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약점 공략 (3)
쐐애액!
은빛 장검이 뻗어 나갔다.
막대한 힘이 검에 실렸다.
검을 쥔 손아귀.
손아귀를 통해 마나가 더해졌다.
마나하트를 통해 뿜어진 평범한 마나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폭발적이며 파괴적인 힘을 실은 마나였다.
키이이잉-!
하비엘의 심장을 둘러싼 세 개의 마나 써클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한계까지 이른 회전력에 의해 비틀렸다.
하나의 써클은 심장을 둘러쌌다.
나머지 두 써클이 충돌했다.
격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력이 혈관을 타고 질주했다.
몸통을 박차고 어깨를 지나쳐, 팔뚝을 따라 내달렸다.
손끝을 통해 검 손잡이로 뛰어들었다.
검날을 통해 더욱 증폭되었다.
마침내 내쏘아졌다.
기가티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
11번 배갑과 12번 배갑 사이의 연결 부위를 향해서였다.
투확-!
약점 부위에 발파가 작렬했다.
그 순간 하비엘의 푸른 눈동자가 번득였다.
'성공이다.'
스무 살의 천재 은발 기사는 확신했다.
이상적인 발파의 성공이었다.
폭발력이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찌른 부위와 각도도 정확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든 조건이 로이드가 알려주었던 약점 공략의 필수요소와 일치했다.
이윽고 폭발이 일어났다.
투콰아아아앙-!
기가티탄의 배갑 사이에서 파괴적인 힘이 소용돌이쳤다.
배갑을 포함하여 발파 범위에 걸린 모든 것을 가르고, 찢어발겼다.
그리고 파고들었다.
그르르어억!
기가티탄이 비명을 내질렀다.
거대한 몸체를 고통스럽게 뒤틀었다.
그 순간 발파의 폭발력이 거침없이 기가티탄의 배갑 사이를 파고들었다. 헤집었다. 질주했다. 치명상을 입힐 부위를 향해. 깨부수며 들어갔다.
그리고 멈추었다.
단 5센티미터.
갑각을 관통하고 속살까지 5센티.
딱 그만큼의 두께만을 남겨두고서.
폭발적이던 관통의 힘이 흩어져 버렸다.
'어?'
하비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그의 어깨를 향해 반발력이 전해졌다.
완벽하게 갑각을 관통하는 데에 실패한 대가였다.
투콱-!
"...!"
폭발력의 여파가 쏟아져 나왔다.
발파로 뚫어놓은 좁은 구멍을 통해 고스란히 돌아왔다.
"크읏!"
하비엘의 검이 튕겼다.
상체가 크게 흔들리며 검을 쥔 오른쪽 어깨가 활짝 열렸다.
반대쪽 팔도 마찬가지였다.
기가티탄의 갑각 돌기를 붙들고 있던 왼손이 순간적으로 풀렸다. 돌기를 놓쳤다.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아니, 반발력에 의해 아래로 내던져지듯 쏘아졌다.
'이런....'
으드득!
하비엘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면이 빠르게 다가왔다.
자신의 발파가 어째서 실패했는지.
왜 기가티탄의 약점 부위를 뚫어내지 못했는지.
약점 파괴를 위한 어떤 조건이 모자랐던 것인지.
그제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조건은 완벽했다. 부위도, 각도도 전혀 틀림이 없었어. 다만 딱 한 가지 조건. 내 힘이 모자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쳐 있었던 거야.'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애초에 하비엘이 발휘할 수 있는 최상의 기량으로 발파 시뮬레이션을 돌렸던 로이드였다.
당연히 하비엘에게 알려준 약점 파괴의 조건도 그랬다.
최고의 힘을 담은 발파를 사용하는 것.
그것이 약점 파괴의 조건이었다.
한데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체력이 이것밖에 안 됐었나.'
벌써 20분이 넘도록 기가티탄에 홀로 맞선 그였다.
거대한 괴수를 상대하느라 쉴 틈도 없이 뛰어다녔다.
전력으로 내달리고, 방향을 바꾸고, 도약하고, 검을 휘둘렀다.
수없이 많은 바위 파편을 뒤집어쓰고, 맞았다.
연이은 충격파에 셀 수도 없이 속이 울컥 흔들렸다.
그 모든 혹사와 데미지를 견뎌내며 홀로 싸우고, 또 싸웠다.
당연히 지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어.'
꽈악!
검을 쥔 하비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한 번의 실패로 끝낼 순 없다.
'로이드 님이 날 믿어줬으니까.'
기가티탄의 약점을 알려주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약점을 공격할 수 있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기가티탄의 주의를 끌어주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은 그 믿음에 답해주어야 했다.
그러고 싶었다.
'그러니 한 번 더!'
휘리릭, 터컥!
지면과 충돌하기 직전,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다.
하비엘의 두 발이 지면을 맹렬히 깨부수며 파고들었다.
힘껏 박찼다.
콰앙-!
부서지는 바위 파편 사이로 솟구쳤다.
그의 두 눈에 섬광이 서렸다.
그 빛은 단 한 지점만을 노리고 있었다.
겨우 5센티 두께만 남기고서 관통에 실패한 약점 부위.
그곳에 뚫다 남긴 구멍이었다.
'한 번만 더 찌르면!'
확실하게 갑각을 관통할 수 있으리라.
그 속에 보호받고 있을 괴수의 심장을 찌를 수 있으리라.
'한 번만!'
콰아아-!
거대한 앞다리 곤봉이 하비엘을 덮쳤다.
순간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하비엘이 검을 휘둘렀지만 거의 소용없었다.
검과 곤봉 앞다리가 부딪쳤다.
맹렬한 불똥이 튀었다.
검이 밀려났다.
몸도 밀려났다.
너무나 거침없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힘이 쇄도해 왔다.
"...!"
터어엉-!
기가티탄의 앞다리 곤봉.
그 강맹한 일격에 스치듯 비껴 맞은 하비엘이 날아갔다.
그의 의식은 이미 끊겨 있었다.
실 끊어진 연처럼 추락했다.
해안가 바위 지대를 지나.
건너편 모래사장 앞 얕은 바닷물에 내리꽂혔다.
"어억?"
지켜보던 로이드의 입에서도 절로 비명이 나왔다.
'저거, 죽은 거 아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녀석 안 죽게 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렇듯 팔자에도 없던 위험을 무릅쓰고 있었는데.
'죽으면 안 되는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르르륵!
앞다리 일격으로 하비엘을 날려 버린 기가티탄이 포효했다.
그리고 거침없는 걸음을 옮겼다.
하비엘이 추락한 모래사장 방향을 향해서였다.
그 뜻은 명확했다.
'저놈, 하비엘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으려는 거야.'
하비엘은 비록 실패했지만 기가티탄의 약점을 거의 일격에 뚫을 뻔했다.
아니, 다소 무모하게 재차 시도했던 두 번째 공격이 성공했다면?
아마도 확실하게 약점을 뚫었을 것이다.
그래서인 듯했다.
'지금 시점에서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를 하비엘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야. 지금은 그 위협을 제거하려는 중인 거고.'
아직 하비엘이 얼마나 다쳤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제대로 모른다.
그런데 만약 살아 있다면?
놈은 그럴 가능성마저 지워 버리려는 것 같았다.
'안 돼. 놈의 발을 묶어야 해.'
로이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뽀동이의 등을 더욱 급하게 두드렸다.
"뽀동아! 더 달려! 힘내!"
"뽀도동!"
하비엘이 당하는 모습을 함께 목격한 뽀동이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재촉을 받자마자 한계까지 달음박질했다.
아예 기가티탄의 머리 아래쪽을 내달렸다.
묶인 수레도 더욱 요란하게 덜그럭거렸다.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서 피우는 소란.
하지만 기가티탄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젠장!'
아무래도 이제 인어 동상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아니, 그보다는 하비엘의 제거가 더 급한 일이라 여기고 있는 듯했다.
한마디로, 이쪽에게 끌려 있던 어그로가 하비엘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어떡해야 하지.'
로이드의 두뇌가 핑핑 돌아갔다.
일단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뽀동아! 우선 하비엘부터 살리자! 이랴!"
"뽀동!"
"그럼 이젠 이거 끊을게!"
"뽀도동!"
로이드가 삽을 들었다. 휘둘렀다.
쩌걱!
뽀동이와 수레를 이어주던 밧줄이 삽에 맞아 출렁였다.
로이드의 삽이 더욱 연달아 맹렬히 휘둘러졌다.
"좀 끊어져라! 좀!"
쩌걱! 쯔걱! 쩍!
연달아 내리치자 밧줄이 조금씩 잘렸다.
그러다 마침내 끊겼다.
터어엉-!
밧줄이 끊기는 충격과 함께 인어 동상을 실은 수레가 뒤에 남겨졌다.
덕분에 뽀동이의 달음박질이 한결 가벼워졌다.
"가자! 기가티탄보다 앞서서!"
"뽀도도도도동-!"
포바바바바밧!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뽀동이의 전력 질주.
기가티탄을 훨씬 앞질러서 내달렸다.
바위를 뛰어넘고, 절벽을 바람처럼 내려갔다.
해안가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얕은 파도에 떠밀려 물가에 늘어져 있던 하비엘 곁을 스치듯 달려갔다.
뽀동이의 옆구리에 매달린 로이드가 손을 뻗었다.
하비엘의 옷깃을 성공적으로 움켜잡았다.
"됐다!"
힘껏 끌어당겼다.
녀석을 당겨 뽀동이의 등에 눕혔다.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하비엘.
일단 녀석의 호흡부터 확인했다.
"...살아 있어!"
"뽀동!"
다행히 하비엘은 숨을 쉬고 있었다.
게다가 외관상으로 보아선 크게 부러진 곳도 없는 듯했다.
녀석이 받았을 충격을 감안하자면 엄청난 기적이었다.
아니, 어쩌면 녀석의 실력 덕분이리라.
'아마도 기가티탄의 앞다리에 얻어맞는 순간에 검을 마주 휘둘러 충격을 분산시켰겠지. 최대한 정타를 피해 비껴 맞은 덕분일 거야.'
하여간 대단한 녀석.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크게 다친 곳이 없으니 당분간 안정을 취하면 무난히 완치될 듯했다.
'며칠쯤은 고생 좀 하겠지만, 그래도 트리플 써클을 지닌 녀석이니까.'
야수 개미와 싸웠던 때도 그랬다.
언제 다쳤느냐는 듯 금방 회복했다.
아마 이번에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젠 벗어나자. 뽀동아, 달려!"
이만하면 정말 할 만큼 충분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비엘까지 쓰러진 마당이었다.
더는 저 빌딩 사이즈의 괴물과 드잡이질을 벌이기 싫었다.
'벌써 30분 가까이 시간을 끌어줬어. 이만하면 도시에서도 기가티탄과 맞서 싸울 준비를 어느 정도는 갖췄겠지. 그러니 이만 빠지자. 이대로 도망쳐서 기가티탄이 사라지고 난리가 수습될 때까지 숨어 있으면 되는 거야.'
겸사겸사 하비엘도 간호해주고.
그렇게 모든 재난이 끝난 뒤에 챙길 것만 챙기리라. 프론테라 남작령으로 돌아가리라.
로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뽀동이의 등을 두드렸다.
"일단 해변에서 벗어나자, 뽀동아. 숲으로!"
그쪽이 우거진 나무 덕분에 기가티탄의 시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유리할 것 같았다.
한데 그때였다.
"뽀도동... 뽀도옹! 헥헥!"
뽀동이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심상치가 않았다.
로이드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뽀동아?"
"뽀도옹? 헥헥헥!"
"설마 너, 지친 거야?"
"뽀도동, 헤엑헥!"
"...."
어쩐지 뽀동이의 질주 속도가 아까보다 느려져 있었다.
모래밭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호흡도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지쳤구나.'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저 무거운 수레와 인어 동상을 끌며 내달렸다.
방금도 기가티탄보다 앞서서 하비엘에게 도착하기 위해 한계 속도로 질주했다.
아무리 소환수라 해도 엄연한 동물인 이상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쪽을 따라오는 기가티탄의 속도는 전혀 줄지 않고 있었다!
'젠장!'
로이드는 이를 갈았다.
'도망만 치면 되는 건데.'
한데 그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뽀동이의 숨은 갈수록 가빠지고 있었다.
내달리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지고 있었다.
반면 기가티탄은 지친 기색도 없이 특유의 갯가재 같은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론 몇 분 안에 따라잡힐 거야.'
길어야 5분 정도가 아닐까.
위기감이 심장을 쿡쿡 찔러 왔다.
로이드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럼 어떡하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방울이를 거대화시켜서 갈아타기.
그 와중에 화산 폭발 스킬로 시야를 막고 도망치기.
혹은 하망이에게 바닷물을 마시게 하고 바다 쪽으로 도망치기 등등.
나름의 방법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실패할 거야.'
방울이는 화산 폭발을 일으킬 때만 빠르다.
짧고 통통한 몸매 때문에 기어가는 속도는 느리다.
아까처럼 수면 위에서 바나나보트처럼 움직여도 마찬가지.
물에선 기가티탄이 더 빠를 것이다.
그건 하망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칠 방법이 없어. 빠져나갈 수가 없어. 하비엘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따라잡힐 거야.'
비관적인 확신이 들었다.
그의 시선이 기절한 하비엘에게로 옮겨갔다.
'버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가티탄이 노리는 건 하비엘이었다.
그러니 하비엘을 버린다면 확실히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하비엘이 죽어. 그건 안 돼.'
앞으로 소드마스터가 되어 자신을 보좌해야 할 놈이었다.
한데 이런 곳에서 녀석을 잃는다면?
그건 너무 큰 손해였다.
'물론 지금 당장의 안전만 따진다면 버리는 게 맞겠지만... 아냐. 길게 봐선 안 좋아. 그러기엔 느낌이 너무 쎄해.'
근시안적인 판단으로 훗날의 큰 이득을 포기하긴 싫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남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결국 그나마 가능한 건 역할 바꾸기인가.'
미끼와 칼날.
어그로를 끌었던 자신.
약점을 노렸던 하비엘.
그 역할을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젠장, 이래서 싸우지 말고 숨자고 했던 건데!'
까드득!
로이드는 이를 갈았다.
기절한 하비엘의 얄미운 뺨을 한 차례 찰싹 때렸다.
그리고 시스템 창을 열었다.
이제부터 기가티탄과 맞서기 위한 무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내 능력으로는 턱도 없어. 놈에게 타격을 입히려면 하비엘이 발파로 뚫다가 남긴 구멍에 타격을 넣어야 돼.'
지금 시점에서 자신이 기가티탄에게 정밀한 타격을 찔러 넣을 수단.
그것은 발파가 유일했다.
'그리고 발파를 사용하려면 최소 세 개의 써클이 필요하지.'
충돌시킬 두 개의 써클.
충격으로부터 심장을 보호할 나머지 하나의 써클.
그렇듯 세 개의 써클을 얻기 위해 로이드는 결심했다.
'해보자. RP도 충분해.'
결심한 로이드는 스킬 메뉴창을 선택했다.
그 언젠가 절망으로 어둡던 개미굴에서 생성했던 스킬, 아스라한 심법.
마침내 그걸 트리플 써클로 업그레이드할 때가 왔다.
74화. 트리플 써클 (1)
그르륵! 투쿠쿠쿠쿠-!
괴성이 터졌다.
지축이 울렸다.
그때마다 뒤쪽에서부터 드리운 달그림자가 가까워졌다.
달빛과 밤하늘을 통째로 가리며 돌진해 오는 거대한 실루엣.
기가티탄이 포효하며 달려왔다.
그 앞에서 뽀동이가 내달렸다.
지친 호흡 가쁘게 내뱉었다.
무거워진 다리로 땅을 박찼다.
하지만 뒤를 추격해 오는 기가티탄과의 거리가 시나브로 좁혀지고 있었다.
기가티탄의 거대한 다리가 줄지어 움직일 때마다 포효와 굉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시간이 얼마 없어.'
로이드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길어야 3분.
정말 잘 쳐줘도 5분 남짓.
지금 상황으로 예측하자면 그 시간이 지난 뒤쯤엔 뽀동이가 기가티탄에게 잡힐 듯했다.
물론 자신과 하비엘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로이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스킬창. 아스라한 심법.'
스킬 메뉴를 열었다.
아스라한 심법을 선택했다.
눈앞에 스킬 정보가 주르륵 떠올랐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 더블 써클 Lv 4]
[마나 증폭률 : 260%]
[스킬 전용 옵션 ① 에너자이저 ② 잠력 폭발 ③ 절전 모드]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190]
[현재 보유 중인 RP : 1901]
'좋아.'
과거 개미굴에서 제법 많은 RP를 투자했던 아스라한 심법이었다.
그렇게 더블 써클 1레벨까지 성장시킬 수 있었다.
이후엔 오크 부락에서 석빙고에 채울 얼음을 만드는 과정에서 2레벨이 올랐다.
그 후에도 틈틈이 훈련을 반복했다.
덕분에 아스라한 심법의 수준이 더블 써클 4레벨에 다다라 있었다.
'후우. RP가 모자라진 않으려나.'
로이드는 남은 RP를 체크했다.
1901.
약간 간당간당할 것 같았다.
'전엔 RP가 500 정도만 있어도 폭풍 성장이 가능했는데, 이젠 그 정도론 턱도 없겠어.'
이제는 1레벨을 성장시키는데 들어가는 RP가 자그마치 190이었다.
그런 RP 소모량은 앞으로 더 눈덩이처럼 불어나리라.
'그래도 일단 해봐야지.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어.'
아스라한 심법을 트리플 써클로 올리는 것.
그걸 위해 로이드는 스킬창 아래의 메뉴를 선택했다.
[아스라한 심법 성장에 RP를 투자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어차피 이젠 망설일 시간도 없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딩동!
[스킬 레벨업!]
[아스라한 심법 : 더블 써클 Lv 5]
[마나 증폭률 : 280%]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220]
[현재 보유 중인 RP : 1711]
'흐음, 이거 쎄한데.'
눈앞에 떠오르는 여러 정보.
그걸 보면서 로이드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머릿속에서 숫자 계산이 파바박 돌아갔다.
'한 번 레벨을 올렸더니 레벨업 필요 RP가 30이 불어났어. 만약 이 기세로 계속 간다면, 으음, RP가 조금 모자랄 것 같은데.'
쎄한 예감이 들었다.
어쨌건 지금은 아스라한 심법을 트리플 써클까지 올려야 한다고 판단한 그였다.
한데 트리플 써클까지 올리려면 더블 써클 10레벨에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
문제는 그 RP가 살짝 모자랄 것 같다는 점이었다.
'만약 정말로 필요 RP가 예상대로 늘어난다면... 마지막 단계에서 RP가 51 정도 모자랄지도.'
하지만 지금은 그걸 미리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딱 한 가지 방법만 있었다.
스킬 레벨업을 계속 실행해보는 것이었다.
'어차피 시작한 마당이야. 이젠 뺄 수도 없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자!'
이미 이판사판인 상황.
결심한 그는 RP를 대량으로 퍼부었다.
아스라한 심법 레벨이 쭉쭉 올라갔다.
더블 써클 5레벨에서 6레벨로.
7레벨에서 8레벨로.
9레벨에서 10레벨까지.
그리고 한계점이 찾아왔다.
딩동.
[스킬 레벨 업!]
[아스라한 심법 : 더블 써클 Lv 10]
[마나 증폭률 : 380%]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370]
[현재 보유 중인 RP : 319]
"쯧."
어째 쎄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다더니.
로이드는 혀를 찼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미리 견적을 냈던 계산이 얄밉도록 들어맞아 버렸다.
'후우. 이거 진심 실화냐.'
실화인 점이 문제였다.
억울함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모았는데.'
정말 구두쇠처럼 알뜰살뜰 모은 RP였다.
하비엘, 남작 부부 등과 호감도를 올리며 차근차근 모았다.
수많은 공사를 하며 업적을 쌓아서 대량의 보너스 RP도 챙겼다.
그럴 때마다 RP를 사용해볼까 싶은 충동이 수시로 들었다.
하지만 참아냈다.
언젠가는 정말 필요한 순간에 요긴하게 쓰일 거라고.
자신만의 비장의 무기가 되어줄 귀한 자원이라고.
10년, 20년을 바라보며 적금을 붓듯이.
혹은 동네 중국집 쿠폰 스티커 모으듯이.
그렇게 정말이지 열심히 모은 RP였다.
'그런데도 모자란다니.'
진심으로 억울했다.
하지만 지금은 억울함에 몸부림이나 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쿠르륵! 쿠구구구-!
어느덧 기가티탄과의 거리가 한결 좁혀져 있었다.
반면 뽀동이의 달리기는 아까보다 더 느려졌다.
지친 까닭이었다.
정말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어설프게 성장시킨 더블 써클 10레벨의 아스라한 심법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무조건 트리플 써클까지 올려야 해. 그래야 발파를 쓸 수 있어!'
저 기가티탄의 갑각을 뚫을 유일한 가능성.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
'RP가 필요해! 당장!'
로이드의 두뇌가 팽팽 돌아갔다.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의 한쪽 손이 힘껏 치켜들렸다.
그리고 세차게 휘둘러졌다.
찰싹!
로이드의 손바닥이 기절한 하비엘의 뺨을 찰지게 때렸다.
그가 외쳤다.
"야 인마! 일어나!"
찰싹! 찰싹!
연달아 때렸다.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일어나! 눈 좀 뜨라고!"
찰싹! 찰싸닥!
때리고 또 때렸다.
때린 자리만 때렸다.
하비엘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때리니 비로소 하비엘이 실눈을 떴다.
"으으음...."
고통스러운지 하비엘이 얼굴을 찡그렸다.
조금은 혼란에 잠긴 눈빛으로 이쪽을 보았다.
"로이드...님?"
실낱같은 음성.
로이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너무나 반갑고도 북받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싹 뒤덮었다.
"그래, 나야. 정신 들어?"
"예, 조금은... 크읏."
"무리하지 마."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하비엘이 다시 쓰러졌다.
