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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별 예선(1) >

-내가? 방금?

-네, 감정을 전달하는 건 표의 언어뿐입니다.

-표의 언어가 그렇게 쉬운 거야?

-아뇨, 단순한 감정 전달이라 가능하셨던 거죠. 복잡한 개념을 담으려면 힘들어집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해석하기 까다롭고요. 아무튼 서문엽 님이 표의 언어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큰 성과로군요.

-표의 언어라··· 시각적 이미지를 오러에 담는 것도 힘든데 그런 건 또 무슨 수로 하냐. 됐다 그래.

일단은 상형 언어에 집중하기로 했다.

영체로 변신한 상태에서는 쉽사리 상형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 요령을 잘 기억했다가 영체를 해제한 뒤에 다시 시도해 보았다.

그렇게 수련을 반복하니, 상형 언어는 금방 해낼 수 있었다.

-자, 이건 어때?

서문엽이 오러에 소리와 시각적 이미지를 담아 '하인'에게 보냈다.

자신이 서문엽에게 폭행당하는 이미지를 받은 '하인'은 기겁했다.

-왜 또 폭력적인 이미지인가요?!

-그냥, 그게 재미있잖아.

-역시 악명 높은··· 아무튼 이제 오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능숙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표의 언어가 남았지만 그건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게 아니고, 굳이 필요하실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냐?

-물론 좋죠. 더 짧은 시간 내에 구체적인 개념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표의 언어는 머릿속의 생각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기 때문에, 뜻이 와전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긴 굳이 필요하진 않지.'

하인에게 오러를 배운 것은 어디까지나 오러를 수련하기 위해서였다.

표음, 상형 언어를 마스터한 덕에 전투 시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좋겠지만, 표의 언어는 지저인이 아닌 서문엽이 굳이 매달려야 할 부분은 아니었다.

'그래, 오러 수련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

표의 언어도 오러 수련 용도로 도움이 될 것 같긴 했지만, 상형 언어도 어려웠는데 표의 언어는 지나치게 힘들 것 같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서문엽은 그렇게 '하인'을 떠나보냈다.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94/95

-민첩성 98/99

-속도 95/96

-지구력 97/98

-정신력 110/111

-기술 105/106

-오러 110/111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영혼 연성.

놀라운 성과였다. 오러가 무려 110에 이르렀다.

'오러 컨트롤이 더 능숙해졌기 때문에 오러 수치가 올라갔다. 이제 이 오러 컨트롤을 어떻게 실전에 적용시킬지 생각해 보자.'

홀로 남은 서문엽은 얼마 전부터 떠올렸던 것을 궁리해 보기로 했다.

'지저인들은 오러의 특성을 다양하게 변화시켜서 적에게 쏘아 보내는 방식을 주로 쓰지. 하지만 그런 건 내가 흉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러 낭비다.'

서문엽은 오러 컨트롤을 무기에 적용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좋은 아이디어를 얻은 참이었다.

'소리와 시각적 이미지를 오러에 담을 수 있다. 그 오러를 창에 싣는 것은 더 쉽지.'

아이디어는 바로 이러했다.

창을 통해 소리와 시각적 이미지를 적에게 전달해 감각을 교란시키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창이 날아오는 방향을 다르게 알려주면 적이 순간적으로 속을 수 있는 것. 짧은 순간만 속여도 실전에서는 치명적이다.

'한 번 시험해 보고 싶다.'

서문엽은 일단 클럽하우스로 돌아갔다.

늦은 저녁 무렵이라 접속 모듈이 있는 훈련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불은 켜져 있었고, 실행되고 있는 접속 모듈이 1대 있었다.

'응? 누구지?'

던전 내부 현황을 보여주는 대형 스크린 전원을 켰다.

열심히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신수경이 보였다.

서문엽은 흐뭇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쌍둥이 동생 놈이 데뷔전을 치렀다지?'

천재로 주목 받은 신태경이 얼마 전에 KB-1 리그에서 데뷔했다.

신태경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KB-1 리그 클럽인 서울 BC와 계약을 했다. 해외 진출을 할 수도 있었는데 의외의 선택이라고 언론에서는 이상하게 여겼다.

물론 서문엽은 신태경이 현명하다고 여겼지만 말이다.

'그 녀석, 아무래도 내가 영입 안 한다고 못 박으니까 불안해서 안전한 선택을 한 모양이지.'

서문엽은 분석안으로 신태경의 능력치가 이미 거의 다 개발되어서 더 성장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KB-1에서는 충분히 먹히지만 해외의 상위 리그로 가면 벤치에 앉아 있다가 임대나 다닐 터였다.

신태경은 내심 YSM을 원했는데, 안목 정확하기로 유명한 서문엽이 영입 안 한다고 못 박자 내심 스스로의 가능성에 불안함을 느꼈던 듯했다.

YSM이 아무리 작은 구단이라지만 개리 윌리엄스나 파울 콜린스 같은 선수도 영입할 정도로 자금 사정은 괜찮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재능의 한계야 어쨌든 국내 무대에서는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선수였다. 얼마 전에 서울 BC의 서브 탱커로 출전하여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신수경이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줄곧 동생의 그늘에 가려졌으니 더더욱 넘어서고 싶은 마음이 있으리라.

-대상: 신수경(인간)

-근력 70/85

-민첩성 71/95

-속도 70/86

-지구력 65/70

-정신력 82/87

-기술 70/86

-오러 80/80

-리더십 25/25

-전술 40/78

-초능력: 위압

피지컬이 전체적으로 많이 올랐다.

이제 막 프로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피지컬은 YSM의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빨리 성장할 수 있는 시기였다.

놀라운 것은 64에서 70으로 껑충 오른 기술!

아직 입단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엄청난 성장이었다. 휴식기를 반납하고 서문엽에게 코칭받은 덕이었다.

'벌써 국내 리그에서 통할 수준으로 올라왔다. 역시 재능은 거짓말을 안 하지.'

쭉쭉 기량이 올라오는 무서운 성장세에 가브리엘 감독도 매료되어서 국내 리그 경기에 내보내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서문엽은 그럴 때마다 거절했다.

'야심이 그리 큰 애가 아니라서 안 돼.'

국내 리그 경기에 내보내면 그럭저럭 잘해낼 것이다.

동생인 신태경하고도 맞붙을 수 있다. 붙어보고 나면 자신의 동생이 생각보다 별 거 아니었다는 것도 깨달을 터.

그러면 신수경은 바로 만족해 버린다.

동생을 이기고 싶고, 좋은 선수로 인정받고 싶을 뿐, 최고가 되고 싶다는 야심 같은 게 없으니까.

사냥 훈련이 다 끝났는지 신수경은 접속을 끊고 나왔다.

"어? 구단주님!"

"혼자 훈련했어?"

"네.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바로 이거다.

늘 서문엽이나 개리, 사니야 같은 뛰어난 선수들하고만 훈련을 하니 기준이 높지 않은가.

서문엽이 원한 대로였다.

"그래, 아직 프로에 어울리는 실력이 아니지. 네 동생은 벌써 데뷔했던데?"

"네, 서브 탱커지만 주전으로 발탁됐어요. 기량이 더 늘어나면 메인 탱커가 될 것 같대요."

'응, 걔는 영원히 서브 탱커야.'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네 동생도 잘하고 있는데 너도 따라잡으려면 더 열심히 해야지?"

"네! 일부러 비교하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어요."

"흐흐, 알면 됐다."

"근데 구단주님은 여긴 무슨 일이세요? 요즘 집에도 잘 안 돌아가시던데."

"이 몸은 요즘 특별 훈련 중이지."

말 나온 김에 서문엽은 신수경을 실험 대상으로 삼기로 했다.

"내가 요즘 특별히 개발 중인 기술이 있거든. 너 한 번 내 대련 상대나 해줄래?"

"알겠어요."

쾌히 승낙한 신수경은 서문엽과 함께 접속했다.

신수경은 풀 세트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서문엽은 간단하게 창만 한 자루 들고 온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털끝 하나 못 건드린다는 것을 매일 같은 대련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신수경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제가 먼저 공격할까요?"

"아니, 내가 공격할 테니까 막거나 피해봐."

"네."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서문엽은 정신을 집중했다.

창이 머리를 향해 찌르는 시각적 이미지를 오러에 담는다.

그리고 그 오러를 창에 실었다.

"간다?"

"네!"

서문엽이 창을 찔렀다.

창에 실려 있던 시각적 이미지가 오러를 타고 발출되어서 신수경에게 전달됐다.

짧은 순간.

콱!

"악!"

상체를 뒤로 젖혔던 신수경. 그러나 오른쪽 다리를 창에 찔렸다.

"어? 어라?"

신수경은 당해놓고도 어리둥절했다.

"어때?"

"바, 방금 제 머리 쪽으로 창을 찌르지 않으셨어요?"

"아니, 처음부터 다리를 찔렀는데?"

창을 내지른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수경은 서문엽이 보낸 시각적 이미지를 받고서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다시. 재접속해 봐."

"네."

신수경은 접속을 끊었다가 다시 들어왔다. 아바타가 새로 만들어지며 다리에 부상도 사라졌다.

서문엽은 이번에도 시각적 이미지를 창에 실었다.

창이 옆구리를 노리는 이미지를 보내면서, 실제 창은 다리를 찌른다.

푹!

"아야!"

살짝 찔렀음에도 신수경이 기겁했다. 아프기보다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격을 받았기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방금 옆구리를 노리셨잖아요?!"

"아냐, 처음부터 다리를 찔렀어."

"창을 엄청 빨리 연속으로 찌르신 건 아니고요?"

"아닌데. 요 정도 속도로 찔렀는데."

서문엽은 가볍게 찌르기를 몇 번 보여주었다. 다리를 찔렀을 때와 똑같은 스피드로, 누구든 가볍게 피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라? 어떻게 하신 거예요?"

"신기하지?"

"저도 가르쳐 주세요!"

신수경이 눈에 불을 켜고 외쳤다.

서문엽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오러 컨트롤이 아주아주 좋아야 되는 건데, 넌 아마 못할 거야."

곧바로 시무룩해진 신수경이었다.

아무튼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소리도 같이 넣으면 더 잘 속을 텐데. 창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어떻게 만들 수가 없네.'

표음 언어는 기본적으로 성대에서 나는 소리를 오러에 담는 것이므로, 창 찌르는 소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입으로 쉭쉭거리며 흉내 내봤자 오히려 더 어설퍼서 상대가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은가.

'어쨌든 되게 잘 통하네.'

가볍게 찔렀는데도 홀랑 속아 넘어간 신수경을 보니, 다른 선수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오러 컨트롤 연마를 위하여 지저인의 언어를 익혔는데,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창술 테크닉도 덤으로 생겼다.

이것은 배틀필드 경기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테크닉이라 더욱 기대됐다.

'됐어. 이거면 월드컵이든 월드 챔스든 문제없겠다.'

시각적 이미지를 담은 이 페인트는 설령 나단 베르나흐라 해도 속아 넘어갈 터였다.

***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수는 없는 법.

국내 리그 경기에서는 팀 전술과 팀워크에 더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서문엽이 적극적으로 킬 사냥에 나설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새로 익힌 테크닉을 써먹을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아시아 챔피언스리그가 예선 플레이오프가 끝나고, 32강전 조별 예선이 시작된 것이다.

이전 시즌 KB-1 리그 우승을 한 YSM은 시드권을 가진 덕에 예선 플레이오프를 생략하고 바로 32강에 진출했다. 이제야 YSM이 팀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챔스 경기를 치르게 된 것이었다.

YSM이 속한 E조는 중국 팀 하나, 일본 팀 하나, 홍콩 팀 하나가 있었다.

홍콩 팀은 최약체였고, 일본 팀 역시 서문엽이 신경 써야 할 수준은 아니었다.

중국 팀이 그런대로 주목할 만했다.

텐진 타이콴.

중국에서 우승 후보로 항상 꼽히던 강팀으로, 월드 챔스 8강까지도 간 적이 있었다.

현재 베를린 블리츠로 이적한 중국 대표팀 주장 저우린이 본래 텐진 타이콴 소속이었다.

지금은 저우린의 부재로 부진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시아 챔스에서는 주의해야 할 팀이었다.

"텐진 타이콴의 에이스는 리양신입니다. 아시지요?"

가브리엘 감독이 텐진 타이콴에 대해 브리핑하다가 서문엽에게 물었다.

리양신.

너무 인상적인 선수라 서문엽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무협 드라마처럼 '경신술' 쓰던 녀석?"

"예."

중국 대표 팀에서 가장 인상적이던 선수는 슈란, 저우린, 첸진, 리양신 4인이었다.

그중 셋은 베를린 블리츠 BC에 가 있고, 리양신만 중국에 남아 있는 듯했다. 꽤 능력치가 좋은 선수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놈 참 잘 걸렸네.'

서문엽은 씨익 웃었다.

필살의 페인트를 써먹기에 충분한 상대였다.

< 조별 예선(1) > 끝

< 조별 예선(2) >

"우리는 강팀이다."

텐진 타이콴의 진쉰 감독이 경기를 하루 앞두고 선수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월드 챔스 8강에 빛나는 팀이고, 저들은 서문엽과 피에트로 아넬라를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는 팀에 불과하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진쉰 감독도 선수들도 YSM이 만만찮다는 것을 안다.

서문엽과 피에트로를 제외하면?

그 두 사람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전 세계가 안다.

"다행히 희소식이 있다. 중국에 입국한 YSM 선수단 중에 피에트로 아넬라가 없었다고 한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는지 벌써 몇 경기 결장했다더군."

텐진 타이콴의 분위기는 밝았다.

피에트로의 결장은 희소식이었다.

베를린 블리츠와 평가전에서 피에트로가 보여준 무지막지한 마법진 활용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13개의 마법진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철벽의 방어선을 구축해 버린다. 슈란처럼 그 마법진을 몇 겹씩 뚫을 수 있는 초강력 초능력이 없으면 대응이 불가능했다.

그로 인해 피에트로에게 추가적인 페널티가 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생겼지만, 세계 협회는 되도록 페널티를 주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이미 페널티를 2가지나 받은 피에트로에게 추가 제한을 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 피에트로가 없으니 텐진 타이콴도 희망이 생긴 것이다.

"숫자에 장사 없다. 저쪽은 전투 능력이 없는 서포터까지 하나 있으니 실질적으로 11 대 10. 우리는 초반부터 강공으로 다른 선수들부터 처리하고, 마지막에 서문엽을 수적 우위로 찍어 누를 것이다."

진쉰 감독은 던전 지도에 자석을 붙이며 갖가지 초반 전략을 보여주었다.

