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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TO 32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2)

나랑 한번 붙어 보는 건 어떤가?

그렇다고 해도 결투한 사람들 전부와 싸울 생각은 전혀 없다.

평일엔 수업도 있고 주말엔 사부와 함께 수련도 해야 하니까.

이런 의미 없는 일에는 시간과 힘을 쓰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할 텐가?"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강한 놈 몇 놈만 추려서 패 주면 나머지 애들은 알아서 꼬리를 말겠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학교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뭐, 그렇게까지 생각은 안 하는데, 개인적으론 자네가 어떻게 알아서 할 건지 좀 궁금하네. 알려 줄 수 있나?"

"거절하면 거절했다고 떠들어 댈 거고 이 사람들 모두와 결투하기엔 시간이 아깝네요. 신청자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나 저보다 높은 랭크 헌터들만 골라서 몇 번 해 주면 알아서 잠잠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 이길 자신은 있나? 신청자 중엔 A 랭크 헌터도 꽤 있던데. 아, 그런 사람들은 랭크가 안 맞으니 거절할 수 있겠군."

"아니요. 차라리 잘됐네요. A 랭크만 골라서 받아야겠습니다."

A 랭크 몇 놈 잡아서 깨 주면 어중이떠중이들은 알아서 걸러지겠지.

"강한 놈만 골라 패서 떨거지들은 알아서 떨어져 나가게 하겠다는 거군."

단번에 이해하는데 표현이 꽤 직설적이다.

"네. 현실적으로 전부를 상대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럼 나랑 한번 붙어 보는 건 어떤가?"

"자…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감이 미쳤나?

아니,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S 랭크 헌터가 A 랭크도 아니고 B 랭크 헌터한테 싸우자니?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르겠다.

"지난번에 자네가 명예 결투를 할 때 티는 안 냈지만 상당히 놀랐네. 솔직히 나는 자네가 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놀라는 거 보고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 네."

"의외였어. 게다가 자네 실력은 다 보여 주지도 않은 것 같던데.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들어 보면 A 랭크 헌터들은 충분히 제압할 자신 있는 것 같고."

아니, 그거야 A 랭크니까 그렇지.

S 랭크부터는 이야기가 좀… 아니, 상당히 다르다.

사실 A 랭크도 한국에 약 천 명 정도밖에 안 돼서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다.

지난번에 결투했던 정 선생도 A 랭크 심사를 신청한 상태였지 진짜 A 랭크 헌터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내 경지는 그때와 달리 절정이 되기도 했고 헌터와 무인의 특성을 고려하면 충분히 다 때려잡을 수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S 랭크.

국내에 딱 10명,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S 랭크 헌터 중에 마법사들은 아예 전략 병기 취급을 받을 정도이고 마법이 아닌 다른 능력을 사용하는 헌터들도 일인 군단이라 불리는 초인들이다.

특히 상대가 S 랭크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이 근육몬이라면 더욱 싸우고 싶지 않다.

원작 소설에서 2학년 1학기가 시작될 무렵 방학 동안 산삼을 밥처럼 처먹은 주인공이 자신감이 생겨 깝치다가 이 양반에게 걸려서 작살이 난다.

그것도 그냥 작살이 아니라 개작살.

물론 나는 내공심법만 익힌 주인공과 달리 사부에게 직접 무공을 배웠고 사부도 단순히 영약을 밥처럼 처먹은 놈보다는 내가 훨씬 나을 거라 말했다.

잘하면 어떻게 비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S 랭크 헌터면 사부 세상 기준으로 최소 초절정 고수일 테니까.

절정이 되고 사부에게 산삼 몇 뿌리를 더 사 먹으면 초절정이 될 수 있냐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당시 사부의 대답은 '불가능하다'였다.

초절정부터는 깨달음이 필요하고 내공과 정신, 육체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데 나는 내공은 충분하지만 다른 부분이 턱없이 부족하단다.

"강 선생?"

"아,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지간한 A 랭크와 몇 명과 싸우는 것보단 나와 한 번 대련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나? 대련 후에 강 선생이 정말 괜찮은 실력자라고 공언하겠네. 그럼 이런 결투 신청 같은 것도 더는 안 올 테니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지 않나?"

확실히 국내에 10명 밖에 없어 10강이라 불리는 헌터 중 하나인 김만동이 내 실력을 인정해 준다면 이딴 결투 신청은 안 올 거다.

김만동에게 같은 학교 선생이라고 봐준 거 아니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따지고 보면 나쁘지 않은 조건 같지만 그건 내가 김만동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 이야기지.

김만동은 올곧은 인물이다.

지난번 역사 선생 김한주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는 그의 도움을 받아 루머를 해소했지만, 만약 내 실력이 자기 성에 차지 않으면 결코 좋게 말해 주지 않겠지.

한마디로 내가 곤란하지 않게 올려 쳐줄 사람이 절대 아니란 말이다.

그냥저냥 봐 줄 만은 한 것 같다고 말해 버리면 오히려 결투 신청은 더 증가하겠지.

나로서는 이득이 없다.

"왜, 자신 없나?"

…나도 참, 당연히 안 된다고 해야 할 텐데 도발하는 김만동을 보고 있으니 배알이 꼴린다.

무인의 호승심이라도 생긴 건가?

"네. 없습니다."

호승심이고 나발이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안 될 걸 알면서도 도전하고 그런 건 주인공이나 하는 거지.

엑스트라인 데다 나같이 연약한 절정 고수는 자기 분수를 잘 알아야 한다.

"아쉽군. 만약 자네가 내게 한 번이라도 유효한 공격을 가한다면 자네 실력을 공언해 주는 건 물론이고 이번 방학 때 받아야 하는 연수는 면제해 주려 했는데."

연수 면제라고?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제 막 7월 초니 곧 있으면 8월 헌터 학교의 방학이 시작된다.

기간은 딱 한 달.

물론 이 기간에도 월급은 나오고 대부분의 교사들은 쉬지만, 신규 실기 교사들은 무조건 연수에 참석해야 한다.

헌터관리국 주관으로 3주간 진행되는데,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진짜 이게 말만 연수지 그냥 예비군 훈련이랑 똑같다.

3주간 합숙을 하면서 이론 1주, 포탈 가서 실습 1주, 선배 교사들의 강의 1주.

전부 알고 있는 것들을 재교육하는 거라 하등 쓸모가 없다.

뭐, 교사들끼리 친목 다지기 역할을 해서 평가는 나쁘진 않지만 비 헌터 학교 출신인 내게도 그럴까?

이미 비 헌터 학교 출신인 게 알려져 우리 학교 실기 선생들 사이에서는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거나 시비만 걸리는데, 거긴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괜한 시비나 안 걸리면 다행이지.

기수 문화도 있다고 하니 마치 해병대 예비군만 모이는 훈련장에 나 혼자만 공익으로 가는 느낌이다.

어쩔 수 없다고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그걸 빼 준다니 혹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연수는 헌터관리국 주관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 뺄 수 있는 겁니까?"

"학기별로 2명만 뽑는 우수 교사 제도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우수 교사가 되면 연수 면제 혜택이 있네. 선정은 나랑 교장 선생님이 1명씩 하고 있지."

"그런 혜택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인데….

"대부분은 혜택이 있어도 연수가 그리 어렵지도 않고 다른 선생님들과 친해지려고 가니까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자네는 사정이 좀 다르지 않나?"

그래, 나는 좀 다르긴 하지.

이 양반, 나와의 대련에 목말랐는지 정말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준비했다.

"저기… 교감 선생님, 그럼 저도 조건을 하나 걸어도 되겠습니까?"

"조건? 한쪽 팔로만 상대해 달라고 해도 상관없긴 한데, 그러면 남들이 보기엔…."

한쪽 팔? 이 사람 선 넘네.

"그런 거 아닙니다."

이 양반이 내가 아무리 하수라고 해도 무시하는 게 정도가 있지.

꾹꾹 눌러 두었던 호승심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우수 교사 발표는 방학식에 한다고 들었습니다."

"맞네."

"그럼 대련 날짜는 방학식 전날로 하시죠."

내 말에 고작 그거냐는 표정을 짓는데… 이 양반이 또 선 넘네?

"그런 조건이라면야 어려운 것도 아니네만, 진짜 하는 거지? 막상 당일에 가서 자네가 안 한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연수에 내가 교관으로 갈 수도 있다는 걸 알아 뒀으면 좋겠군."

"남아일언…."

"중천금이지. 역시 자네는 내 스타일이야."

내 말을 잘라 먹고 자기 멋대로 이어 말하며 웃는다.

그리고 내 스타일?

난 여자가 좋지, 근육 몬스터 영감님은 한 트럭을 줘도 사양입니다.

"슬슬 수업 시작할 시간이군. 얼른 가 보게."

내가 제안을 수락하자 기분이 좋은지 계속 웃으며 말한다,

그래. 영감님, 지금 많이 웃어 두세요.

한 달 후 대련 때 그 웃는 얼굴을 제가 박살 내 드릴 테니까요.

* * *

퇴근을 하고 밥을 먹자마자 기숙사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 체력단련실에 왔다.

오랜만에 온 건데 여전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서라와 만나기로 한 건 9시지만 그동안 학교에 있을 때는 거의 내공심법만 수련해서 오랜만에 땀을 좀 뺄 생각이다.

내공은 만능에 가깝지만 기본적인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효과가 반감되니까.

사부가 내공은 충분하다고 하기도 했고.

가볍게 런닝을 잠깐 뛰다가 웨이트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열심이시네요."

벌써 9시가 됐는지 뒤를 돌아보니 최서라가 서 있다.

"왔어?"

"말랐다고 생각은 안 했지만 보기보다 근육이 있네요. 만져 봐도 돼요?"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또 끼를 부린다.

"안 돼."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요. 치사하게…."

"땀 냄새 나잖아."

"저 이래 봬도 체술 선생인데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말과 동시에 최서라가 손을 뻗었지만 가볍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

"장난은 그만하고. 왜 보자고 한 거야?"

혹시 안타스에서 나를 다시 포섭하라거나 입막음을 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거라면 상당히 곤란하다.

"그동안 선배가 너무 연락이 없으니까 그렇죠."

"너한테 찝쩍대다 차여서 안타스까지 나갔는데 연락하면 이상하잖아."

"그렇긴 한데, 안타스에서 제 휴대전화 기록까지 검사하진 않거든요."

"그래?"

"선배 탈퇴는 정상적으로 처리됐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오늘 보자고 한 건 지난번 그 마약 때문이에요."

"제네시?"

"네. 저희 측에서도 차이나 쪽에서 마약을 판매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 같아요."

"어떻게? 네가 말한 거야?"

"아니요. 이번에 안타스 차이나랑 재팬이 꽤 크게 한판 붙었다고 했는데, 중국 놈들이 우리나라 말고도 일본에서도 마약 판매를 하다 걸린 것 같아요."

흐음, 원작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이야기다.

혹시 지난번에 우리가 했던 일 때문에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넘어간 건가?

장소가 털린 것도 아니고 고작 한 달 치 마약만 빼돌렸을 뿐이니 한국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텐데.

메이린의 이름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대화를 나눴던 상대는 백치가 됐을 테니 차이나 측에서는 모를 거고.

"중재에 나선 건 아메리카랑 유럽 쪽이고 저희는 관망하기로 결정해서 정확히는 모르는 것 같은데, 혹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알려 드리려고요."

서라 이야기와 조건을 종합해 보면 원래 원작에서도 발생했던 분쟁 같다.

"우리 때문은 아닌 것 같으니 특별히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일단 알려 줘서 고마워."

"고맙긴요. 어차피 나중에 선배가 증언해 줄 테니 저도 내부 정보를 최대한 알려 드려야죠. 참, 어제 학교에 피자 돌렸다면서요?"

피자를 돌린 건 고등부뿐인데 중등부에도 소문이 퍼진 모양이다.

"아, 그거 그냥 우리 애들 간식 한 번 사 준 건데 학년부장이 다른 학생들이 위화감 느낀다고 생트집을 잡잖아. 그럼 다 사 주면 문제없으니 플렉스 해 버렸지."

"학년부장도 헌터죠?"

"응."

"실기 선생들은 여전한가 보네요. 그런데 고등부 600명 아니에요?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는 많이 안 나왔어. 얼마 전에 투자했던 주식이 꽤 올라서. 넌 요즘 어때?"

"저요? 딱히… 아, 어제 출근해서 조회하는데 우리 반 애 하나가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 돼서 왔어요. 그런데 누구한테 맞았는지 말을 안 해요. 분명 맞은 건데 본인은 계속 계단에서 굴렀다 하고, 다른 애들도 말을 안 해서 진짜 곤란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누군지 알아냈어?"

"누구긴 누구겠어요. 중등부 최악의 망나니, 이지성 그놈이었죠."

주인공이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3)

기준은 내가 정한다

갑자기 주인공의 이름을 듣게 돼서 잠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런 애가 있냐며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뭘 어떡하긴 어떡해요. 그놈 아빠가 화신전자 사장이고 할아버지가 화신그룹 회장인데. 뒤에서 다 손을 썼는지 피해 학생도 고소 안 하고 그냥 넘어가서 저만 바보 됐다니까요."

"학교에서 처벌 같은 것도 안 하고?"

"우리 학교 후원하는 회사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곳이 화신그룹이잖아요. 다들 넘어가자고 하는데 저 혼자 뭘 어쩌겠어요. 조금 알아보니까 그 자식 자질 테스트 결과도 별로 안 좋아서 7학교 입학도 간당간당한 수준이었는데 집안 백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서 수업 태도는 얼마나 불량한지. 진짜 성격 같아선 콱 어떻게 해 버리고 싶다니까요."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2년 후 빙의 전까지 소설 제목처럼 주인공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망나니 열등생이니까.

원작에서도 최서라가 주인공을 상당히 싫어하던데 이래서였구나.

"너무 열 내지 마."

"선배는 화 안 나요?"

"그렇다고 당장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어리니까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어차피 2년이 지나고 빙의 후엔 주인공이 바뀐다.

알맹이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놈이지만 그동안 자신이 쌓아 올린 악명을 바로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결국 성공한다.

사실 몇 년간 망나니로 살다가 뒤늦게 착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주변 평이 쉽게 바뀔 리는 없겠지만 이곳은 소설 세계니까.

망나니인 인물에 빙의해서 조금만 착하게 행동해도 주변에서 '오오' 이러면서 좋게 봐주고 치켜세워 주는 건 빙의물에서 흔히 쓰이는 클리셰다.

"흥, 그런 쓰레기들이 나이 먹는다고 바뀌겠어요? 절대 안 바뀔걸요."

"미래는 모르는 거니까 잘 좀 대해 줘 봐. 혹시 알아? 지금 당장은 답이 없어 보여도 더 관심을 가지고 잘 보살펴 주면 달라질 수도 있지."

빙의한 주인공도 소설을 읽었기에 최서라가 안타스의 일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빙의하고 주변을 대하는 태도를 싹 바꾸지만 최서라에게는 예전처럼 버릇없이 군다.

어차피 2학년 때 테러를 일으키는 걸 주인공이 막고 쫓아내니까.

주인공도 빙의한 본체의 기억을 전승하니까 지금 잘 챙겨 주면 나중에 분명 도움이 될 거다.

"걔는 완전히 악질이라니까요?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속 편하게 말하는데, 2년 후 그 자식이 고등부 가서 선배네 반이 되기라도 하면 제 심정을 아시겠죠."

여우처럼 눈을 흘기며 악담을 퍼붓는데 안타깝지만 소설 내용대로라면 나는 주인공의 담임을 단 한 번도 맡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어린 학생이라고 말하며 조금 더 거들어 줄까 했지만, 괜히 반감만 더 살 것 같으니 화제를 바꿔야겠다.

"방학 땐 뭐 해? 특별한 계획 없으면…."

"잠깐만요,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안타스가 걱정된다고 문자 한 통 안 하던 사람이?"

"데이트 신청 아니니까 김칫국 마시지 말고. 특별히 계획 없으면 부업이나 같이 할까 했지."

보통 일반 공무원은 겸직이나 다른 소득 활동이 허용되지 않지만 헌터 학교 선생들은 예외다.

매년 1,400명이라는 헌터가 새롭게 배출되고 있지만 포탈이 생겨나는 속도 또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포탈이 줄어들수록 시민이 안전해지니 정부에서도 오히려 방학 때 사냥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세금도 무려 일반 헌터보다 10% 공제를 더 해 준다.

보통은 원래 있던 길드에 들어가거나 다른 길드들과 단기 계약을 하지만 나는 임시 공격대를 꾸릴 생각이다.

"난 또 뭐라고. 그런데 저랑 같이 하면 기록 다 남잖아요. 안타스에서 알면 이상하게 생각할걸요."

확실히 그 부분은 나도 생각은 했는데 최서라말곤 딱히 같이 할 동료가 없다.

혼자 하는 게 제일 편하겠지만 그렇게 하기엔 문제가 좀 있다.

포탈 등급의 종류는 드물게 나타나는 S 랭크를 포함해 A, B, C, D, E, F 이렇게 7가지 등급으로 나뉘고, 입장 인원 제한이 있다.

임시 공격대가 갈 수 있는 포탈은 길드에 배분되고 남은 포탈들로 주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소규모 포탈이다.

단 1인 포탈은 워낙 사망자가 많아 특별법이 만들어져 무조건 길드에 배당되고 숙련된 헌터들이 도맡아 처리한다.

따라서 실제로 갈 수 있는 건 2인부터 4인까진데 포탈 규모에 따른 입장 제한 말고도 법적인 제한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E 등급 2인 포탈을 가려면 E 랭크 이상의 헌터가 최소 1명, 3인 포탈은 최소 2명 이렇게 포함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헌터들이 등급에 맞지 않는 포탈에 무리하게 들어가 목숨을 잃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인데, 다행히 이 조건만 충족시키면 인원은 굳이 다 채울 필요가 없다.