가쁜 숨을 헉헉 내쉬었다.
로이드가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런 하비엘을 부축하며 눕혀주었다.
헐떡이는 녀석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였다.
"너, 많이 다쳤어."
"하지만 로이드 님, 저는...."
"알아. 계속 싸우고 싶을 거라는 거."
"예, 그러니 당장...."
"아니야. 쉬어."
"로이드 님?"
"여기서 더 싸우려다간 너, 죽을 거다. 그러고 싶은 거야?"
"물론입니다. 제가 나서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겁니다."
"내가 상심하는 건 상관없고?"
"...예?"
하비엘이 멈칫했다.
로이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널 잃으면 나는 날개 꺾인 독수리와 같은 신세가 되겠지."
"로이드 님?"
"솔직하게 말하자면 널 잃고 싶지 않다. 네가 무리하는 것도, 희생을 자처하는 것도 싫다."
"...."
"앞으로는 날 위해서만 싸워라."
"하지만 로이드 님, 지금은...."
"내게 맡겨. 여기선 내가 싸운다."
"로이드 님?"
"날 믿나?"
"저는...."
"날 믿느냐고 물었다."
"...."
하비엘의 눈동자가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이 진심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
로이드는 그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말 대신 굳게 다문 입매로 답했다.
진중하게 가라앉은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 님...."
비로소 이쪽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하비엘의 초조해하던 눈길이 진정되었다.
온몸에 들어갔던 힘이 풀렸다.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럼 로이드 님을... 믿겠습니다...."
"그래. 쉬어."
"예, 로이드 님...."
스르륵.
하비엘의 눈이 감겼다.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며 다시 기절했다.
동시에 로이드의 눈앞에 오매불망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의 결의를 진심으로 믿고,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은 대의를 위한 싸움에 선뜻 나서는 당신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4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5]
[주요 인물과의 가시적인 관계 개선으로 72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391]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친밀 등급이 <일상적 타인>에서 <평범한 관심>으로 상향되었습니다.]
[친밀 등급 상향에 따른 보너스로 25 RP를 추가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416]
'좋았어!'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즉석에서 RP 뽑아내기, 아니, 착취하기 작전의 성공이었다.
'후우, 오글거려서 손발 다 사라질 뻔했네.'
열심히 하비엘을 깨웠다.
간신히 의식을 차린 녀석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녀석이 다시 기절하기 전에 낯뜨거운 멘트를 있는 대로 죄다 쥐어짜냈다.
그 멘트를 뱉으면서는 속이 메슥거리는 걸 필사적으로 참아내야 했다. 십이지장 융털돌기까지 모조리 오그라드는 감각도 힘껏 견뎌냈다.
그래도 보람이 있었다.
하비엘은 이쪽이 열심히 날린 멘트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
이쪽을 믿는다는 말을 남겨놓고 장렬히(?) 기절했다.
녀석과의 호감도가 올랐음은 물론이었다.
'덕분에 무려 RP를 97이나 챙겼어.'
아스라한 심법을 트리플 단계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마지막 문턱.
그 문턱에서 살짝 모자랐던 RP.
그걸 메꾸기에 충분히 넉넉한 양이었다.
로이드는 스킬창을 열었다.
망설임 없이 RP를 투자했다.
기다렸던 메시지가 환하게 떠올랐다.
딩동.
[스킬 등급 업!]
'이거지!'
로이드가 속으로 환호했다.
드디어 또 하나의 문턱을 넘은 기분이었다.
그는 눈앞에 떠오르는 안내 메시지를 재빨리 읽었다.
[아스라한 심법의 등급이 <트리플>로 상승했습니다.]
[스킬 등급 상승에 따라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스킬 옵션이 강화되었습니다.]
[아스라한 심법 : 트리플 써클 Lv 1]
[마나 증폭률 : 500%]
[스킬 전용 옵션 ① : 에너자이저(改) - 트리플 써클의 효율성을 극한으로 활용합니다. 옵션 기능 사용 시 20분간 절대로 지치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제한 : 하루 2회 사용 사능.)]
[스킬 전용 옵션 ② : 잠력 폭발(改) - 써클의 증폭 성능을 극한까지 폭발시킵니다. 옵션 기능 사용시 30초간 마나 증폭률이 5배까지 상승합니다. 단, 옵션 사용이 완료되면 사용자는 탈진 상태에 빠져 아스라한 심법을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제한 : 하루 1회만 사용 가능.)]
[스킬 전용 옵션 ③ : 절전 모드(改) - 극도의 탈진 상태에서도 아스라한 심법의 사용 상태를 약하게나마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의 마나 증폭률은 25%로 고정됩니다.]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500]
[현재 보유 중인 RP : 46]
'헐, 대박.'
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 증폭률이 무려 500%로 껑충 뛰었다.
그걸 증명하듯, 그의 심장 주위로 새로운 고리가 생성되었다.
키이이이잉-!
세 번째의 써클이 심장을 감쌌다.
기존에 있던 두 개의 써클과 공명하며 회전을 시작했다.
그 효과는 놀라웠다.
쿠웅! 쿠우웅!
심장이 전에 없이 강하게 뛰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세로 혈액이 혈관 속을 내달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호흡마저 달라졌다.
단 한 줌의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절로 근육에 힘이 차올랐다.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마치, 공기를 통해 스테로이드를 실시간으로 흡입하는 기분이었다!
'장난 아니잖아, 이거.'
이게 트리플 써클의 힘이라는 건가.
로이드는 써클 한 단계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새삼 온몸으로 실감했다.
'게다가 옵션까지 성장했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세 가지 옵션들도 두루두루 업그레이드되었다.
에너자이저의 발동 시간과 횟수가 2배로 늘었다.
잠력 폭발도 사용 시간이 10초 늘었다. 증폭률은 5배로 뻥튀기되었다.
절전 모드도 마찬가지였다.
'비상 증폭률이 10에서 25퍼센트로 늘어났어.'
탈진 상태가 되어서도 동원할 수 있는 15%의 증폭률 차이.
저 차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차이가 될 것이리라.
게다가 성장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를 진짜로 놀라게 하는 소식은 따로 있었다.
딩동.
또 한 번 귓가에 울리는 알림음.
그 직후,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스킬 등급 상승에 따라 새로운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④ : 써클 시프트 - 보유한 마나 써클 각각의 분당 회전수(RPM)를 미리 세팅된 6단계(1-6단)로 조절하여 고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옵션은 초심자가 발파를 사용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무슨....'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
기대한 적도 없던 새로운 가능성.
그걸 읽는 로이드의 눈이 승리의 예감으로 물들었다.
75화. 트리플 써클 (2)
'이건 대체.'
로이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새로운 네 번째 옵션이라니.
써클 시프트라니.
생각해본 적도, 예상한 적도 없는 종류의 보너스였다.
게다가 그 옵션을 설명하는 내용이 어쩐지 조금은 익숙하기도 했다.
'분당 회전수? RMP? 1에서 6단 기어?'
마치 자동차 변속기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자동차 기어를 바꾸듯 써클의 회전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듯했다.
'심지어 따로따로? 써클 세 개를 전부 따로 조절하는 게 가능하다고?'
두근, 두근.
옵션 내용을 재차 읽는 로이드의 가슴이 절로 뛰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로 엄청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난이 아니잖아.'
써클의 회전력을 조절하는 일은 어려웠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일정한 회전력을 유지하는 일은 더 어려웠다.
심장 주위로 마나 써클을 회전시키는 것.
그건 단순하게 비유하자면 손가락에 커다란 링을 걸고 돌리는 것과 비슷했다.
누구나 손에 링을 걸면 손쉽게 돌릴 수 있다.
돌리는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회전 속도를 완벽히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은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당연하지. 비슷한 속도까지는 가능하겠지만, 수십 분의 1초 단위까지 틀리지 않고 일정한 회전을 맞춰야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새로 생긴 옵션인 써클 시프트는?
그걸 가능하게 해줄 수 있었다.
심지어 3개의 써클을 각각 다른 속도로 일정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미친 거야, 이 옵션은.'
로이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까지 그는 더블 써클의 보유자였다.
그렇기에 여러 개의 써클을 각각 다른 속도로 회전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았다.
2개의 써클을 각각 다르게 돌리는 것.
그건 링 두 개를 각각 양손에 하나씩 걸고서 다른 속도로 돌리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트리플 써클, 즉, 3개의 써클은 어떠한가.
'양손에 하나씩 링을 건 상태에서 발목에도 하나 추가하는 거지.'
그렇게 3개로 불어난 써클을 각기 따로 컨트롤하며 돌리는 것.
이미 기술의 범주를 벗어난 일이었다.
거의 기예, 서커스에 비견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써클을 만들자마자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하비엘이 괴물인 것이었다.
'한데 이제 나도 그게 가능해진 거야.'
물론 하비엘보다는 투박하리라.
6단계를 벗어난 디테일한 회전력 조절은 불가능하리라.
'그래도 이게 어디야.'
써클 시프트를 통한 기어 조절.
기어 조절을 이용한 회전력 제어.
덕분에 복잡한 연습 없이 발파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발파를 쓰려면 마나 써클을 충돌시켜야 하니까.'
그런데 써클 사이엔 서로를 밀어내는 힘, 척력이 존재했다.
마치 같은 극의 자석처럼 서로를 밀어냈다.
그래서 접촉시키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척력을 상쇄하려면?
마나 써클의 초고속 회전이 필요했다.
게다가 무작정 빨리만 회전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두 써클을 정확한 비율로 회전시켜야 해. 회전수가 2대 3이었지, 아마.'
로이드는 문득,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2대 3의 회전 비율.
하비엘이 지나가듯 알려준 비율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충돌 조건이라고 언급했다.
언젠가 트리플 써클이 되었을 때 참고하라고 했던가.
그때였다.
그르르륵!
뒤쪽. 아니, 위쪽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기가티탄의 거대한 몸체가 보였다.
그 뜻은 명확했다.
'벌써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콰앙! 쿠콰콰콰콰-!
기가티탄의 앞다리가 땅을 내리찍었다.
불과 5초 전에 뽀동이가 박찼던 자리였다.
'이젠 진짜 안 되겠네.'
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그는 뽀동이의 한쪽 귀를 붙잡고 외쳤다.
"뽀동아!"
"뽀, 뽀동! 헥헥!"
"너! 나 없이도 잘 도망칠 수 있지!"
"뽀동!"
"그래! 조금만 힘내! 내가 저놈한테 한 방 먹여볼게! 그때까지 버텨! 알았지!"
"뽀, 뽀도동! 헤엑, 헥헥!"
뽀동이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는 뽀동이의 등을 박찼다.
파아앗.
몸이 허공에 떴다.
뽀동이의 통통한 등이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이쪽을 태우던 무게가 사라진 덕분인지 아주, 살짝, 조금 빨라진 듯한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기둥 같은 기가티탄의 다리가 급속도로 다가왔다.
후우웅!
"...흐읍!"
로이드는 숨을 들이마셨다.
여전히 추락 중이라 허공에 떠 있는 자신.
그런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기가티탄의 다리.
그는 충격에 대비했다.
꽈앙-!
기둥에 부딪히듯 기가티탄의 다리와 충돌했다.
그 순간 두 팔을 벌렸다.
놈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마침 다리 껍질 표면의 작은 돌기가 잡혔다.
덕분에 놈의 다리에 매달린 채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속이 좀 뒤집히긴 했다.
'커억.'
부딪치며 제대로 명치를 맞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로이드는 이를 꽉 깨물었다.
'내 팔자에 이게 무슨 액션 영화 주인공도 아니고!'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손을 뻗었다.
더 위쪽의 돌기를 잡았다.
암벽 등반을 하듯 열심히 기어올랐다.
다행히 트리플 써클 덕분인지 체력이 넘쳐났다.
저 위쪽 괴수의 몸통까지 수십 미터의 높이.
게다가 기둥 같은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상황.
그런 조건에서도 그는 싱크대를 기어오르는 한 마리 바퀴벌레처럼 재빠르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더 빨리! 빠르게!'
시간이 많지 않았다.
기가티탄이 거의 뽀동이를 따라잡기 직전이었다.
'내가 늦으면 뽀동이도, 하비엘도 당할 거야.'
로이드는 마침내 기가티탄의 등갑 위로 올라섰다.
놈의 머리 쪽 방향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동시에 벼락치기로 발파 연습까지 했다.
'기회가 많지 않을 거니까. 한 번에 성공해야 하니까.'
농구나 축구 드리블도, 아이돌 댄스나 수영도, 하다못해 걸음마조차도 모두가 연습이 필요한 법이었다.
하물며 아스라한 심법의 고급 기술인 발파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2대 3의 회전 비율이랬지?'
그는 하비엘의 조언을 떠올렸다.
새로 얻은 써클 시프트 옵션을 발동했다.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④ : 써클 시프트를 발동합니다.]
'연습이니까 기어는 1, 2, 3으로.'
기어 설정을 마쳤다.
세 개의 써클이 즉시 반응했다.
[알파 써클의 기어가 1단으로 설정되었습니다. RPM 1,000으로 고정.]
[베타 써클의 기어가 2단으로 설정되었습니다. RPM 2,000으로 고정.]
[감마 써클의 기어가 3단으로 설정되었습니다. RPM 3,000으로 고정.]
키이이잉-!
써클 셋이 각각의 회전력으로 돌아갔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인 베타 써클과 세 번째인 감마 써클이 특이한 반응을 보였다.
일부러 둘을 떠민 것도 아닌데, 저절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앗.'
로이드는 화들짝 놀라며 첫 번째인 알파 써클을 움직였다.
RPM 1,000의 알파 써클로 재빨리 심장을 감쌌다.
충돌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투확!
베타 써클과 감마 써클이 심장 주위에서 충돌했다.
"...!"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폭발적인 압력.
내부에서부터 파괴적인 힘이 쇄도했다.
알파 써클에 감싸인 심장을 때렸다.
"크욱!"
심장마비에 걸리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내달리던 로이드는 순간 가슴을 감싸며 주저앉아야 했다.
그리고 황급히 두 팔을 움직였다.
등에 메고 있던 삽을 들었다.
바닥을 찍었다.
동시에 써클의 충돌로 일어난 파괴적인 압력을 삽으로 분출했다.
콰아앙-!
평평한 삽날을 통해 발파가 터져 나왔다.
기가티탄의 등갑을 때렸다.
로이드의 몸을 5미터나 위로 날려보냈다.
"그어앗!"
하마터면 기가티탄의 등 밖으로 떨어질 뻔했다.
그는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으며 등갑 위로 착지했다.
그리고 삽자루를 불끈 쥐었다.
'됐다. 성공이야.'
시험 삼아 해본 발파가 단숨에 성공했다.
아니, 그냥 성공이 아니었다.
'일부러 써클을 충돌시키지도 않았어. 회전수를 황금비율로 맞췄더니 써클 두 개가 알아서 충돌해 버렸어.'
그 뜻은 하나였다.
이제는 원하는 어느 때라도 즉시 발파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가자!'
자신감을 얻은 로이드가 벌떡 일어났다.
기가티탄의 등갑을 따라 달렸다.
약점 부위가 있을 11번 배갑과 12번 배갑 근처로 접근했다.
거기서부턴 묘기를 부려야 했다.
"훅! 후욱!"
기가티탄의 등에서 옆구리를 따라 기어서 내려갔다.
배갑에 착 달라붙었다.
'이건 무슨 유격 훈련도 아니고!'
평평하게 펼쳐진 드넓은 배갑.
그 곳곳에 돌기처럼 솟은 가시를 붙잡았다.
가시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다음 가시를 붙잡았다. 그렇게 몸을 옮겨갔다.
위쪽에는 배갑과 가시가.
아래쪽 수십 미터 거리엔 지면이 놓였다.
'밑은 보지 말자.'
보면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시선을 위로 고정한 채 열심히 이동했다.
마치 피를 빨기 위해 인간의 몸에 달라붙은 여름철 모기처럼 은밀하게 접근했다.
그리고 마침내 약점 부위에 도착했다.
'저거다.'
11번 배갑과 12번 배갑의 연결 부위.
그곳에 만들어져 있는 구멍이 보였다.
지름은 약 50센티.
기가티탄의 머리 쪽을 향해 비스듬하게 파여 있는 구멍이었다.
'하비엘이 발파를 찔러 넣은 자리야.'
로이드는 삽을 움켜쥐었다.
여길 한 번만 더 찌르면 된다.
호흡을 조절했다. 하비엘이 찔렀던 발파와 똑같은 각도로 삽 머리를 조준했다.
'한 번에.'
끝내야 하리라.
다짐하며 마나 써클을 회전시켰다.
써클 시프트로 회전 속도를 설정했다.
'3, 4, 6단.'
키이이잉-!
시프트를 발동하자마자 써클이 즉시 반응했다.
각각 3천, 4천, 6천의 RPM.
아까보다 훨씬 맹렬한 기세로 회전했다.
로이드는 3,000 RPM의 알파 써클로 심장을 감쌌다.
'이제 남은 건 충돌.'
4,000 RPM의 베타 써클과 6,000 RPM의 감마 써클.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두 써클이 충돌하는 즉시 그 힘을 뽑아내리라.
오른팔로 통하는 마나의 경로를 열었다.
폭발력을 삽으로 보낼 준비를 마쳤다.
키이이이잉!
베타 써클과 감마 써클이 공명했다. 순조롭게 가까워졌다. 곧 충돌할 듯했다. 삽을 겨눈 채 그 순간을 기다렸다.
한데 그때였다.
그르르르웍!
기가티탄이 거칠게 포효했다.
갑자기 돌진을 멈추었다.
거의 잡을 뻔했던 뽀동이를 놓아주었다.
대신 곤봉 같은 두 앞다리로 땅을 찔렀다.
찌르는가 했더니 확 움츠렸다.
앞다리에 부서진 암석.
그 파편이 확 움츠린 앞다리의 기세에 휘말렸다. 위로 쏘아졌다. 수십 조각의 치명적인 파편이 되었다.
그리고 11번 배갑과 12번 배갑 일대를 폭격하듯 두드려 왔다.
콰콰콰콰콰!
발파를 준비하던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약점으로 접근한 이쪽의 존재를 깨달은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러니까 저렇듯 갑자기 바위를 깨서 이쪽으로....
뻐억-!
"...!"
옆머리를 강타하는 커다란 충격.
로이드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상반신 전체가 크게 튕겨졌다.
호선을 그리며 옆으로 밀려나는 그의 머리를 따라 핏방울이 튀었다.
'나, 맞은 건가.'
멍해진 의식 사이.
어쩐지 느리게 느껴지는 시간.
그 속에서 로이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근처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돌덩이 하나를 눈에 담았다.
주먹보다 조금 큰 돌덩이.
그 한쪽 면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의 머리를 강타하며 묻어난 피였다.
'여기서 실패하면... 안 되는데.'
발파.
성공하고 싶었다.
하비엘에게 큰소리도 쳐뒀다.
그런데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왼손으로 쥐고 있던 배갑 돌기를 놓쳤다.
몸 전체가 아래로 쑥 떨어졌다.
추락의 시작이었다.
'안 되는데....'
로이드의 눈동자가 위를 향했다.
여전히 느리게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
그 속에서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한 기가티탄의 배갑.
그 와중에도 어쩐지 선명하게 보이는 약점 부위의 뚫다 만 구멍.
'한 번만.'
찌르면 된다.
두 번도 필요 없다.
그러니까 한 번만.
딱 한 번만.
찌르자.
마나 써클을 회전시켜서.
써클 시프트 옵션을 잘 써서.
하비엘이 알려준 비율을 지켜서.
'2대... 3.'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뇌진탕으로 흐려지는 의식.
그 속에서 오로지 떠오르는 한 가지 기억만 되뇌었다.
2대 3.
마나 써클 회전의 비율을 2대 3으로.
그걸 반드시 유지하면서 충돌시킬 것.
'2대 3....'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그의 집념이 써클 시프트를 발동시켰다.
디테일한 조절은 이미 없었다.
그저 2대 3.
그 말만 되뇌며 본능적으로 기어를 조절했다.
알파 써클이 2단으로 놓였다.
베타와 감마 써클이 3단으로 놓였다.
맹렬히 회전했다.
키이이이이잉-!
알파 써클을 중심으로 나머지 써클이 회전했다.
세 개의 써클이 일제히 2대 3의 회전비로 공명했다.
공명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심장을 보호하는 써클 따윈 없었다.
3개의 써클 모두가 충돌했다.
그 순간, 의식을 잃어가던 로이드가 몸에 새겼던 기억대로 강철삽을 뻗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맹렬한 폭발력이 쏘아졌다.
기가티탄의 약점 부위를 파고들었다.
배갑 속에 보호되던 근육 조직과 내장을 헤집었다.
그러고도 계속 뻗었다. 뚫었다. 돌파했다. 앞에 놓인 모든 신체 조직을 부쉈다. 그 너머의 등갑마저 꿰뚫었다.
그렇듯, 해일과도 같은 힘이 기가티탄의 몸통을 배에서 등까지 일격에 관통했다.
투콰하학-!
로이드의 집념과 의지가 만들어낸 경이로운 일격.
역사상 최초의 삼중 발파가 작렬하는 순간이었다.
76화. 기적, 혹은 기연 (1)
투콰학-!
거대한 힘이 작렬했다.
막을 수 없는 파도처럼 쇄도했다.
역사상 최초로 터져 나온 삼중 발파.
그 폭발적인 힘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관통하며 질주했다.
그러걱!
기가티탄의 입에서 처음으로 고통의 괴성이 터졌다.
동시에 거대한 괴수의 몸이 순식간에 꿰뚫렸다.
키틴질과 상아질.
따로 두어도 단단한 두 물질이 분자 단위로 결합된 배갑 껍질이었다.
3중으로 중첩된 벌집 구조가 다시 한 번 나선으로 얽혀 있었다. 그 단단함과 질김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런 무식한 구조의 두께가 무려 1미터에 달했다.
문자 그대로 케블라 섬유를 뛰어넘는 고도의 생체적 방탄 갑주, 혹은 복합 장갑이나 다름없는 껍질이었다.
