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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치사한 놈들! 정말 이렇게 치사한 놈들인 줄 상상도 못 했군."

풍천교주는 화를 참지 못했다.

"자넨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족쇄 사내는 그저 말없이 음뢰종만 쳐다보고 있었다.

"말 좀 해보라고."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든 우릴 돌려보내려 할 것을요."

"했지, 그래 했지. 한데 이런 더러운 수법을 쓸 줄은 몰랐지. 이게 말이 돼? 먹는 거로 장난을 쳐?"

조금 전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외원에서 대기 중인 수하들에게 제공되는 밥과 찬이 달라졌다고 한다. 양이 줄고 질도 떨어졌다. 질 좋은 고기는 비곗덩이로, 술은 싸구려로.

"누가 믿겠어? 천마신교에서 치사하게 먹는 거로 장난질을 한다는 걸. 차라리 독을 먹이라고 해!"

심지어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풍천교의 주력인 십대마인과 일백의 혈나군들이었다. 그들에게 부끄러워서라도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치사한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죠. 그리고 정확히는 천마신교가 아니라 마불의 짓입니다. 이쪽 교주는 힘으로 쫓아내면 내지,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죠."

"그 쪼그만 놈이 이 정도까진 아닌데."

"상황이 그를 밀어붙인 거죠. 교주님을 설득하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어떻게든 교주님을 돌려보내야 다른 마존들에게 체면이 설 테니까요."

"이건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건 자신의 체면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천마신교가 자신을 홀대하는 모습을 수하들에게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교주에게 따지러 가야겠다."

"가서는 뭐라고 하시려고요? 밥 내놓으라고 할 겁니까?"

"해야지, 당연히 해야지. 네 빌어먹을 수하 놈이 내 수하 밥 다 훔쳐 갔다고 소리쳐야지. 세상에 이렇게 치사한 짓은 처음 봤다고 천마전 바닥을 뒹굴면서 일러바쳐야지."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물론 풍천교주는 그러지 못했다. 분노의 화살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대체 이공자 이 허풍쟁이는 뭐 하고 있는 건가? 자기가 방법을 찾아오겠다면서?"

"느긋하게 기다리십시오."

"지금 느긋할 수 없으니 하는 말이지."

"교주를 존경하는 사람은 굶어도 존경할 테고, 교주를 싫어하는 사람은 세 끼 모두 진수성찬을 먹여도 싫어할 겁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일이란 게 그렇게 생각처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네. 날 존경하는 사람은 '이렇게 존경하는데도 날 굶겨?' 하면서 섭섭해할 테고, 날 싫어하는 사람은 '이 한심한 놈이 이런 꼴 당할 줄 알았다'며 다른 사람들을 이간질할 거네."

"그 모든 풍파를 버티는 사람만 남겨서 쓰십시오."

"젠장! 망할!"

그때 밖에서 청선이 찾아왔다고 기별했다.

풍천교주가 놀란 얼굴로 족쇄 사내를 쳐다보았다.

족쇄 사내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안으로 들어온 청선이 정중히 예를 올렸다.

"존경하옵는 새외지존을 뵙습니다. 저는 서환진의 청선이라 합니다."

"익히 들어서 알고 있네. 서환진 제일의 귀술사라고?"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미리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네. 이제라도 와주니 고맙네."

"언젠가 돌아가신 사부님께 들었습니다. 제가 배운 무공의 뿌리는 혈교에 있다고요."

"맞네, 그런 의미에서 우린 동문이라 할 수 있지. 그래, 마존에게 무공은 모두 전수받았는가?"

"아쉽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를 제자로 거둬주십시오!"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를 쳐다보며 전음을 보냈다.

―이공자는 미친놈이다.

―이래섭니다. 우리가 끝까지 이공자여야 하는 이유가요.

―젠장! 내 신물 받으러 올 것 생각하니 벌써 속이 불편해서 체할 것만 같네.

―이참에 그 좁은 속 좀 키웁시다.

―닥쳐!

속으론 이런 대화가 오갔지만 풍천교주의 표정은 더없이 근엄했다.

"새외 마공이 중원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내가 진정 바라는 바네. 다만 자네 교주가 우리의 이 귀한 연을 허락할지 모르겠군."

"본교에는 사제지간을 맺는 것과 관련해서 어떤 제약도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서환진이 강해지는 일이니 교주님도 반대하진 않으실 겁니다."

"자네는 괜찮나? 자네의 사형이 이 일을 문제 삼을 텐데."

"가르쳐주십시오. 사형을 이길 방법을."

풍천교주가 나직이 그녀에게 말했다.

"자네 사형이 죽일 수도 있네."

그러자 청선이 고개를 들어 풍천교주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의 눈빛은 남자에게 휘둘리는 수동적인 여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사우종과 몸을 섞던 순진한 그녀와 지금 이 자리의 그녀는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사우종은 알지 못했다.

잠자리에서 고분고분한 모습은 극히 그녀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은 애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것은 절대 양보하지 않는 그녀의 지독한 자기애(自己愛)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신이 가지지 못한다면 파괴해버리는 지독한 여인임을 알지 못했다. 사우종은 아무것도 몰랐다.

청선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제가 죽을 수는 없잖아요?"

그녀의 눈빛에서 악녀들만이 낼 수 있는 원색의 광기를 읽은 풍천교주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차기 섭혼마존이 기대되는군."

제70회 꼼꼼함의 차이가.

청선은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고 정식으로 풍천교주의 제자가 되었다.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서환진을 비롯한 교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녀를 욕하는 이들보다 좋은 선택이었다며 지지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명분이나 체면을 차리다 마공이 약한 상태로 마존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차라리 풍천교주에게 제대로 배워 마존 자리에 오르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역시 본교의 마인들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더 추구하는 이들이었다.

특히 반발이 심하리라 예상되었던 서환진의 귀술사들이 더욱 그녀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일제자 양도는 난감해졌다. 청선이 외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으로 여론을 악화시키려던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이제 누가 후계자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자네가 보긴 어떻든가?"

풍천교주가 궁금해하는 대상은 청선이었다.

"사람은 교주가 잘 보지 않습니까? 자기 판단을 믿으십시오."

"보기보단 강단이 있어 보이던데."

"저도 비슷하게 봤습니다."

"한번 키워볼 만하겠어."

애초에 제자로 삼고 싶어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중원에 남을 빌미로 삼은 것인데, 막상 청선을 보자 그녀가 풍기는 묘한 악심이 마음에 끌렸다.

"나란 인간은 어쩔 수 없나 보네. 나쁜 년 보니까 끌려."

"조심하십시오. 사부도 잡아먹을 야심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좋다는 거야."

풍천교주가 씩 웃자 족쇄 사내도 옅게 웃었다.

"요즘 자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제가요?"

"욕도 잘 안 하고."

무엇보다 시공이환술로 새로운 공간을 열어달라는 부탁을 며칠째 하지 않고 있었다.

"심심하시면 욕 좀 해드릴까요?"

"천만에! 지금이 좋아."

하지만 내심 마음 한편에는 족쇄 사내의 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쪽 교주는 잠잠하네."

아무래도 풍천교주는 천마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이공자가 부친을 만나 이야기를 끝냈을 테니까요."

"거기까지 신경 썼을까?"

"썼을 겁니다. 성공과 실패는 꼼꼼함의 차이에서 오는 법이죠."

"자넨 왜 이리 이공자에게 호의적인가? 평가도 후하고. 돈이라도 받아 챙겼나?"

족쇄 사내가 고개를 들어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그게 싫습니까?"

"싫네."

"그럼 새외로 돌아가십시다. 이공자가 없는 곳으로 가면 호의를 보일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풍천교주는 짜증을 내려다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얄밉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굳이 이곳까지 철그렁철그렁 족쇄에 묶어 데려온 사람도 자신이었으니까.

"말씀드렸죠? 교주님은 다 가질 만큼 복이 많은 분이 아니라고요."

"젠장. 그 이야기 좀 그만! 박복하다는 얘길 왜 자꾸 하나?"

"진짜 박복한 길로 자꾸 방향을 틀려니 드리는 말씀이지요."

"한마디를 안 지지."

그때였다. 수하가 와서 새로운 사실을 보고했다.

"외원에 있는 우리 무인들에게 숙수들이 와서 요리를 해줬습니다."

"숙수? 어느 숙수들이?"

"이공자가 보낸 숙수들이랍니다. 최고급 재료로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갔습니다."

그 말에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건가? 자네가 말한 꼼꼼함의 차이란 것이?"

족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합니다. 말은 했지만, 저도 이 정도까지 챙길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어쩌면?"

"마교에, 아니 무림에 불세출의 인물이 탄생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린 그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하고 있고요."

"고작 숙수를 보냈다고?"

"네. 도둑도 보내고 제자도 보내고 숙수도 보내고. 맞을 겁니다. 역사의 순간."

격정적인 족쇄 사내와는 달리 풍천교주는 심드렁했다.

"그 역사의 순간에 난 신물을 다 빼앗기고 있지."

이미 그런 이유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족쇄 사내는 담담하게 풍천교주를 위로했다.

"관점을 바꿔 보십시오. 교주님의 신물이 큰일을 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고요."

"전에도 말했듯 그 큰일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지 않나? 나는 누군가의 성공에 도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네."

"주인공이 되려면 이공자처럼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공자처럼 노력해야 하고요."

"나도 노력하잖아?"

"제게 일일이 다 물어보는 노력요?"

풍천교주는 반박하지 못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일을 족쇄 사내에게 맡겨서 처리했으니까.

끝내 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풍천교주의 모습에 족쇄 사내의 표정과 어조가 바뀌었다.

"교주야."

풍천교주는 이 순간 그의 반말이 너무나 반가웠다. 이러다 영영 반말 안 해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그의 하대가 듣기 좋았다.

"나도 너 노력하는 것 안다."

"내가 무슨 노력을 한다고. 자네 말이 맞네."

"아니다. 욕심을 참아가며 신물을 내주는 것도 네 노력이다. 신물을 모아 온 것도 네 노력이고 지켜온 것도 노력이다. 욕심부리는 것도 네 노력임을 나는 잘 안다. 누군가 피투성이가 된 채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빠져나오는 노력만큼이나 네 노력도 힘들다는 것, 나는 안다."

풍천교주의 마음이 울컥했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이 사람에게 이렇게나 위로가 된다는 것을 요즘에 와서야 많이 느낀다.

그렇다고 족쇄 사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애써 속마음을 숨기며 풍천교주가 버럭버럭했다.

"싫다! 내 신물 내주기 싫다! 망할 이공자, 오기만 해봐라. 당장 꺼지라고 할 거다. 꺼져라, 이공자! 내 호통에 귀청 나갈 테니 귀 막아. 알겠어?"

그때 밖에서 수하가 말했다.

"이공자가 도착했습니다."

풍천교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미친 이공자 같으니라고! 정말 이런 순간에 등장한다고?"

족쇄 사내가 오랜만에 소리 내서 웃었다. 그가 귀를 막으며 정중히 말했다.

"자, 전 준비됐습니다."

* * *

"잘 오셨네. 이공자."

풍천교주가 기분 좋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신물 주는 날이면 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는데, 오늘은 좀 편안해 보였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진리라도 터득한 것일까?

잠시 후 수하가 술상을 내왔다.

"오늘은 같이 한잔하세."

"좋습니다."

"한잔 받게."

나는 술을 받았다.

"자, 마시세."

그와 기분 좋게 건배한 후 술을 마셨다. 물론 내 입에는 피독주가 물려 있었다.

"나를 믿는 모습을 보니 기쁘네."

굳이 피독주를 뱉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혹시 자네 피독주를 물고 있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족쇄 사내가 전음을 보내 피독주를 물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음을. 역시 범상치 않은 사내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입에서 피독주를 뱉어냈다.

"맙소사! 언제 그걸 물었나?"

"술상 나올 때 물었습니다."

"표가 전혀 안 났는데?"

"연습 많이 했습니다."

"내가 주는 술에 피독주라니... 정말 너무하는군."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직 우리에게 사이는 없다고요. 교주님과 저 사이란 말은, 세상에 없는 말입니다."

"오늘도 내 귀중한 신물을 가져가기 위해서 와 놓고도 그런 소린가?"

"이 난장판 속에서 사이가 생기려면 신물을 몇 개 가져가느냐로 결정될 문제는 아닐 겁니다."

"지금 우리 사이엔 피독주만 덩그러니 있는 것처럼 말이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어설픈 사이보다 이렇게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확실한 관계가 더 나을 겁니다."

"정말 말로는 못 당하겠군. 누구처럼."

"네?"

"아니네."

나는 그 대상이 족쇄 사내임을 짐작했다.

풍천교주가 일어났다.

"자, 술맛도 떨어졌으니 신물이나 고르자고. 자, 어서 고르게."

"감사합니다."

신물을 고르기 전에 음뢰종으로 갔다.

"음뢰종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봐도 봐도 멋집니다."

사실 족쇄 사내를 가까이서 다시 싶어서였다.

음뢰종을 보다가 힐끗 남자를 쳐다보았다. 족쇄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화석처럼 앉아 있었다.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뭐요?'

나에게 전음을 보낼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가볍지 않은 사내다.

과연 이 사내와 대화를 나누게 될 날이 오게 될까? 그와 나의 운명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서 신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것저것 둘러보는 것처럼 굴었지만, 이미 나는 가져갈 것을 정해두고 있었다.

"이것으로 고르겠습니다."

이번에 내가 고른 신물은 두툼하게 말려 있던 붕대였다.

풍천교주가 인상을 굳혔다. 말 대신에 표정이 이렇게 욕했다.

젠장! 망할! 너는 어떻게 귀한 것들만 이렇게 빼가는 거냐?

"그게 뭔지는 알고 고른 것인가?"

물론 너무나 잘 알지만.

"모르겠습니다. 천이 감겨 있는 것이 뭔가 신비해 보였습니다."

"그건...."

풍천교주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치미는 화를 애써 가라앉힌 후 그것을 설명했다.

"극품천잠사(極品天蠶絲)라네. 검으로 내리쳐도 잘리지 않고 여러 겹을 감으면 검기나 검강조차 막는다고 알려진 천고의 보물이지. 팔이나 다리에 감아서 사용하거나 심장에 감아서 보호할 수도 있지. 그뿐만 아니네. 추위를 막아주는 효과에, 불에도 타지 않는다네. 무림에서 이 극품천잠사를 검기나 검강 없이 자를 수 있는 무기는 한 손에 꼽을 정도라네."

그 손에 꼽을 병장기에 내가 차고 있는 흑마검도 포함되었다.

"제가 식견이 짧아 이렇게 귀한 것인지 미처 못 알아보았습니다."

"못 알아보는데 왜 하필 이것을 골라? 대체 왜!"

"죄송합니다."

풍천교주는 아까워하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고는 그것을 내게 건넸다. 그의 손이 떨렸다.

"부디 잘 쓰게."

"네, 감사합니다."

놓지 않으려는 것을 억지로 빼앗듯 가져왔다.

나는 풍천교주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속마음이야 쓰리겠지만, 그는 항상 약속을 지키며 아낌없이 신물을 주었다.

내가 해준 일보다 과한 보상이지만, 이렇게 스스럼없이 받는 이유는 그의 꿈을 이뤄줄 생각이 있어서였다.

"교주님의 호의를 저는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이럴 때는 배포 있는 모습을 보여도 좋으련만, 풍천교주는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어깨너머로 족쇄 사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아까워하는데 교주가 신물을 순순히 내놨을 리는 없다. 앞서 혈신단도 그렇고, 이 극품천잠사도 그렇고. 족쇄 사내 덕분에 순조롭게 받은 것이 틀림없다.

내가 눈빛에 담아 보낸 마음은 이것이었다.

고맙소. 잊지 않겠소.

마치 알았다는 듯, 족쇄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화석으로 돌아갔다.

* * *

거처로 돌아온 나는 극품천잠사를 꺼냈다.

그것을 손목에 세 번 정도 감을 수 있을 길이로 풀어서 흑마검으로 잘랐다.

그냥도 잘리겠지만 깨끗하게 자르려고 내력을 주입해서 정성껏 잘랐다.

아버지의 천마검이나 내 흑마검과 같은 천고의 보검 앞에서야 천이지만, 다른 병장기들에게는 괴물이 되는 녀석이다.

나는 그것을 왼쪽 팔목에 세 겹으로 감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을 차고 있는 한 상대의 공격에 손이 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왼쪽 손목에만 감아둔 것으로 충분했다. 오른손은 흑마검이 막아줄 테니까. 이렇게 필요한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어떤 보의나 호신구보다 좋은 점이다.

나는 나머지 극품천잠사를 흑마검의 손잡이에 감았다. 다음에 쓸 일이 있을 때 사용할 것이다.

이걸 내 몸에 칭칭 감고 어디론가 뛰어들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그곳엔 지옥이 펼쳐질 테니까. 아니면 애초에 그곳이 지옥이거나.

제71회 모두와 작당 중.

혈천도마가 나를 찾아왔다.

항상 내 거처 근처에 큰 칼을 꽂고 기다리던 그였는데, 요즘은 내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온다. 집에 있으면 집으로 찾아왔고, 오늘처럼 집무실에 있으면 집무실로 찾아왔다.

내가 어른이니 네가 찾아와야지. 혈천도마에게 그런 권위주의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는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그런 사람이다.

"서환진의 삼제자가 풍천교주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 들었나?"

"네, 들었습니다."

"자네가 꾸민 짓이지?"

"어찌 새로운 일만 터지면 제가 한 일이라 여깁니까?"

"그래서, 아니야?"

"맞긴 합니다."

혈천도마는 그럼 그렇지 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대체 풍천교주와 작당해서 무슨 모의를 꾸미는 거냐?"

"거창하게 무슨 모의입니까? 그냥 그 사람 도와주는 겁니다."

"정말 풍천교가 중원진출을 하게 하려고?"

"안 됩니까?"

혈천도마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혹시 풍천교를 말씀하시는 거면 제겐 어르신이 계시지 않습니까? 마존과는 안 싸우신다면, 풍천교주라도 상대해 주십시오."

"그 사람, 우습게 보면 안 돼. 끌려오다시피 본교에 와 있지만, 그는 새외 무림을 이끄는 사람이다. 새외 무림이 발광하면 중원은 피바다가 된다."

혈천도마는 진지했고, 나는 그의 충고를 진심으로 받았다.

"명심하겠습니다."

풍천교주가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족쇄 사내가 떠올랐다. 그는 이 대단한 풍천교주를 조종하고 이끄는 사람이다.

"한데 왜 청선이냐?"

"그녀를 움직이기가 쉬웠습니다."

"청선이 앞으로 마존이 될 수 있겠느냐?"

"제가 볼 땐 일제자나 삼제자나 오십보백보입니다. 두 사람 누구라도 제대로 된 마존의 모습을 갖추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점만은 공감한다는 듯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어르신도 서 조사관 잘 키워두십시오."

"꿈 깨라고 해라."

"꿈은 제가 꾸고 있죠. 서 조사관은 그런 꿈 안 꿉니다."

"남 일 간섭은 그만하고 자네 일이나 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혈천도마가 내 팔목에 두른 극품천잠사를 보며 물었다.

