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선택의 순간이란 언제나 고통스러운 법이다.
기회비용을 계산해가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고르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나에게 있어 [커스텀 네트워크]의 분기점 선택은 늘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떤 것이 자신에게 더 이득이 될 것인가.
내가 언젠가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찾아오지는 않을까.
언제나 그러한 고민을 해왔던 까닭이다.
"······."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 나는 여태껏 자신이 해왔던 선택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지금까지의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선택지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여태껏 단 한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던, 말도 안되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선택지.
터무니 없는 내용으로 가득찬 선택지가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마주하고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선택지가··· 하······."
입밖으로 새어나오는 깊은 탄식.
경악의 목소리를 흘리며 나는 눈앞에 나타난 선택지를 확인했다.
- 커뮤니티의 누적 활동치가 기준치를 돌파했습니다!
- [커스텀 네트워크(A)]가 당신의 커뮤니티에 네번째 분기점을 제시합니다!
- '개방형 커뮤니티 : 집속'을 선택하는 경우, 사망한 커뮤니티 구성원의 무작위 능력치 일부를 양도받으며, 능력치의 성장한계가 사라집니다.
- '폐쇄형 커뮤니티 : 장악'을 선택하는 경우, 커뮤니티 구성원에 대한 이해도와 영향력에 비례해 능력치 일부를 공유받습니다.
고유특성의 네번째 분기점.
해당 분기점의 선택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두가지 선택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번째 선택지의 이름은 '개방형 커뮤니티 : 집속'.
그리고 두번째 선택지의 이름은 '폐쇄형 커뮤니티 : 장악'.
그중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첫번째 선택지의 내용이었다.
"죽은 구성원 숫자에 따라서 강해지는 특성이라고?"
첫번째 선택지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이마를 붙잡은 채 그 내용을 곱씹어보았다.
두가지 선택지 모두 능력치와 관련된 내용이지만, 첫번째의 경우 그 조건이 지나친 편이었다.
커뮤니티의 구성원이 죽을수록 자신의 능력치가 무작위로 상승한다.
그 내용만 봐서는 커뮤니티 구성원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라는거나 다름없었다.
"대체 왜 이런 선택지가······."
나는 지금까지 사람간의 교류를 장려하는 것이 커뮤니티의 목적이라고 생각해왔다.
허나, 지금 내 앞에 나타난 선택지들을 보니 막상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모아놓은 사람들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그러한 질문이야말로 이 특성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인 존재의의였던 것이다.
깜빡, 깜빡-.
수차례 눈을 감았다 뜨며 선택지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도 잠시.
머지않아 게이트 브레이크가 발생한 유적에서 보았던 문구가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 백명을 처형하고, 천명을 씹어삼키며, 만명의 위에 군림하소서.
- 이것은 모든 힘을 당신의 발 아래에 놓이게 하기 위한 우리의 위대한 첫걸음입니다.
- 우리는 모든 신과, 모든 인간과, 모든 능력을 연결하는 이 위대한 계획에 하나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당시에 유적에서 내가 마주했던 문구의 내용.
그것은 거대한 제단이 모든 힘을 황제의 발 아래에 놓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모든 신. 모든 인간. 그리고 모든 능력을 연결하는 그들의 계획.
그 원대한 계획에 붙여진 이름은 나에게 있어서도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이었다.
"······네트워크."
나도 그러한 제단의 문구와 비슷한 방향성을 가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람과 신을 연결하는 능력.
그들이 황제에게 바친 힘과 내가 가진 고유특성의 차이라고는, 나에게는 모든 능력을 연결시키는 기능이 없다는 점 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내 눈앞에 놓여있는 선택지 역시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닐 터였다.
"하, 이거 미치겠네."
이마를 짚고 있던 손바닥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어놓았다.
여전히 이 세상이 나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들이 너무 많았다.
깊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욱 깊은 심연을 마주하는게, 점점 깊은 늪에 빠져들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후우······."
눈앞의 선택지를 보고있자니 머리가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결정이야 이미 내려졌다고는 하지만, 겨우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일개 유튜버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겨놓은 것은 아닌가.
그런 고민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
복잡한 고민에 잠긴 내 감정을 읽어들인 것이었을까.
하늘로부터 순백의 용이 나에게 목소리를 퍼뜨리는 모습이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그대여. 무엇이 우리의 친우를 고통스럽게 만드는가."
용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것을 들은 나는 용을 향해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내 인생에 선택지가 암군 아니면 폭군밖에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체념하듯이 내뱉은 한마디.
순백의 용은 기다란 몸을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지상에 있는 나를 향해 금색의 눈동자를 움직였다.
황금을 박아넣은 듯한 찬란한 눈동자.
용은 나를 내려다보며 진지한 이야기를 전하는 모습이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그대는 실패하는게 두려운건가?"
- "그게 아니면 누군가 그대의 실패를 원망하는 것이 두려운건가?"
새하얀 비늘을 드러낸 용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두려운가.
솔직히 말하면 어느쪽이든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누구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쎄. 둘 다 두려운거겠지."
내가 실패하면 세상이 망한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입장은 실로 난감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저 하늘에 떠있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나와 순백의 용은 비슷한 결론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은 신비롭고, 또 조금은 어른스러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그대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은 실패가 아닐테지."
- "실패가 두려워 나아가지 못한 채, 그 순간을 후회하게 되는게 오히려 최악의 상황이 아니겠는가."
다소 진중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용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결론은 하나였다.
순백의 용은 마지막 전언을 이야기하고선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내키는 대로 결정하도록."
-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대의 선택을 존중할테니."
두려워하지 말라.
실패해도 좋으니 마음가는대로 결정하라.
백색의 용이 나에게 남긴 조언이었다.
그것이 더 이상 책임질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내가 스스로를 믿고 계속해서 강행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암군 아니면 폭군.
정신나간 두 선택지의 앞에서, 나는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뭐, 그렇겠지. 폭군은 그게 맞아."
툭-.
나는 지금까지의 고민에 방점을 찍듯이, 눈앞의 선택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폐쇄형 커뮤니티 : 장악'을 선택하셨습니다.
- 다음 분기점이 나오기 전까지, 더 이상 최대 인원을 확장할 수 없습니다.
- 새로운 기능, [운명장악]이 활성화됩니다.
- [운명장악]은 당신이 커뮤니티의 이용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해도와, 그들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에 비례해 능력치를 공유받는 기능입니다.
- 커뮤니티 구성원, [그림자사냥꾼]에 대한 영향력이 50%에 도달했습니다!
- 민첩 능력치가 다음과 같이 조정됩니다.
- 민첩 : D+ → C+
띠링, 띠링-.
수도 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반투명한 메세지들.
오랜 시간 이어져온 선택의 대가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것들을 앞에 두고서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미 결정했는데 이제와서 뭐라한들 어쩌겠어."
성공하면 카리스마.
실패하면 압제와 폭정.
원래 인생이란게 그런 법이 아니겠는가.
"억울하면 자기들이 폭군 해야지."
그래서 나는 그냥 폭군이 되기로 했다.
* * * * * *
무거운 선택을 마치고서 어느덧 닷새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수많은 고민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대부분은 지난번에 개방된 신규 기능, [운명장악]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교류와 교감은 결국 공동체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그에 대한 고민들이 내 머릿속을 끊임없이 순환한 것이다.
"내가 철학자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물론 그러한 고민들이 나에게 있어서 썩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나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고민들이었던 까닭이다.
다른 헌터들을 이해하고자 유튜브에서 그들에 대한 영상을 보고있으면, 점점 추천 영상을 타고 넘어가더니 결국 이상한 영상에 도달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 결과 나는 지난 닷새동안 낙원에 들러 세계수의 씨앗에 물을 주면서, 하루종일 유튜브와 커뮤니티에 몰두하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하··· 어떻게 해야 새로운 기능을 제대로 써먹지."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착실하게 흐르기 마련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빠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속에서 싹터버린 세계수를 뒤따르듯이, 내가 나무를 기르며 고민하던 시간 역시 쏜살처럼 앞으로 흘러갔다.
그 사이에 유일하게 바뀐 것은 내 손목에 채워져있는 팔찌 하나뿐이었다.
S+급 아이템, <아딜레아의 영광(S+)>.
성좌 아딜레아와의 거래를 통해 새롭게 손에 넣은 물건이었다.
"······."
나는 오늘도 해당 아이템을 착용한 채, 은신처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툭, 툭-.
나무로 이루어진 책상을 내 손가락이 가볍게 두드렸다.
몬스터가 사라진 이 자그마한 은신처는 언제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때면 찾아오는 장소였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깊은 고민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던 찰나.
쩌저저저적-!
나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뒷자리에서 울려퍼지는 기이한 소리를 듣고서 정신을 차렸다.
"······뭐야?"
