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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짝사랑하던 사람이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그것도 한밤중 술에 취해 현관문을 두들기고 있다면 말이다.

지금 내 기분이 그렇다.

"대체...?"

몹시 혼란스럽고도 오묘하게 설레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현관에 서서 고개를 푹 숙인 그레이스의 몸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웨펀 마스터다. 웬만해서는 술을 마셔도 안 취한다는 뜻이다.

그런 그레이스가 취하려면 대체 몇 병을 마셔야 되는 걸까.

"나... 들어가도 대?"

...살아 있길 잘했어.

살아 있길 잘했다고 로한!

"편히 들어오십시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다행이다. 아까 묘지에서 뒤졌으면 망령이 되어 이 세상을 떠돌았을 것이다.

"마실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나는 부엌으로 돌아섰다.

그 순간 그레이스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설마.

"로한."

"예, 아가씨."

"가지 마."

그 말에 서서히 돌아보자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내려간 눈꼬리. 그 속에서 간절하게 너울 치는 눈빛.

화장기 하나 없는 그 입술이, 유성우를 보며 소원을 속삭이듯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랑 같이 있어 줘...."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여기가 끝인 거 같다.

아니, 여기서 끝나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이 전개를 거부....

"부탁이야."

....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새하얀 설원을 닮은 그녀의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턱 끝에 고여 가는 그녀의 슬픔을 바라보며,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지로 미소하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는 당신이 이렇게까지 술을 마시고, 이렇게까지 웃으며, 슬퍼할 수가 없다.

한쪽 무릎을 꿇은 내가 그레이스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들어올린 손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내었다.

그녀의 온기가 내게 스며들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던 인형 같은 당신의 고민을, 나는 듣고 싶었다.

"파혼... 했어."

그 말을 듣게 되자 기분이 묘했다.

기뻐해야 할 텐데,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그레이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나는 무슨 말로 그녀를 위로해야 될까.

잘했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런 못된 사람은 아가씨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괜찮을 겁니다."

나는 모르겠다.

"다 괜찮을 겁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예.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문득 내가 물었다.

물으면 안 되는 말인데, 미치도록 궁금했다.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그대로 굳은 그레이스는 긍정을 하지도, 부정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우선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스르륵 눈이 감긴 그레이스가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숨소리가 새근거렸다.

...나를 이렇게 뒤흔들어 놓고, 정말 너무한다.

나에게 모든 걸 다 떠넘겨 놓고, 정말 무책임하다.

그러고서 이리 눈을 감으면....

"...미워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가져온 나는 그레이스의 몸을 꼭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레이스와 조금 떨어져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내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

세상은 누구의 사랑에도 관심을 두지 않지만,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사는 게 행복이고, 죽는 게 불행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매일을 열렬히 살아왔었다.

지금은 불행하더라도, 살다 보면 언젠가 행복이 돌고 돌아 내게도 와 줄 거라고 믿었다.

"지금 이대로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는데 말이죠."

나는 전해지지 않을 고백 속에서 눈을 감았다....

* * *

어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일은 온다.

정문 앞에 도착한 아리엘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숨을 불어 냈다.

'평소대로 행동해. 어제는, 아무 일도 없던 거야.'

그러나 어제 로한에게 한 말이 귀신같이 재생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아리엘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건 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게 덜 부끄러웠을 정도로.

"하아...."

"아침부터 한숨이라니, 이번에 리펜슈타인 교수님이 어려운 과제를 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로한이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이제 아리엘의 얼굴은 갓 피어난 동백이 되어 버렸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리엘은 꽃잎처럼 수줍게 움츠러든 입술을 간신히 떼어 냈다.

"안녕하세요, 부교수님."

그럼에도 목소리에 떨림은 없었다.

그녀에겐 수많은 가면이 있었고, 그 가면을 쓰는 데 익숙했던 탓이었다.

로한이 답했다.

"강의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훈련인가?"

"네. 훈련을 게을리해선 좋은 기사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 말에 로한은 속으로 뜨끔했다.

챔피언십이 끝난 후 수련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수련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로한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아리엘에게 건넸다.

아리엘은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기사에게 검이란 주군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검을 잃어버리는 건, 너를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명심할게요."

이윽고 아리엘은 로한의 뒤를 따랐다.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둔 그녀는 들고 있던 검과 로한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멋있는 사람이다.

아마도 검이 사람의 형태를 한다면 저런 모습일 거야.

나도 저런 기사가 될 수 있을까?

"훈련동은 저쪽이다."

어느새 본관 앞에 멈춰 선 로한이 훈련동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켰다.

멍하니 서 있던 아리엘이 정신을 차리곤 차분히 인사를 올렸다.

"그럼 강의 때 뵐게요, 부교수님."

빨리 떠나야 한다.

로한이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얼른.

그 순간 로한이 그녀를 불렀다.

"아리엘."

"네?!"

화들짝 놀란 아리엘이 뒤를 돌아보자 로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진 로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끝내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아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 저 얼굴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

혹시 나를 경멸하진 않을까?

당연히 눈앞에서 죽으려 했으니, 싫어하시겠지....

이제 정말 다 끝났구나.

목까지 차오른 말들을 삼켜 낸 아리엘은 터덜터덜 훈련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검의 무게가 다른 것을 느끼곤 검자루를 살짝 잡아당겼다.

"어라...?"

검이 부러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로한이 서 있던 자리를 돌아봤다.

시무룩해진 이목구비가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로한 님...."

다시는 죽지 말라는, 로한의 마음이 검에 새겨져 있었다.

§ 밤 (2)

"...새로 하나 사 준다고 말할 걸 그랬나."

그런데 너무 비싸 보였다.

그 기품 있는 검 자루하며, 예리한 동시에 우아한 검신은 틀림없이 하블다운 공방의 최고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것이었다.

못해도 1억짜리.

내 바이크 세 대는 만들 수 있는 돈이었다.

"어련히 미하엘이 새로 장만해 주겠지."

미하엘의 성격이라면 이번엔 10억짜리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나는 모니터를 켰다.

그레이스와는 같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집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깨어나지 않아 그냥 두고 왔다.

어차피 오늘은 오후 강의만 있고, 오전에는 이론만 검토하면 되니 여유도 있다.

그러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왜 하필 나를...."

나를 향한 아리엘의 마음.

이제 그게 문제였다.

아리엘의 마음은 거기서 그쳐야 한다.

내 마음에 파고들 틈은 없다.

그런 헐렁한 사랑이었다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으니.

"...나중에 잘 말해야겠어."

일단 아리엘의 마음은 두고 보자.

이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될 문제다.

자칫 그 마음을 깨 버렸다간 나와 그레이스의 운명에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어쩌면 그레이스의 운명을 위해 내가 아리엘을... 이거 참 난처하게 됐군.

"로한, 넌 정말 죄 많은 남자―"

빠밤―!

"부겨슈님!"

눈길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왈가닥 시스터즈가 책상 옆에 숨어 나를 빼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눈을 동그랗게 뜬 사라가 내게 물었다.

"무슨 죄를 지으셨는데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치만 방금 '로한, 넌 정말 죄 많은'― 읍읍!"

빠르게 사라의 입을 틀어막은 나는 그래빗과 로라에게 물었다.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이야?"

그러자 그래빗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부, 부교수님에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그때 손을 뿌리친 사라가 들고 있던 가입 신청서를 내게 보였다.

"엘리스 언니를 우리 동아리에 가입시키고 싶은데, 부교수님이 힘 좀 써 주시면 안 돼요?"

"내가 뭘 어떻게?"

"아이 부교수님이랑 엘리스 언니랑 아는 사이잖아요.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이셨고."

"그래서?"

"...진짜 이러실 거예요?"

시스터즈는 단체로 인상을 구겼다.

뭐 너희 생각엔 겁먹으라고 지은 표정 같은데, 전혀 무섭지가―

"!"

뭐야 로라.

얘 혼자 표정이 왜 이렇게 가련해?

"…··부교수님, 부탁드려요…··."

그늘진 로브 아래, 세상 모든 슬픔을 홀로 독차지한 듯한 비운의 여주인공이 나를 애타게 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레이스와 필적하는 외모에 소름까지 끼쳤다.

지금까지는 존재감이 없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로라의 시선을 슬슬 피했다.

"그런 거라면 직접 가서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순간 표정을 푼 시스터즈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실은 카렌 회장님이랑 아리엘 언니한테 전부 거절당하고 오는 길이라서요...."

"저, 전부 이런 거 할 시간 없다고 해서...."

"...."

잠시 엘리를 떠올리던 나는 시스터즈를 훑어보았다.

덜렁이 하나에 토끼 한 마리, 그리고 음울한 미소녀라....

귀여운 거 괴롭히기 좋아하는 엘리라면 거절하진 않을 거다.

동아리에 관심 없어도 얘네들 괴롭히려고 가입할 테니까.

거기다 바이크 관련 지식도 갖춘 엘리가 동아리에 가입한다면 나름 인프라도 갖춰질 것이었다.

포스트잇을 한 장 뽑은 나는 무언가를 적어 사라에게 건넸다.

"엘리 전화번호다. 일단 전화상으로 얘기하지 말고 무조건 만나자고 해. 무조건. 그리고 대화 좀 하다 보면 바로 서명할 거야."

"정말 그렇게만 하면 엘리스 언니가 동아리에 가입해 주는 거예요?"

"소드 마스터 칭호를 걸겠다."

"정말이죠? 만약 엘리스 언니가 가입 안 하면 제가 이제 소드 마스터인 거예요!"

"감마 등위까지 얹어 주마."

"그래빗, 로라. 빨리 전화하러 가자! 감사합니다, 부겨수님!"

서둘러 인사한 시스터즈는 집무실을 호다닥 빠져나갔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각 잡고 업무에 집중하려던 순간 다시 문이 열렸다.

또 시스터즈였다.

"참, 이거 받으세요."

"이건...."

다시 돌아온 사라가 건넨 물건은 토끼 발처럼 생긴 푹신푹신한 인형이었다.

이내 토끼 발을 살펴보던 내가 그래빗을 응시했다.

화들짝 놀란 그래빗이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제, 제 발 아니에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네가 만든 거야?"

그러자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가슴을 펼친 사라가 자랑스럽게 답했다.

"바느질은 로라가 하고 디자인은 그래빗이 했어요!"

"그럼 너는?"

"저는 기획 담당!"

"...결국 아무것도 안 했단 말이잖아."

"그게 무슌, 무슨 소리세요! 재료랑 응원은 전부 제가⸺!"

짧은 혀로 난리를 치는 사라의 목청을 뒤로한 채 눈앞까지 들어 올린 토끼 발을 들여다보았다.

푹신하고 말랑한 게, 귀엽게 잘 만들었군.

"제가 바느질만 잘했어도 이런 건 5분이면 뚝딱...!"

"고마워. 잘 간직할게."

나는 기분 좋게 미소했다.

아주 사소한 선물이라도,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으니까.

사라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잃... 잃어버리지나 마세요!"

그리고는 고개를 획 돌리더니 그래빗과 로라를 이끌고 집무실에서 달아났다.

하여튼 엘리 뺨을 칠 정도로 귀여운 녀석들이다.

토끼 발을 상의 주머니에 집어넣은 나는 자료 파일을 열었다.

드르륵.

...솔직히 세 번은 아니지.

"나를 더 괴롭힌다면 소드 마스터가 어떤 존재인지 각인―"

"소드 마스터가 세긴 세죠. 웬만한 기사단 하나랑 맞먹을 정도니까요."

어른스럽게 팔짱을 낀 코넬리아가 장난감 코너를 구경하는 듯한 눈빛으로 집무실을 훑어보고 있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고개를 숙였다.

"총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당연히 전할 말이 있으니 왔겠죠? 그런데 학생들이 로한 부교수를 못살게 구는 모양인가 봐요."

"아닙니다."

나는 테이블로 이동해 뒤집어진 컵을 바로 세웠다.

"커피 괜찮으십니까?"

"블랙으로 부탁해요. 내가 단 걸 싫어해서."

그 말에 각설탕으로 손을 뻗던 나는 자연스럽게 보온병을 집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란 게?"

기품 있게 의자에 앉아 잔을 집어 든 코넬리아가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흔들거리며 답했다.

"그레이스 교수는 없나요? 다 같이 있을 때 얘기하고 싶은데. 이거 향 되게 좋다. 어디서 산 거예요?"

"리틀 히스 5번가에 가시면 6펜스라는 허브샵이 있습니다. 원두도 같이 팔고 있으니 거기서 구매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그레이스 교수는?"

일단 둘러대자.

"이론 보강을 위해 도서관에 갔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전화를...."

"그냥 두세요. 도서관이면 받기도 힘들겠네."

코넬리아는 커피를 음미하고는 본론을 꺼냈다.

"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마수 토벌을 시작했어요."

"마수 토벌은 보통 가을에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전 세계라니."

"이번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에 마수가 출몰한 게 원인인 듯싶어요. 그거 때문에 챔피언십 끝나자마자 반달리 기사단이랑 에클라트 기사단이 에르츠 중앙고지대를 뒤집어엎었잖아요."

확실히.

챔피언십 도중 에르츠 중앙고지대의 마수가 트랙에 출몰했다는 소식은 지금 꽤 관심 있는 이슈였다.

제국 대형 기사단 두 개가 한 번에 움직였으니 검울음늑대는 물론 인근 마수들까지 씨가 말랐겠군.

그나저나 반달리 기사단이라... 그 사람까지 움직였을 줄은 몰랐다.

"에드가 친왕(親王)이 챔피언십 골수팬이라나 봐요. 느닷없이 대대적인 토벌까지 감행한 걸 보면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에요."

"그게 저희랑 관련이 있습니까?"

"관련은 없지만, 관련 있게 만드는 게 황실인 거 알잖아요."

그녀가 품에서 꺼낸 서류를 내 앞으로 밀어냈다.

선명하게 찍힌 황실 직인.

틀림없는 황명(皇命)이었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걸로는 내 복직이 납득이 안 갔겠지. 웨펀 마스터인 그레이스 교수, 거기에 소드 마스터 로한 부교수도 있겠다, 아주 이용해 먹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목소리 속에서 서류를 살폈다.

크룬데일(Crundale) 마수 토벌 명령서라....

크룬데일이면 나쁘지 않다.

진짜 기사단도 움직이기 아까운 잡일, 딱 그 수준이었다.

서식하는 마수도 스프링윈드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면 무리 없이 사냥이 가능한 수준일 테고, 개체 수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 부담도 덜하다.

이내 달력을 확인하던 나는 곧 학기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벌, 이번 기말시험으로 출제해도 상관없죠?"

"학기말 시험? 음... 괜찮네요. 난이도도 적당하니 실전 경험 쌓기도 좋고."

"그럼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여비나 장비 같은 건 내가 뜯어내도록 할게요. 나한테 이런 엿을 먹였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인근 최고급 호텔에 1인 1실 쓸 수 있도록 뜯어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1인당 백만 링 정도는 노력해 볼게요."

"토벌이 아니라 바캉스가 되겠군요."

입맛이 쓴지 입술을 꾹 다문 코넬리아는 내려놓은 잔을 한없이 내려다봤다.

"...마음 같아선 나도 따라가서 돕고 싶은데, 짐 하나를 더 얹기가 미안해서."

이윽고 나를 올려다보던 총장이 쓰게 웃었다.

...아이의 모습에서 어른의 고뇌가 느껴지는 광경은 정말 기이하고도, 애석하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청춘으로 회귀했으니 기뻐하라고 말하겠지만, 몸은 어려졌어도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어른의 그것이었다.

"괜히 날 복직시켜 가지고...."

그 괴리감은 늘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거기에 힘까지 잃어버렸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총장님이 있기에 스프링윈드가 있는 겁니다."

"응? 방금 뭐라고...."

나는 그녀의 잔에 각설탕 하나를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학생들을 보살펴 주시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코넬리아 린 파르카스탈.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단 것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나만 더. 아니 두 개."

다만 어린아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숨기고 있었을 뿐.

* * *

"...엘리 어딘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내 말이. 엘리가 저렇게 열심히 했나?"

"우리 다 환각에 걸린 게 아닐까? 그래도 엘리가 마법은 잘 부렸잖아."

강단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

이를 악물고 필기를 하는 엘리스의 모습에 그녀의 친구들이 수근거렸다.

불길한 일이었다.

공부와는 담을 쌓은 엘리스가 필기라니!

그것도 중간중간 손까지 번쩍 들며 질문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다니!

이는 곧 지구가 멸망한다는 신호와 다르지 않았다.

자연재해를 예측한 동물들이 이상 행동을 보이는 전조처럼 말이다.

그때 엘리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수잔이 그들을 꾸짖었다.

"조용히들 좀 해 줄래? 우리 엘리 공부하는 거 안 보여?"

"나쁜 뜻으로 한 말 아니야! 아니 우린 그냥 신기해서...."

"응응, 신기해서...."

그러자 그레이스와 로한의 눈치를 힐끔 본 수잔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기하긴 무슨. 한 달 전부터 이랬는데. 너희 엘리한테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냐?"

"우린 몰랐지. 맨날 엎드려 자던 엘리가 어느 날 보니까 술까지 끊고 공부를 하고 있었을지."

"사람은 원래 변하는 거야."

"그래도 이렇게까지 변하면 보통 죽는다고 들었...."

탁.

일순 펜을 쥔 손으로 책상을 가볍게 내리친 엘리스가 친구들을 돌아봤다.

"미안한데 볼륨 조금만 낮춰 줄래? 교수님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잖아. 알았지?"

"...!"

완전히 달라진 엘리스의 모습에 친구들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집에 가면 유서부터 쓰자!'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수업에 열중하는 엘리스.

그녀의 목표는 하나였다.

'나도 반드시 그레이스 님과 같은 기사가 될 거야.'

예전에도 같은 꿈이었지만, 이제는 그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방법이 달라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이 없다면 끝이다.

여기서 말하는 재능은 천재를 뜻하는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갖추고 있는 '기본적인 재능'이었다.

그러나 엘리스는 검술에 관해서라면 그런 재능마저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로한이 가르쳐 준 방법.

오러가 아닌 '서클'로 검술의 술식을 구현해 내는 방법은 놀라울 정도였다.

'조금 복잡하긴 해도,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해.'

더욱이 엘리스는 로한이 알고 있는 미래에서 '아크메이지'가 될 정도로 마법 방면에서는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그런 재능으로 서클을 활용해 검술을 연마하는 건 아예 없던 재능을 쥐어짜 내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기대해. 지금은 다들 비웃고 있을지라도, 내가 기사가 된 후에도 그럴 수 있을지 두고 봐.'

