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편 전장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로이스.
우아아아악!
그는 우렁찬 비명과 함께 달려오는 나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분명 나비였다.
자신이 트루건 가문에 위탁한 뇌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링크가 전해 오는 신호는 분명 눈앞의 존재가 녀석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 왜 뚠냥이가 됐냐?"
일반적인 뇌호에 비해 몇 배는 뚱실한 몸뚱어리.
그에 비례해 짧아진 다리.
여기서 조금만 더 찌면 걷는 게 아니라 굴러다닐 듯싶었다.
'원래 광뇌호가 되면 저렇게 변하는 건가?'
물론 그럴 리 있겠나.
원작 속에 등장하는 광뇌호를 떠올려 봤지만, 그곳의 광뇌호는 용맹한 범의 형상이었다.
저리 뚱그스름한 몸집이 아니었다.
'…내가 털 뭉치로 본 게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멀리서 보면 둥그런 흰 공이었고, 조금 가까이서 봐도 그냥 총총총- 뛰어다니는 털 공처럼 보였다.
'발에 털 공이 달린 건지… 털 공에 발이 달린 건지....'
그 와중에 저 짧은 다리로 어찌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지 신기할 지경.
"우와아악- 나비야!"
악착같이 매달려 있던 라비나는 나비가 로이스의 앞에 급정거하며 결국 튕겨 나가고 말았다.
즈즈즉-.
"으악!"
관성의 영향으로 땅바닥을 굴러간 라비나.
한 10m는 굴러가고 나서야 그녀가 겨우 멈춰 섰다.
"으윽-"
겨우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머리에 묻은 흙과 눈을 털어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난데없이 일어난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비를 향했고.
동시에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나비의 앞에 자리한 새하얀 뒤통수의 사내를.
그리고 그런 사내를 마주한 나비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을.
"어...?"
나비의 생소한 눈빛에 라비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나, 나비… 너?"
지난 십 년간 붙어 지내면서 나비의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간 그녀에게 나비가 보여 준 얼굴은 '귀찮음', '매우 귀찮음', '따분함' 같은 것뿐이었다.
그나마 식사와 간식 앞에서만 약간 기뻐할 뿐이었지, 저렇게 대놓고 여실히 기쁨을 보인 적은 없었다.
라비나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오랜만이네."
등 돌린 사내에게서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뚝- 뚝-.
나비의 큼직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크릉.
녀석은 알 수 있었다.
비록 모습이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눈앞의 존재가 바로 자신의 주인임을.
언젠가 반드시 자신을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했던 그 존재임을.
그리고 이제야 그와 만났음을 말이다.
"아...."
한편, 처음 보는 나비의 눈물에 라비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나, 나비가 울어?'
환수 중의 환수, 광뇌호가?
두려움 따위는 모르는 전설적인 환수가?
그런 라비나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비와 로이스는 눈빛을 교환했다.
"잘 지냈냐?"
-크릉!
고개를 끄덕이는 나비.
녀석이 자세를 낮추고 사내의 몸에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라비나는 물론 트루건 가문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친근감의 표시.
그리고.
"잘 지냈다니 다행이네."
-갸르릉
로이스가 녀석의 머리를 토닥여 주자 나비가 골골송을 부르며 발라당 몸을 뒤집었다.
엄한 놈의 손짓 한 번에 기분 좋게 바둥거리는 나비를 본 라비나.
"뭐...?"
입을 떡 벌린 그녀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다.
190화. 뚠뚠이 (4)
로이스는 앞에서 재롱을 부리듯 뒹굴뒹굴하는 나비를 보며 피식거렸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단번에 자신을 기억하는 녀석이 기특했다.
'뭐… 뚱실한 것도 나름 귀엽고.'
거기다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드는 게 이게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아, 맞다. 얘 호랑이지?'
정확히는 호랑이 과에 속하는 뇌호라는 영수이지만.
'뭐, 결국 고양이 과 아니겠어?'
그리 여기며 로이스는 뇌호의 턱을 손으로 쓸어 주었다.
-골골골골.
뇌호에게서 오토바이 진동음이 들렸다.
로이스가 한참을 그렇게 뇌호의 턱을 긁어 주고 있을 때.
"너, 너, 너 뭐야!"
뒤에서 들려온 앙칼진 목소리에 로이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에 서 있는 단신의 소녀를 본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녀석이다.'
원작의 묘사 그대로였다.
150㎝의 단신.
적안에 금발.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까지.
'라비나 트루건.'
환수 광뇌호의 주인이자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의 1인.
또한, 수많은 영수를 다루며 짐승의 왕(獸王)이라 불린 여인.
그녀와 대면한 로이스의 첫인상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나보다 작네?"
원작 묘사에서도 키가 작고 나이보다 매우 어려 보인다고 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그녀가 얼마나 단신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아주 좋아.'
매우 흡족했다.
'처음이야. 누군가를 이렇게 내려다보는 건.'
키가 2m는 넘는 파브로나 190㎝의 켄드릭.
185㎝의 칸과 자신과 똑같은 키의 카니.
심지어 타니아조차 168㎝로 눈높이는 로이스와 비슷했다.
때문에 누군가를 이렇게 내려다본다는 건 로이스로서는 상당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반면 그런 로이스의 중얼거림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가 있었으니.
"작긴 뭐가 작아!"
로이스만큼이나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그녀였다.
대뜸 초면에 '나보다 작다'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어찌 기분이 좋겠는가.
하물며 그 말은 한 존재가 '도둑놈'임에야.
"야 이 나쁜 놈아!"
"...?"
로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를 라비나가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내 나비 돌려줘!"
라비나의 얼굴에는 배신감, 부러움, 분노 등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소중한 것을 빼앗겼을 때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에 로이스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된 게, 딱 세 마디 말했는데 그게 전부 다 틀린 말이냐?"
"…뭐?"
"첫째, 너 작아. 둘째, 나 나쁜 놈 아니고, 셋째, 나비는 네 게 아님."
"...?!"
라비나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녀의 시선이 로이스의 뒤로 향했다.
약간 미안해하는 얼굴로 자신을 보면서도 여전히 저 허여멀건 놈의 곁을 떠나지 않는 나비.
그런 상황이 라비나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나비… 네가 어떻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바닥에 털썩 무릎 꿇는 라비나를 보며 로이스는 눈을 끔벅거렸다.
'이거야 원… 내가 무슨 불륜남이 된 거 같네.'
아마 라비나에게는 자신이 불륜남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나비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해 겨우겨우 유대 관계를 쌓았는데 갑자기 웬 엄한 놈이 나타나 나비를 채 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럴 걸 예상하고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찜해 놓은 걸.
'억울하면 너도 250년 전에 태어나든가.'
물론 그런다고 나비를 넘겨주지는 않았을 테지만.
로이스는 속으로 킬킬거렸다.
그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너 같은 놈한테는 절대 우리 나비 못 줘!"
"뭐라는 거야? 근데 너 이름 뭐냐?"
이미 진즉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확인차 모른 척 물어본 로이스.
"라비나다! 이 도둑놈아! 네 이름은 뭐냐!"
"알 거 없고."
"너, 이...."
"아무튼, 라비나. 네가 뭘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비는 네 게 아니라니까?"
"웃기지 마! 내가 나비를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말 그대로 알고 지낸 세월이 긴 거겠지. 알고 지낸 지 오래됐다고 네가 나비의 주인이 되는 건 아니다."
"그...."
순간 말문이 막힌 라비나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 뿐.
한참을 그러다 그녀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아, 아무튼! 넌 도둑놈이야!"
"쯧."
로이스의 어이없다는 시선에 라비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공간 주머니?'
라비나가 꺼낸 것은 소형 아공간 주머니였다.
곧 그 안으로 넣어진 라비나의 손에 한 움큼 빛나는 돌멩이가 쥐여 나왔다.
이를 앞으로 내밀며 라비나가 자신감 넘치게 소리쳤다.
"나비, 이거 줄게. 이리 와!"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네가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얕보지 말라고!'