은신처 내부에 생긴 이변을 알아차린 직후.
나는 기이한 소리가 울려퍼지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은신처의 구석에 위치한 벽면.
일찍이 '타락한 신관 레델'이 부수고 나왔던 벽의 표면에, 거대한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쩌적, 쩌저저적-.
더군다나 벽면에 생겨난 균열은 계속해서 확장을 거듭해나가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벽면이 갈라진다고?"
나는 그러한 벽면의 모습으로부터 커다란 불안감을 느꼈다.
아무리 은신처라는 이름이 붙어있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몬스터가 나타났던 게이트였다.
어쩐지 게이트가 폐쇄가 안된다 싶었더니, 설마 이 너머에 몬스터가 하나 숨어있었던 것인가.
그런 걱정을 하면서 나는 벽면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설마 몬스터가 나타나는건 아니겠지."
여차하면 몬스터와 함께 벽을 날려버릴 생각을 가지고 말이다.
스윽.
그렇게 손가락을 겨눈 채로 벽면을 노려보기를 몇분.
빠른 속도로 갈라져가던 벽은 이내 둔탁한 소리와 함께 허물어졌다.
쿵! 데구르르.
투두두두두둑-.
바닥을 나뒹구는 돌조각.
그리고 사방에 흩뿌려지는 자잘한 파편들.
그 속에서 무너진 벽 너머에 존재하던 비밀이 내 눈앞에 드러났다.
"······이건 또 뭐야."
무너져내린 벽면의 안쪽.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 썩어 문드러져가는 나무 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문 한가운데에는 먼지에 뒤덮힌 글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흙먼지에 뒤덮힌 채 글자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문짝.
썩어가는 문의 한구석으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비추어졌다.
언데드가 된 레델 화이트가 격리되어있던 벽 안쪽에, 비밀스러운 공간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벽안에 공간이 있었다고? 문 너머를 망가뜨릴까봐 일부러 벽을 세워둔건가?"
내가 오랫동안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공간이다.
아무래도 지난 싸움의 여파를 버티던 벽이, 끝내 누적된 피로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모양이었다.
언데드가 된 스스로를 벽에 가두어놓은 레델의 성격을 생각해봤을때, 레델 본인이 의도적으로 문을 숨겨놨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터벅, 터벅-.
새롭게 드러난 문을 향해 가까이 다가간 나는, 손바닥으로 흙먼지를 힘껏 털어내었다.
슥, 스윽.
먼지가 닦이며 드러난 글자.
그런 글자의 의미가 번역 기능을 통해 내 눈앞에 출력되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레델 화이트의 예배실
- 주의 : 신실한 성직자만 출입가능
문에 적혀있는 글자.
그곳에는 '레델 화이트의 예배실'이라는 명칭과 함께, 이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레델의 조건이 적혀있었다.
신실한 성직자를 위한 예배실.
그 존재를 깨닫고서 문을 바라보던 나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신을 네명이나 모시는거면 충분히 신실한거 아닌가?"
끼익-.
나는 나무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강하게 열어젖혔다.
그 직후, 오래된 나무문이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나갔다.
"······."
쿠웅!
나는 망가진 나무문을 바닥에 집어던지고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을 바라보았다.
은신처가 숨기고 있던 또 하나의 비밀.
그것을 조사해볼 시간이었다.
76화
은신처의 벽면에 숨겨져있던 비밀공간.
썩어 문드러진 나무문의 너머에 존재하는 통로는 짙은 어둠으로 가득차있었다.
아래를 향해 이어지는 계단.
그곳은 은신처와는 다르게 광원이라고 부를만한 요소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햇빛이 안들어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많이 어둡네."
나는 그러한 어둠속을 스마트폰의 불빛에 의지해 나아갔다.
터벅, 터벅-.
어두운 공간에 내 발걸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벽면을 플래시라이트로 비추어보자, 불이 꺼져있는 횃불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레델 화이트가 이곳을 이용하던 시절에는 항상 횃불을 켜두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은 주인을 잃어버린 횃불만이 이곳에 남아있었다.
"그러고보니 레델 혼자서 이곳에 꽤 오랫동안 머물렀지.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이런 시설을 만들어낸건가?"
벽면의 너머에 있는 통로는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통로에 새겨진 조각들은 레델이 이 예배실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레델이었으니, 그에게 주어진 시간도 적지만은 않았을 터였다.
그러한 시간들을 거쳐 이런 공간을 만들어냈다면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내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반지만 하더라도, 레델이 직접 성물을 개량해 만들어놓은 물건이 아니던가.
은신처에 머무르던 마지막 성직자의 능력이라면 이런 시설을 건설하기에는 충분해보였다.
"아무래도 여기서부터가 진짜인가보네."
짧은 통로를 지나쳐 아래에 내려온 이후, 나는 바위를 깎아 만들어낸 거대한 방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동굴의 동공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공간.
이곳은 누가 보더라도 '방'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었다.
드넓은 공간에 빼곡하게 채워져있는 수많은 책장들.
그리고 그 한구석에 놓여있는 망가진 제단의 모습.
레델 화이트가 생전에 만들어둔 거대한 예배실의 풍경이 드러난 것이다.
말이 예배실이지 일종의 서고처럼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
예배실에 들어선 나는 카메라의 플래시라이트를 움직여가며 방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책들이 꽂혀있는 나무 책장.
허나 그들 대부분은 불에 타거나 그슬린 자국이 보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교적 멀쩡하게 남아있는 일부 서적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었을까.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몇가지 책의 제목들을 확인해보았다.
"블렌도어의 사도들··· 위대한 블렌도어를 섬기는 이들에게··· 허광의 역사··· 계시록······. 하나같이 난해해보이는 책들밖에 없네."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을 확인한 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은 채 그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예배를 드리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었을까.
책장에 꽂혀있는 서적들은 하나같이 성직자를 위한 물건들이었다.
성좌 블렌도어의 상태를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신앙심을 기를 목적을 가지고 읽어볼 필요는 없어보였다.
교단의 역사나 대륙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위함이라면 모를까 말이다.
"솔직히 도움이 될만한 내용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제목을 확인한 책들을 책장에 되돌려놓았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었을까.
띠링-.
머지않아 성좌로부터 후원 메세지 하나가 날아오는 모습이었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의 신앙심에 도움이 될만한 서적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성자 자리를 처음으로 내려준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
그런 그가 나에게 독서를 추천한 것이다.
나는 그런 블렌도어의 권유에, 그를 향해 가벼운 질문을 던져보았다.
"성좌님. 현재 블렌도어님을 섬기는 신도들중에서, 가장 신앙심이 투철한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짧은 질문.
내 질문을 받은 블렌도어에게서, 더 이상 메세지가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답변이 필요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야 성좌 블렌도어가 생각하기에도 단 한명밖에 없을테니까 말이다.
"······."
그런 성좌의 반응으로부터 만족한 나는, 계속해서 예배실의 탐험을 이어나갔다.
터벅, 터벅-.
다시금 방안에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마법적인 수단을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깔끔하게 갈려나간 벽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석벽을 따라 걸어가다보면, 그 사이에서 글씨가 적혀있는 석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석판인가?"
석판에 새겨진 글씨는 상당히 정갈하게 적혀있는 편이었다.
레델의 일기장에서 마주했던 것과 비슷한 유형의 문자였다.
내가 석판을 주의깊게 바라보며 글씨를 확인해보자, 내 눈앞에 석판의 내용이 출력되는 모습이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선명하지 않은 것들의 주인이시여.
- 구분 짓지 않는 이들의 왕이시여.
- 모호한 이들이 교호의 뜻을 두어 청하니, 우리를 보호하소서.
석판에 적혀있는 문구.
그것은 얼핏 보기에 기도문처럼 보이는 내용이었다.
레델이 섬기던 신, 허광의 블렌도어를 향한 기도였던 것이었을까.
그것을 보던 나는 왠지 모르게 흥미가 동하는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기도 한 번 못받아봤을텐데, 성자가 되어서 한번쯤은 기도해주는게 맞지 않나?'
블렌도어에게의 기도.
나는 블렌도어의 성자된 입장으로서, 잊혀진 신을 향해 짤막한 기도를 올려보기로 했다.
내 나름대로 하늘의 성좌를 향한 배려인 셈이었다.
크흠, 흠-.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나는 성직자를 흉내내듯이 기도문을 읊어보았다.
"—모호한 이들이 교호의 뜻을 두어 청하니, 우리를 보호하소서."
그리고 그 직후.
파앗-!
갑작스럽게 내 눈앞에서 선명한 빛이 터져나왔다.
새하얀 빛이 내 시야를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윽······."
나는 시야를 가리는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광원.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신성력이 빠른 속도로 빨려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내 시야 한구석에서는 반투명한 창 하나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띠링-.
