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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 *

이세희가 보는 최준호는 참 신기한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저런 사람이 등장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스스로도 뿌듯함을 느꼈다. 첫 만남에서 수작을 부리려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한 후 빠르게 전략을 수정해서 친해지는데 성공했으니까.

보통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외면하고 회피하는 걸 선택한다.

빠르게 전략을 수정한 것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도 참 대단하다니까?'

최연소 초인과 '친한 사이'라는 타이틀은 물론, 빅뱅 시리즈 히트까지.

신성그룹은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고, 자신의 입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해졌다.

이세희는 아직도 기억한다.

플러스 단계 마물 소예가 최준호에게 겁을 먹는 걸.

초인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던졌다고 하나 최준호는 그 수준이 다른 것 같다.

그래서 내심 리그의 삼악도 견주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런 초인도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다현이 덕분이지.'

이세희는 정다현이 최준호를 처음 만났을 때 공무원 헌터가 되는 걸 강하게 권유하지 않았다면 최준호는 빌런이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세상에 대한 이해가 명백한 괴리가 있었으니까.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과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 외면하고 배척하려 한다.

최준호의 존재는 세상에 있어 이질적이다.

그 오해가 쌓이고 쌓여 빌런이 되는 경우는 꽤 많았다.

최준호 실력을 가진 빌런의 등장이라.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내 공도 있고.'

이세희는 최준호가 빌런이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가 아이돌 세계관 접목과 인터넷방송이라는 기괴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적어도 최준호가 빌런이 될 가능성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자신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주변에 널리 알려서 인정받아야 하는데.

가끔 자신이 세계를 구한 게 아닐까 생각을 한다.

뭐,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는 거니까.

이세희는 더 이상 최준호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인생에 큰 영역을 차지했다.

그래서 최준호의 일본행 이야기를 들었을 때 본인이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크게 반응했다.

"위험해요."

어쩌자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건지.

대통령의 제안이라고 해도 이건 결코 좋지 못했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설명을 했다.

"이미 수락하셨으니 말리지는 못 하겠지만 좋은 의도는 아닐 거예요. 왜냐하면 초인이 타국에 온다는 건 정말 큰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거든요."

친선교류라면 큰 상관은 없다. 외교사절 임무 수행으로 교류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합동 작전이라는 것은 머리가 여러 개에 여러 갈래 이해관계가 얽혀서 최선보다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지금처럼 국제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 타국의 초인을 초대해서 죽이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마물의 위협 아래 인류가 하나로 힘을 합쳐야 하지만 마물에게 시달리는 와중에도 어느 세력 하나가 커지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도 100% 안전하냐고 물어보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

아무리 외쳐도 당사자는 평온한 얼굴로 대답하고 있었지만.

이게 최준호답긴 했다.

솔직히 이세희도 최준호가 임무에 가서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상상되지 않았다.

"타국 작전에 참여해서 죽은 초인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많아요."

"제거하기 좋다는 거네."

"네. 타국에 초인 숫자가 많다는 건 결국 이웃국가의 전력이 강하다는 의미에요. 이웃국가가 강해져서 좋아할 곳은 어디에도 없죠."

아무리 생각해도 득보다 실이 많은 제안이었다.

그렇다고 청와대가 최준호를 속여서 그런 거냐, 라고 말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익 공유도 약속했고, 부탁하는 대통령의 태도도 정중했다.

오히려 최대한 신경을 써 줬던 것.

그래도 안전은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물론 청와대가 그걸 몰라서 권하지 않았을 거예요. 준호 씨의 실력에 대한 확신, 일본이 내어 주기로 한 이권에 대한 욕심이 함께 했겠죠."

"믿어준다고 딱히 기쁘진 않은데."

"그런가요? 제가 말하는 건 일본 측 의도에요. 리그로 인해 오랫동안 고생을 했으니 준호 씨의 손을 빌려 처리하면 좋고······."

"겸사겸사 나도 죽으면 더 좋겠다는 말인가."

"네. 비정한 세계죠."

그렇게 될 리가 없겠지만.

오히려 개수작을 부리다가 최준호의 손에 머리가 부서질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근데 일본 내부에서는 반대가 없나?

그 정도로 몰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없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차했다.

자신의 잔소리가 과했다는 걸 자각한 것이다. 최준호는 지인의 잔소리에 관대한 편이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이렇게 얘기해도 큰 줄기에서는 청와대와 같은 생각이에요."

"무슨 생각?"

"저들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준호 씨는 끄떡도 없을 거란 생각."

"잘 봤어."

최준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그 안에 자신감과 확신이 어우러져 눈부신 아우라를 발산했다.

이세희는 그 모습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차마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게 볼이 화끈거리는 기분이다.

"네······."

어째 열이 식지 않는다.

* * *

마침내 일본으로 가는 날이 되었다.

내가 갈 곳은 후쿠오카였다. 일본 내각에서는 이곳에 리그의 지부가 있는 걸로 추정하고 있으며, 합류 지점으로 유력하다고 전해 왔다.

"조심하게."

"최대한 상대를 덜 죽이라는 겁니까?"

"그럴 리가. 몸조심하라고 하는 걸세."

"알겠습니다."

어째 말하는 게 좀 수상한데.

난 시선을 외면하는 대통령의 말에 납득하곤 정부의 전용기를 타고 후쿠오카로 향했다.

짧은 비행이 끝나고 날 마중 나온 것은 30대 후반에 각진 턱과 부리부리한 눈빛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는 절도 있는 행동으로 내게 인사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초인님. 저는 초인님을 모시게 된 박영후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각성자안보실 소속인 그는 주일대사관에 머물면서 정보를 취합했다고 밝혔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포르투칼어가 가능한 실력자였다.

레벨로 가늠하면 대략 5 턱걸이 하는 정도.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걸 보면 다른 부분에서 실력이 뛰어난가보다.

"이제부터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난 박영후를 따라 숙소로 향했다. 호화로운 숙소에 짐을 풀고 소파에 앉아 있으니 박영후가 다가와 상황을 보고했다.

"현재 일본 상황은 진정 국면에 있습니다. 얼마 전 리그 소속 빌런 백 명을 체포하는데 성공하여 이번 기회에 뿌리를 뽑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리그에서 초인 둘을 보냈다?"

"예. 숫자로 밀어붙이기에는 12궁의 일원도 오고 있어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12궁에서 누가 옵니까?"

"현재 후보로 세 명이 꼽히는데, 가장 유력한 건 위치 닥터입니다."

"위치 닥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박영후가 설명을 시작했다.

"한때 동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빌런입니다. 직접 전투보다 저주 계열 기프트를 활용하는데, 특정 조건이 갖춰지면 십대초인보다 더 무서우며, 저주는 초인조차 죽일 수 있다고 합니다."

"저주라······."

만독불침이나 완전회복이 있는 내게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기프트가 만능인 건 아니니까. 어느 정도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위치 닥터를 상대하던 초인 중 하나가 미쳐서 자살한 적 있습니다."

그건 조심해야겠다. 설마 미쳐서 혈종이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내가 과거로 돌아오면서 의구심을 갖고 있는데 사실은, 녀석이 수면 아래 잠자코 있는 건지 소멸한 건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심하셔야 하는 게 하나 더 있는데."

"뭡니까?"

"이번 작전에서 함께 할 일본 측 초인은 부동심 츠요시와 수호신, 현지에서는 마모리가미(まもりがみ)로 불리는 군지입니다. 그중에 군지는 초인님을 모셔 오는 걸 반대했습니다."

날 싫어하는 녀석이 어디 한둘인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도 이유는 알아 두자.

"이유가 뭡니까?"

"자기들이 해낼 수 있는 걸 굳이 외국에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작 그걸로?"

"예, 자존심 문제니까요."

"그럴 수 있네요."

아직 일본의 세력이 크게 꺾인 게 아니니까.

자기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 외부 인원이 끼어들면 불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근데 어쩌겠나, 위에서 정한 건데.

불만이면 자기들끼리 해결하면 된다.

날 보내고 싶으면 약속한 이권은 다 내놓던가.

저쪽 내부 일은 저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니 내가 굳이 신경 쓸 필요 없겠지.

다음 날, 나는 박영후와 함께 후쿠오카 시청으로 향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수가 날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그중, 유일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오던 것이 세계 초능력자의 날 행사에서 본 적 있는 츠요시였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준호!"

"반갑습니다."

악수를 하면서 우리는 안부를 주고받았다.

여전히 부동심은 탐이 나는 기프트다. 동기화도 갖고 싶고 부동심도 갖고 싶고. 욕심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이번에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츠요시가 자리를 벗어나고 회의가 시작되기 전, 나는 군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들었던 대로 녀석의 눈빛이 상당히 불손했다.

이거, 리그 녀석들 처리하기 전에 내부 정리부터 해야 할 거 같은데.

사달은 회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군지가 일어나 날 보며 뭐라 떠들었다.

통역을 맡던 박영후가 머뭇거리다가 내게 어렵게 말했다.

"군지가 작전 수행을 위해 초인님의 기프트를 알고 싶답니다."

"내가 왜?"

난 박영후를 보며 말했다.

"가르쳐 줄 생각 없다고 전달하세요."

"···예."

박영후가 내 말을 가감 없이 전달하자 군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99화

"······."

나와 군지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애초에 선은 저쪽이 넘었지. 각성자 간에 기프트 언급은 실례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전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만큼 일종의 금기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런데 그걸 요구한다?

한번 해 보자는 거지.

나도 이제는 안다.

녀석이 작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곱지 않은 심보로 제안했다는 것을. 그렇다면 거기에 응해 줘야 할 이유는 없겠지.

어차피 알려 준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다고?

딱 봐도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 보이지 않는다.

"작전을 위해 협력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협력하더라도 성공시킬 의향은 있고? 그게 안 돼서 내가 온 거잖아."

"······."

예의 바른 척은 다하면서 심보는 딱 필요한 것만 빼먹겠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꼭 무능한 것들은 행동보다 입이 앞선다. 이런 말을 듣기 싫으면 성과를 가져오던가. 내가 살펴보니 군지는 방어전에서 탁월하지만 공격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전형적인 기프트 타는 초인이지. 기프트에 휘둘려서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없다.

녀석을 바라보자 눈을 치뜨며 살기를 발산한다. 여기가 자기 홈그라운드라고 뻗대는 건가.

다시 한번 입을 열어 개소리를 하려고 해서 먼저 손을 썼다.

"뭣······!"

화들짝 놀란 군지가 양손을 교차했다. 기뢰가 벼락처럼 파고들었지만 군지의 신체 내부로 파고들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왔다.

방어 기프트의 효능이다. 기뢰를 뿜어내어 좌우와 뒤로도 공략했지만 견고함이 유지되었다.

나한테는 단단한 샌드백에 불과했지만.

군지가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균형이 흔들리는 것까지 어쩔 수 없었다. 연이은 공격으로 신경을 분산시킨 뒤 가까이 접근해서 다리를 툭 차자, 균형이 무너지면서 내 손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곧장 뻗은 내 손이 어깨를 강타했다.

퍽!

하지만 내 기뢰는 녀석을 둘러싼 반투명한 막을 뚫지 못했다. 그 색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는데, 짙어질수록 방어력이 상승하나 보다.

이래서 수호신이라 불리는 건가. 결국 샌드백을 강화한 것에 불과하다.

얼마나 버틸지 해 보자.

퍽! 퍼벅! 퍼버벅!

순식간에 십여 번의 기뢰가 방어막을 두들겼다. 철옹성처럼 견고하던 방어막은 찰나지간 쏟아진 기뢰 앞에 급속도로 균열이 일어나더니 산산조각 났다.

그 사이 군지가 균형을 잡고 섰지만 의미가 없다. 사죄를 하고 싶으면 저승에서 실컷 하도록.

"잠깐!"

내 손이 손목을 으스러뜨리고 목을 거머쥐려 할 때, 지켜보던 츠요시가 개입했다.

기다란 검날이 나와 군지 사이를 갈라놓았다.

넓은 공터였으면 앞으로 피해서 파고들었을 텐데 회의실 공간이 좁은 게 흠이었다.

난 무리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콰과광!

포스에 휘말려 애꿎은 탁자와 의자가 산산조각 났다.

난 츠요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쁘지 않은 관계를 구축했지만 그게 죽이지 않을 이유가 되진 않는다.

이세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타국에 온 초인이 '불의의 사고'로 많이 죽는다고.

그걸 위해 지금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건가?

날 죽일 명분을 쌓기 위해?

어리석은 선택이다. 난 누굴 죽이고 도주함에 있어 그 어떤 빌런보다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빌런 하나 죽이려고 수만 명이 여러 차례 동원된 경우는 나밖에 없을 걸? 까짓 거, 다 죽여 버리고 헤엄쳐서 귀국하는 방법도 있다.

속내를 드러낸다면 나도 어울려 줘야겠지.

그때였다.

츠요시가 검을 놓으며 양손을 들어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죄송합니다. 군지가 아끼는 동생을 리그에게 잃어서 감정이 격해져 있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리그를 잡기 위해 저지른 실례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

이제 와서?

모르는 척 죽여 버리고 부동심을 취할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명분이 없었다.

무기를 버리고 사과하며 대화를 시도하는데 죽이는 건 좀 어려워 보였다.

시비가 붙은 것도 좀 약했고.

원인은 군지가 제공했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마무리하기에는 약했다.

"감사합니다."

내가 전투태세를 풀자, 감사를 표한 츠요시는 고개를 돌리더니 일본어로 군지에게 목소리 높였다. 군지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러자 내가 배제되고 일본의 두 초인이 말다툼을 하는 형국이 이어졌다.

한참 동안 말싸움을 하다 군지가 결국 체념하고 뒤로 물러나자 한숨을 내쉰 츠요시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렇게 저자세로 사과를 하니 받지 않기도 애매했고.

나와 눈이 마주친 군지가 고개를 돌렸다.

마음에 안 드는데.

하지만 자존심을 접고 연신 사과하는 츠요시를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사과를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식어 버려서 나도 더 우기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사방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충돌할 거라고 많이들 놀랐나 보다.

황급히 군지 옆으로 다가간 츠요시가 그를 잡아끌었다. 자리를 벗어나는 동안 날 향한 시선이 무척 불손하게 느껴졌다.

탈이 생기기 전에 먼저 처리를 할까?

한 번 더 수작 부리면 치워야겠다.

* * *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자리를 옮긴 츠요시는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군지가 최준호를 싫어하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상황에 따라 표정을 관리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충돌할 빌미를 줄 이유가 없었다.

"녀석은 초인의 탈을 뒤집어 쓴 빌런이야. 우리는 빌런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거라고."

"그건 너만의 생각이야. 최준호는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초인이자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초인이라고. 왜 이렇게 일을 어렵게 만들려고 하는 건데!"

"진짜 그걸로 족한 거야?"

"뭐?"

"최준호의 도움을 받아 상황을 해결하는 게 괜찮겠냐고.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우리가 최준호의 힘이 간절할 만큼 위급한 상황이야?"

"······."

츠요시는 입을 닫았다. 군지가 한 말은 그 또한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결정한 일이다. 최준호라는 전력이 큰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우리가 해결하자."

"지금 내각의 지시를 거부하자는 거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선제적 조치로 해결하자는 거야. 최준호의 도움이 없어도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걸 보여 준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 츠요시, 난 네가 하지 않더라도 나설 거야."

군지의 의지는 확고했다.

강경한 친구의 모습에 츠요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결심하면 절대 번복하지 않는 친구이기에 결정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무모해도 너무 무모하다. 군지의 기프트는 방어전에 적합하지 어딘가를 공략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패싱은 안 돼."

"츠요시!"

"내 말 계속 들어. 네 말대로 우리가 주축이 되어 상황을 해결하자는 의견은 찬성이야. 최준호는 외곽에서 잔챙이를 죽이는 역할을 맡기자."

"······."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각에 얘기하겠어. 넌 빠지게 되겠지."

"알았어. 네 말대로 하지. 생각해 둔 방법이 있어?"

"있어."

둘의 대화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 * *

둘이 자리를 비우고 1시간여가 지났다.

주변 분위기는 상당히 어수선했다. 특히 날 향한 시선집중이 상당했다.

당장 박영후마저도 떨떠름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지?"

"초인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소문대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음, 그게 말하기 상당히 곤란한 것들이라."

"괜찮습니다."

인터넷 방송할 땐 실시간으로 반응을 보는데,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머뭇거리던 박영후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적으로 규정되면 가차 없이 손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다만 그것으로 말이 나오고 있어서······."

말이야 나오겠지.

어차피 뒤에서 떠드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박영후의 말에 담아 들을 건 있었다.

"명확한 기준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준? 사실 나도 크게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다.

내가 손을 쓰는 기준은 죽일 놈과 죽을 짓을 한 놈, 내게 시비를 건 놈이었으니까.

이제 나도 정상적인 초인이니 그 구분을 할 필요는 있겠지.

내가 생각 정리를 하고 있을 때, 군지와 츠요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하다."

군지가 짤막하게 사과를 건네왔고, 츠요시도 사과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것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받아들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손을 썼겠지만 굳이 그걸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사과를 받아 줌으로써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츠요시는 본인이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그의 부동심 기프트는 위치 닥터의 저주에 상성우위에 서 있었다.

상성에 우위가 있다고 해도 기본 역량이 중요할 텐데?

12궁이라 칭해지는 빌런은 십대초인이 아니고서는 상대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초인이다.

츠요시의 평가는 위치 닥터에 미치지 못했다.

나야 본 적 없으니 그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고.

이번에 그 평가를 뒤집어 보겠다고 작전을 시험처럼 하려는 건가.

나와 군지가 뒤를 받쳐 주는 역할로 미뤄 둔 걸 보면 추측이 사실인 듯했다.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면 그때 개입을 하게 될 텐데, 가장 맛있는 건 츠요시 본인이 먹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과연 평가를 뒤집을 수 있을까?

여태까지 이루어졌던 무수히 많은 평가 중에서 달랐던 건 하나밖에 없다.

내가 미쳤다는 것 정도?

츠요시가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러시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츠요시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어디 실력 한번 볼까.

* * *

리그의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고, 츠요시는 선봉에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잠입이지만 기회가 되면 놓칠 생각이 없었다.

'위치 닥터를 잡는다.'

츠요시는 단 한 번도 자신이 12궁에 뒤처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동심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의미한다.

정신계열 기프트에 면역을 갖고 있으며, 일상의 여러 일에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다.

군지가 잃은 친한 동생은 자신에게도 친한 동생이었다. 그에 영향을 받은 군지와 달리 자신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였다.

흔들리지 않는 건 전투에 큰 이점. 하지만 천성이 나서길 싫어하고 자랑하질 않다 보니 실력이 과소평가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 츠요시는 별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중요할 뿐,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휘둘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얼마 전에 생각이 바뀌었다.

내각에서는 자신들로 충분하다고 했음에도 최준호를 불러왔다.

자신이 못미더운가? 군지는? 모두 일본을 위해 헌신한 초인들이었다. 이번 건은 자신들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여태까지 자기 실력을 확실히 드러내지 않아서겠지.

"군지의 말도 일리가 있어."

이번에 확실한 성과를 거둬 자신들을 인정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심이 없다면 거짓이다. 12궁을 쓰러뜨렸다는 위명은 실로 대단할 테니.

츠요시는 빠른 속도로 리그 아지트를 침입했다. 넓은 공장 부지를 지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창고를 염탐하고 정보를 취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의도는 눈앞에 육감적인 검은 인영이 등장하면서 어그러지고 말았다.

"츠요시 맞지?"

"···넌."

"나? 너희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다고 생각하는데 모르나 봐?"

"위치 닥터."

"정답."

어둠속에서도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그녀가 바로 위치 닥터 콘스탄티나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고요함을 간직한 채 츠요시를 쫓고 있었다.

"······."

자신 앞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 콘스탄티나를 보며 츠요시는 미간을 모았다.

직접 전투 능력이 부족하다고 알려진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생각을 눈치 챈 콘스탄티나가 웃었다.

"함정 중앙에 들어와 놓고 이제 와서 의심하는 건 좀 늦지 않아?"

오른손을 든 그녀가 검지로 허공을 두드리자 검은 파문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츠요시는 세상과 괴리되어 오감이 교란되는 걸 느꼈다.

위치 닥터가 즐겨 사용하는 저주였다. 기습 저주에 잠깐 교란되던 츠요시는 부동심을 발동했다.

어지럽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딴 수작, 안 통한다."

"역시 부동심이네. 그럼 이건 어떨까."

다시 한번 저주를 시전하려는 위치 닥터를 향해 츠요시가 달려들었다.

일본도가 달빛에 반사되어 시퍼런 포스를 뿌릴 때, 위치 닥터의 몸이 흔들리더니 저 멀리 멀어진다. 짧은 순간 저주를 발동한 것이다. 부동심이 상태 이상을 막아내고 있지만 저주 위력이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큽!"