하지만 삼중 발파의 폭발적인 관통력 앞에선 그 방어력도 소용이 없었다.
콰작!
3중 벌집 구조가 깨졌다.
나선으로 얽힌 분자 구조가 녹았다.
삼중 발파의 뜨거운 열기가 두께 1미터의 배갑 껍질을 거침없이 뚫었다.
단단하고 질긴 껍질 안쪽에는 상대적으로 연약한 조직이 있었다.
사나운 힘의 노도가 그 안으로 짓쳐 들었다.
거침없이 찢어발겼다.
끄그럭!
가장 먼저 꿰뚫린 것은 배갑 바로 안쪽에 있는 근육 조직이었다.
단단한 껍질 속 젤리 같은 근육 조직이 막대한 열기에 노출되었다. 단백질이 익어 버렸다. 조직 내의 수분이 끓어올랐다. 주위의 조직에 광범위한 손상이 가해졌다.
그러고도 발파의 관통력은 전혀 힘을 잃지 않았다.
근육 다음은 내장 조직이었다.
꽈즈걱!
척추처럼 몸체 아래를 따라 죽 이어진 배신경삭이 꿰뚫렸다. 끊어졌다. 거대한 신경 조직이 단말마를 내질렀다.
그 뒤에 자리한 나머지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배신경삭 위에 있던 꽈리 모양의 심장도.
거대한 몸에 산소를 공급하던 폐서 기관도.
집보다 큰 위장의 일부와 호르몬 분비샘도.
거기에 등 쪽에 붙어 있던 근육 조직도.
마지막으로 등을 덮고 있던 단단하고 질긴 1미터 두께의 등갑도.
모조리 관통되었다.
녹고, 찢겼다.
갈가리 파괴되어 꿰뚫렸다.
투확-!
사납고 거친 힘의 불길이 기가티탄의 등을 뚫고 솟구쳐 나왔다.
치솟는 발파의 기세 사이로 조각난 내장 조각들이 폭죽처럼 터져 흩어졌다.
주위에 비처럼 내렸다.
그 사이로 로이드도 추락했다.
완전한 혼절로 접어들며 의식을 잃어가면서였다.
'...졸려.'
기가티탄의 배갑에서부터 지상까지.
약 20미터의 높이에서 실 끊어진 연처럼 추락했다.
균형을 잡거나 충격에 대비할 수도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그렇듯 흐려지는 눈빛으로 앞을 보았다.
회색 바위 가득한 해안 절벽의 지면.
그 광경이 급속도로 다가왔다.
'....'
이렇게 떨어지면 무사하진 못할 텐데.
그 생각을 끝으로 로이드의 의식이 끊어졌다.
그의 몸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니, 바위로 내리꽂히기 직전의 순간에 폭신한 털 속으로 파묻혔다.
"뽀동!"
포옥!
때마침 숨 가쁘게 달려온 뽀동이.
뽀동이가 통실하고 퐁퐁한 등으로 추락하던 로이드를 받아냈다.
풍성하고 폭신폭신한 털 덕분에 등으로 떨어진 로이드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 튕겨서 밖으로 떨어지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뽀동이는 좀처럼 웃지 못했다.
로이드를 받아냈다고 해서 안심하지도 못했다.
아직은 도저히 웃거나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뽀도동! 뽀동! 헥헥!"
뽀동이는 안심하는 대신 더욱 열심히, 숨 가쁘게 달렸다.
그런 뽀동이의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쇄도해 왔다.
그르르러럭!
콰앙, 괴성과 함께 뽀동이가 방금 지나온 자리에서 바위 부서지는 굉음이 터졌다.
연달아 거칠게 터졌다.
단말마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과 함께였다.
크르와아아악-!
기가티탄이 날뛰고 있었다.
11번과 12번 배갑 사이.
그 약점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배신경삭 일부가 끊어지고 심장과 호흡 기관이 터졌다.
절대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괴수는 쉽게 죽지 않았다. 경이로운 체력과 생명력, 야성의 힘으로 피할 수 없을 죽음도 잠시나마 미루었다.
그래서 지금은 시시각각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최후의 힘을 짜내어 날뛰었다. 광기에 젖었다.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 덤벼들었다.
해안가 절벽의 바위도, 눈앞에서 재빠르게 도망가는 뽀동이도 모두 파괴의 대상으로 여겼다.
크르워억! 콰앙! 콰콰콰-!
기가티탄의 곤봉 같은 앞다리가 집요하게 떨어져 내려왔다.
그럴수록 뽀동이는 더욱 스스로를 재촉했다.
숨이 끊어질 듯 가빠져도.
다리에 힘이 풀려도.
계속해서 뛰었다.
바위를 뛰어넘고, 바닥을 박차, 한 발짝이라도 기가티탄에게서 멀리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기가티탄의 집념이 조금 더 강력했다.
콰아앙!
"...뽀?"
거대한 곤봉 같은 앞다리가 떨어져 내렸다.
뽀동이가 달려가려던 앞길을 가로막았다.
열심히 내달리던 뽀동이가 황급히 멈추었다. 재빨리 몸을 돌렸다. 왼쪽으로 돌아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투콰앙-!
나머지 앞다리가 빠져나가려던 길마저 가로막았다.
뽀동이의 동글동글한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뽀동?"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오른쪽도, 뒤쪽도 커다란 바위로 막혀 있었다.
물론 기어오를 수는 있는 바위였다.
하지만 자신이 저 바위를 끙끙대며 기어오르는 동안 기가티탄이 가만히 기다려줄까?
아닐 듯했다.
돌아서 빠져나갈 길도 없었다.
바위를 오르려면 덜미가 잡힐 터였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뽀동이는 생각했다.
"뽀동! 뽀도동! 아르르!"
기가티탄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야물딱진 앞니를 드러내며 힘껏 으르렁거렸다.
그런 뽀동이를 향해 기가티탄의 상체가 쏟아져 내려왔다.
한껏 벌어진 거대한 아가리가 서슴없이 쇄도해 왔다.
그리고 지면에 고개를 처박았다.
콰아아아앙-!
"...!"
뽀동이의 궁디가 크게 움찔거렸다.
잠시 후, 이 충실하고 통통한 환상종은 뜻밖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후두둑, 투둑....
사방에 떨어지는 돌가루 파편과 먼지 속.
그 속에 쓰러진 거대한 괴수의 형체가 보였다.
한데 그 거구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뜻은 하나였다.
"뽀동?"
괴수의 숨이 끊어졌다.
그 사실을 깨달은 뽀동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이 통통한 환상종은 자신이 무사해졌음을 자축하지도, 살아남았음을 기뻐하지도 않았다.
대신 달렸다.
기가티탄의 사체를 뒤로 하고서 뛰었다.
숨이 터지도록 가빠져도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등에 업힌 로이드 때문이었다.
"뽀동! 뽀도동!"
자신의 등에 엎드려 있는 로이드.
그의 심장 박동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숨소리는 너무나 희미하게만 들려왔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주인을 살려야 했다.
"뽀동동! 헥헥! 뽀동!"
조금만 더 힘내라고.
조금만 더 버티라고.
자신과 로이드 둘 모두를 격려하듯 외치며 뽀동이는 달렸다. 저 멀리 소란에 잠긴 교역도시, 크레모의 시가지를 향해서였다.
그 뒤쪽, 달빛 아래엔 거대한 괴수의 사체만 덩그러니 남았다.
재난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엿새가 지났다.
괴수가 죽은 후 며칠.
그동안 도시의 시민들은 서서히 충격에서 벗어났다.
모두가 합심했다.
깨진 포석을 치우고, 무너진 담을 복구했다. 다친 이들은 제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았으며, 집을 잃은 자들은 이웃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는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포석을 치우다가도, 담을 세우다가도, 누군가를 간호하다가도,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도시 너머에 웅크린 거대한 실루엣이 보였다. 마치 잠든 듯 해안가 절벽에 남겨진 기가티탄의 사체였다.
사람들은 거대한 사체를 보며 지난 재난의 밤을 되새겼다.
동시에 안도했다.
그토록 느닷없던 재난.
그 난리통 속에서도 죽은 희생자가 한 명도 없었음을.
"그건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제게 누군가가, 그렇게 재빠르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못했거든요."
어느 중년의 여인이 치료소에서 말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마치 벼락 같은 굉음이었어요. 배가 크게 출렁였고, 그 순간 저는 온몸이 뒤집히는 걸 느꼈죠. 정신을 차려보니 전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어요. 그래요. 괴수가 배를 들이받는 순간, 뱃전 밖으로 튕겨 날아가 버린 거였죠."
"그래서요? 어떻게 바다에서 빠져나왔죠?"
그녀를 간호하던 봉사자가 물었다.
다른 봉사자들도 귀를 기울였다.
중년 여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사람이 손을 내밀었어요."
"그 사람이라뇨?"
"이름은 잘 몰라요. 지난달에 광장에서 큰 소환수를 불렀던 사람요."
"아, 그 사람. 알아요. 뱀을 닮은 소환수가 큰 기저귀에 펑펑 방귀 같은 걸 뿜었어요."
"네, 그 사람요. 그 사람이 서슴없이 다가와서 절 물에서 건져줬어요. 저뿐만이 아니었죠. 제 옆에서 정신을 잃고서 가라앉고 있던 어떤 영감님도, 그 곁에서 허우적대던 어린애도. 모두 그 사람이 건져줬는걸요."
"와아...."
중년 여인의 이야기에 봉사자들이 나직한 감탄을 흘려냈다.
그런가 하면 치료소 건너 중앙 광장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오갔다.
"어이, 들었소?"
"듣긴 뭘 들어."
"그 젊은 친구 이야기 말요."
"이 사람이 밑도 끝도 없이 뭔 소리야? 좀 알아먹게 말해."
"아, 그 친구 있잖소. 앞바다에서 공사한다고 설치던 총각."
"아아? 그 총각?"
날아온 동상에 부서진 광장.
그 광장을 보수하던 일꾼들이 두런거렸다.
"그 총각이 왜?"
"듣자하니 그 총각이 불을 껐다더이다."
"불을? 어떻게?"
"소환수를 불렀다더구만요. 통통하니 커다란 소환수가 물을 확 뿜었다던가."
"그래서 불을 껐다고?"
"그랬소. 덕분에 크게 번지려던 불이 잡혔다고 들었소."
"허허, 참. 그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니까 이야기가 도는 것 아니겠소. 본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그래?"
어떤 일꾼들은 귀를 쫑긋거리며.
또 어떤 이들은 눈을 빛내며 소식을 나누었다.
이야기가 퍼지는 곳은 치료소나 광장뿐만이 아니었다.
"제가 목격했습니다. 모두가 사실입니다."
"사실이라니. 좀 더 확실히 말해보게. 그럼 로이드 프론테라, 그 친구가 기가티탄의 몸통에 저토록 커다란 구멍을 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곳은 크레모 백작의 공관 회의실.
진상 조사 위원회가 주관하는 사후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곳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23번 해안 경계 초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다면 소관이 목격한 바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부디 그렇게 해주게나."
"감사합니다."
23번 초소장이 숨을 골랐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자면, 전 그날 죽을 각오를 품었습니다. 초소는 무너졌고, 기가티탄의 상륙을 허용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떤 결단을?"
"초소의 화약을 터뜨렸습니다."
"화약을?"
"예. 그렇게 해서라도 기가티탄에게 타격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놈이 타격을 받지 않았나?"
"예.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전 죽을 위기에 처했고, 그 순간 그 사람이 나타나서 절 구해주었습니다."
"로이드 프론테라가?"
"그렇습니다."
23번 초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한 자리의 백작, 그 밖의 진상 조사 위원회 구성원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증언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가 소관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나서서 싸웠습니다."
"기가티탄과?"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그와 함께 있던 은발의 기사가 먼저 싸웠고, 그가 후에 가세했습니다."
23번 초소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기가티탄과 맞서 싸운 하비엘.
그동안 마개조한 인어 동상으로 기가티탄의 주의를 끈 로이드.
하비엘의 기절.
로이드의 도주와 반격.
마지막으로 기가티탄의 몸을 꿰뚫은 의문의 대폭발까지.
그 모든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백작과 조사 위원회 전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마른침을 삼켰다가, 때론 탄식을 뱉고, 감탄을 흘려냈다.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이야기였다.
동시에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증언이었다.
기가티탄의 몸통에 뚫린 커다란 구멍.
부정할 수도 없이 너무나 확실한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백작이 물었다.
"그럼 로이드 프론테라가 그 구멍을 어떻게 만든 건지는 제대로 알아보진 못한 건가?"
"예. 거리가 제법 멀고 어두웠던지라 소관도 그 방법까지는 자세히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굉장히...."
"굉장히?"
"강력한 대포를 쏘는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대포?"
"그렇습니다."
"흐음, 대포라."
백작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자신이 보유한 어떤 대포도 기가티탄의 갑각을 뚫지 못했다.
한데 대포를 쏘는 듯한 모습이었다니.
"그럼 혹시 남몰래 강력한 마법이라도 사용한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소관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잘 들었네. 수고 많았어. 이만 물러가게."
"예. 감사합니다."
증언을 마친 23번 초소장이 물러났다.
회의실에 남은 조사 위원들이 두런두런 의논을 나누었다.
그 속에서 백작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후우. 당사자가 눈을 떠 주면 좋으련만.'
그는 로이드를 생각했다.
동부 구석의 프론테라 영지에서 온 젊은이.
그 젊은이가 하룻밤에 이룩한 수많은 공적을 떠올렸다.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도 그날 죽었겠지.'
사실이었다.
기가티탄이 출몰하며 범선과 동상을 덮치기 직전이었던가.
그때 로이드가 범선의 닻줄을 잘랐다.
덕분에 자신을 태운 범선이 기가티탄의 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 척의 범선이나마 무사한 덕분에 이후 물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을 전원 구조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시가지에 번지던 화재를 진압하고, 기가티탄을 직접 격퇴하기까지. 나와 내 도시의 사람들이 이번에 얼마나 큰 빚을 진 것인지.'
고마움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 친구가 제발 눈을 떠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도시에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던 기적.
그 기적을 이끌어준 로이드에게도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재난의 밤 이후.
로이드의 심장이 멈추었다.
다시 뛰지도 않았다.
한데 죽지 않았다.
호흡은 계속 유지되었다.
지난 엿새 내내 그러하였다.
멈춘 심장과 유지되는 호흡.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백작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이 도시의 모두가 짐작조차 못 했다.
발파의 충격으로 멈춘 것처럼 보이는 로이드의 심장.
그 내부에서 기적처럼 전무후무한 기연이 일어나고 있었다.
77화. 기적, 혹은 기연 (2)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표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분명히 심장이 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죽는 게 당연합니다. 아니, 이미 죽었어야 합니다. 한데 살아 있습니다. 호흡까지...."
"멀쩡하고 말일세. 맞나?"
"그렇습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로이드.
그런 로이드를 바라보는 의사의 눈길엔 당혹감을 넘어선 혼란이 가득해 보였다.
그럴 법도 했다.
심장이 멈춘 사람이 죽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니, 자연의 법칙이다.
그런데 눈앞에 그 예외가 있었다.
처음엔 언데드인가 싶었다. 갓 죽은 시체로 만든 신선한(?) 좀비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환자는 명백히 살아 있었다!
백작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아, 예."
의사가 반쯤 벗겨진 머리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백작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심장은 몸 전체에 혈액을 공급하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심장이 멈추면 맥박이 멎습니다. 죽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환자는 지금...."
"지금?"
"맥박이 뛰고 있습니다. 심장이 멈춰 있는데도 말입니다."
의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숨도 쉬고 있습니다. 약간 미열이 있긴 하지만 체온도 그럭저럭 정상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됩니다. 혹시 이 환자, 마법적인 치료를 따로 받은 겁니까?"
"아니, 전혀 그런 적 없네."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기가티탄이 불러온 재난의 밤.
그날 쓰러진 로이드는 지금껏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아니, 그를 치료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이다.
'아무도 치료할 엄두를 못 냈으니까.'
로이드의 상태는 실로 기이했다.
심장이 뛰질 않았다.
한데 맥박은 멀쩡했다.
호흡도 평온하게 이어졌다.
덕분에 불러온 의사마다 그의 상태를 진단하고는 당황하고, 기겁하고, 경악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실은 자네를 부르기 전에 다른 의사들도 불렀네. 자네가 열한 번째일세."
"...."
"모두 자네와 같은 반응을 보이더군.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고, 당연히 치료법 또한 제시하지 못하였네. 혹시 자네도 그러한가?"
"저는...."
"솔직하게 말해도 되네. 워낙 기이한 일이니, 누구라도 자네의 능력을 탓하지 못할 걸세."
"죄송합니다."
"역시 그런가."
"예. 저도 이런 환자는 처음 보는지라...."
"괜찮네. 멀리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군. 가보게. 여비와 보수는 총집사가 챙겨줄 것일세."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끝내 열한 번째로 불러온 의사도 황망히 물러나고 말았다.
크레모 백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대로 저 친구를 깨울 방법을 못 찾는 것인가.'
병상에 누워 있는 로이드 프론테라.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인재였다.
지난 재난의 밤.
그날 자신이 입은 은혜를 떠올리자면 더욱 그러하였다.
'수많은 시민들이 저 젊은이에게 빚을 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저 친구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듯 멀쩡할 수 있었을까.'
로이드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자신이 탄 범선도 기가티탄의 습격에 휘말렸으리라.
자신은 물론이고 하나뿐인 딸마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소름을 털어내며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피로하지 않은가."
"전 괜찮습니다."
백작의 시선이 향한 병실 구석.
그곳에서 말없이 자리를 지키던 은발의 기사가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백작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자네도 아직 다 낫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로이드 님을 지켜드릴 힘은 충분합니다."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실제로 하비엘은 아직 왼팔에 부목을 대고 있는 상태였다.
기가티탄의 앞다리에 직격당한 그날.
당시에 다친 팔이 아직 다 낫지 않은 까닭이었다.
"오른팔만 쓸 수 있다면 큰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네, 벌써 나흘째 뜬 눈으로 버티고 있다는 듯하던데."
"어차피 불면증에 시달리는 몸입니다."
"소드마스터 증후군인가?"
"예, 아마도."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엔 몰랐다. 하지만 이젠 로이드 덕분에 그도 자신이 앓는 불면증의 정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나이에 벌써 그 증후군을 앓고 있다니. 대단하군."
"제 주군의 보살핌이 깊고 컸던 덕분입니다."
"프론테라 남작 말인가?"
"예."
"그가 부럽군."
"원하신다면 그 말씀을 주군께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됐네."
백작은 손을 젓고 말았다.
"이런 꽉 막힌 친구 같으니. 자네가 그런 말을 전하면 남작이 기겁을 할 것일세. 나는 아랫사람의 신하를 탐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오해도 받기 싫네. 다만-"
백작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떠올랐다.
"이번 일이 어떤 형태로 마무리가 되든, 자네가 조금 바빠질 수도 있을 것 같네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국왕 전하 말일세."
백작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나는 이번 일을 전하께 보고드려야 하는 입장이네. 이 나라의 모든 땅은 전하의 은총 아래에 있으니 말일세. 그러니 당연하게도 자네 일행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겠지."
"...."
하비엘의 고개가 희미하게 끄덕여졌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나서서 기가티탄의 발을 묶었다.
그 뒤에 나선 로이드가 기가티탄을 끝장냈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마 전하께서 자네들에게 큰 흥미를 드러내실 걸세. 어쨌건, 지금 바랄 수 있는 것은 저 친구가 멀쩡하게 일어나는 일이겠지. 저런 친구가 이대로 눈을 감는 것은 전하도 바라지 않으실 일일 터이니."
"동감입니다."
"뭐, 어쨌건 내 잡설이 길었군. 난 이만 가보겠네. 내일 이 시간에 다른 의사를 데리고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자네도 힘들면 사람을 불러 알리게. 내 기사들도 저 친구를 잘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 친구 참, 딱딱하기는."
"감사합니다."
백작이 허허 웃었다.
마지막으로 병상의 로이드를 한 차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일별하고는 병실을 떠났다.
그렇게 병실에는 로이드와 하비엘만 남았다.
"하아."
그제야 누르고 있던 한숨이 흘러나온다.
애써 감추던 복잡한 눈길 병상에 던진다.
'로이드 님, 괜찮은 겁니까.'
병상에 잠들 듯 누워 있는 로이드.
그를 보는 하비엘의 푸른 눈동자가 심란해졌다.
문득,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열 번째의 의사가 다녀간 후였던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의사 또한 로이드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였던가.
보고 있자니 답답했다.
그래서였다.
로이드와 둘만 남은 시간.
남들 몰래 로이드의 상태를 살폈다.
의사들과 달리 마나를 사용한, 그만의 방법을 동원했다.
한데 그렇게 파악한 로이드의 상태는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트리플 써클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어.'
마나를 투입하여 진단하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세 개의 써클이 로이드의 심장을 감싸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더블 써클의 단계에 머물고 있던 로이드였는데, 자신이 기가티탄에게 쓰러진 사이에 트리플 써클을 생성해 버린 것이었다.
놀라운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세 개의 써클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어.'
상식을 넘어서는 속도였다.
아스라한 심법의 한계에 근접한 회전 속도였다.
덕분에 강력한 수준의 마나적 자기장이 심장을 통째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 때문에 써클 안쪽을 살펴볼 수 없었다. 심장의 상태를 엿볼 수도 없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방법조차 없었다.
기이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틀 전에 살펴본 기가티탄의 사체는... 더했어.'
아직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해안가 바위 절벽에 쓰러진 기가티탄의 거대한 사체.
그 사체를 살피는 조사단에 참여한 그였다.
덕분에 괴수의 몸에 새겨진 치명상을 똑똑히 보았다.
11번 배갑과 12번 배갑 사이.
로이드가 언급했던 기가티탄의 약점 부위.
그곳에 엄청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발파로 뚫은 흔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발파의 규모와 위력이... 내가 알던 것과 너무나 달랐어.'
상식을 뛰어넘는 규모였다.
정신 나간 수준의 위력이었다.
