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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술명가 격투천재 - 마늘생강 >

◈ [1화] 챔피언

경기 시작.

시합을 알리는 레퍼리의 선언이 시작되자, 상대 선수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목이 뻐근해.'

류태신은 고개를 꺾으며 가볍게 굳은 몸을 풀었다.

그런 여유 탓일까, 상대 선수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겨도 이상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분노한 상대방의 얼굴에도 류태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민머리 선수는 결국 도전자였고, 류태신은 챔피언이었다.

왕좌에 앉은 사자는 언제나 여유와 기품을 보유해야 했다.

류태신의 눈이 상대 선수를 좇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와 눈을 마주친 민머리 선수는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무슨 눈빛이....'

마치 피식자가 된 것 같은 감각에 오금이 저려왔다.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기분이었다.

심장의 펌프질이 줄어들자 손끝 발끝부터 신호가 왔다.

몸이 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격투기 선수에게 있어 기민한 움직임은 기본 덕목이다.

손발이 묶인 격투가는 아마추어만 못하다.

류태신이 천천히 접근했다.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미 느껴졌으니까.

'내가 이겼어.'

옥타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류태신은 확신했다.

이미 상대는 겁을 집어먹었다.

아무리 옥타곤이 변수가 가득한 장소라고 한들, 토끼가 사자를 물어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툭.

류태신의 앞발이 상대의 발을 막았다.

'제길!'

상대 선수가 뒤늦게 당황하며 몸을 빼려고 했지만 류태신의 몸이 더 빨랐다.

앞발을 축으로 류태신의 허리가 꺾였다.

뻐억!

류태신의 주먹이 상대 선수의 턱에 꽂혔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제대로 꽂힌 스트레이트였다.

상대 선수의 몸이 허물어지며 경기는 싱겁게 막을 내렸다.

와아아아아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챔피언의 모습에 관중석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류태신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옥타곤을 내려왔다.

대미지 따위는 없었다. 아무런 셋업도 없이 내지른 오른손이 상대의 턱에 꽂힌 것이다.

상대 선수가 실력이 부족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류태신이 규격 외로 강한 것이다.

40전 무패.

SFC 3체급 챔피언이자 불패의 파이터.

그것이 바로 류태신이었다.

하여 환호성은 류태신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않았다.

'재미없어.'

투쟁이 좋아서 격투기를 시작했지만, 그 어떤 상대도 류태신의 투쟁심을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너무나 약했다.

상대의 움직임은 훤했으며, 어떤 전략을 들고 와도 류태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루했다.

류태신의 체급은 현재 미들급.

라이트급부터 순차대로 밟고 이 자리에 올라왔다.

심지어 미들급부터는 감량도 하지 않은 채 평소 몸 상태로 경기에 임했다.

체중 몇 킬로 따위는 류태신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 이상 체급을 월장하고 싶은 생각도 안 들었다.

'어차피 똑같을 테고.'

자신보다 체급이 높은 선수들도 류태신에게 승부욕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은퇴할까."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류태신의 말에 수많은 스태프와 세컨드들이 화들짝 놀랐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약 먹었어?! 뜬금없이 은퇴라니!"

대기실이 순식간에 번잡해지자 류태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그렇게 소란이 잦아들고 코치들과 다른 선수들이 류태신에게 한마디씩 조언을 내뱉었다.

대부분 자신들의 이익에 대해서만 늘어놓는, 같잖은 내용들이다.

'기생충 같은 것들.'

류태신은 알고 있었다.

저들은 자신을 동료로 보고 있지 않았다.

단순한 돈벌이.

류태신이라는 전례 없는 스타성에 기대는 기생충 같은 존재들이었다.

애초에 돈 욕심이 크지 않은 류태신이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최근 들어 저들은 휴대폰이나 방을 뒤지는 등 개인적인 것까지 간섭하려 들었다.

거슬렸지만 구태여 자르기는 귀찮았다.

권태감.

미칠 것 같은 권태감이 류태신을 잡아먹고 있었다.

의욕이 생기지가 않았다.

명예와 돈은 이미 벌 만큼 벌었다. 이 이상 벌어 봤자, 삶의 질은 올라가지 않는다.

류태신은 코치진들의 말을 무시한 채 휴대폰을 들었다.

최근 들어 유일하게 꼬박꼬박 챙겨 보고 있는 소설이 있었다.

내용은 보잘것없는 흔한 양판소였지만, 그렇기에 별생각 없이 시간을 때우기에는 제격이었다.

[현실에서는 왕따인 내가 이세계에서는 용사라고?]

정말 뭣 같은 제목이어서 처음에는 선뜻 손이 안 갔다.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니 그럭저럭 볼만은 했다.

'주인공은 답답하지만.'

유약하고 찌질한 주인공의 성격을 류태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은 꾸준히 역경을 넘어 성장해 나갔다.

그러는 도중에 수많은 절세 미녀들이 주인공 주위로 모여들게 된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현실성 없는 스토리는 물론이고, 작품성도 없었지만 따분한 시간을 때우기에는 썩 나쁘지 않았다.

* * *

"으음...."

류태신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 보군.'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뭐지?"

몸이 무거웠다.

피로로 인해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피곤함 때문에 느껴지는 피로와는 전혀 달랐다.

무거운 중량감이 모래주머니처럼 느껴진다.

그 감각이 소름 돋게 생생해 무심코 팔을 바라봤다.

잘 벼린 칼처럼 단련된 자신의 팔이 아니다.

두툼하고, 토실하며, 포동포동했다.

류태신은 눈을 껌뻑거렸다.

'꿈을 꾸고 있나?'

주위를 둘러보자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는 물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난장판이군. 그건 그렇고...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머리가 깨질 것 같지?'

어이가 없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상황은 말로만 들어봤지, 직접 겪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지방 덩어리는 뭐고.'

허....

기가 찼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되는 일이 없었다.

류태신은 일단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지방이 덕지덕지 붙은 몸으로는, 몸을 일으키는 단순한 행위조차 쉽지가 않았다.

쿠당탕!

테이블과 의자가 널브러졌다.

"...하하."

너무 현실성 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꿈인가?

그게 가장 타당했다.

하지만 류태신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꿈은 아니야.'

꿈이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현실감이 느껴졌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뭐지?

혼란은 해소가 되지 않고 꼬리를 물었다.

류태신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릴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슬슬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서늘했다.

낮은 중저음의 음성이었지만, 목소리에는 가시가 있었다.

류태신의 고개가 돌아갔다.

"도련님?"

눈앞에 있는 남자.

말끔한 턱시도를 입은 노신사.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비주얼을 지닌 노신사였다.

한데 이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가 낯이 익었다.

그 순간 갑자기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수많은 기억의 편린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에단 블란테? 뭐야, 이것들은?"

기억이 중구난방이다.

어질러 둔 퍼즐 같은 기억이 정리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밀려들어 왔다.

혼란스러웠다.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류태신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부여잡았다.

"에단? 블란테?"

혼잡한 와중에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소설?"

현실에서는 왕따 뭐시기?

"하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렇다면 아귀가 맞기 시작한다.

상황을 이해하고 나니, 혼잡하던 기억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갔다.

그렇다고 두통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통은 더욱 격렬해졌다.

'내가 소설 속에 들어왔다고?'

그것도 양산형 개막장 소설 속으로.

류태신, 아니, 지금은 에단 블란테.

그는 갑자기 닥친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꿈이라고 우기며 현실을 도피할 바보 같은 짓을 할 여력도 없었다.

일단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런 에단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이성을 잃으신 모양이군요."

경멸의 눈초리.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동자에 담긴 미약한 감정의 흔적.

에단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네이드.'

에단의 전속 집사.

뼛속까지 오만하고 방약무인한 성격인 에단은 네이드에게 수없이 모욕적인 언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에단, 아니, 소설을 읽은 류태신은 알고 있었다.

네이드는 고작 집사라는 신분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런 그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깨진 잔들과 접시들을 지르밟으며 다가오는 네이드의 분위기는 가볍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금 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가주님의 명령이니 원망하지는 마시죠."

그리 말하는 네이드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고, 그걸 바라보는 에단의 눈살은 가늘어졌다.

'어떻게 해야 되지?'

이 자리에서 모든 상황 판단을 끝내는 것은 무리였다.

최소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에단은 잠시 고민하다가 네이드의 말에 순순히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 순간, 네이드의 손이 에단의 목덜미를 향해 뻗었다.

에단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뻗어진 네이드의 손을 붙잡고, 에단의 육중한 몸이 네이드의 등에 걸쳐졌다.

무거운 질량은 네이드의 무게 중심을 흐트러뜨렸다.

그 상태로 에단이 몸을 숙이자, 순간 네이드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완벽에 가까운 업어치기였다.

'이런.'

에단은 업어치기를 시도함과 동시에 후회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손끝에 느껴지는 단단한 네이드의 몸은 이런 기술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휘익―

역시나 네이드는 업어치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자 에단은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네이드가 싱긋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꽤나 놀랐습니다. 이러한 박투술은 처음 겪는군요."

네이드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놀란 것은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피한 거지?'

방심한 탓에 제대로 걸린 기술이었다. 이미 80프로 이상 걸린 기술은 방어가 무의미했다.

하지만 네이드는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에단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돌아가시죠."

네이드의 주름진 눈길에서 경멸이란 감정은 사라졌다.

"알겠어."

에단이 두 손을 들었다. 여기서 반항을 해 봤자 득 될 것이 없었다.

'어이가 없군.'

처음 겪어 봤다.

보기만 해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은.

* * *

에단이 순순히 말에 따르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네이드였다.

평소 에단의 포악한 성정과 대비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네이드는 중간에 에단이 도망가는 것을 우려해 계속해서 신경 썼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었다.

'소설 속에 들어오다니.'

삼류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유행 지난 설정이었다.

그런 상황을 지금 자신이 겪고 있었다.

'그것도 왜 하필 이 녀석이야.'

에단 블란테.

대륙에서 명망 높은 검술 명가의 둘째.

