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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뭐? 드래곤 뼈를?"

국왕이 반문했다.

그 순간 분명히 보았다.

그녀의 눈에 떠오르던 황당한 심정을.

이내 호쾌하게 피식 배어나던 웃음을.

"무슨, 하. 이런. 로이드 프론테라여."

"예, 전하."

"그대는 처음부터 드래곤 뼈를 원했던 것이었겠지?"

"송구하옵니다, 전하."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드래곤 뼈를 노린 거, 사실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10년짜리 노동 면제권을 언급하며 국왕을 한 번 흔들었다.

안 받아들여지면 말고.

혹시나 받아들여지면 대박이고.

그런 심정으로 제시한 조건이었다.

이쪽을 향한 국왕의 웃음이 살짝 씁쓸해졌다.

"노리는 건 드래곤 뼈인데 흔드는 미끼는 노동 면제권이라. 자꾸 그런 식으로 본심을 슬쩍 내비치는 의도가 뭐지?"

"쉬고 싶사옵니다, 전하."

"하.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이루어지건 아니 되건, 그저 솔직한 바람일 뿐이옵니다."

"하지만 좀처럼 이루어질 수 없을 바람인 것도 알고는 있겠지?"

"야무진 꿈 하나쯤은 꿀 수 있게 하여주소서, 전하."

"꾸는 것은 자유니라. 어쨌건-"

국왕이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말했다.

"드래곤 뼈 한 덩이라. 그게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는 알고서 감히 바라는 것인가?"

"물론이옵니다, 전하."

국왕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고 잽싸고도 뻔뻔하게 대답했다.

"전하를 위하여 성심껏 일하는 제게 딱 어울리는 가치라 생각하옵니다."

"진심으로?

"예, 전하."

"하. 뻔뻔하기까지."

"송구하옵니다."

"...좋아. 꼬리뼈 한 덩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신 너무 큰 건 안 돼. 티가 안 나게 끝 부분으로 줄 것이야."

"성은이...."

"좀 덜 망극하지?"

나름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걸까.

국왕의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피어났다.

좀처럼 그녀에게서 찾아보기 희귀한 종류의 미소였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마차 한 대 크기는 될 것이니 충분한 양이리라 본다. 혹시 이 정도에도 만족을 못 하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이옵니다, 전하."

"좋아."

그렇게 국왕과의 협상(?)이 원만히 이루어졌다.

공사 발주 계약서를 작성했다.

함께 일하게 될 노르트 자작을 소개받았다.

"시종의 안내를 따라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야. 노르트 자작은 정원의 설계와 관리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자이니 그대와 함께 일하기에 손색이 없으리라 본다. 아, 그리고-"

예를 표하고 물러나려던 자신이었다.

국왕이 이쪽을 불러세웠다.

뒤늦게 뭔가 떠올린 듯 덧붙여 알려주었다.

"노르트 자작은 자신의 일과 성과에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지. 가능하다면 그런 그의 자부심을 이해해주도록."

 

 

...이라고 했던가.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로이드는 내심 쓴웃음을 삼켰다.

아까 국왕에게 저 말을 들을 때는 무슨 뜻인지 아리송했다.

한데 이렇게 노르트 자작과 통성명을 나누면서 보니까?

이젠 알 것 같았다.

'이 사람, 날 시기하고 있구나.'

딱 촉이 왔다.

노르트 자작은 이쪽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운 좋게 출세한 어린놈 주제에.'

...라고 말이다.

그 뒤로도 노르트 자작은 시종일관 까칠했다.

"뭐, 어쨌건. 소문난 젊은 설계자와 일을 하게 되었으니 기왕이면 하나만 물어봄세. 혹시 자네, 단독으로 정원을 설계하고 시공한 경험이 있는가?"

"아니요. 없습니다."

"쯧. 그런가?"

"예."

"그럼 곤란한데. 정원을 만든 적이 없으면서 그렇게 드높은 명성을 얻었다는 게 이해가 좀 안 되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말입니다."

"그랬던 건가? 흐음. 그럼 자네, 건설 시공에 뛰어든 것이 몇 년쯤 되었는가?"

"으음, 몇 년 되진 않았습니다."

"설마 10년도 채 안 되는 건가?"

"예."

"쯧쯧쯧. 그것도 곤란한데."

"어떤 점이 곤란하신 겁니까?"

"자고로 오랜 세월 쌓은 풍부한 경험이야말로 현장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안 그런가?"

"백번 옳은 말씀이십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예."

"그럼 자네, 내가 이번 시공의 총괄 지휘를 맡아도 불만이 없겠는가?"

"어이쿠, 아무렴요."

"정말로?"

"예."

"그러면 내가 이번 정원을 건설한 시공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텐데."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아이쿠, 물론입니다."

로이드는 진짜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일체의 가식도 없이.

진실한 진심만을 듬뿍 담아.

열렬하고도 적극적인 대환영의 미소를 싣고서.

노르트 자작의 의견을 반갑고도 행복하게 수용했다.

"어떻게 저 같은 신출내기가 감히 자작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 그렇긴 하지."

"맞습니다. 자작님께서 현명하신 겁니다. 저 같은 새파란 신출내기가 뭘 알겠습니까? 그저 몇 번 인상적인 시공을 했다고 얻은 명성은 거품일 뿐입니다. 자작님처럼 지긋하게, 묵묵히 쌓아온 실적이 진짜지요."

"어흠, 흠! 이 친구가... 뭘 좀 아는구만?"

"아이고, 아닙니다. 저야 그저 자작님 같은 훌륭한 선배들을 보며 현장에서 배워나갈 따름이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허, 허허허. 그런가?"

"예. 그래서 사실 자작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모쪼록 이번 시공의 총책임을 맡아주시면 어떠실까요, 라고 말입니다."

"그랬는가?"

"예. 제가 눈치 없게도 먼저 말씀을 드리질 못한 점이 오히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어흠! 무슨 그런 일로 죄송하기까지...."

"아닙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 진심입니다."

로이드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자작의 손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덥썩 잡고 흔들었다.

진솔한 눈동자로 자작과 시선을 맞추었다.

촉촉한 혓바닥으로 결정타를 넣었다.

"그러니 이번 시공, 자작님 같은 훌륭한 분을 보조할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허허허! 이거, 나야말로 잘 부탁함세. 크흠, 흠!"

자작의 40방 사포처럼 까칠하던 표정이 봄날에 눈 녹듯 확 풀렸다.

로이드의 사탕발림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으쓱.

주름진 입꼬리에 주체할 수 없는 미소가 내걸렸다.

자작은 속으로 멋쩍음을 느꼈다.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군. 그저 어쩌다 운이 좋아서 일찍 명성을 얻은 친구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렇게 싹수없고.

버르장머리도 없이 거만한.

그런 젊은이일 줄로만 여겼었다.

한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인성도 훌륭하고 참으로 겸손한 친구였다.

'뜻밖이야.'

로이드를 보는 노르트 자작의 눈길이 누그러졌다.

업계의 경력 많은 선배를 존중할 줄 아는 젊은이라니.

명성을 한껏 얻었으면서도 겸손할 줄 아는 친구라니.

아까까지 못마땅하게 느껴졌던 로이드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아까는 뺀질뺀질한 인상으로 느껴졌었다면?

지금은 참으로 영민하게만 보였다.

게다가 이쪽의 손을 잡고서 조심조심 말하는 그 태도가 또 얼마나 공손하기 짝이 없는지.

"내 항상 자네 같은 친구와 함께 일을 한다면 소원이 없겠구만. 허허, 허허허."

자작의 웃음이 흡족해졌다.

그러한 자작의 변화에 로이드도 흡족함을 만끽했다.

'좋아. 훌륭해. 중간만 하기 작전, 성공.'

애초부터 국왕에게 노동력 착취를 당할 생각이 없던 로이드였다.

처음부터 원해서 맡은 일이 아니기도 했다.

한데 소개를 받은 자작이 이렇게 적극적이라니.

알아서 이번 일의 메인을 맡겠다며 나서준다니.

이쪽의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군대에서도 딱 그런 말이 있었지. 중간만 가라고. 너무 튀지 말라고.'

괜히 너무 잘난 모습만 보이면 더 많은 일을 떠맡게 된다.

하지도 않을 고생만 잔뜩 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보아도 그랬다.

처음 자대 배치를 받았던 때였던가.

중대 행정실에 긴장해서 각 잡고 앉아 있는데 행보관이 슬며시 다가왔더랬다.

여기 사회에서 삽질 좀 해본 놈 있느냐고 물었더랬다.

'그래서 뭣도 모르고 냉큼 손들었었지.'

거기에 토목공학과를 나왔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단지 잘 보여서 점수를 따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그게 무한 작업 노동의 지옥문을 셀프로 열어젖히는 멍청한 짓이었다는 사실을.

'젠장. 그때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 했어.'

그날 손만 들지 않았으면.

얌전히 모른 척 있었으면.

자신의 군생활이 노가다로 점철되는 참사는 안 생겼겠지.

로이드는 불현듯 떠오르는 멍청했던 과거를 가슴속에 사무치게 묻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예, 앞으로도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저 대신 일 많이 많이 해주세요.

그동안 저 좀 탱자탱자 놀 수 있게요.

로이드는 진심을 담아 미소 지었다.

그런 그의 속을 모르는 노르트 자작도 흡족하게 웃었다.

그렇게, 로이드는 뜻하지 않은 자발적 설계봇(?)을 얻었다.

설계봇의 효과는 다음날부터 곧바로 드러났다.

"흐음. 자네 혹시 측량에 조예가 깊은가?"

"측량 말입니까? 전 그냥 눈대중으로만 대충...."

"허허허, 측량을 눈대중으로만 한다고?"

"예."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르트 자작의 얼굴에 황당함이 묻어났다.

"자네처럼 실력 좋고 명성 높은 설계사가 맨눈으로 측량을 한다니, 이거 놀랄 일이로구먼. 그럼 자네, 이런 측량조준기를 써본 적이 없단 말인가?"

"아, 예. 어쩌다 보니...."

로이드는 멋쩍게 웃었다.

실제로 그는 이곳 세상에 와서 측량조준기를 써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

'측량 스킬이 있으니까.'

조준기를 쓰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고 정확하게 데이터를 따낼 수 있었다.

심지어 설계 스킬과 연동까지 되었다.

하지만 자작이 그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쯧쯧. 안 되겠구먼. 원래는 이거 아무한테나 알려주는 게 아니긴 한데. 자네 잠깐 이리로 와보게. 내 특별히 측량조준기 사용법을 알려주도록 하지."

노르트 자작이 측량조준기를 들어 보였다.

그의 조준기는 약 1.2미터쯤 되는 긴 지지대와 그 위에 놓인 십자 막대, 그리고 십자 막대의 네 귀퉁이에 매달린 실과 추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하는 것을 잘 보게. 이렇게 지지대를 세우고 십자 막대를 정렬하는 거라네. 이렇게. 이렇게. 보이나?"

"아, 예...."

"그럼 네 귀퉁이의 추를 평형 상태로 놓고. 이렇게."

"예."

"추의 정렬이 지면과 수직인지도 확인하고. 이렇게."

"예."

"자, 이 상태에서 가늠자를 보는 거라네. 이러면 조준기가 가리키는 지점이 원하는 각도로 교차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지. 어떤가. 대단하지 않은가?"

"예, 대단합니다. 조금 더 시범을 보고 싶은데요."

"허허. 내 실력에 감탄한 모양이로군?"

"예, 조금...."

"그럼 계속 구경하게. 내 정확하고 정교한 측량이 어떤 건지 옆에서 잘 보면서 느끼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라는 식이었다.

노르트 자작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드높은 만큼 의욕도 넘쳤다.

덕분에 로이드는?

'그냥 대단하다는 리액션만 좀 해주면 돼. 그럼 이 아저씨, 완전 신나서 혼자 다 해결해주잖아?'

편해도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지금껏 치른 그 어떤 시공보다도 높은 행복지수를 만끽하는 측량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당분간 계속 이렇게 지내면 좋겠다고.

지금처럼 노르트 자작이 공사를 싸그리 도맡아주면 좋겠다고.

'그동안 난 왕도에서 여유로운 수도권 라이프를 즐기면 되는 거거든. 그러다가 공사 다 끝내면? 용가리 통뼈, 아니, 드래곤 꼬리뼈만 한 덩이 챙겨서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는 거지. 딱 좋아. 정말 딱 좋아.'

모름지기 세상 모든 공짜는 다 옳은 법이다.

로이드는 365일 공짜 호캉스 티켓을 따낸 자의 미소를 머금었다.

 

 

- 감히... 내 꼬리뼈를 어쩌고 저째?

 

덜그럭.

 

이곳은 마젠타노 왕실 깊은 곳의 보고.

왕실이 보유한 가장 귀한 국보가 보관된 장소.

그 드넓고 호화로운 공간의 중앙에 놓인 거대한 무언가가 들썩였다.

 

덜걱... 덜걱....

 

들썩임은 결코 크지 않았다.

얼핏 보면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소했다.

하지만 들썩이고 있는 물체의 정체는 그리 사소하지 못했다.

드래곤의 머리뼈였기 때문이었다.

 

- 이 새로운 몸에... 적응만 끝나면.... 내 영이 정착되면.... 그러면....

 

감히 자신을 토벌하고 벤 국왕도.

그런 국왕에게 아첨하던 젊은 설계사 놈도.

 

- 모조리....

 

덜그럭....

 

간헐적으로 덜그럭대는 드래곤의 머리뼈.

그 덜그럭거림 속에 시커먼 집념이 배어났다.

214화. 그의 꿈은 월급루팡 (2)

 

 

아프다.

억울하다.

조금만 더.

며칠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모든 계획이 예정대로 실현됐을 텐데.

 

-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 그 가증스러운....

 

흑마법사 타르가는 원망스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차갑게 번득이던 국왕 알리시아의 눈동자.

그 눈빛만큼이나 섬뜩하게 자신의 목을 파고들던 검날.

차갑던 그 감각이 생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렇게 일검에 잘린 자신의 목.

머리가 허공에 떴다가 바닥에 떨어져 공처럼 구르던 순간의 더럽던 기분.

하지만 그런 기분과는 아랑곳없이 최후의 비책을 발동해야 했던 마지막 몇 초의 다급함.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마지못해서.

정말로 어쩔 수가 없어서.

이것 말고는 진짜 방법이 없어서.

죽음으로 치닫던 자신의 육체를 포기하고 이 거대한 뼈다귀로 영혼을 옮겨 버린 지금도 그랬다.

분했다.

치가 떨렸다.

그래서 인내하자고 다짐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몇 달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런다면 모든 복수가 바람대로 실현될 터다.

 

- 내 영이 정착되기만 하면....

 

호화로운 보고에 보관된 드래곤의 뼈.

그 거대한 두개골이 어두운 원념을 담아 미미하게 덜그럭, 움직였다.

 

 

"자네는 정원 설계를 도맡아본 적이 없다고 했었지, 아마?"

"예, 어쩌다 보니."

또 시작이다.

로이드는 멋쩍게 웃으며 생각했다.

노르트 자작이 자랑스러운 미소를 흠뻑 머금었다.

"괜찮네. 부끄러워할 것까진 없어. 어차피 자네는 아직 경력이 길지 못하니까. 오히려 이번이 좋은 경험을 할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저야 자작님만 믿고 있지요."

"허허허, 그런가? 이거, 너무 띄워 주면서 나한테만 일감을 떠넘기는 느낌인데?"

"앗, 들켰습니까?"

"훤히 보인다네, 이 사람아."

"그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정원 설계 분야에서 제가 어떻게 감히 자작님과 실력을 겨룰 수 있겠습니까."

"허허, 이 친구가 말을 해도 참...."

자작의 잇몸이 미소 속에서 만개했다.

손사래를 치는 몸짓과는 달리 절대로 싫지 않은 표정이다.

그럴수록 로이드의 감언이설(?)이 더욱 촉촉하고 쫄깃해졌다.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그러니 이참에 제대로 자작님의 설계를 곁에서 보며 많은 걸 느끼고 싶습니다. 자작님의 말씀처럼 정말로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요."

"허허허. 이 친구 이거, 내 설계 기법을 훔치겠노라 제대로 작정했구만?"

"원래 후배가 이렇게 크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어, 참 신기해. 이런 말을 해도 어째 밉지가 않아."

"아닙니다. 자작님께서 워낙 너그러우셔서 절 좋게 보아주시는 덕분이죠."

"그런가?"

"옙."

"허허허, 참!"

자작이 연신 흐뭇하게 껄껄 웃었다.

그리고 작업대 위로 종이뭉치를 착착 펼쳤다.

"그럼 자네, 이것 좀 보겠나? 내가 어젯밤 정원의 큰 틀을 좀 생각해보았는데 말일세."

"벌써 기초 설계까지 시작하신 겁니까?"

"미룰 이유가 없으니까."

노르트 자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 땅이, 정원으로 꾸며질 공간이 내게 자꾸만 부탁하는 것 같다네. 빨리 아름답게 만들어달라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일세."

"...."

"그래서라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난 이 과정이 참으로 즐겁네. 가슴 떨리고 행복하지.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저 공간에 숨겨져 있던 아름다움과 균형, 조화가 내 손에 의해 조금씩 발굴되는 듯한 이 과정이 말일세."

도면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노르트 자작.

그런 자작의 옆얼굴을 보며 로이드는 문득 처음으로, 그가 멋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정원 설계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단지 돈을 위해서.

혹은 두둑한 대가를 위해서.

속물처럼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자신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 더 알차게 총대 맡길 수 있겠구나.'

일을 더 많이 맡기고 감탄해주자.

그러면 이 사람의 행복지수는 힘차게 쭉쭉쭉 지붕킥을 하겠지.

동시에 나도 편하게 월급 루팡을 할 수 있겠지.

'이게 진정한 상부상조, 윈윈이 아니면 뭐겠어!'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더욱 양심의 가책 없이 노르트 자작을 추켜세웠다.

노르트 자작은 진정 행복해진 얼굴로 측량에 이어 설계까지 떠맡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작에게만 모든 일을 맡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본격적인 정원 설계가 시작되고 보름쯤 지났을 무렵.

노르트 자작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후우, 이거 고민되는구만."

"예?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동안 이쪽이 너무 노골적으로 일을 떠맡긴 걸까.

그래서 마침내 자작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걸까.

로이드는 살짝 걱정하며 물었다.

다행히 자작의 고민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번 시공에 국왕 전하께서 특별히 주문하신 수로 때문일세."

"수로 때문에요?"

"그렇다네. 자네도 기억하겠지? 왕도를 관통하는 마제나 강. 그 강에서 물을 끌어와 정원에 수로를 조성하라고 전하께서 이르시지 않으셨는가."

"예, 그랬지요."

"거기에 최대 50인까지 태울 수 있을 선박이 수로를 여유롭게 통행하며 전하의 조각상과 드래곤 뼈대를 감상할 수 있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시었고."

"예, 저도 기억합니다."

"그래서라네. 이게, 흐음, 수로를 놓는 것까진 좋은데...."

"혹시 수로 설계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이쪽의 물음에 자작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강에서 끌어온 물이 정원으로 들어오는 수로의 입구 지점, 그리고 정원을 돌고 빠져나가는 출구 지점 사이의 수위차가 생각보다 상당해."

"물의 흐름이 예상보다 빨라질 거란 말씀이시군요."

"그래, 바로 그걸세."

자작이 피로가 덕지덕지 쌓인 눈가를 매만졌다.

"유속이 생각보다 너무 빨라. 물론 배를 띄울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이대로면 여유로운 정원 감상 같은 건 포기해야 할 걸세."

"흐음, 확실히 그렇겠네요."

자작이 가리키는 도면을 보며 로이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수로 양 끝단의 수위차가 생각보다 컸다.

'이건 그냥 큰 정도가 아니라 거의 25미터는 되겠는데?'

한데 이런 수로에 배를 띄우면?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건 유람선이 아니라 놀이공원 후룸라이드가 된다.

아름다운 정원 감상?

웅장한 석상과 드래곤 뼈대를 보며 감탄?

그딴 여유는 꿈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다들 뱃멀미로 사방팔방 토하느라 바쁘거나, 혹은 때아닌 스릴을 만끽하는 본격 그랜드캐년 급류 관광이 되겠지.'

생각을 정리한 로이드가 물었다.

"그럼 수로 자체를 길게 늘이면 어떻겠습니까?"

그나마 제일 간단한 해결책이 될 터다.

가파른 산지에서 내려오는 도로를 일부러 빙글빙글 헤어핀 코스로 만들 듯이.

그렇게 수로의 길이를 최대한 연장하면 유속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자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이 아닐세."

"그 방법에도 문제가 있는 겁니까?"

"그렇다네. 아름답지가 않아."

"예?"

"수로가 너무 산만하게 펼쳐져. 이렇게 큰 정원에는 구역마다 테마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수로를 너무 늘리면 수로에 할당된 공간이 모든 테마를 침범해 버려. 그래선 안 돼."

"그럼 쌍여닫이식 마이터게이트 갑문을 쓰면 어떨까요?"

"...뭐?"

노르트 자작이 멈칫했다.

쌍여닫이식?

마이터게이트?

의아해하는 그를 향해 로이드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사실 그렇게 복잡한 개념은 아닙니다. 잠깐 펜 좀 써도 될까요?"

"어, 여기 있네."

"감사합니다. 그림으로 간단하게 원리만 그려드리자면 이렇게, 이렇게. 수로를 계단식으로 단절시켜서 만드는 겁니다."

"잠깐. 그러면 배는?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수로를 어떻게 통과하는 건가."

