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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자고 일어나 오전 10시쯤 청담동에 있는 헌터 협회에 도착했다.

SP가 무한이어서 잠이 안 올 줄 알았는데, 웃기게도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푹 자고 일어나니 정신은 상쾌했고 몸은 개운했다.

아마도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몸이 됐을 뿐, 전혀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닌 듯했다.

SP가 무한이라고 해도 잠은 꼭 자야겠다.

"아, 저기 있다."

스마트폰 속의 새싹에게 마나를 주면서 건물 층별 안내도를 확인했다.

퀘스트 관련 층은 2층~5층이었다.

바로 올라가고자 건물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계단으로 걸어갔는데 스피드게이트에 막혔다.

그것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확인증이 필요했다.

스피드게이트에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확인증 발급 후 출입 가능! 발급은 1층에서!]

나 같이 무턱대고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저런 메모지를 붙여 놓은 걸 보면.

몸을 돌려 1층 확인증 발급처로 걸어갔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대기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번호표 발행기에서 뽑은 접수번호도 0034번이다.

발급처에서 한 남자가 확인증을 받으며 일어났다.

33번이었던 번호 전광판이 34번으로 바뀐다.

내 차례다.

"안녕하십니까, 헌터님. 헌터 자격증 부탁드립니다."

잠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지갑에서 헌터 자격증을 찾아 꺼내 건넸다.

내 헌터 자격증을 지갑에서 얼마 만에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손에 익지 않아 헌터 자격증이 아니라 해체업자 자격증을 제출할 뻔했다.

"네, D등급 헌터 백도운님. 본인 확인되셨습니다."

헌터 자격증을 도로 돌려주는 발급원은 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뭐, 유명인들의 지인이지 나 자체가 유명인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오히려 어설프게 알고서 아는 척을 하면 불편해졌으니 못 알아보는 게 더 나았다.

적어도 인터넷에 '백도희 오빠 퀘스트 받으러 협회 옴!'이라는 게시글을 올리진 않겠지.

"게이트에 출입한 마지막 날짜가 2년 전으로 돼 있으신데, 맞나요?"

"아, 네. 맞습니다. 재활이 끝나 이번에 복귀하는 겁니다."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세계수의 열매를 먹고 난 후 제법 빡빡한 재활을 했으니까.

그 일들을 재활이라고 칭할 수 있다면.

"…그러셨군요. D급 헌터인 백도운 님께선 현재 E등급 퀘스트까지 발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네? 퀘스트는 해당 등급의 것까지 받을 수 있지 않나요?"

D급 헌터는 F~D등급 퀘스트를 받을 수 있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발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그렇습니다만. 백도운 님께서는 복귀하고 첫 퀘스트셔서 그렇습니다."

"아…."

복귀 후 첫 퀘스트여서 제한이 생긴 듯하다.

무리하다가 다쳐서 은퇴하는 헌터들이 많아 생긴 규칙일 것이다.

발급원이 확인증을 건네면서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엔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백도운 님. 행운을 빌어요."

"고맙습니다."

스마트폰과 확인증을 챙기고 발급처를 빠져나왔다.

확인증에는 'D등급 헌터 백도운'과 'F~E등급 퀘스트 발주 가능'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F~E등급 퀘스트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뭐, 목요일까지 시간을 빠르게 보낼 수 있는 퀘스트가 있으면 뭐든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확인증으로 스피드게이트를 통과한 후 계단을 올랐다.

2층에 올라서자 먼저 와서 퀘스트를 검색하고 있던 헌터들이 날 쳐다봤다.

그들의 눈빛은 음침하고 우울했다.

동업자를 따듯하게 맞이하지 않는 눈.

'제길, 또 한 명 늘었군!'하고 배척하는 눈이다.

인상을 찌푸리는 동업자들을 보면서 나는 새삼 헌터가 되었음을 느꼈다.

[세계수 새싹이 더러운 시선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새싹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나 보다.

[새싹은 관리인 백도운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주변의 흙을 전송합니다.]

뭐? 안, 안 돼!

제24화

[세계수 새싹이 더러운 시선을 느꼈습니다.]

[새싹은 관리인 백도운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주변의 흙을 전송합니다.]

안 돼! 절대 안 돼!

홍유릉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인간 흙 분수대가 돼야만 했던 잊고 싶은 창피한 기억이.

오른손에 쥔 스마트폰을 흔들면서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강하게 빌었다.

그 때문일까?

새싹은 흙을 전송하지 않고 의사를 전해 왔다.

[새싹은 의아해합니다.]

의아해하고 싶은 건 네가 아니라 나라고.

날 보던 헌터들의 눈빛이 음울하긴 했다.

그렇다고 더러움을 느끼며 흙을 보내야 하는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새싹이 보낸 흙이 어떤 흙이던가?

세계수의 마나를 머금어 스켈레톤 수백 마리를 한꺼번에 정화해 버릴 정도로 강력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런 걸 이곳 헌터 협회에서 분수처럼 쏟아 내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이 귀한 걸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 댈 테고, 사업 한 번 크게 해 볼 생각 없냐고 권해 올 것이 뻔하다.

어떤 식으로든 들들 볶일 테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 몸이 절로 떨린다.

아니, 그전에 웬 흙을 뿌려 대냐고 혼날 게 분명하다.

[새싹은 관리인의 의도를 존중해 주변의 흙을 우편함으로 전송합니다.]

[또한, 더러운 시선이 여전히 느껴지니 필요할 때 아끼지 말고 쓸 것을 권합니다.]

다행이다.

새싹은 의아해하면서도 내 말을 들어주었다.

화면으로 곧바로 보내는 게 아니라 우편함으로 전송한 거다.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하며 흙을 받았음을 알려왔다.

어쨌든 날 걱정해서 흙을 보내려고 했던 것이니 그 마음이 고맙고 기껍다.

히쭉 웃으며 새싹을 쓰다듬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열심히 두들겼다는 소리다.

따스한 손길이 좋았는지 새싹은 이파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이젠 이 새싹과 말까지 통하는 건가….

"...."

2층에 올라서자마자 멈춰 서서는 스마트폰 게임을 해 댄 것이 이상하게 보였을까.

헌터들은 괴팍한 것을 봤다는 듯 쳐다봤다.

금방 흥미를 잃어 내게서 시선을 거뒀지만.

그들은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고 퀘스트를 검색하는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헌터 협회 사이트에 로그인한 후 퀘스트를 검색했다.

〈헌터 협회 IP에서 접속된 것이 확인됐습니다.〉

〈퀘스트 항목을 열람합니다.〉

퀘스트 창을 열기 위해선 꼭 헌터 협회에서 해야 했다.

신원이 확실해야 하기 때문인 듯하다.

어차피 컴퓨터로 하는 거라면 집이나 스마트폰으로 하면 안 되냐는 말들도 있었는데, 모두 기각됐다.

등급을 위조해 퀘스트를 받았다가 실패한 놈들이 있어서다.

정말, 쓸데없는 거로 성실한 놈들 때문에 사람들이 받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안녕하세요, D급 헌터 백도운 님.〉

〈주의! 현재 백도운 님께서는 퀘스트 자격 제한 상태입니다.〉

〈D등급 이상의 퀘스트는 받으실 수 없으며, F등급부터 E등급까지만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한 번 설명을 들었었기 때문에 화면에 떠오른 주의 창을 바로 껐다.

여러 종류의 퀘스트 목록이 떠올랐다.

〈F등급~E등급 퀘스트(총 353개)〉

〈남산 게이트 놀 가죽 채집(E등급) / (0/1)〉

〈'무주 개미굴 던전' 소탕(E등급) / (현재 인원 3/5)〉

〈'송파 백제 고분 게이트' 스켈레톤 소탕 (E등급) / (0/1)〉

〈'산방산 게이트' 약초 채집 (E등급) /(0/1)〉

〈'치악산 게이트' 흰 가시 도마뱀 독 채집 (E등급) / (0/2)〉

〈······.〉

협회 퀘스트 아니랄까 봐 채집이나 소탕같이 귀찮은 것들뿐이다.

그러다 보니 인원 제한이 1명인데도 퀘스트를 당장 골라 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해한다.

채집은 철저하게 운의 영역에 있는 일이다.

의뢰자가 원하는 양질의 재료를 빨리 얻으면 1시간 만에도 완수할 수 있지만,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며칠이고 사냥과 해체를 반복해야 한다.

소탕의 경우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도록 게이트 내 몬스터를 소탕하는 것이기에 최소 100단위에서 크게 1000단위까지 사냥해야 했다.

힘들다고 퀘스트를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

포기하면 헌터 평가에 '퀘스트 포기'라는 좋지 않은 꼬리표가 붙게 된다.

그런 이유로 헌터들은 조금이라도 더 쉬운 퀘스트를 골라잡으려고 애썼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표정이 별로 좋지 못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경쟁자가 싫은 것이다.

"산방산, 아니. 무주가 좋으려나?"

물론, 나는 그들과 다른 이유로 고민하고 있었다.

애초에 퀘스트를 하려는 목적이 장비가 완성되는 목요일까지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시간이 소모되는 면에서는 뭘 고르든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내가 퀘스트를 고르는데 우선 고민한 건 최대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는가였다.

태천이 있는 서울과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지역은 피해야 한다.

거리상으로 따지자면 제주도에 있는 산방산이 가장 적당하겠지만, 비행기가 있어 쉽게 찾아올 수 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탈락이다.

그런 점에선 무주 개미굴 던전이 괜찮아 보인다.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고 비행 편이나 기차 편도 없어 쉽게 찾아올 수 없다.

실패한 헌터나 피해자가 없는 것을 보면 난이도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문제는 개미굴은 대왕 개미의 서식지로 소탕해야 하는 몬스터의 수가 매우 많다는 것과 나 말고도 인원 1명이 더 필요하다는 점이다.

〈'무주 개미굴 던전' 소탕(E등급) / (현재 인원 3/5)〉

새로 고침을 눌러 봤으나 인원은 여전히 똑같았다.

흠, 무주 개미굴은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혹시 다른 좋은 퀘스트가 없나 찾아보았다.

아니고,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딱 알맞다고 생각되는 퀘스트가 보이지 않아서 마우스 휠을 빠르게 돌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짓을 하게 됐다.

어떤 퀘스트가 있는지 흥미 위주로 훑어보기 시작한 거다.

심지어 받을 수조차 없는 A+등급 퀘스트까지 보기 시작했다.

〈드레이크의 심장 습득 (A+등급) / (???)〉

〈울릉도 미개척 게이트 탐색 (A+등급) / (???)〉

〈홍유릉 게이트 우담화 채집 (A+등급)/ (???)〉

〈....〉

"어라, 우담화도 있네?"

낯익은 단어가 보이자 마우스를 쥔 손이 바로 움직였다.

클릭하자 떠오른 건 '경고! A+등급 퀘스트입니다. 수락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였다.

다시 한번 클릭해 봤지만, 경고 표시만 떠오를 뿐 정보를 열람할 수는 없었다.

간단한 정보라도 보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안 되는 모양이다.

쩝,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남자 네 명이 다가와 내 앞에 섰다.

위쪽 눈꺼풀이 내려앉은, 뱀눈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

"파티 퀘스트 제안하러 왔습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E등급까지밖에 못 받아서요."

"잘됐네요. 저희가 제안하려던 게 E등급 퀘스트입니다."

오?

파티 퀘스트를 제안하러 온 네 명….

설마?

"혹시 무주 개미굴 던전 소탕 퀘스트를 함께 깨실 생각 없습니까?"

설마 했던 것이 맞아떨어졌다.

개미굴 관련 퀘스트는 아까 3명이 대기 중이던 거다.

아마 뒤에 조금 떨어져서 서 있는 청년이 네 번째로 들어온 사람이지 않나 싶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세 남자는 한 패거리고 청년은 모르는 사이인 것 같다.

나잇대도 10살가량 차이가 나 보였고.

"던전 소탕이라고 해서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더니 뱀눈의 남자는 자신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장황하게 떠들어 댄 자랑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자기들은 C급 헌터로서 개미굴 던전을 2년 동안 피해자 없이 완벽하게 청소해 온 베테랑이며, 셋이서도 충분히 소탕할 수 있으니 지금 참여하면 공으로 퀘스트를 완수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무주 개미굴 던전이 괜찮아 보이던 차긴 했다.

1명이 더 필요하다는 문제도 해결됐고, C급 헌터인 그들이라면 E등급 던전쯤이야 충분히 청소할 수 있을 거다.

"혹시 너무 멀다고 생각한다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걱정?"

음?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뭔가 오해를 한 눈치다.

멀면 멀수록 좋았다.

태천이가 날 찾는 데 그만큼 더 오래 걸릴 테니까.

그래도 설명하려는 눈치니까 한번 들어 보기로 했다.

"무주 개미굴 앞까지 연결된 워프 게이트가 있습니다."

"엥? 워프 게이트라니, 그 귀한 게 왜 개미굴 따위에 있습니까?"

"내버려 두면 끝없이 늘어나는 개미들 특성 때문입니다. 꾸준히 소탕하지 않으면 던전의 범위가 계속 넓어질 거니까요."

던전은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면서 환경이 게이트처럼 변한 곳을 뜻한다.

게이트 마나가 퍼져 평범한 사람은 살 수 없게 됐고, 대신 게이트에 살던 몬스터들이 그 땅의 주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 몬스터를 전부 처치한다고 해도 원래의 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게이트에 땅을 빼앗긴 거다.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던전은 게이트 브레이크를 일으키듯 마나가 모이면 영역을 넓혀 나간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몬스터를 소탕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즉, 한 번에 수백 마리를 낳는 여왕개미가 있는 무주 개미굴 던전은 청소 주기가 잦은 특별 관리 구역이었다.

그런 이유로 전국 각지에서 의뢰를 받고 올 수 있도록 협회에서 워프 게이트를 설치해 놓은 것이리라.

"퀘스트 전용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 전용…?

그 말이 내 귓가에 박혔다.

나는 퀘스트 전용인 워프 게이트를 타고 지금 당장 서울을 떠나 개미굴 앞까지 갈 수 있었지만, 태천이는 그럴 수 없다.

왜?

워프 게이트를 쓸 수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녀석은 한 길드의 마스터로서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다.

내게 이보다 좋은 퀘스트는 없었다.

"좋네요. 참가하겠습니다."

"오! 잘 생각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전하자 세 남자가 동시에 방긋 웃었다.

뒤에 있는 청년도 옅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보였다.

모니터에서 무주 개미굴 던전 소탕 퀘스트를 찾아 클릭했다.

곧바로 내 눈앞에 있는 네 남자의 얼굴이 대기 인원으로서 떠올랐다.

세 남자는 자기들이 말했던 대로 8년 차 C급 헌터였고, 청년은 이제 막 E급이 된 1년 차 헌터였다.

아마도 청년은 공으로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다는 말에 참여한 것 같다.

C급 헌터와 인맥을 쌓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겠지.

퀘스트 수락 버튼을 누른 후 인쇄 버튼을 누른다.

컴퓨터 옆의 인쇄기에서 퀘스트 참가서가 뽑혀 나왔다.

"바로 출발할까요?"

"네, 그러시죠."

인쇄된 퀘스트 참가서를 집어 들자 뱀눈 남자는 뭐가 그리 바쁜지 물어왔다.

뭐, 나도 최대한 빨리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남자의 뜻에 따라 주었다.

하지만 내 오른손의 새싹은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푸른 홀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해 왔다.

[세계수 새싹은 세 인간 남자의 시선이 몹시 못마땅합니다.]

[관리인이 그 인간 남자들에게 우편함에 있는 흙을 뿌려 버리기를 원합니다.]

시선이 못마땅하다고 흙을 뿌리라니….

[새싹은 흙을 뿌리기를 강하게 조언합니다!]

새싹이 내게 또 한 번 조언했다.

무턱대고 사람한테 흙 뿌리면 내가 곤란해져, 새싹아.

그래도 일단 생각은 하고 있어 볼게.

제25화

[세계수 새싹은 관리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아 시무룩해졌습니다.]

조언을 따르지 않았더니 새싹이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두 이파리가 축 늘어졌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처럼 천천히 들썩이기까지 했다.

그걸 달래 주려고 워프 게이트를 타고 무주 개미굴 던전으로 넘어오는 동안 계속 새싹이를 어루만져 주었다.

축 늘어진 이파리는 원래대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 건 내가 이상한 걸까.

"여자친구입니까?"

"예?"

뱀눈의 남자는 뜬금없는 질문을 해 왔다.

하긴, 스마트폰을 보며 실실 웃고 있었으니 그런 착각을 할 만도 했다.

화면을 두드려 마나를 주던 것도 대화 메시지를 보내는 거로 보였겠지.

"하하, 그런 거 아닙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부정했다.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고 워프 게이트에서 내려왔다.

이러다가 여자친구에 푹 빠진 바보라는 이미지를 남길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한 명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정말 아닙니다."

"흠, 알겠습니다."

[새싹은 남자의 시선이 못마땅합니다.]

새싹이는 뱀눈 남자가 말을 할 때마다 불만을 토로했다.

얼마 전엔 불러 봐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더니, 오늘은 자기가 먼저 계속 의사를 전달해 왔다.

따스한 손길로 마나를 계속 줘서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걸까?

아니면 세계수 소환을 통해 내 머리에 한 번 있어서 친근함을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김정철! 역시 너였군!"

개미굴 던전 앞에 있던 던전 관리소에서 한 명이 나와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걸어가던 세 남자에게 아는 체를 했다.

2년 동안 완벽하게 청소해 온 베테랑이라고 자랑하더니, 밝게 웃으며 맞이하는 관리자를 보니 그 말이 맞긴 한 모양이다.

"관리소장님, 오랜만입니다!"

배불뚝이 남자가 이 던전 관리소의 소장이었나 보다.

