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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의무실에서 치료를 마친 나는 그레이스를 돌아보았다.

"정말 괜찮습니다."

상처가 살짝 깊긴 해도 치명상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놀라긴 했다.

호신강기를 둘렀음에도 이 정도의 피해를 입히다니, 아리엘의 실력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언제 이렇게 성장한 걸까.

하긴 마물화까지 도달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드 마스터가 되겠지.

"...."

괜찮다는 대답에도 그레이스는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붕대를 감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을 뿐.

그때 곁에 있던 엘리가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하여튼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 성적에 미쳐선 적당히를 모른다니깐!"

"너무 화내지 마, 엘리. 이런 사고야 실습에선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만약에 급소 같은 데라도 찔렸으면 어떡할 뻔했어?"

엘리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문득 눈길을 돌렸지만 아리엘은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걱정이다.

그 순간 내가 그레이스를 보호한 건 메시지 때문이었다.

[ '그레이스 유클리드'의 운명이 변화합니다. ]

아무리 살펴봐도 그레이스의 운명은 악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아졌다.

그러나.

ㅤㅤㅤㅤ[그레이스의 운명⸺90페이지]

『생존』 "━━━◑━━━━━━━╋━━━" 『사망』

ㅤㅤㅤㅤㅤ 「분기점」ㅤㅤㅤㅤ 「분기점」

드디어 그레이스의 운명선이 분기점에 도달했다.

예정된 일이었다.

저 원이 생존을 향해 나아간다면 반드시 직면해야 할 문제였다.

지난번 내 「사망 분기」에 도달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내 운명선은 『사망』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때문에 분기점도 삶과 죽음의 기로였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운명선은 현재 『생존』에 있다.

이 경우 어떤 분기로 갈라지느냐가 관건인데....

띠리링.

침대 머리맡에 올려진 내 스마트폰이 울렸다.

곧 전화를 받자 낯익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기사님. 유클리드 가주님께서 당신을 찾으세요. 아무래도 소파를 변상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만.]

데이지였다.

§ 점화 (4)

눈을 깜빡일 때마다 로한의 입이 닫혔다 열렸다.

"저번에는 죄송했습니다. 급한 용무가 생겨...."

오늘따라 그 목소리가 너무나 멀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때 포크를 내려놓은 그레이스가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먼저 가 볼게."

"피곤하셨던 모양이군요. 제가 바래다드리겠습니다."

"아니. 오늘은 혼자 가고 싶어."

뒷말도 듣지 않고 디저트 가게에서 나온 그레이스.

공허해진 그녀의 눈동자가 거리 위로 휘청거렸다.

'내게 행복할 자격이 있는 걸까....'

제국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앗았다.

이 손끝에 그리고 칼끝에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 모두도,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모든 걸 잊고, 행복해도 되는 걸까?'

없었던 일로 치부하며 잊어버리기엔 과거는 너무나 잔혹하고 끔찍한 기억들뿐이었다.

'그들도 다르지 않았어. 나처럼....'

주군이 달라서.

목표가, 신념이, 정의가 그리고 국가와 종족.

'살아가는 세상'이 달라서 죽여야만 했던 이들.

그러나 그들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빼앗은 걸까?'

죄책감에 짓눌려 추락한 곳은 지옥이었다.

밤이 되면 죽어 간 이들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났고, 간절했던 그들의 마지막 말이 꿈과 현실을 가리지 않고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살려 줘."

살려 줘.

그 한마디였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예...?"

그때 그레이스에게 다가온 중년의 여성이 부드럽게 물었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얼굴이군요, 유클리드 님."

"저를 아십니까?"

그러자 자신을 '샤를'이라 소개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어떻게 은인을 잊겠나요?"

"은인이라니...."

"제 바깥사람이 용병인데 전쟁 당시 9군단에 있었거든요. 그때 목숨을 구해 주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는 샤를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너무 늦었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저는...."

끝내 이어 가지 못한 말이 그레이스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때 어둑해진 하늘을 확인한 샤를이 반대편 거리를 가리켰다.

"저희 부부가 저쪽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요. 감사의 의미로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차마 거절하지 못한 그레이스는 샤를을 따라 허름한 식당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던 그레이스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칫했다.

먼저 주방으로 향하던 샤를이 멈춰 선 그레이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웃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식당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장사를 하지 않은 듯, 흔한 음식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다.

"금방 식사를 준비해 드릴 테니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레이스는 기다리는 동안 식당을 둘러보았다.

창문에 금이 가 있거나 의자가 삐걱거리긴 해도 식당은 의외로 깨끗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묘지 같아... 꼭 그런 기분이 들어.'

그때 쟁반을 든 샤를이 주방에서 나왔다.

"많이 기다리셨죠?"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정말...."

"가게에서 제일 잘 나가는 메뉴로 준비를 했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샤를이 쟁반을 내려놓은 순간 그레이스는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때요? 정말 맛있어 보이죠?"

"...."

접시마다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썩고 상한 재료들로 조리한 듯 색깔조차 탁했다.

그때였다.

"유클리드 님이 오셨어요. 당신도 인사해요."

샤를이 그레이스의 맞은편 자리에 올려놓은 건 액자였다.

액자 속에는 어떤 남자의 사진이 영원히 웃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순간 품속에서 식칼을 꺼낸 샤를이 그레이스에게 달려들었다.

쿵!

의자와 함께 뒤로 쓰러진 그레이스의 눈앞에 칼끝이 놓여 있었다.

"당신 때문에 내 남편이 죽었어. 당신이 무리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바람에 그이가 죽었다고!"

"진정하십시오...!"

샤를의 힘은 강하지 않았다.

마나도 사용할 수 없는, 고작 일반인 수준.

그러나 그레이스는 그녀를 제압할 수 없었다.

"당신이 애슈퍼드 탈환 작전에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행복했을 거야!"

"...."

"그 행복을 깬 건 당신이야. 그레이스 유클리드!"

이윽고 샤를의 얼굴에서 떨어진 눈물이 그레이스의 뺨을 적셨다.

원망스럽도록 일그러진 얼굴.

살아갈 희망도 없이 오직 절망만으로 가득한 눈빛.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외치고 있었다.

샤를을,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바로 너라고.

푹.

그레이스의 머리를 스친 식칼이 바닥에 꽂혔다.

얼마나 강하게 누른 것인지 칼자루까지 박혀 있었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샤를은 부엌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매주 그이가 보내온 편지마다 당신을 칭찬하는 내용으로만 가득했어. 훌륭하고 강하신 분이라고, 악마들로부터 반드시 이 대륙을 지켜 내실 거라고."

부엌에 도착한 샤를은 바닥에 놓인 철제 통을 안아 들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영웅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 간 악마였어."

그리고 통을 머리 위로 뒤집자 끈끈한 액체들이 쏟아져 내렸다.

기름이었다.

"지금 당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알아?"

샤를이 선반에서 가져온 파이어스틸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살아가는 게,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

"...안 됩니다!"

"기다려, 레오. 이제 우리 다시⸺"

화르륵!

그레이스가 손쓸 새도 없이 샤를의 온몸이 불길로 휩싸였다.

재가 되어 사라져 가는 샤를의 시선은 마지막까지도 그레이스를 향했다.

"미안... 미안합니다...."

홀로 남겨진 그레이스가 천천히 뒷걸음을 치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제발 가르쳐 줘, 클라우디아.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해...?'

그녀가 지나간 자리마다 물방울들이 흩날렸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야?'

그저 뛰었다.

뛰고,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곳은 미하엘과 클라우디아의 추억으로 가득한 호수였다.

차오르는 숨 속에서 그레이스는 벤치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순간 미하엘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대는 이미, 죽어 가고 있으니."」

「"무슨...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하나를 죽일 때마다 너의 일부도 함께 죽어 갔을 것이다."」

"죽어 가고 있습니다."

「"너는, 아니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손으로는 미처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죽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버텨도, 언젠가 네가 짊어진 그 무게를 견뎌 내지 못할 날이 도래할 거다."」

미하엘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어째서 그때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조차.

"저는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죽어 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행해 왔던 일들로 인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로한?"

돌연 느껴지는 인기척에 곁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곁에 앉아 있던 인물은 로한이 아니었다.

"당신답지 않으시네요. 교수님."

"아리엘...."

아리엘은 수면 위에 비친 세상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죽어 가고 있는 건 당신만이 아니에요."

그 말에 제동이 걸린 그레이스는 자리에 멈춰 고개를 숙였다.

아리엘은 여전히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렌 리더스톤."

"뭐...?"

순간 아리엘이 그레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 손에 지워진 내 아버지의 이름이에요."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 아리엘.

이제는 너무나 닳고 낡아 버린 편지였다.

"그리고 나도, 그때부터 죽어 가기 시작했죠."

그 편지를 차근히 읽던 아리엘의 손에 힘이 실렸다.

지익⸺

다시 손에 힘을 풀자 반으로 찢긴 편지가 바람을 타고 수면 위로 떨어졌다.

"...아니, 이미 죽어 버렸지만."

잉크가 번지며 지워지는 글씨들.

편지가 수면 아래로 자취를 감춘 순간이었다.

"원래는 부모님의 유언에 따라 당신을 죽이려 했어요. 부모님의 원수이자 위선자였던, 당신을."

달을 품고 있던 구름이 사라지며 서서히 내리깔린 달빛 속에서 아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삶을... 알려 주고 싶었는데...."

오늘 그레이스의 뒤를 쫓던 아리엘은 보았다.

그레이스의 눈앞에서 분신하던 샤를의 모습을.

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만약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었다면 견뎌 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당신도 나와 똑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어요. 내가 복수할 가치도 없을 만큼. ...그렇다고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미안해...."

"당신에게 그 말을 들으려고 하는 말들이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엘이 그레이스에게 다가왔다.

그레이스의 모습을 천천히 살피던 아리엘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누구에게 미움받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진짜 중요한 건 누구에게 사랑받느냐지."

다음 순간 한 걸음 물러난 아리엘이 검을 뽑았다. 수면 위로 비친 그들의 모습이 물결치고 있었다.

"검을 잡으세요, 교수님."

자세를 갖춘 아리엘이 그레이스를 노려보았다.

"아직 대련이 끝나지 않았잖아요?"

허나 그레이스는 검을 들지 못했다.

온몸의 피가 굳어 버린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입가를 일그러트린 아리엘이 재차 말했다.

"그럼 로한 님을, 제가 가져도 될까요?"

"...뭐라고?"

로한의 이름에 반응한 그레이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리엘은 조금 떨어진 가로수를 힐끔거리다가 다시 그레이스를 주시했다.

"당신이 로한 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정곡을 찔린 그레이스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아리엘은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그녀를 도발했다.

"하지만 로한 님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죠. 오히려 이런 모습을 본다면 실망할 거예요."

"로한과 나는 그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좋아요. 그럼 끝났네요."

검을 내리며 돌아선 아리엘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로한 님은 내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이제...."

"아니."

그때였다.

"로한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그레이스의 검집에서 빠져나온 은하수가 영롱한 광채를 발했다.

동시에 자세를 가다듬은 그레이스의 눈동자 위로 집념이 고이고 있었다.

까앙!

다음 순간 검을 부딪쳐 온 아리엘이 그레이스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럼 막아 보세요."

일순 아리엘의 이마에 돋아난 뿔.

마물화를 전개한 그녀의 오러가 주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빼앗아 볼 테니!"

* * *

유클리드 저택의 분위기는 폭풍의 중심처럼 고요했다.

"내 너희를 부른 이유는 이미 알고 있겠지?"

슐라히 유클리드. 폭풍은 그녀였다.

잠잠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언제든 몰아쳐 부숴 버릴 듯 사나운 살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하엘에게 눈길을 옮겼다.

슐라히가 미하엘을 호출했다는 건 그 이유밖에 없을 것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대는 안다."

"리펜슈타인과 유클리드 가문의 혼사 문제로 어째서 제가 불려 왔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석상처럼 굳어 있던 미하엘이 내게 속삭였다.

"죽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해라."

"다 들린다 미하엘. 아직도 내가 무섭느냐?"

"...아닙니다."

그 미하엘이 천적을 만난 피식자처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관계는 미하엘의 아버지가 그레이스를 억지로 빼앗아 온 모양새였다.

더욱이 지금쯤이라면 미하엘이 파혼했다는 사실을 슐라히에게 알렸을 거다.

뺨을 뒤질 때까지 맞았겠지. 뭐 한 대만 맞아도 죽기 직전이겠지만.

슐라히가 내게 재차 물었다.

"정말 모르겠는가?"

솔직히 알 거 같다.

데이지로 하여금 그레이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 있는 슐라히가 모르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가주님께서 사사로운 감정까지 주관하실 거라는 건 몰랐습니다."

"한순간의 감정과 일생을 결정지을 결혼은 별개의 문제지. 나는 이 자리를 비롯해 확실히 하고 싶다, 로한."

"말씀하십시오."

"그레이스에게 마음을 품고 있느냐?"

이거 뭐 공개 처형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한다 진짜.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물러설 생각은 없다.

"마음 깊이, 품고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하는 슐라히.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긍정적인 결정을 고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레이스와 미하엘 리펜슈타인의 파혼을 허락해 줄 수가 없다. 이건 유클리드 가주로서 내린 결정이다."

그리고는 눈살을 찌푸린 채 미하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라진 네 아비를 찾아다 족치고 싶지만, 참겠다."

"...."

"그러니 너 또한 참아라. 내가 정말 네 아버지의 압력을 못 이겨 너와 그레이스를 짝지었는지 아느냐? 오히려 너희 가문과 엮인다면 우리 그레이스는 더욱 위험해지겠지."

다음 순간 슐라히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불투명하게 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너와의 결혼을 허락한 건, 내가 그 아이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기 때문이었다."

슐라히라면 미하엘에 대한 그레이스의 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억제해도 단 하나만큼은 억누르지 못했다.

그레이스의 마음.

한 사람의 마음은 억누른다 해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한데 요즘은 묘연하더구나."

다시금 눈을 뜬 슐라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마치 모르는 문자를 보는 것처럼 그녀의 눈빛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 아이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은 혼잣말을 빙자한 질문이었다.

