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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뺨을 스치고 지나는 서울 밤공기는 제법 선선했다.

골목을 천천히 운전하며 조수석에 앉은 유재이를 흘깃 쳐다봤다.

그녀는 생각에 빠진 듯 턱을 괸 채 창밖만 멀거니 바라봤다.

"...."

우연후는 그의 오른팔인 오주한을 불렀다면서 크라우드 아지트에 혼자 남았다.

나와 유재이를 먼저 보내는 동안 그는 답지 않게 음흉한 미소를 지었는데, 분명 이상한 오해를 한 게 틀림없었다.

백미러를 통해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음흉하게 웃었지, 그 인간.

"그 열쇠, 대체 뭘까?"

그녀가 턱을 괴던 손으로 희고 둥근 이마를 긁으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성질부리지 말고 제작도라도 확인해 볼걸."

생각에 빠졌다 싶더니, 열쇠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전 세계에서 암약하는 테러 조직이 만들려는 열쇠는 대체 무엇일까.

나도 생각해 봤지만, 평소처럼 '그럴듯한데?'하고 떠오르는 것조차 없었다.

"글쎄."

그 때문에 맥이 탁 풀리는 답변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쉬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후 씨가 찾아보겠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보자구."

"응…."

출발하기 직전, 그는 아침 일찍 사람들을 불러모아 제작도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도 우리처럼 열쇠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다.

또 하나 덧붙였다.

크라우드에 관해서도 더 조사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S급의 힘을 소유하고 있을 거라는 짐작에 부정적이었음에도 내 말을 따라 주겠다는 뜻이었다.

용두식 시체는 협회에 갖다 주기로 했다.

마족의 권속이라는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다.

그는 A급 헌터인 데다가 일대 그룹의 부회장이었으니,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더라도 한번 살펴보기는 할 것이었다.

차를 멈추고 시동을 껐다.

"어, 벌써 도착했어?"

유재이가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나도 이렇게 일찍 도착할 줄은 몰랐다.

밤 길이라 안전 운전한답시고 천천히 몰았는데, 교통 체증이 없어서인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도착했다.

그녀가 차 문을 열다가 돌아보며 물었다.

"좀 늦었지만, 잠깐 들어올래?"

"응?"

어차피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보수! 의뢰 완료 보수 주려고!"

"응, 받아 가야지."

차에서 내려 그녀를 따라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대장간은 조용했다.

이 늦은 밤에 손님이 왔다 간 건지 계산대엔 노란 현금 뭉치와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나갈 때만 해도 없었는데.

그녀가 없는 사이 문에 붙은 푯말처럼 정말 알아서 부엌칼을 계산하고 갔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르카랑 경갑 제작해 준 거 지급해야 하는데.

"잠깐만 기다려. 금방 만들어 줄게."

그러더니 그녀는 계산대에 놓인 메모지에 글씨를 마구 휘갈겨 썼다.

대장간 평생 이용권을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너무 대충 만드는 거 아니야?"

"남한테 보여 줄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말은 그렇게 해도 구색은 맞출 생각인지 포스기 옆의 대장간 마크를 찍었다.

대장간 마크는 무기나 부엌칼에 새겨 넣은 알파벳 J.Y.였다.

그녀는 30초도 걸리지 않아 메모지에 간단하게 완성된 이용권을 내게 건넸다.

[재이네 대장간 평생 이용권 - J.Y.]

"…이 이용권으로 감정 부탁해도 되나?"

조심스럽게 마법 주머니에서 세계수의 나뭇잎을 꺼냈다.

용두식의 몸에 꽂혔던 이파리 다섯 가닥도 함께.

그녀는 배시시 웃고는 "당연히 된다"고 말해 주었다.

휴,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기왕 허락받은 거 개미굴에서 얻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주먹만 한 덩어리도 꺼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세계수 나뭇잎이었네."

유재이는 계산대 위에 놓은 그것을 감정하며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별다른 말 없이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세계수 나뭇가지에 세계수의 수액을 가져왔었다.

그 이후에 나뭇잎을 가져왔다면, 당연히 세계수의 나뭇잎이지 않겠는가?

"대체 이 귀한 걸 어디서 그렇게 구해 오는 거람?"

유재이는 나뭇잎 감정을 끝낸 후 내용을 메모에 적어 건네주었다.

[세계수의 나뭇잎. S등급.]

[부정한 에너지를 밀어내는 성질.]

[복용 시 체력 회복 효과 있음.]

오, 체력 회복 효과?

힐링 포션 대용으로 쓸 수 있겠는걸?

부정한 에너지를 밀어내는 성질도 눈에 띈다.

아마 그 성질 때문에 용두식을 손쉽게 죽였던 거겠지.

나뭇잎은 부정한 에너지를 지닌 놈들에게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였다.

크라우드는 부정한 에너지를 지닌 놈들로 구성돼 있고.

"이거 가지고 있어."

"나뭇잎? 왜?"

"이것저것 만들어 달라는 거지, 뭐."

그리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유재이는 세계수 나뭇가지와 수액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었다.

창작자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던 거다.

좀 쉬고 나면 또 창작 욕구를 불태우며 나뭇잎으로 이것저것 만들려고 할 게 뻔하다.

"...왜?"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뻘쭘해져서 시선을 피하는데, 그녀가 피식 웃었다.

"으응, 고마워서."

그러고는 유재이는 둥근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설마 이것도 세계수인 건 아니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그 덩어리는 세계수의 에너지를 머금은 흙과 개미의 사체들이 섞인 것이었다.

세계수 관련 재료라면 관련 재료고, 관련되지 않은 재료라면 관련되지 않은 재료였다.

"영약…이 아니라, 응? 비료네?"

"뭐?"

비료? 식물의 재배를 돕기 위해 영양을 주는 그거?

어쩐지 저게 완성됐을 때 새싹이가 만족스러운 마음을 전하더니만….

자기가 먹을 거여서 그랬던 모양이다.

께름칙함이 느껴져 먹지 않았던 과거의 나, 잘했어!

하마터면 바보처럼 비료를 영약이라고 생각하고 먹을 뻔했네.

"이거 A+등급 비료야. 농사 길드에 갖다 팔면 몇십억은 우습게 받겠는데?"

"이게?"

"응."

그녀가 비료를 계산대 위에 내려놓자, 시야 한 편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세계수 새싹은 관리인이 비료를 주길 바랍니다.]

[새싹은 관리인이 비료를 판매하면 큰 슬픔을 느끼고 토라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아무래도 이걸 내다 팔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새싹이와 내가 어떤 관계던가?

새싹이가 성장할수록 나는 힘을 얻게 되는, 말 그대로 일련탁생의 관계다.

눈앞의 이득을 위해 새싹이를 토라지게 만드는 멍청한 짓을 할 리 없었다.

근데, 어떻게 줘야 하지?

[새싹은 따스한 손길로 비료와 새싹을 어루만지면 전달된다고 전합니다.]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지면?

그러니까, 검지로 비료를 건드린 후 새싹이를 건드리면 된다는 소리다.

새싹이가 가르쳐 준 대로 바로 실행했다.

그러자 비료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에?"

유재이가 당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을 갖다 대자 비료가 떠올랐으니 당연했다.

그것을 보고, 그동안 새싹이가 내게 여러 아이템을 건네던 방식을 떠올렸다.

"설마, 아니지?"

아니긴.

그리 말하듯 비료는 스마트폰을 향해 날아갔다.

화면 속에서 아주 신이 나 춤까지 추고 있는 새싹이를 향해서.

퍽!

비료가 스마트폰 화면에 부딪혔다.

그러더니 빠른 속도로 화면으로 들어갔다.

마치 스마트폰이 비료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듯한 모습이었다.

"...."

"...."

나와 유재이는 가만히 스마트폰 속으로 비료가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비료가 전부 들어가자 곧바로 하얀빛이 내뿜어졌다.

화면 속 새싹이에게서 빛이 나고 있었다.

잠시 후 내뿜어진 빛이 전부 사라지고, 새싹이가 눈에 들어왔다.

"새싹의 상태가...?"

제36화

스마트폰에서부터 내뿜어진 하얀빛은 금방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고 눈에 들어온 새싹의 상태는 조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새싹 줄기가 2배 정도 길어졌고, 두 개였던 이파리는 하나가 늘어 세 개가 되었다.

그렇다. 새싹이는,

[세계수 새싹이 A+등급 비료를 얻어 성장했습니다!]

['새싹' 상태에서 '조금 더 자란 새싹' 상태가 됩니다!]

조금 더 자란 새싹이가 되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춤을 추고 있던 새싹이는 줄기를 꼿꼿하게 펴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른인 척하려고 애쓰는 어린아이 같아 귀여웠다.

그게 사랑스러워 톡톡 두드려 주었더니, 평소처럼 마나를 받아들이며 가늘게 떨었다.

이 맛에 세계수 키우지, 암!

[업적 달성! 관리인 백도운 님이 세계수를 성장시켰습니다.]

[백도운 님은 세계수를 조금 더 자란 새싹으로 성장시켜 관리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업적의 보상으로 S등급 스킬 '관리인 교본 제1권'을 드립니다.]

[관리인 교본 제1권 스킬은 바로 우편함으로 전송됩니다.]

[또한, 성장에 따라 따스한 손길 등 모든 스킬의 효과가 새싹 상태에서 조금 더 자란 새싹 상태로 강화됩니다.]

[아울러 이파리가 더 자란 만큼 관리인의 최대 마나가 증가해 총 15만260이 됩니다.]

"...헐."

A+등급의 비료의 효과는 엄청났다.

비료 한 번 주었다고 바로 성장하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물론, 그동안 꾸준하게 화면을 두드린 것도 빛을 발했겠지만.

그래도 이런 효과를 보고 나니 앞으로도 비료를 열심히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싹이가 흙을 보내올 때마다 무주 개미굴을 들러 비료를 제작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워프 게이트가 있으니 금방 다녀올 수도 있었고.

그나저나 이 관리인 교본 제1권 스킬은 뭘까?

관리인 교본이라는 이름답게 세계수를 가꾸는 방법이 쓰여 있으려나?

비료를 뿌리는 방법이라던가, 가지치기하는 방법이라던가.

단순히 그런 것뿐이라면 S등급 스킬일 리 없긴 하지만.

제1권이라고 하는 걸 보니 제2권도 있을지도 모르겠-

"흐응."

"...아."

바로 옆에 유재이가 있다는 걸 완전히 깜빡 잊고 있었다.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턱을 괸 채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미소는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하고, 나빠 보이기도 했다.

이런, 어떻게 속여 넘기지?

"아, 그게 말이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됐어."

"응?"

"설명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정말?"

"어차피 사실대로 말해 줄 생각도 없잖아, 당신."

"...."

정곡을 찔렸다.

그 말대로 방금까지 어떻게 속여 넘기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알겠으니까, 그만 가 봐."

"어?"

"응?"

"가라고?"

"그럼 안 가?"

유재이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아니, 네가 그렇게 황당한 얼굴로 날 보면 어떡해?

지금 황당해야 할 건 네가 아니라 나인데.

"여자 혼자 있-"

"당신 2시간 전만 해도 크라우드 놈들한테 갇혀 있었다는 거 몰라?"

"어? 아…."

"어어? 아아?"

뭐지,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는 이 얼굴은?

크라우드 놈들이 너무 저자세로 나가서 자기가 정말 위험했다는 걸 모르는 건가?

A등급로 책정된 테러 조직인 데다가 마족이란 존재에게 영혼까지 팔아먹은 놈들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녀를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것도 서슴없이 저질렀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늦게 찾아갔더라면 분명 그랬을 테지.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내게 찾아 달라는 의뢰를 남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건가.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것도 몰랐을 줄이야."

"아냐, 알고 있었어."

"알고 있기는. 알고 있다는 사람이 이 야밤에 혼자 있겠다고 해?"

"그, 그건, 그게 아니라…."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 하는 유재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기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깨달았으면 됐다.

여기까지만 뭐라고 해야지.

"아침에 나랑 같이 백운천에 가자."

"백운천에…?"

"어. 상황 설명하면 너 보호해 줄 거야. 고용비는 내야겠지만, 내가 같이 가면 저렴하게 의뢰할 수 있을 거야."

"음, 알았어. 그렇게-"

할게, 라고 그녀가 말하려던 찰나 문이 드르륵 열렸다.

곧바로 따스한 손길을 쓰며 유재이 앞에 섰다.

크라우드라면 문을 열고 들어올 리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유재이도 세계수 나뭇잎을 집어 들고는 방망이처럼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설마 그걸로 공격하려던 건 아니죠?"

일대 그룹의 김지연이었다.

홍유릉 게이트에서 함께 싸웠던 마법사도 함께 있었다.

그녀들은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하고는 내 오른 손가락과 유재이의 양손에 들린 나뭇잎을 바라봤다.

"아, 미안합니다."

"적인 줄 알았어요."

마나를 거두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유재이도 나뭇잎을 계산대에 도로 올려놓았다.

김지연과 마법사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그녀들이 재이네 대장간으로 온 이유를 말했다.

"채연이가 부탁해서 왔어요. 크라우드라는 테러 조직이 유재이 씨를 노리고 있다던데, 맞나요?"

우연후가 아니라 우채연이 부탁했다고?

설마 우연후가 동생에게 정보를 얘기해 줬다는 건가?

아무리 친한 동생이라지만, 테러 조직에 관한 얘기를 함부로 해 주나?

"네, 맞아요."

그런 의문을 느끼는 사이 유재이가 질문에 긍정했다.

그녀들은 나를 지나쳐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는 일대 길드의 김지연."

"같은 길드의 '심윤진'이에요."

"유재이 씨를 경호하기 위해 왔습니다. 저희의 경호를 받아들이겠습니까?"

김지연과 심윤진이 진지한 목소리로 유재이에게 물었다.

유재이는 살짝 당황한 듯 둘을 쳐다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경호요? 그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방금 백운천에 가겠다고 했던 말 때문인 모양이다.

나로서는 그녀가 백운천의 보호를 받는 게 편했지만, 이곳까지 도와주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의 성의를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의사를 전했다.

"…네. 받아들일게요"

유재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김지연과 심윤진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재이네 대장간의 유재이예요…. 잘 부탁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잘 부탁해요!"

흐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둘에게 맡기고 그만 가 봐도 될 듯하다.

"아, 그런 거군요?"

그때, 날 보던 김지연이 뭔가를 깨달은 듯 손뼉을 탁 쳤다.

"...?"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김지연을 쳐다봤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입꼬리만 살짝 올려 보일 뿐이었다.

