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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드(3) >

서문엽의 경이로운 플레이에 떠들썩한 경기장.

베이징 바오펑의 선수 대기실까지 환호성이 들릴 정도였다. 가뜩이나 초상집 분위기인데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격이었다.

선수들은 모두 멍해져 있었다.

감독도 덩달아 멍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그제야 정신이 현실 세계로 돌아온 선수들.

감독이 말했다.

"5-6으로 간다. 절대로 개별 행동 하지 말고, 언제든 위급 상황 시 금방 합류할 수 있도록 서로 거리 유지한다."

"예······."

선수들은 대답은 했지만 자신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중 셋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문엽에게 데스당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것도 아닌데, 제대로 합을 나눈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불가항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스피드였다. 서문엽 혼자 2배속으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 경기는 5탱커 체제로 간다."

선수들의 안색이 더 안 좋아졌다.

5탱커에 마법형 원거리 딜러만 3명.

그야말로 한 타 싸움에서 요행히 이기는 것을 노리는 조합인 것이다.

"탱커들은 서문엽을 쫓으려 하지 마. 저 속도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대신 지역 방어로 딜러들이 대피할 수 있는 방어선을 형성하는 거다. 알겠나?"

"예!"

명색이 베이징 바오펑이라는 중국 명문 클럽의 감독이기에 급조된 대책이라도 마련했다.

하지만 2세트 경기 시작 전을 알리는 안내가 들리자, 선수들은 도살장이 끌려가듯이 접속 모듈로 향했다.

선수들을 보내는 감독도 침통한 얼굴이었다.

'파리 뤼미에르와 경기를 치렀을 때도 이 정도로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나 가지고······.'

월드 챔피언스리그에서 파리 뤼미에르 BC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는 베이징 바오펑.

그때 이후로 파리 뤼미에르 BC의 전술을 본받아 기동력을 살린 3탱커 전술로 팀의 색채를 바꿨고, 지금까지는 성공적인 변화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다시 세계 정상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전에 터무니없는 괴물을 만나게 된 것이다.

***

2세트.

이번에는 YSM 전체가 베이징 바오펑의 진영을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전력에서 우위인 것을 1세트에서 확인했으니 아예 처음부터 압박하기로 한 것이다.

YSM이 접근해 오니, 베이징 바오펑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보다 떨어진 지역으로 옮겨 다니며 사냥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5탱커 3원딜은 애당초 사냥하기에 적합한 조합이 아니었다.

YSM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우회하다 보니 동선도 길어지고 사냥은 점점 느려졌다.

거기다가 YSM은 이나연이 빠른 발을 이용해 넓은 활동 범위를 가졌고, 개리도 '강화된 시력'으로 감시망이 넓었다. 이를 피하려다 보니 베이징 바오펑의 활동 범위는 상대적으로 점점 축소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베이징 바오펑은 한 판 승부를 벌이기로 했다.

그렇게 벌어진 한 타 싸움.

파앗!

서문엽이 앞장서서 돌격했다.

빠른 속도로 달려간 서문엽은 단단히 방패를 들고 버티고 있는 탱커에게 창을 있는 힘껏 내질렀다.

'증폭, 근력!'

달리는 속도 97.

창을 내지르는 민첩성 107.

창에 실린 근력 102.

쿠아앙!

"헉!"

탱커는 몸이 통째로 뒤로 밀려났다.

밀리지 않도록 단단히 지면에 발을 딛고 버티고 있었는데, 속절없이 온몸이 뒤로 붕 떠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쿠당탕!

탱커는 벌렁 쓰러져 버렸다.

탱커 라인이 뚫리자 서문엽은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적진 안에서 서문엽의 쾌속의 창술이 펼쳐졌다.

-서문엽, 1킬.

-서문엽, 2킬.

-서문엽, 3킬.

탱커 라인 뒤에 있었던 딜러들이 그대로 서문엽의 공세에 노출되었다.

추풍낙엽.

서문엽이 한 차례 짓밟고 적 진형을 무너뜨리자, 뒤이어서 칸 아르얀이 서문엽의 뒤를 쫓아 침투했다.

아직 대인전 전술적 이해도는 투박하지만 킬 기회를 포착했을 때는 무섭도록 과감해지는 칸 아르얀이었다.

-칸 아르얀, 1킬.

-칸 아르얀, 2킬.

두 자루의 단검을 회전시키며 작은 상처를 입히는 칸 아르얀의 단검술. 작은 상처만 입어도 맹독이 침투하므로 금방 킬이 벌어졌다.

개리와 사니야의 합작도 일어났다.

-사니야 아흐메토바, 1킬.

개리 윌리엄스가 멀리서 저격해서 탱커의 발목을 화살로 맞췄고, 비틀거리는 탱커를 사니야가 근력 강화 후 창을 내질러 박살 내버렸다.

하이라이트는 곧 펼쳐졌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팟!

베이징 바오펑 선수들을 에워싸며 나타난 13개의 마법진.

거기서 소환된 영령들이 폭풍처럼 적을 쓸어버렸다.

남은 5명의 선수가 모조리 피에트로에게 데스당하고 말았다.

11-0.

2세트도 압승이었다.

***

<YSM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

<YSM, 월드 챔스 티켓 확보>

<서문엽 도합 11킬. 수준이 달랐다>

<외신도 찬양일색 '서문엽, 세계 최강의 선수'>

YSM이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했다.

상대는 용케도 중국과 일본 클럽들을 제치고 올라온 같은 한국 팀인 쌍성 스피리츠.

참고로 쌍성 스피리츠는 벌써부터 아시아 챔스 준우승을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월드 챔스 티켓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그들로서는 충분히 쾌거였다. 월드 챔스에 진출만 하면 거액의 중계료가 배분되기 때문에 클럽 재정에 큰 도움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두 팀이나 월드 챔스에 진출한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축제 분위기였다.

중국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월드 챔스 아시아 티켓을 2장이나 확보한 것이다.

아시아 챔스가 끝나면 월드컵도 있고, 그 뒤엔 월드 챔스도 있으니 올해는 대한민국 배틀필드 팬들의 축제였다.

아시아 챔스 결승전은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YSM의 승리로 끝났다.

쌍성 스피리츠도 최선을 다해 싸웠고, 양 팀은 5판 3선승제인 결승전에서 마지막 5세트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당연하지만 서문엽과 피에트로가 결장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니야도 빠졌고, 출전 기회가 적었던 선수들에게 좀 더 기회를 준 YSM이었다.

그럼에도 쌍성 스피리츠보다 단연 전력이 앞서는 YSM이었지만, 이번 결승전은 서문엽이 빠진 3탱커로 새로운 실험을 하느라 다소 고전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가브리엘 감독은 서문엽을 탱커지만 탱커 라인에서 벗어나 딜러처럼 활약하는 '가짜 탱커' 체제를 완성시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문엽 없이도 파울 콜린스, 최혁, 김진수가 탄탄한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어야 했다.

이 3탱커 라인이 결승전에서 다소 삐걱거렸던 것이 5세트까지 가는 혈전을 치른 원인이었다.

결국 5세트는 사니야를 투입시켜서 안전하게 이겼다. 이미 기량이 월드클래스의 수준에 오른 사니야는 아시아에서 당해낼 자가 없었기 때문에 서문엽과 피에트로를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우승컵을 갖고도 가브리엘 감독은 코치진과 서문엽을 불러놓고 반성 겸 대책 회의를 했다.

"탱커 라인이 예상 외로 부실하네."

서문엽이 말했다.

가브리엘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탱커 3인을 뜯어보자면, 일단 메인 탱커인 파울 콜린스는 괜찮았습니다. 아시아 챔스 대회 내내 그의 방어가 흔들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당연하지. 아시아에서 걔 가드를 정면 돌파할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어."

서문엽이 단언했다.

-대상: 파울 콜린스(인간)

-근력 96/96

-민첩성 79/79

-속도 70/70

-지구력 90/90

-정신력 80/85

-기술 79/84

-오러 83/85

-리더십 35/56

-전술 54/70

-초능력: 강철 육체

-강철 육체: 1초에 1의 오러를 소모하며 육체의 내구력을 비약적으로 높인다.

파울 콜린스는 기량을 거의 만개했다.

근력 96, 지구력 90. 클래식 탱커로서 육체적으로는 이미 완성 상태다.

70으로 부족한 편이었던 기술이 79까지 확 오르면서 이제 플레이에 미숙함이 사라졌다.

이는 매일 서문엽의 집중 지도를 받는 멤버였기 때문이다.

파울, 개리, 사니야, 박영민, 신수경은 매일 팀 훈련이 끝난 뒤에도 서문엽과 싸우며 특별 훈련을 받는 멤버였다.

월드 챔스에 대비해서 서문엽은 세계 무대에서 통할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로 그들 5인을 따로 불러내 미친 듯이 조련한 것이었다.

그 덕에 파울 콜린스는 YSM에 온 뒤로 좀처럼 데스를 당하지 않는 믿음직한 탱커가 되었다.

96의 근력을 가졌고, 초능력 '강철 육체'를 쓰며 버티면 누구도 파울을 데스시킬 수 없었다.

코치진들 중 탱커 코치가 입을 열었다.

"최혁은 이제 성장에 정체가 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훌륭한 탱커입니다. 지난 결승전에서도 좋은 활약을 했죠."

-대상: 최혁(인간)

-근력 90/90

-민첩성 75/75

-속도 71/71

-지구력 70/70

-정신력 77/80

-기술 70/70

-오러 82/82

-리더십 43/43

-전술 55/55

-초능력: 오러 집중, 내구력 강화

그 의견대로 최혁은 이제 더 성장할 여지가 없었다.

모든 능력치가 한계까지 개발된 상태.

근력은 90으로 준수한 편인 최혁은 어디까지나 클래식 탱커로 분류됐다.

최신 트렌드인 멀티 탱커를 하려면 발이 빠른 게 중요한데, 최혁은 속도가 71로 빅 리그 기준으로는 느린 편이었다.

근접 딜러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에서나 통할 수준이지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어림도 없는 스탯인 것이다.

그렇다고 클래식 탱커라고 하기에는 근력만큼 중요한 지구력이 70밖에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계가 너무 뚜렷했다.

"최혁 선수는 장단점이 뚜렷하죠. 결승전에서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약팀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감독이 말했다.

최혁도 장점은 있었다.

바로 공격도 가능한 초능력이 있는 탱커라는 점.

'오러 집중'이 공격에도 쓸 수 있는 초능력이기 때문에 위의 단점을 상쇄하고 있었다.

가브리엘 감독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드러난 탱커진의 구멍은 김진수 선수입니다."

"음······."

서문엽은 안타까워했다.

탱커인데 근력이 약하다는 최악의 결점이 있는 김진수.

지구력과 방패 다루는 기술이 좋으며, '희생', '재생'이라는 특별한 초능력이 있다는 장점 때문에 서문엽이 월드 챔스에 데리고 가려던 보조 탱커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구단주님이 포함된 4탱커 체제에서는 보조적인 역할을 훌륭히 했지만, 구단주님이 빠지고 3탱커 체제가 되자 가중된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적의 돌파가 집중되는 구멍이 되었습니다."

한 타 싸움이 발생하면 탱커들이 최소한 정면과 좌우 3방향을 커버해야 한다.

서문엽, 파울, 최혁이 함께 3방향을 커버하면, 김진수는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며 혹시나 생기는 구멍을 메꾸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서문엽이 빠지자 김진수가 3방향 중 하나를 맡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럴 탱킹력이 없다는 것이 결승전에서 드러났다. 쌍성 스피리츠는 집요하게 김진수만 팠으니까.

"4탱커였을 때는 괜찮지만 3탱커로 팀의 전술 컬러가 변화하면서 손해를 보게 된 선수로군요."

탱커 코치가 안타까워했다. 힘이 약하다는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극복하려 노력했던 김진수의 평소 태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희생과 재생이 있잖아. 이건 중요한 옵션이야."

"그것도 색 바랜 장점이 됐습니다."

서문엽의 말에 가브리엘 감독이 잘라 말했다.

"구단주님이나 피에트로 아넬라 선수, 둘 중 한 사람을 대신해 희생한다면 김진수 카드는 충분히 가치를 120% 한 것이겠죠. 그런데 그 두 사람 외에는 다른 누구를 대신해 희생해도 오히려 탱커를 하나 잃는 것이 팀에 손해가 됩니다."

그리고 서문엽이나 피에트로나, 경기 중에 데스당할 일이 좀처럼 없는 선수였다.

피에트로는 언제나 안전한 곳에 있고, 위기에 빠져도 마법진 13개를 방패로 활용한다.

서문엽은 이제 최강의 스피드를 손에 넣어서 위기에 빠질 일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그 두 사람이 위험할 일이 거의 없어졌는데, 그 둘 대신 희생해 줄 수 있는 김진수의 가치도 하락한 것.

"새 탱커를 영입해야 합니다."

< 스피드(3) > 끝

< 대표 팀 소집(1) >

YSM은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 및 프로리그 1위로 전반기 시즌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배틀필드 팬들에게 축제는 이제부터였다.

곧 월드컵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각국은 월드컵을 앞두고서 대표 팀을 점검하기 위해 A매치 일정이 잡혔는데 대한민국 대표 팀도 마찬가지였다.

그 탓에 YSM 소속 선수들 상당수가 국가 대표로 차출되었다.

외국 국가 대표 선수도 많았다.

개리 윌리엄스가 영국 통합 대표 팀에 또다시 차출됐다. 최근 개리의 원거리 딜러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대표 팀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사니야 아흐메토바는 당연히 카자흐스탄 대표 팀의 부동의 에이스로 불려갔다.

의외인 것은 칸 아르얀.

망한 7영웅, 인도의 수치라 불리며 욕만 잔뜩 먹던 칸 아르얀이었지만 YSM에서 선수로 새 출발하면서 좋은 기량을 보여주자 다시금 인도 국민의 기대를 불러 모았다. 그 결과 인도 국가 대표 선수로 차출되는 쾌거를 거두었다.

YSM에 있었던 반 시즌 동안 정말로 도박을 끊고서 성실하게 선수 생활을 했던 칸 아르얀.

모바일 게임으로 사행성 캐시 아이템을 마구 질러대다가 서문엽에게 얻어터진 정도가 그가 저지른 말썽의 전부였다.

가족의 품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칸 아르얀은 국가 대표가 되는 영예를 안자 감격했다.

그 바람에 신이 나서 인도의 우승을 이끌겠다느니 허풍을 쳤지만, 인도인들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러려니 했다.

외국인 선수 4인 중에서 무려 3인이 국가 대표이니, 이 또한 강팀의 면모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YSM 소속의 한국 국가 대표 선수는 더욱 많았다.

서문엽, 피에트로 아넬라는 단연 한국 대표 팀의 에이스. 거기에 최혁도 대표 팀의 메인 탱커로 부동의 주전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선수로 명성을 날린 이나연도 호출됐고, 심영수, 조승호도 대표 팀 명단에 포함됐다.

여기까지만 해도 무려 6명.

조승호 외에는 모두 주전이라서 한 팀에서 너무 많은 선수를 뽑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YSM이 한국 최고의 강팀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1명이 더 추가되었다.

바로 박영민.

이제는 PC방 양아치라는 별명 대신 자신의 초능력인 화염검으로 더 유명해진 신예였다.

-대상: 박영민(인간)

-근력 83/84

-민첩성 83/85

-속도 80/81

-지구력 70/70

-정신력 62/62

-기술 78/81

-오러 76/76

-리더십 17/32

-전술 54/54

-초능력: 화염검

시즌 내내 계속된 서문엽의 특별 훈련 덕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박영민.

근력은 1밖에 안 올랐지만 민첩성 3, 속도 4 상승이라는 쾌거를 거두었다.

서문엽이 스피드를 끌어올리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 훈련을 하는 것에 자극받아서 따라하다 보니 스피드가 올라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술 4, 전술 4 상승.

경기 경험이 더해지면서 이제는 방황하던 시절에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을 완전히 만회했다.

이만한 능력치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드문 수준으로, 당연히 대표 팀에 뽑힐 수밖에 없었다.

한편, 박영민 외에도 한국 대표 팀 소집 명단에 새로운 이름이 또 보였다.

바로 신태경.

신수경의 쌍둥이 동생이자, 지난번에 천재의 등장으로 이적 시장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탱커였다.

더 이상 성장할 가능성은 없는데 몸값은 워낙 비싸서 서문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신인 선수였다.

그저 신수경의 투지를 자극하기 위해 언급하는 용도로만 써먹었을 뿐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바이크를 타고 대표 팀 훈련장 주차장에 도착한 서문엽은 누군가에게서 우렁찬 인사를 받았다.

빨간색 페라리에서 내린 청년은 바로 신태경이었다.

"어, 수경이 동생 왔냐."

"예!"

신수경의 동생으로 불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지 눈썹이 꿈틀하는 신태경이었지만, 어쨌건 대답은 잘했다.

-대상: 신태경(인간)

-근력 85/85

-민첩성 75/75

-속도 82/82

-지구력 100/100

-정신력 58/70

-기술 73/76

-오러 80/82

-리더십 35/35

-전술 28/28

-초능력: 무한 체력

'뭐, 큰 변화는 없네.'

이미 다 성장한 탓에 더 발전할 여지가 별로 없었던 신태경이었다.

근력 1, 기술 1씩 오른 정도?

지구력이 92에서 100으로 8이나 뛰었지만, 그거야 어차피 '무한 체력' 때문에 스태미나가 무한이므로 의미 없었다.

그런데 의외인 부분이 있었다.

'어라? 정신력이 좀 깎인 것 같은데?'

분명 전에는 정신력이 60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런데 지금은 58.

반 시즌 동안 2가 깎였다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너 뭐 고민 있냐?"

서문엽은 대놓고 물어봤다.

신태경은 화들짝 놀랐다.

"헉, 아, 아니요! 제가 고민은요."

"고민 있어 보이는데?"

"에이, 없습니다. 팀도 좋고 대표 팀에도 소집되고 잘나가는데요."

"그래? 그럼 됐고."

서문엽은 훈련장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냉큼 뒤따르는 신태경은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의 어두운 기색을 앞서 걷는 서문엽도 느낄 수 있었다.

'고민할 만한 일이야 뻔하지.'

서문엽은 신태경의 심리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해외 구단의 러브콜도 받았지만 일단은 안전하게 KB-1 리그의 국내 팀에 입단하는 선택을 한 신태경이다.

하지만 신태경은 국내로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을 터다.

일단 KB-1 리그에서 프로 생활에 익숙해지고 기량을 키운 후에 해외 진출을 모색하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들어 있을 터였다. 유소년 시절부터 많이 주목받은 만큼 야심도 높아졌을 테니까.

'근데 기량이 잘 오르지 않지?'

문제는 그거다.

유소년 리그야 씹어 먹을 수준이었고, KB-1 리그에서도 제몫을 충분히 할 기량을 갖췄지만 더 성장할 여지는 없다는 것.

이미 유소년 때 자기 모든 잠재력을 대부분 끌어다 쓴 셈이니 다들 천재인 줄 알고 높은 몸값을 불렀지만, 더 성장하지 못하면 해외 진출은 불가능해진다.

'그래도 저만한 능력치에 스태미나가 무한이면 보조 탱커로는 쓸 만한데 말이야.'

여기저기 방어선 뚫린 곳을 쫓아다니며 땜빵을 다녀야 하는 보조 탱커의 역할 특성상, 무한 체력을 가진 신태경은 참 탐나는 재능이었다.

특히나 YSM은 3탱커 체제에서 보조 탱커인 김진수의 약점이 드러났기 때문에 신태경이 탐났다.

전술 이해도가 28/28이라 멍청한 게 흠이지만, 똑똑한 메인 오더가 지시를 내려서 컨트롤해 준다면 극복되는 약점이다.

하지만 서문엽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해외에서 더 좋은 탱커를 영입하는 게 최고지.'

현재 가브리엘 감독이나 스카우터들이 미국 메이저 리그와 유럽 빅 리그에서 영입할 만한 탱커들을 찾고 있었다.

월드 챔스 진출 팀 소속이 아니면서도, YSM이 영입 가능한 정도의 탱커를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클래식 탱커도 제외해야 했다.

이미 파울 콜린스와 최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발이 느린 탱커를 더 추가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누구를 영입해야 할지 시즌 중에 눈여겨봐 뒀던 선수들 명단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저기, 서문엽 선배님."

"어, 왜?"

서문엽이 상념에서 깨어나 뒤돌아봤다.

신태경이 갈등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민을 말할까 말까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뭔데, 인마. 말하기 싫으면 안 털어놔도 돼. 네가 뭔 고민을 하건 내가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영입할 녀석도 아니라서 서문엽은 신경을 끄고자 했다.

"선배님은 왜 저를 영입하려 하지 않은 겁니까?"

"응? 수경이한테 들었어?"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정말 극혐할 정도로 저를 꺼려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극혐까지야. 그건 네 누나가 너 때문에 접근한 거 아니냐고 너무 의심해서 영입 안 한다고 못 박은 거지."

"아무튼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몸값이 너무 비쌌잖아."

"개리 윌리엄스도 영입하셨고 베를린 블리츠의 유망주였던 파울 콜린스도 영입하셨습니다. 서울로 클럽하우스 옮기려던 계획도 포기해서 재정적 여유가 넘쳤고요. 저 하나 영입 못 할 상황이 아니었잖아요."

서문엽은 혀를 내둘렀다.

몸값, 협상 등에 있어서는 정말 똑 부러지는 신태경이라 그런지 YSM의 팀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너 말이야."

"네."

"성장 가능성이 안 보였어."

돌 직구.

신태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문제가 또 있어. 넌 참 똑똑해. 자기 몸값 높일 줄도 알고, KB-1 리그를 선택한 것도 현명했고. 근데 던전에서는 반대로 좀 머리가 멍청해져."

"예?"

"팀 전술을 잘 소화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였단 말이야. 혼자 돌출돼서 플레이하는데, 유소년리그야 씹어 먹었겠지만 프로에서는 어림도 없지. 체력만 만땅이어서는 쉬지 않고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그게 팀 전체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루지 않아."

신태경은 이를 악물었다. 최근 많이 듣고 있는 지적이었다.

