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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

거목 아래로 바람에 실려 온 안개가 모여들었다.

곧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올리비아가 기둥에 손을 뻗어 몸을 지탱했다.

"허억, 허억...."

로한의 앞에서와는 달리 올리비아의 입술에서 흐트러진 호흡이 새어 나왔다.

아론다이트의 힘을 무리하게 사용한 탓이었다. 조금 전에는 진심으로 로한을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괴롭게 하는 건 육체의 고통이 아닌 무너진 평정이었다.

'...하마터면 민간인을 죽일 뻔했다.'

올리비아, 기본적으로 그녀는 아서의 수하이자 대륙을 수호하는 '열두 기사'다.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휘두르기엔 그녀의 검에 깃든 신념은 매우 중하다.

더욱이 이번에는 아서의 의지가 아닌 그녀만의 독단이었다.

아서의 추종자로서, 자칫 자신이 섬기는 주군의 명예에 흠집을 낼 뻔했다.

'후회하진 않는다.'

로한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어째서 주군의 관심이 그에게 향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일 빈자리가 채워질 것이오."」

'갤러해드'가 죽은 지 15년 만의 일이었다.

열두 기사들의 수좌였던 올리비아 또한 그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한은 아니었다.

아니, 로한만은 안 됐다.

'그 기사는 해로운 인물이다. 어떤 방법으로 위인의 눈을 속였는진 모르나, 나만은 속이지 못할 것이다.'

올리비아가 로한을 그렇게 평가한 건 어떤 소문 때문이었다.

그 소문을 자신에게 전한 인물 또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여 올리비아는 로한의 소문을 의심하지 않았다.

"기사 로한, 너는...."

창백한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거부로 뒤얽힌 눈빛이 소슬히 짙어져 가고 있었다.

"...'선한 기사'가 될 수 없다."

* * *

―그는 너무 착해 빠졌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저택을 나선 그레이스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밤까지 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었던 탓인지 그녀의 눈 밑으로 피로가 그늘져 있었다.

―그러니 이번 의장은 반드시 네가 되어야만 한다. 이를 거절해도 상관은 없다. 허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로한이 의장이 되어선 안 된다.

창가에 머리를 기댄 그레이스의 눈동자가 스쳐 가는 풍경으로 향했다.

그러나 머릿속에 가득한 의문에 눈앞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주님께선 어째서 로한을....'

싫어하는 걸까, 아님 걱정해 주는 걸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슐라히는 결코 누군가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달라지신 거 같기도 해.'

이전 같았더라면 소집에 응하긴커녕 의장이 된다는 걸 무조건 반대했을 것이었다.

때문에 그레이스도 슐라히를 설득하기 위해 어제 아침부터 그녀와 대화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슐라히는 소집에 응하지 말라는 엄포를 놓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의장이 되라니. 왜?'

그레이스 또한 자신이 친위대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게 슐라히의 압박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다.

유클리드 가주의 결정이었기에 반발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프링윈드의 교수로 부임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심지어 이젠 검을 내려놓으라는 둥,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십자수나 배우라는 잔소리마저 끊겼다.

그저 묻길 오늘은 누구와 함께 있었냐는 물음이 전부....

"...하아."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숨이 유리를 하얗게 물들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슐라히와 이야기를 마친 이후엔 언제나 눈앞이 깜깜했는데,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아진 느낌이다.

마치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새장의 입구처럼.

하지만 그레이스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문이 열려 있음에도 그 너머로 쉽사리 발을 내딛지 못했다.

눈앞의 자유는 두려움이었고, 기능을 상실한 날개는 여전히 무용했다.

너무나 오랜 시간 갇혀 있던 탓이었다.

'일단은 이번 일에 집중하자.'

로한이 유니온의 의장이 되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녀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도울 것이 있다면 최대한 도울 것이고, 로한이 위험하다고 판단된다면 지체 없이 슐라히의 말을 따라 의장이 될 생각이었다.

그러던 그레이스의 입꼬리가 움찔거린 건 그때였다.

하늘을 부유하던 구름과 눈이 마주친 그레이스.

왠지 모르게 그 구름이 로한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빨리 로한 보고 싶다.'

모든 상념을 한순간 잊어버릴 만큼, 벌써부터 로한이 그리웠다.

§ 로아노크 (3)

다음 날 로한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마차 안에서 검을 정비했다. 그 모습에 엘리스가 혀를 내둘렀다.

"더 안 자도 되겠어? 어젯밤에 무리했잖아."

"괜찮아. 마나도 거의 회복됐으니까."

그 말과 달리 로한의 마나는 아직 절반도 회복되지 않았다.

이를 대변하듯 곧 검을 정리한 그가 자세를 정돈한 뒤 눈을 내리감았다.

「메디테이션」.

엄연히 로한도 4서클 마법사다. 이제 마법사들의 전유물인 명상 또한 사용할 수 있었다.

"메디테이션까지 하면서 괜찮긴 무슨... 아 몰라.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머."

엘리스 역시 로한의 상태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어젯밤 로한이 자신에게 당부한 덕분에 아버지인 데니스에게 이 사실을 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호들갑 대마왕인 데니스가 어제의 일을 알게 된다면 잘 쉬고 있던 에클라트 기사단만 괜한 고생을 짊어질 뿐이었다.

'오늘은 별일 없겠지? 그래. 이제 반나절만 더 가면 성채에 도착하니까 별일 있겠어?'

태평스러운 로한을 따라 마음을 놓은 엘리스도 시트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

그런데 자꾸만 로한이 눈에 밟히는 건 왜일까.

"식은땀 흘리는 것 좀 봐."

엘리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로한의 이마를 닦아 냈다.

그러나 요동치는 마음처럼 그녀의 손이 떨려 왔다.

'이 바보. 그래도 소드 마스터라고 암살 위협까지 받다니....'

굉음을 듣고 도착한 곳에 로한이 공격당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자신 있었다. 지난번 모건 르 페이의 마나로 4서클에 도달했고, 리버 크래프트가 전수한 또 다른 서클로 인해 5서클은 아니더라도 4.5서클 정도는 도달한 상태였다.

기사로 치자면 소드 엑스퍼트 수준.

하여 두려울 게 없었다. 그리고 로한을, 소중한 사람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그 순간 반드시 실현하고 싶었다.

'설마 펜던트의 힘까지 사용했는데 술식이 뚫릴 줄이야.'

성유물 아론다이트의 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 앞에선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사고는 깨끗하게 정지했고, 움직일 여력조차 없었다.

불가항력.

아직 그녀가 도달하기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미래를 직면한 순간이었다.

'그런 걸 맨몸으로 받아 내다니....'

무모하다.

단순할 정도로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

바보, 그 표현이 제격일 만큼.

'...진짜 얘는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이럴까.'

지금까지 로한이 살아 있을 수 있던 건 분명 내가 챙겨 준 덕분이리라.

자신에게 도취된 엘리스의 생각은 그렇게 연결되고 있었다.

'그래. 로한이 고지식한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살아 있으려면 내가 곁에 있어야만 해. 내가 옆에서 챙겨 주는 거야. 평생.'

다음 순간 엘리스의 얼굴이 석류처럼 달아올랐다.

'평생이라구...?'

이미 인생의 반절 정도는 로한과 함께했다.

앞으로의 시간 또한 함께 보내고 싶었다.

속으로는 바보다 뭐다 그렇게 불러도, 그녀에게 로한은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허나 엘리스의 마음은 쉽사리 품을 수 없었다.

품어선 안 되는 마음이었다.

'이미 아리엘이 로한을 좋아하고 있어. 그 마음을 방해하고 싶진 않아. 아리엘은 내 친구니까.'

우정과 사랑 사이, 그 갈림길.

어느 쪽으로든 한 걸음만 내디뎌도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도, 손도 쓰지 못하도록 멀어질 수도 있었다.

'당연히 로한이야 내가 맘먹고 달려들면 못 버티겠지만... 그러면 아리엘이 너무 가여워지잖아?'

지금까지 지켜봐 온 아리엘은 생각보다 여린 사람이었다.

그 철벽과 냉안시 속에 감춰진 살얼음 같은 마음은 손끝으로만 건드려도 깨질 듯 연약하다.

거기다 풍족하고 여유로웠던 자신과 반대되는 과거까지⸺.

'아리엘은 행복해야 해. 그건 로한도 마찬가지고. 무엇보다....'

그레이스, 그녀를 엘리스는 좋아했다.

'나한테는 오직 그분뿐이야.'

그레이스 같은 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것이 엘리스의 꿈이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난 그레이스 님을 존경할 만큼 사랑하는 걸까, 아님 사랑할 만큼 존경하는 걸까?'

너무 뒤늦은 의문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엘리스를 뒤흔들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가슴 속에선 그레이스가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엘리스가 혼란스러워하던 사이 로한이 눈을 떴다.

"왜?"

"뭐가?"

"날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길래."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엘리스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것도 잠시, 평소 모습을 되찾은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지금까지 그것도 얼굴이라고 들고 다니는 게 신기해서. 왜, 꼽니?"

"조금."

"그럼 잘생기게 태어나던가. 응? 뭐야 그 표정? 얼굴 좀 돌려 줄래? 그 못난 얼굴 창문에 다 비쳐서 불쾌하니깐."

"...."

메디테이션으로 고요해진 로한의 정신이 다시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로한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갑자기 엘리스가 왜 이러나 싶었다.

'너무 말이 심했나... 혹시 상처받은 건 아니겠지?'

그러는 사이 엘리스는 모른 척 로한의 눈치만 살폈다.

"하아...."

흩어지는 숨결 아래로 로한의 땀이 스며든 손수건을 몰래 가슴에 품는다.

그의 것에 닿은 것만으로도 기쁜 듯 떨리는 이 마음의 정체를 알고 싶다.

'설혹 한순간의 착각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미움받게 될지라도... 확인해 보고 싶어.'

첫사랑이었다.

* * *

오전부터 또 다른 일에 잡혀 마차에 틀어박혀 있던 데니스가 차를 권했다.

"이거 참 자네에게 실례했구먼. 자, 어서 들게."

"예전부터 단장님께선 늘 업무에 치이셨죠.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그런 말 말게. 이 말썽쟁이와 놀아 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으니."

가만히 과자를 먹고 있다 한 대 얻어맞은 엘리가 이마가 붉어져 발끈했다.

"누, 누가 말썽쟁인데?! 아빠 운 좋은 거야. 나처럼 얌전하고 우아한 딸이 또 어디겠어?"

"이거 원... 그래. 우리 엘리만큼 귀엽고 착한 딸이 또 어딨겠느냐?"

"그치그치?"

"...하하하?"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며 헛웃음 짓는 데니스.

나도 마지못해 함께 웃어 주고는 창밖을 확인했다.

"이제 두 시간만 더 가면 로아노크에 도착하겠군요."

"난 벌써 걱정이네."

"왜 그러십니까?"

손끝으로 자신의 무릎 위를 두들기던 데니스가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번 의장 선거에 자네가 출마한다던데. 오해 말게.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와서 말이야."

나는 잠시 침묵했다.

먹고 있던 과자까지 떨어트릴 정도로 놀란 엘리스가 화들짝 물었다.

"뭐? 진짜? 로한이? 뭐라고 말 좀 해 바!"

숨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데니스 또한 아서의 라인이다.

뭐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지키고 있다곤 하나, 몇 달 전부터 반달리 기사단과의 마찰로 볼프윈과는 거의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서의 편에 서게 된 거지, 실질적으로 데니스는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사실입니다."

"표는 역시 반달리 쪽인가?"

"염치없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허어...."

데니스의 탄성에 마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날 기사로서 챙겨 주는 건 데니스뿐이었다.

이에 보답하긴커녕 적과 손을 잡은 형국이라니. 나를 살갑게 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예?"

한순간 얼이 빠져 고개를 들자 데니스가 푸근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내 손등을 움켜쥔 데니스를 멍하니 주시했다.

"그렇게 볼썽사나운 낯빛 말게. 다 자네도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일 테니. 그리고 난 언제나 자네의 편일세."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었다.

이래서 기사들이 데니스를 따르는구나 싶었다.

"마음은 감사드리나, 감히 청컨대 저를 돕지 마십시오. 그게 저를 도우시는 일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씀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제 편에 서신다면 저나 단장님 모두 득보다 실이 많을 겁니다."

"내가 그런 것도 모르겠는가? 자네 마음은 이해하네. 하지만 내 마음도 이해해 주게. 정말 난 진심으로 로한 자네를 돕고 싶은 게야."

마음 같아선 이 손을 그냥 잡고 싶다.

데니스 또한 자신의 옛 부하이자 엘리를 잘 가르쳐 준 스승에게 답례하고 싶은 거겠지.

그가 도와준다면 이번 선거는 어떠한 변수도 없이 내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안 된다.

데니스의 호의를 생각해서라도 거절해야만 한다.

"이번엔 제 손으로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또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확인해 보고 싶거든요."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구먼. 자고로 기사가 들어 올린 기치는 부러질지언정 절대 꺾을 수 없을 테니."

이번에 내가 의장 선거에 출마하는 건 그 '계획'을 실행할 첫 단계이고, 그 계획에서 데니스는 절대 휘말려선 안 된다.

아마 모든 걸 잃게 될 거다.

내가 걸 수 있는 건 이 한목숨뿐이지만, 데니스에겐 엘리도 있으니까.

물론 그만큼 각오했다는 거지 죽을 생각은 아니다. 죽고 싶지도 않고.

그레이스 아가씨를 두고 내가 어떻게 죽어?

"그래도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게. 우리 그래도 되는 사이니까."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는 다시 숙고해 보겠습니다."

"하하, 그 대답을 원했네."

원만하게 대화를 마친 나는 마른 입 안을 차로 적셨다.

엘리가 데니스 몰래 내 옷깃을 그러쥔 건 그때였다.

"너... 의장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이제 스프링윈드에서 떠나야 하는 거 아니야?"

대충 엘리가 뭘 걱정하는진 알겠다.

기특한 녀석.

"그럴 일 없어. 유니온이 황실 기관도 아니고, 지금이랑 달라지는 거 없을 거야."

"정말? 히, 다행이다."

조금 달라지는 게 있다면,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의 실세들이 지금보다 더 나를 주시하게 된다는 것 정도.

곧 맞이할 '에피소드'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내겐 이득이다.

...당연히 내가 의장이 되는 건 생각보다 쉽진 않겠지만.

띠리링.

담소를 나누던 무렵 데니스의 전화가 울렸다.

"잠시 실례하지. 알랭? 아아, 지금 가는 중이네. 뭐 결혼? 언제? 거참 경축할 일이군. 알겠네. 내 꼭 참석하지."

전화를 끊은 데니스가 엘리를 응시하더니 왠지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물었다.

"경사가 생긴 모양이군요."

"어? 아아, 그래. 알랭이라고 지금은 샤를로아 왕국에서 장교로 근무 중인 부하가 있는데 이번에 결혼한다더군."

"슬슬 그 시즌이 되긴 했죠."

그런데 이상하게 데니스는 자꾸만 한숨을 더해 갔다.

"그래서 말인데, 로한."

"예 단장님."

"갑자기 이런 질문하긴 뭣하지만, 혹시 정인이 있나?"

"...예?"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 아빠! 갑자기 뭔 그런 걸 물어? 주책도 참...."

엘리가 다 부끄러워하자 데니스는 머쓱하니 웃었다.

"자네도 슬슬 혼기가 차지 않았나? 그래서 물었지."

"안타깝게도 아직 없습니다."

"그럼 엘리는 어떤가?"

마차 안이 급속도로 고요해졌다.

나는 잘못 이해했나 싶어 그 말을 거듭 되뇌었고, 엘리는 금방이라도 그를 죽일 듯이 서클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자네와 내 딸이 함께 보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솔직히 난 그래. 자네 같은 사람이면 내 사위로―"

"죽어 그냥."

엘리가 발현한 「아이스 버스트」가 데니스의 얼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콰앙!

우리들의 몸이 붕 떠오른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아빠! 로한!"

박살이 난 마차 파편 사이로 엘리의 음성이 바람에 빗겨 가고 있었다.

거대한 무언가에 부딪힌 우리들 아래로 드러난 것은 흩뿌려진 마부와 말들의 피육이었다.

기습.

그 단어만이 내 머릿속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우우웅⸺

서클을 전개한 내가 「염동」으로 엘리와 데니스의 몸을 허공에 멈춰 세웠다.

동시에 허공을 딛고 있던 나는 우리를 습격한 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살...?"

구도자 중 제1사도, '동쪽의 군세를 이끄는 왕'이 지휘하는 어둠의 기사들.

[ 메인스트림 : 전조(前兆) ]

✵ 소기 목표 : 위협을 제거하시오.

- 실패 " 세계선 멸망

- 성공 " '200P'

그들이 뒤바뀐 이번 에피소드에 개입하고 있었다.

§ 기사들 (1)

대륙에는 히스토리아, 헤맨 그리고 카이사르와 같은 정복자들조차 점령하지 못한 지역들이 더러 있다.

아무리 마법과 검술 그리고 운명이 발달했더라도 미개척 지역들이 존재하는 건 대륙이 광범위한 탓도 있었지만, 막대한 리스크도 한몫했다.

그곳들을 차지하는 건 이득이 없다.

그럼에도 그곳을 점령하고, 나아가 일생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었다.

마수.

인류 최대의 적이자 영원의 적.

현재 인류가 거주하고 있거나 점령한 지역에는 '특급 마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특급 마수는 1급 이하의 존재들과는 격을 달리했다.

'아라크네'가 그랬다.

'기간테스'가 그랬고, 검은 하늘의 지배종 '이름 잃은 용'들이 그랬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욕망과 욕심의 화신이었다.

결국 동쪽의 어느 땅을 정복한 자가 있었다.

마수들을 굴복시켰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현상 사이에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었다.

대륙의 동쪽, '오르토나'의 정복자.

구세주인 퀘오스의 신봉자이자 제1사도, '동쪽의 군세를 이끄는 왕'.

"...바엘."

그의 존재가 수정된 에피소드 위로 새겨지고 있었다.

지금 등장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아니, 등장해선 안 된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퀘오스를 그 꼴로 만들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보복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나도 그사이 구도자들을 차례대로 제거할 계획이었고.