"그건 뭔가?"

"멋으로 둘렀습니다."

"풍천교주에게 받은 거지?"

혈천도마는 대번에 이것이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못 보던 물건이고, 자네는 대가 없이 풍천교주를 돕지는 않을 테니까."

"일을 도와줄 때마다 보상을 바라면 너무 야박하잖습니까?"

"그래서? 안 받았나?"

"받았죠."

"야박한 놈!"

나는 웃었고 혈천도마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극품천잠사입니다."

"아! 이게 그것이구나."

"역시 아시는군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좀 잘라 드릴까요?"

내가 검 손잡이에 두른 극품천잠사를 당장에라도 풀려고 했다.

"됐다. 이 늙은 몸에 안 어울리는 물건이다."

"늙은 몸이라서 두르셔야 하지 않습니까?"

"일 없다."

그는 권위주의도 없고 물욕도 없다. 이럴 때면 정말 시화를 읽는 것을 즐기는 모습이 그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말고 또 받은 것 있나?"

"혈신단도 받았습니다."

나는 혈천도마에게 솔직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가능하면 그럴 작정이다. 이 솔직함이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 수 있는 열쇠가 될 거라 믿고 있으니까.

"혈신단?"

내가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했는지 혈천도마는 혈신단에 대해 인식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의 표정이 이런 순서로 바뀌었다. 혈신단이 뭐였더라? 혈신단? 어? 설마 그 혈신단? 이런 미친! 혈신단이라고?

깜짝 놀란 혈천도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외제일영단?"

"네."

"풍천교주가 그걸 내줬단 말이냐?"

어찌나 놀랐는지 혈천도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어디에 있느냐?"

"제 배 속에 있습니다."

"맙소사! 이제 내공은 나를 넘어섰겠구나."

나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실 혈신단을 복용하기 전에도 마정단과 천외신단으로 마존들과는 쌍벽을 이룰만한 내공이었다. 이제 혈신단까지 복용했으니, 내공으로는 그들을 압도할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도 여전히 왼쪽 날개는 어르신이십니다."

"흥! 천외신단보다 효과가 좋은 영단에 극품천잠사까지 받았으니 왼쪽 날개 따윈 떼어버리겠군."

"제 왼쪽 날개는 제 몸과 하나라서 교체할 수 없습니다. 떼어내면 제가 죽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몸이 죽으면 날개는 새 몸을 찾아 날아갈 거다."

"더 좋은 몸을 만나기를 기원하죠."

농담처럼 오간 말이었지만 어느새 혈천도마의 표정은 풀어져 있었다.

"혹 방금 질투하신 것은 아니죠?"

"질투는 무슨! 견제다. 이렇게 해둬야 신물 좀 줬다고 내 자리를 넘볼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지."

"확인됐습니다."

"진짜 가네. 일 보게."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려던 그가 불쑥 말했다.

"난... 잠자리 날개라도 상관없네."

날개를 여러 장 붙여도 좋다는 뜻.

그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이런 포용력을 지녔으니 어찌 내가 혈천도마를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그가 나가려던 바로 그때였다. 수하가 들어와서 또 다른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일화검존께서 오셨습니다."

검존이 왔다는 소리에 혈천도마는 깜짝 놀랐다.

"날 만나게 하려고 불렀느냐?"

"갑자기 찾아오신 분이 어찌 그런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혈천도마가 창문을 열었다. 그곳으로 나가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

"너무 체통 없으십니다."

"날 보면 싫어할 거다."

여전히 일화검존과의 관계만큼은 어색하고 어려워하는 그였다.

"무슨 상관입니까? 언제 그렇게 남 신경 쓰셨다고요."

잠깐 창가에 서서 고민하던 혈천도마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일화검존이 안으로 들어왔다.

집무실에 혈천도마가 있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그녀가 깜짝 놀랐다.

"자네? 일부러 이 자리를 만든 건 아니겠지?"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두 분이 어찌 이리 똑같으십니까? 제가 두 분이 언제 오실 줄 알고 자리를 만듭니까? 두 분 다 기별도 안 주고 오셨으면서요. 따지려면 저 위에 계신 분에게 따지시지요."

그러면서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운명 아니겠습니까란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은 내 말뜻을 알아들었다.

일부러라도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은 두 사람인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나는 걸 보면, 정말 하늘이 그들의 화해를 주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 앉으시지요."

일화검존이 혈천도마와 마주 앉았다.

"선배님께선 어쩐 일이십니까?"

"한 가지 알려줄 일이 있어서 왔네."

그러자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 나누시게. 나는 가보겠네."

"함께 들어도 될 이야기에요."

혈천도마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한 그녀일 텐데, 이렇게 붙잡았다는 것은 우리 모두와 관련된 일이면서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과연 그녀가 밝힌 내용도 그러했다.

"마불이 나를 찾아와서 한 가지 부탁을 했네."

"무슨 부탁을요?"

"섭혼마존의 두 제자 중 일제자 양도를 지지해 달라더군."

새로운 마존을 뽑는 일은 전적으로 팔마존 소관이었다.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마존이 죽게 되면, 나머지 마존들이 추천을 해서 차기 마존을 정하게 된다. 결국 마존들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만 마존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

"전에 자네가 그랬지? 비무친구로서 우리 쪽 사람을 지지하면 좋겠다고."

"기억하고 계셨네요."

반면 혈천도마는 무슨 말인가 궁금해했다.

"비무친구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자넨 나 빼고 모두와 작당 중이구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르신이 제 첫 번째 날개신데요."

이번에는 일화검존이 물었다.

"날개라니?"

"어르신이 제 왼쪽 날개이십니다. 그리고 지금 오른쪽 날개를 간절히 찾는 중이지요."

나는 의도적으로 일화검존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른쪽 날개가 되어달라는 내 바람을 읽은 일화검존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자네는 누굴 지지하는 건가?"

"청선입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네. 마불과는 뜻이 다를 것 같았지. 좋아, 나도 청선을 지지하지."

마불과의 사이를 차치하고서라도 다른 마존의 부탁을 거스르는 일은 꽤 부담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흔쾌히 나를 지지하려 한다.

또한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것은 혈천도마와 함께 듣자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번 일은 두 사람 모두의 도움이 필요한 사안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지난번 사우종과 관련해서 도와준 일도 그렇고.

좋습니다, 선배. 우리 평생 비무친구 합시다.

심지어 그녀는 왜 청선인지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의미다.

그때 혈천도마가 내게 물었다.

"한데 그래봤자 우리 두 표 아닌가? 다른 마존의 표는 구했나?"

청선을 마존 자리에 앉히려면 일곱 마존 중 네 표가 필요했다.

"아직입니다."

"어떻게 하려고?"

나는 두 사람에게 정중히 말했다.

"두 분께서 각각 한 사람만 설득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청선이 마존이 되면 우린 뭐가 좋지?"

혈천도마의 물음에 나는 넉살 좋게 대답했다.

"두 분보다야 제가 좋지요."

"내가 좋아야지!"

"제가 좋은 것이 곧 어르신이 좋은 거죠."

물론 혈천도마는 부탁을 들어줄 거면서 괜히 너스레를 떠는 중이었다.

반면 일화검존은 흔쾌히 내 부탁을 받아주었다.

"자넬 위해 다른 마존들을 설득해 보겠네. 잘 되면 한 사람 정도는 청선을 위해 표를 던질 거네."

문득 그녀의 이런 호의가 단지 비무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큰 호의를 베풀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보며 혈천도마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가 그러니 내가 없어 보이잖아?"

딴에는 그녀와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던진 말이었는데, 일화검존은 정색하며 맞받아쳤다.

"원래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 아닌가요?"

순간 혈천도마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좋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식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들은 눈빛으로 싸웠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말리지 않고 충분히 감정을 소모할 시간을 주었다.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 어차피 서로를 죽일 일은 없으니까.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눈싸움의 승자인 일화검존이 코웃음을 쳤다. 다행히 갈등이 해소되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난 일화검존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마불 일을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존들을 설득해 주시려는 것은 더욱 감사하고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선배님."

"은혜는 무슨. 다음에 보세."

일화검존이 미소로 답하며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떠나고 곧이어 혈천도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가겠네."

풍천교주에게 신물을 받은 것도 그렇고, 일화검존과 비무친구니 하는 것도 그렇고. 괜스레 신경이 쓰일 법도 했는데 혈천도마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제겐 언제나 어르신이 최우선입니다."

"말만 번드르르하지."

내가 멋쩍게 웃자, 혈천도마도 피식 웃었다.

"검존이 저리 자신 있게 갔어도 다른 마존을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야. 마불 쪽에서도 부지런히 움직일 테니."

"어르신께서도 도와주십시오."

"마존들 사이에서 따돌림받고 있는데 되겠나?"

말은 그러했지만, 누구보다 든든한 뒷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각기 한 명씩만 설득하면 이쪽이 네 표를 만들 수 있다. 과연 어떻게 될지 결과는 나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냥 두 사람을 믿기로 했다. 도마도 검존도 모두 수십 년을 마존으로 살아온 이들이니까.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믿는다.

어쨌든 두 사람이 날 위해 쉽지 않은 일을 해주는데, 이 과실을 풍천교주에게 그냥 퍼줄 수는 없는 일.

나는 풍천교주의 거처로 향했다. 다만 이번 목적은 신물이 아니었다. 신물보다 더 귀한 것을 얻기 위한 첫 포석을 깔 작정이다.

제72회 너흰 뒷물결이라서 좋겠다.

풍천교주가 신물이 놓여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보고 또 보고, 눈을 감았다가 떠도 혈신단과 극품천잠사가 있던 자리는 비어있었다.

"보기 싫다. 완벽한 미녀였는데 앞니 두 개가 빠진 꼴이다."

풍천교주의 탄식에 족쇄 사내는 음뢰종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송곳니도 있고 어금니도 있습니다. 상대를 물어뜯을 수도 있고, 어금니 꽉 깨물고 각오를 다질 수도 있지요."

"신물이 사라질 때마다 자넨 신나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족쇄를 풀어주면 춤이라도 출 겁니다."

풍천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솔직히 두렵네."

"뭐가 두렵습니까?"

"이 모든 게 허망한 꿈이 되고 말까 봐. 깨고 났는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까 봐. 그때는 이런 후회를 하겠지? 대체 뭐에 홀려서 그렇게 다 바쳤을까?"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족쇄 사내가 고개를 들고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려서 오랜만에 자기 얼굴을 보여주었다.

"갑자기 왜 그러나?"

"이놈에게 홀려서 다 바쳤다고 보여주는 겁니다."

"미친놈."

사내의 말이 맞다. 지금 자신은 이공자에게 홀린 것이 아니다. 바로 저 족쇄 사내에게 홀린 것이다. 당당히 자신을 홀렸다고 말하면서, 파멸시키겠다고 웃으며 말하는 저 남자에게.

"어떻게 해야 청선을 마존으로 만들지?"

"마존들을 각개격파 해서 끌어들여야죠. 회유하고 설득하고, 포섭하고. 최소 신물이 두 개 이상은 들어갈 겁니다. 운이 나쁘면 한 개가 더 필요할 수도 있고요."

이미 족쇄 사내는 계산이 끝난 모양이었지만 풍천교주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졌다.

"이공자에게 투자하란 말을 그렇게 돌려 말하는 거지? 자넨 끝까지 이공자니까."

"언제까지 이공자에게 기댈 겁니까? 남자답게 직접 움직이고 처리하세요. 마존들을 어떻게 공략하는 것이 유리한지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비꼬지 말라니까!"

"맞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십시오."

"그게 군사가 할 말인가?"

풍천교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철그렁, 쇠사슬 소리가 났다.

세상에 어느 군사가 이런 족쇄를 차고 있느냐는 무언의 항의에 풍천교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절 군사라고 생각하시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냥 있으세요. 때론 가만히 있을 때 최고의 성과를 얻기도 합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풍천교주가 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

"이공자가 찾아올 겁니다."

"그리고는?"

"청선을 마존의 자리에 앉히는 것을 두고 신물을 요구하겠지요."

"아무리 이공자라도 가능할까?"

"믿어야죠. 우린 이미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때 마당에서 수련 중이던 청선이 소식을 알려왔다.

"이공자가 방문하셨습니다."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고 동시에 감탄했다. 족쇄 사내의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양반은 못 될 놈이군."

"우리가 항상 이공자 생각에 이공자 이야기만 해서 그렇습니다."

"그만 이야기 하라고! 그만 편들라고! 네 주인은 나다, 나!"

"그러길래 누가 장강의 앞물결이 되라 했습니까?"

장강의 앞물결이란 말에 풍천교주의 마음이 철렁했다. 족쇄 사내는 별 뜻 없이 그냥 한 말이겠지만, 풍천교주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에 떠밀려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는 기분을 느끼는 요즘이었으니까.

"그래, 너흰 좋겠다, 장강의 뒷물결이라서."

중원행을 결정했을 때, 자신이 족쇄 사내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말 인생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구나.'

풍천교주는 예측 불가의 인생이 주는 낯선 긴장감을 처음으로 느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예측 가능한 순탄한 삶을 살아온 그였기도 했다.

* * *

풍천교주를 찾아갔을 때, 그곳에 청선도 함께 있었다.

마당에서 한창 수련 중이던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는 정중히 인사했다.

"이공자님을 뵙습니다."

섭혼마존이 살아 있을 때는 닭 개 보듯 무심한 관계였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녀는 자신을 지지할 외부 조력자들이 필요했고, 이공자이자 황천각주인 나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풍천교주님의 제자가 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청 소저.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 이공자님."

그녀는 모를 것이다. 일이 이렇게 흘러온 것은 내가 사우종에게 정보를 흘리는 것에서 시작되었음을.

"교주님께 알려드릴 소식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청 소저도 함께 들으시지요."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족쇄 사내가 고개를 슬쩍 들었고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지난번부터 우린 우리만의 방식으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마불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불이? 어떻게?"

"일제자 양도를 차기 섭혼마존으로 삼기 위해서 마존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젠장! 친구란 놈이 더하는군."

"마불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이상, 여기 청 소저가 마존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청선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존이 되기 위해 큰 모험을 한 그녀였다. 만약 풍천교주의 제자까지 되었는데도 마존이 되지 못하면, 결국 그녀는 풍천교주를 따라 새외로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이공자. 이 아이를 마존 자리에 앉힐 방법이 없겠나? 알다시피 이곳 천마신교에서는 내가 움직일 수 없어서."

"방법은 있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방법인가?"

"우리도 마존을 움직여야죠. 다행히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두 어르신이 제게 우호적이십니다. 두 분께 부탁드리면 어쩌면...."

"제발 도와주게."

"도와주세요, 이공자님."

풍천교주 만큼이나 간절한 것이 청선이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엄살 아닌 엄살을 부렸다.

"표를 주겠다는 마존들이 무엇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설령 일이 잘 풀린다 해도, 나는 도마와 검존 두 어르신들에게 큰 빚을 지는 셈이 되고요."

"나와 내 제자가 도움을 받지 않나? 그 공은 결코 잊지 않겠네."

"알겠습니다, 노력해보죠."

"고맙네. 자네 잠깐만 기다려주게."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는지 풍천교주가 청선을 내보냈다.

"너는 나가서 수련하거라."

"네, 사부님."

청선이 내게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갔다. 나를 향한 그녀의 눈빛에 간절함이 담겼다.

그녀가 나가자 풍천교주가 물었다.

"이번에는 뭘 원하나? 이번에도 신물이겠지?"

"아닙니다."

"아니라고?"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목숨밖에 없는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축복 같은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없다고?"

"네, 없습니다."

"정말인가?"

나는 확실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풍천교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결과가 나오면 제가 술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거기다 술까지?"

"귀한 신물을 두 개나 주셨잖습니까? 이기든 지든 한잔하시죠."

"어디서?"

"여기서 드셔야겠죠. 신물이 도난당한 상태에 교주님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모두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요. 제가 술과 요리를 준비해오겠습니다."

물론 그래서가 아니다. 족쇄 사내가 있는 곳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기왕이면 패배주가 아니라 승리주가 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천교주는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모르니 제자를 잘 가르쳐 두십시오. 청 소저가 일제자 양도와 비무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건 나도 염두에 두고 있네."

"그럼 이만."

그렇게 나가려다가 풍천교주에게 돌아섰다.

"참,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시공이환술로 만든 공간에서 하늘을 만들려는데, 구결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해서 한 번 더 해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앉아 있던 족쇄 사내 역시 흠칫 놀랐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그였는데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 시진 내로 만드는 데 성공해야 하는데?"

"이미 반 시진 내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뭐라고?"

풍천교주는 경악했다. 일전에 두 시진 만에 연다고 했을 때도 그는 믿지 못했다. 다음에 직접 보여준다고 했었는데, 벌써 반 시진으로 줄였다니 놀람은 당연했다.

"내게 보여주게. 그럼 알려주지."

"반 시진이나 기다리실 겁니까?"

"기다리겠네."

"좋습니다."

나는 곧장 구결을 외우며 시공이환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나고 우린 내가 만든 공간에 있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족쇄 사내도 그곳에 함께 데려갔다.

풍천교주도 놀랐고 족쇄 사내도 놀랐다. 하늘이 펼쳐지긴 했는데, 곳곳에 구멍이 생겨서 이상한 하늘이 되어 있었다.

잠시 그곳을 둘러보던 풍천교주가 내게 물었다.

"왜 하필 하늘부터 만든 건가?"

"하늘 보는 걸 좋아합니다. 보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아서요. 그럼 해설을 부탁드립니다."

"약속했으니, 가르쳐주겠네."

풍천교주가 시공이환술의 구결 중에서 공간을 채우는 부분에 대해 자세히 해설했다.

사실 나는 완벽하게 하늘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들 앞에서 내 실력 직접 보이려고 제대로 못 만드는 척 한 것이다.

풍천교주에게 해설을 듣고 다시 반 시진 후, 나는 푸른 하늘이 창창하게 펼쳐진 공간을 새로 열어서 두 사람을 더욱 놀라게 했다.

풍천교주를 위해 보여준 수가 아니었다. 족쇄 사내에게 내가 어떤 재능을 지녔는지 직접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자랑이냐고? 맞다. 의도한 잘난 척이다.

지난 생에서 내가 느낀 수장의 제일 덕목은 강함이었다. 누가 뭐래도 강함이었다. 내 모든 것을 믿고 맡겨도 좋을 만큼 강한 사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족쇄 사내의 얼굴을. 맑으면서도 쓸쓸한 그의 눈빛을.

여전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를 족쇄 사내라고 칭하고 있지만, 그는 족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와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 * *

검무극이 떠난 후 풍천교주와 족쇄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풍천교주였다.

"무공의 천재를 오늘 보았군."

"천무지체가 틀림없습니다."

"천무지체?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시공이환술을 익힐 수는 없겠지."

"이래도 아깝습니까?"

"뭐가? 시공이환술을 준 것? 당연히 아깝지. 이 아까움은 상대의 능력과는 무관한 것 아니겠나?"

"교주님이 전수한 무공으로 어떤 전설을 이룰지도 모르지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그 전설이 내가 아닌데 무슨 소용인가?"