지난 십 년간 자신이 나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 결과 나비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나 나비는 이 광 속성석에 환장했다.
자다가도 광 속성석 냄새만 맡으면 벌떡 일어나지 않는가.
이번 의뢰 역시 나비의 광 속성석 구입 자금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받은 의뢰였다.
'이거면 안 오고 못 배길걸?"
저 벌름거리는 코를 봐라.
나비가 주춤거리고 있는 것을 본 라비나가 반대 손을 주머니에 넣어 다시 광속성석 한 움큼을 꺼내 들었다.
"얼른!"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광 속성석의 유혹.
그것도 저 많은 양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비가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라비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물론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어쭈?"
나직이 들려온 목소리.
잔잔하게 깔린 목소리에 광 속성석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로이스의 중얼거림.
"정신 못 차리지? 나비 원위치."
그 짧은 한마디로 인해 유혹에서 벗어난 나비가 후다닥 로이스의 뒤로 이동했다.
녀석은 언제 광 속성석에 정신이 팔렸냐는 듯 로이스에게 온갖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라비나.
투득-.
그녀의 손에서 광 속성석이 우수수- 떨어졌다.
마치 오랫동안 쌓아온 나비와의 유대감이 무너지듯 말이다.
그리고.
"이, 이럴 수가...."
라비나도 신형도 무너졌다.
세상 다 잃은 듯한 얼굴로 쓰러진 라비나를 뒤로하고.
"나비, 가자."
로이스가 나비를 향해 손짓했다.
'볼일 끝났네.'
광뇌호가 없는 라비나는 그냥 뛰어난 드루이드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또한, 스노우 킹을 상대할 나비가 없으면 3차 저지 공방의 결과 역시 뻔하리라.
아마 며칠 뒤면 스노우 킹의 군단은 제도의 코앞에 들이닥칠 것이다.
-크릉.
로이스의 부름에 나비는 라비나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살랑살랑-.
마치 사람처럼 가볍게 앞발을 흔들어 주는 나비.
그간 자신을 돌봐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것이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아 퍼뜩 정신을 차린 라비나가 일어나 달렸다.
그리고 매달렸다.
…로이스의 바지 자락에.
"이, 이름 모를 아저씨!"
"내가 왜 아저씨냐?"
"그럼 오빠!"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
"선생님!"
라비나는 울며불며 로이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아니, 로이스의 다리를 꽉 감싸 안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말이다.
"제발 우리 나비 좀 돌려주세요!"
"네 나비 아니라니까?"
"나비 없이 저 어떻게 살라고요!"
"잘 살면 되지!"
"못 살아요! 나비 없이 못 살아요!"
"아, 좀! 이거 놔! 바지 벗겨진다고!"
"제발요!"
이미 설원을 뒹굴고 거기에 로이스의 바지에 매달리며 질질 끌려온 탓에 라비나의 새하얀 모피 코트는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엉망진창은 울며불며 매달린 라비나의 얼굴이었지만....
로이스가 질색하며 다리를 털었다.
"야! 내 바지에 얼굴 비비지 마!"
"선생님… 제발 나비 돌려주세요!"
떼어 내고자 하는 자와 악착같이 달라붙는 자.
나비는 차마 그 꼴을 못 보겠다는 듯 앞발로 눈을 가렸다.
이후로도 그들의 실랑이는 계속됐다.
그렇게 몇 분여.
"…좀 놓지?"
"이걸 놓으면 나비와 영영 결별하게 되는데… 어떻게 놓아요!"
"하아...."
로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정신 사나워....'
원작에서 라비나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황폐해진 세상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축축 처지는 파티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존재.
원작을 볼 당시에는 라비나 덕분에 무거운 작품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지만....
'이게 내 입장이 되니 다르잖아?!'
쾌활함을 넘어 당돌하고, 넉살 좋은 캐릭터.
그런데 이게 영 성가신 게 아니었다.
지금도 봐라.
바지가 찢어질지언정 절대 놓지 않겠다는 눈빛.
분명 귀족 영애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흙바닥을 뒹굴며 달라붙는 의지까지.
찰거머리도 이런 찰거머리가 없었다.
'하긴 지난 250년간 돌봐 준 녀석을 내가 데려간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긴 한데....'
살짝.
그것도 아주 쥐똥만큼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그리고....
'궁금하네.'
한 가지 호기심이 그를 자극했다.
'이 녀석이 켄드릭과 만나면 어떻게 되려나?'
바뀐 운명 속에서 원작의 두 영웅이 만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로이스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래서 결정했다.
라비나를 데려가기로.
로이스가 질질 짜고 있는 라비나의 머리를 살그머니 밀었다.
"놔."
"싫어요! 갈 거면 저도 데려가요! 이대로 나비만 보낼 수는 없어요!"
"알았어. 너도 같이 데려갈 테니까 일단 놔."
"네? 저, 정말요?"
라비나가 그렁그렁 습기 찬 눈으로 로이스를 올려다보았다.
"트루건 가문이 저 녀석을 돌봐 준 노고도 있으니까, 기회는 줄게."
"가, 감사합니다! 어...? 그런데 제가 트루건 가문인지는 어떻게 아신...?"
"어떻게 알기는. 너희 집에 저 녀석을 맡긴 게 나니까 알지."
"아...."
라비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도 이해하고 있었다.
눈앞의 이 사내가 나비의 주인임을.
그렇지 않다면 나비가 저리 기뻐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다가 그녀가 놀라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나비를 저희 가문에 맡긴 게 선생님이시라고요?"
"어."
"본인? 당사자? 그분의 후계 같은 게 아니고?"
"어."
"실례지만… 올해로 연세가...?"
"실례인 걸 알면서 왜 물어보냐?"
"…네, 죄송합니다."
라비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 가지 확실히 알게 된 것.
이 젊은 사내의 나이가 못해도 250살은 넘었다는 거다.
물론, 그게 라비나에게 중요한 거는 아니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나비와 떨어지지 않는 것.
라비나가 로이스를 보며 물었다.
"분명 저도 데려가 주신다고 했어요? 그렇죠?"
"그래, 하지만 거기까지야. 그간 나비를 보살펴 준 너희 가문을 생각해서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야."
"우우… 그래도 나비한테 우리 가문이 얼마나 많은 걸 해 줬는데...."
라비나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 '그렇게 많이 해 줬는데 고작 이런 대접이냐!'라는 뜻이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한 그녀를 향해 로이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애초에 내가 제이콥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다면, 지금 너는 존재하지도 않았어."
"...."
"아니, 트루건 가문 자체가 없어졌겠지. 제이콥이 죽었다면."
불만을 좀 내비쳤다가 본전도 못 건진 라비나는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로이스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너무 크네.'
다 자란 나비가 지면을 딛고 서 있으니 그 높이가 4m는 넘어 보였다.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길이는 거의 10m쯤.
'이걸 이대로 데려가면 난리가 나겠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이날을 위해 로이스가 준비해 둔 물건이 있기는 했다.
"보자… 예전에 만들어서 짱박아 뒀었는데."
로이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잠시 뒤.
"찾았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팔찌 크기의 고리였다.
로이스가 나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머리."
잽싸게 로이스를 향해 머리를 내미는 나비.
"조금 따끔할 거다."
찰칵-.
팔찌 같은 고리가 나비의 귀에 채워졌다.
-킁?
난생처음 귀걸이란 걸 해 본 나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달랑거리는 귀걸이가 신기한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
이에 로이스가 명령했다.
"자, 이제 작아진다고 생각해 봐."
-크릉?
"하라면 해 봐."
-킁....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 나비가 눈을 감았다.
-끙… 낑… 끙....
하지만 무언가 잘 안 되는지 녀석이 계속 낑낑거렸다.
이에 한숨을 내쉰 로이스가 손을 내저었다.
"에휴, 이번만 내가 도와줄게. 이 감각을 잘 기억해 둬."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걸이에서 옅은 빛이 번져 나왔고 이는 곧 나비를 집어삼켰다.