횃불과 촛불.
포탄과 구슬.
저 발파와 자신의 것을 비교하면 그 정도 차이는 족히 날 듯했다.
살펴볼수록 경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저 정신 나간 수준의 발파를 쓴 사람이 로이드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대체 어떻게....'
아마도 저 엄청난 수준의 발파와 로이드의 지금 상태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세한 내막은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겁니까, 로이드 님.'
하비엘은 깊은 의문과 걱정이 담긴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병상에 누운 로이드는 대답이 없었다. 쌔근쌔근 내쉬는 숨소리만이 그가 돌려주는 반응의 전부였다.
하비엘이 바라보는 가운데, 고요한 병실에 드리우는 겨울 햇볕만이 말없이 기울어 갔다.
물론 하비엘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
로이드의 내면에서 전무후무한 기적 같은 기연이 싹을 틔우고 있음을.
♣
두근. 두근.
로이드의 심장이 뛰었다.
아니, 마나가 뛰었다.
그의 심장은 멈춘 채였다.
당연했다.
며칠 전, 그의 심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써클의 보호 없이 발파의 충돌에 노출되었다.
심지어 평범한 발파도 아닌, 세 개의 써클이 충돌한 발파였다.
맹렬한 충돌의 힘이 심장을 그대로 타격했다.
만약 하비엘이나 다른 기사였다면 그 순간 반드시 절명했을 엄청난 데미지였다.
그러나 로이드는 달랐다.
그는 죽지 않았다.
심장이 터지지 않았다.
심장에 깃든 마나하트가 폭발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에게 마나하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근, 두근....
아직껏 마나하트를 만들지 못한 로이드였다.
처음 노이만 경과 결투를 준비할 때부터 그랬다.
그에겐 마나하트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나하트를 만들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마나하트는 아무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성 자체에 엄청나게 긴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어야 했다.
세기의 천재라 해도 최소 6개월.
수재라 불리는 이라도 2년 남짓 걸리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빨라야 5년 내외.
자질이 부족한 경우엔 10년 이상 걸리기도 했다.
당연히 로이드는 천재나 수재가 아니었다.
그저 노이만 경과의 결투를 치르기 위해 속성으로 아스라한 연공법을 익힌 사람일 뿐이었다.
아스라한 연공법을 익힌 후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굳이 마나하트를 만드는 일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겐 마나하트가 없었다.
거창하게 심장을 둘러싼 마나 써클의 화려한 면면과 달리, 그의 심장 내부는 그저 평범한 일반인과 똑같은 상태였다.
그 사실이 그를 살렸다.
마나 써클이 일으킨 충돌에서 그의 목숨을 지켜주었다.
두쿵... 두쿵....
애초에 인간의 몸에서 마나하트는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이 더 큰 힘을 내기 위해, 인위적인 훈련을 통해 자연적인 양을 훨씬 초과하는 마나를 심장에 욱여넣고 모아놓은 것이 마나하트의 본질이자 정체였다.
한데 로이드에겐 그게 없었다.
즉, 마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심장은 거의 빈 공간이었다.
터질 마나하트가 없었다.
대신 빈 공간만 있었다.
오히려 발파의 충격이 빈 공간을 채웠다.
폭발적인 힘이 공간을 채우며 응축되었다.
응축되며 특이한 성질의 코어, 핵을 생성했다.
핵을 중심으로 마나의 폭풍이 재구성되고, 심장 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두쿠웅...! 쿠웅!
맹렬히 회전하는 세 개의 써클 내부에서, 전무후무한 형태의 새로운 마나하트가 탄생하고 있었다.
♣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교역 도시 크레모는 한결 정돈되었다.
재난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두가 노력했다.
파괴된 중앙 광장의 보수가 끝났다.
무너지고 부서진 건물과 종탑도 대강이나마 수습이 되었다.
폭파된 23번 초소는 다시 쌓아 올려졌으며, 다친 이들도 대부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동안 도시에 여러 소문이 떠돌았다.
어떤 소문은 기가티탄의 습격에 부서진 범선, 그렇게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낸 사람이 있노라 했다. 또 어떤 소문은 한 사람이 소환수를 부려 광장 인근에 번지던 화재를 진압했노라 했다.
그리고 어떤 소문은 한 남자가 기가티탄에 맞서 싸웠노라 했다. 또 다른 어느 소문은 그 남자가 싸움의 끝에 기가티탄을 격퇴했고, 그 결과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고도 했다.
그렇듯 많은 소문이 퍼져갔다.
퍼지며 하나씩 퍼즐처럼 맞춰졌다.
자연히 진실이 차례차례 밝혀졌다.
바다에 빠진 이들을 건져준 사람과 화재를 진압한 사람이 동일인이었다. 화재를 진압한 사람과 기가티탄에 맞서 싸운 이가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기가티탄을 죽이고,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비로소 모두는 알았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가 해낸 일이었다.
그 덕분에 모두가 무사했다.
그걸 알게 된 날부터였다.
하나둘, 도시의 광장에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염원도 하나였다.
"이 추운 날씨에 왜 모였냐구요? 당연하죠. 절 구해준 로이드 프론테라. 그 사람이 살아나길 원하니까요."
그리하여 모였다.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서운 바람보다, 로이드의 회복을 기원하는 시민들의 바람이 더욱 크고 뜨거웠다.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노래했다.
그것이 도시를 위해 희생한 로이드를 위한 보답이라 여겼다.
그렇게 다시 열흘이 지났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유독 차가워진 바람 불던 그날.
마침내 모두의 염원처럼, 로이드가 눈을 떴다.
[당신은 희생과 용기, 솔선수범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재난으로부터 구해냈습니다. 교역 도시 크레모의 시민들은 당신의 이러한 숭고한 행위에 깊은 감명을 받은 상태입니다.]
[이 커다란 사회적 업적에 따른 막대한 보너스가 지급됩니다.]
[보너스 상세 내역을 보시려면 '이곳'을 선택해주세요.]
[당신은 삼중 발파의 충격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특별한 경험을 통하여 당신은 유니크한 특성의 마나하트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나하트 스킬이 개화되었습니다.]
[스킬의 상세 내역을 보시려면 '이곳'을 선택해주세요.]
78화. 기적, 혹은 기연 (3)
여긴 어딜까.
난 또 왜 낯선 곳에 이렇게 누워 있나.
"...."
로이드는 눈을 끔벅거렸다.
얼마나 오래 눈을 감고 있었던 걸까.
눈꺼풀이 뻑뻑했다.
목과 허리도 뻐근했다.
그는 생각했다.
'아, 그냥 새 몸으로 빙의 되면 좋겠다. 완전 레알 핵금수저 다이아수저 몸에 파팟 하고 들어온 거면 진짜 진심 좋겠다.'
물론 지금 이 상황은 그게 아니다.
그건 로이드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주르륵 떠올라 있는 메시지.
그 내용을 읽으며 그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대략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희생과 용기, 솔선수범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재난으로부터 구해냈습니다. 교역 도시 크레모의 시민들은 당신의 이러한 숭고한 업적에 깊은 감명을 받은 상태입니다.]
[이 커다란 사회적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1,00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046]
'내가 뭐? 희생과 용기에 솔선수범? 수많은 사람을 재난으로부터 구해? 허허.'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로이드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솔선수범이라니.
용기와 희생이라니.
그런 건 사양이다.
부탁해도 딱 질색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만행(?)을 저질렀단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교역 도시의 시민들이 당신을 '크레모의 수호자'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인 투철한 용기와 기지, 희생정신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교역 도시입니다. 수많은 상인, 방문객들이 이곳 시민들의 입을 통해 당신의 업적을 접하고,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미담이 상인들의 입소문을 타고 왕국 곳곳으로 퍼지게 됩니다.]
[당신의 영웅적 미담에 영감을 받은 다수의 예술가들이 이 이야기를 다양한 작품으로 창작하게 될 것입니다.]
[한동안 당신의 업적을 담은 노래와 연극, 미술품이 유행처럼 번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국가적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이름과 업적이 왕국의 역사서에 한 줄 정도 짤막하게나마 새겨집니다.]
[사회적 명성 상승으로 보너스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50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546]
'헐.'
완전 노났네, 노났어.
쉴 틈도 없이 주르륵 올라가는 메시지의 홍수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동시에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기가티탄을 잡은 거구나, 내가.'
대적할 엄두도 안 나던 괴물.
그냥 답도 없던 괴수.
그래서 놈이 설치는 동안 짱박혀 있으려고 했던 자신.
한데 그랬던 자신이 그 기가티탄을 잡았다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사실인 듯했다.
문득,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기가티탄.
약점 공략.
발파 사용을 준비했던 자신.
그 순간 갑자기 날아온 돌무더기의 폭격.
'그리고 머리를 맞았지.'
지금도 당시의 감각이 생생했다.
뭔가가 뻑, 하고 머리를 때려 왔던가.
세상이 확 느리게 변했던 기억이 났다.
기절, 아니, 혼절하는 과정이었다.
그 속에서 자신은....
'발파를 썼어. 그것도 엄청 무식하게.'
2대 3.
발파에 쓰이는 마나 써클의 이상적인 회전 비율.
정신을 잃던 와중에 오직 그 비율만 집요하게 되뇌었다.
그래서 미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심장을 보호하지 않았어.'
보호에 사용할 써클까지 모조리 발파에 동원했다.
그렇게 3개의 써클을 몽땅 충돌시켜 버렸다.
그 순간 전신을 뒤흔들던 압도적인 충격.
그 충격이 자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나, 살았네.'
죽지 않았다.
멀쩡히 살아 있었다.
심장도 잘만 뛰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힘찬 활력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로이드는 얼떨떨해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아까부터 떠올라 있는 메시지를 살폈다.
그곳에 지금 상황이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마나하트 스킬이 개화됐다고?'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나하트.
자신에겐 아직 없던 것이다.
아니, 앞으로도 없을 줄 알았다.
'수련하는 게 너무 힘들고 오래 걸리지. 정말 빨라야 최소 5년은 걸릴 텐데. 그래서 마나하트 수련 자체를 아예 접었는데.'
사실이었다.
매일 집요하고도 꾸준한 수련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접었다.
그 수련에 매달릴 시간에 토목 공사 하나라도 치르는 게 이득일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마나하트를 대체할 마나써클을 지니게 됐기도 했고.'
덕분에 어지간한 기사에 맞먹는 힘을 갖추게 됐다.
곁에는 하비엘도 있었다.
그러니 검술 때문에 아쉬운 일은 없을 거라고, 어디 가서 눈먼 칼에 맞아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타협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런데 그 마나하트가 생겨 버린 건가.'
마치 생각지도 못했던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는 선물 상자를 열어보듯 스킬 상세 내용을 살펴보았다.
딩동.
[스킬 정보를 열람합니다.]
[스킬명 : 마나하트]
[단계 : 마나 유저 Lv. 1]
[인위적인 기법을 통해 심장 내부에 고밀도의 마나를 저장합니다. 저장된 마나는 자유롭게 꺼내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체 능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며, 레벨이 오를수록 마나의 저장량과 효율이 늘어납니다.]
[신체 능력 향상률 : 150%]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50]
[현재 보유 중인 RP : 1,546]
'헐. 미쳤다. 미쳤어.'
로이드는 혀를 내둘렀다.
진짜로 제대로 된 마나하트였다.
내심 만들고는 싶었지만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필요해서 포기했었는데.
그게 정말로 스킬이 되어 떡하니 생겨나 있었다.
실제로 심장이 뛰는 느낌도 조금 달라졌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뛸 때마다 내부에 모인 마나의 덩어리가 느껴졌다.
크기는 자두만 했다.
하지만 힘은 승용차 4기통 엔진 같았다.
마치 심장에 엔진 하나를 통째로 장착한 것처럼 힘이 넘쳤다.
게다가 그 힘이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팔다리로 자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정말로 마나 유저가 됐네.'
일반인을 벗어나는 기준점인 마나 유저.
여기에 트리플 써클과 이 힘이 연계된다면?
어지간한 소드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힘을 발휘할 것 같았다.
잘만 하면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와도 간신히 비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선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니, 진짜가 따로 남아 있었다.
딩동.
[당신이 지닌 마나하트는 일반적 트레이닝이 아닌, 발파의 충격에 의해 생성되었습니다.]
[이 특별한 생성 히스토리가 당신의 마나하트에 유니크한 특성을 부여합니다.]
[새로운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① : 충격 상쇄 - 당신의 마나하트는 특정한 보호 없이도 마나써클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에서의 충격을 자체적으로 상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발파로부터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이 옵션은 발파를 사용할 때 써클 하나를 동원하여 심장을 보호해야 하는 제한을 극복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미친.'
읽다 보니 눈이 휘둥그레.
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는 옵션까지 생겼다.
로이드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정리 좀 해보자. 그러니까, 마나하트가 스킬로 생성됐으니까 RP만 투자하면 소드 익스퍼트나 그 이상으로도 올라갈 수 있다는 거고. 그 와중에 유용한 옵션이 생길 수도 있게 된 거고. 거기다가 발파의 충격에서 자유로워진다는 핵쩌는 옵션까지 기본으로 장착됐단 거네.'
한마디로 대박.
아니, 초대박.
발파를 쓸 때 심장을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즉,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에 기가티탄을 상대로 벌였던 써클의 3중 충돌을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마도 기가티탄을 쓰러뜨린 건 그 3중 충돌로 만든 발파 덕분이었겠지. 그럼 발파의 위력도 충돌 횟수에 따라 제곱으로 늘어나는 건가. 만일 그런 거라면 그 위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로이드는 열심히 계산에 몰두했다.
한데 그때였다.
눈앞에 가득 떠오른 메시지.
그 사이로 익숙한 모습이 스윽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설마 살아나신 겁니까."
"...."
하비엘이었다.
여전히 무신경한 눈초리로.
항상 그랬듯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언제나와 똑같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이쪽을 향해 물었다.
"혹시 또 혼수상태에 빠질 예정은 없으신지."
"...넌 내가 그러길 바라냐."
"으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녀석이 고개를 한쪽으로 골똘히 기울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
"혼수상태에 빠져 계신 동안 무척 편했거든요."
"편했다고?"
"예."
하비엘의 태연한 대꾸가 이어졌다.
"그저 잠든 로이드 님의 곁을 지키고 있기만 하면 됐으니까 말입니다. 발파로 땅을 뚫거나 바위를 쪼개지 않아도 됐고. 망치로 말뚝을 박아넣지 않아도 됐고. 그밖에 지긋지긋한 삽질을 할 필요도 없었고."
"하. 꿀 빨고 있으셨다?"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눈을 떠서 서운하시다?"
"예."
"헐. 부정하지도 않아."
"윗사람이 지나치게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랫사람은 피곤해지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치켜들고 있는 그 오른손의 의미는?"
"...."
"설마 그걸로 나 기절시키려는 건 아니지? 막, 잠들어라 뿅, 하면서 퍽, 하고."
"...."
"지적받고 나니까 주먹 슬며시 펴는 것 좀 보소."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어찌 그런 짓을."
하비엘 녀석이 손을 뻗어왔다.
이쪽의 뒷목과 등을 든든히 받쳐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너무 오래 누워 있다가 일어난 탓일까.
"으윽."
살짝 현기증이 났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밉살맞은 말과는 달리 이쪽을 보며 미소 짓는 하비엘의 얼굴을 보니 더욱 그랬다.
"다행입니다, 로이드 님."
"그러게. 참 다행이다. 다시 널 괴롭힐 수 있게 돼서."
"네, 다시금 다행입니다. 로이드 님의 솔로 기간이 연장될 수 있어서 말입니다."
"맞아. 역시나 다행이야. 이렇게 기어오르는 네 행동을 남작님께 일러바칠 수 있을 거 같아서."
"설마, 진심이십니까?"
"너 하는 거 봐서."
"안 하시겠다는 뜻이군요."
"헐. 단정하는 것 보게."
"맞지 않습니까?"
"맞길 빌어야 할 거다. 가능하다면 매일 밤 물이라도 떠놓고."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자신도, 녀석도 무사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그러자 짐짓 얼굴을 쌀쌀맞게 굳히는 하비엘.
그 모습에 다시금 웃음이 나왔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모든 일이 무사히 지나갔다.
이제는 마음 편히 보상을 즐길 때였다.
♣
보상은 생각보다 집요했고, 파격적이었으며, 전격적이었다.
자신이 깨어났다는 소식.
그게 알려지자마자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가장 먼저 병실로 달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크레모 백작이었다.
"자네, 내 사위가 될 생각은 없나?"
"...예?"
백작은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대뜸 생각지도 못한 구혼(?)의 대사부터 내밀었다.
이쪽의 쾌유를 기원하는 거창한 꽃다발과 함께였다.
"저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씀이긴. 다시 말할까?"
"...."
"내 사위가 되게나."
"...."
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엔 저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싶었다.
한데 눈빛과 목소리를 보니 결코 농담도, 장난도 아니었다.
만약 이쪽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당장 이 자리에 외동딸을 불러서 식을 거행시킬 듯한 기세였다.
그래서 로이드는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어째서?"
"백작님의 호의와 제안은 정말로 감사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일이지만?"
"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실이다.
뜬금없는 혼인이라니.
그것도 백작가 외동딸과 혼인이라니.
겉으로 보기엔 굉장한 기회라고 여겨질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지금 시점에서 결혼이라니. 최악이지. 잘나가는 처가에 격식 맞춰주느라 돈 나가지, 결혼식 치르느라 또 돈 나가고, 애 생기면 기저귀에 분유에 교육비에 또 돈 깨지지, 그래가지고 영지의 빚은 언제 갚겠냐고.'
물론 그 빚을 백작가에서 갚아줄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새로운 무형의 빚이 생기는 것일 뿐.
로이드는 그렇게 백작가에 코가 꿰이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표는 사채꾼들에게 진 빚을 갚고 자유롭고 유유자적하게 꿀을 빠는 것. 그렇게 소소하고도 평화롭게, 부족함 없이 오순도순 무난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기엔 백작가라는 큰물로 뛰어드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터였다.
로이드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쯧. 그러한가."
"예. 백작님의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기왕이면 마음 말고 제안도 받아주지 그러나."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크레모 백작이 못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 뒤로도 제법 많은 이들이 병실을 찾아왔다.
도시의 유서 깊은 상인 가문.
조선업을 기반으로 둔 거부.
사설 호위함 서비스로 돈방석에 앉은 집안까지.
모두가 이 도시에서 제법 영향력을 지닌 유력자들이었다. 그들이 병실까지 찾아와서 하나같이 똑같은 소리를 해댔다.
"자네, 우리 가문과 좋은 인연을 맺어볼 생각이 없는가?"
문병을 빙자한 혼담 제의가 줄을 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백작의 혼담도 거절한 그였다.
그들의 혼담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대신 좋은 말로 거절을 하며 그들과의 인연 정도만 챙겨두었다.
"후아. 이번에도 역시나 또 구혼이었어. 이거, 졸지에 도시 최고의 핫가이가 된 기분인데."
어째 매일 병문안을 오는 사람들의 목적이 저리도 다 똑같은지.
그래도 그만큼 이쪽의 주가가 올라갔다는 뜻이리라. 도시에서 최고의 신랑감 대접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그 생각을 하자 괜히 기분이 좋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상상 속에서도 불가능할 듯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를 간병하던 하비엘도 피식 웃었다.
"핫가이라. 축하드립니다."
"...쓰읍. 어째 비웃는 것 같다?"
"절대로 아닙니다."
"아니야?"
"예."
"그럼 그건 뭐냐."
"예?"
"손에 들고 있는 편지 봉투 꾸러미."
"아."
"설마 그거?"
"예, 맞습니다."
"진짜로?"
"예."
"나 누워 있는 동안 새로 받은 고백 편지?"
"예."
"...."
"몇 통인지 세어볼까요?"
"아니, 하지 마."
"다섯... 일곱... 열하나... 스물...."
"하지 말라고."
"서른아홉 통이군요."
"젠장."
"그러고 보니 로이드 님이 받은 혼담이 열두 군데였지요, 아마?"
"...."
"훗."
"...."
역시 존잘러에겐 함부로 덤비는 게 아니다. 로이드는 그 사실을 통감하며 치를 떨었다.
그때였다.
똑똑똑.
"병문안을 온 분이 계십니다.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백작가 하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로이드는 또 얼굴도 모르는 유력자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다른 사람들처럼 병문안을 빙자한 혼담을 제의하러 온 거겠지. 그렇게 여기며 병실 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이 녀석!"
갑작스레 날아오는 호통.
불쑥 다가와 버리는 걸음.
대비할 틈도 없이 와락 끌어당기는 손길.
"이 녀석, 이 아비가 뭐랬더냐.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그렇게도 당부하였거늘."
와락!
"...어?"
로이드는 눈을 부릅떴다.
이곳까지 올 거라는 예상은 하지도 못했던 프론테라 남작과 부인. 울먹이는 두 사람이 이 병실에서, 어느새 자신을 뜨겁게 끌어안고 있었다.
79화. 명성을 떨치다 (1)
"이 녀석, 이 아비가 뭐랬더냐.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그렇게도 당부하였거늘."
"...어?"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일까.
여긴 프론테라 남작령이 아닌데.
교역도시 크레모의 백작가 저택에 마련된 병실인데.
그런데....
'왜 남작 부부가 여기서 나와?'
로이드는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작 부부가 이쪽을 보며 울 듯이 웃고 있었다.
뭐라고 질문을 던져볼 틈도 없었다.
남작의 손이 양쪽 볼을 다급하고도 우악스럽게 쥐어 왔다.
"어디 보자. 다친 곳은 없느냐?"
"어, 그, 저...."
"말해 보거라. 어디 불편하진 않고?"
"그, 어, 음, 딱히 불편한 곳이 없긴 한데-"
"한데?"
"하도 두 손으로 볼을 찌그러뜨리고 계시니까 숨을 쉬기가 좀 힘들긴 하네요."
"...앗, 아아."
그제야 남작이 움찔하며 두 손을 풀었다.
부인에게 핀잔을 들은 것은 물론이었다.