"혹은 이렇게 서문엽이 사냥 중에 동료들과 떨어져 있을 시, 전력을 집중해서 일찍 제거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듯 서문엽은 반드시 6인 이상의 아군이 협공해서 상대한다."

설명이 이어졌다.

"이렇게 좋은 상황이 과연 나올까 싶을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나온다. 압도적인 실력에 기반한 자신감에, 홀로 싸울 때 더 사냥 속도가 빠르며, 최근 기동성까지 빨라져서 더욱 활동 반경이 높은 서문엽이다. 반드시 단독 행동을 하거나 근처에 아군이 1명밖에 없는 상

황이 나올 것이다."

"옛!"

선수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중국 선수들은 자국의 배틀필드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는데, 그중에서도 이들은 특별했다.

언제나 아시아 챔스 우승 후보였고, 월드 챔스에서도 8강까지 간 적이 있었다.

다만 올해는 잠시 흔들렸다.

중국 협회가 그동안 폐쇄적이었던 기존 기조를 깨고 세계화를 천명했다. 자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과 외국인 선수의 자국 리그 활동에 대한 제재를 완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서 저우린을 베를린에 보내 버렸다. 중국 협회의 강력한 '권유'로 텐진 타이콴은 눈물을 머금고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유럽 빅 리그에서 활동하던 선수들을 다수 영입했다. 저우린을 팔아서 생긴 넘치는 자금으로 용병들을 영입해 전력을 보충한 것.

언어가 잘 통하지 않고 스타일도 전혀 달라서 용병들이 잘 적응을 못 했지만,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

텐진 타이콴이 흔들리고 있다는 세간의 평을 깨고 다시 아시아 왕자의 저력을 보여주겠다고 기세등등했다.

조별 예선에서부터 첫 상대로 YSM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6명이 붙는다고 처치할 수 있을까?'

유독 표정이 어두운 선수가 있었다. 국가 대표 경기에서 서문엽과 싸워본 리양신이었다.

'베를린의 월드 클래스 선수들마저 혼자 여럿씩 상대하는 서문엽인데.'

서문엽이 출전하는 한국 리그 경기는 꼭 챙겨보는 리양신이었다. 지금의 서문엽은 금방이라도 분출할 것 같은 힘을 자제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눈이 휘둥그레지는 장면이 나올 정도였다.

'설마, 월드컵 지역 예선 때보다 더 강해진 건 아니겠지?'

***

"우우우우우!"

텐진 배틀필드 경기장.

양 팀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대형 스크린에 서문엽의 얼굴이 비치자 텐진 타이콴의 팬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가장 경계해야 하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지난 월드컵 지역 예선 때도 한국에게 2연패 당했기 때문에 서문엽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물론 서문엽은 야유를 즐기며 도리어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우우우!"

"서문엽 꺼져라!"

"오늘은 네가 패배하는 날이다!"

중국어로 이루어진 각종 야유가 쏟아졌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서문엽이었다.

"중국 팬들이 날 참 많이 좋아한다, 그렇지?"

서문엽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안색이 안 좋은 칸 아르얀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 그러네. 나도 인도에서 이런 취급을 받고 있긴 해."

칸 아르얀은 중국 팬들의 기세에 눌려 있었다.

하도 비난을 많이 받고 살아와서 그런지 야유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다가 문득 옆에서 함께 입장하는 상대 팀의 선수를 바라보았다.

"리양신?"

호명받은 리양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넌 유럽 안 가냐? 유럽."

중국어는 몰라서 말은 안 통했지만, 리양신은 유럽이라는 단어에 말뜻을 대강 알아들었다.

리양신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엄지와 검지를 말아서 돈 모양을 나타냈다.

서문엽은 낄낄거렸다.

"하긴 그렇겠네. 영화도 출연하는 녀석이니까."

초능력 '경신술' 덕에 수많은 무협 드라마에서 CG 없이 명장면을 수놓은 리양신의 수입은 웬만한 유럽의 월드 클래스 선수들보다 높았다.

"아무튼 잘해보자. 너 제법이더라."

서문엽은 리양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양 팀 선수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관중들에게도 인사를 한 뒤, 던전에 접속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계에 특별히 더 신경 써."

서문엽이 모두에게 말했다.

"놈들은 우위를 만들어놓고 경기를 풀어나가고 싶을 거다. 초반부터 계속 찔러올 테니까 방심하지 마."

"넷!"

-옛!

팀원들이 대답했다.

서문엽은 텐진 타이콴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대략 예상하고 있었다.

'조승호의 존재는 초반엔 별로지만 중반 이후로 경기가 길어질수록 빛을 발하지. 즉, 적은 중반 이후로 넘어가기 전에 게임을 끝내고 싶겠지.'

더욱이 이쪽엔 서문엽이 있었다.

정면 대결은 어림없고, 베를린 블리츠 BC가 보여주었던 대규모 습격처럼 YSM에 미리 큰 타격을 입혀놓고 싶을 터다.

그 뒤에는 혼자 전세를 역전해 보려는 서문엽을 피해 다니며 오러가 소진될 때까지 끈덕지게 기다렸다가 마무리를 가하는 시나리오.

'당연히 베를린 블리츠가 보여준 모범 답안을 답습하겠지. 그 외에 다른 방법도 안 떠오를 테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텐진 타이콴 측이 대규모로 접근하고 있는 것을 조승호가 확인했다.

서문엽이 적의 침입 경로를 예상해서 조승호를 배치했고, '투명화'를 한 채 그곳에 홀로 외롭게 있던 조승호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을 즈음에 적을 발견했다.

-적이 옵니다. 숫자 3명.

"3명? 그것밖에 안 돼?"

서문엽의 두뇌가 팽팽 돌아갔다. 결론이 도출됐다.

"걔네들 미끼다. 다른 곳에 최소 6명 이상 있을 거야."

-진짜요?

조승호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듯이 물었다.

"3명은 너무 적어."

가볍게 견제를 펼치기엔 좋은 인원이지만, 이쪽은 원거리 딜러가 3명이나 있고, 원거리 딜러나 다름없는 서문엽도 있었다. 겨우 그런 인원으로 위험한 견제를 시도할 리 없었다.

"개리, 넷티. 다른 경로로 6명 이상이 침투하고 있을 거야. 확인해. 이쪽이 눈치챘다는 사실은 들키지 말고."

-알겠습니다.

-넹!

개리 윌리엄스가 강화된 시력으로 주위를 훑고, 이나연이 개리 윌리엄스와 소통하며 그의 시야가 안 닿는 부분을 은밀히 정찰했다.

-확인했어요.

이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그놈들 다 잡을 거야."

서문엽이 선수들에게 일일이 지시해 6인을 다 잡을 함정을 깔기 시작했다.

"개리와 이나연은 반대편에서 오는 3인이 6인과 합류 못 하게 견제해. 조승호가 시야 전달로 적 위치를 알려줄 거니까 활로 위협하기 좋을 거다."

-네.

-예.

"나머지는 6인을 삼면에서 포위하는 진형을 짜자. 도망칠 곳을 한 군데만 남겨놓으면 알아서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칠 거야."

-옛!

그리고······.

"도망치는 놈들은 내가 다 잡는다."

서문엽은 도망치는 6인을 혼자서 다 잡을 생각을 했다.

얼마 전에 터득한 테크닉을 써먹을 좋은 찬스였다.

***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테크닉에 대해 많은 실험을 했다.

피실험자였던 신수경은 시각적 이미지 자체를 인식하지는 못했다. 일종의 최면, 암시처럼 무의식중에 시각적 이미지가 전달하는 정보를 믿었을 뿐이다.

피에트로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보통 인간은 상형 언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흥미롭군. 그것은 아마 네가 창을 통해 전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창?"

-창에 담긴 기세가 일종의 암시를 앞당기는 촉매 역할을 하는 셈이다.

누구나 자신을 찌르려 하는 창에 정신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정신적인 빈틈이 생기는 것.

그러나 최면 암시가 그렇듯, 설득력이 떨어지는 정보를 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험 끝에 알아냈다.

신수경보다 더 실전 경험이 많고 똑똑한 선수들에게는 특히나 믿을 만한 정보를 줘야 속일 수 있는 것이다.

던전의 괴물들은 인간보다 더 속이기 쉬웠다.

그러나 괴물들도 지능은 떨어져도 감각은 더 예민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주면 안 속았다.

결국 순간적으로 서문엽이 설득력 있는 속임수를 만들어서 상대에게 줘야 하는, 꽤나 난이도 높은 테크닉이 된 것이다.

하지만 서문엽의 기술은 무려 105.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그 테크닉을 어렵지 않게 펼칠 수 있었다. 오히려 어려워서 더 재미를 느끼는 서문엽이었다.

서문엽이 판 함정에 텐진 타이콴이 걸려들었다.

쉬익- 쉭-

성동격서의 임무를 띠고 침입하던 3인은 개리와 이나연이 쏘는 화살에 가로막혔다.

"적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다."

-적은 몇 명이지?

"개리와 이나연 둘밖에 없다."

-으음, 너무 적은데. 좀 더 이목을 끌어봐. 서문엽을 그쪽으로 끌어들여야 일이 수월해.

그랬다.

텐진 타이콴은 그 3인을 미끼로 서문엽을 끌어낼 수작이었다.

서문엽만 빠지고 나면, 나머지 YSM 선수들을 6인이 기습해서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서문엽이 최근 속도가 엄청 빨라졌기 때문에 더욱 미끼를 적극적으로 물 것이라는,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속았다! 후퇴!

다급한 오더가 떨어졌다.

3면에서 YSM의 선수들이 나타나 위협을 가한 것이다.

텐진 타이콴 선수들은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보이지 않던 서문엽이 그제야 등장했다.

쉬이이익!!

절묘한 궤도로 나무들 사이를 피해 다니며 날아든 창.

콰직!

-서문엽, 1킬.

나무들 탓에 시야가 가려져 날아오는 창을 못 본 선수 하나가 데스당했다.

-창이 2시에서 3시 방향에서 날아왔다!

-11시 방향으로 후퇴! 지금 서문엽과 싸울 시간 없어.

그러나 서문엽은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속도 95!

그들이 따돌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탱커의 무장이 딜러보다 무겁기 때문에 달리기 좋은 복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무장이 가벼운 속도 90의 딜러에 맞먹는 스피드를 낼 수 있는 서문엽이었다.

이윽고 서문엽이 정면에서 나타나 가로막자, 텐진 타이콴 선수들은 기겁했다.

"너무 빨라!"

"이 정도로 빠르다고?!"

씨익 웃어준 서문엽은 그대로 달려들었다.

"차라리 잘됐어! 서문엽 혼자다!"

"죽여!"

텐진 타이콴 선수 5인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반드시 여섯 명 이상이서 협공하라는 당부가 있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그런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서문엽, 2킬.

-서문엽, 3킬.

-서문엽, 4킬.

-서문엽, 5킬.

그들은 폭풍처럼 쓸려 나갔다.

< 조별 예선(2) > 끝

< 조별 예선(3) >

다수와 싸울 땐 첫 공방이 중요하다.

포메이션이 몸에 배인 프로들은 전투 시 본능적으로 선두에 선 팀원을 중심으로 위치를 잡는다.

때문에 선두의 적을 일격에 처치하면 상대의 기세가 확 꺾여서 동요한다.

서문엽은 순간적으로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상황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가장 상대가 믿을 만한 시각적 이미지를 창에 실어 보냈다.

선두의 탱커는 그 페인트에 속았다.

서문엽이 몸통박치기를 해올 줄 알고 대비했던 탱커는 다리를 향해 찔러오는 창을 못 피했다.

콱!

"컥!"

체중을 지탱하던 다리라 몸 전체의 균형이 흔들렸다.

그래서 딜레이 없이 바로 휘두른 방패에 머리를 맞았다.

'근력 증폭.'

뻐어어억!!

-서문엽, 2킬.

강한 근력을 가진 탱커는 투구를 쓰고 있는 적도 방패로 일격에 후려쳐 죽인다.

서문엽은 증폭으로 104까지 근력을 끌어올린 상태였다.

다시 서문엽은 텐진 타이콴 선수들 4인이 배치된 현황을 냉정하게 파악한다.

그 다음에 누구를 노려야 할지 견적을 냈다.

가장 뒤쪽에 있는 근접 딜러!

'증폭, 속도.'

속도를 105로 증폭시켰다.

엄청난 스피드로 적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장 뒤편에 있어 디펜스가 소홀했던 근접 딜러에게 접근했다.

그 찰나, 서문엽은 또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창에 실었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그 짧은 틈에 설득력 있는 속임수를 만들어낸 것이다.

창이 정면에서 찔러올 것을 예상한 근접 딜러는 공중으로 점프했다.

그리고 던진 창에 맞고 데스됐다.

-서문엽 3킬.

이쯤에서 텐진 타이콴 선수들은 지리멸렬한다.

서문엽은 멈추지 않았다.

180도 턴.

바로 뒤에 있던 적에게 쇄도한다.

적 탱커는 방패를 앞세워 충돌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때, 다시 90도 턴을 한 서문엽은 오른쪽에 있던 근접 딜러에게 새 창을 뽑아 찌를 태세였다.

콰직!

-서문엽, 4킬.

죽은 것은 정면에 있던 탱커였다.

오른쪽에 있는 근접 딜러를 찌를 것처럼 하면서, 창을 뒤로 찔러서 탱커를 꿰뚫었다.

2명밖에 남지 않자 텐진 타이콴 측도 글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퇴!"

그 2명 중 하나인 리양신이 소리쳤다.

2명은 도망쳤다.

'속도 증폭.'

서문엽은 105의 속도로 엄청난 가속도를 냈다.

콰지직!

-서문엽, 5킬.

한 명이 또 데스.

경신술로 몸을 가볍게 한 리양신은 쉽게 따라잡을 수 없었다.

훌쩍훌쩍 나무 위를 뛰어 넘으며 날아다니듯 하는 리양신은 확실히 빨랐다.

그런데 서문엽도 빨랐다.

철컹!

서문엽은 입고 있는 완갑과 흉갑을 풀어 버렸다.

무장을 풀어 몸을 가볍게 한 뒤에 더 빨리 달렸다.

달아나는 리양신은 엄청난 스피드로 바짝 쫓아오는 서문엽에게 공포심을 느꼈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게 느껴졌다.

리양신은 뒤돌아 맞서 싸울 타이밍을 쟀다.

서문엽도 리양신이 뒤도는 순간 죽이려고 타이밍을 쟀다.

리양신이 뒤돌려는 순간이었다.

서문엽이 던진 창이 그의 어깨를 스쳤다.

'헉!'

리양신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서 데스를 면했다.

하지만 피해를 안 받은 게 아니었다.

서문엽의 모든 창은 칸 아르얀이 '맹독'을 발라주었던 것.

