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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TO 43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33)

제주 원정

"시간 다 됐습니다. 답안지 앞 사람에게 건네주세요."

20분 전에 마킹을 끝낸 답안지를 앞사람에게 건넸다.

시험 문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게 나왔는지 시험 시간 내내 한숨이 꽤 쏟아졌지만 내게는 너무 쉬웠다.

문제를 보는 순간 기억이 계속 떠올랐으니까.

강신혁이 임용 시험을 볼 때 공부를 꽤 빡세게 했던 것 같다.

시험지를 다 걷은 감독관이 고생했다고 말하고 나가자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약간 피곤하다.

시험 때문이 아니라 연수원이 대전에 있고 시험이 9시부터 시작이라 강원도에서 꼭두새벽부터 출발했으니까.

더군다나 지난 주말에 차를 몰고 강원도에 갔던 터라 대전에 올 때 직접 운전을 해서 더 피곤한 것 같다.

서울이었다면 차는 두고 기차 타고 왔을 텐데.

실기 시험이 있는 날에는 아예 전날 저녁에 미리 내려와야겠다.

슬슬 나도 나가려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을 발견했다.

"어? 선배."

최서라다.

연수는 중등부도 같이 하나?

"네가 여기 왜 있어?"

중등부와 고등부가 같이 연수를 한다고 해도 최서라는 신입이 아니라 연수 대상자가 아니니까.

"저는 시험 감독관으로 왔어요. 선배는 왜… 아, 올해부터 우수 교사도 시험 본다더니, 그래서 왔구나."

"맞아. 교감에게 당했지. 여기를 2주 뒤에 또 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막막하네."

"엄살은. 다른 사람들은 3주나 여기서 보내잖아요."

"그러게.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생각하시는 것만큼 나쁘지만은 않아요. 저는 재미있었는데… 교육 시간만 잘 맞추면 외출도 자유롭고 외박 말고는 따로 제재하는 것도 없고."

"최서라 선생님은 헌터 학교 출신이니 그러셨겠죠."

"하긴. 그래서 지금 바로 가려고요?"

"더 있을 이유 없잖아. 있어 봤자 괜히 시비나 걸리겠지. 무서워서 얼른 도망가려고."

"김만동이랑 대련까지 한 사람이 무서울 게 뭐가 있어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선배도 참… 아, 올 때 어떻게 왔어요?"

"어떻게 오긴, 차 타고 왔지."

"어, 차 샀어요? 그럼 30분만 기다려 주면 안 돼요? 저도 같이 가게요."

"기름값 주냐?"

"치사하게 우리 사이에 이러기예요?"

"우리 사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되는 거 몰라?"

"알았어요. 기름값 주면 되잖아요."

"됐어. 그냥 밥이나 사."

처음부터 말만 그렇게 한 거지 사실 기다리려 했다.

최서라가 강신혁을 안타스에 끌어들인 원흉이긴 해도 녀석이 잘 이야기해 준 덕분에 이제는 안타스에서 나왔으니까.

알고 보니 괜찮은 녀석이기도 했고 오랜만에 보니 꽤 반갑다.

"그럼 차에서 기다릴게. 끝나면 주차장으로 오면서 전화해."

"말만 그렇게 하고 먼저 가는 거 아니죠? 할 말도 있으니까 기다려요."

할 말?

일단 알았다고 대답하고 최서라와 헤어져 주차장 쪽으로 가는데 익숙한 얼굴을 또 만났다.

"어, 강 선생님?"

"아… 시험 때문에 오셨구나."

학기 초 회식에서 신입 교사 모임까지 동행했던 이지아와 그 모임의 개최자였던 윤이슬이다.

아는 척을 안 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먼저 말을 걸어온다.

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모임 이후 1학기 내내 내게 말을 걸지 않다가 방학식 날에 인사를 했지.

"아, 네."

"바로 가시는 거예요?"

"강 선생님도 같이 연수 들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약속이 있어서요. 저는 그럼 이만."

어떻게든 말을 붙이려고 하는 거 같았지만 칼같이 끊고 정문으로 향했다.

솔직히 두 사람 다 모임 때 뒷담화를 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꽤 예쁘장하게 생긴 미인이다.

하지만 1학기 내내 말 한 번 걸지 않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너무 속 보인다.

예전에 김 선생에게도 말했지만 솔직히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다.

일반과목 선생님들과 이번에 가까워진 김 선생도 있고 2학기 때는 이설 씨도 들어올 테니까.

저쪽에서 먼저 숙이고 사과를 하면 한 번쯤 고민해 볼 수 있겠지만 지금 태도를 보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차에 와서 웹 서핑을 하며 잠깐 기다리자 최서라에게 전화가 와서 녀석을 태웠다.

"차 좋네요. 언제 산 거예요?"

"중고찬데?"

"중고차라도 있는 게 어디에요. 깨끗하기만 한데. 예전에는 차에 관심 없다고 했으면서 웬일이에요?"

"학교에 있을 땐 몰랐는데 방학 돼서 나오니 불편해서 샀지."

"방학 때 사냥한다더니 돈 많이 벌었나 보네요."

"뭐 그럭저럭?"

"그러면서 밥도 나보고 사라고 한 거예요?"

"너도 봉사 활동 하지 말고 사냥이나 하지. 번 돈으로 보육원에 기부도 하고."

"후원은 계속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돈이 다가 아니에요."

"네네, 알겠습니다. 설교는 그만하시고, 그래서 뭐 사 주실 겁니까?"

"뭐 먹고 싶은데요?"

"질문은 내가 먼저 했는데… 대전에 유명한 거 뭐 있어?"

"저도 대전은 작년에 연수 오고 이번이 두 번째거든요. 30분이나 시간을 줬는데… 그리고 제가 사니까 메뉴 정도는 선배가 찾아보셨어야죠."

"찾아보니까 빵집은 좀 유명하던데. 맛집은 잘 모르겠네."

포털에 대전 맛집이라고 검색을 해 봤지만 빵집이 제일 위에 나오고 음식점도 여럿 나왔는데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솔직히 다 광고 같은 느낌이고.

"성심당 말하는 거죠? 거기 빵 맛있어요. 그럼 밥은 그 근처에서 대충 먹고 빵 좀 사서 올라가면서 먹을래요?"

나쁘지 않다.

모처럼 대전까지 왔으니 오늘 빵 좀 넉넉하게 사서 내일 이설 씨랑 김 선생 만나서 나눠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빵집 근처에 도착해 바로 보이는 국숫집에서 간단하게 국수로 점심을 해결하고 빵집에 들렀다.

점심을 얻어먹었으니 빵은 내가 사겠다고 했다.

"괜찮아요. 보육원 아이들도 가져다주려고 좀 많이 살 생각이라서요."

"그래? 괜찮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골라."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김 선생과 이설 씨와 사냥하며 벌어들이는 수익이 하루에 최소 천만 원 이상이다.

거기다 화신전자 주식도 꾸준히 오르고 있고.

이참에 나도 좋은 일 한번 해야지.

빵을 사고 차로 돌아왔다.

"고마워요."

"얼마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보다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며칠 전에 안타스에서 연락이 왔어요."

"방학 때는 터치 안 한다며. 무슨 일인데?"

"정기 연락이었는데 선배에 관한 이야기도 나와서요."

"내 이야기?"

안타스랑 나는 이미 끝난 거 아니었나?

"선배가 활약을 많이 했잖아요. 학교 위튜브도 그렇고 특히 방학식 전날 교감 선생님과 대련도 했고."

"위튜브 동영상은 한참 전에 내려갔잖아. 그리고 대련은 네가 보고 한 거야? 대련 때 따로 촬영 같은 건 못 하게 했을 텐데."

학생들이 지켜보는 걸 막을 수는 없었지만 혹여 패배를 해서 망신을 당하는 게 동영상으로 남을까 봐 대련 당시 촬영은 하지 못하게 했다.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동영상 촬영은 못 하게 했어도 본 사람이 몇 명인데요. 학생들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겠죠."

어떤 놈이….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온다.

"혹시 너도 봤어?"

"봤는데, 글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김만동이 봐준 거고 학생들이 뭘 모르니까 과장한 거라 생각해서 크게 화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화제가 안 됐는데 안타스에서 왜 나를…."

"그래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는 건 증명이 된 거잖아요. 요새 인원이 많이 부족하다고 적당히 만나 주는 척하면서 다시 끌어들이면 안 되겠냐고 하던데요."

"하하…. 한마디로 미인계를 쓰라는 소리네. 그래서 설마 하겠다고 한 거야?"

다시 거리를 좀 둬야 하나?

"어떻게든 선배를 꼬시라는 건 아니고 권유하는 느낌이라 일단 적당히 핑계를 대고 넘기긴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돌이켜 보니 내가 그동안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을 한 건 맞지만….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야기를 잘 해 뒀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뭐라고 했는데?"

"네? 아, 그게…."

내 눈치를 너무 보는 느낌이다.

혹시 하겠다고 해 놓고 내가 신경 쓸까 봐 거짓말을 하는 건가?

"괜찮으니까 사실대로 말해 줘."

"그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뜬금없이 채찍 같은 걸 가져와서 저보고 때려 달라 그러질 않나, 발 냄새를 맡고 싶다고 하길래 안 된다고 하니까 양말을 몰래 훔쳐 가려고 하고, 집착까지 심해서 그런 사람은 도저히 못 만난다고…."

"저, 저기… 서라야?"

하하…. 안타스에선 도대체 나를 뭐라 생각할까?

"죄송해요. 그래도 그렇게 말하니까 위에서도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알았다고…."

"그… 그래. 그럼 된 거지."

다행이긴 한데 왠지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시험은 잘 보셨어요?"

"아, 네. 김 선생님 말대로 쉽게 나와서 다행이었죠."

"저… 강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아까부터 계속 내 눈치를 살피는 게 그럴 것 같았다.

그만둔다는 소리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뭔가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우린 팀이잖아요."

"어제 작은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지원을 좀 와 줄 수 있냐고 하셔서…."

역시 그만둔다는 거였나?

곤란한데….

"이설이 작은아버지가 제주도에 있는 해랑 길드 길드장이시거든요. 지난주에 A 랭크 포탈 공략하다가 부상자가 꽤 많이 나와서 인원이 많이 빠졌대요."

어제 같이 쇼핑을 한다더니 김 선생도 미리 들었는지 옆에서 보충 설명을 한다.

설마 김 선생도 같이 빠진다는 이야긴가?

"일주일 정도만이라도 와서 도와줄 수 없겠냐고 간곡하게 부탁하셔서…."

일주일이라 약간 길긴 하지만 나도 연수 시험 때문에 쉬자고 한 적이 있으니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런 사정이면 어쩔 수 없죠. 김 선생님도 같이 가시는 겁니까?"

"네? 저도 돕겠다고 했는데…."

"저기, 신혁 씨만 괜찮으면 저희 다같이 가려고 했는데. 작은아버지가 비행기 푯값은 물론이고 숙소랑 차량도 지원해 주신다고 하셨거든요. 원정은 힘들까요?"

"아, 일주일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럼 내일 출발하는 거로 해도 괜찮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일주일이면 이번 주말에는 사부에게 못 갈 테니 오늘 사냥이 끝나면 사부에게 한번 다녀와야겠다.

방학까지 결제해 놓은 호텔비가 조금 아깝긴 하지만 사냥을 쉬는 쪽이 손해가 더 크니까.

제주도 간 김에 조금 놀다 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모처럼 방학인데 계속 사냥만 하는 것도 좀 그랬는데, 이번 기회에 바다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리프레쉬 할 수 있으니 좋겠네요."

그러고 보니 학생들도 제주도에 간다고 했었지.

놀러 가는 건 아니지만 온종일 사냥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일정이 맞는다면 겸사겸사 만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맞아요. 여름인데 바다 한 번 안 가는 건 좀 아니죠."

"제주도 가면 제가 맛있는 거 많이 사 드릴게요."

"오, 기대 하겠습니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34)

제주공항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꽤 많다.

"완전 바글바글하네요."

"휴가 시즌이라서 그런 것 같은데, 다들 놀러 온 거겠죠? 부럽다."

"어제 삼촌이랑 통화했는데 조금만 지나면 부상당했던 헌터들 복귀한다고 하니까 며칠 고생하면 우리도 놀 수 있을 거야."

"일단 길드부터 가야죠?"

"네. 사촌 동생이 마중 나온다고 했어요. 제가 전화해 볼게요."

"전 그럼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 네. 그러세요."

화장실을 다녀오자 동생이 주차장에 있다고 해서 이설 씨를 따라 이동했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어, 선화 언니? 언니도 도와주러 오신 거예요?"

"응.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잘 지냈어? 이쪽은 언니 동료분들. 선화는 예전에 한 번 봤지? 이분은 선화처럼 헌터 학교에서 일하는 강신혁 선생님이야."

"안녕하세요, 강신혁입니다."

"홍예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선생님이세요?"

"네? 아, 예."

"너무 잘생기셔서요. 선생님이 아니라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인기 많으시겠다."

"아…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저보다 연상이실 텐데 말 편하게 하세요."

살짝 그을린 피부가 인상적인 시원시원한 외모인데 친화력도 외모만큼 좋은 것 같다.

"아니긴. 강 샘 인기 많잖아요."

"아닌데 왜 그러세요."

"저기, 이야기는 차 타고 가면서 하면 안 될까요? 너무 더운데."

"아, 금방 차 빼 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예슬 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30분 정도 달려 길드에 도착했다.

길드로 오면서 예슬 씨에게 보다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주에 공략했던 A 등급 10인 포탈에서 오우거가 무려 3마리나 나왔다고 한다.

간신히 클리어는 했지만, 사망자까지 한 명 발생했고 당시 팀을 맡고 있던 부 길드장을 비롯해 팀원 모두가 많이 다쳤다고 한다.

개중에는 동료의 죽음에 충격이 컸는지 은퇴하겠다는 길드원도 있고.

치료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니 죽지만 않으면 치료는 가능하지만 마법이 정신까지 치료해 주진 못하니까.

사정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바쁠지도 모르겠다.

"강 선생님?"

"네?"

"안 내려요?"

"아, 내립니다."

"아버지랑 이야기 끝나면 식사하고 숙소까지 데려다드릴 테니 짐은 두고 오셔도 돼요."

"아, 네."

"전에 왔을 땐 다른 데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사했어?"

"언니가 지난번에 왔을 땐 여기 아니었나? 1년 정도 됐는데."

시설 같은 걸 보면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건물 같다.

10층 정도로 그리 높진 않아 보였지만 면적도 꽤 넓고.

"여기 전체가 길드 건물인가요?"

"아니요. 저희 길드는 7층부터 10층까지만 쓰고 있어요."

원작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길드라 그저 그런 중소 길드인 줄 알았는데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것 같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 도착하니 새치가 희끗희끗한 아저씨 1명이 보인다.

"우리 조카! 어서 오렴!"

"작은아빠, 잘 지내셨어요?"

"안녕하세요."

"잘 지냈으면 연락을 안 했겠지. 와 줘서 고마워. 선화 양도 오랜만이에요. 만동 형님은 잘 계시죠?"

"네. 아버지도 여유가 있으시면 오셨을 건데 워낙 바쁘셔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마음만이라도 고맙지. 그럼 이쪽 잘생긴 신사분이 강신혁 선생님이신가? 미남이시네. 연예인 하셔도 되겠어. 반가워요, 해랑 길드 길드장 홍종식이에요."

"과찬이십니다. 강신혁입니다."

"마침 점심때인데, 다들 식사 전이죠? 나가서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

"아빠,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민데 어딜 도망가려고. 식사는 내가 대접할 테니 이야기는 사무실에서 하죠?"

"아니, 모처럼… 그래. 안에서 이야기하죠."

현재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듣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상황이야 오면서 들은 것과 특별히 다른 건 없었는데 계약 조건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다.

이설 씨에게 요청을 받아서 온 거긴 하지만 보통 길드에 소속되면 수익의 일정 부분을 수수료로 떼어 간다.

보통 10% 정도에서 대형 길드들은 20% 정도까지 떼는데 해랑 길드장이 우리에게 제안한 건 5%다.

얼핏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길드에 배정되는 포탈은 규모가 커서 수익이 크니까.

임시 공격대와 달리 길드는 어느 정도 체계적인 시스템이 있고 경험이 많기에 안전성 측면에서도 훨씬 낫고.

부상을 당했을 때 치료비 지원은 물론 자녀 장학금과 대출 등 여러 복리후생까지 생각하면 그리 불합리한 건 아니다.

숙소와 차량도 제공하고 밥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 먹으라며 이설 씨에게 법인 카드까지 주었는데 이 정도 조건이면 서울에서 사냥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것 같다.

"작은아빠, 조건이 너무 후한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조카님이 도와주러 오셨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솔직히 난 수수료 아예 안 받으려 했는데 그건 요 녀석이 극구 반대해서."

"이번에 치료비도 꽤 많이 나가고 손해가 컸거든요."

예슬 씨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는데 길드 일에 꽤 깊게 관여하는 것 같다.

"아니야. 5%면 거저나 다름없지. 저희는 좋긴 한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어차피 이번 달에 배정받은 포탈을 일정 비율 이상 처리하지 못하면 다음 배정 때 패널티를 받게 되거든."

"그렇죠. 그럼 주로 공략할 포탈은 B 등급 10인인가요?"

"네. B 랭크 헌터 셋하고 저까지 포함해서 C 랭크 헌터 넷이 붙을 거예요. 팀장은 언니가 맡아 주실 거죠?"

"어?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걱정하실 거 없어요. 언니가 가장 랭크도 높고 인지도도 있잖아요. 합류할 길드원들에게도 미리 말해 뒀으니 잘 따를 거예요."

"그게 아니라 원래 우리끼리 포탈 공략을 할 땐 여기 신혁 씨가 리더였거든. 팀장은 신혁 씨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엥? 갑자기 왜 나한테 떠넘기는 거지?

"저는 이설 씨가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조카님, 혹시 신혁 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야?"

