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이메니아 아카데미(14)
최대한 쥐 죽은 듯이 있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낑낑이를 불러냈지 않나.
아가 낑낑이가 아니라 어른 낑낑이의 존재감으로 적당히 위협하고 주변에 가득한 사기로 테오르도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사신 소환을 발동한 것이었다.
더 이상 뇌제와 청염은 사용할 수 없겠지만, 어차피 남은 마력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최후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뭔....
- 기어이 계속하겠다는 말이구나. 히오 파블렌코.
음산하게.
아득하게 울리는 아타올프의 힘이 실린 목소리.
그 말을 들으면서도 히오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모자를 고쳐 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쥔 채.
'아니 가만히 있었는데....'
그러니까 뭘 계속한다는 건지 똑바로 말을 해 줘야 의견을 적극 반영해서 더욱더 얌전히 있을 게 아닌가.
"신경 쓰지 말게 마법사. 믿고 있겠네."
뒤를 힐끗 돌아보며 말하는 검성에게 걱정 말라는 듯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준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 건 보지 못 했으리라.
'신경 안 쓸 테니까 그냥 알아서 싸우면 안 되나.'
얌전히 잘 있는데 지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염병을 하고 있지 않나.
물론 어떻게든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스킬은 모두 봉인되었고 믿을 건 데스 나이트 테오르도와 구원자처럼 등장한 검성 비탈리아누스뿐.
히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낑낑이를 이용해 테오르도에게 계속 사기를 넣어 주는 것 정도가 전부인데....
'대규모 전투에서나 좋지 이런 전투에서 낑낑이는 별로 쓸모가 없으니.'
관상용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히오의 생각을 읽었음인가.
낑낑이의 시선이 히오를 향한다.
그 붉은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금세 울상이 되는 표정.
눈망울에 서러움이 뚝뚝 흘러넘친다.
명색이 죽음을 관장하는 귀신인데 관상용이라니.
서운한 것이다.
'어허. 눈 무섭게 떠야지.'
하지만 히오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낑낑이답게 다시 눈을 부라리며 정면을 주시하는 낑낑이.
몸에 귀기가 아른거리고 죽음의 기운이 일렁인다.
그 모습은 분명 꿈에 나올까 두려운 사신의 모습. 상식을 벗어난 귀신의 존재감.
…그러니 역시 관상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끝내 최악의 선택을 하는군. 히오 파블렌코.
아타올프가 결정을 내렸다는 듯 짙은 살기를 여과 없이 표출한다.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힘. 무차별적인 파괴.
무엇을 노리든, 어떤 힘이 숨겨져 있든 간에 상관없이 부숴 버릴 수 있는 전능한 파괴력.
수십 년간 쌓아 올린 힘의 폭발이며 그로서도 상당한 무리를 감수하는 것이기에 타격이 있는 것이다.
허나,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탈리아누스와 히오 파블렌코를 동시에 몰아붙이며 위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최악은 네가 여태 선택한 모든 것들이지. 아타올프."
그에 맞서 비탈리아누스 또한 있는 힘껏 오러를 키워 낸다.
의념이 고스란히 담긴 거대한 두 개의 기운.
하늘을 뒤덮는 검은 안개와 지상에서 솟구치는 황금 오러의 물결.
그 두 개의 기운이 온전히 부딪친다면,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예상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의외로 히오 파블렌코였다.
* * *
- 보아하니 저 사신에게 겁을 먹은 것 같네만.
푸르넬의 추측이었고 마침 히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히오가 가진 마지막 패.
겉보기만 그럴싸한 사신.
- 저 두 괴물이 부딪치면 남아나는 게 없겠구먼.
그 말 대로였다.
여기는 아카데미 내부였고 주요 건물들은 물론 생존자 또한 아직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저것이 서로 부딪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러니.
"낑낑아."
먼저 움직여야 한다.
"힘 좀 쓰자."
아타올프는 분명 낑낑이를 의식하고 있다.
아닌 척해도 등장과 동시에 자신의 안개를 가볍게 뚫고 들어와 그 목에 낫을 겨누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것이 어른 낑낑이식 등장 퍼포먼스이자 환영 인사라는 걸 모르는 입장이라면 겁을 잔뜩 집어먹는 것이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라 할지라도 그 바탕이 인간인 이상에야 미지에 대한 공포는 존재할 수밖에 없을 테니.
"최대한 겁주면서 마력까지 뽑아 와."
낑낑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순식간에 훅 날아간다.
애초에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될 귀신이다.
웬만한 법칙은 무시한 채 눈 깜짝할 새 아타올프의 앞에 도달한 사신.
불쑥 나타나 낫을 번쩍 치켜드는 그 모습에 아타올프는 본능적으로 반응해 내었다.
모든 안개가 사신을 향한다.
허나 그게 먹힐 리가 있겠는가.
강하다고는 하나, 한낱 필멸자의 손에 잡힌다면 그것이 어디 죽음을 관장하는 귀신이겠는가.
그러니 모든 안개는 사신을 그대로 관통하고 사신의 낫은 어김없이 아타올프를 향해 휘둘러진다.
검은 안개가 크게 요동치며 발악하듯 휘몰아치지만, 그렇다고 존재하되 실존하지 않는 사신의 낫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
- ...!
그대로 아타올프의 목을 너무도 쉽게 훑고 지나가는 낫.
아타올프는 크게 당황한 채로 서둘러 자신의 목을 더듬는다.
왠지 모르게 쭉 빠져나가는 힘.
「사신으로부터 마력을 +70만큼 전달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커다란 빈틈을 검성 비탈리아누스가 놓칠 리 없었다.
쿠릉-
마치 우레와도 같은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가는 금빛의 섬광.
- 비탈리아누스...!
아타올프가 뒤늦게 안개를 움직이지만, 그 힘이 집중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잔뜩 모았던 힘은 이미 갑작스레 다가온 사신을 향해 쏟아부은 뒤였으니.
황홀한 금빛이 검은 안개를 모조리 깨부수며 전진한다.
"아타올프."
바로 곁에서 아타올프를 지키는 그 안개막이 재차 발동한다.
여태 모든 공격을 막아 내던 절대적인 방어막과 비탈리아누스의 금색 오러가 부딪치고.
그 찰나의 순간 마주하는 눈빛.
어둡고 음침한 검은색 눈.
밝고 찬란한 황금색의 눈.
수없이 많은 죽음을 만들어 낸 악인의 눈.
수없이 많은 죽음을 만들어 낸 영웅의 눈.
한때는 같은 곳을 바라보던 두 쌍의 눈.
전혀 다르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두 개의 눈이 서로를 지긋이 바라본다.
영원같은 찰나가 흐르고.
"아타올프. 내 미운 친구야."
쩌저적- 수백 발의 벼락에도, 푸른 불꽃에도 결코 부서지지 않았던 흑색의 막이 깨져 가기 시작한다.
"어쩌다 이리되어 버렸을까."
그 말을 끝으로.
콰아앙-!
산산이 부서지는 검은 안개의 막.
어둠을 직선으로 관통하는 금빛 광휘가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은 다음 서서히 사라진다.
그에.
"...."
검은 안개 또한 천천히 걷혀 간다.
* * *
"훌륭한 작전이었네. 마법사."
페더 폴을 이용해 옥상에서 뛰어내리자 먼저 내려와 있던 비탈리아누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자 옅게 웃으며 묻는 검성.
"그 귀신은 대체 무엇이었나? 생전 처음 느껴 보는… 특이한 기운이었네."
"뭐, 당연한 걸 묻는군."
그리 답하자 기어이 피식 실소를 흘리는 비탈리아누스.
"그래. 마법이겠지."
저 마법사에게 물으면 항상 돌아오는 대답이다. 그리고 그것 외에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가 칭하기를 세상에 남은 마지막 마법사였으니까.
그런 두 사람의 사이로 시커먼 기사가 저벅저벅 다가온다.
황녀의 호위 기사이자 죽음의 기사, 테오르도.
두 사람의 사이에 다가온 테오르도가 비탈리아누스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고 히오를 빤히 내려다본다.
그 불손한 표정을 읽은 히오가 그를 달래듯 툭툭 치며 말했다.
"알았어.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뭐, 그런 것치고는 잘만 싸우더만. 너도 알고 보면 업무상 스트레스가 제법 쌓인 게 많은…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다고 너 혼자 가면 너무 눈에 띄니까 나중에 같이 가자고."
뚱하게 히오를 한번 쳐다보고는 검성을 향해 고개를 재차 꾸벅 숙이고는 한 줌 연기가 되어 자취를 감추는 테오르도.
스스로를 역소환한 것이었다.
실비아가 걱정되지만, 그렇다고 혼자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황궁 내에서라면 모를까 불길함이 철철 흐르는 그 모습으로 돌아다녔다가는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 게 뻔했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비탈리아누스의 검을 힐끗 쳐다보는 히오.
검에는 제법 많은 양의 혈흔이 묻어 있는 채였다.
그 시선에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는 검성.
"아슬아슬하게 놓쳤네. 그 잠깐의 틈에 통로를 연 모양이야. 그래도 큰 상처를 입었으니 꽤 오랫동안은...."
"차마 죽이지 못 한 건 아니고?"
"...."
검성의 말문이 턱 막힌다.
"…나는...."
"괜찮아. 이해해."
그 말에 검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옮겨 히오를 바라보는 비탈리아누스.
히오는 그런 비탈리아누스를 보며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타올프는 책임지고 내가 마무리하지. 그러니 제국의 위대한 별은 좀 쉬고 있으라고."
아타올프의 이메니아 습격은 히오를 노린 것이었으니 그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타올프는 자신의 손으로 반드시 마무리 짓는다.
"마법사. 자네는… 가만 보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아."
"뭐...."
"그래. 마법이겠지."
"그럼. 마법이지."
마주 보며 씨익 웃고서 꺼내 드는 본론.
"그런데 흑아의 습격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로열 나이츠까지 끌고 생각보다 빨리 왔네."
하룻밤 만에 급작스레 이뤄진 습격이었다.
그런데도 검성과 로열 나이츠까지 왔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검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연이라네. 본래의 임무는 자네를 데려오는 것이었지."
"나를...? 왜?"
"자네의 위치를 잊어버렸는가."
검지 손가락을 펴 왼쪽 가슴을 가리키는 검성.
"제국의 수호 기사이지 않은가. 그리고 곧 황제 폐하의 즉위식이 거행될 예정이지."
"…설마 참석하라고?"
"당연한 소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히오의 표정을 본체만체하며 고개를 돌리는 비탈리아누스.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로열 나이츠를 필두로 돌아오는 수많은 사람들.
전투가 끝났음을 알고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비탈리아누스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나는 늙었네. 이미 시대를 풍미하고 스러져 가는 초목이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히오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만다. 비탈리아누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했어. 열정이었고 신념이었지. 죽어서도 주군을 지키는 어느 기사처럼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네."
하지만 세월은 야속하게도 흘러간다.
제아무리 고고하게 솟은 바위라 할지라도 세월의 풍파에는 깎여 나가기 마련이었으니.
무뎌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며 섭리였으니.
"새로운 시대지 않은가."
젊은 황제. 새로운 정권.
"새로운 희망이 필요할 게야."
언젠가 제국의 유일한 별이 지더라도 그 뒤를 든든히 이을 수 있는 새로운 희망.
그것의 상징.
비탈리아누스는 다가오는 사람들, 그 너머를 바라본다.
"동이 트고 있지 않나."
어느새 밤이 지나가고 해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악몽의 밤이 비로소 지나간 것이었다.
"아침이라고 꼭 좋은 건 아니라네. 준비를 해야 하지. 밤이었기에, 어두웠기에 애써 외면할 수 있었던 것들 말이야."
동이 트고 아침이 밝아 온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함과 동시에 미뤄 놓았던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해가 뜨고 날이 밝으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으니.
가령 바닥 곳곳에 흩뿌려진 핏자국이라든가.
아직 채 피어나지 못하고 저물어 버린 어린 새싹의 흔적이라든가.
잔인하게 짓이겨진 시체라든가.
"그러니 자네도 준비하게."
비탈리아누스가 본래의 검을 집어넣고 새로운 검을 뽑아든다.
기존의 것보다 더욱 화려한 보검.
그것은 황명을 집행하는 자의 검.
영광의 검이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햇빛을 받아 번쩍인다.
비탈리아누스는, 무력의 상징이자 희망의 상징이었던 제국의 검성은 목소리를 높인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고개를 숙여라-!"
검성의 근엄한 목소리가 새벽의 쌀쌀한 공기를 타고 저 멀리 퍼져 나간다.
아직도 조용한 건물들 사이로.
그 벽에 칠해진 잔혹한 핏자국을 지나 그늘에 가려진 바닥을 지나.
그곳에 놓여진 싸늘한 시체를 지나서.
저 멀리 태양을 등지고 걸어오는 이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나간다.
그 목소리에. 새로운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보검의 검날에.
다가오던 로열 나이츠 모두가 무릎을 꿇는다.
고개를 숙인다.
그에 뒤따르던 모든 이들도 어리둥절해하며 천천히 그들과 같이 무릎을 꿇는다.
"제국을 지키는 위대한 방패이자 가장 날카로운 검!"
비탈리아누스는 생각한 것이다.
"위대한 황제 폐하의 고귀한 수호 기사!"
예견하는 것이었다.
"히오- 파블렌코는!"
제국에는 새로운 검이 필요하다고.
무뎌질 대로 무뎌진 옛 검이 아니라 날카롭게 벼려진 새로운 검. 새로운 희망.
그런 희망의 상징이 필요한 것이다.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는 그런 굳건한 상징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 것이었다.
"황명을 받들어라."
혹, 자신이 허망하게 스러진다 하여도.
71화 즉위식 (1)
- 제국의 수호 기사. 히오 파블렌코는 들으라.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 아래.
새로운 여제, 실비아 베르덴의 의지가 검성 비탈리아누스의 입을 통해 울려 퍼진다.
- 즉위식이 머지않았다. 더없는 영광의 순간이 머지않았다. 그런 순간에 제국을 대표하는 나의 기사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는 가장 영광스러운 기사가 참석해야 함이 마땅하니. 제국을 지키는 방패이자 가장 날카로운 검, 히오 파블렌코. 나의 기사여.
- 다시 돌아와 나의 곁에 서라.
- …물론! 와 주면 엄청 좋겠지만, 굳이 오지 않아도 괜찮아! 응. 정말 괜찮아. 할 일이 있는 거 아니야? 궁에도 기사는 많고 이제 전부 다 내 편이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물론 의식장으로 입장할 때 히오가 옆에 있어 준다면 엄청 든든하겠지만… 히오는 바쁘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 마헬 경. 이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읽지 말아 주시고 히오에게만 몰래....
고개 숙인 채 작게 미소 짓는 히오.
"가야겠네."
아침이 밝아 왔다.
* * *
「업적 달성! - 아카데미를 지켜라!」
「업적 달성으로 11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이메니아 아카데미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명성 증가로 8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이메니아에 나타난 수호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집니다」
「명성 증가로 2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2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흑아의 이메니아 아카데미 습격 사건.
그로 인해 벌어진 참사.
쉬이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즉위식과 동시에 전쟁이 선포되겠지."
제국의 중요 기관 중 하나인 이메니아 아카데미.
그곳을 대놓고 습격했는데 제국이 가만히 있는다면 꼴이 우스워질 테니.
결국 다시 전쟁.
하지만 게임이던 시절과는 많이 다를 테다.
의미 없이 벌어지는 정복 전쟁이 아닌, 명백한 명분하에 벌어지는 흑아와의 전쟁인 까닭이다.
거기에 그런 전쟁으로 아타올프를 제거하고 흑아의 세력을 없앨 수 있다면 미래를 대비함에 있어 훨씬 편해지는 것이었다.
"실비아도 고생하겠네. 하필 이런 시대에 황제가 되었으니."
즉위와 동시에 흑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그것이 끝나더라도 곧 어비스로 인해 골머리를 앓을 터.
최악의 시대에 황제로 올랐으니 쉽지만은 않으리라.
뭐, 그래도 이런 시대에 적합한 최고의 황제라고는 생각한다. 실비아의 능력이라면 잡다한 신경전이나 내분 없이 모든 힘을 합쳐 어비스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 이제 황제가 될 테니 슬슬 몇 가지 이야기는 털어놔도 되지 않겠는가.
푸르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어비스.
지금 당장은 빙의자들만 알고 있는 정보이나 실비아가 황위에 오르고 본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황권을 구성하였으니 이제 도움을 받아도 될 터였다.
실비아의 명령으로 제국의 이름 아래 어비스를 직접 관리하는 것도 괜찮을 테고.
"그리고 여러모로 알게 된 사실도 많아."
