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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70화

70화

누구나 살다보면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는 한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대부분 조금 더 '특별한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거대한 방의 풍경처럼 말이다.

화륵, 화르륵-.

시커먼 벽돌로 가득차있는 벽에 불길이 일렁이는 가운데, 나는 어둠으로 가득찬 방의 풍경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방.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의 현장을 증명하듯이, 바닥을 나뒹구는 집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 [게이트 : 아고스토고르의 불길한 제단]에 진입했습니다.

더군다나 내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화면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실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게이트 브레이크.

바깥으로 역류한 필드의 규모가 지나치게 큰 탓에, 행사장을 통째로 집어삼켜버린 것이다.

행사장 일대가 게이트에 물들어 지형이 변형되어버린 셈이었다.

깜빡, 깜빡-.

제자리에서 멍하니 눈을 감았다 뜨던 나는,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서는 난감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역시 통화는 안터지나."

주변을 집어삼킨 필드의 여파때문인지 신호가 잡히지 않는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필드 내에 진입한 사람들을 격리하는 유형의 필드였던 것인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마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른바 거대한 미로에 갇힌 셈이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현장에 있던 이들 대부분이 이 재해에 휩쓸렸을거라는 사실이었다.

행사에 참여한 헌터들을 포함해 주변의 민간인들 역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처해있을거라는 이야기였다.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미로처럼 격리하는 필드인건가?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려면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할 것 같은데."

툭, 툭-.

나는 눈앞에 있는 검은 벽을 손으로 두드려보았다.

당연하지만 그런 내 손길에 벽이 반응하거나 무너져내리는 일은 없었다.

단지 그 강도만을 내 손끝에 여실히 전해올 뿐이었다.

후우-.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내가 고민하고 있던 것도 잠시.

머지않아 두터운 벽 너머에서 갑작스럽게 빛이 터져나왔다.

"하, 미치겠네··· 그러니까 내가 좀 기다리라고 했잖아!"

"미안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봐야 거기서 결론이 나는 일은 없었을거야."

파아아앗!

환한 광채를 흘리는 원형의 게이트.

그 너머로부터 두명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서로에게 불만이 있던 것인지, 썩 퉁명스러운 태도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얼굴은 나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편이었다.

"아니, 이지성 헌터. 이게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잖아. 이곳에 있는 민간인들을 구출하려면······."

"······."

"어, 어······?"

짧은 순간.

게이트 너머에서 들어온 남자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미 나와 한차례 통성명을 했던 탓에, 낯이 익은 S급 헌터가 나를 발견하고서는 멈추어섰다.

HETX 소속의 S급 헌터, 독왕 구성현.

그가 나를 마주하고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구성현? 거기에 이지성까지 같이 붙어있는건가?'

그리고 그런 구성현의 왼쪽에는 마찬가지로 굳어버린 표정의 이지성이 서있었다.

스윽-.

나를 바라보던 이지성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지성은 어두운 얼굴로 나와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번갈아보는 모습이었다.

무언가 고민할 거리라도 있었던 것이었을까.

나를 보며 망설이던 이지성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이야기를 전했다.

"······신유호."

"오랜만입니다, 이지성 헌터님. 아니, 며칠만이라고 해야하나?"

나는 그런 이지성의 인사를 친절하게 받아주었다.

이미 이지성이 나에게 예속되어있는 마당에, 내가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할 이유따위는 없었다.

까득.

이지성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 있는 모양인지, 잠시 이를 악물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신유호. 대체 뭘 노리고 게이트를 열어젖힌거지?"

진지한 얼굴의 이지성이 나에게 던진 무거운 질문.

그 내용은 방금 전의 시상식에서 두 사람이 나에게 보냈던 의심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게이트를 열어젖힐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은 지금 이 사태가 내가 무언가의 의도를 가지고 벌인 일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지? 내가 이 자리에서 뭘 노린다고?'

물론 그런 이지성의 시선을 받는 내 입장에서는 퍽 억울한 일이었다.

나는 단지 오지아를 촬영하기 위해 이 장소에 들어온 것에 불과했다.

그런 나한테 왜 이런 사태를 일으켰냐고 물어봐야,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딱히 없었다.

그야 내가 이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기껏해야 이지성과 구성현을 향해 나름대로의 변명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이지성씨.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피식-.

하도 기가 막힌 나머지 내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그 표정을 마주한 구성현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단지 여기서 상황이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죠."

눈을 굴리는 구성현의 시선이 나를 보며 날카로운 경계심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러한 경계심의 너머에는 거대한 두려움이 깃들어있었다.

쯧-.

혀를 찬 이지성이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넘어가길 바라는건가."

"······."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하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계속 이런 짓을 벌이다가는, 언젠가는 틀림없이 꼬리를 잡히고 말거다."

그림자사냥꾼, 이지성.

그는 나에게 충고아닌 충고만을 내뱉고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던 구성현만이, 한층 더 난감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전보다 더 깊어진 경계심.

그 속에서 구성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하··· 진짜 돌아버리겠네."

구성현의 입에서 탄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의 의심을 받으며, 그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나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전에 내가 저지른 업보 때문이겠지만, 이것이 그리 쉽게 풀 수 없는 오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무리하게 풀어서는 안되는 오해인 것 역시 분명해보였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적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일단은 간단한 질문부터 하나 하고서 넘어가는게 좋겠네요."

"······."

"이지성씨. 대체 어떻게 내가 있는 공간으로 넘어온거죠?"

내가 S급 헌터 이지성에게 꺼낸 질문.

그것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내가 있는 공간에 진입했냐는 것이었다.

S급 게이트, '아고스토고르의 불길한 제단'.

이 폐쇄적인 공간 안에서 그들이 벽을 넘어 이동한 방법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질문에, 이지성이 손에 쥔 단검을 집어넣었다.

스윽-.

가죽으로 된 검집 안에 단검을 집어넣은 이지성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 갇혀있던 방을 조사해봤어. 각 방마다 특정 방향으로 넘어가는 시험이 있었고··· 그걸 해결하고 이쪽 방으로 넘어온거야."

"시험이라······."

"시험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몬스터를 잡는 수준이었어."

나를 바라보며 이지성이 내린 평가.

나는 그것을 들으며 이 독특한 필드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분석했다.

"······."

각 방향마다 주어지는 시험.

그것을 통과해야만 넘어갈 수 있는 구조.

그리고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두명의 S급 헌터.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할까 고민하던 내가 내린 결정은 하나였다.

"이지성씨. 기왕 이렇게 된거 앞장서시죠."

"뭐······?"

3인 파티.

그것도 내가 극단적인 버스를 타는 형태의 파티를 앞세울 시간이었다.

필드의 기믹을 순식간에 찾아낸 이지성이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우리를 심부까지 안내할 수도 있을 터.

결정을 내린 나는 품속에서 <스크롤 북(A)>을 꺼내들었다.

구조대가 오는 것보다도, 현장에 있던 S급 헌터들끼리 뭉치는게 더 효율적일 것이다.

그러니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는게 우선이었다.

"이곳에 헌터가 셋이나 모였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것대로 문제겠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지성을 향해 웃어보였다.

그런 내 미소를 받은 이지성은 부담스러워하는 시선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윽······."

허나, 그런 이지성의 입에서 거절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S급 게이트 공략 파티의 결성이었다.

* * * * * *

도적 이지성을 척후로 앞세운 3인 파티의 출범 이후.

나는 우리가 몸을 담은 이 게이트의 모습을 하나씩 분석해나갔다.

저마다의 시험을 뛰어넘어 방을 통과할 때마다, 그 너머에서 다른 방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의 방에는 제각기 다른 형태의 비석이 서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런 비석들 중에서도 일부에는 낯선 문자가 적혀있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도 글자가 적혀있네."

스윽, 슥-.

장갑을 낀 손으로 먼지에 뒤덮힌 비석을 닦아낸 이지성이 이야기했다.

그가 이야기한 것처럼, 비석에는 정갈한 문자가 새겨져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이미 수차례 마주했던 다양한 필드의 기록물들처럼 말이다.

"필드의 기믹하고는 크게 상관이 없어보이는 내용이야."

이지성은 비석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서 뒤로 물러섰다.

문자를 확인한 이지성이 물러선 이후.

나는 그를 대신해 비석의 앞에 자리잡았다.

"······."

"이 비석에 관심이 있는거야?"

이지성의 시선이 비석을 응시하는 나를 보았다.

그는 비석을 읽는 나를 경계하려는 듯이, 곧바로 뒤로 멀찍이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어지간히도 내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런 이지성의 격렬한 반응에 헛웃음을 지은 채로, 나는 비석에 적힌 글자를 하나씩 읽어나갔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황제여, 어째서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하십니까.

- 위대한 성군이여, 부디 이 충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소서. 

비석에 적혀있는 문구.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이야기였다.

비석에 글을 남긴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황제라는 존재를 향해 남긴 글처럼 보였다.

다만, 해당 필드의 이름에 '제단'이라는 명칭이 들어가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다소 의아한 면이 있었다.

'죽은 황제한테 바치는 제단인건가? 대체 어떻게 이 공간이 제단이라고 불리는거지?'

자리에서 일어난 내 시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색으로 가득차있는 방.

이전에 있던 방들과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고작해야 몬스터의 시체와 비석 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들은 특별한 장치를 통해 네방향으로 연결되어있었다.

각각의 방을 연결하는 마법적 통로.