나 혼자 솔로로 활동하면 C 등급 2인 포탈 혹은 D 등급 3인, E 등급 4인 이렇게 네 곳밖에 못 가지만 최서라의 헌터 랭크가 C고 내가 B니 함께하면 B 등급 2인 포탈까지 갈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포탈 등급에 따라 나오는 몬스터 수준에 차이가 있고 수익 차이도 크다.

포탈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면 양으로 밀어붙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차피 방학 땐 봉사 활동 하느라 시간 없어요."

"응? 봉사 활동?"

"방학 때마다 가는 보육원이 있거든요."

지난번에 사정을 듣기도 했고 같이 돌아다니면서 인식이 좀 바뀌긴 했지만, 국제 범죄단체 조직원이 방학 때마다 보육원 봉사 활동이라니.

의외다.

"선배도 방학 내내 포탈만 다닐 거 아니면 올래요? 애들 다 귀엽고 너무 착해요."

"글쎄, 포탈 말고 따로 계획도 있고 연수도 있어서 난 좀 힘들 것 같네."

"아, 연수… 신입이니까 가시겠네요. 그거 괜찮으시겠어요? 가면 헌터들밖에 없는데."

"잘하면 안 갈 수도 있는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서."

연수는 교감과 내기에서 이기면 면제니까.

하지만 면제여도 봉사 활동은 별로 가고 싶지 않다.

"어떻게요? 신입 연수는 무조건 참석일 텐데."

"우수 교사가 되면 면제라던데? 교감 선생이 제안을 해서 받았지."

"무슨 제안이요?"

대련과 관련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가능하겠어요? 고등부 교감이면 김만동이잖아요. 유효한 공격 한 대만 들어가면 이기는 거라고 해도 힘들 것 같은데."

"우리 후배님은 나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살짝 기분이 상해 하마터면 나 절정 고수라고 말을 할 뻔했다.

"지난번에 창술 선생인가? 명예 결투 한 건 저도 들었어요. 투타 글도 봤고. 하지만 이번 상대는 김만동 이잖아요."

"그래도 한 대 정도라면 할 만한 것 같은데? 나 중국 가서 열심히 했어."

"망신만 당할 것 같은데…."

"어허,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벌써 초치기 있냐?"

"확실히 선배는 좀 변한 것 같아요. 예전이라면 그런 제안 같은 거 안 받았을 텐데. 학교 유튜브 촬영도 그렇고."

"좋은 의미지?"

"네. 응원할게요. 이겨서 연수 면제받으면 같이 봉사 활동 해요."

"그건 좀…."

애초에 서라가 가는 보육원에서도 직접 와서 도와주는 것보다 서라가 돈 벌어다 주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은데.

말을 할까 하다 괜히 한 소리 들을 것 같아 그냥 참았다.

* * *

"좀 진지하게 들어 주라니까요? 아니, 접시는 왜 핥아요? 나중에 또 사 드릴게요."

사부에게 교감에게 대련 제안을 받았다고 설명을 하는데 이놈의 사부는 팔보채에 정신이 완전히 팔렸다.

"너는 밥을 귀로 먹냐? 먹으면서 다 들었다."

"그럼 좀 들은 척이라도 하던가요. 말도 없이 먹기만 하니까 안 들은 줄 알았죠."

"너희 나라 속담에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이 있던데, 모르냐?"

한국말을 배우더니 아주 입이 트였다.

"지난번에 사부가 조금만 노력하면 검강도 쓸 수 있다고 했죠? 대련 전까지 가능합니까?"

검강을 만들 수 있다면 공격 한 번 정도는 충분히 성공할 것 같다.

"대련이 한 달 뒤라 그랬지?"

"정확히는 28일 남았습니다."

"글쎄, 그거야 네가 하는 거에 따라 달렸지. 그런데 고작 한 방이 뭐냐? 세계 유일한 무인이라는 녀석이."

"사부도 있으니 엄밀히 따지면 유일은 아니… 악!"

또 꿀밤이다.

"그만 좀 때려요. 사부는 S 랭크 헌터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놈이 나보다 강하냐?"

"그건 아닐 겁니다. 그래도 무공 경지로 비유하면 최소 초절정 이상은 될 겁니다."

아무리 김만동이 한국에 딱 10명 밖에 없는 S 랭크 헌터라고 해도 사부와 붙는다면 아예 상대가 안 될 것 같다.

다른 기연도 있지만, 주인공의 강함의 근본은 무공이다.

심지어 단순히 벽에 있는 내공심법만 익혀도 후반에는 S 랭크 보다 훨씬 강해지는데, 사부는 그 무공을 남긴 사람이니까.

"고작 초절정 나부랭이가 겨우 한 방만 맞으면 자기가 졌다고 인정하겠다고? 아주 자만이 넘치는 놈이구나."

"저는 절정이라면서요? 그리고 초절정 이상이라니까요?"

김만동은 S 랭크 헌터가 된 지 오래됐고 세간에서도 S 랭크 중에서도 상위권으로 평가받고 있으니까.

"초절정이 대수냐? 내가 강호를 활보할 때 초절정 정도 되는 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암요, 암요. 그러시겠죠."

무슨 말만 하면 흔하고 널리고 발에 채는데 이러다가 나중엔 초절정 위의 경지도 흔하다고 할 것 같다.

"이 자식이! 중소 문파의 문주 중에 쓸 만한 놈이나 대문파 장로들은 대부분 초절정이었다."

중소 문파 문주에 대문파 장로 정도면 이미 흔한 수준이 아니지 않나?

"언제는 자기 분수를 알라면서요?".

"이놈이 끝까지 말대답을 하네. 어휴, 제자야, 넌 글렀다."

"글렀는지 안 글렀는진 한 달 후에 대련하면 알겠죠. 제가 설마 한 번을 못 때리고 지겠습니까? 얼른 수련이나 시작합시다."

"수련은 해서 뭐 하게? 싸우기 전부터 이미 졌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을 하고 혀를 끌끌 차는데 어이가 없다.

내가?

전혀 아니다.

이기긴 힘들어도 한 방 정도는 충분히… 아, 혹시 그런 건가?

처음에는 평소처럼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사부, 제자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호, 진짜 깨달았느냐?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교감이 한 대만 쳐도 인정한다고 했지만 저는 최소한 다섯 대는 때려 줄 생각입니다."

사부의 말은 내가 자존심이 없거나 단순한 무인으로서 호승심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 번만 공격을 성공해도 인정해 주겠다는 제안은 교감이 먼저 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어떻게든 한 번만 공격하면 이긴다고 생각했었고.

하지만 그건 실제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인정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겨우 다섯 대? 50점."

말은 툴툴거려도 굳어 가던 표정이 풀리고 평소의 사부로 돌아왔다.

역시 사부는 남이 정한 기준에 나를 맞춰 한계를 만들지 말고 기준은 내가 직접 정해야 한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쩨쩨하게 50점이 뭡니까. 그럼 10대 때린다고 했으면 100점입니까?"

"그래도 50점이다. 때려 패서 눕힌다고 해야 100점을 주지. 이야기는 그만하고 얼른 가서 수련이나 시작하자."

이렇게 먼저 수련을 다 하자고 하고, 역시 내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앞서가는 사부를 따라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부, 같이 가요."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4)

폭풍전야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좋은 아침."

살짝 피곤하다.

주말에 너무 무리했나?

노트북과 라면 통제 선언 이후 직접 가르쳐 주긴 해도 시간이 흐르며 다시 조금 설렁설렁 모드로 돌아왔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사부가 정말 열성적이었다.

잠도 최소로 줄이고 그 좋아하는 먹는 것도 어차피 내가 없을 때 먹으면 된다며 밀어 두고 주말 이틀을 정말 수련으로 꽉 채웠다.

사부가 협조적으로 나와서 좋기는 한데 기대를 많이 하는 눈치라 걱정이다.

다섯 대는 때려 주겠다고 했지만, 현실은 현실이니까.

내가 기준을 정한다고 해도 근거 없는 자신감은 자만일 뿐이고.

설령 사부에게 말했던 다섯 번은 실패하더라도 면이 서려면 적어도 두 대 이상은 때려 줘야 할 텐데.

남은 기간 정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식사를 마쳤다.

밥을 먹고 교무실에 도착해 출근 카드를 찍는데 어째 또 시선이 내게 쏠리는 느낌이다.

이번에는 또 뭔가 싶어 박 선생에게 물어보려는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하필 자리에 없다.

하지만 어제 하다가 못 끝낸 애들 수행평가 점수를 마저 입력하기 위해 교육 정보 시스템에 들어간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1학기 우수 교사 선정 관련 공지 사항.

교장이 선정하는 일반과목 우수 교사의 경우 전년도와 기준 동일.

교감이 선정하는 실기 과목 우수 교사의 경우 교감과 대련 이후 결과를 반영해 결정할 예정.

*랭크에 따라 차등적으로 어드밴티지 부여.

대련 신청 방법: 교감실로 직접 방문 신청.

대련 신청 및 시행 기간: 금일부터 방학식 하루 전까지.

현재 대련 신청자: 1학년 검술 강사 강신혁(07.30 예정.)]

시스템에 로그인하자마자 바로 이런 배너가 나왔으니까.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갑자기 대련을 취소하기라도 할 거라 생각한 건가?

처음에 제안을 받아들일 때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까지 했는데, 어이가 없다.

"지난번에 정 선생 이겼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네.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나대는 거래요?"

"딱 보면 사이즈 나오잖아요. 헌터 학교도 안 나온 반푼이가 주제도 모르고 우수 교사 타이틀 탐내는 거죠."

"어드밴티지 있다는데 혹시 모르는 거 아니에요?"

"에이, 교감 선생님이 어떤 분인데…. 눈 감고 한 손으로 싸워도 이길걸요?"

배너를 보고 예상은 했지만 아주 신명 나게 까고 있다.

자기들 딴에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절정 고수가 된 이후부터 신체 감각이 좋아져서 듣기 싫어도 들린다.

짜증을 누르며 곧장 교감실로 향했다.

거의 두드리는 수준에 가까운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교감이 웃으며 맞이해 주었는데, 찾아올 걸 예상한 것 같다.

"오, 강 선생, 좋은 아침.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교육 정보 시스템에 배너 뭡니까?"

"역시 그거 때문에 온 건가? 어쩔 수 없었네. 우수 교사가 될 기회를 강 선생에게만 줄 수는 없지 않나?"

"네?"

"다른 실기 선생들이 특혜라고 불만을 제기할 가능성이 다분하잖나.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히 줘야지. 어차피 자네 말고 다른 선생들은 신청 안 할 걸세."

얼핏 듣기에는 아주 그럴싸한 대답 같지만, 솔직히 핑계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목적이었다면 굳이 현재 대련 신청자까지 공지에 올릴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필시 나를 못 믿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어이가 없다.

뭐 문제 있냐는 표정을 하는 교감이 얄미웠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보니 아무 소득 없이 교감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 약속할 때 조용히 남들 모르게 입회인 두셋 정도만 불러 놓고 하자는 조건을 추가하는 건데….

됐다.

후회해 봤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뀌는 건 없다.

교감이 이런 식으로 치졸하게 나오니 오기가 더 생긴다.

이러면 다섯 대로는 부족하지.

최소 열 대… 아니, 엉덩이 정도는 한번 꼭 걷어차 주고야 말겠다.

* * *

"아직 이각도 안 지났거늘, 벌써 지친 거냐?"

사부가 도발하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라 대답할 여력이 없다.

하단을 향해 들어오는 나뭇가지를 칼로 막았지만, 이어서 복부에 들어오는 주먹은 그러지 못했다.

퍽.

"쯧쯧, 당장 모레 대련이라면서. 이래서 한 대라도 때릴 수 있겠냐?"

아프다.

사부가 마지막에 힘을 빼서 그런지 통증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공격 한번 못 했다는 사실은 너무 뼈아프다.

"갑자기 주먹을 쓰는 게 어디 있습니까?"

"내가 그럼 대련 중에 친절하게 주먹도 쓸 거다, 하고 말해 줘야 하냐? 그리고 너랑 대련한다는 놈 원래 주먹 쓴다며?"

"아니, 그건 그렇지만… 하아. 알았으니까 사부, 진짜 초절정 수준으로 하고 있는 거 맞습… 악!"

또다시 꿀밤이다.

"네 녀석이 최소 초절정이라며? 내가 진심으로 했으면 네 녀석이 막을 수나 있었겠냐?"

교감과의 대련을 앞두고 매주 주말마다 수련은 물론이고 강도 높은 대련도 병행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부의 기준이 조금 더 높은 것 같지만, 꿀밤조차 피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이번엔 꽤 오래 버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진짜 대련 때도 버티기만 하려고?"

"알았으니까 조금만 쉬었다가 한 번 더 하죠."

"쯧쯧, 더 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포기하는 건 어떠냐?"

진심은 아니고 나를 자극해서 실력을 끌어올리려고 그러는 것 같긴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사부가 너무 얄밉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하지만 채찍을 계속 때린다고 무한정 뛸 수만은 없다.

당근도 좀 주고 달래기도 해야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고.

다음 주에 올 땐 라면 양을 줄여 버릴까 보다.

"지금까지 수련 성과만 놓고 보면 네 녀석이 이길 가능성은 1할 미만이겠구나."

겉으로라도 좀 나아졌다고 해 주지.

불난 집에 부채… 아니, 기름을 끼얹고 있다.

"지난주에는 검강도 성공했는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어째 사부는 제가 지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성공하면 뭐 하냐? 오래 걸려서 실전에는 써먹지도 못하는 계륵이면서."

계륵 같아 보여도 다 생각이 있는데… 너무하다.

애초에 검강에만 올인한 것도 아니고 정말 노력해서 달성한 건데….

"아주 악담을 퍼부으시네요."

"악담이라니. 네 실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니까 안 된다고 하지. 내가 일부러 낮추기라도 하겠느냐? 네 나이 땐 패배도 경험이니 망신 한번 찐하게 당하고 오거라."

히죽거리며 말하는 사부를 보니 짜증이 나서 뭔가 반박하고 싶은데 할 말이…. 아, 맞다.

"깜빡하고 말씀 안 드린 게 하나 있네요. 제가 대련에서 지면 3주간은 못 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낄낄거리며 웃던 사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신입 교사 연수는 3주 동안 대전에 있는 수련원에서 진행된다.

지난번에 최서라와 신입 교사 연수 이야기를 하며 들었는데, 수련원에서는 교육 시간만 끝나면 이후부터는 자유 시간이라 학교보다 외출은 자유롭다.

하지만 주로 오전에 교육이 몰려 있어 외박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뭐? 아니, 그런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해, 이 녀석아!"

"어차피 제가 이기면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깜빡 잊고 있었네요."

"다… 다음 주에는 오는 거지? 내일 내려갈 때 다음 주에 사 올 목록들 적어 주마."

"아니요. 대련에서 지면 당장 다음 주부터 못 옵니다."

거짓말이 아니다.

방학식은 화요일이고 신입 교사 연수는 금요일부터 바로 시작하니까.

"아니, 이 녀석아! 그런데 이번에 라면이고 과자들을 왜 평소처럼…."

"깜, 빡, 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쌤통이다, 이 양반아.

"…일어나거라."

"더 해 봤자 의미 없다면서요? 아직 내공 회복도 안 됐고. 계속 움직였더니 출출한데 라면이나 좀 끓여 먹어야겠네요."

사부가 워낙 잘 먹어서 평소에도 식료품은 넉넉하게 사 오는 편이다.

물론 그래도 3주는 못 버티겠지만 일부러 더 축낼 생각이다.

제자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지 같은 환경에서 황금 같은 방학을 3주나 날리게 생겼는데, 사부가 편하면 못쓰지.

라면 2개는 먹어야겠다.

후식으로 과자도 좀 먹어 치우고.

어디 3주간 나무뿌리나 씹어 보시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라면이 있는 동굴로 들어가려는데 사부가 나를 붙잡는다.

"왜 이러십니까? 설마 아까워서 그러시는 건 아니시지요?"

"끄응, 초식 하나를 알려 주마."

앓는 소리를 내며 말하는데 어이가 없다.

"당장 모레가 대련인데 이제 와서요?"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금방 배울 수 있을 거다."

"초식 하나를 배운다고 승산이 있겠습니까? 사부 말대로 패배도 경험이니 받아들여야죠."

"이 자식이, 진짜!"

"진짜고 뭐고 라면이나 먹을래요. 전 2개 먹을 건데 사부도 먹을 거죠? 몇 개 드실 거예요?"

"아니, 아까 저녁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녀석아, 네 녀석이 완벽하게 익히기만 한다면 최소 3할이다."

조금 전에는 1할 미만이라더니 단숨에 3할?

하, 이 양반 안 되겠네.

그런 정신 상태로는 시작도 하기도 전에 졌다며 잔뜩 분위기 잡아서 바람을 넣어 놓곤 진짜 내가 지기를 바란 건가?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알려 주셨어야죠."

"내 무공이 아니니까."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소싯적 강호를 주유하며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친우라고 부를 만한 건 딱 두 녀석밖에 없다. 그중 한 녀석이 쓰는 초식이다."

"친구 무공이요? 무인들은 친구면 무공도 공유해요?"

보통 무협 소설에서는 자기 무공은 제자가 아닌 이상 절대 타인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는 설정이던데 이상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여러 차례 겨루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거지. 본디 무림에서 남의 무공을 훔치는 것은 큰 죄고 당연히 가르치는 것도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무공을 쓰는 녀석이 네 녀석밖에 없다니 상관없겠지."

"오, 그럼 그 친구도 사부만큼 강했습니까?"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녀석이었지. 당시 절정이던 녀석이 한 경지 앞서던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초식이다."

"전에 강호 이야기해 주셨을 때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더니 졌나 보네요?"

하여간 우리 사부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꿀밤을 때리려는 것 같아 잽싸게 몸을 굴려 피했다.

"말도 없이 때리려는 걸 보니 제 말이 맞나… 악!"

이번에는 못 피했다.

"지기는 누가 져! 내가 언제 졌다고 했냐? 당혹스러웠다고 했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는데 열을 내는 걸 보니 진짜 패배한 것 같다.

