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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3)

"그 많던 기재들이 실패한 걸 구규지체라는 한계를 가진 네가 해내는구나.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냐."

흑화가 발현했다는 건 천마신공의 높고 험한 첫 문턱을 넘어선 것.

이는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천마의 후계를 찾아낸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진우광의 표정은 더 이상 기쁨이 아닌 아쉬움이 가득 담긴 씁쓸함이었다.

"고작해야 아홉 개의 천공 중 하나를 막았을 뿐. 일류의 경지를 넘어 절정의 초입에 올랐겠으나.... 그 이상은 무리다."

바로 이것이었다.

후계의 자격을 갖춘 이가 나타났음에도 마냥 즐거울 수 없는 이유.

표정에 아쉬움이 진득하게 배어나는 이유.

구규지체가 가진 천성적인 한계.

남은 여덟 개의 구멍을 마저 막지 않는 이상은 결코 내공이 일정 이상 모이지 않아 입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천형의 한계.

따라서.

"너에겐 나의 후사도, 만마의 안위도 맡길 수 없다. 그러니 언제고 나타날 나의 후계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거라. 그게 존재해선 안 될 널 살려주는 이유이니."

영원히 주인은 될 수 없다는 노예 선고.

실로 잔혹한 말일 수 있겠으나 천마로서는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너무 긴 세월을 홀로 선 채 기다렸기에.

조금이나마 제 근처에 기어 올라온 장이서란 존재를 떨어트리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내린 후한 결정이었다.

어쨌든 지존이 아니면서 천마신공을 가진 이가 또 하나 존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대신 너 역시 조금이나마 천마의 영역에 발을 들인 존재이기에. 마음만은 나의 첫 번째 후계였기에. 무엇보다도 큰 선물을 내리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의 입에서 무엇보다도 큰 선물이라는 과감한 발언이 뱉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출로로 운기조식을 성공한 장이서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땐.

"똑똑히 느끼거라. 네게 이를 전수해주는 건 단 한 번뿐일 테니."

등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천마 진우광의 두 손이 그의 등에 얹어져 있었다.

"흡!"

그리고 머릿속으로 스며들 듯 느껴지는 압도적인 기운.

일순 눈이 부릅떠지고, 혼령이 유체를 이탈한 듯 그의 시야에 도저히 볼 수 없는 천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깨 위로 칠흑처럼 어두운 불꽃이 구결을 전수하듯 천천히 형상을 이루어가고 있는 모습이 말이다.

'저, 저건...!'

이를 목도한 장이서는 소리 없는 탄성을 삼키며 전율에 떨었다.

경위는 모르겠으나 지금 그가 하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대번에 짐작했기 때문.

'천마신공...!'

그렇다. 지금 진우광은 자신에게 천마신공의 일부를 전수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황룡의 작은 편린에 불과할지언정.

명실상부 고금 제일의 무공이 주는 깨달음은 그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검극에 달하면 스스로가 검이 되듯, 방출한 마기를 의념으로 하나의 형질을 이루는구나....'

장이서는 제 처지도 잊고 홀린 듯 천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우주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경천동지한 마기를 어깨 위로 흘려보내 형상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그리고 마침내.

퀴아아아아-!

괴수의 비명과 같은 공명음과 함께 진우광의 어깨 위에 거대하고도 절대적인 존재가 자리매김했다.

이글거리는 흑화의 불씨를 떨어내는 악귀.

지독하게 어둡고, 또 소스라치게 두려운 위압적인 기운.

"이것이 천마귀(天魔鬼)다."

아.... 장이서는 천마의 음색에 두려움과 영롱함을 동시에 느끼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길을 개척함과 동시에 막다른 길에 도달한 너에게 주는 내 축하와 위로의 선물이다."

화르륵!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천마귀가 승천하듯 불씨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추락하는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시야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커헉...!"

이내 각혈과 함께 심장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화기가 치솟아 올랐다.

화르륵!

그야말로 감내할 수 없는 지독한 고통.

"끄아아아아악-!"

결국 장이서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는 마치 천마의 낙인이 심장에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억겁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흐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고통이 사라지며 정신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맑아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고독이... 사라졌어?'

제 심장에 제약처럼 자리 잡고 있던 고독이 사라졌다는 것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장이서가 당황하며 뒤를 돌아 살폈다. 하나 천마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선 상태.

묻고 싶은 것 천지였다.

저에게 뭘 한 것인지. 아니, 그 마귀는 무엇이었는지. 대체 왜 제 심장에 불꽃이 새겨진 것인지.

모든 걸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천마의 친절은 여기까지.

"언제고 네 천마귀가 깨어난다면 그때 스스로 확인하거라.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속을 꿰뚫는 듯한 그의 발언에 장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초점을 바로 했다.

그리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선 정중히. 그리고 진심을 담아 포권을 취했다.

"가르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에 천마는 눈썹을 삐딱하게 기울이곤 별일 없었다는 듯 말했다.

"비록 편린이라 할지라도 네 몸은 나와 같은 천마의 기를 품게 되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안다. 아주 제대로 꼬였다는 거. 하지만 지금 그가 이런 대답을 바란 건 아닐 것이다.

장이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천마지존 만마앙복. 본교의 안녕을 위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단, 그것이 중원의 안녕을 위하는 길일 때만 말이다.

장이서의 대답에 천마는 흡족한 듯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교를 위한 충성.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제 넌 일류를 넘어 절정의 경지에 올라섰다."

장이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망각하고 있었지만, 처음 눈을 떴을 때 바로 느껴졌다.

평생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절정의 벽이 무너졌음을.

그리고 이는 많은 것을 의미했다.

이전보다도 내공을 더 쌓을 수 있으며, 발출부터 운공을 하는 데 있어 훨씬 더 빠르고 강한 힘을 펼칠 수 있다.

한마디로 뇌전법을 펼치지 않아도 기존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는 얘기.

'어쩌면 마벽도 열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기대되는 설렘에 잠시나마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한데 너무 이른 탓일까.

곧이어 천마의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하나 거기까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네 몸의 내기는 더 이상 새로운 길을 열지 못한다. 고강한 기일수록 한번 정해진 기억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지."

장이서는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던 천마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막다른 길에 도달한 너에게 주는 내 축하와 위로의 선물이다.'

새로운 길이자 막다른 길.

"그럼...."

"이제 네 안의 마기는 정해진 길만을 계속 답습할 것이다."

장이서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랬다.

천마의 기는 하나. 이를 두 갈래로 나누는 일은 불가능하다.

바꿔말하자면 첫 번째 구멍은 막았지만, 두 번째 구멍은 어림도 없다는 얘기.

"절망스러운가."

천마가 물었다. 이에 장이서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미 바랄 수 없던 경지를 이루었습니다."

"그럼 만족할 것이냐."

이번에도 장이서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도 아닙니다. 언젠가는 답을 찾아낼 겁니다. 단지 그게 오늘이 아닐 뿐입니다."

"후후, 무디고 끈질긴 것이 오래 살 팔자로구나."

천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나 바람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그게 장이서를 살려주는 또 하나의 이유.

그가 더욱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넌 훌륭한 보좌다."

갑작스러운 칭찬. 하나 느낌이 좋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말에 가시가 담겨 있었다.

"하나, 남들도 너를 그리 보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넌 보좌로서 훌륭히 제 일을 해내었다. 그리고 그건 마오 역시 마찬가지. 오늘 보니 다시 알겠더구나. 본래 잠재력만 놓고 보자면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아이였음을. 이제야 그 싹을 튼 것이다. 하여."

천마의 입가에 잔인해 보일 만큼 스산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장이서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오에게 백인장의 인을 내렸다. 그 아인 그 가치를 모르는 듯했지만,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게 무얼 뜻하는지를."

백인장의 인?!

장이서의 눈이 번쩍 떠졌다.

본래 천마의 자식인 일곱 명의 후계들은 세를 이룰 수 없다.

임명할 수 있는 건 오직 보좌뿐.

이는 훗날 다른 후계들이 소교주의 앞길을 막아설 수 있기에 내린 엄명이었다.

하나 여기에도 예외가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인장(人將)의 인이었다.

앞에 들어가는 숫자만큼 공식적으로 조직을 이룰 수 있는 특권.

'그리고 천마가 인장의 인을 하사한 건 오직 세 사람뿐이었지.'

그것이 바로 첫째인 천무기. 둘째인 무한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인 사해령이었다.

이들은 그간 숱한 공로를 세웠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이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하여 천무기와 무한성은 백인장(百人將)의 인을. 사해령은 십인장(十人將)의 인을 얻어 각자의 세력을 구축했다.

한데 마오에게 사해령도 얻지 못한 백인장의 인을 덜컥 하사했다니. 이는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특혜였다.

아예 대놓고 교주가 마오를 편애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모두가 마오를 주목하겠구나. 결코 좋은 시선은 아닐 것이다.'

천마는 장이서의 자못 진중해진 표정을 보곤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서자에 7급귀 출신인 너희가 그 자리에 앉고도 무사할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장이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 바람 잘 만큼 평안했던 나날은 아니었다. 도살방의 습격이 있었고, 일백마성 중 하나인 사도철과는 사투를 벌여 승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마 진우광은 잔인하게도 참혹한 현실을 꼬집었다.

그렇다.

소교주를 향한 진짜 경쟁은 한낱 자객인 도살방도, 마가의 집안싸움도 아니었다.

진짜는 일곱 명의 후계와 그들을 둘러싼 장로회와 오룡당. 그리고 마교의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까지 잠잠했던 건 그저 가소로워서. 신경 쓸 가치가 없었기 때문.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아니, 천만에.

백인장의 인을 받은 순간부터 무관심은 관심으로. 그리고 신랄한 압박으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들이닥칠 위기가 두려운 것이냐."

천마는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다시금 다정해진 어조로 말을 건넸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닙니다."

그가 지금 자신에게 새로운 숙제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니다? 이곳을 나가는 순간부터 너희는 이제 치워야 할 대상이 될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위기를 주고, 이를 기회로 잡게 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럼 어찌하겠느냐? 그저 당하고만 있을 것이냐."

장이서는 홀린 듯이 답했다.

"세를... 키우겠습니다. 칠소궁이 짓밟을 수 있는 싹이 아니라, 함부로 내려다볼 수 없는 거목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겠습니다."

수많은 이가 짓밟으려 할 것이고, 누구도 품에 들어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낼 것이다.

그게 암각 최고의 요원 장이서이기에.

천마는 상기된 장이서의 얼굴을 보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게 네 팔자를 지키는 일일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이만 가보거라."

천마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부복해 있던 장이서의 몸이 저절로 일으켜 세워졌다.

장이서는 깨달았다.

이번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던 천마와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마에게 장이서는 진심으로 예를 갖춰 포권을 취한 뒤 몸을 돌렸다.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

그가 내린 백인장의 인은 위기이자 기회.

소교주 자리를 위한 진짜 경쟁은 이제부터다.

사뭇 무거운 얼굴로 천마전의 복도를 거닐다 보니 어느새 끝자락.

"장이서!"

입구 앞에서 장신에 사내답게 생긴 붉은 머리 미공자가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든다.

마오다.

천연덕스러운 녀석의 얼굴을 보니 굳어져 있던 이마 주름이 조금은 펴졌다.

"살아 계셨습니까?"

"천잰데 당연하지. 그러는 너는?"

"천재 보좌 아닙니까."

푸하! 마오가 웃는다. 이에 장이서도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돌아가죠. 집으로."

교주와의 두 번째 조찬이 마무리되었다.