김정철은 우릴 한 번 돌아보더니 "준비를 끝마쳐 두십시오"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관리소장에게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마치 자신이 이 파티의 리더라도 되는 양 구는 태도에 한쪽 눈이 저절로 치켜떠졌다.

좀, 아니꼽네?

"눈 곱게 뜹시다."

김정철 일행 중 덩치가 큰 남자가 내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내가 김정철을 아니꼬워하듯, 그들도 내가 아니꼬운 듯했다.

흠, 이놈도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파티를 잘못 골라 온 것 같다.

태천이한테 도망치려고 너무 마음을 급하게 군 내 잘못이다.

더 귀찮아지기 전에 상황을 무마해야겠다.

"곱게 안 뜨면, 어쩔 겁니까?"

"뭐?"

"...."

하지만 내 입은 방정맞게도 의지와 상관없는 말을 내뱉었다.

분명 무마할 말을 하려고 했는데, 입에서 시비조의 말이 튀어나왔다.

후우, 인제 와서 그러려던 게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세계수 새싹이 지금이라도 흙을 뿌려 버리라고 조언합니다.]

새싹이가 또 자기 생각을 슬그머니 전해 왔다.

그 조언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웃음이 나왔다.

정말 지금이라도 흙 뿌려 버리고 딴 곳으로 가 버릴까?

실패 패널티를 받게 되겠지만, 다른 협회 퀘스트를 성실하게 해결하면 될 일이다.

"웃어?"

"이 새끼가 실성했나."

내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두 남자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고는 내 멱살을 붙잡으려는 듯 앞으로 다가와 팔을 뻗었다.

옆에 서 있던 신입 헌터가 말리려고 나와 남자들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덩치 큰 남자의 힘에 밀려 뒷걸음질을 쳤다.

"저, 저기-"

밀려나면서도 청년은 말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이가 가장 어린 청년이 말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파티 퀘스트 깨러 와서는 뭘 하는 건지.

살짝 자괴감도 밀려왔다.

일단, 여기선 어른스러움이란 걸 발휘해 봐야겠다.

"후우, 내가-"

"뭡니까? 왜 다들 준비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거예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얼마 없는 어른스러움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어른스러움은 내보일 수가 없었다.

김정철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제 동생들을 번갈아 가며 보더니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동생들을 노려보며 나무랐다.

"너흰 준비하고 있으라니까 왜 또 시비를 걸고 있어?"

"예? 억울합니다!"

"그게 아니라요, 이 새끼가 형님을-"

"권오석, 한기해. 말대답이냐?"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죄송? 시정?

무슨 군대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데, 김정철이 내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가 발휘하려던 어른스러움을 김정철이 발휘한 것이다.

"미안합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별일 아니었어요."

"으음,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관리소장님 말 들어보니 아슬아슬하답니다. 지금 당장 토벌을 시작해 달라고 하네요."

아슬아슬하다.

그건, 개미굴 속에 대왕 개미들이 득시글거린다는 뜻이다.

조금 더 내버려 두면 개미굴에서부터 대왕 개미들이 쏟아져 나오겠지.

이질적인 마나는 범람해서 던전의 영역을 넓혀 나갈 것이고.

확실히 시비가 붙어 싸움이나 해 댈 때는 아니었다.

동일한 생각을 했는지 그들은 각자 마법 주머니에서 무기와 방어구들을 꺼내 착용하기 시작했다.

김정철은 롱소드와 경갑을, 권오석과 한기해는 각각 대검과 한 손 검을 썼지만 둘 다 중갑을 입었다.

신입 헌터는 창을 꺼냈고 상체와 하의에만 방어구를 착용했다.

갑옷에 잔 상처가 많은 걸 보니, 다른 부위는 수리를 맡겼거나 파괴된 듯했다.

나는 롱소드를 오른쪽 허리춤에 찼다.

갑옷은 재이네 대장간에 수리를 맡긴 채였으므로, 오른팔에 낀 놀 가죽 팔뚝 보호대가 전부였다.

김정철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신입 헌터도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옷 착용 안 하세요?"

"아."

날 왜 쳐다보나 했더니.

"대장간에 수리 맡겼어요."

"네? 그럼-"

"괜찮아요."

왓쳐의 광선에도 멀쩡하게 유지됐던 나무껍질 발동시킨 채였다.

A등급 게이트의 몬스터들이 물밀 듯이 공격해 온다면 모를까.

E등급에 불과한 개미굴 던전의 대왕 개미의 공격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신입 헌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김정철도 신입 헌터처럼 걱정이 되는 듯 "정말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어왔다.

그 와중에도 권오석과 한기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D등급 주제에 나대기는", "내버려 둬, 큰코다치는 건 지니까" 따위의 말들을 중얼거렸다.

어휴. 다 들린다, 이놈들아.

"정말 괜찮아요."

"흠…. 네,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김정철은 걱정된다는 듯 덧붙였다.

"진입은 우리가 먼저 하겠습니다. 두 분은 이곳에서 5분~10분 대기한 후 들어와 주십시오. 권오석, 한기해 가자."

"네? 저희가요?"

권오석, 한기해는 왜 그래야 하냐는 얼굴로 김정철을 바라봤다.

물론, 그들의 반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정철이 인상을 찌푸리자 곧바로 깨갱 해서는 개미굴로 뛰어갔다.

저 멍청한 꼴이 꼬리 내린 개 같아서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그럼, 이따가 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김정철은 두 동생을 쫓아 개미굴 속으로 들어갔다.

옆에 있던 신입 헌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을까요?"

"괜찮겠죠. 그래도 C급 헌터들인데. 애초에 자기들끼리만으로도 충분하다 했었고."

"…그렇겠죠?"

이제 1년 차인 신입 헌터라서 그런가?

참 걱정이 많은 친구다.

C급 헌터면 E등급 던전에서 위험에 빠질 일이 없었다.

실수나 방심 때문에 다치거나 진화 몬스터를 만나게 돼도 도망칠 수는 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네요. 백도운입니다."

"김재식이에요. 20살입니다."

"26살입니다."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밀자 김재식이 창을 옮겨 쥐곤 오른손을 뻗었다.

그렇게 악수를 하다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백도운? 혹시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아뇨, 그럴 리가요."

부정했는데도 김재식은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괜히 알아보면 귀찮아질 것 같아 얼른 얼굴을 돌렸다.

***

바깥에서 10분 정도 대기한 후 개미굴로 들어왔다.

개미굴은 어두웠는데, 김재식이 마법 주머니에서 발광석을 꺼내 주변을 밝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다며 내게도 1시간짜리 발광석을 주었다.

고마운 친구다.

"…오?"

개미굴 안에는 대왕 개미 사체가 즐비했다.

사체들은 전부 단번에 베이고 찔려 죽어 있었다.

제법인걸?

솔직하게 그들의 실력에 놀랐다.

옆의 김재식도 죽은 대왕 개미들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마냥 감탄하는 건 아니다.

창을 꽉 쥔 손에서 '자신도 할 수 있을까?' 하는 호승심이 엿보였다.

[세계수 새싹이 혐오스러움에 몸서리를 칩니다.]

혐오까지?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이 아니다.

새싹이는 가장 부정한 몬스터 중 하나인 스켈레톤 로드조차 혐오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겨우 대왕 개미 사체를 보고 혐오스럽다고?

…식물이라서 벌레가 싫은 건가?

보통 식물과 개미는 공생 관계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대왕 개미는 평범한 곤충이 아니라 몬스터라서 다른 걸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의문을 느끼면서 걷다 보니 여러 갈래로 나뉘는 갈림길이 보였다.

그 앞에 김정철 일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뇨, 두 분 다 금방 오셨습니다."

"그나저나 갈림길이라니, 개미굴답네요."

그리 말하자 옆에 있는 김재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정철은 뒤에 걸어온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시면서 확인하셨겠지만,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함께할 수가 없을 것 같네요."

"나누자는 겁니까?"

"네. 1명씩 흩어져서 사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 길을 골라잡아야겠습니다."

갑작스러웠다.

갑작스럽지만, 무턱대고 반박할 수 없기는 했다.

김정철의 말에 따르면 이곳 개미굴 던전은 곧 마나가 범람한다.

개미의 수를 최대한 빨리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아마 개미굴 전체를 쓸어 버리고 여왕개미도 잡고 나서야 청소가 끝이 날 거다.

그렇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나 혼자였다면 그랬으리라.

고개를 돌려 김재식을 봤다.

그는 갑자기 혼자 대왕 개미들과 싸워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자기를 끌어들일 때 했던 말과 다르지 않냐고 반박하고 싶은 듯하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반박할 수가 없어 보였지만.

아무래도 내가 나서 줘야겠다.

김재식은 이제 막 헌터가 되었다.

그 혼자서 범람하는 대왕 개미들을 사냥하라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다.

"세 분은 혼자 도십시오. 나는 재식 씨와 함께 돌겠습니다."

"도, 도운 형…."

갑자기 형이야?

김정철 일행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재식 씨는 1년 차 E급 헌터입니다."

나를 설득하려는 김정철의 말을 끊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건데, 들을 가치가 있는 말이 아니었다.

C급 헌터가 3명에 D급 헌터가 1명이다.

이 4명이 E등급 던전의 범람을 막지 못해 신입 헌터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관리소로 돌아가 퀘스트를 포기하고 협회 소속 헌터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게 낫다.

사람이라면 낯부끄러운 줄은 알아야지.

"혼자 보내는 건 죽으라는 소리랑 같아요. 혹시 죽이는 게 목적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리 대답하면서 김정철은 김재식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와 다르게 양옆으로 선 권오석과 한기해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게진 게 성질을 부리고 싶다는 걸 뻔히 알 수 있었다.

"내 생각이 짧았군요. 미안합니다."

"아, 아뇨! 제가 약해서 죄송합니다…."

"우린 각자, 두 분은 함께. 그게 좋겠습니다."

내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김정철이 날 보는 표정은 좋지 못했다.

동생 놈들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진 않았지만, 살짝 굳어 있었다.

마치 '감히 네까짓 게 내게 대들어?'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보였다.

그 모습에서 권오석과 한기해가 그에게 형님 형님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끼리끼리 노는 법이다.

[세계수 새싹은 인간 남자의 시선이 혐오스럽다고 전합니다.]

그래, 나도 막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어.

제26화

김재식은 어렸을 적부터 무엇이든 쉽게 해냈다.

공부든 운동이든 조금만 해 보면 곧잘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B등급 스킬 '초인'을 지니고 있었던 덕분이다.

중학 의무 교육을 모두 끝마치자마자 바로 헌터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헌터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위험하니 안 된다는 부모님의 만류가 없었더라면 분명 그리했을 거다.

재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후에 헌터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E급으로 단계가 올랐다.

"후우, 후우우…."

김재식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앞을 바라봤다.

대왕 개미 세 마리가 그를 향해 주춤주춤하며 기어왔다.

그것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대왕 개미가 두려워하는 존재는 그가 아니었다.

앞에서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대왕 개미 두세 마리를 죽이는 꽁지머리의 사내.

그 사내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부상 때문에 이번에 다시 복귀했다는 헌터, 백도운이다.

김재식이 보기에 도운은 절대로 D급 헌터가 아니었다.

세상에 어떤 D급 헌터가 한눈에 다 셀 수도 없이 밀려들어 오는 대왕 개미들을 혼자 죽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뒤에 있는 사람을 위해 몬스터의 수를 조절할 수 있을까.

처음엔 한 마리.

쓰러뜨리면 두 마리.

그것마저 쓰러뜨리면 세 마리를 죽이지 않고 흘려 보낸다.

"…하압!"

D급 헌터가 저런 실력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최소한 B급 헌터야!

백도운은 부상 때문에 이번에 복귀했다고 말했다.

분명, 다치고 난 후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저 정도의 경지에까지 올랐을 것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어땠던가?

선천적으로 얻은 알량한 재능 하나만 믿고 언제든지 강해질 수 있다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그 3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더라면, 초인 스킬을 지닌 재식은 지금쯤 C급 헌터는 돼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B급 헌터가 됐을지도 모른다.

"…죄송, 허억, 해요. 도운 형."

"네? 뭐가요?"

왠지는 알 수 없었다.

김재식은 다만 자신을 기다리는 백도운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뭐가 미안하냐고 되묻는 그에게 김재식은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형이 다시 헌터에 복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저는 놀고만 있었어요.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재식은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만 덧붙였다.

"죄송해요…."

***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는 대왕 개미들을 벤다.

따스한 손길이나 세계수 휘두르기는 쓰지 않았다.

수가 많기는 했지만 롱소드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유재이가 준 롱소드는 대왕 개미들의 몸을 마치 두부 자르듯이 잘랐다.

홍유릉 게이트에서는 급한 상황이어서 느끼지 못했었는데, 과연 100대 대장간에 속했다는 명성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몸에서 힘을 전혀 주지 않고 휘두르는 데도 롱소드는 막힘없이 대왕 개미들을 베어 냈다.

롱소드 자체의 절삭력이 뛰어난 것이다.

"하압!"

기합을 내지르며 대왕 개미들과 싸우는 김재식을 쳐다봤다.

그는 내가 일부러 죽이지 않고 흘려보낸 대왕 개미들과 싸우고 있었다.

감당할 수 있는 정도만 보내 실력을 확인한 것이다.

처음엔 한 마리씩이었는데, 지금은 익숙해져서 한 번에 세 마리와 싸웠다.

확실히 김재식은 1년 차인데도 E급 헌터가 됐을 만큼 실력이 출중했다.

금방 D급까지도 오를 것 같다.

그 이상은 모르겠다.

내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영역이다.

C급에서 B급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라는 말도 있고….

"죄송, 허억, 해요. 도운 형."

"뭐가요?"

"죄송해요…. 지금, 저 맞춰 주시려고 일부러 한두 마리씩 흘리시는 거잖아요."

오, 그걸 눈치챘어?

대왕 개미와 싸우느라 모를 줄 알았는데….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건 전투하면서도 계속해서 나를 확인했다는 소리다.

대왕 개미들과 싸우는 게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김재식은 싸우면서도 주변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넓은 거다.

전투하는 동안 파티 원의 행동을 보며 그에 맞춰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험이 쌓이면 다음 플레이를 예상하고 움직이는 경지까지 오르게 될 테지.

파티 플레이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흠.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런 식으로 전진해 볼까?

"재식 씨."

"편하게, 후우. 편하게 불러 주세요, 형."

"음, 그래요. 그렇게 할게. 혹시 내 행동에 맞춰서 움직일 수 있겠어?"

질문을 던지자 재식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재식은 창을 붙잡고 있던 두 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네!"

"좋아. 그럼-"

대왕 개미들이 또다시 나타났다.

그래, 설명은 무슨 설명이야? 인생은 실전이지!

설명하려다 말고 대왕 개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혼자 남게 된 김재식이 뒤에서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눈앞의 대왕 개미를 횡으로 베었다. 그대로 오른쪽에 있는 개미를 사선으로 벤다.

첫 번째 한 마리는 몸이 두 동강 나 죽었지만, 두 번째 녀석은 다리만 베였을 뿐 죽지 않았다.

살아남은 녀석이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것을,

"하압!"

김재식이 창을 찔러 대가리를 꿰뚫었다.

완전히 죽일 수 있는 녀석은 죽이고, 각이 나오지 않아 죽일 수 없는 녀석은 상처만 입혀서 김재식이 그 마무리를 하게 한다.

내가 바라는 플레이를 정확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솔직히 놀라기도 했다.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바로 해 줄 줄은 몰랐다.

김재식이 나를 보조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조금 더 속도를 올려도 될 듯하다.

나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개미들을 베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재식은 조금 뒤에서 내가 미처 베지 못한 대왕 개미들의 목숨을 끊었다. 숨을 헐떡이며 쫓아오면서도 자기가 할 일을 해낸다.

그런 식으로 몇 시간 전진해 나갔더니 튀어나오는 개미들의 수가 점점 줄었고, 결국 더는 나타나지 않게 됐다.

대신 통로가 끝나면서 아래로 향하는 구멍만 하나 나타났다.

그 구멍에선 썩은 내가 났고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한 독기가 올라왔다.

"무… 후웁, 무슨…."

"무슨 구멍일 것 같냐고?"

재식은 호흡이 차올라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있는데 썩은 내까지 올라오자 괴로워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독기를 조심하며 호흡을 정리한다.

그러면서도 주저앉아 쉬지는 않았다.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를 몬스터를 대비하는 거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걸 보니, 아마도 시체 보관소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그래야지. 시체 보관소엔 살아 있는 개미가…어라?"

"형? 왜 그래요?"

날 부르는 재식을 바라보지 않았다.

내 시선은 푸르스름한 메시지창을 향했다.

[세계수 새싹은 관리인이 개미굴의 시체 보관소에 들어가길 바랍니다.]

…시체 보관소에? 왜?

나는 턱밑을 긁적이며 새싹이가 보내온 의도를 알아내고자 생각에 빠졌다.

시체 보관소는 말 그대로 대왕 개미들의 사체가 모여 있는 곳이다.

사체와 오물 따위가 썩고 있을 뿐이다.

그런 곳에 들어가길 바란다는 게 의아했다.

"잠깐만 기다려 줄래?"

"…네. 혹시 좀 떨어져 있어도 될까요?"

"그렇게 해."

내 허락이 떨어지자 재식은 곧바로 멀리 떨어졌다.

아무래도 시체 썩은 냄새와 독기를 참을 수가 없는 듯했다.

나는 세계수의 관리인 스킬 덕분인지 심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악취도 독기 취급을 받는 모양이다.

[새싹은 관리인이 개미굴의 시체 보관소에 들어가길 바랍니다.]

그 메시지창을 읽으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새싹이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 직접 마주한 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봤는데, 그러자마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뭐 하니, 너."