이러한 연결을 통해 해당 필드는 미로와 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을 위한 공간이라기에는 이상하리만치 기이한 공간배치였다.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로 적지 않은 민간인들이 말려들었을거야."

그런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뒤에 있던 구성현은 착잡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행사장에 참여했던 수많은 비각성자들.

그들이 이번 재해에 함께 휘말렸음을 상기시키는 이야기였다.

물론 나 역시도 그런 구성현의 이야기에 동의하는 바였다.

아무런 전조 없이 이루어진 게이트 브레이크의 경우, 한국에서 단 두번밖에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전에도 대량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던 적이 있었지.'

지금에 이르러서, 게이트에 동행가능한 민간인의 숫자는 제한되어있다.

이전에 게이트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벌어졌던 대규모 참사가 그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참사를 일선에서 종식시킨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S급 헌터 신창이었다.

신창, 주선호.

그는 그날의 사건 이후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가 되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피해가 없이 끝낼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당 게이트의 구조가 미로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을까.

특정 구역으로 진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한, 몬스터와 마주할 확률은 극히 드문 편이었다.

물론 그만큼 사람과 만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20개가 넘는 방을 넘어오면서, 단 한번도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어지간하면 문제는 없을겁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다음 방으로 넘어가죠."

그러니 나는 다른 이들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서, 대기하고 있던 이지성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이만 다음 방으로 넘어가자는 이야기였다.

"······어느쪽으로 가고 싶은거야?"

이지성은 내 명령을 듣고서 나에게 물었다.

어느 방향으로 넘어갈 것인가.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그 부분은 전적으로 그림자사냥꾼에게 일임하겠습니다."

"하··· 그래. 내가 알아서 할게."

예로부터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는건 도적의 몫이었다.

특히나 이런 구조의 필드에서는, 나 역시도 자칫하다간 의미없이 [긴급방어]를 날리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앞장서는 일은 이지성에게 일임하려고 하는 것이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이지성은 비석을 지나쳐 벽면을 향해 나아갔다.

"······."

슥-.

벽면에 닿은 이지성의 손길이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작업을 두고서 마력의 흐름을 읽는다고 이야기했다.

비스듬히 벽면을 쓰다듬던 손길.

그것은 어느 순간 특정 지점에서 멈추어서더니, 곧바로 손바닥으로 그 부분을 강하게 짓눌렀다.

철컥. 끼이이이익-.

이지성의 손길이 닿는 부분에서부터 빛이 피어오르더니, 머지않아 빛으로 이루어진 게이트가 형성되는 모습이었다.

"먼저 건너편으로 넘어간다."

이지성은 이전과 다른 풍경을 비추는 게이트를 보며, 무심한 태도로 게이트를 넘어서는 모습이었다.

이지성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진 직후.

힐끔-.

나와 단 둘이 남은 구성현이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움직였다.

"구성현씨, 뭐합니까? 빨리 넘어갑시다."

"······."

구성현은 내 재촉을 받고서는 마지못해 게이트 너머로 넘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런 구성현을 보내고나서, 마지막으로 게이트를 넘어가는 것은 내 몫이었다.

터벅, 터벅.

나는 검은 돌바닥을 걸어 게이트의 너머로 진입했다.

파앗-!

환한 빛이 터져나오며 한순간 내 시야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사그라들었을때, 나는 이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방을 마주할 수 있었다.

"······."

"······."

거대한 제단.

벽면에 쓰여있는 무수한 글자들.

그리고 그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세명의 헌터들.

이지성과 구성현을 보던 내 시선이, 그들과 마주하고 있는 또 하나의 헌터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나와 안면을 터놓은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이 방에 한명의 선객이 있었던 모양이다.

"야마자키 아오."

"······이런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줄이야."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덥수룩한 머리카락의 주인.

피곤해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갈색 코트차림의 남성은, 바로 일본의 S급 헌터 중 하나인 귀령이었다.

야마자키가 우리보다도 먼저 이 방에 도착해있었던 모양이다.

그도 우리와 같이 행사장에 있었던만큼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이 장소에 있었던거야?"

"그래. 여기에 들어온지 1시간 정도 지난 것 같군."

야마자키는 그렇게 말하며 제단을 돌아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야마자키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딱딱한 돌바닥 위에 내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며, 야마자키의 시선이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를 제외한 두명의 헌터들을 순차적으로 번갈아보았다.

"다른 방에서 이곳으로 넘어온거냐?"

"그래. 내 기억으로는 대략 스무개 넘게 넘어온 것 같은데."

"······조심해라. 이곳은 굉장히 음기가 강한 편이다. 아무래도 강한 원념이 서려있는 것 같군."

내가 야마자키를 향해 가까이 다가서자, 야마자키는 그런 나를 위해 조금 뒤로 물러서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벽면에 있는 제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앞을 향해 내딛던 발걸음이 세 헌터의 사이에 들어선 직후.

나 역시도 야마자키를 따라서 제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야마자키가 응시하는 제단의 벽면.

그곳에는 투박한 그림체로 사람을 표현한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이건··· 설마 제단인건가?"

"그 말 그대로, 실제로 기능하는 제단이다. 무언가의 목적을 위해 세워졌다고 보는게 맞겠지."

제단(祭壇).

야마자키는 그것이 무언가의 의식을 위해 지어진 제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벽면에 그려진 그림의 아래에는 기다란 글귀가 적혀있는 모습이었다.

그곳에 적혀있는 문자는 비석에서 보았던 문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도 무언가를 적어놓은건가.'

나는 그림 아래에 적혀있는 글자들을 향해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그 내용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읽어나갔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제국의 위대한 영광을 다시 되찾겠다는 약속을 모두가 잊지 않았습니다.

- 백명을 처형하고, 천명을 집어삼키며, 만명의 위에 군림하소서.

- 이것은 모든 힘을 당신의 발 아래에 놓이게 하기 위한 우리의 위대한 첫걸음입니다.

- 우리는 모든 신과, 모든 인간과, 모든 기적을 연결하는 이 위대한 계획에 하나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길게 이어지던 글귀의 끝자락.

그곳에는 흙먼지에 뒤덮힌 단어 하나가 따로 떨어져 있었다.

내 시선이 벽면에 적혀있는 마지막 단어를 훑었다.

—네트워크.

짧은 단어를 눈으로 읽어낸 직후.

끼에에에에엑-!

정체불명의 귀곡성과 함께 반투명한 메세지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응어리진 저주가 녹아내리며 [필드 보스]가 등장합니다.

- [보스 : 추종하는 원념 바그라타스]가 출현했습니다.

필드 보스.

이 기이하고 음산한 필드의 수호자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71화

71화

필드 보스의 강함은 대부분 게이트의 등급과 필드의 특이성에서 기인한다.

필드의 상태에 따라 보스들의 상태가 천차만별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와 마주한 보스 역시, 이 기이한 필드에 걸맞게 특별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우리를 둘러싼 돌벽의 틈새에서부터 사이한 기운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 [보스 : 추종하는 원념 바그라타스]가 울음소리를 퍼뜨립니다.

치이이이익-.

돌벽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쏟아져내리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비좁은 방안을 가득채우기 시작했다.

지금껏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며 수많은 보스들을 직접 눈으로 마주해왔다.

허나, 이러한 유형의 보스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방에서 눈을 뜨기 시작하는 어두운 그림자들.

진득한 기운을 뒤집어쓴 이들은 입꼬리를 뒤튼 채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해둬라. 적들이 움직일거다."

필드보스의 등장을 지켜보던 야마자키는 우리를 향해 경고의 목소리를 전했다.

끼에엑, 끼에에에엑-!

그와 동시에 방안에 메아리치기 시작한 섬뜩한 귀곡성.

사람의 것이 아닌 울부짖음이 기이한 음역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울림을 듣던 야마자키가 눈을 질끈 감고서 손을 들어올렸다.

"저건 제단에 바쳐진 제물들의 원념이다. 저것에 닿는 순간 영적인 타격을 입을거다."

"······."

"물리적인 방법으로 타격하려는 생각은 접어둬라. 고작해야 성수 좀 바른다고 피해를 입을만한 녀석들이 아니야.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막대한 마력이 필요하다."

야마자키의 손끝으로부터 푸른 불꽃이 일렁이더니, 머지않아 강한 열기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작열하는 불꽃.

야마자키는 그것을 자신의 입가로 천천히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입안에 넣더니, 이내 안쪽 깊숙히 찔러넣는 모습이었다.

푸욱-.

입안으로 파고든 야마자키의 손가락.

그런 야마자키의 기행을 보던 이지성이 난감해하는 얼굴로 구성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구성현, 당신 독으로 저것들 처리 못하는거야? 영체 녹이는 독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이지성의 질문에 대한 구성현의 대답은 간단한 편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단체로 중독되서 다 같이 죽고 싶어? 그것도 신성마법으로 영체 회복조차 불가능한 곳인데?"

공간이 지나치게 협소해서 마음대로 독을 사용하기 어렵다.

그게 구성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 사실을 이해한 이지성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림자를 끌어올렸다.

"쯧-. 정부 소속 헌터라는 인간이 이럴때 쓸모가 없다니."

"하이고, 그럼 우리 이지성 길드장님이 직접 해결해보시지 그럽니까?"

물론 두 사람이 저마다 해결방법을 생각하는 사이에도, 야마자키는 여전히 기행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입속 깊숙히 찔러넣었던 손가락.

그것으로 목구멍이라도 건드렸던 것인지, 바닥을 향해 구역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욱, 우웨엑-.