76.

#칠소궁으로 (1)

끼이이이익!

천마전의 문이 활짝 열리고, 밖으로 나온 마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기지개를 켰다.

"우아아아아!"

중천에 뜬 따스한 태양이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여기 올 때마다 진짜 10년은 늙는 거 같다니까. 여기 이름 바꿔야 돼. 천마전 말고 십년전 어때. 괜찮지."

괜찮겠냐. 장이서는 정색한 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무슨 기분인지는 알겠다. 정말 수십 번 죽다 살아난 기분.

"근데 장이서. 너 몸은 괜찮은 거야아아악! 깜짝이야!"

걸어 나가던 마오가 뒤를 돌아보더니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이에 장이서가 고갤 돌리니, 닫히는 문 옆에 웬 저승사자가 우뚝 서 있었다.

"용케 살아 나왔구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흑색으로 가득한 자.

전전대의 마두이자 천마의 수족인 광명우사 흑야였다.

무슨 사람이 인기척도 없이 벽에 붙어 서 있는 건지. 그것도 저렇게 무섭게 노려보면서.

"예, 덕분에...."

"성취를 이뤘구나. 일평생 교주님께 받은 은혜를 감읍한 마음으로 갚아나가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흑야는 금세 관심을 거두곤, 마오에게 공손히 패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는 백마(百魔)라는 글귀가 적힌 둥그런 신패.

백인장의 인이다.

"이게 뭔데요?"

마오가 눈을 부릅뜨고 건방지게 손을 툭 내밀자 흑야가 미간을 좁히곤 패를 쥔 손을 다시 거두었다.

뭐야? 왜 다시 가져가.

"공손히 받으십시오. 교주님께서 내리시는 겁니다."

"하하. 진작 말하지. 자요."

마오가 멋쩍게 웃고는 공손히 양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흑야가 살기 번뜩이는 눈으로 일갈했다.

"무릎부터 꿇으란 말입니다."

"예...."

왜 화를 내고 그래. 마오가 입술을 앙다물고 다소곳이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러자 흑야는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그의 손에 백인장의 인을 건넸다.

"그럼 이만 돌아가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스스스스. 검은 그림자에 휘감긴 채 벽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솜씨.

"장이서, 봤어? 지금 벽으로 들어가는 거 봤어? 저거 사람 아니야. 스며드는 저승사자야!"

[돌아가십시오!]

"헉! 가자, 장이서 가자."

어딘가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마오가 호들갑 떨며 줄행랑쳤다.

이에 장이서는 천마전을 짧게 일별하곤 뒤를 따라나섰다.

새삼 느끼지만, 정말 괴물들로 가득한 곳이다.

살아남으려면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근데 장이서.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아까 우사가 성취를 이뤘다는 말은 뭐고."

어느새 천마전을 지나 삼천계단에 다다르자 마오가 다시금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얼굴엔 제법 걱정이 가득해 보인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정말이야? 뭐 맨날 툭하면 픽픽 쓰러지니 믿을 수가 있나. 쓰러질 거면 저기 계단 다 지나서 쓰러져. 나 여기서 너 업고 못 내려가. 힘들어."

"업고 잘만 뛰시던데."

"그러니까 주객도전인 거지. 아주 그냥 빠져가지고."

장이서가 피식 웃자 마오도 덩달아 신이 난 듯 웃는다.

이번엔 장이서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내려가는 마오에게 물었다.

"칠공자님은 어떻게 살아남으신 겁니까."

"야, 너 말하는 거 웃긴다? 지가 살 방법 알려 줘놓고. 어떻게 살았냐니. 설마 내가 죽을 줄 알았냐?"

"반반."

"야, 이 씨!"

"얘기나 해보십시오."

장이서가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묻자, 마오는 심드렁한 얼굴로 자세하게 답했다.

내기를 발출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이를 회수했는데, 도리어 그게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것.

거기다 지풍을 상쇄시킨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튕겨냈다는 것까지 말이다.

"그게 말이 됩니까?"

"진짜라니까. 이 손바닥 봐봐. 빨갛게 부었잖아. 이거로 내가 탁 치니까 아버님 깜짝 놀라셨다. 뒤로 자빠지실 뻔."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세상에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는 천마가 어디 있나. 신도들 다 빠져나가겠네.

"하, 얘 봐라. 주인 말을 안 믿네. 내가 그때 손이 막 금강불괴가 된 것 같았다니까. 뭐든 다 쳐낼 수 있을 거 같고."

금강불괴?

"장이서. 내가 혹시 또 새로운 필살기를 찾아낸 거 아닐까? 가능성 충분하잖아. 난 천재니까. 이름은 금강처럼 단단한 손으로 다 되돌려보낸다는 의미로 지존마오수(至尊麻娛手). 어때. 괜찮아?"

괜찮겠냐? 그리고 그냥 네 손이 지존이라는 얘기잖아. 그게 금강이랑 무슨 상관인데.

"누가 쪽팔리게 초식에 제 이름을 넣습니까."

"천마."

"그건 별호고요. 가기나 하십시오."

"응."

하지만 말과 달리 뒤따르는 장이서의 표정은 제법 심상치 않았다.

만일 마오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짜 천재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

왜냐하면 그의 말과 부합하는 건 오직 하나.

발기(發氣).

그러니까 수기(手氣)를 발현하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발기를 온전히 다루려면 최소 내공이 초절정에 근접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치를 깨우쳐야 하지.'

그리고 이치를 깨닫는 건 그야말로 사막에서 나 홀로 보물찾기와도 같은 것. 정해진 노선도, 지표도 없이 걷고 걸어 스스로 깨우쳐야만 하는 것이었다.

한데 그걸 마오가 무의식중에 찾아낸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엄청난 성과.

이미 한번 발을 들였다면, 정처 없이 사막을 횡단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 아니겠는가.

'이 자식,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해질지도....'

내심 마오가 달리 보이는 장이서였다.

그렇게 가벼워진 두 사람의 발길은 어느새 호룡당에 다다랐다.

"하하하하!"

그러자 호탕한 웃음소리가 먼저 귓가에 스몄다.

영리한 호랑이, 지대호다.

"조찬엔 잘 다녀오셨습니까."

"당주! 당연히 잘 다녀왔지. 우리 올 땐 얼굴도 안 비추고. 이거 서운해."

"송구합니다.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처리할 일? 마오가 아래위로 그를 흘깃 살피자 손이며 옷에 지우지 못한 핏자국들이 선명하다. 굳이 뭘 했는지는 안 묻는 게 좋겠다. 마오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침을 꼴깍 삼키곤 답했다.

"바쁘면 일부터 봐야지. 그럼. 하하하."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군요."

마오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지대호가 장이서를 살폈다.

그리고 단박에 깨달았다.

훤해진 신수. 그리고 일전과 달리 훨씬 더 정돈되고 갈무리된 눈빛.

씨익. 드디어 절정의 벽을 깨부쉈군.

그의 입가에 진심이 담긴 웃음이 서렸다.

"축하하네."

"걱정해주신 덕분입니다."

"내 덕은 무슨. 다 자네가 뿌린 대로 거둔 것이지."

또다시 알 수 없는 대화에 마오는 머리를 긁적였지만, 어쨌든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제 보좌가 축하받으니까 마치 자신이 축하받는 기분 같기도 하고.

"사호정 쪽은 잘 해결되었네. 아마 평생 도라옥에서 나올 일은 없을 걸세."

"그렇습니까."

"철마적을 찾아내는 건 비룡당주에게 위임했으니 곧 덜미도 잡힐 것이고."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조로운 결말이다.

"한데 자네 비룡당주와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 겐가? 자네 얘길 하니 반응이 영 좋지 않던데."

없진 않지.

과거 비룡당 부당주였던 환익의 첩자 행위를 방첩대 조장인 자신이 밝혀냈으니. 당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근데 워낙 오래전 일이라.... 아직도 화가 남아 있던가요."

"자네가 제보자라고 했더니 쥐고 있던 술잔을 깨트리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장이서 이 버러지 같은 놈."

"하하...."

아직 화가 안 풀렸나 보네. 장이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이 일엔 더는 개입 안 하길 잘했다.

"조심하게. 비룡당주가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절대 잊지 않으니."

"예. 안 그래도 앞으론 조심할 일들이 부쩍 늘 것 같긴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교주님께서 칠공자님께 백인장의 인을 내리셨거든요."

장이서의 말에 지대호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백인장의 인이라니.

그건 대공자와 이공자만이 지니고 있던 신패가 아닌가. 한데 그걸 칠공자에게 내리다니.

"둘이 뭐라는 거야."

하물며 어디다 쓰는 건지도 모르는 하룻강아지에게 말이다.

이를 알게 되면 대공자와 이공자가 절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거늘.

지대호와 장이서는 서로를 복잡한 심경으로 살핀 뒤 말했다.

"부모의 편애만큼 시기심을 일으키는 일도 없지. 지금까진 없던 견제가 들어올 걸세. 부디 몸조심하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내 제안도 잊지 말고."

"하하,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시게. 살펴 가십시오, 칠공자님."

지대호가 포권을 취한다. 또 나만 모르지. 나만. 마오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인사를 받고 앞으로 걸었다.

하나 굳이 지금 알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제 곧 알게 될 일일 테니.

오늘은 그저....

"집으로 돌아가죠."

"가자!"

살아남았음을 만끽하면 되는 거다.

* * *

- 무림맹 호북지부 암각.

장이서.

아니 암각 요원 103호가 마교의 주요 인사로 점점 커나가고 있을 무렵.

"꺄아아아악!"

제갈소미는 그의 행보를 멀리서나마 지켜보며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도살방 멸(滅).]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닐까. 혹시 방이 너무 어두워서 잘못 봤나.

읽고도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서신을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진짜였다.

"풍림을 없앴을 때도 이렇게 연통이 왔다더니. 내가 이걸 받게 될 줄이야. 어떡해, 너무 좋아!"

제갈소미가 서신을 꼭 끌어안고 파르르 떨었다.

분명 일면식도 없는 자이지만, 암각의 부각주로서 그녀는 짜릿한 희열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라.

버려지듯 방치되어 있던 요원 하나가 임무를 받은 순간부터 날개를 단 듯 활보하기 시작했다.

칠소궁으로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더니, 이젠 도살방까지 해치웠단다.

기대가 없으면 만족이 커지는 법이고, 반대로 기대가 커지면 만족이 주는 법이다.

하지만 103호는 기대가 없을 때도, 있을 때도.

늘 변함없이 대만족이었다.

그러니 그의 소식이 기다려질 수밖에.

"도대체 103호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얼굴도, 성도, 이름도 몰랐다. 그걸 아는 건 오직 암각주인 조부와 맹주뿐.

혹시 이곳에 남은 가족은 없나?

"그러고 보니까 그 사람은 형을 찾고 있었지."

문득 제갈소미의 머릿속에 한 사내의 모습이 스쳤다.

화산파의 무복을 입고선 괴상한 첫인상을 안겨줬던 자.

선유.

'내 형이 사라졌어. 무림맹 소속이었고. 찾아줘.'

'우리 형. 이름은 이서.'

일면이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느껴졌던 슬픔이 가슴을 콕콕 쑤셨다. 분명 진심 같았는데. 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건지.

"무림맹 사람이라면 분명 자료가 남아 있을 텐데...."

제갈소미가 벌떡 일어나 다른 방으로 달려갔다. 일(一)자로 빼곡히 늘어선 책장.

무림맹부터 사파에 마교. 나아가 새외까지.

