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아아아!"
하분 성 정문을 넘어서자마자 귀가 따가울 정도의 함성이 폭발했다. 대로를 둘러싼 병사들과 주민들의 목소리였다.
"전원 무사 귀환이래!"
"하분 성 역사상 처음 아니야?"
"이번 출정대는 전부 실력이 출중했나 보네!"
주민들은 개선장군처럼 들어오는 병사들을 보며 다시 한번 탄성을 터트렸다.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이다!"
"후우, 오랜만에 봐도 크네. 진짜 괴물이라니까."
"근데 저걸 한 명이 다 잡았다며?"
"나도 들었어. 그 울브스하고 대련을 했던 어린 검사가 둘 모두를 잡았다고."
"저기 있다! 특별한 기세도 없는데, 어떻게 그리 강하지?"
"소문이 과장된 거 아니야?"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하루 먼저 들어간 정찰대 때문에 병사들과 주민들의 시선은 전부 라온에게 쏠렸다.
감탄, 탐색, 경외 혹은 의심의 눈으로 그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라온은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시선을 담담하게 받으며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제 정말 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겠네요."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와서 히죽 웃었다. 설격대를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많이 풀었는지 씻지도 않은 녀석의 얼굴에 광채가 흘렀다.
"즐겁나 보네."
"즐겁죠! 후배가 바로 들어왔는데! 원래 단체 생활에서는 밑에 후배가 몇 명이나 있느냐에 따라 생활이 달라지거든요. 전 지금 천국입니다. 천국!"
싸움도 끝났고, 잡일 시킬 녀석들도 많다 보니 도리안의 걸음은 날개를 단 듯 가벼웠다.
퍼레이드 하듯이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의 머리를 앞세우고 지휘부에 도착했을 때 밀랜드의 부관 찰스가 나와 고개를 숙였다.
"사령관님이 바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는 자신과 테리안, 에드퀼 그리고 라딘까지 모두를 불렀다.
"전 버려진 건가요?"
"아, 그…."
"농담입니다. 농담!"
베토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주점을 향해 걸어갔다. 용병들은 오히려 좋아하며 그 뒤를 쫓았다.
"따라오시죠."
라온은 찰스의 뒤를 따라 사령관실로 올라갔다. 오래된 나무의 향이 흐르는 흑색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사령관 밀랜드가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었다.
사망자 없이 엘리트 몬스터를 잡고 왔는데도, 밀랜드가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뻔했다. 예상대로 그는 살벌한 시선으로 설격대주 에드퀼을 노려보았다.
"에드퀼."
"예…."
"내가 널 너무 편하게 대해주었나 보군."
밀랜드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공기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의 압박이 피어났다.
"끄흡!"
그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는 에드퀼은 숨을 쉬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매번 회의 때마다 정찰병들을 잘 챙겨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모든 회의에 참여한 네가 이런 식으로 날 엿 먹여?"
사령관답지 않은 상스러운 말이었지만, 그에게 묘하게 잘 어울렸다.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에드퀼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용서?"
"예! 한 번만 봐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용서 좋지. 다만 대가는 치르고."
조금 누그러진 듯한 밀랜드의 목소리에 에드퀼이 고개를 들었다. 다만 기대를 담은 그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부사령관의 공증하에 치러진 내기이니, 나도 함부로 그 약속을 깰 수는 없다. 그리고 난 그 방법이 꽤 괜찮아 보여. 정찰병이 어떻게 생활하고, 일하는지를 알면 너희들도 정신을 차릴 수 있겠지."
"사, 사령관님…."
"오늘부터 너희는 정찰병 소속이다. 약속은 3개월이었지만, 난 그걸로 끝낼 생각이 없다. 3개월 후 너희들의 태도를 보고, 이 징계를 풀어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 그만 가보도록."
"아, 알겠습니다."
에드퀼은 혼이 반쯤 빠져나간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죽은 자의 숲에 나오는 좀비 같았다.
"라딘."
"예."
"나를 그렇게 못 믿는 게냐."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잡일을 떠맡는 걸 말하지 않았지?"
밀랜드의 분위기는 여전히 사나웠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라딘도 징계를 받을 것 같았다.
"임무나, 토벌에 나갈 때 검사들과 부딪치는 건 병사들입니다. 전 괜찮지만, 제 아래 있는 녀석들에게 보복이 들어올까 봐 두려웠습니다. 오러 사용자의 공격에 맞으면 저희는 한참 앓아누워야 하니까요."
라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부하들을 생각한 마음이 진짜인 듯 그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멍청한 녀석."
밀랜드가 혀를 쯧쯧 찼다.
"내가 이곳을 운영하며 그런 일을 한두 번 겪었을 것 같으냐. 몰래 와서 말해주었다면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저 녀석과 같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라온을 가리켰다.
"패서 안 되는 일은 없어. 만약에 주먹으로 일이 해결 안 된다면 그건 덜 팬 거다."
"예에?"
"아, 아버지?"
테리안과 라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쨌든 네 녀석도 징계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근신이야."
"내일부터요? 오늘은…."
"사상자 없이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을 잡고 돌아왔는데, 바로 징계를 줄 수는 없지. 오늘은 먹고, 놀아라."
"아, 감사합니다."
라딘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사령관실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밀랜드의 시선이 라온을 향했다.
"수고했다. 그리고 고맙다."
언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는 듯 밀랜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솔직히 어울리지는 않았다. 단단한 차돌이 웃는 느낌이지만, 그가 부하를 아끼는 따스함은 그대로 전해졌다.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모두가 돌아온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정말 고생했어."
"아닙니다."
"이곳에 와서 1년을 버티는 게 네 졸업시험이라고 했었나?"
"예."
"이번 일은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전부 지그하르트에 전해주마. 보수도 확실하게 챙겨놓을 테니, 나중에 찾아가도록."
"감사합니다."
라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밀랜드의 미소가 진해졌다.
"이럴 때는 어린애 같군."
그는 끌끌 웃고서 손을 저었다.
"돌아가라. 너도 오늘을 즐겨야지. 늦게 갔다간 자리 없을 거다."
"예."
라온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고, 밀랜드는 멍하니 서 있는 테리안을 손으로 불렀다.
"어땠느냐?"
"예?"
"저 아이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떤 녀석이지?"
"볼 수 없는 아이였습니다."
"볼 수 없다?"
"제가 감히 판단할 녀석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두드려야 할 쇳덩이일 줄 알았는데, 이미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칼날이었습니다."
"후후, 내가 말했잖느냐. 저 녀석은 다르다고."
밀랜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도 선합니다. 먼저 건드리지 않는다면 힘을 드러내지도 않더군요. 지그하르트에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신기하게 잘 어울립니다."
"라온에게 선을 댈 수 있다면 대어놓아라."
"예?"
"언젠가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될 수도 있는 아이니까."
"그, 그 정도입니까?"
"저 녀석…."
밀랜드가 창으로 라온을 내려다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같은 나이의 북패왕보다도 강하다. 나도 처음 보는 괴물이야."
* * *
모두 주점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라온도 바로 서리의 가지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왁자지껄한 소리와 술 냄새가 진동했다.
"라온 님! 여기요!"
얼굴이 빨개진 도리안이 손을 마구 흔들었다.
"어? 주인공이다!"
"우리 정찰대의 자랑!"
"라온! 라온! 라온!"
정찰대 사람들은 맥주잔으로 테이블을 치며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우와아아아!"
"검귀! 검귀!"
"우리도 있다고!"
용병들도 같은 행동을 취하며 환호를 터트렸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도리안의 옆에 앉았다. 북해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저들과 나름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게 그리 싫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쏜다! 유아야! 있는 술이랑 음식 다 가져와!"
"뭔 소리야! 내가 낼 거야!"
"아니, 우리 3번 정찰대가 지른다!"
이젠 정찰대와 용병들이 서로 돈을 내겠다고 싸우기 시작했다. 한 명도 죽지 않고 돌아온 것에 모두 흥이 돋은 것이다.
"에헴!"
주문한 음식과 술을 서빙 한 유아가 가운데에 주점 가운데에 서서 귀엽게 헛기침했다.
"출정대 모두가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제가 오랜만에 한 곡 불러볼게요!"
유아는 작은 손을 들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
"오오오오!"
"정말?"
"이거 얼마 만에 듣는 유아 노래야!"
"검귀 때문에 이런 기회를 다 얻네!"
주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몸을 돌려서 유아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아부 같지 않았다.
"자, 그럼."
유아는 양갈래 머리를 파닥이며 눈을 감았다.
"푸른 파도가 쓸어내리는 얼음 숲의…."
양손을 꼭 모은 채 노래를 시작하자, 순간 주점이 고요해졌다.
"밤을 노니는 요정은 낮을 그리워하고…."
뭐라고 해야 할까. 가슴이 울린다.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재능 자체의 격이 달랐다.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서 이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아이는 처음 보았다.
기교가 좋다든가, 음색이 맑다든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목소리로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져주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잘하는군. 특별한 재능이 있느니라.
'파인애플 줬다고 좋게 보는 거야?'
-본왕은 재능을 보는 데에 있어서 냉정하다. 저건 이미 마법과 비슷한 단계다. 가슴이 울렁이지 않았더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에게 노래를 시킨다면 분명 크게 될 것이니라. 이곳에서 음식을 나르기엔 아까운 아이야. 본왕의 직속 가수이자 셰프로 임명….
'또 시작이네.'
라온은 라스의 주절거림을 무시하고 유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녀석의 말대로 그녀의 노래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떠오르는 해를 마주해본다!"
"우와아아아아!"
"유아! 유아!"
유아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환호로 주점이 들썩였다. 용병과 정찰병들은 너 때문에 유아의 노래를 들었다고 감동하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주점 안에서는 작은 축제가 열렸고, 병사들과 용병들은 뒤섞여서 웃고 떠들며 출정에서 있었던 기억을 풀어냈다.
'그래. 이거였어.'
목숨을 걸고 싸우고, 그를 바탕으로 동료애가 생기는 이 모습이 하분 성에 오며 기대했던 장면이다. 조금 거칠지만, 따스한 감정이 심장을 두드렸다.
'아직도 세상엔 배울 게 많아.'
라온 즐거워하는 모두를 보며 옅게 웃었다.
* * *
지그하르트 별관이 내려다보이는 북망산 중턱의 나무 위.
작은 새나 앉을 법한 얇은 나뭇가지 위에 글렌 지그하르트가 서 있었다.
그의 붉은 시선에 별관 앞에 놓아둔 고급 소고기를 살피는 실비아가 잡혔다.
"쩝, 직접 주면 더 좋아할 텐데."
바로 아래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는 리메르가 입맛을 다셨다.
"난 저 아이가 소고기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글렌은 문을 닫고 들어가는 실비아를 끝까지 눈에 담으며 입을 뗐다.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아비가 아니라, 그저 방관자였으니까."
"...."
"그런 방관자에겐 저 아이 옆에 다가갈 자격이 없다."
"가주님이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원했다. 강해지길 원했고, 그에 따른 결과였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실비아의 모습은 태어났을 때와 이곳으로 도망 왔을 때밖에 없다."
글렌의 목소리는 늦게 피어 홀로 찬바람을 맞는 꽃처럼 쓸쓸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그 시간을 채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리메르."
"예?"
"이곳에서 자루에 든 깃털들을 뿌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날아가겠죠."
"그래. 사방팔방으로 퍼져서 잡을 수 없게 된다. 내가 한 말과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벌인 건 주워 담을 수 없다."
"음, 아닌데?"
리메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가 아니라는 거냐."
"보세요."
그가 주머니에 있던 마권을 갈기갈기 찢은 뒤 허공에 뿌렸다. 찬바람을 타고 종이가 흩어졌다.
"자, 지금!"
리메르는 손을 갈퀴처럼 휘둘렀다. 녹색 바람이 일어나며 흩날리던 마권 조각이 모두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되는데요?"
그는 씩 웃으며 손에 있는 마권을 내밀었다.
"…네놈이랑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글렌이 이를 바득 갈고,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어? 가주님. 삐지신 거예요?"
"닥쳐라."
"그냥 장난이죠!"
"오지 마."
"하하하! 요즘 귀가 자주 가렵던데 혹시 제 욕을 하고 다니시는 건 아니죠?"
"네 이름은 입에도 담고 싶지 않다."
글렌과 리메르가 투닥거리며 가주전으로 걸어갈 때 차디찬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를 스쳤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는 걸 보니, 곧 시작되겠네요."
"그래. 웨이브가 시작되면 그 아이도 왜 하분 성을 지옥이라고 부르는지 알게 되겠지."
"어? 대답하셨네요?"
"쯧."
글렌이 혀를 차고 다시 등을 돌렸다.
"라온이 하분 성에서 활약 좀 했다던데, 저도 좀 알려주시죠."
"난 모른다."
"에이, 모르긴요. 2주마다 정기보고 들어오잖아요! 손자 걱정에 밤잠도 못 이루시는 분이…어?"
"후우우우."
글렌의 손아귀에서 노란 스파크가 튀겼다.
"가, 가주님?"
"한동안 그 주둥이를 열 수 없게 해 주마."
"잠깐! 그거 떨어지면 저 죽어요!"
"그래. 죽어라."
그날 북망산 중앙에 거대한 벼락이 내리쳤다.
128화
하분 성 사령부.
사령관 밀랜드 앞에 1번 정찰대장 바르티가 차려자세로 서 있었다.
"이번에도 없었나?"
"예! 스터린 산부터 북해 인근을 두 번 왕복했지만, 산이나 숲으로 올라오는 해양 몬스터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바르티가 시선을 위로 올리며 대답했다.
"그럼 샤크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군."
밀랜드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는데, 내 착각이었나.'
라온이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을 잡고 돌아온 이후 일주일마다 정찰대를 보내 상황을 살폈지만, 특별한 변화는 관측되지 않았다.
한 달 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 보면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수고했다. 돌아가서…."
휴식을 지시하려고 할 때 병사 연무장에서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기합 소리 한번 좋군요."
바르티가 창밖을 흘낏 보면서 빙긋 웃었다.
"좋기는. 아주 시끄러워 죽겠어."
시끄럽다는 말과 달리 밀랜드의 입가에는 기꺼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자네도 가보았나?"
"예. 자주 갑니다."
"잘 가르치는 모양이군."
"라온이 자세를 봐줄 때마다 실력이 늘어나는 게 확실히 느껴집니다. 병사들이 괜히 가는 게 아니더군요. 오늘 복귀하자마자, 연무장에 간 녀석도 있을 정도입니다."
"나 참."
밀랜드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별난 짓을 한다니까.'
라온은 언젠가부터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병사들에게 훈련법을 알려주거나, 검술과 창술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특별한 기술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기존에 알고 있는 기본 무학을 손봐줬을 뿐인데, 그게 굉장한 효과가 있어서 지금은 많은 병사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전투와 임무의 반복에 지쳐 텅텅 비어 있던 연무장에 활기가 도는 모습을 보자, 몸과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뭐랄까. 라온은 본인만이 아니라, 주변을 바꾸는 힘이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리 밝은 친구가 아닌데도, 그가 온 이후로 하분 성이 활기차진 느낌입니다."
"그런가."
밀랜드가 두 눈을 빛냈다.
'왕의 자질.'
이런 냉혹한 전장에서 1달 만에 사람들을 휘어잡는 건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상대로 라온은 위에 설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저도 약간 몸이 찌뿌둥하니, 수련에 참여 좀 해야겠습니다."
"아, 잠깐."
바르티가 어깨를 돌리며 나가려고 할 때 밀랜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곧 '웨이브' 기간이 온다.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입매가 올라가 있던 바르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신병들에게도 확실하게 전하도록 해."
밀랜드의 시선이 회색 안개에 가려진 스터린 산을 향했다.
"하분 성이 지옥의 전장으로 불리는 이유가 곧 찾아올 거라고."
* * *
1달 전만 해도 찬 바람만 불었던 병사 연무장은 몸을 단련하는 정찰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변화는 전부 한 사람 때문이다.
라온.
홀로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을 죽일 정도로 강한 그가 새벽부터 밤까지 수련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다른 정찰병들이 하나둘씩 찾아와 단련을 시작했다.
라온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단련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그게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지금 연무장은 병사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와! 진짜네. 무릎을 살짝 굽히니까. 검술이 훨씬 편해졌어."
"어떻게 저렇게 잘 아시는 거지?"