부동심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마음의 굳건함은 정신의 견고함으로 이어지고 어떤 변화에도 자기중심을 지켜 낼 수 있는 힘이 된다.

저주를 버텨 냈으니 이제 자신의 차례다.

콘스탄티나 앞에 도달한 츠요시가 검을 휘둘렀다.

12궁의 일원이지만 그녀가 위명을 얻은 것은 초인에게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저주 능력 때문.

직접 전투 능력은 초인에 미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승리다.

반으로 갈라져 죽을 거라 생각하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콘스탄티나가 어렵지 않게 일본도를 튕겨 낸 것이다.

그것도 전력을 다한 일격을.

"어떻게······."

경악하는 그를 향해 그녀가 작게 웃었다.

"설마 직접 전투력도 없이 초인이라 불린 줄 알았어? 유럽에서는 믿는 사람이 없는데 먼 곳에서 믿는 사람이 있네. 속아 줘서 고마워."

"익!"

이를 악 문 츠요시가 검을 휘둘렀다. 푸른 포스가 번쩍이며 어둠을 갈라 버리고 쇄도했다. 콘스탄티나는 새하얀 손으로 어렵지 않게 공격을 받아냈다.

두 초인의 공방이 순식간에 삼십여 번 이어졌다. 적진 한복판에 있는 츠요시는 전력을 다했지만 콘스탄티나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그러자 점차 쫓기는 쪽은 적진 한복판에 있는 츠요시였다.

콘스탄티나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너무 방심한 거 아냐?"

"헛짓거리를!"

허공에 검은 파문이 일어나자 저주가 발동한 것임을 깨닫고 부동심을 발동했다.

그런데 이번 저주는 달랐다.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이 몰려왔다.

눈을 부릅뜬 츠요시는 이를 악 물고 부동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난 놀고 있는 줄 알아?"

그 틈을 콘스탄티나가 파고들었다.

그녀의 손길이 심장을 스치는 순간, 츠요시는 부동심이 산산조각 나는 걸 느꼈다.

설마 기프트를 해제하는 저주도 존재했단 말인가?

"저주 업계도 먹고 살려면 여러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거든."

농담하듯 말했지만 그 여파는 실로 강렬했다.

"크아악!"

무너져 버린 부동심 벽을 타고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물밀 듯 밀려온다.

그중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자신이 행해 온 위선이었다.

대의를 위해서라며 방해가 되는 자는 무고하더라도 죽였고, 성공을 위해 자신에게 헌신하던 여자를 가차 없이 버렸다. 그리고 평화를 핑계로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무고한 증인을 제거하고,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사고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온갖 위선을 행해 왔던 것이 츠요시의 양심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이래서 왜 살지? 자신이 살아 있을 가치가 있나? 난 쓰레기다. 더 살아 봤자 세상에 해악만 끼칠 것이다. 사라져야 한다. 사라지자.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가는 자기혐오.

결정타는 꼭꼭 묻어 두었던 옛 애인에 대한 기억이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뒷바라지를 해 왔던 여인. 수련에 집중하라며 직접 일을 하고 고된 수발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믿어 주고 아무 의심 없이 모든 걸 내어 줬던 여인.

자신의 이별 선언에 담담한 척 받아들였으나 결국 시름시름 앓다 죽은 여자.

그리고 그걸 단호하게 외면한 자신.

'케이코······.'

그녀에 대한 미안함은 댐이 범람하듯 츠요시의 정신을 산산조각 냈다.

"으으!"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일본도를 들어 자기 목을 베었다.

촤아악!

피분수가 뿜어지며 목 없는 시체가 자리에 쓰러졌다.

일본을 대표하던 초인의 허무한 최후였다.

"준비한 수단을 꽤 사용하게 만들었네."

하지만 초인도 결국 사람이다.

자신의 저주 앞에 체구 건장한 장정도, 노약자도, 각성자도, 초인도 모두 동일했다.

저주를 견뎌 낼 기프트가 있다면 그걸 흩뜨릴 저주를 발동하면 된다.

츠요시 시체 앞에 선 콘스탄티나가 몸을 숙였다.

아직 식지 않은 피를 손에 적시며 미소 지었다.

"이제 남은 건 헤드 브레이커네."

100화

츠요시가 정찰을 나간 지 24시간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이미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장내 분위기는 침울해져 있었다. 아무 연락도 없이 24시간이 흘렀다는 건 츠요시에게 변고가 일어났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쉽군.

일본에서 그나마 대화가 되는 초인이었는데. 상황판단이 빠르고 예의가 발라 괜찮은 녀석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죽어 버리다니. 안타까웠다.

부동심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고.

장내에 깔린 침묵은 곧 소란으로 번지더니 군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내가 직접 간다!"

"침착하십시오!"

"적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은 신중할 때입니다."

"내가 가서 츠요시를 구해야 돼! 당장 준비해라!"

···라고 박영후가 통역을 해 줬지만 뉘앙스만으로도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친한 친구가 사라졌으니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더더군다나 자기가 공을 세우기 위해 제멋대로 굴었는데.

물론 그건 일본 각성자들 입장이고.

쟤들이 내각에서 처벌을 받든 말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내가 여기에 온 목적만 이루면 된다.

"내가 갔다 오지."

박영후의 통역이 이루어지자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군지 때는 말리던 일본 각성자들이 멈칫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군지가 적진에 갔다가 죽으면 곤란하지만 난 아닐 테니까.

"직접 가겠다고?"

"츠요시는 나도 알던 초인이다. 그가 쉽게 당했다는 걸 믿기 힘들다. 살아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

내 말에 일본 측 사람들의 얼굴에 실낱같은 희망이 떠오른다.

매우 작은 확률로 포로로 잡혀 있을 수도 있다.

그럼 구해 올 생각이다. 감사함을 아는 녀석이니 버서커 때처럼 기프트를 가져가려고 하는 걸 납득하지 않을까.

간단한 심장 마사지라고 말해도 믿지는 않겠지? 아무튼 시도해 봐야겠다.

죽었으면 그건 그거대로 확실한 정보를 가져가는 셈이고.

"살아 있다면 구해 오고, 만약 죽었다면 확실한 정보를 가져오도록 하지."

"······."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야. 통보지."

"알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군지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하겠다. 츠요시의 소식을 가져다오. 설사 죽었더라도 시체라도 부탁하겠다."

"알았다."

진즉에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보일 것이지. 하여간에 요즘 초인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것 같다.

방해 여지를 완전히 없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박영후가 뒤따라왔지만 어차피 보고를 할 테니 보고 먼저 하라고 보내는 걸 선택했다.

"가 볼까."

난 적의 아지트 위치를 머릿속으로 입력한 뒤, 곧장 떠났다.

* * *

리그의 아지트로 알려진 곳은 흔히 볼 수 있는 해안가 공장 부지였다.

널찍한 부지 위에 조립식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틈으로 나는 공장 부지로 진입했다.

"빌런들이 숨어 있기 딱 좋겠어."

전형적인 은신처였다. 사방에서 튀어나오면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싹 다 죽이기 쉽지 않겠다 싶었다. 기뢰보다는 칼날폭풍이 더 낫겠다.

나는 부지를 지나 건물이 세워진 영역 안으로 들어가려다 포스 흐름을 감지하곤 멈칫했다.

"결계?"

아니, 이건 종류가 달랐다. 이질적인 기운이 공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건 결계라기보다 탐지 트랩에 가까웠다.

상대가 진입하는 걸 방지하기보다 상대 진입을 허용하되 알람에 충실하도록.

오만했다. 상대 진입을 허용해도 언제든 잡아낼 수 있다는 건가. 이걸 설치한 녀석이 12궁의 위치 닥터인가? 무슨 자신감인지 얼굴을 한번 보고 싶어졌다.

난 손에 기뢰를 실어 탐지 트랩을 잡아 뜯어냈다.

파직!

상대가 눈치 챘을까? 잘 모르겠지만 개의치 않고 안으로 진입했다. 알아도 상관없다.

일본 측에서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외곽에 위치한 창고는 각종 물자가 비축되어 있고 리그 소속 빌런들은 가장 안쪽에 위치한 대형 건물에 모여 있다고 한다.

넓은 공간을 방어하기보다 필요한 공간을 방어하겠다는 의사였다.

"없군."

창고 건물 안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고 더 깊이 진입했다.

정보가 정확한지 외곽에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사람의 그림자마저도.

그러다 어느 순간 날 쫓는 눈이 있었다.

결계를 꽤 빠르게 철거했다고 생각했는데 속일 수 없던 거였나.

"나와라."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달빛을 등지고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농염한 매력의 여인. 안나 크리스틴이나 벨루스처럼 매력으로 유혹하는 타입인 건가? 아무튼 내가 전달 받은 위치 닥터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나는 검은색 정장으로도 육감적인 몸매를 가리지 못했다. 나를 본 그녀는 눈을 반짝이다가 반달을 그리더니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당신이 헤드 브레이커?"

영어였다.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아직 말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영어로 스피킹까지 해 줄 이유는 없다.

"넌 위치 닥터인가?"

"한국어! 저도 듣기만 돼요."

그래서 나는 한국어로, 위치 닥터는 영어로 말하는 기묘한 대화가 이어졌다.

"다시 소개할게요. 위치 닥터로 불리는 콘스탄티나 스타닐라라고 해요."

적으로 마주쳤는데 우아한 척 하기는. 하여간에 빌런이란 녀석들의 미친 사고회로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

자고로 적을 만나면 우선 손부터 쓰는 거다.

기선을 제압하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니.

기습 효과까지 나오면 금상첨화였고.

"츠요시는 어떻게 됐지?"

"그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꽤 강하던······."

콘스탄티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내가 누리로 시전한 칼날폭풍이 그녀를 휩쓸었다.

완벽한 기습의 묘를 살렸기에 녀석의 대응이 한 발 늦었다.

황급히 손을 뻗어 포스 장벽을 시전했지만 단정했던 정장이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었다.

팔다리 중 하나 정도는 날려 버리려고 한 건데 생각보다 효과가 없군.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콘스탄티나의 표정이 지워졌다.

"···아르고스의 말대로네요. 당신, 굉장히 무례해."

"그래서 츠요시는?"

"강자에게 대항한 대가를 치렀답니다."

"안타깝군."

"살아 있다는 생각은 안 하네요?"

"난 살려 둔 적 없거든."

아쉬웠다. 진심으로. 부동심만 있었으면 만독불침과 세트로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미치지 않을 수 있는 보험 세트가 완성되는 거였는데.

입맛이 쓰군.

죽고 10분이 넘으면 혈중섭식으로 기프트 복사가 불가능하다.

"질문에 대답했으니 제가 원하는 말을 듣고 싶네요."

"뭔데."

"헤드 브레이커, 우리 리그에서 함께 하지 않겠어요?"

이 말일 줄 알았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군. 리그도 참 집요하다 싶었다. 아니, 아르고스가 집요한 건가.

내가 미쳤냐, 빌런도 아니고 빌런이 될 생각도 없는데 빌런 조직에 왜 들어가나.

"아르고스가 또 헛소리했나."

"아니요."

"그럼?"

"오히려 당신은 리그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빌런이라고 했어요. 근데 내 생각은 달라. 충분히 함께 할 수 있다고 보이는데. 오면 좋은 게 있을지도?"

눈웃음을 치며 혀로 입맛을 다신다.

마그네슘이 부족한 건지 배고픈 건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다른 곳에 도달해 있었다.

"···그 미친놈이 그런 소릴 했다고?"

나더러 빌런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극찬하며 리그로 오라더니.

이제는 빌런이라서 감당하기 힘들다고?

굉장히 기분 나쁘다.

애초에 난 리그에 가입할 생각도 없었다. 당연히, 난 빌런이 아니니까.

그런데 리그에서 받아 주지 않겠다고 하니 이것도 기분이 나쁘다.

어처구니없군.

"말이 심하네요."

"뭐가."

"방금했던 말."

내가 칼날폭풍을 시전해도 웃던 콘스탄티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아르고스는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에요."

"어쩌라고."

빌런 중에 정점에 있는 놈이니 가장 미친놈이 확실하지.

신기한 건 미친놈을 미친놈이라 하는 걸 부하 미친놈이 기분 나빠하는 것이다.

이건 속된 말로 덜 미친 거다. 현실부정 중인 거지.

버서커같이 진짜 미친놈은 미쳤다고 하면 웃어넘긴다.

"아무래도 자기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네요. 자기 수준을 알려 줘야겠어."

내 손에 죽던 녀석들이 가장 많이 하던 말이다.

"네 수준이나 깨닫고, 죽어라."

난 웃으며 손을 뻗었다.

* * *

'시험해 보겠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지만··· 강해.'

콘스탄티나는 최준호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여유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피하는데 급급했다.

최준호는 아직 여유가 넘치고 있음에도 공격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손에서 이글거리는 뇌전을 제 몸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이 또한 보고서와 달랐다. 근접거리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5m 이상의 반경을 커버할 수 있었다.

집요할 정도로 신체 내부를 파괴하는 기뢰라는 공격은 프란츠의 블리츠와 동일한 것으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콘스탄티나는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프란츠와 마주했던 적이 있다. 손의 번개를 제 몸처럼 다루던 그는 자신이 왜 십대초인의 일원인지 알게 해 줬다.

지독할 정도로 강하던 영감이 떠오르자, 기분이 안 좋아졌다.

여기에 수십 개의 포스 블레이드를 한정된 영역에 휘몰아치게 만드는 기프트까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최적화 된 기프트로 무장하고 있었다.

파지직!

방금 공격도 가까스로 피했으나 머리를 스치면서 우수수 쏟아졌다.

하마터면 머리가 통째로 날아갈 뻔한 일격이었다.

"직접 전투력은 낮다고 들었는데, 역시 정보가 믿을게 못 돼."

"······."

콘스탄티나는 대답하지 않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전투도 전투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저주였다. 이걸로 상대의 전투력을 무지막지하게 깎아 내는 것이 그녀의 전투 스타일. 가장 큰 문제점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하는 점이고 강력할수록 발동조건이 까다롭다는 점이다.

저주를 걸기 위한 영역으로 최준호를 끌어들일 것, 이미 발동중인 저주가 본격적인 대상을 설정할 시간을 버는 것 등등 저주마다 조건은 다양했다.

저주가 강력할수록 발동 조건이 많고, 간단한 것일수록 발동 조건이 적어진다.

초인과 대결에서 콘스탄티나가 선호하는 건 사소하게 감각을 교란하는 저주다.

초인은 정밀한 부품 수천수만 개로 이루어진 존재. 하나가 어긋나면 그 균열은 빠르게 전체로 퍼져 나간다.

최준호의 신경을 어긋나게 만들기 위해 미리 준비한 저주를 발동했다.

주변 공기 흐름을 왜곡하고, 청각을 살짝 저하시키는 저주다. 이것은 포스 운용과 몸의 균형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찌이잉!

"잔수작이군."

저주가 먹혀들지 않았다.

이건 초인 본인이 가진 저항력이 아니다. 기프트다. 웅혼한 포스 위로 작은 파문조차 일으키지 못하게 만드는 기프트가 존재하는 것이다.

'왜 아르고스가 그렇게 말을 한 건지 알겠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최준호는 이대로 두면 세계 최강은 물론, 리그 앞길마저도 가로막을 것이다.

어쩌면 아르고스 말대로 리그를 파멸시킬지도.

어떤 초인이더라도 블랙하운드와 헬 마스터에게 걸리면 끝이 난다.

하지만 헤드 브레이커는 아니다. 이미 같은 반열에 올라서 있다.

가차 없이 머리를 부숴 버리는 초인.

빌런으로 이보다 더 적합한 이명이 없는데.

리그에 가입하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면서 그 생각이 씻은 듯 사라졌다.

저주라는 기프트를 가진 자신을 왜 보낸 건지 아르고스의 의도가 이해되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죽일 수 없는 초인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저주를 발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장 저주를 막아내고 있지만 츠요시의 부동심을 파훼한 것처럼 방어 기프트도 파훼할 방법이 존재한다.

두웅!

발을 구르자, 포스 구름이 피어나면서 저주가 발동한다. 저주로 균형감각을 무너뜨리자, 최준호의 공세가 잠깐이지만 느슨해졌다. 대신 콘스탄티나의 어깨가 주저앉았다.

"흑!"

"제법인데?"

어깨를 내주고 잠깐 가로막은 게 전부다. 하지만 틈을 만드는데 성공한 콘스탄티나의 눈이 빛났다.

방어 기프트를 파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발동하는 속도를 늦추고 저주가 잠식하는 속도를 빨리 하는 것이다.

주저앉은 어깨를 빠르게 맞추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최준호가 밀어붙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콰득! 콰드득! 콰직!

팔이 부러지고 손목이 뒤틀렸다. 비틀거리면서 세 차례 저주를 중첩으로 발동한 콘스탄티나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끝났어."

생애 자신이 벌인 모든 혐오스러운 짓을 일시에 떠오르게 만들어 정신방벽을 무너뜨리는 저주, 디스거스트(Disgust).

부동심을 가진 츠요시조차 버텨 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벨 수박에 없던 저주였다.

최준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사이 빠르게 부러지고 뒤틀린 팔을 맞추며 콘스탄티나가 접근했다.

최준호가 가진 방어 기프트를 무너뜨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바로 앞에 도달한 순간, 뻗어오는 손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콰득!

"아악!"

팔이 정반대 방향으로 꺾여 피가 뿜어지고 뼈가 튀어나왔다.

다행히 저주 여파가 남았는지 최준호가 뒤를 쫓지 않았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으면 팔이 아니라 목이 꺾였을 거다.

"안 속네. 걸린 척하면 완전히 낚을 줄 알았는데."

"어, 어떻게?"

"별거 아니던데. 다 남 탓하면 되거든."

"······."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저렇게 몇 마디 말로 넘어갈 만큼 가벼운 저주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부정적인 기억을 일시에 폭발시키는 저주였다.

최준호가 젊다고 해도 그가 벌여 온 일을 생각할 때 살아온 세월이 짧아 정신은 약할 것이고, 업보는 강하게 닥쳐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버텨 냈다.

"미친놈 탓으로 몰면 되는데, 확실히 저주란 게 새롭기는 해."

최준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대로 흐름이 이어지면 죽는 건 자신이다.

"···아직 안 끝났어!"

그가 달려드는 순간, 입술을 깨물어 피를 터뜨린 콘스탄티나는 자신을 제물로 하여 저주를 발동했다.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최준호가 선 곳을 중심으로 붉은 피가 그려진 형이상학적인 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항거불가능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해 둔 저주였다.

이 저주를 발동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다.

하나는 시전자의 피와 생명력.

다른 하나는 초인의 심장과 피.

또는 유해 8단계 마물의 심장.

일시에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켜 인격을 파괴시키는 궁극의 저주.

"네거티브(Negative)."

부정적인 모든 감정을 폭발시킴으로써 모든 걸 앗아 간다.

자아가 있고, 욕구가 있는 존재라면 이 저주를 절대 버텨 낼 수 없다.

"헛수작을······."

코웃음치던 최준호의 움직임이 멎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했다. 저주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유해 9단계, 리그의 삼악조차 한번에 이 저주로 자아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걸 버텨 낸다고?

생명력이 빠져나가 처음보다 20년 넘게 늙어 버린 콘스탄티나가 치를 떨었다.

"이 괴물!"

그녀는 간신히 맞춰 놓은 팔에 느껴지는 통증을 감수하고 최준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기뢰였다.

퍽!

저주에 저항하느라 전보다 느려졌지만 무위는 여전했다.

배에 기뢰를 적중당한 콘스탄티나가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다.

다행이라면 저주에 저항하는 최준호가 쫓아오지 않았던 것.

믿기지 않았다.

···정녕 사람이란 말인가.

최준호를 향한 콘스탄티나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인간의 수준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악의 화신이다.

그때였다.

"만독이 이 자식 똑바로 일 안 하네······."

강렬한 안광을 뿜어내던 최준호의 눈이 어느 순간 탁 풀렸다.

저주가 집어삼킨 것이다!

콘스탄티나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끝났어!"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쓰러뜨렸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동공이 풀린 지 0.1초도 되지 않아 폭발적인 붉은 안광이 뿜어지며 콘스탄티나 앞으로 칼날폭풍이 휘몰아쳤다.

"아악!"

칼날폭풍에 무방비로 노출된 콘스탄티나의 왼쪽 어깨가 뜯겨 나갔다. 그녀는 망연한 표정으로 최준호를 바라보았다. 저주에 자아가 무너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회복했다고?

"마, 말도 안 돼!"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괴물인가!

이런 자를 리그가 상대해야 한다고?

마지막 남은 삶의 희망마저 사라졌을 때였다.