나와 유재이를 번갈아 보는 시선과 함께.

…우연후의 동료 아니랄까 봐, 김지연은 분명 이상한 오해를 한 게 분명하다.

***

집에 가기 전에 차 안에서 새로 얻은 스킬을 확인했다.

스킬을 발동하자 푸르스름한 책 한 권이 허공에 떠올랐다.

[관리인 교본 제1권]

제목을 향해 왼손을 뻗자 책의 질감이 만져진다.

아무래도 펼쳐서 직접 넘기며 읽어야 하는 모양이다.

학생 때도 안 읽었던 책을 스킬 때문에 읽게 될 줄은 몰랐는데.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면서 책의 첫 장을 펼쳤다.

[반갑다. 세계수의 새 관리인이여.]

[나는 세계수의 전대 관리인 '디싱 나 토르', 그대의 선배라고 할 수 있겠다.]

[심정 같아선 직접 마주하고 그대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사정상 그럴 수 없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전대 관리인?

이 교본을 쓴 사람인가?

[우선, 전대 관리인으로서 그대에게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얼굴도 모르면서 충고를 하겠다고 하니 반발심이 들 수 있겠으나 세계수 관리인이 꼭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니 꼭 읽어 주었으면 한다.]

[그 마음가짐이란, 바로 세계수를 '도구'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세계수는 감정이 있는 존재로서....]

대충 읽으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읽지 않고 넘겨 버릴까도 했지만, 꼭 읽어 달라는 신신당부에 다 읽어 주기는 했다.

요약하자면, 세계수를 도구로 여길 때 세계수 또한 나를 도구로 여기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화면 속에 줄기가 늠름하게 자란 새싹이를 내려다봤다.

도구라니, 이렇게 귀여운 애를 어떻게 도구로 볼 수가 있지?

병신인가.

[짧은 충고를 굳이 다 읽어 주어 고맙다.]

[앞으로는 세계수 관리인으로서 제 몸을 지키는 방법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

세계수 관리인으로서, 자기 몸을 지키는?

그 문구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해질 방법을 소개하겠다고 했다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거다.

그런데 전대 관리인은 강해질 방법이 아니라 지키는 방법이라고 표현했다.

세계수 관리인은 위험하니 몸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듯이.

마치 세계수 관리인을 노리는 적이라도 있다는 듯이.

"…감이 영 좋지 않은데?"

그러나 내 좋지 않은 직감을 해결해 줄 설명은 없었다.

다음 내용부터는 디싱이라는 양반이 말한 것처럼 제 몸을 지키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대는 세계수 관리인이 되어 마나가 많이 늘어났음을 느꼈을 것이다.]

[회복력까지 뛰어나니 마나가 다 떨어지는 경험은 해 보지 못했으리라.]

[이렇게 무한에 가까운 마나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터, 앞으로 그 방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겠다.]

오, 같은 관리인이라 그런가 생각하는 게 비슷한데?

나도 마나를 얻게 되자마자 어떻게 써먹어야 하나 생각했었다.

[세계수의 마나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바로 그것을 신체에 직접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나를 신체에 직접 받아들인다!

"…가, 뭔 소리래?"

[현재 그대는 세계수의 마나를 소유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원소를 다룰 수 있는 순수한 마나를 소유하고만 있는 것이다.]

[마나를 낭비하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얼마나 아까운 일이란 말인가?]

[그러니 이 방법을 통해 신체를 강화하기 바란다.]

[성공적으로 받아들였을 경우 그대의 신체 능력은 그전과 크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흠, 혹시 그거랑 비슷한 거려나?"

몸을 다친 후 하게 된 재활 훈련 중에 마나로 근육을 자극하는 훈련이 있었다.

극소량의 마나를 신체에 흘려서 다친 근육을 다시 활동하게 하는 것이었다.

마나를 접목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전기로 자극을 줬다고 한다.

미세전류 치료였던가?

[동시에 부수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을 텐데, 혹시 그대가 여성이라면, 진심으로 축하한다.]

[부수적인 효과 중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꿀피부를 얻게 된다는 이점도 있다.]

[그래, 그대가 눈치 빠른 편이라면 세계수 마나를 받아들이니 피부가 좋아진다는 사실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아차렸겠지.]

[그 생각이 옳다.]

[세계수의 에너지가 담긴 수액이나 나뭇잎은 피부 미용에 아주 좋은 재료다.]

[그러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재료들로 미용품을 만들어 팔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바이다.]

[손쉽게 떼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각설하고, 다음 장에서 세계수 마나를 신체에 녹아내는 방법을 후술하도록 하겠다.]

"...미용품? 떼돈?"

이 양반, 세계수 도구로 여기지 말라는 거 순전히 자기 얘기 아냐?

제37화

교본을 다 읽은 후 장소를 옮겼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마나를 주입하라는 충고가 있어서다.

운 좋게도 가까운 위치에 딱 알맞은 장소가 있었다.

바로 'B등급 화염산 던전'이다.

원래 서울 월드컵 경기장이었던 곳으로, B급 게이트가 폭발해 생겨난 던전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화염을 내뿜는 산이다.

서식하는 몬스터는 대부분 불꽃을 두른 놈들이었는데, 가장 많은 건 화염 골렘들이다.

열기가 더운 걸 넘어 뜨거운 데다가 방어력이 대단한 몬스터가 출현하니 헌터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다.

이따금 협회 소속 헌터들이 던전 마나가 범람하지 않도록 골렘을 사냥하러 올 뿐이다.

"후우, 이쯤이면 되려나?"

화염산의 화염이 번지지 않도록 세워 놓은 마나 냉각기를 지나 10분쯤 산을 올랐다.

패시브 스킬 덕분에 화염산의 화염은 내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다만, 숨을 쉬는 것이 평소와 달리 쉽지 않았다.

화염산의 타오르는 화염 때문에 공기 중의 산소가 부족해서 그런 듯했다.

불꽃이 붙지 않은 바위 하나에 엉덩이를 깔고 앉는다.

주변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인지 바위는 뜨거웠다.

"…어라?"

갑자기 몸이 기울었다.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급하게 균형을 잡는다.

"…켁."

깔고 앉은 것은 바위가 아니었다.

화염 골렘의 머리였다.

자고 있던 녀석은 머리 위에 내가 앉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퍼억…!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따스한 손길로 대가리를 후려쳤다.

화염 골렘은 그 한 방에 대가리와 그 안에 있던 붉은 핵이 깨져 죽었다.

쿵.

골렘의 몸은 다시 커다란 바위가 되었다.

"깜짝 놀랐네…."

중얼거리면서 또 다른 골렘들이 나타나는 건 아닌가 주변을 돌아봤다.

바위에 붙은 불꽃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만 들려왔다.

골렘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각자 구역에서 잠만 청하는 녀석들이다.

내 엉덩이에 깔린 놈을 처치했으니, 다른 골렘들은 없을 거다.

"시작해 볼까…. 관리인의 교본 제1권."

주변을 확인한 후 스킬을 발동한다.

허공에 관리인의 교본이 떠올랐다.

책을 펼쳐 빠르게 뒷부분으로 넘겼다.

페이지 넘기는 걸 멈춘 건 마나를 주입하는 방법이 쓰인 부분을 펼쳤을 때다.

[신체에 마나를 주입하는 방법]

[소위 '가지치기'라 불리는 이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따스한 손길로 그대의 몸을 어루만지면 된다.]

[물론, 108군데를 정확히 어루만져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다음 장에서 그림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내가 다 읽었으면서도 다시 교본을 펼친 이유다.

정확히 신체 108군데를 두드려야 하는데, 이걸 한꺼번에 다 외울 수가 없었다.

갑옷을 모두 벗어 마법 주머니에 넣는 동안 몸을 어떻게 두드려야 할지 고민했다.

교본에는 어루만져야 할 곳을 분명하게 어루만지면 될 뿐, 순서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왼쪽 다리부터 천천히 두드려 위쪽으로 올라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반신반의하면서 조심스럽게 온몸을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머리까지 모두 두드리고 난 후에는 조금 기다려 보았다.

교본에,

[조금 기다리면 그대가 두드린 곳에서 푸른 점이 떠오를 것이다.]

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

과연 그 문장대로다.

조용히 10초 정도 기다리고 있자 왼쪽 발목에서부터 푸른 점이 떠올랐다.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한 푸른 점은 조금씩 내 몸을 채워 나간다.

그러다가,

펑!

"...?"

폭발했다.

왼쪽 발목이.

그 아래가 폭발해서 사라져 버렸다.

붉은 피가 바위로 뿜어진다.

이게, 이게 왜 터져?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했다가 사라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더 큰 고통이 찾아와서다.

심지어 고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목 윗부분도 폭발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두드린 순서대로 폭발하는 모양이었다.

"잠, 깐! 그럼…!"

머리도 터진다는 소리잖아!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무느라 중얼거릴 수가 없었다.

무릎 부위가 폭발하는데,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는 법.]

[그대가 이 고통을 꾹 참고 진정한 관리인으로서 거듭나기를.]

[나 '디싱 나 토르'는 진심으로 바란다.]

책의 공백 부분에 그런 문장이 떠올랐다.

이, 이 개새끼가?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 개새끼아악!"

[어허, 선배한테 욕하는 거 아니야.]

[나도 다 겪은 고통이니 그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바이긴 하다만.]

[나 때는 말이야….]

안타깝게도 분노가 차올랐음에도 입으로 욕을 끝까지 내뱉을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파서 욕보다는 비명이 더 내질러졌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마나를 주입하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렇게 몸이 펑펑 폭발하니 당연히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시킬 수 없었겠지!

도희나 태천이가 이 꼴을 보면 얼마나 걱정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세계수를 탓하면서 당장 스마트폰에서 없애 버려야 한다고 했을 거다.

[세계수 새싹이 관리인 백도운에게 괜찮냐고 물어봅니다.]

[관리인이 괴로워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아니, 새싹아. 그게 대체 무슨 말이니.

이 꼴을 보고서도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니?

팔과 다리가 날아갔는데 아프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

[새싹은 관리인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아, 그런 거구나….

새싹이는 인간이 아니다.

나무다.

나뭇잎이 하나 떨어지고 나뭇가지가 부러진다고 해서 아파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디싱이라는 양반이 교본에 '가지치기라 불리는 이 방법'이라고 서술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깊은 깨달음을 얻으며 아파하는 동안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골… 골렘?"

다수의 화염 골렘이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내가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고 발광을 떨어 대는 바람에 주변 골렘들이 깨어난 것이다.

그 골렘들을 보고 있으니, 왠지 디싱이라는 양반의 면상이 더욱 굉장히 궁금해졌다.

적어도, 아프면 아프다고 서술해 줄 수는 있지 않았냔 말이다.

그랬다면 이 가지치기란 걸 던전이 아니라 집 방구석에 혼자 처박혀서 했을 텐데!

[…라는 일이 있었지.]

[아, 혹시 고통스러우리라는 걸 미리 말하지 않은 데 대해 따지고 있나?]

[그렇다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대답해 주겠다.]

[그대의 마음이 심약해 가지치기를 실행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세계수 관리인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일이기에 잠깐 숨긴 것….]

[선배의 깊은 생각을 후배로서 너그러이 이해하고 용서해 주기 바란다.]

"지랄하네에엑!"

선배의 깊은 생각?

후배로서 너그러이 이해하고 용서?

정말 내가 그럴 거로 생각한다면 디싱은 큰 실수를 한 거다.

나는 그런 인격자가 아니다.

오늘 밤부터 매일매일 이 양반을 향해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어 주리라!

"우웅…!"

화염 골렘이 나를 향해 붉게 타오르는 팔을 휘둘렀다.

당연히 부서진 건 내 얼굴이 아니라 얼굴을 때린 그것들의 팔이었다.

사실, 골렘의 공격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무껍질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내가 숨을 쉬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회복력이 트롤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호흡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화염을 내뿜는 골렘들이 모여들면 이곳에 있는 산소가 전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전에 어떻게든 장소를 옮겨야겠다.

이동하고자 몸을 구르려고 할 때, 화염 골렘의 발아래에 초록빛의 새싹이 자라나는 게 보였다.

내가 새싹이를 소환했던가?

"...!"

아니, 그것은 새싹이가 아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흘린 피에서 풀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묘목을 땅에 심은 듯 어린나무들도 자랐다.

그런 식으로 자라난 풀과 나무는 씨를 뿌렸고, 또 다른 식물들을 자라나게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의식을 잃었다.

고통을 참지 못한 것은 아니다.

차례가 되었을 뿐이다.

폭발할 차례가.

그렇다.

가장 마지막으로 두드렸던 머리가 폭발한 거다.

***

"으, 시원하다."

샤워하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와 온몸의 물기를 닦아 냈다.

옷을 대충 걸치며 거실로 걸어간다.

TV에서 남자 앵커가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TV 속 남자 앵커가 그리 말한 후 기사 내용을 줄줄 읊었다.

던전에서 서식하던 화염 골렘과 뜨거운 열기가 전부 사라지고 따스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숲이 우거졌다는 것이다.

아래 자막에는 '하룻밤 사이 던전 사라져!'라는 문장이 반복적으로 흘러갔다.

"…흠, 흠."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소파에 앉았다.

뉴스에서 떠들고 있는 던전이 사라진 이유는 다름 아닌 나 때문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에 봤던 식물들의 발아 현상이 숲을 무성하게 이룰 때까지 이어진 거다.

마치 던전의 마나가 먹이인 것처럼 전부 먹어치워 가면서.

가지치기가 끝나고 보니 화염산은 온데간데없고 울창한 숲만 보여서 어찌나 당황했는지….

그 이후로는 뉴스에서 떠드는 대로다.

던전은 그 기능을 완전히 잃었고, 따스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숲이 되었다.

아마 따스한 에너지는 세계수의 마나를 뜻하는 거겠지.

"던전을 없앴다, 라…."

여태껏 던전이 사라져 버리는 일은 없었다.

전 세계가 합심하여 던전을 없앨 방법을 연구하고 온갖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의 산물인 마나 발전기를 1년 동안 가동해 던전 에너지를 억눌러 보기도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20년 전쯤 '생불'이라고 불리는 티벳의 한 고승이 삼천 배를 하며 기도를 드렸던 적도 있다.

신성한 기운이 잠시 머무르다 떠났을 뿐 던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런 만큼 뉴스에서 저렇게 똑같은 내용으로 계속 떠들어 대며 난리를 피우는 것도 이해가 됐다.

온갖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던 던전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숲이 우거졌으니까.