"그래서 갑문이 있는 거지요."

 

슥슥슥.

 

로이드가 싱긋 웃으며 갑문의 대략적인 모습을 그렸다.

"수로의 중간, 그러니까 계단의 끝 부분에 갑문을 만듭니다. 갑문으로 배가 들어오면요? 그럼 배가 들어온 길목을 틀어막습니다. 어항에 가두듯이 말입니다."

"그다음엔?"

"어항의 물을 빼면 되지요."

로이드가 슥슥, 그림 속 수면을 더 낮은 곳에 새로 그렸다.

"어항에서 물을 빼면 낮아지는 수면과 함께 배도 같이 내려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렇게 충분히 수면이 낮아졌을 때, 아까 틀어막은 쪽과 반대편 갑문을 열면 됩니다."

"...아."

자작이 눈을 반짝거렸다.

"반대편 갑문에서 수로의 '다음 계단'이 이어지는 거로군. 한 칸 아래의 수위를 지닌 수로 말일세. 맞나?"

"예,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간단한 원리다.

수로의 특정 지점에 수로를 차단할 격벽인 갑문을 만든다.

배가 갑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갑문을 닫으면?

갑문 안쪽의 공간이 네모난 어항이 된다.

그러면 어항 속의 물을 넣거나 빼서 수면의 높이를 조절한다.

수위가 높은 수로에서 낮은 수로로 갈 때는?

물을 빼면 된다.

낮은 곳에서 높은 수로로 올라갈 때는?

물을 넣으면 된다.

그렇게 높이가 다른 양쪽 수로에 맞추어 물을 넣고 빼면 된다.

말 그대로 선박용 엘리베이터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마치, 프랑스 파리의 생 마르탱 운하(Canal Saint Martin)에 있는 갑문처럼 말이다.

"물론 갑문 자체가 수압을 버텨야 하니까 무작정 크게만 만들 수는 없겠죠. 대략 제 계산으로는 갑문 하나당 3미터 정도씩은 수위를 조절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면 그런 갑문을 수로 곳곳에 설치하면 된다는 건가?"

"예. 그러면 수로 전체의 유속을 매우 완만하게 유지하면서도 관광선의 운항을 여유롭게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겠군. 더불어 배를 타고 정원을 구경하는 승객들은 갑문이 작동하는 모습에도 넋을 빼앗길 듯해. 그럼 갑문 내부를 아름답게 꾸미면 되겠군. 물이 빠지고 갑문 안쪽 면이 드러나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을 제대로 사로잡을 수 있도록 말일세."

"...어, 그건 저도 생각 못했던 부분인데요."

"그런가?"

"예. 정말 거기까진 생각 못했습니다. 역시 자작님이십니다."

"허허, 이 친구 겸양은. 허허허."

노르트 자작이 껄껄 웃었다.

동시에 그는 내심 감탄했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로이드를 보았다.

'이 친구, 역시 날 배려하고 있는 거로군.'

사실은 처음 만날 날, 자신에게 공손히 굴던 때부터 느꼈던 터였다.

이 젊은 친구가 자신의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는 거라고.

괜히 나서서 아는 척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의 칭찬을 경계하며.

시종일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었다.

방금도 그랬다.

'갑문이라. 그걸 정원의 수로에 쓸 생각까지는 미처 못했어. 한데 내가 그 점에 무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말을 골라서 꺼내는 모습이었지.'

심지어 마지막에는 갑문을 꾸미는 아이디어의 공적을 이쪽으로 돌려주었다.

미처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물론 자작은 그게 로이드의 배려임을 알 수 있었다.

'갑문을 정원에 적용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그 정도쯤을 생각 못했을 리가 없지. 저건 명백히 이번 아이디어의 공적마저 내게 돌리려는 행동이야.'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작은 로이드가 밉지 않았다.

아니, 한편으로 기특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아마도, 사실은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날 테지만.

그걸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젊은 친구가 고마웠다.

동시에 은근한 선의의 경쟁심도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더 열심히 해야겠군.'

무작정 업계 후배의 호의에만 기대는 꼴사나운 꼴은 사절이다.

이쪽도 오랜 시간 쌓아온 경력과 능력을 보여줘야 할 터다.

그렇게 자작은 더욱 불타는 의욕을 다졌다.

그날부터였다.

총대를 멘 노르트 자작의 적극적인 주도.

그리고 로이드의 적당한 참여에 힘입어.

마젠타노 왕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정원이 본격적으로 설계되었다.

왕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시공이 시작되었다.

동원된 노동자의 숫자만 자그마치 5천 명이었다.

심지어 왕실 마법사들까지 소매를 걷었다.

강력한 마법이 땅을 헤집고, 뒤집고, 정돈했다.

수천의 일꾼들이 삽과 연장을 놀리며 땀 흘렸다.

거기에 로이드의 환상종도 가세했다.

"자, 알지? 파고, 까고, 걷어내고!"

"뽀, 방, 하, 꼬!"

뽀동이가 수로를 팠다.

방울이가 흙더미를 삼켰다.

하망이가 물을 담아와 연못을 채웠다.

꼬밍이는 수천 그루의 나무를 바쁘게 옮겼다.

한편으론 프론테라 영지에 연락하여 비벙이까지 불러왔다.

"비벙-!"

작업이 진행되는 내내 비벙이는 방울이에게 자신의 엄청난 힘과 지치지 않는 터프함을 어필하려 애썼다. 즉, 혼신의 열정으로 공사에 참여했다.

100미터 덩치의 환상종까지 적극적으로 가세하자 공사 속도가 놀랍도록 빨라졌다.

계절이 휙휙 바뀌었다.

단풍이 짙어졌다.

낙엽이 떨어졌다.

나뭇가지가 앙상해졌다.

새하얀 서리가 가지를 덮었다.

그렇게 첫눈 내리는 연말이 지나고.

모두의 나이가 한 살씩 많아지고.

하비엘이 그걸로 로이드를 또 놀려먹고.

로이드가 부들거리며 애써 썩소를 짓고.

아웅다웅하는 사이에 꽃망울이 맺히고.

목련 활짝 피는 초봄이 다가온 어느 날.

마젠타노 왕실이 국력을 대외에 드러내기 위해 만든 야심찬 쇼윈도, '테르미나 대정원'이 완성된 첫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그날, 봄철을 맞이한 왕도에 축제가 열렸다.

테르미나 대정원의 중심에 자리한 '왕의 진격로'와 그 끝의 메인 광장, '마젠타노의 쉼터'에서는 성대한 완공식이 열렸다.

우뚝 선 국왕의 석상.

석상을 향해 공손히 엎드린 몸길이 200미터의 드래곤 뼈대.

웅장한 위용에 완공식에 참석한 모두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완공 기념 연회가 이어지는 내내.

드래곤 뼈대에서 은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감지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덜그럭....

 

드래곤의 두개골이 미약하게,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확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15화. 성대한 완공식 (1)

 

 

"자, 신사 숙녀 여러분, 모두 여길 보십시오. 이렇게 레버를 당기면 갑문의 주수구가 열리고 물이 빠집니다."

 

덜그럭!

 

갑문 관리원의 설명과 함께 레버가 당겨졌다.

철컥대는 금속성 소음과 함께 갑문 내부의 도르래가 돌아갔다.

주수구가 열렸다.

갑문의 물이 빠지며 수위가 내려갔다.

"어엇? 진짜다. 물이 빠지잖아?"

"세상에. 무슨 이런 장치가 다 있담?"

갑문에서 대기 중이던 소형 유람선도 낮아지는 수면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유람선의 승객들이 저마다 신기한 눈길로 갑문 내부를 둘러보았다.

정사각형의 거대한 수조처럼 생긴 갑문 내부.

수위가 내려가자 부조로 새겨진 갖가지 조각이 드러났다.

까마득한 과거, 왕성을 뽑던 드래곤.

드래곤의 투표로 선출된 임시 국왕.

임시 국왕이 늙자 탐욕을 드러내던 야심가들.

야심가들의 내전에 의해 불길에 휩싸인 왕도.

그때 나타난 한 사람의 영웅 같은 기사.

늙은 임시 국왕을 구했다.

야심가들을 몰아냈다.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렇게 임시 국왕의 공주를 반려자로 맞아들이고.

마침내 이곳을 왕도 마젠타로 선포하며 새 왕조를 열었다.

"저거, 우리 왕국의 건국 설화 아니오?"

"저기 저 기사, 건국시조인 영웅왕 미카엘 경 같은데?"

"투구에 꽂은 커다란 꽃으로 봐서 확실한 듯하구려."

"저 꽃, 영웅왕께서 젊은 시절에 드래곤과 맺은 약속의 증표였다죠?"

"바로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 왕가의 상징으로도 쓰이는 꽃이 아니겠습니까?"

갑문 내부에 새겨진 건국 설화의 조각.

그 예상치 못한 장관을 본 승객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떠올랐다.

번영하는 왕국의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한 승객들의 애국심은 수로를 따라 흘러간 여객선이 정원의 중심에 다다랐을 때 절정에 달했다.

"드, 드래곤이다...."

"진짜 드래곤의 뼈예요, 저거?"

"그런 것 같소. 그런데 저건... 설마 석상이오?"

"석상? 어디요?"

"엎드린 드래곤 뼈대 앞쪽 말이오."

"...아, 진짜로 있네요!"

"아무래도 저거, 국왕 전하의 모습인 거 같은데."

"마치 드래곤을 무릎 꿇린 것 같아요."

"멋지다...."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린 드래곤.

그 앞에 우뚝 선 국왕 알리시아의 석상.

웅장하고도 절묘한 조화를 품은 대작이었다.

보는 이를 절로 압도하는 규모와 힘이 느껴졌다.

소형 유람선이 그 바로 앞을 지나치며 석상과 드래곤 뼈를 올려다보도록 물길이 놓였기에, 그러한 압도감이 더욱 극적으로 피부에 닿았다. 아니, 꼭 자신이 드래곤과 국왕이 있는 현장의 일부가 된 느낌마저 받았다.

위대한 역사를 체험하는 기분.

극적인 순간의 일부가 된 듯한 일체감.

유람선 투어는 승객들의 애국심을 더없이 고취시켰다.

그 상태의 승객들이 선착장에서 내렸다.

선착장은 완공식 연회장과 곧바로 이어져 있었다.

즉, 왕도의 귀족 승객들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최고인 상태에서 연회에 참석하게 된 셈이었다.

물론 그 틈바구니에 은근슬쩍 끼어들어 있는 로이드의 국뽕(?)도 최고치에 다다라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 뷔페라니. 마젠타노 왕실 만세. 국왕 누님 만만세.'

정원의 중심 공간인 '마젠타노의 쉼터'에 마련된 드넓은 연회장.

더없이 호화로웠다.

지금껏 이 세계에서 제법 연회에 참석해본 로이드의 눈높이로 봐도 그랬다.

그야말로 호화로움의 끝판 대장 같은 느낌이었다.

'아힌샤에서 돈지랄 벌였던 때보다 더한데, 이건?'

정말로 온갖 음식이 다 있었다.

그게 모조리 다 맛있었다.

월급 탈탈 털어서 사온 트리플 플러스 최고 등급 한우처럼.

어떤 음식이든 혀에 올려놓자마자 아주 그냥 미각 세포에 대자연의 신비를 선사하며 사르르 녹아내렸다.

심지어 그게 다 공짜였다!

"그래서, 로이드 님은 이런 음식이 좋으십니까."

"어, 당연하지."

로이드는 이름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맛있는 해물 파스타를 후르릅 흡입하며 대꾸했다.

그리고 물음을 던져 온 하비엘을 향해 되물었다.

"당연히 좋지. 공짠데 왜 싫어해?"

"...."

"뭐해. 얼른 먹어. 모르겠으면 외워라. 이럴 땐 무조건 먹는 게 남는 거야."

"별로...."

"안 내키냐?"

"예."

"어째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굳이 이렇게 호화로운 음식을 위해 돈을 낭비해야 하나 회의감이 들어서입니다."

로이드가 앞에 두고 있는 접시.

그 접시 가득 쌓인 음식을 보며 하비엘이 말했다.

"지나치게 귀합니다. 쓸데없이 고급스럽습니다. 비효율적으로 비쌉니다. 그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마련할 돈으로 훨씬 많은 양의 곡식과 빵을 사들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하비엘의 눈빛에 서려 있는 희미한 불만이 느껴졌다.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하. 이런 호화로운 식사를 조금 포기하면 왕도의 많은 사람이 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거란 뜻인 거지?"

"예."

"뭐, 네 말도 틀린 건 아니긴 한데. 그런데 어쩌냐."

"어쩌냐니요."

"어차피 네가 안 먹는다고 여기 음식이 남아서 평민들에게 돌아가진 않을 거잖아."

"...."

"우리 돈 쓴 것도 아니야. 왕실에서 준비하고 시행한 연회야. 이 자리의 격에 맞게 준비한 음식인 거고."

"그래도 이렇게 너무 호화로운 행사는...."

"꼭 필요하지."

하비엘이 멈칫했다.

로이드가 연회장을 슥 둘러보았다.

"저기 볼래? 저 사람들, 왕도의 귀족들이지?"

"예,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 저쪽 사람들은?"

"외국인 같습니다."

"맞아. 인접국의 외교 대사로 보이네. 그래서야."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행사는 반드시 필요하지. 특히나 국가의 자금을 쏟아부어서 거대하고 웅장한 공사를 치러낸 직후라면 더더욱."

"어째서인 겁니까."

"이곳 자체가 철저하게 기획된 거창한 쇼윈도나 다름없으니까."

로이드가 광대하고도 꼼꼼하게 만들어진 정원을 둘러보았다.

하비엘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쇼윈도라면...."

"그래, 보여주기 위한 거."

"설마 국내외에 국력을 과시하는 행위라는 겁니까."

"당연하지."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이런 정원을 아무나 만들겠냐. 이 정도 규모의 공사를 무리 없이 치러낸다는 것 자체가 그만한 자본력이 있다는 뜻이고, 물자가 풍부하다 못해 넘쳐난다는 방증이며, 그만큼 부강한 군대를 동원하고 뒷받침할 능력이 있다는 걸 만방에 증명하는 행위인 거거든."

사실이었다.

즉, 이런 공사는 겉보기와 달리 절대로 허세나 사치가 아니었다.

이 정도의 대규모 공사는 왕가의 실질적인 국력을 가늠할 수 있을 간접적이고도 명확한 척도가 되니까.

실제 지구의 역사를 봐도 그랬다.

이번 테르미나 대정원과 비슷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 그랬다.

그 사례를 본받아 지었던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의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도,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의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도 그랬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쇼케이스나 다름없는 거다.

국내와 대외 모두에 왕가의 힘과 저력을 알리는 커다란 행사 말이다.

"그러니까 즐겨. 필요해서 벌이는 행사고 사치야."

"후우, 하지만...."

"어? 이거 아힌샤 특산 야자 열매다."

 

흠칫.

 

볼멘소리를 꺼내려던 하비엘이 멈칫했다.

아힌샤에서 맛봤던 특산 야자 열매.

그 달콤알싸한 맛이 절로 떠올랐다.

로이드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낚였네?"

"...."

"거 봐. 좋아하는 음식 있으면 서슴없이 흡입할 거면서."

"아닙니다. 단지 재채기가 나올 뻔해서 참느라 몸에 힘을 주었던 것뿐입니다."

"정말로?"

"예."

"진심으로?"

"예."

"그럼 눈앞에 그 야자 열매가 놓여도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

"당연히...."

"어이쿠, 실물이 여기 있네."

로이드가 지나가던 시종의 접시를 냉큼 낚아챘다.

접시엔 정말로 아힌샤 특산 야자 열매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로이드의 미소가 한결 사악해졌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

와락 굳는 하비엘의 얼굴.

그걸 보자니 또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녀석을 골려먹을 수 있었기에?

아니었다.

'방금 보인 반응들, 확실히 하비엘 녀석답네.'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는 기사.

눈앞의 권력보다 멀리 있는 올바름을 보다 추구한 영웅.

새삼스럽게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으며 무수히 보았던 하비엘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래. 맞아. 매일 붙어 다니느라 은근 까먹는 사실이긴 한데, 원래 하비엘은 이런 녀석이었어.'

호화로운 연회보다는 모닥불 앞에서의 대화를.

진귀한 음식을 마련할 돈으로 빵 수십 포대를 사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행동을.

스스럼없이 선택하고 후회하지 않을 녀석이었다.

그런 모습은 소설 속에서 그랜드 마스터가 되고도 변하지 않았더랬다.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부와 권력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겠지. 아니, 정말로 대놓고 막 나가는 거라면 왕국 하나쯤은 얼마든지 세울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러나 하비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여간 대단한 녀석.'

로이드는 싱긋 웃으며 특산 야자 열매를 집었다.

하비엘을 향해 내밀었다.

"뭘 그렇게 정색하고 있냐. 먹어."

"...."

"뭐라 안 할게. 먹으라니깐?"

"...."

"야, 맹세보다 중요한 게 먹는 거거든?"

"맹세, 한 적 없습니다."

결국, 하비엘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피어났다.

녀석에게 야자 열매를 건네주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덜커덕, 쿠아앙-!

 

"...!"

너무나 갑자기, 요란하고 묵직한 굉음이 울렸다.

깜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헐."

정원 중앙을 장식하듯 엎드려 있던 드래곤의 뼈대.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공룡 화석처럼 조립되어 있던 그 뼈의 두개골이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뭐지.'

황당했다.

저거, 저렇게 쉽게 분리되고 떨어질 물건이 아닌데.

설치하는 모습을 내가 직접 봤는데.

강철로 만든 사슬과 지지대로 엄청 엮어놓은 건데.

'그나마 깔린 사람이 없어서 다행인 건가.'

하필이면 쇼케이스가 되는 행사에서 저런 사고라니.

로이드는 내심 혀를 차며 그쪽 현장을 지켜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연회장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국왕 알리시아가 벌떡 일어나 좌우에 무어라 명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두 사람이 상석으로 불려 가는 광경도 보였다.

석상과 드래곤 뼈대 설치를 담당했던 조각사.

그리고 정원 공사의 총책임을 맡았던 노르트 자작이었다.

'에휴. 착한 자작님, 제대로 시말서 쓰시겠구만.'

상석으로 불려 가 안절부절못하는 노르트 자작의 뒷모습을 보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아저씨, 아주 살짝 깐깐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한테 잘해줬는데.'

자작이 자진해서 정원 대부분의 설계와 시공을 도맡아주었다. 덕분에 자신은 수로와 갑문의 시공에만 신경 쓰면 되었다.

덕분에 자신은 공사기간 내내 얼마나 편했던가.

'게다가 이번 공사 끝낼 때 저 아저씨, 감격해서 울기까지 했었는데.'

이 정원이 자기 인생의 최고 역작이라고 했던가.

드디어 왕국의 건설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노라고.

이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라며 펑펑 울었더랬다.

한데 그 역작의 완공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이런 사고가 터질 줄이야.

'쯧쯧쯧. 이래서 사람은 함부로 총대를 메면 안 돼.'

로이드는 한편으로 안타까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새삼 정원 공사의 총책임을 맡지 않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때였다.

"로이드 님."

"어?"

하비엘이 이쪽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야자 열매 더 달라고?"

"아닙니다. 저 드래곤 뼈대 말입니다."

"뼈대? 그게 왜?"

"조금 이상합니다."

"...."

하비엘의 표정과 눈빛이 딱딱하고, 진지하게, 굳어 있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상황과 분위기였다.

이거, 언제 겪었더라.

잠깐 머리통을 굴려보니 금방 떠올랐다.

'아 맞다. 크레모에서. 그때도 완공식이었지.'

인어 동상 건설을 기념하던 해상 완공식.

그 완공식 연회장을 덮쳤던 기가티탄.

그때도 하비엘이 최초로 위험을 감지했던가.

거기까지 떠올리자 문득, 쌔한 기분이 들었다.

"또 뭔데. 설마 저 드래곤 뼈대가 이상하다 못해 수상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그렇게 말씀드리려던 거, 맞습니다."

하비엘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래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아, 진짜.

진심으로 완공식이 문제다.

생각해보면 지난번 왕도에서 현수교 완공식 때도 국왕 시해 사건이 벌어졌었는데.

우연의 일치라고만 보기엔 너무 고약하다.

이 정도면 완공식이 만악의 근원이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동안 하비엘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전부터 느낀 건데, 뼈대 내부에서 마나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뭐? 마나가?"

"예. 원래 드래곤의 뼈에는 대량의 마나가 깃들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거, 죽은 상태라서 흐름이 멈춘 마나잖아."

"예. 아까까지는 분명 그랬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머리뼈가 떨어진 무렵부터...."

"흐르기 시작했다고?"

"확인해보시죠."

"...."

새삼 떠올리는 사실이지만.

아스라한 심법은 마나의 감지와 흡수 및 운용에 특화된 기술이다. 또한, 하비엘은 그 아스라한 심법의 창시자이며 최고의 전문가다.

한데 녀석이 마나의 흐름을 잘못 감지했을 리가 없다.

"...."

로이드는 스멀스멀 피어나는 쌔한 느낌을 받으며 세 갈래 써클을 회전시켰다.

 

키이이이잉...!

 

아스라한 심법이 운용되며 주위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국왕의 강렬한 마나.

뜻밖의 사태에 술렁이고 있는 사람들의 마나.

스치는 바람에 스며 있는 자연적인 마나.

그리고....

"젠장."

드래곤 뼈대 속 마나의 흐름을 감지한 순간.