신분은 좋았다. 하지만 따라오는 호칭은 결코 좋지 못했다.

블란테의 개망나니.

가문의 수치.

검술 명가의 자제이면서도 검을 두려워하는 머저리.

두려워하는 이유조차 별다른 게 아니었다.

에단은 천성이 겁이 많고, 자신의 안위를 가장 중요시하게 여겼다.

그런 성향 탓에 에단은 검을 두려워한다.

도저히 검술 명가의 피를 이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의 비루한 재능과 성향.

그에 따라 가문 내의 평가도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엑스트라 악역.'

원작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들 장치.

딱 그 정도의 입지를 가진, 그런 목적으로 조형된 캐릭터였다.

입체적인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형적으로 만들어진, 작위적인 악역.

'그럴 수는 없지.'

류태신은 에단의 캐릭터를 그대로 이어 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포식자이며, 우두머리고, 챔피언이었으니까.

지구로 돌아가는 것 따위는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 [2화] 소설 속 망나니 (1)

근신 처벌을 받은 에단은 별채로 돌아왔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처우였다. 그간 저지른 패악과 사건들이 있으니 이 정도 처벌쯤은 달게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호화롭네.'

근신을 위해 마련된 별채였지만, 시설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확실히 대륙 제일의 검술 가문이라 그런지 형벌 목적으로 건축된 건물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사치스러운 물품들은 없었지만, 에단과 몇몇 시종들이 지내기에는 과분하다 못해 넘쳤다.

'오히려 다행이지.'

에단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서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것은 그의 성격이 아니었다.

이왕 벌어진 일이라면 최악을 피하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야만 했다.

'초반에 객사할 수는 없지.'

그따위 엑스트라가 되어 줄 생각은 전혀 없다.

에단이 비중 하나 없는 악역이라면, 이제부터는 그 비중을 키울 생각이었다.

'먼저 몸부터 만들어야겠군.'

에단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살이 많다 한들 이건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조금 있으면 걸어 다니는 게 아니라 굴러다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계획을 실행하기 앞서 몸부터 탈바꿈시켜야 했다.

에단은 거울 앞에 섰다.

정확한 체중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추할 수는 있었다.

"키는 170 중반에 체중은 150킬로 정도인가."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랜 기간의 선수 생활 덕에 감량이라면 이골이 나 있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금 몸으로는 뭘 할 수 있는 게 없지.'

아무리 에단이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한들, 그건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된 상태여야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처럼 평판도 바닥을 치고, 몸 상태도 엉망인 상태라면 가지고 있는 정보들도 쓸데가 없었다.

"어이, 거기."

에단이 시종 하나를 불렀다.

평소의 류태신이라면 다짜고짜 반말을 하진 않았을 테지만,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이 섞여서인지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너 말이야."

순간, 시종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 저를 부르신 건가요?"

벌벌 떨면서 다가오는 눈치를 보아하니 겁에 질린 게 분명했다.

'...지랄 났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마나 밥 먹듯이 패악질을 저질렀으면 반응이 이따위란 말인가.

에단이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여기 연무장이 어디지?"

"여, 연무장 말씀이신가요?"

"그래. 연무장 말이다."

시종이 불안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도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순간 시종이 갑자기 넙죽거렸다. 에단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왜?"

"제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나, 부디 그것만은... 흑흑."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러는 거냐고."

에단의 물음에 시종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연무장에서 저를 벌하려던 거 아닌가요?"

"...내가 왜?"

"그냥 제가 마음에 안 드셔서...."

"...혹시 내가 평소에도 툭하면 두들겨 패고 그랬나?"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에단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계획대로 진행하기가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 *

"갑자기 체력 단련을 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이드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묻자,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군.'

무언가 바뀌었다.

평소의 에단이었다면 훈련은커녕 대낮부터 술과 여자를 탐했을 것이다.

'단순한 변덕인가?'

타당한 의심이었다.

한순간에 바뀌었다고 믿기에는 그간 에단이 저지른 만행이 만만찮다 보니, 변덕으로 치부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때 그 기술....'

네이드는 난장판이 된 주점에서 에단이 펼친 기술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겪은 기술이었다.

어지간한 무술과 박투술은 모두 꿰고 있다고 자부했건만, 접근해 오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은 처음 겪었다.

'한 번쯤은 믿어 봐도 괜찮겠지.'

애초에 큰 걸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네이드에게는 연무장 사용을 금할 권한이 없었다.

검술 가문의 자제가 몸을 단련한다는 것만큼 아귀가 맞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본채로 갈 생각은 안 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네이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에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따위 걱정은 하지 말고. 당분간 여기서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오히려 잘됐다.

이 저택 내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하다면 굳이 이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에단은 지금 이 보기 힘든 몸을 탈바꿈시킬 생각이었다.

'파이트 캠프랑 비슷하군.'

시합 전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한 파이트 캠프.

생각해 보니 거기와도 크게 다를 바 없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폐쇄적인 환경은 익숙했다.

처한 상황이 기구해 웃음이 흘러나왔다. 에단이 발을 내디뎠다.

시작은 천천히. 근육이 놀라지 않게끔 예열을 시켜야 했다.

땀이 흐르며 몸이 어느 정도 풀리자 속도를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올라가던 속도는 어느덧 조깅 수준이 되었다.

'제기랄. 진짜 생각 이상이군.'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다.

이제 막 달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것도 매우 여유로운 속도였다.

조깅을 한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

선수 시절의 류태신이라면 이 정도 달리기쯤은 온종일을 해도 거뜬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몸은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몸에서 적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관절이 삐걱거리며 아우성을 치고, 근육은 연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육중한 몸은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요란하게 출렁였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다. 하지만 에단은 주저앉지 않았다.

이제 고작 시작일 뿐이다. 여기서 포기하면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한다.

체계적인 훈련? 컨디션 향상?

선수 시절 경험에서 비롯한 수많은 운동 프로그램?

그딴 것들은 지금 사치였다.

일단 이 무수한 지방을 걷어 내야만 한다.

당장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데 무슨 훈련과 운동을 한단 말인가.

허억, 허억.

에단이 숨을 헐떡이며 달리기 시작하자, 네이드가 묘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정말 운동을 시작할 줄이야.'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에단은 정말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처참하고 처절하게 뛰고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애초에 그는 당장 걷는 것조차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개인 시종과 마차가 없으면 근방에도 나가지 않는 것이 바로 에단이었다.

그런 그가 달리기라니.

네이드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럼 오늘 저녁을 준비해 볼까.'

본래 식사를 담당하는 주방장이 있었지만, 네이드는 오랜만에 직접 주방에 들어설 생각이었다.

에단의 노력이 묘하게 갸륵했다.

* * *

네 시간.

장장 네 시간이었다.

에단이 쉬지 않고 달린 시간이다.

단련하지 않은 일반 성인 남성도 한 시간을 뛰면 호흡이 버거워진다.

그런데 운동이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에단이 네 시간을 쉬지 않고 내리 달렸다.

150킬로의 육중한 몸을 이끌고, 의지력 하나만으로 말이다.

연무장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에단이 입고 있는 옷도 땀을 비롯한 다양한 체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연무장에 엎어진 에단의 몸이 숨소리와 함께 들썩였다.

"허억, 허억."

머리가 어질거리고 당장 게워 낼 것처럼 속이 울렁였다.

고통스러웠다.

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고, 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은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에단은 앓는 소리를 하지 않고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여기서 조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면 과호흡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에단은 고통을 억눌렀다.

어차피 사람은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이따위 고통은 감내할 수 있었다.

에단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 몸을 일으켰다. 땀에 젖은 바닥이 미끄러웠다.

'생각보다 괜찮아.'

에단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분명 처음에는 죽을 맛이었지만, 나중에 갈수록 생각보다 할 만하다고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몸은 빠르게 적응했다.

'낙오자라 한들 검술 가문의 핏줄이라 이건가.'

웃음이 나왔다.

이런 재능을 썩히고 이따위 몸을 만들어 놓다니.

그 또한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이 몸을 이대로 놔둘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비록 지금 에단이 비루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평판과 인식도 바닥을 친다 한들 그 사실에 절망 따위는 하지 않았다.

결국 치고 올라갈 생각이었으니까.

'가지고 있는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에단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원작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원작에서 블란테라는 검술 가문은 멸망한다.

* * *

에단이 비틀거리며 복도를 거닐었다. 물먹은 수건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알고 있었다. 이 또한 경이적인 컨디션이었다.

첫 운동으로 네 시간을 달린 대가치고는 매우 싸게 먹혔다.

고작 이 정도로 앓는 소리를 낼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이어 나갔다.

그때 에단의 앞에 하녀 하나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자신 앞에 겁먹은 채 쭈뼛거리는 하녀를 바라봤다.

에단을 보며 잔뜩 겁먹은 하녀는 기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욕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허."

하녀의 대답에 기가 찬 에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다음부터 목욕 시중 같은 건 안 와도 돼."

"...정말인가요?"

"한 입으로 두말하게 하지 마."

에단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섞이자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봐. 아, 잠깐."

쭈뼛거리며 멀어지는 하녀를 에단이 불러 세웠다.

하녀의 표정이 순간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기색이었다.

"...목욕탕은 어디에 있지?"

별채는 상당히 넓었다.

* * *

에단이 욕탕 앞에서 옷을 벗었다.

뒤룩뒤룩 찐 살 탓에 옷을 벗는 단순한 행위도 쉽지 않았다.

땀에 푹 젖은 옷이 찰거머리처럼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옷 꼬라지가 가관이네.'

몸은 이따위인 주제에 옷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걸 보고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하는 건가?

에단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옷을 집어던졌다.

'앞으로는 편한 옷을 달라고 해야겠군.'

지금부터 에단이 할 일은 훈련밖에 없었다.

화려한 장식 따위는 움직임에 있어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옷을 모두 벗은 에단은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하얗다.

처음 느낀 감상이었다.

하얀 몸에 지방이 푸짐하게 붙어 있었다.

"...."

에단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선수 시절 자신의 몸이 그리워졌다.