저런 일을 벌인 사람이 나라는 걸 몰랐다면 나도 신기해했을 거다.

도희나 태천에게 TV 봤냐고 연락을 해 댔겠지.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걸?

던전이 사라지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두 사람이 왜 나한테 연락을 하지 않지?

아직 TV를 안 본 건가?

띵동.

내 의문을 지우는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거실 탁자에 놓인 인터폰을 눌러 찾아온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다.

문 바깥을 나타낸 홀로그램 영상에는 난생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도희의 손님인 것 같아 연결 버튼을 눌렀다.

"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헌터 협회의 헌터 관리 4팀 '최기우' 팀장입니다."

렌즈를 사이에 둔 최기우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는 헌터 협회라고 쓰여 있었다.

헌터 협회라면, 역시 예상한 대로 도희를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안타깝게 됐군.

30분만 더 빨리 왔어도 도희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을.

도희는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출근했다.

가지치기하느라 붉게 물든 옷을 보고는 어디서 그렇게 다치고 온 거냐고 혼낼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그저 "몸 좀 소중히 하고 다녀요…."라는 말만 덧붙였을 뿐이다.

아마 회복력이 좋아져서 다치는 걸 신경 쓰지 않은 거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다.

"도희 없는데요? 이미 출근했습니다."

- 네? 아, 아닙니다. 저는 백도운 님을 뵈러 왔습니다.

"나를요?"

헌터 협회에서 왜 나를 찾아와? 나 뭔 짓 했던가?

[이번 던전이 사라진 일에 따라 대통령은 특별 조사 지시를 내렸습니다.]

귓가에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저게 내가 한 짓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제38화

최기우는 개미굴 사건 때문에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함께 마실 커피를 타는 동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힐끔 바라봤다.

헌터 사냥꾼은 현재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다.

요즘 들어서는 게이트에서 죽는 신입 헌터보다 사냥꾼 놈들에게 죽는 헌터가 더 많을 정도다.

그에 따른 문제로 헌터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헌터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는 해도… 협회 팀장급 직원이 D급 헌터 따위한테 직접 찾아오나?

소파에 앉아 커피를 타는 날 지켜보던 최기우가 피식 웃었다.

갑자기 왜 웃어?

"보고 받은 내용이 사실이었군요. 정말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

"게임이요. 스마트폰 게임."

"엥? 그게 무슨 말… 어머니, 깜짝이야!"

깜짝 놀라서 어렸을 적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찾고 말았다.

내 오른손 검지는 식탁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을 열심히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새싹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세 이파리를 휙휙 흔들었다.

"내, 내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지?"

"…문 열고 맞이해 주셨을 때부터 쭉 그러고 계셨는데요."

"내가요?"

"네."

최기우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도 나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네, 맞습니다. 이렇게나 게임을 좋아한답니다. 아하하!"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어색하게 웃는 날 쳐다보는 최기우의 시선이 곱지 않다.

구제할 길 없는 게임 폐인으로 보는 시선이었다.

"...."

"...."

그를 이해한다.

지금 이 순간,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싶었으니까.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커피를 들고 거실로 걸어갔다.

스마트폰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진지한 얘기를 하려고 찾아온 사람을 앞에 두고 게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흠, 흠!"

최기우도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집어넣는 것을 보곤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주 보고 앉아 진지한 얼굴을 내비쳤다.

한심스럽게 바라보고, 한심스러운 시선을 받아들이던 두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집에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개미굴 청소 퀘스트에 관련해서였다.

개미굴을 청소한 것이 모두 확인됐다면서 퀘스트 완수 보상으로 300만 원과 퀘스트 제한을 풀어 주겠다고 말했다.

E등급 퀘스트였으니 보상은 당연히 별거 없었다.

겨우 300만 원밖에 안 주니까 퀘스트 깨겠다는 헌터들이 없지.

그런 생각만 들었다.

이어 그는 헌터 사냥꾼인 김정철 일당을 잡은 보상에 관해 얘기했다.

"김재식 헌터에 따르면 백도운 헌터 혼자 김정철 일당을 잡은 것이더군요."

어라?

김재식과 먼저 얘기를 하고 왔던 모양이다.

"자긴 한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 보상을 절대 받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냥 모든 보상을 백도운 헌터에게 몰아주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엥, 그래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됩니다. 김재식 헌터가 동의했으니까요."

대충 자기 몫 챙길 것이지.

뭘 또 진솔하게 다 나 덕분이었다고 얘기했대? 고맙게.

"김정철 일당 전부 C급 헌터였으므로, 백도운 헌터를 C등급으로 올려드리기로 했습니다."

"귀찮은 일 하나 없애서 좋네요."

"그리고 헌터 사냥꾼을 붙잡은 보상을 드려야 하는데, 사실 김정철 일당은 현상금이 붙지 않은 상태라서 현상금이 없습니다."

"어라, 그럼 보상이 전혀 없는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최기우가 엷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의를 통해 기본 현상금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오."

"현상금이 붙지 않았다고 보상을 주지 않는 사례가 있게 되면, 헌터 사냥꾼을 발견해도 붙잡지 않는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맞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내가 받게 된 현상금은 리더인 김정철이 1억 원, 권오석과 한기해가 각각 5천만 원씩 해서 총 2억 원이었다.

또 부수입으로 세 명이 갖고 있던 현금과 아이템도 전부 내게 넘기기로 했다.

최기우는 그것들을 현금으로 따졌을 경우 전부 1억 정도 되는 금액이라고 덧붙였다.

김정철 일당을 붙잡은 일로 C급 헌터가 되고 총 3억을 벌게 된 것이다.

"흠, 나쁘지는 않은데요."

"네?"

내가 좋아할 줄 알았는지 최기우는 당황한 기색을 내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억을 벌었다면 기분이 좋아서 헤벌쭉해졌을 거다.

하지만 현재 내 통장엔 우담화를 채집한 대가로 받은 50억 원이 있었다.

이성훈에게 우 회장을 소개해 준 소개비를 조금 떼 줬지만, 그리 큰 금액은 아니다.

원래 갖고 있던 금액까지 합쳐 여전히 내 수중에는 50억이 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돈이라고는 하지만, 현재 돈이란 것은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보상이 아니다.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겁니까?"

최기우가 곤란한 얼굴로 물었다.

자기들 생각에 타당하다고 생각한 금액을 가져온 것이다.

곤란함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보상을 더 달라고 요구할까 걱정되는 마음도 있을 터였다.

"돈보다 대신 바라는 게 있어서요."

"바라는 것, 입니까?"

"혹시 개미굴을 제게 맡겨 볼 생각 없습니까?"

"…개미굴을요?"

그가 미심쩍다는 듯 되물었다.

"네. 개미굴이요."

"그러니까, 무주 개미굴 독점권을 원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겁니다."

내 산뜻한 대답에 최기우는 눈을 찌푸렸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뜻밖에 제안을 이해할 수가 없는 듯했다.

E등급 무주 개미굴 던전은 보상으로 얻을 것은 전혀 없는 던전이다.

그런 주제에 수백 마리의 대왕 개미들을 사냥해야 하는 지랄 맞은 곳이고.

사람들이 꺼리는 던전의 독점권을 달라는 것이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미심쩍게 보는 건 당연했다.

나도 새싹이가 보내는 흙과 대왕 개미들의 사체로 A+등급 비료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개미굴 독점권 따위 원하지 않았을 거다.

준다고 해도 저리 치우라고 했겠지.

"결정하기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 거라면 다른 날 다시 찾아오셔도 됩니다만."

협회의 헌터 관리팀장에게 어느 정도의 직권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E등급이라지만 한 던전의 독점권을 멋대로 넘기고 말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기우가 굳은살이 잔뜩 배긴 손가락으로 턱밑을 문질렀다.

원래 헌터였나?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제 직권 밖의 일이기는 합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럼 다음에-"

"그런데도 제 마음대로 무주 개미굴 독점권을 백도운 헌터에게 넘기는 것은 가능합니다."

"네?"

"아마 위에서는 잘했다고 칭찬을 할 겁니다. 신경 거슬리는 귀찮은 곳 하나 잘 줄였다고."

그리 말하고는 그는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무주 개미굴은 협회가 빨리 치워 버리려고 하는 쓸모없는 곳 중 하나에 불과하니 잘 판단하라'라고 경고를 하는 듯했다.

괜찮다.

그들에겐 귀찮기만 한 곳에 불과할 테지만, 내겐 분명한 쓰임새가 있는 곳이었다.

새싹을 성장시킬 수 있는 비료를 공급할 수 있었으니까.

나를 생각해 준 최기우에게 빙그레 웃어 주었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까? 독점권을 넘기면 개미굴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백도운 씨가 책임져야 하는 건 알고 계시죠?"

당연히 알고 있다.

독점권을 넘긴다는 건 그에 따른 책임까지도 함께 넘긴다는 뜻이니까.

"네. 정말 괜찮습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러면 위에 말씀드렸던 보상 대신 백도운 헌터에게 무주 개미굴 독점권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개미굴 독점권을 따냈다.

새싹아, 잘 보고 있니?

앞으로 형이 꼬박꼬박 비료 챙겨 줄 수 있게 됐다!

[세계수 새싹이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춥니다!]

***

"헌터 등급 재조정을 부탁드립니다."

떠나기 전 최기우는 그리 말하며 추천서를 써서 건네주었다.

추천서라고 해 봐야 '헌터 협회 관리 3팀장 최기우'라는 이름이 쓰인 종이에 불과했지만.

낙서를 휘갈긴 종이 취급을 받을 것 같았던 종이는 그래도 팀장의 도장이 찍혀 있기 때문인지 추천서로서 충분한 효력을 발휘했다.

그것을 제출하니 심사장 직원이 당황하며 나를 바로 '시험의 탑' 워프 게이트로 안내했다.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 감회가 새로운걸…?"

시험의 탑은 협회가 독점하고 있는 게이트 중 하나다.

다른 게이트와 달리 생명에 전혀 위험이 없는데, 입장하는 사람들의 수준에 걸맞은 가상의 몬스터들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사람들이 이 게이트를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처럼.

이런 특이성 때문에 시험의 탑은 신이 만든 거라는 설도 있다.

이 게이트를 통해 인간이 게이트라는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거라나 뭐라나.

뭐, 신의 증거든 뭐든 그딴 건 잘 모르겠다.

내게 시험의 탑은 그저 등급을 책정하는 심사장일 뿐이다.

등급 낮은 헌터들은 이용할 수 없게 제한돼 있어 D급 헌터였던 나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지만.

"응?"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시선들을 따라가니, 탑에 입장하는 사람들이 대기하는 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우연후의 동생 우채연이었다.

나처럼 테스트를 치르기 위해 온 모양이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옆모습에서 나와 달리 시험의 탑이 익숙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 저렇게 차가운 인상이었던가?"

병원에서 봤던 것과 다르게 그녀는 굉장히 차가워 보였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말을 걸지 말라는 싸늘한 오오라를 풍기고 있었다.

물론, 세상에는 그런 차가운 분위기도 뚫고 걸어가는 용감한 사람이 하나쯤 있다.

얼굴이 제법 반반한 남자가 우채연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남자를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지상욱'이다…!"

"지상욱? 그게 누군데?"

"몰라? 얼마 전에 '한라산 게이트' 솔로잉한 B급 헌터잖아!"

"뭐? 거기 '레드 만티코어' 서식지 아냐?"

레드 만티코어는 붉은 사자 몸뚱어리에 커다란 박쥐 날개가 달린 몬스터다.

무리 생활을 하는 데다 날아다니기까지 해서 사냥하기 여간 귀찮은 녀석들이 아니다.

라고, 한라산 게이트를 솔로잉 하고 돌아온 태천이가 설명해 준 적 있다.

그런 곳을 혼자 사냥했다면, 확실히 대단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태천이가 대단한 실력자였으니까.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지상욱은 우채연 앞에 섰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우채연 양."

우채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지상욱을 올려다봤다.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은 두 남녀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쾌차한 겁니까?"

"...."

그녀는 올려다보던 시선을 금방 내렸다.

그를 깔끔하게 무시한 거다.

지상욱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입술을 살짝 떨었다.

무시를 당했는데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 대단했다.

"저기, 사람이 질문을 했으면-"

"...!"

지상욱이 한 마디 쏘아붙이려고 하자 우채연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고개를 든 방향은 지상욱 쪽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람과 당황이 담겨 있다.

쏘아붙이려던 지상욱은 그녀가 다급하게 고개를 들자 입을 다물었다.

우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상욱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길가에 돌을 보듯 무관심한 태도에 사람들은 그를 비웃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라…?"

우채연의 시선과 발걸음이 나를 향해 당황스러웠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도 나로 옮겨졌다.

내 앞까지 걸어온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온 님."

그녀는 나를 백도운이 아니라 지온이라고 지칭했다.

우연후에게 내 정체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소리다.

정체를 들었다면, 지온이 아니라 백도운이라고 호명했을 테니까.

가면을 안 쓰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본 거지?

"…어떻게 알았어요?"

"머리 스타일 때문에요."

우채연은 자기 뒤통수를 톡톡 가리키며 대답했다.

아니, 보통 머리 스타일만으로 한 번 본 사람을 알아보나?

그런 의문을 느끼는데, 주위 사람들이 '저 새끼 뭔데?', '저거 누군데 우채연이 아는 척을 해?'라며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세계수 새싹이 졸렬한 시선을 느꼈습니다.]

졸렬한 시선?

그건 또 무슨….

아, 뭘 뜻하는지 알겠다.

지상욱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너를 무시한 건 우채연인데 왜 날 노려보고 지랄이야?

그러니까 새싹이한테 졸렬하다는 소리나 듣지.

[새싹은 관리인 백도운에게 자기 주변의 '돌멩이'를 전송하길 희망합니다.]

돌멩이…?

제39화

시험의 탑 심사실은 모니터가 벽 하나를 메우고 있다.

게이트 안의 여러 장소가 각기 다른 크기로 분할 송출되는 모니터다.

그 모니터 화면을 한 남자가 들여다보고 있다.

목에 걸린 사원증에 '공철'이라고 쓰인 남자는 화면 속 인물들을 보면서 무언가를 체크하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사람을 까먹지 않게 표시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글렀군…."

그가 중얼거리며 모니터의 화면을 하나 껐다.

더 두고 볼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도 모른 채 분할된 화면 속 사람들은 몬스터를 열심히 사냥하고 있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그들의 손목 발목 가슴에는 똑같은 색깔과 형태의 방어구가 장착돼 있다.

마나와 근육의 간단한 정보를 파악하는 기계다.