번쩍-.
"윽!"
갑작스러운 빛에 라비나가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잠시 뒤.
"어...?"
서서히 잡히는 시야에 라비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맙소사!"
눈앞에 존재하던 거대한 뇌호가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큥?
작디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작은 호랑이라고나 할까?
머리부터 꼬리까지 30㎝의 앙증맞은 크기로 변한 나비를 보고 라비나가 놀라 물었다.
"저, 저게 어떻게 된 건가요?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공간과 생명체의 시점을 분리하고 적절하게 이를 뒤틀어서 나비의 전체적인 크기를 조율한 거다. 그에 따라 유지되는 질량은 힘 속성으로 분산시켜서 경량화를 한 거고."
"…그게 무슨 말인데요."
"그런 게 있다."
퉁명스럽게 말을 끝낸 로이스는 작아진 자신의 신체에 신기해하는 나비를 집어 들었다.
몸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여전히 뚱그스름한 나비.
가만히 품에 안긴 녀석은 조금 오동통한 호랑이 인형으로 보였다.
그렇게 준비가 끝난 로이스가 말했다.
"그럼 간다."
"네?"
라비나가 채 반문하기도 전에 로이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츠팟!
둘의 모습이 설원에서 사라졌다.
잠시 뒤.
공간 이동으로 자리를 옮긴 로이스와 라비나.
그리고 그날.
검성(劍星) 켄드릭.
수왕(獸王) 라비나.
원작 속,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의 동료 둘이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마주했다.
191화. 구세주 (1)
켄드릭과 라비나.
로이스가 아니면 동료가 되었을 둘의 만남은 모순되게도 로이스 덕분에 일어났다.
츠팟!
"어? 선생님!"
"로이!"
"로이 왔다!"
"로이스 님!"
오늘의 할당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쌍둥이.
그들의 옆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타니아와 핀까지.
로이스를 발견한 이들이 퇴근하고 돌아오는 부모를 반기듯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다 그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4쌍의 시선이 향한 곳은 로이스의 품에 안긴 새하얀 털 뭉치.
나비를 본 타니아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눈을 빛냈다.
"우, 우와! 걔 뭐예요? 세상에, 너무 귀엽잖아!"
통통한 뚠냥이에 홀딱 넘어간 타니아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탁-.
캬햐악!
나비가 타니아의 손을 쳐 내며 하악질 했다.
마치 너 같은 게 감히 나한테 손을 대냐는 듯 앙칼진 모습.
타니아가 상처받은 얼굴로 손을 감싸자, 뚠냥이의 정체를 알아차린 쌍둥이가 쪼르르 고개를 내밀었다.
"어?"
"설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나비가 움찔거렸다.
녀석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250년 전, 캐시 타워 산.
크헝!
식후 간식거리 크기의 인간이 돌아다니기에 달려들었던 나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두 입 거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상은 자신을 한입에 집어삼킬 괴물이었다는 걸.
[앗, 고냥이!]
[큰 고냥이!]
-켕!
그날 자신은 어린 꼬마들이 휘두른 주먹에 먼지 나게 얻어맞고 기절까지 했었다.
새록새록 떠오른 기억이 자신을 바라보는 쌍둥이의 얼굴 위로 투영됐다.
그리고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저 녀석들이 바로 그 두 입 거리 괴물임을.
"얘… 나비잖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카니의 손을 본 나비.
녀석의 생존 본능이 자존심을 넘어섰다.
할짝-.
카니가 자신의 손을 할짝이는 나비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칸도 녀석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라비나의 턱이 뚝 떨어졌다.
'마, 말도 안 돼....'
가문 내에서는 황제처럼 군림하던 그 광뇌호 나비가.
핥핥핥-.
여기서는 그냥 애완 고양이처럼 열심히 손이나 핥고 있었다.
그렇게 라비나의 넋이 빠져나간 사이.
"어? 오셨어요?"
밖에서 들어온 켄드릭이 로이스를 보고 반색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한쪽에 멀뚱히 서 있는 작은 여인에게 향했다.
"...."
"...."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
검성과 수왕의 만남에 로이스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어떨까?'
로이스가 라비나를 데려온 게 바로 이 만남을 위함이지 않은가.
원작에서 동료가 돼야 했을 운명을 지닌 둘이 새롭게 바뀐 세상에서 만나면 어떻게 반응할지.
바뀐 운명으로 인해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게 아닐지.
'켄드릭과 동료들이 다시 만나지 말란 법은 없다.'
우연이란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만약 우연히 켄드릭과 과거의 옛 동료들이 만나고 그로 인해 '알 수 없는 작용' 같은 게 일어난다면 로이스에게 이로울 게 없었다.
특히 켄드릭과 엘비스가 만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이 녀석한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는 없지.'
때문에 켄드릭과 라비나의 만남은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로이스는 잠잠히 켄드릭과 라비나를 관찰했다.
과연 두 영웅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짧은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켄드릭이었다.
"선생님, 이 거지 새… 음… 누굽니까?"
처음에 거지라는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라비나.
그녀는 자신을 향한 켄드릭의 시선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내 거지가 자신을 지칭하는 것임을 깨달은 라비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가 켄드릭을 노려보며 빼액 소리쳤다.
"이게 누구보고 거지래!"
"지금 소리치는 그쪽."
"내가 어딜 봐서 거지냐!"
"어딜 보든, 거지 맞는데?"
이리저리 진흙탕을 뒹굴고 온 그녀의 몰골은 사실 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제야 자신의 행색을 알아차린 라비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거지 봤어!"
"지금 봤어. 예쁘다는 거는 동의 못 하겠지만, 귀엽기는 하네."
"어… 그래? 고마… 아니, 무슨 소리야!"
전혀 말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켄드릭을 보며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원작에서 라비나는 켄드릭에게 투정 부리는 일이 다분했다.
어찌 보면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 라비나의 성격을 모두 받아 준 게 켄드릭이었다.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켄드릭은 라비나가 뭐라 하건 그저 웃으며 받아넘긴 것이다.
그런데 원작의 라비나와 지금의 라비나의 성격은 같았지만, 가장 중요한 켄드릭의 성격이 변했다.
빽빽 소리치는 라비나를 보고 켄드릭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매우 시큰둥한 얼굴로 말이다.
"귓구멍 막혔냐? 난 했던 얘기 두 번 안 한다."
"이, 이...."
라비나가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파들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로이스가 속으로 킬킬댔다.
'고럼 고럼, 누가 키운 놈인데!'
켄드릭이 로이스와 쌍둥이 눈치를 보고 매번 타니아한테 쥐어터지기는 하지만, 그건 다른 일행이 워낙 드세기 때문이다.
로이스한테 교육받고 갈굼받으며 자라난 켄드릭의 말빨은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정도.
마치 파브로가 로이스에게 식모 취급을 받으면서도 밖에서는 중후한 대전사 노릇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그렇게 어쩌면 동료가 되었을 이들이 신나게 말싸움을 벌일 때.
"로이스 님, 저 왔습니다!"
파브로가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그는 켄드릭과 대치 중인 라비나를 보고 물었다.
"저 땅딸보 거지 꼬맹이는 누굽니까?"
"...."
이제 드워프한테까지 땅딸보 취급을 받은 라비나.
"흐...."
나비도 빼앗겨.
로이스한테 무시도 받아.
"흐으...."
거기에 연타로 거지 소리를 들으며 쌓이고 쌓인 서러움이 폭발해 버린 그녀는....
"흐헝!"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냈다.
"흐아아앙!"
"...."
라비나의 대성통곡에 모두가 어이없는 시선을 보냈다.
* * *
로이스가 라비나를 데려온 날로부터 사흘이 흘렀다.
첫날 상거지 꼴을 하고 대성통곡을 했던 라비나.
지금에 이르러 그녀는....
"언니, 언니! 카니 언니, 너무 예뻐요. 세상에 피부 좀 봐!"
"우리 동생, 보는 눈이 좀 있네? 후후."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카니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카니뿐만이 아니었다.