그래도 보통은 가장 약한 녀석들부터 오는 게 순서 아닌가? 아몬이라던가.

...아몬은 내가 죽였지 참.

스스스스.

모습이 연기처럼 흩날리던 어둠살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수는 총 스물.

모두가 소드 마스터 이상이었다. 더욱이 인간도, 마수도 아니다.

호문쿨루스.

그것도 바엘의 유전자로 만들어진, 즉 '복제'들이다.

"단장님."

"...그래, 로한."

데니스는 이 상황에 대해 묻지 않았다.

다만 감각적으로 저들이 보통의 존재가 아니란 걸 알아차린 듯 검을 뽑아 들었다.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아직 제 마차 쪽에 말들이 남아 있으니 단장님께서는 엘리스를 데리고 성채로 직진하십시오."

"그럴 순 없네. 도망쳐도 같이 도망쳐. 자네가 남겠다면 나도―"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둠살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자는 이 대륙에 없습니다."

"...."

안개 같은 모습처럼, 저들의 기동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바엘의 어둠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귀신같은 이들이니까.

"또한 엘리스가 무사하려면 단장님께서 보호해 주셔야만 합니다. 걱정 마세요. 버티다 보면 성채로 향하는 다른 기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채앵!

순식간에 밤이 찾아왔다.

어느새 몰려든 어둠살들이 내 사위를 가득 메운 채 검을 부딪쳐 오고 있었다.

역시 목적은 나였나. 저쪽으로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군.

"단장님!"

"...조금만 기다리게. 성채에서 증원을 데리고 돌아올 테니."

분한 듯 주먹을 말아 쥔 데니스는 엘리를 둘러멘 채 말에 올라탔다.

"로한, 로한...!" 그의 어깨 위에서 버둥거리던 엘리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미안하게도 괜찮다고 답해 줄 여력은 없었다.

어느새 찢어진 옷깃 사이로 내 피가 눈앞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우우웅⸺!

염동을 해제해 바닥으로 추락한 동시에 술식을 전개했다.

이윽고 나를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어둠살들을 향해 폭풍이 휘몰아쳤다.

사계 그 세 번째 검식, 「가을」.

내 궤적을 따라 오러 스톰이 분출했다. 그러나 가을 녘 이는 들판처럼 아무런 소리 없이 고요하다.

서거걱!

믹서기에 갈린 듯 무질서하게 비산하는 어둠살들.

나는 바닥에 착지한 동시에 「사계‧봄」으로 연계해 전방을 보호했다.

콰앙!

육중한 충격이 온몸에 전해져 왔다.

다시 모여든 어둠살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부딪쳐 오고 있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나와 달리 평온하기 그지없는 어둠살들.

빌어먹게도 어제 너무 많은 마나를 사용한 모양이었다.

다른 마차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쉽지만 지난번 충전해 둔 이터널 하트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나.

"...꼬여도 단단히 꼬였군."

빌어먹을 전개.

어떻게서든 내게 엿을 먹이는구나.

틀어진 운명을 바로 잡기 위해서 말이다.

[기회를... 주겠다.]

그때였다.

[기사... 로한.]

"뭐?"

방금 내 이름을 부른 건가?

분명하지 않은 음성이라 알아듣기 어려웠다.

[너를... 원한다.]

나를 원한다고...?

"누가? 혹시―"

[나... 우리가.]

기묘하게도 이 세계의 빌런들은 나를 몹시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악인이 될 예정이었던 아리엘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인공이 되어 달라는 퀘오스까지... 차라리 멸망 루트를 탔으면 더 수월했으려나.

[네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그레이스의 행복.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 내가 쓰이는 것.

[우리와... 함께하라.]

"좀 솔깃한 말이네."

[그렇다면 내게 복종⸺]

"근데 너무 늦었다."

번쩍⸺⸺!

다음 순간 이터널 하트가 형용할 수 없는 빛을 발산했다.

"모든 건 때가 있기 마련이니까."

지금이야말로 구도자들에게 나를 알릴 때다.

다시는 이처럼 모욕할 수 없도록.

* * *

"이랴!"

고삐를 쥔 데니스는 엘리스와 함께 산맥을 가로질렀다.

자꾸만 귀가 따끔거렸다. 뒤가 신경 쓰여 참을 수 없었다.

"로한... 정말 괜찮은 걸까?"

언제였을까, 딸의 음성이 이토록 불투명하고 비관적이었던 것이.

⸺아, 기억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엘리스의 어머니가 죽었던 그 순간....

"로한을 믿으렴."

데니스는 그날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때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다시금 그런 순간이 도래한다면 절대로 반복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인한 사람이란다. 내가 왜 부단장 자리에 로한을 고집하겠니?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그럼에도 데니스는 로한에게 맡긴 채 도망쳐 왔다.

그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무엇을 믿겠는가.'

마치 현재가 아닌 미래를 투영하고 있는 깊이. 그 눈빛에는 표현할 수 없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눈빛은 이전에도 더러 보았다. 주로 전장의 기사들이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늘 소수였다.

그리고 그 소수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로한은 죽지 않을 게야. 다만 걱정스러운 건 제시간에 맞출 수 있느냐인데....'

품속에서 꺼낸 회중시계의 시침이 오후 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성채까지는 앞으로 30분 정도.

'8시 정각이 된다면 성채의 문이 닫힌다. 그럼 누구도 들어오지 못해.'

유니온 소집에 응한 기사가 불참하게 된다면 불명예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기사 자격을 박탈당하는 건 물론 두 번 다신 검을 들 수도 없다.

이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로아노크'의 유지를 잇는 모든 기사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빠, 저기!"

데니스가 한참을 침음하던 사이 성채 입구를 발견한 엘리스가 손을 뻗었다.

곧 입구에 들어선 데니스는 말에서 내려 에클라트 가문의 인장을 문지기에게 보여 주었다.

"데니스 에클라트. 로아노크의 인도 아래 지금 당도했다."

"에클라트 가주님을 뵙습니다."

엘리스까지 신원 확인을 마친 데니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문지기를 보챘다.

"시간이 없네. 현재 로아노크 성채의 수성 인원이 몇이나 대기 중이지?"

"예?"

"지금 일행이 습격을 당했네. 당장 증원을 보내야...!"

그때 초소에서 모습을 드러낸 기사가 데니스에게 걸어왔다.

"일행이 습격을 당한 모양이군요."

"그대는...."

"올해 새로 부임한 경비대장, 커터 칼슨입니다."

커터의 날카로운 인상을 살펴볼 시간도 없이 데니스가 말을 이었다.

"사정을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그럼 지금 당장 경비대를―"

"송구하오나 불가합니다."

"뭐라?"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정자세로 자신을 주시하는 커터.

그런 커터의 모습에 데니스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았다.

"내가 이런 말을 정말 싫어한다만... 지금 경이 무례를 범하고 있는 대상이 누군지 알고 있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에클라트 기사단을 몰라서야 이 대륙에서 기사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그 에클라트 기사단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도 있겠군?"

"지금 이 자리에서 제 목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겠죠. 안타깝지만 갑질이나 하는 폐기사를 자처하신다 한들, 로아노크의 경비대를 움직일 순 없습니다."

한숨을 내쉰 데니스는 자신이 달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끝도 보이지 않는 여정길. 그 위로 쓰여진 의미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었다.

"결국 시련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데니스 님께서 굳이 마차를 타고 알레스 산맥을 돌고 돌아 이곳까지 내도하신 것도 그런 의미지요."

데니스의 곁으로 다가온 커터가 함께 산맥을 굽어보았다.

"하여 도중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한들 로아노크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로한 정도면 그리 고지식한 편도 아니었군... 그래, 알겠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기사야말로 말도 안 되는 것들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었기에 데니스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엘리스에게 돌아선 데니스가 성을 가리켰다.

"먼저 방으로 가 쉬고 있거라. 내가 로한을 데리고 올 테니."

"아니. 나도 같이 가."

"엘리스. 나야 지금껏 원 없이 검을 휘둘렀다지만, 너는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나도 같이...!"

그 순간 서로를 똑 닮은 부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기울었다.

그들이 고개를 들자 잘생긴 오우거 하나가 살가운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데니스. 설마 이 아가씨는 엘리스? 오우,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어."

"...볼프윈 경."

이미 도착해 있던 볼프윈의 등장에 데니스가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로한을 떠올린 데니스는 라이벌 관계인 것도 잊어버린 채 볼프윈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내 경에게 부탁 하나만 합시다. 지금 로한이 위험해요."

"로한이 왜?"

데니스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상황을 다 들은 볼프윈이 턱을 쓸어내렸다.

"음,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겠는걸?"

"아니 좀 도와 달라니까 그것도 싫은 게요? 알았어요. 이번에 입찰받은 웰턴 토벌권, 반달리 기사단에게 양보하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이야."

"그게 무슨...."

볼프윈은 조금의 사심도 없이 허허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몰랐던 데니스가 어리둥절한 사이, 볼프윈은 산맥 어딘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로한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로한이라면 멀쩡히 돌아올 거야. 내가 아는 로한은 그런 사람이니까."

"경은 웨펀 마스터잖습니까? 차라리 경이 도와주는 게...."

"음음, 오히려 싫어할걸? 그리고 이 정도로 죽을 사내였다면 내가 신뢰하지도 않았겠지."

"로한을 신뢰해...?"

"신뢰하지. 꽤 많이."

그러자 데니스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제국의 웨펀 마스터, 그것도 대륙의 거인이자 진정한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볼프윈 반달리의 신임을 받는 자가 이 세상에 몇이나 존재할까.

'로한, 자네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거물이었구먼.'

이런 인물에게 신임받는 인물을 걱정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지금까지 자신의 걱정들이 물거품처럼 허무해졌다.

그리고 이제, 데니스도 로한을 진정으로 믿어 보려 했다.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한잔하지? 서로 직위 같은 건 잊어버리고 친구 대 친구로. 어때?"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습니까? 그렇게 말하곤 나 취한 사이에 또 뭘 빼 가려고. 참, 웰턴 토벌권은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자네는 꼭 나한테만 이리 야속하게 군단 말이야. 서운하게시리."

"꼬우면 반달리 기사단 해체하고 진짜 나랑 친구 먹던가."

함께 전장을 누빈 과거를 추억하던 볼프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 엘리스도 나중에 보자."

"네? 아 네...."

볼프윈이 떠난 후, 얼떨결에 대답했던 엘리스가 데니스에게 물었다.

"아빠. 나 저 사람이랑 아는 사이였어?"

"아주 예전에, 우리 엘리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 그때 엘리 네가 저 인간 등을 많이 타고 놀았었지."

"진짜? 기억 한 개도 안 나는데 난."

"잊어버리려무나. 지금은 모르는 게 더 좋을 테니...."

말끝을 흐리던 데니스는 씁쓸해진 미소를 밀려오는 석양을 향해 던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여지없이 흘렀다.

밤이 되었고, 완전히 어둠에 잠긴 산맥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시간을 확인하던 엘리스가 방금 막 입성한 기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지금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냐?"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이제 5분도 남지 않았다구!"

"...."

앞으로 5분 후면 성채의 문은 폐쇄된다.

폐쇄되는 게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데니스는 망부석처럼 로한을 기다렸다.

'로한은 올 것이야. 분명히.'

그러나 데니스의 믿음과 달리 8시를 알리듯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성문을 닫아라!"

활짝 열려 있던 성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착했던 데니스의 얼굴도 이제 초조해지고 있었다.

문틈이 좁아지고 있음에도 마차는커녕 말발굽 소리 하나 울리지 않았다.

이윽고.

쿵⸺

"...로한. 대체 어떻게 된 겐가."

완전히 닫혀 버린 성문을 지켜보던 데니스는 밀려오는 허무에 눈을 내리감았다.

그렇게 믿었건만, 로한은 그 믿음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욱 원망스러웠다.

'내가 갔어야 했다....'

로한을 돕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멍청이처럼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시간이.

「"내가 갔으면 그녀가 죽지 않았을 텐데...."」

그 전부가.

「"미안하구나, 엘리스."」

사무치도록.

「"미안하다... 엘리자베스."」

후회가⸺

...서걱

"방금 뭐지? 어이, 성문 앞 확인―"

수상한 낌새를 느낀 경비원들이 망루로 향하던 순간 굳게 잠겨 있던 성문에 사선으로 된 금이 이어졌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성문을 살펴보던 엘리스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데니스의 팔뚝을 다급하게 두들겼다.

"아, 아빠! 저기!"

"저건 대체...?"

쿠그그그!

굉음 속에서 두 동강이 난 성문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도하던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 성문이 부서진다!"

"말도... 말도 안 돼...."

로아노크의 성문은 지난 수백 년간 한 번도 부서진 적 없는 역사를 지닌 철옹성이었다.

그랬던 성문이, 지금 누군가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쿠웅!

거대한 문 조각이 떨어지며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엘리스를 끌어안은 데니스가 바람결에 옅어지는 먼지 속에 서 있는 두 명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그리고 로한. 이상 두 기사는 유니온의 부름을 받아 지금 로아노크에 입성했습니다."

§ 기사들 (2)

성문이 철거되어 거대한 구멍이 생긴 입구를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 부서짐이 끝일지 시작일지는....'

검흔을 더듬던 눈빛이 끝없이 가라앉는다. 간신히 가늠될 흔적의 주인을 상상한다.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밤이었다.

'...우리의 검 끝에 달려 있겠지.'

그가 알고 있는 이 검흔의 주인은 누구보다 차분한 사람이었다.

길어지던 생각을 끊어 낸 중년의 남자는 다시 성탑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의 등 뒤로 늘어진 그림자에서 계단을 오르듯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걸음이 무거워 보입니다. 또 무슨 근심을 하고 계신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오. 다만 롤랑 경의 생각을 듣고 싶소."

그의 부름에 눈 밑에 주근깨가 듬성듬성한 사내, 롤랑이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제가 잘 말해 두었으니 당분간 잠잠할 거예요."

"고생 많소. 그런데 내가 묻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오."

"그럼 무엇을...."

롤랑은 말없이 멈춰 선 주군의 등을 응시했다.

그 어디에서도, 그 어떤 때에서도 보고 있노라면 결코 패배할 것 같지 않은 성벽.

믿고 기대는 것을 넘어 언제나 자신 앞에서 신념을 지켜 주던 방패.

롤랑을 포함한 열두 기사들에게 '아서'의 등은 그런 의미였다.

아서가 말했다.

"이 제국 말이오. 지금껏 우리가 피와 쇠로써 지켜 온, 이 땅."

그 말에 롤랑은 떠올렸다.

「"더는 히스토리아 가문의 폐단을 방관하지 않으리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이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고통은 우리만 짊어져도 충분합니다. 이제 우리의 후손들이 안식을 얻길 소원하오."」

아서가 이번 유니온 의장 입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주군의 말씀대로 현 제국은 죽어 가고 있다. 지금껏 거대한 나무로 자라 왔다지만, 이제 뿌리는 썩었고 기둥은 벌레 같은 자들로 인해 모조리 파먹혔다.'

고목(枯木)으로 변한 제국은 곧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물론 헤아릴 수 없을 사람들이 목숨, 혹은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이었다.

"하나를 살리기 위해 아홉을 죽여야 한다면, 경은 어찌하겠소?"

하지만 이 또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그들이 준비하는 건 자유와 해방이란 허상으로 장식된 전쟁이고 늘 그렇듯 전쟁 후에 남는 건 지워 낼 수 없는 슬픔과 비극, 그 두 가지가 전부다.

롤랑이 답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언젠가 쓰러질 거라면, 미리 쓰러질 자리를 정한 뒤 잘라 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기사에게 희생 없는 수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목숨을 내걸고 대륙을 지켰던, 지난 인마 대전처럼 말이죠."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죽는 것보다, 단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지켜 내는 것이 기사로서의 임무이자 의무였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비록 제가 수좌는 아니지만, 저희 열두 기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군의 의지에 부응할 것입니다."

아서는 말이 없었다.

다만 지금의 자신은 누구의 '기사'인가를 어루더듬었다.

...이미 자신이 모셨던 주군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 * *

"많이 아프지?"

내 등에 붕대를 감아 주던 아가씨를 돌아봤다. 그리고 생긋 웃었다.

"별로 안 아픕니다. 살짝 긁힌 것뿐인걸요."

"아까 뼈가 보이던데...."

...어쩐지 더럽게 아프더라니.

"아가씨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제를 돌리고자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십년감수했다.

이터널 하트의 힘을 개방했음에도 어둠살들을 상대하기 버거웠다.

하필이면 마나가 소진된 상태에서 그런 녀석들을 만날 줄이야.

열한 마리까진 처리하긴 했는데, 그 뒤가 문제였다.

그때 구원자처럼 등장한 게 바로 그레이스, 나의 든든한 아가씨였다.

"미안해.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가주님과 이야기가 길어져서 너무 늦었어."

붕대를 마무리한 아가씨가 고개를 떨궜다.

뭐가 그리 미안하신지. 이렇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난 무한히 감사할 뿐인데.

문득 궁금했다. 솔직히 나도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늦을 줄은 몰랐다.

"유클리드 가주님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라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나도 널 돕고 싶어."

끝까지 말을 맺지 못한 나를 향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이런 눈빛은... 무척 낯설다.

어째서 그녀 홀로 전장에 서 있는 느낌이 드는 걸까.

"그래서 이번 의장, 내가 되고 싶어. 번복해서 미안해...."

로아노크로 출발하기 전, 이미 나와 볼프윈 그리고 아가씨까지 이야기를 마친 뒤였다.

아가씨를 의장으로 만들려고 했던 처음 계획과 달리, 우리의 표를 포함한 볼프윈의 세력까지 나에게 투표할 예정이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일어난 변수에도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아가씨가 어째서 이런 결심을 하게 됐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나 때문이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목구멍에 돌이 박힌 듯했다. 단순한 답답함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걱정을 안겨 주었다는 죄책감, 그 견딜 수 없는 마음이었다.

"나 알고 있어. 로한이 나 때문에 위험해지고 있다는 걸."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말들은 사실이었다.

그래, 사실이'었'다.