사냥하는 동안 기계가 착용자의 신체 능력을 파악하고 심사실로 정보를 전달해 온다.

그렇게 전달된 정보는 현재 프린터기에서 열심히 종이로 뽑히고 있었다.

공철은 손을 뻗어 인쇄물들을 제 앞에 갖다 놓고 살펴보았다.

"어이, 공철. 체크 잘하고 있냐?"

그때, 한 남자가 문을 열며 들어왔다.

공철은 고개만 뒤로 돌려 들어온 사람을 확인했다.

남자는 한 손에 탄산음료 두 캔을 들고 있었다.

"어,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

"구경 왔지. 우채연 왔다며?"

그러면서 남자는 탄산음료를 책상에 내려놓는다.

공철에게 팀장님이라 불린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는 '강인재'라고 쓰여 있다.

강인재는 모니터 화면을 보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린다.

그가 말한 대로 구경하기 위해 우채연을 찾는 것이다.

공철은 탄산음료를 따 마시며 모니터 좌측 상단을 가리켰다.

"왼쪽 위 끝이요."

"아, 찾았어."

공철은 강인재의 시선을 따라 왼쪽 위 끝을 바라봤다.

모니터 왼쪽 위 끝에 가장 크게 분할된 화면에는 우채연이 얼음 마법으로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다.

B등급 몬스터인 레드 만티코어들은 빠르게 쏟아지는 거대한 얼음 창에 속수무책으로 찔려 죽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두 사람은 심사하는 것도 잊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야, 방금 캐스팅 속도 봤냐?"

"봤어요. 미쳤는데요? 저 정도 크기면 마나 끌어내는 데만 한참 걸리지 않나?"

"한참 걸리지. 마법사가 괜히 솔로잉이 불가능하단 소릴 듣는 줄 알아?"

"혼자서도 충분히 솔로잉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절맥증이 치료만 하면 세상을 뒤집을 천재가 된다더니…."

"신체 능력만 좋게 나오면 바로 A등급으로 승급하겠어요."

공철은 인쇄물에서 우채연의 것을 찾으며 말했다.

강인재는 그 말을 들으며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우채연이 방금 막 얼음 마법으로 공중을 빠르게 날아가던 '레드 와이번' 한 마리를 맞혀 죽였기 때문이다.

레드 와이번은 한 마리로도 사냥하기 껄끄러운데 떼거리로 공중을 날아다녀 A등급으로 책정된 몬스터였다.

"저게 17살이라니, 세상 더럽게 불공평하네."

"그러게요. 절맥증 낫고 나니까 예전보다 더 무시무시해요."

"그럴 수밖에. 예전엔 스킬을 쓰면 쓸수록 몸이 얼어붙는 페널티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잖아.

그는 감탄하다가 하려던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공철도 또 다른 와이번을 바로 영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강인재는 침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스스로 놀라는 공철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뭐, 다행이네. 매번 스킬 쓸 때마다 괴로워하는 게 영 보기 불편했는데."

"뭐예요, 팀장님도 우채연 팬이었어요? 삼촌팬이신 거?"

"팬은 무슨. 그냥 마음이 쓰인 거지. 어린애가 힘들어하니까."

공철은 강인재의 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한 가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우담화는 대체 어떻게 구한 걸까요? 우리나라에선 그거 채집할 수 있는 사람 없잖아요."

"그러게. 이번 원정에 관해서는 워낙 알려진 게 없어서. 정보를 일부러 통제한 느낌이더라고."

"팀장님도 몰라요? 헌터 관리 2팀장인데?"

"…팀장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실망한 눈치의 공철을 보고 강인재는 황당한 얼굴을 했다.

팀장이라는 직급에 뭔가 큰 환상을 품고 있나 보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철은 일반 사원이니 팀장이 대단하게 보일 수 있겠으나, 사실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협회가 돌아가도록 쓰이는 톱니바퀴에 불과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저 그 크기가 조금 더 클 뿐.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국정원 쪽에 친하게 지내는 놈 하나 있어."

강인재는 실망스러워하는 공철의 주의를 끌었다.

공철은 눈빛을 반짝 빛냈다.

내가 부하를 키우는 건지, 애를 키우는 건지.

"그놈한테 물어봤는데."

"물어봤는데?"

"말해 줄 수 없다더라."

"네?"

"알긴 아는데 기밀이라 말해 줄 수 없다는 거지."

"아하."

모른다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공철의 표정이 나아졌다.

실망스러운 감정만 있었던 얼굴은 조금 달라져 '역시 팀장님'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강인재는 한숨을 내쉬고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 속 우채연 근처에서 레드 만티코어를 사냥하는 꽁지머리 남자를 발견했다.

"…저 꽁지머리 놈은 누구냐? 왜 우채연이랑 같이 있어?"

그가 알기에 우채연은 그동안 늘 혼자 시험의 탑 심사를 치렀다.

그녀를 알아본 헌터들이 말을 걸어도 대답 한마디 없이 무시하던 게 떠올랐다.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철벽을 떠올리게 했다.

협회 직원들도 괜히 잘 보이고 싶어 인사하러 나갔다가 무시당하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찾아가서 인사하고 오는 불상사를 저지르지 말라는 공문이 따로 내려올 정도였다.

"아, 이제 발견하신 거예요? 백도운이에요."

"백도운? 낯이 익은데… 아. 백도희 오빠 백도운?"

"네."

"그놈이 왜 우채연이랑 함께 있어?"

"저야 모르죠. 우채연이 먼저 아는 척을 하던데요?"

"우채연이?"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강인재는 놀라워하면서 화면 속 백도운을 자세히 살폈다.

백도운은 왼손을 뻗어 레드 만티코어가 버둥거리지 못하게 붉은 갈기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오른 검지로 만티코어의 대가리를 두들겨 팼다.

그럴 때마다 대가리가 깨지고 피가 철철 터져 나왔다.

"...."

"…저거 뭔데? 왜 되는 거야?"

난생처음 보는 기행에 그들은 어안이벙벙해졌다.

시험의 탑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는 입장한 사람의 수준에 맞춰 출현하는 가상의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쳐부수는 게 말이 되나?

뭘 잘못 본 걸 거야.

강인재는 눈을 비볐다.

두 눈을 몇 번 껌뻑인 후 모니터를 다시 들여다본다.

"...."

다시 확인한 보람은 없었다.

화면 속 백도운은 레드 만티코어를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사냥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기는 했다.

오른손으로 붉은 갈기를 붙잡고는 왼손 검지로 만티코어의 콧등을 두들겨 패고 있다는 점이다.

B등급 몬스터를 겨우 한 손가락으로….

"…무섭네, 무서워."

"네? 뭐가요?"

"그동안 저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거잖아. 전명환 같은 놈들이 쳐들어올 때까지."

"그러고 보니…."

강인재의 말에 공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에 따르면 백도운은 타 길드의 견제를 예상하고 대비하고자 무능한 척을 했다.

2년 동안 적의 습격을 대비해 자기 실력을 숨겨 온 것이다.

말도 안 된다며 믿지 않던 사람들도 그날 같은 장소에 있었던 백운천 소속의 두 길드원이 증언해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친 사람이네요."

"그래, 제정신이 아니지. 그러니까 이태천 그 미친 새끼랑 친구를 하는 거겠고."

"아직도 화가 안 풀리신 거예요?"

"아직 같은 소리 한다. 너 같으면 풀리겠냐? 대뜸 쳐들어와서는 천칭 길드에 의뢰한 놈들 밝히지 않으면 A등급 길드를 하나씩 없애 버리겠다고 한 미친놈인데."

"지랄하는 클라스가 남다르긴 했죠."

"장담하는데, 그딴 놈이랑 친구인 백도운 저놈도 정상은 아닐 거다."

그러면서 강인재는 화면 속의 백도운을 가리켰다.

그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짓을 벌이고 있었다.

검지와 중지로 번갈아 두드려서 만티코어의 대가리를 깨부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클리커형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듯했다.

공철이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었다.

"근데 천칭 길드에게 의뢰한 곳이 어디인지는 밝혀졌어요?"

"아니. 두 군데로 좁혀지긴 했는데, 그것도 확실치는 않아."

"두 군데나요?"

"'마인'이랑 '아이가이온'."

두 길드는 한국에서 이름난 A등급 길드였다.

특히 마인 길드는 한국 최대 길드로 이름이 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두 길드는 백운천 길드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는 길드는 아니었다.

갑질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하청을 맡긴 작은 길드의 사정을 봐주지 않아 악명으로 유명했다.

"듣고 보니 당연히 그곳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천칭 길드와 접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라 아닐 수도 있긴 해."

"그럼-"

"잠깐만."

"네?"

"저거, 지상욱 아니야? 왜 저기 있어?"

"지상욱이요?"

공철은 강인재가 가리키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레드 와이번과 레드 만티코어를 사냥하는 백도운과 우채연이 보였다.

별로 멀지 않은 곳에는 그들을 지켜보는 지상욱이 있었다.

***

[세계수 새싹은 졸렬한 시선이 느껴진다고 전합니다.]

[관리인 백도운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새싹이가 보내온 경고 메시지를 본 후 우채연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심사를 보는 거라 조금 걱정돼요.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시험의 탑에 들어오기 전에 그런 말을 하며 파티를 맺자고 하더니만….

걱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얼음 마법으로 와이번과 만티코어를 능숙하게 사냥했다.

완전 거짓말쟁이다.

뭐, 병실에 누워 있기만 했던 사람이 오랜만에 몸을 푸는 것일 테니 이해한다.

저렇게까지 사냥하는 데 집중하고 있으면 내게 신경을 쓰지도 못할 거고.

"오히려 잘됐어."

자리를 비워도 못 알아차릴 테니까….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졸렬한 시선을 그만 치워야겠다.

나는 조용히 우채연에게서 떨어졌다.

[새싹은 졸렬한 시선이 따라오고 있다고 전합니다.]

음, 예상대로 지상욱이 잘 따라오고 있는 모양이다.

빠른 걸음으로 5분 정도 걸은 후 주변을 돌아봤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멀리서 와이번을 공격하는 얼음 마법들만 보였다.

"나와."

"…알고 있었냐?"

지상욱이 바위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법 반반하다고 생각했던 얼굴은 이제 졸렬하게만 보였다.

손을 뻗어 나와 지상욱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놈은 내가 가리킨 카메라를 올려다봤다.

시험의 탑에는 여타 게이트들과 달리 저런 기계를 설치할 수가 있었다.

마나 압박이 전혀 없어 기계들이 닳아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와 협회가 협력해 조사팀을 꾸렸지만, 이유를 밝히지는 못했다.

이유는 모른 채 그럴 수 있고 또 되니까 써먹는 것이었다.

"카메라에 찍히고 있는 건 알지?"

"알고 있다. 문제 될 거 있나?"

"뭐?"

"난 그냥 인사나 하러 온 거다. 겸사겸사 몸도 좀 풀고."

"같이 몸 푸는 데 나는 동의한 거고?"

"당연히, 했지."

어깨를 으쓱이며 지상욱은 씩 웃는다.

아주 지랄도 풍년인 것이, 저 녀석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졸렬한 시선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다.

마족의 권속이라면서 벌레처럼 변태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대신."

주머니에 넣어뒀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면서 새싹이에게 돌멩이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세계수 새싹은 기쁜 마음으로 돌멩이를 전송합니다!]

"네가 시작한 거다."

그런 후 스마트폰 화면을 녀석에게로 내민다.

화면에는 세 이파리가 마치 머리와 팔처럼 보이는 새싹이 있었다.

커다란 양날 도끼를 꺼내 든 지상욱이 내 손의 스마트폰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흙 분수대가 되었던 모습을 떠올린다.

하늘 높이 솟아올라 돔 모양으로 떨어지던 흙을….

새싹이는 무언가를 전송할 때 온 힘을 다해 보내고는 한다.

지상욱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무슨 장난질-!"

빠악!

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지상욱의 목소리는 묻혔다.

당연히, 깨진 건 스마트폰에서 막 튀어나온 돌멩이가 아니었다.

돌멩이보다 못한 지상욱의 대가리다.

이마가 찢어져 흘러내리는 붉은 피는 코를 중심으로 두 갈래로 갈라졌다.

배팅머신이 된 기분인걸?

"이, 개자식이! 비겁하게 돌멩이를 던지, 크헉!"

빡! 빠악!

새싹이가 나를 위해 보낸 돌멩이는 하나가 아니다.

스마트폰에서 튀어 나간 돌멩이들이 놈의 이마와 코를 때린다.

이제 놈은 두 눈 부릅뜨고 돌멩이를 피하려 했지만, 회전이 걸린 돌멩이는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져 머리가 아니라 몸뚱어리에 박혔다.

직구인 줄 알았는데, 완벽한 변화구였다.

"이야, 우리 새싹이 투수해도 되겠는데?"

제40화

지상욱은 돌멩이에 총 7번 얻어맞았다.

안타깝게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이마와 코가 부러져 피를 줄줄 흘리고 눈이 퉁퉁 부어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정도?

저런 멍청이도 인간이긴 해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스켈레톤이나 마족의 권속 같았으면 돌멩이 한 방에 치명상을 입었거나 심하면 존재가 사라져 버렸을 텐데.

녀석은 그렇게 얻어맞아 놓고서도 기가 죽지 않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을 맞히고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따가 챙길 요량이었다.

새싹의 마나가 담긴 돌멩이니 분명 대단한 것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끄악! 제대로! 제대로 싸우지 못해, 이 개자식아!"

코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노발대발하는 꼴이 참 우습다.

놈에게 짐짓 당황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제대로? 우리 그냥 잠깐 몸 푸는 거 아니었어?"

"이, 썅!"

쾅!

놈이 분노를 터뜨리고자 거대한 양날 도끼로 바닥을 내리쳤다.

땅바닥이 크게 패인 것을 보니 확실히 위력은 충만해 보였다.

하지만… 저놈 정말 B급 헌터 맞나? C급 아니야?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양날 도끼를 휘두르는 속도가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저런 느린 속도로 도끼를 휘둘러서 레드 만티코어를 사냥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한 마리는 어찌어찌 사냥한다고 해도, 그 녀석들이 떼거리로 서식하는 한라산 게이트 솔로잉은 어려울 것 같다.

날개가 달린 만티코어는 여차하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면 그만이다.

"이 새끼! 장난질은 다 끝났냐?"

지상욱은 힐링 포션의 뚜껑을 거칠게 따며 소리쳤다.

벌컥벌컥 마시다가 반쯤 남은 포션을 열을 식힐 요량인지 머리에 부었다.