"암요, 암요. 사부님이 킹왕짱이십니다. 그런데 고작 당혹스럽게 할 정도밖에 안 되는 초식으로 승률이 2할이나 올라갑니까?"

원래 초식을 익히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사부가 쉽다고 하고 이틀 만에 완벽하게 익힐 정도면 대단한 건 아닐 테니까.

"지금보다 부족하긴 해도 그 시절에도 내 경험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 나조차 완전히 처음 보는 파격적인 초식이었고. 바깥세상에서 무공을 익힌 건 네 녀석 하나뿐이니 3할은 족히 되지 않겠느냐?"

평소보다 말도 많고 처음에는 라면 못 먹게 하려고 약 파는 줄 알았는데 듣다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배워 보죠."

* * *

점심을 먹고 다시 검술 훈련장에 도착했다.

우산을 썼는데도 바람이 많이 불어 홀딱 젖었다.

어제부터 태풍 영향권이라 그런지 밤새 비가 내렸는데 오늘도 아침부터 종일 쏟아지고 있다.

시간이 참 빠르다.

내일은 드디어 헌터 학교 방학식.

그러니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교감과 대련을 하는 날이다.

대련이 시작되는 건 저녁 7시.

교감의 대련 제안을 수락했던 한 달 전부터 사부와 함께 수련했던 어제까지.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정말 최선을 다했다.

바람 소리와 스산한 빗소리가 검술 훈련장 사무실 창밖을 때리고 있다.

폭풍전야.

그동안 학교에서도, SNS 커뮤니티인 '투게더타임'에서도, 나를 비웃던 선생들에게, 지금도 비웃고 있을 선생들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비웃던 그들이 허접한지 내가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 줄 테니까.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5)

사부 친구

"선생님, 수업 안 해요? 밖에 애들 다 왔어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너무 분위기에 심취했던 모양이다.

그래. 결투도 결투지만 일단 수업부터 해야지.

밖에 나와 보니 아이들 표정이 해맑다.

물론 학생 전부가 비 오고 바람도 세게 부는 이런 날씨를 좋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내일이 방학식이라 오랜만에 집에 갈 생각으로 설레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비가 많이 오면 구보를 안 해서가 아닐까?

태풍 때문에 어제도 비가 와서 구보를 안 했고.

오늘도 줄기차게 비가 오고 있으니 당연히 구보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주에 주문했던 물건이 오늘 도착했다.

"선생님, 들어가서 VR 기기 꺼낼게요."

검술 훈련장 사무실 옆에는 우천 시에도 훈련을 할 수 있게 작은 실내 공간이 있다.

어제도 비가 많이 와서 거기서 VR 실습만 했지만, 오늘은 다르다.

"아니, 스트레칭부터 하자."

"네? 그게 무슨…. 선생님, 설마 구보는 아니겠죠?"

"맞아요. 밖에 비 많이 와요. 그리고 오늘이 1학기 마지막 날인데…."

평소에는 별말 않고 잘 따르는 은서까지 거들고 나서는 걸 보니 진짜 구보가 싫은 모양이다.

"그래서 준비한 게 있으니까 다른 애들은 스트레칭 하고 두 사람은 사무실로 들어와."

불안한 표정인 은서와 은수에게 아침에 옮겨 놨던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 하나를 건넸다.

"가지고 가서 애들 한 장씩 나눠 줘."

"이게 뭔데요?"

"뭐긴 뭐야, 판초 우의지."

"우의면 비옷이에요?"

"응."

"샘, 너무해요…."

두 녀석 다 원망 가득한 얼굴로 쳐다본다.

그렇게 나를 악마 보듯 보지 말아 줄래?

내가 진짜 악마라서 애들을 고생시키려고 이걸 산 건 아니다.

이번 학기 1학년 검술부 비품 예산이 약간 남았는데 전부 안 쓰면 다음 학기엔 안 쓴 만큼 감액된다고 해서 고민 끝에 구매했다.

처음엔 애들이랑 간식이라도 사 먹으려 했지만 알아보니 비품 예산은 그렇게 쓰면 안 된다니 어쩔 수 없지.

두 녀석이 울상인 채로 판초 우의를 들고 나가는데 바깥 녀석들도 다들 난리다.

"샘? 이거 냄새 이상해요."

"너무 축축한데요?"

"A 조가 아침에 썼으니까 그렇지. 대충 털면 다 털리니까 축축하면 털어서 입고 얼른 스트레칭 하자."

예산이 그리 많이 남은 건 아니라 40개밖에 구입하지 못했다.

뭐, 어차피 우리 1학년은 A 조, B 조 나눠서 수업하고 조마다 40명이니 상관없지만.

아, 당연히 내 건 필요 없다.

가끔 같이 뛰긴 해도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에는 나는 절대 안 뛸 거니까.

"선생님 다 돌았어요."

"그래, 고생…이 아니라 서은수, 정말 다 돈 거 맞아?"

"네? 아, 그… 그럼요."

"저희 다 돌았어요."

또 은서까지 언니를 거들고 나서는데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

대충 한두 바퀴 정도 덜한 것 같지만 뭐 비 맞으면서 뛰었으니 이 정도는 눈감아 줘야겠다.

너무 빡빡하기만 한 선생님은 인기 없으니까.

"다들 우의는 잘 털어서 박스에 보관하고 들어가서 VR 훈련 준비해. 참, 학기 끝났지만, 오늘 기록부터는 2학기 성적에 반영할 거니까 대충할 생각은 다들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물론 뻥이지만 학기 말이라 그런지 학생들 분위기가 많이 풀어져서 어제 훈련도 평소에 비해 엉망이었다.

내일이 방학식이니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만, 선생이 된 입장으로선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으니까.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수업인 만큼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마치고 매점에서 간단히 과자와 음료수를 사서 먹이며 마무리를 할 생각이다.

오전에 A 조도 그렇게 했는데 B 조만 안 해 주면 또 난리가 날 테니까.

지난번에 A 조 애들에게 피자를 사 줬을 때 그랬다.

당연히 B 조도 사 줄 생각이었지만 놀래켜 주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몇 녀석이 자랑을 했고 나는 오후 수업 때 '우리는 안 사 주려고 A 조 애들 입단속 시킨 거냐'고 따지는 폭도들과 마주해야 했다.

어휴, 지금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 * *

시끄러운 알람에 눈을 뜨니 벌써 6시 반이다.

보통 때라면 퇴근 카드를 찍고 밥을 먹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밥도 걸렀다.

명색이 절정 고수니 체하지는 않겠지만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다.

수업이 끝나고 계속 교감과의 싸움을 시뮬레이션했다.

내가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어느 정도 승산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조금 힘들겠지만 그래도 허무하게 지지는 않을 거다.

이제 슬슬 가야 할 시간이라 미리 챙겨 놨던 검을 들었다.

평소에 사용하는 수련용 검도 아니고 원래 강신혁이 쓰던 검도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가장 익숙한, 사부와 수련할 때 늘 쓰던 사부의 검이다.

지난주 일요일, 학교로 돌아가려는데 사부가 가지고 가서 쓰라며 주기에 들고 왔다.

검집이 없어 오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당시에는 약간 곤란했지만 익숙한 검이 있으니 불안이 한결 가시는 기분이다.

게다가 이 검이 무슨 우리 문파의 기보 이런 건 아니지만, 사부의 둘밖에 없는 친구 중 하나가 선물해 준 비싼 칼이란다.

비록 오래되고 손때도 너무 타서 꼬질꼬질해 보이지만 검날만큼은 사부가 매일 관리해서 시퍼런 예기가 번뜩인다.

검 날을 한 번 바라보다 늦을 것 같아 빠르게 검술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오늘 결투 장소는 검술 훈련장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마법 결투장이다.

마법 결투장은 각종 마법이 걸려 있어 복구가 간편하고 내부에서 벌어진 충격도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

김만동과 나, 둘 다 마법사는 아니지만 서로 마나를 사용하는 헌터니까.

학생들 기준으로 만들어진 거라 일정 수준 이상의 공격을 하면 깨질 위험이 있어 오늘 대련에서는 안전을 위해 마법 학과 교사 몇 명이 따로 배리어도 펼친다고 들었다.

결투 장소인 마법 결투장에 도착했다.

열린 문틈 사이를 보자 이미 객석에는 학생이며 교사며 할 것 없이 사람들로 빼곡히 차 있다.

축제 때도 이곳에서 무투 대회가 열리기에 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는데, 빈자리가 거의 안 보이는 걸 보니 고등부뿐만 아니라 중등부에서도 꽤 많이 보러 온 모양이다.

교감이 올린 공지는 교사들만 볼 수 있는 교육 행정 시스템에 올라왔지만, 학교 사람들 대부분은 오늘 내가 결투를 하는 걸 알고 있을 거다.

실기 교사들이 일부러 학생들에게 흘린 거겠지.

그들은 당연히 내가 처참히 패배할 테니 이왕이면 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특히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하길 바랄 테니까.

물론 나는 B 랭크 헌터, S 랭크인 교감에게 지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소문은 우수 교사 타이틀이 탐난 내가 주제도 모르고 교감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해서 오늘 대련이 성사됐다는 식으로 났으니까.

이것 역시 실기 교사들의 짓이겠지.

물론 그럼에도 난 직접 내게 물어보는 학생들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고 할 뿐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지 않았다.

결과로 증명하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따로 해명을 하지 않아도 내 학생들만큼은 나를 믿어 줬으니까.

어떻게 아냐고?

아까 수업이 끝나고 과자를 먹으면서 이야기할 때도 다들 내 걱정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증거는 지금 눈앞에도 있다.

"강신혁 선생님 화이팅!"

"우리 강 선생님 최고!"

"우윳빛깔! 강신혁!"

"사랑해요! 강신혁!"

나를 발견했는지 2층 객석에서 목청껏 응원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은수와 은서, 진수와 민희처럼 대표를 맡고 있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우리 검술반 80명 학생 모두 온 것 같다.

언제 준비한 건지 '최강 꽃미남 검술 강사 강신혁'이라는 플래카드까지 들고 있다.

약간 쑥스럽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물론 마지막 사랑해요란 응원과 플래카드는 상당히 부담되지만.

결투장에 올라가 우리 학생들을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얼마 안 가 객석이 소란스러워졌다.

"교감 선생님이다!"

"김만동! 김만동!"

"최강 헌터! 김만동!"

아까 나 때보다 훨씬 큰 환호지만, 뭐… 어쩔 수 없다.

지위나 인지도 그리고 랭크까지 내가 전부 밀리니까.

아까 우리 학생들의 환호를 보고 실기 교사들이 다른 학생들에게 교감이 오면 크게 환호를 하라고 시켰을 수도 있다.

교감은 손 한 번 안 들어 주고 무심한 표정으로 결투장에 올라왔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많이 올 줄은 몰랐는데. 준비는 많이 했나?"

모르긴 뭘 몰라, 이 영감탱이야.

"나름 열심히 했습니다."

사실 나름이 아니라 정말 최선을 다했다.

"나름 준비한 거 가지곤 안 될 텐데…. 망신당하기 싫으면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물론이죠. 교감 선생님도 너무 방심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하, 역시 자네는 재밌다니까. 일단 선공은 내가 양보할 테니 시작하면 먼저 들어오게."

나이스.

보통 무협 소설을 보면 고수가 하수에게 3초식, 그러니까 세 번을 양보한다.

그리고 고 랭크 헌터와 저 랭크 헌터의 대련에서도 세 번까지는 아니어도 고 랭크가 선공 정도는 양보한다.

법에 그렇게 하라고 딱 정해진 건 아니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교감이라면 이렇게 나올 거라 생각했다.

"저… 교감 선생님, 시간은 약간 남았지만 다 왔으니 시작해도 될까요?"

심판을 맡은 남자 선생님이 교감에게 묻는데 내 쪽은 아예 쳐다도 안 본다.

"나는 상관없네. 강 선생, 준비됐나?"

"저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룰을 다시 한 번 공지하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어드밴티지 적용으로 여기 강신혁 선생이 교감 선생님께 단 한 번이라도 유효한 공격을 성공시키면 강신혁 선생의 승리입니다. 교감 선생님, 조건에 동의하십니까?"

"물론일세."

"강 선생도 동의하죠?"

"동의합니다. 저… 그런데 심판분께서는 경기가 시작되면 바깥으로 나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금 위험할 수가 있거든요."

"뭐? 아니, 강 선생, 난 A급…."

"강 선생 말대로 하지."

"아, 알겠습니다."

괜히 휘말릴까 봐 그런 건데 다행히 교감이 말하니 바로 꼬리를 숙인다.

나를 노려보는데 단단히 미움을 산 모양이다.

혹시 내가 이겨도 판정패 당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가볍게 경례를 하고 약간 거리를 두고 서자 소란스럽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삐이익―!

남자 선생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대련이 시작됐다.

아까 말했던 대로 먼저 들어오라는 뜻인지 교감이 손짓한다.

나는 곧장 단전에 있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몸에 힘이 넘치며 모든 감각이 확장되는 게 느껴진다.

또한, 내가 들고 있는 검에 점점 푸른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와! 오러소드다."

"강 선생 B 랭크 아니었어?"

객석에서 놀란 학생들의 목소리가 내게도 들린다.

검기, 헌터들 사이에서 오러소드라 불리는 기술은 보통 A 랭크 헌터들이 많이 사용하니 놀란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이르다.

단전의 저릿함을 참고 극한까지 내공을 끌어올리자 검을 감싸고 있던 푸른 기운이 점점 진해진다.

이내 검을 완벽히 뒤덮으며 검기 스스로 검의 형상을 갖춰 냈다.

"저… 저거 오러블레이드 아니야?"

"무슨 오러블레이드야? 그건 S 랭크 헌터들만 쓰는 기술이라고! 겉모습만 비슷한 거겠지."

"위튜브에서 봤던 거랑 똑같은 것 같은데."

아까보다 웅성거림이 더 커진 것 같다.

사부는 실전에서는 쓰지 못할 계륵이라며 폄하했지만 교감의 자만심은 내게 기회를 줬다.

"크흠, 슬슬 공격해도 될 것 같은데."

교감도 티는 안 내려고 하는 것 같지만 꽤 당황한 기색이다.

보통 양보한 선공은 탐색을 위해 가볍게 공격하는 데 쓰지, 나처럼 이런 식으로 전력을 쏟아부어 공격을 준비하진 않는다.

약간 비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더 비겁한 건 남자라는 이름을 걸고 약속을 했음에도 못 믿고 이런 공개적인 대련을 하게 만든 저 영감탱이다.

"갑니다, 교감 선생님."

내가 준비한 건 검강이 끝이 아니다.

사부가 우리 문파의 무공이 결코 달리는 건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며 알려 준 친구의 무공.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었지.

연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강기가 잔뜩 머금어진 검을 회전시켜 그대로 교감을 향해 쏘아 보냈다.

천마검법(天魔劍法) 오의.

유성폭멸마강(流星爆滅魔罡).

계속 회전하는 내 검에서 튀어나온 작은 검강 조각들이 초식 이름 그대로 유성이 폭발하는 것처럼 비산하며 결투장을 가득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초식명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사부의 가장 친한 두 친구 중 한 명이자 이 무공의 주인은 천마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6)

명예로운 패배

"사부 친구가 진짜 천마라고요?"

"그럼 가짜 천마도 있느냐? 그런데 네가 그 녀석은 어떻게 아느냐?"

무협 소설을 몇 번만 읽어 봤다면 누구나 알 거다.

천마는 정파와 사파로 나누어지는 무림을 양분하는 하나의 축.

마교 혹은 천마신교라 불리는 곳의 절대자니까.

한창 내 작품이 연재될 때도 천마는 꽤 핫한 소재였다.

기존 무협 소설뿐만 아니라 판타지 세계에 넘어가 드래곤을 때려잡기도 하고, 현대에 환생해서 조폭 두목이 되거나, 환생해서 빵집을 차리기도 하고, 심지어 애를 키우는 소설도 있었으니까.

"자세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옛날이야기를 찾아보다 봤던 것 같습니다."

"하긴 그놈이 무림에서 꽤 유명하긴 했지. 그래도 내게는 한 번도 못 이겼다."

용까지 때려잡았으니 나름 강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친구가 천마일 줄이야.

"친한 친구가 두 명이시랬죠? 그럼 다른 한 명은 누구예요?"

"장씨 성을 가진 삼봉이라고, 맨날 태극이 어쩌고 구시렁거리는, 술 좋아하는 말코 도사 녀석이 하나 있다. 모당인가 무당인가 문파 하나 만들었는데. 걔도 아냐?"

자… 장삼봉?

* * *

교감은 피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는지 날아오는 검을 피해 몸을 왼쪽으로 움직였지만 소용없는 행동이다.

쾅! 콰앙! 쾅! 콰앙!

대부분의 검강 파편은 교감 쪽을 향해 날아갔지만, 일부는 배리어에 부딪혀 폭발을 일으켰다.

기존 결투장에 설치된 마석으로 만들어진 배리어에 선생 둘이 만든 배리어까지 무려 세 겹이나 결투장을 감싸고 있었지만, 마지막 한 겹을 제외하곤 모조리 박살이 났다.

마지막 배리어도 꽤 위태로워 보이는데…. 파편 대부분이 교감에게 향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만약 내 검강이 완벽했다면 사고가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연습에서는 이 정도까지 내공을 불어넣은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역시 사부 말대로 순간 파괴력 하나만큼은 진짜 최고다.

하지만 대부분의 파편을 맞은 교감은 여전히 서 있다.

물론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옷이 군데군데 구멍이 났고 찢어진 옷 사이로 피까지 스며 나오고 있으니까.

오러소드까지 견뎌 낸다는 교감의 강철 육체도 역시 검강까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군. 검을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공격이 가능할 거라는 건 전혀 예상 못 했어."

사부가 예상했던 그대로다.

교감이 아무리 실전 경험이 많아도 무공이 없는 이 세계에선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방식이니까.