새싹이 두 이파리를 내려 마치 팔을 옆구리에 짚은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마치 '내 말 한 번 믿어 봐, 관리인 양반!'하고 말하는 듯했다.

위풍당당함마저 느껴졌다.

그 꼴이 귀여워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왜 바라는 건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뭐.

한 번 들어주자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오기까지 새싹이의 조언을 계속 거부했으니 들어줄 때도 됐다.

"재식아, 나 여기 아래에 좀 갔다 올게."

"네? 어딜 갔다 오신다고요?"

"혹시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쳐. 알았지?"

"잠깐, 잠깐만요! 정말 내려가…"

재식의 놀란 얼굴을 보면서 구멍 속으로 뛰었다.

"시려고요…!"

시체 보관소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재식의 목소리는 작게 변했다.

어두워서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발에 닿는 것이 느껴져서 바닥에 도착한 걸 느낄 수 있었다.

마법 주머니에서 재식이 개미굴 초입에서 줬던 발광석을 꺼내 주변을 밝혔다.

"켁…."

시체 보관소에는 역시나 대왕 개미의 사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아니, 쌓여 있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대왕 개미들의 사체들이 썩고 산성액에 녹아내리면서 거대한 한 덩어리가 됐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거대한 독기 덩어리'였다.

[새싹이 우편함으로 전송한 흙을 뿌려 독기를 정화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렇구나!"

새싹이가 바라던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 정도로 거대한 독기 덩어리에 흙을 뿌려 정화하면 어떻게 될까.

홍유릉 게이트의 스켈레톤은 부정한 것 그 자체였다.

정화된다는 것은 곧 죽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독기 덩어리는 그렇지 않다.

정화가 된다고 해도 그 에너지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

즉, '거대한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새싹이는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니 새싹이는 평소처럼 두 이파리를 활짝 펼친 채로 서 있었다.

평소와 같은 상태였다.

그래도 어쩐지 나에겐 그것이 승리의 V로 보였다.

우편함을 열고 받기 버튼을 누르자 스마트폰에서 흙이 마구마구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인간 분수대가 되지 않기 위해 잘 버티고 서서 거대한 덩어리에 흙을 잘 묻도록 골고루 뿌렸다.

부정한 기운과 악취가 점점 사라져갔다.

그 대신 숲을 걷고 있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어, 어라?"

흙이 모두 뿌려지자 거대한 독기 덩어리가 전부 사라졌다.

그렇다.

말 그대로 시체 보관소를 가득 메웠던 대왕 개미의 사체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내 주먹만 한 동그란 '덩어리'가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새싹이 관리인에게 만족스러운 마음을 전합니다.]

"...?"

이게 뭔데?

자기 혼자 알고 만족하면 되는 거야?

형태를 봐서는 꼭 영약 같긴 한데,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왕 개미의 사체였던 것이어선지 이대로 먹기에는 께름칙함마저 느껴졌다.

음, 아무래도 감정을 받아서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아내야겠다.

그리 결정한 후 그것을 마법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다시 올라갈 생각으로 천장의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점프하면 닿긴 하나, 이거?"

무릎을 굽히고 두 발에 힘을 주는데, 하얀 뼈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해골이었다.

정화 범위에 들지 못해 남은 대왕 개미의 사체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살이 썩고 남은 뼈였다.

"이게 왜 여기 있어?"

무주 개미굴은 헌터 협회가 직접 특별 관리하는 구역이다.

민간인은커녕 헌터도 퀘스트를 받지 않고서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그런 곳에 백골이 있다는 건, E등급 던전 마나에 의해 풍화되지 않는 시간인 1년 안에 퀘스트를 받은 헌터가 들어와 죽었다는 소리다.

"우리는 개미굴 던전을 2년 동안 피해자 없이 완벽하게 청소해 온 베테랑…."

…김정철이 했던 말과 모순된다.

설마.

바로 뼈를 살폈다.

뼈는 대왕 개미의 산성 액에 조금 녹아 있다.

당연히 산성 액이 사인의 직접 요인은 아니었다.

E등급 몬스터의 산성 액이다.

피부는 녹일 수 있어도 한 번에 뼈까지 녹일 수는 없었다.

죽은 후에 녹은 것이다.

"칼자국…."

등 쪽에서 찔린 칼자국이 보였다.

즉,

"어쩐지 하는 짓마다 아니꼽더라니."

김정철. 권오석, 한기해.

이놈들은 헌터 사냥꾼이었다.

제27화

재식과 함께 통로를 되돌아갔다.

갈림길에 김정철 일행이 앉아 있었다.

자기들끼리 오순도순 얘기하는 꼴이 퍽 우애 좋은 형제들처럼 보였다.

아마 나와 재식을 언제쯤 어떤 식으로 죽일지 의논하고 있는 거겠지.

쓰레기들.

김정철이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 댔다.

"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보면 오랜만에 만난 사이 좋은 친구인 줄 알겠네.

기다리고 있긴 뭘 기다려?

혹시라도 우리가 빠져나갈까 봐 길을 막고 있던 게 분명하다.

새싹이 저놈의 시선이 못마땅하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으…."

김정철 일당과 가까워지는 동안 재식의 표정은 점점 나빠져 갔다.

저놈들이 헌터 사냥꾼이라는 사실을 말해 줬기 때문에 긴장한 거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해당하게 둘 순 없어서 말해 준 건데, 지나치게 긴장하는 걸 보니 괜히 말해 줬나 싶다.

이러다간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것 같다.

"속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은 겁니까?"

"별로 괜찮지는 않습니다. 통로 끝이 시체 보관소더라고요."

"아… 그랬군요. 이런,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들 앞에 서자 김정철이 짐짓 걱정스러운 듯 물으면서 손을 뻗었다.

재식은 제 이마를 향해 뻗어지는 놈의 손을 보고 몸을 움츠렸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이상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왜 두렵다는 듯이 몸을 움츠렸을까?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 순간 나와 김정철이 동시에 움직였다.

나는 왼손을 뻗어 재식의 뒷덜미를 붙잡아 당겼고, 놈은 허리춤에 있던 롱소드를 휘둘렀다.

부웅!

롱소드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히익!"

재식이 이상한 소릴 내며 제 목을 부여잡았다.

그럴 만하다.

방금 내가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목이 베여 죽었을 거다.

제 목이 멀쩡한 것을 확인한 재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김정철이 휘둘렀던 롱소드의 끝을 내게 겨눴다.

여유로운 태도로 묻는다.

"어떻게 알았지?"

"운이 좋았어. 너희가 뒤에서 찌른 시체를 봤거든."

"설마 시체 보관소에 들어갔다 나온 건가?"

김정철 일행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권오석과 한기해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하긴,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독기와 악취로 심한 곳이다.

그런 곳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하니 역겨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도 새싹이가 들어가 보라고 조언하지 않았다면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이게 다 새싹이 덕분이다.

"몰랐으면 편하게 갈 수 있었을 것을."

놈들은 오늘 밤 나와 재식이 자는 틈을 노려 죽일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편하게 갈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는 거겠지.

그게 꼭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듯 말하는 게 우습다.

자기들 편하려고 그러려던 게 뻔한데 말이다.

"사적인 감정은 없다."

"...."

"도, 도운 형…."

재식이 긴장한 듯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해한다.

지금 상황 돌아가는 걸 보면 김정철은 혼자서 날 상대하려고 했다.

그리되면 재식은 권오석과 한기해 두 명을 혼자서 상대해야 한다.

E급 헌터가 혼자서 두 단계나 위인 C급 헌터 두 명을 상대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초에 그런 걸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낯부끄러운 줄 아는 인간이니까.

"걱정하지 마. 너한테 맡길 생각은 없었어."

그리 말하면서 세계수 휘두르기를 썼다.

한 번, 두 번….

왼손에 든 롱소드에 세계수의 푸른 마나가 모여든다.

모여든 푸른 마나는 투명한 칼집처럼 칼날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권오석과 한기해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 검기…!"

"말도 안 돼! 어떻게 D급 헌터가 검기를!"

사실, 마나가 모여 있는 것일 뿐 당연히 검기는 아니었다.

상태로 따지면 불을 지핀 횃불을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막대 끝에 불타기 쉬운 헝겊을 감아 불을 지핀 것처럼 검에 푸른 마나를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A급 헌터인 우연후조차 오해했을 정도로 완벽하게 검기처럼 보였다.

C급에 불과한 그들이 검기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권오석, 한기해. 저놈에게 집중한다."

"네…!"

김정철은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진지한 모습으로 명령을 내렸다.

권오석과 한기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명령에 따랐다.

이해가 가지 않는 명령과 이해가 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검기는 주로 A급 헌터들이 다루는 것이다.

권오석과 한기해가 놀란 것도 그런 이유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분명 A급 헌터 혹은 그 수준에 달하는 B급 헌터로 보일 터였다.

그런데도 김정철은 도망간다는 선택지가 아니라 나를 상대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권오석과 한기해도 항명하기는커녕 곧바로 따르기를 선택했고.

"...!"

그 이유를, 김정철이 꽉 쥐고 있는 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어둡고 탁한 빛의 마나가 검을 감싸기 시작했다.

내 롱소드를 감싸고 있는 마나보다 작았지만, 나처럼 가짜가 아닌 진짜 검기였다.

C등급 헌터가 어떻게?

아니, 멍청한 의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건 헌터 사냥꾼이다.

당연히 등급을 속였을 것이다.

김정철은 검기를 뿜어내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가소롭다는 듯 지껄여 댔다.

"너만 검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을 찌푸렸을 때, 권오석과 한기해가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딱 C등급 헌터에 걸맞은 움직임을 보였다.

맹공을 가했지만 어렵지 않게 막고 피해 낼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반격하려고 할 때마다 김정철이 눈빛을 빛내며 달려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한 방을 노리고 들어오려는 놈 때문에 큰 움직임을 취할 수가 없었고, 할 수 없이 소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라고, 김정철 일당은 생각하고 있을 거다.

"이, 귀찮게 굴기는!"

그렇게 소리치며 왼손에 쥔 롱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마치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실수를 한 멍청이처럼 보이게.

롱소드는 권오석과 한기해 중 한 명도 베지 못하고 허공을 갈랐다.

그때,

"멍청한 놈!"

김정철이 내 예상대로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탁한 검기를 두른 김정철의 롱소드가 내 왼쪽 옆구리를 향해 쇄도했다.

"죽엇!"

김정철의 롱소드가 내 왼쪽 옆구리를 찌르자,

캉!

하고, 옆구리에서부터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친 듯한 소리였다.

녀석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무, 뭐?"

"자, 이제 멍청한 놈은 누구지?"

그리 물으면서 히죽 웃었다.

녀석은 당황해서 날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소리의 발원지만을 내려다봤다.

김정철의 롱소드는 나무껍질처럼 변한 피부에 가로막혀 옆구리를 찌르지 못했다.

나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녀석이 소리를 빽 질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실드로 검기를 막아!"

녀석의 말마따나 보통 실드로는 검기를 막아낼 수 없다.

검기란 귀수산의 등껍질, 드래곤의 비늘까지도 베어 내는 힘이다.

냉병기를 쥔 헌터들의 전매특허인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내 스킬은 평범한 실드가 아니다.

[세계수의 나무껍질(A등급) - 세계수의 마나로 인해 현재 세계수(새싹 상태)의 나무껍질처럼 변한다.]

피부를 세계수의 나무껍질처럼 변하게 하는 능력이다.

검기는 대단한 힘이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힘은 아니다.

B급 헌터의 검기와 A급 헌터의 검기가 과연 같을까?

당연히 같지 않다.

김정철이 몇 급 헌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놈의 검기가 과연 세계수 나무껍질을 벨 수 있을 만큼 대단할까?

그럴 리가.

유재이의 말에 따르면 전대 세계수의 나뭇가지는 그 자체로 완벽한 무기라고 했다.

새싹 상태라고 해도 세계수다.

당연히 김정철의 검기가 통할 리 없었다.

그걸 전부 설명해 주기 귀찮아서, 나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다.

"네가 약해서."

"이, 개자-!"

빠악!

내게 욕을 내뱉으려는 녀석의 주둥이를 검지로 연달아 때렸다.

한 번에 입술이 터졌고, 두 번에 앞니가 부러졌으며, 세 번에 턱이 빠졌다.

턱이 빠진 채로도 김정철은 날 쓰러뜨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롱소드를 휘둘렀다.

이젠 검기도 사라진 롱소드를 나무껍질로 튕겨 내면서 두 팔과 두 다리를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었다.

뽀각, 뽀각!

팔과 다리가 연달아 부러진 김정철은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면서도 내게 마구 욕을 해 댔다.

"…그 꼴이 됐는데도 욕할 힘이 있는 것도 대단하다, 야."

성질이 못돼 먹었으면 적당히 눈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놈은 그런 것도 없었다.

"난 적당히 봐주려고 했어. 이건 네가 아가리 함부로 털어서 처맞는 거야."

그리 말하고는 따스한 손길로 몸 구석구석을 자진모리장단으로 두들겼다.

그러면서 동시에 권오석과 한기해를 쳐다봤다.

둘은 자신이 따르던 김정철이 힘도 못 쓰고 처맞고 있자 다리가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다음은 너희 차례니까 얌전히 기다-"

"으아아…!"

갑자기 내 밑에 깔린 김정철이 소리를 질러 댔다.

고개를 내려다보니 녀석은 아직도 독기(毒氣)가 남아 있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나를 노려봤다.

이게 미쳤나?

"아직 덜 맞았으니 더 때려 달라고 사정하는 거야?"

"으아, 으아아!"

앞니가 부러지고, 턱이 빠졌기 때문일까.

도대체 뭐라고 지껄여 대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그건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김정철은 혀를 잘근잘근 씹어 대고 있었다.

굴욕감에 맛이 간 건가.

혀를 깨문다고 죽을 수 없다는 건 잘 알 텐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히, 히익…!"

이상한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김정철이 제 혀를 씹어 댈 때마다 권오석과 한기해가 신음을 흘렸다.

공포, 두려움.

그런 감정에 휩싸인 듯 몸을 끌어안은 채 부들부들 떨어 댔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뿌드득, 뿌득!

발아래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이게 뭐야?"

내려다보니, 듣도 보도 못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끔찍해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서 떨어져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뿌드득 소리는 녀석의 몸에서 뼈가 전부 빠지는 소리였다.

몸속에서 튀어 오르고 돌아 대는 소리였다.

녀석의 피부는 점점 창백해졌고, 등에서는 검은 날개가 튀어나왔다.

그 모습은 마치,

"악, 악마…?"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재식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김정철은 꼭 판타지 게임 같은 데서 봐 왔던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뿌드득 소리가 그치며 변신이 끝난 김정철이 천천히 일어났다.

따스한 손길에 부러졌던 몸은 다 회복되어 멀쩡했고 거대해졌다.

[세계수 새싹이 더러운 시선의 정체를 깨달았습니다!]

김정철의 모습을 가리면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정체?

새싹이는 저게 뭔지 알고 있는 건가?

[새싹은 인간 남자가 '마족의 권속'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마족의 권속은 마족에게 영혼을 팔고 부하가 된 인간이라고 설명합니다.]

"마족의 권속…?"

"호오, 우리를 아나? 역시 평범한 D급 헌터는 아니로군."

새싹이 말해 준 것을 읽었을 뿐인데, 멋대로 오해해서는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정말 마족의 권속이라고?

"여기서 정체를 드러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순간, 김정철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다시 나타났을 땐 어느새 내 앞에 서 있었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는 소리다.

"...!"

"이 힘이라면 능히 널 쳐죽일 수 있지!"

그렇게 외치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퍼엉!

강렬한 타격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어찌나 강렬했는지,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하다.

"으흐흐, 그까짓 실드 따위 부숴 버리면 그만이지! 으하하하하!"

김정철이 개미굴이 떨어져 나갈 듯이 웃어젖혔다.

영화에 나오곤 하는 삼류 악당처럼 웃고 있는데, 녀석과 내 눈이 마주쳤다.

"...."

"...."

"…네, 네놈! 어떻게,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그야, 네 주먹에 안 맞았으니까?"

"뭐? 그럼 방금 그 소리는…!"

"무슨 소리긴, 네 오른팔 터져 나간 소리지."

"끼이, 끼에에엑!"

…이거 병신인가?

제28화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나온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대는 김정철이 한심해서다.

전투 중이라는 생각은 들었는지, 놈은 뒤로 빠르게 물러나 박살 나서 없어진 오른팔을 노려본다.

그런데… 도마뱀 꼬리가 다시 자라나듯 팔이 돋아났다.

마족의 권속이라더니, 확실히 보통 인간의 회복력은 아니었다.

"끼이엑!"

지껄여 대는 것도 더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무슨 짐승처럼 울부짖어 대는 꼴이 영 시끄럽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만.

그 고통이 자업자득으로 인한 결과였으므로 봐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김정철이 검은빛의 마나를 발산하며 나를 노려보더니 곧 다시 달려들었다.

"날,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

갑자기 왜 열등감을 폭발하고 지랄이야?

인상을 찌푸리는데, 김정철이 주먹을 마구 휘둘러 댔다.

검은 마나를 발산하고 있어선지, 힘 조절을 하고 있어선지 나무껍질을 때리는 녀석의 주먹은 멀쩡했다.

그만큼 공격의 위력도 약했다.

백날 때려 봐라, 나무껍질이 파괴되나.

"으, 아아!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란 말이다! 나는, 나는 강해졌-푸헥!"

따스한 손길로 김정철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김정철은 머리부터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크헉!"

그러면서도 두 눈만은 나를 향했다.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그래, 너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어떤 열등감이 있었겠지. 그러니까 마족이란 거에 영혼을 팔아 강력한 힘을 얻은 거겠지.