"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신혁 씨가 리더를 해? 리더는 실력 좋고 경험 많은 사람이 하는 게 원칙이잖아."

헌터 랭크만 놓고 보면 길드장처럼 생각하는 게 이상하진 않지만 왠지 무시당하는 기분이다.

리더라고 따로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그냥 자기가 하지.

"그러니까요. 저보다 신혁 씨 실력이 훨씬 좋아요."

"응? 신혁 씨는 B 랭크 아니었어?"

"랭크랑 실력이 꼭 비례하지는 않아요."

"그, 그래? 우리 조카가 쉽게 남을 인정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신혁 씨 실력이 대단하신가 보네요. 그런데 이미 이설이 네가 팀장을 맡을 거라고 이야기를 해 뒀는데…."

말이야 다시 하면 그만 아닌가?

아무래도 나를 못 미더워하는 눈치다.

"저는 정말 신경 안 쓰는데. 어차피 이설 씨가 제안해서 온 거니까 이설 씨가 하죠?"

"아니에요."

"제 생각도 설이랑 같아요. 지금까지 강 선생님이 우리의 리더였으니 팀장도 강 선생님이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흐음. 강 선생님, 학교 가시기 전에 어느 길드에 계셨죠?"

갑자기 웬 호구 조사?

"체이스 길드인데요."

"한 손에 꼽히는 명문 길드 출신이셨군요. 저도 체이스 쪽에 아는 사람이 몇 있는데… 혹시 몇 팀 소속이셨나요?"

"작은아빠,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니, 설이 너는 내가 안다지만 신혁 씨는 잘 모르잖아. 팀장을 맡기려면 어느 정도 정보는 알아야…."

"학교 오기 전까진 외국에 파견 나가 있었고 솔로로 활동했습니다."

길드장이 안색을 찌푸린다.

"제가 듣기로 체이스에서 솔로는 신입이나 조금 실력이 부족한 헌터들이…."

"전부 그런 건 아닙니다."

강신혁이 솔로로 활동한 건 비 헌터 학교 출신이기 때문이지 결코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다른 걸 다 제쳐 두고 무공을 익히기 전에도 경쟁이 치열한 헌터 학교 교사 시험을 한 번에 붙었으니까.

아까부터 은근히 기미가 보이긴 했는데 역시 무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작은아빠! 진짜 뭐 하시는 거예요?"

"팀에서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진 너도 알 거 아니야. 우리 길드원들이 다칠 수도 있는데."

리더가 중요한 건 알지만 이런 걸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좋게 좋게 넘어가려 했는데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 한다.

"길드장님, 말씀이 좀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어? 아니, 나는…."

"아까부터 계속 은근히 강 선생님 무시하는 눈치던데 제가 다 불쾌하네요. 이런 말까진 안 하려 했는데 해랑 길드에 강 선생님보다 능력 있는 사람도 없을 걸요?"

저기… 김 선생?

무시당한 건 난데 김 선생이 급발진을 해 버렸다.

사무실 분위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신혁 씨, 기분이 언짢았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선화 양, 방금 발언은 그냥 넘길 수 없겠는데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근거 없이 한 말 아닌데요? 해랑 길드에서 오우거 혼자 잡을 수 있는 사람 있어요?"

"그게 무슨…."

"강 선생님은 오우거 혼자 잡았어요. 이설이 넌 직접 봤잖아."

"그, 그렇지."

"학교에서 아버지랑 대련한 적도 있는데 그때도 거의 막상막하였어요."

"김 선생님, 그건 아닙니다. 대련은 교감 선생님이 사정을 봐주신 거라 애초에 핸디캡도 있었고 결과도 제 패배였잖아요."

"그건 아빠가 억지 부린 거지. 저는 강 선생님이 졌다고 생각 안 해요."

길드장과 예슬 씨 모두 상당히 놀란 표정이다.

"저는 정말 상관없으니까 리더는 이설 씨가 하세요."

"아니에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신혁 씨가 팀장을 하시는 게 좋겠네요."

못 믿는다고 결투라도 하자고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인정이 빠른 스타일인 것 같다.

"알겠습니다. 그럼 팀장으로서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아, 네. 뭐든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까 인원을 7명 더 붙여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7명까진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10인 B 등급 포탈이면 B 랭크 헌터 다섯만 있으면 법적으로 입장하는 데 문제없다.

사람이 많으면 괜히 수익만 줄어들지.

보통 포탈 공략 수익은 우리처럼 사전에 정하지 않는 이상 기여도에 따라 분배하지만 자기가 잡았다고 몬스터에 대한 수익을 전부 가질 수는 없다.

김 선생처럼 회복이나 보조에 특화된 헌터도 있고 합공해서 잡는 경우도 많으니까.

"저희야 지금 헌터 한 사람이 아쉬운 입장이니 반가운 말씀이네요. 인원은 어떻게 해 드릴까요?"

"B 랭크 헌터 2명에 예슬 씨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B 랭크 헌터 2명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지만, 아무래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하다 보면 조금 전 같은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으니까.

가교 역할로 양측을 다 아는 예슬 씨가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럼 인원이 너무 적지 않나요? 인원이 적을 때도 최소 8명 이상은…."

"일단 해 보고 인원이 더 필요할 것 같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안전이 최우선이니 언제든 필요하면 이야기하세요.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다행히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마치고 길드장을 제외한 모두와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예슬 씨가 추천하는 식당에서 물회로 점심을 해결하고 숙소에 들렀다.

길드에서 10분 정도 걸렸나?

서울에서 머물던 호텔만큼 고급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사람도 많이 없어 조용해서 나름 괜찮다.

길드와도 가깝고 차로 20분만 나가면 바다도 있다고 하니 나중에 일이 끝나고 여가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을 것 같다.

오후부터 바로 사냥을 하러 가기로 해서 캐리어를 열어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검을 챙겨 1층에 내려왔다.

주차장에 와 보니 예슬 씨만 있고 두 사람은 아직 안 내려온 모양이다.

"일찍 내려오셨네요. 숙소는 괜찮으세요?"

"좋네요. 합류할 헌터 분들은 연락됐나요?"

"아, 네. 바로 포탈로 오시라고 했어요."

"어떤 분들인지 간단하게 설명 가능할까요?"

"한 분은 화염 계열 마법을 주로 쓰시고 다른 한 분은 활을 쓰세요."

몬스터 사체 나를 때 도움이 되게 힘 좀 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법사에 궁수라니 최악이다.

나도 검을 쓰고 이설 씨도 근접이다 보니 원거리 딜러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건가?

화력이 부족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미 오라고 했다니 어쩔 수 없다.

"합류하기로 한 분들 중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분들이에요."

실력은 상관없는데 성격이 모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35)

포탈에 도착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이 많다.

길드에 배정된 포탈은 국가가 아닌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관리하게 되어 있어서 직원이 상주하긴 하지만 보통 한두 명이다.

하나, 둘, 셋… 총 7명인데 복장을 보니 1명을 빼곤 전부 헌터인 것 같다.

뭐지? 전달이 제대로 안 됐나?

아까 분명히 연락했다고 했는데.

"사람이 왜 저리 많죠?"

"연락 안 했어?"

"아니에요. 분명히 말했는데…."

예슬 씨도 당황한 표정을 하더니 사람들 쪽으로 달려간다.

"광호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광호 오빠랑 지혜 언니만 오면 된다고 했는데 왜 다들 여기 와 있는 거죠?"

"그게… 지혜 누나랑 둘이 오려고 했는데 팀장님이랑 팀원분들이 걱정된다고 하셔서…."

"무슨 걱정이요?"

덩치 좋은 남자가 앞으로 나선다.

"광호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걱정이 돼서 도저히 둘만 보낼 수 없어서 온 거니 너무 뭐라 하지 말게."

"최 팀장님, 뭐 하자는 거죠?"

"나야말로 예슬 씨에게 묻고 싶은데. 어째서 광호랑 지혜만 부른 거야? 원래 우리 팀 전체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잖아."

흐음, 예슬 씨가 설명을 제대로 안 한 건가?

"팀장님이 요청해서 그런 거라고 내가 설명했잖아요."

"저도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아니, 예슬 씨 팀장이면 홍이설 씨지? 홍이설 씨가 A 랭크에 실력 좋은 건 알아. 그렇다고 해도 10인 B 등급 포탈을 고작 6명으로 공략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리더는 이설 씨가 아니라 난데.

인원을 줄인 이유를 설명을 안 해서 이 사달이 난 것 같다.

"나도 헌터 밥 먹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10인 포탈을 6명으로 간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어."

"예슬 언니, 저희는 광호 오빠랑 지혜 언니가 걱정돼서 온 거예요."

"예슬 씨, A 랭크 헌터가 있다고 해도 이설 씨 1명이잖아. 예슬 씨는 C 랭크에 나머지는 전부 B 랭크라고 들었는데, 이건 아니지."

"A 등급 포탈 공략하다 길드원들이 다친 게 아직 일주일도 안 됐잖아. 그런데 소수 인원으로 공략하다 또 사고 나면 어떡하려고.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말할 틈도 안 주고 한 명 한 명 불만을 토로하니 예슬 씨가 제대로 대응을 못 한다.

"다들 뭐 하시는 거죠? 불만이 있으면 절차를 밟아 길드장님에게 말을 하지 왜 여기 와서 이러십니까?"

이설 씨가 끼어들자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는데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조금 안 좋아지려 한다.

우리 쪽에 합류하기로 한 헌터 둘이 걱정돼서 온 거라고 하지만 우리를 믿지 못해서 왔다는 말과 다름없으니까.

"다들 그만하시고 저랑 이야기하시죠. 인원을 줄여 달라고 요청한 건 이설 씨가 아니라 저니까요. 팀장도 저고요."

"예슬 언니? 이설 씨가 아니라 왜 저 사람이 팀장이에요?"

"예슬 씨, 어떻게 된 거야? A 랭크 헌터가 1명 더 있었어? 그렇다고 해도 6명으론 무리지."

"팀장은 나고 그쪽은 제 팀원이 아닌데 무리인지 아닌지를 왜 그쪽이 판단합니까?"

"뭐?"

"A 랭크 헌터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 그쪽이 무리하게 소수로 진행하다 우리 광호랑 지혜가 다치기라도 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전 A 랭크 아닌데요? 그리고 책임을 왜 제가 집니까? 포탈 공략 중에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 시의 보상은 길드에서 하는 게 원칙인데. 예슬 씨."

"네? 네."

"사고가 났던 A 등급 포탈 공략 팀장이 부길드장이라고 했죠? 길드에서 보상 안 하고 부길드장이 했습니까?"

"아니에요. 저희 길드에서 했어요."

"들으셨죠?"

"아니, 예슬 씨, A 랭크도 아닌데 무슨 저런 무례한 사람을 팀장으로 뽑은 겁니까?"

지금 무례한 게 누군데… 어이가 없다.

"지시도 안 따르고 행패 부리는 게 더 무례하지 않나? 그리고 팀장을 할 능력이 있으니까 팀장이 된 거겠죠."

내가 한마디 하려 했는데 이설 씨가 선수를 쳤다.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홍이설, 네가 아무리 A 랭크라지만 내가 너보다 몇 살이나 위인데 말을 그런 식으로…."

"홍이설? 언제 봤다고 반말이에요?"

"이 바닥이 언제부터 나이로 대접해 줬죠? 나이 대접 받고 싶으면 길드에 있을 게 아니라 경로당을 가야지."

김 선생도 한마디 거들고 나서는데 이러다간 끝이 안 날 것 같다.

지난번에 최서라에게 안타스에서 다시 나를 꼬드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웬만하면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신혁 씨?"

"강 선생님, 왜 그러세요."

"뭐, 뭐… 결투라도 하자는 건가? 누가 피할 줄 알고."

최 팀장이라는 남자도 검을 빼 드는데, 기분 같아선 진짜로 결투해서 몇 대 패 주고 싶지만 참고 원래 계획대로 내공을 끌어올려 검으로 보냈다.

푸른색 기운이 서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검을 완벽히 감싸며 검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거 오러블레이드 아니야?"

"A 랭크 헌터 아니라고 했잖아?"

"A 랭크 헌터가 오러블레이드를 어떻게 써? 오러블레이드는 S 랭크 헌터들이 쓰는 기술이잖아."

"저렇게 젊은 S 랭크 헌터가 있었어?"

예상대로 다들 놀란 표정으로 웅성거린다.

"이 정도면 실력 증명은 충분히 될 것 같은데, 원하신다면 결투도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저는 그냥…."

자신 있게 검을 뽑았던 최 팀장이란 남자가 눈치를 보며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다.

더 따질 사람은 없는 것 같아 검강을 거두고 칼을 갈무리했다.

"먼저 들어갈 테니 예슬 씨가 정리하고 두 분 데리고 오세요."

"네? 아, 네."

* * *

하늘이 노란색으로 물들고 있다.

"이놈이 마지막이었나 보네요. 다들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어요. 이설아, 우리 들어온 지 얼마나 됐어?"

"글쎄. 두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두, 두 시간 안 됐어요. 제가 포탈에 들어올 때 체크 했는데 1시 20분이었고 지금이 3시니까 1시간 40분이에요."

숙련된 팀들도 기본 4시간에 조금 까다로운 몬스터가 나오거나 지형이 안 좋으면 6시간을 넘기는 것도 다반사다.

포탈에서 나온 몬스터는 레드빅마우스로 그렇게 까다로운 녀석은 아니지만, 속도도 빠르고 숫자도 많아 쉬운 녀석은 아니니까.

아까 오러블레이드도 그렇고 사냥하는 내내 깔끔한 실력을 보여 줘서 계속 감탄했지만, 시간을 확인하니 정말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그래요? 확실히 10인 등급이라 그런지 몬스터가 많아서 오래 걸렸네요."

"자, 자, 얼른 사체나 옮기죠. 옮기는 게 더 일이겠네요. 다들 얼른 움직입시다."

지치지도 않았는지 먼저 나서서 사체를 나른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나도 열심히 몬스터 사체를 나르고 업체를 불러 계산을 했다.

마석과 사체를 처분하고 나온 수익은 총 6천.

10% 세금 감면도 받고 마석도 생각했던 것보다 잘 쳐줘서 수익은 좋은 편인데 마냥 좋지만은 않다.

수익은 기여도에 따라 분배하는 게 원칙인데 비율로 따지면 대략 80% 정도는 신혁 씨 혼자 잡았으니까.

마법을 쓰지도 않고 몬스터 위치를 귀신같이 파악해서 마주치는 족족 단칼에 죽여 버리니 다른 사람들은 활약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이설 언니와 선화 언니는 나름 활약을 했지만 나와 광호 오빠, 지혜 언니는 거의 손 놓고 구경만 한 수준과 다름없다.

"세금 제하면 얼마 나왔나요?"

"아, 6천이에요."

"오, 역시 머릿수가 많으니 금액이 확실히 크네요."

"저… 팀장님, 분배는 어떻게 하실 건지…."

* * *

예슬 씨가 조심스럽게 분배를 어떻게 할지 묻는데 한 게 별로 없다 보니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아까 오러블레이드를 보여 주긴 했지만, 사냥하면서 확실히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평소보다 오버했더니 조금 과했던 모양이다.

"예슬 씨는 500에 광호 씨랑 지혜 씨는 각각 600씩 괜찮을까요?"

원칙이 원칙인 만큼 똑같이 N분의 일로 나눌 수는 없으니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제안한 건데 합류한 헌터들과 예슬 씨는 많이 놀란 표정이다.

너무 적게 불렀나?

"네? 그렇게 많이요?"

많아서 놀란 거구나. 다행이다.

"저희는 거의 한 것도 없는데…."

"오늘만 날인가요? 제가 오늘은 조금 오버한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죠."

"그래도…."

합류한 두 사람도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이고 다들 염치는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지혜 씨랑 광호 씨 없으면 입장도 안 되는데. 예슬 씨도 처리 부분은 혼자 도맡아 주셨고. 괜찮습니다. 남은 금액은 수수료 공제하고 저한테 입금해 주시면 알아서 분배할게요."

이설 씨와 김 선생과는 예전처럼 1:1:1로 분배할 생각이니 비율이 알려지면 괜히 서운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세 사람에게 1,700이 나갔으니 남은 돈은 4,300.

수수료 5%를 떼면 약 4천이니 대충 내 수익은 1,300 정도인가?

4인 포탈보단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수익은 4인 포탈을 2개 공략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니, 역시 10인 포탈이다.

"바로 입금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다음 포탈로 가죠."

"네? 포탈을 하나 더 가자고요?"

"이제 겨우 4시 조금 지났잖아요. 여름이라 해도 길고. 아까 길드장님이랑 이야기할 때 포탈이 많다면서요. 근처에는 더 없나요?"

"아니, 포탈은 있긴 하지만 무리하시는 게 아닌지…."

"저는 괜찮습니다. 이설 씨랑 김 선생님도 괜찮죠?"

"물론이죠."

"저도 괜찮아요. 많이 해치우면 해치울수록 나중에 여가가 늘어날 테니까요."

"다른 분들도 괜찮죠?"

제주도에 온 첫날인데 무리하는 것 같아 좀 그렇긴 하지만 방학이 벌써 절반이 지났으니까.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지.

사체 나른 것 말고는 거의 한 게 없어서 그런지 다들 OK를 했고 10분 거리에 있던 포탈을 하나 더 정리했다.

아쉽게도 두 번째 포탈은 언데드형 몬스터가 나와서 돈이 별로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두 곳을 정리하니 수익이 2천을 훌쩍 넘겼다.

처음엔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원정 온 보람이 있다.

"수고하셨습니다."

"팀장님, 저녁은 다 같이 먹고 들어가는 게 어때요?"

"회식입니까? 좋습니다. 제가 쏘지요."

"저도 찬성."

"저도요."

"저도 좋아요."

오늘 하루 같이 사냥하면서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 풀리긴 했지만, 완전히 친해진 건 아니니까.

앞으로 최소 일주일 이상은 같이 다녀야 하니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

"아니에요. 오늘 포탈 2개나 공략했잖아요. 법인 카드로 살게요!"