"기발하긴 했지만 이제 자네는 검이 없군. 약속했던 선공도 끝났고 말이야."

그래, 이젠 검도 없고 저 양반도 공격을 시작하겠지.

하지만 이미 승부는 결정 났다.

"지금 상태를 보시죠. 설마 유효한 공격이 아니었다고 우기실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교감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아니…."

"아니 뭐요? 아까 동의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주 쌤통이다.

만약 교감이 선공을 양보한다면 처음부터 나는 이럴 작정이었다.

배운 지 얼마 안 됐고 불완전한 검강이라지만 무려 천마의 검법을 받아 내고도 서 있는 저런 괴물과 제대로 싸운다면 무조건 필패니까.

공격은 단 한 번이었지만 교감의 옷에 난 구멍은 5개… 아니, 10개도 충분히 더 된다.

비록 엉덩이를 걷어차 주진 못했지만, 사부에게 말했던 열 번은 이미 이룬 거나 마찬가지다.

정말 운이 좋았다.

"부…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끝내기엔…."

"제가 먼저 선공을 양보해 달라고 했습니까? 양보하신 건 교감 선생님이셨습니다."

"…."

"할 말 없으시면 이만 심판을 부르죠."

바로 올라올 줄 알았는데 내 검강 파편들이 설치되어 있던 배리어를 많이 부숴 버리는 바람에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자… 잠깐만. 그래, 검을 다시 줍게 해 주겠네."

이대로 지면 체면이 구겨질 게 걱정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나와 제대로 싸워 보고 싶은 호승심 때문에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너무 구질구질하다.

"싫은데요. 이미 제가 이겼는데 왜 더 싸웁니까?"

"저렇게나 많은 학생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 강 선생이 가르치는 학생들도 저렇게 응원하고 있는데 이대로 끝내기엔 아쉽지 않나?"

"우리 선생님 최고!"

"검술이 미래다!"

"잘생겼다, 강신혁!"

내가 선방하자 우리 제자들은 난리가 났다.

그런데 저거 마지막에 외친 건 진수 같은데 응원은 고맙지만… 이 녀석아, 내가 네 친구냐?

너는 2학기 태도 점수 빵점이다.

아무튼, 응원하는 제자들을 보니 마음이 살짝 흔들렸지만 어림도 없지.

"전혀 안 아쉬운데요."

마침 결투장 바깥도 어느 정도 수습이 됐는지 심판이 결투장 위로 올라왔다.

"결투장 배리어를 유지해 주는 마석 손상이 심해서 마법 학과 선생님 두 분이 더 배리어를 쳐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승부는 끝났으니까."

"네? 아…."

심판을 맡은 선생이 교감의 상태를 보곤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강 선생? 아직 안 끝났지."

아니, 이 영감탱이가….

"교감 선생님, 구차해 보이니까 그만하시죠."

쿵―.

김만동이 말과 함께 진각을 밟자 단단한 암석으로 지어진 결투장 일부분이 갈라졌다.

괜히 바닥에 화풀이하는 것 같은데, 그래 봤자 나는 절대 안 싸울 거다.

"분명히 아까 대련 시작 전에 유효한 공격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보다시피 나는 끄떡없네."

지금 당신 상태를 보라고.

옷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피까지… 아니, 피가 벌써 멎었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누가 봐도 억지다.

"교감 선생님이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죠. 그럼 대련은 계속하시는 거로 하겠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하…. 그래. 내가 잠깐 잊고 있었다.

심판을 맡은 선생도 실기 선생이자 헌터라는 걸.

물론 학교의 실기 선생들은 전부 나를 싫어하니 편파 판정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김만동이 그런 불합리를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은 아니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강 선생, 어서 가서 검을 잡아야 하지 않겠나? 내가 그 정도 배려는 해 주지."

진짜 욕이 나올 것만 같다.

원작 작가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런 인물을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한 거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게 뭐가 정의로운 거냐고.

자기의 체면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 나와 싸우고 싶어서 억지를 부린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나름 좋게 보고 있던 김만동이란 인간에게 완전 실망했다.

"알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지만 나는 대답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검을 다시 잡았다.

여기서 안 하겠다고 따져 봤자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거고 나만 또 이상한 사람이 될 테니까.

다행히 절정에 오른 이후 회복 속도가 빨라져 아까 사용했던 내공은 거의 다 회복됐다.

가능성은 희박해도 이런 억지나 쓰는 사람에게 곱게 질 수 없지.

어떻게든 망신을 주겠다고 생각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럼 재개하겠습니다."

심판이 내려가기도 전에 김만동이 내게 빠르게 달려온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누구보다 빠른 것 같지만 반응하지 못할 속도는 아니다.

부웅.

내 얼굴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주먹이 날아왔지만,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피했다.

콰앙!

하지만 이어지는 왼손까지 피할 수 없어 검을 틀어 막았다.

광음과 함께 뒤로 밀려났는데 어이가 없다.

아까처럼 검강은 아니더라도 검기가 어려 있는 검에 부딪친 건 분명 맨주먹인데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

한 방 한 방이 묵직함을 넘어 마치 커다란 강철 바위가 날아와 부딪친 느낌이고.

부웅.

방금도 얼굴로 날아오는 주먹을 고개를 꺾어 겨우 피했는데, 뺨을 스쳐 가는 풍압에 등골이 저절로 서늘해진다.

콰앙! 콰앙!

연속해서 공격이 쏟아진다.

반격을 의식해서인지 발은 쓰지 않고 있지만 두 손만으로도 상당히 버겁다.

피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피하고 나머지는 막아 냈다. 채 열 번도 충돌하지 않았는데 손목이 부러질 것 같다.

이대로 막기만 해서는 가망이 없을 것 같아 부딪칠 때 생긴 반동을 이용하며 뒤로 물러났다.

바로 따라붙을 줄 알고 대비했는데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따라붙지 않고 여유를 부린다.

"아까 같은 기술을 다시 쓸 생각인가?"

그럴 리가.

천마 검법은 위력이 폭발적인 만큼 내공이 상당히 많이 소모된다.

무리하면 못 쓸 것도 없지만 이미 한 번 보여 준 기술이 다시 통할 것 같진 않다.

애초에 기다려 줄 것 같지도 않고.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검에 내공을 불어넣는 데만 집중했다.

검기가 점점 짙어지자 역시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쇄도해 온다.

이제는 준비한 비장의 수 같은 것도 없다.

속도만큼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나름 잘 막고 피하기는 했지만, 내구력에서 차이가 너무 난다.

검기가 어려 있는 검과 수십 차례 부딪힌 영감탱이의 주먹은 완전히 멀쩡한 반면 이제 몇 번 더 막으면 내 손목뼈는 부러지고 말 거다.

솔직히 S 랭크를 상태로 큰 피해 없이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실력은 증명했다.

기권해도 될 것 같지만 억지를 부려 대련을 다시 시작한 영감탱이의 기를 살려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제자들도 모두 지켜보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날아오는 주먹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검으로 막지 않고 왼팔로 막았다.

빡! 뿌드득―.

내공을 주입했는데도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밀려왔지만 참아 내고 그대로 검을 휘둘러 교감의 왼팔을 사선으로 베었다.

살이 아니라 쇠를 찌르는 느낌이지만 끝까지 칼을 밀어 넣었다.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내주고 뼈를 자른다.

내 실력이 모자라 육참골단이 아닌 골참육단 밖에 안 될지라도.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 * *

눈을 떠 보니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보인다.

눈을 비비고 주위를 보니 병원은 아닌 것 같고… 아, 예전에 몇 번 왔던 학교 보건실 같다.

기절했던 건가?

마지막에 나는 왼쪽 팔을 포기하고 교감의 왼팔을 베었다.

물론 검강이 아니었기에 결국 튕겨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감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한 것 같은데, 아마 그때 당해서 기절한 모양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기절했다는 게 약간 부끄럽지만 나름 만족한다.

내가 교감의 오른팔에 만든 검상.

세 치도 안 될 것 같은 아주 작은 검상이었지만 피가 흘러나오고 있던 걸 분명히 봤으니까.

설마 그것까지 유효하지 않은 상처라고 우기진 않았겠지?

에이… 뭐, 이젠 상관없다.

대련에서 내가 이겼든 졌든 무조건 연수 면제는 받아 낼 생각이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장단을 맞춰 줬는데 양심이 있다면 면제는 당연히 해 주겠지.

"어, 강 선생님 일어났어요?"

내가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커튼이 걷혔다.

백의를 걸친 보건 선생이 보이는데 역시 보건실이었다.

"아, 네. 제가 얼마나 여기 있던 거죠?"

"네 시간 정도 됐네요."

그럼 지금 시간이 11시는 넘었다는 소린데.

나 때문에 이 시간까지 퇴근도 못 하고 있던 것 같은데 미안하다.

바로 일어나서 돌아갈 생각으로 팔에 힘을 주는데… 어?

팔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

"조금 더 누워 있으세요. 마법으로 치료는 다 했지만 뼈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서 감각이 완벽하게 돌아오려면 두 시간 정돈 더 있어야 할 거예요."

순간 불구라도 된 줄 알고 걱정했는데 보건 선생 말을 들으니 기억났다.

원작에서도 치료 마법으로 웬만한 상처는 다 치료되지만 이런 불편함이 있었다는 게.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퇴근도 못 하시고."

"아니에요. 저도 어차피 기숙사에 거주하는데요. 그리고 교감 선생님이 깨실 때까지 봐 달라고 특별히 부탁하셨거든요."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내일 연수 면제 안 해 주기만 해 봐라.

"저는 괜찮으니까 이만 기숙사로 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보건 선생도 치료 마법을 사용하는 헌터라 나를 그리 곱게 보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젊은 여자다 보니 괜히 같이 있으면 어색하기만 하다.

"싫은데요?"

"네?"

"사실 아버지도 통금 시간 되면 두고 그냥 가라고 했지만, 일부러 기다렸어요."

일부러 기다렸다니… 아니, 잠깐만. 아버지?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7)

방학식

조금 전까지 속으로 교감 욕을 하고 있었던지라 깜짝 놀랐다.

내 기억으론 교감에게 딸이 있다는 내용은 원작에는 안 나오니까.

보건 선생도 아예 등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니까 있기야 했겠지만, 따로 등장하는 장면이 언급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가운에 쓰인 김선화라는 이름의 인물은 기억에 없다.

"아, 방금 그건 실수니까 못 들은 거로 해 주세요. 학교에선 아무도 모르거든요."

낙하산 취급이라도 받을까 봐 그러는 건가?

어차피 보건 교사래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야 들어올 테니 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게다가 말은 실수라고 하면서 얼굴은 웃고 있다.

고의로 흘린 것 같은데, 뭐지?

"알겠습니다. 저기, 그런데 저 정말 괜찮으니까…."

"제가 같이 있는 게 불편하세요?"

그걸 말이라고.

"괜히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아까 말했잖아요. 교감 선생님이 통금 시간 되면 두고 가라고 했는데 제가 남은 거라고. 사실 제가 강 선생님에게 관심이 좀 있거든요."

"네?"

"오늘 대련 이전부터 약간 관심은 있었는데 오늘은 정말 멋있으셨어요. 솔직히 교감… 아니, 어차피 이제 강 선생님은 아시니까. 저는 강 선생님이 아버지랑 그렇게 싸울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거든요."

"감사합니다. 결투는 어떻게 됐나요?"

"아, 그게…."

바로 대답을 못 한 걸 보니 교감의 승리가 된 모양이다.

비록 기절하긴 했지만, 마지막에 확실히 검상을 입혔는데 억지 대마왕 영감탱이가 그것도 유효하지 않은 공격이라고 우긴 건가?

설령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심판이 교감의 편이었을 테니… 뭐, 됐다.

양심이 있다면 연수 면제는 시켜 주겠지.

"제가 기절했으니 교감 선생님의 승리가 됐나 보군요."

"네. 심판을 맡은 백 선생이 강 선생님이 기절하고 아버지가 이겼다고 판정했어요."

"그렇군요."

살짝 짜증이 나긴 하지만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저는 강 선생님이 졌다고 생각 안 해요. 처음에 강 선생님이 보여 주셨던 공격은 정말 대단했잖아요. 아마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 많을 거예요."

오호,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영감탱이, 딸은 그래도 잘 키웠구나.

인성도 그렇고 얼굴도 무지막지한 교감에게서 어떻게 이런 딸이 어떻게 나온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괜찮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어차피 조건 없이 정식으로 싸웠다면 졌을 테니까요. 양심 있다면 연수 면제는 좀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연수 면제요?"

교감한테 못 들었나?

"사실 우수 교사가 되면 신입 교사들이 가는 연수 면제된다고 해서 대련을 받아들인 거거든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거 꽤 재미있는데…. 말만 연수지, 1주일 이론 때만 지나가면 딱딱한 것도 없고 다들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 친해질 수도 있어요. 저도 2년 전에 다녀왔거든요."

그야 그쪽은 헌터 학교 출신이니까 그러시겠죠.

"저는 비 헌터 학교 출신이라서 괜히 가 봤자 좋은 꼴 못 볼 것 같았거든요."

"아… 저기, 그런데 강 선생님, 이 학교에서 헌터라고 다 강 선생님을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글쎄요. 제가 그동안 겪은 게 있다 보니 그 말은 믿기 힘드네요."

할 말이 없는지 정적이 흐른다.

억지를 부린 건 교감이지 양호 선생이 아닌데 너무 까칠하게 말했나 싶다.

"저도 들은 이야기라 정확한 건 아니지만 실기 선생님들 사이에선 업무 이외에 강 선생님이랑은 아예 말 섞지 말자는 이야기가 돌았다던데, 그래서 눈치 보느라 다가가지 못한 선생님들 많을 거예요."

대충 뒤에서 안 좋은 소리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아예 말을 섞지 말라니.

애들도 왕따는 안 시키던데 선생이란 작자들이 참….

"저는 그런 건 신경 안 쓰는데 보건실에만 있다 보니 강 선생님을 만날 일이 없었네요."

"아, 네. 괜찮습니다."

"그래도 다음 학기부턴 달라질 거예요. 헌터 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 선생님 같은 실력자를 외면하는 바보들은 없을 테니까요."

"글쎄요. 지금까지 계속 그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그래 봤자 별로 달갑진 않은데. 솔직히 좋은 생각은 안 들 것 같아요."

"그래도 학교에 계속 있으실 거면 관계를 개선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딱히 친해지고 싶지 않은데요. 학교에 선생님들이 실기 선생님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 확실히 여선생님들이랑은 많이 친해 보이시더라고요."

눈을 흘기며 말하는데, 당황스럽다.

도대체 뭘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평소에 제일 많이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사람은 옆자리 박 선생이다.

친한 여선생… 아니, 그나마 연락처라도 있는 여선생님은 민 선생님 딱 한 명이고.

이마저도 모임 연락 때문에 알게 된 거고 이후에도 위튜브 때문에 몇 번 이야기한 게 전부지 사적인 연락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일반과목 선생님들이랑은 남녀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친해요."

"부럽네요. 저도 강 선생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네? 아, 그럼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친구비는 매달 월급날에 입금하시면 됩니다."

교감 딸이라는 게 약간 걸리긴 하지만 이런 미녀 선생님이라면 얼마든지 오케이다.

연락처를 서로 교환하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데, 슬슬 몸에 힘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이제 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김 선생이 배시시 웃더니 갑자기 백의를 벗는다.

아니, 왜 옷을….

그러고 보니 아까 나한테 관심 있다고 하더니….

어휴, 이놈의 인기.

"저기… 선생님, 저는 그냥 정말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왜 그러세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여기 학교잖아요. 그리고 저희 오늘 이야기 나눈 것도 처음인데 벌써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네?"

"얼른 옷 다시 입으세요."

다른 걸 다 떠나서 자기 딸이 먼저 나를 덮친 거라 해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저는 강 선생님이 괜찮아졌다고 해서 이제 슬슬 돌아가려고 가운만 벗은 건데… 무슨 생각하신 거예요?"

….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 그냥 농담을 한번…."

"농담이 아닌 것 같던데. 설마 제가 지금 강 선생님을 뭐 어떻게 해 보려는 줄 아신 거예요?"

"죄송합니다."

"보기와 다르게 응큼한 구석도 있으시네요. 아! 역시 늑대 같아요."

갑자기 웬 늑대?

남자는 다 늑대다 이 말인가?

아니, 늑대고 나발이고 자칫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피식 웃으며 농담을 하는 걸 보니 다행히 그냥 넘어가 줄 것 같다.

"늑대는 또 뭔가요?"

"오늘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강 선생님 왠지 고독한 늑대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고독한 늑대라니, 손발이 오그라든다.

"제가요?"

"네. 이제 보니 고독한 늑대가 아니라 응큼한 늑대였지만요."

"진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소문 같은 거 안 낼 테니 대신 친구비는 면제해 주시는 거죠?"

싱긋 웃으며 말하는데, 얼굴도 얼굴이지만 성격이 참 괜찮은 것 같다.

"혹시 방학 때 시간 좀 있으세요?"

"어머, 지금 데이트 신청하시는 거예요? 네. 저 방학 때 완전 한가해요."

김칫국은 좀 잘 마시는 스타일 같지만.

* * *

방학식이 생각했던 것보다 늦게 끝날 것 같다.

물론 수업은 아예 없고 1학기 성적 우수자와 우수 교사 선정 같은 시상과 교장의 연설뿐이다.

시상을 먼저 했는데, 교감에게 마지막 양심은 있었는지 우수 교사는 내가 차지했다.

물론 아침에 이기지도 못한 강 선생을 왜 우수 교사로 선정했냐고 몇몇 실기 선생들이 항의했다는데 교감이 대련을 신청한 게 강 선생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며 뭉개 버렸다고 한다.

교감에게 처맞고 뻗는 건 싫으면서도 내가 우수 교사 타이틀을 가져가는 게 배가 많이 아팠나 보다.

아니꼬우면 자기들도 신청하던가 하지.

그리고 아까 실기 선생 중에서 여선생 몇 명이 말을 걸어왔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가벼운 아침 인사였다.

