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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

제임스 리드가 최준호와 함께 밖으로 나가고, 둘만 남게 된 대통령과 천명국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은 정부 입장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물의 무덤이라 듣는 것만으로 골치가 아프군."

"작년 2월에 북한에서 일어난 현상과 동일합니다."

"자료에 없던 유해 8단계 마물이 튀어나왔지."

"예."

당시 정부는 유해 8단계 마물의 등장이라 판단, 발칵 뒤집혔던 적이 있다.

자칫 마물이 남하하면 주변 마물도 같이 밀고 내려올 가능성이 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최전선 도시는 개성이다.

수복한 지 얼마 안 된 도시였기에 방어 강화를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을 쓰느냐를 놓고 왈가왈부했다.

여기에 사냥에 나서지 않으려고 발을 빼던 김영환과 대형길드의 몸값 높이기 행동들로 정부가 겪은 어려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새로 탄생한 마물이 중국으로 향했다. 대한민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면 중국은 난리가 났었다. 장쯔둥은 이걸 놓고 한국이 마물을 북쪽으로 몰았다고 우기면서 한동안 사이가 안 좋았었지.

지금 와서 보면 제임스 리드가 설명한 현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이런 현상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고 쳐. 다만."

말을 멈춘 대통령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초맨이 한국에 머물 정도라는 게 놀랍군. 미국에서 평가하는 최준호의 가치가 우리가 생각하는 거보다 훨씬 높나 보군."

"계속해서 평가가 올라가는 중이긴 합니다. 직접 일해 봐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있지만 그마저도 감수할 수 있는 요소라 생각할 수 있는 거겠지. 기상천외한 행동을 일삼는 초인들이 워낙 많으니. 천 실장은 어떻게 생각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걸 미국에서 알고 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로군."

"...."

천명국은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최준호의 가치는 더 이상 평가가 무의미할 정도였다.

타국의 초인 다섯과 바꾸자고 해도 최준호를 선택할 만큼 모든 가치에서 최상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젊고, 강하고, 계산적이지 않으며, 한 번 결정하면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얼마 전 발표된 초인 몸값 중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다만 대놓고 폭탄(Bomb)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다루기 어렵다는 평가였다.

이게 유일하게 몸값을 떨어뜨리는 요소였다. 다른 부분은 모두 최상위를 달리면서 최준호의 가치를 증명해 주었다.

제임스 리드의 행동은 여러 상상을 자극했지만 천명국은 당장 눈앞에 놓인 상황을 언급했다.

"지금 문제는 제임스 리드입니다.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이 믿을 수 있는 국가라고 광고할 수 있으나...."

"대놓고 염탐이 걱정되겠지."

"예."

스탠퍼드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친 제임스 리드는 초인 중에서 손에 꼽히는 두뇌파였다.

같은 걸 봐도 많은 걸 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걱정할 건 그게 아니지 않나."

"그럼?"

"제임스 리드의 목숨을 걱정해야지."

"아...."

제임스 리드가 최준호와 친하다고 하나 그 관계가 언제 뒤틀릴지 알 수 없다.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대통령이 위로하듯 말해 주었다.

"그래도 요즘 경우를 차리니 기대를 걸어 봐야겠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천명국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 * *

제임스 리드, 이 녀석이 한국에 머문다고 했을 때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순진한 척 컨셉을 잡고 있지만 속은 새까만 녀석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날 따라 청와대 밖으로 나온 녀석이 눈치를 살살 살피더니 슬그머니 다가와 부탁을 해 왔다.

"준호! 버서커 좀 소개시켜 줘."

"버서커는 왜?"

"디버퍼를 죽인 빌런을 보고 싶거든."

"빌런을 왜 나한테 찾냐."

"준호가 버서커랑 졸라 친한 거 잘 알거든!"

"...."

한 대 칠까?

누가 그런 미친놈하고 친하다고.

그냥 생각날 때 부려먹기 좋은 녀석일 뿐인데.

그래, 일방적인 비즈니스 관계라고 하면 딱이다.

그것과 별개로 내가 버서커와 교류하는 걸 알고 있다니.

이게 미국의 정보력이란 건가.

"싫은데."

난 거절했다. 내가 버서커랑 알고 지낸다고 녀석에게 소개시켜 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자 제임스 리드가 다른 방향으로 어필을 해 왔다.

"준호! 내가 매번 졸라 레시피 잘 만들어 오는 게 신기하지 않아? 나한테 방법이 있어!"

그러면서 언급한 게 분자요리였다.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새로운 형태 혹은 식감을 만들어 내는 분야였다.

"...."

내가 이 정도로 넘어갈 줄 알았다니 오산이군.

…물론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넘어갈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녀석에게 뽑아먹을 게 있기도 했고.

"다른 걸로 지불해. 승낙하면 버서커를 소개시켜 주지."

"뭔데? 필요한 거 말해 봐!"

"너 박사라며?"

"…하하! 시험 다 찍었는데 졸라 우연히 딴 거야. 나, 잘 몰라요!"

멍청한 척 해 봤자 속지 않는다.

녀석이 나에 대해 조사한 것처럼 나도 녀석에 대해 조사한 게 있다.

철저하게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자기 몸을 개조한 초인. 지금의 제임스 리드는 계산의 산물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다.

평가는 12궁과 대적할 수 있거나 한 수 아래 정도, 십대초인보다 낮게 평가된다.

이 정도면 그냥 뛰어난 초인이겠지만 남들이 갖지 못한 두뇌를 지녔다.

현장과 연구소 상황을 동시에 파악하고 있는 인재란 이야기다.

내가 필요한 건 녀석의 뇌다.

아, 물론 직접 머리를 열어서 뇌를 꺼내 가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연구하고 있는 게 있는데 협력하면 버서커를 소개시켜 주지."

"너무 일방적이잖아."

"싫으면 하지 말고."

"으으!"

제임스 리드가 고민에 휩싸인 표정을 짓는다.

이미 다 들켰는데 끝가지 컨셉을 유지하는 걸 보면 경이롭기까지 했다.

"알았어! 할게!"

"좋아."

걸려들었군.

녀석에게 한국이 공돌이를 어떻게 갈아 버리는지 알려 줘야겠다.

약속을 받은 나는 이틀 뒤, 제임스 리드와 버서커가 만나는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처음에는 톡을 읽씹하던 버서커도 마초맨 제임스 리드가 만나보고 싶다고 하니 미끼를 물었다.

내 연락 씹은 대가는 나중에 치르도록 해 줘야겠군.

그렇게 미친놈과 이상한놈이 만나게 되었다.

"여기는 마초맨 제임스 리드. 잔머리가 잘 돌아가고 겉과 속이 다른 녀석이야."

"준호! 말이 졸라 심하잖아."

"심하기는 무슨."

오히려 좋게 말해 준 건데.

먹튀에 교활하다는 평가는 특별히 빼 준 걸 녀석은 모르고 있다.

못들은 척하고 버서커를 소개했다.

"버서커는 알지? 미친놈이야. 정상적으로 대화가 안 된다고 보면 돼."

"늘 그렇지만 네놈한테 그런 말을 들으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느껴지는군."

"응, 넌 빌런."

그리고 난 국가 소속 초인이다.

불만이면 너도 과거로 돌아와 공무원 헌터가 되던가.

아무튼 내 소개에 둘은 인사를 나눴다.

"...."

처음부터 불꽃이 튀는군.

미친놈과 이상한놈 사이에서 정상인인 내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였다.

워낙 개성이 두드러지는 녀석들이라.

아무튼 내 역할은 둘을 만나게 해 주는 걸로 끝났다.

딱 봐도 제임스 리드의 목적은 뻔했고.

일본에 이어 미국인가. 버서커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그럼 편하게 대화 나눠."

괜히 귀찮아질 거 같아 내 선택은 어색한 자리에서 탈출이었다.

* * *

최준호가 밖으로 나가자 제임스 리드의 눈이 번뜩였다.

버서커는 오래 전부터 이름을 들어왔던 빌런이다.

미쳤다고 생각하기 좋은 이명이지만 미국에서 평가하는 버서커는 의외로 후했다.

악보다 중도 악에 속하는 성향으로 만약 미국이었다면 빌런이 아닌 독특한 개성을 가진 초인으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물론 그 기준이 아슬아슬하긴 했다.

하지만 최준호라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허용선이 무한대에 가깝게 늘어났다.

리그 소속과 최준호 성격만 아니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달까.

"할 얘기가 있나?"

"있지."

어떤 방식으로 미국에 오라고 얘기를 해야 할까.

그리 고민하는 제임스 리드의 귀로 버서커의 스산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일단 한 판 붙고 할까."

"어?"

"원래 한 번 어울려야 진솔한 얘기가 오가는 법이지. 걱정은 마라. 가볍게 뼈가 부러지는 정도고 심하더라도 팔다리 한두 개만 날아갈 테니까. 빠르게 응급조치를 취하면 붙일 수 있다."

"...."

제임스 리드는 할 말을 잃었다.

최준호가 나가서 잠깐 방심했다.

'이 새끼도 졸라 미친놈이잖아!'

미친놈 옆에 미친놈이 있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10화

미친놈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지만 제임스 리드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버서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기회였다.

미국에서 파악하는 버서커의 실력은 초인 초입 수준.

초인이 된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알려졌기에 어쩌면 당연한 평가다.

'여기에서 조금 더 높게 평가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제임스 리드는 여기에서 조금 더 추가했다.

'최준호와 함께 다니니 실력이 더 뛰어날 것이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최준호에 대해 연구를 해 왔다. 종잡을 수 없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조차 쉽게 가늠하기 힘든 계산이 깔려 있었다.

최준호는 아무나 함께 다니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천재 정다현도 그렇고 신성그룹의 재녀 이세희도, 친동생인 최윤희마저도 모두 굉장한 재능의 소유자다.

버서커도 꽤 알고 지냈으니 숨겨둔 한 수가 있을 것이다.

둘은 자연스럽게 마주 보고 섰다. 기세가 가볍지 않고 묵직하다. 의지만으로 주변 공기를 바꿔 버릴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완숙한 초인에게서나 발산될 법한 서릿발 같은 기세가 피부를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제임스 리드가 미간을 모았다.

버서커가 대검을 뽑아 겨눴다.

"와라."

"...."

"오지 않으면 내가 가지."

순간, 눈앞에 벼락이 쳤다. 포스가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면전에 도달하기 무섭게 연이은 충격파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예상을 초월한 자연스러운 포스 수발이고, 연계 공격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제임스 리드가 손을 휘둘렀다. 강렬한 회전이 일어나며 주먹에 실린 포스의 위력이 배가 되어 버서커의 검격을 튕겨 냈다.

포스가 무겁고 날카로우며 단단하다. 초입이 아닌 완숙의 경지가 맞다.

"호오, 제법인데."

나직한 감탄사와 달리 버서커의 검격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얼핏 보면 포스를 남발하는 공격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 실린 강맹함은 부드러움과 조화되어 한번 잡은 기선을 이어 나갔다.

'효율적이다.'

어지럽게 쇄도하는 검격을 일일이 쳐내며 제임스 리드는 버서커의 스타일을 분석했다.

흐름을 꽉 쥐고 강맹함으로 찍어 누른다. 빈틈을 파고들지만 빈틈이 없더라도 힘으로 열어젖히고 파고든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방어에 임하는 상대를 힘으로 제압해 놓은 뒤 부수는 방식이다.

그것이 버서커의 스타일이었다.

무식하지만 가장 확실한 승리공식이다.

꽝!

"큽!"

포스를 두른 팔이 부서질 것처럼 시큰거렸다. 제임스 리드는 근육 컨트롤로 통증을 상쇄시켰다.

그의 기프트 '바디 컨트롤'은 세세한 조정으로 육체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도 하고 자연치유력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여파를 순식간에 해소시킨 제임스 리드가 앞으로 파고들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놀란 듯한 버서커의 말을 흘려버리며 제임스 리드가 주먹을 뻗었다.

그 궤적은 기괴하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직선이 아닌 복잡한 곡선을 그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극한의 바디 컨트롤로 만들어 낸 예측 불가능한 공격이었다.

제임스 리드는 이러한 움직임으로 마물보다 각성자에게 더 강한 초인이라 칭해지며, 초인들의 사신이라 불렸다.

쿵!

"크크크!"

"...!"

주먹이 가슴을 강타했지만 버서커는 오히려 웃었다.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맞대응을 한 것이다.

제임스 리드의 옆구리에는 버서커의 칼등이 틀어박혀 있었다.

"컥!"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난 제임스 리드.

그의 두 눈에 경악이 서려 있었다.

대결이 시작하기 전만 해도 자신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대결이 시작되고 그 생각은 오산이었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버서커, 이 정도 강자일 줄은.'

입가를 훔쳤다. 피가 묻어나왔다. 조금 전 공격으로 내부가 진탕된 것이다.

그에 반해 버서커는 멀쩡해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맷집이란 말인가.

'괴물이군.'

최준호 앞에서 경박한 캐릭터를 연기하지만 제임스 리드는 기본적으로 빠른 판단력, 뛰어난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간파할 줄 아는 능력자였다.

대결 전에 버서커를 한 수 아래로 본 이유는 간단했다.

흔히 초인이 된 후에 힘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과정, 위력을 극대화하고 완급 조절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밑바탕에 온전히 깔려야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체계적인 훈련이다. 빌런인 버서커는 기본적으로 추적당하는 입장이며, 근거지를 마련해 두지 않는다. 이것은 체계적인 훈련을 쌓을 시간이 부족함을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상성이었다. 버서커의 전투 스타일은 지극히 본능적이고 즉흥적이다. 마초맨이라는 이명과 달리 철저한 분석과 몇 수 내다보는 수를 가진 자신이라면 버서커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간에 완전히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신의 실력이라면 리그의 12궁을 상대해도 그날 컨디션, 주변 환경, 포스 잔량 등을 고려할 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건 착각에 불과했다.

계산이 어긋났지만 제임스 리드는 가슴에 불같은 승부욕이 들끓는 걸 느꼈다.

이런 맞수를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뼈가 녹는 대결을 한번 벌이고 싶었다.

"꽤 하는군."

"…응?"

재차 이어질 공격에 대비하던 제임스 리드는 버서커가 검을 내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끝을 봐도 상관없긴 한데, 더 하고 싶나?"

"처음부터 그런 생각인 줄 알았는데."

"크크, 대결에 피가 튀어야 재미가 있지. 하지만 이걸로 네 실력은 알 거 같고,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던 거 아니었나?"

"맞아."

"그 말을 들어 보고 대결을 지속할지 결정하지."

"...."

제임스 리드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당최 이해하기 힘든 사고회로였지만 대화가 이어진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었다.

대결의 결과는 무승부…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하게 인정했다. 자신의 열세였다. 물론 끝까지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이 정도로 강해진 거지?"