실제로 엘리스의 성적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비록 평균 F에 불과했던 성적이 이제 막 C까지 올라선 것뿐이지만, 그마저도 엘리스 에클라트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말이 거짓이다에 전 재산을 베팅할 정도로 엄청난 이슈였다.

그때 수업을 마무리하던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전달 사항이란 단어에 긴장한 학생들이 그녀를 일제히 주목했다.

그레이스가 그 단어를 꺼낼 때면 어김없이 과제나 시험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물론 그 폭탄들은 어김없이 로한의 작품이었다.

"이제 학기말까지 보름 정도 남았군요."

...꿀꺽.

'기말'이란 단어에 모두의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이번 학기 마지막 시험은 '실전 토벌'입니다."

...실전 토벌이라니?

그게 뭐야?

토벌이 토벌이지 이 띨빡아!

자신들의 예상을 뒤엎는 발언에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아예 게슈탈트 붕괴가 와서 '토벌'이란 단어의 정의까지 망각한 학생도 있었다.

그 순간 로한이 발을 굴렀다.

쿵!

"...정숙. 아직 그레이스 교수님의 말씀이 끝나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의 위용이 한순간 강의실 전체에 번져 나갔다.

포식자를 만난 것처럼 절로 몸이 굳어지는 오러.

로한이 꽤 강력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새벽마다 진행한 수련 그리고 「성장」의 결과였다.

로한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레이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계속 부탁드립니다."

"토벌은 조별 시험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구성은 4인 1조로, 여러분들의 성적에 따라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도록 편성할 겁니다. 점수 역시 개인이 아닌 조별로 채점됩니다."

그건 조별 과제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학생들이 가장 꺼리는 것이 무언인가.

조별 과제다.

인간이 다섯, 아니 넷이나 모이면 반드시 하나는 쓰레기가 있다는 그⸺

"토벌 지역은 어디인가요?"

손을 든 아리엘의 질문에 로한이 답했다.

"토벌 장소는 크룬데일 10구역이다."

"답변 감사합니다...."

얼굴이 붉어진 아리엘을 뒤로한 채 학생들은 '크룬데일'이란 이름에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한창 말 많은 에르츠 중앙고지대나 지난 인마 대전 당시 최전방 격전지로 유명한 챌록(Challock)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레이스가 말을 이었다.

"고위험 등급으로 지정된 마수는 서식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채점 방식은 마수를 공략하는 능력부터 처리한 마수에서 전리품을 채취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검술학과 인트라넷 시험 카테고리에 게시할 테니 숙지 바랍니다."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엘리가 주먹을 부르쥐었다.

'기회다!'

그리고는 로한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는 아리엘을 주시했다.

'저년만 제치면 내가 과탑이야.'

서서히 이마가 붉어지는 엘리스.

그러나 엄청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감히 내 사과를 무시해? 거기다 뭐? 다음부터는 가축처럼 굴지 말라고? 아나 씨...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그래, 그런 식으로 나와 줘. 그래야 더 꺾는 맛이 있으니까!'

그것은 바로 아리엘은 총평점이 A+, 스프링윈드 내에서도 상위 0.1%에 속한 '수석'이란 사실이었다.

§ 밤 (3)

"점점 잘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전부 로한 덕분이야...."

고개를 푹 숙인 그레이스.

부랴부랴 퇴근 준비를 마친 그녀는 거의 뛰다시피 문으로 걸어갔다.

"나 갈게."

"조심히 들어...."

드르륵.

"...가십시오."

그레이스는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떠났다.

내 마음이 문틈에 끼인 것인지 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아직도 서먹하군...."

만취한 그레이스가 나를 찾아왔던 밤.

그날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기억을 못 했으니까.

나는 그저 그레이스가 내 자택에서 눈을 뜬 이유를 묻길래, 조금 축약해서 말했을 뿐이다.

그냥 술에 취해 집을 착각해서 온 거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런데 기억이 없다는 건 거짓말 같다.

아무 기억 없었다면 저렇게 나를 피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아마도 끊어진 필름이 이어진 거겠지.

"언제까지 나를 피하실 생각이신지...."

하루 이틀이면 내가 걱정도 안 한다.

벌써 일주일째다.

그래도 업무 관련해서는 피하지 않는데, 꼭 점심을 먹을 때나 퇴근 시간 때는 이렇듯 나를 피하곤 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날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까지, 웃으며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그래도,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까지 좋았다.

"...파혼이라."

생각해보니 헤실거리고 있을 일이 아니다.

그날 그레이스는 내게 파혼을 했다고 고백했다.

내가 기억하는 페이지에서 그레이스는 미하엘과 파혼을 하긴 한다.

하는데, 이렇게 일찍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리펜슈타인 님은 저를 죽이셔야만 합니다."」

「"그러니 이제... 저와 파혼해 주십시오."」

악마와 계약한 그레이스가 세상의 멸망이 되던 날.

그녀가 미하엘에게 검을 겨누며 했던 말이었다.

완전히 부서진 마음,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 그 너머에서 슬픔보다 분노를, 파괴를, 증오를 선택한 한 사람의... 비애(悲哀).

이건 후반부의 전개였다.

물론 원작대로의 전개라면 말이다.

그랬던 '파혼'이 이 시점에 나왔다는 건 이 페이지가 후반부라는 의미일까, 혹은 거듭된 전개 수정으로 인한 새로운 페이지라는 의미일까.

당연히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가 끝나기엔, 아직도 많은 페이지가 쓰여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

이제 이틀 후면 이번 학기 마지막 시험이다.

크룬데일.

거기서 얻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 * *

"야, 로한! 내가 왜 쟤랑 같은 조여야만 하는데?"

먹구름 낀 하늘 아래, 음산한 크룬데일의 풍경을 뒤로한 엘리가 내 멱살을 붙들고 있었다.

"그게 가장 형평성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학과에서 가장 쎈 애들 둘을 한 조에 몰아넣는 게 무슨 형평성이... 뭐야 그 표정? 내가 제일 약하다는 표정은 뭐냐구!"

"그렇게 말한 적 없어."

"그럼 그 표정은 뭔―!"

"그리고 나는 지금 부교수로서 이 자리에 있다."

"―데요...."

금세 시무룩해진 엘리가 내 멱살을 놓아 주었다.

엘리는 한눈에 봐도 굉장히 비싼 개인용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이번 시험을 위해 아주 명품관을 쓸어 담은 모양이었다.

"이곳에 있는 50개의 조 중에 불리하게 편성 받은 학생은 없어. 나와 그레이스 님이 학생들의 능력을 정확히 고려해서 분배했으니까."

"그레이스 님이 그러셨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해도 나랑 아리엘이 같은 조인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요."

"너랑 아리엘을 제외한 나머지 둘. 잘 생각해 봐."

"에밀리랑 프레디? 얘네 둘은, 아."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은 엘리가 아리엘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는 에밀리와 프레디를 돌아봤다.

내가 말했다.

"에밀리랑 프레디는 너희와 달라. 너희에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저 학생들에게 이번 토벌은 목숨을 걸어야 되는 시험이라고."

"...."

다른 지역에 비하면 크룬데일이 상대적으로 쉬울 뿐, 결코 놀이터 수준이란 말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기사와 마법사는 소수다.

모두가 마나를 잘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반인이 대다수이고, 그들을 수호하는 게 바로 기사단이나 마탑 그리고 제국의 군대다.

일반인이 마수와 싸우게 된다면, 장담컨대 죽는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또한 기부 학생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에밀리와 프레디는 아카데미 생도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위험한 상황이 생기기 전에 나와 그레이스 교수님이 움직일 거지만, 그래도 조원인 네가 그들을 보호하는 게 먼저다. 자고로 기사란―"

"타인을 보호하고 나아가 국가를 수호하는 존재라는 거지? 나도 알고 있다구."

"알고 있다면 다행이네. 아무튼 잘해 봐. 아리엘이랑 싸우지 말고."

그 말에 엘리가 얼굴을 붉혔다.

"누, 누가 싸웠다 그래?!"

"듣기로는 화해를 제대로 못했다던데."

"그렇긴 한데... 걱정 마! 로한이 생각하는 그런 일 없을 거니까. 난 그냥 아리엘만 꺾으면 돼. 응. 그거면 충분해."

"어련하실까. 알았으면 이제 돌아가. 곧 시험 시작하니까."

돌아온 엘리를 본 에밀리와 프레디가 그녀를 반겼다.

다 떠나서 엘리는 친화력 하나는 좋은 아이다.

부디 아리엘과도 저렇게 친해질 수 있어야 할 텐데.

엘리는 누구나 좋아하는 좋은 친구니까 곧잘 알아서 하겠지.

"시간 되었습니다, 교수님."

"...응."

"잠시."

내게 시선도 주지 않고 시험을 시작하려던 그레이스에게 한 자루의 검을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이건...?"

"이터널 스톤으로 제작한 검입니다."

마침내 어제, 하블다운 공방에 의뢰를 맡긴 검이 배달되었다.

그레이스는 받아 든 검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이걸 왜 나한테?"

"그레이스 님 덕분에 우승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니야. 나는 방해만 됐는걸. 받을 자격 없어."

"그레이스 님에게 자격이 없으면 지금 이 검을 버려야 됩니다. 저와 엘리 또한 자격이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미안한 듯 머뭇거리는 그레이스.

나는 허리에 찬 또 다른 검을 보여 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물론 저도 한 자루 있습니다. 엘리스야 집에 가면 쌓이고 쌓인 게 검일 테니 관심도 가지지 않더군요.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이 검은 가난한 기사 지망생들에게 기부를⸺"

"잠깐."

순간 그레이스가 하얀 가죽 홀더에 검을 부착했다.

"우리가 노력해 얻은 물건을, 그렇게 할 순 없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레이스도 기사는 기사다.

좋은 검을 보면 욕심나고, 가지고 싶은 게 모든 기사의 마음인 것처럼 말이다.

검 자루를 살짝 잡아당겨 본 그레이스가 은하수를 닮은 검신에 작게 감탄했다.

"이터널 스톤으로 만든 검신이라니... 정말 아름다워. 이 검의 이름은 뭐야?"

"뭐 많은 이름이 있죠. 검을 휘두를 때마다 별과 별 사이가 이어지는 것 같다 해서 부르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혹은 모든 마수에게 황혼을 선사하기에 붙여진 트와일라잇(Twilight)처럼 말입니다."

"둘 다 들어 본 거 같아. 유명한 검들이잖아."

"그러니 교수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내가?"

"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 하나의 검이 될 수 있도록 말이죠."

한참을 고민하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닉네임 생성할 땐 세 시간 가까이 고민하는 성격이라 그 마음 이해한다.

그레이스가 물었다.

"로한은 어떤 이름을 지어 줬어?"

"그게...."

민망함에 손으로 검 자루를 감춘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

"이터널 하...."

말끝을 흐린 나는 시간을 띄운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저도 아직입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이제 시작하시죠."

...이터널 하트.

정말이지, 내게 이름 짓는 재주는 없는 것 같다.

* * *

"조별 현황은 각자 보호구에 내장된 카메라로 나와 로한 부교수의 화면에 실시간으로 전송됩니다. 위급 상황 발생 시 즉시 신호벨을 눌러 우리를 호출하세요.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50개의 조는 각자 정해진 구역으로 이동했다.

엘리스와 아리엘이 속한 7팀은 10-5구역.

앙상한 백자작나무 숲 사이로 들어선 엘리스가 선두에서 걷고 있던 아리엘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천천히 좀 걷지? 애들 뒤처지는 거 안 보여?"

"...."

"여보세요? 아리엘 씨? 내 말 안 들려? 아나... 에밀리, 나 지금 음소거 돼 있니?"

엘리스의 물음에 검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떨고 있던 에밀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잘 들리는데...?"

"근데 왜 아리엘만 내 목소리를 못 들으실까? 아~ 알겠다. 긴장했구나? 아리엘."

그때 슬쩍 뒤돌아본 아리엘이 싸늘한 시선으로 응수했다.

"프레디."

"네?! 아니, 응?"

"에클라트에게 조용히 좀 해 달라고 전해주겠어요? 경계심 많은 '멜크'가 도망칠 수 있으니까."

"알았어... 요."

둘의 눈치를 살피던 프레디가 앵무새처럼 그 말을 전하려던 순간이었다.

"누가 고매하신 리펜슈타인 가문 사람 아니랄까 봐 대단하셔 정말. 전에도 우리 수잔을 하인 대하듯 민망을 줘 놓고. 전달을 안 하면 대화를 못 하나 봐?"

"그쪽이랑 이야기하기 싫으니까."

"오... 이렇게 직설적으로 잘 얘기하면서 지금까지는 왜 그러셨대?"

"...시험에 집중하죠. 그쪽이랑 싸우고 싶은 생각 없어요. 시간도 없고."

조원들을 위해 참고 있던 엘리스의 이마가 결국 붉어졌다.

"똑바로 들어. 난 그쪽이 아니라 엘리스 에클라트야. 아무리 리펜슈타인 가문의 영애라 해도 이쪽 그쪽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 아니라고. 너 에클라트 기사단이 얼마나 거대한지 모르는구나?"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 참, 저번에 제가 '그렇게' 굴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또... '그렇게' 굴고 있네요."

"뭐, 발정 난 가축? 너 내가 욕을 못 해서 안 하는 거 같니? 하츠다운 아카데미의 미친 장미가 뭔지 보여 줘? 어!"

이윽고 한계에 다다른 아리엘이 자리에 멈춰 한숨을 토해 냈다.

"알았어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조용히 좀. 네?"

"진작 그럴 것이지. 아, 미안해 얘들아. 우리 때문에 시끄러웠지? 너무 겁먹지 마 에밀리. 프레디도 긴장 풀고. 내가 있잖아~ 나만 믿어."

엘리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에밀리와 프레디를 각별히 챙기기 시작했다.

"...미칠 거 같아 정말."

아리엘은 마치 자기 보라는 듯 더 유난을 떠는 그녀를 보다 못해 걸음을 옮겼다.

'사과? 웃기지 마. 로한 님은 내 거야. 너 같은 거한테는 절대 안 뺏겨.'

사실 엘리스가 대충 사과한 것도 아니었다.

엘리스는 아리엘과 정말 화해하고 싶었다.

로한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도 사생활까지 건드린 건 본인도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엘리스 에클라트. 네가 로한 님을 좋아하는 이상 너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없어. 영원히.'

매몰차게 거절한 건 아리엘이었다.

그녀는 엘리스가 로한을 좋아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실 엘리스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빨리 끝내자. 끝내고, 빨리 로한 님을 만나러....'

바스락.

일순 저 멀리서 풀 밟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아리엘이 검을 뽑는 동시에 달려 나갔다.

엘리스가 외쳤다.

"아리엘! 단독 행동 하지 마!"

"...당신들은 여기 있으세요.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미치겠네, 진짜... 우리도 가자!"

그리고는 달려가는 엘리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본 그녀가 느릿느릿하게 뛰어오는 조원들에게 소리쳤다.

"빨리! 이러다 아리엘한테 다 뺏기겠어!"

최선을 다해 뛰고 있던 에밀리와 프레디가 숨을 헐떡거리며 답했다.

"이, 이게 가장 빨리 달리는 거야!"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엘리스 먼저 가...!"

미쳐 버리겠다 정말.

이마를 문지르던 엘리스는 곧 조원들에게 돌아가 속도를 맞췄다.

"엘리스? 우리는 괜찮으니까 너 먼저⸺"

아리엘이 달려간 곳을 주시하던 엘리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안 괜찮아. 팀은 하나야. 너희가 뒤처지면 나도 뒤처지는 거고. 너희가 떨어지면 나도 떨어져."

"엘리스...!"

그 말에 에밀리와 프레디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이 조의 짐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스는 그들을 짐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같이 움직이자. 자칫 너희가 다치는 것보다 그냥 시험에서 떨어지는 게 나아."

"엘리스...."

에밀리와 프레디는 어째서 학생들이 엘리스를 따르고 좋아하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엘리스가 미소로 화답했다.

"미안해하지 마. 팀이잖아?"

그때였다.

파앙!

정면에서 들려오는 굉음.

돌풍처럼 불어오는 마나의 파장은 아리엘의 것이었다.

엘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여튼 누가 재수탱이 동생 아니랄까 봐!'

조바심이 그녀의 뒤꿈치를 걷어차며 빨리 가라고 외치고 있지만, 친구들을 버릴 순 없다.

'아리엘. 넌 누구보다 기사에 가깝지만, 누구보다 기사가 되면 안 되는 사람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전우를 버리지 않는 건 꺾을 수 없는 기사의 기치(旗幟)다.

엘리스는 아버지인 데니스를 따라다니며 일찍이 기사 생활을 몸에 익혔다.

비록 아직은 기사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마음가짐은 이미 기사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도대체 너는 왜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거야...?'

그렇게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아리엘의 앞으로 멜크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흡사 순록처럼 생긴 멜크를 확인하던 엘리가 소리쳤다.

"대체 무슨 생각이니 너?"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아리엘이 시체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요. 난 이 시험을 빨리 끝내는 게 목적이라고."

"너 혼자 시험 보면 나머지는?"

"저와 같은 점수를 받겠죠."

"이게 진짜 암 걸리게 하네... 야!"

이윽고 완전히 열이 받은 엘리스가 아리엘에게 달려가 건틀릿을 붙들었다.

"이런 식으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면 교수님이 이걸 조별 시험으로 내지도 않았어. 오히려 이런 게 마이너스 요소라는 거 몰라?"

"말 잘했어요. 채점 방식엔 분명 마수 공략하는 것 외에도 마수 추적, 전리품 채집도 있었죠?"

다음 순간 아리엘이 자신의 검을 엘리에게 들이밀었다.

"채집해 보세요."

"뭐...?"

"같은 팀이라 해서 꼭 모두가 같은 일을 할 필요는 없어요."

에밀리와 프레디에게 눈길을 옮긴 아리엘이 말을 이었다.

"누군가는 사냥을, 누군가는 추적을, 누군가는 채집을. 그렇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역할을 분배하는 게 더 효율적이란 말이에요. 기사단도 그래요. 공격대와 지원대가 나뉘어 있듯이 말이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검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에밀리나 프레디에게 마수를 사냥하는 역할 대신, 짐을 들어 주거나 전리품을 채집하는 역할을 부여한다면 능률이 더 올라갈 것이었다.

이것은 공장에서 각자에게 작업 라인을 분배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그건...!"

"제 말이 틀렸나요?"

"...."

말문이 막힌 엘리스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리엘의 말이 옳다.

에밀리와 프레디에게 억지로 전투를 시켰다간, 그렇게 우려하던 부상자가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얘네가 겨우 그딴 거 하려고 스프링윈드에 입학했을 거 같아?"