티는 안 내고 무심하게 같이 인사하며 받아 줬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놀랐다.

어제 김 선생에게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 바로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안 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좋은 감정은 안 든다.

그나저나 이놈의 연설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방학이라고 긴장 풀고 어디 가서 사고 치지 말라고 하면 되는 걸 어쩜 그리 길게 늘여 말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할 지경이다.

교장이 되면 생기는 패시브 스킬인가?

"그럼 학생 여러분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방학은…."

진짜 그놈의 마지막만 도대체 벌써 몇 번째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선생들도 지루해하는 것 같은데… 우리 사정을 알 리 없는 교장의 연설은 계속됐고, 결국 예정 시각이었던 10시를 꽉 채우고 나서야 방학식이 끝났다.

"강 선생도 나가지? 태워 줄까?"

"아니요. 어제 치료받고 시간도 늦고 몸도 쑤셔서 짐도 못 챙겼어요."

어차피 2학기가 되면 다시 돌아와야 하고 짐도 거의 없어 특별히 챙길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 나가 봐야 학생들을 데리러 온 차들로 엄청 복잡할 테니 여유롭게 출발할 생각이다.

박 선생님과 함께 교무실로 가려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온다.

"선생님, 우수 교사 축하드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제 진짜 멋있었어요."

"우리 검술반 애들은 선생님이 졌다고 생각 안 할 거예요."

차례대로 은수와 은서 진수와 민희다.

"다들 고맙다. 선생님은 괜찮아. 너희도 얼른 집에 가야지."

"차 막혀서 좀 걸린다고 하셔서요. 그보다 선생님, 저희 방학 때 바다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요? 악!"

내가 꿀밤 한 대 먹일 생각이었는데 민희 녀석이 선수를 쳤다.

"왜 때려?"

"갈래요는 반말이잖아!"

쯧쯧, 하여간 진수 이 녀석은 매를 번다.

"그래. 이진수, 너 어제도 선생님 안 붙이고 선생님 이름 막 불렀잖아. 선생님이 네 친구야?"

"진수, 버릇없어."

은수와 은서도 한마디씩 했다. 이거 뭐… 나는 나설 필요도 없겠다.

"아니, 그냥 나는…. 어쨌든 선생님, 갈… 아니, 가실 거예요?"

"쌤, 같이 가용. 네에에?"

민희가 혀 짧은 소리를 낸다.

"민희야,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건 진수한테 하라니까."

"샘, 저도 싫어요. 정민희,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냐? 역효과 나니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까는 네가 하라면서. 진짜 뒈질래?"

진수가 도망치자 그런 진수를 잡으러 민희가 떠나가고 은수와 은서만 남았다.

"너희도 같이 가니?"

"네. 민희네 외삼촌이 제주도에서 펜션 하신대요. 선생님도 같이 가시는 거죠?"

"미안하지만 방학 때 일이 많아서."

"거짓말. 연수 안 가신다는 거 이미 들었는데요."

"누가 그래? 헛소문이야. 선생님 연수 간다."

거짓말이 아니다.

원래 우수 교사가 되면 연수를 안 가는 게 맞다.

하지만 하필 올해부터 헌터 관리국에서 우수 교사라도 평가는 치러야 하는 게 맞지 않냐며 규정을 바꾸어 버려 이론과 실기 평가를 위해 이틀을 나가야 한다.

교감은 자기도 몰랐다고 말했지만 사기를 당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3주짜리 연수가 이틀로 줄어들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신입 연수? 그거 우수 교사 돼서 이틀밖에 안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것도 출퇴근이라서 다행이라고 했잖아."

"아니, 박 선생님, 제가 언제 그런…."

급하게 눈치를 줬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하…. 진짜 눈치가 그렇게 없나?

"아니, 그럼 난 이만 차 더 막히기 전에 가 봐야겠네."

박 선생 당신은 2학기에 손절이야.

"선생님?"

"그럼 같이 가시는 거죠?"

"그래도 안 돼. 선생님 방학에 할 게 많다니까."

세워 둔 계획도 있고 약속도 있긴 한데, 솔직히 그리 바쁘지는 않다.

계획도 확실한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정도라면야 시간이 맞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애들끼리 노는데 끼어 봤자 그리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다.

가서 괜히 뒤치다꺼리만 하게 될 것 같고.

다른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방학 때 같이 놀러 가자고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 녀석들은 나를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 샘, 같이 가요."

"좋아. 선생님이 같이 가면 매일 아침 구보 20바퀴씩 뛸 건데 다들 참여하는 거지?"

"저희끼리 갈게요."

"저희끼리 가겠습니다."

구보 소리가 나오자마자 두 녀석 다 빠르게 손절을 때리는 걸 보니 진작 이럴 걸 그랬다.

"그래. 방학 잘 보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2학기에 보자."

"구보는 장난이시죠? 저희 놀러 가기 전에 연락 드릴 테니까 시간 되면 같이 가요! 선생님도 방학 잘 보내세요."

"방학 잘 보내세요."

장난 아닌데…. 인사를 하고 가는 녀석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 교무실에 들러 카드를 찍고 퇴근했다.

짐을 정리하던 중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꺼내 확인해 보니 어제 연락처를 교환했던 김 선생이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8)

돈 안 되는 잡몹은 거릅시다

"네, 김 선생님."

"강 샘, 어제 부탁하셨던 거 있잖아요. 마침 친구 하나가 길드랑 계약이 만료돼서 시간 된다고 하네요."

어제 김 선생에게 방학 때 같이 사냥을 하자고 제안하면서 혹시 친구도 있으면 1명 정도 더 구해 달라고 했다.

포탈 대부분이 2인용보단 3~4인이 훨씬 많으니까.

"정말요? 잘됐네요.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혼자였다면 갈 수 있는 포탈은 최대 2인 C 등급 포탈이라 돈도 안 되는 잡몹이나 잡아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다.

* * *

"분명 한 달간 쉰다고 하지 않았냐?"

"사부가 가장 좋은 수련은 실전이라면서요. 그리고 쉬는 동안 여기서 수련만 하고 있으면 돈은 누가 법니까?"

당연히 방학 때도 월급은 나오지만 그럼 놀면서도 돈 버니 이것저것 더 사 달라고 할 것 같아 일부러 말을 안 했다.

"그래서 또 안 온다고?"

"네. 그래도 전처럼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들를 거예요. 더 자주 들를 수도 있고요."

"아니, 진작 말을 했어야지, 이 녀석아. 미리 알았으면 아껴 먹었을 것인데."

너무하다.

제자가 몬스터랑 싸움을 하러 간다는데 제자 걱정이 아니라 자기 먹을 거 걱정이나 하고.

"그러게 좀 적당히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더 사 주고 갈 거지? 난 우리 제자 믿어!"

저런 말투는 또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네네. 지금 가서 사다 드리고 갈 테니까 필요한 거 적어 두세요."

사부에게 필요한 목록을 받아 포탈을 빠져나왔다.

방학이 시작된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일할 때는 참 안 갔던 시간이 방학이라 그런지 한 것도 없는데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는 느낌이다.

경공을 이용해 30분 만에 산 아래로 내려와 슈퍼마켓에 왔다.

물건을 사려고 목록을 보는데 참 많이도 적어 놨다.

라면 종류만 7개에 과자도 열 종류, 초코바, 육포, 치즈, 커피 믹스까지.

3일 전에 들어갈 때도 이것저것 많이 사서 들어갔는데 그걸 벌써 다 먹었나?

물론 같이 지내다 보니 나도 좀 먹기는 했지만 거의 이주치 식량은 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사부에게 장난으로 돈, 돈 거린 건데 우수 교사 부상으로 받았던 500만 원이 아니었다면 이번 달은 적자가 났을 것 같다.

물론 주식으로 번 돈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학교 사람들한테 피자도 사고 사부에게도 이것저것 사 주며 쓴 돈도 적지 않다.

게다가 남은 돈 대부분은 재투자해서 당장 수중엔 돈이 거의 없다.

원래 지난번에 마음고생을 너무 심하게 해서 주식은 좀 멀리하려 했지만 고민하다 주인공 이지성의 부친이 회장으로 있는 화신전자에 투자했다.

물론 이번 재투자는 전처럼 대출이나 신용 거래 같은 건 안 했다.

단기 급등을 노린 게 아닌 장기투자 목적이니까.

내후년에 주인공이 고등부에 들어오고 5년 후면 주인공이 아카데미를 졸업한다.

졸업 이후 주인공은 여러 길드에서 러브 콜을 받지만 전부 거절하고 부친의 회사를 모기업으로 하는 길드를 만든다.

주인공이 만든 길드니 미래엔 당연히 대한민국 1등… 아니, 세계 1등 길드로 성장한다.

길드 가치와 수익이 올라가면서 모기업의 주가도 당연히 뛰겠지만 나는 그걸 노리는 게 아니다.

그렇게 되기까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까.

내가 노리는 건 조금 더 가까운 미래.

주인공이 길드를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소설에서는 위기 한 번 겪지 않고 계속 잘나가던 주인공 아버지의 회사가 대통령 비자금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어려워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세무조사를 비롯해 전방위로 압박을 받는데 주식이 많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대통령이 작정하고 기업 하나를 죽이려 드는데 주가가 멀쩡할 리 없지.

내가 주목한 부분은 '위기 한 번 겪지 않고 계속 잘나가던 아버지 회사' 이 부분이다.

회사가 잘나가면 주식도 당연히 잘나가겠지.

대통령과 갈등을 겪기 전까지 꾸준히 사서 이득을 보다가 주인공 졸업할 때쯤 다 팔아 버리고 주인공 부친 회사가 어려워지면 그때 다시 매입할 생각이다.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결국 주인공이 나서서 다 해결하고 대통령은 탄핵까지 당하니까.

사실 지금도 수익권이다.

뭐, 대기업이다 보니 주식이 비싸서 그리 많이 사지 못해 큰 수익은 아니지만.

그러니 방학 때마다 열심히 부업해서 자본금을 늘릴 생각이다.

"카드 여깄습니다."

카드를 받고 챙겨 온 커다란 배낭에 산 물건들을 전부 집어넣고 다시 산을 올랐다.

배낭 무게가 꽤 돼서 내려올 때보단 시간이 약간 더 걸렸지만, 워낙 길이 익숙해서 큰 차이는 없었다.

사부에게 좀 아껴 먹으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다시 산에서 내려왔다.

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12시를 약간 넘겼다.

약속 시각은 1시인데 살짝 출출하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을까 하다가 혹시 만나서 밥을 먹자고 할지도 몰라 김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선생도 막 친구를 만났다며 점심 같이 먹자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약속 장소로 이동해 5분 정도 기다리자 김 선생과 친구가 도착했다.

그런데 친구가 여자였다.

뭐… 일단 나도 남자다 보니 시커먼 남자보다 여자가 좋긴 하지만 이왕이면 힘 좀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는데….

체형을 보니 딱 마법 쪽이라 약간 실망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좀 늦었죠. 많이 기다리셨어요?"

"딱 맞게 오셨는데요.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이쪽이 친구분이시군요. 안녕하세요, 강신혁입니다."

"이쪽은 제 친구 이설이에요."

"홍이설입니다."

홍이설? 어디서 들어 본 것… 아, 기억났다.

주인공이 3학년이 됐을 때 담임을 맡게 되는 박투술 교사다.

이미 1학년과 2학년을 학교에서 보냈기에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3학년을 지루하지 않게 채우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현재 학교에 없어서 내년이나 내후년에 들어오겠거니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니 신기하다.

"강 선생님, 우리 이설이 같은 스타일 좋아하세요?"

"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시길래요."

"아니… 그냥 제가 아는 분하고 조금 닮은 것 같아서요."

"뭐야? 지금 작업 멘트 치시는 거예요? 그래 봤자 우리 이설이의 철벽은 뚫지 못할걸요? 얘가 학교 다닐 때 고백만… 악!"

왠지 맞을 것 같더라니, 홍이설이 김 선생의 옆구리를 툭 친다.

"너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사부는 내 편 들어 줄걸?"

원작 내용대로라면 홍이설이 김만동의 제자라서 그런지 상당히 친해 보인다.

"평소엔 장난쳐도 반응 없으면서… 어? 설마, 너 혹시 강 선생님 마음에 들어?"

"누… 누가! 나는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해."

아무리 자기 스타일이 아니어도 초면에 기생오라비라는 좀 아니지 않나?

솔직히 나도 홍이설 같은 스타일은 별로다.

게다가 어차피 홍이설은 나중에 주인공을 좋아하게 되는 히로인 중 하나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이 교감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주인공이 건방지다고 생각한 홍이설이 대련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많이 괴롭히는데, 끝내 주인공에게 패배하고 반해 버린다.

그리고 주인공이 졸업함과 동시에 학교도 그만두고 길드에까지 따라간다.

물론 우리 둔감한 주인공은 당연히 홍이설의 마음도 모르고 다른 히로인들이랑만 잘 지내는데, 참다 못한 홍이설이 폭발해서 고백하는 장면은 꽤 인상 깊었다.

한마디로 나랑은 인연이 없다.

"초면에 기생오라비가 뭐야? 강 선생님, 너무 담아 두지 마세요. 애가 원래 말을 좀 막 하는 경향이 있는데 애는 착해요."

"아, 죄송합니다. 선화 때문에…."

"괜찮습니다. 그보다 식사하면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시간이 아까워 자리를 옮겨 밥을 먹으며 앞으로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전투 포지션부터 수익 분배까지 약간 이견이 있었지만 서로 양보도 하고 조정도 해 가면서 나름 잘 이야기가 되나 싶었는데, 포탈 등급에서 의견이 완전히 엇갈렸다.

내가 B 랭크, 김 선생도 B 랭크에 홍이설은 무려 A 랭크라 우리 셋은 4인 B 등급 포탈까지 갈 수 있다.

"절대 안 된다니까요. 4인용이 괜히 4인용이 아니에요. 무조건 C 등급으로… 아니, 처음이니 D 등급 포탈에 가서 손발을 맞춰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수익의 극대화를 위해 당연히 4인 B 등급 포탈을 가자고 했지만 홍이설이 이렇게 한사코 반대를 한다.

"4인이나 3인이나 큰 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법도 그렇게 정해진 거고요."

게다가 내가 심사를 안 봐서 그렇지 보기만 한다면 A 랭크 정도는 껌일 테니까.

"강 선생님 실력이면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두 사람 다 지금 현역이 아니라서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잘못되는 헌터들 많이 봤다니까요. 욕심부리지 말고 안전이 우선이니까 C 등급이나 D 등급으로 가요. B 등급은 나중에 3인 포탈이 나오면 가고요."

안전이 우선이라는 말에 동의는 하지만 포탈 등급에 따라 수익 차이가 꽤 크다.

C 등급은 4인 포탈 기준 대충 500 정도다.

셋이 나누면 170도 안 되고 거기서 또 세금 20%를 공제하고 포탈까지 이동하는 교통비와 부산물을 가져갈 업체에 지급할 비용까지 넉넉하게 뺄 거 다 빼면 130 정도다.

반면 B 등급은 4인 포탈 기준 최소 1,500인 데다 2,000 이상 나오는 경우도 있다.

대충 계산해도 3~4배 차이가 나고 D 등급은 잘 나와야 100만 원이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라 아예 생각도 안 했다.

애초에 나오는 몬스터 수준도 홉 고블린, 리자드맨, 오크 정도로 무척 낮고.

주인공도 졸업하자마자 바로 C 등급부터 가지 D 등급은 쳐다도 안 본다.

거짓말 좀 보태면 D 등급 포탈을 가면 사냥하는 시간보다 이동하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하아, 답답하다.

"만약 잘못되면 제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잘못되면 죽는 건데 신혁 씨가 어떻게 책임을 져요?"

무슨 A 랭크가 이렇게 겁이 많아?

마음 같아선 김 선생에게 다른 친구를 좀 알아봐 달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입장 제한만 없었어도 이런 귀찮은 과정 없이 그냥 혼자서 다 쓸어버리고 다니는….

어?

그래, 그러면 되겠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일단 B 등급 포탈을 하나 신청하고 두 분은 진입해서 입구에서 기다리세요. 사냥은 저 혼자 할 테니까요."

어차피 포탈에 진입하면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입구 쪽은 무조건 안전 지역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안전 지역 범위가 점점 줄어든다.

포탈 해방 현상이라고 부르는, 몬스터가 우리가 사는 세계로 넘어오는 일이 생기는 이유가 안전 지역이 전부 사라져서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 죽고 싶어요?"

"네? 아니, 강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제가 안 돌아오면 두 분은 그냥 나가시면 위험할 일 없을 겁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선화야, 너 무슨 이런 사람을…."

"정말 자신 있어서 드리는 말이니까 한 번만 믿어 주시죠."

무슨 일이든지 간에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 법인데 시작부터 돈도 안 되는 '잡몹'을 잡고 싶진 않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29)

홍이설은 계속 반대했지만 김 선생이 내 편을 들어 줬고 다수결로 인해 결국 B 랭크 포탈을 신청해 배정받았다.

배정받은 포탈이 용인에 있는 야산 쪽이라 차를 하나 빌리려 했는데, 홍이설이 차를 가지고 있어 그녀의 차로 이동했다.

딱히 홍이설이 눈치를 주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까 트러블도 있고 얻어 타니 기분이 좀 그렇다.

그동안 학교에서 지내다 보니 차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 안 샀는데, 조만간 중고로라도 한 대 뽑아야겠다.

입구에 도착해 포탈 주변에서 경계를 서던 군인들에게 신분증과 어플을 통해 포탈 배정받은 걸 확인시켜 주고 포탈에 진입했다.

포탈의 환경은 포탈마다 제각각인데 용암이 끓어오르고 사막 같은 곳도 있지만 이번에 우리가 배정받은 이곳은 가장 흔한 산악형이다.

"그럼 두 분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진짜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지금이라도 그냥 취소하고 나가는 게…."

"괜찮다니까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는 안전 구역을 나서자 울창한 숲이 보인다.