"신안(神眼)이야. 신안! 자세를 딱 보면 뭐가 모자라는지 보이시나 봐."
"난 보지도 않고 문제점을 말씀해주셨는데, 그게 딱 맞더라. 무서울 정도야."
정찰병들은 오늘은 무얼 배웠고, 자신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떠들며 웃음꽃을 피웠다.
-쯧, 시끄럽도다.
라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쯧 찼다.
-조용해서 편했는데, 저것들 때문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니라.
'네 수다만 하겠어?'
라온은 연성검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낸 뒤 피식 웃었다.
-본왕의 경험담은 금괴의 산을 주어도 들을 수 없는 마계의 보배이니라. 들을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영광은 모르겠고, 마계가 점점 친숙해지긴 해.'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본왕이 마계에서'라는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이젠 마계가 고향 같아졌다.
-본왕은 네놈이 이해되지 않는다.
'뭐가?'
-왜 저런 인간들을 신경 쓰는 거냐. 어차피 1년만 지나면 마주칠 일도 없는 것들인데.
'딱히 신경 쓰지 않았어.'
-하나하나 자세를 봐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저 사람들의 자세를 봐주는 것도 내 수련의 일환이야.'
-수련이 된다고? 저런 허술한 움직임들이?
'그래.'
라온이 빙긋 미소 지었다.
'아주 확실하게 도움이 되고 있지.'
정찰병들의 움직임은 눈이 아니라, 글래시아를 통해서 보고 있다.
많은 사람의 움직임을 감각의 바다로 파악하다 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바다는 빗물을 받아들이듯 넓어지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이미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진의를 파인애플 피자에 넘긴 마계의 군주 덕분이었다.
'다른 이유도 하나 있고.'
라온이 뒤를 돌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육체를 단련하고, 검을 휘두르는 병사들의 눈빛은 자신의 전생과 닮았다.
살아남고 싶고, 강해지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때가 생각나서 저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게 무엇이냐.
'비밀인데.'
-말을 하다가 마는 건 마계의 죄악 중 하나이니라. 네놈의 육체를 얻자마자 그 영혼을 빙하 속에 가둬버릴 것이니라!
'할 수 있다면 해.'
라온은 라스의 저주를 무시하고 뒤에 있는 정찰병을 보았다. 접힌 어깨 때문에 검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깨를 조금만 펴면 좋을 겁니다."
"어깨요? 알겠습니다!"
그는 신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바로 어깨를 폈다. 움직임이 달라지는 만큼 그의 표정도 밝아졌다.
"어이!"
그 옆의 병사를 봐주려고 할 때 연무장 외곽에서 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아니지! 더 빨리 뛰어!"
도리안은 아직도 말단 정찰병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설격대 검사들을 데리고 연무장을 돌고 있었다. 저들에게 검술을 가르칠 수는 없으니, 저렇게 체력 단련만 시키는 것이다.
'힘이랑 다리 하나는 좋은 녀석이니까.'
수련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매일 달려왔기 때문에 도리안의 체력은 웬만한 검사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누가 오러 쓰는 소리를 내었는가?"
뒤를 돈 도리안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녀석은 리메르에게 배웠던 대로 오러 사용을 금지하고, 육체와 체력으로만 달리도록 설격대를 갈구었다.
'잘 뛰네.'
라온은 도리안의 바로 뒤에서 달리는 설격대주 에드퀼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사령관이 무섭긴 무서운지 눈빛에 불평불만이 가득하면서도 지시는 제대로 듣고 있었다.
"자, 그만!"
도리안이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전력으로 뛰었기 때문에 검사들의 얼굴에는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다음은 수색 연습이다. 엎드려!"
"끄윽!"
"제, 젠장…."
"이게 제일 싫어…."
설격대 검사들은 코가 땅에 닿을 것처럼 네 발로 엎드렸다.
"이제 그 상태로 연무장을 돈다. 바닥의 흔적을 살피는 연습이니까. 최선을 다하도록."
"끄응…."
"후욱…."
설격대 검사들은 거북이처럼 기어서 연무장 외곽을 돌기 시작했다. 놀리는 것 같지만, 저건 정찰병들이 하는 수색 훈련 중 하나였다.
-근데 왜 저 녀석이 정찰병 교육을 하는 것이냐. 정찰도 제대로 모르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그러네….'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다 보니 도리안이 저들의 교육 담당이 되어 있었다. 재밌는 건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는 거다.
'아니, 당연한 건가.'
저들이 지금 정찰병 신분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검사들이다. 평범한 정찰병들이 교육하기엔 부담스러우니, 도리안이 딱 제격이긴 했다.
"후후."
도리안이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좋아 보인다?"
"좋긴요. 귀찮아 죽겠습니다."
말과 달리 녀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처음에 하분 성에 왔을 때는 곧 죽을 것처럼 창백했지만, 지금은 포동하니 살이 올라와 있었다.
"그래도 예상한 것보다 편하긴 하네요. 전 정말 숨도 못 쉬고 싸울 줄만 알았거든요."
도리안이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중얼거렸다.
"음? 너 몰라?"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예? 뭘요?"
"여기가 지옥의 전장 혹은 전장의 지옥이라 불리는 이유는 일 년에 두 번 발생하는 웨이브 때문이야."
"웨…이브?"
"스터린 산과 숲에 있던 육지 몬스터와 북해에서 올라온 해양 몬스터가 끝없이 몰려오는 현상이지. 너라면 알 줄 알았는데?"
"아, 알면 알수록 무서우니까. 알아보지도 않았죠! 모르는 게 약이잖아요!"
도리안이 물에 젖은 개처럼 맹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웨이브라니, 그게 뭐야! 무서워!"
"곧 그 징조가 있을 거다. 시작되면 3일에서 5일 정도는 잠도 못 잔다고 보면 돼."
"싸우느라 잠도 못 잔다구요?"
"응."
"으어어억!"
손톱을 물어뜯는 녀석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괜찮아. 배웠던 대로만 움직이면 무사히 끝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겠죠? 그럴 수 있…지 않아요!"
도리안은 악 소리를 지르고 정찰병들에게 달려가 웨이브에 대해 물었다. 자신과 같은 대답이 돌아오자 녀석의 표정이 점차 흙빛으로 물들어 갔다.
"끝났어! 내 인생은 끝이야!"
이젠 머리를 부여잡고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네 1호 부하 참 재밌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멍하니 떠 있는 라스를 툭 쳤다.
-…본왕이 모르는 놈이니라.
* * *
"미친놈! 그래서 그냥 보내줬다는 것이냐?"
푸른 로브를 입은 사내가 이를 드러냈다.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에서 서늘한 한기가 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한 번 더 습격하는 건 악수였으니까."
검은 로브의 사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계획, 그놈의 수! 네놈은 머리를 너무 많이 굴린다!"
"무지성으로 들이박는 네놈보다야 낫지."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몬스터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야성적인 투기를 뿜어냈다.
"그래서 다음은 뭘 어쩔 건데. 밀랜드를 끌어낸다는 계획은 깨진 거나 다름없잖아!"
"괜찮다. 새로운 계획을 짰으니까."
검은 로브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계획?"
"곧 시작될 웨이브. 그 안에 너와 내 힘을 조금 섞는다."
"섞는다고?"
"그래. 넌 웨이브에 더 많은 해양 몬스터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힘을 써라."
"네놈은 뭘 하려고?"
"나는 벽을 무너뜨릴 것을 준비하겠다."
그가 로브를 들쳤다. 길쭉한 검은 털이 나 있는 해골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살아 있는 듯 빈 안구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붐 스컬?"
"이 녀석을 이용한다면 그 정도 성벽은 확실하게 부술 수 있다."
"성벽에 다가가기 전에 밀랜드에게 찢길 것이다."
"괜찮아.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게 개조했으니까. 마스터라고 해도 발견할 수 없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자신 있는 손짓으로 붐 스컬을 쓰다듬었다.
"그 이후에는? 벽을 부숴도 하분 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밀랜드와 간부들을 끌어낼 계획은 그 이후부터 시작되니까. 벽이 무너지게 되면 놈들은 나올 수밖에 없다."
"후, 이번이 마지막이다."
푸른 로브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너와 내가 같은 목적을 가졌다고 해도 그 과정마저 같을 필요는 없지.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나는 내 나름대로 움직이겠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손에 든 녹색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하분 성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카드를 꺼낼 테니까."
* * *
어둠이 지워지지 않은 새벽 연무장.
라온이 검을 내리쳤다. 열기가 깃든 검풍에 얼어붙은 땅이 녹아내리고, 찬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발을 구르고 검날을 추켜올린다. 강대한 적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살아 있는 움직임. 그는 이미지로 만든 적과 생사를 다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후우우욱.
라온의 입에서 냉기가 뿜어진다. 눈빛이 얼어붙고, 칼날의 열기가 차게 식었다.
푸르게 번들거리는 칼날이 짐승의 어금니처럼 사납게 쏘아진다. 불길에 녹아내렸던 땅이 바위처럼 굳고, 허공에 서리의 꽃이 피어났다.
은빛 칼날 위에서 춤을 추던 얼음꽃이 바람에 흩날리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치이잉!
서리의 꽃잎은 하나하나가 냉기와 예기를 담은 칼날이 되어 라온이 이미지로 그린 적을 찢어발긴 후에야 이슬처럼 녹아내렸다.
"후우."
라온이 냉기를 가라앉히며 숨을 골랐다.
-으음….
라스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신음을 흘렸다.
'왜?'
-이상하리만큼 성장이 빠르구나.
'....'
리온이 벙찐 얼굴로 라스를 보았다. 지가 이미지를 연습하라고 알려줘 놓고 저런 반응이라니, 파인애플 피자의 맛만 빼고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다.
"이야!"
라스의 반응에 어처구니없어할 때 연무장 외곽에 서 있던 도리안이 다가왔다.
"이젠 얼음꽃도 여섯 송이가 피어나네요. 볼 때마다 달라지니, 정신을 못 차리겠네."
도리안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강해지냐며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내 예상보다 성장세가 빠르긴 해.'
라스의 조언과 임무에서 얻었던 경험을 조화시키니, 글래시아와 광아검의 성장이 눈부셨다. 예측을 벗어난 성장 속도에 자신도 당황할 정도였다.
"너도 새벽부터 밤까지 수련하면 빨리 강해질 수 있어."
"새벽부터 밤…. 도련님은 16살이 되셔도 변하질 않으시네요."
"달라질 이유가 없지."
집을 떠났다고 해도, 16살이 되었다고 해도 달라진 건 없다. 주어진 시간을 최대로 활용해 수련하는 것뿐이다.
"너도 훈련하고 온 거야?"
"훈련까지는 아니고, 성을 좀 돌고 왔습니다."
도리안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설격대 애들 데리고 간 거냐?"
"예. 일과죠. 일과."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아쉽겠네?"
"그러게요. 하…."
설격대가 정찰병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도리안의 표정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래도 다른 후배들이 있어서 괜찮아요."
도리안은 본인을 정찰대의 호위가 아니라, 정찰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엔 죽겠다고 하더니, 제대로 적응했다.
"이제 적응 좀 됐나 보네."
"도련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뭐, 그렇지."
그의 말대로 정찰이나, 임무에서 동고동락하고, 훈련장에서 매일같이 보니, 정찰병들에게 나름 정이 든 상태였다.
"그놈의 웨이브만 없으면 참 좋을 텐데. 헉! 내 입으로 그 불길한 단어를 꺼내다니! 젠장!"
도리안은 생각하기도 싫은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예에."
힘이 축 빠진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의 가지로 가자. 병사 식당 음식은 정말이지 최악이니라.
라스가 제발 서리의 가지에 가자며 냉기로 만든 손을 흔들었다.
'병사 식당도 괜찮지 않아? 난 맛있는데?'
-그 딱딱한 빵 쪼가리와 스프가 맛있다니, 예전부터 느꼈지만, 네놈의 혀는 정상이 아니다. 혀에 가야 할 능력치가 전부 정신력으로 간 게 분명 하느니라.
'그럴지도.'
라온이 피식 웃었다. 전생의 어린 시절엔 임무를 마쳐야만 빵 한 조각을 받았다. 끼니마다 밥을 챙겨주는 이곳은 천국이나 다를 바 없다.
다만 민트초코와 파인애플 피자에 정신이 나간 놈에게 듣고 싶진 않은 말이었다.
'오랜만에 한 번 가볼까.'
-저, 정말이냐?
'그래. 가끔은 네 말도 들어줘야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지?
'아니야.'
라온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검술과 오러, 냉기가 모두 성장한 기분으로 간만에 라스의 혀를 만족시켜주기로 마음먹었다.
"도리안. 오늘 아침은 서리의 가지로 가자. 내가 살게."
"예? 웬일이세요?"
"가끔은 특식을 먹어줘야지."
"오! 알겠습니다!"
기분이 풀린 도리안과 함께 서리의 가지로 들어갔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테이블은 한자리 빼고 전부 차 있었다.
"오! 교관님!"
"교관님! 인사 박습니다!"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유아야! 교관님 식사는 내 앞으로 달아놔!"
아침 식사를 하던 병사들이 우르르 일어나 라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교관 아니라니까요."
"저희 자세를 매일 봐주시는데, 교관님이죠!"
"예!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됐으니, 식사하세요."
라온이 손을 젓고서 가운데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요즘엔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관이라고 부르고, 인사를 해와서 귀찮을 지경이다.
"오늘 정말 잘 오셨어요!"
유아가 양갈래 머리를 살랑이며 주방에서 달려 나왔다.
"신메뉴가 나왔거든요! 한 번 맛봐주시겠어요?"
유아는 방긋 웃으며 메뉴판에 새로 추가된 부분을 가리켰다.
"애플 미트 파이?"
"네! 간 사과를 넣어서 만든 촉촉하고, 달달한 고기파이에요!"
"음…."
안 끌리는데.
고기면 고기. 과일이면 과일이 좋다. 섞는 건 딱히 선호하지 않았다.
-먹어라! 골라라! 선택해라!
라스의 냉기가 불기둥처럼 치솟았다.
-본왕은 애플 미트 파이가 끌리느니라!
녀석의 목소리에 군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럼 그 파이 하나 주고, 도리안 너는?"
"전 모험을 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평범하게 정찰병 정식에 파인애플 쿠키 추가!"
"네!"
녀석은 배 주머니에서 파인애플 하나를 꺼냈다. 유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파인애플을 챙겼다.
-파인애플 쿠키를 추가해라! 본왕도 그 쫀득함을 느끼고 싶다!
"하아, 나도 파인애플 쿠키."
"네에!"
유아는 상큼하게 웃고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너 대체 파인애플이 몇 개나 있는 거냐?"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녀석은 아쉽다는 듯 배 주머니를 쓰다듬었다.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이 좀 무서웠다.
-철저한 준비성. 역시 본왕의 1호 부하답구나. 음식 재료를 철저하게 챙기라 지시해라.
'얼마 전에는 모르는 놈이라며.'
-....
라스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도리안과 잡담을 하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유아가 따끈따끈한 음식들을 가지고 왔다.
"오, 냄새 좋네."
"냄새만 좋은 게 아니라, 맛도 좋아요. 드셔보세요!"
유아가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라온이 옅게 웃고서 나이프를 들었다. 파이를 자르자, 사과의 새콤함과 고기의 짙은 육향이 조화롭게 퍼져 나왔다. 혀에 침이 절로 고였다.
-빠, 빨리! 빨리 먹어라.
'보채지 좀 마.'
파이를 덜어서 먹으려고 할 때 식당 밖이 분주해졌다.
쾅!
곧 문이 열리고, 얼굴이 빨개진 라딘이 들어왔다. 급한 일이 있는지 눈빛이 다급했다.
"라온! 여기 있었구나!"
그가 찾던 사람은 자신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사령관님의 호출이다!"
"이 시간에요?"
"급한 일이니까."
그의 말을 듣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웨이브의 징조가 일어났다."
"웨이브…."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웨이브? 웨이브. 웨이브!"
도리안은 웨이브를 세 번 외치고 목각인형처럼 굳었다.
"웨, 웨이브라고?"
"시발…."
"후, 올 때가 되긴 했지."
병사들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불안한 듯 포크를 내려놓고 입술을 깨물었다.
"유아야. 신메뉴는 나중에 먹어야겠다. 걱정하지 말고 있어."
"아, 네."
라온은 불안해하는 유아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라딘을 따라 식당을 나갔다.