나는 눈앞에 떠오른 짤막한 메세지를 읽어보았다.
- <아딜레아의 영광(S+)>이 새로운 신성주문을 기록했습니다!
- 첫번째 잎사귀에 [신성주문 : 수호의 광채]가 등록되었습니다.
* 시야를 밝히며 사용자를 수호하는 빛을 만들어냅니다.
* 저장된 힘을 모두 소진하면 사라집니다.
지금 내 시야에 보이는 메세지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S+급 아이템, <아딜레아의 영광(S+)>.
해당 아이템에 새로운 신성주문이 기록되었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서 지금 내가 신성주문을 사용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게 단순한 기도문이 아니라 신성주문이었다고······?"
나는 해당 메세지를 마주하고서 상당히 당혹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기껏해야 기도문을 새겨놨을거라 생각했더니, 레델이 터무니 없는 보물을 남겨놓았던 까닭이었다.
—[수호의 광채].
어느새 내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환한 빛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주변을 밝히며 사용자를 보호하는 기능이 달려있는 신성주문인 모양이었다.
레델 화이트가 먼 미래의 나를 위해서 남겨놓은 보물인 것이다.
"······신성주문."
이제부터는 <스크롤 북(A)> 없이도 제대로 된 신성주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가볍지 않았다.
지금껏 네명의 신을 모시는 성자로 살아왔지만, 제대로 된 기적이라고는 하나도 펼칠 수 없었던 나였다.
그런 내가 이제 작정하고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 무척이나 큰 진전인 셈이었다.
"이러면 이제 진짜배기 성자라고 봐도 무방한거 아니야······?"
나는 주위를 맴도는 신성한 빛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여태껏 [커스텀 네트워크]가 허락하는 스킬에만 의존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아이템이나 특성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도, 나 자신이 신성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감격스러운 상황에 만족하며,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바라보았다.
"일단은 팔찌부터 다 채워둘까."
신성주문을 스톡할 수 있는 성물을 활성화시킨 상황.
그러니 이제는 해당 팔찌에 한껏 주문을 때려박을 차례였다.
홀리 유튜버, 헌잘알.
나는 자신의 팔찌에 한계까지 주문을 채워넣기 시작했다.
* * * * * *
S급 헌터, 검귀 천시예.
그녀는 한국에서 슈퍼스타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기를 가진 헌터였다.
특징적인 외모에 대한민국에서도 2위라 불릴만한 실력.
거기에다가 국내 최연소 S급 헌터라는 타이틀까지.
스타가 될만한 요소는 전부 다 갖추고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재미없는 글밖에 없어."
그리고 그런 특성때문에 그녀는 상당히 소시민적인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날때마다 S급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에 접속해 게시글을 작성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지금에 이르러서 천시예에게 남은 몇안되는 취미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툭-.
오늘도 천시예는 [커뮤니티]에 접속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다만, 방금 천시예가 클릭한 게시글은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당 게시글을 작성한 이용자가 스스로 신창이라고 자칭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이용자명, '망원동불주먹'.
그는 오늘도 S급 헌터들이 모인 [커뮤니티]에 게시글을 업로드했다.
[ 제목 ] 나는 우리같은 훌륭한 인재들이 힘을 합쳐야한다고 생각한다.
[ 작성자 ] 망원동불주먹
날이 갈수록 게이트에 이상현상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머지않아 심각한 이변이 인류 전체에게 닥칠지도 모른다.
게이트가 처음 생성된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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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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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나는 우리들이 힘을 합치고 뜻을 모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댓글 2개 ]
- tex11 : 너무 길어서 쭉 내렸어요 ㅜㅜ
- frz0777 : 요즘 훌륭한 인재들은 '망원동불주먹'같은 닉네임 사용하나봐
이용자명 '망원동불주먹'이 [커뮤니티]에 올린 게시글의 내용.
그것은 하나같이 지루하고 형식적인 내용들 뿐이었다.
누군가는 해당 내용에 공감할지도 모르겠지만, 대다수는 제대로 읽지않고 넘어갈 터였다.
장문의 논문이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걸 선택하지는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천시예에게는 해당 게시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존재하고 있었다.
"주선호······."
세계 최고의 헌터라고 일컬어지는 신창 주선호.
그는 오래 전부터 천시예와 악연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주선호와의 악연이 시작된 것은 오래전에 있었던 토벌작전의 결행일이었다.
주선호와 같은 길드에 몸을 담은 채 헌터로서 생활해왔던 천시예의 양친.
그 두사람이 주선호와 함께 진행했던 토벌작전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시예는 자신의 부모가 목숨을 잃은 이유를 아직까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짓을 벌여놓고도 태연하게 이런 글을 쓰는구나."
—주선호가 죽였다.
그 한마디가 천시예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맴돌았다.
현장에서 살아나왔던 길드소속의 헌터가 그녀에게 직접 해줬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헌터는 사고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며칠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의 사고를 증언해줄 이들은 전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천시예는 여전히 그 범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가족의 원수를 갚는다.
그것만이 천시예가 지금껏 쉬지않고 자신을 갈고닦아왔던 유일한 동기였다.
"······."
까득-.
이를 갈던 천시예의 손가락이 주선호의 게시글에 비추천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비추천 숫자가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화풀이를 끝낸 이후에는, 계속해서 게시판을 탐색하는 천시예였다.
스윽, 슥-.
빠른 속도로 스크롤을 내리던 천시예의 손은 머지않아 익숙한 닉네임을 게시판에서 찾아내었다.
"거품판독기······?"
이용자명 '거품판독기'.
천시예가 잘 알고있는 헌터였다.
S급을 달성했으면서 그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미등록 헌터.
더군다나 그는 구독자가 100만명이 넘는 채널을 운영하는 대형 유튜버이기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글이지?"
꾸욱-.
천시예의 손가락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유호의 게시글을 클릭했다.
그 직후, 해당 게시글의 내용이 천시예의 눈앞에 출력되었다.
[ 제목 ] 나를 홀리 엘프 폭군이라고 불러주지 않겠니?
[ 작성자 ] 거품판독기
너희들에게 부탁이 있다
이제부터 나를 홀리 엘프 폭군이라고 불러주지 않겠니?
[ 댓글 3개 ]
'거품판독기'가 커뮤니티에 올린 게시글의 내용.
그것은 스스로를 '홀리 엘프 폭군'이라는 괴상한 칭호로 불러달라는 글이었다.
천시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글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내용이었다.
"······대체 왜 이런 부탁을 하는거야?"
당황한 천시예의 손가락이 스크롤을 내렸다.
그리고는 댓글의 내용을 확인했다.
[ 댓글 3개 ]
- thundershock : 홀리 쉣
- frz0777 : 엘프들 다 굶어죽었나봐
- yamazaki : 폭군 인정. ʕ ◔ᴥ◔ ʔ
신유호의 글에 달린 댓글의 내용.
거기에는 모든 유저가 친절하게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세로로 모아서 보면 읽히긴 하는만큼 부탁을 들어주기는 한 셈이었다.
그리고 천시예 역시 '홀리 엘프 폭군'에게 어울리는 자그마한 도움을 주기로 했다.
"······."
꾸욱-.
천시예의 손가락이 비추천 버튼을 터치했다.
그렇게 오늘도 그녀는 일곱개의 게시글에 비추천을 선물했다.
77화
예배실을 발견한 이후,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계속해서 예배실에 보관되어있던 책들을 읽어나갔다.
유튜버의 길을 선택하고서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게 언제였던가.
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 책 대신 유튜브 영상과 쇼츠를 보기 시작한지 제법 오래된 것 같았다.
애초에 나부터가 고상한 책을 읽는 취미는 없다시피 했다.
정보수집 목적으로 종교관련 서적들을 꺼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열중하는 일도 없었을테고 말이다.
"대륙의 신들에 대한 책이라······."
내가 지금 은신처에서 열중해서 읽고 있는 책의 내용.
그것은 대륙에 존재하는 신들과 그들의 특징에 대해 기록해놓은 서적이었다.
이른바 '성좌 도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인 셈이다.
이 책에는 내가 아는 성좌들을 포함해서,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 적혀있었으니까 말이다.
"—청록의 아딜레아. 엘프들의 수호자. 숲과 자연을 사랑하는 신이다. 뭐, 여기까지는 알고 있는 이야기고."
대표적인 성좌를 뽑아보자면, 아딜레아나 라스테리오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나는 명예 엘프의 입장에서 해당 내용들을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아딜레아의 경우는 워낙 그 특징이 명확하니 당연하다고 쳐도, 라스테리오의 경우에는 조금 의외였던 부분이 있었다.
여태까지의 행보만 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을만한 내용이 적혀있었으니까 말이다.
"—황금의 라스테리오. 인간으로 태어나 스스로 별이 된 황제.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황금기를 이끌었다."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
그는 먼 과거에 제국을 다스리던 황제였다.