로이드는 서늘하게 돋은 소름에 사로잡혔다.

확실하다.

하비엘의 말이 맞았다.

정말로 드래곤 뼈대 내부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심지어, 감지하는 동안에도 그 흐름이 급속도로 강해지는 게 확연히 보였다.

매우 노골적이고 폭발적인 흐름이었다.

 

꿀꺽.

 

그러니까 이건, 뭔가 있다.

이 장소에 있는 누구도 예상치 못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려는 거다.

그 사실을 예감한 순간.

예감을 넘어서 확신한 순간.

'어오, 이놈의 얼어 죽을 완공식 진짜!'

로이드는 망설일 것도 없이 즉각 움직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단 사람들을 피하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즉시 안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아직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위협.

그 위협으로부터 모두를 멀리 보내기 위해.

비벙이를 꺼냈다.

"비벙아?"

"비벙?"

"이번 공사 끝난 뒤로 억지로 작아진 채로만 지내야 해서 갑갑했지?"

"비버벙? 비벙?"

"아냐, 넌 갑갑했을 거야. 그러니까 이것 좀 먹자."

"비벙?"

왕도에서 지내느라 요즘 파란 해바라기씨를 매일 먹고 지내야 했던 비벙이. 그랬던 녀석에게 빨간 해바라기씨를 내밀었다.

"나 믿지?"

"...비벙?"

"아님 방울이는 믿어?"

"비벙!"

방울이라는 한마디에 일단 야물딱지게 끄덕.

"좋아. 그럼 이거 먹고 나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녀석에게 해바라기씨를 먹였다.

그 즉시 멀리멀리, 사람이 없는 공간으로 던졌다.

이윽고.

 

퍼펑!

 

"비벙-!"

몸길이 100미터짜리 비버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장 한쪽에 우뚝 서서 포효했다.

쿵쿠쿵 캉캉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그 효과(?)는 확실했다.

"꺄아아아아악-!"

어느 귀부인의 찰진 비명을 출발 호루라기 삼아.

기겁한 연회 초청객 모두가 민족대이동을 방불케 하는 신속한 대피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216화. 성대한 완공식 (2)

 

 

"꺄아아악!"

"저, 저거! 저거 뭐야!"

"도망쳐! 아니, 아니, 비켜요 좀!"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렸다.

하나같이 화들짝 놀라고 경악한 채.

남자들은 셔츠 깃 휘날리며.

여자들은 구두마저 서슴없이 벗어 던지고는.

모두가 민족대이동을 방불케 하는 재빠른 대피를 선보였다.

그렇듯 도망치는 연회 참석객들을 향해 비벙이가 포효했다.

"비벙-!"

우렁찬 외침에 모두의 도주가 10퍼센트쯤 빨라졌다.

무리도 아니었다.

'저거, 대체 무슨...!'

사람들은 두려움과 당혹감을 느꼈다.

자신은 그저 연회에 참석해 있었을 뿐인데.

맛있는 음식과 향긋한 와인을 즐기고 있었던 건데.

그저 아름답고 웅장한 대정원을 구경하며.

국왕의 연회에 초청받은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비슷한 지위의 사람들과 교분을 다지고 있었던 것뿐인데.

"비버벙-!"

"...!"

그랬던 자신이 왜 저런 엄청난 덩치의 몬스터를 코앞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건지.

아니, 어째서 저런 거대한 몬스터가 갑자기 나타난 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픈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앞에 좀 빨리 뛰어요, 좀!"

"여기, 내 손 잡아!"

사람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달렸다. 썰물처럼 연회장을 벗어났다. 저만치 도망치고, 멀어졌다.

북적이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그만큼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후아. 이게 되네.'

솔직히 긴가민가했다.

비벙이를 꺼내면서도 이게 통할까 싶었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 중에 비벙이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제법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비벙이도 이 정원 공사에 참여했으니까. 엄청난 활약을 벌였으니까. 덕분에 왕도의 시민들 사이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으니까.'

조금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왕도에서 비벙이 등의 환상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있어 봤자 젖먹이 아기 정도가 유일한 예외가 될까.

그래서였다.

이 방법이 통할까 한편으로 불안했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연회장 밖으로 피하게 해주고 싶은데.

과연 비벙이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도망칠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단 질렀(?)다.

심리적인 충격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비벙이를 소문으로만 접하고 직접 본 사람은 얼마 없을 테니까.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에서라면 더더욱.'

큰 몬스터를 소문으로만 듣는 것과 눈앞에서 목격하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사진으로만 접하던 국내 최고층 빌딩을 직접 코앞에서 올려다보는 거?

그것보다도 더 심하게 다를 것이다.

비벙이가 움직이고, 포효하기 때문이었다.

'몸길이만 100미터야. 그냥 빌딩 하나 크기라고. 그런 녀석이 두 발로 일어서서 움직이고 포효하면? 아예 뱃살 출렁거리며 탭댄스를 쿵쿵 춰 대면? 일단 기겁하고 도망치게 되는 게 사람 심리지.'

그것이 로이드가 기대한 효과였다.

빌딩 크기 비버가 눈앞에서 훌라춤을 추는데, 멀리 떨어지고 싶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생각했다.

비벙이가 순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도?

다를 바 없으리라고도 여겼다.

'당연하지. 길들여진 북극곰이 있다고 쳐. 근데 그 녀석이 칸막이 없이 코앞에서 크워엉하고 포효하면? 속옷이나 안 적시면 다행인 거야. 설령 그 북극곰 앞발에 콜라가 들려 있더라도 그럴걸.'

어쨌건 그렇게 기대했던 효과가 제대로 먹혀들었다.

참석객 대부분이 예상보다 훨씬 기겁하며 도망을 쳐 주었다.

일부 사명감을 지닌 시종과 악사 몇몇을 빼고는 연회장이 싹 비워졌다.

대신 그 빈자리를 근위대가 채워 주고 있었다.

이쪽을 향해 삼엄한 눈길을 보내면서 말이다.

"아르코스 프론테라 백작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와 그를 따르는 기사는 즉시 무릎을 꿇고 지시를 따르도록."

권위적인 명령.

그보다 더 위압적인 눈빛.

근위대장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 앞에서 로이드는 쓴웃음을 삼켰다.

'내가 연회 중에 난리를 일으켰다고 여기는 거겠지.'

완공식 연회가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한데 이쪽이 난데없이 거대한 환상종을 꺼냈다.

무차별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그 서슬에 연회가 제대로 파토 난 것은 물론.

아마도 엄중한 문책을 받게 될 것이다.

로이드는 근위대장의 눈치를 살피며 비벙이를 불렀다.

파란 해바라기씨를 먹였다.

작아진 녀석을 안주머니에 챙겼다.

근위대의 명에 따라 고분고분 무릎을 꿇었다.

"이번엔 좀 따끔하게 깨지겠네.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면 말이지."

"...그렇다고 설마 비벙 경을 꺼내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곁에서 나란히 무릎을 꿇으며 하비엘이 투덜거렸다.

그런 녀석을 돌아보며 피식.

"사람들을 일사불란하게 대피시킬 다른 방법이 안 떠올라서."

"국왕 전하께 상황을 알리는 온건한 선택지는 없었던 겁니까."

"그건 전하한테 컨펌, 아니, 검토를 받아야 통하는 방법인 거잖아. 어떤 상황인지 설명에 설득까지 해야 하고. 느려. 어느 세월에 그렇게 절차 따지고 있냐."

하비엘과 거기까지 잡담을 나누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설명에 설득, 지금이라도 들어봤으면 하는데."

어느새 국왕 알리시아가 다가와 있었다.

불과 세 걸음 앞에서.

오연한 눈빛으로.

무릎 꿇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 눈길에서 노여움 등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당혹스럽군. 로이드 프론테라여. 짐이 아는 그대는 이런 만행을 함부로 저지를 인물이 아닐 터인데."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니, 송구하기 전에 이유부터."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가 허례허식을 잘라냈다.

로이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역시 국왕 누님.'

보통이 아닌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함부로 속단하지 않는다.

쉽게 평정심을 잃거나 흥분하지도 않는다.

대신 냉철한 두 눈을 빛낼 뿐.

로이드는 국왕을 향해 차분하고도 재빠르게 대답했다.

"예, 하오면 요점만 고하여 드리겠나이다. 지금 저기, 드래곤 뼈대 안쪽에서 심상치 않은 마나의 흐름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사옵니다."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고?"

"그러하옵니다, 전하."

"짐조차 느끼지 못한 것을 그대가?"

"정확히는 아스라한 경이 느꼈사옵니다."

"...."

하비엘을 돌아보는 국왕의 눈길이 잠시 굳었다.

아직 자신이 하비엘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걸 실감한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드래곤 뼈대 안쪽의 마나 흐름이 더욱 격렬해지는 중이니까.

"하여 감히 무리한 행동을 감행하였사옵니다."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피하게 하기 위함이었나."

"그러하옵니다, 전하."

"아울러, 이런 난리를 일으키면 병력이 이곳으로 집결할 거라는 계산도 덧붙인 거겠지. 맞나?"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직 송구하기엔 일러. 확인을 해야 하니까."

그녀의 명이 떨어졌다.

왕실 수석 마법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드래곤 뼈대 앞으로 다가가 마법 지팡이를 겨누었다.

한참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의 흐름을 감지했다.

그동안 로이드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거 시험 답안지 채점 받는 기분인데.'

물론 이건 만점 답안지다.

아스라한 심법을 지니지 못한 국왕과 달리, 자신은 멀리 떨어져서도 드래곤 뼈대 속의 마나 흐름을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느껴졌다.

'점점 더 흐름이 격렬해지고 있어.'

거의 살아 있는 생명체의 마나 같았다.

심장이 뛰고.

혈맥이 펄떡이고.

호흡을 들이마시며.

마침내 눈을 뜨고 움직이는.

"...."

설마 저거, 진짜로 움직이게 되는 걸까.

그럼 난 어떡해야 하지.

불현듯 쌔하게 몰아닥치는 예감.

그 속에서 로이드는 잠깐 고민에 휩싸였다.

만약 정말로 쌔한 예감이 맞는 거라면?

답은 하나이리라.

'당연히 도망쳐야지.'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속 설정 하나가 떠올랐다.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나 움직이는 언데드 몬스터.

그중에서도 최강의 존재가 둘 있다고 했다.

'헬나이트. 그리고 본드래곤.'

드래곤의 뼈대는 그 자체로도 마력 덩어리다.

한데 그걸 원천으로 뼈대가 되살아나 움직이는 거라면?

그게 본드래곤이다.

움직이는 재앙, 그 자체인 존재라고 언급도 되었더랬다.

'누가? 소설 속 하비엘이 그랬지. 아직 소드마스터였던 시절에. 그런 존재와 맞닥뜨리면 도망만이 살 길일 거라고.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그랜드마스터만이 본드래곤과 맞상대가 가능할 거라고.'

철혈의 기사.

특이하게도 이 소설 속 본드래곤은 보통의 드래곤보다도 강력했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간단했다.

그냥 드래곤이 일반인이라면?

본드래곤은 스켈레톤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의 일반인이 스켈레톤과 마주치면 당하기 일쑤이듯.

그냥 드래곤도 본드래곤과 마주친다면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드래곤 중에서도 전사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일부 개체들만이 본드래곤을 제압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로 만에 하나 저 드래곤 뼈대가 되살아나서 움직인다면?

본드래곤이 되어 활동을 시작해 버린다면?

'뒤도 보지 말고 도망치자.'

로이드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아울러 옆에 나란히 무릎 꿇고 있는 하비엘도 같이 데리고 도망치리라고 다짐했다.

'당연하지. 나나 하비엘이나 여기서 목숨 걸 이유가 없잖아.'

자신은 영웅이 아니다.

영화에서나 나올 슈퍼히어로도 아니다.

그저 유유자적하게 노후를 즐기길 바라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전투나 쌈박질에 재능?

그딴 거 별로 없다.

어찌어찌 위기를 헤쳐 오다 보니 아스라한 심법이며 마나하트를 보유하게는 됐지만, 그걸로 절세의 무력을 뽐낼 거라는 기대는 스스로도 하지 않았다.

'그냥 호신 수준인 거지. 고작, 딱 그 정도인 거야.'

한데 하물며 그랜드마스터나 대적이 가능할 본드래곤이 상대라면?

미련 없이 도망치는 것이 현명할 터였다.

심지어 양심에 가책도 없었다.

'여기 군대 있잖아. 국왕도 있잖아.'

나라 지키라고 있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있는 마당에 굳이 일부러 목숨 걸고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제발 이번엔 내 예상아, 틀려라.'

로이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왕실 마법사와 그 앞의 드래곤 뼈대를 쳐다보았다.

한편으로는 뼈대 속 마나의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제발.'

흐름이 더 격해졌다.

'아, 제발.'

더욱 거세지는 마나의 흐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 좀.'

국왕한테 문책당해도 좋으니까.

그냥 아무 사고 없이 해프닝으로만 지나가 주길.

내심 간절히 바라고 또 빌었다.

한데 그런 기도가 통한 걸까.

'...어?'

드래곤의 뼈대 속에서.

마나의 흐름 증폭이 멈추었다.

그러더니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피크를 찍고 나서 내려가는 비트코인 그래프처럼.

혹은 개고생 끝에 내 집 마련을 했더니 다음 달부터 집값이 쑴펑쑴펑 떨어지듯.

"...."

로이드는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하비엘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녀석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녀석도 느낀 거다.

'확실해. 마나의 흐름이 약해지고 있다.'

로이드는 무의식중에 미소를 머금었다.

느껴졌다.

드래곤 뼈대 내부의 마나 흐름이 언제 기세를 피워 올렸나 싶을 정도로 급속히 가라앉고 있었다.

왕실 마법사도 그걸 느낀 듯했다.

"전하.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이 고한 바대로 뼈대 내부에서 마나의 흐름이 감지되는 것은 맞사오나, 그 기세가 염려할 만큼 거세지는 않사옵니다."

"염려할 만큼은 아니라고?"

"그러하옵니다, 전하."

지팡이를 거둔 마법사가 공손히 답하였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사옵니다. 본디 드래곤의 뼈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워낙 풍부한 마나를 담고 있지 않사옵니까. 하여 그 풍부한 마나가 간혹 스스로 흐름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고 기록이 말해 주고 있었사옵니다."

"하면, 마나의 흐름이 감지되기는 했으나 특별히 위험하거나 이상이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하옵니다, 전...."

 

콰앙-!

 

마법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드래곤 뼈대 앞발이 움직였다.

단숨에 마법사를 짓뭉갰다.

"...!"

지면을 통해 달려오는 맹렬한 진동.

폭발적으로 피어나는 흙먼지.

그 속에서 머리를 치켜드는 드래곤의 뼈대.

본드래곤이 포효했다.

 

...!

 

그것은 소리 없는 포효였다.

발성 기관이 사라진 탓에 오로지 마나로만 발산하는, 그렇기에 더욱 위력적인 포효였다.

 

...콰아아-!

 

순수한 마나의 파장이 전방위로 질주했다.

테이블을 날려 버렸다.

단상이 박살 났다.

나무가 뽑혔다.

깨진 접시와 와인 잔이 수천 조각의 파편이 되었다.

반경 삼백 미터의 범위를 휩쓸었다.

"...그, 구으와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려가는 시종.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며 버티는 근위병.

그 마나의 폭풍 속에서 국왕 알리시아는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무슨!'

그녀의 눈길이 본드래곤을 향했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저 전리품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의 업적을 기릴 도구로만 여겼는데.

한데....

'설마.'

이건 우연이 아니다.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닐 것이다.

국왕의 머릿속에 의심과 의혹이 스쳤다.

지금까지 저 뼈대와 얽혔던 모든 기억을 맞추었다.

흑마법사들의 잔당을 토벌하고 가져온 드래곤 뼈대.

그걸 왕도 중심에 세운 자신.

그걸 기념하는 행사.

그 와중에 뼈대가 움직여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이 상황까지 모두.

그리고 마침내.

까마득한 높이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본드래곤.

놈과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속았구나.'

흑마법사 무리가 떠올랐다.

쉽게 토벌했노라고 여겼다.

대성공을 거두었노라 자평했다.

한데 지금 보니 그게 실수였다. 실책이었다. 자만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국왕 알리시아는 이미 땅을 박차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오러를 검에 싣고서.

자신의 실책을 스스로 지우려 움직였다.

 

투콱!

 

비호와 같은 돌진.

땅을 딛고 있는 본드래곤의 앞발.

그 발목을 향해 검을 흩뿌렸다.

오러가 흉흉하게 빛났다.

그리고 허무하게 퉁겨졌다.

 

터컹-!

 

"...!"

본드래곤의 발목뼈를 자르긴커녕 흠집도 새기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경악의 감정이 서렸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침착하게 외쳤다.

"로이드 프론테라여!"

이 사태를 가장 먼저 예견한 자.

그렇기에 이 순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

어쩌면 이 상황의 돌파구를 알려 줄 수도 있을 자.

좌우를 돌아보며 로이드를 불렀다.

그리고 곧,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

로이드는 이미 저 멀리,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217화. 국왕이 짊어진 것 (1)

 

 

"후우! 후욱!"

힘차게 숨을 마시고, 뱉는다.

호흡에 맞추어 다리를 뻗고, 박찬다.

밤 공기가 귓가에 광풍처럼 스쳐 간다.

그렇게 로이드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도주를 위해서였다.

'어오, 진짜 이거 실화냐.'

허리 높이 수풀을 훌쩍 뛰어넘으며 그는 넌더리를 냈다.

하여간 완공식이 문제다.

완벽하든, 화려하든, 성대하든.

일단 완공식을 열기만 하면 뭔가 반드시 사고가 터지고 사건이 벌어진다.

'이건 무슨 창의성 없게 빼다 박은 클리셰도 아니고 진짜!'

그는 치를 떨며 뒤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까만 밤하늘 아래 우뚝 솟은 회색 실루엣.

실로 거대한 드래곤 뼈대가 보였다.

본드래곤이었다.

날뛰고 있었다.

소리 없는 마나의 포효를 일으키며.

기다란 꼬리와 목으로 사방을 휩쓸고 있었다.

뼈대만 남은 채 활짝 펼쳐진 날개의 모습은 더욱 기괴했다.

마치 밤하늘에 새겨진 거미줄처럼 퍼덕거리고 있었다.

'대체 저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저 드래곤 뼈대.

국왕이 흑마법사 잔당을 토벌하고 얻은 전리품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이번 공사가 끝나면 꼬리뼈 한 덩이도 통짜로 얻기로 했는데.

'망할!'

이대로면 꼬리뼈를 얻기는 고사하고 왕도가 박살 날 판국이다.

물론 그럼에도 로이드는 불타는 사명감이나 숭고한 투지 같은 건 1그램도 느끼지 못했다.

'당연하지. 내가 저런 거랑 왜 싸워?'

싸우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아니, 목숨을 걸어도 될까 말까다.

누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거절이다.

그렇게 내심 다짐하며 로이드는 도주를 위해 계속 달렸다.

한데 아까부터 나란히 달리고 있는 하비엘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로이드 님, 어디로 달려가시는 겁니까."

"정원 밖으로."

"그럼 이제부터 어떤 작전으로 움직이고 대응하실 계획인 겁니까."

"...."

로이드는 달리는 와중에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아니,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녀석도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느냐는 듯한 눈빛까지 보내왔다.

'이 녀석.'

아무래도 이쪽을 좀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뭔가 거창한 작전이나 야물딱진 계획이 있어서 어딘가로 뛰어가는 중인 거라고.

그래서 이 상황에 대응할 뭔가를 할 거라고.

그렇게 지레짐작하고 있는 걸까.

'난 그런 놈 아닌데.'

아니, 그런 놈은 못 되는데.

일단 오해부터 좀 풀어야겠다.

로이드는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반문했다.

"대응이라니, 작전?"

"예."

"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작전 번호 36번?"

"예?"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인마."

"...."

이쪽을 돌아보는 하비엘의 표정이 굳었다.

굳었다기보다는 정색했다는 말이 어울릴까.

"로이드 님은-"

녀석의 목소리마저 아까보다 온도가 훅 내려간 게 느껴진다.

"언제나 이런 식인 겁니까."

"이런 식이라니."

"많은 이들이 위험에 처한 상황입니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 본인 한 사람의 안전만을 위해 서슴없이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겁니까."

"응. 맞아."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게 나빠?"

"...."

"그러고 보니까 우리 전에도 이런 비슷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지, 아마?"

"크레모에서였습니다."

"맞아. 기가티탄 때."

"당시에도 로이드 님은...."

"응. 도망치려 했었지. 지금처럼."

"...."

"이게 나쁜 거냐? 진짜?"

로이드는 진심으로 물었다.

재난과 사고를 맞이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람들.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소방관.

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경찰과 시민들.

정말로 존경받을 훌륭한 분들이었다.

이 세상의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난 그냥 평범해. 겁난다고, 이런 상황은.'

솔직히 말해서 개죽음당하기 싫었다.

그냥 편안하게만 살아가고 싶었다.

거창한 활약도, 영웅 같은 칭송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비엘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변한 곳이 없으시군요, 로이드 님은."

이쪽을 보는 하비엘.

녀석의 눈빛에 실망의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니, 실망이라기보다는 씁쓸한 기색이라고 해야 할까.

로이드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잖아. 앞으로도 쭈욱 이럴 거야."

"진심이신 겁니까."

"넌 내가 거짓말하는 걸로 보이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그럼 제 몫까지 편안하게 살아가 주십시오."

"...응?"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달리기를 멈추었다.