"불안해. 지난번엔 무사히 돌아왔지만, 이번에 로한이 눈을 감으면 영영 뜨지 못할 것만 같아. 그러니까 난―"

"아가씨."

"어?"

처음 이 얼굴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희미한 묘사였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가씨의 얼굴은 더없이 선연하다.

뒤바뀐 운명과 수정된 전개.

그것이 거듭될수록 불투명했던 아가씨의 미래는 이제 그 끝이 보일 정도로 확연하다.

나는 그 반대였다.

내일, 혹은 앞으로 5분 후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녀를 지켜 내기 위해 적지 않은 적들을 만들어 왔다.

카리나를 적대시하는 대가주 몇몇이 나를 죽이고자 살수를 보낼 수도 있다.

당장 저녁에만 해도 구도자 중에 가장 강력한 인물이 나를 견제했다.

이처럼 내 운명은 지금도 『사망』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선, 여기서 멈추는 게 맞다.

하지만.

"죄송하지만 아가씨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보고 싶었다.

"그저 지키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도 아가씨와 같은, '기사'니까요."

끝내 읽지 못한 이 이야기의 끝을.

실망과 분노 그리고 후회로 점철된 내 여정의 마지막을... 나는 보고 싶다.

많은 의미는 없다.

이것은, 단 한 사람에 불과한 독자로서의 욕심이었다.

"...미안."

아가씨는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무색하도록 창백해진 그녀의 옆모습에 얼른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선택이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뭔데?"

"앞으로 제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완전히 몸을 돌려 힘없이 늘어진 아가씨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더 미안해지니까요."

"알았어...."

지금보다 훨씬 나은 미래가 분명히 있었을 거다.

이런 미래밖에 선택하지 못한 나는, 멋대로 아가씨의 운명을 재단한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어?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아가씨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내가 화들짝 일어났다.

실수했다.

식은땀이 흐른다.

방이 원래 이렇게 더웠나?

더 실수하기 전에 어서 나가야겠어.

"그, 그럼 밤이 깊었으니 안녕히 주무십시오."

도망치듯 셔츠를 집어 방에서 뛰쳐나온 나는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아무렇게나 함부로 뛰고 있었다. 그저 한순간 맞닿은 것뿐인데.

"...."

방문 옆 벽에 등을 기댄 나는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아직 그녀의 온기가 손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언젠가."

그 손을 잡고도 놀라지 않을 날이 올 수 있을까.

그 언젠가를, 나는 온전히 기다릴 수 있을까.

아마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도 없이 기다려 왔으니 이번에도 분명....

달칵.

갑작스레 열리는 방문에 서둘러 옆을 바라봤다.

방에서 나온 아가씨가 수줍은 듯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설마 아가씨도,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인 걸까?

"로한."

"예, 아가씨."

"여기가 네 방이야."

"실은 저도, 예?"

뒤통수를 철퇴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내 방이었다.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해서요."

"그렇구나."

그리고 무안한 침묵이 흘렀다.

* * *

그레이스가 방으로 돌아간 뒤, 그대로 어색하게 헤어진 로한은 묵고 있던 성탑의 옥상으로 올라왔다.

"여기서 떨어진다고 안 죽겠지...."

로한은 소드 마스터다.

고작 이 정도 높이에서 몸을 내던진다 한들, 절대로 죽을 수 없다.

잊으려고 해도 아까의 일이 더욱 선명해졌다. 죽고 싶을 만큼 민망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것도 잠시 마른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린 로한의 서클과 오러가 공진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마나를 더 회복해야 해.'

지금 로한의 마나는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으나 이 상태로는 그레이스를 지키는 건 고사하고 제대로 된 전투도 불가능했다.

'더욱이 서클이 생긴 후로 마나량이 증가한 덕분인지 회복도 느려.'

실상은 그 반대였다.

4서클에 도달한 로한의 마나 회복 속도는 이전보다 배 이상은 상향되었다.

그럼에도 더디게 느껴지는 이유는 마나의 총량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 「상태창」 발동 〕

ㅤㅤㅤㅤㅤㅤㅤㅤ이름 : 로한

ㅤㅤㅤ [근력 : A] ㅤㅤ ㅤㅤ [민첩 : A]

ㅤㅤㅤㅤㅤ├───능력치───┤

ㅤㅤㅤ [체력 : A] ㅤ ㅤㅤㅤ[마력 : A]

ㅤㅤㅤㅤㅤ⸺「보유 설정 목록」⸺

ㅤ 「북마크」ㅤㅤ「설정 상점」 「성장」

ㅤ 「식스 센스」 「상태창」ㅤㅤ「통합 언어」

ㅤ 「인물 동화」 「다시 읽기」 「소드 마스터」…[생략]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던 로한은 만족스러운 듯 끄덕였다.

'B였던 마력이 A로 변했어. 고작 한 단계 상승한 것뿐인데 체감은 두 배가 넘는다. 능력치 중 하나라도 S가 되는 게 있다면... 그땐 나도 웨펀 마스터에 등극하게 되겠지.'

하지만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든, 또 얼마나 노력하든 근력, 민첩, 체력은 여전히 A에서 늘어나지 않았다.

현재 로한은 소드 마스터와 웨펀 마스터 사이에 정체되어 있었다.

3.5서클과 같은, 소위 '깨달음'을 반드시 수반해야만 하는 구간.

그 깨달음을 얻기 전까진 절대로 웨펀 마스터가 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로한은 지금까지 평범하게 성장해 온 적이 없었다.

불과 1년 만에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던 건 로한만이 가진 '정보와 개연성' 덕분이었다.

'설정 상점 오픈.'

[ '35P'를 지불합니다. ]

〔 설정 강화 : 「상태창」 Lv.1 ⸺> Lv.2 〕

로한은 다시 상태창을 확인했다.

ㅤ [근력 : A(98.6%)] ㅤㅤ[민첩 : A(42.9%)]

ㅤㅤㅤㅤㅤ├───능력치───┤

ㅤ [체력 : A(91.7%)] ㅤㅤ[마력 : A(17.3%)]

이전과 달리 수치 옆에 퍼센티지가 생겼다. 이윽고 그가 「근력」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 「성장」 특화 발동 〕

[ 「근력」 능력치를 0.1% 올리기 위해선 '15P'가 필요합니다. ]

상태창을 업그레이드하자 로한이 생각했던 대로 능력치를 강화할 수 있었다.

이를 「성장」의 힘으로 강화할 줄은 예상 밖이었지만, 일단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저번에 페이지를 이탈한 덕에 소비한 것을 제외하면 현재 내가 가진 개연성은 338. 210P를 사용한다면 근력을 S까지 올릴 수 있어.'

이번 메인스트림을 클리어한 덕분에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저번처럼 미하엘이나 다른 등장인물의 설정이 필요하게 될 경우까지 고려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번 에피소드는,

[ 메인스트림 : 방황하는 신념 ]

✵ 소기 목표 : '아서 펜드래곤'을 죽이시오.

- 실패 " '하블다운 제국' 몰락, 메인스트림 「악인전(惡人戰)」 연계

- 성공 " '600P'

그 어떤 에피소드보다 결코 만만치 않을 테니까.

"아서를 죽여라...."

이번 메인스트림이 시사하는 바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가 다른 마음을 먹었군.'

기사 전쟁.

원작에서도 아서는 미하엘의 편에 서서 기사 전쟁을 일으킨 볼프윈과 맞섰다.

'아서 펜드래곤, 그는 진정한 구원자였다.'

실제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 그 기회를 틈타 몰락했던 미하엘은 자신의 세력과 위치를 완벽하게 복구했다.

'그렇다고 해도 기사 전쟁은 일어나선 안 된다.'

한 번 뻗어 나간 검은 제국의 심장만이 아니었다.

아서가 미하엘을 도운 건 썩은 황실과 그 황실을 이용하려는 '볼프윈 반달리'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전개가 바뀌었으니까.'

황실 친위대장 자리를 약속받은 볼프윈은 이제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사 전쟁이 일어날 미래도 소멸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형국의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아서가 볼프윈의 전개를 이어 갈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그레이스를 멸망으로 내몰고 로한을 죽이려 드는, 이 세계의 인과(因果)처럼.

'더욱이 유클리드 가주를 만족시키려면 아서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

로드의 상원에 오르지 않으면서 그와 대등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계획.

그것은 바로 아서를 자신의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운명 같으니. 또 이렇게 꼬여 가는군....'

도무지 쉬운 일이 없었다.

그러나 로한은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눈을 뜬 그 순간부터, 그에게 쉬운 일은 없었으니까.

'일단 능력치를 올리는 건 보류하자. 상황을 보며 실행해도 늦지 않아. 당장 어떤 변수가 생겨날지 모르니까.'

생각을 마친 로한은 달빛이 가장 짙은 자리에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아직 모건 르 페이의 마나가 대기에 남아 있다. 당일에 비하면 미미한 양이지만, 조금이나마 이터널 하트를 충전할 순 있겠어.'

모든 걸 쥐어 짜내는 한이 있더라도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한다.

여차하면 성유물의 힘까지 사용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질서의 굴대가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느냐인데....'

더 이상 아서는 구원자가 아니었다.

그를 대적하기 위해선 더 큰 힘이 필요하다.

질서의 굴대가 그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아직 로한조차 제대로 구사할 수는 없었다.

'그때 나를 보호해 준 걸 보면 불가능하진 않을 거 같고.'

다행히도 상황은 긍정적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성유물이 자신에게 전했던 메시지였다.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무엇도 되돌릴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었다.

그사이 메디테이션을 끝낸 로한은 어느 정도 회복된 마나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던 도중 문득 상태창의 능력을 떠올리곤 서클을 사출해 반투명한 거울을 소환했다.

"운명도 좀 변했으려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머리 위를 살펴보던 로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화가 더 필요한 모양이군."

달리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그가 나아가는 운명선의 끝도 『사?』로 되어 있었다.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서클을 흩어 내려던 순간이었다.

"...이건 또 뭐야."

ㅤㅤㅤㅤㅤ[당신의 운명⸺101페이지]

『사망』 "━━━╋━━━━━━╋━━●━" 『사?』

ㅤㅤㅤㅤㅤㅤ「사망」 ㅤㅤㅤㅤㅤ 「사망」

...

[ 운명선에 따른 당신의 남은 수명. ]

ㅤㅤ 0일 16시간 47분 03초

§ 기사들 (3)

참관석에 앉아 있던 엘리스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좀 떨리네."

소형 규모의 원형 극장(圓形劇場).

계단 형식으로 둘러싸인 좌석마다 기사들이 일정한 간격을 둔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두를 조견할 수 있는 최정상. 그곳에 유니온의 의장 프레데릭 아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아노크의 부름에 응해 집결한 경들의 충지에 나 프레데릭 아스만은 감탄한다.]

마나가 실린 프레데릭의 목소리가 소드 엑스퍼트들이 자리한 1층까지 웅장하게 내리 앉았다.

오늘 프레데릭은 의장 자리에서 물러날 예정이었지만, 그 누구 하나 긴장을 풀지 않았다.

[경들과의 약속대로 오늘부로 나는 유니온 의장을 사임한다.]

이윽고 엘리스를 포함해 자리에서 일어난 모두가 정면을 주시한 채 심장 위로 주먹을 얹었다.

수고했다던가, 고마웠다는 겉치레 따위는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기사들의 방식대로 예를 표할 뿐.

[허나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겠다.]

이제 프레데릭은 유니온의 상위 기관인 로드의 하원(下院)으로 활동할 예정이었다.

로드는 이곳에 모인 기사들뿐만 아니라 마법사들까지 목표로 하는 여정의 종착지.

물론 그 안에서도 상원을 넘어 '로드'가 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건 똑같다.

[...언젠가 경들 모두 로드에서 재회할 날을.]

그 말을 끝으로 프레데릭은 기사들에게 예를 표한 후 극장을 떠났다.

이후 정상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겨졌다.

그 바로 아래층, 단 3개의 좌석만이 존재하는 상석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후우, 그럼 다들 바쁜 몸이실 테니 바로 회의로 넘어가자고. 상관들 없지?"

볼프윈이었다.

볼프윈의 맞은편 자리에는 또 다른 웨펀 마스터, 그레이스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왼편에 앉은 마지막 웨펀 마스터.

"저 사람이 바로 아서...."

아서 펜드래곤.

이렇게 멀리서 올려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엘리스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

어떤 사념도 없이 올곧게 뻗어 간 직선적인 시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상처럼, 그는 어떠한 변화도 없이 그 자리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그때 붉은 정복을 입은 기사가 볼프윈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음? 뭔데. 많이 중요해?"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아. 발언하도록."

다음 순간 붉은 정복의 기사가 가만히 앉아 있던 로한을 오시했다. 그리고 무덤덤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아직 그레이스 유클리드와 로한 기사의 성문 파손 사건이 토의되지 않았습니다."

차분히 그를 응수하던 로한은 속으로 한숨지었다.

'...저 자식 성격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 원작에서도 데니스의 성격을 그렇게 긁어 놓다가 에클라트 기사단에게 박살이 나더니 여전하구나.'

제국 남부에서 대부분의 토벌을 담당하고 있는 팔콘 기사단의 주인, 루인.

그의 성격을 대강 알고 있던 로한이 반박하려던 순간이었다.

"그건 정당한 행위였습니다, 루인 경."

로한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데니스가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당한 행위라니? 이 성채는 로아노크의 마지막 유산 이전에 세계적인 유산이다. 국제법에 따르면 이는 중범죄에 해당해."

"언제부터 로아노크의 관례가 국제법을 연연했습니까? 그리고 발언 신중히 하십시오. 나 당신 부하 아니니까."

슬그머니 이를 드러내는 데니스.

그의 배경을 상기한 루인이 가시방석에 앉은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역시 우리 아빠라니깐.'

로한을 변호하면서도 루인의 기세를 꺾어 버리는 데니스의 모습에 엘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크흠, 그럼 다른 이들에게 의견을 묻지."

주춤거리던 것도 잠시, 다시 기세를 되찾은 루인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부분의 시선이 로한을 향했다. 지난번 황실 연회를 떠올린 로한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레이스 라인에 선 이상 절대 좋은 시선을 기대하긴 어려울....'

그때였다.

"로한은 기사 중의 기사요. 나는 그가 유니온이자 기사로서의 본분을 다했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많은 기사들이 루인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래서 성문 수리비가 얼만데? 까짓것 내가 지불하리다. 근데 루인 당신은 여전히 오만무도하시구려?"

"뭐라? 오만무도? 이게 감히...!"

발끈하는 루인의 모습에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던 기사들 또한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지금 감히라고 했나? 로한 저 기사가 국민들을 위해 거금을 기부했을 때 당신네 기사단은 대체 뭘 했지?"

"내가 알기로는 하청 기사단에 지불할 대금을 '감히' 횡령해서 소송까지 갔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참으로 딱하십니다. 이런 건 그냥 넘어가는 것이 기사의 참된 의(意)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루인 네게 묻지. 넌 살면서 실수 안 할 거 같냐?"

다른 기사들의 반응에 로한의 눈썹이 살짝 들썩거렸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나한테 호의적이지? 황실 연회 때랑은 반응이 정반대잖아.'

엘리스 또한 놀라움을 머금은 채 로한을 바라보았다.

'로한의 인기가 이렇게 좋았구나. 저런 모습 처음 봐....'

지금까지만 해도 그냥 부교수, 혹은 조금 듬직한 오빠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로한은 부교수도, 친오빠 같은 사람도 아니었다.

'...로한도 결국 기사였어.'

기사 로한.

한 걸음 물러서 여유롭게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로한의 모습은 어른스러운 것을 떠나 기사 그 자체였다.

무릇 기사란 검으로만 싸우는 이들이 아니다.

인망과 명예. 그 두 가지는 어떤 검보다 날카롭고 묵중한 무기였다.

'하긴 스프링윈드 교수직도 아무나 올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지.'

마법방어학과만 해도 대륙 최고의 멀린이자 천재 마법사라 불리는 미하엘 리펜슈타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조금 모자람이 있지만, 다른 교수들도 비슷한 위치와 명예를 지닌 것은 마찬가지다.

'좀... 멋있네.'

벌써 두 번째였다.

이미 한 번 마차에서 흔들렸던 마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금 요동치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서 엘리스와 함께 회의를 참관하고 있던 기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 기사가 로한 님을 시기하나 봐요."

"네?"

오른쪽을 돌아보자 언니뻘 정도 되어 보이는 순하게 생긴 기사가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녀의 벽안을 들여다보던 엘리스가 슬쩍 물었다.

"혹시 루디비엄 기사단의 다프네 님 아니세요?"

"절 알고 있다니 영광이에요."

"저번 토벌 때 언니네 기사단이 공을 세웠다는 기사 읽었거든요. 아, 죄송해요. 선배님한테 언니라니."

"괜찮아요. 편하게 부르도록 해요. 그리고 이제 루디비엄 기사단도 아닌걸요."

간단한 통성명을 마친 그녀들은 다시 로한에게 눈길을 옮겼다.

여전히 언쟁을 높이고 있는 기사들 사이로 엘리스가 물었다.

"로한... 님이랑 아는 사이신가 봐요?"

"아는 사이라고 해야 할지. 실은 예전에 로한 님한테 차였거든요."

"네?!"

적잖은 소리로 놀란 엘리스의 반응은 시끄러웠던 주위에 묻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금방 머쓱해진 엘리스가 이마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그럼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먼저 대시했는데 시작도 못 해 보고 차였거든요. 글쎄 받은 연락처로 전화해 보니 다른 사람이 받더라구요."

"아... 로한이 좀 철벽같은 부분이 있긴 하죠."

속으로 안심한 엘리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다행이었다.

"엘리스 양은 로한 님과 친한 사인가 보군요?"

"그냥 스프링윈드에서 검술을 배우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에클라트 님의 하나밖에 없는 따님을 모르는 기사도 있던가요?"

"히, 그렇긴 하죠."

"참, 소문을 들어 보니 로한님께서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까지 내려놓고 유클리드 님과 함께 스프링윈드의 교수로 부임했다던데."

"네. 거의 1년 됐어요."

그리고는 두 손을 모은 다프네가 로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로한 님은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세요. 누가 출세까지 포기하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저라면 못할 거 같아요."