그런데?

뭐 어쩌라고?

그렇게 얻은 힘으로 헌터 사냥이나 하는 주제에 뭐 잘났다고 열등감을 내비쳐?

선행하다가 악한에게 당하는 거라면 동정이라도 해 줄 수 있다.

그 넘쳐나는 힘으로 범죄와 악행을 저지른 놈이 어디서 감히 발광이야, 발광은?

오른발로 바닥에 널브러진 김정철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컥!"

차라리 변신하기 전이 나았다.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정확한 한 방을 노렸을 때가 더 나았다.

지금은 그냥 주체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취한 짐승과 다를 게 없었다.

"사적인 감정은 없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

놈이 했던 말에 하고 싶은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세계수 휘두르기를 써서 김정철의 목을 베었다.

놈의 목은 도마 위에 놓인 두부처럼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몸에서부터 머리가 떨어졌는데도 김정철은 죽지 않아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마지막 말 한마디까지 내뱉어 줬는데 말이다.

"…너 왜 안 죽냐?"

"지옥에서 네놈을 기다리고-!"

"그래, 그래."

가슴팍을 밟고 있던 오른발로 주둥아리를 틀어막았다.

시끄러운 것도 적당해야지.

김정철은 "읍! 으읍!"하며 1분가량 뭐라 뭐라 지껄여대다가 어느 순간 컴퓨터 전원이 꺼지듯 죽었다.

죽었기 때문일까?

변신했던 몸이 연기를 내뿜더니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말이지, 징그럽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목이 잘렸는데 대체 얼마나 더 살아 있다가 죽는 거야?"

그동안 날 상대하던 놈들이 이런 기분이었나?

전명환이 겁먹고 도망치던 게 이해가 갔다.

겨우 목이 잘린 채로 말하는 놈을 보는 게 징그러운데, 심장이 찔려도 멀쩡하고 배에서 흘러나온 내장을 집어 드는 놈은 얼마나 징그러웠을까.

[관리인 백도운 님이 마족의 권속을 처치했습니다!]

[첫 번째 마족의 권속을 처치한 업적의 보상으로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을 드립니다.]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은 바로 우편함으로 전송됩니다.]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

그 순간, 전대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떠올랐다.

나뭇가지라고 해 놓고선 통나무가 나왔던 기억이.

그래, 이것도 나뭇잎이라고 해 놓고선 파라솔처럼 거대한 게 튀어나오겠지.

통나무를 나뭇가지라고 했으니까 나뭇잎도 분명 그럴 거다.

이어 메시지창이 또 하나 떴다.

그건 세계수 퀘스트였다.

[A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 내용 - 관리인 백도운은 마족의 권속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앞으로 또 다른 마족의 권속들과 맞서 싸워 승리하십시오. (1/10명)]

[성공 보상 – 현재 없습니다. 처치한 권속의 숫자에 따라 조정됩니다.]

[실패 시 페널티 없음.]

김정철을 처치했기 때문이지 1/10명으로 표시돼 있다.

앞으로 9명만 더 처치하면 완수할 수 있긴 한데, 나머지 녀석들을 어디서 찾는담?

실패 시 페널티가 없으니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아, 이런.

깜빡할 게 따로 있지, 권오석과 한기해가 남아 있다는 걸 깜빡했다.

보상 아이템에 눈이 돌아갔던 나를 책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히익…!"

"오, 오지 마!"

권오석과 한기해는 도망가지 않았다.

녀석들은 멍청하게도 도망치는 대신 김재식을 인질로 잡았다.

어느새 밧줄을 꺼내서는 두 팔까지 뒤로 포박한 채였다.

참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들이었다.

아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라서 저런 짓을 벌인 거겠지.

두려워하던 사람을 손쉽게 죽인 놈한테서 살아남으려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던 것이리라.

차라리 제각기 따로따로 도망쳤으면 한 명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을 거다.

한기해가 재식의 목에 한 손 검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이 새끼 죽어!"

정말, 진심으로, 저게 내게 통할 거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어떤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한 인질에는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그 인질이 '아주 소중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희랑 태천이라면 모를까 오늘 처음 만난 김재식으로는 그 효과를 보기가 힘들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죽이-"

"형."

죽이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그리 말하려던 나를 김재식이 불렀다.

한쪽 눈을 치켜뜬 채 그를 쳐다봤다.

김재식….

재식은 감정의 동요가 없는 얼굴로 나를 마주 봤다.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얼굴이었다.

정말….

흐뭇함을 참지 못한 나머지 흐흐 웃고 말았다.

"웃, 웃어?"

당황한 한기해를 무시하고 재식만 보며 물었다.

"괜찮겠냐?"

"…나도 헌터예요."

E급에 불과하지만.

아마 재식은 그 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았을 거다.

그의 말마따나 헌터는 등급이 어디에 해당하든 죽음을 각오한다.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게이트에 진입하는 족속들이었으니까.

그럼, 같은 일을 하는 종사자로서 그 각오에 따라 줘야 하지 않겠는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준 후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미친놈들! 개소리하지 마…!"

"멈춰! 정말, 정말로 죽일 거야!"

그 모습을 보고 권오석과 한기해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한 사람의 목숨을 결정짓는 칼자루를 쥔 건 녀석들인데, 얼굴과 행동만 보면 꼭 그 반대 같다.

그렇겠지. 지금 녀석들이 나아가고 있는 길은 살아남을 길이 아니다.

"죽인다니까! 멈추라고!"

"죽여."

"뭐?"

"죽이라고. 헌터라잖아. 각오했다잖아. 그러니까, 죽이라고."

한 걸음, 두 걸음.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둘은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니까,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인질극이었다.

"그런데, 걔 죽이면 너희는? 살 수 있고?"

"...."

저놈들이 재식을 죽이면 내가 복수라는 핑계로 저놈들을 죽이면 그만이다.

아무도 얻는 것이 없는, 세 명의 개죽음만 더 생겨나는 멍청한 짓인 거다.

거침없이 앞으로 내디뎌진 내 두 발은 세 남자의 앞에 멈춰 섰다.

그렇게 가까워질 때까지 권오석과 한기해는 김재식을 죽이지 않았다.

깨달은 거다.

살아남기 위해 벌였던 인질극이 오히려 살아남을 수 없는 지옥행 열차 티켓이라는 걸.

"어떡할래? 굳이 이 녀석을 길동무로 삼겠다면, 기다려 줄 수는 있는데."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가만히 녀석들을 바라봤다.

녀석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를 내리고는 재식의 팔을 포박한 밧줄을 풀었다.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살아서 교도소에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멍청한 놈들이지만, 도저히 구제할 길이 없는 바보들은 아니었다.

"잘 생각했다, 바보들. 너흰 지금 너희 목숨을 구했어."

밧줄이 풀리자 재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죽음을 각오했다고 하더라도, 역시 살아 있는 게 최고지.

***

무주 던전 개미굴은 무척 한적하고 한가한 곳이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던전의 마나가 범람할 때쯤 몬스터를 소탕하러 오는 헌터들이 전부다.

그마저도 한 번 청소하고 나면 마나가 다시 범람할 때까지 3개월이 걸려 1년에 네다섯 번 정도 찾아오고 만다.

그런 이유로 그곳을 관리하는 '무주 개미굴 관리소'도 자연스럽게 아주 한가한 곳이 되었다. 헌터 협회 사람들이 발령받고 싶은 곳 베스트 10위 안에 손꼽히고 있기도 하다.

"저, 이곳엔 대체 어쩐 일 때문에 오신 건지…?"

그런 곳으로 발령받았기 때문에 '드디어 인생 좀 편하게 살겠구나!'하고 좋아했던 관리소의 관리인들은 현재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관리소장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야 할 만큼의 거물들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A등급 길드 백운천의 길마 이태천과 그의 파티원들.

같은 길드의 부길마 백도희와 그녀의 파티원들이다.

"아침 일찍 미안합니다. 친구 만나러 왔는데, 사람 여럿 불편하게 해 버리네요. 하하."

"오라버니를 만나는 것뿐인데 왜들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한 명은 나무 밑동에 앉은 채 호탕하게, 한 명은 허공을 의자 삼아 앉은 채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 가시 돋친 말은 관리인들을 향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뒤에 서 있는 10명가량의 길드원을 향한 말이었다.

관리소장은 어색하고 민망해하는 길드원들을 보며 그들이 이태천과 백도희를 무작정 따라나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분…이시라면, 백도운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못 보셨습니까? 어제 낮에 던전에 들어갔다고 하던데요."

"어, 어제 낮에요?"

관리소장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머릿속으로 어제 낮을 떠올렸지만, 사람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김정철 일당과 함께 온 2명이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이 났다.

그는 뒤에 서 있는 부하들을 쳐다봤다.

부하 중 하나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민다.

서류철에는 씩 웃은 미소가 시원해 보이는 청년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사진 옆에는 D급 헌터 백도운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서, 관리소장은 생각했다.

좆됐다! 지금쯤 이 자식 죽었을 텐데!

"아아…! 기억, 기억납니다! 네, 그랬군요…."

관리소장은 던전을 입장시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사람의 얼굴을 일일이 머릿속에 남겨 둘 필요는 없었으니까.

도망쳐야 해. 여기에 있다간 난 죽어!

관리소장은 어떻게 해야 이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좋은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후우. 드디어 나왔네요, 오라버니."

허공에 떠 있던 백도희가 땅으로 내려왔다.

하얀 머리, 하얀 눈썹, 하얀 피부.

온몸이 새하얀 그녀가 내려오자 꼭 눈이 내린 듯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개미굴을 쳐다봤다.

관리소장도 마찬가지로 개미굴을 쳐다보면서 하늘을 향해 아주 절박한 기도를 드렸다.

제발! 제발 죽이지 말았어라!

"...!"

개미굴에선 얼마 지나지 않아 백도운과 김재식이 나왔다.

그들은 무언가를 질질 끌고 나오고 있었다.

살아 있어? 대체 어떻게?

관리소장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정철은 예전에 퀘스트를 깨러 왔던 B급 헌터도 사냥한 적이 있던 엄청난 실력의 헌터 사냥꾼이었다.

D급 헌터에 불과한 백도운이 그 남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지 않은가?

백도운은 개미굴을 빠져나오다 멈춰 섰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희?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금요일에 도착한다며!"

"어머, 그걸 믿었어요? 실망인데. 당연히 거짓말이죠."

도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제 오빠를 비웃기 위해서.

그 모습을 보고 백도운은 좌절했다.

"으아아, 신이시여! 내 이틀 남은 자유 시간을 이렇게 가져가시는 겁니까!"

"...."

꼴값 떨고 있네.

개미굴 앞에 선 사람들은 절규하면서 비틀거리는 백도운을 보며 생각했다.

소중한 여동생도, 하나뿐인 친구조차도.

딱 한 명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관리소장이었다.

그는 백도운이 김정철에게서 도망쳤든 싸워 이겼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멀쩡히 살아 있었으니까.

김정철 일당의 입만 잘 틀어막으면 아무 문제 없이 살아나갈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관리소장의 사고가 정지했다.

비틀거리면서 그의 앞까지 걸어온 백도운 때문이었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도운이 어느새 뽑아 든 단검으로 관리소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흐억! 왜…, 왜?"

"그냥, 감?"

대답하며 도운은 씩 웃었다.

서류 사진에서 봤던 것처럼 시원스러워 보이는 미소였다.

제29화

"감, 감이라니, 대체 무슨 소릴-!"

"어어, 움직이지 마, 더 다쳐."

반박하고 싶은 듯 눈을 부라리는 관리소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붙든 후 단검을 쥔 손을 살짝 돌린다.

관리소장이 돼지 멱따는 소릴 질렀다.

식은땀을 흘리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진 듯 주저앉는다.

"커헉, 살, 살려 줘…!"

당연히, 감만으로 단검을 옆구리에 쑤셔 댄 것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지금까지 감만으로 살아온 놈이라고 해도, 눈앞에 있는 건 헌터 협회 소속의 사람이다.

증거도 없이 이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권오석과 한기해에게 녀석들과 한편이라는 검증을 끝냈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찌른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 다 보는 곳에 찌르지 않고 아무도 없을 때 찔렀으리라.

주저앉은 관리소장의 대가리를 탁탁 치며 말했다.

"누가 죽인데? 급소 피했으니까 살 거야."

"허억!"

애초에 죽일 생각은 없었다.

도망칠 궁리를 하는 얼굴이기에 그따위 생각을 못 하게 하려고 한 것뿐이다.

또 이놈을 죽이면 이후 귀찮아지는 게 문제였다.

헌터 사냥꾼들과 내통하고 있었다고 해도,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도 아닌데 죽이게 되면 협회에게 "왜 생포하지 않았나?"라는 말을 듣게 될 거다.

칭찬받을 짓을 했는데 왜 더 칭찬받을 짓을 하지 않았냐고 혼나는 이상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건 도희에게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헌터 사냥꾼들과 한패였습니다. 포박하세요."

그리 말하면서 관리인들을 쳐다봤다.

관리인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황스러운 눈초리를 하며 되물었다.

"네? 관리소장님이요?"

"네, 당신들 관리소장님이요."

갑자기 관리소장이 헌터 사냥꾼들과 한편이었다는 말을 듣게 되면 믿을 수가 없을 거다.

함께 지내 온 시간이 나보다 관리소장과 더 많을 테니까.

날 의심하는 게 더 올바른 판단이리라.

"그러니까, 아니. 됐습니다."

"...?"

한기해에게 들은 것들을 말해 줄까 하다가 그냥 그만뒀다.

내가 해 줄 건 다 해 줬다.

밥 차려 줬으면 됐지, 숟가락으로 퍼 주기까지 하긴 싫다.

자기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관리인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형 말이 맞습니다! 이 녀석들에게 교차 검증한 사실이에요!"

재식의 그 말이 있고 나서야 움직였다.

관리소에서 은빛의 수갑을 갖고 와 관리소장을 포박했고, 그중 두 명은 재식에게로 달려갔다.

내가 아니라 그에게서 상황 설명을 들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편해졌는걸.

"너희 왜 여기 있는 거야?"

도희와 태천이에게로 걸어가며 물었다.

도희는 나와 자신들 사이에 불투명한 빛의 장막을 둘렀고, 태천이는 애용하는 검과 방패를 꺼내 든 채였다.

그들의 파티원들에게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관리소장을 찌른 나를 제압하려는 파티원들을 막아선 것이다.

태천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알면서 모른 척은? 너 보고 싶어서 왔지."

"우리 대화할 게 참 많잖아요?"

그러면서 태천이와 도희는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나는 인상을 팍 구기고 싶었다.

개미굴을 나올 때 이 녀석들을 보고 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특히, 금요일에 온다던 도희가 눈앞에 있었을 땐 내가 여왕개미의 독기에 취해 환각에라도 빠진 줄 알았다.

여왕개미의 독기 따위에 당할 몸도 아니었지만.

"인상 펴요, 오라버니. 인상 구기고 싶은 건 난데."

"너무 반가워서 눈물을 참으려다 보니까."

"정말, 말이나 못 하면."

그러더니 도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에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나는 네 친구지만, 백운천 길마기도 하거든."

"갑질을 했다고?"

"미쳤냐? 요즘이 어떤 시댄데 갑질을 해. 정당한 거래였어."

"그래, 그랬으면 한다. 도희, 너는?"

"…사랑의 힘?"

"너 나한테 위치 추적 장치 달아 놨니?"

"무, 무,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왜 나를 못 봐, 도희야.

위치 추적 장치라니, 아무리 남매라고 해도 너 그거 범죄다.

"그럼 워프 게이트 타고 온 거야?"

"어. 거기서 도희 만났어."

그렇군, 둘이 함께 온 건 우연이었나.

도희 입장에선 안타깝게 됐는걸?

태천이랑 함께 오고 싶지 않았을 텐데.

이러면 상황을 대충 무마할 길이 보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 백도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재임이 빽 소리쳤다.

보육원에서부터 이태천의 오른팔을 자칭하며 사사건건 내게 트집을 잡는 녀석이다.

지금도 그러고 싶은 것 같다.

내 변명 좀 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인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주먹은 내 턱주가리를 날리고 싶은 듯하다.

한재임뿐만이 아니다.

다른 녀석들도 날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그들과는 보육원에서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다.

분명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예전처럼.

좀 억울하네. 이번엔 내 잘못만 있는 건 아닌데.

뭐, 다 막 살아온 내 업보다.

"...."

그들 중에서는 이연지만이 엷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연지는 두 사람의 파티원 중 유일하게 나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녀의 아이돌인 도희와 태천의 오빠이자 친구라서다.

그렇지 않았으면 오히려 나한테는 관심도 두지 않았을 거다.

어렸을 적의 나를 모르는 것도 한몫했을 거고.

"관리소장을 찌르다니, 너 미쳤어!"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진정 좀 해, 한재임."

"이유는 무슨 이유! 또 그놈의 감이 어쩌고저쩌고 하려는 거겠지!"

"...."

이야, 귀신 같은 놈.

그러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던전 안에서 이 사람들과 싸운 건가요?"

도희가 관리인들에게 질문과 답변을 건네받던 재식에게로 걸어갔다.

정확하게는 재식의 뒤에서 질질 끌려온 권오석과 한기해, 그리고 목이 잘린 김정철의 시체를 향해서다.

재식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도희를 보며 크게 소리쳐 대답했다.

꼴을 보면 무슨 연대장 앞에 선 이등병 같다.

"네, 네! 그렇습니다!"

"오라버니가 아무 이유 없이 싸웠을 리 없고. 범죄자였겠네요."

"네! 헌터 사냥꾼이었습니다!"

"이곳이 사냥터였군요. 그렇다는 건, 편을 맺은 협회 사람이 한두 명 정도 있었다는 거고. 맞아요?"