"뭐냐, 그 소리는."

녀석에게 물었다.

어느샌가 하비엘 녀석,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비장한 소리를 더없이 진지하게 꺼냈다.

"그동안 로이드 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나가 주십시오."

"어이."

"그리고 프론테라 영지에 계실 주군께 그동안 감사했노라고, 더 오래 곁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꼭 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야 인마?"

당황스러웠다.

왜 꼭 죽을 놈처럼 저런 말을 하는지.

어째서 이쪽이 부르는데도 대답도 않는지.

뜻 모를 희미한 미소만 짓고서 돌아서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드래곤을 향해 달려가 버리는 건지.

"...뭐냐. 저 오글거리는 대사는."

자리에 남겨진 로이드는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재난을 막기 위해 달려가는 것까진 좋은데.

굳이 저렇듯 과다한 비장함을 내보이는 건 대체 뭔지.

'하여간 소설 주인공들이란.'

저래서 문제다.

정의로움으로 무장한 것도 모자라, 사람 오글거리게 만드는 대사라니.

'뭐, 하비엘이야 원래 저런 녀석이니까.'

로이드는 하비엘이 뛰어간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미 녀석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쪽 방향에서 날뛰고 있는 본드래곤의 모습만 밤하늘 아래 또렷하게 보였다.

"...."

녀석, 설마 진짜로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로이드는 잠깐 떠오른 불안감을 털어내듯 다시 달렸다.

도주를 위해 달음박질을 서둘렀다.

'그래도 하비엘이니까.'

설마 잘못될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당연하지.'

소드마스터니까.

아스라한 심법까지 지녔으니까.

보통의 소드마스터보다 훨씬 강하니까.

체력, 탄탄한 검술의 기초, 기교, 다양한 기술의 변화와 응용,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까지.

모든 부분에서 가히 역사에 남겨질 천재 중의 천재니까.

어지간해선 잘못되진 않을 거다.

어지간해선 죽진 않을 거다.

어지간해선....

"어오, 진짜! 이눔 시키는 왜 그런 소리를 해가지고 사람 걱정되게!"

로이드는 버럭 소리쳤다.

어느새 뛰던 걸음마저 멈춰 버렸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려 본드래곤을 노려보았다.

'이대론 안 돼. 하비엘 그놈 그거, 죽을 거야.'

소설 속 하비엘의 대사가 또 떠올랐다.

본드래곤.

오직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야만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하비엘은?

그냥 소드마스터다.

그러니까 이대로 무모하게 본드래곤에게 맞서다간?

천재고 나발이고 간에 죽을 거다.

'녀석, 어지간해선 물러서지 않을 거니까.'

하비엘 녀석의 성격을 감안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니,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높다.

'국왕이 위험에 처하면? 지가 대신 그 위험을 덮어쓸 거야. 다른 사람이 위기에 처해도? 굳이 지가 또 달려가서 감당하려고 들걸?'

원래 그런 놈이니까.

소설 속에서도.

자신이 본 실제 모습도.

시종일관 그래 왔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래서 죽을 거 같다.

그건 좀, 싫다.

"아놔...."

말 더럽게 안 듣는 똥고집 친구놈을 사고 현장에 남겨 두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로이드는 치를 떨며 걸음을 돌렸다.

지금까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본드래곤이 있는 쪽을 향해서였다.

'그래, 간다, 가! 너 이눔 시키! 귀를 잡아당겨서라도 내가 너, 거기서 빼내고 만다, 이 자식아.'

물론 괴수와 싸울 생각 따윈 전혀 없다.

본드래곤과 맞선다는 건 그냥 넌센스다.

그저 잔재주를 좀 부려서라도.

그래서라도 기회를 봐서 하비엘을 저곳에서 데리고 나오리라.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일단 녀석부터 살리고 보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로이드가 달렸다.

"어오! 이눔 시키, 내가 진짜!"

 

 

"이건 진짜로 제 진심이옵니다. 전하, 부디 신속히 자리를 피해 주소서!"

"싫어."

자신을 향해 절절하게 외치는 근위대장의 충언.

국왕 알리시아는 그 소리를 단숨에 일축했다.

그리고 오히려 핀잔을 놓았다.

"진정으로 짐을 지키고 싶다면 경은 그 목소리부터 낮추는 게 좋을 것이야."

"...아."

근위대장이 흠칫했다.

"혹시 제 음성이 컸사옵니까, 전하?"

"당연하지. 저놈이 듣지 못한 것이 다행일 정도로."

국왕 알리시아가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몸을 숨기고 있는 무성한 수풀.

그 나뭇잎 사이로 밤하늘이 엿보였다.

밤하늘 아래 포효 없이 날뛰고 있는 본드래곤의 모습도 보였다.

그 어떤 존재도 저 괴수를 저지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연회장의 경비를 맡았던 근위대원들은 날뛰는 본드래곤에게 밟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건 싸움이나 전투가 아니었다.

날뛰는 개미핥기를 피해 도망 다니는 개미떼 같은 모습이었다.

곁에서 함께 그 모습을 보던 근위대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하, 그럼 이제부터 어떡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어쩌긴."

국왕 알리시아의 입꼬리에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싸워야지."

"하오나...."

"하면, 경은 짐이 왕도를 위협하는 위험 앞에서 도망치기를 바라는 것인가?"

"그건 아니옵니다. 다만-"

"다만?"

"지금은 잠깐 물러나 전열을 정비함이 옳지 않나, 감히 사료되옵니다."

"그 말도 틀린 생각은 아니긴 해. 하지만 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국왕의 말이 이어졌다.

"저 드래곤 뼈대가 어째서 본드래곤으로 화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지, 짐에게 토벌된 흑마법사의 무리가 어떤 수작을 부려놓은 것인지는 아직 알 길이 없다. 다만, 짐은 저 본드래곤이 이곳 대정원에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였다는 점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음이야."

"다행이라 하심은?"

"만약 저 괴물이 왕도 시가지에서 날뛰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

근위대장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수만 명의 시민이 거주하는 시가지에서 날뛰는 본드래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듯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 이곳에 발을 묶어야 해. 왕도 주둔군이 전열을 갖추고 조직적인 대응을 시작할 때까지."

"하오면, 전하께오서 직접 그 시간을 끄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당연하지."

어느새 이쪽을 돌아보는 국왕 알리시아.

그녀의 눈빛과 표정 모두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왜 그렇게 묻느냐는 듯 실소를 머금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인 짐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경이 혼자?"

"전하께옵서 명하신다면 기꺼이...."

"아니, 경은 나를 지키기 위해 이제껏 함께 있었던 것만으로 이미 존재가치를 증명하였어. 하니, 이제부터는 짐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차례라고 생각하는데."

"전하께서 존재가치라니... 그럴 필요 없으시옵니다. 전하는 그저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왕관을 쓴 자. 그것이 왕이 아니던가?"

"...."

"하니 그 사명을 다하겠다는 뜻이야."

"저, 전하!"

"쉿. 목소리 낮추라니까."

"...하, 하면, 제가 전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함께 싸워도 되겠사옵니까?"

"소드마스터가 아닌 경에겐 좀 무리일 텐데."

"하오나 지금처럼 전하의 곁을 지키는 것이 제 책무이자 사명이옵니다."

"오늘은 그 사명 잠깐 내려놓고 대원들을 챙겨. 저러다 다 죽겠으니까."

알리시아가 턱짓으로 대정원을 가리켰다.

여전히 본드래곤을 피하고자 갈팡질팡하고 있는 근위대원들.

그들의 모습을 본 근위대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오나 소관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전하의 곁을...."

"어명이다."

"...명, 받들겠사옵니다."

근위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국왕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났다.

"고맙군. 짐의 뜻을 알아줘서. 오늘도 짐의 곁을 지켜 줘서. 그럼 뒤는 경에게 맡기겠노라."

"저, 전하!"

"왜."

"부디... 감히 바라건대 무사하소서."

"알겠노라. 그럼."

거기까지였다.

 

스르륵.

 

국왕은 수풀 밖으로 나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래서 근위대장이 미처 붙잡을 틈도 없이.

저벅저벅 걸어 나오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동시에 전신으로 기파를 발산했다.

 

파핫-!

 

국왕의 마나하트가 거칠게 날뛰었다.

그보다 더욱 거친 기파가 그녀를 중심으로 포효했다.

앞서 연회장을 휩쓸었던 본드래곤의 마나 포효.

그 기세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 폭풍이었다.

 

투화학!

 

거칠고 동시에 날카로웠다.

도사린 맹수처럼 위협적이었다.

그 기세에 본드래곤도 즉시 반응했다.

 

- ....

 

우뚝.

 

본드래곤이 날뛰던 동작을 멈추었다.

알리시아가 검을 늘어뜨렸다.

죽음에서 살아난 드래곤.

영토를 지키려는 인간의 군주.

두 존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 순간, 국왕 알리시아의 전신이 흠칫 떨렸다.

"...."

역시 장난이 아니다.

본드래곤의 눈빛.

그걸 마주하는 순간.

얼음물을 덮어쓴 듯한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오히려 웃었다.

입꼬리 가득 용맹한 미소 지었다.

스스로를 향해 되뇌었다.

'두렵지 않아.'

솔직히 이길 자신 같은 거, 없다.

그런 기대도 안 한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설령 이곳에서 지더라도.

혹은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자신의 왕국만은 지켜내겠노라고.

왕국에 기댄 수많은 이들도 지키겠노라고.

최소한 그걸 준비할 시간 정도는 벌어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니.'

다시 걸었다.

본드래곤을 향해.

서슴없이 다가갔다.

'이게 내가 할 일이야.'

지는 것도.

죽는 것도.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그녀는 오연한 눈길로 본드래곤을 쏘아보았다.

'나는 국왕이니까.'

218화. 국왕이 짊어진 것 (2)

 

 

'나는 국왕이니까.'

시선을 들어 올린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거대한 산맥 같은 본드래곤이 우뚝 서 있었다.

결코 넘을 수 없을 장벽.

절대 무너뜨릴 수 없을 철옹성.

홀로 거인에게 맞서는 하루살이의 심정이 이러할까.

'쓸데없는 걱정.'

국왕 알리시아는 웃었다.

다음 순간, 땅을 박찼다.

 

파핫!

 

도약이 감행된 직후.

그녀가 있던 자리가 파괴되었다.

 

투콰앙-!

 

본드래곤의 거대한 앞발이 땅을 찍었다.

막대한 충격력이 지면을 헤집었다.

깊이 10미터, 지름 25미터의 구덩이가 파괴적으로 생성되었다.

사방으로 튀는 무수한 파편은 덤이었다.

"...흡!"

허공으로 몸을 띄운 국왕 알리시아가 검을 휘둘렀다.

검영을 수십 갈래로 나누며 전신을 휘감았다.

수백 조각의 파편이 아음속의 기세로 날아왔다.

검기와 충돌했다.

 

카카카카카캉!

 

수백 갈래의 불꽃이 피어났다.

그녀가 불꽃을 돌파했다.

본드래곤을 향해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쓰흡!"

거칠게 뱉는 한 차례 호흡.

동시에 그녀의 마나하트가 포효했다.

그녀의 검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키아아아앙-!

 

그녀의 손에 들린 롱소드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숨기고 있던 송곳니를 드러냈다.

붉은 섬광을 토해 내며.

롱소드의 검면보다 열 배에 가까운 면적의 오러를 뿜어냈다.

그렇게 생성된 오러 소드의 검날 너비는 무려 50센티.

길이는 장장 4미터에 달했다.

파괴적 사이즈의 오러 소드로 도끼질하듯 내리찍었다.

본드래곤의 앞발 손목을 노렸다.

 

콰카각!

 

아까까지는 흠집도 나지 않았던 본드래곤의 뼈였다.

한데 이번에는 달랐다.

'됐다!'

오러 소드가 뼈에 1센티가량 파고들었다.

살짝 파인 뼈 표면으로 검은 마력이 피처럼 울컥 쏟아져 흘렀다.

'조금이지만 통했어.'

국왕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던 아까와 다르다.

비록 조금이지만 본드래곤의 뼈 표면을 파고드는 데에 성공했다.

그 뜻은?

조금만 더 잘하면.

조금만 더 제대로 하면.

더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으리란 뜻이었다.

'거창한 건 바라지 않아. 다리 한쪽만. 그 정도만 부수면 뒷일은 왕도 주둔군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니까. 할 수 있어!'

 

키아아아아!

 

국왕 알리시아의 마나하트가 더욱 맹렬히 포효했다.

그녀의 동작이 한결 사납고 묵직해졌다.

마치 근육질 맹수가 그러하듯.

일격에 사냥감의 목을 부러뜨리는 짐승처럼.

지면에 최대한의 힘을 실었다.

 

투쿠우우웅-!

 

그녀가 딛는 지면마다 균열이 일어났다.

포석이 깨지고 바위에 금이 갔다.

강맹한 걸음과 걸음.

맹렬하게 생성된 반발력.

그녀의 전신이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막대한 힘을 모조리 오러 소드에 실었다.

"흐읍!"

 

투콰학!

 

자잘한 기교보다는 확실한 한 방으로.

본드래곤의 손목뼈를 다시금 후려쳤다.

후려치고, 베고, 찍고, 다시금 더욱 강렬하게.

 

콰아앙-!

 

다섯 번의 돌진.

폭격 같은 5회의 공격이 연달아 터졌다.

본드래곤의 철옹성 같던 손목뼈에도 살짝 더 깊어진 흠집이 새겨졌다.

그리고 본드래곤이 손목을 털었다.

"...!"

 

투컥!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알리시아가 앞발에 스치듯 맞았다.

그대로 30미터나 날려갔다.

가까스로 균형을 찾았다.

착지했다.

"...크헉!"

국왕 알리시아는 헛구역질을 했다.

그저 딱 한 방을 스쳐 맞았을 뿐인데.

그것마저도 타격을 받는 순간에 오러 소드로 맞받아치며 충격을 상쇄했는데.

그런데 그 한 방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무슨 이런.'

국왕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지금도 진탕된 뱃속이 가라앉질 않았다.

타격을 받은 마나하트도 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문득, 억울해졌다.

'그렇게 열심히 훈련했는데.'

국왕 시해 미수 사건을 겪은 뒤부터였다.

단 하루도 편히 쉬어 본 날이 없었다.

매일 스스로를 극한의 상황으로 밀어 넣으며 훈련했다.

마치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해 훈련하던 시절보다 더욱 혹독하게 스스로를 내몰았다.

덕분에 성장했다.

과거의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을 배신했던 체르니 경도 넉넉히 제압할 실력을 갖추었노라 자부했다.

그러한 자부심은 흑마법사 잔당을 소탕하며 확신으로 바뀌었더랬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어. 한데....'

하늘 위에 하늘이 있었다.

아니, 넘을 수 없는 괴물이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본드래곤.

그 괴물을 올려다보며 국왕 알리시아는 절감했다.

'대적할 수가 없어.'

최소한 약간의 타격은 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왕도 주둔군이 대응태세를 갖출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고.

그건 소드마스터인 자신만 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니 자신이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것마저도 착각이었던 건가.'

 

으드득!

 

국왕 알리시아는 이를 갈았다.

자신을 향해 온몸으로 달려드는 본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놈의 한껏 벌어진 아가리.

그걸 향해 오러 소드를 마주 세웠다.

한데 그때였다.

 

투확!

 

어디선가 폭풍 같은 마나의 기파가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본드래곤의 옆얼굴을 정통으로 때렸다.

 

콰아앙-!

 

본드래곤의 머리가 옆으로 확 퉁겨졌다.

덕분에 놈의 돌진이 아주 살짝 늦추어졌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알리시아의 청각을 두드렸다.

"힘보다는 속도로. 정면보다는 우회해서. 감히 돕겠사옵니다, 전하."

"...!"

그제야 알리시아는 볼 수 있었다.

구름 사이로 반쯤 드러난 보름달 사이.

한 사람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본드래곤의 등뼈 위로 착지했다.

검을 찍었다.

콰앙, 또 맹렬히 일어나는 폭발.

그 폭발을 이용해 다시금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이쪽 옆으로 내려섰다.

까딱, 예를 갖추며 빠르게 말했다.

"송구하오나 저쪽으로."

"...!"

하비엘 아스라한.

은발의 기사였다.

그가 한쪽으로 눈짓하고 있었다.

국왕 알리시아는 곧바로 반응했다.

하비엘이 알려 주는 쪽으로 돌진했다.

그 직후, 본드래곤의 거대한 아가리가 그녀 떠난 공간을 맹렬히 씹었다.

 

콰그걱!

 

"...."

피했다.

그때부터였다.

국왕 알리시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 반격에 하비엘이 합세했다.

그것은 역사에 드문 소드마스터 2인의 연합 공격이었다.

"국왕 전하."

"어, 그래."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되겠사옵니까."

"상황이 상황이니 복잡한 경어는 다 떼고. 최대한 간결하게."

쏟아지는 본드래곤의 파상공세.

그걸 피해 아슬아슬하게 내달리며 알리시아가 명했다.

나란히 달리며 하비엘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하는 마음껏 땅에서 날뛰십시오."

"그대는?"

"저는 교란을 도맡겠습니다."

"교란이라니?"

"전하를 노리는 공세에서 정확도를 앗아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만."

 

훅.

 

나란히 달리던 하비엘이 바람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아니, 순식간에 저만큼 멀어졌다.

빛을 번득였다.

 

투콰학-!

 

순식간에 날린 발파가 본드래곤의 등뼈 정중앙을 타격했다.

비록 뼈에 균열이 새겨지진 않았다.

하지만 거대한 본드래곤의 몸체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마침 알리시아를 향해 내리치던 본드래곤의 앞발 궤적이 살짝 흔들렸으니까.

 

콰앙-!

 

알리시아를 놓친 앞발이 애꿎은 지면을 때렸다.

'좋아. 그렇게 하겠단 거지.'

하비엘의 의도를 파악한 국왕.

그녀의 눈빛에 사나운 기세가 떠올랐다.

그때부터였다.

국왕의 거대한 오러 소드가 맹수처럼 날뛰었다.

본드래곤의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를 활발히 오가며 착실하게 흠집을 새겼다.

그러나 본드래곤은 국왕에게 반격을 가하지 못했다.

하비엘 때문이었다.

 

투확!

 

오러로 근접 공격만 가능한 국왕과 달리, 하비엘에겐 발파가 있었다. 그가 검을 뻗을 때마다 발파의 기세가 수십 미터씩 공간을 가로질렀다.

매번 본드래곤의 관절 틈새를 찌르듯 타격했다.

그럴 때마다 본드래곤의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본드래곤이 움직일 때마다 체중이 실리는 부위.

오직 그 부위의 가장 취약한 관절만 골라서 타격했기 때문이었다.

본드래곤이 앞발을 휘두를 때면 반대편 팔꿈치와 손목을.

뒤로 주춤할 때면 무릎과 골반을.

자세를 바로잡으려 들면 허리를.

매번 너무나 적절하게 찔렀다.

그럴 때마다 본드래곤의 거대한 몸체가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

기껏 노리던 국왕 알리시아를 간발의 차이로 놓치곤 했다.

그러면 국왕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마음 놓고 맹렬히 달려들었다.

사자처럼 포효하며 거대한 오러 소드로 칼춤을 추었다.

그동안 국왕 알리시아의 심장이 한층 격하게 뛰었다.

'된다. 할 수 있어.'

희망의 박동이 뛰었다.

조금씩 가능성이 엿보였다.

혼자였던 때에는 대적할 엄두가 나지 않던 본드래곤이었는데.

저걸 어떻게 잡나 싶어서 막막했던 괴물이었는데.

하비엘과 힘을 합치니 대적이 가능해졌다.

최소한의 싸움이라는 것이 성립되고 있었다!

'내 검이 먹혀들고 있어.'

깊은 타격은 아니었다.

혼신의 힘으로 베어도 고작 1센티 깊이.

하지만 그런 타격을 같은 지점에 백 번을 터뜨려 넣으면?

균열의 깊이가 1미터가 된다.

'1미터. 그거면 충분해. 저 엄청난 무게를 떠받치는 손목과 발목. 그곳에 1미터 깊이의 균열을 새겨 넣으면?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스스로 균열이 퍼지고 마침내 부러질 거야.'

거대한 동물을 공략할 때는 체중을 받치는 부위부터.

괴물 같은 본드래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여겼다.

하여 처음부터 앞발 손목만 집요하게 노렸다.

베고, 또 베고.

찍고, 또 찍고.

그리고 이제,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콰앙! 카칵! 투콰학!

 

하비엘의 지원에 힘입어.

아슬아슬하게 본드래곤의 공세를 피해내며.

연달아 같은 자리만 후려치며 알리시아가 사납게 웃었다.

웃음과 함께 희망이 더욱 커졌다.

승리의 예감이 어렴풋이 엿보였다.

본드래곤이 순식간에 날아오르기 전까지는.

 

투확-!

 

갑자기 펼쳐진 웅장한 날개.

단 한 번의 강렬한 날갯짓.

국왕 알리시아가 백 번째 타격을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본드래곤이 땅을 박찼다.

날개를 퍼덕이며 훌쩍 날아올랐다.

단 한 번의 도약과 날갯짓으로 300미터 이상 높이까지 솟구쳐 버렸다.

국왕 알리시아는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본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본드래곤이 너무나 훨훨 자유롭게 날고 있었다.

이쪽이 어찌할 수조차 없는 높이에서.

여유롭게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짓말."

열심히 깨물던 독수리 발목을 놓치고 나동그라진 개미의 기분이 이런 걸까.