네가 정말 그레이스를 가질 자격이 있느냐. 그녀의 눈빛이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어차피 슐라히가 허락하지 않으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그레이스도 나도 그리고 미하엘도 아닌 저 할머니다.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슐라히가 허락하든 말든 그레이스가 세상의 멸망이 되어 파혼하게 되겠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서 '나'를 증명해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이번 유니온 선거에서 의장이 되겠습니다."

"네가?"

원래는 그레이스를 의장 자리에 앉힐 생각이었다만, 당신의 생각이 그렇다면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일단 그 '자격'이라는 걸 갖추는 게 우선이니까.

"예. 표는 이미 확보해 두었으니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게 지금 문제와 무슨 연관이―"

"그리고 3년 내로 가주님께서 속한 '로더'의 상원(上院)자리까지 오르겠습니다."

침묵에 잠긴 슐라히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온몸의 피가 전부 말라 버리기 전에 말을 이었다.

"대신 가주님께서도 약속해 주세요."

"무엇을 말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나는 아까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미하엘을 응수했다.

"유클리드 가문과 리펜슈타인의 가문의 파혼."

순간 분위기가 급속도로 삭막해졌다.

미하엘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꿈틀거리면서도 반지를 어루만졌다.

슐라히는... 이거 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때였다.

"하하하하!"

온 저택이 떠나가라 크게 웃어 대기 시작한 슐라히.

양 팔걸이를 움켜쥔 그녀가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랬던 웃음소리가 뚝 멎은 건 그녀가 데이지를 향해 손짓한 순간이었다.

"데이지."

"예, 가주님."

"넌 저 말을 어떻게 생각하니?"

"뇌를 거치지 않은 척수 반사 수준의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소드 마스터라는 자가 본인의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다니 안쓰럽군요."

"헛소리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아, 근래에도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궁금하니 얼른 말해 보렴."

"장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놀이터에서 놀던 꼬마들이 서로 웨펀 마스터니 아크메이지니 외치고 있더군요."

"호, 지금 상황과 몹시 비슷하구나."

이윽고 길게 숨을 내뱉은 슐라히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좋다. 그 헛소리, 속은 셈 치고 한번 믿어 보겠다."

§ 어떤 마음 (1)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진짜...!"

호수에서 멀리 떨어진 가로수.

그 뒤에 숨어 그레이스와 아리엘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엘리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저 기집애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깐.'

온종일 아리엘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평소라면 정해진 시간마다 훈련동과 도서관에 처박혀 있을 그녀가 오늘따라 그레이스만 쫓아다녔다.

'그것도 사람 죽일 것만 같은 눈을 하고 말이야.'

엘리스는 하교를 마치자마자 사라진 아리엘을 이 호수에서 간신히 찾아냈다.

그러나 함께 마주한 광경은 뜻밖인 것을 넘어 충격적이었다.

"머, 머야 쟤? 갑자기 왜 검을 뽑아?!"

그들의 관계를 몰랐던 엘리스가 모습을 드러내려던 순간, 아리엘의 시선이 가로수로 향했다.

화들짝 놀란 엘리스는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바짝 숨겼다.

'저 눈빛... 진짜야.'

진정으로 아리엘은 그레이스와 대적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건 오히려 아리엘 쪽이었다.

'그레이스 교수님처럼 평소에 온화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운 법이라고.'

거기다 웬만한 기사단은 홀로 궤멸시킬 수 있는 웨펀 마스터.

그런 사람의 분노는 고작 오러 유저에 불과한 아리엘에게는 흡사 재해와도 다르지 않았다.

'로한, 일단 로한한테 연락하자!'

막아야 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엘리스가 로한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이었다.

콰앙!

폭발하는 굉음 속에서 오러 스톰이 광풍처럼 몰아쳤다.

가로수가 휘청거릴 정도의 위력.

필시 그레이스의 일격이리라 생각한 엘리스가 눈길을 돌린 순간이었다.

"...아리엘?"

예상과 달리 먼저 공격을 나선 건 아리엘이었다.

그녀의 상상과 반대로 그레이스는 아리엘의 일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어떻게 쟤가 저런 힘을?'

이 정도면 소드 마스터 수준에 근접한 위력이었다.

아리엘의 실력을 목도한 엘리스가 치맛자락을 쥐었다. 막연한 질투가 명치 아래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소드 마스터가 됐단 말이야? 이 엘리스 에클라트 님보다 먼저? 거짓말!'

예정된 결과였다.

물론 마물화의 영향이 가장 크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엘리스는 밀려오는 질투심에 움켜쥔 주먹을 바들거렸다.

그렇게 엘리스가 질투에 사로잡혀 있던 사이.

"지금 뭐 하세요?"

그레이스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아리엘이 물었다.

"언제까지 방어만 하실 거죠? 이대로 저한테 패배해도, 로한 님을 빼앗겨도 좋다는 건가요?"

"...."

끝까지 침묵하는 그레이스의 태도에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 아리엘.

검이 부딪히며 일어난 불씨가 서로의 머리 위로 소실하고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로한 님은 과분해.'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그때 로한이 그레이스를 보호했는지.

어째서 이런 사람을 로한이 좋아하고 있는지.

이런 바보 같은 사람보다 자신이 백 배, 아니 만 배 더 나은데.

'겨우 이런 사람 때문에 로한 님이...!'

고민하며 아파하고 있다.

로한을 유혹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날. 그의 얼굴에서 읽었던 슬픔을 아리엘은 기억하고 있다.

마치 천장 너머의 하늘, 그보다 더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

방향조차 잃어버린 그 시선의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리엘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당신만 사라지면 돼. 당신만 없으면 나도 로한 님도 전부 행복할 수 있었어!'

채앵⸺!

칼날이 크게 부딪친 순간 부러진 아리엘의 칼날이 달을 향해 튀어 올랐다.

아리엘의 입이 열린 건 떨어진 칼날이 바닥 깊숙이 꽂힌 순간이었다.

"그거, 로한 님과 같은 검이군요."

"...."

"제가 이기면 그 검도 가져가도 되겠죠?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검이니까요."

이것만큼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그레이스가 칼자루를 굳게 움켜쥐었다.

"...안 돼."

"그럼 최선을 다하세요. 최선을 다해 저를 막아 보시라고요!"

다음 순간 그레이스의 오러가 집결하기 시작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아주 작은 블랙홀처럼,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이 맹렬하게.

그리고 소리 없이.

"넌 죽어."

천천히 닫히는 그레이스의 입술.

동시에 전방을 향해 강렬히 뻗어 가는 마나의 파형(波形).

뒤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처럼 크게 휘청거리는 가로수들.

마른침을 삼킨 아리엘이 뒤를 돌아보자 커다란 호수가 반으로 찢어져 있었다.

"...!"

자신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힘의 광막(廣漠).

다시금 그레이스를 마주한 아리엘의 눈동자 위로 비친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죽음이었다.

"이런 건 무의미해, 아리엘."

그녀는 사신처럼 서 있었다. 무표정히.

그제야 그녀를 장식하던 모든 수식언이 체감되었다.

'이게 웨펀 마스터....'

이길 수 없다.

감당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그랬다.

수천, 수만 번을 죽어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 같은 건 형체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 수 있으리라.

'...그래도 물러설 수 없어.'

그때 아리엘의 뿔이 꿈틀거렸다.

'언젠가.'

더욱 짙은 오러를 발산하던 뿔은 이내 검지만큼 자라났다.

우우웅⸺!

일순 부러진 검신을 따라 아리엘의 오러가 검의 형상을 갖췄다.

그녀의 굳은 의지 속에서 소드 마스터의 증거인 「오러 블레이드」가 실현되고 있었다.

"언젠가, 로한 님이 날 사랑하게 만들 테니까!"

다시금 기세를 되찾은 아리엘이 술식과 함께 검을 치켜들었다.

그것을 전부 기다려 주던 그레이스가 이윽고 아리엘의 오러 블레이드를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맨손으로? 말도 안 돼...!'

파직, 소리와 함께 깨진 오러 블레이드의 파편이 아리엘의 눈앞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말했다.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 것 같아."

검을 역수로 쥔 그레이스가 칼자루로 아리엘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그리고 이제 뭘 지켜야 하는지도."

그레이스는 쓰러지는 아리엘을 품에 안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이거 놔...!"

"미안하구나."

아리엘이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때.

"분명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 씻어 낼 수도, 지워 낼 수도 없어. "

그레이스의 발치 주위로 그녀의 몸에 매달려 있던 과오와 미련들이 한 겹, 한 겹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부 감내할게."

인내하겠다.

버텨 내겠다.

참아 내겠다.

지난한 과거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

'이제 과거는 상관없어.'

무엇을 지켰는지, 누구를 지키지 못했는지, 또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상관없었다.

지금까지 나를 살아 있게 도와주었던 한 사람.

위태롭게 휘청거리던 나를 넘어지지 않게 지지해 주었던 한 사람.

이제는 너무나 바라고 또 바라서, 소원이 되어 버린 한 사람.

'로한.'

...그를 사랑하는 이 '마음'을 지키겠다.

'네가 사랑하는 이 세상을⸺ 나는 살아갈게.'

그것이, 그레이스가 마지막으로 지키고 싶은 것의 전부였다.

"...밤하늘이 꼭 고양이 같지 않나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레이스가 눈을 떴다. 고개를 든 아리엘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

"네, 검은 고양이."

그 말에 그레이스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고는.

"정말 그렇구나...."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로한의 얼굴뿐.

* * *

이야기를 마친 후 저택에서 나온 우리는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미하엘이 자신이 가져온 차를 턱짓했다.

"타라. 집까지 바래다줄 테니."

"제가 차멀미를 해서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너와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의미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절한 거고."

"괘씸한 소릴 잘도 하는구나."

"이미 건방진 소리도 했는데요 뭘."

"어떻게 한마디를...."

뒷짐을 쥔 미하엘이 정면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까마득해진 전경처럼 그의 눈빛을 한 치도 읽을 수 없었다.

"하긴 그러니 유클리드 가주님 앞에서도 그리 대범하게 말할 수 있었겠지."

이내 내게 돌아선 미하엘이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계획이 뭐냐."

"알면 도와주시게요?"

"도와주겠다."

살짝 소름이 끼쳤다.

천하에 미하엘 리펜슈타인이 나를 도와준다니.

이건 함정이다.

무조건 함정이다.

함정이 아니고서야 저 자식이 나를 도와줄 리가....

"나 또한 파혼을 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니까."

"아쉽지 않습니까? 그래도 제국에서 그레이스 님 정도면―"

"아쉽다."

달빛 한 점 반사되지 않던 미하엘의 눈동자가 덧없이 추락했다.

반대로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어렴풋이 짓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놓아주지 못해... 아쉽구나."

미하엘은 몹시 기쁠 거다.

평생을 털어 내도 떨어지지 않던 혹 하나가 드디어 사라졌으니.

그런데 왜, 왜 나는 네 얼굴이 하나도 시원해 보이지 않는 걸까.

정말 미련이라도 남은 사람처럼, 어째서 내가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는 묘사를 하고 있는 걸까....

"허나 도울 수 있다는 말은, 방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대로 내가 유클리드와 혼인을 한다면 아리엘에게도 기회가 오겠지."

"아리엘에게 마음이 있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있다."

순간 미하엘의 모든 것이 생기를 머금었다.

방금 막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그의 몸태를 따라 떠돌던 마나가 태동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아리엘이 좋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하엘은 도둑놈이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마나의 영향으로 잘 늙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지, 나이 차이가 얼만데.

뭐 서로 사랑만 한다면 상관은 없겠지만, 이 자식은 짝사랑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기에 놓아주려 한다."

...잊고 있었다.

미하엘 리펜슈타인.

이 자식이야말로 진정한.

"클라우디아 로렌, 그 이름만 품기에도 내 가슴은 부족하니까."

순애의 끝판왕이란 걸.

"내가 널 방해한다면 아리엘만큼은 행복해지겠지."

"제가 아리엘과 함께할 거라는 보장은요?"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지난번 너에게 걸린 지배의 인을 연구한 자료가 남아 있으니 불가능하진 않다."

"그럼 행복할 것 같습니까?"

"적어도 행복하겠지. 아리엘은...."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미하엘을 바라보며, 아니 지금까지도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바보 같은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뇨, 리펜슈타인 님 말입니다. 그게 정말 당신의 행복입니까?"

미하엘의 발목까지 차오른 침묵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오히려 너의 그 태도가 아리엘을 불행하게 바꿀 거다.

애써 도구로 바라보려는 그 시선이, 말이, 몸짓이 아리엘을 더 괴롭게 할 거다.

...너와 아리엘의 관계는 과거의 악순환에 불과하기에, 이대로 간다면 그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아리엘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당신들이 아는 것과 달리 의외로 자상하세요.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불처럼."」

"아리엘도 돕고 싶었을 겁니다. 자신을 도와준 은인을, 다시 살아가게 한 당신을 말이죠."

「"우리 가주님은... 불쌍한 분이에요."」

"지난 수십 년째 저택에 고용인 하나 두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당신과 함께 살던 아리엘은 지금까지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러니까 제가 곁에 있어 드려야 해요. 더는 외롭지 않도록."」

미하엘을 유일하게 이해한 사람이 바로 아리엘이었다.

외로움으로 얼어붙은 저택에서, 외로움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그릇에 담긴 외로움을 떠먹던 그의 모습을, 아리엘은 늘 지켜보았다.

아리엘은 미하엘을 동정했다.

그러다 마음을 갖게 되고, 그때부터 미하엘을 위해 진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 원작의 전개인데 말이다.

지금의 전개는 위태롭다.

이대로라면 미하엘이 고립될 거다.

고립된 미하엘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대의를 서두를 수도 있고, 정말 나와 그레이스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방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아리엘의 마음을 온전히 지키며 돌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미하엘과 아리엘은....

"네가 그렇게 말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클라우디아 로렌, 오직 그녀 한 사람뿐이다."

...뭐?

