

발이 허공을 갈랐다.

얼굴을 틀어 피한 것이다.

공우재는 다시 자신의 차례라는 듯 맹렬하게 공격을 이어 나갔다.

한 번, 두 번.

휘둘러지는 단검을 피하면서 그의 실력을 파악했다.

그는 김정철이나 용두식보다는 빨랐고 벌 인간보다는 느렸다.

A급 헌터 수준이라는 소리다.

이런 실력으로 왜 음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뭐,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이유 없는 무덤은 없으니.

"흐읍!"

단검을 횡으로 휘두른다.

기합이 담겨서 그런지 아까보다 빠르다.

그래도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목을 살짝 뒤로 당겨서 단검을 피했다.

핏!

"오…."

콧등이 살짝 베였다.

그가 휘두른 단검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거다.

피하지 못한 이유는,

"검기…."

단검에 둘린 초록빛의 검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검기를 발동해 리치를 늘린 것이다.

잔머리를 이용한 잔재주였다.

물론, 잔재주라도 검기를 이용하면 그건 훌륭한 필살기가 된다.

상대가 내가 아니라는 전제로 조금만 더 깊이 휘둘렀더라면 공우재는 방금 승리를 쟁취했을 거다.

얼굴이 콧등을 경계로 나누어졌을 테니까.

"…대단한데?"

"칭찬 고마워."

그러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난다.

콧등의 상처는 가려움과 함께 아물었다.

"회복 스킬…?"

거리를 벌리던 공우재가 눈을 찌푸렸다.

어렵게 상처를 냈는데 바로 회복하니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고개를 짧게 저으며 놀란 감정을 지운다.

그러고는 홀스터에 있는 약병들을 모조리 꺼내 마셨다.

단검에 둘린 초록빛의 검기가 점점 커졌다.

순간적으로 마나의 양을 증폭시키는 포션을 마신 것이 확실하다.

엄청나게 커진 검기가 둘린 단검은 이제 단검 같지가 않다.

그 모습은 꼭 작은 아르카를 꼬나쥐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을 꺼내지 않아도 되겠어?"

텅 빈 약병들을 바닥에 버리며 묻는다.

뉘앙스가 꼭 아르카를 꺼내라는 것 같다.

제대로 싸우라는 것이겠지.

"없어도 충분할 거 같은데?"

그리 말하자 공우재가 피식 웃었다.

고개도 몇 번 끄덕인다.

내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래. 그 말이… 맞긴 하지!"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달려든다.

마나를 증폭시켜서일까?

아까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비교하자면 벌 인간이 돌진해 오던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정도 속도라면 가지치기를 한 지금으로서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휙, 휘익, 휙!

휘둘러지는 검을 차례차례 피했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그리고 뒤로.

뒤로 멀리 물러나는 식으로 회피했을 때, 공우재의 오른 다리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스킬이다.

뒤로 점프한 나를 바로 쫓기 위한 스킬.

쾅!

공우재가 거대한 총알처럼 쏘아졌다.

예상대로 돌진형 스킬이었다.

내게로 쇄도해 오면서 그는 몸을 비틀었다.

아무래도 회전력을 더하려는 것 같다.

회전하는 탄성을 이용해서 단검을 휘두르는 속도와 위력을 올리려는 거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잔재주를 써가며 싸우는 스타일이라면 다른 의도를 더 가졌을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내 앞까지 도달한 그가 회전하면서 왼손을 휘둘렀다.

단검을 쥔 왼손을 붙잡기 위해 왼손을 뻗었다.

그런데,

"...!"

그의 왼손엔 단검이 없었다.

공우재의 왼손이 내뻗은 내 왼팔을 쳐낸다.

이어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단검이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설마설마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예상한 덕분에 대처할 수 있었다.

오른손을 뻗어 단검을 쥔 오른손을 붙든다.

그대로 쭉 잡아당겨서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크헉!"

바닥에 등부터 떨어진 공우재가 피를 토했다.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고 입술을 깨문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나를 올려다봤다.

시간이 지나 참을 수 있는 고통이 됐을 때 그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런 잔재주…."

"...."

"내가 잘하는 짓이거든."

"...!"

공우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올려다봤다.

내 입에서 그의 잔재주를 인정하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이어 그가 걷어 올렸던 소매를 가리켰다.

"그리고… 소매 덕분에."

"소매?"

"그래."

"무슨… 말이냐?"

"왼팔 소매는 깔끔하게 접힌 데 반해 오른팔 소매는 제대로 접히지 않았잖아."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정밀한 작업을 하는 데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익숙해 보인다…라는 거지."

"...!"

즉, 공우재는 왼손잡이가 아니라 오른손잡이다.

그런 놈이 무기를 왼손으로만 쥐고 싸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자. 이만 포기하지 그래? 유혜주 어디 있는지도 말해 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 값은 해야지?"

"…아니."

"아니 아니."

"이렇게 끝나면 재미없잖아?"

"난 충분히 재미있었-."

"페이즈2다, 백도운."

"...."

곧 공우재의 몸에서 초록빛 마나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마나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현상….

이 현상을 나는 잘 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봐왔다.

변태, 또는 괴물화….

내가 이걸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공우재는 크라우드일 가능성이 큰 유혜주와 함께 있던 사람이다.

[세계수 어린나무가 혐오스러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새싹이의 확실한 인증까지 떨어졌다.

"드디어…!"

주먹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퀘스트를 시작한 지 나흘 만에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괴물로 변신할 줄 아는 놈을.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공우재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변신을 끝낸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

말끔하게 생겼던 외모는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저 모습은….

"…트롤?"

"그래, 트롤이다."

"...!"

"이 모습을 보고서도 별로 놀라질 않는군?"

그리 묻는 공우재는 당황스러운 듯했다.

트롤처럼 변한 얼굴에서는 표정 변화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해서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트롤처럼 변한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거나 겁먹지 않은 사람은 처음 본 듯하다.

"아니, 충분히 놀라고 있는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만?"

"진짜야. 너 지금 어떻게 말하고 있는 거냐?"

"…그것도 알고 있었나."

김재식도, 이정근도 말을 하지 못했었다.

이정근의 경우 버섯이란 놈에게 조종당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괴물 상태일 때 제정신으로 말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하긴…. 넌 유혜주를 노리고 있었지. 당연히 이 현상을 본 적이 있겠어."

"오. 드디어 유혜주 얘기를 하기로 한 거야?"

"...."

트롤의 큰 눈이 더 커진다.

반대로 커다란 입은 꽉 다물어진다.

말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할 수 없지.

우선 내 할 일부터 해야겠다.

그리 생각했을 때,

[어린나무가 순수한 시선을 확인했습니다.]

시야를 가리는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순수한 번개의 마나 소유자.

한진환이 제 할 일을 끝내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거다.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아마 관련 스킬을 써서 지켜보는 듯하다.

뭐, 지금 쓰려는 건 세계수의 뿌리다.

사전에 최희석에게 전부 들었을 테니 딱히 숨길 필요도 없다.

마음껏 구경하라지.

"아, 미안. 기다리게 했네."

"...."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너는 그 모습이 돼서는 안 됐어."

"뭐?"

오른손을 공우재에게 내뻗는다.

그는 곧바로 커다란 몸을 웅크렸다.

내 손에서 사용될 스킬을 피하려고 준비하는 거다.

그 판단은 옳았지만….

"세계수의 뿌리."

"헉…!"

세계수의 뿌리란 게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쉽게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것도 트롤처럼 거대한 몸으로는.

나무뿌리처럼 변한 오른손이 순식간에 트롤의 몸을 움켜쥐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쉽게 풀 수 있었다면 S급 스킬이지도 않았을 거다.

바로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힘…! 이 힘이!"

힘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런데… 왜일까?

공우재의 눈에선 절망감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오."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도망치려는 듯이 허공을 향해 날아가지만, 얼마 가지 못한다.

몸으로 도로 들어와서는 곧 내 오른손으로 들어왔다.

액체화된 타르를 만진 것 같은 감각….

그 에너지는 이내 오른손에서 정화되기 시작했다.

"공우재."

"…왜, 왜 불러?"

"인간이 될래, 괴물로 남을래?"

"…설마!"

질문을 던지자 공우재가 눈을 빛냈다.

힘을 빼앗기는데도 절망하지 않더니, 이젠 갑자기 눈을 빛내기까지 한다.

이놈 진짜 뭐지?

"인간. 인간이… 되겠다."

"…그래."

왼손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세계수의 뿌리를 써서 이마에 박았다.

그러고는 세계수의 마나를 넣었다.

"죽지 마라?"

"그게 무슨 마하아악!"

공우재가 고통에 괴로워했다.

나무뿌리에 휘감긴 몸을 마구 비틀었다.

그럴 거다.

이 스킬은 당하는 이에게 끔찍한 고통을 줬다.

지상욱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기절했을 정도다.

곧, 공우재의 몸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모든 작업이 끝난 거다.

그리고… 이정근 때처럼 심장의 마나를 건드렸다.

이제 공우재는 마나 운용을 하지 못하는 몸이 됐다.

그 순간, 오른손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정화 작업이 끝난 거다.

[이번에 세계수의 뿌리로 얻게 된 마나는 총 50만1115입니다]

[첫 번째 결실은 앞으로 60% 남았습니다.]

50만….

공우재는 이정근보다도 많은 마나를 지니고 있었다.

마나를 증폭하는 포션을 마셔서 그런 듯하다.

[퀘스트 알림!]

[마족의 권속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7/10명)]

[현재 완료 보상 – 전대 세계수의 굵은 나뭇가지.]

"…응?"

눈을 감았다, 뜬다.

떠오른 알림창을 다시 바라본다.

[현재 완료 보상 – 전대 세계수의 굵은 나뭇가지.]

세계수의 굵은 나뭇가지?

그럼, 아르카는 뭔데.

저번에 받았던 그 통나무는 뭐였냐고.

그게 가는 나뭇가지였다는 소리야?

제91화

꽝!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천둥소리를 듣자마자 다졸 길드원들은 곧장 단 하나의 행동을 취했다.

어디로든 멀리 도망치는 것.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는 것.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달았다.

그들이 있는 건물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 되어 있었다는 걸.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붙잡은 동료 한 명이 전기에 감전되어 쓰러졌기 때문이다.

문으로는 나갈 수 없다.

아니, 건물에서 나갈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닫고서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건물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건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몰이를 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했다.

꼭대기 층에 순간이동 마법진이나 워프 게이트 같은 탈출로가 준비돼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을 미끼로 삼은 거였다.

다졸 길드의 리더인 공우재가 지하로 내려갔음을 알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고자 위로 올라간 것이다.