중독되어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리양신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세 차례의 합을 교환하고서 창에 심장이 꿰뚫렸다.

-서문엽, 6킬.

서문엽은 그야말로 폭풍처럼 6인을 쓸어버렸다.

남은 적은 고작 5인.

예정된 승리를 챙길 시간이었다.

서문엽이 나직이 말했다.

"다 쓸어 담아."

남은 5킬을 마저 챙기라는 지시였다.

-옛!!

YSM의 선수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개리 윌리엄스가 '강화된 시력'으로 적 잔당의 위치를 파악했고, 이나연도 달리기와 '점프'를 반복하는 미친 스피드로 적을 찾아다녔다.

텐진 타이콴 선수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1킬이라도 거둬서 11-0이라는 치욕의 퍼펙트를 내주지 않을 각오였다.

그러나 YSM은 강했다.

서문엽이 아니더라도 다들 튼튼한 조직력을 갖게 되었다.

베를린 블리츠 BC로부터 동료와 연계하는 플레이를 배운 그들은 단 1킬도 적에게 내주지 않았다.

1세트가 종료되고 접속 모듈에서 나오니, 충격으로 인해 적막에 휩싸여 있던 경기장이 이내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으아아아! 서문엽 너무 강하잖아!"

"서문엽은 반칙이다!"

"한국 팀 따위에게 진 게 아냐! 서문엽에게 진 거다!"

"너무 강해! 무지막지하다고!"

"게임이 안 되잖아!"

텐진 타이콴의 열성팬들이 서문엽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런 원망 섞인 소음들이 하나로 합쳐지니 환호성이 되었다.

개운하다는 듯이 어깨를 돌린 서문엽은 그의 놀라운 활약상에 멍해져 있는 가브리엘 감독에게 말을 건넸다.

"감독, 어때? 이 정도면 월드 챔스 우승 가능해?"

"···어쩌면요."

가브리엘 감독도 감히 꿈과 같은 월드 챔스 우승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월드 챔스 8강, 텐진 타이콴.

에이스 저우린을 잃었지만, 실력 있는 유럽 용병 선수를 여럿 영입해 전력을 강화한 아시아 수위의 강팀.

그런 적을 상대로 서문엽은 순식간에 게임을 터뜨려 버렸다.

강해도 너무 강했다.

혼자서 6인을 솔로 킬하는 속도가 질풍 같았고, 적의 의도를 파악하고 역공을 지휘한 판단 속도로 빨랐다.

조금의 실낱같은 약점도 없는 완전무결함!

'저런 선수가 있다면 가능성이 있어.'

가브리엘 감독은 옛날 배틀필드 지도자에 입문하면서 꿈꿨던 월드 챔스 우승컵을 다시 꿈꾸게 되었다.

그날 경기는 2-0으로 YSM의 승리가 되었다.

패배한 텐진 타이콴의 진쉰 감독은 인터뷰에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서문엽 선수의 1세트 6킬을 보고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째서 저런 선수를 냈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1, 2세트 모두 MVP를 차지한 서문엽도 인터뷰를 했다.

"아시아를 후딱 정리하고 월드 챔피언스리그에 갈 겁니다. 베를린 블리츠든 파리 뤼미에르든 목 씻고 기다려야 할 겁니다. 누가 세계 최고의 선수냐는 답이 뻔히 나와 있는 논쟁도 종식시키겠습니다."

***

-누구도 내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TV에 승자 인터뷰를 마무리 짓고 훌쩍 떠나는 서문엽이 보였다.

아무리 바빠도 서문엽의 경기는 꼭 챙겨 보는 모로 형제는 이번에는 고핀 감독까지 초대해서 경기를 지켜봤다.

큰 덩치답게 식성도 좋은 고핀 감독은 순식간에 끝난 경기에 너무 충격을 받아 식사를 절반도 못 끝냈다.

모로 형제도 경외를 느껴 말을 잃은 지 오래.

침묵 끝에 고핀 감독이 입을 열었다.

"저 선수, 사주시면 안 됩니까?"

농담치고는 너무 간절했다.

"살 수 있다면야 3억 유로도 쓸 용의가 있는데 말이지."

필립 모로가 투덜거렸다.

형 장 모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단, 치치를 세트로 묶어서 서문엽과 트레이드하고 싶어. 서포터들에게 쌍욕을 먹을 테지만."

세계 최고의 근접 딜러와 세계 최고의 탱커를 같이 넘겨주고 서문엽 하나를 데려오고 싶다니.

그런데 고핀 감독은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둘을 하나로 합쳐놓은 듯한 플레이였다.'

나단 베르나흐처럼 빠르고 강렬했다. 치치 루카스처럼 단단하며 시야가 넓었다.

텐진 타이콴은 만만한 클럽이 아니었다. 점점 성장하고 있는 아시아 배틀필드의 상징 같은 강팀이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최단 시간에 6킬을 내는 엄청난 킬 스코어링.

거기에 재깍 상황을 판단하고 지휘하는 완벽한 전술성까지.

고핀 감독은 전율을 느꼈다.

두려움도 느꼈다.

파리 뤼미에르 BC의 감독으로서, YSM을 월드 챔스에서 만나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명쾌한 답이 안 나왔다.

다른 선수들이야 문제없다.

그런데 송곳처럼 돌출된 서문엽. 거기에 불가사의한 피에트로까지.

오히려 선수 11인이 고르게 평균적으로 강한 유럽의 다른 명문들보다 YSM이 더 무서웠다.

그런 고핀 감독의 기색을 눈치챈 것일까.

선수 관리 담당인 필립 모로가 입을 열었다.

"비록 서문엽을 동경하지만, 만약 붙게 된다면 파리 뤼미에르의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어야겠죠?"

"아, 예. 물론입니다."

고핀 감독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핀 감독은 부임 후 선수단을 리빌딩하여 빅맨 파워 게임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파리 뤼미에르 BC를 세계 최고의 클럽에 올려놓은 명장이었다.

다른 팀에게 진다는 생각 따윈 있을 수 없었다.

"YSM을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 영입해야한다고 생각되는 선수가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장 모로도 동의했다.

"이적 시장에 쓸 자금은 넘칩니다. 서문엽을 가질 수 없다면, 그를 이기기 위해 이 돈을 써야지."

최근 서문엽이 들고 다니는 새 방패에 새겨진 브랜드 로고의 홍보 효과 덕분에 사업체들이 더 잘나가고 있는 모로 형제였다.

세계 최고 명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돈을 얼마든 쓸 저력이 있었다.

***

LA 워리어스는 이적 시장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굵직한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전력 강화를 위해 이적료를 쓸 의지가 없다면, 나도 더는 팀에 애정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런 무서운 선언을 한 로이 마이어 때문이었다.

로이 마이어와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 그가 가진 강력한 마케팅 효과, 티켓 파워, 월드 챔스 연속 진출 성적 등이 모조리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LA 워리어스의 구단주도 경각심이 들었다.

로이 마이어를 잡기 위해 구두쇠 구단주가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지갑을 연 김에 아주 확실하게 월드 챔스 성적을 위해 투자를 단행했다.

그 바람에 LA 워리어스는 주전 선수들이 많이 바뀌면서 혼란이 일었다. 심지어 감독까지 교체됐으니 말 다했다.

하지만 혼란은 곧 종식되었다.

팀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는 로이 마이어의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리더십도, 전술적 지모도, 실력도 뛰어난 로이 마이어는 기존 선수와 새로 영입된 선수를 휘어잡고 새로 부임한 감독을 도와 팀 리빌딩을 도왔다.

그 덕에 LA 워리어스는 메이저리그에서 벌써 10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이 마이어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우승하겠다. 기필코 월드 챔스 우승을 갖고 말겠어.'

2017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 올렸던 월드 챔스 우승컵.

그때 19세의 어린 나이에 폭발적인 활약으로 팀을 멱살 잡고 우승시킨 로이 마이어였다.

고난 끝에 왕좌에 오른 희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 서포터들.

그 마약 같은 짜릿함을 로이 마이어는 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서포터들을 다시 한번 그곳에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산 너머 산이었다.

파리 뤼미에르 BC는 여전히 강하고, 베를린 블리츠 BC도 중국의 특급 선수 2명을 영입해 월드 챔스 우승컵을 가질 준비를 마쳤다.

거기다가 YSM까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강하다.'

로이 마이어는 서문엽의 맹활약을 TV로 지켜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일전에 붙었을 때보다 더 강해진 모습이었다.

이제는 서문엽까지 월드 챔스 우승 한 번 해보자며 나섰다. 그래봤자 원맨팀이라고 여겼지만 이제 더는 그렇게 치부할 수 없었다.

'우리 팀에 서문엽을 마크할 수 있는 선수가 없어.'

여럿을 붙여도 오늘 경기에서 추풍낙엽이 된 텐진 타이콴의 6인과 같은 꼴이 난다.

'나밖에 없다. 내가 어떻게든 서문엽을 막아야 해.'

다시 한번 영광을 꿈꾸는 아이리시 위저드가 투지를 느꼈다.

-누가 세계 최고의 선수냐는 답이 뻔히 나와 있는 논쟁도 종식시키겠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답안을 내지 마라, 서문.'

< 조별 예선(3) > 끝

< 버려진 후의 역사(1) >

괴물들에 의해 지성체들의 문명이 전소(全燒)된 세계.

그곳에 태고부터 존재해 온 뱀이 있었다.

몸을 일으키면 머리가 하늘 끝에 닿을 듯한 거대한 뱀.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강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땐 작고 약했던 뱀은 기억할 수 없는 어떤 계기로 인해 지성을 얻었다. 그로 인해 강한 괴물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보다 강한 괴물을 어떻게 함정에 빠뜨려 처치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작고 어린 뱀은 강자를 피해 자기보다 약한 괴물을 잡아먹으며 성장했다.

때로는 기습을 가해 자기보다 강한 괴물을 먹이로 삼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렇게 먹고 성장할수록 뱀은 강해졌다.

오직 생존.

오래 살수록 자신은 결국 강해질 거라고 뱀은 생각했다.

그렇게 까마득한 세월을 보냈다.

뱀은 최상위의 포식자가 되었다.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은 괴물이 되었고, 그로 인해 누구보다도 크고 강해졌다.

모든 지성체가 죽거나 도망치고 괴물들밖에 남지 않은 버려진 세계에서, 뱀은 괴물들의 왕으로 군림했다. 세계의 왕이 되어 지배를 받을 괴물과 포식의 대상이 될 괴물을 정하였다.

아주 오랫동안.

왕에게 복종할 줄 아는 괴물은 지배하에 살아남았고, 왕에게 복종할 줄 모르는 괴물은 먹이가 되었다.

그러한 통치가 까마득한 세월간 계속되자, 버려진 세계는 왕에게 복종하는 괴물들만 남게 되었다.

그것은 왕이 생각한 이상향이었다.

왕의 힘이 절정을 달하는 동안 그 이상적인 통치는 계속되었다.

왕은 자신이 이루어놓은 이 이상적인 세계가 계속 유지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왕은 활동이 줄었다.

언제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여 괴물들에게 공포를 주던 왕은 점점 그러한 활동을 줄여 나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서 누구도 접근 못 하게 했다.

약육강식에 예민한 괴물들이었다.

왕과 같은 지성은 없었지만, 힘에 대해서는 매우 눈치가 빨랐다.

괴물들은 왕이 전보다 약해졌음을 깨달았다.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한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자 왕이 오랜 통치로 이루어놓은 세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다시금 왕에게 불복하는 괴물들이 생겨난 것이다.

왕은 충격을 받았다.

왕은 열심히 세계를 다스려 왔다.

불복하는 흉포한 괴물들을 죽였고, 복종할 줄 아는 괴물들만 살렸다. 그렇게 불순인자를 계속 솎아냈기 때문에 이제는 태어나서부터 복종을 배운 괴물들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들이 무색하게도 다시 통치 이전처럼 괴물들에게 반항심이 생긴 것이다.

복종심을 잃고 다시 약육강식의 본능을 되찾은 괴물들.

왕은 분노했다.

다시 몸을 일으킨 왕은 다시금 자신의 힘과 공포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세계에 다시 왕의 공포가 찾아왔다.

하지만 왕은 깨달았다.

세계를 이상향으로 만들고자 했던 자신의 노력이 모두 헛되었음을.

'결국 나의 힘 때문이었던가. 나의 힘이 약해지면 무너져 버릴 질서였던가.'

기실 왕은 지성을 갖게 된 어릴 적부터 노쇠(老衰)의 개념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강한 괴물도 세월이 흐르면 늙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노쇠하길 기다렸다가 강대한 적수를 처치한 적도 있었다.

당연히 자신도 언젠간 그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노쇠하더라도 영원히 통치가 계속될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꿈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이다.

아무리 복종심을 심어놓아도 괴물들의 투쟁 본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왕은 노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왕은 자신의 노쇠함을 걱정했다.

그러나 노쇠한 뒤에도 여전히 왕으로 군림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당연한 명제였다.

세계의 질서를 만들고 생존할지 먹이가 될지를 멋대로 정했던 절대 권력을 절대로 놓을 생각이 없었다.

권력을 손에서 놓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왕은 자신이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했고, 괴물들이 지성을 얻어 그러한 이치를 깨닫길 원했다.

왕은 궁리 끝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자식이다.'

왕은 그동안 미뤄왔던 번식을 시도했다.

자신처럼 특별한 암컷이 없었기 때문에 격 떨어지는 번식을 하지 않았던 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변했다.

왕의 통치를 떠받들 자식들을 낳고자 했다.

노쇠에 직면한 괴물은 자신의 노후를 위하여 자식을 키운다는 발상을 떠올린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지성을 총동원한 결과였다.

물론 그것은 후사를 잇게 할 생각보다는 자기 자신의 통치를 유지할 수단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왕은 자신의 자식을 낳을 특별한 암컷 괴물을 선택했다. 그리고 긴 세월에 걸쳐 수천 마리의 자식을 낳았다.

왕은 자신과 같은 지성을 가진 자식을 원했다.

왕의 통치에 복종할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왕이 생각하는 지성이었다. 자신이 세계의 지배자라는 것을 깨달았듯, 자신의 지배에 굴복할 줄 아는 것이 지혜라 여겼다.

작고 어린 뱀이었던 왕.

한때 생존을 위한 욕구만 있었던 뱀은 지성을 얻어 '나'라는 주체를 깨달았다.

자아를 얻은 괴물은 한없이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왕 자신을 제외한 어떤 괴물도 자아를 갖지 못한 탓일 수도 있었다.

문명이 사라진 세계에서 자아를 가진 유일한 괴물. 어쩌면 왕이 될, 그리고 권력의 화신이 될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노쇠한 뒤에도 영원히 왕으로서 통치를 유지하려던 속셈은 실패했다.