검성과 아타올프의 전투를 눈앞에서 직접 목격한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타올프가 오더라도 충분히 해 볼만한 싸움이라 생각했었다.
사신 소환을 제외하더라도 최상위 스킬이 무려 두 개나 있지 않은가.
벤타이얼 세계에서 최상위 스킬이란 말 그대로 몇 년을 갈아 넣어야만 얻을 수 있는 강함의 상징.
그런 것이 두 개나 있으니 제법 자신이 있는 것이었다.
허나 직접 마주한 아타올프는 어떠했는가.
같은 최상위임에도 담겨 있는 힘이 달랐다. 최상위 스킬을 세 개나 보유했음에도 하나의 스킬을 뚫지 못해 도망 다니기만 했다.
게임이었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때는 마력이 더 많고 최상위 스킬이 더 많으면 이기는 싸움이었으니.
하지만 이곳은 게임이 아닌 현실.
그렇다는 것은 게임과는 달리 최상위보다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
- 어쩌면 최상위 위에도 또 다른 등급이 있는 게 아니겠나. 스킬이란 것도 결국 다루는 이가 어떻게 갈고 닦느냐가 중요한 것이구먼.
주어지기는 하늘에서 정해져 뚝 떨어지지만, 그것을 키우고 갈고 닦아야 하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었다.
- 아타올프의 검은 안개에는 의념이 담겨 있었어. 7위계 이상의 초인이나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처럼 말이야.
"의념이라."
검성 역시 그런 말을 했다.
아타올프의 안개를 베기 위해서는 의념을 실어야 한다고.
"그게 대체 뭔데?"
히오의 물음에 태연히 답하는 푸르넬의 목소리.
- 나야 모르지? 그걸 알았으면 나도 7서클의 대마법사가 되지 않았겠나. 초인이나 대마법사의 경지는 깨달음의 영역이고 아타올프라는 자는 그것을 자신의 스킬에 적용시킨 모양이야. 선악을 떠나서 대단한 일이지.
"…그래. 그렇구나."
하여튼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자세히 들어 보면 결국 아는 게 없다는 말이었다.
모른다는 말을 왜 저리 장황하게 하는 건지.
…아무튼, 그것 외에도 얻은 건 있었다.
"페널티에 대한 것도 좀 더 자세히 알게 됐고."
지성을 가진 생명체의 육체에 상처나 피해를 입힐 때에 페널티가 발생하는 히든 특성, '폭력은 안 돼!'
이미 아타올프의 검은 안개가 되어 버린 흑아의 존재들.
그것들은 생명체라 볼 수 없었으니 상대한다고 해서 패널티를 받지는 않을 거라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신. 즉 낑낑이가 마력이나 다른 기운을 빼 오는 것은 페널티를 받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것 역시 페널티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히오로서는 꽤나 달가운 소식.
- 아무래도 육체적인 손상을 입힌 건 아니니 그런 게 아니겠나?
"그렇겠지. 요는 육체적인 손상이란 말이야."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히오.
"이제 다시 나가 봐야겠어."
밖에는 정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생존자의 수색, 부상자의 수습.
부서진 건물의 잔해나… 시신의 정리 등.
전쟁이 끝나면 늘상 따라오는 무거운 뒷정리.
그렇게 히오가 방을 나서려는데.
똑똑-
그보다 한발 앞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대답도 하기 전에 벌컥 열리는 문.
들어오는 이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내.
하지만.
"...."
그를 본 히오의 표정이 급격하게 가라앉는다.
"히오 파블렌코."
낯선 모습과 낯선 목소리.
하지만.
"보고 싶었어."
왠지 익숙한 눈웃음.
그 눈동자만큼은 분명 본 적 있는 선홍색.
"…아이라이츠."
아이라이츠였다.
* * *
히오의 맞은 편에 자연스럽게 앉는 아이라이츠.
그런 그녀에게 히오의 싸늘한 음성이 내려 꽂힌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는 있나. 아이라이츠."
"응. 물론이지."
너무 당당한 그 태도에 외려 할 말이 없어진다.
"…그래. 너도 그쪽이구나. 시르베르트가 말했던 놈들."
현실을 현실이라 받아들이지 않고 게임이라 외면하는 자들.
그리 여기기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자들.
"아직도 이곳이 게임 속이라 착각하는...."
하지만 그런 히오의 말에 아이라이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응? 게임 속이라 착각하는 애들이 있어? 그런 멍청한 놈들이 랭커랍시고 있다는 말이야?"
"...."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힌다.
"…그럼 현실임을 인지하고서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1황자 군단을 조종해 수많은 죽음과 혼란을 발생시키고, 테오르도를 죽게 만들고.
흑아에게 시르베르트의 정보를 넘기는 것까지 전부 현실임을 알면서도 한 짓이라는 말인가.
잔잔했던 마음에 파문이 인다.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그런 의문이 가장 먼저 피어오르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말해라, 아이라이츠. 흑아에게 또 뭘 넘겼지."
대체 흑아와 손잡고 무엇을 꾸미고 있는가.
어떤 보상을 약속받았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넘겼는가.
그 물음에 아이라이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음… 이번 일에 관해서는 시르베르트의 정보랑 아카데미 경비 병력 배치도. 그리고 교수들의 대략적인 수준이랑 능력 정도?
장난기가 섞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지한 얼굴로 진지하게 답하는 것이었으니.
"…허."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제재를 가할 수도 없다.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아이라이츠였지만, 그 육체는 무고한 사람일 것이기에.
결국 묻고 마는 것이다.
"대체 왜?"
흑아에게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무엇에 있단 말인가.
랭킹 3위를 유지하던 아이라이츠가 무엇이 아쉬워서?
"왜라니?"
아이라이츠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게 가장 빠르잖아."
태연히 답하는 것이었다.
"흑아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리느니 그것을 유도하는 게 낫지. 시르베르트의 정보 좀 넘긴다고 한들 녀석이 죽을 것 같지도 않았고.... 결국 이득이지 않아?"
"그러니까…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응. 아타올프는 네가 어떻게든 해 줄 거라고 믿었거든. 아쉽게 놓치기는 했지만, 뭐 결과는 나쁘지 않아."
아이라이츠는 이런 결과를 바라고 한 일이라는 말이었다.
흑아가 무리해서 아카데미를 습격했고 그로 인해 제국이 움직이기를.
아카데미의 참사를 이용해 제국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나서기를.
"…이번에 몇 명이나 죽은 줄 알고는 있고?"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흑아를 늦게 처리하면 다른 곳에서 희생자가 나올 테니까."
"성급했고 무리한 도박수였다. 아타올프가 오지 않았으면 별다른 타격도 못 입히고 일방적인 참사로 마무리됐겠지."
흑아의 무서운 점이다.
검은 안개의 본체는 아타올프.
즉, 흑아의 검은 안개를 아무리 소멸시켜 봐야 그 타격은 미미하다는 말이었으니.
마지막에 검성이 아타올프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면 정말로 무의미하게 끝나 버릴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히오의 그런 말에도 여전히 태연하게 답하는 아이라이츠.
"그래도 제국의 거대 기관 중 하나를 습격했으니 결국 군대가 움직일 계기가 되었겠지?"
"비탈리아누스가 오지 않았다면 아타올프에게 전멸이었어."
"에이.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 싸우던걸? 겸손의 모습도 나쁘지 않지만, 좀 낯서네. 지존천마."
대화가 합쳐지지 않고 빙빙 돈다.
사고방식이 다른 것이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있었으면 흑아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거였어."
"남들처럼...."
그 말에 아주 잠시였지만, 굳어지는 아이라이츠의 표정.
그것은 찰나였고 이내 곧 예의 그 눈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지존천마 너한테 잘 보이고 싶었는걸?"
그런 웃음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그딴 행동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나?"
"…응? 최대한 빨리 흑아를 처리하는 방법이었는데… 네가 원하는 거 아니야?"
"이참에 제대로 말해 주지."
소파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지팡이를 집어 들며 아이라이츠를 향해 똑바로 내뱉는 말.
"최악이다. 아이라이츠."
그대로 서클을 회전시키며 자팡이를 들어 올린다. 이전처럼 캔슬레이션을 발동하려는 것이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언정 네가 숨어 있는 곳을 내가 못 찾을까."
정보 길드장 제이슨도 있고 무식한 방법이기는 해도 마력을 역추적하는 것도 가능하다.
위치를 찾는 마법을 마탑으로 돌아가 배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너는 내가 반드시 잡아서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야겠다."
대충 마탑의 빈 층에 던져 놓으면 서클도 없는 아이라이츠를 가두기에는 안성맞춤이리라.
그녀의 사상은 위험하다.
자기 딴에는 목표를 위해 한 것일지라도 그 방법이 이런 것이어서야. 그렇게 이룬 결과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결과를 위한 결과.
껍데기만 남은 결과이지 않은가.
그렇게 막 캔슬레이션을 발동하려는데.
"자, 잠깐만! 미안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을 내젓는 아이라이츠.
"나 뭐 잘못한 거지? 미안해! 미워하지 말아 줘!"
아예 소파 위에 올라가 무릎까지 꿇는 모습이 참으로 극단적이다.
"나는 지존천마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잘했다고 칭찬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못했어. 응? 내가 그럼 다른 방법 생각해 볼 테니까 나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될까?"
"…미워하지 말라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아이라이츠.
"응! 나 진짜 이번에는 잘 할게. 뭐 하면 될까?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정말이야."
그 태도와 행동에 문득 썩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 시키는 대로 다 할 수 있어?"
"응! 물론이지! 그냥 지금 여기로 올까? 좀 멀긴 한데 조금만 기다려 주면...."
"아니. 그것보다."
아이라이츠를 향해 다가가며 낮게 속삭이는 말.
"너 그럼 아타올프에게 꽤나 신뢰받고 있겠네?"
"맞아! 이번에 내가 넘긴 정보가 정확했으니 제법 신뢰를 쌓았을걸?"
"좋아. 그럼 아타올프를 꾀어내."
"꾀어내? 어디로?
"어디든. 바알 숲에서 나오게 해."
바알 숲.
다른 이름은 안개의 숲. 혹은 저주받은 숲.
흑아의 본거지이자 아타올프의 영역.
제국에서도 흑아를 여태 섣불리 건들지 못한 이유였으니.
아타올프를 그곳에서 빼내고 전쟁을 치른다면 일이 배는 수월해지는 것이다.
"그거면 돼? 그럼 나 안 미워할 거야?"
"그래. 대신 확실하게 꾀어내. 타이밍 잘 맞춰서. 그건 네가 알아서 맞출 거라 믿을게."
"응! 걱정 마. 나 꾀어내는 거 잘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진해지는 선홍색의 눈빛.
그것이 히오의 눈과 마주치고.
「정신 침입이 감지되었습니다」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가 발동됩니다」
정신 공격에 높은 내성을 지닌 '간지 없이는 못 살아!' 특성이 발동되었음에도 농밀하게 파고드는 선홍색의 빛.
심장이 강제로 두근거리는 기분 나쁜 느낌에.
히오는 인상을 찌푸리며 지팡이로 아이라이츠의 머리를 툭 내려친다.
"쓸데없는 짓거리 말고 제대로 준비나 해. 즉위식 이후에 바로 아타올프를 치러 갈 거니까."
"응! 그럼 잘 해내면 나 사랑해 줄 거야?"
"…일단 하기나 해."
"응! 진짜 잘 할게! 사랑해!"
왠지 점점 광기가 차오르는 것 같은 눈빛에 히오가 뭐라 할 말을 찾고 있는데.
"잠시만, 누가 온다. 아타올프인 것 같네. 응. 내가 다시 연락할게 지존천마! 아니, 히오 파블렌코! 사랑해! 사랑해!"
그렇게 외치더니.
"...."
힘을 잃고 축 늘어지는 몸.
히오는 고개를 절래 내저으며 잠시나마 아이라이츠였던 사내를 내려다본다.
그러고는 곧 마법사의 모자를 쓰고 방문 밖을 향하는 걸음.
이게 정말 맞는 선택일지....
"하아...."
확신은 서지 않는다.
72화 즉위식 (2)
"아이라이츠."
쇳가루가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에 아이라이츠의 고개가 돌아간다.
검은색 안개를 나울거리며 들어오는 이는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아타올프.
다만 그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몸 중앙에는 척 보기에도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사이를 검은 안개가 메우고 있었으니.
"저런, 다쳤구나 아타올프. 가엾게도."
가엾다는 것치고 짓는 눈웃음은 고혹적이다.
화려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여인. 아이라이츠.
그 정체는 서부와 남부를 아우르는 대규모 범죄 집단의 장.
정확하게는 수많은 집단의 장들을 모조리 현혹하여 자신의 발아래에 둔 배후의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만들어진 아타올프와의 인연이었다.
아타올프는 그런 아이라이츠에게 명령하듯 말한다.
"모든 세력을 바알 숲으로 불러들여라. 전쟁이 벌어질 거다."
"그 몸으로? 가능하겠어?"
몸에 난 구멍을 가리키며 묻는 아이라이츠.
하지만 아타올프는 조금의 동요도 없다.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는 얼굴로 덤덤하게 내뱉는 것은 강자의 당연한 여유.
"내 영역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숫자가 몇 명이든 상관없다. 아직도 모르겠나 아이라이츠."
신경을 잔뜩 긁는 목소리. 그럼에도 아이라이츠의 웃음은 더욱 진해져만 간다.
"알겠어. 네 뜻대로 모조리 다 불러 모으지. 뭐, 슬슬 쓸모도 없어지던 참이었는데. 그럼 너도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할 거야. 아타올프."
"…히오 파블렌코를 넘겨라?"
"그래."
점점 진해지는 아이라이츠의 눈웃음. 어찌나 심한지 눈꼬리가 기괴할 정도까지 휜다.
"팔다리 정도는 잘려도 상관없으니까 살려서 내게 넘겨."
"알겠다."
"그리고 말이야… 더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 말인데."
아타올프에게 조금씩 다가가며 말하는 아이라이츠.
마치 유혹하는 듯한 손짓. 우아한 걸음.
"히오 파블렌코 약점. 알려 줄까?"
방안에 가득한 선홍빛 기운.
* * *
당연하게도 아카데미의 남은 모든 일정은 취소되었고 연기되었다.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는 추모식이 진행되었고 학생 교수 할 것 없이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생활하였다.
은은하게 흐르던 노랫소리도.
중앙 광장에 흐르던 분수도 멈춘 채 슬픈 공기가 이메니아 전역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클레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은 스커트에 튜닉. 그리고 밋밋한 재킷을 걸치고 붉은 머리칼은 단정하게 틀어 올린 채였다.
"클레어."
"응.... 가자."
클레어와 라베나, 어느새 옆에 합류한 롤랑까지. 걸어가는 와중에 마주한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웃고 떠는 이가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수업을 듣던 친구가 죽었다. 가르치던 교수가 죽었다.
가득했던 핏자국이나 끔찍하게 죽은 시신들은 빠르게 정리되었지만, 분위기만큼은 정리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지고만 있었으니.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겪었던 모든 슬픔과 눈물을 닦아 주심을 믿습니다.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사제의 기도문이 조용하게 울려 퍼진다.
하얀 꽃 한 송이를 내려놓고서는 높게 세워진 추모비를 올려다본다. 주위에 가득한 하얀 꽃. 그만큼이나 가득 들어찬 슬픈 공기.
사람은 슬퍼할 곳을 찾는다.
슬퍼함과 동시에 위로받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다시 나아갈 수 있기에.
홀로 꾸역꾸역 삼키는 슬픔은 결국 침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에 모여서 눈물을 흘리고.
그 모습이 번져 울음을 터트리며 삽시간에 번져 나가는 것이다.
"죽음과 절망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고인에게 영원한 안식을...."
터트려야 가벼워지기에. 나누어야 가벼워지는 것이었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가 기억하는 이를 그린다. 죽기 직전의 처참했던 모습이 아닌, 밝고 환하게 웃고 있던 모습을 떠올린다.
기억 속에서만큼은 행복했던 그 모습으로 영원히 남기를 바라며.
어쩌면 그런 것이다.
한껏 울고 한껏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또 원망하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또다시 살아가는 것 말이다.
원동력.
클레어는 시선을 옆으로 틀어 한 사내를 바라본다.
늘 입던 로브와 화려한 모자는 잠시 내려놓고 검은 옷을 입은 모습이 사뭇 낯설은 사람.
2년이나 함께했음에도 그 시간보다 최근에 알게 된 것이 더 많은 사람. 히오 파블렌코.
높은 신분일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설마 황제의 수호 기사라니.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자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자 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고귀한 기사의 상징.
그것이 자신을 아카데미에 보내 준 히오 파블렌코라는 사람의 정체였다니.
그것과 더불어 아카데미 내에도 이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내전에 관한 소문.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황녀 실비아 베르덴.