"대, 대장이 도망칠 수 있을까?"

"...."

한 사내가 질문을 던졌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명백했다.

도망칠 수 없다.

그들이 하는 행위는 그저 1분에서 2분 정도 시간을 버는 행위밖에 되지 못했다.

뚜벅, 뚜벅.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꼭대기 층에 있는 모든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부스스한 머리의 남자.

"한진환…!"

이름을 불린 남자, 진환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저희끼리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검지와 중기를 펼친 채.

"너희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어."

"그게… 뭡니까?"

"가만히 잡히는 거. 아프게 잡히는 거."

그리 말하면서 진환은 다졸 길드원들 사이를 걸었다.

다졸의 구성원들은 가만히 서서 자신들 사이를 걷는 그를 바라봤다.

그가 제안한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할 것은 당연히 하나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어 올린다.

"가만히! 가만히 잡히겠습니다!"

"저도! 저도 그냥 잡혀가겠습니다!"

"저흴 제발 붙잡아 가 주십시오!"

그들은 한진환에게서 도망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았다.

어차피 잡힐 것이라면, 아프지 않게 잡히는 게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한진환이 그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잘 생각했어들."

마치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꽝!

또다시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건물이 울릴 정도로 우렁찬 소리였다.

그 소리에 다졸 길드원들은 귀에서 이명 현상을 느꼈다.

삐 하고 울리는 소리가 점점 작아질 때, 그들은 자신들의 두 팔이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한진환이 그들을 포박한 거다.

한 명도 아니고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을 한순간에 묶은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은 하나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바로 안도감이었다.

한진환이 포박하는 게 아니라 죽이려고 했었다면?

그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숨이 끊겼으리라.

털썩, 털썩….

한숨을 몰아쉬며 주저앉는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한진환은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 없군…."

중얼거린 후 눈을 감는다.

그의 발에서 빠직거리며 마나가 빠져나왔다.

전류를 흘려 주변을 탐색하는 스킬이었다.

곧 지하층에 두 존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했다.

다만, 감지된 존재의 크기가 조금 이상했다.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마치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감지한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한진환이 눈을 뜨고 주저앉아 있는 남자를 불렀다.

"이봐."

"네, 네? 저 부르셨습니까?"

"혹시 공우재 괴물화할 줄 알아?"

"그!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잘됐군…."

"네?"

오른손을 휘저으면서 진환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지하층을 향해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의 발에서부터 흘러나온 마나가 순식간에 지하층에 다다랐다.

마나는 지하층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 줬다.

백도운과 트롤처럼 변한 공우재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도운은 괴물처럼 변한 인간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진환의 머릿속에 최희석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최희석은 그 정보를 말하면서 관련 보고서를 주었다.

다만, 보고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운이 이정근을 원래대로 되돌리던 작업이 묘사돼 있었는데, 말 그대로 작업 묘사만 돼 있었다.

어떻게 그런 작용을 하는 것인지까지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반쪽짜리 보고서.

그 때문에 진환은 그것을 읽고 나서 그리 생각했다.

또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 서류 작업에 익숙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헐…?"

그런데 도운이 그 보고서와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을 나무뿌리처럼 바꾼 것이다.

나무뿌리처럼 변한 오른손은 트롤을 붙잡고는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트롤의 몸이 작아졌을 때, 도운은 이어 왼손을 나무뿌리로 바꾸고는 공우재의 이마에 쑤셔 박았다.

진환이 보기에 도운은 그의 마나를 공우재에게 억지로 주입하고 있었다.

저런 짓을 하면 죽어 버릴 텐데?

그런 생각이 진환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공우재는 죽지 않았다.

고통으로 울부짖을 뿐 죽지는 않았다.

이내, 공우재의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트롤처럼 변했던 몸 대신 인간의 몸이 나타났다.

"...?"

대체 어떻게?

진환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도로 인간의 몸이 된 공우재만 보일 뿐이었다.

"허, 이제 보니…. 그 보고서가, 아주 완벽한 보고서였구먼?"

진환은 헛웃음이 나왔다.

***

"굵은 나뭇가지라니…"

어이없는 마음에 속마음이 밖으로 나왔다.

아르카의 전신이 됐던 통나무가 굵은 나뭇가지가 아니라는 건데….

그 통나무가 가는 나뭇가지라거나 보통 크기의 나뭇가지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아, 하윽! 하…."

퀘스트 알림 창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굵은 나뭇가지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긴 하다.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에 와서 퀘스트를 완료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족의 권속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7/10명)]

퀘스트 완료까지 앞으로 3명 남았다.

3번만 더 하면 퀘스트 조건을 모두 채우게 된다.

1명씩 쓰러뜨릴 때마다 완료 보상이 좋아지는 것을 보면, 조건을 모두 채웠을 땐 굵은 나뭇가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무언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을 한번 해 보자면,

전대 세계수의 열매

같은 거라든가.

"하아, 하…."

"…아까부터 정신 사납게시리."

아까부터 들려오던 숨소리의 주인은 공우재다.

그는 엄청난 고통을 느꼈을 텐데도 지상욱과 달리 기절하지 않았다.

의식을 잃지 않고, 제정신으로 날 쳐다보기까지 한다.

다만, 비를 맞은 듯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거칠게 숨을 연신 헐떡여 댔고, 팔과 다리도 덜덜 떨렸다.

그런 와중에도 시선은 계속 나를 향했다.

힘을 빼앗길 때처럼 눈을 빛내고 있는 채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저렇게 쳐다보는 걸까.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눈빛과는 조금 다르다.

불법 약물을 제조하는 길드의 리더라서 그런가?

"후, 후우…."

"…대단하네. 기절할 줄 알았는데."

"고통은, 익수욱흐읍…!"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아직 몸에 고통스러운 감각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래도 말하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는 알겠다.

아마 "고통은 익숙하다"라고 말하고 싶었으리라.

말했던 대로 고통은 익숙한 덕분일까?

곧 공우재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거친 숨소리가 줄어들었다.

"방금… 뭐라고…?"

"방금? 뭘?"

모르는 척 되물었다.

공우재가 물어본 건 뻔하다.

내가 "굵은 나뭇가지"라고 중얼거린 걸 들은 거다.

가르쳐 줄 생각이 없어서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

"...."

피식.

힘없이 웃는다.

그러고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제 몸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나와 싸우기 전에 보였던 덤덤한 얼굴로.

대단한 놈이다.

몇 초 후, 공우재가 눈을 감았다.

"심장을, 건드렸나…."

"맞아."

"...."

"넌 이제 다시는 트롤로 변신하지 못할 거야."

그뿐만이 아니다.

공우재는 원래 지니고 있던 힘도 쓰지 못할 거다.

이정근처럼 모든 힘을 잃은 것이다.

하트 브레이크를 쓴 사람처럼 심장이 고장 났으니까.

그 사실을 안 공우재는,

"흠…."

무덤덤했다.

가만히 누워서는 천장만을 올려다봤다.

음…. 좀 이상한걸?

힘을 전부 잃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덤덤할 수 있는 걸까.

이정근은 힘을 잃은 것을 알게 된 순간 발악을 해 댔었다.

아니, 비단 이정근뿐만이 아니다.

힘을 잃는 사람들은 누구나 지랄발광을 해 대곤 한다.

나도 그랬다.

2년 전 하트 브레이크를 쓰고 모든 힘을 잃었을 때….

이정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었다.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흑역사를 꼽는다면 그때를 고를 정도로 심했다.

그런데… 공우재는 마치 이렇게 될 거라는 걸 각오한 사람처럼 보였다.

"예상과 다른가 보지?"

"응?"

"내가 절망하거나, 절규할 거로 생각한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럴 거로 생각했지. 너 왜 무덤덤하냐?"

그리 묻자 돌아온 건 미소였다.

웃어?

제힘 빼앗는 놈을 보고?

"이미 전부 포기했으니까."

"...?"

"한진환이라는 이름엔 그만한 힘이 있거든…."

"아."

"어제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죽음을 각오했다. 힘을 잃는 것만으로 끝난다면… 저렴하게 값 치른 거지."

"...."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더니 입을 다문다.

다시 천장을 올려다본다.

대체 뭐야, 이 모든 일에 달관한 거 같은 놈은?

전부 포기했다고 해서,

죽음도 각오했었다고 해서,

이렇게 무덤덤할 수가 있나?

"야. 한 가지 묻자."

천장을 올려다보던 공우재가 시선을 돌린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적의가 없다.

이정근조차 날 바라볼 때 비굴한 적의가 있었는데….

공우재의 얼굴에는 나른한 감정만이 담겨 있었다.

그가 말했던 대로 각오했기 때문일까.

"…너 같이 몬스터화 할 수 있는 놈. 길드에 또 있어?"

"있긴 했지. 네 명 정도."

"오. 그래? 지금 어디 있어?"

완전 대박이었다.

네 명 정도나 있다니.

그놈들에게서 에너지를 빼앗는다면….

첫 번째 결실이란 걸 이룰 수 있을 거고, 퀘스트도 완료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전부… 처리한 지 오래다."

공우재의 입에서 나온 말이 속을 쓰리게 만들었다.

있긴 했고, 정도였고.

생각해 보면 그가 한 말은 전부 과거형이었다.

"전부? 한 명도 남김없이?"

"할 수 없었어."

그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녀석들은 더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었으니까…."

"이런…."

그야 그럴 것이다.

지상욱도 그랬다.

만티코어처럼 변했을 때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몬스터처럼 다른 헌터들을 먹이로 생각하고 공격했을 뿐.

하지만… 정신을 차리게 할 방법은 있었다.

그것도 두 가지나.

새싹이의 아침이슬을 먹이는 것.

세계수의 뿌리로 힘을 빼앗는 것.

지상욱과 이정근을 각각 그 방법들로 제정신을 차리게 했었다.

"...."

하지만 그 사실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공우재의 목소리에서 쓸쓸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말한 '녀석들'은 부하나 동료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료를 처리해야 했을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넌 대체 유혜주의 뭘 믿고 그것들을 복용한 거야?"

"음? 아니, 나는 바바와 브이피를 복용하지 않았어."

"...?"

"나도 약물 제조의 프로다. 마약 같은 걸 복용할 리 없지."

"그럼 너 트롤로 변신은 어떻게 한 건데?"

공우재는 크라우드가 아니다.

마족의 권속들은 변신했을 때 인간형을 유지했었다.

박쥐 인간, 지네 인간, 벌 인간 같은 식으로.

그럼 공우재는 어떤 방법으로 V 물질에 노출된 걸까.

"몸을 몬스터로 바꾸는 물질…. 그것만 빼내서 체내에 주입했다."