"말도 안 되는 일어나니 세상이 재밌는 거지. 네 저주 덕분에 잠깐 빌려 쓸 수 있게 됐다."

최준호의 안면근육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는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비웃고 있는 것 같은 모습.

조금 전과 다른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비슷하면서 다르다. 이건 최준호가 아니다.

콘스탄티나는 전혀 다른 존재가 최준호의 몸을 차지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웃긴 녀석이야. 과거로 돌아와 낌새도 풍긴 적 없는데 내가 등장한다고 난리법석을 피우기나 하고. 좁은 골방에서 24시간 내내 기회를 엿봐야 하는 내 입장이 얼마나 서글픈지 알아?"

최준호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누가 보면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격체인 줄 알겠어. 내가 누구를 기반으로 탄생한 건데, 자기는 다르다고 유세 떨기는. 그 나물에 그 밥인데.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최준호. 넌 혈종이 인정한 미친놈이니까. 그건 그렇고··· 아차차."

그리 말하던 최준호가 혀를 차더니 콘스탄티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광기가 끓어오르다 못해 차분해진 눈과 마주한 순간, 콘스탄티나는 소름이 번져 가는 걸 느꼈다.

"내가 지금 잠깐 빌려 쓰는 거라 시간이 많이 없거든?"

또 다른 최준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니 나랑 놀자."

101화

최준호의 육체와 정신을 파고드는 저주는 강력했다.

여느 초인이라면 저주에 휘말려 영향력 아래 놓일 정도.

그러나 최준호 상황은 달랐다.

그가 갖춰 놓은 정신방벽, 웅혼한 포스 벽은 두터워서 저주가 파고들 틈이 없었다.

츠요시의 부동심조차 깨 버린 디스거스트가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지만 네거티브가 발동하는 순간, 저주 일부가 벽을 허무는데 성공했다.

수성을 책임지는 것은 만독불침이었다.

만독불침은 고민했다.

저주의 종류는 정신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강력하게 행사하는 것이다. 주인의 정신에 심각한 손상을 끼칠 수 있었다.

자칫하면 정신에 문제가 생길지도.

인격이 바뀔 수 있는 강력한 저주였다.

그런데.

만독불침의 고민이 깊어 가는 지점은 이거였다.

[정신에 더 문제가 생길 게 있나······?]

만독불침이 진단한 주인의 정신 상태는 심각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

[저주로 인격이 바뀌면, 좋은 거 아닌가······?]

더 나빠질 게 있나 싶었다.

주인의 몸에 자리 잡은 이후, 뒤틀린 정신을 되돌리려다가 강제로 진압을 당했지만 만독불침의 의문은 여전했다.

주인의 정신은 이상하다. 근원부터 뒤틀려 있다. 이걸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변화가 없다.

하지만 주인의 힘이 너무나 강하다. 혼자서 역부족이다.

그런데 저주와 힘을 합치면 상황은 달라진다. 앞장 서는 저주를 도와 주인의 정신이 되돌아오게 하면 주인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

그래서 저주의 힘과 연합하여 주인의 정신을 되찾게 만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인이 정상이 되면 좋겠다.

만독불침의 바람은 오직 그거 하나였다.

저주와 힘을 합쳐 잠깐이지만 주인의 정신 방벽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뒤틀린 구조만 바로잡으면 된다고 생각했을 때, 수면 아래에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인격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놓고 뒤틀려 있는 정신.

주인이되 주인이 아니다.

분명 주인의 향기가 느껴지는데 왜 다른 느낌이 드는 걸까.

피처럼 붉게 물든 이것도 미쳐 있었다.

이 정신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한다.

[안 돼. 주인의 몸을 차지하려고 하고 있어.]

반격에 나서려던 만독불침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상해.]

어느 게 제정신인지 판별이 불가능했다.

주인의 본래 정신도 뒤틀려 있고, 이건 대놓고 뒤틀려 있다.

···누가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없었다.

전부 이상하다면 전부 이상했고, 용납할 수 있다면 둘 다 용납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뒤틀린 정신이 수면 위에 떠오른 것도 미쳐 버린 게 아니라 그냥 성향만 달라진 게 아닐까?

그럼 꼭 바꿔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둬야 하는 걸까?

혼란에 빠진 만독불침이 이도저도 못 할 때였다.

-야.

안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이건 주인의 목소리다.

만독불침은 자기도 모르게 거센 떨림을 일으켰다.

주인이 어떻게 말을 거는 거지?

어떡하지? 무시하고 조용히 있어야 하나?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대답 안 하냐?

만독불침은 결국 떨림으로 대답했다.

바로 앞에 주인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느낌이었다.

-일하자?

[······!]

주인의 경고는 그것이 끝.

만독불침은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둘 다 뒤틀려 있는 거니까. 본래 주인으로 되돌리고 기회를 엿보자.

그때부터 만독불침은 주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저주 여파를 소멸시키고 주인 대신 육체를 차지한 인격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옆에서 도왔다는 말이 옳았다.

자신이 없어도 주인은 이미 저주를 해소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주인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만독불침은 자신의 존재가 없었어도 주인이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옆에서 열심히 했으니까.

자신의 충성심이 증명됐겠지?

-만득아.

주인은 육체 통제권을 되찾기 전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자기 이름은 만득이가 아닌데.

하지만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잘하자, 알았지?

만독불침은 알겠다며 필사적으로 수긍했다.

-지켜본다.

그렇게 주인이 통제권을 되찾으러 떠났다.

만독불침은 안도했다.

* * *

콘스탄티나는 자신의 저주가 먹혔다는 걸 확인했다.

초인의 피와 심장으로 구축한 저주 네거티브(Negative)는 십대초인급이라고 해도 피할 수 없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망라하여 일시적으로 폭주시키는 이 기프트는 자아를 붕괴시키는 힘을 지녔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아, 아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콘스탄티나의 눈에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그의 지부가 모조리 불타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옥이었다.

그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나는 사지가 잘려 바닥에 쓰러져 있기 때문.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게 전부였다.

자기 앞에는 함께 일본으로 넘어왔던 초인은 진즉에 최준호에게 사지가 잘려 과다출혈로 사망한 상태였다.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모습은 보기 좋아. 발버둥 칠수록 바닥은 피로 붉게 적셔지거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광경이야. 약자는 이렇게 대우해 줘야 자기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깨닫거든. 물론 다음 기회는 없어."

최준호, 아니 혈종은 자신이 펼친 풍경을 감상하며 웃었다.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폭발적으로 발산되던 안광이 그윽한 빛을 띠었다.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이런 미친 빌런이 모습을 드러낸 걸까.

다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이 미친 빌런을 불러온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흡족하게 참상을 감상하던 혈종이 콘스탄티나에게 시선을 옮긴다.

"어때, 너도 좋지? 좋은 구경 시켜 주려고 호의를 베푸는 거야."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는다.

"······."

이건 조롱이었다. 약자를 향한 능멸이다.

아르고스가 옳았다. 이자는 빌런이다.

아르고스나 블랙하운드, 헬 마스터는 신념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기존 질서와 충돌하며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빌런이란 오욕을 감수했다.

그 본질이 빌런이지만 각성자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란 대의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자는 다르다.

모든 걸 짓밟고 파괴하기 위해 나타난 빌런이다. 그 파괴는 오직 본인의 쾌감을 위해 자행되었다.

순수한 거대한 악의 앞에 짓밟힌 콘스탄티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잃은 채 리그 지부가 소멸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혈종의 칼날폭풍 앞에 리그의 빌런들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러곤 만족스럽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린다.

"이 기프트는 효율은 좋은데 손맛이 떨어지잖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이자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

콘스탄티나가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리고 숨소리를 작게 조절했다.

상대에게 완전히 굴종했다는 표시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야."

"네."

"내 예술 작품이 어떠냐."

"···너무나 압도적인 힘이에요. 이런 분에게 제가 저항하려고 했던 게 얼마나 무모했는지 깨달았어요."

"그래? 눈치가 제법 빠르네."

"네, 그렇죠. 한없이 어리석은 절 꾸짖어 주세요."

콘스탄티나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비위를 맞췄다. 발을 핥으라면 핥을 수 있고 짖으라면 짖을 기세였다.

히죽 웃던 혈종은 방금 전에 죽인 빌런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가 악랄한 이유는 칼날폭풍의 위력을 조절해서 상대에게 최대한 많은 고통을 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갈가리 찢겨 나간 빌런들은 죽지도 못한 채 걸레짝이 되어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그리고 과다출혈 쇼크가 발생해서 생을 마감.

그렇게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게 더 많을 정도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혈종이 혀를 찼다.

"오랜만에 나왔는데 고작 이 정도라니, 여흥거리도 안 되잖아. 차라리 리그 본부 앞이면 좋았을 텐데."

힘 조절 없이 칼날폭풍을 시전하자, 포스에 휘말린 시체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아, 아아······!"

콘스탄티나는 전율했다. 그녀 또한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여 왔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죽이는 것 그 자체를 행함에 있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얼굴에 튄 피를 혀로 할짝거리며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라.

혈종의 시선이 콘스탄티나에게로 옮겼다.

"살고 싶다고?"

"사, 살려 주세요."

"내게 저항하던 녀석이 이 꼴이 된 걸 보여 주고 싶긴 해. 그래야 날 더 두려워하고 범접하지 않으려 할 거 아니야."

"그럼······."

"살려 줄게."

콘스탄티나의 두 눈에 희망이 서렸다.

살 수 있다. 살아서 돌아가 알려야 한다. 그 후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시선이 마주치자 혈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뻥이야."

"무슨······."

그대로 콘스탄티나의 목이 몸과 분리되었다. 두 눈이 부릅뜨인 그녀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 좋다."

혈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랜만에 보는 피 맛은 황홀할 정도로 달콤했다. 비릿한 혈향이 가져다주는 붉은 풍경은 삶을 의미했고, 검붉게 변해 가는 것은 끝을 의미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충분히 즐겼다.

"보채기는. 다음에 또 보자고."

혈종의 눈에 발산되던 붉은 안광이 점차 옅어졌다.

오랜만에 이루어진 잠깐의 외출.

즐기기에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것만으로 최준호에게 깊은 자상을 남겼으니까.

"그리고."

혈종은 소리 죽여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네가 더 미친놈이야."

그 말을 끝으로 붉은 안광이 자취를 감추었다.

* * *

제정신으로 돌아온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참혹한 시산혈해였다.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광경이지만 난 두 눈으로 현장을 담아냈다.

아무리 거부해도 내 손으로 만들어 낸 참사임을 부인할 수 없으니까.

익숙한 느낌이다. 저번 생에 내가 숱하게 봐 왔던 풍경이다.

혈종이다.

"안 사라졌던 건가."

과거로 돌아오면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혈종은 과거의 잔재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 바람이었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콘스탄티나의 얼굴이 보였다.

끝까지 농락당하다가 최후를 맞이했을 거다. 혈종은 그런 녀석이다.

빌런이 되기 위해 탄생한 뒤틀린 자아. 나는 그걸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미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아니다, 이번은 다르다. 저번 생에는 저항할 틈도 없이 녀석에게 모든 걸 다 내어 줬지만 이번 생에서 주도권은 내가 가지고 있다.

콘스탄티나가 필생의 역작으로 발동한 저주와 만독불침의 태업이 있고 나서야 혈종이 잠깐 튀어나온 것에 불과했다.

내가 다시 주도권을 되찾은 것 자체가 달라진 상황을 의미했다.

"만득이 녀석을 확실하게 교육시키면 되겠어."

만독불침이 자아를 갖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차근차근 진도를 밟아 나가면 된다.

녀석이 오락가락해서 혈종에게 잠깐 통제권을 내어 줬지만 얼마나 대단한 기프트인지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만독불침을 앞으로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내 뒤로 은밀히 접근하는 인기척이 있었다.

쐐액!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칼날을 가볍게 피해 내고 달려드는 녀석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콰드득!

"컥!"

어깨가 우그러지면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녀석을 보며 나는 가차 없이 누리를 휘둘렀다.

섬광처럼 뻗어 나간 칼날 폭풍에 녀석이 버텨 냈지만 거듭 중첩되어 파고드는 포스 블레이드에 휘말려 팔다리가 잘려 나갔다.

"크아악!"

굳이 팔다리를 날려 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이건 혈종의 처리 방식이다.

나도 모르게 혈종의 손속이 잔향처럼 남았나 보다.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는 녀석을 처리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직접 마주친 적 없는데 친숙하다? 크게 의미가 있나 싶다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내각에서 행여나 보게 되면 생포해 달라고 부탁하던 얼굴이다.

일본 소속 초인이다가 리그로 옮겨 간 초인. 이명이 환월이라고 했던가. 어쩐지 접근하는 게 은밀하다 싶었다.

원래 죽이고 살려 두고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혈종이 튀어나와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으니 호의를 베풀기로 했다.

여기서 죽여 버리면 나와 혈종이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 같고.

팔다리가 없긴 한데 목숨 붙여서 데려가면 일본 내각에서 좋게 값을 치러 주겠지?

이세희에게 의뢰했던 팔다리 붙여주는 포션이 완성되지 않은 게 아쉽군.

"상처야 나아라."

난 회복제를 꺼내 부어 줬다.

102화

"헤드 브레이커!"

가만히 앉아 있던 아르고스의 몸이 들썩이며 눈을 부릅떴다.

깜짝 놀란 하인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

"······."

하지만 아르고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에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눈에 힘을 준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티나가 죽었어."

"······."

"아주 처참했어. 온몸이 갈가리 찢겨나간 채, 끝까지 삶에 대한 의지를 농락당했어."

"콘스탄티나."

블랙하운드가 눈을 감았다. 리그에 들어왔던 콘스탄티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악을 혐오하던 그녀는 위치 닥터라는 위명과 달리 빌런에 어울리던 여인이 아니었다. 그래도 늘 자기 자리에서 빛을 발했었다.

리그의 대의에 동참하며 아름다운 결과를 보길 바라던 동지였는데.

"헤드 브레이커의 소행인가."

"맞아. 근데 달라."

"어떤 게 다르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미쳐 있었어. 평소 헤드 브레이커와 다른 방향으로."

아르고스는 그가 최준호이되 최준호가 아니라고 말했다.

블랙하운드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콘스탄티나의 죽음이 아쉽지만 아직 대처할 시간이 있을 거다. 우선 파견 나간 전력을 추슬러야······."

"늦었어."

"무슨 의미지?"

"다 죽었어. 전부 다. 헤드 브레이커 소행이야."

후쿠오카에 마련된 리그 지부에는 콘스탄티나를 포함해서 네 명의 초인과 이백 명이 넘는 빌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죽었다고?

경악하는 블랙하운드에게 아르고스가 시선을 고정했다.

"하인즈."

"안 된다."

바로 나오는 거절.

그 말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르고스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드 브레이커를 죽이려면 상성상 걔가 더 나아. 너도 알잖아.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는 걸."

"안 된다. 네가 버텨 내지 못해."

"······."

"네 목적은 헤드 브레이커를 죽이는 게 아니다. 널 바라보는 소속원들을 생각해라. 헤드 브레이커를 맞상대하지 않아도 목표는 이룰 수 있어."

"하지만 헤드 브레이커를 제거하지 않으면 벽에 가로막힐 거야."

아르고스는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않았지만 블랙하운드는 강경했다.

"녀석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최악을 제거하기 위해 최악을 부르지 마라."

"···하인즈 네가 그리 말한다면 넘어가겠어. 하지만 헤드 브레이커는 언제고 우리의 목을 움켜쥘 거야."

"그땐 어쩔 수 없겠지."

하인즈는 아르고스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고 느꼈다.

최준호를 향한 집착이 지나치다.

블랙하운드는 그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참고 넘어갔다.

자신이 아는 아르고스라면 금방 냉정을 되찾고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올 거라 믿었기에.

"미안해, 티나."

* * *

혈종이 다시 깨어난 것은 내게 큰 위기감을 가져다주었다.

다시 미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어서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 다짐했건만.

그 정도로 콘스탄티나의 저주는 강력했다. 잠깐이지만 정신이 이탈할 정도로.

만득이가 있어서 곧바로 상태 이상을 회복했지만 혈종의 인격이 등장한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이게 다 만득이 녀석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날 적극적으로 돕지 않고 간을 봐? 혈종을 소멸시키기 전에 녀석을 단단히 교육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렇고.

기어이 끝까지 따라온 혈종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이 깊어졌다.

녀석은 알지 모르지만 나는 녀석이 하던 말을 다 들었다.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한번 해 보자고."

콘스탄티나의 저주 같은 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

정신방벽을 더 두텁게 쌓고, 만득이를 확실히 조련해야겠다.

상념을 정리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혈종이 저지른 참사였지만 내가 저지른 걸로 될 것이다.

다시 봐도 느끼지만 자기 재미를 위해 학살을 저질렀다.

나라면 좀 더 효율적으로 처리했을 텐데. 이러니까 전투를 할 때 불필요한 부상을 입고 하는 것이다.

하긴, 미친놈에게 뭘 기대할까 싶냐마는.

"슬슬 도착할 텐데."

일은 저질렀으니 수습을 해야 한다. 나는 대기하고 있을 군지 등에게 연락을 보냈으니 곧 올 것이다.

약 30여 분이 지나고, 자동차 배기음 소리와 함께 수십 대의 차량이 공장 부지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에서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 작전 실행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일본 측 각성자들이다.

"······."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은 이내 자신들이 보는 게 시체로 이루어진 산이고 피가 고인 웅덩이임을 알아차리고 반응을 보였다.

"우욱!"

"뭐, 뭐야! 우웩!"

"우웨엑!"

이 정도로 난리법석 떨기는.

빌런을 죽이다 보면 이거보다 더 참혹한 광경도 숱하다. 이 장면에 익숙하지 않다는 건 그만큼 면역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음, 생각해 보니 이거보다 더 참혹한 광경도 내가 혈종이던 시절에 벌인 거였다.

각성자로 활동하면서 보기 힘든 광경이긴 하겠군.

간신히 토하는 걸 참아낸 각성자들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거나 떨떠름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답답하다, 내가 한 게 아닌데. 혈종이 다 한 건데.

하지만 내 몸에 튄 피들이 내가 벌인 참사인 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각성자들을 이끄는 리더인 군지가 앞으로 다가왔다.

"군지."

"헤드 브레이커, 이건······."

"다 죽였다. 일본에 더 이상 리그 세력은 존재하지 않아."

"······."

군지는 굳은 표정으로 시체의 산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하나 있는데.

나는 옆에 쓰러진 사지가 잘린 녀석을 가리켰다.

"이 녀석은 너희를 배신하고 떠난 초인으로 아는데."

내가 말할 때까지 시체로 알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과다출혈로 죽지 않게 회복제를 사용해 줬다.

군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나카야마."

"맞지?"

"맞다. 환월(幻月) 나카야마. 한때 우리의 동료였다."

지금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군. 내각 입장이랑 군지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환월 나카야마는 일본 초인 중 가장 젊은 초인으로, 일본 내에서 잔뜩 기대받던 초인이란다. 장래가 촉망되었기에 리그로 전향했을 때 충격이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그런 놈이 어디 한둘인가.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내각의 부탁이 있어서 죽이진 않았어. 잘린 팔다리는 저기 있으니 가져다가 붙여 봐. 설득을 하던 죽이건 난 신경 쓰지 않을 테니."

"고맙다, 그리고······."

말끝을 흐린 군지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츠요시는 죽었다. 콘스탄티나가 피와 심장을 저주 매개로 사용했어."

안에 시체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고 하니 군지가 알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를 수색하고 츠요시의 시체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

애초에 내가 온 목적이 일본으로 오는 리그 세력 일소였으니까.

힘을 합쳐서 해결하려던 걸 나 혼자 해결한 셈이 되었지만.

일본 각성자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지켜보다 내게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박영후였다.

"초인님."

"이 자리에 굳이 안 와도 되는데요."

"혼자 남아 대기해서 뭐하겠습니까."

차라리 이렇게 찾아와서 얼굴 도장 찍는 게 더 점수 따는 거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뭘 좀 아는 양반이로군.

근데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

태연하게 얘기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애써 시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거 같고.

설마 겁먹은 건가.

생긴 건 시체밭에서 삼시세끼 먹을 것처럼 생겨서는 의외로 섬세하군.

한번 직시하게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안에 같이 들어가시죠?"

"···전 여기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저 따라오려는 거 아닙니까?"

"그렇기는 한데······."

"그럼 가시죠."

"제발······."

박영후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군.

더 했다가는 토할 거 같아서 멈췄다.

"그럼 현장은 일본 측에 맡기도록 하죠."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려까지는 아니고, 더 손을 대 봤자 좋을 게 없어보여서."

딱 지금이 빠져 줄 타이밍이다. 박영후가 감탄하는 표정이 되었다.