그런 황녀의 곁에 홀로 남아 동부 연합을 설득하고 1황자와 2황자의 군대를 모조리 격파하며 내전을 종식시켰다는 한 마법사에 대한 소문 말이다.
힘없는 황녀를 기어이 황제의 위에 올려놓은 마법사.
그것이 누군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히오를 바라보던 클레어는 몸을 돌린다.
사는 세계가 다르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또래들 보다 앞서 나가며 우쭐하고 있을 동안 히오 파블렌코가 이룬 업적들을 보라.
지위로 보나 가진바 힘으로 보나 자신과는 사는 세계가 달랐다. 보는 시야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 자신 따위는 너무 아래에 있어 보이지도 않는 것이 당연할 터.
강해져야 한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도 모자란 것이다.
죽을 듯이 노력해도 닿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지금보다 더.
더, 더, 더, 더, 더, 더, 더, 더 강해져야만 한다.
* * *
합동 장례식과 추모식까지 빠르게 진행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힘을 쏟은 덕택이었다.
소식이 퍼지자 제국민들은 공분했고 자식을, 가족을 잃은 가문은 더욱이 분노했다.
그들은 흑아와의 전쟁에 아낌없이 병력을 보낼 터였다.
"얼굴 보고 가려 했더니 영 보기가 힘드네."
그런 와중에 히오는 아카데미를 떠나기 위해 채비를 마친 참이었다.
"사춘기인가?"
이제 가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좀처럼 클레어를 보기가 힘들었기에 그리 말했고.
"사춘기는 한참 지났을 나이지. 너는 클레어를 너무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어."
그와 마주한 시르베르트는 그리 답했다.
"그런가?"
"…아무튼, 그럼 난 황궁에는 손 뗀다. 알아서 해."
시르베르트의 본래 계획은 황녀를 황제로 만들어 본인이 실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허나 변수로 작용한 것은 실비아의 능력.
어떤 능력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성내의 모든 귀족이 완전한 실비아의 편으로 돌아선 것은 알 수 있었다.
꾸준히 연락을 해 오던 모든 귀족들의 태도가 조금씩 변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와 나누던 대화, 계획까지 전부 일러바쳤을 수도....
"연락 수단은 폐기했다고?"
"아이라이츠가 배신한 걸 알고 바로 폐기했지."
"그럼 따로 연락 수단도 찾아봐야겠네."
"포인트 상점에 있긴 한데 거리 제한이랑 기간 제한 없는 건 가격이 좀… 네가 사 주면 안 되냐?"
"나도 포인트 없다."
"…진짜 성의 없는 거짓말이네. 아무튼 볼일 다 보면 다시 한 번 와라. 어비스 공략이 초반부를 넘어가면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하니까."
"그래. 너도 다음 계획 준비 잘하고 클레어도 잘 챙겨 줘."
그 정도의 대화를 끝으로 이메니아 아카데미에서의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계획했던 대로 시르베르트와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계획했던 대로 3서클에 올랐다.
그리고 계획에 없던 아타올프를 만났고.
계획에 없던 참사가 벌어졌다.
그러나 그 속에서 진정한 강자의 힘을 확인했으니.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엿본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다시 나아가면 될 터였다.
* * *
명실상부한 대륙의 패자. 베르덴 제국 황제의 즉위식.
성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임은 당연하기에 수도는 각국에서 방문하는 이들과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인다.
수도뿐만이 아니다.
황궁 내에도 방문하는 각국의 손님들로 정신이 없었다.
대표적인 국가로는 상업이 발달한 아카이아 왕국.
리퓨에 교단의 성지, 신성 왕국 히베루니아 등이 있고 그 외에 제국과 인접한 중소 왕국에서 앞다투어 몰려왔다.
그들의 처지에서는 베르덴의 황제가 누가 되느냐. 어떤 성정을 지녔는지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1황자가 황제위에 올랐던 게임 속에서는 즉위 직후 저런 중소 규모 국가들은 모조리 초토화되었으니.
"신기한 복장이 많네."
어쨌든 즉위식 날이었고 각국의 사신들이 온 만큼 황궁을 돌아다니기만 해도 제법 볼만한 구경거리가 많았다.
애초에 벤타이얼 온라인은 제국 중심의 세계관.
아카이아 왕국이나 신성 왕국처럼 제국과 가깝고 큰 왕국들은 히오에게도 친숙한 국가이다.
하지만 대륙은 넓고 게임 속에서는 그 넓은 대륙을 전부 구현하지는 못했었다.
즉, 이름만 알려지고 직접 볼 수는 없었던 많은 국가들.
이를테면 사막에 세워진 왕국 시르.
"저쪽이 시르 왕국에서 온 사신들이겠고."
게임 속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 특징은 기억하고 있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시원한 옷차림.
짙은 눈썹과 화려한 장신구까지.
왠지 성격도 화끈할 것 같은 게 친해지면 재밌을 것 같지 않나.
"…그럼 저기가 피어리어."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왕국 피어리어.
워낙 아름답다고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어서 궁금했었는데 게임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은 왕국이었다.
그 정도가 딱 복장으로 알아볼 수 있는 선이었고 나머지는 이야기를 나눠 봐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자네 그만 좀 중얼거리지. 제국의 수호 기사로서 체통은 어디다 팔아먹었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히오를 보다 못한 비탈리아누스가 그를 조용히 말린다.
그렇지 않아도 히오를 힐끗거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던 것이다.
정확히는 '쟤는 뭔데 이상한 모자에 지팡이까지 쓰고 검성 옆에 서 있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보고 있었다.
결국 히오는 즉위식에서까지 모자와 지팡이를 쓰고 나온 것이다.
울먹이는 시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복은 입었지만, 그 위에 로브를 걸쳤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결국 담당 시녀가 울음을 터트리며 뛰쳐나갔다는 소문이 조용히 나돌았음에도 히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우스꽝스러운 복장처럼 보일 테다.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익숙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첫 번째 스승에게 약속했지 않나.
그 무덤 앞에서 다짐했지 않았던가.
궁극의 마법을 완성해 보이겠다고.
마법의 인식을 바꾸고 그 누구도 마법을 비웃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다.
마법사는 결코 우스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결코 허황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설령 그게 마지막 남은 마법사라 할지라도 마지막 마법사이기에 그 무거운 책임감이 뒤따르는 것이었으니.
"시작하네. 준비하게, 마법사."
검성의 말과 동시에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장내에 울리는 웅장한 음악.
그랜드 홀에 모인 각국의 인사들 역시 대화를 멈추고 시선을 집중한다.
육중한 문이 서서히 열리고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우렁찬 목소리.
들어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위엄 있게 치장된 실비아 베르덴.
예쁜 은발과 어울리는 망토를 두른 채 입장하는 실비아의 뒤로 테오르도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전신을 빈틈없이 갑주로 감싼 모습이었지만, 숨지 않고 당당히 실비아의 뒤에서 함께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황제와 그녀의 호위 기사는 이제 누군가의 눈치를 볼 만한 위치가 아니었으므로.
"가지."
그렇게 실비아가 입장하면 그 뒤를 히오와 비탈리아누스가 뒤따른다.
제국의 새로운 황제의 뒤를 수호 기사와 검성이 뒤따르며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다.
열 명의 로열 나이츠가 검을 바로 세우며 길을 만들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하얗게 차려입은 늙은 사제. 교황이었다.
리퓨에 교단의 교황이 이번 즉위식을 위해 예까지 행차한 것이었다.
실비아와 교황이 마주하고 가벼운 선서가 이루어진다.
그 뒤로 이어지는 교황의 축복.
신성력이 가득 들어차는 보기 드문 광경에 장내의 인물들은 넋을 놓고 성스러운 장면을 감상한다.
짧은 축복이 끝나고 나면 대관식이 거행되는 것이다. 황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왕관을 머리에 얹는 대관식.
그리고 교황이 실비아의 머리에 왕관을 얹는 순간.
히오의 지팡이가 가볍게 움직인다.
「스킬 - '실드'가 발동됩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금빛의 기적.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늘에 나타난 여신의 형상. 새로이 탄생하는 황제를 감싸는 여신의 손길.
"아아...."
그 기적 같은 현상에 신실한 자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다.
장내는 물론, 황궁 바깥에서 황제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또한 그러한 광경을 목격하고 기적을 외친다.
감탄하고 환호한다.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여신마저 축복하는 것이기에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에 관을 얹은 실비아는 그대로 바깥을 향한다.
테라스에 서서 손을 높게 올리면 도열한 황궁 기사단이 동시에 검을 뽑아들며 충의를 표한다.
군중의 환호성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햇빛을 받아 번뜩이는 수백 개의 검날.
그 위에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황제, 실비아 베르덴의 자태.
바깥에 모인 제국민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
그쯤에서 히오의 지팡이가 한 번 더 움직인다.
실비아에게 직접 샤우트 마법을 걸어 준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실비아가 입을 연다.
드넓은 공간에 울려 퍼지는 황제의 목소리.
즉위와 동시에 다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흑아와의 전쟁 선포.
제국을 좀먹고 대륙을 좀먹는 악의 집단의 완전한 말살.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영혼을 울린다.
말에 담긴 힘에 감격한 대중은 오열하며 환호한다.
이것이 실비아 베르덴의 힘.
혼에 직접 울리는 목소리.
여신이 직접 축복을 내리고, 황제의 연설은 영혼을 울린다.
역사에는 가장 완벽한 즉위식이라 기록될 터였으니.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즉위식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한창 그렇게 떠들썩한 와중에.
- …자네. 느꼈는가.
히오의 시선은 실비아가 아닌, 그랜드 홀의 한구석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그 많은 인파 가운데 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저건...."
처음 보는 낯선 얼굴.
하지만 그 속에 느껴지는 것은 분명.
"…서클이잖아."
마력의 서클.
마법사의 상징.
73화 즉위식 (3)
축제가 열렸다.
아카데미의 참사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님에도 축제는 열렸다.
새로운 황제.
제국의 여제. 실비아 베르덴의 즉위를 여신조차 축복하고 있는데 어찌 국민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게다가 실비아는 즉위와 동시에 만민 앞에서 선언하지 않았던가.
악의 원흉을 뿌리 뽑겠다고 말이다.
흑아의 완전 몰락을 선언하고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열광할 수밖에.
명분도 충분하고 시기 또한 적절하다.
황제에 대한 민심은 최고조이고 흑아에 대한 분노 역시 비슷한 것.
즉위 전에 이미 황궁 관료 전부를 장악해 놓았으니 내실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사악한 악의 집단이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 믿으며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새로운 황제를 칭송하며 노래하고 즐겁게 떠드는 것이었다.
궁내에서는 연회가 벌어진다.
악단의 연주가 은은하게 울리고 각국의 인사들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서로 교류하고 이야기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그중 제일이라 한다면 역시 실비아의 근처.
즉위를 축하하며 여러 희귀한 물건들을 진상하고 한 마디라도 더 말을 걸기 위해 모여 있는 귀족들. 각국에서 온 사신들.
길게 줄 선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황제도 참 할 짓이 못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물론 히오에게도 적지 않은 귀족들이 몰려왔다.
조금 전에 있었던 실비아의 행동 때문이었다.
가슴에 매달린 수호 기사의 훈장.
별다른 수여식도 없이 덜컥 줘 버린 것이 못내 미안했는지 히오의 가슴에 직접 훈장을 매달아 주며 선포하였다.
히오 파블렌코는 황제의 수호 기사이자 제국의 수호 기사임을.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임을 말이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파블렌코 경. 저는 아스렌 백작가의...."
"예. 그 욘단 상회를 이끄는 가문이 맞습니다. 허허허."
"저는 람바드 백작가를 책임지고 있는...."
정신없이 몰려드는 귀족들의 태도는 정중했다.
그것이 비록 가식적인 것일지라도 황제가 대놓고 선포한 수호 기사에게 무례하게 굴 머저리는 이곳에는 없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제국의 수호 기사였던 비탈리아누스가 당연히 그 역할을 수행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떡 나타나 그 자리를 이어받아 버렸으니 호기심이 이는 것이다.
더군다나 검성마저도 즉위식 내내 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니.
"파블렌코 경. 뵙게 되어 영광...."
"허허허. 제국의 수호 기사를...."
검성이 물러나고 새로이 등장한 히오 파블렌코.
정치와 권력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던 비탈리아누스와는 다를지도 모르니 안면을 터 두기 위해 이토록 몰려드는 것이었다.
"모자가 참으로 잘 어울리시는구려."
심지어 그딴 막말을 내뱉는 자도 있었다.
물론 히오는 헤벌쭉 웃으며 눈썰미가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고 머릿속에 저장했지만....
어쨌든 마법사는 전부 사기꾼 혹은 광대라는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꾸게 된 것이다.
비록 지금은 가면을 쓰고 그리 대하는 자들이 대부분이겠으나 그러한 인식마저도 서서히 바꿀 수 있다 히오는 자신했으니.
"파블렌코 경. 저는...."
연회는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 * *
"…다시는 안 해."
적당히 괜찮은 귀족들만 골라 상대했음에도 어찌나 많은지.
굳이 찾아오는 인맥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받아 주었건만,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렇게 한참을 시달리다가 겨우 틈이 보였기에 빠져나왔고.
"참 황제도 할 짓이 못 된단 말이야."
그랜드 홀 안쪽으로 보이는 실비아.
그리고 그 앞에 아직도 길게 늘어선 줄.
귀한 아티팩트나 물건을 진상하고 실비아와 대화라도 한마디 하기 위해 만들어진 줄이었다.
히오는 고개를 짧게 가로젓고는 걸음을 옮긴다.
"아까 그거 분명 서클 맞지."
대관식 직후에 우연히 발견한 한 소녀. 이곳 분위기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은 앳된 얼굴의 소녀.
이리나와 또래 정도나 될까… 아니, 그보다도 더 어려 보이던 녹색 머리칼의 소녀.
옷차림으로 봤을 때 제국의 귀족은 아니었다.
비슷한 옷차림의 사람이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타국에서 온 사신의 일행일 터.
휘황찬란하고 개성이 강한 타국에 비해 수수한 복장.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인 그 소녀에게서 느껴진 것은 분명한 서클의 기운이었다.
마력이 한데 뭉쳐 느릿하게 회전하는 그 느낌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푸르넬 역시 그것을 알아보았고.
- 맞네. 1서클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완전한 것은 아니네만… 분명 서클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확실히 온전한 느낌은 아니었지."
그렇지만, 서클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여기 어디로 가는 걸 봤는데...."
틈을 봐서 그랜드 홀을 빠져나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서클이 느껴지던 소녀를 찾기 위해.
어디서 온 것인지.
마법은 누구한테, 어떻게 배운 것인지 등.
궁금한 것이 너무 많지 않은가.
"마법을 어디서 배웠을까?"
- 그러게나 말일세. 마법을 상실한 시대에 저 정도의 서클을 만든다는 건 엄청난 재능과 제대로 된 마법 스승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마법서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이다.
기존의 마법서대로 아무리 해도 마법이 펼쳐지지 않자, 온갖 편법과 비정상적인 방법이 난무하였으며 그것이 정통 마법처럼 굳어진 시대이다.
마치 베르가가 마법을 다르게 펼쳤듯이 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불완전하게나마 서클을 만들었다는 건 제대로 된 기초 마법서를 보유했다는 의미.
혹은 제대로 된 마법 스승이 있다는 의미였으니.
"어디 간 거야...."
소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지만, 어디로 간 것인지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간 것일까 슬쩍 들여다봐도 역시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저물고 하늘이 어둑해져 갈 때쯤.
- 저기, 저 아이 아닌가?
드디어 찾아 헤매던 초록빛 머리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원에 쪼그리고 앉아 꽃을 구경하고 있는 소녀. 흔치 않은 녹빛 머리칼과 다시금 느껴지는 익숙한 마력의 서클까지.
"찾았다."
쪼그려 앉은 채 고개를 까딱이며 정원의 꽃을 구경하고 있는 소녀의 뒤로 다가간다.
"흐흐흐...."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웃음. 드디어 찾았다는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소녀.
우선은 경계심을 늦추고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히오도 알고 있다.
"꼬마야."
필요한 것은 우선 밝은 미소.
그리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공통의 관심사를 꺼내어 흥미를 가지게 해야 한다.
그러니 일단 활짝 웃으며 해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흐흐흐."
공통의 관심사를 꺼내 보는데.
"아저씨랑 즐거운 마법 놀이할까?"
주변에 듣는 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 * *
끄덕끄덕!
수상쩍기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인 히오의 행동에도 녹색의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결과였다.
척 보기에도 '나 마법사요'하며 광고하는 듯한 히오의 복장.
거기에 실비아의 선언까지 있었지 않았던가.