"오, 해랑 길드 복지 좋은데요."

"엣헴, 우리 길드가 다른 건 몰라도 회식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에요. 지혜 언니, 광호 오빠, 안 그래요?"

"그렇지. 얼마나 잘 사 주면 '밥 잘 사 주는 웅이 길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돕니다."

"맞아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드시고 싶은 메뉴 말해 주시면 잘하는 곳으로 모실게요."

"전 다 괜찮으니 그냥 예슬 씨가 알아서…."

"에이, 그래도 팀장님이 정하셔야죠."

"맞아요. 강 선생님이 정하세요."

"그럼 회식이니 회 어떤가요?"

나름 재치있게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다들 표정이 안 좋다.

"회식이니 회요? 아, 회 좋죠."

"하하…. 정말 재밌네요."

"아… 아이고, 내 배꼽."

"그, 그럼 회로 할까요?"

* * *

회식을 마치고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안 온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나가서 맥주라도 더 사서 마시고 잘까 했지만, 다시 옷 입고 나가기 귀찮다.

웹 서핑이나 하려고 휴대폰을 켰는데 메신저가 꽤 많이 쌓여 있다.

[선생님, 저희 모레 제주도 가기로 했어요. 정말 같이 안 가실 거예요?]

[선생님, 잘 지내시죠? 혹시 방학식 때 이야기했던 거 기억하시나요? 저희 모레 제주도 가는데, 혹시 시간 되세요?]

[선생님, 저희 모레 제주도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구보는 시러요! ㅠㅠ]

[응애, 나 애기 제자 진수. 쌤, 모레 제주도 같이 가용.]

차례대로 민희부터 은수와 은서 그리고 진수 녀석이다.

안 그래도 언제 오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그냥 해 본 말일 수도 있고 이미 다녀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연락을 하지 않았다.

토요일까지 사냥을 하기로 해서 당장 목요일은 무리지만 모레가 목요일이니 주말까지는 있겠지?

매일 볼 땐 징글징글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안 보니 보고 싶기도 하고 생각해서 연락해 준 거니 잠깐 들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36)

내 학생은 내가 지킨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정말요? 아직 4시밖에 안 됐는데."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아니요. 내일은 휴일이기도 하고 제자들이 제주도에 놀러 왔다고 연락이 와서 잠깐 가서 얼굴이라도 보려고요."

다들 표정이 밝다.

하긴 첫날을 제외하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포탈을 3개씩 처리하는 강행군을 했으니까.

당장 오늘만 해도 오전에 1개 처리하고 바로 다른 포탈에서 김밥과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고 한 곳을 더 처리했다.

물론 그만큼 돈은 많이 벌었다.

하루 수익이 적게는 4천에서 5천을 넘는 날도 있었으니까.

다음 주부터는 다쳤던 헌터들도 대거 복귀하니 여유가 좀 생길 것 같다.

팀원들에게 월요일에 보자고 인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수고했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팀장님, 제자들 보러 가시면 차 필요하지 않아요?"

"아, 별로 안 멀어서 택시 타려고요."

진수 삼촌이 운영한다는 펜션 주소를 받아 확인해 봤는데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다.

택시가 아니라 경공을 써서 가도 괜찮을 정도라서 굳이 차는 필요 없다.

"제주도는 차 없으면 불편해요. 어차피 길드원 전체 보험 들어간 거라 상관없어요. 내일은 저도 쉬니까 두고 갈게요. 필요하면 쓰세요."

"아, 고마워요."

정 필요하면 내가 빌려도 그만이지만 굳이 빌려준다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별것도 아닌데요. 그럼 다들 월요일에 봬요."

"월요일? 예슬아, 내일 보기로 한 거 잊어 먹은 거야?"

"아, 내일 10시 화신백화점.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언니들은 내일 봬요."

아까 계속 쇼핑 이야기 하더니 내일 같이 백화점에 가기로 했나 보다.

"저희 이따가 요 앞에 이탈리아 식당 가려고 하는데 강 선생님은 저녁 드시고 오시나요?"

"아, 네. 아마 저는 애들이랑 먹을 것 같아요."

전화해 보고 바비큐 같은 거 해 먹는다고 하면 고기나 좀 사 가야겠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씻고 나갈 채비를 마친 후에 진수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가려는데 필요한 거 있어?"

―어? 선생님 내일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사실 일 때문에 한참 전부터 제주도에 있었어."

―네? 아니, 그러면 목요일에 오시지.

"바빠서 시간이 안 됐어. 고기나 라면 같은 거 사 갈까?"

―저희 지금 시내 나왔는데.

―선생님이야? 선생님 저 민희예요. 진짜 제주도 오신 거예요?

―어? 선생님 오셨대?

―다들 조용히 좀 해 봐.

"다들 기운이 넘치네. 그럼 밥은 시내에서 먹으려고?"

―글쎄요. 삼촌이 일이 있어서 나가시는 길에 저희도 이틀 내내 펜션에만 있었더니 지루해서 시내 구경하려고 따라온 거거든요. 삼촌 일 보고 이따 6시쯤에 만나기로 했는데 은서가 펜션에 있으니까 들어가서 먹을 것 같아요.

"응? 은서는 왜 같이 안 가고. 어디 아파?"

―어제 물놀이를 너무 오래 해서 그런지 살짝 감기 기운이 있대요. 병원 가자니까 심한 게 아니라고 약 먹고 자겠다고 해서 저희끼리 왔어요.

"그래. 그럼 이따 들어갈 때 연락해 줘. 필요한 건 없고?"

―목요일에 장은 다 봤는데…. 야, 너희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쌤이 사 주신대? 쌤, 민희는 쏘고기가 먹고 싶어요!

"진수야 민희도 어디 아프니?"

―야. 정민희, 너 샘이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신다. 선생님, 목요일에 장 많이 봐서 그냥 오셔도 될 것 같아요.

"그래. 이따 보자."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빈손으로 가는 건 좀 그렇다.

애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진수의 삼촌도 있으니까.

적당히 음료수랑… 그래, 뭐, 돈도 많이 벌었는데 까짓거 소고기도 좀 사야겠다.

호텔을 나와 차를 몰고 일단 슈퍼에 먼저 들러 음료와 과자들을 샀다.

다음은 정육점에 들러 고기를 샀는데 역시 한우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

다들 워낙 잘 먹는 걸 알고 있어 숯불에 구워 먹기 좋은 두께로 등심 네 근을 사니 거의 40만 원 돈이 들었다.

가격을 보고 수입 소고기나 사 갈까 했지만, 동네 정육점이라 수입은 취급을 안 하고 마트까지 가기엔 또 멀고 귀찮아서 그냥 샀다.

그래도 사장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비스라고 떡갈비에 소시지, 파채와 버섯 등 이것저것 잔뜩 챙겨 주시긴 했다.

고기를 차에 싣고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다섯 시밖에 안 됐다.

너무 일찍 나왔나?

사장님이 스티로폼 박스에 아이스팩을 넉넉히 넣어 포장해 주시긴 했지만, 여름이니 일찍 가서 냉장고에 넣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애들은 아직 안 돌아왔겠지만, 어차피 은서가 펜션에 있다고 했으니까.

내비게이션에 펜션 주소를 찍자 25분이 찍힌다.

지도 어플로 볼 때는 꽤 가까워 보였는데 은근히 거리가 있다.

정육점을 찾다 보니 호텔에서 좀 멀어져서 그런가?

아무튼, '내비'가 알려 주는 대로 와서 거의 도착했는데 갑자기 차가 너무 막힌다.

앞에 사고라도 났나?

굼벵이 같은 느린 속도로 움직이다 보니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던 찰나 드디어 앞이 보이는데, 뭐지?

웬 군인들이 잔뜩 서 있다.

음주 단속은 경찰이 할 텐데 누가 탈영이라도 했나?

총까지 들고 있는 걸 보니 설마 무장탈영인가?

마침 군인 1명이 다가와 창문을 두드리기에 창문을 내렸다.

"무슨 일인가요?"

"근처 포탈 공략을 하던 중에 몬스터가 한 마리 빠져나왔다고 해서 현재 이 일대를 통제 중입니다. 앞쪽 차들 빠지면 유턴해 주세요."

몬스터가 빠져나왔다고?

어떤 등신 같은 길드가 몬스터를 놓쳤… 아니, 잠깐. 그럼 은서는?

"저기… 아저씨, 그럼 어디까지 통제하는 겁니까?"

"이 일대는 다 통제한다고 알고 있는데 혹시 안쪽에 거주하시는 주민이신가요? 그럼 문자 갔을 텐데."

"그건 아닌데 일행이 그쪽 펜션에 있어서요."

"대피 방송도 했고 지역에 거주하는 분들과 위치 정보 기반으로 해당 지역에 계시는 분들에겐 재난 문자 보내서 대피하게 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말을 하고 가 버리는데 진수 말로는 은서는 약 먹고 잠들었다고 했으니 못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바로 은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질 않는다.

메신저를 보내도 답이 없고.

계속 자고 있어서 못 받는 거면 다행이지만 계속 자는 거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똑똑―.

"선생님, 뭐 하십니까? 유턴 안 하십니까?"

"일행이 저 안에 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제가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네? 아니, 선생님, 저긴 몬스터가 있다니까요. 못 들어갑니다."

"저 헌터입니다."

지갑에서 교원증을 꺼내 보여 줬다.

"아무리 헌터여도 혼자이시지 않습니까? 빠져나온 놈이 보통 놈이 아니라서 여러 길드에서 팀 단위로 파견해 수색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헌터라도 출입시키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어요."

그럼 더 위험하다는 소리 아닌가?

"무슨 몬스터인데요?"

"그건 저도 잘 모르지만 헌터셔도 안 됩니다."

아무래도 이 군인하고는 이야기가 안 될 것 같아 차에서 내렸다.

"책임자가 누구죠? 직접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아니… 선생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곤란하지 않게 하려는 거니까 안내 좀 해 주세요."

"김 상병, 거기 차 왜 유턴 안 해?"

"주, 중대장님, 여기 이분이 계속 안에 들어가시겠다고…."

"하아.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 어? 혹시 강신혁 헌터님 아니십니까?"

응? 나를 알아?

"맞습니다. 절 어떻게…."

"위튜브에서 보고 이야기도 많이 들었거든요. 세진이가 제 막내 동생입니다."

세진이? 그게 누구… 아! 학생회장?

"그러셨군요. 저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통제 구역 안에 있는 펜션에 일행이 있어요. 점심때 약 먹고 잠들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연락이 안 됩니다."

"경황이 없으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대피 방송도 수차례 하고 문자도 보냈는데…."

"그랬으면 좋겠는데 연락이 안 돼서 일단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좀 도와주시죠."

"아… 그게, 포탈에 빠져나온 몬스터가 섀도우리퍼인데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섀도우리퍼는 그림자 속에 숨어 다니는 능력을 가진 B 등급 몬스터다.

은신 능력에 거대한 낫을 들고 다니는데 은신 능력뿐만 아니라 무력도 결코 약하지 않다.

A 등급에 오우거가 있다면 B 등급에는 섀도우리퍼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까다로운 만큼 꽤나 희귀한 녀석이라 나도 책에서만 봤지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괜찮습니다."

까다롭다고 해 봤자 결국 B 등급 몬스터.

내 상대가 될 순 없다.

"알겠습니다. 얘들아, 이분은 괜찮으니까 바리케이드 치우고 길 열어 드려."

학생회장이 내가 교감과 대련했다는 이야기도 했나?

아무튼, 안된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차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 은서가 등장하니 별일은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내가 이곳에 와서 한 행동들이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고.

제발 별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액셀을 밟았다.

내 학생은 내가 지킨다.

* * *

일어났는데 집안이 조용하다.

아까 점심 먹고 진수네 삼촌을 따라 시내에 나간다고 하더니, 아직 안 돌아온 건가?

약이 효과가 있는지 아침보단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체온계로 열을 재 보니 아직 열이 조금 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켰는데… 어?

[(제주특별자치도)

실제 상황. 이호 테우해수욕장 포탈에서 몬스터 탈주 발생. 해수욕장 인근 및 이호동 인근에 있는 국민들께서는 지정 대피소 혹은 통제선 바깥으로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통제 구역 및 대피소 위치 링크: https:.j11.kr/abcd]

모… 몬스터 탈주?

이제 보니 언니와 진수, 민희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고 선생님에게도 전화가 왔었다.

연락할까 하다 일단 대피소에 가는 게 먼저일 것 같아 링크로 위치를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거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직 해가 지진 않아서 어둡진 않지만, 차도 안 다니고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어째 으스스하다.

"저기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다.

"언니, 여기에요. 혹시 대피소 가시는 거면 같이 가 주시면 안 돼요?"

옆을 보니 빌라 2층 베란다에 서 있는 여자아이가 보인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데 옆에는 동생인지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도 같이 있다.

저 아이들도 나처럼 문자를 나중에 확인했나 보다.

같이 가 줄 테니 내려오라고 말하고 입구 쪽으로 향하는데, 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한 손에는 낫을 들고 있는 2미터도 넘을 것 같은 커다란 사람이 보인다.

처음엔 헌터인 줄 알고 다가가려 했지만 바로 옆에 전봇대 뒤로 빠르게 몸을 숨겼다.

다시 봐도 저건 사람이 아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야 하는데 저건 발이 없으니까.

검은 로브에 낫이라면… 맙소사, 도망친 몬스터가 섀도우리퍼였어?

다행히 나는 들키지 않은 것 같지만 아이들이 곧 내려올 텐데.

"꺄아아악!"

쿵! 쿵!

내려왔던 아이들이 섀도우리퍼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자 섀도우리퍼가 문을 부수려 한다.

다시 집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물론 나는 들키지 않았으니 도망가서 신고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저 아이들은… 죽겠지.

섀도우리퍼는 B 등급 몬스터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무척 강한 몬스터다.

B 랭크 헌터들도 여럿이 합공으로 사냥한다는 몬스터인데 이제 겨우 헌터 학교 1학년인 나 혼자서는 어림도 없다.

더군다나 지금 나는 무기도 없고.

뭐, 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만….

애들에겐 미안하지만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오늘 처음 본 사이니 어쩔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죽고 싶지 않으니까.

어차피 내가 당하면 다음 차례는 아이들일 테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물러나려 했지만,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문득 방학 전날 기억이 떠오른다.

1학기 동안 잘 따라 줘서 고맙고 2학기 때도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선생님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셨다.

헌터가 되려는 이유가 뭐냐고.

설마 재능이 있다고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온 건 아닐 테니 한 명씩 이야기해 보라고 하셨다.

헌터는 돈 많이 버니까. 멋있어서, 가족도 헌터니까 등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는데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걱정을 했었다.

나는 선생님 말씀처럼 자질 검사를 했을 때 재능이 있다고 나왔고 언니가 헌터 학교에 가겠다고 해서 따라서 입학한 거니까.

계속 고민하다 어느새 내 옆에 있던 언니 차례가 됐는데 언니는 나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어렸을 때 몬스터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 관한 다큐를 보다가 내가 저런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게 돕고 싶다며 헌터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작 나는 기억도 안 나지만 언니는 그런 내가 멋있다고 생각했고 나를 돕고 지키기 위해 헌터가 되기로 했다고 대답했다.

역시, 이대로 혼자 도망은 갈 수 없다.

선생님은 언니에게 '시스터콤플렉스'냐며 놀리셨지만 내게는 역시 은서라며 멋있다고 칭찬을 해 주셨으니까.

이대로 도망치면 나를 따라 헌터 학교에 온 언니나 칭찬해 주셨던 선생님을 다시 뵐 면목이 없다.

섀도우리퍼의 속도가 빠르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고 달리기라면 1학기 내내 구보를 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직접 상대는 못 해도 '어그로'를 끌어서 대피소까지 놈을 데려가면 대피소에는 헌터들이 있을 테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마침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가 보여 집어 들어 섀도우리퍼를 향해 던졌다.

퍽―!

운 좋게 명중하자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얘들아, 절대 나오지 말고 집으로 들어가서 문 잠그고 숨어 있어!"

이미 도망갔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몰라 크게 소리쳤다.

놈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걸 보니 신경이 내게로 완전히 집중된 것 같아 바로 등을 돌렸다.

혹시 다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을까 걱정돼 중간중간 뒤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놈은 계속 나를 쫓아오고 있다.

평소에 제일 싫어했던 구보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숨이 점점 가빠 왔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봤는데… 어?

놈이 없다.

설마 다시 아이들에게 간 건가 생각하는 순간, 옆에 있던 나무 그림자에서 놈이 튀어나왔다.

쿵―!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옆으로 몸을 굴러 피했는데 방금까지 내가 있던 땅바닥이 한 움큼 파였다.

빠르게 다시 일어나 도망가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

망했다.

아까 구르며 피하다가 발목을 접질린 것 같은데.

키랏랏!

놈은 내가 일어설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빨간 안광을 번뜩이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부웅―.

쿵!

…어? 분명히 낫을 휘두르고 부딪히는 소리까지 들렸는데, 어째서인지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죽으면 원래 이런 건가 생각하는 순간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서은서, 내가 몬스터 상대할 때 눈 감으라고 가르쳤어?"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37)

[목적지 부근입니다. 안내를 중단합니다.]

펜션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를 않는다.

대문은 잠겨 있었지만 담을 가볍게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똑똑―.

"은서야, 안에 있어?"

대답이 없다.

전화를 다시 걸어 봤지만 진동으로 해 놨는지 벨 소리도 안 들린다.

주위를 둘러보다 다행히 창문이 열려 있는 곳을 발견해 펜션 안에 들어왔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송을 듣고 대피소로 간 건가?

괜히 호들갑을 떤 것 같아 살짝 허탈한데 식탁에 물이 약간 담겨 있는 컵이 눈에 들어온다.

여름이라 실온에 있었다면 미지근해야 정상일 텐데 아직 차갑다.

일어나서 뒤늦게 확인하고 대피소로 간 건가?

오는 내내 사람이나 차를 전혀 보지 못했는데…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바로 인터넷에 검색해 대피소 위치를 파악하고 펜션을 빠져나왔다.