혼자 돌출된 플레이를 많이 하다 보니, 팀에서는 스타병을 버리고 팀에 헌신하라고 만날 지적했다.

근데 신태경은 나름대로 동료들을 위해 헌신하려고 열심히 뛰어다닌 것이다. 그게 팀 전체의 포메이션과 조화를 전혀 안 이루었을 뿐.

전술 28/28의 비애인 것이었다.

벌써 프로 무대에 데뷔한 지 반 시즌이 지났는데 피지컬적으로도 큰 성장세가 안 보이고, 전술 면에서도 적응을 못하니 평가는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팀을 위해 뛴다고 뛴 건데, 자꾸 자기가 팀 중심인 줄 안다고 지적을 받고······."

그때부터 신태경이 잘 풀리지 않는 선수 생활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서문엽이 말했다.

"야, 내가 너 선수 생활 잘할 방법 가르쳐 줄까?"

"네."

"넌 말이야. 똑똑한 메인 오더가 있는 팀에 들어가야 해. 네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면 불필요한 동선을 줄일 수 있으니까."

"······."

"넌 천생 보조 탱커야. 근데 어차피 메인 탱커는 팀에 하나뿐이야. 보조 탱커는 활동량이 많아야 하는데 그건 네 특기지. 그 부분을 살려서 보조 탱커로 쭉 나간다면 괜찮을 거야. 이제 와서 아직도 메인 탱커가 되겠다고 욕심 품은 건 아니지?"

"네."

신태경은 쉽사리 충고를 받아들였다. 현실 파악을 잘하는 성격인 탓이었다.

그런데······.

"그럼 이번 여름 이적 기간 때 YSM에서 절 영입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잉?"

"보조 탱커 새로 영입할 계획 있으시잖아요."

"······."

"그쪽의 김진수 선수가 4탱커에서는 괜찮은데 3탱커 체제에서는 결점을 보였잖아요. 4탱커 체제에서는 김진수 선수를 계속 쓴다 해도, 3탱커 체제로 갈 시에 따로 쓸 탱커가 필요하잖아요."

서문엽은 기가 막혔다.

YSM의 팀 내부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는 신태경. 던전 밖에서는 상당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었다.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왜 던전 안에서는 그 모양이 되는 거냐?"

"모르겠어요. 저도 제 플레이 영상 다시 보고 있으면 갑갑합니다!"

그렇게 하소연하는 것도 잠시.

"어쨌든 월드 챔스에 투입할 즉전감 탱커를 찾으실 텐데, 마침 저는 팀에서 꽤 실망한 눈치라 영입 의사를 넌지시 밝히면 협상을 하려 할 겁니다. 생각 있으시면 저도 팀 안에서 호응할게요."

"글쎄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서 저보다 더 실력이 검증된 선수를 더 원하시겠죠. 근데 저도 장점이 있습니다. 대표 팀에 선배님을 포함해서 YSM 선수분들이 많잖아요. 월드컵 기간 내내 같이 호흡 맞춰볼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 다른 선수 영입해 봐요. 호흡 맞춰볼 틈도 없이

바로 월드 챔스 시작인데 영입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 나올 수 있잖아요?"

그 말도 맞는 말이라 서문엽은 마음이 흔들렸다.

신태경이 더욱 강력하게 어필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전 똑똑한 오더 역할의 동료가 필요합니다. YSM에 그런 분들이 많죠! 개리 윌리엄스, 조승호 선수, 서문엽 선배님 등. 저 정말 쉬지 않고 시키는 대로만 돌쇠처럼 뛰겠습니다. 제 초능력 아시잖아요? 무한 체력!"

던전 밖에서의 신태경은 처세술이 무척 뛰어난 선수였다. 이 또한 쌍둥이 누나 신수경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 대표 팀 소집(1) > 끝

< 대표 팀 소집(2) >

대표 팀에 합류하여 다른 선수들과 만난 신태경은 분석안에 안 보이는 자신의 진정한 재능, 불꽃같은 처세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캡틴! 잘 부탁드립니다."

가장 먼저 인사를 넙죽 박은 대상은 대표 팀 주장 채우현.

메인 탱커는 최혁에게, 오더 역할은 서문엽과 백하연에게 내줬지만 탱커진을 이끌며 방어선을 조율하는 역할은 여전히 채우현의 것이었다.

같은 탱커인 신태경은 채우현과 좋은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 리그에서 여러 번 만났지? 지금은 한 팀이니까 잘 해보자."

"예, 지시하시는 대로만 충실히 따를 테니 마음껏 부려주십쇼."

"그래."

신태경이 적극성에 채우현도 기분이 좋은 표정이었다.

그 뒤로도 다른 선수들과 친목을 도모했는데, 특히 YSM 소속 선수들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저 자식을 그냥······.'

서문엽은 그런 신태경을 보며 혀를 내둘러야 했다. 선수가 아니어도 뭘 해도 잘살 놈 같았다.

그에 비해 또 다른 대표 팀 신입 멤버 박영민은 형식적인 자기소개만 하고는 말수가 적었다. 저게 정상이긴 하지만 서문엽이 보기에는 속 터졌다.

그때였다.

"이리 오너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만 아니었으면 장군감이라고 칭찬했을 우렁찬 목청.

"이 몸이 왔도다!"

백하연이 큰소리 탕탕 치며 의기양양하게 나타났다.

"오, 파리 뤼미에르의 주전 딜러 아냐."

"월드 스타 납셨네."

친한 대표 팀 선수들이 저마다 농담을 건네며 반겼다.

"삼촌!"

백하연은 서문엽에게 달려왔다.

"어, 그래. 요즘 잘나가더라?"

"흐흐, 이제 로테이션 멤버가 아니지롱."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자랑하는 백하연.

본래 후보에 조커 정도의 역할로 파리 뤼미에르 BC에 입단한 그녀였지만, 작년의 월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우승에 공헌한 후로 입지가 올랐다.

-대상: 백하연(인간)

-근력 82/82

-민첩성 90/90

-속도 95/95

-지구력 80/80

-정신력 81/81

-기술 75/75

-오러 70/70

-리더십 95/95

-전술 86/86

-초능력: 순간 이동, 로프

'이 정도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증폭된 분석안으로 살펴본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봤듯이 육체적으로는 다 완성된 백하연이었다.

거기에 아직 여지가 약간 남아 있었던 리더십과 전술마저도 꽉 찼다.

한국 나이로 26세.

백하연은 벌써 기량이 절정에 오른 것이었다.

'리더십과 전술이 저 정도면 파리 뤼미에르에서도 충분히 주전이 될 수 있지.'

리더십 95나 되는 선수면 동료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다.

거기에 전술적 이해도도 86!

감독이 어떤 역할을 시키든 능히 소화할 수 있다. 이미 대표 팀에서도 서문엽에 이어 서브 오더 역할을 채우현에게서 건네받은 백하연 아닌가.

기술과 오러가 70대라는 뚜렷한 약점이 있었지만, 이만하면 감독의 전술 스타일에 따라 주전도 될 수 있고 후보가 될 수도 있었다.

빠른 속도와 순간 이동, 리치가 긴 채찍 등 전술적 활용도가 무척 높기 때문에, 지략 좀 쓴다고 자부하는 감독이라면 쓰고 싶어지는 선수였다.

명문 클럽에 간 덕에 훌쩍 성장한 조카에게 만족하고 있을 때였다.

"백하연 선배님!"

헐레벌떡 달려오는 녀석이 있었다.

신태경이었다.

90도로 인사를 한 신태경이 말했다.

"새로 대표 팀의 부름을 받은 신태경입니다."

"오호, 그래. 네가 그 태경이구나."

"하하, 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 팀의 서브 오더이시라고 들었는데, 뭐든 지시만 내려주시면 궂은일을 다 하겠습니다!"

"응, 그래. 초능력이 체력 만땅이라고?"

"무한 체력입니다, 선배님."

"응, 그래. 경기 내내 팔팔한 서브 탱커 하나 있으면 편하지."

처세술 수치가 최고치인 신태경은 최고치의 리더십을 가진 백하연과 잘 어울렸다.

스타병 걸렸을 거라는 이미지가 강한 신태경이 선배들에게 깍듯이 공손하니 대표 팀의 분위기는 밝아졌다.

그런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서문엽도 심사가 복잡해졌다.

'금방 현실 파악을 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구나.'

신태경은 자신의 성장이 더딘 것을 지난 반 시즌 동안 겪었고, 서문엽에게 확인 사살을 당했다.

그랬는데, 시름에 빠지기는커녕 주어진 한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판단을 하고 있었다.

마침 비어 있는 YSM의 서브 탱커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자신이 꿈의 월드 챔스에 출전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클럽 입장에서도 신태경이 현실적인 방안이긴 한데.'

트렌드에서 뒤처진 클래식 탱커는 널려 있지만, 발 빠른 멀티 탱커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나마 있던 매물도 LA 워리어스가 선수단 리빌딩을 감행하면서 쓸어갔다. 요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발 빠른 멀티 탱커는 지옥에서도 데리고 온다'는 농담을 한단다.

신태경은 다소 아쉽긴 해도, 일단 속도는 82였다. '무한 체력'으로 지치지 않고 전력 질주할 수 있으니, 확실히 기동성은 보장되어 있다.

'이건 가브리엘 감독의 의사를 물어보자.'

서문엽은 잠시 밖으로 나와서 가브리엘 감독에게 전화했다.

-신태경이라··· 확실히 좋은 대안입니다.

"그래?"

-유럽에서 탱커들을 알아보고 있긴 합니다만, 월드컵 기간 끝나고 바로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과 팀워크를 맞출 틈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월드 챔스 앞두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셈이라, 기존 선수들에게 불만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것도 그러네?"

독불장군 타입인 서문엽은 거기까지 고려해 보지 못했다.

-김진수 선수도 그동안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외국인 선수에게 자리를 뺏느니, 신태경을 영입해서 여지를 남기는 게 좋습니다. 4탱커 체제는 김진수 그대로, 3탱커 체제는 신태경을 쓰는 식으로요.

"그도 그러네."

생각해 보면 다들 서문엽이 직접 선택해서 키운 애들이었다.

함께 월드 챔스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왔던 동료들인 것.

갑자기 더 좋은 선수 데려와서 버리느니, 계속 기회를 유지하는 게 나을 것이다.

-마침 이 부분에 대해서 알려 드릴 사항이 있는데, 최정민 선수가 이적을 요청했습니다.

"최정민?"

최정민은 바로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취약한 피지컬이 약점이지만, 높은 기술과 전술적 이해도, 그리고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는 '관찰'로 나름 가치가 있는 근접 딜러였다.

-요즘 근접 딜러 포지션에 경쟁이 심화됐는데, 칸 아르얀 선수가 오는 바람에 출전 기회가 더 줄어들게 되었죠.

"으음, 그건 그렇지."

사니야, 칸 아르얀, 남궁지훈, 거기에 이제 대표 팀에 뽑힐 정도로 성장한 박영민까지.

심지어 최근은 서문엽까지 딜러 포지션으로 뛰게 되었다.

최정민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 J리그의 클럽에서 좋은 제안이 온 듯합니다.

일본은 피지컬보다는 기술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최정민과 어울리긴 했다. 아마 최정민은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내린 결정일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신수경 선수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수경? 아, 관찰로 봤겠구나."

최정민은 서문엽의 분석안 같은 초능력은 없지만, 대신 관찰로 상대의 약점을 볼 수 있다.

아마 신수경을 관찰로 보고는 점점 약점이 사라져 가는 것을 봤을 것이다.

'도리가 없구나.'

서문엽은 최정민을 보내주기로 했다.

"알았어. 이적 추진해. 최정민하고는 따로 얘기할게."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서문엽은 말이 나온 김에 최정민에게 바로 전화 걸었다.

-네, 구단주 형님. 들으셨어요?

"오냐, 일본에 갈 거라며?"

-네, 도쿄예요, 도쿄.

"도쿄에 팀이 한두 개냐?"

-에이 참, 아시아 챔스에 4강까지 올라왔던 도쿄 BC요.

"호오, 제법 괜찮은 팀이네?"

아시아 챔스 4강에서 쌍성 스피리츠에게 지긴 했지만, 4강이면 아시아에서는 우량한 클럽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클럽하우스가 도쿄 다이토구에 위치하죠!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게 뭐?"

-아키하바라가 지척에 있다고요!

"아키하바라? 뭐 어쩌라고, 인마?"

-어휴, 말이 안 통하네. 아무튼 전 일본에 갈 겁니다. 연봉도 거의 2배라고요!

"그래, 좋아하니 다행이다."

-당연히 좋죠. 뭐, 이게 다 구단주 형님 덕분이니 감사하단 말씀은 드릴게요.

"당연하지, 새꺄. 나 아니었으면 넌 되지도 않는 소설 붙잡으면서 백수 생활 했어."

-되지도 않다니요! 두고 봐요! 제가 베스트셀러 꼭 써서 찾아갑니다.

"네 재주로 베스트셀러 쓸 방법은 내 자서전밖에 없단다."

-두고 보라고요!

뚝.

통화를 마친 서문엽은 피식 웃었다.

주전 경쟁에서 밀려서 떠나게 되었지만, 최정민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서문엽의 강권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을 뿐 선수로서의 야망은 딱히 없는 탓이기도 했다.

'그래도 하나둘씩 떠나는구나.'

기존의 한정실업 출신 중 남아 있는 선수는 이나연과 남궁지훈뿐이었다.

서문엽이 직접 선택하고 키운 선수들도 여럿 떠났다. 윤범, 노정환 등······.

'팀이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지.'

서문엽은 선수들이 떠나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전쟁 시절을 겪은 서문엽은 동료들의 죽음도 수없이 봤다.

그에 비해 비즈니스에 의한 이별은 각자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떠난 것이니 해피엔딩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얘는 잘 있나?'

서문엽은 어디론가 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매가리 없는 여자의 목소리.

"뭐해?"

-숙소에서 쉬고 있어요.

시즌을 마치고 다들 휴가를 받았기 때문에 쉬는 게 당연하긴 했다.

"얼씨구? 쉴 틈이 있냐? 네 동생은 태극 마크도 달았는데?"

-흐엑! 또 태경이 얘기예요!

그동안 계속 동생과 비교하며 자극한 덕에 신수경은 경기를 일으켰다.

"참고로 네 동생 우리 팀에 올지도 몰라."

-흐엑! 어째서요?!

"탱커 하나 더 필요하니까 그렇지. 이야, 애가 사회생활 무지 잘하더라? 어떻게 쌍둥이가 이렇게 성격 차이가 많이 나냐?"

-으으······.

신수경은 몹시 싫어하는 눈치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늘 주목받았고 사회생활도 잘하는 인싸 동생에게 늘 비교당했던 만년 후보 아싸 누나. 그동안 신수경이 어떻게 살았을지는 뻔했다.

"월드컵 기간 동안 놀고 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흐으··· 네.

"열심히 해라. 네 동생 오면 네 실력을 똑똑히 보여주라고."

-알았다고요!

버럭 소리 지르고는 통화를 끊어버리는 신수경.

그녀가 지금쯤 클럽하우스로 훈련하러 달려가고 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참 다루기 쉽다고 생각하면서 서문엽은 낄낄거렸다.

***

대표 팀에 소집된 선수들이 모두 모인 회의실.

국가 대표 감독 백제호도 코치진들과 함께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서문엽과 피에트로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인사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백제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잘 지냈나?"

"예!"

"그래야지. 이제 월드컵이 코앞이고, 이번 A매치 경기로 마지막 점검을 한다. 너희들에 대한 평가도 아직 끝난 게 아니니 방심하지 마라."

"옛!"

"이번 월드컵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이 매우 크다. 얼마 전의 아시아 챔스도 국내 팀이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고. 이번 A매치에서 실망시키면 월드컵에 대한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기대감이 사라지면 비판적인 시각만 남는다. 월드컵 경기 내내 비판에 시달

리며 무엇이 잘못됐나, 누가 뭘 잘못 했나 등을 따지고 들 테고. 이런 경험 많이 해봤지?"

바로 이전 월드컵 때의 이야기였다. 그때도 대표 팀에 있었던 선수들은 표정이 굳었다.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이 이번 A매치에서 상대할 팀은 2팀이었다.

브라질.

이탈리아.

다행히 축구가 아니었다.

< 대표 팀 소집(2) > 끝

< 이탈리아전(1) >

"이탈리아가 강적이네."

"브라질이야 뭐, 걔들은 축구만 하는 애들이니까."

비꼬는 말이 아니다.

축구의 나라 브라질은 초인들도 축구에 정신이 팔렸다.

초인이 배틀필드 이외의 프로 스포츠에 진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수익이 없는 아마추어 대회는 금지하지 않았다.

이 점을 이용, 브라질은 아마추어 초인 풋볼 리그가 존재했다.

물론 순수한 아마추어 대회가 아니라 음지에서 도박이 이루어져서 큰돈이 오가며, 선수들에게도 몰래 주급을 준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축구 플레이가 어떤 것인지 보고 싶어 하는 브라질 축구 팬들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광받는 슈퍼스타였다가 초인으로 갑자기 각성하는 바람에 신세를 망친 선수들도 초인 풋볼 리그로 전향해서 대중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어찌 보면 무기 들고 싸우는 것보다 축구하는 걸 더 보고 싶어 하는 건전한 취향이었지만, 덕분에 브라질은 배틀필드가 약체였다.

프로 배틀필드 선수들도 부업으로 축구를 하니 말 다했다. 뭐가 주업이고 뭐가 부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다르다.

세계 랭킹 9위.

한 번도 10위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전통의 강호였다.

'이탈리아의 수호신' 치치 루카스가 버티고 있는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전력이 강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클래식 탱커들보다 강한 파워와 딜러들보다 빠른 스피드를 가진 치치 루카스는 미국의 제럴드 워커와 세계 최고의 탱커의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기량이 물 오른 제럴드 워커가 위협적이지만, 팀 성적 때문에 파리 뤼미에르 BC 소속인 치치 루카스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형편.

물론 세계 최고 탱커 경쟁에서 서문엽은 논외로 치고 있지만 말이다.

피에트로 아넬라가 한국에 귀화하지 않았더라면 월드컵 우승도 어렵지 않았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나라 이탈리아.

전형적인 유럽의 강팀으로,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이었다.

***

브라질 대표 팀은 한국을 방문하여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브라질 대표 팀의 경기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방한한 첫날 숙소에 짐을 풀고는 곧장 컨디션 관리 차원이라며 풋살을 즐겼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축구가 어떤 것인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스포츠 뉴스와 유튜브에 그들이 보여준 엄청난 볼 컨트롤 영상이 떠돌았다.

브라질은 국가 대표 선수들조차 본업보단 축구에 몰두한다는 말이 루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경기력은 형편없었다.

대한민국은 A매치에서 브라질을 2-0으로 가볍게 제압했다.

배틀필드에서는 별다른 플레이를 못 보여준 브라질은 조용히 돌아갔다.

"정말 축구만 하는 놈들이구나. 난 축구공 터뜨리면 반칙이라는 룰은 처음 들었어."

서문엽은 문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백제호가 웃었다.

"그래 보여도 한땐 우리나라 대표 팀이랑 비슷비슷한 전력이었어."

"걔들이랑?"

서문엽은 치를 떨었다.

브라질전은 이 세상에 '맥없이 이겼다'는 표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기였다.

정말 대표 팀의 팀 전술을 실험하기도 전에 이겨 버린 것이다.

일부러 피에트로도 제외하고 한 타 싸움 시의 포메이션을 실험했는데, 그만 서문엽이 삽시간에 7킬을 하고 말았다.

결단코 서문엽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대놓고 킬 각이 보이는데 애써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표 팀은 5탱커 전술을 실험하고 있었는데, YSM과 마찬가지로 서문엽을 딜러로 놓고 표면상 4탱커인 전술이었다.

여차하면 서문엽도 탱커 역할을 할 수 있으니 실질적으로는 5탱커인 것이다.

거기다가 서문엽의 첨언으로 세부 전술을 추가했는데, 최전방의 메인 탱커인 최혁이 초능력 '오러 집중'을 공격적으로 사용해 적진을 정면에서 뚫는 방식이었다.

이때 신태경이 최전방에 올라와 방어를 보조하면, 최혁이 마음 놓고 공격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서문엽은 빠른 발을 십분 활용해 측면이나 배후에서 돌파를 시도하니,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 할 수 있었다.

서문엽의 측·후면 공격이 성공해서 적이 흔들리면, 반대편 측면에서도 백하연과 이나연이 공격해서 삼면에서 적을 포위 공격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대표 팀은 탱커가 많고 피에트로의 강력한 초능력을 활용한 철저한 한 타 싸움 전술에 올인한 것이다.

그런데······.

-서문엽, 5킬.

-서문엽, 6킬.

-서문엽, 7킬.

서문엽이 추풍낙엽처럼 브라질 선수들을 쓸어버렸다.

반대편 측면에서 공격하려던 백하연이 화들짝 놀라 당황해 버렸다.

정면에서 신태경의 보조에 힘입어 공격적으로 압박하려던 최혁도 당황해 버렸다.

그 자리에서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피에트로밖에 없었다.

콰콰콰콰!

피에트로가 마법진을 만들면서 1세트가 끝났다.

결국 2세트는 서문엽도 빠져야 했다.

서문엽의 역할은 백하연이 대신했고, 백하연의 자리는 이나연과 함께 유벽호가 기용되었다.

유벽호는 수년 전부터 쭉 태극 마크를 달았던 근접 딜러인데, 30초간 몸을 30%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순간 가속'이라는 초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다만 그 스피드를 스스로 제어 못한다는 단점 탓에 예전 올스타 경기에서 서문엽에게 한 방에 데스당한 바 있었다.

그 후 서문엽이 많은 선수를 발굴하고 키우면서 대표 팀 내의 경쟁에서 밀려 후보로 밀렸다.

하지만 그동안 절치부심했는지 70/85였던 기술이 84/85까지 올라 있었다. 그에 따라, 순간 가속의 스피드도 이제는 어느 정도 컨트롤할 줄 아는 모습이었다.

2세트는 백하연이 서문엽의 역할을 잘 수행했고, 유벽호가 2킬 2어시로 뛰어난 활약을 하면서 대승을 거뒀다.

1세트 11-0.