"칸 오빠,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응, 고마워."
어디서 난 건지 모를 간식거리를 가지고 칸에게 달려가 쪼르르 내미는 라비나.
그녀는 다음으로 파브로를 목표로 잡고 움직였다.
"와, 파브로 아저씨 손재주 진짜 좋으시네요!"
"헐헐! 뭘 이 정도로!"
"요정님, 파브로 아저씨가 만든 것 좀 보세요! 세상에!"
"원래 파브로는 손재주 좋아. 쟤가 저래 보여도 드워프거든."
"네? 파브로 아저씨가 드워프라고요? 아하핫! 그거 요정식 농담인가요? 완전 재밌어요!"
"…진짠데."
심지어 핀까지 라비나와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타니아도 살짝 경계하는 눈빛이기는 했지만, 딱히 라비나를 거북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이를 보며 로이스는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위화감이 없어… 위화감이...."
단 며칠 사이에 라비나는 놀라운 친화력으로 로이스 일행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인 것처럼.
라비나에게서 조금의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이도 있었으니.
라비나가 사나운 눈을 하고 쏘아붙였다.
"야, 피대가리. 거기 내 자리거든?"
"네가 말하는 피대가리에 타니아도 포함되는 거냐?"
순간 흠칫한 라비나가 켄드릭을 향해 삿대질했다.
"…너 말이야, 너! 수컷 피대가리!"
"그럼 타니아는 암컷 피대가리냐?"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아, 아무튼 거기 내 자리라고!"
"언제부터?"
"사흘 전부터!"
"여기 왔을 때부터 내 자리였는데?"
"증거 있어?"
투덕거리는 켄드릭과 라비나를 보며 로이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야 원… 애들도 아니고.'
나이를 스물셋이나 먹고 투덕거리는 저들을 보고 있자니....
'재밌네?'
재밌었다.
뭔가 대형견과 고양이가 아웅다웅하는 것 같달까?
정작 진짜 고양이 과에 속하는 나비는 난로 옆에 배를 드러내고 대자로 퍼질러 자고 있었지만.
'뭐, 그건 그거고.'
로이스가 라비나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흠칫 어깨를 떤 라비나.
'왜, 왜 오는 거야?'
그녀가 이곳 생활에 적응하면서 알아낸 것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첫째, '나비를 데려간 도둑놈'의 이름이 로이스라는 것.
둘째, 저 로이스란 자가 이 일행의 수장이며 말 한마디로 모두를 부려 먹는 절대 권력자라는 것.
자신을 상대로 조금도 물러섬이 없는 수컷 피대가리조차 로이스의 눈치를 보며 꼼짝을 못 했다.
그런 절대 권력자가 다가오니 라비나가 겁에 질린 눈망울을 했다.
"왜, 왜요?"
"너, 집에 안 가냐?"
"…가야 해요?"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데?"
"저 데려가 주신다고 하신 건 로이스 님이셨잖아요?"
"내가 데리고 간다고 했지, 앞으로 쭉 데리고 있겠다고는 안 했는데?"
"그, 그거야 그렇지만… 이대로 갈 수는 없어요! 나비랑 같이 가야...."
라비나의 시선이 난로 쪽을 향했다.
자신이 언급되자 나비가 살짝 고개를 젖히고 라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봐도 라비나를 따라가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비와 눈이 마주친 라비나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나비 너....'
지난 사흘간 틈만 나면 나비를 데려가고자 꼬드겼지만, 이미 주인을 찾은 나비는 라비나의 꼬드김에 넘어오지 않았다.
"나비가 뭐?"
"…아무튼, 전 나비가 간다고 할 때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그리 말하고는 타니아의 등 뒤로 쏙 숨어 버리는 라비나.
"어? 저, 저기...."
당황한 타니아가 허둥거렸다.
라비나는 켄드릭과 동갑.
다시 말해 라비나가 타니아보다 언니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하는 짓을 보면 누가 봐도 타니아가 언니처럼 보였다.
그렇게 타니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라비나를 구원해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이, 그냥 쟤 같이 데리고 다니자."
"맞아, 애는 착해 보이네. 조금 정신없기는 하지만."
무려 쌍둥이에게 정신없다는 소리를 들은 라비나.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라비나는 그저 자신을 변호해 주는 칸과 카니가 고마울 뿐이었다.
"언니! 오빠!"
칸과 카니를 향해 쪼르르 달려가는 라비나를 보며 로이스가 혀를 내둘렀다.
'쯧, 이러려고 쌍둥이를 그렇게 쫓아다닌 거냐?'
며칠 지켜본 결과 라비나의 눈치는 비상했다.
그러니 알아차렸을 테지.
자신 다음으로 발언권이 있는 게 바로 쌍둥이란 걸.
그러고는 쌍둥이에게 알짱거리며 제 편으로 만든 것이리라.
"에휴...."
크게 한숨을 내쉰 로이스가 쌍둥이를 향해 말했다.
"칸, 카니."
"응?"
"왜?"
"앞으로 걔 사고 치면 니들이 책임져라."
"그래, 알았어!"
"뭐, 그게 어렵다고. 우리가 사고 못 치게 제대로 단속할게!"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쌍둥이를 보며 로이스가 씨익 미소 지었다.
돌아가는 상황에 라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그녀는 몰랐으리라.
늑대를 피해 도망친 곳이 호랑이 굴임을.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로이스에게 설설 기는 편이 백배 나았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핀과 파브로는 라비나를 향해 명복을 빌어 줄 뿐이었다.
그렇게 대충 라비나를 쌍둥이에게 떠넘긴 로이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런 그에게 켄드릭이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슬슬 때가 됐으니까."
"네?"
"이제 막판이니까 마무리하고… 판돈 회수하러 가야지."
"아아...."
"벌써 그렇게 됐네요."
핀, 쌍둥이, 불꽃 남매, 파브로.
로이스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여섯은 올 게 왔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나비는 자세를 뒤집어 단잠에 빠져들었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막판? 판돈?"
아무것도 모르는 라비나는 연신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워 올릴 뿐이었다.
192화. 구세주 (2)
수만의 몬스터 무리 속.
4마리의 오우거가 거대한 가마를 짊어지고 있었다.
가마의 크기가 어찌나 크던지 마치 집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 보였다.
가마의 정체는 수만 몬스터를 이끄는 제왕의 거처.
그 안에 자리한 스노우 킹은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크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정체 모를 괴물의 협박에 허겁지겁 백치 산맥을 떠났고, 계속되는 괴물의 추격에 정신없이 쫓겨 다녔다.
-췩?!
정말 끔찍한 나날이었다.
분명 떠나라고 해서 떠났건만, 왜 쫓아온단 말인가!
이리로 가면 저기서 나타나고.
저리로 가면 또 이쪽에서 나타나고!
끝까지 쫓아올 기세로 따라붙는 괴물 덕분에 쉬지도 못하고 도망만 쳐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인간 놈들은 왜 자꾸 나타나 앞을 막아서는지....
-크륵....
인간의 군대가 처음 나타났을 때 조금 쫄았다.
철갑 거인.
인간들이 만들어 낸 괴이한 물건.
그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약한 놈도 오크 수십은 가뿐히 썰어 버리며, 조금 센 놈은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와 맞먹었다.
그런 철갑 거인 수천이 정면에 쫙 깔려 길을 막아서고, 뒤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쫓아오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졌다.
-췩!
만약 알 수 없는 빛에 철갑 거인들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아마 그곳이 내 무덤이 됐으리라.
그리고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정신없이 쫓기고 막아서는 인간들을 짓밟고 넘어가고.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얼마나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8만에 달했던 부하들이 이제는 겨우 5만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인간들에게 당한 부하들이 2만 정도였고, 나머지는 쉬지도 못하고 도망치는 통에 탈진으로 죽어 버렸다.
혹은 배고픈 동족의 먹이로 전락했거나.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내다 보니 어느 순간 괴물들이 쫓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크르르륵
이곳에 도달해 있었다.