이건 시험이다.

시험에서까지 그런 '잡일'을 도맡아 하는 건 매정하다 못해 가혹한 현실이었다.

"할 수 없는 건 해 봐야 알 수 있는 거야. 진짜 무능한 게 뭔지 알아?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무능이라고!"

엘리스 에클라트.

그녀는 지금까지 스스로 무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무능하기에 기사가 될 수 없다고, 그렇게 자신을 탓해 왔다.

그러나 그녀는 무능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을 뿐.

"...이쯤에서 조장을 정하는 게 좋을 듯하네요."

아리엘은 엘리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에밀리와 프레디에게 물었다.

"거기 두 사람이 선택하세요. 나랑 에클라트 중에 누굴 조장으로 할 건지."

"...그래 좋아. 둘 다 부담 갖지 말고 선택해. 누굴 선택한다 해도 너희 선택을 따를 테니까."

갑자기 선택권을 부여받은 에밀리와 프레디가 어쩔 줄 모른 채 그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잠깐만 상의해도 될까? 너무 갑작스러워서...."

묵묵부답인 아리엘과 달리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에밀리와 프레디는 나무 뒤로 걸어가 이야기를 나눴다.

"어떡하지? 넌 누가 조장이라고 생각해?"

"모르겠어. 근데 아리엘이 하는 말도 맞는 거 같고...."

"나도 그래. 그래도 우리 생각해 주는 건 엘리스잖아. 아 진짜... 고래 싸움에 새우등 미친 듯이 터진다 정말."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두 사람.

여전히 그들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사이, 에밀리와 프레디가 한 사람을 지목했다.

"...."

슬쩍 옆을 확인한 엘리스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 악 (1)

스마트폰으로 상황을 감독하던 나는 7팀의 화면에서 눈길을 돌렸다.

"결국 엘리가 이겼네."

엘리와 아리엘이 한 조에 속한 이상 마찰은 불가피하다.

솔직히 나도 이 둘의 관계는 예측하기 어렵다.

50화 이전에 퇴장한 엘리와 그 이후에 등장하는 아리엘 사이엔 어떠한 접점도 없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친구는 어렵겠고...."

결국 서로 라이벌이 되는 건가.

나쁘지 않은 결과다.

어차피 엘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아리엘을 꺾을 수 없다.

아리엘은 노력에 재능까지 더해진, 말 그대로의 '수석'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아리엘이 엘리를 가지고 놀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본 것처럼 엘리에겐 '리더십'이 있다.

사람을 가꾸고 결집하게 만드는 힘.

결속의 존재인 인간에게 엘리가 가진 능력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이다.

그리고 나는 이 두 사람이 하나로 힘을 합치길 바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게 엄청난 힘이 될 거고, 보다 수월하게 운명에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이쯤 어딘가였을 텐데."

그레이스와 갈라져 10구역의 순찰을 돌고 있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번 토벌이 시험이긴 하지만, 엄연히 황실에서 명령한 정식 토벌이다.

어설프게 처리했다간 괜한 흠을 잡혀 새로운 구설수에 오를 것이다.

이왕 하는 일, 확실히 끝내는 게 낫다.

그래도 일단 찾을 건 찾아야지.

"마나 탐지기를 가져올 걸 그랬나...."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건 반지다.

토벌하러 왔다면서 무슨 반지를 찾고 있겠냐, 싶겠지만.

정말 중요한 반지다.

레아 실비아의 반지.

인마 전쟁 당시 사망한, 제국의 전 웨펀 마스터의 유일한 흔적.

이제 엘리의 소유가 된 호라이즌 팬던트가 '수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실비아의 반지는 오직 '파괴'만을 위해 만들어졌다.

누가.

무슨 재료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능력 하나는 확실한 반지다.

"...또 어떻게 죽을지 몰라."

불과 하루 만에 운명이 두 번이나 악화되었다.

그리고 다음 사망까지 남은 악화도 두세 번 언저리.

지금까지 나는 막연히 생각해 왔다.

죽기 직전에 북마크를 사용해 페이지를 되돌리면 되겠지.

그렇게 다시 전개를 바꾸면 돼, 라고.

...하지만 바꿀 수 없는 전개가 있었다.

아무리 페이지를 되돌려도, 지나간 순간을 다시 읽어도, 똑같은 결말에 도달하는 전개가 있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적어도 내 몸 하나는 건사할 줄 알아야 된다."

아리엘에게 자극까지 받은 나는 요즘 미친 듯이 수련에 빠져 있다.

거기다 레벨이 올라간 「성장」까지 더해지니 이제 기본기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지금 좋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을 뿐, 이제 중요한 건 장비다.

그레이스와 같은 진짜 '영웅'들과 대적하지 않는 이상, 결국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장비'로 승패가 결정되니까.

그런 의미로 이제 내게 필요한 건 장비, 즉 '아티팩트'다.

"그런데 이걸 무슨 수로 찾는담...."

크룬데일에 실비아의 반지가 묻혀 있다는 사실은 '볼프윈 반달리'가 지나가는 식으로 설명한 게 전부였다.

「"이 반지? 아... 주웠어. 크룬데일을 산책하던 길에 우연히. 운이 좋았지."」

볼프윈이 우연히 주운 것은 아니었다.

레아 실비아, 그녀의 부하가 바로 볼프윈이었으니까.

그 역시 나중에 발견된 실비아의 유서가 아니었다면 찾지 못했을 것이었다.

일단 찾아보자.

이렇게 서 있는다고 해서 이곳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반지가 내게 굴러오진 않을 테니까.

"...일단 그걸 사용해 보는 수밖에."

「식스 센스」를 사용하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의 아우라를 볼 수 있게 된다.

반지에는 엄청난 힘이 깃들어 있을 테니, 적어도 작은 단서 하나는 건질 수 있을 것이다.

〔 「식스 센스」 발동 〕

음습한 대지에서 거멓게 죽은 아우라가 악취처럼 올라왔다.

이내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허...."

북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부근.

그곳에서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구치고 있는 섬광을 마주한 나는 어이가 없었다.

"...호라이즌 펜던트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 * *

밤이 되자 인근의 도시로 돌아온 그레이스와 로한은 프리미엄 호텔의 7층과 8층을 통째로 빌려 학생들에게 분배했다.

복도에 학생들을 집합시킨 로한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오늘 수고했다. 룸서비스든 뭐든 다 학교에서 부담할 테니까 내일 2일 차를 대비해 마음껏 즐기면서 쉬어라. 이상."

"와! 정말여?"

"대박! 야, 빨리 룸서비스 예약하자!"

분주해진 학생들이 저마다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레이스는 학생들 사이로 이리저리 치이고 있는 로한을 바라보다 걸음을 돌렸다.

"...."

씁쓸해진 눈빛이 바닥을 그었다.

호텔을 벗어난 그레이스는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로한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있을 수 없었다.

'그레이스, 넌 왜 항상 이 모양인 거야....'

로한에게 미안했다.

그레이스는 언제나 로한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잘 나가고 있던 그에게 부교수직을 권했을 때도,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몰랐을 때도, 주말 아침 그의 집을 불쑥 방문했을 때도, 사계의 변형을 연구할 때도, 그가 만들어 준 스파게티를 먹을 때도, 함께 미하엘을 만나러 가자고 했을 때도, 만나러 갔을 때도, 식사 도중 한마디를 지지 않고 미하엘의 심기를 건드렸을 때도, 아리엘과 대화를 하다 회의감에 휩싸였을 때도,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다 미하엘에 대한 마음을 토로했을 때도, 그럼에도 로한이 자신의 곁을 영원히 지키겠다 맹세했을 때도....

...내가, 미하엘이 아닌, 로한, 너를 떠올리며, 숨이 차오를 때조차....

"...미안해."

그레이스의 가슴속엔 언제나 그 말뿐이었다.

받은 게 너무 많아 어떻게 갚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지금 가진 것으로는 그때 먹은 스파게티 한 접시의 값조차 지불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만큼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녀에게 로한의 호의는 간절한 것이었다.

"여긴...."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길을 거닐고 있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잠시 걸음을 멈춘다.

뒤를 돌아보자 대낮처럼 밝혀진 도시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먼 세상의 풍경 같다.

지금 저들은 웃고 있다.

내가 지켰으니까.

그러나 나는 웃지 못한다.

무엇을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많은 것을 지킨 거 같은데...

...지금 내 곁에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시 앞을 돌아보면 복구되지 못한 세상의 아픔이 나를 반긴다.

무너진 건물들, 부서진 채 녹이 슨 자동차, 쓰러진 전신주, 아름답도록 멸망한 세상... 그 모든 전쟁의 흔적들.

오직 그것만이, 내가 살아 숨 쉬는 게 허락된 세상이었다.

나는 너무나 많은 목숨을 앗아 갔고, 나는 너무나 많은 행복을 짓밟았으니까.

"...."

벌을 받고 있음이 마땅하다.

많은 죄를 지었으니, 이제 그 값을 치를 때라고 생각했다.

이미 이 세상은 그녀에게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망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되풀이하던,

'어디든 좋으니까....'

간절한 한마디.

'...도망가게 해 줘.'

사랑하는 사람도 잃었다.

간신히 붙들고 있었는데, 그마저 놓아 버렸다.

이제 남은 일은 그렇게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추락하는 것뿐.

깊고, 깊고, 또 깊고, 아득히 깊은 곳으로....

"바람이 살갑습니다."

그때였다.

"산책하기 좋은 밤이군요."

어느새 로한이 그레이스의 곁에서 무너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로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사과를 건네야 할지 몰랐다.

"로한...."

천천히 뒷걸음치는 그레이스.

이윽고 고개를 완전히 돌린 그녀가 물었다.

"여긴 어떻게?"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이렇게, 능청스러우면서도 든든하게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 순간 그레이스가 나쁜 마음을 먹으려 했다.

'로한이라면, 나와 같이 도망쳐 주지 않을까?'

언제나 내 곁에 있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신념도 정의도 의무도 저버린 채 도망친다 해도, 내 곁을 지켜 주지 않을까?

"로한."

그런 마음속에서 그레이스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이었다.

"다시는 아무 말 없이 떠나지 마십시오."

"어?"

다음 순간 로한이 멍청이처럼 웃어 보였다.

"여기 계신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아다녔지 않습니까."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어 버리는 미소.

"미안해. 걱정할 줄 몰랐어."

"당연히 걱정이 되죠. 그 많은 채점을 혼자 다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도망칠 걸 그랬나...."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미소를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은, 버틸 만하다고.

"이만 돌아가자."

그렇게 로한을 뒤따라 걷던 그레이스가 문득 물었다.

"있잖아, 로한."

"말씀하십시오."

"그날 나...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

로한이 침묵했다.

사실 그레이스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모른 체, 로한을 한 번 떠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때 로한의 입이 열렸다.

"하셨습니다."

그대로 얼어붙은 그레이스.

"뭐라고 했는데...?"

"...나 와써. 열어 조 이거."

"뭐, 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린 로한은 이내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지금처럼 정말 귀여우셨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던 성좌들이 속삭이듯 반짝이고 있었다.

* * *

시험 2일 차.

어젯밤 잘들 쉰 건지, 이제 합이 맞기 시작한 건지, 다들 마수를 사냥하는 솜씨가 좋아졌다.

순찰을 돌던 나는 왼손 중지에 착용한 반지를 자랑스럽게 들어 올렸다.

"쓸 만한 반지를 얻었군."

어제, 섬광을 따라 도착한 곳에서 썩은 나무 아래에 깔린 실비아의 반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저 아무 문양도 없는 검은 반지에 불과하지만, 이게 진짜 물건이거든.

게임으로 치면 사용자의 능력치를 일시적이지만 두 배로 뻥튀기 시켜 주는 아티팩트다.

정확히 두 배인지는 모른다. 다만 엘리의 펜던트와 달리 이 반지는 사용자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빛을 발하는 물건이었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펜던트가 더 좋겠지만, 그건 내가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다.

"얻은 김에 한번 써 보고 싶은데...."

좋은 장비를 얻었으면 써 줘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학생들이 다 잡아 버렸는지 멜크는커녕 마수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다행이다. 토벌은 성공적이었으니.

거기다 코넬리아가 어떻게 한 건지 호텔을 빌리고도 여비가 남았다.

인당 50만 링씩 남았으니, 시험 끝나면 리틀 히스에 가서 학생들과 회식을....

위잉위잉위잉―!

순간 신호벨이 울렸다.

그렇다고 당황할 일은 아니다.

어제도 학생들이 전투 도중 실수로 신호벨을 울린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제 곧 잠잠해질 것....

위잉위잉!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군.

띠리링!

이윽고 내 스마트폰까지 울렸다.

전화를 받자 에밀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부, 부교수님! 마물, 마물이 나타났어요...!]

"기다려. 곧장 가겠다."

그대로 통화를 끊은 나는 7팀의 위치를 확인한 동시에 나무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내 '마물'이란 단어를 곱씹은 내가 인상을 구겼다.

"...빌어먹을."

어쩐지 전개가 너무 평화롭더라.

§ 악 (2)

조원들을 돌아보던 엘리스가 기합을 넣었다.

"이대로만 가면 우리가 1등이야! 에밀리, 프레디. 너무 잘하고 있어. 다 너희 덕분이야."

"엘리랑 아리엘 덕분이지 뭐... 우린 그냥 네 말대로 주의만 끌었을 뿐인걸."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빈틈을 만드는 거야. 너희가 빈틈을 만들지 않았으면 우린 아직도 저 뒤에서 멜크나 잡고 있었을 거라구."

"그, 그런가?"

"당연하지!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야? 그럼 못 써. 더 자신감을 가져!"

"고, 고마워 엘리! 더 열심히 해 볼게!"

그 말에 신이 난 에밀리와 프레디가 구부정한 어깨를 펼치고 있을 무렵, 엘리스의 곁으로 다가온 아리엘이 슬그머니 말했다.

"너무 비행기 태우시네요."

"비행기라니?"

"과도한 자신감이 어떤 적보다 두려운 존재라는 걸 아실 텐데 말이죠."

"뭐. 그러니까 네 말은 분수에 맞지 않게 깝치고 다니다 뒤질 수도 있단 뜻이야?"

"글쎄요. 본인이 믿는 게 정답 아닐까요?"

"누가 그 가문 사람 아니랄까 봐 어쩜 재수 없는 말투까지 똑같니?"

"입조심해요. 우리 가주님을 욕하는 건 그냥 못 넘어가니까."

고개를 가로젓던 엘리스는 곧 에밀리와 프레디를 힐끔거렸다.

처음보다 자신감이 많이 좋아진 그들은 이제 걸음부터 달라져 있었다.

엘리스가 그들을 다정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에밀리랑 프레디가 약하다 해도, 멜크 하나 못 잡을 정도는 아니야. 쟤들에게 필요한 건 재능도, 더 나은 이론도, 값비싼 무기도 아닌 자신감이야. 전투에서 자신감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엘리스는 에밀리와 프레디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간파하고 있었다.

그건 본능이었다.

그리고 지휘관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안목이기도 했다.

엘리스는 그런 눈으로 아리엘을 응시했다.

"그런데 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리엘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지,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리엘이 서 있는 자리만 풍경에서 뜯겨져 나간 것처럼 무한한 공허만이 엘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엘리스가 물었다.

"...넌 왜 기사가 되고 싶은 거야?"

그 말에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아리엘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엘리스를 마주했다.

"너 정도로 강하면 웬만한 기사단에 입단 시험을 보면 바로 통과할 수 있을 텐데, 뭐가 부족해서 스프링윈드까지 다니고 있는 걸까 궁금해서. 아, 오해하지 마. 진짜 궁금해서 그래. 진짜."

"...."

그 질문에 아리엘이 떠올린 건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떠올린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찔해지고 걸음이 휘청거리게 만드는 사람.

갖고 싶지만, 그저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되는 존재.

그녀의 세계관에 신이란 게 있다면, 로한, 바로 그 인물일 것이다.

"당신은 내가 기사가 될 자질이 부족해 보이나요?"

"어? 아, 아니. 꼭 그런 의미는 아니고... 미안, 괜히 이상한 말을 꺼내서. 방금 한 말은 그냥 잊어―"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으응?"

너무나 의외의 답변에 엘리스는 순간 이상한 신음이 흘러나온 입을 틀어막았다.

로한에게 다가서는 길처럼 흙바닥을 가지런히 밟던 아리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전부와 맞바꿔도 내가 이득인 사람. 나는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기사가 되고 싶은 거예요. 이걸로 답변이 되었나요?"

"어? 어... 고마워...."

당황한 엘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엉뚱하게 던져 버린 질문이었는데, 예상외로 굉장히 진지한 답변을 받아 버렸다.

대화를 마친 아리엘은 다시 엘리스의 곁에서 멀리 떨어졌다.

아리엘을 힐끔거리던 엘리스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내가 좀... 경솔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자칫 한 사람의 신념을 비웃을 뻔했다.

아리엘 또한 기사가 될 자격은 충분했다.

또한 인생 전부를 걸어 무언가를 지키려 하는 기사는 그레이스를 제외하고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저게, 진정한 기사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에, 엘리? 아리엘...?"

그때 프레디의 뒤에 숨어든 에밀리가 앞을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게 뭐야...?"

엘리스와 아리엘은 에밀리가 가리킨 곳을 서둘러 확인했다.

"저건... 사람 같은데?"

"사람이 아니에요. 똑바로 보세요."

그것은 분명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온몸의 피부가 그을린 것처럼 검었다.

이윽고 엘리스의 머릿속으로 '악마'란 단어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꾸득― 꾸드드득!

악마의 몸이 뒤틀리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변형을 마친 악마를 지켜보던 엘리스가 입을 틀어막았다.

크르르....

검은 피부의 육중한 몸체.

인간이 괴물이 된다면 필히 저런 모습이리라 생각될 정도로 끔찍하게 뒤틀린 존재가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πολύ, θυμός, όχι."

"아리엘!"

엘리스의 외침 속에서 검을 뽑은 아리엘이 오러를 발산했다.

「염동」을 전개한 엘리스의 네 자루의 검 또한 그녀의 등 뒤로 수놓였다.

전투태세에 돌입한 엘리스가 에밀리와 프레디를 향해 외쳤다.

"교수님들을 불러! 어서!"

마물.

혹은 악마.

이곳에 있어서 안 되는 것이 그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 * *

제국력 914년.

그해는 제1차 인마 대전의 시작이자, 역사 위로 인류의 비극이 쓰이기 시작한 해였다.

어느 순간 전 세계적으로 상공에 열리기 시작한 게이트.