2세트 9-0.

대한민국 대표 팀의 달라진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줄 의도로 초청한 브라질 대표 팀에게 미안할 정도의 대승이었다.

한때는 라이벌 수준으로 비슷했던 브라질에게 크게 이기자 여론이 크게 상승한 것은 물론이었다.

백제호가 대표 팀 감독으로서 목을 보전한 것은 물론이었다.

"휴, 정말 이번 월드컵까지만 하고 이 짓 관둔다."

백제호는 감독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잘 알게 되었다.

서문엽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유능한 코치진에 의존한 덕에 지금껏 잘해왔지만, 체질상 안 맞는다고 느꼈다.

"월드컵 성적 잘 나오면 감독 더 하라고 국민들이 요구할 텐데?"

서문엽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백제호는 진저리쳤다.

"됐다. 이제 정말 안 해. 사업이나 할 거야."

"무슨 재미로 사냐? 쫄려서 조마조마한 맛도 있어야 인생이 재밌지."

"넌 너무 인생을 재미있게 살려고 해서 문제야."

"꼰대 같기는."

"나 꼰대 맞거든?"

그렇게 투덕거릴 때는 옛날로 돌아간 듯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코치진과 함께 다시 이탈리아전을 대비한 전술을 수립했다.

"팀 전술이 너무 한 타 싸움에 집중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이탈리아 대표 팀은 파리 뤼미에르와 흡사한데, 마치 뉴욕 베어스 왕조가 파리 뤼미에르에게 막을 내린 것과 흡사합니다."

독일에서 초청된 전술 코치 라이너 하임이 말했다.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30대 중반의 젊은 코치인데, 일찌감치 뮌헨 울펜리터 BC의 유소년 팀에서 유능함을 증명했다.

뮌헨 울펜리터 BC 내부에서는 자질이 보이는 라이너 하임에게 경험과 실적을 쌓을 시간을 충분히 주어서 차기 사령탑으로 키울 계획이었는데, 한국 협회가 해적질에 성공했다.

한국 배틀필드 협회장 박진태가 크게 될 싹이 보이는 라이너 하임에게 대표 팀 전술 코치를 제의하고, 차기 감독 혹은 최소한 수석 코치까지 약속한 것이다.

아직 증명한 것보다 증명할 게 더 많은 새파란 코치에게는 파격 대우였다.

이 일을 밀어붙이기 전에 박진태 협회장은 서문엽에게 자문을 구했었다. 라이너 하임의 자질을 분석안으로 살핀 서문엽은 얼른 영입하지 않고 뭐하냐고 질책했다.

-리더십 62/87

-전술 90/97

'싼 값에 잘 데려왔다.'

라이너 하임 코치로서도 단시간에 국가 대표 감독 지위까지 오를 수 있는 기회이므로 쾌히 승낙했다.

뮌헨 울펜리터 BC로서는 분통 터질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라이너 하임 전술 코치는 이탈리아 대표 팀이 작년에 미국 대표 팀을 꺾었던 A매치 경기를 보여주며 첨언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미국은 클래식 4탱커에 기동력을 보완하기 위한 빠른 딜러들로 한 타 싸움 위주의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이탈리아 대표 팀은 싸움을 피하고 빠른 사냥을 통한 성장과 견제로 운영해 미국을 꺾었습니다."

한국 대표 팀의 현 조합이 이때의 미국 대표 팀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딜러들이 빨라도 탱커들이 쫓아오지 못하면 사냥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지."

백제호가 동의했다.

"YSM은 개리 윌리엄스와 이나연 선수를 앞세워서 4탱커를 놓고도 사냥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었죠. 하지만 대표 팀은 개리 윌리엄스도 없고 화살에 독을 발라줄 칸 아르얀도 없습니다."

그때 서문엽이 반박했다.

"그러니까 한 타 싸움에 올인한 거잖아."

"조승호 선수나 피에트로 선수는 사냥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사냥 속도가 더 느려집니다."

"그럼 어쩌자고?"

"피에트로 선수는 뺄 수 없으니, 조승호 선수를 제외하고 3탱커로 줄인 뒤 딜러 숫자를 충원하는 쪽을 추천합니다. 3탱커라고 하지만 서문엽 선수가 본래 탱커이니 디펜스는 문제없습니다."

그러자 서문엽은 가늘게 뜬 눈으로 라이너 하임을 응시했다.

"이 나라 놈들로 3탱커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직 모르나 보네?"

"서문엽 선수가 공수 모두 능하니 문제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결국 3탱커 갖고는 당해내기 어려우니까 나도 탱커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게 돼. 날 탱커 역할로 묶어놓는 게 전 세계 모든 팀이 원하는 바고."

"그만큼 방어력이 보강됩니다. 공격은 늘어난 딜러 숫자만큼 충원되고요."

"독일 최고의 슈퍼스타가 누구냐?"

뜬금없는 질문에 라이너 하임 코치는 바로 대답했다.

"다니엘 만츠 선수죠."

"걔 서포터지?"

"물론입니다."

"왜 걔가 최고의 스타인지 알아?"

"재능과 실력이 충분히 입증된 탓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십니까?"

"내가 네게 해주고 싶은 대답이 여기에 있어서 그런다. 다니엘 만츠는 서포터라서 혼자 날뛰지 못하잖아. 팀플레이를 뒷받침해주는 윤활유 같은 역할이지. 그래서 너희들이 다니엘 만츠를 가장 좋아하는 거야."

"······."

황당해하는 라이너 하임에게 서문엽이 일침했다.

"너희 독일 애들은 혼자 날뛰는 선수를 겁나게 싫어해요! 조직력, 단합, 팀플레이! 엠레 카사가 독일 애들을 다 버려놨어. 넌 결국 내가 활개 치지 못하게 탱커로 묶어놓고 싶은 거야, 알간?"

그 말에 허를 찔린 라이너 하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포지션별로 완전히 정비된 팀플레이.

각자 자기 맡은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팀.

모든 지도자가 엠레 카사 감독의 베를린 블리츠 BC 같은 팀을 꿈꿨다. 독일인인 라이너 하임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누구 하나 돌출되게 빛나는 선수가 없으면, 팀의 조직력을 닦은 감독의 전술적 능력이 가장 부각되기 때문이다.

"의욕 많은 건 알겠는데, 욕심을 버려. 베를린 블리츠가 파리 뤼미에르한테 결국 지는 이유가 있어. 나단 베르나흐처럼 빛나는 애를 가만 못 내버려 두거든."

서문엽은 어깨를 으쓱했다.

"튀지 마라, 중간만 해라, 그런 식으로 죽을 쒀왔던 게 우리나라 대표 팀이야. 이 팀은 내가 캐리해야 해. 알겠냐?"

라이너 하임은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원맨팀 소리를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것은 바로 감독이었다. 한 명의 선수의 하드 캐리로 이겼다는 오명을 쓰니까.

라이너 하임은 욕심을 내려놓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전은 서문엽의 활약에 달렸다. 다가오는 월드컵도 마찬가지로.

< 이탈리아전(1) > 끝

< 이탈리아전(2) >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양 팀 선수가 입장하고 있는 것을 더그아웃에서 바라보는 라이너 하임 코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서문엽의 활약을 제한하려 했다고? 맞는 말이야.'

라이너 하임은 서문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인적인 감정 같은 게 아니었다.

일개 선수가 선수 기용과 전술 등에 깊이 관여하며 좌지우지하는 게 꺼려졌다.

자기 소속 팀인 YSM에서도 구단주이자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서문엽이다. 심지어 인류를 구한 영웅이니 이 나라에서의 권위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방식으로 지금까지 한국 대표 팀이 잘 흘러간 건 알겠지만, 이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장차 내가 관리하게 될 팀이다.'

최단기간에 감독이 되어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기꺼이 한국에 왔고 한국어도 열심히 익혔다.

한국 대표 팀은 지금까지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본 적은 없지만, 앞으로는 달랐다.

서문엽과 피에트로까지 합류하면서 경계해야 할 강팀으로 급부상했다. 그런 한국 대표 팀의 차기 사령탑이 될 찬스이니,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열정을 갖고 한국 대표 팀에 합류한 라이너 하임으로서는 자신의 능력을 펼치는 데 방해되는 선수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감독이 되었다 해도 서문엽이 지금처럼 개입하면 자신의 능력을 펼치는 데 방해될 것 같았다. 라이너 하임은 백제호 감독처럼 선수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실은 코치로서 가장 먼저 서문엽에게 감독과 코치진의 권위를 넘보지 말라고 경고하고 싶었는데.'

한국에서 서문엽의 위상은 잘 알지만, 젊은 라이너 하임은 패기 있게 일침하여서 한국 대표 팀의 기강을 확립하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맞을까 봐 말을 못 했다.'

서문엽이 갖은 폭행 사고를 친 뉴스는 많이 접했지만, 실제로 목격하니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랬지, 이 멍청한 새끼야!"

뻐억!

"쿠억!"

전술 훈련을 하다가 잘못 움직인 신태경에게 발길질을 한 서문엽.

저 멀리 날아가는 신태경을 보고, 라이너 하임의 용기도 날아가 버렸다.

심지어 서문엽이 백제호 감독까지 구박하며 로우 킥을 몇 번 날리는 걸 봤다.

저런 인간과 대립각을 세우다가는 자신의 목이 먼저 날아갈 것 같았다.

'저, 절대 겁먹어서가 아니다. 장차 내가 이끌 대표 팀에 서문엽도 필요한 선수기 때문이야.'

그래서 서문엽을 팀플레이에 녹아들도록 전술을 제안해 보았으나, 곧바로 거절당했다.

오히려 라이너 하임이 서문엽에게 충고를 받아야 했다.

'빛나는 선수를 가만 못 내버려 둔다고? 조직력에 집착해서 선수들의 재능을 제한한다고?'

라이너 하임은 그 말에 일견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베를린 블리츠 BC의 엠레 카사 감독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었으니까.

자신 역시 조직력에 지나치게 집착해 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서문엽이 지금까지 틀린 적은 없지.'

대표 팀에서 독불장군처럼 감 놔라 배 놔라 하는데도 누구도 뭐라 안 하는 이유가 있었다. 결국 서문엽이 항상 옳았기 때문이다.

계속 맞아가며 훈련받은 신태경은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불필요한 동선이 다소 사라지며 한결 나은 모습을 보였다.

전술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재능까지 꿰뚫어 보는 서문엽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오늘 경기 전 인터뷰에서 이탈리아의 주장 치치 루카스가 서문엽에게 감사를 표했을 정도였다.

"서문엽이 나의 진정한 재능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나의 은인이다."

알고 보니 식물을 잘 자라게 만드는 치치 루카스의 특별한 초능력이 서문엽 덕에 각성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서문엽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라이너 하임은 오늘 경기를 지켜보고 확인하기로 했다.

팀 스포츠에 있어서 서문엽 같은 이레귤러의 존재가 옳은 것인지 말이다.

1세트 경기가 시작되었다.

던전은 아즈사의 나선 굴.

5-1구역에서 시작한 한국 대표 팀은 곧바로 세 구역으로 흩어져서 사냥에 나섰다.

5-5-1.

5인 1조로 짝짓고 서문엽만 혼자서 움직이는 형태.

시작부터 팀플레이와는 거리가 먼 서문엽을 보며 라이너 하임은 나직이 한숨을 쉬어야 했다.

홀로 5-3 구역으로 향한 서문엽은 5구역의 보스 몹인 세르펜과 홀로 싸웠다.

콰직!

"퀴이이이익!"

한 방이었다.

세르펜이 아가리를 벌리며 덮치는 순간, 서문엽이 슬라이딩으로 파고들어 약점인 턱 밑을 창으로 찔러 넣은 것이다.

이 던전은 보스 몹인 세르펜이 죽으면 5구역 전체가 붕괴되는 구조였는데, 다행히 세르펜은 비실거리긴 해도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세르펜의 상태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서문엽이 그대로 북쪽으로 연결된 4구역으로 향했다.

비실대는 세르펜은 나중에 팀원들이 처치하게 놔두고 말이다.

'미치겠군. 세르펜이 한 방이라니.'

라이너 하임은 혀를 내둘렀다.

저것도 서문엽이 힘 조절을 했기 때문에 세르펜이 안 죽은 것이다.

턱 밑으로 파고드는 동작도 예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서문엽이었다.

예전에 서문엽이 처음 배틀필드에 출전한 올스타전 경기에서 선보였던 세르펜 사냥법이었다.

그 후로 전 세계 수많은 선수가 같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성공한 선수는 극소수였다.

그런 것을 서문엽은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서문엽은 4구역에서 스켈레톤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스켈레톤들은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테크닉을 지녔지만, 서문엽은 반 박자씩 빠르게 움직이며 한 방에 한 마리씩 죽여 나갔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장기도 빠른 사냥이다. 혼자서는 잘하지만 혼자서 팀을 이길 수는 없어.'

이탈리아는 정석적인 4-4-3으로 나뉘어서 사냥했다.

대단히 빨랐다.

딜러들은 물론 탱커들도 빠르게 이동하며 사냥 템포를 최고 속도로 유지했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서문엽을 제외해도 탱커만 4명이다. 그것도 신태경을 제외하면 이동 속도가 느린 클래식 탱커들이다.

조승호, 피에트로도 끼어 있다.

원거리 딜러인 이나연과 심영수를 제외하면 나머지 3명이 근접 딜러의 전부다.

서문엽을 근접 딜러로 포함시킨다 해도 고작 4명.

이탈리아에게 사냥 속도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가 지금처럼 무서운 속도로 사냥 포인트를 모으면, 후반에 이르렀을 때는 선수들 개개인이 무척 강하게 성장한다.

그렇게 선수들을 성장시킨 뒤에 서문엽을 상대하겠다는 전략인 것이다.

그런데······.

'응?'

라이너 하임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양 팀의 전체 사냥 포인트 누적치가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탈리아의 사냥 속도가 저렇게나 빠른데.'

4인 1조, 혹은 3인 1조로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는 이탈리아 대표 팀의 사냥.

세 조에 탱커는 하나씩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딜러이니, 각 조의 포지션 구성부터가 사냥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런데 한 타 싸움에 올인한 비대칭 조합의 한국 대표 팀이 어떻게 사냥 속도에서 큰 격차를 내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4구역에서 스켈레톤들을 휩쓸고 있는 서문엽이었다.

서문엽이 증폭된 '던지기'로 8자루의 창을 모두 던졌다.

던져진 창은 마나가 적은 2, 3마리의 스켈레톤을 부순 후에 되돌아왔다.

8자루를 로테이션으로 던지니 주변의 스켈레톤들이 삽시간에 전멸했다.

4-3, 4-2구역에 이어서 4-1 구역까지 혼자서 진입한 서문엽.

그때쯤 다른 팀원들이 세르펜을 처치하고서 5구역을 완전히 섬멸했다.

-5구역이 붕괴됩니다. 60초, 59초, 58초······.

서문엽은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희는 6구역으로 가고 조승호만 이리로 보내!"

9명의 한국 선수가 6구역으로 사냥을 갔고, 조승호만 서문엽이 있는 4구역에 합류했다.

"여기서 기다려. 4-1 구역 정리하고 올 테니까."

"네······."

가만히 있는 일이야 도가 튼 조승호였다.

서문엽은 4-1 구역에서 4구역의 보스 몹인 '죽음의 기사단'과 맞닥뜨렸다.

죽음의 기사단은 사람들이 지은 별칭으로, 황금빛 갑옷으로 무장한 화려한 스켈레톤 기사 9마리가 모두 보스 몹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9마리를 모두 처치하면 4구역이 붕괴된다.

하나하나가 배틀필드 일류 선수 수준의 파워와 기술을 가졌다는 게 문제인데, 서문엽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저 문명이 언데드에게 입력시킨 검술은 뻔했다. 그 검술을 상대할 해법을 다 알고 있는 서문엽에겐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런 자신의 기술을 뒷받침해 줄 스피드가 있었다.

파앗!

서문엽은 질풍처럼 9마리 사이로 뛰어들었다.

빠각!

순간적으로 엄청난 가속으로 질주해 스켈레톤 1마리를 창으로 꿰뚫어 버렸다. 갑자기 스피드를 올려서 엇박자로 들어간 기습이었다.

다른 8마리가 검을 휘두르며 공격했지만, 더 빠른 속도로 움직여 벗어났다.

서문엽의 현재 속도는 98.

그사이에 97에서 1 더 올랐다.

매일 괴물 같은 뱀을 상대하다 보니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필요성이 몸에 배인 탓이었다. 목표점이 높아지니 훈련에 능률이 붙어서 점점 강해지는 서문엽이었다.

치고 빠지기를 무서운 속도로 반복한 서문엽은 끝내 4구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4구역이 붕괴됩니다. 60초, 59초, 58초······.

서문엽은 조승호를 데리고 4구역에서 빠져나왔다.

조승호를 불러온 까닭은 간단했다.

"야, 오러 주고 네 갈 길 가라."

"단물만 빨고 버린다는 게 이런 거군요."

조승호는 빠른 사냥을 위해 오러를 다소 소모한 서문엽에게 '오러 전달'을 펼쳤다.

덕분에 오러가 가득 찬 서문엽은 홀로 3구역으로 향했고, 조승호는 다른 팀원들이 있는 6구역으로 이동했다.

서문엽이 어마어마한 스피드로 사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대표 팀과 사냥 포인트 격차가 크게 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라이너 하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효율적이다.'

서문엽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오러 효율이 좋은 사냥꾼일 것이다. 최소한의 움직임과 힘으로 괴물을 잡는 테크닉과 노하우가 있었다.

그런 서문엽이 다소 오러 소모를 각오하고 사냥 속도를 높이니, 그야말로 폭풍처럼 사냥 포인트가 누적되었다.

그렇게 소모된 오러는 조승호가 보충해 주면 그만이었다.

서문엽 하나를 위해 선수 1명을 소모품처럼 쓰는 격이지만, 그 효과가 나타났다.

'근접 딜러 1명을 더 추가하는 것보다, 서문엽에게 오러를 충전해 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건가!'

홀로 빛나는 스타보다 여러 선수의 협동이 더 중요하다는 라이너 하임의 고정관념에 금이 갔다.

대신 라이너 하임은 고정관념을 탈피하고서 새로운 가설을 마음속에 제시하게 되었다.

단 1명의 천재.

그리고 그 천재를 받쳐주는 조직력 있는 집단.

'그래, 바로 이거야. 서문엽을 제한할 필요가 없어. 마음껏 날뛰게 해도 돼. 난 서문엽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머지 10명의 선수를 조직시키면 되는 거다.'

한국 대표 팀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비로소 감을 잡은 라이너 하임 코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플레이는 지금부터였다.

그들의 무기는 빠른 사냥뿐만이 아니었다. 빠른 기동력을 이용한 장기 운영은 치고 빠지며 상대 팀에게 피해를 누적시키는 것 또한 주요 포인트였다.

이탈리아가 한국 팀의 사냥을 방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 이탈리아전(2) > 끝

< 이탈리아전(3) >

서문엽이 4구역을 다 쓸어버린 소식은 이탈리아 대표 팀에게도 전달되었다.

-4구역이 붕괴됩니다. 60초, 59초, 58초······.

"4구역이 벌써?"

이탈리아 대표 팀의 캡틴, 치치 루카스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한국 팀은 6구역에서 사냥하고 있다며?"

"네, 제가 두 눈으로 확인했어요. 최소 8명 이상은 6구역에 있었어요. 서문엽은 보이지 않았는데, 서문엽을 포함해서 몇 명은 4구역으로 따로 사냥한 것 같은데요."

조금 전에 한국 팀 동향을 정찰했던 스무 살의 젊은 근접 딜러, 프란체스코 카니니가 대답했다.

치치 루카스는 곰곰이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4구역은 스켈레톤들이 있지. 스켈레톤들이라면 서문엽이 가장 좋아하는 사냥감이야."

-나도 서문엽의 경기 영상을 본 적 있어. 스켈레톤을 엄청난 스피드로 때려잡던데.

-4구역에 혼자 갔을지도 몰라. 동료와 함께 사냥하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더 빨라 보였거든.

다른 지역에 있던 팀원들도 한마디씩 의견을 제시했다.

치치 루카스는 의견들을 토대로 상황을 정리했다.

"4구역은 서문엽이 혼자서 붕괴시켰을 거야. 끽해야 서포터 조승호나 오러 보충용으로 데려갔겠지. 안 그래도 딜러가 부족한 한국 팀이고, 탱커는 데려가 봐야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할 거야."

치치 루카스는 상황을 정확하게 유추했다.

"그럼 놈 혼자 있는 셈이잖아?"

프란체스코 카니니가 눈을 빛냈다.

"놈을 잡자. 녀석이 거만해져서 방심하고 있는 거야."

이탈리아의 신성 프란체스코 카니니.

어린 선수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우는 데 탁월한 모로 형제의 동생 필립 모로가 파리 뤼미에르 BC에 데려와 키우던 유망주였다.

프르미에 리그에 데뷔시켜 나단 베르나흐와 함께 투톱의 킬러로 키우려고 담금질하던 중 LA 워리어스가 해적질을 해버렸다.

파리 뤼미에르 BC는 노발대발했지만 대대적인 리빌딩을 추진하던 LA 워리어스는 눈에 뵈는 게 없었고, 나단 베르나흐의 그늘 아래에 있기 싫었던 프란체스코 카니니의 야망과 일치한 결과였다.

역시나 필립 모로가 품질 보증한 유망주답게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자마자 폭발적인 활약을 펼쳐 이탈리아 국가 대표로도 전격 발탁되었다.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한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당연히 오늘 경기에서 서문엽을 굉장히 의식하고 있었다.

'서문엽은 확실히 강해. 하지만 그런 그를 상대로 내가 킬을 올린다면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다.'

파리 뤼미에르 BC 소속인 치치 루카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서문엽이 나단 베르나흐와 일대일로 이겼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한다.

그 말은 프란체스코 카니니의 승부욕을 더욱 자극했다.

이 스무 살 혈기왕성한 청년에게 서문엽은 최고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하지만 올해로 28세인 치치 루카스는 동조해 주지 않았다.

"서문엽은 섣불리 건드리지 말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셨어."