그 말에 동의하듯 엘리스도 끄덕였다.

그제야 어째서 이곳의 기사 대부분이 로한을 변호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괜히 소드 마스터인 게 아니었구나, 로한.'

엘리스가 비로소 로한의 위치를 실감하고 있을 때 다프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로한 님의 연락처를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기회가 된다면 식사라도 해 보고 싶어서요."

"아 그게...."

말끝을 흐리는 엘리스.

다프네 정도면 무척 괜찮은 기사였지만, 왠지 엘리스는 머뭇거렸다.

그러던 엘리스가 마지못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정숙!]

한순간 건물이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볼프윈이 내지른 사자후에 모든 말소리가 멎었다.

한숨을 내뱉은 볼프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좀 시끄럽네. 우리 혀로 싸우는 사람들 아니잖아? 참관 중인 후배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응?"

그때 거의 울기 직전까지 내몰린 루인이 볼프윈을 올려다보며 사정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상석에서 결정해 주십시오! 도저히 머저리 같은 기사들과는 상종할 수가―"

"그 머저리 같은 기사들에 나도 포함인가?"

"그, 그런 말이 아니라...."

순간 볼프윈의 기세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그럼 좀 닥쳐, 루인."

"...!"

거대한 포식자를 조우한 기분 속에서 루인이 입을 틀어막았다.

다시 인상을 핀 볼프윈이 그레이스와 아서를 둘러보았다.

"난 딱히 상관없는데, 그쪽들은 어때?"

이번 일의 당사자였던 그레이스는 침묵했다.

아서가 감았던 눈을 뜬 건 그 무렵이었다.

"...로한 경. 그대가 말해 보시오."

일순 아서의 눈동자가 로한을 향했다. 심판과 같은 그의 시선을 로한은 피하지 않았다.

"먼저 루인 경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까?"

"뭐? 그게 무슨 말―"

"당신은 성문을 부술 수 있냐는 말입니다."

"그게 뭐 잘한 일이라고...!"

순간 마나가 실린 아서의 목소리가 루인을 관통했다. 루인의 몸이 불에 데인 듯이 크게 움찔거렸다.

"루인. 경은 묻는 말에 답하시오."

이내 루인은 고개를 떨군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불가능하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 불가능을 그레이스 유클리드 님과 저는 가능케 했습니다. 자고로 기사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법."

이윽고 다른 기사들에게 몸을 돌린 로한이 말을 이었다.

"알레스 산맥을 따라 이곳까지 도달하는 건 로아노크께서 저희에게 부여한 시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묻습니다. 우리 유니온에게 로아노크의 시련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 말에 기사들이 천천히 끄덕였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불기하지 않고 한계를 깨부수는 것."

그것을 시작으로 모든 기사가 하나둘 말을 이었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길."

"초심을 되찾는 여정."

"신념이 신념으로서 집결하는 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전진."

...

저마다 다른 의미와 이유였지만, 끝내 그 마지막에 놓인 건 같은 것이었다.

이윽고 마지막 기사까지 말을 마쳤다. 로한이 물었다.

"저희의 행동이 여러분들의 생각과 불합합니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그의 처벌을 요구하던 루인까지도 동조하고 있었다.

"다시 묻습니다. 시련을 극복한 저희에게 필요한 건 처벌입니까, 아니면 축하입니까?"

이제 그 결과는 명확하다.

그때 눈을 감은 아서가 기사들에게 말했다.

"로한 경의 말이 옳소. 다만 그 축하는 각자 돈을 모아 더 튼튼하고 견고한 성문을 다는 것으로 대신합시다. 모두 그리해도 되겠소?"

"그럼 그 돈은 저희 에클라트 기사단에서 충당하겠습니다."

로한은 손을 들고 있던 데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걱정 말라는 듯 로한을 향해 윙크를 보냈다.

상황이 정리되자 물러난 아서 대신 볼프윈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야기는 끝났네. 어서들 회의를 진행하자고."

시작된 회의와 함께 주요 안건들이 정렬되었다.

엘리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앉아 있는 로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엘리스 양?"

"네...."

"아까 로한 님 연락처 말인데, 여기 찍어 줄래요?"

다프네에게 고개를 돌린 엘리스가 미안한 듯 웃었다.

"미안해요, 언니. 저도 몰라요."

알려 주기 싫었다.

§ 기사들 (4)

"이것으로 오늘 회의는 끝. 이제 내일이 선거네. 모두 바른 선택을 하길 바라."

볼프윈을 따라 기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떠났다.

마지막까지 남아 그레이스를 기다리던 로한은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그녀를 향해 나아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곧 내일이군요."

유니온 회의는 총 3일에 걸쳐 진행된다.

원래라면 그 3일에 걸쳐 논의될 안건들이었지만, 이번 회의에는 선거까지 겹친 덕분에 그 안건들을 오늘 전부 몰아서 처리했다.

"방으로 돌아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랜만에 진을 뺀 탓인지 그레이스의 얼굴이 부쩍 피로했다.

이제 공석이 되어 버린 의장 대신 상석에서 모든 결정을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극장에서 벗어난 그들은 성탑에 도착했다.

아까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걷고 있는 그레이스. 로한의 주위를 희미하게 맴돌던 그녀의 숨소리가 끊어진 순간이었다.

"로한."

로한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끝을 붙잡은 그녀를 눈에 담았다. 움츠러든 손마디에 그녀가 어떤 말을 건네 올지 상상이 됐다.

"아서 경의 분위기가 이상했어."

다분히 경직된 음성에 로한이 조용히 끄덕였다.

'그건 나도 느꼈다. 호의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이었지.'

맞지 않은 신발에 억지로 발을 비집듯, 회의 내내 아서의 눈길이 자신과 그레이스를 향하고 있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야기는 저녁에 다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내일 있을 선거를 준비해야 하니까요."

"알았어. 네 말대로 선거가 우선이니까."

"그리고 아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다른 기사들이 있는 한 로아노크 앞에서 허튼짓을 벌이진 못할 테니까요."

"그럼 먼저 올라가 볼게. 혼자 정리할 게 남아 있어서. 이따 연락할게."

그레이스와 헤어진 로한도 이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던 그의 눈매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앞으로 세 시간....'

* * *

올리비아는 성벽에서 그레이스와 함께 걷고 있는 로한의 등을 주시했다.

'대체 위인께선 무슨 생각으로....'

아무리 자신의 주군이라 해도 그 의중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로한은 파렴치한 기사다.'

지금이야 그를 많은 기사가 훌륭한 인물이라 평가하고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가짜이자 속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는, 이 제국을 독차지할 셈이다.'

희대의 망나니라 불렸던 에드가와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그 소문을 입증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이제는 볼프윈과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올리비아는 알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야지. 배 안 고파?"

그때 올리비아의 곁으로 소리 없이 나타난 남자가 난간에 팔을 걸쳤다.

"뭘 하고 있나 싶어 와 봤더니 역시나구나."

남색 정복의 기사, 롤랑이 콧등을 찡긋거렸다. 그는 대꾸도 하지 않는 올리비아의 옆모습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설마 주군의 의지를 잊은 건 아니겠지?"

"잊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래."

그제야 올리비아가 고개를 돌렸다. 많은 것들이 적혀 있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단 하나.

"저 기사가 모두를 속이고 있으니까."

절제되지 않은 분노만큼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난 또 뭐라고."

같잖다는 듯 피식거린 롤랑.

순간 미소가 가신 그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 기사를 이용하는 것뿐이야. 쓸모가 다할 때까지. '주군'의 의지를 위해."

"그게 문제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로한의 모습은 이미 올리비아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올리비아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어질러진 생각처럼, 눈꺼풀 위로 정오의 햇살이 산란하고 있었다.

"아무리 악인이라 해도 타인을 이용하는 건 위인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위인께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전쟁이라니. 정말 이게 주군의 뜻이란 말인가?'

그녀가 아서를 주군으로 섬기며 따랐던 이유도 그 청렴과 결백을 선망했기 때문이었다.

'...주군은 나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시다.'

올리비아는 호수 위로 죽은 물고기처럼 떠다니는 시체들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호수는 모든 것이었다.

목을 축일 물과 허기를 달랠 양식. 그 모든 것을 드넓은 호수 하나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호수에 비친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진정한 삶을 가르쳐 준 분이다.'

그랬던 호수였다.

그랬던 호수가, 지난 전쟁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더럽혀져 가던 순간.

수면 위로 띄워진 낙엽처럼 고여 있던 그녀의 삶 또한 오염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분께서 가르쳐 준 삶은 이런 게 아니었다.'

짓무르고 부패한 시체들이 풍기는 악취.

그 속에서 질식해 죽어 가던 올리비아를 구원한 기사가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저 '기사'라 생각하시오."」

처음 자신의 손에 검을 쥐여 주며 아서가 했던 말이 있었다.

「"기사가 무엇이냐면, 죽음으로써 삶을 수호하는 업(業)이오."」

「"그러니 명심하시오. 검은 누군가를 지키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죽이기 위한 무기임을."」

다른 것을 죽여 자신의 것을 지킨다. 그런 단순한 논리가 아니었다.

"...위인께서는 스스로를 죽여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기사라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올리비아 또한 아서를 따라 목숨을 바쳐 대륙을 지켰다.

"다시 묻겠다, 롤랑."

한때 낚시를 하며 호수에 비친 세상을 구경하기 좋아하던 소녀는 이제 없다.

지금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이고, 신념을 매달은 칼끝을 끊임없이 휘두를 뿐이다.

"내게 들려주었던 로한이란 기사의 소문, 정말 사실인가?"

얼굴을 감싸 쥔 롤랑이 주근깨를 어루만졌다. 그 손 틈 사이로 알 수 없는 눈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사실이지. 올리비아, 우리는 주군의 뜻을 따라 세상을 '구도(求道)'하면 되는 거야. 그것만 생각해."

"...."

말없이 돌아선 올리비아는 불어오는 서풍을 등진 채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고민이 정처 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정말 그것만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잠잠한 마음 위로 떨어진 물방울 같은 의문에 가슴 속에서 파란이 일고 있었다.

* * *

"...세 시간 후면 나는 죽는다."

어제부터 흐르기 시작한 시간은 나의 시한(時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시간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움직였다.

어떻게 변화를 줄 수 없을까 싶어 적극적으로 회의에 임했지만, 보다시피 달라진 건 없었다.

"아직 죽을 때는 안 된 거 같은데."

거울에 비친 내 운명을 다시 확인했다.

아직 내 운명은 끝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시간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죽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걸맞은 개연성이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메인스트림."

지금 나는 메인스트림을 진행 중이다.

운명과 상관없이 내가 죽을 만한 이유는 그거밖에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당장 지난 메인스트림들에서도 실패할 경우 내 운명이 악화되거나 사망한다고 적혀 있었으니까.

그럼 답은 간단하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이번 메인스트림을 클리어하면 된다.

"다만 문제가 아서라는 건데...."

이번 메인스트림 보상만 해도 무려 600P다.

지금까지 100에서 200, 많아야 250이 최대였다.

이렇게 알려 주지 않아도 내가 직면한 에피소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진 알고 있다.

나는 미하엘이 그러했듯, 실비아의 반지를 쓸어내렸다.

"...모든 힘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 에피소드는 그 어느 때보다 위협적일 것이다.

이미 어둠살을 조우한 것만으로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건 구도자 중 최소 1사도가 이 에피소드에 개입했다는 의미니까.

정말 세상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그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물론 원하던 바다.

퀘오스가 움직이기 전, 구도자들을 전부 토멸해 그의 팔다리를 잘라 버리는 것도 내 계획의 일부다.

아직 이 세계의 진짜 '최종 보스'는 죽지 않았다. 그를 죽이는 것이 내 계획의 마지막이고.

"어쨌거나 그건 마지막이다."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다. 그건 정말 마지막 페이지에 쓰일 전개니까.

일단은 아서에게 집중해야 한다.

아가씨의 말처럼 아서의 어딘가가 이상한 건 나도 느꼈다.

"무엇보다 '엑스칼리버'를 소지하지 않았단 말이지."

「엑스칼리버」 또한 올리비아의 「아론다이트」나 내 몸속에 깃든 「질서의 굴대」와 같은 성유물이다.

내가 소유한 이터널 하트도 충천을 마치면 성유물과 동등한 힘을 낼 수 있지만, 성유물의 수준은 아니다.

모든 세상이 그러하듯, 이 세계에서도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존재한다.

성유물은 그 속에서 탄생한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그 수는 극히 소수다.

그마저도 각자 주인의 손에 들려 있고, 그걸 빼앗느니 차라리 용암 속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 나을 지경이었다.

당장 엑스칼리버만 해도 기사들의 왕이자 웨펀 마스터인 아서 펜드래곤이 소유한 성검(聖劍)이었으니까.

"...그런 엑스칼리버는 아서의 상징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서는 이번 소집에 자신의 상징을 놓고 온 것일까.

로아노크에서는 모든 기사가 자신의 무구를 소지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검을 놓고 다닐 가능성도 없었다.

바엘의 어둠살들.

어떤 전조.

나를 습격한 호수의 기사, 올리비아.

마지막으로 엑스칼리버가 없는 아서....

...그것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끼익.

그 생각들 속에서 내 방문이 열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폐부 속에 쌓여 있던 숨을 밀어내며 문을 향해 돌아선 순간이었다.

"선한 기사여."

아서 펜드래곤.

이번 에피소드의 '보스'가 죽음처럼 내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 * *

"이거 얼마예요? 300링? 아니 도시에서 왔다고 놀리지 말구. 놀린 거 아니라구요? 그럼 네 개, 아니 여덟 개 주세요!"

로아노크 성채의 인근 마을.

양손 가득 먹을 것이 포장된 쇼핑백을 들고 있던 엘리스는 시장을 구경하며 흥얼거렸다.

"시골이라 그런지 물가가 싸긴 싸구나. 리틀 히스에서 하나에 1,000링에 팔던 도넛이 고작 300링이라니."

그래 봤자 엘리스에겐 그게 그 가격이었지만,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할인받는 기쁨은 늘 기분이 좋았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쇼핑을 하던 엘리스는 산세 너머로 보이는 로아노크 성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쇼핑이 좋아도 혼자서 하니까 심심하긴 하네. 다프네 언니라도 같이 오자고 할 걸 그랬나."

원래라면 로한과 그레이스도 함께 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선거가 껴서 빡빡해진 일정 덕분에 바빠진 이들의 모습을 보자 쉽사리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더욱이 엘리스는 참관인 자격으로 방문했다. 참관이 끝난 후에는 모두 자유 시간이었고, 그 시간엔 할 일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그 시간에 인맥을 쌓고 있겠지만, 엘리스는 에클라트 기사단을 소유한 데니스의 영애였다.

"애써 쌓을 필요가 없지. 무슨 목적으로 접근하는지 너무 뻔해."

귀찮았다.

정말 순수하게 친구가 되고자 접근하는 거라면 엘리스도 환영이었다. 친구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그러나 다른 기사들이 엘리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녀의 순수한 마음과는 정반대였다.

"...그러고 보면 로한도 참 순진하단 말이지."

자신에게 가장 수월하게 접근하고 또 이용할 수 있던 사람이 바로 로한이었다.

"욕심이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치, 바보."

엘리스가 아는 한 출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로 로한이었다.

그러나 로한은 달랐다.

데니스의 호의에는 기사의 의(義)로서 보답했고, 자신을 거대 기사단의 단장 딸이 아닌 한 사람의 학생이자 동생처럼 대했다.

'나라도 날 이용했을 텐데.'

당장 스프링윈드의 친구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몇몇 족속들만 해도 자신의 지위와 위치를 보고 접근하는 이들도 허다했다.

물론 그런 이들은 일찍이 엘리스의 안목으로 전부 걷어찼다.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기에 누가 진정한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는지 구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번에 의장 선거에 출마하는 걸 보면 욕심이 없는 거 같진 않은데.'

그런 엘리스의 눈으로도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로한의 의중이었다.

데니스에게 로한이 입후보했다는 말을 들은 엘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로한이? 왜? 아무리 자신에게 되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연히 눈앞으로 그려지는 로한의 얼굴이 요즘 들어 살짝 낯설게 보일 뿐.

"이거 로한 좋아하겠다. 사장님.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 다 포장해 주세요."

"이, 이 많은 걸 전부?"

"네. 참, 카드 되죠?"

금세 로한의 생각에 빠져든 엘리스는 그를 생각하며 카드를 긁었다.

이제는 손으로 들 수도 없을 만큼 물건을 구매한 엘리스는 염동으로 주변에 띄운 쇼핑백을 둘러보다 입술을 오므렸다.

"...너무 많이 샀나?"

너무 많이 사 버렸다.

로한을 생각하며 손을 뻗다 보니 한계도 없이 사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이 물건 중 절반이 로한의 것이라는 걸 깨달은 엘리스가 이마를 붉혔다.

'이, 이건 다 내가 쓸 거야! 그래. 로한 게 아니라 내 거라구. 나도 참 지금 무슨 생각을....'

요즘 들어 부쩍 이상하다.

로한을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그러면 안 되기에 더....

"시, 시끄러! 시끄러!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냐구 대체...!"

자신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사념들에 고개를 흔들던 엘리스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엘리스 양은 혼자서도 씩씩한 사람이군요."

"응? 선배님!"

생긋 웃는 다프네.

그러다 엘리스의 손을 둘러보던 다프네가 짐짓 놀란 듯 손끝으로 입술을 가렸다.

"어머나, 이렇게 많은 쇼핑백이라니. 선물을 줄 사람이 무척 많은 모양이에요."

"네? 아 이거요? 히, 그냥 줄 사람이 있어서요. 선배님도 마을 구경 오셨나 봐요?"

"산책하던 길에 우연히 들렀을 뿐이에요. 참, 이러지 말고 저기 찻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때요? 차는 제가 살게요. 물론 달콤하고 폭신한 디저트도 말이죠."

"정말요? 음, 좋아요! 그럼 잠깐만⸺"

그때 그림자가 머리 위를 뒤덮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흙길을 내려다보던 엘리스가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저건...!"