제국의 수호 기사 히오 파블렌코는 마법사라고 말이다. 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듣고 보았으니 이 작은 소녀도 보았을 터였고.
마법을 배웠다면, 마법사라는 말에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좋아. 어디보자… 뭐가 좋으려나...."
1서클부터 3서클까지 가진 마법을 쭉 떠올려 본다.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게, 보자....
"이게 좋겠구나."
가볍게 들어 올리는 지팡이.
1서클의 기본 소환 마법이 스킬이 되어 세상에 나온다.
「스킬 - '까마귀 소환'이 발동됩니다」
지팡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풍경이 썩 잘 어울리지 않은가. 히오가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물론 정원에서 일어나는 약간의 소란은 애써 외면한 채였다.
"꺄아악!"
"갑자기 뭔 까마귀야!"
"으아 징그러!"
녹색의 소녀는 입을 헤 벌리고 그런 광경을 바라보더니 이내 곧 활짝 미소 짓는다.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그런 미소였다.
"어때? 신기하니?"
끄덕끄덕!
"다른 것도 보여 줄까?"
끄덕끄덕!
"그럼 마법을 어디서 배웠는지 가르쳐 줄래?"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계속 끄덕이던 소녀가 이번 질문에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누구한테 배웠는지는?"
도리도리!
"어떤 마법을 쓸 수 있는지...?"
도리도리!
"그럼 네가 어디서 왔는지는?"
도리도리!
"…이름은 뭐야?"
절대 말 못 한다는 듯 눈 꼭 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이름을 묻는 말에 멈칫한다.
잠시 고민하더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흙 위에 써 내려가는 이름.
"프… 레… 이… 야?"
그리고 그때.
"세상에 프레이야!"
반대편에서 프레이야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한 사내.
프레이야라 불린 녹빛의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킨다.
사내는 달려오며 히오를 쳐다봤고,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프레이야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죄송합니다. 프레이야가 무슨 결례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다가간 건데요 뭐."
얼핏 보기에는 제국의 귀족과 흡사했으나 자세히 보면 옷의 양식과 재질이 다르다.
조금 더 거칠고 조금 더 가벼운 옷감. 조금 낯선 억양. 타국에서 온 것은 확실했다.
사내 역시 히오의 옷차림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연회장의 그분이셨군요. 제국의 새로운 수호 기사시라고...."
"히오 파블렌코입니다."
"뮤틴스 크라츠입니다. 아릴레이야 출신이죠."
가볍게 악수를 하며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여는 뮤틴스.
"듣자하니 마법사라고 하시던데… 하하. 이거 정말 대단하십니다."
자신을 뮤틴스라 소개한 사내는 악수하는 손을 빼며 호탕하게 웃어 보인다.
입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하하...."
그 눈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히오를 노려보고 있다는 게 문제였을 뿐.
히오는 뮤틴스가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감정을 손쉽게 읽어 낼 수 있었다. 수없이 받아 보았기에 너무도 익숙한 그것.
뮤틴스의 두 눈에는 분명 경멸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
쉽사리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저는 그럼 이만…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가 보겠습니다. 프레이야. 가자."
비웃음이나 의심 따위의 작은 감정이 아니었다.
경멸을 넘어선 적의.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한 히오에게 어찌 저 정도의 적의를 불태우는 것인가. 무엇에 그리 화가 났기에.
그리고 프레이야는 왜 꽁꽁 감추고 숨기려는 것인가.
많은 게 의문이었지만, 히오는 여유롭게 웃어 보인다.
프레이야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뮤틴스.
그렇게 돌아가는 뮤틴스와 녹빛 소녀의 뒤에 대고 말하는 것이었다.
"프레이야. 오늘 만나서 반가웠단다."
프레이야가 고개를 돌려 밝게 웃어 보인다. 손을 흔들었다.
그에 히오도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고.
"…가자."
사내는 이제 숨길 생각도 없는지 경멸이 잔뜩 섞인 눈빛으로 히오를 노려보다가 프레이야를 이끌고 사라져 버린다.
"…이거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뭐, 아직 연회는 이틀이나 더 남았으니 차차 알아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히오의 영혼 속에서 푸르넬이 낮게 중얼거린다.
- 자네는 이유 없이 미움받는데도 화 한 번 내지를 않는군.
* * *
게임 속 세계관에서 최강이라 불리던 NPC는 세 명이었다.
제국의 황금 사자, 검성 비탈리아누스.
흑아의 수장,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
그리고 마지막 한 명.
세계가 멸망하고 서버가 닫히는 그 순간마저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의문에 휩싸인 채 그저 죽었을 거란 추측만이 나돌았던 이.
서쪽 바다의 지배자.
레가르다.
그가 바로 아릴레이야 출신이었다.
서클을 지닌 소녀, 프레이야와 뮤틴스는 그런 아릴레이야에서 왔다는 말이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그리고 벤타이얼을 조금이라도 해 본 유저라면 모두가 들어 봤을 악명 높은 국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아릴레이야로 갈 수가 없었기에 악명이 높았던 것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막은 것인지.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여태껏 밝혀지지 않았지만, 확실한 사실은 한 가지.
서쪽 바다의 지배자라 불리우는 레가르다가 아릴레이야로 들어오는 길목을 모조리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억지로 뚫고 들어오려는 유저는 있었고 어김없이 레가르다의 손에 의해 사망했다는 메시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레가르다는 물론이고 섬나라 아릴레이야까지 악명이 높아질 수밖에.
의문투성이인 왕국, 아릴레이야.
어비스로 개판이 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도 아릴레이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지존천마 역시 제국을 지켜 내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시절이었기에 그런 아릴레이야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렇게 잊혀졌었는데....
"이렇게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또 다르지."
삼 일간 이어지는 연회의 이틀 차.
클레어는 여전히 정신없고 다른 이들 역시 한참 무르익은 연회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는 상황 속에서 계속 틈을 엿보던 히오는.
"으흐흐흐. 안녕 프레이야?"
홀로 떨어진 프레이야를 기어이 찾아내고야 만다.
"아저씨랑 즐거운 마법 놀이할까?"
74화 즉위식 (4)
이틀 차에 알아낸 것은 프레이야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서클을 이루기 위한 문양은 만들었지만, 그 외의 문양은 아직 새기지 못했다는 것.
그 말인즉, 서클은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전무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고작 1서클의 마법에도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 아니겠나.
"파이어."
지팡이를 통해 화륵- 피어나는 작은 불꽃.
프레이야는 폴짝폴짝 뛰며 해맑게 웃는다.
무릇 보는 사람이 저렇게 신나한다면 보여 주는 사람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법.
지팡이로 향하는 마력을 끊고 다른 문양에 힘을 싣는다.
"이번에는 아쿠아!"
불이 사라진 자리에 뽀글뽀글 생겨나는 물의 구.
지팡이를 프레이야의 눈높이에 맞춰 내려 주자 물방울을 콕콕 찌르면서 즐거워한다.
표정은 환하게 웃고 있지만, 그것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아예 소리 자체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람처럼 분명 웃고 있는데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
그것이 못내 안쓰러웠기에 히오는 더욱 신을 내며 마법을 펼쳐 보였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기본적인 마법에도 세상 그 누구보다 환한 표정으로 즐거워하는 프레이야.
한참을 마법을 구경하고 때론 직접 만져 보기도 하는 등, 정원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정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휴식을 취한다.
프레이야는 멀쩡했는데 히오가 지친 것이다.
딱히 뭔가를 한 것도 없는데 괜히 힘이 쭉 빠지는 기분.
'…이게 육아의 힘듦인가?'
- 뭘 했다고 엄살을 그리 부리나?
'엄살이 아니라… 에휴, 됐다. 유령이 뭘 알겠냐.'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시선을 프레이야 쪽으로 향했다.
땅에 닿지도 않는 다리를 까딱이며 밝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프레이야.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서클은 어떻게 만들었고 그걸 가르쳐 준 사람은 누구였으며… 아릴레이야는 어떤 상황인지.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내 첫 번째 스승은 말이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마법사였어."
내뱉은 말은 전혀 다른 종류였다.
"마법을 상실한 시대에서도 평생을 한 줄기 불꽃을 위해 살다 가셨지."
궁금하긴 했으나 이토록 어린 소녀를 속여 가며 알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면 될 일이다.
프레이야를 이용해서 조금의 정보를 얻는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러니까 프레이야 너도 포기하면 안 돼. 가끔씩 마력이 네 말을 듣지 않고 마법이 억지로 꼬이는 것 같아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길이 생길 테니까."
잃어버린 마법을 어떻게든 되찾아 낼 테니 말이다.
그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프레이야가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
첫 번째 스승이 있으니 두 번째 스승도 이야기해 달라는 의미임을 파악했기에 슬쩍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간다.
"음… 두 번째 스승은 엄청 사악한 네크로맨서야."
그 말에 화들짝 놀라는 프레이야. 네크로맨서가 어떤 것인지 아는 모양이다.
"사람이나 영혼을 무슨 재료 보듯이 본다니까? 그리고 말은 또 어찌나 많은지 가만 들어 보면 실속은 없고 허세만 잔뜩 끼어 가지고는...."
-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그 말에 프레이야가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히오를 올려다본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두 번째 스승은 살아 있… 으니까?"
히오의 무릎을 톡톡 두드리는 프레이야.
마치 힘내라고 하는 것 같은 그 모습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래. 고마워."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가는 두 사람의 위로 문득 짙은 그림자가 생겨난다.
"프레이야. 여기 있었구나."
뭐가 그리 바쁜지 뒤늦게 나타나서는 프레이야를 데리고 가려는 사람.
아릴레이야 왕국의 사신, 뮤틴스였다.
"오늘도 함께 계셨군요. 히오 파블렌코님."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날카로운 눈빛으로 히오를 바라보는 뮤틴스.
"예. 프레이야가 심심해 보이길래 이야기나 좀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한 일입니다마는 프레이야가 몸이 좋지 않아서 밖에 오래 나와 있는 것은 부담이 되는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먼저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나 잘 뛰어놀았는데 몸이 안 좋기는 무슨.
물론 생각과는 달리 히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프레이야. 오늘도 즐거웠단다."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프레이야와 함께 자리를 떠나는 뮤틴스.
히오는 뒤를 자꾸 돌아보는 프레이야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고.
연회의 두 번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 * *
세 번째 날은 앞선 두 날과는 조금 달랐다.
우선 연회에 참여하는 인원이 제법 줄었으며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한산했다.
히오에게 말을 걸기 위해 다가오는 이도 거의 없다시피 했고 그만큼 시간에 여유가 남아 프레이야가 있는 아릴레이야 측을 주시했으나… 딱히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야 말로 프레이야를 놓지 않겠다는 듯 뮤틴스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히오는 연회장을 빠져나와 실비아를 찾아간다.
연회의 마지막 날.
즉위식의 마지막 행사이자 축제.
이것이 끝난다면 이제 해야 할 것은 아타올프와의 전쟁이었기에.
연회장에 잠시 얼굴을 비추고 사라진 실비아를 찾아갔고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 히오! 마침 잘 왔어. 그렇지 않아도 의견 묻고 싶은 게 좀 있었는데...."
실비아는 서류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상태였다. 즉위식 끝나자마자 이런 상태인 것이다.
가뜩이나 새로운 황제로서 할 일이 많을 텐데 바로 전쟁 준비까지 해야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황궁의 모든 관료가 비슷한 상태일 것이었다.
역시 황제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대화의 시작은 역시 곧 있을 전쟁에 관해서였다.
대륙 최대이자 최악의 범죄 집단 흑아.
흑아의 본체가 아타올프라고는 하지만, 그만한 악명에는 당연히 그만한 인간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흑아의 습격을 받아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들의 본진을 치고 완전한 몰락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들을 상대해야 하고, 때문에 전쟁에 준하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었다.
"이건 이번 참사로 자식을 잃은 가문에서 보내겠다 약속한 병력인데...."
시작된 이야기는 예상보다 더욱 길어졌다.
뭐, 병력의 편제나 구성 따위는 다른 관료들이 알아서 잘 할 테지만, 그것 외에도 변수가 많은 까닭이었다.
첫 번째 변수는 아이라이츠.
과연 그녀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아이라이츠가 배신할 이유가 없다지만, 배신하지 않을 이유 역시 없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니 온전히 신용해서도, 무조건 배척해서도 안 될 것이었다.
두 번째는 아이라이츠가 아타올프를 바알 숲 밖으로 꾀어낼 수 있을 것인가.
믿는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실패했을 경우도 상정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아타올프의 영역 내에서 벌어질 전투도 계획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변수는… 다름 아닌 히오 자기 자신이었다.
아마도 치열할 그 전장에서 아타올프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의념이 실린 검은 안개를 뚫고 그를 확실히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인지. 그것도 변수라면 변수라고 할 수 있겠다.
제법 오랫동안 이야기를 이어 가다 보니, 주제 또한 조금씩 바뀌어 간다.
전쟁의 이야기에서 잠시 일상적인 이야기.
아카데미의 참사 이야기 그리고 셋이서 함께하던 과거의 이야기까지.
그렇게 흘러가던 주제는 결국 히오가 목표했던 것에 닿는다.
"영혼이 텅 빈 자들을 따로 추렸어."
실비아의 능력 중 하나인 영혼을 보는 눈으로 추린 목록.
이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영혼이 텅 빈 몇몇이 있다고.
그중 하나가 시르베르트라는 말을 듣고 생각해 낸 것이다.
혹시 빙의자들은 전부 영혼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
그렇기에 실비아에게 자신의 혼은 어떻게 보이냐고 물으니.
- 히오의 혼은 볼 수가 없어. 누가 보지 못하게 막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야.
머리만 더 복잡해진 것이었다.
어쨌든 이번에 추린 이 목록이 황궁에 있는 빙의자들의 신상. 그것을 쭉 훑어 내려가던 히오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춘다.
익숙한 이름이 보인 까닭이었다.
시르베르트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랭킹 2위로서 지존천마의 이름 아래 항상 자리하고 있던 그 녀석이 황궁에 있다고.
하지만… 당장에 만날 필요는 없으리라.
녀석도 히오의 존재를 알고 있을 테고 히오도 그 존재를 알고 있으니.
"일단 최대한 티 내지 말고 녀석들을 감시해 줘. 웬만해서 별다른 짓은 저지르지 않겠지만, 그래도 감시의 눈을 떼면 안 돼."
그리고 이야기가 거기까지 도달하면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이다.
"영혼이 텅 빈… 그런 사람들은 대체 뭐야?"
그것들이 대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적어도 실비아에게는 모두 털어놔야 적극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기에 히오는 입을 열었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물론 전부가 사실은 아니었다.
적당한 거짓과 적당한 사실이 뒤섞여 히오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고 실비아는 연신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유지하다가 어비스의 이야기까지 끝나고 나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관식이 끝나고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는데 그야말로 일복이 터진 것이다.
"진짜… 히오가 말한 게 아니었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그만큼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어비스가 침략해 오고 그에 맞서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자들.
그것이 영혼이 텅 빈 자들의 정체라니.
누가 그런 말을 믿어 주겠는가.
"아무튼, 영혼이 텅 빈 녀석들 중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저지르는 놈들이 제법 있으니 잘 보고 있어야 할 거야."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실비아를 내버려두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황제가 되었더니 대뜸 나라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데 어찌 심정이 복잡하지 않을까.
또 다시 생각하는 건데 역시 황제는 할 게 못 되는....
톡톡!
다리를 두드리는 느낌에 히오의 상념이 깨졌다.
뒤를 돌아보니 녹빛의 소녀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프레이야!"
프레이야가 히오를 먼저 찾아온 것이었다.
"세상에. 아저씨랑 마법 놀이할까?"
프레이야를 번쩍 안아 들며 묻자 웬일로 고개를 가로젓는 프레이야.
대신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제 손바닥만 한 돌멩이를 건넨다.
마력이 느껴지는 평평한 돌.
"이건… 아티팩트구나?"
- 휘스퍼링 스톤이라는 걸세. 연락용 아티팩트인데 우리 시대에는 거의 구석기 유물 취급을 받는....
히오가 그것을 받아들자 프레이야는 주머니에서 똑같이 생긴 돌을 하나 더 꺼낸다.
그리고 그곳에 작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끄적이자.
잠시 뒤, 히오의 손에 들린 휘스퍼링 스톤에서 옅은 빛과 함께 쓰여지는 글자.
『저는 프레이야예요! (˶• ֊ •˶)』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작성해 연락을 주고받는 아티팩트인 듯했다.
"오! 좋은 아티팩트네. 내가 써도 똑같이 네게 가는 거니?"
히오의 한쪽 팔에 걸터앉은 채 다시 꼬물꼬물 글자를 써 내려가는 프레이야.