"섣불리 안 건드리면 되지. 확실하게 킬 각을 설계해 보자고!"

"서문엽을 상대로 확실한 킬 설계를 하려면 이쪽도 너무 많은 투자가 필요해."

치치 루카스의 말에 다른 지역에서 사냥하던 선수들도 동의하는지 한마디씩 했다.

-서문엽 최근 플레이 영상 못 봤어? 갑옷까지 경량화시켜서는 미친 스피드로 다닌다고.

-마음먹고 도망치면 잡기가 어려워. 서문엽도 빨라진 자기 발에 자신감을 갖고서 혼자 활개 치는 거야.

-캡틴 말이 맞아. 팀 적으로 충분히 우위를 차지할 때까지는 서문엽과의 충돌을 자제하는 게 좋아.

선배들이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자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치치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벌써 4구역을 정복했다면 한국 팀의 사냥 포인트 획득량도 상당하다는 뜻이야. 한국 팀에 이제 슬슬 제동을 걸어야 할 필요는 있어."

"내 말이 그 말이야! 이대로 놔두면 서문엽이 너무 크잖아."

프란체스코 카니니가 재차 서문엽 킬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치치 루카스는 서문엽을 어떤 식으로 견제해야 하는지 이미 감독에게 지시를 받은 바 있었다.

"세 조가 로테이션으로 번갈아가며 한국 팀을 계속 공격한다. 타깃은 적 탱커 숫자를 줄이는 것과, 피에트로 아넬라의 오러를 소모시키는 것 두 가지다."

-알았어.

-우리 2조가 먼저 시도하지.

탱커의 숫자가 줄어들면 자연히 서문엽이 팀을 돌봐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거기에 피에트로의 오러양을 줄여놓는 것도 차후의 한 타 싸움에 대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피에트로를 최대한 아끼려 하겠지만 강한 압박을 준다면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할 거다.'

압박을 주어서 서문엽이 팀을 도우러 오게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이득이었다. 서문엽의 시간과 동선을 낭비시킨 것이기 때문.

그 뒤로부터 이탈리아 대표 팀의 진정한 운영이 시작되었다.

4-4-3으로 나뉜 세 조가 로테이션으로 번갈아가며 한국 팀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압박 전술은 세 단계로 나뉜다.

첫째, 적 정찰에 걸리지 않고 침투할 루트를 확보한다.

둘째, 빠르게 습격한 뒤 더 빠르게 물러난다.

셋째, 물러나면서 다른 적이 합류하는지 주변 정찰을 병행한다.

이 3단계 행동을 3개 조가 번갈아가며 수행한다.

핵심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선에서 적을 습격하고 빠져야 하며, 기동력이 매우 빨라야 했다.

또한 다른 두 조는 가까운 위치에서 사냥을 하다가, 습격조가 추격을 받아 위험해지면 재빨리 합류할 수 있어야 했다.

여러 가지 응용도 가능했다.

습격조가 적을 공격하고, 다른 두 조는 적의 지원군이 오는 길목에 매복했다가 역습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선수들의 기동력뿐만이 아니라 상황을 판단하고 지휘하는 캡틴의 능력이 중요했다. 바로 치치 루카스가 적임자였다.

파리 뤼미에르 BC의 고핀 감독이 처음 선보인 이 전술은 치치 루카스를 중심으로 맞춰져 있었다.

이것으로 뉴욕 베어스를 처참하게 뭉개 버리며 왕좌 교체를 했었고 말이다.

이탈리아 대표 팀 선수들 전원이 한국 진영 가까이로 이동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대표 팀의 압박이 펼쳐졌다.

***

-적 출현! 3시 방향!

이나연이 소리쳐 경고했다.

파리 뤼미에르 BC를 그대로 본뜬 이탈리아 대표 팀의 전술은 당연히 한국도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된 것은 이나연을 주변 정찰로 계속 활용하는 것이었다.

매우 빠른 달리기와 점프로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이나연은 이탈리아 측의 습격을 재빨리 캐치해 냈다.

이나연의 경고 덕에 한국 팀은 재빠르게 사냥하던 괴물들을 정리하고 대비할 수 있었다.

서문엽을 제외하고 5명씩 두 조로 나뉘어져 있던 한국 팀은 한 조에 탱커가 2명씩이나 있었기 때문에 단단히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되돌아가고 있어요. 발각된 걸 아나 봐요.

이나연이 다시 보고했다.

이나연의 정찰에 침투가 들켰다는 걸 감지한 이탈리아 측이 되돌아간 것이다.

"됐군."

채우현이 안도했다.

그러나 서브오더를 맡고 있던 백하연이 고개를 저었다.

"안심하지 마요. 적 정찰을 속이고 다른 조가 침투하는 패턴도 있으니까."

백하연의 말에 함께 있던 채우현, 심영수, 신태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백하연도 파리 뤼미에르 BC 소속이었기 때문에 치치 루카스가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의 전술 패턴을 잘 알고 있었다.

적이 습격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쯤은 당연히 이 전술을 펼치는 쪽도 안다. 철저히 경계하면 그만인 전술이 월드 챔스 우승을 이끈 새로운 트렌드가 될 리가 없다.

그렇게 백하연의 조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습격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적 출현!

-제길, 치치 루카스랑 프란체스코 카니니야!

백하연도 깜짝 놀랐다.

이탈리아 측이 다른 조를 습격한 것이다.

이나연이 열심히 정찰 다니던 이쪽은 양동 작전이었다.

다행히 습격은 무난하게 막혔다. 그쪽은 피에트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에트로 형님이 마법진을 소환하니까 다들 달아나 버렸어요.

심영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때, 홀로 사냥에 몰두하던 서문엽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렸다.

-피에트로, 걔들 반응이 어땠어?

-치치 루카스와 프란체스코 카니니라는 두 녀석이 마법진을 하나씩 부수더군. 제법이었다.

-그러고는 바로 달아나 버렸고?

-소환까지 지켜보고 달아났다. 내가 오러를 소모하는 걸 노렸나 보더군.

피에트로는 상대측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서문엽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들었지? 걔들 계속 습격할 거야. 피에트로의 힘을 미리 빼놓고 싶어 하니까 그쪽 조도 피에트로가 함께 있다고 방심하지 마.

-옛!

-그리고 탱커들.

-예.

-너희들도 타깃에 포함되어 있다. 딜러들 보호하려다가 오히려 너희가 당하는 일이 생길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이후로도 습격은 계속되었다.

백하연 측도 방심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 측이 이나연의 정찰 패턴을 빠르게 파악하고는 정찰에 포착되지 않는 루트로 습격을 감행한 것이다.

물론 백하연이 민첩하게 대응했지만, 그쪽 조도 약점이 있었다.

"신태경! 적과 너무 붙지 말고 물러······!"

물러나라고 하려던 찰나, 프란체스코 카니니가 신태경에게 매섭게 덤벼들었다.

열심히 적과 싸우던 신태경은 적이 뒷걸음질 치자 저도 모르게 쫓아서 앞으로 돌출되었는데, 그게 적의 유인이었음을 전혀 눈치 못 챘다.

-슈칵!

프란체스코 카니니가 롱 소드를 휘둘렀다.

롱 소드에서 오러의 칼날이 쏘아져 나와 신태경을 베어버렸다.

-프란체스코 카니니, 1킬.

"이런······!"

백하연은 프란체스코 카니니를 노려보았다.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씨익 웃고는 동료들과 함께 철수했다.

백하연은 자존심이 상해서 뱃속이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백하연도 모를 수 없는 선수였다. 그가 파리 뤼미에르 BC에서 무사히 데뷔했더라면 백하연은 다시 후보로 밀려날 처지였으니 말이다.

'오러의 칼날. 실제로 보니 더 위협적이야.'

거대 사마귀처럼 생긴 괴물 망트와 똑같은 오러의 칼날을 쓰는 프란체스코 카니니의 초능력. 지능이 떨어지는 괴물이 아닌 사람이 쓰니 훨씬 더 살상력이 높았다.

-당한 사람 누구야? 혹시 신태경이냐?

서문엽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삼촌."

-내 그럴 줄 알았다, 돌대가리 같으니라고.

"이제 어떻게 할까, 삼촌?"

백하연은 메인오더인 서문엽에게 의견을 물었다.

-뭘 어떻게. 그냥 하던 대로 계속 해.

서문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쟤들이 나연이 정찰 패턴을 파악하고 역이용해서 들어왔지?

"응."

-나도 똑같이 해주려고 하니까 기다려 봐.

그 말에 백하연은 안심이 들었다.

서문엽도 가만히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던 것은 아닌 듯했다. 습격받는 동안, 서문엽도 이탈리아 측의 움직임을 살피고 패턴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

1킬을 올리며 습격에 성공한 이탈리아 선수 3인은 후퇴하면서 3갈래로 각각 흩어졌다.

그들 전술의 또 다른 특징인 '정찰 겸 후퇴'였다.

세 사람이 각자 세 방면에서 적이 근처에 있는지를 정찰한 뒤에 다시 한 자리에 합류하는 전술적 행동이었다.

정찰 경로, 합류 지점도 사전에 다 준비되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움직임은 조직적이었다.

그런데 그중 프란체스코 카니니에게 문제가 생겼다.

"엇?"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화들짝 놀랐다.

눈앞에 적 선수 한 명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 놈은 이리로 올 줄 알았다."

사내는 씨익 웃었다.

이탈리아의 정찰 겸 후퇴 패턴을 파악하고 미리 잠복해 있던 서문엽이었다.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잠시 낭패감이 들었지만, 이윽고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꼭 내가 지리라는 법은 없지.

그것은 승부욕이었다.

< 이탈리아전(3) > 끝

< 이탈리아전(4) >

-서문엽과 프란체스코 카니니! 일대일 상황에서 맞닥뜨렸습니다!

-현 세계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는 서문엽 선수와 이탈리아의 떠오르는 신성 카니니! 일대일 맞대결 성사되나요?

"우와아아아!!"

경기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관중들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대표 팀의 선수 하면 치치 루카스의 이름값이 압도적이지만, 프란체스코 카니니 또한 인기가 높았다.

아무래도 대량의 킬을 내는 딜러가 대중의 인기를 얻기 더 쉽기 때문이다.

로이 마이어 때문에 언제나 주목받는 클럽인 LA 워리어스에서 새로운 킬러로 떠오른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큰 미국 시장에서 어필함으로써 쉽게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 카니니 선수, 엄밀히 말해서 지금 상황은 위기입니다. 서문엽 선수와 맞대결할 기량은 아직 아니에요.

-예, 지금쯤 카니니 선수가 많이 궁금할 겁니다. 어떻게 서문엽 선수가 저기서 딱 기다리고 있었는지 말이죠.

-답은 간단합니다. 아까부터 저쪽 7구역에서 홀로 외롭게 웅크리고 있는 조승호 선수가 보고 알려준 거죠!

-정말 인내심 있는 선수죠. 정말 오랫동안 저기서 '투명화'를 펼쳐놓고 숨죽이고 있었거든요.

그랬다.

이탈리아 선수들의 루트는 조승호가 '투명화'한 채 살피고 있었다.

기척을 죽이고 있는 데는 이제 도가 튼 조승호라 이탈리아 측도 전혀 알지 못한 것.

조승호가 알려주고 때때로 '시야 전달'로 보내주는 이미지를 보며 서문엽이 분석한 것이다.

그리고 타깃으로 가장 까다로운 프란체스코 카니니를 택했다.

***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긴장했다.

눈앞에 서문엽이 있다.

일대일.

절대 5명 이하의 멤버로 맞붙지 말라고 감독이 신신당부하던 서문엽이다.

바로 도망쳐야 하는데, 프란체스코 카니니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겁먹어서가 아니었다.

승부욕이 샘솟았다.

상대가 서문엽이라도 말이다.

'꼭 내가 지리라는 법은 없지.'

일류는 어떤 상황에서든 개인적인 감정을 누르고 냉정해야 한다.

그런데 얄궂게도 끓어오르는 호승심이 없이는 일류가 될 수 없다.

'어차피 도망쳐 봐야 따돌릴 수 없어.'

빠른 발이라면 프란체스코 카니니도 자신 있었지만, 서문엽은 그보다 더 빨랐다. 특히나 경량화된 갑옷을 입고서는 그야말로 광속으로 질주한다.

하지만 맞붙는다면 가능성도 있다.

경량화된 저 갑옷은 프란체스코 카니니도 알고 있었다. 모로 공방에서 만든 실패작이다.

방어력이 너무 부족해 폐기한 신소재로 제작된 것으로, 서문엽의 새 갑옷이라고 잠깐 선수들이 관심을 가졌지만 금방 사그라졌다.

'방어구는 방패밖에 없어. 저 갑옷 따윈 내 오러 칼날에 종이처럼 찢긴다.'

프란체스코 카니니의 주 무기인 '오러의 칼날'은 크고 빠르기 때문에 피하기가 까다롭다.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승산이 있다고, 서문엽과 붙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한편······.

'꽤 하는 놈이네.'

서문엽도 프란체스코 카니니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대상: 프란체스코 카니니(인간)

-근력 82/87

-민첩성 92/98

-속도 93/93

-지구력 79/79

-정신력 77/77

-기술 86/95

-오러 86/86

-리더십 23/50

-전술 46/55

-초능력: 오러의 칼날, 집중력

-오러의 칼날: 도검류의 무기로 오러로 칼날을 만들어 날린다.

-집중력: 승부욕을 느꼈을 때 일시적으로 정신력과 기술이 5 상승.

잠재된 재능은 사니야와 비슷할 정도로 높다.

그런데 초능력은 훨씬 좋다.

사니야의 초능력 '근력 강화'는 일시적으로 근력을 40% 증가시켜 주는데, 프란체스코 카니니의 두 가지 초능력은 그보다 대량의 킬을 따내기가 더 좋다.

물론 활용하기 나름.

사니야는 상대 탱커진을 힘으로 강제로 뚫는 데 좋고,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다른 동료가 킬 파티를 벌일 판을 만들어줘야 한다.

'판을 만들어주는 팀원이 소속 팀에 있지. 이 녀석, 팀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그것까지 감안해서 팀을 선택한 거야?'

LA 워리어스에 바로 로이 마이어가 있는 것이다.

킬 파티 벌이기 좋은 판을 팀원들에게 만들어주는 데 도가 튼 아이리시 위저드 말이다.

어쨌든 능력치를 모두 다 끌어 올리고 나면, 나단 베르나흐의 위치에도 도전할 수 있는 재목이었다.

물론 나단도 아직 재능을 완전히 다 개화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지금.

자신과 맞닥뜨린 저 스무 살 애송이의 표정이 왠지 패기로 가득 차 보인다.

"해볼 만하다는 표정이네?"

서문엽은 프랑스어로 가볍게 말을 건넸다.

파리에서 유망주 시절을 보낸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당연히 알아들었다.

"안 될 건 뭔데?"

"좋은 마인드야. 난 그런 녀석 패는 게 더 재밌더라."

그 말과 함께 서문엽이 달려들었다.

프란체스코 카니니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카니니에게는 모든 거리가 다 공격 범위였다.

검에서 오러의 칼날이 튀어나와 서문엽에게 날아들었다.

길이가 족히 5m는 될 법한 기다란 칼날!

서문엽은 훌쩍 점프했다.

안으로 접은 다리 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오러의 칼날.

이어서 카니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칼날을 하나 더 쏘았다. 공중에 점프해 있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휘릭!

서문엽은 놀랍게도 창으로 땅을 찍고,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오러의 칼날을 다시 피했다.

심지어 창조차도 오러의 칼날에 베이기 전에 회수해 버렸다.

민첩성 107.

카니니는 서문엽이 찰나의 순간에 얼마나 많은 동작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때문에 방금 선보인 서문엽의 묘기에 충격을 받아 멍해져 버렸다.

서문엽이 계속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져 창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카니니의 위기였다.

'접근시키면 안 돼!'

서문엽의 창이 얼마나 빠르게 찔러오는지 최근 경기를 보았다.

경각심을 가진 카니니는 오러의 칼날 3개를 만들어 쏘아 보냈다.

가로, 세로, 대각선.

피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은 형태로 날린 카니니. 확실히 대인전에서 킬을 만들 줄 아는 선수였다.

'막아라.'

카니니는 서문엽이 방패로 막길 바랐다.

일류들의 실전에서 회피 행위는 위험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원하는 위치로 이동하는 역동적인 행위다.

그러나 방어는 수동적이다.

상대의 공격에 의하여 움직임이 제한된 상태다.

등 뒤에 지킬 동료가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일대일이기 때문에 상황 해석이 달라진다.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시키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페이스로 싸움을 이끌 자신이 있는 카니니였다.

일합(一合) 승부라는 말은 거기서 나온다.

일류들은 한 번 가져온 흐름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니까.

파앗!

그렇기 때문에 카니니는 당황했다.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날린 칼날의 삼각형 모양의 틈바구니 속으로 서문엽이 뛰어들었으니까.

절묘하게 그 속을 통과하며 착지.

또다시 거리가 좁혀졌다.

'크윽!'

이제는 불과 10m 남짓.

초인들에게 이 정도는 거리도 아니었다.

"이제는 내 차례 같네?"

한번 이죽인 서문엽이 창을 던지는 그립으로 고쳐 쥐었다.

던지려는 동작을 한 번 보여주자, 맞받아치기 위해 오러의 칼날을 준비하는 카니니.

하지만 빠르게 다시 찌르는 그립으로 고쳐 쥐고,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돌격했다.

이것은 서문엽이 정한 완급 조절 루틴이었다.

스피드로 승부하는 일류 초인들은 저마다의 완급 조절 루틴이 있다. 아무리 빨라도 똑같은 스피드로 움직이면 상대도 적응하게 마련이니까.

한창 때의 백제호나 딸 백하연의 경우는 순간 이동. 아예 움직임의 시작점을 바꿔 버리므로 상대의 허를 찌르기 좋은 최강의 루틴이다.

나단 베르나흐는 분신술과 쌍도법.

분신술로 움직임의 시작점이 두 개로 나뉘어 버리는 사기성 초능력이 있고, 또 하나는 불규칙적으로 휘두르는 쌍도법이다.

정작 킬은 요란 떨지 않고 단칼에 내버리는 나단이지만, 한 번씩 기어를 바꾸는 완급 조절 루틴으로 쌍도법을 쓴다. 그의 쌍도법은 상대가 현혹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거기서 힌트를 얻고서 서문엽은 이 간단한 그립 체인지 동작을 루틴으로 삼은 것이다.

그의 투창 또한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상대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갑자기 더 빠르게 달려드는 서문엽에게 카니니는 당황했다.

그 순간, 한 가지 동작을 더 섞었다.

방패를 휘두를 것처럼 들어서 상대에게 또다시 선택지를 준 것이다.

카니니는 당황했지만 판단이 빨랐다.

창과 방패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냥 같이 오러의 칼날을 휘둘러서 맞불을 놓았다.

같이 죽을지언정 안 피한다는 투지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푹.

서문엽은 오러의 칼날을 피해, 매우 낮은 자세로 웅크린 채 슬라이딩하며 창을 찔렀다.

창은 가슴을 관통했다.

카니니는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아바타가 소멸되었다.

-서문엽, 1킬.

***

"뭐지?"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너무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자신이 데스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뒤늦게 자신이 접속 모듈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니니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됐죠? 서문엽은요?"

팀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카니니는 감독에게 물었다.

같이 죽었는지, 자신만 죽었는지 알고 싶었다.

감독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형 스크린을 가리켰다.

킬과 데스가 교차된 장면이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아······."

카니니는 허탈해졌다.

서문엽은 몹시 깔끔한 동작으로 자신의 공격을 피한 채 창을 찔렀다.

그것은 행운도 뭣도 아니었다.

운이 좋아서 저렇게 깔끔한 동작이 나올 수는 없으니까.

카니니 또한 일류 선수였기 때문에 서문엽이 처음부터 원했던 방식으로 자신을 데스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좋은 승부였다. 하지만 결과가 아쉽구나."

감독이 다가와 위로해 주었다.

자존심을 건 승부였기 때문에 이때 질책하는 것은 선수의 멘탈에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 카니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서문엽의 시나리오대로 당했을 뿐이에요. 오러의 칼날을 난사하면서 도망쳤으면 따라잡히기 전에 동료와 합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 그게 더 좋은 선택이었을 수도 있었지. 하지만 다 가정일 뿐이니 자책은 관두자. 상대 팀 서포터가 저기에 처박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잖니."

대형 스크린에 투명화한 채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조승호의 모습이 보였다.

비겁하게 웅크려 숨은 채로 계속 눈알을 움직이며 주변을 지켜보는 모습.

카니니도 그제야 어째서 서문엽이 자신이 가는 길에 나타났는지 알 수 있었다.

방심하지 않고 조승호라는 선수에 대해서도 분석한 그들이다.

저 선수의 투명화는 움직이지 않을 때만 유지된다.

즉 조승호가 접근하는 것은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는데, 조승호가 미리 가서 웅크리고 있으면 알아차리기 어렵다.

"한국도 우리의 전술에 대해 준비를 아예 안 한 게 아니더구나."

단순히 오러만 빨고 버리려고 조승호를 출전시킨 게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서문엽은 전술 100의 소유자였다.

상대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수단만 있으면 분석하고 해법을 찾을 수 있었다.

시야 전달까지 있는 조승호는 그런 용도로 최고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게 해도 잘 따르는 인내심이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조승호를 활용하여 서문엽은 이탈리아 팀의 공격적인 압박 전술을 파괴해 나가기 시작했다.

습격을 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문엽을 만나 데스당하는 일이 또 한 번 벌어지자, 치치 루카스도 더 이상은 습격을 더 시도할 수 없었다.

파리 뤼미에르 BC의 전술에 대항하는 해법이 세상에 공개된 순간이었다.

< 이탈리아전(4) > 끝

< 대적 불가(1) >

엠레 카사 감독은 당연히 한국 대 이탈리아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탈리아 대표 팀은 파리 뤼미에르 BC와 비슷한 전술을 구사했고, 한국 대표 팀은 YSM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월드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날 선수들이 많이 나오니 안 볼 수가 없었다.

한국이, 정확히는 서문엽이 이탈리아 선수들이 구사하는 까다로운 압박을 분쇄하는 과정은 엠레 카사 감독에게 퍽 흥미로웠다.