"아픈 애를 두고 당신이 먼저 흥분하면 어떡하나요? 그러다 더 다치면 어쩌려구요."
"으음, 그게, 마음이 급하다 보니.... 그나저나 괜찮으냐?"
"아, 네. 괜찮습니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남편을 타박하면서도 이쪽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살피고 있는 남작부인. 그런 부인에게 핀잔을 받아 버벅대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쪽에게 질문을 던지는 회피력(?)을 발휘하는 남작.
둘의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행색이 그리 좋지 못한 걸 보며 마음이 아려왔다.
'아마도 밤낮을 거르지 않고 다급하게 여기까지 온 탓이겠지.'
평소 항상 깔끔한 옷차림을 유지하던 남작 부부였다.
한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부부가 걸친 여행복 곳곳엔 얼룩이 가득했다.
팔꿈치와 무릎 곳곳엔 흙자국도 남았다.
프론테라 남작령에서 이곳 크레모까지. 두 사람이 얼마나 다급하게 일정을 재촉하며 왔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크레모에 도착하자마자 옷 갈아입는 것마저 생략하고 곧바로 병실로 달려온 것이리라.
"혹시 백작님께 연락을 받으신 겁니까?"
로이드가 짐작되는 바를 물었다.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백작님께서 전서구를 보내주셨단다."
"뭐라고 연락을 보내셨나요."
"네가 위중하다고 하시더구나."
"크헐."
"그리고 네가 벌였던 일들을 간략하게 알려주기도 하셨다. 그래서였지."
"그날 바로 출발했단다."
남작의 뒷말은 부인이 이어받았다.
부부의 말 그대로였다.
약 열흘 전, 부부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로이드의 당부대로 온돌방 시공의 마무리, 그리고 자작령에 공급하는 상수도의 관리 상태를 점검했다. 한편으로는 로이드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기도 했다.
뜻밖의 전서구가 날아온 것은 오후의 일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로이드가 위중하다고 했다.
그 앞뒤의 말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가티탄이 크레모를 습격했니 마니, 그런 기가티탄에게 로이드가 용감히 맞섰느니 어쩌니, 아드님의 용기와 희생정신이 만인의 귀감이 될 것이고 저쩌고....
그런 미사여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로이드가 위중하다는 것.
서신의 말미에 크레모 백작의 마법 인장이 박혀 있다는 것.
두 가지 사실만이 머릿속에 메아리치며 하나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로이드가 정말로 위중하다는 것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곧바로 여장을 꾸렸다.
마차?
그런 것에 의지했다간 자칫 겨울철 눈밭과 빙판에 바퀴가 탈이 나서 발이 묶일 수도 있었다.
호위병?
많이 데려가 봤자 준비할 식량만 많아지고 출발과 이동 속도 모두 느려지게 될 터였다.
그래서 부부는 직접 말을 탔다.
호위도 딱 한 명, 바이에른 경만을 대동했다.
낮엔 온종일 달렸다. 밤마저 낮처럼 여기며 횃불과 달빛에 의지해 발길을 재촉했다. 부부와 바이에른 경을 태운 말들마저 녹초가 될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힘든 줄도 몰랐다.
잠마저 아껴가며 더욱 서둘렀다.
식사도 말 등에서 해결했다.
그렇게 불과 아흐레 만에 이곳, 크레모에 도착했다.
도착하고도 옷매무새를 정리할 정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대강 떡진 머리칼만 허겁지겁 정리하며 백작가 저택으로 달려왔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자신들이 이곳 크레모까지 오는 사이에 로이드가 눈을 떴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모른단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여기 네 엄마는 다리가 풀려 쓰러질 뻔하기도 했지."
"아이 참, 당신도."
"왜 그러오? 사실인데."
"그런 말 하면 애가 부담스러워하잖아요."
"...."
"아픈 애 앞에서 못 하는 말씀이 없으세요."
"커흠, 흠."
"그나저나 넌 인형 잘 챙겼니?"
"네?"
인형이라니. 그게 무슨?
부부가 이곳까지 온 이야기를 잘 듣던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남작부인의 말을 듣고서야 그녀가 언급한 인형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네가 출발할 때 이 어미가 준 부적 말이다."
"아."
기억났다.
밤마다 끌어안고 자면 악몽을 막아줄 거라던 그 부담스러운 핑크색 인형.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인형이라면 으음, 여관에 있을 겁니다."
"여관에?"
"네."
로이드가 얼른 대답을 보충했다.
"난리가 벌어지기 전엔 여관에 묵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여기엔 안 가져온 거니?"
"네."
"그럼 설마 그 전에도 사용을 안 한 거니?"
"그야 물론...."
당연하지요.
그걸 안고 자면 오히려 핑크색 곰인형이 나오는 악몽을 꿀 것 같았습니다만.
로이드는 뒷말을 삼켰다.
해선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남작부인이 애석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런. 인형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구나."
"으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네, 조금은."
"그럼 더 큰 걸로 만들어주마."
"...네?"
저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쩐지 쎄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 예감은 안타깝게도 현실이 되고 말았다.
남작부인의 맡겨두라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였다.
"부적으로 쓰라고 줬는데도 안 썼던 걸 보니 인형이 작아서 마음에 안 들었던 까닭이 아니겠니. 그러니 하는 얘기란다. 전보다 더 크게, 폭신폭신 끌어안기 편하도록 훨씬 크게 만들어주마."
"...."
"혹시 그래도 마음에 안 드니? 그럼 리본이라도...."
"아뇨, 괜찮습니다. 절대로요."
로이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절로 쓴웃음이 왕창 흘러나왔다.
솔직히 이런 관심과 애정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평소의 품위와 격식마저 잊고 이렇듯 정을 내비치는 남작 부부. 그들의 모습을 보니 문득,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는데.'
어린 시절, 당시의 아버지는 무척 바쁜 분이셨다.
항상 일에 매달려 계시느라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가끔 집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날엔 종일 주무시는 모습만 보였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 놀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아버지가 쉬셔야 한다고 타이르는 엄마 말을 잘 들었다.
한데 그러던 7살의 어느 날이었다.
집 앞에서 어린이용 킥보드를 타고 놀다가 넘어졌다. 넘어지는 와중에 이마를 바닥에 호되게 찧었다. 과장 좀 보태서 달걀 같은 혹이 났다.
울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휴일이라 주무시던 아버지가 깜짝 놀라 깨어나셨다.
황급히 병원에 데려다 주셨다.
병원서 돌아오는 길엔 경양식집에 들렀다.
그때 함께 먹은 돈가스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아버지와 나누었던 이야기들, 아버지의 걱정하시던 표정과 목소리, 지금도 생생했다.
일만 아시는 줄 알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지를 피부로 느낀 날이었다.
"후우."
로이드는 애써 크게 숨을 내쉬었다.
찡해지려는 코끝을 털어냈다.
그리고 남작부인을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 인형, 얼마나 크게 만들어 주실 생각이신가요."
"한 이만큼?"
남작부인이 활짝 미소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걸 본 로이드의 미소도 밝아졌다.
"네, 그 정도면 딱 좋겠네요."
"그렇지?"
"네. 그러니 기왕 만드시는 김에 하나 더 만들어주시죠?"
"하나 더?"
"네."
"설마 두 개나 안고 자려고?"
"그건 아니구요."
로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병상 옆에 서 있던 하비엘을 가리켰다.
"항상 절 호위하느라 애쓰는 아스라한 경도 하나 챙겨주고 싶어서 말입니다."
움찔!
차분한 표정으로 가족의 해후를 구경하던 하비엘의 어깨가 살짝 요동쳤다. '어머, 마음씨가 곱기도 하여라'라는 남작부인의 감탄에는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로이드의 미소가 물귀신처럼 사악해졌다.
기쁨은 혼자.
비극은 나누어서.
역시 흑역사는 혼자보단 둘이 함께 겪어야 수치심이 덜해지는 법이다.
♣
며칠이 더 지났다.
그동안 로이드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었다.
전신에 가득하던 타박상이 빠르게 아물었다.
혹사 때문에 찢어졌던 근육도 활력을 되찾았다.
남작 부부의 정성 가득한 간호와 보살핌.
그리고 트리플 써클과 마나하트의 영향 덕분이었다.
예전과는 회복력 자체가 엄청나게 차이가 났다.
그의 몸을 살펴본 의사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이제는 다 나으셨습니다. 당장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가셔도 될 몸입니다."
"그런가요. 그럼 제 심장은?"
"정상적으로 잘 뜁니다."
혼수상태에 빠졌던 때엔 멈춘 것처럼 보였던 심장.
그러나 이제는 정상적으로 멀쩡하게 뛰는 심장.
로이드는 그 이유를 하비엘에게만 살짝 알려주었다.
나머지 사람들에겐 시치미를 떼었다.
자신도 어쩐 영문인지 모르겠다고만 했다.
덕분에 그의 심장에 관한 일들은 사람들에게 여전한 미스터리로만 남게 되었다. 기가티탄을 잡은 비결도 모른다고, 사실은 자신이 한 일이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열심히 싸우다 기절하고 깨어났더니 상황이 이렇게 되어 있더라는 정도로만 얼버무렸다.
물론 의혹의 시선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본인도 모른다고 우기는데 어쩌겠는가.
몇 번쯤 철판을 깔고 나니 다들 기가티탄을 어떻게 잡았는지를 묻지 않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내가 기가티탄을 잡았다고 여기고들 있겠지. 다만, 그 비결을 밝히기 싫어한다는 정도로 느끼겠지. 그 정도가 딱 좋아.'
어차피 마나써클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한데 하비엘을 제외한 사람들은 마나써클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괜히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그리고 병상을 벗어났다.
백작가를 나섰다.
시가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마련된 연단으로 올라섰다.
연단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광장을 바라보았다.
"와아아아아아-!"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이루 셀 수도 없을 만큼 운집한 인파.
토박이 상인, 부두 하역꾼, 선원, 어부, 학자, 목수, 어린애까지. 모두가 교역도시 크레모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시민들이었다.
그들이 연단을 향해 환호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단 양쪽에서 경쾌하고도 웅장한 곡이 트럼펫으로 연주되었다. 광장 둘레를 따라 늘어선 건물 옥상에서는 잘게 자른 색종이가 뿌려졌다.
로이드의 가슴도 자연히 벅차올랐다.
'후아. 나 좀 쩌는 듯.'
대한민국 고시원 골방에서 매일 코피만 쏟던 김수호.
그랬던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한편으로는 좀 부담스럽고 긴장됐지만, 그보다는 뿌듯해지는 마음이 더 컸다.
어쩌다 보니 세워 버린 공적.
하지만 어쨌건 공적은 공적이다.
대접받는 김에 제대로 당당하게.
쑥스럽다며 빼지 말고 산뜻하게.
로이드는 다짐하며 옆을 보았다.
연단 옆의 크레모 백작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음성 확대 마법이 준비되었다는 뜻이었다.
로이드가 연단에 놓인 구슬을 집었다.
목청을 가다듬었다.
"크흠, 흠."
그 소리가 음성 확대 마법을 타고 광장 전체에 또렷하게 울렸다. 덕분에 환호하던 시민들의 소리가 조금은 잠잠해졌다.
이쪽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로이드는 소매에서 쪽지를 꺼냈다. 연설을 해달라는 백작의 요청 때문에 미리 작성해둔 연설문 쪽지였다.
'뭐, 내용이야 뻔하지. 재난이 일어났던 그날 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느라 애쓴 선원들이 영웅이다. 광장에서 무너진 건물에 깔린 이들을 구하려 비지땀을 흘린 경비대원과 시민들, 불길을 잡느라 위험을 무릅쓴 의용소방대원이야말로 진짜 영웅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 함께 뭉친 크레모의 시민 전체가 진정한 영웅이다, 대강 그런 식으로.'
쉰내 풀풀 나도록 뻔하디뻔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로이드는 고민했다.
원래는 무난하게 연설을 마치려고 했던 마음이 흔들렸다. 완전 구름처럼 운집한 군중을 보자 예정에 없던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선택했다.
결심했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지르는 심정으로 확성 마법 구슬을 입가로 가져왔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 세상엔 온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광장 구석까지 야무지게 번졌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로이드의 연설이 이어졌다.
"집 바닥 전체를 군고구마처럼 따끈따끈 데워줍니다. 벽난로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눈이 매워서 눈물 줄줄 흘리거나 연기 때문에 기침을 연발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불이 날까 걱정하며 한 사람씩 잠을 마다하고 밤새도록 벽난로 앞에 붙어 앉아서 불을 살피지 않아도 됩니다."
뭔 소리인지 뜬금이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끌리는 이야기였다.
광장이 더욱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더욱 숨죽여 귀를 열었다.
그렇게 열린 사람들의 달팽이관으로 로이드의 침도 바르지 않은 사기성 멘트가 쏙쏙 알차게 스며들었다.
"네. 그거, 제가 만들어드리는 겁니다. 오늘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크레모 동쪽에 자리한 프론테라 남작령으로 문의를 부탁드립니다. 언제든 성심껏 답하고 시공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감사합니다."
너무 구구절절하지 않게.
딱 호기심이 생길 정도로만 감질나게.
그리하여 나중엔 온돌 시공 주문이 쇄도하도록.
연설, 아니, 온돌 광고를 마친 로이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연단에서 빠르게 내려왔다.
여전히 멍한 표정의 시민들.
그리고 헛웃음을 짓는 백작.
그 모두의 반응 앞에 철판을 둘렀다.
오히려 크레모 백작에게 다가가 태연하게 인사까지 올렸다.
"도시를 떠나기 전에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은 말없이 쓴웃음만 지었다.
그도 최근 정보망을 통해 온돌의 존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연설 자리에서 그 온돌을 광고하는 놈이었을 줄이야.
'이거, 더 탐나는 친구로구만.'
대담한 것은 둘째치고 보통내기가 아니다.
적당할 때는 적당하게.
과감할 때는 더 과감하게.
적절히 치고 빠지며 자신의 이득을 밀어붙일 줄 아는 놈이구나 싶었다.
'게다가 실제로 능력 또한 출중하고.'
기가티탄을 어떻게 잡은 건지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확실하게 확인된 사실이 있었다.
공사를 치러내는 능력만은 자신이 본 어떤 건설자보다 빼어나다는 것이었다.
'그건 기가티탄의 습격에서도 멀쩡한 저 해상 인공 토대가 말해주고 있으니까.'
백작의 시선이 항구 앞바다를 향했다.
그곳에 남겨진 인공지반을 눈에 담았다.
기가티탄의 습격에 완전히 박살 난 인어 동상.
그 난리를 겪고도 철근과 시멘트로 만든 지반은 한쪽 면만 살짝 뭉개졌을 뿐, 거의 멀쩡했다. 바로 새 동상을 세워도 무방할 정도였다.
'확실히 시골구석에서 썩을 인재가 아니야.'
로이드를 향한 백작의 눈빛이 남몰래 번득였다.
그런 백작의 눈빛은 연설을 마친 로이드 일행이 도시를 떠날 때까지도 여전했다.
"부디 잘 가게. 다음에 또 보기를."
로이드 일행을 직접 배웅한 백작은 곧바로 저택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로이드 프론테라의 능력과 업적을 상세히 고하는 크레모 백작의 보고서가 전서구의 발목에 실려 왕국의 수도, 왕성을 향해 날아갔다.
80화. 명성을 떨치다 (2)
보름이 지났다.
로이드 일행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새해를 맞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눈이 내리지 않았다.
덕분에 일행의 걸음은 가벼웠다.
로이드와 남작 부부, 하비엘, 바이에른 경, 거기에 함께 크레모로 왔던 병사들까지. 모처럼 아무런 사건 없는 평화롭고도 한적한 여정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15일의 여정 끝에 일행은 프론테라 남작령에 돌아왔다.
동시에 로이드의 휴가도 끝났다.
'집에 왔으니까 일해야지!'
영지로 돌아온 반가움과 포근함?
로이드에겐 그런 것 따위, 없었다.
할 일이 많았다.
그야말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온돌 보급도 마무리해야지. 겨울철 냉기에 상수도관 얼어서 막히진 않는지도 점검해야지. 게다가 이제 슬슬 초겨울부터 온돌 팡팡 땠던 사람들 비축한 장작도 다 떨어져 갈 테니까 역청탄 팔아먹을 준비도 해야지.'
그래야 돈을 번다.
돈을 벌어야 가문의 빚을 갚는다.
빚을 갚아야 이 영지에 마음 편히 빨대를 꽂는다.
그래야 평생 적당히 평온하고 안락한 이곳에서 꿀 빠는 여생을 보낼 수 있으리라.
그러한 원대한(?) 포부를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로이드는 여장을 풀자마자 남작가 행정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로이드 님."
"응, 불렀어. 부탁 좀 하려고."
"어떤 부탁이신지."
"샤일로와 미트로프, 연락되지?"
샤일로와 미트로프.
홀쭉이와 뚱뚱이.
바로 남작가에 거금을 빌려주고 고리대로 이자놀이를 하는 두 사채꾼이었다.
행정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됩니다."
"그럼 당장 연락 보내줘. 좀 만나자고."
"그 외에 전하실 다른 용건은 없으신지?"
"없어. 그 정도만 전해도 충분할 거야."
"알겠습니다."
행정관이 물러났다.
로이드의 지시대로 샤일로와 미트로프에게 사람을 보냈다.
과연 그날 오후, 두 사채꾼이 남작가를 방문했다.
한데 그들의 태도가 예전과 조금 달랐다.
"하하하, 안녕하십니까?"
"큼큼! 그간 별일 없으셨지요?"
샤일로와 미트로프는 전에 없이 깍듯한 태도로 예의를 지켰다. 심지어 두 손에는 각자 선물용 꽃바구니와 와인까지 바리바리 챙겨왔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모습.
남작 앞에서도 안하무인이던 거만한 표정 따윈 이젠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죽기 싫을 테니까.'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이미 지난번 방문 때 오크 전사 아로쉬의 위협을 코앞에서 겪었던 두 사람이다. 프론테라 남작과 강철모래 오크 부족이 혈맹임도 잘 아는 그들이다.
오크에게 있어서 혈맹은 소중한 친구.
친구의 적은 곧 나의 적.
적은 척살하는 것이 원칙.
그렇게 남작가의 적이 되고 싶지 않기에 몸을 사리는 것이리라.
로이드는 쓴웃음을 삼키며 그들을 맞았다.
마주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오랜만이군요. 실은 알려드릴 희소식이 있어서 두 분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희소식이라니요?"
"제가 최근에 목돈이 좀 생겼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샤일로와 미트로프.
아직 이 지방까지 크레모에서의 일이 퍼지지 않은 모양이다.
로이드가 둘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덕분에 두 분께 신세 졌던 금액 일부를 상환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상환 말입니까?"
"예."
"그럼 얼마나...."
"대략 전체 채무의 절반쯤 될 것 같습니다."
"헉?"
두 사채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웠다. 믿기지 않았다.
프론테라 남작가가 짊어진 채무 금액.
그건 결코 만만한 금액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감당이 안 될 텐데. 어떻게?'
샤일로와 미트로프는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한편으로는 프론테라 남작이 자신들에게 사채를 빌려 쓰던 당시의 상황도 떠올렸다.
'그때의 프론테라 남작은 자신만만했지.'
자신들을 찾아온 남작.
이번에 땅을 사들일 계획이라 했던가.
한데 사들일 돈이 조금 모자라 보태려고 빌리는 것이라 했던가.
그래서 샤일로가 물었었다.
괜찮겠느냐고.
이자, 비싸다고.
그랬더니 남작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사들일 땅이 곧 천정부지로 값이 뛸 거라고 했다. 그러면 그 차익으로 이번에 빌려 가는 돈 정도는 금방 갚을 수 있을 거라고도 장담했다.
그리고 프론테라 남작은 망했다.
'땅을 알선해준 업자가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다지.'
사람을 풀어 알아본 결과, 사기꾼이 프론테라 남작의 투자금을 모조리 횡령하고는 잠적했다고 했다. 심지어 프론테라 남작이 투자했던 땅은 서류로만 존재하는 땅인 허위매물이었다.
완벽하게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프론테라 남작에게 온정을 베풀 두 사채꾼도 아니었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돈을 빌렸고,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니까.'
돈 앞에선 온정이고 뭐고 없다.
무조건 계약대로다.
그게 돈의 무서운 점이다.
두 사채꾼은 누구보다도 그 원칙에 충실했다.
계약을 고스란히 이행했다.
단기로 돈을 빌려간 대신 걸렸던 막대한 비율의 이자. 그걸 매일매일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이 원금에 덧붙였다.
이자가 붙으며 원금이 늘어났다.
원금이 늘어나며 이자가 또 불었다.
이자가 이자를 부르고, 불어난 원금이 거품처럼 늘었다.
그렇게 프론테라 남작이 이자조차 갚지 못하여 끙끙대는 사이, 어느새 전체 채무 금액이 처음의 원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불어났다.
하여 샤일로와 미트로프는 내심 생각했다.
저 돈은 평생 못 갚을 거라고.
남작의 능력으로는 감당이 안 될 거라고.
그러니 이자로 말려 죽여서 남작가 저택 등을 비롯한 유산이나 챙기자고.
'그게 우리 방식이니까. 그 정도만 챙겨도 처음 빌려준 원금보다 한참 남는 장사니까.'
기다렸다.
거미줄에 걸려 버둥대는 파리를 지켜보는 거미처럼. 온몸으로 퍼지는 독에 헐떡이는 생쥐를 바라보는 독사처럼.
남작이 말라 죽기를 기다렸다.
한데 아니었다.
말라 죽을 줄로만 알았던 남작가에서 뜻밖의 카드가 나왔다. 망나니였다던 장남이 어느 날부터 여러 일을 벌여대며 변화의 바람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 망나니 로이드 프론테라가 지금, 자신들을 향해 전체 채무의 절반을 한꺼번에 갚을 수 있게 됐노라는 선언을 날려오고 있었다.
"저기, 그게 사실입니까?"
하도 믿기지 않아서 샤일로가 물었다.
물론 로이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진짜 당연히 사실이었다.