"나는 클라우디아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을 아리엘에게 대신 해 주고 싶었다. 그것으로 클라우디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위로했지. 하지만 그뿐이다."

미하엘은 있는 힘껏 반지를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한 꺼풀 편안해진 그의 목소리가 수백 광년 떨어진 우주에서 이어진 별빛처럼 영원하게 들려왔다.

"아리엘 리펜슈타인은 내 누이다. 그리고 나는, 내 누이의 행복을 소원하겠다."

...이건 내가 아는 전개가 아니다.

아니, 내가 아는 미하엘 리펜슈타인이 아니다.

유독 아리엘의 문제만큼은 민감하게 반응하던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 정말 아리엘을 마음속에서 놓아줬다는 건가?

"그러지 마시고 생각을 다시...."

"다시 한다 해도 이 마음은 변치 않다."

아니 그래야 우리가 산다니까?

너랑 아리엘이랑 잘돼야 나랑 아가씨가 행복해진다고!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아리엘도 리펜슈타인 님에게 마음이...."

"없다. 확언할 수 있다."

...미쳐 버리겠네, 진짜.

대놓고 사정을 말할 수도 없고.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론만 말하지. 유니온의 의장 자리는 그렇다 쳐도, 넌 로드의 상원 자리까지 오를 수 없다."

그래 그만하자.

그의 말대로 나는 3년이 지나도 로드의 상원이 될 수 없다.

마‧기사를 불문하고 대륙의 최정점에 서 있는 자들이 속한 무력 연합, '로드(Lord)'.

아무리 제국이라도 함부로 관여할 수 없는 곳이 바로 로드다.

제국이 섣불리 그레이스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도 로드의 원로원으로 있는 슐라히 덕분이었다. 뭐 그레이스를 친위대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 것도 결국 슐라히였지만은.

아무튼 미하엘도 로드에 속해 있었다.

그것도 내가 목표로 하는 상원 자리에.

그러나 천재 마법사이자 베타 등위에 속한 미하엘조차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했다.

겨우 소드 마스터에 감마 등위에 불과한 내가 상원이 되려면 최소한 '웨펀 마스터'는 되어야만 한다.

3년.

불가능한 기간이다.

웨펀 마스터가 된다면 등위 문제도 자연히 해결되겠지만, 심사 기간만 1년인 것을 감안하면 턱도 없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 전에 제국의 가문과 등위를 해체할 거니까.

그렇다 된다면 다른 국가들도 영향을 받게 될 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 대부분의 국가에서 가문과 등위가 사라질 거다.

슐라히에겐 3년 내로 상원까지 오르겠다 약속했지만, 나는 다른 방법을 쓸 거다.

그거라면 슐라히도 어쩔 수 없겠지.

"제가 상원까지 오르지 못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대신 동등한 힘을 얻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빙긋 웃었다.

어떻게 하면 상원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자격'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한 인물을 떠올린 순간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엘리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왜?"

[여기 지금 큰일 났어! 그레이스 님이랑 아리엘이랑 서로 막...!]

전화를 끊은 나는 미하엘의 차로 달려가 운전석에 앉았다.

"죄송하지만 차 좀 빌리겠습니다."

"아까는 차멀미가 있다고 들었다만."

"농담할 시간 없습니다."

"급한 일이 생겼나 보군. 유감스럽게도 그 차의 시동은 내가 설계한 암호 술식을 풀이하지 못하면...."

부웅!

단칼에 암호를 풀어낸 나는 걸린 시동 속에서 액셀을 밟았다.

"쉽네요. 이따 차고에서 뵙죠."

"...."

§ 어떤 마음 (2)

차에서 내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묵묵한 호수. 그러나 식스 센스를 사용하자 보이는 마나의 잔상들.

다시 엘리에게 전화를 걸려던 그때,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레이스였다.

"...아가씨."

바로 뒤까지 다가가 불러도 아가씨는 답이 없었다.

그저 그때처럼, 호수에 비친 세상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다.

나는 아가씨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곳에는 그레이스뿐만 아니라 아리엘의 마나도 희미하게 떠돌고 있었다.

드디어 폭발한 건가... 두 사람의 관계가.

내 안에서 두 사람에 대한 걱정과, 이제 한고비 넘겼다는 안도가 섞여 갔다.

마침내 그레이스의 입이 열린 건 아물거리던 밤빛이 내 코끝에 내려앉을 무렵이었다.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다급한 엘리의 전화를 받고 왔지만, 정작 이 사실을 알려 준 엘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답변할 말을 골랐다. 그사이 아가씨가 말을 이었다.

"로한은 참 신기한 사람 같아."

현실에서 동떨어진, 흐릿하면서도 선명한 음성.

호수를 응시하던 그녀의 옆모습이 문득 초연해 보였다.

"내가 어디에 있어도 늘 찾아오잖아. 마치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에게 전할 수 없는 진실들은 내 가슴 깊은 곳에 항상 숨겨져 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았다.

출근길 지하철, 피로를 애써 버텨 내던 사무실, 홀로 굶주린 배를 채우던 점심,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갈까 망설여지던 하루 끝, 외로움이 먼지처럼 뒤섞인 방 한편에 웅크려 당신을 읽어 내리던 수많은... 어느 날 속에서... 나는...….

"로한.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나?"

기억한다.

새하얀 페이지 위에 쓰인 당신의 묘사를, 나는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묻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로한의 과거는 지난번 그레이스와 대련할 때 대부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쌓아 올린 서사 속에 어떤 비화가 존재하는지, 이제는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 버린 기억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나는 장난스레 미소를 그렸다.

"말도 제대로 못 했죠. 음식이 보이면 무조건 달려들어 손으로 퍼먹고. 다시 생각해 보니 아찔하군요. 짐승도 그런 짐승이 없었으니."

"맞아. 한 번은 더웠는지 옷도 다 찢어 버리고 알몸으로 계곡에 뛰어들기도 했지."

...미하엘이 시간 이론을 증명하면 가장 먼저 바꿀 게 생겼군.

"그래도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었어."

그레이스는 눈앞으로 스쳐 가는 기억들을 건져 올리듯 손을 끌어모았다.

"로한 너만이, 내 곁을 지켜 주었으니까."

한순간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기억 속에서 그레이스는 힘겹게 미소하고 있었다.

"로한은 나를 편견 없이 바라봐 준 유일한 사람이었어. 네 앞에서 나는 군단장도, 웨펀 마스터도, 그레이스 유클리드도 아닌,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그녀의 묘사를 무수히 읽었듯, 누구에게나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은 순간은 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기에 더욱 휘황하고 간절한 것들.

"아가씨께서 제 눈을 바라봐 주었을 때."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눈을 감으면 더욱 선명해진다.

"아가씨께서 제 손을 잡아 주었을 때."

당신의 대사 한 줄에 마음 설레고, 페이지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당신의 묘사에 두근거리던 순간.

"아가씨께서 제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당신을 읽는 시간이 내 전부였던 하루.

이제 나는 그녀를 읽고 있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저는, 이 세상에서 로한으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지우고 쓰길 반복하던 전개. 동시에 수도 없이 전복되었던 정서와 이유들.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그녀를 '읽었다'라는 과거가 아닌,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현재의 말단 속에서 나는.

"아가씨께서 저를 바라봐 주고, 잡아 주고,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살아가는 당신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바라보던 매 순간 마음속으로 무한히 쓰고 지웠던 단 한 마디의 고백.

지금은 너무나 당연해져서 오히려 전하지 못하게 된 말.

이제 나는 또 다른 '어느 날'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어느 날의 끝을, 나는 보고 싶다.

"...."

바람에 흩어진 아가씨의 머리카락이 눈가에서 하늘거렸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많이 놀라셨겠지.

나도 이 말을 내뱉은 순간 스스로 얼마나 놀랐....

"...아가씨?"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녀의 눈꺼풀이 차분히 내려가 있었다.

"혹시 주무시고 계십니까?"

"코오...."

...이런.

어쩐지 아까부터 숨소리가 새근거리더라니.

막상 영화나 드라마에서 꼭 중요한 순간에 나오던 클리셰를 실제로 당해 보니 좀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나름 용기 낸 고백이었는데.

"아리엘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리 곤히 주무시는지...."

웨펀 마스터인 그녀가 아리엘을 상대로 몸이 지쳤을 리는 없겠고.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많이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걱정할 일은 아니다.

ㅤㅤㅤㅤ[그레이스의 운명⸺93페이지]

『생존』 "━━━○╋━━━━━━╋━━━" 『사망』

ㅤㅤㅤㅤㅤ 「분기점」ㅤㅤㅤㅤ 「분기점」

그녀의 운명선은 이제 생존 분기를 지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기특했다.

내가 없는 사이 혼자서 운명을 개척해 나아가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언젠가 내가 사라져도, 걱정스럽지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린 나는 헝클어진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머나먼 하늘을, 별빛을, 미래를 향해 소원했다.

"다음에도 이러시면 그땐 안 참을 겁니다."

언젠가 그녀를 마주하며 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목적지를 알고 있음에도 갈피 잃은 걸음은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그녀도 자신만큼 가여운 사람이었다. 복수할 가치도 없을 만큼. 어떻게든 하루 끝자락으로 날아가고 싶어 버둥거리는... 한 마리의 새처럼.

'이 길이 맞는 걸까?'

처음에는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다.

살아남아야만 그녀를 만나 죽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이 순간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게....'

그러나 이제 자신의 삶에 의심이 들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삶을 살아가기엔, 앞으로도 너무나 많은 날이 아리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무해.'

기뻐할 줄 알았다.

비로소 자신과 똑같이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할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따라다닐 건가요?"

돌연 걸음을 멈춘 아리엘이 지나친 가로등을 돌아봤다.

가로등 뒤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엘리스가 주춤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아, 알고 있었어?"

"미행을 하려면 좀 제대로 하던가. 다 보이게 그게 뭐예요? 바보도 아니고."

"이게 걸리네. 히...."

어이가 없어진 아리엘이 한숨을 내쉬던 사이 엘리스가 머쓱하니 걸어 나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걸음을 옮기는 아리엘.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걷던 엘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어차피 내가 허락 안 해도 떠들 거잖아요."

"그건 그래. 그 있잖아, 교수님이랑은 왜...?"

아리엘은 고민했다.

솔직하게 말해 버릴까, 이제는 사라진 편지처럼 없던 일로 치부해 버릴까.

자연스레 표정이 무거워진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에클라트."

"응?"

"에밀리를 죽였던 악마, 기억하고 있나요?"

"...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잊어."

에밀리의 죽음과 악마를 떠올린 엘리스가 고개를 떨궜다.

오히려 그때의 분노는 지금 더 커져 가고만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엘리스의 말은 마음과 정반대였다.

"그래도 복수하고 싶진 않아."

"왜죠?"

"내가 복수하면, 다른 원한이 생겨 버리잖아."

"그럼 에밀리가 무고하게 죽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자리에 멈춰 선 아리엘이 엘리스를 주시했다.

엘리스는 말없이 두 팔을 뒤로 감췄다. 팔꿈치를 움켜쥔 그녀의 손끝이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에밀리는 성실한 아이였어."

항상 강의실 앞자리에 앉던 에밀리의 모습을, 엘리스는 기억한다.

"자신의 어디가 부족한지 알고, 또 그만큼 노력하는 친구였지."

누구보다 기사가 되고자 했던 꿈이 커다랗던 친구.

그러나 정작 기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현실.

그런 에밀리를, 엘리스는 늘 응원했다.

"그리고 엄청 착했어. 마음씨가 너무 고왔거든."

"그게 지금 하는 얘기랑 관련이―"

"에밀리라면 내가 복수해 주길 바라지 않을 거야."

"...."

엘리스의 얼굴 위로 그리움과 슬픔이 교차하고 있었다.

"오히려 더 슬퍼할지도 몰라."

지켜 주지 못했다는 괴로움과 떠나보내야만 하는 아쉬움.

이 지옥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책임은 엘리스뿐만 아니라 검술학과의 모두가 짊어지고 있었다.

"난 에밀리가 더 이상 슬퍼하는 게 싫어. 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히."

미소를 그리던 엘리스는 에밀리가 사라진 세상을 내다보았다. 흘러내린 눈물이 그 미소 위로 겹치고 있었다.

아리엘이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받아요."

"응? 이건 왜...."

그때 얼굴로 손을 가져간 엘리스가 비로소 흘러내리는 눈물을 알아차렸다.

"이상하다. 나 왜 이러지 진짜. 이제 울지 않기로 했는데...."

더는 눈물 흘리지 않겠다는 다짐과 달리, 어째서인지 지금의 감정을 멈출 수 없었다.

웃고 있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지 말아요."

순간 아리엘이 엘리스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더 시간이 지나면,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나이가 될 테니까."

"응...."

눈가는 물론 코끝까지 선분홍빛으로 물든 엘리스를 바라보던 아리엘은 속으로 웃음 지었다.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당신이 내 앞에서 울고 있는지 참....'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누군가 대신 울어 주고 있는 걸 보자 한편으로는 개운하기도 했다.

'그래. 지금부터는 내 손으로 진짜 진실을 찾아낼 거야. 복수는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그때까지는....'

생각을 정리한 아리엘은 심란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문득 엘리스의 눈물을 힐끔거렸다.

"에클라트. 나도 죽으면, 이렇게 울어 줄 건가요?"

"무, 뭐? 갑자기 뭔 재수 없는 말을 하고 있어!"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그제야 눈물을 멈춘 엘리스가 새침하게 고개를 틀었다.

"절대 안 울어 줄 거거든?"

"울어 줄 거 같은데."

"그럴 일 절대 없을 거니까 꿈도 꾸지 마! ...뭐, 옛정을 생각해서 한 방울 정도는 흘려 줄 순 있지만 말이야."

"차라리 하품을 하지 그래요?"

다음 순간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엘은 배를 부여잡고 웃어 대는 엘리스를 힐끔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는지, 이제 조금 알 거 같아.'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유도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저 속도 없이 바보 같은 얼굴을 보다 보면 자신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된다.

그것이 엘리스의 매력이었다.

"고마워요, 에클라트."