"응, 맞아."

그리 대답하자 도희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한재임을 향했다.

평소 나와 태천이가 사고를 쳤을 때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눈빛과 살짝 비슷했다.

그렇다. 살짝 비슷하기만 했다.

두 시선엔 절대적인 차이가 있었다.

한재임을 바라보는 도희의 시선에는 애정이 없었다.

애정을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 시선에는 오로지 경멸만이 섞여 있었다.

"제발 머리를 좀 써요. 매번 열폭만 하지 말고."

"...."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그러면서 도희는 다시 시선을 내게로 돌리고 걸어왔다.

입술을 꽉 깨무는 한재임을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웬 열등감? 그런 게 있을 리 없는데.

한재임은 A급 헌터이며 '빙결의 귀공자'라는 별명을 가진 실력자였다.

그가 내게 무슨 열등감을 느끼겠는가?

보편적인 생각으로는 열등감 느끼는 건 나여야 했다.

안 느끼지만.

태천이가 한재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한재임은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풀었다.

"그래서, 많은 일이 있었더라고요, 오라버니?"

"…화 많이 났어?"

"그럴 리가요."

싱긋 웃는 도희의 지팡이에서 매직 미사일이 발사됐다.

"화났네, 뭐!"

화들짝 놀라 매직 미사일을 피했다.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지나쳐 간 매직 미사일은 갑자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고는 1개였던 것이 10개로 나뉘면서 나를 향해 다시 돌아왔다.

한 발쯤은 내가 피할 것을 예측하고 동선을 미리 설정해 둔 거다.

도희라면 저 10발로 나뉜 매직 미사일들의 동선을 전부 설정해 뒀으리라.

어느 방향으로 피하든 나를 끝까지 쫓아오겠지.

…아니,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 같다.

도희가 매직 미사일을 쏜 건 나를 맞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아마 딱 한 방향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나는 제자리에 섰다.

퍼퍼펑!

열 발의 매직 미사일이 차례차례 내 몸에 꽂혔다.

"조금만 생각하면 매직 미사일을 피할 수 있는 방향이 있었을 텐데요."

알고 있다.

알면서도 일부러 맞은 거다.

매직 미사일을 피할 수 있는 방향, 그건 바로 도희에게로 이어지는 길이다.

토끼몰이를 당하듯 도희 앞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 앞은 더 큰 사지였으니까.

그걸 말했다간 더 화낼 테니 다르게 반응했다.

"하하, 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나무껍질? 실드인가요?"

내 몸을 감싼 나무껍질 보며 도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만히 지켜 보고 있던 태천이도 마찬가지다.

대체 실드 따위를 뭐 하러 배웠냐고 따지고 싶은 듯이 보였다.

내가 세계수의 열매를 먹고 마나가 굉장히 많이 늘어났다는 걸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원래 내 마나량이었다면 실드는 방금 열 발의 매직 미사일을 다 막아내지 못하고 깨졌을 거다.

"…복귀한 이유는 이해했어요."

원래 그랬어야 할 실드가 깨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그건, 내 최대 마나 양이 늘어났음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증거다.

그렇기에 도희는 내가 헌터를 복귀하려고 한 걸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도희는 살벌하게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나와 전혀 의논하지 않고 백운천 탈퇴한 거. 그동안 내 메시지 무시한 거. 그리고,"

음, 화를 내는데 아주 타당한 이유였다.

"우리 길드 탈퇴해 놓고 우연후 그 기생오라비 놈 길드에 들어간 거는 용서 못 해!"

"뭐? 마지막 거는 오해야! 나 그 길드 가입한 적 없어!"

"어, 그래요?"

"그래! 내가 백운천을 나와서 다른 길드에 갈 리가 없잖아!"

"응, 그건 그러네요. 그럼 그건 취소."

그러더니 도희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곤 말을 이었다.

"나와 전혀 의논하지 않고 백운천 탈퇴한 거. 그동안 연락 무시한 거는 용서 못 해요!"

아까 했던 말을 우연후 이야기만 쏙 빼고 다시 했다.

그러고는 도희는 나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다.

다시 매직 미사일을 쏘려는 듯했다.

아니, 매직 미사일은 통하지 않은 걸 알았으니 다른 공격 마법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지금이 타이밍인 것 같다.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백운천의 첫째로서 지금 당장 가족회의 개회를 제안합니다!"

"...!"

가족회의.

그 단어가 입에서 나오자 도희의 지팡이에 모이던 마나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던 도희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어떤 생각으로 가족회의를 제안한 것인지 눈치챈 것이다.

가족회의는 나 도희 태천이 우리 셋이서 어렸을 적부터 해 왔던 거다.

주로 어떤 일로 감정싸움을 심하게 할 때나 결과가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함께 해결할 때 하던 거다.

뭔 소린지 모르겠는 얼굴로 웅성거리는 주변 사람들을 무시한 채 도희가 소리쳤다.

"절대 안-!"

"백운천의 둘째로서 가족회의 개회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태천이는 내게 눈을 찡긋했다.

역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바라는 걸 잘 안다.

"웃기지 마요! 이건 무효야!"

"백운천의 셋째는 가족회의 개회 제안을 거부하시는 겁니까?"

태천이 정중하게 도희에게 물었다.

그녀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거부가 아니라 무효라니까!"

"네, 그럼 기권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이리하여 가족회의 개회 제안은 찬성2 기권1 과반으로 통과되었습니다. 이 시간부로 백운천 가족회의를 시작하겠으며, 이번 가족회의 의장은 저 이태천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아악! 짜증 나아! 내가 이럴 줄 알고 혼자 오려고 한 건데!"

신경질을 부리는 도희를 무시하며 나와 태천은 서로를 보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러게 왜 태천이랑 같이 왔니, 도희야.

제30화

우리는 가족회의를 위해 서울 집으로 올라왔다.

개미굴 관련 일은 한재임에게 일임했고, 재식은 연락처를 교환한 후 헤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족회의는 바로 시작되었다.

주제는 '백도운, 백운천으로 돌아오지 않고 솔로 헌터 생활을 해도 괜찮은가?'였다.

나는 도희와 태천을 설득시키기 위해 스마트폰에 세계수가 자라났다는 사실을 밝혔다.

업적으로 세계수의 열매를 얻게 되어 먹었다는 사실도.

그 말을 듣고 나서 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드디어 미친 건가."

"지금이라도 정신 병원에 데려가는 게 좋겠어요."

"그래, 그러자."

"바로 알아볼게요."

"...."

미쳤나?

그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했다.

드디어 미쳤나?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말하는 거 보니 내가 언젠가는 미칠 거로 생각하긴 했었나 보지?

이거 아주 괘씸한 녀석들이네.

한숨을 내쉬며 둘에게 스마트폰을 꺼내 세계수를 보여 주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아무리 말해 봤자 직접 보여 주는 게 더 빠르다.

태천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이거 네가 하던 스마트폰 게임이잖아. 뭐, 나무가 진짜 자라나긴 했네."

"그래. 그게 바로 세계수야."

"...."

믿지 못하겠는 얼굴로 날 쳐다본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태천이 옆에 앉아 있던 도희도 스마트폰 속에 자라난 세계수 새싹을 들여다봤다.

"어머, 귀여워라."

새싹이 귀엽다는 소리를 들으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팔불출이 된 기분인걸?

"어? 마나가…."

화면을 톡 두드린 도희가 당황하며 손가락을 뗐다.

아마 자신의 마나가 스마트폰 속으로 옮겨가서 당황한 듯했다.

당황한 건 새싹이도 마찬가지다. 메시지창을 보내왔다.

[세계수 새싹이 너무나 순수한 빛의 마나의 소유자에게 감탄을 보냅니다.]

"빛의 마나…?"

"오라버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아, 그게-"

"설마, 내 마나를 느낀 거예요?"

새싹이가 말해 줬다고 설명하려고 했지만, 도희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내 마나의 성질을 느끼다니, 대단해…."

중얼거리더니 생각에 빠졌다.

잘 됐다 싶어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날 대단하다고 생각하면 어쨌든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내가 검지로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자 도희가 질문을 던졌다.

"지금 새싹에게 마나를 전달해 주는 거예요?"

"응."

"허! 진짜, 정말로 그게 세계수인 거야?"

"그렇대도. 이게 그 증거고."

화면을 강하게 톡톡 두드렸다.

마나가 스마트폰 속의 새싹이에게로 전달됐다.

태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 그건 대체 왜 스마트폰 속에 자라난 거냐?"

"그건… 모르겠는데?"

그러고 보니,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진짜 세계수를 키우는 이 게임은 왜 스마트폰 게임 목록에 있었던 걸까?

이런 똥겜을 도대체 왜 만들었냐고 따지려 게임 제작사를 찾아 본 적도 있었다.

어떠한 관련 정보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게임 어플에 남겨진 'PG Corporation'이라는 이름만 확인할 수 있었다.

PG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 의문만 남겼었다.

"음, 주제는 세계수가 아니니까 다음에 생각해 보자."

"아, 참. 그렇지."

"…난 반대예요. 오라버니가 다시 헌터를 하는 건 찬성. 근데 왜 길드를 나가요? 우리랑 함께하면 되지."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태천이한테도 말했던 건데, 너희와 다시 파티를 맺을 생각은-"

"파티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솔로 헌터? 좋아요. 그렇게 해요. 누가 그거 반대한대요? 단, 백운천의 백도운으로."

"그러기 싫어."

"그러니까 왜요."

내가 백운천에서 활동하면 도희와 태천이가 가만 내버려 둘 리 없다.

무기든 아이템이든 최고의 지원을 해 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 뻔하다.

하나뿐인 오빠이자 친구인 내가 너무나도 소중하니까.

또 그들의 마음에 담긴 부채감을 지우기 위해서.

둘은 2년 전 그날 둘이 도망칠 수 있도록 혼자 끝까지 남아 싸운 내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오빠가 동생을 살리고자, 친구가 친구를 구하고자 목숨을 건 거다.

그것에 부채감을 느끼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뭘 노리고 그리 행동했던 것도 아니다.

불편해서 절대 못 받는다.

더군다나 그렇게 성장하는 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다.

나는 나의 힘으로 두 사람 옆으로 가고 싶다.

"너희도 내 도움 없이 성장했으니까 나도 그러고 싶-"

"무슨 소리야? 네 도움이 없었다니,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줬는데!"

"맞아요. 오라버니가 없었으면 우린 2년 만에 A급 헌터가 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딴 생각 하지도 마!"

음….

내가 없었으면 A급 헌터가 될 수 없었을 거다?

그리 말해 줘서 고맙긴 하지만….

두 사람이 날 동생이자 친구로서 좋게 봐주는 것일 뿐이다.

나는 2년 동안 정말로 한 게 없었다.

해체업자 아저씨들을 관리하고, 세계수 키우기를 하고.

그게 다다.

"해 준 게 많기는? 그래서 내가 낙하산이나 등골 브레이커 소리를 듣고 있냐?"

그렇다.

그런 이유로 현실의 평가는 정반대다.

괜히 낙하산이나 등골 브레이커 같은 거로 불리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의 파티원들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던 그들은 과거의 내가 얼마나 몰상식한 놈이었는지도 안다.

아주 잘….

"뭘 모르는 사람들이 함부로 떠드는 소리 따위 신경 쓰지 마요!"

"그래! 우리 길드에 해체업자 아저씨들 데려온 것도 넌데, 한 게 없긴 뭐가-"

"아, 정말! 아무튼! 나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어!"

역시 2대1이 되니 설득하기 힘들다.

지금은 백운천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뒤에서 도망칠까?

지구 반대편인 남미 쪽으로 튀면 아무리 둘이라도 쉽게 못 쫓아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태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희야, 이렇게 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도운이가 괜히 백운천의 '운(雲)'을 맡고 있겠냐."

"알아요. 아는데…!"

뭔 소리래?

갑자기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천의 말마따나 내가 백운천에서 운을 담당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그냥 우리의 이름을 땄을 뿐이다.

백도희의 백.

백도운의 운.

이태천의 천.

거기에 무슨 역할이 있거나 하지는 않다.

그러나 도희는 대뜸,

"혼자 하세요."

라고 말해 왔다.

뭐야? 무섭게 갑자기 왜 너희끼리 납득하고 그래?

좀 떨떠름하지만, 일단 허락해 줬으니 된 건가?

도희가 지팡이 끝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갑자기 지팡이는 왜 내게 겨누는 걸까.

"실드 발동해 볼래요?"

"켜 뒀는데?"

"그때부터 계속 발동해 둔 거예요?"

"응."

"정말 웬만한 공격은 다 막겠네요."

그러는 도희의 지팡이에서 하얀 마나가 날 향해 쏘아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랐지만, 나무껍질을 켜 둔 채여서 가만히 있었다.

콩!

"…아파?"

흰 마나가 내 이마를 콩 때렸다.

꿀밤을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그러다가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며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이거 설마,

"힐링이에요."

"진짜로? 힐링이 왜 아파?"

힐링으로 아프게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아니, 그보다, 도희는 대체 힐링으로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 기술을 왜 터득한 걸까.

…나랑 태천이 때문인가?

"실드만 믿다가 큰코다칠 수 있으니 조심해요. 그걸 우회하고 오라버니만 공격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니까."

"알았어. 그래도 걱정하지는 마. 나무껍질이 뚫려도-"

"걱정돼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오라버니는 작정하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인데!"

쩝.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짓이 있다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작정하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옳은 말이고.

일단, 안심시켜 주어야겠다.

"태천이한테 들었겠지만, 나 이젠 웬만한 상처엔 끄떡도 안 해. 머리가 박살 나도-"

"머리가, 박살…?"

"어?"

도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날 바라봤다.

마치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고개를 돌려 태천이를 보자 그는 인상을 팍 구긴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날 일 말 안 했구나.

"멍청이, 네가 비밀로 해 달라며!"

"어머? 태천 오라버니도 알고 있었나 봐요?"

"...."

"가족회의는 방금 끝났어요."

도희는 얼음보다도 차가운 눈빛으로 우릴 노려봤다.

후, 여기서 또다시 가족회의를 제안하면 무지하게 화내겠지?

할 수 없다.

여기선 그냥 도희의 분노를 받아들여야겠다.

"살려는 드릴게."

제발 그래 주라….

***

목요일 날이 밝자마자 재이네 대장간을 찾았다.

너무 이르게 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어서 빨리 장비들을 보고 싶었다.

문에는 여전히 '작업 中, 주방용품은 알아서 가져가세요'라는 푯말이 달려 있었다.

설마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 그날처럼 유재이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쪽에서부터 망치질하는 소리 따위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밤새 작업하다가 잠이라도 든 건가 싶어 조심히 작업실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라?"

유재이는 작업실에도 없었다.

"또 계란이라도 사러 나간 건가?"

혼잣말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는 없더라도 장비는 만들어 놨을 테니 먼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작업실 한가운데에 내 어깨 높이까지 오는 거대한 검이 서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 검은 모양이 참 특이한 양손 검이었다.

가늘고 긴 이파리 모양에 칼자루가 거의 절반에 달했다.

날 부분에는 선을 따라 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마나를 주입하면 발동될 것으로 보였다.

아마 저 무늬는 왓쳐의 눈알로 새겨 넣은 것이 아닐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칼자루 부분에 메모지가 붙은 게 보였다.

메모지를 떼서 읽어 보니 아이템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아르보르 카풀루스Arbor cápŭlus(S등급), 줄여서 '아르카'.]

[공격력 A등급, 내구도 S등급, 최대 마나 5만↑]

[마나 주입 시 공격력 상승.]

"아니, 이름만 달랑 적어 넣고 뭔 뜻인지 말 안 해 주면 어떡해?"

라틴어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모르겠다.

최대 마나 증가가 붙은 걸 보니, 세계수 수액도 들어간 것 같다.

아르보르 카풀루스.

너무 멋을 부린 것 같긴 하지만, 마음에 든다.

아르카라고 줄여서 부르는 것도.

아르카 옆에는 경갑이 놓여 있었다.

스켈레톤 로드에게 파손돼서 수리를 맡겼던 그것이었다.

수리하면서 개조를 한 듯 생김새가 조금 변했다.

갑옷 속에 원래 없었던 검은 천이 덧대어 있다.

검은 천은 갑옷 위쪽으로 튀어나와 머리를 덮는 후드가 되기도 했다.

아마 검은 천은 스켈레톤 로드의 그림자 망토가 아닌가 싶다.

[그림자의 눈(A등급)]

[방어력 A등급, 내구도 B등급.]

[그림자 밟기(A등급) – 하루 3번 자기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상대 그림자에서 나올 수 있음.]

그림자 밟기가 붙어 있는 걸 보니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다.

나는 그림자의 눈과 아르카를 챙겨 들고 작업실을 나왔다.

그러다가 계산대에 메모지가 놓인 걸 발견했다.

내용을 읽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메모지 위쪽에 쓰인 '백도운'이라는 내 이름이 눈에 띄었다.

아마 일이 있어 자리를 잠시 비우겠다는 내용을 남긴 것이겠지.

확인해 보니 내 예상이 얼추 맞아떨어졌다.

그렇다, 얼추다.

[백도운에게]

[또 크라우드가 찾아왔어.]

[자기들을 따라오면 아빠에 관한 정보를 가르쳐 주겠대.]

[그 증거로 아빠가 쓰던 망치를 가져와서 보여 줬고.]

[음. 아마 함정일 거야. 분명 그렇겠지….]

[그래도 따라가려고. 정말, 정말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추신, 바보 같이 대비도 하지 않고 따라갈 수는 없으니까.]

[헌터 백도운 님에게 의뢰를 부탁합니다.]

[27일 자정, 유재이가 대장간으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찾으러 와 주십시오.]

[의뢰 보수는, 재이네 대장간 평생 이용권… 정도면 되려나?]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되지. 가족은."