"우리 교주님, 포기를 모르는 남자시군요."

"또 비꼬는군."

"아닙니다. 솔직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네니까! 자네 앞이니까 솔직하다고. 나 딴 데 가면 이런 물렁물렁한 사람 아니라고."

자신은 이렇게 곧잘 속마음을 밝히지만, 족쇄 사내는 단 한 번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풍천교주는 그 이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 족쇄를 풀어주지 않는 한, 영원히 그의 진심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족쇄를 풀어줄 일 또한 영원히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자넬 빼앗기지 않을 거야.'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족쇄 사내는 음뢰종에 새겨진 악귀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또 악귀가 말을 거나?"

"왜 그렇게 사느냐고 또 묻소."

"다들 그렇게 산다고 전하게. 이 악귀 놈아, 다들 그렇게 산다, 넌 뭐 대단하다고 그딴 걸 묻느냐?"

하지만 풍천교주는 알지 못했다. 이 순간, 사내는 전혀 다른 말을 악귀에게 건네고 있다는 것을.

제발 그만 편들고 그만 얘기하란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음뢰종 만큼이나 입이 무거워 보이는 악귀는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제73회 고수일수록 답은 간단하다.

풍천교주의 거처에서 나온 나는 이안을 찾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수련에 매진 중이었고, 비천검법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있었다.

"이안아."

"네."

"나중에 신독정화술을 받고 나면 언제라도 떠나도 좋다."

"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족쇄 사내에게 족쇄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풍천교주의 거처를 나오는데 문득 이안 생각이 났다.

어쩌면 그녀 발목에도 족쇄가 채워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족쇄가 어디 눈에 보이는 족쇄만 있겠는가?

화무기를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내 의지에도 보이지 않는 족쇄는 채워져 있었으니까.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사이에도 끊어내기 어려운 미움의 족쇄로 이어져 있다.

그럼 아버지는? 마치 음뢰종 앞에 묶인 족쇄 사내처럼, 어쩌면 아버지는 태사의에 묶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를 지켜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진 채로.

"네 인생은 네가 선택해도 좋다는 말이다. 귀영대주가 아니어도 좋다. 교를 떠나 중원을 여행하면서 살아라. 어딘가 평화로운 마을에서 숨은 고수로 살아도 좋다. 내게 무공을 전수받았으니, 그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다. 이미 너는 충분히 내게 할 만큼 했으니까, 마음 편하게 선택해도 된다는 말이다."

이안은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이 꼬리 하나를 더 꺼내야겠네요."

"무슨 뜻이냐?"

"도련님 옆에 있어서 저는 더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어요. 여행도 하루 이틀이고, 숨은 고수도 하루 이틀이죠. 저는 도련님 울타리에서 매일이 행복해요. 저 바보 아니에요, 제가 정말 싫었다면 목숨 걸고 야반도주했을 년이라고요. 대체 왜 이렇게 절 착하게만 보시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숨겨둔 꼬리는 몇 개나 남았냐?"

"한 일곱 개 정도 남았을까요?"

"충분하네. 그럼 수련해."

돌아서려다 괜한 걱정이 발동해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꼬리 하나쯤은 꼭 숨겨둬."

내가 살아보니 비장의 초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거더라.

그쯤은 말씀 안 하셔도 다 압니다,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그곳을 나섰다. 그래, 알면 됐다.

* * *

마불이 풍천교주를 찾아왔다.

그는 작정하고 왔기에 들어설 때 눈빛부터 달랐다.

"사람이라도 죽이다 왔소? 법문을 따르는 사람 몸에서 살기가 그득하오."

"내가 모시는 부처께서는 가끔 살계(殺戒)를 범하시기도 하지요."

"색불이 되셨다, 살불이 되셨다, 참으로 바쁘신 분이시구려."

마불은 자리에 앉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풍천교주와 거의 높이가 맞았다. 키와 관련해서 예민한 그였기에, 이런 식으로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그가 화가 많이 났다는 단적인 표현이었다.

"이보시오, 풍천교주!"

"왜 그러시오?"

"우리가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소?"

"잘 기억나지 않소."

"맞소. 잘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긴 인연인데, 내게 이럴 수 있소?"

"앉으시오. 우리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하지만 그는 앉지 않고 풍천교주를 노려보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대가 이런 속 보이는 수작을 부릴 줄은 몰랐소!"

"수작이라고 했소?"

풍천교주가 인상을 굳혔지만 애초에 마불은 작정하고 찾아왔다.

일화검존과 혈천도마가 움직여 다른 마존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마존들의 반응은 마불을 만났을 때 다르고, 혈천도마를 만났을 때가 달랐다. 그들은 모두 제각각에 남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어서 마지막 순간 누구 말을 들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불은 직접 풍천교주를 공략하려고 온 것이다.

"섭혼마존의 어린 제자를 꼬드겨 제자로 삼다니? 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냔 말이오!"

"내가 꼬드긴 것이 아니오. 그 아이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소."

"그럼 돌려보냈어야지! 어른인 당신이 돌려보냈어야지!"

"내가 왜 그래야 하오?"

"당신이 왜 본교 제자의 사부가 되려는 거요?"

"귀술사들이 익힌 무공은 혈교의 마공이니까!"

"그럼 당신 지금 혈교 소속이라 말하는 거요? 진심이시오?"

풍천교가 혈교의 후신이란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혈교를 언급하거나 연결해선 안 되었다. 혈교는 천마신교와 여러 차례 전쟁까지 벌였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풍천교주이기에 초대받은 것이다.

"지금 말꼬리를 잡는 거요?"

"신물을 도둑맞았다는 자작극을 벌일 때만 해도, 한편으론 이해하기도 했소. 한데 이번 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자작극? 지금 신물을 도난당한 친구에게 와서 자작극이라 하셨소? 난 그대만 믿고 이곳에 왔다가 신물까지 도둑맞았소. 책임은 못 질망정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니!"

"그 말을 우리가 믿을 거로 생각했소? 마존들은 바보가 아니오."

"당신을 보니 그리 똑똑한 것 같지도 않던데."

"뭐요?"

"당신, 살면서 똑똑하다는 소리 몇 번이나 들었소? 솔직히 말해보시오."

순간 마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자신이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남들에게 못된 말로 쏘아붙이는 것도, 그렇게 상대의 기세를 눌러서 대화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풍천교주가 자신의 열등감을 훅 찌르고 들어오자 마불은 강수를 선택했다.

"이보시오, 친구.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은 새외가 아니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 아니라 현실을 말해주는 거요. 나는 오랫동안 그대와 친분을 맺어왔지만 다른 마존들은 생각이 다르다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나는 알 수가 없소."

"당신들의 그 빈약한 상상력이라면 별것 있겠소? 당신 앞세워 날 죽이려 들겠지."

"차라리 그렇다면 우린 작별인사라도 할 수 있을 거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존들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그보단 훨씬 더 비참하게 당신을 처단하려 들 거요."

"자기들은 우습게 보지 말라면서 난 왜 이렇게 우습게 보는 거요?"

"우습게 보지 않소. 그저 당신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을 뿐이지."

"약점이라니?"

"만약 마존들이 당신을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직접 당신을 치는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을 거요. 대신 교주님과 당신 사이를 이간질해서 없애버리게 만들겠지. 감당할 수 있겠소? 우리 교주님."

천마를 두고 위협하자 풍천교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혈교를 싫어하는 천마는 확실히 풍천교주의 약점이라 할 수 있었다.

"한 며칠 신물 찾는 척하다가 그만 떠나도록 하시오. 제자는 파문하시고. 마존들에게는 내가 잘 말해두겠소."

"내가 거절한다면?"

마불은 대답 대신 피식 웃고는 나가버렸다. 그게 더 기분이 나빴는지 풍천교주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 방금 결심했네."

음뢰종 앞에 있던 족쇄 사내를 쳐다보며 풍천교주가 이를 갈았다.

"이공자를 반드시 천마로 만들기로."

* * *

"어쩐 일이십니까? 이공자님."

오늘도 여전히 총군사 사마명은 일에 파묻혀 있었다.

"군사님과 놀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저와 마가촌에 놀러 가시죠."

내 제안에 사마명은 깜짝 놀랐다.

"마가촌을요?"

"본교에서 제일 중요한 분이시지만 하루쯤 농땡이 쳐도 본교가 망하진 않을 겁니다."

"서글픈 비밀은 제가 일 년을 농땡이 쳐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그럼 비밀이 들키지 않도록 딱 두 시진만 놀다 오시죠?"

"좋습니다."

사마명은 고민하지 않고 서류를 덮으며 일어났다. 그는 내가 놀자고 찾아온 것이 아님을 짐작했을 것이다.

"군사님이 안 계시면 무림맹에서 당장 쳐들어올 겁니다."

"통천각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물러나기만 기다리는 머리 좋은 군사들이 줄을 서 있답니다."

"참 어려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네요."

우린 웃으며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를 데려간 곳은 풍류주점이었다.

"역시 이곳이었군요."

풍류주점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긴, 나에 대해서 낱낱이 알고 있을 테니, 당연히 풍류주점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혹시 실망하셨습니까? 마가촌 최고의 기루라도 갈까 기대하셨는데?"

다소 과한 농담이었지만 사마명은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가 볼까 기대했었지요."

"이래서 선입견이 무섭습니다. 다음 농땡이 때에는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하하하."

풍류주점에서 항상 앉는 이 층 자리에 사마명과 마주 앉았다.

주문받으러 온 조춘배에게 사마명을 소개했다.

"본교의 총군사십니다. 인사하시오."

"으허헉!"

조춘배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사마명에게 허리를 굽혔다. 요즘 높은 사람들의 방문에 정신이 없는 그였다. 각주에 마존에, 이제는 총군사까지. 특히 다른 어떤 사람보다 총군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달랐다.

"평소 존경하고 있습니다. 제일 존경하는 분입니다."

"제일 존경하는 분이 우리 아버지가 아니시네요?"

내 장난에 조춘배가 화들짝 놀랐다.

"그럴 리가요! 군사님을 두 번째로 존경합니다."

"아, 두 번째는 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사실은 각주님을 제일...."

그는 당황하는 척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농담입니다. 술부터 주시고 오늘 요리 맛있게 부탁드립니다."

"네!"

조춘배가 술을 내준 후 주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사마명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렇게 군사님과 단둘이 술은 처음이죠?"

"그렇습니다."

"진작 모셨어야 했는데, 제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간 많이 바쁘셨잖습니까?"

"바쁘기야 군사님이 바쁘시죠, 저는 항상 농땡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진짜 농땡이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요즘 내가 얼마나 부지런하게 돌아다녔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였다.

우린 이런저런 일상사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사마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주량이 셌다.

"술을 잘 드시는군요."

"그럼요. 저도 소싯적엔 말술이었습니다."

"의외인데요?"

술을 잘 마시던 사마명의 젊은 시절이 잘 연상되지 않았다.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사마명은 내가 놀자고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말을 돌리지 않고 본론을 말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좋은 군사는 어떤 군사입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사마명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내 그의 시선이 술잔을 향했다.

"젊은 시절에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졌었는데, 한동안 잊고 살았네요."

원래 이런 질문이 어려운 법이다. 누가 내게 좋은 무인은 어떤 무인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사마명의 대답은 바로 나왔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군사는 상대편 군사보다 더 똑똑한 군사입니다. 심오한 뜻 없고 그냥 말 그대로 상대 군사보다 똑똑한 군사, 이게 제 답입니다. 본교에서 저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어도 됩니다. 여기 이 주점에 있어도 됩니다. 이공자님이 저보다 똑똑해도 됩니다. 하지만...."

잠시 사이를 두고 사마명이 말했다.

"무림맹 군사보다는 똑똑해야 합니다. 사도맹 군사보다도 똑똑해야 됩니다. 그거면 됩니다."

정말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사마명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싱거운 대답이죠?"

"그래서 확 와닿았습니다."

"젊어서는 오히려 생각이 많아서 다른 답이 나왔을 겁니다. 조금 더 현학적인 답이 되었을 수도 있고요."

어떤 마음인지 짐작되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고수일수록, 답은 간단해지기 마련이다.

"현장에서 움직이는 무인들은 임기응변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작전을 바꿀 수도 있죠. 하지만 군사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번 작전을 잘못 세우면 전멸입니다. 차라리 자기 선택으로 죽으면 후회는 덜 되겠죠. 한데 상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후배 군사들에게 항상 말합니다. 필사적으로 더 똑똑해져라!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렸다."

나는 사마명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가 술을 곧잘 마신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듯.

사마명이 내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자, 이제 제가 질문할 차례네요."

사실 나는 좋은 군사가 어떤 군사냐는 대답을 듣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오늘 그와 만남은 이 질문을 듣기 위해서였다.

"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까?"

제74회 감을 믿으세요.

"요즘 제가 군사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마명과의 만남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저로는 부족합니까?"

사마명의 농담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나 저나, 한 욕심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아버지는 절대 사마 군사님을 제게 나눠주지 않으실 겁니다. 잘 아시잖아요, 우리 아버지?"

사마명은 미소로 대답을 무마했다.

"그래서 군사님께 조언을 구하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어떤 군사를 구해야 할지 여쭤보려고요."

잠시 사마명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이 없었다. 평온한 모습이지만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찾아온 의도에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 자신이 말해준 여파가 자신이나 본교에, 혹은 후계싸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온갖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좋은 군사의 조건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사실만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좋은 군사는 결국 좋은 선택을 한다.

내가 아는 한 사마명은 누구보다 좋은 군사였으니, 분명 제대로 된 답을 줄 것이다.

그가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셨고, 내가 술잔을 다시 채워줬을 때, 그는 생각을 마쳤다.

사마명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혹시 이미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닙니까?"

이 질문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사마명은 이미 족쇄 사내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내가 염두에 둔 사람이 그라는 것까지 그는 알고 있다.

그는 지금 내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풍천교의 그 사람을 군사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총군사 사마명이 풍천교의 군사 역할을 하는 족쇄 사내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요즘 도난 사건을 핑계로 풍천교주의 거처를 드나들던 내가 갑자기 이렇게 만나서 군사를 구하고 싶다고 말했으니, 당연히 그를 떠올렸을 것이다.

"고민하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아직 확신이 들지는 않습니다."

직접 묻는다면 그는 절대 대답하지 않을 것이기에, 난 눈빛으로 물었다.

―그를 내 군사로 삼아도 되겠습니까?

사마명은 나를 응시하며 대답을 아꼈다. 이제 오늘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나올 순간이었다.

"사람을 얻는 일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나긴 과정을 거쳐야만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죠. 그러니 지금은 이공자의 감을 믿으십시오."

감을 믿으라.

누구라도 해줄 수 있는 평범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조언은 의미가 달랐다. 내가 족쇄 사내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내 감을 믿으라 했으니 결국 그를 받아들이란 조언이었다.

족쇄 사내가 본교에 해가 될 사람이라면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명이 인정하는 능력이 되는 사람이란 의미.

사마명은 내 사람이 아니지만, 적어도 본교를 위한 충성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내가 천마가 될 가능성이 있는데 아무나 추천하진 않을 것이다.

"네, 제 감을 믿겠습니다."

내가 잔을 들자 사마명이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힘차게 건배했다.

오늘 그는 내게 자신의 감을 믿으란 말을 했을 뿐이다.

아버지든 마존이든, 후일 족쇄 사내를 내게 추천했다는 혹여 있을지도 모를 추궁에서 그는 자유로웠다. 심지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왜 그를 추천했느냐고 따질 수 없다. 사마명은 그저 감을 믿으라고 했을 뿐, 그를 추천하지 않았으니까.

우린 두 시진을 꽉 채워서 술을 마셨다.

이런저런 온갖 이야기를 다 나눴지만, 사마명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단 한 마디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 * *

며칠이 지났다.

겉으로는 다른 날과 다름없는 날들이었지만 마존들 사이에서 온갖 모략과 정치질이 난무한 며칠이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운명의 날이 되었다.

"지금 한창 투표 중이겠군요."

서대룡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지금 마존들의 회합을 통해 차기 마존을 결정하고 있었다.

혈천도마나 일화검존이 다른 마존을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따로 찾아가서 묻지 않았고, 그들 역시 내게 와서 말해주지 않았다.

"이번 일에도 각주님이 개입되어 계신 거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팔인데 모르는 일이 많아서 섭섭하지?"

"아뇨,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일에 제외된다고 절대 삐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저 모르게 진행하십시오. 각주님이 무림일통 하신 것도 다음날 소문 듣고 알아도 괜찮습니다!"

"자네 원래 이렇게 웃긴 사람인데, 처음에 나 볼 때 어두운 척한 거지?"

"이젠 저도 헷갈립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밝은 게 좋지. 그녀도 그걸 더 좋아할 거야."

"그녀라니요?"

"자네가 좋아하는 후배 말이야."

"저조차 잊고 있었든 그녀 말이죠?"

이제는 부인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듯 서대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주님 덕분에 우린 혼인하게 될 겁니다."

"그러려면 밥부터 먹어야지. 밥 먹자고 이야기해봐."

"바쁜 사람에게 뭐하게요."

"밥 먹는 거와 바쁜 게 무슨 상관이야? 처음부터 그런 부담을 가지니까 될 일도 안 되는 거다. 그냥 편하게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다가서야지."

살짝 서대룡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이 느껴졌다.

"자주 본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자주 보면 달라지지. 대신 너무 편한 사람은 되면 안 돼. 이게 제일 중요해. 만만하게 보이지 말 것!"

"만만하게 안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눈에 힘을 줘야 할까요?"

"맙소사!"

내가 한숨을 내쉬자 서대룡이 재빨리 말했다.

"농담입니다, 농담."

"아니란 것 아니까 더 슬프다."

"제가 그 정도로 감이 없진 않습니다."

그 진위를 밝힐 수는 없었다. 수하가 뛰어 들어와서 투표 결과를 보고한 것이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됐나?"

"무승부가 나왔습니다."

"무승부? 마존이 일곱인데 어떻게 무승부가 나와?"

"마존 한 분이 기권했다고 합니다."

"아, 기권도 있었군."

마존들이 누가 어디에 표를 던졌는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중 한 사람은 절반만 설득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제자와 삼제자가 비무를 해서 승부를 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내일 바로 진행한답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국 비무로 결정을 짓게 되었다. 차라리 서환진 입장에서는 잘 된 결정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쪽이 마존 자리에 앉는 것이 뒷말이 없을 테니까.

보고한 수하가 나가자 서대룡이 물었다.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왜 묻나?"

"저잣거리에 가서 내기도박이라도 걸게요. 박봉인생 이럴 때 인생역전 하는 거죠."

"청선에게 전 재산 걸어!"

"왜 삼제자죠?"

"삼제자에게 거는 게 아냐. 풍천교주에게 거는 거지. 아니, 정확하게는 풍천교주의 절박함에 거는 거지. 그는 자기 제자를 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어디가?"

"집 저당 잡히러 갑니다!"

서대룡이 문을 열고 나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안 말리세요?"

"어차피 자넨 내기도박 안 할 테니까."

"어떻게 아세요?"

"도박하는 사람은 일확천금이나 노리지, 자네처럼 현실을 바꿀 생각을 안 하거든."