혹시 이거, 악몽을 꾸는 건 아닐까.

'저런 것과 어떻게 싸우란 거지?'

아니, 어떻게 막으란 거지?

하늘의 본드래곤을 올려다보는 국왕 알리시아.

그녀는 넘을 수 없을 벽에 가로막힌 암담함에 빠져들고 말았다.

 

- 그래, 절망해라. 그렇게 더. 암담함을 느끼는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본드래곤이 날개를 펼쳤다.

밤하늘을 향해 악몽처럼 날아오르며.

지면에 남겨진 국왕 알리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본드래곤은 생각했다.

아니, 그 속에 깃든 영혼, 흑마법사 타르가는 생각했다.

'실험실에서 목이 잘릴 때 내 표정이 저랬겠지.'

이쪽을 올려다보는 국왕 알리시아의 표정.

막막함에 물들어 있었다.

암담함에 젖어 있었다.

마치 자신의 힘으로 더는 어찌할 수 없을 자연재해를 바라보는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흑마법사 타르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 그래야지. 그런 표정이라도 못 봤으면 내가 얼마나 억울했겠어.

억울했다.

국왕 알리시아에게 죽던 순간까지도 그랬다.

잘린 목이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던 순간.

그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몸을 포기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대로 끝나긴 싫었으니까.

그래서였다.

자신의 영혼을 연구실 안쪽에 보관하던 드래곤의 뼈대로 옮겼다.

마지막 비책.

혹은 발악이라 불러도 좋았다.

사실 스스로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성공 확률은 잘 쳐줘 봐야 10퍼센트도 안 될 거라 봤다.

그런데 그게 됐다.

영혼이 옮겨졌다.

드래곤의 뼈대 속으로 깃들었다.

그렇게 인감임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펼쳐졌다.

영혼이 드래곤의 뼈대에 정착되길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몇 개월이 흘렀다.

그리하여 오늘.

마침내 새로운 육체를 얻어 눈을 떴다.

한데 그 성과가 완전히 기대 이상이었다.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줄은 몰랐는데.'

너무나 강했다.

실제 본드래곤에겐 살짝 못 미치겠지만.

그저 비슷하게 흉내를 내는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소드마스터인 국왕을 벌레처럼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심지어 갓 움직이기 시작해서 새로운 몸이 익숙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그랬다!

'이제 걸음마 연습은 끝이다.'

단조로운 앞발 휘두르기만으로 대응하는 건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더욱 본격적으로 가지고 놀아주마.

흑마법사 타르가는 사납게 웃었다.

날개를 퍼덕이는 낯선 감각에 집중했다.

그럴수록 본드래곤의 육신이 밤하늘 높이 치솟았다.

지상에 남겨져 이쪽을 올려다보는 국왕 알리시아도.

광대하게 조성된 정원과 그 뒤의 왕궁도.

왕도 마젠타의 시가지도.

모두 장난감, 혹은 벌레들의 도시처럼 느껴졌다.

혹은 반대로 자신이 전능한 존재가 된 것처럼도 느껴졌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건 마치.

- 신이 된 기분이야.

짜릿했다.

원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존재를 부수고 싶어졌다.

'특히 국왕 알리시아. 건방지게 감히 내 목을 베었어? 그 대가다. 넌 이 왕도 전체가 불타고 허물어질 때까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서 그 모든 참상을 목격하게 될 것이야.'

본드래곤 내부의 영혼.

흑마법사 타르가가 잔혹하게 웃었다.

이제 날갯짓 감각에도 익숙해졌다.

본격적으로 짓밟을 준비가 끝났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즐길 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고, 죽일 때다.

- 크하하핫!

거대한 머리를 아래로 숙였다.

허공을 휘젓던 날개를 접었다.

급강하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뜻밖의 존재가 그에게 급강하를 감행하며 내려왔다.

"꼬밍!"

 

쐐애애애액!

 

'...엇?'

밤하늘의 먹구름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오는 하얀 형체.

통통했다.

아담한 날개를 지녔다.

동그란 머리와 똘망똘망한 눈망울도 보였다.

그러니까 그건....

'뱁새?'

사람보다 커 보이는 뱁새였다.

한데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문득 전에 접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마란에서의 거사가 실패한 직후.

그곳에 심어두었던 자로부터 받은 사후 보고서에서 말하길, 거사가 실행된 날 뱁새를 타고서 흑마법사들을 공격했던 자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자의 이름이....

'로이드, 프론테라?'

흑마법사 타르가가 기억을 떠올린 순간.

꼬밍이와 함께 급강하한 로이드가 외쳤다.

뭔가를 이쪽으로 던졌다.

"일단 이거 받으시고!"

 

휘익!

 

이쪽으로 날아오는 물체.

아니 정정, 동물(?).

그것은 평범한 비버였다.

타르가는 황당함을 느꼈다.

'....'

뭐지.

지금 이 상황에서.

저런 비버를 던져서.

대체 뭘 하자는 걸까.

그렇게 흑마법사 타르가가 어처구니를 잃어 가던 바로 그 순간.

 

퍼어엉!

 

- ...!

그에게 날아온 비버가 거대해졌다.

무려 100미터 크기로.

무지막지한 뱃살을 출렁이며.

대응할 틈도 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비벙-!"

- 그엇?

순식간에 본드래곤을 붙잡아 버린 비벙이.

그 뚠실한 환상종의 3천 톤 궁둥짝 바디프레스 어택이 2,500미터 상공에서 감행되었다.

219화. 통수를 때리고 튀어라 (1)

 

 

"비벙!"

이곳은 왕도 마젠타의 왕궁.

...에서 상공 2,500미터 지점.

그 까마득한 높이에서 비벙이가 우렁차게 외쳤다.

그리고 본드래곤의 등뼈와 갈빗대를 야물딱지게 움켜잡았다.

 

꽈드득!

 

마침 뼈다귀만 남은 본드래곤이었다.

덕분에 잡을 곳이야 넘쳐나게 많았다.

비벙이의 손이 물건을 쥐기엔 인간보다 불편한 구석이 있었지만, 상대가 본드래곤이다 보니 그냥 손닿는 모든 곳이 손잡이나 마찬가지였다.

- 그엇?

본드래곤에 깃든 흑마법사의 영혼, 타르가는 깜짝 놀랐다.

'이건 뭐야?'

황당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을 향해 난데없이 날아온 뱁새 위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비버를 던졌고, 비버가 몸길이 100미터 크기로 순식간에 커져서 바디프레스를 시전하려 든다.

...라고 어디 가서 말한다면 돌아오는 건 코웃음밖에 없지 않을까.

아니,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런 소리를 지껄인다면?

헛소리 따윈 집어치우라며 흑마법으로 상대에게 저주를 걸어 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이 상황은 타르가에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건 실제 상황이었고, 실화였으며, 팩트였다.

즉, 본드래곤은 비벙이에게 제대로 붙잡혀 버렸다.

"비버벙!"

비벙이가 용을 썼다.

본드래곤을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뚠실한 궁디에 힘을 빡 주며.

뚠뚠한 뱃살로 본드래곤의 등짝을 압박했다.

본드래곤의 날갯죽지가 뱃살에 꽉 눌렸다.

날갯짓에도 심각한 지장이 생겼다.

- 그, 그으읏! 떨어져!

기겁한 타르가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온몸을 뒤틀며 비벙이를 털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비벙이의 힘이 생각보다 강력했다.

체중 때문이었다.

'이놈, 생각보다 엄청 무겁잖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드래곤의 몸길이는 약 200미터.

100미터인 비벙이보다 거의 2배나 길었다.

당연히 체중도 훨씬 많이 나가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내실을 따져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이 비버, 나보다 무거운 건가?'

그제야 타르가는 깨달았다.

이 몸이 뼈다귀만 남아서 본드래곤(Bone dragon)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그래서 몸길이에 비해 굉장히 슬림한 멸치(?) 체형이라는 것을.

게다가 본드래곤의 전체 몸길이에서 꼬리가 차지하는 비율도 상당했다.

그에 비해서 비벙이는?

참말로 실했다.

궁디는 뚠실.

뱃살도 뚠뚠.

볼따구마저 빵빵.

안 뚱뚱한 곳이 없었다.

출렁거리지 않는 곳도 없었다.

거기에 그 무게를 항상 감당하는 근육마저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었다.

즉, 본드래곤이 제아무리 용가리 통뼈라고 해도 리미트 풀린 지방의 위대한 무게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비벙이가 그런 무지막지한 무게와 뱃살로 본드래곤을 살포시 끌어안아 날갯죽지를 꽉 눌러 버렸다.

마침내 본드래곤의 날갯짓이 중단되었다.

즉, 추락이 시작되었다.

"비벙-!"

- 그아아아앗!

상공 2,000미터.

본드래곤이 기다란 고개를 돌렸다.

뒤를 끌어안은 비벙이에게 물어뜯기를 시도했다.

비벙이가 동그란 고개를 팍 숙였다.

오히려 대빵 큰 앞니로 본드래곤의 목뼈를 꽈득 깨물었다.

"비버벙-!"

- 그거어억!

상공 1,300미터.

본드래곤이 꼬리를 휘둘렀다.

채찍처럼 길고 유연한 꼬리로 비벙이의 등을 후려쳤다.

비벙이가 넙데데한 꼬리로 맞대응했다.

마치 커다란 노처럼 넓고 납작한 꼬리였다.

이런 순간에 전신을 방어하기에 딱 좋았다.

본드래곤의 꼬리가 비벙이의 방패 같은 꼬리에 팅팅 튕겨 나갔다.

"비벙!"

- 그으으읏!

상공 500미터.

지면과의 충돌을 직감한 본드래곤이 마지막 반전을 시도했다.

온몸에 힘을 주었다.

뒤집기를 감행했다.

그러나 그 수단도 통하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비벙이가 너무 뚱뚱해서 뒤집기에 실패했다.

즉, 3천 톤 무게에 짓눌린 채로.

지면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내리꽂혔다.

"비버벙-!"

- 제, 제기라아아알!

 

...!

 

굉음 따윈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모두는 땅이 뒤집혔다고 잠시 느꼈다.

굉음과 진동, 흙먼지 돌풍은 그다음에 몰려왔다.

 

투확-!

 

도합 4천 톤이 넘는 물체가 무지막지한 운동에너지로 내리꽂힌 상황.

지면이 통째로 들썩였다.

충격파가 사방으로 터졌다.

주위의 나무가 모조리 넘어졌다.

근위대원들은 고막을 보호하기 위해 귀를 막아야 했다.

"엎드려!"

"그읍!"

먼지 가득한 돌풍은 잠시 후에야 걷혔다.

근위대원들이 저마다 기침을 하며, 누군가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중에는 두 눈을 시퍼렇게 빛내고 있는 국왕 알리시아도 있었다.

"...."

그녀는 근위대원들처럼 추락지점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서슬 퍼런 눈길을 들었다.

먼지 사이로 엿보이는 하늘에서 선회 중인 커다란 뱁새에게 눈길을 던졌다.

'로이드 프론테라.'

아까 자신이 불렀을 땐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치고 있었는데.

그래서 내심 참으로 실망을 하였는데.

혹시 이런 짓(?)을 벌이려고 그랬던 걸까.

일부러 도망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걸까.

'쯧. 실로 해괴한 자 같으니.'

국왕은 피식 웃었다.

어쨌건 다행이었다.

정말로 막막하던 터였는데.

대체 본드래곤을 어찌 상대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혀 암담함에 사로잡히던 판국이었는데.

그런데 때마침 저자가 나타나 주었다.

커다란 환상종으로 믿기지 않는 대담한 짓을 벌여 버렸다.

'그 높이에서 큰 환상종에게 깔린 채로 추락했으니.'

알리시아의 시선이 추락지점을 향했다.

아무리 본드래곤이 강하다 해도.

그 높이에서 떨어지며 짓뭉개졌으니 멀쩡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방금 한 방으로 제압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국왕이 그런 희망을 품을 때였다.

 

쿠그그그극...!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비죽비죽 뼈다귀가 드러난 회색 실루엣.

본드래곤이었다.

"...!"

 

후웅!

 

거인의 채찍 같은 꼬리가 지면을 휩쓸어 왔다.

"크읏!"

간신히 피했다.

하지만 뒤이어 오는 공격을 피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꼬리를 피하기 위해 뛰어오른 그녀를 향해.

부채처럼 거대한 날개가 휘둘러져 공간 전체를 휘몰아쳐 왔기 때문이었다.

 

콰아아-!

 

국왕 알리시아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저건 피할 방법이 없다.

막아낼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이 방법밖에!'

머리끝까지 돋는 소름 속에서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맞서리라.

마주 부딪치리라.

설령 이게 마지막이라 해도.

최후의 순간까지 용맹하게 싸우는 것으로 생의 몸짓을 마무리하리라.

비장한 각오로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갑자기 뒷덜미를 확 움켜쥐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었다.

"전하!"

 

터텁!

 

"...!"

무엄하게도,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뒷덜미를 확 움켜쥐었다.

전신이 뒤로 확 당겨지는 감각.

국왕은 기겁하며 휘두르려던 검을 회수했다.

고개를 돌렸다.

발견했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가 자신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고삐를 붙잡고 있었다.

그를 태운 커다란 뱁새가 필사적으로 날갯짓하는 모습도 보였다.

즉, 자신은 로이드에게 뒷덜미를 붙잡힌 채 뱁새의 비행에 딸려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그극! 버둥거리지 마시옵소서!"

무거운데 버둥거리기까지 하면 확 놓쳐 버릴 거야.

...라고 말하는 듯한 협박성(?) 멘트에 국왕은 몸의 힘을 뺐다.

그리고 이쪽을 추격하듯 쇄도해 오는 거대한 날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콰아아아아아-!

 

'세상에.'

날아오는 파리채를 바라보는 파리의 1인칭 심정이 이런 걸까.

절벽만큼 거대한 날개가 날아오고 있었다.

공간 전체를 빗자루처럼 휩쓸어 오고 있었다.

절로 아득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쪽에겐 그 아득한 공격을 뿌리칠 기동성이 있었다.

"꼬밍!"

"좀 더! 꼬밍아! 가즈아!"

"꼬미미미미미밍-!"

뱁새가 미친 듯이 날개를 파닥였다.

순식간에 폭발적인 가속을 선보였다.

쇄도해 오던 날개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그 순간, 뱁새가 날개를 접었다. 순간적인 급강하. 지면에 내리깔리듯이. 거의 스치듯이. 곡예에 가까운 비행을 선보였다.

 

쑤와아아아앙-!

 

거대한 날개 뼈대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 간격은 불과 1미터 미만.

국왕 알리시아는 소름을 털어내듯 숨을 훅 뱉어내며 뱁새의 등에 올라탔다.

"전하, 무사하시옵니까?"

"그래. 고맙군. 짐이 그대에게 목숨 빚을 졌어."

"다행이옵니다."

정말로 다행이다.

로이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데서 국왕이 죽어 버리면 곤란하니까.'

국왕 알리시아는 매번 자신에게 일거리를 던져주는 불편한 상사다.

하지만 동시에 더없이 든든한 후원자이며 빽이다.

어지간한 일로는 역모를 의심하지 않는다.

영지에 각종 지원까지 빵빵하게 해준다.

'세상에 이런 분 만나서 모시기가 정말 쉽지 않은 거거든.'

자꾸 자신을 부려먹으려는 점만 빼면 정말로 이상적인 군주라고 할 수 있었다.

한데 그런 국왕을 여기서 잃는다면?

그래서 엉뚱한 다른 자가 왕이 된다면?

새로 왕위에 오를 자가 자신에게 호의적일 것이란 보장이 없다.

그래서였다.

'국왕이 여기서 죽으면 안 돼. 그건 하비엘도 마찬가지고.'

로이드는 본드래곤의 공격 범위 밖으로 꼬밍이를 몰아가며 지상을 살폈다.

날뛰고 있는 본드래곤.

바디프레스를 시전한 후유증 때문인지 비틀비틀 자리를 피하고 있는 비벙이.

그 곁을 지나쳐 하비엘을 순식간에 태웠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속도가 생명이다.'

이대로 튄다.

국왕과 하비엘을 태우고서.

안전하게 도망부터 친다.

그게 내가 여기로 돌아온 이유니까.

로이드는 호기롭게 외쳤다.

"그럼 갑시다!"

"어디로?"

국왕의 반문이 곧바로 날아왔다.

로이드가 입술을 촵촵 적셨다.

"더 나은 싸움터를 향해서이옵니다!"

"새 싸움터?"

"그렇사옵니다. 이곳엔 기껏 건설한 대정원이 있을뿐더러 가까운 곳에 왕궁과 왕도의 시가지, 무고한 시민들마저 있으니 말이옵니다!"

준비한 멘트를 촥촥 펼쳐놓았다.

다행히 국왕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로이드 프론테라여. 그대는 환란에 휩쓸릴 무고한 시민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좋다. 그대의 뜻이 옳군. 하면 이대로 왕도 밖까지 저 괴물을 끌어낼 심산인 건가?"

"그 역시 그렇사옵니다!"

"좋군. 그대의 계획을 허하는 바이다."

"성은이...."

"망극하지 말고 우선 서두르도록."

"알겠사옵니다!"

다행이었다.

국왕의 윤허가 떨어졌다.

로이드는 계획의 성공을 다짐하며 고삐를 움켜쥐었다.

"꼬밍아!"

"꼬밍?"

"가즈아!"

"꼬미밍-!"

화악, 꼬밍이의 비행 속도가 한결 빨라졌다.

로이드의 눈길이 힐끗 본드래곤을 훑었따.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국왕이 이쪽을 믿어 줬다.

그러니 이제는?

제대로 계획을 실행할 때다.

'그러니까 계속 튀는 거야.'

멀리.

왕도 밖까지 멀리.

더 멀리.

훨씬 나은 싸움터가 있을 곳으로 확 멀리.

기왕이면 한 사흘쯤 계속 튀면 될 터다.

'싸움? 저런 놈이랑 왜 싸워? 그냥 계속 튀어야지.'

솔직히 로이드는 본드래곤과 맞서거나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냥 이대로 본드래곤과 계속 술래잡기를 할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국경 밖까지 날아가는 거야. 여기 왕도에서 완전 먼 곳으로. 그래서 왕도의 사람들도, 국왕도 모두 안전해질 수 있게.'

그러면 된다.

덤으로 잘하면 본드래곤을 처리할 수도 있다.

어떻게?

'가펠 지방. 거기로 가면 돼. 그곳에 본드래곤보다 훨씬 센 놈이 있다고 들었으니까.'

로이드는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잠깐 언급된 존재를 떠올렸다.

가펠 지방.

겉으로는 그저 평범하고 작은 중립국으로 보이는 곳.

사실은 그곳에 어마어마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베르키스. 용왕이라고 했지, 아마?'

용왕 베르키스.

이곳 로라시아 대륙의 역사서에 기술된 사상 최강의 드래곤.

아주 짧은 언급이었다.

소설에서도 거의 스치듯이 딱 한 번 소문으로만 언급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내내 까먹고 있었다.

오늘 우연히 떠올린 게 기적일 정도였다.

'그래도 그거면 충분해.'

로이드는 내심 소설 속 그 내용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용왕.

무려 드래곤의 왕이라고 했다.

모름지기 왕이라면 같은 드래곤의 일에 관심이 많을 터.

나름 책임감을 갖춘 성실하고 부지런한 존재일 터.

그러니 뼈다귀 상태로 날뛰는 본드래곤을 데려가면?

'사람으로 치면 날뛰는 좀비나 해골 병사를 왕 앞에 데려가는 것과 비슷한 거겠지. 그러니 저절로 일이 처리될 거야. 용왕이니까. 면전에서 날뛰는 본드래곤을 가만히 앉아서 보진 않겠지. 좌우를 돌아보며 저 본드래곤을 처리하라고 지시하거나, 혹은 본인이 직접 나서서 해치워 주거나.'

상황을 처리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만약 그 계획이 실패해도 상관없어.'

소문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용왕이 그곳에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땐 플랜 B로 가면 돼. 뭐, 대강 인적 없는 곳에서 본드래곤을 따돌려 버리면 되니까.'

그렇게 도주를 완성하면 된다.

물론 이후에 본드래곤이 날뛸 터다.

하지만 그땐 지금보다 대처하기가 편할 것이다.

이쪽이 본드래곤을 데리고 가펠 지방까지 추격전을 벌이는 사이에 모두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펠 지방까지 날아가려면 사흘은 족히 걸려. 그럼 그동안 여기 왕도는 물론이고 왕국 전체에 급보가 전해지겠지. 아니, 술탄국과 인접국 모두가 이 소식을 듣게 될 거야.'

그러면 다들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강력한 군대를 정비하여 본드래곤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

최소한, 여기서 국왕이 칼 한 자루로 본드래곤에 맞서는 것보다는 훨씬 조직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 돼. 그게 어떤 관점으로 봐도 명백히 이득이야. 그런데 여기서 무리하게 왜 싸워? 당연히 도망쳐야지!'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현명한 판단이다.

로이드는 자신의 계획에 만족하며 꼬밍이를 더욱 힘껏 날게 했다.

그리고 본드래곤을 쳐다보았다.

본드래곤이 이쪽을 쫓아오도록.

아예 분노로 눈이 뒤집혀서 이쪽에게 집착하도록.

그래서 몇 날 며칠이고 이쪽을 집요하게 추격해 올 수 있도록.

관심(?)부터 좀 끌어야겠다.

"하비엘, 잠깐 검 좀."

하비엘에게 롱소드를 빌렸다.