수없이 몰려든 어둠살들이 마을 하늘을 온통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 기사들 (5)

"...아무래도 방을 잘못 찾아오신 듯하군요."

나는 침착하게 아서를 마주했다. 굽힘 없는 그의 이목구비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저는 펜드래곤 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기사'가 아닙니다."

"그럴지도 모르오. 선한 기사는 이미 죽었으니."

선한 기사.

아서의 휘하에 놓인 열두 명의, 아니 원래는 열세 명의 기사들.

내 기억으로는 그중에서 열세 번째 기사, '갤러해드'가 바로 선한 기사였다.

하지만 갤러해드는 아서의 말대로 죽었다. 지난 인마 대전의 일이었다.

"그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소. 참으로 보람 있는 인생을 걸어오셨소이다."

"과장으로 부풀려진 소문들일 뿐, 펜드래곤 님의 업적에 비하면 제가 행한 일들은 하잘것없고 당연한 것들에 불과합니다."

"하잘것없고 당연하다... 작금 대부분의 기사는 그런 하잘것없고 당연한 것들조차 선행하지 않고 있소. 같은 기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오."

그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쓸쓸했다.

방으로 들어선 아서가 내 곁을 지나 창가 앞에 섰다. 그는 창턱에 손을 얹은 채 바깥 풍경을 한없이 응시했다.

"로한 경. 그대는 이 제국에서 무엇을 지키셨소?"

나는 아무것도 지키지 않았다.

과거의 일이라면 내가 아닌 '로한'의 일이었고, 그렇기에 이 손으로 지켜 낸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지켜 왔다고 생각했소. 제국과 국민, 약속과 맹세 그리고 단 하루도 변한 적 없던 신념...."

아서가 내뱉은 말들이 창밖으로 투신하고 있었다. 유형의 의미도 없는 것들을 쌓아 올린 그의 전신이 초라하도록 무너져 내리는 착각이 나를 감싸 쥐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지켰다고 생각한 것들은 모두 허무였소."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지키십시오."

내게 돌아선 아서가 눈을 끔뻑거렸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기보다 내 말의 저의를 묻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엇을 말이오?"

"아서 펜드래곤, 그 이름을 말입니다."

가치와 신념.

그 두 가지만으로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

단지 이름만으로도 그러한 힘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아서 펜드래곤'이란 명상(名狀)은 이 대륙에서 어떤 무기보다 위협적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소.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차피 잃어버리게 될 시간을 끔찍하도록 연장시키는 것뿐."

그렇기에 아서는 무서운 인물이다.

당연히 부와 명예밖에 없는 볼프윈은 상대가 되지 못하고, 어쩌면 미하엘보다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서는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저 그가 빌려줄 수 있는 건 지난 삶을 걸어오며 찾아낸 불확실한 해답과 기사가 기사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자신의 신념뿐.

...이런 인물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과연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름은 허상에 지나지 않소이다. 어떻게 불리느냐가 아닌, 어디에 쓰이느냐가 중요한 법이오."

아서가 검에 손을 가져간 순간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기세가 내게 부딪혀 왔다.

저절로 무릎이 굽혀질 만큼 거대하고 막막한 서슬.

그제야 내가 누구와 직면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와 함께해 주시오. 우리에겐 그대와 같은 선량한 기사가 몹시 필요합니다. 그러디 부디 세상을 새롭게⸺"

"나는 국민을 위해 일평생 검을 쥘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

한 걸음 내딛던 나의 머릿속에서 아리엘이 정식 기사가 되던 페이지가 쓰여지고 있었다.

"제가 처음으로 검을 쥐며 세상을 향해 발설한 약속입니다. 펜드래곤 님께 묻습니다. 지금 당신께서 하고자 하는 일은 국민을 위한 대의입니까, 아니면 개인을 위한 사의입니까?"

"...로한 경."

이에 물러서지 않고 성큼 다가온 아서가 지척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제국은 이제 불능하오. 더는 서 있을 힘도 없지. 곧 쓰러질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많은 이들이 죽소. 나는 그 희생을 줄이고 싶소이다. 반이라도 좋으니, 아니 하나라도 좋으니 구하고 싶은 마음뿐이오."

"그 말은 하나를 살리기 위해 나머지 전부를 죽이겠단 말씀입니까?"

"모두가 죽는 것보단 나을 것이오."

언제라도 검을 뽑을 듯이 자루를 움켜쥔 내가 아서를 노려봤다.

"그걸 왜 당신이 속단하는 겁니까?"

제국은 아직 썩지 않았다.

그래, 불과 1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불의에 용기 내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힘없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검을 내세우는 기사가, 믿음을 믿음으로서 얻어 내는 기사가, 지금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던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기사가 있다면 나도 알고 싶...."

"아서 펜드래곤, 그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

제국에서 희망을 본 내가 미하엘의 대의를 거절한 건 아서 같은 인물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희망조차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세계의 수순에 따라 누군가 '멸망'이 되어야만 하기에....

"우리 기사들의 의무는 수호와 보전이지 변화와 개혁이 아닙니다.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기껏해야 그들이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는 방풍의 역할뿐이죠.

...이 빌어먹을 운명 위로 내가 지워 버린 페이지를 인과와 개연이 다시금 써 내려가고 있었다.

"힘이란 타인을 위해 사용할 때는 동력이 되지만, 자신을 위해 사용할 때는 폭력이 된다는 것을 어째서 모른 척하십니까!"

나는 이 세상 따위는 지키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아가씨가 전부였을 뿐.

"전쟁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지난 수십 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죠. 이미 일어났던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마세요"

...아가씨를 지키고 싶기에, 이제 나는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키고 싶다.

"제국은 아직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십시오. 진심으로, 국민을 주군으로 받드십시오."

그녀가 사랑하는 세상을, 나는 살아가고 싶다.

"저는, 이 제국이 국민의 나라가 되길 소원합니다."

황실과 귀족을 뿌리 뽑고 그 자리를 힘없는 국민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일.

그로써 미하엘이 대의를 실행하지 않아도 어떠한 피해 없이 이 제국을 '하블다운 공화국'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방법.

그것이, 내 계획의 전부다.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다.

"국민의 나라... 그대가 원하는 세상이란 그런 것이오?"

잠시 눈을 감은 채 언젠가 도래할 내 마지막 페이지를 상상했다.

모든 게 끝이 나지만, 또다시 어떤 이야기의 시작이 될 그 페이지를.

그러자 미소가 그려졌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서가 입을 열었다.

"역시 그대는 선한 기사가 맞았소."

일순 아서의 검집에서 이탈한 칼날이 처량하도록 울었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 버렸소이다. 그대를 조금 더 빨리 만났어야 했는데. 로한 경, 그대에게 부탁이 있소."

이윽고 아서의 등 뒤로 펼쳐진 창밖의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부디 나를 막아 주시오."

〔 전개 수정 〕

[메인스트림이 변경됩니다.]

[ 메인스트림 : 구원 ]

✵ 소기 목표 : '아서 펜드래곤'을 저지하시오.

- 성공 " 800P

* * *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집.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주민들을 지켜 주던 집이 이제 그들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아, 안 돼...!"

도망치던 주민이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를 확인하곤 뒤를 돌아봤다. 부서진 지붕이 그를 향해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웅!

그 순간 거짓말처럼 허공에 멈춘 지붕. 주민이 고개를 돌리자 염동을 발현한 엘리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어서 도망쳐요!"

"고, 고맙습니다!"

무사히 대피한 주민을 확인한 엘리스가 염동을 유지한 채 전방을 주시했다.

콰광!

"살려, 살려 주세요!"

"씨발 이것들 다 뭔... 으악!"

헤아릴 수 없을 어둠살들이 곳곳에서 마을을 부수고 있었다.

어둠살이 등장한 지 5분 만에 쑥대밭이 된 마을.

이제 거리는 비명과 상처에서 쏟아진 핏물들로 가득했다.

'침착하자. 나는 기사야. 내가 지켜야 해!'

지난 트라우마가 엘리스를 괴롭혔지만, 더 이상 그녀는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은 무능력한 소녀가 아니었다.

"선배님!"

"엘리스 양, 그쪽은 무사한가요?"

고개를 끄덕인 엘리스는 사람들을 돕고 있던 다프네에게 외쳤다.

"여긴 제가 맡을 테니 선배님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채로 대피해 주세요!"

"하지만 이 많은 것들을 엘리스 양 혼자서는...."

"야, 암막 커튼!"

엘리스의 외침에 근처에서 마을을 부수던 어둠살들이 그녀를 돌아봤다.

곧 어둠살들에게 지붕이 날아든 순간 허공으로 비산한 엘리스의 검들이 그들의 몸을 도륙했다.

그러나 엘리스의 표정은 더욱 굳어만 갔다.

'보통이 아니야. 검이 잘 들어가지도 않아....'

이제 엘리스도 4서클에 넘어선 상태였다. 염동 또한 상급 마법 수준에 도달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에 매달린 결과 검술도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그럼에도 어둠살들은 여전히 엘리스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반쯤 탈진한 상태라 해도 그 로한조차 그레이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던 상대.

'...하지만 유니온이 올 때까지 내가 시간을 벌어야 해.'

축 늘어져 있던 엘리스의 펜던트가 빛을 머금었다. 동시에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한 서클들. 엘리스를 중심으로 얼음송곳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 순간이었다.

쩌저적⸺!

엘리스를 덮쳐 오던 어둠살들이 얼음송곳에 복부를 관통당한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놀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렇게 강했나?'

마법의 수준이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내려 펜던트를 확인해 보니 엄청난 마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예전보다 펜던트가 더 무거워진 느낌이야. 반대로 몸에선 마나가 넘쳐.'

호라이즌의 펜던트가 진정한 힘을 서서히 개방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몸속에서 홀로 사선을 그리며 회전하고 있던 하나의 코어를 감지했다.

'리버 크래프트... 그 언니가 준 서클이 내 펜던트랑 감응하고 있어....'

그동안 거의 사용할 수 없었던 리버 크래프트의 서클이 어째서 지금 발동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선 저것들부터 막아야 해.'

이곳에서 사람들을 지킬 존재는 오직 자신뿐.

기사의 길로 한 걸음 내딛듯, 천천히 걸음을 디딘 엘리스가 「사계」를 발현했다.

[엘리스... 에클라트.]

그때 모든 어둠살의 시선이 엘리스를 향했다.

수백 개의 칼끝이 몸을 관통한 듯한 착각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엘리스를 주시하던 어둠살 중 하나가 말을 이었다.

[너는... 재능이 없다.]

"뭐...?"

어째서 이 상황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마가 붉어진 엘리스가 「얼어붙은 불꽃」이 서린 검들을 자신의 주위로 집결했다.

"하, 그딴 같잖은 도발에 내가 넘어갈 거 같아? 입 털지 말고 그냥 덤벼!"

서걱!

다시 어둠살들을 썰기 시작한 엘리스. 달라진 그녀의 검이 어둠살의 몸통을 스펀지케이크처럼 쉽게 잘라 냈다.

할 만하다. 그렇게 생각한 엘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 순간이었다.

[너는....]

[너는....]

[너는....]

잘린 어둠살들이 재생하는 것을 넘어 분열하고 있었다.

베어 낸 만큼 불어나기 시작한 어둠살을 본 엘리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재능이 없다.]

[...재능이 없다.]

[...재능이 없다.]

이윽고 어둠살들이 엘리스에게 부딪혀 왔다.

지면에서 도약해 날아오른 엘리스는 발아래로 새카맣게 몰려 있던 어둠살들을 내려다보았다.

"...알아. 나 재능 없는 거."

그녀의 눈앞으로 거대한 술식이 배열되고 있었다.

"근데 재능이 없다는 건 변명이더라."

순식간에 술식을 완성한 엘리스의 몸에서 대부분의 마나가 훅 빠져나갔다.

무사히 다프네와 함께 숲속으로 도망치는 주민들을 힐끗거린 엘리스가 나지막이 고했다.

"근데 끝까지 하면 안 되는 건 없어. 이렇게 말이야!"

이윽고 발현된 「프로즌 템페스트」가 어둠살들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콰과과광!

거기에 멈추지 않고 술식을 재배열하자 쏟아지던 냉기 폭풍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서거걱!

'이제야 진짜 기사가 뭔지 알 거 같아....'

조각조각 흩어져 가는 어둠살들을 바라보던 엘리스는 생각했다.

'...마법이든 검술이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지키는 것. 그게 바로 기사야.'

§ 각자의 길 (1)

성탑 벽면이 부서짐과 동시에 한 인물이 허공으로 던져졌다.

뚫린 구멍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서가 추락하던 로한을 망연히 응시했다.

"...."

소란을 듣고 달려 나온 기사들이 하늘을 물들인 어둠살들을 보고 기겁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저기, 저길 보십시오!"

"저 사람은 펜드래곤...?"

그때 로한을 발견한 그레이스가 도약해 추락하던 그의 몸을 낚아챘다.

"로한!"

그러나 로한은 눈을 뜨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순간 그레이스의 손바닥을 흠뻑 물들이는 뜨거움. 바닥에 착지해 손을 들어 올리자 로한의 피가 온통 묻어 있었다.

"로한...?"

로한의 가슴에는 일자로 된 관통상이 생겨 있었다.

"미안... 아니, 이제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그 상처를 손바닥으로 덮은 그레이스가 무섭도록 굳어진 표정으로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내리깔은 아서가 세상을 오시했다. 로한의 피로 더럽혀진 청렴(淸廉)이 그의 얼굴 위로 쓰여 있었다.

"경들은 들어라."

나지막한 아서의 음성이 모든 이들의 귓가에서 생생히 메아리쳤다.

"이 시간부로 나 아서 펜드래곤은 전쟁을 선언하는 바이다."

전쟁이란 말에 누구 할 것 없이 기사 전부가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몰려든 어둠살들이 아서의 앞으로 계단을 만들었다.

주저 없이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오는 아서. 떨어져 나온 그의 갈기가 바람을 타고 떠내려갔다.

"...아서!"

빛줄기처럼 튀어 오른 그레이스가 아서에게 돌진했다. 고개를 돌린 아서는 자신을 향해 맹렬히 뻗어 오는 칼끝을 슬며시 지켜보았다.

스스스슷!

그러나 그레이스의 공격은 방패처럼 모여든 어둠살들로 의해 가로막혔다.

그레이스가 이를 악문 채 물었다.

"왜...!"

고작 왜라고밖에 물을 수 없었으나, 그 한 음절에는 너무나 많은 질문이 담겨 있었다.

아서는 한때 제자였던 그레이스를 더없이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오."

"...제가 아는 펜드래곤 님은, 스승님은 이러실 분이 아닙니다."

그레이스의 음성이 검과 함께 떨렸다.

한때 아서는 그레이스를 웨펀 마스터로 성장시켜 준 은인이었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검을 쥐는 마음가짐과 그 검을 어떤 목표로 휘둘러야 하는지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아서, 자신의 스승이었다.

아서는 그레이스에게 부모님 같은 존재였다.

때로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아 주는 아버지였고, 때로는 쓰러질 것처럼 휘청일 때마다 걸음을 바로 잡아 주는 어머니였다.

그랬던 사람이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해하고 있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쿵!

오러를 발산한 아서는 튕겨져 날아가는 그레이스를 눈으로 좇았다. 그녀가 쓰러지는 순간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제 그대의 배움을 확인해 볼 시간이오."

그러나 저 쓰러짐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보여 주시게. 내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발아래로 오러를 압축해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 세운 그레이스의 검이 하얗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스승으로서 내 너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마지막 가르침이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쿠그그그!

그레이스의 주변으로 오러가 폭발하고 있었다.

웅혼하리만치 발산한 마나에 그레이스의 주변으로 현상이 발생할 듯 공간이 왜곡되고 있었다.

"저 유클리드 가문의 그레이스. 본심을 다해 당신을 쓰러트리겠습니다!"

* * *

엘리스는 두 팔을 늘어트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광명도 일절 없이 먹구름만이 가득한 하늘.

다음 순간 떨어진 빗방울이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쿨럭!"

숨과 함께 터져 나온 핏물이 엘리스의 앞으로 흩뿌려졌다.

이윽고 추락한 엘리스는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거친 호흡만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마을을 떠돌았다.

마을을 습격한 어둠살은 엘리스의 마법 속에서 소멸한 뒤였다.

로아노크로 몸을 돌린 엘리스가 비틀거리며 전진했다.

'그레이스 님... 로한....'

자꾸만 눈앞이 깜빡거렸다.

마나를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탈진한 것은 물론 서클까지 수축되어 있었다.

우우웅⸺

그 순간 불어온 바람에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오러 웨이브」가 엘리스를 휩쓸었다.

"...!"

털썩, 눈을 부릅뜬 엘리스가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온몸에서 터져 나온 피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하아... 하아...."

피로 고인 웅덩이에 쓰러진 엘리스가 죽어 가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놀랍네. 아무리 그분의 '레플리카'라 해도 고작 오러 유저의 손에 30기가 넘는 어둠살이 전멸할 줄이야."

푸른 정복의 기사가 핏물 위를 찰박이며 엘리스의 앞까지 걸어왔다.

검을 쥔 손목으로 자신의 주근깨를 쓸어내리던 기사, 롤랑이 쓰러진 엘리스를 들여다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에클라트의 영애셨구나. 어머니에게 좋은 피를 물려받은 모양이야. 차라리 그 재능으로 정식 마법사가 되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섰을 텐데."

그리고는 엘리스의 목덜미에 칼날을 밀착한 롤랑. 그가 표정을 살짝 찡그린 순간이었다.

"그렇게 구경하고 있지 말고 그냥 나와."

그 말과 동시에 주위를 맴돌던 안개가 롤랑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올리비아의 눈동자에 엘리스가 비쳤다.

"자, 올리비아."

올리비아는 침묵 속에서 롤랑이 내민 검을 응시했다.

손끝에 검 자루를 아슬아슬하게 걸친 롤랑이 그녀에게 미소했다.

"이제 결정할 차례야."

"...."

생사를 오가는 전장 속에서 고민은 기사에게 독이었다.

늘 생각보다 앞서 행동하는 것이 기사가 가져야 할 자세였으나 너무 오랜 시간을 고민해 버렸다.