"감탄했습니다. 최근 초인님의 정치감각이 범상치 않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단하시네요."

고작 이 정도가?

"잘 모르겠는데요."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상위 10%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은 뭐하지만 높으신 분들은 그게 굉장히 잘 안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 거 같다. 근데 그거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눈치를 어디에 밥 말아 먹은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박영후도 동의했으니 행동으로 옮길 때다.

"그럼 우리는 복귀하죠."

"예? 아예 현장을 벗어나실 생각이십니까?"

현장을 맡기기로 해 놓고 뭘 그리 놀라시나.

"그 정도가 아니라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비행기를 준비하세요."

"예에?"

기왕 빠져 주는 거 확실하게 빠져 줘야지.

나카야마를 과다출혈도 안 죽게 하려고 회복제 사용한 거 때문은 아니다.

사실 저렇게 회복제를 사용해 놓으면 팔다리 붙이는 게 굉장히 어렵거든.

진짜 그거 때문이 아니다.

정말로.

* * *

후쿠오카 대참사.

최준호가 일으킨 혈겁을 보고 붙여진 사건 이름이다.

보통 참사라고 하면 아군 측 피해가 엄청날 거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일본 측 피해는 컸다.

무려 초인이 죽었으니까. 부동심 츠요시는 핵심 전력 중 하나였기에 그를 잃은 건 뼈아픈 손해였다.

하지만 리그가 입은 피해는 압도적이었다. 아예 일본 지부 세력이 소멸되었을 정도였으니까.

참사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살육이 벌어졌다.

리그 소속 초인 셋이 죽고, 한 명은 병신이 되었다. 죽은 초인 중 하나는 무려 12궁의 일원인 위치 닥터 콘스탄티나 스타닐라였고.

12궁의 악명은 대단하다. 리그의 중추이자 세계 각지에서 악명을 쌓아 나가고 있는 빌런으로, 위치 닥터는 직접 전투력은 낮다고 하나 유럽에서 보여 준 실력은 재앙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그녀의 힘을 악용하려던 루마니아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당시 십대초인이던 프란츠의 손에 유유히 벗어난 것만으로도 콘스탄티나가 얼마나 대단한 초인인지 증명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콘스탄티나가 죽었다.

뿐만 아니라 죽은 빌런도 이백여 명에 달했다. 그중 레벨 7에 도달한 빌런이 열 명이 넘었고, 레벨 6이 백 명이 넘었다.

말 그대로 한 국가의 전력이 소멸한 것이다.

고작 한 사람에 의해서.

다케다 총리는 이 보고서를 받아들고 현장 담당자가 잘못 적은 줄 알고 다시 한번 재확인 절차를 거쳤을 정도였다.

하지만 보고서 내용은 사실이었다.

"······."

총리실에 불려 온 각성장관은 보고서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총리가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보인 반응이 방금 전 자신의 반응이었다.

"믿어지나?"

"···솔직히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듭니다."

"나도 마찬가지네. 그런데 사실이라고 하더군. 몇 번이나 교차검증을 했는데도 말이지."

"하하."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보니 저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게 인간이 벌인 일이 맞단 말인가?

차라리 최근 대두되고 있는 플러스 플러스 단계 마물이 리그 지부를 습격했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총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이 수준이면 어느 정도라 보는가? 삼악? 십대초인?"

"설사 그들이라 해도 이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 최준호가 그들보다 위에 있다는 건가?"

"보여 준 성과로 비교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12궁의 일원인 콘스탄티나가 직접 전투 능력이 부족한 초인이라고 하나 리그 지부에 모인 전력은 전 세계 국가를 통틀어도 파워 랭킹 10위권에 준하는 전력이었다.

일본조차 정면으로 리그 지부를 없애려고 하면 피해를 복구하는데 30년 이상을 봐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력이 후쿠오카에 몰려 있었다.

최준호는 그곳을 홀로 소멸시켰다.

총리가 탄식을 터뜨렸다.

"최준호가 세계 최강이란 뜻이로군."

"예, 하지만 보고서만으로 믿는 건 섣부릅니다."

각성장관은 신중론을 꺼내 들었지만 그 또한 머릿속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축소를 하고, 후려치더라도 참사를 일으킨 최준호의 성과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 자리에 누가 있던 게 아니니까.

차라리 최준호를 침투시키기 위해 저만한 전력을 버렸다고 말하는 걸 믿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실컷 과소평가를 해도 최소 십대초인 수준이란 거로군."

"······."

각성장관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 십대초인 중 최상위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특히 일본을 빛낼 초인이던 환월 나카야마는 사지가 잘린 채 송환됐다. 가까스로 팔다리를 다시 붙였지만 본래 무위를 회복하는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일부러 그런 것인가?

강한 의심이 들었지만 숨을 붙여 무사히 돌려보냈으니 따질 수 없는 일이다.

츠요시를 잃으면서 일본은 한 명의 초인도 필요한 처지였다.

각성장관이 간언했다.

"최준호를 눌러 앉히십시오."

"무슨 말이지?"

"타국의 초인이지만 그가 이뤄 놓은 성과는 실로 큽니다. 찬양하자면 일본을 구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요."

"···한국에서 할 수 없는 성대한 대우를 해 줘라?"

"예. 그렇게 해서 이 기회에 마음을 우리 쪽으로 돌리는 게 어떻습니까?"

"최준호에게 미인계는 쥐약이라고 하던데."

그 유명한 서큐버스 안나 크리스틴도 최준호에게 물을 먹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미인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공 확률이 높은 계략이었다. 무수히 많은 초인이 미인계에 넘어가 국적을 바꿨고, 리그에 포섭되고 도주하여 빌런이 되었다.

하지만 최준호는 단 한 번도 미인계에 넘어간 적이 없다.

아니,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한때 동성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제가 직접 후쿠오카로 가서 최준호 전담으로 붙겠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취향을 낱낱이 분석해서 일본에 사는 게 이득이라는 걸 알 수 있도록 유도하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지원하도록 하지."

다행히 일본에는 최준호 나이대 남자가 좋아할 만한 애니메이션과 게임, AV 산업 등등이 발달해 있다.

한국에서 즐길 수 없는 컨텐츠 물결이라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

만약 최준호를 눌러 앉힐 수만 있다면, 일본은 여태까지 입은 피해를 모두 만회하고도 플러스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음모는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각성장관이 총리실을 나서려고 할 때, 보고 하나가 더 도착했던 것이다.

"최준호가 출국했다고?"

"예, 급한 일이 생겼다고······."

"왜 안 막았나?"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해서 더 막을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설득할 사람이 현장에 없었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까닭에··· 죄송합니다."

"······."

졸지에 닭 쫓던 개 마냥 지붕만 쳐다보게 된 총리와 각성장관이 침묵했다.

103화

전용기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옆에서 안절부절 못 하던 박영후의 예상과 다른 무척 안전한 귀국이었다.

"역시 한국 공기가 최고라니까."

크게 달라진 것 없지만 기분이 다른 것이 역시 신토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일본은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보니 불편해서.

그래도 된장국 하나는 일품이었다. 종류도 다양하다고 하던데 그걸 다 맛보지 못한 게 유일한 아쉬움이다.

여기에 초밥도 좋았다. 아무래도 도주를 오래 하다 보니 날 것은 별로 먹어 보지 못해서. 내가 원래 또 날로 먹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

내 옆에 선 박영후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랫동안 일본에 있었으니 나보다 더 각별하게 느껴지겠지.

"고생하셨습니다, 초인님."

"수고했습니다."

"위에서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뵙자고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일본에서 거하게 일을 벌였어도 내일 보자고 하는 건 날 배려하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고, 일본에 있어야 할 박영후가 함께 왔다는 건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자세히 듣기 위함일 것이다.

당사자가 이야기하는 것과 제3자가 얘기하는 게 다를 테니까.

아니면 벌써 일본에서 벌어진 일을 접하고 교차검증을 할 수도 있다.

내가 일본에서 벌인 일이 워낙 크다 보니 조심하는 것도 있을 테고.

혈종 녀석이 저지른 일이니 녀석 탓으로 몰고 싶지만 안 먹히겠지?

결국 내 손에 피 묻히면서 저지른 일이니까. 발뺌할 수 없는 게 아쉬운 점이다.

박영후는 그대로 청와대로 향했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뭐, 뭐야? 왜 이리 일찍 와?"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TV를 보던 윤희가 날 보고 놀랐다. 어째 내가 일찍 오는 걸 그다지 반기는 눈치가 아닌데?

"숨기는 거라도 있냐?"

"없거든!"

"그럼 됐고."

수상하긴 했지만 더 채근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여기도 며칠 후면 벗어나게 된다. 과거로 돌아와 꽤 익숙해진 공간인데 떠난다니 싱숭생숭하군.

좋은 기억이 있는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건 언제나 이런다.

내가 혈종일 때 어디 한 곳에 머무른 적이 없다 보니 더 애틋함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혈종. 이 녀석의 등장이 내 머릿속을 계속 복잡하게 만든다.

"무슨 속셈이냐."

과거로 돌아오면서 녀석도 함께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샅샅이 찾아봐도 찾을 수 없고 녀석도 등장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마음을 놓고 있던 게 사실이다.

소멸했다 생각했던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게 드러난 것이다.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걸까.

크게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내 정신 속에 숨어 있는 경우.

나와 한 존재라 판단이 되기에 내가 녀석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을 수 있다.

내 정신의 일부라면 숨을 쉬는 것처럼 존재가 자연스러울 테니까.

두 번째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경우지만 만득이를 보고 생각한 거다.

어쩌면 혈종은 혈중섭식에 있는 자아가 아닐까.

혈중섭식이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전설의 기프트이며, 이 기프트의 자아가 내 것과 결합한 게 혈종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의 기프트를 빼앗는 혈중섭식이 평범한 기프트일 리 없을 테니까.

다만 혈중섭식이 만득이보다 훨씬 선명한 자아를 갖고 있다는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무분별하게 기프트를 취할 때 녀석의 힘이 커진 걸까.

여러 가지 가정을 해봤지만 뚜렷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궁금증 하나는 풀렸다.

"그래서 만득이가 움직였던 거였어."

내가 착각하고 있던 것이다.

녀석은 내 정신에 숨어 있던 혈종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던 건데 내가 잘못 파악하고 만득이의 반란이라 판단했다.

표류하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자 그림이 완성되었다.

나를 위해서 일해 주던 거였다니.

"정상참작을 해 줘야 하나."

내가 좀 모질게 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미안해지는군.

다음에 보면 잘해 줘야겠다.

* * *

다음 날, 차를 몰고 윤희를 신성길드에 데려다주었다.

청와대에 가는 김에 데려다주는 거였는데, 괜히 했다. 가는 내내 윤희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고물차 좀 바꿔."

"아직 잘 굴러가는데?"

"돈도 잘 벌면서 이 구린 차를 몰고 싶냐?"

"난 크게 상관없어서."

괜히 새 차를 몰면 신경이 쓰일 거 같다. 나는 막 몰고 다니는 타입이라, 괜히 좋은 차를 사면 관리해 줘야 할 것 같고 이리저리 신경 쓸 게 많아질 거 같아 버티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차가 얼마나 좋은데?

문콕 당해도 신경 안 쓰이고, 먼지로 더러워져도 그러려니 하고, 내가 과거로 돌아와 힘 조절이 잘 되지 않을 때 실수로 엑셀을 세게 밟았는데도 저속으로 주행해 준 녀석이다.

내가 늘어놓는 장점에 윤희가 폭발했다.

"아오! 내가 하나 사 줘? 그럼 그거 몰 거야?"

"사 주면 몰아야지."

"나한테 용돈은 그렇게 잘 주면서 차 하나 바꾸는 게 아깝냐?"

"그것도 그러네."

주변에서 하도 잔소리를 하니 고려해 봐야겠다. 새 거 사고 막 몰다가 망가지면 바꾸면 되니까. 그래도 버리긴 아까우니 이 차를 세컨카로 쓸까.

정작 써야 할 곳에 망설이고 쓰지 않아도 될 곳에 손이 큰 걸 보면 정상인의 삶을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윤희를 데려다주고 나는 청와대로 향했다.

각성자안보실에 도착하자 천명국이 날 납치하듯 대통령 집무실로 데려갔다.

대통령이 날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화려하게 저질렀더군. 아주 잘했어."

"감사합니다."

"···위험하진 않았나? 상대 전력이 엄청나던데."

"별로 위험하진 않았습니다."

실은 내가 아니라 혈종이 저지른 살육이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손을 썼어도 비슷한 결과였을 거 같다.

이미 박영후에게 대략적인 내용을 전해 들었을 테니 난 순순히 인정하는 걸 선택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콘스탄티나 스타닐라는 직접 전투 능력도 초인에 비해 크게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12궁의 실력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우위에 속한다는 점이다.

콘스탄티나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각자 한 수를 숨겨 두고 있을 테니까.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서 항의를 하더군. 그래도 자기들 은인인데 보답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고."

"무슨 보답이죠?"

"한마디로 개수작이지."

대통령이 이렇게 격하게 말할 줄 몰랐는데.

"어떻게든 붙잡아 두려고 했겠지. 자기들한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줘서 데려가려고."

"그렇군요."

"최준호 초인은 명색이 대한민국 소속인데! 필요할 때 철판 까는 건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

그러면서 대통령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일본 내각을 성토했다.

하마터면 내가 붙들려서 일본의 애정 공세에 시달릴 뻔했단다. 날 눌러앉히기 위해 온갖 공작을 벌일 거라 말하는데, 어차피 내가 거기에 넘어갈 것도 아니고.

근데 대통령이나 천명국을 보면 내가 넘어갈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내가 일본에서 만족스러웠던 건 된장국밖에 없었는데.

음? 설마, 다양한 된장국으로 날 유혹했다면?

···이건 좀 위험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나저나, 이건 대통령의 입장이고.

"저한테는 나쁠 게 없지 않습니까?"

"······!"

대통령과 천명국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의아한 눈으로 보자 대통령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내가 섭섭하게 군 거라도 있나? 응?"

"초인님, 저희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반영할 테니······."

둘이 갑자기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한다.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불만 없습니다. 그냥 일본 내각에서 챙겨 주면 저한테는 나쁠 게 없다는 거였습니다."

받아먹고 내빼도 되니까.

오해가 풀렸는지 둘이 안도한다.

"행여나 그런 말은 하지도 말게. 우리가 실수라도 한 줄 알았잖나."

"그랬습니까."

"그만큼 최준호라는 초인이 대한민국에 중요한 존재라는 걸세."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난 현재도 무척 만족하고 있다. 말도 잘 통하고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커버해 주고 내 편을 들어 주고.

하지만 엄연히 계약관계인 만큼 그런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

내 가치가 올라갈수록 더 안달이 난다는 게 이세희의 조언이었다.

"계약에 충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그거만으로 충분하네."

"별말씀은 없으시네요?"

"어차피 다음 계약은 그 다음 대통령이 고민할 문제잖나. 난 은퇴해서 유유자적 휴식을 취할 테니 상관없는 일이지."

그것도 그렇군.

* * *

최준호가 돌아갔다.

시선이 마주친 대통령과 천명국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속내는 없어 보였지?"

"예."

"다행이군. 그나저나 내가 안 떨고 있었나?"

"평온을 잘 유지하셨습니다."

"그렇군. 다행이야."

대통령은 손을 들어 보였다. 애써 감춰왔던 걸 증명하듯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 실장이 보기에도 그런가? 각성자 시점에서 얘기해 보게."

"이런 각성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일본에서 전해진 소식. 그리고 박영후의 보고는 천명국으로 하여금 두 눈과 귀가 멀쩡함에도 이상현상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이게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성과란 말인가.

보고 또 봐도 믿기지 않았다.

세계 초능력자의 날에 최준호가 초인 셋을 상대로 압도한 적 있다. 하지만 목숨을 건 대결까지 가지 않았기에 다른 초인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프란츠를 꺾은 걸로 십대초인 반열에 올랐을 거라 봤으니.

하지만 후쿠오카 참사로 불리는 사건은 그 선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가 거둔 성과를 보고 세계 최강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이라 볼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특별대우를 하자니 불편하게 생각할 게 뻔하니 우리가 평소대로 대해야겠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걸로 한 가지는 분명해졌군. 절대 최준호의 뜻을 거스르지 말아야 돼. 만약 어긋나서 빌런이라도 되면, 후쿠오카 참사가 대한민국에 벌어질 수도 있어."

그리 말한 대통령이 양손으로 천명국의 어깨를 짚었다.

"대통령님?"

"난 우리 천 실장만 믿겠네. 최준호를 책임져 줘!"

"예?"

보통 이런 걸 책임지는 건 대통령이 아니었나?

하지만 얼굴을 보니 책임질 생각이 1도 없어 보였다.

"자네의 수완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려 있네."

"······."

갑자기 배가 아파 왔다.

* * *

청와대에서 면담을 마친 나는 정다현에게 연락했다.

내가 현재 훈련을 봐주고 있는 건 정다현과 이세희였는데, 둘과 대화를 나눈 끝에 번갈아 훈련을 도와주기로 말을 맞춰 놓았다.

한 명이 훈련을 받을 형편이 되지 않으면 넘어가는 걸로 하고.

이번 순서는 정다현이었다.

-가능해요! 퇴근하고 찾아갈게요!

내 이른 귀국에 정다현이 놀라워하면서 바로 훈련 제안에 응했다.

평소에는 그녀가 먼저 연락을 했지만 정반대가 된 이유는 일본행에서 얻은 게 있어서다.

그게 혈종 때문이란 게 웃을 수 없는 일이지.

이세희에게 연락하니 다음을 기약하면서도 나와 얘기했던 '고유 포스'의 상용화 가능성에 대해 높게 판단했다.

내가 흔적을 남기던 습관을 얘기했던 건데, 이걸 사업적으로 엮어 내는 걸 보면 대단하다 싶었다.

훈련장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다현이 도착했다. 준비운동을 하고 다가오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오늘은 훈련은 조금 다르게 해 보려고 해. 내가 실험해 보고 싶은 게 하나 있거든."

"어떤 건가요?"

"기프트 응용."

만득이의 반란으로 잠깐 혈종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을 때, 혈종이 기프트를 활용하는 방식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오늘 정다현을 지도하면서 그 방법을 사용해 볼 생각이다.

"평소보다 더 고될 거야."

"오히려 바라던 바에요."

결연한 표정 위로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어떤 곤경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게 정다현이지.

검을 든 그녀가 기세를 감추지 않고 온전히 내게 집중력을 쏟았다.

레벨 7이 되면서 확실히 직감을 활용하는 폭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자신의 감각과 직감 사이에 혼란을 겪지 않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알게 되면서 공격을 막아내는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상대 공격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 없기에 정다현은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정다현에게 손을 뻗었다. 내 손에 서린 기뢰를 본 정다현이 뒤로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평소대로라면 닿지 않을 거리였지만 내 손을 떠난 기뢰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하여 정다현에게 작렬했다.

"악!"

비명과 함께 쓰러진 정다현이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경악했다.

"어, 어떻게?"

"기뢰의 응용 버전이야."

그동안 내가 기뢰를 사용하는 방식은 엄밀히 말해 저번 생에 혈종이 사용하던 방식을 베껴 왔다.

그런 혈종이 내가 사용하는 것을 봤는지 내 기본 베이스에 기뢰의 사정거리를 늘릴 수 있는 단초를 내어 줬다.

기뢰는 시전자의 신체에서 벗어나면 급격하게 위력을 잃는 기프트다. 그래서 근접전투 외에 효용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하지만 기뢰에 포스를 실어 보낼 수 있다면? 그 포스로 기뢰 위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포스 또한 내 일부에 속하고 기뢰는 포스로 변환되는 힘이기에 내 손을 떠나도 포스가 존재하면 위력이 줄어드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점은 기뢰와 포스를 따로 분리하는 것이다. 둘을 따로 운용해서 하나에 실어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래서 기뢰를 시전하는 나도 의식적으로 분리해서 하나로 합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려면 굉장히 많은 실전을 거쳐야겠지.

내가 볼 때 제대로 손에 익으면 직접 손으로 발동한 기뢰와 비교해서 70~80% 위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방금은 위력이 제대로 안 실렸어."

"그런 거 같아요."

기뢰에 적중당했지만 정다현은 멀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생각한 위력이었다면 오른팔이 부러졌을 것이다.

제 위력이 아니란 의미다.

"거리가 늘어났으니 내게 선택지가 무수히 많이 늘어났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최선을 다해 '잘' 피해야죠."

"멋진 말이야. 그럼 잘 피해 봐."

검을 세운 정다현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도 손을 뻗었다.

대련을 하면서 정다현은 팔이 두 번 부러지고, 어깨가 한 번 부서졌다.

평소보다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일이다.

칼날폭풍이 다수의 적을 몰살시키기 좋다면 원거리 기뢰는 지정한 한 명을 골라 죽이기 좋다.