서대룡이 씩 웃으며 문을 닫았다.

"저 진짜 갑니다. 눈에 힘주고 밥 먹으러 갑니다."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어슴푸레 땅거미가 내려앉은 연무장으로 무인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투표 결과를 들은 각각의 조직들은 내일 결과에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청선이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게 더 중요한 것은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

'고맙습니다, 어르신들.'

* * *

다음 날, 비무가 벌어졌다.

비무대 주위로 칠마존과 그의 수하들, 서환진의 귀술사들이 모두 모였다. 이번 대결은 마존들의 직속 수하들이 아니더라도 구경할 수 있도록 했기에 나와 풍천교주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만 아버지는 참석하지 않았다.

비무대 위로 일제자 양도와 삼제자 청선이 올라섰다.

그들의 등장에 서환진 귀술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죽은 섭혼마존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란 그들이지만, 앞으로 서환진을 이끌어나갈 차기 마존이었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 서환진의 운명이 갈라질 것이다.

기존의 강자였던 양도가 이길 것인가, 풍천교주에게 무공을 배운 청선이 이길 것인가?

칠대삼 정도의 비율로 양도가 이길 것으로 예상했다. 청선이 비록 풍천교주의 제자가 되었지만, 무공을 배울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양도와 청선 모두 시공이환술을 전수받지 못했기에 우린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세상 싱거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눈앞에서 사라진 후, 승패가 결정이 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을 테니까.

두 사람 사이에 정중한 인사는 없었다.

"비겁한 년. 사부 팔아먹은 년."

"지금 사부를 들먹이는 것부터가 사부 팔아먹는 짓이다. 이 멍청한 사형아."

싸늘한 욕설과 함께 비무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인생과 목숨이 걸린 싸움이란 것을 알았기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양도가 불러일으킨 시커먼 연기가 청선을 덮쳤고, 그녀의 섭혼술이 양도의 정신을 침입했다. 귀신 울음이 들렸고 귀신들린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서 검은 괴물이 튀어나와 상대를 끌고 들어가려 했고, 허공에서 튀어나온 붉은 손이 상대의 머리통을 뽑으려 했다.

마존이 아니라 그 제자들의 싸움이었음에도 생각보다 치열하고 강력했다. 기대를 안 했기에 다들 놀랐다.

콰콰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고, 마른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지켜보던 마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절망했다.

대체 저 수법을 어떻게 막아내지?

왜 정파에서 섭혼마존을 가장 까다롭게 여겼는지 이 제자들의 싸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수법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모두들 숨을 죽였다.

그들이 암기를 날려도, 바닥을 뒹굴어도, 아무도 무시하지 않았다.

날아오던 암기를 검은 악귀가 튀어나와 대신 맞았고, 바닥을 뒹구는 순간에도 손에서는 귀기가 발출되고 있었다. 바닥을 녹이는 핏물이 상대방을 덮쳤고, 아지랑이가 상대의 양팔을 뜯어내려 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구사했고, 싸움은 필사적이고 처절했다. 상대의 목을 물어뜯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지켜보던 마인들은 격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싸움 내내 들렸던 귀곡성이 그쳤다.

두 사람 주위를 휘감으며 미친 듯이 회오리치던 회색빛 연기가 사라지자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들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누가 이겼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양도였다.

"마지막 수법은?"

"새 사부님에게 배운 필살마기."

"난 네년이... 이런 쌍년인지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 잘 알겠네. 돌아가신 사부님보다 내가 더 뛰어난 섭혼마존이 될 거라는 것을."

청선이 그를 세워둔 채 귀술사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 서환진이 팔마 중 최고가 될 거다!"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파파파파팍!

일제자 양도의 입과 코, 귀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전신 혈맥이 가닥가닥 끊어진 채 바닥에 쓰러졌다.

청선이 일제자를 잔혹하게 죽여버릴 줄 생각도 못 했기에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것도 잠시, 그곳을 진동할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

청선은 천천히 칠마존이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정중히 포권했다.

"인사드립니다, 청선입니다."

그녀를 뽑은 이들은 웃고 있었고, 뽑지 않은 이들은 굳어 있었다.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대표로 소리쳤다.

"서환진의 새로운 주인이 탄생했다!"

그의 외침에 모두가 함성을 질렀다.

새로운 섭혼마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청선이 풍천교주를 쳐다보고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다음으로 나를 보면서 인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우종이 있는 쪽으로는 눈길 한번 보내지 않았다.

남몰래 스쳐 가는 눈빛이라도 기대했는지, 사우종은 매우 실망한 기색이었다. 언젠가부터 그의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제75회 한잔 받겠습니다.

조춘배와 함께 내원의 마지막 경계선을 넘었다.

앞서 두 번이나 했던 신분 확인과 몸수색, 그리고 조춘배가 챙겨온 여러 식자재를 다시 검사했다.

조춘배는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내원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지키는 무인들의 기세가 강해지고 무서워졌기에 그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그렇게 경계선을 벗어난 후에야 조춘배는 긴장을 풀었다.

"휴우, 살면서 이렇게 떨어본 적은 처음입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오. 내가 있잖소?"

"그럼요, 각주님 아니시면 제가 여기까지 올 수나 있었겠습니까? 처음입니다, 내원은."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은 풍천교주가 기거하는 거처였다.

"내원의 첫인상이 어떻소?"

"무서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무서워할 것 없소. 이 넓은 곳에 주인장만큼 열심히 사는 사람 몇 안 됩니다."

"어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조춘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기분 좋은 입꼬리는 손을 흔들 때마다 올라갔다.

"제가 무슨 복이 이리 많은지 이공자님이 제 주점을 찾아주시고, 그 덕분에 꿈에서도 못 뵐 분들에게 요리를 대접하고, 이렇게 내원까지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오늘 조춘배를 데려온 이유는 풍천교주와 술을 마실 때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는데, 사실은 그에게 내원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흘러가는 이야기로 천마신교 내원을 구경해 보고 싶다고 했는데, 오늘 그 바람을 이뤄주려는 것이다.

요즘 내 전속 숙수인 임 숙수는 다른 숙수들을 데리고 외원에서 대기 중인 풍천교 마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기에, 조춘배를 데려올 명분은 충분했다.

"제가 전생에 공덕을 많이 쌓았나 봅니다."

"우리 주인장께서 전생에 무림을 구하셨나 보오."

"무림까진 못 구했어도 본교에 쳐들어온 무림맹 장로 하나쯤은 제가 쇠국자로 때려잡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의 농담에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 지나가던 내원의 무인들이 나를 보며 정중히 인사했다. 그 우락부락 무서운 무인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조춘배였다.

"막상 오니 좋으면서도 두렵습니다."

"그래서 마가촌에 소지부를 세운 것이오. 다들 쉽게 오기가 어려운 곳이니. 그러니 주인장께서는 마가촌 사람들과 소지부를 잘 살펴보시다가 제게 전할 말이 있으면 꼭 전해주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우린 풍천교주가 기거하는 거처에 도착했다.

"왔는가?"

풍천교주가 반갑게 맞았다. 섭혼마존이 결정되면 내가 술을 대접하기로 약속했었다. 청선이 되어서 기분이 좋은 데다가 내가 신물까지 거절한 터라, 풍천교주의 기분은 아주 좋아 보였다.

"여긴 지난번 보셨던 풍류객잔 주인장입니다. 식은 요리를 가져와서 대접하는 것보단, 주인장이 해주는 따뜻한 요리를 먹고 싶어서 함께 왔습니다. 주인장, 부탁하오."

"제 혼을 담아서 요리를 내놓겠습니다."

"주인장 혼은 별로 먹고 싶지 않으니, 평소대로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네!"

조춘배가 요리를 준비하는 사이 풍천교주와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마존을 제자로 삼으신 것 감축드립니다."

"이공자가 아니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네. 고맙네."

"교주님이 제자를 잘 가르친 덕분이지요."

"우리 승리라고 하세."

우린 이렇게 서로에게 덕담하며 승리를 즐겼다. 난 청선이 이길 줄 알았다. 풍천교주 정도 되는 고수가 손을 댄 이상,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승리를 얻어냈을 테니까. 일제자 양도가 변수를 만들어내기에는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다.

잠시 후 조춘배가 만든 요리와 술이 나왔다.

음식을 맛본 풍천교주는 만족했다.

"숙수 실력이 괜찮네."

"제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주인장이 좋아할 겁니다."

우린 술과 요리를 즐겼다. 작정을 했는지 오늘 조춘배의 요리는 훌륭했다.

"아버지는 만나보셨습니까?"

"일간 뵙기로 했네."

"만나시면 그걸 강조하십시오. 청선을 제자로 삼아서 이전 섭혼마존보다 더 강한 섭혼마존으로 키우겠다고요. 아버지에게는 그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말해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나는 대수롭지 않게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저기 족쇄를 찬 분에게 한 잔 드려도 되겠습니까?"

순간 풍천교주가 흠칫 놀랐다.

"왜 저 사람에게 술을 주려는 건가?"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교주님 뵈러 올 때마다 여러 번 뵈었는데, 이런 기분 좋은 날 한 잔 주고 싶어서요."

풍천교주가 웃으며 말했다.

"저 사람은 아예 술을 입에 대지 못하네."

"그렇습니까?"

그때였다. 족쇄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한잔 받겠습니다."

나도 깜짝 놀랐지만, 풍천교주는 더 놀랐다. 풍천교주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 감추지 못한 표정 변화로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족쇄 사내는 지금껏 한 번도 풍천교주의 술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그럼 한잔 드리죠."

나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풍천교주를 못 본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술잔과 술병을 들고 족쇄 사내에게로 갔다.

그의 앞에 앉아서 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족쇄 사내가 고개를 들더니 내 잔을 받았다.

나는 천천히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전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술만 한잔 따라주었을 뿐이다.

족쇄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받은 후, 그대로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내게 술잔을 돌려주더니 이번에는 그가 술을 따라주었다.

나도 술을 받아서 시원하게 비웠다.

눈빛만 교환하던 우리가 드디어 술을 나눴다. 대화 한마디 없이 오직 술만 마신 것이었지만, 난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풍천교주는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

"저 친구 장기가 뭔지 아나? 개처럼 냄새를 잘 맡는다네. 신물을 훔치러 오는 자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지. 어떤가? 저 족쇄가 개 목줄 같아 보이지 않나? 하하하하."

농담보다는 멸시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는 풍천교주가 크게 웃었다.

방에는 그의 웃음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정적.

조금 전 그 말은 족쇄 사내를 무시하는 명백한 실언이었다. 나는 그 말을 재치 있게 받아서 실언을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건 그의 경솔함이 내게 준 일종의 선물이었으니까.

난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그새 비어있는 그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었다.

"자, 한잔 드시지요."

풍천교주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족쇄 사내는 평소 모습처럼 고개를 숙인 채 화석처럼 굳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풍천교주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족쇄 사내와 관련해서 풍천교주는 감정을 숨기거나 다스리지 못했다. 혈천도마가 일화검존과 관련한 일에 그러듯이 말이다.

처음 예정했던 시간보다 일찍 나는 작별을 고하고 그곳을 나왔다.

족쇄 사내에게 술을 줬고, 그의 술을 마셨으니 나는 오늘 방문의 목적을 이뤘다.

* * *

검무극이 돌아간 후 분위기는 썰렁했다.

풍천교주는 자신이 잘못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사과하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사과했다.

"아깐 미안했네."

풍천교주의 사과에도 족쇄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니까."

다시 사과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풍천교주는 결국 폭발했다.

"젠장!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난 네 주인이다. 넌 내 수하고. 내가 그런 말도 못 해? 지금껏 오냐 오냐 해줬더니 기고만장해졌지? 죽고 싶어? 그런 거야?"

풍천교주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마음의 소리는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뭘 잘했다고 소리까지 질러대는 거냐?'

자책이 클수록 그의 목소리도 커졌다.

"지금껏 내가 얼마나 참아줬어? 반말 다섯 번? 어떤 미친놈이 수하에게 그딴 기회를 준단 말이야? 나니까! 나나 되니까 그랬던 것 아니냐? 그런 고마움도 모르고. 술 못 마신다면서? 죽어도 싫다면서? 그런데 이공자 술을 받아? 그것도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말을 한 상황에서?"

아무리 화가 났어도 여기까지만 냈어야 했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었다.

다음 순간 그들이 있던 공간이 바뀌었다.

항상 열었던 푸른 하늘과 들판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핏물이 흐르고 시체가 널려 있는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들어와서 잠시도 있기 힘든 곳이었다.

"네게 딱 어울리는 곳이지. 앞으로 네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될 거다!"

결정적으로 풍천교주가 분노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실수하고, 자신이 화내고.

족쇄 사내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술을 받았을 뿐인데.

'아니, 잘못은 저놈이 먼저 했어. 그 술을 받지 말았어야지. 나더러 그랬지? 속 좁고 욕심 많다고? 알면서 왜 이러냐고.'

그때 자신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족쇄 사내가 정중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나 정중해서 풍천교주의 가슴이 철렁했다.

두 번 다시 족쇄 사내의 허심탄회한 말을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풍천교주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거 아니다. 어서 사과해. 어서!'

마음속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도 쌓인 것이 많았다.

'왜 내가 사과를 해? 내가 저놈 주인인데. 내가 풍천교주인데!'

그와 여러 번 다투기는 했지만 이렇게 큰 갈등을 겪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다른 누군가를 상대했다면 훨씬 냉철하게 대처했을 텐데. 마불이 상대였다면 겉으론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속으로는 주판알을 튕겼을 텐데.

하지만 족쇄 사내에게는 그게 되지 않았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시산혈해가 풍천교주의 마음이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끝내 풍천교주는 사과하지 못했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의 울음소리만 야속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 * *

나는 혈천도마의 거처 마당 구석에서 서대룡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기본기 수련을 지나 이제 초식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도를 휘두르는 솜씨가 예전과 달랐다.

내가 과거 풍류객잔에서 서대룡에게 말했다. 늦었지만 더 정성껏 배울 것이라고. 그래서 괜찮다고. 내 말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단 한 번의 움직임도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게다가 똑똑한 사람이 무공도 잘 배운다고, 서대룡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때 혈천도마가 내 옆에 와서 나란히 섰다.

"수하 고생하는 것 구경하러 왔나?"

"낮에도 고생 많이 하는 친구라서, 제게 그런 악취미는 없습니다."

"그럼 이 시간에 웬일인가?"

"상의드릴 일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들어오게."

수련하는 서대룡을 두고 나는 혈천도마의 거처로 들어갔다.

나는 벽장을 가득 채운 책들을 보며 감탄했다.

"책이 정말 많으십니다."

"하고 싶은 뒷말 붙이게."

"어울리지 않게요."

"읽을 책이 아니라 장식용 책이다."

"장식조차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놈아! 소싯적에 읽은 책을 다하면 교주가 죽인 사람만큼은 될 거다."

"그럼 대학사가 되셨을 겁니다."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고서 우린 본론을 이야기했다.

"상의할 내용이 뭔가?"

"족쇄를 풀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란 혈천도마는 이렇게 오해했다.

"지하 뇌옥에서 풀어주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긴 건가?"

"아닙니다. 제 주변에 한 명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 다들 족쇄 하나씩은 차고 살지."

"어르신 족쇄는 어떤 겁니까?"

"나야...."

뭔가 나올 듯하다가 쏙 들어가며 혈천도마가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

"풍천교주 수하입니다."

"저런."

벌써 난관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자네가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 괜찮은 사람일 테고. 그렇다는 말은 풍천교주도 그를 아끼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정확하십니다."

"자네가 그 사람을 원하는 걸 풍천교주도 아는가?"

"모릅니다."

"그 수하와는 이야기가 됐나?"

"아뇨,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통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음? 믿고 있다고? 이거야말로 첩첩산중이로군."

족쇄 사내 일을 누구와 상의할까 떠올렸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바로 혈천도마였다. 그가 답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와 대화하다 보면 내가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혈천도마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어르신을 찾아뵌 것 아닙니까? 제게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방법 맡겨놨냐?"

나는 활짝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네! 맡겨둔 것 주십시오. 이 첩첩산중을 빠져나갈 길을 알려주십시오."

제76회 내가 살고자 마음먹으면.

나는 분명 혈천도마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있다면, 혈천도마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

"자네가 제일 잘하는 거로 해결해."

"뭐죠?"

"풍천교주를 죽여버려."

나는 농담이라 여겨 크게 웃었지만, 혈천도마는 진지했다.

"왜 웃어? 일거양득일 텐데. 풍천교주를 죽이면 감히 누구도 자네가 후계자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 못할 거네. 덤으로 자네가 원하는 수하도 얻고."

"풍천교주는 안 죽일 겁니다."

"왜?"

"좋은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여야 할 정도의 악인도 아니니까요."

"그래서가 아니겠지. 자네의 보물창고라서 못 죽이는 것 아닌가?"

"뭐, 그 점도 있습니다만."

"악당은 자네야."

"인정합니다."

"뭘 이리 쉽게 인정해?"

"착해 빠져서 악인들을 어찌 잡겠습니까? 제대로 된 악당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업보는 제가 지고 지옥으로 가겠습니다."

"지옥은 나 같은 사람이 가야지. 자넨 꽃길을 걷게."

진심으로 한 말임을 느꼈기에 내심 감격했다.

"자넨 이미 결정을 내렸지?"

"네."

나는 총군사 사마명과의 대화를 끝으로 족쇄 사내를 내 사람으로 만들겠다 결심했다.

"풍천교주의 사람이니 함부로 뺏어올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죠."

"그럼 그쪽에 맡겨야지. 그가 직접 자네에게 오게끔 하게."

"족쇄까지 묶여 있는 사람인데요?"

"그 족쇄는 스스로 풀어야지. 그 정도 능력은 보여줘야 데려올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아닌가?"

"맞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그 사람에게 그 정도 확신을 줬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우린 아직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랬기에 혈천도마를 찾아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혈천도마만은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에.

과연 그는 미친놈이라 욕하는 대신 내가 생각지도 못한 답을 내놓았다.

"그럼 그에게 확신을 주게."

"어떻게요?"

"그 사람에게 자네 사람들을 보여주게."

"!"

"자네 사람들을 보여주면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겠지. 자네가 영입하려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라면, 자네 사람들만 봐도 자네에 대해 확신하게 될 거네. 아마 오지 않고서는 못 배길 거야."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이런 조언을 해줄 줄이야. 그의 경험이 깃들어 있는 말이었기에 더욱 값진 조언이었다.

"왜 그렇게 보나?"

"최고의 조언이십니다."

"솔직히 그 정도까진 아니잖아?"

"제 사람 중 일 번이 어르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최고의 조언입니다."

"그럼 최악의 조언인데?"

이번에는 내가 먼저 웃었고, 혈천도마가 따라 웃었다.

"날 보면 올 사람도 달아날 테니, 다른 사람들을 보여주게. 날 염두에 두고 한 말도 아니었고."

나는 그에게 단호히 말했다.

"어르신도 가셔야 합니다."

"싫다."

"그 사람에게 어르신을 보여주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럼?"

"어르신께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누굴 골랐는지요."

"왜?"

"그럼 제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왜?"