번식하여 낳고 키운 수천 마리의 자식들은 왕이 원했던 '지성'을 갖지 못한 것이다.

-어째서냐!

왕은 분노했다.

자식들은 왕을 닮아 강했다.

그리고 교활함과 판단력을 갖췄다. 강한 아버지에게 복종할 줄 알았지만, 복종하는 척하면서 탐욕 어린 눈빛을 희번덕거렸다.

바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기 때문에 왕은 대번에 자식들의 심성을 파악했다.

자식들이 하나같이 아버지의 지위를 넘보고 있었다.

다만 자식들은 아버지처럼 지능이 좋지는 못했다. 교활한 심성은 갖췄으되, 그것을 구현하는 지능 수준은 다른 괴물과 다를 바 없었다.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어린아이의 악의(惡意)와 같았다.

-어째서 왕에게 복종할 줄을 모르는 것이냐, 어리석은 놈들!

왕은 자식들을 모조리 죽였다.

지능은 닮지 못했지만, 강대한 힘과 교활함은 물려받은 자식들은 살려둘 수 없었다. 노쇠한 왕의 통치를 돕기는커녕 앞장서서 도전해 올 놈들이었다.

그리고······.

수천 마리의 자식들이 죽임당하는 것을 공포에 질린 채 바라보는 어미 괴물이 있었다.

어미 괴물은 아직 낳지 않은 하나의 알을 몸속에 품은 채로 달아났다. 그 알 하나의 존재를 왕이 모르는 것이 행운이었다.

***

왕은 달아난 어미 괴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세계는 왕과 왕에게 복종하는 괴물들, 그리고 언젠간 먹이로 전락할 괴물들밖에 없었다.

이 세계 어디에도 왕의 눈을 피해 달아날 곳은 없었다.

그리고 번식으로 약해진 어미 괴물은 왕이 주는 먹이를 받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을 터였다.

쓸모없는 자식들만 낳은 어미 괴물에게 더는 볼일이 없었다.

자식을 낳는 계획은 실패.

왕은 다른 방법을 찾아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가 문득 과거를 생각했다.

'그 작은 생명체는 어찌 그리 강할 수 있었지?'

먼 옛날.

왕이 가장 강대했을 때.

가장 젊고 강대했던 전성기 시절, 자신을 패퇴시킨 무시무시한 지성체가 있었다.

그때는 아직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을 때였다. 그저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만족하던, 그러나 힘만은 가장 강대했던 시절이었다.

우연히 세상 바깥의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문이 열렸다.

왕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알던 세계가 다가 아니었음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왕은 흥분했다.

다른 괴물들을 이끌고 문을 통과해 새로운 세계에 진입했다.

이 세계 외에도 또 다른 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도 자신은 최강의 생명체라는 것을 마땅히 증명해야 했다. 적을 죽이고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해야 했다.

문을 열었던 생명체들은 비록 작았지만 오러를 갖가지 방법으로 활용하여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왕은 그들에게서 오러의 활용법이 무척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작은 생명체들이 무척 맛있고 오러가 풍부한 먹이라는 것도.

새로운 미지의 지식을 배우는 데 즐거움을 느낀 왕은 새로운 세계를 침공해 미친 듯이 누비며 작은 생명체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배웠다.

배우면 배울수록 왕은 강해져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때 새로운 세계에서도 먹이사슬의 꼭짓점에 서 있다고 생각되는 생명체가 등장했다.

싸울 때 자신의 신체 일부나 오러뿐만이 아니라, 딱딱하고 기다란 도구 2개를 사용하는 이상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왕은 그 생명체와의 사투를 통해 죽음을 느껴야 했다.

왜 이렇게 강하지?

어떻게 나보다 더 강한 생명체가 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더 이상 작고 어린 뱀이 아닌데!

그 무시무시한 생명체는 다른 동족을 이끌고 왕과 괴물들을 살육했다.

왕은 그들의 조직적이고 질서 정연한 움직임에 또 놀랐다.

저것은 보다 강한 힘으로 위협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먹이를 탐하여 집단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욕망이 아닌 다른 것으로서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쳐서 원래 세계로 되돌아온 왕.

다행히 작은 생명체들도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못했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싸움이었지만, 그때 아주 소중한 것을 깨달았다.

그 작은 생명체들은 바로 왕에 대한 복종심으로 똘똘 뭉쳤다는 것을.

그 무시무시했던 작은 생명체가 바로 다른 동족들을 복종시켜서 질서 있게 따르도록 만든 왕이라는 것을.

자신 역시 그처럼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거대한 젊은 뱀은 '왕'이 되었다. 다른 괴물들을 복종시키고 통치하는 일에 집착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 뒤로 까마득한 세월이 더 흐른 현재.

왕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 있었다.

'그 작은 놈들의 왕은 어찌 그렇게 강할 수 있었지?'

육체?

그의 육체는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이상한 2개의 길쭉한 도구?

그것은 나약한 육체를 대신해서 사용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오러?

확실히 그 작은 생명체들 중 가장 강력하고 다채로운 오러 활용법을 보였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왕은 오랫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골몰했다.

그리고 긴 세월이 지나서야 영혼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왕은 영혼을 다룰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연구했다. 노쇠를 멈추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였다.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왕은 긴 세월이 흘러 조금씩 노쇠해졌지만, 여전히 이 세계에 왕을 위협할 적은 없었다.

영혼을 연구한 끝에 왕은 영령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 수많은 영령들을 보았고, 그중에는 한때 자신보다 더 강대했으리라 짐작되는 오래된 자도 보았다. 가장 깊은 곳에 어느 위대한 영령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왕은 낙담했다.

결국 다 노쇠하고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위대한 통치를 보다 오래 연장시킬 방법은 있겠지.'

영원한 게 없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왕이 겸허해진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에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지식이 있을 거다. 그때 새로운 세계에서 많은 걸 배운 끝에 이곳에 이르렀듯이!'

목표가 달라졌을 뿐, 왕은 여전히 탐욕스러웠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통치하는 세계 어딘가에서 자신의 대적(大敵)이 탄생했음을 알지 못한 채.

< 버려진 후의 역사(1) > 끝

< 버려진 후의 역사(2) >

다시 긴 세월이 흘러 현재.

왕은 몹시도 예민해져 있었다.

영령계를 통해 새로운 계획을 꾸밀 때는 한창 기분이 좋았는데, 순조롭던 계획이 최근 차질을 빚고 있었다.

왕을 태초의 빛이라 여기며 신봉하는 지저인 무리를 통해 저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려는 계획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저쪽 세계는 인간이라는 또 다른 지성체가 있었다.

신봉자들에게 듣기로는 지저 문명에 비하면 턱없이 못난 종족이라고 했다.

하지만 두 종족의 전쟁이 있었고, 승리한 건 인간이라고 했다.

어떻게 더 못나고 하등한 종족에게 져서 몰락한단 말인가?

편견이 없는 왕은 지저인처럼 인간을 얕보지 않았다. 인간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저인은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게 과신하는 버릇이 있다.'

왕은 자신을 태초의 빛으로 착각하여 신봉하는 지저인을 면밀히 관찰했다.

관찰 결과, 지저인은 세상 만물 대부분이 자신들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왕과 같은 괴물들도 지저인이 만들었으니 그리 착각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런 오만함과 달리 왕이 본 지저인은 제대로 하는 일이 없었다.

왕을 신봉하는 지저인 무리는 문을 열려는 계획을 조금도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이름이 서문엽이라고 했던가.

이름이라는 개념도 몰랐던 왕이 '서문엽'이라는 단어를 알 정도로, 그 인간은 방해가 되고 있었다.

이미 지금까지 여러 실패를 겪은 왕은 더는 실패를 원치 않았다.

왕은 지금도 계속 노쇠해지고 있었고, 근래에 들어 자신을 위협하는 적의 존재가 감지되었다.

적은 한 번도 자기 모습이나 위치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버려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왕은 어느새부턴가 위협적인 적이 이 세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는 괴물을 미리 처치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던 왕이었다. 그 같은 일을 계속해 왔기에 육감으로 새로운 적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숨죽인 채 왕의 시선 밖에서 조심스럽게 성장해 왔을 적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조금씩.

정체를 드러내진 않되, 왕의 신경을 건드릴 정도로 말이다.

그러한 교묘한 행동이 왕을 더 긴장시키고 있었다.

'무언가 다르다.'

단순히 좋은 체질을 물려받고 잘 먹고 잘 커서 성장한 큼직한 괴물들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런 덩치 큰 바보들이야 왕이 늘 제거하던 잡초들일 뿐이니까.

그런데 이런 교묘한 행동이라니.

자기 존재감을 아주 조금씩 드러내며, 도발을 해오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괴물들의 행동이 아니었다.

욕구에 충실한 괴물의 본성에서 벗어난 절제된 위협.

그러나 더 강렬한 악의.

교활함.

적의 행동거지는 바로 왕과 비슷했다.

왕도 작고 어린 뱀이었던 시절 자신보다 더 강한 적을 그렇게 상대했었다.

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적은 대체 어디서 탄생한 것인가!

왕은 그냥 힘만 가진 지배자가 아니었다. 왕은 버려진 세계의 모든 것을 속속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의 괴물이 어떻게 번식해서 탄생한 것인지 몇 대를 걸친 조상까지 다 알았다.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온 왕은 세대를 걸쳐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괴물들의 생태와 체질을 관찰하고 위협이 될 만한 종을 제거해 왔다.

개념을 모를 뿐, 그것은 유전자 개량의 일종이었다.

물론 개량은 실패했다.

아무리 약화시키려고 노력해도, 괴물들은 적절한 환경과 기회만 주어지면 폭발적으로 성장해 버렸다. 왕이 노쇠한 이후를 걱정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어쨌든 그 정도로 자신이 통치하는 세상의 모든 걸 아는 왕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탄생한 적이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적의 존재 자체를 믿지 못했다.

그러나 영령계에서 만난 한 똑똑한 친구 덕에 왕은 새로운 개념들을 배웠다. 피에트로라는 이름의, 특이하게도 인간의 몸에 깃든 지저인이었다.

영혼을 붙잡아 곁에 두고 싶을 정도로 똑똑한 그 친구가 말했다.

"애당초 만들 때 지성을 가질 수 있도록 설계했을 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지성을 갖게 되면 어찌 되는지 그 위험성을 선조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 나는 어떻게 지성을 갖게 되었을까?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첫 번째 가설은 정말 까마득히 희박한 확률로 탄생한 변종이라는 것."

아니다.

내 자식들은 하나같이 멍청했다. 교활한 성품은 닮았지만 말이다.

저 정체불명의 적도 마찬가지.

왕의 기억에 덩치가 크거나 새로운 독성을 품은 변종은 나올 수 있지만, 저런 식의 변종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엄청난 세월을 살아온 동안 단 한 번도 말이다.

"유전이 아닌 외부의 요인에 의하여 지성이 생긴 경우."

외부의 요인?

"어떤 초자연적인 작용에 의해 지성이 인위적으로 심어졌을 수도 있지."

그래.

내가 지성을 얻은 것은 태어나서부터가 아니었다.

어떤 계기로 인해 갑자기 생겨났다.

왜냐면 지성을 얻기 전의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그 사라진 기억이야말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왕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처럼 적도 어떤 특별한 계기로 변종이 되었을 수 있다.

유전적 변종은 확실히 아니다.

왕이 확인했다. 수천 마리나 되는 자식들을 낳고 키워보고서······.

'자식?'

왕은 비로소 자신이 염두에 두지 않았던 변수를 깨달았다.

그때 달아났던 자식들의 어미!

자기도 죽임당할까 봐 무서워서 달아난 줄 알았다.

그런데 만약 달아나야 했던 다른 이유가 있었다면?

'그건가!!'

왕은 진노했다.

적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비로소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

서문엽을 위한 훈련용 던전을 제작하기 위해 여왕 측과 합류한 피에트로는 생각보다 오래 발이 묶였다.

던전 제작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지형이야 대충 기존의 아무 던전이나 본뜨면 된다.

문제는 왕을 닮은 괴물을 만드는 것.

그것은 왕을 직접 만나보았던 피에트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피에트로도 직접 만나봤어도 왕에 대해서는 빙산의 일각만 봤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히 피에트로는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고대의 선조들이 만든 괴물들에 대한 기록을 읽은 적 있었다.

그보다 더 이전인 버려진 세계 시절의 지식까지는 모르지만, 고대의 지식이 버려진 세계에서부터 이어졌을 테니 연관성이 있을 터였다.

고대의 선조들이 만든 괴물 중 가장 뱀과 유사한 종을 찾았다.

마침 여왕 측은 지저 문명의 고대 역사 유물을 찾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참고 자료가 계속 조달됐다.

'이게 가장 그럴듯하군.'

피에트로는 뱀 괴물의 자료를 찾았다.

이를테면 세르펜의 선조격인 괴물이었다.

세르펜은 개량되어서 철갑 같은 껍질과 수백 개의 독니를 가졌지만, 이 뱀은 그냥 평범하게 맹독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 대신 장점도 있군. 먹이를 통해 흡수하는 오러량이 더 많고, 외형적 성장에도 제한이 없다. 충분한 시간과 오러가 주어지면 거대해질 수 있는 종이야.'

어쩌면 왕이 바로 이 종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샘플을 찾았으니 작업에 착수했다.

배틀필드 시스템을 만드는 데 중심 역할을 했던 지저인 '관측'과 함께 괴물 제작에 들어갔다.

현실에서는 샘플 유전자가 없으니 불가능했지만, 가상공간 내에서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괴물 제작에 능통했던 피에트로가 괴물의 유전적 형질과 체질적 특성을 설계했고, '관측'은 피에트로가 설계한 대로 구현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괴물.

-크아아아아아!!

거대한 뱀이 포효했다.

울음소리는 세르펜을 닮았지만, 포효 속에 해일 같은 오러의 파장이 느껴졌다.

-저, 정말 이게 '왕'입니까?

관측이 두려움에 질려 물었다.

피에트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휴우, 역시 이 정도까지는 아니죠?

안심한 '관측'의 기대를 피에트로는 무참히 깼다.

-겨우 이 정도가 아니야.

-설마요. 그런 괴물이 있을 수가······.

-체내에 흐르는 혈액과 오러가 강물처럼 느껴졌었다. 그때 내가 받았던 압도감은 이 정도가 아니야. 덩치도 오러도 더 키워야 해.

-아, 알겠습니다. 가상공간인데도 만들기 겁이 나지만요.