"...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는 아리엘. 더는 망설임이 실려 있지 않았다.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엘리스가 정신을 차리곤 달려왔다.

"너 방금 나한테 고맙다고 한 거니?"

"글쎄요."

"아니, 방금 분명 나한테 '고마워요, 에클라트'라고 했잖아!"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 모양이군요. 가여운 에클라트."

"알았다. 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지?"

"...아니에요."

"응? 뭐야 그 표정? 부끄러워 죽겠다는 그 표정은 대체 뭐냐구~"

"아니라고 했어요."

"뭐라구? 부끄러움에 귀까지 빨갛게 익어 버렸다고~?"

스윽.

얼굴에 명암이 드리운 아리엘은 조용히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 모습에 황급히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엘리스가 무표정하게 걸었다.

"미안."

"...하아."

그럼에도 아리엘은 여전히 자루 끝을 만지작거렸다.

조금씩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대로 이 길과 정반대였던 엘리스의 집은 더 멀어져만 갔다.

그 사실을 알던 아리엘은 자신과 함께 걷던 엘리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웠다.

"그런데 에밀리 얘기는 왜 꺼낸 거야? 혹시, 아까 그레이스 교수님이랑 싸운 것과 관련 있어?"

"싸운 게 아니라 대련한 거예요. 그냥... 내가 얼마나 강해졌나 알고 싶어서."

"그런가? 그럼 로한 어쩌고 했던 건 뭐였어?"

로한의 이름에 속으로 뜨끔했다. 그것까지 듣고 있었나.

아리엘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어차피 엘리스도 로한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물론 엘리스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레이스였지만.

"당신은 로한 님이 누굴 좋아하고 있을 거 같나요?"

"엉?"

정작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로한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이 아닌, 로한의 마음이었다.

지금까지는 그걸 빼놓고 상정하고 있었다.

'현재의 로한 님이라면 그레이스 교수에게 마음을 품고 있겠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 확실한 건 아니야.'

확실히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설혹 로한이 그레이스를 사랑한다 해도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로한을 지키기 위해 기사가 되고자 하는 꿈까지 말이다.

"나한테 그런 걸 물어봐도 당연히... 날 좋아하고 있겠지, 로한은."

"...뭐라고?"

"아 너 몰랐어? 로한이 날 위해서 지난 황실 경매 때 130억짜리 반지까지 샀던 거."

거짓말이었다.

정작 엘리스는 떼를 써도 그 반지를 껴 보지 못했다.

"그 반지 어딨는데요?"

"왜, 부숴 버리려고? 그럴 줄 알고 집에...."

"또 거짓말이군요. 내가 말했죠, 당신 얼굴만 봐도 안다고."

그 말에 엘리스는 황급히 자신의 귀와 오른쪽 눈썹을 가려 올렸다.

속으로 안심한 아리엘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난 궁금해요. 로한 님이 누구를...."

흐려지는 말끝과 함께 아리엘의 마음이 가슴 속에서 번지고 있었다.

그녀가 로한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엘리스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네."

"뭘 말이죠?"

마침내 도착한 리펜슈타인 저택.

깡충거리며 달려간 엘리스가 초인종을 누르며 답했다.

띵동―

"로한이 누구를 좋아하고 있는지 말이야."

§ 어떤 마음 (3)

이튿날, 리펜슈타인 저택의 연무장.

나는 어설프게 검을 부딪혀 오는 미하엘의 검술을 천천히 훑었다.

"단순히 뻗으려고만 하지 말고 상대를 밀어낸다는 생각으로 휘두르세요. 미하엘 님 정도면 나머지는 마나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

"쉽지 않군."

그 말과 다르게 내가 교정해 줄 때마다 미하엘의 검술은 한층 더 정갈해지고 있었다.

미하엘에겐 어제 빌린 차를 가져다 놓을 겸 지난번 약속한 검술을 가르쳐 주는 중이었다.

채앵⸺!

손목이 살짝 저려 오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두 시간 가르쳤을 뿐인데도 이 정도 성과를 보이다니, 하여간 빌어먹을 먼치킨 자식이다.

그렇다고 대충 가르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미하엘이라면 그 사실을 눈치챌 거고, 어차피 검술을 배우게 될 예정이라면 내가 가르치는 게 나았다.

그래야 혹시라도 이 녀석을 상대하게 될 때 우위를 점할 수 있을 테니까.

"칼날을 비스듬하게 세우지 마세요. 또 한 자루 부러트릴 셈입니까?"

"...."

"서클을 오러처럼 사용하기 위해선 검신에 두르는 게 아닌 내부에 밀집시켜야만 합니다. 이거 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보다 못한 수준이군요."

"...."

"그 자세는 대체 뭡니까? 춤이라도 추시려는 겁니까? 음악이라도 틀어 드려요?"

"...."

"그 검술식은 제가 분명 10분 전에 가르쳐 드렸을 텐데요. 그 기억력으로 어떻게 마법사가 되신 겁니까?"

"...."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더 지나자 검을 바닥에 내팽개친 미하엘이 숨을 고르며 선반으로 걸어갔다.

"...잠시 휴식하지."

고개를 끄덕인 나도 미하엘의 곁으로 다가가 물을 들이켰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저 자식의 성격이 폭발할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미하엘이 연무장 곳곳에 생긴 검흔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어렵군. 처음 마법을 익힐 때보다 더."

미하엘은 천재 마법사다.

말문이 튼 동시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그쪽 방면에선 타고난 인재였다.

마법과 검술이 완전히 다른 매커니즘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더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미하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러 유저를 넘어 소드 엑스퍼트 수준까지 달성할 거다.

상태창에 적힌 능력치는 이미 소드 마스터였다. 참으로 불공평한 재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때 미하엘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유클리드는 어떤가? 그러니까... 아니 됐다.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하시면 더 신경 쓰입니다."

그제야 어제 아가씨가 홀로 호수에 앉아 있던 이유가 조금 짐작되었다.

미하엘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던 거겠지.

아가씨를 흔들 수 있는 건 이 자식과 아리엘이 유일하니까.

"당신이 아가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더 이상 괜한 참견하지 마십시오."

"참견이라. 그럴지도 모르겠군. 허나 유클리드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유약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나를 응시하는 미하엘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가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겪어 온 역사는 평범한 이들의 정신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몇 번을 무너져 내릴 거다.

몇 번을 꺾일 것이고, 몇 번을 부러질 것이다.

그건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녀는 다시금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애당초 리펜슈타인 님도 아가씨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포기하셨지 않습니까?"

고개를 돌린 내가 미하엘을 마주했다.

나를 응수하던 미하엘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바로 세운 그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네 말이 옳다. 그렇기에 놓아준 것이다. 나로서는 그녀를, 결코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니."

이내 호흡이 차분해진 미하엘의 눈빛이 멀어졌다.

그는 연무장이 아닌 어떠한 풍경을 보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이전에는 늘 내게 방법을 묻곤 했지. 요즘도 네게 그런가?"

"아가씨는 방법을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나는 아가씨가 했던 모든 말들을 떠올리며 답했다.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향. 아가씨는 그걸 묻고 계신 겁니다."

아가씨가 독단을 고집했다면 나도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다.

내가 이 페이지에 서 있을 수 있던 이유는 비단 나 혼자만의 노력만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교만일뿐더러 착각이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큰 힘은 미래를 읽었다라는 것이 아닌, '그레이스 유클리드', 그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니까.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라. 어쩌면 나 또한 그녀와 함께 나아갈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군. 그러기엔 이미 늦었지만."

"후회하고 계십니까?"

"후회는 언제나 하고 있다. 내가 행해 온 일들은 과거가 되어 있으니. 다만 그럼에도 후회스러운 것은...."

끝말을 삼켜 낸 미하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무장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수다가 길었군. 시작하지."

"그러죠."

굳이 그 뒷말을 알고 싶진 않았다.

알게 되더라도, 미하엘의 후회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지금껏 입혀 왔던 모든 상처와 아픔이, 이제는 자신에게 돌아올 차례니까.

"그러고 보니 곧 열릴 유니온 소집에 참가한다고 들었다."

"맞습니다. 한 달 뒤군요."

"네게 부탁할 것이 있다."

"저희가 부탁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거 아시죠?"

"건방진... 이번 소집에 아리엘을 데려가주길 바란다."

아리엘이란 이름에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풀렸다.

미하엘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검을 부딪쳐 왔다.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거다. 너 또한 네가 가르치는 제자가 경험을 쌓을 수 있다면 좋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불가합니다."

검을 고쳐 잡은 나는 미하엘의 검술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거울처럼 구사했다.

"...조금 매섭군. 어째서 불가하다는 거지?"

다음 순간 미하엘의 손목을 내리쳐 검을 떨어트린 내가 그의 심장에 칼끝을 겨눴다.

"이번 유니온 소집은 살아서 참가하는 게 더 어려울 테니까요."

* * *

로한이 연무장에서 미하엘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을 무렵, 아리엘은 저택 근처의 카페에서 엘리스를 만나는 중이었다.

"모건 르 페이?"

"그래!"

"그날이 어쨌다는 거죠?"

"...너 진짜 몰라서 물어?"

전혀 모르겠다는 아리엘의 반응에 벌써부터 엘리스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런 애가 나랑 동갑이라니... 솔직히 말해 봐, 너 나이 속였지?"

"허튼소리 할 거면 갈게요."

"그런데 어떻게 그날을 모를 수가 있어? ...아니다. 너라면 충분히 모를 수 있겠구나."

속이 답답해진 엘리스는 얼음 가득한 레몬티를 한껏 들이키곤 말을 이었다.

"이번 주 금요일이 무슨 날이야?"

"...모건 르 페이?"

"그럼 그날에 뭐 해?"

"훈련. 그리고 복습."

"아 나 돌아 버리겠네. 그게 아니지!"

그리고는 앞에 놓인 메모지에 모건 르 페이라고 쓴 엘리스가 그 글씨를 또박또박 읽었다.

"자 따라해 봐. 고, 백, 데, 이."

"가여운 에클라트. 멍청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네요. 이걸 어떻게 고백 데이라고 읽을 수 있죠?"

"야! 너 사실 다 아는데 일부러 이러는 거지, 지금?"

아리엘은 정말 모르고 있었다.

엘리스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지, 도대체 모건 르 페이를 왜 고백 데이라 부르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모르겠다는 아리엘의 얼굴에 한숨을 내리쉰 엘리스는 하는 수 없이 설명했다.

"잘 들어. 모건 르 페이는 예전부터 유명한 날이었어. 오직 이날 하루만 1년 중 마나가 가장 짙어지는 시기거든."

"그래서 훈련해야 한다고 말했잖아요."

"너 저번에 초승달 산에 갔을 때 어땠어? 막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어?"

"그야 당연히 대기의 마나가 짙어서...."

"바로 그거야!"

이마가 살짝 붉어진 엘리스가 검지 끝으로 아리엘의 왼쪽 가슴을 콕콕 찔렀다.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신체 반응을 감정으로 오해하곤 하지. 특히 사랑에 빠졌을 때 말이야."

"사랑에 빠졌을 때...?"

"너 훈련하고 나면 어때?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 있을 때처럼 막 심장이 두근두근하지 않아?"

그 말에 아리엘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로한 님을 바라볼 때랑 훈련을 마쳤을 때가 비슷하긴 했지....'

"...그렇긴 하네요."

"그치그치? 자 그럼 문제. 1년 중 하루만 특별하게 마나가 짙어지면 어떻게 될까?"

"평소보다 심장이 더 뛰―"

무심히 대답하던 아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스는 바로 맞혔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 좀 감이 와? 모건 르 페이가 왜 고백 데이로 불리는지."

"이해했어요. 그냥 뇌가 현실과 착각을 혼동해서 일어나는 귀인 오류라고 말하면 될 것을. 이렇게 간단한 걸 참 어렵게도 설명하시네요."

"귀신 뭐? 아무튼, 그걸 이용하는 거야."

"대강 무슨 계획인지 파악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이용할 건데요?"

"스프링윈드 정원에 엄청 커~ 다란 벚나무 있는 거 알지?"

엘리스가 나뭇가지처럼 두 팔을 위로 활짝 펼쳤다.

자연스레 벚나무를 떠올린 아리엘이 끄덕였다.

"그 나무라면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그럼 전설도 알겠네?"

"전설?"

주변을 살피며 고개를 기울인 엘리스가 아리엘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모건 르 페이 때 그 벚나무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혜성을 보면 무조건 이어진다는 전설 말이야."

"난 또 뭐라고. 너무 흔한 전설이네요. 저길 봐요."

너무나 예상적인 말에 눈을 경멸적으로 치켜뜬 아리엘이 자신의 뒤편을 턱짓했다.

그녀를 따라 눈길을 옮긴 엘리스는 카페 벽면에 붙여진 배너를 읽었다.

"매달 1일, 이 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슈퍼 디럭스 파르페'와 '프리미엄 티라미수'를 드시게 될 경우 그 사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머야, 저건 그냥 상술이잖아!"

"그거랑 이거랑 일맥상통하지 않나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달라. 너 그 벚나무가 왜 그렇게 큰지 알아?"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

"다 그 자리의 마나가 비옥한 덕분이라고. 그런데 모건 르 페이까지 겹치면 어떻게 되겠어?"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넘긴 아리엘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답했다.

"당연히 현상이 발생하겠죠."

"그래, 현상이... 뭐? 현상?"

한심하고 허술한 엘리스의 모습에 팔짱을 낀 아리엘이 혀를 찼다.

"그래서 모건 르 페이 때는 스프링윈드 정원뿐만 아니라 중앙 도서관까지 일시적으로 폐쇄돼요. 전설이고 뭐고 아예 접근조차 불가능하단 말이에요. 스프링윈드에 다닌다는 학생이 그것도 몰랐나요?"

"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하아, 이 한숨 도둑. 대체 날 어디까지 실망시켜야 만족할 셈이죠? 솔직히 말해 봐요. 그거, 당신이 방금 지어낸 이야기지?"

"히...."

금세 시무룩해진 엘리스가 케이크를 깨작거렸다.