그 일을 계기로 각국은 게이트 너머에 정체불명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차원에 '악마'라는 존재들이 살고 있다는 공포를 국민들에게 공표했다.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쟁 과정은 대체로 순탄한 편이었다.

승리의 여신이 인류에게 미소하듯 각국의 기사단들은 게이트 너머에서 싸워 불패하였고, 전리품으로 엄청난 양의 자원을 가지고 귀환했다.

―에테르 스톤이 가득한 차원, 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마물로 변형하는 괴이한 존재....

―율리오 히스토리아 황제, 해당 차원과 그 차원에 속한 모든 존재를 '마계'와 '악마'라 규정....

―식인을 일삼는 악마들, 식인 행위로 인해 인간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 주의를....

―...제국력 918년. 마침내 히스토리아 황제가 종전을 선포, 게이트들도 자취를 감추고 있는 상황....

제1차 인마 대전 이후 인류는 유래 없는 황금기를 누렸다.

'마계'에서 채굴한 에테르 스톤의 양이 가히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939년, 또다시 게이트가 열리며 이번엔 악마들이 역으로 침공하는 제2차 인마 대전이 시작되던 해.

한순간 대륙은 지옥이 되어 버렸다.

'마계의 패잔병들이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러나 그 누구도 전쟁이 왜 발발했는지, 어째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잃어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적으로, 악으로 규정된 차원의 존재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며 대륙을 지켰을 뿐.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교수님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악마의 기세가 땅을 울리고 대기를 죄여 오고 있었다.

저 정도 악마라면 최소 '소드 엑스퍼트'는 되어야 대적이 가능하리라.

달려오는 악마를 주시하던 엘리스는 미간을 구겼다.

'몰라! 일단 싸워야 돼!'

그녀 혼자만이라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었지만, 프레디와 에밀리는 잡힐 게 분명했다.

그 순간 악마에게 정면으로 돌진한 아리엘이 술식을 발현하는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우우웅― 콰앙!

오러 폭풍이 흙먼지와 함께 몰아쳤다.

팔로 얼굴을 가려 올린 엘리스가 아리엘에게 외쳤다.

"안 돼! 너 혼자서는 무리야! 일단 시간을 끌어야 된다고!"

그럼에도 아리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일격을 준비했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당신들은 도망치세요."

"그럼 너는?"

"언제부터 나를 신경 썼다고."

"너 진짜―!"

파앙!

파공음 속에서 아리엘의 칼날이 악마의 목을 노리며 나아갔다.

그러나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의 악마가 손을 뻗어 그녀의 검신을 움켜쥐었다.

"익숙한, 마나군."

"!"

검과 함께 끌어당긴 아리엘을 한 손으로 움켜쥔 마물이 물었다.

"어째서, 저들을, 돕는, 것이냐."

"그게 무슨...?"

되묻는 아리엘의 음성에 악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각이, 없는, 것인가."

거북하게도 아리엘은 한 번도 배운 적 없던 '언어'를 알아듣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악마가 손에 힘을 실었다.

꽈악!

몸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

그것을 버티기 위해 아리엘은 필사적으로 오러를 발산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피가 흐르도록 입술을 물어도, 단순한 악력을 견디기 버거웠다.

쎄에엑!

순간 날아든 네 자루의 검이 악마의 등을 난자했다.

손을 움직여 염동으로 검을 조종하던 엘리스가 소리쳤다.

"지금이야!"

그와 동시에 몸을 회전시킨 아리엘이 마수의 손가락을 베어 내며 날아올랐다.

투둑.

잘려 나간 손가락을 바라보던 악마가 중얼거렸다.

"망설, 였군."

이윽고 잘린 부위에서 새로운 손가락들이 급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임무, 속행, 한다. 예외, 없이."

'임무라고...?'

아리엘이 그 말의 의미를 곱씹던 사이, 마물이 주먹을 내질렀다.

일순 아리엘은 자신과 같은 악마의 마나를 보며 소리 없이 경악했다.

'이건 나와 같은...!'

퍽!

아리엘의 복부를 직격한 주먹.

허공으로 떠오른 그녀는 이내 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악마가 주먹을 휘두른 궤적을 따라 주변의 나무들이 박살 났다.

"커억...!"

쓰러진 아리엘이 하늘을 향해 피를 토했다.

다시 일어나려 해도 전신의 뼈들이 나무처럼 박살 나 있었다.

"뭐야...."

꿈틀거리던 아리엘을 지켜보던 엘리스가 어금니를 물었다.

'상대가 안 되잖아...!'

저 악마는 멜크와 같은 마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냥을 당해 온 멜크들의 심정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쿵, 쿵....

이윽고 악마가 엘리스를 향해 서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엘리스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늪에 빠진 것처럼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다.

순간 눈앞으로 그날이 재생되었다.

"씨발...."

그녀의 어머니가 죽었던 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날.

그렇게 자신을 죽도록 원망하기 시작했던, 그 어느 날을.

꽈악―

자신의 무능함을 짓씹던 엘리스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제 도망치지 않아.'

도망치지 않겠다.

'이제 아무것도 잃지 않을 거야.'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음 순간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가 빛으로 휩싸였다.

동시에 각오를 다진 엘리스가 힘껏 외쳤다.

"...에클라트 기사단의 차기 단장이다!"

그녀의 숭고한 의지 속에서 마나가 폭발하고 있었다.

* * *

「"엘리, 넌 웃는 모습이 정말 이쁜 거 같아."

ㅤ"내가 그랬나? 히"

ㅤ"응응! 그래서 너랑 있으면 매일이 파티인 기분이야!"」

울고 싶을 때마다 억지로 웃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웃는 상이 되어 버렸다.

「"그럼 다행이네...."」

언제나 슬픔을 지우며 행복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엘리스 에클라트, 그녀였다.

'다행이야....'

이 순간, 그랬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왠지 싸울 수 있을 거 같아.'

펜던트가 빛을 발한 순간 형용할 수 없는 크기의 마나가 전신을 에워싸고 있었다.

바라고자 하면 모든 게 가능할 거 같은 기분.

세상이 한없이 낮아 보이는 자신감.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수석도 별거 없었네. 겨우 악마 따위한테 당하기나 하고 말이야."

장난스럽게 말한 것과 달리, 엘리스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우우웅―

이윽고 그녀의 코어로 마나가 응집되고 있었다.

'이론이라면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아.'

아직 3서클도 쌓지 못한 엘리스였지만 이론 분야만큼은 전문가, 그 이상이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엘리스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4에서 5서클. 오러로 따지면 소드 엑스퍼트 상급 수준이야.'

그리고는 물속을 유영하듯 허공에 떠 있는 펜던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50억짜리 예쁜 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엄청난 힘이 깃들어 있을 줄이야....'

어째서 그날 경매장에서 로한이 기를 쓰고 입찰하라 했는지 깨달았다.

로한은 여기까지 예상했던 걸까.

...그날 식당에서 내게 염동을 연마하라고 한 것처럼.

쎄에엑!

한층 더 강화된 염동을 타고 엘리스의 검들이 악마를 향해 쇄도했다.

그것은 더 이상 염동이 아니었다.

이기어검(以氣馭劍).

오러 블레이드와 더불어 검술의 경지에 올라야만 구현할 수 있다는 진기.

그것을 지금 엘리스가 구사하고 있었다.

서걱!

일순 악마의 목이 떨어졌다.

손가락이 재생하는 것을 기억한 엘리스의 검들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떨어지는 목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쿠웅!

도저히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악마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바닥에 고꾸라졌다.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에 엘리스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내, 내가 해냈어! 에밀리, 프레디! 너희 봤어? 내가 방금 악마를...!"

그리고 엘리스가 그들을 돌아봤을 때.

"살, 살려 줘 엘리...!"

다섯 마리의 악마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엘리스가 검의 궤도를 악마들에게 비튼 순간이었다.

"아, 아빠...!"

에밀리를 낚아챈 악마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목이 잘린 에밀리의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엘리스의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아!"

다시 눈앞에서 누군가를 잃은 엘리스의 사고가 마비되고 있었다.

펜던트의 빛이 요동친 순간 더욱 강력해진 마나 속에서 그녀의 검들이 악마들에게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까앙!

한 팔로 검들을 쳐 낸 악마가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

그것은 오러였다.

동시에 죽은 동료를 확인한 악마들이 엘리스를 인식하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저년부터, 죽여라."

크르르!

빠른 속도로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스는 서둘러 검을 운용해 그들의 후미를 노렸지만, 아예 검을 낚아챈 악마들의 손아귀 속에서 검신이 바스라졌다.

한 자루에 수천만 링이 넘는 명품들이었다.

그러나 목숨을 지키기엔 너무나 볼품없는 액수였다.

"프레디...."

"엘리, 위험―"

"도망쳐! 너라도 도망치라고 이 등신아!"

그 말에 우물쭈물하던 프레디가 바닥을 기다시피 도망쳤다.

"미안해", 라는 프레디의 눈물 섞인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도망치라고 진짜 도망치냐."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린 엘리스.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뒷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흐윽... 흐으윽...!"

죽음을 앞두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러웠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내가,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 내 신세가 너무나 서럽다.

아직 죽기 싫은데....

"...늦어서 미안하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엘리스가 눈을 뜬 순간이었다.

서거걱!

...푸학⸺

엘리스를 끌어안은 로한의 어깨 너머로 조각난 악마들의 살점들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 악 (3)

"부, 부교수님! 살려 주세요!"

마물에게 쫓기던 10조와 13조가 나를 발견하고 목이 쉬어라 부르짖었다.

검 자루를 꼬나쥔 내가 차분히 손짓했다.

"머리 숙여."

"예?"

영문도 모른 채 되묻던 학생들이 눈앞으로 펼쳐지는 은하수를 바라보다 뒤로 자빠졌다.

서걱!

발도한 순간 마물의 몸이 두 동강이 되어 밀려났다.

마물의 특성상 재생하기에 반드시 일격에 심장을 베어야 한다.

목을 잘라서도 안 된다. 대가리가 다시 자라나는 묘사를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당장 베이스 캠프로 복귀해. 오는 길에 마물을 정리했으니 안전할 거다."

"가, 감사합니다, 부교수님...!"

"울고 있지 말고 서둘러."

학생들과 헤어진 나는 다시 7팀을 향해 내달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벌써 열한 마리의 마물을 죽였다.

학생들도 대부분 복귀시켰고,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다.

나는 한쪽 이어폰을 터치해 그레이스에게 통화를 걸었다.

[로한.]

"이쪽은 거의 다 대피시켰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이제 7팀만 남았어.]

"위치를 확인해 보니 크룬데일 중심부였습니다. 7팀은 제가 책임지고 복귀시킬 테니 교수님께서는 베이스 캠프로 돌아서 남은 학생들을 돌봐 주십시오."

[하지만... 알았어.]

통화를 끊으려던 찰나 다시금 그레이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마물들, '우리' 때문이겠지?]

"그런 말 마십시오. 그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 그럼 반드시 7팀과 함께 무사히―]

그때였다.

"미, 미안해 엘리스...! 미안...!"

저 멀리, 눈물로 범벅이 된 프레디가 엉망진창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다섯 마리의 마물이 엘리스에게 달려들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에밀리는 죽었군.

지면을 밀어내며 힘껏 도약한 순간 멀리 떨어져 있던 마물들의 모습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서거걱!

「성장」을 통해 궁극에 다다른 베기가 마물들의 몸을 조각내었다.

흩어지는 살점을 그대로 통과한 나는 엘리스의 앞에 멈춰 섰다.

"...흐윽... 흐으윽...."

이 바보가 울 줄도 아는구나.

그러고 보니 그레이스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도 지금처럼 서럽게 울었지.

나는 끌어안은 엘리를 진정시켰다.

"...늦어서 미안하다."

엘리스의 몸이 연약하게 떨리고 있다.

그녀가 느낀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다 주변을 살피다 넝마가 된 아리엘을 발견했다.

소드 엑스퍼트에 근접한 아리엘이 저리 심하게 당했을 줄이야.

마물의 강함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체감이 되진 않았다.

그만큼 내가 이전보다 강해졌다는 의미였다.

그때 엘리스가 내 등을 거세게 두들겼다.

"로, 로한!"

"걱정 마."

"그게 아니라 뒤!"

나는 바닥에 꽂아 두었던 검을 뽑아 들며 돌아섰다.

"알고 있으니까."

녀석의 기척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도망칠 기회를 주었는데, 기어코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까앙!

"!"

반격이 막혀서 놀란 게 아니었다.

목이 잘린 놈의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놀란 것이었다.

아리엘이 자른 건가?

"얘, 얘는 내가 이미 목을 잘랐을 텐데...?"

너였구나, 엘리.

하긴 마물, 아니 '악마'와 싸워 본 경험이 없으니 몰랐겠지.

꾸드득!

이윽고 자라난 녀석의 머리에서 입이 열렸다.

"크아아!!!"

첫인사는 함성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함성이 아닌, 마나가 담긴 「부름」이다.

허나 저 부름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미 동료들은 그레이스의 손에 죽었을 테니까.

조용히 엘리에게 속삭였다.

"아리엘을 데리고 곧바로 베이스 캠프로 귀환해."

"로한은?"

"곧장 따라갈게."

"그럼 이 펜던트 로한이 하고 있어. 이거 엄청...!"

그 말에 펜던트를 보니 빛을 머금고 있었다.

벌써 펜던트의 힘을 개방한 건가?

그래도 이 정도 마나량이면 아직 1퍼센트도 개방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기야 이 펜던트의 힘이 전부 개방되었다면 크룬데일 전체가 날아갔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야. 나는 사용할 수가 없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움직이면 아리엘을 업고 도망치란 소리다."

동시에 마물에게 달려든 내가 마물의 한쪽 팔을 잘라 냈다.

서걱!

다음은 오른팔.

왼쪽 무릎. 오른쪽 허벅지.

쿠웅!

사지가 잘린 마물이 토막 난 장작처럼 바닥을 굴렀다.

나는 녀석의 심장에 칼끝을 겨눈 채 입을 열었다.

"...이름을 말해라, 추방자여."

* * *

지금 내게 꽤 많은 개연성이 모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상태창」을 구매했다.

ㅤㅤㅤㅤㅤㅤㅤㅤ이름 : 로한

ㅤㅤㅤ [근력 : A] ㅤㅤ ㅤㅤ [민첩 : A]

ㅤㅤㅤㅤㅤ├───능력치───┤

ㅤㅤㅤ [체력 : A] ㅤ ㅤㅤㅤ[마력 : B]

ㅤㅤㅤㅤㅤ⸺「보유 설정 목록」⸺

ㅤㅤㅤㅤㅤㅤㅤ ㅤ [펼치기]

상태창의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실망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저기, 「보유 설정 목록」의 아래를 펼친 순간.

지금까지 상태창을 구매하지 않은 내가 원망스러웠다.

〔 「통합 언어」 발동 〕

나도 모르는 몇 가지 설정을 더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그중 하나가 바로 「통합 언어」라는, 내가 이 세계에서 글을 읽고 말귀를 알아듣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설정 중 하나였다.

"허튼 수작 마. 낌새가 보이는 즉시 심장을 찌를 것이니."

마물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사이 엘리는 아리엘을 데리고 무사히 이곳을 탈출했다.

"이름은, 없다."

그럼 '대전사'는 아니란 의미다.

아마도 이 녀석들의 정체는... '이름 없는 것'.

마계에서 대륙으로 건너온 '공작원'이다.

"어떻게, 우리의, 말을?"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돌아가라."

"돌아, 가라고? 순진하군."

그리고는 비웃는 마물.

한참을 웃던 마물이 나를 노려봤다.

"내가, 이대로, 돌아갈 것, 같냐?"

"나는 지금 네게 살아서 돌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멜른의 전사여."

"...너는, 대체, 누구지?"

하멜른의 전사, 추방자 그리고 마계.

그 모든 키워드가 조합된 결과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검을 거둔 내가 핏방울 같은 마물의 눈을 들여다보며 답했다.

"나는 관측자다."

* * *

아주 오래 전.

이 땅에는 두 부류의 인간들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는 단순히 마나를 부리며 살아가던 '멀린의 아이들'.

다른 하나는 마나를 부리는 것을 넘어 마물로 변형할 수 있던 '하멜른의 전사들'.

창세(創世) 직후에는 두 집단이 서로 힘을 합쳐 문명을 이룩하고 인류를 번영했다.

그러나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 마법과 검술은 미개한 수준에 불과했다.

때문에 마물이 될 수 있는 하멜른의 전사들이 멀린의 아이들을 지배했고, 핍박했으며, 심지어 역사를 유린했다.

...라는 게 멀린의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표명하는 입장이었다.

실상은 그 반대였다.

마법과 검술이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건 맞지만, 하멜른의 전사들은 결코 멀린의 아이들을 지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조화를 꿈꿨다. 미래를 지향하며 인류의 발전을 꿈꿨다.

그렇게 화합이야말로 진정한 번영이라고 믿어왔다.

하멜른의 전사들은 끔찍한 모습과 달리, 굉장히 온순하고 평화적인 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마법과 검술의 발달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리고 어느 기점을 순간으로 관계가 역전되는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화약이 개발되고 강선이 등장하자 칼, 창, 활 같은 냉병기들이 총과 대포 같은 화기들에게 밀리기 시작한 현실의 역사처럼.

이때까지만 해도 마법과 검술을 그저 장작에 불을 피우고 산짐승을 사냥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나에서 '서클'과 '오러'가 파생된 순간.

마법은 장작을 넘어 숲을 불태우기 시작했고, 검술은 단단하고 두꺼운 마물의 피부까지 베어 낼 정도로 막강해졌다.

그때부터였다. 하멜른의 전사들이 '그저' 끔찍하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하기 시작한 것은.

그동안 자신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보호해 준 은혜는 모래알처럼 쌓인 역사의 사막 어딘가에 함몰된 지 오래였다.

이제 반대로 미개해진 하멜른의 전사들은 갖은 핍박에도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이용당하고, 빼앗기고, 빌어먹을지언정, 결코 반격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존재하는 기사도(騎士道)의 뿌리일지도 모른다.

혹은 노예였거나.

어쨌거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갈등은 곪은 상처처럼 썩어 문드러질 뿐이었다.

―저 마물들을 대륙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치고 구역질이 올라와서 못 참겠어요!

―애초에 우리 '인간'들이 왜 저 '마물'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겁니까?

여론은 점점 그들을 추방해야 된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무렵, 하블다운의 제국의 창업 군주 히스토리아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예 차원 밖으로 추방시키는 것은 어떻겠소?