-거기서 끝이 아니지. 오러는 물론 영혼도 잘 다룬다. 영혼은 나보다 더 잘 다루는 것 같더군. 그물을 펼쳐서 나를 붙잡으려고도 했으니까. 첫 번째 녀석은 이미 영혼이 저당 잡혀 있지.

그 말에 '관측'은 기가 질렸다.

영령계의 선조를 불러오고 사령도 마음대로 다루는 피에트로였다. 그보다 더 잘 다루면 대체 어느 정도인가.

어째서 태초의 빛께서 그 괴물의 출현을 예언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이것은 세상을 능히 멸망시킬 괴물이었다.

죽어서도 영혼이 붙잡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그런 괴물.

그렇게 괴물 제작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여왕이 놀라운 소식을 가져왔다.

"흔적을 발견했어요."

-첫 번째의 흔적이오?

피에트로가 물었다.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요?

"아쉽게도 이동 흔적을 발견한 건 아니에요."

-그럼?

"선왕분들을 모신 왕릉(王陵) 중 하나가 붕괴됐어요."

-왕릉······.

왕릉은 기본적으로 만인릉 이후로 호화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지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만들지도 않는다. 누군가 일부러 훼손하지 않는 한, 영원히 붕괴되지 않도록 유지 장치가 만들어진다.

그런 왕릉이 붕괴됐다면, 누군가가 훼손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왕릉이 훼손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최근에 붕괴된 게 맞소?

"네, 20년 전에는 무사했었어요."

성역이 서문엽에 의해 붕괴된 이후, 오갈 데 없이 방황하던 여왕은 역대 왕릉을 모두 돌며 선왕들에게 죄를 빌었다.

그때가 20년 전.

요 20년 사이에 누군가가 훼손했다면 첫 번째 상급 사제일 확률이 높았다.

"왕릉 중 일부는 왕의 혈통이 흐르지 않는 이를 공격하는 함정이 있어요. 붕괴된 그 왕릉이 그러했죠."

-은밀히 다녀가려고 했는데 함정이 발동되는 바람에 흔적이 남아버렸군. 그래서 아예 통째로 붕괴시켜서 흔적을 인멸했을 거요.

"맞아요."

피에트로는 일전에 첫 번째 상급 사제 무리와 싸웠을 때를 떠올렸다.

싸우고 나서 첫 번째 상급 사제 일당이 도망쳤던 장소도 왕릉이었다. 그곳에서 서문엽이 기습적으로 다섯째 상급 사제를 처치하는 데 성공했었다.

-놈이 왕릉을 조사하고 있군.

"네, 그런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쪽도 문을 열기 위한 단서를 찾기 위해 고대 역사를 조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역대 왕들께서 잠드신 곳을 뒤지는 것 같고요."

-왕릉에 놈이 원하는 단서가 있소?

"제가 아는 왕릉에는 없어요."

여왕은 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자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역대 왕릉 위치를 다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는 곳은 전부 가보았다.

"아마 그런 단서가 남아 있다면 제가 모르는, 만인릉보다도 이전 시대 왕릉에나 있겠죠."

피에트로도 그 말이 옳다 여겼다.

만인릉의 참상을 겪은 이후로 왕릉은 간소해졌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왕릉에 이것저것 보물을 잔뜩 매장했었다. 그중에 역사가 기록된 유물도 있을 터였다. 첫 번째 상급 사제가 노리는 것도 그것이고.

왕릉은 대개 한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공간 좌표가 다들 비슷비슷했다.

지금은 사라진 만인릉도 다른 왕릉들 인근에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장소가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지 않은 왕릉도 찾아다닐 수 있다.

물론 비슷하다고 해서 옆 동네처럼 찾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시공을 헤매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찾아다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만인릉 이전의 왕릉이라. 우리가 찾아야 할 것도 그것이로군요.

"네, 찾다보면 첫 번째 상급 사제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겠죠. 저희가 수색해 보고 또 발견되는 게 있으면 알려 드릴게요."

< 버려진 후의 역사(2) > 끝

< 시뮬레이션(1) >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빅 매치'입니다!"

수염을 기른 갈색 머리의 잘생긴 중년 사내가 카메라를 보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그는 프랑스의 인기 스포츠 쇼 프로그램인 '오늘의 빅 매치'의 MC 조엘 란넨스키였다.

전쟁 때 뛰어난 활약을 한 베테랑 초인이었고, 배틀필드 초창기 3년간 선수 생활을 하며 월드 클래스의 평가를 받았다.

지금은 또 방송인으로서 잘나가니, 인생이 성공밖에 없다며 모두가 부러워했다.

조엘 란넨스키가 말했다.

"오늘은 색다르게 구시대의 유물들을 게스트로 모셨습니다. 한번 보시죠."

그렇게 소개받고 카메라에 비춰진 게스트는 둘.

하나는 유럽을 휘어잡은 초인 에이전트 제이크 랜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놀랍게도 7영웅의 에릭 튀랑이었다.

전쟁 시절에 실력과 인품으로 명성을 떨친 초인이자 지금은 배틀필드계 최고의 에이전트로 자리 잡은 제이크 랜드는 장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서글서글한 미남이었다.

"제이크 랜드 씨야 TV에 자주 보는 얼굴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죠. 전에도 우리 쇼에 나왔고요."

"그렇다고 대접이 이러기입니까?"

제이크 랜드가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렸다. TV 앞에서 전혀 어색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순박한 인상의 흑인 사내는 달랐다.

모든 게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도 낯설었다. 에릭 튀랑은 TV에 거의 출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릭 튀랑 씨!"

"예? 아, 예."

딴청을 부리다가 뒤늦게 대꾸한 에릭 튀랑.

조엘은 웃었다.

"여기 집중 좀 해주세요."

"아아, 죄송합니다. TV 출연은 뉴스 말곤 처음이라서."

"그러네요. 저도 튀랑 씨를 마지막으로 본 게, 낚시하다 배가 난파됐다는 뉴스였네요."

"네, 며칠 내내 헤엄쳐서 해안가에 있던 작은 마을에서 쉬고 있었죠. 그런데 아내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는 바람에 전화를 빌려서 해야 했어요."

에릭 튀랑의 말에 조엘과 제이크 랜드는 낄낄 웃었다.

"그러고 보면 실종 신고된 적이 많은데요,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자초하시는 건가요?"

"하하, 글쎄요······."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전쟁 끝나고 갑자기 찾아온 평화로운 세상에 적응을 못 했었거든요. 다행히 배틀필드가 생겨서 안정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었죠."

역시나 초인이었던 제이크 랜드도 그 말에 동의했다.

"지금은 대부분 은퇴했지만, 전쟁을 겪었던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많은 케어가 필요했죠. 정신력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처럼 외상 후 스트레스는 잘 안 나타나지만, 튀랑 씨처럼 스릴을 원하는 경우가 많이 생겨요."

"자, 튀랑 씨. 어떤가요? 심심하시면 차라리 배틀필드 선수가 되시죠?"

그 말에 에릭 튀랑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안 돼요. 배틀필드는 실제로 목숨이 위험하지가 않잖아요. 심지어 죽을 정도의 고통도 느끼기 전에 접속 종료되고요. 그런 것을 해도 전혀 위기감이 안 들어요."

"허어, 정말로 목숨이 걸려야 직성이 풀리시는군요."

"정말 이런 선수가 제일 골치인데."

조엘과 제이크 랜드가 혀를 차자, 에릭 튀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스릴 중독이 맞아요. 하지만 이유는 조금 달라요."

"그럼 어떤 심리입니까?"

"음, 서문욥이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넌 쓸모없는 머저리인데 위기가 닥치면 쓸 만해진다고요. 실제로 저를 7영웅에 뽑아서는 저를 수시로 위기 상황에 밀어 넣었죠. 전 위기 때 신체 능력이 향상되는 초능력이 있었거든요."

"그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시키려고 위기에 몰아넣었던 거군요."

"무서운 리더로군요. 전 던전에서 저를 일부러 위기에 던져놓는 리더와 절대로 일을 못 했을 거예요."

"하하, 욥은 좀 달랐어요. 꼼짝없이 죽을 상황은 피해서,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 있는 정도의 상황에만 만들었죠. 욥은 그런 상황을 굉장히 잘 컨트롤했어요."

에릭 튀랑이 말을 이었다.

"처음엔 이러다 죽겠다고 무서워했는데, 그런 경험이 계속되니까 제게 특별한 악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위기가 닥쳤을 때 저는 특별한 행운이 생겨요. 아마도 이것도 제 초능력이라고 생각해요. 확인이 안 되는 초능력이지만요."

"예, 언제 한번 튀랑 씨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행운을 실험하도록 하죠. 오늘은 요 며칠 사이에 있었던 빅 매치 하이라이트를 함께 볼 시간입니다."

잡담을 한참 나눈 후에야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루에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경기가 있는 배틀필드였지만, 그중 '오늘의 빅 매치'에서 다루는 경기는 한둘이었다.

선수들의 활약이 등장하는 하이라이트를 보여주면, 게스트로 초대된 두 사람이 코멘트를 하는 방식이었다.

제이크 랜드는 에이전트의 관점에서 설명했는데, 다행히도 에릭 튀랑도 행동거지나 성격과 달리 전문적인 의견을 보여주었다.

풍부한 실전 경험을 토대로 해당 선수의 플레이를 설명하고 칭찬하는 에릭 튀랑의 모습이 신선해 보여서 쇼 호스트인 조엘 란넨스키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럼 가장 주목할 경기를 보겠습니다. 아시아 챔스 조별 예선! 서문엽의 YSM과 아시아 최강 팀 텐진 타이콴의 2차전이죠."

"이제 더 이상 아시아 최강이라 말할 수 없게 되었죠."

제이크 랜드가 덧붙였다.

"예, 그렇습니다! 지난번 월드 챔스에서 8강까지 올랐던 텐진 타이콴은 지난 1차전에서 YSM에게 무참히 패배했죠. 이번에는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었을 텐데,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1세트 경기 내용이 요약되어서 주요 장면만 펼쳐졌다.

먼저 선수 입장.

"여전히 피에트로 아넬라 선수는 출전을 안 했네요. 프로리그에서도 안 보이고, 최근 실종설까지 돌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YSM은 아시아 챔스의 강력한 우승 후보입니다."

"YSM은 참 탐나는 선수가 많으니까요. 사니야와 파울 콜린스, 무엇보다도 원거리 딜러로 포지션 전향에 성공한 개리 윌리엄스가 주목할 만하죠."

"하하, 제이크. 당신은 백하연의 에이전트를 맡으면서 서문엽과도 인연을 맺었잖습니까? YSM 선수들을 줄기차게 꼬셨을 것 같은데 성과가 어떻습니까?"

"하하, 중요한 비즈니스라 말을 아끼겠습니다. 이야기가 잘되고 있는 선수는 있습니다."

사실 제이크 랜드는 사니야와 이야기가 잘되고 있었다. 야망이 많은 사니야는 빅 클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만약 YSM을 떠나게 된다면 연락하기로 했다. 물론 YSM이 월드 챔스 우승이라도 하면 얘기가 달라질 테지만 말이다.

"가장 탐난 선수는 역시 피에트로 아넬라였겠죠? 서문엽은 구단주라 불가능하니까요."

그 말에 제이크 랜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선수는 포기했습니다. 제가 지금껏 본 어떤 선수와도 달라요. 피에트로 선수가 지금 받는 연봉이 약 10만 유로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와우! 주급이 아니라요?"

"예, 돈에 일절 관심이 없는 거죠. 서문엽 씨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 의심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여러모로 우리들 인간 세상에서 초탈한 수도사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자,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오늘 서문엽의 무장이 상당히 가볍죠?"

"근접 딜러 복장이군요."

그랬다.

이번 경기에서 서문엽은 근접 딜러처럼 가벼운 무장으로 출전했다.

탱커 같은 중무장이 아니라서 몸이 훨씬 가벼워진 상태.

그만큼 방어력이 낮아지지만, 대신 이동 속도가 훨씬 빨라진다.

에릭 튀랑이 말했다.

"요즘 욥의 스피드가 말도 못 하게 빨라졌더라고요. 경기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예전에는 순발력이나 반응 속도는 빠르지만 발 자체는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거든요."

"근력도 올라갔죠. 여전히 예전 스타일대로 싸우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웬만한 클래식 탱커보다 센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이크 랜드가 거들었다.

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죠. 이제 서문엽에게 약점이 없어졌다고요."

"약점이라······."

에릭 튀랑이 유심히 서문엽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지켜보았다.

오랜만에 견제 플레이에 나선 서문엽은 혼자서 텐진 타이콴 선수 4인을 처치해 버렸다.

텐진 타이콴 선수들이 초능력을 적극적으로 쓰며 협공하는 포메이션을 구사했지만, 엄청난 스피드로 회피했다.

마치 사과를 돌려 깎듯, 시계 방향으로 돌며 4인을 차례로 처치해 버리는 무서운 속도와 창술 테크닉!

순간순간마다 절묘하게 펼친 페인팅에 텐진 타이콴 선수들은 최면에 빠진 것처럼 속절없이 걸려들었다.

제이크 랜드가 혀를 내둘렀다.

"말이 나오지 않네요. 제가 본 가장 뛰어난 역량의 플레이입니다."

"예, 첨언하자면 상대는 결코 약한 게 아니었습니다. 텐진 타이콴은 유럽의 상위권 클럽들과 견주어지는 강팀이죠."

"예, 최근 중국 배틀필드 시장이 개방되는 풍조여서 저도 노리는 선수가 꽤 많습니다."

1세트는 결국 서문엽의 4킬로 승기가 YSM에게 기울었다.

서문엽은 계속 달려서 혼자 무려 9킬을 하는 살상력을 떨쳤다.

"하하, 칸 아르얀 자식! 아무것도 안 하고 11어시스트를 챙겼네."

에릭 튀랑이 낄낄 웃었다.

추억의 7영웅 동료들 중 무려 2명이나 경기에 나오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오늘 경기에서는 어시스트를 공짜로 쌓은 느낌이었지만, 칸 아르얀도 요즘 주목받는 선수죠. 동안인 얼굴처럼 신체도 아직 저렇게 젊을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습니다."

"평소에 몸 관리를 잘했다고는 할 수 없는 선수인데, 행운을 타고난 선수네요."

탱커 3명을 따로 두고, 서문엽은 근접 딜러로 출전하는 스타일은 2세트에서도 펼쳐졌다.

딜러가 되어 기동력을 최대한 살린 서문엽은 그야말로 전천후로 날아다녔다.

멀리서 창을 던질 때는 원거리 딜러였고, 가까이서 싸울 때는 근접 딜러였다.

창 리치 이내로 적의 접근을 허용했을 때도 서문엽은 끄떡없었다. 무장은 가벼워도 여전히 왼손에 방패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그의 방패는 주로 후려치는 공격에 쓰였다.