목구멍에 손가락을 찔러넣은 야마자키의 입에서 검은 액체가 쏟아져나왔다.

입에서 흘러나온 액체는 진득하게 바닥에 눌어붙는 모습이었다.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풍겨져나오는 거무칙칙한 액체.

그것을 양껏 밖으로 쏟아내던 야마자키는, 머지 않아 숨을 고르며 입가를 닦아내는 모습이었다.

"허억, 헉··· 내가 한국에 챙겨온 유일한 주물이다."

"저게 주물이라고?"

나는 그런 야마자키의 이야기에 의문을 표했다.

야마자키가 몸에 담고 있던 유일한 주물.

그것이 바로 저 검은 액체라는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야마자키가 작정하고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내가 야마자키에게 의문을 표하면, 야마자키가 발걸음을 옮겨 검은 액체의 위에 올라섰다.

"그래. 그것도 천년에 걸쳐 만들어진 우리 집안의 야심작이지. 사람이 죽어 만들어진 원념들에게는 독과도 같은 물건이다."

"······."

"이것만 있으면 저것들 대부분을 억누르는데에는 문제가 없을거다. 그렇다고 해서 원념의 핵이 되는 녀석까진 붙들어놓기 힘들겠지."

철퍽-.

자신의 발로 주물을 밟은 야마자키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그런 야마자키가 나와 두 헌터들을 번갈아보며 이야기했다.

"그러니 중심이 되는 녀석은 너희들이 직접 죽여라."

"야마자키······."

"나머지는 내가 잡아먹어주지."

S급 헌터, 귀령(鬼靈)— 야마자키 아오는 그렇게 말을 끝마치고서 손가락으로 인을 맺었다.

그 직후 스산한 기운이 야마자키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모습이었다.

"—접(接). 파단(破斷). 영(零). 종단(終斷)."

"————."

분주하게 인을 맺던 야마자키의 입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이 순식간에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으며, 그 아래에서는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모습이었다.

야마자키의 발끝에 머무르던 짙은 어둠은 주변으로 번져나가며 거대한 방을 서서히 잠식해나갔다.

우우우우웅-.

공간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한 지독한 저주의 기운.

야마자키의 이야기를 증명하듯이, 수많은 그림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녹아내리는 풍경이었다.

- 끼에에에에엑!

- 끼에에엑!

더군다나 그러한 그림자의 아래에서는 주변의 무엇보다도 거대한 영체가 꿈틀거렸다.

콰아앙-!

단단한 돌바닥을 깨부수며 튀어나온 어두컴컴한 그림자의 형상.

그것은 펄럭이는 망토를 맨 채 검을 쥐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었다.

원념의 핵.

야마자키가 주장하던 진정한 의미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 녀석이 진정한 보스였던거냐."

자욱한 연기를 휘감으며 나타난 괴물을 보던 헌터들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상대해야만 하는 필드 보스.

그 본모습을 확인하고서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스릉-.

그림자를 휘감은 이지성이 재빠르게 단검을 뽑아들었다.

구성현 역시 손바닥에 자줏빛의 흐름을 피워올리는 모습이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위대한 황제여! 어째서 제국의 충신을 저버리셨나이까!"

검을 뽑아든 원념은 가벼워보이는 영체를 움직이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머지 않아 붉은 안광을 흘리더니, 제단의 앞에 서있던 우리를 향해 쇄도하는 모습이었다.

영체의 끝을 흩날리며 돌진하던 원념은, 단검을 뽑아든 이지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캉-!

이지성은 다급하게 단검을 들어올려 원념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무슨 영체형 보스가 이렇게 무식한 힘을······!"

"이지성 길드장!"

휘익-!

독왕 구성현 역시 영체를 향해 독이 묻은 바늘을 집어던졌다.

허나 원념은 날아오는 바늘을 향해 검을 휘둘러보였다.

티잉! 팅!

단 두번의 참격.

그러한 검격에 닿은 구성현의 바늘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림자 속박]."

까득-.

이를 갈던 이지성은 자신의 그림자를 움직여 원념을 붙잡으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검을 휘두르던 원념의 몸이 빠른 속도로 튕겨나가는 모습이었다.

영체가 되어 흩어져버린 녀석은 이지성의 속박을 가소롭다는 듯한 얼굴로 피해냈다.

"이걸 벗어났다고······!"

순식간에 흩어진 그림자를 바라보던 이지성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실체화한 채로 휘두르는 검격.

그리고 영체화를 이용해 만들어내는 기이한 움직임.

영체로서의 장점과 실체화를 이용해 공방일체의 모습을 보이는 녀석이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나 아슬론이 위대한 제국의 전사들을 이끌고 그대들을 벌하겠노라!"

우우우우웅-.

이지성의 공격을 피해낸 영체는 사념을 퍼뜨려 그 목소리를 사방에 전하는 모습이었다.

녀석의 전언이 메아리치며 우리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아슬론이라··· 제국에 속해있던 장군들 중에 하나였나?'

아슬론. 그리고 위대한 제국.

그 이야기를 듣자 과거에 읽었던 일기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마지막 신관, 레델 화이트.

그는 다가오는 멸망속에서 제국이 모든 영광을 잃고 무너져내렸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슬론은 그러한 제국의 영광을 추억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죽어서 원혼이 되어 게이트의 안을 떠돌게된 모양이야.'

스스로 제국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아슬론은 어째서 이곳에 갇힌 신세가 되었는가.

다가오는 멸망에 저항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아서였을까.

신중하게 이 상황을 분석해보면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원념은 이상하리만치 모순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구성현!"

"윽······!"

콰아앙!

카앙! 캉-!

물론 내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도 눈앞에서는 분주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림자사냥꾼, 이지성.

그는 애써 단검과 그림자를 휘두르며 적을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영체와 실체를 뒤바꾸며 헌터들을 몰아붙이는 그림자.

그는 때때로 원념들을 집어삼키고 있는 야마자키를 향해서도 달려들었다.

"야마자키 헌터!"

"조심해! 뒤에서부터 온다!"

뒤엉키는 마력과 사념.

사방에서 빛이 터져나오고 사그라들기를 반복하는 풍경이었다.

카앙! 콰드드드득-!

어둠속에서 무수한 공방이 계속해서 이어져나갔다.

부서지는 벽.

튀어오르는 파편.

그 속에서 검과 마력이 서로의 목을 노리고 움직였다.

'영체화를 기반으로 자신의 무력을 통해 우위를 점하려는건가.'

원념은 상당히 저돌적이면서, 또 수계산이 철저한 편이기도 했다.

헌터들을 강렬하게 몰아붙이면서도, 자신이 손해볼만한 상황에서는 빠르게 물러섰다.

다만 특이한 점은 그러한 공방속에서 이상하리만치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카앙! 캉-!

대신 녀석은 집요하게 다른 헌터들을 노릴 뿐이었다.

평소 지독하게 운이 없었던 내 경험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풍경이었다.

"신유호! 언제까지 지켜보기만 할 생각인거냐!"

오죽하면 그런 내 상황을 바라보던 이지성이 격노의 외침을 전할 정도였다.

귓가에 울려퍼지는 질책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목걸이를 붙잡았다.

"여태껏 내가 직접 나서길 바라고 있었던거야?"

솔직히 말하면 나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녀석에게 [강력경고]를 날릴만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원념이 지나치게 빠른 탓에, 제대로 조준하는게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에너지 증폭]을 썼다간 다른 헌터들도 휘말리게 될 터.

그러니 내 나름대로는 신중하게 진행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거냐! 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 도우라고!"

"그래. 그러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줘야겠지."

허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지성으로서는 제 목숨이 걸린 상황에 불만을 표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목에 걸고 있던 <오르미르의 선견(S+)>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파앗-!

신성력이 들어간 성물로부터 환한 빛이 터져나왔다.

그 직후, 내 눈에 비추어지는 풍경이 두개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현재와 미래. 양쪽 모두를 보고서 올바른 타이밍을 잡아야한다.'

마주하고 있는 현재.

그리고 도달하게 될 미래.

양립할 수 없는 풍경이 내 시야를 양단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헌터들과 사투를 벌이던 원념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그 불쾌한 빛을 치워라—!"

사납게 울려퍼지는 목소리.

그 사나운 소리와 함께 원념이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쇄도해온 것이다.

후우우우웅-.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자신을 향해 뻗어나온 검은 칼날.

나를 노리고 날아들던 그것이 강력한 힘에 붙들린 채 허공에 멈추어섰다.

- [긴급보호]가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긴급보호]를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쾅! 콰드드드득-!

푸른 빛을 머금은 반투명한 보호막.

[긴급보호]가 발동하며 아슬론과 그의 칼날을 허공에 멈춰세웠다.

나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서, 눈앞에 있는 검은색의 원념을 노려보았다.

현재. 그리고 미래.

두개의 시야 모두에서 이탈하지 않은 적을 향해서 내가 해야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

날카로운 시선이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한 괴물에게, 두번째의 죽음의 공포가 내려앉았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강력경고]를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끼에에에에에엑-!

나를 마주한 원념의 입에서 지독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끝없이 터져나오는 공포의 흐름.

삶과 죽음의 개념에 대해 다시금 이해하게 만드는 원초적인 공포가 녀석을 짓눌렀다.

끼익, 끼이익-.

원념의 몸은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렸으며, 어긋난 육신에서는 짙은 저주가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

-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 끄아아아아악······!