요원을 제하면 역대 웬만한 인물은 전부 담겨 있는 희대의 인사기록고였다.

이는 각주인 제갈상이 소싯적부터 수집해 온 것으로 이만큼 방대한 양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영화정이 제갈소미가 사람을 잘 찾는다고 말해준 것도 이 인사기록고를 알고 있기 때문.

"이서, 이서, 이서. 근데 선유는 도호잖아. 그럼 본명은 뭔데. 선이서는 아니잖아."

그녀가 사이를 누비며 서책을 뒤지다 문득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선이서일 리가.

탁!

서책을 덮고는 다시 드륵 책장에 꽂아 넣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럼 그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77.

#칠소궁으로 (2)

- 월하촌 칠소궁.

캉! 카앙!

귀 아픈 소음과 함께 아직 끝나지 않은 대문 공사가 한창이다.

겉을 커다란 천으로 가려놓아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철옹성을 만들겠다는 것인지 담벼락부터 그 크기가 실로 위압적이었다.

어림잡아 길이만 대략 오 장(15m)쯤.

바로 앞에선 고개를 한참 들어야 할 정도로 컸다.

"기관진식은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바퀴와도 같은 것. 조금만 어그러져도 발동하지 않으니 조심히. 아주 조심히 쌓거라!"

그리고 안쪽에선 제갈귀룡의 감독하에 용태를 비롯한 흑룡파 식구들이 열심히 작업 중이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는지 별말 없이 꿋꿋하게 제 일들을 해낸다.

"이것 좀 들고 하세요."

취홍란은 그런 이들을 위해 간식을 들고 이곳을 찾았다.

"크하하! 잘 먹겠소, 낭자!"

"루주! 늘 잘 먹고 있지 말입니다."

용태와 메기가 땀 범벅이 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준비해 온 육전과 냉차를 허겁지겁 먹었다.

그리고 이를 본 취홍란은 헛웃음을 지으며 공허한 눈으로 대나무 숲을 살폈다.

장이서와 마오가 떠나간 지도 어느덧 열흘 남짓.

이제 올 때도 되었거늘.

소식 없는 바람이 이리도 서운할 수가 없다.

떠나는 순간까지 장이서의 몸이 편치 않았던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은 더더욱 불편했다.

부디 아무 일 없기를. 밝게 웃는 얼굴로 저 길목에 나타나 주기를.

이렇게 되뇌고 또 되뇌며 나쁜 생각을 밀어낸 지도 어느덧 수백 번.

그 마음이 닿은 것일까.

솨아아아-

대나무 숲에 여느 때와 다른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이윽고 저 멀리 숲길에서 다가오는 두 사람. 취홍란이 입을 가린 채 작게 신음을 뱉었다.

"아...."

뒤이어 용태와 메기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라?"

"어...?"

그들이다.

"우리 왔다-!"

금의환향하듯 당차게 걸어오는 장신의 미공자, 마오.

그리고 그 뒤에서 늘 그렇듯 다정한 웃음을 짓는 장이서.

잔바람에 대나무가 흩날리던 그날.

마침내 그들이 돌아왔다.

"치, 칠공자님이 돌아오셨다-!"

"형니이이임!"

모두가 무색이던 눈동자에 화색을 담으며 반가움이 가득 담긴 웃음꽃을 피웠다.

"이, 이놈들이! 먹다 말고 어딜 가는 게야!"

용태와 식구들이 당황하는 제갈귀룡을 뒤로한 채, 먹던 것마저 내던지고 달려간다.

이에 마오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이렇게 외쳤다.

"천재 귀환-!"

드디어 귀환했다.

칠소궁으로.

*

마오와 장이서가 돌아오고 칠소궁은 오랜만에 들썩였다.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용태와 메기는 그간 배운 것들을 쏟아붓느라 여념이 없었고, 제갈귀룡은 아직 멀었다며 폭풍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장이서는 이를 묵묵히 들었고, 마오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아냐며 우하하 웃고는 맞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제갈귀룡과 흑룡파는 취선루에 마련된 숙소로 떠났고, 마오가 일찍 자러 간 사이.

장이서와 취홍란은 자연스레 산책을 거닐다 별관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까지 꾸며 놨을 줄은 몰랐는데."

휑했던 전과 달리 고풍스럽게 꾸며진 별관.

보는 순간 절로 감탄이 나왔다. 조잡하지도 않았고, 시원시원하게 꾸며진 장식과 화분은 다분히 제 성향을 고려했음이 느껴졌다.

"기다리는 동안 적적하여...."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이실직고하자 장이서는 고맙다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마음이 예뻐 괜히 미안해진다.

"이쪽에 집무실을 마련해 뒀습니다."

홍란이 2층의 좌측 방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잘 꾸며진 아담한 공간에 네댓 명 대화 나누기 좋게 가운데 탁자가 놓여 있다.

그녀가 먼저 가서 상석의 의자를 꺼낸 뒤 옆에 공손히 서서 기다린다.

본래 장이서는 이런 과한 대우를 불편해했다.

하지만 이젠 이마저 익숙해진 걸 보니 그녀와 오래 같이하긴 한 모양이다.

장이서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자 그녀도 옆자리에 착석했다.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니 뭐부터 말해줘야 할지 바로 알겠다.

"다행히."

장이서가 속 시원하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제 목숨에는 지장 없다."

"아...."

"걱정을 끼쳤어. 미안."

"아닙...니다...."

취홍란이 애써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이를 본 장이서는 그녀가 얼마나 조마조마하며 기다렸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갔다.

절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동료가 있다는 건 그야말로 축복받은 일.

"그럼 이젠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봐봐. 멀쩡해."

장이서가 활짝 웃으며 소맷자락을 거두었다. 그러자 다시금 멀쩡해진 선홍빛의 깨끗한 피부가 눈에 담긴다.

"다행이에요. 정말로...."

"운이 좋았어. 살다 살다 교주의 덕을 볼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장이서가 다정히 웃는다. 이에 취홍란은 가슴이 들뜨는 기분과 함께 덜컥 숨을 삼켰다.

단순히 그를 보고 좋아서가 아니었다.

뭐랄까. 이전하고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저 눈만 봤을 뿐인데 본능적으로 천적을 두려워하듯 손발이 떨리고 중압감이 느껴졌다.

이는 그녀가 아직 알 순 없지만, 실은 장이서가 내면에 천마신공의 정수인 천마귀를 태동했기 때문이었다.

*

교주 진우광이 준 선물, 천마귀.

물론 아직은 깨어나지도 못한 태아 같은 존재이지만, 상급 마공을 익힌 그녀는 본능적으로 기운을 감지했다.

'마교인들은 알까. 주인님께서 저들을 묵시하며 숙연히 바람을 일으키고 계신다는 걸.'

그리고 그게 언젠가는 이유도 모른 채 본인들을 휩쓸어 갈 거대한 태풍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홍란은 은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그가 걸어갈 길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도 한때의 정도인으로서 이 꽉 막히고 병폐한 마교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그걸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함께 걸어가는 사람으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홍란은 곁눈질로 그를 살피곤 들썩이는 마음을 휘휘 내치며 한숨과 함께 털어냈다.

"별다른 일은 없었겠지?"

이내 장이서의 물음에 정제된 어조로 답했다.

"예. 가 계시는 동안 월하촌엔 별일 없었습니다. 도살방을 막아낸 여파 때문인지 그 후로 소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현저히 줄어들었고요."

"그렇겠지.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곳 천산의 귀는 밝으니까."

한데 말과 달리 장이서의 표정이 내심 좋지 않다.

"걱정거리라도 있으신 겁니까."

"오래지 않아 다시 소란스러워질 거 같거든."

도살방 건이 해결된 지 얼마나 됐다고. 하나 이유는 충분했다.

"교주가 칠공자한테 백인장의 인을 하사했다."

"예? 백인장이라면... 대공자와 이공자만이 지니고 있던 신패 아닙니까."

"맞아."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취홍란은 화들짝 놀랐다.

교주가 인정한 일곱 명의 후계자.

이른바 칠대공자.

이들 중 유력한 소교주 후보로 꼽히는 세 사람은 교주로부터 특별한 권능을 하사받았다.

그것이 바로 세를 꾸릴 수 있는 인(印).

해서 이들에겐 각자의 세력이 존재했다.

먼저 사해령을 따르는 은빛 가면의 십인(十人) 고수, 월광십귀(月狂十鬼).

모두가 가장 난폭하다는 광룡당 출신으로 전대 당주인 보좌 나락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괴물 중의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십인.

칼잡이로는 충분하지만, 여타 조직을 전면에서 위협할 만한 숫자는 아니다.

진짜는 이들 둘이었다.

'대공자의 흑화위(黑火衛)와 이공자의 백괴단(百怪團).'

모두 총 백인으로 구성되어 능히 단일 세력으로 마교 내 웬만한 조직은 손쉽게 와해시킬 정도였다.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권력 그 자체.

한데 칠공자가 그들과 똑같은 일백 인의 세력을 이룰 수 있는 권능을 갖게 되었다니.

"그럼 저희에겐 잘된 일 아닙니까."

맞다. 그래서 선물이라고 받은 걸 테고.

하지만.

"호사다마. 좋은 일엔 늘 방해가 꼬이기 마련이지."

"그 말씀은...."

"소교주로 삼자 구도가 명확해진 이 시국에 교주가 칠공자에게 백인장의 인을 하사했어.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일이야. 아마 편애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럼 어떻게 될까."

장이서의 말에 그녀가 얕게 침음을 삼켰다.

"대공자가 움직일 거라는 말이십니까."

"확실히."

장이서는 확신했다.

그가 조사한 바로 대공자 천무기는 차분함으로 이목을 숨기고, 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를 품은 사내였다.

지금까진 마오를 풀어둔 건 그가 망나니였기 때문.

교주의 총애를 받았다고 생각한 순간. 어떤 식으로든 손을 쓰려고 할 것임이 분명했다.

"너무 앞서 생각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백인의 세력을 모은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또 칠공자 아닙니까."

그래, 망나니 칠공자 마오.

세간엔 뭘 해도 기대는커녕 비웃음만 사는 아이.

하나.

"우리만 생각하면 그 말도 맞아. 하지만 대공자 생각은 다를걸. 이 사태를 절대 간과하지 않을 거다."

"어째서입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

대공자가 고작 망나니로 평 받던 칠공자가 대체 뭐가 두려워서.

하지만 장이서가 이처럼 확신하는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를 삼공녀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아...!"

쿵! 홍란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그리고 장이서의 말이 단박에 이해가 갔다.

망나니라면 백인장이든, 십인장이든 그냥 거슬리는 정도겠지만, 경쟁자인 사해령이라면 다르다.

"위기의식을 느끼겠군요."

정답이다.

그녀가 아끼는 칠공자가 그녀가 추천한 보좌와 함께 백인장의 인을 따냈다.

대공자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마 사해령한테 한 방 먹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견제가 들어오는 건 불가피한 일.

"안 그래도 쉽지 않을 텐데... 더더욱 어려워지겠군요."

"맞아. 하지만 그래도 우린 세를 키워야 해. 그래야 이 싸움에서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싸움에도 급이라는 게 있다. 민물의 포식자인 메기가 바다에 나가면 한 입 거리로 전락하듯, 지금 장이서가 논하는 이 싸움은 도살방 때와는 체급 자체가 다른 판이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사도련까지.

천하가 치를 떨고 두려워했던 마교의 중추들이 뒤엉켜 싸우는 판이다.