-자, 잠깐! 어딜 가는 것이냐!
라스는 고무줄처럼 몸을 늘려서 파이 그릇에 꼭 달라붙었다.
-웨이브가 뭐든 본왕이 전부 해결해주겠노라! 한 입. 딱 한 입만 먹고 가라! 라온!
냉기로 만든 손으로 파이 그릇을 잡으려고 했지만, 당연히 잡히지 않았다. 그는 활시위를 떠난 활처럼 라온에게 끌려갔다.
-본왕은 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냐! 왜!
"웨이브으으으!"
서리의 가지는 파이를 먹지 못한 마왕과 겁쟁이의 절규로 가득 찼다.
129화
웨이브.
다른 말로 몬스터들의 파도.
하분 성이 전투의 지옥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름과 겨울 2번에 걸쳐 일어나는 이 웨이브 때문이었다.
스터린 산과 북해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과 5일 밤낮으로 싸우다 보면 하분 성에서 평생을 산 베테랑들도 죽고 싶어질 정도라고 한다.
웨이브의 이유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오마의 수작이라는 말도 있고, 여름과 겨울에 개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몬스터들이 먹이를 찾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밀고 나온다는 말도 있었다.
라온은 그 웨이브의 대책을 세우기 위해 사령관실에 와 있었다.
"숫자는?"
"눈에 들어온 놈들만 세어도 만 단위 이상입니다. 제 감일 뿐이지만, 작년보다 많아 보입니다."
"매번 어디서 그렇게 튀어나오는지 알 수가 없군."
밀랜드가 손에 쥔 종이를 구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쯤 도착하지?"
"이동속도로 볼 때 모레 새벽이면 성벽에서 관측될 겁니다."
"특별한 건?"
"투기를 사용할 수 있는 몬스터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아이스 트롤 워리어나 오크 투사, 북해 부근에선 만타쿤이나, 옥스톨 킬러, 크라트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1번 정찰대장 바르티는 파악해놓았던 엘리트급 몬스터를 모두 읊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지 말에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엘리트급도 많군."
"이번에도 목숨을 걸어야겠네요."
"그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어."
밀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정비관."
"예!"
"모레 새벽까지 성문과 성벽의 상태를 전부 확인하도록.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병창관."
"예!"
"무기를 확인하고, 벽 위에서 던질 수 있는 돌과 기름을 준비해라."
"명을 받듭니다!"
그는 회의장에 있는 간부들에게 임무를 주었고,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다급하게 회의장을 떠났다.
"테리안. 너는 나 대신 지휘부에서 총괄 업무를 맡는다."
"예!"
부사령관 테리안까지 떠나자 남은 건 라온뿐이었다.
"라온."
"예."
"웨이브에 대해 알고 있느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웨이브를 한 번 치르면 셀 수 없이 많은 사상자가 나온다. 계속 정찰을 보내고, 출정을 나가는 이유도 그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지."
밀랜드의 굳건한 눈동자가 비틀어진다. 노쇠한 장수의 애잔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웠다.
"무너진 성벽은 세우면 되고, 박살 난 성문은 새로 만들면 된다. 하지만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아."
"지키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최대한 많은 병사를 지켜다오. 그게 너와 도리안의 임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하마."
라온은 밀랜드에게 고개를 숙인 뒤 회의장을 나왔다. 그는 출정과 임무마다 모두를 살려서 데려오는 자신에게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도, 도련님! 어떻게 됐어요?"
사령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리안이 달려왔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긴장했나 보다.
"뭘 물어. 뻔하지. 우리 임무는 성벽으로 올라오는 몬스터를 막고, 병사들을 보호하는 거다."
"아이고!"
도리안이 주저앉아서 땅을 쳤다.
-망할 웨이브. 먹지 못한 애플 미트 파이의 원한을 갚겠노라.
겁에 질린 도리안과 반대로 라스는 차디찬 분노를 끌어 올렸다.
"진짜 죽었다. 웨이브를 어떻게 버텨!"
"1달 전에 웨이브가 온다고 말해줬잖아."
"전 운 좋게 비켜 갈 줄 알았죠! 진짜 인생 망했어!"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라온이 혀를 쯧쯧 차고 도리안의 목덜미를 잡았다.
"어? 어디 가십니까?"
"네가 이러면 다른 병사들이 위험해. 오랜만에 정신 교육 좀 하자."
"저, 정신 교육이라면…."
"뭘 물어. 광아검을 쓰는 나랑 놀아보는 거지."
"잠시만요! 지금 막 괜찮아졌…."
라온은 서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안 괜찮아."
* * *
땡땡땡땡!
귀가 따가운 종소리가 새벽을 밝힌다.
벽에 기댄 채 명상을 하고 있던 라온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왔군."
하분 성에 온 이후로 처음 듣는 비상종 소리다. 다급한 종소리만으로도 밖의 상황이 어떤지 예상이 갔다.
"도, 도련님."
"잘 준비해서 나와."
라온은 도리안의 어깨를 두드린 후 검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빨리 움직여!"
"아, 젠장 정비 덜 끝났는데!"
"병창을 열어!"
"보병과 창병은 성벽으로!"
병사들만이 아니라, 정비사나 대장장이들까지 이 추운 날 땀을 줄줄 흘리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후우…."
라온은 숨을 고르며 성벽으로 향했다.
-피 냄새가 나는구나. 오늘은 피가 강이 되어 흐르겠어.
라스는 찬 공기를 크게 들이키며 서늘한 미소를 흘렸다. 미트 파이의 원한을 갚으라는 자칭 마왕을 무시하고 성벽을 올랐다.
꿀꺽.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간다.
밤새 쌓인 설원 위로 녹색과 푸른색의 파도가 굽이친다. 오크, 트롤, 놀, 샤크몰, 크라트, 샤미르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몬스터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감각이 뛰어난 자신으로서도 세기 힘들 정도의 숫자에 손끝이 떨렸다.
몬스터들에게서 뿜어지는 광기와 식탐의 악취에 후각이 마비될 것 같았다. 놈들은 이 성안에 있는 인간들을 상자 안에 든 먹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후욱!"
"아…."
"미, 미쳤어!"
"시발!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성벽에 선 병사들은 무기를 쥔 손을 덜덜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의 눈빛에 어린 건 확연한 두려움이었다.
쿠구구구!
다른 몬스터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엘리트 몬스터들이 피워내는 강렬한 투기에 병사들의 떨림이 점점 더 심해졌다.
챠아아앙!
성벽 중앙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칼날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몬스터들이 피워내던 광기가 내려앉고, 정심한 기운이 그 자리를 채웠다.
"겁먹을 필요 없다! 하분 성에 몸담은 자라면 누구나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다! 정렬하라!"
"정렬하라!"
밀랜드였다. 어느새 성벽 위에 오른 그가 대지가 흔들릴 정도의 웅대한 목소리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방패병과 창병은 전방으로. 궁병은 그 뒤에 대기하라!"
직접 움직인 사령관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굳은 다리를 풀고 마음을 다지기 시작했다.
"대기하라!"
밀랜드는 설원을 가득 채우는 몬스터의 해일을 보고도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몬스터들에게서 풍겨오는 혈향과 노린내가 바로 가까이에서 코를 자극할 때쯤, 그의 검이 불을 뿜었다.
"쏴라!"
은색 칼날에 담긴 막대한 기운이 전방으로 뻗어나갔다.
콰아아아앙!
거리를 격하는 검기가 몬스터들의 선두를 몰아쳤고, 그 뒤로 정찰병과 궁수들의 손에서 화살이 떠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아아앙!
어둑한 남색 하늘 위로 은색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퍼버버버벅!
화살에 맞은 몬스터들이 뒤로 넘어갔지만, 파도는 그치지 않았다. 동족을 밟고, 뜯으며 성벽을 향해 밀려왔다.
"쏴!"
재빠르게 장전한 쇠뇌와 활이 다시 바람을 뿜었다. 두 번째, 세 번째 화살 무더기가 쏟아져도 몬스터들의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결국 성까지 도착한 오우거 한 마리가 그 거대한 주먹으로 성문을 후려치려 할 때 밀랜드의 칼이 뒤집혔다.
콰아아앙!
강기에 휘감긴 검격이 연속으로 쏟아지며 오우거와 오크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성벽을 사수하라! 절대 넘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압도적인 무력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성벽에 달라붙어 올라오는 해양 몬스터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창을 찔렀다.
모두가 손가락이 찢어지도록 무기를 휘두르고 활을 날렸지만 몬스터들의 광기는 멎지 않았다. 놈들은 얼어붙은 성벽을 평지처럼 타고 올라와 식탐 어린 손톱을 내리쳤다.
"허어억!"
메뚜기처럼 성벽을 뛰어 올라온 트롤이 병사의 머리를 뜯으려 할 때 라온이 움직였다.
촤아악!
광아검으로 트롤의 발목을 잘라 아래로 떨어뜨렸다. 넘어진 보병을 세워주려 했지만, 바로 옆에서 놀이 갈고리를 타고 올라왔다.
"끼아아아!"
창을 내지르려는 놀의 머리를 베어버리고, 우측으로 움직여 도끼를 든 오크의 가슴을 갈랐다.
퍼어엉!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성벽 위로 갈색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 해양 몬스터 스웰피쉬의 독 안개였다.
"아악!"
"끄아아악!"
독 안개에 노출된 병사들이 얼굴을 감싸 쥐며 뒤로 물러섰다.
터엉!
라온이 독 안개 속으로 들어가서 검을 내리쳤다. 붉은 검풍이 독 안개를 오크 쪽으로 밀어냈다.
"크아아아!"
"크라락!"
독 안개를 들이킨 오크들이 피부를 긁으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라온은 인사를 해오는 병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길고도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 *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된 전투는 태양이 서산에 걸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체 어디에 이 숫자가 숨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몬스터들의 물결은 끝이 없었다.
성벽에 서서 용맹을 뿜어내던 병사들은 추위와 피로에 지쳐 팔다리를 허우적댔고, 기계처럼 화살을 뿌리던 궁병들의 손가락에도 핏물이 가득했다.
끊임없이 오러를 운용하며 성벽을 사수하던 검사와 기사들도 오러 고갈 현상이 나타나 얼굴이 노랗게 죽어갔다.
그들 모두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웨이브 중 이번이 가장 지독하다고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옥 같은 전장에서 가장 건재한 사람은 하분 성에 온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은 라온이었다.
그는 불의 고리와 만화공이라는 희대의 연공법으로 육체의 피로를 풀고, 오러를 회복시키며 전장을 제집처럼 노닐었다.
그가 구한 병사만 100명이 넘고, 죽이거나 떨어뜨린 몬스터는 300마리에 가까울 정도였다.
퍼어엉!
라온이 성벽을 올라오던 트롤의 목을 베어버리고, 아래로 밀어버렸다.
"후우…."
굳어버린 듯한 허리를 폈다. 해가 지고 있음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며칠 동안 지속된다고 하니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으라라야!"
도리안은 어느샌가 검을 내려놓고, 설격대에게 고통을 주던 통나무를 아래에 던지고 있었다.
매번 무거운 걸 잘 든다 했더니, 힘이 장사였다. 통나무에 얻어맞은 오크와 놀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콰아아앙!
성문 앞에서 대지가 뒤틀리는 소리가 울렸다. 밀랜드다. 그는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성문에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학살했다.
사령관인 그가 굳건하게 버텨준 덕분에 성문과 주변 성벽은 조금의 손상도 입지 않았다.
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바닥으로 기우는 태양. 해가 떨어지고 나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모두가 잘 버텨주기를 바라며 피 묻은 검을 털었다.
"하아."
천천히 숨을 고르며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다시 움직이려고 할 때 감각의 바다에 처음 느끼는 기척이 잡혔다.
기사들이 무기와 갑옷의 정비를 위해 잠시 빠져서 정찰병들과 소수의 검사만 남은 우측 외곽. 그곳으로 시꺼먼 무언가가 날아가고 있었다.
'저게 뭐지?'
트롤의 머리통만 한 크기에 검은색 털로 뒤덮여 있는 기이한 외형의 몬스터다. 놈은 성벽에 닿는 게 인생의 목표라도 되는지 죽을힘을 다해 질주했다.
다른 사람은 저 몬스터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뭔가 불안해.'
처음 보는 몬스터라는 점. 현재 가장 약하다고도 할 수 있는 방향을 노리고 다가가는 게 왠지 마음에 걸렸다.
터엉!
라온이 땅을 박차고 우측 성벽으로 뛰었다. 시커먼 몬스터를 향해 검기를 쏘아냈다.
콰아아앙!
놈이 성벽에 닿기 전에 베었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갈라진 몸에서 뿜어진 불길한 기운이 그대로 폭발했다.
쿠구구구!
거미줄처럼 갈라졌던 금이 터지며 성벽이 중간부터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아악!"
"끄으으윽!"
벽 위에 있던 30명 정도의 병사와 검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몬스터들의 살점으로 가득한 땅에 떨어졌다.
"아아아아악!"
"내, 내 다리! 내 다리가!"
"흐으윽!"
"사, 살려줘! 팔이 꼈어! 몸이 안 움직여!"
무너진 성벽에 깔리거나 착지를 제대로 못 한 병사들이 피에 젖은 비명을 터트렸다.
"큭!"
"내려가지 마라!"
라온이 움직이려 할 때 밀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성벽을 사수해라! 작은 것을 보다간 큰 게 무너진다!"
그는 아래로 떨어진 병사들을 보며 입술을 물어뜯었다. 일개 검사나 병사가 아닌, 사령관으로서의 선택이었다.
맞는 말이다. 저들을 보호하다간 반만 무너진 성벽이 완전히 깨져나갈 테니까.
'하지만 나는….'
라온은 이를 드러내는 몬스터들을 보고, 검을 고쳐잡았다.
저들 모두는 함께 임무에 나간 적 있는 전우들이었고, 직접 자세를 봐주었던 동료들이었다.
지나가듯이 들었던 그들의 사연이, 우렁차게 외쳤던 그들의 목표가 자신의 심장을 두드렸다.
'나는 지휘관이 아니야.'
밀랜드가 원한 건 병사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살리라는 지시. 라온은 먼저 내려온 임무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라온!"
"라온 님!"
등을 후려치는 듯한 밀랜드와 도리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미친놈이로다.
라스가 쇳소리를 내며 비웃음을 흘렸다.
'다 방법이 있어.'
라온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수천 개의 광기를 마주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살아나가면 내가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되네.'
-…진짜 미친놈이로다.
130화
후우우우.
라온은 심장을 조여오는 몬스터들의 살의를 느끼며 숨을 골랐다.
-어떻게 버틸 생각이냐.
'감각을 최대한 열고 싸워야지.'
-감각으로 느껴도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네 뒤에 있는 것들을 보호할 때는 더더욱.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떨어지기 전부터 폭발에 휩싸였기 때문에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알았느냐. 네놈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한 것인지. 네게 남은 건 개죽음뿐이다.
'해보지 않고서는 몰라.'
-본왕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한쪽을 막지 않는 이상 지쳐 있는 네놈은 저들 모두를 보호할 수 없다. 정에 움직이다니, 한심한 놈!
라스의 말을 들은 것처럼 해양 몬스터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한심하다라….'
라온이 피식 웃으며 검기를 쏘아냈다. 반월을 그리며 쏘아진 붉은 칼날이 해양 몬스터 무리를 반으로 찢어버렸다.
'맞는 말이야.'
전생에서 정에 이끌리다가 죽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봐왔다. 암살을 할 때 그걸 이용한 적도 있고.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지금의 자신은 암살자 라온이 아니라, 검사 라온 지그하르트였으니까.
'견딘다.'
감각의 바다를 열고, 만화공을 끌어 올렸다. 이미 저지른 일. 저들을 구할 때까지 전력을 다해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견디는 정도로는 안 된다. 본왕에게 몸을 넘겨라. 저 몬스터들을 모조리 얼리고, 인간들을 구해주겠노라.
'그게 목적이었나? 오랜만에 본색을 드러내는군.'
-본왕의 목적은 처음부터 그거 하나였으니….
'집중하게 조용히 좀 해.'
"라온 님! 피해요!"
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검을 세울 때 도리안의 경고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도리안의 손에서 길쭉한 바위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콰아아앙!
떨어진 바위가 땅에 박히며 우측을 막는 벽이 만들어졌다.
"흐아압!"