인류를 황금기로 이끌었던 위대한 황제.
그런 존재가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라스테리오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다보면, 그가 어째서 아서에게 그만한 관심을 보였는지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기야, 그런 사람이니까 최강의 기사한테 그렇게까지 깊은 관심을 보였겠지."
원래 군주들은 기사들만 보면 눈이 뒤집히지 않던가.
분명 라스테리오의 눈에는 어린 시절부터 아서가 특별하게 보였던 것이 틀림없었다.
사락-.
라스테리오에 대한 설명이 적힌 페이지를 넘어간 이후에는, 낯선 성좌에 대한 내용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처음 보는 성좌의 이름.
나는 그것을 조용히 읽어나갔다.
"—파멸의 알라티오. 파멸의 운명을 마주할 이들을 비호하는 신이다."
파멸의 알라티오.
그 이름을 읽고 있다보니 어째서인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름만 봐서는 악신인가 싶다가도, 막상 도움을 주기는 하는걸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보면 볼수록 계륵같은 성좌가 아닐 수 없었다.
"뭔가 미심쩍은데······."
그렇게 성좌에 대한 메세지를 보며 고민하는 것도 잠시.
띠링-.
머지않아 그런 내 귓가에 1:1 대화가 도착했음을 알려오는 알림이 울려퍼졌다.
커뮤니티의 누군가가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온 모양이었다.
"슬슬 시간이 됐나."
메세지를 보내온 인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오늘은 한참전부터 예고되어왔던 중요한 날이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헌터사에 새로운 획을 그을만한 특별한 날이었다.
스윽.
나는 들고 있던 책을 책상에 놓아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
화면을 열어 1:1 대화방에 접속하자, 익숙한 닉네임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 engine555 : 도착했어
- engine555 : 약속장소로 나와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인물의 정체.
그것은 그림자사냥꾼 이지성이었다.
그동안 나를 피해왔던 이지성조차도, 어쩔 수 없이 직접 연락해야만 하는 상황을 마주하고야 만 것이다.
나는 그런 이지성의 메세지에 헛웃음을 지으며 가방을 챙겼다.
"카메라로 오늘 일을 못남기는게 아쉽기는 하네."
이지성과의 불편한 동행.
오늘 벌어질 일들을 카메라에 담지 못하는게 상당히 아쉬울 따름이었다.
* * * * * *
깊은 어둠이 드리워진 야심한 밤.
이지성과의 약속장소에 다다르자, 나를 맞이한 것은 연식이 오래된 국내 브랜드의 세단이었다.
터벅, 터벅-.
내가 이지성이 준비해놓은 차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는 창문을 열어 나를 바라보았다.
"뒤에 타라, 신유호."
나는 그런 이지성의 이야기를 따라 세단의 뒷자리에 탑승했다.
평소에 내가 S급 헌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었을까.
이지성의 수입을 생각해봤을때, 차량 내부의 상태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부아아아앙-.
나를 태운 이지성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S급 헌터치고 상당히 검소한 분이셨네."
나는 그런 이지성을 바라보며 차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쯧-."
한차례 혀를 찬 이지성이 마지못해 나를 향해 대꾸했다.
"추적이 안될만한 물건을 급하게 구해온거라 나도 어쩔 수 없어."
"어쩐지, 내가 아는 그림자사냥꾼의 이미지랑 잘 안어울리더라니."
"······중요한 일 처리할때 몇번씩 쓰고 버리는 차량들이야."
아무래도 오늘을 위해 특별히 구해온 차량인 모양이었다.
이번 토벌작전이 극비리에 진행되는만큼, 이지성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내 질문에 퉁명스러운 대답을 돌려준 이지성은 입을 다문 채로 운전대를 잡았다.
차 안에 내려앉은 적막.
그 속에서 백미러에 비추어진 이지성의 얼굴이 보였다.
"······."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시선을 움직이는 이지성.
다른 누구보다도 이지성 본인이 잘 이해하고 있겠지만, 지금의 나와 이지성 사이에는 명확한 상하관계가 나뉘어져있었다.
폭군에게 바친 맹세.
그러한 맹세를 내뱉은 이후부터 이지성은 내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더는 이전처럼 그림자사냥꾼으로서 대우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후우······."
그렇기에 이지성이 차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나를 힐끔거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게 전부였다.
애초부터 이지성 본인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결과였다.
이제와서는 누구를 원망할 여지도 없을 터였다.
그런 이유로 계속해서 눈동자만을 반복해서 굴리던 이지성은, 한참동안의 고심끝에 백미러에 비추어지는 나를 향해서 이야기했다.
"신유호.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이유가 뭐지?"
이지성이 나에게 던진 질문.
그것은 내가 이번 토벌작전에 참가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내가 주선호의 토벌계획에 빠지지 않은 것이 의외였을까.
나는 그런 이지성을 향해서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형제들이 나를 필요로하는데 당연히 가야지."
반쯤은 농담조로 꺼낸 이야기.
허나 이지성이 생각하고 있을 내 이미지에 어울리는 답변이기도 했다.
그에 이지성의 안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너······."
이전보다 무거워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지성이었다.
나는 그런 이지성을 향해 짧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라고 해서 마냥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는건 아니야."
내가 이번 토벌 작전에 참여하는 이유.
거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른 헌터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
성좌들에게 받은 <별자리 시험>을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언젠가 마주했던 예지몽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서.
그러한 이유들이 잔뜩 존재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것들이 필요한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뿐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지금 이 정도가 딱 괜찮은 수준이겠지. 여기서 세상이 더 망해버려서야 나도 곤란해."
멸망으로부터 살아남는 것.
그것만이 내가 주선호의 이야기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이유였다.
그런 내 이야기에 이지성의 눈동자가 다시금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 말의 진정한 의도를 해석해보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그 이상의 뜻이라고는 찾아낼 수 없을테지만 말이다.
"게이트를 열어젖히는 능력을 가지고서, 대체······."
긴장한 목소리의 이지성이 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허나, 그런 그의 이야기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지성은 결국 고개를 저으며 앞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와서 대답을 듣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나."
그리고는 체념한듯한 얼굴로 핸들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림자사냥꾼, 이지성.
S급 헌터를 운전기사로 삼은 이 터무니없는 사치는 30분이 더 지나서야 끝을 맺었다.
* * * * * *
오랜만에 마주한 주선호와의 재회는 상당히 시끄러운 편이었다.
물론 주선호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평상시에도 말을 자주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주선호와의 재회가 시끄러운가.
그야 당연히 지금 내 옆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어떤 여자 때문이었다.
"허, 허, 헌잘알······?!"
"······."
S급 헌터, 풍랑(風狼).
대한민국 최강의 마법사가 지금 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중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시끄러워진 원인은 당연히 내 정체에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 유튜버, '헌잘알'.
그녀가 유튜버로서의 내 정체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유명한 유튜버잖아! 그런 사람이··· 사실 S급 헌터였다고······?"
"······."
"그것도 미등록 S급 헌터였어?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하기야, 원래도 유명했던 유튜버였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 유명해진 나였다.
검성이나 귀령처럼 저명한 헌터들과 인기 컨텐츠들을 잔뜩 찍었으니까 말이다.
특히나 서유화처럼 유튜브를 자주 볼 것 같은 유형은 나에 대해서 모르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 서유화의 격렬한 반응이 의외였던 것이었을까.
나와 서유화를 번갈아보던 주선호가 나를 소개했다.
"소개하지. 이쪽이 우리의 '계획'을 지원하는 네번째 동료, 신유호 형제다."
"신유호라고 합니다. 이런식으로 처음 만나게됐네요, 서유화씨."
주선호의 소개.
그리고 서유화를 향한 내 자기소개.
그것들을 동시에 마주한 서유화는 당황한 눈으로 그녀의 동료들을 훑었다.
주선호와 이지성.
그리고 그녀의 앞에 마주서있는 나.
세 사람을 번갈아보던 서유화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이야기했다.
"······설마 나 빼고 전부 다 알고 있었던거야? 아홉번째 S급 헌터의 정체가 유튜버였다는거 말이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군."
그런 서유화의 이야기에 주선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창을 움켜쥐었다.
이지성 역시 복잡한 얼굴로 서유화의 시선을 외면했다.
다른 두 사람이야 이미 나와 마주한 적이 있지만, 서유화만큼은 나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상황이다.
그러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퍽 억울하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설마했더니 유튜버 '헌잘알'이 커뮤니티에서 '거품판독기'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다니."
"크흠······."
갑작스럽게 커뮤니티에서의 닉네임을 꺼내는 서유화의 행동.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도덕이 없는 행동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닉네임과의 괴리감이 가장 큰 것은, 단언컨데 이 자리에 있는 '망원동불주먹'의 주인공일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거품판독기가 망원동불주먹보다는 낫지 않나?'