기동성을 최대한 살려 치고 빠져서 아예 적의 공격을 허용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2세트에서 기록한 서문엽의 공격 포인트는 8킬 1어시.

"두 세트에서 17킬. 이걸로 결정됐네요. 서문엽은 근접 딜러로 출전했을 때 더 무섭습니다. 다만 탱커진이 서문엽 없이도 충분히 방어력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말이죠. 파리 뤼미에르나 베를린 블리츠 같은 최강 팀을 상대로도 저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저 같으면

다음 이적 시장에서 어떻게든 월드 클래스의 탱커를 영입하고, 서문엽을 자유롭게 만들 겁니다."

"아하, 그 부분이 오늘 나오지 않았네요. 서문엽 선수의 원맨쇼로 경기가 끝나 버렸으니까요. 월드 챔스를 목표로 두고 있는 야심만만한 YSM인데요, 아직 서문엽을 제외한 탱커진들이 시험에 통과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유심히 서문엽을 살펴보던 에릭 튀랑이 입을 열었다.

"전 욥의 약점을 알 것 같아요."

모두의 이목이 에릭 튀랑에게 모였다.

"예전의 욥과 지금의 욥은 육체의 성능이 완전히 달라요. 근데 스타일은 아직 예전 그대로에요."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한 점에서는 한결 나아졌다고 보여집니다만."

제이크 랜드가 반론했다.

"그건 욥이 백제호를 어떻게 다뤘는지 못 봐서 그래요."

에릭 튀랑이 고개를 저었다.

"백제호는 칼솜씨가 별로였어요. 근데 최고의 테크닉은 스피드라고 욥이 항상 강조하며 백제호의 전투능력을 최고로 끌어올렸죠."

설명이 이어졌다.

"오늘 욥의 경기에서 스피드는 이동 시간을 단축하는 용도로만 쓰였지, 킬을 할 때는 예전처럼 테크닉에 집중됐어요."

에릭 튀랑은 웃으며 설명을 마무리했다.

"근데 욥도 그걸 아는 것 같아요. 스피드와 강한 힘을 온전히 활용하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것 같아요."

< 시뮬레이션(1) > 끝

< 시뮬레이션(2) >

"나도 안다, 자식아."

서문엽은 TV를 보며 뚱하게 대꾸했다.

오랜만에 TV에 출연한 에릭 튀랑이 '서문엽의 약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에릭 튀랑은 저 TV 출연으로 인해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이미지를 벗고 의외로 날카로운 식견을 지녔다는 호평을 받게 되었다.

지난번 경기에서 근접 딜러로 출전했던 것은 속도 95를 다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가브리엘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이 서문엽의 플레이를 분석하고서 제안한 결과였다.

"지금까지의 플레이를 보면, 구단주님은 데스당할 때 말고는 갑옷이 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

"전쟁 시대엔 공격이 갑옷에 직격당하면 중상이나 사망이었지요?"

"그렇긴 하지."

생각해 보니 정말 갑옷이 무용지물이었다.

전쟁 시절엔 갑옷을 제작하는 합금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해서 던전의 괴물이나 지저인의 공격에 버티지 못했다.

그래서 절대로 공격에 당하지 않도록 서문엽의 전투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중무장한 클래식 탱커와 무장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하고 대신 기동성을 높인 요즘의 탱커가 있는데, 구단주님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갑옷이 의미 없습니다. 대부분 피하거나 방패로 막으시죠."

그래서 가브리엘 감독이 낸 제안이 바로 딜러처럼 가볍게 무장하라는 거였다.

성과도 있었다.

가벼운 무장으로 속도 95를 다 살린 서문엽은 이동 시간을 급격히 단축했다.

적의 공격 범위에서 탈출하는 데도 용이해졌다. 백제호의 예전 스타일을 다소 참고하여 치고 빠지는 스타일을 구사했다.

그런 면에서는 '기동성 활용이 한결 나아졌다'는 제이크 랜드의 의견도 옳았다.

하지만 에릭 튀랑의 의견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닌 게, 킬 순간에는 여전히 테크닉만 쓰였다.

옛날부터 기술은 최고치였던 서문엽이다.

당연히 그의 전투 기술은 적을 속이고 빈틈을 만드는 테크니컬한 스타일이다.

심지어 시각적 이미지를 창에 싣는 페인트까지 습득하는 바람에 그 방면이 극대화되었다.

'이걸로 부족해.'

배틀필드야 지금의 스타일로도 충분히 씹어 먹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문엽의 최종 목표는 예언의 괴물.

자신의 모든 능력을 100% 활용할 수 있도록 스타일을 개량시켜야 했다. 그래야만이 정체되어 있는 능력치도 더 향상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피에트로가 결과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파앗!

공간 이동으로 서문엽의 사무실에 나타난 피에트로는 접속 모듈도 2기 가져왔다.

"아바타의 제한이 해제된 접속 모듈 2기다."

"괴물은 완성된 거야?"

"최대한 내가 파악한 괴물 왕을 구현했다. 하지만 미리 경고해 두자면, 실제 왕은 이보다 더 강할 거다."

서문엽은 히죽 웃었다.

"그런 말을 하면 더 싸워보고 싶잖아?"

"같이해 보지."

팀 훈련이 끝나고 늦은 시각.

두 사람은 함께 접속 모듈에 들어갔다.

***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

거대한 바위들이 여기저기에 산처럼 서 있는 지형.

서문엽과 피에트로는 뱀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감각이 예민한 놈이다. 말할 때 오러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라. 할 줄 알 테지?

-어, 할 줄 알아.

서문엽은 피에트로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건넸다.

피에트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투박하군. 오러의 파동도 쉽게 알아차린다. 더 적은 오러로 조심히 얘기하도록 해라.

-끄응, 이 정도면 돼?

서문엽은 아주 극미량의 오러만 써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아직 모자라지만 어쩔 수 없군. 저 뱀 보이나?

-그래. 이야, 진짜 저 크기 맞아?

서문엽은 뱀을 보고 감탄을 했다.

커도 너무 컸다.

똬리를 틀고 자고 있는 모습이 산과 같았다.

몸을 펴고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면 구름에 닿을 지경이다.

-고대의 선조들이 만든 뱀이다. 괴물 생태계에서 그리 유리한 종은 아니지. 맹독 외엔 큰 무기가 없고, 대부분의 괴물은 그 정도 맹독에는 내성이 있으니까.

-전혀 안 약해 보이는데?

-단점만큼 장점도 있지. 안전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최대 저 크기까지 성장할 수 있다. 오러 보유량의 한계도 다른 괴물보다 훨씬 높지. 고대의 선조들은 오러 저장고 같은 역할로 저 괴물 종을 활용했더군.

-너희 조상 돌았지?

-저렇게까지 크도록 방치했을 리가 없으니까. 야생에서도 저렇게 크기 전에 다른 괴물에게 죽임당한다. 특별한 지능이 없는 한은.

서문엽은 뱀을 보고 질렸다.

분석안에 나오는 수치가 괴랄했다.

-대상: 뱀(괴물)

-근력 40318/40318

-민첩성 1001/1001

-오러 20172/20172

-약점: 없음

서문엽은 지금까지 살면서 천 단위를 넘어가는 능력치를 본 적이 없었다. 엄청나게 큰 보스 몹 괴물도 근력이 천 단위였다.

단순히 순수 근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 근력에 체중까지 실리면 자연재해다.

오러가 연소되어서 운동 에너지가 더 극대화될 테니 실질적으로는 몇 배로 위력이 불어난다.

그나마 낮은 민첩성도 1001.

저 덩치로, 서문엽보다 10배는 더 민첩하다는 뜻이니 이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오러 2만은 그저 웃음만 나온다.

-인간적으로 저건 좀 심하지 않냐?

-많이 약해진 상태다.

-뭐?

-시간을 조작해서 실제 왕의 추정 나이를 적용시켰다. 노화가 한참 진행된 상태지. 오차 범위가 클뿐더러, 실제 왕은 지능을 얻어서 오러를 일찍부터 활성화했으니 노화가 더 더딜 수 있다.

서문엽은 하마터면 욕을 할 뻔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이길 각이 안 나오는데.

서문엽은 싸우기가 싫었다.

1%라도 승산이 있으면 어떻게든 공략하는 것이 서문엽의 근성이었다.

그런데 저건 좀 심하다.

타격을 입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냐. 영체로 접근하면 돼.'

서문엽은 마음을 다잡았다.

민첩성 1001.

놈은 분명 자신의 반응 속도보다 더 빠르게 공격할 거다.

피할 틈도 없으리라.

하지만 영체로 변신하면 공격을 무시할 수 있다.

-일단 한 번 해봐야겠다.

서문엽은 창과 방패를 들고 나섰다.

쉬이익.

뱀은 곧장 서문엽의 인기척을 발견하곤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노란 눈동자 한 쌍이 서문엽을 주시한다. 오싹해졌지만 겁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파아앗!

곧장 '불사'를 증폭시켰다.

영체로 변신한 서문엽.

뱀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서문엽을 파악하려 든다.

혓바닥에서 엄청난 양의 오러가 뿜어져 나와서 위협적이었다.

서문엽에게는 엄청난 양의 오러가, 저 뱀에게는 그저 적을 감지하기 위해 내보내는 정찰용에 불과하니까.

-에라 모르겠다!

팟!

서문엽이 달려들었다.

뱀은 곧장 꼬리를 휘둘렀다.

예상대로 서문엽이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영체니까 무시해도 괜······!'

뻐어억!

***

"뭐야, 저건!"

훈련은 중단됐다.

덤빈 지 1초 만에 데스당한 서문엽은 무척 열받은 상태였다.

게임으로 치면 하드코어 게이머인 서문엽. 깨라고 만든 스테이지가 아닌데도 어떻게든 공략한다.

하지만 아예 시스템상으로 공략이 불가능하게 만들어놓으면, 개발자에게 쌍욕을 하기 마련.

"저게 말이 돼!"

서문엽은 피에트로에게 분노를 퍼부었다.

피에트로는 덤덤히 대꾸했다.

"왕은 영혼도 다룬다. 나보다도 잘. 영체를 공격 못 할 거라고 생각했나? 그랬으면 만인릉의 황제가 고생하지도 않았겠지."

"···그건 그러네."

슬그머니 수긍한 서문엽.

"게다가 방금 공격은 영혼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수법도 아니었다."

"뭐?"

"넌 그냥 엄청난 오러의 격류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영체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서문엽은 그저 멍해졌다.

단순히 꼬리를 휘두를 때도 그 정도의 오러를 실었단 말인가.

세계의 멸망이 피부로 느껴지는 한 방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이길 생각은 없었어. 그냥 한 대만 때려보자는 생각이었지. 근데 한 대도 못 때리겠네. 네가 녀석의 움직임을 잠시 멎게 할 수 있겠냐?"

피에트로는 고개를 저었다.

"내 힘으로도 불가능하다. 다만 이목을 돌려서 반응 속도가 살짝 늦어지게 할 수는 있겠지."

그래봤자 여전히 피할 수 없는 스피드로 꼬리를 휘두를 테지만 말이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떡였다.

"좋아, 일단 그걸 목표로 하자. 첫 공격을 어떻게든 피하는 게 1단계 훈련이다."

피에트로는 그런 서문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구원자가 맞나 보군.'

그 괴물을 보고도 여전히 투지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다. 합리적인 피에트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끈기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훈련이 시작됐다.

예언의 괴물을 상대하기 위한 전투 시뮬레이션.

시작은 암담했다.

피에트로가 온갖 화려한 수법을 다 동원해서 뱀의 시선을 돌렸다.

그 틈에 영체가 된 서문엽이 돌입했다.

그러나 피에트로를 신경 쓰다가 이내 영체를 보는 뱀.

뒤늦게 꼬리를 휘둘렀고.

뻐어억!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씨발, 다시!"

서문엽은 독기를 품고 계속 도전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꼬리를 휘두를 걸 알고 있는데도 못 피했다.

휘두르기 전에 피했는데도 말이다.

때로는 너무 성급하게 피하는 바람에, 꼬리가 수정된 각도로 날아와 파리 쫓듯 후려쳐 버렸다.

그렇게 30회쯤 시도를 하고 난 뒤였다.

"미치겠네."

잠시 휴식을 하던 서문엽은 문득 사무실의 거울로 스스로를 보며 분석안을 펼쳤다.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94/95

-민첩성 100/101

-속도 95/96

-지구력 97/98

-정신력 110/111

-기술 105/106

-오러 108/109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영혼 연성.

'어라?'

서문엽은 깜짝 놀랐다.

98이었던 민첩성이 100이 되어 있었다.

민첩성이 하루 만에 2가 오른 경험은 처음이었다.

가상 던전에 접속한 상태에서는 피지컬이 오르지 않는다. 신체 역시 가상의 아바타니까.

그런데 민첩성이 올랐다는 것은, 서문엽의 반사 신경이 빨라졌다는 뜻이었다.

뱀의 공격 속도에 반응하려고 애쓰다 보니, 초인적인 집중력과 맞물려서 뇌가 몸에 신호를 보내는 속도가 빨라진 것.

서문엽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연마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민첩성이다. 근력이고 지구력이고 나발이고, 일단은 첫 공격을 피할 정도의 민첩성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해.'

훈련은 좀 더 체계적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가브리엘 감독과 실력 있는 코치진이 YSM에 있었다.

가브리엘 감독을 찾아간 서문엽이 말했다.

"갑옷을 좀 더 경량화해야겠어."

"지금보다 더 말입니까?"

"어."

"지금도 이미 무장 상태가 딜러 수준입니다. 그보다 더 가벼우면 방어력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괜찮아. 피하면 돼. 그리고 민첩성을 높일 수 있는 트레이닝 코스를 짜줘."

"갑옷뿐만 아니라 몸도 더 가볍게 하시겠다는 거군요. 근력의 손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괜찮아. 난 더 빨라져야 해."

서문엽은 확인을 가지고 단호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피지컬 테스트를 다시 한번 하고 트레이닝 코스를 짜보도록 하죠."

그리하여 클럽하우스 내에 있는 메디컬 테스트 룸에서 피지컬 측정이 다시 이루어졌다.

양쪽 벽의 버튼을 연달아 누르는 테스트.

서문엽은 미친 듯이 움직였다.

파파파파파팟!

"헉."

"저게 사람이야?"

코치진은 멍해졌다. 가브리엘 감독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때? 얼마나 나왔어?"

"1011점입니다. 비공식 세계 신기록이죠. 이보다 더 빨라져야겠다는 것은 욕심 아닐까요?"

"아냐. 내 생각은 확고해."