지상에서 날뛰고 있는 본드래곤.

놈의 주위를 선회비행하며 검을 겨누었다. 허공을 찔렀다.

 

투화학-!

 

삼중발파가 작렬했다.

수십 미터의 공간을 헤집으며 날아갔다.

본드래곤의 뒤통수를 거세게 때렸다.

 

투컹!

 

졸지에 뒤통수를 맞은 본드래곤의 두개골이 찰지게 휘청거렸다.

220화. 통수를 때리고 튀어라 (2)

 

 

투컹!

 

머리를 맞는 일은 기분이 나쁘다.

머리에 뭔가가 부딪치는 감각도 불쾌하기만 하다.

특히, 그 감각을 맛보면서 자신이 죽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면 더더욱.

- ...!

난데없이 날아온 삼중발파.

그 충격에 휘청거리는 두개골 속에서.

흑마법사 타르가는 이를 갈았다.

잠깐 본드래곤이 되며 얻은 힘에 취해 있었는데.

마치 신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하던 참인데.

난데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지.'

목이 잘리고.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며 뒤통수가 퍽.

충격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데구르르.

머리가 바닥을 구르던 기분은 얼마나 기괴하고 소름 끼치던지.

새로운 육신을 얻은 이제는 제발 잊고 싶었다.

한데 또 떠올라 버렸다.

방금, 자신에게 따끔한 일격을 날린 저놈 때문에.

- ....

본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 자신을 삼중발파로 후려친 로이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뱁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

그걸 보자 또 떠올랐다.

- 나마란.

교역도시 나마란에서의 어그러졌던 계획이 떠올랐다.

시민들을 제물로 바쳐 헬나이트를 소환하려 했는데.

그렇게 헬나이트가 한 달만 날뛰어 주면.

이 왕국의 주요 도시와 주전력을 궤멸시킬 거라고 보았는데.

실패했다.

누구 때문에?

- 저놈.

나마란에서의 거사가 실패한 후였던가.

그곳에 심어두었던 연락책에게서 받은 사후 보고가 떠올랐다.

자신들이 본드래곤의 뼈에서 추출한 마력으로 정제한 검은 보석 녹타니움.

그 녹타니움을 누군가가 모조리 도굴했다고 했다.

게다가 거사의 날에는 뱁새를 탄 인물이 이쪽의 흑마법사들을 모조리 도륙했다고도 했다.

심지어 헬나이트가 깨어난 후에는?

은발의 기사와 더불어 싸워 헬나이트를 제거했다고 하였던가.

- 로이드 프론테라.

그 장본인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놈이 자신을 방해한 것은 나마란에서뿐만이 아니었다.

- 국왕의 시해도 막았어.

정말로 어렵게 구한 극독이었다.

그보다 더 어렵게 포섭한 소드마스터 체르니 경이었다.

완벽한 계획일 거라고.

마젠타노 왕가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 거라고.

절대적인 확신을 품고서 일을 추진했다.

그런데 실패했다.

역시나 저놈, 로이드 프론테라 때문이었다.

- 네놈만 아니었어도....

모든 계획이 성공했을 것이었다.

최소한 지금처럼 완전한 실패로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었다.

국왕 알리시아는 죽거나 폐인이 되었을 터다.

왕가의 기강이 흔들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을 터다.

그런 정국 속에 나마란에서 헬나이트가 깨어났을 것이다.

프론테라 영지 인근에서는 500구에 달하는 언데드 마스토돈이 깨어나 호응했을 것이다.

헬나이트와 500구의 언데드 마스토돈.

왕국 하나쯤 쓸어버리기엔 손색이 없었을 터다.

거기에 자신은 결정타가 될 한 가지 비책을 더 준비했었다.

바로, 인간을 좀비로 만드는 역병과 전용 치료제였다.

- 그것만 성공했다면....

엄청난 수의 양민이 좀비로 변했을 터다.

역병처럼 그 저주가 번졌을 것이다.

특수한 과정으로 만든 저주이기에 상급 신관들의 가호로도 치료할 수 없었을 터다. 유일한 치료 방법은 자신이 본드래곤의 뼈에서 추출한 마력의 약재뿐이었다.

즉, 자신만이 좀비가 된 환자들을 구할 수 있도록 계획을 짰더랬다.

왕가의 지도력이 무너지고.

지방이 불길에 휩싸이고.

전국이 좀비화의 도탄에 빠질 때.

자신이 메시아처럼 나설 무대가 마련될 수 있었던, 그런 계획이었다.

- 그렇게만 됐더라면....

왕이 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황제도 가능했을 터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자신은 죽었다.

비록 이렇게 날뛰고는 있지만.

이제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됐으니까.

인간으로 돌아갈 방법도 없게 됐으니까.

그러니까.

- 이제 난 그저 괴물일 뿐인 거야.

높은 지위에 올라 세상을 호령하고 싶었는데.

만인의 두려움과 존경과 우러름을 받고 싶었는데.

흑마법사라는 차별의 꼬리표를 떼고서.

역사에 길이 남을 지배자가 되고 싶었는데.

- 이젠 못 해.

아무리 신이 된 듯한 힘을 지니게 되었어도.

그 바람은 이제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계획은 실패했고.

자신은 괴물일 뿐이다.

- 네놈 때문에.

로이드를 향한 본드래곤의 눈길에 시퍼런 불길이 타올랐다.

짙은 살의가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그 감정이 본드래곤에게 변화를 불러왔다.

아니, 본드래곤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흑마법사 타르가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 죽인다. 네놈만은 무조건 죽인다.

 

투확!

 

본드래곤이 날개를 펼쳤다.

이제 아까와 같은 걸음마도.

날갯짓 연습을 위한 어설픈 움직임도 없었다.

본드래곤의 낯선 육체?

마법사 출신다운 단계적이고 조심스러운 적응?

그런 건 더는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날아오르고, 찢고, 부수고, 씹어 먹으리라.

성이 풀릴 때까지 태우고, 짓밟아, 잿더미로 만들리라.

 

투컥, 화아악-!

 

본드래곤이 땅을 박찼다.

단 한 번의 도약.

그것만으로 단숨에 800미터 상공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뼈다귀 날개를 펼쳤다.

비어 있는 날개 뼈대 사이로 시퍼런 불길이 맺혔다.

원념의 깃털처럼 날갯짓에 폭발적인 힘을 불어넣었다.

 

콰하학!

 

딱 한 번.

날개를 휘저었다.

공기를 밀어냈다.

그 날갯짓 한 번에 공간이 산산이 휘말렸다.

공기가 폭발적으로 밀려나고, 압축되며, 충격파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몸길이 200미터에 달하는 본드래곤의 육체를 단숨에 수백 미터나 전진시켰다. 아니, 돌진시켰다.

 

쐐애액!

 

본드래곤이 순간적으로 음속을 돌파했다.

거대한 두개골 앞쪽을 정점으로 하여 공기의 파동이 중첩되었다.

중첩되고, 증폭되다가, 마침내 발산하듯 폭발했다.

 

콰앙-!

 

수증기 응결 현상과 함께 강력한 소닉붐(Sonic boom)이 생성되었다.

인근 왕궁과 모든 건물의 유리창이 깨졌다.

아래쪽 정원의 모두가 귀를 틀어막으며 쓰러졌다.

"무슨... 미친!"

쓰러지고 싶은 건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튀어나올 듯 커진 눈으로 뒤쪽을 돌아보았다.

본드래곤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아니, 아예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냥 아주, 때려 박을 듯이 쏘아져 오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빨라!'

로이드는 경악했다.

그냥 이대로 도망치려 했던 건데.

도망치는 동안 계속 이쪽을 따라오라고.

그러기 위해 열 좀 받으라고.

삼중발파로 뒤통수 한 대 때렸을 뿐인데.

설마 저렇게 상상 초월의 속도로 날아올 줄은 몰랐다.

앞뒤 안 재고 무시무시하게 달려들 줄도 정말 몰랐다.

'뒤통수 맞는 거 엄청 싫어하는 타입인가?'

어쨌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도 본드래곤이 또 한 번 날갯짓을 쏴학.

공기가 밀려나고 수증기가 팍 응결되며 소닉붐이.

 

콰앙-!

 

놈과의 거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좁혀졌다.

'잡힌다.'

이대로면 5초?

아니, 4초?

그 안에 잡힐 것 같았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전력질주로 달려온 탱크에 브레이크 없이 후방추돌 당하는 마티즈 꼴이 나겠지.'

그냥 아주 뼈도 못 추릴 거다.

그걸 직감한 로이드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꼬밍아! 아래로!"

"꼬밍-!"

마침 꼬밍이도 후방에서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쇄도를 느끼고 있던 차였다.

로이드의 외침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날개를 접었다.

꼬밍이의 주특기이자 가장 자신 있는 비행.

급강하였다.

"꼬미밍!"

머리를 낮추며 물 찬 제비처럼 아래로 쏘아졌다.

쏘아지듯 수직으로 강하했다.

'그으으으읍!'

폭풍 같은 맞바람.

그 속에서 로이드는 안장을 잡고 버텼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따라올까?'

뒤를 힐끔 살폈다.

'...따라오잖아!'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바로 뒤에 본드래곤이 있었다.

이쪽과 똑같이 머리를 낮추고서.

과감하게 날개를 접어 몸에 붙이고서.

물 찬 제비처럼 수직으로 강하하며 이쪽을 추격해 오고 있었다!

"무슨 저런... 꼬밍아! 왼쪽!"

"꼬밍!"

위기를 직감한 로이드가 외쳤다.

꼬밍이가 즉시 왼쪽으로 머리를 틀었다.

720도 반시계방향으로 스크루처럼 회전했다.

그 회전의 기세를 실어 급강하 경로를 왼쪽으로 90도 꺾었다.

순식간에 수평 비행으로 전환했다.

그 직후.

본드래곤도 이쪽의 비행을 똑같이 따라 했다.

거대한 몸으로 제비 같은 말도 안 되는 기동을 선보였다.

심지어 기다란 목을 쭉 뻗어왔다!

 

콰커덕-!

 

방금까지 꼬밍이가 있던 공간을 본드래곤이 씹었다.

커다란 이빨이 꼬밍이의 꽁지깃에 거의 닿을 뻔했다.

"꼬밍! 꼬미밍-!"

다급해진 꼬밍이가 외쳤다.

이젠 더는 무리라고.

이대론 따라잡힐 것 같다고.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재촉했다.

"알아! 나도 알아!"

로이드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솟아났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안일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번만은 실수다. 그냥 다른 사람들 따위, 어떻게 되든 무조건 도망이나 쳐야 했는데.'

비겁자라고 욕을 먹어도 좋다.

쓰레기라는 비난을 받아도 상관없다.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한 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오! 내가 왜 하비엘이랑 국왕 살리겠다고 괜히 나서가지고!'

그는 10분 전에 했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진짜 여기서 끝인 거야?'

막막했다.

암담해졌다.

지금 꼬밍이는 최선을 다해서 비행하는 중이다.

이게 이쪽이 지닌 최고의 기동력이다.

한데 저 본드래곤은?

약간 어설프게 뒤뚱거리던 아까와 같은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도 없어졌다.

그냥 아주 초음속 제트기.

혹은 대놓고 로켓처럼.

공기를 쾅쾅 찢으며 엄청난 속도로 날고 있었다.

게다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정신 나간 수준의 기동성까지 선보이는 중이다.

마치, 제비 같은 기동력의 고래라고 하면 말이 될까.

아니, 차라리 잠자리처럼 날아다니는 63빌딩이라는 게 더 어울리겠다.

'도망칠 수가 없어.'

저런 정신 나간 수준의 비행 능력 앞에서 도망칠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저걸 뿌리친다는 상상 자체도 잘 되지가 않았다.

하지만 로이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안 돼. 포기하면 죽어. 그러니까 생각해. 일해라 머리야!'

아슬아슬한 곡예비행을 이끌어가며.

매 순간 매초 구사일생의 수준으로 본드래곤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 가며.

로이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죽기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살아야 했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알차게 쌓아올린 프론테라 영지의 꿀단지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였다.

목숨 걸고 머리를 굴렸다.

머릿속 모든 정보를 뒤적였다.

이 소설의 설정.

자신이 변화시킨 역사.

오늘부터 몇 달 전의 사소한 일까지 전부.

그러다가 마침내.

'어, 잠깐.'

떠올랐다.

로이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재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확인부터!'

질질 끌 시간 따윈 없다.

바로 뒤에서 엄청난 덩치로 쇄도해 오고 있는 본드래곤.

그 거대한 괴물을 똑바로 쳐다보며 속으로 외쳤다.

'측량!'

눈에 힘을 빡 주었다.

측량 스킬을 발동하며 본드래곤을 노려보았다.

 

츠츠츠츠츠!

 

[스캔을 시작합니다.]

 

익숙한 메시지와 함께, 본드래곤의 몸이 낱낱이 들여다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본드래곤의 전신을 살펴보진 않았다.

'지금은 그럴 시간 없어!'

그의 시선이 곧바로 본드래곤의 몸체 아래를 향했다.

미칠 듯한 템포의 기동 추격전.

그 와중에 언뜻언뜻.

놈의 몸체 뒤로 이어진 꼬리가 보였다.

거대한 꼬리는 비행의 균형을 잡느라 위아래, 좌우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보여라. 좀!'

로이드의 애타는 눈길이 본드래곤의 꼬리를 끝에서부터 훑었다.

제일 가느다란 끝에서 점점 굵어지는 중간 어름까지.

그리고 마침내 몸체에 가려서 언뜻언뜻 보이는 1/3 지점에서....

'찾았다!'

로이드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찾았다.

보였다.

목표로 찾던 꼬리뼈 한 덩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짜 꼬리뼈!'

로이드가 주목하는 곳.

그곳의 꼬리뼈 한 칸이 나머지 꼬리뼈와 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래 드래곤의 뼈가 아닌 화강암으로 만들어 끼워져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저기 저 칸, 내가 국왕 누님한테 공사 대금으로 받으려고 진짜 뼈를 빼놓은 자리거든!'

몇 달 전.

테르미나 대정원 공사를 시작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그때 이미 드래곤 뼈대 설치를 맡은 설치 전문가에게 귀띔해 두었었다.

저 꼬리뼈 한 덩이가 자기 거라고.

그러니까 잊지 말고 한 덩이 빼놓아 주시라고.

'그 뒤로 계속 정원 시공에 신경 쓰랴, 오늘 일 터지는 거 수습하랴 하면서 잠깐 까먹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나서 확인해 보니?

역시나 꼬리뼈 한 칸이 빠져 있었다.

그 자리가 돌로 깎은 가짜로 채워져 있었다.

'게다가 저 돌덩이, 자재비 절감하려고 대강 화강암 깎아서 만든 거거든!'

원래는 왕실에서 저 자리에 값비싼 황제고래의 등뼈를 쓰려고 했던 게 떠올랐다.

드래곤 뼈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경이로운 강도와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게를 자랑하는 고급 자재였다.

한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너무 비쌌지.'

그냥 비싼 게 아니라 쓸데없이 비쌌다.

괜히 자재비만 껑충 뛰게 만드는 초호화 재료였다.

그래서 자신이 말렸더랬다.

어차피 설치된 드래곤 뼈대를 가까이에서 돋보기 대고 구경할 사람은 없다고. 다들 그냥 유람선 타고 멀찍이 지나가듯 구경하며 우와 할 거라고.

그러니 바위의 색깔과 질감만 드래곤 뼈와 비슷하게 맞춰서 조각하면 된다고.

아울러 뼈대가 무너지지 않을 강도만 갖추면 된다고.

그러니 화강암이면 차고 넘친다고.

그렇게 주장했었다.

주장을 관철했다.

'그게 바로 자재비 절감이지!'

비록 왕실의 국고를 쓰는 거긴 하지만.

그럼에도 쓸데없는 자재비가 낭비되는 건 싫었다.

그래서 그땐 나름 자재비 낭비를 막아보겠다고 고집을 부린 거였는데.

그 고집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유일하게 노려볼 약점이자 희망이 될 줄도 진짜로 몰랐다.

로이드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저기! 저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뒤를 향해 빽 외쳤다.

"근데 실패하면 여기서 다 같이 오순도순 죽을 거 같으니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 없습니까들!"

"...."

어쩐지 돌아오는 대답이나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헐. 둘 다 표정 왜 저래.'

국왕도.

하비엘도.

지나치게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서 장엄하지만 감당 못할 싸움 앞에 의연히 죽을 준비를 마친 사람들 같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실소가 흘러나왔다.

둘 다 지나치게 긴장한 모습이다.

저대로는 무슨 말을 해도 귀에 안 들어갈 것 같다.

그러니 일단 정신부터 퍼뜩 들게 해줘야겠다.

그래야 작전 계획을 제대로 들어줄 테니까.

독한 마음 먹고서.

마음의 각오 다지고서.

폭탄발언 한 무더기를 혓바닥 가득 장착했다.

"할 말 없으면 이쪽부터! 하비엘! 함께해서 재밌었는데 너 좀 재수 없었다! 너 고백 편지 많이 받았다고 맨날 자랑했어도 사실은 나랑 똑같이 솔로잖아! 그리고 국왕, 아니, 누님!"

"...뭐? 나?"

"그래요, 국왕 누님! 누님도 좀 그랬습니다! 맨날 이쪽 알차게 부려먹으려고만 드시고!"

"그대가 감히 짐을, 누님이라 부른 것인가, 방금?"

"곧 진짜로 죽을 거 같은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대는...."

"어쨌건! 저 덕분에 긴장 좀 풀리신 것 같으니까!"

국왕의 반박을 로이드가 확 자르며 외쳤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 제대로 듣고 따라 주시옵소서! 이거! 성공만 하면 우리 다 살 수 있는 거니까! 방금 누님이라고 부른 것도 좀 너그럽게 봐주시고! 진짜로 노동 10년 면제권도 좀 주시고! 진짜로 만약에! 저 본드래곤 잡으면! 저놈 뼈다귀 전부 다 저 주시고! 동의하십니까!"

221화. 통수를 때리고 튀어라 (3)

 

 

"동의하십니까!"

"뭐?"

국왕 알리시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드래곤 뼈를 전부 다 자신에게 하사하라고? 게다가 10년 노동 면제권?'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길이 후방을 재빠르게 훑었다.

 

콰턱!

 

불과 3미터쯤 뒤에서 거세게 닫히는 본드래곤의 턱뼈.

이대로면 자칫 저 거대한 경첩에 낀 딱정벌레처럼 으스러질 판국이다.

더는 망설일 시간도.

손익을 따질 틈도 없었다.

'이런 상황을 틈타 과하게 큰 걸 원하는군, 로이드 프론테라여. 하지만....'

저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게 여기서 죽는 것보단 낫겠지.

국왕의 판단은 빨랐고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좋다. 허하노라."

"정말이시옵니까!"

"그러하다."

"하오면, 정말로 제게 향후 10년 동안의 노동 면제권과 본드래곤의 뼈다귀 전부를 내리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물론이다."

"좋사옵니다. 국왕 전하의 확언은 여기, 곁에 있는 하비엘 아스라한이 제삼자로서 증인이 되어줄 것이옵니다! 동의하시옵니까!"

"동의한다니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콰텁!

 

다시금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닫히는 본드래곤의 턱뼈.

"하오면!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설명을 잘 들어주소서!"

로이드가 손을 뻗어 본드래곤의 몸체 뒤쪽을 가리켰다.

"저길 보시오면! 본드래곤의 꼬리 19번째 뼈대가 주위와 아주 약간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19번 꼬리뼈?"

"그렇사옵니다!"

국왕 알리시아와 하비엘의 시선이 본드래곤의 19번 미추를 향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번 미추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상하군. 짐이 보기엔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모양과 재질 모두가 똑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아니옵니다!"

로이드가 확언했다.

아니, 실토(?)했다.

"사실 저거! 뼈가 아니라 화강암을 깎아서 넣은 것이옵니다!"

"...뭐? 화강암을?"

"그렇사옵니다! 당초에 제게 드래곤 꼬리뼈 한 덩이를 하사하시기로 되어 있었지 않았사옵니까!"

"그렇지! 한데 그대에게 줄 꼬리뼈를 떼어낸 자리엔 화강암이 아니라 황제고래의 등뼈를 넣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강도와 품질이 우수하여 훌륭한 대체재가 될 거라고, 짐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만."

"전하께서 알고 계신 것이 맞사옵니다!"

"한데 어째서?"

황제고래의 등뼈가 아닌 화강암으로 가짜 모형이 만들어져 있다는 걸까.

로이드의 고해성사가 이어졌다.

"황제고래 등뼈가 너무 비쌌사옵니다!"

"...."

"하여 화강암으로 자재를 바꾸자는 의견을 냈고, 시행하였사옵니다!"

"...."

"화강암을 깎아서 적당히 가공하여 보니 원래 본드래곤의 꼬리뼈와 육안으로는 분간이 불가능할 정도로 감쪽같았사옵니다! 실제로 방금 전하께오서도 육안으로 구분을 못 하시었지 않사옵니까! 게다가 자재비도 황제고래의 등뼈보다 백 분의 일이나 저렴하였으니, 그게 이득일 거라고 생각하였사옵니다!"

"설마 그 차익을 횡령한 것은 아니겠지?"

"그건 아니옵니다!"

로이드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횡령은 정말로 안 했다.

그저 원가 절감만을 실천했을 뿐.

"어차피 관람객들이 그저 멀리서 보고 지나칠 드래곤 뼈대였사옵니다! 육안으로 보기에 이질감이 없고, 뼈대가 지탱되기에 충분한 내구도를 지녔다면 화강암을 쓰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라 여겼사옵니다! 그렇게 아낀 자재비가 국고로 돌아가면 훗날 훨씬 유익한 곳에 쓰일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옵니다!"