"미국에서 분석했던 것보다 내가 강했나 보지?"

"맞아."

제임스 리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버서커가 상대한 초인은 붉은 뱀이 전부였고, 한때 전미를 열광케 했던 디버퍼 샤일로가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은 전성기가 지난 초인이고, 다른 하나는 부스트라는 수법으로 초인이 된 가짜였다. 당연히 버서커의 실력에 평가절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멋대로 판단하고 제멋대로 행동했어. 세상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데."

"하지만 가장 많은 정보를 알려 주는 단서지."

"틀린 말이 아니야."

미친놈처럼 보였던 버서커는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제임스 리드는 속으로 평가를 바꿨다.

"왜 당신 같은 자가 이 좁은 국가에서 빌런 취급을 받으며 있는 거지?"

버서커는 이렇게 저평가 받을 초인이 아니었다.

12궁에 준할 수 있다면 어딜 가도 상상을 초월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빌런이라...."

"만약 최준호 때문이라면 미국이 책임질 수 있어. 당신의 재능은 좀 더 중요한 곳에 쓰일 수 있다. 미국으로 와. 그곳에 기회가 있으니까."

버서커는 결코 이곳에서 썩어서는 안 된다.

나날이 리그의 위협과 마물의 위협이 심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동유럽은 러시아의 위협에 더 이상 힘을 보태지 못하는 서유럽을 손절하고 친 리그 정권이 들어서고 있다.

강한 마물의 등장 빈도는 점점 더 높아져 각성자 전력이 부족한 전력이 지원을 호소한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자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제임스 리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미국이라 생각했고, 뜻 있는 초인들이 그곳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말에 버서커가 폭소했다.

"크크, 그걸 정하는 게 누구지? 미국의 높으신 나리들인가?"

"...."

"세계의 운명을 논하지만 네 말 속에 담긴 함의는 패권을 향한 야욕이지."

"확실한 리더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룹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

설사 그것이 패권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러한 강경함은 각성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안다. 나는 그게 꼴 보기 싫다는 거고."

"넌 자유로운 영혼이군."

제임스 리드는 자신이 성급했음을 인정했다.

버서커는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이다.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이 이끌리도록 해야지, 계산적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커진다.

그가 누리는 것들이 지켜야 할 것들이며, 그걸 위해 말살해야 할 적이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한다.

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감대부터 형성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 있지?"

"네가 보기에 강해 보였나 보군."

"네 실력을 분석한 놈들을 전부 해고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강함이라는 건 별의 순간을 엿보기 위해 딸려 오는 부산물이라 생각했지."

자부심을 느껴야 할 이야기에 버서커는 오히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강해질 수 있었던 건 간단하다. 누군가의 샌드백이 된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고, 팔다리가 부러지고 가슴이 뜯겨 나가더라도 버텨야 했다. 넌 아나? 초인이 되어도 새벽마다 누군가 불쑥 찾아와 두들겨 패는 악몽을 꾸는 기분을. 이 과정을 거치니 강함은 저절로 따라오더군."

"...."

씁쓸함이 담긴 말에 제임스 리드는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던 거지?

저 상황이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텐데.

부활 기프트라도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망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경험담이라는 건데.

이런 짓을 저지를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최준호인가?"

"날 그렇게 만들 녀석이 또 있을 거 같나?"

결국 나와 버린 이름.

이토록 고강한 초인도 최준호에게 일방적인 샌드백밖에 안 된단 말인가.

제임스 리드는 속으로 경악했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곤경에서 꺾이지 않고 버텨 낸 버서커가 탐이 났다.

"미국으로 가면 최준호 손에 벗어날 수 있어."

"크크, 그걸 믿으라고?"

"내 말은 거짓이 아니...."

"뒤통수에 구멍 뚫릴 위기를 느끼며 살고 싶지 않다. 평생 최준호를 마주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나?"

"...."

당연히 장담 못 했다.

최준호의 뒤끝은 자신 또한 겪어 봤으니

고작 지중해식 된장찌개 레시피 갖고 면박을 받지 않았던가.

"최준호에게 종속된 처지가 아니니 잘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

"그건 틀린 말이 아니군. 근데 끌리지 않아."

제임스 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말을 꺼내 놨으니 버서커에게도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리라.

"당장 오지 않아도 좋아. 생각해보다 끌리면 얘기해 줘. 미국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

"알았다."

'됐다!'

거의 억지를 쓰다시피 해서 받아 낸 승낙이지만 제임스 리드의 표정이 환해졌다. 처음 허락이 어렵지 나중은 일사천리였다.

"미국은 버서커 널 환영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김칫국 거하게 마시는군."

"어차피 한 식구가 될 거니까."

능글맞게 웃어 보이니 버서커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밀어붙이는 거에 약한 타입이로군.

제임스 리드는 버서커의 아픈 부분을 공감해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준호도 너무한 거 아냐? 이토록 강한 초인을 막 다루고."

"음?"

"버서커는 좀 더 존중받아야 할 초인이야. 그런데 준호는 그러지 않고 있어."

"내가 좀 험하게 굴려지고 있긴 하지."

버서커의 입가에 걸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고 제임스 리드는 흥을 냈다.

최준호를 향한 험담이 늘어날수록 호감도가 상승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미국에는 널 더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 또 독특한 개성을 가진 초인들도 많이 있고!"

"그거 심심하지 않겠어."

"맞아! 한식도 LA가 세계에서 제일 맛있어!"

근거 없는 확신도 날려보고.

슬슬 버서커가 미국으로 넘어올 확률이 반반이다 싶을 때,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거하게 붙었군."

자리를 비웠던 최준호였다. 멀리서 대결이 끝나길 기다렸나 보다.

하필이면....

조금 더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제임스 리드는 본능적으로 말투를 바꿨다.

"끝났어."

"그래서 결과는?"

"승부를 내지 못했다. 마초맨의 위명이 허언이 아니더군."

"버서커 너도 졸라 강했어."

"쓸 만하지. 아직 멀었지만."

"...."

12궁에 견줄 수 있는 초인이 이런 취급당하다니.

버서커의 반응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제임스 리드가 흠칫했다.

기분 나쁘거나 실망한 게 아니라 히죽 웃고 있는 게 무척 수상했던 것이다.

무척 악의적인 느낌이 풀풀 풍겼다.

그리고 대뜸 튀어나온 말.

"그건 그렇고 마초맨은 최준호 앞과 내 앞에서 말투가 많이 다르군."

"그야...."

허를 찔린 제임스 리드가 멈칫했다.

방금 전까지 분위기가 꽤 좋았지 않나?

그런데 뭔가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는 기분이다.

최준호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말투가 달라?"

"내 앞에서는 한국어가 유창하던데."

"붙었다면서 그 사이 대화까지 나눴냐."

"용건이 있는 거 같아서 간만 봤다. 날 미국으로 오라고 하더군."

버서커는 최준호에게 비밀이 없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결정타는 그 다음이었다.

"그리고 네 욕을 많이 하더군."

"내 욕?"

"너더러 제정신이 아니라던데."

"자, 잠깐!"

"왜? 내가 없는 말이라도 했나?"

"...."

제임스 리드는 경악했다.

그건 둘만의 대화 아니었던가?

아니, 그보다 자신은 최준호가 제정신 아닌 거 같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아니야, 그런 말 한 적 없어! 준호! 날 못 믿어?"

"그럼 내가 널 믿겠냐?"

"...."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분명 분위기가 좋았었는데!

제임스 리드가 버서커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히죽 웃는 게 보였다.

처음부터 완전히 농락당한 것이다.

시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준비해."

"뭐, 뭘?"

"나한테 사기치고 튀어 놓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냐? 버서커를 상대해 봤으니 나도 상대해 봐야지."

"나, 난 지금 졸라 지친 상태야."

"상관없어. 그럼 맞기만… 아니, 막기만 해."

기어이 두들겨 주겠다는 의지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그보다 방금 맞기만 하라고 한 거 같은데?

'왓더 졸라 퍽!'

최준호와 눈이 마주친 제임스 리드가 혼종 욕설을 내뱉었다.

111화

제임스 리드가 쓰러져 있다.

"나 죽어! 졸라 아파!"

"엄살 그만 부려."

치이익!

최준호가 제임스 리드 몸 위로 회복제를 뿌렸다.

눈에 띄게 회복되는 중에도 제임스 리드는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엄살 한번 심하다.

"그니까 왜 뒷담하냐."

"억울해! 난 욕 안 했어!"

"뒷말은 했다는 거잖아."

"...."

"돌아갈 준비나 해."

최준호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임스 리드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사실 고통은 가신 지 오래였다. 최준호가 회복제를 뿌린 순간, 바디 컨트롤로 고통을 완전히 지워 버린 후였다. 극악의 훈련을 견뎌 내고 육체를 개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조정이 가능해서다.

하지만 진짜 충격받은 것은 육체가 아닌 정신이었다.

"…이게 헤드 브레이커."

압도적인 강함이었다. 세계 초능력자의 날 행사에서 초인 셋을 압도했을 때 봤던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뼈와 살을 분리시키는 강렬한 공격 속에 상대를 말살하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매 공격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최준호의 공격을 마주하면서 머릿속으로 계산을 지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극한까지 육체를 단련하면서 더 이상 고통에 지배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최준호의 일방적인 공세에 두드려 맞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순간이 끝나기만을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제임스 리드 옆으로 버서커가 다가왔다.

"네놈도 드디어 최준호 맛을 봤군."

"다 네놈 때문이잖아."

"최준호 맛, 각별하지 않나?"

"...."

미간을 찌푸린 제임스 리드가 버서커를 노려보았다.

이번 사태가 벌어진 게 다 이놈 탓인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왜? 오해 풀어 줬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말은 맞는데. 흠, 내가 너무 돌려 말했나. 아까 네가 했던 제안에 대한 내 대답이다."

"뭐?"

자신이 최준호에게 두들겨 맞게 한 게 대답이라고?

버서커가 히죽 웃었다.

"미국에서 나에 대해 조사했을 테지. 내가 초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내 실력을 하찮은 수준으로 설정하면서."

"…무시는 하지 않았어."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버서커의 실력은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내가 미국으로 가면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하던 건 거짓이었나?"

"초인의 단련은 과학적으로 이뤄져야 해. 체계적인 관리 속에서 단련하면 지금보다 더...."

"그럼 내 힘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

"짧은 기간 동안 내가 너와 승부가 가능할 정도로 성장했다. 내가 천재라서? 애초에 천재였다면 얼마 전에 초인이 될 일도 없었겠지."

머릿속에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버서커는 1년 전, 숨기고 있다고 해도 2년 전쯤 초인이 되었다.

그런데 실력은 자신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고강해져 있다.

최대 2년 사이 이만한 성장이 가능했다는 의미.

이게 최준호와 만남이라면 1년 사이에 이 정도로 강해졌다는 말이 된다.

"최준호가 그 정도란 말인가...."

"그래도 네놈은 맞을 이유가 있었지. 하지만 난 아무 이유도 없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강해져야 할 수밖에 없었지. 너도 한국에 있는 동안 녀석의 옆에 붙어 있어라. 그럼 얻어 가는 게 있을 거다."

"왜 날 도와주는 거지?"

무슨 이득이 있다고?

모든 각성자는 힘을 추구한다.

그 기회를 양보하는 버서커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도와주는 거라고?"

버서커는 코웃음쳤다.

"헤드 브레이커가 네놈에게 신경이 쏠려 있으면 내가 편해지니 하는 말이다. 네놈에게 신경을 쓰는 만큼 난 관심에서 멀어지겠지. 그건 내게 자유가 주어짐을 의미한다."

"...."

"물론 네게도 이건 기회가 될 수 있다. 고통스러운 만큼 강해지는 속도는 빠를 거거든."

"난 강해질 수 있다면...."

그리 말하던 제임스 리드는 방금 전 대결을 떠올렸다.

이걸 자주 겪어야 한다고?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을 뻔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홀로 남은 제임스 리드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한국이라면 안전할 거라 생각해서 왔다. 옆에서 지켜보고 얻어 갈 게 있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라 봤고.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호랑이굴로 쳐들어간 게 아니라 호랑이입으로 뛰어든 격이었다.

와그작 씹혀 버리는 신세가 되었고.

"졸라 짱나네."

머리를 굴리다 되레 그물에 걸려든 꼴이 된 제임스 리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고뇌하는 제임스 리드의 모습을 멀리 지켜보던 버서커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물 건너 온 희생양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매우 튼튼하면서 쉽게 꺾이지 않을 샌드백이다.

"드디어 나도 한숨 돌리게 되었군."

해외로 휴가나 다녀올까.

잠시나마 최준호의 레이더망에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버서커는 행복을 느꼈다.

* * *

조사해 본 자료를 살펴보면 졸라맨은 굉장히 똑똑한 인재였다.

두뇌는 웬만한 천재급에다가 각성자로서도 초인의 반열에 올랐다.

연구소의 이론과 현장의 경험을 동시에 갖춘 인재다.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기 딱 좋았다.

이런 인재가 굴러들어 왔는데 쉽게 놓아줄 수 없지.

무엇보다.

자기 몸을 스스로 개조해서 초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거 자체가 정상의 범주에서 한참 이탈했다는 의미였다.

제임스 리드도 미친놈이란 뜻이다.

나는 녀석에게 연구 중인 몇 가지를 공유했다.

하나는 신체 절단 회복제였고, 다른 하나는 펜타 개량형이었다.

"이건 미쳤어!"

신체 절단 회복은 제한적인 환경에서 가능한데, 회복제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에 제임스 리드는 흥분했다.

그리고 펜타 개량형.

처음에는 마약이라는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각성 상태만 유지하는 성분을 추출하면 기프트 개방에 도움이 될 거란 말을 듣고 눈이 뒤집혔다.

"이건 졸라 좋아!"

"완성만 해. 미국에 저렴하게 수출할 테니."

"약속하는 거야!"

"연구는 적당히 하고. 그러다 중독된다."

이 헬창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자기 몸에 마약을 투여하고도 남을 놈이라 적당한 선에서 말렸다.

이건 내 연구에 도움을 요청한 부분이고.

그 다음 요구를 들은 제임스 리드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작은 단위로 신체를 괴롭히는 법?"

"네가 그렇게 해서 강해졌던데."

"그건 단련이야! 미세 단련! 나노 단련!"

"그래, 단련."

날 보는 녀석의 눈이 떨떠름했다. 내가 왜 그걸 궁금하게 여기나 싶나 보다.

실제로 제임스 리드의 기프트인 바디 컨트롤은 굉장히 유용한 기프트였다. 신체 능력을 극한으로 활용하게 만들어 인간이 펼치는 거라 믿기 힘든 기괴한 궤적으로 적을 압박할 수 있었다.

이 위력이 극대화 된 건 녀석이 머리가 좋기 때문이겠지.