"저에 대한 확신을 드리고 싶어서요. 어르신과 더 친해지고 싶어서죠.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네요."

혈천도마의 눈가가 꿈틀했다. 보통 화가 났을 때의 표정인데, 지금은 어색해서 보인 반응이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면전에서 잘도 하는구나."

"가시죠."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차피 가실 것 미룰 것 있습니까? 시간 되는 사람 다 데리고 가죠. 서로에게 보여주겠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골랐는지. 그래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역시 넌... 미친놈이다."

"하하하."

그러니까요. 내 사람 하나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혈천도마도, 족쇄 사내도, 다 해당하는 말이었다.

* * *

방 공기가 차가웠다.

풍천교주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고, 족쇄 사내는 음뢰종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먼저 말하나 보자, 이 대결의 승자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족쇄 사내는 일 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결국 풍천교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어렵게 한 사과였다. 그래서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족쇄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자신은 고민하고 고민해서 한 사과였는데 너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서 풍천교주는 다시 발끈 화가 났다.

하지만 앞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자신이 화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시체가 쌓인 공간까지 연 것은 정말 큰 실수였다. 족쇄 사내가 푸른 하늘과 들판이 있는 공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면서 말이다.

"최근에 신물을 이공자에게 주면서 나도 모르게 화가 많이 쌓였던 모양이야. 미안하네."

풍천교주가 다시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한결같은 어조의 대답에 풍천교주가 인상을 굳혔다. 이 표정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그는 창밖을 계속 쳐다보았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온갖 잡념이 그를 괴롭혔다.

'이게 다 속이 좁고 욕심이 많아서 이런 건가? 내가 소인배라서? 빌어먹을! 수하 마음 하나 못 얻는데, 무슨 중원진출을 하겠다고? 다른 수하들은 더 하겠지? 겉으론 충성을 맹세하지만, 속으론 나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지.'

정말 이럴 때 운기조식이라도 했다간 주화입마에 걸릴 것이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

"교주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풍천교주는 울컥 격동했다. 화를 내고 자책하고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두 번 다시 저 말을 듣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그였다.

"왜?"

"교주는 나를 족쇄로 붙잡아 두면서, 내 마음까지 붙잡으려고 하고 있다. 내가 전에 말했지? 교주나 나나 버리지 않고도 다 가질 만큼 복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새외 무림을 지배하는 사람이다! 내가 복이 없다면 누가 복이 있나?"

"새외 무림을 네 힘으로 차지했나? 교주야, 넌 그냥 물려받았을 뿐이다. 하긴, 그것도 복이라면 큰 복이지만, 내가 말하는 복은 그런 탯줄 타고 내려온 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깐족깐족! 또 나를 열받게 하는구나!"

그러자 족쇄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말을 해도 열 받고, 말을 안 해도 열 받고.

풍천교주는 오늘 자신의 분노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공자 술은 왜 받은 거냐?"

"그냥."

"그냥이 어디 있어? 이유를 말해라. 난 들을 자격이 있다."

족쇄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풍천교주가 불쑥 물었다. 정말 이 질문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설마 이공자에게 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

족쇄 사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순간 풍천교주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가겠다고? 정말?"

"아직 결정 내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이 그 말이지!"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풍천교주의 두 눈이 길게 찢어졌다.

"언제 작당한 거냐? 나 몰래 전음이라도 나눈 거냐?"

차라리 그랬다는 대답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전음은 한 번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읽었다. 이공자는 나를 원하고 있다."

"개소리 집어치워!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어디서 섭혼마존 흉내질이야? 마음을 읽긴 너희가 뭔 마음을 읽어?"

풍천교주는 앞서 검무극이 족쇄 사내에게 술을 따를 때 왜 그렇게 빈정이 상하고 화가 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자기 술은 안 받고 이공자 술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바로 이런 일을 예감한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본능이, 자신의 예감이 이런 개 같은 일을 읽은 것이다.

"내가 널 보낼 것 같아? 죽이면 죽였지 절대 안 보내!"

"그럼 지금 죽여야 할 거다."

"뭐?"

"죽일 수 있을 때 죽이라고. 나중에는 못 죽일 거야."

풍천교주의 온몸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족쇄 사내는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죽인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긴다고?

"내가 못 죽인다 생각해서 이러는 거지? 날 개무시해서!"

풍천교주가 성큼성큼 족쇄 사내에게 걸어갔다.

그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일장을 내리치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족쇄 사내가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면, 어쩌면 내리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족쇄 사내는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에 풍천교주는 일장을 내리치지 못했다.

"지금 못 죽이면 영원히 못 죽일 거다. 내가 살고자 마음먹으면 누구에게도 죽지 않을 거다. 그러니 죽일 거면 지금 죽여야 한다."

허공에 치켜든 풍천교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내리치지 못했다.

풍천교주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용암처럼 분출했던 분노는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 난장판 같은 세상에서 혼자만 달아나겠다고? 이렇게 쉽게? 천만에! 그렇게 두진 않을 거다."

족쇄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복잡한 감정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풍천교주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직 가겠다고 결정 내린 것 아니라고 했지?"

"그래. 아직은 아니다."

"널 안 빼앗기면 되잖아? 내가 이공자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면 되잖아?"

족쇄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억지웃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그래, 앞으로도 이렇게 사는 거다."

"이별할 것처럼 말하지 말라니까!"

"내게 집착하지 마라. 남이 가지려 하니까 더 커 보이는 거다."

"닥치고! 내가 설득할 기회는 주고 누굴 모실지 결정해. 미운 정도 정이라는데, 그래도 한방에서 지낸 세월이 있으니 발버둥은 쳐볼 수 있겠지. 악착같이 널 잡아볼 거다."

"그래도 안 될 거다. 네 상대가 아니다."

풍천교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비어버린 신물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냥은 못 보낸다. 가려면 나도 데리고 가라."

족쇄 사내가 피식 웃었다. 둘이 다투고 난 후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그래. 나와 함께 이공자에게 가자."

"뭐?"

설마 함께 가자고 할 줄은 몰랐기에 풍천교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이냐?"

하지만 이어진 족쇄 사내의 말은 더 놀라웠다.

"이공자를 천마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면서? 나와 함께 가서 이공자를 천마로 만들어주자. 그럼 교주 꿈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지금의 이공자라면 천마신교 옆에 풍천교 본단도 만들어줄 사람이다."

"미친놈! 그걸 말이라고."

그때 밖에서 수하가 말했다.

"이공자와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들?"

"네. 함께 온 일행이 다섯 명이나 있습니다."

풍천교주가 탄식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정말 무섭게 밀어붙이는구나."

원래라면 짜증을 확 냈을 텐데, 풍천교주는 마음을 내려놓은 편한 얼굴이었다.

"자네 말이 맞아. 우린 이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 그러니 만날 이렇게 제 말 들은 호랑이처럼 나를 찾아오지."

풍천교주가 수하에게 말했다.

"어서 모셔라. 그리고 술과 안주를 거하게 준비해라."

"네!"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를 쳐다보았다. 평소와 다른 눈빛이었다.

"운명이 널 두고 담판 지으라는 가보다. 그래, 오늘 결정하자. 이공자가 죽든, 내가 죽든. 이공자에게 가든지, 내게 남든지. 오늘 다 결정하자. 대신 공평하게 판단해라."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이공자가 불리하다. 교주 말대로 정은 당신과 더 들었으니까."

"좋아. 그럼 됐어."

곧이어 검무극 일행이 안으로 들어섰다.

풍천교주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하하하, 어서들 오시오!"

그렇게 그들의 운명을 바꿀 결전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제77회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 들면?

오늘 나는 내 사람 모두를 데리고 왔다.

이 방법을 제안한 혈천도마부터 일화검존, 이안과 서대룡, 그리고 마군주 장호까지.

나머지 사람들에게 왜 풍천교주를 방문하는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뭔가 하기를 바라지 않아서였다. 오늘 자리는 설득이 필요없고, 감동을 줄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귀한 손님들이 함께 오셨구려. 잘들 오셨소이다!"

두 팔까지 활짝 벌리며 우릴 반기는 풍천교주는 만난 이래 가장 기분이 좋아 보였다.

족쇄 사내에게 크게 실언했었는데 벌써 화해를 한 걸까?

"갑자기 흥취가 나서 함께 있던 일행들과 함께 찾아뵈었습니다.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네. 이런 기회에 신교의 호걸들과 교류하는 것 아니겠나?"

"하해와 같은 마음이십니다."

함께 온 사람 중에 가장 먼저 인사한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반갑소."

"잘 오셨소."

당연히 풍천교주는 마존들과는 익히 아는 사이였다.

"근래 이공자와 친분이 깊어졌다는 소식은 들었소."

"잘못 들으셨소. 친분이 깊어진 정도가 아니라 내가 이공자 왼쪽 날개요."

우리끼리는 날개 이야기를 농담처럼 편하게 주고받았지만, 혈천도마가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마 족쇄 사내에게 자신은 이렇게 검무극을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리라. 이런 모습을 보일지는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함께 온 일화검존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녀가 이 자리를 내켜 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이 기회에 혈천도마와 한 번이라도 더 보게 하려고 부탁했다.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내 의지도 있었고.

잠시 놀란 얼굴로 혈천도마를 쳐다보던 일화검존이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제가 오른쪽 날개는 아니랍니다."

어떻게든 혈천도마와 얽히고 싶지 않은 그녀의 의지였는데 풍천교주는 재치 있는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번에 청선이 마존이 되는 일에 큰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공자를 믿고 한 일입니다."

그녀는 내게 공을 돌렸다. 거기에 하나 더.

"그리고 큰 도움은 도마께서 주셨습니다. 저는 기권표를 얻어냈지만, 도마 선배는 온전한 한 표를 얻으셨지요."

그녀는 구체적인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도마 덕분에 한 표를 얻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혔다. 아무리 싫어하는 도마라지만 남의 공을 차지하면 마음이 불편해서 그냥 있지 못하는 게 그녀의 성격이었다.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일화검존이 한 표를 확보했고, 혈천도마가 기권표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혈천도마가 한 표를 확보했다고? 이 괴팍한 늙은이는 그래 놓고선 날 찾아와서 생색 한 번 안 냈다.

내가 혈천도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따돌림받으신다더니요?

―그게 불쌍해서 누가 도와줬나 보지.

―두 번만 따돌림받으시면 마존들 전부 꿇리시겠습니다.

―두 번 다시 부탁하러 다닐 일 없다.

―감사합니다.

―됐고.

풍천교주가 혈천도마에게 포권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내 친구보다 낫소."

"애초에 강호에서 친구를 찾는 것이 이상한 일 아니겠소?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 거지. 그렇게 사는 것이 여러모로 인생이 깔끔한 법이오."

"좋은 가르침, 잊지 않겠소."

그렇게 두 마존이 인사를 마쳤고 이번에는 장호가 그에게 인사했다.

"마군주 장호입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용맹하신 마군주를 이렇게 뵙다니, 오히려 이 몸이 영광이외다."

"새외지존을 뵙게 해달라고 이공자님을 졸랐습니다."

"허명뿐인 이름이니 실망이나 하지 않으면 좋겠소이다."

장호는 내 부탁을 듣고 이유도 묻지 않고 따라왔다. 어떤 일을 맡겨도 묵묵히 해낼 것 같은 이 믿음직스러움은 장호란 사람만이 가진 특별함이었다.

다음으로 서대룡이 인사했다.

"제가 이 자리에 끼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황천각 조사관 서대룡입니다."

"자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네. 우리 이공자의 오른팔이라지?"

그러자 서대룡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런 말도 다 했습니까? 라는 표정에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신 걸 보니, 정말 다들 그렇게 여기나 보다."

마지막으로 인사한 사람은 이안이었다.

"이공자님을 보필하는 이안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기세가 살아있는 눈빛, 참으로 오랜만이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련 삼매경인 그녀의 기세는 요즘 한 자루 칼이었다.

누구라도 벨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

이 예기를 어떻게 낮춰가는가가 앞으로 그녀의 과제였다.

"저기 서 조사관이 오른팔이라면 여기 이안은 제 심장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내가 모두 앞에서 그렇게 말하자 이안이 당황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나는 선포하듯 당당히 말했다.

"다들 알고 계십시오. 이안이 심장입니다."

둘이 있을 때 말하는 것과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둘만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라면, 모두 앞에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관계가 진짜 관계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그런 관계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정말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안을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단지 회귀 전의 목숨 빚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지에게도 말했듯, 그녀가 훌륭한 사람이어서다.

꼬리를 아홉 개나 감추고 있다면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

나와 친해졌기에 그 말을 밝혔지,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평생 여우임을 감추고 곰처럼 자신의 소임을 다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날 위해 몸을 던질 필요는 없다. 누가 날 높이 산다고, 그를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잊어선 안 돼. 그 둘은 확실한 별개라는 것을."

상관과 수하에 대한 내 가치관이었다.

이안에게 한 말이지만 동시에 족쇄 사내에게도 한 말이기도 했다.

풍천교주가 감탄했다.

"이렇게 칭찬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부럽네."

그의 어깨너머로 족쇄 사내가 보였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공자가 이렇게 수하 자랑을 하니 나도 그냥 있을 수 없군. 자, 나도 한 사람 소개하겠소. 저기 족쇄를 차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의 오른팔이오."

나는 내심 놀랐다. 풍천교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족쇄 사내를 인사시킨 적이 없었는데, 오늘 소개한 것이다. 게다가 오른팔이라는 표현까지 하면서. 실언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혈천도마가 대놓고 물었다.

"오른팔인 사람을 어찌 족쇄로 묶어 두셨소?"

"잠시라도 눈을 돌리면 승천할 사람이라서 억지로 붙잡아 두었소."

"승천할 사람은 승천시켜 줘야 하지 않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이다."

혈천도마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이놈의 이무기들이 어찌나 제멋대로인지, 우리 같은 인간들은 쉬이 다룰 수가 없지요."

그러면서 혈천도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보내 줄 사람은 풀어주라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내가 승천할 용이라는 칭찬을 한 것이다.

혈천도마는 정말 눈치도 빠르고, 분위기 파악을 잘한다.

정말 한 십 년만, 아니 이십 년만 젊었어도 혈천도마를 군사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는 펄쩍 뛰면서 절대 안 한다고 하겠지만.

그러는 사이 술상이 차려졌다.

우린 둘러앉아서 서로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운명이 인간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명은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그 기회를 판단하고 잡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다.

회귀에 대비해 많은 조사를 하고 대비했지만, 거기에 족쇄 사내는 빠져 있었다. 회귀 후 내 삶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를 사람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괜찮다.

오히려 내가 미리 알고 준비하지 않았기에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는, 그래서 종국에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자리 말이다.

오늘 자리의 첫 포문은 이안이 열었다.

몇 순배의 술이 돌았을 때, 이안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분에게 술 한 잔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녀가 말한 사람은 족쇄 사내였다. 내가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일전에 내가 그에게 술을 준 것 때문에, 풍천교주는 한 차례 큰 말실수를 했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이안이 같은 제안을 하고 있었다.

풍천교주는 앞서 나에게 보였던 반응과는 달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사람도 좋아할 거네."

확실히 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안이 술병과 잔을 가져가서 그에게 술을 따라 주며 정중히 물었다.

"무인께서는 이 종을 지키고 계시나요?"

대답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뜻밖에 족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이젠 종이 나를 지켜주고 있소."

이 대답이 얼마나 귀한 대답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저랑 비슷하네요."

족쇄 사내가 슬쩍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제가 도련님을 지켰는데, 이제는 도련님이 절 지켜주시거든요."

나는 보았다. 족쇄 사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안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종은 무인께 떠나란 소리 안 하죠? 우리 도련님은 제게 자꾸 떠나라고 하세요. 내 삶을 살길 바란다고요. 정말 그래서일까요? 아니면 제가 싫어서 내보내시려는 걸까요?"

그러자 족쇄 사내는 또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싫어서 내보낼 사람을 두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심장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요."

족쇄 사내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이안의 질문에 벌써 두 번이나 대답을 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이안의 질문이 그랬듯, 족쇄 사내의 대답 역시 이안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역시 그렇겠죠?"

이안이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 그녀가 또 하나의 꼬리를 펼치고 있음을 느꼈다. 이렇게 자신들을 데리고 이곳에 온 이유가 이 남자와 관계가 있을 거라는 촉이 발동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족쇄 사내와 이런 대화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심장을 두 번 두드린 후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안이 활짝 웃었다.

"너무 저러시니까 장난 같아서요."

그때 앉아 있던 서대룡이 자기 술잔을 들고 그곳에 가서 합류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움직여서 말리고 말고 할 것도 아니었다.

서대룡이 이안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이 무인을 너무 걱정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를요?"

"네. 지금껏 각주님을 관찰한 결과 수하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십니다. 험난한 도산검림을 떠나서 잘 살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 같은 거죠. 저를 사부님께 무공을 배우게 한 것도 그런 걱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이안이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비천검법을 전수받은 그녀였으니 당연히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으리라.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해다. 앞으로 제대로 부려 먹기 위해서 가르치는 거다. 그렇게 순진하면 평생 이용당한다!"

그러자 서대룡이 그녀를 대신해 대답했다.

"일하다 보면 제대로 부려 먹는 사람 밑이 편할 때가 있습니다. 어설프고 우유부단한 수장 밑에 있으면 더 힘들죠."

이안이 공감한다는 듯 술잔을 내밀었고 서대룡이 건배했다.

"서 조사관님은 우리 도련님을 왜 그리 좋아하세요?"

"제가 좋아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자리로 안 오셨을 거잖아요?"

이안은 서대룡의 성격을 한눈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튀는 것 싫어하고, 위험한 것 싫어하는 그가 자진해서 이안의 옆자리로 간 것은 나름의 용기를 발휘한 것이었다.

"제가 오른팔이니까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한마디에는 서대룡의 많은 심경이 담겨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족쇄 사내가 고개를 들며 나직이 물었다.

"누군가 그 오른팔 자리를 차지하려 들면 어쩔 겁니까?"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그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 그 첫 말은 너무나 도발적이었다.

생각지 못한 질문에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치렁치렁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족쇄 사내의 눈빛이 강렬했다.

뭐라 답을 할까 복잡한 심경이 표정에 드러나더니 이내 서대룡이 차분히 대답했다.

"제가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맞서 싸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차지하라고 하십시오. 저는 그런 날을 대비해서 다른 사람의 오른팔이 되려고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사람들마다 오른팔은 있어서요."

그 대답에 도발적이던 족쇄 사내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한편 그 너스레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알았기에 혈천도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혈천도마를 보며 말했다.

"잘 키우십시오."

"싫다."

그때 마군주 장호가 그들 쪽을 쳐다보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다음 오른팔 후보로 내가 줄 서 있소. 서 조사관은 사람이 좋아서 그 자리를 넘길지 몰라도 나는 아무에게나 오른팔 자리를 넘기진 않을 것이오."

장호가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제78회 단체로 미친놈들이다.

장호는 원래 나서는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감히 건방지게 오른팔 자리 운운하는 족쇄 사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오늘 이 자리가 족쇄 사내 때문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온 것이 저 족쇄 남자 때문일지도 모르겠소.

그래서 이안과 서대룡에게 전음까지 보냈다.