그 시절 류태신의 몸은 동물처럼 질겼으며, 강인했고, 탄력적이었다.

지금 에단의 토실토실한 몸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괜찮은 점은... 있군."

에단이 욕탕 앞에 설치된 거울에 다가섰다.

푸짐하게 붙어 있는 살들이 흔들렸는데,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역겨웠지만, 객관적인 분석은 필요했다.

거울 앞에 선 에단은 찬찬히 몸을 둘러봤다.

리치와 골격, 그리고 체형.

워낙 지방이 많아 확실하게 분석하긴 어려웠으나, 대충 봐도 몸이 상당히 훌륭하다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류태신도 동양인치고는 우월한 신체 조건을 가진 편이었다. 하지만 에단에 비하자면 손색이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비만인 상태로도 이 정도라니....'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몸이나 담가야지."

에단은 자신의 몸을 감추려는 듯 데워진 욕탕 안에 하얗고 무거운 몸을 들이밀었다.

에단이 몸을 밀어 넣자, 차 있던 물이 해일처럼 넘쳤다.

"...제기랄."

기분이 더러웠다.

◈ [3화] 소설 속 망나니 (2)

목욕을 마친 에단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더럽게 넓네.'

이게 고작 별채라고?

얼마나 돈이 썩어 넘치면 이 정도 크기의 별채가 고작 근신용이란 말인가.

어이가 없었지만 에단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상황이었다.

뭘 해도 의심 사지 않고, 눈총을 받지도 않았다.

그러니 적어도 에단에게만큼은 최적의 장소였다.

에단은 잠시 침대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별채까지 오면서 대략적인 생각은 정리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완전히 정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설 속에 들어왔다.

그것도 엑스트라 악역으로.

믿기 힘든 현실이었고, 그러다 보니 정리하기도 힘들었다.

'먼저 가문 밖으로 나가야 하나.'

에단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가문 내에서 활용도가 떨어졌다.

소설은 언제나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속단할 문제는 아니었다. 블란테는 거물이었다. 단순히 명망 높은 가문 수준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무력 집단으로서 일대를 호령하는 사자였다. 류태신은 알고 있었다. 권력이 가지는 이점이 얼마나 큰지를.

그렇기에 도망치듯 가문을 떠나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당장 가용하기 힘든 정보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주인공이 알게 되는 지식이나 주인공이 개입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은 알고 있었지만, 블란테라는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독자적인 상황은 그다지 알지 못했다.

'가문이 멸망한다는 사실과 그 외에 사사로운 것들....'

그러나 블란테 가문의 멸문은 스토리의 중반부 이후에 벌어진다.

그 배후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나, 당장 손쓸 수는 없는 상대였다. 그전까지는 에단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움직여야 했다.

'가문을 떠나는 방법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스토리상 에단은 주인공과 만나게 된다.

만나게 되는 장소는 대륙의 아카데미.

아카데미에 가기 전 도시에서 처음 주인공과 조우해 시비를 걸고, 아카데미에서 제대로 깨진다.

그리고 주인공이 다른 지역으로 임무를 배정받았을 때, 별 되도 않는 수를 쓰다가 결국 주인공에게 목숨을 잃는다.

어찌 보면 주인공의 첫 살인이었다.

그동안 주인공은 우물쭈물 망설이는 성향이 짙은 캐릭터였으니까.

'그렇게 뒈질 생각은 없고.'

그딴 식으로 병신같이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에단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큰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걸 독차지할 필요는 없지.'

딱 필요한 만큼.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비굴해지지 않아도 될 정도의 패만 지니고 있으면 된다.

어차피 흐름은 에단이 쥐고 있었다.

어떤 변수가 벌어질지는 알지 못했지만, 원작의 큰 흐름은 바뀌지 않을 터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에단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노신사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실례했군요. 아직 도련님이 식사를 하지 않아 걱정이 돼서 말이죠."

태연한 답변에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식사부터 하시지요."

네이드의 한 손에는 상이 얹혀 있었고, 반대편 손에는 의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이제는 힘을 숨기지도 않는 건가?"

원래 스토리상 네이드는 평범한 집사를 연기하고 있었다.

네이드의 힘이 세간에 드러나는 것은 원작 소설에서도 중반부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금 네이드를 보아하니, 힘을 숨길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힘이라뇨? 저 같은 일개 노인에게 무슨 힘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이드가 생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에단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그런데 의자는 왜 두 개지?"

"저도 아직 밥을 못 먹어서 말이죠."

"...아니,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

* * *

네이드가 차려 준 식사는 상당히 훌륭했다.

천성이 한국인인 류태신에게는 이국적이라고도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먹는 거를 가리지는 않았다.

첫날부터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만큼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네이드가 차린 상은 영양적으로 훌륭했다.

육류와 야채의 밸런스가 적절했으며, 과하게 기름지지도 않았다.

"격리 기간은 언제까지지?"

"대답은 따로 없으셨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가주님도 상당히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한두 달 정도로 생각하면 되나?"

그 정도 기간이 딱 적절했다.

에단이 최소한의 몸을 만들기에.

"글쎄요. 저는 단지 집사일 뿐이라 가주님의 의중을 알 방도가 없네요."

네이드가 미소 지으며 말하자 에단이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상관없어. 누가 부르든 난 여기서 두 달 동안 박혀 있을 거니까."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살 빼야지."

지금은 이 출렁이는 살을 없애는 게 우선이었다.

* * *

이후 에단의 생활양식은 지극히 단순해졌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오전 운동을 나서면 저녁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점심을 거르는 에단의 모습에 시종들이 걱정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의 지방을 가진 몸은 고작 한 끼를 굶는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식사를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운동이 끝났을 때는 확실하게 제대로 된 영양을 챙겼다.

상당히 높은 강도의 운동을 진행하는 만큼, 그만한 영양이 보충되어야 몸이 상하지 않았다.

에단의 몸은 운동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방은 순식간에 크기를 줄여 갔으며, 빠르게 근육이 붙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아직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았지만, 에단의 육중한 몸은 티가 날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몸까지 저질인 건 아니군.'

에단의 몸 자체가 허약한 체질은 아니었다.

그간 훌륭한 몸을 썩히고 있던 것일 뿐, 반사 신경, 동체 시력, 근육의 힘과 탄력 등 그 모든 것이 보통을 넘어서 있었다.

게다가 몸을 만들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네이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연무장에서 육수를 흘려 대자 의심을 완전히 거뒀다.

'가주님께 말씀드려야겠군.'

가문의 망나니가 달라졌다고.

네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그 말이 사실인가?"

블란테 가문의 가주 빈센트 블란테가 되물었다.

평소 평정심을 잃지 않기로 유명한 철혈에 기사였다.

그런 그가 당혹해할 정도로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네, 확실합니다. 에단 님은 달라졌습니다."

"허허...."

빈센트가 말끝을 흐렸다.

에단이 달라졌다니....

그간 에단이 가문의 망나니로서 얼마나 속을 썩여 왔는가.

검의 재능은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그 오만하고 포악한 성정을 죽이기 위해 엄하게 대했던 것인데, 에단은 더욱더 엇나갔다.

최근에는 그 정도가 심해 영지민들의 불만이 속출하자 에단에게 근신을 명령했다.

고작 그 정도 처벌로 에단이 바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처벌은 그동안에도 숱하게 내렸으니.

하지만 네이드는 에단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이드는 빈센트가 가장 신용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그 말을 믿어도 되겠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이드가 작게 미소 지으며 자신하자 빈센트는 의심을 거뒀다.

"그래도 내가 직접 봐야겠군. 에단을 불러와 주게."

"그리하겠습니다."

"부디 실망시키지 않으면 좋겠군."

빈센트가 가라앉은 눈으로 네이드를 응시했다.

네이드는 빈센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봤다.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네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선 네이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도 놀랐으니 말이죠.'

* * *

여느 때처럼 훈련을 마친 에단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복잡하군."

천장을 바라보던 에단이 중얼거렸다.

성장하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 따위는 사치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조급함이 조금씩 쌓여 갔다.

아니, 생각해 보면 조급함과는 조금 달랐다.

'설레는 건가?'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을 때도 느끼지 못한 설렘이 느껴졌다.

'네이드도 그렇고.'

잃어버린 투쟁심을 일으키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당장 싸운다고 한들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원래 몸이라고 해도 못 이기겠지.'

애초에 근간이 달랐다.

류태신이 아무리 극한까지 단련한 챔피언이라고 한들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소설 속이었다.

그것도 판타지 세계.

이곳에서는 '평범함'을 가지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에단은 지금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에단의 대답과 함께 주름진 미소를 짓고 있는 네이드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빈손이네?"

"식사보다 먼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할 말?"

"궁금한 점이 생겨서 말이죠."

"뭐가 궁금한데."

"언제부터인가, 아니, 별채로 근신 처분을 받은 날부터 도련님이 바뀐 것 같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말이죠. 혹시 그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네이드의 질문에 에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어찌 보면 예민한 질문이기도 했고.

지금 에단의 몸에는 에단과는 전혀 다른 '류태신'이라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잠시 고민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잖아."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이 노인에게 거짓으로 말하면 순식간에 간파당할 것만 같았다.

네이드의 연륜은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에단의 대답에 네이드의 주름진 눈가가 조금 커졌다.

"...그렇군요."

"그래서 묻고 싶은 건 그것뿐이야?"

"그럴 리가요.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가주, 아니, 아버지가?"

당황스러웠다.

벌써 나를 찾는다고?

이건 예상이랑 다른데.

* * *

다음 날, 해가 뜨자 에단은 채비를 갖췄다. 평소 운동할 때 입던 복장이 아닌, 나름대로 격식을 갖춘 정복을 입었다.

"어라? 이럴 리가 없는데? 죄송합니다...."

에단에게 옷을 맞춰 주던 시종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에단에게 맞춘 의복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즈가 조금 남는 정도가 아니었다. 헐렁해서 흘러내리는 수준이었다.

시종이 당황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살이 많이 빠지시긴 했군요."