짙은 저주를 흘리며 비명을 내지르는 괴물의 형상.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검지와 중지.

맞붙은 두개의 손가락이 눈앞의 괴물을 향해 겨누어졌다.

파앗!

그리고 그러한 손끝에서 찬란한 빛이 피어올랐다.

- [징벌]이 활성화됩니다.

- 에너지의 충전시간에 비례해 [징벌]의 위력이 강력해집니다.

우우우우웅!

강렬한 빛을 끌어모으며 손끝에서 파동이 퍼져나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최강의 공격용 스킬, [징벌].

5일에 한번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최강의 기술이, 내 손끝에서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파직, 파지직!

격렬하게 떨리는 손끝을 향해 막대한 에너지가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스킬을 안써서 그런지, 들어가는 에너지가 이전보다 크게 늘어난 것 같은데.'

에너지를 충전하던 나는 직감했다.

내 손끝에 모인 에너지의 양이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수준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위력 역시 다를 것이었다.

치이이이익-.

파동을 퍼트리던 손끝에서는 어느덧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등급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내 육체 역시도 과부하를 호소해왔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그, 아아아아악······!"

- "위대한··· 황제폐하께··· 나, 아슬론이··· 귀쟁이들의, 보물을··· 가져왔다고··· 이야기를······!"

어느덧 공포의 효과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었을까.

[강력경고]에 의해 억눌려있던 원념의 몸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제와서 움직여봤자 늦은 상황이었다.

이미 내 손끝에 한계까지 힘이 응축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괴물에게 다시금 공포를 발하며, 그 끝을 고하는 선언을 녀석에게 전했다.

"직접 가서 전해라."

내려앉는 공포.

그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권총의 총구를 겨누듯이, 원념의 머리를 향해 손가락 끝을 겨누었다.

- [커스텀 네트워크]의 에너지 저장량이 3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 충전을 종료합니다.

억제된 힘이 손끝에서 터져나온 직후.

파멸의 빛이 한차례 직선궤도를 휩쓸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눈이 멀 정도로 화려하게 터져나오는 찬란한 빛.

그것이 내 눈을 가리고, 맹렬한 굉음은 내 귓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러한 혼란속에서 제단을 뒤엎는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콰앙! 콰지지지직-!

쩌저저적!

쿵! 데구르르-.

"······."

모든 감각을 어지럽히는 듯한 새하얀 빛의 향연.

이 자리의 모두가 입을 다문 채로, 백색의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적막. 고요. 그리고 침묵.

그 모든 것이 제 역할을 끝냈을 즈음, 방안을 뒤덮었던 찬란한 빛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아······."

"이, 이건, 어, 어, 어떻게······."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 새겨진 파괴적인 궤적.

그것은 정신을 차린 헌터들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나오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단 일격에 보스를 지워버린 에너지의 파동.

빛의 흔적을 뒤쫓아가던 구성현은, 짙은 공포에 젖은 눈으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치이이이익-.

새하얀 빛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뚫려버린 벽과 녹아내린 바닥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필드 보스를··· 고작 한방에······."

독왕의 이명을 가진 헌터가 입을 벌린 채로 경악했다.

경로에 걸친 모든 것이 파괴되어 무로 되돌아간 자리.

[징벌]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천벌이 보스를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그 속에서 많은 것들이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는 아래, 검은 색으로 물든 무언가가 내 손바닥 위로 떨어져내렸다.

짙은 저주로 뒤덮혀있는 팔찌의 형상.

그것은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내 손바닥에 정확히 안착하는 모습이었다.

- [필드 보스 : 추종하는 원념 바그라타스]를 처치했습니다.

치이이익-.

서서히 무너져가는 저주의 너머.

그곳에서 푸르른 잎사귀의 빛깔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72화

오래전부터 나는 헌터가 되고 싶었다.

강한 헌터가 되어 유명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고 싶었다.

그리고 헌터중의 헌터가 되어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고 싶었다.

그런 어린 시절의 꿈은 지금도 내 가슴속 한켠에 잠들어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다.

"······."

툭-.

나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떨어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마치 내 손바닥에 떨어져야만 한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안착한 물건.

짙은 저주에 물든 팔찌의 곳곳에 푸른 녹음의 흔적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건을 들고 있는 나를 향해, 주변의 날카로운 시선이 향하는 모습이었다.

그림자사냥꾼 이지성을 필두로 한 의심의 시선.

그것은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모습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던거야?"

"······."

나를 의심하는 듯한 이지성의 눈빛.

더군다나 내 손바닥에 올려져있는 팔찌는, 그러한 의심을 품기에 썩 어울리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 팔찌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물건을 손에 넣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해보일 정도였다.

이지성이 보내던 의심의 눈빛을 마주하던 나는 다시금 팔찌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띠링-.

그러자 내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 아딜레아의 영광(S+) >

[ 아이템 설명 ]

- 잊혀진 신 아딜레아가 자신의 종복에게 하사한 성물입니다.

- 아고스토고르에 의해 지독한 저주가 걸려있는 주물입니다.

- 아딜레아의 인정을 받은 성직자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아고스토고르의 저주를 감당할 자격이 있는 이들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 강력한 저주에 물들어 장시간 접촉할 경우 주기적으로 부정적인 효과가 발생합니다.

[ 아이템 효과 ]

- 위대한 희생 : 대상에게 적용된 부정적인 효과를 대신 짊어집니다.

- 숲의 가호 : 수많은 자연물로부터 사랑받으며 동물들과 식물들이 당신에게 강한 호의를 가집니다.

- 은혜의 기록 : 각각의 나뭇잎에 특별한 신성주문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 부정확산 : 주변의 모두가 당신을 조금 더 꺼림칙하게 여깁니다.

- 존재왜곡 : 당신에 대한 기억이 조금 더 모호해집니다.

토벌당한 원념이 남기고 사라진 S+급의 헌터장비.

<아딜레아의 영광(S+)>.

그 이름을 확인한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챙길건 챙겨야지.'

아무리 주변으로부터 의심을 사더라도 챙길건 챙겨야했다.

전부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물건이었으니까 말이다.

스윽-.

내가 <아딜레아의 영광(S+)>을 자연스럽게 챙기자, 저주받은 물건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구성현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만한 주물을··· 대체 어디에 사용할 생각으로······."

나는 그런 구성현의 반응을 깔끔하게 무시해보였다.

엄밀히 말해서 내가 이번 토벌의 첫번째 기여자가 아니던가.

두번째가 바로 야마자키였고 말이다.

그러니 내가 보상을 챙기는게 당연한 일일 터였다.

"이지성 길드장님.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팔찌를 집어넣은 나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이지성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오늘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마무리를 짓기 위함이었다.

그런 내 이야기가 의외였던 것이었을까.

이지성은 나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신유호.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전투는 이지성 길드장님의 활약 덕분에 피해없이 끝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죠?"

"너······."

"저도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나는 그런 이지성을 향해서 미소를 지은 채로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이지성이 입을 다물었다.

"······."

내가 그에게 하려는 이야기의 진의를 깨달은 것이다.

이지성은 [맹세]의 효과때문에 내 명령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오늘 있었던 일은 전부 이지성의 업적으로 남게 될 터였다.

나는 입을 다문 이지성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옆에 있던 구성현을 바라보았다.

"구성현 팀장님도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습니다."

"······."

"여기 계신 훌륭한 헌터분들 덕분에 저같은 '민간인'이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시선을 마주한 구성현의 표정이 점점 기이하게 변해갔다.

물론 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었다.

내가 방금 전에 품에 집어넣은 <아딜레아의 영광(S+)>.

저주받은 아이템이 발하는 부정적인 영향에 휩쓸린 까닭일 터였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은신처에 넣어두고 다녀야겠어.'

성좌들과의 거래에 의해 나는 저주가 일절 통하지 않는 몸이 되었다.

허나,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계속해서 저주받은 성물의 영향을 받게 될 터였다.

그러니 해당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가능한 은신처에 처박아놓고 다니는게 나을지도 몰랐다.

'야마자키의 경우에는··· 내가 따로 이야기를 전하는 편이 낫겠지.'

물론 눈앞에 있는 두사람과는 다르게, 야마자키의 경우에는 조금 논외였다.

그는 애초부터 이런 부류의 저주들을 자주 접하던 인간이었으니까 말이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야마자키에게는 시간을 내어 따로 설명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후-."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헌터들과 마주하고 있던 자리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한차례 [징벌]이 스치고 지나간 까닭이었을까.

웅장했던 제단의 풍경은 후폭풍에 휩쓸려 처참하게 변해버린 모습이었다.

무엇 하나 멀쩡하게 남아있는 부분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건······.'

모든 것이 산산히 깨지고 부서져버린 거대한 제단의 아래.

내 시야의 한구석에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바닥을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우리는 오늘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의 힘을 황제 폐하께 바칩니다.

- 그 거대한 발자취를 취하소서.

예전부터 게이트 너머에 존재하는 필드들에는 수많은 비밀들이 숨어있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서 무너져가는 이 거대한 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쩌적, 쩌저저적-.

갈라지고 무너져내리는 칠흑의 제단.

천장으로부터 새어들어오는 찬란한 빛이 나와 비석을 뒤덮었다.

'모든 능력을 연결하는 계획이라.'

이미 멸망해버린 머나먼 이국의 땅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이 존재했다.

우리의 힘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가.

우리는 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그리고, 이 기나긴 싸움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 [아고스토고르]가 당신을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을 알기까지는 굉장히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헌터가 되어 겪어왔던 시간보다도, 훨씬 더 길고 긴 시간이 말이다.