이안은 용감하게 행동을 개시했고, 서대룡 역시 움직였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장호는 이곳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될 전장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장호의 말에 족쇄 사내가 고개를 들어 장호를 응시했다. 장호의 얼굴에 난 커다란 상처가 꿈틀거렸다.

족쇄 사내가 장호에게 말했다.

"왜 오른팔에 집착하시오? 나 같으면 왼팔하면서 오른팔들 싸우는 것 구경하겠소."

"나는 남들 싸움 즐기는 그런 취미는 없소. 오른팔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으니, 오른팔이 되려고 노력하겠소."

"남자다우시오."

"고맙소."

그때까지 지켜보기만 하던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에게 전음을 보냈다.

-남자다우시오? 지랄한다. 자네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나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다. 나는 온갖 말을 다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농담도 하고 너스레도 떠는 사람이다.

-젠장! 이 상황에서 그딴 말은 왜 하나?

-시작은 교주가 먼저 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한데 이것들이 지금 자네에게 몰려가서 뭐 하자는 수작인가?

-보면 모르겠나? 자기 수장을 위해서 다들 애쓰고 있잖아?

-비겁하다! 나는 혼자인데.

-평소에 뭐 했나? 교주 수하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이공자가 더 수하들을 아끼는 그런 수장이다?

-만약 이공자에게 가더라도 이들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유일 거다. 백 명이 몰려와서 이공자 칭찬을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럼 무슨 이유로 간다는 거냐?

하지만 족쇄 사내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풍천교주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이공자는 좋은 수하들을 두었군."

"좋은 수하야 교주님이 더 많으시겠지요."

"아니네. 나는 외로운 사람이네. 저기 저 사람 빼고는 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지."

"누군가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생의 큰 복이죠."

"저 복이 오랫동안 내 곁을 지켜줬으면 좋겠네."

검무극은 그렇다면 족쇄를 풀어줘야 하지 않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족쇄를 언급하며 그를 밀어붙이는 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 내 술 한 잔 받게."

풍천교주가 술을 따라주면서 내공을 함께 실었다. 술잔을 깨지 않고 내공을 싣는 것은 진정한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는 수법으로, 자신만큼의 내공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절대 술을 끝까지 받지 못할 것이다.

또르르륵.

하지만 술이 가득 따라질 때까지 검무극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풍천교주는 내심 크게 놀랐다.

'설마? 내 내공을 능가해? 그럴 리가!'

충격에 빠진 그에 비해 검무극의 표정은 온화했다. 그가 술을 받아서 마시고는 술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제 술 한 잔 받으시죠."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었다. 만약 검무극의 술잔을 받아내지 못하면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세상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좋네. 우리 승천하는 잠룡의 술을 받아보세."

풍천교주가 술을 받았다.

이번 역시 떨어지는 술에 내공이 실렸다. 풍천교주는 애써 태연하게 술을 받았다. 충분히 버틸 만한 내공이었다.

"술맛이 아주 좋군."

"오늘 취할 때까지 마셔보죠."

"좋네."

풍천교주가 의기양양하게 족쇄 사내에게 전음을 보냈다.

-봤나? 이공자의 내공이 실린 술을 받아내는 것? 별것 아니더군.

-이공자는 교주 체면을 살려준 거다. 내키지 않았을 텐데 굳이 내공까지 실어서 따른 것은, 교주는 내공을 실었는데 자신은 그냥 따르면 교주가 민망할까 봐 실은 거고. 그래서 내공을 다 담지도 않았고.

-....

사실 누구보다 먼저 풍천교주가 느꼈던 바였다. 몸으로 내공을 주고받았는데 어찌 그가 모르겠는가? 괜히 족쇄 사내에게 잘난 척하려다가 밑천을 드러낸 것이다.

-의기소침하지 마라. 교주가 이런 사람이란 것 잘 알고 있으니까.

-너 때문에 더 위축된다. 원래 이보다는 더 나은 사람인데 자꾸 실수하게 된다.

-그것도 이해한다.

검무극은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와 전음을 나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혈천도마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왜 망신을 주지 않았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겁니다.

-보여줄 기회가 있을 때, 보여줬어야지. 제대로 짓밟았어야지. 사람 마음은 생각보다 단순한 곳에서 움직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봤을 겁니다, 저 사람은.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닌가?

-어쩌면 그럴지도요.

다시 술자리가 계속되었다.

검무극은 풍천교주와 술을 마시며 차분한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그를 공격하는 언행은 삼갔다. 그의 작전은 풍천교주를 공략하지 않는 것이었다.

검무극은 오늘 왜 이곳에 왔는지에 집중했다. 자신의 사람들을 족쇄 사내에게 보여주는 그 일에.

"서 조사관. 요즘 무공수련은 어떻게 되고 있나?"

"힘들지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끼어들었다.

"힘들다고?"

"아뇨, 안 힘듭니다."

"그래? 훈련량을 늘려야겠군."

"아닙니다, 죽도록 힘듭니다."

검무극이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르신 비위 맞추기가 우리 아버지 급소 맞추기만큼이나 힘들 거다."

"사부님이 그만큼 힘들지는 않습니다."

"또 사부라고 하는구나."

혈천도마가 무뚝뚝하게 서대룡을 질책했다. 실수가 아니라는 듯, 서대룡은 당당하게 말했다.

"정식 제자로 삼아주시진 않았지만, 저는 스승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일 쫓아내시더라도, 영원히 사부님으로 기억할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기억하느냐?"

"아니 기억도 마음대로 못 하게 하십니까?"

검무극의 핀잔에 힘을 보탠 사람은 일화검존이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툭 내뱉은 그녀 말에 혈천도마는 발끈하지 않았다.

"날 제대로 알고나 하는 소린가?"

"똑똑히요. 저야말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두 사람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신경전을 펼쳤다.

검무극은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오늘 방문의 목적이었으니까. 너무 그대로 보여줘서 문제지만.

검무극이 말없이 그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일화검존은 술잔을 만지작거렸고, 혈천도마는 곧바로 술잔을 비웠다.

풍천교주는 그런 모습을 다소 생소한 감정으로 쳐다보았다. 설마 자기 앞에서 마존들이 감정싸움을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에게 전음을 보내 물었다.

-대체 뭐 하자는 수작인가? 무슨 의도지?

-저 두 사람이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었잖아?

-한데 내 앞에서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놓고 싸운다고? 저 능구렁이들이? 그럴 리가 없다. 저것들이 어떤 것들인데.

-교주 앞이라서가 아닐 거다.

-!

풍천교주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면서 검무극과 두 마존을 쳐다보았다.

마치 양쪽 날개라도 되는 듯 검무극을 사이에 두고 앉은 그들은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껏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조차 풍천교주에게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외딴 바위섬에 홀로 서 있는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이대로는 안 돼!'

처음 이 자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정말 기세 좋게 검무극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대단한 반전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지만 현실은 기세에서 밀리고, 내공에서 밀리고, 도량에서 밀리고, 게다가 함께 온 놈들은 그의 예상과 다르게 움직였다.

여자는 갑자기 족쇄 사내에게 술을 권했고, 저 작고 음침한 놈은 나서서 맞장구를 쳤으며, 마군주는 어울리지 않게 오른팔 자리를 탐냈다. 그리고 지금 두 마존이 서로 감정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단체로 미친놈들이다.'

풍천교주는 온갖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선 상을 엎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 새끼들아! 다 안 꺼져? 내가 누군지 알고 떼로 몰려와서 지랄들이냐! 새외무림과 전쟁 한 번 해볼 테냐? 덤빌 테면 다 덤벼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차라리 그런 배포라도 있었다면, 이런 순간이 오진 않았을 텐데.

풍천교주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검무극에게 술을 따라주며 기분 좋게 말했다.

"자네가 차기 천마가 되게끔 본교가 아낌없이 지원하겠네."

"감사합니다. 저 역시 풍천교의 중원진출을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이번에 자네 도움으로 내 제자가 마존이 되었네. 자넨 그에 대해서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았지만, 나는 자네에게 보상해줘야겠네."

풍천교주는 더는 신물이 아깝지 않다는 모습을 보였다. 족쇄 사내 앞에서 자신이 변한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다. 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려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속 좁고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고르게."

"정말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실 겁니까?"

"그렇네. 이 방에 있는 것이라면 뭐든 주겠네."

모두 검무극을 쳐다보며 무엇을 고를지 기대했다.

이윽고 검무극이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그 자리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 족쇄를 주십시오."

족쇄를 원한다는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중 풍천교주의 놀람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예상된 놀람이었다.

그랬기에 더 분노했다.

'감히 내가 오른팔이라고 했는데도 이따위 요구를 해?'

풍천교주가 싸늘한 눈빛으로 단호히 말했다.

"저 사람은 절대 줄 수 없네."

하지만 그는 검무극의 요구를 오해했다.

"사람을 달란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족쇄를 달라고 했습니다."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족쇄는 뭐에 쓰려고?"

"말 안 듣는 사람 있으면 묶어 두려고요."

농담처럼 말하면서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서대룡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족쇄는 말 잘 듣는 사람에게 묶어두는 겁니다. 저처럼 말 안 듣는 사람을 묶으면 안 된다고요! 큰일은 그때 나는 겁니다."

그는 장난처럼 한 말이었는데, 풍천교주는 흠칫 동요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때 검무극이 풍천교주에게 족쇄를 원한 원래의 목적을 밝혔다.

"저 만년한철을 녹여 더 값진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만한 보물은 신물 중에서도 찾기 어렵겠죠."

어차피 또 다른 족쇄로 남자를 묶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요구는 상징적인 요구였다. 나는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저 족쇄를 주십시오."

풍천교주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때 족쇄 사내가 뭐라 전음을 보내 주면 좋겠지만.

'제 족쇄를 풀어주는 일인데 전음을 보낼 리가 없지.'

그때 족쇄 사내가 전음을 보냈다.

-거절해라.

-뭐?

-교주를 위해서는 받아들여선 안 될 요구다.

-왜 내게 알려주는 거냐?

-공평하게 해달라면서?

풍천교주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무극이 족쇄를 달라고 할 줄도, 족쇄 사내가 전음을 보낼 줄도 몰랐다.

'다들 나보다 똑똑하니, 내 머리로는 따라갈 수가 없구나.'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 큰 차이로 자신을 절망케 했다.

풍천교주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의식했다.

"약속은 지켜야지."

자존심이나 체면 때문이 아니었다. 이때 풀어줘야 족쇄 사내가 더 멋있게 볼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풍천교주가 목걸이에 달린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서 남자의 족쇄를 풀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음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족쇄를 풀었고, 남자는 지켜보기만 했다.

철그렁.

풍천교주가 내 앞에 족쇄와 열쇠를 가져와서 내려놓았다.

"가지게."

"감사합니다."

족쇄 사내는 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검무극이 족쇄 사내에게 물었다.

"혹 이걸 녹인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모두의 놀란 시선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설마 만년한철 녹인 것을 족쇄 사내에게 되돌려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풍천교주가 현기증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들을 상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술상을 뒤집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79회 나도 그렇다.

술상을 엎으려 할 때 한 줄기 내력이 흘러와서 술상을 눌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혈천도마였다.

그가 풍천교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참으시오. 상이 뒤집히면 보이는 건 상 바닥이 아니라 교주 바닥일 거요.

호의에서 나온 만류임을 느꼈기에 풍천교주는 상에서 손을 뗐다. 혈천도마의 눈빛이 말했다. 나도 어느 정도는 당신 이해한다고.

검무극이 족쇄 사내에게 다시 말했다.

"여기에 오래 묶여 계셨으니, 이 족쇄로 만든 물건을 가지고 싶을 것 같아서요."

족쇄 사내는 사양하지 않고 한 가지 물건을 요구했다.

"그럼 부채 한 자루를 만들어주십시오."

"그거면 됩니까?"

"충분합니다."

나는 족쇄를 장호에게 맡겼다.

"이것을 본교 철방의 곽 장인에게 가져가서 만년한철 부챗살로 만들어진 부채를 만들고, 나머지로는 오늘 모인 사람 숫자만큼 비수 여덟 자루를 만들어 달라고 하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도 기념인데 한 자루씩 나눠 가지자."

여덟 자루면 풍천교주와 족쇄 사내 것도 포함이었다.

그러자 서대룡이 말했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이렇게 귀한 비수를 제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요."

"저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이안과 장호도 함께 나섰다.

"겸손 떨 시간에 죽도록 일해서 갚아라!"

내 농담에 모두 고개를 숙이며 황송해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반면 풍천교주의 반응은 차가웠다.

"왜 내 것까지 챙겨주는 건가?"

"오늘을 기념하고 싶어섭니다."

"나는 기념하고 싶지 않은데?"

그때 족쇄 사내가 전음을 보냈다.

-좋게 받아라. 나 때문에 흥분해 있지만, 교주는 중원진출이라는 대업도 이뤄야 하잖아?

풍천교주는 족쇄 사내가 너무나 고마웠다. 마지막까지 그는 노력하고 있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일 뿐.

"농담이네, 나도 한 자루 주게. 저 족쇄는 내게도 의미 있는 것이니."

"네, 그러지요."

"그나저나 자넨 정말 대단하군. 만년한철로 만든 비수라면 중원에서 구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걸 모두에게 나눠주다니."

"그만큼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 소중한 사람들이 나중에도 소중하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나중을 보고 주는 선물이 아닙니다."

"그럼?"

"지금까지 제게 해준 고마움으로 주는 선물입니다."

검무극의 말에 풍천교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혈천도마가 그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아까 우리가 말하지 않았소? 승천하는 용들을 우리가 다룰 수 없다고. 그냥 마음 편히 놓아주는 게 상책일 거요."

풍천교주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한두 잔씩 주거니 받거니 마시다 보니 다들 취했다.

"서 조사관님. 그만 드세요. 이러다간 오늘도 사부님 바짓가랑이를 잡으시겠어요."

이안의 만류에 서대룡이 큰소리를 쳤다.

"저는 멀쩡합니다!"

"벌써 혀 꼬부라진 소리가 나는데?"

"걱정 마시라니까요! 저 안 취했습니다."

요즘 쌓인 게 많은지 서대룡이 술을 달리기 시작했고, 말리던 이안 역시 수련 내내 참았던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검무극이 장호를 쳐다보았다. 장호가 두 사람은 자신이 잘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반대로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네가 취하고, 저 둘이 말리고."

"그러게 말입니다."

"주사 부릴 기미라도 보이면 그 큰 주먹으로 한 방씩 때려주게."

"그러기도 쉽지 않습니다. 두 사람 다 요즘 기세가 보통이 아니라서요."

물론 서대룡은 아직 멀었지만, 이안 같은 경우는 장호에게 무조건 진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방심하면 장호도 죽을 수 있는 무공이 비천검법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풍천교주가 마존들에게 말했다.

"세상이 거꾸로 되었소. 아랫것들 비위를 맞춰야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안과 서대룡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족쇄 사내를 두고 한 한탄이었다. 그러면서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공자는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가 교주가 되어도 수하들 눈치를 보면서 교를 운영할 작정인가?"

검무극은 대답 대신 풍천교주에게 물었다.

"일 못하는 사람들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그야 무능력하고 게을러서 아닌가?"

"그럴 수 있죠. 한데 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뭔가?"

"눈치가 없는 겁니다."

순간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었다. 명백히 그의 말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수하들 눈치를 보라는 건가? 그래서 교가 제대로 굴러가겠는가? 그러다 정파 놈들에게 잡아먹히면?"

"눈치를 봐야 수하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요. 눈치를 봐야 어떤 마음인지를 알지요. 전 억지 충성은 사절입니다."

"그만!"

결국 풍천교주는 술상을 뒤집었다.

와장창 엎어진 술상에 모두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옷에 술과 요리가 옷에 묻었지만,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풍천교주가 소리쳤다.

"가식이다. 네게 잘 보이려고 하는 가식이라고. 말만 저러지 말 안 듣는 수하 있으면 몰래 끌고 가서 죽일 거다. 지금 수하 눈치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네 눈치를 보고 있다. 널 데려가고 싶은 마음에 가식을 떨고 있다고."

그의 말이 쩌렁쩌렁 울렸다. 남들 눈에는 급출수지만, 그에게는 쌓이고 쌓인 폭발이었다.

풍천교주는 몇 번이나 술상을 엎고 싶은 것을 참았다. 한데 검무극의 마지막 말 중에 억지 충성이란 말을 듣는 순간, 참았던 둑이 무너졌다.

족쇄 사내도, 혹은 다른 수하들도 모두 자신에게 억지 충성을 하고 있다고 자책하며 피해의식까지 느끼고 있던 요즘이었으니까.

그곳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뒤집힌 상 바닥을 보며 풍천교주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어쩌라고? 이게 난데? 저딴 말 듣기 싫은 걸 어쩌라고! 젠장!'

엎어진 술상이 오늘의 길고 긴 결전의 끝을 알렸다.

"제가 무례했던 것 같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찾아뵙고 사죄드리겠습니다."

검무극의 사과와 함께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작별을 고했다.

마존들 앞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두 사람은 화를 내도 될 상황이었지만, 검무극을 생각해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장호가 족쇄와 서대룡, 이안을 챙겨서 뒤따라 나왔다.

검무극은 미소로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성립되지 않았을 자리였다.

그들은 입구에서 헤어졌다. 아무도 풍천교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장호와 서대룡, 이안은 셋이 한잔 더 하겠다고 풍류주점으로 갔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피곤하다고 거처로 돌아갔고 검무극 역시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 * *

족쇄 사내가 일어났다.

풍천교주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족쇄 사내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족쇄 사내가 방바닥에 쓰러진 술병 중 하나를 들어서 병 채로 마셨다. 그리고는 그 술병을 풍천교주에게 내밀었다. 풍천교주가 술병을 받아서 술을 마셨다.

어쩌면 진작부터 이렇게 나란히 마주 앉아서 술을 마셨어도 되었을 거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족쇄를 채워둔 것은 자네가 날 죽일까 두려웠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자넬 죽일까 봐 두려웠던 거지."

"아닐 거다."

"아니라고?"

"그냥 교주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뭐?"

"조금 전에 든 이유는 요즘에서야 한 생각들이지. 그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잖아? 그냥 처음에 묶어 뒀으니까 계속 묶어 둔 거지. 타성에 젖어서."

풍천교주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으니까. 이 족쇄가 이렇게 큰 문제였다는 것은 최근 이공자와 얽히고 나서부터 실감한 일이다.

그럼에도 족쇄 사내는 풍천교주를 위로했다.

"괜찮다. 다들 이렇게 산다."

"괜찮긴 뭐가 괜찮나? 이것 때문에 네가 떠나려 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은 그래서가 아니야. 나를 족쇄에 묶어둬서가 아니다."

"그럼 왜? 이공자와 함께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나?"

"세상을 바꿀 꿈 같은 것 내겐 없다."

"하면 왜? 도대체 왜!"

그 이유는 풍천교주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것도 못 맞춰서 간다."

"뭐?"

"난 교주와 함께 새외에서 무림정세에 관련한 모든 것들을 처리했다."

"그랬지."

"그 과정에서 이공자와 관련해서는 하나도 못 맞췄다."