"무, 뭐 이 미친놈아?"

동정심이 생기려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V 물질을 직접 주입했다?

그러니까, 공우재는 괴물로 변하리라는 걸 알고서 주입했다는 거다.

제 몸에도, 동료의 몸에도.

힘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아니, 그건 좀 아니잖아….

[세계수 어린나무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눈앞의 인간의 어리석음에 나뭇잎을 휘휘 젓습니다.]

새싹이가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92화

벌컥!

실험실 문이 열렸다.

공우재를 한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던 나는 문을 돌아봤다.

한진환이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내게 씩 웃었다.

"리더를 잡은 거야? 대단한걸?"

"...."

싸우는 모습 다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나도 굳이 아는 척할 생각은 없었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모른 척할 생각이다?

그럼 나도 지켜봤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척할 거다.

"그럴 줄 알았어. 유혜주는?"

"여기가 유혜주 실험실 같기는 한데요."

"없었어?"

"네."

현재 다졸의 건물은 결계가 쳐져 있다.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전기 통구이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몇 가지 없었다.

사람을 통구이로 만들어 버리는 결계의 전격을 버티고 나가거나 순간이동 마법을 써서 나가거나.

같은 이유로 워프 게이트로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녀석뿐이었습니다."

앞으로 걸어오는 한진환에게 아래를 가리켰다.

공우재가 쓰러져 있는 곳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공우재의 얼굴이 변했다.

눈이 최대한으로 커지고 입이 벌어진다.

또 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상체를 일으키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고통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일으키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주 잠깐의 버둥거림으로 인해 다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영-"

"반갑다, 공우재."

"...!"

공우재의 눈이 커졌다.

아까 커진 게 최대한일 줄 알았는데, 틀렸다.

지금이 훨씬 더 컸다.

그 때문에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보였다.

몇 초간 입을 벌리고 있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간다.

"저, 절…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여기 너 잡으려고 왔는데 모를까."

"절 잡으러 오셨다니… 영광입니다."

"영광…?"

"이런 꼴을 보여 민망합니다."

"...."

영광, 민망….

말하는 것만 보면 붙잡힌 범죄자 같지가 않다.

한진환도 그리 생각한 걸까?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나를 보는 얼굴은 마치 "이놈 왜 이래?"라고 묻는 것 같았다.

"...."

"...."

나도 그처럼 '저놈 왜 저러나'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비슷한 기분이었으므로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그래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존경하던 멘토를 만난 멘티 같은 모습이었으므로.

물어보면 대답해 주지 않을까?

나처럼 생각한 듯 한진환이 공우재에게 질문을 던졌다.

"공우재. 유혜주 여기 있었어?"

"…그렇습니다."

"...."

진짜로 대답하네?

내가 물어볼 땐 입을 꾹 다물더니….

"어, 그럼…."

한진환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대답할 거 같아서 물어보긴 했는데, 정말로 대답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지금 어디 있어?"

"모릅니다."

즉답이다.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거짓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거짓말 같지는 않다.

지금 공우재의 얼굴은 아이돌을 우러러보는 팬의 얼굴이었다.

최희석을 바라보던 지상욱처럼.

모른다, 라….

"결계가 처져 있는 이곳을 빠져나간 걸 보면…."

"응?"

"순간이동 마법이나 워프 게이트를 이용했을 겁니다."

"그래? 잠깐만 기다려. 확인해 볼 테니."

그러고는 한진환은 곧바로 바닥으로 전류를 흘려보냈다.

발아래에서 전류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프거나 따끔하지는 않았다.

아르카로 만든 푸른 칼날이 베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지 않았을 때 바위와 나무를 베지 않았던 것과 같다.

순수한 마나로 만들어 흘려보낸 전류에는 공격 의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곧 한진환이 말했다.

"워프 게이트는 없어."

"그럼 순간이동 마법을 썼겠군요."

"하지만 그녀는 마법사가 아니지."

"네."

그의 말마따나 유혜주는 아이템 메이커다.

적어도 B급 마법사 정도는 돼야 쓸 수 있는 순간이동 마법을 직접 펼쳤을 리 없다.

그런데도 이곳을 빠져나갔다면, 방법은 하나다.

"순간이동 마법이 저장된 스크롤을 사용했겠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나는 공우재를 쳐다봤다.

유혜주가 스크롤을 사용해 이곳을 빠져 나갔다면, 공우재의 "모릅니다"라는 대답은 사실일 거다.

이동한 장소는 스크롤을 쓴 주인만이 알고 있을 테니까.

다른 나라일 수도 있고, 다른 대륙일 수도 있다.

"유혜주는 포기해야겠군요."

"그래야겠지? 다른 정보를 알아내지 않는 한은."

"아쉽게 됐네요."

"내 잘못이야. 너무 느긋했어. 뭐, 놓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한진환은 공우재를 바라봤다.

공우재는 아까부터 그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돌을 보는 팬 같은 얼굴도 여전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걸까?

스리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 친구 넘기고 나서 다음으로 어느 쪽으로 갈래?"

"남은 곳이 어디 어디였죠?"

PDF 파일에 따르면 강원도에는 세 조직이 있었다.

우리는 그중에서 다졸에 제일 먼저 쳐들어왔다.

이유는 유혜주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가능성대로 그녀가 있기는 했었다.

안타깝게도 도망쳐서 놓쳐 버렸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 두 손가락 프로젝트를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유혜주를 붙잡지 못했더라도 한국에서 바바와 브이피를 소탕하는 일은 계속 진행해야 했다.

이제 남은 건 이곳 강원도를 포함해 경기도와 충청도, 그리고 제주도뿐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치악산이랑 양양."

"그럼, 먼저 치악산 쪽부터 처리하는 게 어떨까요?"

"왜?"

"밤에 산 타는 것보단 낮에 산타는 게 좋을 테니까."

"그렇긴 하네."

한진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의견에 동의한 것이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고…. 공우재 붙잡았다고 협회에 연락 좀 하마."

"그러시죠. 아."

"...?"

"넘어가기 전에 볼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볼일? 무슨 볼일?"

엘프들 밥 챙겨 줘야 돼요.

그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대충 둘러댔다.

아니,

"아. 한 시간?"

둘러대기도 전에 한진환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흘 동안 꼬박꼬박 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기 때문인가?

이제 자리를 비우는 데에 익숙해진 것 같다.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건지…."

"하하."

"뭐, 처음부터 그렇게 계약했으니 할 수 없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녀와."

"네.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리 말한 후 공우재를 바라봤다.

실험실을 빠져나가기 전에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한진환을 보고 있던 공우재는 내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왜?"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나한테?"

"어. 별건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

"...?"

"강원도 특산물 좀 추천해 주라."

그동안 나는 전국 각지의 대표 음식을 엘프들에게 갖다 줬다.

부산에서는 흑염소 불고기를 사줬다.

나도 먹을 겸 색다른 고기가 뭐 있을까 검색하다가 찾은 거다.

경상도에서는 울산의 언양 불고기를 사 줬고, 전라도에서는 담양의 떡갈비를 골랐다.

그리고 엘프들은 지금까지 사 준 사람이 보람을 느낄 만큼 맛있게 전부 먹어치웠다.

나흘째 되는 오늘도 실패할 생각은 없었다.

"특산물?"

"어."

"갑자기?"

"어."

"…뜬금없긴."

공우재가 눈을 찌푸린다.

그러면서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추천하자면… 치악산 쪽의 복숭아나 양양의 송이 정도겠군."

"아."

"정선의 곤드레도 나쁘지는 않겠어."

"확실히 맛있을 것 같긴 한데…."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다.

복숭아, 송이버섯, 곤드레.

맛있긴 하겠지만 쓸모없는 음식들이다.

우리 엘프들은 과일이나 채소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오늘 저녁은 정선 가서 먹을까…."

한진환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곤드레밥에 비빔장을 비벼 먹을 생각을 하니 침이 고였다.

"근데 내가 원한 건 고기 종류야. 다시 추천해 줘."

"고기? 바라는 것도 많군."

"하하. 선물용이라서 말이야."

"선물용이라…."

"받는 사람들이 육식주의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은 아니었지만.

공우재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도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씩 웃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역시 하나밖에 없지."

"오?"

"바로-"

***

강원도. 고기.

그 두 단어를 합쳤을 때 공우재는 딱 하나의 음식을 생각해 냈다.

치이익.

고기 굽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그렇다.

공우재가 추천해 준 것은 바로 횡성 한우다.

흰 꽃이 아름답게 피어난 고깃덩이를 가스버너 위에 얹는다.

성역은 바람이 세게 불지도 않고 춥지도 않다.

새싹이를 비롯한 어린나무와 풀숲이 자라나고 있어 풍경도 좋다.

고기 구워 먹기 딱 알맞은 장소라는 소리다.

다 구운 고기를 접시에 덜어 냈다.

"레지나 님. 여기 있어요."

"우와…."

레지나는 접시를 건네받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을 다셨는지, 분홍빛 입술이 반들반들해 보인다.

소고기 구워지는 냄새를 오랫동안 맡았을 테니 그럴 수밖에.

그녀는 다른 엘프들이 받아간 뒤 맨 마지막으로 고기를 받았다.

리더로서 마지막까지 참은 것이었다.

나이가 가장 어렸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모습이 대견스러워 다른 엘프들보다 한 점 더 구워줬다.

"잘 먹을게요!"

"네, 맛있게 먹어요."

횡성 한우를 받아들자마자 자리에 가 앉는다.

그러고는 곧바로 손에 쥐고 있던 포크로 한우를 찍어 먹었다.

포크를 쥔 손이 마구 흔들렸다.

"으으응! 맛있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름기가 잔뜩 묻은 입술을 혀로 닦으며 한우를 포크로 찍어 먹었다.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참 좋다.

저런 모습 보려고 고기를 구워 준다는 사람들의 말이 이해가 갈 정도다.

그래도… 역시 고기는 먹는 게 최고지.

나도 이제 좀 구워 먹어 볼까?

고기 구워 주느라 내 걸 먹지 못했다.

아마 내 입술도 레지나처럼 반들반들할 것이다.

"관리인님."

"아, 네. 파트리아 님."

"오늘도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맛있었다니, 다행이네요."

진심이었다.

이게 얼마짜리인데.

엘프들이 맛있게 먹지 않았더라면 굉장히 슬펐을 거다.

"혹시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닙니까?"

파트리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리하긴 했지.

한우란 게 원래 내 돈 주고 사서 먹기엔 아까운 음식이니까.

비싼 만큼 맛있긴 하지만.

"고기의 빛깔로 예상하건대… 귀한 재료 같아 보입니다."