-크륵!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
인간들이 만들어 낸 쓸모 있는 건축물.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인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췩!
이거였구나!
자신을 이리로 내몬 괴물의 진정한 뜻!
바로 자신을 이리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큭큭.
기꺼이 괴물의 기대에 응해 주면 그만.
'인간의 도시라....'
딱 보아도 꽤 규모가 컸다.
아마 인간들의 도시 중에도 제법 이름난 도시겠지.
'오히려 잘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산보다는 인간이 쌓아 올린 것을 빼앗고 이를 나의 터전으로 삼으면 된다!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착취하여 이곳을 기점으로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거다.
인간이 세운 도시가, 그들의 피와 살이 나의 새로운 양식이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의 땅을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
저 멀리 보이는 제도를 바라보는 스노우 킹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고, 검붉은 혀가 입술을 핥았다.
마치 맛난 고기가 바로 앞에 있다는 듯.
끈적한 군침을 가득 머금고 말이다.
* * *
도미넌트 제국의 제도.
겨울 대륙 동부를 거의 장악한 거대 국가의 심장부에 5만에 달하는 몬스터 대군이 등장했다.
놈들은 제도에서 1㎞ 떨어진 지점에 진을 치고 움직이지 않았다.
말이 1㎞지, 사실상 코앞에 이르렀다고 봐야 했다.
때문에 제국은 급히 제도를 봉쇄했다.
진을 친 몬스터 대군으로 인해 일반 평민은 물론 상인들까지 출입을 자제했다.
아니, 문을 열어 준다고 해도 저 숱한 몬스터 무리를 뚫고 나갈 간 큰 이는 없었다.
제도에 사는 귀족은 물론 일반 평민.
외부에서 왔다가 발이 묶인 자들까지.
그렇게 제도가 스노우 킹 군단으로 인해 얼어붙은 상황.
모든 판단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황궁에서는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그래서 대책이 있어야 할 거 아니오!"
"지금 상황에서 무슨 대책을 논해! 당장 폐하를 제도 밖으로 모시고 제도를 이전해야 하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제국의 근간인 제도를 버린다는 것은 사실상 이 나라를 포기한다는 소리이다!"
"뭐? 어디서 말을 함부로 놔!"
버젓이 황제가 지켜보고 있음에도 고성으로 토로하는 대소신료들.
황제는 아무런 말 없이 그들의 탁상공론을 지켜볼 뿐이었다.
사실상 그에겐 이를 뭐라 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황제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기어코 이리되었구나....'
사활을 걸고 만들어 낸 3차 저지선.
그곳이 마침내 뚫리고 말았다.
'어쩌다… 어쩌다....'
으득-.
황제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났다.
분노가 일고 그의 의식이 이번 일의 시초인 사무엘 후작에게 닿았다.
며칠 전, 감옥으로 끌려가면서도 억울하다고 소리치던 뻔뻔스러운 놈.
'씹어먹을 놈!'
애초에 모든 일을 계획한 그놈의 실수로 이런 파국이 발생했다.
거기에 이번 일을 수습하겠다고 나서더니 상황을 더욱 최악으로 몰고 갔다.
'검공이 죽었다니.'
제국 최강의 검.
전해진 바로는 사무엘 후작이 보낸 괴물이 갑작스럽게 전선을 이탈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계획했던 모든 전략이 어그러졌고, 검공은 스노우 킹을 상대하다가 전사했단다.
'잃은 게 너무 많구나....'
막대한 군자금은 물론 수천의 초월기.
거기에 제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사까지.
너무도 허무하게 많은 것을 잃었고,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일로 인해 제국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방법이 없는가....'
이번 전쟁에 투입된 제국의 병력이 무려 15만에 달한다.
거기에 추가로 불러들인 속국의 병력을 포함하면 20만에 육박한다.
물론 시간만 주어졌다면 그 몇 배의 병력도 운용할 수 있었다.
제국이 괜히 제국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시간이 없구나.'
시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전쟁 물자부터 시작해서 병사들의 준비까지.
하지만 제국은 불과 몇 주 사이에 엄청난 규모의 전쟁을 연달아 치렀다.
제대로 된 준비 과정 없이 말이다.
그나마 제국이기에 이 정도의 준비를 한 것이지만, 이제 한계였다.
아니, 실상 이제 더 뭔가를 준비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후우...."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 속에 황제의 한숨이 뒤섞였다.
그때였다.
철컥철컥-.
문밖에서 갑주가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의 무사가 대전으로 들어섰다.
대전의 중앙에 급히 무릎 꿇은 무사가 입을 열었다.
"충! 보고드립니다!"
무사의 등장에 대전의 소란이 사그라지고 황제가 등받이에서 살짝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더냐?"
"방금 막 몬스터 군단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
황제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가 다급히 물었다.
"아군의 준비는?"
지금 남은 중앙 수비군은 기껏해야 1만 남짓이다.
수성전을 펼친다면 충분히 버틸 만한 병력이었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황제의 물음에 무사는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문제없습니다! 이대로 전부 달려든다고 해도 놈들은 절대 제도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을 겁니다."
"흠… 한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 듯싶더냐."
"만약 준비된 물자만 소비한다면 석 달은 버틸 수 있으나, 제도의 물자를 한계까지 끌어모은다면 1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한계까지 제도의 물자를 끌어모은다.
그것은 제도에 자리한 평민들의 재산을 강제로 징집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이를 뭐라 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안도했다.
"하… 다행이군."
"1년이라… 그 정도면 저 괴물들도 포기하고 물러나겠지."
"1년이면 그 전에 서부 사령부의 예비 병력이 준비를 끝마치고 우리를 구하러 올 것이네!"
제도의 귀족들에게 평민의 재산 따위는 별로 신경 쓸 게 없는 터럭과도 같은 것.
이를 소비하여 자신들이 안전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낭비돼도 상관없는 것들이다.
그렇게 탁상공론을 펼치던 귀족들이 안도하고 있던 찰나.
쾅-.
황궁의 대전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는 굉음에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이냐!"
놀라기는 보고를 하던 무사도 마찬가지였다.
"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무사는 다급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쿵- 쿵-.
그사이에도 묵직한 굉음은 계속됐다.
얼마 뒤, 되돌아온 무사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보, 보고드립니다! 현재 대형 몬스터들이 제도를 향해… 오, 오크를 집어 던지고 있다 합니다!"
"...?!"
다 자란 성체 설원 오크의 무게는 족히 100㎏이 넘어간다.
어지간한 바윗덩어리와 같은 무게.
그리고 놈들에게는 수만 마리의 오크들이 있었다.
더군다나 오크들의 번식력은 경악스러울 정도.
만약 놈들의 투석… 아니, 오크 투척으로 계속해서 피해가 누적된다면?
'과연 이 황성이라고 안전할까?!'
황제는 머리 위로 1만 마리의 오크가 날아오는 상상을 했다.
그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빠져나갔다.
"폐하, 폐하! 속히 피신하셔야 하옵니다!"
"어허! 경거망동 마시게! 일시적인 일일 뿐이네! 이곳에서 버티고 있다면 충분히 놈들을 물리칠 수 있네!"
"그러다 폐하께 변고라도 생긴다면 그대가 책임질 터인가! 폐하가 계셔야 이 제국이 존재하는 거네!"
"제국은 강하오! 고작 저런 몬스터들 따위에 점령될 리 없습니다!"
"그 몬스터들이 바로 코앞까지 와서 오크를 날려 대고 있지 않냔 말이다!"
대회의장은 다시 시장통으로 변했다.
황제를 피신시켜야 한다는 무리와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위험하니 원조를 기다리자는 무리.
대소신료들은 양 파로 나뉘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언쟁만 높아지고 뚜렷한 대책은 생기지 않을 때.
'답답하구나....'
황제는 숨을 할딱거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턱턱 막히는 호흡에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났다.
더불어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지금의 상황과 너무도 대조적으로 아름답게 말이다.
'…하얗게?'