나라면 절대 생각해 내지 못했을 거다. 그럼 좋은 머리를 이용하면 된다.

그중 내가 주목한 건 극한의 작업을 통해 개조를 완성해 낸 방식이다.

"내가 지정한 사람을 지도해 줬으면 좋겠어."

"누구?"

"내 동생."

"헤드 브레이커 시스터! 졸라 잘 알지! 레그 브레이커로 불린다며?"

레그 브레이커(Leg Breaker).

내 친동생 윤희의 이명이었다.

사냥 도중 습격해 온 빌런의 다리를 샷 시리즈로 모조리 잘라 버리면서 붙은 이명이다.

내가 가르치긴 했는데 현장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잘라 버렸다더라.

그 장면이 워낙 임팩트가 강하다 보니 윤희의 이명은 어느 순간 레그 브레이커로 굳어져 버렸다.

나도 최근에 안 거다.

이러다 브레이커 남매라 불리겠군.

아니, 이미 그렇게 불리고 있을지도.

오빠는 헤드고 동생은 레그인가.

그래도 내가 더 낫군.

"근데 그냥 도와주기 좀 그런데...."

"공짜로 도와 달라는 건 아냐."

"그럼?"

"네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여기에 온 목적도 이뤄 주게 해 주지."

한번 쥐어박으면서 녀석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파악을 끝냈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없는 척 잡아떼기에 여념이 없다.

"나 아무 문제없어! 졸라 무난해! 그리고 목적도 없어!"

진짜 없다고?

미끼를 풀어봤다.

"전투 지연."

"...!"

"진짜 해결할 생각 없어? 난 해결 방법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어?"

제임스 리드가 우스꽝스러운 컨셉을 버린 채 눈을 크게 떴다.

"내 말에 대답이나 해. 그 부분에 문제가 있어, 없어."

"있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순순히 인정하는군.

녀석도 결국 각성자다. 강해지고 싶은 욕망에 헬스 중독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되었으니 그냥 넘어갈 수 없겠지.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부터 해."

"할게! 그러니 알려 줘! 제발!"

제임스 리드에게는 오래 전부터 가로막아 왔던 벽인가 보다.

의외로 해결하기 쉬운 문제인데.

뜸 들이며 괴롭힐 일도 아니어서 바로 말해 줬다.

"네가 머릿속으로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서 그래."

"왓?"

제임스 리드가 겪는 현상은 정다현과 비슷하면서 달랐다. 정다현은 아직 완급조절 요령이 부족하다면 제임스 리드는 요령이 완숙의 경지에 도달하여 흡수되는 대로 받아들이다 보니 과잉 현상으로 흘러가 버렸다.

일종의 과도기인데 문제라면 그 과도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는 점이겠지.

오히려 나이가 먹어 두뇌 능력이 떨어지면 급격하게 약해질 수 있다.

"...."

내 말을 듣고 표정이 짧은 순간 여러 번 바뀌었다.

너무 갈궜나?

꿈과 희망이 없어 보여서 미끼를 투척했다.

"이걸 극복하면 12궁은 잡을 수 있을걸?"

"진짜?"

"어."

"할게! 동생을 사이보그로 개조시켜 줄게! 하게 해 줘!"

"좋아."

이걸로 윤희가 제 몫을 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었군.

근데 사이보그까지는 좀 아닌 거 같고.

내가 볼 때 제임스 리드의 기프트는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하는 종류인 거 같은데 어떻게 작용하는 건지 지켜봐야겠다.

"근데 어떤 방법인데?"

"과할 때는 항상 덜어 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알아."

"넌 정보를 과하게 받아들여. 그 안에서 최적의 결과를 찾아내려고 하니 시간이 걸리는 거지."

그나마 제임스 리드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시간이 적게 걸리는 거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최적의 결과가 그려지지 않아."

"모든 걸 계산으로 해서 생기는 문제야. 정보를 받아들이되 거기에 본능을 가미하면 해결 돼."

"본능?"

"생존본능."

"...."

제임스 리드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이제야 이해가 되고 있는 건가.

"준호! 나 뭔가 졸라 불안해지고 있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최적의 결과를 알려 줄 거야. 필요한 정보는 취하고 필요없는 건 버리지. 극한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어. 이제부터 그 본능을 새겨 보자."

"왓더 졸라 퍽!"

누가 보면 내가 두들겨 패고 싶어서 이런 제안을 한 줄 알겠다.

일단 맛보기를 보여 줘야겠다.

그럼 한국에 좀 더 붙어 있겠지.

한국에 있는 이상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손을 보탤 테고.

이게 다 내가 편안하게 볼일을 보기 위한 안배였다.

* * *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 제임스 리드를 적당한 선에서 어루어 만져 줬다.

거동도 힘들게 만들면 다음 스케줄 소화에 문제가 생기거든.

녀석을 훈련장에 넣어 두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윤희는 제임스 리드의 지도를 받겠냐는 제안을 냉큼 수락했다.

나는 잘 몰랐지만 마초맨 제임스 리드는 뛰어난 지적 매력과 폭발적인 남성적인 매력으로 여성 각성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단다.

그에 비해 나는 비리비리하다나 뭐라나.

이것이....

본인이 선 넘은 것도 모른 채 단꿈에 부풀어 있었다.

"내가 초인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니...."

네 오빠는 초인 아니냐.

웬수라고 말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젠 초인 취급조차 안 해 주는군.

좋아하는 걸 보면 감동을 깨 주고 싶은 충동이 든다.

참아야겠지?

어차피 곧 현실을 깨닫게 될 테니까.

윤희를 데리고 훈련장에 도착하니 그 사이 멀끔해진 제임스 리드가 운동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나와 윤희를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왔다.

"하이, 반가워요. 최윤희 씨. 제임스 리드입니다."

"와! 완전 멋져. 한국말도 완전 잘해. 진짜 마초 지니어스구나."

윤희의 중얼거림에 제임스 리드가 느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준호 초인에게 배우려고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말투가 완전 바뀌었다.

졸라거리던 졸라맨 어디 갔지?

버서커가 말투가 바뀌었다고 하더니 진짜 나란 사람 한정으로 바뀌고 있던 거였군.

그러건 말건 날 빼놓고 둘은 빠르게 친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떤 방식으로 훈련이 진행될지 전해 들은 윤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거, 진짜 아니지?"

"뭘 들었는지 몰라도 맞을 거야."

"자, 잠깐! 이런 얘기는 못 들었다고!"

"지금 들었잖아."

"장난해?"

윤희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제임스 리드가 웃었다.

"하하! 실제로 나노 단위로 단련하는 게 아니니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요. 최소 단위로 확실하게 단련하면 됩니다. 사람의 몸은 참 신비해서 죽을 것 같은 고통도 견뎌 내거든. 열심히 하면 윤희도 나처럼 완벽한 육체를 가질 수 있어! 이 선명한 근육을 봐!"

"시, 싫어! 오빠! 살려 줘!"

좋다고 행복할 땐 언제고?

비명을 지르는 윤희를 향해 난 손을 뻗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내 동생 파이팅!

* * *

"제임스 리드가 한국에 머무는 것은 초인님을 살펴보기 위함일 확률이 높습니다."

천명국은 내게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부쩍 데리고 다니니 불안했나 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제임스 리드가 생각보다 활용할 구석이 많더군요. 서로 만족스러운 거래 중이라고 보면 됩니다."

실제로 신성그룹에 데려가서 며칠 동안 아이디어를 뽑아내기도 하고, 윤희를 새로운 방향으로 굴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등, 알차게 써먹고 있었다.

특히 근육을 최소 단위로 단련하는 것은 내게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어서 특별히 더 강해지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게다가 아는 것도 많아 뭐든 척척 말하니 휴대용 백과사전 느낌이었다.

제임스 리드가 내게 가장 많이 말한 건 세계 정세였다. 나날이 강해지는 마물 속에서 국가의 역할, 초인의 역할, 시민의 역할과 기술의 발전 방향 등을 풀어서 얘기하고 자기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서 얘기하기도 하는데, 인상이 깊었다.

"지금 고분고분하니 이용가치가 높으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여차하면 그때 치워 버리면 되겠죠."

"치운다는 게 혹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거죠."

유해 8단계 마물을 사냥하다 초인도 종종 목숨을 잃으니까.

제임스 리드가 날 지켜보기 위해서라면 내가 사냥 간다고 할 때 따라오지 않을까?

초인이라고 마물 사냥에서 사고가 피해 가는 건 아니다.

"아...."

탄식을 터뜨린 천명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안심하겠지.

물론 난 효용 높은 제임스 리드를 최대한 부려 먹을 생각이었다.

곧 벌어질 사건에 대비해서 잠깐 한국을 떠날 생각인데 버서커와 제임스 리드를 두면 임시 땜빵 정도는 될 테니까.

"아, 그리고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긴장한 표정을 지을 거 없는데.

그냥 간단한 소비자 조사였다.

"천 실장님도 기프트를 개방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습니까?"

"기프트요? 당연히 개방하고 싶습니다."

음, 더 이상 성장을 포기한 각성자도 기프트는 꼭 갖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펜타 개량형이 완성되었을 때 상품성은 충분하겠다.

다만 이건 각성 상태를 유지해줄 뿐, 나처럼 잠재된 기프트가 어떤 건지 알지 못하는 상태니까.

하지만 천명국은 뭔가 냄새를 맡았나 보다.

"초인님, 혹시?"

"일단 연구 중입니다."

"완성되면 제게 꼭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1차로 하고 싶습니다."

"좀 위험할 수 있는데요."

"그래도 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움켜쥐어야 하는 건데.

나중에 알고 졸도하지 않겠지.

난 분명 위험하다고 말했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감당하겠지.

112화

"제가, 실수를. 실례했습니다. 평생 기프트를 갖는 게 소원이어서. 지금은 포기했지만 초인님에게 들으니 의미가 남다르게 들리네요."

"괜찮습니다."

잔뜩 흥분해 있던 천명국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저러니까 나도 마음이 편해진다.

천명국 정도 되면 공짜로 얻어지는 기프트는 없다는 걸 잘 알 테니까.

펜타 개량형이 완성되면 말해 줘야겠다.

날 많이 도와주는데 기프트 개방 정도는 도와줘야겠지.

심장의 피가 필요하다고 하면 오해하지 않겠지?

"하지만 획기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분명 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이 일어날 겁니다."

천명국이 말하길, 전 세계적으로 기프트를 탐지하기 위한 연구가 한창이란다.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까지 개발이 완료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개발이 끝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중국에서 협력 요청이 들어왔다고 들었는데요."

"아, 예. 외교적 사안이라 초인님과 크게 연관이 없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예."

고개를 끄덕인 천명국은 중국에서 온 요청에 대해 말해 주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남부 바다에 판을 치고 있는 해적 토벌 협력에 관한 내용이었다.

마물에 의해 바다를 장악당하고, 제공권에 제약이 가해지면서 해적들이 활보하는 시대가 되었다.

거점을 미사일로 타격도 해 봤지만 오히려 비행 마물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아 자제하고 있었다.

결국 해적을 소탕하려면 군함을 동원해야 하는데 목숨을 걸고 해로를 개척하는 해적을 쫓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함정에 빠져 군함이 해양 마물의 제물이 되곤 했다.

한반도는 해적 침입이 많지 않은 편이지만 제주도에서 종종 목격되곤 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거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이런 제안을 해 온 이유는 첫째가 내용 그대로 해적 소탕이고, 둘째가 한국과 관계 개선, 마지막이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것이다.

"특히 영토 수복에 대해 중국이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강해질수록 중국의 영향력이 축소된다. 이것만이 아니라 영토 수복 과정에서 마물들이 북쪽으로 밀려나면 중국으로 넘어가는 마물이 늘어난다.

즉, 한국이 영토를 수복할수록 중국으로 마물이 몰려간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강해지고 중국은 피해를 입고.

중국이 난리 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런다고 중국이 일방적인 피해자냐, 그것도 아니다.

자기들도 장쯔둥이 있을 때 남하 정책이라면서 각성자 전력을 투입해서 북한 지역을 꿀꺽하려고 했다.

결과는 실패였고. 이쪽이 해낼 거 같으니 좋게 지내자고 한다. 어이가 없는 제안이다.

어차피 정부가 영토 수복을 포기할 리도 없기에 말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나는 해적 이야기를 짚고 넘어갔다.

"해적과 태평문이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있습니까?"

"매우 높습니다. 아니,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태평문의 보급이 여태까지 이어질 리가 없습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까지 활동하는 해적들은 각국의 빌런 조직과 연계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 태평문인데, 중국 전역은 물론이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상은 리그와 밀접하게 닮아 있으며, 중소 규모 조직은 리그 산하에 들어가기도 했다.

현 태평문은 스스로 리그와 대등한 협력자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부에서는 반쯤 귀속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는 해적의 본체가 태평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

천명국의 말을 들으니 퍼즐이 맞춰져 그림이 완성되었다.

단순히 중국에서 활동하는 빌런 조직이면 내가 신경 쓸 게 없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8단계 마물 두 마리가 등장할 때 태평문이 부산을 기습 공격한다.

해적들이 모는 배를 타고 상륙을 한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뒤통수를 당하면서 부산은 어마어마한 인적, 물자 피해를 입었다. 당시 납치된 사람만 수천 명이었으니.

굳이 먼저 나서려는 이유는 별거 없다.

미래에 일어나는 참사를 지나칠 수 없어서다.

내가 남들과 다른 정의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 뻔히 일어날 참사를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나도 이 사회에 깊숙이 녹아들었다.

그렇다면 빌런들은 미리 처리해 두는 게 좋겠지.

그리고 태평문의 멸문은 리그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수단이다. 이 좋은 걸 양보할 수 없지.

난 천명국에게 해적에 대한 자료와 태평문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

"초인님."

"예."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겁니까?"

"별거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초인님은 지금 어마어마하게 큰일을 벌이려는 거 다 압니다."

천명국은 벌써부터 암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누가 보면 사고뭉치인 줄 알겠다.

미래를 보고 왔다고 할 수도 없고. 이럴 땐 답답함을 느꼈다.

"단독작전을 수행하려고 합니다."

"태평문과 관련된 겁니까?"

"예. 아직 확실한 건 없어서. 먼저 저질러 보고 결과가 나오면 보고 올리겠습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서."

"아니, 그 단독작전은 상부에도 보고하는 건데. 자세히 좀 알려 주시지요."

"보고 대상인 대통령님이 안 계시니까요. 확실해지면 알려 드릴게요."

"자, 잠깐!"

천명국이 애타게 날 불렀지만 못 들은 척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그 길로 부산에 향했다.

* * *

내가 부산에 도착하면서 느낀 것은 도시 전체 분위기가 축 처져 있었다.