나는 어깨에 창을 걸쳐놓은 채로 서있는 주선호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거품판독기'가 주선호의 닉네임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던 것인지, 서유화는 주선호를 향해서도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었다.
"그러고보니까 우리 대장도 이상한 닉네임을 쓰던데. 어떤 닉네임이었지? 망원동불주먹?"
"죽은 동생이 게임에서 사용하던 닉네임이다."
서유화의 추궁에 대한 주선호의 해명은 간단했다.
죽은 동생이 사용하던 닉네임.
그 이야기를 듣자 한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다만 그 사실을 이야기한 주선호만큼은 덤덤하게 게이트의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저벅, 저벅-.
흙으로 뒤덮힌 길을 나아간 주선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게이트의 앞에 놓인 바위에 앉았다.
"시시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그리고는 우리를 바라보며 본론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굳게 닫힌 채로 빛을 빨아들이고 있는 자그마한 균열.
주선호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오늘 이 자리에 4명의 S급 헌터가 모여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 내 뒤에 있는 게이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EX급 게이트다."
"EX급 게이트······."
주선호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화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EX급 게이트.
여태껏 단 한번도 공략된적 없으며, 아직까지 완성된 적조차 없는 게이트였다.
그리고 그런 EX급 게이트를 앞에 두고서, 주선호는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도 이 자리의 모두가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무척이나 무겁고도 어려운 이야기를 말이다.
"헌터협회가 극비리에 조사한 결과, 국내에 이와 동일한 미완성 게이트가 78개 존재하고 있다."
"······."
"그리고 현재 한국에는 78개의 EX급 게이트를 처리할 역량이 없다."
78개의 EX급 게이트.
그 무거운 주제에 뒤따르듯이, 주선호는 이 자리의 헌터들을 향해 선언했다.
"대한민국은 조만간 멸망할거다."
78화
—세계는 곧 멸망할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는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내용이었다.
오래된 일기나 성좌들의 메세지를 통해 비슷한 정보를 반복적으로 접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주선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른 편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인류 최강의 헌터이면서, 또 내가 마주한 멸망의 미래에 서있던 생존자였으니까 말이다.
EX급 헌터, 신창(神槍).
그는 이 자리의 모두를 향해 더 이상 국가가 존속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78개··· 농담하는거지?"
경악으로 가득찬 서유화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지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서유화, 이건 농담이 아니야."
진지한 얼굴의 주선호가 서유화의 물음에 답했다.
EX급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한 목적으로 게이트에 진입하는 것조차 우리가 최초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78개의 EX급 게이트의 존재는 터무니 없는 소리로 여겨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한국에 존재하는 게이트의 개수만 추린 것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한국에만 국한된 일도 아니겠지."
아시아에 위치한 자그마한 나라에 78개나 되는 게이트가 있다.
그렇다면 전세계에 존재하는 EX급 게이트의 숫자는 대체 몇개라는 말인가.
이 자리의 누구라도 대략적인 규모를 짐작하기에는 어렵지 않은 숫자였다.
"저 게이트들이 전부 역류하는 순간, 전세계 규모의 대재앙이 찾아올거다."
머지않아 EX급 게이트들이 전세계를 휩쓸고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은, 현존 최강의 전력이라 여겨지는 S급 헌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선호의 이야기에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항거할 수 없는 막연한 재해.
주선호는 그러한 재해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헤맸던 것이다.
"게이트와 공존하던 시대도 머지않아 끝이다. 안일하게 살아왔던 대가를 이제 모두가 함께 치뤄야겠지."
"······."
"새로운 자원의 탄생이니, 헌터의 인기를 통한 부가가치 창출이니··· 우스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마지막이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이야기한 주선호의 창끝이 게이트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카앙-!
창이 도달한 위치로부터 터져나오는 각양각색의 파문.
완성되지 않은 게이트가 주선호의 공격을 저지한 것이다.
"우리는 헌터다. 목숨걸고 괴물들을 사냥하는게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역할이지."
카가가가가각-!
어떠한 물리적 수단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게이트를 앞에 두고서, 주선호는 나와 S급 헌터들을 바라보면서 선언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앞으로 인류가 마주할 적들을 이곳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앞으로 마주할 적들?"
"그래. 판정등급 EX, 다시 말해서 기존의 헌터들로 저지할 수 없는 규격외의 존재들이 있는 곳이다."
흐트러지는 파문의 너머.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필드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EX급 게이트의 토벌작전을 시작하겠다."
인류가 여태껏 마주한적 없는 미지의 풍경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 * * * * *
- [게이트 : 요새도시 라바르그]에 진입했습니다.
- 통신 효과 및 탐지 효과가 해당 공간에서 금지됩니다.
- 모든 종류의 상태이상이 해당 공간에서 조금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주선호를 포함한 네명의 헌터들이 발을 내딛은 필드.
이곳은 '요새도시 라바르그'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한 성채였다.
물론 요새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요새보다는 폐허가 더 가까워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미 황폐화된 요새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모습이 될 것인가.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의 상태는 실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여기가 EX급 게이트······."
"다들 지금부터는 조심하는게 좋을거다. S급이라고 해도 살아남기 힘든 곳이니까 말이야."
주선호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터벅, 터벅-.
앞장서는 주선호를 따라서 다른 헌터들 역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전세계의 어떤 헌터보다도 근접전투에 일가견이 있는 존재가 주선호였다.
그런 그가 선두에 서서 나아가는 중인데도, 이지성은 주변의 어둠을 무척이나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뭔가 좀 지나치게 어두운 느낌인데.'
밤도 아니고 천장이 트여있는 공간이었건만, 주변이 지나치게 어둡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내가 주위를 온전히 식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S급 헌터들이 있는 곳에서, 모양빠지게 스마트폰으로 불을 켜고 다닐수도 없는 상황.
결국 고민하던 나는 팔찌를 낀 손을 들어올렸다.
"—[수호의 광채]."
그리고는 팔찌에 준비해두었던 신성주문을 활성화시켰다.
블렌도어의 성직자가 사용가능한 신성주문, [수호의 광채].
한 번 사용하면 신성력이 고갈될만큼 대량의 신성력을 요하는 주문을, 나는 손에 차고 있는 팔찌에 가득 채워온 것이다.
파앗-!
허공에 거대한 빛의 구체가 생겨나더니, 이내 주변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빛나는 구체가 가진 광량은 결코 적지 않은 편이었다.
신성주문의 힘으로 조금이나마 주위의 어둠을 몰아낸 이후.
옆에서 나를 바라보던 서유화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나에게 물었다.
"방금 신성주문을 쓴거지? 설마 성직자··· 보조계열 헌터였어?"
헌터로서의 능력을 외부에 공개한 적이 없었던 까닭일까.
서유화는 내가 신성력을 사용한 것에 무척이나 놀라는 모습이었다.
주선호 역시 의외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뭐, 비슷한 느낌입니다."
나는 구태여 서유화의 이야기를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은근하게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야, 내가 쓸 수 있는 신성주문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보조계열의 S급 헌터라고 주장한들, 그만한 서포팅을 해달라고 하면 곤란해질 터였다.
그러니 나로서는 이정도의 애매한 대답이 최선인 셈이었다.
내 답변을 들은 서유화는 그에 나를 향해 다른 질문을 던져왔다.
"S급 보조계열 헌터··· 혹시 정체를 왜 숨겨왔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그 다음에 이어진 질문.
그것은 내가 가진 비밀에 대한 것이었다.
"서유화씨. 그건 좀 곤란한 질문이네요."
"······알았어. 더 이상 캐묻지는 않을게."
나로서는 심히 곤란한 질문이었기에, 나는 해당 질문을 빠르게 잘라내었다.
그러자 서유화는 그 이상의 내용을 캐묻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어디까지가 서로에게 그어진 선임을 이해한 것이다.
입을 다문 것은 내 비밀을 일찍이 알고 있던 이지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침묵속에서 어둠을 가르며 걸었다.
"······."
이지성과 주선호의 눈은 계속해서 어둠속을 확인하며 경계했다.
빛을 머금은 구체만이 유일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는 공간.
그곳에서 여러 헌터들의 발걸음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려퍼졌다.
천장이 무너진 채 기울어진 집.
이끼가 끼어있는 폐허들.
사람의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공간들이 시야를 밝힌 우리의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 [아고스파고르]가 당신을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그러한 공간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EX급 게이트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온 마경들과는 공기부터가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마경의 최선두에서 전투를 치른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이 성채에 가득차있는 무거운 분위기만큼은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이 독보적이었다.
'언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짐작조차 안되는 공간이야.'
요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폐허밖에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게다가 시야에 비추어지는 공간은 광원의 주위로 한정되어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주위에 몬스터가 있을거라는 사실이 주는 압박감은 적지 않았다.