무심코 차에 타려다가 다시 내렸다.

차로 이동하면 엇갈릴지도 모르니까.

대피소 방향으로 이동하며 내공을 퍼뜨렸는데 딱히 걸리는 게 없다.

계속 내공을 퍼뜨리며 걷다 보니 기감에 생명체가 느껴진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보니 거의 반쯤 부서진 빌라와 그 안쪽에 쓰러져 있는 아이 2명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 보니 다치지는 않고 기절한 것 같다. 대문 상태로 봐선 몬스터의 짓인데 어째서 이 아이들은 멀쩡한 거지?

"으으…."

"정신이 좀 드니?"

"아저씨 누구? 헌터예요?"

"그래, 헌터야. 저기… 이렇게 생긴 언니 못 봤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 방학식 때 찍었던 단체 사진에서 은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봤어요. 이 언니가 보여서 같이 대피소에 가자고 했는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서 문을 막…."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 언니가 괴물을 유인해 간 것 같아요."

하아… 미치겠다.

"어느 쪽으로… 아니다, 얼른 동생 챙겨서 집에 들어가 있어."

녀석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대충 예상이 가니까.

은서는 우수한 학생이다.

자신이 B 등급 몬스터인 섀도우리퍼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테니 필시 헌터들이 있는 대피소 쪽으로 유인하려 했을 거다.

내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대피소 방향으로 뛰었다.

쿵―!

근처에서 큰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달려가 보니 검은 망토를 걸치고 낫을 든 몬스터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은서가 보인다.

몬스터가 천천히 은서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데… 은서 녀석, 얼른 일어나서 피할 생각을 해야지, 포기했는지 눈을 감아 버린다.

놈이 은서에게 낫을 휘두르려 하는 것 같아 신법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쿵―!

다행히 중간에 끼어들어 놈이 휘두르는 낫을 막았다.

겨우 막긴 했지만, 손에 상당한 충격이 느껴진다.

이제 보니 손가락 끝이 살짝 베여 피도 나고 있다.

막으면서 손 쪽에 내공을 보내긴 했지만, 여유가 없다 보니 제대로 전달이 안 돼 베인 것 같다.

"서은서, 내가 몬스터 상대할 때 눈 감으라고 가르쳤어?"

"서… 선생님?"

"얼른 일어나서 물러나!"

"저 다리가 삐어서…."

키랏! 키랏랏!

놈이 괴성을 내지르며 다시 한 번 낫을 휘두른다.

쿵―!

은서를 발로 밀어 뒤로 보내고 보법을 밟아 피했다.

녀석이 공격한 위치의 아스팔트가 갈라지며 땅이 움푹 들어가는데 위력이 상당하다.

아까 내공이 조금만 덜 들어갔어도 살짝 베인 게 아니라 손이 잘렸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포탈에서도 도망쳐 나온 놈이고 섀도우리퍼 자체가 지능이 높다고 들어서 공격을 막았으니 도망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놈은 전혀 그럴 기미가 없다.

내가 피를 흘리는 걸 보고 할 만하다고 판단한 것 같은데 오산이다, 이 자식아!

비록 검은 없지만 상관없다.

사부도 항상 검은 손의 연장선이라고 말했으니까.

놈을 주시하며 단전에 내공을 끌어 올려 손에 집중했다.

오른손 전체에 푸른색 기운이 일렁이더니 이내 완벽하게 손을 감싼다.

검강을 만들 줄 알면 수강(手罡)도 당연히 가능하다.

키랏? 키라랏!

수강에 담긴 기운을 느꼈는지 당황한 표정을 짓는 섀도우리퍼를 향해 보법을 밟아 쇄도했다.

놈은 낫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어림도 없지.

쩌억―.

막으려는 낫째로 놈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늘 검을 쓰다 손을 쓰니 너무 생생한 감촉이 느껴져서 기분이 약간 이상했지만,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사체에 다가가 죽은 걸 확인 하고 바로 은서에게 갔다.

"서은서,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저는 괜찮은데 선생님 손이…."

상처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움직이며 피가 꽤 많이 흘러나와 많이 다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 살짝 스친 거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 정말 괜찮아?"

"저는 정말 괜찮은데…."

정말 살짝 베인 정도라 대충 옷에 문질러 닦고 멀쩡하다는 걸 보여 줬는데 녀석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별거 아니라니까. 다친 건 난데 왜 네가 울려고 해? 그리고, 이 녀석아! 너 까닥하면 죽을 뻔했던 거 알아? 어쩌자고 몬스터를 유인한 거야!"

아까 아이들을 만나서 사정은 대충 알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아니, 그게… 대피소로 가고 있는데 몬스터가 아이들을 공격하려 해서…."

"착한 일도 좋고 남을 돕는 것도 좋아. 하지만 네가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래도 선생님이 구해 주셨잖아요."

말대답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는 은수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어쩔 뻔했어?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조금만 기다려. 몬스터 잡았다고 신고할 테니까 사람 오면 병원 가자."

"네? 아니, 그렇게 심한 건 아니에요."

"심한 게 아니긴,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병원 가야지."

하여간 너무 착한 것도 문제다.

그런데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하지?

잠깐 고민하다 경찰에 통화하면 알아서 조치할 거란 생각이 들어 112에 전화를 걸어 몬스터를 잡았다고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골목에 여러 대의 차들이 도착했다.

경찰차뿐만 아니라 군용 트럭과 일반 차량도 있었는데 내리는 사람들 복장을 보니 수색하던 헌터들도 온 것 같다.

반으로 갈라진 섀도우리퍼를 보며 다들 놀란 표정인데 다가가 신고자라고 밝히고 설명을 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느 길드에 소속되신 분이신가요?"

"아, 길드가 아니라 헌터 학교 교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신분증을 꺼내 보여 주고 일단 병원부터 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병원이요? 어디 다치신… 어? 그러고 보니 옷에 피가…. 많이 다치신 겁니까?"

"아니요. 저는 별거 아닌데 우리 학생이 몬스터를 유인하다 다리를 다쳐서요. 아, 아까 말씀드렸던 몬스터와 마주친 아이들도 제가 확인했을 땐 상처는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여기 맞나요?"

"네. 맞습니다. 고맙습니다."

"별것도 아닌데요. 오히려 저희가 더 고맙죠. 선생님께서 섀도우리퍼를 처리해 주지 않으셨으면 며칠을 작전 태세였을 텐데요. 제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정말 감사합니다."

칭찬도 계속 들으면 질린다더니. 아까 그 무슨 합동 본부, 거기서도 내내 듣던 말이라 이젠 별 감흥이 없어 적당히 인사하고 차에서 내렸다.

은서를 먼저 경찰차에 태워 병원에 보내고 나는 군인들을 따라서 합동대책본부…? 아무튼 군인과 헌터들이 가득한 곳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잡혀 있었다.

물론 실제로 내가 뭐,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니 잡혀 있었다고 하긴 좀 그렇지만 처음에는 부대 책임자인 대령에게 가서 설명하고 그다음엔 도지사, 그다음엔 몬스터를 놓쳤던 길드장까지….

한 번에 다 같이 모여서 들으면 어디가 덧나나?

설명 조금 하면 사람이 새로 와서 했던 말을 계속 다시 반복하는 게 너무 귀찮았다.

따지고 보면 나도 부상자인데.

그리고 설명만 한 건 아니고 보상 이야기도 해서 시간이 좀 걸렸다.

몬스터를 놓친 길드 측에선 섀도우리퍼 사체 대금은 물론 포상금까지 지급해 주겠다고 했다.

도지사도 의인상(?) 같은 걸 검토해 보겠다고 했는데 포상금은 환영이지만 의인상 쪽은 썩 구미가 당기진 않는다.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당연히 기사는 나겠지만 그런 상까지 받으면 일이 더 커질 테니까.

언론에 내 신상 노출이 안 됐으면 좋겠다고 말을 해서 알겠다는 대답을 듣긴 했는데, 정말 들어줄진 모르겠다.

안타스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눈에 띄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세상이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

이야기가 끝나고 목적지까지 태워다 준대서 은서가 간 병원을 가려 했는데, 전화를 해 보니 이미 치료 후 퇴원했다고 한다. 호텔로 갈까 하다 차가 펜션에 있어 이곳으로 왔다.

대문 옆에 있는 벨을 누르자 곧이어 사람이 나왔는데 진수 녀석이다.

"어? 쌤! 조사받으신다더니 이제 끝나신 거예요?"

"무슨 조사를 받아. 내가 범죄자냐, 이 녀석아. 경위 설명하고 온 거지."

"그게 그거 아니에요?"

"어휴, 됐다. 은서는 어때?"

"인대가 조금 늘어났는데 지금은 치료해서 멀쩡해요. 같이 온 아이들은 아무 이상 없어서 검사만 하고 부모님이 와서 데려갔고요."

"아이들? 아… 걔네도 이 병원에 왔었나 보네."

진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서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드럼통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선생님, 이쪽은 우리 삼촌이랑 외숙모세요, 우리 학교 선생님이세요. 아까 은서 구해 주신 분."

"안녕하세요, 강신혁이라고 합니다."

"아, 어서 오세요. 진수 삼촌 되는 사람입니다."

"애들이 잘생겼다고 입에 달고 살더니 듣던 대로 정말 미남이시네. 애들이 공부는 안 하고 선생님 얼굴만 보는 거 아니에요?"

"네?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직 식사 전이죠? 저희도 이제 막 도착해서 밥 먹으려고 준비하던 참인데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들 나와 봐. 선생님 오셨어."

진수가 소리치자 우당탕탕 발소리가 들리더니 애들이 나온다.

"우와! 진짜 쌤이다."

"쌤, 보고 싶었어요!"

"난 별로 안 보고 싶었는데. 은서 너 그렇게 걸어 다녀도 괜찮아?"

"치료 마법으로 치료했거든요. 괜찮아요."

"부모님께 연락은 드렸어?"

"아, 그게… 말하면 돌아오라고 하실까 봐…."

하여간 애는 애다.

"그래도 연락은 드려야지."

"멀쩡한데 괜히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돌아가서 말할게요."

"어휴, 그래. 이번엔 운이 좋았던 거니 다음부턴 절대 그렇게 나서면 안 돼."

"맞아. 나도 이야기 듣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알아?"

은수가 한마디 거들었다. 늘 동생 편이던 은수도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미안. 그리고 선생님, 아까는 제대로 인사 못 드렸는데,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한 건데 뭘…. 감사는 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목숨이 1순위라 생각하고 행동해."

"네."

"준비 거의 다 됐으니까 다들 손 씻고 와서 앉아. 선생님도 손 씻고 앉으세요."

저녁은 바비큐인…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올 때 샀던 소고기가 아직도 차에 있다.

"진수 넌 잠깐 따라와."

"네?"

여름이라 혹시 상했으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정육점 사장님이 냉매재도 많이 넣고 꼼꼼히 포장해 주셔서 아직 차가운 게, 괜찮은 것 같다.

"선생님, 그냥 오셔도 된다니까 뭘 이리 많이 사 오셨어요?"

"아무리 그래도 빈손으로 오면 예의가 아니잖아. 이건 내가 들고 갈 테니까 진수 넌 거기 있는 음료랑 과자 들어."

"그건 뭔데요? 고기에요? 고기는 진짜 많이 있는데."

"소고기 먹고 싶다며?"

소고기를 챙겨 돌아가자 애들은 완전 난리가 났다.

삼촌 내외분도 좋아하셨고 한우라고 하니 민희 녀석이 아까처럼 혀 짧은 소리를 내면서 몹쓸 애교를 부려서 도로 가져가겠다고 할까 하다 참았다.

"소고기라 빨리 익네요. 얼른 드세요."

"너무 부드러워요. 흑돼지도 맛있었지만 역시 고기는 소고기죠!"

"입안에서 살살 녹네요."

"야. 이진수, 너 하나씩 먹어."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

"강 선생님, 술은 좀 하십니까?"

"아, 좋아하는데 제가 차를 가져와서 술은 좀…."

솔직히 술기운은 내공으로 날리면 그만이지만 어쨌든 운전대를 잡으면 안 좋게 생각할 테니까.

설명하면 되겠지만 핑계로 생각할 수도 있고 귀찮다.

"네? 오늘 묵고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방은 많은데, 묵고 가시죠."

"선생님 내일 쉬신다고 하셨잖아요. 자고 가세요."

"맞아요. 어차피 내일 저희랑 바닷가 가기로 하셨잖아요. 이따가 보드게임도 같이해요."

"묵고 가시죠."

"그러면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것 같은데…."

"민폐라뇨. 오늘 선생님이 사 오신 한우로 포식을 했는데. 절대 그렇지 않으니 묵고 가세요."

호텔과 멀진 않지만 내일 다시 오려면 귀찮을 테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확실히 비싼 값을 하는지 고기 맛은 말할 것도 없고 바닷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온다.

좋은 분위기에서 오랜만에 만난 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맛있는 걸 먹으니 힐링 되는 느낌이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보채서 보드게임을 했다.

부루마블 같은 종류도 하고 트럼프 카드가 있어서 원카드와 도둑 잡기 같은 게임도 했는데, 처음에는 시시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다 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꽤 재미있었다.

"곧 있으면 12시네. 슬슬 들어가서 자자."

"에이, 선생님은 한 번도 안 졌잖아요. 한 판 만 더 해요."

애들이 너무 순수해서 표정에 다 티가 나니 도둑 잡기 같은 건 지려야 질 수가 없다.

"선생님은 지지 않아요. 그리고 이 녀석들아, 내일 바다 안 갈 거야?"

한 판 더를 외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진수 삼촌이 내어준 별채에 들어왔다.

침대도 넓고 이불에서도 좋은 냄새가 나는 게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은데, 다음에 시간이 나면 개인적으로도 한번 놀러 와도 괜찮을 것 같다.

침대에 눕자 피곤함이 몰려와 바로 눈을 감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잘 끝났다고 생각했던 오늘 일이 말도 안 되는 사태로 발전한다는 걸.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38)

아침을 먹고 아이들과 함께 해수욕장에 나왔다.

펜션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걸어왔는데,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말 동상이 두 개나 보인다.

하나는 빨강이고 하나는 흰색이라 조형물인가 싶었지만 등대였다.

"특이하지 않아요?"

"그러네."

제주도라 등대도 말 모양으로 해 놓은 건가?

포토 스팟 같은데, 이따 앞에 가서 사진 한번 찍어야겠다.

그나저나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사람이 꽤 많다.

커플도 많고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사람도 보이는데 왜 나는 학생들이랑….

조금 서글퍼지려다가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있으니 그나마 기분이 풀린다.

파라솔을 하나 대여해 자리를 잡았다.

"쌤, 우린 바로 가시죠?"

말과 동시에 진수가 갑자기 바지를 훌러덩 벗기에 깜짝 놀랐는데 미리 수영복을 안에 입고 온 거였다.

"난 안 들어갈 건데."

"네?"

"짐 지킬 사람 1명은 있어야지. 쌤이 여기 있을 테니 애들이랑 놀다 와."

여름 바다 그 자체가 좋은 거지 물놀이는 안 좋아한다.

예전에 어릴 때 물에 빠져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 딱히 물 공포증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고, 수영도 배웠지만 뭐… 그냥 귀찮다.

여벌 옷도 없고 이따가 발 정도만 담글 생각이다.

"휴대폰이나 귀중품 같은 건 코인 로커에 넣어 두면 되는데요."

"옷도 없고 쌤은 괜찮으니까… 어? 저기 애들 오네. 같이 놀다 와."

탈의실에 갔던 민희, 은서, 은수가 돌아왔다.

다들 같이 놀자고 꼬셔 댔지만 짐 지킨다는 핑계로 거절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파라솔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사람 구경을 하는데, 하아… 여기도 저기도 다 래시가드다.

예전에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바다에 오면 비키니 입은 예쁜 누나들이 간간이 있었는데, 래시가드가 나온 이후부터는 그런 누나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아까 진수 녀석은 평범한 반바지에 상의 탈의였지만 다른 애들은 전부 래시가드였다.

애초에 애들이 뭘 입든 관심이 없지만.

대체 어떤 자식이 이런 몹쓸 물건을 발명한 건지….

모든 남성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씹어 대고 있는데 바지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꺼내 확인하니 등록이 안 된 번호다.

잠깐 고민하다 딱히 할 것도 없으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제주도청 재난대응과 과장 정만수라고 합니다. 강신혁 헌터님 맞으신가요?

재난대응과라면, 어제 일 때문인가?

"네. 맞습니다."

―용감한시민상 관련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어제 도지사님께 이야기 들으셨죠?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라고 직접 지시하셔서 부득이하게 주말 아침부터 전화드리게 됐네요. 죄송합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실까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청에서 도지사님이 직접 시상하실 텐데 날짜는 언제가 편하실까요?"

"아, 저기… 제가 시민상을 별로 받고 싶지 않은데 혹시 거절은 힘들까요?"

―네? 어째서요?

어째서긴. 전부 안타스 때문이지.

어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제가 언론에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싫어해서 어제도 부탁을 드렸거든요. 헌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고. 그리고 제가 다음 주 중으로 제주도를 나갈 예정이기도 해서. 어떻게 안 될까요?"

―아니, 그래도 도지사님이 직접 지시하신 사항이라… 언제 제주도를 나가시나요? 가시기 전에 상 받으실 수 있게 일정 조절하겠습니다.

아니, 본인이 싫다는데 왜 이리 끈질겨….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상을 꼭 주셔야 한다면 제가 아니라 우리 학생이 받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우리 학생이요?

"제가 헌터 학교에 근무하고 있거든요. 우리 학생 이야기도 어제 했는데 전달이 안 됐나요?"

―사건 당시 현장에 다리를 다친 여학생이 있었다고 보고서에 적혀 있긴 했는데 일행이셨군요. 바로 병원에 갔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야기는 안 적혀 있어서요.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아무래도 몬스터를 잡은 게 나라서 내 쪽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전달된 모양이다.