솔직한 진심이었다.

국고가 남의 돈이긴 했다.

그럼에도 시공을 하면서 낭비가 생기는 건 싫었다.

기능과 안전, 미관상 100% 완벽하면서 1/100이나 저렴한 자재가 있다면?

당연히 저렴한 쪽을 쓰는 게 경제적인 시공일 터였다.

그래서 화강암을 쓰자고 밀어붙였다.

실행하게 되었다.

"그래서이옵니다. 어쩌면 그때의 결정이 지금! 저놈에게 타격을 입힐 실마리가 되어줄 것 같사옵니다!"

 

콰텁-!

 

바로 2미터 뒤에서 닫히는 본드래곤의 턱뼈.

그동안 꼬밍이도 수없이 선회와 급강하, 급상승을 반복했다.

거대한 독수리를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파리처럼.

그야말로 날갯죽지에 땀띠가 나도록 날았다.

로이드의 외침이 이어졌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저 19번째 가짜 꼬리뼈 또한 본드래곤의 신체를 유지하는 마력의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저렇게 이질감 없이 다른 관절과 연동되며 움직이고 있는 것일 터이고."

"그렇사옵니다. 당연히 그 단단함 또한 평범한 화강암의 것을 아득히 뛰어넘을 것이옵니다."

"하나 본드래곤의 다른 뼈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할 것이란 뜻이로군."

"바로 그것이옵니다! 게다가-!"

로이드가 확신을 담아 외쳤다.

"저길 부수면 그 뒤의 꼬리 전체가 끊어질 것이고, 저 본드래곤이 더는 지금처럼 비행할 수 없게 될 것이옵니다!"

당연한 소리였다.

꼬리는 장식이 아니다.

아니, 필수적인 기관이다.

저렇게 비행을 하는 존재에게는 더욱 그렇다.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니까!'

한데 그런 꼬리가 사라진다면?

꼬리 날개를 잃은 항공기 꼴이 날 것이다.

즉시 균형을 잃고 추락할 것이다.

다시는 날아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용왕이란 자의 힘을 빌리기 위해 벌이려던 초장거리 유인 작전은 실행하기 어려워지겠지. 그래도 일단은 이게 최선이야. 지금 당장 저 본드래곤에게 따라잡혀서 머리통 터지도록 으깨지고 대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보단 훨씬 나아.'

당장 죽는 것보단 일단 유효한 타격을.

다음 일은 다음에 따질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재빠르게 말했다.

"하여! 제가 미끼가 되겠사옵니다!"

"그대가?"

"예!"

눈을 휘둥그레 뜨는 국왕 알리시아.

눈썹을 꿈틀거리는 하비엘.

둘을 돌아보는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내걸렸다.

"여기서 저보다 꼬밍이와 호흡 잘 맞추며 비행할 수 있는 분, 없지 않사옵니까?"

그것 또한 사실이며 팩트다.

"그러니 제가 미끼가 되어 저놈의 주의를 끌겠사옵니다. 그 사이에 놈의 열아홉 번째 꼬리뼈를 부숴 주시옵소서."

로이드가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안주머니에서 뽀동이와 방울이를 꺼냈다.

"이 아이들이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뽀동!"

"방울!"

야물딱진 눈빛을 띄운 뽀동이와 방울이에게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였다.

곧바로 지상을 향해 던졌다.

펑펑, 연달아 소리가 나며 커다래진 두 녀석이 착지했다.

"자, 어서 내려가소서!"

"...."

그때까지 국왕 알리시아는 말없이 로이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이드가 한쪽 입술로 웃었다.

"전하, 시간이 없사옵니다. 서두르시옵소서."

"그대는...."

"제 걱정은 마시옵소서."

"아니, 걱정이 아니고. 황제고래 등뼈 대신에 화강암을 썼다는 걸 이제야 밝힌 게 어쩐지 괘씸하여서."

"...."

"이런 일이 없었으면 끝끝내 아니 밝혔겠지?"

"...."

"그거 깐깐하게 따진다면 엄연히 횡령...."

"부디 무사하시옵소서!"

다급해진(?) 로이드가 꼬밍이를 파전 뒤집듯 홱 뒤집었다.

순식간에 감행된 급격한 기동.

그 서슬에 국왕 알리시아와 하비엘의 몸이 안장에서 붕 떴다.

아니, 스스로 안장을 놓았다.

더는 논쟁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10년 노동 면제권? 그대가 감히 짐에게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가? 그대를 묶어둘 방법이야 간단하지. 횡령의 죄를 받을 것인지, 면제권을 없앨 것인지를 물으면 될 터이니.'

하지만 지금은 일단 살아남는 것부터.

왕도에서 벌어진 저 끔찍한 재난을 막아내는 것부터.

지상으로 착지하는 국왕 알리시아의 입가에서 쓴웃음이 사라졌다.

비장한 눈빛을 던졌다.

나란히 착지한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간의 눈빛 교환.

두 소드마스터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타다닷!

 

수풀을 헤치며 각자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그곳에 각자의 짝이 될 환상종이 있었다.

"뽀동 경, 잘 부탁합니다."

"뽀동!"

하비엘이 뽀동이의 통실한 등에 올라탔다.

뽀동이가 땅을 박차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곳 반대편의 수로에서는 국왕이 방울이와 마주쳤다.

"그대의 이름이 방울?"

"방울!"

"짐의 기억이 맞군. 그대와의 분전을 기대하노라."

"빠방울! 방울!"

국왕이 방울이의 등에 올라탔다.

방울이가 수로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딸랑딸랑딸랑!

 

구성진 경고성을 사방에 알렸다.

그 순간, 치켜든 꼬리 아래 응꼬에서 맹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뿌그륵! 뿌글!

 

방금 마셨던 물을 급속도로 소화시켰다.

물이 펄펄 끓으며 막대한 양의 수증기가 되어 화산처럼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투확-!

 

엄청난 압력의 수증기가 쏘아졌다.

방울이가 로켓 바나나보트처럼 수로를 맹렬히 내달렸다.

그 등 위에서 국왕이 검을 치켜들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녀의 눈길이 밤하늘을 향했다.

그곳에 숨 가쁜 비행을 이어가고 있는 꼬밍이와 로이드가 있었다.

여전히 바로 뒤를 바짝 추격해 오는 본드래곤에게서 도망치려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짐은 그대를 잃고 싶지 않아.'

훌륭한 신하다.

믿을 수 있는 일꾼이다.

한편으로는 더없이 고마운 자다.

그런 로이드 프론테라를 이런 곳에서 잃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꾸우욱!

 

검을 쥔 국왕 알리시아의 손등에 힘이 들어갔다.

한편, 같은 순간 하비엘도 비슷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로이드 님.'

그는 뽀동이의 등에 몸을 싣고 정원을 내달렸다.

그동안 그의 시선은 상공의 로이드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로이드 님이 그런 마음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비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오해를 하고 말았다.

이런 사태 앞에서 도망만 치려는 사람이라고.

비겁한 겁쟁이처럼 혼자 살겠다고 내빼는 거라고.

그렇게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을 섣부르게 판단하고 말았다.

'크레모에서도 그랬지.'

실망했다고.

이런 분인 줄 몰랐다고.

심한 말을 해버리고 말았더랬다.

'오늘도 그랬어.'

자신이 어리석다.

사실 로이드 님은 저렇게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인데.

'하지만... 그런 희생, 하는 일이 없도록 제가 지키겠습니다.'

 

꽈드득!

 

하비엘은 각오를 다졌다.

로이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안위를 따지지 않으리라. 설령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하여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절대로.'

무사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기원하며 하비엘은 더욱 뽀동이의 질주를 독려했다.

그동안 로이드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후아! 국왕 누님! 하비엘! 좀 빨리!'

 

콰터텁!

 

바로 뒤에서 거칠게 닫히는 본드래곤의 턱뼈.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한순간이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씹혀 으스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해볼 만해!'

국왕과 하비엘이 내렸다.

그만큼 꼬밍이의 등이 가벼워졌다.

아까보다는 기동이 약간 경쾌해졌다.

'좋아. 이대로만 계속 잽싸게 도망 다니면 돼!'

다행히(?) 본드래곤은 미친 듯이 이쪽만 쫓아오고 있었다.

거의 집착, 혹은 아집이 느껴질 정도였다.

행여나 이쪽한테 받아낼 돈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였다.

'어오! 그러니까 좀 빨리!'

세상에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 팔자에도 없던 본드래곤과 술래잡기를 벌이게 되었나.

로이드는 실시간으로 쑴펑쑴펑 치솟는 비애감을 집어삼켰다.

틈틈이 뒤쪽으로 발파를 알뜰살뜰하게 쏘았다.

본드래곤의 어그로를 더욱 야물딱지게 끌었다.

필사적으로 꼬밍이와 혼연일체가 되어 날았다.

연달아 급선회.

급강하에 이은 교란 비행.

본드래곤의 등줄기를 역주행했다.

놈의 갈빗대 사이를 날았다.

분노한 본드래곤의 앞발이 갈빗대를 긁었다.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허리를 통해 우측으로 빠져나갔다.

다시 급강하.

고도를 더욱 낮추었다.

동시에 꼬밍이의 가방을 흔들었다.

 

푸슈슥!

 

거미줄 다발이 연달아 후방으로 쏘아졌다.

본드래곤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 틈에 거리를 벌렸다.

더욱 낮게 비행했다.

정원 나무 꼭대기에 스치듯 날았다.

콰앙, 뒤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로켓처럼 급가속을 감행한 본드래곤이 쇄도해 왔다.

 

화아악-!

 

온몸으로.

공간 전체를 부수듯.

밤하늘을 완전히 뒤덮듯.

'...!'

저건 못 피한다.

로이드는 직감했다.

놈도 그걸 확신할 것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말하면.

이게 바로 기회다.

"지금!"

로이드가 벼락처럼 외쳤다.

그 순간, 아래쪽 숲에서 화산 같은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뽀동이가 미리 도착해서 파놓은 땅굴.

그 속에 몸을 숨겨 매복한 방울이.

그렇게 방울이가 땅굴에서 궁디만 치켜들고서 내쏜 화산폭발이었다.

맹렬하게 치솟는 열기와 화산재.

그 폭풍의 물결이 로이드가 방금 지나친 지점을 뒤덮었다.

마치 위장용 연막처럼.

본드래곤의 시야를 순간적으로 가렸다.

- ...!

앞이 보이지 않았다.

본드래곤 내부에 깃든 흑마법사 타르가의 영혼이 일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런 당황도 잠깐.

- 이까짓 잔재주 따위!

자신은 본드래곤의 힘을 지녔다.

이런 연막 따위는 그저 힘으로 돌파하면 될 뿐.

 

쿠아앙-!

 

본드래곤의 날개가 공간을 찢었다.

더욱 맹렬히 가속하며 충격파를 터뜨렸다.

그 순간 타르가의 시선과 의식은 오로지 연막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로이드의 바퀴벌레 같은 뒷모습만을 향해 쏠렸다. 집중되었다. 집착했다.

그렇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거침없이 통과하는 연막 너머.

그곳에서 두 소드마스터의 서늘한 칼끝이 자신의 약점을 겨누고 있음을.

 

투화학-!

 

화산 폭발의 연막 너머에서 하비엘이 발파를 쏘아냈다.

 

콰츠삭!

 

발파가 유성처럼 공간을 가로질렀다.

음속으로 날아가던 본드래곤의 19번 꼬리뼈를 정확히 타격했다.

관통했다.

너무나 삽시간에.

50센티 지름의 구멍을 만들었다.

구멍 주위로 치명적인 균열이 번졌다.

본드래곤의 전신이 크게 떨렸다.

- ...!

흑마법사 타르가가 기겁했다.

바로 그 순간, 두 번째 소드마스터의 연이은 공격이 감행되었다.

"뽀동!"

뽀동이가 괴력을 발휘했다.

투포환 쏘듯 국왕 알리시아를 내던졌다.

국왕이 허공을 가르며 위로 솟구쳤다.

그런 그녀의 검은 이미 거대한 오러소드로 뒤덮여 있었다.

 

츠칵!

 

오러소드가 19번 꼬리뼈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이미 발파를 맞아 관통되어 있던 꼬리뼈였다.

로이드가 저지른 자재비 절감의 마법(?)에 휘말려 화강암으로 대체되어 있던 가짜 꼬리뼈이기도 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본드래곤의 신체 유지 마력에 보호되고 있어도 그랬다.

 

퍼컥!

 

19번 꼬리뼈가 폭발하듯 박살 났다.

그 뒤로 이어진 꼬리 전체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갔다.

- 그, 어어억!

흑마법사 타르가가 당황에 젖은 외침을 내질렀다.

우랄산맥 떡멧돼지처럼 돌진하던 본드래곤.

그 거대한 몸체가 순식간에 균형을 잃었다.

하늘에서 허둥지둥 영덕대게 스텝을 밟았다.

브레이크 없는 추락의 시작이었다.

222화. 총력전 (1)

 

 

- 그, 그어억!

흑마법사 타르가는 당황했다.

그것은 너무나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난데없이 지상에서부터 터진 맹렬한 화산재.

그 연막 속을 거침없이 돌파하던 도중이었던가.

기습적으로 가해진 두 번의 타격이 19번 꼬리뼈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꼬리뼈가 깨졌다.

- 이게... 무슨!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본드래곤의 육체를 얻었는데.

소드마스터의 오러소드 따위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게 되었는데.

아니, 그랬다고 믿었는데.

- 망할!

다급히 날개를 움직였다.

폭발적으로 퍼덕였다.

그러나 이미 많이 늦어 있었다.

19번 꼬리뼈가 깨지며 그 뒤로 연결되어 있던 꼬리 전체를 잃었다.

그 서슬에 균형마저 완전히 잃어버렸다.

- 그... 으으으아앗!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확 숙여지는 상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지면.

 

...!

 

그대로 꽂히듯 처박혔다.

음속을 돌파하며 날던 기세 그대로.

800미터 길이의 고랑을 지면에 새기며.

그 경로에 있던 나무와 바위, 모든 것을 온몸으로 부수며.

막대하게 피어난 흙먼지 속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본드래곤의 몸이 움직였다.

 

쿠웅!

 

거대한 앞발로 땅을 짚었다.

상체를 불쑥 일으켰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콰앙-!

 

반쯤 일어서던 본드래곤은 다시 지면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갑작스럽게 꼬리를 잃어 균형을 잡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됐어!'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본 국왕 알리시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가 말한 작전이 정말로 통했다.

'아슬아슬했어.'

국왕은 조금 전의 긴박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방울이가 터뜨린 화산폭발의 연막.

그 속에서 하비엘과 연계 공격을 퍼부었더랬다.

마지막 순간, 온몸을 날려가며 19번 꼬리뼈에 오러소드의 일격을 꽂아넣었더랬다.

솔직히 그때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본드래곤의 꼬리뼈를 베는 순간.

예상보다 훨씬 강한 반탄력이 검을 통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본드래곤의 신체를 유지하는 마력 때문이었겠지. 그냥 화강암을 베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단단함이었어.'

평범한 화강암이 아니었다.

거의 미터 단위 두께의 강철 덩어리를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만약, 자신이 국왕 시해 미수 사건 이후로 맹훈련을 거듭하지 않았다면?

'실패했겠지.'

결정적인 순간 반탄력을 버티지 못해 검을 놓쳤을 터다.

꼬리뼈를 완전히 부수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해냈다.

그동안의 맹훈련이 헛되지 않았다.

"후우."

국왕 알리시아는 숨을 고르며 검을 고쳐잡았다.

자욱하게 피어난 흙먼지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하비엘이 있었다.

"그럼 놈을 끝장내러 가보도록 할까."

"따르겠사옵니다."

지금이 기회다.

거의 유일한 기회일 것이다.

꼬리를 잃은 본드래곤은 일어나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시간을 주면 적응할 테니까.'

꼬리를 잃었다고 해서 천년만년 못 일어날 리가 없다.

한 시간?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르게?

꼬리 없는 상태에 금방 적응할 것이다.

하니 그 전에 끝장을 보아야 한다.

"하비엘 아스라한. 그대와 로이드 프론테라는 주위의 마나 흐름을 읽을 수 있지, 아마?"

"예, 맞사옵니다."

"역시."

신기한 기법이다.

국왕 알리시아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물었다.

"그럼 한 가지 묻겠노라. 저 본드래곤의 마나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부위가 어디지?"

"머리뼈이옵니다."

"거길 부수면 되겠군."

하면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완전히 제압할 수도 있으리라.

본드래곤의 추락지를 향하는 국왕 알리시아, 그리고 하비엘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전력을 다해서. 단숨에. 가장 이른 시간 내에."

"명심하겠사옵니다."

여전히 자욱하게 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몸을 일으키려다 넘어지길 반복하는 본드래곤의 거체가 보였다. 가까워졌다. 점점. 서슴없이. 놈을 향해. 달렸다. 도약했다.

 

파앗!

 

국왕 알리시아가 먼저.

하비엘이 연이어 놈의 등뼈 위로 올라탔다.

두 소드마스터가 등뼈를 밟으며 나란히 달렸다.

목표는 본드래곤의 머리뼈였다.

'아까처럼.'

국왕의 눈짓.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주 속도를 높였다.

거대한 파도처럼 요동치는 본드래곤의 등뼈를 그대로 박차며.

날뛰는 심장 둘러싼 써클을 발동하며.

충돌시켰다.

맹렬한 충돌의 기파를 그대로 검에 실었다. 내쏘았다.

 

투투확-!

 

정교하게 쏘아진 연속 발파 세 줄기가 본드래곤의 뒤통수를 향했다.

정확히는 두개골과 목뼈가 연결되는 부위를 노렸다.

 

투컥!

 

폭발음과 함께 본드래곤의 뒤통수가 움찔했다.

물론 그 정도 발파에 타격을 입을 본드래곤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비엘은 준비했다.

더 많은 발파를.

훨씬 많은 발파를.

 

투투투투투확!

 

- ...!

쏘았다. 쏘고 또 쏘았다.

타격했다. 같은 자리만 계속.

다양한 각도에서 발사했다.

그러나 타격점은 하나였다.

 

투커커커컥! 쿠컥! 콰드컥!

 

한 발로 안 뚫리면?

두 발, 세 발.

열 발.

스무 발.

서른 발이 넘는 발파가 같은 자리에 연달아 꽂혔다.

물론 본드래곤이라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 크아악!

온몸을 뒤틀었다.

기다란 목을 움직였다.

어떻게든 같은 자리에 발파가 꽂히는 걸 피하려 했다.

그 와중에 몇 번인가 머리를 움직여 반격도 시도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본드래곤에 비해 하비엘은 너무 작았다.

그만큼 기민했다.

동시에 정교했다.

본드래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목을 거칠게 움직이고 반격을 시도해도.

그걸 모조리 피해내며 매번 같은 자리에만 발파를 꽂아넣었다.

한데 본드래곤은 제대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효과적인 반격이나 대응이 거의 불가능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일방적인 구타, 혹은 괴롭힘이었다.

그 모습을 상공에서 보던 로이드마저도 혀를 내둘렀다.

'어우야. 미쳤다. 미쳤어.'

로이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본드래곤이 추락하던 순간부터 상황을 지켜보던 그였다.

이대로 본드래곤의 꼬리를 끊은 걸로 만족하며 물러나는 것이 좋을지, 혹은 계속 기세를 타고 공세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지 간을 보려고 했다.

한데 지상의 국왕과 하비엘이 먼저 총공세를 시작해 버렸다.

그때부터 조금은 초조하게.

약간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소드마스터의 반격을 지켜보았다.

한데 막상 진행되는 상황을 보니?

'이거, 의외로 본드래곤이 불쌍해지는 그림인데.'

그만큼 하비엘의 공격은 무자비할 정도로 집요했다.

제일 아픈 데만 골라서 때리기.

때린 자리만 때리기.

죽을 때까지 때리기.

그러한 인정사정없는 타격법의 필수 3원칙을 너무나 철저하게, 모범적으로, 교과서처럼 실천하고 있었다.

'저러다 진짜 본드래곤 잡겠는데?'

문득 그런 희망이 엿보였다.

맹공을 퍼붓는 하비엘 근처에서 결정타를 준비하는 국왕의 모습을 보니 더욱 그랬다.

'국왕 누님, 아까 썼던 거대한 오러소드를 쓰려는 건가.'

오러소드의 폭이 무려 수십 센티는 되어 보였다.

길이는 족히 4~5미터는 될 듯했다.

말 그대로 오러로 이루어진 엄청난 거검이었다.

'일반적인 오러소드와 격이 달랐어.'

보통의 오러소드는 마치 광선검처럼 그저 검 위로 얇게 덮이는 정도가 다다.

길어봤자 검 끝에서 1미터쯤 연장되는 것이 최대다.

한데 국왕의 오러소드는 달랐다.

'어쩌면 소드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의 경계에 다다라 있는 건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그랜드 마스터가 됐던 하비엘.

당시의 그가 보여줬던 경이로운 오러보다는 약하긴 했다.

하지만 그 단계로 가는 길을 국왕이 밟고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국왕 누님도 엄청나게 실력 향상이 되고 있는 거야.'

이제는 과거 근위대장이었던 소드마스터 체르니 경도 상대가 안 될 것이다.

어쩌면 혼자서 보통의 소드마스터 둘쯤은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저 아래에서 국왕이 검을 치켜드는 것이 보였다.