터벅, 터벅-.
그렇게 긴장속에서 모두가 발걸음을 옮기며 나아가던 도중.
돌연 주선호가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온다."
짧은 경고.
그 직후 본격적인 몬스터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콰앙-!
커다란 굉음이 울려퍼지는 것과 동시에, 주선호의 앞에서 어둠을 휘감은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두터운 갑옷을 입은 채 안광을 흘리는 괴물의 형상.
진득한 어둠에 뒤덮힌 녀석은 주선호를 향해 대검을 겨누는 모습이었다.
후우우우웅-.
바람을 터트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에 덮힌 기사가 주선호를 노리고 검을 휘둘러왔다.
"서유화! 긴장을 풀지마라!"
그렇게 외친 주선호의 창이 기사의 검격을 막아내었다.
카앙! 카가각-!
주선호의 창에서 불똥이 튀었다.
허나, 주선호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려하게 창을 움직였다.
휘릭-.
콰아아아앙!
공격을 받아낸 주선호의 창대가 기사를 후려친 직후, 검은 기사는 거대한 갑옷 채로 벽에 처박히는 모습이었다.
"나, 나 말이야······?"
그 외침에 의문을 표한 것은 후방에 있던 서유화였다.
이미 정령을 소환해놓은 채로, 주선호의 뒤에서 보호받고 있던 서유화.
그녀에게 있어서는 썩 와닿지 않는 충고였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 경고의 의미는, 그로부터 수초가 지난 뒤에야 나타나게 되었다.
"서유화!"
"······!"
쩌저저저적-.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지는 벽면.
콰앙!
그 너머에서 또 다른 검은 기사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어둠을 휘감은 채 안광을 퍼뜨리는 기사.
녀석은 마경에서 보았던 엘리트 몬스터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기세로, 육중한 대검을 들고서 서유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위, 윈드······!"
"—[수호의 광채]!"
두갈래로 겹치는 시야.
그 속에서 미래를 본 내가 먼저 손을 뻗었다.
파앗-!
거대한 빛의 구체가 서유화와 괴물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직후, 괴물이 포효하며 검을 휘둘러왔다.
- 그아아아아아—!
콰득! 콰아아아앙!
파괴적인 일격.
말도 안되는 힘이 실려있는 대검이 서유화를 지키던 구체들을 동시에 갈라버렸다.
더군다나 그것으로도 모자라, 서유화가 반사적으로 펼친 방어벽을 타격하는 모습이었다.
쿠웅! 치지지지직-!
S급 헌터가 전력으로 펼친 방어벽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서유화와 이지성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S급 게이트의 필드보스와 비견될만한 수준이라고?'
눈앞에 보이는 괴물의 전력.
그것은 S급 게이트에서 나와 마주했던 필드보스가 생각날법한 수준이었다.
그만한 개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동시에 출현했다.
우리의 눈앞에 선 검은 기사들이 '엘리트 개체'조차 되지 못한 일반 몬스터라는 이야기였다.
"—[윈드 블레이드]!"
"—[그림자 속박]."
비좁은 어둠속에 울려퍼지는 헌터들의 목소리.
나는 그제서야 해당 게이트에 매겨진 등급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판정등급, EX.
기존의 등급으로는 판정할 수 없는 규격외의 존재들이 모인 게이트.
그것이 해당 게이트에 대한 시스템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방심하지마라! 지금까지의 게이트를 생각했다간 위험해질거다!"
뒤엉키는 그림자.
기사를 베어내기 위해 몰아치는 바람의 칼날.
울려퍼지는 소음을 집어삼키듯이 주선호의 거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콰직, 콰드드득-!
선두에 있던 기사의 몸통을 꿰뚫어낸 주선호의 창이 비틀렸다.
짧은 대치를 끝내고서 적을 도륙한 그는, 다시금 창을 뽑아내며 스스로의 몸을 검은 기운으로 적셨다.
"—[오러 부스트]."
몸을 비튼 주선호의 창이 어둠을 머금더니, 주선호의 손을 떠나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콰아아아앙-!
이번에는 주선호의 창이 검은 기사의 머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투구를 짓이긴 채 괴물을 분쇄해버리는 주선호의 투창.
주선호의 공격에 맞은 괴물은 머리를 잃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 그륵··· 그르륵······!
털썩, 쿵-.
헌터들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거대한 체구의 괴물.
머리를 잃은 검은 기사를 앞에 두고서, 서유화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선호 역시 빠르게 전투를 끝내고서 가볍게 숨을 골랐다.
"후우······."
그는 어째서 자신이 유일한 EX급 헌터인지 증명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장소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곳인지 증명하기도 했다.
S급 게이트였다면 필드보스 수준이었을 녀석들이 즐비한 공간.
그것이 이 EX급 게이트의 실체였던 것이다.
"정신을··· 절대로 정신을 놓지마라."
전투의 여파로 머리가 흐트러진 주선호가 쓰러진 검은 기사를 향해 다가왔다.
방금 전에 던진 창을 회수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 주선호의 발걸음에 서유화는 길을 비켜주었다.
터벅. 턱-.
걸음을 멈춰세운 주선호는 괴물의 머리를 날려버린 창대를 붙잡았다.
"······주선호."
"다친 곳은 없나?"
"여기, 우리가 공략할 수 있는 곳이 맞긴 한거야······?"
마창을 뽑기 위해 붙잡은 주선호.
그런 주선호의 뒤에서 가라앉은 서유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옅은 두려움이 뒤섞여있는 목소리였다.
방금 전에 눈앞에서 마주한 몬스터가 서유화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것이다.
주선호의 시선이 그런 서유화를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가 이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냐고 물었나?"
"나는 모르겠어. 저런게 필드보스도 아니고, 엘리트도 아니라는게······."
"굉장히 멍청한 질문이군. 공략할 수 없다고 말하면, 게이트가 역류할때까지 방치하고 그대로 죽을 셈인거냐?"
창대를 붙잡은 주선호의 다리가 괴물의 몸을 걷어찼다.
콰앙! 투두두둑-.
건물의 벽을 부수고 괴물의 몸이 뒤쪽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검은 기사의 사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주선호의 창이 다시금 자유를 되찾았다.
"착각하지마라, 서유화. 우리들은 괴물들의 가장 앞에 서야만 하는 헌터다."
"······."
"여기서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 괴물과 싸워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창을 되찾은 주선호는 그것을 자신의 어깨에 걸쳐매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서유화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그로부터 조금 더 먼곳을 바라보며, 우리를 향해 무거운 목소리를 퍼뜨렸다.
"애초부터 이곳에 찾아온 목적은 고작해야 이따위 몬스터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온게 아니야."
"그건······."
"나는 너희들과 10년 전에 내가 보았던 풍경을 공유하기 위해서 찾아온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색의 눈동자.
그것을 가지고서 주선호가 우리를 향해 이야기를 꺼내온 순간.
띠링, 띠링-.
갑작스럽게 내 시야를 반투명한 메세지가 가득채웠다.
- 요새를 보호하던 어둠이 걷히며 [엘리트 개체]가 등장합니다.
- [엘리트 : 왕관을 따르는 자]가 출현했습니다.
- 위대한 황제의 명령이 이 땅의 모든 피조물에게 내려집니다.
- 보유중인 마력 능력치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효과가 적용됩니다.
* 마력 능력치 E : 90% 확률로 [엘리트 : 왕관을 따르는 자]의 정신지배에 대한 저항에 실패합니다.
* 마력 능력치 D : 65% 확률로 [엘리트 : 왕관을 따르는 자]의 정신지배에 대한 저항에 실패합니다.
* 마력 능력치 C : 50% 확률로 [엘리트 : 왕관을 따르는 자]의 정신지배에 대한 저항에 실패합니다.
* 마력 능력치 B : 35% 확률로 [엘리트 : 왕관을 따르는 자]의 정신지배에 대한 저항에 실패합니다.
* 마력 능력치 A : 20% 확률로 [엘리트 : 왕관을 따르는 자]의 정신지배에 대한 저항에 실패합니다.
* 마력 능력치 S : 10% 확률로 [엘리트 : 왕관을 따르는 자]의 정신지배에 대한 저항에 실패합니다.
드넓은 어둠.
그 속에서 거대한 눈동자를 가진 인간의 형상이 피어올랐다.
- ······.
판정등급 EX급 게이트.
그곳에 속한 [엘리트 개체]가 등장한 것이다.
79화
사람의 형체를 한 괴물.
그것은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며 그 자리에 서있었다.
섬뜩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
가늘게 찢어진 입가.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라고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가 헌터들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위대한 황제폐하의 충신이자, 그 대리자인 나 발론이 선언하노라."
- "[무릎 꿇으라]."