어설프게 잔꾀만 굴리다간 꿈틀대기도 전에 잡아먹히고 말 일.

대공자가 어떻게 움직일지라도 알고 있다면....

장이서의 침묵이 길어지자 홍란이 넌지시 운을 띄웠다.

"혹 방첩대에게 도움을 청해보는 건 어떨까요? 일전에도 도움을 받았지 않았습니까."

"불가."

겸사익은 인연이나 낭만에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경조사야 저도 받아야 하니까 챙긴다지만, 이건 전혀 다른 정치의 영역.

돈이라면 모를까. 절대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들을 움직이려면 천마고를 다 털어도 부족할 게 뻔했다. 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천문학적인 돈을 요구할 테니.

'금삭도가 황금알을 낳는구나! 크하하!'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차라리....

"방(榜)을 띄우는 게 좋겠어."

공개 모집이다.

78.

#공개모집 (1)

"방이라면... 모두에게 알리겠단 건가요?"

"그래. 그것도 아주 파격적인 조건으로.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전부 걸어."

"네?"

"무기든, 무공이든, 영약이든. 다 준다고 해. 누구든 혹할 수 있게."

"아니, 하지만...."

"아, 오룡당 현직이면 참가만 해도 거마비까지 두둑이 준다고 해."

"주인님...."

취홍란은 곧장 울상을 지었다. 도저히 장이서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시면 대공자의 이목만 더 끌게 될 텐데.... 게다가 주인님이 가진 자본이 크다는 것까지 알려주는 셈이잖아.'

한 마디로 표적이 되기 더 쉽다는 얘기.

한데 도대체 왜.

"대신 모집은 삼소궁에서 한다고 적어."

"예?"

"덩달아 엮여 골머리 썩는데 우리만 고생하는 건 억울하잖아. 그리고 그녀 이름 정도는 나와줘야 사람들도 와 주지 않겠어?"

"아니.... 그렇게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요?"

"장소하고 이름만 빌리는 건데, 뭘. 그리고 들어줄 수밖에 없어."

장이서가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그리고 이를 본 취홍란은 점점 입이 벌려지고, 정신이 멍해졌다.

그의 의도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천무기의 시선을... 먼저 삼공녀 쪽에 잡아두시려는 거구나!'

맙소사.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이렇게 되면 대공자도 삼공녀가 작정하고 선수를 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럼 그가 취할 행동은 하나뿐이야. 손실이 크더라도 어떻게든 이 일을 덮는 것. 주인님은 거기서 틈을 노리시려는 거다....'

부르르. 취홍란은 저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다. 그리고 다시 장이서를 살피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이 실로 교활하고, 음흉해 보였다.

'뱀이야. 그것도 무서운데 착한 뱀.'

이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하겠습니다. 대대적으로 방을 붙이고, 어느 정도 자금도 미리 풀어둘게요.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

"역시 루주는 척하면 딱이라니까."

"부끄럽습니다."

"기왕 부끄러운 거 일 하나만 더 해. 인근 부족들이 최근까지 전쟁을 벌였어. 다들 마교 눈치 보고 사는 처지인 건 똑같지만, 그중엔 산왕가처럼 무시 못 할 자들도 존재하지."

갑자기 북방의 정세는 왜....

하나 장이서가 쓸데없이 말을 꺼냈을 리는 없는 일.

홍란이 귀를 쫑긋 세우자 그의 입에서 지시가 떨어졌다.

"최근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낸 자들이 누가 있는지 알아봐봐."

"그 말씀은...!"

"어차피 이 안에서 백날 모아봤자 그놈이 그 새끼야. 사상부터 흉흉한 마인들이지. 그럴 거면 아예 밖에서 데려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런 거구나. 삼공녀 쪽으로 그들의 눈을 돌리고, 밖으로 움직이실 생각인 거야.

역시 주인님은....

"오늘은 늦었으니까 그만 가 봐. 조만간 다시 얘기하지."

"예!"

홍란이 일어서며 다소곳이 인사를 올렸다. 이에 장이서가 손을 들어 답하자 그녀는 단아한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장이서는 창문을 텅 열곤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불리한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없어. 그럴 땐 판을 직접 짜는 수밖에."

어차피 상대의 수를 읽어낼 수 없다면, 차라리 이쪽에서 수를 정하여 유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장이서가 내린 계책.

"천무기. 이제 어찌할 테냐. 내 초대에 응할 것이냐."

달빛 아래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의 미소가 자욱이 번지는 밤이었다.

* * *

며칠 후.

장이서의 의도대로 천산이 크게 들썩였다.

객잔이며, 벽이며 할 거 없이 사방 곳곳에 붙은 방이 그 이유였다.

"자네들 봤는가? 이번에 삼공녀께서 사람을 모으는데, 조건이 아주 좋더구먼."

"봤네. 달에 은자만 닷 냥을 준다던데. 거짓말 아닌가?"

"거짓말은 무슨. 내 야장한테 듣기로 지금 삼공녀님 앞으로 최고급 병장기들 주문이 싹 다 잡혔다던데."

"세상에. 그럼 맞네!"

그저 동네 한 바퀴만 걸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형님! 얘기 들으셨습니까? 마오 이 새끼가 세력을 꾸린다는데요?!"

"크큭... 하하하하! 그게 가능하면 손을 장에 지져주마."

목발을 짚고 마가로 달려온 마진구와 이를 듣고 광소를 터트린 마이신도.

"장 보좌... 대단해!"

주마지 언덕에 앉아 쓸쓸히 풀을 뜯고 있던 맹휘도.

그 누구 하나 모를 수 없게 일파만파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당연히 대공자 천무기가 거주하는 일소궁이 자리한 마을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을 가져오거라."

흑색 피풍의 속에 얼굴까지 붕대로 휘감은 자가 갈라지는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겉보기에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의 이름은 환사.

전대에는 유령마군(幽靈魔帝)이라는 별호로 잘 알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보다는 직책이 더 익숙했다.

일공자 보좌.

바로 대공자 천무기의 오른팔 말이다.

"가져왔습니다."

무사 하나가 다가와 절도 있게 고이 접힌 방을 건넨다. 흑색 피풍의에 피로 새겨진 것 같은 불꽃 문양. 천무기를 따르는 일백 명의 검은 마귀, 흑화위(黑火衛)다.

"삼소궁에서 감히 이딴 짓을...."

방을 펼쳐 살피던 유령마군의 눈에서 짙은 살광이 뿜어졌다. 이에 주변을 지나던 교인들이 식겁하며 쳐다보자.

스스슥!

흑화위가 차륜전을 펼치며 교인들에게 갈 길 가라는 듯 위압감으로 밀어낸다.

방의 내용은 기가 차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一. 삼소궁에서 일백 인의 마웅을 모집한다.

二. 오직 실력만 보고 뽑을 것이며, 최고의 대우를 약속한다.

三. 오룡당 현직인 자가 참가하면 거마비를 지급한다.

그리고 콩알처럼 자그마하게 적혀진 글귀 하나.

* 단, 소속은 칠소궁으로 한다.

최근 칠공자가 백인장의 인을 하사받았다는 건 알음알음 다 퍼진 내용. 그러니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삼공녀와 칠공자 둘이서 작정하고 수작을 부리겠다는 얘기지.

유령마군은 방을 팍! 다시 접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대공자님께 돌아간다."

*

기와부터 담벼락까지 온통 흑색으로 칠해진 커다란 장원.

심지어 복도 바닥도, 안쪽 끝의 장지문도. 모든 게 어둡기만 하다.

그나마 한 가지 특색이 있다면 그건 바로 불꽃.

호룡당이 범이었다면 이곳은 곳곳이 다 불꽃의 문양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마교에 이 같은 곳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일소궁 흑화원(黑火院).

마을에서 바로 복귀한 유령마군은 길고 좁은 복도에 흑화위가 각기 대기 중인 일곱 개의 장지문을 지나서야 그의 방에 다다랐다.

드르륵. 이내 마지막 문이 열리자, 정중앙 탁자 앞에 앉은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긴 흑발에 흑의. 일말의 감정도 없어 보이는 차분한 눈빛.

자리에 앉아 난초를 그리는 자세마저도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다.

마인이 득실대는 이곳에서 시문(詩文)과 서화(書畫)를 즐긴다는 게 실로 모순적이지만, 또 묘하게 어울리는 이 남자.

대공자 천무기.

바로 그였다.

보좌인 유령마군은 별말 없이 삼보 앞에서 옆으로 빠져 기둥처럼 뻣뻣하게 시립했다.

그러곤 묵묵히 기다렸다.

그가 다시 움직인 건 천무기가 난을 다 그리고 붓을 툭 내려놓은 후였다.

"무슨 일이더냐."

고저 없이 차분한 목소리. 듣기만 해도 알겠다. 코앞에 벼락이 떨어져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다.

이는 마교 제일 기재라 불리던 유년 시절에도 그랬었다.

늘 감정이 휘몰아치는 마이신과 달리 그는 돌처럼 잠잠했다.

하여 이들 둘을 놓고 불과 물이라 지칭하던 때도 있었다.

옛날얘기다.

"삼소궁에서 교내에 이런 걸 붙여두었습니다."

유령마군이 조심히 다가와 방을 건넸다. 이를 펼쳐 든 천무기는 산문을 읽듯 무심히 읽어내렸다.

오히려 이를 지켜보는 유령마군의 마음이 조급할 정도.

천무기는 금세 다 읽었는지 도로 건네주곤 역시나 고저 없이 평했다.

"셋째가 기특한 짓을 벌였구나. 막내가 받은 인을 제 사리사욕을 위해 쓰겠다니."

"이건 선을 넘은 것입니다. 칠공자에게 보좌를 붙였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아니다. 이건 셋째를 인정해 주는 것이 옳다. 이젠 오라비들마저 속일 만큼 다 컸다는 얘기 아니겠느냐."

설마 그래서 넘어가 주겠다는 것인가? 이런 발칙한 짓을 보고도?

아니, 그럴 리가.

유령마군의 입꼬리가 올라섰다.

전대의 대마두인 그가 모시는 천무기는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다 컸으니 이젠 철부지 애로만 대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수밖에."

역시.

온화한 얼굴 속에 무자비함을 갖춘 냉혈의 검.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만마를 휘두를 자격이 있는 유일한 자.

그것이 바로 대공자 천무기였다.

"어찌할까요."

유령마군이 서늘한 어조로 물었다. 당장 명령만 내려주면 칠소궁이든, 삼소궁이든. 그냥 싹 다 뭉개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리고 아마 천방지축 이공자였다면 그리 명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나.

'사해령. 가만히 있어도 어련히 손 봐줬을 것을. 너답지 않게 먼저 머리를 썼구나. 힘이 안 되니, 모두의 이목을 끌어 방패로 쓰겠다는 것이겠지. 누구냐. 넌 이런 얄팍한 수를 짜낼 아이가 아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은 것이냐.'

천무기는 문무를 갖춘 만능형.

이미 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를 품고 있는 자였다.

이 계략이 사해령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까지 단번에 알아낼 만큼 말이다.

"명만 내려주신다면 사흘 안에 모조리 쓸고 오겠습니다."

한데 그 와중에 유령마군이 음산한 기운을 드러내며 눈치 없이 말을 뱉는다.

"흐음."

하나 천무기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고민하는 척 침음을 뱉었다.

이는 그의 말에 혹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가 그런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성정이 불같고 자나 깨나 살심이 깊은 자.