처음 아바타 테스트를 했을 때, 서문엽은 나단 베르나흐와 같은 1007점 타이 기록을 세운 바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육체 능력을 향상시킨 상태, 즉 초능력으로 각성하기 전의 '증폭'이었다.

지금은 민첩성을 증폭하지 않고도 최대 기록을 세운 것이다.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갔다.

식단부터 조절하며, 매일 엄청난 양의 운동을 했다. 오직 민첩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코스였다.

웬만한 선수들도 오래 버틸 수 없는 혹독한 난이도였지만, 서문엽은 정신력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괜찮아. 지금보다 더 빡세게 가자."

"아무리 초인이라도 부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동준이 불러. 걔가 회복 걸어주면 돼."

그 말에 최동준 수석 코치가 훈련에 합류했다.

감독으로서는 부족했지만 선수들의 멘탈 관리에 능한 최동준 수석 코치는 서포터 출신으로 '회복'과 '고취'를 갖고 있었다.

최동준 수석 코치가 '회복'을 수시로 걸어주면서, 훈련이 더욱 탄력을 받았다.

YSM의 선수들은 서문엽의 엄청난 트레이닝에 자극받았다.

'세상에. 난 절대 저렇게 못해.'

'어떻게 저런 훈련을 참고 계속할 수 있는 거야?'

'괜히 세상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구나. 멘탈부터가 인간이 아니었어.'

선수들은 그런 서문엽의 노력을 월드 챔스 우승을 위한 집념으로 착각했다.

구단주조차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자신들도 가만히 안주하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느꼈다. 그들도 덩달아 평소보다 독한 훈련에 참여했다.

YSM에 활기가 돌았다.

'정말 우승이 꿈은 아니군.'

가브리엘 감독은 팀의 분위기를 느끼고는 희망을 얻었다.

그러나 트레이닝이 언제나 플러스만 된다면, 세상에 혹사하지 않는 선수가 없으리라.

혹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인 결과, 체중이 줄었다. 그와 함께 근력도 94에서 93으로 하락. 그나마 손실이 이 정도에서 그친 것도 코치진의 뛰어난 캐어 덕분이었다.

'좋아, 잘되고 있다.'

서문엽은 도리어 만족을 느낀다.

그 이유는 분석안으로 보이는 능력치가 설명해주었다.

-민첩성 103/104

누구도 견딜 수 없는 혹독한 트레이닝.

그리고 1분 1초도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해 훈련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정신력.

그 결과, 놀라운 수치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 시뮬레이션(2) > 끝

< 스피드(1) >

경량화된 방어구 제작을 맡긴 곳은 역시나 모로 공방이었다.

모로 공방은 마침 경량화에 최적화된 합금을 1년 전에 개발한 상태였다. 방어력이 너무 낮아 결국 사장된 재질인데, 서문엽의 주문에 의해 다시 쓰이게 되었다.

혹독한 훈련으로 체격이 달라졌으므로, 다시 치수를 재서 모로 공방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모로 공방은 금방 방어구를 완성하여 보내주었다.

갑옷부터 하나씩 걸쳤다.

투구, 부츠 등 모든 게 가벼웠다.

확실히 괴물에게 얻어맞으면 찢길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 뱀 대가리한테는 빗맞아도 사망이야.'

하드 트레이닝을 하면서도 밤에는 계속 뱀과 사투를 벌인 서문엽.

여전히 첫 공격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정타(正打)는 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빗맞아도 골로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심 타락한 대사제를 처치해서 미연에 방지하길 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뱀과 싸워 이길 생각을 포기하진 않았다.

매일 사투를 벌인 효과는 있었다.

낮에는 육체를 트레이닝하고, 밤에는 뱀의 일격을 피하는 타이밍을 재며 반사 신경을 훈련했다.

검정색 슈트에 YSM의 팀 컬러인 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서문엽.

다 착용하고 나니 예전 장비보다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 좋았다.

전신 거울로 확인하고는 만족감을 느꼈다.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93/95

-민첩성 106/107

-속도 96/97

-지구력 98/99

-정신력 111/112

-기술 107/108

-오러 108/109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영혼 연성.

훈련의 효과가 나타났다.

근력은 여전히 1 하락한 93 그대로. 이 정도를 유지한 것도 우수한 코치진 노력이 컸다.

대신 민첩성이 무려 106.

가브리엘 감독은 인간이 어디까지 빨라질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속도, 지구력, 정신력이 1씩 올랐다.

몸이 가벼워져서 속도가 올랐다.

또한 워낙 혹독한 훈련 강도를 견디고, 계속 집중력을 100% 유지했으니 정신력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력도 마찬가지였고.

'좋아. 강해지고 있어.'

기술도 그사이에 2 올랐다.

서문엽은 스스로를 아무리 몰아붙여도 멘탈이 부서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쉴 때도 그냥 쉬지 않았다.

쉬는 동안은 태블릿 PC로 나단 베르나흐의 플레이 영상을 참고하며 스피드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연구했다.

YSM 선수들은 서문엽이 월드 챔스에서 나단 베르나흐를 만났을 때를 대비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참고하고 써먹을 부분을 찾고 있었다.

나단 베르나흐는 서문엽이 아는 한 자기 스피드를 가장 잘 활용하는 선수였으니까.

무게가 서로 다른 두 자루 쌍도를 휘두르며 변칙적인 움직임을 일으키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상당히 간결했다.

쌍도법은 화려하지만, 단칼에 처치하는 것보다 시간이 낭비되기 때문에 자주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쌍도법을 저 정도까지 연마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단은 서문엽처럼 절묘한 속임수로 상대를 속이기보다는, 스피드로 윽박질러서 처치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말이다.

'완급 조절이야.'

아무리 빨라도, 계속 최고 속도로 쌍도를 휘두르면 결국 상대도 적응한다.

그러니 쌍도법의 변칙으로 한 번씩 쉬어가며 기어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런 완급 조절 덕에 나단은 계속 상대를 더 빠른 스피드로 윽박지르며 단칼에 쉽게 처치할 수 있는 것이다.

'좋아, 나도 할 수 있겠군.'

서문엽은 바로 자신의 전투 스타일에 적용시키기로 했다.

사실 난이도로 따지면 서문엽의 스타일이 가장 어려웠다. 계속 상대를 속이거나 연속 공격으로 상대가 빈틈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설계를 끊임없이 한다.

기술이 100에 달하지 않으면 흉내 낼 수 없는 극한의 난이도였다.

그런 테크닉이 덩치가 산 같은 괴물 뱀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뿐.

어쨌든 그러한 노력으로 기술도 올릴 수 있었다.

근력을 제외하면 종합적으로 쭉쭉 성장하고 있는 서문엽이었다.

"어떻습니까?"

가브리엘 감독이 물었다.

새로운 장비도 선수에게 매우 중요하므로 가브리엘 감독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음, 아주 좋은데? 몸에 무척 가벼워."

"구단주님께서 써보시고 괜찮다면 이나연 선수에게도 적용해 보고 싶습니다."

"아하, 그러네. 넷티도 어차피 스피드로 승부하는 애니까."

지상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인간인 이나연.

달리기와 점프로 날아다니지만, 대신 한 대라도 공격에 당하면 움직임이 멎어버리므로 순식간에 적의 킬 먹잇감이 된다.

어차피 맷집이 약한 거, 아예 서문엽처럼 최경량의 무장으로 무게나 덜자는 아이디어였다.

"일단 내가 한 번 써보고 괜찮다 싶으면 추천할게. 다음 경기가 아시아 챔스 8강전이었나?"

"예, 상대는 대만 팀입니다."

서문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만은 배틀필드에서 그리 강하지 않았다.

"4강전은?"

"아무래도 '베이징 바오펑'이 올라올 겁니다."

베이징 바오펑은 텐진 타이콴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팀이었다.

그제야 서문엽의 표정이 펴졌다.

"4강전으로 하자. 그 전엔 개인 훈련에 좀 더 집중할게."

"예, 그러시죠."

***

-근데 말이지.

뱀을 앞에 두고, 서문엽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한 방에 뒈지면 영체로 변신할 이유가 없잖아? 그러면 '증폭'으로 민첩성을 높이고 뛰어드는 게 낫잖아?

-맞는 말이다.

피에트로가 동의했다. 하지만 그냥 동의하진 않는다.

-다만 접근에 성공하면 무기 영체화 외에 통할 만한 공격은 없을 거다.

-그건 그렇지. 영체화된 무기가 아니면 이쑤시개로 벽돌을 찌른 격일 테니까.

-첫 공격을 피하면 다음 공격이 이어질 거다. 그 짧은 틈에 무기 영체화를 한 뒤에 공격할 수 있을까?

-안 되겠지.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 당장의 목표는 뭐가 됐건 첫 공격을 피하는 거니까.

-마음대로.

피에트로가 마법진을 생성시켰다.

13개의 마법진에서 영령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령들이 폭풍처럼 공격을 개시했지만 뱀은 별반 당황하지 않는다. 날파리 떼라도 본 듯한 반응이다.

그때, 서문엽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영체가 아닌 맨몸이었다.

그래서일까.

뱀이 서문엽을 주시하는 게 평소보다 늦어졌다. 영체가 아니면 뱀이 위협을 느낄 이유가 없었기 때문.

하지만 역시나 서문엽이 가까이 접근하자 뱀도 반응했다.

곧바로 꼬리가 날아든다.

쐐애애애애액!!

엄청나게 굵은 꼬리가 세차게 날아오니 파공성이 폭풍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증폭, 민첩성에!'

서문엽이 힘껏 점프했다.

빠각!

꼬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두 다리가 박살 났다.

"끄헉!"

비명을 지르며 날아간 서문엽이 뱀의 지척에 맥없이 떨어졌다.

두 다리가 으스러져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서문엽은 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다급히 영체로 변했다. 운 좋게 뱀의 지척으로 날아왔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한 대라도 때려서 작은 생채기라도 내고 싶었다.

그러나······.

텁!

꿀꺽!

***

"으헉!"

접속 모듈에서 나온 서문엽은 등에 젖은 식은땀을 닦았다.

마찬가지로 접속을 끊고 나온 피에트로에게 소리쳤다.

"봤냐?"

"봤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접근하는 데는 성공했더군."

"아니, 그거 말고! 그 새끼가 날 한입에 삼켰어!"

뱀의 머리는 꼬리처럼 빨랐다. 그냥 냅다 서문엽을 한입에 삼켰다. 덕분에 서문엽은 뱀의 몸속을 여행하다가 접속이 끊겼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겠군."

"아오, 열받아. 한 방 먹힐 수 있었는데, 역시 접근하고 나서 영체화를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해."

"말했을 거다. 영체화를 하고 가야 접근했을 때 바로 공격할 수 있다고."

영체가 되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날아봐야 뭐 하겠나.

파리채 맞은 파리처럼 꼬리에 맞고 패대기쳐질 뿐인데.

역시나 민첩성을 증폭시켜서 달리는 게 스피드는 가장 빠르다.

서문엽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무기 영체화를 더 빨리 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겠어."

결국 서문엽의 선택은 접근하고 난 후에 무기 영체화를 신속하게 펼쳐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완전 영체 상태로 있으면 오러 소모가 심하다. 저 뱀을 단시간에 처치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장기전을 생각했을 때 완전한 영체 상태로 오러를 소모하면 이길 수 없었다.

"훈련 코스를 하나 더 늘려야 되네. 제기랄, 빡세다 빡세."

그렇지 않아도 혹독한 서문엽의 하루에 무기 영체화 훈련이 추가되었다.

'완전히 피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은 확인했다.'

서문엽의 두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의 삶을 지탱한 원동력, 오기와 투지였다.

'지가 아무리 빨라봐야 신체 구조는 머리, 몸통, 꼬리지. 공격 자체는 단순하니 예측하기도 쉬워.'

***

서문엽은 훈련에 몰두하느라 한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대신 피에트로가 오랜만에 경기장에 돌아왔다.

마법진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피에트로의 플레이는 서문엽의 결장으로 관중들이 아쉬워할 틈도 주지 않았다.

"헉! 저게 뭐야!"

"저, 저걸 어떻게 뚫으라고······."

KB-1 리그 경기에서 만난 화성전자 팀 선수들은 한 타 싸움을 열었다가 눈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13개의 마법진이 주르륵 펼쳐진 채 YSM 선수들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마법진에서는 영령들이 소환되어서 화성전자 선수들을 습격했다.

공격과 방어가 일체화된 최고의 필살기였다.

순식간에 4킬.

틀렸다 싶었는지 화성전자 선수들이 후퇴했다.

그러자 마법진 13개가 이번에는 퇴로를 가로막았다.

앞에는 마법진.

뒤에는 YSM 선수들.

양쪽에서 협공을 받고 화성전자는 전멸했다.

"와아아아아!"

"YSM! YSM!"

"천하무적 피에트로!"

YSM을 응원하는 관중들이 열광했다.

그야말로 적을 질식사시키는 듯한 피에트로의 무적의 마법진!

관중들은 피에트로가 세계 최고의 원거리 딜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피에트로의 활약에 힘입어 YSM은 프로리그에서 연승 행진을 했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도 대만 팀을 꺾고 4강에 진출했다.

4강전 상대는 베이징 바오펑.

중국 슈퍼리그에서 텐진 타이콴과 우승을 다투는 라이벌 팀이었다.

그러나 YSM을 응원하는 한국 팬들은 희희낙락했다.

-베이징 바오펑 월드 챔스 단골 출장하는 강팀으로 유럽 빅 클럽들도 무시 못 한다. 응, 근데 상대가 서문엽.

-서문엽 형님의 킬 신기록 달성을 응원합니다.

-베이징 지금 초상집ㅋㅋㅋ

베이징 바오펑 팬들은 4강전에서 강적 YSM을 만났음에도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결승에서 붙었으면 준우승이라도 했을 텐데 하필 4강에서 만나 버렸다.

-괜찮다. 월드 챔스 티켓은 3장 있다. 3·4위전에서 이기면 월드 챔스에 갈 수 있어.

-내일은 마음은 비우고 아시아의 자존심 서문엽을 응원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이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들다 보니 패닉에 빠질 일도 없는 것.

라이벌 텐진 타이콴 선수들이 무참히 썰려 나가는 걸 보고 이미 마음을 비웠던 베이징 바오펑의 팬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한동안 결장한 서문엽이 이번에는 출전할 거라고 기대를 모았다.

서문엽 본인도 기대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분석안으로 확인할 수는 있지만, 역시 숫자보다는 몸으로 체감하는 게 더 재미있지.'

하루 4시간만 자고 식사도 신속하게 해결하면서, 나머지 모든 시간을 훈련에 쏟았다.

그 결과.