부산시장이 불명예스럽게 사퇴하고 보궐을 치러 여당 소속 시장이 당선되었지만 유성수가 벌여 놓은 정책과 충돌하면서 불필요한 심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유성수가 워낙 큰 부산을 외치면서 동남권을 하나로 묶으려고 하다 보니 행정구역을 예전대로 되돌리려는 여당 정책과 충돌하는 있었다.

콩고물을 주워 먹는 주체가 바뀌면서 생기는 잡음일지도 모르고.

난 딱히 여당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시락 건으로 최효직과 충돌도 했고, 리그 첩자였던 유중호도 여당 소속이었고.

그놈이 그놈이란 생각과 함께 비리가 눈에 띄면 그때그때 때려잡을 뿐이다.

대통령과 친한 것도 여당이어서가 아니라 코드가 잘 맞아서고.

이번 부산시장도 그러길 바랐다.

나는 약속이 되지 않았지만 부산시장에게 면담을 청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부산시장은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주었다.

"한기열입니다. 최준호 초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산시장 한기열은 여당 원내대표 출신으로 얼마 전 사퇴한 지창용과 절친한 사이이자 대통령 계파 출신이다.

여당이 청와대와 거리를 둘 때 대통령과 소원해졌다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내가 거기까지 알 바는 아니고.

내가 여기 온 목적만 이루면 된다. 잘 협력해 주면 베스트 파트너가 되지 않을까.

"최준호입니다."

"위명 높은 초인께서 어쩐 일로 부산에?"

"단독작전 수행 때문에 오게 되었습니다."

"...."

한기열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내가 유성수처럼 본인을 잡으러 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요즘 불필요한 오해를 하는 사람이 많아진 느낌이다.

"시장님과 관련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한기열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여당 지도부가 날아가면서 다음 여당 후보가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으니까.

난 곧장 목적을 밝혔다.

"해경의 지원을 받고 싶습니다."

"초인님의 요청이 다 필요성이 있으셔서겠지만 어떤 임무인지 알아야 원활한 협력이 가능합니다. 실례지만 어떤 이유로 지원을 바라시는지?"

"최근에 중국 남해에 해적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종종 제주도에도 등장한다는 말이 있고 최근에는 거제도 앞까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냐고 물어보니 멀리 쫓아내는 게 전부라고 한다.

추적하면 해적들이 해양 마물이 있는 곳으로 유인하기에 나포가 쉽지 않단다.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해적을 자극하면 태평문이 쳐들어올 수 있어서 자제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태평문은 초인 둘을 보유한 동북아 최대 빌런 조직입니다."

그 초인이 부산에 상륙한다고 하면 끔찍한 일이겠지.

타고 있는 배를 격침시켜도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을 테니까.

대한민국 각성자 전력은 북진을 위해 북쪽에 배치되었기에 초인이 쳐들어오면 막기가 쉽지 않다.

근데 미래에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진다.

그 점에서 한기열은 상황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대비를 하려는 자세는 취하고 있으니까. 생각해 보니 저번 생에서는 부산시장이 유성수 그대로일 테니 전혀 대비가 안됐었을 것이다.

밀무역 조장에다 리그와 끈을 연결하고 있으니 해적들이 와도 경계태세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지. 도둑한테 안방 문을 열어 두고 맞이한 셈이다.

난 정보를 풀었다.

"조만간 태평문이 부산에 상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이건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이다.

좀 더 놀랄 줄 알았는데.

"아시는 게 있으신지?"

"중국에서 태평문 세력을 대대적으로 색출에 나서고 있습니다. 점 조직이라 버티고 있지만 압박이 심해서 숨어 있다고 하는데 은신처가 있다고 해도 먹고 싸면서 버텨야 하니 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한기열은 유성수가 시장일 때 밀무역 비중 중 상당수가 태평문의 것일 확률이 높다고 밝혔다.

달리 보면 내가 태평문의 돈줄을 날려 버린 셈이군.

"그럼 해경의 도움이 필요한 건 태평문의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맞습니다. 뒤통수가 간지러운 일이 없도록 하려고 합니다."

말이 해적이지 결국 빌런이니까. 제거해 버리면 뒤통수가 간지럽지 않을 것이다.

한기열의 표정이 환해졌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 * *

어둠에 휩싸인 남해를 가로지르는 배 한 척이 있었다.

갑판 위에 선 선장이 부리부리한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최대한 자세히 조사해라! 안 그러면 경을 칠 줄 알아!"

"겨우 이 정도 가지고 호들갑은...."

선원들은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순순히 명령에 움직였다. 남해를 순찰하는 배들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빈틈을 찾기 바빴다.

배에 탄 대다수 선원은 중국인이었다.

평범한 어부를 가장했지만 그들은 태평문 산하 수룡단 해적들이었다.

대적하기 힘든 상대 앞에서는 어부, 만만한 배 앞에서는 해적으로 돌변한다.

"곧 문(門)에서 습격할 곳이다. 너희들도 두둑하게 수당을 챙기고 싶으면 지금부터 열심히 해!"

"알았수다."

그들이 모는 배가 조용히 남해를 거슬러 올라가 거제도를 지나 부산 인근에 도착했을 무렵이다.

저 멀리 빠르게 다가오는 배 하나가 있었다. 그들과 다르게 환하게 불을 켠 배의 정체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선장! 저기 배가 옵니다!"

"무슨 배?"

"해경선입니다!"

선장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해경선이 왜? 지금 시간은 순찰을 안 하던 거 아닌가?"

근래 들어 몇 차례 살피면서 순찰 시간은 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오늘은 목적은 부산 앞까지 측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해경선의 등장으로 상황이 꼬여 버렸다.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눈으로 해경선 너머 부산 앞바다를 보던 선장이 침을 뱉으며 조타수에게 말했다.

"배를 돌려. 뿌리칠 수 있지?"

"가능합니다."

조타수의 대답에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간다."

오늘만 기회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귀찮지만 한 번 더 폼을 들이면 된다.

다음을 기약하고 배를 돌릴 때였다. 뒤에 선원들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선장! 해경선에서 뭔가가 내려섰습니다.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뭔 헛소리...."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던 선장은 볼 수 있었다. 해경선에서 내린 인영 하나가 바다를 가로질러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드는 걸.

그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범상치 않은 실력자다. 자신들이 올 걸 알고 있었나? 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쏴! 쫓아내!"

투두두두!

그 말과 동시에 총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영 앞으로 반투명한 막이 생겨나더니 총알을 모조리 튕겨 냈다.

바다 위를 달려오면서 포스 방어막까지 생성한다고?

예상을 뛰어넘은 실력자였다.

총을 쏘던 선원들도 그걸 느꼈다.

"서, 선장! 총알이 안 먹힙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쏴! 속도를 늦추기라도 해!"

하지만 나아가는 배보다 다가오는 인영의 속도가 더 빨랐다. 총알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인영의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못했다.

인영이 배 근처로 접근했을 때였다.

촤아악!

바다를 딛고 수십 미터가 넘게 점프했다. 신형이 달과 겹치는 듯한 착각과 함께 인영은 허공을 걷듯 발걸음을 내딛더니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배를 향해 하강했다.

목표는 이 배였다.

"막아! 막으라고! 저 녀석을 벌집으로 만들어!"

악을 쓰는 선장의 명령에 선원들이 난사했다.

그때였다. 여태까지 한 번도 반격하지 않던 인영이 하늘 위에서 손을 휘둘렀다.

달빛에 반사된 푸른 기류가 휘몰아치며 쇄도했다.

칼날처럼 생긴 폭풍이 갑판 위를 휩쓸었다.

선장은 재빨리 칼을 뽑아들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저 녀석을 죽...."

후두둑!

그것은 인세에 펼쳐진 지옥이었다. 눈앞에서 선장은 물론, 주변에 서 있던 십여 명의 선원들이 휘말려 수천 조각 육편이 되어 흩어졌다.

뒤이어 갑판이 붉게 물들었다.

간신히 여파에 휩쓸리지 않은 선원들의 얼굴로 피가 튀었다.

그들은 기겁했다.

"히익!"

"괴, 괴물! 도망쳐야 돼!"

"어, 어디로 도망쳐?"

하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주변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뿐이었던 것이다.

그 사이 혈풍을 일으킨 주인공이 배 위에 안착했다. 조금 전 선장이 서 있던 곳이다.

무시무시한 위용을 선보였던 것과 다르게 새파랗게 젊은 남자였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몇몇 선원이 오줌을 지렸다.

순식간에 배를 압도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 배는 내가 접수한다."

"네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1등 항해사가 반발했지만 돌아온 건 포스로 이루어진 벼락이었다.

파지직!

우드드득!

"끄악! 끄아아아! 사, 살려...."

퍽!

포스 벼락에 휘말려 사지가 부러지고 바닥을 기던 항해사의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지며 최후를 맞이했다.

다시 한번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불만 있는 사람?"

"...."

존재하지 않았다.

"좋아. 그럼 한국어 가능한 사람 나서 봐."

"...."

"나타날 때까지 죽이면 배워지겠지."

"제,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사색이 된 조타수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선족이라고 밝혔다.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말했다.

"너희 본거지로 간다."

"...."

순간 조타수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차라리 엉뚱한 곳으로 가서 시간을 벌어 최대한 전력을 끌어 모아 녀석을 처리하면....

콰득!

"끄악! 끄흐흐!"

어깨가 주저앉은 조타수가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을 벌레처럼 기어 다니던 그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치이익!

남자가 회복제를 뿌려 주었다. 고통이 가시며 정신이 돌아온 조타수는 감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거짓말하면 다음은 머리다."

태평문 초인들을 본 적 있던 조타수는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그들보다 더 잔인했으면 잔인했지, 결코 인정을 베풀 상대가 아니었다.

한 번 더 잔머리를 굴리면 죽일 거다.

자신이 죽더라도 본거지로 안내할 녀석들은 많았다.

"가, 가겠습니다."

"출발해."

잔뜩 겁먹은 조타수가 배를 몰기 시작했다.

113화

확실히 빠르다.

배를 몇 번 타 본 적 있지만 지금처럼 빠르게 이동한 적 없는 거 같다. 가는 내내 세밀하게 체크를 하고, 속도도 함부로 높이지 못했었지.

그에 비해 해적들의 이동 속도는 몇 배 빨랐다.

자기들만의 항로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정부에서 잡지 못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설사 마물을 만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바로 앞에서 마주한 게 아니라면 전속력으로 이탈할 때 다른 마물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거든요. 그럼 더 쫓아오지 못합니다."

내 옆에서 설명을 보태는 건 조타수였던 조선족 출신 김철남이었다.

나와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은연중 보스로 인정받은 건가.

놈은 내 옆에서 살랑거리며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정부에서는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저희야 잃을 거 없는 이판사판인 인생이지만 저쪽은 지켜야 할 게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험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좀 쫓다가 돌아가는 게 대부분입니다."

지킬 게 많은 놈들의 침묵이라는 건가. 실제로 도망치다 실패해서 마물의 밥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100% 통용되는 것도 아니군.

내가 모르는 바다의 질서라는 것도 꽤 흥미진진했다.

인류가 육지에서 마물을 몰살시킨다고 해도 그것은 10%의 극복이라던 대통령의 말이 떠오른다.

궁극적으로 인류가 옛 성세를 되찾으려면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했던가.

하긴, 육지보다 바다가 더 넓고 넓은 만큼 더 강한 마물들도 많을 것이다. 지금 고전하는 플러스 단계를 뛰어넘은 투뿔 단계 마물은 이미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쏴아아아!

내가 더 손을 쓰지 않으니 선원들도 조용히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편안한 항해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별안간 배가 멈췄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잠시 후, 김철남이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저, 그, 초인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왜?"

"중국 순시선입니다."

"피해 가면 되지."

바다는 넓지 않은가. 먼저 인지했으면 피해 가면 그만 아닌가?

김철남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따돌리면 되겠지만 목적지까지 굉장히 오해 걸리게 됩니다."

"얼마나?"

"최소 2배입니다."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로군.

시간에 쫓길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느긋하게 처리할 일도 아니다.

얘들이 본거지에 연락했을 가능성이 99.9%거든.

적의 함정에 뛰어드는 격이 될 수 있는데 굳이 장단에 맞춰 줄 이유는 없겠지.

그렇다고 저들이 내게 맞춰 이대로 돌아갈 리도 없으니 결국 치워야 한다는 소리로군.

가급적 건드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안 되겠다.

어차피 중국은 태평문이 부산을 침공하도록 방치 혹은 물밑에서 도움을 줬다고 볼 수 있으니 내 정체만 들키지 않으면 되겠지.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결하고 올 테니 지나가고 있어."

"예? 하지만 순시선이 곧 저희를 감지할 겁니다."

"곧 움직이지 못하게 될 거야. 가고 있어."

난 김철남의 대답을 듣지 않고 허공을 밟아 하늘로 중국 순시선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과연,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데 저 멀리서 중국 순시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지런도 하다. 하긴, 자기나라 바다를 지키는 일인데 게을리해서는 곤란하지.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그것이 오늘의 사달을 일으키게 되었지만.

나는 순시선의 뒤로 접근해서 엔진이 있을 곳을 향해 칼날 폭풍을 시전했다.

쾅! 콰과광!

요란한 폭음과 함께 배의 속도가 점점 줄어든다. 그러다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려지더니 이내 멈춰 섰다.

제대로 타격을 준 것이다. 그런데 배가 좀 기울어지는 거 같은데? 방금 공격이 좀 과했나?

어차피 멈춰 세웠으니 침몰하던 아니던 알아서 하겠지.

선박 위에서 중국어로 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어차피 나와 관련 없는 일이니 뒷수습은 알아서 하도록 두고 바다 속으로 입수해서 순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허공을 박차고 위로 올라가니 부지런히 가는 해적선이 보인다. 그런데 내가 탑승했을 때보다 속도가 더 빠른 거 같다. 내 착각인가? 설마 내가 처리하는 틈을 타 도망치려고 하는 건가.

나는 어렵지 않게 따라잡아 갑판 위에 착지했다.

"히, 히익!"

하늘 위에서 떨어진 나를 보고 선원들이 기겁했다.

도망치려 한 게 맞나 보다.

다 죽여야 하나?

잠깐 그 생각이 들었지만 주변에 다른 해적도 없고, 죽여 봤자 상황이 해결되는 게 아니니 잠깐 자비를 베풀어 줘야겠다.

어차피 기회는 많다.

"내 의자는?"

"가, 가져오겠습니다!"

선원 하나가 내가 앉던 의자를 가져왔다. 힘 좀 썼다고 앉으니 편했다. 잠시 후, 사색이 된 김철남이 다가왔다.

"오, 오셨군요. 초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절대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전속력으로 튀는 거 같던데."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순시선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원을 불러 따라붙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쳐 주지. 날 보며 안절부절 못하던 김철남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 순시선은...?"

"엔진을 건드려 놨어. 쫓아오지 못할 거야."

"아, 다행입니다."

순시선이 어지간히 무서운 존재였나 보다.