도리안은 그 위로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발로 걷어차 벽을 조금 더 높게 만들었다.
'역시 저건 평범한 아공간 주머니가 아니었군.'
많은 물건을 넣는 것으로 모자라, 꺼낼 때 일시적으로 물건이 경량화되는 능력까지 있는 것 같다. 최소 유일급 이상의 주머니였다.
"제가 말했죠! 물건들에는 다 쓰임새가 있다고! 바위는 이럴 때 쓰는 겁니다!"
"허…."
헛웃음이 나왔다. 왜 바위를 가지고 다니냐고 뭐라고 했던 걸 지금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꼭 버티세요!"
도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그래. 고맙다."
이 정도면 충분해.
중앙과 좌측, 우측에서 우측이 막혔으니, 이젠 두 방향만 막으면 된다.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해졌다.
-바위를 이렇게 쓴다고? 이익!
어처구니가 없는지 라스는 넋이 나간 눈으로 도리안을 올려보았다.
"와라!"
라온이 앞으로 나가며 오러를 실은 포효를 터트렸다.
"끄륵!"
"끼이익!"
"크르르!"
그 사나운 으르렁거림에 몬스터들이 잠시 움찔거렸지만, 식욕과 광기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라라락!"
가장 먼저 돌진해 온 건 오크다. 벌겋게 녹이 슨 도끼로 머리를 노려왔다. 광아검으로 도끼를 튕겨낸 후 오크의 목을 베었다.
"끼아아!"
뒤를 이어 놀이 철퇴를 내리쳐왔다. 놈의 목표는 머리. 상체를 비튼 채로 검을 그어 놀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촤아악!
뿜어지는 놀의 핏물 사이로 시퍼런 도끼가 들이닥쳤다.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오크 투사의 기습이었다.
쩌엉!
검을 수평으로 세워 도끼를 막자마자, 오크 투사의 두 번째 도끼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알고 있어도 섬뜩하군.'
감각의 바다를 통해 오크 투사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는데도 놈이 뿜어내는 살기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다. 무력 이상의 투기와 투지였다.
치이잉!
라온이 차가운 눈빛을 발하며 검을 휘돌렸다. 풍차처럼 돌아간 검날이 두 개의 도끼를 튕겨냈다.
아래에서 멈춘 칼날을 그대로 위로 그었다. 오크 투사가 투기로 칼날을 잡으려 했지만, 그 정도에 막힐 검격이 아니었다.
촤아악!
가슴이 사선으로 갈라진 오크 투사가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쯧."
라온이 혀를 찼다.
'숨을 돌릴 틈도 없군.'
바닥의 진동 그리고 내려앉는 그림자. 위에서 아이스 트롤이 떨어져 내렸고, 아래에서 샤크몰이 올라오고 있었다.
화아아아!
검을 뒤로 젖힌 뒤 창처럼 내질렀다. 샤크몰이 솟구치고, 아이스 트롤이 떨어진 순간 칼날에서 뿜어진 불꽃이 두 괴물을 집어 삼켜버렸다.
"크르륵…."
"키이이익…."
밤을 지우는 화염의 꽃잎에 몬스터들은 겁먹은 듯 멈춰 섰다.
"끼아아악!"
뒤에서 사이한 목소리가 울렸다. 문어와 비슷하게 생긴 해양 몬스터 오르쿠스의 괴성이다. 머리가 좋은 놈답게 촉수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쿠구구구!
몬스터들이 동시에 달려든다. 자신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무방비 상태의 병사들을 노리고.
"젠장."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성벽 위에서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어주고 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 역부족이다. 밀랜드가 중앙을 비우는 순간 성이 무너질 수 있기에 그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어쩔 수 없이 혼자 해야겠군.'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고, 감각의 바다를 최대로 열었다. 만화공을 끌어 올리며 발을 굴렀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을 휘감아 검을 내질렀다.
광아검의 이빨이 오크를 찢어발기고, 연성검의 검세가 트롤의 사지를 가른다.
밀려오는 녹색의 파도를 향해 만화공의 불꽃을 뿜어냈다. 숨결처럼 뿜어진 불길이 반원을 그리고 퍼지며 전방의 몬스터들을 녹여버렸다.
"후우욱."
라온이 거친 숨을 뱉었다. 육체는 지쳐가지만, 정신과 감각은 점점 또렷해진다. 오랜만에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기분을 맛봤다.
쿠구구구!
도리안이 세워준 벽에서 진동이 일었다. 바위가 갈기갈기 깨지며 거대한 집게를 가진 해양 몬스터 크라트가 튀어나왔다.
투석기처럼 쏟아진 바위에 부상자들이 짓눌릴 것 같았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광아검을 후려쳤다. 사납게 휘어지는 검격으로 돌무더기를 쳐내고, 왼손으로 진혼검을 뽑았다.
요기를 담은 일섬. 크라트들은 그 단단한 갑각이 무색하게도 일격에 머리가 터지며 쓰러졌다.
"끼이이익!"
뒤에서 다시 오르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군.'
감각의 바다에서 일어난 파도를 향해 열기에 휘감긴 검을 내리쳤다. 새빨간 검기가 밤공기를 가르고 푸른 문어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날 쓰러뜨리기 전엔 이 뒤로 못 간다."
라온이 두 검을 교차하며 진각을 밟았다. 갈라지는 대지 위로 피어나는 붉은 기류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 * *
밀랜드는 홀로 수천의 몬스터를 압도하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만용이라 여겼다.
이곳에 작은 승리를 이룬 애송이가 실력을 과신하여 나섰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저 지옥 같은 곳에서 30명의 부상자를 보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하지만 라온은 버텼다. 도리안이 바위로 우측을 막아주었다고 해도 끊임없이 몰아치는 몬스터들의 공세를 견디고 있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고, 오크를 베고, 트롤을 태우고, 크라트를 부수며 홀로 무쌍의 위용을 자랑했다.
라온이 앞에서 완벽한 방어를 해준 덕분에 그의 뒤에 무방비로 쓰러져 있는 병사들은 떨어진 이후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정상적인 감각이 아니야.'
무력 이상의 감각.
라온의 기감은 그의 무력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예리한 감각을 토대로 펼치는 진중한 검술은 두꺼운 벽이 되어 병사들을 보호했다.
'심지어 강해지고 있군.'
그는 이 최악의 상황을 기회로 삼아 성장하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하분 성을 지키면서도 처음 보는 괴이한 경우였다.
"켈런!"
밀랜드는 라온의 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밤여우 기사단의 단장 켈런을 불렀다.
"예!"
"부상자들을 구해라."
"예? 하지만…."
"괜찮다."
그는 검기를 내뿜어 오르쿠스마저 잡아낸 라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버텨줄 것이다. 내려가서 부상자를 구해라!"
밀랜드가 검을 꽉 말아쥐었다. 불가능한 일을 이룬 라온을 보자 지쳐가던 늙은 육체에 다시 한번 활력이 돌았다.
콰아아아앙!
그의 검에서 뿜어진 막대한 검격이 전방의 몬스터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버텨라!"
하늘을 향해 찌른 검에서 강렬한 서기가 치솟았다. 달과 이어지는 듯한 검광을 본 병사들의 눈빛에 그와 같은 색이 입혀졌다.
"밤은 끝난다. 버티고, 버텨서 무찔러라!"
* * *
"네놈 이제는 붐 스컬도 제대로 조작 못 하는 거냐? 솜씨가 많이 녹슬었군."
푸른 로브의 사내는 중간부터 무너지는 성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밀랜드마저 속일 정도로 조작은 완벽했다. 검기를 쏘아낸 놈의 감각이 비상했을 뿐이다."
"그런 핑계를…음?"
그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린 금발의 검사를 보고 키득거렸다.
"저 미친놈은 뭐야?"
"저 녀석이다."
"뭐?"
"내 위험 감지 능력을 발동시키고, 방금 붐 스컬을 베었던 놈이 바로 저 어린놈이다."
"흐음…."
그 말에 검은 로브의 사내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별거 없어 보이는데."
"보면 알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검은 로브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푸른 로브 사내는 콧등을 찡그리며 라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겁 없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해 보이는데.'
어린 나이에 막강한 무력을 가졌고 용기가 뛰어나다. 하지만 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저런 놈에게… 음?"
푸른 로브의 사내가 말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뭐야?'
오크 투사가 놀의 시체를 이용한 완벽한 공격을 했는데, 놈은 그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쳐냈다.
이상한 건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오크나 트롤에 이어 크라트까지 전부 어딜 노릴 것인지를 파악하고 단숨에 끝을 냈다. 육감이 기괴할 정도로 발달한 놈이었다.
"저놈의 감각이… 가진 경지를 한참 넘어서고 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나도 트롤 샤먼의 위험 감지 능력이 없었다면 저놈에게 위치를 잡혔을 거다."
"으음, 검술에도 지독한 살의가 어려있어. 일검일살. 사람을 지키면서 저런 살검이라니 특이한 놈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조금 더 자세히 보라고 말하며 라온을 가리켰다.
"헉!"
턱을 긁적이며 라온을 살피던 푸른 로브의 사내가 둔탁한 신음을 흘렸다.
"지, 지금 설마…."
"그래. 저놈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다."
검은 로브 사내의 목소리가 진흙의 밑바닥처럼 가라앉았다.
* * *
오크가 도끼를 내리친다. 흐름을 읽고 오크와 도끼를 동시에 베었다.
베어울프가 손톱을 휘둘렀다. 공격을 흘려내고, 목을 갈랐다.
아이스 트롤 워리어가 포효를 터트리며 쇄도해온다. 거대한 주먹에 어린 투기가 번들거렸다.
여섯 번의 부딪침 끝에 트롤 워리어의 투기에 작은 틈이 벌어졌다. 만화공을 일으켜 빈틈을 내질렀다. 심장이 터진 트롤 워리어가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감각의 바다. 심상으로 만들어낸 냉기의 물결로 적의 움직임을 읽었다.
오싹하다.
연필을 깎고 또 깎아 심을 세우듯 집중력이 최고조에 올랐다.
적의 호흡이, 근육의 움직임이 눈에 선명하게 어렸다.
베고, 베고, 또 벤다.
도미노처럼 몬스터가 쓰러질 때마다, 뒤에 있는 병사들이 사라질 때마다 족쇄가 풀리듯 정신이 고조된다.
샤크몰이 땅에서 튀어나오기 전에 가슴을 터트렸다.
크라트가 갑각을 단단하게 만들기 전에 목을 베었다.
성문과 맞먹는 크기의 만타쿤을 일검에 갈라버렸다.
고양된 정신이 심장을 울린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능해진다.
시리도록 푸른 칼날이 베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뻗어나가는 발이 닿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붉은 핏물이 시야를 가릴 때마다 하늘이 변한다.
어둑했던 밤하늘에 광명이 깃들고, 다시 꽉 찬 달이 떠오른다.
그 만월마저 기울었을 때 눈앞에 남은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피에 젖은 대지를 밝히는 여명. 그 상서로운 빛 아래 시체들의 산이 쌓여 있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극한의 집중력을….]
[글래시아를 습득….]
라온은 메시지가 아니라, 떠오르는 금색의 태양을 보며 쓰러졌다.
131화
밀랜드가 성 중앙으로 쇄도하는 만타쿤을 향해 강기 다발을 쏟아냈다.
콰아아앙!
성문을 무너뜨리려던 거대한 가오리가 네 조각으로 쪼개진 채 오크 무리를 덮쳤다.
"사수하라!"
"사수하라!"
병사들은 그의 지시를 따라 외치며 성벽 위에서 검과 창을 휘둘렀고, 궁수들은 찢어진 손가락을 가죽으로 동여맨 채 시위를 튕겼다.
다시 새벽으로 돌아간 듯 군기는 하늘을 찔렀고, 그들의 열기는 얼어붙은 땅을 녹일 정도였다.
다만 하분 성의 분위기를 끌어 올린 건 사령관 밀랜드가 아니다.
정찰대의 호위 라온.
사령관조차 포기했던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머뭇거림 없이 뛰어내린 바보 때문이다. 홀로 몬스터의 해일을 막아선 무력과 망설임 없는 용기에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곳은 내가 막는다. 저 남자를 살려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울브스 용병단장 베토가 악을 지르며 라온을 가리켰다.
"단장이 안 시켜도 그러려고 했어!"
"저런 진짜 무인을 여기서 죽게 놔둘 수는 없지!"
"얼굴은 곱상하지만, 성격은 화끈하더라고. 마음에 들어!"
울브스 용병단은 강함을 숭상하고, 싸움을 즐기는 별종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몬스터들의 바다에 뛰어든 라온은 미친놈이자, 누구보다 울브스다운 사람이었다. 적당한 정도였던 호감이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쇠뇌를 쏴라! 손가락이 찢어졌으면 이빨로라도 당겨!"
라딘이 물기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성벽 아래에 떨어진 병사 중에는 3번 정찰대의 부하들도 있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들고 싶었지만, 방해만 될 게 뻔하다. 이곳에서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라온을 보조해! 뒤에서 몰려오는 놈들을 노려!"
"예!"
"알고 있슴다!"
정찰병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부서질 듯 비명을 지르는 쇠뇌를 당겼다.
"후우욱…."
비상 상황이라 임시로 설격대의 대주로 복귀한 에드퀼이 거친 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녹색과 푸른 파도를 홀로 감당하는 금발의 소년이 보였다.
'저 녀석….'
뛰어난 무력과 정립된 무학을 보고 라온이 잘난 집안의 아들임을 확신했다. 잘난 집에서 먹고 자랐으니, 세상이 좋게만 보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떠날 놈이니, 정찰병들을 위해주는 것도 자기만족이라 여겼다.
하지만 라온은 진짜였다.
그는 죽을 게 확실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지옥으로 내려갔다. 떨어진 부상자 중에 직속 부하가 있음에도 머뭇거린 자신과 달리 망설임이 없었다.
등골 사이로 전율이 일었다. 그저 잘난 집 아들의 유희라고 확신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창피해서 못 견디겠군.'
에드퀼은 이 전쟁이 끝나면 가장 증오했던 저 아이에게 사과하겠다고 다짐하며 위로 올라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앙! 쩌어엉!
밀랜드의 검에서 태양 빛 같은 섬광이 뻗어나간다. 그는 아껴둔 기운까지 끌어 올리며 중앙만이 아니라, 좌측의 성벽까지 사수했다. 많은 힘을 소모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라온을 돕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성벽 밖으로 떨어진 부상자 전부 구했습니다! 부상 정도가 심한 녀석도 있지만, 전부 살아 있습니다!"
밤 여우 기사단장 켈런이 다가와 소리쳤다. 흥분한 듯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라온만 남았습니다. 저희가 앞을 막겠습니다! 그동안 녀석을 데리고…."
"구하지 않는다."
밀랜드가 라온의 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예?"
"그, 그게 무슨!"
"사령관님!"
라온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에 성벽에 있던 모든 간부와 병사들이 밀랜드를 돌아보았다.
"병사들을 위해 홀로 몬스터 대군 앞에 선 녀석입니다! 버리다니요!"
"사령관님.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데요."
"아버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신 겁니까!"
라딘이 이를 악물었고, 베토가 눈매를 좁혔으며, 성벽 아래에서 병력을 총괄하던 테리안마저 올라왔다. 전부 직접 뛰어들 기세였다.
"흥분하지 말고, 저 녀석을 잘 보아라."
밀랜드가 손가락을 들어 라온의 등을 가리켰다. 그는 부상자들을 전부 구했음에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검을 휘둘렀다. 지치긴커녕 점점 힘이 나는지 검세가 예리해지고,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
"서, 설마…."
"지금 저기에서 무아지경에 빠진 겁니까?"
"아니,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사람들은 홀린 듯 검을 휘두르는 라온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무아에 들어간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저 녀석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절대 방해하지 말고, 주변을 정리해라!"
"아, 알겠습니다!"
"가자!"
"움직여!"
기사, 검사, 병사들은 모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저 작은 영웅이 더 강해지기를,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꽉 잡기를 바라며 각자의 위치를 사수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세 번째 태양이 떴을 때 물밀듯이 밀려들던 몬스터들의 파도는 끝이 났고, 성벽 아래에는 시체들로 언덕이 쌓여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웨이브가 끝났다!"
성벽의 병사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며 참고 참던 함성을 터트렸다.
