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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지?"

"별채에서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겁을 집어먹은 것 같습니다."

카론의 호위 기사인 아드먼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드먼은 카론의 호위 기사인 동시에 스승이기도 했다.

"흥, 요행으로 이긴 주제에 건방을 떨 때부터 예상했어. 망나니 새끼가 감히...."

그때를 떠올리자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이가 갈렸다.

"자중하시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지. 운도 좋은 녀석. 아버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

"수련은 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흥, 그딴 망나니 새끼 따위 수련 없이도 상대하는 데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준비는 해야겠지."

카론이 목검을 쥐었다. 이윽고 자세를 취하자 아드먼도 가볍게 목검을 들어 올렸다.

타닷.

카론이 경쾌한 발검으로 아드먼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웅!

카론의 목검이 아드먼의 목덜미를 노렸는데, 상당히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감정이 실려 있군.'

재능은 있는 편이었지만,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다.

일전의 사태를 떠올리며 아직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고, 그 탓에 검술에도 분노가 묻어났다.

좋지 않은 습관이었지만, 아드먼은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때로는 분노 또한 좋은 양분이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가 그 망나니 녀석이라면.'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패배는 염두에 두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아드먼은 에단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에단이 어릴 때, 그의 곁에서 수습 기사를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블란테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놈이다.'

오만하고, 거만했으며, 포악했다.

그렇다고 겁이 없느냐고 물으면 그렇지도 않았다.

에단은 겁쟁이였다.

검술 명가의 자제이면서도 검에 대한 공포를 떨쳐 내지 못했다.

아드먼은 그런 에단을 마음속으로 경멸했다.

그 이후로 카론이 태어나자 아드먼은 일말의 고민 없이 카론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러고는 성심성의껏 카론을 지도했다.

아드먼은 뛰어난 기사는 되지 못하지만, 좋은 지도자는 되었다.

빈센트도 아드먼이 카론을 지도하는 것을 기꺼워했다.

'이제 증명할 때가 다가왔군.'

카론이 에단을 보기 좋게 박살 낸다면 아드먼의 위상도 덩달아 상승할 터였다.

대련이 끝난 후를 떠올린 아드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 [9화] 격투천재 (1)

기상과 동시에 에단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곧바로 하드한 운동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먼저 땀을 뺀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유산소를 뛰었다.

몸이 몰라보게 가벼워졌는데, 단기간에 빠르게 변하다 보니 체감이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체중이 빠지는 속도가 가팔랐다.

원래 이 정도 속도라면 신체가 적지 않은 부담을 느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신체의 잠재력 덕분인지 오히려 몸이 예리하게 세공되는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숨이 차오르고 신체 곳곳이 아려왔지만, 에단은 그 통증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성장의 쾌감이었다.

꽤나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감정이지만, 에단의 몸에 들어온 뒤로는 매일같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더 이상 훈련이 지루하지 않았다.

고통 따위는 찰나일 뿐이었다.

네이드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훈련을 즐기다니. 보면서도 놀라웠다.

기사들도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구보다.

체력의 기본이자 근간이지만, 뭐든지 기본기가 어려운 법.

하지만 에단은 훈련을 시작한 뒤로 오전 구보를 단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에단은 왼쪽 손목에 손가락을 얹었다.

'심박수는... 안정적이네.'

이전처럼 주체 못 할 정도로 격렬히 뛰지는 않았다.

심장이 서서히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후욱, 후욱―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신체는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구보를 마친 에단은 가볍게 몸을 씻고 식사를 챙겼다.

본 훈련을 하기 전에 영양 섭취는 필수로 가져가야 했다.

이제 탄수화물도 적당히 섭취해 주고 있었다.

근력의 향상과 순간적인 폭발력을 위해서는 탄수화물은 필수적이었다.

'식단은 훌륭해서 맘에 들어.'

귀족은 귀족이다.

그것도 검술로 위세를 떨치는 가문인 만큼, 음식의 질에 있어서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육류와 야채 곡물류 모두 최상급이었다.

비록 조리법은 조금 구시대적이었지만, 투박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에단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자연 친화적인 음식이 입에 맞았다.

음식을 섭취한 후에는 스트레칭으로 몸의 기능을 끌어 올렸다.

근육과 관절의 가동 범위와 유연성은 신체가 받는 대미지를 감소시키며, 신체를 더욱 치밀하게 컨트롤할 수 있게 만들어 줬다.

'끄응, 적응이 안 되는군.'

원래 스트레칭은 최대한 고통을 감수해야 진전이 있는 법이었다. 에단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스트레칭을 진행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재밌나?"

에단은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 네이드를 바라봤다.

"성실하시군요."

"...비꼬는 거냐?"

"그럴 리가요. 감격스러워서 그렇습니다."

"그런 표정이 아닌데?"

"그럴 리가요."

네이드가 작게 미소 짓자, 에단은 한숨을 내쉬고 하던 스트레칭을 마저 끝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르자 에단은 다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 도착한 에단은 목검을 쥐었다.

"뭐 해? 어서 안 오고."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던 네이드가 에단에게 다가왔다.

"왜 그러시죠?"

"왜긴 왜야. 검 알려 줘야지."

"...검 말씀이신가요?"

"그럼 이건 장식이야?"

에단이 손에 쥐고 있는 목검을 휘두르며 물었다. 바람을 가르는 목검의 소리가 꽤나 흉악했다.

네이드는 그런 에단을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는 어쩔 수 없이 상대가 되어드렸습니다만... 저는 결국 한낱 집사에 불과합니다."

'속 검은 노인네가.'

네이드에 말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어. 그건 알고 있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네. 나도 그 컨셉을 지켜 주고 싶기는 하거든? 그런데 지금 내 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 지나가는 하인보고 상대가 돼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허허."

에단의 말에 네이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언제부터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지?'

망나니 시절에 해 온 막무가내식 패악질이 아니었다.

거침없는 언행은 그대로였지만, 이전에는 없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건 많지 않습니다."

"나도 많이 배울 생각은 없어."

검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은 에단도 알고 있었다.

에단이 원하는 것은 기본기였다.

'검을 알아 가는 게 먼저겠지.'

거리감, 공격 양식, 변수.

모두 승부에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대련이라는 허울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에단과 카론 모두 무기를 쥐고 싸운다.

찰나의 순간, 결판이 지어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대응책을 마련해 두는 것이 옳았다.

예상 못 한 변수로 낭패를 볼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럼 기본적인 것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네이드는 목검을 쥐었다.

손에 쥔 목검을 바라보는 네이드의 시선이 복잡했다.

네이드는 잡념을 떨쳐 내고 에단에게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가르치는 것에 재능이 없습니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잘 배우니까."

"...."

에단의 오만한 대답에 네이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검을 휘둘렀다.

휘익.

세로로 휘둘러진 검.

언뜻 보면 단순하고 별거 없어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네이드의 동작에는 작은 군더더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예비 동작 없이 수직으로 그어지는 네이드의 목검.

"이것이 세로 베기입니다."

에단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네이드의 동작을 천천히 떠올리며 곱씹었다.

그러길 잠시, 이내 에단이 눈을 뜨고 곧장 자세를 잡았다.

'보폭은 이 정도였나?'

평소 격투기 시합 때와는 조금 다른 비교적 좁은 보폭.

검을 들되, 너무 높이 들지 않고 그대로 수직으로 긋는다.

에단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모든 상황이 그려졌다.

마치 눈앞 환영이 미래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에단은 천천히, 그렇다고 느리지 않은 속도로 검을 내리그었다.

쉬익―

방금까지 에단이 펼치던 흉악한 파공음과는 전혀 다른,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움직임을 본 네이드의 눈이 커졌다.

'...방금 뭘 한 거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검에 대해 모르는 자가 보면 평범한 세로 베기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네이드는 알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세로 베기가 아니었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완성된 베기였다.

호흡, 자세, 움직임, 모든 것이 완벽했다.

"흠, 대충 이런 식인가."

에단은 검을 바라봤다.

묘한 감흥이 들었다.

맨몸으로 싸울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검을 배우지 못한 것이 맞습니까?"

"넌 나랑 계속 붙어 있었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네? 내가 알아서 배운다고 했잖아. 계속해."

에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네이드는 에단이 영유아 시절 때부터 곁에서 보필했다.

하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에단이 네이드의 시선을 피해서 무언가를 하기는 힘들었다.

물론 네이드가 에단의 곁을 지키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사라는 신분이 있는 만큼 처리해야 할 업무도 있었고, 그렇게 잠시 자리를 비울 때면 에단은 곧장 사고를 치곤 했다.

그렇기에 네이드가 느끼는 충격은 더욱 컸다.

"빨리 진행이나 하자."

"...알겠습니다."

네이드는 결국 의구심을 뒤로한 채 다시 목검을 휘둘렀다.

이어지는 일격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내려 베기, 가로 베기, 찌르기.

모두 처음 검을 잡으면 배우는 기본기였다.

가문 고유의 비전 검술 같은 것도 아니었으며, 화려한 연계 동작도 없었다.

흔한 허초도 섞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검격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그 동작들을 반복했다.

몸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 그 동작을 시도할 때 나오는 예비 동작, 검끝이 향하는 방향, 거리감 등을 익히기 위해 반복했다.

네이드는 아무런 말 없이 에단이 하는 행동을 바라만 봤다.

"네이드."

"네, 도련님."

"나한테 검을 휘둘러 봐."

"...진심입니까?"

"어."

에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이드는 별수 없다는 듯이 에단에게 다가섰다.

쉭―

네이드의 검이 바람처럼 휘둘러졌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세로 베기.

아무리 에단의 몸이 튼튼하다고 한들 이 일격을 제대로 맞으면 몸이 성치 않을 터였다.

에단은 검이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을 내렸다.

평소라면 가벼운 스텝으로 공격을 피해 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됐다.

기본적으로 거리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컸다.

아무리 공격 한 번을 회피해 냈다고 한들, 기회는 아직 상대방에게 있다는 소리였다.

에단은 그 기회를 포착할 수는 있어도, 손에 쥘 만한 무기가 없었다.

에단의 신체 능력은 아직 볼품없었다.

체력이 많이 올라왔다고 한들 거기까지였다.

마나 유저와는 상대가 안 됐다.

승리를 위해서는 달리 접근해야 한다.

에단은 오히려 네이드가 휘두르는 목검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네이드가 의아한 눈빛을 내비쳤지만, 검을 멈추지는 않았다.

탁!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단은 목검을 들어 네이드의 목검을 막아 냈다.

그리고 두 발짝 더 다가갔다.

부딪힌 목검을 타고 두 사람이 가까워졌고, 네이드가 뒤로 몸을 빼자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흠, 이런 식인가."

에단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감을 잡으려고 했다.

반면 네이드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게... 재능인가....'

저런 대응책은 아직 시범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저건 갓 검을 쥔 초심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제대로 해 볼까?"

대충 느낌이 잡혔으니 본격적으로 행동에 옮겨야 할 시간이었다.

에단은 검을 들고 네이드에게 다가섰다.

"집중하자고."

에단은 씨익 웃었고, 네이드는 한숨을 푹 쉬며 목검을 들었다.

"노인을 고생하게 만드는군요."

* * *

시간이 흘러 대련 날짜가 다가왔다.

대련이 행해지는 장소는 가문 본채에 있는 대연무장.

블란테 가문에서 가장 넓은 크기를 자랑하는 연무장이었다.

평소라면 기사단 단위의 훈련을 위해서 사용하는 연무장이었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단 두 명 때문에 사용하게 되었다.

연무장을 사용하는 것은 둘이었지만, 모인 인원은 적지 않았다.

블란테 가문의 기사와 그 수행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것이다.

이 대련은 가문 내에서 꽤나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화제도 화제였지만, 카론과 모룬이 주도적으로 판을 키운 탓도 있었다.

카론은 일전의 굴욕을 설욕하기 위해.

모룬은 에단을 완전히 매장하기 위해.

그렇게 두 사람의 의도가 모여 더욱 사건이 커졌다.

게다가 참관인 제한이 없는 탓에 대련을 직접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덕분에 웬만한 곳에서는 도저히 진행할 수가 없었다.

"겁을 집어먹고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잘도 나왔다?"

카론이 속 보이는 도발을 하자 에단은 귀를 후비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때 맞은 머리가 아직도 아픈 모양인가 봐."

에단의 심드렁한 대꾸에 카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애새끼긴 하군.'

감정의 변화가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결과는 걱정도 안 되고.'

애초에 승리를 의심하진 않았다.

다만, 에단이 노리는 것은.

'어떻게 이겨서 입지를 키울 것인가.'

그것이 이번 대련의 주된 목적이었다.

◈ [10화] 격투천재 (2)

"가주님이 입장하십니다."

웅성거리던 인파가 양쪽으로 나뉘어 길을 텄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소란이 잦아들고 사람들은 침묵했다.

이것이 블란테 가문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입지였다.

'재밌네.'

흥미로웠다.

시합을 뛰던 시절 언제나 주인공은 류태신이었다.

환호든지, 원성이든지 주목을 한 몸에 받는 당사자는 류태신이 분명했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자리에 수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에단이 일으킨 사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조차 한순간에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가주라는 존재.

빈센트 블란테였다.

'먹을까?'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무너질 가문이었다.

시기를 잘 조율하고 맞물리는 상황 속에 에단이 자신의 입지와 명분을 들이민다면, 가능성은 차고도 넘쳤다.

'지금은 시기상조지.'

아직은 이 가문에 그렇게 큰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블란테라는 가문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에단이 얻어야 할 것들은 밖에 있지만, 추후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 있어서는 가문의 힘이 필요했다.

원작 주인공에겐 블란테 가문이 무너지며 생기는 혼란이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에단은 블란테 가문이 살아 있어야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여 에단은 블란테가 원작에서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블란테는 에단의 든든한 배경이 될 테니까.

가문의 몰락을 최대한 늦추며, 원하는 것을 가져갈 생각이었다.

'모든 걸 얻으면 그 이후로 가문은 중요치 않아.'

에단이 잡념을 지웠다.

'지금은 집중.'

자신감은 충분했지만, 자만할 수는 없었다.

에단은 분명히 불리한 입장이다.

아무리 카론이 생각 없는 애송이라고 한들 마나 유저였다.

네이드와의 대련을 통해 마나를 다루고, 다루지 못하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체감했다.

아무리 에단이 다양한 변수 창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한 번 실수하면 끝장이었다.

"큭큭, 이제야 긴장이 좀 되는 모양이지?"

"지랄한다."

카론의 도발에 에단이 태연하게 대처하자, 카론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까지다.'

대련이 시작되면 바닥을 구르는 것은 저 녀석이 될 것이다.

어찌어찌 비대한 지방은 덜어 낸 모양인데 그걸로 자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카론은 마나 유저였다.

에단은 아직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일반인이라는 소리였다.

'일반인은 마나 유저를 이길 수 없다' 이것은 정설이자 깨지지 않는 공식이었다.

이미 마나를 깨우친 기사급 존재들은 마음속으로 카론의 승리를 점쳤다.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카론은 고민했다.

'이대로 이겨봤자... 얻는 건 별로 없겠네.'

이미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승리를 점쳤다.

자신은 검을 다룰 줄 아는 마나 유저였고, 에단은 검을 제대로 휘둘러 본 적도 없는 일반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승리도 매력적이긴 한데....'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가문의 망나니 돼지 새끼한테 조금이라도 더 처절한 굴욕을 주고 싶었다.

"어이."

카론이 에단을 불렀다. 에단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까지 진짜....'

속이 뒤틀릴 정도로 약이 올랐다.

카론이 에단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타인은 듣기 힘들게 에단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이번 대련. 마나는 안 쓸게."

"...호오."

"생각해 보니까 너 같은 버러지 상대로는 마나도 아깝더라고. 기껏 사람들이 모였는데 결과가 시원치 않으면 안 될 일이잖아? 마나를 쓰지 않고 잘근잘근 밟아 줄게."

"후회는 안 하고?"

에단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카론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후회를 왜 해. 바닥을 기면서 나한테 살려 달라고 애원하게 되는 건 널 텐데."

"하하, 그 말 기억해 둘게."

귀엽다.

저런 수위 낮은 도발은 감흥도 없었다.

격투기 선수 시절 서구권 선수들이 내뱉던 트래시 토크에 비교하면 애교였다.

'멍청한 녀석이군.'

아무리 상대가 자신보다 약해 보여도, 이런 자리에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런데 저런 여유를 부리고 있다니.

'괘씸하기도 하고, 정신 좀 차리게 해야겠어.'

* * *

"이제야 에단 님에게서 해방되시겠군요."

아드먼이 네이드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네이드는 별다른 반응 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기회에 에단 도련님이 패배하시면 입지도 더욱 좁아지겠죠. 그러면 네이드 씨도 더 이상 에단 님 곁에서 고생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허허, 결과를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네이드의 말에 아드먼이 눈을 껌뻑였다.

"...설마 에단 도련님이 승리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하지만 결과는 모르는 법이죠."