"이걸 로한한테 슬쩍 알려 주면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가지 않을까 해서...."

"로한 님은 스프링윈드 부교수예요. 상식적으로 학교 임직원이 수칙을 어기겠나요? 애초에 로한 님은 그런 거에 관심조차 없겠죠. 세상 사람 모두가 당신처럼 바보는 아니에요, 엘리스 에클라트."

"...."

입술을 깨문 엘리스는 아예 테이블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리엘은 그녀의 정수리를 바라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건 르 페이라... 나쁘지 않네.'

미소가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 어떤 마음 (4)

"...오늘인가."

출근 준비를 마친 나는 달력을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모건 르 페이'다.

동시에 내가 가장 기다리던 날이기도 했다.

"이날에는 반드시...."

...내 서클을 한 단계 더 올리고 말리라.

1년 중 단 한 번, 온 세상의 마나가 가장 짙어지는 시기가 바로 모건 르 페이다.

이건 내게 기회다.

정체되어 있던 서클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

"4서클만 돌파할 수 있다면 당분간은 안심이야."

기사들에게 소드 엑스퍼트 입문과 소드 마스터가 마의 구간이라면, 마법사들에겐 3.5서클 그리고 5.5서클이 이에 해당된다.

소위 '깨달음'이라는 것을 습득해야만 올라설 수 있는 경지.

아무리 검을 잘 휘두르고 이론의 이해도가 높다 한들,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영원히 정체될 수밖에 없다.

지금 나는 3.5서클에서 멈춰 있었다.

특이하게도 마법사에겐 x.5서클이라는 단계가 존재한다.

x.5서클은 다음 단계에 도달할 서클의 굵기를 만족했지만, 서클이 아직 분열하지 않은 상태를 뜻했다.

그리고 내가 직면한 단계는 보통의 방법으로는 돌파하기 어렵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천재 마법사라 불리는 미하엘조차 나를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개인마다 겪는 깨달음은 다르다.

누군가에겐 볼품없는 사실이, 누군가에겐 인생을 반전시킬 거대한 영향력을 주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상대적이다. 하여 온전히 자신만의 깨달음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너무 오래 걸린다는 거지."

자타공인 먼치킨이었던 미하엘조차 3.5서클에서 4서클에 도달하기까지 정확히 1년이 걸렸다.

그리고 5.5서클까지는 3개월 만에 도달했지만.

아무튼 내게 1년이란 긴 시간을 기다릴 여유는 없다. 미하엘처럼 1년이 걸릴 거라는 보장도 없고.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깨달음을 찾는 동안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앞으로도 나는 많은 일들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와 동시에 깨달음까지 얻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아무리 주먹으로 두들겨도 부서지지 않을 땐... 그냥 트럭을 가져와서 들이박으면 되니까."

모건 르 페이의 마나가 바로 그 트럭이었다.

나는 4서클에 도달하기 위해 그 마나를 사용할 생각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초승달 산이나 스프링윈드 정원처럼 원래부터 마나의 농도가 풍부한 지역의 도움도 빌려야 한다.

농도를 생각한다면 초승달 산이 가장 적합하겠지만, 여긴 일단 제외.

기본적으로 초승달 산의 마나는 탁하다. 오염된 마나를 체내에 주입하는 건 혈관에 공기를 주입하는 것보다 위험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날엔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져서 접근조차 불가능할 거고.

"가장 가깝고 적당한 지역은... 역시 그 나무인가."

스프링윈드 정원의 벚나무.

이곳은 초승달 산과 달리 관리가 잘 된 덕분인지 마나가 순수하다.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적고, 인간의 마나와 가장 유사한 모건 르 페이의 마나와 섞인다 해도 부작용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읽어서라고 밖엔 답을 못 한다.

원작의 49화쯤에서 미하엘이 학생 하나를 가르쳐 주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 학생이 바로 카렌 디 아릴레리아. 스프링윈드의 현 학생회장이자 훗날 미하엘에게 엄청날 도움을 줄 아크메이지다.

그러고 보면 카렌과 나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제대로 마주쳤던 건 지난번 챔피언십 대기장에서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제대로 마주할 생각은 없다.

카렌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아릴레리아 가주가 보통 미친 인물이 아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흑화한 슐라히? ...생각보다 끔찍하네.

그나마 미하엘 정도가 되니 감당할 수 있는 거다. 저번 코린느 때도 그렇고, 미친 인간들끼리 통하기 마련이니까.

거실로 향한 나는 거치대에서 검을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자루를 당기자 검집을 이탈한 이터널 하트의 검신에서 빛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이것도 잊으면 안 되지."

나와 그레이스의 애장은 이터널 스톤이란 천운석으로 만들어진 검이다.

모건 르 페이는 역사 속의 영웅인 '모건 르 페이'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지정된 날이지만, 1년마다 되돌아오는 주기 혜성(週期彗星)이 밤하늘을 장식하는 날이기도 했다.

마나의 근원은 그 혜성이었다.

천운석 또한 우주에서 온 물질.

그날의 마나를 내 검에 충전해 놓는다면, 곧 다가올 유니온 소집에서 큰 힘이 되어 줄 거다.

"...아가씨도 그 힘에 죽었으니까."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천운석을 빼앗은 결과, 미하엘은 이터널 스톤으로 스태프를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 힘은 이제 나에게 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현관을 나서며 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기회에 엘리도 4서클로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 * *

아리엘과 엘리스가 함께 들어선 '핼리의 별빛'은 리틀 히스에서도 나름 인지도 있는 옷가게였다.

엘리스는 전신 거울 앞에 서 있는 아리엘의 몸 위로 여러 옷들을 겹쳐 보고 있었다.

"이것도 좋긴 한데 마감이 별로네. 이건 볼륨이 좀 아쉽고."

인형 같은 미모를 하고 인형처럼 서 있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대충 고르죠? 옷이라면 내 옷장에도 많으니까."

"네가 로한을 몰라서 그래. 로한은 너같이 옷 입고 다니는 스타일 싫어한다구."

모건 르 페이 당일.

엘리스는 오늘 아리엘의 코디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미 메이크업을 포함해 헤어까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완벽하게 꾸며 놓았다.

"그럼... 어떻게 입어야 하는데요?"

로한의 이름에 아리엘이 거울 속에서 수줍게 서 있었다.

들고 있던 옷을 도로 내려놓은 엘리스는 다시 진열대에서 옷을 고르며 답했다.

"나 같은 스타일."

"당신 같은 스타일이 뭔데요?"

"순수하면서도 살짝 섹시한 스타일?"

"거짓말. 로한 님이 정말 그런 걸 좋아한단 말인가요?"

"당연하지! 넌 걱정 말고 나만 믿어.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엘리스의 착각이었다.

그때 새하얗고 수수한 원피스 한 벌을 발견한 엘리스가 손뼉을 쳤다.

"오~ 이거 좋네!"

아리엘의 손에 원피스를 쥐여 준 엘리스가 그녀를 피팅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빨리 입고 나와."

"자, 잠깐...!"

저항할 새도 없이 닫혀 버린 문을 응시하던 아리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제멋대로라니까."

하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은 아리엘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나쁘진 않네."

하얗디하얀 자신의 모습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이윽고 피팅룸에서 나온 아리엘의 모습을 훑어보던 엘리스도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옷은 이걸로 하고, 다음은 언더웨어. 그리고 구두랑...."

"잠깐만요. 구두는 알겠는데 속옷은 또 뭐죠?"

"너 몰라? 언더웨어야 말로 진정한 자신감의 근원이라고. 지금 나만 해도 한 세트에 50만 링짜리 명품...."

주절거리는 엘리스를 차마 볼 수 없었던 아리엘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좋아하는 상대에게 꼭 속옷을 보여 줘야만 직성이 풀리나 보군요."

"그,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패션의 시작은 언더웨어부터...."

"너무 천박하네요."

"...."

천박이라는 단어가 엘리스의 뺨을 후려쳤다.

구두가 진열된 선반을 둘러보던 아리엘은 한 대 맞은 듯이 붉어진 엘리스의 뺨을 힐끗거렸다.

"그런데 당신은 안 고르나요?"

"나? 당연히 난 이미 집에 종류별로 다 있으니까! 이래 봬도 내가 스프링윈드 패셔니스타인 거 몰라?"

금세 기운을 되찾은 엘리스가 아리엘의 곁으로 다가와 구두를 골랐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아리엘이 문득 물었다.

"어째서 날 도와주는 거죠?"

"그야 친구니까. 친구끼리 돕는 데 이유 있어?"

"...."

"그리고 경쟁도 상대랑 수준이 맞아야 경쟁인 거잖아? 나도 시시하게 이길 생각 없다구."

살짝 감동할 뻔했던 아리엘은 다음에 이어진 엘리스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거적을 입어도 그 자라다 만 것 같은 당신의 하반신보단 낫겠죠."

"자, 자라다 만 하반 뭐? 이게 진짜!"

"내 말이 틀렸나요? 마침 저기 종업원이 지나가는군요. 불러서 확인해 볼까요?"

"...됐다. 착한 내가 참는다, 참아."

엘리스는 차분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당장이라도 저 재수 없는 뒤통수를 후려쳐 주고 싶지만, 아직까진 검술로 아리엘을 이길 재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저번에 봤었던 뿔... 심상치가 않단 말이지.'

뿔이 검지만큼 자라났을 때는 어디선가 본듯한 기억이 떠올랐었다.

'설마 아리엘이 마물 같은 건....'

그때 아리엘의 음성이 그녀의 생각 사이를 파고들었다.

"...당신은 왜 로한 님을 좋아하는 건가요?"

"응?"

초점을 맞추자 어느새 아리엘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엘리스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레이스지만, 그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야 당연히... 착하니까?"

"로한 님이 착하시긴 하죠."

"그리고 또... 가끔 듬직하더라구. 바보답지 않게."

그 말에 아리엘은 말없이 끄덕였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고개를 갸웃한 엘리스도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넌 왜 좋아하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아리엘의 눈앞으로 로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나요? 그냥 사랑하는 거죠."

"그럼 나한테는 왜 물어본 거야?"

"그냥 얼마나 바보 같은 이유를 품고 있을까 궁금해서."

"...너 일루 와. 오늘 우리 관계의 끝장을 보자."

"잡아 볼 테면 잡아 봐요. 물론 그 짧은 하반신으로는 어렵겠지만."

"넌 오늘 뒤져써."

황급히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서는 아리엘을 엘리스가 추격했다.

그때 멈춰 선 아리엘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엘리스의 공격을 피했다.

숨을 씩씩거리던 엘리스는 아리엘이 보고 있던 노점 좌판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목걸이는 왜? 저승 갈 때 기념으로 가져가려고? 좋아. 저승으로 보내 주는 김에 내가 하나 사 줄게."

"그런 게 아니라...."

손을 뻗은 아리엘의 손바닥 위로 작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올려져 있었다.

그 보석을 한동안 들여다보던 아리엘의 입술이 천천히 속삭였다.

"이 보석... 로한 님의 눈동자 같지 않나요?"

아리엘은 아주 그리운 듯이, 엄지 끝으로 보석을 쓸어내렸다.

반대로 그녀의 입꼬리는 아득히 올라가 있었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번지는 얼굴과 이름과 목소리.

늘 아리엘의 머릿속을 떠돌던 상념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너 그렇게나 로한을... 좋아하는 거야...?'

그 모습을 관망하던 엘리스는 옷자락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이런 애가 마물일 리 없잖아.'

로한에 대한 아리엘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이거 계산이요."

아리엘이 멍하니 목걸이를 보고 있는 사이 값을 지불한 엘리스가 뒷걸음질했다.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든 아리엘이 그녀를 직시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응? 아 그거?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아서. 너 가져."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돈이라면 나도...."

"에이, 선심 쓴다. 선물 하나 더 줄게."

그때 돌아선 엘리스가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이었다.

"저녁 아홉 시에 벚나무 아래로 가. 로한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게 무슨... 그보다 어디 가는 거죠?"

"오늘 아빠랑 저녁 약속 있는 거 깜빡해서. 나 갈게!"

그대로 떠난 엘리스.

홀로 남겨진 아리엘은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에클라트...."

거짓말로 붉어진 엘리스의 귀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 * *

로한과 함께 저녁까지 남아 이론을 연구하던 그레이스는 별관의 제3도서관에서 서적을 대여하고 있었다.

품에 서적을 한가득 안은 그레이스는 한 가지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오늘 저녁은 뭐가 좋을까?'

로한과 함께라면 어디서 무엇을 먹든 상관없었다.

그저 그의 눈길을 음미하며 그의 목소리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을 로한을 생각하면 그럴 순 없다.

그러던 그레이스의 생각은 자연스레 지난 호수의 일로 흘러들었다.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때 잠이 들어서 듣지 못했어.'

분명 거기까진 들었다.

그런데 이후로는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의식이 끊겨 듣지 못했다.

아쉬웠다.

그다음에 이어진 말이 무엇인지, 어째서 자신의 눈빛과 손길 그리고 목소리가 로한이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였는지 듣고 싶었다.

적어도 로한은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돌려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끔 엉뚱한 말을 하거나 횡설수설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귀엽고 악의가 없다는 걸 알기에 그레이스도 모른 척 넘어가 주곤 했다.

'나 혼자 독단해 온 건 아닐까.'

자신이 곁에 있어 로한이 힘들어진다고.

자신이 곁에 있어 로한이 슬프게 된다고.

자신이 곁에 있어 로한이 불행해진다고....

지금까진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래서 그의 곁을 떠나야만 한다고, 수도 없이 가슴속으로 실행하지도 못할 다짐들만 늘려왔다.

「"아가씨께서 제 눈을 바라봐 주었을 때."」

...다시는 뜨고 싶지 않았던 내 눈을, 로한이 바라봐 주었을 때.

「"아가씨께서 제 손을 잡아 주었을 때."」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 손을, 로한이 잡아 주었을 때.

「"아가씨께서 제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언제나, 로한이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저는, 이 세상에서 로한으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그레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이 마음을, 한번 믿어 보려 했다.