내공을 끌어 올려 사방으로 퍼뜨리자 곳곳에서 생명 반응이 느껴진다.

일단 가까이 있는 건 3마리다.

무슨 몬스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포탈이 산악 지형이니 까다로운 마법을 사용하거나 언데드형 몬스터는 아닐 거다.

보통 이런 지형에선 동물형과 광물형 몬스터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왕이면 동물형이면 좋겠다.

광물형이라고 못 잡는 건 아니지만 방어력이 높아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무게도 많이 나가 옮기는 것도 힘드니까.

일단 가장 가까이 있는 무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근접했다고 생각했을 때 나무 위를 뛰어다니는 녀석들을 발견했다.

자이언트몽키다.

전체적으로 원숭이를 닮은 녀석들인데 크기는 성인 남성 정도로 그리 크진 않지만, 속도가 빠르고 나무를 잘 타서 잡기가 꽤 까다로운 녀석이다.

게다가 개체 수는 많은데 마석 드롭률은 상당히 낮아 다른 B 등급 포탈에서 나오는 몬스터보다 약하지만 헌터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녀석이다.

그나마 자이언트몽키의 가죽이 제법 비싸게 팔리기는 하는데 저 재빠른 놈들을 잡는 수고에 비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물론 까다롭다는 건 일반 헌터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우끼끼―.

끼끼.

위에서 놀던 녀석 하나가 나를 발견했는지 빠르게 달려들었다. 마주 달려가 날아오는 길쭉한 손톱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스윽.

칼질 한 방에 바로 목이 떨어져 나간다.

자이언트몽키도 몬스터다 보니 사람을 보면 무조건 공격하는데, 지능이 꽤 높아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판단하면 바로 나무를 타고 도망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고 단번에 죽여 버리면 문제없다.

놈들의 가죽은 갑옷 재료로도 쓰일 만큼 꽤 질기고 튼튼한 편이지만 검기 앞에서는 칼로 두부 자르는 것처럼 그대로 잘려 나간다.

몬스터 특유의 검은 피가 흘러나오는 게 약간 징그럽긴 한데 학교에서 VR로 익히 봤던 장면이라 그런지 구토가 올라올 정도는 아니다.

우끼!

우끼끼!

동료의 피 냄새를 맡았는지 나머지 두 녀석도 내게 달려들었다. 첫 번째 녀석에게 해 준 것처럼 바로 목을 쳤다.

스윽, 스윽.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2마리 다 절명했다.

놈들의 사체를 구석에 발로 차서 대충 모아 놓고 다시 내공을 퍼뜨렸다.

몇 놈이 피 냄새를 맡았는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기다려도 될 것 같지만 일부러 놈들이 오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자기는 A 랭크인데 왜 객기를 부리냐며 은근히 나를 무시하던 홍이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

* * *

"김 하사님, 포탈이 좀 이상한 것 같지 말입니다."

"뭐가 이상해?"

"밥 먹으러 가기 전까진 파란색이었는데 지금은 남색에 가까워 보이지 말입니다."

무슨 개소린가 싶어 포탈을 쳐다봤는데 정말 나, 남색이다.

"야, 그걸 왜 이제 말해! 남색이면 A 랭크로 바뀐 거잖아."

포탈 경계 교육을 받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어서 당황스럽다.

"저, 저도 이제 봤습니다. 아까 헌터들 들어갔는데 어떡합니까?"

"이, 일단 중대장님한테 보고 먼저 하자."

바로 휴대폰을 꺼내 중대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했다.

"김 하사님, 중대장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알았으니까 일단 대기하래."

중대장님도 처음 겪는 일인지 무척 당황한 목소리였다.

"대기요? 안에 들어간 헌터들은 어쩌고요? 알려 주고 나오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길 어떻게 들어가?"

"포탈 경계 교육 때 들어가면 바로 몬스터가 나오는 게 아니라 안전 구역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안전 구역이 있으면 뭐? 들어간 지 꽤 됐잖아. 진작 안전 구역 넘어갔을 거라고."

"그러면…."

"진수야, 어쩔 수 없어. 우리가 헌터도 아니고. 중대장님께 보고드렸으니 헌터관리국에 연락해서 인근 길드에 지원 요청하시겠지."

* * *

10분 이상 자리를 옮겨 가며 내공을 퍼뜨렸는데 몬스터가 감지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50마리 정도 잡은 것 같은데 끝인가?

하늘 색깔을 보니 다 잡은 건 아닌 것 같은… 잠깐, 설마 이 포탈 고정형인가?

보통 포탈은 모든 몬스터를 전부 처리하면 하늘이 노랗게 물들며 12시간이 지나고 사라지는 소멸형이다.

하지만 사부가 기거하는 포탈처럼 모든 몬스터를 잡아도 사라지지 않는 고정형 포탈이 가끔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고정형 포탈은 몬스터를 다 잡아도 새롭게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고 포탈도 사라지지 않는다.

대개 그런 고정형 포탈은 포탈이 존재하는 국가의 영토로 귀속된다.

물론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거주 구역으로는 쓰이지는 않지만,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금속이나 식물 같은 자원채취 및 연구 목적으로 활용 가치가 높다.

고정형 포탈에 있는 몬스터를 처치한 헌터들에게도 추가 보상금을 준다고 들었는데… 대박이다.

첫 사냥을 온 곳이 고정형 포탈일 줄이야.

이게 바로 초심자의 행운인 건가?

크와아아아앙!

하하…. 아직 처리하지 않은 녀석이 있던 모양이다.

젠장, 좋다 말았다.

그런데 내공에 탐색이 안 될 정도면 거리도 꽤 있다는 이야긴데 소리를 봤을 때 자이언트몽키는 아닌 것 같다.

설마 트롤?

탁월한 재생 능력을 갖추고 있는 트롤의 피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이동하다가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만 해도 내 3배? 아니, 4배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녹색 피부의 괴물을 발견했으니까.

눈앞에 보이는 저 녹색 괴물은 내가 기대했던 트롤이 아니다.

트롤 특유의 털도 없고 무기도 들고 다니지 않으며 성체가 돼도 4m 정도밖에 되지 않는 트롤보다 덩치도 훨씬 컸다.

이 녀석은 헌터들 사이에서는 숲의 악몽이라고 불리는 오우거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몬스터 도감에서 본 적 있고 원작 소설에 나오는 묘사와도 일치한다.

그런데 왜 이 녀석이 여기에 있는 거지?

오우거는 A 등급 포탈에서도 아주 드물게 등장하는 녀석이라고 들었다.

우리가 배정받은 포탈은 B급.

진입했을 때도 포탈 입구는 분명 파란색이었다.

주인공도 3학년 때 실습을 나갔다가 안내를 맡은 길드 소속 헌터의 실수로 A 등급 포탈에 들어가 오우거와 싸우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상당히 고전한다.

물론 그때 주인공이 싸운 녀석은 S 등급 포탈에서나 나올법한 머리가 2개 달린 오우거였다.

오우거는 완전한 성체가 되면 10m까지도 자란다고 했으니 저 녀석은 성체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오우거는 오우거다.

다행히 아직 녀석은 나를 인지하지 못한 것 같은데, 돌아갈까?

키가 비슷해서인지 자이언트몽키를 잡을 땐 몬스터지만 두렵다는 느낌은 전혀 안 받았는데, 이 녀석을 보니 약간 위축되는 느낌이 있다.

A 랭크 헌터 3명이 오우거와 싸우면 1명은 무조건 죽고, 4명이 싸우면 1명은 크게 다치니 최소 5명 이상으로 잡으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트롤만큼은 아니더라도 오우거의 부산물도 꽤 비싸게 거래된다고 들었다.

뼈도 단단하고 힘줄도 탄성이 좋고 가죽만 놓고 봐도 검기로도 흠집만 날 정도로 무척 질기다.

무엇보다 마석이 나올 확률도 거의 100%에 가깝다고 하고.

A 랭크 마석은 순도별로 다르지만 기본 천만 원부터 시작한다.

그래 한번 잡아 보자.

A 랭크 헌터들과 5:1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생각해 보니 주인공이 트윈헤드오우거를 해치울 때 사용했던 건 강기고 나도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해도 강기를 쓸 수 있으니 기습하면 충분히 승산은 있다.

크와아아앙!

뜬금없이 소리를 질러 대서 혹시 들킨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이후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인마, 놀랐잖아.

아까도 그렇고 별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내공을 끌어올려 검으로 보냈다.

검을 감싸고 있던 푸른 빛이 점점 진해지더니 시간이 약간 지나자 완벽하게 검을 감싸며 검강이 만들어진다.

"강 선생님, 어디 계세요!"

이건 또 뭐야?

조금만 더 거리를 좁혀서 습격하려 했는데 뒤쪽에서 김 선생 목소리가 들린다.

입구에 가만히 있으라니까 왜 갑자기 나를 찾는 건지… 미치겠다.

크와아아앙!

젠장. 이번에는 아무 의미 없는 포효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오우거 녀석이 내 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다.

웬만하면 기습으로 한 번에 끝내려 했는데….

혹시 나를 지나쳐 김 선생 쪽으로 가게 되면 곤란하니 나도 녀석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나는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놈의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금세 조우했다.

크와아아앙!

나를 발견한 놈이 포효하면서 곧장 내게 주먹을 내지른다.

덩치가 덩치다 보니 주먹이 내 얼굴보다 더 크다.

검으로 받아칠까 하다가 담겨 있는 힘이 무시무시할 것 같아 몸을 비틀어 피하며 통나무 같은 녀석의 손목을 벴다.

챙!

중간까진 저항감 없이 부드럽게 검이 들어갔지만, 뼈에서 막힌 건지 쇠와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더 들어가지 않아 검을 거둬들이고 뒤로 물러났다.

크와아아앙!

이번 포효는 고통스러워서 내지르는 비명인지 반쯤 잘린 손목에서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다행히 오우거는 트롤처럼 재생력이 좋은 몬스터는 아니니 꽤 타격을 준 건 맞는데 솔직히 좀 당황스럽다.

아무리 완벽한 검강이 아니라고 하지만 녀석의 뼈를 못 자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완전한 성체는 아니라서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판단한 것 같다.

크와아아앙!

나를 노려보는 놈의 눈이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빨갛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부상을 입었으니 혹시 도주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예상대로 놈은 내게 다시 돌진해 왔다.

아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멀쩡한 반대편 주먹을 휘두른다.

후욱―.

처음과 똑같은 방식으로 피하며 베어 내려 했지만, 학습 능력이라도 있는 건지 피하려고 했던 공간 쪽으로 발이 날아온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던져 피했지만 이내 다른 발로 나를 내려찍는다.

쿵!

볼썽사납게 왼쪽 바닥을 굴러 겨우 피했다.

바로 일어나 자세를 잡고 놈을 주시하며 옆을 슬쩍 봤는데 무슨 폭격을 맞은 것처럼 땅이 움푹 파였다.

버서커 모드인가?

속도만 보면 교감과도 거의 엇비슷할 것 같은데.

힘도 오우거니 더 세면 더 셌지 약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교감도 피하지 못했던 공격이라면 어떨까?

방학이 시작된 후 나는 전보다 더욱더 치열하게 수련했다.

학생들이나 내 주변 사람들은 내 패배가 아니라고 말했고 솔직히 나도 졌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스스로 벽을 느꼈으니까.

지금은 대련했을 때처럼 시간도 없고 자세도 불안정하고 완벽한 컨디션도 아니다.

하지만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천마검법(天魔劍法) 오의.

유성폭멸마강(流星爆滅魔罡).

놈은 아슬아슬하게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검을 피했다.

맞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상관없다.

쾅! 쾅!

크아아아앙!

내 검이 쏟아 내는 강기의 유성이 놈의 전신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으니까.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30)

이 남자 도대체 뭐지?

포탈에 진입하진 한 시간이 지났는데 호언장담하고 떠났던 강신혁이란 남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끝까지 만류했지만 강신혁이 계속 괜찮으니 자신을 믿으라고 호언장담하고 선화까지 편을 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강신혁 그 사람이 너무 거만해 보여서 망신 한번 당해 보라는 마음도 조금 있다.

선화가 계속 편을 드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그런 작자가 사부와 동등하게 싸우고 S 랭크 헌터들이 사용한다는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했다는 말은 당연히 믿을 수 없다.

그래도 선화가 아예 없는 이야기를 하는 애는 아니니 어느 정도 실력은 있겠지.

상황이 안 좋아도 이곳까지 도망 올 실력은 될 거라 생각했는데 복귀가 늦어지니 조금 불안하다.

사실 강신혁이 떠나고 얼마 안 돼서 선화도 같이 따라가 보자고 했었다.

그 남자가 그렇게 호언장담했는데 굳이 뭘 따라가냐며 반대했고 선화는 약간 기분이 상했는지 구석에서 휴대폰만 보고 있다.

만났을 때부터 대충 눈치를 보니 선화가 관심이 좀 있는 것 같던데… 이왕 온 거 같이 따라갈 걸 그랬다.

"서, 설아."

"왜 그래?"

"포탈 색깔이 이상한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지, 진짜네?"

우리가 들어올 땐 파란색이었던 포탈이 언제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짙은 남색으로 변해 있다.

"남색이면 A 등급인데. 이거 언제 바뀐 거야?"

"나, 나도 방금 봐서 확실히는…. 강 선생님 어떡해?"

포탈 색깔이 변했다면 지금 이 포탈에는 A 등급 포탈에 나오는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소리다.

몬스터들이 서로를 잡아먹다가 진화하거나 다른 이유로 아주 드물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지금껏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당황스럽다.

"빨리 강 선생님 찾으러 가자. A 등급 포탈로 바뀐 거면 무리잖아."

선화 말이 맞다.

A 등급 4인 포탈은 A 랭크 헌터 최소 3명이 있어야 클리어가 가능하니까.

아니, 사실 A 등급 포탈부터는 몬스터 수준이 확 올라가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저랭크 헌터는 동행하지 않는다.

정 사람이 없거나 혹은 경험을 위해 아주 숙련된 B 랭크 헌터 1명 정도 끼워 데리고 가는 정도지.

하지만….

"왜 그래?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강 선생님이 위험할 수도 있잖아."

"일단 나가자. 나가서 헌터관리국에 신고부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강 선생님도 찾아서 같이 나가야지!"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이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선화는 강신혁이란 선생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안타깝다.

몬스터는 자기들끼리 잡아먹고 진화를 하기도 하지만 헌터들을 잡아먹고 진화하는 경우도 있다.

들어올 땐 분명히 파란색이던 포탈이 강신혁이 혼자 떠나고 시간이 좀 지나고 바뀌었다면 아마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선화는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잠깐 고민을 했지만 결국 선화에게 이야기했다.

말을 하지 않으면 혼자라도 찾으러 떠날 기세였으니까.

"그,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몬스터끼리 잡아먹어서 진화한 걸 거야."

"강신혁 씨가 떠난 지 한 시간도 넘었고 아까 우리가 올 때는 분명히 파란색이었어."

"아… 아닐 거야."

"선화야, 현실적으로 생각해. 어떤 몬스터인지도 모르잖아. 괜히 섣부르게 나섰다가 우리까지 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아까 안전 구역 경계에서 살짝 살펴본 바로 이 포탈은 산악형 포탈이다.

산악형 A 등급 포탈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는 자이언트포이즌스파이더나 자이언트스네이크, 에이션트오크 그리고 숲의 악몽이라고 불리는 오우거 정도인데 이 중 내가 혼자서 잡을 수 있는 녀석들은 없다.

애초에 A 등급 포탈 몬스터를 혼자 처리 가능한 헌터는 A 랭크 최상급… 아니, 만약 오우거 같은 녀석이 상대라면 사부 같은 S 랭크 헌터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

내가 너무 몰아붙였나?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

"나도 안타까워, 미안하고. 하지만 우리가 억지로 혼자 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가겠다고 한 거잖아. 일단 나가서 신고하고 지원 요청하자."

"미안. 난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어. 이설아, 먼저 나가. 나는 강 선생님 찾아서 같이 나갈게."

하…. 진짜 미치겠다.

"너까지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래?"

"나도 B 등급으로 오자고 했을 때 찬성했잖아. 내 책임도 있는데 이렇게 갈 수는 없어."

"혹시 네가 잘못되면 사부는 어떡하라고. 사부 생각도 좀 해!"

선화는 어머니도 어릴 적에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도 없어 가족이라곤 사부 한 명뿐이다.

"아빠…."

"사부에게 가족이라곤 너 하나밖에 없잖아. 그런데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 때문에 이러는 건 진짜…."

"그만. 오히려 그 말을 들으니까 확신이 섰어. 우리 아빠였다면 절대 강 선생님을 버리고 도망가진 않았을 거야."

겨우 마음을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사부 이야기를 꺼낸 게 실수였던 것 같다.

무력으로 기절시켜 밖으로 데려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선화와 사이가 영영 틀어질 것 같다.

그렇다고 선화 말대로 나 혼자 밖에 나가서 신고했다가 선화가 잘못되면 사부 얼굴을 볼 면목이 없고.

완전히 진퇴양난이라 결국, 위험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자는 약속을 하고 선화와 함께 안전 구역을 벗어났다.

경계를 넘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이언트몽키 사체들을 발견했다.

상태를 보니 잡은 지 좀 된 것 같아 지나쳐서 수색을 이어 가니 곳곳에서 자이언트몽키 사체를 발견했다.

처음 봤던 사체도 그렇고, 지금까지 발견한 사체들 모두 상태가 똑같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부 목이 없고 잘린 단면도 완전히 매끈했으니까.

자이언트몽키가 B급 포탈에 나오는 몬스터 중에서 그리 강한 편은 아니지만, 가죽도 상당히 질기고 뼈도 방어구의 재료로 쓰일 정도로 꽤 튼튼하다.

강신혁이 들고 있던 그 꼬질꼬질한 칼이 아무리 명검이라도 이렇게 자르는 건 불가능할 텐데.

오러를 쓴 건가?