"허."

아드먼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네이드가 에단을 챙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생각보다 멍청한 노인네였군.'

가문 내에서 적지 않은 입지를 가지고 있는 자인지라 가까이 지낼 생각이었건만,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대련이 끝나면 대세는 카론 님이다.'

그렇게 되면 덩달아 자신의 위상도 높아질 것은 불 보듯 빤했다.

나이 먹은 노집사 따위는 대세에서 멀어질 것이다.

'결과가 기대되는군.'

아드먼이 장밋빛 미래를 떠올리며 에단과 카론을 바라봤다.

* * *

카론과 에단의 거리가 멀어졌다.

심판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사가 대련을 진행했다.

"그럼 지금부터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패배를 외치시거나 대련의 속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대련이 종료됩니다."

카론이 에단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곱게 끝낼 수는 없지.'

패배를 외치기도 전에 곤죽을 내 줄 생각이었다.

위치상 에단은 카론의 형이었지만, 카론은 단 한 번도 에단이 자신의 형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늘 가문의 수치이자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망나니로 여겼다.

'검술 가문의 자제가 검을 두려워하는 게 말이 돼?'

에단을 향한 카론의 경멸은 점점 심해져 갔다.

그러던 와중 불시의 일격으로 굴욕을 당했다.

정당한 결투 신청을 모욕했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수치심을 주었다.

하여 카론은 고작 승리하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울고불고 애원하게 만들어 준다.'

에단은 카론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생각이 다 드러나는군.'

선수 시절에도 저런 녀석이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녀석.

좋지 않은 습관이다.

프로는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흥분은 눈앞을 흐리게 만들고, 기술을 무뎌지게 만든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순간의 방심으로 결과가 좌지우지된다.

"대련 시작!"

기사의 목소리가 울리자 카론은 곧장 뛰어들었다.

오랜 시간 단련된 카론의 움직임은 민첩했다.

'가로 베기.'

에단은 침착하게 카론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손이 향하는 방향, 그리고 보폭을 확인해 카론이 내지를 수를 읽었다.

에단의 예상처럼 카론의 목검은 에단의 옆구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거리를 벌리면 안 되겠지.'

신장은 에단이 더 컸지만, 에단은 검에 익숙하지 않았다.

거리를 벌리면서 승부를 보기에는 불리했다.

그리고 애당초 에단은 검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 없기에 목검을 들어 카론의 공격을 방어해 냈다.

쾅!

이윽고 묵직한 충돌음이 퍼져 나갔다.

'이걸 막아?'

카론의 눈이 커졌다.

꽤나 힘을 실은 일격이었다. 죽지 않도록 조절했다곤 하나, 일반인이 막을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은 어렵지 않게 일격을 막아 냈다.

몸이 상당히 밀리긴 했지만, 분명히 방어를 해낸 것이다.

'관건은 속전속결.'

카론이 아직 정신을 차리기 전에 몸을 움직였다.

검을 회수하지는 않았다. 그러기는 늦었다.

퍼억!

에단의 오른발이 카론의 명치에 정확히 꽂혔다.

"커헉!"

카론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며 순간적으로 뒤로 밀려났다.

"이게 무슨?"

지켜보던 관중들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단이 행한 움직임은 검술이 아닌,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비겁한...!'

그리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명치에 제대로 꽂힌 발차기 때문에 카론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는 태세를 정비하기 위해 몸을 뒤로 물렀다.

'확실히 빠르네.'

에단은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기회가 보이면 끝내려고 했지만, 마나를 깨우친 신체답게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에단이 앞발을 강하게 내디뎠다.

허리가 비틀리며 오른손이 뒤로 젖혀졌다.

'설마?'

카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쉬익―!

에단이 목검을 투척했다.

힘을 실어 투척한 목검은 바람을 가르며 카론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갔다.

"멍청한 녀석!"

카론은 손에 쥐고 있던 목검을 휘둘렀다.

방금 전 발차기에 적지 않게 당황하기는 했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저런 근본 없는 공격에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타닥!

카론이 지면에 자세를 잡고 목검을 쳐 냈다.

매섭게 날아든 에단의 목검이 허무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겼다...!'

에단이 멍청한 짓을 한 덕에 수월하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게 되었다.

검이 없는 기사가 대련을 제대로 지속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스윽―

시야에서 목검이 사라지자마자 에단이 가까워졌다.

에단의 몸이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카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목검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지만, 에단의 무릎은 카론의 사각을 노리고 정확히 꽂혔다.

빠악―!

이전에도 연습한 플라잉 니킥이 카론의 얼굴에 정확히 적중했다.

"커헉!"

그의 입에서 다시 한번 신음이 터져 나왔다.

카론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제대로 적중한 플라잉 니킥이다. 실신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확실히 좋긴 하군.'

검술 명가다운 튼튼한 몸이었다. 그건 확실했다.

에단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카론의 손을 붙잡았다.

"수고했다. 잘 가라."

휘릭.

에단은 카론의 품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카론의 팔이 에단의 어깨에 걸쳐졌고, 이내 무게 중심이 기울어진다.

그의 체중은 이미 에단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카론의 몸이 붕 떴다가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쳐졌다.

쾅!

자비는 없었다.

제대로 된 낙법도 익히지 못한 카론이 완벽하게 걸린 업어치기에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커헉!"

"오, 뭐야. 아직도 정신이 있어?"

이번에도 역시 제대로 들어간 업어치기였다. 낙법도 취하지 못한 채 온전히 충격을 전달받았음에도 카론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끄아악!"

카론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이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머릿속에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죽여 버릴 거다!"

"새끼, 허세는. 지가 한 말도 못 지키는 새끼가."

카론이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에단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마나를 쓰니까 힘이 세긴 하네.'

이 정도 근력이면 최소 중량급은 되어야만 낼 수 있는 완력이었다.

아직 어린 티를 못 벗은 카론이 낼 만한 힘은 아니었다.

'뭐 상관은 없지만.'

카론은 아무 기술 없이 무턱대고 에단의 품에 파고들었다.

방법이 없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근력이 세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무방비상태라면 무용지물이다.

에단이 카론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허리를 감아 주고, 몸을 틀어 주면.'

꽈아아악!

순식간에 엄청난 압력이 카론의 목을 압박했다.

"커, 커헉!"

카론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이게 대체 뭐야...!'

처음 겪는 상황에 카론은 정신을 못 차리고서 바동거리고 있었다.

손에 든 목검은 놓친 지 오래였다.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별다른 방도는 없었다.

'쉽게 풀릴 건 아니라서.'

그라운드 기술에 조예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무런 지식 없이 바동거리는 것만으로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미 대미지를 입은 상태였다. 아무리 마나 유저인 데다가 우월한 스펙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경동맥이 압박당하는 상황을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기가 무섭게 카론의 몸이 축 늘어졌다.

'끝났네.'

에단은 카론이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판단한 뒤 초크를 풀었다.

"이, 이게 무슨...."

한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드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 이 대련은 무효입니다. 검술 대련에서 저런 근본 없는 주먹질이라니...."

아드먼의 말에 네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이 대련이 언제부터 검술 대련이었죠?"

"...?"

"목검으로 싸워야 한다는 조항은 여태껏 들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

네이드의 말에 아드먼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대련 내에 그런 조항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트집을 잡으려 한다면, 애당초 마나 유저인 카론과 아직 마나도 깨우치지 않은 에단의 대련은 성사되지 말아야 했다.

침묵하고 있는 관객들에게서 경악과 경탄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블란테는 힘을 숭상한다. 당연히 블란테의 검이라 불리는 기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에단의 전투술과 그가 대련 도중에 보여 준 움직임은 경이로운 수준이었으며,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 주었다.

"뭐, 뭐야...?"

"저 움직임... 처음 보는 것들인데...?"

"에단 님에게 저런 재능이 있었다고?"

아드먼이 입을 다물고 다른 수행인들도 감탄만 하고 있자, 모룬이 거친 발걸음으로 에단에게 다가섰다.

"이, 이런 비겁한 새끼가!"

모룬이 다짜고짜 에단의 멱살을 잡으려고 하자 에단이 자세를 갖추고 대응하려 했다.

그 순간, 우레 같은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그만!"

빈센트의 목소리였다.

그의 노호성에 순간 연무장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모룬, 지금 이게 무슨 추태지?"

빈센트의 싸늘한 눈초리에, 흥분하며 에단에게 다가서던 모룬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쯧."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은 빈센트가 한차례 혀를 찼다.

그러고는 좌중을 훑었다.

"대련은 끝났다. 이 결과는 두말할 것도 없는 에단의 승리다."

"하지만... 에단은 비겁한 수를...."

모룬이 슬며시 고개를 들며 불복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빈센트는 가차 없이 묵살했다.

"실전이었다면 카론은 죽었다. 너는 전장에서도 그따위 변명을 내뱉을 셈이더냐?"

빈센트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모룬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에 드는군.'

사실 에단의 체력은 지금 한계치에 다다랐다.

마나 유저와의 스펙 차이를 통감하던 터라 속전속결을 위해 전력을 다한 것이었다.

한데 이때 모룬 같은 자가 시비를 걸면 제대로 대응할 자신이 없었다.

원래도 빈센트가 중재할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확실하게 중재자의 역할을 해 주었다.

"이제 보상의 시간이군요."

에단은 웃음을 머금고 빈센트를 바라봤다.

◈ [11화] 몬스터 토벌 (1)

"그래, 토벌대 말이더냐?"

빈센트가 피식 웃으며 묻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다. 가주가 되어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 토벌대를 꾸릴 권한을 주마. 물론 그렇게 많은 인원을 차출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많은 인원을 통솔할 생각도 없었다.

이번 대련으로 이미지 쇄신이 있었다고 한들 에단은 여전히 가문에서 버린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가문 내에서 입지가 좁은 것은 물론이요, 기가 세기로 유명한 가문의 기사와 병사들이 순순히 에단의 말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에단의 밑에 들어간 순간, 좌천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다룰 자신도 없고.'

싸움에 재능이 있는 것과 통솔력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소수의 인원을 컨트롤하는 것과 소대급 인원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 또한 아예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머리 아픈 일을 떠맡을 생각도 없고.'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일에 자처해서 나설 정도로 이번 토벌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에단이 토벌에 참가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죽은 나무.'

중반부에 주인공이 얻게 되는 기연.

혹은 이스터 에그.

주인공의 수많은 스펙 중 하나가 되는 가호.

에단은 그것을 가로챌 생각이었다.

'주인공이 먹게 둘 수는 없지.'

현 시점에서도 이미 주인공이 먹은 기연이 몇 가지는 될 터였다.

하니 에단은 조금이라도 주인공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그런 만큼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기연 몇 개는 가로채 가야 수지 타산이 맞는다.

그때, 에단의 주위에서 머뭇거리던 모룬이 소리쳤다.

"아버지!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끄럽다. 지금 대화 중인 게 안 보이더냐?"

빈센트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모룬이 멈칫했지만, 이번에는 그도 양보하기 힘들었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미 토벌대는 구성이 완성되었습니다. 갑자기 인원을 차출한다고 하시면...."

"십인대 수준이면 충분합니다."

모룬이 반대 의사를 계속해서 표출할 때 에단이 말했다.

에단은 경멸의 눈초리로 모룬을 슬며시 훑어본 후 다시 빈센트를 바라봤다.

"십인대라... 생각보다 적구나. 그 정도로 충분하겠느냐?"

"충분합니다. 다만, 인원은 제가 구성할 겁니다."

"...뭐라고?"

"그 정도 권한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가주님께서 인원을 강제로 배정시킨다고 한들 그들이 제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리란 것쯤은 가주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에단의 말에 빈센트는 침묵하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다. 하지만 나도 하나 조건을 걸지. 네가 뽑는 병사나 기사도 차출에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강제로 차출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빈센트는 입을 다물고 있는 모룬을 바라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불안감에 젖어 있던 모룬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속이 훤히 보이는군.'

빈센트는 한심한 모룬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혀를 찬 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작게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조금의 시간을 주시죠. 일주일 안에 제 부대를 완성해 오겠습니다."

'재밌구나.'

빈센트는 에단의 기개 어린 태도에 묘한 감흥을 느꼈다.

철없던 망나니인 줄만 알았는데, 계속해서 자신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변덕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변덕 같아 보이지 않았다.

빈센트는 에단의 눈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일말의 망설임과 부담도 없이, 자신감과 총기만이 가득했다.

'오만한 녀석이구나.'

하지만 빈센트는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오만함은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였다.

이유 없는 자만과 오만은 독이 되겠지만, 에단은 이미 한 번 결과로 증명을 해냈다.

'하지만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한 번의 증명으로는 지금껏 에단이 저지른 일들을 무마할 정도의 성과를 냈다고 보기 힘들었다.

따지고 보면 동생을 제압한 것뿐이었으니까.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것뿐이었다.

당연히 이것을 성과라고 볼 수는 없었다.

'마나 유저를 제압한 것은 놀랍긴 하다만.'

빈센트는 묘한 눈으로 에단을 훑어봤다.

두툼하던 지방 덩어리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밀조밀한 잔 근육이 에단의 몸을 갑옷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정할 테냐?"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죠. 여기서 권유해 봤자 제 밑으로 올 사람은 없을 테고요. 기껏 얻은 이점을 버릴 만큼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에단은 주변 인파를 둘러봤다.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관중까지. 하나같이 표정들이 가관이었다.

그들은 모두 충격과 놀라움에 물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내뱉고 싶어 하는 표정들이었지만,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주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허락은 구한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에단은 빈센트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예를 표한 다음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면서 마주친 모룬을 보며 에단은 작게 중얼거렸다.

'쫄지 마.'

잠시 벙 쪄 있던 모룬이 에단의 입 모양을 읽었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에단은 태연하게 모룬을 지나치며 네이드를 향해 손짓했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가자."

"...네."

네이드와 함께 연무장을 빠져나온 에단이 발걸음을 옮기자 수많은 인파가 홍해처럼 갈라졌다.

'마음에 드는군.'

저 눈초리들.

당혹으로 물든 눈빛.

류태신으로 살던 선수 시절, 시합이 끝날 때마다 질리도록 받아 본 눈초리였지만, 저 시선을 받을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늘 짜릿했다.

응당 질 것이라고 예상한 언더독이 일으킨 반전.

그는 그 상황을 즐기곤 했다.

'...설마 더 완벽하게 성공시킬 줄이야.'

에단을 뒤따르던 네이드가 복잡한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네이드는 에단과 몇 차례 합을 맞췄다.

당연히 에단이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대결에서 에단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연습과 실전은 달랐다.

에단은 실전에서 더욱더 뛰어난 움직임을 보여 줬다.

지금껏 해 온 것들은 몸 풀기에 불과하다는 듯이.

'이번 토벌에서도 또 일을 낼지도 모르겠군.'

매해 이뤄지는 정기적인 토벌이었다.

하지만 숨겨진 의도는 따로 있었다.

'자격의 판별.'

토벌대를 꾸리고, 얼만큼의 성과를 내는지를 판별하는 용도였다.

가주와 그 직속 기사단은 토벌 과정에 발을 깊게 담그지 않았다.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토벌이었지만, 세력 구도는 이미 완성이 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장남인 모룬이 가장 큰 성과를 냈고, 맡은 토벌의 규모도 가장 컸다.

'과연 다시 이변을 일으킬 수 있을까.'

네이드도 에단과 가주와의 대화를 들었다.

고작 십인대 수준의 부대다. 첨병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규모였다.

'중요한 건 규모가 아니었지만.'

토벌의 성과는 규모가 전부가 아니었다.

어쩐지 이번에 에단이 한 번 더 사건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 * *

'토벌대라....'

에단은 자신의 별채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원래라면 슬슬 근신이 끝날 시기였다.

하지만 에단은 이 별채가 마음에 들었다.

'외압도 없고.'

에단은 머릿속으로 모룬과 카론을 떠올렸다.

본채에서 지낸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칠 녀석들이었다.

경쟁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팔 벌려 반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매일 귀찮은 일을 겪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에단은 자잘한 반격보다 한 번에 터트리는 것을 원했다.

'남은 형제들은, 어디 보자....'

에단은 머릿속으로 블란테 가문의 자제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먼저 장남인 모룬, 둘째인 에단, 셋째 여동생인 리사, 그리고 막내 카론.

'이 중에 영향력 있는 녀석은....'

가문 내의 입지는 모룬이 가장 높았다. 장자인 점도 한몫했고, 가진 무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블란테 가문은 검술 가문인 만큼 약육강식을 추종한다.

'문제는 멍청하다는 거지.'

앞서 겪은 대로 모룬은 단순 무식했다.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앞을 내다보지도 못한다.

편협한 아집도 있으면서 자존심은 또 강했다.

그런 점들 때문에 모룬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도 존재했다.

'나는 뭐, 보다시피.'

가문의 문제아이자 망나니. 어찌 보면 최악의 상황이었다.

성격은 형제 중 가장 지랄 맞은 데다, 검에 재능은커녕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녀석.