"음. 비싼 고기긴 하죠."

"역시나! 다음부턴 이러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를 위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

아무래도 파트리아가 오해를 좀 한 것 같다.

내가 맛있는 음식들을 구해 온 건 오로지 엘프들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음식을 맛있게 먹는 엘프들을 보고 있으니 흐뭇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엘프들은 배부르게 먹고 나면 열심히 새싹이를 보살폈다.

온종일 알테라-쇼넴을 써 가면서 말이다.

그 덕분인지 새싹이한테서 뿜어지던 은은한 빛이 더욱 세지기도 했다.

새로운 이파리가 자라나지는 않았지만, 영양 상태가 좋아졌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뭐, 그래도 일단 맞장구쳐 줘야겠다.

내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좋지만, 미안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파트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들어줄 생각도 없는데 감사까지야.

"저, 관리인님…."

"네."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요?"

"이렇게 매번 음식을 얻는 게 죄송스러워서요. 목장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목장…이요?"

"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동물들을 구해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장을 만들게 동물들을 구해 와 달라.

파트리아의 입에서 부탁이 나오자 이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E등급 세계수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 내용 – 엘프들이 목장을 만들고자 한다.]

[목장을 위한 각종 살아 있는 동물을 구해오자.]

[성공 보상 – 어린 세계수의 나뭇잎.]

[실패 시 어린 세계수와 엘프에게 실망을 받게 됩니다.]

오, 퀘스트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어라?"

성공 보상이….

어린 세계수의 나뭇잎?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이 아니라?

나는 의문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이파리들이 보였다.

내 손바닥보다 큰 이파리들이.

제93화

파트리아의 부탁은 당연히 들어주기로 했다.

자급자족하고 싶다는데 기쁜 마음으로 들어줘야지.

또 새싹이의 잎이 전대 세계수의 것과 얼마나 다를지도 궁금하다.

아직 어린 세계수니까 상급 포션을 만들기엔 무리일지도 모른다.

이번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바로 퀘스트를 깨야겠다.

살아 있는 동물이면 된다고 했으니 구할 수 있는 대로 다 구해 가면 되겠지.

"어라?"

성역을 빠져나온 후 바로 다졸 건물로 돌아왔다.

한진환과 다시 합류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돌아온 날 맞이한 건 헌터 협회 사람들과 경찰들이다.

그들이 이곳에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다졸 길드원들을 데려가라고 한진환이 연락했었으니까.

협회와 경찰들이 통행 저지선을 설치하고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막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건, 협회와 경찰 중에서 간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명 정도 끼어 있어서다.

"한진환 구경이라도 온 건가…?"

얼굴 보기 쉬운 양반은 아니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경찰에게나 해당한다.

협회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쉽게 그를 볼 수 있었다.

협회 소속 헌터인 최희석과 친하기 때문이다.

남의 사무실을 제방처럼 쓰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한진환은 A급 헌터치고 협회에 자주 들락날락한다.

"더는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네? 아."

젊은 경찰이 손바닥을 내밀며 나를 막아섰다.

아마도 나를 구경꾼쯤으로 착각한 것 같다.

현재 나는 장을 보고 성역에도 다녀오느라 갑옷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무기 대신 새싹이와 엘프가 표시된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고.

헌터로 보이지 않으니 착각할 만도 하다.

요즘 들어 김무연 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그것도 나보다 도희와 태천이가 더 시선을 잡아끌었다.

나를 못 알아보는 건 당연하다.

"저는-"

"앗, 괜찮아! 그분 보내 드려."

3m 정도 떨어져 있던 경찰이 끼어든다.

날 가로막던 경찰이 당황해서 동료를 쳐다본다.

나이대가 다른 걸 보니 동료보다는 선후배 사이 같다.

"네? 하지만…."

"괜찮다고. 사전에 연락받았어."

"아…."

"백도운 님이시죠?"

선배 경찰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지나가라는 듯 저지선을 들어 올렸다.

"진환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기, 간이 천막으로 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천막까지 세웠어? 왜?

다졸 길드원들만 데리고 가면 이곳에서의 일은 전부 끝난다.

치악산 쪽으로 바로 넘어가자고 말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도 천막을 세우고 간부들이 왔다는 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우재가 도망이라도 쳤나?"

피식.

중얼거렸던 입에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모든 힘을 빼앗겨 무능력자가 된 공우재가 한진환에게서 도망친다?

차라리 스마트폰에서 세계수가 자라났다는 말이 더 가능성 있는 얘기일 것이다.

뭐, 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응?"

경찰의 말대로 한진환은 천막 안에 있었다.

다만, 그의 바로 옆에 최희석이 함께였다.

2m가 넘는 덩치 때문에 천막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하다.

한국에 저런 큰 바위 같은 덩치의 소유자는 얼마 없었다.

한진환은 답지 않게 진중한 얼굴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점잖은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군?

그리 생각했을 때, 한진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게감이 느껴지던 얼굴이 사라지고 미소가 피어올랐다.

"백도운! 여기야, 여기!"

나를 발견한 한진환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내 이름을 들은 최희석도 상체를 옆으로 기울여 나를 바라봤다.

한진환처럼 손을 흔드는데, 키 큰 게 마냥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왠지 벌집을 헤집는 곰처럼 보이기도 했고….

"일은 잘 끝내고 왔냐?"

"네, 덕분에요."

"한 것도 없는데 덕분은 무슨."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아, 그게-"

천막 안으로 들어가며 최희석에게 물었다.

최희석이 대답하려고 하는데, 한진환이 먼저 끼어들었다.

내게 코를 들이밀며 킁킁거린다.

"뭐야. 너 밥 먹고 온 거?"

"냄새납니까?"

"나냐고? 완전 진동을 한다. 한우?"

"네."

"밥 먹으러 가는 거였으면 같이 가지 그랬냐."

"같이 먹을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선물이라고 했었지?"

"네. 그보다…."

한진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의 얼굴이 되어서는 우릴 보고 있다.

마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이나 얘기하자'라고 말하는 듯했다.

정말이지, 저 얼굴들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내게 있어 그들의 얼굴은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얼굴에 담겨 있는 생각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이를테면, 백운천 회의 시간에 수다를 떠는 나와 태천이를 바라보는 도희와 한재임에게서 봐왔던 얼굴이랄까?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있었지. 미국에서-"

"잠깐만요."

젊은 여성이 최희석이 말하려는 걸 제지했다.

다른 사람들이 당황하며 여성을 쳐다본다.

바로 옆에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피어올라 "사, 사무관님…"하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럴 거다.

헌터들에게 최희석은 평범한 A급 헌터가 아니다.

선망의 대상이며 우상의 대상이다.

여기에 지상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지상욱은 "감히 선배님이 말씀하시는데…!"라면서 분개했으리라.

"백도운 헌터는 이 정보를 들은 권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았다.

마치 자기가 윗사람이라는 듯한 고압적인 태도였다.

사무관이라고 불린 걸 보면 협회 소속이 아니라 정부 쪽 사람인 게 분명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 천막 아래에는 그만한 권한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으리라.

"…떨어져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뭐? 아니야, 괜찮아."

내 질문에 여성과 한진환이 동시에 대답했다.

동시에 말한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본다.

한쪽 눈을 치켜뜨는 한진환.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는 여성.

둘이 사이 안 좋나?

최희석도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과거에 이런 상황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 전 아무래도 상관없는데요?"

정말이다.

무슨 일인지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내게는 파트리아가 부탁한 퀘스트가 더 중요하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뭔가 했다면 그야말로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여성이 나를 가리키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네요."

"내가 안 괜찮아서 안 돼."

"그게 무슨 억지에요?"

여성이 눈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러게. 내가 괜찮다는데 자기가 안 괜찮다는 건 뭔 소리일까.

한진환이 씩 웃으며 날 쳐다본다.

양쪽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미소.

저 미소 또한 내게 굉장히 낯익은 것이었다.

태천이가 도희의 조언을 따를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을 때 짓는 미소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이유와 같은 상황으로 내가 태천에게 자주 짓는 미소이기도 했다.

한진환은 여성의 의견에 따라 줄 생각이 1도 없었다.

"미국에서 내일 사람이 도착한대."

"진환 님!"

"내일? 사람이요?"

"그렇다니까."

"그만 말씀하세요! 더 말씀하시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대체 누가 오길래 이러는 거야?

들을 권한이 없다고 하지 않나.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나.

"'알레딩 밀러'."

익숙한 이름이었다.

실물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수도 없이 봐왔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래, 지명도만으로는 눈앞의 한진환보다도 위였다.

알레딩 밀러.

세계에서 네 명밖에 없다는 S급 헌터의 이름이다.

"정말…입니까?"

최희석에게 물었다.

질문을 받은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치를 살폈다.

한진환의 입을 막으려고 했던 여성이다.

여성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최희석의 얼굴에서 연민이 느껴지는 건 그저 착각인 걸까.

아무래도 한진환에게 휘둘리는 사람으로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정말이야."

대답한 건 한진환이다.

최희석은 여성의 부탁대로 말하지 않았지만, 소용없었다.

한진환은 제 입을 틀어막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정말로 알레딩 밀러가 한국에 오고 있다고?

왜?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한테 들을 권한이 없다고 말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전쟁의 억지력이 되는 핵.

그런 무기와도 같은 존재가 한국에 오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 사람이… 갑자기 한국엔 왜 오는 건데요?"

"그게, 나도 방금 들었는데 던전 때문이라네?"

"던전이요?"

"정확히는 서울월드컵경기장 때문입니다. 백도운 님."

한 남성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여성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남성이었다.

여성이 홱 고개를 돌린다.

날카로운 시선이 닿자 남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듯 두 손을 아래쪽으로 눌렀다.

"태석 씨!"

"자자, 진정하십시오. 이미 얼버무리기엔 늦었어요."

"...."

"진환 님께 설명 듣는 것보다 우리한테 듣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러네요. 맞는 말씀이세요."

"그럼 설명하겠습니다?"

"...."

여성은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마를 짚지 않은 손을 거칠게 휘젓는다.

설명해도 좋다는 뜻이다.

"오랜만입니다. 백도운 님."

"…응? 절 아세요?"

"이런, 저 기억 안 나십니까? 홍제천 근처에서 한번 뵀었는데요."

"홍제천 근처요? 거기라면…."

재이네 대장간이 있는 곳이다.

그 근처에서 한번 본 사람.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가?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

비쩍 말라 도드라져 보이는 광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선 저렇게 광대가 튀어나온 사람이….

어?

"...아!"

"오, 기억나셨습니까?"

"네, 네. 기억났습니다. 분명 화염산 조사팀의… 그러니까…."