"우리 학생이 감기 기운이 있어서 자다가 대피 방송을 못 들었거든요. 뒤늦게 확인하고 대피소로 가려다가 자기처럼 대피 방송을 듣지 못하고 있던 아이들을 만났대요. 같이 대피소로 데려가려 하다가 몬스터가 하필 그 아이들이 있던 집 앞에 나타나 아이들을 노려서 우리 학생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몬스터를 유인했거든요."

―어? 그게 정말인가요?

"네. 몬스터를 잡은 건 저지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상대할 수 없는 몬스터라는 걸 알면서도 용기를 내서 몬스터를 유인한 우리 학생이야말로 용감한시민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생각이 그러시다면야, 일단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너무 늦은 시간만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일요일인데 아침부터 고생이시네요."

나도 공무원이다 보니 일요일에 일하고 있는 이 사람이 딱하게 느껴진다.

―도지사님 특별 지시 사항이라니 별수 없죠. 감사합니다. 그럼 추후 연락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잘 넘긴 것 같긴 한데, 혹시 둘 다 준다고 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다.

그러면 좀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다에 갔던 녀석들이 돌아왔다.

"더 안 놀고 왜 벌써 와?"

"선생님, 계속 혼자 있으면 심심하시지 않아요?"

"같이 놀아요. 매점에서 수영복 팔 텐데."

"반바지도 팔아요. 저도 저기서 샀는데…."

"이런 데서 사면 비싸잖아. 선생님 어제 고기 사는 데 돈 다 써서 가난해."

"에이, 거짓말. 그럼 제가 사 드려요?"

"어떻게 학생한테 사 달라고 하겠니. 괜찮으니 어서 가서 놀아."

"쌤, 그러지 말고 같이 놀아요."

은서와 은수가 양쪽에서 팔을 붙잡는다.

"둘 다 뭐 하는 거야? 옷 젖잖아."

"헤헤. 선생님, 바닷가 와서 이렇게 있으시면 안 되죠."

진수 녀석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하더니 민희와 함께 갑자기 몸을 숙이고 내 다리를 한쪽씩 잡는다.

설마 이 녀석들, 날 강제로 빠뜨리기라도 할 셈인가?

하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바로 내공을 방출해 진수와 민희의 혈도를 점했다.

"이진수, 김민희, 뭐 해? 얼른 잡아."

"가, 갑자기 몸이 안 움직이는데."

"나, 나도."

"날 빠뜨리려고? 100년은 이르다, 요 녀석들아."

"쌤이 하신 거예요? 쌤, 저는 그냥 진수가 하자고 해서…."

은수는 빠르게 내 팔에서 손을 떼고 둘을 손절했지만, 은수도 진수 못지않은 악동이라 믿음이 안 가 녀석의 혈도도 점했다.

"쌤! 전 진짜 억울해요. 진수가 먼저 하자고 했다니까요."

"너도 좋다고 찬성했다는 데에 선생님 손목과 전 재산을 건다. 그리고 안 그랬어도 어디 친구를 팔아? 은서도 얼른 팔 안 떼면 다른 애들처럼 될 텐데 괜찮겠어?"

"저는 상관없는데… 저랑 계속 붙어 있고 싶으신 거예요?"

"어?"

웬일로 소심한 은서 녀석이 계속 내 팔을 잡고 협박을 한다.

"기껏 바다까지 왔는데 같이 놀면 안 돼요?"

다른 녀석들이야 평소에 장난을 많이 치던 녀석들이니 그러려니 하는데 안 그러던 녀석까지 이러니 내가 좀 너무했나 싶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놔."

"정말요?"

그제야 웃으며 팔을 푼다. 뭐… 나도 슬슬 발 정도는 담가 볼까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와, 쌤! 지금 은서만 편애하는 거예요?"

"우우! 편애 교사는 물러가라!"

"말도 못 하게 해 줄까?"

"언론 통… 읍!"

진수는 아예 아혈까지 점해서 말도 못 하게 만들어 버렸다.

"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으니까 좀 풀어주세요."

"어허, 서은수. 친구들은 다 벌 받고 있는데, 네 친구들을 버려?"

"아니, 제가 언제 친구를 버렸어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말했지. 연대책임."

"그럼 은서는요?"

"은서야말로 너희들이 억지로 시켜서 했겠지. 선생님은 은서랑 같이 매점 다녀올 테니까 짐이나 지키고 있어."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짐을 지키냐며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은서와 함께 매점으로 향했다.

"선생님, 진짜 애들 온종일 저렇게 둘 건 아니죠?"

"돌아가면 풀어줄 거니 걱정하지 마. 선생님이 은서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따로 온 거니까."

상 받는 게 나쁜 일도 아니고 모두가 있을 때 말해도 상관없어 보이지만,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니까.

기껏 말을 해서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막상 내가 받는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네? 할 말이요?"

어째 얼굴이 좀 붉어진 것 같은데… 이 녀석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기 선생님, 저도 사실 선생님을 좋아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전 학생이잖아요. 갑자기 이러시면…."

"어… 어?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까 어제 일 때문에 도청에서 전화 왔었거든. 그래서 너 용감한시민상 받을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려던 건데."

평소엔 너무 조용해서 몰랐는데 은서도 김칫국 잘 마시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네? 아니… 쌤!"

아까는 조금 빨간 정도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그, 그런 거였으면 그냥 아까 애들 있는 데서 말해도 되잖아요. 괜히 사람 헷갈리게 하시고… 너무해요."

"그게 원래 나한테 주겠다고 해서 내가 나 말고 너 주라고 추천했거든. 그런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서 괜히 애들 다 있는 데서 말했다가 내가 받으면 좀 그렇잖아."

"아… 알았어요. 대신 조금 전 이야기는 못 들으신 거로 해 주세요."

무심코 어떻게 들은 걸 안 들은 거로 하겠냐고 말하려다가 은서 얼굴을 보니 그렇게 말하면 터질 것 같아 알겠다고 대답했다.

매점에서 반바지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오니 다들 꼼짝 못 하고 있어서 그런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다들 반성은 좀 했나?"

"잘못했어요."

"다신 까불지 않겠습니다."

다들 풀 죽은 목소리라 조금 심했나 싶어 풀어주자 연기였는지 어떻게 한 거냐며 마법도 쓸 줄 아냐며 질문 세례를 쏟아붓는다.

"헌터가 되면 저희도 할 수 있어요?"

"마법반 애들도 이런 건 못 한다고 들었는데."

"마법은 아닌데… 자식들, 그렇게 궁금하면 그만 놀고 돌아가서 수업이나 할까? 일단 그럼 펜션까지 구보로…."

"아닙니다."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우와! 아이스크림이에요? 잘 먹겠습니다."

수업 소리가 나오자마자 바로 말을 돌려 버린다.

"그래. 남의 밑천 캐낼 생각 말고 곱게 아이스크림이나 먹어라."

"은서야,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어? 나 그냥 조금 더워서…."

"더위 먹은 거 아니야?"

흐음, 아까 일을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 같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할까 했지만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더 신경 쓸 것 같다.

애들이 오해할지도 모르고 자리를 비켜 주면 좀 나으려나?

"진수, 탈의실 어느 쪽이야?"

"어? 진짜 옷 사셨네요?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진수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는데 우리 파라솔에 못 보던 남자 셋이 서 있다.

"싫다는데 왜 그러세요?"

"아니, 우리가 뭐 잡아먹어요? 3:3 인원도 맞으니 같이 놀자는 건데."

"저희 일행 있다고요."

"에이, 셋밖에 없는 것 같은데 너무 빼시네. 그러지 말고 같이 놀아요. 20살? 21살? 이따 저녁에 맥주도 한잔 살게요."

"저희 미성년자거든요? 술 안 마셔요."

"어? 그럼 고등학생? 방학해서 친구끼리 왔나 보네. 괜찮아. 이렇게 놀러 오면 다들 한 잔씩 하는 거야."

"그래. 우리 그렇게 나이 안 많아."

나이가 안 많기는… 누가 봐도 20대 중후반은 될 것 같은데. 어이가 없다.

지금 누구 제자한테 개수작이야?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39)

파렴치 교사

"애들이 싫다는데 추태 그만 부리고 가지?"

"어? 선생님!"

"이 샌님이랑 꼬맹이가 그쪽 일행이야?"

"어이, 샌님. 방금 뭐라 했어, 추태?"

"지금 여자들 앞이라고 폼 잡는 거냐?"

"그러다 처맞고 질질 짜는 수가 있다."

하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체격을 보니 다들 헬스나 운동으로 다져진 듯했지만 그래 봤자 일반인 같은데….

애초에 헌터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도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꼬맹이? 당신들 나 알아?"

"오우, 꼬맹이가 사납네. 뭐, 어떻게… 덤비기라도 하려고?"

진수 녀석,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게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기세다.

"이진수, 참아."

솔직히 이런 양아치들이야 내가 안 나서도 애들 선에서 정리할 수 있겠지만 헌터와 일반인이 싸우다가 경찰 조사라도 받게 되면 무조건 헌터가 불리하다.

D 급 헌터만 돼도 웬만한 일반인… 아니, 운동선수라고 해도 상대가 안 되니까.

보통은 머리가 어떻게 된 놈들이 아닌 이상 일반인들이 헌터에게 시비를 거는 일도 거의 없다.

진수는 아직 헌터는 아니지만, 예비 헌터도 다를 건 없다.

교칙에도 절대 일반인에게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내용도 있으니 진수가 여기서 저 자식들 패 버리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샌님이 그래도 분위기 파악은 좀 할 줄 아네."

"무릎 꿇고 싹싹 빌어. 곱게 가 줄 테니까."

"이 자식들이 정신이 나갔나."

"거기 꼬맹이, 진짜 죽고 싶어?"

"이진수, 입 닫아."

"아니, 선생님…."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는 진수를 뒤로 보내고 앞으로 나섰다.

"비는 건 너희들이 빌어야지. 싫다는 애들한테 껄떡거리고 미성년자인데도 술까지 권한 건 네놈들이잖아."

"이 자식이!"

"여자 앞이라고 객기 부리네."

제일 덩치가 좋은 놈이 내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기에 그대로 잡아 반대로 꺾어 버렸다.

우드득―.

"끄아아악! 내 팔!"

"재, 재윤아! …넌 뒈졌다!"

꼴에 의리는 있는지 친구가 당하자 옆에 있던 두 놈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정말 너무 느려 하품이 나올 수준이다.

달려드는 두 놈 모두 발목을 걷어차 무릎을 꿇렸다.

"무릎이 좀 빳빳한 것 같아서 도와줬는데, 이제 한번 빌어 보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설마 허, 헌터였냐?"

"헌터가 일반인 팬다!"

"겨, 경찰 불러!"

얼씨구, 방금까지 기세등등 달려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경찰을 찾는 게 추하기 그지없다.

"안 그래도 내가 부르려 했다, 이 자식들아. 진수, 112에 전화해."

"네? 선생님, 그러면 곤란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괜찮아."

헌터 학교 교칙 제10조 3항.

모든 헌터 학교 교원들은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

학생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할 시엔 최선을 다해 학생을 지켜야 한다.

법도 아니고 교칙일 뿐이지만 만약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을 땐 면책이 법률로 보장되어 있다.

지난번 이론 시험에 문제로 나왔던 내용인데, 살인이라도 했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나는 가볍게 제압만 했으니까.

내가 오히려 당당하게 경찰을 부르라고 하자 눈치를 보는 게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것 같아 내공을 발출해 세 놈 모두 점혈했다.

"어딜 내빼려고. 경찰 불렀으니까 기다려."

"끄읍읍!"

잠시 후 경찰이 도착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놈들을 넘겼다.

점혈을 풀어주자 놈들은 자기들은 그냥 같이 놀자고 권유했을 뿐인데 내가 폭력을 썼다고 개소리를 지껄였지만, 소용없다.

경찰도 눈이 있지.

껄렁껄렁해 보이는 양아치들의 말보단 신분이 확실한 내 말을 신뢰했다.

더군다나 우리 쪽엔 미성년자도 있는 데다, 출동한 경찰 중 1명이 어제 대책본부에서 나를 봤다고 아는 척을 하며 무척 우호적이었다.

저놈들을 처벌하려면 나도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라도 써야 할 줄 알았는데, 융통성 있게 신원 파악과 조사를 해 둘 테니 나중에 와도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선생님, 너무 멋있어요."

"우리 선생님 최고."

"녀석들도 참. 다들 잘 참았어. 얼른 가서 놀자."

"쌤, 휴대폰이랑 지갑 같은 건 코인 로커에 먼저 넣어 놔야죠."

"아, 그래. 가자."

진수와 함께 코인 로커에 휴대폰과 지갑을 넣었다.

코딱지만 한 크긴데 이용료가 5,000원이나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가져와서 안에다 둘걸.

"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가실 거예요?"

"응? 바지 갈아입었잖아. 수영복 아니어도 상관없다며."

"윗옷은 안 사셨잖아요. 이따 가실 때 축축할 텐데."

생각해 보니 진수 말이 맞는 것 같아 윗옷을 벗어 넣었는데, 진수 녀석이 깜짝 놀란 표정이다.

"왜 그래?"

"선생님, 몸이…."

몸이 뭐 어쨌… 아니, 잠깐. 이 녀석 설마 그런 취향이었나?

갑자기 윗옷 벗으라고 한 것도 그렇고.

아니지. 이 녀석은 원작에서 민희랑 지지고 볶는 인싸 커플이었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

"징그럽게 왜 그런 눈으로 봐?"

"흉터가 너무 많아서…. 전부 몬스터랑 싸우다 생긴 거예요?"

어휴, 난 또 뭐라고.

흉터는 원래부터 많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 샤워를 할 땐 나도 좀 놀랐었다.

"왜, 보기 흉하냐? 그냥 옷 입을까?"

진수 녀석이 놀랄 정도면 다른 애들 보기도 좀 안 좋을 텐데.

마법으로 흉터 제거하는 게 가능하긴 하지만 옷을 입으면 보이지도 않고 딱히 아픈 것도 아니라 귀찮아서 내버려 뒀었다.

지울 걸 그랬나?

"아니에요. 멋있어요. 선생님이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증거잖아요."

"짜식, 그런 식으로 아부해도 나올 거 없어."

"아부가 아니라 진짠데요. 많이 아프셨겠어요."

"딱히.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자."

반응을 보니 가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그냥 옷을 넣어 두고 파라솔로 돌아왔다.

다들 흉터를 보고 처음엔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진수처럼 몬스터랑 싸워서 그런 거냐며 멋있다고 칭찬 일색이었다.

애들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대부분 여자다.

흉터도 흉터지만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몸이 괜찮은 편이니까.

살짝 쑥스럽기도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애들과 한참을 놀다 출출해서 점심을 먹으려고 나왔다.

"다들 매점에 먼저 가 있어. 선생님 지갑 가지고 갈게."

코인 로커에서 지갑을 꺼내며 휴대폰도 확인했다. 공무원 쪽에선 연락이 없고… 어? 김 선생과 이설 씨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메신저가 와 있었다.

7시면 괜찮을 것 같아 알겠다고 답장을 보내고 코인 로커를 닫았다.

"저기요."

"네? 아, 죄송합니다."

"예? 아직 별말도 안 했는데…."

뒤를 돌아보니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서 있다.

"짐 꺼내려는 거 아니셨어요?"

짐을 빼려고 말을 건 줄 알아서 비키며 죄송하다고 했던 건데.

"아닌데. 아까부터 계속 봤는데 너무 제 스타일이셔서요. 혹시 번호 좀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이거 헌팅인가?

하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웃으며 알려 주려 하는데 불청객이 끼어든다.

"왜 안 와요? 애들 다 기다리고 있는데."

"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왜 왔어?"

내 앞에 있던 여자를 보더니, 은서 녀석이 갑자기 내 팔을 잡는다.

"뭐 하는 거야? 금방 갈 테니까…."

"애들? 유부남이셨어요? 죄송합니다."

아니, 유부남은 무슨 유부남이야.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듣지도 않고 가 버린다.

"아는 사람이에요? 저도 휴대폰 가지러 온 건데요. 얼른 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말을 하지만 누가 봐도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아까 일을 이렇게 복수하는 건가?

내가 오해하게 만든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착각해서 그런 거면서….

못된 녀석 같으니라고.

"쌤, 얼른 가요."

"갈 테니까 팔 좀 놔. 무거워."

감히 하늘 같은 선생님의 연애 사업에 훼방을 놔?

은서 네 녀석 라면엔 계란 추가 없다.

* * *

제주도에서 올라오자마자 호텔에 들러 짐만 놔두고 강원도로 향했다.

약속했던 열흘이 아닌 2주를 제주에서 보냈으니 사부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강원도에 도착해 라면과 과자를 비롯해 각종 물건을 사서 익숙한 산을 올랐다.

포탈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서 있는 사부를 만날 수 있었다.

"사부! 오랜만이에요. 많이 기다리셨나 봅니다."

"나흘 전에 왔어야 할 녀석이 왜 이제 온 것이냐?"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이 많아서…."

사실 해랑 길드의 헌터들이 대부분 복귀해서 사냥은 목요일까지밖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 선생과 이설 씨가 모두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제주도에서 놀다 가자고 꼬드겨서 넘어갔다.

어차피 용감한시민상 수상 때문에 금요일까진 있어야 했으니까.

용감한시민상은 내가 아니라 은서가 받았다.

제주시 측에서 둘 다 주겠다는 걸 은서가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극구 사양해서 겨우 넘어갔다.

은서가 부모님께 말을 안 해서 설명을 드릴 땐 최대한 놀라시지 않게 하느라 제법 애를 먹었지만, 다행이다.

은서가 수상하자 지역신문뿐만 아니라 포털 사이트에도 기사가 올라오고 학교에서도 연락이 왔다.

직접 몬스터를 잡은 게 나다 보니 기사에 내 이름도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상을 받은 건 은서라 포커스는 은서 쪽에 맞춰졌다.

"녀석, 피부가 많이 검어진 걸 보니 뙤약볕에서 일하느라 고생이 많았나 보구나."