'그게 지금 내 입장이란 말이지.'

남은 핏줄은.

'리사 블란테.'

검술의 재능도 출중하고 성격 또한 불같았지만, 가문 승계에 관심이 없어 아카데미로 떠났다.

'히로인 중 한 명이고.'

에단은 리사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주인공이 가문 내에서 얻어 가는 기연 대부분이 리사로 인한 것들이었다.

'이제 다 내 거지만.'

주인공 녀석이 이곳에서 가지고 갈 것은 한 톨도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걸 위해 자원한 토벌대였다.

'예정보다는 빠르지만, 상관없겠지.'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 피해 없이 기연을 얻어 갈 수 있는 상황이니.

에단은 별채를 돌아다니며 고민했다.

'어찌할까.'

대련에서 승리하여 전보다는 나아진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데.'

그것만 가지고는 인력을 끌어오기가 애매했다.

실력이 있는 기사는 이미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테고, 싹수가 보이는 녀석은 에단을 따라오지 않을 테다.

'썩은 동아줄이라 그거지.'

괜히 에단을 따라갔다가 피를 볼 바에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토벌대에 불참할 게 빤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갈 수는 없고.'

이번에 얻을 계획인 '죽은 나무'는 그리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 마나를 깨우치지 못한 에단에게는 그랬다.

길을 열어 줄 녀석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에단의 말을 충실히 따를 녀석들로 토벌대를 구성해야 했다.

'기존의 토벌대에서 이탈해도 별말이 안 나올 녀석들.'

고집 세기로 유명한 기사는 당연히 제외하고.

'병사들도 쉽지 않겠네.'

블란테 가문의 기사들은 대체적으로 용맹한 편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녀석들은 아니었다.

당연히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았고, 에단의 계획을 들으면 제대로 따르지 않을 것이 빤했다.

'그럼 이제 남은 녀석은....'

아직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받지 못한 수습 기사, 갓 군에 들어온 말단 병사, 그리고 하인들.

'우선은 하인부터인가.'

있을 것이다.

재능을 개화시키지 못한 하인 몇 명이.

'이름이....'

원작 내에서도 입지가 적어 잘 떠오르지 않는 녀석.

결국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 에단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네이드에게 물었다.

"네이드."

"네, 도련님."

"웬만한 하인이랑 하녀들은 대충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얼굴에 긴 흉터 있는 하인 혹시 알아?"

에단의 물음에 곰곰이 고민하던 네이드가 입을 열었다.

"얼굴에 자상이라.... 휴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이드의 말을 듣자 에단의 입가에는 긴 미소가 지어졌다.

"어 맞아."

◈ [12화] 몬스터 토벌 (2)

"갑자기 휴고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 거죠?"

"그럴 이유가 있어. 그 녀석 지금 어디에 있지?"

"...휴고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마구간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좋아. 안내해."

에단은 멋대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휴고를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오늘 보면 처음일걸?"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게 있어. 잔말 말고 길이나 안내해."

'첫 단추는 맞춰졌고.'

원래라면 주인공 파티에 함께하게 될 녀석이었지만, 자신이 먼저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야성의 휴고.'

비록 남성 캐릭터라 원작에서의 입지는 적었지만, 실력은 확실한 놈이었다.

녀석이라면 이번 토벌 작전에서도 존재감을 뽐내기에 충분했다.

* * *

블란테 가문의 마구간은 규모가 매우 컸다.

마구간의 숫자도 적지 않았지만, 각각의 크기도 컸다.

한 마구간에서 수용하는 말의 숫자도 많고, 말도 전부 명마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블란테의 마구간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하지만 휴고가 일하고 있는 마구간은 매우 조용했다.

묘하게 스산한 기운까지도 느껴졌다.

'흠, 묘하네.'

마구간에 들어섰지만, 말들은 에단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영양 상태는 괜찮은 것 같은데.'

윤기가 흐르는 털들을 보아하니 영양 쪽은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에단은 전문가가 아니었다.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때, 말들은 괜찮아 보여?"

"네. 상태는 훌륭하군요. 관리를 잘한 것 같습니다. 다만, 이상한 점이... 말들이 겁을 먹고 있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말을 마친 에단이 다시 한번 주변의 말들을 둘러봤다.

'녀석의 특성 탓인가.'

야성의 휴고.

녀석은 온전한 인간이 아니었다.

휴고에게는 또 다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말들이 겁을 먹은 건가.'

짐승은 인간보다 예민한 법이다.

본능적인 감각이 인간보다 예민하면 예민했지, 결코 둔하지 않다.

그때, 저 멀리 마구간을 분주하게 정리하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얼굴까지 가리고 있는 로브 탓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근처의 말들이 유독 더 겁을 먹은 걸 보니 휴고일 듯싶었다.

"맞아?"

"맞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건장한 체형은 아니네.'

얼핏 보면 왜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체격이었다.

에단이 발걸음 소리를 내며 남성에게 다가갔다.

"누, 누구...?"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몸을 돌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그러다 몸에 두른 예복을 확인하고는 부랴부랴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예고 없이 찾아온 건 나니까 미안해할 건 없고. 휴고 맞지?"

"...네, 맞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에단이 주위를 훑어봤다.

조용했다.

이렇게 큰 규모의 마구간이건만, 일하고 있는 자는 휴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네이드."

에단이 네이드를 부르자, 그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네, 도련님."

"여기는 원래 이딴 식인가?"

"아닙니다."

"네가 하는 게 애들 총괄이지?"

"...그렇습니다."

"잘 좀 하자."

"주의하겠습니다."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에단은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는 아직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후드 좀 벗지?"

에단의 말에 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후드를 걷었다.

'흉터가 크긴 하군.'

휴고의 왼쪽 볼에는 사선으로 그어진 커다란 자상이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의 휴고에게는 상당히 큰 트라우마로 작용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에단은 신경 쓰지 않았다.

류태신으로 살던 기간까지 합치면 흉터 따위에 꺼림직함을 느낄 나이는 이미 지났다.

게다가 격투기 선수들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전신에 문신을 하는 경우도 흔했다.

'저런 흉터쯤이야.'

오히려 흉터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여긴 원래 너 혼자서 일하는 건가?"

"...네."

휴고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자 에단은 혀를 찼다.

"언제부터?"

"얼마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알고?"

"...저만 들어오면 말들이 얌전해진다고 해서...."

"네이드."

"네, 도련님."

"여기 마구간 소속 하인들 모조리 잘라."

"알겠습니다."

"인력이 부족할 일은 없잖아? 가문의 자원을 허비하는 꼴을 볼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한 에단은 가만히 휴고를 바라봤다.

'지금으로서는 알기 힘들군.'

예민한 감각으로는 타인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에단이었지만, 지금의 휴고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바로 불러서는 안 되겠고. 내일 내가 있는 별채로 찾아와."

"네... 네?!"

휴고가 당황하며 되물었지만, 이미 에단은 몸을 돌린 뒤였다.

뒤돌아선 에단은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마구간을 나서고 있었다.

* * *

다음 날이 되자 휴고는 에단의 별채로 찾아왔다.

"길 안 잃고 잘 찾아왔네."

"감사합니다...."

"그럼 연무장으로 가자."

에단은 휴고를 이끌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단을 뒤따라갔다.

'내가 연무장에는 왜 가는 거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마음 한편에서 불안감이 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낱 시종에 불과한 자신이 연무장에 갈 이유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에단에게 그 이유를 여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휴고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에단을 뒤따랐다.

연무장에 도착한 에단은 말없이 휴고를 바라보더니 옷가지를 던졌다.

"먼저 이걸로 갈아입어라."

"이건...."

휴고가 받아든 옷가지를 보고 멍하니 있자, 에단이 말을 붙였다.

"연무복이야."

"연무...복 말씀이신가요?"

"어. 먼저 체력부터 봐야 할 거 아니야."

휴고가 가지고 있는 기본 몸 상태.

그걸 먼저 확인해야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휴고는 에단의 말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느라 드러난 휴고의 몸에는 오래된 흉터가 가득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에단도 절로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다친 건 아닐 테고. 학대인가.'

원작에서는 그에 대한 묘사는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원작에서 조명을 받는 캐릭터는 주인공을 제외하면 대부분 여자 캐릭터였다. 휴고는 나름대로 주인공의 동료임에도 비중에 있어서는 가차 없었다.

휴고가 주섬주섬 옷을 모두 갈아입고 불안한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말랐군.'

휴고의 몸은 삐쩍 말라 있었다.

오랜 시간 제대로 된 영양 섭취가 이뤄지지 않은 것 같았다.

에단이 인상을 구겼다.

"뭐야. 먹는 걸로도 차별받는 거야?"

"...."

휴고가 대답함에 어려움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자, 에단은 네이드를 불렀다.

"네이드."

"네, 도련님."

"이거 안 보여?"

에단이 휴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휴고의 앙상한 몸에 네이드도 잠시 미간을 좁혔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확실하게 해. 천하의 블란테 가문이 애들 밥 못 먹인다는 소문이 나돌면 좋겠어?"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고개를 숙인 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연무장을 나서는 네이드의 표정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뭐, 그래도 대충 몸은 움직일 수 있지?"

에단의 말에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까지 찍고 와 봐. 전력으로."

에단이 손을 뻗어 벽을 가리켰다.

어림짐작한 거리로는 대략 200미터.

벽을 찍고 온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록이 20초 중반 정도만 나와도 매우 훌륭하다.

"뭐 해, 안 뛰고."

에단이 눈을 부라리자 휴고가 화들짝 놀라며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닷.

'뭐야. 저 엉성한 자세는.'

기대에 못 미치는 출발이었다.

마치 달리기를 처음 해 보는 것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달리는 휴고의 모습에 에단은 작은 실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실망은 기우에 불과했다.

휴고의 몸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자세는 엉망이었지만, 보폭이 커지며 체공 시간이 길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늦으면 꽤나 힘들어질 거야!"

에단이 호통치자, 휴고의 발이 더욱 분주해졌다.

탁!

휴고의 손이 벽을 짚었다.

그 순간, 에단의 눈이 커졌다.

휴고의 무게 중심 이동이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벽을 짚은 휴고가 마치 짐승처럼 튀어나왔다.

'탄력 좋다는 흑인도 이 정도는 아니야.'

최고의 탄력을 가진 흑인들. 그중에서도 지상 최대의 괴물들만 모여 있다는 미식축구 선수들도 이만큼의 탄력은 가지지 못했다.

이건 본능의 영역이었고, 재능의 영역이었다.

아직 몸을 다루는 것에 미숙한 휴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재능이라고 봐도 좋았다.

휴고가 순식간에 에단이 있는 자리까지 뛰어왔다.

'20초도 안 걸린 거 같은데.'

엉성한 자세로 나오리라고 믿기 어려운 기록이었다.

심지어 휴고는 호흡이 가빠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빨라졌던 호흡이 순식간에 안정되기 시작했다.

'야성의 휴고라기에 다른 건 무시했는데.'

근본적인 신체 능력 자체가 매우 훌륭했다.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야. 너 하인 그만해라."

"네, 네?"

휴고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대뜸 휴고가 무릎을 꿇었다.

"...제가 뭔가 결례를 저지른 건가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울먹이는 표정으로 애원하는 휴고를 보며 에단이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인 말고 내 밑에서 직속 병사하라고. 왜, 싫어? 적어도 밥은 잘 먹게 해 줄 건데."

에단의 말에 휴고가 눈을 껌뻑거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그게... 정말인가요?"

"어. 배 터질 때까지 먹여 줄게. 대신 내 말만 잘 따르면 돼."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띠던 휴고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에단이 손을 뻗어 휴고와 손을 맞잡았다.

'짐승 같은 손이군.'

에단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휴고의 손에서 느껴지는 야성을.

"자, 그럼 밥 먹기 전에 마저 할 건 해야지?"

"...네?"

"먼저 팔굽혀펴기부터 하자."

에단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 * *

"마구간 하인을 데려갔다고? 왜?"

모룬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하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같이 마구간에서 일하던 하인들은 모두 가문에서 쫓겨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 에단이 쫓아냈다는 말이야? 아니, 지가 뭔데?"

기가 찬 모룬은 괘씸한 마음에 에단을 찾아갈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하인을 쓸 정도로 사람이 없나? 하긴, 이 상황에 누가 그 녀석 밑으로 들어가겠어. 눈치라는 게 있다면.'

형제 중에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자신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모룬이 이내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알아서 하게 놔둬."

"예? 하지만...."

"끽해 봐야 하인이라며. 이걸로 꼬투리 잡기도 귀찮다. 우리는 이번 토벌만 제대로 준비하면, 더 이상 에단 녀석이 나대는 꼴은 안 봐도 된다고."

모룬은 일전의 일 때문에 일말의 경계심이 들었지만, 에단이 한낱 하인을 수중에 얻은 걸 보니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을 듯싶었다.

'어디 한번 애써 보라고.'

이미 은연중에 소문은 돌고 있었다.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는 기사나 병사라면 절대 에단의 밑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터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너는 끝장이야.'

건방진 동생을 떠올린 모룬이 웃었다.

◈ [13화] 새로운 훈련 (1)

본격적인 체력 단련이 시작되었다.

기술의 체득은 체력이 밑바탕이 된 이후에 쌓아 올려도 늦지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그 기술을 발현할 기반이 쌓여 있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에단이 요구하는 체력 기준은 높았고, 그렇기에 훈련의 강도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몸을 혹사시키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의미가 없으니까.'

헝그리 정신 같은 고리타분한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멍청한 짓을 벌이지는 않는다.

'심폐 지구력부터 올린다.'

HIT(High Intensity Training)

에단이 직접 경험한 바로, 단기간에 가장 높은 효과를 보는 훈련법이었다.

다만, 그만큼 지옥 같은 훈련법이었다.

평생을 운동에 매진해 온 운동선수들도 HIT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맥을 못 추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체력을 극한까지 몰아가야 하니까.'

원래 가진 체력이 얼마나 좋은지는 관계가 없었다.

HIT의 요점은 심박수에 있었다.

최대 심박수의 90프로.

체력이 좋은 사람이든지, 나쁜 사람이든지 본연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 바로 HIT 프로그램이었다.

단순히 100미터를 달리거나, 고중량 웨이트를 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훈련법이다.

고통과 마주하는 훈련법.

'그런데....'

휴고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에단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휴고를 바라보았다.

휴고는 짐승 같은 몸놀림을 가진 주제에 식물처럼 무럭무럭 성장했다.

충분한 영양을 주고 훈련을 시켰더니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 몸뚱이도 평범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검술 명가 블란테의 피를 이은 에단의 재능도 뒤지진 않았지만, 순수한 몸의 탄력만 놓고 보면 휴고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확실한 장점을 가지고 있군.'

괜히 주인공과 함께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꼼수를 부리는 것은 안 되지.'

휴고는 은연중에 체력을 안배하고 있었다.

여기서 체력을 모두 소진하면 이후의 훈련이 매우 고단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 꼼수를 부리고 있어.'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사람의 눈은 속여도 에단은 속일 수가 없었다.

'슬슬 나도 뛰어 볼까.'

에단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육중한 몸을 자랑했지만, 지금 에단의 몸은 상당히 말라 있었다.

체지방은 모두 빠지고 근육만 남은 에단의 몸은 잘 벼려진 검 같았다.

이윽고 몸을 푼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타닷!

에단이 순식간에 달리고 있던 휴고를 따라잡았다.

"어이, 휴고."

"...허억, 허억, 히익?!"

갑자기 따라붙은 에단을 바라보며 휴고가 비명을 질렀다.

"도, 도련님?"

"어쭈, 이 새끼가 대답도 하네? 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거야? 당장 심장이 터져 뒈질 정도로 뛰라고 했지. 그런데 지금 나를 보고 대답을 해?"

에단의 살벌한 눈으로 휴고를 훑었다.

휴고는 소름이 다리부터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변명하면 죽는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휴고는 속도를 올렸다.

순식간에 휴고와 에단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거봐. 할 수 있으면서 엄살은."

에단이 피식 웃으며 휴고에게 따라붙었다.

에단의 손에는 투박한 채찍이 둘둘 말려 있었다.

"나한테 뒤를 잡히면 꽤나 아플 거야."

에단의 음험한 목소리가 휴고의 귀를 타고 들어가자 휴고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사람의 한계를 시험하기 가장 좋을 때가 바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였다.

휴고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제 에단이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에단도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내색하면 안 된다.'

힘든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지금 이건 훈련일 뿐이었다. 여기서 뒤처지면 휴고에게 위압감을 심어 줄 수가 없다.

바로 뒤에는 생사를 걸고 나서는 정기 토벌이 예정되어 있었다.

겪어 본 적은 없지만 토벌은 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

'휴고는 여려.'

휴고는 태생적으로 마음이 약하고 여렸다.

그런 그를 통제하고 성장시키려면 정신적 지주가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권위였다.

혈통이 가지고 있는 상하 관계로는 부족했다.

그렇기에 에단은 휴고 앞에서 결코 지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쿵쾅쿵쾅.