롤랑의 검을 건네받은 올리비아가 자루를 그러쥐며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겠다."

"얼마든지."

"이 아이는 무슨 잘못을 했지?"

"잘못? 아아, 잘못. 난 또 뭐라고."

여전히 엘리스를 내려다보던 롤랑이 짙게 미소했다.

"아무 잘못 없어."

"아무 잘못 없다...?"

"그래. 잘못이 있다면 줄을 잘못 선 것뿐이지."

올리비아는 눈살을 찌푸리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은 채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오해하지 마. 우리에겐 그런 것조차 위협이 되니까. 누군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그만큼 늘어나. 낭비되는 시간 속에서 또 많은 이들을 지키지 못하게 되겠지. 그러니까 지금 제거하는 것뿐―"

"알고 있다."

롤랑의 말을 끊어 낸 올리비아가 자신의 가슴 앞으로 검을 세웠다.

말끔하게 닦인 검신 위로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롤랑."

"응?"

"이건 네 검이 아니군. 너의 '듀란달'은 어딨지?"

"어⸺"

올리비아가 손을 뻗은 순간 멍청해진 롤랑의 얼굴이 바닥을 굴렀다.

...털썩.

목이 잘린 롤랑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목이 잘린 단면부에서는 피 대신 끈적하고 역겨운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눈살을 찌푸린 올리비아가 '가짜'였던 롤랑의 시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넌 내가 아는 영광의 기사가 아니다."

롤랑의 시신이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이내 주먹만 한 살점으로 변한 롤랑의 몸.

콰직!

그것을 밟아 터트린 올리비아가 쓰러진 엘리스를 안아 들었다.

"괜찮은가?"

"으음... 아파...."

"조금만 버텨라. 금방 치료를―"

"로한, 어딨어...."

"뭐?"

엘리스는 의식이 다해 가는 상황에서도 로한을 찾아 연신 중얼거렸다.

그 이름을 듣던 올리비아가 미간을 좁힌 채 로아노크 성채를 올려다보았다.

'롤랑은 가짜였다. 이제 다른 기사들도 믿을 수 없어. 설마 위인께서도... 서두르자.'

* * *

성채 중심에서부터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분노한 자연이 세상을 응징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재해.

그러나 저 폭풍은 자연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두 존재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츠즈즈즛!

⸺채앵!

고요한 폭풍의 중심.

그레이스의 검을 한 손으로 막아 내고 있던 아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나의 명백한 실수요."

로한과 대화하며 깨달았다.

자신이 저지르려 했던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우둔한 짓이었는지.

그러나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모든 준비는 이미 끝났다.

어긋난 신념은 어긋난 채로 굳어 가기 시작했고, 되돌린다 한들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실수 또한 저버리지 않겠소. 떠안겠소이다. 그것이 나의 책임이오."

아서가 로한의 말에 따랐다면 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아서는 그러지 않았다. 이 또한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기사란 등 뒤의 모든 것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정체는 한계를 의미했고, 한계에 직면한 기사가 내몰릴 미래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러니 부디 증명해 주시게. 이 길이, 내가 선택한 것들이 틀렸다는 것을."

웅... 웅웅⸺!

묵빛을 품은 아서의 검이 메아리쳤다.

「레저넌스」.

오직 웨펀 마스터만이 구사할 수 있는 검의 궁극.

세계와 감응하기 시작한 아서의 검이 그레이스의 어깨를 꿰뚫었다.

"...!"

그레이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흐름이 뒤틀린 자신의 오러가 역으로 그녀의 몸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틀린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텁, 아서의 검을 맨손으로 움켜쥔 그레이스가 충혈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저마다 다른 길을 걸어갈 뿐, 타인이 틀렸다고 간섭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다시 순류를 되찾은 그레이스가 오러를 밀집시켰다.

아서의 검에 금이 일고 있었다.

그그그그...!

고요한 하늘 아래로 요동치는 대지.

전신을 호신강기로 두른 그레이스가 진정한 웨펀 마스터의 저력을 신념 밑바닥에서부터 건져 올리고 있었다.

"스승님의 가르침은 오래전에 끝이 났지요. 그러나 지금껏 제가 배운 건 그것만이 아닙니다."

곧 그레이스가 은하수를 흩뿌렸다. 수직으로 쳐올린 검신이 아서의 심장 바로 위를 긁고 지나쳤다.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 많은 것을 배워 갈 것입니다. 그러니 가르쳐 주십시오."

서걱!

아서의 피가 그레이스의 얼굴을 적셨다. 감정을 버려야만 살아 있을 수 있었던 전장.

그때의 감상이 다시금 그레이스의 온몸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저희 모두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갈라진 아서의 가슴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덧없이 쏟아지는 자신의 피를 눈으로 좇던 아서가 소슬히 미소했다.

"그런 방법은 없소. 모든 길의 종착지가 하나이듯."

그 말과 동시에 아서의 심장 위로 새겨진 술식이 박동했다.

쏟아졌던 피가 역류하고 있었다.

지퍼를 닫듯 순식간에 아물어 간 상처.

자신의 시간을 「역행」한 아서의 칼날이 그레이스의 목덜미를 향해 나아갔다.

"누군가는 죽어야만 끝나오."

서걱―

피육이 베이는 소리가 아서의 음성을 서늘하게 장식했다.

"그것이, 내가 걷고자 한 길이외다."

휘청거린 그레이스의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오러를 방출해 그레이스를 날려 버린 아서는 지상을 향해 추락하는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우리는 저마다 고유의 길을 걸으며 살아가고, 삶이란 그러한 길들이 얽히고설킨 풍경이겠지.'

당당히 죽음을 마주한 아서의 시선이 쓰러진 로한을 향했다.

'하나를 살리기 위해 아홉이 죽어야만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아홉 중 하나가 되겠소.'

그의 눈동자 위로 로한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 각자의 길 (2)

"...아무래도 오늘은 서로 힘을 합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러게.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건지 참."

검을 들어 올린 데니스가 볼프윈의 곁에 섰다. 주위로는 기사들이 이도 저도 못 한 채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쓰러진 그레이스를 응시하던 볼프윈의 눈빛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난 저 기사가 쓰러진 광경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레이스가 아서를 대적했을 때, 볼프윈은 방관했다.

무패의 기사이자 자신과 같은 군단장이었던 그레이스 유클리드라는 이름의 무력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서... 성검도 없이 제국의 자랑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정말 괴물 같은 인재야.'

자이언트의 피를 물려받은 볼프윈조차 아서의 저력 앞에선 갓 태어난 새끼 곰에 지나지 않았다.

'이럴 생각이란 걸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아서와 손을 잡는 거였는데.'

씁쓸히 미소 짓던 볼프윈이 쓰러진 로한을 일별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 버렸어.'

볼프윈은 이미 로한을 믿기로 마음먹었다. 한 번 믿은 대상을 끝까지 믿는 성격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그린 볼프윈이 사자후를 터트렸다.

[모두 들어라!]

천지를 뒤흔드는 볼프윈의 목소리에 혼란에 빠져 있던 기사들이 정신을 차리곤 그를 주목했다.

[지금부터 나 볼프윈 반달리가 로아노크를 지휘하겠다. 다들 괜찮지?]

"예! 반달리 님!"

[그리고 현 시간부로 저 정체불명의 세력을 이끄는 아서 펜드래곤을 적으로 간주, 국가와 국민의 수호를 위해 이 자리에서 처단한다.]

스릉⸺

그 말과 동시에 모든 기사가 발검했다.

그때였다.

콰앙!

아서를 향해 천둥처럼 몰아친 인물을 바라보던 볼프윈이 눈썹을 들썩였다.

'...역시 무사했구나 로한.'

로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한 그의 뒷모습이 그들이 다음에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고 있을 뿐.

이윽고 대기 중이던 어둠살들이 기사들을 향해 부딪쳐 왔다.

볼프윈이 데니스에게 말했다.

"로한 혼자서는 무리야. 우리가 지원을...."

"떠들 시간에 빨리 따라오기나 하세요!"

"하여튼 자넨 부하를 끔찍하게 아낀단 말이지."

어느새 로한을 돕기 위해 먼저 뛰쳐나간 데니스를 따라 볼프윈도 내달렸다.

그 순간 거대한 마나의 파장이 그들을 급습했다.

채앵!

손쉽게 오러 웨이브를 받아친 볼프윈이 옆을 돌아보았다.

"유감이지만 저희 주군에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경들은...."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열한 명의 기사들을 주시하던 데니스가 침음했다.

롤랑의 손에 들린 광명(光明), 듀란달이 거칠고 날카로운 마나를 토해 내고 있었다.

"우리 열두 기사들은 주군의 의지를 따를 뿐, 용서하십시오."

"그래. 그래야 주군을 모시는 기사지...."

헛웃음 짓던 볼프윈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셨다. 사냥을 시작한 맹금의 살기가 눈동자에 어리기 시작했다.

"...오늘 제국은 유망한 열두 기사를 잃었군."

* * *

정면에서 나를 응수하는 아서. 내 눈앞으로 지나간 메시지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 설정 변경 ⸺ 「소드 마스터」 > 「웨펀 마스터」 〕

쓰러진 채 쉬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린 순간 개연성을 소모해 힘을 S까지 올렸다.

겨우 등급 하나가 변한 것뿐인데도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것들이 수축되고, 무심히 지나친 감각들이 선명히 내 눈길을 잡아끌고 있다.

그러한 변화에는 설정도 한몫했다. 이 세상에서 '설정'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대에게 묻겠소. 그대가 이 세상에서 본 희망은 무엇이오?"

흔들림 없이 내 일격을 받아 내던 아서가 물어오고 있었다. 나는 전보다 예리해진 감각으로 멀리 떨어진 아가씨를 느끼며 답했다.

"바꿀 수 있다는 희망. 제게 희망은 오직 그뿐입니다."

...처음부터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계를 읽어 가던 독자에 불과했던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 세계에 들어선 순간 나는 더 이상 독자가 아니었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던 그레이스와 그런 그녀를 죽였던 아리엘.

아픔과 상처 속에서 흐느끼며 스프링윈드를 떠나야만 했던 엘리와 원작대로라면 지금 이 자리에 나 대신 아서의 앞에 서 있어야 했을 미하엘.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들 여전히 칼날과 같은 황실 속에서 살아가는 카리나와 라이칸.

내가 바꾼 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늘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볼프윈의 전개를 바꿨기에 흑화한 아서가 전쟁을 일으켰듯 말이다.

이 세계에는 운명이란 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운명은 인과와 개연이란 힘으로 끊임없이 원상태로 회귀하려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건 그레이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 제국을 바꾸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당신처럼요."

침묵 속에서 아서의 검이 내 목덜미를 스쳐 갔다. 조금만 느렸어도 목이 잘렸을 것이었다.

쩌저적....

눈에 띄게 금이 일기 시작한 반지.

반지의 힘을 개방한 내가 아서의 검을 막아 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철회하십시오."

"말했다시피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소. 나는 책임을 지려 하오. 비록 하잘것없는 목숨이지만은."

나의 귓가로 성탑에서 나눴던 그의 마지막 음성이 재생되었다.

「"나를 죽여 주시오."」

자신을 죽여라.

「"힘은 더 큰 힘으로만 막을 수 있으니, 그대가 나를 막아 증명해 보시오."」

그리하여 이 전쟁을 멈춰 달라.

「"...아직 이 제국에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것이 아서가 내게 전한 마지막 말이었다.

아서는 이번 일을 그냥 무마할 생각이 없었다.

일전에 퀘오스와 접촉한 것인지 바엘의 어둠살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개입은 절대 정권을 전복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의 피로써 실수를 지워 낸다.

참으로 기사다운 발상이었다.

...그런데 난 기사가 아니다.

"죽음으로써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잘못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서는 이기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당신이 떠난 후 남겨질 것들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 책임을 지십시오."

주먹으로 아서의 손목을 내리친 동시에 검끝을 어깨를 향해 내질렀다.

일순 이터널 하트가 나의 의지에 감응했다. 내 손끝 아래로 은하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직, 당신의 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콰앙!

방출한 이터널 하트의 힘이 아서의 정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대지를 비트는 충격파.

덧없이 날아오르는 아서와 나의 검.

추락하는 신념들 아래로 우리는 서로의 멱살을 움켜쥔 채 주먹을 힘껏 날렸다.

⸺파앙!

주먹에 맞은 순간 세상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개연성으로 힘을 강화하고 실비아의 반지까지 사용했음에도 나는 아직, 일평생 국민을 위해 싸워 온 저 기사의 관록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츠즈즈즛!

그 순간 아서의 오른손으로 빛의 편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희망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오."

산란하는 섬광 속에서 아서의 주먹이 다시 부딪쳐 오고 있었다.

그 찬란함 속에서 내 눈앞에 그려지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서걱!

아서의 등 뒤로 날개처럼 흩뿌려지는 피. 눈을 부릅뜬 아서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그의 뒤를 스쳐 간 그레이스가 하늘을 향해 검을 뻗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랬군."

이내 기울어지는 아서의 몸.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그의 얼굴 위로 막연한 평온이 차오르고 있었다.

무의미하게 뻗은 그의 손을 나는 붙잡았다.

내 손끝에 위태롭게 걸친 아서가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그 순간 아서의 눈동자 위로 비친 것은 허무와 패배가 아닌, 밝기를 가늠할 수 없는 희망이었다.

"저희와 함께 나아가 주십시오. 제가 만들고자 하는 제국엔 당신 같은 기사가 필요합니다."

부서져 바닥에 떨어진 아서의 갑옷이 불어오는 바람에 바스러지고 있었다.

흩어지는 가루 속, 그는 이제 나와 같은 길에 서 있다.

"로한 경."

이윽고 무릎을 꿇은 아서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음성은 어딘가 개운한 느낌이었다.

"그대가 걷고 있는 길은 한없이 넓구려. 과분한 부탁이지만 그 길을... 나도 함께 걸어가도 되겠소?"

"저마다의 길이 존재하지만, 모두가 그 길의 주인은 아닙니다."

나 역시 이 길을 홀로 나아갈 순 없다.

엘리와 데니스의 도움이 필요했고, 미하엘 리펜슈타인, 그 빌어먹을 주인공과 아리엘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그 누구보다 살고 싶어 했던 카리나 그리고 라이칸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나의 유일한 구원, 그레이스 유클리드까지도....

그 모두가 있기에 나 또한 이 길을 나아갈 수 있었다.

길이란 비단 혼자만이 걷는 것이 아니다.

길이란, 모두와 함께 나아갈 수 있기에 길이다.

"그런가. 그런 것이었나...."

그 말을 끝으로 아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요 속에서 손을 놓자 아서가 편안히 눈을 감고 있었다.

[ 메인스트림 완료. ]

〔 800P 획득 〕

눈길을 돌리자 다른 기사들이 상대하던 어둠살들이 허공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때 숨을 돌리던 기사들의 이목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괜히 머쓱해진 내가 말없이 등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새로운 웨펀 마스터를 뵙습니다."

모든 기사가 나를 향해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새로운 변화처럼 불어오는 바람.

기사들에게서 눈길을 돌린 나는 마주한 그레이스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한, 괜찮아?"

"덕분에 무사합니다."

아직 이 메인스트림은 끝나지 않았다.

* * *

부유성 더글라스.

백금으로 장식된 황궁 중앙에서 로한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사 로한은 고개를 드세요."

작지만 분명한 음성이었다.

그 어떤 얼룩도 묻지 않은 단아한 울림.

그러나 그 목소리는 어떤 것보다 무겁게 로한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기사 로한,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고개를 들겠습니다."

이전과 달리 로한은 금장으로 도배된 회색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브와 숄더에 각인된 하블다운 제국의 상징. 각종 특급 마수들의 부산물들로 코팅된 표면이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빛을 다채롭게 반사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로한의 눈동자에 비친 건 은발을 곱게 땋아 올린 소녀였다.

아델라 히스토리아 황제가 입을 열었다.

"본 제국은 경의 노고에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을 텐데, 앞으로도 제국을 위해 부단히... 쿨럭, 쿨럭!"

순간 소매로 입을 가린 아델라가 기침을 심하게 시작했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옥좌 옆에서 대기 중이던 황실친위대 부대장, 시에나 밀란이 걱정스럽게 황제를 살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이렇게 무리하실 필요는...."

"괜찮... 괜찮습니다. 시에나 경,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하지만...."

입가를 정돈하며 가까스로 미소하는 아델라.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듯 힘겹게 올라간 입꼬리에 시에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하아... 로한 경에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뢰옵기 송구스러우나 괜찮으십니까?"

"가린다고 최대한 가렸거늘 결국 경에게 불안이 튄 모양이군요."

아델라가 고개를 숙이려는 모습에 로한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짐의 무안을 덜어 주기 위해 고개를 아낌없이 숙여 주시니, 로한 경은 참으로 자상하신 기사님 같습니다."

"기사로서 제가 모시는 주군을 위할 뿐입니다."

"새로운 웨펀 마스터가 이리도 훌륭하니 짐의 걱정이 한결⸺"

힘이 들어간 아델라의 목에 핏대가 섰다. 고통에 잠긴 표정으로 간신히 기침을 참아 냈다. 더 이상 앉아 있는 건 무리였다.

"...그럼 기사 로한은 황명을 받으세요."

그 말에 고개를 든 로한이 가볍게 쥔 주먹을 심장 위로 얹었다.

"나 아델라 히스토리아는 온 국민을 대신하여 기사 로한에게 웨펀 마스터 칭호와 베타 등위를 약속할 것을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

아델라의 선언에도 로한은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들으라는 듯 목을 가다듬은 시에나가 입을 열었다.

"기사 로한은 폐하의 은혜에 대답―"

"미천한 기사의 신분으로 주군께 감히 청원할 것이 있습니다."

그 말에 뒷짐을 지고 있던 시에나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아델라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던 시에나를 뒤로한 채 천천히 끄덕였다.

"말하세요."

"칭호와 등위는 필요 없습니다. 그 대신 구금 중인 아서 펜드래곤을 구제하여 주십시오."

"불가합니다."

조용히 입을 닫은 아델라. 고개를 기울여 로한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무릎 위로 손을 차분히 모았다.