―차원 밖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그저 단면에 불과하오. 종이를 자르듯 공간을 찢는다면 그 너머의 세상이 보이고, 또 존재한단 말이지.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오.

계획은 아주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단순했다.

공간에 균열을 일으켜 게이트를 열고, 그 비좁은 구멍에 수천만 명이 넘는 하멜른의 전사들을 모조리 밀어 넣으면 끝이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저항으로 인한 유혈 사태는 없었다.

하멜른의 전사들이 순순히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게이트를 통과하던 하멜른 6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떠난다. 다만 이 땅에서 우리가 사라진 순간 너희와의 '계약'은 사라진다. 그 이후에도 우리의 전사를 건드린다면, 참지 않겠다.

하멜른 6세의 말은 활자가 되어 책과 신문을 통해 대륙에 널리 퍼졌다.

그 말을 본 인간들은 사색이 되었다.

사색이 될 정도로, 비웃었다.

하지만 히스토리아는 그 경고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게이트의 술식을 영원히 봉인하는 동시에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하멜른의 전사'에 관한 모든 기억을 삭제했다.

...이것이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 세상의 역사다.

동시의 하블다운 제국의, 아니 이 세상의 추악한 민낯이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을 '관측자'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나도 이걸 다 읽었으니 관측자는 맞겠지.

나는 원망과 증오의 역사로 점철된 마물을 향해 나지막이 고했다.

"너희의 차원으로 돌아가라. 우리는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마물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경고를, 어기고! 전쟁의, 불씨를, 지핀 건! 너희, 인간들이었다!"

"사과는 하지 않겠다. 대신 제2차 인마 대전을 주도한 건 너희가 아닌가?"

"...!"

이 녀석들은 분명 피해자다.

아니, 피해자였다.

복수로 물들어 다시금 전쟁을 시작하기 전까진 말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억울함을 비하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나라도 복수했을 테니까.

그런데 말이다.

"...."

나는 에밀리의 시체를 조용히 응시했다.

강의마다 가장 먼저는 아니더라도 열 번째 안에 출석해 앞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아이였다.

강단에 서면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앞자리 학생들의 얼굴이었으니,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부교수님, 저도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재능이 없고 능력이 없어도, 비록 기부 학생이더라도, 노력만큼은 누구보다 스프링윈드에 어울리는 학생이었다.

"...너는 이미 기사였다."

누구를 원망해야 될까.

이미 역사가 이렇게 쓰이기 시작한 것을.

"에밀리 로즈. 너희가 죽인 인간의 이름이자, 내 제자의 이름이다."

"그게, 뭐, 어쨌다는⸺!"

"내가 죽인 네 동료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

나는 조각난 마물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너는 무엇을 잃었나? 그리고 무엇을 빼앗았나? 너의 마음은 이해한다. 나 역시 지금...."

푹!

"...같은 기분이니까."

순간적으로 마물의 귀를 스친 검신이 흙바닥 속으로 가라앉았다.

검 자루에 힘을 주던 나는 마물의 눈동자를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지금 너를 갈기갈기 찢어 에밀리의 죽음을 달래 주고 싶지만, 살려 주마."

"어째서...?"

"지겨운 이 복수의 사슬을 끊어 내기 위함이다."

"내가, 살면, 다시, 너를, 죽이러, 올 것이다."

"기다리고 있겠다."

"...너는, 정말, 관측자인가?"

대답 없이 검을 거두고 일어난 나는 에밀리의 시신을 수습했다.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저기 살점 어딘가에 뒤섞여 있을까....

기어이 머리를 찾지 못한 채 떠나려던 내게 마물이 물었다.

"너, 이름, 뭐냐?"

걸음을 멈추고 서서히 숨을 들이마셨다.

곁을 떠돌던 피비린내가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폐부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기사 로한."

* * *

쓰러진 마물은 잘린 사지를 돌아보았다.

머리를 재생하는 통에 팔다리가 자라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치이익....

마물의 모습이 줄어들더니 이윽고 인간의 형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때 멀리서 발소리가 쿵쿵 울렸다.

"대, 대장!"

이번 임무에 함께 투입된 전사 중 한 명이었다.

이름 없는 것의 대장, 'A'의 부름에 달려온 전사가 마물화(魔物化)를 해제하고 무릎을 꿇었다.

A가 그의 주변을 훑어보며 물었다.

"다른 전사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그자에게 말인가?"

그러자 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다른 기사에게도 꽤 당했습니다."

"그 기사의 이름이 혹시 '로한'이었나?"

"모르겠습니다. 제발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A는 숨을 고르며 하늘을 우러렀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

구름이 흐르고 햇볕이 쏟아지는, 자신들의 차원과 다를 바 없는 하늘이었다.

'아니, 우리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들은 모두 원수라는 것뿐.

'이곳에서 관측자를 조우하게 될 줄이야....'

A가 전사, '이름 없는 것'들을 이끌고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였다.

'멀린의 후예들을 밟아 터트리긴커녕, 되려 우리가 당해 버렸군.'

그레이스 유클리드.

제국의 군단장이자, 마계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힌 '악'.

그레이스가 정치 싸움에 밀려 스프링윈드의 교수직으로 좌천됐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더 피해를 입힌다면 그녀의 명예는 더욱 실추될 것이고, 인간들의 시기와 질투에 의해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나락으로 치닫게 될 것이었다.

"스물여덟을 하나와 바꿨다... 그때와 똑같군."

거짓말 같은 현실에 A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 포함 서른 명의 전사들을 투입한 결과가 고작 이거란 말인가?'

그것도 28명의 전사들까지 사망한, 최악의 결과.

모두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인간을 얕봤기 때문이었다.

'그 기사, 이름이 로한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엄청난 인물이 그레이스의 곁에 있을 줄은 몰랐다.

'관측자라....'

관측자는 그에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들 역시 또 다른 관측자의 도움으로 제국 각지에서 공작 활동 중이었다.

'그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필시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순간 로한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지겨운 이 복수의 사슬을 끊어 내기 위함이다.

이내 팔다리를 재생한 A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람을 따라 머리를 뒤로 쓸어내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후퇴한다. '대전사'에게 보고할 것이 생겼으니."

"예!"

§ 술 (1)

이튿날, 메모리아 국립묘지.

에밀리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내가 관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후두둑―

슬픈 영화나 드라마의 클리셰처럼 내리는 비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대신 거대한 물의 술식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이 세상에서 애도를 표하는 방법이다. 우습게도.

"...."

그 순간 코넬리아 곁에 서 있던 미하엘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응시하며 담배를 털어 낸 그가 멀리 떨어진 고목 아래로 향했다.

여전히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장을 가다듬은 나는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거진 그늘 아래, 미하엘이 입을 열었다.

"마물이 출현했다지."

"...그렇습니다."

"유감이군."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다시 묘지로 눈길을 돌렸다.

가뜩이나 축축한 땅이 흘린 눈물들로 젖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미하엘을 들여다봤다. 눈앞으로 그의 모든 것이 나열되었다.

ㅤㅤㅤㅤㅤㅤㅤㅤ이름 : 미하엘 리펜슈타인

ㅤㅤㅤ [근력 : A] ㅤㅤ ㅤㅤ [민첩 : A]

ㅤㅤㅤㅤㅤ├───능력치───┤

ㅤㅤㅤ [체력 : A] ㅤ ㅤㅤㅤ[마력 : SSS]

ㅤㅤㅤㅤㅤ⸺「보유 설정 목록」⸺

ㅤ 「주인공」, 「플롯 아머」, 「천재 마법사」

ㅤ 「고결함」, 「권선징악」, 「칭찬 알레르기」

ㅤ 「독설」, 「결벽증」, 「소심함」...[생략]

무슨 설정이 이렇게 많은지.

주인공 하나를 만들려면 이렇게 많은 설정이 필요한 건가.

플롯 아머는 또 뭐야. 아예 죽지도 않는다는 건가?

하여간 빌어먹을 먼치킨이다.

"지난번 내게 했던 말, 기억하고 있나?"

상태창을 해제한 나는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그날 나는 아리엘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했었다.

그때는 너무 열이 받아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돌이켜 보니 절대 해선 안 될 말도 끼어 있었다.

"그럼 그 말의 의미도 알고 있겠군."

"...예."

"언제부터였지?"

"조금 되었습니다. 한, 2년 정도."

"그런가."

반지를 감싸 쥔 미하엘이 나를 바라봤다.

에밀리의 관이 사선의 경계를 지나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어째서 나를 밀고하지 않았지?"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리펜슈타인 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장례에서 눈길을 돌린 내가 미하엘을 마주했다.

그는 평온했다.

평온하게, 나를 방관하고 있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더욱이 제국에서 반역죄는 양날의 검입니다. 상대를 말살하지 못하면, 다음은 제가 되죠."

"확실한 증좌가 없었단 말인가?"

"증거야 이미 많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다섯, 아니 여섯이 넘는군요. 게다가 없는 죄를 만들어 내는 게 관리국이란 거 아시잖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여섯 개라... 보기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미하엘이 반역을 꾀했다는 증거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다.

실제로 당장 움직이면 두세 개 정도는 금방 찾아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리펜슈타인 가문의 손가락 몇 개는 잘라 버릴 수 있다.

다만 그 이후가 문제다.

손가락 몇 개 없다고 해도, 거인은 거인이니까.

"그게 그동안 네가 내 앞에서 세우던 자신감의 근간이었군."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유클리드 때문인가?"

미하엘은 나와 동시에 그레이스를 주시했다.

그녀는 살랑이는 바람에도 날아갈 듯이 멀거니 서 있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얼마나 가져갔나?"

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그레이스의 마음을 1밀리미터도 거머쥐지 못한 것 같으니까.

그들이 파혼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레이스는 미하엘을 원하고 있었다.

"조금씩 가져가야만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했다.

"한 번에 가져올 겁니다. 상처 하나 없이."

"그렇다면 묻겠다."

"말씀하십시오."

"그 이후엔 무엇을 할 생각인가?"

순간 머리에 쥐가 난 것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번도 상정하지 않은 문제였다.

내가 그레이스를 가져온 뒤.

그 이후에 무엇을 하게 될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정말 솔직해서 좋군."

"그래도."

그래도, 한 가지 소원을 한다면.

"리틀 히스에 식당 하나 열어서 그레이스 님과 같이 운영하고 싶습니다."

"식당?"

"예. 이왕 할 거면 파스타 전문점이 좋겠군요."

"허, 제국의 웨펀 마스터를 데리고 한다는 일이 고작...."

기가 차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린 미하엘.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소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소박한 목표군. 이 말을 한 자가 소드 마스터라고 했다간 돌팔매를 당할 만큼."

"저도 압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꿈은 이렇게 시작하죠. 아직 그려나가지 않은 여백은, 다음에 이어서 그려도 늦지 않습니다."

"나 역시 동감이다. 성급히 그려 나간 꿈은 성급히 망칠 뿐이지. 바라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신중히 그려야 하는 법이거늘."

"...."

아까부터 묻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내가 미하엘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저에게 호의적인 겁니까?"

"진정한 강적에겐 이빨을 들이미는 것보다 악수를 권하는 게 옳은 방법이니까."

"저 따위가 리펜슈타인 님의 적수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과소평가 마라. 너는 강하다. 적어도 내 면전에서 약혼녀를 가로채겠다고 선포한 건 네가 최초였으니까."

집히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하엘은 언제나 대의를 위해 로한을 고집해 왔으니까.

그레이스가 세상의 악이 되고, 그녀의 길을 따라 걷기로 한 로한을 끝까지 설득하려 했던 게 바로 미하엘이다.

실상은 한 점의 소드 마스터라도 더 보유하고 싶었던 거겠지만.

"서론은 이만하면 충분하겠고, 본론만 말하지."

그 순간 미하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해라. 나는 너의 힘이 필요하다. 소드 마스터, 로한."

나 역시 미하엘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다.

이 제국을 무너트리기 위해선, 아니 바꾸기 위해선 13대 가문 중 하나인 미하엘의 리펜슈타인 가문이 건재해야 하니까.

어차피 미하엘은 내가 죽일 수 없다.

아니 죽지 않는다.

미하엘 리펜슈타인, 그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니까.

"혹여나 거절할 생각 마라. 이것이 너와 유클리드를 위하는 길이다."

다음 순간 나는 미하엘의 손을 잡았다.

서서히 웃음기가 감도는 미하엘.

그 얼굴에 침을 뱉듯 답했다.

"죽어도 싫습니다."

* * *

하멜른의 전사들 그리고 퀘오스.

이 세계에서 '악'이라 불리는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호문쿨루스들이 그 전조였다.

지금이라도 퀘오스를 잡아다 족치고 싶은데, 명분이 없다.

의심만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건 제국의 관리국뿐이고, 누아르가(家)는 그 관리국 위에 있으니까.

섣불리 건드렸다간 되려 내가 잡아먹힐 수 있다.

아니, 100퍼센트 잡아먹힌다.

미하엘의 계획을 망가트리고 그레이스를 무너트린 게 바로 퀘오스 뤼미에르 듀 누아르, 그 인물이었으니까.

더욱이 지금 내가 가진 것들만으로는 퀘오스를 상대할 수 없다.

일신의 무력이 아닌 한 세력의 무력을 갖춰야만 간신히 상대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세력을 찾을 때다.

이제 내일이다.

내일이면 나는, 초대받은 '황실 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게 의미하는 바를 모를 수가 없다.

어쩌면 내 운명이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획을 위해서라면 이 연회에서 그 '망나니'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 사람이라면 이번 연회에 반드시 참석할 테니까.

"로한."

급히 뒤를 돌아보자 퇴근 준비를 마친 그레이스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 교수님."

"같이... 퇴근할까?"

이전과 달리 퍼석해진 음성.

내색은 하지 않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레이스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다만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얽매여 살아왔다면, 그레이스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

"가시죠. 제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스프링윈드를 떠난 우리는 리틀 히스로 들어섰다.

캔터베리에 위치한 유클리드 가문의 저택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지, 그레이스의 걸음이 막연히 느렸다.

"황궁으로 떠나는 날, 내일이지?"

총장인 코넬리아가 이번 '참사'를 경험한 이들의 안정을 위해 일주일간 임시 휴강을 명했다.

거기다 아리엘을 포함한 몇몇 학생들이 입원해 있었고, 휴강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부상이 꽤 심했던 아리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 '설정'이라면 하루 만에 부상을 딛고 회복할 테니까.

"예. 준비는 마쳤습니다. 그레이스 님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수련... 할 거야."

그레이스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더욱 수련에 매달렸다.

현실을 이겨 내는 그녀만의 방법이다.

그렇게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다 실신하듯 잠에 드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테니까.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북마크」를 만지작거렸다.

"다시 그때로 되돌리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페이지를 되돌리면, 에밀리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지금 이 세상 어딘가에서도 누군가는 죽어 가고 있다.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내가 살리고 싶은 사람은 단 하나다.

그리고 내가 페이지를 되돌리는 순간은, 그 사람을 위해서여만 한다.

나는 주인공도 아니고, 정의를 실천하는 기사도 아니며, 세상을 구할 구원자도 아니다.

그 모든 책임을 나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오만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미하엘이 아닌 로한으로 빙의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후회한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야. 얼마나 실수하든, 얼마나 실패하든...."

오히려 이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 게 그레이스의 신념이다.

그러나 그녀는 손에 떠난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죽음이 그랬다.

그녀의 신념은 두루뭉술하지 않으며 언제나 명확하고 확고하다.

하지만 동시에 손에 남은 것은 어떻게든 지켜 내려고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로즈는 죽었지만, 우리는 199명을 지켰어. 그 하나를 위해 나머지 모두를 버리는 선택은 하지 않아."

그레이스는 가끔은 엉뚱한 부분에서 답답할 때도 있지만, 지금처럼 결코 신념을 굽히지 않을 때도 많다.

그렇기에 나는 그레이스에게 고즈넉이 빠져 지냈다.

"그래도 오늘은...."

걸음을 멈춘 그레이스의 시선이 환하게 밝혀진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척 힘이 드는구나."

아무래도 전개가 많이 수정된 듯하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시는 묘사는 나도 두어 번밖에 읽어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편의점으로 방향을 옮겼다.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 * *

병실에 누워 있던 아리엘이 눈을 떴다.

몸을 살피던 그녀는 이윽고 어둠이 깔린 창밖을 바라봤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눈을 뜨니 병실이었다.

악마의 주먹이 눈앞을 드리우던 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아리엘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가벼워."

하루 종일 푹 쉰 것처럼 온몸이 개운하다.

순간 아리엘의 눈동자에 불길함이 맺혔다.

'나 설마... 혼수상태였나?'

그날 이후 얼마나 지난 거지?

보름? 한 달? ...설마 일 년?!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엘리스가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툭 떨어트렸다.

엘리스를 마주한 아리엘이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우물거렸다.

엘리스가 외쳤다.

"너, 너, 너...!"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나도 이렇게까지 오래 누워 있을 줄은 몰랐―"

"너 어떻게 하루 만에 일어난 거야?!"

"...뭐?"

고작 '하루'란 말에 아리엘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그것도 잠시, 표정을 가다듬은 그녀가 굴러온 사과를 집었다.

아삭―

"그러게나 말이죠. 고작 그 정도 부상으로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니. 사과 맛있네요. 잘 먹을게요."

"너 진짜 멀쩡한 거 맞아?"

굴러다니는 과일들을 바구니에 주워 담던 엘리스가 아리엘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너, 설마 마물이 위장한 건 아니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납득이 되질 않았다.

전신의 뼈가 가루가 될 정도로 다 으스러졌다.

심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기가 파열됐고, 붕괴된 코어로 인해 마나가 폭주한 상태였다.

일반인이 아니라 소드 엑스퍼트라 해도 안 죽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투둑.

상의 첫 단추를 푼 아리엘이 옷깃을 옆으로 젖히며 몸을 확인해 보였다.

"그렇게 의심되면 확인해 보던가."

"아, 알았으니까 다시 잠그기나 해!"

"...?"

이마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붉어진 엘리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단추를 여미고 침대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아니, 시험은 어떻게 되었죠?"

"누가 수석 아니랄까 봐 어떻게 눈 뜨자마자... 시험은 총장님의 지시로 전원 A+ 받았어."

"잘됐군요. 난 또 에클라트 당신 때문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대신 에밀리가 죽었어."

그 말에 머리를 빗어 내리던 아리엘의 손이 우뚝 멈췄다.

"...프레디. 프레디 라운즈는 어떻게 되었나요."

"프레디는 살았어. 죽은 건 에밀리뿐이야."

아리엘은 다시 손을 움직이며 한숨 지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악마가 나타났는데 고작 한 명밖에 죽지 않았으니."