심장 소리가 고막을 터트릴 것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휴고도 방금과 달리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속도 줄여!"

에단의 외침에 휴고의 속도가 확연하게 줄었다.

"30초간은 이 페이스다."

에단의 말에도 휴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 안 해?"

에단의 스산한 목소리에 휴고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자, 30초 지났다!"

"아, 아직 안 지난 것 같은...."

"지금 나한테 말대답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휴고가 입을 닫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쐐액!

그때 공기를 가르는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휴고가 본능적으로 속도를 올리자, 뒤에서 지면을 후려치는 파공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에단이 휘두른 채찍 때문이었다.

'제, 제정신이 아니야.'

지금 그건 진심으로 휘두른 것이다. 정통으로 얻어맞으면 몸살로 끝나지 않을 거다.

휴고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런 휴고를 바라보며 에단이 사악하게 웃었다.

"빨리 안 달려?"

휴고의 발이 다시 빨라졌다.

'제, 제기랄.... 처음에는 천국에 온 줄 알았는데, 지옥이었어.'

맛있는 음식과 포근한 잠자리.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하인들이 없는 삶은 휴고에게 꿈만 같았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견딜 만했고, 몸은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져서 동기 부여도 됐다.

하지만 훈련의 강도가 점점 올라가면서 그런 생각도 지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 훈련은 정말 지옥 같았다.

이후의 훈련을 대비해서 어느 정도 체력을 안배하려고 하면, 에단은 지금처럼 귀신같이 눈치채고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목에서는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 죽을 거 같아.'

하지만 사신과도 같은 에단이 채찍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쫒아오고 있었다.

저 악귀에게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으아아악!"

휴고가 비명을 내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정말 괄목할 만한 성장이군.'

말없이 둘의 훈련을 지켜보던 네이드가 작게 감탄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검술 명가인 블란테 가문에는 독자적인 훈련 방법이 존재했다.

오랜 전통을 따른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법으로 정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단은 그 전통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네이드는 처음에는 회의적이었지만, 볼수록 그 효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원래의 재능이 발현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놀라운 성장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의 오른 네이드는 지금 에단이 진행하는 훈련법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치밀한지 몸소 느끼고 있었다.

훈련에 정답은 없다.

결국 성장은 재능의 몫이다.

진정한 강자는 숱한 실전 끝에서 탄생한다.

이 모든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탁상공론이었다.

잘못된 훈련으로 몸을 망치는 수습 기사들은 적지 않았고, 재능이라는 벽을 마주치기 전에 좌절하는 전사들도 있었다.

숱한 실전은커녕 단 한 번의 실전에서 목숨을 잃는 병사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넘쳐 났다.

결국 실전을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를 갖춰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에단의 훈련법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가문의 교관으로 초청하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그렇게 될 일은 없겠지.

네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단은 교관으로서의 재능이 넘쳐 났지만, 전사로서의 재능과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도 뒤지지 않았다.

'이번 토벌, 이변이 일어날 것 같군.'

그런 예감이 들었다.

* * *

소문이 들려왔다.

에단이 토벌대 대원 중 하나로 하인을 영입했다고.

그런데 심지어 하인을 골라도 삐쩍 곯은 볼품없는 녀석을 골랐다고.

가문의 내부에선 비아냥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혹시 카론 도련님을 이긴 것도 우연 아니야?'

'그건 아니지 않을까? 증인이 그렇게 많은데.'

'그러면 안목이 없는 거 아니야? 하필 골라도 그런 멍청이를 고르다니.'

'확실히 그렇긴 한데....'

하지만 에단은 세간의 평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죽을 거 같네.'

고강도 트레이닝은 에단 본인에게조차 고통스러웠다.

'원래라면 며칠은 쉬어야 회복될 것도 지금은 하루 만에 회복된다.'

에단의 몸은 끝없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망치로 거칠게 두들겨도 몸이 부서지기는커녕 점점 단단해졌다.

그 사실을 느끼고 있기에 에단은 멈추지 않았다.

성장하는 것은 비단 에단뿐이 아니었다.

'잘 따라오는군.'

휴고도 에단에 뒤질세라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고 있었다.

훈련이 끝난 뒤에 먹는 양도 엄청났다. 휴고는 성인 장정 10명분의 음식을 가볍게 해치웠다.

에단과 휴고 둘의 일상은 반복적이었다.

운동하고, 먹고, 싸고, 자고, 다시 운동하고.

이것밖에 없었다.

'슬슬 실전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전에.'

슬슬 사람을 모을 채비를 해야 했다.

휴고와 에단 둘만으로는 성과를 내기가 어려웠다.

'많은 인원은 필요 없고.'

어차피 에단의 목적은 정해져 있었다.

'자잘한 것 따위는 필요 없어. 큰 거 하나면 족하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부가적인 이득까지.

"휴고, 지금부터 체력 훈련은 중단한다."

"...진짜입니까?"

휴고가 쉽사리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휴고의 건방진 눈초리를 마주하던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왜? 더 하고 싶어?"

"아닙니다."

휴고가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 정도면 기준치는 넘었어.'

삐쩍 말라 있던 휴고의 몸은 건강을 되찾았다. 아니, 건강을 되찾은 정도가 아니라 오밀조밀한 근육들이 온몸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지방은 끼어 있지 않고, 날렵했다.

"이제 실전 준비를 해야지."

그 말에 휴고는 올 게 왔다는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휴고도 알고 있었다.

에단이 어째서 자신을 데려왔는지.

정기 토벌.

블란테 가문의 정기적인 행사이자 과시.

웅크린 사자가 정당하게 자신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시기이자, 후계자들이 역량을 드러내고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

그 모든 것이 이 토벌에 깃들어 있었다.

에단은 자신의 첫 패로 휴고를 선택했다.

'이해가 안 돼.'

고작 하인에 불과한 자신을 토벌에 참여시키다니.

휴고 본인이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의심을 하진 않았다.

'나는 성장하고 있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에단의 훈련은 고통스러웠지만, 확실한 성과가 있었다.

원래부터 몸을 쓰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모든 성과가 단기간에 일어난 것이다.

'모룬 도련님은 본 적이 있어.'

건장한 체격을 가진, 얼핏 봐도 기사에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런 자라면 가문을 물려받아도 맡은 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에단 도련님에는 미치지 않아.'

에단에게는 사람을 휘어잡는 위압감이 있었다.

배움이 짧은 휴고도 모룬보다는 에단이 뛰어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

그렇기에 휴고는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하필 자신을 선택한 것일까.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기사들이나 병사들을 택해 그들로 토벌대를 꾸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뭘 요상한 표정을 짓고 있어?"

생각에 잠겨 있던 휴고를 향해 에단이 말했다.

"쓸데없는 고민하지 마."

"...네."

속내를 읽힌 것 같은 감정에 휴고가 고개를 숙였다.

"너는 걱정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해. 그러면 재밌는 걸 보여 줄 테니까."

에단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 [14화] 새로운 훈련 (2)

추후의 대비.

에단은 그것을 택했을 뿐이다.

당장 목전의 위기를 모면하는 것?

그따위 것을 바랐다면 토벌대에 참가할 생각 따위는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휴고는 데리고 가는 게 맞아.'

원작에서 묘사된 휴고의 재능은 최상위권이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휴고는 엄청난 성장세를 올리고 있었다.

가능성 넘치는 휴고의 몸이 완성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

'문제는 그 외의 것들.'

신체 능력만으로는 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없었다.

단순 생존이라면 에단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니.'

그런 결과는 에단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투쟁.'

경쟁, 승리.

격투기 선수로서 전 세계를 누비던 당시의 욕망이 꿈틀거렸다.

에단은 투쟁을 갈망하고 있었다.

투쟁 끝에 모든 것을 거머쥐는 것.

그것이 에단의 목표였다.

모든 것은 그것을 위한 초석일 뿐이었다.

'마나라....'

에단은 아직 마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에단이 알고 있는 마나라고 해 봐야 소설이나 만화의 설정에 불과했다.

그런 에단에게 갑자기 마나를 이해하라고 한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석으로 가면 안 돼.'

정석대로 차근차근 마나를 수련해 나가서는 너무 늦었다.

에단이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녀석은 온갖 진귀한 기회와 기연들을 모조리 습득해 버릴 테니.

'죽은 나무.'

이번 정기 토벌.

아직 온전히 성장하지 않은 주인공이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여기서 더 커 버리면 에단이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시간도 부족하니.'

에단은 휴고를 흘겨봤다.

이 녀석이 이번 작전의 중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한된 시간 동안 더욱 혹독하게 단련시켜야만 했다.

그런데 휴고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불안과 의심이 뒤섞인 복잡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더니 다시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내 들었다.

"아직 살 만하구나?"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감과 동시에 휴고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 * *

강도 높은 훈련이 끝난 뒤, 에단은 곧바로 휴식을 취하지 않고 별채의 공원으로 나왔다.

"날이 아직 쌀쌀합니다."

"난 아직 젊어서 괜찮아."

에단이 네이드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그런 훈련법들은 어떻게 고안해 내신 겁니까?"

"몰라. 그냥 감으로 하는 거지, 뭐."

"끝까지 숨기시는 겁니까?"

"숨기고 말고가 어디 있어? 훈련이 그냥 훈련이지, 뭐."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노련하게 휴고를 지도하시던데요?"

"큭큭, 내가 남들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나 봐."

에단이 웃음을 흘리며 밤하늘을 바라봤다.

커다란 보름달이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니, 달이 더 크기도 했으니, 지구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라는 게 더 옳은 표현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감회가 새롭군.'

정말 소설 속에 들어와 버렸다.

이 기괴한 상황이 소설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이 꽤나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기껏해야 소설 속일 뿐이고, 현실에서의 삶은 따분했으니까.

이곳에서의 죽음이 현실에서의 죽음과 연결이 돼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굳이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야심한 밤에 무슨 볼일이지?"

에단의 물음에 네이드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의 훈련 방식은 감탄스러운 수준이었습니다. 만일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가문의 교관으로 초청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하고. 본론부터."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어쩌실 계획입니까?"

"뭘 어쩌긴 어째. 몬스터 잡으러 가는데."

"장난은 그만하시죠. 아무리 도련님의 재능이 천부적이라고 한들, 도련님은 아직까지...."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고?"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리고 심지어 나를 수호할 측근도 없고. 토벌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뒈져도 이상할 게 없겠어."

"그걸 아시면서...."

"그런데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지나?"

달을 바라보던 에단의 눈이 네이드에게로 옮겨졌다.

달빛을 머금은 에단의 눈은 깊었다.

에단의 눈에는 불안감이나 걱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이드, 너는 네가 할 것을 해. 이번에도 결과로 보여 줄 테니까."

카론 때처럼.

에단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또다시 시간은 흘렀다.

이제 정기 토벌대 출정까지 보름도 남지 않았다.

정기 토벌이 가까워지자 블란테 가문의 분위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에단의 일과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새벽, 오전, 오후.

이렇게 하루에 세 번씩, 휴고와 함께 미친 강도의 트레이닝을 감행했다.

범인이었다면 혈뇨를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혹독한 훈련이었다.

하지만 훈련 내용의 대부분은 체력과 근력 훈련에 국한되었다.

'아니, 이제 실전 준비를 하는 거 아니었어?'

에단의 말과 달리 체력 훈련은 지속되고 있었다.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휴고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깃들었다.

정기 토벌이 목전에 다가왔는데 휴고는 아직 검을 잡는 법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에단 도련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뭐가 있지?"

에단의 태연스러운 태도에 휴고는 가슴이 답답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어. 계획대로 진행 중이니까."

휴고의 걱정이 무엇인지는 에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전 준비는 제대로 되고 있었다.

휴고는 자신이 하는 훈련이 단순한 체력 훈련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폭발적인 신체 능력, 그리고 도약력.'

모든 것은 하나의 동작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에단은 휴고를 바라봤다.

이 녀석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토벌은 훈련이 아니니까.

에단은 직접 겪어 보지 않았지만, 얼추 예상할 수는 있었다.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몬스터들은 목숨을 걸고 달려들 터였다.

평범한 인간들은 견디기 힘들 정도의 악의와 살의를 대면하는 것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 약육강식의 현실 속에 제정신을 유지할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가진 병사는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너는 견딜 수 있어.'

이미 이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아는 에단은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슬슬 다른 것도 준비할 때지.'

이제 추가 인원을 모집할 시기가 되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그 말에 휴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훈련을 도중에 그만두다니.

평소의 에단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휴고의 걱정 어린 물음에 에단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뒈질래?"

에단의 살벌한 목소리에 휴고가 찔끔하며 뒤로 물러났다.

"갈 데가 있으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에단은 뒤도 안 돌아보고 걷기 시작했다.

휴고는 그런 에단을 부랴부랴 뒤따랐다.

* * *

에단이 휴고를 데리고 향한 장소는 본가의 연무장이었다.

기사들의 연무장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훈련하는 대다수의 사람은 수습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에단과 휴고를 보자마자 훈련을 멈추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에단 도련님이잖아? 여기는 무슨 일이지?'

'설마 토벌대원을 차출하기 위해서 온 건가?'

'진짜로? 난 죽어도 가고 싶지 않은데. 이제 정기 토벌까지 보름도 남지 않았잖아.'

수습 기사들의 무례한 수군거림에도 에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오히려 휴고가 잔뜩 위축된 기색으로 에단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야."

에단이 사나운 눈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에단의 눈길에 휴고가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나 쪽팔리게 할래? 어깨 펴."

에단의 말에 휴고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폈다.

그 모습에 에단이 콧방귀를 뀌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어떻게 겁을 안 먹냐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일개 하인에 불과했다.

하인 중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는 하인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재능을 인정받은 수습 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였다.

자신 같은 일개 하인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움츠린 모습을 보이면 안 돼.'

휴고는 에단이 한 말을 떠올렸다.

여기서 위축되고 겁먹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에단까지 싸잡아서 욕을 먹게 하는 행동이었다.

적어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삼가야만 했다.

휴고는 최대한 불안함을 내색하지 않은 채로 에단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가 좋겠군."

에단이 주변을 대충 훑으며 중얼거렸다.

주변의 수습 기사들은 모두 훈련을 멈춘 채 에단을 의식하고 있었다.

원하던 상황이었다.

주변을 말없이 바라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자, 내가 여기서 한가락한다, 앞으로 나오도록."

에단의 뜬금없는 말에 수습 기사들이 눈을 끔뻑였다.

그 반응에 에단이 피식 웃더니, 한 차례 발을 굴렀다.

쾅!

"블란테 가에 몸담은 새끼들이라는 게 고작 이따위의 어중이떠중이 놈들밖에 없는 건가?"

에단의 거친 언행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굴이 붉어진 수습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도련님이라도 이런 행패를 부려도 되는 겁니까?"

수습 기사의 말에 에단이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너 따위 버러지도 꼴에 기사 지망생이라고 자존심은 있나 보군. 그런 녀석이 방금 전 호출에는 입을 다물고 있었나?"

"그런 갑작스러운 말에 모습을 드러낼 자가 어디...."

항변을 하려던 수습 기사의 말을 대충 팔을 휘저으며 끊은 에단이 입을 열었다.

"됐고. 너희들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증명해 줄까?"

'미, 미친!'

점점 도를 넘는 에단의 언행에 휴고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당혹과 공포로 물든 휴고가 에단의 옷가지를 당기며 말했다.

"도, 도련님, 어떻게 수습하시려고 이런 짓을...."

하지만 에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수습 기사라면 자존심이 꽤나 상했겠지? 하지만 어째. 사실인걸."

에단의 모욕적인 언사에, 주변에 있던 수습 기사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으십니까?"

분노로 떨리는 수습 기사의 목소리에 에단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저 소리 들었냐? 책임? 책임이란다. 하핫! 그럼 당연히 책임질 수 있지."

에단이 박장대소를 하며 옆에 있는 휴고를 두드리고 있었다.

휴고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에단의 손찌검을 묵묵히 받고 있었다.

'더럽게 아프네.'

장난 섞인 손찌검에도 통증이 상당했기에 휴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자, 봐라. 내 첫 번째 단원인 이 녀석도 잔뜩 화가 나 있네. 아직 시원찮은 녀석이지만, 너희들은 상대도 안 될걸?"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휴고가 당황하며 에단을 쳐다봤지만, 에단은 순간 휴고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그와 거의 동시에 에단이 휴고의 귓가에 속삭였다.

"반응하지 말고 대충 눈치껏 따라와."

"대체 무슨 짓을 벌이실...."

휴고는 에단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에단이 주위를 둘러봤다. 상당한 인파가 몰려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블란테 가문의 수습 기사들이었다.

모두 자질을 인정받은 자들이었고, 가문에 속한 그들의 자긍심은 드높았다.

하지만 에단은 그들의 자존심을 깎아내리고, 조롱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망나니였던 녀석이.

'가문에 먹칠이나 하던 놈이!'

에단의 비아냥거림을 면전에서 들은 수습 기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를 주체 못 하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인정을 못 하겠어?"