그때였다.

쾅! 꽈르릉! 꽈과광!

무시무시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저 멀리서 폭발 구름과 불꽃이 번쩍였다.

저기는 순시선이 있던 곳인데.

내가 힘을 과하게 썼나?

김철남의 얼굴은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거, 혹시 침몰한 게 아닐지...."

"작은 오작동이겠지."

안 믿으면 말고.

내가 더 말하지 않자 김철남도 침묵했다.

* * *

태평문주(太平門主) 장우위안.

장우위안은 중국에서 최악의 악이라 불리는 태평문의 문주다.

한때 중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초인이자, 충성스러운 초인이던 그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당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추격을 피해 도망친 장우위안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태평문을 개파하고 점 조직을 꾸려 중국 내 최악의 악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빌런이 될 당시, 추격전에서 중국 측 초인 두 명의 협공을 두 시간 넘게 대등하게 맞선 건 전설적인 이야기였다.

나날이 커져 가는 태평문의 세력으로 인해 중국에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며 대대적인 소탕을 선언, 대 마물 전선을 무너뜨리고 각성자를 투입하니 태평문은 대부분의 근거지를 잃고 섬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세력이 한풀 꺾였지만 장우위안을 끝내 잡지 못하면서 그 명성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태평문의 본거지를 남중국해 작은 섬으로 옮긴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로베르토입니다. 반갑습니다, 장 문주님."

"반갑소, 컬렉터, 로베르토 공."

컬렉터 로베르토는 이탈리아 출신의 초인이자 리그 소속 12궁의 일원이다.

세계적인 부호이자 강자인 그는 리그 사절로 장우위안을 찾았다.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본론에 접어들자 주변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리그에서는 장 문주님의 행적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변방에서 홀로 힘을 기르기보다 함께 힘을 합쳐 가능성을 높여 보는 게 어떻습니까?"

"리그의 제안은 굉장히 매력적이지. 솔직한 마음으로 당장 그 제안을 받고 싶을 정도요."

"좋게 생각해 줘서 다행입니다."

"다만."

장우위안은 로베르토의 푸른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여태까지 이런 방법으로 리그는 군소 조직들을 많이 먹어 치웠더군. 그리고 초라한 꼴로 내팽개쳐졌지. 우리 입장에서 그 부분을 우려할 수밖에 없소."

"걱정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뭔가를 얻으려면 내어 주는 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목적을 이룬 시점에서 리그의 공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리 될 수 있다고 보는 건가. 그리 유쾌한 말은 아니군."

"교언영색이라, 진실을 마주해야 서로 원하는 걸 합쳐 나갈 수 있습니다."

"...."

장우위안의 입이 닫혔다. 현재 태평문의 상황은 어려웠고, 리그는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는 상황이다. 로베르토의 말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라는 것과 같았다.

그의 말마따나 태평문 홀로 중국을 도모할 수 없다. 하지만 세계와 전쟁을 벌이는 리그의 힘이 더해진다면 가능성은 높아진다.

"중국은 기회의 땅입니다. 장 문주님은 물론 무수히 많은 재능 있는 인재들이 태평문에 모여 있습니다. 그들이 중국을 통치한다고 생각해 보시길."

"간판은 리그로 갈아타야 하고."

"그게 조건이라 힘을 빌려 드리는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장우위안이 화제를 돌렸다.

"긍정적으로 검토하지. 그 전에 한국을 공격해 달라고?"

"현재 한국의 상태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대략적으로. 장쯔둥이 한국 초인에게 죽었다더군. 멍청한 놈, 교만한 성격을 고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장우위안이 혀를 차자, 로베르토가 미소 지었다.

"이름은 최준호라고 하고 헤드 브레이커라는 이명이 붙어 있습니다. 실력은 십대초인급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정도라고?"

"힘을 빼놓지 않으면 이웃인 중국도 힘들어질 겁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나와 상관은 없어 보이는군. 녀석을 찾아갈 수도 없고."

"그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장 문주님이라면 어렵지 않게 해낼 거라 생각합니다."

로베르토가 잘생긴 얼굴로 미소를 짓자, 장우위안이 미간을 모았다.

"왜 컬렉터라 불리는지 알겠어. 혀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칭찬 감사합니다. 이번 제안은 양측 모두 손해는 아닐 겁니다. 제 기프트가 그리 얘기했으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으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로베르토는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내밀었다.

"리그에서 개발한 부스트입니다. 일신의 힘을 증폭시키는 약물입니다."

"이런 게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무슨 부작용이 있을 줄 알고 내게 내미는 거지?"

"무슨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혹여나 위급한 상황에 사용하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부작용은 힘을 끌어다 쓴 피로가 몰려오는 정도입니다."

"감사히 받도록 하지."

장우위안이 부스트를 챙겨 들었다. 하지만 이런 기물이 있으면 머릿속에 잔상이 남는 터라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 둘 생각이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인연도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인연을 건가."

"창천검제 남궁기."

"...."

"각자 선만 안 넘으면 장 문주도, 리그도 모두 만족스러운 거래가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로베르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모습을 지켜보는 장우위안의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거할까?

장우위안이 고개를 저었다.

[지켜보기만 해라. 여기서 제거하면 귀찮은 일만 벌어져.]

-알았어.

그 말을 끝으로 조용해졌다.

홀로 남은 장우위안이 혀를 찼다.

"언제까지 오만할지 지켜보마."

* * *

밖으로 나온 로베르토는 호화로운 요트에 올라섰다.

편안하게 자리에 앉은 그는 조금 전 만난 장우위안에 대해 떠올렸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부류로군."

마땅한 패가 없어 선택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유용하지도 않다.

실력에 비해 야망이 지나치게 크다.

홀로 중국을 먹겠다고? 코웃음이 절로 쳐지는 야망이었다.

본래 로베르토는 태평문에 대해 무관심을 주장했다. 이대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곳이었다. 좀 더 상황이 안 좋아질 때 선심 베풀 듯 손을 내밀면 모든 것이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아르고스의 생각이 달랐다.

일본 리그 지부가 소멸한 지금, 태평문을 끌어들여 견제 장치를 만들어 놓아야 한단다.

경계 대상은 헤드 브레이커, 최준호였다.

"헤드 브레이커를 그렇게 경계해야 할 정도인가?"

콘스탄티나 스타닐라가 헤드 브레이커에게 목숨을 잃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로베르토는 과장된 소문으로 인해 헤드 브레이커를 견제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힘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부호이자, 12궁의 일원인 그는 리그가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북미와 유럽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특별한 거점이 없는 동북아시아에 신경을 쓰는 아르고스의 결정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때 부하가 다가왔다.

"보스."

"무슨 일이지?"

"멀리서 배가 한 척 다가오고 있습니다. 비정상 항로입니다. 목적지는 태평문인 거 같습니다만, 정보에 없는 배입니다. 격침할까요?"

"...."

평소대로면 제거를 지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기다려."

로베르토는 품속에서 낡은 종이를 꺼내들었다. 컬렉터의 이명으로 불리지만 리퍼비시(Refurbish) 기프트를 가진 그는 신화와 전설이 담긴 옛 보물의 능력 일부를 사용할 수 있다.

옛 페르시아 제국의 점성술 보물을 손에 넣은 그는 간단한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다.

점괘의 결과는 대흉이었다.

로베르토의 표정이 굳었다.

"…항로를 튼다. 마주치지 말고 지나치도록."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기 무섭게 로베르토가 탄 호화 요트는 비정상적인 움직임으로 항로를 이탈했다.

로베르토는 멀리 점으로 바뀌어가는 태평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불운이 날 피해 태평문으로 향하는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겠어."

* * *

저 멀리 섬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 옆으로 다가온 김철남이 주위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섬에 곧 도착 예정입니다."

"저기가 태평문?"

"예. 태평문의 본거지입니다. 그런데 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 할 것이지.

머뭇거리는 게 오히려 거슬리기 시작했다.

"말해."

"태평문에 무슨 일로 방문하시는 건지?"

"내가 왜 그걸 말해 줘야 하지?"

"죄, 죄송합니다."

김철남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보고했을 텐데,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가?"

"그건...!"

"왜, 아니라고?"

"...."

창백하게 질린 김철남이 고개를 숙이며 내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난 주위를 둘러봤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해서인지 삶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

돌아가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원래 다들 이렇게 희망을 갖고 사는 법이지.

"여기까지 데려다 주느라 수고했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강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뻗댄 저희 잘못입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죽기 전에 자기 잘못을 깨달아서 다행이긴 하군.

나는 녀석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갑판을 박찼다.

포스를 실어 높게 점프한 나는 섬을 향해 몇 발자국 내딛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가 타고 온 배를 향해 칼날폭풍을 시전했다.

114화

최준호가 해경의 협조를 받을 무렵, 부산시장 한기열은 최준호의 단독임무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작성하여 청와대에 올려 보냈다.

"...."

자세한 내막을 보고받은 대통령은 표정을 굳혔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그가 이미 내용을 숙지하고 있을 천명국을 보며 물었다.

"최준호의 의도가 뭐라고 보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보고서에 있길, 태평문은 해적과 결탁하여 부산을 습격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불안의 싹을 사전에 자르겠다는 말인데,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최준호는 태평문과 접점이 없다.

단지 한 가닥 의심만으로 멀리 떠난다? 여태까지 보여 준 일관성이 무너지는 행동이다. 최준호는 눈앞에 보인 악(惡)만을 응징했다.

바다 건너 저 멀리, 있을지도 모르는 악을 지우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 행동이 즉흥적이라 보기 십상이지만 마치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보여 주는 혜안에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뭔가 이유가 있다.

물론 태평문은 경계해야 한다. 중국의 대대적인 탄압 속에서도 전력 보전에 성공했으며, 무려 두 명의 초인을 보유한 동아시아 최대 빌런 조직이다.

혹시 태평문이 최준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이 있나 싶어 조사까지 했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이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군. 최준호가 없는 현재 대한민국이 플러스 단계로 얼마나 버텨 낼 수 있는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말을 멈춘 천명국이 이후 전망에 대해 얘기했다.

"의도했건 아니건 최준호 초인의 몸값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을 겁니다."

"최준호가 없으면 초인 셋에 불과한 국가니까. 신성길드 사냥도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었지."

"예. 최근 조직된 최준호 팀에서 그런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최준호만한 초인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몸값에 맞는 행동을 하면 그만큼 정부의 손해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와 별개로 대한민국은 세 명의 초인 외에 버서커와 제임스 리드라는 초인이 존재한다.

천명국이 플러스 단계 마물 사냥을 자신하는 이유다.

"그건 우리 입장일 테고. 부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 그건 그렇고 최준호가 왜 움직였을까 고민을 해 봐야 돼. 우리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을 정보가 있다고 생각해 보면 이런 가정이 만들어지는군."

대통령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태평문의 습격. 그 뒤에는 중국이 있겠지."

"태평문과 중국 정부의 관계는 최악이지만...."

"그래. 그 안에 파벌이 있으니까."

"...."

그 말을 듣는 순간 퍼즐이 빠른 속도로 맞춰졌다.

만약 중국에서 손을 내밀고 태평문을 움직여 부산을 습격하게 한다면? 북진을 준비하던 대한민국은 동력을 상실하고 피해를 수습해야 할 것이다.

물론 완벽한 그림에는 치명적인 구멍이 존재했다.

"어떤 경로인지 몰라도 최준호가 냄새를 맡았다는 점이지."

"주변에서 조언해 줬을 수도 있습니다."

"태평문이 사라지겠어."

중국이 태평문 뒤에 있다면 심각한 주제였다.

하지만 대통령의 표정은 심각하지 않았다.

최준호가 보여 준 결과물은 믿음을 갖게 해 줬다.

"요즘 전문가 영입으로 인터넷에서 이미지가 좋더군. 그와 별개로 기사마다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걸 어떻게?"

오히려 천명국이 놀랐다.

대통령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도 최준호 칭찬 좀 해 주려고 했는데 댓글에 아주 악질이 있지 않던가? 내가 최준호였다면 피가 거꾸로 솟았을 텐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런 면에서 의외로 자비로운 면이 있어."

"저도 그 댓글 봤습니다."

"심했지?"

"예.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어쩌겠습니까. 심하다 싶으면 고소를 하겠지요. 아, 물론 저는 걸리지 않을 수위로 악플을 달았습니다. 제발 주변 사람 그만 힘들게 하라고."

"비슷한 걸 본 거 같은데? 내가 좋아요 누른 걸 수도 있겠어."

둘은 웃음을 지었다.

최준호는 두 사람에게 고민을 안겨다 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실력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서 저버릴 수 없었다.

대통령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최준호 초인이 어디 가서 당할 사람이 아니니 그 부분을 넘어가기로 하고. 일단 플러스 단계 마물이 둘이나 등장한 상황에서 이번에는 우리나라 초인들의 힘을 믿어 봐야겠어."

"잘해 낼 수 있도록 최적의 작전안을 수립하겠습니다."

"믿겠네."

그렇게 대한민국 정부는 마물 사냥 권리를 입찰 받은 아스가르드 길드와 사신 길드를 대대적으로 지원하며 남쪽과 북쪽에 나타난 마물 상대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 * *

칼날폭풍에 휘말린 배는 산산조각이 났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선원들이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보였다. 만약 저기에서도 살아남으면 살아갈 자격이 있는 거겠지.

나는 몸을 돌려 태평문 본거지로 발을 들였다.

태평문은 빌런 조직이라기보다 일종의 군대 병영 요새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섬 주민들이 살아가는 곳처럼 꾸몄지만 살벌한 기세를 발산하는 청장년들이 방어복을 입고 섬을 배회하고 있었다.

내가 온다고 보고를 한 게 아닌가? 아니면 대수롭지 않은 침입이라 생각한 건가?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다.

그것이 태평문이 가진 자신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침입하는 입장에서 문을 활짝 열어 준 것과 같다.

"오히려 좋아."

외부와 고립되어 도망칠 곳이 없는 섬이라는 특성은 소탕전을 벌이기에 딱 좋다. 저들이 모두 빌런인 이상 모두 죽일 생각이다.

난 태평문이 부산을 습격하기 전까지 무슨 악행을 저질렀고, 어떤 이념을 가진 조직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부산 습격당시 태평문이 벌인 행각은 치가 떨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잔인했다. 재물을 약탈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반항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학살하고 사람들을 납치해 갔다.

강 건너 불구경이던 태평문의 실체가 밝혀졌다. 이후 대한민국 사람들은 태평문이라면 치를 떨었다.

그 속에 어머니의 육촌 친척도 계셨다. 그 원수를 갚는 걸로 하자.

김철남에게 듣기로 산하에 있는 해적들을 제외하고 순수 태평문도들 숫자는 오백여 명.

그리 부담되지 않는 숫자였다.

내 침입이 별다른 경계태세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누리를 뽑아 요새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너, 누구...."