처음에는 그저 현기증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
사방을 밝게 물들인 새하얀 빛에 황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대소신료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무슨?!"
"무슨 일이냐?!"
"갑자기 웬 빛이?!"
모든 것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빛의 근원은 밖이었다.
밖으로부터 대전 안으로 흘러들어 모든 것을 밝게 비추고 있던 것이다.
보고를 기다릴 수 없었던 황제는 직접 움직였다.
그는 빠르게 대전의 창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제도의 높디높은 상공.
그곳에 떠 있는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저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크기만 수십m에 달하는 거대한 인간이었다.
모든 것이 하얗고 성스러움이 풍기는.
지상을 굽어보는 눈빛에 지엄함이 깃든 존재.
제도를 밝게 물들인 빛은 바로 그 형상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황제는 물론, 귀족들까지 한참 동안 넋 나간 얼굴로 하늘을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 명의 무사가 다급히 대전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화색을 지으며 말했다.
"그, 급보입니다! 몬스터들의 공격이 멈추었습니다!"
"...?!"
"또한, 몬스터들이 겁을 먹고 물러나고 있다 합니다!"
보고를 받은 황제가 무사를 보며 물었다
"몬스터들이 겁을 먹고 물러난다?"
"그렇습니다!"
"어찌… 어찌 말이냐?"
"정확한 원인은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오나 하늘에 저것이 나타나고 몬스터들이 겁에 질려 뒤로 도망쳤다 하옵니다!"
"허...."
황제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기에...."
무엇이기에 몬스터들 물리쳤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황제의 궁금증은 곧 해결되었다.
번쩍-.
황제의 대전에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빛.
그리고 그곳에서 들려온 목소리.
"전신의 은총이 함께하리… 오, 주여!"
옅은 빛을 등지고 그 안에서 백발의 청년, 로이스가 성호를 그리며 등장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고 있는 파브로까지.
그들의 등장에 놀란 이들이 소리쳤다.
"웬 놈이냐!"
"누구냐!"
자신을 향한 외침에 로이스가 웃으며 답했다.
"너희의 구세주시다. 이 새끼들아."
193화. 협상 (1)
난데없는 로이스의 폭언.
살면서 귀한 대접만 받고 자란 이들이, 생전 처음 보는 이의 폭언을 참아 줄 리 없었다.
특히나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도미넌트 제국의 귀족들이었다.
그나마 쓸 만하고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귀족들은 진작에 제국을 위해 검을 들고 싸우거나 각 부처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다시 말해 현재 대전에 모여 탁상공론을 하는 귀족들은 쓸모없는 잉여 인력이란 소리였다.
가진 재주에 비해 쓸데없이 콧대만 높은 이들.
그런 자들의 반응은 뻔했다.
"어디서 온 놈들이냐!"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입을 함부로 놀려!"
"침입자다! 근위대는 뭐 하는가!"
여기저기서 분노 가득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큰 목소리에 로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목소리 큰 사람이 장땡인가?"
그럼 내가 한 목소리 하지.
킬킬거린 로이스가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곧 그의 입에서 우렁찬 노성이 터져 나왔다.
"닥쳐!"
웅- 웅-.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입을 놀리던 이들이 놀라 멍하니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이에 로이스가 흡족하게 웃었다.
"이게 복식호흡이란 거야."
복식호흡 한 번으로 상황을 정리한 로이스.
정적이 찾아온 가운데 로이스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너희의 구세주가 납셨는데 그렇게 떠들어 대면 쓰나."
로이스가 웃는 낯으로 대전을 쑥 훑었다.
곧 그의 시선이 대전의 가장 안쪽, 높은 단상에 향했다.
누구보다 화려한 의복과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중년의 사내.
한눈에 봐도 어떤 직위를 지닌 이인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오늘 로이스가 만나러 온 인물이기도 했다.
저벅저벅-.
로이스가 그를 향해 걸어가는 사이 파브로가 말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잠시 뒤, 약 5m의 공간을 두고 마주한 두 사람.
먼저 입을 연 것은 황제였다.
"누구냐. 나는 그대를 초대한 적이 없는데?"
덤덤한 목소리에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오호? 황제는 황제라는 건가?'
다른 귀족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하지만 로이스는 담담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 섞인 당혹스러움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조금 섭섭한데요? 전 분명 그쪽이 보낸 초대장을 자아아알 받았는데?"
황제를 향한 로이스의 가벼운 언사에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이놈! 예를 갖추지 못할까!"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그들의 노성에 로이스는 상대해 주지 않았다.
대신 파브로가 나섰다.
쿵-.
묵직하게 대전을 내리찍은 파브로의 발.
그러자.
쩌저적-.
대전의 대리석이 갈라지며 움푹 가라앉았다.
바닥의 균열은 조금 전 소리친 이들의 앞에서 정확히 멈추었다.
파브로가 그들을 보며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
"조용히 하라. 본 교의 교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이다."
싸늘한 파브로의 목소리가 깔리고, 그를 알아본 이들이 나타났다.
"저, 저자는?!"
"교단의 대전사?"
"조용히 하라 하였다. 다음번에 입을 열 시… 이번처럼 경고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입을 열었던 이들이 파브로의 날카로운 눈총에 입을 다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교단의 대전사란 호칭에 황제의 눈에도 살짝 놀라움이 스쳤다.
'저자가 그 늙지 않는 괴물이란 말인가?'
교단의 대전사에 관한 소문은 황제 역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제국이 자랑하던 검공보다 훨씬 윗줄의 실력자로 평가되는 존재.
다시 말해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현재 이곳에서 살아남을 자는 없다는 뜻이었다.
설사 그것이 암중의 호위에게 보호받는 황제 본인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할 터.
다시금 찾아온 정적 속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교단의 교주라고? 한데, 이상하군, 내 언제 그대에게 초대장을 보냈다고 하는 건가?"
"왜 이러십니까? 그쪽이 애들 시켜서 우리 집에 있는 신물 훔쳐 갔잖아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뭐, 그렇게 나오셔야겠죠."
"무슨 방법으로 이곳에 온 것인지는 모르나… 더 이상 너의 시답지 않은 소리에 어울려 주기에는 내 오늘 시간이 없구나. 이만 돌아가라."
"정말요? 우리 정말 가도 돼요? 후회할 텐데?"
로이스가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창문 밖,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말이다.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것 역시 너희의 짓이더냐?"
"칼로스 님의 뜻이죠. 제가 모시는 주님께서 어찌나 자비로우신지… 제국에 기회를 주라고 하더라고요."
"참으로 재밌는 헛소리이군."
"와, 이거 서운합니다. 신의 기적을 보고도 헛소리라는 말이 나와요?"
"거짓된 말로 나를 현혹하려 하지 마라."
"흠… 그런가요?"
로이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돌연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파브로, 어디서 자꾸 윙윙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아? 벌레가 있나 보네."
"이런… 속히 처리하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파브로가 힘차게 주먹을 내리꽂았다.
쾅- 쩌저적-.
삽시간에 지면을 파고든 파브로의 주먹.
동시에 대리석에 균열이 일며 뻗어나가 황제의 뒤편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커헙! 큽!
작은 신음과 함께 두 명의 사내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곧이어 천장에서 검은 옷을 입은 무사 18명이 내려와 황제를 에워쌌다.
그들의 면면을 바라본 파브로의 얼굴이 살짝 경직됐다.
'모두 2티어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파브로조차 감지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18명의 2티어급 무사.
그들의 저력은 파브로도 쉽사리 무시할 게 아니었다.
한편, 모시는 주인의 위기에 호위 무사들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파브로와 로이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보호를 받는 황제.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피를 토하는 두 명의 무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
단숨에 자신의 암중 호위를 잡아내고 치명상을 입힌 파브로의 무위에 황제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가 잔뜩 굳은 눈으로 물었다.
"이러고도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
"저희가 살아남을지 폐하가 살아남을지는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두 번의 기습은 통하지 않는다."