'적이 후퇴하는 경로를 노려서 한 명씩 잘라낸다고?'

퍽 흥미롭다.

물론 시도가 없었던 대응책은 아니다.

이탈리아 대표 팀이 습격 후에 뿔뿔이 흩어져서 '정찰 겸 후퇴'를 행하는 이유는 주변을 살펴서 적의 움직임을 꼼꼼히 살피기 위함이었다.

적이 나타나면 재빨리 달아나 아군과 합류하여 반격하는 과정이 따른다.

또한 같은 전술을 구사하는 파리 뤼미에르 BC는 다들 이동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도망치는 걸 잡기 어려웠다.

서문엽은 오늘 경기에서 두 가지를 첨가했다.

감시자.

그리고 적보다 더 빠른 이동 속도를 가진 킬러.

바로 조승호와 서문엽 본인이다.

'정찰을 강화해서 적의 후퇴 경로를 파악하는 게 핵심이군.'

조승호는 투명화와 시야 전달 등 감시자로서 특화된 서포터였다. 정찰에 특화된 선수로 정보전에서 상대를 능가하니, 저렇게 반격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찰에 특화된 선수. 그리고 적보다 더 빠른 발을 가진 소수의 선수. 이 두 가지만 있으면 파리 뤼미에르 BC를 이기는 데 도움이 되겠어.'

베를린 블리츠 BC도 발 빠른 선수가 많이 있었다.

다니엘 만츠나 새로 영입한 중국 선수 첸진, 저우린 등.

선수 풀이 워낙 넓어 정찰에 특화된 선수도 찾아보면 있을 터였다.

엠레 카사 감독은 그동안 파리 뤼미에르 BC의 끊임없는 습격 로테이션이라는 살인적인 압박 전술에 대하여 정면으로 일일이 받아치는 정공법을 택했는데, 방어하는 입장이 공격하는 입장보다 수동적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오늘 서문엽에게 새로운 힌트를 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경기는 후반에 접어들었다.

서문엽의 넓은 활동 반경에 따라 점점 축소되는 이탈리아 팀.

사냥에 몰두하여서 사냥 포인트를 엄청나게 쌓은 서문엽은 괴물이 되어 있었다.

소모한 오러까지 조승호에게서 또 충전 받고 쌩쌩해졌다.

혼자서 마지막 5단계인 백색 광채에 둘러싸인 서문엽은 깡패처럼 이탈리아 선수들을 찾아다녔다.

던전 적지 한복판에 조승호를 짱박아놓고는, 이탈리아 선수를 발견할 때마다 알리게 한 듯했다. 조승호가 이탈리아 선수를 포착하면 즉시 서문엽이 그곳에 달려왔으니까.

그렇게 서문엽은 3킬까지 거두며 이탈리아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탈리아는 계속 피해 다니면서 도망자 전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싸움을 피하면서 사냥으로 포인트를 모아 막판까지 기회를 엿본다는 전략이었다. 지고 있는 팀이 마지막에 쓰는 전법이기도 했다.

'저놈은 어떻게 막지?'

엠레 카사 감독은 마음껏 활개 치는 서문엽을 보며 의문을 느꼈다.

최악의 패턴이었다.

조승호의 오러 전달을 받으면서 혼자서 사냥 포인트를 무지막지하게 축적한 서문엽은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이전까지의 서문엽을 막는 방법은 간단했다.

약체인 팀이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포인트를 잘 먹어서 성장한 선수들로 후반에 협공으로 처치한다는 시나리오다.

그동안 서문엽은 포인트를 쌓으며 성장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약한 팀원들로 인해 생기는 전력 불균형을 메꾸기 위해 서문엽이 활발하게 견제 플레이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는 서문엽이 결국은 빅 리그에 진출하지 않고 한국, 그리고 YSM에 머물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약점도 피에트로를 시작으로 좋은 선수들이 발굴되면서 어느 정도 채워지고 있었고, 서문엽은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자유롭게 사냥을 하는 서문엽의 폭발력을 엠레 카사 감독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괴물을 사냥하는 데 있어서 서문엽보다 탁월한 선수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저렇게 잘 크고 나면 막을 방도가 없는데······.'

지금 경기 상황이 그랬다.

조승호만 있으면 다른 동료의 도움 없이도 백색 단계까지 일찌감치 찍어버리는 서문엽이 날뛰고 있는 걸 이탈리아 선수들이 어찌 못하고 있지 않은가.

베를린 블리츠 BC라고 해서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쪽의 에이스 다니엘 만츠도 서문엽을 부담스러워한다.

서문엽은 다니엘 만츠보다도 빠르고, 밀고 당겨도 균형이 안 무너진다. 한마디로 천적이다.

'현장에서 자유롭게 전술을 멋대로 바꿀 수 있는 게 가장 위협적이다.'

현장 지휘관으로 던전에서 팀을 이끄는 서문엽은 어느 감독이든 적으로 만나길 꺼려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은 경기 중에 개입할 수 없으니까.

'월드 챔스에서 만나면 큰 적수가 된다. 반드시 해법을 찾아야 해.'

엠레 카사 감독은 YSM에 대한 경계심을 강하게 느꼈다. 이는 비단 베를린 블리츠 BC만 느끼는 게 아닐 터였다.

***

-어? 적 발견!

정찰을 나갔던 이나연이 소리쳤다.

"오케이, 어디야?"

-7구역, 숫자는 2명!

"지금 간다. 계속 따라붙으면서 체크해."

서문엽은 재빨리 7구역으로 향했다.

생쥐처럼 도망 다니는 이탈리아 선수들을 잡기 위해 활발하게 다니고 있었다.

'속도가 높아지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서문엽은 신세계를 만끽하고 있었다.

최후의 던전에서 막 귀환했을 당시 서문엽의 속도는 불과 76. 클래식 탱커들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려 98이었다.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적이 도망쳐도 잘 쫓아가서 잡고, 혼자 고립되어도 쏜살같이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사냥 속도가 말도 못 하게 빨라졌다는 점이다.

'속도가 중요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클 줄은 몰랐네.'

경기 내내 선수를 관찰해 보면, 싸우는 시간보다 이동하는 시간이 더 많다.

이동 시간이 단축된다는 것은 남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세계적으로 발 빠른 선수들이 강세를 보일 수밖에 없는 흐름이었다.

덕분에 벌써부터 백색 광체에 둘러싸인 서문엽은 빠르게 이나연이 제보한 지역으로 향했다.

현재 8명밖에 없는 이탈리아 선수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사냥하고 도주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한국 팀도 흩어져서 다각도에서 몰이사냥을 해야 하지만, 한국 대표 팀의 어쩔 수 없는 약점 때문에 불가능했다. 개개인의 기량에서 밀리므로 소수끼리 싸우면 무참히 데스당할 위험이 컸다.

그래서 조승호와 이나연이 수색을 하고 적이 발견되면 서문엽이 찾아가 사냥하는 방식을 쓰고 있었다.

"찾았다."

서문엽은 이나연이 제보한 2명을 찾아냈다.

탱커 하나와 원거리 딜러 하나였다.

'음?'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낌새가 느껴진다.

저 원거리 딜러는 '원격 조종'이라는 초능력을 가졌는데, 여러 개의 부메랑을 던져서 자유자재로 조종한다.

탱커는 발이 빠르고 방패 컨트롤이 좋아서 치치 루카스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라는 별명이 있다.

시간 벌고 도망치기 딱 좋은 조합이다.

"조승호."

-왜요.

조승호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하도 혼자 처박히는 임무를 많이 시켰더니 점점 태도가 아니꼬워진다.

"적들 보여?"

-위치는 파악되고 있어요.

"거기 치치 루카스 없을 거야. 체크해 봐."

-잠시만요.

'물체 전달'을 응용해 치치 루카스가 그곳에 있는지 확인해 본 조승호가 이내 말했다.

-네, 정말 없네요? 못 봤는데.

"네 시야를 피할 정도로 교묘하게 움직였단 말이지."

서문엽은 순식간에 계산이 됐다.

이탈리아 측은 조승호가 어디에 처박혀서 자신들을 감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야에서 벗어났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들키므로, 아마도 치치 루카스를 비롯하여서 2, 3명.

'견적 나왔다.'

서문엽은 거침없이 눈앞에 보이는 2명에게 달려들었다.

"적 출현!"

"서문엽이다!"

탱커와 원거리 딜러가 깜짝 놀라 싸울 태세를 했다.

원거리 딜러가 부메랑 7개를 한꺼번에 던졌다.

컨트롤할 수 있는 부메랑이 최대 7개까지라고 들었는데 처음부터 한계까지 초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휘리리릭!

서문엽은 날아드는 부메랑들을 보고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밤마다 싸우는 망할 거대 뱀에 비하면 저 부메랑은 속도나 위력이나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팟! 파팟!

방패도 쓰지 않았다.

빠른 좌우 왕복으로 피했다.

하나, 둘, 셋······.

4개의 부메랑이 서문엽의 갑옷도 못 스치고 빗나갔다.

저러다가 잔상까지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번개같이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서문엽.

민첩성 107의 위용이었다.

피했던 부메랑들이 돌아와서 계속 공격했지만, 역시나 서문엽을 맞추지 못했다.

피하고 창으로 쳐내기도 하면서 서문엽은 부메랑 7개의 공세에 발이 묶이지 않고 2명에게 접근했다.

그때였다.

"간다!"

"죽여!"

좌우에서 숨어 있던 2명의 또 다른 적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는 치치 루카스였다.

서문엽은 웃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역전할 방법은 자신을 처치하는 것뿐인데,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는 없으니 4명 내지 5명이 한계. 그중 하나는 치치 루카스가 반드시 끼어 있어야 해볼 만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겠지.'

서문엽도 이것을 기다려 왔다.

본때를 보여줄 참이었다.

'증폭, 기술.'

기술을 무려 117로 증폭시킨 서문엽은 창을 꼬나 쥐고 덤볐다.

치치 루카스가 비호처럼 덤벼든다.

역시나 명성답게 매섭게 창을 찔러온다.

방패를 왼쪽 가슴에 고정한 자세는 자신을 닮았다.

첫 만남 때 사인을 받았을 정도로 서문엽의 팬이었으니 스타일도 영향받았을 수 있다. 소속 팀 구단주조차 극성팬인 문어 형제 아닌가.

카캉!

첫 공방.

서로의 창이 서로의 방패에 막혔다.

'안정감도 있군.'

서문엽은 치치 루카스를 내심 칭찬해 주었다.

반대편에서도 근접 딜러가 사람 키만 한 대검을 휘둘러 온다.

서문엽은 뒷짐 지듯 방패를 뒤로 놓고, 치치 루카스의 창 아래로 파고들었다.

텅!

대검이 방패를 후려쳤다.

충격이 밀려왔지만, 서문엽은 조금도 균형이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창을 타고 들어오는 서문엽을 보며, 치치 루카스는 물러서기보다는 방패로 내려찍을 준비를 했다.

가까이 접근했을 때,

부웅!

치치 루카스가 방패로 힘껏 내려찍는다.

서문엽도 방패를 들어 막았다.

꽈아앙!

두 사람의 충돌에 오러의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서문엽의 근력 92.

치치 루카스는 90.

그러나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므로 치치 루카스에게 유리한 상황이다.

기세에 밀려 오른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서문엽.

하지만 그 순간, 서문엽은 왼발로 치치 루카스의 한쪽 다리를 휘감았다.

"엇!"

그 상황에서 갑자기 서브미션 테크닉이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치치 루카스는 당황하며 휘청거렸다.

치치 루카스를 기어코 넘어뜨리고, 오른손의 창을 짧게 쥔다.

찔러서 마무리하려는 찰나,

휘리리릭!!

부메랑 7개가 단숨에 날아든다.

치치 루카스가 넘어지는 바람에 시야가 열려서 냉큼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왼쪽의 방패로 막았다.

킬은 포기하고 태세를 정비하나 싶었다.

부메랑을 조종하는 원거리 딜러도, 재빨리 방패를 쥐고 일어서려는 치치 루카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푹.

-서문엽, 4킬.

물러서는 척하면서 창을 뒤로 찌른 것.

창 뒤편의 이중날이 방패 아래로 절묘하게 파고들면서 치치 루카스를 허무하게 데스시켰다.

눈으로 보지도 않고 뒤로 찔렀는데도 절묘하게 킬을 내는 서문엽의 솜씨.

남은 3명은 충격을 받았다.

기술이 증폭되어 인간의 한계를 넘어 117에 이르면 이렇게도 되는 것이었다.

가장 위협적인 적이 사라지니 이제부터는 쇼 타임이었다.

서문엽은 거침없이 킬 파티를 벌였다.

< 대적 불가(1) > 끝

< 대적 불가(2) >

결국 1세트는 서문엽에게 다수가 데스당한 이탈리아 팀이 패배했다.

이탈리아 측의 숫자가 확 줄어들자, 한국이 던전을 전체적으로 포위하고 좁혀 들어가 강제로 전투를 유도했다.

수적으로도 우위였으나, 한국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훈련받았던 대로 전투를 전개했다.

서문엽이 측면에서 공격.

반대편 측면에서 백하연이 이어서 들어갔고, 최전방에서 최혁이 공격적으로 압박하며 3면에서 이탈리아 팀을 분쇄했다.

한국 대표 팀이 그렇게 준비했던 한 타 싸움이었다.

비록 수적에서부터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지만, 실전에서 제대로 호흡이 맞았다는 점에서 선수들은 스스로 의미를 가졌다.

이어진 2세트.

이탈리아는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왔다.

타깃은 서문엽.

서문엽이 사냥 포인트를 획득해서 성장하는 것을 최대한 방해할 의도였다.

서문엽이 무난하게 성장하면 답이 안 나온다는 것을 1세트에서 느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접근하여서 위협을 걸어 서문엽이 사냥을 지속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때로는 다른 한국 선수들을 노리기도 했다.

서문엽을 성장을 방해하든,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다른 한국 선수들부터 처치해서 수적 우위를 가져오거나 해서, 초반부터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 들었다.

이는 그만큼 이탈리아 대표 팀이 서문엽에게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서문엽에게도 읽혔다.

"조승호, 너 3구역에 가봐."

홀로 사냥하는 서문엽.

그 옆에서 멀뚱히 서 있던 조승호가 황당해했다.

"거길 저 혼자 어떻게 가요? 거기에 적이 있으면 전 눈에 띄자마자 슥삭이에요."

-전술 88/90

바로 조승호의 전술 능력치다.

조승호도 3구역이 상대측에서 서문엽을 훼방 놓기 위해 오는 주요 루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 필살기 있잖아."

"저한테 필살기가 있었어요?"

"응, 포복 전진."

조승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두 사람의 대화에 다른 한국 선수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저 그거 절대 안 해요. 저 요즘 유튜브 스타인 거 아세요?"

"잘됐네."

"제가 포복 전진하면서 던전을 횡단했던 영상이 유튜브에 유행하면서 웃음거리가 되고, 짤방에도 쓰인다고요."

"그 새끼 참 말 많네. 같이 가, 그럼."

결국 서문엽이 3구역으로 조승호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메인 오더에게 항명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 지금은 조승호의 말이 옳았다.

위험하니까 데려다 달라는 요구를 궁시렁거리는 말로 대신한 거였다.

이에 서문엽이 농담을 건넨 것은 알겠다는 의미였고.

하도 많이 경기에 같이 출전하다 보니 제대로 된 대화가 아니어도 서로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조승호의 전술이 높아서 서문엽의 의도를 잘 파악하는 덕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새끼 봐라,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눈을 의식했어? 너 원래 던전의 개그 캐릭터잖아."

"그건 안 유명했을 때고요. 이젠 너무 웃음거리가 돼서 동생이 부끄럽대요."

"택배 기사 하던 놈을 억대 연봉자로 만들어주니까 배은망덕하기는."

"미국 유럽 팀 러브콜 거절하고 재계약해 줬는데 너무 배은망덕하신 거 아닌가요?"

"시끄러. 이제 여기 짱 박혀서 투명 놀이나 하고 있어."

"네."

스르륵.

조승호는 즉각 '투명화'를 펼쳤다.

서문엽은 다시 본래 위치로 돌아와 사냥에 전념했다.

그런데 잠시 후, 조승호가 시야 전달을 보내왔다. 투명화를 하는 동안은 움직이거나 말도 해서는 안 되므로 초능력을 써서 알린 것이다.

소리 없이 천천히 다가오는 적 1명이 눈에 띄었다. 부메랑을 쓰는 그 원거리 딜러였다.

서문엽을 상대로 고작 1명.

이는 부메랑으로 위협만 하고 줄행랑을 치겠다는 의도였다.

"오케이, 잡자. 조승호, 시야 전달 계속 하고 있어."

서문엽은 조승호가 보내주는 시야를 바탕으로 적의 위치를 가늠했다.

그리고 창을 던졌다.

하나, 둘, 셋, 넷······.

계속 창을 꺼내 던졌다.

그리고 8자루를 다 던졌다.

8자루의 창은 속도가 세심하게 조절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목표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중 3개는 궤도가 휘게 해서 피하기 힘들게 변화를 줬다.

서문엽이 즐겨 사용하는, 못 피하는 초장거리 투창이었다.

조승호가 보내는 시야를 통해 당황하는 적의 모습이 보였다.

피하려고 움직였지만,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한 번 당해보고 나서야 깨닫는 서문엽의 필살기였다.

푹!

"크억!"

결국 오른쪽 다리에 창이 꿰뚫린 원거리 딜러. 그런데 운이 좋았는지 죽지는 않았다.

"어라?"

1킬이라고 확신했던 서문엽은 당혹했다.

그리고······.

퓻!

"헉!"

-조승호, 1킬.

가만히 투명 모드로 구경하고 있던 조승호가 냉큼 활로 쏴버렸다. 전투력이 전무할 뿐, 결단은 매우 빠른 조승호였다.

던졌던 창 8자루는 다시 서문엽에게 되돌아왔지만, 킬은 이미 조승호가 챙긴 뒤였다.

-저 A매치 첫 킬 했습니다.

"스틸 축하한다."

***

한국 대표 팀 전술 코치 라이너 하임은 허탈감을 느꼈다.

"저 선수는 서문엽 선수의 CCTV 같군요."

조승호를 일컬은 표현이었다.

절묘한 표현이라 백제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CCTV 겸 보조 배터리 겸 택배 기사지."

"전투 능력을 가진 선수 하나를 더 투입하는 것보다 서문엽 선수를 보조하는 선수가 더 쓸모 있는 것 같습니다."

다수로 소수의 적을 상대한다.

독일의 배틀필드 전술은 그러한 기본에서 시작된다. 1명의 자원이라도 낭비할 수 없다.

물론 전투 외에도 다른 분야에 두루 활용 가능한 전술적 가치가 서포터에게 있지만, 기본적으로 전투에도 보탬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은 세계 배틀필드계의 트렌드였다.

하지만 현재.

서문엽은 조승호를 CCTV처럼 사용하면서 이탈리아 팀의 전술을 분쇄하고 있었다.

"결국 던전이야."

백제호가 말했다.

"미지의 변수만 없으면 어떤 상황이든 극복 가능하다고 서문엽은 생각하는 거야."

조승호뿐만이 아니었다.

이나연도 거의 사냥은 뒷전이고 정찰만 하고 있었다.

이것도 서문엽이 시키는 일일 터였다.

이나연도 사냥 포인트를 모아서 성장해 봤자 전투에서 딱히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닌 유형이었다.

끽해야 상대에게 화살을 쏴서 귀찮게 하는 정도인데, 집중력이 고조되는 전투에서 그런 화살에 맞아주는 선수는 없다.

칸 아르얀이 화살에 맹독을 발라준다면 적을 위협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정신만 분산시키는 용도였다.

한 타 싸움에 올인하는 전술 기조를 세웠으면서, 한 타 싸움에 적합하지 않은 선수를 둘이나 내보냈다. 이는 순전히 서문엽의 편의 탓이었다.

'서문엽이 두 사람을 활용해서 정보를 얻고 변수를 차단하고 있다. 그저 자기 플레이에 편하자고 팀에 불합리한 선택을 한 건 아닐 거야.'

서문엽은 아마도 주변 상황을 모두 자기 인지하에 두어야, 최소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 싸우지는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냥 믿고 놔두기에는 팀원들의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팀은 서문엽을 중심으로 싸워야 성과를 낼 수 있어.'

라이너 하임 코치는 한 명의 천재를 위해 팀의 조직력이 뒷받침해 주는 전술 스타일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2세트.

조승호가 1킬을 거둔 상황.

일찌감치 한국에 피해를 입혀 유리한 상황에서 운영을 하고 싶었던 이탈리아는 도리어 피해를 입고는 더 조급해졌다.

"엇? 이탈리아가 또 움직이는데?"

백제호가 놀랐다.

이탈리아 선수들이 대규모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엔 타깃을 바꿨는지 서문엽이 아니라 다른 한국 선수들을 칠 생각인 듯했다.

"괜찮습니다. 상대가 더 조급해졌을 뿐입니다."

라이너 하임 코치는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초반에 피해를 입히고 스노우 볼을 굴리는 운영으로 격차를 더 벌려놓겠다는 목적인데, 서문엽 선수를 견제하는 방법이 너무 무모했습니다."

"음, 그건 그렇지. 원거리 딜러 혼자서 엽이를 괴롭히려 했으니까."

"이탈리아가 조급해져 있다는 것을 서문엽 선수도 이를 통해 눈치챘을 겁니다.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 더 과감해질 거라는 것도 예상할 겁니다."

서문엽을 신뢰하게 된 후부터, 라이너 하임 코치도 서문엽의 의중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문엽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나연과 조승호를 이끌고 적의 배후로 우회.

나머지 팀원 8인은 4-4로 나뉘어 있었는데, 금방 합류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시켰다.

4-4-3 세 무리가 삼면에서 덮쳐 전투를 열겠다는 의도였다.

이탈리아의 조급한 습격을 아주 세게 받아쳐서 승부를 보겠다는 뜻.

한국 대표 팀이 준비한 한 타 싸움 전술이 이제야 제대로 시험대에 올랐다.

조승호를 제외하고 10 대 10.

1세트 때와 달리 서로 동등한 숫자로 붙는 것이다.