검에서 특유의 거대한 오러소드가 생성되었다.

하비엘 같은 정교함보다는 한 방의 힘.

파괴력에 역량을 집중한 무지막지한 오러소드가 5미터 가까이 솟구쳤다.

거의 공성 병기에 가까운 위세였다.

반면 본드래곤의 머리뼈는?

하비엘의 연속 발파로 취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어쩌면, 진짜로 깨부술 수 있을지도 몰라.'

승리의 희망이 엿보였다.

도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꼬밍이를 독려했다.

고도를 낮추었다.

삼중발파를 준비했다.

행여나 국왕의 일격이 아깝게 실패한다면 곧바로 그 자리에 삼중발파를 꽂아넣으리라.

다짐하며 바람을 갈랐다.

아래쪽 싸움터의 광경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국왕이 오러소드를 앞세우고서 돌진하고 있었다.

본드래곤의 뒤통수를 후려치려고.

맹렬히 쇄도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너무나 갑자기.

본드래곤의 거대한 꼬리가 하비엘을 후려치는 모습도 보였다.

 

투컥-!

 

"...!"

똑똑히 보였다.

그건 잘려나갔던 꼬리였다.

아까 깨부순 19번 꼬리뼈.

그 뒤로 연결되어 있던, 그래서 본드래곤의 몸체에서 떨어져 나갔던, 지면에 떨어져 널브러져 있던 꼬리였다.

한데 그게 움직였다.

아무런 예고나 조짐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럽고도 빠르게.

거대한 사슬이 휙 하고 움직이듯.

삽시간에 움직였다. 휘둘러졌다. 공간을 가르고. 하비엘을 후려쳤다.

"...어!"

그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서.

조심하라거나.

위험하다거나.

피하라거나.

등등의 아무런 외침도 전해주지 못했다.

그저, 섬뜩한 타격음과 함께 하비엘이 수백 미터 저 멀리 날려가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하비엘이 추락했다.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어."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 내가 뭘 본 건지.

방금 본 게 진짜 현실인 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비엘, 열심히 싸우고 있었는데.

집요하게 발파를 날리며 본드래곤을 착실히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그래서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잘 풀리면.

어쩌면 정말로.

오늘 본드래곤을 잡을 수도 있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나도 가서 도와야겠다고.

그런 생각도 하던 참인데.

'그런데 왜?'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가 않았다.

"하비엘!"

외침은 한발 늦게 터져 나왔다.

아니, 어떻게 외친 건지도 모르겠다.

외치는 순간 이미 꼬밍이를 독려하고 있었다.

날아가서 확인해야 한다고.

하비엘 녀석, 괜찮은지 봐야 한다고.

그러니까 빨리, 진짜로 빨리, 날아가 보자고.

꼬밍이를 재촉했다.

꼬밍이도 서둘렀다.

그런데 날아갈 수가 없었다.

어느샌가 허공으로 날아오른 본드래곤.

놈이 정면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잃었던 꼬리를 복구한 채로.

이쪽의 날아갈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

설마.

'저놈, 내 의도를 알고 있는 거야?'

느껴졌다. 확실하다.

하비엘이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이쪽을 막는 거다.

행여나 하비엘이 치료를 받을까 봐.

되살아나면 자신이 곤란해질까 봐.

하지만 그래도....

"나, 하비엘한테 가봐야 하거든."

빨리 가봐야 한다.

저 거대한 꼬리에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크레모에서 기가티탄에게 얻어맞았던 때와는 다르다.

그땐 하비엘이 요령껏 비켜 맞았었다.

그런데 방금은?

제대로, 정통으로 맞았다.

수백 미터나 날려가서 추락했다.

아무리 하비엘이라도 저건 최소 중상이다.

어쩌면 지금쯤, 목숨이 경각에 달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진짜로 빨리 가봐야 한다.

'아스라한 심법이 있으니까!'

숨만 붙어 있다면 살릴 수 있다.

이쪽의 아스라한 심법으로 하비엘의 마나 써클을 공명시키면 된다.

그러면 마나가 강제로 순환되며 신체의 자연치유 능력이 극대화될 것이다.

곧 죽을 사람을 중상자로.

중상자를 보통의 환자로 보듬을 수 있다.

그러니까 가야 한다.

당장 가봐야 한다.

"비켜!"

저도 모르게 버럭 외쳤다.

하비엘을 잃는 손해가 막심할 거라고 생각해서?

유용하게 부려먹을 일꾼이자 기사를 잃는 게 뼈아파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가슴이 급박하게 뛰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두려워졌다.

'하비엘, 인마!'

무서웠다.

가슴 한쪽이 텅 비는 상실감.

기이할 정도로 엄습하는 불안감.

생각해보니 그랬다.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던 날.

그렇게 처음 녀석과 대면했던 날.

그날 뒤로 난 녀석과 떨어져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하물며 녀석과 영영 떨어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라도 있었던가.

없다.

그냥, 없다.

그런 생각 따윈, 품어본 적도 없다.

언제나 함께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앞으로도 영영 그러할 것이라고.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할 거라고.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고생도 함께할 거라고.

기쁜 순간도.

여유로운 나날도.

그 모든 시간을 나눌 것이라고.

그런 뒤엔 언제나처럼 서로에게 악담을 퍼부을 거라고.

실없는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지낼 거라고.

시골 영지 한량 같은 영주와 그를 호위하는 기사로 늙어갈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별다를 특별한 감상도 없이.

그저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곁에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그래서 너무나 안일하게.'

녀석을 데리고 있었다.

녀석을 누리고 있었다.

녀석을 대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이제는 깨달을 수 있었다.

'하비엘.'

녀석이 어떤 의미였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호위 기사?

유용한 건설 장비?

강력한 소드마스터?

아니, 그 전에 녀석은....

"내 친구한테 가봐야 하니까 비키라고, 이 자식아."

앞을 가로막은 본드래곤.

그 절망적 존재를 쳐다보는 로이드의 눈이 회색 빛깔로 착 가라앉았다.

223화. 총력전 (2)

 

 

철컥!

 

안장에 묶어둔 접이식 삽을 꺼냈다.

펼치고 쥐었다.

가슴이 뛰었다.

'할 수 있을까.'

로이드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어서 하비엘을 구해야 한다.

어쩌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를 녀석을 살려야 한다.

그러자면 감정에 모든 걸 맡겨선 절대로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그리고 침착하게.

스스로를 향해 되뇌는 로이드의 눈빛이 회색으로 착 가라앉았다.

뛰는 가슴과 식은 머리로 생각했다. 계산했다.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

앞을 가로막은 본드래곤.

놈을 돌파하고 하비엘을 찾으러 갈 방법.

계산은 잠깐이었고, 결론은 금방이었다.

'할 수 있어.'

망설일 시간이 없다.

그는 곧바로 움직였다.

"꼬밍아!"

"꼬밍!"

그의 외침에 꼬밍이가 호응했다.

작달막한 날개를 야물딱지게 휘저었다.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듯 선회하는 척하다가 급상승했다.

본드래곤의 날갯짓에도 힘이 들어갔다.

뒤를 따라 상승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로이드는 꼬밍이의 귓가에 말했다.

"꼬밍아, 잘 들어."

"꼬밍?"

"이제부터 네가 해줄 역할이 중요해. 내가 여기 남고, 네가 하비엘한테 날아가야 할 거니까."

"꼬미밍? 꼬밍?"

"거꾸로가 아니냐고? 아냐. 내가 남을 거야. 여기에."

"꼬밍?"

"괜찮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네. 내가 여기서 저놈 붙들고 있을게. 아무래도 저놈, 아까부터 은근 나한테 집착하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잘 붙들 수 있을 거 같아. 그 사이에 네가 날아가는 거야."

"꼬미밍?"

"맞아. 하비엘한테. 아까 하비엘이 추락한 지점 봐뒀지?"

"꼬밍!"

"잘했어. 가서 녀석을 찾아. 아직 죽진 않았을 거야. 하비엘이니까. 철혈의 기사니까. 그러니까 녀석을 찾으면 당장 태워서...."

"꼬밍?"

"아니, 여기로 데려오면 안 돼. 시가지로. 의사에게 데려가."

"꼬미밍?"

"의사 맞아.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니야."

"...."

"어지간해선 내가 응급처치를 직접 해주는 게 제일 좋겠지. 아스라한 심법을 지녔으니까. 녀석의 써클을 직접 공명시킬 수 있을 거니까. 근데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안 될 것 같다. 그래서야. 내가 못 해준다면 의사가 해주는 응급처치가 그나마 나을 거야."

"꼬밍...."

"그거면 충분해. 하비엘이라면 회복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녀석 응급처치만 마치면 바로 다시 태우고 날아. 그리고 왕도 남쪽 관문 근처에서 기다려. 나도 거기로 도망칠 테니까."

"꼬미밍? 꼬밍?"

"괜찮아. 나도 본드래곤 같은 괴물이랑 작정하고 맞설 생각 없어. 적당히 시간만 끌다가 얍삽하게 도망칠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

"꼬밍...."

"괜찮다니까?"

어느새 울상이 된 꼬밍이.

그런 녀석을 향해 짐짓 웃었다.

사실은 불안하다.

잘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상황에서 하비엘을 살리고 나도 살려면 이것밖엔 없어.'

혼자 도망치는 건 싫었다.

녀석도 살리고 싶었다.

친구니까.

이 세상에 온 이후로 언제나 붙어서 지내온.

거의 모든 힘들었던 순간을 함께 이겨냈던.

그런 유일한 친구니까.

여기서 잃고 싶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였다.

"꼬밍아, 너만 믿는다!"

"꼬, 꼬밍?"

급상승의 끝자락에서 안장을 놓았다.

꼬밍이의 등에서 벗어났다.

마치 놀이공원 바이킹이 최대로 솟구쳤을 때처럼.

온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약간의 메슥거리는 감각이 명치 어름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추락이 시작되었다.

"꼬, 꼬미밍!"

당황해서 다급하게 외치는 꼬밍이의 모습이 저 위쪽으로 훅 멀어졌다.

대신 아래쪽에서 상승해 오는 본드래곤의 거대한 모습이 시야를 꽉 채웠다.

그제야 후회의 감정이 쑴펌쑴펑 샘솟았다.

'으으업!'

시야를 꽉 채워오는 본드래곤의 모습.

마치 산을 향해 덤벼드는 개미의 기분이 이런 걸까.

소름이 확 돋았다.

솔직히 무서웠다.

괜한 미친 짓을 했구나 싶기도 했다.

'어오, 친구가 뭐라고 진짜!'

그냥 확 버리고 튈걸.

그러나 이젠 후회하기에 늦었다.

로이드는 정신을 집중했다.

청개구리처럼 팔다리를 활짝 펼쳤다. 본드래곤 이마의 뿔 한쪽에 배치기 자세로 떨어졌다. 뿔 밑동을 움켜쥐듯 얼싸안았다.

 

투퍽!

 

"...그후업!"

속이 확 뒤집히는 충격.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그래도 다행히 본드래곤 뿔에 무사히(?) 달라붙는 데에는 성공했다.

'방금 꼬밍이가 그랬던 것처럼 본드래곤도 이런 건 예상 못 했을 테니까.'

예고도 없이 안장을 확 놓아 버렸던 자신이었다.

그건 꼬밍이도 예상하지 못했다.

뒤를 추격해오던 본드래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꼬밍이와 본드래곤의 거리도 굉장히 가까웠던 상황이었다.

'안 그랬음 웬 떡이냐 하고 한입에 먹혔겠지.'

사실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래도 그 도박이 통했다.

그거면 된 거다.

'그으으읏!'

로이드는 전력으로 뿔을 끌어안고 버텼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본드래곤이 이쪽을 털어내려 머리를 거칠게 휘젓고 있었다.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헤드뱅잉을 감행하는 기린.

그런 기린 머리에 달라붙은 파리가 된 기분이었다.

'일단 아래로!'

이대로라면 당한다.

머리 털기에 털려서 지상으로 떨어지거나.

앞발 긁기에 터져 죽는 벼룩 꼴이 나거나.

그걸 직감한 로이드는 곧바로 스킬 옵션을 발동했다.

'에너자이저!'

 

딩동.

 

[아스라한 심법 옵션 ① : 에너자이저(改)를 발동합니다.]

[트리플 써클의 효율성을 극한으로 활용합니다. 앞으로 20분간 절대로 지치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키이이이잉-!

 

심장을 둘러싼 써클에서 곧바로 반응이 왔다.

세 갈래 써클이 한층 활발하게 회전했다.

마치 소드마스터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끝없는 마나의 순환처럼.

써클에서 증폭된 마나가 계속해서 순환했다.

첫 번째 써클을 거쳐 두 번째 써클로.

두 번째 써클에서 세 번째 써클로.

그리고 다시 첫 번째 써클로.

마나가 재활용되듯 순환하며 지치지 않는 활력을 주었다.

로이드는 그 힘을 바탕으로 본드래곤의 머리 휘두르기 원심력을 버텨냈다.

끈질긴 나무늘보처럼 뿔 아래로 기어 내려갔다.

'끄읏차!'

그는 계속 기었다.

가끔 달려드는 앞발 긁기를 바퀴벌레 같은 본능으로 피해냈다.

그리고 꼬밍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 빨리!'

녀석은 당황해서 주위를 빙글빙글 날고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손짓했다.

알려준 대로 하라고.

그제야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날아갔다. 하비엘이 추락한 지점을 향해서였다.

'그럼 이젠 내 차례겠네.'

꼬밍이가 하비엘을 찾아 안전한 곳으로 옮길 때까지.

그때까지만 시간을 벌어주자.

아주 확실하게.

'이렇게!'

바락바락 기었다.

본드래곤의 정수리를 지나갔다.

머리뼈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곳에 본드래곤의 눈구멍이 있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로이드는 망설일 것도 없이 눈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드래곤의 생전에 시신경 다발이 지나갔을 통로를 기어서 통과했다.

이윽고 널찍한 뇌실에 다다랐다.

그리고 삽을 야물딱지게 쥐었다.

휘둘렀다.

 

카앙!

 

삽이 본드래곤의 두개골 뇌실 안쪽 벽을 두들겼다.

물론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었다.

사소한 흠집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의도한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 ...!

본드래곤 속의 영혼, 흑마법사 타르가가 움찔했다.

머릿속에서 별안간 울려 퍼진 쇳소리.

그게 깜짝 놀랄 정도로 요란했다.

- 이, 이놈이!

타르가는 당황했고, 분노했다.

그렇지 않아도 찢어 죽여야 속이 풀릴 놈이 로이드였다.

한데 감히 자신의 뿔이며 머리에 매달리던 것도 모자라 머리뼈 속으로 들어오다니.

심지어 안쪽에서 머리뼈를 요란하게 쳐대다니.

- 당장 나오지 못해!

온몸의 뼈를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영혼의 포효일 뿐.

로이드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당연히 로이드를 말릴 수도 없었다.

"하, 반응 좋아."

딱 한 대 카앙 내리쳤을 뿐인데 온몸으로 트위스트를 추는 본드래곤.

기대 이상의 리액션이었다.

로이드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삽이 더욱 요란하게 춤을 추었다.

"훅! 후욱!"

 

카앙! 캉! 카카카캉! 캉캉캉!

 

- ...그, 그아앗!

대놓고 현란한 비트로 움직이는 삽자루!

본드래곤의 몸부림이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 날갯짓마저 멈추었다.

지상으로 가까스로 내려섰다.

머리뼈를 흔들고 긁으며.

로이드를 꺼내려고 발악했다.

그러나 로이드는 에너자이저 옵션을 발동하는 중이었다.

절대로 지치지 않았다.

지치기는커녕 더욱 사악하게 삽을 놀려댔다.

"혹시 철판 긁는 소리 좋아하냐?"

- ...!

 

끼기기끼기기기기기-!

 

급기야 삽으로 머리뼈 안쪽을 박박 알차게 긁었다.

본드래곤의 트위스트가 더 심해졌다.

흑마법사 타르가의 행복지수가 음차원의 영역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로이드라고 해서 마냥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더, 아직 모자라. 더.'

놈이 당황하는 건 잠깐일 뿐이다.

지금 머리뼈 안쪽을 삽으로 때리고 긁는 이런 거, 결국엔 적응할 거다.

'실질적인 타격은 전혀 못 주고 있으니까.'

말 그대로 놈을 성가시게 만드는 것밖에 못 하고 있으니까.

그런 로이드의 불안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세차게 날아온 본드래곤의 앞발과 함께였다.

 

콰아앙-!

 

머릿속에서 울리는 쇳소리를 참다못한 본드래곤이 앞발로 자신의 머리뼈를 후려쳤다.

수천 톤의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물론 그 정도에 머리뼈가 박살 나지는 않았다.

대신 머리뼈 안쪽에 있던 로이드를 날려 버리기에 딱 충분했다.

"...!"

아무리 튼튼한 트럭에 타고 있어도.

설령 단단하기 그지없는 탱크에 타고 있어도.

그 차량이 어딘가에 충돌하면 안쪽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충격을 받는다.

아니, 물체가 단단할수록 더 큰 충격을 받기도 한다.

지금의 로이드가 그랬다.

"커헉!"

막대한 충격력이 머리뼈 내부를 흔들었다.

마치 안전벨트 없이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처럼.

로이드의 전신이 머리뼈 내부에서 날려갔다.

반대편 벽에 때려 박히듯 부딪쳤다.

널브러졌다.

"...!"

숨이 콱 막혔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벌어진 입에서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크, 허헉!"

갈빗대가 부러진 건 아닐까.

아니, 온몸의 뼈가 모조리 으스러진 건 아닌지.

로이드는 간신히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애썼다. 바닥을 기면서 손을 뻗었다. 놓친 삽을 잡았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

또 한 번의 타격이 반대쪽에서 들어왔다.

"...!"

다시금 날려갔다.

반대편 내벽에 부딪혔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의식은 몇 초 뒤에야 간신히 돌아왔다.

'제, 젠장.'

로이드는 삽을 움켜쥐고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경련했다.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나긴커녕 당장 기절하지 않으려 애를 써야 할 판국이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본드래곤이 스스로 머리뼈를 후려칠 줄은 몰랐는데.

온몸이 아팠다.

으스러지는 기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자신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왔다.

결정을 했고, 행동을 했다.

그러니 결말을 봐야 한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래서 싸우는 거, 싫었다니까.'

하지만 시작한 싸움이니 지기 싫었다.

최소한 목표 달성은 하고 싶었다.

아니, 이쯤 되니 한 방 먹이고 싶어졌다.

'이렇게.'

 

딩동.

 

로이드가 삽을 움켜쥐며 독한 마음을 먹는 순간.

그의 눈앞에 새로운 옵션 발동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스라한 심법 옵션 ② : 잠력 폭발(改)을 발동합니다.]

[30초 동안 써클의 증폭률이 5배로 상승합니다.]

 

키이이이잉-!

 

그때부터였다.

세 갈래 써클이 움직였다.

꿈틀거리고, 요동쳤다.

일어나서, 포효했다.

아니, 미쳐 날뛰었다.

그 폭발적인 힘이 로이드를 일으켰다.

빈사 상태이건 말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앞으로 24초.'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

오늘, 지금,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그가 아스라한 심법의 네 번째 옵션을 발동했다.

 

[아스라한 심법 옵션 ④ : 써클 시프트를 발동합니다.]

 

미쳐 날뛰어 가는 세 갈래 써클의 회전수를 지배했다. 맞추었다. 최적의 충돌 비율로. 공명시켰다.

 

키이이잉-!

 

포효하는 세 마리 맹수에게 목줄을 채운 기분이 이럴까.

서클 시프트에 강제된 세 갈래 써클이 서로를 물어뜯었다. 뒤얽혔다. 충돌했다. 폭발했다.

그 순간, 삽으로 눈구멍 바깥을 겨누었다.

 

투콰학-!

 

다섯 배로 증폭된 출력.

그만큼 더욱 증폭된 충돌.

다섯 배로 위력이 폭증 된 삼중발파였다.

밀폐된 공간에서 그 격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내쏘았다.

삼중발파가 거침없이 분출되었다.

본드래곤의 시신경 다발 통로를 긁었다. 넓혔다.

눈구멍을 통해 쏟아져 나갔다.

'더!'

다시 한 번.

 

투확-!

 

다섯 배로 증폭된 삼중발파의 격류에 눈구멍 둘레 뼈가 미세하게 깎여 나갔다.

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충분했다.

삼중발파로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안 했으니까.

이건 그저 진짜 한 방을 위한 준비일 뿐이니까.

그 순간.

 

딩동.

 

[아스라한 심법 옵션 ② : 잠력 폭발(改) 발동이 종료되었습니다.]

[옵션 발동의 페널티로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붉은 메시지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전신에서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울부짖듯 미쳐 날뛰던 세 갈래 써클도 잠잠해졌다.

하지만 로이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두 눈에 독기를 떠올렸다.

'내가 말했지. 비키라고. 오늘, 할 수 있는 거 다 한다고.'

그래서 진짜로 다 했다.

마침내 발동했다.

처음부터 노렸던 가장 강력한 한 방을.

 

[아스라한 심법 옵션 ⑤ : 급속충전을 발동합니다.]

[옵션 적용 범위 내 주위의 무작위한 대상으로부터 대량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가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마나 써클이 다시금 눈을 떴다.

그것은 포식자의 눈이었다.

게걸스럽게.

탐욕스럽게.

옵션 범위 내의 모든 것을 흡수할 먹잇감으로 삼았다.

물론, 본드래곤의 머리뼈도 예외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