선화가 오러블레이드를 썼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는데, 오러블레이드는 몰라도 최소한 오러 정도는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인 것 같다.

거기다 목이 없는 것 외엔 다른 상처가 하나도 없다.

전부 일격에 죽였다는 건데, 재빠른 녀석들의 속도를 생각하면 그건 나도 힘들 것 같다.

이 정도면 최소 숙련된 A 랭크 헌터다.

호언장담한 만큼의 실력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불안이 커진다.

그만한 실력을 지닌 헌터가 도망도 못 가고 죽을 수준이라면 흔한 A 등급 몬스터는 아닐 테니까.

크와아아앙!

갑자기 들려온 포효를 듣자 몸이 굳어 가는 느낌이다.

선화는 아예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헐떡이는데 마법사라 그런지 피어에 대한 저항력이 낮은 것 같다.

마나를 활성화시켜 피어의 기운을 해소하고 선화에게도 상태 이상 해제 마법을 사용하라고 말했다.

"방금 그거 도대체 뭐야?"

절대로 그 녀석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그 녀석이다.

"방금 그건 오우거 피어야. 선화야, 진짜 우리 나가야 해."

A 랭크 헌터들 사이에서도 '숲의 악몽'이라고까지 불리는 무시무시한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나타났으니까 오러까지 사용할 수 있던 강신혁도 도망가지 못하고 당한 거겠지.

"오, 오우거라고? 확실해?"

"틀림없어. 아까 안전 지역 벗어날 때 약속했던 거 잊은 건 아니지? 당장 나가자."

"…."

"뭘 꾸물거리고 있어?"

"하지만 아직 강 선생님을…."

"강신혁 씨는 이미 당했을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정신 차려! 나도 자이언트몽키 사체를 보고 강신혁 씨가 오러까지 쓸 줄 안다는 건 확인했어. 하지만 상대는 오우거야. 오러를 쓸 줄 아는 A 랭크 헌터 다섯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숲의 악몽이라고!"

답답해 미칠 것 같다.

"지금 전투 중일 수도 있잖아. 우리가 가서 도와 주면 다 같이 도망 정도는 칠 수…."

"현실을 외면하지 마. 강 선생은 이미 죽었어."

오우거 놈들은 전투 중이 아닐 때도 이유 없이 포효를 하는데 방금 포효는 그런 경우였을 거다.

만약 싸우는 중에 내뱉은 피어였다면 이렇게 쉽게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니까.

애초에 포탈의 색깔이 바뀌었으니 강신혁이 죽었다는 사실은 반론할 여지가 없다.

크와아아앙!

한 번 더 포효가 들려오는데 이번에는 미리 대비를 하고 있어서인지 처음처럼 패닉에 빠지진 않았다.

선화도 살짝 휘청하긴 했지만, 마법 효과 때문에 괜찮아 보인다.

"강 선생님, 어디 계세요!"

미치겠다.

오우거는 청각도 상당히 발달해 있는데 선화는 오히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가가며 강신혁을 부르기에 빠르게 다가가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저 자식이 우리를 알아차리면 끝이라고."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바보 같은 소리 좀 그만해."

크와아아아앙!

어쩔 수 없이 선화를 기절시켜서라도 데려가려 했는데 한 번 더 포효가 들리며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망했다.

대비하고 있는데도 몸이 이렇게 굳어 버린다는 건 앞선 두 번처럼 아무 의미 없는 포효가 아니라는 소리다.

바로 마나를 전신에 보내 마비에선 벗어나고 마법을 썼음에도 꼼짝 못 하고 굳어 버린 선화에게 다가가 마비 해제 포션을 먹였다.

"놈이 우리가 있다는 걸 알아챘어. 시간이 없어.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얼른 도망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오우거를 너 혼자 어떻게…."

"난 A 랭크 헌터잖아. 너만 없으면 대충 상대하다 도망갈 수 있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했지만, 당연히 거짓말이다.

숲에서 오우거보다 빠른 생물체는 없으니까.

놈이 우리를 인지한 상황에서 도주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진짜 괜찮아. 오히려 네가 있으면 오히려 짐만 되니까 얼른 가."

선화는 잠시 주저했지만 내 연기가 통했는지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선화가 고집만 부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솔직히 원망스럽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을 게 뻔하니까.

그동안 사부가 그리고 선화가 내게 잘해 줬던 걸 생각하면 이게 맞다.

그나마 다행인 건 놈은 우리가 마비를 풀 거라곤 생각 못 하는지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 같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선화라도 살리기 위해서 최대한 오래 버티겠다고 생각하며 포효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크와아아아앙!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한 번 포효가 들려와 속도를 높이다가 펼쳐진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우거는 여유를 부린 게 아니라 올 수가 없던 거였다.

수십 아니 수백 개는 될 것 같은 아주 작은 오러블레이드 조각들이 오우거의 전신을 난자하고 있다.

마치 그 모습이 밤하늘의 유성우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대한 놈의 거체가 쓰러짐과 동시에 하늘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포탈 클리어를 알리는 신호다.

"왔어요? 그냥 기다리라니까. 선화 씨는요? 아까 목소리 들리던데."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 도대체 뭐지?

숲의 악몽이라 불리는 오우거를 잡아 놓고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와 말하고 있다.

조금 전의 공격도 아주 작긴 했지만 내 눈이 틀린 게 아니라면 분명 오러블레이드였다.

"가죽이 비싸다고 들어서 최대한 상처 없이 잡고 싶었는데, 이거 팔 수 있을… 이설 씨, 왜 그래요?"

"네? 아… 아니에요."

"뭐가 안이에요? 여긴 밖인데. 아, 포탈 안은 맞죠."

여러 가지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는데… 정신이 번쩍 든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남자 개그는 최악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어떻게 한 거예요?"

"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한… 죄송합니다. 저는 이설 씨가 넋 놓고 계시는 것 같아서 농담을…."

"그거 말고, 어떻게 오우거를 혼자 잡았냐고요? 그리고 조금 전의 공격 오러블레이드 아닌가요?"

"아. 제가 처음에 말했잖아요. 혼자 하겠다고. 그리고 오러블레이드는 거의 비슷한데 완벽한 건 아니에요. 그보다 이거 가죽은 역시 못 쓰겠죠? 아깝다."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곤 오우거 사체를 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얼굴은 반반하지만 성격은 완전히 거만 그 자체로 보여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오산이었다.

이 남자 너무 매력적이다.

처음엔 이해가 안 됐지만 이제는 선화가 왜 이 남자에게 관심을 가진 건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설아! 이설아, 어디야?"

선화 목소리다.

하늘을 보고 포탈이 클리어된 걸 확인해서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이쪽이야!"

"어떻게 클리어를… 어? 강 선생님! 강 선생님!"

처음엔 내 쪽으로 오는 것 같더니 강신혁을 보곤 그대로 달려가 와락 끌어안는다.

죽은 줄 알았던 강 선생을 발견하고 기뻐서 그런 걸 텐데 어째 기분이 이상하다.

"기… 김 선생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저는 강 선생님이 죽은 줄 알았어요."

"네? 제가요? 왜요? 일단 답답하니까 이것 좀 풀고 이야기하시죠. 이설 씨도 계시잖아요."

"아, 죄송해요."

선화가 강 선생에게서 떨어지더니 내게 눈을 흘긴다.

"아니, 나는 당연히…."

"내가 그럴 리 없다고 했잖아."

"왜들 그래요?"

두 사람 다 나를 쳐다보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31)

응애, 나 애기 제자 선생 시켜 줘!

김 선생은 보자마자 나를 껴안지 않나, 이설 씨는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나… 뭐냐고 물어보니 내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황당했지만 설명을 들어 보니 이해가 간다.

의외다.

내가 만약 김 선생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지 확신이 안 드니까.

이설 씨도 살짝 괘씸하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김 선생과 동행한 데다 오우거에게 발각됐다고 생각했을 때도 김 선생을 혼자 보내고 내 쪽으로 온 걸 보면 의리는 있다.

"제가 멋대로 생각해서… 정말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오해는 다 풀었으니 얼른 몬스터 사체나 옮기죠."

"저희가 할게요. 신혁 씨는 좀 쉬세요."

"맞아요, 강 선생님.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운반 정도는 우리한테 맡기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워낙 체력이 좋아서. 그리고 같이 하면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12시간 동안은 유지되니 시간은 넉넉하지만 자이언트몽키들을 몰아서 잡은 게 아니기 때문에 혹시 놓칠 수도 있으니까.

다 함께 몬스터 사체를 포탈 입구 쪽으로 옮겼다.

힘이 장사인 이설 씨가 양손에 사체 하나씩을 들고 옮기고 김 선생도 마법으로 공중에 3마리씩 띄워 옮기다 보니 자이언트몽키는 금방 끝났다.

문제는 오우거였는데 다행히 뼈의 관절 부분은 검강으로 잘라져서 여덟 조각으로 분해해 옮겼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려 모든 사체를 옮겼다.

"김 선생님, 먼저 나가세요."

포탈 근처에서 클리어하기 전까지 군인들이 경계를 서지만 그 군인들이 몬스터 사체를 빼돌리는 일도 가끔 발생해서 보통 1명이 먼저 나가 감시를 한다.

"저보단 강 선생님이 나가시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맞아요. 원래 마지막에는 리더가 먼저 나가는 거예요."

솔직히 나는 누가 나가든 별로 상관없지만, 은근히 자기가 리더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던 이설 씨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오우거를 혼자 잡은 게 그녀에겐 꽤 충격을 준 모양이다.

솔직히 나도 대수롭지 않게 말은 했지만 천마검법이 통하지 않았다면 꽤 곤란했을 것 같다.

뭐, 그래 봤자 곤란한 정도지 결과는 변함이 없었겠지만.

알겠다고 말하고 포탈을 나왔는데 약간 놀랐다.

수십 명의 군인이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으니까.

들어갈 때는 달랑 2명 밖에 없었는데… 뭐지?

말로만 듣던 사체 빼돌리기 현장을 목격한 건가?

"뭡니까?"

"어? 혹시 아까 들어가셨던 헌터분 아니십니까?"

"맞는데, 왜 그러시죠?"

"경계 책임자 한상수 하사입니다. 같이 갔던 다른 헌터분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네?"

"혹시 본인만 살아 돌아오신 건가요?"

아! 사체 빼돌리려고 모인 게 아니라 포탈 등급이 올라가서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들 무사합니다. 포탈은 클리어했고 제가 정리를 위해 먼저 나온 거니 곧 나올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포탈에서 빛이 번쩍이며 자이언트몽키 사체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좀 비켜 주실래요? 정리를 좀 해야 해서."

말을 걸었던 하사가 물러나더니 급하게 전화를 하는데, 우리가 당했다고 생각해서 위에 지원 요청을 했던 것 같다.

차곡차곡 사체를 정리하는데 병사들이 꽤 수다스럽다.

"김 병장님, 저건 무슨 몬스텁니까? 자이언트몽키는 아닌 것 같은데."

"조각나서 확실한 건 아니지만 오우거 같다. 와, 내가 살면서 오우거 사체를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짜 크다."

"네? 저게 오우거라고요?"

"교육 때 너도 봤을 거 아니야."

"아까 3명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넷도 아니고 셋이서 어떻게 오우거를…. 오우거는 A 랭크 헌터 다섯은 있어야 잡을 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역시 진짜 홍이설이었네."

"네? 그게 누굽니까?"

"김만동은 알지?"

"국내에 딱 10명밖에 없는 S 랭크 헌터 아닙니까? 모르면 간첩이죠."

"그 양반 제자야. 꽤 유명한데 아까 헌터증 확인할 때 이름 중에 홍이설이 있었거든. 동명이인인 줄 알았는데 진짜 홍이설이었나 봐."

"저는 저 남자가 잡은 줄 알았는데."

"저 흔적을 봐. 저 남자는 검산데 검으로 어떻게 이런 상처를 만들겠냐."

"아무리 홍이설이라고 해도 혼자 잡은 건 아닐 테니 도움은 주지 않았겠습니까?"

홍이설이 한 거라곤 마지막에 운반한 것밖에 없어서 정정해 줄까 하고 있는데 포탈이 번쩍이며 김 선생과 홍이설이 넘어왔다.

"고생했어요."

"아니에요. 사람이 왜 이리 많아요?"

"혹시 저 군인들…."

둘 다 표정이 안 좋은 게, 아까 내가 했던 것처럼 오해를 하는 것 같아 간단하게 설명을 해 줬다.

"그런 거였구나."

"하긴 포탈 바깥에서도 등급이 올라간 건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업체 불러야 할 텐데, 혹시 아는 회사 있으세요?"

몬스터 사체는 대부분 몇 곳의 대기업에서 가공하지만 헌터에게서 직접 매입을 하진 않는다.

이것 역시 독점 때문에 다른 업체를 통해 구입을 하는 식인데, 자회사를 차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도 있지만 중소 업체가 대다수다.

길드에서는 따로 정해진 업체가 있지만, 우리처럼 임시 공격대는 그런 게 없다.

시세야 업체마다 거의 비슷하지만 그래도 간혹 가격을 후려치는 곳도 있고 고정적으로 거래하면 수수료 할인 같은 혜택도 있으니까.

"저는 사냥이 오랜만이라 잘 모르는데."

"제가 할게요. 친구 아버지가 하시는 곳인데 다른 곳보다 무조건 괜찮아요. 지점도 많아서 이곳도 금방 올 거예요."

이설 씨의 말처럼 전화하고 30분도 안 돼서 업체가 도착했다.

이설 씨가 안면이 있는 사람이 왔는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바로 사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작은 휴대폰처럼 생긴 마석 확인 장치로 측정을 하고 계산하는 걸 함께 확인했다.

"일단 마석은 오우거를 포함해 총 21개가 나왔고 2,500에 해 줄게."

"네? 황 사장님, 자이언트몽키 마석 50은 괜찮은데 오우거 마석 1,500은 너무했다."

"아까 확인하는 거 봤잖아. 보니까 막 진화한 상태였던 것 같은데. 마석은 수치로 계산하는 거라 우리도 남는 거 얼마 안 돼."

확실히 도감에서 봤던 것보단 좀 작은 편이긴 하다.

그래도 예상에 없던 부수입이니까.

"알았어요. 그럼 나머지는요? 솔직히 이런 상태는 역대급 아니에요?"

"확실히 역대급이긴 하지. 이렇게 좋은 상태의 자이언트몽키도 처음이지만 이렇게 걸레짝이 된 오우거는 처음 봤네."

"그래서 얼맙니까?"

"몽키는 요즘 시세가 25에서 30 정도인데 상태도 좋고 수량도 꽤 되니까 1,600에 해 드리죠."

"그럼 오우거는요?"

"오우거는 뼈는 괜찮은데 가죽이 너무 상해서 많이 드리긴 힘들 것 같은데… 1,300 어떠신가요?"

1,300이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까 업자를 기다리며 검색을 해 봤는데 오우거는 보통 마리당 4천 정도 받는다.

그 중 2천은 마석 값이고 나머지 2천이 사체 값이다.

업자 말대로 뼈는 괜찮아도 가죽은 완전히 만신창이니까.

알겠다고 하려는데 다시 이설 씨가 나섰다.

"황 사장님, 우리가 자투리도 다 챙겨 왔는데 이럴 거예요? 이런 것도 방어구 수선 재료로 쓸 수 있어서 다 매입하잖아요."

"그건 맞는데…."

"제가 황 사장님 적극 추천했단 말이에요. 체면 좀 살려 주세요."

"알았다, 그럼 1,400에…."

"1,500 안 돼요?"

"우리도 먹고살아야지."

"1,400에 콜 할 테니까 대신 출장비는 빼 주시는 거죠? 아저씨 오늘만 볼 것도 아닌데."

"아주 벗겨 먹어라. 딸 친구만 아니었어도 얄짤없었을 텐데. 그렇게 하자."

이설 씨가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까도 그렇고 첫인상은 약간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다.

출장비까지 빼 주면 세금도 20%만 제외하면 되니까 4,400인가?

고작 오우거 1마리 더 잡았을 뿐인데 수익이 두 배가 넘었다.

"입금은 어떻게 할까? 네 계좌로 보내?"

"아니요. 신혁 씨, 계좌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아저씨, 세금은 20%만 빼세요. 둘 다 헌터 학교 교원이거든요."

"합법 탈세까지 하면서 출장비까지 빼먹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두 분 중 아무나 교원증 좀 주세요."

지갑을 꺼내 교원증을 건네주고 계좌를 알려 주자 바로 입금이 됐다.

"들어왔네요."

"네. 그럼 저희는 이만 작업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이설아, 시간 되면 밥이나 한번 먹으러 와."

"네. 이번 주말에 들를게요."

"그럼 저희도 이만 갈까요?"

"그래요. 참, 두 분 계좌 알려 주세요."

"네? 아, 저는 괜찮아요."

"저도요. 한 것도 없는데."

둘 다 손사래를 친다.

"그래도 약속했는데. 얼른 알려 주세요."

나 혼자 다 잡은 건 맞지만 이미 포탈에 들어올 때 이번에는 혼자 잡는 대신 총수익을 1:1:1이 아닌 내가 80% 두 사람에겐 각각 10%씩 분배하기로 약속했다.

아깝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두 사람이 없었으면 B 등급 포탈 배정조차 못 받았을 테니까.

게다가 두 사람이 아예 손 놓고 구경만 한 것도 아니고 운반도 도와주고 여기로 이동할 때 이설 씨 차로 왔고 가격도 이설 씨가 흥정해서 더 받아 줬으니까.

둘 다 한사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끈질기게 물어본 끝에 알아내 입금했다.

"강 선생님, 저 돈이 더 들어온 것 같은데요?"

"저도요. 4,400의 10%면 440이잖아요. 500 들어왔는데."

"처음에 10%라고 약속은 했지만 오우거 덕분에 수익이 늘었잖아요. 그래서 조금 더 넣었습니다."

두 사람 말대로 원래 10%로 계산하면 440이지만 오우거 덕분에 기대 이상의 수익이 생겼는데 딱 10%만 보내는 건 정이 없다.