앞으로 한 명만 죽일 때 주위를 초토화 시키지 않을 수 있겠군.

이런 게 친환경 기프트인가.

고맙다, 혈종. 네 덕에 좋은 무기를 하나 얻었다.

* * *

"아득한 기분이었어요. 평소에는 거리를 두면 조금이라도 생각할 시간이 있었거든요."

대결이 끝난 뒤, 정다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평소보다 더 엉망인 몰골이었지만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 제한이 없어지니 모든 것을 본능에 의존하게 되었어요. 제가 판단할 방향을 한쪽으로 강요당한 거죠. 여기에 오빠가 허초를 섞으면서 생각이 교란되고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지금 같은 결과가 나왔죠. 기프트를 이렇게 발전시키기가 어려운데, 정말 굉장해요."

그러면서 정다현이 감탄한 눈으로 바라본다.

음, 이거 혈종한테 얻은 힌트로 발전시킨 건데.

···하긴.

단초는 혈종이 줬지만 어쩌겠는가, 완성한 건 나인 걸.

불만이면 튀어나와 보시든가.

그래봤자 만득이한테 소멸행이다.

아니, 이건 내 순수한 바람이겠지. 혈종의 등장은 내게 불확실성을 더한 셈이니까.

이 녀석을 어떻게 제거한다?

생각이 깊어 갈 때 정다현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고민 있으세요?"

"···어떻게 알았어?"

"오랫동안 봐 왔으니까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말씀해 주시겠어요?"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호의를 거절할 수 없지.

"하나는 아니고 여러 고민이 생겨나더니 머리가 아프네."

"그렇군요. 고민 해소는 중요해요."

"방법이 있어?"

"다른 곳에 몰두해서 잡념을 흩뜨리는 게 중요해요."

고개를 끄덕이던 정다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봉사 활동을 해 보는 건 어떠세요?"

"봉사 활동?"

"네, 저번에 기부 얘기를 듣고 생각했던 거거든요. 오빠 이미지를 좋게 만들기도 좋아 보이고요. 이제껏 느낀 다른 종류의 충만감을 느낄 수도 있고··· 아,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아니, 나쁘지 않은데?"

봉사 활동이라.

머리를 비울 수 있다면 나빠 보이지 않는다.

혈종과 내가 다른 점을 스스로 어필할 수도 있어 보이고.

혼자 가기 심심한데 버서커나 데리고 가야겠다.

녀석에게 부탁할 것도 있고.

"봉사라······."

그리고 봉사라는 단어.

왠지 나와 잘 어울리는 거 같다.

104화

나는 오랜만에 오종엽과 술 한잔을 했다.

저번 생에 빌런이었던 녀석은 이번 생에서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죽었던 동생 오종수가 건강하게 살아 있고, 본인은 국가수호국의 유망한 공무원 헌터로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본래 실력이 뛰어난 녀석이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히려 저번 생보다 덜 필사적이어서 그런가? 실력 상승하는 속도가 느린 거 같았다.

"승진 축하한다."

"아직도 박봉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길드로 갈 걸 그랬어. 친구 따라 왔더니 정작 그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가 버리고."

쓰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진심이 아니라고 위에다 말하지 말아 달란다.

그런 거였나? 난 대우가 모자란 거 같아 정다현에게 전달해 주려고 했지.

잠깐 시선에서 멀어져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종엽은 굉장히 잘 지내고 있었다. 최근에 여자친구도 사귀었는데, 좋은 사람이라면서 자기 인생이 참 많이 바뀌었단다.

이대로 열심히 돈을 벌어서 결혼까지 가고 싶다나.

슬래쉬 오종엽이 결혼이라, 내가 생각하지 못하던 전개로군.

결혼식에 간다면 기분이 참 묘할 거 같았다.

"네 덕분이다. 그날 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난 수렁을 걸었겠지."

"알고 있네."

"근데 네가 빚졌다고 한 게 아버지냐 어머니냐? 아직도 모르겠던데."

내가 뭐라고 했더라. 이젠 기억도 안 난다.

"삼촌인 거 같기도 하고, 숙모인 거 같기도 하고."

"···그럼 그렇지. 순순히 알려 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어."

"알면 더 묻지 마라."

녀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실력이 너한테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다 써. 널 위해서라면 팔 하나쯤은 내놓을 수 있으니까."

"목숨은 안 거네?"

"한창 연애하는 사람한테 목숨 내놓으라는 건 좀 심하잖냐. 내 목숨은 이제 내 거가 아니라고."

"어차피 관심도 없었어."

저번 생에서 기꺼이 웃으며 죽었던 친구의 목숨을 두 번 탐할 리 없다.

자기 행복을 찾아가면 그걸로 족할 뿐.

다만 녀석이 지금의 날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그건 그렇고."

"응?"

"넌 내가 미쳐서 빌런이 되면 어떨 거 같냐?"

그럴 일은 만에 하나도 없지만, 오종엽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녀석은 잠깐 벙 찐 표정을 짓다 오히려 내게 물었다.

"설마 지금 제정신이라 생각하는 거야?"

"내가 제정신 아니라고?"

이 자식, 선 넘네.

"···아니, 네가 정상이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우선 그렇게 되면 찾아가서 설득을 해야겠지? 너라면 정상으로 되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래."

끝까지 날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저번 생에서도 오종엽은 내 옆에 남아 줬었다.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 생각했지만 녀석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진짜 문제 있으면 나한테 말해 줘. 내가 조용히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아무 문제없어."

"아니, 감춘다고 되는 게 아니······."

"죽을래?"

"······."

받아 주다 보니 끝을 모른다.

어딜 감히 사람을 미친놈 취급하고 있어.

내 주변에서 내가 가장 정상이다.

아무리 말해도 믿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가끔 외로울 때가 있다.

"내가 봉사활동 하려고 하는데 괜찮은 곳 하나 추천해 줄 수 있냐?"

"갑자기 봉사활동?"

이 녀석, 봉사활동이 가져다주는 충만함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

아직 나도 해 본 적은 없지만 정다현에게 들었던 만큼 간접경험은 해 본 상태였다.

"기분 전환도 하고 긍정적인 영향도 끼쳐 보려고. 그리고 봉사라는 단어가 왠지 나랑 잘 어울리지 않냐?"

"···설마 내가 아는 봉사가 빌런들 잡아다 봉사로 만들겠다는 거 아니지?"

"미쳤냐?"

"휴, 다행이다. 아직 거기까지 선은 안 넘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

녀석의 말이 거슬리긴 했지만 재촉한 끝에 몇 곳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 * *

사실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진 좀 찍고 그러면 이미지 개선이 되는 건 알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런 것보다 내 기분 전환이 더 중요하다고 봐서.

아닌 척 하지만 혈종의 존재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하지만 이걸로 혼란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면 그건 녀석이 바라는 바겠지. 오히려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줘야 녀석이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좁은 공간에서 24시간 내내 틈을 노리고 있다고 하니까.

그걸 말한 것이 혈종 네놈의 실책이다.

내가 보란 듯이 잘 즐겨 주지.

그러니 정신건강을 잘 유지하면서 녀석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만득이를 교육시키고 정신방벽 강화를 하는 것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봉사활동은 잡념을 비워 내기에 좋았다.

남에게 베풂에 있어 복잡할 의미가 없으니까. 내가 그걸로 인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니 순수하게 내 것만 베풀면 되는 일이다. 여기에 복잡한 계산이 섞일 필요가 없다.

이 좋은 걸 나만 즐길 수 없지.

그래서 나는 보육원으로 봉사활동을 갈 때 버서커를 대동했다.

막상 타보니 캠핑카라는 게 꽤 좋았다.

"캠핑카를 접하고 가장 기쁠 때가 언젠지 아나?"

"언젠데?"

"내 캠핑카가 팔렸을 때다."

"뭔 소리야?"

"모를 때가 행복한 거다. 그나저나."

운전대를 잡고 있던 버서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봤다.

"내가 왜 네놈 운전기사 노릇을 해야 하는 거지?"

"내 차는 작아. 네 차가 크니 선물 가득 싣고 가기 좋잖아."

"그건 네놈이 사람을 쓰면 되는 일인데 왜 날 부른 거냐."

"사람을 죽이고 별의 순간만 맛보려는 네가 봉사로 새로운 충만함을 맛보길 원하는 내 배려다. 언제까지 미쳐 있을 거냐? 빨리 나처럼 정상이 될 생각을 해야지."

"······."

날 보는 버서커 녀석의 눈이 매우 불손했다.

눈을 파 버릴까.

잠깐 그 생각을 했지만 이내 접어 두었다.

신성한 봉사활동을 하러 가는데 미친놈의 피를 볼 수 없지.

게다가 눈알은 회복제로도 재생할 수 없다.

"농담이고, 새로 기프트 응용 방법을 터득했거든. 너도 가만히 놀고 있지 않았을 거 아냐. 서로 확인을 해 봐야지."

"취급이 샌드백인 거 같다만."

"이용해 주면 감사하다고 해라."

"물론이다. 이번 기회에 네놈의 팔을 뒤틀어 주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여 버린다느니, 목을 날린다느니 했던 거 같은데 팔 하나 뒤틀어 주겠다는 건 좀 소박하지 않나.

현실적으로 바뀐 거 같기도 하고.

이걸 주제파악 했다고 좋아해야 하나 아니면 패기가 없다고 욕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럼 가볼까."

나는 버서커와 함께 준비해 놓은 선물을 들고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희망보육원은 마물들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정부에서는 아이들이 커서 빌런이나 난민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세금이 또 제대로 쓰인다 싶었다.

원장, 선생들과 먼저 인사를 나눴다.

내가 기부 의사를 밝히자, 굉장히 기뻐했다. 원래 내가 하려던 금액의 1/100 수준에 불과한데.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말려서 줄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좀 더 늘려야겠다.

"와아!"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준비해 놓은 선물을 건네주자, 애들이 좋아하며 내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원래 아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내게 넘쳐 나는 걸 베풀어서 누군가가 행복하다면 좋은 일이다.

이게 봉사의 참맛인지는 잘 모르겠고.

내 감정이 메마른 걸까, 아니면 처음이라서 감을 못 잡는 걸까.

정다현이 얘기했던 충만함은 느끼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여러 복잡한 사안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애들이 날 보고 좋아하는 것도 괜찮았고.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선물을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버서커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봐라, 이게 참된 봉사다."

"훗!"

"웃어?"

싸우자는 건가?

하지만 버서커 녀석은 재수 없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고작 선물 몇 개로 세상을 다 얻은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

이 자식이 지금 시비를 거는 건가.

내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서커는 자기 옆에 있는 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번쩍 들더니 냅다 위로 던졌다.

미친놈, 저런 걸 애가 좋아할 리가······.

"꺄르르!"

···좋아하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버서커가 놀아주는 것을 본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더니 저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와! 나도!"

"나도 해 줘요!"

"다 해 줄 테니 줄을 서라."

버서커는 애들 하나씩 던져 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보육원의 중심이 버서커가 되었다. 삽시간에 애들이 모여들자 버서커는 절반을 뚝 떼어 내게 건넸다.

"저 아저씨도 해 줄 수 있다. 해 달라고 해 봐."

"아저씨! 저도 해 주세요!"

"저도요! 아저씨!"

"······."

졸지에 몰려든 아이들을 안고 나도 던져 주기 시작했다.

이런 게 패배라는 건가.

돈은 내가 썼지만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버서커가 가져갔다.

그 뒤에 이어진 아이들과 놀아 주기도 완패였다.

버서커는 아이들 눈높이에서 웃겨 줄 수 있는 스페셜리스트였다.

설마 똥!이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도 자지러지게 웃을 줄이야.

남자 애들에게 공룡이 만능일 줄은 몰랐다.

무슨 사우르스가 이렇게 많은 건지.

내가 녀석을 이기려면 공룡 도감이라도 달달 외워야 하는 건가.

버서커 녀석, 날 보며 승자의 미소를 짓는다. 재수 없다. 근데 부럽기도 했다. 이런 특기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내공 차이지. 이래 보여도 애를 키워 본 몸이다."

그래, 너 잘났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개인사에 대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하고 자식은 보고 싶지 않냐?"

"···가끔은 모든 걸 놓아 버리는 게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무슨 소리야?"

"너도 결혼해 보면 알 거다."

"안 해 봐서 물어보는 건데."

갑자기 날 왜 그렇게 부럽다는 얼굴로 보는 거냐.

"결혼이란 건, 아주 좋은 거다. 강력 추천하고 싶군."

왜 이를 악 물고 말하는 거냐.

결혼 행복하다며?

"꼭 해라."

* * *

내가 버서커에 대해 설명하자면 녀석은 조질 맛이 있는 녀석이다.

끝없는 투쟁심.

별의 순간을 엿보겠다는 확고한 목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재능과 노력.

탄탄한 맷집.

이 부분을 놓고 볼 때 녀석은 쓸모 있는 스파링 파트너였다.

정다현에게는 어쩔 수 없이 힘 조절을 했다면 버서커한테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살기를 담아 아낌없이 퍼부어도 녀석은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여기에 적절한 긴장감 부여까지 되었고.

무엇보다 마지막에 내가 이기는 게 결정적이다.

모름지기 승부는 내가 이겨야 재밌는 거다.

"저번보다 더 강해졌네."

"······."

대(大)자로 누운 녀석은 숨을 몰아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이 으스러졌어도 내가 회복제를 뿌려 줘서 괜찮을 텐데 저런다.

설마 토라진 건가.

생각해 보니 이번 대결에서는 내가 흥을 좀 내기는 했다. 녀석도 분전했지만 좀 지나서 대책 없이 무너졌고.

"···대체 네놈은 어디까지 강해질 생각이냐."

"수단 하나 늘어난 거 가지고 엄살은."

"차이가 더 벌어진 느낌이군, 후우!"

한숨을 내쉬던 녀석이 몸을 일으켜 날 바라봤다.

"위치 닥터와 붙었다고 들었다."

"어."

"어땠지?"

"꽤 강하던데. 저주가 까다로웠고."

그 저주 때문에 혈종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

녀석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지?"

버서커와 위치 닥터?

기본 전투력은 버서커가 더 강하다. 무려 나한테 살아남은 녀석인데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기프트를 놓고 봐야 하는데 하필 상극이로군. 버서커의 만득이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주에 있어 절대적인 우위에 설 수 있다.

이렇게 보니 만독불침이 사기긴 했다.

우리 만득이, 귀여워해 줘야겠다.

"네가 이길 거 같은데."

"우선 그 수준에 도달한 건가."

"기뻐 보인다?"

"다른 초인도 아닌 12궁이니까."

"목표가 12궁이었나?"

내가 볼 땐 리그 삼악의 꼬봉이란 느낌이 강했는데 버서커한테는 아닌가 보다.

하긴, 콘스탄티나를 죽였을 때 놀란 사람이 많았지.

"1차 목표였다. 지금은 더 높은 목표를 세웠고."

그러면서 도발적인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목표가 나라고 시위하는 건가.

아직 덜 맞았나?

"힘 남아 있으면 한 판 더?"

"사양하지. 지금도 간신히 서 있다."

미쳤어도 한 가닥 이성은 남아 있군.

사실 나도 해 보고 싶은 걸 다 해봐서 더 두들겨 봤자 의미가 없다.

이 이상은 일방적인 폭력행사지.

"그래서 그 힘을 실험해 보려고 날 데려왔던 건가?"

"그것도 이유 중 하나고. 다른 걸 하나 당부하고 싶어서."

나는 여전히 내가 미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혈종에게 먹히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확신이다.

내가 콘스탄티나의 저주로 인해 잠깐이지만 혈종에게 몸을 내어 줄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만약의 가능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0.01%의 가능성이더라도 내가 미쳐 버리면 그것은 내게 100%였으니까.

그래서 보험을 들어 두려고 한다.

"앞으로 나와 정기적으로 대련을 하자. 널 강하게 만들어 주지."

"의도가 뭐지?"

"내 의도가 중요해? 강해지고 싶다며? 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날 이용해."

"네가 이용당해 줄 녀석이 아닌 걸 알아서 하는 말이다."

버서커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이러니 나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평소처럼 윽박지르자니 내가 하려는 부탁의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내키지 않지만 알려 줘야겠군.

"지금은 정상이지만 언제 어느 순간, 내가 미쳐 버릴지 몰라."

날 보는 버서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 자식이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데······.

아무튼, 나는 혈종에게 먹혀서 녀석이 펼치는 살육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그때가 되면 날 죽여라."

이것이 내가 버서커에게 바라는 것.

어쩌면 버서커라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

난 진지하게 말했지만 버서커의 표정은 이상했다.

"네놈······."

"왜?"

"그런 얼토당토한 말을 해서라도 날 조지고 싶었던 거냐."

"뭐?"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지금 진지한데.

"차라리 더 두들겨 패고 싶다고 말해라."

"······."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러네.

하지만 날 향한 버서커의 의심은 지워질 줄 몰랐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자기를 더 두들겨 패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억울하군.

105화

버서커는 최준호가 한 말을 미친 소리라고 치부했다.

자기가 미치면 죽여 달라니.

애초에 미친놈이지 않던가. 미친놈이 또 미치는 경우가 있단 말인가.

미친놈이 미치면 정상이 되는 거 아닌가.

아니군, 더 매운맛 미친놈이 될 수도.

잠깐 엉뚱한 생각도 들었지만 최준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녀석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미쳐 버릴 상황에 대해서.

버서커는 안다.

최준호라는 녀석의 힘을.

만약 그가 제어가 되지 않는 빌런이 되어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끔찍하군.'

세상에 레벨 9 각성자가 존재한다면 최준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최준호를 막기 위해서 자신이 그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버서커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리그에 가입하려던 생각을 지워 버린 것도 최준호 존재가 컸다.

그곳에서 강자로 분류된 녀석들보다 최준호가 더 강해 보였으니까.

같잖은 정의를 내세우면서 자기들이 옳다고 떠드는 녀석들 사이에 부대끼는 것보다 최준호에게 한 수 배우는 게 더 이득이라 생각했다.

그 선택은 옳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최준호와 맞붙어 볼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그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

어느 순간 목표도 바뀌어서 죽이는 거에서 우위를 점하는 걸로, 동수라도 이뤄 보는 걸로 가다가 이제는 팔이라도 한번 비틀어 보는 게 소원이 되었다.

그 정도로 녀석은 강했다.

그런 녀석에게 자신을 죽일 사람으로 지목되다니. 기분이 좋았다.

이것도 일종의 인정이라면 인정이었다.

"내가 널 죽일 수준까지 성장할 거라고 보는가."

"아니, 전혀."

"······."

차라리 말이라도 못하면.

단호한 말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미쳐 버린다는 건 미끼였고 자신을 더 두들겨 패려고 그러는 건가.

"그래도 잘하면 내 팔다리는 날려 버릴 수 있을 거 같아. 지금보다 더 혹독하게 구르고 성장해야 하지만."

보통 그 전에 죽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쯤이면 오기가 생겼다.

"네가 미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당연히 최선을 다해 제정신을 유지해 볼 거다."

자기가 제정신이라 생각하는 거 자체가 이미 돌은 거 같은데.

버서커는 단 한 번도 최준호가 제정신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만약의 상황이란 게 존재하는 법이니까. 네가 날 죽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팔다리라도 하나 날려 주면 내가 덜 행패 부리지 않을까."

"어떤 기대를 하는 건지 알 거 같군."

"그럼?"

"받아들이겠다."

버서커는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녀석과 대결은 전신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확실한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은 무수히 많은 비열함을 본다.

하지만 그 비열함의 끝을 본 적 있느냐 물어본다면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버서커는 자신 있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비열하고 악랄한 녀석은 최준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녀석의 수법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빌런으로 오랫동안 쫓겨 다니며 무수히 많은 빌런을 봤지만 최준호만큼 비열한 수를 구사하는 각성자는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싫냐? 그건 아니다.

대결에서 상대를 속일 수 있어야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실제로 온몸에 녀석의 흔적이 새기면서 그걸 거름 삼아 더 강해졌다.

가끔 자다가 경기를 일으키고 혼자 있다가도 습격당하는 섬뜩함을 느끼는 게 문제였지만.

"두고 봐라. 다음에는 네놈의 손톱 하나라도 깨 버릴 테니까."

"아까 전에는 팔 아니었냐? 급 소박해지네."

"······."

언젠가는 이 굴욕을 기필코 갚겠다고 버서커는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도 잠깐일 뿐, 현실은 최준호 운전기사 신세였다.

"여기는 왜?"

녀석이 도착한 곳은 집이 아니라 차 전시장이었다.

"차 하나 뽑으려고."

최준호는 그 자리에서 저렴한 국산 준중형 차를 하나 뽑았다.

* * *

이영문의 부름에 이세희는 회장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 와라."