이런 자들은 저에게 맞게 바꾸는 쪽이 아니라 그냥 그런 순간이 필요할 때 쓰면 되는 거다.

물론 그렇기에 쓰일 구석은 늘 뻔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게 이번은 아니었다.

이번엔 여론이 쏠린 만큼 자신들을 대신해 전면에 나서줄 자들이 필요했다.

가령....

"천무기이이이이이-!"

지금같이 천방지축으로 분간 못 하고 달려와 소리나 내지르는 이공자 무한성처럼 말이다.

씨익. 천무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한편 일소궁 담장 밖에는 웬 무뢰배들이 즐비해 있었다.

분명 한 패거리인 건 알겠는데 마땅한 복식도 없고, 병장기도 제멋대로. 심지어 서 있는 자세들도 껄렁대며 가지각색인 게 불량하기 짝이 없다.

하나 이들을 단순 왈패로 치부하기엔 풍기는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다.

낄낄대는 웃음 사이에서 느껴지는 섬찟한 눈빛.

하나하나가 어디 가서 한 명 보기도 힘든 독종 같은 용모.

굳이 왈패로 치겠다면 전국의 두목들만 고루 모아 놓은 느낌.

한마디로 기센 놈들.

딱 그거였다.

꼭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오룡당에서도 사고뭉치로 통하던 백 명의 괴짜들.

이공자의 사조직인 백괴단(百怪團)이었으니 말이다.

"천무기이이이이이-!"

그리고 목청 터져라 대공자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는 이 사자머리 사내가 바로 이공자.

패왕권제(霸王拳帝) 무한성이었다.

79.

#공개모집 (2)

명실상부 차기 소교주로 가장 유력시되는 사내 중 하나.

그가 일소궁에 찾아왔다.

그것도 전력을 이끌고서.

"문이라도 부술까요."

바로 뒤에 독사처럼 생긴 마른 사내는 보좌 조양악.

"됐어. 저기 나오네."

무한성은 씩 웃으며 전방에 고갯짓했다.

그러자, 끼이이이익!

일소궁의 문이 열리고 무감정한 살귀 흑화위가 먹물이 번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길목으로 고고한 흑로처럼 무결한 용모의 사내가 걸어 나온다.

대공자 천무기. 바로 그다.

똑같은 형제의 만남이거늘, 맹휘와 마오가 만나던 것과는 그야말로 천양지차.

용과 범이 만난 것처럼 양측에서 살벌한 기운이 물씬 쏟아진다.

잠시 후 서로의 경계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저지선에 두 공자가 마주 섰다.

보좌들은 당장이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공자들의 우측 뒤에 시립한 채 서로를 노려 살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기세. 긴장감이 잔뜩 고조된 그때.

두 공자의 입이 열렸다.

"보고 싶어 찾아온 거라면, 이리 부끄러워 말고 안으로 들어오면 될 일을. 몸소 온 아우를 내칠 만큼 박하지 않다."

"부르면 알아서 기어 나올 걸 내가 뭐 하러. 게다가 저리 우중충하고 고리타분한 집구석엔 발 들이기가 싫네."

"마음이 조급해졌던 거로구나. 하나 그렇다고 해도 지금처럼 표면에 드러내진 말거라. 상대는 너의 이런 모습을 약점으로 알고 우습게 볼 테니."

"훈계질은 셋째나 막내한테 가서 하시지. 이번엔 아주 제대로 당한 모양이던데. 형님 꼴이야말로 아주 우스워졌잖아."

"그래 보였느냐."

"어. 왜. 혹시 화났어? 그럼 붙어보든지."

솨아아아아-

그야말로 살 떨리는 기 싸움. 이미 주변의 공기는 낙엽마저 찢을 것처럼 첨예하고, 양측 세력의 손에는 병장기가 들렸다.

이 정도면 동전 한 닢만 사이에 떨어져도 칼부림 날 수준.

하나 한없이 차분하기만 한 대공자의 모습에 이공자 무한성은 금세 맥이 빠졌다.

"쳇. 하여튼 재미라고는 뭣도 없다니까."

이내 손을 뒤로 휘젓는다. 둘이 대화할 테니 밖으로 물러나 쥐새끼도 못 들어오게 막으라는 얘기.

그러자 보좌를 비롯해 백괴단이 한참을 떨어져 반원으로 영역을 만든다.

"구경났어? 꺼져."

지나가는 교인들한테 시비 거는 건 덤이고.

"물러서라."

천무기 역시 이를 지켜보곤 유령마군에게 돌아가라 명했다. 그러자 흑화위가 일시에 담장 위로 올라가 칼을 뽑아 든 채 경계하듯 자리한다.

껄렁거리던 백괴단과 달리 절도와 위엄이 느껴지는 모습.

물론 무한성 입장에서는 똥 같은 군기일 뿐이다.

"내 집이라고 유세는."

"찾아온 이유나 얘기하거라."

"알면서 뭘 물어. 어쩔 거야? 아주 사방팔방 난리가 났는데."

무한성이 인상을 와락 찌푸린다. 그가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천산 곳곳에 붙은 방이 그 원인이었다.

"백인장의 인이라니. 아버님도 생각이 이상해지신 거 아니야? 어떻게 막내 새끼한테 그걸 주냐고. 또 그 새끼는 자존심도 없이 쪼르르 셋째한테 갖다 바쳐? 이게 콩가루지. 안 그래?"

"말조심하거라."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옛날부터 의지도 없는 막내 새끼 거둬준 것도 어이가 없고, 셋째만 총애하던 것도 기가 막히는데. 이젠 대놓고 싸고돌겠다는 거 아니면 뭐냐고."

"아버님에 대한 불충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하나 한 번 더 입을 놀리면 그땐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야."

"속으로 좋으면서 입은. 효자 놀이하는 건 잘 알겠으니까,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냐고."

본디 두 사람은 가장 경쟁이 치열한 관계. 누구보다 사이가 좋지 않다. 하나, 삼공녀가 끼면 얘기는 달라졌다.

그녀 먼저 치우고, 둘이서 승부를 보자는 묵시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

"요즘 안 그래도 광룡당 내부에서 나락 그 새끼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거 알지. 머뭇거리다간 백 명 채우는 거 순식간이야. 알아?"

"그러게, 잘 관리하지 그랬느냐. 가진 것도 없이 태어난 네가 오룡당의 지지 말고는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데."

"이게 내 탓이야? 애초에 막내들부터 잡자니까 3대 가문이니 뭐니 떠들면서 막았다가 이 사달 만든 건 그쪽 아니냐고."

"흐음...."

천무기가 얕게 침음을 뱉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마오와 맹휘. 그리고 맹원원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는 장로회의 지지를 받는데 굳이 마가와 맹가를 건드려 얼굴 붉힐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니.

"알겠다. 그럼 이리하도록 하자."

천무기가 장고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히 제안했다.

"내가 장로회에 뜻을 전하고, 각 대주들을 따로 불러 모집에 참석지 말라 주의를 주겠다."

"그거로 되겠어?"

"흐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네가 삼소궁으로 가 혹여 오는 이들이 있으면 타일러 돌려보내는 게 어떠하겠느냐."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무한성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모두가 다 주목하고 있는 이 일에 욕받이는 나더러 해라?"

"그렇다고 네 성격에 가만히 앉아 타령만 늘어놓는 것도 썩 좋진 않지 않으냐."

하. 무한성이 이빨을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그러곤 사자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냥 가주면 너무 꼴이 우습지. 바보도 아니고. 안 그래?"

안 가겠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하긴, 그래야 너지.

천무기는 미약하게나마 입꼬리를 올리며 본론을 물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무한성의 입이 삐죽 올라선다.

"들었지. 오룡당 현직이면 참가만 해도 거마비를 준다던데. 온 애들 달래주고, 돌려보내려면 나도 뭐 줄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내가 누구처럼 잘나신 가문에서 뒤봐주는 놈이 아니라서 말이야."

"해서 돈을 내놓아라? 도적이더냐."

"종놈도 부리려면 대가를 치르는 게 인지상정인데. 나 정도 부리려면 곳간 하나는 털어야지. 천가에서 운영하는 상단 하나 넘겨."

천무기의 눈이 서늘해졌다. 분명 아까와 변함없는 표정이거늘 눈빛이 다르다. 그만큼 말 같지도 않은 제안이라 생각하기 때문.

하나.

"흐음."

천무기는 금세 이를 갈무리하곤 무심한 얼굴로 침음을 뱉었다. 그러곤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형이 된 도리로 부족한 아우를 챙겨주지 않을 이유도 없지."

천무기가 한발을 양보한 것이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건 무한성이었다.

'뭐야. 이걸 이렇게 쉽게 허락한다고? 이 새끼.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구나?'

그게 아니고서야 대뜸 질러본 제안이 이리 쉽게 먹힐 리가 없지 않겠는가.

"단, 천가에서 관리 중인 상단을 넘기면 시기가 공교로워 보기에도 좀 그럴 테니.... 내 마 장로께 따로 청해두도록 하마."

"마가든, 천가든. 알 바겠어. 알아서들 하시고. 동생으로서 용돈까지 받았는데 형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줘야지. 삼소궁은 내게 맡기라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들어오게 할 테니까."

무한성이 좋은 속내를 훤히 드러내며 가슴을 탕탕 쳤다.

이에 천무기는 태연한 얼굴을 하곤 속으로 그를 조롱했다.

'역시 어리석구나. 가진 거 하나 없는 네가 그 자리까지 올라선 건 딱히 어디가 빼어나서가 아니다. 기성세대와 일절 타협하지 않고, 제 길을 갔던 성향 때문인 거지. 어리석은 이들에겐 너의 이런 단순함과 무지함이 간혹 패도라는 이름으로 둔갑하니 말이다.'

한데 그런 그가 마가의 돈을 받고, 그 집안 막내를 핍박했다?

그럼 어찌 될까.

흠집 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겐 좋은 먹잇감이 될 거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공자에 대한 허물이 벗겨지고 실망만이 남게 되겠지.

무너트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실금 하나만 만들어도 그 값어치는 충분하다.

"셋째에게 안부나 잘 전해주거라."

"걔가 들어 처먹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볼게."

두 사람이 동시에 웃는다. 이로써 거래는 성사되었다.

이제 삼소궁의 모집 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성사되지 않으리라.

"참, 막내는.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애 버릇 나빠져."

무한성이 뒤돌아 나가다 우뚝 멈춰 선 채 피식 웃고 말했다.

"내가 적당히 잘 타이르도록 하마."

타이르긴 무슨. 애 잡겠다는 얘길 예쁘게도 돌려 하네.

무한성은 다시 길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천상도 삼소궁.

아마 한동안은 누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주들에게 모두 일소궁으로 들라 하거라."

"존명!"

천무기 역시 장원으로 돌아섰다.

입가에 승자의 미소를 드리운 채로.

'사해령. 네가 뭘 꾸몄든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절대로.'

하지만 이처럼 사태를 뒤에서 조종하는 천무기마저 모르는 게 하나 있었으니....

이 사태 자체가 결국엔 장이서가 짜놓은 판이며, 지금 그가 신나게 발을 담갔다는 것이었다.

* * *

- 월하촌 칠소궁.

칠소궁에 돌아온 지도 어느덧 며칠이 지났다.

장이서는 해뜨기 전 푸른 빛이 은은히 감도는 시간, 오랜만에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열린 창문 너머 새벽이슬이 느껴지는 공기, 적당히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마음이 평온해진다. 얼굴에 주름마저 없어지는 기분.

집 벗어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흡족했다.