"고작 한 명이라니! 넌 에밀리가 고작 한 명이야?"

"목소리 낮추세요. 여기 병원이니까. 싸우려고 온 거면 다시 나가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남 일처럼 말하는 아리엘의 모습에 엘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죽일 듯 노려보던 엘리스는 곧 힘을 풀었다.

"...미안. 싸우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는데. 자꾸 너만 보면 싸우게 되네."

이윽고 엘리스는 바구니를 탁자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일주일간 임시 휴강이야. 혼자 빈 강의실에 앉아 있지 말라구. 아무튼, 갈게...."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엘리스는 초라해진 어깨를 이끌고 문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주시하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당신 잘못 아니에요."

"어?"

"그때 내가 싸우기보다 보호하는 걸 택했다면, 적어도 에밀리는 살았을지도 몰라요."

의외의 위로에 오히려 엘리스는 씁쓸해졌다.

"아니. 조장인 다 내 잘못이야... 넌 아무 잘못―"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다만 운이 안 좋았을 뿐.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란 말이에요."

"누, 누가 자책했다고? 난 그냥 에밀리한테 미안해서. 넌 기절해 있느라 못 봤지? 에밀리가 얼마나 잘 싸웠는데!"

엘리스는 억지로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일그러졌다.

"얼마나... 잘... 싸웠는데...."

엘리스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유리창 가까이 다가간 아리엘이 대낮처럼 밝은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술 한잔, 할래요?"

누구도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밤이었다.

§ 술 (2)

푸르른 창공이 눈부셨다.

퍼스트 클래스에 앉아 있던 나는 커튼으로 창문을 가렸다.

"공로라...."

대륙을 가로지르는 비공정 안에서 초대장을 다시 꺼냈다.

세어 보진 않았는데, 지난번 내가 열다섯이 넘는 마물을 죽인 모양이다.

연회에 초청된 것도 황실에서 그 공로를 치하하기 위함이었다.

악마들은 대륙의 간첩이나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도 간첩을 잡으면 후한 포상을 내리듯, 제국 또한 악마의 목 하나당 1억 링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하지만 내게 돈이 필요한 건 아니다.

돈이야 당장 기사단으로 돌아가면 넘치도록 벌 수 있을 테니까.

"...친왕, 에드가 히스토리아."

내가 이번 연회에 참여한 목적이자, 반드시 얻어 가야 할 인물.

황실의 2인자이자, 현 황제의 형제.

나는 연회에서 많은 인물을 만나게 될 거다.

조력자뿐만 아니라 언젠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검을 맞댈 상대까지도.

안타깝게도 그 상대들은 전부 제국의 기둥이라 말할 수 있는 실세들이다.

손짓 한 번, 말 한 마디 실수한 순간 바로 내 모가지를 날릴 수 있는, '이야기의 주축'들 말이다.

나는 초대장을 접고 에드가에 관해 떠올렸다.

"...에드가 히스토리아."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종합하자면, 에드가는 별명 그대로의 '망나니'이다.

이 사람이 얼마나 망나니냐면, 하루는 시종 하나를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긴 채 정원에서 개처럼 기어 다니도록 명했다.

뿐만 아니라 여자면 신하든 뭐든 일단 겁탈부터 했다. 거부하면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역적으로 몰아 창관에 팔아 버렸다.

아무튼 많다.

많은데....

전부 다 그가 스스로 꾸며 낸 소문이다.

"망나니인 척, 모두를 속이며 말이지."

그래도 일단 만나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망나니인 척을 하고 있는 성군일지, 혹은 망나니 컨셉질을 하다 진짜 망나니가 되어 버린 성군 껍데기일지 말이다.

―승객 여러분, '더글러스(Douglas)'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비공정이 완전히 정지한 후 운항 사인이 꺼질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

이제 곧 도착한다.

그리고 모든 게 시작되겠지.

하블다운 제국의 부유성, 더글러스에서.

* * *

부유성, 더글러스.

지상에서 수백 킬로미터쯤 떨어진 제주도 크기의 이 거대한 '성'은 하블다운 제국의 랜드 마크이자, 히스토리아 가문을 포함한 황실 인재들이 속해 있는 황궁이다.

역사를 설명할 순 없다.

더글러스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게 된다면 지금부터 일주일이 지나도 설명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대충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 성 하나로 웬만한 왕국 하나는 박살 낼 수 있다.

실감이 안 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저 찬란하고 아름다운 거리는, 전쟁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 많은 세금이 여기다 낭비되고 있었군."

그저 축복. 그리고 우아함. 그 모든 것을 위한 찬연(燦然).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인 이들이 느끼는 공통된 소회는 그런 것들이었다.

부우웅!

푸르게 물이든 가로수길을 따라 요란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리무진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항 앞에 서 있던 나는 황실의 인장이 새겨진 엠블럼을 보고 팔을 뻗었다.

초대장에는 분명 황실의 하인들이 마중을 나온다고 적혀 있었다.

이윽고 내 앞에 정차한 리무진.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제가 소드 마스터 로한⸺"

"더글러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웨펀 마스터 볼프윈 반달리 님."

순간 내 곁으로 바윗덩어리가 하나 굴러갔다.

정정한다.

그건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읽은 묘사, 그대로였다.

"먼저 지나갈게."

그리고는 리무진 뒷좌석에 힘겹게 몸을 구겨 넣는 볼프윈.

잘생긴 오우거 한 마리가 걸어 다닌다면 저런 느낌일까.

"내가 몸이 이래서 태워 주고 싶어도 자리가 없네. 미안하지만 먼저 가도 괜찮지?"

"...괜찮습니다. 오히려 반달리 기사단의 전신을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전신이라... 그것도 다 옛말이야. 무튼 연회 때 보자고, 로한."

리무진은 그대로 떠나갔다.

볼프윈의 무게에 짓눌려 바닥에 쓸린 뒤 범퍼에서 스파크가 튀기는지도 모른 채.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게 의외긴 한데, 딱 그뿐이다.

그럼 그렇지.

나도 혹시나 싶었다.

볼프윈은 베타 등위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격의 차이가 벌어지는 게 등위고, 고작 감마 등위에게 저런 리무진이 할당될 일은 없었다.

어디 보자, 그럼 나를 마중 나온 차는 무엇⸺

뛰뛰빵빵!

운전석 안에서 손잡이를 돌려 창문을 연 기사가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로한 님! 황실에서 마중을⸺"

"그냥 걸어가겠다."

"예에? 그래도 폐하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타셔야 합니다!"

황제고 나발이고 구식 티코처럼 생긴 저건 도저히 못 타겠다.

페달을 밟아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

설마.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중얼거리지 마시고 얼른 타십쇼! 시간 없슴다!"

"...너 소속 성명 말해 봐."

* * *

기사의 이름은 '칸'이었다.

운전기사할 때 그 기사는 아니고, 엄연히 황실 기사단 소속의 진짜 기사다.

그래 봤자 이런 허드렛일이나 도맡는 말단에 불과했지만.

"이야~ 지난번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거 실시간으로 봤다니까요?"

"싸인은 나중에 해 줄 테니까, 일단 운전부터."

"거기다 이번엔 악마들을 열다섯이나 베다니! 역시 될 사람은 되나 봐요? 아, 부유성은 얼마 만에 오신 거예요?"

"앞."

"예? 아~ 앞으로 자주 오시겠다고요?"

"그게 아니라 앞을 보란 말⸺"

끼이익!

중앙선을 침범해 역주행하고 있던 우리는 간발의 차이로 앞차를 스쳐 갔다.

이 녀석 뭘까?

뭔데 나한테 이렇게 관심을 갖는 거지?

진짜 기사가 맞긴 맞는 건가?

말투나 행동을 보면 영락없이 말 많은 택시 기사인데... 왜 어디선가 읽어 본 기억이 나는 걸까.

"황실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엔 어디에 몸담았어?"

"저 여기 첫 기사단이에요."

"그럼 수료한 아카데미나 대학은."

"헤헤, 없어요."

그 말에 창밖을 구경하던 내가 칸을 돌아보았다.

헤실거리며 운전대를 잡고 있던 녀석이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길바닥 출신이걸랑요. 로한 님처럼."

길바닥 출신의 황실 기사라....

"그래서 나를 반가워하는 모양이군."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실은 저, 로한 님을 보고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나를?"

"예! 당신 같은 사람도 출세하는데 나라고 못 할까! 싶었죠."

"...넌 출세하기 글렀구나."

"잘 못 들었습니다? 이거 엔진 소리가 너무 커서 말이죠."

"그냥 전방이나 주시해."

"예이~"

인조 해변을 등지고 내달리던 차는 곧 로드 스트리트로 들어섰다.

연회는 오늘 저녁이다.

지금은 우선 내 숙소로 향하는 길.

다행히 내가 묵을 숙소는 멀쩡한 호텔이었다.

입구에 도착해 재빨리 내려선 칸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수고했다."

그대로 짐을 챙겨 떠나려던 찰나, 내 앞을 가로막은 칸이 날파리처럼 손을 비볐다.

와, 황궁이 다르긴 다르네.

뭔 웨이터도 아니고 기사가 팁을 받다니.

"동료 기사들끼리 술이나 마실 때 써라."

나는 지갑에서 1만 링짜리 지폐 아홉 장을 꺼내 칸에게 내밀었다.

멍청히 지폐를 바라보던 칸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하긴 더글러스면 물가도 비쌀 텐데 내 생각이 짧―"

순간 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무리 그래도 기사의 긍지를 짓밟으시면 곤란하지 말입니다."

그리고는 내 손을 붙잡고 공손히 흔들었다.

악수?

아, 이런 의미였나.

이거 참 난처한데....

내가 아는 황실 기사단의 모습은 전부 썩어 빠진 탐관의 초상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

내가 정중히 사과하려고 하자 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헤실거렸다.

"아니에요! 그럴 만도 하죠 뭐. '황실 기사단'이 그렇잖아요? 대신 다음엔 제 검에 싸인도 새겨 주셔야 합니다?"

"알겠다. 그리하지."

내 인기가 언제 이렇게 오른 것인지.

하기야 챔피언십 우승에 악마들까지 해치웠으니 그레이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에클라트 기사단의 데니스 정도는....

"길바닥 인생끼리 화이팅!"

그렇게 외친 칸은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차를 몰고 돌아갔다.

"...묘하게 열받네."

묘사로만 읽었을 땐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 더 열받는 인물이었다.

칸.

아니.

"라이칸 로더."

그 '황실 기사단장'이 나를 떠본 거다.

물론 내 의사도 전달했다.

그 정도면 확실했겠지.

* * *

기사단으로 복귀한 칸은 무표정히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때 그를 발견한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 그에게 달려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악!

"야, 칸! 너 귀빈 모셔다드리고 곧장 복귀하라고 했지? 지금까지 뭘 하다가 이제야...!"

"장난할 기분 아니야. 따라와."

"...죄송합니다, 단장님."

곧 단장실로 들어선 라이'칸'이 거칠게 문을 닫으며 부단장에게 지시했다.

"기사단에서 아직도 뒷돈 받아 처먹고 있는 새끼들 싹 골라내. 잡히는 새끼 그 자리에서 귀, 아니다. 손가락 잘라."

"예?"

"내가 누누이 말했지. 나 단장 되고 한 번만 더 돈 받아먹다 걸리는 사람 있으면 다 모가지 쳐 버릴 거라고."

이윽고 귀 뒤에 그려진 작은 술식이 사라지며 라이칸이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인상. 하물며 체형까지 변해 작았던 옷이 터질 듯 끼었다.

부단장은 옷을 갈아입던 라이칸에게 그럴 리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올해 단장님이 새로 취임하면서 부패한 기사들을 전부 파면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씨팔 아직도 기사가 기사에게 돈을 건네? 넌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냐? 어?"

"진정하십시오. 누가 감히 단장님의 명을 어긴단 말입니까? 기사에게 명은 목숨―"

순간 라이칸이 갈아 신던 그리브를 부단장에게 집어 던졌다.

쾅!

"너 내가 맨날 웃으면서 장난 받아 주니까 황실 기사단장이 만만해 보이냐?"

"예...?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건 윗대가리가 썩은 거야. 말단 기사가 무슨 깜냥이 있다고 돈을 받겠냐? 너 같은 선배⸺"

이번에는 건틀릿이 날아들었다.

쾅!

"기사들이⸺"

다음은 견갑.

쾅!

"하는 꼬라지⸺"

마지막으로 부단장의 눈앞으로 날아든 건 서슬 퍼런 검이었다.

푹!

"...보고 배운 거 아냐. 이 씨발롬아."

"죄송합니다...."

가까스로 뺨을 스쳐 간 검이 부단장이 등지고 있던 벽에 완전히 꽂혀 있었다.

라이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내 입에서 욕 좀 안 나오게 해 줘라. 내가 무릎이라도 꿇고 빌까? 어? 이렇게?"

라이칸이 정말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달려온 부단장이 그를 만류했다.

"진짜 왜 이러십니까! 차라리 제 무릎을 자르십시오!"

"...마지막 기회다. 처신 잘해, 에일. 내가 진짜 칼춤 한번 추기 전에."

"알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

"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단장은 허겁지겁 단장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라이칸은 거칠게 머리를 헝클었다.

"...로한 같은 인재들이 부단장을 하고 있어야 되는데 말이야."

제국 기사들 사이에서 그레이스와 로한은 모두가 칭송하는 '진짜 기사'였다.

지난번 황실 경매 때 136억을 기부한 것만 해도 그랬다.

챔피언십은 또 어떠한가?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해임된 총장의 복직을 위해 우승을 했다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의심이 되면서도 그 충성심을 헤아린다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인성이면 인성.

충성심이면 충성심.

거기다 소드 마스터란 보장된 능력까지.

그런 걸 따지는 건 이제 의미가 없었다.

기사 로한.

이미 그 네임 밸류 하나만으로도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 되기엔 충분했으니까.

'이번엔 악마들까지 처리했다지. 그것도 소드 마스터 혼자 1급 악마 열다섯을 고작 6분 만에. 하, 딸딸이를 쳐도 그거 보단 오래 걸리겠네.'

웬만한 소드 마스터도 혼자 열다섯이 넘는 악마를 상대한다면 고전을 면치 못한다.

거기다 1급 악마다.

하나하나가 소드 엑스퍼트 최상급 수준으로 강력한 마물들.

로한이 혼자 그걸 해치우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6분에 불과했다.

그것도 이제 막 오러 유저에 도달한 학생들을 보호하면서 말이다.

"...날 못 알아본 기색은 아니었는데."

달리는 차 안에서 계속 자신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로한.

그 정도의 소드 마스터가 싸구려 변형 술식 하나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내 악수까지 거절하고, 거기다 9만 링... 제대로 한 방 먹었어."

악수야 뭐 그럴 수 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해도 그 악수의 의미까지 파악하진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다음에 로한이 지갑에서 꺼낸 건 1만 링 지폐 아홉 장.

여덟 장도, 그렇다고 열 장도 아닌 9만 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9군단. 네가 충성하는 사람은 오직 그레이스 유클리드라는 거냐."

제9군단 군단장 그레이스 유클리드.

그것이 로한이 제시한 9만 링의 의미였다.

"로한이라...."

라이칸은 처음 자신의 검을 갖게 된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 * *

내가 읽었던 황실 연회의 묘사는 불쾌함투성이었다.

그날, 미하엘과 함께 연회에 초대받은 그레이스는 모든 귀족이 보는 앞에서 '알파 등위'를 박탈당했으니까.

물론 내가 존재하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원래도 지금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그레이스였을 터.

나로 인해 전개가 수정되고 있다는 게 슬슬 실감이 난다.

"그래서 언제 오신 겁니까?"

대기실에 앉아 있던 내가 옆을 바라봤다.

팔짱을 낀 미하엘이 눈을 감고 있었다.

"...말 걸지 마라. 숨을 더 쉬게 되니까."

얼마나 황궁이 역겨우면 이곳에서 숨 쉬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을까.

리펜슈타인 가문의 가주인 미하엘이 이곳에 앉아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의 가문도 엄연히 제국의 기둥 중 하나고, 지난 9년간 멀린상을 수상해 제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니 초청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도 온다면 온다고 말을 하던가.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뭐 그렇다고 사이좋게 비공정을 타고 올 사이는 아니지만.

내색하지 않지만, 내가 왜 연회에 참석한 건지 미하엘도 궁금한 모양이다.

걱정하지 마라.

곧 알게 될 테니까.

―금번 연회에 참석하신 각국의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후 연회를 빛낼 유공자들을 축하할 예정이오니....

대기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대기실은 지하 1층.

위층에서는 이제 막 연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저, 로한 님이시죠?"

들려오는 음성에 뒤를 바라보자 못 보던 미인이 앉아 있었다.

트윈 테일로 묶어 올린 애쉬그레이의 머리카락.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벽안. 전체적으로 순둥순둥한 게 매력인 여자였다.

"맞습니다. 억양을 보아하니 제국민은 아니신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죠?"

"루칸이요. 제국의 기사단으로 이적한 지 얼마 안 됐거든요."

루칸이면 제국에서 한참 떨어진 북부의 작은 나라다.

인구수 5천 명 규모의, 서로를 끌어안아도 몰아치는 칼바람을 견뎌 내기 어려운 소국가로 기억한다.

북부 사람들이 죄다 미남 미녀라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 「상태창」 발동 〕

그녀의 정보를 바라보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이번 토벌에서 공을 세웠다는 기사는 읽었습니다. 다프네 델레나스 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제국의 소드 마스터 로한입니다."

"제, 제 이름을 알고 계셨나요? 영광이에요!"

다프네 델레나스.

설정도 몇 개 없고, 능력치도 대부분 D에서 C 정도인 인물이었다.

이 정도가 소드 엑스퍼트의 평균 능력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 내가 알기로는 미하엘에게 관심을 보였던 것 같은데.

"저 죄송한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까 나랑 미하엘이 대화하는 걸 들었나.

역시 내게서 미하엘의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연락처 좀 알려 주시겠어요?"

뭐?

"그러니까... 실제로 보니 정말 잘 생기셨네요."

아하, 그렇군.

미하엘의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것인가.

보기보다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

그녀가 내미는 스마트폰을 보고 나서야 현실을 자각했다.

이건 실제 상황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다프네의 스마트폰에 번호를 저장하고 돌려주었다.

번호를 확인하던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는 순간이었다.

"퍽이나 잘 생겼다. 요즘 세상 많이 좋아졌어? 감자가 말도 하고."

날카로운 음성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다프네가 곁을 돌아봤다.

엘리스의 장비와 비견될 정도로 명품으로 도배한 기사 하나가 건들거리며 앉아 있었다.