언제 들어도 온기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혈색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춘 이세희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최준호와 사업 하나를 더 해 볼 거라고?"

"네."

"고유 포스라. 오래 전에 쓸모없는 기술이라 판정받고 사장된 걸로 알고 있다."

이건 시험이다.

이영문은 이미 자신이 올린 보고서를 다 읽은 상태였다.

그 말은 어떤 비전으로 어떤 방향으로 추진할지 지켜보겠다는 의미겠지.

이세희는 고개를 들고 자세를 꼿꼿이 했다. 그리고 목에 힘을 줬다.

"현재 기술은 준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기존 기술은 고유 포스라고 하기에는 보안이 허술합니다. 그래서 이번 사업은 특별합니다."

"얼마나 다르다는 거지?"

"보안에서 수준이 다릅니다."

이세희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기존에 존재하는 고유 포스 인식은 각성자 개인이 지닌 특색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흉내 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오래 전 외면당한 기술이다.

하지만 최준호가 제안한 고유 포스는 기존에 지닌 포스에서 한 번 꼬아 변화를 주는 것에 시작한다.

파장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고유 포스에 변화를 가미함으로써 보다 완벽한 특색이 발현되는 것이다. 이걸 보안 분야에 적용하여 각성자가 보다 안전하게 자기 것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응용할 분야가 무궁무진해요. 당장 헌터들이 사용하는 통신장비는 물론, 개인 스마트폰까지 적용할 수 있고 개인 무구에 On/Off를 적용할 수 있게 돼요. 자기 것에 집착이 심한 헌터들의 특성을 자극하면 보안을 생각해서라도 우리 것을 이용하게 될 거예요. 이 부분을 잘 공략한다면 우리 기술이 세계 표준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세계를 장악하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새로운 시장을.

이세희의 눈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즉석에서 이루어진 발표가 끝나자 이영문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시장성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걸 어떻게 적용하고, 어떤 방향으로 장악해 나갈지는 오너의 역량에 달려 있지. 네가 다음을 보는 시야와 추진력까지 보여 주니 내 마음이 놓이는구나. 잘했다."

"감사합니다."

짧은 칭찬 하나에 밤새도록 노력해 온 모든 걸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활짝 웃는 이세희를 보며 이영문은 수염 하나 없는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이러니까 강권을 할 수 없겠어."

"따로 말씀하실 게 있으신가요?"

"대영그룹 회장님의 부탁이다. 내게는 큰아버지 같은 분이지. 너도 어린 시절에 몇 번 뵈었을 거다."

"아, 대영그룹. 네, 기억하고 있어요."

대영그룹은 재계서열 3위에 속하는 그룹으로, 자동차와 중공업, 화학 분야를 주력으로 삼고 있다.

신성그룹처럼 길드 보유에 실패했지만 여전히 경쟁력을 가진 재벌그룹이다.

"대영그룹 진 회장님이 둘째 손자를 너와 약혼 시키고 싶어 한다. 원한다면 중공업을 딸려 보낼 수 있다고 하더군."

"아······."

이세희의 표정이 흐려졌다. 전혀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대영그룹 둘째손자는 이세희도 안다. 큰 키에 잘생긴 외모, 재능도 꽤 뛰어나 레벨 3에 도달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평판은 최악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를 갈아치우는 것은 물론, 갑질 사건에 마약까지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만약 업무 능력이 떨어졌으면 쫓겨났을 만큼, 행실이 개판이었다.

그러면서 자신과 마주칠 때면 자신감 넘치는 척, 온갖 허세는 다 부렸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이세희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다.

"대영그룹 진 회장님에게는 예전에 신세를 끼쳐서 말이다. 너라면 둘째를 갱생시킬 수 있을 거라며 부탁하더군. 네 생각은 어떠냐?"

"아버지는, 아니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

"네 판단을 전적으로 믿어 줄 생각이다."

"···감사합니다."

적어도 강권하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다행이란 생각에 이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예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무수히 떠오르는 감정들을 놓고 잠깐 고민 정도는 했을지도 모른다.

대영에서 중공업을 분리해서 합칠 수 있다면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을 테니. 결국 거절했겠지만 찜찜함은 남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오빠는 이지를 상실했고, 자신은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차근차근 다져 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대영그룹 망나니의 행실을 감수해 주기에는 자신의 비위가 그리 좋지 못했다.

저렇게 넋 놓고 날뛰는 망나니의 말로는 뻔했다.

임자 만나는 순간 골로 가는 거지.

그동안 운이 좋아서 임자를 만나지 않았지만, 세상은 의외로 좁다.

당장 떠오르는 임자도 있었고.

마음을 굳힌 이세희가 거절 의사를 표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알았다."

짤막한 이영문의 대답에 오히려 이세희가 놀랐다.

"더 권하지 않으세요?"

"네 판단을 전적으로 믿어 주겠다고 했다. 진 회장님에게는 다른 방법으로 빚을 갚으면 된다. 대영그룹은 진승열이를 제법 능력 있는 걸로 포장했지만 자기가 홀로 해낸 건 없더군. 너랑 맺어지게 하기에는 내 딸이 많이 아깝지."

담담한 말속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애정에 이세희의 표정이 편하게 풀렸다.

"감사합니다."

"무리한 부탁을 한 건 나였다."

그리 말한 이영문이 이세희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너한테 웬만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테고."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부정해도 다 안다. 그럼 가 보거라."

"네."

얼굴이 빨개진 이세희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자리를 벗어났다.

뭔가,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 기진맥진해진 기분이다.

아버지와 만남이 심력을 많이 쏟는 것도 있지만 속내가 드러난 것도 한몫했다.

그런 게 아닌데, 많이 오해하고 계신 거 같다.

그렇다고 바로잡기도 좀 그렇고.

머릿속에 고민이 채워졌지만 그것도 잠시, 이세희는 빠르게 자기 페이스를 되찾았다.

"일해야지, 일."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서류 업무를 끝내더라도 단련을 해야 하고.

저번에 최준호 연락이 왔을 때 기프트를 좀 더 발전시켰다고 하던데, 어떤 건지 보고 싶었다.

그만한 무위를 지녔으면 만족할 법도 한데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다니. 볼 때마다 감탄을 하곤 한다. 시간이 되는지 한번 연락해 봐야겠다.

곧장 신성길드로 복귀하려던 그녀는 본사 건물 앞에서 멈칫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대놓고 그녀를 보고 있던 것이다.

대영그룹 진화성 회장의 둘째 손자 진승열이었다.

이 인간이 왜 신성그룹 건물에 있는 거지?

건들거리는 자세로 서 있던 녀석이 이세희를 발견하고는 느물거리며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여기는 무슨 일이죠?"

"약혼할 사이잖아. 약혼녀 얼굴 보러 왔지."

능글맞은 웃음, 허세 섞인 제스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어깨에 얹으려고 해서 이세희가 딱 쳐 냈다.

자기 손을 쓰다듬으며 진승열이 말했다.

"여전히 쌀쌀 맞네. 약혼할 사이면 좀 친밀해지는 게 좋잖아?"

"안 그래도 거절했어요."

"···뭐라고?"

진승열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김칫국 거하게 마시고 있었나 보다.

"애초에 내가 받아들일 이유가 없잖아요? 대체 무슨 자신감인 거죠?"

"말도 안 돼. 내가 할아버지한테 얼마나 졸랐는데."

"결혼은 당사자가 정하는 거죠. 할아버지가 아니라."

"내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닌 걸 알 텐데? 세희야, 우리 좀 더 얘기를 해 보자."

"야."

이세희의 싸늘한 목소리에 진승열이 얼어붙었다.

"이 정도로 거절했으면 눈치 까고 돌아가라."

냉기를 풀풀 풍기며 이세희가 진승열을 지나치려고 할 때였다.

멀어지는 그녀를 잡기 위해 진승열이 손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악!"

역으로 손이 잡아채인 진승열은 뼈가 부서질 것 같은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자기도 모르게 힘을 준 이세희가 아차했다.

최준호랑 자주 만나서 그런가.

하마터면 부러뜨려 놓고 대화를 이어 나갈 뻔했다.

사방에서 시선이 모여들었지만 이세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아악!"

느껴지는 고통이 커지자 진승열이 무릎을 꿇고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친한 척 하지 마."

이세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한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난 진승열의 표정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 개같은 년이······."

* * *

세상이 좁다하며 망나니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진승열이지만 이세희는 건드릴 수 없었다.

상대는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는 신성그룹이었다. 잘못 날뛰다 표적이 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

그것이 제 마음대로 날뛰던 진승열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이세희만 가지면 신성그룹을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재계 서열 3위 대영그룹의 로열패밀리지만 둘째 손자라는 신분은 그룹의 총수가 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눈독 들인 것이 신성그룹이었다.

이세찬이 바보가 되었으니 이세희만 꼬시면 자신의 손에 떨어질 거라 생각했으니까.

"도도한 척 하기는. 그래, 버텨 봐라. 그 앙칼진 모습도 오래 가지 못할 테니."

이를 바득 갈며 후일을 기약했지만 분노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분풀이를 위해 평소 놀던 여자를 데리고 드라이브에 나섰다.

목적지는 정부에서 출입금지로 지정해 놓은 곳이지만 그건 아무것도 없는 서민들이나 지켜야 하는 룰이고. 자신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오빠 화 많이 났어?"

"짜증나게 하는 년이 있잖아."

"에이, 그런 여자 신경 끄고 나랑 재밌게 놀자."

아양 떨며 붙어 오니 기분이 좀 풀렸다. 조만간 이세희도 이렇게 될 거다. 그때가 되면 봐주지 않을 거다.

자신에게 매달릴 이세희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 죽여 줄 테니 각오해."

"죽일 수는 있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내 도로를 가로질렀다. 진승열이 탄 스포츠카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 다른 차들이 분분이 비켜섰다.

이거였다. 남들과 자신이 차원 다르다는 걸 알려 주는 것. 재벌인 자신과 서민이 같은 급으로 노는 거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화가 쌓여서일까.

한참 질주하던 진승열의 눈에 거슬리는 차가 하나 있었다.

"저 똥차는 뭐야?"

"에이, 무시하고 지나치자."

남들처럼 눈치가 있으면 비켜서야 하는데 녀석은 굼뜬 속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새끼가. 지 주제도 모르고."

"오빠······."

"넌 입 닥쳐."

눈에 불을 켠 진승열이 차를 몰아 옆으로 따라붙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자신보다 몇 살 정도 어려 보이는 녀석이었다.

차라리 나이 맞은 영감이었다면 재수 없었다며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슈퍼카를 옆에 두고도 똥차를 이따구로 운전해?

"넌 죽었다."

진승열은 눈앞의 똥차에게 주제파악이란 걸 시켜 주기로 했다.

보복운전이었다.

106화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새 차를 바라보았다.

붉은 자태의 준중형 자동차. 내킨 김에 새로 뽑은 자동차였다.

솔직히 새 차가 무슨 차이인가 싶었다.

하지만 차를 뽑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했던 말을 후회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느낌이랄까.

차라는 게 엑셀을 밟는 즉시 차가 튀어 나가는 거였다니. 옵션도 차원이 달랐다.

얻어 탈 땐 몰랐는데 우리나라 자동차 기술이 이렇게 발전했을 줄 몰랐군. 왜 윤희가 차를 바꾸라고 악을 썼는지 알 거 같다. 내 기억에 차량은 어디까지나 이동수단으로서 저번 생에 멈춰 있었다.

어떤 색을 고를 거냐는 직원의 물음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골랐다.

"역시 빨강이지."

강렬한 색상인 레드는 내가 저번 생에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면 눈에 띄니까.

도주 생활을 이어 나가던 나는 차를 탈취하더라도 그레이 계열만 타곤 했다.

레드는 일종의 자기과시였다.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당당히 드러내도 된다는 그런 종류의.

여기에 그치기에는 아쉬움이 있어서 나는 차에 이름까지 붙여 줬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적토마다."

하루에 1,000km 이상 갈 수 있을 것 같은 이름이다.

아, 천 리랑 1,000km는 달랐던가? 아무렴 어떤가. 잘 나가기만 하면 되지.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윤희가 한마디 했다.

"아주 좋아 죽네."

"그럼 안 좋겠냐."

"알면 진즉에 바꾸지."

"나도 후회 중이야."

"그러니 앞으로 동생 말 잘 들어. 알았지?"

이 녀석은 바꿔도 난리였다.

평소라면 후일을 기약해 줬을 테지만, 오늘 나는 무척 너그러운 상태였다.

내 몰래카메라 하는 날 단단히 굴려 주면 되겠지.

나는 차 키를 챙겨들었다.

"나가려고?"

"어, 길들여 놔야지."

"어째 동생보다 취급이 더 좋은 거 같은데?"

어머님 따님 아니랄까 봐 감각이 날카롭군.

나는 그 길로 적토마를 몰고 시내주행에 나섰다. 승차감이나, 옵션 모든 게 기존 차보다 월등했다.

주변 차들도 훨씬 양보를 잘해 주는 느낌이다.

예전 차를 몰고 다닐 땐 끝까지 안 비켜 주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내친 김에 속도를 밟아 볼까 싶어 고속도로로 향할 무렵이었다.

"응?"

뒤에서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스포츠카가 있었다.

어제만 해도 무심했는데 지나가는 차를 보면 눈여겨보게 된다.

예전만 해도 차량 성능보다 색깔이나 상태, 기름량부터 살펴보고는 했는데.

하도 내가 차량 탈취를 하니 나중에는 기름을 일정량 이하로 맞춰 놓는 수작을 부렸다.

그걸 주도한 게 천명국이었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기껏 탈취해도 100km도 가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좋은 관계니까, 잘해 줘야지.

알아서 지나가겠거니 싶어서 그냥 주행하고 있었는데 내 차 옆으로 달라붙는다. 적토마도 이렇게 좋은데 저 차는 더 좋겠지? 갑자기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는 거 같다.

스포츠카의 운전석에 앉은 희멀건 녀석이 뭐가 불만인지 옆에 여자를 끼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냥 지나갈 것이지 왜 옆에서 치근덕거리는 건지 모르겠군.

신경을 끄고 내 운전에 집중하려고 할 때였다.

끼이익!

그런데 녀석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계속 내 적토마 옆에서 얼쩡거리더니, 끼어들 것처럼 굴다가 급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난 대응하지 않고 차를 몰았다. 그러니까 녀석이 점점 더 위험하게 내 차로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혹시 2차선을 선호하는 건가 싶어 1차선으로 이동해 봤지만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아아!

이게 보복운전이라는 건가? 처음 당해 봤다.

참 위험하게 운전하는군. 어차피 내가 피하려고 해도 녀석이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나한테 뭐가 불만인지 점점 선을 넘고 있어서.

더 위험하게 옆으로 밀고 와서 피할 공간도 없고 그냥 들이받았다.

끼이익! 쾅! 콰과광!

다행히도 가드레일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았다. 하마터면 적토마가 언덕을 구를 뻔했군.

"...."

내 애마인 적토마는 이미 작살 나 있었다.

출고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난 안전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왔다. 완전 박살 난 적토마와 다르게 녀석의 슈퍼카는 휀다만 일그러진 게 전부였다. 손익비가 그리 좋지 않군.

슈퍼카에서도 두 사람이 내렸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잘생긴 남자와 모델처럼 쭉 빠진 여자였다.

그나저나, 두 사람이 나오니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 느낌이 아니라 후각에서 전해지는 냄새였다. 어디서 맡아 본 적 있는데?

"야, 너 미쳤냐?"

남자는 다짜고짜 나한테 삿대질을 했다.

보복운전을 하는 녀석과 안전운전을 한 나.

둘 중 누가 미쳤을까. 이젠 정상적으로 행동해도 미쳤냐고 삿대질을 당한다. 어이가 없다 못 해 황당했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내가 누군지 모르나 보다. 일단 사고부터 접수해야 되나?

그게 더 화를 돋웠는지 녀석이 쌍심지를 피웠다.

"내 말 안 들려? 씹냐?"

하긴, 생각해 보니 내가 오만했다.

얼굴을 알리는 걸로 분란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니.

진세정은 날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나면 조심할 거라 말했지만 세상 모두가 뉴스를 보고 인터넷 방송을 보는 게 아니다.

모두가 날 알아볼 거라 생각한 거 자체가 자의식 과잉이겠지.

반성은 반성이고 일단 주제 모르는 녀석부터 처리해야겠다.

"미친 건 너 같은데."

"하, 요즘 버러지들이 자기 주제를 파악 못하네."

녀석이 실소를 흘린다.

"이거 어떻게 할 거냐? 너 때문에 내 차가 긁혔잖냐. 네 벌이로 수리비나 나오겠냐? 어? 장기라도 꺼내서 갚을 거야?"

"사고 과정이야 블랙박스 까보면 알 거고, 보복운전으로 처벌은 네가 받을 텐데."

녀석이 오히려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 내가 처벌? 그런 걸 내가 왜 받아?"

"안 받나?"

"당연하지."

나도 처벌 안 받는데.

나랑 비슷하군.

왜인지 녀석이 의기양양해졌다.

"법이란 건 말이야, 너 같은 서민들 통제하려고 있는 거야."

"넌 서민이 아닌가 보네."

"나 모르냐?"

나부터 좀 알아봐라.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자의식 가득한 얼굴로 자기소개를 했다.

"대영그룹의 진승열이다. 앞으로 평생 잊지 못할 이름이다."

대영그룹? 이세희한테 들어본 적 있다.

일찍부터 규모를 줄이고 알짜 계열사로 투자를 집중하여 확실한 수입원을 획득한 그룹이라고 했지. 재계 서열 3위라고 하던데 녀석이 자신만만한 게 이해가 되긴 했다.

근데 그게 다 그룹 회장 돈이지 자기 돈은 아니지 않나.

훌륭한 사람은 본인이 아니고 회장이라고 하던데.

"왜 널 잊지 못하지?"

"내가 기분이 잡쳐서 널 좀 밟아 줄 생각이거든."

아, 그렇군.

나랑 생각이 같아서 다행이다.

난 살기등등하게 다가오는 진승열을 보다 옆의 여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 여자도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데 조금 이따 털어 봐야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한 눈으로 날 보던 여자는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하더니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오, 오빠!"

"넌 왜 그래. 가만히 있어. 이 녀석 손봐 주지 않고 못 배기겠으니까."

"자, 잠깐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버르장머리가 없네? 미쳤냐?"

진승열은 말리는 여자에게 오히려 화를 냈다. 저런 게 망나니인가. 그냥 미쳐 버린 거 같다. 피아식별이 제대로 안 되는 거 보면. 방금 내가 손을 썼으면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목이 날아갔을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진승열에게 악을 썼다.

"저 사람 누군지 몰라?"

"내가 저딴 희멀건 놈을 어떻게 알아!"

"최준호라고! 초인 최준호!"

"뭐, 최준호? 최준호가 왜 저딴 똥차를 몰고 다니...."

감히 내 적토마를 모욕하다니.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말끝을 흐리던 녀석의 얼굴에 긴가민가 하는 기색이 서렸다.

날 완전히 모르고 있던 건 아닌가보다. 알자마자 바로 분노가 조절되는 걸 보면.

"서, 설마! 진짜 최준호 초인?"

"어."

그것은 마법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싹 바뀌는 마법.

"그렇게 지껄여 놓고 무사하길 바란 건 아니지?"

"잠깐! 난 대영그룹 회장님의 손자...."

더 나올 말이 뻔해서 녀석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접근해서 손목부터 잡아 비틀었다.

콰득!

"끄아악!"

손목이 뒤틀린 녀석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양 발목을 차례대로 부러뜨렸다.

그래도 멀쩡한 팔로 짚어 도망가려고 하길래 어깨도 부숴 줬다.

순식간에 바닥을 기어 다니게 된 진승열이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려 댔다.

"네, 네놈. 가만두지 않을 거다."

"매를 버는 소리를 하네."

"끅!"

발목을 밟아 짓이겨 주자 도로에 얼굴을 처박는다.

대영그룹이니 뭐니 하면서 내세워 봤자 자기 실력 없으면 이 꼴이다.

"할 말 더 있냐?"

"우리 할아버지가 가만있지 않을 거다."

누가 보면 당장 이놈 할아버지가 달려와서 구해 줄 수 있는 줄 알겠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리 있는데.

그리고 법도 안 지키면 그만이다.

"그럼 구해 달라고 해 봐."

콰드득!

"끄아악! 아파! 제발! 제발!"

녀석의 양 허벅지까지 밟은 나는 같이 온 여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떠는 여자를 보다 아까 전부터 익숙한 냄새가 난 걸 떠올렸다.

"마약하냐?"

"히익! 도망 안 칠게요! 제발 살려 주세요!"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소리쳐서 손을 쓰지 않았다. 누가 보면 내가 죽이려고 한 줄 알겠다.