네이드가 감탄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빠져야지. 그렇게 난리를 쳐 댔는데.'

하루 종일 뛰는 것 외에는 한 기억이 없었다.

그렇게 뛰어 댔는데 몸이 그대로라면 억울했다.

시종이 허겁지겁 뛰어다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에단이 입을 만한 복장을 준비해 왔다.

'아직 갈 길이 멀어.'

에단은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처음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빠지기는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여기서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두 달도 필요 없을지도.'

컨디션이 올라오는 것을 보아, 운동 강도를 더 올린다면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체지방을 모두 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급격하게 체지방을 줄이면 몸에 가해지는 타격이 적지 않았지만, 이 몸뚱이는 그런 사소한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튼튼했다.

에단이 느끼기에는 축복받은 몸이었다.

그런 만큼 에단은 쉬지 않고 이 말랑한 몸뚱이를 사정없이 굴릴 생각이었다.

'귀찮게.'

그런데 대뜸 가주가 에단을 불렀다.

하루하루가 부족한 에단으로서는 이렇게 허비하는 시간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어쩔 수 없지.'

적어도 여기서는 한번 굽혀야만 했다.

그간 벌여 놓은 일도 있었고.

'앞으로 벌일 일도 있으니까.'

아직까진 블란테라는 이름이 가지는 가호가 필요했다.

◈ [4화] 소설 속 망나니 (3)

원작 소설에는 블란테 가문에 대한 비중이 크지 않았다.

아니, 적다고 보는 게 옳았다.

좋게 쳐도 딱 중간 보스의 입지.

소설의 흐름에 간간이 떡밥이 뿌려지고, 연관된 캐릭터가 나오는 정도.

그러다 여러 상황이 맞물려 대륙 제일가는 검술 명가는 몰락하게 된다.

그런 혼란 속에서 떨어져 나온 떡고물들은 주인공의 양분이 되었다.

'그 꼴은 못 보지.'

비루먹은 몸으로 빙의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혼자 기연을 독식하는 꼴을 두고 보라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에단은 최근까지 가주의 눈에 띌 만한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다.

요 며칠간 한 것이라고는 연무장을 연신 달린 것 말고는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다.

운동하고, 먹고, 자고, 싸고.

이 행위들의 무한 반복이었다.

뼛속까지 격투기 선수인 류태신은, 에단의 배를 둘러싸고 있는 두툼한 뱃살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눈에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당장은 이 지방 덩어리부터 조금 지워 내야지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계획 따위는 뒤로 미뤘다.

어차피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은 드물었다.

선택과 집중.

지금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것은 체중 감량이라 판단한 것이다.

체중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복은 답답하게 몸을 조이고 있었다.

"대뜸 나를 부른 이유가 뭘까."

고민을 거듭했지만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글쎄요. 이번 일을 꾸짖으려고 부르시지 않았을까요?"

네이드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딘가 묘하게 기분 나빴으나, 그걸 내색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궁금은 하네.'

현시점.

검으로만 봤을 때는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

대륙의 절대자 중 한 명.

그 고명한 검술 명가의 주인이었다.

세계 최강 중 하나로 인정받아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은 류태신으로서는 이 세계의 절대자라 불리는 존재가 궁금했다.

'과연 어떤 사람일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에단은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 생각이었다.

"그래, 바로 출발하자."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 * *

별채와 본채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거리가 생각 외로 가까워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타당한 위치 선정 같았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을 시에는 근신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감시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뭐 잘된 일이었다.

지금 에단은 근신이 오히려 달가운 상태였으니.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운동까지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가.

"시선들이 살벌하구만."

에단이 휘파람을 불었다.

본채에 발을 딛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가시처럼 박혀 피부가 아릴 정도였다.

재밌었다.

인식이 이 정도로 개차반일 줄이야.

그래도 가문의 적통 중 하나인데 말이야.

곱지 못한 시선은 익숙했다.

격투기 선수로 세계를 누빌 때도 이런 눈길은 일상적으로 받았다.

시선으로만 끝나면 다행이었다. 류태신에게는 온갖 야유가 쏟아졌다.

이해를 못할 것은 아니었다.

격투기 선수 시절의 류태신은 발언 하나하나가 거칠었으니까.

그리고 그 발언들은 모두 시합으로 증명시켜 왔었다.

물론 거친 발언이 상대 선수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만큼이나 시시한 상대인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도발을 하거나, 자신을 꺾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겠다는 자가 있으면 가만있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타국에서 경기를 치를 때, 상대 선수가 그 국가의 자국민이면 더욱 심한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류태신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겼다.

쏟아지던 야유가, KO로 인해 정적으로 돌변하는 상황.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표정들 풀지?'

어차피 저 표정은 조만간 바뀔 예정이었다.

에단은 입가에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여유롭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기사들과 하인들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에단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망나니라고 욕을 먹고 손가락질당한다고 해도 에단의 핏줄은 블란테 가문의 것이었다.

그리고 저들은 블란테 가문의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신분의 간극은 도저히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에단의 발걸음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그때, 에단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나왔다.

"돼지 새끼가 여긴 무슨 일이냐?"

팔짱을 낀 채 곱지 못한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보는 남자.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외모를 지녔지만, 몸은 잘 벼린 칼날처럼 단련되어 있었다.

두툼한 뱃살을 지닌 에단과는 정반대의 남자가 사나운 표정으로 에단을 훑어봤다.

'뭐야.'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원작 소설에서는 서브 캐릭터에 관한 외모 묘사가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있는 묘사도 여자 캐릭터에 치중되어 있었기에, 에단으로서는 눈앞에 남자가 누군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네가 누군데?"

"...뭐라고?"

에단의 대답을 예상 못 했는지, 남자는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냐? 감히 돼지 새끼 주제에?"

남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모멸감에 몸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에단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 네가 뭔데. 대뜸 지랄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인내심의 한계가 높지 않은 에단은 대놓고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애당초 상대방이 예의를 밥 말아 먹은 상황 아닌가.

에단은 이 상황에서 굳이 말을 조심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상황이 과열되어 가자 네이드가 다가왔다.

"카론 도련님, 죄송합니다. 지금 에단 도련님께서...."

네이드가 상황을 중재하려 했지만, 카론이 네이드를 밀어냈다.

"너는 빠져 있어. 그리고 너, 가문에 먹칠을 일삼는 망나니 주제에 감히 나를 모욕해?!"

카론이 언성을 높여 갔다.

에단은 잠시 카론이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뭔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아! 네가 내 동생이구나?"

비중이 크지 않은 조연이라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

카론이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자, 에단이 그 상황에 못을 박았다.

"동생 주제에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다는 소리를 하는 거잖아. 혹시 대가리에 하자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에단의 본 성격에 가까운 말투였다.

물론 류태신의 성격도 온순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말이다.

그러니 두 성격이 합쳐진 지금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시비를 건 것은 카론이었다.

에단은 이 상황 속에서 참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격투기 선수였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상대 선수가 도발성 발언을 하면 류태신은 그의 배로 돌려줘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 거친 언행으로 인해 안티 팬도 상당히 형성되었지만, 반대로 그런 거침없는 스타성을 좋아하는 팬 또한 상당했다.

에단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카론은 멍하니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네."

웃음을 멈춘 카론이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벗은 장갑을 그대로 에단에게 던지려고 한 순간.

에단의 육중한 몸이 빙그르 회전했다.

육중한 질량에 회전이 실리고 그 힘은 그대로 카론의 턱에 적중했다.

뻐억―!

완벽하게 적중한 백스핀 블로우.

에단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무거운 질량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격법을.

그리고 그 질량과 함께 제대로 꽂힌 백스핀 블로우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에단이 알기로는 없었다.

털썩.

카론의 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아무리 몸을 단련시켰다고 한들, 턱까지 단련시킬 수는 없었다.

턱에 충격이 가해지면 그대로 뇌가 흔들리게 되고, 사람의 몸은 중심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짧은 순간에 카론이 바닥에 엎어지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정적을 느낀 에단이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사실 조건반사는 맞았다.

카론이 장갑을 던지려고 하는 순간, 에단은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카운터를 꽂아 넣었던 것이다.

백스핀 블로우를 사용한 것도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류태신의 본능이 이 무겁기만 한 몸으로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격을 보여 준 것이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러려고 벌인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별 비중도 없는 새끼가 까부니까 이 사달이 벌어진 거 아니야.'

갑자기 대뜸 시비를 건 카론에 대한 짜증이 치밀었다.

잠깐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에단은 금방 떨쳐 냈다.

'신경 쓰지 말자.'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게 되면, 앞으로의 사건에는 손도 대지 못한다.

게다가....

'애초에 망나니 새끼잖아?'

여기서 조금 더 막 나가면 어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후회한들 늦었다.

"카론 도련님!"

곁에 있던 기사들이 뒤늦게 카론에게 달려와 부축하기 시작했다.

"네이드, 가자."

자리를 벗어날 필요성을 느낀 에단이 네이드를 불러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괜히 여기에 발이 묶일 필요가 없었다.

'기껏해야 징계로 끝나겠지, 뭐.'

지금껏 벌인 일이 있는 만큼, 한 소리 들을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거기에 사소한 사건 몇 개 추가된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리라 판단하기도 했고.

'...우연이 아니었군.'

네이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일전에 술집에서 겪은 반격.

당시에도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카론을 제압한 것을 보고 다시금 확신했다.

카론은 가문에서 정식으로 임명된 마나 유저였다.

갓 입문한 것이기는 하나, 마나를 깨우친 자와 그러지 못한 자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카론의 나이는 열여섯.

평균적으로 마나 유저로 입문하는 나이가 20대인 것을 감안한다면 카론의 성취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블란테 가문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카론은 에단과 마찬가지로 블란테 가문의 적통이었다.

대륙 제일가는 검술 명가의 피를 물려받은 이상, 세간의 영재 수준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카론은 늘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시킬 유일한 존재를 찾아냈다.

에단.

가문의 수치라고 불리는 망나니.