대답 대신 칼날폭풍을 시전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셋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아들었지만 칼날폭풍이 녀석을 휩쓰는 게 더 빨랐다.

후두둑!

살점과 피가 쏟아지며 문지기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 갔다. 뒤에서 지켜보던 빌런들이 기겁해서 외쳤다.

"적이다!"

"안으로 보고해!"

위이이잉!

동시에 요새 전체가 울릴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야 일일이 쫓아다닐 거 없이 다 튀어나와 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아직 중국어를 모르거든. 나오라고 도발하기가 쉽지 않다.

제대로 찾아왔다고 확신을 한 것은 빌런들이 중국어로 외치고 있어서다. 태평문이라는 확신을 얻은 나는 검을 휘둘렀다.

"마, 막아! 컥!"

"괴, 괴물이다!"

"끄아아악!"

우르르 몰려오던 빌런들이 칼날폭풍에 휘말려 순식간에 50여 명이 죽자, 주춤거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산개하면 하나씩 쫓아가서 죽이기 귀찮아지는데.

여럿을 죽이기에는 기뢰보다 칼날폭풍이 효율이 좋아서 나는 무더기로 처리할 수 없어도 칼날폭풍을 쏟아 냈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녀석은 왼손으로 기뢰를 시전해서 죽였다.

그러다 홀로 대항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단체로 진을 이뤄 내게 맞섰다. 그마저도 칼날폭풍 아래 무력했다. 뭉쳐서 힘의 여파를 해소하려고 한 거 같은데 한꺼번에 죽이기 오히려 좋았다.

중국 최대 빌런 조직이라는 것치고 강한 맛이 없는 거 같은데.

어떻게 그런 악명을 얻을 수 있던 거지?

"소문이 과장됐나?"

나야 상관없는 일이다. 이대로 태평문주의 목을 들고 가면 되니까.

그때였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더니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누리를 치켜들었다.

쩌엉!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라서 여파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옆으로 몇걸음 물러나서 예기가 느껴진 곳을 보자, 놀라운 현상이 발생해 있었다.

갈라진 공간 틈 사이로 검은 복면에 피풍의를 두른 남자가 나타나 있었다. 남자의 모습은 금세 균열 사이로 모습을 감췄지만 제법 놀라운 광경이었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한다고?

뒤이어 발목, 배를 노리고 공격이 퍼부어졌다.

공간 굴절인가. 어떤 원리이지? 아무튼 공간 계열 기프트인 건 분명했다. 나는 녀석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모두 막아낸 뒤 시선을 고정했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기프트는 내가 오래 전부터 갈망해 온 것이다. 분명 페널티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포스량으로 커버할 수 있거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거라면 활용도는 달라진다.

일단 신체 일부만 어그러뜨려 등장시키는 건 안 되는 거 같고.

공격에서 번거로움이 발생하지만 반대로 회피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긴 하다.

"기프트 능력을 살펴보면 되겠지."

난 공간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복면인을 보며 미소지었다.

"기프트 좀 보자."

내 손을 타고 기뢰가 뻗어 나갔다.

* * *

장우위안은 오래 전부터 꿈이 있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중국을 세계 최강의 각성자 대국으로 키워 내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불려오며 초인이 되었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기 위해 공을 세워 나갔다.

승승장구하며 출세에 출세를 거듭하던 그는 금방이라도 최상위에 도달할 듯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을 세워도 어느 순간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당에서 더 이상 자신의 출세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장우위안은 자신의 존재를 위협으로 판단한 당을 보며 실망감을 느꼈다.

"그때 내 말만 들었어도...."

위에는 각성자 현장에 대해 알려는 노력도 없이 초인이라면 견제하고 감시했다.

왜 미국보다 더 많은 인적 자원을 보유하고 뒤처진단 말인가. 마물을 몰아내고 세계가 하나로 묶이기 전에 힘을 키워야만 세계 최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한 그의 마음과 달리 당의 견제는 점점 더 강해졌다. 결국 좌천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순간, 장우위안은 위험을 감수하고 태평문을 세웠다.

좌천은 곧 숙청을 의미했다.

마물이 많은 지역으로 보내 싸우다 죽으라는 이야기였으니까.

태평문이 중국 최대 조직으로 발돋움하고 오랫동안 대립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초인들이 있어서다. 그들이 직접 나서지 못했지만 뒤에서 지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기세를 올리며 한때 큰 꿈을 꿨으나 당 측에서 대대적인 반격에 숫자로 밀려 버리면서 홀로 해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그 결과가 수억 명이 죽는 거라고 해도 지금 이대로는 변화하지 못한다.

그때 손을 뻗어온 게 리그였다.

"내 목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겠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더 큰 그림을 기르는 리그. 국가에 귀속된 것이 아닌 각성자들의 세계를 꿈꾸는 그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국가에 얽매이지 않는 그들과 국가 중심인 자신의 생각은 달랐지만.

당장 중국 내에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초인들도 있었으니까 그들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보았다.

더 많은 희생을 일으켜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당의 무능함을 실감한 인민들이 자신의 존재에 열광하게 될 것이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고,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

장우위안은 수억 명을 죽여서 지존이 될 생각이다.

"모든 건 대의를 위해서다."

장우위안은 홀로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는 든든한 동생이 있었다.

음지에서 무수히 많은 임무 성공으로 자신을 도와줬다.

동생이 있기에 목표를 이룸에 있어 두려움이 없다.

최근까지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대대적인 반격에서 결국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동생에게 암운(暗雲)이라는 이명을 붙여 주었다.

"남궁기가 오면 좀 더 자세히 얘기를 해 봐야겠어."

기회주의자였지만 창천검제는 뜻이 맞으면 협력할 인사였다.

장우위안이 생각 정리를 끝마치려 할 때, 부하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문주님!"

"무슨 일이지?"

"습격입니다! 헤드 브레이커가 습격해 왔습니다."

"헤드 브레이커?"

분명 리그에서 경계하는 초인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녀석이 혼자서 쳐들어왔다고? 대체 왜?

장우위안은 즉시 그의 기프트인 혜광심어(慧光心語)를 발동했다. 그러자 바로 동생에게서 답이 들려온다.

-오지 마.

제압할 수 있어서 오지 말라는 게 아니었다. 동생의 목소리는 극한에 몰려 있었다.

-도망쳐.

[기다려라, 곧 가마.]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장우위안이 빠른 속도로 현장을 향해 걸어갔다.

"...."

밖에서 본 광경은 처참했다.

헤드 브레이커는 인세에 지옥을 연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걸 파괴해 버렸다. 처참하게 파괴된 요새와 희미한 흔적만 남긴 채 죽어 버린 문도들의 시체.

격전 장소에 도착한 장우위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헤드 브레이커의 손에 목이 붙들린 동생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 참상을 만들어 냈단 말인가.

장우위안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보다 더 급한 건 동생의 안위였다. 초인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자신의 대의를 위해 그림자에 숨어서 임무를 수행했던 동생.

장우위안이 그림에는 자신 옆에 동생이 서야만 했다.

"멈춰!"

[갈(喝)!]

그와 동시에 혜광심어에 의지가 실려 헤드 브레이커를 강타했다.

하지만 기프트 발동이 무색하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 사이 헤드 브레이커의 손이 동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

허무하게 심장이 꿰뚫린 동생의 눈이 빛을 잃으며 그대로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뜻을 세우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그림자를 자처했던 동생의 죽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드 브레이커는 손에 묻은 피를 입으로 가져가 핥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털썩!

지탱하는 힘이 사라지자 동생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꽝이네. 뭔 제약이 이렇게 덕지덕지 붙어 있어? 이러면 가질 필요가 없잖아."

초인 하나를 죽여 놓고 가볍게 혀를 차는 게 전부였다.

"...."

믿기지 않는 현실에 장우위안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장차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서야 할 동생이 죽었다.

이 모든 참사를 일으킨 헤드 브레이커는 이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더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래도 뽑기 기회가 다시 생겼네."

115화

하여간에 빌런이란 놈들은 음흉하기 그지없다.

복면에 피풍의를 입고 있는 녀석이 초인이라 불릴 무위를 보유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까다로운 기프트까지 보유하고 있어 제법 거세게 저항했다.

물론 그게 전부일 뿐,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공간의 균열을 이용한다고 해도 결국 패턴이 정해져 있다. 신체 일부만 옮겨와서 공격하면 좋을 텐데, 그건 안 되나 보다.

몇 번의 접전이 이어졌지만 암살자 타입인지 정면대결에서 극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

암살자를 상대하는 법은 간단했다. 정면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강요하면 된다.

녀석은 두 가지 페널티를 안고 있다.

하나는 이곳이 섬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곳이 지켜야 할 곳이란 점이다.

그 부분을 공략하니 결국 내 손에 목이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

"나 중국말 모른다니까."

저 뒤에서 뭐라 외치는 녀석이 있었지만 난 개의치 않고 심장을 꿰뚫었다.

손이 뭉클한 심장을 꿰뚫고 피로 적셔지는 광경은 언제나 흥분된다.

적의 숨을 끊고 적이 강한 원천을 내 손으로 옮겨오는 과정이 생생하다.

선물상자를 개봉하는 어린아이처럼 어떤 기프트일지, 나와 어떤 방식으로 어우러질지 기대감은 곧 결과물로 드러날 것이다.

피로 물든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공간 계열 기프트는 언제나 그렇듯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해석햇으나....

"에이, 꽝이네."

결과는 실패였다.

녀석의 기프트는 '공간이동'인데 신체 일부 이동은 불가능하고 무조건 전신이 이동해야 된다. 뿐만 아니라 의지대로 이동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동할 위치에 고정을 시켜 놔야 해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적을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여기에 포스 소모와 신경 집중, 육체의 공간 귀속까지 선행되어야 하고. 이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별로였다.

한마디로 정적인 적을 상대하기 위한 암살 특화 공간계열 기프트였다.

쓸모는 있지만 단점이 너무 많았다. 굳이 암살을 위해 이 기프트를 얻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암살은 내 전문이기도 하다.

어차피 목격자만 전부 없애 버리면 암살 아니겠는가.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 이것도 엄연히 암살이다.

나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날 노려보는 중년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기는 아는 얼굴이다.

"네가 장우위안?"

"네놈, 죽여 버리겠다."

기세 한번 살벌하군.

자기도 태평문을 이끌면서 무수히 많은 학살을 자행해 놓고.

저 녀석도 리그와 다를 바 없는 사고관의 소유자다. 각성자는 우월하고 비각성자는 열등하고.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수억 명이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진짜 빌런이다.

한참 중국어로 떠들던 녀석이 영어로 말한다. 안 듣는 척하면 영어가 척척 나오는군. 역시 말이 통하는 게 좋다.

나도 최근 영어 스피킹을 연습해서 짧은 대화는 가능하다.

"죽는 건 너."

"대체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혈겁을 일으키는가!"

혈겁은 무슨, 도망친 숫자가 꽤 많던데. 대충 오백 명 된다고 했으니 내가 죽인 건 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어쩌라고."

"어찌 이런 악귀가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인가."

"뭐래."

듣는 악귀 기분 묘하게 만드는군.

난 빌런 조직을 소탕하러 온 국가소속 초인이다.

그런데 왜 만나는 빌런 조직마다 나한테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자기들이 일으킨 혈겁은 생각도 안하는 건가.

아무튼 녀석과 말을 길게 할 이유가 없겠지. 난 발로 복면인의 시체를 차서 녀석 앞에 던져 놓았다.

"꽤 각별하게 챙기는 거 같은데 줄게. 이제 덤벼."

"으아아아!"

눈이 뒤집힌 장우위안이 달려들었다.

* * *

태평문주 장우위안은 고강한 무위와 대형 리더십을 보유했다.

여기 오기 전, 태평문에 대한 정보를 열람했다. 점 조직인 태평문은 장우위안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곳이었으며, 하나의 꿈과 하나의 목적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더 강한 중화라나.

수억 명을 죽여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집단이라니.

듣던 나도 질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어떻게 미쳤으면 수억 명을 죽여서라도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 하는가. 나 같아도 귀찮아서라도 수억 명은 죽일 수 없을 거 같다.

큰 관심이 없지만 정치 9단 대통령과 자주 만나다 보니 나도 대국적인 시선을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웃나라가 강해지면 인접국은 힘들어진다.

중국을 더 강하게 만들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더 강한 중화를 이루기 위한 녀석의 망상이 부산 습격으로 이어지면서 똥을 여기저기 싸 댔다는 것이다.

당시의 참혹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니 일고의 가치도 없이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똥을 나한테 싸 버리면 귀찮아지니까.

그런데.

[갈(喝)!]

머릿속을 뒤흔드는 외침. 만독불침이 자동으로 발동해서 바로 상태이상을 해제했다.

만약 만독불침이 없었다면 상태이상을 해제하기 위해 잠깐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 찰나가 승패를 좌지우지하지 않겠지만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짜증 정도는 유발했겠지.

그나저나.

이건 예상하지 못한 보물의 발견이다.

전설급 기프트인 만독불침이 있음에도 잠깐이나마 멈칫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상당한 기프트라는 거다.

어쩌면 이것도 전설급 기프트일 수도 있고.

저건 무슨 기프트일까, 궁금해진다.

장우위안의 기프트가 전설급이었나? 그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분명한 건 언령 계열인 건 알겠다.

난 아무 타격을 받지 않고 기뢰를 시전했다.

장우위안이 놀라며 검을 휘둘러 포스 블레이드로 기뢰를 상쇄했다. 하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지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네놈, 어떻게."

"우스운, 수준."

나는 녀석이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안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십여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장우위안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면서 내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했다.

조금 전 죽인 녀석과 거의 비슷한 투로였다. 사제지간인가? 거의 같은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여서 오히려 상대하는 게 쉬웠다.

꽝!

장우위안은 포기하지 않고 기프트를 시전했다.

머릿속으로 불교 용어가 쏟아진다.

그중 가장 강렬했던 건 옴마니반메훔이라 외쳤던 것이다.

이것은 기이한 형태의 언령으로 바뀌어 다시 한번 뇌리를 파고든다. 만독불침이 빠르게 해제했지만 남아 있는 의지의 잔향이 지독하게 내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다.

번뇌와 죄악을 씻고 소멸시킨다?

헛짓거리를 하는군.

번뇌와 죄악은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죽으면 다 해결되는데 왜 살아서 괴로움을 느낀단 말인가.

참고로 나는 번뇌와 죄악을 가져도 알아서 잘 씻어 내니 예외다.

그와 별개로 집요하게 정신적 빈틈을 노리면서 앞에서는 공격을 퍼붓는 장우위안의 수법은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상대가 자신에게 100%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방해수단이다.

네 기프트, 잘 써 주지.

콰득!

장우위안의 검을 부러뜨렸고, 왼 주먹으로 가슴을 강타했다. 피를 토하며 밀려나는 녀석을 향해 발을 뻗어 기뢰로 다시 한번 공격을 가했다.