"아, 뭐… 그, 그랬죠."

사실 고생보다는 바다에서 놀다 보니 피부가 탄 건데….

뭐,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겠지.

"이번에도 뭘 많이 사 왔구나. 설마 또 오늘 오고 몇 주야 동안 안 오는 것이냐?"

"아닙니다. 오늘, 내일은 여기에 있을 거고 월요일엔 일이 있어 나갔다가 며칠 안에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곧 개학이니 개학하면 다시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뵐 거고요."

이틀 뒤 월요일엔 실기 시험이 있고 그다음 주는 개학이다.

실기 시험은 하루만 보면 끝이지만 사냥은 더 하지 않기로 했다.

해랑 길드에서 워낙 열심히 사냥한 덕에 이번 방학에 모으려고 했던 액수도 이미 초과했으니까.

돈도 좋지만, 방학이 이제 열흘도 안 남았으니 남은 기간은 휴식도 취하고 조금 소홀했던 수련도 할 생각이다.

"오, 이번엔 제대로 참깨라면을 사 왔구나. 너도 먹을 거냐?"

"저는 피곤해서 생각 없어요."

아침부터 비행기 타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강원도까지 운전하고 왔더니 피곤이 몰려온다.

"진짜 안 먹을 거지? 나중에 다 끓였을 때 한 젓가락 달라고 해도 안 줄 거다."

원래 라면은 남이 끓여 준 라면이 최고라 한 젓가락만 딱 뺏어 먹을 생각이었는데… 그동안 몇 번 당하다 보니 예상을 했는지 선수를 친다.

1개 더 끓이라고 할까 했지만 먹고 자면 속이 더부룩할 것 같다.

"진짜 안 먹을 거니까 사부 많이 드세요."

동굴에 와서 자려고 누웠다.

벽에 적힌 내공심법 구결을 보고 있으니 마음속에 불안함이 피어오른다.

이제 원작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남은 기간은 1년 반.

물론 주인공이 이 동굴을 찾아오는 건 1학년 2학기 수련회로 그때까진 아직 2년 정도 남긴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부가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다.

원작에 사부는 등장하지 않으니까.

언제인지 알고 있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불안한 마음에 나와 보니 사부는 라면 물을 끓이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자식이, 안 먹을 거라며? 이미 물 올렸는데."

"안 먹어요."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지만 내일은 나가서 산 밑에 있는 동네에서 중국 음식을 좀 사 와야겠다.

산골 동네 중국음식점이니 정통 중국 술은 없겠지만 빼갈 같은 게 있으면 몇 병 사 오고.

보내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하라는 말도 있으니까.

* * *

아침에 일어나 수련을 조금 하다 점심 뭐 먹을 거냐는 사부에게 기다리라 하고 포탈을 나왔다.

산 밑에 중국집에 와 보니 시골 중국집이긴 해도 요리류는 꽤 다양하다.

양장피와 탕수육에 라조기와 류산슬, 난자완스까지. 평소에 나도 잘 안 먹는 요리들을 몽땅 시키고 거기에 빼갈도 열 병이나 포장해 다시 돌아왔다.

먹는 내내 기름이 너무 많네. 향이 약하네 하며 투덜대긴 했지만, 요리는 물론 술까지 깡그리 비웠다.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다음에 올 땐 저번에 사 왔던 동파육을 사 달라고 해서 알았다고 말하고 포탈을 빠져나왔다.

지난번에 이론 시험을 보러 갔을 때 강원도에서 운전해서 가면 너무 피곤해서 오늘 서울에 가서 차를 두고 KTX를 타고 미리 내려갈 생각이다.

아니, 실기 시험이면 차를 가져가는 게 편하지 않을까?

서울에서 대전이면 그리 멀지도 않으니 호텔에서 자고 내일 출발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최서라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려고 휴대폰을 꺼내자 막 포탈을 나와서 그런지 통화는 물론 인터넷도 신호가 안 잡힌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빠르게 산을 내려가는데 신호가 잡혔는지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져 걸음을 멈췄다.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는데 깜짝 놀랐다.

부재중 전화가 30통에 문자도 50통이 넘게 왔고 메신저는 300개가 넘어간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40)

평소에도 포탈을 나오면 밀린 연락들이 쌓여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메신저를 켜 보니 김 선생과 이설 씨, 최서라에 은수와 은서, 민희와 진수는 물론 심지어 교감을 비롯해 박 선생님과 민 선생님 같은 학교 선생님들까지.

내가 아는 사람들은 전부 내게 연락을 했다.

하나같이 기사 봤냐며 사실이 아니지 않냐고 묻는 내용인데, 도대체 무슨 기사를 말하는 건지….

설마 안타스가 내가 예전에 안타스 일원이었다는 걸 까발리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최서라에게 들은 바로는 나를 회유하려 한다고 했는데….

더군다나 내가 잡히면 최서라도 위험해진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같이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도대체 뭐지?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해 보려는데… 맙소사, 내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다.

바로 클릭해 보니 기사들이 주르륵 나왔다. 뭐야, 이게?

[헌터 강신혁은 왜 용감한시민상을 거부했나?]

[강신혁 그가 숨기고 싶어 했던 건 금단의 사랑?]

[파렴치 교사 강신혁의 완벽한 이중생활, 주변 교사도 전혀 몰라….]

파렴치 교사?

내가 완벽하진 않아도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교사 생활을 못 하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어이가 없어 가장 상단의 기사를 클릭했다.

[Deathpatch=황제윤·남지민 기자. (단독) 〈헌터 강신혁은 왜 용감한시민상을 거부했나?〉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화제의 인물이 있다. 바로 제1 헌터 학교 검술과 1학년에 재학 중인 서은서 양이다.

서은서 양은 얼마 전 제주도에서 발생했던 섀도우리퍼 탈주 사건에서 위험을 무릎 쓰고 섀도우리퍼를 유인해 민간인 2명의 목숨을 구했다.

헌터 학교에 재학 중이지만 1학년이라 경험도 없고 자기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인을 구하고자 했던 서은서 양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제주도청 또한 서은서 양에게 용감한시민상을 수여했다.

본 기자도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던 중에 문득 의문이 생겼다.

섀도우리퍼는 B 등급 몬스터 중에서도 까다롭기로 악명이 자자한 녀석이다.

서은서 양이 섀도우리퍼를 유인하긴 했어도 잡을 수는 없었을 테니 섀도우리퍼를 잡은 사람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다.

섀도우리퍼를 처리한 사람 또한 용감한시민상을 받을 만한데 어째서 서은서 양 혼자 수상을 하게 된 걸까?

섀도우리퍼를 놓쳤던 길드에서 처리해서 공과 과가 상쇄된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섀도우리퍼는 한 헌터가 단신으로 해치웠다.

그 헌터의 이름은 강신혁. 제1 헌터 학교 검술 교사다.

대부분의 기사에선 서은서 양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지만 한 신문사에서는 그나마 조금 상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강신혁 헌터가 서은서 양이 당시 감기약을 먹고 잠든 상태라 대피 방송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통제 구역 안으로 진입했고 운 좋게 서은서 양과 만나 몬스터를 해치웠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강신혁 헌터는 제1 헌터 학교 검술 교사로 몬스터를 놓친 연무 길드와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용감한시민상은 서은서 양 혼자 수상한 걸까?

상을 수여했던 제주도청에 문의한 결과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몬스터를 처리하고 신고한 사람은 강신혁 헌터였으며 제주도청 측에서는 강신혁 헌터에게 상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강신혁 헌터는 헌터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상을 받기 쑥스럽다며 민간인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낸 제자를 추천했다고 한다.

자신의 공까지 학생에게 돌리는 선생님이 있다니 정말 훈훈한 미담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상을 수여하려 했는데 끝까지 고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기사를 꼼꼼히 읽은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두 사람은 사제 관계다.

그런데 어째서 방학인 8월에 두 사람은 제주도에 같이 있던 걸까?

어떤 언론사에도 이러한 내용은 다루지 않았기에 우리 '데스패치'는 직접 제주도에 기자를 내려보내 탐문 취재를 시작했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충격적인 정보의 연속이었고 끝내 우리 '데스패치'는 강신혁과 서은서 양이 열애 중이란 진실에 도달했다.

첫 번째 증거는 강신혁 헌터와 직접 통화까지 했다는 재난대응과 공무원 A 씨의 이야기다.

(아래는 A 씨와 본 지의 인터뷰 내용의 녹취록)

"도지사님께서 직접 지시가 내려와 일요일에 전화를 드렸는데 상을 받기 싫다면서 제자분을 추천하시더라고요. 제가 전달받은 사건 보고서엔 은서 양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상을 서은서 양이 받은 거죠?"

"은서 양의 이야기를 알고 조사를 해 보니 강신혁 씨 이야기가 사실이었고 상을 수여했죠."

"그럼 왜 보고서엔 그 이야기가 빠졌던 건가요?"

"아, 그 부분은 저희 실수였어요. 저도 궁금해서 당시 합동대책본부에 있던 후배에게 물어보니 강신혁 씨가 본인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게 싫다고 조용히 넘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하네요."

"어째서요?"

"글쎄요. 그것까진 저희도 잘 모르는데. 뭐, 관심을 받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누락 됐던 건데… 실수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상은 받을 사람이 받았으니 문제는 없지 않나요?"

강신혁 헌터는 이렇듯 처음부터 언론에 노출되는 걸 꺼렸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제자와 밀월여행 중에 발생한 일이다 보니 스스로 떳떳하지 못해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짙어지던 찰나 의심에 쐐기를 박는 두 번째 증거를 찾아냈다.

두 번째 증거는 바로 이 사진이다.

CCTV 동영상을 캡처한 탓에 화질이 고르지 않지만, 팔짱을 끼고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는 이 남성은 강신혁 헌터, 옆의 여성은 서은서 양이다.

그리고 그 앞에 모자이크 처리된 여성은 우리 '데스패치'에 제보를 해 주신 제보자다.

제보자는 지난 일요일 이호 테우해수욕장에서 훤칠한 외모를 가진 강신혁 씨에게 호감이 생겨 번호를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때 서은서 양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팔짱을 끼며 애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본 제보자는 젊은 부부인 줄 알고 사과 후 돌아왔지만 나중에 기사를 통해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라 제보를 해 주셨다.

위 사진만으로도 '데스패치'는 두 사람의 열애가 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신중을 가하기 위해 추가 취재를 하던 도중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했다.

강신혁 헌터가 제주도에서 있을 당시 머무르던 호텔은 제주 시내 중심가에 있는 C 호텔이다.

보통 호텔은 투숙객의 정보를 밝힐 수 없어 협조해 주지 않지만, 우리 '데스패치'는 비공식적으로 호텔 관계자와 접촉했고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강신혁 헌터는 C 호텔에서 약 2주가량 머물렀는데 처음엔 혼자 지냈지만 섀도우리퍼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방을 하나 더 예약했다고 한다.

기존에 강신혁 헌터가 쓰던 방은 싱글 침대 하나인 1인용 객실이었지만 새로 예약한 방은 더블 침대가 있는 2인용 객실이었다.

예약 및 결제는 전부 강신혁 헌터가 했지만 실제로 방을 이용한 건 젊은 여성이었고, 호텔 관계자에게 서은서 양의 사진을 보여 주자 관계자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며 이용객이 그녀였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사랑엔 국경도 나이도 없다고 했고 학창 시절 잘생긴 선생님을 좋아했던 추억을 가진 사람도 꽤 있을 거다.

실제로 그러다 이루어진 커플도 있고 서은서 양과 강신혁 헌터의 나이 차이는 8살로 그리 크진 않다.

하지만 서은서 양은 미성년자.

순수한 사랑이었다면 두 사람을 응원했겠지만, 함께 호텔까지 드나든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그럴 수가 없다.

'데스패치'는 최종 확인을 위해 강신혁 헌터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여러 차례 전화를 시도했지만, 통화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데스패치'가 목격한 둘의 관계는 명백한 연인이다.

강신혁 헌터는 지금은 삭제된 제1 헌터 학교 위튜브 채널에 출연해 뛰어난 외모와 출중한 실력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받았다.

'데스패치'가 접촉한 제1 헌터 학교 교직원의 말에 따르면 그는 1학기 우수 교사로도 선정됐고 평소에도 자신감이 넘치며 당당한 태도였다고 한다.

'그저 친밀한 스승과 제자 사이.' 등의 식상한 대응 대신, 평소처럼 당당하게 쿨한 인정을 하며 책임감 있는 자세를 보여 주길 기대해 본다.]

너무 어이가 없어 휴대폰을 내던질 뻔했다.

정말 누군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아니, 수십 대는 후려치면 이런 기분일까?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개 같은 기사가….

아니, 이건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만 확인해 봐도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도대체 취재를 어떻게 했길래….

그냥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생각한 망상 그대로를 기사로 냈다.

처음에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건 안타스의 이목을 사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두 번째 증거도 기사에 다정하다고 써 놔서 그래 보이지만 친한 선생과 제자 사이면 팔짱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결정적인 증거라는 호텔도 내가 예약하고 결제한 건 맞지만 다 사정이 있다.

원래 애들은 수요일에 제주도를 떠나는 일정이어서 펜션엔 목요일부턴 다른 손님이 오는데, 금요일에 용감한시민상 수상이 잡혀 펜션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미성년자는 혼자서 숙박이 안 되니 같은 호텔에 내 이름으로 예약을 하고 보호자로 방을 잡아 준 거다.

심지어 은서만 있던 것도 아니고 은수도 같이 있겠다고 해서 2인으로 잡았던 거고 호텔을 잡을 땐 수상 때문에 이틀 더 머물게 된 걸 설명하기 위해 직접 은서 부모님과 통화까지 했다.

당장 이 말도 안 되는 기사를 내리고 정정 보도를 내 달라고 할 목적으로 포털에 데스패치를 검색해 번호를 알아냈다.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갈 뿐 연결이 되질 않는다.

아직 6시도 안 됐는데 무슨 놈의 회사가…. 젠장, 생각해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아니, 아무리 일요일이라도 그렇지, 기사는 올리면서 전화는 안 받는 게 말이 되나?

이 와중에도 휴대폰은 계속 울리는데… 진짜 미칠 것 같다.

일단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아니라고 말을 해야겠다.

잔뜩 쌓여 있는 메신저와 문자, 부재중 목록을 보며 누구에게 먼저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은서 어머님 번호가 보여 전화를 걸었다.

―강 선생님? 몇 번이나 전화를 드렸는데, 왜 이제야….

"죄송합니다. 제가 아까까지 포탈에 있다가 방금 나왔습니다. 은서에게도 들으셨겠지만 지금 나온 기사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당연히 우리 은서랑 강 선생님을 믿죠. 하지만 지금 인터넷에선 완전히 은서랑 선생님을 부적절한 관계로 몰아가는 분위기인데 어떡합니까? 사실이 아니니까 기사 내려 달라고 하려고 처음 기사 올린 데에 전화를 했는데, 아예 받지를 않던데….

은서 어머님도 전화를 하셨구나.

하긴 나도 나지만 제주도의 영웅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던 은서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시궁창에 처박혀 버렸으니, 내가 은서의 부모님이었어도 가만히 있진 못했을 거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최대한 빨리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은서도 많이 놀랐을 테니 어머님이 잘 다독여 달라고 부탁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또다시 휴대폰이 울린다.

[교감 김만동]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반사적으로 살짝 긴장을 했지만,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는 떳떳하니까.

"네, 교감 선생님. 기사 보고 전화하신 거죠?"

―맞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교감과는 지난 금요일에도 은서의 용감한시민상 수상 기사가 나가고 통화를 했다.

그때와는 목소리가 전혀 딴판인데 살기까지 느껴진다.

―정말 학생에게 손을 댄 건가?

이 노인네가 진짜 사람을 어떻게 보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교감은 내가 은서와 밀월여행을 간 게 아니라 자기 딸이랑 같이 사냥하러 제주도에 간 거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평소에 내 이미지가 그렇게 안 좋았나?

"전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헌터 학교의 교사로서 부끄러운 짓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 그렇지? 나는 자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혹시나…. 그래서 어떻게 할 텐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합니까? 진실을 바로잡고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사실인 것처럼 기사로 내보낸 기레기와 언론사에겐 대가를 치르게 해야죠."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41)

새벽이라 그런지 도로는 시원하게 뻥 뚫려 있지만,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기사가 올라온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져 나는 미성년자 학생을 건드린 파렴치 교사가 되어 버렸다.

서울에 가면서도 서울에 와서도 수십 번 전화를 했지만 데스패친가 데스파친가 하는 놈들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건 아니다.

어제 온종일 주변 사람들에게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내 결백을 증명할 증거를 준비했다.

원래 오늘 해가 뜨자마자 준비한 증거들을 가지고 방송사나 신문사를 찾아가 내 결백을 증명하고 처음 기사를 올렸던 곳을 고소하려 했지만 나는 지금 대전에 있는 연수원으로 가고 있다.

빌어먹을 신입 교사 실기 평가 때문에.

'국민쓰레기'가 됐으니 실기 평가 같은 건 미루거나 나중에 따로 받을 수 없을까 해서 알아봤지만,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단다.

직계 가족 사망, 자연재해, 심각한 질병이나 전치 3주 이상의 부상 같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연기가 불가능하고 오늘 평가를 치르지 않으면 당장 다음 학기부터 수업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인 심정으로 대전으로 가고 있다.

연수원에서 따로 휴대폰이나 인터넷을 통제하지 않으니 다들 내 이야기를 알고 있을 텐데….

애초에 비 헌터 학교 출신이라고 안 좋게 보던 놈이 미성년자인 제자까지 건드렸다고 알려졌으니 해명할 기회 같은 건 주지도 않고 벌레 보듯이 할 게 벌써 눈에 선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출발하기 전에 김 선생에게 연락이 왔는데 지인 중에 메이저 언론사 기자가 있어 실기 평가가 끝나고 전화를 하면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실기 평가는 임의로 편성된 헌터들끼리 등급에 맞는 포탈을 공략하는 형식으로 치러지니 최대한 빨리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다.