"김태석입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인다.

나도 미안한 체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김태석.

정장을 입은 채로 재이네 대장간 앞 골목을 내달렸던 사람이다.

화염산 조사팀인 동시에 구청 소속 헌터였지 아마?

그런 사람이 이곳에 있다면….

알레딩 밀러가 한국에 오고 있는 이유를 알겠다.

"화염산 던전 조사… 때문이군요?"

"네, 맞습니다. 던전이 원래대로 되돌아온 사건….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일이니까요."

"…그렇죠."

"그래서, 미국에서 조사팀을 꾸려 우리나라에 보냈습니다. 그 조사팀의 호위로-"

"알레딩 밀러가 선택됐다…?"

"그렇습니다. 아. 알려진 바로는 선택된 게 아니라 자원했다는 것 같습니다. S급 헌터라도 처음 겪는 일일 테니 궁금한 거겠죠."

"그, 그렇군요…."

즉, 나 때문이라는 거다.

S급 헌터가 우리나라에 오고 있는 이유가.

화염산 던전을 원래대로 되돌린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

"응? 왜 그러십니까? 표정이 안 좋으신데…."

"아무, 아무것도 아닙니다."

"...?"

김태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진환과 최희석도 내게 이상함을 느낀 듯하다.

"…언제 도착한답니까?"

"내일 오후 5시쯤 도착한다는 것 같습니다. 평택에 있는 미군기지를 통해 비밀리에 들어올 계획이고요."

빨리도 오네.

언제 출발했길래 벌써 도착하는 거람?

그나저나 비밀리에라고…?

하긴, S급 헌터의 현 위치를 공개적으로 떠들어 댈 수는 없으리라.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진환을 다급하게 찾아온 것도 그래서였어."

"맞이하러 나갈 때 나한테 경호를 맡아 달래."

"경호요?"

"어."

"...."

D급 헌터가 C급 헌터를 이길 수 없듯.

B급 헌터와 A급 헌터의 실력이 다르듯.

A+급 헌터도 S급 헌터하고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과연, 한진환이 알레딩 밀러를 막을 수 있을까.

"야. 너 지금 내가 그 여자 못 막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야… 알레딩 밀러잖습니까."

"흐음. 그렇긴 한데…."

한진환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싸우면 내가 진다고 생각 안 해."

"...."

이 양반 자신감 보소?

저 말을 한 게 한진환이 아니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을 거다.

그런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왠지 그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한진환을 고깝게 보던 여성조차도 그랬다.

"특히, 너와 함께라면 더욱 쉽게 막을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네? 저요? 갑자기?"

"그래. 그래서 말인데. 너도 함께 나가지 않을래?"

너무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 탓에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던 내 엄지가 처음으로 멈췄다.

나를 왜?

제94화

"특히, 너와 함께라면 더욱 쉽게 막을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저요? 갑자기?"

"그래. 그래서 말인데. 함께 나가지 않을래?"

툭, 툭….

입보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오른손 엄지가 다시 화면을 두드린다.

당황의 늪에서 빠져나온 거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릴 잘도 하는 양반이다.

여기에 있는 것도 권한이 없던 탓에 방금 자리를 비켜 달라는 소리를 들은 나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와 함께 나가겠는가.

"말도 안 되는 말씀 좀 하지 마세요! 백도운 헌터는 B급이에요, B급! 거기가 어디라고 함께 가요?"

"배 사무관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 자리에 도운 님이 나가기에는 무리입니다. 친구분이라면 모를까."

"함께 나갈 헌터는 현재 저희가 따로 알아보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경력이 출중한 헌터로 찾아보고 있으니-"

"딴생각하지 마요. 절대."

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나 자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성을 내니 기분이 조금 그렇다.

"...."

내 시선을 느낀 걸까?

배 사무관이라고 불린 여성과 김태석이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도 본인을 앞에 두고 너무 열을 냈나 싶은 것이리라.

배 사무관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옆에 있던 김태석도 그녀를 따라 사과를 건네왔다.

"…실례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으음, 괜찮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니."

그들 말대로 현재 나는 B급 헌터였다.

내 진짜 실력은 A급 헌터에 해당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현재 B급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S급 헌터를 맞이하러 가는 자리에 내보내기에 급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한진환과 함께 장관과 협회장을 경호할 수준의 헌터가 아니다.

최희석이 손을 들었다.

커다란 손은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끌었다.

"나도 반대야."

"형님?"

한진환이 최희석을 부르며 올려다본다.

최희석이 반대하고 나설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나처럼.

"나도 너만큼 도운 군이 마음에 들어."

최희석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 덤덤함 말투가 천막 안의 분위기를 지배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연장자로서.

가장 오랫동안 일을 해 온 선배로서.

"B급으로 랭크돼 있지만 A급 헌터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하고. 너와 함께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지."

"그럼 왜 반대하는 거요?"

"두 사람이 앞서 말한 대로 자격이 없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는 건…."

"그래. 도운 군은 위쪽 양반들을 설득할 만한 업적이 없어."

자격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있긴 하다.

알레딩 밀러가 오는 원인이 바로 나 때문이었으니까.

화염산 던전을 원래대로 바꾼 사람이 난데 참여할 자격이 없을 리가.

같은 이유로 위쪽 양반들을 설득할 만한 업적도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던전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엄청나게 귀찮아질 게 뻔하다.

아니, 귀찮아진다는 표현은 애교일 거다.

자기 영토에서 던전을 없애길 바라는 국가는 수두룩하고, 그 국가들은 내게 던전을 없애 달라고 접근해 올 테니까.

특히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경우는 날 납치할 계획을 짤지도 모른다.

땅덩어리가 넓은 만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버려두고 있는 곳이 많았으니.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다.

그곳은 현재 나라보다 게이트와 던전이 더 많은 곳이 돼 버린 지 오래다.

유럽이 세상의 체면을 생각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광활한 몬스터 서식지가 돼 버렸을 거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네."

"아뇨,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

최희석이 정중하게 사과를 해왔다.

그들의 시점에서 보면, 나는 백도희의 하나밖에 없는 오빠 혹은 이태천의 가장 친한 친구일 뿐이다.

덧붙이자면 스마트폰 게임 중독자였고, 폭주한 김무연을 죽인 인간이었으며, 한진환과 함께 협회 퀘스트를 진행 중인 헌터다.

커리어가 별로 없는 헌터인 것이다.

S급 헌터를 맞이하는 자리에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해는 한다.

함께 나가자고 하는 한진환이 이상한 거다.

물론.

자꾸 실력이 부족하다느니 자격이 없다느니 같은 소리를 들어서 기분이 나쁘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나가겠습니다."

반발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왜 자꾸 안 된대?

사람들이 긍정적이지 못하게 말이야.

"오."

한진환이 감탄사를 내뱉고는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는다.

내게 함께 나가지 않겠냐고 말한 건 그였다.

자격 같은 게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함께 나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일 터였다.

"백도운 헌터! 이 자리는 B급밖에 안 되는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는데요?"

"그럼 등급부터 올리지, 뭐."

"뭐, 뭐라고요?"

배 사무관이 당황스러운 낯으로 한진환을 바라본다.

그는 배 사무관을 뒤로 한 채 스마트폰을 꺼냈다.

곧바로 화면을 터치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나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심상치 않다.

"어, 나야. 웬일이긴, 부탁 좀 하려고 그러지. 백도운이라고 B급 헌터가 있는데, 안다고? 그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네. 그 친구 A급 헌터로 올려 줘. 지금 당장."

뭐를 올려?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다.

배 사무관이 한진환을 제지하려고 나섰다.

"잠깐, 잠깐만요!"

"...."

"그렇게 함부로 사람의 등급을 올려 버리는 건 월권-"

"…네가 그 걱정을 왜 해? 어차피 책임은 내가 질 건데."

한진환이 통화 속 상대방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을 하는 그의 눈은 배 사무관을 향해 있었다.

그렇다.

걱정을 왜 하냐는 말은 통화하는 상대방에게 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시선을 마주친 배 사무관에게 한 것이기도 했다.

이 일로 잘못이 생긴다면 그에 따른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어, 그래. 고맙다. 밥 한 번 쏠게. 알았어, 인마."

뚝.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는 배 사무관을 보던 시선을 옮긴다.

내게로 향하는 건가?

싶었던 두 눈은 내 얼굴이 아니라 오른손에 들린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우웅.

그의 시선이 닿자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전류라도 흘려보냈나?

그런 생각이 들어 화면을 들여다봤다.

스마트폰이 진동한 것은 메시지가 왔기 때문이었다.

[B급 헌터 백도운님은 금일부로 A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강인재 헌터 관리 2팀장.]

메시지는 용건과 발신자만 적혀 있어 아주 간략했다.

전체 내용은 그러나 간략하지 않았다.

B급이었던 등급이 A급으로 올라갔다는 내용이었으니까.

"헐…."

당황스러운 감정이 입으로 흘러나왔다.

전화 한 통으로 헌터의 등급을 바꿔?

테스트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의문의 답은 화면에 있었다.

가능한 일이니까 이렇게 메시지가 온 거다.

"자, 이제 백도운은 A급 헌터야. 등급은 문제없는 거다?"

"없긴 왜 없어요! 전 절대 인정 못 해요! 이렇게 A급으로 올리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여기 있지."

"여기 있지, 라뇨! 이거 정식으로 협회에 항의할 거예요!"

"그러든가."

배 사무관이 따지지만, 한진환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다.

글쎄, 신경 써야 하지 않나?

그래도 정부 사람인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뭐?"

"이렇게 막 올렸다가 문제 생기면 어떡하려고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한진환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 웃었다.

"괜찮고말고. 네 실력은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까."

"흐음, 그래요?"

"뭐가 아닌 척 '그래요?'야. 지도 스스로 A급 헌터 수준은 된다고 자신하고 있으면서."

"...."

음, 내가 그렇게 티를 냈었나?

아무래도 난 나도 모르는 사이 자신만만한 얼굴 같은 걸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머쓱해서 목을 긁적였다.

"그럼 이제-"

"업적 문제가 있지."

"그래요, 그거. 백도운에게는 이렇다 할 경력이 없다, 였죠?"

"음."

그들 말대로다.

A급으로 올라온 건 출발선에 서게 됐을 뿐이다.

우리나라에 A급 헌터는 몇 백 명 단위로 있다.

그들이 아니라 내가 나가게 된다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인정하고 납득할 만한 이유가.

괜히 김태석이 경력 출중한 사람을 찾아보고 있다고 말한 게 아니다.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눈에 띌 만한 경력이 있어야 했다.

"너 뭐 한 거 없냐?"

"한 거요?"