"확인해 보시렵니까? 저와 파브로가 이곳에서 죽는다 쳐도 저들 중 절반과 폐하는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로이스와 황제 사이에 팽팽한 기 싸움이 이어졌다.
더불어 파브로와 황제의 암중 호위단 사이에 살기도 더해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
그 순간 로이스가 웃으며 말했다.
"아아, 서로 시간도 없는데 이렇게 날 세우지 맙시다. 저도 그냥 원하는 것만 얻어 가면 그만이니."
로이스가 먼저 물러서니 황제도 한발 양보했다.
"…원하는 게 뭐냐."
드디어 제대로 된 대화의 기미가 보이자 로이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하나씩 펴지는 손가락.
"제가 원하는 것은 단 세 가집니다. 첫째, 우리에게서 훔쳐 간 신물의 반환. 둘째, 우리를 고생하게 한 거에 대한 적절한 피해 보상. 그리고...."
이윽고 세 번째 손가락이 펴졌다.
"협상."
"…협상? 무슨 협상을 말하는 거냐?"
"지금 제도 밖에 진을 치고 있는 몬스터를 저희가 처리해 드리죠."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나타났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다만 공짜로 해 주겠다는 거는 아니고."
"무얼 원하는 거지?"
"글쎄요? 뭘 원할까요?"
"…지금 뭘 하자는 짓이냐?"
"협상 중이잖아요?"
"그래서 묻지 않았는가! 원하는 게 있다면 이야기하라고!"
"에이, 뻔하죠. 그걸 꼭 제 입으로 얘기해야 합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랗게 보였다.
그러면서 말했다.
"아, 어디서 우리 칼로스 님한테 헌금 같은 거 안 들어오나...."
그냥 대놓고 돈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성호를 긋는 게 어찌나 얄밉던지.
황제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얼마를 원하는가?"
"에이, 그렇게 날로 먹으려고 하면 안 되죠. 협상의 기본이 안 되어 있으시네."
"…뭐라?"
부들부들 떠는 황제를 보며 로이스가 웃으며 손을 내밀고 까딱거렸다.
"선제시요."
"...?"
"원래 협상의 기본은 꿀리는 쪽이 선제시하는 거 아니겠어요? 자, 그러니 해 봐요. 그쪽에서 얼마나 해 줄 수 있는지."
부들부들-.
유들거리는 로이스의 언사에 황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태어나 누군가에게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이 있던가?
날 때부터 그는 모든 이들의 위에 있었고, 받들어지는 존재였다.
지금까지 로이스의 무례한 언사를 참아 준 것만으로도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바닥난 인내심의 바닥까지 싹싹 긁어 가며 참았다.
황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100만 골드를 주겠다."
"…얼마요? 100만? 고작?"
"…고작?"
황제의 얼굴에 어이가 사라졌다.
한편 로이스는 귀를 후볐다.
후비적.
묻지도 않은 귀지를 입김으로 털어 낸 로이스.
"와, 이 넓은 땅덩어리를 가지신 분이 생각보다 배포가 작으시네."
"도대체… 얼마를 원하는 거냐."
"음, 여엉… 감을 못 잡는 거 같으니 그냥 알려 드리죠."
"…말하라."
황제의 살기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로이스는 웃을 뿐이었다.
그러다 돌연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1억 골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내에 충격이 퍼져 나갔다.
주변 반응과는 상관없이 로이스의 얼굴에는 다시금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어때요? 생각보다 저렴하죠?"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르는구나."
"왜 이러십니까? 제국이라는 곳에 그 정도 돈도 없어요?"
"1억 골드면 제국의 10년 치 예산이다."
"그럼 싼 거 아닌가요?"
"…뭐?"
"이대로 몬스터 군단에 제도가 탈탈 털려서 제국이 사라지는 것보다는 10년 치 예산을 들여서 제국의 명맥을 이어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아, 액수가 부담스러우시다면… 할부도 받습니다."
로이스의 능청스러움에 기어코 황제의 마지막 인내심마저 바닥나고 말았다.
까득-.
"돌아가라. 내 오늘의 무례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정말요? 돌아가요?"
"꺼져라."
"후회하실 텐데? 우리 칼로스 님이 생각보다 내성적이셔서 이렇게 거절당하시면...."
로이스가 창문을 가리켰다.
여기서 우리 쫓아내면 저거 뺀다?
그래도 가라고 할 거야?
…라는 게 로이스의 눈빛에서 적나라하게 보였다.
현재 상공에 떠오른 괴이한 형상이 몬스터로부터 제도를 지켜 주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걸 빼겠다고 하는 것은 그냥 협박이었다.
황제가 이를 아득 깨물었다.
"그대는 협상이 아닌 협박을 하고자 왔군."
"에이, 협박이라뇨. 애초에 우리 칼로스 님의 도움으로 지금 잠깐 숨통이 트였잖아요? 이건 그냥 본격적인 협상을 위한 약간의 맛보기입니다. 고객이 사야 할 물건에 흠이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유들거린 로이스가 등을 돌렸다.
"뭐,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
"아,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하얀 신호탄 하나를 쏘아 올리세요. 그럼 언제든지 올 테니까."
마치 언제든지 황궁에 들어올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가자, 파브로."
"예, 교주님."
그렇게 로이스를 뒤쫓는 파브로.
곧 그들의 신형이 다시금 빛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더불어.
"어, 없다?!"
"사라졌다!"
"저, 전신 역시 사라졌습니다!"
제도의 상공에 둥둥 떠 있던 전신의 형상마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꿈이었다는 듯 아무런 흔적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쾅- 쾅-.
다시금 황궁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도 상공에 나타난 전신의 형상이 사라지기 무섭게 몬스터들의 폭격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큭!"
로이스가 떠나자 다시금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려왔고, 황제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극심한 두통이 찾아든 것이다.
다시금 의자에 주저앉은 그는 로이스가 머물다 간 자리를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 * *
황궁을 빠져나온 로이스와 파브로.
크어어어!
크륵!
키에에엑!
로이스가 제도 인근 상공에서 몬스터들이 발광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파브로가 그를 스리슬쩍 곁눈질했다.
황궁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계속 따라붙는 시선에 결국 로이스의 짜증이 폭발했다.
"아, 왜! 할 말 있으면 말로 해!"
"…안 때리실 겁니까?"
"들어보고."
"그럼 그냥 안 하렵니다."
"그럼 나도 그냥 때릴래."
"으아아아! 합니다! 할게요!"
허둥거리는 파브로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왜 고작 1억만 부르신 겁니까?"
황궁에서부터 파브로가 품어 온 의문.
그건 로이스가 '고작 1억 골드'만 불렀다는 점이다.
언제부터 1억 골드가 고작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로이스에게는 '고작'이 맞았다.
그간 들인 수고와 노력이면 못해도 10억을 불렀어야 했다.
그게 파브로가 알고 있는 로이스였다.
파브로의 질문에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난 또 뭐라고. 물론 내가 들인 수고에 비하면 1억 골드는 푼돈이나 다름없지. 암! 그렇고말고."
"…네, 그러시겠죠. 그래서 어찌 1억 골드만 부르신 건데요?"
"파브로 내가 당장 10억 골드, 100억 골드를 불렀으면 저쪽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당연히 지랄했겠죠. 1억 골드에도 저렇게 게거품을 무는데.... 10억 골드나 100억 골드를 어떻게 주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금액인데."
"바로 그거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금액! 하지만 1억 골드는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는 금액이잖아?"
"어?"
10억 골드면 제국의 100년 치 예산.
100억 골드면 1,000년 치 예산이다.
정말 감조차 오지 않을 엄청난 금액.
하지만 1억 골드는 다르다.
한번에는 무리더라도 조금씩 갚는다면 수십 년 내에 충분히 상환이 가능한 금액이다.
아니, 어쩌면 제국의 금고를 턴다면 1억 골드쯤은 충분히 지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냥 1억 골드가 아닐걸?"
"네?"
"후후. 있어 그런 게."
또 자기만 알고 말 안 해 준다고 속으로 꿍시렁거린 파브로.