뭐라고 적는지 다 보였지만, 모른 체하며 휘스퍼링 스톤에 떠오르는 것을 보니.
『네! 그런데 횟수가 정해져 있어서 많이 쓰지는 못해요!( •︠-•︡ )』
"그래. 그럼 아껴 써야겠구나."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프레이야.
『저희 이제 돌아가야 한대요! 이거 드릴 테니까 아릴레이야로 놀러 오시면 안 돼요?』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를 들면 레가르다 같은 사람… 그래서 말인데."
넌지시 프레이야에게 말하는 히오.
"프레이야가 잘 말해서 초대해 주면 안 될까? 그럼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저 먼 서쪽의 섬나라. 아릴레이야 왕국.
그런 곳에서 제국의 수도까지 온다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다.
거기에 황제의 즉위식이지 않은가. 고작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아이가 올 수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이번 연회에 참석한 이들 중 프레이야의 또래로 보이는 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으니.
그렇다는 말은 프레이야의 신분이 보통 신분이 아니라는 말일 터.
『음....』
그런 히오의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알겠어요! 제가 잘 말해 볼게요! •᷅ ʚ •᷄』
비장하게 다짐하는 프레이야.
히오는 웃으며 그런 프레이야의 밝은 녹빛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래그래. 잘 부탁할게."
그렇다고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었다.
꽤 높은 신분이라고 한들 아직 어린아이가 아니던가.
설사 왕녀급의 신분이라도 오랫동안 이어진 봉쇄령을 풀 수는 없을 터였으니까.
그렇게 한쪽 팔로 프레이야를 안아 든 채 복도를 거닐고 있는데.
"…세상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뮤틴스.
히오와 히오의 품에 안긴 프레이야를 번갈아 보더니 경악하며 달려오는 모습이 제법 볼만했다.
"이게 무슨...!"
뭐라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차마 하지 못하는 그런 표정.
히오가 프레이야를 내려 주자 뮤틴스는 별다른 말도 없이 프레이야의 손을 잡고 등을 돌린다.
"…가 보겠습니다."
그런 말을 남기고는 프레이야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뮤틴스.
저렇게 놀랄 거면 프레이야를 잘 지키고 있었어야지. 참 이상한 놈이라 생각하며 히오 또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연회의 삼 일 차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방문했던 각국의 사신들은 모두 감도는 전운을 피해 빠르게 돌아갔고.
그들의 빈자리는 절그럭 거리는 기사의 갑주 소리와 병장기를 옮기는 소리 따위가 채운다.
전쟁이 머지않은 것이었다.
"…프레이야 님."
황궁을 떠나는 마차 안.
뮤틴스는 잔뜩 토라진 프레이야를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누구 보다 현명하신 프레이야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이해하실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프레이야는 고개를 돌린 채 손가락만 꼼지락 움직인다.
그리고 잠시 후, 빛을 내는 뮤틴스의 휘스퍼링 스톤.
『히오 파블렌코 아저씨는 정말 마법사가 맞아!』
그런 메시지를 확인하고 고개를 가로젓는 뮤틴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대륙에 마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제국의 수호 기사가 될 정도의 무력을 마법으로 얻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한 마디로 히오 파블렌코는 희대의 사기꾼.
그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만큼은 간신히 막았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한동안 프레이야를 못 볼 수도 있었으니까.
『아니야. 내가 확인했어. 정말 마법을 사용했단 말이야.』
"프레이야님. 제국을 속여 수호 기사 자리에 오른 자입니다. 본래 사기꾼이란 족속들이 다 그렇죠. 속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말을 가만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깜빡 속아 넘어가는 그런 자들입니다."
뻔한 것이다.
어떤 스킬 따위를 이용해 마법이라 속이고 제국 수호 기사 자리까지 얻어 낸 것이겠지.
그런 사기꾼이니 아직 어린 프레이야를 구워삶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터.
"프레이야님께서도 조금 더 크시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그러니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
프레이야의 미움을 조금 받더라도 이건 단호하게 말하는 수밖에.
『…뮤틴스랑 안 놀 거야!』
정말이지.
사기꾼 한 명 때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죄송합니다. 프레이야님."
그렇게 프레이야가 단단히 토라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풀릴 것이다.
마음이 모질지 못한 아이였으니.
다시 바다를 보면 마음이 풀어지고 지금도 내심 너무 심한 말은 한 것은 아닐까 고심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아이였다.
프레이야 예니스는.
이토록 여린 아이였다.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용의 후예는.
75화 악당 (1)
전쟁의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새로운 황제 실비아 베르덴의 소집 명령에 귀족들은 앞다투어 기사와 병력을 지원할 것은 약속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충심을 보여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바뀌는 것들이 많은 시대이지 않은가.
한순간에 몰락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만큼 올라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무엇보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와 동시에 벌이는 전쟁이다. 철저한 준비와 많은 관심이 쏟아질 것이고 그만큼 공을 세운다면 크게 돌아올 수 있을 터였다.
개중에는 가주 스스로가 지휘관이 되어 참여할 것을 약속하는 가문도 존재했다.
소문이 퍼진 까닭이었다.
흑아의 수장,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가 지난번 습격에서 검성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고.
새로운 수호 기사와 검성의 합작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도망쳤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번 원정에 수호 기사와 검성이 그대로 참전한다는 말이 나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몇 주 사이, 네 개의 군단급 병력이 모여들었다.
예상을 웃도는 전력.
아마 대부분의 이들은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승리의 가능성이 농후한 원정.
황제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기회.
제국이 작정하고 나섰으니 제아무리 흑아라 할지라도 별수 없지 않겠는가. 그만큼이나 막대한 병력이 모여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신들은 적당히 발만 걸쳐도 악을 멸한 원정대에 참여했다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수뇌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성대한 출정식 후에 군대가 출전한다.
아카데미를 급습하고 무수히 많은 학살을 벌인 흑아.
그리고 그런 흑아를 무너트리기 위해 출전하는 군단.
악을 멸하는 원정대.
뭐, 그런 식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기사고, 병사고 할 것 없이 가슴을 쭉 편 채 당당히 나아간다.
당당하게 깃발을 들고 뿔피리를 불며 전진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보여 주기 위한 행렬이었고 실제로는 수도 외곽 지역에 정렬한다.
제국의 군대는 굳이 힘을 들여 수도에서 남부까지 전진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었다.
대규모 공간 이동 능력자. 이오스라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옮길 수 있는 숫자에도 한계가 있어 며칠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용과 시간이 절약되는 것이었다.
남부의 지정된 장소로 가장 먼저 1군단의 척후병 부대가 넘어가고 그다음 날 넘어간 것이 히오와 검성, 그리고 사령관을 포함한 군대의 수뇌부였다.
총 네 개의 군단과 그러한 군단을 이끄는 네 명의 사령관.
그 모두를 아우르는 총사령관의 자리에는 로베룬 공작이 임명되었다.
제국의 유서 깊은 공작 가문의 가주이자 권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자. 황위 다툼에도 중립을 유지하던 로베룬 공작은 실비아의 충직한 신하가 된 채 이번 원정의 총사령관이 된 것이었다.
단순 작위가 높아서 뽑힌 것은 아니다.
전쟁의 경험 또한 풍부했고 선황제의 정권에서 보안무관장을 역임하며 총사령관으로서 경력 또한 있었으니.
백전노장이며 귀족 위의 귀족이라 불리우는 자가 이번 원정대의 총사령관인 것이다.
구축된 지휘소의 막사 안.
바깥은 진영을 구축하는 병사들의 군홧발 소리와 그것을 지시하는 지휘관들의 목소리로 정신없는 가운데, 유난히 조용한 막사 안.
그곳에 위치한 사람은 세 명이었다.
히오와 검성 비탈리아누스.
그리고 히오와 마주앉은 총사령관 로베룬 공작.
하얗게 센 백발에 강직한 얼굴.
턱 아래로 길게 늘어진 흰 수염.
척 보기에도 제법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 입이 천천히 열린다.
곧은 두 눈은 정확히 히오를 응시한 채였다.
"사랑해."
그에 히오는 표정을 와락 구기며 한숨을 내쉰다.
"하아...."
"사랑해! 여기서 보니까 더 그런 마음이 막 드는 것 같네?"
"뭘 어떻게 하면 로베룬 공작까지 이 꼴로 만드는 거냐."
로베룬 공작의 늙은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이라이츠.
그리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비탈리아누스가 검을 뽑아 아이라이츠가 되어 버린 로베룬 공작의 목을 겨눈다.
"이자는 누구길래 공작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가."
날카로운 검이 자신의 목을 겨누든 말든 웃으며 히오만을 쳐다보는 로베룬 공작. 아니, 그냥 아이라이츠.
"아이라이츠라고, 흑아에 잠입해 있는 녀석이야. 일단은… 믿어도 돼."
당장은 로베룬 공작보다 아이라이츠가 더 쓸모 있을 테다. 이것은 일반적인 전쟁과는 장소도, 방식도 다른 전쟁. 결국에는 아타올프를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이었으니.
히오의 말에 비탈리아누스는 검을 거두었고 히오는 아이라이츠의 눈을 직시한다.
갑자기 이렇게 불쑥 나타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우선 녀석의 정확한 능력을 알아야 한다.
"네 능력부터 확실히 말해 아이라이츠. 로베룬 공작까지는 어떻게 닿은 거야."
로베룬 공작은 핵심 귀족 중 하나. 가문의 위세, 작위, 직위 할 것 없이 모든 게 최상위 수준인 고위 관료.
당연히 황궁 내에서도 중요 인물이고 그런 만큼 실비아에게 우선적으로 영혼이 개조당한 인물이었다.
어찌 그런 최중요 인물에게까지 아이라이츠는 닿을 수 있었을까.
그에 아이라이츠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답했다.
"내 능력은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라고 생각하면 돼. 한 번 오염되면 급속도로 퍼져 나가지. 평상시에는 오염됐다는 게 티가 나지도 않아. 그러다가 기회가 오면 다시 퍼져 나가고… 뭐, 그런 거야. 어때. 매력적이지?"
아이라이츠의 스킬은 매혹.
대상과 눈을 마주하고 있다면 언제든 시전 가능하고 그 상대가 이성이라면 확률은 급격히 상승한다.
높은 수준의 정신 방벽이 없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매혹 당한 사람의 몸을 빌려 다른 이들에게 매혹을 걸 수도 있는 것. 마치 전염병처럼 말이다.
"…약점은?"
"매혹 당한 대상의 능력은 제대로 쓰지 못하고 내 본래의 힘은 약하다는 것 정도? 스탯이랑 그 외에 자잘한 스킬이 전부니까."
역시나 이번에도 별다른 고민 없이 답한다.
본인의 스킬과 약점을 어느 누가 이리 쉽게 털어놓겠는가.
"너무 막힘없이 다 말해 주니까 더 의심 가는데."
그렇게 의심해도 아이라이츠는 책상 위로 턱을 괴고서 히죽 웃을 뿐이었다.
"원래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이런 것도 다 털어놓는 거라고 했어."
"…됐고, 더 이야기할 건?"
"많지. 엄청 많지."
몸을 바짝 당겨 히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아이라이츠.
"흑아의 이름으로 집결한 전력은 사천이 조금 넘어. 기존의 산하 세력에다가 서부와 남부의 갱단이나 범죄 집단까지 모조리 끌고 온 전력이지. 게다가 불완전하게나마 완성된 마인까지 모두 동원될 것이고."
아이라이츠를 통해 전해지는 흑아의 전력은 생각보다는 많았지만, 충분히 감당 가능한 범위 내였다.
단박에 괴물이 되어 버리는 마인이 있다고 한들, 이쪽은 제국의 최정예 군단이다.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압도하는 것이었다.
"흑아에 기생충처럼 붙어서 활동하던 그놈들은 참여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이란, 악명을 이용해 포인트를 버는 빙의자들. 흑아에 기생충처럼 붙어 있던 놈들.
아이라이츠는 옆의 검성을 의식해서인지 히오의 귓가에 대고 간질거리듯 속삭인다.
"지존천마, 히오 파블렌코가 아타올프를 정리하러 왔다고 내가 소문을 퍼트렸거든. 목숨이 아까우면 흑아의 편에 서지는 않겠지."
그렇게 속삭이고는 얼굴을 떼고 다시 빙긋 웃어 보이는 아이라이츠.
"어때? 쓸 만하지? 사랑스럽지?"
그러나 히오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지 않은가.
"아타올프를 바알 숲에서 빼내 오는 건?"
바알 숲을 둘러싼 짙은 안개. 질척거리는 늪지.
이것은 피아 식별을 방해하며 방향 감각과 인지 능력까지 저하시키는 지독한 안개이다. 중심으로 갈수록 더욱 지독해지는 안개는 정신 착란과 방향의 완전한 상실까지 가져온다.
중앙으로 가려 할수록 길을 잃고 헤매게 될 터였으니.
진입하는 순간 전력 차이는 무의미해지는 것이었다.
그러한 안개에는 아타올프의 힘마저 섞여 있어 바깥에서 공격하는 방법 또한 통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
천혜의 자연에 아타올프의 힘과 아티팩트가 만나 이루어진 절대적인 영역.
흑아에게 타격을 입힐 수는 있어도 여태 완전히 멸하지는 못한 이유였다.
그러니 아타올프를 바알 숲 바깥으로 꾀어내는 것이 가장 좋은 작전이었겠으나....
아이라이츠는 고개를 작게 가로젓는다.
"실패했어. 미안해."
"역시 그런가."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다만 기대했던 것은 아이라이츠의 능력이었는데 역시 아타올프에게는 먹히지 않았던 모양.
"그, 그래도 두 번째 방법은 있어. 바알 숲의 안개를 없애는 것 말이야."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생각하는지 다급하게 말을 잇는 아이라이츠.
"히오 너를 바알 숲 중앙의 옛 성까지만 데려가면 되는 거 아니야? 그 아티팩트의 위치는 네가 알고 있을 테니까."
드넓은 바알 숲의 중심에는 아타올프가 기거하는 옛 성이 있다.
그곳에 있는 것이다.
이 숲 전체를 안개로 둘러싸게 하고 온갖 방해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아타올프의 힘을 받아 더욱 강력한 효과를 내는 아티팩트가.
그리고 게임 속에서 그것을 부수고 아타올프를 직접 죽인 이는 다름 아닌 지존천마였기에.
그것을 알기에 아이라이츠는 말하는 것이었다.
"너를 그곳에 데려다줄게. 너는 안개를 제거할 수 있을 테고 그럼 제국군이 순식간에 흑아의 세력을 소탕. 상처 입고 고립된 아타올프는 여기 이 검성과 히오 네가 힘을 합쳐서 재빨리 슥삭- 하면 끝! 어때?"
손짓발짓 다해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아이라이츠.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 않나. 아타올프가 바보도 아니고 중심부까지 내가 가는 걸 보고만 있는다고?"
"그러니 연기를 해야지. 제국군은 예정대로 바알 숲으로 진입해. 아타올프는 초입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저지할 거야. 자신의 영역 안에 있을 때 검성의 힘을 최대한 깎아 놓기를 원하고 있거든."
"그래서?"
"아타올프가 직접 나서서 검성을 괴롭힐 때, 나도 함께 갈 거야."
"네가 직접 온다고? 본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 짓는 아이라이츠.
"응. 내가 직접 나설 거야."
아이라이츠의 능력은 본체의 위치를 숨기면 숨길수록 무서운 능력이다.
자신의 입으로도 밝히지 않았던가. 본체의 힘은 보잘것없다고.
"왜?"
그러니 히오의 의문은 제법 합당한 것이었고.
아이라이츠의 눈웃음은 진해져만 간다.
"히오 너를 만나기 위해서지."
그 대답과 그 모습에 히오의 미간이 좁혀진다.
의미를 대강 파악한 까닭이었다.
"…네 능력을 내게 직접 쓴다는 말이겠네."
"응. 아타올프를 속여야 하니까."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 양 뺨을 감싸며 환하게 지어지는 웃음.
그 감정에 맞춰 조금씩 크기를 키워가는 선홍빛.
"어쩔 수 없이 나의 매혹에 걸려야 한다는 말이야. 히오 파블렌코."
아이라이츠의 능력에 걸린 채로 바알 숲의 중심부까지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야 아타올프의 의심을 피하고 안개의 근간을 이루는 아티팩트를 파괴할 수 있을 테니까.
"아타올프가 그걸 순순히 내버려둘까. 내가 매혹에 걸린 걸 알면 즉시 죽이려 들 텐데."
"그건 아니야. 녀석도 제법 궁지에 몰린 만큼 내 능력이 필요하거든. 훗날을 위해서라도 나를 내치지는 못해. 그리고 내가 요구한 건 하나뿐이니 그건 반드시 들어주려고 할 거야."
"요구?"
"응. 뭔지 궁금해? 말해 줄까?"