아델라와 시에나 그리고 로한밖에 존재하지 않는 황궁은 그 어느 때보다 적막했다.

눈매를 좁힌 시에나가 로한을 주시하며 생각했다.

'도대체 그레이스 님께선 무슨 생각으로 저 사람을....'

몇 달 전, 시에나는 자신에게 걸려 왔던 그레이스의 전화를 떠올렸다.

「"로한이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만일 더글라스에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시 시에나 부대장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로한은... 제가 가장 아끼는 사람입니다."」

시에나가 아는 그레이스 유클리드는 그 누구도 곁에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전장에서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레이스를 따르고 있었지만, 아무리 거리를 좁히려 해도 좀처럼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레이스 님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그레이스의 마음을 훔친 것인지 시에나는 궁금했다.

아무리 보아도 지금 저곳에 무릎을 꿇고 아델라를 올려다보는 로한에게서 장점은 보이지 않았다.

로한이 웨펀 마스터에 등극했다고 한들 그레이스는 상대의 힘이나 재력을 보고 마음을 주는 성미도 아니었다.

그때 아델라의 입이 열렸다.

"아서 펜드래곤은 전쟁을 꾀한 반역자입니다. 그를 돕겠다는 경의 저의를 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처하군요."

"아서가 전쟁을 꾀한 것은 맞으나 그 모두 제국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제국을 위한 일?"

고개를 주억거린 로한이 옥좌 뒤로 늘어진 제국의 문양을 바라보며 답했다.

"송구하오나, 현 제국은 썩었습니다."

스릉!

시에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지만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레이스의 부탁 때문이었다.

오른손을 들어 시에나를 진정시킨 아델라가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제국이 썩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건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무례합니다. 짐에게 자신이 다스리는 땅을 비하하라는 건...."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말을 가로막은 로한은 지난번 리버 크래프트와 재블린의 고향에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직도 길거리에서 많은 이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 가고 있습니다. 없는 이들은 더욱 빈곤한 삶을 살아가며, 가진 이들은 더욱 부유한 삶을 살아갑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가진 이들이 없는 이들에게서 빼앗기 때문입니다. 빼앗기는 것은 비단 돈만이 아닙니다. 시간, 청춘, 건강 그리고 인생. 그 모든 것을 국민들은 자신이 따르는 국가로부터 병탄당하고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로한의 주먹에 힘이 실렸다. 얼마나 짓누른 것인지 주먹을 얹은 가슴 부위가 우그러지고 있었다.

"이것이 빼앗고 빼앗기는 전쟁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

"엎드려 묻건대 반역은 누가 저지르고 있습니까? 그 폐단을 막기 위해 병사를 일으킨 아서 펜드래곤? 아니면 백성이란 가면 아래 국민들을 착취하고 있는 귀족들? 청컨대 답하여 주십시오. 진정한 제국의 반역자는 누구―"

"그만, 그만하세요...."

그 순간 가슴을 움켜쥔 아델라가 고통스럽게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검은색 포장지를 꺼냈다. 서둘러 다가온 시에나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 더는 그것을 복용하시면...."

"괜찮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입니다."

"하오나...."

"이토록 충직한 말을 들었는데, 비록 못난 황제지만 이럴 때만이라도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황명을 받듭니다."

시에나가 물러나자 아델라는 들고 있던 사탕을 머금었다. 몰래 그 사탕을 주시하던 로한이 어금니를 물었다. 지난번 스프링윈드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호마'였다.

그러나 완전히 호마는 아니었는지 사탕을 머금은 아델라의 안색이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경이 하고자 하는 말은 전부 이해했습니다. 그래도 불가합니다. 현재 아서 경은 우리 제국이 아닌 '로드'에서 구금 중이니. 아무리 짐이라 하여도 로드에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못나고 부족하여 경의 요구도 들어줄 수도 없는 짐을 부디 원망하세요."

희미하게 숨을 내뱉은 로한은 속으로 긍정했다.

'어차피 로드에 구금된 이상 황실의 힘을 빌리긴 어려웠어. 혹시나 해서 황제 정도면 어떻게 될까 싶었다만 역시....'

그리고는 홀더에서 검집을 떼어 낸 로한이 아델라를 향해 양손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아델라에게 그가 답했다.

"헤아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만 방금 그 말은 제 목을 내놓고 올린 이설(異說)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 목을 쳐 더럽혀진 황궁의 법도를 바로잡아 주시길 청합니다."

"더럽혀진 황궁이라...."

아델라가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에나가 무릎을 꿇었다.

옥좌의 계단을 내려온 그녀는 곧 로한의 앞에 멈춰 서 검을 받아 들었다.

"이미 여러 이들의 욕심으로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곳이 황궁입니다. 로한 경, 고개를 드세요."

로한이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던 아델라는 그의 손바닥 위로 검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니 이 검과 함께 그 목숨을 부디 국민을 위해 사용해 주세요."

검을 다시 홀더에 부착한 로한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황명을 받듭니다."

§ 구원자 (1)

"못 본 사이에 더 근사해졌는걸?"

환복을 마친 뒤 황궁을 떠나 곧장 공항으로 향하던 로한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곁을 힐끗거린 로한이 그녀의 걸음에 맞추며 답했다.

"전에는 감사했습니다."

"고마워하지 마. 그대에게 진 빚은 그것으로 모두 갚았으니."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카리나 님께서는 제게 빚을 진 적이 없으십니다."

그 말에 카리나는 사람들 사이로 걷고 있던 로한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언제 봐도 한결같은 사람이다.

'여전히 그대는 가질 수도, 빼앗을 수도 없이 내 마음이 안달 나도록 눈앞에서 아른거리고만 있구나.'

카리나가 로한에게 고즈넉이 빠져 있던 사이 시계를 확인한 그가 물었다.

"상황은 어떠십니까? 요즘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바쁘다. 눈코 뜰 새도 없이. 그래도 내 사람 배웅 나올 시간은 있느니라."

그러다 로한의 팔에 안긴 카리나가 근처 카페를 가리켰다.

"어찌 이리 서두르는가? 이러지 말고 저곳에서 오붓이 담소나 나누자꾸나. 오랜만이지 않느냐?"

"저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카리나의 품에서 슬쩍 팔을 거둔 로한이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리 가까워졌더라도 카리나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특히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스킨십들은 순결한 로한에겐 너무나 가혹한 자극이었다.

"그보다 저쪽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쪽? 아아, 저쪽. 완만하다. 덕분에 적지 않은 자금을 축적하고 있어. 고작 생필품과 군수 물품 따위로 순도 높은 에테르 스톤을 얻게 될 줄이야.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한 일...."

그때 눈썹을 꿈틀거린 로한이 카리나를 돌아보았다.

"생필품 말입니까?"

"그래. 특히 물을 많이 원하더구나. 아무리 물장사가 돈이 된다고 한들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늘."

카리나의 음성 속에서 로한은 마계의 상황을 상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계 대륙이 대부분 사막화되어 있다지만 물이 부족할 리가 없어. 비록 하멜른의 전사들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물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도시마다 「마르지 않는 샘」이 곳곳에 있을 터....'

로한이 기억하는 마계는 문명화가 덜 되어 있긴 해도 물이 부족한 곳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난 전쟁으로 이곳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 유입된 상황이었다.

'...그쪽도 전개가 바뀐 모양이군.'

전개 수정.

결론은 하나였다.

'그동안 마계에 너무 무관심했어. 슬슬 그쪽 상황도 살펴볼 때가 됐군.'

나머지 사정은 루갈에게 자세히 듣기로 마음먹은 로한이 황제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행이군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난 그대가 이곳을 물어 줬으면 하는데."

그리고는 자신의 쇄골 부근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는 카리나. 순간 눈앞이 아찔해진 로한이 마음을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

"...현 황제의 수명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다고 보십니까?"

농담도 잠시, 그 물음에 카리나의 입술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느덧 도깨비처럼 로한을 홀리던 얼굴엔 근심이 덧씌워져 있었다.

마치 감추고 외면하듯, 카리나는 분주한 거리의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앞으로 두세 달, 아니 모르겠다."

쇠락한 목소리가 로한의 어깨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듯 움츠러든 손마디. 초점 잃은 눈동자 위로는 가까이 있음에도 그리운 얼굴이 스쳐 가고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아델라 히스토리아, 그 아이를 죽이고 황제로 등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아델라는 이 세상에 남은 내 마지막 혈육. 그 아이마저 사라진다면 나는 정말 외톨이가 되겠지....'

손끝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질 것만 같은 그 아이의 숨결을, 조금만 더 듣고 싶었다.

"그대에게 묻겠다."

"말씀하세요."

"꼭 내가 황제가 되어야만 하는가?"

로한은 걸음을 멈춰 선 카리나를 따라 제자리에 섰다.

고개를 숙인 채 옷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갸륵해서 눈길을 줄 수가 없었다.

"...내 동생이 연명할 방법은 없는 것이냐...?"

카리나가 고개를 들자 로한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 침묵이 그녀에게 답하고 있었다.

너를 죽이려 했던 동생을 살릴 개연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고.

"...정녕 없는 모양이구나."

카리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올라간 입꼬리가 슬프도록 떨리고 있었다.

"그대는 어떨 때 한없이 자상하다가도, 또 어떨 때는 끝없이 매정해. 물론 내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거겠지만...."

카리나는 진정으로 자신을 살리고 싶어 했던 로한을 기억한다.

반대로 살기 위해선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로한도 기억했다.

"...오늘의 그대는, 매정하구나."

거기에 강요는 없었다. 그렇게 결정한 건 자신의 선택뿐.

엘리스에게 그랬듯, 아리엘에게 그랬듯, 미하엘에게 그랬듯 또 그레이스에게 그랬듯.

언제고 로한은 그들이 찾아내지 못한 몇 가지의 선택만을 제시할 뿐이었다.

"대륙 최북단."

그때였다.

"그곳에 피오르드라는 섬이 있습니다. 그 섬 어딘가에 '생명의 기원'이 숨겨져 있을 거예요."

"생명의 기원이라 하면...."

"저도 그냥 지나가다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연히 말이죠."

「생명의 기원」.

그것은 자신이 운명을 바꾸지 못했을 때 그레이스를 살리기 위해 남겨 놓은 최후의 보루이자, 이 세계의 히든피스였다.

피오르드 섬이 대륙 최북단에 위치해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걱정도 없고, 신기로운 능력에 비하면 입수 방법도 쉬웠던 탓에 로한도 아직까진 손에 넣지 않은 것이었다.

'어차피 이제 운명에 의해 아가씨가 죽을 일은 없다. 난이도가 꽤 높아지긴 해도 여차하면 팔라스그린에 존재하는 세계수의 씨앗으로 생명의 기원을 대체할 수도 있고. 다만 걱정스러운 건 현 황제가 죽지 않았을 경우야.'

자신의 계획에 아델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연히 죽을 운명이었고, 그렇기에 아델라의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직 바뀔 여지가 있어.'

바뀔 여지가 있다.

오늘 아델라 히스토리아를 대면한 순간 로한은 깨달았다.

'아델라의 죽음은 사건의 시발점이었을 뿐, 그녀는 누구보다 이 제국을 아끼는 인물이다.'

황명에 따라 고개를 들었을 때, 로한은 발동한 상태창 속에서 그 누구에게도 보지 못했던 '설정'을 보았다.

로한은 그 설정을 떠올리며 카리나를 응시했다.

'어쩌면 카리나가 황제가 되지 않아도 제국을 바꿀 수 있을지 몰라.'

그렇다고 로한도 굳이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려 하진 않았다.

모든 걸 살릴 수 없으니까.

나는 구원자가 아니니까.

...나는, 주인공이 아니니까.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그러나 카리나의 간절함을 마주한 순간 그는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건 계획을 세우는 일.

수많은 변수와 상황 속에서 계획이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진량(津梁)일 뿐이다.

'아서가 그렇게 된 순간 내 계획은 이미 뒤틀렸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자신이 의장이 된 후 아서를 영입해 귀족들을 몰아내고 구도자들을 제거할 계획이었다.

'유니온은 이제 끝났어. 로드에 귀속되어 버렸으니까.'

유니온은 로드의 산하 기관이다.

이번 일이 발생하며 유니온의 흡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로드의 상원들이 결국 모든 운영권을 가져가 버렸다.

아서가 전쟁을 선포한 순간 로한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아서 또한 자신이 의장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에 외력을 빌려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니까.

'...그럼 이제 남은 건 로드인가.'

생각을 정리한 로한은 자리에 멈춰 카리나를 마주했다. 그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누가 주워서 쓴다고 한들, 주운 사람 마음이겠죠?"

로한이 다정한 미소와 함께 흐트러진 카리나의 단추를 잠가 주었다.

그제야 표정이 밝아진 카리나가 로한의 손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러니 내가 그대에게 반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자신이 평생을 바쳐도 갚을 수 없는 빚만이 무한히 쌓여 가고 있었다.

뺨이 수줍게 물든 카리나는 다시 로한을 따라 걸었다.

도착한 공항. 게이트 앞에 선 로한이 자신을 올려다보던 카리나에게 물었다.

"복지국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나흘 안으로 전국 빈민가에 구호물자와 재건 사업이 시작될 것이다. 자금은 넉넉히 지원했으니 1년 안에 모두 복구될 게야. 망나니 행세를 하며 귀족들을 수탈한 덕분에 더러운 돈이 꽤 모였거든."

"이제야 빼앗긴 돈들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겠군요. 참,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하라. 마침 나도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니."

잠시 머뭇거리던 로한. 손으로 입가에 묻은 난처함을 쓸어낸 그가 속삭였다.

"율리우스 포드 시니어를 만나고 싶습니다."

* * *

"...네가 두 명이었다."

그 말에 오른쪽 눈과 이마에 붕대를 두른 롤랑이 철창 너머로 올리비아를 응시했다.

"내가 두 명이었다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올리비아.

그녀는 손목과 발목에 블랙스톤으로 만들어진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있던 롤랑의 허리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이간질했다.'

그때 롤랑의 입이 열렸다.

"그럼 누군가 우릴 모략한 거겠네."

"그렇다."

"그래서 네가 로한을 선한 기사로 인정하지 않은 거였고?"

"...그렇다."

언제나 롤랑은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듯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 롤랑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주도면밀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목을 벰과 동시에 밟아 터트린 그 살점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자신들에게 접근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너를 사칭한 그 가짜는 우리들의 와해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만일 자신들의 주군과 손을 잡은 세력이었다면 분란을 조장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롤랑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 와해가 목적이었다면 우린 이미 죽었을 거야."

롤랑은 살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열두 기사들 모두 현재 구금 중이지만 사지 멀쩡히 숨 쉬고 있다.

"물론 후배들을 생각하시는 데니스 님과 볼프윈 님의 아량 덕분에 비참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정말 우릴 죽이려 했다면 판을 더 키웠겠지. 그러는 편이 확실하니까."

"똑바로 말해라. 네가 알다시피 나는 멍청하니까."

"올리비아. 내가 그랬지. 그렇게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라고. 넌 멍청하지 않아. 잘 생각해 봐."

자신을 배려하는 롤랑의 모습에 올리비아는 눈앞의 그가 진짜라는 것을 확신했다.

올리비아는 차분히 숨을 들이마신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입을 연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짜 목적은... 로한이었단 말인가?"

"그거야 올리비아. 이거 봐, 네가 얼마나 똑똑한데."

롤랑의 칭찬에 쑥스러웠던 올리비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그는 로한의 적이겠군?"

"바로 맞췄어. 로한의 적이기 때문에 우릴 이용해 그를 죽이려 했을 거야.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어."

"뭐지?"

팔짱을 끼려던 롤랑은 수갑에 걸려 얌전히 손을 모았다.

"왜 너에게만 혼란을 줬을까, 하는 의문이."

"그거야 내가 가장 멍청... 아니, 어리숙하니까."

"이왕이면 다음부턴 착하다고 표현해 줘. 아무튼, 난 이렇게 생각해."

다음 순간 차분히 가라앉은 롤랑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장난을 치고 있다."

"장난이라니?"

"그래, 장난."

이윽고 올리비아를 비추던 그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동료를 대하던 자상한 모습은 어느새 원수를 눈앞에 둔 복수자처럼 변해 있었다.

"마치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 * *

웨스트랜드 또한 아직도 아물지 못한 제국의 아픔이자 수많은 빈민가 중 한곳이었다.

마을 입구로 들어선 올리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허가 되었다는 소문과 달리 평범한 풍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저 멀리 만나야 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쪽인가.'

소리를 따라 이동하자 주민들에게 식사를 배급 중인 로한이 보였다. 올리비아의 낯빛에 미안함이 감돌았다.

그때의 사과를 하기 위해 로한의 곁으로 이동한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오해한...."

"미안한데 거기 그릇 좀 집어 줄래요?"

"어? 아... 여깄다."

"고마워요."

아주 자연스럽게 그릇을 건네받은 로한이 스튜를 담아 꼬마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맛있게 먹어. 부족하면 더 오고."

"네에. 감사합니다."

로한이 분주했던 탓에 타이밍을 찾지 못한 올리비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릇이 거의 사라져 가던 것을 발견한 올리비아가 설거지통으로 다가가 물의 술식을 발현했다.

"그릇 다 씻었다."

"고마워요. 거기 소고기 좀 줄래요? 썰어서 주면 더 좋고."

"...알겠다."

어느새 올리비아도 로한을 따라 주민들에게 식사를 나눠 주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요리와 배급을 반복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로한의 옆모습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역시 나는 멍청하다. 감히 주군의 눈을 의심했으니.'

그의 얼굴에선 어떠한 사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진실한 미소에 사람들도 진실하게 화답했다. 남이 시켜선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급이 끝난 로한이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으며 숨을 돌렸다.

"덕분에 빨리 끝났어요. 그래서 나한테 할 말이 뭐죠?"

"경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

"사과라... 방금 했잖아요."

"방금 하다니?"

천천히 기지개를 켠 로한. 그가 바라보던 하늘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날 도와준 거. 그거면 충분합니다."

"...경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누구한테 부탁받은 게 있어서. 어차피 다음부터는 복지국에서 움직일 테니 오늘이 마지막이지만은."

"복지국은 절대 이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을 텐데?"