전체 채무의 절반에 달하는 금액.
충분히 넉넉하게 마련했다.
아니, 심지어 절반의 채무를 해결하고도 약간의 여유가 남을 정도로 마련한 그였다.
'크레모 백작의 도움이 컸지.'
로이드가 흐뭇한 눈웃음을 지었다.
교역도시 크레모.
자신에게 핵이득을 안겨준 고마운 동네였다.
오크족에게서 얻어온 중고 보물을 백작에게 팔아치웠다.
그걸로 일단 제법 묵직한 목돈을 마련했다.
거기에 백작의 의뢰를 받았다.
해상 인공 지반 공사를 치렀다.
그 공사비를 당초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받아냈다.
크레모를 떠나오던 전날 밤, 백작과 성사시킨 딜(?) 덕분이었다.
'자네, 내일 남작령으로 돌아갈 생각인 건가?'
'그렇습니다.'
'아쉽군. 기가티탄을 막아준 자네의 공에 합당한 보답을 주지도 못했는데.'
'그럼 지금 보답해주시면 안 될까요.'
'혹시 보상으로 받고 싶은 게 있는가?'
'예. 돈입니다.'
'....'
'인공 지반 공사비, 두 배로 챙겨주시죠.'
'쓰읍. 1.5배로 합세.'
'공에 보답을 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1.6배.'
'하아. 기가티탄 잡느라 뼈 빠지게 싸웠는데.'
'후우. 1.7배. 더는 안 되네.'
'감사합니다.'
...라는 일련의 건설적이고도 조화로운 협상 과정을 거친 결과였다.
"전액 현금입니다. 물론 확인이 필요하시겠지요. 그럼 가시죠."
로이드가 일어났다.
여전히 얼떨떨한 두 사채꾼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프론테라 남작, 행정관과 함께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 금화와 금괴가 번쩍이고 있었다.
두 사채꾼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그렇게 남작가에 얹혀 있던 거액의 빚 절반을 해결했다.
앞으로의 이자 또한 절반으로 줄었음은 물론이었다.
'그건 이제 자작령에서 받는 수도세의 절반이 고스란히 순이익으로 쌓이게 될 거란 뜻이지.'
계산을 마친 로이드는 흡족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빚을 갚느라 다시 금고가 비었다.
물론 다시 채울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려면 게으름 피울 틈 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날부터 로이드는 다시 부지런한 매일을 보냈다.
"여기! 잡아!"
"옙!"
직접 연장 벨트를 허리에 찼다.
오랜만에 건설 현장에서 연장을 잡았다.
그동안 남작령에 꾸준히 보급했던 온돌 주택.
그 마지막 온돌을 만드는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그렇게 예전 첫 온돌 계약부터 이후에 추가로 따낸 공사 계약까지, 모든 계약을 완료하고 공사를 마무리한 순간이었다.
딩동.
[프론테라 영지의 온돌 주택 보급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한 지방에 새로운 난방 방식을 도입하여 보급하는 일에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주민들은 이 새롭고 간편한 난방 방식에 빠르게 적응하며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온돌 난방이 프론테라 지방의 고유한 주거 문화로 정착됩니다.]
[온돌 난방이 <프론테라식 난방법(Frontera floor heating system)>이라는 명칭으로 로라시아 대륙 건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유의미한 건설사적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40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946]
'와우.'
기분 좋은 메시지가 눈앞을 장식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업적 보상.
거기에 소소한 공사 대금까지.
이래저래 굴러들어온 반가운 이득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멈추지 않았다.
잠깐의 이득에 입이 찢어지지도, 안주하며 뒹굴지도 않았다.
오히려 밀린 일 처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가티탄 때문에 영지를 너무 오래 비웠어.'
할 일이 많았다.
역청탄 광산으로 향했다.
며칠간 광산을 들락거리며 안전 점검에 매달렸다.
그다음엔 마레즈 개간지의 임대주택 건설 상황을 체크했다.
당장 봄이 오면 계약을 맺은 이주민들이 들어와서 살게 될 집이었다.
'그러니 잘 지어줘야 해.'
계약을 맺은 이주민들.
그럭저럭 소박하나마 안정적으로 생활하던 소작농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랬던 이들이 나름의 큰 모험을 결심했다.
남의 땅을 안정적으로 일구기보다는 조금 부담되더라도 내 땅을. 그런 생각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이주를 결정한 이들이었다.
'고마운 사람들이야. 큰 위험을 감수해준 사람들이기도 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위험이란 그런 것이다.
월세로 살던 집을 옮긴다든가. 혹은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한다든가. 당장 생활비가 모자라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보험을 해지한다든가.
하나하나의 사소한 선택이 모두 나락 위에서의 아슬아슬한 모험이다. 비축된 자산이 없으니 한번 실패하면 만회할 기회가 없다.
아마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기분을 모를 터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기분을 직접 느껴보았다.
대한민국에서 하루하루를 고시원에서 살아가며, 그런 심정을 매 순간 느끼며 살아야 했다.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선택도 고민을 거듭하며 각오를 다진 뒤에야 실행할 수 있었다.
뒤가 없는 기분.
기회비용이 고스란히 생존의 문제로 이어지는 매일의 순간.
그걸 겪어봤기에 그는 이주민들이 어떤 각오로 개간지에 들어오는지도 너무나 잘 알았다.
'우선 그들이 안심하도록 해줘야지. 그래야 일에 몰두할 수 있을 테니까.'
최소한 집에 머무는 시간만은 편하게 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야 이주민들도 더욱 힘내서 땅을 개척할 것이다. 개간지 전체를 더욱 풍족하게 가꿀 수 있을 것이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아늑한 집.
그것이 개간지 정착의 시작이라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신경 써서 임대주택 건설을 점검했다.
그 뒤로도 일은 계속 이어졌다.
상수도가 얼지 않는지 꼼꼼히 살폈다.
비축된 석탄의 상태도 체크했다.
그렇듯 거의 20일을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그러고서야 쌓였던 일 대부분을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이드는 쉴 수 없었다.
"로, 로이드 님!"
석탄 체크를 마치고 창고에서 나오던 로이드였다.
그를 향해 행정관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저기, 지금 손님, 소,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
"예!"
"그런데 왜 그렇게 당황해?"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행정관은 노련한 사람이었다. 한데 그런 사람이 겨우 손님이 온 것 때문에 저토록 당황해서 횡설수설하고 있다니.
혹시 엄청나게 대단한 손님이라도 온 걸까.
로이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누가 왔길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건데. 게다가 중요한 손님이라면 나보다 남작님께 먼저 알려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
로이드가 까칠하게 물었다.
실은 이제 막 모든 일을 끝내고 좀 편히 쉬어보려던 참이었다. 한데 영주도 아닌 자신을 굳이 찾아와서 호들갑을 떨어대니, 솔직히 좀 귀찮았다.
그의 까칠해진 물음에 행정관이 버벅거렸다.
"그, 그게, 그게...."
"그게?"
"칙사가 왔습니다."
"칙사라니? 무슨?"
"왕도에서 행차한 국왕 전하의 칙사 말입니다."
"국왕 전하의?"
"예."
행정관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이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국왕 전하의 칙사가 로이드 님을 찾고 계신단 말입니다."
"뭐?"
국왕의 칙사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비로소 로이드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81화. 명성을 떨치다 (3)
"예부터 짐은 물론이고 선대의 많은 왕들께서는 귀족, 시민, 그 외 만백성의 평온과 안락을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뿐만 아니라 백성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짐의 책임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촤악!
칙서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펼쳐졌다.
칙사의 엄숙한 목소리가 귓구멍을 쏙쏙 파고들었다.
그래서 로이드는 가만히 생각했다.
'아 씨. 이러면 나가린데.'
칙사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은 로이드.
고개를 푹 숙이고 있기에 다행이었다.
칙사에게 복잡해진 표정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국왕의 칙령이라니. 이건 좀 양날의 검일 듯.'
그는 힐끗 옆을 돌아보았다.
남작이 나란히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예를 표하는 남작의 눈꺼풀과 속눈썹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벅차게 차오르는 영광스러움.
한없이 피어나는 기쁨과 행복.
마치 로또 1등 당첨용지를 받아들고서 은행 창구 앞에 앉아 있는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뭐,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이곳은 시골이었다.
동부 구석탱이에 처박힌 일개 남작령이었다.
큰 전쟁이 나서 국왕이 친정을 한다면 모를까. 혹은 역사에 남을 재난이 일어나서 직접 시찰을 온다면 모를까.
그런 일 외에는 국왕이 평생 발가락 하나 들여놓을 일 없을 깡촌이었다.
한데 이런 곳에 국왕의 칙사가 왔다.
국왕의 친필로 쓰인 칙령이 내려왔다.
'아마 두고두고 자랑할 가문의 영광이겠지. 남작의 입장에서는.'
귀족에게 이보다 더 큰 기쁨과 영광이 어디 있을까.
로이드의 표정이 남몰래 조금 더 복잡해졌다.
'뭐, 영광은 영광이긴 하지. 잘 이용할 때만 유용할 영광.'
칙사가 국왕의 칙령을 전하러 왔다.
그것만으로도 대략적인 상황이 그려졌다.
'아마 크레모에서 벌인 일 때문이겠지.'
백작에게서 공사를 따냈다.
해상 인공 지반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그 후엔 도시를 습격한 기가티탄을 처치했다.
아마도 그 활약이 국왕의 귀에 들어간 덕분이리라.
그래서 그 공을 치하하고 상을 주려는 것이리라.
'기분은 좋긴 한데. 쓰읍. 좀 부담스럽네. 이래서 기가티탄과 싸우기 싫었다니깐.'
로이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사실이었다.
그냥 딱 공사까지만 성공적으로 마치고 오는 게 제일 좋았을 터였다.
그렇게 공사대금을 챙기고, 그 인연으로 크레모 백작을 통해 큰 도시의 유력자들에게서 여러 공사를 따낸다. 그렇게 적당히 시공자로 이름값을 높이며 짭짤한 수익을 거둔다.
그게 로이드가 그렸던 그림이었다.
또한, 거기까지만 그리려 했다.
'그 정도까지였어야 했어. 거기까지가 딱 좋았어. 그렇게 몇 년만 열심히 공사 치르면 사채꾼들한테 진 빚, 충분히 갚을 거라고 봤으니까.'
그의 계산상으론 그랬다.
이미 빚을 절반이나 갚은 터였다.
덕분에 이자가 예전보다 팍 줄었다.
게다가 이웃인 라코나 자작령에서 매달 받아내는 수도세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자를 내고 남는 금액으로 저축이 가능했다.
해서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더 나가는 건 과유불급이라 보았다.
'빚만 다 갚으면 돼. 그러니까 과하게 일을 크게 벌이는 것까진 나가면 안 돼. 자칫 일을 너무 크게 벌여놓으면 나중에 빚 다 갚고도 계속 일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지금의 분주함은 빚을 갚기 위한 것이었다.
빚을 다 갚은 후엔?
일하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살기 싫었다.
죽도록 열심히 살아가는 건 이미 대한민국에서 지겹도록 겪었다.
그런데 여기서마저 평생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부귀영화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평생 적당히 시골 귀족으로 꿀만 빨고 싶었다.
'삼시세끼 배부르게 먹고. 책이나 보면서 뒹굴거리고. 그러다가 심심하면 말 좀 타고. 마음 잘 맞는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너무 애쓰지 않고. 애들 낳고 오순도순 적당히만 넉넉하게 사는 거. 그게 딱 내가 바라는 삶이라고.'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그렸던 그 그림에 뜻밖의 변수가 끼어들고 있었다.
원하지 않았던 기가티탄과의 싸움. 안 죽으려고 구르다 보니 어쩌다 세워 버린 거대한 업적.
그렇게 국왕의 눈에 제대로 도장을 찍어 버린 셈이었다.
'후우. 이걸 어떡해야 한담.'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난감했다.
문득, 군대에서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군대에서도 이랬지. 적당히, 중간만 가는 게 제일 무난하고 좋은 건데, 당시의 난 그걸 몰랐어.'
사실이었다.
이등병 시절이었던가.
훈련소 과정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받았던 첫날이었다.
가자마자 중대 행보관님이 이렇게 물어 왔더랬다.
'어? 토목공학과네? 삽질 좀 하나?'
그래서 대답했다.
행정실 의자에 각 잡고 앉아서.
신병 특유의 군기 바짝 들어 우렁찬 목소리로, '예! 그렇습니다!'라고.
'그게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지.'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 없이 질렀던 그 대답.
그게 스스로 불러온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날부터 자신은 행보관의 전용 소환수(?)가 되었다. 온갖 작업에 다 불려 나갔다.
배수로 작업부터 시작해서 경계초소 보수, 외곽 울타리 보수, 중대 족구장 건설, 체력단련장이나 빨래건조장 보수, 대대 짬 처리장 신축 공사, 갖가지 보수, 공사, 또 보수의 나날이었다.
'나중에는 예초기 돌리거나 용접하는 일까지 죄다 불려 나갔어!'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용접까지 나름 마스터했다.
그렇게 후방인 경기도 여주의 기계화부대 출신임에도 소대 전술, 각개전투 훈련보다 작업을 하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장갑차보다 리어카를 더 많이 탔다.
소총보다 삽을 훨씬 많이 만져야 했다.
그러다 보니 반 노가다맨으로 군생활을 다 보냈다.
'심지어 전역할 때 다가오니까 은근슬쩍 말뚝 박으라고 꼬시기까지 했지!'
실제로 하사, 즉, 부사관으로 군대에 남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회유까지 받은 그였다.
물론 군대도, 말뚝도 질색이었다.
당연히 거절했다.
나중에 생활이 어려워졌을 땐 조금 후회하긴 했지만.
'어쨌건, 그렇게 너무 튀면 안 돼. 잘한다는 소문이 너무 퍼져도 곤란해. 그때부턴 계속 윗분들한테 시달리게 되거든.'
한데 지금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칙사가 지치지도 않고서 낭독하고 있는 저 칙령의 내용을 들어보니 더욱 그랬다.
"그리하여 짐은 이번 크레모에서 일어난 사태의 경위를 듣고는 근심을 거둘 수 없었으며... 어쩌고저쩌고... 그 와중에 놀라운 용기와 희생정신을 보여준 젊은 귀족과 호위기사의 업적에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쿵저러쿵... 이에 두 사람의 업적을 특별히 기리고자 한다."
'후아. 제발.'
마레즈 개간지 정리도 해야 하는데.
이제 딱 석탄 장사도 시작할 참인데.
안 그래도 미치도록 바쁜 몸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왕도로 부르거나 하지만 말아 주십셔.
아니, 부르시더라도 좀 나중에 한가해질 때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로이드는 진심으로 국왕을 향해 빌었다.
그러나 칙사의 엄숙한 목소리에는 얄짤이 없었다.
"지령. 업적을 치하하기 위하여 로이드 프론테라와 하비엘 아스라한을 왕도로 초청한다. 두 사람은 칙령을 전달한 칙사와 더불어 즉시 왕도로 이동할 것을 명함. 공용력 617년 1월, 왕도 마젠타에서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가 공표함."
촤락, 탁!
칙령 담긴 스크롤이 경쾌하게 말렸다.
어쩌면 저 칙사, 종일 저 동작만 연습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동시에 곁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작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찌나 감격했는지, 숙인 고개 사이로 오열하기 시작했다.
"으... 흐흑흙! 끄흡, 흐흑!"
"남작 아르코스 프론테라여, 고개를 드시게."
"끄, 흐흑! 흐흐흑!"
"아들이 자랑스럽겠군. 실로 훌륭한 아들을 두었어."
"여, 영과앙, 입니, 흐흑! 끄흥, 흑!"
딩동.
[아르코스 프론테라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9 상승하였습니다.]
[아르코스 프론테라와의 현재 관계 : +56]
[주요 인물과의 크나큰 관계 개선으로 9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2,036]
'후아.'
로이드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쯤이면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아주 제대로 판을 벌이는 게 낫겠네.'
변화된 상황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낼 방법들.
그리하여 아예 빚 청산을 더 앞당기는 선택.
이쪽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듯했다.
아니, 활용하기에 따라서 훨씬 나을 수도 있으리라.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로이드는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로이드 프론테라가 위대한 전하의 칙령을 받듭니다."
그렇게, 벼락치기 사법고시 수석 합격 같은 왕도행이 결정되었다.
♣
프론테라 남작령에 축제가 열렸다.
마침 겨울이 한창인 시기라 농사에 드는 일손도 적은 때였다. 따뜻한 온돌 구들장 아랫목에서 뒹굴거리던 영지민들이 너도나도 모였다.
정말로 동네에서 사법고시 수석 합격자가 나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마을 입구 전봇대에 현수막 몇 장만 걸려 있으면 분위기 제대로 딱일 듯.'
축제를 지켜보던 로이드가 문득 떠올린 생각이었다.
정말로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 그럴 법도 했다.
꿈도 희망도 별로 없던 시골 깡촌 영지였다. 그런 영지에서 매일 술만 퍼마시고 행패나 부리던 도련님이었다.
한데 그러던 도련님이 어느 날부터인가 완전히 달라졌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
여러 일을 벌였다.
벌이는 일마다 성공했다.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돈을 팍팍 벌었다. 사기꾼에게 당해 드리웠던 암운을 걷어냈다.
그러더니 이제는 급기야 국왕의 칙령까지 받게 되었다.
무려 왕도로 불려 가서 큰 상을 받는단다.
순박한 시골 영지민들의 어깨가 절로 으쓱거려질 일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들에게 주어질 이득이 제법 적지 않을 일이기도 했다.
"영지 주민들의 자부심이 고취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영지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받게 될 대접도 좋아지겠지요. 쉽게 업신여김받는 일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물물 거래를 할 때 소소한 이득을 보게 될 겁니다."
"흐음, 이제는 '깡촌에서 온 주제에'라는 소리를 덜 듣게 될 거란 뜻인가."
"비슷합니다."
하비엘의 대답에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여기 주민들에겐 이 영지가 전부일 테니까.'
이곳 프론테라 영지가 고향이자 터전 그 자체다.
한데 이번 일로 영지의 명망이 올라갔다.
국왕에게 칙령과 서훈을 받은 영지가 되었다.
다른 지방 사람들이 쉽게 무시하지 못할, 나름의 타이틀이 붙게 된 셈이다.
'충분히 자부심 생길 만하네. 뭐, 자기가 응원하는 축구나 야구팀이 우승만 해도 어깨가 들썩들썩하는 게 사람 심리니까.'
그런 심리는 대한민국이 있던 현대 세계에서도 숱하게 보았다.
특정 축구팀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다.
심지어 그 팀의 인기 선수가 결승골까지 넣으며 경기를 캐리하고 터뜨린다.
그러면 그날 온라인의 무수한 커뮤니티 게시판이 왕창 터지는 걸 숱하게 본 로이드였다.
'자기한테 아무런 이득이 없어도 그렇게 난리가 났지.'
지구 반대편의, 본인과 아무런 학연, 지연, 혈연조차 없는 축구선수 하나에도 그렇게 열광하는 것이 사람 심리였다.
한데 이곳에서 벌어진 경사는?
자신이 칙령을 받은 사건은?
주민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실제 이득이 될 일이었다.
칙령을 받으며 명망을 얻은 자신이 앞으로 영주가 될 몸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니 다들 저렇듯 진심으로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것이리라.
길에서 자신을 볼 때마다 지구 최강 아이돌 방탄조끼단을 만난 팬들처럼 두 눈이 초롱초롱해지곤 하는 것이리라.
'뭐, 덕분에 난 RP도 추가로 챙겼고.'
남작부인에게 100.
바이에른 경에게 30.
영지 주민 전체에게 70의 RP를 받았다.
물론 그렇게 모은 RP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당장 마나하트 스킬을 올릴까도 싶었지만, 언제 또 위급한 순간이 올지 몰라 꾹 참았다.
'무작정 마나하트 같은 스킬만 키운다고, 힘만 세진다고 될 일이 아니야.'
닥쳐올 상황에 맞춰서 스킬을 올려야 한다. 그렇게 적절한 맞춤형 성장을 추구해야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 개미굴에서도, 기가티탄과의 싸움에서도 그랬다.
로이드는 그 경험을 떠올리며 겨울잠을 대비하는 반달곰처럼 RP를 열심히 쟁여두었다.
그나마 환상종들의 변신을 위해 약간의 RP를 투자한 것이 그가 스스로에게 허용한 지름신의 전부였다.
[해바라기씨 세트 100개를 구매하셨습니다.]
[구매 비용 : 100 RP]
[현재 보유 중인 RP : 2,136]
그렇듯 로이드는 차곡차곡 왕도행 여정을 준비했다.
물론 얌전히 여정만 준비하지는 않았다.
더욱 큰 그림을 준비했다.
'기왕 이렇게 국왕이 판을 깔아줬으니까, 그 판에서 제대로 육수까지 쪽쪽 빨아먹는 게 사람의 도리(?)겠지!'
그렇게 로이드는 결심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계획을 짰다.
그리고 마침내 왕도를 향한 출발의 날이 밝아왔다.
왕도로 가는 김에 남작가에 남은 빚을 완벽히 걷어낼, 로이드의 큰 그림이 본격적인 시동을 거는 날이었다.
82화. 정답보다 뛰어난 오답 (1)
"저는 후회가 됩니다."
"음? 뭐가?"
남작령을 출발한 지 열흘쯤 지난, 햇살 맑은 한겨울의 낮이었다.
일행 모두가 발길을 멈추고 식사를 즐겼다.
스푼을 깨작깨작 놀리던 하비엘이 대뜸 저런 말을 꺼냈다.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회가 된다니?"
"말씀 그대로입니다."
"왜? 태어난 게 후회가 돼?"
"...."
"아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
"고민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작년 한 해 동안 제가 너무 게으름을 피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으름이라니?"
"검술 훈련을 너무 등한시했습니다."
하비엘이 스푼을 꽉 쥐었다.
그릇 속에서 식어가는 수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로이드 님께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크레모에서의 일을 말입니다."
"크레모에서?"
"예. 기가티탄과 맞섰던 그날 밤 말입니다."