해명뿐만 아니라 변호사도 만나기로 했으니까.

협력은 기대도 안 하고 최선을 다해 최대한 빨리 끝낼 생각이니 괜한 시비만 안 걸렸으면 좋겠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누가 건드리면 죽기 직전까지 패 버릴 것 같으니까.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를 몰다 보니 어느새 연수원 앞에 도착했다.

9시에 연수원에 있는 강당에서 조 추첨을 하고 공지를 한다고 했는데 아직 8시 반도 안 됐다.

일찍 들어가 봤자 좋은 꼴 못 볼 테니 조금 있다가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가장 먼저 들어간 본 건 메일.

어제 하도 연락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기사에 있는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으로 정정 보도를 내라고 메일을 보냈는데 아직도 읽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와서 정정 보도를 내 준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지만.

여전히 메인에 걸려 있는 기사를 클릭해 확인을 하는데 그새 댓글이 또 늘었다.

대부분… 아니, 99%가 내 욕과 당장 파면하라는 내용이다.

1%는 광고나 정치 이야기고.

내가 고아에 비 헌터 학교 출신이라는 것까지 들먹이며 입에 담지도 못할 욕들이 가득하다.

일차적 책임은 이런 말도 안 되는 허위 기사를 올린 기자와 언론사고 대중들은 잘못된 기사를 보고 욕하는 거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는 개뿔, 전부 고소할 거다.

어제 변호사와 상담에서도 잘못된 기사든 정당한 기사든 선을 넘는 악플은 고소를 할 수 있다고 들었으니까.

계속 보고 있다간 속만 더 상할 것 같아 휴대폰을 집어넣으려는데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무시할까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메일에 번호도 적어 놨으니 기자일 수도 있으니까.

"여보세요."

―강신혁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서울시 교육청 학생인권교육센터 인권조사관 김영광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사건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아…."

사건이 터지고 쏟아지던 기사엔 경찰의 입장도 있었는데, 은서가 미성년자이긴 하지만 만 16세니 상호 동의를 했다면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고 따로 신고도 들어오지 않았으니 나설 수 없다고 했다.

―강신혁 씨, 관련 조사를 받으셔야 하니 내일 9시까지 이곳으로 좀 와 주셔야겠습니다.

법적으로 처벌할 순 없어도 징계는 가능할 테니 교육청이 나선 모양인데, 차라리 잘됐다.

"내일 말고 오늘 당장은 안 됩니까?"

―오늘 신입 교사 연수 실기 평가가 있지 않나요? 그래서 내일로….

"조사 먼저 받겠습니다. 실기 평가는 그쪽에서 어떻게 조치 좀 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미 대전까지 내려온 게 조금 아깝긴 하지만 누명을 쓰고 평가를 치르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테니까.

이미 증거 자료는 다 준비해 뒀고.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냥 받고 내일 오시죠.

단칼에 거절당했다.

욕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고 말을 이었다.

"제가 진짜 억울해서 그런데, 그럼 오늘 실기 평가 끝나고 가도 되겠습니까?"

―흐음, 신입 교사 연수 실기 평가는 꽤 오래 걸린다고 들었는데요. 저희가 6시엔 다 퇴근을 해서 늦어도 3시까지는 오셔야 할 텐데, 가능하시겠어요?

3시면 충분하지.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9시가 다 되어 가기에 차를 몰고 연수원 안으로 향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오늘 실기 평가 때문에요."

"신분증 좀 주시겠습니까?"

신분증을 주자 확인하던 경비원의 표정이 안 좋아진다.

쓰레기를 보는 눈빛으로 신분증을 돌려주는데 이 사람도 기사를 본 모양이다.

기분이 거지 같았지만 꾹 참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주차하고 강당으로 향하는데 뒤통수가 너무 따갑다.

"저거 강신혁 아니야?"

"맞네.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왔대?"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제자를 건드릴 수가 있지?"

"쌤도 기사 봤어? 여학생 고 1밖에 안 됐다는데. 진짜 세상이 미쳐 돌아가네."

"저런 쓰레기랑 같은 조 하긴 싫은데."

"딱 보니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얼굴로 꼬셨나 보네. 헌터 학교도 안 나왔다고 하던데."

"그럼 고아겠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저런 쓰레기 때문에 괜히 멀쩡하게 학생 가르치는 우리까지 욕먹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일부러 그러는 건지 다 들린다.

하나같이 일면식도 없는 놈들이지만 내 얼굴은 이미 다 팔렸다.

예전에 위튜브에도 출연했고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간 내 사진을 위튜브 사이버 렉카들이 실어 날랐으니까.

하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겪으니 진짜 주먹이 운다.

나 아냐고, 알지도 못하면서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한 놈 한 놈 쫓아가 그럴 수도 없고 믿어 주지도 않을 것 같아 마음속으로 계속 참을 인 자를 되새기며 강당에 도착했다.

강당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누구 하나 내 주위론 오지 않는다.

지난번에 내가 말을 걸던 여선생들을 발견했는데 눈길 한 번 안 주고 외면한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조 배정이 시작됐지만, 여전히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는데 얼른 내 이름이 불리면 좋겠다.

B 등급 포탈이든 A 등급 포탈이든 결정만 되면 빨리 박살 내고 누명을 벗으러 갈 거니까.

"그럼 E 조 마지막 인원입니다. 강신혁!"

E 조구나.

바로 E 조가 공략해야 할 포탈 위치를 휴대폰에 옮겨 적었다.

"하아, 왜 하필 저런 쓰레기랑 같은 조가 된 거야."

"재수 옴 붙었네."

"거지 같다, 진짜."

나랑 같은 조인지 몇몇 사람들이 인상을 쓰며 불만을 토로하는데… 누구는 좋은 줄 아냐?

아예 말조차 섞기 싫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 E 조 조장으로 결정된 남자에게 다가갔다.

"잠깐 이야기 좀 하죠."

벌레 보는 눈으로 쳐다보다 싸가지 없게 고개만 까딱하는 남자에게 나는 개별로 움직이겠다고 했다.

어차피 차도 가져왔고 나랑 같이 다니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평가 항목에 협동심 같은 것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없다.

남자가 알겠다고 해서 바로 강당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내비를 찍어 보니 15분.

꽤 가깝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차를 몰아 포탈 인근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검을 챙겨 산을 조금 오르니 포탈과 함께 경계를 서는 군인들이 보인다.

내가 워낙 서둘렀기에 아직 다른 조원들은 도착하지 않은 것 같지만 1분 1초가 아까워 바로 군인들에게 향했다.

"연수원에서 오셨나요? 신분증 좀 주시… 아."

신분증을 요구하던 하사의 표정이 아까 경비처럼 단번에 굳는다.

근처에 있던 다른 군인들도 웅성거리며 쳐다본다.

"저 사람 강신혁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어제 소대장님이 여기 포탈 연수받는 교사들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저 자식은 그런 짓거리를 하고도 선생 계속하려나 본데?"

"진짜… 경찰은 뭐 한대, 저런 쓰레기 안 잡아가고."

"아침에 기사 봤는데 여학생이 만 16세고 신고도 안 들어와서 경찰도 어떻게 못 한다던데."

"여학생 부모는 신고 안 했대? 진짜 뻔뻔하네. 저런 놈도 선생이라고…."

요새 군인들도 휴대폰을 쓴다더니 다들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여깄습니다."

신분증을 대충 보더니 썩은 얼굴을 한 채 돌려준다.

"먼저 들어가 있을까 하는데, 괜찮죠?"

"마음대로 하시죠."

표정도 그렇고 퉁명스러운 말투도 상당히 거슬리지만 참았다.

마음대로 하라는 건 들어가도 된다는 뜻이니까.

다른 조원들이 다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라 생각하며 바로 포탈에 뛰어들었다.

* * *

"호식이 형, 저도 E 조예요."

"그래? 잘됐네."

"아까 쓰레기가 형한테 가던데, 뭐래요?"

"지도 부끄러웠는지 개별로 행동하겠단다. 포탈까지도 알아서 가겠데. 어차피 태워 줄 생각도 없었지만."

"개별 행동이요? 그건 좀 위험하지 않아요?"

"그런 쓰레기 죽든 말든 알 게 뭐야. 우리가 꺼지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개별 행동 하겠다는데."

"그건 그렇죠. 그럼 저희 조는 9명인 셈이나 마찬가진데… 좀 빡세겠네요."

"아예 낙제 안 받으려면 몇 마리는 잡겠지. 그리고 영식아, 형 A 랭크잖아. 걱정할 거 없어. 형 못 믿냐?"

실기 평가 과제로 공략해야 할 포탈은 B 등급 10인.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지만 그런 쓰레기 같은 놈 하나 빠진다고 해도 클리어는 문제없다.

"당연히 믿죠. 형이랑 같은 조 돼서 얼마나 든든한데. 잘 부탁드려요."

"그래. 아, 영식이 네 차가 12인승 카니발이랬나?"

"네. 이따 갈 때 제 차로 다 같이 가죠."

"그게 낫겠네. 그럼 우리도 준비하자. E 조 되신 분들은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조원을 모으고 각자 간단히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쓰레기가 안 보이니 조원들이 질문을 했지만 영식이에게 말했던 것처럼 설명했다.

몇몇 조원들이 영식이처럼 실질적으로는 9명인 거 아니냐며 걱정하는 눈치기에 괜찮다고 안심시키며 준비를 하고 10시까지 정문에서 모이기로 했다.

조금 더 일찍 출발하려 했는데 다들 포탈 위치도 가깝고 어차피 오늘 내로 처리하면 되는데 서두를 필요 있냐고 해서 10시로 정했다.

방으로 돌아와 준비를 마치고 웹 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10시가 됐다.

부랴부랴 정문에 왔는데… 뭐지?

영식이 차도 없고 다른 조원들도 안 보인다.

먼저 출발했을 리는 없을 테니 전화를 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그제야 주차장 쪽에서 검은 카니발이 나오는 게 보인다.

영식이 녀석은 깜빡 졸았다고 하고 다른 조원들도 한두 명씩 오면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기에 한마디 할까 하다가 참았다.

나도 정시에 온 건 아니고 괜히 분위기를 해칠 필요는 없으니까.

포탈에 도착하니 10시 반이 훌쩍 넘었다.

우리 조가 배정받은 포탈은 연수원에서 15분 거리밖에 안 되지만 다들 늦기도 했고 중간에 영식이가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시간을 좀 많이 날렸다.

점심 전까지 끝내는 건 무릴 테니 적당히 처리하다 1시쯤 되면 나와서 밥 먹고 이어서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쓰레기는 안 보인다.

개별 행동한다고 해 놔서 알겠다고 했지만, 아예 안 오면 실격인데.

그런 놈이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괜히 내게 불똥이 튈 수도 있어 경계를 서던 군인에게 다가가 물었더니 9시 20분쯤인가 와서 들어갔다고 한다.

군인들이 내게 그 강신혁이 파렴치 교사가 맞냐며 물어보는데, 아무래도 군인들 눈치가 보여서 먼저 포탈에 들어간 것 같다.

9시 20분이면 한 시간도 넘게 기다린 건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안했겠지만 그런 쓰레기 같은 놈에겐 미안한 감정 같은 것도 사치다.

"다들 들어가죠. 강신혁 씨는 먼저 와서 들어갔답니다."

"형, 그런 쓰레기 같은 놈한테 무슨 존칭을 붙여요."

"그런 쓰레기는 다 죽어야 하는데."

강신혁을 씹으며 모두와 함께 포탈에 진입했다.

산악 지형이라 아주 좋다.

비교적 쉬운 편에 보상도 짭짤하니까.

"호식이 형, 강신혁 먼저 들어간 거 맞아요? 안 보이는데요?"

"개별 행동한다고 했다면서요. 먼저 사냥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에이… 민서 씨, 기사에서 그 자식 헌터 랭크 B라고 하던데 여기 10인 B 등급 포탈이잖아. 어떻게 혼자 돌아다녀?"

"군인들이 거짓말한 게 아니라면 혼자 간 것 같은데?"

이상하다.

처음부터 개별로 행동하겠다고 했지만, 우리 뒤나 따라다니면서 놓치는 몬스터들 한두 마리 정도나 처리하는 식으로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죽으려고 환장했나?"

나도 같은 생각이다.

"솔직히 그런 쓰레기는 죽어도 싸지."

"조원이 죽으면 우리 다 평가 점수 깎이는 거 아니야?"

"자기가 먼저 개별 행동 하겠다고 했고 혼자 와서 그런 거니 우리는 상관없을…."

순간 너무 놀라서 말을 멈추고 말았다.

우리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푸르던 하늘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으니까.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42)

나도 선생님 애인인데요?

"형, 이거 포탈 클리어 신호 맞죠?"

"우리 방금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포탈이…."

"그럼 강신혁이 혼자 클리어한 거예요?"

말도 안 된다.

분명히 경계를 서던 군인은 쓰레기가 9시 20분쯤에 들어갔다고 했으니까.

조 배정도 9시에 시작했고 놈이 아무리 빨리 왔다고 해도 해도 9시 15분. 아직 11시도 안 됐는데 2시간도 안 돼서 어떻게 클리어를….

아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 자식 B 랭크잖아!"

B 등급 10인 포탈을 B 랭크 헌터 혼자서 클리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뭔가 착오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모두와 함께 숲으로 진입하려는데 사람이 걸어 나온다.

"가, 강신혁?"

피를 잔뜩 뒤집어쓴 몰골인데 놀랍게도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옷과 칼에 묻어 있는 피 중 빨간색은 조금도 없고 전부 검은색이니까.

"강신혁은 반말인데, 당신 나 알아?"

"그게… 아니, 혹시 그쪽이 혼자서…."

"당신네들이 늦은 거잖아. 나는 적당히 할당량만 채울 생각이었는데."

맙소사, 그럼 정말 혼자 클리어한 건가?

"늦게 왔으니 사체랑 뒤처리는 그쪽들이 하는 거지?"

"아니, 잠깐만! 정말 그쪽 혼자서… 뭐, 뭐야?"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내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길래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뭘 쫄고 그래? 누가 보면 내가 때리려는 줄 알겠네. 정산금 보내려면 계좌번호는 받아야 할 거 아니야. 직접 불러 줘?"

녀석의 손을 보니 종이가 들려 있다.

"누… 누가 쫄았다고!"

다른 사람들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 바로 다가가 종이를 잡아챘다.

"절반."

"절반? 그게 무슨 말…."

"일 있어서 가 봐야 하니까 정산하고 절반만 보내라고. 시세 다 아니까 장난칠 생각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짓거리는 안 한다고 말하려는데 놈은 그대로 나를 지나쳐 포탈을 나가 버렸다.

* * *

놀란 표정을 하는 군인들을 뒤로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차 유리에 비친 꼴을 보니 완전히 거지가 따로 없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되는 일은 없었는데.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생각으로 너무 날뛰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까부터 참기만 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조금은 해소된 느낌이다.

트렁크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입었던 옷은 비닐에 싸고 칼도 한 번 닦아서 다시 트렁크에 넣어 두고 운전석에 앉았다.

머리나 신체에 달라붙은 피들은 물티슈로 대충 닦아 내긴 했는데 제대로 안 닦였는지 여전히 피 냄새가 난다.

찝찝해서 샤워 한번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다.

이어폰을 끼고 김 선생에게 전화를 걸고 바로 액셀을 밟았다.

―강 선생님, 오늘 연수 실기 평가 끝나고 전화 주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설마 안 가신 거예요?

"아니요. 끝나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벌써요? 아직 11시도 안 됐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조금 서둘렀거든요. 이제 막 올라가려 하는데 어제 말씀하셨던 기자인 친구분이랑 같이 볼 수 있을까요?"

―오려면 두 시간쯤 걸리죠? 어디에서 만날까요?

"이왕이면 교육청 근처에서 뵐 수 있을까요?"

―교육청 근처면 종로구인데… 거긴 왜요?

"아침에 학생 인권 어쩌고 하는 데서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왔거든요. 원래 내일 오라고 했는데 일찍 올 거면 오늘 와도 된다고 해서요."

―그럼 광화문 근처는 어떠세요? 마침 친구 회사가 그쪽이거든요.

"잘됐네요. 1시 반에 광화문역에서 뵙죠. 장소 알려 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네. 이따 봬요.

생각을 정리하며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서울 톨게이트가 보인다.

김 선생은 이미 친구랑 만났다고 해서 조금 더 속도를 냈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서 차가 안 막혀 얼마 안 걸렸다.

김 선생에게 근처에 왔다고 어디로 가야 할지 전화를 하니 차로 오겠다고 한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배려를 해 준 것 같다.

주차장 위치를 알려 주고 잠시 기다리자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고 내렸다.

"강 선생님… 어머, 얼굴이 완전히 반쪽이 되셨네요. 식사는 하신 거예요?"

"생각이 없네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분이 기자님이신가요? 안녕하세요, 강신혁입니다."

"동석일보 다니는 임은지예요. 3시까지 교육청에 조사받으러 가신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아, 네. 누추하지만 타시죠."

차에 타자마자 바로 정말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상당히 직설적인 성격인 것 같은데 괜히 배려한다고 돌려 말하는 것보단 이편이 낫다.

"하늘에 맹세코 아닙니다."

"그럼 데스패치에서 연인 사이라고 주장하며 제기했던 상황들을 반박할 증거라거나 증인들이 있으신가요?"

"제주도에 간 이유가 은서랑 밀월여행 같은 게 아니었다는 건 내가 증언할 수 있어."

"저도 따로 준비하게 있습니다. 잠시만요."

대시보드에서 노트북을 꺼내 키고 '1번'이라고 써진 동영상을 재생했다.

―안녕하세요. 해랑 길드 길드장 홍종식입니다.

―해랑 길드 소속 헌터 홍예슬입니다.

두 사람은 내가 해랑 길드의 요청으로 제주도에 왔으며 매일 같이 사냥을 했고 쉬는 날은 단 이틀뿐이라고 이야기했다.