"...솔직히 그렇습니다."

수습 기사의 대답에 에단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래. 남자가 그 정도 자존심은 있어야지."

에단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휴고의 등을 밀었다.

"자, 그럼 네놈들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마."

에단의 말에 수습 기사와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죠?"

"사내끼리 뭐 증명할 방법이 따로 있어? 당연히 이 녀석과 붙어 봐야지. 내가 카론에게 한 것처럼."

"네? 도련님?"

에단의 말에 휴고의 눈이 커졌다. 휴고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갔다.

에단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렸다.

"닥치고 앞을 봐. 여기서 실수하면 넌 진짜 내 손에 뒈지는 거야."

"네, 넵...."

에단의 말에 휴고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 [15화] 세력 구축 (1)

분위기가 냉각된다.

소문의 속도는 빠르다. 특히 폐쇄적인 집단에서 도는 소문은 더욱 빨랐다.

에단이 카론을 이겼다.

에단이 토벌대를 꾸린다.

토벌대의 첫 인원으로 마구간 하인을 택했다.

제정신이 아니다.

자만이 하늘을 찌른다.

이와 같은 소문들이 무성하게 싹을 틔우고 있었다.

블란테 가문에서 행하는 정기 토벌은 자신의 용맹함과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

수습 기사들에게는 공을 세워 정식 기사로 임명받을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목을 걸고 나가는 전쟁터인 만큼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명예와 각오를 다지고 나섰다.

그런데 그런 신성한 토벌에 망나니가 등장해 물을 흐리고 있었다.

첫 번째 단원으로 하인을 영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들이 훈련하는 장소에까지 찾아와 자신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있었다.

자긍심 높은 수습 기사들은 모두 소리 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마구간이나 지키던 하인과 비교되는 이 상황에.

"왜, 쫄리냐?"

에단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겁을 집어먹은 건 그 녀석 같은데, 아닙니까?"

"설마. 야, 겁먹었냐?"

휴고의 발을 지그시 짓밟자 그가 당황한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대체 어쩌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하지만 휴고의 생각이 어떻든, 에단은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최고의 훈련은 실전이다.'

어차피 휴고의 잠재력은 알고 있었다. 신체 능력만 보면 웬만한 기사와 견줘도 부족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심성.'

휴고의 심성은 여리다.

'본성을 끌어내야지.'

차분하게 성장 드라마를 지켜볼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벌써 정기 토벌의 일정이 훌쩍 다가왔다.

실전을 경험시켜 줄 기회는 앞으로 없었고, 휴고의 심성은 뜯어고친다고 바뀌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휴고의 정신을 개조할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전이었다.

이번 기회에 휴고에게 그것을 경험시킬 생각이었다.

에단이 휴고의 귓가에 속삭였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에단이 말을 이어 갔다. 말을 듣는 휴고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갔다.

그 뒤에 잠시 머뭇하던 휴고가 입을 열었다.

"고추 달린 새끼가 잔말이 많네."

'옳지.'

완전 만족스러운 말투는 아니었다.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 정도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에단은 만족스러웠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눈앞에서 하인 나부랭이에게 모욕을 당한 수습 기사가 격분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이걸 노린 거니까.'

트래쉬 토크.

트래쉬 토크는 격투기 선수 같은 엔터테이너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단순히 상업성을 위한 것은 아니지.'

시합이든, 대련이든, 결투든, 실전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평정심이었다.

냉정한 이성을 유지해야만 준비해 온 것들을 온전히 보여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가토는 기사 서임도 받지 못한 수습.

실전 경험은 부족했고, 지금과 같은 도발도 겪은 적이 없을 터.

그러한 것들이 표정에 벌써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좋네.'

분노를 주체 못 하던 가토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게 식었다.

하지만 에단은 갑작스런 변화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무 꼭지가 돌아서 오히려 머리가 식었군.'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더 이상의 모욕은 참기 힘들군요. 도련님이라면 어찌 이해할 수 있지만...."

수습 기사의 살기 어린 시선이 휴고에게로 향했다.

휴고가 뒤로 주춤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에단이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물러나는 휴고를 막아선 에단이 씨익 웃었다.

"앞서 말한 대로, 증명하는 방식은 간단하네. 결투를 신청해."

"...그걸 원하신다면 해 드리죠. 후회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수습 기사가 장갑을 벗어 휴고의 안면을 향해 던졌다.

휴고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장갑을 피했고, 집어던진 장갑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네.'

에단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거 어쩌지? 너 따위의 장갑은 맞고 싶지도 않다는데."

"제, 제발... 그만...."

휴고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에단과 수습 기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수습 기사는 에단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휴고를 응시했다.

"블란테 가문의 수습 기사 가토, 결투를 신청한다. 이름을 대라."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가토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에단 토벌대의 대원 휴고... 결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결투의 막이 올랐다.

* * *

"도련님, 이제 어쩌죠?"

휴고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을 바라보는 휴고의 표정에는 원망도 깃들어 있었다.

"아까는 잘만 말하더니 이제 와서?"

"그건 도련님이 시켜서...."

"어허, 사내가 되어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하면 쓰나."

"...하."

결국 체념한 휴고가 고개를 떨궜다.

에단은 장난기 있던 웃음을 지운 채 휴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네가 이겨."

"하지만... 상대는 기사인데 제가 어찌 감히."

"지랄. 누가 기사야? 고작해야 수습 기사 햇병아리 새낀데."

"...."

"걱정 마.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이겨. 진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 어차피 의미가 없으니까."

"의미가 없다니요?"

"저 새끼한테 지면 내가 널 죽일 거거든."

"...."

휴고의 얼굴이 검게 죽어 갔다.

* * *

연무장 한편에 공간이 마련되었다.

꽤나 많은 인파가 모였음에도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저들의 분노를 대변해 줬다. 공기가 무거웠다.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가토가 먼저 나섰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가토의 얼굴이,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 줬다.

가토는 재능 있는 수습 기사였다.

아무리 혹독한 훈련이라도 불평이나 불만 하나 없이 견뎌 냈고, 그러는 와중에도 동료를 챙기는 전우애를 보여 줬다.

다른 수습 기사들도 동료이자 경쟁자인 가토를 인정했다.

가토라면 분명 훌륭한 기사가 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오늘도 가토가 모욕당한 수습 기사의 대표로 앞에 나왔다.

가토의 어깨에는 그들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휴고의 표정은 미묘했다.

마치 어딘가 불안한 것 같은 표정으로 가토의 앞에 마주 섰다.

가토는 그런 휴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녀석도 결국 망나니에게 이용당한 것뿐인가....'

차갑게 식은 분노가 잦아들고,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분노 사이에 일말의 연민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가는 치러야 한다.'

아무리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한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면 고통 없이 끝내 주마."

가토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하지만 휴고는 가토의 예상과는 상반되는 대답을 내뱉었다.

"지, 지랄, 쫄리냐?"

순간, 가토의 이마에 거대한 혈관이 돋아났다.

"곱게 끝날 생각은 말아라!"

가토의 살기 어린 노성에도 휴고는 여유롭게 가토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휴고의 손에 들린 목검은 엉성했다.

검을 수련한 자의 것이 아니었다.

아직 수습 기사에 불과한 가토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숱한 대련의 경험이 가토에게 미래를 엿보여 줬다.

가토는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격분 속에서도 승리를 위한 검로가 보였다.

반대로 휴고는 약점투성이였다.

손에 쥔 목검은 엉성했고, 자세는 허점투성이였다.

승리를 확신한 가토가 달려들었다.

그동안 숱하게 흘린 피와 땀이 결과를 보여 주고 있었다.

쐐액!

그때 휴고가 목검을 집어던졌다. 가토의 눈이 커지며 목검을 쳐 냈다.

가토의 대처는 빠르고 정확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최적의 판단을 했다.

하지만 빠른 것으로는 휴고도 만만치 않았다.

매일같이 고된 단련을 이겨 낸 휴고의 신체 능력은 가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휴고는 짐승처럼 가토에게 다가갔다. 가토는 어떻게든 대응하려고 목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이어진 휴고의 공격은 예상을 벗어났다.

휴고가 도약했다.

탄력적인 근육이 상식을 뛰어넘는 도약을 가능케 만들었다.

휴고는 그 도약력에 힘입어 무릎을 들어 올렸다.

가토는 그 와중에도 목검의 경로를 꺾어 휴고의 공격을 방어하려 들었지만.

우지끈.

목검이 볼품없게 으스러지며 휴고의 무릎이 가토의 턱에 꽂혔다.

뻐억!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가토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대련이 막을 내렸다.

* * *

'역시 먹힐 줄 알았어.'

무기를 쥔 것과 맨손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의식해야 하는 거리도 늘어나고, 가볍게 던지는 공격들도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격투기 선수들도 팔이 긴 선수를 만나면 상대하기 껄끄러워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검을 쥔 상대는 어떠한가.

평범한 방식으로는 결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

물론 실력 차이가 많이 난다면 가능하겠지만, 휴고는 아직 제대로 배운 것이 전무하다.

그렇기에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알려 줬다.

'먼저 상대를 도발해.'

선제공격을 유도해야 승산이 높아졌다.

'그리고 검을 던져.'

이건 에단도 애용한 방법이다.

피하든지, 막든지.

어떤 방식을 택해도 상대는 일말의 빈틈이 생긴다.

그리고 그 빈틈이면 충분했다.

남은 것은 휴고의 신체 능력이다.

마치 짐승을 연상케 하는 휴고의 스피드와 탄력이면, 단 한 번으로 상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저 탄력에 가장 걸맞은 공격은 바로.

플라잉 니 킥.

역시 이것만 한 것이 없었다.

에단은 휴고와의 훈련에서 플라잉 니 킥을 위한 동작만을 알려 줬다.

'체력 훈련인 줄로만 알았겠지.'

휴고가 해 온 모든 것은 플라잉 니 킥의 사전 동작이었다.

'워낙 신체 능력이 뛰어나서 별로 알려 줄 것도 없었지만.'

처음부터 가능할 것이라 여겼다.

휴고의 신체 능력은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었으니까.

'애초에 인간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녀석이지.'

에단이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휴고를 바라봤다.

가속도가 붙은 무릎이 제대로 턱에 적중하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물론 상대가 마나 유저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상대는 수습 기사에 불과했다.

아직까지 그 정도의 맷집과 반사 신경을 갖추지는 못했다.

결투에서 승리한 휴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내가... 이겼어?'

휴고는 쉽사리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저 에단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반신반의했다.

에단은 확신했지만, 휴고는 의심했다.

하지만 결과가 증명했다.

에단이 옳았고, 휴고가 승리했다.

휴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기사를 이겼다.'

사실대로 말하면 수습 기사였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휴고에게는 수습 기사든, 정식 기사든 모두 넘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사람들이었다.

휴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하인들에게도 천대받던 하인이었으니까.

처음 겪은 승리는 짜릿했다.

그때, 에단이 다가와서 휴고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걱정하지 말랬지?"

"그, 그러네요...."

"그럼 돌아가자."

어차피 수확은 내일이 되어야 거둘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아니나 다를까 가토가 별채에 찾아왔다.

해가 뜨기도 전에 찾아왔다고 네이드가 말했다.

이미 소문을 들은 것인지 네이드의 눈초리가 의미심장했지만, 에단은 가볍게 무시했다.

"조금 더 기다리게 해."

"알겠습니다."

대어를 낚으려면 인내를 길러야 했다.

그렇게 오전 훈련을 끝내고, 오후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네이드를 불렀다.

"걔 아직 안 갔지?"

"네. 아직도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럼 안내해. 만나러 가야겠어."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별채로 향하는 작은 문 앞에는 가토가 서 있었다.

가토의 눈은 흐릿했다. 이전 같은 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재밌군.'

기사로서의 자부심이 높던 녀석이 추락했다. 당연히 그 충격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생각 이상이었다.

"이미 끝난 거 아니었나? 구질구질하게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가토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모래를 삼킨 것 같았다.

"뭐가?"

피식 웃은 에단이 대답하자 가토는 멍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저는 평생을 수련해 왔습니다. 기사가 되기 위한 목표 하나만을 보고 저의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따위 방식으로 패배하면 제 인생은 뭐가 되는 겁니까?"

가토의 말에 에단이 눈을 껌뻑였다.

"그래서 그따위 투정을 부리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투정이라니...!"

"시끄럽고. 둘 중 하나겠지. 재능이 없거나, 수련을 게을리했거나."

에단의 말에 가토가 입을 다물었다.

억울했다. 또다시 결투를 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 비겁한 방식에는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생각 집어치워. 그게 실전이었으면 넌 죽었어. 진 건 진 거야."

"...."

에단의 대답에 가토는 침묵했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 [16화] 세력 구축 (2)

"...실례했습니다."

가토가 몸을 돌리려 하자 에단이 중얼거렸다.

"한번 보여 주든가."

"...어떤 걸 말하시는 겁니까?"

"죽을 각오로 훈련했다며. 그러면 증명을 해야지. 휴고가 하는 훈련을 한번 따라와 봐. 그러면 인정해 주도록 하지."

가토가 이를 악물었다. 자긍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상처랑 악밖에 남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가토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 * *

"허억, 허억."

가토가 숨을 헐떡이며 연무장을 달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달리고 있는 휴고는 가토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고생하실 필요는 없는데...."

"시, 시끄러워."

활활 타오르던 눈빛이 무색하게 가토의 한계는 빠르게 드러났다.

체력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아침 구보에서도 가토는 선두를 놓친 적이 없었고, 대련은 달이 뜰 때까지 해 왔다.

하지만 지금의 체력 단련에서는 30분이 채 되지 않아 한계가 드러났다.

'이, 이건 미친 짓이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엎드렸다가 일어서는 기괴한 동작과 전력 질주.

무거운 바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

이 일련의 과정을 혼합하니 순식간에 한계가 찾아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하지만 옆에 있는 휴고는 이 극한의 체련 단련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었다.

'저 녀석도 하는데...!'

가토는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때, 둘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자, 앞으로 50세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가토가 황당해하며 입을 열자, 옆에서 휴고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순간, 가토가 멍한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웃기는 녀석이군.'

에단은 조소를 삼키고 있었다.

아무리 체력이 뛰어나도 이 훈련법을 따라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자신의 체력을 한계로 몰아붙이는 운동법이었으니까.

'저 녀석은 그냥 괴물인 거고.'

에단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의 체력은 애초에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고, 그마저도 하루가 다르게 한계가 늘어났다.

때문에 에단은 시작도 전에 결과를 알았다.

가토가 어떤 훈련을 해 왔든 휴고의 상대가 될 순 없었다.

가토는 당장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버텼다.

지금 가토를 이끌고 있는 것은 악이라는 이름의 정신력이었다.

버피 테스트, 전력 질주, 스내치.

이곳에는 바벨과 덤벨이 없는 탓에 커다란 바위로 대체했다.

한데 바위는 부피가 크고 무게 중심이 잡혀 있지 않으니 훈련 강도는 배가 되었다.

그리고 세트 사이 휴식 시간도 없었다.

그야말로 미친 방식의 훈련법.

하지만 휴고는 묵묵히 그 운동을 따라왔고, 가토는 다섯 세트 만에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쩌나.'

에단은 숨을 몰아쉬는 가토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시작인데.'

* * *

훈련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가토는 마치 혼이 나간 표정으로 말도 없이 별채를 나섰다.

제대로 걷기도 힘든지 몸이 비틀거렸다.

"...도련님."

"왜 불러."

"...괜찮을까요?"

"뭐가."

"그때는 우연이었습니다. 다시 싸우면 제가 질 거예요."

"그렇겠지. 뭐야, 설마 일은 벌여 놓고 후환이 두려운 거냐?"

"...."

"내가 말했지.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실전에서는 두 번 따윈 없어. 실전이었으면 쟤는 죽은 목숨이야. 그게 대련의 기본 아닌가?"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그건 맞지. 하지만 이제 전사가 되어야 해. 토벌이 장난은 아니잖아?"

그 말에 휴고가 침묵했다. 에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 저 녀석, 저래 보여도 내일 올걸? 너한테 한 번 졌다고 앙심 품을 녀석은 아니야."

에단의 표정에는 확신이 있었다.

* * *

에단의 말대로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가토가 다시 찾아왔다.

비틀거리는 것을 보니 몸 상태가 전날과는 상당히 다른 것 같았지만, 가토의 얼굴에는 결의가 보였다.

그 모습에 휴고는 입을 다물었고, 에단은 휘파람을 불었다.

"자, 어제는 네 패배였지? 결국 휴고랑 나 못 따라왔잖아."

"...인정하겠습니다."

"인정하는 모습은 보기 좋군. 그럼 오늘도 시작해 볼까?"

"각오하고 왔습니다."

"어제 같은 추태나 보이지 마."

"네."

하지만 가토가 격한 숨을 몰아쉬는 데에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 *

소문이 돌았다. 가토가 패배한 후 에단에게 찾아간다는 소문이.