제31화

"11시 50분…."

유재이의 부탁대로 자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갑옷을 착용하고, 어깨에 아르카를 비스듬히 대 놓고, 새싹이를 두드리면서.

마냥 기다리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워서 정보를 모았다.

이 대리가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유재이의 아빠는 그녀가 어렸을 적에 실종됐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았다.

자식을 버리고 도망쳤다느니,

야장 실력을 인정받아 정부에 기밀 의뢰를 받았다느니,

뒷세계 길드의 눈에 띄어 납치를 당했다느니.

"...."

그녀도 나처럼 혼자서 컸다.

아니, 나보다 더 혼자였다.

내겐 도희와 태천이가 있었지만, 그녀는 완연히 혼자였다.

혼자서 한국 100위 안에 드는 대장간을 일궈 낸 거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거다.

내 인생은 혼자인 시간보다 도희와 태천이와 함께해 온 시간이 훨씬 많다.

이 대리가 보내온 크라우드에 관한 정보도 읽었다.

정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 수준으로는 크라우드를 알아낼 수 없었어요.]

[뒷세계에서 활동하는 길드인 건 확실한데, 정보가 다 차단된 느낌이었습니다.]

역시 무리였나?

이 대리의 정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일개 길드원에 불과했다.

뒷세계 길드에 관한 정보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나 보다.

신경 쓰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이 대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급한 일이라면 좀 무리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무리해 보겠다, 그 말이 뭘 뜻하는지 안다.

제 수준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알아내고자 여기저기 건드려 보겠다는 거다.

그랬다간 뒷세계 길드인 크라우드의 시선을 잡아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 대리가 아니어도 정보를 구할 곳은 또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째 평소랑 다르게 기가 팍 죽은 것 같다.

나는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애초에 이럴 것 같아서 우찬성 회장에게도 정보를 부탁했었다.

이 대리는 임시방편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탁해 봤던 거다.

우 회장에게는 무언가 알아내면 오늘 자정까지 연락 달라고 했으니, 이제 슬슬 연락 올 때가 됐다.

부르르, 손에 쥔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우찬성 회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네, 백도운입니다."

- 음? 지온인 척은 그만둔 건가?

"…정보나 말씀해 주십시오."

- 흠. 그게 말이야….

불안하게 왜 말끝을 흐려?

설마,

"뭡니까? 알아낸 게 없는 겁니까?"

-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자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크라우드는 테러 단체거든.

"테러 단체?"

- 그래. 그것도 A등급에 속하는. 음지에서 무지막지한 짓을 많이도 벌였더군.

A등급이라면 세계적으로 테러를 저지르고 다녔다는 소리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놈들이 왜 유재이를 찾아온 걸까.

그런 놈들이라면 그녀보다 뛰어나면서 말도 잘 듣는 대장장이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녀여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 그런 놈들이다 보니 추적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네.

"못 찾은 겁니까?"

- 아니, 아까부터 왜 이렇게 부정적인 건가?

"네? 제가 그랬습니까?"

- …운이 좋았네. 어젯밤 마포구에서 대장장이를 끌고 가는 모습이 포착됐더군. 아지트로 보이는 곳을 한 군데 찾아냈네.

유재이다.

마포구 대장장이라면, 그녀가 분명하다.

근데 왜 끌고 가는 모습이람?

알아서 따라갔던 거 아닌가?

- 아지트 장소는 인편으로 보냈네.

"네? 아뇨, 그럴 시간 없습니다. 그냥 문자로-"

- 그럼 수고하게. 대장장이에겐 안부 전해 주고.

그러면서 우 회장은 전화를 끊었다.

아니, 이 양반은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정보를 인편으로 보내겠다고 해?

그냥 문자로 보내면 간단할 것을.

"쯧…."

혀를 차며 시간을 확인했다.

방금 화면 속 11:59라는 숫자가 12:00으로 바뀌었다.

자정이 됐으나 유재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의뢰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스마트폰을 갑옷 속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아르카를 등에 찼다.

그때, 미닫이문이 드르륵 하며 열렸다.

"지온, 오래 기다렸-"

"...."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우연후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인편으로 보내겠다더니, 아들이었나. 쓸데없이.

"문자로 보내도 됐는데요."

"그날 병원에서 제법 오래 기다렸다는 거 압니까? 도운 씨."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가면을 쓰지 않고 만나는 건 처음이었던가.

"당신을 돕지 못하면 우리가 마음이 편치 못해서요."

"…당신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나를 이용하지 마십시오."

"네. 다음부터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일부러 기분이 나쁜 티를 팍팍 내는데도, 우연후는 제 잘못을 인정하며 바로 사과를 해왔다.

당신을 도우려고 찾아온 건데 왜 성질을 내느냐고 따지는 게 아니라 진실한 사과를 해온 것이다.

정말이지, 이상한 방법으로 사람 미치게 하는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후우…. 그래서? 어디입니까?"

"따라오십시오. 안내하겠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함께 갈 요량으로 이곳에 온 거였다.

우 회장도 그리할 생각으로 일부러 아들을 보낸 걸 테고.

뭐, 마음 편하게 잘됐다고 생각하자.

이제 A등급 테러 단체의 아지트를 쳐들어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하나보단 둘이 낫겠지.

나는 우연후와 함께 대장간을 나갔다.

대장간 앞에는 그가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세단이 한 대 서 있었다.

"…차 좋습니다?"

"'YH-603'. 올해 우리 회사에서 비밀리에 만든 차입니다."

분위기를 환기할 겸 대장간 앞에 선 차를 보고 한마디 건넸다.

우연후가 빙긋 웃으며 자랑을 해왔다.

자랑을 간단하게 줄이자면 이렇다.

최신식 마나 엔진을 달아 무소음으로 주행할 수 있고, 미노타우로스 가죽 시트로 주행자의 안락함을 챙겼으며, 와이번 뼈 프레임으로 A등급 공격 마법에도 버틸 수 있었다.

차 디자인 면에서는 현대의 도시적인 이미지와 헌터의 야성적인 매력을 섞었다는데, 뭔 소린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보자마자 "차 좋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세련돼 보이기는 했다.

우연후가 주머니에서 키 지갑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당신 겁니다. 도운 씨."

"네? 이게요?"

"채연이가 구해 줘서 고맙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필요 없어, 이 양반아.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거부하기엔 너무나 매력적인 차였다.

내 손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키 지갑을 쥐어 들고 있었다.

***

크라우드의 아지트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무갑산 중턱에 있었다.

창을 어깨에 둘러멘 우연후가 '마나 화상 카메라'를 꺼내 아지트를 들여다봤다.

마나 화상 카메라는 렌즈 속에 담긴 마나의 흐름을 알아볼 수 있는 카메라다.

사람의 마나를 확인하는 데 주로 쓰여 군에서 많이 쓰는 물건이다.

마나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마나의 최대량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기엔 제격이었다.

또 어떤 장소에 결계나 실드 마법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기에도 용이했다.

"건물에 실드가 쳐져 있고, 열댓 명정도 되는군요."

"예상했던 숫자네요."

"그렇습니까?"

저번에 재이네 대장간에 찾아왔던 놈들의 수가 딱 그 정도였다.

그는 내게 카메라를 건넸다.

나도 놈들이 정확히 어디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것이었다.

확인하니 놈들은 2층에 3명, 1층에 10명, 지하 1층에 3명이 있었다.

아마도 지하 1층에서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게 유재이 같다.

마나 수갑을 찬 듯 마나의 흐름이 손목 부분에서 끊어지고 있었다.

끌고 갔다더니. 마나 수갑을 차고 있어서 그렇게 보였나 보다.

카메라를 건네자 그가 물어왔다.

"어떻게 할까요?"

"마음 같아선 아지트 통째로 공격하고 싶은데요."

지금 중요한 건 내 기분 따위가 아니다.

유재이를 안전하게 구해 내느냐 마느냐다.

통째로 공격하려고 세계수 휘두르기를 썼다가는 그녀가 휘말릴 수도 있었다.

"역시 유재이만 빼내 오는 게 낫겠습니다."

문제는 결계다.

결계가 쳐져 있어 무턱대고 들어갔다간 바로 들킬 거다.

A등급 헌터인 우연후라면 검기를 써서 실드만 베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실드를 발동한 사람이 알아차리게 된다.

우연후가 씩 웃으며 마법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 따라오길 잘한 것 같군요."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럴 걸 대비하고 '베리어 우회기'를 챙겨왔죠."

"…대체 그걸 왜 가지고 있는 겁니까?"

"사실 제가 아니라 민주가 챙긴 겁니다.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가져가라고 했는데, 정말 도움이 되네요."

베리어 우회기는 이름 그대로 베리어를 우회하는 기계다.

결계나 실드 등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는 식으로.

12시간 충전으로 1분밖에 작동하지 않고, 높은 등급의 것들에는 소용이 없어 비효율의 극치에 달한다.

그래도 소수의 인원이 해제할 수 없는 실드에 구멍을 내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용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적당한 물건이었다.

"바로 가죠."

우린 지하 1층의 유재이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우회기의 전원을 누르자 아주 조용히 작동을 시작하더니 곧 한 사람이 걸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을 만들어 냈다.

통로를 통해 바로 건물로 들어갔다.

어두운 건물 내부를 빠르게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먼저 내려갔던 우연후가 멈춰 섰다.

"이런. 일자 통로군요."

그의 말마따나 지하는 하나의 통로였다.

통로 끝에 2명의 흰색 가면이 철로 된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저 2명을 동시에 쓰러뜨려야 잠입한 것을 위의 놈들에게 들키지 않을 터였다.

"연후 씨, 투창은 좀 합니까?"

"네, 왼쪽에 있는 놈을 맡겠습니다."

자신만만한 게 보기 좋다.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롱소드를 뽑아 든다.

등에 차고 있는 아르카는 통로가 좁아 휘두를 수가 없다.

약지를 접자 우연후가 창을 던질 준비를 하고, 중지를 접자 튀어 나가고자 무릎을 굽힌다.

마지막으로 펼치고 있던 검지를 접자 그가 튀어 나간다.

그 모습을 보며 스킬을 썼다.

"그림자 밟기."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3개의 구멍만 보인다.

바로 앞에 있는 구멍은 우연후의 그림자다.

멀리 떨어진 2개의 구멍 중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구멍 위에 서자 시야가 밝아지더니 머리에 긴 창이 박힌 흰색 가면이 보인다.

다른 흰색 가면이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침-!"

등에서부터 가슴이 꿰뚫려 죽는다.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한 녀석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연후가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스킬이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칼자루로 자물쇠를 내리쳐 부수고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캉!

귓가에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유재이가 주먹으로 나를 때렸다.

정확히는 나무껍질로 변한 내 볼을.

아마도 나를 크라우드 녀석이라고 착각한 것 같다.

"아, 아파…."

그녀는 고통을 날려 보내고 싶은 듯 손을 털어 댔다.

아픈 거로 끝나서 다행이다.

어떤 놈은 자기 손이 터져 나갔었다.

"우으, 금방 왔네?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능력 좋은 지인이 있어서."

뒤에 있는 우연후를 가리켰다.

그녀는 크라우드의 머리에서 창을 빼내는 그에게 고개만 까닥여 인사했다.

"아버지는?"

"…후회하는 중이었어."

역시 그녀를 꾀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나.

유재이는 함정인 걸 알면서도 따라온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 쓴웃음을 흘렸다.

위로해 주고 싶긴 하지만, 여기서 도망치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 도망부터 치자."

"잠시만.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

도망치기 위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끌었다.

그녀가 다른 손으로 내 손목을 붙들며 나를 멈춰 세웠다.

"뭔데?"

"혹시 아르카에 마나 주입해 봤어?"

"아니? 안 해 봤는데."

내 대답을 듣고는 유재이가 씩 웃었다.

뭐지, 이 불안한 웃음은?

"지금 넣을 수 있는 만큼 넣어 봐."

"지금?"

"응, 지금."

"…흠. 좋아, 알았어."

길게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지금 상황에서 아무 이유 없이 시켰을 리 없었다.

롱소드를 집어넣고, 등에 찬 아르카를 빼낸다.

처음 쥐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아르카는 무척 가벼워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었다.

롱소드를 든 정도의 무게다.

빼든 아르카를 45도 각도로 기울인다.

세로로 세우면 칼끝이 천장에 닿았다.

그런 후 그녀가 바랐던 대로 마나를 넣을 수 있는 만큼 주입했다.

칼날에 그려져 있던 무늬들이 푸르게 발광하다 마나를 뿜어냈다.

그러더니,

"그 검의 이름은 아르보르 카풀루스. 직역하면, '나무로 만든 칼자루'라는 뜻이야."

검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마나가 거대한 칼날이 되었다.

그 칼날은 천장을 뚫고 들어갔으면서도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재이의 말에 따르면, 이 내 키만 한 대검은 대검이 아니었다.

"세상에 170cm짜리 칼자루가 어디 있어!"

제32화

"세상에 170cm짜리 칼자루가 어디 있어!"

천장을 뚫고 들어간 칼날을 보며 소리쳤다.

그리 소리치면서도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살짝 움직일 때마다 천장에 금이 갔다.

그 금을 통해서 위쪽이 소란스러워진 것이 들렸다.

그럴 거다. 이 푸른 칼날은 1층을 지나쳐 2층에도 닿아 있을 테니까.

유재이는 히히 웃으며 검지와 중지를 펼쳐 보였다.

뭘 잘했다고 V야, V는.

누군 이러다가 아지트 무너뜨리는 거 아닌가 싶어 무서운데.

"설마, 마나를 정제하는 기술을…! 당신은 대체…."

"유재이.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대장장이지."

매우 놀란 듯 그녀와 아르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우연후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는 정말로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대장장이였다.

아는 대장장이가 그녀 말고는 전혀 없거든.

"말은 잘해요. 야장술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주제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손목의 수갑을 아르카에 갖다 댔다.

마나 수갑은 푸른 칼날에 닿자 베여서는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왼쪽 오른쪽 수갑을 모두 베어 낸 그녀는 우연후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오해하지 마요. 마나 정제한 거 아니니까."

"네? 그럼 칼날 모양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겁니까?"

"유지하는 거 아니에요. 마나를 무식하게 계속 내뿜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나니, 마나 칼날 끝부분에서 마나가 흩어져가는 게 보인다.

"그게 가능합니까?"

"이 사람이 가져온 재료들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 만큼 무지막지했어요."

"대체 무슨 재료들이었기에…."

무슨 재료들이었냐고?

전대 세계수의 나뭇가지, 전대 세계수의 수액, 왓쳐의 눈알.

유재이의 말대로 확실히 무지막지한 재료들이었다.

아마 경매장에 올리면 이걸 사기 위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지 않을까?

조금 급이 떨어져 보이는 왓쳐의 눈알도 A등급 재료로 현대 사회 구석구석에서 쓰여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재료다.

내가 그렇게 두드려 대는 스마트폰 패널에도 들어가 있었다.

"참, 당신 그거 오래 유지 못 할 거야."

"응?"

"1분에 소모하는 마나만 5만 정도거든. 보통 A등급 헌터라면 꾸준히 마나를 주입했을 경우 3~5분 정도 유지할걸?"

A등급 헌터의 마나 보유량은 10만~100만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A등급 헌터라도 2분에서 10분밖에 유지하지 못한다.

마나 소모율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긴, 그러니까 스스로 "마나를 무식하게 내뿜고 있는 거"라고 표현했겠지.

"그런 무지막지한 걸 지금 쓰게 한 거야?"

"당신 마나가 몇이지?"

"15만."

원래는 10만이다.

세계수의 수액이 들어간 아르카를 쥐고 있어 5만이 늘었다.

1분에 5만씩 소모한다고 했으니, 3분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내 마나 회복 속도를 계산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바라봤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그래, 들어줄게."

"아직 말도 안 했는데?"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굳이 크라우드 놈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 마나를 집어넣어 거대한 칼날을 만들게 했다.

왜?

거대한 칼날을 뿜어내는 아르카로 어떤 짓을 해 줬으면 하니까.

그렇다면 유재이가 바라는 그 어떤 짓은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다.

"이런 거잖아."

비스듬히 기울인 아르카로 천장을 마구 찔러 댔다.

층간 소음을 일으키는 위층 집을 향해 복수의 창질을 하듯이 거세게.

천장 위에서 보이지 않는 흰색 가면들의 비명과 기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소리가 듣다 보니 어쩐지 즐거워져서 장소를 옮겨가며 아르카를 찔러 댔다.

그 꼴을 보며 유재이는 깔깔 웃었다.

예상대로 원했던 게 이런 것인 듯했다.

그 자리에서만 했다간 무너질 것 같아서 통로로 나왔을 때, 계단에서 흰색 가면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천장을 마구 찔러대던 아르카를 내려 놈들에게로 겨눴다.

"히익! 이게 뭐야?"

"칼? 칼이었다고?"

계단을 내려온 흰색 가면들은 당황스러워하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내 얼굴과 아르카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문양이 그려진 흰색 가면이 걸어 나왔다.

재이네 대장간에서 한 번 마주쳤던 리더 가면이었다.

"웬일로 잠자코 따라오나 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건가, 유재이."

"말했잖아. 너희들을 믿을 수가 없다구."

"흥, 발칙한 년."

[세계수 새싹이 혐오스러운 시선을 느꼈습니다.]

[새싹은 관리인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혐오스러운 시선?

그 말이 내 신경을 건드렸다.

새싹이가 혐오스러움을 느꼈다고 전해 온 건 김정철 때뿐이었다.

그 김정철은 마족의 권속이었고.

그렇다면 리더 가면도 김정철처럼 마족의 권속일지도 모르겠다.

"우연후. 설마 일대 그룹 도련님이 이곳에 올 줄은 몰랐는데."