앞으로 한 달 가까이 함께 사냥할 텐데 먼저 호의를 보이면 두 사람도 더 잘 따라 줄 테고.

미래를 위한 투자에 120이면 거저나 다름없다.

"아무것도 안 하고 돈만 받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이렇게 더 챙겨 주시면…."

"맞아요. 이러면 너무 미안한데…."

"아까 이설 씨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오늘만 볼 것도 아니잖아요. 설마 저희 오늘로 끝인 건가요?"

"네? 아니요. 방학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저는 계속 나올 거예요."

"저도요."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마세요."

* * *

서울로 돌아와 저녁까지 같이 먹고 헤어져 선화를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차로 돌아왔다.

"이설아, 어땠어?"

"뭐가?"

"너 오늘 아침엔 하루 해 보고 별로면 안 한다고 했잖아. 계속 나온다고 하는 걸 보면 괜찮았나 봐?"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잖아. 아무것도 안 하고 500이나 벌었는데. 솔직히 지금도 부담스러워서 돌려줄까 고민 중이야."

A 랭크 헌터인 내게 500이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내가 한 거라곤 사체 운반과 운전해 준 게 전부니까.

"괜찮아. 강 선생님이 부담 가지지 말라고 했잖아. 오히려 돌려 주면 어색할걸? 그보다 처음엔 강 선생님 별로라더니 어때,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까?"

"약간."

사실 많이 놀랐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하면 선화가 놀릴 게 분명하다.

"오우거를 혼자서 잡았는데, 겨우 약간?"

"네가 말했잖아. 실력 있다고."

"그럼 피고 홍이설, 아까는 왜 그리 반대를 하셨습니까?"

"그때는 몰랐잖아. 사과도 했는데 너무 갈구지 마."

"그러게 처음에 말했을 때 좀 믿지. 강 선생님 너무 괜찮지 않아? 얼굴이면 얼굴, 실력이면 실력, 인성까지…. 도대체 부족한 게 뭘까? 진짜 한번 확 꼬셔 볼까?"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 너 모쏠이잖아."

"그러는 자기도 모태솔로면서."

"나는 고백 받았는데 안 사귄 거고. 너는 고백 한 번 못 받았잖아."

"그게 내 탓이야? 다 우리 아빠 때문이지."

선화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와 선화가 학교를 다닐 때 사부는 박투술을 가르치며 선도부까지 담당하는 학생주임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겐 공포의 대명사라 그의 딸인 선화에게 다가오는 남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 그래서 개명까지 하고 교감 선생님 딸이라는 거 숨겼는데도 안 생겼잖아."

"너 진짜 그러기야?"

"그러길래 뭐 한다고 밖에도 못 나오는 선생이 됐니?"

"나 남학생들한테 인기 많거든."

"그래 봤자 애들이잖아. 설마 애들을 어떻게 할 목적으로 선생님이 된 거야? 이거 집이 아니라 경찰서로 가야겠네."

"죽을래?"

선화와 티격태격하다 보니 어느새 선화 집에 도착했다.

"덕분에 편하게 왔네. 어, 왜 내려?"

"사부는 집에 없어? 온 김에 인사라도 하려고."

사실 단순히 인사만 할 생각은 아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소리를 들었는지 사부가 한걸음에 달려 나오는데 슬리퍼가 짝짝이다.

"우리 딸, 왜 이렇게 늦게… 어? 이설이 너도 왔냐?"

"오늘 같이 사냥 다녀왔어. 나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둘이 이야기하고 있어."

선화 앞에서 이야기하기 조금 그랬는데 다행히 알아서 자리를 비켜 준다.

"사냥을 다녀왔다고? 혹시 위험하진 않았어? 우리 선화 다친 데는 없지?"

밖에서는 잔뜩 무게 잡고 다니지만 이럴 때 보면 평범한 딸바보 아빠다.

"누가 팔불출 아니랄까 봐…. 없어요. 있어도 선화가 회복 마법 전문이잖아요."

"너도 나중에 애 낳아 봐라. 아무튼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가 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매정하시네. 그보다 사부, 지난번에 학교에 자리 하나 남는다고 했죠?"

"남는 자리는 창술인데?"

"애들 가르치는 건데 뭐, 조금 연습하면 되겠죠."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할 땐 선생은 돈도 얼마 못 벌고 마음대로 외출도 못 해서 답답하다고 때려 죽여도 안 하겠다더니, 갑자기 왜?"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아무튼 마침 길드 계약 기간도 끝났고 선화도 계속 권유하기도 했고…. 가능하죠?"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32)

밥은 사 먹읍시다

알람 소리에 눈은 떴지만, 이불이 주는 안락함에 중독됐는지 일어나고 싶지 않다.

약속만 없었다면 계속 누워 있었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방학 후에 계속 사부가 있는 포탈에서 지내다 보니 약간 불편했는데, 샤워를 하고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몸을 닦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어제 식사를 마치고 헤어진 후 지난번에 왔었던 호텔에 왔다.

결제할 때까지만 해도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호텔은 호텔이다.

아침 먹고 개학 전까지 연장해야겠다.

주말마다 사부에게 들르긴 할 거지만 사냥을 계속하는 이상 서울에서 지낼 곳이 필요하니까.

학교 기숙사도 이용할 수 있지만 너무 외진 곳에 있다 보니 교통이 불편하다.

그러고 보니 옷도 몇 벌 안 챙겨 왔는데, 이따가 사냥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좀 사야겠다.

차도 사야 할 텐데.

돈 나갈 곳이 많다고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고 식당에 내려왔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하나같이 깔끔하고 괜찮은 게 학교 기숙사 밥도 잘 나오는 편이긴 하지만 역시 호텔은 못 이긴다.

로비에 들러 개학 전까지 연장하고 호텔을 나서 택시를 잡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차가 조금 막혔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다.

잠깐 기다리자 김 선생님과 이설 씨도 함께 도착해서 바로 차에 탑승했다.

"두 분 다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선화랑 같이 먹었어요. 신혁 씨는 식사하셨어요?"

"네. 저도 먹었습니다. 같이 드셨으면 일찍 만나셨나 보네요."

"아, 어제 이설이가 저희 집에서 잤거든요."

"그랬군요. 그런데 저건 뭔가요?"

차 뒤에 어제는 못 봤던 꽤 긴 쇠봉이 여러 개 보인다.

하나는 날도 달렸는데 조립식 창 같다.

"아, 그거 제 거예요. 오늘부터 창을 좀 써 보려고요."

운전을 하던 이설이 대답을 한다.

뭐지?

원작에서 홍이설은 단 한 번도 창을 쓰지 않는다.

본인 특기도 박투술이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도 박투술이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웬 창?

"이번에 우리 학교 창술 선생 TO 하나 나왔잖아요. 설이가 거기 지원할 거래요."

나에게 패배하고 그만둔 정 선생 자리를 말하는 것 같은데, 박투술 선생이 아니라 창술 선생이라니….

원작이 바뀌었다.

내가 뭐 실수한 게 있나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없다.

딱히 창을 권한 적도 없고.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그러게 말이에요. 자기 전문분야도 아닌데. 그리고 제가 작년부터 계속 학교 오라고 꼬셨는데 절대 안 한다고 그랬거든요. 근데 어제 갑자기 아빠한테 학교 가고 싶다고 했다네요."

"그게… 길드 계약 기간도 끝났고 두 분 보니까 학교생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방학 때 쉬면서 월급도 받고."

확실히 방학이 메리트이긴 하지만 길드에 속해서 돈 버는 게 더 낫지 않나?

예전에 학교에서 인터뷰했을 때 헌터들보다 조금 적게 번다고 말을 했었지만 실제로 사냥을 해 보니까 조금이 아니라 차이가 어마어마할 것 같다.

A 랭크 헌터도 선생이 되면 각종 수당을 다 합쳐도 월급 천만 원 근처밖에 안 된다고 들었는데, 당장 어제 하루만 포탈에서 사냥으로 3,400을 벌었으니까.

물론 오우거라는 뜻밖의 수익에 교사라 세금을 10% 덜 떼기도 했고 80%를 내가 먹어서 그런 거긴 하지만, A 랭크 헌터면 한 달에 1억 이상은 가볍게 벌 텐데.

솔직히 나도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주인공과 친분을 쌓으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면 학교 때려치우고 사냥이나 주야장천 다녔을 것 같다.

"전문분야가 아니면 힘들지 않아요?"

"창을 쓰는 헌터들이 조금 더 유리하긴 하겠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창술이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되겠죠."

"임용 시험이 쉬운 게 아닌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A 랭크 헌터 가산점도 있고 어차피 이번 학기에만 임시로 하는 거니까. 하다가 적성이 맞는 거 같으면 내년에 다시 시험 보고 박투술로 전환할 거야."

홍이설이 창술 선생이 되면 미래가 바뀔지도 몰라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 * *

"입금했으니까 다들 확인하세요."

"들어왔네요."

"확인했어요."

오전에 배정받은 포탈에서는 언데드 몬스터가 나왔다.

이미 죽어 있는 놈들이다 보니 어지간한 상처로 죽지 않아 까다롭다.

게다가 사체도 돈이 별로 안 되는 데다 망령 계열은 마법이나 오러가 아니면 아예 피해를 줄 수 없어 시간만 잡아먹고 돈은 안 되는 소위 거지 몬스터다.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김 선생이 빛 속성 인챈트 마법이 가능해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끝났다.

"다음 포탈은 시흥시라 거리가 있네요. 도착하면 점심때가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저는 점심 싸 왔는데."

"저도 같이 준비했어요."

어?

"미리 말을 해 주셨으면 저도 준비해 왔을 텐데…. 저는 그럼 근처에 편의점이라도 나오면 거기서 세워 주세요."

다들 도시락을 준비할 거면 나한테도 가져오라고 말을 하던가….

자기들끼리만 싸 오고 너무하다.

어제도 느꼈지만 둘이 너무 친하다 보니 나만 소외되는 느낌이다.

"네? 강 선생님도 같이 드실 거라 생각하고 준비했는데요? 뭐 따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내 것도 있다고?

전혀 예상 못 했다.

학창 시절 소풍을 갈 때도 항상 돈 주고 김밥을 사 갔고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친구들도 한 번도 도시락 같은 건 싸 준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당연히 두 분 것만 준비한 줄 알고…."

"에이, 강 샘, 설마 우린 한 팀인데 강 샘만 따돌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 것만 싸 올 리가 없잖아요."

"저희가 그렇게 매정한 이미지였어요? 너무하시네."

"아… 아닙니다."

감동이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차에서 먹긴 좀 그렇지 않아?"

"아까 오다가 봤던 공원 하나 있던데. 차에 돗자리 있으니까 거기서 먹는 거 어때? 강 선생님도 괜찮죠?"

"저는 어디든 좋습니다."

차를 타고 약간 이동해 공원에 내렸다.

양해를 구하고 잠깐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왔는데 깔끔한 하늘색 돗자리에 놓여 있는 알록달록한 도시락 통을 보니 마치 피크닉을 온 기분이다.

"마실 거라도 사 올까요?"

"아침에 같이 챙겼으니까 괜찮아요. 얼른 앉으세요."

크으, 마실 것까지 미리 준비해 오다니 어제 호의를 베푼 보람이 있다.

"아,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아서 도시락 통을 열었다.

4단 도시락은 각각 김밥과 주먹밥, 유부초밥, 과일이다.

그런데 어째 주먹밥과 유부초밥은 김밥에 비해 양이 많이 적다.

"주먹밥이랑 유부초밥은 선화가 만들고 김밥은 제가 만든 거예요."

"아침에 만드는데 아빠가 계속 집어 먹어서 양이 별로 없네요."

"이 정도면 충분한데요. 다 너무 맛있어 보이네요. 잘 먹겠습니다."

가장 먼저 겉에 김가루가 붙어 있는 주먹밥부터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켁!"

"여기 물 드세요. 안 뺏어 먹을 테니 천천히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급하게 먹어서 그런 게 아니다.

이게 도대체 뭐지?

무슨 소금을 통으로 들이부은 건지… 짜도 너무 짜다.

뱉으려다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물을 잔뜩 머금고 씹는데 안쪽에서는 단맛이 무지하게 올라온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어 내용물을 살펴보니 웬 갈색이 보인다.

설마 이거 초콜릿인가?

"어떠세요? 우리 아빠는 맛있다고 하던데 강 선생님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이게 맛있다고?

교감 선생 미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하하, 조금 독특하네요."

어떻게 삼키긴 했지만 두 번 먹기는 싫어 일단 주먹밥을 내려놓고 유부초밥을 집었다.

유부초밥 같은 건 보통 제품으로 나오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한입에 털어 넣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왠지 신 냄새가 과할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혀가 아릴 정도로 시다.

'4배 식초'를… 아니, 이건 '16배 식초'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게다가 밥은 아까 주먹밥에 들어간 밥인지 시고 짜고 아주 대환장 파티가 따로 없다.

"괜찮죠? 우리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게 제가 만든 유부초밥이에요."

어떻게 이런 걸 좋아할 수가 있는 거지?

어쩌면 교감이 S 랭크 헌터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음식들로 단련을 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하…. 교감 선생님 참 좋으시겠어요."

"말도 마세요. 매일 하기만 하면 옆에 와서 다 주워 먹는다니까요. 오늘도 아빠가 다 먹으려고 하는 거 강 선생님 드린다고 말려서 겨우 챙겨 왔다니까요."

이제 보니 교감은 미각이 이상한 게 아니라 딸의 요리 실력을 알지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희생하는 길을 택했던 것 같다.

이놈의 영감탱이… 감추려면 끝까지 감출 것이지.

나는 당해도 괜찮다는 건가?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할까 하다가 괜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참았다.

맛은 괴팍해도 생각해서 싸 온 거기도 하고, 혹시 교감이 보복할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다행히 홍이설이 만든 김밥은 정상적인 김밥이었다.

"왜 김밥만 드세요?"

이 정도면 일부러 엿 먹이려는 거 아닐까?

딱 보면 모르겠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데, 하아… 참자.

"아, 다른 건 조금밖에 없잖아요. 이설 씨도 드시고 김 선생님도 드셔야죠."

"저는 유부초밥이랑 주먹밥 원래 안 좋아해서 안 먹어요."

아니, 홍이설 너 그러는 거 아니지.

그럼 이걸 누가 다 먹으라고….

"이설이가 원래 입맛이 좀 까다롭거든요. 저는 아침에 많이 먹었으니까 강 선생님 다 드셔도 돼요."

웃으며 말하는 김 선생이 악마로 보인다.

오후에 사냥도 해야 하는데… 더 먹으면 문제가 생길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말을 하려는데 마침 김 선생이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선화 오면 다 먹었다고 하죠."

"네?"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이설 씨는 비닐봉지에 주먹밥과 유부초밥을 전부 집어넣더니 꽁꽁 싸서 쓰레기통에 그대로 집어넣어 버린다.

김 선생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말리지 않았다.

아니, 이설 씨가 안 그랬으면 내가 버렸을 거다.

"괜찮으세요? 선화 입맛이 원래 조금 특이한데 어릴 때부터 교감 선생님이 계속 맛있다고 해 주셔서 진짜 자기가 요리를 잘하는 줄 알아요."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알고 계셨으면 아침에 좀 말리시지 그러셨어요."

"일어나 보니 선화가 이미 준비를 다 해 놓은 상태라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김밥이라도 급하게 준비한 건데…."

"그렇게 된 거군요. 김밥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정말요? 사실 오늘 처음 해 본 건데… 감사합니다."

솔직히 엄청나게 맛있는 건 아니고 평범했지만, 주먹밥과 유부초밥이 워낙 최악이었으니까.

칭찬에 약한 타입인지 이설 씨 얼굴이 붉어졌다.

"신혁 씨, 그런데 다음 주 월요일은 무슨 일로 쉬는 거예요?"

연수 이론 시험 때문인데 어제는 포탈 문제로 다투느라 제대로 설명을 못 했다.

"아, 월요일에 신입 교사 연수 이론 시험이 있어서요. 2주 뒤에도 실기 시험 있어서 한 번 더 쉬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교사 되고 나서도 시험을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공부는 좀 하셨어요?"

"아니요. 이론은 김 선생 말로는 다 아는 것들 확인하는 거라고 해서 따로 준비 안 했어요."

이론은 강신혁의 기억도 있고 학교 실무에 관한 것들이라 크게 걱정은 안 된다.

문제는 실기지.

실기 시험은 연수 대상자들끼리 팀을 이뤄 포탈 클리어를 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팀은 정해 주는 게 아니라 연수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짠다고 하는데, 나랑 같이 팀을 할 사람이 있을까?

차라리 혼자가 편한데… 일단 그때가 되어 봐야 알 것 같다.

학교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김 선생이 돌아왔다.

"어? 벌써 다 드신 거예요?"

"강 선생님이 너무 잘 드시더라고."

전부 쓰레기통에 버려 놓고 아주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아, 생각 없이 계속 집어먹다 보니…. 죄송해요, 선화 씨도 드셔야 하는데."

김 선생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살아야지.

"저는 괜찮아요. 아직 김밥도 많이 있고. 과일도 있으니까요."

"그래. 강 선생님 입맛에 맞으셨나 봐. 김밥 먹어."

"입맛에 맞으셨으면 내일도 싸 올까요?"

겨우 넘어가니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

"네? 아니, 번거로우실 텐데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여자가 진짜 나를 죽이려고 그러나?

"맞아. 사 먹으면 편하잖아."

홍이설도 거든다.

"밖에서 매번 사 먹으면 몸에 안 좋잖아요. 만드는 것도 얼마 안 걸려서 괜찮아요."

"정말 괜찮습니다."

"맞아. 계속 도시락 싸 오면 사부가 막 질투할 것 같은데?"

"에이, 우리 아빠가 애도 아니고 무슨 질투를 해. 알았어요."

죽다 살아난 기분이다.

"그래도 가끔은 싸 올게요."

김 선생을 파티에서 내보내고 다른 멤버를 구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