그 폭발적인 함성에 화답하듯 라온의 검이 멈췄다. 고개를 들어 올리던 그는 이윽고 정신을 잃은 듯 뒤로 넘어갔다.
"이런!"
"라온!"
"잡아라!"
성벽 위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쓰러지는 라온을 향해 뛰어내렸다. 모두 지쳤지만 어디서 힘이 났는지 질풍처럼 달려갔다.
"라온!"
그건 사령관 밀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구보다 빨리 달려가 라온을 잡았다.
"어떤가요?"
"크게 다친 겁니까?"
"사령관님!"
검사, 기사, 병사할 거 없이 모두가 밀랜드의 입을 바라보았다.
"탈진이다. 체력과 오러가 한 방울도 남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싸우는 놈은 내 평생 처음이다."
밀랜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라온의 어깨를 꽉 잡았다.
"하아…."
"다행이네요."
"정말이지…."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라온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라는 눈빛 위로 경악과 감탄이 비쳤다.
"라온은 무사하다! 다시 승리의 함성을 질러라!"
"와아아아아아!"
"몬스터들이 전부 도망갔다!"
"하분 성이 이겼다!"
라온이 무사하다는 걸 알게 된 병사들과 기사들은 다시 승리의 환호를 내질렀다. 쉰 목소리와 지친 음성뿐이었지만, 기쁨과 환희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라온! 라온! 라온!"
"으아아아아!"
목이 터질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 사람 중에는 라온을 증오하던 설격대 검사들도 끼어 있었다. 설격대주 에드퀼을 시작으로 설격대 모두가 함성을 터트렸다.
"나 참."
밀랜드는 광휘가 내리쬐는 성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라온의 이름을 외친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 이런 영향력을 가지다니, 전무후무한 일이다.
"네가 깨어나면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 기대가 되는구나. 그리고 모두가 널 어떻게 볼지도."
그는 오러를 운용하여 지친 라온의 육체를 풀어주었다.
"이겼다!"
"웨이브가 3일 만에 끝났어!"
"와아아아아!"
기사, 검사, 병사할 거 없이 모두가 웃고, 울며 승리를 기뻐했다.
하지만.
한 마왕은 달랐다.
그는 라온이 읽지 못한 메시지를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글래시아?
라스가 몸을 덮은 냉기를 불기둥처럼 일으켰다.
-글래애애애시아?
다른 건 다 괜찮다. 능력치가 올라갈 줄도, 강해질 줄도 알았으니까.
하지만 글래시아는 예외다. 5개월을 내기로 걸었거늘 3개월 만에 습득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이 사기꾼 놈!
라스가 기절한 라온의 멱살을 쥐었다.
-일어나라! 네놈이 또 본왕에게 사기를 쳤음이 분명하노라!
악을 내지르며 냉기를 마구잡이로 뿜어냈다.
-일어나! 이 족제비 같은 놈아!
라스는 드물게도 근엄한 마왕의 어투를 버리고, 괴성을 터트렸다.
-끄아아아악!
인간들이 환호를 지르는 승리의 땅에 홀로 비명을 지르는 마왕이 있었다.
* * *
"저놈. 위험하군."
푸른 로브의 사내가 라온을 보며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싸우면서 강해지는 재능이라니….'
넓고 넓은 대륙에서도 보기 힘든 자질이다. 3일 동안 무아지경으로 칼을 휘두르며 성장하는 저 괴물을 보고 있으니,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말했지 않느냐. 보는 순간부터 감이 좋지 않았다고."
검은 로브의 사내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냥 놔둬서는 안 될 놈이다. 죽이자."
강해지는 속도,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성정을 보았을 때 하분 성에서 썩을 놈이 아니다. 언제가 에덴과 부딪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건 나중 일이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 녹색의 왕의 마석과 세이렌의 화신이다. 그중 저놈의 제거는 들어 있지 않아."
"언젠가 부딪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부딪칠 거다. 저런 놈을 키울 수 있는 건 육황 외에는 거의 없어!"
"그래도 지금은 아니다. 아직 계획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정해진 대로 움직여라. 빙아귀."
"그 잘난 계획이 뭔지 이제 좀 말해. 언제까지 네놈만 알고 있을 거냐!"
빙아귀라 불린 남자가 검을 로브의 사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말해주려 했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로브 안에서 꺼낸 지팡이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기이한 문자가 떠오르며 바닥에서 거대한 아이스 트롤 한 마리가 나타났다.
"어?"
빙아귀가 트롤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크기는 트롤 워리어보다 컸지만, 털의 색은 아직 성장을 끝내지 못한 백색이었고, 보통의 트롤에게는 없는 뿔이 이마 중앙에 솟구쳐 있었다.
"서, 설마! 로드인가?"
"맞다. 아이스 트롤 로드. 스터린 산 위쪽 협곡에서 태어난 녀석을 세뇌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이쪽이 먹힐 뻔했는데, 타이밍이 좋았지."
검은 로브의 사내가 아이스 트롤 로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는 필연적으로 주변의 몬스터를 끌어모아 복종시킨다. 로드를 나타난 걸 확인하면 밀랜드가 참지 못하고 병력들을 이끌고 나올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파고들 때로군."
"그렇다. 웨이브로 성벽이 무너지고, 많은 병사가 죽었으니, 로드의 총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기습공격을 할 게 분명하다. 우리는 그때를 노려서 녹색의 왕의 마석과 세이렌의 화신을 데리고 가면 그만이다."
"네놈이 왜 그렇게 계획했는지 알 것 같군."
빙아귀는 눈이 풀려 있는 아이스 트롤 로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녀석을 산 위쪽 협곡에서 데리고 왔다고 했나?"
"그렇다."
"그럼 산 정상에는 뭐가 있지?"
"무서워서 가지 못했다.
"뭐?"
"내 모든 감각이 절대 올라가지 말라고 비명을 지르더군. 저 위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다."
검은 로브의 사내의 뺨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흥. 겁쟁이 놈. 이 일이 끝나면 내가 직접 올라가서 확인해주지."
"계획이 끝난 뒤에는 네놈이 개죽음을 당하든 말든 상관없다. 지금은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안 그래도 그럴 거다."
빙아귀가 콧방귀를 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아까 그놈은 꼭 죽이고 싶은데 아쉽군."
"계획이 가장 우선이지만…."
검은 로브 사내는 라온이 끝까지 사수한 성벽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기회가 있다면 죽이는 것도 좋겠지."
* * *
"으음…."
라온이 눈을 떴다. 낡고 익숙한 천장. 정찰병의 숙소였다.
"얼마나 잔 거지?"
극한의 감각을 유지한 채 검을 휘두른 건 기억나지만, 그 이후는 멍하다. 마지막에 보았던 황금빛 태양만 생각났다.
-사흘이다.
대답은 꽃팔찌 속의 라스에게서 들려왔다. 녀석의 목소리는 찬 바람이 불어올 정도로 쌀쌀맞았다.
'그렇게나 잤어?'
-....
스멀스멀 피어난 라스가 대답 없이 푸른 얼굴을 들이밀었다.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네놈. 본왕을 또 속였더구나.
"어? 뭘?"
라온이 몸을 뒤로 젖혔다. 하도 속인 게 많아서 뭘 따지는지 모르겠다.
-파인애플로 본왕을 유혹해서 글래시아의 정보를 빼가지 않았더냐! 이 치사하고 더러운 인간 놈아!
"아…."
말을 들으니, 라스가 저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뭔지 알았다.
-음식을 이용해서 내기를 유리하게 가져가다니, 네놈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없는 것이냐!
마왕이 양심 소리를 하다니, 신박했다.
-이미 한 번 말했을 터다. 밥을 먹을 때는 케르베로스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고, 네놈 같은 사악함은 마계에서도….
"아, 잠깐."
말이 끝나질 않아서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 내기가 끝나지도 않았잖아. 벌써 화부터 내는 건…."
-끝났다.
"뭐?"
-내기는 이미 네놈의 승리로 끝났단 말이다!
라스가 폭주하듯이 냉기를 터트렸다. 분노의 냉기가 방을 가득 휘감았다.
"끝났다고?"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라스에게서 뿜어지는 냉기를 가볍게 털어낸 뒤 메시지를 확인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보이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3포인트?"
능력치는 올라갈수록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다. 한 번에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나 오르다니, 예상을 벗어난 보상이었다.
[극한의 집중력을 유지하셨습니다.]
[특성 <집중>이 생성되었습니다.]
새로운 특성까지?
<집중(1성)>
집중상태에 들어가는 시간이 짧아지고, 집중상태를 유지하는 시간은 길어진다.
"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전투나, 수련 모두에서 도움이 되는 굉장한 특성이다. 계속 성장한다면 성벽을 지킬 때처럼 극한의 집중상태에 들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끄으윽….
라스는 곧 폭발할 화산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맛을 다시며 마지막 메시지를 보았다.
[글래시아를 습득하셨습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5성이 되었습니다.]
"어?"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한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글래시아 습득?'
이걸 언제?
검술과 오러 그리고 감각이 크게 성장한 건 알고 있었지만, 글래시아를 습득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수속성 저항력도 올랐고.'
냉기를 꾸준히 운용한 덕분인지 수속성 저항력도 5성이 되었다.
-이제 알겠느냐. 본왕이 왜 화를 내는 건지!
복어가 몸을 부풀리듯 라스의 냉기가 둥글게 응축되기 시작했다.
-본왕의 유일한 약점을 이용하여 내기를 이기려 들다니! 네놈은 악마라도 되는 것이냐!
악마의 왕에게 악마 소리를 듣다니, 이것 또한 신박했다.
-본왕은 인정하지 못한다! 이번 내기는 시작부터 잘못되었어! 본왕의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절대 보상을 내어주지 않으리라!
"흐음, 오랜만에 해볼까?"
-무얼 하겠다는 것이냐! 본왕은 절대 꺾이지 않는다!
"애플 미트 파이."
-뭐? 그, 그걸 왜 지금 말하는….
"애플 미트 파이에 파인애플 피자 추가."
—....
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만으로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애플 미트 파이, 파인애플 피자에 파인애플 쿠키 추가."
-....
이래도 안 넘어오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이제 음식으로는 안 되는 건가?'
하긴 마왕이 음식에 몇 번이나 자존심을 파는 건 좀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고 새로운 딜을 제시하려 할 때였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커흠!
라스의 몸집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녀석은 창피한지 고개를 홱 돌렸다.
대답이 없는 건 거절이 아니라, 내기를 인정하는 중이라 그랬던 것 같다.
"허…."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되지만, 파이와 피자에 쿠키면 마왕의 의지를 꺾을 수 있었다.
쉽네.
너무 쉬워서 무서울 정도다.
하지만 라온도, 라스도 몰랐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모든 능력치가 4포인트 상승합니다.]
[분노에게 다섯 번째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5연승의 효과로 추가 보상이 생성됩니다.]
132화
-여, 연승?
라스의 입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아, 연승이 있었지."
라온이 메시지를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연승의 추가 보상은 이번에도 적용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 어차피 능력치 몇 개가 올라가는 정도잖아."
4연승 때는 근력과 민첩성, 기력 능력치가 1에서 2포인트 정도 상승했었다. 이번에도 그 수준일 테니, 그렇게 엄청난 보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전부 본왕의 본체에서 가져오는 능력치지 않느냐.
"음식을 생각하자고, 음식을."
-쯥.
라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추가 보상으로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어?"
-모, 모든 능력치?
개별 능력치가 아니라, 모든 능력치가 상승한 것에 라온과 라스 둘 다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추가 보상으로 두 특성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연승 덕분에 원래 한 개의 특성 등급이 상승해야 하는 보상이 두 개로 늘어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연승의 보상은 5단위마다 크게 뛰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드네."
라온이 사라지는 메시지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특성의 성취를 올리는 건 시스템이 있음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 특성의 등급을 2개나 올려주다니, 예상을 한참 뛰어넘은 보상이었다.
-왜, 왜 특성이?
라스는 이해할 수 없는 듯 머리를 바르르 떨었다.
-모든 능력치만으로도 분노가 이는데, 특성의 등급을 왜 올려준다는 말이냐!
"네가 말했잖아."
라온은 손을 저어서 불길처럼 일어나는 라스의 냉기를 짓눌렀다.
"완벽한 시스템은 소유자를 강하게 만드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고. 이번에도 그런 거지 뭐."
라스가 평소에 본인 자랑처럼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 그래도 이건 아니니라. 이런 추가 보상이 있을 줄 알았다면 이렇게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잊은 사람이 문제이지 않을까? 연승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끄으윽….
라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이를 바득 갈았다.
라온은 기대감을 입가에 걸치고 떠오를 메시지를 기다렸다
[암습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글래시아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어?"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암습은 그렇다 치고, 방금 습득한 글래시아의 등급이 상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웅.
바로 눈을 감고, 감각의 바다를 열었다.
'미쳤군.'
감각의 바다 범위가 마지막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넓어졌고, 그 물결은 더 순수해졌다. 이 숙소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까지 무엇을 하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부르르르!
코앞에서 거대한 해일이 치솟았다. 누구인지는 뻔했다.
-크으으….
눈을 뜨니, 예상대로 라스가 어마어마한 냉기와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다.
화아아아!
화산처럼 폭발한 냉기의 물결이 라온의 전신을 뱀처럼 휘감았다.
-오늘이야말로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겠노라!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또 능력치만 퍼줄걸?"
라온은 진심으로 충고했다. 아직 몸 상태는 회복되지 않았다. 단전도 거의 비었고, 정신은 멍하며, 뼈마디가 아렸다. 하지만 지금의 라스에겐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닥치거라! 텅 빈 네놈 따위는 그대로 집어삼킬 수 있노라!
라스는 그 말과 함께 끌어 올린 냉기와 분노의 해일을 내리쳤다. 무시무시한 냉기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 몸과 정신을 짓눌렀다.
"음…."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수속성 저항력이 상승했음에도 피부가 찢어질 것 같은 냉기다. 확실히 라스도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발전 속도는 자신이 우위였고, 이젠 최강의 방패까지 생겼다.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
후우우우.
라온이 숨을 고르며 2성에 오른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이미지로 그려 낸 냉기의 벽이 마나 회로에 세워져 라스의 냉기를 차단했다.
치이이익!
냉기가 냉기를 차단하며 살을 으깨는 듯한 고통이 급속도로 줄었다. 육체의 통증이 사라지니, 정신적인 부담도 감소했다. 이 정도라면 하루종일. 아니, 평생도 견딜 수 있었다.
-얼어붙어라! 사기꾼 족제비 놈아!
라스는 그걸 알고 있을 텐데도, 분노에 잠식되어 끝없이 냉기를 쏟아부었다.
'언제 끝나려나.'
살짝 미안한 마음이 있긴 해서 하품을 참으며 조금 더 맞아주었다.
적당히 참다가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메시지가 올라왔다.
"아, 능력치 올랐다."
-어훅!
* * *
-정말이겠지?
또 능력치를 빼앗긴 라스는 쪼그라든 채로 불안에 떨었다.
'그래. 약속했으니까.'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 덕분에 많은 이득을 얻었으니, 음식을 먹는 약속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나도 배가 고프기도 하고.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라스가 아니더라도 밥 생각이 간절했다. 겉옷을 걸치고 방을 나갔다.
"어? 도련님!"
물수건과 물을 가지고 오던 도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방금."
"몸은 괜찮으세요? 사흘 동안 누워만 계셨어요!"
"조금 멍하긴 한데,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빙빙 돌렸다.
"정말 다행이에요! 사령관님하고 회복사들을 찾아갔는데, 괜찮으니,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만 해서…."
도리안은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겠다고 중얼거렸다. 자신이 쓰러져 있는 동안 계속 걱정해줬던 것 같다.
고맙다고 말하기엔 살짝 민망해서 그냥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근데 일어나자마자, 어디 가세요?"
"배가 등가죽에 붙었다. 밥 좀 먹어야겠어."
"같이 가요! 저도 먹을 때가 됐으니까."
녀석은 물을 내려놓고 옆으로 붙었다.
"아, 그리고 나가서 놀라지 마세요."
"뭘?"
"곧 알게 되실 거예요. 흐흐."
"무슨 소리인지."
-저놈은 무시해라. 빨리 가서 본왕과의 약속을 지켜라.
뜻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릴 때 라스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팔을 흔들었다.
'알겠으니까. 그만 보채.'
라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숙소를 나섰다.
"수성이 이렇게 편한 건 오랜만이네."