사실 이렇게 편안히 명상에 잠기는 건 천마와의 만남 이후로 처음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천무기를 엮어내기 위해 이래저래 바빴기 때문.

오늘은 모처럼 시간이 남는 하루였다.

그리고 장이서는 내심 이 시간을 기다렸다.

이유는 명확했다.

살아생전 고치게 될 줄 몰랐던 자신의 천형.

단전에 뚫린 아홉 개의 구멍 중 하나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는 마기가 새 나가지 않아. 이유 없이 객사할 위험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야말로 엄청난 기연이었다.

우연히 천마전으로 들어서며 시작된 인연이 이런 기적을 불러올 줄이야.

더구나.

'아직 혈에 불순물이 남아 있지만, 분명 난 절정 초입에 들어섰다.'

가장 큰 쾌거는 바로 이것이었다.

평생 넘을 수 없을 거라던 일류의 벽을 깨고 절정에 오른 것.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하면.

쉽게 말해 일류가 순수하게 칼을 잘 쓰는 무사라면, 절정은 내기를 발출해 인간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괴인의 영역이었다.

어찌 다루느냐에 따라 그야말로 경천동지한 차이.

지금까지는 머리로 이해해도 몸이 따라가질 않아 제대로 펼쳐낼 수 없던 것들이 가능해진 것.

물론....

'구멍을 더 막기 전까지는 초입 이상의 단계로 올라갈 수 없겠지. 이 이상 내공이 쌓이지 않을 테니.'

하나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지금도 기적처럼 천마에게 정순한 마기를 받아 간신히 막아낸 것 아닌가.

더구나 천마의 기는 오직 하나의 길만을 답습하기에 둘로 나누어 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구규지체를 막는 건 이제 끝났단 얘기. 더는 강해질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천마도 같은 생각일 거였다.

'내 한계를 본 것이다. 그러니 정식 후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천마신공을 가르쳐 준 거다. 어차피 마교에 위협이 될 존재가 아니니까.'

80.

#창룡도의 주인 (1)

장이서는 침음을 삼키며 교주가 보여줬던 악귀를 떠올렸다.

모든 걸 다 불태울 것처럼 위압감을 풍기며 일렁이던 천마귀(天魔鬼).

만일 자신이 이를 깨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마교는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게 자명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천마신공이 소교주도 아닌 한낱 보좌의 손에서 펼쳐진다면?

개판 되는 거 한순간이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천마는 천마귀를 가르쳐줬다. 누구보다 마교를 우선시하는 그가 말이다. 그것도 그냥 구결만 던진 게 아니라 직접 이 심장에 태동시켜주었다.

왜?

'언제고 네 천마귀가 깨어난다면 그때 스스로 확인하거라.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못 깨어날 걸 아니까.

구규지체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단 걸 잘 아니까 그런 것이다.

정확하진 않으나 천마귀를 원활히 다루려면 내공이 최소 2갑자는 필요해 보였다.

정공법으로 자그마치 120년을 수련해야 쌓을 수 있는 양. 더 쉽게 말하면 절정 끝자락과 초절정 경지의 시작점을 뜻했다.

그럼 지금 장이서의 내공은 어느 정도일까.

정확히 1갑자. 딱 절반인 60년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경지로 치자면 절정 초입.

'날고 기는 자들도 초절정 경지에 오르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나는 최소 구멍을 네 개까지는 막아야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천마가 당당하게 천마귀를 가르쳐 준 이유였다.

절대 깨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해서 다음에 오라는 언질도 없던 것이다. 더는 기대할 게 없을 테니.

하지만 아쉬움은 없다. 오히려 좋다.

천마의 관심이 커질수록, 그만큼 임무도 어려워졌을 테니까.

'잠깐. 근데 고독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니, 아닐 거다. 생사신의가 이건 절대 알아챌 수 없다고 했었으니.... 게다가 알았다면 살려뒀을 리도 없고.

후. 깊게 숨을 뱉었다.

어쨌든 이젠 고독까지 사라졌으니 사실상 자유의 몸.

하지만 그렇다고 바뀌는 건 없다.

제 본질이 정도(正道)에 있다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

그들이 먼저 도를 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암각은 마오를 소교주로 만들라고만 했지, 그 후에 대해선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속 좋게 생각하면 그냥 맹한 놈 위로 올려 전쟁을 막겠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장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일이 그리 쉽게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여곡절 끝에 마오를 소교주로 올린다 한들, 모든 게 끝일까?

천만에.

어설프게 했다간 오히려 마교에 내란만 일으킬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암각이 바라는 일일 수도 있었다.

'내 임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마오가 소교주에 가까워질수록 교내의 반발은 커진다. 그만큼 분란이 잦고, 세는 찢어지겠지. 자중지란에 빠지는 거다.'

그러다 만일 정사마의 힘 균형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무림맹에서 먼저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다.'

맞다. 과도한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장이서는 무슨 이유에서든 세상이 혼란에 빠지는 건 원치 않았다. 또한 그런 폭풍에 휩쓸려 사라지는 희생양이 되길 바라지도 않았고.

'기우이길 바라야지.'

물론.

'만약을 대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놔야겠지만.'

장이서는 조용히 심호흡하며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그러자 창밖에 아침 댓바람부터 괴성을 내지르며 안채로 달려 나가는 빨간 머리 소년이 보였다.

"으랴아아아아!"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주인.

'우선 너부터 일단 강해져야겠다.'

칠공자 마오.

*

"젠장!"

마오는 바닥에 팔짱을 낀 채 드러눕고는 욕지기를 뱉었다.

안채 초입에선 그를 날려버린 쇠추가 다시금 천장으로 말려 올라간다.

과거와 다르게 이젠 맞아도 견딜 만은 했다. 아니, 더 냉정히 말하자면 버텨낼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오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었다.

"왜 안 피해지냐고. 왜."

피하고 싶었다.

교주의 지풍도 막아낸 자신 아닌가. 그럼 이제 좀 맞기만 할 게 아니라 멋들어지게 피해낼 줄도 알아야 하는 법.

한데 분명 뻔히 어디서 날아오는지 아는데도 영 발재간이 따라주질 않았다.

"꼬맹이랑 장이서는 쇽쇽 거리면서 잘만 빠져나가더구만. 천재인 내가 그게 안 된다고? 왜. 설마 타고난 위엄 때문인가...?"

합리적인 추론. 마오가 집게손가락을 제 턱밑에 붙였다. 그러곤 대뜸 데구루루 옆으로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턱! 무언가에 가로막혀 멈춰졌다. 이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통 이런 모습을 위엄이라고 하진 않죠. 조금 위협적이긴 하겠네요. 너무 놀라워서."

"장이서!"

파란 하늘 대신 그의 웃는 얼굴이 보인다.

"웬일이야? 요 며칠 바쁘더니."

"아침부터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바닥 청소하는 것도 아니고."

"아."

마오가 활짝 웃으며 팔딱 뛰듯이 일어섰다. 그러곤 몸을 탁탁 털면서 말했다.

"몸이 구르면 혹시 머리도 잘 굴러가지 않을까 했지."

그런 얘기를 당당히 할 수 있는 네가 진정한 승자다.

장이서는 피식 웃고는 안채를 바라보며 말했다.

"쇠추를 피하려고 했던 겁니까?"

"어, 근데 됐어. 이제 급한 것도 없는데. 천천히 하련다."

"급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수련을 나오셨다고요."

"아니, 그거야... 심심하기도 하고...."

마오가 괜스레 딴청을 피우자 장이서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뭐."

"거짓말 정말 못하는 거."

"뭐, 이 자식아?"

"어디 가서 남 속이려곤 하지 마십시오."

마오가 한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순간, 장이서가 다시 돌아서선 안채를 바라보며 비수처럼 핵심을 찔렀다.

"무혈공한테 맞은 게 억울하셨습니까?"

"...!"

마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러자 쉴 새 없이 장이서의 물음이 이어졌다.

"복수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복수... 하고 싶냐고?

마오는 한참을 입을 오물거리며 고민했다.

지금 이 감정이 뭘까.

솔직히 얻어맞았던 날에는 마냥 기뻤었다. 그 미친개한테 굴하지 않고 버텨냈다는 마음으로 위로를 했던 거 같다.

그런데 조찬을 다녀온 후부터는 뭔가가 이상했다.

왠지 모를 수치심과 모멸감이 눈만 감으면 느껴졌다. 심지어 날이 갈수록 더 커져 이젠 잠도 자기가 싫었다.

분명히 그랬다.

"솔직히...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식한테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

"왜요. 상대가 너무 미워서?"

"아니. 나한테 화가 나서."

음? 장이서가 고개를 갸웃하자 마오는 두서없이 속내를 털어놨다.

"원래 그 자식을 떠올리면 늘 안개가 끼어 있는 거 같았거든. 왜 그런 거 있잖아. 아무리 손을 휘둘러도 닿지 않을 거 같은 그런 x같은 기분. 덤벼도 덤벼도 질 것만 같은. 그래서 이긴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질 않았거든? 근데 이상해. 지금은 진짜 지고 싶지 않아. 너무너무 이기고 싶어. 장이서. 이거 내가 이상한 거야?"

아니.... 아주 지극히 정상이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생각을 해낸 거다.

장이서는 기쁨을 감춘 채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는 그걸 호승심이라고 하죠."

"호승심?"

"이기고자 하는 마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길 수 있다는 미련. 칠공자님은 드디어 강해질 수 있는 첫 번째 심기(心機)를 얻으신 겁니다."

"강해질 수 있는 심기...."

무림인은 평생을 수련해야 하는 자. 장이서는 그런 무림인에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이기고 싶다는 호승심.

둘째는 고행을 버텨내는 인내심.

셋째는 스스로를 믿는 자긍심.

넷째는 목표를 관철하는 부동심.

선악을 떠나 이러한 심기가 없이는 절대 일정 경지 이상은 이룰 수 없다고 믿었다.

왜?

자신이 하는 수련에 계속해서 의문을 품게 될 테니까.

그럴 때마다 나태해지고, 나약해질 테니까.

그리고 마오는 무림인이 아니었기에 이런 심기를 가질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 해서 수련할 때마다 애써 이유를 찾아야 했다.

문을 열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

'한데 천마의 지풍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처음으로 호승심이 생겨난 거다.'

천마도 막았는데. 그보다 발톱의 때만큼도 못한 마이신한텐 죽도록 처맞았다. 그것도 하필 제 벗들을 죽인 원수 새끼한테.

마오는 거기서 울분을 느낀 거다.

그리고 이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무혈공을 이기고 싶으십니까?"

장이서의 물음에 마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열렬하게."

"좋습니다. 그 소원 이루어드리죠."

"진짜로?"

"대결은 두어 달 후. 마가에서 성대하게 치를 겁니다."

"잠깐만.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이미 마이신과도 다 합의 봤습니다."

"갑자기?! 대체 언제! 난 방금 정했는데?!"

네가 죽도록 맞고 기절한 날.

"뭐지? 지금 이거 나만 이상해?"

"토 달지 마십시오. 중요한 건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니까. 그런 의미로 수련은 아주 혹독할 겁니다."

하. 마오가 싱숭생숭한 얼굴로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점점 눈에 생기를 불태우며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아. 이길 수만 있으면 뭐든 다 해주지! 우하하하!"

역시 마오. 생각이 참 단순해서 좋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필승의 전략뿐.

장이서는 눈매를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무림인이 강해지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무공을 익히는 것.

그리고 여기서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원동력이 되는 내기를 강화하는 심법과 이를 구현하는 체행법(體行法).