동영상이 말미엔 두 사람 다 나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법정에 서게 된다면 증인으로도 출석하겠다면서 강한 신뢰를 보여 주었는데, 한 번 봤지만 다시 봐도 살짝 눈물이 날 뻔했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어요?"

"어제 부탁드렸더니 찍어서 보내 주셨습니다."

"이 영상이면 확실히 제주도에 간 게 밀월여행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되겠네요."

"여기 2번은 뭐예요? 이것도 증거예요?"

"아, 네. 같이 보시죠."

2번 영상을 재생하자 두 사람 다 깜짝 놀란다.

―아아, 제1 헌터 학교 교감 김만동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강신혁 선생을 믿습니다.

"선화야, 이분 너희 아빠잖아?"

"정말 우리 아빠네."

―강 선생 사건을 제일 처음 보도한 기사를 보면 강신혁 선생이 공을 세워 놓고도 언론에 노출되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나와 있었죠. 그런 부탁을 한 이유가 학생과 밀월여행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하던데, 아주 희대의 개소리가 따로 없더군요.

"아버님은 여전히 화끈하시네."

"하하…."

―강 선생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이유는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지금은 폐지된 저희 학교 위튜브 채널에 강 선생이 출연해서 상당히 화제가 됐죠. 좋은 관심도 있었지만 악플도 많았습니다. 강 선생은 특히 심했고 강 선생이 비 헌터 학교 출신이라 만만하다고 생각했는지 결투 신청도 학교 행정이 마비될 정도로 많이 들어오는 등 곤란하고 힘든 상황을 겪었으니 언론에 노출되는 걸 어떻게 좋아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건 아닙니다.

이어서 자기랑 대련한 이야기와 유일하게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서 우수 교사로 삼았다는 칭찬과 함께 다시 한 번 나를 믿는다고 말하며 영상이 끝났다.

사실 교감에겐 따로 부탁도 안 했는데 통화할 때 나를 잠깐이나마 의심했던 게 미안하다며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쓰라며 영상을 보내 줬다.

"중간중간 비속어도 있고 관련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그대로 쓰진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편집하면 확실히 도움은 되겠네요. 이거 3번도 증거인가요?"

"아, 그건 동영상은 아니고 음성 통화 파일이에요."

정말 천운으로 은서 어머님이 지난번에 통화했던 게 자동 녹음이 되어 있었다며 보내 주신 파일이다.

호텔 예약 부분도 나오고 은서와 은수가 같이 호텔에서 머무른다는 내용도 들어가 있다.

"준비 많이 하셨네요. 이거 뭐, 인터뷰도 필요 없이 동영상만 공개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아, 혹시 그 팔짱 끼고 있던 사진에 대한 반박 증거도 있나요?"

"기사를 보면 제보자가 저랑 은서를 부부로 착각했다고 하는데 아마 은서가 애들이 기다린다고 말해서 그런 걸 거예요. 은서가 말한 애들은 당시 같이 있던 다른 학생들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겐 따로 연락을 못 했지만 부탁하면 언제든지 증언을 해 줄 겁니다."

"스킨십은요?"

"그때가 점심때였거든요. 제가 휴대폰이랑 지갑 가지러 온 거였는데. 은서가 얼른 가자고 잡은 거예요. 평소에 제가 애들이랑 워낙 친하게 지내서…."

"설명을 들으니 이해는 가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네요."

사실 나도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어쨌든 스킨십이 있었던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평소에도 스스럼없는 사이라 팔짱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일단 여기 파일들 제 메일로 좀 보내 주시겠어요?"

"아, 네."

"어차피 준비하신 증거들만으로도 충분히 강 선생님이 결백하다는 건 증명할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기 기사는 언제쯤 올라갈까요?"

"지금 바로 들어가서 써서 올릴 거니까 걱정 붙들어 매세요."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아, 데스패치는 고소하실 거죠?"

"당연하죠."

데스패치뿐만 아니라 악플러들까지.

누구 하나 봐줄 생각 없다.

* * *

"허, 진짜 완전히 오해였군요.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내일 오라는 걸 지금 왔겠습니까?"

"교육청 차원에서도 강 선생님의 명예 회복을 돕기 위해 보도 자료를 낼 겁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만 가셔도 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까지 열어 주는데, 조사 시작할 땐 무척 까칠하더니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솔직히 처음에 교육청에 들어올 땐 긴장했지만 긴장한 게 허무할 정도로 임 기자에게 했던 것처럼 설명하니 교육청도 나를 믿어 줬다.

애초에 증거가 너무 확실하니까.

물론 완전히 잘 풀리기만 한 건 아니다.

계속 마음에 걸리던 팔짱을 낀 사진이 결국 문제가 됐다.

나를 상대하던 조사관은 별말 안 했는데 중간에 들어온 학생인권옹호관이라는 늙은이가 트집을 잡았다.

인권 센터 책임자라는데 아무리 친해도 선생은 학생이 스킨십을 하려 하면 제지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학교 측과 상의해 징계위원회가 열릴 수도 있다고 한다.

일단 교감이 내 편이니 안 열리고 구두 경고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고, 조사관도 열려 봤자 가장 낮은 징계인 서면 경고 정도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먼저 팔짱을 낀 것도 아닌데, 억울하다.

교감이랑 이야기 한번 해 봐야겠다고 생각해 교육청을 빠져나오며 휴대폰을 꺼내니 김 선생에게 메신저가 와있었다.

[강 선생님, 아직 조사 중이세요? 끝나면 이거 한번 보세요. http:.bit.l1/32MQRE]

인터넷 주소 링크는 뭐지? 벌써 기사가 올라왔나?

클릭하니 뉴스 기사가 아니라 웬 인터넷 커뮤니티 인기 게시판이 나온다. 아니, 이게 뭐야?

[1287957. 나도 강신혁 선생님 애인임. (증거 有)]

[1287968. 내가 강신혁 선생님 애인인데? (사진 있음)]

[1287979. 나야말로 진짜 강신혁 선생님 애인임. (사진 2장 첨부함)]

[1287974. 내가 강신혁 선생님 애인인데? (인증 있음)]

[1287953. 진짜 강신혁 선생님 애인 등판. (인증샷 첨부)]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43)

이제 악플을 넘어 조롱까지 하는 건가….

도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질 나쁜 장난을 하는 건지 글을 클릭했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클릭하자마자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낯익은 여고생과 팔짱을 끼고 있는 내 사진이 나왔으니까.

B 조에 있는 민하다.

배경을 보니 검술 훈련장인데… 아, 그땐가?

위튜브 촬영해서 한창 유명세에 시달릴 때 애들이 SNS에 올리고 싶다며 같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서 몇 장 찍어 준 적이 있는데, 그때 사진인 것 같다.

평소에도 장난기 많고 활발한 녀석이긴 하지만…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

[저는 제1 헌터 학교 검술반에 재학 중인 박민하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은서와 팔짱을 낀 사진이 은서가 선생님의 연인이라는 증거면 저도 선생님의 애인입니다.

어그로 끌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허위 기사로 저희 선생님과 은서가 욕먹는 걸 지켜보기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선생님은 엄할 땐 엄하시지만 평소에는 이야기도 잘 들어 주시고 간식도 자주 사 주시고 장난도 잘 받아 주시고 항상 친근하게 대해 주셔서 저도 그렇고 저희 검술반 학생들 모두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제가 올린 사진처럼 팔짱 정도는 검술반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다 해 봤을 겁니다.

그래서 기사를 처음 봤을 때부터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저희 검술반 학생끼리 단톡방이 있어서 은서에게 직접 사건의 진실도 들었습니다.

저희 조 대표인 진수의 삼촌이 운영하는 펜션이 제주도에 있어 같은 검술반이자 평소에 같이 학생회 활동을 하며 친했던 은수와 은서, 진수와 민희 이렇게 넷이서 제주도에 갔다고 합니다.

방학식 때 아이들이 선생님께도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가자고 권유했는데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애들이 선생님께 권유하는 건 저도 실제로 봤고 본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마침 선생님께서도 애들이 놀러 간 시기에 제주도에 계셔서(원래 방학 때 서울에서 사냥 중이셨는데 같이 사냥하시는 분 친척이 운영하는 길드가에 사고가 나서 사람이 부족하다고 해 도와주러 가셨다고 합니다.) 연락이 닿아 선생님께서 토요일 일정을 끝내고 저녁을 같이 먹으러 펜션에 오셨습니다.(이날이 몬스터 탈주 사건이 있던 날입니다.) 기사에 나온 사진은 다음 날 모두 같이 펜션 앞에 있는 해수욕장에 가서 놀다가 찍힌 겁니다.

당시 팔짱을 낀 건 선생님이 지갑과 휴대폰을 가지러 가셨는데 안 오시고 웬 여자랑 이야기하고 있어서 가자고 잡아당기려고 팔을 잡은 거였다고 합니다.

팔짱을 끼면서 애들이 기다린다고 말했는데 선생님께 접근하던 여성분이 '유부남이셨어요?' 하면서 혼자 착각하신 채 가 버리셨다고 합니다.

같은 호텔을 이용한 건 은서가 받은 용감한시민상 시상식이 금요일에 있는데 아이들이 숙박하던 펜션의 이용 기간이 끝나 다음 손님이 예약되어 있어 더 묵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미성년자는 예약이 안 되니 선생님이 머무르는 호텔에 선생님이 방을 잡아 준 겁니다.

방이 2인실이었던 건 은서와 쌍둥이 자매인 은수도 같이 머물렀기 때문이고 호텔을 예약할 때 선생님께서 직접 은서 어머님과 통화도 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엔 선생님께서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더라도 학교를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학생으로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믿습니다.

은서에게 듣기론 선생님도 지금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계신다고 하는데, 이 글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망상을 있는 그대로 써서 내보낸 기자와 데스패치가 꼭 처벌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장난기 많은 말괄량이로만 생각했었는데….

다른 글들도 클릭해 보니 전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쓴 글이었다.

인증샷이라고 올린 사진들은 전부 나와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사진이고.

하나같이 선생님을 믿는다, 우리 선생님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나를 옹호하는 내용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은 엑스트라라고 생각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애초에 내가 선생이 된 이유는 주인공과 친분을 쌓기 위함이었으니까.

물론 생활하다 보니 정이 들어서 이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딱히 잘해 준 건 없다.

한창 욕을 먹고 있는 나를 위해 나선다는 게 절대 쉽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사진을 올리면 자기들 얼굴까지 노출되는데,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이렇게 나서 주다니….

가슴이 먹먹한 걸 넘어 눈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드는 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같이 지낸 시간이라고 해 봤자 겨우 한 학기. 고작 반년도 채 되지 않는데….

세상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하고 욕하며 등을 돌렸는데 우리 학생들은 나를 믿어 줬다.

* * *

"괜찮아진 것 같다고 약 안 드시지 마시고 꼭 챙겨 드셔야 합니다. 마음도 굳게 가지시고요."

"네…."

최대한 힘들어 보이는 표정을 유지하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계산하고 병원을 빠져나와 약을 사서 차에 탑승했다.

약은 대충 구석에 던져 버렸다.

어차피 먹을 생각은 없고 전에 받은 것도 먹지 않았으니까.

시동을 걸고 내비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제1 헌터 학교]

내일이 벌써 개학인데 시간이 참 빠르다.

원래 조금 쉬면서 놀러도 다니고 수련도 하려 했는데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보니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다.

그래도 잘 해결됐으니 다행이다.

아이들이 올린 글들은 각종 커뮤니티로 퍼지며 화제가 됐고 결국 기사화까지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지 씨의 기사도 올라오고, 다음 날 교육청의 공식 조사 결과 발표까지 나오자 여론은 급반전됐다.

언론사들은 태도를 180도 바꾸어 정정 보도를 냈고 처음 기사를 올린 데스패치도 정정 보도를 내고 연락을 취해 왔다.

거듭 미안하다고 말하며 직접 찾아와서 사과한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아무리 봐도 그런 식으로 대충 사과받고 넘어갈 수준은 진작 넘어섰으니까.

교육청 조사를 받은 다음 날 '장앤김'이라는 국내 최대 로펌을 찾아가 변호사 셋을 고용했다.

데스패치는 물론 기사 댓글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와 은서에게 심한 말을 했던 악플러들을 특정해 전부 고소를 진행해 달라 요청했다.

대부분은 나를 욕하는 댓글이었지만, 은서에게 달린 악플도 만만치 않아서 은서 어머님께도 이야기 드렸고 로펌에 갈 때 동행했다.

사실 처음엔 변호사를 셋이나 고용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변호사가 데스패치와 처음 기사를 쓴 기자는 이미 정정 보도까지 내며 잘못을 인정했으니 내가 무조건 승소하겠지만 악플러들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잡아서 처벌해도 벌금 200이라 그냥 내고 말지 합의 안 하는 경우도 많다며 만류하기에 아예 악플 전담으로 둘을 더 고용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합의를 안 해 수익성이 떨어지는 건 전혀 상관없다.

시간은 나 대신 변호사가 써 줄 테고 애초부터 합의금 장사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돈은 충분하다.

방학에 번 돈만 5억 가까이 되고 투자했던 화신전자 주식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으니까.

데스패치와 악플러 누구 하나 봐주지 않고 철저히 박살을 낼 생각이다.

오늘 정신병원에 와서 진료를 받은 것도 그래서다.

변호사가 계약하고 내게 처음으로 물어본 게 정신과 진료를 받았냐는 거였다.

원래부터 강철 멘털인 데다 결백도 증명됐으니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혹시 내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이런 질문을 하는 줄 알고 살짝 불쾌했지만 착각이었다.

소송하면 당연히 내가 승소는 하겠지만, 통상적으로 정신적 피해에 관한 손해배상금은 법원에서 인정을 많이 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그나마 조금 더 쳐준다는데, 병원비와 약값은 물론 일하지 못해서 생긴 손해까지 청구할 수 있을 거라고 해서 바로 그날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지속해서 치료를 받는 기록이 있으면 재판에 유리하다고 해서 오늘 두 번째 상담을 받았는데 올 때마다 힘든 척하는 게 쉽진 않다.

학교도 휴직하고 조금 쉬라고 했지만 그건 거절했다.

결백은 충분히 밝혀졌지만, 괜히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모르고 나를 위해 나서 준 학생들을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교육청에서 조사받을 때 열릴지도 모른다는 징계위원회도 잘 처리됐다.

교감이 내 편을 들어 주기도 했고 사실 무엇보다 학생들이 나를 위해 저렇게 나서 줬으니까.

징계위원회 없이 교장에게 구두 경고를 받는 선으로 정리됐는데 실제론 경고도 안 받았다.

그저께였나?

교장에게 전화가 왔는데, 말도 안 되는 소문 때문에 고생했다고, 푹 쉬면서 털어 버리고 많이 힘들면 휴직계 제출하면 언제든지 처리해 주겠다는 말도 했으니까.

물론 거절했다.

어느새 학교 앞에 도착했다.

학교 앞에는 평소보다 훨씬 차도 많고 학생과 학부모도 많이 보인다.

내일이 개학이라 학생들은 오늘까지 입소해야 하니까.

차가 너무 많아 한참을 기다리다 겨우 학교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기숙사 쪽으로 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어? 쌤!"

진수 녀석이다.

생각해 보니 이 녀석도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어깨동무한 사진을 올려 놓곤 나도 강신혁 선생님 애인이라고….

일부러 어그로를 끌기 위해 학생들끼리 이야기해서 그렇게 올린 거라고 하는데… 그래도 다른 남학생들은 내 이름만 써서 글을 올렸는데, 진수 녀석은 진짜….

어휴, 지금 다시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쌤, 오늘 왜 5시까지 학교로 오라고 하신 거예요? 다른 애들도 다 부르셨던데… 설마 그만두시는 거예요?"

"글쎄."

"쌤, 안 돼요! 헛소문이라는 건 밝혀졌잖아요."

녀석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하는 걸 보니 먼저 말해 줄까 싶기도 했지만 요 녀석은 입이 너무 가볍다.

"이따가 애들 다 모을 건데 그때 이야기해 줄게."

"쌤…."

침울한 표정을 한 진수를 뒤로하고 기숙사에 들어와 애들에게 5시 반까지 학교 정문에 모이라고 메신저를 보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보내자마자 휴대폰이 쉬지 않고 계속 울려 댄다.

다들 진짜 그만두시는 거냐며 걱정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진수 녀석, 그새 이야기를 퍼뜨린 모양이다.

짐 정리를 하다가 5시 반이 돼서 정문에 가니 80명이 다 모여 있다.

"쌤, 많이 안 좋으신 거예요?"

"저희가 이제 말도 잘 듣고 더 열심히 할게요."

"쌤, 그만두지 마세요."

"저희는 쌤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몇몇 학생들은 아예 울 것 같은 표정인데? 은서도 그렇고 늘 활발한 은수까지….

어이구 이 귀여운 것들.

다들 내가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불렀다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 그만둔다는 말 한 적 없는데?"

"네? 아니, 진수가 쌤 그만두신다고 했는데…?"

"야! 김진수! 너 뭐야?"

"죽을래?"

"아니, 나는…."

진수를 살리네 죽이네 하며 다들 난리여서 말 좀 하게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 녀석들 통제가 안 된다.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다들 구보하고 싶은가 봐?"

순식간에 소란이 멈췄다.

"너희들이 올린 글 누구 한 명 빠지지 않고 전부 읽었다. 전혀 생각 못 했는데 친구를 걱정하고 선생님을 도와주려는 너희들에게 정말 감동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요."

"선생님이 은서랑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맞아요. 나중에 졸업하면 저랑 결혼하셔야 하는데."

"무슨 소리야? 쌤은 졸업하면 나랑 결혼하실 건데."

…나 꽤 인기 많았구나.

나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녀석들에게 말했다.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선생님이 사려고 하는데…."

"와! 대박!"

"메뉴는 뭔가요?"

"치킨?"

"피자?"

"아니면 둘 다?"

치킨에 피자라니… 녀석들, 너무 소박하다.

"배달 음식을 시킬 생각이었으면 선생님이 정문에서 보자고 안 했겠지. 다들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