그러고는 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진 빈 병과 다르게 다친 얼굴이 더디게 회복되어갔다.

몸이 회복되어감을 느끼면서 녀석은 양날 도끼를 쳐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장난질에 힐링 포션 쓴 주제에 할 말이야?"

"이, 죽엇!"

"허, 나 죽이기로 한 거야?"

바보도 아니고, 죽이면 어쩌려는 걸까.

지금이라면 시비가 붙어 충돌한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

협회도 시험의 탑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떠들고 싶지 않으니 좋게좋게 해결하고 싶을 거다.

하지만 나를 죽여 버리게 되면 시비가 붙은 정도로 끝낼 수 없게 된다.

폭행 및 살인으로 헌터 자격증이 취소되고 교도소에 들어가는 거로 끝나면 다행이다.

내 동생과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을 녀석에게 선사해 주고자 온갖 노력을 다할 게 분명하다.

"시끄러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상욱은 양날 도끼를 휘둘러 댔다.

거대한 양날 도끼는 마구 휘둘러지는 정도라 피하기 쉬웠다.

어딜 노리고 있는지 빤히 보였다.

피하는 거로 끝내지 않고 반격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지는 않았다.

피하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이를 배워 노는 것처럼 녀석의 맹렬한 공격을 부드럽게 피해 냈다.

"촐랑."

"여기야."

"촐랑!"

"아니, 여기래도."

"움직이지 좀 마!"

사선으로 휘둘러지는 양날 도끼를 피하며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따스한 손길을 쓰지 않은 검지로 허리를 콕! 찌르자 놈이 '으흥!' 이상한 소릴 냈다.

B급 헌터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니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가지치기 전이었다면 도끼를 피해 내지 못했을 텐데.

아마 나무껍질을 이용해 공격이 통하지 않는 사실에 당황하게 만든 후 반격하거나 다치는 것을 불사하고 불나방처럼 공격했을 거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후욱, 후욱!"

양날 도끼를 휘두를수록 지상욱의 숨이 세차게 거칠어졌다.

가지치기의 위력이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껴졌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임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몸이 이렇게까지 매끄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팔다리를 재생성하는 것도 할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리 충고해 주지 않은 디싱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그 양반에게 매일 밤 저주의 말을 퍼붓겠다는 맹세는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 양반을 향한 증오의 말들이 떠오르고 있으니까.

"쥐새끼 같은 놈! 피하기만 할 거냐!"

"피하기만 해도 충분할 거 같은데? 숨 헐떡이는 꼴을 보니."

그 말을 듣고 지상욱은 양날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그건, 나를 벨 생각보단 물러나게 해 거리를 벌리려는 셈 같았다.

녀석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뭘 하려는 건지 지켜봤다.

무언가를 할 요량이니 거리를 벌린 거겠지.

녀석은 허리춤의 마법 주머니에서 둥근 약병을 하나 꺼냈다.

불투명한 유리병엔 불길함이 느껴지는 보랏빛의 액체가 찰랑거린다.

독? 기껏 하려는 게 독을 뿌리는 건가 싶었는데,

"…마셔?"

지상욱은 뚜껑을 뽕 따서는 벌컥벌컥 마셨다.

보랏빛 액체가 녀석의 입속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지금 상황에 마실 만한 포션이라면, 한 종류밖에 없다.

버프 효과가 있는 포션일 거다.

이제야 저 정도 실력으로 어떻게 한라산 게이트를 솔로잉 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눈 색깔이 보랏빛으로 변한 녀석을 보며 부러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약쟁이였어?"

"...."

사실, 녀석을 화나게 하려고 멸칭으로 부른 거다.

버프 효과가 있는 포션을 복용하는 행위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테로이드랑 달리 부작용도 없는 순수한 포션이라고 정부에서도 합법으로 인정한 건데 내가 뭐라고 나쁘게 보겠는가?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싸 구매할 생각은 해 본 적 없지만, 부족한 신체 능력을 보강해 주는 좋은 소비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

멸시하는 사람들도 그 이유가 순수한 힘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싫으면 마법사들에게 버프를 받지 말고, 능력 올려주는 마법 아이템도 끼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뿐이다."

그리 말하고는 지상욱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카메라에 찍히는 곳에서 도핑하는 모습을 보일 생각은 없었으리라.

흠. 아까와 달리 차분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니 더는 여유를 부릴 수 없을 것 같다.

아까보다 1.5배 정도 더 강해졌으려나?

허리춤에 단 마법 주머니에서 아르카 꺼내 어깨에 둘러멨다.

거대한 아르카를 보고 지상욱이 나를 비웃는다.

"목검? 그걸로 뭘 하겠다는 거냐?"

아르카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니 비웃는 것도 이해한다.

그 나무가 세계수라는 사실도 모를 테니까.

"이건, 검이 아니야."

"뭐?"

내 말을 듣고 나서 녀석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검이 아니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아무리 봐도 대검으로 보였으니까.

나도 유재이에게 듣기 전까지는 아르카를 대검으로만 생각했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아르보르 카풀루스."

"아르, 뭐?"

"칼자루란 뜻이다."

"칼자루? 대체 무슨 소릴 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칼자루…!"

마나를 불어넣는다.

아르카가 푸른 칼날을 뿜어 낸다.

지상욱이 입을 떡 벌린 채로 아르카를 하염없이 응시한다.

높이만 따졌을 때 3층 높이에 다다르는 칼날은 모습만으로도 위압감을 내비친다.

도핑한 덕분에 몇 배로 강해진 녀석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고양감에 취해서 위압감을 떨쳐 버린 것이다.

양날 도끼는 아까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이놈!"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녀석의 공격을 손쉽게 피할 수 있었다.

도핑해서 2~3배 빠르고 힘이 세진 지상욱을 상대로 전혀 달리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건 아르카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수 관련 아이템을 들고 있으면 신체 능력이 향상하는 세계수의 관리인 스킬 패시브가 발동한 거다.

가지치기 전에는 신체 능력이 향상됐어도 그리 큰 폭으로 느껴지지 않았었다.

지금은 확실히 신체 능력이 좋아진 것이 체감됐다.

"어째서! 어째서 닿지 않는 거야!"

그 사실을 모르는 지상욱이 절규했다.

도핑했는데도 아르카의 범위 안으로 파고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아르카의 푸른 칼날이 지상욱의 목에 닿았다.

녀석은 히익 소릴 내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계속할 거야?"

"…졌어! 내가 졌어! 그러니까 이것 좀 제발 치워 줘!"

"그래, 잘 생각했다."

녀석은 양날 도끼를 내려놓으며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아직 지지 않았다면서 더 난리를 피울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다르게 빨리 포기했다.

그때, 지상욱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검지를 내뻗었다.

이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눈은 뭐야?

"저거, 저거!"

"...!"

내 뒤에 나타난 그것은 아파트 상가 건물만 했다.

A등급 외눈박이 몬스터 '사이클롭스'였다.

같은 A등급에 같은 한눈이지만 유리 대포라고 무시 받는 왓쳐하고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었다.

저놈에게 살해당하고 다쳐서 은퇴한 헌터도 한 자릿수로는 다 셀 수 없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도 '통곡의 몬스터'다.

많은 A등급 헌터들이 저것을 사냥하지 못해 제대로 된 A등급 헌터 취급을 받지 못했다.

"저게 대체 왜 나타나는-!"

지상욱은 소리치다가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사이클롭스가 나타난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걸 깨달은 거다.

시험의 탑이 내가 저걸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A등급 헌터들에게 통곡의 몬스터라고 불리는 사이클롭스를.

"내가, 저놈을…?"

붉은 눈의 사이클롭스를 올려다본다.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오른손에 쥔 나무 몽둥이를 휘두른다.

몸을 풀기 위한 단순하고 간단한 팔 동작이다.

그런데도 푸른 칼날을 만든 아르카처럼 거대한 나무 몽둥이는 지상욱이 휘두른 양날 도끼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땅에 박혔다.

또 폭탄을 터뜨린 듯한 굉음을 내며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냈다.

"이 자식이!"

그것은 곧바로 나를 향해 나무 몽둥이를 휘둘렀다.

마치 한 번의 팔 동작으로 인사를 끝냈다고 말하는 듯하다.

내가 정말 저걸 쓰러뜨릴 수 있는 건가?

그런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나와 사이클롭스의 전투는 시작됐다.

***

우채연은 지온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변 몬스터들을 마구 사냥하는 바람에 그가 자리를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걸 사과하기 위해 쫓아가려는 순간 그를 먼저 뒤쫓는 남자를 발견했다.

"저 남자는 분명…."

그녀는 남자가 아까 대기줄에 앉아 있던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가 자기 때문에 귀찮은 일에 휘말렸음을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으로 단번에 알아차렸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 남자를 치워 버리려고 했는데, 이따금 지온이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고 그만뒀다.

지온은 남자가 뒤쫓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천재라고 칭찬을 받아온 그녀도 지금까지 미행당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도.

그는 어떻게 알아차리고 유인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조금만 더 지온을 지켜보기로 했다.

"…대단해."

가만히 지온을 지켜보던 채연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는 아주 능숙하게 자기보다 실력이 낮은 상대와 겨뤘다.

그 모습은 마치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도록 가르쳐 주는 듯했다.

몇 분이 지난 후 감탄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사이클롭스의 공격을 저렇게 막아?"

우채연은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오빠가 "늘 놀라움을 주는군요"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그녀에게 계속 새로운 놀라움을 주었다.

대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칼자루였다는 것도 놀라웠다.

하지만 더욱더 그녀를 놀라게 한 건 수많은 A급 헌터를 은퇴하게 만든 사이클롭스를 단신으로 상대하는 모습이었다.

지온은 폭탄을 터뜨린 것 같은 구덩이를 만들어 낸 사이클롭스의 공격을 아무 피해도 없이 막았다.

그 공격을 막아내느라 충격이 컸을 텐데도 바로 돌진해 반격을 꾀하기도 했다.

백도운과 사이클롭스의 서로 물러나지 않는 공방을 보면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의문을 중얼거렸다.

"지온…. 저 사람 대체 정체가 뭘까?"

우채연은 저런 실력의 소유자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남자는 한라산 게이트를 솔로잉 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였다.

그런데도 지온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오빠에게서 듣기 전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그것이 궁금했던 우채연은 지온이 어떤 사람인지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녀는 그의 이름이 지온이 아니라 백도운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는 것이었다.

제41화

부푼 기대를 끌어안고 새로 발급받은 헌터 자격증을 확인했다.

[백도운, B급 헌터]

B급이라는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굵게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음, 착각일 거야.

혼자서 사이클롭스까지 사냥했는데 어째서 A급 헌터가 아닌 걸까.

실망스러운 마음에 한숨이 절로 푹 나왔다.

"후우… 대체 어째서?"

"괜찮으세요? 어, 아마 아주 조금 부족한 B등급일 거예요. 그러니까 힘내세요. 네?"

옆에서 헌터 자격증을 확인한 우채연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어설픈 위로였지만, 그 덕분에 실망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있었다.

대신 부끄러운 마음이 피어났다.

그녀는 17살인데도 어른스러운 태도로 26살인 나를 위로해 줬다.

심지어 자기도 B등급 판정을 받았는데.

정말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모르겠군.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음, 괜찮아요. 신경 써 줘서 고맙습니다."

"헤헤, 네…."

싱긋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다가 생각에 빠져 들었다.

B급으로 책정된 이유에 대해서다.

시험의 탑 심사는 신체 능력과 전투 능력을 측정한다.

나는 단신으로 사이클롭스를 쓰러뜨렸으니 전투 능력에선 A를 받았을 거다.

그런데도 B급이 나왔다는 건, 신체 능력에서 A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아르카를 쥐었을 때와 쥐지 않았을 때 신체 능력에 차이가 생겨서 그런 것 같다.

아르카를 쥐어 상승한 신체 능력을 버프 스킬 효과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우채연이 B등급 판정을 받은 것도 그런 이유일 터.

그만큼 뛰어난 얼음 마법을 보여줬는데도 B급 판정을 받은 걸 보면 신체 능력에서 A급 헌터 자격을 넘지 못한 거겠지.

물론, 금방 자격을 얻게 되겠지만.

그녀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A급 헌터가 될 거다.

그녀의 재능에 일대 그룹의 자본력이 더해질 테니까.

"아, 참. 돌멩이들은 왜 주운 거예요?"

"네? 아, 그거요?"

그녀는 내가 사이클롭스를 잡은 후 돌멩이를 줍고 있을 때쯤 도착했다.

뭘 하는 거냐고 묻는 그녀에게 나는 그냥 돌멩이를 줍고 있다고만 설명했다.

돌멩이를 줍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이다.

지상욱은 이미 꼬리를 말고 도망친 뒤였다.

사이클롭스를 쓰러뜨릴 수 없을 거라 판단하고 도망쳐 버린 거다.

뭐, 어차피 녀석은 제가 한 짓이 카메라에서 다 찍혔으니 알아서 페널티를 받을 터였다.

"그냥 취미 생활이에요."

"…음, 그렇군요."

취미 생활일 리가 있나.

우채연도 그걸 알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그녀의 오빠가 그랬듯이 나를 배려할 생각으로 그냥 넘어간 거다.

정말, 아까부터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모르게 만드는 아이다.

우연후야 한 길드의 마스터인 데다가 기업 부회장으로서 생활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겨우 17살이다.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나 17살 때는 어땠더라?

"...."

"오늘 시간 어떻게 되세요?"

"시간이요?"

"네. 생명의 은인이신데, 보답할 기회는 주셔야죠."

"어, 이미 충분히 받았는데요?"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받았다.

보수로 50억이라는 큰돈을 받았고, 테스트용이었던 설지초도 챙겼으며, 최고급 승용차 한 대도 받았다.

그러고 보니 테스트로 받았던 설지초를 완전히 깜빡 잊고 있었다.

상성을 알아본 후 복용할지 말지 정해야겠다.

상성이 좋지 않은데 복용했다간 사달이 날 테니까.

"제 마음이 편할 만큼 드리지 못했으니, 부족한 거죠."

"...."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녀는 역시 우 씨 집안사람답다.

어쩜 제 아버지와 오빠와 똑같은 말을 하는지.

이번 일로 가장 크게 얻은 건 우 씨 집안사람들과 안면을 텄다는 것 같다.

이렇게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내 주가는 오르고 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사람들 시선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부담스러워서, 원.

"시간이야 있기는 한데요."

"잘됐네요! 식사 대접하고 싶었는데."

그러고는 우채연은 해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는 얼굴을 보니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다.