"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거. 특히…."

한진환이 고개를 까딱여 배 사무관을 가리켰다.

그것 본 그녀는 눈을 찌푸리더니 나를 사납게 노려봤다.

고갯짓으로 자길 가리킨 건 한진환인데 왜 날 노려봐?

"흠. 인정할 만한 거라…. 헌터 사냥꾼인 김정철 일당이랑 수배범인 이정근을 붙잡았죠."

"덧붙이자면 김정철은 크라우드 소속이었다. 이정근은 크라우드에 조종당하고 있었고."

"크라우드? 이번 일도 그렇고, 너 게네랑 사이 엄청 나쁘구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리고…."

용두식 건은 얘기하지 말아야겠다.

크라우드와 본격적으로 사이가 틀어지게 된 이유였지만,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유재이와 우연후에 관해서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 보육원 연쇄 살인마를 처리한 적이 있습니다."

"보육원? 혹시 보육원 연쇄 방화범을 말하는 건가?"

"맞아요, 그놈. 아니, 년이라고 해야 하나? 여자였으니까."

"그게 정말인가? 보고 받은 적 없는데?"

"보고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니, 왜 그랬나? 보고했으면 포상을 받았을 텐데? 헌터 평가도 좋아졌을 거고."

"그야… 처리한 거라서?"

딱!

최희석이 제 이마를 쳤다.

처리했다.

그 말에 담긴 속뜻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한진환이 손을 휘저었다.

"그놈 얘긴 됐고. 또?"

"현재 두 손가락 프로젝트를 하고 있죠."

"…끝이야?"

"네."

"흐으음."

한진환과 최희석이 생각에 빠져 들었다.

팔짱을 끼거나 자기가 때렸던 이마를 긁적였다.

역시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옆에 서서 우릴 바라보던 배 사무관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흥, 그럴 줄 알았지!'하고 말하는 듯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가 한 일들을 듣고 놀랐던 주제에….

확 그냥 화염산 던전을 원래대로 되돌린 사람이 나라고 말해 버려?

아니, 관두자.

말해 봤자 귀찮아지는 건 나다.

내가 정말 그럴 수 있는지도 이들에게 증명해 줘야 할 것이다.

둘 중에 먼저 입을 연 건 최희석이었다.

"설득… 할 수 있을 것 같군."

"어, 정말입니까?"

"음."

최희석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을 보고 두 사람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한진환은 씩 웃었고, 배 사무관은 혀를 찼다.

"형님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면, 할 수 있는 거야."

"...."

"그럼 이제 다 된 거지?"

질문이 던져졌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배 사무관을 향했다.

그녀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깐 나를 바라봤다.

3초 정도 흐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뇨. 실력을 확인해야겠어요."

"끈질기네. 안 해도 된다니까? 내가 확인했다고."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굳이 하고 싶다면야 말리지는 않겠는데."

아니, 내가 동의를 안 했는데?

왜 자기들 멋대로 얘기를 진행하지?

"어떻게 할 건데?"

"당연히 대련이죠."

"그거 물어본 거 아닌데."

"...?"

무슨 소리냐고 묻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도 그런 건 줄 알았기 때문에 한진환을 쳐다봤다.

그는 날 향해 검지를 내밀었다.

"나랑 형님 빼면 여기서 저놈이 제일 강한데."

"...!"

"그런 놈 실력을 너희가 확인할 수나 있겠어?"

그 순간,

천막 아래에 있던 모든 눈동자가 내게 모였다.

이 시선은,

[세계수 어린나무가 아니꼬운 시선들을 느꼈습니다.]

새싹이가 느낀 것처럼, 아니꼬운 시선들이었다.

마치 '저놈 따위가?'라고 말하는 듯한.

하하, 오랜만에 느껴 보는 시선인걸?

제95화

정부는 백도운을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 책정된 관리 등급은 D.

중요한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를 지켜보는 이유는 오로지 백운천 길드의 간부였기 때문이다.

A등급 백운천 길드.

그들은 어디로 튈지 가늠이 되지 않는 폭탄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젊은 헌터들이 모여 꿈을 좇는 집단.

같아 보이다가도,

다른 조직이라도 된 양 냉철한 판단을 내리며 현실을 똑바로 보기도 했다.

지금까지 상업적 이익만을 좇던 길드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정부는 백운천 길드 간부진 전체에 감시를 붙여 놓았다.

사람에 따라 관리 등급을 다르게 책정했을 뿐.

즉, 정부는 도운이 하트 브레이크를 쓴 후유증으로 마나를 운용할 수 없는 몸이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도운이 '브레이크 후유증'을 해결했습니다.]

[영약을 섭취한 덕분으로 보입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신종 영약'으로 추정됩니다.]

그 보고를 받았을 때 정부는 믿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브레이크 후유증을 회복한 사람은 손에 꼽았다.

그마저도 모래사장에 벼락이 떨어지자 비행기가 만들어지는 정도의 가능성이었다.

그들 중에서 영약을 복용하고 회복한 사람은 전무했다.

설지초나 우담화도 브레이크 후유증을 낫게 하지는 못했다.

마나의 성질이나 신체 능력을 딴사람처럼 바꿔 놓거나 다른 질병을 치료해 줬을 뿐이었다.

그러나 보고에 따르면 도운은 무언가를 복용한 후 마나를 쓸 수 없던 몸이 나았다.

신종 영약.

정부는 그것에 집중했다.

백운천 길드가 브레이크 후유증을 낫게 하는 영약을 제작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얀 성녀 백도희.

분명 그녀가 낙산 게이트에서 나오는 재료를 써서 심장을 고칠 영약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그날 이후 D등급이었던 도운의 관리 등급은 B등급이 되었다.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등급이 변경됐을 때 관리자도 새롭게 바뀌었다.

새로운 관리자는 '배수현'.

젊은 나이에 헌터부 장관이 신설한 'A급헌터관리부'를 맡게 된 엘리트다.

헌터부 장관이 직접 만든 부서인 만큼 이곳저곳에서 인원들을 끌어왔는데, 문제는 많은 인원에 반비례하는 인재였다.

허울 좋게 덩치만 불린 나머지 A급 헌터를 관리할 능력이 있는 인재가 별로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능력 없는 관리자들이 감당하지 못한 A급 헌터들을 맡았다.

백운천 길드 소속 길드원들이나 한진환 같은 헌터가 대표적이다.

당연히 도운도 그녀가 감당하게 됐다.

[5월 28일 개미굴 던전(E급) 독점권 이전.]

[같은 날 백도운 B급 헌터로 등급 변경.]

[일개 그룹의 우채연과 친분이 있는 듯?]

그녀가 도운을 관리하게 된 이후 한 일은 당연히 정보 열람이었다.

특히 먼저 확인한 건 시험의 탑에 기록된 정보다.

도운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신체 능력은 B급 헌터 수준이었다.

지상욱과 사이클롭스를 상대할 때 아주 잠깐 A급 헌터 수준으로 올라가기도 했었다.

통곡의 몬스터라고 불리는 사이클롭스를 단신으로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는데, 그 힘은 길게 유지되지 않았다.

금방 원래대로 되돌아왔고, 시험의 탑 심사위원들은 그 힘을 버프 효과로 판단했다.

심사에 따라 그는 B급 헌터로 책정됐다.

"나랑 형님 빼면 여기서 저놈이 제일 강한데. 그런 놈 실력을 너희가 확인할 수나 있겠어?"

정보를 직접 확인했던 배수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시험의 탑 테스트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보름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이다.

겨우 보름 만에 A급 헌터 수준의 범죄자를 붙잡는데 차출되기도 하는 그녀와 김태석보다 강해질 수는 없었다.

도운이 한진환처럼 A+급 헌터가 될 잠재력이라도 지니고 있지 않은 한은.

그녀는 한진환의 말을 단순히 띄워 주기라고 생각했고, 자신만만하게 대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에요?"

5분도 채 안 되어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도운은 B급 헌터 두 명의 공격을 유려하게 피해 냈다.

그러면서 사람 성질을 긁는 말들을 뱉어 댔다.

"정말? 그쪽은 셋이나 되는데 나 하나를 상대 못 하는 거예요?"

원래 대련은 1대1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진환의 도발과도 같은 충고로 상황이 바뀌었다.

배수현, 김태석, 강원도청 소속의 B급 헌터.

세 명의 헌터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소속이 다 달랐지만, 마치 함께 해 왔던 것처럼 합이 아주 잘 맞았다.

정부 소속이라는 공통점 덕분이었다.

그들은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아주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바로 눈앞 대상자를 체포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대 A급 헌터 전용 포메이션'.

정부가 A급 헌터 수준의 범죄자를 붙잡기 위해 고안한 대형이다.

사실 대형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간단했다.

근접 무기를 다루는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고 마법사가 뒤에서 원호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 A급 헌터 전용 포메이션이라고 거창하게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배수현이 지팡이를 양손으로 쥐며 주문을 외웠다.

그 모습을 본 김태석과 강원도청 헌터는 맹렬하게 도운을 공격했다.

두 헌터의 맹공 속에서 도운은 말했다.

"그래, 힘내셔야지!"

김태석이 롱소드를 휘두른다.

강원도청 헌터도 거대한 망치를 강하게 내리찍는다.

공격들은 도운에게 닿지 못했다.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한 두 사람을 향해 도운은 한 마디씩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아슬아슬한 척 공격을 피해 내며 속닥거린다.

휙!

"아이고, 아까웠어요."

쾅!

"와, 맞으면 골로 가겠는데요? 맞으면."

이런 식으로.

김태석과 강원도청 헌터는 숨을 거칠게 내쉬거나 이를 갈았다.

도운을 씹어먹을 듯이 사납게 노려보기도 했다.

두 헌터의 시선을 느낀 도운이 재수 없게 웃었다.

눈을 찌푸리고, 한쪽 입꼬리를 최대한 올린 미소….

누가 봐도 업신여기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왜요? 그렇게 노려보고 있으면 공격이 막 저절로 내게 닿아요?"

"다시 갑니다!"

"네!"

김태석이 다시 롱소드를 고쳐 잡았다.

강원도청 헌터도 포기하지 않고 김태석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이 포메이션의 진가가 발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진가는 배수현이 외우고 있는 스킬의 주문이 모두 끝나면 발휘될 터였다.

"힘이 넘치시는 건 좋은데, 괜찮겠어요?"

그 주문만 발휘된다면…!

김태석과,

"이야, 힘 좋으시네. 그 힘으로 날 맞출 수 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근데 어쩌나. 못 맞췄네."

저 주둥아리에 주먹을 꽂아 넣을 수 있다!

강원도청 헌터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피어올랐다.