마나를 깨우치기는커녕 검을 두려워해 검조차 휘두르지 못하는 멍청이.

게으른 천성과 포악한 성격. 바닥을 치는 재능.

카론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고 자존감을 높이기에는 에단만 한 존재가 없었다.

그때부터 카론은 에단을 주기적으로 괴롭혀 왔다.

그리고 그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아무리 에단이 악명 높은 망나니라고 한들, 무력에서 밀리는 이상 방도가 없었다.

권위로 누르자니 같은 적통이었으며, 블란테 가문은 힘을 숭상했다.

가문에 속해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에단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에단은 그 존재만으로도 가문에 민폐를 끼치는 존재였으니.

한데 바뀔 일 없어 보이던 먹이사슬이 오늘 무너졌다.

비록 정식 결투도 아니었고 카론이 방심하고 있었다고 한들, 카론은 마나 유저였고 에단은 일반인이었다.

그런데도 쓰러진 것은 카론이었다.

'이변이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군.'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술집에서 겪은 공격은 네이드조차 순간 아찔한 느낌을 들게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지?'

단시간에 너무 많이 바뀌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블란테의 피는 어디 가지 않는 것인가.'

검의 저주를 받았다고 할 만큼 몸 쓰는 것에는 재능이 없던 에단이었다.

그런데 어떠한 일을 계기로 재능이 개화됐을까.

자타가 공인하는 검술 명가의 피 때문일까.

'허허.'

네이드는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일이었다.

후계자들의 경쟁은 곧 블란테의 힘을 강하게 만들 테니까.

◈ [5화] 소설 속 망나니 (4)

"...뭐라고?"

블란테 가문의 가주, 빈센트 블란테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한 말이 사실이겠지?"

빈센트의 물음에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확실합니다. 불시에 이루어진 에단 도련님의 일격에, 카론 도련님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쓰러졌습니다."

"...허."

빈센트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금 빈센트 앞에 서 있는 기사 첸은 빈센트가 신용하는 얼마 없는 충복이었다.

지금 상황에 첸이 거짓 보고를 할 이유도 없으니, 이 보고는 사실일 터였다.

어차피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닐 테니, 첸이 아니었더라도 빈센트의 귀에 들어올 내용이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땠지?"

빈센트의 물음에 첸은 잠시 말을 아끼다가 입을 열었다.

"...놀라웠습니다. 마나도 깨우치지 않은 일반인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무거운 체중을 최적으로 이용한 움직임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평가를 내릴 정도인가?"

첸은 검은 사자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검은 사자 기사단은 블란테의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로만 구성된 기사단이었다.

블란테에도 몇 없는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강자이자, 기사단의 단장이 내린 평가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후한 평가였다.

단장으로서의 첸은 엄격하고, 박한 평가를 내리기로 악명 높았다.

"마치 그간 고의로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던 것 같더군요."

"...알겠다. 이제 나가 보도록."

첸이 가볍게 목례를 취하고 영주실을 나섰다.

영주실에 앉은 빈센트가 머리를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

속만 썩이던 망나니가 꽤나 재밌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 * *

에단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사건의 발단은 싸가지 없는 동생이 먼저 제공했다.

아무리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는 에단이라고 한들 명색이 가문의 혈통이자, 카론의 형이었다.

에단은 꿀릴 만한 게 없었다.

대놓고 던지는 장갑 따위에 맞아 줄 생각도 없었다.

저택의 복도를 거침없이 걸으며 수많은 시선을 마주했지만, 에단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뭐지?'

걷던 도중 에단의 발걸음이 멈췄다.

묘하게 거슬리는 감각이 에단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각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저 녀석 탓이군.'

앞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는 한 남자.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남자였다.

외관상 특별할 점은 없어 보였지만, 에단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강해.'

이런 감각은 처음 느껴 봤다.

사람에게는 개개인의 기류가 존재했다.

미신이나 과민 반응이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에단은 그 사실을 미신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선수 시절에도 자주 느꼈다.

뛰어난 기량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개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기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감각은 처음이었다.

'네이드랑 비슷한 정도인가.'

에단이 시선을 돌려 네이드를 바라봤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네이드가 에단을 바라봤다.

"왜 그러시죠?"

"쟤는 누구지?"

"첸 님 말씀이신가요?"

"아."

떠올랐다.

에단의 머릿속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기억 중 하나가 꺼내졌다.

'기사단장쯤 되면 저 정도란 말이지.'

에단이 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싸우면 진다.'

에단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호승심의 여부 문제가 아니었다.

에단은 첸과 싸우면 필패다.

'이게 경지의 차이인가.'

미소가 지어졌다.

묘한 흥분도 들었다.

강해질 수 있다.

예전보다 더.

류태신 시절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때처럼 무료하지도 않았다.

이 소설 속 세계는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득실거렸으니.

'그래도 결국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건 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모를까.

에단은 자신이 있었다.

원작 주인공이 얻어온 기연들을 에단은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첸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지나갔다.

에단은 고개를 슬쩍 돌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대답 없이 발을 옮겼다.

첸은 묘한 눈초리로 멀어지는 에단을 바라봤다.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먼발치에서 지켜봤을 때도 의문이 들긴 했다.

그때 에단이 보여 준 움직임은 재능이나 반사 신경 따위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정밀했으며, 신속했다.

마치 전문적으로 수련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검술 가문에서 천박한 박투술이나 격투술 같은 것을 수련한다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 * *

후우.

에단은 심호흡을 한 채 앞을 바라봤다.

문 앞에 섰을 뿐인데 벌써부터 몸이 저릿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기운과 피부를 찌르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 안에 있는 사람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했다.

'정말 적성에 맞는군.'

싸우고 쟁취하는 것을 좋아해서 격투기를 시작했다.

부와 명예를 얻어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적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허무함이 엄습했다.

투지는 이미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간절함을 지니지 않아도 시합은 늘 이겨 왔다.

그런 그에게 이런 감각은 오랜만, 아니, 처음이었다.

에단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마치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문을 타고 넘어왔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죠."

네이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에단을 바라봤다.

"긴장 안 해."

긴장은 적성에 안 맞는다.

에단은 피식 웃더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 안에 들어가자 상당히 정갈하고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는 가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에단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

의자에 앉아 있어 체격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에단은 대략적인 눈대중으로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늠했다.

'신장은 대략 180 후반에 체중은 90킬로 정도인가.'

검을 쓰기 때문인지 압도적인 거구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은 알 수 있었다.

'더럽게 강하군.'

강자를 볼 때 맹수를 빗대어 말하고는 한다.

하지만 빈센트에게 사자를 들이밀면 사자는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갈 거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빈센트는 강했다.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빈센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생이 예절을 모르기에 조금 지도를 해 줬을 뿐입니다."

"...예절? 허, 예절이라고 했느냐?"

빈센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별로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말을 꺼낸 당사자가 다름 아닌 에덴이었다.

"네가 그동안 벌인 짓은 예절을 지켰다는 말이냐?"

"그때는 뭐... 잠깐 방황했다고 치죠."

"허, 뻔뻔한 것은 변함없구나. 지금은 정신 차렸다는 소리냐?"

"정확합니다."

에단이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빈센트의 눈살이 좁혀졌다.

'확실히 달라졌군.'

본래의 에단이라면 빈센트 앞에서 고개를 들기도 힘들어했다.

패악질을 일삼는 오만한 망나니였지만, 빈센트 앞에서는 겁을 집어먹은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빈센트는 그런 모습에 더 크게 분노했다.

포악한 성정을 가진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자를 두려워하고 꼬리를 마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단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사건을 몰고 다녔다.

결국 빈센트는 에단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끽해야 사건을 일으키면 근신 처분을 내리는 정도.

사실상 시선을 끊은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에단이 바뀌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가장 신용하는 두 명이 내뱉은 말이었다.

'거짓이 아니었군.'

반신반의하며 한 호출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달라져 있었다.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에단은 지금 빈센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빈센트는 지금 미약하게 기운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마나 유저라면 이겨 낼 만한 수준이었지만, 에단은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었다.

그가 견디기에 버거운 수준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에단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보란 듯이 견뎌 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빈센트에게는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빈센트가 피식 웃더니 기세를 거뒀다.

"그 말은 이제 정신을 차렸다는 소리냐?"

"사춘기로 방황할 나이는 지났죠."

"확실히 혀는 길어졌구나. 그 말에 책임질 수는 있겠지?"

빈센트의 시선이 에단을 향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에단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당연하죠."

"그래.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나 수련을 시작한다는 소리겠구나."

"아니요."

"...뭐라고?"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한 말은 말장난이었다는 건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넘겨짚지 말아 주시죠."

"무슨 소리지?"

"아시다시피 저는 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허. 더 말해 봐라."

뻔뻔하기 그지없는 에단의 태도에 기가 찼지만, 빈센트는 그의 말을 막지 않았다.

에단은 말을 이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일단, 이 살덩이부터 떼어 버리려고요."

"헛소리를 하는구나. 수련을 하면 그깟 살쯤은 자연스럽게 빠지게 될 거다."

"그거야 뭐 당연하죠. 문제는 제가 지금 이런 몸으로 기사들과 같이 수련을 한다고 따라갈 수 없다는 겁니다."

"...더 말해 봐라."

"일단 기초를 쌓는 게 먼저입니다."

"그 뒤부터 수련을 하겠다?"

"맞습니다."

에단이 히죽 웃었다. 빈센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에단을 응시했다.

"솔직히 말해 보거라. 무슨 속셈이지?"

에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 가문에서 제 입지는 좁다 못해 바닥에 가까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눈에 띄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네요."

"경쟁을 회피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그럴 리가요.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습니다. 단지 귀찮은 미래가 보이기 때문에 사양하는 것뿐이죠. 승산 없는 싸움에 목을 매고 싶지도 않고요."

"...너 정말 에단이 맞는 거냐?"

에단은 말없이 씨익 웃었다.

* * *

영주실을 나선 에단은 조금 전의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 냈다.

생각보다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애초에 에단이 원하는 것이 포상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얻어 내기 수월한 것도 있었다.