"아…."

"...?"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뭐 때문에 저러나 싶어 봤더니, 그녀의 시선 끝엔 기가 팍 죽은 지상욱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수군거렸지만, 그는 시험의 탑에 입장하기 전처럼 으스대지 않았다.

어깨를 움츠러뜨리며 자격증 발급처를 조용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힐끔힐끔 나를 보는 게 내 시선을 끌지 않도록 노력한 것 같다.

이미 들켰지만.

우채연이 싸늘한 표정과 목소리로 물었다.

"한마디 쏘아붙이고 올까요?"

"괜찮아요."

저렇게 기죽어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하다.

상처에 더 소금을 뿌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이번 일을 반면교사 삼아 정신 차리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상한 놈을 만나서 살해당하게 될 테니까.

17살의 백도운 같은 놈.

"좋지 못한 거 그만 보고, 좋은 거 먹으러 갑시다."

"네, 그래요!"

나와 우채연은 자격증 발급처를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지상욱이 벌써 사고를 친 건가?

싶어 쳐다봤는데,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그놈 때문이 아니었다.

차 2대가 서 있다.

차에 대해서 잘 모르는 문외한이 봐도 최고급 승용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걸 보자 우채연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럽게 정말…."

"아하하."

우채연이 그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차 앞에는 김민주와 오주한이 각각 서 있었다.

차 2대는 일대 그룹이 보낸 거였다.

남남인 나도 민망한데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그녀는 오죽할까.

그들이 막 발급처를 빠져나온 우리를 발견하곤 다가왔다.

사람들 시선이 그들을 따라 나와 우채연을 향했다.

"심사는 잘 치렀냐?"

"아빠가 시켰어요?"

"아니, 네 오빠가."

"오빠가요?"

"어."

우채연이 앙칼지게 묻고 오주한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는 복면을 쓰지 않은 사복 차림이었다.

복면을 벗으니 날렵해 보였던 인상은 느긋한 인상이 되어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지온."

"어떻게 알았어요?"

"네? 그야 꽁지머리 때문에 알았죠. 머리끈이랑."

"...."

이놈의 꽁지머리 잘라 버리든가 해야지, 원.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오주한이 내민 손이나 맞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채연이 말했다.

"어쨌든 두 분 잘 왔어요. 밥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가요."

"이 대리도 부를까요?"

김민주를 보며 질문했다.

그녀는 눈을 살짝 크게 떴고, 우채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대리? 그게 누구예요?"

"있어요. 돈 무지하게 밝히는 놈."

"그런 사람을 뭐 하러 불러요?"

그리 물으면서 우채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 원래라면 부르지 않고 상종도 하지 않는 게 맞지.

씨익 웃으며 김민주를 바라봤다.

오주한도 알고 있는지 히죽 웃었다.

"…그럴 수는 없을 거 같아요."

"...?"

음? 뭐지?

김민주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사뭇 진지한 태도를 이어 나갔다.

평소처럼 다른 모습에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그녀는 뒤에 있는 차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는 집으로, 도운님은 재이네 대장간으로 가셔야 해요."

차가 두 대나 온 이유가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한 대는 나를 한 대는 우채연을 데리러 온 것이다.

우채연은 그렇다 쳐도, 나는 왜 데리러 온 걸까.

무슨 일이라도 났나?

엄청나게 큰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 거다.

그랬으면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진 않았겠지.

"왜 집으로… 도운?"

"도운?"

우채연과 오주한이 내 이름을 되뇌었다.

뭐야, 둘 다 내가 백도운이란 걸 몰랐던 거야?

어쩐지 지온이라고 부르더니 그 이유가 있었군.

"언니 왜 아가씨라고 해? 무슨 일 있는 거야?"

"...."

"정말, 맨날 나한텐 말 안 해 주지!"

우채연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김민주를 보며 토라진 체를 했다.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보였다.

다음에 "제대로 대접할게요"라는 말을 덧붙인 후 차 뒷자리로 걸어가 탑승한다.

오주한이 그녀를 따라가 조수석에 탑승했고 차는 곧 출발했다.

김민주는 나를 뒤쪽에 있는 차에 태웠다.

나는 뒷자리, 김민주는 조수석에 탑승했다.

"도련님이 무갑산에서 건물 잔해에 깔린 상자를 찾았고, 현재 재이네 대장간으로 이동 중이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벌써 찾았답니까?"

"네. 그 상자에 그게 들어 있지 않을까 예상되며, 그게 아니라도 상자에 넣어 둔 걸 보면 중요한 것 같다고도 말씀했어요."

그게.

그리 말한 걸 보면 그녀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는 듯하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해도 공과 사는 구분하는 거겠지.

김민주가 도련님이나 아가씨라고 하는 것도 그걸 구분하기 위해서겠군.

"흠, 그렇군요."

"...."

"근데 나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았어요?"

백미러를 통해 조수석에 앉은 김민주를 바라봤다.

그녀는 시선이 마주쳤으면서 스리슬쩍 피했다.

"설마 나한테 미행 붙여 놨어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모셔 오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랍니다."

질문에 그리 대답하면서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따듯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하지만 난 저 미소가 연기라는 걸 안다.

생각해 보면 우연후는 내가 재이네 대장간에 있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날 찾아왔었다.

아마 내게 사람을 붙여 놨을 거다.

이 대리, 너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민주 씨 아주 무서운 여자야.

***

[Closed]

푯말이 걸린 대장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간다.

김민주는 건물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해서 혼자 들어갔다.

들어가니 유재이, 우연후, 김지연, 심윤진이 있었다.

유재이는 혼자 계산대에 앉아 있고, 나머지 세 명은 검은 상자를 가운데에 두고 서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

뭔가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대장간에 들어온 나를 발견한 우연후가 손을 들어 보인다.

"왔습니까?"

"앗, 안녕하세요."

김지연과 심윤진도 인사를 건네와 그들과 짧게 인사를 나눴다.

그 후 유재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나뭇잎 한 가닥을 목덜미에 갖다 댄 채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으으… 왔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인사를 건네온다.

몸 지키라고 준 나뭇잎을 왜 목 안마기처럼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뭐 해?"

"보면 몰라? 안마하잖아."

"아니, 그건 아는데. 그걸로 왜 그러고 있냐고."

"시원해서. 당신도 한 번 해 볼래?"

그러면서 유재이는 내게 나뭇잎 한 가닥을 휙 던졌다.

내 손에 부드럽게 안착한 나뭇잎을 가만 지켜보다가 그녀처럼 목덜미에 둘렀다.

어라, 이거 진짜 시원한데?

"…상자엔 마법이 걸려 있더군요."

우연후가 끼어들었다.

"그 덕분에 건물이 무너져도 멀쩡할 수 있었지만-"

"그 때문에 열지 못하고 있는 거고요?"

"네, 그렇습니다."

검은 상자를 내려다봤다.

상자는 열릴 생각이 없다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

"내가 마법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잠금 마법은 간단한 거 아닙니까?"

"맞아요."

심윤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표정을 보니 내가 그런 질문을 할 것을 예상한 듯했다.

"잠금 마법만 걸려 있다면 잠금 해제 마법으로 풀었을 거예요. 하지만 여기엔 열쇠 마법도 같이 걸려 있어요."

"열쇠 마법?"

"네. 이 상자를 열려면 열쇠가 필요해요."

"그 열쇠는…."

우연후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자는 찾았어도 열쇠는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검기로 상자를 베어 버리면요?"

"가능해요."

"오, 그럼-"

"열쇠 마법의 영향으로 속에 있는 것들이 다 파괴돼 버리겠지만요."

"...."

좋다 말았네.

검기로 안 된다면 마법으로 부수는 것도 안 된다는 거다.

흠, 잔해 속에서 열쇠를 찾아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새싹이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세계수 새싹이 관리인 백도운에게 돌멩이로 상자 자물쇠를 내리치라고 조언합니다.]

...?

뭐로 뭘 내리쳐?

[새싹은 돌멩이로 혐오스러운 기운을 담은 마법을 없애 버리라고 조언합니다!]

제42화

[세계수 새싹이 관리인 백도운에게 돌멩이로 상자 자물쇠를 내리치라고 조언합니다.]

조언을 따르기 위해 마법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냈다.

지금까지 새싹이의 조언을 따라서 잘못된 적은 없었다.

사람들 모여 있는 곳에서 흙을 뿌려 버리라는 둥, 돌멩이를 던져 버리라는 둥,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있었을 뿐.

새싹이는 언제나 날 위해 조언해 주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다.

당황한 사람들이 나와 손에 들린 돌멩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돌멩이?"

"웬 돌멩이?"

그들이 당황하는 걸 이해한다.

갑자기 돌멩이를 왜 꺼내나 싶겠지.

나도 새싹이가 조언하지 않았으면 꺼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흐흐, 어쩌면 좋을까.

그들의 당황스러움은 곧 배가 될 터였다.

돌멩이로 빠르게 자물쇠를 후려쳤다.

마치 원시인이 짐승의 대가리를 깨부수듯이.

깡!

"아악!"

"도, 도운 씨? 뭐 하는 거예요!"

돌멩이로 자물쇠를 후려친 소리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는 소리에 묻혔다.

그들을 무시한 채 손에 들린 돌멩이를 바라봤다.

빠각 소릴 내며 반으로 쪼개진다.

손에 들리지 않은 반 쪼가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새싹은 한두 번으로는 부족하니 계속 시도하라고 조언합니다.]

마법 주머니에서 두 번째 돌멩이를 꺼냈다.

돌멩이는 6개나 더 남아 있다.

총알은 아직 충분하다.

자물쇠를 내리치려고 다시 팔을 들어 올리자 심윤진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바라보니 눈을 부릅뜨며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안 돼요! 안에 있는 거 다 파괴할 생각이에요?"

"아뇨, 자물쇠만 부술 생각인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되는지 안 되는지는 해 봐야 아는 법!"

방심한 심윤진의 손을 뿌리치고 자물쇠를 내리쳤다.

깡!

내리치는 소리와 심윤진이 기겁하는 소리가 함께 울려 퍼진다.

이번에도 자물쇠는 멀쩡했고, 돌멩이만 반으로 쪼개졌다.

새싹이는 한두 번으로 안 된다고 했었다.

계속 시도해 봐야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심윤진이 내가 돌멩이를 또 꺼내자 "왜 자꾸 나오는 거야!"라며 기겁했다.

그러고는 내 손목을 꼭 붙잡고 우연후와 김지연에게 소리쳤다.

"뭐 해요, 언니! 안 말리고!"

"아, 어, 어!"

당황의 늪에 빠져 있던 김지연은 심윤진을 돕기로 한 듯하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돌멩이를 빼앗고자 팔을 뻗었다.

손을 빙글 돌리는 바람에 손등을 붙잡게 됐지만.

A급 헌터 둘이 내 손목을 붙잡고 있어선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줘서 아래로 내리다가도 두 사람의 힘에 밀려 올라갔다.

그녀들은 궁수랑 마법사인데도 힘이 굉장했다.

그 고착 상태를 유지하면서 우연후를 바라봤다.

지금 상황에 그까지 끼어들면 돌멩이로 내리칠 수 없을 터였다.

다행히 그는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깐만, 두 사람 그만해 봐."

"네? 하지만…!"

우연후는 반발하는 심윤진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을 살살 흔들었다.

아래쪽으로 살살 누르는 듯한 동작을 보고 심유진은 숨을 후 내뱉었다.

그러고는 김지연과 함께 동시에 내 손목을 붙들던 손을 뗐다.

생각을 끝낸 그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도운 씨, 무슨 생각이 있는 겁니까?"

아뇨, 아무 생각 없는데요.

새싹이가 해 보래서 하는 것뿐입니다.

"네, 그럼요. 설명하기 좀 어렵지만."

"흠…."

내 말에 우연후는 다시 고민에 빠져 들었다.

심윤진이 그의 앞으로 걸어가 나를 말려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이 기회-

"...."

"...."

돌멩이를 쥔 손을 높이 쳐든 순간 김지연이 몸을 숙였다.

자세를 보니 자물쇠를 내리치려고 하면 내게 태클을 걸 생각인 듯했다.

당신 궁수면서 왜 태클을 걸려고 하는 건데.

누가 보면 레슬링 선수인 줄 알겠네.

손을 천천히 내리자 그녀는 반대로 몸을 일으켰다.

슥,

"...!"

"...."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보며 다시 손을 들었다.

그녀가 아주 빠른 속도로 태클 준비를 하는 바람에 자물쇠를 내리칠 수 없었다.

아, 이게 안 통하네.

우연후가 그런 나와 김지연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버려 둬."

"네?"

"도운 씨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고."

"하지만…!"

까앙!

심윤진과 김지연이 당황하는 순간을 이용해 돌멩이를 자물쇠에 내리쳤다.

세 번째 돌멩이가 반으로 쪼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들은 나를 말리고 싶었지만, 우연후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흠, 남은 돌멩이는 네 개였다.

남은 거로 충분하려나?

"대체 저건 왜 자꾸 나오는 거야…."

"몰라, 묻지 마요."

마법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내 연달아 계속 내리쳤다.

그녀들은 돌멩이를 자꾸 꺼내는 나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일하게 유재이만 나뭇잎을 내려놓고 내 옆으로 와서 돌멩이를 이리저리 살폈다.

아마 이 돌멩이가 평범한 돌멩이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감정해 보고 있는 걸 거다.

"헤, 이거 굉장한걸?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그녀가 감탄하는 소리는 6개째 돌멩이가 깨진 소리에 묻혔다.

마지막 7번째 돌멩이를 꺼냈다.

아, 이것마저 부서지면 나가린데.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은 채 마지막 돌멩이를 자물쇠에 힘껏 갈겼다.

깡! 파각, 우르르…!

[새싹은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자물쇠가 으스러지는 걸 보고 나도 새싹이처럼 속이 시원해졌다.

"헉!"

"저게, 저게 어째서?"

심윤진과 김지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연후도 놀란 듯 눈이 살짝 커져서는 나를 쳐다봤다.

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묻고 싶은 눈치다.

설명해 주는 대신 씩 웃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옅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럴 줄 알았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명을 요구하지 않아 다행이다.

상자에 걸려 있는 자물쇠 잔해를 치우고 상자를 연다.

우연후 일행도 상자를 둘러앉아 안을 살폈다.

"이건, 포션인가?"

"이 고철 덩어리들은 어디에 쓰는 거려나?"

"보석…이 아니라 마법석이네요."

상자에는 많은 잡동사니가 담겨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 용도를 모르겠는 고철 더미들, 탁한 마나가 담긴 마법석, 우리가 찾고 있던 열쇠 제작도 등등.