하비엘이 고개를 들었다.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기가티탄과 맞서겠노라고, 싸우겠노라고, 그렇게 나섰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힘이 모자랐습니다. 그 결과 로이드 님이 직접 나서야 했습니다. 큰 위험에 처하셨고, 실제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아하. 그래서 반성하고 계시다?"
"예."
고개를 끄덕이는 하비엘.
그는 진심이었다.
"만약 제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기가티탄을 홀로 상대하여 제압할 수 있었더라면, 모든 게 달랐을 겁니다. 물론 로이드 님이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겠지요. 그래서입니다."
은발 기사의 눈빛이 결의로 반짝거렸다.
"그래서 이번 한 해의 목표를 새롭게 세웠습니다."
"올해의 목표?"
"그렇습니다."
"음, 거창하네. 그래서 새로 세웠다는 올해의 목표가 뭔데?"
"소드마스터입니다."
"푸크업."
로이드는 하마터면 마시던 수프를 뿜을 뻔했다.
이쪽을 보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는 하비엘.
그런 녀석의 목표가 우스워서?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무려 올해의 목표가 소드마스터 되기라니. 남들이라면 평생 매달려도 거의 불가능할 일인 건데, 그런데 저 녀석이 저렇게 말하니까 뭔가 진짜로 될 것 같잖아.'
실제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녀석이라면 진짜로 해낼 것 같았다.
소설에서도 실제로 그랬으니까.
'그게 하비엘의 무서운 점이지.'
역사상 얼마나 수많은 기사들이 훈련에 매진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드마스터가 되고 싶어 했을까.
목숨을 걸고서 싸움을 치르고, 그 실전에서 익힌 감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또 땀을 흘렸을 터다. 말 그대로 평생 검술을 갈고 닦았을 터다.
그렇게 검에 매달린 사람의 숫자는 역사를 통틀어 몇 명일까.
'아마 수십만 명은 족히 되겠지.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반면, 그중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채 200명도 안 돼.'
정말로 그랬다.
로라시아의 역사서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명단의 숫자를 근거로 삼자면 정확히 179명이다. 거기에 정말 잘 봐줘서, 기록이 애매하거나 진위가 불분명한 케이스를 합쳐도 300명은 넘지 않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역사상의 추정치까지 싸그리 모아도 300명 이내.
정확히 증명된 숫자로만 치면 179명.
'거의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한 고구려, 신라, 백제, 거기에 고려와 조선까지 역대 모든 왕의 숫자를 다 합친 인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
대한민국의 역사 중에서 상대적으로 사료가 부족한 고조선이나 삼한, 가야, 부여 등을 제외한 주요 국가 왕의 인원수.
그 숫자와 거의 비슷했다.
'그만큼 소드마스터가 되는 게 무진장 어렵다는 증거겠지.'
한데 그 어마무시하게 어려운 일을 고작 '올해의 목표'로 설정하고서 매진한다니.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으면 미친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한데 그걸 저 녀석이 말하니까?
절대로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하여간 괴물 같은 놈.'
로이드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여전히 진지한 하비엘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콕 찔러 왔다.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할 생각입니다. 로이드 님께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어? 나?"
"예."
"내가 왜?"
로이드는 의아해졌다.
하비엘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벌써 트리플 써클을 만드셨습니다. 거기에 마나하트를 보유한 유저 수준에 이르시지 않았습니까."
"어, 그랬지."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로이드 님은 겉으로만 보이던 굼뜨고, 아둔하고, 맥없던 모습과 다르게 사실은 검술의 천재였던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뭐? 굼뜨고 아둔?"
로이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비엘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검술적인 기준에서는 분명히 그랬습니다. 딱히 가르침을 빠르게 습득하시는 것도 아니고, 타고난 완력이 특출하게 강하다거나 몸이 날래신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평범 이하였달까요."
"그거, 널 기준으로 삼은 거 아니냐?"
"어쨌건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막무가내구만."
"어쨌건, 그랬던 제 생각이 오해였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로이드 님이 1년도 되지 않아서 이렇게 마나하트를 만들어내실 줄은 정말로 몰랐으니까요."
"쩝. 이야기가 그렇게 되냐."
"예. 그래서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로이드 님께 따라잡힐 것 같다는 위기감도 느끼는 요즘입니다."
"헐."
이봐요, 철혈의 기사 씨.
절대로 그럴 일 없거든요?
로이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자신은 결코 천재가 아니다.
그저 아스라한 심법 등을 스킬로 개화하고 RP를 투자해서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쪽이 아무리 애써도 하비엘을 따라잡을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같은 트리플 써클을 보유하게 됐어도 그렇다.
심지어 하비엘보다 강력한 삼중 발파를 쓸 수 있음에도 마찬가지다.
'그냥 스펙상의 출력만 센 거지. 그걸 활용하는 능력은 하비엘한테 감히 비빌 수도 없을 거야.'
실제로 그랬다.
기본적인 체력과 완력 등의 종합적 피지컬, 지미 헨드릭스의 현란한 기타 독주를 방불케 하는 마나 운용 능력, 반사신경, 가진 힘의 활용 능력, 균형 감각, 응용력, 전투 센스, 경험, 투지, 그걸 모조리 망라하는 차원이 다른 기술까지.
모든 분야에서 비교가 무의미했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하비엘은 그야말로 초고성능의 31세기 최첨단 미래형 슈퍼 포뮬러 머신이라 할 수 있었다.
반면 자신은?
'전투기 엔진을 장착시켰는데 운전대는 빠진 20세기 티코지, 뭐.'
트리플 써클에 삼중 발파도 갖췄지만 컨트롤은 안 되는 로또 샷. 그것이 로이드가 스스로를 향해 내린 냉정한 평가였다.
'그러니까 안심해, 인마.'
물론 로이드는 그런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RP의 존재를 알려줄 필요까진 없다.
오히려 하비엘이 혼자 오해하며 느끼고 있을 위기감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더 열심히 노력해줘서 일찍 소드마스터가 되면 내가 이득인 거지, 뭐.'
모처럼 실력 성장의 의지를 불태우는 하비엘.
그런 하비엘을 보며 로이드는 남몰래 빙긋 웃었다.
흩날리기 시작한 한낮의 눈발 사이로 왕도를 향한 여정이 이어지고 있었다.
♣
여정은 금방이었다.
아무런 사건도, 사고도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사건이라면 칙사단 수행원 한 사람의 만성 불면증이 말끔히 치유된 정도가 다였다. 물론 하비엘에게 읊어주던 로이드의 자장가 서비스를 어깨너머로 들은 덕분이었다.
어쨌건 그렇게 다시 열흘이 지났다.
마침내 일행은 왕도 마젠타에 도착했다.
"자네들은 곧바로 국왕 전하를 알현하게 될 것이네. 알현 시의 주의 사항은 잘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로이드와 하비엘은 칙사를 따라갔다.
왕도는 새하얗고 붉은 도시였다.
거의 모든 건물의 벽이 따스한 베이지 톤의 흰색이었다.
반면 지붕엔 하나같이 적갈색 기와 패널을 얹었다.
왕도의 외곽에서 왕성으로 향하는 대로도 넓고 깔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왕궁의 모양은 좀 특이하단 말이지.'
칙사를 따라 대로를 통과하며 로이드는 멀리에 있는 왕성으로 눈길을 던졌다.
왕성의 모양은 특이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나온 묘사를 읽어서 대강 짐작하고는 있었는데, 실제로 비쥬얼을 접하고 보니 소설로 읽던 것보다 훨씬 특이하게 느껴졌다.
'꼭 삶은 달걀을 절반쯤 땅에 파묻은 것처럼 생겼네. 혹은 수타크래프트에서 나오던 벙커라거나.'
동글동글했다.
매끈매끈했고 납작했다.
동시에 바위처럼 무거워 보였다.
마치 둥글고 납작한 벙커를 수백 배쯤 확대한 것 같았다.
보통 중세의 왕성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보편타당한(?) 모양과는 수십 광년쯤 차이가 있는 모습이었다.
한데 그런 이쪽의 흥미를 눈치챈 것일까.
앞서 가던 칙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우리 왕성이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아, 예. 그렇습니다."
"그럴 법도 하지."
칙사가 낮게 웃었다.
"누구나 우리 왕성을 처음 보면 그런 생각을 품는다네. 괴상하고 특이하다고. 왕성이 아닌 것 같다고. 혹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는가?"
"그런 것까진 아닙니다. 소문으로는 익히 들은 바가 있어서."
"그럼 어째서 저런 모양을 하고 있는지도 들은 적이 있나?"
"예."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잠시 언급됐던 내용을 떠올렸다.
"수백 년 전에 지어져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이 도시가 '탈리아노'라고 불리던 때였다던가요. 그 시기에 어떤 불운하고 멍청한 왕이 같은 드래곤에게 무려 두 번이나 왕성을 뽑힌 사건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맞네.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노라고 역사서에 전해지고 있지. 그래서 그 시기에 지어진 왕성이 대부분 저런 모양을 하게 된 거라네."
"드래곤이 와도 '뽑히지 않기' 위함인 건가요."
"그런 셈이지. 납작하고 둥글게. 잡을 곳이 없도록. 그 당시엔 저런 양식이 유행이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저 왕성이 마지막으로 남은 달걀형 왕성이고 말입니다. 맞습니까?"
"허허. 공부를 많이 한 친구로구만. 볼수록 마음에 드는데?"
"과찬이십니다."
로이드는 너스레를 떨었다.
칙사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왕성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일행은 복잡한 절차를 거친 후 왕성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알현실로 향했다.
알현을 위한 새 의복을 걸치자 비로소 왕성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후우.'
이제 곧 국왕을 만난다.
예전에 만났던 크레모 백작이 그냥 갑이라면, 이제부터 만날 국왕은 그야말로 갑 중의 갑, 슈퍼 갑이다.
한마디로 이 나라에서 제일 큰 손.
즉, 가장 큰 돈주머니를 쥔 최대의 고객님이라는 뜻이다.
'잘해보자.'
로이드는 철혈의 기사를 통해 읽고 습득한 국왕의 성격과 특성 등을 되뇌었다. 이곳으로 오기까지 수없이 머릿속으로 돌렸던 시나리오를 샥샥 그렸다. 이제부터 실현하고자 마음먹은 큰 그림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이윽고 국왕이 알현실로 들어왔다.
"국왕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
당당한 발걸음 소리.
왕좌에 앉는 기척이 들렸다.
이내 맑고도 힘 있는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려 왔다.
"로이드 프론테라와 하비엘 아스라한은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었다.
바닥의 붉은 카펫 너머.
검은 가죽 부츠가 보였다.
거친 질감의 갈색 가죽 바지도 보였다.
탄탄하고도 날렵한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은 손때 묻은 롱소드 한 자루. 그 위로 수수한 복장 속 강인한 느낌의 상체와 어깨, 군더더기 없는 목선이 차례로 보였다.
마지막으로 시야에 들어온 것은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었다.
마치 불꽃을 그대로 옮겨온 듯이 물결진 붉은 머리칼. 그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당당하고도 준엄한 청록빛 눈동자.
그 눈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멋있다.'
이 나라의 국왕이자 유이한 소드마스터.
불굴의 군주,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의 묘사를 통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목소리는 더욱 그러했다.
"그대가 로이드 프론테라인가?"
하비엘을 굽어보며 국왕이 물었다.
로이드가 어깨를 움찔했다.
"국왕 전하 만세. 로이드 프론테라가 이 땅의 합당한 주인이신 국왕 전하를 뵈옵습니다."
"...그대가?"
"예, 전하."
"로이드 프론테라?"
"그러하옵니다."
"흐음. 괴상하군. 용모로 보아선 저쪽이 귀족처럼 보이건만."
"...."
"게다가 느껴지는 기세로 미루어 짐과 검을 섞을 자격도 있어 보이고."
흠칫.
이번에는 옆에서 나란히 예를 취하고 있던 하비엘이 어깨를 흠칫했다.
잠깐 일별한 것만으로도 하비엘의 경지를 대략 간파한 국왕.
과연 소드마스터의 위명에 어울리는 눈썰미였다.
국왕, 알리시아가 붉은 눈썹 끄트머리를 치켜들었다.
"어쨌건 짐은 크레모 백작의 충심 어린 간언을 통하여 그대들의 활약상을 전해 들을 수 있었도다. 이에 크레모 시에서 그대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정신을 치하하는 바이다. 다만-"
국왕의 청록빛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서렸다.
"짐은 무턱대고 누군가의 추천만 듣고서 섣불리 인물을 평가하지 않아. 오직 짐의 눈만 믿는다. 따라서 짐에겐 그대들의 능력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구나. 특히 로이드 프론테라, 그대의 능력부터."
"능력이라 하오시면 무엇을 확인하고 싶으신 것이온지...."
"간단하다. 짐이 듣기로 그대의 토목 공사를 추진하는 능력이 대단하노라 하였다. 하니 로이드 프론테라 그대는 짐의 질문에 나름의 지혜를 짜낸 대답을 하면 될 것이야."
"예, 전하. 하문하소서."
국왕이 피식 웃었다.
그녀의 질문이 떨어졌다.
"로이드 프론테라여. 그대는 작금의 시국에서 이곳 왕도 마젠타에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공사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국왕의 미소가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
사실은 이미 로이드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그녀였다. 크레모 백작의 보고를 접하던 때부터 로이드가 발휘했다는 능력에 크나큰 흥미를 느끼게 된 그녀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증명하라. 그러기만 하면 내 친히 그대를 중히 써보도록 하지.'
내심 염두에 둔 정답을 생각하며 로이드를 바라보는 국왕 알리시아.
그녀의 눈동자가 젊은 인재에 대한 갈망으로 번득였다.
그렇기에 이 순간, 그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발치 아래에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이드.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라 있는 상태임을.
'왔다.'
정말 예상대로다.
이곳에 오는 여정 내내 분석을 거듭한 그였다.
소설 철혈의 기사의 기억을 뒤적였다. 이곳에서 입수한 왕도에 대한 소문과 기록을 점검했다. 그렇게 국왕이 가장 바라고 왕도에 가장 필요할 공사가 무엇이 있을지를 염두에 두었다.
한데 지금, 그렇게 예상하고 준비했던 부분을 국왕이 그대로 물어오고 있었다.
딱 벼락치기로 하루 공부한 내용이 기말고사에 그대로 나온 기분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이쪽이 구워삶아 드릴 차례.'
로이드의 슬쩍 말려 올라간 입꼬리.
그가 입술을 찹찹 적셨다. 혓바닥에 힘찬 기어를 넣었다.
"전하의 하문에 감히 대답을 올리옵자면...."
그에게서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라에서 제일 큰 대박 큰손 고객인 국왕.
그러한 국왕의 가려운 곳을 적절하게 폭폭 긁어 공사 발주를 따내기 위한 로이드의 승부수가 던져졌다.
83화. 정답보다 뛰어난 오답 (2)
"왕도 전체를 가로지르는 마제나 강에 새 다리를 놓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감히 생각하옵니다."
드넓은 알현실이었다.
국왕의 성격처럼 넓되 화려하기보다는 호방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 전체에 로이드의 음성이 낭랑하게 울렸다.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리를?"
"그러하옵니다."
"더 자세히 고하라."
"예, 전하. 감히 듣기로, 마제나 강에 놓인 지금의 다리가 수시로, 종종, 잊을 만하면 무너진다 하였사옵니다."
"...수시로?"
"그러하옵니다."
"그건 좀 과장이 아닌가?"
"수십 년에 한 번씩 무너지는 것은 토목공학적으로 매우 종종, 빈번하게 무너진다는 뜻이라 사료되옵니다."
"...정말로?"
"그러하옵니다."
안면 전체에 철판을 깐 로이드가 대답했다.
솔직히 사실이었다.
수십 년에 한 번씩 붕괴.
그건 토목공학적 관점으로는 '매우 자주'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이곳 왕도, 마젠타를 가로지르는 마제나 강의 다리가 딱 그러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도 그 문제가 몇 번 언급됐지. 심지어 지금 시점으로부터 3년쯤 뒤에는 실제로 수십 년 만에 무너지기도 했으니까.'
소설에서 말하던 이곳 왕도의 입지가 떠올랐다.
왕도를 가로지르는 마제나 강은 사시사철, 연중 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러한 풍부한 수원 덕분에 이 도시는 오랜 세월 번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풍부한 수원은 동시에 양날의 검도 되었다.
'매년 봄철마다 홍수가 발생하지. 동부의 봄철 우기 때문에 수량이 급격히 늘어나. 게다가 근처 고산지대에 겨우내 막대하게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강수량의 증가를 더욱 부추기지.'
그러한 봄철 홍수는 왕도 마젠타의 고질병이었다.
특히 마제나 강에 놓인 다리에겐 재앙과도 같았다.
짧게는 10년에 한 번. 길면 5, 60년에 한 차례씩 다리가 홍수에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왕실에서는 막대한 공사비를 들여 새 다리를 지어야 했다.
'마침 지구에도 비슷한 케이스의 다리가 있었지, 아마.'
독일 하이델베르크.
그곳 네카어 강의 '카를 테오도어 다리'가 떠올랐다.
'11세기 중엽에 첫 번째 버전의 초대 카를 테오도어 다리가 건설됐지. 그리고 1288년의 홍수로 무너졌어. 그다음에도 비슷했던가.'
아마도 그랬던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지은 2대 다리는 1308년에.
3대와 4대는 각각 1340년과 1400년에.
5대 다리마저도 1470년에 붕괴되었다.
그 뒤로도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6대 다리는 1565년에 홍수와 함께 흘러온 유빙 때문에. 7대는 팔츠 계승전쟁 와중에 루이 14세의 군대에 의해. 그 뒤에 요새화까지 해가면서 더 튼튼하고 견고하게 지었던 8대 다리는 1784년에 홍수와 유빙으로 무너졌다지.'
그리하여 현대에 존재하는 카를 테오도어 다리가 무려 '9대'째가 되신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데 이곳, 소설 속 왕도 마젠타의 상황이 중세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와 참으로 흡사했다.
"그렇게 지금 마제나 강에 놓인 다리가 열한 번 무너진 끝에 열두 번째로 세운 것이라고 들었사옵니다. 하여, 매번 무너지는 다리를 다시 짓는 이런 실태는 참으로 비효율적인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무너진 걸 다시 짓는 상황이 비효율적이라고?"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래서 새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그러하옵니다, 전하."
"하면, 그대가 제시하는 새 다리는 봄철의 홍수와 유빙에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역시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런 배팅의 순간에는 당당해야 한다.
그걸 명심하며 로이드는 자신 있게 답했다.
국왕 알리시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만약에 무너진다면?"
"하면-"
로이드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당장 짐 싸들고 국외로 튀어야지.'
그러한 각오(?)를 속으로 삼키며 고했다.
"제 목을 치소서."
"진심인가?"
"진심이옵니다. 대신-"
"대신?"
"제가 감히 아뢴 새 다리가 무너질 때까지 저의 가문이 지닌 지위를 영원히 보장하여 주시옵소서."
"지위의 보장이라. 새로 지을 다리가 무너질 때까지?"
"그러하옵니다, 전하."
"...."
아예 바닥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인 로이드.
그런 로이드의 알밤 같은 뒤통수를 보는 국왕 알리시아의 눈꼬리가 매서워졌다.
'이 녀석 봐라.'
동부 구석 남작가의 장남.
그런 주제에 감히 자신에게 협상을 제시하고 있다.
남작가의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영원히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위의 보장.
그 뜻은 명확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봉토인 영지를 몰수하지 않을 것.
그리고 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을 안정적인 금액을 평생 연금으로 지급해줄 것.
그 두 가지가 저 요청에 숨은 진짜 뜻이리라.
'게다가 심지어, 가만히 지켜보자니 새 다리를 건설하는 걸 이미 기정사실로 못 박힌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괘씸하고도 능글능글한 화법이었다.
빤히 보이는 잔꾀를 부리고 있었다.
한데 그 모습이 하찮아서 귀엽게도 느껴졌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저렇듯 뻔뻔하게 구는 모습이 신기하게도 여겨졌다.
마치 사자에게 간식 달라며 찡찡대는 강아지 같았다.
게다가 홍수에 무너지지 않는 다리가 생긴다면?
왕실로서도 결코 손해는 아닐 터였다.
국왕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졌다.
"하면 그대가 주장하는 무너지지 않을 다리, 그걸 만들 묘수라도 있단 말인가?"
"물론이옵니다."
넘어온다.
넘어왔다.
로이드는 국왕의 누그러진 목소리를 통해 분위기를 읽어냈다.
다행히 승부수가 먹혔다.
'됐어.'
소설 철혈의 기사를 통해 기억하는 국왕 알리시아의 성격이 떠올랐다.
불굴의 군주,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
그녀는 절대권력과 절대적인 무력을 함께 지닌 인물답게 호방하고 거침이 없었다. 또한, 공명정대하여 상대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조언을 들었다.
그런 만큼 비굴한 자를 극도로 싫어했다.
지금 자신이 행동한 것처럼,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할 말을 따박따박 하는 사람을 좋아했고, 가까이 두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한쪽 팔을 잃게 된다.
가장 믿던 사람의 독에 당한다.
팔을 포기하고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 배신의 충격으로 성격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누구도 믿지 않는 잔혹한 폭군으로 변모한다.
불굴의 군주에서 학살의 군주로 타락하고 만다.
'하지만 그 불행한 사건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어.'
그건 소설을 기준으로 지금으로부터 3년 뒤에나 벌어질 일이다.
지금 이 시기의 국왕 알리시아는 여전히 밝고, 공명정대한 붉은 사자처럼 존재감을 빛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처럼 대담한 제안이 먹힐 거라고 보았다.
실제로 마제나 강의 다리가 수시로 무너지는 사태는 항상 왕실의 골칫거리였기에, 이 제안에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
그리고 그 계산이 먹히고 있다.
로이드의 대답에 확신 어린 힘이 실렸다.
"마제나 강에 현수교를 짓는다면, 어떤 홍수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현수교?"
"예, 그러하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국왕.