* * * * * *

헌터협회의 시상식은 결국 도심을 뒤덮은 소란속에서 취소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필드의 규모에 비해 피해가 적었다는 점이었을까.

아무래도 가능한 빠르게 게이트 내부를 정리한 덕분으로 보였다.

물론 TV에 보도된 내용은 나와 이지성이 사전에 합의한대로 이루어졌다.

- "세계헌터협회에서는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이지성 길드장에게 감사장을 전달했습니다."

- "그림자사냥꾼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이지성 길드장은 평소부터······."

이번 사태는 이지성의 공로 덕분에 해결된 것으로 처리되었으며, 이지성은 헌터협회로부터 감사장을 받게된 것이다.

그와 함께 주선호가 그토록 경고해왔던 게이트의 이변에 대한 부분 역시 연달아 보도되는 모습이었다.

최근에 이르러서 심상치 않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게이트였다.

더 이상은 게이트의 이변을 사회에 숨길 수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

"유튜버 친구. 하나 물어봐도 되나?"

그리고 그런 사건의 당사자 중 하나인 야마자키는, 지금 나와 함께 작업실에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나와 야마자키의 손에 들려있는 소주잔에는 투명한 술이 가득 따라져있었다.

야마자키가 근처에서 사온 사케였다.

그는 손에 든 사케를 바라보면서, 나에게 질문을 건네오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나에게 궁금한 점이 생긴 모양이었다.

"뭐가 궁금한데 그래?"

나는 그런 야마자키의 질문을 들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야마자키는 술을 한잔 들이키고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계속 정체를 숨기면서 살 생각인거냐?"

"······야마자키."

"난 솔직히 네놈의 재능이 아깝다고 본다."

야마자키가 나에게 꺼낸 이야기의 내용.

그것은 이번에 우리가 겪었던 사건의 연장선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미 야마자키는 제단에서의 전투를 통해 내 전투장면을 지켜본 상황.

그러니 내가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미등록 헌터로서의 생활을 고수하는게 아쉽다는 뜻이었다.

허나, 나는 안타깝게도 야마자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5일에 한 방 쏠수있는데 무슨 헌터야.'

야마자키가 본 '대단한 공격'은 나에게 있어서도 필살기에 해당하는 스킬이었다.

그런만큼 자주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라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직선경로에 있는 대상밖에 타격할 수 없는 스킬이기도 했다.

설령 5일에 한 번 헌터일을 나선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몬스터들을 일직선으로 모아줘야만 한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내가 야마자키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그저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 뿐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누구나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잖아?"

상식적으로 그만한 기술을 난사할 수 있었다면 대놓고 헌터생활을 하지 않을만한 이유가 없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S급 헌터가 되어서 무작정 스킬을 난사하고 싶었다.

허나, 내가 가진 전투능력은 들키면 문제가 생기는 몬스터 사육장 정도였다.

그러니 이렇게 작업실에 앉아서 씁쓸하게 술잔이나 기울이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이야기였다.

"결국 나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이야기지."

"그렇군.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

야마자키는 그런 내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듯이, 내 옆에서 함께 술을 들이키는 모습이었다.

쿵-.

비어버린 잔을 보던 야마자키가 술병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나와 자신의 잔에 한잔씩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나도 너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

"나랑 비슷하다고?"

"나 역시도 오래전부터 죽음과 밀접한 삶을 살아왔다. 지금도 그리 썩 내키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꺼리기도 하는 일이지."

쪼르륵-.

무심하게 병을 기울이는 야마자키의 손길이 두 사람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가득 차버린 술잔에서는 자그마한 기포가 올라오는 모습이었다.

"지난번에 액운을 짊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했었지.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

"내키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때가 결국 찾아오게 되는 법이지. 선택의 기회란 것도 아무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잔을 들어올린 야마자키가 나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건배의 신호였다.

나 역시 그런 야마자키의 신호에 응해 잔을 들어올렸다.

역시 사람은 커뮤니티에서의 모습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내가 직접 만나본 야마자키는 게시판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그래서, 촬영하고 싶다는 유튜브 영상이 대체 뭐냐?"

야마자키의 질문이 끝난 직후.

짠-.

두 사람의 소주잔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잔에 가득 따라진 술을 들이킨 나는, 입안을 가득 채운 알콜의 냄새를 느끼며 내 야심찬 기획을 이야기했다.

"흉가탐험."

"······뭐라고 했지?"

"일본의 S급 헌터, 귀령과 함께하는 심야의 흉가탐험."

내가 준비한 유튜브 컨텐츠.

그것은 S급 헌터 귀령과 함께하는 흉가탐험 이벤트였다.

그것도 인터넷에서 심령스팟으로 유행하는 무시무시한 장소에,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야마자키 아오와 함께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 내 기획이 의외였던 것이었을까.

흐음-.

내 이야기를 들은 야마자키는 고민하는 얼굴을 보였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겠군."

"철저한 준비?"

"나라고 해서 아무런 준비 없이 그런 곳에 들어갈 수 있는건 아니야."

야마자키는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손을 덮고 고민을 이어나갔다.

이 분야의 프로라고 하더라도, 가벼운 일조차 쉽게 대응하지는 않는다는 것일까.

야마자키는 철저한 준비를 해오겠다고 나에게 장담하는 모습이었다.

유튜브 구독자들에게 훌륭한 컨텐츠를 보여주기 위해 준비를 아끼지 않겠다고 하는 야마자키.

나는 그 모습에 감탄을 표하며 그를 향해 이야기했다.

"역시 프로는 프로구나."

"무슨 소리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야마자키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 이후에는 내일의 컨텐츠에 대한 간단한 잡담이 이어질 뿐이었다.

간단하고도 또 사소한, 사나이 두명의 술자리 대화였다.

* * * * * *

다음날 저녁.

나는 한국 3대 흉가로 유명한 장소 앞에서 야마자키를 기다렸다.

그것도 야마자키를 만나기 위한 특별한 준비물들과 함께 말이다.

이번에는 찾아온 장소가 장소인만큼, 공포체험 유튜버에게 전용 장비를 빌려온 것이다.

대부분은 배터리를 이용해 작동시키는 탐지 장비였다.

야마자키와 함께 흉가에 입장해 사용하기 위해 준비한 물건들이었다.

오늘은 이번 기획에 어울리게 작정하고 컨셉을 잡아 진행할 생각이었다.

"······왜 이렇게 안오지?"

다만, 내 철저한 준비와는 다르게 이번 기획에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주인공인 야마자키가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의외의 일이었다.

어제 보았던 야마자키의 모습에선, 무척이나 프로페셔널한 분위기가 느껴졌던 까닭이었다.

"설마 아예 안오는건 아니겠지?"

야마자키를 기다리기 시작한지 십여분.

나는 슬슬 찾아오지 않는 야마자키의 모습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낯선 한국의 길을 찾는게 어려웠던 것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야마자키가 말한 '철저한 준비'가 생각보다 오래걸렸던 것일까.

어느쪽이든 그리 썩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다.

"슬슬 연락을 해야······."

그렇게 슬슬 야마자키에게 메세지를 보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터벅, 터벅-.

나는 저 아래에서부터 울려퍼지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묵직하게 울려퍼지는 남성의 발걸음 소리.

나는 해당 방향을 향해 들고 있던 손전등을 비추었다.

그러자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올라오고 있는 야마자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늦었다."

"······."

그것도 무척이나 특이한 모습의 야마자키를 말이다.

내가 태어나서 마주한 광경중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충격적인 광경.

그럼에도 무척이나 신성하다고 생각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눈앞의 야마자키를 경악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대체 뭐야?"

그는 양팔에 염주를 가득채우고, 등에는 커다란 십자가를 맨 채, 한손에는 코란을 들고서 나타난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성스러운 물건들의 집합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차림새를 한 야마자키가 내 앞에 멈추어섰다.

스윽-.

무거운 십자가를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던 야마자키는, 손가락으로 흉가를 가리키며 나에게 이야기했다.

"오늘 필요한 준비물이다."

"준비물······?"

"나도 저런 곳에 들어가는거 무서워."

야마자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적을 떼서 한장씩 코트 위에 붙이기 시작했다.

S급 헌터, 귀령.

그는 의외로 겁이 많은 편이었다.

73화

일반적으로 S급 헌터들에게 허용되는 체류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각 국가간의 이해관계가 깊게 얽혀있었다.

상식적으로 자국의 S급 헌터를 타국에 맡겨두고 싶은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해당 헌터가 체류하고 있는 국가 역시, 그러한 상황을 크게 부담스러워하기 마련이었다.

당연하게도 S급 헌터인 야마자키 역시 그러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몸이었다.

결국 야마자키의 첫 해외여행은 며칠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야마자키도 벌써 일본으로 돌아간건가."

야마자키가 돌아간 다음날 오후.

나는 함께 컨텐츠를 촬영했던 S급 헌터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며 눈앞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띠링. 띠링-.

그런 내 눈앞에 띄워져있는 반투명한 창에는, 야마자키로부터 메세지가 보내져오고 있는 중이었다.

- yamazaki : 빌어먹을 방위대신이 재촉해서 빨리 돌아가게 됐어.

- yamazaki :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와야겠어.

- yamazaki : (`・ω・́)

- yamazaki : 그 헌터마스터라는 유튜버를 못만나고 가서 아쉽게 됐네!