한참을 투덜거리던 그가 살짝 걱정을 담아 물었다.
"한데, 과연 황제가 그 돈을 주려고 할까요?"
"처음에는 안 주려고 하겠지."
"그럼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 뭘 어째? 우리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게 바짝 쪼이면 되는 거지. 제발 1억 골드를 줄 테니 도와달라고."
"역시...."
음흉하게 웃는 로이스를 보며 파브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194화. 협상 (2)
칸부르크 왕국과 도미넌트 제국의 접경 지역 인근.
스노우 킹 군단이 제국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 되었지만, 칸부르크 왕국의 병사들은 여전히 국경 인근에 진을 치고 있었다.
후욱-.
허연 입김을 뿜어 낸 로칸 7세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
분주히 움직이는 병사들 사이에 흰 천으로 가려진 철장이 있었다.
크륵-.
취익-.
가려진 철장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다름 아닌 몬스터의 울음소리.
너덧 명의 병사들이 낑낑거리며 철장을 외곽으로 빼내면 초월기가 그것을 들고 국경을 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칸 7세는 기어코 한탄하고 말았다.
"…이게 이리되는군."
현재 칸부르크 왕국에서 하는 짓은 몬스터를 잡아다가 제국 깊숙이 풀어 놓는 것.
제국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던 예전이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스노우킹 군단에 의해 제국 동부가 궤멸하면서 이 말 같지도 않은 일이 가능해졌다.
"내 살다 살다 생포한 몬스터를 남의 나라에 푸는 짓까지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건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시킨 존재는 다름 아닌 교단의 교주였다.
막 스노우 킹 군단이 제국의 동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제도에 다다랐을 때.
병력을 철수하려는 로칸 7세의 앞에 로이스가 나타났다.
'어디 가시려고요?'
'우리의 할 일은 끝났으니 이제 그만 병력을 물리려고 하오.'
'에이 그러시면 안 되죠.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일 하나만 더 합시다. 거국적으로다가.'
로이스가 말한 거국적인 일을 들은 로칸 7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몬스터를 제국에다가 풀라는 말이오?'
'네.'
'왜 그래야 하는 거요?'
'열심히 일하고 있는 왕돼지에게 총알이 떨어지지 않게 보충해 주는 개념이랄까요?'
'총알? 그건 무슨 말이오?'
'대충 오크 로드가 더 미쳐 날뛰게 도와준다는 말이죠.'
'듣자 하니 우리가 잡아 온 몬스터로 스노우 킹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는 거 같은데… 설사 그리한다고 해도 제국 내 풀 몬스터가 스노우 킹의 군단에 합류하겠소이까?'
'스노우 킹의 영역 일정 범위에 들어가기만 하면 몬스터들은 제집 찾아가는 것처럼 그리로 향할걸요.'
'좋소.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만약 제도가 이대로 무너진다면, 저 몬스터들이 도리어 칸부르크로 넘어올 수 있소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손으로 위험만 키운 꼴이 되지 않소이까?'
'그건 걱정 마세요. 몬스터 군단은 제국의 영토에서 완벽하게 처리될 테니까.'
'흐음....'
'저 못 믿어요? 제 덕분에 이득 본 거 이왕 끝까지 한번 믿어 봐요.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니까.'
'…알겠소이다.'
결국 로칸 7세는 로이스의 자신감 가득한 제안을 승낙하고 말았다.
지난 수십 년간 마물과 몬스터와 싸워 온 입장에서 몬스터를 잡아다 남의 나라에 풀어놓는다는 게 매우 찜찜했지만, 그것도 처음뿐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슬슬 이 일이 재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빨리빨리 움직여!"
"어허! 조심히 다루라고! 고상하신 제국 놈들에게 뿌릴 귀하신 똥이라고! 온전히 모셔다 드려야지!"
병사들은 그간 자신들을 업신여긴 제국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찾아왔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며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로칸 7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나도 모르겠구나....'
과연 이번 일의 끝이 어떻게 날 것인지.
전혀 예측되지 않았다.
* * *
도미넌트 제국 서부 사단장저(邸).
저택의 주인인 서부 사단장 바르콘 후작은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제도가 위험하다라....'
이미 며칠 전, 제도로부터 전서가 도착했다.
그 내용은 스노우 킹 군단에 의해 제도가 포위당했으니 신속히 병력을 이끌고 제도의 위험을 제거하라는 것.
하지만 바르콘 후작은 아직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오늘에 이르러 제도로부터 한 명의 무사가 파견됐다.
제도를 포위한 수많은 몬스터 무리를 뚫고 겨우겨우 서부에 닿은 황제의 밀사.
그는 바르콘 후작에게 황제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의 내용은 그전에 보낸 긴급 전서와 같은 내용이었다.
어서 빨리 병력을 보내라는 것.
이를 받아 든 바르콘 후작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다급하면 할수록.
제도를 둘러싼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 실감할수록.
이번 일이 자신에게 기회라는 생각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지난 3차 저지군에 보낸 병력은 3만, 현재 나에게 남은 서부 사단의 병력은 7만.'
겨울 대륙 서부의 열강과 맞닿아 있는 서부 사단은 동부 사단에 비해 월등히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 3만의 병력이 지난번 일로 소모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에게는 7만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오랜 기간 국경 수비를 책임져 온 최정예 병사들이 말이다.
'이미 동부의 병력은 대다수가 중상을 입고 사실상 궤멸한 상태다. 황제가 보유하고 있던 중앙 수비군 역시 마찬가지. 그렇게 되면… 사실상 현 제국에서 내가 보유한 병력이 가장 많다.'
물론 황제가 징집령을 발동하여 병력을 모은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현재 황제는 제도에 묶여 있다.
설사 징집령을 발동해 병력을 모은다고 해도 이를 인솔할 지휘관이 없었다.
'검공은 죽었고, 동부 사단장인 호안 후작은 생사를 알 수 없다.'
자신의 가장 큰 경쟁자 둘이 사라진 상태.
고민하던 바르콘 후작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한참 전부터 곁에 서 있는 그의 보좌관.
오랜 시간 자신과 손을 맞췄고, 그 누구보다 신뢰하는 이였다.
바르콘 후작이 그를 향해 물었다.
"너는 어찌해야 한다고 보느냐."
"제도의 구원 요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함께한 시간이 헛것은 아니었는지 보좌관은 단번에 상관의 의중을 꿰뚫었다.
바르콘 후작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보좌관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약간 이어진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만일 각하께서 이 제국의 영광을 이어 나가길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서부의 정예를 이끌고 황제 폐하와 제도를 구하러 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후작의 질문에 보좌관의 눈이 번뜩였다.
"과거의 영광 위에 더욱더 거룩한 영광을 씌워… 새로운 세상을 여시면 됩니다."
"…그렇군."
보좌관의 말이 도움이 됐는지 바르콘 후작의 복잡했던 눈이 맑아졌다.
그러했던 후작의 눈 속에 무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득한 열망이었다.
"제도에서 칙서를 들고 온 그놈은 어찌하고 있느냐?"
"저희가 마련해 준 숙소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래… 그 사선을 뚫고 왔으니 피곤할 만하겠지."
"...."
"편히 쉬게 해 주어라."
후작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좌관이 모를 리 없었다.
"명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보좌관이 후작의 곁을 떠나갔다.
사선을 뚫고 온 황명의 전달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기 위해.
그렇게 그날 하나의 생명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서부 사단은 침묵했다.
마치 제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남의 나랏일인 양,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듯 말이다.
한편, 지난 며칠 서부 사단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던 로이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것 봐라?"
지금 제도에서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이 서부 사단이었다.
저들이 작정하고 병력을 일으켜 제도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진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고 수작질을 부리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네?"
분명 제도의 상황이 전해졌을 터.
한데 서부 사단이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딴맘을 품었다는 거지.'
그런 서부 사단의 선택은 로이스에게 호재였다.
귀찮게 이것저것 손쓸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자, 그럼 이제 황제는 어떻게 나오려나?"
로이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