근신 기간의 연장.

에단이 원하는 것은 근신이 길어져 몸을 가꿀 시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서 괜히 근신이 해제된다면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에단의 머릿속에는 차곡차곡 계획이 쌓여 갔다.

'일단 영지를 나서야 한다.'

소설에서 본 정보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영지 밖으로 나서야 했다.

어차피 끝이 좋지 않을 가문에서 지금부터 아귀다툼을 해 봤자 득 될 게 없었다.

'마나는 얻어야겠지만.'

정석적인 기사의 수련법대로 수련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에도 주인공이 얻어 가는 치트는 존재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에단이 자신의 배를 바라봤다.

여전히 푸짐한 뱃살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지방부터 떨쳐내야 할 텐데.'

암담했다.

◈ [6화] 소설 속 망나니 (5)

"어이, 머저리."

영주실을 나서자 난데없이 신경을 긁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겪은 일 아닌가?'

에단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꽤나 건장한 덩치의 남성이 서 있었다.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쉽사리 떠오르지가 않았다.

툭툭.

에단이 네이드에게 눈치를 줬다.

작게 한숨을 내쉰 네이드가 에단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첫째 도련님인 모룬 님입니다."

"아, 그렇군."

네이드가 언질을 하고 나서야, 에단은 남자의 정체를 깨달은 듯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룬 블란테.

이 녀석 역시 비중 없는 엑스트라 악역이었다.

장자인 만큼 권력 승계 구도에서는 우위에 서 있는 녀석이었지만, 장자라는 이유 하나로 너무 안일하게 굴다 결국에는 적들에게 모든 실권을 빼앗긴다.

검술 명가라고 불리는 블란테 가문의 몰락은 모룬이 주도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룬은 욕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능력이 없었다.

늘 시기와 질투를 달고 다니며, 타인을 폄하하는 성격을 지닌 그였다.

주변에는 믿을 만한 이가 없고,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어떠한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결국 블란테라는 거대한 성을 무너뜨리게 된다.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일이군.'

대륙에서 손꼽히는 검술 명가라는 블란테라는 가문이 저 머저리 하나 때문에 흔들리고 무너지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나는 아니었지만.'

모룬을 제외하고도 멍청한 새끼가 두 명이나 산재한 게 문제였다.

'이 새끼랑 동생.'

에단은 이곳으로 오며 만난 동생, 카론 블란테를 떠올렸다.

에휴.

고개가 저절로 저어졌다.

아무리 자식 농사를 못 지었다고 한들 어떻게 이렇게 흉년이란 말인가.

'애초에 그렇게 치밀한 설정의 소설도 아니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원작 자체가 크게 개연성 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딱 주인공 위주로 사건이 흘러가는 킬링 타임 소설.

거기에다 대고 억지니 뭐니 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엑스트라 처지인 게 문제지.'

에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직도 길을 막고 있는 모룬을 바라봤다.

모룬은 입꼬리를 씩, 들어 올린 채 에단을 내려 봤다.

"어떤 수작질을 부린 거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직도 발뺌할 속셈이냐?"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짜증이 치밀었지만 여기서 대놓고 하극상을 벌일 수는 없었다.

영주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본채의 안이었다.

에단은 일단 조용히 화를 삭였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다. 수작질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허,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뻔뻔한 놈이로군. 너 같은 머저리가 카론을 이길 리가 없잖아."

'아, 그런 거였나.'

이제야 대충 눈앞에 있는 저 머저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할 일도 더럽게 없는 모양이군.'

가문의 장자라는 놈이, 동생들이 벌인 사소한 사건을 간섭하고 있었다.

"제가 뭐 비겁한 수라도 썼다는 소립니까?"

"그래.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구나."

모룬이 히죽 웃으며 에단을 응시했다.

"하아...."

에단이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기서 어떻게 할까.

괜히 여기서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모룬은 어차피 자멸하게 될 운명이었다.

가만히 둬도 알아서 무너질 녀석이라는 소리였다.

자멸하는 도중에 가문도 조금 말아먹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조금 바꾸긴 해야겠어.'

에단이 된 이상, 이용할 수 있는 요소는 모두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지를 키울 필요성이 있겠군.'

에단이 모룬을 바라봤다.

살이 있어서 그렇지 에단도 작은 키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룬은 에단이 올려다봐야 할 만큼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증거 있어?"

하지만 에단은 기가 조금도 죽지 않았다.

에단이 눈을 부라리며 모룬을 노려봤다.

"뭐, 뭐라고...?"

모룬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럴 만했다.

에단은 망나니이기는 했지만,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거나 강한 사람에게는 그 누구보다 비굴해지는 녀석이었다.

모룬은 가문의 장자.

권력으로 보나, 입지로 보나 에단보다 위에 있었다.

그런 사실 때문에 에단은 모룬에게 단 한 번도 반항을 한 적이 없었다.

모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 미친 거냐?"

"아니, 멀쩡한데? 그보다 내가 묻고 있잖아. 증거 있냐고."

에단이 모룬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자 모룬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쫄기는.'

한심했다.

그래도 장자라는 녀석이, 상대가 조금 드센 모습을 보였다고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니.

군기를 잡고, 위계질서를 유지하려 든다면 최소한 일관성이라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모룬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증거 따위 필요 없어!"

저편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론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모룬이 득의양양한 기세로 웃었다.

"카론이 이를 가는 모양인데?"

'진짜 한심하군.'

고작 동생 하나 왔다고 태도가 뒤바뀌는 꼴이 역겨웠지만, 에단은 내색하지 않았다.

카론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이 자식!"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로 뻗어 오는 카론의 손을 에단은 살짝 상체를 빼는 것으로 피해 냈다.

"...피해?"

"그럼 병신같이 잡혀 주리?"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에단의 말에 카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는 나를 모욕했어."

"모욕이 아니라 예의를 가르친 거지."

"뭐?! 비겁한 수로 나를 쓰러트린 주제에...."

"비겁이고 뭐고가 어딨어? 시비는 지가 먼저 걸어 놓고."

카론은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너... 나랑 결투하자."

잠시 침묵하던 카론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왜... 라고?"

"내 귀중한 시간을 왜 너한테 써야 하지?"

"아니, 너는 카론이랑 결투를 해야 한다."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모룬이 앞으로 나섰다.

"너 같은 가문의 수치가 건방을 떠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어."

카론이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무슨 권한으로?"

"나는 차기 가주나 다름없다. 그런 내 명을 거스르겠다는 소리인가?"

"도련님...!"

그때 모룬의 곁에 있던 기사가 모룬을 말리려고 들었지만, 모룬이 손을 들어 기사를 제지했다.

"내 말은 곧 블란테 가문의 뜻이나 다름없다."

"허, 생각보다 더 머저리 같은 새끼구나."

"...뭐라고?"

"네이드."

에덴이 고개를 돌려 네이드를 바라봤다.

네이드가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지금 저 발언, 아무 문제 없는 건가?"

"그럴 리가요."

네이드가 서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감히 집사 따위가...!"

모욕을 당했다고 여긴 모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짜 심각한 수준이네.'

소설로 볼 때는 별생각 없이 넘어가고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가관이 따로 없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돼?"

"...무슨 소리지?"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는지 모룬이 되물었다.

"너는 지금 가주님을 모욕한 거야."

"헛소리! 내가 언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소리지?"

"방금 네 말이 곧 가주의 말이라고 했잖아."

"그 말이 뭐가 어때... 가, 가주님?!"

"재밌는 짓을 벌이고 있구나."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만큼은 소란이 적막으로 바뀌었다.

아까 느낀 압박감은 장난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졌다.

중력이 배가 된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생각보다 대단하군.'

하지만 에단은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빈센트를 바라봤다.

빈센트는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에단을 바라보며 작은 감탄을 했다.

이 정도의 기운은 마나 유저도 쉽게 견디지 못했다.

그런데 아직 마나도 깨우치지 못한 에단이 견디고 있었다.

'확실히 달라졌어.'

방금의 대화에서도 느꼈지만, 지금 그 사실이 더 확실해졌다.

에단은 바뀌었다.

이전까지 보여 주던 철없는 망나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숙련된 기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에 반해 모룬과 카론은 당황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모룬과 카론이 갑작스러운 빈센트의 등장에 당황해하자, 빈센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인가?"

"무, 무슨...."

"너의 말이 곧 나의 말이나 다름없다는 소리 말이다."

"그, 그것이...."

모룬이 뒤늦게 변명을 시작하려 들었지만, 이미 상황은 엎질러진 뒤였다.

"변명은 필요 없다. 너는 블란테 가문의 장자로서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단호한 어조에 모룬이 입을 다물었다.

빈센트의 시선이 이번에는 카론과 에단을 향했다.

"경쟁심을 가지는 것은 좋다. 우리는 검술 가문인 만큼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희는 도를 넘었어."

"...죄송합니다."

카론이 고개를 숙였다.

"됐다. 고작 이런 일에 내가 끼어들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군. 에단."

"네."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동생이 가진 불만이 작지 않은 것 같구나. 하지만 형제 사이에 결투는 허락할 수 없으니... 그래, 대련은 어떠냐?"

빈센트의 말에 에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좋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빈센트의 눈이 휘었다.

"조건?"

"제가 득 될 것이 없는 상황이니 그 정도는 들어주시죠. 그리 어려운 요구는 아닙니다."

"먼저 조건을 들어 보고 생각하마."

"정기 토벌에 참가하겠습니다."

"의외구나. 갑자기 토벌을 나가겠다고?"

"물론 단순히 토벌에 참가하려는 생각은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토벌대를 꾸릴 권한을 주시죠."

"이유는?"

"아직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에단의 말에 빈센트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토벌대라.

어렵다면 어려운 부탁이고, 쉽다면 쉬운 부탁이었다.

어차피 다른 형제들도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자기만의 세력을 꾸리고 있었다.

하지만 에단에게는 네이드밖에 없었다.

게다가 네이드는 공식적으론 일개 집사에 불과했다.