귀령, 야마자키 아오.

그는 자국에서 이어지는 무수한 복귀요청에 결국 며칠만에 귀환하게 된 것이다.

그런 야마자키의 메세지에는 '헌터마스터'를 만나지 못해 아쉽다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헌터마스터··· 당분간은 새로운 저주때문에 고생 좀 하겠네."

아무래도 농담처럼 보이는 말이지만, 그가 헌터마스터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만큼은 진심일 터였다.

오죽하면 끝장을 보겠다고 내 작업실까지 찾아왔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덕분에 컨텐츠도 뽑고··· 조회수도 꽤 많이 나왔으니 만족스러운 결과였나."

하암-.

짧은 하품을 내뱉은 나는 의자에 기대어 며칠간의 여정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야마자키가 한국에 오고나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공항에서 만나 싸인을 받고, 주물을 가져온 야마자키와 마주하기도 했다.

거기에 함께 게이트를 공략하고 수확물을 얻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다사다난한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은 기억을 꼽으라면, 야마자키와의 흉가탐험을 촬영한 기억일 터였다.

"특히나 이번 영상은 기세만 타면 인기 동영상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야마자키와 진행한 유튜브 영상은 유튜브에서 커다란 화제를 모으게 되었다.

아서 테브란트 때와는 다른 이유로 조회수가 쌓이게 된 것이다.

염주에 십자가, 코란까지 풀장착한 야마자키의 모습.

그 모습에 경악한 한국과 일본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폭증한 까닭이었다.

물론 그 모습을 직접 대면했던 나 역시 감탄할 정도였으니,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발 이 기세를 타서, 200만까지도 한 번 가보자······!"

나는 채널의 대시보드에 나와있는 영상의 썸네일을 보며 간절한 염원을 가슴에 품었다.

막대한 조회수.

폭증하는 구독자 숫자.

그리고 유튜버로서의 성공.

어느쪽이든 놓고 싶지 않은 목표들이 자신의 가슴속에 있었다.

그렇게 내가 거대한 야망을 품은 채 야마자키와의 대화창을 닫으려던 찰나.

띠링-.

갑작스럽게 자신의 눈앞에 낯선 메세지가 나타났다.

"······."

성좌로부터의 메세지.

그것을 마주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서 그 내용을 읽어나갔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욕심을 버리고 겸허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짧은 적막.

그 속에서 나는 눈앞에 나타난 메세지의 주인을 확인해보았다.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느낌이 드는 그 이름을 보던 내 머릿속에, 저주에 물든 팔찌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스쳐지나갔다.

"······아딜레아?"

S+급 아이템, <아딜레아의 영광(S+)>.

아무래도 성물의 주인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 * * * * *

엘프(Elf).

그것은 멸망해버린 세계에 존재하던 미형의 지성체들을 의미하는 단어다.

뾰족한 귀. 조각같은 얼굴.

그리고 긴 수명과 섬세한 손재주.

숲을 사랑하며 자연에게서 사랑받는 종족.

어떻게 보아도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로 보이는 이들은 더 이상 세계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종족이었다.

"아니, 엘프가 아니면 안된다구요?"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러한 엘프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엘프가 아니라서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성좌가, 나에게 성자 자리를 내려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 미치겠네······."

S급 게이트,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

그곳에서 나는 성좌 아딜레아의 후원메세지를 보며 탄식했다.

먼 옛날 엘프들을 비호하던 잊혀진 신.

그녀는 한참 전부터 계속해서 나에게 단호한 메세지를 보내오는 모습이었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엘프가 아닌 이들은 자신을 섬길 자격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성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라고 설득합니다.

아딜레아가 나에게 보낸 메세지.

그 내용은 엘프가 아닌 이들은 그녀를 섬길 자격이 없으며, 당연히 성자조차도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니 나를 향해 성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라고 이야기해온 것이다.

"······."

허나, 성좌가 나에게 그렇게 요구한다고 한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성물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딜레아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던 나는 아딜레아를 향해 첫번째 제안을 전달했다.

"5만 포인트. 그냥 그거 받고 서로 좋게 해결합시다."

내가 아딜레아에게 제안한 포인트는 자그마치 5만 포인트.

다른 성좌들이 나를 성자로 임명할때 평균적으로 받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아딜레아는 그런 내 제안에 넘어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90만 포인트가 남아있으니 그런 포인트는 필요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나에게 이런 메세지를 보내오기까지 했다.

아딜레아 자신은 이미 포인트를 많이 가지고 있으니, 굳이 나에게 포인트를 더 받아갈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이전에 성좌들과 거래를 통해 주고 받은 100만 포인트.

그 포인트에서 10만 포인트를 쓰고도, 아직까지 90만 포인트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10만. 10만 포인트는 안됩니까?"

고심하던 나는 포인트를 두배로 올려보았다.

다른 성좌들이 받던 포인트의 두배.

그것을 아딜레아에게 제시한 것이다.

앞으로의 협상을 생각하면 썩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그녀를 설득하려면 이러한 방법밖에는 없어보였다.

"······아딜레아님?"

그러나 아딜레아는 내가 제시한 10만 포인트에도 반응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실상 포인트로는 성좌 아딜레아를 설득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제안한 비장의 무기도 먹히지 않았으니, 이제 더 이상 마땅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털썩.

나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서 백구의 위에 드러누웠다.

푹신한 털위에 누워서 백구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아진 백구가 가볍게 짖어보였다.

- 왈! 왈왈왈!

"하, 백구야. 이걸 어떻게 해야할까."

청록의 아딜레아.

그녀는 내가 여태껏 마주한 성좌들 중에 가장 까다로운 유형이었다.

포인트도 통하지 않고 그럴싸한 협박수단도 존재하지 않았다.

엘프들에게만 축복을 내려주고 자신의 종복으로 삼는 특이한 성좌.

아무래도 이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해보였다.

예를 들자면, 내가 엘프라고 그녀에게 인정을 받는 방법처럼 말이다.

"엘프··· 엘프만이 성자가 될 수 있다라······."

백구에게 기대어 멍을 때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기를 잠시.

나는 주머니에서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의 셀프 카메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찰칵-.

깔끔하면서도 남자다운 면모가 보이는 얼굴이 카메라에 비추어졌다.

"얼굴은 엘프랑 닮은것 같은데? 별로 문제는 없지 않나?"

- 왈! 왈왈왈왈! 왈왈, 왈왈왈!

- 왈왈왈왈왈왈왈왈왈왈왈!

- 왈왈왈! 컹컹! 으르르렁-!

갑작스럽게 내 옆자리에서 짖기 시작하는 백구의 모습.

나는 그런 백구의 털을 손바닥으로 지긋이 짓눌렀다.

더 이상 개 짖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의미였다.

"백구야."

- ······.

"백구야. 폭군이 뭔지 알려줘?"

- 깨갱.

내 쓰다듬을 받은 백구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곳에 있는 신수들의 수준으로는 내 고민에 명확한 해답을 내려주기 어려울 것 같았다.

스윽, 슥-.

결국 나는 고심끝에 카메라 어플리케이션을 끄고 메인화면으로 돌아왔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신수를 괴롭히는 대신 눈을 닦고 정신을 차릴 것을 조언합니다.

나는 청록의 아딜레아가 보낸 후원메세지를 보며 스마트폰을 어루만졌다.

종의 차이를 나 자신의 외모만으로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아딜레아에게 인정을 받을만한 편법이 필요했다.

"엘프··· 엘프만이 될 수 있는 성자···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자리에 앉아 온갖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고민하기를 한참.

지잉-.

머지않아 내가 쥐고 있던 스마트폰으로부터 진동이 울렸다.

누군가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온 것이다.

"······누구한테 연락이 온거지?"

스윽.

나는 스마트폰의 메신저 앱을 실행시켜서,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메세지를 보낸 인물의 이름.

그것은 나에게 있어 굉장히 익숙한 인물이었다.

- 오지후 : 고민이 좀 생겼는데

- 오지후 : 헌잘알한테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어서

- 오지후 :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할까?

S급 헌터, 파천궁 오지후.

그로부터의 고민상담 요청이었다.

"······."

아무래도 오늘은 나뿐만이 아니라 오지후에게도 깊은 고민이 생긴 모양이었다.

피차 고민으로 머리가 아픈 날이었다.

* * * * * *

나와 오지후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성사되었다.

나와 오지후, 어느쪽이든 깊은 고민을 끌어안고 있는 까닭이었다.

한강이 보이는 오지후의 집.

나는 그곳에서 오지후와 만나 저녁식사를 겸해 와인잔을 기울였다.

물론 테이블에는 오지후의 특제 고기요리들을 올려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 지아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아."

나를 술자리에 초대한 오지후의 고민은 실로 현실적인 것이었다.

파천궁 오지후의 여동생, 휘광 오지아.

S급 헌터를 동생으로 둔 오빠로서의 고민이었으니까 말이다.

홀짝-.

손에 든 와인을 음미하던 오지후는 나를 향해 자신의 무거운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헌터로서의 성장이 지나치게 빨라."

"성장이 빠른 것 같다고?"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말도 안되는 속도야. 진작에 나를 추월한건 당연하고, 슬슬 S급 헌터들 중에서도 상위권을 바라볼만한 수준처럼 보이던데."

오지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오지아에 대한 감상.

그것은 같은 S급 헌터인 오지아의 성장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포텐이 높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안될정도의 성장그래프를 보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되니까 이제는 이쪽에서 뭐라고 조언도 함부로 못하겠더라고."