이윽고 전투가 펼쳐졌다.

갑작스러운 3방향 역습에 이탈리아 선수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역시나 일류 선수들답게 즉시 3탱커가 3방향에 위치하며 포메이션을 정비했다.

하지만 급한 와중이라 치치 루카스가 서문엽이 달려오는 후방을 담당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보조 탱커는 서문엽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파팟!

빠른 좌우 왕복 스텝으로 보조 탱커의 창을 피하며 접근.

연이어 페이크가 연속으로 섞인 콤보가 펼쳐졌다.

창으로 찌르기.

방패로 후려치기.

반 바퀴 돌면서 등 뒤로 창 찌르기.

마지막으로 창만 던져놓고 몸만 물러서기.

서문엽이 물러서는 줄 알고 안심했다가 시야의 사각에서 날아오는 창을 보지 못한 보조 탱커는 다리에 맞아버렸다.

콰직!

"크윽!"

주저앉은 보조 탱커는 서문엽의 먹잇감이었다.

보조 탱커가 사력을 다해 도끼를 휘둘렀지만, 서문엽은 맞대응하지 않고 그냥 점프로 훌쩍 건너뛰어 버렸다.

뻑!

-서문엽, 1킬.

방패로 후려쳐 마무리.

탱커 라인이 붕괴되자 서문엽은 그대로 짓쳐 들어가 딜러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연이어 백하연도 왼쪽에서 순간 이동으로 안으로 침투했다.

최전방의 최혁도 신태경이 올라와 디펜스를 맡아주자, '오러 집중'을 공격적으로 사용하며 밀어붙였다.

-서문엽, 2킬.

-백하연, 1킬.

-서문엽, 3킬.

-치치 루카스, 1킬.

-치치 루카스, 2킬.

격렬하게 펼쳐진 전투.

그런데 하필 최혁의 상대는 치치 루카스였다.

오랜만에 근접 딜러였던 시절을 회상하며 공격적으로 플레이했던 최혁은 그만 치치 루카스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디펜스로 최혁을 보조해 줘야 했던 신태경도 당황하다가 치치 루카스에게 처치 당했다.

"아이고, 우리도 탱커진이 무너졌네."

"위험합니다."

백제호와 라이너 하임 코치도 심각성을 느꼈다.

치치 루카스를 뒤따라 이탈리아의 다른 딜러진도 이판사판이라는 듯 돌격을 감행한 것.

하지만, 역전을 노려보려던 치치 루카스의 행보는 거기까지였다.

파파파파파파파팟!

무려 13개의 마법진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잠자코 오러를 아끼고 있던 피에트로가 마침내 실력 행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으아아아!"

치치 루카스는 고함을 지르며 온 오러를 다 동원하여 마법진을 후려쳤다.

콰아아앙!

마법진 하나가 부서졌다.

하지만 아직도 12개나 남아 있었다.

당연하지만 마법진은 방어용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영령들이 소환되었다.

콰콰콰콰쾅!!

모든 것을 휩쓰는 일격.

왜 한국을 상대로 한 타 싸움을 해서는 안 되는지 보여준 광경이었다.

천하의 프란체스코 카니니도 킬 하나 못하고 영령들에게 휩쓸려 데스당해 버렸다.

그렇게 2세트는 6-0으로 한국의 승리가 되었다.

A매치 2연승.

심지어 유럽의 강호 이탈리아를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압도했다.

전문가들은 서문엽과 피에트로, 백하연 등이 있으니 서로 전력상 비슷할 거라고 내다봤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매우 강한 한국이었다.

< 대적 불가(2) > 끝

< 동료(1) >

이탈리아를 상대로 거둔 대승.

1, 2세트 모두 MVP가 된 서문엽은 감독인 백제호와 함께 기자회견을 치렀다.

두 사람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하나였다.

"최근 대표 팀의 활약으로 국민의 기대감이 높아졌는데요, 한국의 월드컵 우승이 가능할까요?"

"우승을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일단은 당초 목표였던 16강부터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백제호는 점잖게 답변했다.

서문엽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요즘 한국에서 배틀필드 열풍이 불면서 우승 가능성을 점치는 것이 유행이었다.

서문엽은 덤덤히 말했다.

"개인적인 목표는 우승인데, 못해도 책임은 안 질 거니까 그 질문 그만합시다. 오케이? 이렇게 말하면 뒷말을 잘라먹고 '목표는 우승'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겠네. 근데 그건 댁들이 알아서 하시고, 각자 생업에 종사합시다."

스포츠 기자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서문엽 선수는 올해 들어 놀라울 정도로 폼이 많이 올라왔다는 평가를 받고 계십니다. 나단 베르나흐, 로이 마이어, 다니엘 만츠 등과 함께 올해의 선수상을 경쟁할 거라고 하는데, 수상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지션부터 다르고 하물며 11명 팀 경기에서 누가 최고냐를 논하는 평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제 주관이 있고, 제 주관상 명백히 제가 최고이기 때문에 상을 주는 사람들의 평가에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 선수들과 경기에서 겨루게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와 같은 어투로 거만함을 드러내는 서문엽.

그러나 다들 익숙해져서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어떤 중년의 기자가 색다른 질문을 던졌다.

"일부는 배틀필드를 폭력성을 조장하는 스포츠라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지저 문명의 침공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질 때에 대비한다는 취지에 의문을 품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감한 질문이라 백제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급히 서문엽의 발언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서문엽은 입을 열었다.

"분명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최후의 던전은 붕괴됐고 그 뒤로 지저인들의 공격은 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서문엽의 말에 기자가 재차 물었다.

"그 말씀은 배틀필드의 취지에 의문을 품는 주장에 일부 동의하시는 겁니까?"

"전혀요."

서문엽이 단호히 말했다.

"그 뒤로 20년이 흘렀습니다. 인간은 아직도 지저 세계를 정찰할 수단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확인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낙관할 수는 없습니다. 대비를 하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세계를 탐사하고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는."

기자회견은 그렇게 끝났다.

***

서문엽은 YSM의 클럽하우스로 되돌아갔다.

바이크를 타고 달려가니 피에트로가 이미 공간 이동으로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하지."

피에트로가 덤덤히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서문엽은 자기 사무실에 있는 특수 접속 모듈에 들어섰다.

황무지 위에 거대한 뱀이 언제나처럼 두 사람을 맞이했다.

머리가 하늘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뱀.

그 위용을 지켜보다가, 피에트로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파앗!

공간 이동으로 단숨에 뱀의 코앞에 나타난 피에트로가 마법진을 만들었다.

파파파파팟!

마법진 13개를 한 줄로 겹쳐놓았다.

뱀은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에 놀랐지만,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가리를 들이밀며 돌격했다.

콰콰콰콰쾅!

박치기로 13겹의 마법진을 일거에 박살 내버리는 뱀.

그리고 삼키려는 찰나, 피에트로가 먼저 공간 이동을 펼쳐서 피했다.

이번에도 가까웠다.

바로 뱀의 머리 위에 나타난 피에트로가 또다시 마법진 13개를 만들어 겹쳐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법진의 형태가 조금 달랐다.

동그란 원 안에 수놓아진 기하학적인 선들이 기존의 영령의 일격과 달랐다.

서문엽도 처음 보는 것이어서 깜짝 놀랐다.

'저 자식도 실력이 늘고 있구나.'

공간 이동으로 뱀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멀찍이 도망가려 하지 않고 계속 가까이 붙어서 싸우는 과감함.

거기에 기존에 본 적 없던 마법진들까지.

피에트로도 그간 뱀을 상대하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좋은 방법을 찾은 듯했다.

이윽고,

우우우웅!

놀랍게도 마법진 13개가 서로 연결되었다.

13개의 원이 겹쳐지고, 놀랍게도 그 원 안의 기하학적인 선들이 서로 절묘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수학자들도 놀라서 저 수백 가지 선의 연결 형태를 연구하고 싶어 할 것 같은 놀라운 패턴의 마법진을 선보인 피에트로.

당연하지만 그것은 영령을 소환하기 위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뱀이 거침없이 돌격했다.

촤라라라라락!

마법진의 용도가 밝혀졌다.

바로 그물이었다.

13개의 원과 수백 가닥의 선들이 뱀을 부드럽게 감쌌다.

놀란 뱀이 격렬하게 대가리를 흔들며 저항했다.

저항하는 힘에 밀려 마법진들이 통째로 흔들렸지만, 피에트로는 끈질기게 컨트롤했다.

'좋아, 나도 간다!'

피에트로도 어느 때보다도 잘 뱀의 이목을 끌어주고 있었다.

서문엽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증폭, 속도에!'

속도를 108로 만든 서문엽이 바람처럼 질주했다.

갑옷도 경량화되었기 때문에 처음 싸웠을 때보다도 훨씬 빨랐다.

피에트로의 그물이 찢겨져 나갔다.

파앗!

다시 공간 이동으로 뱀의 머리 뒤로 간 피에트로는 다시금 마법진 13개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사령 소환이었다.

영령계에 이르지 못한 사악하고 억울한 영혼들이 오러에 깃들어 나타났다.

-억울하다······.

-너도 죽어야 한다.

-거대한 괴물이다.

-존재해서는 안 될 생명체구나······.

사령들이 뱀을 맹렬히 공격했다.

하지만 뱀은 자기 머리를 철퇴처럼 휘둘렀다.

부우웅! 붕!

뱀 머리에 얻어맞을 때마다 사령들이 우수수 쓸려 나갔다.

거대한 몸집도 몸집이지만, 그 몸 안에 강물처럼 흐르는 거대한 오러에 사령들이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서문엽은 질주하여서 뱀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피에트로도 너무 잘해준 덕에 여기까지 접근할 때까지 뱀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로소 뱀이 서문엽을 의식했다.

부웅!

꼬리를 휘두른다.

바로 지금!

'증폭, 민첩성에!'

순간적으로 민첩성이 117이 됐다.

대신 속도는 98로 돌아왔지만, 지금까지 달려온 가속이 남아 있어서 크게 줄지 않았다.

이는 뱀과 끊임없는 사투 끝에 체득한 요령이었다.

팟!

힘껏 점프!

콰콰콰콰콰!

꼬리가 땅을 쓸고 지나갔다.

거대한 흙먼지가 일대를 뒤덮었다.

흙먼지를 뚫고 서문엽은 뱀의 몸에 접근했다.

동시에,

팟-

순식간에 무기 영체화를 시켰다.

무기 영체화를 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이 또한 훈련의 성과였다.

콰악!

-키아아아아!!

뱀이 비명을 질렀다.

고통보다는 분노였다.

영체화된 무기가 주는 고통에 몹시 민감하게 반응하는 뱀이었다.

'그래, 만인릉 황제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지. 영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제 뱀의 분노가 온전히 서문엽에게 쏟아졌다.

어쨌든 전에는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먹이지 못했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팟!

서문엽은 찔러 넣은 창을 딛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콰앙!

가까스로 뱀의 아가리가 서문엽이 서 있었던 지면을 통째로 씹었다.

또 한 번 회피에 성공한 서문엽.

등에서 창 한 자루를 더 꺼내 무기 영체화시키고 집어 던졌다.

푹!

-키아아!

목 언저리에 박혀 들었다. 뱀은 더욱 분노했다.

촤라라라라락!

온몸을 뒤트는 뱀.

삽시간에 길고 거대한 몸체가 똬리를 틀었다.

똬리를 틀어서 만든 거대한 동굴이 서문엽을 가둬버렸다.

삽시간에 피할 곳이 없게 만든 뱀은 동굴 안으로 아가리를 벌린 채 돌격했다.

'증폭, 불사!'

서문엽은 판단이 빨랐다.

재빨리 영체로 변신해서 위로 비행했다.

방패와 창을 앞세워 똑바로 마주 돌격했다.

충돌하려는 찰나.

방패와 창만 그 자리에 놓고, 몸만 옆으로 바짝 붙어서 피했다.

카득!

뱀의 아가리가 방패와 창을 삼켰다.

그것은 고도의 페이크였다.

방패와 창만 제자리에 놓았을 뿐만 아니라, 시각적 이미지를 뱀에게 전달해 자신이 그곳에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서문엽은 아슬아슬하게 동굴의 벽에 붙어서 아가리를 피했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창 한 자루를 더 꺼내 뱀의 눈을 찔렀다.

푹!

-키아하아아아아아아아아!!!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초음파에 가까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이었다.

'좋았어!'

서문엽은 희열을 느꼈다.

저 망할 뱀에게서 저런 비명이 나오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위기는 계속됐다.

뱀은 똬리를 틀었던 몸을 그대로 조여서 서문엽을 죄어 죽이려고 했다.

파앗!

문득 피에트로가 공간 이동으로 나타났다.

피에트로는 서문엽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른 손에는 귀환석을 꺼낸 채였다.

파아앗!

똬리 튼 몸이 죄이기 전에 두 사람은 공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공간 이동은 함께할 수 없다.

서문엽을 먼저 보내놓고, 그다음에 자신이 이동하는 건 가능했지만 방금은 그럴 틈이 없었다.

그래서 귀환석을 매개체로 활용해서 둘이 함께 이동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귀환석을 매개체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이는 지저인 중에서도 오직 시공 컨트롤의 장인인 피에트로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제법이더군."

피에트로가 칭찬했다.

"너야말로."

서문엽도 씨익 웃으며 화답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최고의 콤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뱀이 어느 때보다도 더 분노한 상태였으니까.

게다가 서문엽이 찌른 눈도 완전히 실명된 게 아니고 상처만 났을 뿐이었다.

***

"우리 둘만 갖고는 안 돼."

서문엽이 견적을 내렸다.

"내가 열심히 수련하고 너도 새로운 마법진을 많이 개발하면 더 잘 싸울 수는 있겠지. 근데 확실히 부족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동료를 불러오자는 건가."

"필요할 거야."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군."

그게 문제였다.

그냥 물량 공세로 될 일이었다면 수백 명의 초인을 동원해서 싸울 것이다.

그런데 숫자가 많아봐야 소용이 없다.

뱀에게는 정상적인 공격 자체가 안 통하기 때문이다.

탱커들?

막긴 뭘 막겠나.

꼬리 한 번 휘두르면 수십 명이 스크럼을 짜도 학살당할 텐데.

'제럴드 워커 같은 튼튼한 녀석 수십 명을 세워놔도 볼링 핀처럼 우수수지.'

근접 딜러도 소용없다.

오러를 주입한 무기로 공격한다고 생체기 하나 못 낸다.

오직 무기 영체화를 시킨 서문엽의 물리적 공격만이 통한다.

단적으로, 나단 베르나흐를 데려와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공격이 아예 안 통하니까.

마법형 초능력을 쓰는 원거리 딜러들?

그들 중에서도 제한이 있다.

예를 들어 심영수.

제법 괜찮은 폭발을 일으키는 '폭발 구체'는 전 세계 원거리 딜러를 통틀어도 준수한 수준이다.

그러나 저 뱀에게는 조금도 타격을 못 준다. 폭발 구체를 아무리 퍼부어도 뱀은 아예 신경조차 안 쓸 것이다. 아무런 타격도 안 받는데 신경을 왜 쓰겠는가?

적어도 슈란은 되어야 대미지다운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슈란이라······.'

분명 도움을 될 거다.

하지만 그 도움이라는 게 전술적으로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닐 것 같다.

상대는 그 정도로 무지막지한 괴물이었다.

괜히 백제호에게조차 이 일을 비밀로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도움은 되지 않고, 괜히 공포심만 조장할 뿐이니까.

"인간 중엔 딱히 없네. 지저인 중에는 없냐?"

"잘 모르겠군."

"최소한 공간 이동은 자유자재로 쓰니까 뱀의 공격을 피할 수는 있을 거 아냐."

"쉽게 생각하는군. 보통은 공간 이동을 쓰기 전에 공격에 맞을 거다."

한마디로 자신이니까 이 정도로 싸우는 거라는 피에트로의 거만한 한마디였다.

"최소한 상급 사제 정도는 되어야 공격을 피하기 전에 공간 이동을 쓰는 게 가능한데, 그 정도 수준의 실력자가 남아 있지는 않지."

거기까지 말하다가 피에트로는 잠시 침묵했다.

"살아 있는 이들 중에는 없는 것 같군."

죽은 이들을 데려오면 된다는 말투로 들렸다.

< 동료(1) > 끝

< 동료(2) >

-억울하다··· 억울하다······.

사령이 끊임없이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억울한가.

-억울하다··· 억울하다······!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가.

-내 인생과 신념 모두가 헛되이 버려져 버렸어!

조금 부추기자 사령은 분노를 토해냈다.

-지금도 사령들의 악의에 찬 비웃음이 들려. 난 영원히 굴욕 속에서 이대로 떠돌게 될 테지!

-누구 때문이냐?

-태초의 빛을 사칭한 거짓된 망령! 그리고 거기에 속아 넘어간 머저리 같은 첫 번째 상급 사제! 그놈이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믿어왔어! 옛날부터 재기발랄하게 빛났던 동료였으니까.

-동의한다. 그게 지나쳐서 타락한 자를 많이 봤지.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가······!

-그럼 어찌할 것이냐?

-나는··· 나는······!

유도하던 대로 분노의 말을 쏟아내던 사령이 문득 말을 멈췄다.

사령은 보통 사령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넋이 비교적 또렷했다.

다른 사령들의 악의에 찬 마음에 휩쓸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그건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구냐. 누군데 나를 감히 다스리려 드느냐?

-알 텐데?

-뭐라고?

놀란 사령이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대사제님이십니까?

-이제는 아니다.

-저를 사령 언데드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요약하자면 그렇지.

-당신이라면 그럴 능력이 있죠. 하지만 부디 저를 모욕하지 말아주십시오.

-강제할 생각은 없다. 한 번 죽었더니 그 정도 능력도 남아 있지 않아.

영혼을 다루는 계열은 전 대사제, 피에트로의 특기 분야였다.

하지만 한 번 죽어서 사령이 된 몸.

인간의 육신을 빌려 살아났지만 완전한 생명이 아니라서 육체와 영혼의 결속력이 약했다.

본인의 영혼을 간수하는 것도 노력이 드는 만큼, 다른 이의 영혼을 옛날처럼 자유자재로 다루기는 무리였다.

특히 살아생전 대사제 휘하에 8명뿐인 상급 사제였을 정도로 거물인 사령을 강제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감당 못 할 사령을 건드리지 말라는 철칙은 이제 피에트로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건 다행이군요. 어쨌든 반가웠습니다. 대사제님과 대화를 하면서 정신이 약간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다시 혼탁해지겠지.

-···그렇겠지요.

-영령계와 달라. 악의밖에 남지 않은 사령들 사이에서 휩쓸리면 자아를 잃고 만다. 결국은 네가 누구였는지도 잊겠지.

-역시 잘 아시는군요. 그게 제 처지입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겠죠.

-딱 하나. 자아를 잃어도 영원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피에트로가 계속 말했다.

-원한. 다 잊어도 분노는 남아 있을 거다. 영원히 분하고 억울함을 품은 채 존재하겠지.

-그래서!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겁니까? 어리석은 첫 번째 대사제를 추종하다가 멍청한 희생을 한 저를 비웃으시렵니까? 아니면 절 언데드로 살려내시렵니까? 제 시체는 남아 있지도 않을 텐데요!

온전한 시체가 어떤 일에 쓰일지 모두 잘 알았다.

첫 번째 상급 사제가 그의 시체를 남겨두는 실수를 할 리 없었다.

-심지어 진짜 육체도 아닌 것에 저를 가둘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말했듯 강제할 생각은 없다.

피에트로가 차분하게 그를 타일렀다.

-그럼 무슨 생각이십니까?

-일단 하나는 확실히 하지. 내가 널 살려내려 한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첫 번째를 처치하는 일입니까?

-첫 번째는 찾는 게 문제일 뿐이지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다. 너도 악령들이 너를 비웃는 말을 들었지? 너희가 누구에게 조종당했다고 하더냐?

-그··· 가짜 태초의 빛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놈을 일컫는데 그분을 언급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그것은 강대한 괴물이다. 생장의 한계가 매우 높은 고대 시절의 괴물이며, 지성까지 얻었지. 그 지성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는지는 너도 알 테지? 다섯째여.

그랬다.

피에트로가 접촉한 사령은 바로 다섯째 상급 사제였다.

문명이 몰락한 후, 대사제를 자처하는 첫 번째 상급 사제를 추종하다가 서문엽에게 죽임당한 사령이었다.

신념을 위해 첫 번째 상급 사제를 대신하여 희생했지만, 결국 영령계에 이르지 못하고 사령이 되어 떠돌게 된 신세였다.

사제의 최종 목표인, 영계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영령이 되어서 후세에게 조언을 주는 선조가 되는 것에 실패한 것이다.

상급 사제가 되어 살았던 평생을 부정당한 천후의 한이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잘못되었는지는 명백했다.

-그래서 제게 뭘 원하십니까? 영민했던 첫 번째마저 속여 영혼을 속박시킨 지성을 가진 강대한 괴물! 예, 그런 적과 어떻게 싸우실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추한 언데드가 되어 돕는다 한들 한 줌의 보탬이라도 되겠습니까?!

다섯째 상급 사제는 역정을 냈다.

-재단에서 싸울 때 제가 만든 괴물을 보셨지요?

-그렇다.

-그게 제 모든 지식을 다 넣은 역작이었습니다.

-훌륭하더군.

20m나 되는 덩치에 날개까지 달린 미완성 괴물.

예언의 괴물이 자기 수하 괴물의 영혼을 불어넣어서 살려놓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었다.

-제 작품이 대사제께서 말씀하신 그 괴물 자식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3초도 못 버틸 거다.

-하하하······.

다섯째 상급 사제는 힘없이 웃었다.

승산이 없다는 뜻이었다.

설령 언데드가 되는 굴욕을 감수하더라도, 이 원한을 풀 방법이 없었다.

이 얼마나 원통한가.

거짓말에 속아 일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영원히 고통받게 된 이 말로가. 그럼에도 원한을 풀 방법이 조금도 없다니!

다섯째 상급 사제는 들끓는 분노를 느꼈다.

분노로 이성을 잃고 고통을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아를 잃은 사령의 특징임을 알기에 억지로 억눌렀다.