기사들은 에단은 기피했고, 혐오했으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권한을 얻는다면 다시 가문 내에서 입지를 키울 수 있는 발판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좋다. 허락하마."

모룬과 카론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얼굴에 불만이라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단, 대련에서 승리할 경우만이다."

빈센트의 첨언에 모룬과 카론의 얼굴이 환해졌다.

반면 에단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예측한 범위 내였기 때문이다.

'이기면 되지.'

자신은 있었다.

에단은, 아니, 류태신은 아직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내가 불리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아직 몸은 완성되지 않았고, 마나는 깨우치지 못했다.

지금 급하게 마나 수련을 시작한다고 한들, 이미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카론보다 능숙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차고 넘쳤다.

◈ [7화] 본색 (1)

'비겁한 자식.'

카론은 여유를 부리고 있는 에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번에는 안 당해 준다.'

설마 장갑을 던지려고 하는 찰나에 기습을 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사 가문의 피를 이은 자가 천한 용병도 하지 않는 짓을 벌일 줄이야.

남아 있던 일말의 연민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아버님 덕에 목숨은 건진 줄 알아라.'

만일 빈센트가 대련이라고 못을 박지 않았다면, 카론은 곱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죽이진 않을 테지만, 적어도 불구로 만들 생각이었다.

후환이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망나니로 악명 높은 가문의 수치였다.

오히려 쓰레기를 치워 주는 행위가 아닌가.

하지만 대련이라는 말로 인해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팔다리 하나는 분질러 주마.'

대련이 아니니 불구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팔다리 중 하나는 부러트릴 심산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대련은 지금 바로...."

"보름 뒤."

에단이 말을 끊고 못을 박았다.

처음엔 이해를 못 해 멍하니 있던 카론의 얼굴이 이내 와락 일그러졌다.

"누구 마음대로?"

"누구기는 내 마음이지. 대련해 달라고 징징거리길래 그 요구까지 들어줬잖아. 아직도 불만이 남아 있어?"

"지, 징징?"

"어. 지금도 애새끼처럼 땡깡을 부리고 있잖아."

"에단, 설마 겁을 집어먹은 거냐?"

모룬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든가. 그건 그렇고, 장자라는 사람이 너무 사사건건 참견하는 거 아니야?"

에단이 고개를 돌려 빈센트를 바라봤다. 빈센트는 말없이 에단의 눈을 마주쳤다.

'눈이 달라졌군.'

이전까지 에단의 눈은 혼탁했다.

온갖 더러운 욕망과 정돈되지 않은 생각이 눈빛으로 드러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에단의 눈은 진중했고, 차분했다.

"좋다. 대련은 보름 뒤로 하지."

빈센트의 말이 떨어지자 모룬과 카론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에단은 그 모습에 피식 웃더니 빈센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보름 뒤, 보상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호오, 꼭 이길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이길 거니까요."

"아무리 네가 나이가 더 많다고는 하지만, 너무 건방진 생각 아니더냐? 너는 아직 마나도 깨우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빈센트의 말에 에단이 피식 웃으며 카론을 바라봤다.

"이미 한번 혼내 준 녀석입니다. 두 번째는 성심성의껏 예의범절을 주입시킬 생각입니다."

"이 자식이!"

에단의 도발에 카론이 순간 발끈했지만, 빈센트의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말은 청산유수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를 보여야 할 것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에단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뒤 저택을 빠져나갔다.

'정말 바뀌었군.'

언행부터 행동거지까지,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달라졌다.

'이번 대련으로 증명되겠지.'

빈센트는 카론을 바라봤다.

카론은 아직 성정이 유약하고 감정을 감출 줄 모르는 아이였으나, 검에 대한 재능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블란테라는 이름에 어울릴 만큼도 아니었다.

저 정도 재능은 대륙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

'증명해 보거라.'

약육강식.

승자만이 모두 독식한다.

블란테의 신조였다.

* * *

"허억, 허억."

별채로 돌아온 에단은 다시 반복적인 일상으로 복귀했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구보.

감량이 최우선이다.

에단은 달리면서도 카론을 떠올렸다.

'엑스트라 녀석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에단은, 카론과 정면으로 승부하면 승산이 없었다.

애송이처럼 보인다고 한들 카론은 마나 유저.

일반인인 에단과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실제로 마나 유저와의 차이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 책에서 나온 묘사만으로 어림잡아 짐작한 것이다.

정확한 파악은 아무래도 직접 경험해 봐야 알 것 같았다.

'뭐, 그것도 내 밑에 기사가 있을 때 하는 소리지.'

에단은 그간 저지른 언행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사람이 없어.'

에단을 따르는 사람은 네이드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별채에 있는 하인과 하녀들조차 별채 관리를 위한 최소 인원에 불과했다.

'어쩔 수 있나. 있는 거에 만족해야지.'

승부에 대한 초조함은 느끼지 않았다.

에단은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대련 상대는 필요한데.'

에단은 고개를 돌려 네이드를 바라봤다.

네이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땀을 폭포처럼 쏟아 내는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노인네한테 부탁하기는 그렇고.'

네이드는 대륙에 몇 없는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빈센트의 측근이기도 했다.

에단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뛰는 것에 집중했다.

시작한 운동은 제대로 끝내야 했다.

* * *

달리기를 마친 에단은 몸을 풀기 시작했다.

달아오른 몸을 한차례 식혀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은 에단이 맨몸 운동을 시작했다.

'더럽게 무겁군.'

단순한 팔굽혀펴기였지만, 나약한 근력과 묵직한 체중이 더해지자 가벼운 맨몸 운동도 상당한 난이도로 느껴졌다.

하지만 고통을 참는 건 익숙하다.

에단은 불평하지 않고, 침착하게 팔굽혀펴기를 지속했다.

'하나라도 확실히.'

지금 몸 상태로 폭발적인 운동을 하기는 힘들었다.

조금 느리더라도 천천히, 확실하게 하는 게 중요했다.

얼마나 했느냐보다,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했다.

에단은 구슬땀을 흘리며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중간에 팔이랑 가슴이 후들거리면 잠깐씩 쉬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팔굽혀펴기를 지속했다.

'다시 생각해도 몸은 쓸 만한 녀석이야.'

운동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거늘, 에단의 몸은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었다.

에단은 알고 있었다. 지금 겪고 있는 변화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약을 써도 이 정도는 힘들 텐데.'

약물을 사용하는 약물러 선수와 일체 그러한 것에 손대지 않는 내추럴 선수와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에단이다.

'이것이 이 세계의 재능이라는 건가.'

검술 명가 블란테의 혈통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뜻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재능을 썩히고 있었다니.'

아직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않았는데도 체감이 됐다.

체지방을 걷어 내기 시작하자, 근육이 엄청난 속도로 붙기 시작했다.

에단은 그러한 자신의 성장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격투기 선수로서의 류태신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조금씩 스스로를 깎아 내며 가다듬었지만, 성장의 재미를 느끼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에단의 몸은 세공되지 않은 원석이었다.

비대한 지방을 봤을 때 가망이 없다고 느꼈으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 육체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어렴풋이 예측이 되었다.

"네이드."

팔굽혀펴기를 모두 마친 에단이 네이드를 불렀다.

"부르셨나요, 도련님."

"목검 하나만 준비해 줘."

"목검 말씀이신가요?"

"그래. 슬슬 준비해야지."

"대련 말씀이시죠?"

"어."

슬슬 대련을 준비할 시기이다.

남은 날짜는 일주일.

촉박하다면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에단은 자신이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대련에서 승리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 * *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목검을 가져왔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목검이었다.

에단은 목검을 쥐더니 허공에 붕붕 휘둘렀다.

에단이 평범하게 목검을 휘두르자 네이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검을 두려워하시지 않아.'

에단은 첫 대련에서 크게 다친 뒤로 검을 무서워했다.

대련에서 부상이야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블란테라는 이름을 어깨에 짊어진 이상, 검과 친해지는 것은 숙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평생을 함께할 친우를 두려워하다니.

블란테 가문의 사람들은 에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에단은 엇나가기 시작했고, 검을 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에단은 아무렇지 않게 검을 쥐었다.

자세는 엉망이었지만, 검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풍기지 않았다.

"네이드."

"말씀하시죠."

"검을 잡아."

"...저는 일개 집사일 뿐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잡으라고."

에단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네이드는 그런 에단에 태도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검을 쥐었다.

"후우, 미리 말씀드리지만 애매하게 봐드리지는 못 합니다."

"바라던 바야."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에단은 강자와의 싸움을 즐겼다.

비록 몸 상태부터 시작해 모든 여건이 성에 차지 않았지만, 에단은 불평하지 않았다.

실전보다 더 좋은 단련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놀랍군.'

네이드는 에단의 눈빛을 바라보며 가벼운 마음을 다잡았다.

저 눈빛은 하룻강아지가 낼 수가 없는 눈빛이었다.

마치 백전노장의 눈빛.

자신의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지금 느끼는 감각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네이드는 작게 미소 지었다.

망나니라고만 생각하던 자신의 안목이 틀린 모양이다.

"한 수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네이드가 말하자 에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은 상하는데, 거절하진 않겠어."

에단은 냉정하게 상황을 인식했다.

지금의 에단은 무슨 수를 써도 네이드를 이기지 못한다.

포기나 체념이 아니었다.

에단의 투지는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세계는 마나와 마력이 있고, 냉병기가 판치는 세상이다.

때로는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결국 올라설 거니까.'

자신이 있었다.

타인은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다.

그리고 시대를 바꿔 나갈 인물들도 알고 있었다.

'엑스트라로 죽을 생각은 없으니.'

비록 에단이 엑스트라 악역에 불과했을지라도.

그 몸에 류태신이 빙의한 이상,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걸 위한 첫 실전이다.'

에단이 목검을 꽉 쥐었다.

힘이 실린 목검에는 어색함이 감돌았다.

살짝 떨리는 기분도 들었다.

'육체의 기억인가?'

검으로 인한 트라우마.

막연한 공포.

에단은 웃으며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떨쳐 냈다.