엘리트 개체가 우리를 향해 내뱉은 전언.
그 직후, 기이한 파동이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우우우우웅-.
빠른 속도로 확산하며 귓가를 뒤흔드는 소리.
가늘게 울려퍼지는 저주파속에서 이지성이 스스로의 얼굴을 붙잡았다.
"아악, 끄아아아악······!"
지직, 지지직-.
이지성을 둘러싼 그림자가 흐트러지며, 괴물을 마주하고 있던 이지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입에서는 고통에 젖은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는 모습이었다.
"끄윽, 으으윽··· 끄으으윽······!"
이지성의 눈동자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는 고통스러운 듯이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있었다.
엘리트 개체의 힘이 이지성에게 강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괴물이 불러온 변화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괴물의 '명령'을 들은 내 시야에도 관련 메세지가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 [폭군]에게 적용되는 모든 위압 효과가 효력을 잃습니다.
- 정신지배에 저항했습니다.
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이명, [폭군]의 효과.
해당 이명이 가진 효과덕분에 정신지배에 제압당하지 않은 것이다.
이명의 효과가 없었다면 마력 능력치가 낮은 나로서는 언제 제압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치이이이익-.
사방으로 뻗어나오는 아지랑이를 확인한 나는 주변의 다른 헌터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지성, 너 설마······?"
"엘리트 개체의 능력이다.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메이지라는 특성상 마력이 많을 수밖에 없는 서유화와, 모든 능력치가 정상급인 상태에서 EX급에 도달한 주선호.
두 사람 모두 '왕관을 따르는 자'의 정신지배에 성공적으로 저항한 모습이었다.
다만, 이지성만큼은 괴로움에 젖은 채로 바닥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이지성은 하늘을 바라보며 포효했다.
"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른 채 주저앉은 이지성의 모습.
그 모습을 마주한 우리는 요새도시를 뒤덮고 있던 어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시야를 제한하던 거대한 어둠.
그것은 이곳을 돌아다니는 괴물들의 모습을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방금전까지 주변에 깔려있던 어둠의 진정한 목적.
그 목적은 오래 전에 나타났을 '어떤 괴물'의 시선으로부터, 요새 내부를 완전히 감추어놓기 위함이었다.
"서유화, 뒤로 물러서라. 이지성은 이미 정신지배에 당했다."
"······."
"가만히 놓아두면 후방에서 너희들을 공격할거다. 일단은 과격한 수단을 써서라도 억눌러놓는게 좋겠지."
더군다나 주선호는 그런 이지성을 완전히 전력에서 벗어난 것으로 판단한 상황이었다.
휘릭-.
마창을 움직여 자세를 잡는 주선호.
그런 주선호의 행동으로부터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한 나는, 지금이 바로 내가 나서야하는 순간임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지금 이 상황에 나설 수 있는게 나밖에 없음을 이해한 것이다.
'내가 직접 나서야만 하는 타이밍이다.'
터벅, 터벅-.
나는 주선호의 앞으로 나아가 그와 이지성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주선호가 의문에 젖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뭐하는 짓이지? 정신지배에 넘어간 이상, 명령만 받으면 우릴 공격할거다."
"잠깐만. 내가 직접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어."
"뭐라고······?"
주선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허나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의식을 잃어버린 이지성을 바라보았다.
눈이 뒤집힌 채 정신을 놓고 있는 이지성.
나는 그런 이지성의 머리에 조용히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내가 이지성에게 생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나는 기꺼이 이지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맹세한 남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말이다.
"—[위대한 희생]."
파아아앗-!
손목에 찬 팔찌로부터 환한 빛이 터져나왔다.
<아딜레아의 영광(S+)>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효과들 중 하나.
타인에게 걸려있는 부정적인 효과를 나 자신이 대신 짊어지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지성에게서 가져올 효과는 당연하게도 엘리트 개체의 정신지배였다.
'[폭군]의 효과로 정신지배를 받지 않는 나라면, 이지성에게 걸린 정신지배를 대신 옮겨받아도 문제가 없을거다.'
[위대한 희생]은 얼핏 보기에는 상당한 패널티가 있는 능력처럼 보인다.
허나 그것을 사용하는 인물이 해당 효과를 상쇄할 수 있다면 사실상 패널티의 의미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모든 종류의 위압과 중독, 저주에 대한 완전면역을 가지고 있는 나처럼 말이다.
우우우우웅-.
무릎을 꿇은 이지성의 몸이 푸른 빛에 뒤덮였다.
그와 동시에, 녀석으로부터 새어나온 검은 기운이 나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띠링.
방금 전에 마주했던 것과 동일한 메세지가 눈앞에 출력되었다.
- [폭군]에게 적용되는 모든 위압 효과가 효력을 잃습니다.
- 정신지배에 저항했습니다.
이지성에게 걸려있던 부정적인 효과만을 내가 대신 짊어져 소멸시킨 것이다.
정신지배가 사라졌으니 그 뒤에 남은 결과물은 하나뿐이었다.
성자인 내 덕분에 부정적인 효과를 제거받은 이지성.
그가 거친 비명을 집어삼킨 채, 다시금 눈빛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끄윽··· 허억, 허어억······!"
"정말로 이지성에게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했군."
숨을 고르며 의식을 되찾은 이지성.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선호는 내가 만들어낸 광경에 감탄했다.
서유화 역시 나를 향해 경악에 젖은 목소리를 전했다.
"아니··· 정신지배까지 처리가능한 보조계열 헌터가 존재하는 거였어?"
"덕분에 창을 휘두를 수고를 덜었다. 형제."
신창, 주선호.
그는 이지성을 제압하는걸 포기했는지, 몸을 돌리고서 다시금 괴물에게 시선을 향했다.
터벅, 터벅-.
앞을 향해 나아가는 주선호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오래 전에도 너같은 헌터가 있었다면 조금은 희생이 줄어들었을텐데."
"······."
"이미 늦어버린 상황에서 그런 기대를 해봤자 소용없겠지."
과거에 대한 회한이 담긴 한마디.
주선호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타다다다닥-.
빠른 속도로 가속하는 신형.
전방을 향해 나아가는 주선호를 앞에 둔 채, 비틀거리던 이지성이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후···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정신을 차린 이지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았다.
퉤-.
한손으로 피눈물을 닦아낸 이지성은 입가에 고여있던 피를 뱉었다.
정신지배에 걸린 부작용이 생각보다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지성의 실핏줄 일부가 터져나간 모습을 보아하니 말이다.
"서유화. 적을 묶어둬라."
그런 이지성의 옆에 서있던 헌터를 향해, 선두에 선 주선호로부터의 명령이 날아들었다.
눈앞에 나타난 엘리트 개체를 묶어두라는 지시.
주선호의 지시에 호응하듯이, 서유화는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펄럭였다.
"······알았어, 대장."
서유화의 손이 검은 부채를 강하게 휘둘렀다.
휘이이이잉-.
그녀의 부채를 따라서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지랑이를 비틀며 한곳으로 빨려들어가는 바람.
그것들은 엘리트 개체를 묶어두려는 듯이, 한점을 중심으로 강하게 회전하는 모습이었다.
후우우우우웅!
매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속에서 '왕관을 따르는 자'가 손을 들어올렸다.
앙상하게 마른 채 어둠을 감싸고 있는 괴물의 손길.
그것을 마주한 주선호가 마창을 쥐고 있던 손을 비틀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위대한 황제폐하의 충신이자, 그 대리자인 나 발론이 선언하노라."
- "[멈춰서라]."
손을 들어올린 괴물은 주선호를 향해 이전처럼 명령하는 모습이었다.
제자리에 정지할 것을 강요하는 명령.
허나 주선호는 그것을 듣고서도 완전히 무시한 채, 손에 쥔 창을 괴물을 향해서 강하게 휘둘렀다.
카앙! 카가가가각-!
주선호의 마창과 괴물의 팔뚝이 마주한 자리에서,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불똥이 튀는 모습이었다.
"······."
진지한 얼굴의 주선호는 계속해서 녀석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카앙! 캉! 카아앙-!
회전하는 창날과 충돌하는 손아귀.
규격 외의 필드를 지배하는 괴물은 강철보다도 단단한 육신을 이용해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적들을 섬멸하라]."
더군다나, 엘리트 개체의 명령을 받는 것은 인간들 뿐만이 아니었던 것일까.
괴물의 후방에서 서성거리던 검은 기사들이 우리를 포착하고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퍼지며 대지를 진동시켰다.
- 그륵··· 그르르륵······!
- 그르르르르······!
지금까지 쓰러뜨린 적의 숫자를 아득하게 넘어서, 압도적인 규모를 가지고 밀어닥치는 기사들.
일찍이 괴물들로부터 요새를 지켰을 기사들이, 이제는 괴물이 되어서까지 요새를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다.