"…아니, 왠지 알 것 같은데...."
몸을 바짝 당기다 못해 책상에 엎드린 채 히오를 올려다보는 아이라이츠.
"히오 파블렌코만 살려서 내게 넘겨 달라. 이게 내 조건이었어."
그렇게 말하는 아이라이츠의 두 볼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5일에 걸쳐 모든 군단의 이동이 완료되었다.
제국의 수도 이메니아에서 남부의 페트로나 지역까지 고작 5일 걸린 것이다.
기사와 병사들의 피로도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사기 또한 높았으니.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자들이 대다수인 것이었다.
바알 숲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흑아가 왜 수십 년간 공포의 상징으로 불리웠는지 그 진정한 힘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진격!"
명령과 함께 울리는 뿔피리와 북소리. 붉은 깃발을 치켜드는 기수와 그에 맞춰 진군하기 시작하는 행렬.
조금씩 넓게 퍼지며 드넓은 바알 숲을 감싸듯 진군한다.
군마에 올라탄 채 그것을 바라보는 검성 비탈리아누스와 로열 나이츠 데이먼, 맬리사.
그리고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
"그래. 자네가 그리하기로 했다면, 믿겠네."
아이라이츠의 계획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위험 부담이 큰 것은 사실이다.
다만 위험도에 비해 얻을 것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결국 바알 숲을 천천히 한걸음씩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 과정에서 입을 피해는 과연 어느 정도일 것인가.
얼마나 많은 죽음이 닥칠 것인가.
상상조차 가지 않았기에.
"해 보자고."
흑아의 중심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지 않겠는가.
무척이나 간단한 것이다.
이 지긋한 안개만 없앤다면 손쉬운 승리.
그렇지 못한다면 상처뿐인 승리.
저 멀리 보이던 안개 숲이 어느새 코앞까지 닥쳐왔다.
76화 악당 (2)
새벽녘, 숲에 스며드는 물안개는 신비롭다.
향긋한 풀내음과 청량한 공기.
거기에 은은하게 깔려가는 안개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겪는 것이다.
허나 무엇이든 적당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
짙디짙은 안개는 불쾌하다.
불쾌함마저 넘어선다면 두려워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뿌연 시야.
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는 습기.
방향은 종잡을 수 없고 바로 옆에 있던 동료가 갑작스레 보이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벅찬데 언제 어느 곳에서 적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가는 것이었다.
- 끄아아악!
어디선가 비명이 울려 퍼진다.
병장기가 부딪치고 무언가 커다란 것이 땅을 울리는 소리.
하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다.
왼쪽에서 들린 듯하다가도 뒤에서 들려오는 것 같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그런 감각이었다.
미리 언질을 받았음에도 이 정도라니.
공포의 상징, 흑아.
그들의 영역에 들어왔음이 그제서야 실감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리를 지켜라! 당황하지 마! 예상했던 상황이다!"
다만 다행이라 할 만한 점은 이런 불합리한 환경 속에서 무리하며 전진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내려진 명령이 그러했다.
바알 숲을 넓게 둘러싼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전진.
그러니 등 뒤에는 수없이 많은 제국군이 도열한 채 천천히 움직이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사람이 움직이는 데는 인기척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렇게나 많은 병력이 모여 있음에도 느껴지는 인기척은 미미했으니 의심이 드는 것이다.
정말 다들 멀쩡히 따라오고 있는 건지.
혹, 흩어지고 자신들만 뚝 떨어져 버린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 그어어어어!
안개를 뚫고 불쑥 나타나는 거대한 손.
"마인이다!"
재빠르게 진형을 갖춰 나가는 병사들.
대응은 신속했다.
이것을 위해 갖춰진 구성인 까닭이었다.
한정된 시야 내에서 최대한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병사와 기사가 뒤섞여 움직인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선두라 할 수 있는 이곳은 특히나 대단했다.
"나서지 마라!"
지상에서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어느새 괴물의 머리 위에 나타난 사내.
언제 휘두른 것인지, 뽑은 것도 몰랐던 검은 진작에 괴물의 목을 지나쳐 검집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몸이 바닥에 사뿐히 착지하고 나서야 괴물의 목이 땅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로열 나이트, 데이먼 리에프테.
극도의 쾌검과 짧은 공간을 뛰어넘는 스킬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자.
"리에프테 경."
"역시 로열 나이트...."
자신의 근처에, 자신이 속한 부대 안에 로열 나이트가 있다. 긴장감이 절로 끓어오르는 안개 속에서 이 얼마나 든든한 일이겠는가.
허나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로열 나이트, 데이먼의 표정은 다른 이들처럼 그리 희망차 보이지 않았다.
무력의 중추 중 하나인 데이먼은 이 작전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안개가 오래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아군의 피해는 커진다. 급속도로 지쳐 갈 것이고 정신적인 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날 터.
그렇다고 검성을 비롯한 최정예들로 안개를 뚫고 중심부를 향해 돌파를 감행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그것을 파악하는 순간 흑아의 모든 전력이 그들을 향해 끈덕지게 달라붙어 올 것임으로.
자칫하다가는 망망대해 같은 안개 속에서 고립되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단 하나.
이 희뿌연 안개를 치워 버리는 것.
괴이한 안개만 없다면 순식간에 밀고 들어가며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이었으니.
그리고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있을 한 사람을 데이먼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로 가득한 저 먼 곳.
'지금쯤....'
작전은 시작되었을 터였다.
"긴장한 얼굴은 아니로군."
검성의 말에 미약하게 끄덕이는 고개.
짙은 안개 속에서 비탈리아누스와 나란히 선 채, 먼 곳을 응시한다.
"그 아이라이츠라는 자, 그다지 신뢰할 만한 정신 상태는 아니었네. 알고 있겠지?"
멀지 않은 뒤편에는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이곳을 바라보는 기사들이 보인다. 그들 역시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 것이다.
검성과 수호 기사가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은, 이곳이 곧 격전지가 되리라는 의미임을.
"확실히 멀쩡한 정신은 아니야."
"그런데 무얼 믿고 이번 작전을 감행했나. 성공한다면 확실히 손쉽게 승리할 수 있겠지만, 실패한다면 가장 위험해지는 게 자네이지 않은가."
"무얼 믿었냐라...."
글쎄.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 히오는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글쎄다. 그냥 뭐, 옛날 생각이 났다고 해 두지."
"언제나 그렇듯 싱거운 대답이야."
"그러는 비탈리아누스, 너는 어때. 머지않아 아타올프와 다시 만나게 될 텐데."
"더할 나위 없이 좋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진다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비탈리아누스의 표정은 일관되게 평온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비탈리아누스였다.
"마법사. 자네는 목표가 무엇인가?"
긴장과 적막이 감도는 안개 속에서 묻기에는 다소 뜬금없는 질문.
히오는 답하지 않았다.
뒷말이 더 남아 있음을 느낀 까닭이었다.
"어렸을 적 나는 최고가 되고자 했다네. 친구와 함께 최고가 된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고는 했어."
안개를 통해 번져 오는 비탈리아누스의 담백한 독백.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내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했네. 칼리아스 베르덴이라고, 참으로 호쾌하고 멋있는 사내였지."
그는 여전히 읽을 수 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안개의 먼 곳을 응시한다.
"그래서 이루었다네. 기어이 검 한 자루로 별의 칭호를 받아 최고가 되었고 언제나 영광스럽길 바랐던 사내는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가 되어 영원토록 기억될 거란 말이야."
"다 이루었으니 행복했겠군. 비탈리아누스."
"하하하! 그렇지. 그렇고말고."
비탈리아누스의 웃음이 잦아들고 다시 찾아온 적막.
안개는 점점 더 짙어져만 간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란 어찌나 간사한지. 그렇게 다 이루고 봤더니 문득 허무하지 뭔가. 뒤늦게 옛 친구 생각이 떠오르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테지."
"…뒤늦게라."
"아무튼, 그러니 자네는 가능한 한 목표를 더 높게 잡으란 말이야. 그래야 평생을 불꽃처럼 태울 수 있지 않겠나."
"그렇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높은 목표야. 이보다 더 높을 수 없을 정도지."
"자네가 그리 말하니 궁금하긴 하군. 살짝만 말해 줄 수 있나?"
"장황한 목표야 몇 가지나 있지만… 그중 하나만 꼽아 보자면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막는 것 정도일까."
그 대답이 제법 황당했는지 비탈리아누스의 시선이 히오를 향한다.
그렇게 잠시간 바라보더니.
"하하하! 그건 정말로 엄청난 목표로구먼. 내가 세웠던 목표 따위는 하찮게 느껴질 정도야."
나름 진지한 히오의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웃음을 터트리는 비탈리아누스.
히오 역시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러라고 한 대답이었으니까.
한동안 즐겁게 웃던 비탈리아누스는 곧 웃음을 멈추고 다시 정면을 주시한다.
웃음소리는 멈췄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린 채였다.
마치 후련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운 만담이었네. 마법사."
그리고는 천천히 검을 뽑아든다.
영웅을 상징하는 찬란한 금빛이 검을 통해 뿜어져 나온다.
"이제 준비를 하지."
뿌연 안개 속으로 얼핏 스쳐 지나가는 것은 검은빛.
사방에 자욱한 안개보다 더욱 짙은 검은 안개가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악당을 상징하는 어두운 안개가.
그에 히오 역시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딤과 동시에 의지를 불어넣는다.
「스킬 - '뇌제(雷帝)'가 발동됩니다」
새벽녘 바알 숲의 상공을 뒤덮는 먹구름.
백색으로 타오르는 두 눈과 몸 주위에 작열하는 작은 벼락.
뒤에 늘어선 기사들 역시 그것을 확인하고 각자의 오러를 끌어올린다.
그 누구도 섣부르게 입을 열지 못했다.
슬슬 느껴지는 것이다. 땅을 울리는 진동이, 기괴한 울음소리가.
희뿌연 안개가 점차 검게 변해가는 두려운 광경이 보이는 것이었다.
긴장감은 고조되어만 가고 결국 그것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쐐애액- 쏘아져 오는 한 줄기 검은빛.
그것을 막아서는 것은, 황금의 오러.
콰아앙-!
두 기운의 부딪침이 바알 숲의 안개를 날카롭게 뚫고 멀리 울려 퍼진다.
그 속에서 낮게 울리는 비탈리아누스의 목소리.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린 채였다.
"아타올프."
그에 화답하듯 들려오는 목소리는 인간의 것이라 여기기 어려운 것.
낮고 날카로우며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이 들게 하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
그 표정은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비탈리아누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힘의 충돌. 연달아 이어지는 굉음.
그리고 그러한 폭발 속에서.
"…안녕?"
히오는 눈앞에 불쑥 나타난 여인과 마주하고 있었으니.
"드디어 만나네."
커다란 눈동자 속에 보석처럼 빛나는 선홍빛.
아이라이츠의 등장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이라이츠의 고백에 히오는.
꽈아아앙-!
수십 발의 벼락을 냅다 꽂아 버리는 것이다.
쿵쿵- 땅을 울리며 짓쳐드는 수 미터의 괴물들. 전부가 마인이었다.
"막아라!"
그에 맞서는 기사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제국의 정예 중에서도 격전지에 선택되어 올 정도의 정예 기사들이 아닌가.
허나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건 마인뿐만이 아니었으니.
"죽어! 죽어! 죽어!"
마인과 마인의 사이로, 혹은 그 뒤로 계속해서 몰려드는 수백의 인간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눈에 선홍빛이 가득 들어찬 그들 대부분은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들이었다.
괴물의 소리와 인간의 비명, 고함과 흥분, 막대한 기운 간의 충돌이 일어나는 그 전장 속에서.
"아이라이츠."
히오는 아이라이츠와 마주한 채 서 있다.
꽈아앙-!
주변에는 여전히 벼락이 내려치고 그로 인한 연기가 자욱하다.
아타올프의 눈을 속이기 위한 연막이자 나름의 연기.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까 나 심장이 막 두근거려. 이거 사랑 맞지?"
주위에 가득한 비명과 소음 따위는 귀에 들리지도 않는 건지 가슴에 손을 얹고 조금씩 다가오는 아이라이츠.
그 모습에 히오는 냉정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랑이 아니라 누구든 이런 전장 속에서는 심장이 빨리 뛰어."
새하얀 피부에 작은 얼굴. 커다란 눈 위에 자리한 쌍꺼풀과 얇지만 짙은 눈썹은 조화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곱게 휘어진 눈 속에 자리한 선홍빛이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으니.
"어쨌든 나와 함께 가야 해. 히오."
눈웃음과 함께 천천히 다가오는 아이라이츠.
내려치는 벼락 속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명심해라 아이라이츠. 아타올프가 의심을 거두는 순간, 너 역시 능력을 풀고 나와 함께 아티팩트를 찾아 움직여야 한다."
"응. 알지. 걱정하지 마."
결국 히오의 코앞까지 도착한 아이라이츠. 머리 하나는 더 작은 키 덕에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 부드럽게 찰랑이는 흑색 머리칼.
그에 히오는 뇌제를 거두어들였다.
"시작해."
"응. 좋아."
자욱한 안개와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
비명과 고함, 전투의 커다란 소음 속에서.
아이라이츠는 양팔로 히오의 목덜미를 감싸 안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바짝 가까워진 거리.
내려다보는 히오의 무심한 눈과 그를 올려다보는 아이라이츠의 눈동자.
"내가 얼마나 가지고 싶어 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히오."
두 쌍의 눈이 서로를 마주하고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선홍빛의 기운.
히오의 눈동자 역시 비슷한 색으로 조금씩 물들어 간다.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가 발동됩니다」
밀어내려는 특성을 외려 진정시키며 천천히 그 선홍빛을 맞이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잠식해 들어오는 욕망.
"갖고 싶었는데 갖지 못하고, 떠올리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거의 맞닿을 듯 아슬한 간극 속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묻는 아이라이츠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으니.
"이거 사랑 맞지?"
"...."
활짝 웃으며 그 품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응! 그래! 나도 사랑해!"
검과 검이 부딪치는 마찰음. 오러와 검은 안개가 부딪치는 폭발음. 비명과 고함, 격정과 흥분의 외침.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들리지 않는 벼락과 천둥의 소리.
그에 먼지 구름도 서서히 가라앉아 갔고 그것이 완전히 걷혔을 때.
그 속에 있었을 히오와 아이라이츠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291 / 1000)]
77화 악당 (3)
정신없이 살다 보면 잊고 있던 기억들이 참 많다.
아니,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뤄 두었다는 말이 더 옳겠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 외면했던 것들.
무거워지는 마음에 돌아보지 않았던 기억들.
그건 아주 사소한 계기만 주어져도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것이었다.
위대한 검성, 비탈리아누스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8위계의 초인이라 한들 근간은 인간이지 않은가.
그 역시도 미뤄 놓았던 기억은 존재했다.
받아들이는 태도와 마음이 다를 뿐.
아타올프라는 존재는 비탈리아누스에게 그런 기억이었다.
"이러고 있으니 옛 생각이 나지 않는가. 아타올프."
콰앙-!
연달아 벌어지는 아타올프와 비탈리아누스의 격돌.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치열한 광경이겠으나 당사자들은 퍽 여유로웠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서로가 진심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탐색전도 아니다.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에게 탐색전은 의미가 없었으니.
이는 아타올프의 일방적인 견제.
검성의 힘을 빼고 자신을 따라 깊은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 오게 하려는 함정임과 동시에 전체적인 군의 속도를 늦추고 피로도를 높이는 작전.
그것을 알기에 비탈리아누스도 온 힘을 다해 상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대화나 주고받는 게 아니겠는가.
"예전에는 매일 같이 자네와 검을 나누었는데 말이야."
"추억놀음이 하고 싶은 건가. 비탈리아누스."
"그게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이야기로군."
아무렇게나 짓쳐들어오는 검은 안개를 대충 받아넘기고 태연하게 말을 내뱉는 비탈리아누스.
아타올프는 그런 비탈리아누스를 보며 고막을 긁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린다.
"표정이 좋아 보이는군 비탈리아누스. 그래,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이야."
아타올프 역시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잡으러 안개 숲에 들어온 이상 그것은 제국군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짓는 저 표정은 여유인가.
아니면 여유를 가장한 허세인가.
"그럴 수밖에."
그에 비탈리아누스는 옅은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자넨 내 지난날의 과오이니 말이야."
듣기에 따라 광오하게 들리는 대답.
아타올프의 표정이 조금 더 굳어지고 검은 안개에 점차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그래. 네 오만은 끝도 모르고 더욱 커져 버렸군."
그럼에도 비탈리아누스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내 과오를 바로잡고자 나름대로 노력했다네. 흑아라는 이름이 들려오는 곳이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갔지. 하지만 번번이 실패."