사람들은 소문을 의심했다.

가토같이 촉망받는 수습 기사가 썩은 동아줄과 다름없는 에단을 찾아간다는 건 쉬이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얼마 안 가 사실로 밝혀졌다.

그 어떤 고된 훈련도 이겨 내던 가토가 에단을 찾아간 뒤로는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주변에 수습 기사들이 물어봐도, 가토는 '에단 도련님에게 훈련을 받고 있다'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동료 수습 기사들은 궁금했다.

대체 어떤 훈련을 하길래 가토가 이 지경이 될까?

그렇게 소문이 점차 부풀려지며 살이 붙자, 수습 기사들은 에단의 훈련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에단이 유도한 상황이었다. 얼추 조건이 갖춰지자 에단이 소문을 흘린 것이었다.

'수습 기사 훈련시키는 교관을 잠깐 휴가 보내. 그리고 애들도 묶어 두지 말고.'

어떻게 보면 월권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저들은 아직 수습 기사에 불과했다.

아무리 망나니라 해도 가문의 적통인 만큼, 에단의 권한으로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었다.

'서른일곱인가.'

상황이 계획대로 흐르자, 에단은 만족한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봤다.

'이 중에서 쓸 만한 녀석들을 선별하는 건 내 몫이네.'

어차피 이들은 계획의 중추가 아니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에단이 원하는 것은 성과였다.

아직 수습 기사에 불과한 녀석들을 통해 얻어 내는 성과.

그를 통해 얻는 평판.

'먼저 이 중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을 솎아 낼까.'

최소한 방해는 되지 않으려면, 이들을 대충이라도 걸러 낼 필요성이 있었다.

"허억, 허억!"

수습 기사들은 생각보다 쉽게 걸러졌다.

인터벌 훈련을 하거나 고중량을 다루는 훈련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렇게 머릿수가 많을 때는 단순한 달리기 하나면 충분하다.

휴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연무장을 뛰고 있었고, 가토도 침착하게 호흡을 고르며 휴고를 따라붙고 있었다.

'체력이 많이 늘었네.'

첫날에는 억지로 휴고를 따라붙던 가토였고, 둘의 체력 차이는 꽤나 심했다.

함께 훈련을 한 지 아직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가토는 휴고를 꽤나 잘 따라붙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휴고가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고, 그 뒤로 가토와 수습 기사들이 뒤따랐다.

가토의 표정은 아직 여유가 있는 반면, 다른 수습 기사들의 표정은 죽상이었다.

'이대로 한 시간.'

녀석들을 시험할 시간이다.

* * *

남은 한 시간을 버틴 자들은 총 여섯 명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다.

에단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요즘 가문에 소문이 돈다고 하긴 하던데. 대충 알고 있지?"

수습 기사들은 탈진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들 나한테 훈련을 받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에단의 말에 수습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대가가 있어. 나도 자원봉사자가 아니니까 그만큼 얻을 게 있어야지. 안 그래?"

"금전적인 부분이라면 죄송하지만...."

"그딴 건 아니고. 내가 미쳤다고 너희들한테 삥을 뜯겠냐? 내 직할 토벌대. 여기에 합류하는 게 내 조건이다."

에단의 말에 수습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토벌대에 합류하는 것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블란테 가문에는 다양한 파벌이 있다.

그중 대세는 바로 장자인 모룬이었다.

최근에 에단이 이변을 일으키고 있다지만, 대세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역시 후계자는 모룬이다'라는 평이 아직은 지배적이었다.

혹자는 모룬이 작위를 승계받기 전 마지막으로 입지를 다지는 것이 이 정기 토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원작에서는 이 토벌 뒤로 모룬이 거의 실권을 장악하니까.'

권한에서부터 매우 큰 차이가 났다.

에단의 직할 십인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모룬이 통제하고 있었다.

당연히 토벌에서 거의 모든 성과를 모룬이 독식하는 구조였다.

에단이 성과를 내기가 매우 힘든 구조였다.

수습 기사는 기사가 되겠다는 열망 하나로 고된 훈련을 견뎌 낸 자들이었다.

그런데 괜히 에단의 토벌대에 들어갔다는 낙인이 찍혀 버릴 수도 있는 일.

그렇게 된다면 수습 기사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해지는 상황이었다.

수습 기사들이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에단이 입을 열었다.

"장담하지. 내 밑에서 훈련하면 너희들은 지금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성장할 거다. 그것에 대한 증명은 나 자신과 휴고, 이 녀석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아직 마나를 다루지도 못하는 나는 마나 유저인 카론을 쓰러트렸고, 며칠 전까지 마구간이나 지키던 휴고는 수습 기사 중에 가장 촉망받던 가토를 상대로 승리했지."

에단의 말에 가토는 고개를 숙였고, 다른 수습 기사들도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건 자유지만, 기회를 잡는 것도 자유다. 단언하지. 이번 정기 토벌이 끝나면, 내 아래의 대원들은 모두 정식 기사로 임명할 생각이다."

에단의 선언에 수습 기사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기사 임관.'

모든 수습 기사들이 염원하는, 꿈이자 목표였다.

기사라는 목표 하나만 보고 달려오던 수습 기사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달콤한 과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진맥진하던 수습 기사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의구심을 가져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기사 임명은 오직 가주의 권한이었다.

에단은 블란테의 적통이었지만, 아직 제대로 된 귀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런 그에게 그만한 권한이 있을까?

'입에 발린 소리면 누가 못 해?'

에단이 제 성과를 위해 자신들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사양이었다.

"구태여 설득할 생각은 없으니 믿거나 말거나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나는 빈말은 하지 않아."

에단의 태도는 진중했다.

수습 기사들은 그 모습에 침묵했고, 하나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습 기사 팔론, 토벌대에 참가하겠습니다."

"수습 기사 한센,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그 이후는 순식간이었다.

에단이 선별한 수습 기사들이 모두 토벌대의 소속이 되었다.

'계획대로군.'

완전한 전력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에단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도 감사히 여겨야 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기사나 병사라면 에단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하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토와 휴고처럼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이제는 정말 실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네이드."

"부르셨습니까."

"부탁해."

"...제가 말씀입니까?"

"내가 뭘 안다고 얘들을 가르쳐?"

에단이 눈을 끔뻑이며 네이드를 바라봤다.

네이드는 할 말을 잃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뭐 해? 애들 안 가르치고."

열 명은 채워졌다.

어차피 마지막 한 명은 네이드였으니까.

* * *

훈련은 여전히 높은 강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휴고와 가토는 뭔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있지만,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목이 타는 것처럼 아프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에 적응해 버린 탓이었다.

훈련용 목검은 무거웠고, 어깨가 아렸지만 딱 그뿐이었다.

이미 지옥 같은 고통에 익숙해진 둘은 무언가 충족이 안 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걱정 마. 저녁에는 똑같이 훈련할 거니까."

둘의 모습을 알아채기라도 한듯 에단이 다가왔다.

"굳이 안 그러셔도 될 것 같습니다."

"동감합니다. 이미 충분한 강도의 훈련인 것 같습니다."

뒤늦은 변명에 에단이 코웃음 쳤다.

"내가 성에 안 차서 그런 거니까 입 다물어."

에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수습 기사들을 둘러봤다.

훈련의 강도는 충분이 높았다.

사실 HIT 같은 고강도 인터벌 트레이닝은 한 주에 많아도 두 번이면 충분했다.

그 이상은 신체에 무리가 갔다.

훈련은 성장이 목적이지, 몸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달랐다.

매일같이 훈련해도 보란 듯이 성장한다.

에단은 그 모습을 보며 훈련 계획을 수정하고 있었다.

'이제 내 생각도 할 때지.'

물론 에단도 훈련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다.

블란테의 피를 이은 에단은 그들보다 더욱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 [17화] 천적의 만남 (1)

훈련은 탄력을 받았다.

능력을 감추고 있던 네이드는 어쩔 수 없이 수습 기사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미 에단에게 비밀이 까발려진 터라 더 이상의 비밀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력이 부족했다. 에단으로서는 쓸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사용해야 했다.

수습 기사들은 자존심이 높았고, 일개 집사인 네이드에게 지도를 받는 것은 그만한 자존심을 내려 놓을 때나 가능한 문제였다.

처음에는 작은 반발이 있었지만, 네이드가 실력을 행사하자 모두 잠잠해졌다.

네이드의 실력은 거짓이 아니었으며, 이런 실력자에게 받는 지도가 얼마나 귀중한지는 말해 봤자 입만 아팠다.

시간은 촉박했고, 인원은 부족했다.

마음가짐부터 다질 시간이 없었다.

개인의 역량을 끌어올리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에단은 최단기간 내에 최고의 효율을 요구했다.

정기 토벌은 기사들끼리의 명예로운 결투가 아니었다.

명예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적들의 목을 베고, 그들의 씨를 말려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최대한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들 위주로 훈련해야 한다.

효율은 곧 높은 살상력이다.

에단은 그 점을 강조했고, 네이드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에단의 명을 따랐다.

'기대를 걸고 있는지도 모르지.'

에단이 앞으로 어떤 이변을 불러일으킬지.

네이드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 * *

에단의 토벌대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자 소문이 돌았다.

에단의 토벌대에 합류한 자들은 모두 미래를 촉망받는 수습 기사들이었다.

기사들도 눈여겨보던 자들이 모두 에단의 밑으로 들어갔다.

예측하기 힘든 에단의 행보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였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아무리 미래가 기대되는 자들이라고 한들 그들은 일개 수습 기사였으니까.

"큭,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건가?"

소식을 전해 들은 모룬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에단의 십인대가 본격적으로 행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첫 단원으로 마구간이나 지키던 하인을 뽑았다고 하길래 박장대소를 했건만, 남은 인원들은 수습 기사로 구성했다고 한다.

꽤나 놀라운 성과였지만 그것뿐이다.

수습은 어디까지나 수습. 마나를 다루지 못했다.

큰 전력이 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머릿수가 달랐다.

에단이 통솔하는 부대를 제외하면 모든 부대는 모룬의 통솔을 받는다.

큰 작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정기 토벌은 그리 힘겨운 전투가 아니었다.

고되긴 하지만 상대는 일개 몬스터에 불과했다.

체계적인 수련을 거듭한 병사들과 기사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번 정기 토벌은 얼마나 피해를 적게 내느냐가 관건이었다.

'그 인원수에다 수습 기사라면 빤하지.'

위협은커녕 가소로웠다.

실낱만큼 남아 있던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녀석에 대한 보고는 이제 필요 없겠어."

"괜찮으시겠습니까?"

"고작 수습 기사들로 뭘 한다고 티나 나겠어? 어차피 업혀 가는 녀석이야. 신경 꺼."

모룬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 * *

영주실에 첸이 찾아왔다. 정기적인 보고를 위한 행동이었다.

"그래. 이번엔 녀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지?"

빈센트는 흥미가 가득한 표정으로 첸을 바라보았다.

에단이 바뀐 뒤로 소란이 잦아든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별일이라고 여기던 것이, 요즘은 녀석이 무슨 일을 벌일지 기대가 될 지경이었다.

"토벌대 구성을 완료한 것 같습니다. 휴고라는 하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대받던 수습 기사들입니다."

"흐음...."

빈센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수습 기사라.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지금의 입지에서는 수습 기사를 영입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10명의 단원. 마나를 깨우치지 못한 수습 기사.

그리고 에단.

이대로 정기 토벌이 진행되어 봤자 결과는 자명했다.

대부분의 업적은 모룬에게 넘어갈 터였고, 에단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치기나 객기였나.'

하지만 그러기에는 뭔가 마음에 걸렸다.

일전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에단은 뭔가 숨겨둔 패가 있는 것 같았고, 그렇기에 뭔가를 또 저지를 것 같았다.

"계속 지켜봐 주게."

빈센트는 첸에게 그리 부탁했다. 이대로 신경을 끄기에는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을 벌일 것 같단 말이지.'

이번 일로 가문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 *

정기 토벌 날의 새벽이 밝자, 블란테 가문은 전투를 준비했다.

저택 전체에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검술 명가라는 명성답게 병사 하나하나가 풍기는 기세도 심상치 않았다.

이것은 사냥이기도 했지만, 전쟁이기도 했다.

자신의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

아직까지 블란테라는 이름이 패배한 적은 없었지만, 사상자는 늘 발생했다.

그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출전이 얼마 남지 않자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이윽고 모룬이 갑옷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갑옷에는 블란테를 상징하는 검은 사자 무늬가 빛나고 있었다.

"완벽하군."

모룬이 미소 지었다. 병사들을 보자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토벌은 작위를 승계받기 전, 자신의 용맹과 명예를 입증하는 자리였다.

'멍청한 동생 녀석도 보이는군.'

에단이 이끄는 십인대는 자신의 대군과 비교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에단이 설칠 때는 화가 치밀었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 일말의 연민마저 들었다.

"출전한다!"

성문이 열리고, 모룬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이 성을 나섰다.

토벌의 개막이었다.

* * *

에단은 휘파람을 불며 병사들을 바라봤다. 지금 저들과 함께 나갈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토벌대는 어차피 따로 외곽으로 빠질 계획이었으니.

"이제 와서 겁을 집어먹은 거냐?"

언제 다가왔는지 카론이 에단에게 비아냥댔다.

에단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가득 담아 카론을 바라봤다.

"너는 할 짓도 더럽게 없냐? 왜 여기서 시비를 털고 있어."

"이, 이 자식이!"

에단의 반응이 예상과 다른지 카론의 얼굴을 붉어졌지만, 그는 이내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흥, 그렇게 건방을 떨더니 결국 결과가 이따위인가?"

"아직 보여 주지도 않았는데?"

"아직도 허세를 부리긴...."

"허세는 나한테 처맞기 전에 네가 부리던 게 허세고."

"이익!"

카론이 다시 성을 내기 시작했지만, 에단은 관심이 없는 듯 자신의 단원들을 불러 모았다.

"슬슬 출발해 볼까?"

단원들은 올 게 왔다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계획은 기억하고 있겠지?"

"...그 말이 정말 사실입니까?"

가토는 아직도 반신반의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에단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쓸데없는 걱정 마. 진짜 반전을 보여 줄 테니까."

다시 말하지만 에단은 자신이 있었다.

* * *

블란테의 영지 밖은 산맥이 둘러싸고 있고, 산맥에는 사나운 몬스터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그 개체 수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났을 때, 몬스터들은 생존을 위해 산맥을 내려온다.

몬스터가 내려오기 전에 토벌대는 산을 올랐다.

산은 험난했다. 그러나 병사들 또한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거칠었다.

그들은 덮쳐 오는 몬스터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착실히 척살해 나갔다.

토벌대는 거침없이 토벌을 진행했다.

반면 에단은 후미에 있었다. 선두에 나가서 몬스터를 처치하지도 않은 채 유유자적 여유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카론은 의구심을 느꼈다.

'역시 포기한 건가?'

그 추측이 가장 타당해 보였지만, 그렇게 넘기기에는 저 여유로운 태도가 거슬렸다.

"언제까지 쫓아오게?"

에단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자 카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이전에 결투에도 느꼈지만, 에단은 이전과 달라졌다.

싸가지가 없는 것은 다를 바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속을 알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대체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속셈이랄 것까지는 없고."

에단이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등산을 시작하려고."

* * *

에단은 모룬의 토벌대가 진격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산맥에는 몬스터가 득실거렸다.

당연히 에단이 향하는 길목에도 수많은 몬스터가 등장했다.

하지만 에단의 앞을 가로막은 수습 기사들은 별 어려움 없이 몬스터를 처치해 나가고 있었다.

첫 토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능숙한 행동이었다.

몬스터가 쓰러졌다고 방심하지 않고, 몬스터의 목덜미에 확실하게 검을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감흥이 없는 것은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에단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험난한 길목을 건너고 있었다.

'낙엽의 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방향으로.'

원작에서 묘사된 짧은 글귀.

그 글귀 하나를 믿고 무작정 걷고 있었다.

산을 오를수록 몬스터는 점점 사나워졌고, 숫자도 점점 늘어났다.

피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몬스터가 자극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몬스터는 혈향을 맡고 더욱 몰려올 터였다.

한차례 생각을 정리한 에단이 속도를 올렸다.

위기를 느끼기에는 아직 일렀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군.'

해가 뜨기 전에 출전한 터라 아직 어두워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숲의 심층부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빛이 점차 사라져 갔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도련님, 이 앞부터는 위험합니다."

에단의 곁에서 네이드가 말했다.

네이드의 본능은 이 앞이 쉽지 않다는 걸 경고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앞으로 가는 것은 바뀌지 않으니까."

에단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상당히 많은 거리가 남아 있었다.

"허억, 허억."

토벌대원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각오가 얕은 건 아니었다.

강도 높은 긴장이 지속되니, 심신 모두 금방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몬스터가 언제, 어디서 덮칠지를 알지 못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수습 기사들의 눈에 불안감이 조금씩 깃들기 시작했다.

'과연 에단을 믿어도 되는 걸까?'