억눌러도 그의 분노는 고스란히 피에트로에게 전달되었다.

-네가 도움이 될 방법이 있다면 하겠느냐?

-전 결코 언데드로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제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군요. 살아생전의 능력으로도 모자란데 하물며 이미 죽은 지금은 어떻겠습니까?

-내게 생각이 있다. 내가 지금 시도하려는 새로운 술법은 네가 생각하던 언데드와 다를 거다.

그 말에 다섯째 상급 사제는 호기심이 들었다.

사령으로 전락한 와중에도 대사제의 새 술법에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뭡니까?

-내가 지금 인간의 몸인 건 알 테지?

-예.

-하지만 사령이 되어서 완전하지 못한 내 영혼은 육신이라는 그릇을 완전히 채우지 못해. 그래서 결속도 약하지.

-이미 죽음을 경험한 영혼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언데드가 살아생전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 빈 공간에 너를 불러들여 채울 생각이다.

그 말에 다섯째 상급 사제는 터무니없다는 듯 웃는 감정을 보냈다.

-말도 안 됩니다. 여러 사령으로 육체를 다 채우려는 시도는 이미 예전에도 했잖습니까. 자아를 잃은 사령을 같이 놓으면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고, 아직 자아를 가지고 있는 저나 대사제님의 경우는······.

-육체의 그릇에 공간이 부족하지.

-알고 계시는군요.

-거기에 새로운 힌트를 얻었다. 인간의 문물은 영감을 주는 것들이 많더군. 긴말 하지 않겠다. 나는 없는 공간을 만들어 확장했다. 그게 이 술법의 근간이지.

-그, 그게 가능합니까?

-내게 온다면 넌 그저 내게 속한 채로 잠들어 있게 될 거다. 그리고 난 나의 능력에 너의 능력을 더할 수 있지.

-그저 잠들어 있을 뿐입니까?

-그래, 인간의 육신에 깃들었다는 치욕을 느낄 새도 없이 그저 잠들어 있으면 된다. 그러나 태초의 빛의 뜻에 따라 싸우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하겠습니다.

-좋아, 널 부르겠다.

***

출입을 금지시켜 놓은 서문엽의 사무실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바닥에 새긴 초혼(招魂) 마법진 위에 상의를 탈의한 채 앉아 있는 피에트로.

또 하나는 피에트로가 하는 양을 구경하는 서문엽이었다.

피에트로의 벗은 상의는 문신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인간이 된 피에트로가 갑자기 타투이스트가 된 것은 아니었다.

몸에 새긴 문신은 모두 마법진과 같은 문양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물 마법진하고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데.'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하도 피에트로가 펼치는 마법진을 많이 본 서문엽은 대강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상반신에 새겨진 문신의 형태는 얼마 전에 뱀과 싸울 때 피에트로가 선보였던, 그물처럼 뱀을 잡아놓던 마법진과 비슷하게 생겼다.

'잡아놓는다? 무엇을 잡아놓으려고 몸에 새겼지?'

어쨌든 서문엽은 방해되지 않게 묵묵히 구경만 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파아앗!

바닥에 새긴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검은 영기(靈氣)가 한 줌의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와 피에트로의 몸에 들어갔다.

이윽고.

파앗!

상반신에 새겨진 마법진들도 온통 흰빛을 냈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물처럼 서로 얽혀 있는 문신이 상반신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돌출했다가 다시 원상복귀 되었다가를 반복했다.

마치 그물에 갇힌 물고기가 빠져나가려고 날뛰는 걸 억지로 붙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러다 그물 찢겨지는 거 아냐?'

서문엽은 우려스럽게 피에트로를 지켜봤다.

피에트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저렇게 고통을 표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얗게 빛나는 문신들이 피부 위에서 멋대로 움직였다.

정교한 손목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치밀하게 움직인다.

이윽고 빛이 잦아들었다.

피에트로가 눈을 떴다.

"됐군."

고통 탓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지만 피에트로는 덤덤히 말했다.

"이제 괜찮은 거야?"

"그래. 성공했다. 다섯째를 불러들였어."

"한 몸에 두 영혼이 같이 있다고?"

"그렇다."

서문엽은 분석안으로 피에트로를 살펴보았다.

-대상: 피에트로 아넬라(인간)

-근력 52/53

-민첩성 60/61

-속도 57/58

-지구력 41/42

-정신력 100/100

-기술 42/42

-오러 197/197

-리더십 100/100

-전술 97/97

-초능력: 공간 이동, 명상, 초혼, 영령의 일격, 생명 조작

'응?'

서문엽은 깜짝 놀랐다.

노화 탓인지 근력, 민첩성, 속도, 지구력이 1씩 줄어 있는 상태. 하지만 그것은 평소와 같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오러의 수치가 이상했다.

100/100이었던 오러가 지금은 무려 197/197이었다.

현재 능력도 한계치도 2배 가까이 뻥튀기 된 것이다.

초능력도 하나 더 늘었다.

지저인의 경우 오러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잘하는 특기만이 초능력으로 따로 표기된다.

피에트로에게 초능력이 하나 더 표기되었다.

생명 조작.

괴물을 만드는 게 특기였던 다섯째 상급 사제의 영혼이 가진 힘을 흡수한 덕분이었다.

우우웅.

피에트로는 오러를 한 번 일으켜보더니 다시 사그라뜨리고는 말했다.

"괜찮군. 이 정도면 그럭저럭 생전의 능력에 가까워졌어."

살아생전 대사제였던 피에트로의 오러는 서문엽이 분석안으로 봤던 수치가 228이었다.

아직 거기에는 못 미치지만, 적어도 그 밑의 상급 사제들 수준은 넘어섰다. 물론 오러 활용법은 한참 위지만 말이다.

"그래, 더 강해진 건 축하하는데, 그게 큰 의미가 있냐? 동료를 불러온다고 했잖아?"

"불러왔다. 내 몸 안에 잠들어 있지만."

"허이구, 그러셔?"

서문엽이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피에트로가 말했다.

"언데드가 되면서 생전의 힘을 잃었지만, 대신 인간이라는 새로운 종족으로서 살면서 나는 많은 걸 얻었다.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지. 설령 살아생전의 나라고 해도 지금의 나보다 더 뱀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식은 나보다 못하지만, 다양한 실험을 해보았던 다섯째의 사고방식을 얻고자 했다. 오러량이 늘어난 건 도움이 되지만 그게 주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도움 되는 지식이 있냐?"

"다섯째가 예전에 재미있는 발상을 한 적 있더군. 그걸 구현하는 기술이 한참 부족해 이루지 못했지만, 나는 다르지. 이건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 동료(2) > 끝

< 생명의 창(1) >

-C조: 미국, 네덜란드, 대한민국, 남아공

월드컵 조 편성에서 대한민국은 C조에 속했다.

언론은 C조가 죽음의 조라고 말했다.

언론이 언제나 조 편성을 놓고 호들갑 떨긴 했지만, 이번에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미국은 말이 필요 없는 월드컵 최다 우승 팀.

네덜란드도 랭킹 20위 안에 드는 유럽의 강호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우 최근 급부상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한 팀이며, 빅 리그 선수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거기에 중국을 제치고 올해 아시아 최강팀으로 분류된 한국은 얼마 전 이탈리아전에서도 저력을 보여주었다.

선수들이 기량이 고르지 못한 게 단점이지만, 서문엽과 피에트로 아넬라가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때문에 C조를 죽음의 조로 부르는 것은 비단 한국 언론만이 아니었다.

월드컵이 코앞에 다가오면서 모든 국가 대표 선수들이 소집되어 훈련을 개시했다.

이는 서문엽도 마찬가지여서 트레이닝에 열중했다. 월드컵보다는 자신의 능력치를 더 높이는 데 안간힘을 쓰는 서문엽이었다.

얼마 전부터 엄청난 하드 트레이닝을 하는 서문엽의 열정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YSM이 그랬듯, 대표 팀의 선수들도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로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는 서문엽에게 동화되었다. 서문엽처럼 강한 선수도 그토록 열심히 하니 다른 선수들도 눈치껏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서문엽은 때때로 선수들에게 저승사자라 불렸다.

"유벽호."

"헉, 예!"

음료수를 뽑으러 나왔던 유벽호는 서문엽과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대상: 유벽호(인간)

-근력 72/72

-민첩성 79/79

-속도 80/80

-지구력 65/75

-정신력 77/80

-기술 84/85

-오러 71/71

-리더십 32/40

-전술 52/61

-초능력: 순간 가속

-순간 가속: 오러를 지속적으로 소모하여 30초간 몸을 30% 빨리 움직인다.

예전과 달리 기술이 84까지 오른 덕에 순간 가속으로 빨라진 스피드를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유벽호.

그 덕에 얼마 전 A매치에서도 계속 주전으로 기용됐다.

"너 지구력이 많이 부족하더라?"

분석안으로 슥 본 서문엽이 말했다.

"아, 네.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냐. 전하고 큰 차이가 없는 걸 보니 노력이 부족해."

"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유벽호는 마음속으로 '제발······' 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내일부터 나랑 같이 훈련하자."

"크헉!"

그렇게 저승사자의 부름을 받게 된 유벽호는 다음 날부터 서문엽의 하드 트레이닝에 동참하게 되었다.

서문엽이 최근 주로 하는 셔틀 런은 지구력에 더 큰 효과를 보이기 때문에 유벽호에게 제격이었다.

엄청난 정신력으로 인해 1분1초도 집중을 놓지 않는 서문엽은 훈련을 잠시도 대충 습관대로 하는 법이 없었다.

그 탓에 유벽호도 죽을 맛이었다.

뒤에서 서문엽이 함께 뛰는데, 자신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오래 뛰는 사람과 직접 비교되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가,

"어쭈? 정신 줄 놨냐? 집중해!"

조금이라도 지쳐서 느려지려는 기미만 보여도 지적이 날아왔다.

붙들려서 함께 훈련한 유벽호는 코치가 나타나 그만하고 쉬라고 구조해 준 뒤에야 해방되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혹사당한 유벽호는 좀비처럼 눈빛이 풀려 버렸다. 다만 지구력이 69/75로 단기간에 큰 폭으로 늘어났으니 본인에게는 행운이었다.

'금방 70 채울 수 있겠네. 계속 굴려야겠다.'

유벽호는 당분간 이 훈련 지옥에서 해방될 기미가 안 보였다.

희생자는 또 있었다.

"만식이."

"헉, 예!"

"간밤에 치맥 맛있었냐?"

"헉!"

최만식은 기겁했다.

백하연이 간밤에 순간이동으로 탈출해 치킨과 맥주를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최근 높은 강도의 훈련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선수들은 몰래 파티를 벌였다.

그러나 밤마다 피에트로와 함께 YSM 클럽하우스에서 뱀과 사투를 벌이는 서문엽이 숙소로 돌아와서 이를 알아챘다.

물론 서문엽은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용서가 안 되는 건 아직 재능을 다 끌어내지 못한 최만식의 능력치였다.

"잘 먹었으면 더 열심히 뛰어야지?"

"예······."

"너 발이 너무 느리던데, 나랑 트레이닝 같이해야겠다."

"크흑!"

대표 팀에서 늘 후보였던 탱커 최만식은 최근 서문엽이 딜러로 가고 그 외에 4탱커를 선발하는 대표 팀의 기조 덕에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경기마다 그냥저냥 괜찮은 근력과 지구력을 가졌지만 발이 느려서 왜 후보였는지를 보여주던 최만식은 속도 64/69의 소유자였다.

한계치인 69를 달성할 때까지 그는 서문엽의 훈련 지옥에 동참해야 했다.

그렇게 서문엽은 눈에 띄는 대표 팀 선수를 가끔씩 잡아와 자신의 훈련 코스 일부에 집어넣었다.

경이로운 것은 선수 여럿이 힘들어 죽으려 하는 훈련들을 그는 매일매일 전부 다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초인이라는 단어는 사실 저 사람에게만 써야 하는 걸지도 몰라."

"혼자서 3인분의 훈련을 하고 있어."

"저러다 몸 탈나는 거 아냐? 초인이라도 몸에 한계는 있는 법인데."

혀를 내두른 것은 선수들뿐만이 아니었다.

대표 팀 코치들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혹사하는 오버 트레이닝에 기겁을 해서 뜯어말렸지만, 서문엽은 자기 몸은 자기가 잘 안다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통은 그러다가 부작용으로 몸에 문제가 생기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서문엽은 초능력 '영혼 연성'으로 인해 각 능력치의 한계가 언제나 1씩 늘어나고 있었다.

사실상 무제한으로 훈련하는 만큼 올릴 수 있는 것.

가브리엘 감독이 지적했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는 적과 싸워보고 보강해야 될 점을 알게 되면서 서문엽은 꾸준히 능력치가 상승하고 있었다.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91/95

-민첩성 108/109

-속도 100/101

-지구력 101/102

-정신력 111/112

-기술 108/109

-오러 110/111

-리더십 100/101

-전술 100/101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영혼 연성.

근력은 1 더 줄어서 91.

대신 몸이 가벼워져서 민첩성은 1 늘었고, 속도는 2 늘어나서 마침내 100에 이르렀다.

99였던 지구력 또한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여 101이 되었다. 고강도 트레이닝을 장시간 반복했으니 지구력이 안 늘 리 없었다.

기술도 1 늘었다.

100을 넘은 지 오래였던 기술은 올리기가 참 힘든 능력치였는데, 뱀을 상대로 싸울 때 영체 상태와 무기 영체화를 수시로 바꾸며 응용한 까닭에 늘었다. 영체화를 다뤄야 기술이 더 쉽게 오른다는 걸 깨달은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이유로 영체화를 집중적으로 다뤘더니 오러 컨트롤도 좋아져서 오러가 1 상승했다.

'이 정도로도 소용없어.'

서문엽은 목표치가 매우 높았다.

그의 적은 무려 예언의 괴물이었다.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는 그 괴물보다 더 약한 가짜 뱀한테도 맥을 못 추고 있는 현실에서 서문엽이 만족을 느낄 리 없었다.

물론 공격 한 번 못 하고 꼬리 한 방에 나가떨어졌던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아직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아프게 해서 화를 돋울 수는 있어도 확실한 대미지를 줄 방법이 없어.'

이런 생각 하긴 싫지만 서문엽은 자신이 그 거대 뱀 앞에서 모기가 된 기분이었다. 귀찮긴 하지만 병균이라도 옮기지 않는 이상 사람이 죽진 않는다.

대체 만인릉의 황제는 살아생전에 얼마나 강했던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능력치를 더 올려봤자 공격을 몇 번 더 피하는 게 고작이야. 역시 기대할 건 피에트로밖에 없나. 근데 이 자식은 어디서 뭘 하는 거지?'

다섯 번째 상급 사제의 사령을 흡수한 피에트로는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매일 정규 훈련만 마치면 공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무엇을 연구하는지는 몰라도 빨리 성과를 가져왔으면 싶었다. 월드컵이 목전인데 서문엽은 뱀과 싸워 이길 생각으로 가득했다.

***

카메라 셔터 소리가 공항에 난무했다.

한국 대표 팀이 월드컵 참가를 위해 출국하는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기대감이 높은지라 기자들과 팬들이 공항에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었다.

"월드컵 출전 앞두고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똑같은 질문 몇 번 하냐?"

서문엽은 가벼운 핀잔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휙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르던 피에트로도 기자들을 무시하고 따라 들어간다.

그 뒤의 선수들이나 열심히 대답해 줄 뿐이었다.

서문엽은 피에트로에게 물었다.

"하는 일은 어떻게 됐어?"

"곧 있으면 완성될 것 같다."

"만드는 게 뭔데? 끝내주는 괴물이라도 되냐?"

"생체 조작으로 괴물을 만들어봐야 왕에게 대적하기엔 턱없이 약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괴물이라는 말이 틀린 표현도 아니군."

"뭐래?"

"며칠만 더 있으면 완성된다. 그때 확인해도 늦지 않아."

피에트로는 말을 아꼈다.

비행기를 타고 월드컵 개최지인 미국 LA로 향하는 중에도 피에트로는 남은 비행시간을 확인하더니, 비행기 안에서 달리 할 것도 없으니 가서 연구나 하고 오겠다며 화장실 가는 척하며 공간 이동으로 사라져버렸다.

LA에 도착하자 환영 인파가 있었다.

"서문이다!"

"서문엽! 인류를 구해줘서 고맙다! 하지만 로이 마이어가 더 위대한 선수야!"

"우승은 미국이 하고 MAP는 로이 마이어다!"

LA 워리어스의 연고지답게 배틀필드 열성팬들이 상당히 많았다.

서문엽 실물 좀 보겠다고 온 배틀필드 팬들이 그의 등장에 고래고래 소리치며 환영했다.

그런데 은연중에 로이 마이어와 비교되고 있는 피에트로 아넬라가 나타나자, LA 팬들의 태도가 거칠게 변했다.

"이 자식아! 너 따위가 로이 마이어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착각하지 마!"

"최고의 원거리 딜러는 로이 마이어야!"

"아니꼬운 늙다리 자식!"

물론 피에트로는 야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예 관심이 없었다.

서문엽은 낄낄거렸다.

저들을 알까.

인간도 아니고 지저인도 아닌 저 이상한 녀석에게 세계의 존망이 달려 있다는 것을 말이다.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쉬고 있을 때, 피에트로는 다시 한 번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밤, 피에트로는 2m가량 되는 길이의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완성했다."

서문엽은 피에트로가 들고 온 것을 보며 물었다.

"그거 혹시 창이냐?"

"그렇다."

피에트로는 물건을 둘둘 말고 있던 천을 풀었다.

그것은 서문엽이 난생처음 보는 괴상한 창이었다.

아니, 그것을 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앞쪽의 창날은 어떤 괴물의 뼈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체는 자드룬의 줄기와 비슷했다.

끝부분은 주먹만 한 마력석이 장착되어 있었다.

분명 괴물들의 신체 일부를 이것저것 가져와서 만든 창 같았다.

그런데 서문엽은 그 창에서 단지 재질이 괴물의 부산물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질감을 느꼈다.

생긴 것부터가 꺼림칙스러웠지만, 서문엽은 일단 창을 쥐어보았다.

이질감의 정체가 확실해졌다.

창을 쥔 손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창에 오러가 흐르고 있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서문엽이 오러를 주입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서문엽이 물었다.

"혹시 이거 살아 있냐?"

"잘 아는군."

피에트로가 가볍게 대꾸했다.

이질감의 정체.

피에트로가 만든 것은 한 자루의 창이었지만, 살아 있는 괴물이기도 했다.

창끝에 달린 마력석은 이 괴물 창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장치였던 것이다.

< 생명의 창(1) > 끝

< 생명의 창(2) >

살아 있는 괴물이라는 느낌이 손아귀에서 물씬 드니, 창을 계속 쥐고 있기가 찜찜했다.

괴물을 밥 먹듯이 죽인 서문엽이 고작 괴물 창에 불길함을 느낀 건 아니다.

다만······.

"찜찜하네. 살아 있는 놈이니까 무기로 신뢰가 잘 안 들어."

서문엽은 피에트로가 가져온 괴상망측한 창에 대한 첫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냥 금속으로 된 창이면 뭘 하든 컨트롤하는 대로 다뤄질 테니 문제없다.

그런데 살아 있는 녀석이면, 싸움 중에 일어나는 미지의 변수가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살아 있다 할 수는 없지."

피에트로가 설명했다.

"다른 환자에게 이식하기 위해 적출한 장기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말하기는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자체로 살 수 없는 형태이기 때문에 구현하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이 어려운 걸 나는 해냈다는 결론에 이르는 피에트로의 화법.

설명이 계속되었다.

"마력석이 미세한 오러를 계속 공급하기 때문에 완전히 살아 있지는 않지만 죽지도 않은 채로 유지시킨다."

서문엽은 창을 들어 괴물의 뼈로 만들어진 창날을 유심히 살폈다.

"그래서, 이 창이 내가 쓰던 것보다 좋은 거야?"

"용도에 따라 다르겠지. 창의 전체 내구도 자체는 쇠보다도 약하니까."

"뭐?"

서문엽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찰나, 설명이 이어졌다.

"생물과 무생물의 오러 전도율 차이를 생각해 보면 이 창의 용도를 확실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만."

그제야 서문엽은 손에 든 찜찜한 창을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오러가 더 원활하게 전달된다면 확실히 최고의 무기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오러를 주입한다 해도 무기 자체의 내구성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하긴 어차피 뱀이랑 싸울 때는 무기 영체화를 무조건 해야 하니까."

서문엽도 납득했다.

"무기 영체화를 했을 때도 영혼의 힘이 무생물보다 잘 전도될 거라는 발상에서 제작한 무기다. 처음 만든 것이니 일단 시험해보고 보완할 부분을 찾는 게 어떤가?"

"그래야겠네. 그럼 잠시 한국에 다녀와 볼까?"

"그러지."

피에트로는 공간 이동으로 서문엽을 강화도에 있는 YSM 클럽하우스로 먼저 보냈다. 그 뒤에 뒤따라 공간 이동을 썼다.

***

던전에 접속했다.

이번에는 가진 무기가 방패와 창 한 자루뿐이었다.

처음 써봐서 다소 생소한 무기였다. 손에 쥔 감촉부터가 낯설다.

그래도 괜찮다.

고작 무기 하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변수가 생겼으니까.

'이전까지는 얼마나 길게 싸우느냐가 달랐을 뿐 승산이 0%인 건 마찬가지였어. 무기라도 뭔가 달라지는 편이 낫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저 거대한 뱀은 언제나처럼 산 같은 위용으로 우뚝 서 있었다.

실제로는 저만한 덩치에 지성이라는 이름의 교활함에 오러와 영혼을 다루는 각종 술법까지 갖췄다고 하니 기도 안 찬다.

이렇게 승산이 없는 경우는 난생처음이라 당황스러울 정도인데, 그럼에도 서문엽은 도전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설마 승산이 0%인데도 이겨보고 싶다는 오기가 발동될 줄은 몰랐다.

"먼저 시작하지."

가볍게 말한 피에트로가 공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팟!

다시 나타난 곳은 뱀의 머리 위.

뱀은 곧바로 휙 고개를 치켜든다. 왕을 본떠서 오러의 파동 감지에 극도로 예민하게 설정해놨기 때문이었다.