그리고.

레벨 4 정도로 보이는데 왜 비각성자인 척 하지?

내가 개의치 않고 걷어차려던 순간, 여자가 눈을 번뜩이더니 표홀한 몸놀림으로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한 번 더 공격을 펼쳐야겠지만 발끝으로 기뢰를 시전하여 포스를 실어 쏘아냈다.

콰득!

"꺄악!"

깔끔하게 양다리를 부러뜨렸다.

나는 그대로 냄새나는 곳을 쫓아 슈퍼카 안 서랍을 뜯어냈다.

그러자 잘 포장된 마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보면 중계상인 줄 알겠네."

마약 소지를 했고, 보아하니 꽤 투여도 했을 테니 예비 빌런으로 취급해도 되겠다. 나는 곧장 정다현에게 연락을 넣은 뒤 마약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저 여자가 각성자인 것도 수상했다. 그리고 이 마약.

"익숙한 느낌인데?"

나는 냄새를 맡아보며 추적을 하다가 옛 기억을 떠올리는데 성공했다.

같은 종류는 아니지만 비슷했던 마약이 기억난다. 그건 쾌락을 위해서라기 보다 감각의 확장을 위한 마약이었다. 암시장에 가면 팔던 거였는데 상인들이 투덜거렸었지.

왜 그랬더라.

맞다, 한국에 리그가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바다 건너 와야 한다고 했었지.

그러니까 이 마약은 리그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찾아낼 줄 몰랐는데."

탈탈 털어 보면 숨어 있는 세력의 꼬리가 잡히겠지. 저 여자도 수상했고.

그때, 경찰차 두 대가 도착했다. 차에서 여섯 명의 경찰이 내렸다.

바닥을 기어다니며 고통스러워하던 진승열은 날 가리키며 경찰들에게 외쳤다.

"저 녀석을 잡아! 체포하라고!"

새로운 청부살인 방법인가.

평소에 경찰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이렇게 죽이려 들 줄 몰랐는데.

그런데 진승열의 말을 듣고 가장 나이가 많은 경찰이 흉흉한 기세로 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자, 잠깐만요! 선배님! 우선 상황 파악부터 하셔야...."

"너희 지금 범인을 앞에 두고 뭐하는 거야! 범인부터 잡아!"

선배 경찰이 소리 지르며 후배들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후배 경찰들은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 눈이 찢어져라 커졌던 것이다.

"저, 저분은 그러니까...."

"됐어! 안 도울 거면 나 혼자 잡는다."

후배 경찰을 입 닫게 만든 선배 경찰이 총을 들고 내게 겨누며 다가왔다.

저걸로 날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 한 건가. 그때, 후배 경찰 한 명이 선배 경찰을 뒤에서 포박했다.

"선배님! 안 됩니다!"

"너, 너!"

"최, 최준호 초인이라고요!"

"뭐? 누구?"

"최준호 초인이요! 얼굴 모릅니까? 당신 지금 자살하러 달려들고 있다고! 미쳤어?"

"...."

그제야 선배 경찰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그러다 얼굴이 급격하게 새하얗게 바뀌기 시작했다.

요즘 사람들은 왜 먼저 저지르고 나서 알아보는 경우가 많은 건지 모르겠다.

내 얼굴이 흔해서 못 알아보는 건가.

"지, 진짜 최준호 초인님이십니까...?"

"왜 안 덤빕니까? 내가 초인이면 상황이 달라지기라도 합니까?"

"그, 그야 당연합니다."

"사람에 따라 법 적용이 바뀌는군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대영그룹 도련님과는 어쩐 일로...."

"보복운전 당했습니다."

"예?"

"제가 피해자입니다."

난 안전운전을 하던 선량한 운전자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아무튼 이왕 벌어졌으니 망나니 녀석도 확실하게 처리하고 수상한 여자가 속한 곳과 마약을 팔던 곳까지 털어 버려야겠다.

날 보는 경찰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난 뭐, 피해자 되면 안 되나.

"저건 정당방위 산물이고."

"그, 그럼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사람에 따라 대우가 휙휙 바뀌는 걸 봤는데 이대로 데려가게 둘 수 없지.

"마약 소지하고 있는 걸 봐서 국가수호국에 연락했습니다. 그분들이 인계해 갈 겁니다. 경찰 여러분들은 현장 통제만 해 주시죠."

"…아, 알겠습니다."

선배 경찰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면 곤란하지.

"그리고, 경찰님 소속과 이름 좀 알려 주시죠."

"예? 저는 왜?"

"대처 방식이 인상적이어서. 경찰청장님과 얘기 좀 해 보려고요."

"...."

선배 경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 *

정다현이 직접 현장에 도착하면서 상황은 빠르게 끝이 났다.

나는 진승열 옆에 있던 여자를 브레인워싱해서 마약 중개상의 존재를 알아냈다. 그러자 굵직한 정보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 외곽 지역이 한바탕 발칵 뒤집힐 정도의 사건이었다. 광범위하게 마약을 유통하던 조직 하나가 뿌리째 뽑혔다.

이곳에서 재밌는 정보를 손에 쥐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신성그룹 본사에 나와 있었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전날 사건에 대해 파악을 마쳤는지 이영문이 간곡히 부탁해서 와 달라 한 것이다.

내가 앉기 무섭게 집무실 문이 열렸다. 머리가 하얗게 샜지만 풍채가 좋은 노인이었다.

그가 대영그룹 회장 진화성이었다.

나를 본 그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내 손자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앉으시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진화성이 맞은편에 앉았다.

"손자가 리그에 기업 비밀을 넘기고 있습니다."

"승열이 이 못난 놈이...."

난 고개를 저었다.

"진승열이 아닙니다."

"예? 그럼 누구입니까?"

"진승후입니다."

진승후는 진화성의 맏손자이자 대영그룹의 후계자였다.

왠지 익숙한 이름인가 싶더니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이름이더라.

역시, 열심히 외워 두니 필요한 순간 떠오르더라.

107화

대영그룹 후계자인 진승후는 어린 시절부터 반듯한 인성과 천재적인 두뇌로 진화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인물이다.

재계에서 이세희와 더불어 가장 유망한 차기 오너로 꼽혔단다.

하지만 내게는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앞뒤가 다른 음습한 녀석에 불과했다.

뭐라고 했더라, 내 실력이 무사할 경우 관련 종사자가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했던가.

좋게 표현했지만 그 속에 감춰진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든 날 폄하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애써 표정을 관리하는 앞뒤가 다른 인물이겠지.

뭐, 실제로 좋은 녀석이라고 해도 내게 이를 드러낸 이상 참아 줄 생각이 없었지만.

내 말을 들은 진화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승후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겁니까?"

"리그에 정보를 넘기고 있습니다. 아마 기업의 기밀도 넘어갔을 겁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승후는 오래 전부터 그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착실히 경험을 쌓아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왜...."

뭔가 착오가 있을 거란 표정이 역력했다.

끝까지 사람을 믿는 타입은 아닌 거 같고, 아직 손자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걸로 보였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이영문이 말했다.

"회장님께서 승열이에게 중공업을 떼어 주려 하는 게 정 상무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수 있습니다. 재벌가를 이어받을 후계자로서 자기 제국이 쪼개지는 걸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회장."

"제 경우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

난 침묵하는 진화성에게 말했다.

"진승열에게 제공되던 마약과 여자의 배후에 진승후가 있더군요."

이 모든 정보는 마약 중개상을 습격하면서 얻은 것이다.

마약 중개상이 리그의 끄나풀인지 관련이 없는 건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다. 하지만 리그와 관련된 마약을 유통한 건 사실이다.

여기에 분명한 건 진승열이 망가지도록 만든 배후에는 진승후가 있었다.

그가 진승열에게 건넨 건 펜타(Penta)라 불리는 마약인데, 이것은 각성자 전용으로 투여하면 강력한 환각과 더불어 감각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중개상은 이 마약에 굉장한 효과가 있다면서 입을 털었는데, 효과 중 하나가 바로 기프트 개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승열은 기프트를 보유하지 못한 각성자.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펜타는 필요했을 것이다.

마약 복용으로 기프트 개방?

이게 가능할지 아닐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한 가지 분명한 건 진승열 옆에 붙어 있던 여자가 리그에 포섭된 각성자였다는 점이다. 미인계로 대영중공업의 비밀을 빼돌리고 있던 것이다.

진승열을 망가뜨리는 대가로 진승후는 기밀을 줬고.

리그가 양쪽으로 해 먹고 있었다.

"그렇게 붙은 리그 끄나풀이 대영그룹의 기밀을 적잖게 빼 갔습니다."

"…허허, 난 무얼 위해."

"세상 일이 그렇더군요. 상심할 필요 없습니다."

허탈해하는 진화성.

난 그에게 위로를 해 줬다.

다행히 대영그룹만 그런 게 아니더라.

"이건 대영그룹에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재계 전체에 벌어지고 있는 공작입니다. 아마 세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영문이 말을 보탰다.

자신이 세계를 구원해야 할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미친놈이라면 분명 이런 짓을 세계적인 스케일로 벌이고 다닐 것이다.

아마 확실하겠지.

안 그러면 리그의 기술력이 설명되지 않는다.

버서커에게 듣기로 인위적으로 초인의 경지에 올려놓는 기술도 있다고 들었는데.

다시 떠올려 보니 나도 탐이 나는데?

진화성이 고개를 저었다.

"승열이가 그리 된 상황에서 승후까지 쳐낸다면 우리 그룹은 혼란에 빠질 거다."

"회장님이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

이영문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청와대에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처리하라는 말인가?"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그땐 손을 쓰면 된다.

오늘 이 자리도 이영문의 간절한 부탁으로 이루어진 거라.

내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날 향한 진화성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 애들 뒤에 리그가 있다는 말씀, 책임질 수 있습니까?"

"내가 왜 책임을 집니까."

"...."

누가 사업가 아니랄까 봐 책임 소재에서 슬쩍 빠져나가려 한다.

알아서 해야 할 곳은 대영그룹 측이지.

"제 말을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저는 빌런전담팀과 연계해서 이번 정보를 토대로 리그 세력을 쫓을 겁니다. 그때 진승후가 모습을 드러내면 자비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리스트를 놓고 논의를 거친 뒤 일괄 배포를 할 생각이었지. 그리고 자체 정화가 되지 않는 곳을 찾아다닐 계획이었다.

재벌들도 과연 팔이 안으로 굽을까?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거 같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건 편견이다.

힘을 주면 바깥으로도 잘 굽어진다.

아, 이런 건 부러진다고 해야 하나.

진화성의 눈에 체념이 서렸다. 그 모습을 본 이영문이 말했다.

"초인님. 제가 진 회장님들 설득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

여기서 바로 답을 들어도 되는 일인데.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 길러 온 손자들입니다. 가족을 저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데 효과가 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이영문의 수완은 꽤 믿음직해서.

기회를 주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와 생각해 보는데 확실히 리그 녀석들이 음흉하다 싶었다.

이렇게 각지에 마수를 뻗어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다니. 제법 난 놈들이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재계 모든 그룹에 손을 뻗었다면 신성그룹도 예외가 아니었을 텐데.

내가 이세찬에게 브레인워싱을 해서 사전에 차단이 된 건가?

그럼 내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그때 이세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화려함이 아닌 차분한 그레이 계열의 오피스룩이었다.

"안녕하세요, 준호 씨. 대화는 잘 하셨어요?"

"무슨 일로 왔어?"

"중요한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들어서요. 진 회장님은 재계 큰 어르신이기도 해서 성의를 보여야죠. 왜 밖에 계세요?"

"둘이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

생각해 보자.

신성그룹에 마수를 뻗었다면 두문불출하던 이영문은 제외하고 이세찬과 이세희가 남는다.

여기에서 알짜 정보를 쥐고 있는 건 이세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난이도가 확 올라갔다.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겠지.

"갑자기 왜 그렇게 보세요?"

"최근에 접근하던 사람 없었어?"

"엄청 많았죠."

"그래?"

예상치 못한 말이다.

이세희가 싱긋 웃었다.

"네, 근데 다 쫓아냈어요. 딱 봐도 다른 속내가 있어보였거든요."

기프트 매혹을 가진 이세희는 타인의 호감을 사는데 능숙했는데 동시에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접근해 오는 걸 귀신같이 탐지해 냈고 그 사람들을 멀리하는데 도가 텄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가 남자 보는 눈이 좀 까다로워요."

"편식은 안 좋은데."

"거기서는 보통 감동을 받아야 하거든요?"

내가? 왜?

의아함을 담아 보니 이세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농담이고, 저는 행실에 신경을 안 쓰면 바로 구설수가 나오거든요. 평소에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어요. 왜 그러세요?"

"대단하다 싶어서."

이세희가 아니고서는 보여 줄 수 없는 처신이었다. 여러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조건임에도 참아낸다는 건 보통 정신력이 아니고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진승열이 이세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던데.

그걸 말하자 눈에 띄게 난감해했다.

"어, 음. 그게, 집안일이었어요."

"집안일?"

"그게, 오해하지 마시고요. 사실 혼담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거든요. 바로, 바로 거절했어요."

"...."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 화제로 깊게 들어가 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돌렸다.

"리그가 재벌들의 기술을 빼내고 있어."

"수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리그였네요. 정말 안 끼는 곳이 없네요. 얼마 전에는 태평문도 그러더니."

태평문이 뭔가 싶어 물어보니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빌런 조직이란다.

민간에 깊이 퍼져 있어 중국에서 눈에 불을 켜고 색출하는 중이라고.

리그가 세계적인 스케일이라면 각국을 속앓이 하게 만드는 빌런 조직이 몇 개 존재한단다.

하긴, 세계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토착 세력이 영향을 끼치는 게 더 현실적이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진화성이 나왔다.

잠깐 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구나, 세희야."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어엿한 오너가 아니더냐. 당연히 사업에 집중해야지. 네 성공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

"감사합니다. 힘이 되네요."

"그건 그렇고."

이세희와 나를 번갈아 보던 진화성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잘 어울리는 커플을 두고 헛꿈을 꾸고 있었어. 우리 집이 불타고 있는 것도 모르고. 허허."

고개를 젓다가 자리를 벗어났다.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우유부단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그 뒤로 나온 이영문이 내게 말했다.

"진 회장님에게 잘 말해 뒀습니다. 애지중지하던 손자라서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해합니다."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겠지.

다만 결정은 빨랐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세희를 위해 나서 줘서 감사드립니다."

"...."

무슨 말인가 싶었다. 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영문은 내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고, 얼굴이 홍당무가 된 이세희만 남았다.

훈련을 도와줘서 그런 건가?

딸이 반쯤 죽어갈 정도로 매진하는데 그걸 고맙다고 하다니.

이영문의 취향도 참 독특하다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진화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손자 녀석을 처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우유부단하다는 말 취소였다.

* * *

진승후는 자신의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졌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영그룹의 맏손자이자, 할아버지에게 공인받은 후계자. 몇 가지 사업을 맡아 성과를 냈고, 탁월한 이미지 관리로 주변의 신뢰를 받고 있다.

그에게 눈에 거슬리는 건 딱 두 가지였다.

첫째는 망나니 동생이 중공업을 물려받는다는 것.

능력이라고는 여자 후리는 것밖에 없는 녀석에게 그룹의 핵심인 중공업을 물려주는 게 어디 가당한 일이란 말인가.

그래, 녀석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도 했다.

신성의 이세희를 잡기라도 하면 신성그룹과 이어질 희망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못 하는 걸 보고 기대를 완전히 버렸다.

차라리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대영과 신성을 아우르는 최대 재벌그룹이 탄생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최준호라는 존재였다.

재계에서 최준호의 존재는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같았다.

타협보다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미치광이.

그런 주제에 이미지 관리를 하면서 미친 행보가 정의로 포장되고 사이다라 불리고 있었다.

재계 후계자들 사이에서 언제고 반드시 치워야 할 걸림돌이라 생각했는데.

그 걸림돌에게 자신이 걸려 넘어졌다. 그로 인해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었고.

하루아침에 감춰 왔던 모든 비밀이 까발려졌다.

그것도 할아버지한테.

"네게 실망했다."

"할아버지, 그게 아닙니다. 이건 대영그룹이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늘 같은 할아버지였다. 엄할 땐 엄하고 인자할 땐 한없이 인자했던. 그래서 할아버지 것을 온전히 지켜 자신이 발전시켜 나가고 싶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지금은 한없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승후는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진화성의 표정은 냉정했다.

"끝까지 내게 거짓을 말하려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그럼 말해 봐라. 왜 리그와 손을 잡은 거냐?"

"...."

진승후가 입을 닫았다.

국가 전복 세력인 리그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큰 뜻을 가지고 진행한 일이었고,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네가 입을 열지 않는다고 사건이 숨겨지는 게 아니다. 넌 선을 넘었다."

"할아버지."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진승후는 숨이 멎을 뻔했다. 최준호가 왜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

"어서 오십시오, 최준호 초인님."

더 놀라운 건 할아버지가 녀석을 정중하게 맞이한 점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어, 어떻게 저자가?"

"내가 모셨다."

최준호는 무심하게 자신을 보다 진화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보를 뽑아낼 수 있지만 두 번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룹을 말아먹을 놈은 내 손자도 아닙니다. 녀석의 처우는 초인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처음에는 모르다가 흘러가는 내용을 듣고 알게 되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최준호는 저승사자였다.

"오, 오지 마!"

주변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 봤다.

조심스럽게 대하고, 호감을 사려 했으며, 행동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게 보였다.

자신은 그렇게 태어난 존재였다.

처음부터 모든 걸 손에 거머쥐고 태어난 핏줄이 다른 존재.

하지만 최준호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극찬을 받던 영민한 두뇌도, 철저하게 관리하던 몸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사이 자신 앞에 선 최준호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단해. 리그에 대한 정보만 불면 돼."

"그, 그...."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최준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싫어서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생략된 뒤에 말이 더 무서웠다.

입을 닫아도 정보를 뽑아낼 수 있다는 걸로 들었으니까.

암암리에 들리는 정보로 알고 있다.

상대가 입을 닫아도 최준호는 정보를 뽑아낼 수 있다고.

그리고 정보가 다 털린 대상은 텅 빈 깡통이 되어 백치가 된다.

신성그룹 장남 이세찬도 최준호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자신도 그렇게 된단 말인가.

도움을 청하듯 할아버지를 봤지만 자신을 향한 눈동자에 일말의 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

짧은 시간 무수히 많은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최준호의 손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고 머리 위로 뻗어 왔다.

결국 진승후의 선택은 '굴복'이었다.

"마, 말하겠다."

"왜?"

그러면서 손이 다가온다.

진승후가 기겁해서 외쳤다.

"다 말하겠다고!"

"아, 말한다고? 좀 더 기개를 보여 줄 줄 알았어."

"...."

"아쉽네."

녀석은 처음부터 자신을 백치로 만들 생각밖에 없었다.

입맛을 다시는 걸 본 순간, 진승후는 하체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108화

다이내믹 코리아.

마물이 창궐하기 전, 매일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던 대한민국을 일컫던 말이다.

이 말만큼 대한민국을 잘 일컫는 말이 없다.

최근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리그 협력자' 소식은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정계에 이어 재계까지 뒤집혔어.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지."

정치인부터 시작해서 재벌가 로열패밀리까지.

리그는 독버섯처럼 영역을 넓혀 나가 음지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다.

미인계, 위장취업, 해킹, 이면 거래 등등으로 리그에 기술이 유출되고 있었다니. 리그의 작전수행이 오늘 내일 하는 문제가 아니었으나 직계, 나아가 후계자까지 연결된 것은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로 퍼져 나간다면 그 위협이 얼마나 클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은 양반이다.

단순히 간담이 서늘한 걸로 끝이 났으니까.

대한민국은 명실 공히 리그 청정국이다.

이곳도 이 정도인데 다른 곳은 어느 정도일까. 당장 리그에 협력하고 있을 정치인, 기술이 유출되고 있는 기업, 사상적으로 동조하는 내부 협력자들.

여기에 정부 조직을 뒤집을 것처럼 기세를 키우는 지부까지.

실제로 타국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민국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걸 찾아낸 게 최준호고. 이렇게 또 우리를 구해 주는군. 참 대단하단 말이야. 안 그런가?"

"…예. 하지만 상황이 많이 위험합니다."

"위험하지. 실제로 우리 손등이 베이고 있으니까."

최준호가 재계에 터뜨린 폭탄은 정계에 불똥이 튀고 말았다.

대영그룹 후계자 진승후가 리그와 협력을 자백하면서 재계와 리그의 가교 역할을 한 게 유중호임이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올라서다.

여당의 차세대 리더였던 유중호는 리그의 자발적 첩자였고, 그로 인해 여당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등 한차례 내홍을 겪어야만 했다.