[새싹은 물품들에서 혐오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고 경고합니다,]

그 경고에 사람들이 만질 수 없도록 상자를 다시 닫았다.

물론, 닫기 전에 반의반으로 접혀 있는 열쇠 제작도를 꺼냈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무시한 채 그것을 쫙 펼쳤다.

과연, 열쇠 제작도답게 열쇠가 그려져 있다.

검은 건 제작도요, 흰 건 여백이니.

이게 다 뭘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므로 전문가에게 맡겼다.

유재이에게 제작도를 내민다.

그녀는 돌멩이들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두 손을 탁탁 턴 후 건네받은 제작도를 살폈다.

"...?"

제작도를 살펴보던 그녀는 눈을 찌푸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기도 했다.

"이거 평범한 열쇠인데?"

"평범한 열쇠라고?"

그녀처럼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게 왜 평범한 열쇠란 말인가?

분명 그녀가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열쇠일 줄 알았는데.

"잘못 본 거 아니에요?"

심윤진의 질문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선을 넘은 질문이어서다.

전문가에게 잘못 봤다고 물으면 참도 좋아하겠다.

우연후와 김지연이 당황하며 심윤진을 돌아봤다.

"...."

유재이는 눈을 치켜뜨며 심윤진을 노려봤다.

날 크라우드라고 오해했을 때 봤던 눈빛이었다.

적을 향해 달려들기 직전의 조용히 타오르던 눈빛.

나는 손을 올려서 유재이의 눈두덩을 덮었다.

"…뭐 해?"

"왜 평범하다는 건데?"

그 상태를 유지한 채로 질문했다.

유재이는 그 상태로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네파' 꼬리, '라바피시스' 심장, '스트리가' 브로치."

네파는 사막에서 사는 전갈 몬스터.

라바피시스는 용암에서 사는 거대 물고기.

스트리가는 언데드가 된 마녀다.

한국에선 출현하는 게이트가 없는 몬스터들이다.

네파는 몽골, 라바피시스는 미국, 스트리가는 노르웨이였던가?

"그것들이 왜?"

"웬만한 대장장이들은 다룰 수도 없는 고급 재료들이지, 만."

"이지만?"

"꼭 내가 다룰 필요는 없어. 제작도를 보면 알 텐데-"

"봐도 모르는걸."

"아, 그렇구나. 으음, 재료에 마나를 불어넣는 기술이 있는 대장장이라면 만들 수 있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만들 수 있으니까 평범한 열쇠라고 한 거고."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유재이의 눈두덩을 덮었던 손을 치웠다.

그녀는 아까처럼 타오르던 눈빛은 사라지고 평소처럼 무료한 눈으로 돌아왔다.

우연후와 김지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윤진은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듯했다.

A급 헌터라도 애는 애군.

"이유를 알게 될 줄 알았더니, 더 오리무중인걸?"

"더 알아보는 수밖에요. 혹시 제작도와 상자 속에 있는 것들 저희가 가져가서 조사해 봐도 되겠습니까?"

우연후의 물음에 제작도를 든 유재이는 나를 쳐다본다.

내 의사를 묻기 위해서다.

부러 고민하는 척하다가 김지연과 심윤진을 쳐다봤다.

"두 분 식사하셨습니까?"

"…네?"

뜬금없는 질문에 둘은 당황하며 되묻는다.

미소를 지은 채로 질문에 대답해 주길 기다렸다.

"아니요. 아직입니다."

대답한 건 그 둘이 아니라 우연후다.

아마 내가 질문한 이유를 파악했기 때문이리라.

잘됐군.

대장간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식사하고 오시죠. 그동안 이곳은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네."

나와 우연후는 빙긋 웃었다.

그런 후 그는 지금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2명을 데리고 대장간을 나갔다.

대장간의 미닫이문이 닫히자 유재이가 물었다.

"경호, 계속 받아야 하는 거겠지?"

사실 열쇠의 정체를 알게 되면 결론이 날 줄 알았다.

하지만 열쇠 제작도를 봐도 크라우드가 그녀를 노리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 경호를 계속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신을 위해서니까 감수해."

"으아, 내가 아니어도 되는데 왜 나 갖고 그러는 거야!"

유재이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러고는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들을 줍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를 도와 부서진 돌멩이 조각들을 주웠다.

"근데 저 사람들은 왜 내보낸 거야?"

"이거 좀 물어보려고."

"어? 저 사람들 당신이 세계수 아이템을 갖고 다니는 걸 몰라?"

"자랑하며 떠들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그리 묻자 그녀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주운 돌멩이 조각들을 그대로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작은 돌멩이를 하나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거, 따지고 보면 평범한 돌멩이야."

"그래?"

"세계수 에너지가 담겨 있는 돌멩이라는 게 포인트지만. 그래서 아까 같은 짓을 할 수 있었던 거고."

그녀는 돌멩이에 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세계수의 마나로 인해서 마법 자체를 공격하는 게 가능해. 돌멩이가 조금만 더 컸으면 실드 마법도 부술 수 있을걸?"

"실드 마법을 깨부수는 돌멩이라…."

돌멩이가 그 정도인데, 바위에 세계수의 마나가 담기면 어떨까.

무슨 짓을 할지 벌써 아찔하다.

[새싹은 관리인이 원한다면 지금 바위를 전송해 보겠다고 말합니다.]

응?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새싹아.

그런 엄청난 걸 갖고 있어도 지금 당장 쓸 데도 없는걸.

[새싹은 관리인에게 바위 전송을 시작합니다.]

[3, 2….]

뭐? 아니, 잠깐-

[새싹은 농담이라고 말합니다.]

…새, 새싹아?

너 설마 잎 하나 자랐다고 사춘기 온 거니?

제43화

이태천과 백도희는 진중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길드 마스터실에서 나누는 대화지만, 그들의 대화 주제는 길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둘의 대화 주제는 그의 친구이자 그녀의 오빠인 백도운에 관한 것이다.

이태천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탁자에 있던 홀로그램 영상기에서 영상이 떠올랐다.

숲에서 빠져나오는 백도운의 모습이었다.

옷이 온통 피에 젖어 크게 다친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상처는 전혀 없었다.

"화염산 던전에서 찍힌 모습이야."

"역시…. 예상대로 던전을 숲으로 바꾼 건 오라버니였군요."

"응. CCTV 영상을 다 찾아봤는데, 도운이밖에 찍히지 않았어."

"영상은요?"

"모조리 챙겨 왔지. 원본은 다 삭제했고."

이태천이 자신만만하게 USB를 들어 보였다.

손가락의 손톱만 한 크기의 USB는 곧 그의 검지와 엄지에 짓눌려 으스러졌다.

가루가 돼 버린 USB는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다른 데선 확인하지 못할 거야."

"잘했어요."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된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태천이 말한 '다른 데'는 다른 길드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와 헌터 협회를 뜻했다.

세계 최초로 던전이 숲으로 바뀐 현상이 벌어졌다.

정부와 협회는 어떻게 해서든 그 이유와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애쓸 것이다.

영토가 넓어 게이트를 다 관리하지 못하는 나라에 아주 강력한 무기로 쓰이리라.

세상엔 던전이 되어 원래의 용도로 쓸 수 없는 땅이 너무나 많았다.

"스마트폰에 있던 세계수…."

"응?"

"그것의 능력이겠죠?"

"아마 그렇겠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이태천은 팔짱을 끼면서 홀로그램 영상을 들여다봤다.

영상 속 백도운은 재이네 대장간에서 나와 차를 타더니 몇 분 후 출발했다.

재이네 대장간, 재이네 대장간….

영상을 보던 그는 불쑥 말을 내뱉었다.

"도운이 화염산 던전으로 가기 전에 재이네 대장간에서 출발하던데, 둘이 연애하나?"

"…네?"

"응?"

이태천이 툭 던진 말에 백도희가 그를 응시했다.

부릅뜬 두 눈은 흰 눈에 박힌 보석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꼈다.

팔짱을 낀 두 팔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의식에 각인돼 버린 공포였다.

"어, 도희야?"

"지금 도운 오라버니가 누구랑 연애하는지가 중요해요? 오라버니를 노리는 놈들이 우후죽순 늘어날지도 모르는 이 판국에?"

"아니, 잘 생각해 봐. 이것도 중요해. 도운이가 유재이랑 사귀는 거면 드디어 모솔 탈출하는 거라니까?"

쾅!

백도희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태천은 말을 이어 나가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중요한 이야기해요. 중요한 이야기."

"어, 응. 그래, 그러자."

그러고 나서 5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백도희였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사과한 후 말을 이어 나갔다.

"일단, 이 일은 우리만 아는 비밀로 해요."

"그래야지. 도운이가 했다는 걸 정부나 협회가 알면 이용하려고 할 게 뻔한데."

"하아…. 대체 오라버니한테 왜 이런 엄청난 능력이 나타난 걸까요?"

"글쎄, 잘 모르겠다."

"...."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알아."

이태천은 오른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우리가 도운이를 지켜야 한다는 거…."

2년 전과는 다르게.

이태천은 말끝을 흐렸지만, 그녀는 그가 하려던 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가 무력감을 느꼈을 당시 그 옆에서 함께 절망과 좌절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백도희는 피로 흠뻑 젖은 채 차에 올라타는 영상 속 백도운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결연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

"오라버니, 김상철과 이재욱 그 두 사람 올라오라고 하세요."

"시킬 거 있어?"

"네. 역시 위치추적기만으로는 안심이 안 돼요."

"...."

그거 정말로 달아 놨었구나.

이태천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빙긋 웃었다.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도운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위치추적기 알아내서 가르쳐 줄게.

이런 일에 있어서 태천은 늘 백도운의 편이다.

***

운전하는 와중에 갑자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평범한 풍경만 보였다.

신호에 막힌 차들과 신호가 바뀌어 출발하는 차들만 있었다.

난 신호가 바뀌어 출발하는 차 쪽이었다.

풍경과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목적지를 확인했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유재이가 추천해 준 '포션 메이커'는 가산 디지털 단지에 거주했다.

세계수 나뭇잎을 보여 줘도 다른 데 가서 떠들지 않을 사람이라고 덧붙였는데,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좀 웃겼다.

자기처럼 좁은 인맥의 소유자라서 다른 데 가서 떠들 곳이 없다는 거였다.

세상엔 인터넷이라는 넓은 세상이 있는데 말이다.

크라우드 아지트에서 찾았던 상자 속의 보랏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도 챙겼다.

세계수 나뭇잎을 보여 주면서 그 내용물도 확인하기 위해서다.

"버프 포션이긴 한데, 정확하게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어. 내 감정 스킬로는 무리야."

유재이가 감정 스킬로 액체를 확인했을 땐 그런 결과가 나왔다.

사실, 버프 포션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시험의 탑에서 지상욱이 마시던 것과 비슷했다.

상자에서 나온 유리병 쪽의 액체가 더 진한 보랏빛이긴 했지만.

유재이는 전문가에게 가는 길이니 가져가서 정확한 감정을 받아 보라고 조언했다.

우연후에게는 결과를 말해 주겠다고 말한 후 챙겨왔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경로 안내를 종료합니다.]

"…여기야?"

도착한 곳은 산업단지가 끝나기 직전의 낡고 허름한 2층 건물이었다.

2층밖에 안 됐지만, 옆에 건물 주차장이 있어 그곳에 차를 댔다.

건물에는,

[수정 공방, 포션 제작 및 아이템 감정 전문!]

이라고 쓰인 네모난 간판이 붙어 있었다.

간판은 처음 제작한 이후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는지 다 낡아 빠졌다.

유재이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절대 찾아오지 않았을 외양이다.

간판 이름인 수정은 유재이가 소개한 사람의 이름이다.

홍수정이었던가?

녹이 슨 초록색 철문에 달린 초인종을 누르고 몇 초간 기다렸다.

"흠. 없을 리가 없는데?"

유재이가 대장간을 나서는 내게 연락해 두겠다고 말했었다.

자리를 비웠다면 분명 내게 연락을 해 줬을 것이다.

또 한 번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다.

할 수 없이 초인종을 누르는 동시에 철문을 쿵쿵 두드렸다.

"유재이 소개로 왔습니다! 없습니까?"

"…요!"

그제야 철문 안쪽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들려온 건 "요"뿐이었지만, 아마 "나가요"라고 말한 걸 거다.

이어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

서둘러 나오다가 무언가를 쓰러뜨린 듯하다.

철문 뒤쪽에서부터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소리가 아주 많이 가까워졌을 때, 철문이 끼익 열렸다.

"죄송해요, 소리 못 들었어요! 어,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커다란 둥근 안경을 쓴 젊은 여자가 나와서는 밝게 인사했다.

수정 공방의 사장인 홍수정이다.

그녀는 안경 렌즈가 어찌나 두꺼웠는지, 눈이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보이지 않는 눈은 내 오른손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와, 정말 게임 하고 있네?"

유재이에게 나에 관한 얘기를 들었는지 그런 말을 했다.

아하하 웃으며 오른손을 살짝 뒤로 물렸다.

왜 괜한 소릴 해서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거야.

"아, 이럴 게 아니지. 들어오세요!"

그러면서 홍수정은 건물 안쪽으로 먼저 들어갔다.

따라 들어갔는데, 그녀가 나오면서 왜 우당탕거렸는지 깨달았다.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됐다.

건물 내부는 온갖 책과 포션 제작에 필요한 여러 도구로 가득 차 있었다.

포션을 만드는 공방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연구실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재이한테 연락 왔을 때 깜짝 놀랐잖아요."

"놀랐다고요?"

"설마 사람을 소개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것도 남자라고 해서 믿을 수가 없었어요."

"어이쿠. 둘이 친구예요?"

책이 가득 쌓인 통로를 나아가다가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후, 정리 좀 하고 살아라.

"네.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그쪽은요?"

"저요?"

"재이랑 무슨 사이냐고요. 남자친구?"

"아니요. 그냥 대장장이와 고객입니다."

"에이, 정말요?"

홍수정은 입꼬리를 올린 채 나를 흘겨봤다.

사실 고개가 내 쪽으로 돌려져서 흘겨본 것 같은 거다.

안경 렌즈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아 나를 본 건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니 재미있어 하는 건 알겠다.

하긴, 친구가 남자를 소개했으니 저러는 것도 이해는 갔다.

나도 태천이가 여자를 데려와 소개하면 누구냐며 눈을 반짝반짝 빛낼 거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책으로 데코를 한 통로를 빠져나오자 대충 제작실로 보이는 장소가 나왔다.