'그리고 대부분은 선천적인 재능과 인연의 운이 뒤따라야 하는 심법에서 좌절하게 되지. 한데 마오는....'

"덤벼라, 세상아-! 내가 천재 마오다! 우하하하하!"

솨아아아! 그저 웃는 것일 뿐인데도 대나무 숲까지 내기가 뻗쳐나갈 만큼 웅장한 공력을 지녔다.

이미 내공만 놓고 보면 초절정 문턱에 다다른 수준.

그러니....

'저 극양지력에 어울리는 무공만 익히면 된다는 얘기. 그리고 그건... 이미 손에 넣었다.'

장이서는 제 등에 매여 있는 날이 널찍한 도 한 자루를 풀었다. 흑철에 붉은 천이 휘감긴 칼집.

"응? 잠깐... 그건...?"

그리고 그제야 이를 본 마오가 눈매를 좁히며 중얼거렸다. 아주 낯이 익었기 때문.

의심으로 가득 차 있던 두 눈은 마침내 장이서가 이를 뽑아 든 순간. 반가움의 고성으로 바뀌었다.

"창룡도-!"

넓적한 회색빛 도면에 날아오르는 용이 인각된 명도(名刀).

교주에게 하사받은 신물이자 그간 봉인해 뒀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마오가 단기간에 폭풍처럼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마이신에게 호언장담했던 이유였다.

'천마는 자식들이 천마전의 문을 열면 천하를 위시할 수 있는 무공을 전수해주었다. 무한성에겐 패왕권(覇王拳)을. 사해령에겐 환영신보(幻影神步)를. 다른 이들도 상세히 알려지진 않았으나 분명 폐관에 들었다고 알려졌다.'

한데 그런 천마가 마오에게 준 것은 오직 하나.

처음 제자가 되었을 때 주었었던 신물 창룡도였다.

그리고 이를 마오가 저도 모르게 휘둘렀을 땐....

'자, 장이서! 살려줘-!'

마치 불꽃을 다루는 도신(刀神)이라도 씐 것처럼 상상을 불허하는 칼솜씨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는 칼에 깃든 전인의 잔념(殘念) 탓이 분명했다.

비록 전인이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엄청난 고수였던 것은 분명한 일.

바꿔 말하자면 그의 무공이 일부 담겨 있다는 얘기다.

81.

#창룡도의 주인 (2)

'문제는 다루어야 할 칼에게 도리어 잡아먹힐까 봐, 그동안 봉인해 두었던 건데.... 이제는 시간이 없다.'

대공자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이신도 칼을 갈고 기다리고 있다.

한데 고작 지금 수준에 안주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

바다로 가기 위해선 마오가 먼저 몸집을 키워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솨아아아아-

적막을 깨트리고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분다.

장이서는 척! 칼을 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

"칠공자님께선 이제 이 칼의 주인이 되셔야만 합니다."

반드시.

"이 칼의 주인이 되라고...?"

마오가 적잖이 충격받은 얼굴로 창룡도를 받는다. 그러곤 도면을 살피며 말했다.

"원래 주인이 난데...?"

물론 갈 길이 구만리겠지만 말이다.

*

장이서는 마오에게 칼집을 건네주곤 경고하듯이 말했다.

"전에 보셔서 아시겠지만, 창룡도는 의지를 가진 신물입니다. 어설프게 다루려 했다가는 오히려 잡아먹히기 십상이죠."

"나 그거 뭔 말인지 알아. 그때 이 자식이 제멋대로 날뛰는 바람에 내가 꼴이 아주 우스워졌잖아?"

마오가 창룡도를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린다. 보아하니 금방 친해지겠다.

"병기는 무인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벗이자 동반자입니다. 아무리 고강의 병기를 쥐었다고 해도, 제 손에 맞지 않으면 열두 살 때 처음 쥔 병기만도 못하다는 말은 괜한 것이 아니죠."

"오."

어느새 마오는 바닥에 앉아 집게손가락으로 턱을 짚고는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갖고 계신 그 창룡도는 칠공자님과 그 무엇보다도 상성이 잘 맞는 단짝일 겁니다. 지닌 화기(火氣)가 강해 칠공자님의 양기를 분명 잘 수용해줄 테니까요."

"맞아. 아버님께서도 이 녀석이 날 인정해줬다고 했었어."

그래. 그랬다고 했지. 그리고 천마의 지풍도 쳐냈다고.

하지만 일평생 칼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마오의 실력으로 그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창룡도의 의념이 마오를 움직인 것이지.

"아니, 근데 인정했다면서 왜 멋대로 날뛰는 건데?"

그거야... 주인이 만만하니까. 장이서가 입맛을 다셨다.

한참 봉인돼 있던 신물이 새로운 주인을 만났으니, 날뛰고 싶은 건 당연지사. 한데 주인이란 자가 제 의지에 이리저리 휘둘리니 점점 도를 넘어서는 거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멋대로 날뛰지 않게 친해져 봐야죠. 아주 가깝게. 친구처럼."

"누구랑. 설마 내가 얘랑? 그게 말이 돼? 이건 그냥 칼이잖아."

"왜 말이 안 됩니까. 하면 다 하는 거지."

"세상에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지. 친구는 아무나 하냐?"

"못할 건 뭐냐."

"아니, 이딴 말도 못 하는 쇳덩어리랑.... 잠깐. 근데 너 왜 반말...."

"친해지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윽!"

장이서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근엄하게 툭 말을 자르고 나섰다. 이에 마오의 코가 벌렁거리고 콧김이 숭숭 나온다. 하나 어쩌겠는가. 스승 말 들어야지.

"계속 쥐고 계십시오. 잘 때든, 깰 때든, 어디를 가든. 웬만해선 절대 놓지 마십시오. 우선 손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럼 어느 순간 내 칼이 나한테 바라는 게 무언지 조금은 느껴지게 될 겁니다."

"...."

마오는 손에 쥔 창룡도를 물끄러미 내려 살폈다. 그러고 보니 왠지 손바닥이 조금은 울렁이는 게 저한테 말을 걸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심박동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얘랑 친해지기만 하면.... 그럼 정말 마이신 그 자식을 이길 수 있다, 이거지?"

그건 모르지. 하지만 친해지든, 안 친해지든 네가 질 일은 없을 거다. 무슨 수를 써 서든 절대 그리 만들지 않을 것이니.

"예."

"좋아.... 그럼 해주지 뭐. 친, 구."

벌떡 일어선 마오가 칼을 높이 척! 쳐들고 외쳤다.

"이제부터 너는 내 친구 도룡이다! 그러니 내 말에 절대복종하라. 우하하하하!"

친구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떠드는 거냐. 그리고 창룡이도 아니고 도룡이는 뭔데.

이 새끼가 친구 없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장이서가 고개를 절절 젓고는 말했다.

"어쨌든 주의해야 할 건 절대로 손에 쥔 채로 내기를 운용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이미 했는데?"

"뭐?"

우우웅! 공명음이 울리고 눈을 크게 깜빡이자 마오의 단전에서 주황빛 광채가 삽시간에 그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화르륵!

죽어 있는 것 같던 회색 도면이 주황빛으로 생기 있게 물들고, 뒤이어.

쐐애애애액!

"으갸아아악!"

장이서를 향해 거침없이 횡으로 베어졌다.

이런 미친놈이!

이에 상체를 뒤로 확 젖혀 가까스로 피해낸 장이서. 코 위를 스쳐 지나가는 칼날에 지독한 열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빠르다!

쐐애애액!

피해내자마자 말 한마디 꺼낼 틈도 없이 또다시 칼날이 정수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번엔 종(縱-세로) 베기다. 그야말로 일도양단할 기세.

"자, 장이서!"

울먹이는 마오의 외침.

그 순간 장이서의 눈빛이 시리도록 차가워지고, 파직! 전신에 벼락이 휘감겼다.

그리고 이형환위!

콰앙!

마오의 창룡도가 허상을 베어낸 뒤,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불기둥이 용오름처럼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는 손바닥을 어깨 뒤로 빼낸 채 자세를 잡고 선 장이서가 있었다.

『철쇄장(鐵碎掌)』

그리고 척추를 향해 무섭게 쏘아지는 일장.

퍼억!

"크아아아악!"

와당탕! 한참을 날아가 패대기쳐지는 마오. 이내 사지를 부르르 떨다가 혼절해 버린다.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삼류 무공 철쇄장.

하지만 펼치는 이가 무리를 꿰뚫는 장이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까딱하면 반신불수.

물론 마오니까 괜찮다. 아니, 괜찮을 거다.

"역시 금방 친해지겠어. 그 와중에도 칼은 안 놓고 있는 걸 보면."

장이서는 기절한 마오를 만족스레 바라보곤 몸을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마오는 이제부터 천천히 지켜보면 될 일이고.

"슬슬 천무기가 더 날뛰기 전에 나서줘야겠군."

장이서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섰다.

그러곤 칠소궁 밖으로 걸음을 나섰다.

외근이다.

* * *

- 천상도 삼소궁.

뜨거운 온천 호수 위에 자리한 외딴섬, 천상도.

이곳 주인인 사해령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짙게 서렸다.

만년 설산의 시들지 않는 빙화처럼 늘 꼿꼿하기만 한 그녀를 이토록 뒤흔드는 이는 최근 들어 단 한 명뿐이었다.

'장이서. 너....'

칠공자 보좌 장이서.

바로 그였다.

게다가 이번의 감정은 놀라움이나 신선함. 설렘과 같은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진산, 부탁 좀 하자. 삼공녀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며칠만 참아 달라고 해줘. 기억하지? 전에 빚 달아뒀던 거. 그거 이번에 쓴다. 추신 - 다음에 술 살게.]

이 미친 자식. 사해령은 서신을 와락 구기곤 찌푸린 눈으로 앞을 살폈다.

그러곤 스릉!

군말 없이 허리춤에서 두 개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살기를 무섭게 내뿜었다.

제집 앞마당에서 이처럼 검 뽑을 일도 흔치 않거늘, 심지어 하나도 아니고 쌍검이다.

화천검(火天劍)과 빙해검(氷海劍).

그녀를 빙화검제로 불리게 만든 신물들이었다.

하나만 휘둘러도 바다와 하늘을 가른다는 최상의 명검이거늘, 이를 동시에 뽑아 든 것이다.

이는 지금 눈앞에 나타난 상대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님을 잘 알기 때문.

"이거 모처럼 오라비가 누이 집에 놀러 왔는데. 대우가 영 그렇네."

사자처럼 뻗은 머리에 살벌하게 육체적인 태를 감추지 못한 회색 무복.

딱 봐도 힘깨나 쓰게 생긴 호남아.

이공자, 패왕권제 무한성.

바로 그가 이곳에 행차한 것이다.

"놀러 올 사이는 아닐 텐데요. 죽으러 온 거라면 모를까."

사해령이 잔악한 발언을 뱉자마자 그녀의 보좌인 은발의 나락과 월광십귀가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쌌다.

"죽으러 오다니. 무슨 말을 또 그리 정 없게 하나. 듣는 오라비 상처받게. 봐봐. 나 혼자 왔잖아.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진짜."

진짜는 무슨. 우습지도 않은 개소리.

안개 너머 정박한 나룻배만 수십 척이다.

사해령이 푸른 빛이 감도는 빙해검을 슥 목젖을 향해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무한성이 눈썹을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안 통하네."

이내 낄낄낄! 깔깔깔! 안개 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사방 가득 울려 퍼졌다.