이름은... 널슨 디그리오.

근력 B에 평균 능력치가 C인걸 보니 이 녀석도 소드 마스터다.

당황한 다프네가 널슨을 돌아봤다.

"단장님? 갑자기 무슨 말씀을...."

"악마를 쓰러트렸다지? 몇 급? 9급? 8급? 꼬라지를 보아하니 최하급이구만?"

오호라....

이건 의외다.

나한테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너 출세했다, 로한.

"누구냐 넌."

나는 일부러 널슨을 자극했다.

이 녀석, 원작에서도 미하엘에게 뒤지게 깨지고 연회가 한창일 때 난동을 부리다 퇴장하는 인물이다.

"디그리오 가문의 널슨 님을 모르신다고? 기사라고 너무 신문을 안 읽는 거 아니야? 하여간 너 같은 놈들 때문에 기사들이 무식하다는 선입견이 생기는 거야."

"그만하세요, 단장님!"

"다프네 넌 빠져. 내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

요즘 목이 좀 마르긴 했지.

"디그리오 가문의 산하 기사단은 에클라트 기사단의 하청으로 알고 있는데."

"흥! 이젠 고작 스프링윈드의 부교수 따위가 된 퇴물 기사 주제에!"

다가간 내가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래도 옛 상관을 봤으면 무릎을 꿇는 게 예의 아닌가?"

쿠웅!

손에 오러를 담은 순간 널슨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아직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널슨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퇴물보다 약해서 아끼는 부하를 지킬 수 있겠나?"

"이런 씨...!"

―곧 수여식이 시작됩니다. 대기 중인 유공자께서는 연회장으로 이동 바랍니다.

방송을 듣고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나를 따라 일어난 미하엘이 내 곁으로 나란히 걸었다.

"한 성깔 하는군."

"위계질서가 어긋나서야 제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군대보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곳이 바로 기사단이다.

방금은 내가 널슨의 목을 베었어도 그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널슨이 내게 덤벼든 건 자존심 때문이었겠지. 아끼는 부하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 뻔했으니.

미하엘이 물었다.

"보기보다 인기가 많던데, 이참에 그레이스 따위는 잊고 저 여인은 어떤가?"

"조용히 하십시오."

"그럼 아까 왜 번호를 알려 준 것이지?"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거 제 번호 아닙니다."

"음?"

내가 다프네에게 알려 준 건 미하엘의 번호다.

§ 술 (3)

황실 연회는 이름만큼 다채로운 편이다.

세계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건 기본이고, 이름만 들어도 기함하게 만드는 유명 인사 또한 제법 만날 수 있다.

이것만으로 다채롭다 말한다면 그게 초라한 거겠지.

황실 연회의 진정한 메인 코스는 음식이 아니었다.

-먼저 죄송한 소식을 전합니다. 폐하께서는 중요한 만기(萬機)가 생겨 이번 연회를 불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대신 상을 전달해 드릴 예정이오니 부디 고귀한 이해심으로 사려 바랍니다.

메인 코스.

그건 바로 우리를 뜻했다.

1분 1초가 돈이고 권력이고 명예가 되는 저 이들이, 고작 음식 하나 먹자고 더글러스까지 달려온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 먼저 버크홀(Birkhall) 토벌 작전에서 가장 많은 공헌도를 쌓은 루디비엄 기사단의 널슨 디그리오 단장과 다프네 멜레나스 보좌관입니다!

특별석에 앉아 있던 널슨과 다프네가 레드 벨벳을 따라 메인 홀로 걸어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연회 귀족들이 그들의 걸음마다 꽃을 던지듯 외쳤다.

"버크홀의 골칫거리였던 마수를 만 마리 가까이 토벌했다니, 정말 놀랍군!"

"우리가 지금 즐기는 이 여유도 그대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네. 디그리오 그리고 멜레나스의 앞날을 위하여 내 기꺼이 한잔하지!"

"루디비엄 가주 아래서 썩히기엔 능력들이 너무 아깝지 않아? 이번 기회에 우리 기사단으로 이적하라고. 지금 받는 보수의 3배를 보장할게."

널슨이 저리 보여도 제국에 몇 없는 소드 마스터 중 하나다.

아무리 약한 소드 마스터라 해도 그 이하, 즉 널리고 깔린 소드 엑스퍼트들 위에선 왕으로 군림할 수 있다는 의미.

저 정도의 대우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무대로 오르자 상패와 상금을 든 황실 집사들과 하인들이 움직였다.

―널슨 디그리오 그리고 다프네 멜레나스는 폐하의 은혜에 예를 갖추십시오.

"예!"

수여가 시작되고 상패를 품에 안은 널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에 숨을 크게 들이마신 널슨이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루, 루, 루디비엄 기사단장 넬슨 디그리오입니다...!

―이런, 수상자께서 많이 긴장한 모양이군요. 이곳에 모이신 귀빈 모두 넓은 아량을 가진 분들이오니 부디 편안히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가, 가, 감삿, 컥...!

본인의 혀를 씹는 소리가 마이크를 지나 스피커에서 생생히 흘러나왔다.

폭소를 터트리는 귀족들.

안 되겠다 싶었던 사회자가 진행을 서둘렀다.

―목표로 하시는 기사단이 있으시다면 이 자리를 빌려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볼프윈! 볼프윈 반달리 님 계십니까?

―마침 저쪽에 계시는군요. 아, 역시 스위트 베어라는 별명답게 다정히 손을 흔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저, 저는! 기사가 될 때부터 반달리 기사단이 꿈이었습니다! 반달리 님! 보십시오! 이렇게 반달리 님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까지...!

―예. 소감 잘 들었습니다. 그럼 다음은....

분위기가 루즈해지기 전 사회자가 급히 소감을 끊었다.

자리를 배정받던 널슨은 아쉬운 듯 볼프윈을 힐끔거렸다.

볼프윈이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그의 테이블로 지정됐을 터였다.

―...9연속 올해의 멀린상을 수상한 멀린 중의 멀린. 미하엘 리펜슈타인 님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하엘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벨벳 위로 올라서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꺄악! 리펜슈타인 님!"

"지난번 논문은 정말 감명 깊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함께 식사하며 심도 있는 대화를...!"

"어떡해, 더 멋있어지셨어!"

유명 아이돌이 길거리에 돌아다니면 저런 느낌일 거다.

의외로 미하엘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걸음걸이, 말투, 마법 철학 등 모든 것에 그의 품격이 서려 있었고, 이는 여느 귀족들의 동경 대상이었다.

팬 사인회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 속.

무대로 올라선 미하엘이 연회장을 훑었다.

그리고는 집사에게 직접 다가가 상패를 빼앗아 가듯 낚아챘다.

"앗, 그건 아직...."

"시끄럽다."

미하엘의 돌발 행동에 하인들은 물론 사회자와 귀족들 모두 당황했다.

반대로 그의 성미를 이미 알고 있던 몇몇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라."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소감 한 말씀....

"없다."

...확실히 저 녀석은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스타일이다.

행보 하나하나가 톡톡 튀고 독보적인 게 시원하니까.

이윽고 미하엘은 연회장 문을 열고 떠나 버렸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상패가 어렴풋이 보였다.

"...어떤 의미로 존경스럽네."

저 짓거리를 널슨이 했다간 그 즉시 갈기갈기 찢겨 대륙의 산맥 이곳저곳에 흩뿌려졌을 거다.

미하엘 정도가 되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저 정도는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그래도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렇게까지 하면 이미지가 박살....

"어쩜 저렇게 박력 있으실까!"

...뭐?

"같잖은 소감 몇 마디가 아닌 행실로 보여 주시겠다는 건가."

"역시 미하엘 리펜슈타인. 모든 귀족의 귀감다워!"

"젠장, 나도 저 녀석 발끝만이라도 따라갈 수만 있다면...!"

허.

다들 미친 건가?

어떻게 저걸 보고 저런 소리를 해 댈 수 있는 거지?

"귀족들의 코드란 이해할 수가 없군...."

넋을 놓고 저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이 세상에서 「스프링윈드의 천재마법사」를 연재하면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그사이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 수여가 있겠습니다. 이번 유공자는 에클라트 기사단의 전 부단장이자, 현재는 스프링윈드의 검술학과 부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로한 님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가다듬은 나는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로한이라면 유클리드를 따라 스프링윈드로 간 그 기사가 아닌가?"

"이번 토벌에서 악마를 사냥했대요."

"악마라고? 종전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널슨과 다프네가 입장할 때도 이 정도로 싸늘한 반응은 아니었다. 오히려 뜨거웠다. 그들의 나약함을 감춰 주려는 듯이.

하지만 연회에서 내 존재는 한여름에 내린 눈과 같았다.

말도 안 된다는 시선들, 익숙하나 낯선 것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들.

절대 오지 말았어야 했을, 혹은 와도 달갑지 않은 그런 부외자.

이해는 한다.

썩은 동아줄이나 다름없는 '그레이스 유클리드'를 쥐고 있는 유일한 사람을, 그 판단을 탐탁지 못하는 거겠지.

또한 마음에 들어도 대놓고 드러내진 못했을 것이다. 인간에게 '분위기'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사회자 또한 내게 소감조차 묻지 않았다.

귀족들을 향해 묵례한 나는 하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축하를 기대하진 않았다.

이미 말했듯 나는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다.

그때 한 테이블 앞에 멈춘 하인이 의자를 뒤로 빼냈다.

"부디 즐거운 연회 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떠나가는 하인을 뒤로한 채 테이블의 주인을 조용히 응시했다.

"축하해, 로한. 그 축배를 내가 채워 주고 싶은데, 괜찮겠지?"

볼프윈 반달리.

그가 나를 지목했다.

* * *

제국에서 영웅이란 유성우와 같다.

한순간 떠올랐다가, 한순간 사라져 버리는 모습처럼 수많은 인재가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사람들 또한 그 수식이 허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여 영웅이란 그저 듣는 이의 기분을 띄우는 도구일 뿐이었다.

"저를 기억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수식 뒤에 '볼프윈 반달리'라는 이름이 붙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제1차 그리고 제2차 인마 대전을 승리로 이끈 불멸의 영웅이자 대륙의 거인.

아무도 강함을 의심할 수 없는 인물이 지금 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후배 기사의 이름도 몰라서야 제대로 된 지휘를 할 수 있겠어?"

"지당하신 말씀이군요."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마시자고."

볼프윈은 내 잔의 열 배가 넘는 술을 쉬지 않고 들이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중을 모르겠다.

겉보기엔 오우거, 아니 곰처럼 생겼지만.

이 사내는 곰의 탈을 쓴 여우다.

그가 이끄는 반달리 기사단은 에클라트 기사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의 대형 기사단이다.

소속된 기사만 80만 명.

200개의 하청과 산하 기사단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그런 걸 제외하더라도 우선 볼프윈은 제국에도 단 3명뿐인 웨펀 마스터다.

그런 자가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에 기부왕 그리고 악마 몇 해치웠다 해도 이자의 앞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다.

"편하게 들어. 난 식사 자리에서 일 얘기 하는 걸 무척 싫어하는 편이거든."

그 말에 나는 표정을 바로 잡았다.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표정으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볼프윈이 멧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썰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1학기도 곧 종강이지?"

"예. 보름 정도 남았습니다."

볼프윈도 스프링윈드 출신이다.

졸업한 지 이십 년도 더 되었겠지만.

"그럼 언제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시간이라면...."

"사냥이나 같이 갈까 해서."

기사들에게 사냥이란 '골프 치러 가자는 것'과 비슷한 말이었다.

고민 좀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볼프윈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이다.

통제할 수 없다면 중요한 순간에 계획이 뒤틀릴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결국 나는 잡아먹히게 된다.

저 멧돼지처럼 말이다.

"이 돼지도 맛있긴 한데, 잡은 즉시 바비큐를 해 먹는 맛은 못 따라오거든."

순간 내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볼프윈이 덩치에 맞지 않게 속삭였다.

"뭣보다 이 자리에서 얘기하기엔 듣는 귀가 너무 많아서 말이지."

"알겠습니다. 그럼 일정을 통보해 주시면 시간을 맞춰 보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연락처 남겨 줄 테니까 나중에 스케줄 봐서 가능한 시간만 보내 줘. '부탁'하는 입장인데 내가 맞춰야지."

"...배려 감사합니다."

의중이 무엇이든 일단 만나 봐야 알 것 같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방법을 강구해 내 세력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두려울 게 없을 터.

일단 지금은 '그 인물'에게 집중하자.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볼프윈이 물었다.

"참, 자네 그 머리는 어디서 했어?"

"예?"

"아까부터 봤는데 미용사 솜씨가 좋은 듯해서."

그리고는 사담이 이어졌다.

스프링윈드는 요즘 어떻냐, 10서클 할매 스튜는 아직도 있냐는 둥의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대충 답했다.

이 연회에서 내 메인 디쉬는 볼프윈이 아니다.

곧 나올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벌컥!

...드디어 등장하셨군.

저벅― 저벅⸺

황실의 상징, 히스토리아 가문의 문장이 수놓인 검은 가운.

가슴이 다 드러나도록 풀어헤친 앞섶 아래로 피가 말라붙은 검신이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춤을 췄다.

이자가 바로 하블다운 제국의 친왕(親王)이자 망나니, 에드가 히스토리아다.

"나만 빼고 이리들 모여 있었나? 사람 서운하게시리."

친왕의 등장에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근처 테이블로 설렁설렁 걸어간 그는 낚아챈 술병을 들이켰다.

"하아... 그깟 예는 잘난 폐하께 많이들 올리시고 다들 계속 즐겨. 응?"

하이에나 같은 눈빛이 연회를 떠돌고 있었다.

누구의 목을 물어뜯을까, 어떻게 씹을까, 또 어떻게 가지고 놀까.

그런 소름 끼치는 감상들을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즐기라고."

에드가에 명에 얼어붙었던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 끊어진 흥은 이어지지 않았다.

사색이 된 이들은 코를 박듯 접시만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나마 권력 좀 쥐고 있다는 이들마저도 억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응? 넌 또 누구냐?"

추위를 타듯 벌벌 떨고 있던 다프네를 발견한 에드가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를 힐끗거린 다프네는 몸을 움츠렸다.

"예쁘네~ 북부 아이냐?"

"그, 그렇습니다...."

"이름."

"예...?"

"이름이 뭐냐고."

풀린 눈으로 다프네를 내려다보는 에드가.

무언가로 검게 물든 혀가 그의 입술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이름은 됐고, 나랑 같이 놀자!"

에드가는 의사도 묻지 않고 다프네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대어를 낚은 어부처럼 보였다.

다프네가 저항하듯 팔꿈치를 구부렸다. 에드가의 미간 역시 구부러졌다.

"왜. 싫으냐?"

"그, 그게...!"

순간 널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치, 친왕이시여. 그녀는 제 부, 부하입니다!"

...제법 용기 있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에드가의 앞에서 그 용기는 만용이었다.

에드가가 손을 휘둘렀다.

쨍그랑!

널슨의 머리에 부딪힌 술병이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피가 섞여 붉어진 술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널슨이 간절히 웃어 보였다.

"부디 아량을 부탁, 부탁드립...."

스릉.

치켜세운 검날을 널슨의 목까지 들이민 에드가가 신기한 벌레를 발견한 것처럼 말했다.

"그럼 네가 나랑 놀아 줄래?"

"살, 살려 주십시오...!"

"이럴 땐 보통 죽여 달라고 그러지 않냐?"

에드가는 널슨의 얼굴이 비치는 검신 위를 혀로 핥았다.

눈물을 머금은 널슨이 외쳤다.

"죽여... 죽여 주십시오!"

에드가가 웃었다.

"...난 그 말이 너무 좋더라."

칼자루를 쥔 그의 손에 힘이 실린 순간이었다.

"친왕을 뵙습니다."

그 목소리에 에드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를 발견한 그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밝아졌다.

"로한! 이번 챔피언십 우승자 로한!"

이윽고 에드가는 어린이날 선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내게 달려왔다.

"야야, 나 손 한 번만. 응?"

그 말에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내밀었다.

순간 에드가가 내 손을 붙잡은 동시에 나를 일으켜 세웠다.

에드가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내가 너 팬인 거 알아?"

"친왕께서 챔피언십을 좋아하신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영광입니다."

"그럼 나 사인해 주라."

가운을 옆으로 젖힌 에드가가 자신의 검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가 사인을 해 달라고 내민 것은 종이가 아닌 자신의 가슴팍이었다.

"여기에. 응?"

이윽고 검신을 움켜쥔 에드가가 스스로 칼끝을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철컥철컥!

스릉⸺

대기 중이던 황실 기사들이 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황가의 핏줄에게 검을 들이댄 것만으로도 반역이나 마찬가지.

엄청난 살기들이 내게 집중되고 있었다.

"빨리. 응?"

"...친왕이시여."

"왜? 애태우지 말고!"

"더 넓은 곳에 해 드리겠습니다."

검을 거둔 동시에 검신 전체로 내 손바닥을 그었다.

이윽고 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끝으로 연회 바닥에 사인을 그리기 시작했다.

표정이 일그러진 에드가가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냐?"

...대단한 연기력이다.

나조차 순간 이 사람이 망나니라고 속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감히 옥체에 손을 댈 수 없어 대신 새겼습니다."

"난 분명 여기다 하라고 말했을 텐데."

이 사람이 진정한 성군이라는 것을.

"이 연회장 또한 친왕의 소유가 아니겠습니까?"

에드가가 흥미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릎을 굽혀 바닥에 묻은 내 피를 손끝에 찍어 핥던 에드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 나랑 놀자."

§ 망나니 (1)

연회장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참.

"종잡을 수가 없군."

미하엘의 일정에 이번 연회는 없었다.

초대장은 받자마자 찢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미하엘이 연회에 참가한 건 한 사람 때문이었다.

'출세와는 담을 쌓은 게 아니었나, 로한.'

그가 기억하는 로한은 황실 친위대의 자리도 마다한 별종이었다.

아마도 그레이스가 없었다면 전쟁이 끝난 후 수도로 오지 않고 대륙을 떠돌았을 것이었다.

들개.

그것이 '제국의 노예'로 살아가던 로한의 원래 모습이었다.

'이 또한 그레이스, 그녀를 위해서인가....'

가늠할 수가 없다.

은혜를 갚기 위해 삶을 바칠 각오를 하려면 도대체 어떤 구원을 받아야만 할까.

대체 어떻게, 그레이스는 로한을 구원했던 것일까.

'…··우선은 지켜보는 수밖에.'

그리고 궁금했다.

로한이 황실 연회까지 온 진정한 목적이.

또각또각⸺

2층에 도착한 미하엘은 난간 앞으로 다가섰다.