"잠을 더 잘 수 있다는 게 가장 좋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어."
"그 사람만 깨어나면 다 끝나는데."
평소보다 성 내부가 분주했다. 웨이브를 이겨낸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어?"
"음?"
"저, 저 사람!"
병사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리의 가지로 향할 때 시끄럽던 거리가 손아귀로 움켜쥔 것처럼 조용해졌다. 입을 다문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라온을 향하고 있었다.
"라온 님!"
"라온!"
"일어난 거냐!"
"드디어 일어났다! 이번 웨이브의 영웅이!"
"와아아아아!"
병사, 기사, 검사할 것 없이 모두가 라온의 곁으로 달려와 환호를 질렀다. 눈과 입이 함께 움직이는 진짜 미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그가 깨어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왜들 이러지?'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시간을 끌어서 병사들을 구했을 뿐이다. 얼굴만 마주쳤던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이유를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라온은 아직 환자다! 전부 물러나!"
귀가 따가운 환호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테리안이다. 그가 자신의 팔을 잡아끌며 병사들을 물렸다.
"헙!"
"아, 알겠습니다!"
"라온 님! 꼭 회복하셔서 제 술을 받아주십시오!"
"제 동료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겠습니다!"
병사들은 물러나면서도 인사 한마디를 남겼다. 감사하다든가, 빨리 회복 하라는 말로 전부 자신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자네는 여전하군."
테리안은 미간을 좁힌 라온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예?"
"친분이 없던 보병이나, 기사, 검사들이 왜 자네를 걱정하고, 환호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건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를 구하기 위해서 앞을 막은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성벽 아래로 떨어진 사람 중에 정찰병들이 꽤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네와 별 관계가 없었지. 그중에는 자네를 무시했던 설격대 검사도 있었고."
그는 라온의 이름을 외치는 병사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자네는 그중 누구도 외면하지 않고, 모두를 위해 검을 들고 벽을 세웠어. 사령관조차 포기한 병사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앞을 막은 영웅. 그런 남자에게 끌리지 않는다면 하분 성에 있을 자격이 없지."
테리안의 눈이 푸르게 반짝였다. 하분 성의 무인들이 영웅에게 끌린다는 말은 그도 예외가 아닌 것 같았다.
"이건 부사령관으로서 전하는 감사의 인사일세."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라온. 우리 병사들을 구해주어 고맙네. 훗날 자네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이 은혜를 갚겠네."
얼굴을 들어 올리는 테리안과 눈을 마주쳤다. 의지를 담은 미소. 진심이 어린 웃음이었다.
"저도!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언제라도 불러 주십시오!"
"라온! 나도 도와줄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간다!"
"나, 나도 도울 수 있다면 가겠어."
병사들과 기사들, 정찰병들만이 아니라, 설격대 검사들도 부르기만 하라며 손을 들었다.
"하…."
라온이 격한 숨을 토했다. 가슴이 탈 것처럼 뜨겁다.
이곳에 오면서 보고 싶었던 장면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싸움 중 혹은 싸움을 끝낸 후 모두가 하나가 되는 듯한 모습. 그걸 직접 겪으니, 심장이 열기로 박동한다. 또 하나의 감정을. 이 세계를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 된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병사와 기사들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안 가냐?
* * *
라온은 라스의 재촉에 사람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서리의 가지로 들어갔다. 내부에서도 밥을 사겠느니, 술을 바치겠느니, 평생 무료로 먹으라는 등 아주 난리가 났다.
"아까 말했던 게 이거였어?"
"예. 제 예상보다 더했지만요."
도리안이 손부채질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검사님!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주방에서 유아가 양갈래 머리를 찰랑이며 달려왔다.
"그래."
"다행이에요. 찾아갔었는데!"
"왔었다고?"
"네. 죽을 가져갔었는데, 드시질 못하셔서."
"그건 제가 먹었습니다!"
도리안이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어쨌든 고맙다."
"아니에요. 단골 관리는 필수죠."
유아가 헤헤 웃으며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진심이든, 농담이든 저렇게 말하니 귀엽게만 보였다.
"오늘은 뭘 드시겠어요?"
"이전에 못 먹은 애플 미트 파이랑…."
-흐으읍!
애플 미트 파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라스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기대감이 가득 차오른 호흡이었다.
"아, 죄송해요."
유아가 눈매를 찡그렸다.
"지금 사과가 다 떨어져서 애플 미트 파이는 품절이에요."
"없다고?"
"예. 웨이브가 끝난 후에 손님들이 엄청나게 오셔서요."
-어? 뭐?
라스의 눈이 탁 풀렸다. 입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니 다시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럼 파인애플 피자는?"
"그건 제가 아니라…."
유아의 시선이 도리안을 향했다.
-빠, 빨리 물어봐라! 본왕의 1호 부하에게 파인애플과 사과가 있을 게 분명하다!
라스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열기 가득한 눈으로 도리안을 보았다.
"아쉽게도 둘 다 없네요."
도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웨이브가 끝난 기념으로 파인애플 쿠키를 뿌려서 다 떨어졌어요."
"사과는?"
"한참 전에 라온 님이랑 정찰병들에게 간식으로 드렸잖아요."
그 말을 들으니, 예전에 녀석이 주었던 노란 사과가 생각났다. 아침에 좋다면서 매번 사과를 주었었다.
"주머니에서 사과랑 파인애플이 계속 나오면 개연성이 없잖아요."
도리안은 배 주머니를 긁으며 헤헤 웃었다. 이 녀석 입에서 개연성이라는 말이 나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위랑 통나무는 괜찮고?"
"그건 자주 쓰는 물건이잖아요. 필수죠!"
"허…."
라온이 헛바람을 흘렸다. 도리안의 상식에는 무언가 큰 문제가 있었다.
'신기한 녀석이….'
-저런 쓸모없는 놈!
라스가 도리안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1호 부하라더니, 순식간에 버려버린다.
-애플 미트 파이, 파인애플 피자, 파인애플 쿠기. 셋 모두 없다고? 이럴 수는 없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어!
라스의 목소리에 크나큰 절규가 어렸다.
-어떻게 할 것이냐!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재료가 없는 걸 어떻게 해.'
-본왕은 그런 거 모른다. 약속했으면 지켜라!
'좀 가만히 있어.'
귀를 울리는 라스를 밀어내며 유아를 보았다.
"그럼 지금 되는 건 뭐가 있어?"
"기사 정식, 검사 정식, 정찰병 정식이 있어요. 기본적인 통구이도 돼요."
"그럼 정찰병 정식을 하나….
-빵, 스튜, 구운 고기에 스크렘블 에그! 평범해서 지루한 식단! 본왕이 가장 싫어하는 게 정식이니라!
라스가 악을 내지르며 복어처럼 몸집을 뾰족하게 부풀렸다. 평소라면 녀석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능력치와 특성을 빼앗긴 오늘은 새끼복어처럼 작아서 왠지 안쓰러웠다.
'어쩔 수 없네.'
라온은 오늘이 숨겨둔 비밀 무기를 쓸 때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이건 어때?'
-닥쳐라! 본왕의 미식욕은 그리 쉽게 해결되지….
'루난이 준 구슬 아이스크림 아직 남았는데.'
-어?
뾰족했던 라스의 냉기 가시가 동그랗게 말려 들어갔다.
'너도 알잖아. 루난이 떠날 때 아이스크림 준 거. 그거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
-구, 구슬 아이스크림….
광기로 물들었던 라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내가 알기론 그중에 민트초코도….'
-민트초코!
민트초코를 말하자마자 라스의 입에서 냉기가 대나무처럼 솟구쳤다. 자동반사급 반응이었다.
-크, 크흠.
라스는 침이 흘러내리는 듯한 입을 닫고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그….
'음?'
-2개는 먹어주겠지?
녀석은 화가 다 풀린 선선한 목소리로 손가락 2개를 들어 올렸다.
미식가란 무엇일까.
라온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 * *
밀랜드와 간부들은 사령관실에서 웨이브 이후의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라온이 일어났다고 하니, 하루 정도는 축제를 여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도 동의합니다. 그간 찔끔찔끔 쉬었으니, 딱 하루 정도는 푹 쉬도록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날 라온에게 표창을 수여하면 병사들의 사기를 최고치로 끌어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하분 성의 영웅은 라온이니까요."
간부들의 입에서 계속 라온의 이름이 나왔다. 큰 호감이 깃든 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축제라, 하루 정도면 괜찮겠지."
밀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브가 끝나면 한동안 몬스터가 공격해오지 않는다. 라온도 깨어났으니, 하루 정도는 축제를 즐겨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축제 건은 찰스가 진행하고, 라온에게 줄 상에 대해서…."
다음 안건을 말하려고 할 때 사령관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렸다. 정찰을 나갔던 2번 정찰대장 키젠이었다.
"사, 사령관님!"
키젠은 문을 부여잡은 채 턱을 덜덜 떨었다. 정찰대 중 가장 용기 있는 그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자네. 대체 뭘 보고 온…."
"로, 로드가! 아이스 트롤 로드가 나타났습니다!"
그 섬뜩한 말에 흥겨움이 가득했던 사령관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133화
리메르는 불만이 가득한 듯 콧등을 찡그린 채 가주전 알현실로 들어갔다.
글렌은 여느 때처럼 리메르를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 턱을 괴고 있었다.
"가주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또 무슨 헛소리를 하고 싶어서 온 것이냐."
"라온이 그렇게 엄청난 활약을 했으면 바로 알려주셔야죠! 왜 혼자만 보물처럼 껴안고 계신 겁니까!"
"후우, 로엔."
글렌이 낮은 한숨을 뱉으며 우측에 서 있던 로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 아닙니다."
로엔은 이번 일과 상관없다는 듯 빠르게 손을 저었다.
"그럼 저놈이 어떻게 알았다는 거냐. 직접 비연회에 가서 훔쳐 듣지 않고서야…."
"오, 정답! 비연회 천장에 붙어서 라온의 보고를 읽고 왔죠."
리메르가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헤헤 웃었다. 비연회에 빈틈이 많다고 중얼거리는 건 덤이었다.
"내일부터 비연회에 천검대를 보내야겠군. 뻘건 굼벵이가 천장을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굼벵이? 요즘 날씨에 굼벵이가 있어요?"
"네놈을 말함이다!"
"에이, 전 나비죠. 이렇게 팔팔 날아다니는데, 굼벵이라뇨!"
"후우, 됐다. 네놈하고 입씨름을 해봐야 머리만 아프지."
글렌이 혀를 차고, 눈을 내리감았다.
"지금은 저 말고 라온을 생각해 보자구요. 그 녀석 정말 상상 이상 아닙니까?"
리메르는 활짝 핀 미소를 지으며 방방 뛰었다.
"성벽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수천 몬스터 앞을 막아서다니, 미친놈도 그런 미친놈이 없습니다!"
"음…."
글렌이 눈을 감은 채 살짝 입맛을 다셨다.
"근데 그놈이 평범한 미친놈이 아니었죠, 삼일 밤낮을 버티며 모두를 구하고, 웨이브를 승리로 이끌었잖아요. 와, 진짜 누구 제자인지, 스승 얼굴 좀 보고 싶네."
리메르는 분명 잘 생기고, 마음이 따뜻할 거라며 떠들었다.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불가능을 이뤄가는 라온을 보고 있으면 젊은 시절 가주님이 생각납니다. 아니, 가주님보다 더해요."
"더하기는 무슨."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글렌이 눈을 떴다. 입가도 가늘게 올라간다. 손자가 본인보다 더 하다는 칭찬에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분 성의 무인들은 정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대신 전투를 좋아하고, 의리가 넘치죠."
리메르는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씩 웃었다.
"지금 라온은 하분 성의 영웅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훗날 녀석의 뒤에 하분 성이 서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이렇게 될 걸 아시고, 라온의 시험을 허락해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허무해 보이는 눈동자에 옅은 열기가 일었다.
"그저 그 아이라면 어딜 가든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배경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 지금 라온을 인정하신 거예요? 내일은 서쪽에서 해가 뜨겠는데?"
리메르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조용히 해라."
"전 라온이 많은 경험을 쌓고 오길 바라며 하분 성을 고른 건데, 병사들을 위해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깜짝 놀랐어요."
리메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장난기가 사라진 공간을 진중한 빛이 채웠다.
"차갑고 냉소적이었던 라온이 무력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성장한 것 같아서 가슴이 울컥했어요."
"음."
글렌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동의하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자식을 키워보지 않았지만, 내 자식이 잘 큰 것 같아서 굉장히 뿌듯하더군요."
"사고도 치지 않고, 끝없이 발전해나가는 자식은 흔치 않다. 그리고…."
그가 입매를 비틀며 리메르를 내려보았다.
"그 아이는 나와 다른 길을 걷지만, 내 손자다. 네놈의 자식이 아니야."
"어? 인정했다! 로엔 님 들었죠! 방금 자기 손자라고…."
"그, 그건…."
"들었습니다!"
로엔이 드물게 크게 소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북망산이 내려앉는 거 아닐까요? 아니면 하늘이 무너질지도…."
"시끄럽다!"
글렌이 호통을 쳤고, 리메르는 능글맞게 웃어넘겼다. 라온의 소식이 들어간 알현실은 오늘도 쌓인 정이 흐르고 있었다.
* * *
나름 화기애애한 지그하르트 알현실과 달리 하분 성 회의실의 분위기는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번 정찰대와 4번 정찰대가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1번 정찰대장 바르티가 급하게 끄적인 서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우거에 맞먹는 덩치, 가슴에 박힌 왕의 문양 그리고 이마 위에 외뿔까지. 전부 아이스 트롤 로드의 특징입니다. 확실합니다. 로드가 나타났습니다."
"끄응!"
"젠장! 트롤 로드라니…."
"웨이브가 끝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회의실에 있는 간부들은 트롤 로드의 등장에 한숨을 내쉬거나,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자, 잠깐 돌연변이나, 오우거일 수도 있…."
"로드의 특징. 아니, 왕급 몬스터들의 특징인 몬스터들을 복속시키는 능력도 목격되었습니다."
"맞습니다. 트롤만이 아니라, 오크와 놀, 해양 몬스터들까지 놈에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1번 정찰대장과 4번 정찰대장이 차례로 말을 이었다.
"빌어먹을!"
"그럼 진짜잖아!"
마지막 희망까지 깨진 간부들이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시간이 지난다면 로드의 밑에 모여든 몬스터들로 인해 제2의 웨이브. 아니, 웨이브보다 더 큰 해일이 몰아칠 겁니다."
회의실에서 말이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래도 딱 하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 이런 상황에 좋은 소식이 의미가 있나?"
"저희에게는 유리한 소식입니다."
바르티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번째 서류를 들었다.
"아이스 트롤 로드의 털은 아이스 트롤 특유의 푸른색 털이 아니라, 백색 털이었습니다. 즉, 놈은 아직 성체가 아닙니다. 완성되지 않았죠."
"아!"
"그, 그러면…."
"놈이 완성되기 전에 끝을 내야겠군."
밀랜드가 지도에서 로드가 관측된 지점을 손가락으로 내리찍었다. 강력한 압력에 책상이 짓눌렸다.
"내일 바로 출정에 나간다."
"내, 내일이요?"
"너무 빠릅니다! 병사들을 준비시키려면…."
간부들은 아직 부상자가 많아서 모두가 움직이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반대했다.
"병사들은 가지 않는다."
밀랜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지 않은 신장에서 거인과 같은 위압이 흘러넘쳤다.
"기사와 검사 그리고 1번과 2번 정찰대들만 움직인다. 정예로 움직여 최대한 빨리 로드의 숨통을 끊겠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속도입니다. 더 많은 몬스터가 모이기 전에 로드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우측에 앉아 있던 테리안이 두 눈을 빛냈다.
"음…."
"그게 피해를 줄일 유일한 방법이긴 하군."
"그래. 사령관님이라면 충분히 로드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몬스터를 막으며 시간만 끌면 돼."
간부들도 그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출정 준비를 시작해라. 부상자가 많은 설격대와 나머지 정찰대와 병대는 남아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잠시 괜찮겠습니까."
간부들이 일어서서 회의실을 나가려 할 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라온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저도 가겠습니다."
라온은 밀랜드의 가라앉은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넌 아직 부상이 회복되지 않았다. 육체와 정신 모두 만전이 아니야."
"그래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 네 무력이라면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이 이상 무리시킬 수는 없다."