그들에겐 지금 하는 것이 대련이라는 생각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새로운 목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슈티른 스타크!"

배수현이 스태프를 앞으로 내밀며 마법을 발동했다.

스태프 끝에서부터 마나로 만들어진 거미줄이 넓게 흩뿌려졌다.

그것은 곧 안팎이 서로 보이는 사각형의 공간이 되었다.

도운은 넓은 공간을 만들어 낸 결계를 돌아봤다.

"이건… 결계?"

"그렇습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이 모여 힘을 합쳐 만든 자랑스러운 결계죠."

김태석이 대답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세가 사나울 정도로 공격했던 김태석은 가만히 서 있었다.

강원도청 소속의 헌터도 멈춰 서서는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더는 공격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도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대련 아직 안 끝났어요?"

"아뇨. 끝났습니다."

"무슨 소리를… 어라?"

도운이 머리를 긁적이다 멈췄다.

무언가를 느낀 사람처럼 눈이 커진다.

살짝 커진 눈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결계를 바라봤다.

"이거 설마…."

***

"…지금 내 마나를 빼앗고 있는 겁니까?"

결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거미줄 같아 보였다.

외형 때문인지 거미줄에 걸린 사냥감이 된 듯하다.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비슷합니다."

"놀랍네요. 무슨 생각으로 이 마법을 만들었는지도 알 만하고요."

"그렇죠.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마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요."

그러면서 김태석은 구경하고 있던 한진환을 바라봤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설령 A+급 헌터라고 해도 마나가 없으면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B급 헌터인 그들만으로도 한진환을 제압할 수 있다.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김태석은 다시 나를 쳐다봤다.

"…자랑스러워하셔도 좋습니다."

"그래요?"

"네. 이 마법은 A급 헌터 수준의 범죄자를 잡을 때만 사용합니다. 도운 님은 우리에게 A급 헌터라고 확실히 인정받으신 겁니다."

"실력 확인은 됐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드득.

김태석이 오른손으로 주먹을 쥔 왼손을 눌렀다.

"일단 좀 맞으시죠."

"...."

옆에 서 있던 강원도청 헌터도 망치를 다시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날 때리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해 보였다.

내 주둥아리를 때리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얼굴이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결계를 펼치고 있는 배 사무관도 그러고 싶은 듯하다.

"싫습니다."

"외통수입니다. 그만 포기하시죠."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서요."

"괜히 반항하면 하실수록 더 아프게 때릴 겁니다."

"더 아프게 때릴 거라니, 때리는 건 확정입니까?"

"네."

"음. 그럼 안 때린다고 하면 포기할게요."

"…까득! 그냥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너무하네."

"진짜 너무한 건 도운 님 주둥… 아니, 입입니다!"

김태석이 다시 달려들었다.

옆의 헌터도 바로 망치를 들어 올리고는 돌진해 왔다.

어떻게든 날 때리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아무래도 너무 놀린 것 같다.

"한 대만 때리겠습니다!"

"딱 한 대만!"

내 앞까지 달려온 김태석과 헌터가 소리쳤다.

동시에 각자 든 무기를 휘둘렀다.

횡으로 휘둘러진 롱소드를 피하자 곧바로 거대한 망치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그걸로 맞으면 사람 죽어!"

"A급 실드 스킬이랑 재생 스킬 있다면서요! 괜찮을 겁니다!"

"겁니다? 지금 '겁니다'라고 했어요?"

"많은 거 바라는 거 아니잖아요! 제발 한 대만요!"

그 말을 끝으로 아까와는 다른 목적을 지닌 맹공이 이어졌다.

방금은 배 사무관이 결계를 펼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스킬을 쓰게 해서 마나를 빨리 소비시키기 위해서였다.

화난 척하면서도 할 일은 하고 있었다.

"하압!"

"훅!"

맹렬한 공격은 한동안 이어졌다.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났다.

가장 먼저 이상함을 느낀 것은 배 사무관이었다.

지금의 공방을 멀리서 보고 있어 눈앞의 두 사람보다 많이 매몰되지 않은 덕분이다.

그녀는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백도운이 왜 지치지 않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슈티른 스타크는 좋은 마법이다.

지정한 대상의 마나만 빼앗는다는 점이 특히.

하지만 내게는 소용이 없는 스킬이었다.

문제는 두 가지다.

"어째서…?"

김태석이 롱소드를 휘두르며 날 쳐다본다.

내가 지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아르카 유지하는 데 소비되는 마나가 몇인지 알아요?"

"아르카?"

"마나 칼날 만들어 내면 소모되는 마나가 1분에 5만이에요."

"아…!"

그런데도 나는 마나 회복 속도가 빨라 평생 발동할 수 있다.

내 마나를 전부 빼앗겠다?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마나가 소모되는 속도보다 회복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괜히 디싱 나 토르가 무한에 가까운 마나라고 말한 게 아니다.

"하지만 슈티른 스타크는 그보다 훨씬 더 빠르게 빼앗을 텐데…!"

"확실히 좋은 마법이긴 한데요."

배 사무관을 바라봤다.

또 다른 문제는 배 사무관이 A급 헌터 수준의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잘 쳐 봐야 B급 헌터 수준.

그녀로서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이 만든 결계를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B급 헌터와 A급 헌터가 파이어 볼트라는 동일한 마법을 썼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똑같은 위력이 나올까?

그럴 리 없다.

쿠당탕!

강원도청 헌터가 발이 꼬여 넘어졌다.

체력이 다한 것이다.

이어서,

"말도 안 되는…!"

김태석이 중얼거리며 주저앉았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빙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고는 주저앉은 그의 입을 때릴 것처럼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통을 대비해 눈을 감았다.

"...."

때리지 않고 지나쳤다.

애초에 때릴 생각은 없었다.

나 때리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길래 장난 한번 친 거다.

배 사무관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이제 당신 차례인데, 계속할 거예요?"

"...!"

시선이 닿자 그녀는 겁을 먹은 듯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럴 수밖에.

그녀는 파티 플레이형 마법사다.

혼자서 나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졌습니다."

낙승이구만.

제96화

배수현은 장관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만나러 온 방의 주인은 현재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

미국에서 S급 헌터가 오고 있어 브리핑하러 간 것이다.

원래라면 함께 따라갔을 테지만, 오늘 그녀는 A+급 헌터 한진환을 만나기 위해 강원도에 다녀왔다.

"경호를 맡아 달라고?"

그녀의 머릿속에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알레딩 밀러를 맞이하러 나갈 정부 사람들의 경호를 부탁하던 때였다.

"네. 지금 이런 일을 부탁드릴 분은 진환 님뿐이에요."

"에이, 그렇게 말하면 형님이 서운하지."

"네? 아, 아니! 그런 뜻 아니었습니다!"

"하하, 오해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게."

"...."

"그럼 퀘스트는? 아직 도중인데."

배수현은 아직 당황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최희석이 대수롭지 않게 웃어 주어 다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진환은 궁금한 것을 물었고, 최희석도 바로 대답했다.

"적당한 헌터들로 새 팀을 꾸려야지."

"보상은?"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두 사람이 없앤 길드의 재산들이 지급될 거야. 보고에 따르면 각각 몇십억 정도 받을 것 같다는군."

"그럼, 내가 받을 거 백도운한테 돌려줘."

"음, 도운 군한테?"

"어. 그리고."

한진환은 고개를 돌려 배수현을 바라봤다.

"경호 맡을게."

그의 입에선 수락하겠다는 말이 선뜻 나왔다.

배수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단, 조건이 있어."

조건을 요구해 왔다.

애초에 올 때부터 무엇이든 들어줄 요량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말씀하세요. 정부 차원에서 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놈이랑 협회 퀘스트 중이거든."

"사전에 보고 받았어요. 백도운 헌터였죠?"

"그래. 그놈과 함께 나가고 싶어."

"네? 그게 무슨-"

"백도운! 여기야, 여기!"

한진환이 어딘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손까지 흔들어 대며 이름을 부른다.

배수현은 그곳을 바라봤다.

멍청해 보이는 얼굴.

대충 정리한 듯한 꽁지머리.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오른손.

몸에서부터 풍기는 고기 냄새….

말 그대로 눈이 절로 찌푸려지는 모습이었다.

이 한량은 뭐야?

"하아…."

수현은 도운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멍해 보이는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짜증을 유발하고 아니꼬움을 느끼게 했다.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진정하고자 앞에 놓인 따듯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후룩.

따듯한 기운이 입에서부터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 이 일은 대통령님이 아니라 내가 나가기로 확정됐어."

장관실 바깥에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 장관실의 주인인 '황정희' 장관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황 장관 옆에는 남성 비서가 함께였다.

그녀는 바로 일어나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황 장관이 현재 통화하고 있어 입은 열지 않았다.

휙, 휙휙.

앉아 있으라는 듯 손을 휘젓는다.

이어 비서에게 입 앞에 컵을 쥔 것처럼 손을 오므려 흔든다.

그 행위가 요구하는 바를 알아차린 비서는 입 모양으로만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나갔다.

배수현도 그가 바랐던 대로 소파에 다시 앉았다.

"…비밀리에 진행하기로 했으니까 기자들한텐 알리지 말고. 그래, 어. 그래."

통화를 끝낸 황 장관이 소파에 드러눕듯 앉았다.

툭.

스마트폰은 탁자에 던지듯 내려놓는다.

꺼지지 않은 화면에는 [통화 시간 18분]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화면이 차츰 어두워지는 동안 황 장관이 눈을 감았다.

입에서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괜찮으세요?"

"아니, 전혀 안 괜찮아."

"...."

"빌어먹을 놈들…."

황 장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

배수현은 맞장구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한숨을 내쉬고 욕을 하게 한 대상이 확실하게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금까지 통화한 사람일까.

오늘 만나고 온 사람들일까.

아니면 이 상황의 직접적 원인이 된 사람들일까.

그녀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맞장구치지 않았다.

대신 걱정스러운 태도를 내보였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피곤하니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원. 빌어먹을 미국 놈들…."

황 장관은 두 손바닥을 펼쳐 두 눈 위에 얹었다.

약하게 누른 채로 말했다.

욕의 대상은 미국이었다.

"알레딩 밀러는 9일에 출발했어."

"9일? 이틀 전이잖아요."

"그래. 자기들 말로는 갑자기 출발하게 돼서 미리 통보하지 못했다는데,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지."

"그렇죠. 출발한 날에도 충분히 말해 줄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배려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는 새끼들! 흥. 지들이 강국이다, 이거지."

"너무 괘념치 마세요."

"후우, 그래. 그래야지…."

황 장관이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를 덮듯 장관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곧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아까 그 남성 비서였다.