점점 늘어나는 숫자를 보던 서유화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한마리만 하더라도 방어벽을 짓이겨놓을만한 위력을 가진 녀석들이다.
그런 기사들이 떼거지로 몰려오는 마당에, S급 헌터라고 해도 평정을 유지하긴 어려웠던 것이었을까.
주선호와 괴물들을 번갈아보던 서유화가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
적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
그런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적들의 전진을 저지할 생각이었는지, 막대한 마력을 끌어올리는 모습이었다.
휘이이이잉-.
이전보다도 강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무지막지한 기세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윈드 월]!"
"—[오러 부스트]."
콰앙!
주선호 역시 엘리트 개체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차서는, 자신으로부터 다시금 거리를 떨어뜨려놓는 모습이었다.
후우-.
적을 떼어놓은 주선호가 숨을 고르며 투창을 위한 자세를 잡았다.
다가오는 적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엘리트 개체.
그 모두를 한번에 격멸할 모양이었다.
그 의도를 이해한 나 역시도 손가락 끝을 들어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겨누었다.
'더 이상 공격수단을 아끼고 있을 상황이 아니야.'
EX급 게이트의 너머는 죽음의 땅이었다.
고작해야 S급조차 되지 못한 헌터가 힘을 아끼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나도 지금은 최선을 다할 차례였다.
휘이이이잉-.
휘몰아치는 바람이 기사들의 전진을 늦추는 가운데.
나는 적들을 향해 손가락 끝을 조준했다.
- [에너지 증폭]이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에너지 증폭]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강력경고]를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광범위한 영역에 확산하는 공포.
필드의 효과에 의해 한차례 강화된 원초적인 공포가 적을 묶어놓았다.
그리고 그런 적들을 노리듯이, 내 손가락 끝으로부터 빛이 피어올랐다.
내가 가진 최강의 전투스킬, [징벌].
5일에 한번밖에 못쏘는 필살기를 사용할 시간이었다.
- [징벌]이 활성화됩니다.
- 에너지의 충전시간에 비례해 [징벌]의 위력이 강력해집니다.
점멸하는 광채.
그리고 주변으로 확산하는 파동.
막대한 에너지가 응집하며 강력한 힘이 내 손끝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터져나오는 빛과 열기속에서 내 눈동자가 신창의 모습을 담았다.
지이이이잉-.
검은 오러를 피워올린 주선호는 투창의 자세를 잡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
공격을 준비하는 신창.
그리고 그 뒤에서 그를 보조하고 있는 나 자신.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으면, 오래된 꿈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했다.
인류 최강의 헌터, 주선호.
나 역시도 최강이라고 불리는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하고서 싸우는 순간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이런식으로 주선호와 함께 싸우는 상황이 찾아오게 될줄이야.'
비록, 이 순간을 즐기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아버렸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순간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할 터였다.
동경하던 꿈은 현실이 되었고, 그들의 여정을 기록하던 나는 헌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보다 한층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두를 속여버린 채, 때로는 자신의 꿈마저도 속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커스텀 네트워크]의 에너지 저장량이 3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 충전을 종료합니다.
맥동하는 손끝에서 빛이 반짝였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백색으로 가득차는 세계.
그 속에서 내 눈앞에 보이던 영웅은 손에 쥔 창을 집어던졌다.
"—[필중]."
파아아아앙-!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마창이 눈앞을 떠났다.
허공을 가르는 흑색의 창.
공간을 채우는 백색의 섬광.
흑과 백.
두가지의 색은 이윽고 뒤섞여 파괴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윽······!"
"······!"
콰과과과과광-!
우측의 적을 지우며 뻗어나가는 백색의 궤적.
콰아앙! 콰아아아앙-!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을 꿰뚫은 채 좌측으로 날아가는 흑색의 궤적.
양단된 세계속에서 각자의 색이 적들을 짓이겨나갔다.
터져나오는 핏방울은 바람의 장벽에 틀어막히며, 무너져내린 돌조각은 사방으로 휘날린 채 흩뿌려졌다.
"······신유호."
귓가에 터져나오는 이명.
흐려진 시야속에서 나는 자신을 부르는 주선호의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후폭풍에 휘말려 흔들리는 머리카락.
빛으로 가득찬 풍경을 앞에 두고서, 주선호는 계속 그 자리에 서있었다.
삐이이이이-.
귓가를 가득 채우던 이명은 십여초가 지나서야 완전히 가라앉았다.
"이건··· 이 위력은 대체 뭐야······?"
그리고 눈을 어지럽히던 백색이 가라앉을 때가 되었을 즈음.
양단당한 세계를 지켜보던 서유화의 입에서는 경악에 가까운 감탄이 흘러나왔다.
쿠웅! 툭, 투두둑-.
전투의 여파에 휘말린 폐허의 벽이 무너져내렸다.
치이이이익-.
내가 쏘아낸 백색의 광선이 지나간 경로 아래에서는, 매캐한 연기를 흘리는 대지가 그 충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살아남은 녀석은 없는 모양이군."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진득한 피를 흘리며 갈기갈기 찢겨져나간 몬스터들의 산이 보이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체액을 흩뿌린 채로 널부러져있는 몬스터들.
터벅, 터벅-.
주선호는 그런 사체의 산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피바다를 헤집고 나아가던 주선호가 앞으로 전진하기를 잠시.
그는 머지않아 바닥으로부터 무언가를 들어올렸다.
"대장, 그건 설마······."
"엘리트 개체의 머리?"
나와 서유화의 입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이, 주선호는 머리카락을 붙잡은 무언가를 들어올렸다.
방금 주선호가 쓰러뜨린 엘리트 개체의 머리.
그는 우리를 향해 그것이 잘 보이도록 들어올리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헌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위대한 계획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형제들에게 처음으로 소개하지."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사체들을 짓밟은 채, 괴물의 머리가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이도록 내밀었다.
거대한 눈동자를 가진 채 입이 찢어져있는 괴물.
푸른 빛을 띄는 피부마저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괴물의 머리를 모두에게 선보인 주선호가 이야기했다.
"이 녀석의 이름은 엘리트 개체, 왕관을 따르는 자."
"······."
"그리고 십년 전의 사고에서 내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인류의 적이다."
십년 전의 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이 자리의 모든 헌터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그의 이야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온 정적속에서, 주선호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게이트 브레이크와 동시에 발생했던 이중게이트. 해당 게이트에서 밖으로 나온 것은 단지 이 녀석 하나뿐이었다."
"······."
"그리고 십년전의 나는 당시에 나타난 이 녀석 하나때문에, 내 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죽여야만 했다."
오랜 과거를 회상하듯이 이어지는 주선호의 이야기.
그런 주선호의 얼굴은 어딘가 씁쓸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잘려나간 괴물의 머리.
그것을 바닥에 내던진 주선호가 그 위에 발을 올렸다.
콰직-.
분풀이를 하듯이 괴물의 머리를 깨부순 주선호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우리를 돕기 위해 파견된 군인들이 동료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불타는 도시 안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려고 들었지."
엘리트 개체, 왕관을 따르는 자.
녀석이 가진 능력은 마력이 적은 이들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일말의 마력도 존재하지 않는 비각성자라면, 그런 녀석의 정신지배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였다.
오래 전, 주선호가 마주했던 게이트 브레이크의 현장처럼 말이다.
"그 당시의 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나를, 내 동료들을 죽이려고 드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해야만 했으니까."
"······."
"그리고 우리를 죽이려고 드는 이들중에는, 내가 가장 존경하던 동료 역시 포함되어있었지."
십년전의 재액.
그것에 대해 언급하던 주선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몬스터를 지키기 위해 내 앞을 가로막는 동료를 보는 경험은,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어버리지 못할 풍경이었다."
"그건······."
"그런데도 내 손으로 끝을 맺어야만 했다. 그날 몇명이 내 손에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숫자가 결코 적은 편은 아니었을거다."
스윽-.
주선호의 손이 바닥에 비스듬히 꽂혀있는 창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바닥으로부터 뽑아들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영웅인줄 알았는데, 막상 그 상황을 마주하고보니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더군."
푹-.
바닥으로부터 뽑혀나온 마창이 주선호의 손아귀로 되돌아왔다.
검은 마창의 끝에는 몬스터의 체액이 진득하게 묻어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헌터계의 정점으로 군림해왔던 주선호.
그가 지금껏 창에 묻혀온 괴물의 피는 셀 수 없이 많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무력한 내가, 동료라고 생각하는 너희들에게 하는 이야기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창.
힘이 빠진 손아귀.
신창이라고 불리던 남자는 우리를 향해 고독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를 살릴 수 없다면, 나는 조금이라도 더 필요한 사람들을 살리기로 결정했다."
주선호의 눈이 나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둡고 칙칙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나머지 전부를 희생해서라도 말이다."
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