이 마음을 믿고서, 그와 함께하는 어느 날을 그려 보기로 했다.

"...."

서서히 손끝을 들어 올린 그레이스는 허공과 허공 사이를 천천히 이었다.

직선으로 이으려고 했던 선이 휘어지고.

원래 생각했던 색과 다르게 채색되며.

조금 엉망이더라도, 조금 서투르더라도, 조금 어설프더라도....

'...그 어느 날을, 언젠가 내 손으로 완성하고 싶어.'

이제 그레이스는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

과거의 미련들은 흘러가는 시간에 떠내려 보내고 있었다.

도래하려면 아직도 먼 불완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비로소 삶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그녀의 운명처럼....

그때였다.

"...그거, 정말이야?"

"응!"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와 나긋하지만 그늘로 뒤덮인 울림.

복도 귀퉁이로 살며시 다가간 그레이스는 고개를 내밀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실루엣들을 힐끔거렸다.

'저 아이들은....'

그 실루엣의 정체는 그래빗과 로라였다.

그레이스가 귓가에 마나를 집중하자 그녀들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정말 벚나무 아래에서 같이 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져?"

"나도 엘리가 하는 말 얼핏 들은 거야! 에, 엘리가 거짓말할 성격은 아니잖아? 그리고 나도 비슷한 전설을 들어 본 거 같아."

그 대화를 엿듣던 그레이스가 갸웃거렸다.

'벚나무? 전설? 사랑...?'

그러고 보면 오늘 교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사랑이란 키워드만은 동일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분을 벚나무 아래로 오게 할 수 있을까? 중앙 도서관도 그렇고, 오늘은 출입할 수도 없잖아...."

"...방법 있어."

"저, 정말?"

"...총장님."

"총장님?"

"...응. 총장님한테 부탁하면 돼."

"총장님이랑 로라랑 친했지 참. 잘됐다, 사라도 무척 기뻐할 거야!"

순간 대화를 마친 그래빗과 로라가 그레이스가 숨어 있던 방향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서둘러 반대편으로 도약한 그레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들이 지나갈 때까지 뒤돌아 있었다.

잠시 후, 홀로 남은 그레이스가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좋아."

§ 어떤 마음 (5)

엘리스는 걸었다.

"...야, 엘리스. 너 진짜 왜 그래?"

눈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밤.

자신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축제 때부터 아리엘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바보 같은 로한과 아리엘이 서로 잘되길 바랐다.

그래서도 로한도, 아리엘도, 과거 따위는 잊고, 앞으로 행복하게, 행복하게....

"엘리."

정처 없이 걷고 있던 엘리스의 걸음을 멈춰 세운 건 그 목소리였다.

"여기서 지금 뭐 해."

"네가 왜 여기에...?"

뒤를 돌아보자 세상의 중심에 로한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엘리스는 눈을 몇 번이고 비벼 앞을 확인했다. 손바닥에 물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리엘은? 분명 아까 벚나무 아래에서―"

"아리엘이 가르쳐 줬어. 네가 여깄을 거라고."

"뭐...?"

혼란스러웠다.

아리엘이 어째서?

그때 성큼 다가온 로한이 엘리스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가자."

"어, 어디 가는데?!"

"이럴 시간 없어. 지금 가야만...."

"이거 놔!"

거칠게 손을 뿌리친 엘리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무언가 두려워하듯, 가슴 위로 두 손을 포갠 그녀는 로한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로한의 눈빛.

반대로 간절하게 수평을 이탈한 입꼬리.

평소와 다른, 자신이 모르는 로한을 바라보던 엘리스는 비로소 깨달았다.

'너 정말 나를...?'

그것도 잠시.

고개를 떨군 엘리스가 쓰게 웃었다.

"...왜 나야?"

"왜 너냐니? 당연히―"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나였냐구!"

엘리스의 외침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메아리. 로한의 눈동자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네가 아니면 안 됐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처음에는... 연민이었다."

"연민...?"

연민이란 단어에 엘리스는 처음 로한을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로한. 앞으로 절 그렇게 부르시면 됩니다, 에클라트 아가씨."」

날붙이 같은 사람이었다.

건드리면 차갑고, 단단하고, 손이 베일 거 같은 사람이었다.

오랜 전장 생활에 몸에 밴 혈향과 갑옷처럼 투박한 인상.

그것이 엘리스가 기억하는 로한의 첫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엘리, 난 진정으로 네가 행복하길 바라."

「"부끄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저 역시 부모가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그랬던 로한이 변하기 시작한 건,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돕기 시작한 건 어머니의 그리움을 실토한 후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연민으로 시작한 감정이었으리라.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 것도 그저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 로한이 드러낸 감정들은 비단 연민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 욕심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순 없어. 너무 늦어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윽고 다가온 로한이 엘리스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내가 널, 책임지게 해 줘."

"...."

말없이 로한을 올려다보던 엘리스의 눈앞이 서서히 흐려졌다.

엘리스 또한 그레이스만큼이나 로한을 좋아했다.

그리고 이 고백 속에서 그 마음이 한쪽으로 무한히 기울기 시작했다.

"알았어...."

"그럼 서두르자."

"응!"

로한의 손을 마주 잡은 엘리스는 그를 따라 스프링윈드를 향해 내달렸다.

도시의 빛이 그들의 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히려 빛 때문에 그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엘리스는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다.

'어쩌면 나도 이게 욕심일지도 몰라 로한... 하지만.'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이 길을 끝까지 걸어 보고 싶었다.

* * *

30분 전.

―리틀 히스 7번가로 가 보세요. 거기 로한 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

엘리 대신 나를 찾아온 아리엘은 그 말만 남기고 떠났다.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서둘러 그녀가 알려 준 3번가로 향했다.

"엘리."

그리고 도착한 리틀 히스 7번가.

나는 느릿하게 걷고 있던 엘리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지금 뭐 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혜성이 지나가기 전에 엘리와 함께 서클을 연마해야만 했다.

"네가 왜 여깄어...? 아리엘은? 분명 아까 벚나무 아래에서―"

그래서 아리엘이 날 찾아왔던 거였나.

그런데 엘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리엘이 가르쳐 줬어. 네가 여깄을 거라고."

"뭐...?"

"가자."

"이거 놔!"

거칠게 손을 뿌리친 엘리가 한 걸음 물러섰다.

가슴 위로 두 손을 포갠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얘가 왜 이러지 싶었다.

그때였다.

"...왜 나야?"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나였냐구!"

엘리의 외침이 나를 향해 울려 퍼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메아리.

설마... 알아차려 버린 것일까.

그래, 눈치 빠른 엘리스라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솔직하게 실토하는 수밖에.

"...네가 아니면 안 됐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처음으로 엘리를 읽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어쩌면 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너를 기만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연민이었다."

언제나 실패와 좌절을 반복하던 너를.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모진 말을 듣고 눈물 흘리던 너를.

너는 언제나 나와 닮아 있었다.

제대로 하는 일조차 없고, 제대로 하고 싶은 일조차 하지 못하는 네 모습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그렇게 너에게 나를 투영했다. 그리고 응원했다.

잘되길 바랐다.

네가 행복하길 바랐고, 그 넓은 이마 아래로 쓰여진 미소가 지워지지 않길 바랐다.

처음에는 그렇게 엘리를 도와주고 싶었다.

검을 포기하고 마법을 사용하라고 말했던 것도, 손끝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엘리의 꿈을 걷어차 무너트린 것도 네가 아닌⸺ 전부 나와 그레이스의 운명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나는 너를 기만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엘리, 난 진정으로 네가 행복하길 바라."

죽도록 노력하는 너를 보며, 그렇게 조금씩 바뀌어 가는 너를 보며, 나도 바꿀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어쩌면 내 욕심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순 없어. 너무 늦어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내 사랑을 위해, 엘리스 에클라트, 너를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 내 마지막 페이지에 네가 쓰여 있길 소원한다.

...우리와 함께.

"내가 널, 책임지게 해줘."

그레이스만큼이나 엘리도 내겐 소중한 존재다.

그러니 내가 바꿔 버린 너의 미래를, 반드시 책임지겠다.

"알았어...."

"응!"

그제야 환하게 웃는 엘리.

그녀의 손을 마주 잡은 나는 스프링윈드를 향해 내달렸다.

오늘이 끝나 가고 있었다.

* * *

"...우리 지금 뭐 한 거야?"

코어 위로 손을 얹은 엘리스가 곁에서 가부좌를 튼 로한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함께 4서클에 도달한 로한이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뭐 하냐니? 당연히 서클을 올린 거지. 어때, 전보다 마나가 달라진 느낌이 들어?"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엘리스가 벼락을 내리치듯 화를 냈다.

"아니 여기서 같이 혜성 보자고 나 부른 거 아니었어?"

"봤잖아, 혜성."

"그 말이 아니라! 그, 그... 전설...!"

"전설이라니?"

전혀 모르겠다는 로한의 표정.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엘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아까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한 건 뭐야?"

그 말에 뜨끔한 로한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답했다.

"그야 당연히 지금 3.5서클에 도달한 건 너였으니...."

"그럼 날 책임진다는 건? 행복은? 응?"

"널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책임지고 너를...."

"...야!"

그제야 엘리스는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그럼. 지금까지 나 혼자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이런 멍청한!'

엘리스의 얼굴이 장미처럼 온통 붉어졌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속도 없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던 로한을 힐끔거렸다.

'그럼 그렇지. 로한이 날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럼 로한은 누굴 좋아하고 있는 거야?'

곧 로한의 마음으로 생각이 도달한 엘리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있지, 로한."

"왜?"

"그... 너 정말 이 나무에 얽힌 전설 몰랐어?"

"전설? 뭐 내가 모르는 슬픈 사연이라도 있나?"

로한은 정말 그런 전설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다지 중요한 정보도 아니었고, 알고 있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보였기에 전개 노트에도 기록하지 않았다.

로한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진 엘리스는 화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러다 저 멀리, 수풀 사이로 어렴풋하게 튀어나온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곤 걸음을 옮겼다.

"너 여기서 뭐 하니?"

"...!"

아리엘이었다.

수풀에 숨어 있다가 들킨 아리엘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당당히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환경 미화 중이었어요."

"이 시간에? 네가? 우리 좀 솔직해지자, 응?"

"정말 솔직하지 못했던 게 누구라곤 말 안 할게요, 엘리스 에클라트."

"조, 조용히 안 해?"

그리고는 로한을 바라보던 아리엘이 한숨지었다.

"...당신이나 나나 계획은 물 건너간 듯하네요.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 아리엘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좇던 엘리스는 벚나무 가지 사이로 숨어 있던 누군가를 발견하곤 놀라 소리쳤다.

"그, 그레이스 교수님?!"

엘리스의 목소리에 덩달아 놀란 로한도 자신의 위를 보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교수님? 그레이스 교수님께서 이곳엔 어쩐 일로... 아니 언제부터 거기 계셨던 겁니까?"

"...날씨가 좋아서."

"예?"

이윽고 벚나무 아래로 모인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피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하던 로한이 묘수를 떠올리곤 그녀들을 향해 말했다.

"이왕 이렇게 모인 김에 유성우나 구경하죠."

"유성우?"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스가 되묻자 로한이 끄덕였다.

"응. 보통 혜성이 지나간 자리에 유성우가 남으니까. 그레이스 교수님은 어떻습니까? 아리엘은?"

머뭇거리던 그레이스와 아리엘도 이내 동의했다.

"좋아."

"...저도 좋아요."

"그럼 별이 잘 보이는 곳으로 장소를―"

그때 본관 쪽에서 코넬리아가 시스터즈와 함께 정원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서 보죠?"

곧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총장을 마주한 로한이 시스터즈들이 들고 있던 돗자리와 바구니를 둘러보았다.

"총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퇴근하려고 준비하는데 이 아이들이 잠깐만 정원의 개방을 부탁해서요. 마침 나도 별이나 구경할까 했는데 잘됐지 뭐."

다음 순간 로한에게 안겨 든 사라가 반가운 듯이 입을 열었다.

"부겨슈님! 안녕하세요?"

"안녕은 한다만 너희들이 이 시간까지 왜...."

"헤헤, 그래빗이 별 구경하자고 그래서요!"

곧 로한과 눈이 마주친 그래빗이 어색하니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 그냥 저희는 별이 보고 싶어서...."

"...별의 궤도는 술식 연구에 도움이 되니까요."

로라도 거들자 그래빗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예기치 못한 코넬리아의 참여에 그래빗과 로라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 가려던 참이었다.

그사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코넬리아가 주머니에서 꺼낸 달걀 모양의 금속 장치를 바닥으로 굴렸다.

"마침 이전에 리펜슈타인 교수가 개발한 현상제어기를 테스트해 보기 좋겠군요. 현상은 걱정하지 마요. 그 교수 실력은 확실하니까."

그리고는 시스터즈에게 손짓해 돗자리를 펼친 코넬리아가 자리에 앉았다.

바구니에서 다과를 꺼내던 그녀는 어색하게 서 있는 이들을 보며 손짓했다.

"뭐해요? 빨리 앉지 않고. 기상 정보에 따르면 곧 시작된다구요."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은 이들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레이스와 아리엘 그리고 엘리스만은 아무 생각도 없이 하늘을 주시하는 로한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때였다.

"오...."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 로한의 입에서 감탄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그를 따라 하늘을 보던 코넬리아와 시스터즈도 아이처럼 손을 모았다.

"너무 예뻐요...."

"그러게. 혼자 봤으면 아까웠을 뻔했어...."

어둠 속에서 피어난 유성들이 하나둘 머리 위로 스쳐가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하늘을 장식하는 유성우의 풍경은 1년에 단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린 엘리스가 곁에 있던 아리엘을 팔꿈치로 슬쩍 찔렀다.

"왜요?"

"아까 말이야... 왜 로한한테 내가 있는 곳 알려 준 거야?"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리엘.

불어온 바람에 은하수처럼 흐르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거 정당하지 않으니까."

"정당하지 않다니?"

이윽고 아리엘은 유성우를 담은 눈동자로 엘리스를 응시했다.

"그러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나요? 바보 같은 에클라트."