물론 그런 오지후의 고민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내가 오지아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애초에 그만큼 포인트를 퍼부었는데 격차가 안나면 그게 더 이상한거겠지.'

오지아는 현재 성좌 '인피니튜드'가 비밀병기로 키우고 있는 인물이었다.

다가올 게이트 재해를 대비해 작정하고 성장을 유도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유의미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오지후와 격차가 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다만, 오지후 쪽에도 충분히 투자를 고민해볼만한 가치는 있다.'

물론 지금 내 눈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오지후 역시도, 내가 성좌로서 투자를 고민하고 있는 대상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가 장난기가 많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헌터 일을 할때만큼은 진지한 인물이기도 했다.

경험이나 기술은 충분한데 기본 능력치가 부족한 케이스인만큼, 작정하고 밀어준다면 훌륭한 성장세를 보일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에 대한 결정을 위해서는 오지후를 충분히 지켜봐야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글쎄··· 운좋게 성좌한테 후원이라도 받은거 아니야?"

결국 고민에 잠긴 오지후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이라고는 이런 이야기가 전부였다.

성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직후.

오지후는 한층 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성좌? 그러고 보니 포인트를 후원하는 성좌라는 존재가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아직 한번도 못받아봤어?"

"당연히 뭐··· 한번도 못받았지. 나같이 애매한 부류는 성좌들 눈에도 잘 안띄는 모양이다."

단 한번도 성좌에게 후원을 받지 못한 S급 헌터.

헌터랭킹 68위의 원거리 딜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천궁 오지후의 입지 자체가 워낙 애매한만큼 성좌들의 눈에 들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신창이나 검성같은 이들이 있는 마당에, 구태여 파천궁에게 눈독을 들일만한 이들도 없을테니 말이다.

"운이 좋으면 조만간 한번쯤은 후원을 받아보겠지, 뭐."

"제발 그러면 좋을텐데 말이지. 안되면 '헌잘알'한테 컨설팅이라도 한 번 받아봐야겠어."

내가 오지후를 보며 자그마한 위로를 건네자, 오지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달그락, 달그락-.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잠시동안 테이블 위에 울려퍼졌다.

나와 오지후가 조용히 음식을 먹는 소리였다.

인기만점 성좌와 비인기 헌터.

서로 다른 입장의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

그렇게 식사가 이어지기를 한참.

말없이 스테이크를 한껏 먹어치우던 오지후가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우리 100만 유튜버님도 고민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포크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묻는 오지후의 질문.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서로가 가진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자리에서 만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터무니 없는 이야기란걸 알고 있지만, 혹시나 오지후가 가진 창의력이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고민··· 고민이야 가지고 있지."

"무슨 고민인데 그래?"

오지후의 시선을 마주한 나는 휴지를 이용해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눈앞의 오지후를 마주했다.

장난이라고 여기지 못할만한 진지하고도 진중한 표정.

나는 그런 표정으로 오지후를 향해 진지한 고민을 이야기했다.

"엘프에 대해서 알고 있지?"

"엘프? 당연히 잘 알고 있지."

"어떻게 해야 내가 엘프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거울 안본지 좀 됐냐?"

그리고 애석하게도 오지후의 대답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그것도 안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74화

S급 헌터, 사토 료타.

화염술사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일본 최강의 헌터, 귀령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편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야마자키 아오와 얼마나 친하냐고 묻는다면, 상당히 친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야마자키와의 인연은 그가 처음으로 대형 길드에 몸담았을 때부터 이어져온 인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여전히 귀령에게 계속해서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기인한 일이었다.

"······야마자키 선배."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의 선배인 야마자키의 앞에서 동영상 하나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한국에 있는 어느 헌터 유튜버가 촬영한 동영상.

그것도 현재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유명한 동영상을 말이다.

S급 헌터, 귀령이 직접 참여한 흉가탐험 컨텐츠.

다른 사람이라면 흔히 유튜브에서 마주할 수 있는 예능형 컨텐츠라고 생각하겠지만, 문제는 해당 영상에 나오는 출연자가 그의 오랜 지인이라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상속의 야마자키는 염주에 십자가, 코란, 부적을 들고 나타난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사토는 옆자리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야마자키를 향해, 영상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그냥 동성애자로 남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런 사토의 감상에 대한 야마자키의 답변은 심플한 편이었다.

틱, 틱-.

그는 사토의 이야기를 무시한 채, 라이터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이게 왜 안되냐. 연료가 떨어졌나. 사랑하는 후배야, 불 좀 빌려줘봐라."

"아니, 저한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요. 전국민이 선배의 이런 모습을 다 봤다니까요."

"괜찮아. 우리 엄마만 그 동영상 확인 안하면 문제생길일 없다."

스윽.

사토를 바라보던 야마자키가 그를 향해 담배를 내밀었다.

라이터에 연료가 떨어졌으니 불을 빌려달라는 의미였다.

후우-.

그런 야마자키의 모습에 사토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선배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있는데······."

"료타야. 불 좀 빨리 붙여봐라."

"—[파이어]."

치이이익-.

사토의 손끝에서 나온 희미한 불씨가 야마자키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야마자키는 그제서야 만족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무는 모습이었다.

"고맙다, 료타."

그 모습에 사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처음 마주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사토가 기억하기로는 그때도 분명 지금처럼 불을 붙여달라고 했었던 것 같았다.

불 좀 빌려주면 싫어하는 사람한테 저주를 대신 걸어준다고 했던가.

사토는 저주를 사양한 채 담배에 불만 붙여주었고, 그때부터 이어져온 인연이 지금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배 어머니한테는 왜 동영상을 들키면 안되는거죠?"

그렇게 손끝으로 불을 붙인 사토가 야마자키에게 물으면, 그는 조금 난감해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엄마가 교회를 다녀서 그건 좀 곤란하지."

"······교회요?"

"세례도 받으셨더라고."

역시나 그가 아는 귀령이기 때문이었을까.

야마자키는 사토가 생각하기에 그와 퍽 어울리는 그럴싸한 이유를 제시하는 모습이었다.

그 황당한 이유에 두 사람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는 것도 잠시.

후우.

머지않아 짙은 담배연기를 내뱉은 야마자키가 사토를 보며 입을 열었다.

"후배야. 이번에 보니까 역시 세상이라는게 넓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우리같은 S급들은 여행도 쉽게 못나가잖아요."

"나는 한국에서 신창이라는 녀석만 잘난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만도 않더군."

야마자키의 눈앞에 퍼져나가는 희뿌연 담배연기.

그것은 두 사람의 눈앞에서 서서히 흩어져가는 모습이었다.

무너져가는 담배연기의 너머.

사토는 그곳에 비추어지는 야마자키의 감정을 읽어들였다.

"한국에서 대체 누굴 만났길래 그래요? 검귀? 아니면 풍랑?"

"글쎄. 그 녀석이 누구인지가 중요한건 아니겠지."

"······."

"정말로 중요한건 지금에 만족하고서 가만히 있다가는, 그런 녀석들이 우리를 내버려두고 멀리 떠날거라는 사실이다."

야마자키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공포도, 악령에 대한 망설임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사토의 눈에 비추어지는 것보다 조금 더 먼 장소를 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일찍이 등을 바라보며 뒤쫓았던 어떤 헌터처럼 말이다.

"······그렇군요."

언젠가의 야마자키도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다.

때로는 좀스럽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헌터.

그럼에도 그는 가끔씩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 사토의 두눈에 비추어지는 것처럼, 조금은 칙칙한 채 피곤에 찌들어있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어느 어른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어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항상 고리타분한 정답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쪽에서도 앞으로 더 정진해야겠지."

화염술사, 사토 료타.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 야마자키보다 큰 키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보다 아득하게 커보이는 어른의 등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 * * * * *

무슨 일이든 대체로 철저한 준비가 훌륭한 결과를 만드는 법이다.

그것은 게이트 너머에 존재하는 괴물들을 토벌하는 일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그것이 여태껏 단 한번도 공략되지 않았던 게이트를 폐쇄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판정등급 EX급 게이트.

해당 게이트의 공략은 그 어느때보다도 신중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참 뒤져보다보면 뭔가 살만한게 나올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나는 현재 커뮤니티의 [경매장]을 부지런히 뒤져보는 중이었다.

스윽, 슥-.

손가락을 움직여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경매장]에 있는 수많은 아이템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토벌을 이어가는데 필요한 소모품이나 신성장비 역시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일전에 '마산사나이 최두식'이 그랬듯이, 몬스터의 생식기처럼 전혀 쓸모없는 아이템들도 많이 존재하는 편이었다.

"대체 이런 잡템들은 누가 계속 경매장에 올려놓는거야?"

나를 포함한 수많은 S급 헌터들이 커뮤니티의 [경매장]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비슷한 편이었다.

수많은 잡동사니속에 파묻힌 보물들.

그것이 [경매장]의 실체인 셈이었다.

내가 그렇게 분주하게 경매장을 뒤져보기를 한참.

그런 내 시야에 갑작스럽게 아이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뭐지? 씨앗인가?"

씨앗처럼 생긴 외형의 아이템.

그런 아이템의 옆에는 해당 아이템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세계수의 씨앗(A)>.

그것이 이 아이템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세계수의 씨앗? 이걸 심으면 땅에서 세계수라도 자라나는건가?"

나는 씨앗의 자세한 설명을 확인해보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툭-.