'망나니가 내뱉은 말에 현혹된 것은 아닐까?'

'기사는커녕 여기서 죽으면 어떡하지?'

토벌대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장소에서는 일말의 방심이 피해와 직결된다.

키엑!

수풀에서 고블린이 뛰쳐나왔다.

집중력이 떨어진 탓에 고블린의 목표가 된 토벌대원의 대처가 늦었다.

얼굴에 고블린의 몽둥이가 꽂히기 전, 휴고의 칼날이 녀석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순간의 대처라고 믿기 힘들 만큼 민첩한 반응이었다.

"고, 고맙다."

"방심하지 마세요."

휴고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에단을 따라나섰다.

목숨을 구한 수습 기사는 입을 다문 채 발을 옮겼다.

"슬슬 이쯤인데."

에단은 주위를 둘러봤다.

벌써 저녁처럼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다가왔다는 증거다.

'이제 이 녀석이 중요하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휴고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소설 속에서도 토벌대에 휴고가 따라나섰다.

"보인다."

주변이 어두워 형체가 확실치 않았지만, 눈앞에 동굴이 하나 보였다.

토벌대원들이 침을 삼켰다.

정말 에단의 말대로 동굴이 보였다. 고블린 따위의 녀석이 터를 잡았다기에는 동굴의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직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음험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여기를 들어간다고?'

전의를 불태우던 그들조차도 망설이게 할 정도였다.

동굴 안에는 몬스터가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자리를 선점하고 있는 몬스터는, 습격하는 몬스터보다 배로 까다로웠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그리고 휴고, 넌 나랑 간다."

에단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휴고 하나만을 데리고 동굴로 향하려 했지만, 곁에 묵묵히 있던 네이드가 반대했다.

"저곳은 위험합니다, 도련님."

"위험한 건 여기도 매한가지야."

에단의 궤변에 네이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그때, 에단이 네이드의 눈을 응시했다.

"의심하지 마. 돌아올 거니까."

에단의 눈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에단이 뒤를 돌아 휴고를 바라봤다.

"너도 쫄지 말고."

휴고는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두 시간 내로 못 나오면 먼저 퇴각해."

"...야영지를 만들고 있겠습니다."

에단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고와 함께 동굴로 진입했다.

◈ [18화] 천적의 만남 (2)

동굴은 음산했다.

날씨가 추워지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어째서인지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적막을 흩트려 놓았다.

휴고는 잔뜩 움츠러든 채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반면, 에단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특별한 낌새는 모르겠군.'

외관으로는 평범한 동굴로만 보였다.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긴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조금 더 들어가 봐야 하나.'

퍼더덕!

키에엑!

"히익!"

어둠 속에서 박쥐가 뛰쳐나왔다. 휴고가 몸을 웅크린 채 비명을 질렀다.

"일어나."

"도, 도련님, 하지만 방금."

"걔네가 문제가 아니니까 일어나라고."

"네...?"

휴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단을 올려다봤다.

어둠에 적응된 휴고의 눈에 에단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우, 웃고 있어?'

마치 이제야 나타났다는 표정이었다.

휴고는 에단의 정신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저런 여유를 부리는 모습은 휴고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박쥐.'

하지만 에단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박쥐가 나타났다는 사실.

맞는 길을 찾아오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찾았다."

어둠 속에서 사나운 안광이 번뜩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솜털 하나하나가 곤두서며 에단에게 경고했다.

휴고를 바라보자 분위기가 바뀌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동공이 가늘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뱀파이어의 천적.'

휴고의 몸속에는 웨어울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탄력.

아무리 혹독한 훈련으로 몸을 혹사시켜도 하루면 회복되는 짐승 같은 회복력.

이 모든 것이 휴고의 혈통 때문이었다.

그러나 휴고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지내면서 야성이라는 본능이 흐려지고 퇴색된 것이었다.

야성을 잃은 짐승의 야성을 일깨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싱싱한 먹이를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기류가 바뀌었군.'

순진무구하던 휴고의 표정이 사납게 바뀌었다.

하지만 유약한 성격으로 일평생을 살아오던 휴고는, 치미는 살의와 야성을 받아들이기가 힘겨운지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더러운 피가 섞여 있구나."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청년으로 보이는 남성의 얼굴은 창백했고, 풍기는 분위기는 음산했다.

그는 싸늘하고 낮은 음성을 내며 에단과 휴고를 번갈아 봤다.

"대체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이유가 뭐지?"

"너 같은 애들 족치려고 온 거지. 안 그래?"

에단이 휴고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여기는 휴고에게 맡긴다.

지금은 힘겨워 보였지만, 곧 있으면 웨어울프의 진면목이 드러날 터였다.

'이걸 위해서 검술은 가르치지 않았다.'

야수에게 사냥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그저 본능대로 움직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전투 방식이다.

고양이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쥐를 잡고, 뱀을 잡아먹는다.

휴고의 피에는 늑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귀족의 피라고 했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막장 스토리가 확실하다.

하지만 에단은 그 막장 세계관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럼 나는 먼저 간다."

휴고를 노려보던 뱀파이어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옮겨졌다.

"...감히 나를 조롱하는 것이냐?"

"아니, 천적 놔두고 왜 나한테 신경 써? 알아서 지지고 볶으라고."

에단의 말이 뱀파이어의 인내심을 무너뜨렸는지 뱀파이어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네놈같이 건방진 녀석은 권속으로 삶기도 역겹군. 그냥 죽어라."

쐐액!

뱀파이어의 손이 에단의 얼굴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에단은 고개를 간단히 돌리는 것만으로 뱀파이어의 공격을 피해 냈다.

'손이 빠르긴 하군.'

공격의 낌새가 보일 때부터 대비하고 있었지만, 하마터면 얼굴에 구멍이 뚫릴 뻔했다.

"...감히 인간 주제에 피해?"

"네 말투는 못 고치냐? 진짜 듣기 엿 같네."

에단의 신랄한 비난에 뱀파이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들어주...."

크아아아악!

뱀파이어가 손을 쓰기 직전에 뒤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에단은 뱀파이어가 방심한 틈을 타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걸 알아차린 뱀파이어가 에단을 뒤쫓으려 몸을 돌렸지만, 뒤에서는 야수가 덮쳐 오고 있었다.

타닷!

휴고의 몸이 바뀌었다. 골격이 거대해졌고, 은빛 털과 긴 주둥이가 생겨났다.

모습이 변모한 휴고가 뱀파이어에게 달려들었다.

가뜩이나 우월한 탄력과 민첩성을 자랑하던 휴고였다.

그러나 웨어울프로 탈바꿈한 휴고의 신체 능력은 그 수준을 아득히 상회했다.

뱀파이어가 미처 반응하지도 못할 정도로.

"크아아악!"

뱀파이어가 고통에 찬 비명을 흘렸다. 휴고의 손에 돋아난 날카로운 발톱이 뱀파이어의 어깨를 한 움큼 뜯어 간 탓이다.

뱀파이어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그는 긴 손톱을 마치 칼처럼 휘둘렀다.

뱀파이어의 손끝을 응시하고 있던 휴고는 고개를 들어 뱀파이어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 냈다.

휴고는 완전히 이성이 잡아먹힌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방심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뱀파이어가 표정을 굳혔다.

야생에서 실수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던 뱀파이어에게 있어, 위협적인 천적의 등장은 결코 가벼운 상황이 아니었다.

에단은 달려 나가면서도 뒤를 슬쩍 바라봤다.

'예상보다 강하네.'

원작에서 휴고는 뱀파이어와 비등하게 싸우던 걸로 기억했다.

하지만 웨어울프로 변모한 휴고는 뱀파이어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훈련의 영향인가?'

원작에서의 휴고는 웨어울프로 변하고 나서 자신의 힘을 견디지 못했다.

완성되지 않은 신체가 과부하를 일으켰고, 본능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이 족쇄를 채웠다.

하지만 에단은 휴고에게 최상의 신체를 만들어 줬다.

근력, 순발력, 지구력, 심폐 능력까지.

짧은 시간 내에 최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전투 훈련은 배제하고, 모든 걸 체력 훈련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휴고의 몸은 지금 웨어울프의 모습을 견뎌 내고 있었다.

'결과는 변하지 않아.'

에단은 보는 눈이 좋았다.

뱀파이어는 방심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한 구역의 패자로 군림하던 녀석이니 그럴 만도 했다.

감각은 무뎌졌고, 그는 여유를 부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유는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졌다.

무시하기에는 깊은 상처였다.

싸움은 대개 먼저 피를 흘린 쪽이 불리했다.

그렇다고 실력 차이가 압도적으로 나는 것도 아니었다.

전투에 익숙한 것은 뱀파이어였지만.

사자는 태어나서부터 싸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휴고 또한 사냥법 따위를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 보상을 얻을 차례지.'

에단이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 * *

뱀파이어는 지나쳤지만, 그 이후로도 에단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뱀파이어와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의 녀석들이었다.

삐쩍 마른 흡혈귀와 코볼트 따위의 하위 몬스터들.

밖에서 볼 때와 다르게 동굴 내부의 크기가 협소해서 그렇다지만, 너무나도 빈약한 상대였다.

에단은 손에 든 단검으로 앞길을 방해하는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처치하며 나아갔다.

'아직 부피가 큰 건 익숙하지 않아서.'

에단의 검술이 빠르게 성장한다고 한들, 에단이 가장 잘 다루고 자신 있는 것은 본인의 육체였다.

이번 작전에 목숨이 걸려 있는 만큼, 익숙하지 않은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사용하는 것이 맞았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네.'

현대인인 류태신은, 아니, 에단은 지금껏 살생을 저질러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죽이고 있는 것은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인간이던 것들'과 '인간과 흡사한 크기의 생명체'였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을 죽이면서도 에단은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했다.

'이 캐릭터의 성격 탓인가?'

그럴 수도 있었다.

원작 소설에서 등장하는 에단의 성격은 오만방자하고 방약무인한 사이코패스였다.

고문을 즐기고, 살생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망나니 캐릭터에게 빙의한 만큼, 이 정도의 변화는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소설 속이잖아.'

소설 속.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곳은 소설일 뿐이다.

푹―

에단은 고블의 뒤를 붙잡고, 그대로 목덜미에 단검을 밀어 넣었다.

'이 짓에도 적응이 되고.'

처음에는 실수로 옷에 피가 튀는 일이 있었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전과 같은 실수가 줄어들었다.

'흠, 생각보다 거리가 있는데.'

에단은 단검의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빛 한 점 없는 동굴을 바라보던 에단은, 이내 발을 옮겨 동굴의 심층부로 들어섰다.

"이건가?"

에단은 동굴의 깊은 곳에 꽂혀 있는 작은 나무 막대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죽은 나무.'

뭔가 섬뜩한 이름값과는 다르게 평범한 나무 막대기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에단은 잠시 동안 지면에 꽂혀 있는 막대기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묘하네.'

에단의 감각은 예민했다. 예민한 에단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더 이상 발을 내딛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에단은 본능을 짓누른 채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이것을 얻기 위해 온 여정이었다.

'이게 가장 빠른 길이다.'

정석으로 갈 생각은 없다. 소설의 주인공 녀석을 쫓기 위해서는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에단이 손을 뻗어 막대기를 움켜쥐었다.

"큭."

막대기를 움켜쥐자마자 저릿한 느낌과 함께 통증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손에서만 느껴지는 통증이 아니라 피부와 혈관을 타고 몸을 엄습하는 기분이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당장에라도 손을 뗄 뻔했지만, 에단은 이를 악물고 막대기를 뽑았다.

말라비틀어져 생기를 잃은 나무 막대기는 마치 울기라도 하는 듯 웅웅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네.'

견디지 못할 수준의 고통은 아니었지만,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역겨운 기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기운은 점차 줄어들었고, 잠시 후 평상시의 상태를 되찾은 에단은 말없이 죽은 나무를 바라보았다.

죽은 나무에서는 이전과 같은 섬뜩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흠... 끝난 건가?'

에단은 주먹을 쥐었다 펴 봤다.

아직 체감상 크게 와닿는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틀림없다.

그는 죽은 나무를 흡수했다.

'이제 돌아갈까?'

슬슬 휴고와 뱀파이어와의 싸움이 끝났을 테다.

― 어딜 가느냐.

그때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발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건 아닐 테고...."

에단이 중얼거리자 의문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 블란테의 피가 느껴지는구나.

이번에는 빼도 박도 못할 정도로 확실한 음성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에단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음... 당신은 누구십니까?"

― ....

에단의 물음에 의문의 목소리는 잠시 침묵하다 이어 말했다.

― ...나도 블란테의 피를 이은 자다. 너의 선조라고 할 수 있겠지.

...뭐라고?

에단은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선조?

뜬금없이 여기서 그런 설정이 풀린다고?

아니, 대체 왜?

◈ [19화] 천적의 만남 (3)

검술 명가 블란테.

소설에서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가문이다.

악역이라고는 하나, 블란테 가문이 대륙을 위협할 음모를 꾸미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가문 사람들의 오만함과 거만함이 문제가 되었다.

블란테의 권위는 주인공에게 통하지 않았고, 그들의 운명은 애당초 결정되어 있었다.

주인공에게 정의의 철퇴를 맞을 운명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양쪽으로 처맞아서 문제지.'

주인공과 진짜배기 흑막.

주인공에게는 얻어맞고, 흑막에게는 이용당한 블란테는 이름값도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물론 그중에서 주인공의 히로인인 셋째 리사는 잘 살아남게 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에단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블란테라는 가문은 대륙 내에서는 큰 입지를 가지고 있지만, 원작 스토리 내에서는 그다지 큰 비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잘 쳐 봐야 3류 악역 포지션이다.

설정상으론 분명 대륙에서 손꼽히는 검술 명가로 높은 위상을 자랑했지만, 자식들이 문제였다.

에단을 필두로, 모룬, 카론까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캐릭터가 없었다.

딱히 주인공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문이 멸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에단이, 아니, 류태신이 소설을 읽을 때도 딱히 블란테의 비중이 있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병신 같은 새끼들.'

딱 이 정도 감상.

하지만 에단은 지금 그 상황 속을 헤쳐 가야 했다.

그렇기에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이용하고 있는데....

― 왜 말이 없는 거지?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뜬금없는 설정이 여기서 풀린다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애초에 이 장소는 주인공 일행이 한차례 지나간 장소였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동굴의 심층부에 도착해 보상을 얻어 가는, 주인공 성장의 발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러한 묘사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죽은 나무를 얻은 장면이 끝이었고, 그걸로 충분했다.

에단이 생각했을 때, 죽은 나무가 가진 효용성은 충분히 엄청났으니까.

―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노기 서린 음성에 에단은 잡념을 털어 내고 고개를 들었다.

역시 동굴의 안쪽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작은 한숨을 내쉰 에단이 입을 열었다.

"저의 선조라고 하셨습니까?"

― 그렇다.

에단은 생각했다.

거짓말일 확률은?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이 세계는 몬스터와 마물이 존재하는 세상이었고, 이능과 이물이 비일비재한 세계관이었다.

망령 따위의 존재가 에단을 현혹하기 위해 농간을 피우는 것일 수도 있다.

에단의 의심을 눈치챘는지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 거짓이 아니다.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감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무엇을 믿고?"

에단의 말이 짧아졌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여기서는 강하게 나서도 된다는 사실을.

― 자, 잠깐만 내 얘기를 좀 들어다오.

에단의 태도가 돌변한 것을 느꼈는지 목소리가 조급해졌다.

그에 맞춰 에단의 분위기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쉽게 믿기 힘들긴 한데.'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에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크, 크흠, 내 이름은 페온이다. 페온 블란테. 빌어먹을 레일라가 내 동생이지.

"레일라라면...."

― 그래, 너라면 알겠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블란테의 가주였으....

"모르겠네요."

― 뭣이?!

페온의 어조에서 당혹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단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원작을 기반으로 한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에서 블란테 가문의 입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내부에서는 머저리 같은 애들로 인해 붕괴되었고, 외부에서는 온갖 기연과 특혜를 독식한 주인공 무리에게 얻어맞다가 흑막에게 이용당하는 결말을 맞는다.

거기에는 딱히 풀어 나갈 설정도 뭣도 없었다.

당연히 에단의 지식도 블란테 가문의 선조까지는 닿지 않았다.

에단의 말이 단순한 떠보기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페온의 목소리가 음울해졌다.

― 이래서 요즘 애들은....

"그래서 용무는 무엇이죠?"

에단의 목소리가 심드렁해졌다.

블란테의 선조라.

상당히 의외인 설정이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과거의 망령에 불과하다면 에단에게는 득이 없었다.

그리고 에단은 득 될 것 없는 일에 심력을 쏟을 생각이 없었다.

― 기, 기다리거라!

"이유는?"

에단의 말이 확연히 짧아졌다. 하지만 페온은 그것을 따지고 들 여유가 없었다.

― 너에게 힘을 주마! 움직임을 보아하니, 너 검을 쓰는 놈이 아니지?