"맞췄잖아? 그가 온다고 하니 오고. 신물을 요구할 것도 맞추고."

족쇄 사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고. 새외에서 천마신교와 관련한 보고가 많이 날아들었지. 그중 상당수가 이공자였어. 그때마다 이공자는 내 예상을 다 벗어났다. 마군주를 죽일 줄도 몰랐고, 섭혼마존을 죽일지도 몰랐지. 혈천도마를 끌어들일 줄은 더욱 몰랐고. 오늘 자신이 거느린 사람을 모두 데리고 올지도 몰랐어. 심지어 족쇄를 요구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래, 맞아. 어쩌면 이공자가 나보다 더 똑똑해서 가면 박대받을 수도 있어. 뭐야? 군사라고 데려왔는데 보기보다 별로잖아? 하며 실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가서 봐야겠다. 대체 내가 왜 못 맞췄는지,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이런 행보를 할 수 있는지 가서 봐야겠다. 난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족쇄 사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것은 처음이었다.

풍천교주는 알 수 있었다. 더는 그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말 나와는 안 되겠냐?"

"된다. 같이 가자."

"이 미친놈아, 어딜 자꾸 같이 간단 말이냐! 수하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새파란 이공자 밑으로 들어가는 나를 따르기나 하겠냐고!"

"그럼 다 버리고 가자."

"뭐?"

"후계자에게 교주 자리 물려주고 나와 같이 가자. 새로운 삶을 사는 거다."

풍천교주는 온갖 욕이 다 떠올랐다. 하지만 분노보다 앞서는 패배감이 있었다.

"풍천교주란 직함을 빼면 날 어디에 쓸까?"

"그 직함을 빼면 당신은 꽤 멋있는 사람이 될 거다. 평생 그 직함에 묶여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았지. 족쇄에 묶여 살아온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뭐라는 거야."

풍천교주가 들고 있던 술병을 던져 깨뜨렸다.

"교주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라고? 죽이고 싶은 사람을 말 한마디에 죽이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뭐든 먹을 수 있고, 온갖 미녀들을 불러올 수 있는 이 자리를?"

"그래서 행복하냐?"

"당연히 행복하지! 아니,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않다고 치자.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행복해지나? 교주일 때도 없던 행복이 제 발로 걸어오냔 말이다."

"그건 나도 모르지. 네가 찾아야지."

"넌 날 파멸시키려 하고 있어. 날 불행하게 하려고 지랄발광을 하는 거다."

"그럴지도 모르고."

"젠장! 그냥 널 죽이고 끝내련다."

"그건 늦었다."

"뭐?"

"죽이려면 이공자가 오기 전에 죽였어야 했어. 이공자가 족쇄를 풀어줬는데 나를 죽여버린다면 당신에 대한 감정이 어떻게 되겠나? 자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자책할 거고, 그건 교주에 대한 미움으로 번질 거다. 그렇게 되면 교주는 영원히 새외에서 나오지 못해. 교주 당신을 위해서도 날 죽이면 안 돼."

"젠장!"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운명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이렇게 사람 차별하는 운명이 어디에 있나?"

"교주, 당신은 풍천교주다. 새외의 모든 사람을 차별하며 군림하던 사람이다. 당신 입에서 어찌 차별이란 말이 나오나?"

한참을 말없이 있던 풍천교주가 툭 내뱉었다.

"내가 졌다. 그래, 말 잘하고 똑똑한 너희들에게 내가 졌다. 가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가 족쇄 사내를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가서 죽도록 고생해라. 날 떠난 오늘을 죽도록 후회해라. 가라, 가. 더러워서 보낸다."

드디어 풍천교주는 진정으로 족쇄를 풀었다.

그때 족쇄 사내가 뭔가를 풍천교주 앞에 내려놓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족쇄를 풀 수 있는 열쇠와 똑같이 생긴 열쇠였다.

"이게 뭐야? 설마? 족쇄 열쇠냐?"

족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풍천교주는 경악했다. 앞서 목걸이에 달려 있던 열쇠는 검무극의 수하가 족쇄와 함께 챙겨갔는데, 같은 열쇠가 또 나온 것이다.

"몇 년 전에 위조해둔 거다."

"대체 어떻게? 아니, 그럼 왜 달아나지 않았나?"

족쇄 사내는 그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족쇄를 풀 수 있었다면 나를 죽일 기회도 있었을 텐데? 왜 죽이지 않았지?"

"내가 당신에게 욕을 해대도 나를 죽이지 않은 이유와 비슷하겠지. 교주가 그랬지? 당신을 가장 많이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나라고. 나도 그렇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풍천교주의 마음이 울컥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래서다. 이 이별이 이리 어렵고 아쉬운 이유가.

풍천교주는 열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걸 이 순간에 내놓다니. 난 마지막까지 패배자군."

그러자 족쇄 사내는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가장 정중한 표정과 말로 인사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지 않은 것도, 이렇게 순순히 가라고 하는 것도. 적어도 내게 교주님은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달아날 수 있었는데도, 몇 번이나 죽고 싶었는데도 이렇게 살아온 것은, 어쩌면 교주님과 정이 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나를 풀어준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함께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교주님."

족쇄 사내는 그렇게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풍천교주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꽝꽝 내리쳤다.

속이 후련하면서도 아쉽고, 그러면서도 허탈하고, 또 그러면서 기뻤다. 그리고 슬펐다.

제80회 언젠가 뻔한 사람이 되어도.

급결성된 삼인방은 풍류주점으로 향했다.

이안과 서대룡은 제법 취했었는데, 풍천교주가 술상을 뒤집는 순간 거짓말처럼 술이 다 깼다.

평생 살면서 풍천교주가 마존들 앞에서 술상을 뒤집는 모습을 언제 또 보겠는가? 손자들 무릎에 앉히고 이 할애비가 소싯적에 말이다로 시작하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하나 생긴 것이다.

이런 날 그냥 갈 수 없다는 것이 세 사람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마가촌으로 나가기 전에 장호는 만년한철을 본교 철방의 책임자이자 신수(神手)라 불리는 곽 방주에게 맡겼다.

곽 방주는 오랜만에 제대로 손 좀 풀겠다며 크게 기뻐했고, 평소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그였기에 세 사람은 자신들이 받는 선물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새삼 실감했다.

세 사람이 마가촌 풍류주점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세 분만 오셨네요."

조춘배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오늘부로 삼인방 결성되었습니다."

서대룡의 농담에 이안이 덧붙여 말했다.

"조만간 사인방이 될 수도 있고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조춘배에게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술부터 주세요."

세 사람이 항상 앉는 이 층 자리에 앉았다.

술자리는 장호의 농담 반 진담으로 시작되었다.

"저는 가끔 섭섭합니다."

"왜요?"

"두 분은 심장이고 오른팔이지만,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잖습니까?"

농담처럼 말했지만 섭섭함이 묻어났다.

그때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더 대단한 것 아닐까요?"

"무슨 말씀이시오?"

"말씀처럼 심장도 아니고, 오른팔도 아닌데 항상 도련님이 군주님을 부르잖아요?"

그런 관점에서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지 장호는 눈을 크게 떴다.

"오른팔이니 심장이니 하는 것은 장난이지만, 마군주님을 신뢰하는 도련님 마음은 진짜예요. 전 도련님 눈빛만 봐도 알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우리 이 무인께서는 사람 기분을 참 좋게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이안이 그런가요? 라고 물었고, 장호는 이안처럼 크게 네라고 대답했다.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

그러다 문득 이안은 족쇄 사내를 떠올렸다. 오늘 술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까 그분은 누굴까요?"

"범상치 않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서대룡의 대답에 장호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무리 중요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함부로 굴게 두진 않을 겁니다."

그는 족쇄 사내를 자신이 견제하겠다는 뜻을 명백히 밝혔다.

"아까 절 위해 나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대룡이 고마움을 전했다. 아까 족쇄 사내가 누군가 오른팔을 차지하려고 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압박했을 때, 장호가 나서줬기 때문이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서 조사관을 위해서 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진심입니다. 오른팔 후보로 줄 서 있다는 말."

이안과 서대룡이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장 군주님이시라...."

서대룡이 뭔가 말을 하려는데 장호가 끊었다.

"양보할 수 있다는 말씀은 말아주십시오. 이공자님의 오른팔 자리는 그렇게 쉽게 양보할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뇨, 저는 장 군주님이시라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네? 그럼 왜 아까는 양보한다고 했습니까?"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분위기가 제가 나설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요. 솔직히는 양보 못 하죠. 절대 안 합니다."

서대룡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안이나 장호에게 한 번쯤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황천각의 제 선임이 전대 마군주에게 죽고 저는 복수할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군들의 인적 사항을 다 외우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나서서 재조사하자는 말을 하지 못하면서 그냥 마음으로만 복수심을 불태웠습니다."

서대룡이 술을 마셨다. 장호가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한심하죠? 한데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었거든요. 아마 그때 임시조사관으로 각주님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전 평생 자책만 하면서 어둡고 우울하게 살아갔을 겁니다. 요즘 제가 각주님께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뭔지 아십니까? 왜 이리 밝아졌냐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의 오른팔 자리를 쉽게 내놓겠습니까? 군주님이라도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 하루가 다르게 무공 실력도 늘고 있습니다."

한풀이하듯 말을 쏟아낸 서대룡이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뭐라 한마디 할 것 같았던 장호는 그냥 기분 좋게 웃었다. 서대룡은 이 거친 사내가 가끔 이렇게 씩 웃는 웃음이 굉장히 낯설면서도 멋지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저런 느낌으로 웃고 싶다는 생각이 매번 들었으니까.

서대룡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 모임, 앞으로도 계속하죠. 제발요!"

그날 늦게까지 세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검무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족쇄 사내에 관해서도 나눴다. 마존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각자 자기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그래서 왠지 이 자리에서는 뭐든 다 말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믿음이 드는 그런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 검무극이 없어서 더 자유롭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오늘 모이길 정말 잘했어요."

이안이 술잔을 높이 들자 두 사람이 힘차게 건배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온 세 사람은 주점 앞에 나란히 섰다.

저 멀리 보이는 본단 건물을 보며 서대룡이 말했다.

"오늘 밤 여러 사람의 운명이 바뀌고 있겠죠? 아니면 이미 바뀌었거나."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린 그 운명들을 이끄는 운명을 믿으면 될 거예요."

끝까지 이공자라고? 끝까지 진심인 사람들, 여기에도 있었다.

* * *

새벽 여명이 밝아올 무렵, 족쇄 사내가 나를 찾아왔다.

항상 음뢰종 옆에 족쇄를 차고 있던 모습만 보다가 내 거처에서 그를 보니 너무나 새로웠다.

나는 인사도 하기 전에 그의 발목부터 살폈다.

"발목은 괜찮으시오?"

"이공자는 끝까지 제 예상을 빗나가시네요."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차분했다.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첫인사에 제 발목을 살펴볼 줄은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인사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제 발목은 괜찮습니다. 대단한 무공은 아니더라도, 전 무인이니까요."

"어떤 무공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시오? 정확히 실력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서요."

"한때 명인권법(名人拳法)을 칠 성까지 익혔습니다."

"아, 좋은 권법이죠."

"명인권법을 아십니까?"

"새외십구강(塞外十九强) 중 권사(拳師) 양성(羊成)의 독문무공 아닙니까?"

"어떻게 그것까지 아십니까?"

"제가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다행히 남자의 발목은 괜찮았다. 허리를 펴고 일어나는데 남자가 말했다.

"제 이름은 고월(孤月)입니다."

드디어 족쇄 사내의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고월. 쓸쓸하고 외롭게 떠 있는 달이란 뜻이 그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고월. 좋은 이름이군요."

"감사합니다."

나와 고월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치렁치렁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맑은 눈빛이 보였다. 처음에도 이 눈빛이 마주치면서 시작되었듯, 그와는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 군사가 되어 주시오."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내 제안에 고월은 차분하게 되물었다.

"나중에 이공자께서 천마가 되시면 저는 천마신교의 총군사가 될 겁니다. 그런 중책을 제게 맡기실 수 있습니까?"

"제가 천마가 되는 일에 큰 역할을 해냈을 때 맡게 되겠죠. 제가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올라서야 할 겁니다."

정확하게 짚은 후에 농담을 덧붙였다.

"그래도 제 오른팔보다는 마교 총군사가 되는 것이 더 쉬울 겁니다."

고월이 옅게 웃었다.

"아까 보니 그렇더군요."

내 제안이 그랬듯 고월 역시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예를 갖췄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저를 군사로 받아주신다면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제 목숨과 명예를 걸고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나 역시 정식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무인 고월, 이 순간부터 그대를 나의 총군사로 삼겠습니다. 부디 나를 잘 이끌어 주시오."

말보다 그의 맑은 눈빛에 담긴 열의를 믿는다. 그를 내 앞으로 데려온 나의 운명을 믿는다.

"이제부터 말씀은 편하게 해주십시오."

"그러겠네."

고월을 맞이하는 이 순간은 특별했다. 모든 것을 혼자 다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우선은 자네 건강 회복부터 하세."

"저는 괜찮습니다."

"서두를 것 없어. 난 자네가 십 년 후, 이십 년 후, 삼십 년 후에도 계속 필요해. 그 기간 중 언젠가는 무림맹과 전쟁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사도맹을 달래야 할 수도 있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고, 강적이 우릴 칠 수도 있지. 난 오늘 당장 내게 조언해줄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그 모든 일을 함께해줄 사람을 구한 것이네."

순간 고월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거기까지 생각하시다니. 정말 이공자님은 예측 불가하신 분입니다."

"지금의 나는 예측 불가한 면이 있지만, 나중의 나는 너무나도 뻔한 사람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때라고 수하들의 목숨이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지금도 날 도와줘야 하지만, 그때도 날 도와줘야 하네. 우린 아주 먼 길을 가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고월이 내게 물었다.

"제가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하게."

"만약 앞으로 저보다 더 뛰어난 군사를 발견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의 부군사가 되어 나를 도와주게. 어떤가? 내 대답, 합격인가?"

"합격입니다."

"섭섭하지 않겠나? 다른 사람을 데려와서 오늘부터 이 사람이 내 군사다, 이러면?"

"제가 이공자님을 찾아온 것은 친분을 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와 친해지실 필요 없다는 뜻이죠. 그러니 그런 상황이 오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당연한 선택도 못 한다? 그럼 군사로 있는 제가 병신이거나 나쁜 놈이겠지요. 단호하셔야 합니다. 공자님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요."

고월은 확실히 통찰력이 남달랐다. 정에 사로잡히면 결국 관계를 더 크게 망치고 만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실 이공자께서 워낙 똑똑하신 분이라, 과연 제가 필요할까 싶습니다."

"사람이 언제나 똑똑할 수는 없잖아? 나도, 자네도 실수하겠지. 그래도 둘 다 동시에 실수할 가능성은 작지 않겠나? 그러니 같이 의논하면서 가자고."

"대체 이공자께서는 어떤 인생을 살아오신 겁니까?"

그 인생을 어찌 그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 인생 대신 사마명이 내게 했던 말을 그에게 전했다.

"내가 존경하는 군사님이 그러더군. 좋은 군사란 상대방 군사보다 더 똑똑한 군사다."

"제 상대방은 무림맹 군사입니까? 아니면 그 존경하는 군사입니까?"

"둘 다."

고월은 짐작할 것이다. 내가 말한 존경하는 군사가 본교 총군사 사마명이란 사실을. 그를 능가하는 군사가 되란 의미임을.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이 있네. 정보 조직을 만들고, 중원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게. 통천각보다 뛰어난 조직을 목표로 한다."

"네!"

"그 일이 이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일인가?"

고월이 자신 있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힘들게 절 데려오신 것 아닙니까?"

* * *

며칠이 지났다.

고월은 며칠 동안 몸을 추스르는 데 집중했다. 거처는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당분간 내 거처의 객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첫날부터 쭉 그랬듯 오늘도 그는 일찍 일어나 있었다.

"일어났나?"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잘 잤네."

"아침부터 어떤 일이십니까?"

"자, 여기 이 돈부터 받게."

내가 전장에서 찾은 전표 뭉치를 그에게 건넸다.

"조직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할 테니 이 돈을 쓰게."

백만 냥이나 되는 거액임을 확인했음에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제가 이 돈을 들고 달아나면 어쩌시려고요?"

"사람 풀어서 잡아 와야지."

"그리고는요?"

"지금 만들고 있을 부채랑 비수 다시 녹여서 족쇄부터 채우고. 그리고는 가장 미운 사람에게 자넬 보여줘야지. 그때도 신비로운 느낌으로 잘 연기해야 해."

이 농담만은 참기 어려웠는지 그가 살짝 소리 내서 웃었다.

"가세, 오늘은 나가서 밥 먹자고."

그렇게 마가촌으로 나왔는데 풍류주점 이 층에 풍천교주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풍천교주가 벌써 두 번이나 혼자 왔다고 이곳 주인장이 기별해줬다네. 자넬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어떤가? 만나보겠나?"

그렇지 않다면 풍천교주가 이곳에 두 번이나 와서 밥을 먹을 리가 없다.

"네, 그러잖아도 만나고 싶었습니다."

내 문제는 풀었지만, 아직 이들에게는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 등짐은 지고 싸워도 마음의 짐은 놓고 싸워야지.

우린 천천히 이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81회 다른 인생 한 번 살아보자.

나와 고월을 본 풍천교주는 놀라지 않았다.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우릴 기다렸으면서 괜히 한마디 쏘아붙이는 그였다.

"새 사람을 들인 것 자랑이라도 하시게?"

"자랑하라고 여기서 식사하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나와 고월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풍천교주가 고월을 힐끗 쳐다보았다. 요 며칠 쉬면서 살도 붙고 몸 상태도 좋아진 그의 모습이 적응 안 되는지 자꾸 쳐다보았다.

"새 주인이 잘 해주나 보네."

"잘 먹고 잘 자고 있습니다."

"잔칫날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줄은 모르겠지?"

"기왕이면 큰 잔치면 좋겠네요."

이 둘의 관계 역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 풍천교주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다. 그때 내가 왜 그리 집착했을까? 지금 와서 보니 별일도 아니었는데.

아니면 이 일은 잊지 못하는 상처가 되고 한이 될까?

평생을 살았던 나이지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가 침울해지기 전에 나는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는 만나 뵈었습니까?"

"만나 뵈었네."

"그 말씀은 드렸습니까? 새로운 섭혼마존을 더 강하게 키우겠다고요."

"드렸네. 자네 말처럼 흡족해하시더군."

"다른 말씀은 안 하셨고요?"

"하셨네. 청선의 무공수련은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더군. 내가 빨리 돌아가 주기를 바라는 눈치셨네."

"그래서 뭐라 대답하셨습니까?"

"아직 신물도 찾아야 하고, 가르칠 것도 많다고 말씀드렸네."

"잘하셨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대가로 또 신물을 요구하진 않겠지?"

"그 부분은 제 군사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순간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걸 지금 내게 할 말인가?"

나는 차분하게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교주님."

"듣고 있네."

"본교에 오셔서 한 사람을 잃었지만 다른 한 사람을 얻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뒤돌아보는 인생을 사신다면, 그 사람도 잃게 될 겁니다."