"사령관님."
"네 마음은 그날의 일로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충분히 느꼈어. 이번에는 쉬어라."
밀랜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로드는 우리에게 맡겨."
"확실히 목을 베어서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라온 님 대신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오겠습니다."
부상을 입은 라온이 싸우겠다는 투지를 비치자, 간부들의 눈동자에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널 남기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나를 대신해서 성을 부탁하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막아다오."
밀랜드가 옅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부탁하마."
"알겠습니다."
라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장을 나갔다.
'괜찮은 먹잇감을 놓쳤네.'
로드를 잡는다면 영혼의 격과 능력치가 오를 게 분명하기에 조금 아쉬웠다.
-멍청한 놈. 어차피 네놈에겐 기회가 없다. 저 늙은이가 상대할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그건 그렇네.'
라스의 말대로 로드를 상대할 사람은 사령관 밀랜드로 정해져 있다. 거기까지 가서 들러리를 서느니, 이곳에서 몸을 완벽하게 회복시키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돼지 새끼도 아니고, 뭘 그리 욕심이 많은지 모르겠구나.
'네 식욕만큼은 아니지.'
-무슨 소리냐! 본왕에게 식욕 따위는 없다! 그저 미식에 대한 욕구만….
'네. 그러시겠죠. 민트초코 소리만 들으면 침샘이 고장 나시는 마왕님.'
-끄으윽!
라온은 라스를 놀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 * *
다음날 새벽.
밀랜드가 이끄는 출정대는 설원의 끝에 있을 로드의 목을 노리고 성을 뛰쳐나갔다. 부상이 없는 정예만 움직였기 때문에 그 속도는 평범한 출정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라온은 하얀 폭풍을 일으키며 멀어지는 출정대를 지켜보다가 성벽을 내려왔다.
"아, 진짜 아쉽네. 로드의 목은 내가 베었어야 했는데."
함께 남은 도리안이 되지도 않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출정에서 빠졌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환호를 내지른 주제에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헛웃음만 나왔다.
'네 1호 부하. 참 대단해.'
-…본왕은 모르는 놈이다.
라스는 이럴 때만 도리안을 모르는 척했다.
"오늘은 뭘 하실 거예요?"
"연공 해야지. 빨리 회복해야 하니까."
"도와드릴까요?"
"괜찮으니, 네 할 일이나 해."
"옙!"
그 말을 기다렸는지 도리안이 경례 자세를 취한 뒤 숙소 반대편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서리의 가지에 가서 유아랑 놀 생각인 것 같았다.
'꽤 친해졌나 보네.'
-파인애플 소녀와 정신 연령이 딱 맞지 않느냐. 아니, 솔직히 저 녀석이 더 어리니라.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긴 하지.'
너도 비슷하고.
발작을 일으킬 게 뻔해서 마지막 말은 꺼내지 않았다.
-정신연령이라고 하니 생각나는군. 본왕은 마계에서 고고한 정신을 가진 존재로 이름이 높았느니라. 다른 마왕들이 추한 짓을 할 때도 본왕만큼은 언제나 우아하게….
'빨리 가서 연공이나 해야겠네.'
-들어라! 피가 되고 살이 될 이야기니까!
'네 자랑은 이미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었어.'
-끄윽, 매번 말하지만, 네놈은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라온은 자칭 우아한 마왕의 저주를 무시하고,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후우우…."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순도 높은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며 불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고리가 공명하며 몸 상태를 끌어 올렸을 때 만화공을 운용했다. 단전에서 치솟은 용암 같은 열기가 마나회로를 질주하며 전투의 잔재를 녹이기 시작했다.
집중 특성 덕분인지, 능력치가 올랐기 때문인지 마나 회로를 내달리는 오러의 흐름이 손에 잡힐 것처럼 세밀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가능하겠어.'
라온이 평소보다 많은 마나를 끌어들였다. 어깨가 살짝 떨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지만, 더 높아진 무학과 감각을 이용하여 그 흐름을 통제했다.
마나의 변화 덕분에 집중력이 고조된다. 자연스럽게 호흡하듯 불의 고리를 돌리고, 만화공을 운용했다.
창밖에서 쏟아지던 태양 빛이 가라앉고, 달이 하늘의 중심에 올라섰을 때 라온이 눈을 떴다.
번쩍!
이미 가라앉은 태양이 다시 떠오른 듯 붉은 눈이 타오른다. 새벽과 달리 힘으로 가득 찬 눈동자였다.
'내일쯤이면 오러는 전부 회복할 수 있겠어.'
라온이 단전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능력치와 무학 성취가 많이 올랐기 때문에 회복 속도 역시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완벽한 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본왕의 위대한 능력 덕분이니라. 잊지 말고 보답해라.
'그래. 그래.'
라온은 턱을 쭉 내밀고, 위엄 있는 척하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글래시아도 한 번 운용해볼까.'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니, 글래시아의 수련도 이어가기로 했다. 다시 눈을 내리감고, 호수보다 넓어진 감각의 바다를 펼쳐냈다.
치이잉!
라온은 감각의 바다에 더 깊게 잠수했다. 설화의 감각까지 운용하여 기감의 범위를 확장했다. 집중 특성 덕분인지 감각을 펼치는 게 훨씬 쉽고 빨라졌다.
고오오오!
둥글게 퍼져나가는 감각의 물길을 문어의 촉수처럼 조형하여 성 주변을 살폈다. 이미지를 통해 글래시아를 운용하는 수련이었다.
'음?'
감각의 물길로 사위를 살피던 라온이 우뚝 멈췄다. 감각의 바다에 다수의 파도가 일어났다. 사납게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기척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야.'
몬스터들 사이에 세 개의 커다란 해일이 솟구쳤다. 평범한 놈들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한 존재들이었다.
덜컥.
라온이 다시 한번 기척을 확인할 때 슬쩍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와, 아직까지 하고 계셨네."
도리안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속삭였다. 그가 까치발로 침대로 다가갈 때 라온의 눈이 번뜩였다.
"헉!"
"방해꾼이 왔군."
"바, 방해꾼이라니요! 말이 심하잖아요! 일부러 늦게 왔는데!"
"너 말고."
"예?"
"아니지. 방해꾼이 아니라 먹잇감이겠어."
그가 몸을 일으키며 검을 챙겼다.
"도, 도련님? 이 시간에 왜 검을…."
"가서 전해."
라온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튀겼다.
"적이 오고 있다고."
* * *
달이 하늘의 중심에 떠올랐을 때 검은 로브의 사내가 일어섰다.
"빙아귀. 시간이다."
그 말에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빙아귀가 눈을 떴다. 짐승처럼 가늘게 선 동공이 부르르 떨렸다.
"드디어 피를 보겠군."
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한 음성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밀랜드는 확실히 간 건가?"
"정찰용으로 사용한 트롤의 눈으로 확인했다. 예상보다 이동속도가 빨라. 6시간 후면 스터린 산 부근까지 도착할 것이다."
"아쉽게도 정말 네 말대로 되었군. 밀랜드와 한번 부딪쳐보고 싶었는데."
빙아귀는 아쉽다며 긴 혀를 날름거렸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준비나 해라. 바로 쳐야 하니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로드가 아까워. 제대로 키운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 쩝."
"로드?"
"그래. 미끼로 쓰기에는 너무 큰 녀석이잖냐."
"뭘 착각하는군."
검은 로브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로드는 여기에 있다."
그가 로브에서 꺼낸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었다. 괴이한 문양이 번쩍이며 이전보다 더 커진 아이스 트롤 로드가 튀어나왔다.
"끄르륵…."
로드는 멍한 눈으로 식욕으로 가득 찬 신음을 흘렸다.
"왕급 몬스터들은 피를 볼수록 강해진다. 안전하게 로드를 키울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그, 그럼 스터린 산에는 뭐가 있는 거지?"
"내가 주술로 만든 가짜가 있다."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밀랜드는 바로 알아차릴 텐데?"
"그렇겠지. 다만 그때는 이미 우리의 일이 끝난 뒤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차게 웃었다. 그걸 위해서 정찰대에게 3번이나 아이스 트롤 로드를 보여주었다. 도착하면 알아차리겠지만, 지금은 속을 수밖에 없다.
"그럼 시작하지."
그가 다시 한번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산이 뒤틀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뒤에 있던 눈 덮인 언덕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부르르 떨렸다.
콰아아아아!
새하얀 눈들이 쓸려나가고, 푸른 털들이 솟구쳤다. 트롤과 오크. 하얀 언덕은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몬스터들로 만들어진 가짜였다.
"그 언덕… 하분 성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조금씩 쌓아 올린 거지? 청주귀. 네놈의 계획은 지루하지만, 효과는 확실하군."
"계속 말했잖느냐. 계획대로 움직이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라고."
청주귀가 입매를 틀어 올리며 트롤 샤먼의 가면을 얼굴에 썼다.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가면이 그의 머리를 휘감았다.
"크르르륵."
청주귀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음이 흘러나왔다. 안구에서 몬스터보다 더 흉악한 빛이 번들거렸으며, 손에 든 지팡이에선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 나왔다.
"크흐! 시체로 가득할 하분 성을 볼 밀랜드의 표정이 기대되는군."
빙아귀가 히죽거리며 상어의 투구를 머리에 썼다.
치리리링!
투구에서 흘러내린 푸른 물결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등과 어깨에서는 칼날 같은 지느러미가 돋아났고, 팔과 다리에서는 푸른 가시가 솟구쳤다. 닿기만 해도 피부가 찢겨나갈 것처럼 가시가 가득 박힌 갑옷. 해양 몬스터 중 가장 흉폭하다는 샤크스팅의 갑옷이었다.
"가자!"
"크아아아아!"
"크라라락!"
청주귀가 암녹색으로 빛나는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죽은 듯 멈춰 있던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하분 성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웨이브 때보다 몇 배나 더 흉악한 기세였다.
"경계도,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을 테니, 무너진 성벽을 바로 돌파한다."
"저항이 약한 상대로 학살이라, 난 이런 게 좋단 말이지."
청주귀는 끝까지 계획을 짰고, 빙아귀의 눈빛은 사악함으로 타올랐다.
"성이 보인다! 어? 근데…."
"뭐, 뭐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분 성으로 달리던 두 괴인은 이미 대비가 끝난 듯 병사로 가득 찬 성벽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자신들의 존재를 확신한 듯 하늘 위로 발광탄까지 솟구쳤다.
"함정인가?"
"함정은 아니다. 밀랜드의 위치는 확실하게 확인했어! 대체 무슨…."
빙아귀만이 아니라, 청주귀도 당황하며 눈동자를 떨었다.
"이, 이걸 어떻게…."
"당황하지 마라. 청주귀. 어차피 성에 남은 것들은 어중이떠중이뿐이다. 힘으로 밀어버리면 그만이야!"
"후우, 이번만큼은 네 말이 맞군."
청주귀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괴이한 단어를 연달아 내뱉었다.
"끼아아아아!"
"크아아아아!"
지팡이에서 흐르는 빛을 받은 몬스터들은 뻘건 눈빛을 발하며 더 빠르고 사납게 성벽으로 돌진했다.
"성벽으로 가라! 단숨에 깨부숴!"
"크흐흐, 이번엔 내가 먼저… 어?"
몬스터들이 몸통으로 성벽을 부수려 할 때 성 위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휘날리는 금발. 며칠 전 수천의 몬스터를 홀로 막아선 영웅이 그곳에 있었다.
"가지 않길 잘했네."
라온이 서슬 퍼런 칼날을 겨누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먹잇감이 알아서 찾아와주잖아."
134화
도리안은 바로 숙소에서 튀어나가 하분 성에서 가장 높은 중앙탑을 올랐다.
"어? 도리안?"
"네가 왜 여기에 온 거냐?"
탑 최상층에서 경계를 서던 경비병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 지금 시간이 없어요!"
도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달려가 경종을 내리쳤다.
땡! 땡! 땡! 땡! 땡!
순식간에 다섯 번의 종이 울리고, 웨이브와 같은 수준의 최고 경계가 발동되었다.
"너, 너 미쳤어?"
"이런 젠장!"
경비병들이 도리안의 팔을 당겼지만 이미 늦었다.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던 병사들이 중앙탑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뭐, 뭐야!"
"갑자기 경종이라니! 무슨 일이야!"
"다섯 번이면 웨이브밖에 없잖아!"
"도리안이잖아! 네가 왜 거기 있어!"
병사들은 경종을 울리고 있는 도리안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몬스터가! 서쪽에서 몬스터가 밀려온다고 합니다!"
도리안은 계속 경종을 치면서 라온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몬스터? 무슨 헛소리야!"
"서쪽에서 왜 몬스터가 나와!"
"이 멍청아! 주변의 몬스터는 전부 로드에게 복속됐잖아!"
"꿈이라도 꿨냐! 당장 내려와!"
설격대 검사들과 병사들은 욕설을 뱉으며 도리안에게 내려오라 손짓했다.
"도리안!"
"그만 좀 해!"
"라온 님이!"
경비병들이 도리안을 말리기 위해 다가갈 때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라온 님이 말했어요! 서쪽에서 몬스터가 온다고! 웨이브만큼은 아니지만 더럽게 많다고!"
"헉! 라온 님이?"
"그분이라면 미, 믿을 만하지."
"믿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믿어야지!"
"당장 움직여!"
"방어 준비를 해라!"
"다시 경종을 쳐!"
병사들과 설격대 검사들은 라온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리안을 말리려던 경비병들도 함께 경종을 쳤다.
"몬스터라고? 어떤 몬스터를 말하는 거냐!"
뒤늦게 뛰어나온 테리안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대체 뭐가 오는 건데! 종류에 따라 대비 방법이 다르잖아."
"웨이브처럼 트롤하고, 오크, 해양 몬스터들이 섞여 있대요. 그리고…."
도리안이 심호흡하고서 말을 이었다.
"에덴의 귀신 두 놈이 끼어있다고 합니다!"
"에, 에덴? 오마의 에덴?"
"그 미친놈들이 온다고?"
"말이 돼? 그놈들이 여기에 왜 있어!"
"무슨 개소리야!"
병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몬스터까지는 믿어도 에덴이 온다는 말은 믿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 진짜! 제가 아니라! 라온 님이 말씀하셨다고요! 에덴도!"
"그럼 진짜로군. 전투를 준비해라! 병창을 열어!"
테리안은 라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전투 지시를 내렸다.
"라온의 말이면 정말이잖아! 빨리 움직여!"
"에덴이 온다! 더 빨리 방어 태새를 갖춰!"
"창과 검을 들고 성벽에 서라!"
"기름을 끓이고, 바위와 통나무를 준비해! 바닥에 화살을 깔아라!"
병사들도 라온의 말이라니까. 의심을 지우고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도리안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병사와 검사들을 보며 콧등을 좁혔다.
'다 때려치울까.'
자신의 말은 조금도 믿지 않던 사람들이 라온의 말이라고 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아니꼬워졌다.
'어쩔 수 없지.'
서글픔을 참으며 성벽으로 올라갔다. 라온이 서쪽을 노려보며 물 흐르는 듯한 기세를 피워내고 있었다.
"음…."
도리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성문 위에 서 있는 라온을 보자, 밀랜드가 자리를 지킬 때처럼 불안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진짜 괴물인가?'
자신의 미약한 무력으로도 느껴진다. 라온이 한층 더 발전했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놀라움이 깃든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온의 빠른 지시 덕분에 적들이 오기 전에 먼저 하분 성의 전열이 갖춰졌다.
웨이브 때처럼 보병과 창병들이 성벽 위에 섰고, 그 뒤를 궁병과 설격대 검사들이 받쳐 주었다.
"음."
도리안이 뒤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상하네.'
테리안이 방어 준비를 하느라 이곳에 없었기 때문에 설격대주 에드퀼이 라온에게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병사들 이상으로 조용했다.
그는 라온의 말을 신뢰하는 듯 서쪽만을 바라보았다. 저런 싸가지 조차 변화시킬 정도라니, 라온이라는 사람의 존재감이 상상 이상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고오오오!
서쪽을 바라보던 라온의 기세가 급변했다. 개울처럼 매끄럽게 흘러가던 오러의 물결이 거친 해일이 되어 치솟았다.
"온다."
그의 낮은 목소리를 따라 서쪽을 보았다. 얕은 숲이 무너져 내리며 몬스터들이 산사태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녹청색 파도의 중심에는 귀기를 흘리는 가면과 투구의 괴인이 있었다. 에덴의 주구. 청주귀와 빙아귀였다.