-시이이이!

뱀이 아가리를 벌린 채 달려드는 찰나, 피에트로도 술식을 발현했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팟!

무려 20개나 되는 마법진.

다섯째 상급 사제를 흡수한 뒤에 오러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덕에 기존의 13개에서 한계가 대폭 늘었다.

20개나 되는 마법진이 서로 겹쳐진 채, 그 안의 기하학적인 패턴들이 하나로 연결된다.

오차가 없이 맞아 떨어지는 절묘함!

거대한 오러의 그물이 하늘을 뒤덮은 장관이 연출되었다.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 서문엽도 놀랐다.

'저 정도면 성역에서 싸웠을 때 수준의 위압감인데?'

오러 197.

살아생전의 228에 상당히 근접한 수치가 되니, 피에트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촤라라라라라라락!

거대한 그물이 뱀 대가리를 감싸고 휘어잡았다.

-크아아아아!

뱀이 노하여 대가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물이 상당히 성기게 붙들었다. 이전과 다르게 뱀의 움직임을 꽤 제한시키고 있었다.

'저 정도까지 붙잡을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비약적으로 상승한 피에트로의 힘은 이 싸움에 상당히 도움 됐다.

서문엽은 더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달려 나갔다. 속도를 증폭시키고 바람처럼 질주했다.

뱀은 피에트로가 어느 때보다도 성가시게 만들어서 서문엽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있었다.

파앗! 팟!

연속으로 공간 이동을 펼쳐 뱀의 송곳니를 잇달아 피한다. 정확한 타이밍에 공간 이동을 쓰는 피에트로. 그가 아슬아슬한 선까지 뱀을 자극한 덕에 서문엽은 어느 때보다도 여유로웠다.

벌써 공격 한 번 안 당하고 코앞까지 도달한 서문엽은 창을 들고 무기 영체화를 시전했다.

획!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이러할까.

영체화의 기운이 느껴지자마자 뱀의 관심은 100% 서문엽에게 꽂혔다.

서문엽도 놀랐다.

뱀의 주목을 받아서가 아니다.

창을 둘러싼 영체의 힘이 매우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뭐지?'

무기 영체화가 이루어지는 과정도 평소보다 훨씬 매끄러웠다.

마찰력이 사라져서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오러가 창에 주입되고, 무기 영체화는 기름에 젖은 종이가 타오르듯이 폭발적으로 형성되었다.

푸욱!

뱀의 몸통에 일격을 찔렀다.

-크아아아아아!

뱀이 비명을 질렀다.

전에 없던 고통의 표현!

내지른 창이 평소보다 훨씬 깊이 파고든 탓이었다.

뱀조차 고통을 느낄 만한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한 것!

쐐애애애애액!

뱀의 꼬리가 거대한 자연재해처럼 날아들었다.

서문엽은 창을 뽑는 동시에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피할 때는 순간적으로 무기 영체화를 해제하고, 대신 증폭을 민첩성에 사용했다.

꽈아아아앙!

꼬리가 지면을 때리면서 지진이 벌어지고 흙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민첩성을 118로 증폭시키기 않았으면 일격에 가루가 될 뻔했다.

'이건 통한다!'

서문엽은 없었던 일말의 승산이 생겼음을 느꼈다.

무기 영체화가 평소보다 더 강해진 점.

그 덕에 더 깊이 찌를 수 있게 된 점.

그리고 그 외에도 창은 무언가 또 다른 기능을 더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뱀의 몸속에 창을 찔러 넣은 순간, 창이 무언가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뭔지는 몰라도 살아 있는 괴물 창이 뱀의 몸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것 같았다.

뱀이 연이어 서문엽을 삼키기 위해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118의 민첩성으로도 피할 타이밍이 잘 나오지 않았다. 뱀이 그만큼 고통을 받고서 서문엽을 먼저 처치하려고 악착같이 덤빈 탓이었다.

그러자 피에트로가 다시 그물을 만들어서 뱀을 붙들었다.

찌이이이익!

20개의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그물조차도 뱀의 강대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찢겨 나갔다.

그러나 서문엽이 피할 시간은 충분히 벌어주었다.

콰드드드득!!

뱀은 한 발 늦게 지면을 씹어 먹었다.

엄청난 크기의 크레이터가 패일 정도로 잔뜩 지면을 씹은 뱀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빛으로 서문엽을 노려보았다.

뱀이 또 서문엽을 노리고 아가리를 벌렸다.

그때, 서문엽은 처음으로 뱀을 상대로 회피 이외의 선택지를 택했다.

초능력 '불사'를 증폭.

영체로 변신한 뒤, 무기를 남겨놓고 영체화를 해제한다.

그런 복잡한 과정이 걸쳐지는 무기 영체화가 삽시간에 펼쳐졌다. 괴물 창이 있으니 무기 영체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거기에 시각적 이미지를 뱀에게 보냈다.

자신이 뱀에게 삼켜지는 이미지.

뱀이 속을 수밖에 없는 이미지였다.

그러면서 서문엽은 힘껏 점프했다.

콰아앙!

뱀이 아슬아슬하게 서문엽을 놓쳤다. 시각적 이미지가 통한 것이다.

"뒈져!"

서문엽은 뱀의 미간에 창을 꽂았다.

콰아악!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뱀이 절규했다.

머리와 꼬리를 마구 흔들며 몸을 뒤틀었다.

산처럼 거대한 몸으로 몸부림을 치니 주변 지형이 뒤바뀔 정도였다.

서문엽은 뱀의 발광 탓에 미처 창을 회수하지 못했고, 피에트로도 이번에는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지 않고 멀찌감치 공간이동으로 달아났다.

서문엽은 속도를 증폭시켜서 쏜살같이 달아났지만, 몸부림치는 뱀에 의해 지면이 쪼개지고 흔들려서 몇 번을 넘어졌다. 그래도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나중에 피에트로가 공간 이동으로 나타나, 귀환석을 써서 서문엽과 함께 다시 공간 이동을 펼쳤다.

안전한 곳까지 물러난 두 사람은 고통에 발광하는 뱀을 살폈다.

"쟤 저 정도로 고통을 호소한 적은 처음이지?"

"그렇다. 좋은 부위에 공격을 성공시켰군."

"죽으려나? 미간에 딱 찔렀는데."

"그럴 것 같지는 않군. 타격은 입혔지만 육체보다는 정신적인 대미지가 유효했다."

그랬다.

뱀은 지금껏 미간에 저 정도의 상처를 입어본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 모델인 왕은 만인릉 황제에게 호되게 쓴맛을 봤겠지만, 그것도 상당히 옛날 일이라 오랜만에 고통을 느끼면 크게 놀라 저 정도의 반응을 할지도 모른다.

"근데 창에 무슨 장난을 쳐놓은 거야?"

서문엽이 물었다.

그는 자신의 창이 뱀의 몸속에 꽂혔을 때 무언가 이상한 짓을 했다는 것을 감지했다.

손에 쥐고 있는 창에서 미세한 오러 반응이 일어나는데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피에트로가 말했다.

"창은 생명체의 몸에 창날을 꽂아 넣으면 두 가지 행동을 한다. 하나는 오러 흡수, 또 하나는 혼란."

"혼란?"

"그래, 찔린 적에게 혼란을 주어 정신에 타격을 입히는 효능을 발휘한다. 특히나 방금은 뇌에서 가까운 미간에 창을 꽂았지. 창이 지금도 뱀에게 혼란을 부여하고 있는 거다."

그 말에 서문엽은 혀를 내둘렀다.

창에 그 정도의 효과를 넣어놓다니.

이것은 초능력 2개가 더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면 진짜 예언의 괴물한테도 통하겠어."

서문엽은 피에트로가 만든 괴물 창이 성공작이라고 인정했다.

"보완해야 할 점은 없나?"

피에트로는 칭찬에 기뻐하는 기색은 없고, 보완점부터 물었다.

서문엽은 아무것도 없는 오른손을 보여주며 말했다.

"몇 자루 더 만들어야겠는데. 하나뿐이라서 지금처럼 창을 뺏기면 속수무책이잖아."

뱀의 미간에 꽂혀 있던 괴물 창은 곧 부러져버렸다. 뱀의 극심한 몸부림 탓이었다.

괴물 창의 오러 흡수, 혼란 효과도 사라지자 뱀은 서서히 진정을 되찾았다.

무기를 잃은 서문엽은 더 싸울 수 없어 접속을 종료했다.

접속 모듈에서 나온 서문엽은 괴물 창을 아까와 달리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승산이 생긴 것 같아. 많이 쳐줘서 3% 정도?"

"여전히 비관적이군."

"그래도 아예 0%일 때보다는 한결 낫잖아."

괴물 창이 놀라운 성능을 보여준 점 외에도 피에트로가 더 강해진 게 한몫했다.

두 사람은 공간 이동으로 LA의 호텔에 돌아왔다.

침대에 드러누운 서문엽이 계속 말했다.

"야, 사는 게 왜 괴로운지 알아?"

"좋은 일은 쉽게 잊히고 괴로운 일은 잘 안 잊히니까."

피에트로는 간단히 대꾸했다.

"아냐, 새꺄. 오래 산 놈이 그것도 모르냐?"

"그럼 뭔가?"

"가만히 있으면 죽잖아. 질식하지 않으려면 숨도 쉬어야 하고, 목마르지 않으려면 마셔야 하고, 굶주리지 않으려면 음식도 찾아 먹어야 하고."

서문엽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쳇바퀴 위를 달린다고 생각해 봐. 뒤에서는 어떤 새끼가 독 바른 창으로 똥구멍을 찌르려 들어. 안 찔리려면 계속 달려야 해. 결국은 지쳐서 죽겠지. 좆같아, 안 좆같아?"

"······."

"근데 게임이 재미있으려면 원래 좀 불리해야 해. 어려운 맛이 있어야 즐거워."

서문엽은 누운 채로 가만히 손에 쥐고 있던 괴물 창을 바라보았다.

살짝 올라간 승률.

그러나 여전히 난이도가 극악한 게임.

서문엽은 무척 즐거운 표정이었다.

< 생명의 창(2) > 끝

< C조(1) >

C조 첫 경기가 펼쳐졌다.

미국 대 네덜란드.

미국 대표 팀은 주축 선수들이 클래식 탱커들이라 전통적인 파워 게임을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대신 기존의 4탱커에서 3탱커로 줄이는 선택을 했다.

이는 모순이었다.

클래식 탱커는 발이 빠르지 못하기 때문에 넓은 범위를 커버하지 못한다. 그래서 탱커가 적어도 4명은 필요했다.

그런데도 3탱커를 채택한 것은, 혼자 2인분 이상을 할 수 있는 탱커가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키가 2.2m에 달하는 거인이 커다란 카이트 실드와 핼버드를 들고 던전을 누볐다.

푸학!

핼버드의 도끼날이 세르펜의 몸통을 거침없이 찍었다.

시이이익!

세르펜이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거대한 몸으로 몸부림치니 깔릴 위험이 있었지만, 그는 방패를 들고 버텼다.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절대로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몸을 땅에 고정했다.

오러를 일으켜 육체의 근력을 높여주었다.

그 결과, 훨씬 큰 세르펜의 몸부림에 당하고도 밀리지 않고 버티는 놀라운 뚝심을 보여주었다.

그사이 다른 미국 선수들이 잽싸게 달려들어 세르펜을 처치했다.

서문엽처럼 혼자 세르펜을 처치하는 기예는 못 보여줬지만, 신속하게 사냥하는 솜씨는 역시나 일류 팀다웠다.

세르펜의 몸부림조차 받아내는 거구의 탱커는 바로 제럴드 워커였다.

-제럴드 워커! 역시 세계 최고의 탱커다운 탱킹을 보여줍니다. 세르펜이 다른 선수들을 신경 쓸 여력도 없었어요.

-탱킹뿐만이 아니라 저 커다란 핼버드에서 나오는 위력도 살인적이니까요. 예전에는 수비 위주였다면 지금은 공격 또한 능해진 제럴드 워커 선수의 모습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그의 활약상이 기대됩니다.

경기장의 미국 중계진들도 연신 찬사를 보냈다.

세르펜을 처치한 뒤에는 양 팀 모두 평범한 사냥으로 시간을 보냈다.

특별한 장면이 나오지 않으니, 카메라는 슬슬 경기장 내부도 비추고 있었다.

카메라는 VIP석에서 좋은 장면을 건져냈다.

서문엽이 백제호와 함께 경기장에 관람을 하러 온 것이다.

-서문엽 선수와 백제호 감독이군요!

"와아아아!"

대형 스크린에 서문엽의 얼굴이 비치자 관중들이 환호했다.

서문엽.

그리고 옆에 있는 백제호.

인류를 구원한 7영웅의 멤버로서 국적을 떠나 인기 있는 두 사람이었다. 특히나 영웅을 좋아하는 미국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이어서 사람들이 박수까지 치며 존중을 표하니, 서문엽과 백제호도 손을 흔들며 화답해야 했다.

-한국도 내일 두 경기가 있는데 오늘 경기를 관람하러 왔습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내일 남아공과의 경기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오늘 경기를 펼치는 두 팀이 더 신경 쓰이겠지요.

한때 같은 조에 끼어 있으면 1승은 공짜라고 좋아했던 약체 한국. 그 시절이었다면 경기장에서 관람하는 장면이 포착돼도 아무도 신경 안 썼을 터였다.

이제는 미국조차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강팀이 되었다.

서문엽의 등장으로 달라진 위상이었다.

여전히 한국은 몇몇 선수만 제외하면 약체였다. 본래 같았으면 모든 선수가 대형 스타인 미국이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어야 했다.

그러나 최근 보여준 서문엽의 활약상이 너무 경이로웠다.

불가사의할 정도의 플레이를 보여준 탓에 미국에서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물론 한국에 서문엽이 있듯, 미국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선수는 있었다.

"이야, 쟤 실력 엄청 늘었네."

서문엽은 맹활약을 펼치는 제럴드 워커를 보며 감탄했다.

백제호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1,000만 달러짜리 가르침을 내려주긴 했지."

서문엽은 실실 웃었다.

몇 년 전, 백제호의 저택까지 찾아온 제럴드 워커와 겨룬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겨룬다는 말도 무색했다.

엄청난 재능을 갖고도 그걸 제대로 활용 못하는 제럴드 워커의 둔함에 측은함을 느끼고 가르침을 내려줬다고 봐야 했다.

'그땐 거대한 철벽같은 방패를 썼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역시나 크긴 하지만 제럴드 워커의 체구를 감안하면 적당한 카이트 실드를 쓰고 있었다.

예전의 초대형 방패는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도 틈틈이 주위를 살피기 위해 제럴드 워커가 고안한 고육지책이었다. 초대형 방패를 쓰면 방어에 용이하기 때문에 싸우는 중에도 주위를 살필 여유를 벌 수 있다는 얄팍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초대형 방패가 도리어 제럴드 워커의 시야도 가려버리는 단점이 있었고, 방패 컨트롤이 단조로워서 공격·수비 패턴도 단순해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서문엽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뭔가를 깨달은 제럴드 워커는 이제 성장을 가로막던 장애에서 벗어나 쭉쭉 기량을 상승시켰다.

그리하여 현재······.

-대상: 제럴드 워커(인간)

-근력 100/100

-민첩성 95/96

-속도 62/62

-지구력 100/100

-정신력 93/97

-기술 90/93

-오러 88/88

-리더십 60/83

-전술 46/48

-초능력: 육체 강화, 불굴

근력·지구력은 여전히 100·100으로 깔끔한 세 자릿수였다.

58밖에 안 되던 속도는 62로 조금 올랐으나 이미 한계.

그야말로 전형적인 클래식 탱커의 정점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 경이로운 것은 민첩성이었다.

예전에 서문엽과 처음 봤을 때는 81이었는데, 이제는 무려 95였다.

엄청난 덩치에 육중한 갑옷으로 무장했고 발까지 느리니 둔하다는 편견이 들 법도 한데, 실제로는 세계 최고의 서포터 다니엘 만츠(95/95)만큼이나 민첩하다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도 매우 성숙했다.

93이면 멘탈이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뜻이었다.

기술도 82에서 90으로 8 상승.

저런 압도적인 신체 조건을 가졌으면서도 힘만 믿고 날뛰지 않고, 오히려 민첩하고 테크닉이 뛰어난 선수.

그걸 두고 월드 클래스라고 한다.

'전술이 40대였구나. 옛날엔 더 낮았을 테니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었네.'

그래도 40대 후반이면 문제가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고 그냥 살짝 아쉬운 평균 정도였다.

저 정도 약점은 있어야 인간적이었다.

아무튼 발이 느리다는 약점은 뚜렷했다.

62에 무거운 무장 탓에 더 이동 속도가 느리니 말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장점밖에 없었다.

"그냥 힘만 센 게 아니야."

제럴드 워커의 플레이를 보면서 백제호가 말했다.

"방패도 세련되게 잘 활용하는 것 같고, 이제는 엽이 너라도 얕봐서는 안 되겠다."

"힘세고 오래가고 테크닉도 좋은데, 이제 날렵하기까지 하네."

서문엽의 평가에 백제호가 갸웃거렸다.

"날렵해?"

"잘 지켜봐 봐. 발은 느려도 반응은 빠르잖아. 움직이기는 남보다 반 박자씩 더 먼저 움직여."

마침 경기가 격렬해지면서 제럴드 워커가 싸우는 장면이 많이 보였다.

제럴드 워커의 활약상을 지켜보던 백제호의 표정이 굳었다.

"정말이네."

"저러면 발이 느려도 앞서 움직이는 걸로 커버하니까 디펜스 범위가 굉장히 넓어지는 거야."

제럴드 워커는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이동을 하지는 않지만 제자리에서 몇 걸음씩 움직여도 핼버드의 길이까지 더해져서 넓은 범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따금 제럴드 워커의 스피드를 얕본 네덜란드 선수들이 번개처럼 반응하고 휘두른 핼버드에 킬을 내줬다.

-제럴드 워커, 1킬.

-제럴드 워커, 2킬.

단숨에 주변의 적을 소탕한 제럴드 워커는 초능력을 사용하여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육체 강화: 근력, 민첩성, 속도, 지구력을 30초간 20% 강화한다.

무려 네 가지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올려주는 '육체 강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첩성과 속도 20% 상승이었다.

30초간 민첩성은 114가 되고, 속도는 74.4가 된다.

이 정도면 일시적으로나마 발이 느린 클래식 탱커라는 한계가 탈피되는 것이었다.

근력과 지구력은 120이 되니, 30초간 괴물 그 자체가 된다는 뜻!

아니나 다를까.

'육체 강화'가 30초간 제럴드 워커는 주변의 적을 쓸어버렸다.

결국 미국은 네덜란드를 2-0으로 압살해버렸다.

1세트 9-0.

2세트 8-0.

치열한 경기가 될 거라는 전망을 뒤엎고, 미국은 우승 후보답게 완승을 거두었다.

경기장을 채운 미국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백제호는 미국의 경기력에 경악을 해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를 어쩌지? 네가 괴물을 만들어 버렸어."

"원래 저만한 재능이 있던 놈인 걸 어떡해?"

서문엽은 별로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

백제호가 걱정했다.

"미국은 파워 게임을 하니 당연히 한 타 싸움 중심이고, 우리도 한 타 싸움에 주안점을 뒀잖아. 한 자리에서 맞붙어서 이길 수 있겠어? 제럴드 워커는 네가 반드시 처치해 줘야 하는데."

'육체 강화'가 지속되는 시간은 30초.

그 30초간 제럴드 워커는 괴물이 된다.

근력 120, 지구력 120, 민첩성 114, 속도 74······.

정신력과 기술도 93·90이니 허점이 없다.

전투에서 30초면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단 수치만 따지면 지금의 서문엽도 방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민첩성 114만 해도 서문엽의 108보다 더 높으니 말이다.

물론 서문엽은 100을 찍은 속도가 있다.

하지만 그 빠른 속도로 피해 다니면, 제럴드 워커는 서문엽을 쫓기보다는 주변의 다른 한국 선수를 핼버드로 찍어 죽일 터였다.

30초간 괴물이 된 제럴드 워커와 정면 대결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서문엽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괴물 뱀과 싸워야 하는데 제럴드 워커가 대수냐?'

***

네덜란드가 아무것도 못 해보고 완패당하자 세계는, 특히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경기력에 깜짝 놀랐다.

유럽은 트렌드에서 뒤처진 미국 메이저 리그를 자본만 많을 뿐 실질적인 실력은 뒤떨어졌다고 은연중에 무시해왔다. 최근 6년간 월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유럽의 클럽이 차지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에서 미국은 트렌드에 따른 기동성 위주의 전술을 펼친 네덜란드를 무참히 쳐부쉈다.

특히 제럴드 워커의 괴기스러운 활약상은 세계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제럴드 워커 맹활약 '올해의 선수상 정조준'>

<절정의 기량 오른 제럴드 워커, 미국의 월드컵 우승 이끄나>

<제럴드 워커 '서문엽과 대결 기대돼'>

같은 C조에 속한 한국은 미국전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마침내 한국도 LA 월드컵 첫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상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공 대표 팀은 유럽과 비슷하게 날렵하고 빠른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실제로 대표 팀 선수들 상당수가 유럽 빅 리거가 많다.

선수들이 하나같이 빠르고 테크닉도 화려해서 조직력은 약하지만 개개인의 기량은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즉, 한 타 싸움보다는 수시로 기습을 걸어올 확률이 지극히 높다는 뜻이다."

경기 직전.

라이너 하임 전술 코치가 선수들에게 마지막으로 설명했다.

"그러니 항상 견제가 올 것에 철저히 대비해라. 특히 남아공 선수들은 개개인이 공격성이 높고 과감하니 신경 쓰도록."

"예!"

백제호도 마지막으로 선수들에게 격려를 했다.

"첫 경기다. 미국도 상대해야 하는데, 남아공 정도는 가볍게 이겨줘야지? 너희만 믿는다."

"예!"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그동안 월드컵에서 좋은 경기를 펼쳐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 선수들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함께 입장하는 남아공 선수들도 표정에 여유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서문엽과 피에트로를 흘깃흘깃 쳐다보면서 의식하고 있었다.

< C조(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