부딪치는 힘이 점점 커져 간다.
"그러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나. 이번에야말로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인 것을."
정말로 기분 좋다는 듯 입가에 지은 미소를 키워가는 비탈리아누스.
그와 반대로 아타올프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다.
"못 보던 새 오만함이 도를 넘어섰군."
"나의 실수를 내가 바로잡겠다는 것이 오만이라면, 자네의 말이 맞겠지."
검성을 뒤흔들기 위해 왔던 아타올프는 외려 그 말에 흔들리며 계획 이상으로 힘을 끌어올렸다.
"…그래. 비탈리아누스."
하지만 이내 곧 정신을 차리고 일그러진 표정을 바로 한다. 여유를 되찾는다.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벼락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히오 파블렌코를 납치하겠다는 아이라이츠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말이다.
"네 오만이 어디까지 갈지 지켜보지."
그러니 힘을 거두고 검은 안개가 되어 서서히 물러나는 것이다.
그를 마주하고 있던 검성 또한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지만, 이미 늦었지 않나.
"…마법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 자네의 짓인가."
클클 웃음을 터트리는 아타올프와 반대로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비탈리아누스의 표정.
그리고 아타올프의 괴이한 음색이 안개를 통해 널리 퍼져 나간다.
"구하고 싶다면… 그래. 한시라도 빨리 숲의 중심으로 와라. 그때까지 녀석이 멀쩡할지는 장담 못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안개와 함께 숲의 깊은 곳으로 사라지는 아타올프.
뒤늦게 비탈리아누스가 오러를 더욱 불어넣으며 검을 휘둘렀으나 진작에 물러나기로 마음먹은 아타올프에게 닿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쫓아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이곳은 이미 그의 영역인 탓이었다.
"마헬 경!"
기사 몇몇이 허망하게 서 있는 비탈리아누스를 향해 외쳤다.
"적들이 물러납니다!"
아타올프가 물러남과 동시에 상대하고 흑아의 있던 모든 병력이 함께 등을 돌린 것이다.
그 뒤에서 검을 휘두르든 말든 전혀 상관없다는 듯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는 놈들.
비탈리아누스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단호하게 명령한다.
"쫓지 마라."
전쟁 중에 저렇게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것은 적의 처지에서 보자면 최악의 선택이고 아군으로서는 최고의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이런 난투 중에 갑작스레 뒤돌아 도망가는 적은 너무도 손쉬운 사냥감. 이대로 쫓아가기만 한다면 대승을 거둘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전투의 흥분에 잠식당한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적들의 뒤를 쫓아가려 했으니.
"모두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허나 그것이야말로 아타올프가 노리는 것이지 않겠는가.
바알 숲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눈앞의 승리가 아니라 언제나 곁에 있는 안개인 것이다.
"그런데 마헬 경. 정말로 수호 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심각하게 말하는 기사.
그에 비탈리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큰일이로군."
큰일이라는 말과 달리 그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 깃들어 있었으니.
마법사가 납치당한 것은 사고가 아닌, 작전인 까닭이었다.
비탈리아누스는 믿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큰일이야."
자신의 뒤를 이을 새로운 희망의 상징을.
몸이 의지를 따르지 않는 느낌. 정신이 장악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더러운 느낌이다.
물론 지배당한 와중에는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직 황홀감만이 존재할 뿐.
그럼에도 히오는 기분 나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특성, '간지 없이는 못 살아!' 덕에 최소한의 이성은 유지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허나 그렇기에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자꾸만 은밀하게 파고드는 저 유혹을 계속해서 견뎌 내야 한다.
그 말인즉.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301 / 1000)]
쉼 없이 인내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바알 숲의 중심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면 회색의 성 한 채가 불쑥 나타난다.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성.
옆에 자리한 호수가 조용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썩 괜찮은 풍경을 자아내지만, 너무 짙은 안개가 그러한 분위기를 해치는, 그런 곳이었다.
히오의 손을 잡고 성으로 들어가며 아이라이츠는 밝게 웃는다.
"어서 와. 여기가 우리 신혼집이야."
신혼집이라기에는 음침한 분위기.
사방에 자욱한 안개와 적막감. 우중충한 회색의 성.
하지만 그런 것쯤이야 상관없다는 듯 아이라이츠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히오의 손을 잡고 이쪽저쪽 둘러보기 시작한다.
"여기가 로비, 저쪽이 주방이고 계단으로 올라가면 우리 신혼방!"
성 내의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는데 정작 주방은 반대편에 있었고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찾지 못해 허둥대는 게 보였다.
"사실 나도 여기까지는 처음 와 봐.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아타올프가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장소잖아?"
원래 뒤가 구린 놈들은 자신의 위치를 숨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대륙 최악의 범죄 집단이 아닌가.
그런데도 아이라이츠가 바알 숲의 성에 드나들 수 있다는 건 둘 중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이라이츠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생각 이상으로 그녀를 신뢰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런 것 따위 무시할 만큼 현 상황을 위기라 판단했거나.
뭐가 됐든 호재임은 틀림이 없었다.
본래 이토록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신혼방!"
아이라이츠에게 이끌려 빈방으로 자연스레 들어가는 히오.
"…이제 슬슬… 스킬을 풀어라. 아이라이츠."
일부러 매혹에 걸린 채 최소한의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그냥 마음 편히 매혹에 걸려 아이라이츠의 노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끓었으니.
"그건 안 돼. 히오."
하지만 아이라이츠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곧 아타올프가 올 거야."
히오에게 몸을 밀착하며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부드럽다.
당장에라도 이성을 놓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매혹에 완전히 걸린 척 연기해야지? 아타올프가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내게 사랑한다 말해야 할 거야."
"자, 연습해 볼까? 사랑해!"
눈앞에서 여우처럼 웃는 눈웃음. 코끝을 간질거리는 달콤한 향기.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312 / 1000)]
그럼에도 가까스로 인내한다.
이런 소꿉놀이나 하자고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매혹에 걸린 척 연기해야 한다는 말은 동의했기에 히오는 아이라이츠의 말에 따랐다.
"…나도 사랑해."
그 말에 지그시 눈을 감는 아이라이츠.
단어를 음미하듯 한동안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아이라이츠가 다시 눈을 뜨고 히오의 몸을 끌어안는다.
"이번엔 이름까지 넣어서. 사랑해 아이라이츠라고 해 줘."
"그만하지. 아타올프가 온 것도 아닌데...."
그때, 불현듯 들이닥치는 검은 안개.
성내를 가득 채우는 그 안개의 정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기에.
"사랑해 아이라이츠...!"
히오는 품에 안긴 아이라이츠를 꽉 끌어안는다.
검은 안개가 점차 사람의 형상을 갖춰 나가고.
그러거나 말거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깊숙한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라이츠.
"응! 나두 사랑해!"
…나름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318 / 1000)]
"내 집에서 헛짓거리하지 마라 아이라이츠."
아타올프의 기괴한 목소리가 작은 회색의 성안을 가득 울린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소리만으로도 위축되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겠으나… 그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아이라이츠였다.
속된 말로 미친년이라는 말이다.
"헛짓? 네 눈에는 내가 헛짓거리하는 걸로 보이니?"
"그럼 그게 헛짓이 아니면 무어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숭고한 과정이지."
"그러니 그게 헛짓이라는 말이다."
그쯤에서야 아이라이츠는 히오를 안고 있던 손을 떼고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입가에 가득했던 미소는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버린 후였다.
"내 조건은 히오 파블렌코 하나뿐이었을 텐데 이것마저 못 봐주겠다면 네가 나가렴. 아타올프. 아니면 내가 나갈까? 바깥에 애들 전부 데리고?"
바알 숲 병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아이라이츠 산하의 범죄 집단이다.
하나같이 매혹에 걸린 채 완벽한 통제하에 있으니 그녀가 빠진다면 병력에 큰 공백이 생긴다는 말이었고.
그것을 알기에 아타올프는 한동안 아이라이츠를 노려보다가.
"쯧."
혀를 차고는 돌아선다.
"매혹은 확실히 먹힌 것이겠지."
"그럼. 보여 줄까?"
"됐다. 못 봐주겠으니까."
그렇게 뒤돌아 걸어가는 아타올프.
그 모습을 끝까지 확인하지도 않고 아이라이츠는 재차 히오의 품으로 파고든다.
"이상한 사람이었어!"
그에 히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라이츠를 끌어안는다.
"그러게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걸어가는 아타올프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화를 삭이는 게 느껴졌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지금 아이라이츠의 유일한 요구 조건.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아주 사랑스러운 정혼자인데 말이다.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아타올프, 아이라이츠와 함께 하는 기묘한 신혼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78화 악당 (4)
게임의 후반부.
절망이 짙게 드리운 세상에는 좋은 소식이랄 게 거의 없다.
그나마 몇 가지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좋지 않은 소식이 수십 배로 늘어나 보복하듯 쏟아지는 것이었다.
가령,
- 화염의 지배자가 이메니아에 나타난 어비스 몬스터를 전멸시켰다더라.
그런 소식이 전해지는 날이면.
- 왕국 피어리어가 멸망했다네. 그들이 수호하던 천년 얼음은 부서지고 새하얀 눈 위로 새빨간 피가 흩뿌려져 붉게 물들었다는군.
- 상업 왕국 아카이아에서도 더 이상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그들이 자랑하던 황금의 탑도 소용이 없었던 게지.
어김없이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다.
희망을 가지는 모습조차 보기 싫다는 듯이.
허나 딱 한 번.
수많은 나쁜 소식과 소문이 휘몰아치는 나날 속에서 단 하루.
온갖 번잡한 이야기가 가라앉은 날이 있었다.
모두가 침묵하며 고개를 떨군 날이 있었다.
- 검성 비탈리아누스 마헬. 위대한 검의 별이 스러졌다.
이보다 더 나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은 이상에야. 다른 말들 따위를 떠들 여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세상이 이 모양이 된 이후로 늘 모든 전장의 선봉에서 굳건히 버티던 찬란한 별.
황제마저 백성을 등졌을 때 포기하지 않고 금빛의 오러를 피워 올리던 위대한 영웅.
그런 영웅마저 죽어 버렸다.
이제 실감이 나는 것이다.
아, 희망은 없구나.
희망의 상징, 정신적 버팀목이 무너진 상황에서 멸망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당시 지존천마였던 히오가 검은 안개를 찾아간 것은 그런 소문이 퍼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어느 순간부터 잠잠해진 흑아를 찾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검성의 마지막 부탁. 위대한 영웅의 마지막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 바빴던 시기에 굳이 아타올프를 찾지 않았으리라.
바알 숲의 안개를 헤치고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마인을 사냥하며 그렇게 도착한 숲의 중앙. 작은 회색의 성.
아타올프는 그런 성의 꼭대기에 있었다.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한 눈으로 말이다.
대단한 이야기가 오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몇 마디.
비탈리아누스가 자신의 친구에게 전하고자 했던 몇 마디를 전했고 아타올프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그리 웃다가 다시 하는 말은 당시의 지존천마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미 검성에게 전해 들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 말하니 아타올프는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서글프게 들리는 웃음이었다.
그러더니 한쪽 구석에서 낡은 검 하나를 꺼내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본다.
관리되지 않아 곳곳에 녹이 슬었지만, 본래는 썩 괜찮았을 검.
- 그거 알고 있나. 이 낡아 빠진 검에 아티팩트를 박아 넣었다네. 바알 숲에 만연한 안개의 비밀이지.
제법 커다란 비밀이었음에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런 지존천마의 반응에 아타올프는 클클 웃음 짓고는 낡은 검을 거꾸로 쥔다.
검 끝으로 자신의 심장을 겨눈다.
- 그렇다면 이것도 알고 있나.
대륙을 피로 물들였던 공포의 상징.
최악이자 최강이었던 희대의 악당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기억에 제법 오랫동안 남는 것이었으니.
- 사실 나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네.
그렇게 세상에는 다시 소문이 퍼진다.
화염의 지배자가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를 죽였다는, 사실과는 조금 다른 소문이 말이다.
대륙 최악의 악당이 드디어 죽었다.
하지만 기뻐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희망이 죽어 버린 탓이었다.
* * *
대륙 최악의 범죄 집단, 흑아의 수장 아타올프.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조직을 거느린 아이라이츠.
이 두 악당과 함께하는 신혼 생활을 요약하자면, 개판이었다.
"사랑해!"
품에 파고들며 뺨에 입을 맞추는 아이라이츠.
그 보드라운 촉감과 달콤한 향기에 욕망이 치솟는다.
허나 그것에 함락당해서야 영영 끝이었다. 지독한 안개가 어서 걷히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비탈리아누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
자신이 매혹에 완전히 걸려드는 순간, 아이라이츠가 어떻게 나올지는 쉬이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356 / 1000)]
솟구치는 욕망을 억누르고 인내하며 겉으로는 사랑에 빠진 연기를 계속해 나가야만 했다.
"나도 사랑해. 아이라이츠."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아이라이츠가 딱히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뭐, 사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당장은 그저 이 정도로 만족한다는 듯 종일 사랑해 소리만 듣고 있는 것이다.
"그 같잖은 짓거리 좀 안 보이는 데서 할 수 없나. 휴식에 상당히 방해되는데."
표정을 구기며 나지막이 말하는 아타올프.
허나 아이라이츠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뭐야. 네가 다른 곳으로 가. 너야말로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데 방해되잖아."
"…짜증나게 하는군."
결국 자리를 비키는 건 아타올프였다.
사랑을 나눈다니… 말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매혹에 걸린 것에 대해 의심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그치 히오?"
"…맞아. 뭐 저딴 놈이 있나 몰라."
"헤헤.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그렇게 한동안 염병을 떨고 있으면 아타올프는 검은 안개가 되어 성을 벗어나 버린다.
눈꼴 시려워서 가 버리는 것은 아니고 천천히 진군하고 있는 제국군과 검성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아티팩트를 찾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사랑해!"
"…빨리 풀어."
"쳇."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이라이츠는 스킬을 풀고 아티팩트를 찾는 일에 순순히 협조했다.
뭐, 특성의 효과를 키우고 캔슬레이션을 활용한다면 스스로 매혹을 해제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정신의 대부분을 허락한 상태에서 마법을 발현하고 정신 방벽을 새로이 세운다는 것은 대단한 심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으니.
시간도 제법 오래 잡아먹을 터였다.
"빨리 찾아야 해. 금방 돌아올 거야."
다급하게 움직이는 히오와는 달리 실실 웃으며 여유롭게 움직이는 아이라이츠.
"응. 그래야지."
그런 것까지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예측하기 힘든 저 성격에 협조하고 있는 게 어디인가.
"낡은 검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봐."
게임 속에서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아타올프가 그 낡은 검을 이미 곁에 두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 많은 것이 다르니 직접 찾아야 하는 것이다.
넓은 바알 숲 전체를 뒤덮는 안개.
그것도 보통 안개가 아니라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인지와 방향 감각을 상실케 하는 안개.
그 정도의 효과를 내는 아티팩트인 만큼, 강한 마력의 흔적이 있을 터였고 그렇기에 쉽게 추적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단순 마력이 아니라 아타올프의 힘 또한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순전히 아티팩트의 힘만으로 유지되는 안개였다면 이리 힘들게 일을 벌일 필요도 없었으리라.
두 번째로는 성 내에 아티팩트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었다.
수십 년이 넘는 세월을 공포의 상징으로 군림해 온 흑아. 그동안 얻은 막대한 재화와 보물, 아티팩트가 성에 쌓여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곳을 뒤져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으나 히오는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아티팩트가 쌓인 방을 지나쳤다.
자신의 직감에 의거한 행동이었다.
아타올프는 자신의 낡은 검을 저곳에 놔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직감.
그리고 마력을 되짚어가기 힘든 세 번째 이유는.
"…여기, 마법사의 집이었군."
이 작은 회색 성이 마법사의 집인 까닭이었다.
"정말이지 온 세상에 마법사의 집이 있었네. 이런 숲 한가운데까지 말이야."
- 흐흐흐. 우리 마법사가 세상을 다스리던 시절이 아닌가. 당연한 일이지.
히오의 혼잣말에 아이라이츠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응? 마법사의 집?"
"…아니다. 신경 쓰지 말고 검이 있을 만한 곳이나 얼른 찾아."
그리 재촉했지만, 안타깝게도 주어진 시간은 끝이었다.
아타올프가 돌아온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아이라이츠에게서 매혹이 발동된다.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가 발동됩니다」
특성이 바로 벽을 세우고, 그 벽을 뒤로 물려 매혹이 자리할 공간을 내어 주면 재차 욕망이 정신을 장악해 간다.
그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한창 좋았는데."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아타올프를 노려보는 아이라이츠.