이에 그녀의 미간이 좁혀지고, 월광십귀는 바짝 긴장한 채 좌우를 두리번 살폈다.

"삼공녀님."

그리고 나락이 옆으로 다가와 경계를 취했다. 하지만 더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누군지 이미 잘 알고 있으니.

"낄낄낄!"

"끌끌!"

조여오듯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

따로 봐선 도저히 한 패거리로 볼 수 없을 만큼 자유로운 복식.

그들이었다.

거친 성정에 패도적이기 그지없는 백 명의 괴인들.

"백괴단(百怪團)...."

이공자의 전력이 천상도에 상륙한 것이다.

대충 상황은 파악했다.

칠공자가 이번 조찬 때 백인장의 인을 받았고, 상의도 없이 제 이름을 팔아 세를 모으겠다고 선언한 것.

이에 이공자가 이를 막기 위해 직접 방문한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바로 장이서의 머릿속이었다.

'이걸 그냥 잠자코 보고만 있으라고?'

멋대로 제 이름을 판 건 그렇다고 치자.

한데 이걸 묵인하면 대체 무슨 수로 세를 모은단 말인가.

이공자가 오는 족족 다 내쫓을 게 뻔한데.

'모르겠다. 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삼공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옆에 있던 나락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교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잊으신 겁니까."

천마 진우광이 말한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 규칙.

첫째, 후계 간의 대결은 인정하나 선공에는 세력을 쓰지 말 것.

둘째, 반드시 상대의 동의하에 싸울 것.

한데 지금 이리 대놓고 삼소궁까지 전력을 끌고 왔다는 건 둘 다 어기겠다는 얘기.

"나락. 주제넘게 끼어들지 마라."

무한성의 옆으로 뒷짐 진 불혹의 중년인이 걸어 나온다. 흡사 뱀처럼 마르고 섬찟한 인상. 굳이 말 안 해도 알만하다.

이공자 무한성의 보좌 절명수(絶命手) 조양악이다.

수공(手功)의 달인으로 당대의 마두 중에선 잔혹하기로 유명한 자다.

"뒤에 그 손부터 빼지."

하나 나락 역시 나이는 어려도 이력으로는 빠지지 않는 당주 출신.

그가 앞으로 한 발 나서자 당장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처럼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펼쳐졌다.

이에 사해령이 얕은 숨을 뱉고는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이 자리에서 서로 끝을 보자는 건가요?"

아무리 삼공녀 쪽이 수에서 밀린다고 해도 맞붙으면 최소 칠 할은 찢어 죽인다.

그만큼 무력으로 치자면 밀리지 않는 것이 이들이다.

그리고 이는 무한성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오해 말라는 듯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답했다.

"우리끼리 끝을 볼 순 없지. 누구 좋으라고."

82.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자님 (1)

이공자와 삼공녀가 동귀어진하면 누가 좋겠는가.

대공자만 가만히 앉아 꿀만 쪽쪽 빨아 먹는 거다.

"바라는 건 별거 없어. 여기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한동안 신세 좀 지자고."

"누구 마음대로."

"왜 이래. 일 벌인 건 너잖아. 백인장을 쓰더라도 받은 막내가 써야지. 그걸 셋째인 네가 가로채면 되나. 그건 반칙이지. 남매끼리 의 상하게."

그건 내가 벌인 짓이 아니다! 사해령은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막아서시겠다고요?"

"그러게 왜 쓸데없이 방을 붙이고 다녀. 우리가 그냥 넘어가 줄 줄 알았어?"

쓸데없는 짓? 그래, 맞다. 도대체 장이서는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

그냥 도와달라고 따로 절 찾아왔으면 될 일을. 그럼 어련히 도와줬을 것을.

"그러니까 괜히 힘쓰지 말고 들어가라고. 잠을 처자든. 밥을 처먹든. 난 여기서 아주 조용히 기다릴 테니까. 우리 누이는 가서 쉬어. 밖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말고."

하. 밑도 끝도 없는 통보구나.

사해령은 웃고 있는 무한성을 가만히 직시했다. 누가 봐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듯한 상황. 하지만 이는 표면일 뿐이다.

[나락.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넌 밖으로 나가 장이서랑 마오. 둘 다 잡아서 내 앞에 데리고 와.]

전음이다. 가만히 있으란다고 있어 줄 사해령이 아니다.

"우리 누이께서 왜 대답이 없으실까?"

찰나의 시간이 흐르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무한성이 말을 툭 던졌다.

눈치는. 그러자 사해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돌아섰다.

"크큭, 그래. 오라비 말을 이리 잘 들으니 얼마나 보기 좋냐. 앞으로도 그러라고. 귀엽게 굴면 혹시 아냐. 나중에 내가 소교주 되면 너한테도 한자리 챙겨줄지. 이참에 우리 동맹 맺을까?"

동맹은 서로 득 될 게 있을 때 하는 거고.

[지금.]

그녀가 나락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짤막한 전음을 내던짐과 동시에 콰앙! 쾅! 콰아앙! 사방 곳곳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동시에 사해령과 월광십귀가 몸을 날려 일렬로 길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사이 나락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큭! 기관진식?!"

소매로 얼굴을 가린 무한성이 낭패감이 깃든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맞다. 제갈귀룡은 사해령의 사람. 설마 삼소궁에 이 정도 장치도 없을까.

"잡아!"

무한성이 사라진 나락을 확인하곤 거세게 외쳤다. 이에 잠시 주춤거렸던 백괴단이 챙! 각자 무기를 빼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서걱!

저들 발끝에서 딱 한 걸음 앞에 교차로 땅이 깊숙이 파이기 전까지는. 그것도 오 장(15m)에 달하는 길이.

"한 발자국만 더 오면 다음엔 디디고 선 발목이 될 것이다."

백괴단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앞을 살폈다. 그러자 십여 걸음 앞에 털어내듯 교차로 검풍을 쏘아낸 채, 지그시 저들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빙화검제 사해령. 그녀다.

실로 압도적인 신위.

더구나 그녀의 좌우에는 은색 가면을 쓴 월광십귀가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기세로 서 있었다.

미치광이 백괴단이라도 함부로 덤비기엔 위험한 모험.

"하하하하하!"

이공자 무한성도 이를 느낀 것인지 갑자기 대소를 터트리며 손뼉을 쳤다.

"우리 누이 참 대단해. 역시 그냥은 안 넘어가지. 설마 보좌를 내보낼 줄은 몰랐네. 이 오라비가 한 방 먹었어."

솔직한 평가였다.

만일 사해령이 움직이는 기색이 보였다면, 자신이나 보좌인 절명수 조양악이 나섰을 것이다.

그랬다면 누구든 빠져나가는 건 꿈도 못 꿀 일. 사해령도 그걸 알기에 나락을 움직인 거였다.

"좋아. 하나는 보내주지. 나도 온전히 그 형님 뜻대로만 움직이기엔... 또 자존심이 상하잖아."

무한성이 씨익 웃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백괴단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척! 무기를 집어넣는다.

분쟁은 여기까지.

이에 사해령도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 대신 척! 쌍검을 납검(納劍)했다.

'장이서... 다음에 네가 사야 할 술은 아주 비쌀 거다.'

그녀가 이를 악 깨물고 삼소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한편 무한성이 천상도를 점령할 무렵.

그의 소식을 발에 단 비둘기는 빠르게 일소궁으로 귀소했다.

"이공자께서 삼소궁에 도착했다는 전갈입니다."

그리고 이는 유령마군의 음산한 목소리를 통해 방 안에 전달되었다.

탁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천무기는 휙! 휙! 거침없이 난을 그렸다. 그러면서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둘째가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야. 금세 달려간 걸 보니. 하나 어쩔 수 없지. 요행으로 보물을 쥐게 된다면 누구든 화나는 건 당연한 일. 애써 노력하는 이들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혼잣말인가.

천무기는 슬쩍 고개를 들어 제 앞의 장지문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금 물었다.

"다들 아니 그러한가."

그러자 촤르륵!

장지문이 활짝 열리며 가려져 있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다란 복도에 일렬로 늘어선 식탁과 그 앞에 마주 앉은 자들.

첫 줄부터 끝줄까지 대체 몇 명인지 세기도 벅차다. 더 놀라운 건 이들의 신분이었다.

실무를 담당하는 대주들부터, 온갖 가문의 인사들까지.

가히 마교의 기둥이라 할 만한 인사들이 그의 부름 한 번에 모두 달려온 것.

"맞습니다. 대공자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천무기의 뜻에 동의를 표했다.

중립을 표하던 이들도 마찬가지.

'대공자가 명분을 쥐고 흔드니 무어라 할 말이 없구나.'

차라리 편 가르기였다면 따져라도 볼 것을.

칠공자의 것을 삼공녀가 쓰려 하는 걸 문제 삼으니, 누구든 나설 명분 자체가 없었다.

더구나 이공자까지 가세한 일에 누가 눈치 없이 반기를 들겠는가.

이 건은 명백한 삼공녀의 패배다.

"모두 내 말을 이해하는 것 같아 다행이군. 그럼 이만 돌아가거라."

모여든 이들은 그의 섬찟한 인사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곤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고갤 숙인 뒤 물러갔다.

"이제 막내만 남았구나."

삼공녀의 계획은 불발되었다. 남은 건 칠공자의 처우뿐.

물론 꽤 가혹할 것이다.

이내 천무기가 붓을 들어 다시 그림을 마무리 지으려는 찰나였다.

"음?"

모두가 빠져나간 끝자락 탁자에 단 한 사람.

아직도 자리에 남아 식사에 열중하는 이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지극히 평이한 용모.

오늘 온 자들이라면 모두 일면이 있어 어렴풋이나마 기억에 있을 텐데.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이다.

천무기가 유령마군에게 눈짓을 보내보지만, 그 역시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 이는 호위를 선 흑화위들도 마찬가지.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밥이나 훔쳐 먹으러 온 놈은 아닐 테고.

아니, 그것보다 대체 여길 어떻게 들어온 것인가.

"누구냐."

유령마군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하나 들려오는 건 젓가락질하는 소리뿐.

이에 유령마군은 천무기에게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장지문 앞에 호위 중이던 흑화위의 검을 자연스레 스릉! 뽑아 들곤 그대로 악귀처럼 내던졌다.

쐐애애애액!

섬광처럼 쏘아지는 검.

이곳에 온 이유가 없다면 죽을 것이고, 있다고 해도...? 죽을 것이다.

이미 답할 기회를 잃었으니.

한데.

"아직 식사 다 안 끝났는데. 야박하네."

유령마군과 천무기는 분명히 보았다.

관자놀이에 검이 박히기 직전에 정확히 저희를 보며 씨익 웃는 사내의 얼굴을.

그리고 한 치의 차를 두고 여유롭게 고갤 젖혀 피해내는 모습을 말이다.

파악!

날아간 검이 뒤쪽 벽에 박히곤 지이이잉!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사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스스스슥!

이에 수십의 흑화위가 본능적으로 대공자를 호위하듯 길을 막았다.

'별 볼 일 없는 놈은 아니라는 것인가.'

대공자는 피식 웃고는 다시금 붓을 내려놓은 뒤 바깥으로 손을 저었다.

그러자 유령마군의 신호로 흑화위가 다시 좌우로 길을 연다.

어느새 장지문 앞까지 다가선 사내.

그가 멈춰 선 채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자님."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칠공자 보좌, 장이서입니다."

"...!"

장이서. 그가 이곳 일소궁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자 천무기를 만나기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