"지, 진짜였어."
"정말 에덴이야."
"처, 청주귀…."
"저건 빙아귀다!"
"끄윽…."
에덴의 귀신과 웨이브보다도 흉악한 기세를 풍기는 몬스터들을 본 병사들의 동요에 성벽의 군기가 출렁였다.
"자, 잠깐만! 저 뒤에 있는 거 로드잖아! 아이스 트롤 로드!"
"로드도 여기에 온 거야?"
"하, 함정이었어! 이걸 어떻게…."
"발광탄을 쏴라."
라온의 차분한 목소리에 병사들의 떨림이 일순간 멈췄다. 뒤에 있던 병사가 하늘 위로 두 발의 발광탄을 쏴 올렸다.
퍼버벙!
어둠이 가시고 몬스터들의 일그러진 기세와 흉악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작전을 짤 시간이 없으니, 했던 대로 간다."
라온이 아직 보수가 끝나지 않은 우측 성벽으로 이동했다.
"예?
"그게 무슨?"
"내가 아래에서 막을 테니, 위에서 지원하도록."
"라, 라온 님!"
도리안이 말리려 손을 뻗었지만, 라온은 이미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허억!"
"또, 또 한다고?"
"그걸 다시?"
"라온…."
"라온 님!"
설격대 검사들과 병사들의 눈동자에 경악과 경외가 어렸다. 전율을 느낀 듯 몸을 떠는 병사들도 있었다.
쿠구구구!
거신처럼 성벽 앞을 지키는 라온 덕분에 공포에 짓눌렸던 군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라온 님."
도리안은 막강한 기세를 뿜어내는 라온을 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 옆에 있던 에드퀄도 입술을 깨문 채 라온의 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 * *
라온은 돌진해오는 에덴의 귀신과 몬스터들을 보며 숨을 골랐다.
'8할 정도인가.'
아직 회복이 끝나지 않아 전력의 8할 정도의 무력밖에 발휘할 수 없었다. 다만 크게 성장한 덕분에 웨이브 전보다 지금이 더욱 강한 건 확실했다.
'그래도 혼자서 막긴 조금 버거울지도 모르겠군.'
청주귀, 빙아귀에 아이스 트롤 로드까지 있었다. 뒤의 몬스터들이 아니라, 저 셋만 상대하기도 벅찼다.
'그래도 해야겠지.'
무인은 어려운 싸움을 겪을수록, 위기를 이겨낼수록 강해지는 법이다.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만화공을 끌어 올렸다.
"네놈이 여기에 있었다니! 행운이로구나!"
빙아귀가 땅을 박찼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을 파고들어 팔목의 칼날을 내리찍어왔다. 막강한 투기와 예기가 동시에 깃든 공격이었다.
쿵!
라온이 진각을 밟았다. 솟구치는 기운에 광아검의 검결을 담았다. 빛살처럼 뻗어 나간 검격이 빙아귀의 칼날을 쳐냈다.
쩌어엉!
쇳덩이가 찌그러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빙아귀가 휘청이며 튕겨 나갔다.
"이, 이놈이!"
당황했는지 투구 속 빙아귀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후우우웅!
하늘에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청주귀가 펼쳐낸 얼음 주술이었다. 기온이 낮아지고, 얼음 조각이 괴이한 각도로 짓쳐들어왔다.
후욱.
호흡을 조절하며 칼날 위에 새빨간 꽃을 피워냈다.
만화공 화령.
붉은빛으로 명멸하는 꽃잎이 흩날리며 허공을 가득 메운 얼음을 녹이고, 청주귀가 펼친 주술의 선을 끊어버렸다. 공명하는 불의 고리가 이뤄낸 격의 파동이었다.
"이게 무슨!"
망가진 주술에 충격을 받은 청주귀의 가면이 바르르 떨렸다. 일순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 놈의 목을 노리고 달려가려 할 때 우측에서 무시무시한 투기가 타올랐다.
"크아아아!"
들소처럼 달려온 아이스 트롤 로드였다. 막대한 투기가 깃든 도끼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터엉!
라온이 태화보를 밟았다. 밤의 그림자처럼 흐려진 그가 한 발짝 뒤에서 나타나 검을 쳐올렸다.
"크르륵!"
성장이 끝나지 않았다고 해도 로드는 로드. 그 순간 도끼를 틀어 완벽한 방어 태세를 갖췄다.
쩌어어엉!
힘과 힘이 격돌하며 터진 충격파가 어둠이 내려앉은 대지를 갈랐다.
"흐읍!"
라온이 이를 아득 깨물며 광아검을 펼쳤다. 빈틈의 냄새를 맡은 흉악한 칼날이 아이스 트롤 로드의 도끼를 쳐냈다.
쿠우웅!
균형을 잃은 아이스 트롤 로드가 밀려나며 뒤에 있던 오크 무리를 덮쳤다. 여섯 마리의 오크가 그 아래에 깔려 한 줌 핏물이 되었다.
쿠구구구.
피어나는 하얀 먼지 위로 라온이 검을 내렸다.
세 번.
고작 검을 세 번 휘두른 것으로 에덴의 두 귀신과 백 단위의 몬스터들이 멈춰 섰다.
그 압도적인 무력에 성벽 위의 사람도, 아래에 있는 몬스터들도 넋이 나간 듯 눈을 꿈뻑였다.
"겨우 이 정도라면 실망인데?"
라온은 가는 미소를 지으며 검을 세웠다. 은빛 칼날에서 흐르는 사나운 기운이 공간을 잠식해나갔다.
-무리하고 있으면서 허세를 부리기는.
라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긴 한데.'
라온이 피식 웃었다.
'난 앞만 막으면 그만이라서.'
왼손을 들어 움켜쥐자, 평온한 달빛을 가르는 화살과 쇠뇌가 하늘을 수놓았다.
퍼버버벅!
무방비 상태에서 화살을 맞은 몬스터들이 우르르 쓰러지고, 무릎을 꿇었다.
"다시 쏴!"
테리안의 호기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번 수백 개의 은빛 벼락이 떨어졌다. 이전보다 더 많은 몬스터들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역으로 기습을 당한 기분이 어때?"
"우리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감이 좀 좋거든."
라온이 청주귀와 빙아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함정은 정말 잘 팠어. 깜빡 속았으니까. 하지만…."
꺼져가는 발광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건 위험 신호다.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사령관님이 이곳에 오실 거다. 난 그전까지만 막으면 그만이야."
"빙아귀. 이번만큼은 네놈이 옳았다."
청주귀의 가면에서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음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저건 지금 이곳에서 죽여야 할 놈이다."
"죽인다? 너희들론 안 돼."
"라 티아!"
청주귀가 지팡이를 내리치며 주술을 외웠다.
"크르르르!"
"캬아아아아!"
화살을 맞고 죽어가던 몬스터들이 좀비처럼 일어나 뻘건 눈빛을 뿜어냈다. 처음보다 더 흉악한 기세를 펼치며 살점이 끼어있는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계획을 수정한다. 1순위는 저놈이다. 저놈을 죽여라!"
"나 참."
청주귀의 말을 들은 빙아귀가 킥킥 웃으며 다가왔다.
"그때보다 더 성장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너 진짜 괴물이구나."
놈이 시퍼런 눈빛을 발하며 투기를 끌어 올렸다. 거칠고 차가운 북해의 파도가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들었지? 네놈부터 죽이란다!"
빙아귀가 끌어 올린 기운을 폭발시키며 쇄도해왔다. 순식간에 커지는 샤크스팅의 투구.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속도였다.
그에 맞서 라온이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감각의 바다를 통해 빙아귀의 움직임을 읽으며 검을 내리쳤다.
쩌어어엉!
칼날 지느러미와 검이 맞부딪치며 대지의 축이 흔들리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빙아귀가 힘으로 밀고 들어온다. 대해의 해일을 맨몸으로 감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콰아앙!
라온이 만화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광아검을 후려쳤다. 빙아귀의 칼날을 튕겨냈을 때 놈이 상어처럼 몸을 뒤틀며 가시로 목을 노려왔다.
"뒈져라!"
"네가 죽어라."
가시가 목젖에 닿기 직전 라온의 왼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허리 뒤편의 진혼검을 뽑아 그대로 그었다.
촤아악!
요기가 깃든 칼날이 빙아귀의 갑옷을 베고, 뻘건 핏물을 맛봤다.
"이 정도 상처쯤이야!"
빙아귀는 물러서지 않았다. 흉폭한 샤크스팅의 특성을 가져온 귀신답게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대로 베어주지."
라온이 섬뜩한 눈빛을 발하며 검을 뒤로 젖혔다, 그대로 일섬을 그으려 할 때 시야가 하얀 털로 가득 채워졌다. 상처를 모두 회복한 아이스 트롤 로드였다.
치이이잉!
우측에서 시야를 가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눈덩이들이 쏟아져 내린다. 청주귀가 발동시킨 눈 폭풍이다. 아이스 트롤 샤먼의 주술과 달리 눈덩이 하나만 맞아도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콰앙! 쾅!
라온은 쏟아지는 눈 폭풍 속에서 아이스 트롤 로드의 공격을 피하며 빙아귀의 칼날을 쳐냈다.
'후욱!'
빙아귀, 청주귀 모두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무력을 지녔는데,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지닌 아이스 트롤 로드까지 상대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멍청하게 달려드니 그 꼴이지.
'시끄러.'
라스의 조롱을 뒤로하고 검격을 뻗어냈다.
만화공 십화.
회천.
불꽃의 톱니가 회전하며 빙아귀의 칼날과 아이스 트롤 로드의 허리를 찢어발겼다. 계속 나아가려 할 때 청주귀가 얼음 주술로 벽을 만들어 움직임을 차단했다.
"쯧."
이런 식이다. 이런 방해 때문에 끝을 볼 수가 없었다.
'몬스터도 문제고.'
일반 몬스터들도 성벽을 뚫기 위해 광기를 휘감은 눈으로 달려들었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셋 중 하나만 빠지면 될 거 같은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때 성벽 위에서 두 사람이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덜덜 떠는 도리안과 입술을 깨문 에드퀼이었다.
"도리안? 그리고 당신은…."
"로, 로드는 저희가 맡을게요!"
"너는 그 둘만 상대해라."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검은색 돌과 하얀색 돌을 꺼냈다.
"두 번이나 혼자 싸우게 둘 수는 없어서요!"
녀석은 두 돌을 부싯돌처럼 부딪친 뒤 로드를 향해 던졌다.
파아앙!
돌이 터지며 회색 연기가 치솟아 아이스 트롤 로드와 몬스터들을 뒤덮었다.
"가요!"
"알겠다."
도리안과 에드퀼은 이상한 안대 같은 것을 쓰고 연기 안으로 들어갔다.
-하, 저놈이 도움이 되는 모습을 보게 될 줄 몰랐군.
'나도 그래.'
라온이 옅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청주귀와 빙아귀가 눈매를 좁히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어."
두 귀신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무력은 인정한다. 그 나이에 가질 법한 검력과 반응이 아니야. 하지만 우릴 너무 우습게 보는군."
청주귀가 귀기 어린 미소를 흘렸다.
"이쪽도 평범한 괴물이 아니거든."
* * *
빙아귀가 라온을 노려보며 자세를 낮췄다. 늑대처럼 두 팔과 두 다리로 땅을 짚고 고개를 들었다.
전신을 뒤덮은 투기를 운용하며 심장을 휘도는 북해의 냉기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그대로 얼어 뒤져라!"
먹이를 삼키는 상어처럼 입을 쩍 벌렸다. 시꺼먼 목구멍에서 차디찬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샤크스팅의 능력, 냉기의 숨결이었다.
치리리링!
갈라진 대지를 순식간에 얼려버린 순백의 냉기가 라온을 덮쳤다. 무시무시한 냉기 파동에 그의 뒤에 가시로 가득한 얼음의 벽이 세워질 정도였다.
"끝났어. 이제…어?"
입가를 닦으며 일어서던 빙아귀가 석고상처럼 멈춰 섰다.
흔들리는 그의 동공에 라온의 모습이 비친다. 냉기의 숨결을 정면에서 맞았다고는 생각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끔한 모습이었다.
"뭐, 뭐야!"
빙아귀가 중풍에 걸린 것처럼 전신을 떨었다.
"어떻게 냉기의 숨결을…."
냉기의 숨결은 투기와 냉기를 조화시킨 특별한 기술이다. 평범한 방한 능력으로는 절대 버틸 수 없는데, 어떻게 저리 멀쩡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켜. 내가 하겠다. 카디아르틴!"
청주귀가 지팡이를 내리찍고 주술을 외웠다. 하분 성 주변을 몰아치던 눈 폭풍의 범위가 라온에게 집중되고, 색이 불길할 정도로 누렇게 변했다.
정신을 공격하는 냉기의 주술 황련의 눈송이. 이 주술은 신체가 아닌, 정신에 동상을 입히기에 강한 냉기 저항이 있어도 견딜 수 없다.
"어?"
무시무시한 저주의 폭풍이 휘몰아쳤지만, 그 안에 있는 인간은 당당히 서서 하늘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콰아아아아!
벼락처럼 떨어지는 붉은 칼날에 저주를 담은 눈 폭풍이 반으로 찢겨 나갔다.
은빛의 코트를 두른 듯한 그가 흩날리는 눈꽃을 짓이기며 걸어와 입매를 끌어 올렸다.
"마, 말도 안 돼! 저주를 담은 주술이 어떻게…."
황련의 눈송이는 밀랜드를 막기 위해 준비한 정신 공격용 주술이었다. 이렇게 파훼 되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냉기? 저주?"
라온의 검에 어둠을 녹여 내리는 새빨간 불길이 치솟았다.
"그딴 건 평생 겪어왔어."
너희보다 훨씬 지독한 놈한테.
135화
로드의 목을 베기 위해 하분 성을 나선 출정대는 스터린 산 인접 지역에 도착해 있었다.
"10분간 휴식!"
밀랜드는 스터린 산이 희미하게 보이는 언덕에 멈춰 서서 휴식을 지시했다. 언제 싸움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항상 전투를 대비하며 움직여야 했다.
"로드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가 어디지?"
"스터린 산 중턱에 있는 흔들바위였습니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놈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1번 정찰대장 바르티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가…."
밀랜드는 어둠과 눈에 묻혀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뿜어내는 스터린 산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불길하군.'
한시가 급해서 일단 움직이고 보았지만, 여러모로 상황이 기이하다.
북해에서 산으로 올라온 해양 몬스터, 정찰대의 뒤를 노리고 움직인 아이스 트롤 샤먼과 워리어 그리고 웨이브 이후에 등장한 로드까지. 전부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밀랜드가 허리에 찬 검을 부러질 듯 쥐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3번이나 확인했으니, 아이스 트롤 로드가 등장한 건 확실하다. 이게 누군가의 함정이라고 해도 로드만큼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
"이제 출발을…음?"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고 다시 출발 지시를 내리려 할 때였다.
하분 성이 있는 방향에서 작은 불똥이 치솟았다.
"어? 저건?"
"발광탄?"
발광탄을 본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두, 두 개째?"
"저 뜻은…."
두 번째 발광탄을 본 검사와 기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연속된 발광탄의 의미는 위기. 하분 성이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었으니까.
"도, 돌아가야 하는 건가?"
"가더라도 로드부터 잡고 가야지!"
"미쳤어? 저건 성이 위급하다는 신호라고!"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그리고 지금 죽어라 뛰어도 너무 오래 걸려!"
검사와 기사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렸다. 논쟁을 하던 사람들은 결국 결정권을 가진 밀랜드를 돌아보았다.
"하분 성에는 테리안과 라온, 에드퀼이 있다."
밀랜드가 사그라드는 발광탄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 녀석들이 별일도 아닌 걸로 발광탄을 쐈을 리 없다."
테리안은 라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런 라온이 있음에도 위기 신호를 보낸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밀랜드의 결정은 그 하나 때문이 아니었다.
웨이브 때 본인보다 병사들을 우선해서 성벽을 뛰어내렸던 라온의 모습. 그 영웅적인 장면이 아직도 뇌리에 깊게 박혀, 그의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모두 몸을 돌려라."
밀랜드가 스터린 산을 뒤로하고 두 눈을 빛냈다.
"전속력으로 복귀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