아이템 이름을 터치하기 무섭게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 세계수의 씨앗(A) >

[ 아이템 설명 ]

- 가장 거대한 나무의 가장 작은 일부분입니다.

해당 아이템의 설명은 무척이나 간단한 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

그런 나무의 가장 작은 일부분에 해당하는 아이템.

그것이 설명의 전부였던 것이다.

"뭐야. 설명이 이거밖에 없어?"

설명만 봐서는 그 효과가 심히 보잘 것 없어보이는 모습이었다.

허나 아이템의 등급이 워낙 높아서 그런 것인지, 가격은 어중간하게 비싼 편이기도 했다.

용도도 모르고 써먹기도 곤란하지만 쓸데없이 가치만 비싼 아이템.

그게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세계수의 씨앗(A)>이었던 것이다.

"하기야 뭐, 이걸 올린 놈도 심어봤는데 아무것도 안나오니까 올렸겠지."

경매장에 올린 이용자도 쓸모를 찾다못해 답이 없으니 올려놓은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런 물건에 대한 관심은 깔끔하게 끊어버리는 편이 좋을 터였다.

그렇게 내가 경매장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던 찰나.

띠링-.

갑작스럽게 성좌가 후원메세지를 나에게 보냈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해당 아이템을 반드시 구입하라고 조언합니다.

메세지를 보낸 인물은 다름아닌 '청록의 아딜레아'.

내가 무슨 조건을 제시해도 성직자로 임명하지 않던 성좌였다.

그런 성좌의 메세지에 내가 고민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들어 아딜레아를 향해 질문을 던져보았다.

"안그래도 비싼 물건인데 저걸 구매하라는 겁니까?"

띠링-.

그러자 아딜레아로부터 빠른 답장이 날아왔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포인트를 대신 지불할테니 구매하자고 설득합니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세계수를 키우면 좋은 일이 있을거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포인트를 대신 내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아이템을 구매해달라고 요구하는 아딜레아.

그런 아딜레아의 모습에 나는 대략적인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

그녀에게 있어서 저 씨앗과 세계수는 무척이나 중요한 물건인 모양이었다.

'나보고 나무를 키우라고?'

아무리 내가 신수농장을 운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 자신은 동식물을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돈과 명예를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합당한 리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굳이 아딜레아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아딜레아님, 세계수를 키우면 정확히 어떤 부분이 좋은겁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아딜레아의 성자가 된다거나 하는 리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내가 아딜레아에게 '세계수 기르기'의 장점을 물어보자, 아딜레아는 나에게 터무니없는 제안을 꺼내왔다.

나에게 정확한 답변을 전해주기보다, 그저 말을 돌리기에 급급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자신의 포인트를 전부 지불해도 좋으니, 그걸 이용해 세계수를 키워달라고 부탁합니다.

다급해보이는 아딜레아의 반응.

그것을 보던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이제서야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할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역시 고결한 신들이라 그런지 협상은 조금 서투른 모양이었다.

여기서는 내가 온라인 게임의 '선제시 거래'를 통해 쌓은 협상 실력을 보여줄 차례였다.

"하··· 아딜레아님. 제가 엘프가 아니라서 그런지 식물을 잘 못키우는 편입니다."

내가 아딜레아를 향해 운을 띄운 직후.

띠링-.

아딜레아로부터 다시금 메세지가 날아왔다.

세계수의 육성 난이도에 대한 메세지였다.

"예? 세계수는 대충 키워도 잘큰다구요? 저희집 선인장도 그럴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물론 그런 이야기를 꺼낸들, 나를 상대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었다.

나는 보상없이는 세계수 육성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말이다.

띠링, 띠링-.

아딜레아의 다급한 메세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딜레아의 이야기에 그럴싸한 구실을 계속해서 돌려주었다.

"게이트 안에 심어두고 가끔씩 성수만 주면 된다구요? 저희집 다육이도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띠링-.

"신수들 있는 곳이 평화롭고, 햇빛도 잘들고 좋은 곳이죠. 그래서 그런가 땅값이 좀 비싼 편입니다."

띠링-.

"그런데 제가 좀 바쁜 유튜버다보니까, 이것 저것··· 예, 자주 깜빡하고 그럽니다."

띠링, 띠링-.

"어떻게 해야 제가 세계수를 키울거냐고요? 그건 아딜레아님께서 직접 고민해보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 이후로는 아딜레아와 나 사이의 토론대결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떻게든 세계수를 키우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아딜레아.

그리고 계속해서 선제시를 요구하는 S급 유튜버.

한참동안 이어지던 두명의 논쟁이 끝을 맺은 것은, 결국 한명이 먼저 백기를 들어올린 이후였다.

온갖 수단을 이용해 나를 설득하려고 시도하던 아딜레아가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특별히 당신을 명예 엘프로 임명하겠다고 선언합니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는 그 대신 당신이 엘프의 의무인 세계수 수호의 사명을 이행해야한다고 요구합니다.

오랜 시간끝에 결국 나는 그토록 갈망하던 아딜레아의 성자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것도 '명예 엘프'라는 전례없는 칭호와 함께 말이다.

모든 엘프들에게 주어지는 세계수 수호의 사명을 이행하라는 의미였다.

"아딜레아님께서 제시하신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그런 아딜레아의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툭-.

화면을 터치한 내 손바닥에 빛나는 씨앗 하나가 떨어져내렸다.

커뮤니티 [경매장]을 통해 <세계수의 씨앗(A)>을 구매하는 것으로, 비로소 그녀의 유일한 성자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명예 엘프··· 가장 엘프에 가까운 사람인가······."

118만 헌터 유튜버, '헌잘알'.

헌터 역사상 최초로 명예 엘프가 된 순간이었다.

* * * * * *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에는 나무를 꽤나 자주 심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식목일이 될 때마다 학교에서 나무심기 행사같은걸 진행했던 것이다.

물론 언젠가부터 그런 행사가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막상 지금 나무를 심고있자니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했다.

"백구야. 조금 더 깊게 파야지."

- 왈! 왈왈!

S급 게이트,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

나는 현재 그곳에서 백구와 함께 열심히 땅을 파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땅파는 일은 백구가 하고, 나는 그 옆에서 현장을 감독하는 중이었다.

어째서 내가 직접 땅을 안파고, 백구에게 땅파는 작업을 시키고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야, 백구가 나보다 더 잘파니까.

내가 파는 것보다는 사람보다 큰 백구가 파는 편이 몇배는 더 빠른 것이다.

"옳지, 그래. 조금만 더 깊게 파자."

- 왈왈! 왈왈왈!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는 것.

그것이 83명의 커뮤니티를 이끄는 훌륭한 리더의 자질인 셈이었다.

그렇게 백구의 앞발이 낙원의 땅을 한차례 헤집어놓은 이후.

나는 백구가 파놓은 구덩이에 씨앗을 집어넣었다.

"잘했어. 이제 다시 덮자."

- 왈?

"백구야, 왜 그래? 파놓은 사람이 당연히 다시 덮어놔야지."

- ······.

힘껏 땅을 파놓은 백구는 나를 바라보며 의문을 표하는 모습이었다.

스윽, 슥.

나는 그런 백구의 털을 쓰다듬으며 녀석을 향해 다시금 명령을 전달했다.

부드러운 털의 촉감이 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왔다.

- 왈왈!

백구 역시 그런 내 커다란 뜻을 이해한 모양인지, 결국 다시금 앞발을 움직여 흙을 덮는 모습이었다.

툭, 툭-.

거대한 체구에 걸맞게 힘이 좋은 덕분인지, 백구는 순식간에 흙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렇게 양지바른 곳에 세계수를 심어놓은 이후.

나는 아딜레아에게 들었던 조언대로 성수를 흙위에 뿌려놓았다.

"이제 여기에 성수만 뿌려놓으면 무럭무럭 자라는건가."

콸콸콸-.

한병당 수백 포인트짜리 성수가 흙위에 쏟아져내렸다.

전세계의 헌터중에 식물 하나 키운다고 성수를 들이부을 수 있는 헌터가 얼마나 될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없겠지 싶을 정도였다.

세계수의 씨앗을 위해 땅에 뿌린 성수의 숫자가 열몇병.

나는 그렇게 잔뜩 성수를 부어놓은 땅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햇빛도 잘 들어오고, 성수도 많이 뿌려줬고. 명색이 세계수인데 이만큼 해줬으면 알아서 잘 자라겠지."

명예 엘프인 내가 세계수를 위해 특별히 골라놓은 명당이다.

이만하면 씨앗도 충분히 만족할거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혼자만의 식목일을 마치고서, 나는 씨앗이 심어져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딜레아와의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팔찌를 착용해볼 생각이었다.

찰칵-.

나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의 금속프레임을 돌렸다.

"그럼 이만 은신처에 돌아가볼까."

그렇게 내가 낙원을 떠나 은신처로 향하려던 순간.

띠링-.

시스템이 보낸 알림음이 울려퍼졌다.

그와 함께 내 눈앞에 반투명한 화면이 떠올랐다.

귓가에 울린 알림에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화면으로 향했고, 시스템의 메세지를 확인한 내 입은 곧바로 다물어졌다.

"······."

갑작스럽게 떠오른 메세지.

내 눈동자가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 커뮤니티의 누적 활동치가 기준치를 돌파했습니다!

- [커스텀 네트워크(A)]가 당신의 커뮤니티에 네번째 분기점을 제시합니다!

고유 특성, [커스텀 네트워크(A)].

그 네번째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7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