"그런 복지국이라도 발로 걷어차 보니 움직이긴 움직이더라고요. 비록 고귀한 분의 발을 빌린 것이지만."

그때 올리비아에게 돌아선 로한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때요? 이제 좀 자세히 볼 마음이 생겼습니까?"

그의 뒤로는 평범하지만 평범할 수 없는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이 노을 속에 잠겨 있었다.

지난번 숲에서 로한이 했던 말을 떠올린 올리비아가 하얗게 웃었다.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선한 기사여."

비로소 올리비아는 로한을 인정했다.

§ 구원자 (2)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빛이 일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아서 펜드래곤."

대륙의 진정한 실세라 불리는 로드의 상원들이 일렬로 배치된 의사당의 자리에 앉아 아서를 지켜보고 있었다.

"...."

온몸이 구속구로 얽힌 아서는 말이 없었다.

신념을 잃은 눈동자는 타고 남은 잿더미 같았고, 초췌한 전신은 패잔병의 그것처럼 헐벗고 퇴색해 있었다.

"너는 기사도의 상징이었다."

온갖 장식들로 도배된 상원들의 자리 위, 그곳에서 낡은 목제 의자에 앉아 있던 노년의 마법사가 하얗게 센 수염을 쓸어내렸다.

"나는 한때 너를 선망했다. 모두가 존경하고 우러르는 너의 절개를, 의리를 그리고 신념을. 마법사들의 얼개에 갇혀 살던 나에게 너는 영감이자 깨달음이었다."

제국의 아크메이지이자 로드의 원로원, 율리우스 포드 시니어의 입술이 탄식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한데 너 또한 영원하지 못했구나. 끝없이 운회(運回)하는 만물의 이치처럼. 비참할 따름이다."

이윽고 율리우스가 상원들의 뒷모습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구금 중인 아서 펜드래곤과 열한 명의 기사들에 대한 처분을 시작하겠다. 그들의 직위와 칭호, 자격을 박탈하고자 하는 이들은 거수하도록."

손을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상원들을 보던 율리우스가 다시 말했다.

"그럼 그들의 목숨을 거둬 제국의 실추된 위상을 복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거수."

그제야 다수의 손끝이 천장을 향했다.

들어 올린 손들 사이로 미하엘 리펜슈타인이 입구로 눈길을 돌린 순간이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온 한 기사.

모두가 그 기사를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기사 로한? 그대가 여길 어찌...."

"내가 호출했습니다."

상원들의 수군거림에 답한 슐라히가 로한에게 손짓했다. 그녀 또한 율리우스와 같은 로드의 원로원이었다.

"들어오라. 그대를 위한 자리는 저쪽이다."

묵례를 올린 로한이 아서의 곁으로 걸어갔다. 한차례 아서를 일별한 그는 의사당에 모인 이들에게 예를 갖췄다.

"저 로한, 처분을 결정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때 상원 중 한 명이 로한의 말을 받아쳤다.

"유감이지만 로한 경에겐 어떤 자격도 없―"

"있다."

그의 말을 끊어 낸 슐라히가 묘한 미소를 그리며 로한을 응시했다.

"로한에겐 자격이 있다. 그러니 말하라."

로한은 무심히 상원들을 훑어보는 슐라히의 얼굴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초면부터 자신의 자격이 없음을 운운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뭐 유클리드 가주님께서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슐라히가 로한을 두둔하는 모습에 상원들 또한 입을 다물었다.

희미하게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 로한이 한 걸음 내디뎠다.

"아서 펜드래곤을 사면해 주십시오."

"기어이 주제를 넘는구나."

로한의 이마를 관통하는 직선적이고 새파란 어조.

고개를 돌린 로한이 등받이 깊이 몸을 파묻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던 미하엘을 응수했다.

"펜드래곤의 죄는 반역이다. 한 마을이 파괴되었고 실추된 유니온의 명예가 수많은 이들에게 짓밟혔다. 이를 두둔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리펜슈타인 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일상이 무너졌고, 저잣거리에 던져진 로아노크의 유지가 사람들이 내뱉은 침으로 더럽혀져 가고 있죠."

다음 순간 호흡을 가다듬은 로한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국이 피해를 본 것이 있습니까?"

"...."

"다프네 셀레나스와 엘리스 에클라트의 활약으로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또한 로아노크 성채 인근의 마을은 제국이 아닌 알레스 산맥을 소유한 샤를로아 왕국의 영토. 유니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블다운 제국의 산하 기관이 아닌, 이곳 로드 소속인 것처럼 말이죠."

침묵하는 미하엘. 그러나 그의 입가엔 불쾌함이 아닌 어딘가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히고 있었다.

"다시 묻습니다. 아서 펜드래곤에게 반역죄를 부여하는 건 합당한 일입니까?"

"발언 조심하시게, 로한. 아무리 자네가 웨펀 마스터가 되었다고 한들 지금 그 행위는 세상의 악을 지지하는 것과 다름없네."

또 다른 상원의 말에 로한이 중얼거렸다.

"악을 지지한다라... 악을 지지하는 게 누구입니까? 아니, 진짜 '악(惡)'이 누굴까요?"

로한은 상원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 보았다. 당당히 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몇몇은 슬쩍 눈을 피하기도 했다.

그때였다.

"원로원들이시여."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上席)을 향해 돌아선 미하엘이 정중히 물었다.

"한 가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부디 답변해 주십시오."

"리펜슈타인 가주는 발언하라."

"지금 저희가 아서 펜드래곤을 벌하고자 하는 목적이 제국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로드를 위해서입니까?"

"...."

"저는 저희가 제국을 위해서 이 재판을 열고 있다고 생각하여 반역죄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제 생각이 그릇된 것이겠군요."

원로원뿐만 아니라 이곳 모두가 침묵했다.

옷깃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은 미하엘이 하찮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기사 로한은 방금 발언을 잊어라. 내가 착각한 모양이었으니."

그제야 이 재판의 목적이 가다듬어지고 있었다.

로한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미하엘을 응시했다. 반지를 쓸어내리던 미하엘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로한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율리우스의 입이 열렸다.

"다른 이들은 없나? 아서의 목숨을 거둬 '제국'의 실추된 위상을 복구하고자 하는 이들 말이다. 아까는 꽤 많았던 거 같은데."

"...."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이 투표의 논지가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기사 로한."

"원로원이시여."

로한을 향해 상체를 기울인 율리우스가 아서를 눈짓했다.

"아서는 세상의 악이 맞다. 아무도 죽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일상이 파괴되었고, 이는 참을 수 없는 슬픔이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아서를 처단하신다고 한들, 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제2의 그리고 제3의 아서가 등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경의 생각을 듣고 싶다."

그 말에 숨을 깊게 들이마신 로한은 미리 정리한 생각을 말했다.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

"예.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말입니다."

그 말에 아서가 로한을 올려다보았다. 로한은 그를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아서 펜드래곤이든 저든, 그리고 이곳의 모두 또한 언제나 올바른 판단만 할 순 없습니다. 언젠가 실수를 합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 실수가 실패로 끝나선 안 됩니다."

이윽고 고개를 돌린 로한은 율리우스가 아닌 모든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아서 펜드래곤에게 실수를 바로잡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을 기회를 주십시오."

하나하나가 대륙의 실세나 다름없는 로드의 의원들 앞에서 주눅 하나 들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피력하는 로한의 모습에 율리우스의 눈동자에 흥미가 감돌았다.

'어째서 친왕께서 저 인물과 함께하는지 알 것 같다.'

어젯밤, 로한과 만난 율리우스는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직 제국에는 아서와 같은 기사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로한은 이렇게 답했다.

「"누구도 아서를 대체할 수 없을뿐더러, 이 세상에는 그가 죽기만을 바라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아서라는 인물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율리우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과오를 진흙처럼 뒤집어쓰고 있다지만, 이전까지는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

그저 제국에 아서 펜드래곤이란 이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벽녘 늦게 밀려오는 불안을 씻어 낼 수 있었다.

아서 펜드래곤, 그는 제국의 방패였다.

그러나 율리우스의 생각은 반대였다.

'나는 오히려 제국엔 너 같은 기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로한.'

지금 로한은 목숨을 내놓고 저 자리에 서 있었다.

이곳 의사당에 모인 이들 중 하나라도 눈 밖에 난다면 앞으로의 여정이 무척 험난해질 터.

그런데도 로한은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적으로 돌아선 아서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너야말로 진정한 제국의 검이자, 국민의 방패다.'

로한의 진심에 마음 깊이 탄복한 율리우스가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아서 펜드래곤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고자 하는 이들은 거수하도록."

가장 먼저 손을 올린 미하엘을 선두로 과반수의 상원들이 그 말에 동의했다.

로한이 등장한 순간부터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슐라히를 힐끗거린 율리우스가 서서히 끄덕였다.

"좋다. 본 로드는 아서 펜드래곤에게 그 사의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을 기회를 주겠다. 다만 마을 주민들의 슬픔까진 좌시할 순 없다. 현 시간부로 아서 펜드래곤의 칭호와 지위 그리고 기사 자격을 박탈한다. 또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여 파괴된 마을을 복구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

"포드 가주, 유감이지만 그에게 몰수할 재산이 없을 거예요."

그때 입을 연 슐라히가 딱하다는 듯이 아서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펜드래곤 경이 국민들에게 돌려준 돈만 해도 6천억 링이 넘어갔으니 말입니다. 일곱 평짜리 원룸에서 생활하는 웨펀 마스터이자 베타 등위는 저 사람밖에 없을 거예요."

"...그럼 마을 복구 자금은 우리 원로원을 포함해 상하의원 따지지 않고 모두 일정하게 거둬 지원하도록 하겠다. 이는 나 율리우스 포드 시니어의 결정이니 누구도 반발하지 않길 바란다."

그 말에 상원들의 얼굴이 뭐 씹은 것처럼 변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적지 않은 돈이 깨질 터였다.

"그리고 아서 펜드래곤의 처분은... 기사 로한이 알아서 하라. 이것으로 본 회의를 마치겠다. 그리고 아까 자격 운운한 페티 가주는 잠깐 나 좀 보도록 하지."

"예? 아 예, 알겠습니다...."

* * *

촤르륵!

얇은 타이어가 흙길을 가로질렀다. 선두에서 애뮬러 바이크를 몰고 있던 사라가 뒤따라 오던 그래빗과 로라에게 외쳤다.

"10킬로미터만 더 높일게!"

"아, 알았어...!"

사라를 따라 핸들에 마나를 주입한 그래빗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때 그녀의 곁에서 보조하던 로라가 분출한 마나로 그래빗의 바이크를 안정시켰다.

"...무리하지 마."

"괘, 괜찮아. 내 곁에는 너희가 있는⸺"

콰당!

그 순간 앞쪽에서 브레이크를 잡는 소리와 함께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서둘러 정면을 돌아보자 멀쩡히 달려가는 바이크 옆으로 사라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 사라! 너 괜찮아...?"

황급히 멈춰 선 그래빗이 바닥에 처박힌 사라에게 달려왔다.

흙바닥에 얼굴이 파묻힌 사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빗이 걱정스레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푸학! 휴,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네. 헤헤!"

"괜, 괜찮은 거 맞아?"

"그냥 살짝 구른 거라 괜찮아!"

"아까 굴러갈 때 목이 꺾였던 거 같은데...."

"그래서 목이 뻐근한 거였구나. 아, 고마워 로라."

그제야 돌아온 로라가 주인도 없이 혼자 굴러간 사라의 바이크를 가져다주었다. 이내 손수건을 꺼낸 그래빗이 사라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마치 엄마에게 세수를 당하는 아이처럼 눈을 꼭 감고 있던 사라가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확인했다.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갈까?"

"그러자. 로라는?"

"...그렇게 해. 벌써 밤이야."

곧 시스터즈는 바이크를 끌며 나란히 걸었다. 문득 자신의 주머니를 더듬던 사라가 입을 가려 올렸다.

"나 지갑! 구르다가 잃어버렸나 봐."

"그럼 같이 가자. 우리도 찾아 줄게."

"아냐 아냐 아냐! 나 혼자 얼른 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하아."

말도 끝나기 전에 바이크를 타고 달려간 사라.

한숨 짓던 그래빗이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래빗."

"응?"

그때 안장에 걸터앉은 로라가 후드 한쪽을 가볍게 쥔 채 입을 열었다.

"...만약에, 이 세상이 가짜라면 넌 어떻게 할래?"

"그게 무슨 소리야? 미, 미안. 나 이해가 잘 안 돼서...."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

"어? 어... 알았어...."

소연히 가라앉는 해거름의 하늘, 그 언저리를 올려다보던 로라의 시선이 소리 없이 침몰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어두웠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녀의 얼굴에 깔린 어스름이 짙어지고 있었다.

'...만일 모든 게 가짜라면.'

「"너는 가짜다."」

'...그때도 너희들은 나를.'

「"그러니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 마라."」

'...친구로 생각해 줄까?'

「"그것이 그분의 꼭두각시인 너의...."」

마냥 무표정했던 로라의 입꼬리가 불투명하게 일그러졌다. 로브를 움켜쥔 손등이 떨려 왔고, 가슴 밑바닥부터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차올랐다.

「"...운명이다."」

§ 가짜 (1)

"그럼 모시겠습니다."

아서는 뒷좌석 문을 열어 주는 로한을 말없이 바라봤다.

무언가를 묻고 싶은 듯 잠시 들썩인 입술은 이내 무겁게 주저앉았다.

"...."

로한과 아서를 실은 자동차가 한적한 도로를 내달렸다.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자유, 그 속에서 아서의 입이 열렸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이오?"

로한은 답이 없었다.

룸미러에 비친 그의 눈매처럼, 그저 어딘가를 향해 직진할 뿐이었다.

로드의 의사당이 위치한 로열 힐을 벗어난 그들은 제국의 북부, 세인트 스노우(St. Snow)로 들어섰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파르카스탈 설원의 정경.

시리도록 창백한 만년설의 세상이 로한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름답소...."

"도시에 갇혀 살면 이런 것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 거죠."

설원 초입에 들어선 로한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브레이크를 밟아 정차한 로한이 룸미러에 비친 아서를 응시했다.

"처음 여기서 기사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전쟁터에서 승격하는 일이 빈번했으니 말이오."

"다시 돌아오니 어떠십니까? 처음, 그곳으로."

"...왜 나를 죽이지 않았소?"

그러자 로한이 빙긋 웃었다.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말에 아서는 우두커니 끄덕였다.

손잡이를 당기자 살며시 열린 문틈 사이로 들이치는 찬 바람.

뜨거워진 마음을 식히듯, 그 바람을 맞는 아서의 얼굴은 몹시 편안했다.

차에서 내린 아서는 순백의 세상을 마주 보고 섰다.

'정말 그때로 돌아온 기분이구나.'

아무것도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다짐했던 순간.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지.'

검은커녕 쇠막대기 하나 없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던 순간.

'이렇게 어디론가... 아니 어디든지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어.'

그때의 열정이 그리고 정열이 다시금 아서의 가슴 위로 쓰여지고 있었다.

뽀드득⸺

한걸음 내딛는다.

저토록 새하얗기만 한 설원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적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검게 그을린 흑야(黑夜) 같은 인생으로, 하나의 점이 되어, 나라는 존재를, 그 존재의 부질없음을, 그럼에도 나아가고 싶다는 희망을.

그 모두를....

"...로한 경."

"말씀하세요."

"그대는 어째서 세상을 지키려 하오?"

"저는 세상을 지키고 싶은 게 아닙니다."

고개를 돌린 아서가 로한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 사람을 목마에 태우기도 버거운 어깨가 아슬아슬하게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솔직히 세상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그 말은 조금 놀랍소. 그렇게 보이진 않았는데."

"다만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지키고 싶은 사람...?"

바람에 날려 온 몇몇 눈송이가 로한을 스쳐 갔다.

"예. 저는 그 사람을 무척 사랑하거든요."

여전히 로한의 마음은 한결같다.

한결같이 그레이스 유클리드,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 하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세상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대는 진실로... 낭만적인 기사요. 한편으로는 부럽소. 세상보다 가치 있는 것을 찾은 그대가, 그 깨달음이."

다시 설원으로 눈길을 돌린 아서의 심상이 초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때는 나도 마찬가지였소. 어느새 돌이켜 보니 너무 많은 것들을 지키려 하고 있었소이다. 다 지켜 내지도 못할 것을 어찌 그리도 욕심을 부렸는지...."

아서에게 주군은 국민이었다.

한 사람의 국민을 위해 주먹을 쥐었고.

열 사람의 국민을 위해 검을 잡았으며.

백 사람의 국민을 위해 자신을 휘둘렀다.

그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틀렸소. 한데 너무나 늦어 버렸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소."

눈밭 위로 아서의 무릎이 닿는다.

두 손을 늘어트린 그의 뺨을 타고 낡고 오래된 감정들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단순히 전장에서 패배한 기사의 슬픔이 아니었다.

방향을 상실한 한 사람의 설움이었으며, 길을 잃어버린 한 사람의 비애였다.

아서 펜드래곤, 이 드넓은 설원에서는 그 역시 수많은 국민 중 한 사람.

그 한 사람에 불과했기에.

"일어나세요."

아서를 향해 손을 내민 로한.

다음 순간 고개를 든 아서의 눈앞으로 황홀하도록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정오의 태양을 등지고 서 있던 로한이 빛줄기 속에서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처음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씩 말이죠."

그 빛에 아서는 눈이 멀 것만 같았다.

그제야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아홉을 죽이려 했던 자신의 우둔함이 만천하에 탄로 나고 있었다.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제가 그 시간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 세상을 구원해 주십시오."

한쪽 무릎을 굽힌 로한이 아서를 향해 정중히 예를 올렸다.

"...구원의 기사여."

그 말을 시작으로 아서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후회가 차올랐다.

왜 이제야 로한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후회와 원망들을 속에서 아서의 신념이 다시 싹을 틔우고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주먹을 말아 쥔 아서도 로한을 향해 예를 올렸다. 햇살을 머금은 만년의 설원이 쉴 새 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국민을 주군으로 모시는 기사로서, 국민의 명을 받잡겠습니다."

구원자라도 구원은 받고 싶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