"...."

우연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옆에 서서 창끝으로 바닥을 거칠게 찍었다.

흰색 가면들을 노려보는 그 모습에서 나와 함께 싸우겠다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리더 가면은 이미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시선을 돌린 채 나만을 쳐다봤다.

그날 내가 서지혁이라고 그를 속인 걸 알아차린 듯하다.

"백도운…!"

리더 가면이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사납게 내 이름을 불렀다.

자신을 속인 놈이 눈앞에 있으니 눈꼴 시린 거겠지.

어떻게 해야 저 새끼를 더 빡치게 할 수 있을까.

"영 바보는 아닌가 봐? 아직도 서지혁이라고 여길 줄 알았더니."

"푸훕."

"이, 빌어먹을 연놈들…!"

내 비꼼에 리더 가면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도 감정을 완전히 토해 내지는 않았다.

꼴에 한 그룹을 이끄는 간부답게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꼬운걸? 조금 더 신경을 거슬리게 해 볼까?

"마족의 권속이 뭘 노리고 유재이를 납치했지?"

"응? 마족?"

"권속?"

내 말에 유재이와 우연후가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둘뿐만이 아니라 다른 흰색 가면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모습이다.

자기들끼리 '무슨 소린지 알겠어?'라고 묻는 모습을 보면서, 리더 가면은 부하들에게도 제 정체를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크라우드는 마족의 권속이 만든 조직일까.

마족의 권속이 숨어 들어가 있던 걸까.

리더 가면이 팔을 들며 명령을 내렸다.

"…유재이와 백도운은 생포해라. 우연후는 죽여도 좋다."

그날처럼 팔에서부터 암기가 튀어나왔다.

피했다간 내 뒤에 있는 유재이가 맞을 게 뻔해 그냥 내가 맞았다.

어차피 암기는 나무껍질 있어서 소용이 없었다.

설령 내가 모르는 꼼수로 나무껍질 꿰뚫는다고 해도 자연히 회복될 터였다.

깡! 데구르르….

마나 실드에 가로막힌 암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흰색 가면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푸른 마나로 거대한 칼날을 만든 아르카의 범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바보들."

아르카를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휘둘렀다.

통로가 좁은 탓에 흰색 가면들은 아르카를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아니, 얻어맞았다는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다.

흰색 가면들은 벽과 벽 사이에 끼어 마치 샌드위치 속 햄 같은 모습이 되었으니까.

"왜 나만 죽이라는 겁니까? 억울하게."

"그야, 유재이는 필요하고. 나는 저놈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정체…. 마족의 권속 말입니까? 마족이 대체 뭐기에요?"

A등급 헌터인 우연후도 모르는데 나라고 알 리가 있겠는가?

마족이라는 단어는 판타지 게임이나 소설에서만 읽었었다.

현실에서도 존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마족은 알려진 정보가 전혀 없는 존재였다.

알고 있는 정보도 새싹이가 가르쳐 줘서 알고 있는 것이었다.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서 부하가 된 인간, 입니다. 그 이상은 나도 잘 모릅니다."

"영혼을 팔아? 고전적이네."

"그렇군요. 여기서 나가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우리는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 흰색 가면들을 쓰러뜨렸다.

아르카를 양옆으로 휘둘러 퍽퍽 짓뭉개고, 그걸 피해 접근해 온 놈들은 우연후가 창으로 급소를 찔러 단번에 마무리했다.

차라리 피하지 말고 아르카에 뭉개진 게 나았겠다.

실신은 해도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

"빌어먹을…!"

마지막 흰색 가면이 원통하다는 듯 바닥에 쓰러졌다.

뭐가 그리 원통할까.

다가오지도 못하고 전 인원이 정리돼 놓고선.

우연후를 쳐다보며 물었다.

"좀, 이상한데요?"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흰색 가면들은 너무나도 약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A등급 테러 조직의 일원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크라우드가 아니라 크라우드인 척하는 놈들인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또 이상한 점은 리더 가면이 싸움에 합세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저놈은 재이네 대장간에서 나를 서지혁으로 착각했을 때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다고 말했었다.

그런 놈이 부하들과 함께 싸우지 않았다.

어째서?

"…아."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마족의 권속이라는 소리를 들은 부하들을 버린 거다.

"백도운, 너 때문이다. 이놈들이 죽는 건!"

그러더니 리더 가면은 기절한 부하들에게 암기를 쏘아 댔다.

흰색 가면들의 목에 암기가 꽂히자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축 늘어졌다.

저번에 맞았을 땐 몰랐는데 독이 발라져 있었던 모양이다.

우연후가 창을 리더 가면에게 겨눴다.

"개소리! 네놈이 저지른 죄를 도운 씨에게 넘기지 마라!"

그러게나 말이다.

목숨을 거둔 건 지가 한 짓인데 왜 내 탓을 할까.

리더 가면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해라, 너희는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

"도망치지 못하는 건 네놈이다. 나와 도운 씨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이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놈은…."

리더 가면은 우연후를 비웃었다.

눈을 찌푸리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백도운!"

"응?"

"네놈이라면 알 테지. 마족의 권속이 얼마나 강한지! 상대를 짓뭉개고 찢어발기는 그 압도적인 힘을!"

"아, 그거? 별거 없던데?"

"뭐?"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을까.

놈은 몸에 찬물이 뿌려진 듯 싸늘하게 식었다.

놈을 비웃으며 오른 검지를 들어 보였다.

"정말이야. 손가락 하나로 가뿐하게 쥐어 패 줬어."

오른손을 들어 보이자 우연후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내 오른손이 얼마나 이상한지 아는 건 그뿐이었다.

그는 홍유릉 게이트에서 검지로 스켈레톤들과 싸우는 모습을 봤고, 우담화나 설지초를 손쉽게 뽑아내는 것도 봤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유재이와 리더 가면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저었고, 놈은 자신을 모욕한다고 여겨 신경질을 부렸다.

"이 빌어먹을 자식! 나를 능멸해? 좋아, 네놈은 직접 내 두 손으로 찢어발겨 주마!"

모멸감을 느끼며 소리친 리더 가면의 몸이 비틀리기 시작한다.

비틀리는 몸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부하들도 다 죽었으니 마음 놓고 변신을 시작한 거다.

김정철 때야 당황해서 가만히 지켜봤지만, 지금은 무슨 현상인지 파악하고 있다.

변신 로봇 만화도 아니니 가만히 기다려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쿵…!

아르카를 휘두르려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다.

아르카로 천장을 쑤셔 댔었으니까.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한 거다.

"도운 씨, 일단 빠져나가야겠습니다!"

나와 그라면 건물이 무너져도 상관없다.

문제는 대장장이인 유재이다.

그녀는 무너진 건물에 깔려 죽을 거다.

"나한테 맡겨요."

대답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세계수 휘두르기를 쓴다.

한 번 두 번. 마나를 모을 때마다 마나가 검집처럼 거대한 칼날을 덮기 시작한다.

그 때문인지, 칼날 끝의 마나도 흩어지지 않고 유지된다.

거대한 칼날은 그런 식으로 더욱더 커졌다.

열 번의 마나를 모두 모은 후에야 칼날은 거대해지는 것을 멈춘다.

그렇게 거대해진 아르카를 휘둘렀다.

"...!"

밤하늘이 보였다.

제33화

별 하나 없는 밤하늘에 달만 휘영청 밝다.

입꼬리가 쳐진 듯 가로로 누운 달은 점점 위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달이 아니었다.

무너지는 건물 잔해를 없애기 위해 날린 세계수 휘두르기다.

누운 반달 형태로 하늘 높이 솟아올라 마치 달처럼 보인 거다.

"…딸꾹!"

옆에 서 있던 유재이가 그걸 보면서 딸꾹질을 했다.

우연후도 입을 헤 벌린 채 달구경을 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아지트는 형체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고, 날린 푸른 마나는 달처럼 떠올라 주변을 밝히다가 서서히 흩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너지는 잔해만 없애려 했던 것이 이런 일을 벌이게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어처구니없어 하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변신을 전부 끝낸 리더 가면도 두 눈을 휘둥그레 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벌인 짓을 믿을 수 없는 눈치다.

우리의 시선을 느낀 놈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아마 아르카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고 싶은 듯했다.

위력을 봤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행동이다.

나 같아도 뒤로 물러났을 거다.

"마족의 권속이라더니, 과연 그런 모습이군요."

"그래요? 내 눈엔 벌레처럼, 딸꾹, 보이는데."

그녀의 말마따나 리더 가면은 벌레가 인간으로 탈바꿈한 듯했다.

변신하는 동안 가면이 떨어져 드러난 얼굴은 더듬이와 이빨이 자라나 말 그대로 인간과 벌레의 얼굴이 섞여 징그러웠다.

등에도 김정철처럼 날개 한 쌍이 돋아나 있었지만, 형태가 조금 달랐다.

김정철의 것이 박쥐 날개 같았다면, 리더 가면의 날개는 벌레의 날개처럼 투명했다.

"백도운…. 네놈은 대체 정체가 뭐냐?"

그리 묻는 리더 가면의 목소리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압도적인 힘이 어쩌고저쩌고해 놓고선 전투 의지를 완전히 잃은 듯했다.

세계수 휘두르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유재이와 우연후가 저 녀석처럼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리라.

누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에는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니까.

"그냥 평범한 D급 헌터인데."

"네놈의 등급 따위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역겨울 정도로 정결한 마나! 그 마나를 대체 어떻게 얻은 거냐고 물은 것이다!"

역겹다?

말하는 걸 보니 내게서 세계수의 기운을 느낀 것 같다.

그런데 정결한 마나를 역겨워하는 게 웃기다.

저놈을 혐오스러워하는 새싹이, 그런 새싹이를 역겨워하는 저놈.

아마도 세계수와 마족은 극 상성의 관계인 모양이다.

"어떻게 얻었냐고?"

"그래! 그런 마나를 그냥 가질 수는 없다! 대체 어떻게-"

"게임으로?"

"뭣?"

"어떻게 얻었냐며, 게임하다가 얻었다니까?"

당황하는 녀석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내 옆에 선 유재이와 우연후도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사실을 말했지만, 그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내 말과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 도희와 태천이조차 스마트폰 속 새싹이를 보여 주기 전까진 나를 미쳤다고 생각해 정신 병원을 알아보려고 했었다.

"너도 1년 정도 꾸준히 해 볼래? 제법 재미있어. 성취감도 들고."

"이, 이 빌어먹을 새끼! 나를 놀려?"

"물어봐서 가르쳐줬는데 왜 화를 내? 너 놀린 거 아니야. 정말이라고."

"기고만장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아, 새끼. 못 믿을 거면 왜 물어본 거야?"

"이익!"

리더 가면은 온몸에서 까만 연기를 뿜었다.

까만 연기는 그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녹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지트의 콘크리트와 철골조차 녹아내렸다.

독이 분명했다.

나는 스킬 때문에 독에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지만, 유재이는 아니었다.

"위로 올라가!"

"아, 알았어!"

"유재이를 부탁합니다!"

"네!"

그리 소리치면서 리더 가면을 향해 달려 나갔다.

독을 뿜어내는 놈을 당장 없애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판단했다.

문제는 놈도 그걸 예상했다는 거다.

놈은 아르카가 몸에 닿기 직전 투명한 날개로 몸을 띄워 하늘 위로 도망쳤다.

붕붕 소릴 내며 날아다니는 꼴이 꼭 거대한 모기 같았다.

잠 못 들던 여름밤이 떠올라 열이 확 뻗쳤다.

"내려와, 이 모기 새끼야!"

"모기가 아니라 지네다!"

"지네 같은 소리 하네. 네가 어딜 봐서 지네야!"

"이 붉은 더듬이를 봐라!"

"더듬이 붉다고 지네냐? 정 지네라고 하고 싶으면 그 날개 떼고 내려와!"

지네는 무슨.

푸른 칼날을 뿜어낸 아르카를 피해 내는 모습은 영락없이 모기였다.

제 몸집에 몇 배나 되는 파리채를 피해 내는 짜증스러운 모기.

"하하하! 그렇게 여유 부려도 되겠나, 백도운!"

"뭐, 인마? 그 위에서 도망만 치는 주제에 말은 잘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저걸 봐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유재이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우연후는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며 당황했다.

까만 독연은 지하층에만 퍼져 있다.

지상에 있는 그들에겐 독연이 닿지 않았는데 그녀는 괴로워했다.

그렇다는 건….

"보이지 않는 독인가."

"그렇다! 보이는 독을 뿌리면, 보이지 않는 독은 잘 신경 쓰지 않거든!"

머리 좀 썼는걸.

나도 눈에 보이는 까만 연기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독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허억…!"

옆에서 유재이를 걱정하고 있던 우연후가 몸을 비틀거렸다.

그녀는 그렇다 쳐도, 그가 독에 당할 줄은 몰랐다.

독기와 냉기만으로 A+등급을 책정받은 홍유릉 게이트에서도 멀쩡했던 그였다.

놈의 독이 홍유릉의 독기보다 세다는 건가.

"내 독은 체내에 쌓이면 쌓일수록 심해지지. A등급 헌터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네놈도 곧 저렇게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

"자, 절망에 빠져라! 하하, 으하하!"

그러면서 녀석은 크게 웃어댔다.

저렇게 웃다간 빨간 더듬이가 떨어져 나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후우, 저놈은 어쩜 저렇게 한 여름밤의 모기보다 짜증 날 수 있을까.

독에 당한 그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놈을 해치워야 할 것 같다.

세계수 휘두르기를 쓰면서 리더 가면을 올려다봤다.

녀석은 아직도 경망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방심하고 있다가 죽어 버려라.

"세계수 휘두르기…!"

"으하하, 아악!"

푸른 초승달이 하늘 위로 솟아올랐으나 안타깝게도 리더 가면의 몸을 베어 내지 못했다.

녀석은 방심한 채로 웃다가 내가 아르카를 휘두르는 것을 보곤 옆으로 피했다.

거대한 칼날은 아지트를 통째로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했지만, 거대하다 보니 피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재수 없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 버릴 수는 있었다.

"대체 어떻게? 백도운, 대체 어떻게 멀쩡한 거냐!"

"독에 면역이라서?"

"뭣?"

"네 독이 아무리 강해 봤자 소용없다고. 독 자체가 나한테 안 통하거든."

"...."

"세계수 휘두르기!"

"히익…!"

당황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놈에게 다시 한번 세계수 휘두르기를 썼다.

사고가 정지한 모습이라 통할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녀석은 손쉽게 피해 냈다.

기겁하는 꼴을 보니 한 번 맞으면 골로 가는 건 확실하다.

모기처럼 피해 대서 도저히 맞힐 수가 없었지만.

"크윽…!"

뒤에서부터 우연후가 괴로워하며 무릎을 털썩 꿇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보고는 리더 가면이 다시 기가 살아 지껄여 댔다.

"그래, 너는 독에 면역이라도 저놈은 어떡할 거지? 저렇게 뒀다간 곧 죽을 텐데."

저놈은? 저 연놈들이 아니라 저놈?

곧 죽을 거라는 말엔 유재이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지금 이런 순간에도 그녀를 살려서 데려갈 생각이다.

생각했던 대로 크라우드는 그녀가 꼭 필요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녀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다른 대장장이는 안 되고 그녀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연후를 살려 주마."

뜬금없는 말이 놈의 입에서 나왔다.

놈은 팔을 휘두르더니 지층에 깔린 독연을 한데 모았다.

독연은 곧 똬리를 튼 거대한 뱀 같은 모양이 되었다.

저놈 저거 끝까지 지네 같은 짓은 안 하네.

"대신 저년을 넘겨라."

"미친놈 지랄하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그리 말하고는 놈은 팔을 휘둘렀다.

거대한 뱀 형태가 된 독연이 꾸무럭꾸무럭 우연후를 향해 기어갔다.

입조심 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독연으로 그를 덮쳐 죽이겠다고 말하는 듯했다.

"우린 우리 서로를 죽일 수 없으니까."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저놈의 공격은 내게 전혀 통하지 않았고, 저놈은 내 공격을 전부 피할 수 있었으니까.

세계수 휘두르기는 강력했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놈을 맞히지 못하니 무용지물이다.

내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탓이다.

아무리 좋은 무기를 들고 아무리 강력한 공격 스킬을 지녔다고 해도, 그걸 써먹는 내 몸은 C급 헌터 수준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열매를 먹고 좋아진 덕분이었다.

원래는 D급 헌터였으니까.

이럴 때 돼지 목에 진주라는 말을 쓰는 거겠지.

"그러니 유재이만 넘기면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도운 씨! 저따위 말, 더 듣고 있을 겁니까?"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우연후는 씩 웃고 있었다.

그는 또렷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독연 때문에 괴로울 텐데도.

"나는 괜찮으니 이분을 구하십시오."

"웃, 웃기지… 하윽!"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자신이 죽겠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을 두고, 덤덤하게 타인의 생명을 선택한 것이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유재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둘 다 제 목숨이 아니라 옆 사람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하고 있었다.

자기 목숨 소중한 걸 모르는 바보 멍청이들이다.

"히, 나 이런 거 정말 약한데."

아르카를 어깨에 둘러메며 주입하던 마나를 멈췄다.

나무껍질도 껐다.

"...?"

그런 내 모습을 두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모기가 가만 쳐다봤다.

갑자기 무기를 거두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겠지.

그 시선을 받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세계수 소환."

병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든 마나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마나 고갈로 인한 현기증 때문에 몸을 비틀거렸다.

다행히 한 번 경험했던 일이라 쓰러지지는 않았다.

"끼, 끼에엑!"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와 현기증이 나는 와중에도 고개를 쳐들었다.

놈은 마치 가정용 살충제에 맞은 모기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붕붕거리며 왔다 갔다 했다.