-근력 92/95

-민첩성 107/108

-속도 97/98

-지구력 99/100

-오러 109/110

근력이 1 줄었지만, 다른 네 가지 능력치가 1씩 올랐다.

특히 오러 1 상승은 무기 영체화를 신속하게 펼치는 훈련을 하다가 얻은 쾌거였다.

괴물이 된 서문엽이 양민 학살을 위해 출격 준비 중이었다.

< 스피드(1) > 끝

< 스피드(2) >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4강전.

YSM 대 베이징 바오펑.

1차전은 YSM의 홈인 인천 배틀필드 경기장에서 치르게 되었다.

인천 배틀필드 경기장은 본래 인천 BC의 홈이었다. 그곳을 YSM이 한정실업 시절부터 빌려 쓰고 있을 뿐.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상황이 역전되어 YSM의 홈이고 인천 BC가 빌려 쓰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인천 BC는 KB-2 리그 클럽인 데 반해 YSM은 한국 무대를 제패하고 세계적인 강호로 발돋움하려 했기 때문이다. 현재 인천에서 YSM의 서포터 숫자는 인천 BC를 아득히 압도하고 있었다.

서문엽은 클럽의 재정이 탄탄해지면서 연고지를 옮길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결국 강화도에 남는 선택을 했다. 주변 땅값이 싸서 이것저것 시설을 잔뜩 짓기 쉬웠기 때문.

게다가 인천 전체가 자신들의 연고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인천시장이 서문엽의 팬이라 경기장을 증축해 주는 등 YSM의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인천을 떠나지 말라는 회유였다.

덕분에 인천 BC는 기필코 KB-1 리그로 승격하고야 말겠다며 이를 갈고 있는 상황.

YSM의 영향력은 인천에서 끝나지 않았다.

강화도에서 인천으로 가려면 김포를 반드시 거쳐야 했는데, 김포는 마침 변변한 프로 팀도 없었다. 서문엽의 귀환 이후로 배틀필드 열풍이 불었기 때문에, 김포도 YSM을 자신들의 연고팀으로 여기며 응원했다.

사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서문엽을 응원하고 있으니 주변 지역을 점점 잠식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와아아아!!"

"YSM! YSM! YSM!"

"서문엽! 서문엽!"

인천 배틀필드 경기장.

관중석을 가득 메운 서포터들이 쩌렁쩌렁한 응원을 펼쳤다.

함께 입장한 베이징 바오펑의 선수들은 그 응원 열기에 압도되었다.

YSM의 팬들은 어김없이 야유를 퍼부었다.

"중국 놈들 왔냐!"

"여기가 너희들 무덤이다!"

"서문엽이 너희들 몸에 창으로 꽃꽂이 할 거다!"

"죽으러 잘 왔다!"

선수들이 하나하나 대형스크린에 비춰지며 호명되니 YSM 선수들에게는 환호를, 베이징 바오펑 선수들에게는 야유를 보냈다.

오늘은 오랜만에 서문엽과 피에트로가 함께 출전하는 탓에 관중들이 더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적지의 응원 열기 말고도 베이징 바오펑 선수들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서문엽.

그의 무장이 오늘은 아예 근접 딜러보다도 가벼워 보였던 탓이었다.

'살짝 맞아도 박살 날 것 같은 갑옷인데?'

'대체 얼마나 빨리 움직이려고 작정했기에?'

'전에는 도망치는 리양신도 따라잡았을 정도지.'

서문엽을 상대할 생각에 베이징 바오펑 선수들의 머릿속은 혼잡해졌다. 감독조차 그들에게 수비 위주의 장기전을 주문했다. 약팀이 강팀 상대로 하는 뻔한 방식 말이다. 감독도 이길 생각을 못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1세트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 시작 후 양상은 평범했다.

빠른 사냥이 이번 시즌 테마인 YSM은 1분 1초라도 더 빠르게 사냥하려고 시간 단축에 열을 올렸고, 수비 위주의 장기전을 하려는 베이징 바오펑도 특별한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나 잠깐 다녀온다."

평범하게 사냥을 하던 서문엽이 어슬렁어슬렁 베이징 바오펑의 진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도 만나는 괴물을 사냥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서문엽은 아직 훈련의 성과를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서문엽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든 관중이 이미 그를 주목했다.

-서문엽 선수, 혼자서 적진으로 향합니다.

-단독으로 견제에 나서는데, 정말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위치를 들켜서 11명의 적에게 쫓겨도 몸을 빼낼 자신이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최근 발이 굉장히 빨라진 서문엽 선수이니까요. 심지어 오늘은 경량화된 특수 갑옷을 입고 출전했죠. 보다 스피드를 살린 플레이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 진가를 이제 곧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베이징 바오펑이 이번 경기에 마법형 원거리 딜러 선수를 3명이나 넣었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강한 화력을 지닌 초능력으로 한 타 싸움 시 변수를 만들어보자는 의도죠. 그런데 서문엽 선수는 소멸 광선도 막는 선수라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적진에 도달한 서문엽.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괴물들이 출몰하지 않는 지형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괴물들 탓에 소란이 일어나 위치를 들키면 여기까지 온 게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괴물들의 습성에 대해서는 단연코 서문엽이 제일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서문엽은 손쉽게 괴물들에게 들키지 않고 베이징 바오펑 선수들이 사냥하는 현장에 도착했다.

'5명.'

탱커 1명, 근접 딜러 3명, 원거리 딜러 1명.

5-3-3으로 흩어져서 사냥 중인 듯했다.

가장 견제받기 쉬운 지역에 5명이 조를 이루고, 다른 곳은 3인 1조로 활동하는 패턴이다.

서문엽은 베이징 바오펑이 5-3-3을 썼던 경기들을 떠올려 보았다.

단순한 5-3-3이 아니다.

5인 1조가 중심을 이루고, 3인씩 모인 두 조가 위성처럼 일대를 돌아다니며 사냥 겸 정찰을 해낸다. 대체로 기동력이 좋은 중국 선수들이다 보니 그런 역동적인 전술을 펼치기 용이한 것.

'여기서 저 다섯 녀석을 치면 바로 양방향에서 포위망을 펼치겠군.'

서문엽은 베이징 바오펑 선수들의 움직임을 거의 다 예상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어떻게 공격해서 어느 루트로 빠져나갈지를 구상했다.

전술 100.

서문엽은 금방 견적을 잡았다.

"야, 피에트로."

-뭐냐?

"잠시 후에 내가 지시하면 3-2 구역으로 공간 이동해."

-알았다.

그렇게 안배를 하나 해둔 후, 공격하기로 결심한 서문엽은 창을 꼬나 쥐었다.

쉬익!

첫 공격은 역시 투창으로 시작했다.

손끝으로 창대를 긁어 회전을 일으키며 던진 창은 스크루를 그리며 날아갔다.

타깃은 적 원거리 딜러였다. 강력한 마법형 초능력을 쓰므로 가장 먼저 처치하려 했던 것이다.

"헉!"

아쉽게도 원거리 딜러는 소스라치게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창에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몸을 일으킬 때까지 초능력을 쓰지 못할 테니까.

서문엽은 새 창을 꺼내며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적이다!"

"서문엽!"

베이징 바오펑 선수들이 소리쳤다.

탱커가 본능적으로 앞장서서 서문엽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문엽은 탱커를 피해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탱커도 급히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바로 그때,

휙!

급격한 180도 턴으로 방향 전환!

"큭!"

탱커는 방향 전환을 쫓아가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마술 같은 플레이가 펼쳐졌다.

180도 돌았을 때, 서문엽은 양손에 들고 있던 창과 방패를 바꿔 들고 있었다. 창을 왼손에, 방패를 오른손에 스위칭한 것이다.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탱커를 따돌린 서문엽은, 왼손에 쥔 창을 곧장 던졌다.

탱커가 간신히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쫓아오려 할 때는 이미.

콰직!

-서문엽, 1킬.

탱커를 믿고 바짝 뒤따르던 근접 딜러가 투창에 맞아 데스당한 뒤였다.

눈 뜨고 적에게 따돌려진 탱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금 뭐야? 왜 이렇게 빨라?!'

방향 전환만으로 간단히 따돌려진 경험은 지금까지 결단코 없었다. 이렇게 쉽게 따돌릴 수 있으면 탱커라는 포지션이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동료를 보호해야 하는 탱커의 입장에서 자신이 마크하던 적이 킬을 거두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탱커의 수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씨익.

웃어 보인 서문엽은 새 창을 꺼내 들며 달렸다.

서문엽이 속도는 97.

거기다가 현존하는 방어구 중 가장 가벼운 장비를 무장한 상태.

증폭을 쓰지 않았는데도, 탱커가 따라잡을 수 있는 빠르기가 아니었다.

서문엽은 적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대로 원거리 딜러에게 창을 찔렀다.

이미 몸을 추스르고 초능력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원거리 딜러였지만.

슈칵!

-서문엽, 2킬.

거의 눈 뜨고 킬을 그냥 내줬다.

슬로우 모션으로 보면 가만히 있다가 그냥 창에 찔린 걸로 보였다.

하지만 실제 스피드로 그 광경이 방영된 경기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와아! 빠릅니다! 어떻게 저렇게 빠른가요?!

-창을 찌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상대가 보고도 아무 반응 못 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스피드입니다! 눈앞에서 찌르는데 상대가 반응도 못 할 정도로 빨라요!

그랬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다시 방향을 왼쪽으로 돌려서 2명의 근접 딜러 중 하나를 새 타깃으로 잡았다.

그 와중에 열심히 쫓아오는 탱커를 흘깃 바라보았다.

서문엽은 피식 웃었다.

'고생한다.'

탱커의 존재감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서문엽은 또다시 빠른 스피드로 반시계방향으로 우회하며 탱커를 따돌렸다.

그대로 쌍검을 든 근접 딜러와 맞붙었다.

아니,

촤촥!

-서문엽, 3킬.

한쪽이 일방적으로 죽임당하면 맞붙었다고 표현할 수 없다.

아래, 위로 2번 연속 찌르는 창에 근접 딜러는 삽시간에 데스됐다.

아래를 찌르다가 다시 머리를 찌르는 창의 왕복 속도가 너무 빨랐으니까.

상대가 너무 빠르면, 그 템포를 쫓기도 바빠서 깊이 생각할 틈이 없다. 그 결과, 간단한 트릭에도 자기도 모르게 반응해 버린다.

'이런 맛이구나.'

나단 베르나흐가 왜 매년 킬을 쓸어 담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적의 목을 따기가 너무나 손쉬운 스피드의 세계였다.

"내 뒤로 와!"

동료 세 명이 죽을 때까지 아무 것도 못한 탱커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근접 딜러 1명은 다급히 탱커의 뒤로 피신했다.

서문엽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이미 양방향에서 적들이 몰려오고 있다. 미리 플랜을 다 계산했기 때문에 단 1초도 낭비할 수 없었다.

촤악! 촥! 촥!

서문엽은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좌, 우, 좌, 우로 지그재그 스텝을 밟았다.

탱커도 덩달아 좌, 우, 좌, 우로 고개가 휙휙 돌아갔다.

고개만 돌리는데도 너무 빨라서 템포를 따라잡기 벅찼다.

자연히, 서문엽이 오른손에 쥔 창에 주의가 쏠릴 수밖에 없다. 방패보다 창이 더 위협적인 건 당연했으니까.

그 심리를 서문엽이 모를 리 없었다.

뻐억!

-서문엽, 4킬.

결국 공격은 왼손에 든 방패로 후려치기였다.

탱커마저 4킬의 희생양이 되었다.

"으악! 괴물!"

탱커까지 데스되자 홀로 남은 근접 딜러는 재빨리 달아났다.

서문엽은 쫓지 않았다.

슬슬 양방향에서 적들이 나타날 시간이었으니까.

서문엽은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7명의 베이징 바오펑 선수들이 양방향에서 그를 추격했다.

단 한 사람에게 최단시간에 4킬을 헌납해 버렸다. 이대로 멀쩡히 보내면 수치였다.

"잡아!"

"서문엽을 처치해야 돼!"

"이대로 살려 보낼 수는 없어!"

하지만 맹렬히 쫓아온 그들을 반긴 것은 바로 피에트로였다.

서문엽의 지시로 공간 이동해 온 상태였던 것이다.

13개의 마법진이 허공에 떠오른 채 플래카드처럼 환영하는 것을 보며, 베이징 바오펑의 선수들은 졌음을 직감했다.

피에트로는 영령을 소환하여 3킬 1어시를 기록했다.

그리고 서문엽은 혼자서 살아남은 적 잔당을 모두 처치해 8킬을 기록했다.

한 세트 8킬도 대단한데, 심지어 최단 시간 8킬 신기록이었다.

서문엽은 이미 자신의 스피드를 100% 살린 스타일을 완성한 모습이었다.

< 스피드(2) > 끝

< 스피드(3) >

서문엽의 경이로운 플레이에 떠들썩한 경기장.

베이징 바오펑의 선수 대기실까지 환호성이 들릴 정도였다. 가뜩이나 초상집 분위기인데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격이었다.

선수들은 모두 멍해져 있었다.

감독도 덩달아 멍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그제야 정신이 현실 세계로 돌아온 선수들.

감독이 말했다.

"5-6으로 간다. 절대로 개별 행동 하지 말고, 언제든 위급 상황 시 금방 합류할 수 있도록 서로 거리 유지한다."

"예······."

선수들은 대답은 했지만 자신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중 셋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문엽에게 데스당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것도 아닌데, 제대로 합을 나눈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불가항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스피드였다. 서문엽 혼자 2배속으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 경기는 5탱커 체제로 간다."

선수들의 안색이 더 안 좋아졌다.

5탱커에 마법형 원거리 딜러만 3명.

그야말로 한 타 싸움에서 요행히 이기는 것을 노리는 조합인 것이다.

"탱커들은 서문엽을 쫓으려 하지 마. 저 속도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대신 지역 방어로 딜러들이 대피할 수 있는 방어선을 형성하는 거다. 알겠나?"

"예!"

명색이 베이징 바오펑이라는 중국 명문 클럽의 감독이기에 급조된 대책이라도 마련했다.

하지만 2세트 경기 시작 전을 알리는 안내가 들리자, 선수들은 도살장이 끌려가듯이 접속 모듈로 향했다.

선수들을 보내는 감독도 침통한 얼굴이었다.

'파리 뤼미에르와 경기를 치렀을 때도 이 정도로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나 가지고······.'

월드 챔피언스리그에서 파리 뤼미에르 BC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는 베이징 바오펑.

그때 이후로 파리 뤼미에르 BC의 전술을 본받아 기동력을 살린 3탱커 전술로 팀의 색채를 바꿨고, 지금까지는 성공적인 변화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다시 세계 정상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전에 터무니없는 괴물을 만나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