공포라는 감정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에단은 몸을 숙였다.

단거리 육상 선수의 자세와도 흡사했다.

마치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에단의 허벅지가 팽창했다.

아직 미숙한 몸이었다. 생각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의 반만 따라가도 성과는 있을 거다.

에단이 몸을 젖혔다.

그러는 동안에도 네이드는 말없이 에단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실 겁니까.'

흥미가 일었다. 지금 에단이 보여 주는 모습은 평범한 기사와는 크게 달랐으니.

쑤욱!

순간, 에단의 몸이 뛰쳐나갔다.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얼마 전 비대한 몸을 가지고 있던 것을 떠올리면 믿을 수 없는 성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실망입니다.'

바로 그때, 에단의 목검이 날아들었다.

네이드의 눈이 커졌다.

날아드는 목검을 쳐 냈고, 당연하게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네이드는 순간 기가 찼다. 설마 이것을 노린 것인가?

그렇다면 더한 악수, 검사가 검을 놓게 되면 그 말로는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네이드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에단이 몸을 숙여 달려들었다.

에단은 애초부터 검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

◈ [8화] 본색 (2)

기습적인 태클.

격투기에서는 흔하게 나오는 태클이기도 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펀치 대신에 목검을 집어던졌다는 것.

애초에 에단은 검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검에 대한 조예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에 이점이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 것이었다.

애초부터 노린 것은 태클이었다.

'내가 태클을 걸게 될 줄이야.'

에단은, 아니, 류태신은 레슬러가 아니었다.

류태신은 언제나 상대 선수를 타격으로 잠재웠다.

상대는 언제나 타격을 피해 왔고, 류태신에게 레슬링 게임을 유도했다.

그러다 보니 류태신은 언제나 레슬링을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하수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니, 지금은 에단이 레슬링 게임을 시도해야 했다.

네이드는 마스터 중 한 명.

검에 통달한 강자였다.

그런 강자에게 정면에서 맨주먹으로 싸움을 건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에단은 '자신'과 '자만'을 혼동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에단은 레슬링에 자신이 있었다.

네이드를 넘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아도, 변수는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에단이 다리를 향해 순간적으로 파고들자, 네이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찌할까.'

당혹스러운 반전이었다.

여기서 마력을 이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면 대련의 본질이 흐려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은 궁금증이었다.

여기서 어떤 공격을 할까.

예상을 벗어난 에단의 공세에 순순한 궁금증이 들었다.

네이드는 순순히 한쪽 다리를 내줬다.

에단은 네이드의 왼쪽 다리를 붙들자마자 곧바로 몸을 붙였다.

싱글 렉 태클.

체중도 제대로 실은 데다가 타이밍도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네이드는 쉽게 넘어지지 않았다.

네이드가 절묘하게 무게 중심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잡아선 안 된다.'

에단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네이드는 쉽게 넘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맨손인 것도 아니었다.

네이드의 손에 목검이 들려 있는 지금 상황에서 이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위험했다.

에단은 곧바로 네이드의 뒤를 잡았다.

'빠르군.'

네이드는 작게 감탄했다. 무슨 짓을 벌일까 궁금해 맞춰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에단의 움직임이 체계적이고 치밀했다.

무게 중심의 이동조차 매우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위기를 감지하고 뒤를 잡은 것도 놀라웠다.

에단이 손에 날붙이라도 들고 있다면 상황은 또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을 터였다.

에단이 허리에 힘을 줬다. 네이드의 몸이 지면에서 뽑히려는 찰나.

네이드가 에단의 손을 가볍게 뜯어냈다.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힘이 개입한 것이다.

마나를 끌어 올린 걸 확인한 에단은, 여기서 힘을 더 쓰는 걸 포기했다.

판단은 빨랐다.

손을 떨쳐 낸 에단은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뒤를 잡은 상황이라면 메치기나 초크 류가 정석적이었지만, 방금 전의 괴력을 보고는 다른 방향으로 튼 것이다.

상대가 마나를 사용한 이상, 레슬링 따위의 힘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네이드는 마치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에단의 주먹을 피했다.

하나 에단은 리듬을 잃지 않았다. 순식간에 네이드를 따라붙어 발차기를 날렸다.

네이드가 에단의 발차기를 도중에 붙잡았다.

'이 움직임은 대체 뭐지?'

네이드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심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에단의 움직임과 기술.

모두 어설프게 행할 수 없는 고등한 기술이라 주의가 약해지면 일격을 허용할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둘의 역량 차이는 확실했다.

충분히 빠른 일격이었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이상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마나를 쓰니까 다른 사람 같군.'

설마 이 정도의 반사 신경을 얻게 될 줄이야.

그러나 이조차 에단의 예상범위에 들어 있었다.

에단은 빠르게 판단하여 자신의 다리를 잡은 네이드의 팔을 뱀처럼 휘어 감았다.

선수들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플라잉 암바.

"대처 능력이 좋군요."

네이드는 꽤나 놀랐다.

빈말이 아니었다.

사실상 네이드가 마나를 사용한 이상, 그의 패배라고 봐도 좋았다.

에단의 공격은 매 순간 허를 찔렀고, 좁힐 수 없는 마나의 유무만 제외한다면 에단의 승리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이드가 마나를 사용한 이상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에단이 이를 악물며 네이드의 팔을 꺾으려 들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네이드가 작게 미소 지으며 잡힌 팔에 힘을 실었다.

"훌륭합니다."

뚜득.

마력을 사용하자 암바가 순식간에 풀려났다.

암바가 순식간에 풀리자 에단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네이드가 목검을 휘둘렀다. 에단의 눈이 네이드의 목검을 좇았다.

퍼억!

에단이 팔을 들어 목검을 막자, 저릿한 통증이 뇌리를 타고 올라왔다.

타닷.

에단이 지면에 발을 디뎠다.

"여기까지."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쳇, 더럽게 아프네."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팔을 털어 냈다. 목검에 가격당한 부위가 얼얼했다.

소매를 걷어 확인해 보자 피부가 검게 죽어 있었다.

"아직 마나도 못 쓰는 상대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그만큼 도련님의 공세가 위협적이었습니다."

"아부 떨기는."

에단이 툴툴거렸다.

하지만 네이드는 빈말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네이드가 가라앉은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놀라운 움직임이군.'

정확히 말하면 네이드가 놀란 것은 에단의 격투술이었다.

기사들도 맨몸 격투를 수련하기는 한다.

다만, 그 비중이 매우 낮았다.

기사들은 검을 자신의 형제, 혹은 애인처럼 아꼈다.

전투에 있어서도 검을 지키는 것을 덕목으로 여겼다.

그러한 점이 격투술을 등한시하는 이유이기도 하였지만, 가장 큰 것은 효용성의 차이었다.

맨몸인 상대와 검을 든 상대의 차이는 컸다.

맨몸으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작은 날붙이라도 들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어린아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상력을 얻게 되는 거다.

그런 근본적인 효용의 차이 때문에 기사들은 격투술을 등한시했다.

그 시간에 검술을 더 단련하고, 비상시를 대비해서 단검을 착검했다.

블란테는 검술 명가였다.

대륙 전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검술을 모두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서 파생되는 격투술도 예외는 아니다.

고대부터 존재하는 격투술, 혹은 박투술.

효용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검술과 비교할 것은 되지 못했다.

네이드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전에 에단이 보여 준 움직임을 토대로 가문 내에 존재하는 격투술이나 박투술에 대한 서적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에단의 움직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극한의 효율을 좇는 움직임. 변수를 창출해 내는 창의성.

흡사 암살자의 무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던 네이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에단이 암살자의 무술을 배울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그 박투술은 어디서 배워 오신 겁니까?"

"어? 음... 내가 만들었는데?"

"...그 모든 것을 직접 창작하셨다는 겁니까?"

"뭐, 전부 오리지널은 아니고, 책들 몇 개 엮어서 만들었어. 아무래도 칼보다는 몸 쓰는 게 적성에 맞아서."

네이드의 입이 벌어졌다.

그 모든 것들을 직접 만들었다고?

이건 천재의 영역을 넘어선 일이었다. 에단의 나이는 아직 10대에 불과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네이드가 계속해서 물어보자, 부담을 느낀 에단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 난 이제 씻으러 간다."

에단은 그 말을 끝으로 연무장을 나섰다.

'꼬치꼬치 캐묻기는.'

에단이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현대 종합격투기의 근간은 결국 모든 무술의 집합체였으니까.

다양한 무술의 장점을 응집해 만든 것이 MMA였다.

물론 그 와중에 부상 위험도가 높거나 하는 것들은 반칙성 기술로 금지가 되었다.

'이제는 가릴 처지가 아니야.'

칼과 창을 쓰는 시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력까지도 사용하는 판타지 세계관이다.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지.'

필요에 따라서는 검도 사용할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의 숙련도로는 큰 의미가 없다고 여긴 것뿐이지.

시간만 주어진다면 모든 것을 흡수할 생각이었다.

'종합격투기의 기술이 어디까지 통용될지도 궁금하고.'

에단은 카론을 떠올렸다.

'지지는 않을 것 같지만.'

하지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방금 직접 느끼지 않았는가.

마나를 쓰는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와의 간극은 넓었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거길 가기에는 명분이 부족한데....'

주인공이 얻어갈 기연 중 하나.

마음 같아서는 그걸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지금 대외적으로 에단은 별채에서 근신 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전에 본채로 가게 된 것은 가주의 호출로 인해서였지, 에단의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

괜히 트집 잡힐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서는 안 됐다.

'그 녀석만 이기면 명분이 생기니까.'

에단은 조급함을 느끼지 않았다.

천천히 하면 되는 일이었다.

"볼 때마다 놀랍네."

욕탕에 들어가기 전 에단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매우 짧은 시간 이뤄진 몸의 변화가 놀라웠는데, 볼 때마다 몸의 테가 달라지니 매번 신기했다.

'정말 어마어마하군.'

앞으로 변하게 될 몸을 떠올리며 탕에 몸을 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