연이은 결정타에 장우위안은 대응하지 못했다.

옆구리에 구멍이 뻥 뚫려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가슴에 구멍을 내서 심장을 부숴 버릴 뻔했군.

나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넋이 완전히 나간 녀석은 텅 빈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이건 아니야...."

"꽤 흥미로운 기프트다. 내가 잘 써 주지."

"아, 안 돼! 위대한 지배자가 될 내가...."

"내가 미래를 보고 왔는데 네 이름이 안 들리더라. 안타깝네."

이건 그냥 인사치레.

기프트 주고 떠날 녀석을 위한 나의 작은 위로였다.

퍽!

내 손이 녀석의 머리를 부숴 버렸다.

맥없이 쓰러지는 녀석의 시체를 붙들고 가슴에 손을 찔러 넣었다.

심장에서 만들어 낸 가장 신선한 피로 손이 물들어 간다. 붉게 변한 손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피에 새겨진 녀석의 기프트 정보가 내게 전달되기 시작한다.

강렬한 두통이 머릿속으로 퍼져 나갔다. 이 강도가 강할수록 좋은 기프트란 이야기였다.

마침내 기프트 해석이 완료되고 장우위안이 가진 기프트가 정체를 드러냈다.

"혜광심어."

엄청난 기프트로군. 언령에 가까운 위력을 가졌으며 여러 요소로 살펴볼 때 전설급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강력한 기프트였다.

다만 정신수양에 기반 한 불교 쪽 기프트라는 점이 조금 걸리는데 만득이 녀석처럼 내 정신을 고쳐 보겠다고 날뛰는 건 아니겠지?

사소한 충돌이 벌어질 수 있지만 걱정은 나중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나는 그동안 사용하던 기프트 간 연계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던 테더를 삭제하고 혜광심어를 추가했다.

좀 더 기프트 탐구를 해 볼까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일단 도망치는 놈들을 처리할까."

빌런이 도망쳐 봤자 빌런 짓밖에 안할 테니 기회가 왔을 때 깔끔하게 청소해야겠다.

* * *

섬을 돌아다니면서 백이 넘는 태평문도를 죽이고 섬 밖으로 도망치던 배 다섯 척을 가라앉혔다.

일단 눈에 띄는 녀석들을 다 처리하기는 했는데.

문제는 내가 타고 갈 배가 없다는 점이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섬을 돌아보며 탈 배가 있는지 찾는 것이고 둘째는 해적이 복귀할 배를 기다리는 것이다. 둘 다 가능성이 희박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고, 마지막 방법은 배가 떠나던 방향으로 무작정 달려가는 것이다. 육지가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을 테니 말이다.

이것도 비효율적인 방법이군.

어디 하늘에서 배 하나 안 떨어지나.

이런 내 소원은 태평문 본진으로 돌아왔을 때 이뤄져 있었다.

태평문 본진에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와 있던 것이다.

선두에 서 있는 것은 검은색 고급 정장을 입고 있는 쥐 상의 중년 남자였다.

녀석은 날 보더니 묘한 감탄과 함께 대뜸 입을 열었다.

"^%!@&#$"

뭐라는 건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기색을 내비치니,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거, 네가 저지른 건가?"

"그건 왜?"

"마침 잘됐군. 안 그래도 당에 보고할 성과가 필요했는데 태평문을 전멸시킨 걸 내 공으로 하면 되겠어. 암운(暗雲)도 있군. 완전 대어야. 단번에 몇 단계 더 올라갈 공이겠어."

지 혼자 떠들고 지 혼자 결론을 내리는군.

뭐하는 건가 싶어 지켜보니 날 보며 히죽 웃었다.

"이만한 혈겁을 일으킬 정도면 꽤 실력 있는 녀석 같다만,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은 없다. 지친 상태에서 날 만난 네 불운을 탓하도록 하고."

"어?"

"네 운이 없음을 탓하라."

"딱히 운이 없는 건 아니고."

순간 생각을 들켰나 싶을 정도로 내 생각과 같아서 그랬다.

나도 보내 줄 생각이 없거든.

그런데 녀석은 다르게 해석했나 보다.

"아니면 방법이 하나 있다."

"뭔데?"

"내게 충성을 맹세하라. 이걸 먹으면 내 휘하에서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그러면서 품속에서 갈색 환약을 꺼내 보였다.

딱 봐도 불길해 보이는 물건이다.

저 약도 만독불침이 막아낼 수 있을지 궁금했지만 굳이 모험할 필요는 없겠지.

"네가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다."

"...."

녀석이 손을 튕기자 갈색 환약이 내 손 위에 안착했다.

제법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군.

약 안에 미약한 생명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게 무협소설에서 나오는 고독 같은 건가?

그럼 저 자신감도 이해가 된다.

난 환약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켜보던 녀석의 표정이 굳어갔다.

"지금 무슨 짓이지?"

말이 많은 녀석이군.

난 내 앞에서 떠드는 녀석의 얼굴을 알고 있다.

창천검제 남궁기.

중국의 초인이다.

극도로 좁은 속에 이기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알려진 녀석은 오로지 자기 영달에만 관심 있다고 한다.

여기 온 걸 보니 태평문과 끈을 대고 있었고, 전멸한 걸 보고 바로 태세를 바꾼 걸 테지.

빌런과 손을 잡았다면 녀석도 빌런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속이 편해졌다.

재수 없는 녀석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군.

누명도 써주고, 내가 탈 배도 제공해 주고.

"이거, 네가 저지른 걸로 하자."

"뭐?"

창천검제가 소수의 부하들과 격전 끝에 태평문과 양패구상했다.

남궁기가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어차피 죽으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테니까.

116화

"...."

창천검제 남궁기는 가슴을 파고 든 손을 보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이렇게 죽는다고?

평생을 위에서 군림했고, 벌레처럼 발악하는 녀석들을 짓밟으며 살아왔다.

부도, 권력도, 명예도 모두 거머쥐어 왕 부럽지 않은 인생이었다.

장우위안은 눈에 거슬리는 녀석이지만 난 녀석이다. 태평문의 세력은 중국에서 단일세력으로 가장 거대해서 이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자신의 입지가 더 탄탄해지리라 생각했다.

놈도 제법 머리를 굴려 덜미가 잡히고 말았지만.

그런 와중 태평문의 멸문은 호재였다. 자신의 공으로 삼는다면 당의 중심에 들어갈 공적이었다.

이 거대 세력을 무너뜨린 녀석을 마주했을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히 지쳤을 거라 생각해서다.

초인 숫자가 둘이나 되고 태평문도가 수백이었으니.

십대초인이니 뭐니 해도 중화의 초인을 상대한 이상 무사할 수 없다.

그것이 남궁기가 갖는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오산이다.

홀로 태평문을 쳐들어왔을 실력자면 숫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주제를 파악하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결과가 죽음이다.

그제야 남궁기는 상대의 정체도 알아차렸다.

"헤드 브레이커...."

"알아봤네."

"네, 네놈!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난 매번 무사했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 더 열 받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녀석이 태연하게 지껄이던 '계획'이 남궁기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태평문을 무너뜨린 건 네가 될 거야. 죽어서 명예를 챙겨 주는 거지."

"아, 안 돼."

"돼."

지금은 밀려 태평문이 작은 섬에 웅크리고 있지만 잔존 세력은 중국 전역에 퍼져 있었다. 만약 태평문을 멸문시킨 것이 자신의 소행으로 알려지면 태평문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장우위안과 친한 초인들도 분명 움직인다.

그리 되면 자신의 가족은? 함께 연을 맺은 동료들은?

전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중국 남부를 휘어잡던 자신의 세력이 말소됨을 의미했다.

"사, 살려다오. 네가 원하는 게 어떤 거든 내가 들어주겠다. 개처럼 기라고 하면 개같이...."

"네 목숨."

콰드득!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헤드 브레이커는 손을 썼다.

안 되는데...!

심장이 부서지는 통증과 함께 남궁기의 고개가 푹 꺾였다.

* * *

남궁기는 전격을 다루는 기프트의 보유자였다. 기뢰보다 위력이 많이 떨어져서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

혜광심어 하나를 건진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어있는 장우위안과 복면을 쓴 초인, 그리고 태평문도들. 옆에는 남궁기와 중국 측 각성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이 정도면 대충 양패구상인 거 같고."

사실 전력 차이가 많이 났지만 남궁기가 분전한 걸로 판단되겠지.

믿기지 않더라도 어쩌겠는가.

남궁기가 쳐들어와서 태평문과 양패구상한 게 설득력 있지, 이 자리에도 없는 나를 끌고 오지 못할 것이다.

리그를 탓하면 더 좋고.

기왕이면 둘이 크게 붙어 줬으면 좋겠지만 중국은 리그보다 태평문이 득세하던 지역이다.

나는 자리를 벗어나 남궁기가 타고 온 걸로 추정되는 배를 찾았다.

"누, 누구냐!"

"막아!"

"으아악!"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조리 처리했다.

중국 소속 각성자들이라고 해도 남궁기의 수하다.

남궁기는 빌런 조직인 태평문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걸로 보아 빌런으로 규정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일단 배는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올 때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배다.

문제는 배를 몰 사람의 유무였다.

"내가 몰아야 한다는 건데."

나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해적들이 배를 몰던 걸 떠올렸다. 대충 눈대중으로 봤으니 가다 보면 목적지가 나오겠지.

중간에 사람 있는 곳에 도착하면 배를 몰 방법을 물어보면 되고.

"가자."

* * *

천명국은 허겁지겁 인천으로 향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중국 국적으로 보이는 배가 도착했다는 말을 들어서다.

평소라면 인천 항구에 도착하는 배는 중국의 불법 어선이거나, 밀무역을 위한 배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도착한 천명국은 오랜만에 익숙한 얼굴을 보고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를 최준호라 주장하던 사람은 다행히도 최준호가 맞았다.

"최준호 초인님."

"오랜만입니다, 천 실장님."

최준호가 손을 들어 보였다.

실컷 걱정하게 만들고 저렇게 태연한 표정이라니.

문제는 저 얼굴이 반갑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특히 마물 문제로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더더욱.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의존적이었는지.'

자신만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욱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삭였다.

괜히 열 받아서 덤벼 봤자 목이 뒤틀리는 건 자신일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부산시장이 말 안 했습니까? 바로 보고 올렸을 텐데요."

이 와중에 사람 보는 눈은 귀신같았다.

"보고가 올라오긴 했습니다만 초인님은 항상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일을 키우시지 않습니까."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는데 결국 욱하는 감정이 드러나고 말았다.

다행인 건 최준호도 납득하는 표정이란 점이다.

"그건 그러네요. 생각보다 커지긴 했습니다."

여기에서 더?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다.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말했다.

"듣고 싶은 말도 많고 드리고 싶은 말도 많습니다. 대통령님께서 바로 청와대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죠. 아, 근데 제가 타고 온 배는 어쩔까요?"

"그러고 보니 무슨 배를 타고 오신 건지?"

"중국의 배입니다."

"...!"

화들짝 놀란 천명국이 당직자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배의 정체를 전해 듣는 순간 허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대체 저 배는 어떻게...."

"주인을 죽이고 뺏었습니다."

"그 주인이 누군지?"

"걱정하지 마시길. 빌런한테 협력하려던 빌런 같은 놈입니다."

그 말은 빌런이 아니란 의미잖아!

설마설마 했지만 진실일 줄이야.

천명국은 차마 진실을 먼저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최준호는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배가 문제 되는 겁니까?"

"예, 아주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리 말한 최준호는 새하얀 검, 누리를 뽑아 들더니 그대로 기프트를 발동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뻗어 나간 포스 블레이드 폭풍이 배를 강타했다.

쾅! 콰과광! 쿠웅!

갈가리 찢겨 나간 배가 천천히 바다 아래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러면 되죠."

마치 분리수거 끝낸 듯이 말하지 말라고!

속으로 절규했지만 한편으로는 저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싶었다. 당직자의 입단속을 한 뒤 천명국은 최준호와 함께 청와대로 향했다.

제발 별일이 아니길.

아닐 걸 알면서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 * *

청와대에 도착하고, 대통령과 함께 한 자리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던 천명국은 기절할 뻔했다.

태평문이 중국과 끈이 닿아 있는 상태이며, 부산을 공격할 준비였다는 것에 분노했다. 후방이라 할 수 있는 부산이 타격을 입으면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라도 몇 년간 꼼짝없이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적선을 탈취하여 태평문의 본거지로 향하고, 그곳에서 태평문주 장우위안을 비롯한 정체모를 초인과 태평문 빌런들을 제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태평문에서 새로 등장한 초인인 암운일 확률이 높습니다. 새로운 초인인 줄 알았는데 완숙한 초인이었다니...."

"이미 죽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허."

가끔 최준호의 말을 듣다 보면 드는 느낌은 반박할 생각이 안 든다는 점이다. 맞는 말이긴 했으니.

하지만 초인을 길 가던 어린 아이 손목 비트는 것처럼 얘기하니 적응이 안 될 때가 많았다.

대통령도 같은 생각인지 웃기만 했다.

최준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태평문을 멸문시킨 뒤 도주하는 빌런들도 척살하고 돌아오니 중국 초인 남궁기가 있었단다.

그리고 태평문을 멸문시킨 걸 남궁기라고 뒤집어씌우기 위해 모조리 죽이고 돌아왔다면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

대통령과 천명국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짧은 시간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고 온 것이다.

무려 세 명의 초인이 한 자리에서 죽었고.

당장 남궁기가 죽은 게 밝혀진다?

얼마나 시끄러워질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건 무조건 비밀로 가져가야 한다.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가 입을 닫으면 영원히 비밀이 되겠군."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좋아. 그럼 이 건은 무덤까지 갖고 가도록 하지. 남궁기가 태평문과 협조했다고 해도 중국 측이 알아서 좋을 건 없어."

"알겠습니다."

최준호가 수긍하자 천명국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단속을 마친 뒤 대통령은 다른 부분에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나?"

"중간에 경유한 섬에서 배 운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찍고 무작정 왔습니다."

"배를 몰고 무작정 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다가는 해양 마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것이다.

인류가 마물로 인해 힘들어하는 건 마물 자체의 강력함도 있지만 바다를 장악한 해양 마물들로 항로가 막혀 물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면이 더 컸다.

바다를 자유자재로 다닐 능력이 있다면 세계 경제를 주무르고 있었겠지.

"아, 깜빡했네."

최준호는 가져온 가방 안에서 주먹 크기만 한 걸 꺼내들었다.

마물의 심장이었다.

"해양 마물의 심장입니다. 아마 유해 8단계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

경악한 대통령과 천명국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돌아오면서 마물까지 사냥했다고? 해양 마물 사냥 난이도는 육지보다 몇 배 더 높은데?