지금이라면 아르카로도 벨 수 있었겠으나 모든 마나를 소모한 상태였다.

거대한 마나 칼날도 만들어낼 수 없었고 당연히 스킬도 쓸 수 없었다.

아르카를 던진다고 해서 맞출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어, 몸이 괜찮아졌어?"

"이 스킬은, 저번에 병원에서 썼던…."

둘은 독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내 머리 위에 자라났을 새싹이를.

설명을 요구하는 눈치였지만, 일일이 말해 줄 생각은 없어서 내 할 일이나 했다.

갑옷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을 실행했다.

내 머리 위에 있기 때문인지, 화면 속엔 새싹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우편함을 클릭했다.

우편함엔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이 담겨 있었다.

세계수의 에너지가 깃든 흙은 존재만으로 스켈레톤을 정화했었다.

세계수의 나뭇잎이라면 저놈의 독을 정화하는 부적으로 쓰일 수 있을 거다.

받기 버튼을 눌렀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세계수의 나뭇잎이 튀어나왔다.

"나뭇잎…?"

스마트폰 화면에서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 튀어나왔다.

나뭇가지라고 해놓고 통나무가 나온 전적이 있지 않은가.

이번에 나오는 나뭇잎은 파라솔처럼 거대한 나뭇잎일지도 모른다.

그리 예상한 대로 화면에서 나온 나뭇잎은 거대했다.

다만, 나뭇잎은 활엽수가 아니라,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Ver.침엽수)]

…침엽수였다.

제34화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Ver.침엽수)]

스마트폰에서 튀어나온 그것을 보고 있으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뭇잎은 막연하게 활엽수가 나올 줄 알았다.

침엽수가 나오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대 세계수는 극지방에서 살았던 걸까?

아니, 모든 나무의 정점인 세계수니까 사는 지역과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어느 때는 침엽수 버전, 또 어느 때는 활엽수 버전 등 마음대로 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선인장 형태가 되지는 않겠지만.

…안 그러겠지?

"나뭇잎? 저 거대한 나뭇잎이 대체 어디에서?"

"그보다 머리 위의 새싹은 뭐예요? 지금 저 새싹이 독연을 전부 없애 버린 거예요?"

"네, 아마 그럴 겁니다. 도운 씨 스킬이라더군요."

"저게 스킬이라고요?"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우연후와 유재이의 대화가 아득해진 정신을 다시 붙잡아 주었다.

마냥 여유롭게 나뭇잎을 살펴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 리더 가면 놈이 하늘 위에 있었으니까.

왼손을 뻗어 스마트폰 위에 뜬 나뭇잎을 집어 든다.

세계수의 기운이 내 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한 대로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마치 부적처럼 저놈의 독을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바로 뒤를 돌았다.

우연후는 나와 손의 나뭇잎을, 유재이는 나와 머리의 새싹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

머리에 새싹을 단 채 거대한 나뭇잎을 들고 있는 남자.

제삼자의 시점에서 내 모습을 상상했더니, 도저히 정상인이라고 할 수 있는 꼴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나 자신도 자꾸만 눈이 나뭇잎에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고슴도치 가시처럼 무수히 많이 달린 잎들은 한 가닥씩 뽑아서 창처럼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우연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창이랑 길이랑 두께도 비슷했고.

"도운 씨, 왜 그러십니까?"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라서요."

"네?"

되묻는 그를 무시한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놈은 머리 위에 새싹이가 소환돼 있어선지 여전히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붕붕 휘저었는데, 그럴 때마다 몸이 허공에서 왔다 갔다 했다.

어떻게 봐도 가정용 살충제에 맞은 모기 같은 모습이었다.

지네는 무슨. 모기 맞잖아.

"으아! 이 빌어먹을 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이, 이 역겨운 냄새는 대체 뭐란 말이냐!"

꼬락서니를 보니 맞힐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자신감이 차오르자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뭇잎에서 잎 하나를 떼었다.

손에 쥐어진 기다란 이파리는 단단하면서도 탄력감이 느껴져 정말 창을 손에 쥔 듯했다.

통나무 형태의 나뭇가지가 그 자체로 완벽한 무기였으니, 이 나뭇잎도 그 자체로 완벽한 무기가 되지 않을까.

"가만히 좀, 있어라!"

몸을 오른쪽으로 당기고 이파리를 투창했다.

투웅!

이파리가 내 손을 떠나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때 마침 모기 녀석이 정신을 차리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정수리 위의 새싹이가 사라져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거다.

"이건 또 무슨 장난질…!"

녀석은 소리를 지르면서 이파리를 쳐내려 팔을 휘둘렀다.

퍼억!

"…뭣?"

쳐내진 건 이파리가 아니라 녀석의 팔이었다.

이파리는 녀석의 팔을 아주 손쉽게 꿰뚫었다.

팔을 꿰뚫는 나뭇잎이라….

공격이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앞으로 할 일은 간단했다.

이파리 따위에 팔이 꿰뚫려 당황하는 녀석에게 이파리들을 열심히 던지는 것이었다.

"잠, 이게 무슨, 그만…!"

한 발, 두 발.

이파리가 몸에 꽂힐 때마다 녀석은 내게 멈추라고 소리쳤다.

사정해도 모자랄 판에 윽박지르면 내가 퍽도 멈춰 주겠다.

녀석은 연달아 던진 이파리들을 피하지 못했다.

"끄아악…!"

몸에 이파리들이 꽂힌 녀석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꼴을 보니 한 여름밤 잠들지 못하게 한 모기들을 전부 잡은 듯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속이 다 시원하다.

녀석은 나뭇잎이 몸에 다섯 발이나 꽂혔는데도 아직 죽지 않았다.

몸부림을 치면서 내게 소리쳤다.

"으으…. 크라우드가, 우리가 네놈을 쫓을 것이다!"

"그래,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대충 중얼거리면서 놈에게로 걸어갔다.

놈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연신 "곱게 죽지 못할 것"이라느니 "내 동료가 꼭 복수해 줄 것"이라느니 지껄여 댔다.

검은 피를 콸콸 흘리고 있어 곧 죽을 것은 자기였는데도 입은 살았다.

"그분의 뜻을 받드는 우리는 영원한…!"

그렇게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고 녀석은 두 눈에 빛을 잃었다.

무슨 원한이 그리 강한지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었다.

"어휴, 징글징글한 놈."

김정철 때처럼 시체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변태한 모습으로 죽었다면 정부나 협회를 찾아가 마족의 권속이라는 존재를 확인시켜 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

어딜 봐도 인간의 시체였으므로 들고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부한다면 다른 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 상태로는 갖고 가 봐야 살인의 증거만 될 거다.

[마족의 권속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2/10명)]

[현재 완료 보상 –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

이번 퀘스트는 도중에 완료할 수 있는 형태인 모양이다.

2명을 쓰러뜨려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또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이었다.

"또 침엽수 버전이 나오려나?"

짧게 중얼거린 후 보상을 받지 않고 메시지창을 껐다.

녀석들을 잡으면 잡을수록 보상이 좋아진다.

더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을 때 퀘스트를 완료해야겠다.

그리 생각을 정리하면서 놈의 몸에 꽂힌 이파리를 뽑아냈다.

"당신 진짜 정체가 뭐야?"

이파리를 뽑아낸 후 놈의 시체를 뒤지는 내게 유재이가 다가오며 물었다.

세계수 관리인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어서 들리지 않는 척 주머니를 뒤졌다.

그녀는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안 들리는 척하지 말지?"

그러면서 그녀는 나를 쳐다봤다.

살짝 기운 목선을 따라 머리칼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하하…."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하지도 말고."

유재이는 그리 말하면서도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내 의도를 파악하고 넘어가 주기로 한 거다.

그녀는 나처럼 시체를 뒤졌다.

내가 아직 뒤지지 않았던 반대쪽 주머니에서 지갑을 하나 찾아 꺼냈다.

"테러 단체라면서 지갑을 갖고 다니네? 어, 신분증도 있다."

"위조 신분증이겠지."

"그래도 한 번 살펴볼까요."

우리 맞은편에 털썩 앉은 우연후가 손을 내민다.

그녀는 바로 신분증과 지갑을 건넸고, 그는 건네받은 신분증을 들여다봤다.

신분증을 살피던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짠데요?"

"엥, 그게 왜 진짭니까?"

그는 지갑에서 헌터 자격증을 꺼내 확인했다.

"이것도 진짜네요."

"무슨 테러 조직 간부가 진짜 신분증을 갖고 다녀?"

"자만. 혹은 오만이겠죠."

"얘네 정말 바보 아니야?"

"그쪽은 그걸 어떻게 알아봤어요?"

"아…. 얼마 전 어떤 분의 부탁으로 위조 자격증을 만들었거든요. 그때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배웠죠."

그리 말하면서 우연후는 나를 쳐다봤다.

시선을 보고 어떤 분이 누굴 지칭하는지 알아차린 그녀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위조 자격증을 만든 이유와 사용 용도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아마 어디에 썼는지 알기 때문인 듯했다.

D급 헌터가 A등급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사냥해 재료를 구해 왔으니 어떻게 썼을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우연후가 내게 신분증과 자격증을 내밀며 말했다.

"이름은 용두식. B등급 헌터군요."

"B급?"

B급 헌터가 A급 헌터를 제압할 정도의 강력한 독을 뿜어냈다고?

쉽게 믿을 수가 없는 말이어서 건네받은 헌터 자격증을 살폈다.

자격증에는 정말 'B등급 헌터'라고 쓰여 있었다.

투툭….

손가락에 힘이 빠져 쥐고 있던 신분증과 자격증을 떨어뜨렸다.

놈의 독이 그제야 내게 통한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직감적으로 떠오른 것 때문이었다.

"설마, 말도 안 돼…?"

C급 헌터인 김정철은 A급 헌터의 전유물인 검기를 썼다.

흉내를 내는 정도였으니 사실 B급 헌터 수준이었을 테지.

변태하고 나서는 A급 헌터 수준이었을 거고.

용두식도 마찬가지다.

B급 헌터가 변태하고 난 후에는 A급 헌터를 웃도는 힘을 보였다.

그렇다는 건, 하나의 사실로 귀결된다.

최소한 한 단계 위의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도운 씨?"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럼, A급 헌터 수준의 권속이 변태하면 어떻게 될까.

A+급이나 S급에 해당하는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지만, 내 직감은 그것이 옳다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쳐댔다.

S등급 헌터는 전 세계에 4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도 미국에 2명, 중국에 1명, 러시아에 1명.

그야말로 천외천의 존재인 것이다.

우리나라 헌터 랭킹 1위이자 S등급에 가장 근접한다는 평을 받는 '한진환'도 A+등급 헌터에 불과했다.

"…크라우드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습니다."

"왜요?"

"이놈들, 무슨 변신 로봇처럼 변신하면 강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A급 헌터 수준의 실력자가 변신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

"S급에… 해당하는 힘을 얻게 되는 건 아닐까요?"

직감한 것을 전하자 둘은 황당하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믿을 수가 없는 것일 테지.

이해한다.

나도 내가 말해 놓고선 믿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내 직감은 부정적일수록 대체로 잘 들어맞는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래, 그건 크라우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야!"

"S급에 해당하는 힘? 허무맹랑해도 너무 허무맹랑한 말입니다."

"좋아, 그놈들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놈들이라고 쳐. 그럼 왜 나를 바로 끌고 가지 않고 설득하려고 한 건데?"

그 말도 맞다.

그렇게 대단한 조직이 왜 그녀를 납치하지 않고 몇 번이고 찾아와서 설득하려고 했을까.

애초에 유재이여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이 녀석이 당신을 왜 데려왔는지 말한 거 있어?"

"있어. 무슨 열쇠를 만들라고 하던데."

"열쇠?"

"응. 그걸 만들면 아빠 얘기를 해 주겠다고 했어."

"무슨 열쇠인지는 들었습니까?"

"아뇨. 너흴 어떻게 믿냐고 따지니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며 바로 지하 방에 처박았거든요."

이건 좀 뜬금없는걸?

마족의 권속이 속해 있는 테러 단체였으니 무기 같은 걸 만들라고 할 줄 알았다.

살상력이 높고 쉽게 방어할 방법이 없는 아주 강력한 무기.

이를테면, 마나 폭탄 같은.

그런데 그런 무기가 아니라 겨우 열쇠를 제작해 주길 원했다?

대체 그 열쇠가 뭐기에?

"혹시 열쇠 제작도 같은 걸 보여 주진 않았습니까?"

열쇠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데 우연후가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제작해 달라는 것이 있으니 제작도를 갖고 있을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만들어 달라는 거면 그마저도 없겠지만.

유재이가 눈을 찌푸리며 생각에 빠졌다.

"제작도…. 아! 말할 때 뭔가를 흔들어 보이긴 했어요. 혹시 그건가?"

"그러면, 제작도가 있는데도 유재이 씨여야 하는 거군요."

"확인하지 않아서 그게 제작도가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시체엔 없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봤지만, 제작도 같은 건 없었다.

용두식의 시체에서 나온 거라곤 지갑뿐이다.

"그렇다면…."

우연후가 고개를 돌려 아지트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아지트는 온데간데없고 1층 벽만 드문드문 남아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제작도가 저곳에 있었다면, 분명 세계수 휘두르기에 휩쓸려 버렸을 터였다.

"...."

"...."

"음, 미안합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순수한 마음으로 사과했다.

제35화

어두운 방에는 지름 2미터짜리 원탁이 하나 놓여 있다.

원탁 주변에 푸르스름한 빛이 나더니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이어 그 옆으로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우후죽순 나타나 원탁을 둥글게 채웠다.

가장 먼저 나타난 사람이 두 손을 모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몇 초 후 생각의 정리가 끝난 듯 그가 말했다.

"'박쥐'와 '지네'가 죽었다."

원탁에 모인 이들은 얼굴의 절반이 가려져 있는데도 당황하는 것이 역력하게 보였다.

깍지를 낀 사람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당황한 이들을 대표해 의문을 표했다.

"어쩌다가 그리됐나?"

"박쥐는 개미굴에서 놀다가."

"그 멍청한 놈."

원탁에 앉은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욕을 내뱉었다.

"지네는 내가 맡긴 일을 하다가 실패했다."

"맡긴 일?"

"유재이를 데려오는 것."

그러자 그들은 동시에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번엔 놀다 죽은 게 아니었기 때문인지 욕을 내뱉은 이들은 없었다.

"또 백도희 그년입니까?"

두 목소리보다 젊은 목소리의 주인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손을 모은 사람은 고개를 가로젓고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아니, 백도희는 아니었다."

"뭐라? 백색 마녀에게 당한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화를 내시겠군요."

젊은 목소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변에 모인 이들이 야유하면서 부정적인 말을 한마디씩 내뱉었다.

"화? 그까짓 놈들 죽은 게 뭐 대수라고."

"그래, 맞아. 그놈들은 우리 중 최약체였어. 그분께서도 그러려니 하실 거다."

"맞아요, 그 말씀들이 옳습니다."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그분이라고 불리는 존재도 마땅히 슬퍼하지 않을 터였다.

"…그분께서는 당황하셨다."

그때, 두 손을 모은 이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그들은 지금껏 내비쳤던 그 어떤 감정보다 큰 감정을 드러냈다.

당혹감이었다.

"당황? 그분께서 말인가?"

"그래. 내 부족한 식견으로는 그리 보였다. 놀라셨고, 황당해하셨다."

"허…. 그 말이 진정 사실인가?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지 알겠나?"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질문한 이도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처럼 고개만 끄덕여댔다.

"다만…."

두 손을 모은 이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며 원탁을 두드렸다.

정확하게는 원탁이 아니라 실제에서 그가 앉아 있는 책상의 키보드를 두드린 것이었다.

원탁 한가운데에 푸르스름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이걸 보고 그런 감정을 내비치셨다는 건 알지."

홀로그램 안에는 네 명의 존재가 있었다.

한 명은 그들이 잘 아는 지네였고, 다른 세 명은 처음 보는 인간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장면에서 정확히 무엇을 봐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머리 위에 새싹이 자라 있는 인간 남자가 그들의 눈길을 확 잡아끌었다.

"새싹…이군. 저놈은 대체 저걸 왜 달고 있는 건가?"

"나도 모른다. 그분께서 저것을 '저것이 왜 저기에 있는가!'라며 놀라셨다는 것만 알 뿐."

저것, 저것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새싹을 머리에 단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왼손에 거대한 침엽수 나뭇잎을 들고 있었는데, 이파리 한 가닥 한 가닥 뽑아서는 지네를 향해 창처럼 던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방금 창처럼 던진 이파리 한 가닥이 지네의 몸에 푹 꽂혔기 때문이다.

한 발이 꽂히자 다음 발들도 계속 꽂혔다.

결국 지네는 몸에 꽂힌 이파리들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분께서 주신 육신이 저까짓 나뭇잎에 꽂힌단 말인가?"

"아마 축성을 받은 나뭇잎이 아닌가 싶다."

"축성? 어떤 미친놈이 저런 나뭇잎 따위를 축성해 준단 말인가?"

"생각해 보게. 저런 짓을 할 사람이 딱 한 명 있으니."

"...백색 마녀?"

다시 두 손을 모은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맞은편에 앉은 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놈이 누구라고 백색 마녀가 나뭇잎에 축성을 걸어 줬다는 건가?"

"백도운."

"백…씨?"

"그래, 저놈은 백도희의 오빠 백도운이다."

"...!"

원탁에 모인 이들은 새삼스럽게 다시 홀로그램 화면을 쳐다봤다.

어느새 머리에서 새싹이 사라진 백도운은 커다란 나뭇잎을 어깨에 둘러멘 채 땅바닥에 곤두박질친 지네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마치 한 여름밤의 왱왱거리는 모기를 잡은 듯 속 시원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