아무리 무대를 살펴봐도 로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길 잠시, 볼프윈 맞은편에 앉은 로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곧 미하엘이 귓가에 마나를 집중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미하엘은 반지로 손을 가져갔다.

"...이번 휴강 때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시간이라면...."

"사냥이나 같이 갈까 해서."

"...알겠습니다. 그럼 일정을 통보해 주시면―"

혀를 차고 돌아선 미하엘.

도저히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내 손을 뿌리치고 잡은 게 고작 저 금수의 발가락이었다니.'

계단을 내려가는 미하엘의 발걸음에 힘이 실려 있었다.

정문에 도착한 그가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꺼낸 순간이었다.

"미하엘 리펜슈타인 경."

"...!"

에드가를 마주한 미하엘이 얼어붙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총명한 눈동자로 미하엘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 연회가 한창인데,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곧바로 예를 갖춘 미하엘이 무릎을 꿇은 채 답했다.

"급한 용무가 생겨 서두르고 있었나이다."

"아... 그래도 한 접시는 하고 가지. 폐하의 성의를 생각해서 말이야."

"...."

묵묵부답인 미하엘의 모습에 에드가는 눈길을 돌렸다.

"다음에 볼 땐 더 근사해져 있길 바래."

그리고는 연회장 문을 벌컥 여는 에드가.

연회를 망치기 시작한 그에게 로한이 다가가고 있었다.

미하엘은 혼란스러웠다.

'로한, 설마 네 목적이란 게....'

이윽고 로한의 목적을 간파한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녕 제정신인 것이냐...!'

* * *

인테리어가 온통 검었다.

벽지, 가구, 장식품, 그 모든 게 에드가의 묘사를 대변하고 있다.

"우리 집 어때? 이거 다 내가 한 거야. 자, 봐! 이 거북이 '블랙 스톤' 하나를 통째로 조각해서 만든 거다? 응?"

에드가를 따라 연회장을 벗어난 나는 현재 더글러스 북동쪽에 위치한 대저택에 앉아 있었다.

내 앞 테이블에는 연회장을 방불케 할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고, 손에 거북이 조각상을 든 에드가는 우스꽝스러운 피에로처럼 떠들었다.

"친왕이시여."

"응? 아아 이거? 이건 말이지―"

"'가짜'를 자랑해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

내 앞에서까지 연기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의 연기는 내가 연회장 바닥에 사인을 새긴 순간부터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허울뿐인 자랑이라면 이미 연회에서 더러 보았습니다."

다음 순간.

쾅!

조각상을 집어 던진 에드가가 나를 무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한순간 온몸의 솜털이 오소소 일어섰다.

어떠한 마나의 이동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저,

"무엄하다."

두려워진다.

"내가 누군지 잊은 것이냐?"

히스토리아.

그 이름 앞에서 감마 등위니 소드 마스터니 하는 수식들은 소용이 없다.

그 모든 수식을 결정하는 자들이 바로 에드가가 속한 황실이었으니까.

"가짜라니,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알고는 있냐?"

잘 알고 있다.

방금 그 한마디를 하는 것보다, 압축기 위에 대가리를 올려놓는 게 더 안전할 테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였다.

"당신에 대한 모든 소문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자리에서 너를 겁탈하고 죽여 심장을 꺼낼 수도 있다. 이래도 가짜 같나? 하여간 천한 것들이란 겪어 봐야만 알지. 죽어서 후회해도 늦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럼 해 보십시오."

"하?"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날카롭게 부서진 조각 하나를 집어 에드가에게 내밀었다.

"여기서 저를 겁탈하고 죽여 심장을 꺼내 보시란 말입니다."

"...."

에드가는 말없이 조각을 건네받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인 순간 조각 끄트머리가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어찌 이리도 무엄할까."

에드가는 금방이라도 내 눈을 후벼 팔 듯이 물었다.

"내 소문이 가짜라는 걸 어찌 알았지? 진실로 말하지 않는다면, 너는 죽는다."

"아무리 친왕이라 하여도 가면을 쓰고 대하시는데 어찌 진실로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에드가가 내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혹시 너...."

그때였다.

"하하하! 아하하하―!"

에드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스스로 몸을 부둥켜안은 채, 숨도 못 쉴 정도로, 처절하게 느껴질 만치....

그 모습이 정말, 슬픈 분장을 한 채, 관객들을 웃겨야만 하는, 피에로처럼 보였다.

"...눈빛에 망설임이 없구나. 매 순간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야 서릴 수 없는 기상이거늘."

"제겐 과분한 칭찬입니다."

"어찌 그리도 목숨을 걸고 있냐? 대체 무엇을 위해."

그 물음에 눈앞으로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마지막은 그레이스의 미소였다.

"그래. 네 청대로 가면을 벗도록 하지."

옷장으로 다가가는 에드가의 발자국 위로 가운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그, 아니 '그녀'의 등에 새겨져 있던 술식이 사라지며 체형이 변하고 있었다.

에드가의 나신에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옷장을 뒤적이던 그녀가 고혹적인 미소를 흘렸다.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얼굴이 붉어진 사내 하나가 서 있을까?"

"어서 의복을 착용하십시오."

그 말에 에드가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대로 돌아선 그녀가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내게 명할 수 있는 건 오직 폐하뿐이니라...."

입고 있던 정장 위로 그녀의 몸태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온몸을 내게 밀착한 그녀의 숨결이 옷깃 사이마다 파고들고 있다....

"여기서 너를 죽여 심장을 꺼내진 못하더라도, 겁탈은 할 수 있다."

"시체로 가득한 전장을 굴러먹던 몸입니다. 부디 스스로 옥체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그럼 더 좋다. 내 평생 사내로 위장한 채 살아 경험이 없으니, 경험 많은 그대가 제격이다."

이런 건 내가 계획한 전개에 없었는데.

"...자세히 보니 꽤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길고 흰 손마디가 내 뺨을 쓸어내렸다.

내 숨을 빨아들여 다시 토해 내는 목소리.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어두운 흑발.

오랜 시간 망나니로 살아와 본능으로만 가득해진 눈동자.

폐쇄적인 그녀의 모든 것들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여기서 저를 범하시면, 당신은 죽습니다."

어느새 내 목덜미까지 내려간 손길을 멈춘 그녀가 묘하게 웃는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입니다."

"나를 죽이겠단 말인가?"

"죽이진 못하더라도, 방관은 할 수 있죠."

에드가 히스토리아.

73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그녀는 정확히 75화 6페이지에서 죽는다.

미하엘이나 그레이스의 손에 죽는 게 아니다.

그녀의 죽음은 정말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니 약조해 주십시오. 저의 순결을 지켜 주신다면, 저 또한 당신의 목숨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순결? 그렇다는 것은 너도?"

빌어먹을.

"...예."

에드가는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서 내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는 다시 옷장으로 돌아가 가운을 걸쳤다.

그제야 한시름 놓인 내가 말을 이었다.

"황실 기사단에 에일 맥켈린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부단장 말인가?"

"예. 그자를 심문하십시오. 그리고 실토하든 안 하든 죽이십시오."

소파에 앉아 턱을 괸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친왕께서 황실 기사단의 실소유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첩자를 솎아 내지 않으면 당신은 물론 기사단장까지 죽게 됩니다."

"놀랍구나.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니. 허나 그건 곤란하다. 맥켈린은 라이칸의 신임을 받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자를 죽였다간 나는 황실 기사단의 소유권을 잃게 돼. 아무리 맥켈린이 첩자라 해도 라이칸은 그를 죽일 수 없다."

확실히 라이칸과 에일의 사이는 돈독하다.

에일 또한 라이칸과 함께 길바닥에서 동고동락한, 형제 같은 사이였으니까.

하지만 에일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

친형이나 다를 바 없는 라이칸마저 배신할 정도로 말이다.

"기사단장에겐 이 쪽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럼 그도 납득할 겁니다."

나는 협탁에 올려진 메모장에 무언가를 적어 에드가에게 건네주었다.

메모를 읽던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짓은?"

"없습니다."

"그대는 이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세상을 읽어서라곤 답을 못하겠다.

"이미 예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이제,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되었으니까.

* * *

로한이 호텔로 돌아간 이후.

홀로 침대에 기대어 앉은 에드가는 협탁에 올려진 글라스에 와인을 따랐다.

"관측자라...."

그가 떠나기 전, 에드가는 한 가지 물었었다.

―혹시 악마들에 대해 아느냐?

―하멜른의 전사들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복수를 위해서 말이죠.

로한은 틀림없는 관측자였다.

더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 대답이 증거 그 자체였다.

어떤 이유인지 멀린의 진정한 핏줄인 히스토리아 황제의 권능으로도 기억을 지울 수 없는 자들이 있었다.

하여 그들을 관측자라 불렀고, 권세를 이용해 모두 죽였다.

'아직도 관측자가 존재했다니. 권능이 많이 약해졌구나.'

「망각의 인」.

이 술식은 발현 시 상대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권능이다.

기억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기억은 인간의 자아 그 자체다.

삶 또한 그렇다.

언제나 인생은 기억의 연속이었으니까.

기억을 잃는다는 건 모든 것을 잃는 것이고, 이는 곧 죽음과 다르지 않다.

수많은 웨펀 마스터 그리고 아크메이지 사이에서 히스토리아 가문이 황제로 군림할 수 있던 건 그 때문이었다.

'부귀를 부여하는 것으로 귀족들을 통제하고 있지만, 이것도 언제까지 유효할지....'

시대가 많이 변했다.

더 이상 귀족은 귀족이 아니었으며, 황제도 황제가 아니게 되었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 히스토리아 황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시대를 거듭할수록 망각의 인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고, 자비롭지 않은 자연에서 도태란 곧 사라짐을 뜻했다.

'거기다 그 관측자가 어디로 튈지 몰라.'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하나다.

로한, 그를 지금 죽이는 것.

하지만.

'어찌 나를 살리려 할까? 고작 망나니에 불과한 이 몸을....'

누구도 그녀를 살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장도 모자라 망나니 행세까지 한 건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계승 서열에서 가장 높은 아델라를 지지하는 세력이 더 강했으니까.

그날, 에드가는 아델라가 자신을 향해 한 말을 되새겼다.

「"지금 '모습' 그대로 살아가세요.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조차 아깝게 생각할 만큼."」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죽으십시오. 그게 당신이 이 황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여 망나니가 되기로 택했다.

일단은 살아남아야만 했으니까.

살아남아서, 한 번뿐인 이 인생의 결말을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저 살아남고자 했던 당연한 본능의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이미 나는 선택했다. 그렇게 연명한 결과가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만 죽고 싶다.

모든 아픔이 그러하듯,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폐하의 수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연회에도 그리고 지난 황실 경매에도 아델라가 참여하지 못한 건 건강 때문이었다.

아델라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거기다 황위를 계승할 후사도 두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제국은 귀족들에 의해 내전을 맞이할 것이었다.

발톱만을 열심히 갈아 대던 그 맹금들이, 이 기회를 절대 놓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에드가는 더 이상 황궁의 내정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에 지쳐 버린 것은 둘째치더라도, 이제 싸울 힘마저 잃어버렸으니.

'그러니 그 전에 나는 죽어야만 한다.'

온갖 더러운 꼬락서니는 수도 없이 보아 이제 질려 버렸다.

"그래도...."

그래도 살아 있는 이상.

"...이 술은 조금 더 마시고 싶구나."

그 누가 죽고 싶어 하겠는가.

그 누가, 죽기 위해 살아가겠는가.

"라이칸."

에드가의 부름에 방문을 지키고 있던 라이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차림새를 보던 라이칸이 눈두덩이를 벅벅 문질렀다.

"거참 옷 좀 입고 사시라니까. 왜, 와인이나 더 가져옵니까?"

"그 거지 같은 말투... 덕분에 내가 망나니 연기를 잘하게 되었지. 고맙다."

"새삼스럽게 고맙다는 무슨. 그럼 보수나 더 올려 주시던가요. 그래도 명색이 황실 기사단인데, 보수가 드럽게 짜니까 밑에 애들이 뇌물이나 받아 처먹죠."

"황실의 말단 기사도 한 해에 3억 링을 가져가는데 그게 적다고 하면 내 몸을 팔아야 하느니라."

"됐어요, 됐어! 하여튼 농담도 못 해... 뭐, 뭐, 뭐! 그래서 시키실 게 뭡니까? 예에?!"

협탁에 올려진 메모를 집어 든 에드가가 손을 뻗었다.

괜히 보수 올려 달라고 했다가 본전도 못 건진 라이칸이 성난 걸음으로 다가와 메모를 낚아챘다.

"보아라."

"이게 뭐길래⸺"

메모를 읽던 라이칸의 목에 핏대가 서고 있었다.

이윽고 이를 드러낸 라이칸이 재차 물었다.

"...이거 진짭니까?"

"내가 보증하지."

"출처는요?"

"시궁창에서 너를 찾아낸 내 정보원."

"검은 별? 검은 별이면 믿을 만하네. 썩은 물소 내장에 숨어 있는 것까지 찾아냈던 새끼들이니까."

이윽고 검 자루를 움켜쥔 라이칸이 목례를 올리고 돌아섰다.

에드가의 목소리가 떠나가던 그의 발목을 붙잡은 순간이었다.

"그래도 너의 오랜 우인이었을 텐데, 할 수 있겠느냐?"

"친왕이시여. 이걸 보고도 못 죽인다면, 내 누구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 알았다."

그대로 인사도 올리지 않고 떠나 버린 라이칸.

에드가는 라이칸이 느끼는 감정을 바로 알았다.

그의 말투가 정갈해졌다는 건 정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저벅저벅

글라스의 와인이 그녀를 따라 출렁거렸다.

이내 달빛이 쏟아진 창가 앞에 멈춰 선 에드가.

"...."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목 아래로 손목을 기울였다.

주르륵.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와인.

입술 사이로 애절하도록 새어 나오는 숨소리.

"하아...."

그동안 수많은 이들을 겁탈했다고 거짓된 소문을 자처했지만.

"...죽기 전에 그냥 할 걸 그랬나."

정작 거룩한 신분의 그녀는 스스로 외로움을 달랠 방법조차 모르고 있었다.

* * *

"더글러스의 명물, 꽃잎 비스킷이 오늘만 개당 500링!"

"이게 그렇게 맛있습니까?"

나는 정말 꽃잎처럼 생긴 과자를 집어 들었다.

이거 묘사로만 읽어 봤는데, 정말 팔고 있었구나.

"그럼요! 자, 그러지 마시고 한번 잡숴나 보세요."

그럼 어디....

바삭―

"!"

바삭거린 순간 혀에 닿자마자 녹아 버렸다.

정말 꽃잎 같은 부드러움이었다.

그리고 입 안에 남은 것은 화사하고 달콤한 꽃내음... 와, 기어이 과자로 꽃을 만들어 내는구나.

이게 진짜 마법이지.

"어떻습니까, 아주 살살 녹지요?"

"마법 같은 솜씨를 가지셨군요. 이거 넷, 아니 다섯 상자 포장해 주세요."

목적을 달성한 나는 번화가에서 선물들을 사고 있었다.

원래는 그레이스에게 줄 선물만 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다른 이들의 선물까지 사 버리고 말았다.

지갑 걱정할 일은 없다.

이번 공로로 황실에서 30억 정도 받았다.

원래 더러운 돈은 바로바로 써 줘야 하는 법.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들을 훑었다.

"옷이랑 구두 그리고 손수건... 얼추 다 샀네."

아시다시피 그레이스는 어딜 가나 제복만 입는다.

출근을 해도 제복, 우리 집을 방문해도 제복.

무슨 만화 캐릭터처럼 제복만 입고 다니는 그레이스를 볼 때마다 좀 안쓰럽기도 했다.

더글러스에 다녀왔다는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선물을 주면 되겠지.

"이대로 가려고?"

아직은 낯선 목소리에 주변을 살펴봤다.

수많은 인파 속.

선글라스를 쓴 매력적인 여자가 흑발을 찰랑이며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대는 오늘도 어설프구나. 어젯밤처럼."

에드가의 등장을 예상하고 있던 나는 목례만 건넸다.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이 정말 망나니일지, 혹은 진짜 성군⸺

"스파이크 피시를 먹지 않아서야 감히 더글러스에 다녀갔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예?"

곁으로 다가온 그녀가 내게 팔짱을 꼈다.

"순순히 따라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망나니가 되기 전에 말이야."

§ 망나니 (2)

편편히 검을 휘두르는 그레이스. 햇살에 사무친 검무가 아름다웠다.

세상을 달관한 듯한 무표정 뒤로는 고백 못 할 근심이 숨어 있다.

쿵!

발을 구르자 잔잔히 떠돌던 마나가 오러가 되어 솟구쳤다.

이내 검신에 서린 오러는 검의 궤적을 따라 빛무리가 되어 허공을 물들였다.

'...이상해.'

이상하다.

평소처럼 밥을 먹어도.

평소처럼 검을 쥐어도.

평소처럼 수련을 해도.

평소와 같지가 않다.

'자꾸만....'

자꾸만 안 되는 마음이 그녀를 보채고 있다.

이런 마음을 가져선 안 되는데.

가진 것만으로도 미안함이 밀려와 가슴에 멍이 든 것처럼 아릿하다.

그럼에도.

'...보고 싶어.'

고작 하루를 떠나보냈을 뿐이었다.

24시간, 1,440분, 86,400초⸺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를 초 단위로 그리워하고 있었다.

삐끗.

일순 호흡이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검이 원래의 궤적에서 1밀리미터 정도 어긋나 버렸다.

"...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백만, 수천만 번을 반복했던 동작이었다.

완벽을 추구하진 않았지만, 완벽해질 정도로 연습했다.

'내가 왜 이럴까.'

잠시 수련을 멈춘 그레이스는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스마트폰.

그것을 보자 누가 조종하기라도 한 듯 몸이 저절로 움직여졌다.

마침내 스마트폰을 연 순간이었다.

'목소리 듣고 싶어.'

듣고 있노라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지던 음성.

'얼굴도 보고 싶어.'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안심이 되는 자상한 미소.

그에겐 무심함이 없었고.

차가움보다는 따스했으며.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자신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손을 뻗으면 언제라도 거머쥘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가지기 쉽게.

마치 가져 달라는 듯이.

'...그건 착각이야.'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건 충과 의로서 살아가는 기사의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따스한 사람이었으며.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 그저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뿐, 그것을 나, 혼자,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

그레이스는 바닥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을 조용히 엎었다.

가슴에 손을 모은 그녀는 기도를 올리듯 그 이름을 외웠다.

"로한...."

어긋난 마음이, 사실은 맞물려 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