"...더 말해 보시죠."

에단이 다시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기 시작했다.

― 후우, 이제야 내 말을 들을 생각이 들었구나. 시작은, 그래... 과거의 나는 찬란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에단의 미간이 좁혀졌다.

말이 길어질 예정이라는 건 서론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에단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간절한 음성이 에단의 발목을 붙잡았다.

― 기, 기다려라!

간절함이 담긴 외침에, 망설임 없이 내딛던 에단의 발이 우뚝 멈췄다.

"아직 할 말이 남았습니까?"

싸늘한 목소리였다.

― ...너에게는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없단 말이냐...?

"그런가 봅니다."

― 자, 잠깐! 이번에는 진짜 너에게 도움 되는 얘기를 해 주마!

에단의 발이 다시 멈췄다. 에단의 얼굴에는 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에단이 다시 움직이려 하자, 페온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 격투술을 알려 주마!

"격투술... 말입니까?"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묘한 감흥이 들었다.

기대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뜻밖의 기연이었고, 애초에 블란테 가문은 소설 내에서 큰 비중이 없었다.

말 많은 과거의 망자는 조금 흥미를 이끌긴 했지만, 에단은 현혹될 마음은 없었다.

수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필요한 것은 모두 가져갈 생각이었으니.

선조라는 자가 대충 가문의 비전이나, 보물 따위를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페온이 말한 것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에단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페온이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 꽤나 솔깃하지 않더냐. 몬스터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눈치챘다. 너는 검을 쓰는 녀석이 아니지?

"그런가요?"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단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 큰 크기는 아니었고, 살상력도 충분했다. 에단은 대부분의 적들을 이 단검으로 사살했다.

행동으로 특색을 추정할 수 있을 만큼 길게 싸우지는 않았다.

에단의 행동은 빨랐고, 단출했다.

최소한의 행동으로 몬스터를 죽였으니, 일련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추측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 단검을 쓰는 솜씨가 초보자는 아니었지만,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지. 검을 쓰는 놈들은 모든 행동에서 검을 의지하는 티가 나. 그런데 너는 그렇지 않더군. 손에 든 단검은 도구일 뿐이라는 듯 행동했지.

"저의 선조라고는 믿기 힘든 언행인데요."

― 흥! 검술 가문이라고 꼭 검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법이라도 있더냐? 어차피 모든 검술은 모두 강함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련하는 것이다. 나는 단지 그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 검을 택하지 않은 것뿐이고.

"그렇군요."

에단이 피식 웃으며 작게 수긍했다.

흥미로운 대답이었다.

검술 가문에서 태어나 검이 아닌 외도를 택한 자라....

꽤나 재밌었다.

페온은 에단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에단은 검을 꺼리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 익숙한 무기가 격투기였을 뿐이었다.

아무리 맨몸으로 날고 기어 봤자, 살상력으로는 날붙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였다.

그렇기에 에단은 검을 수련할 생각이었다. 한 가지에 얽매일 생각은 없었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에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갑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인지한 눈빛이었다.

페온은 은연중에 그 의중을 알아챘다. 수치심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저한테 딱히 끌리는 제안은 아닙니다."

떠보는 게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투쟁이라는 행위를 즐기기에 격투기를 한 것뿐이다.

에단이 예상외의 반응을 보이자 오히려 다급해진 것은 페온이었다.

― 이, 이익! 너는 줏대도 없는 것이냐! 자고로 남자는 한길을 파야...!

"글쎄요. 동의하기는 힘들군요."

MMA에서는 한 가지의 특출한 장점을 가진 선수보다, 육각형으로 여러 가지를 고루고루 익히고 있는 선수가 더욱 강했다.

자신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좋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있다면 결국 상대에게 물어뜯긴다.

에단이 쌓아 온 기술은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흥미는 생기는군.'

류태신은 현대적으로 발전한 격투기를 수련했다.

격투기에 있어서는 거의 끝을 봤다고 해도 무방했다.

선수 시절 류태신은 무적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그 본질은 결국 스포츠였다.

반면에 이 세계는 창과 칼이 난무하는 세계였다. 전투는 곧 살상이었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장소였다.

물론 격투기 기술로도 적을 죽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무기와 견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대화하고 있는 선조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격투술을 알려 준다 말하고 있었다.

흥미가 일었다.

검술 명가의 피를 이은 자가 살상을 위해서 창안한 격투 기술은 어떨까.

하지만 그것에 매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에단에게 있어 페온의 제안은 흥미를 끌기는 했지만, 반드시 가져야만 할 것은 아니었다.

― ...후우∼ 내가 졌다.

페온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에단과 말을 지속하면 할수록 자신이 말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 내 처지를 솔직하게 말하마.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부탁드립니다."

― ...끝까지 얄밉게 구는구나.

페온의 한숨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 지금껏 한 말은 사실이다. 나는 블란테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검을 꺼려했지. 맨주먹을 맞대는 전투가 내 피를 더 끓게 했거든. 하지만 당연히 좋은 시선을 받지는 못했다. 선조가 닦아 오는 길을 부정하는 행위였으니까.

페온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 이제야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 게냐?

"아니요. 서론이 너무 길어서 그냥 갈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

당장에라도 뒤돌아 나설 것 같은 에단의 태도에, 페온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축약해서 자신의 입장을 말했다.

이윽고 모든 얘기를 들은 에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론은 저한테 기생해야 소멸을 안 한다는 소리입니까?"

― ...기생이라는 말은 조금 듣기 거북하구나. 정확히 말하면 기생이 아니라 서로 상생하는 관계....

"저에게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 그러죠."

에단은 이미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 놨다.

가장 급박한 마나에 관한 문제도 '죽은 나무'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죽은 나무를 이용한다면 마나 수련법에 소요할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할 수 있었다.

― 아니. 넌 내가 필요할 거다. 방금 네가 끄집어낸 그 기분 나쁜 것에 의존할 생각이 아니더냐? 그건 하책이다. 당장에 힘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좋은 선택이 아니야. 사기를 통해 흡수한 마나는 결국 내부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지.

"그렇습니까?"

에단이 고개를 갸웃했다.

소설에서는 그런 묘사가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페온의 말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죽은 나무가 가진 능력은 사자의 마나를 흡수하는 힘이었다.

주인공이야 아무 페널티 없이 사용했다고 묘사되기는 하나, 그것이 에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20화] 죽은 나무 (1)

에단이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흥미는 생겼다. 하지만 주도권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얘기를 조금 더 들어 보고 생각하죠."

― ...능구렁이 같은 놈.

진저리가 난다는 듯 말한 페온이 작은 설명을 덧붙였다.

― 편법으로 얻는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그 기물도 같을 뿐이야. 죽은 자의 사기(死氣)를 계속해서 취하면 너는 점차 이성을 잃게 되겠지.

"그렇군요."

― ...반응은 그게 다더냐?

"뭐, 어쩔 수 없죠."

어떤 것이든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치러야 하는 법이다.

이성을 잃게 되는 페널티? 그것보다 당장의 생존이 우선이었다.

지금 여기서 에단이 마나 수련을 시작한다 한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에단이 마나를 어느 정도 깨우치고 두각을 나타낼 때면 주인공 일행은 이미 스토리의 후반부에 달려갈 터였다.

'대책이 없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이 얻은 물건 중 정신 강화에 특화된 것들도 있었다.

계획을 어느 정도 수정할 필요는 있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상당히 귀찮을 뿐.

― 이, 이익!

에단의 반응이 심드렁해지자 페온이 다시 분통을 토해 냈다.

― 이 정도 정보를 알려 줬으면 그에 걸맞은 감사를 표해야 하는 것 아니더냐!

"아, 음... 감사하군요."

― 이, 이런 괘씸한! 하, 됐구나. 엎드려 절 받기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내 말은 장난이 아니다. 그 능력은 분명 너를 파멸로....

'말이 많네.'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에단은 슬슬 흥미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걸 느꼈는지 페온도 말을 멈추고, 슬쩍 본론을 꺼냈다.

― ...나도 데려가면 안 되겠나?

"...굳이요?"

― 구, 굳이 라니....

페온이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그간의 삶에서 이 정도의 처우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페온은 고민했다. 여기서 자신의 가치를 구차하게 설명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이대로 소멸을 당하는 게 맞는지.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저울질을 시작했다.

페온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더 고수할 자존심도 없거니와, 페온에겐 목적이 있었다.

― 이대로 가면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소멸될 예정이다. 그 기물의 힘이 나를 붙잡고 있던 것이니, 소멸을 맞이할 시간은 더욱 빨라지겠지.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소멸을 맞이하기에는 아직 해야 할 것이 남았다.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제야 좀 바뀌었군.'

고자세를 유지하던 에단의 태도가 드디어 바뀌었다.

"도와드리죠. 단 대가가 있습니다."

물론 공짜로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 * *

쾅!

휴고는 짐승처럼 뱀파이어를 몰아붙였다.

독보적이던 탄력과 유연성은 배가 되었고, 여린 심성은 늑대의 야성으로 바뀌었다.

길어진 손톱은 단단한 바위도 두부처럼 잘라 버렸다.

뱀파이어는 속수무책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비천한 혈통 주제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애송이는 반쪽짜리였다. 웨어울프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뱀파이어이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반쪽치고는....'

쾅!

휴고가 벽을 후리자, 지진이 난 것처럼 큰 진동이 울렸다. 단단한 동굴의 벽면이 크게 파였다.

뱀파이어 벨몬트는 침음을 흘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끝장이다.

지금은 어떻게 방어 일변도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조만간 승부가 난다.

결과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벨몬트는 휴고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벨몬트는 뱀파이어였다. 하지만 가진 힘은 볼품없었다.

뱀파이어의 신체 능력도 뛰어나긴 하지만, 그건 인간과 비교했을 때 뛰어난 수준이었다.

뱀파이어의 진가는 마력과 현혹에 있다. 하나 벨몬트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벨몬트는 지금 부릴 수 있는 마법이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그나마 자신 있는 현혹이 휴고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혹 같은 정신 계열 마법은 상대의 격이 자신보다 낮고, 지능도 낮아야만 통했다.

하지만 휴고는 지금 지능을 논할 만한 정신이 없는 상태이며, 그 격도 벨몬트에게 뒤지지 않았다.

현재로써는 승산이 없었다.

'도주도 불가능해.'

이미 모든 수족을 잃었다. 대피를 위한 방도가 몇 가지 있었지만, 휴고는 틈을 주지 않고 벨몬트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작은 기회도 없었다.

벨몬트는 숨통이 조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분이 치밀었지만,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회의감도 함께 들었다.

'저런 애송이에게!'

휴고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웨어울프의 피를 깨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놈이었다.

하지만 벨몬트는 그런 녀석에게 밀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쉬익!

그때, 휴고가 달려들며 팔을 휘둘렀다.

벨몬트는 간신히 상체를 젖혀 공격을 피해 냈다.

하지만 공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휴고가 몸을 숙여 바닥에 팔을 디뎠다.

지면에 디딘 팔을 중심 삼아 휴고의 몸이 크게 움직였다.

원심력이 실린 휴고의 발이 벨몬트의 배에 꽂혔다.

"커헉!"

벨몬트의 입에서 진한 선혈이 솟구쳤다. 일격을 허용했을 뿐인데도 상당한 충격을 입었다.

휴고가 그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재차 달려들려 했다.

"멈춰, 휴고."

바로 그때,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고의 누런 눈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동굴의 저편에서 에단이 걸어오고 있었다.

에단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 호오, 웨어울프구나. 꽤나 괜찮은 녀석이군.

"제가 키운 놈이죠."

에단이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원작에서의 휴고는 자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야성화는 큰 힘을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신체에 큰 부하가 걸린다.

골격과 근육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때문에 웬만한 내구도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단과 함께한 고된 훈련이 신체에 걸리는 부하를 감당할 수 있게 만들었다.

육식 동물은 사냥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사냥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신체가 부하를 견디자 휴고는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에단은 잠시 휴고를 바라봤다.

"음, 역시 못 알아보는 거 같은데."

이거는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이 정도로까지 성장했을 줄이야.

"뭐, 방법은 있겠죠?"

에단이 페온에게 물었다. 에단의 낙관적인 태도에 페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 ...어쩌다가 이런 놈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 것 같은 한숨 소리에 에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이 없는 거 같은데요."

휴고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런 안광에서는 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휴고는 포식자였다. 이 일대에서 가장 강한 우두머리였다.

에단은 상대를 가늠할 줄 알았다.

'필패.'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예상이 됐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발악해도 성인을 이길 수는 없다.

이건 그보다 더했다.

휴고는 평범한 짐승보다 월등히 강했으니까.

― 잠깐 몸을 빌리마.

"내키지 않는군요."

에단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몸의 주도권을 넘기는 건 에단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페온이 기가 차다는 목소리로 묻자,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힘만 빌려주시죠."

에단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페온은 지금 사념체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내포하고 있는 힘은 적지 않았다.

에단은 그 힘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 건방지구나. 아직 마나도 깨우치지 못한 놈이 다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페온은 에단의 겁 없는 치기가 건방지게 느껴졌다.

"싫으면 여기서 끝이고요."

에단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페온은 백기를 들었다.

― 허... 알겠다. 다만, 네가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내가 개입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좋습니다."

이번에는 에단도 수긍할 수 있었다.

페온이 최대한 양보한 결과였다.

'궁금하네.'

야성을 일깨운 휴고를 마주하자 간만에 몸이 근질거렸다.

― 조심해라. 몸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니까.

반투명한 페온의 손이 에단에 어깨에 얹어졌다.

서늘한 느낌 뒤로 정체 모를 기운 밀려들어 에단의 몸에 흘렀다.

― 내 마나를 강제로 주입하고 있다. 원래라면 거부 반응이 나타나는 게 정상이지만... 같은 피가 흘러서인지 큰 부작용은 없어 보이는구나.

페온은 덤덤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내심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에단은 끝없이 페온의 마나를 탐하고 있었다.

페온은 죽은 자였다. 당연히 품고 있던 마나 대다수가 소실되었고, 남은 것도 극히 일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에단은 아직 마나를 깨우치지 않은 몸이었다.

아무리 몸에 흐르는 피가 같다고 한들 마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흠, 이런 거군.'

에단은 자신의 몸에 들어오는 묘한 감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작의 묘사랑 흡사하네.'

원작에서는 몸에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기분이라고 묘사했다.

'대충 어떻게 쓰는지 감이 와.'

주인공 녀석도 마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실전에서 사용했다.

주변인들이 경악하며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 칭송하던 모습이 기억이 났다.

묘한 승부욕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 ...말하지 않아도 멈추려고 했다, 건방진 놈아.

페온은 고개를 저었다. 하마터면 마나의 대부분을 빼앗길 뻔했다.

어차피 일시적인 조치였기에 오래가지는 않을 테지만, 마나를 모두 뺏기면 페온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에단이 고개를 꺾으며 몸을 풀었다.

"도망가진 말고."

에단이 피식 웃으며 벨몬트를 바라봤다.

'마나는 이렇게 실으면 되나?'

발에 기운을 집중하며 발을 내디뎠다.

쿵!

지면이 움푹 파였고, 에단은 쓰러져 있는 벨몬트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벨몬트의 눈이 커졌다.

"잠깐 기절해 있어."

이 녀석에게는 아직 얻을 게 남았다.

에단은 벨몬트의 머리를 움켜쥐더니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쾅!

큰 굉음과 함께 얼굴이 지면에 처박히고, 이내 벨몬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조르기 따위로 천천히 기절시킬 여유가 없어.'

얼핏 봐도 도망칠 기색을 내비치기에, 조금 무식한 방법을 사용해 기절시켰다.

크릉!

에단이 근방으로 다가오자, 휴고가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에단에게 달려들었다.

'빠르네.'

쐐액!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아도, 휴고의 움직임은 꽤나 효율적이었다.

에단의 몸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임시방편으로 페온의 마나를 빌리긴 했지만, 말 그대로 임시적인 조치였다.

천천히 마나와 함께 성장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몸에 끼워 맞춘 상태였다.

그렇기에 에단의 몸은 지금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적당히 하면 되지, 뭐.'

이 정도가 딱 좋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필패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휴고의 움직임은 빠르고 사나웠지만 단순했다.

변칙이나 허초 없이 정직했다. 누런 안광이 노리는 대로 에단을 공격했다.

조금 전까지는 이게 단점이 되지 않았다.

단순한 공격도 압도적인 스피드가 더해지면 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총구가 어디로 향하는지 안다고 총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지금은 휴고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었다.

쐐액!

휴고가 날카로운 발톱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에단은 상체의 움직임 하나로 휴고의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조급함을 느낀 휴고가 더욱 빠르게 움직여 가까이 다가갔다.

휴고의 상체가 에단을 향해 쏠리자 에단이 몸을 뒤로 젖혔다.

그와 동시에 발을 뻗었다. 에단의 프론트 킥이 휴고의 명치에 꽂혔다.

"커헉!"

휴고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 [21화] 죽은 나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