"그렇게 됐습니다."

"…허허!"

대통령과 천명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 * *

보고를 끝낸 뒤 내 복귀는 조용히 이루어졌다.

현재 대한민국은 갑자기 나타난 두 플러스 단계 마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마물 사냥에 아스가르드 길드와 사신 길드가 나섰는데, 둘 모두 1차 사냥에서 실패하고 후퇴를 한 상태였다.

마물에 타격을 줬지만 체력 문제로 결정타를 입히지 못한 것이다.

이에 정부는 신성 길드를 예비대로 편성했는데, 일각에서는 왜 내가 나서지 않느냐고 아우성이었다.

연구하던 제임스 리드의 합류도 권유 중이라는 뉴스가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껏 마물을 쉽게 사냥하는 모습만 보여 주다가 고전하니 좀처럼 믿기 힘든 건가보다.

집으로 가기 전, 상황부터 파악하기 위해 최준호팀 사무실에 가서 진세정과 함께 청와대 요청에 대해 논의했다.

"저는 반대에요."

"반대?"

"네! 표면적으로는 다른 길드에 기회를 주겠다고 주장하시는 거죠. 이미 순번이 정해져 있는 문제니까요."

정부에서는 플러스 단계 마물 사냥이 여의치 않은 것을 놓고 내 합류를 요청했다.

나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미뤄 놓은 상태였고.

내심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진세정의 생각은 달랐다.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초인님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소중함이라.

그거 안다고 크게 달라질 게 있나?

진세정은 단호하게 있다고 말했다.

"초인님은 마물을 어렵지 않게 사냥하시죠. 그건 정말 엄청난 무위고 축복받은 재능이죠. 문제는 그걸 지켜보는 절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잡히는 것만 보고 플러스 단계 마물의 위험성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거예요."

진세정은 내가 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찬양에 가까운 말을 쏟아냈다.

요약하자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사람들이 알게 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절차상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초인님이 먼 길을 다녀오셨잖아요? 컨디션 회복을 위해 거절하시면 돼요."

"그런다고 여론이 형성되겠습니까?"

"가만히 기다리면 오래 걸리죠. 그러니 되게 만들어야죠. 그걸 위해 제가 있는 걸요. 그리고 그런 여론은 이미 흘러나오고 있어요. 이걸 보시겠어요?"

진세정이 보여 준 것은 플러스 단계 마물 사냥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기사였다.

그러면서 내가 나섰을 때 사냥 결과가 얼마나 좋았는지, 내 존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찬양에 가까운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댓글도 보세요."

베스트 댓글은 이미 나에 대한 내용이 전부 뒤덮여 있었다.

나로 인해 대한민국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자신들이 마물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지 주된 내용이었다.

간혹 내가 다치면 안 되니 나서면 안 된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호의적이다.

"이게 만들어진 여론이 아니거든요."

진세정이 보여 준 것은 반대가 많이 찍힌 댓글이었다.

반대 숫자가… 백만이 찍힐 수 있는 거였던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아이디가 익숙했다. 다시 보니 진세정의 계정이었다.

"빠가 까를 만드는 것처럼 까가 빠를 만들기도 하죠. 이제 저를 보고 분노해서 초인님에게 호감을 느끼는 단계에 도달했어요."

"...."

순간, 나는 진세정이야 말로 세계관 최강 미치광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제 목표가 반대수 천만 찍어보는 거예요!"

"...."

차마 잘하라고 응원할 수 없었다.

117화

주변의 조언도 그렇고, 돌아가는 흐름을 지켜보니 당장 내가 사냥에 나설 이유가 없어 보였다.

내 힘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번 기회에 나 없이 사냥을 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마물 사냥 비중에 내 역할을 줄이려는 사람도 많았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지만 정식으로 사냥할 순번을 부여받은 것이 아스가르드와 사신 길드였기에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논의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최근 부모님 집 근처로 이사를 오면서도 윤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나는 믿을 수 있지만 윤희는 개판으로 살게 뻔하다나.

"그런 것치고 자주 오시던데."

같은 아파트단지라서 좋은 점은 왕래가 자유로워졌다는 점이고, 단점은 좀 과할 정도로 자주 보는 정도?

그래도 저번 생의 후회를 바로잡을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윤희의 개김성은 성장판이 닫히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 될 때가 있었지만.

며칠 만에 돌아온 집은 어수선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이사를 왔는데 윤희가 소파와 혼연일체가 된 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상태였다.

누운 채 손만 든 윤희가 반겨줬다. 누가 쟤를 데려갈까. 데려간다는 사람이 생기면 절이라도 해야겠다.

"어서 와, 대체 며칠 동안 어딜 다녀 온 거야?"

"비밀 임무."

"그렇게 무게 잡고 말하면 내가 감탄할 줄 알았어? 딱 봐도 어디 가서 뒤집고 온 거 같은데."

눈치는 귀신같은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도 내가 위기에 빠질 뻔한 부산을 구했는데, 이 녀석은 그걸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남매라서 그러는 게 있으니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야겠지.

그건 그렇고, 떠나기 전 내준 과제를 어느 정도 했나 확인해야겠다.

"제임스 리드랑 하는 훈련은 어떠냐?"

윤희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으, 그거 때문에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잖아."

평소에도 이랬는데?

내가 팩트를 언급할 틈도 없이 윤희가 하소연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최소 단위로 차근차근 육체 개조를 하는 제임스 리드의 방식은 단련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을 괴롭힐 수 있는지의 끝을 보여 준다고 한다.

내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군.

"그래도 버틸 만한가 보네."

"완전 죽어나고 있거든?"

졸라맨이 제대로 일하고 있군. 그래도 멀쩡히 TV 볼 힘이 남아 있으니 더 강도를 높여도 좋다고 해 줘야겠다.

난 윤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방으로 들어왔다. 전보다 훨씬 크고 깨끗한 방에 들어오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곳에 들어오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거 같은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내 모습을 보면 새삼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걸터앉아 남궁기에게 받아온 갈색 환약을 꺼내들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은 무협소설에 자주 나오는 독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고독인 거 같은데...."

독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기 전에 남궁기를 죽여 버려서다. 나는 환약을 지켜보다가 포스를 불어넣었다.

포스에 반응해서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내 포스에 저항하는 것이다. 난 터지지 않게 포스로 조련을 해 보기 시작했다.

꽤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어느 순간 포스를 받아먹고 있었다.

굴복한 건가 싶어 움직여 보려고 하니 발작을 일으킨다. 아직 굽힌 건 아니군.

이건 좀 더 연구해봐야겠다.

그나저나 장우위안한테 뺏어 온 것도 있는데, 이건 어떻게 하지?

* * *

태평문을 지우고 돌아온 건 대외적으로 비밀이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중국 초인과 얽혀 있는 문제라서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기로 했다.

주변이 바쁘게 움직이니 내가 한가한 게 더 실감나는 기분이다.

내가 신성길드에 도착하자 이곳도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희는 예비대로 분류되어서 연락이 오면 바로 출동해야 하거든요. 언제 지원을 갈지 모르니까요."

북쪽에 나타난 마물은 황해남도 해주에, 남쪽에 나타난 마물은 경상남도 진주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피해만 발생하고 사냥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플러스 단계 마물로 차륜전을 벌이려면 그 시간 동안 고스란히 피해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

이게 이렇게 어렵게 사냥할 일인가?

이세희는 당연한 결과물이라 말했다.

"쉽지 않을 거예요. 당장 저희도 준호 씨가 아니었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모르거든요."

"신성길드는 알아서 잘하던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지만 준호 씨가 옆에 있던 게 큰 힘이 되었죠. 삼촌도 인정하는 부분이고요. 다른 곳은 그게 안 되니 골치가 아플 거예요."

심리적인 부분이라는 건가.

목숨이 걸린 일이니 미신이 성행하는 건 알고 있다. 내면의 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종교에 빠지거나 온갖 징크스를 만들어 낸다.

"이번 사냥 흐름 덕분에 신성길드가 대형길드 중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이것도 준호 씨 덕분이죠."

"잘됐네."

"네, 덕분에 이미지 메이킹도 성공했고 구성원들 자부심도 커지고 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내 덕이라니 그러려니 하면 되겠지.

난 이세희와 본론에 들어갔다.

"그리고 진 팀장 이야기 들었는데 쉬어 가기로 하신 건 잘하셨어요. 이 기회에 준호 씨 없이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깨달을 필요가 있거든요."

"그렇게 될지 아닐지 지켜봐야겠지."

"저마다 행복회로를 돌리는 거죠. 준호 씨가 싫은 사람은 준호 씨 없이 충분하다는 걸 어필하고 싶고, 다른 쪽은 한쪽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고, 대형길드는 플러스 단계 마물 사냥 실적을 쌓고요."

모두의 이해가 일치한다고 하던데 정작 나는 가만히 있음으로써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신기하긴 했다.

"기존 유해 8단계라면 저마다 자료가 축적되고 노하우를 습득한 상태거든요. 하지만 플러스 단계가 등장하면서 전부 제로베이스로 시작하게 됐죠. 실력이 뛰어난 강자는 더더욱 귀해졌고요."

이전까지 초인이라면 충분했지만 이제는 최소 자격이 되었으며, 큰 피해 없이 사냥할 수 있는 초인의 몸값이 올랐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바로 나고.

근데 몸값 높아진다고 뭘 받아내야 하지?

"그건 줘야 하는 쪽이 고민해야 할 문제죠."

"그래?"

"필요한 게 있으시면 넌지시 흘리셔도 되고요."

"없어."

몇 번 생각을 더 해 봤지만 필요한 게 진짜 없다.

"아! 너무 제 얘기만 했네요.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죠?"

"저번에 8단계 마물의 심장 필요하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그랬었죠. 설마?"

"한번 살펴볼래?"

"...!"

난 이미 가공을 끝낸 마물의 심장을 꺼내 들었다. 귀국하던 도중 나타난 마물을 사냥한 것이었다.

이제 와서 얘기하지만 해양 마물은 유해 8단계임에도 확실히 까다롭긴 하더라.

정작 심장을 찾으려고 해도 꽤 어려웠고.

이번에는 귀국이 우선이라 빨리 처리했지만 다음에는 제대로 시간을 들여야겠다.

기대감 가득하던 이세희는 마물의 심장을 확인하고는 얼굴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경악으로 바뀌었다.

"주, 준, 준호 씨! 이거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출처는 밝히기 좀 그래."

"그, 그래요? 근데 8단계 마물의 심장이 맞아요. 이걸 저한테 보여 주셨다는 건 저희한테 팔 의향이 있으시다는 거죠?"

"어."

"이거면 무기 성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서 길드원들한테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게 되고, 여러 소재 연구도 할 수 있고, 출력 상승도… 으흐흐!"

"...."

자기만의 상상에 빠진 이세희가 눈을 번뜩이며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괜찮은 거겠지?

* * *

대한민국이 갑작스레 등장한 두 마리 플러스 단계 마물로 시끌벅적할 때 세계를 강타한 소식이 하나 있었다.

동아시아 최대 빌런 조직이자, 중국을 골치 아프게 만들던 태평문의 멸문 소식이었다.

여기에 중국 초인인 창천검제 남궁기의 시체가 함께 발견되어 의아함을 자아냈다.

남궁기와 함께 발견된 중국 측 각성자 숫자는 불과 열 명.

그에 반해 태평문은 태평문주 장우위안과 새로운 초인, 암운을 비롯해 삼백 명이 넘는 태평문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남궁기가 해낼 수 없는 성과를 이뤄 낸 것이다.

세계 언론도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남궁기와 소수정예 각성자로는 태평문을 멸문시킬 수 없다면서 의문을 드러냈다.

이에 대한 가장 그럴싸한 내용은 역시 하나였다.

리그가 태평문을 멸문 시켰다!

하지만 여기에도 여러 의문점이 존재했다.

리그는 태평문을 멸문시킬 대상이 아닌 협력할 대상으로 여겼다.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해도 그게 태평문을 지울 이유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북미와 유럽에 상당한 전력이 주둔하고 있는 리그 전력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동아시아까지 전력을 옮겨 왔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결정적으로 중국 소속 초인인 남궁기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

그러던 중, 조사를 하던 중국에서 알음알음 태평문의 멸문 이유에 대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헤드 브레이커가 태평문을 멸문시키고 중국 초인을 죽였다!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이 한국으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으나, 태평문의 멸문이 벌어진 상황을 대입해 보면서 조금씩 그럴 듯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소수 정예로 그만한 혈겁을 일으키려면 십대초인급 초인이어야 한다는 점과.

다수를 상대하는데 효과적인 기프트를 가져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동안 마물 사냥에 앞장서던 것과 달리 현재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의심을 자아냈다.

마지막으로 중국 남부 섬에서 최준호와 닮은 남자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전체 모습이 담긴 건 아니지만 얼핏 보면 닮아 있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이다.

의혹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음에도 최준호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인터넷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와! 갑자기 어디 갔나 했더니 태평문을 혼자 박살내고 있던 거였어? ㄷㄷㄷ

-미쳤다, 태평문이면 동아시아 최대 조직인데. 초인이 둘이나 있고 각성자도 전투 경험이 풍부해서 절대 만만한 조직이 아님.

-걸어다니는 전략무기다, 진짜. 터지면 다 죽는 거야.

-근데 왜 태평문을 멸문시킨 거지? 접점이 아예 없지 않나.

-들리는 말로 중국이 태평문에 사주해서 부산 공격한다는 말이 있었음. 최준호가 선빵 갈긴 거고.

-진짜냐? 레알 미쳤네.

-안 그래도 마물 대응으로 전력 긁어가서 텅텅 비었는데 공격받았으면, 와! 진짜 미친 놈들이네.

-그래서 남궁기가 저기 가 있던 건가?

-잔머리 굴리다가 초인 전력 하나 잃은 거네? 쌤통이다 ㅋㅋ

-중국은 초인이 귀한 게 지킬 곳은 많고 초인이 감당할 전선은 개넓음 ㅋㅋ 내가 중국 초인이면 진즉에 도망갔을 걸.

-근데 저 정도 규모 조직을 최준호 혼자서 몰살시키는 게 말이 돼?

-진짜, 저 정도는 리그 삼악이라고 해도 감당 못할 거 같은데.

-ㄹㅇ;;

-크크, 여기 최준호 그놈의 힘을 모르는 녀석들 천지로군. 녀석에게 저 정도 규모 조직을 몰살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숨어있는 걸 찾아내는 걸 귀찮아하지, 모여 있으면 오히려 감사 인사를 했을 테지. 녀석의 잔악함을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는 의심하던 이들도 태평문의 규모를 보고 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정말 최준호가 태평문을 멸문시킨 걸까?

초인이 둘이나 있고, 실전에 단련된 각성자가 수백 명인데?

여러 생각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최준호가 신성그룹 신제품 런칭 행사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