황 장관의 부탁대로 마실 것을 가지고 온 것이다.

비서는 곧바로 사각형 쟁반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고마워."

황 장관은 건네받은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순식간에 내용물이 사라져 텅 빈 컵은 도로 비서가 들고 있는 쟁반 위에 놓였다.

컵의 찬 기운이 옮겨져 젖게 된 손을 휘젓는다.

나가라는 손짓이다.

할 일이 끝난 비서는 인사를 하곤 바로 장관실을 빠져나갔다.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네. 부탁하러 갔을 때 한진환 헌터는 협회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들었어. 두 손가락 프로젝트였지, 아마? 보상 문제가 있었겠군?"

"생각하신 대로입니다. 협회 퀘스트를 포기하게 하고 경호 의뢰를 맡기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최희석 헌터가 배려해 주었습니다."

"음?"

"일이 일이다 보니 협회에서 양보해 주겠다. 그리 말했습니다."

"오. 잘됐군그래."

"그래도 일이 끝난 후 따로 인사 차원의 감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 문제는 그렇게 하자고."

"네."

"그럼, 한진환은 확실하게 수락한 거지?"

"그렇습니다."

"한진환은 됐고…. 다른 녀석은?"

다른 녀석.

진환과 함께할 다른 경호 헌터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배수현은 바로 대답했다.

"가장 먼저 마인 길드에 연락을 취했는데… 그들은 스케줄 확인 후 대답하겠다고 했습니다."

"흐음…."

"다음으로는 아이가이온 길드에게 연락했습니다만."

"다만?"

"최동훈이 자리를 비운 상태라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죄송합니다."

맞이하러 나가야 하는 시간까지 앞으로 24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찾고 있다는 말이 곱게 들릴 리 없었다.

그런데도 황 장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시간을 촉박하게 알려 준 미국놈들이 잘못한 거니까."

"…저, 한진환 헌터가 추천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추천? 한진환이?"

"네."

헌터 랭킹 1위가 추천한 헌터.

황 장관은 흥미가 동한 듯 물었다.

"누굴 추천했는데?"

"백도운입니다."

"백도운? 백도운이라면… 백도희의?"

"네. 생각하시는 그 사람 맞습니다."

"한진환이 그놈을 어떻게 알고 추천을 해?"

"현재 함께 협회 퀘스트 중이었습니다."

"뭐? 백도운이 한진환이랑?"

"네."

황 장관은 다시 눈을 감았다.

백도운에 관한 이미지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도운은 그저 백도희의 하나뿐인 오빠면서 이태천의 절친한 친구일 뿐이었다.

하지만 한진환과 협회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다면….

그저 단순히 오빠나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한진환과 함께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실력 있는 헌터.

적어도 그런 이미지는 갖고 있어야 했다.

재빠르게 정리를 끝낸 그는 다시 눈을 뜨고 물었다.

"…원래 알던 사이야?"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한진환과 최희석이 백운천 길드에 직접 찾아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최희석 혼자서 찾아간 것도 모자라 한진환이 함께 갔다고?"

"네."

배수현의 즉답에 황 장관은 이마를 긁었다.

이어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생각에 빠진 듯 입에서 흠 소리가 났다.

"최희석 말고는 관심도 없던 놈이 왜…."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음? 아니. 물어본 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

황 장관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배수현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뭐,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백도운이 조건은 되나?"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네. A급 헌터고, 한진환 헌터의 추천을 받았으며, 협회에서도 허락을…."

배수현이 덤덤하게 이어나가던 말끝을 흐렸다.

듣고 있던 황 장관이 고개를 가로저어서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닌 거 알 텐데?"

"네?"

"자네도 잘 알지 않나. 헌터 중에선 해당 등급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약한 놈들도 있고, 등급보다 월등히 강한 놈도 있다는 거."

"아…."

"강한가, 약한가. 헌터에게 중요한 건 그게 전부야."

"...."

"그러니까 다시 묻지. 그놈. 강해?"

머릿속에서 지웠던 미소가 다시 피어올랐다.

멍한 얼굴, 대충 정리한 머리, 진동하던 고기 냄새.

반복적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던 오른손까지.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하자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백도운이 그려졌다.

"그는…."

이어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3 대 1로 그와 대련했던 일이다.

"…졌습니다."

그녀가 패배를 시인했을 때, 도운은 여유로웠다.

슈티른 스타크 속에서 전혀 지치지 않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두 헌터의 맹공을 완벽하게 피하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아르카.

그는 칼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던 김무연조차 들지 못했던 그것을 빼 들지 않았다.

대련 내내 오른손에는 무기가 아니라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스마트폰을 쥐지 않은 자유로운 손이었다면?

대신 거대한 목검을 쥐고 공격을 했었더라면?

"...."

배수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운이 이 자리에서 한진환과 최희석을 제외했을 경우 가장 강한 헌터라는 것을.

한진환이 장난처럼 했던 말은 그저 진실이었다.

보름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 만에 그만큼 강해졌다.

"...."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수현은 아연실색했다.

백도운.

그가 한진환처럼 A+급 헌터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럼 실력 확인한 겁니다?"

"네…."

힘없이 대답했을 때, 도운은 고개를 돌렸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을 향해서였다.

화면에 떠 있던 건 스마트폰 게임임이 분명했다.

수현은 그가 스마트폰 게임 중독자라는 정보를 읽은 적이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무를 키우는 게임'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면을 들여다본 도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또 한 번.

"응? 이파리가… 자라난 거야, 만 거야?"

그런 말을 한 후 그는 웃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시원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고 배수현은 생각했다.

저 웃고 있는 주둥아리를 때리고 싶다고.

잠재력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밉살스러운 말을 내뱉는 주둥아리를 때리고 싶었다.

"악마…."

"뭐?"

"그는 악마의 주둥아리를 가졌…."

"뭐라고?"

뭔 주둥아리?

황 장관은 눈을 찌푸렸다.

자기가 잘 못 들었나 싶어서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기까지 했다.

강하냐고 물었는데 왜 악마의 주둥아리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배수현은 곧 자신이 생각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음을 깨달았다.

오른손을 황급히 들어 입을 가린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네, 네!"

"얼버무리긴. 아무리 봐도 아닌 게 아닌데."

그리 말하고는 황 장관은 배수현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 보지 못했다.

눈동자를 살짝 떨어뜨려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고 황 장관은 풋 웃어 버렸다.

"자네가 당황하는 모습은 한진환과 처음 만난 이후로 처음이군."

"...."

"하긴, 이태천의 친구고… 한진환이 마음에 들었다는 놈이었지."

"…장관님?"

"정상일 리 없을 거야. 분명히 그렇겠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앞뒤로 천천히 끄덕거렸다.

자기 혼자서 뭔가를 납득한 듯했다.

대체 뭘 긍정하고 이해한 걸까.

황 장관은 오른 검지를 들어 올리며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밌겠네. 진행시켜!"

"네?"

"못 들었나? 진행-"

"아, 아뇨. 들었습니다.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황 장관이 씩 웃었다.

만족스러운 듯 구김이 없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고 배수현은 생각했다.

장관님도 딱히 정상은 아닌 거 같아요….

제97화

귀가 간지러워 면봉으로 후볐다.

속에 무언가가 들어간 듯한 이물감 때문은 아니었다.

느낌으로 보자면, 누군가가 내 얘길 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썩 좋지 않은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말이지만 그 정도로 난데없이 가려웠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난 지도 제법 지났다. 물기 때문일 리도 없었다.

소파에 편히 누워서 면봉으로 살살 후빈다.

가려운 부위를 직접 문지르자 몸이 가늘게 떨릴 정도로 시원한 쾌감이 느껴졌다.

중독될 것만 같은 쾌감은 배에 올려놓았던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릴 때까지 이어졌다.

진동에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한 번 울리고 마는 것을 보니 메시지였던 모양이다.

차례대로 배 위에 올려 둔 채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던 검지와 중지를 멈추고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귀에 꽂았던 면봉을 살살 돌리며 화면을 바라봤다.

메시지는 배 사무관이 보내온 거였다.

[백도운 헌터님, 배수현입니다.]

[장관님께서 허가하셨습니다.]

[내일 오전 10시 장관실로 오시면 됩니다.]

[위치는 세종특별자치시 갈매로….]

"건물 안에 들어서면 안내인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라…."

헌터관리부는 문화체육관광부 옆에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다.

도희와 태천이가 길드 일로 찾아간 적이 있을 뿐.

그마저도 두 사람에게는 "건물이 깔끔했다"라는 평을 들은 게 전부였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간단히 답장한 후 다시 [세계수 키우기]를 띄웠다.

화면엔 새싹이와 엘프들이 함께다.

은은한 빛을 뿌리는 새싹이 주변에 엘프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네모로소.

엘프들은 온종일 움직였던 몸을 쉬고 있었다.

그들이 열심히 알테라-쇼넴을 쓴 덕분에 새싹이에게 변한 부분이 있었다.

톡톡.

변한 부분을 검지로 두드렸다.

새싹이의 나뭇가지 끝부분이다.

거기에 이파리가 자랄 것처럼 싹이 텄다.

아마 조금 더 두드리거나 알테라-쇼넴을 쓰면 될 것 같다.

확실하진 않지만, 느낌으로는 내일이나 모레쯤 새로운 이파리가 자라날 듯하다.

아, 아직 완전히 자란 것은 아니기 때문일까?

[MP – 210만260]

마나는 그대로였다.

이파리가 완전히 자라면 마나도 변동이 있을 거다.

우웅.

새싹이와 쉬고 있는 엘프들을 가리면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배 사무관이 답장을 보냈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보낸 사람은 유재이였다.

유재이가 보냈다면 분명….

[방금 솔방울 정확히 1/3 잘라 냈어.]

[바로 대장간으로 갖고 가서 방패 제작할게.]

[며칠 정도 걸릴 거야.]

역시 솔방울에 관한 거였다.

잘라 내는데 나흘이나 걸릴 줄이야.

하긴, 솔방울은 최고의 방어구 재료인 귀수산의 등껍질과 비슷한 단단함을 지녔다.

잘라 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1/3을 정확히 잘라 내야 했으니….

아마 프타 대장간에서 작업하지 않았으면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

[고마워, 잘 부탁해.]

[그거 완성하고 나면 이사하자.]

답장을 보낸 후 잠깐 기다렸다.

그녀에게서 또 다른 메시지가 올까 싶어서였다.

30초 정도 흘러도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좋아, 그럼….

메시지창을 껐다.

곧바로 [세계수 키우기]가 떠올랐다.

쉬고 있는 엘프들과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새싹이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자 볼까?"

나는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