"바, 바보라니! ...뭐,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그래도 이 선물은 고마웠어요."

다시금 하늘로 눈길을 돌린 아리엘이 눈을 감은 채 목걸이를 감싸 쥐었다.

눈앞에서는 여전히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친구라....'

오늘에서야 엘리스의 마음을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다.

자신을 위해 힘써 주는 그 마음은 적어도 진실이었다.

'...좋은 친구는 아니어도, 그냥 친구 정도는 괜찮을 거 같네요.'

닫혔던 아리엘의 마음이 열리고 있는 사이, 함께 별을 보고 있던 그레이스가 로한에게 물었다.

"저번에 절벽에서 들려준 별들의 이야기, 또 들려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어디 보자, 그럼 저 별자리부터...."

그레이스는 지난번 로한이 들려준 성좌들의 설화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번 더 들려 달라고 한 것은, 그저 로한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로한.'

나긋이 이야기하는 로한을 바라보며, 그레이스는 유성우 대신 소원했다.

'앞으로도 너와 함께이고 싶어.'

지금의 일상을.

로한과 함께하는 하루를.

그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이렇게, 영원히.'

그 순간 고개를 돌린 로한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그레이스가 황급히 눈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어?"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로한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인 그레이스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로한은 이야기를 참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

"여러 이야기를 읽었으니까요."

"이야기 좋아해?"

"예,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 그의 눈앞에 현실이 되어 있었다.

"즐거워하는 걸 보니 안심이군요. 다음에는 더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응. 좋아."

그러던 로한의 시선이 본관으로 향했다.

어느 유리창을 들여다보던 그는 작게 혀를 찼다.

"...저러지 말고 같이 보면 될 것을."

본관 6층 마법방어학 강의실.

불 꺼진 그곳에서 미하엘이 홀로 서 있었다.

"...쯧."

미하엘은 유리창 너머로 벚나무 아래에 모인 이들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가 지금까지 퇴근하지 않은 건 아리엘 때문이었다.

"괴상한 미신 따위를 믿다니,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그러다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가 조용히 유성우를 좇았다.

"...뭐, 아름답긴하군."

쉼 없이 쏟아지는 유성우처럼, 어떤 마음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때 미하엘의 등 뒤로 기울어진 그림자가 눈을 떴다.

"리펜슈타인 님."

"예정보다 조금 늦었군, 칼."

이내 돌아선 미하엘이 그림자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예정대로 누아르 가문이 쥐고 있던 영역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곧 메텔 광산의 채굴권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공적이군. 수고했다, 칼."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미하엘은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순간 잠잠해졌던 그림자에서 다시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이건 예외이오나, 한 가지 정보가 더 있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말하라. 들어는 보겠다."

손끝에 피워 낸 불씨를 담배에 붙이려던 순간이었다.

"12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2기사?"

"예. 아무래도 이번 유니온 소집 때문인 듯한데, 그 목적이...."

툭,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린 미하엘이 서둘러 창밖으로 눈길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 행복해하던 로한을 향하고 있었다.

한숨을 연기처럼 내쉰 미하엘이 그를 보며 말했다.

"...이번엔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군, 로한."

§ 로아노크 (1)

"무슨 기사가, 그것도 부교수가 영업 사원보다 출장이 잦은지 원...."

짤막한 불평 속에서 나는 짐이 든 가방을 마차에 실었다.

이 세계 배경에서 무슨 마차인가 싶겠지만, 엄연히 마차도 존재한다.

일종의 낭만이다.

농담이고, 통상적으로도 마차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도로에 마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보기 어려운 건 이곳 주민들도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마차를 이용해야만 하는 경우가 몇 가지 있다.

처음 기사나 마법사가 되는 의식이라던가,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떠날 때라던가, 더글러스에 위치한 황궁에 입장할 때가 대표적이다.

전통에 의한 관념이었다.

이제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현실의 명절날 사람들이 한복을 입는 의례처럼 말이다.

유니온 소집에 응한 모든 기사는 말과 마차를 제외한 그 어떤 이동 수단도 이용할 수 없다.

걸어와서도 안 된다. 전통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복장 또한 개인마다 정복을 입어야만 하고, 검을 소지하되 기사도에 어긋나는 상황에선 절대 뽑아선 안 된다.

그 외에도 여러 준수 사항이 있지만 전부 숙지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알레스 산맥. 거길 무사히 건너는 게 가장 큰 관건이니까."

유니온 성채는 알레스 산맥 정상에 위치한 '로아노크(Roanoke)'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는 건 쉽다.

지난 애뮬러 챔피언십의 코스도 알레스 산맥이었을 만큼 바이크로도 손쉽게 횡단할 수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이제는 거의 토멸된 에르츠 중앙 고지대의 검울음늑대와는 궤를 달리하는 적들이 나를 노릴 것이다.

"이번에 내가 조우하게 될 적은 마수 따위가 아닐 테니까."

나와 볼프윈이 손을 잡았다는 건 웬만한 인사들이라면 이미 인지하고 있을 정보다.

엘리의 아버지인 데니스조차 그것을 알고 내게 매달렸었다.

하지만 그건 현재까지 중립을 고수하고 있는 데니스의 경우고, 아서를 위시하는 세력들에겐 다른 이야기다.

나를 죽이려 들 거다.

죽이진 못하더라도 반드시 나와 아가씨를 이번 유니온 소집에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 거다.

이건 명백히 확신할 수 있다.

"...물론 나도 가만히 당해 줄 생각은 없지만."

이제 나는 엘리와 함께 4서클에 도달했다. 검술에 빗대자면 소드 엑스퍼트 정도.

검술도 지금까지 수련한 결과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대부분 이해했다.

이제 나는 좋은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뉴비가 아니다.

'로한'으로 살아가게 된 지도 어느덧 많은 시간이 흘렀고, 슬슬 검이 수족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다 실었습니다. 이제 출발해 주세요."

"예! 그럼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마차에 올라탄 나는 마부에게 먼저 캔터베리로 향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가씨를 데리러 유클리드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아서."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가볍게 손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펴자 눈부시도록 새하얀 보석이 손에 들려 있었다.

리버 크래프트가 내게 맡긴 성유물, 「질서의 굴대」.

이 아티팩트 안에는 엄청난 힘이 내재되어 있다.

착용자를 병기로 만들어 준다는 엘리의 펜던트나 내가 보유한 실비아의 반지조차 이 보석에 비한다면 평범한 장신구에 불과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거 하나 때문에 대륙이 멸망할 수 있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퀘오스가 세계를 재구축하기 위해 '또 다른 굴대'를 찾았고.

"다만 그때는 아서의 손아귀에 있어 안전했다는 건데...."

당장 구도자 중 1사도인 '동쪽의 군세를 이끄는 왕'만 만나더라도 이 보석을 허무하게 빼앗길 거다.

그 인물은 진짜 동쪽의 군세를 이끌고 있으니까.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질서의 굴대를 아서에게 넘겨줘야만 한다.

물론 공짜로 넘겨줄 생각은 없다.

최소한 이 보석이 지닌 가치의 절반만이라도 받아 낼 예정이다.

"다 왔습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마차에서 내려 저택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다시 한번 눌러도 같았다.

약속 시간을 확인하곤 그레이스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이었다.

"반갑습니다, 기사님."

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그레이스가 아닌 데이지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가씨는?"

"현재 아가씨께서는 유클리드 가주님과 중요한 대화 중입니다."

대화?

설마 또 잔소리를 듣고 있는 건가.

"하여 먼저 로아노크로 출발하세요. 아가씨는 대화가 끝난 후 출발할 예정이시니."

"얼마나 걸리는데? 아직 시간 많으니 그냥 기다렸다가―"

"아가씨께서도 먼저 출발하라 명하셨습니다."

"알았어. 그럼 먼저 가겠다고 전해 줘."

하는 수 없이 마차로 돌아온 나는 시무룩하게 자리에 앉았다. 이틀간 아가씨를 가까이서 바라볼 절호의 기회를 놓쳤군.

"...그나저나 무슨 대화일까."

슐라히의 성격상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거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이번 일에 관여하려 들겠지.

"이랴!"

나는 마차와 함께 덜컹거리기 시작한 의문에 빠진 채 로아노크로 향했다.

* * *

고요했던 몬 마운티스에 말발굽 소리가 또각거렸다.

도시에서 벗어난 마차가 광활한 녹지(綠地)로 들어서자 읽고 있던 이론서를 덮은 로한이 창문을 열었다.

"여긴 여전하네."

하루만 지나도 수많은 것들이 변해 있는 게 도시의 풍경이다.

그러나 자연은 다르다.

어제 심은 묘목이 거목으로 성장하려면 수십 년이 걸리듯 몬 마운티스의 풍경은 아주 느리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달라져 있을 뿐이었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쉴 틈 없는 하루 속에서 찾아온 여유 때문일까, 경치를 구경하던 로한의 가슴 밑바닥부터 지나간 그리움들이 스멀거렸다.

처음 이 세상에서 눈을 떠 그레이스와 마주한 순간이 그 시작이었다.

그녀를 따라 스프링윈드의 부교수로 부임했을 무렵, 원망하고 또 원망했던 아리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엘리스와 재회한 반가움도 잠시 알려 줘야만 했던 현실, 어느 순간 자신의 페이지 위로 쓰여지던 이 세계의 주인공, 미하엘 리펜슈타인, 호수의 맹세, 엘리와 함께 참여했던 황실 경매의 추억, 블랙 캔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조우했던 위협, 만나지 않았더라면 서운했을 시스터즈, 난생처음으로 타 봤던 자전거 그리고 그레이스의 운명을 향해 힘껏 내달렸던 챔피언십, 묘지에서 알게 된 아리엘의 마음과 미하엘의 슬픔....

그 외에도 더 많은 기억들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려준다면 하루를 꼬박 새워도 끝맺지 못할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 속에서, 로한은 희망했다.

"...언젠가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은 과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로한은 자신이 쌓아 온 페이지를 딛고서 읽어 본 적 없는,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오~ 맞네!"

"예?"

그때 고삐를 갈무리하던 마부가 로한의 얼굴을 힐끗 확인했다.

"기사님 저번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셨죠?"

"아... 예.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손하시긴. 하도 대외 활동이 없으셔서 하마터면 몰라뵐 뻔했습니다. 참, 겨울에 열리는 '하이런던 게임'에도 참여하실 건가요? 듣기로는 홍보팀으로 출전했다가 우승하셨던데, 이번에도⸺"

다음 순간 뒤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딸랑! 딸랑! 딸랑!

마부와 함께 뒤를 확인하자 또 다른 마차가 바로 뒤에서 서행하고 있었다.

마부가 화답하듯 종을 세 번 울렸다. 그러자 다른 마차에서도 다시 종을 울렸다.

로한이 물었다.

"무슨 일이죠?"

"타종을 세 번 하는 건 저희에게 볼일이 있다는 신호입니다. 제가 내려 확인해 보겠습니다."

곧 마차를 멈춘 마부가 주먹을 풀며 마부석에서 내렸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한에게 들려온 건 마부들의 말싸움이 아닌 정겨운 음성이었다.

"로한!"

고개를 돌리자 엘리스가 열린 창문으로 손을 넣어 마차 문을 열고 있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

그녀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건 로한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자네에게 무척 섭섭하네."

"단장님."

데니스까지 등장하자 서둘러 마차에서 내린 로한이 예를 갖췄다.

그럼에도 데니스는 어딘가 서운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뭔가, 로한? 내가 부끄러웠으면 말을 했어야지 이 사람아.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자네와 함께 이번 소집에 참여하려고 어제부터 밤잠을 설쳤건만.... 엘리, 지금 이 아빠의 슬픔이 보이니?"

"...기사 로한, 단장님의 마음을 사려하지 못한 불충을 이 자리에서 목숨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표정을 굳힌 로한이 망설임 없이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화들짝 놀란 데니스가 그를 진정시켰다.

"노, 농담 좀 해 본 걸세!"

"아빠도 참. 로한처럼 고지식한 바보한테 그런 농담을 하면 어떡해 정말!"

덩달아 놀란 엘리스까지 로한을 만류했다.

그때 미소를 그린 로한이 목례를 올렸다.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한 번만 더 농담하면 누군가 저세상으로 가 있겠구먼. 허허...."

"이 바보, 바보!"

덩달아 속은 엘리스가 로한의 옆구리를 괴롭히고 있던 사이 그는 데니스에게 물었다.

"듣기로는 내일 출발하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아아, 맞아.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금방 해결돼서 오늘 출발하게 되었네."

"기사단은 요즘 어떻습니까? 지난번 대규모 토벌도 성공적으로 완수하셨다던데,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겠군요."

"다 우리 단원들이 출중한 덕분이지 뭐. 물론 그렇다 해도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는 자네를 위해 언제나 공석이네."

"마음은 감사드리나 하루라도 빨리 좋은 부단장을 찾으시어 지금보다 기사단이 더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런 말 하지 말게. 그 말이 내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니."

그러다 로한의 마차를 확인한 데니스가 자신의 마차를 손짓했다.

"이러지 말고 마차를 합치는 건 어떻겠나?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내가 타고 온 마차가 승차감이 좋아. 이번에 시트를 바꿨거든."

확실히 데니스의 마차는 로한의 것보다 수십 배는 비싼 모델이었다.

하지만 로한이 고민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일 출발한다고 해서 일부러 오늘 출발했건만... 이러면 난처한데.'

현재 로한은 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 사실을 로한도 확신하고 있었고, 때문에 데니스도 소집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도 따로 움직이려 했다.

더욱이 엘리스까지 동행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이전에 아리엘을 부탁한 미하엘의 말처럼 경험을 위해 데려온 것이었지만, 오히려 자신 때문에 이들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데니스도 아서를 지지하고 있는 세력이라는 점. 설마 날 방해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세력의 핵심인 데니스까지 적으로 돌리진 못하겠지.'

고민을 마친 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그래, 그럼 몸만 챙겨서 이쪽으로... 잠시 실례하겠네."

그때 걸려 온 전화에 데니스가 등을 돌렸다.