그녀를 향해 로이드가 더욱 자신 있게 고하였다.
"현수교는 지간이 장대한 교량에 적합한 교량 건설 방식이옵니다. 일반적으로 양쪽에 드높게 세운 주탑을 세우고, 그 주탑 사이를 기다란 로프 형식의 케이블로 지지하여...어쩌고저쩌고... 교량 양단의 앵커 블록에서 그 케이블을 고정하여...나불나불... 우선 현수교의 장점은 강물 속에 교각을 세울 필요가... 블라블라...따라서 감히 고하건대...."
"그만. 거기까지만."
"...."
"하고픈 말은 다 하였는가?"
"아쉽게도 전하께서 그만하라 명하셔서...."
"그만하면 되었다. 뜻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국왕 알리시아가 무의식중에 넌더리를 내었다. 이마의 진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어쩐지 방금 들은 로이드의 설명이 모조리 왼쪽 귓구멍으로 들어와 오른쪽 귓구멍으로 슈르륵 죄다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로이드의 물음이 은근해졌다.
"하오면 전하의 의중은 어떠하시온지...."
"의중이라."
국왕이 피식 웃었다.
"짐은 분명 그대의 능력을 시험하겠노라 일렀도다. 그렇게 내린 질문에 그대가 답을 하였고, 충분한 자신감마저 내비쳤으니 무얼 더 망설일까. 시행하라."
"새 다리의 건설을 시행하라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러하다. 직접 짓고, 증명하라. 만일 성공한다면 그대가 앞서 크레모에서 세웠던 공적까지 더하여 크나큰 상을 내리겠노라. 단-"
피식 웃던 국왕 알리시아의 눈빛이 엄정해졌다.
"그토록 내비친 자신감의 크기만큼, 건설에 실패하였을 때의 대가는 한층 커질 것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로이드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마당이다.
이제는 실력을 발휘해야 할 때였다.
♣
"날 앞에 두고도 저토록 방자하고 건방진 자는 처음 보는군."
로이드와 하비엘이 물러난 알현실.
그곳에 남은 국왕 알리시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내 그녀의 쓴웃음에 호응하듯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리하고 계산에 밝은 자로 보이옵니다, 전하."
지금껏 묵묵히 국왕의 뒤에 시립해 있던 근위기사단장이었다.
"체르니 경, 그대도 그렇게 보았는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하, 그래. 생각보다 훨씬 영악한 자야."
국왕 알리시아의 입술에 걸린 쓴웃음이 짙어졌다.
문득, 크레모 백작에게 받았던 보고서가 떠올랐다.
그 보고서에서는 로이드 프론테라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본인에게 주어질 명확한 이익이 있는 상황이라면 지닌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모두를 놀라게 할 영악한 인재.'
...라는 평가였다.
"실제로 보니 역시 그러한 듯하군. 한데 설마하니 저런 오답을 내놓을 줄은 몰랐어."
"오답이라 하심은...?"
"짐이 하문한 것에 대해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가 꺼낸 대답 말이야."
"마제나 강에 새 다리를 놓는 일이 시급하다던 대답 말이옵니까?"
"그래."
"그것이 오답이라 하오시면...."
"염두에 두던 정답이 따로 있었다."
국왕 알리시아가 칼로 자르듯 말했다.
실은 로이드에게 질문을 던지던 때부터 내심 염두에 두던 정답이 따로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정답은 교량 건설이 아니었다.
심지어 마제나 강의 범람이나 강에 관련된 어떤 것도 아니었다.
"사실 짐이 생각하고 있던 정답은 왕궁의 보수였다."
"아...!"
알리시아의 말에 체르니 경이 탄성을 머금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씀이시옵니다. 때마침 10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르는 왕성 보수 공사 기간이 다가오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니...."
"그래. 맞아. 드래곤의 습격에 대비하느라 지나치게 두껍고 튼튼하게 지었지. 그래서 무거워. 자주 보수해줘야 해. 그래서 그걸 정답으로 생각했지. 건설에 조예가 있는 자라면 응당 짐이 생각한 정답을 입에 담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로이드는 그녀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답을 꺼냈다.
말할 여지도 없는 오답이었다.
한데 단순한 오답이 아니었다.
'사실 마제나 강의 교량 공사는 전부터 필요했지. 하지만 딱히 뾰족한 방법이 없었어.'
실제로 그랬다.
선대의 왕들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
봄철에 눈이 녹는 시기마다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홍수. 그런 사나운 자연의 재해에 맞서는 방법은 더 튼튼한 다리를 짓는 것밖에 없었다.
다리가 무너질 때마다 전보다 튼튼한 새 다리를 지었다.
그러나 몇십 년 버티지 못하고 또 무너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학적인 딜레마 때문이었다.
'건설자들이 말했던가. 다리를 튼튼하게 지으려면 다리를 떠받치는 교각을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데 그렇게 교각이 튼튼해지는 만큼 두꺼워지고, 그만큼 강물에 의한 수압을 더 많이 받게 된다고.'
그녀는 건설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하지만 건설 기술자들이 고하였던 그 내용만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간단한 원리였다.
교각은 물속에 세워져 다리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흘러오는 강물이 옆으로 밀어내는 힘을 항상 받는다.
한데 교각이 두꺼워지면?
그만큼 면적이 넓어지면?
강물의 압력, 유수압을 받는 면적도 넓어진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건설자들이 교각 상류 방향의 면을 쐐기꼴로 만들어도 보았다. 교각 상류 쪽에 유빙을 막아줄 나무 구조물을 따로 설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수십 년에 한 번 정도는 그런 방편으로도 감당하기 힘겨운 홍수가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다리는 어김없이 붕괴되었다.
그래서 내심 그냥 포기하고 있었다.
그저 최선을 다해서 튼튼하게 짓는다. 무너지면 어쩔 수 없다 여기고 다시 짓는다. 자연의 힘 앞에 정기적으로 내는 세금으로 여긴다.
그것이 오늘날 마젠타노 왕가의 마제나 강 다리에 대한 정책이었다.
하여 국왕 알리시아도 그 사안에 대한 참신한 대책이 있을 거라는 기대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상상도 못했다.
'한데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는 그걸 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꺼냈어.'
자신이 내심 염두에 두고 있던 정답.
그 정답보다 훨씬 뛰어난 오답이었다.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
국왕 알리시아는 내심 생각했다.
로이드가 호언장담한 교량, 현수교.
그 새로운 다리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자고. 로이드 프론테라의 능력을 관찰하자고. 그리하여 만약 능력이 증명된다면, 필히 그를 중히 쓰겠노라고.
그렇듯 국왕의 기대감 담긴 눈도장을 받으며, 로이드의 교량 공사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84화. 줄리앙 프론테라 (1)
"일단 여기부터 시작해볼까."
유난히 햇볕 맑은 오후였다.
그렇듯 쨍쨍한 한겨울 햇볕 아래, 로이드가 손그늘을 만들었다.
드리운 손그늘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마제나 강을 둘러보았다.
'측량.'
츠즈즈즈즈!
그의 눈동자에 신비로운 기운이 깃들었다.
동시에 그의 시야가 변했다.
원래 보이던 풍경에 수많은 정보가 떠올랐다.
마치 증강현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마제나 강을 따라 늘어선 지형의 정보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비스듬한 강둑이 반듯한 포석으로 덮여 있어. 그 강둑 위로는 사람과 마차가 다니는 길이 나 있고, 길 건너에는 곧바로 건물이... 흐음, 이거 좀 빡빡하겠는데.'
한강처럼 왕도 중심을 가로지르는 마제나 강.
한데 한강과 다른 점이 있었다.
강가에 곧바로 시가지가 딱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강둑에서 사람이 다니는 도로와 집까지의 거리가, 좁은 곳은 겨우 10미터 남짓한 곳도 많았다.
'이런 면에선 한강보다는 으음, 프랑스 파리의 센 강이나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도나우 강이랑 더 비슷할지도.'
직접 파리나 부다페스트를 가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시 개발 사례에 관련된 자료를 본 적은 있었다.
어쨌건 덕분에 지금 그가 측량을 시도하는 이곳은 전혀 한적하지 않았다.
인적 없는 강둑 따위와는 백만 광년쯤 거리가 있었다.
바로 옆으로 마차 끄는 말이 지나갔다.
푸힝 투레질하며 목에 콧김도 뿜었다.
마무리로 말똥까지 푸짐하게 푸직 방출해놓고는 멀어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수많은 행인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마치 금요일 저녁 홍대 거리를 보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렇듯 지나다니던 인파 대부분이 발길을 멈추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재잘거리고 수다를 나누며 이쪽으로 눈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머나? 저 사람 좀 봐."
"어쩜 사람이 저렇게 조각처럼 잘생길 수가 있지?"
"햇볕이 저 사람 덕분에 더 빛나고 있어...."
"흐음, 멋지군. 마치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처럼 빛나는 외모야."
"수문장님 외모는 지금도 빛이 나시지 말입니다."
"허허허, 그런가?"
"예, 정수리가 반짝반짝하시지 말입니다."
"크흠! 자네, 내일부터 출근하기 싫은가 보군?"
...이라는 식의 웅성거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이쪽을 향해 남녀노소 수십, 수백 쌍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 또한 물론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눈길이 꽂히는 목적지는 단 한 곳.
바로 하비엘의 얼굴이었다.
'후아, 미치겠네.'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옆을 향해 원망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어이."
"부르셨습니까, 로이드 님."
"응, 불렀어."
"어쩐 일이신지."
여전히 태연하고 서늘한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대꾸하는 하비엘.
그런 하비엘을 향해 로이드가 핀잔을 톡 쏘았다.
"어쩐 일이긴. 너 좀 나한테서 떨어져서 따라오면 안 되냐?"
"예?"
"예는 무슨. 저기 좀 볼래?"
"...."
"뭐가 보이냐."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렇지? 그런데 사람들이 어쩌고 있냐?"
"이쪽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습니다."
"너라면 당연히 저 웅성거리는 말이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들리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뭐 느끼는 거 없냐?"
"있습니다."
하비엘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왕성에 마련된 숙소로 돌아가기 전까지 바구니를 하나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구니?"
"예."
"바구니는 왜? 혹시 머리에 써서 얼굴 가리려고?"
로이드의 입가에 피식거리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저 녀석이 어쩐 일로 그렇게 참한 생각을 다 했을까. 대견했다.
그러잖아도 저 녀석을 구경하느라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 특히 지금도 실시간으로 불어나고 있는 여인들. 그렇게 오늘 당장 하비엘 팬클럽 하나쯤은 뚝딱 결성할 것 같은 저 여인들 때문에 정신이 사납던 터였다. 측량 작업이 방해받던 참이었다.
"기왕 쓰려면 큰 걸로 꼭꼭 가리면 더 좋겠네."
빙글빙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어쩐지, 하비엘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대꾸해 왔다.
"머리에 쓴다니. 왜 얼굴을 가려야 하는 겁니까?"
"...어?"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그런 용도로 쓰려는 바구니가 아닙니다."
"그럼?"
"받게 될 것들을 숙소까지 편하게 가져가기 위함입니다."
"받게 될 것들이라니, 설마...."
"예, 고백 편지입니다."
"...."
"받은 편지가 몇 장 안 될 때는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하지만 모이면 곤란해집니다. 편지지나 봉투 크기가 하도 다양해서 말입니다. 게다가 개중엔 그 자리에서 급하게 쪽지만 써서 건네는 분들도 제법 있습니다."
"그래서, 고백 편지 운반용 바구니를 구하시겠다?"
"예."
"...."
너무나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비엘 녀석. 지금 이런 상황쯤이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크흡, 더러운 존잘 놈들.'
천하의 야비하고 치사한 놈들.
나중에 치질이나 콱 걸리면 좋겠다.
거기에 만성 변비까지 세트로 당첨되면 더 좋겠다.
그런 자그마한(?) 소망을 가슴 한쪽에 소중히 품으며 로이드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래, 바구니야 뭐 그렇다 치고. 어쨌건 좀 떨어져서 따라와라."
"어째서 그래야 합니까?"
"집중이 안 되니까."
사실이었다.
"저 사람들 떠드는 건 둘째 치고 시야를 너무 가리잖아. 할 일도 없이 옹기종기 저렇게들 모여서 뭣들 하는 거냐, 진짜. 아니, 측량을 하려면 좀 강변이랑 강둑이랑 찬찬히 둘러보고 자리도 살피고 해야 하는 거잖냐. 그런데 저게 뭐냐. 무슨 톱스타 강림한 것도 아니고.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어휴, 참 말세다, 말세야."
"그럼 저 사람들이 로이드 님의 측량에 방해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제가 로이드 님과 떨어져서 걸으면 방해가 덜 되는 겁니까?"
"아마도?"
"그래도 그 명령은 들을 수 없겠습니다."
"...어째서?"
"시샘으로 부들거리는 로이드 님의 모습을 곁에서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니까요."
"크헐."
"농담입니다."
"절대로 농담처럼 안 들렸는데?"
로이드가 가자미눈을 떴다.
하비엘이 여전히 침착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농담 맞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로이드 님의 호위입니다. 한데 이곳은 통행인이 많은 번잡한 장소입니다. 예기치 못할 돌발상황에 대비하는 근접 경호는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부들대는 내 모습도 겸사겸사 즐기고?"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어. 내 몸은 지켜주고, 대신 멘탈은 두들겨 패고. 참 신난다, 그치?"
"두말하면 잔소리인 당연하신 말씀을."
"...."
"훗."
"...."
그냥 입 다물고 측량이나 하자.
역사책에 길이 남을 존잘러를 옆에 둔 비애를 씹어 삼키며, 로이드는 다시금 측량에 집중했다.
사실 실제로 하비엘을 보기 위해 모인 구경꾼들이 좀 방해가 되긴 했다. 그래도 사람들을 치워(?) 버릴 수는 없기에 대신 발품을 팔았다. 이리저리 관측 위치를 바꾸어가며 상세한 데이터를 모았다.
그러자 자연히 파악되는 사실이 있었다.
'다리가 계속 무너진 이유가 있네.'
강변 곳곳에 주기적으로 강물이 범람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맨눈으로 보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측량을 사용하니 그게 명확히 보였다.
포석과 흙에 남겨진 미묘한 성분 차이 덕분이었다.
'아주 소량이지만 이곳 시가지의 흙과 다른 토질의 흙이 저쪽, 강물이 차오른 자리까지만 약간씩 남아 있어. 상류에 있을 사면붕적층에서나 보일 법한 성분이야.'
아마도 마제나 강 상류에 있던 다른 성분의 흙이 홍수에 의해 이곳으로 함께 쓸려 내려왔고, 도시에서 강물이 범람한 높이까지 함께 차올랐다가 흔적으로 남은 듯했다.
한데 그 높이가 상당했다.
예상보다 더 높았다.
'제일 높이 차오를 때는 다리의 교각은 물론이고 평평한 윗부분, 사람과 마차가 통행하는 부분까지 물에 잠겼잖아? 어지간한 돌다리로는 버티기 어려웠겠네.'
다리의 윗부분, 사람이 통행하는 교상.
거기까지 물이 차오르면 다리는 끝장이 난다.
길고 넓게 걸쳐 있는 구조 자체가 막대한 양의 강물에 떠밀리며 횡으로 작용하는 수압을 받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득 차오른 물의 부력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
다리를 건설할 때부터 설계되고 유지되던 힘의 균형이 완전히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리를 무작정 높이 만들 수도 없었겠어.'
돌다리를 높게 만들려면 그만큼 다리를 떠받치는 교각이 튼튼해지고 커져야 한다. 한데 그러면 교각 자체의 부피 때문에 강물의 흐름을 방해하게 된다. 그만큼 수압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튼튼해지는 만큼 더 많이 받게 되는 수압.
큰 다리를 만들려고 노력할수록?
위험 또한 함께 증가하는 아이러니.
그러한 일종의 딜레마가 발생하는 셈이다.
'역시 현수교 건설을 주장하길 잘했어.'
로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국왕에게 주장한 현수교.
그걸 짓는다면 앞서 다른 돌다리가 겪은 문제를 대부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너진 다른 다리들과 같은 불운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교각을 강 중간에 세울 필요 자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폭은 약 238미터. 이 정도면 양쪽 강둑, 그러니까 강물에 잠기지 않을 곳에 주탑을 세울 수 있어.'
그렇게 주탑을 세운다.
주탑을 통해 케이블을 드리운다.
케이블을 이용해 교량 자체를 허공에 띄우고 지지한다.
그러면 강물이 불어난다 한들, 홍수가 일어난다 한들 교량이 타격을 받는 일이 거의 없어질 것이리라.
그것이 로이드의 계산이었다.
물론 마냥 쉬운 일은 아니긴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거대한 도전이었다.
그걸 아는 로이드는 측량을 마친 저녁부터 왕궁 내의 숙소에 틀어박혔다. 온종일, 밤까지 꼬박 지새우며 현수교 설계에 매달렸다. 설계 스킬에 딸린 시뮬레이션 옵션으로 수많은 모델을 만들고 시험하길 반복했다.
그러자니 자연 이번 설계의 가장 큰 화두는 케이블의 제조가 되었다.
케이블이란 굵은 철사를 엮은 일종의 로프라 할 수 있었다.
"방울아?"
"방울?"
한창 케이블 제조 방법을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로이드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뒹굴거리던 방울이에게 물었다.
"너, 혹시 강철 끙까 말이야."
"방울!"
"그거 평소보다 훨씬 가늘게 뽑아낼 수도 있어?"
"빠방울?"
"얼마만큼이냐면, 으음, 한 요 정도?"
로이드가 손을 들어 눈앞에서 엄지와 검지를 좁혔다.
그 간격은 약 5밀리미터 정도 되었다.
"딱 요 정도야."
"바앙우울?"
"가능할까?"
"방우울?"
방울이가 고개를 새침하게 갸웃거렸다.
된다는 걸까, 안 된다는 걸까.
조금 애매한 반응이었다.
마치 뭔가를 원하는 듯도 보였다.
로이드가 은근슬쩍 물었다.
"내가 뭔갈 해주면 가능한 거지?"
"방울!"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방울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것이 기쁜지 말문이 제대로 트였다.
"빠방울! 방울! 방울방울방울! 빠방울! 빠방빠방울!"
"...뭐? 기름 섞어 만든 찰흙인 유토에 석분점토를 1:1 비율로 섞어야 한다고? 거기에 자철석이 풍부한 모래랑 마사토를 더하고 자갈도 추가해야 한다고?"
"방울! 빠방울! 방울!"
"기왕이면 피자처럼 만들어서?"
"빠방울!"
"점토를 반죽처럼 펼치고? 그 위에 나머지를?"
"방울!"
"하는 김에 현무암이랑 흑요석이랑 감람석에 청금석이랑 활석에 주석까지 토핑으로 넉넉하게 뿌려달라고?"
"빠방울!"
"고객님, 더 원하시는 건 없으세요? 혹시 황토 치즈 크러스트라도?"
"방울!"
"...그 정도가 다라서 다행이네."
일단 적절한 종류와 비율로 흙을 먹으면 가느다랗고 탄력적인 철근을 철사, 와이어처럼 뽑을 수 있다는 것이 방울이의 설명이었다.
게다가 다행히도, 방울이가 설명한 재료들은 구하기가 아주 불가능한 것들이 아니었다.
"알았어. 왕실에 필요하다고 요청해둘게."
"방울!"
그 길로 로이드는 왕실의 관계자를 찾아갔다.
방울이가 말한 재료들을 요청했다. 국왕 전하의 명으로 시행하는 현수교 건설에 반드시 필요한 재료라는 말도 덧붙였다.
덕분인지 며칠만 기다리면 전부 마련될 거라는 답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가느다란 와이어는 반드시 필요하니까.'
그게 있어야 케이블을 만든다.
특히, 자신이 방울이에게 요구한 5mm 지름의 와이어는 이번 시공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내심 염두에 두고 있는 평행선 스트랜드(Parallel Wire Strand : PWS) 케이블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후우. 이 정도면 당장 준비할 건 다 됐네.'
며칠 동안 잠까지 설쳐가며 설계에 매달린 터였다.
그동안 숙소에 틀어박혀만 있다가 처음으로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동안의 긴장이 살짝 풀리기도 했다.
그런 탓일까.
조금은 어지럽고, 머리가 띵했다.
'머리 좀 식혀야지. 오늘만 좀 쉬자.'
로이드는 뻐근해진 뒷목을 주물렀다.
여전히 설계할 것들이 잔뜩 쌓인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강행군만 이어가다간 이쪽이 먼저 쓰러질 판이다.
'때마침 쉴 겸 바람 쐬면서 처리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기도 하고.'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떠올랐다.
왕도에 도착하고 난 뒤부터 국왕과의 일에만 신경을 쓰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당부가 떠올랐다.
'왕도에 가거든 이 물건을 네 동생에게 꼭 전해주거라.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도 빼먹지 말고.'
불현듯 떠오르는, 남작령을 출발하던 날의 풍경.
그 풍경 속에서 건네 오던 남작 부부의 당부.
그렇듯 이쪽에게 건네주던 큼직한 보따리.
그 안에는 온갖 물건이 잔뜩 들어 있었다.
'영지에서 직접 만든 베이컨에 겨울용 외투와 담요, 그거 말고도 자잘한 게 엄청 많던데. 이건 무슨. 내가 봇짐 장사꾼도 아니고.'
떠올리자니 쓴웃음이 더욱 짙어진다.
자식 생각에 바리바리 보따리를 준비했을 남작 부부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훤히 그려졌다.
그래서였다.
'오늘은 바람도 쐴 겸 좀 움직여야겠네.'
로이드는 숙소로 돌아갔다.
남작 부부에게 받은 예의 커다란 보따리를 챙겨 나왔다. 왕도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그는 남작 부부의 심부름을 위해 왕도의 마젠타 대학, 왕립 아카데미를 향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로이드의 혈육이라고 언급되었던 줄리앙 프론테라. 왕립 아카데미에서 학문을 닦았지만 끝내 피어나지 못했던 안타까운 인재.
그 미지의 남동생을 만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