아타올프의 손짓 한 번이면 죽을 정도로 본체는 약할 텐데도 개의치 않는 저 담대함이 신기할 지경이다.
"시끄럽다."
익숙하게 아이라이츠를 지나쳐 가는 아타올프.
이번에도 딱히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럼 우리도 방에 들어가서 하던 거 마저 할까?"
자연스레 달라붙어 오는 아이라이츠를 감싸며 히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응. 사랑해!"
"나도 사랑해. 아이라이츠."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373 / 1000)]
유혹에 넘어가고픈, 끓어오르는 욕망을 꾹꾹 눌러 담으며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
* * *
그런 과정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타올프는 성을 나섰고 히오와 아이라이츠는 그 틈에 성내를 수색한다.
하지만 아타올프가 나가 있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애초에 군의 진격을 늦추고 검성의 힘을 깎으며 자신이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렇게 짧은 시간을 이용해 계속 찾아봤음에도 대체 어디에 놔둔 것인지 통 보이지가 않았다.
"남은 건 아티팩트가 쌓인 창고인데...."
"거긴 좀 위험하지 않겠어?"
"그게 문제지."
한창 돌아다닐 때 아타올프가 돌아와도 문제 되지 않았던 것은 다른 방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티팩트가 쌓인 일종의 창고는 다르지 않은가. 각종 보물과 재화, 아티팩트가 가득 있으니 수색도 오래 걸릴 뿐더러 근처에 있을 때 아타올프가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 저의를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씁… 그것도 그렇고 거긴 아닐 것 같은데 말이야."
느낌이란 게 있다.
비록 게임 속이었지만. 모니터 화면 너머로 본 게 전부였지만, 지금에서야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음을 알지 않는가.
아타올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의 그 느낌. 그 공허한 분위기.
그는 무엇을 원했던가.
그는 어찌하여 희대의 악당이 되어 버렸던가.
수십 년 전에 사용하던 낡은 검을 여태 가지고 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어떤 심정으로 검을 거꾸로 쥐고 스스로 심장을 찌른 것이었나.
혹, 아타올프는.
대륙 최강이자 최악의 악당, 아타올프는.
"누군가 자신을 멈춰 주길 바랐을지도."
돌아갈 수 없는, 이제는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을 누군가 멈춰 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따라와 봐."
번뜩 떠오른 생각에 히오는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으로 향한다.
계단을 성큼 뛰어넘어 올라가고 몇 층 더 올라가면 첨탑의 꼭대기로 향하는 좁은 계단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마저 오르고 나면 성의 가장 높은 꼭대기가 드러난다.
짙은 안개만 아니었다면 사방이 훤히 보였을 전망 좋은 곳.
그리고 사방에서 볼 수 있었을, 가장 눈에 띄는 곳.
"여기였구나."
어쩐지 익숙한 방의 구조. 게임 속, 아타올프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곳이 이곳이었다.
그대로 창문으로 향해 고개를 내밀어 위를 쳐다보니.
"역시."
보이는 것이다.
지붕에 꽂혀 있는 낡디 낡은 검이.
그 손잡이에 박혀 있는 흑요석과도 같은 아티팩트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찾았어."
히오는 망설임 없이 바깥으로 나서려 했다.
팬텀 스티드를 소환하고, 영체화하여 그곳에 있는 아티팩트를 손에 쥐면 끝이었으니까.
허나 그런 생각에 너무 몰입했음인가.
"…응. 찾았구나."
아니면 여태 순순히 협조하던 아이라이츠를 조금 믿어 버린 것일까.
"히오 파블렌코."
부르는 목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고.
"이리 와."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끈적이는 선홍빛.
여태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짙은 선홍색의 향연.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가 발동됩니다」
정신 방벽을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오는 그 기운에는 얼핏 의념과도 비슷한 것까지 느껴졌으니.
"내 옆으로 와서,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아득한 선홍빛 사이에서 얼핏 보이는 아이라이츠의 모습.
그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린 채였다.
히오를 마주한 후로 항시 걸려 있던 밝은 미소가 아닌.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423 / 1000)]
어쩐지 조금 씁쓸한 미소.
79화 악당 (5)
충족이 있다는 것은 결핍이 있다는 것이다.
결핍이 없다는 말은 충족 또한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삶이란, 밑 빠진 결핍에 충족을 들이붓는 과정의 반복이 아니겠는가.
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충족을 찾아 헤매는 것은, 어쩌면 삶의 본질이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기에 소녀는 항상 궁금했다.
사랑이란 뭘까.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부모조차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자신 역시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애초에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어찌 사랑할 수 있을까.
어찌 사랑받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소녀는 항상 궁금했다.
사랑이란 뭘까.
길을 걷다 보면 들려오는 것은 하나같이 사랑을 담은 노래였다.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원망하고, 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래.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보이는 것은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평생을 함께하는 가족과 연인들.
TV를 틀면 나오는 것은 언제나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랑 때문에 울고,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이야기.
사랑을 찾아 나온 남자와 여자.
사랑하면서 겪은 이야기. 재밌어하는 사람들.
온 세상이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며 사랑을 나눈다.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했고 사랑하지 못했던 소녀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세상 모든 것에 사랑이 스며들어 있는 것일까.
그것은 평생을 따라다닐 의문임과 동시에 해결해야 할 결핍이었으니.
소녀는 충족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그것이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결핍일지라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일지라도.
"사랑해."
외려 그렇기에 끝없이 갈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 *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441 / 1000)]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단순한 스킬을 넘어선, 무엇인지 모를 강한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지는 선홍빛의 기운.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가 발동 중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최소한의 이성은 간신히 지켜낼 수 있었다.
이전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좁고 미약한 정신.
작디작은 울타리.
그리고 그 나머지를 차지하는 것은 오로지 아이라이츠를 향한 사랑.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맹목적인 마음.
너무도 거대한 그 마음에 대항하는 이성은 무척이나 작은 것이었으니.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479 / 1000)]
정신이 몽롱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무릎 위에는 아이라이츠가 머리를 기댄 채 누워 있었다.
"사랑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자 배시시 웃는 아이라이츠.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 느껴졌기에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마는 것이다.
"사랑해 아이라이츠."
그런 감정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들이닥치는 선홍빛 감정에 비해 이성이 차지한 공간은 너무도 좁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단단했다.
똘똘 뭉친 채 조금씩이나마 영역을 넓히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전진은 무척이나 더디고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안아 줘."
해맑게 웃으며 팔을 벌리기에 마주 웃으며 꼬옥 안아 주었다.
전해져 오는 온기와 기분 좋은 미소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느낌이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500 / 1000)]
빠르게 솟구치는 인내력은 무시한다.
무엇을 인내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쯧."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들어오는 아타올프.
그 모습에 문득 화가 난다.
우리의 숭고한 사랑을 저리도 무시하는 태도라니.
참기 힘든 것이었다.
"응. 괜찮아 히오. 우리만 서로 사랑하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그런 아이라이츠의 말에 애써 화를 억누르고 다시 한 번 그녀를 꽉 안았다.
역시 아이라이츠. 착하기도 하지.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을 잡기가 쉽지 않다.
몽롱한 정신. 한 줄기 이성을 부여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탓이었다.
"밖에 나갈까?"
그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바깥을 향한다.
회색 성벽을 낀 채 바깥을 걷는데 마주 잡은 손이 따뜻해서 문득 웃음이 나오는 게 아닌가.
그래서 웃으니 아이라이츠도 따라 웃는다.
손을 더욱 단단히 붙잡고 계속 걷고 있자니 마치 벚꽃이 만개한 길을 둘이 걷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주변에는 벚꽃 대신 짙은 안개만이 자욱할 뿐이었다.
* * *
조금이지만, 정신 방벽의 범위가 넓어진 듯했다. 본능적으로 이성만 간신히 보호하던 수준에서 아주 흐릿하지만,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 정도.
"히오."
"응?"
"나 사랑해?"
"그럼. 당연하지."
물론 미미한 수준이다. 몸과 마음을 장악한 매혹은 강력했으며 마음속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아이라이츠였다.
"안아 줘."
이제 품에 안겨 드는 것도 제법 자연스럽다.
"음. 이제 조금 이해 가는 것 같기도 해. 사람들이 왜 저렇게 못 껴안아서 난리일까 궁금했는데 말이야."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품으로 더욱 깊게 파고드는 아이라이츠.
절로 생겨나는 미소와 함께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잠에 드는 것이다.
"잘자. 아이라이츠."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582 / 1000)]
* * *
분명 뭔가 중요한 일을 해야 했던 것 같은데 영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도 그건데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낯선 느낌이다.
"무슨 생각해?"
웃으며 불쑥 얼굴을 내미는 아이라이츠.
"그냥… 뭔가 잊고 있었던 것 같아서."
"신경 쓰지 마. 우리는 우리만 생각하면 되는 거야. 히오."
뺨을 감싸는 아이라이츠의 손길에 결국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그렇지?"
그 손 위에 손을 덮으니 아이라이츠는 행복하게 미소 지었고.
그에 히오 역시 행복하다는 듯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그러한 일상이 반복되던 중, 변화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이제 너랑 그 마법사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라."
언제 들어도 거북한 목소리로 아타올프가 말한 것이다. 사실상 통보나 다름없었다.
"제국군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지금이 적기야. 아이라이츠, 네가 그 마법사를 데리고 제국군을 상대해라. 녀석이라면 손쉽게 쓸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비탈리아누스는 내가 맡고 있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뭐?"
하지만 아이라이츠는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다는 듯 아타올프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히오를 전투에 동원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동원하지 않는다는 말 또한 하지 않았지."
"아무튼, 안 돼. 우린 바쁘단 말이야."
"느린 속도긴 하지만, 언젠가는 여기까지 들이닥칠 거다. 그럼 너 역시 죽는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말하는 거냐. 아이라이츠."
"그것도 뭐, 나쁘지는 않겠네."
말이 통하지 않자, 아타올프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풀풀 날리기 시작한다.
"그럼 여기서 내 손에 죽을 테냐."
"내가 죽고 나면, 뒤는 감당할 수 있고?"
그런 말에도 아타올프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도 이제는 아이라이츠의 협조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안개 속에서 내 몸 하나 빼내지 못할까.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저 히오 파블렌코를 미끼로 나는 몸을 빼내면 그만이다."
한 걸음씩 다가오는 아타올프.
그의 몸에서 나온 안개가 아이라이츠를 압박해 들어간다.
물론 아이라이츠의 입장에서는 그따위 압박보다 그 뒤에 나온 말이 더욱 문제였으니.
"그리고 떠나기 전에, 히오 파블렌코는 내가 반드시 죽이도록 하지."
아이라이츠는 대답 없이 서 있다가 돌연 뒤돌아서서 히오의 품에 포옥 안기는 것이다.
고개는 아래로 떨구고 시선은 바닥을 향하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것이었다.
"진짜 못되게 말한다. 그치 히오."
"…그러게."
"역시 흑아의 수장. 최악의 악당다운 협박이지 않아? 어떻게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할 수가 있지?"
"그러게."
"…나 사랑해?"
"응. 사랑하지."
그 대답에 아이라이츠는 히오의 몸을 더욱 꽉 끌어안는다. 다만 고개는 더욱 아래로 숙여졌다.
그 상태로 잠깐의 침묵 후에 어렵사리 내뱉는 말.
"…언제부터였어?"
덤덤하게 답하는 히오.
"얼마 안 됐어."
"응. 그렇구나."
그런 대화에 아타올프는 슬슬 짜증이 솟구친다.
적당히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놀음이라니.
정말이지 같잖지 않은가.
허나 그 뒤로 이어지는 대화는 다소 의아한 것들이었다.
"그럼 바로 움직이지 왜 가만히 있었어?"
여전히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 묻는 아이라이츠.
그리고 다소 엉뚱한 히오의 대답.
"너 죽을 거야."
그쯤에서 아타올프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허나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을 택한 것은, 어차피 저 두 사람은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한 행동이었고.
또 아쉬웠기 때문이다.
히오 파블렌코가 매혹에 걸린 채 말을 충실히 듣는다면 이 불리한 전쟁에서도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의 예감이 틀리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지켜보는 것이었다.
"있잖아."
그리고 아이라이츠는 비로소 히오의 품에서 벗어난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히오를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하는 거, 사랑 맞지?"
히오는 대답 대신 그런 아이라이츠의 눈을 마주했다.
"아니야. 대답 안 해도 돼. 나도 이제 알 것 같거든."
히오에게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몸을 돌리는 아이라이츠.
"이거 사랑 맞아."
그 몸에서 선홍빛 기운이 짙게 뿜어져 나온다.
"쯧."
그에 아타올프는 혀를 차고는 히오를 바라본다.
"매혹에 걸리지 않았구나. 히오 파블렌코. 아니, 걸렸다가 스스로 풀고 나온 것인가."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아쉽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녀석을 미끼로 삼아 몸을 빼내는 수밖에.
그렇게 아타올프가 손을 쓰려 했건만.
「스킬 - '뇌제(雷帝)'가 발동됩니다」
그보다 히오가 한발 먼저 움직였다.
성 내에 갑작스레 번뜩이는 벼락.
그럼에도 아타올프는 가소롭다는 듯 손을 뻗는다.
"네 벼락은 내게 닿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벼락은 아타올프를 향한 것이 아니었으니.
꽈아앙-!
그대로 창문을 통해 밖으로 솟구쳐 나가 버린 히오 파블렌코.
이것은 첫 번째 변수였다.
"허."
설마 도망칠 줄은 예상 못 하긴 했으나 달라질 건 없었다. 일대는 이미 아타올프 강한 힘이 담긴 그의 영역인 까닭이었다.
녀석은 의념을 다루지 못하니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이 영역 안에서 히오 파블렌코는 순식간에 제압당할 것이 분명했다.
허나 그 짧은 순간에 두 번째 변수가 발생했으니.
가히 검은 안개에 비견될 만한 짙은 선홍빛이 그 존재감을 과시하며 아타올프에게 짓쳐들어 오는 것이었다.
"결국 멍청한 선택을 하는구나. 아이라이츠."
물론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아타올프의 시선이 아이라이츠를 훑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검은 안개가 진한 선홍색을 잡아먹으며 그대로 아이라이츠의 몸까지 꿰뚫어 버리는 것은.
그렇게나 쉽고, 간단했으며 허망한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아이라이츠의 능력으로는 목숨을 건다고 한들 그저 아타올프의 시선 한 번 받는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이는 분명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다.
허나 그 찰나면 또 충분한 것이기도 했다.
한 줄기 벼락이 높은 첨탑 지붕의 낡은 검에 도달하는 것은.
딱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변수.
퍼석-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
분명 작은 소리였음에도 모두의 귀에 똑똑하게 들린 그 소리와 동시에.
"...!"
안개가 걷힌다.
드넓은 바알 숲을 오랫동안 장악하던 안개가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추고, 드러나는 광경은 장엄하다.
끝없이 펼쳐진 군대의 행렬.
바알 숲 전체를 포위하고 있는 그 은색의 물결. 수없이 많은 깃발.
그것을 상대해야 하는 흑아의 병력은 몹시도 초라한 것이었으니.
안개가 걷히고 나자 비로소 그 압도적인 전력 차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너무 오래 걸렸지 않은가."
황금빛 눈동자가 정확히 회색 성, 그 안에 있는 아타올프를 직시한다.
사자를 닮은 금색의 눈이었다.
"…비탈리아누스."
더없이 먼 거리였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여전히 자네는 찾기가 힘들어. 아타올프."
더 이상 아낄 필요가 없다는 듯, 하늘 높이 솟구치는 황금빛 오러.
수십 년간 희망을 상징해 온 영웅의 힘.
아타올프는 곧바로 남은 모든 안개의 힘을 끌어모은다.
결국 달라질 건 없었다.
검성, 비탈리아누스만 잡으면 모든 게 해결될 터.
이전처럼 광범위하게 일을 벌일 필요도 없었으니 모든 힘을 작게 압축하여 모으는 것이었다.
꾸물대며 아타올프에게 모여드는 검은 안개.
수십 년간 공포로서 군림해 온 악당의 힘.
비탈리아누스는 검을 치켜들고 공간을 격하며 날아든다.
그에 아타올프는 압축된 검은 안개를 손에 쥔다. 압축되고 압축된 막대한 힘.
그 막대한 힘이 압축된 모양은 제법 익숙한 것이다.
낡은 검의 모양과도 흡사한 흑빛의 검.
마치 한 사람만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은 안개의 검.
"아타올프."
순식간에 코앞까지 날아든 비탈리아누스가 황금빛 검을 세로로 내려찍는다.
그에 질세라 흑빛의 검을 있는 힘껏 들어 올려 막는 아타올프.
황금빛 검과 흑빛의 검의 충돌.
"이제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네."
두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의외로 맑은 것이었다.
80화 악당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