풍천교주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지만, 화를 내지는 못했다. 섭혼마존이 된 청선은 소홀히 상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제자로 맞은 청 소저는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집중하십시오."

내 조언에 괜한 심술이 났는지 풍천교주는 고월에게 화풀이를 했다.

"자네 말대로 여기 이공자가 불세출의 영웅이라면 앞으로 수많은 사람이 주위에 모여들 거다. 더 똑똑한 사람들도 많겠지. 넌 거기서 그저 그런 사람으로 전락하게 되겠지. 누구였더라? 아, 그때 그 족쇄! 딱 이런 사람이 될 거야."

나는 느꼈다. 이 말은 고월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한다는 것을. 고월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말라는 풍천교주의 경고라는 것을. 이 사람, 고월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다.

그때 고월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공자께서 백만 냥이나 주셨습니다."

설마 그가 이런 상황에서 풍천교주에게 돈 받은 것을 자랑할 줄 몰랐기에 나는 내심 놀랐다.

"이공자가 가식을 떤다고 하셨죠? 가식을 떨어도 이 정도로 크게 떨어야 합니다."

나도 놀랐으니 풍천교주의 놀람은 당연했다. 물론 놀람은 분노로 이어졌다.

"충고는 잘난 새 주인에게나 해!"

풍천교주는 자리를 박차고 그곳을 나가버렸다.

고월이 이런 경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에게 담담히 물었다.

"왜 그랬나?"

과연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

"군사로서 첫 번째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뭔가?"

고월이 날 응시하며 말했다.

"풍천교주를 영입하고 싶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풍천교주를 우리 편으로 들이겠다는 소린가?"

내 물음에 고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열받게 한 건가?"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아마도 풍천교주를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포석인 모양이다.

"왜 그를 끌어들이려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잠시 사이를 두고 고월이 말했다. 생각지 못한 이유였다.

"풍천교주를 살려주고 싶어서입니다."

"나와 손을 잡지 않으면 그가 죽나?"

"네, 저는 그렇게 되리라 예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천마신교 교주님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때문에? 왜?"

천마를 언급하고 있기에 고월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두 교주분 간의 그릇 크기가 너무 차이가 납니다. 공자님 아버님께서는 역대 천마 중 손에 꼽히는 무재를 지니신 분이죠. 야망도 크신 분이고요. 결국 풍천교는 천마신교에게 잡아먹히고 말 겁니다."

나는 고월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제 고월조차 없는 풍천교가 새로운 군사를 제대로 들이지 못한다면 어떤 화를 겪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풍천교주를 살려주고 싶다?"

"네, 그렇습니다. 공자님의 사람이 되면 그 화를 면할 수 있겠지요."

풍천교주를 얻는다? 그 결과 여러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실만큼이나 득도 있는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내 군사의 첫 제안인데 받아들여야지. 좋아, 풍천교주를 우리 쪽으로 끌어 들여보세."

"감사합니다."

고월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나는 그에게 제대로 군사 취급을 해줄 작정이다. 아버지가 사마명을 대하듯 말이다.

"제가 망쳐버릴까 봐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뭘?"

"풍천교주와 제가 감정적으로 깊이 얽혀 있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까닥 잘못 그를 다루다가 풍천교가 적이 돼버릴 수도 있고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한데 왜 허락하신 겁니까?"

"서로 외면한다고 괜찮아질까? 오히려 보지 않으면 미움과 증오는 더 커진다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풍천교주와 지지고 볶아서 결판을 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우리 편을 만들든 원수가 되든, 어떻게든 결론을 내보자고."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처럼 말이다. 내 말에 고월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악수 한 번 하세."

고월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족쇄보다 더 단단한 손입니다."

"만년한철을 부술 손이란 말인가? 자넬 붙잡아 둘 족쇄 같은 손이란 말인가?"

"어느 쪽이십니까?"

"난 둘 다 같은데?"

"전 둘 다 좋습니다."

우린 힘차게 손을 맞잡았다.

드디어 내게 군사가 생겼다.

* * *

다음 날 나는 풍천교주를 찾아갔다.

"중원에서 나는 좋은 차입니다."

풍천교주는 고맙다는 말 대신 코웃음부터 쳤다.

"자네 군사에게 백만 냥 준 것 자랑하러 왔나? 돈 많아서 좋겠군."

"그냥 뵙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리고 돈은 교주님이 저보다 백 배는 더 많지 않습니까?"

"백 배는 무슨! 천 배는 더 되겠지."

"그럼요. 저도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사람입니다. 교주님 앞에서 돈 자랑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왔나?"

"차 한잔하면서 담소나 나눌까 해서 왔지요."

풍천교주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부터 보냈다. 나 때문에 쌓인 피해의식이 뒤에 놓인 신물보다도 더 쌓인 그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실 고월과 관련해서 고민이 있습니다."

"무슨 고민?"

"어제 보셨지요? 교주님 앞에서 경망스럽게 돈 자랑 하는 것."

"실망이라도 했다는 건가?"

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약간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물론 고월이 시킨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어제 고월이 돈 자랑을 한 것이다.

"저는 고월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지극정성을 보인 건가?"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해봤는데?"

"어쩌면 교주님과 저와 인연을 맺어주기 위한 디딤돌 같은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사람은 아나? 자네가 이렇게 뒤통수를 치고 있다는 것을."

"험담이나 배신은 아니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지."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고월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풍천교주의 표정에 불쾌감이 스쳤다.

"이보게, 이공자."

"네."

"좋게 말할 때 오늘은 그만 가시게."

싸늘한 축객령에 인사만 하고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렇게 쫓겨나는 것도 고월의 예측에 있었다.

* * *

다음날은 고월이 풍천교주를 찾아갔다.

"이것들이!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인가?"

그래도 검무극이 왔을 때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손님으로 왔으니 예의를 갖춰주십시오."

"지랄한다."

풍천교주가 옆으로 돌아앉았다.

고월이 옆에 놓인 탁자로 가서 제 손으로 차를 탔다. 풍천교주의 거처에는 시비도 잘 들이지 않고 둘만 있었기에 주로 풍천교주가 차를 탔었다.

"독이라도 타려고?"

"교주님을 독살해서 뭐 하겠습니까?"

"나 없는 세상에서 이공자와 즐겁게 살 수 있잖아?"

"교주님이 살아계셔야 자랑을 하지요. 어제 돈 자랑처럼요."

"이런 미친놈이."

고월이 차를 가져왔다.

"드십시오. 그러고 보니 처음 제 손으로 타 드리는 차네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풍천교주는 차를 호호 불어가며 마셨다.

"어떻습니까?"

"맛없다."

"한 잔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그러든지."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러다 불쑥 풍천교주가 말했다.

"이공자가 자넬 완전히 믿지 않고 있어."

원래라면 절대 말해주지 않으려 했다. 검무극에게 뜨거운 맛 좀 봐라, 이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까 그게 잘 안되었다.

"이간질이십니까?"

기껏 말해줬더니 뭐? 발끈하려던 풍천교주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여기든지."

그제야 고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동입니다. 제게 그런 말씀도 다 해주시고."

"이간질이라면서?"

"아닌 줄 압니다."

"어떻게?"

"작전이거든요."

작전이란 말에 풍천교주가 깜짝 놀랐다.

"작전? 무슨 작전?"

"교주님을 끌어들이려는 작전이죠. 이공자님이 저를 의심해서 궁지로 몰아가고, 교주님 약한 마음을 이용해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작전입니다."

"뭐?"

잠시 멍하게 있던 풍천교주가 목청을 높였다.

"그런 시답잖은 작전에 내가 넘어갈 줄 알고?"

"제가 궁지에 몰리면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

"당연히! 이미 간 사람인데, 내게 왜?"

"하면 지금 왜 흥분하고 계십니까?"

"흥분 안 했다. 안 했다고!"

하지만 분명 풍천교주는 흥분하고 있었다.

"한데 왜 내게 말해주는 거냐?"

"교주님을 속여서 데려오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

풍천교주가 뭐라 말할까 몰라 망설이고 있던 그때. 고월이 다시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까지도 작전입니다. 더욱 저를 신뢰하게 만드는 작전이죠."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이 망령 같은 놈이 떠나서도 날 괴롭히는구나! 훠이! 물러가라!"

"이제 교주님 같으십니다."

"소리나 질러대는 것이 나답다고? 놀리냐? 그래? 원 없이 질러줄 테니 맘껏 조롱해봐라!"

한바탕 소리를 질러대자 풍천교주는 속이 후련해짐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해서 날 데려가려는 이유는?"

"이대로라면 천마신교 교주에게 당할 것 같아섭니다."

고월은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하게 풍천교주를 대했다.

"안 당해! 돌아가자마자 새 군사 구할 거야."

"대충 풍천교 내에서 어떤 사람이 제 자리에 앉을지 제가 알잖습니까? 그들로는 무립니다."

"구하면 되지. 자넬 구했던 것처럼."

"그런 행운이 두 번이나 올까요?"

"젠장! 망할! 이 시건방진 놈!"

"저는 이제 패를 다 깠습니다. 이제 교주님이 패를 까실 차례입니다."

"...어차피 내 패는 다 알고 있으면서."

풍천교주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공자는 내 모든 것을 털어먹을 거다."

"그럼 그때마다 교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다 얻어내십시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어서 채워 넣으십시오."

"내 머리로는 그게 안 되잖아?"

"제가 돕겠습니다."

"가서 너 자신이나 도와라. 거기서 개털 돼서 족쇄에 묶이지 말고. 인간들 착한 척, 잘난 척 해봤자 다 거기서 거기다."

"그래섭니다. 거기서 거기니까 같이 어울리자고요."

"정말 널 믿어도 되나?"

"떨리십니까?"

"너라면 안 떨리겠냐?"

그때 고월의 표정이 달라지며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교주야."

풍천교주가 반가우면서도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짓말마라. 지금까지 인생 살면서 떨렸던 적 없었잖아. 한 번도 없었지? 교주를 위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중원진출 생각만 해도 떨린다고? 거짓말 마라. 중원진출, 중원진출 노래를 불렀지만, 그 역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었잖아?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솔직히 교주에게는 귀찮은 일이었지?"

"!"

부정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다 숙원이기에 자신도 숙원이 된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을 거부하면 풍천교의 죄인이 되는 것 같아서 중원진출을 원했을 뿐이다.

"한마디만 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온갖 미녀를 안을 수 있고, 매일 산해진미를 먹는 인생도 좋지. 모두가 꿈꾸는 인생이니까. 한데 교주야, 교주는 그 인생 실컷 살아봤잖아? 이제 그 인생에서는 어떤 자극도 행복도 없잖아? 교주야, 우리 다른 인생 한 번 살아보자. 긴장되고, 짜릿하고, 간이 철렁철렁하는 그런 인생 한 번 살아보자. 모래바람에 녹슬어가는 교주 무공, 진짜 피바람이 뭔지 세상에 한 번 보여줘야지. 그러다 운 나쁘면꽥하고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인생 말이다. 다행히 우린 서로의 무덤가에 꽃 한 송이 가져다줄 사람은 있잖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윽고 풍천교주가 나직이 말했다.

"이공자 부르게."

제82회 그때 그 족쇄, 그때 그 교주.

내가 풍천교주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교주의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만약 자네와 손잡는다면 지금과 뭐가 달라지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서 성급함보다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는 진지했다. 고월이 그를 거의 설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확신에 찬 말을 해주면 좋았겠지만, 나는 진실을 말해주었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달라지는 게 없다고?"

"그럼요, 뭐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허락도 안 받았는데 풍천교 지부를 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손잡았다고 공표를 하겠습니까? 그냥 우리끼리의 약속이죠."

"그것뿐이라고?"

풍천교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고월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야? 이러려고 나를 데려가려는 거냐? 이런 눈빛을 보였지만, 고월은 조용히 내 말만 기다렸다.

"다만 이건 있겠죠. 정말 교주님이 내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면, 교주님이 위험에 빠지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 저는 구하러 달려갈 겁니다."

"난 위기에 빠진 적이 없어서. 살면서 위기에 빠지는 일, 잘 없지 않나?"

"그만큼 순탄한 삶을 살아오신 거죠."

풍천교주가 힐끗 고월을 쳐다보았다. 그 순탄한 삶의 많은 부분은 고월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반면에 저와 손잡으시면 위기에 빠지실 겁니다. 뭐? 이공자와 풍천교주가 손잡았어? 풍천교주부터 없애버려! 이런 적들이 안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죠."

"그럼 내가 미쳤다고 자네와 손을 잡나?"

"교주님과 손을 잡는 일은 제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교주님이 부담스럽습니다."

"어렵게 말해서 나 헷갈리게 하지 말고. 쉽게 말하게."

"아버지가 교주님이나 풍천교에 대해서 좋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죠?"

"물론이네."

"그런 상황에서도 저는 교주님과 교류했습니다. 이제 고월 이 사람까지 제 사람이 되었지요. 과연 아버지가 그 사실을 모르실까요?"

"알겠지."

"저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이 관계를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신물 욕심도 있었지만...."

나는 왼손을 그 앞에 내밀었다. 극품천잠사가 팔목에 감겨있었다.

"이 천 쪼가리가 아무리 귀해도 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감수할 정도는 아닙니다."

풍천교주는 반박하지 못했다. 천마가 되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한데 왜 이 난리지? 왜 날 번갈아 찾아와서 내 마음을 흔드냐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생각이 아니라고요. 바로 고 군사 생각이죠."

고월은 반쯤 눈을 내리 깐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 사람들 옆자리로 교주님을 데려오자는 생각은 전적으로 여기 고 군사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고 군사에게 제가 묻겠습니다."

나는 고월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왜 아버지와의 갈등을 감수하고서라도 교주님을 내 편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풍천교주는 나보다 더 궁금한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고월이 차분하게 말했다.

"송구하게도 이 결정은 공자님을 위한 결정이 아닙니다. 제 옛 주인을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고월이 풍천교주를 응시했다.

"교주님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하고 싶어섭니다. 교주님과 새 인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교주직을 후계자에게 맡기고 오십시오."

"교주직을 버리고 오라고?"

"네. 저는 풍천교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주님 개인을 원하는 겁니다."

풍천교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그는 한 집단을 이끌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이기심과 욕심은 모두를 속이는 지독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현실에 안주했던 새외의 지배자는 이제 위태로운 줄 위에 서 있다. 저 아래에는 수많은 창과 검날이 장대처럼 솟구쳐 있는 위태로운 줄 위에.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알지 못했다.

과연 그가 한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풍천교주의 자리를 버리고 내게 올까? 이 세상에 정말 그런 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없으면 본교는...."

"더 잘 돌아갈 겁니다. 걱정 마시고 오십시오."

"생각 좀 하자고! 좀! 제발!"

그때 내가 바깥에 있는 풍천교주의 수하에게 황천각에 가서 서대룡을 데려오라고 했다. 내 행동에 풍천교주와 고월 모두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잠시 후 서대룡이 바람처럼 그곳으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갑작스러운 부름에 풍천교주의 거처까지 온 그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나는 장난스러운 인사는 일절 생략한 채 진지하게 그에게 물었다.

"최근 자네 인생을 바꿀 결정을 어디에서 했나?"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서대룡 역시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주점에서 했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린 시간은?"

"채 일각도 안 걸렸을 겁니다."

"그 결정 후회하나?"

"아뇨."

"만약 그날 그곳에서 결정 안 했다면?"

"영원히 못 했을 겁니다."

"그때 일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주게."

원래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는 서대룡이다. 하지만 기왕 나섰다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똑똑한 사람이기도 하다.

"제 경험상 인생을 바꿀 결정은 순간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집을 떠날 때도, 황천각에 들어올 때도. 오래 고민하지 않았죠. 제가 옷 한 벌 살 때는 며칠을 고민해서 삽니다만, 이번에 제 인생은 일각 만에 바꿨습니다. 미루면? 저는 결정 못 합니다. 다음 날에는 다른 사람으로 깨더라고요."

내가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어떻습니까?"

풍천교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짰지? 말 다 맞추고 와서 이러는 거지? 어제 밤새 연습했지?"

그러자 서대룡이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감히 교주님께 한 말씀 드리자면, 이공자님을 만난 후에 저도 비슷한 경험 여러 번 했습니다. 다 짜고 절 놀리는 것 같은 상황 말이죠. 이게 뭐지, 저건 또 뭐지 하다 보면 상황이 끝나 있고. 이리로, 저리로, 시키는 대로 정신없이 가다 보면 또 상황 끝나 있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풍천교주님 앞에서 이런 대답을 한다고요? 왜요? 지금도 다 짜고, 절 놀리는 것만 같습니다."

서대룡이 나를 보며 따지듯 물었다.

"맞죠? 저 놀리려고 이러시는 거죠? 이래 봬도 저 황천각 수석입학자라고요. 척 보면 다 안다고요!"

난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역시, 내 오른팔답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음에 든다. 안 짜도 되는 게 오른팔이다. 그래서 오른팔인 거다."

서대룡도 날 따라 웃었다.

"오른팔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요즘인데, 점수를 딴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럼 오른팔 아직까진 잘 붙어 있는 걸 확인했으니,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잠시 기다려. 어쩌면 역사적인 순간이 될 수도 있는 자리니까."

"혈투가 벌어지는 자리는 아니겠지요? 저 아직 무공수련 기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교주님 마음속에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모두의 시선이 풍천교주에게 집중되었다.

"뭐야? 정말 지금 결정하라는 건가? 풍천교주 자리를 포기하는 것을 일각 만에 결정하라는 거야? 다른 자리도 아니고 풍천교주 자리를?"

그 순간 서대룡이 화들짝 놀라며 '헉!' 탄성을 내질렀다. 자기는 신나게 설명했지만, 풍천교주가 결정을 내릴 내용이 이런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맙소사! 저라면 백 년은 고민했을 겁니다. 지금 결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솔직한 말이 오히려 풍천교주에게 자극이 되었다.

"자넨 정말 후회하지 않나?"

"교주님은 후회하실 겁니다. 돌아가셔서 한 일 년은 고민하십시오! 적어도 백 일은 하십시오."

"건방진 놈! 묻는 말에만 대답하게."

"네, 후회하지 않습니다. 각주님을 만나 제 수명은 줄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무척 행복합니다."

풍천교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방에 진열된 신물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음뢰종을 치기 시작했다.

뎅!

깊은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소리가 사라질 때쯤 그가 다시 종을 쳤다. 또 치고, 또 치고.

종소리를 들으며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음뢰종에 새겨진 악귀가 그에게 무슨 조언이라도 해주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몇 번이나 종소리가 울렸을까? 갑자기 풍천교주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가면 자네 오른팔 자리 나 줄 텐가?"

서대룡이 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자기 오른팔 자리를 노려서가 아니라, 정말 풍천교주가 교주직을 포기하려는 사실에 놀라서일 것이다.

내가 풍천교주직까지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한술 더 뜨며 말했다.

"안 됩니다. 제 오른팔은 여기 서 조사관입니다. 장 군주 뒤에 줄 서시고, 싸워서 쟁취하셔야 합니다."

서대룡이 눈을 더 크게 뜬 채 애절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