"그래, 무슨 일인가? 뭐? 그건 어제 승인했잖는가. 그거참... 결국 그렇게 됐구먼. 알겠네. 지금 처리하지."

다시 돌아온 데니스에게 로한이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기셨습니까?"

"아아, 별거 아닐세. 웰턴 알지? 이번에 그 지역 토벌권을 입찰했는데 잠깐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어허,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 말게. 아무튼 자네는 엘리와 내 마차에 타게나. 난 자네 마차에서 일을 처리할 테니."

"괜찮습니다. 서류를 옮기려면 번거로울 테니 제 마차를 타고 가겠습니다. 일이 끝나면 그때 불러 주세요."

"흠, 미안하지만 그럼 실례 좀 하겠네. 대신 저녁엔 내가 맛있는 바베큐를 만들어 줄게. 콜?"

"당연히 콜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로한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고삐를 당기려던 순간 문을 열고 올라온 엘리스가 로한의 무릎 위로 몸을 날렸다.

"같이 가도 되지?"

"내려."

"아 심심하단 말야. 가면서 나랑 놀자. 웅?"

"내려."

"이렇게 귀여운 엘리스 님이 놀아 준다니까? ...뭐야 그 표정? 싫어? 하는 수 없네. 아빠한테 로한이 나 싫어한다고 말하는 수밖에."

"...내려와서 편하게 앉으라는 말이었다."

"그런 말이었어? 히,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곧 옆으로 이동한 엘리스가 문에 등을 기댄 채 로한의 무릎 위로 발을 쭉 뻗었다.

"머해? 빨리 다리 안 주물러?"

"너 이거 권력 남용이야."

"그럼 어때? 로한한테만 남용할 건데 뭐. 왜, 불편해? 아빠~!"

"종아리가 많이 뭉치셨습니다, 엘리스 아가씨."

장난스럽게 웃던 엘리스가 다리를 웅크리곤 로한에게 물었다.

"그레이스 교수님은? 같이 오는 거 아니었어?"

"일이 생겨서 나중에 오실 거야."

"아 머야. 그레이스 교수님 보려고 약속 다 취소하고 따라왔는데."

"...그런 이유였군."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야."

엘리스의 눈동자가 창밖을 향했다. 그녀는 아직 배우지 못한 세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언젠가 로한이나 아빠처럼 유니온에 소속될 거고, 지금부터 이런저런 경험을 쌓아야 나중에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으니까."

"기특한 소릴 잘도 하는구나."

"기특해? 그럼 특별히 엘리스 님의 머리를 쓰다듬게 해 주지. 자."

"거절한다."

"아니 쓰다듬게 해 준다니까?"

"거절."

"이게 또!"

뾰로통해진 엘리스가 발바닥으로 로한의 뺨을 뭉갰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한은 다시 펼쳐 든 이론서를 읽기 시작했다.

엘리스는 그런 로한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로한 마음을 확인 못 했지, 참.'

한 달 전, 모건 르 페이.

어쩌다 보니 다 같이 별 구경을 하게 되어 로한의 마음을 확인하는 일은 물 건너가 버렸다.

그러나 엘리스는 잊지 않았다.

「"...네가 아니면 안 됐으니까."」

로한이 그 말을 어떤 의미로 했는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때 가슴 속에서 뛰기 시작했던 엘리스의 심박(心搏)은 진실이었다.

'가만 보면 로한도 괜찮게 생겼단 말이지.'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그건데, 뭔가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있어....'

평소에는 그냥 바보 멍청이 같다가도, 어떨 때 보면 정말 기사는 기사구나 싶은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특히 진지할 땐 다른 사람 같아. 내가 알던 로한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마주친 순간 온몸에 전율이 관류하는 눈동자.

엄숙한 목소리는 전장 한가운데에서 종전을 알리는 기사의 칼끝처럼 무겁고 자유롭다.

무엇보다 몸짓 하나하나에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자신감이 존재했다.

'그 점이 멋있긴 해. 그래서 왠지 더 혼나고 싶어서 일부러 실수하고 싶을 만큼....'

물론 엘리스의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 불과했다.

당장 데이지만 해도 로한을 그레이스의 장난감 취급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린 엘리스가 로한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어머 나 미쳤어, 미쳤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너?'

그러나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생각을 지우려 할수록 오히려 로한의 모습이 가슴속에서 번지고 있었다.

'나한테는 그레이스 님뿐이야. 그레이스 님만 생각하자. 그레이스 님만...!'

그 순간이었다.

"...마법은 불공평한 학문 같아."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론서에서 고개를 든 로한이 마부석 쪽으로 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걸, 누구나 배울 수 없으니까."

한순간, 로한의 서클이 흩어지더니 엘리스의 눈앞으로 크고 작은 눈꽃들이 피어났다.

부유하는 눈의 결정들.

겨울이 찾아온 듯한 차가운 적막감.

그러나 불의 술식이 배합된 눈꽃의 열기는 따스함으로 가득했다.

발현된 「서리불꽃」 속에서 로한이 엘리스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

"전혀? 그건 네가 마법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그래 바보야."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괜한 헛소리하지 말고 책이나 읽으셔."

엘리스는 침착하게 답한 것과 달리 문에 바짝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묻었다.

술식을 해제한 로한이 다시 이론서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자꾸만 그의 눈치를 살피던 엘리스가 자신의 가슴 손으로 꾹 눌렀다.

'나 미친 거 맞나 봐...!'

심장이 아찔하게 뛰고 있었다.

§ 로아노크 (2)

저녁 식사 이후 모두가 잠든 밤, 나는 홀로 숲길을 나아갔다. 은빛으로 물든 숲이 부드럽게 늘어져 있었다.

나를 보며 속삭이듯 흔들리는 가지들.

보고 있노라면 심원하게 빠져 버릴 수밖에 없을 풍경.

한편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은 은근한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어둠 내린 저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지는 보이지 않는 미래와 같았고, 결국은 도달해야만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쯤이면 마차까지 안 들리겠지."

그러나 내겐 익숙한 공포와 두려움이다.

언제나 나는 어둠 속에서 검을 연마해 왔다.

정신을 차려보면 썰물처럼 밀려 나간 새벽 끝에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참 기이한 일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해진 시간에 울리는 알람 소리를 듣고 힘겹게 눈을 떴는데, 이제 나는 내일이 가져다주는 희망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이 변화가 조금씩 로한을 닮아 가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바뀌어 가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내 모습이 싫지 않다는 것이다.

"하아...."

처음은 심호흡이다.

온몸의 힘을 빼는 것이다.

그래야만 힘을 주고 싶은 곳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우웅―

다음은 코어였다.

발산된 오러가 근섬유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척.

중심을 지탱할 발을 한걸음 내디딘다.

검은 어떻게 들어 올리든 상관없다.

이제 칼끝은 내 의지와 일치했다.

휙⸺

내지른 검신 위로 놓인 꽃잎 하나.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흠집 없이 말끔한 꽃잎을 집었다.

후, 하고 입김을 불자 꽃잎은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내가 입을 연 건 정처 없이 춤을 추는 꽃잎을 구경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밤에만 피는 꽃이 있지."

뒤를 돌아보자 어디선가 반사된 달빛이 눈가를 적셨다.

은폐물 하나 없이 텅 빈 숲길, 그 위로 음영에 가려진 인물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가까이 와서 보는 게 어때? 뭐든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으니까."

"...나는 너를 인정할 수 없다."

⸺챙!

눈을 한 번 깜빡인 순간 검이 부딪혀 왔다.

그 인물이 내가 서 있던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눈앞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었다. 머리카락이었다.

"그분께서 어째서 너를...!"

밤안개 같은 음성이었다.

이토록 가까이 있음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거리감. 생자(生者)와 망자(亡者)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낯빛.

그 속에서 유일하게 분간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성별뿐.

문자 그대로 '시체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인물이 누구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묘사들이 어울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명이니까.

나는 대칭을 이루고 있던 검 너머로 그녀의 수식을 불렀다.

"호수의 기사."

"...."

"이번이 그대와 초면으로 알고 있는데, 그대는 나를 잘 아는 모양이군."

열두 기사들의 수좌(首座)이자 호수의 기사, '올리비아'.

그녀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을 넘어 이렇게 검을 맞댄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위인(Worthies)께서 나를 죽이라 그대를 보냈나?"

'위인'은 추종자들 사이에서 '아서'를 칭하는 밀어였다.

뭐 아서를 포함해 떡하니 '아홉 위인'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다지 비밀스러운 말도 아니겠지만.

츠즈즈즛!

다음 순간 짙어지기 시작한 올리비아의 오러.

점점 밀리기 시작한 내 귓가에 들려온 건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

눈으로도 좇을 수 없을 세기의 검풍이 사각에서 몰아쳤다.

직감과 함께 「식스 센스」를 발동한 나는 살아 있는 송장처럼 검을 휘두르는 그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식스 센스조차 올리비아에게서 어떠한 아우라도 탐지하지 못했다.

놀라울 정도로 무색(無色)하다.

분명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은데 분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외에도 작은 향기나 소음조차 없었다.

마치 공간 그 자체가 나를 밀어내는 듯한 압박감. 확실히 열두 기사들의 수좌는 수좌다.

...그래도 대충 실력은 파악했으니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인가.

쎄에엑!

올리비아의 검을 쳐올린 순간 전개된 「스피어」들이 그녀를 노렸다.

챙!

이미 내가 마법까지 사용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하게 스피어를 받아치는 올리비아.

그러나 그녀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

검신에 부딪친 스피어가 오히려 그녀의 검을 튕겨 내며 날아들었다.

내가 전개하는 스피어는 단순한 1서클 마법이 아니다.

오러, 그것도 「오러 블레이드」가 혼합된 결코 멈출 수 없는 '창'이다.

"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건 무슨 말이야?"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올리비아를 몰아붙였다.

"내가 아는 위인께서는 이런 더러운 짓을 벌일 분이 아니다. 이것은 너의 독단인가?"

"...입 닥쳐."

콰앙!

숲을 뒤흔드는 굉음 속 올리비아의 검에서 범람한 마나가 파도처럼 나를 덮쳐 왔다.

성유물(聖遺物), 「아론다이트」.

이건 허용하면 위험하다.

아직 나는 올리비아가 소유한 성유물의 힘을 받아 낼 수준이 아니다.

그때였다.

"위험해, 로한!"

"네가 여길 어떻게...!"

어느새 나타난 엘리가 두 팔을 벌린 채 내 앞을 가로막았다.

허공으로 떠오른 엘리의 펜던트가 빛을 발했다.

"걱정 말고 내 뒤로 와!"

이윽고 엘리의 전방으로 펼쳐진 사계의 「봄」.

그러나 저것만으로는 아론다이트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

"안 돼!"

다리에 오러를 집결해 피할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끌어당긴 엘리를 감싸 안았다.

"큭!"

아론다이트의 마나가 내 등에 직격한 순간 고통으로 열린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로한...? 로한!"

눈앞이 휘청거렸다. 모든 서클과 오러를 사용해 몸을 보호했음에도 사경을 헤맬 만큼 가히 엄청난 충격이었다.

눈앞으로 새하얀 빛이 소환된 건 그 순간이었다.

파앗⸺!

사랑하는 이의 품처럼 따스하고도 온화한 기운.

시야가 온통 하얗게 물들 정도로 화려하나 전혀 눈부시지 않은 밝기.

급속도로 회복된 상처와 함께 초점이 돌아오자 허공에 떠 있는 보석이 보였다.

"질서의... 굴대?"

질서의 굴대는 마치 나를 부르듯 점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보석을 움켜쥔 순간이었다.

[ 무엇도 되돌릴 수 없다. ]

...뭐?

[ 그러니 무엇도 되돌려선 안 된다. ]

환청이었을까, 그 음성과 함께 빛을 잃은 보석은 다시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때 엘리가 내 옷깃을 끌어당겼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보였다.

"괘, 괜찮아...?"

"괜찮아. 우선 저쪽으로 가 있어."

엘리를 뒤로 물린 나는 올리비아를 돌아보았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나와 눈이 마주친 올리비아가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뒷걸음질하던 그녀의 모습이 안개로 변하더니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아...."

그제야 마음이 놓인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보석의 힘으로 상처는 회복되었지만, 아론다이트의 일격을 막아 내느라 마나를 전부 소진한 탓에 제대로 서 있을 기력조차 없었다.

"다친 데 없어 엘리?"

"로, 로한이야말로 괜찮은 거야?"

잔뜩 겁에 질려 나를 살펴보는 엘리.

나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미소를 지었다.

"미안한데 마차까지 좀 데려다줄래? 보다시피 몸이 이런 상태라."

"아, 알았어! 빨리 업혀!"

순식간에 나를 둘러멘 엘리가 숲길로 나아갔다.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

"...생각보다 힘이 세구나?"

"아카데미 생도 때는 너보다 더 무거운 것도 지고 다녔다구."

엘리를 안심시키고자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진짜 업어 주다니. 그녀와 함께 숲길을 나아가던 내가 문득 물었다.

"근데 어떻게 알고 왔어?"

"어? 아 그게, 그냥 잠이 안 와서...."

"왜, 무슨 고민이라도 생겼나?"

"...."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힐끗 옆모습을 들여다보자 엘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얼굴 붉어진 거 봐. 힘들면 내려놔. 대충 걸을 순 있으니까."

"그,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하나도 안 힘드니까 잠자코 있어!"

"정말 어련하구나."

이렇게 누군가에게 업혀 본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나는 묵묵히 걷고 있는 엘리의 머리를 자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나 위험할 때 달려와 주는 사람도 생겼구나. 헛살진 않았어.

"...고마워, 엘리."

"머가?"

"업어 줘서 고맙다고."

"히, 다음에 또 힘 빠지면 말해. 언제든 내가 업어 줄 테니까."

"쓸 만한 탈것이 생겼군."

"이게 진짜! 그래도 농담하는 걸 보니 그렇게 다친 건 아닌 모양이네."

머금고 있던 미소가 조금 씁쓸해졌다. 저 멀리 마차가 보였다.

이제 시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