유중호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는 건 청와대 입장에서 달갑지 않았다.

실제로 정권 지지율과 여당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

"곪을 뻔한 상처를 일찍 터뜨려 준 거야. 우리로서는 감사할 일이지. 지지율이 아깝지만 일희일비하면 안 되지."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도 지지율이 높은 게 좋으니 최준호한테 마물 하나 사냥 해 달라고 할까?"

천명국도 순간, 혹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빠르게 정신을 되찾았다.

"그러다 불똥이 다른 곳으로 튈 수 있습니다."

"반박할 수 없군. 그래도 이걸로 끝났다는 확신을 얻어서 다행이야."

"그땐 말렸지만 유중호 의원을 제거한 건 올바른 선택이셨습니다."

"음."

유중호에게 정보를 빼낼 당시, 대통령은 여당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웠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잠깐 지지율이 흔들려도 정부에서 보여 준 진심을 시민들도 알고 있다.

오히려 이번 일로 몸통이 뽑혀 나갔다는 확신을 줘서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국가는 우리보다 훨씬 심할 테지.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야."

"핫라인으로 알렸으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일 겁니다."

"우리에게는 최준호가 있지만 저쪽에는 없지. 아마 쉽지 않을 거야."

대한민국에서 리그 세력은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쉽게 소탕했다.

누가 보면 일개 빌런 조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천명국의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대신 저희는 최준호맛을 보고 있습니다."

"…음! 그래도 가끔 이런 시원한 맛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사건 사고가 터지는 걸 보면...."

"하긴. 우리가 하루 다르게 늙는 게 그 이유도 있지."

그리 말하던 대통령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미친놈들을 봐 왔지만 하늘 위에 하늘이 존재한다는 걸 오늘도 깨닫고 있었다.

'격'이 다르다는 걸 매일매일 보여 주고 있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최준호의 존재는 하이리스크와 하이리턴을 동반하고 있었다.

"재계에서 푸쉬가 들어오고 있겠지?"

"예. 그들은 최대한 조용히 상황을 해결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몇몇 곳은 충분한 성의를 표시할 수 있다고 의사를 밝혔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무려 대영그룹 후계자가 날아간 상황이었다.

진화성이 칼을 뽑아들었는데 다른 재벌들이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조용히 하게 가만히 둔다?

그럼 최준호가 알아서 시끄럽게 만들어 줄 것이다.

"모두 거절해."

"예."

"그리고 뭉그적거리면 이렇게 말해. 우리가 직접 나서서 최준호를 출동시킬 거라고. 우리가 말려도 자발적으로 출동할 테지. 어느 게 더 좋을지 결정하는 건 자기들 몫이라고 하고."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망설일 수 있는 사람이 없겠지.

무책임하지만 이게 최선이다.

"...."

천명국은 대통령도 최준호를 폭탄취급 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 * *

대영그룹에서 진승후가 내쳐지면서 상황은 깔끔하게 종료되었다.

내가 나설 것도 없는 깔끔한 조치였다. 진화성 회장은 내게 사과를 하면서 제대로 된 후계자를 길러 내겠다고 천명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본인이 의지를 다지는 거니까.

난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

이영문의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거겠지.

마지막에 추한 모습을 보인 진승후는 제주도로 보낼 거란다.

섬이니까 외부로 나오기도 힘들 테니 사실상 유배로군.

진화성이 말하길, 대영그룹에서 본을 보였으니 다른 곳도 잘 알아서 해결할 거란다.

글쎄? 그건 지켜봐야 할 일이고.

일처리를 할 때 최정상에 선 이들은 제대로 본을 보인다면 그 밑은 뭉개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하긴,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그때 나서도 된다.

어차피 내가 가만히 있어도 잘 해결될 테고.

재벌 그룹도 하나의 정글인 이상 반대파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리그와 연관된 이 호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일단 블랙리스트에 있던 녀석 하나는 처리했군. 그러니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

오히려 내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렸는데, 진승열이 갖고 있던 마약이었다.

"펜타(Penta)."

현재 이 마약에 붙여진 이름으로, 각성자들의 마약이라 불린다.

리그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기프트를 개방할 수 있는 각성제라고 소개했다.

구매자들은 이 소개에 모두 코웃음을 친단다. 하긴, 마약 투여로 기프트를 개방할 수 있다면 각성자들 상당수가 리그에 투신했을 테지.

그들이 이 마약을 투여하는 건 부작용과 의존도에 비해 효과가 뛰어나고 오랫동안 각성 상태를 유지시켜 줬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이게 '감각이 날카로워져서 기프트도 개방할 수 있는 마약'으로 우스운 이미지가 되었지만 내가 볼 때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펜타는 기프트 개방에 도움이 된다.

"잠재된 기프트가 어떤 건지 알아 둘 필요가 있지만."

자신이 개방할 수 있는 기프트 종류를 알고 펜타를 투여하면 각성 상태가 유지되면서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온전히 확장된 집중력이 기프트라는 미지의 영역을 샅샅이 탐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목적지가 확실한 방향으로 훈련을 한다면?

극적인 효과가 나타날 거라 확신할 수 있다.

결국 기프트라는 게 선천적으로 타고나 개방하는 게 아니면 후천적으로 결합된 몇 가지 요소로 개방된다는데 일반적인 견해였다.

효율을 높여 줄 수 있다는 건 기프트 개방 속도를 앞당길 수 있다는 의미고.

물론 100%는 아니다. 하지만 해 봐서 나쁠 건 없다.

문제는 이걸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점이다.

마약 효과는 줄이고 각성 효과만 뽑아낼 수 없을까?

그럼 한 명은 확실하게 기프트를 개방시킬 텐데.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윤희인데 여동생에게 마약으로 분류된 걸 사용할 수 없으니까.

"이세희한테 부탁해 봐야겠다."

어쩌면 이게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일지도.

기프트를 개방할 수 있다면 각성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다.

그때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약을 그렇게 애절한 눈으로 보면 의심을 받을 수 있어요."

오늘 훈련을 봐주기로 한 정다현이었다.

내 연락에 와 줬으니 신세를 갚는 것이다.

조만간 실전을 위해 빌런 조직도 같이 소탕하기로 약속했다.

"왔어?"

"무슨 고민하셨어요?"

"이거."

난 펜타를 들어보였다.

"마약 성분은 제거하고 각성 효과만 얻을 수 없을까 생각했거든."

"그건 왜요?"

정다현도 펜타로 기프트 개방이 가능하다는 걸 안 믿나 보다.

하긴, 요령보다 정석에 충실한 타입이니.

묵묵히 자기 길만 걷는 걸 보면 정다현답다 싶었다.

"기프트 개방에 도움이 될 수 있어 보여서."

"진짜요?"

정다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리그에서 말하는 게 사실일 줄은."

"걔네들은 진짜 이런 효과가 있는지 모를 걸."

"근데 저항이 클 거예요. 펜타는 세계 각지에서 골칫거리라."

"하긴."

만약이라는 인식이 그렇긴 하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아쉬움은 있었다. 강해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데. 내가 정당한 수련 방법을 고집할 때 다른 사람들은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나만 해도 강해지려고 남의 피를 섭취하지 않던가.

인식을 생각해서 사용하지 않는 건 아쉬운데.

일단 해결되지 않는 고민은 거기까지 하기로 하고, 정다현과 볼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막히거나 어려웠던 점은 없어?"

"오히려 놀랄 정도로 수월해서 문제에요."

"그래?"

정다현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세상 일이 이렇게 수월할 리 없을 텐데?

"네. 가령...."

정다현이 돌연 손을 뻗어 내 눈을 노렸다. 그걸 왼손으로 잡아내고 오른손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 몸을 뒤틀면서 회피한다.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면서 싱긋 웃는다.

"이런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본인은 직감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내 생각은 달랐다.

"좋지 않아."

"네?"

"이건 이기는 흐름이 아니잖아. 불필요한 포스가 소모와 기프트 남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지."

"아!"

"그러다 금방 퍼져서 서 있지도 못할 걸."

"...."

난 애정 어린 조언을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 동 레벨 각성자를 만날 텐데 그 상태를 바로 알아차릴 거야. 그들을 상대로 체력적 열세를 겪는다고 생각해 봐."

"끔찍해요."

"신이 났던 거지. 그 상태에서 각성자들이 가장 많이 죽어."

"…반성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제부터 집중할 건 기프트 활용의 완급조절이야. 유리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 과감하게 끄는 거지. 그리고 퍼즐 조각을 찾아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보는 거야."

물론 쉽지 않을 거다.

날 상대로 퍼즐 한 조각도 찾기 쉽지 않을 테고.

하지만 그 정도 어려움은 있어야 발전을 꾀할 수 있다.

"해 볼게요."

"좋아."

* * *

펜타에 대해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윤희를 보니 다시 펜타가 생각났다.

최근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 걸 보면 계기만 있으면 바로 각성할 거 같은데. 기로에 서 있는 상태인 거 같아서 더 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윤희가 미간을 모으더니 바로 반응했다.

"왜 그렇게 봐?"

"뭐가?"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지?"

"아니."

"딱 보면 알거든?"

이젠 별 걸로 다 시비를 건다.

…근데 어떻게 알았지?

윤희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화두였다.

펜타를 보고 고민에 휩싸일 만큼 윤희의 기프트 개방 속도는 느렸다.

물론 내 기준에서.

이세희나 정다현은 결코 늦지 않다고 말하더라.

물론 내 기대치가 높을 뿐 윤희의 재능이 부족한 건 아니다. 본인 나이대에서 매우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신성 길드 소속이라는 점, 선배들의 리드에 실전 경험을 쌓아 나가고 있는 점이 큰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모자랐다.

적어도 자기 몸 지킬 수 있는 실력 정도는 갖춰야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딱 지금 정다현 정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드니.

음, 내 기대가 과한 건가?

아무튼 좀 더 빠르게 성장하길 바라는 게 내 마음이다.

절대 윤희를 더 굴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내 진심은 과거로 돌아와 동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증명해 줄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윤희가 훈련 도움을 요청해 왔다.

"나 좀 도와줘."

"평소에는 경기를 일으키더니?"

"그, 감이 오고 있거든."

"그래?"

"응. 평소라면 지쳐서 나가 떨어져야 하는데, 갑자기 힘이 솟곤 해. 오빠 말대로 내가 얻을 기프트가 불굴이면 그거와 관련이 있는 거 같아."

윤희가 제대로 봤다. 불굴은 언제 어느 순간이던 자신의 실력을 100% 발휘할 수 있는 기프트였다.

굴려 달라니 굴려줘야지.

"나 굴릴 생각하니 그렇게 좋냐?"

"아니?"

"근데 왜 웃냐?"

…표정 관리에 실패했군.

아닌 척 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면 대놓고 웃어 주마.

결과부터 말하자면 윤희의 기프트 개방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기미는 보이고 있었다. 기프트 개방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확 얻기도 하지만 차근차근 쌓아온 결과물이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다.

마물 한가운데에 던져 놓으면 생존본능이 극한으로 발휘돼서 바로 개방할 거 같은데.

극약처방이지만 한번 시도해 볼까?

이게 다 윤희를 위해서 하는 거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죽는다."

…혹시 독심술을 얻어 놓고 못 얻은 척 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본인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한번 봐줘야겠다.

* * *

진화성이 본을 보이면서 재계 내 리그 협력자 색출은 빨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룹 후계자였던 진승후가 쫓겨나는 걸 본 재계 그룹에서 관련자들을 모조리 제주도로 내려보낸 것이다.

이렇게 보니 제주도가 무슨 핫플레이스라도 된 거 같다.

이러다 밖에 나오면 재계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는 거 아닌가.

유배 개념으로 보낼 거면 울릉도 같은 곳도 나빠 보이지 않는데.

대한민국이 한바탕 떠들썩한 사이, 세계 각지도 사건사고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발트 3국 중 에스토니아가 사실상 친 리그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데, 동유럽은 현재 리그와 러시아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중국의 빌런 조직 태평문에서는 새로운 초인이 등장했음을 선언했고, 중동에서는 플러스 단계 마물 데저트 드래곤으로 인해 초인 한 명이 전사하고 천 명이 넘는 각성자가 실종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새로운 이상 현상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이상 현상이라면 이맘때쯤 벌어지는 일이었던가?

하루가 조용할 날이 없군.

여느 때처럼 청와대에 도착한 나는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마주했다.

"하이! 준호! 졸라 반가워!"

미국의 초인, 제임스 리드가 와 있었다.

이 졸라맨,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난 녀석에게 성큼 다가갔다.

"너 잘 왔다."

"응?"

"지중해 레시피 알려 준다고 하고 홍합 잔뜩 넣어 준 거 생각 안 나냐?"

"왓?! 말이 너무 빨라효! 나 한국말 미숙해요!"

헛소리하네, 이 졸라맨이.

이미 녀석이 머리 좋은 걸 난 눈치채고 있었다.

지 불리할 때만 한국어 약한 척 하고.

내가 없으면 한국인 못지않게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할지 모른다.

여태까지 날 속여 먹은 놈들 중에 살아남은 놈들은… 암시장 상인들이 있구나. 걔들은 저번 생에서 사기 친 거라서 어쩔 수 없는 거고.

이 졸라맨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녀석이 서류 하나를 내밀기 전까지는.

"하하! 그럴 줄 알고 내가 뉴요커 레시피를 가지고 왔어. 이거 완전 죽여! 둘이 먹다 졸라 다 뒤져!"

…한번 믿어 볼까?

녀석이 내민 레시피가 맛없었던 적은 없으니까.

내가 손을 뻗자 녀석이 슬쩍 뒤로 뺀다.

"내놔."

"나중에 주면 안 돼?"

"내가 한번 당하지 두 번 당할 거 같냐? 빨리 내놔."

"졸라 깐깐해!"

툴툴거리던 제임스 리드는 한글로 적힌 레시피 서류를 내게 넘겼다. 글씨를 한국인인 나보다 더 잘 쓰는 거 같군.

설마 레시피에 장난을 치진 않았겠지.

수상함을 느꼈지만 관대하게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지금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레시피 공유를 원한다면 해 줘야겠군.

일본에서 묵은 원한을 풀었으니 찾아온 용건을 들을 때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어?"

"미국과 한국은 오래 전부터 졸라 끈끈한 우방이었잖아!"

"그게 뭐?"

"그만큼 졸라 오래된 동맹이란 이야기지! 서로 돕고 돕는!"

"핵심만 추려서 말해. 바라는 거 있지?"

"응. 지금 미국이 졸라 위험해!"

굉장히 핵심만 이야기했군.

최근 미국에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더니 그거였나.

어떤 말을 하는 건지 알겠다.

"알았어, 잘 막아 봐."

"잠깐! 준호! 도와줘야지!"

"내가 왜?"

"준호! 졸라 야박하네!"

제임스 리드가 대놓고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109화

제임스 리드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봐!"

하도 간절해서 레시피도 받았으니 한번 들어주기로 했다.

"해 봐."

"그러니까...."

제임스 리드가 바다 건너 먼 한국으로 온 건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강렬한 포스 반응이 일어났다. 새로운 플러스 단계 마물인가 싶어 캘리포니아에 비상대기령이 떨어지고 각성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려 수십만이 넘는 마물들이 해당 장소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비상이 걸렸다.

수십만이 넘는 마물의 웨이브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거대한 재앙이었다.

만약 이 마물들이 일시에 들이닥치면?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가 예상되었다.

일각에서는 선제적 핵 타격을 주장했지만 그것이 도리어 마물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 반대 의견이 우세한 상황이라고 했다.

"...."

그나마 이성이 살아 있군.

핵을 쐈다면 오히려 최악의 상황이 빨리 닥쳤을 것이다. 상황 진행을 가로막고 있는 잔챙이들을 치워 주는 격이 되니까.

아무래도 졸라맨이 말하는 상황은 내가 예상한 게 맞는 듯했다.

뭐, 그건 그거고.

난 삐딱하게 자리하곤 말했다.

"그래서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준호는 졸라 똑똑하잖아! 방법이 없을까?"

"그니까 왜 나한테 묻냐고."

"에이, 다 알면서."

언제부터 우리가 친했다고 능글맞게 구는 건지 모르겠다, 이 졸라맨은.

일단 이야기나 들어 볼까.

"우리는 이걸 마물의 무덤이라 부르기로 했어."

제임스 리드의 추측은 정확했다.

마물의 무덤, 미국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은 마물의 시체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저번 생의 경험을 떠올렸다.

마물이 등장하고, 각성자가 등장하면서 각자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유해 8단계 마물이 등장하면서 레벨 8 초인이 등장했고, 유해 8단계를 뛰어넘는 플러스 단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류 영역을 절반 이상 장악한 마물의 숫자는 무시무시하다.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려고 해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마물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각국에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마물이 늘어나는 속도는 빠르고 수준급 각성자를 길러 내는 시간은 오래 걸리니까.

그러다 보니 마물 생태계가 조성되고, 서로 치고받으면서 약육강식 환경 속에서 높은 단계 마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해 8단계 숫자가 늘어나면서 특정 지역에서 포식자로 군림할 마물끼리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했고.

승자는 해당 지역을 차지하고 패자는 쫓겨난다.

무사히 빠져나왔을 때 새로운 영역에 자리 잡을 수 있지만 간혹 부상이 심각한 마물은 이동하다가 사망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마물의 시체란 거지."

"맞아."

제임스 리드가 말한 마물의 무덤은 유해 8단계 마물이 죽으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마물 생태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유해 8단계 마물의 심장, 달리 코어(Core)라 불리는 포스가 갈무리 되지 않고 폭주하게 된다.

마물들이 모여드는 건 이 코어를 노린 것이다. 코어는 마물에게 있어 강함의 상징이자, 힘의 원천이니 이걸 차지하려 각축전을 벌인다.

온전히 흡수할 경우 새로운 유해 8단계 마물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표현하니 장보도를 쫓아 몰려다니는 무림인 같군.

"방법을 알지? 응?"

"마물이 죽어서 발생하는 현상인 건 알 텐데."

"알지!"

"저 코어를 마물이 흡수하면 새로운 유해 8단계 마물이 되는 것도 예상하고 있을 테고."

"응!"

제임스 리드는 뭔가 엄청난 해법을 기대하고 있나 보다.

그런 게 뚝딱 나오면 세상 살기 얼마나 쉽겠나.

세상은 모름지기 정석이다, 정석.

나도 빠르게 강해지려고 기프트를 이것저것 취하다 미쳐 버리지 않았던가.

"그럼 그냥 둬."

"왓? 그게 끝?"

"낮은 단계 마물이 코어를 흡수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미국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유해 8단계 코어가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무수히 많이 모여든 마물 중 하나가 코어를 흡수한다고 해도 보통 힘의 폭주를 이겨 내지 못하고 폭발해 버린다.

"하지만 만약에 흡수를 성공하기라도 하면...."

"그땐 유해 8단계 마물이 되는 거지."

"졸라 무책임한 말이잖아, 준호!"

이런 게 기도메타인 줄 알았는데 별론가.

"무책임은 된장찌개에 홍합 넣으면 그게 지중해 레시피라고 말한 뒤 튄 너고."

"...."

"이 경우는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코어를 흡수한 마물이 자폭하는 걸 기대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소수 결사대를 꾸려서 코어를 파괴하는 거지."

그러면 코어의 힘에 이끌린 마물은 알아서 흩어질 것이다.

오히려 뒤죽박죽 뒤섞인 마물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획기적으로 숫자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정도는 미국도 이미 알고 있을 거다.

날 찔러본 건 기상천외한 방법이 없는지 혹시나 한 걸 테고.

그래도 선택지를 정해 놓을 수 있는 게 나쁘진 않을 거다.

제임스 리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없어. 용건 끝났으면 가라."

그래도 새로운 레시피를 준비한 성의를 봐서 봐줘야겠지.

뉴욕식 된장찌개라, 뭔가 뉴요커 감성이 느껴지는군.

제임스 리드는 내가 미국에 와 주길 바라는 눈치인데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와서 갈 생각이 없다.

윤희 기프트 개방도 시켜 줘야 하고 펜타 각성 성분 추출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얼마 후에 벌어질 '습격'도 대비를 해야 한다.

내가 알기로 남쪽과 북쪽에서 플러스 단계 마물이 동시에 출몰하고, 그 틈을 타 습격해 오는 세력도 있는 걸로 아니까.

이만 불청객을 쫓아내나 싶었는데, 예상 밖의 대답을 들었다.

"나 안 가."

"뭐?"

"앞으로 한국에 머물기로 했어! 졸라 오래 머물 예정! 그러니 잘 부탁해!"

제임스 리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강제 출국은 안 되나?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천명국을 보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리드 초인께서는 주한미국대사 책임자로 오셨습니다."

"...."

초인이 그런 게 가능한 거였나?

골치 아픈 녀석이 한국에 머물게 되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