"어, 음."

홍수정은 한 바퀴 돌며 무언가를 찾았다.

아마도 내가 앉을 곳을 찾는 듯했다.

제작실에는 포션 제작대와 기이한 형태의 의자 하나밖에 없었다.

정말, 손님 응대할 생각이 있긴 한 거야?

"대충 이걸로 의자 삼아 앉겠습니다."

한가득 쌓여 있는 책더미를 가리키자 홍수정은 미안한 듯 목을 살살 긁었다.

"어, 그래도 괜찮으세요? 원하신다면 의자에 앉으셔도 되는데."

"아뇨, 괜찮아요. 책은 훌륭한 라면 받침대, 아, 아니. 의자 대용이니까요."

실없는 말을 하면서 책더미에 대충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그런 후 마법 주머니에서 보랏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건넸다.

"'바이올렛 바이올런스'?"

"압니까?"

오, 역시 전문가다. 보자마자 알아보다니.

홍수정은 유리병을 흔들고는 눈을 감고 귓가에 갖다 댔다.

유리병 속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인 듯했다.

"네, 요즘 시중에 소량으로 유통되고 있는 신생 버프 포션이에요. 다른 포션보다 저렴해 인기가 아주 많죠. 문제는…."

"문제는?"

"식약처 검증을 통과한 포션이 아니란 거예요."

"불법 포션이란 겁니까?"

"네. 뭐로 만들었는지, 부작용이 뭔지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포션이에요."

하긴, 크라우드가 갖고 있던 것이다.

당연히 식약처 검증을 통과한 포션일 리 없었다.

"대체 이거 어떻게 구했어요? 전 아무리 찾아봐도 못 구했는데!"

대답해 주지 않고 어깨만 으쓱 올렸다.

A등급 테러 조직인 크라우드한테서 빼앗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요, 말해 주기 싫을 수 있죠. 내 손에 이 포션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목적은 역시 이걸 조사하는 거겠죠?"

"네."

"자세히 검사하려면 결과는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걸릴 거예요."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오래 걸린다니요? 나니까 그 정도인 거예요. 다른 곳이었으면 보름이 뭐야? 한 달 넘게 걸릴걸요?"

홍수정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문외한인 나는 얼마나 대단한 건지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라고 칭찬해 주었다.

영혼이 조금 빠져 있던 탓에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검사 결과는 재이를 통해 연락드릴게요."

"네, 그렇게 하시죠."

"근데 제가 깜짝 놀랄 거란 건 뭐예요?"

그녀가 제작대에 바이올렛 바이올런스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유재이에게서 세계수 나뭇잎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내가 가져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거라고 말한 듯하다.

마법 주머니에서 세계수 나뭇잎을 꺼내 제작대에 내려놓았다.

"나뭇잎? 크긴 한데…. 이게, 뭐라…!"

나뭇잎을 보고 중얼거리던 홍수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나뭇잎에 얼굴을 처박았다.

코를 처박은 채 냄새를 킁킁 맡았고, 혀를 내밀어서는 핥아 보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이거 세계수 잎이잖아요!"

흠, 감정 방법이 굉장히 특이한 사람일세.

"세계수 나뭇잎이라니. 이런 걸 대체 어디에서. 아니, 아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이게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흐아아…. 냄새 좋은 것 봐. 미쳤어, 미쳤어!"

그녀는 무섭게 중얼거리면서 세계수를 살폈다.

끝없이 이어지는 중얼거림을 보면서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쭙잖게 말렸다간 물어 버릴 것 같다.

지금 모습이 꼭 먹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개 같았다.

몇 분 정도가 흘렀을까?

드디어 침착해진 그녀는 내게 물었다.

"이걸로 뭘 하고 싶어요?"

물론, 침착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뺨을 나뭇잎에 갖다 댄 채였다.

"…포션이나 화장품을 만들고 싶은데요."

"음, 힐링 포션이 더 좋을 것 같네요."

"화장품이 더 비싸게 팔리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요즘은 달라요."

"왜죠?"

"A급 헌터들이 쓸 만한 상급 포션이 나오지 않고 있거든요. 이걸로 힐링 포션 만들면 많이 벌 수 있을 거예요."

"어, 그래요? 그럼 힐링 포션 만들게요."

"잘 생각했어요! 아주 탁월한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홍수정은 세계수 나뭇잎을 꽉 끌어안았다.

나뭇잎에 얼굴을 처박고 끌어안은 채로 나를 빤히 응시한다.

"...."

"...."

어라?

이거 언젠가 봤던 시선인데.

아, 그래. 대장간에서 유재이가 나 쫓아낼 때 봤던….

후우.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아주 똑같군.

"가 볼 테니, 완성되면 연락해 주세요."

"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한숨을 내쉬면서 바로 공방을 빠져나갔다.

공방의 녹슨 철문을 열자 아는 얼굴이 보였다.

"오, 금방 나왔군?"

헝클어뜨린 머리.

어두운 계통의 가죽 재킷.

천칭 길드의 서지혁이었다.

제44화

서지혁의 합의하자는 제안과 함께 천칭에서 사슬이 뻗어 나왔다.

내 앞에 멈춰 선 사슬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 어쩌라고?

의문을 품은 채 바라보고 있자 그가 말했다.

"나는 네게 '공정한 합의'를 제안했다. 받아들이면 우린 '계약자'가 되는 거지."

"계약자?"

"서로에게 이득과 손해가 엇비슷해질 때까지 제안을 더하고 빼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면서 그는 합의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합의하기로 해 놓고선 시간을 오래 끌면 페널티를 받는다.

페널티는 제안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으로, 상대보다 더 큰 제안을 해야지 수평을 이룰 수 있다.

계약을 어기면 합의 내용에 따라 몸에 결손이 생기며 심할 경우 죽을 수도 있다.

천칭의 능력은 저주에 가까워 재생이나 회복으로는 팔이 다시 자라날 수 없다.

간략한 설명을 끝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정성을 의심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 지금이라도 싫다면 거절해라."

"거절해도 되는 거였어?"

"강제적으로 시작하면 그게 합의인가?"

"...."

"내 이름을 걸고 공정할 것이라 말하고 싶지만, 그게 네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발언은 아니겠지."

맞는 말이다.

서지혁은 사람을 죽여달라는 암살 의뢰를 받는 길드의 수장이다.

명예가 드높은 사람의 이름도 아닌데 걸어 봤자 공정할 것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내 직감은 그와 합의하라고 노래를 불렀다.

그와 합의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는 듯이.

"흠…."

"합의하겠다면 사슬을 붙잡으면 된다. 진지하게 생각해라."

그는 손을 뻗어 사슬을 붙잡으려던 내게 경고했다.

"한번 사슬을 붙자고 합의를 진행하면 도중엔 끊을 수 없으니까."

"끊을 수 없다? 그 말은, 그러니까-"

"그래. 사슬에 묶여 합의가 끝날 때까지 영원히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

"물론,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영원히 서지혁과 지내야 한다?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직감을 따르기 위해 사슬을 붙잡았다.

신기한 능력이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천칭 길드는 백도운을 공격하지 않겠다."

서지혁이 먼저 제안을 던졌다.

"또 백운천 길드를 공격하는 의뢰도 받지 않겠다."

그 제안에 천칭이 그에게로 기울어졌다.

그의 제안이 작은 추가 되어 천칭을 기울게 한 것이다.

"단, 백운천이 의뢰하는 경우는 제외한다."

그러자 기울었던 천칭이 조금 올라왔다.

추의 무게가 가벼워져서 그런 듯하다.

조건을 걸 수도 있는 모양인걸?

나도 한 번 해 봐야지.

"나는 합당한 이유 없이 천칭 길드를 먼저 공격하지 않겠어. 단, 천칭 길드임을 인지하지 못했을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아야겠지."

천칭은 내 쪽으로 기울다가 조건이 걸리자 살짝 올라왔다.

서지혁은 살짝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제법이군."

"응?"

"처음 합의를 할 때 바로 조건을 거는 경우는 별로 없거든. 하나의 제안을 하는데 몰두해서 말이야."

그러면서 서지혁은 천칭을 바라봤다.

천칭은 수평을 이루지 않았다.

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 있었다.

천칭은 내 제안을 서지혁의 제안보다 무겁다고 판단한 듯하다.

서로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제안을 했으니 엇비슷했어야 했는데도, 천칭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서지혁이 소환한 천칭이었으니 그에게 유리하도록 조작될 줄 알았다.

공정한 합의란 건 다 거짓부렁일 줄 알았는데.

괜한 의심을 한 것 같다.

내 쪽으로 기운 걸 보면 그의 말마따나 정말 공정한 합의였던 모양이다.

"흠…."

서지혁은 엄지로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고민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그의 제안이 부족할 거로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놀라는 모습은 아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납득한 것 같다.

나 한 명이 길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것과 천칭 길드 전체가 나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제안이다.

천칭은 어떻게 내 쪽으로 기운 걸까.

나도 납득이 안 되는데 그는 왜 납득한 걸까.

"나 서지혁은 백도운에게 공정한 합의를 할 수 있는 '작은 천칭'을 빌려 주도록 하겠다."

제안을 하나 더 더하자 천칭이 수평을 이룬다.

작은 천칭을 빌려 준다고?

"음, 수평을 이뤘군. 이대로 합의하겠나?"

"질문."

"작은 천칭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건가?"

묻지도 않았는데 바로 알고 대답해 온다.

작은 천칭을 빌려 준 적이 여러 번 있었던 것 같다.

다른 계약자들도 나처럼 작은 천칭이 무엇인지 물어본 거겠지.

"작은 천칭은 지금처럼 합의할 때 쓰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천칭에 관해 설명했다.

지금 나와 그 사이에 떠올라 있는 천칭은 큰 제안도 문제없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천칭은 그렇지 않다.

떠오른 천칭보다 크기가 훨씬 작은 그것은 그만큼 가벼운 제안밖에 올릴 수 없었다.

그에 따른 페널티도 심하지 않았다.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팔의 영구적인 소멸 정도다.

역시 재생 및 회복으로는 팔이 다시 자라날 수 없다고 했다.

"제안을 더 해도 되겠지만, 이걸로 끝내기를 권하지. 너를 위해서도."

그는 심플한 태도로 권해 왔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내가 천칭 길드를 공격하지 않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던 것처럼.

"좋아, 합의를 끝내자는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합의를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긴 하다.

그와의 합의는 공평할지 몰라도, 어쨌든 내 행동의 제한을 강제하는 것이다.

행동이 제한되면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진다.

"공정한 합의를 마친다."

나와 그에게서 합의를 끝내자는 의견이 나오자 천칭의 사슬이 끊어졌다.

그 사슬은 뱀처럼 내 팔을 휘감는다. 금세 투명하게 사라졌다.

팔을 만져도 팔을 휘감은 사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 합의 내용에 따라 그가 작은 천칭을 소환했다.

손을 뻗어서 내게로 천천히 날아오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뭐지?"

"합의할 때 룰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

서지혁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짓기만 했다.

그 미소를 보고, 나는 그가 일부러 룰을 설명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룰을 설명받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페널티를 받았을 거고, 페널티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됐으리라.

내게 룰을 설명해 준 건 그저 변덕이었을까?

그것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는 대화는 끝났다는 듯 눈앞을 떠나갔다.

"서지혁…."

***

"네가 왜 여기 있지?"

서지혁은 부하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고서도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걸 보면 공격 의사는 없는 듯하다.

하긴, 애초에 우린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보았다.

페널티를 받게 될 테니 공격하고 싶어도 공격할 수 없었다.

능력의 소유자였으니 페널티를 받지 않는 꼼수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옆에 있는 부하를 소개했다.

"이쪽은 최기정. 저번에 말했던, '자꾸 떠민 부하'지."

예전에 그는 부하 놈 하나가 자꾸 떠밀어서 나를 찾아왔다고 했었다.

검은 로브로 온몸을 전부 가린 최기정은 턱 아랫부분만 보였다.

얼굴도 드러내지 않은 채로 고개를 숙여 인사해 온다.

지팡이를 짚은 채로 서 있는 걸 보면 마법사인 것 같다.

"그래서?"

인사에 답해 줄 의리는 없었다.

시선을 돌려 서지혁을 보면서 바로 용건을 물었다.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뭐야?"

"찾아오게 만들어 놓고선 그리 말하면 쓰나."

서지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간다.

"나를 사칭한 이유가 뭐지?"

"뭐래. 내가 너를 뭐 하러 사칭… 아."

"기억났나? 그 일로 크라우드 놈들과 싸우게 됐거든."

기억났다.

서지혁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내게 있었다.

나는 크라우드 놈들에게 서지혁이라고 했었다.

그것 때문에 날 찾아온 게 분명했다.

아마 나를 서지혁이라고 생각한 크라우드는 천칭 길드를 견제했을 거다.

갑작스럽게 A급 테러 조직의 견제를 받게 된 천칭 길드는 당황해서 그 이유를 알아내려 했을 거고.

그 원흉이 나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을 거다.

"난 억울해."

"나로 속여 놓고서 억울하다?"

"속인 게 아니라 녀석들이 제멋대로 속은 거야."

"제멋대로 속았다? 무슨 소리지?"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가면을 쓴 채로 작은 천칭을 꺼냈을 뿐이었다.

그러자 크라우드 놈들이 겁먹고는 서지혁이라고 여겼다.

물론, 편하게 넘어갈 수 있을 듯해 그걸 부정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어쩐지 그 여자를 지키고 싶으면 조심하라는 이상한 소릴 하더니."

"그 여자?"

"대장간 여자 말이다."

"유재이? 걔가 왜 나와?"

"무슨 오해를 했는지 내가 그녀를 사랑해서 정체를 숨긴 채 찾아간 거로 생각하더군."

"...."

이건 또 뭔 병신 같은 소리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오해를 해도 그런 오해를 해?

어이없다는 얼굴을 지어 보이자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딱 그 표정을 지었었지. 어이가 없어서 그따위 말을 내뱉은 놈들을 죽여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못 했어."

"나 때문에 고생한 건 알겠어."

"그럼-"

"잠깐만. 내 책임은 아니잖아? 난 한 번도 나를 서지혁이라고 말한 적 없으니까."

그저 서지혁이 아니라고 사실대로 정정해 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얘긴 넘어가도록 하고."

"응?"

이렇게 쉽게 넘어가?

그거 따지려고 찾아온 거 아니었나?

"현재 너와 크라우드는 어떤 관계지?"

"당연히 적대 관계지. 그놈들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

[세계수 새싹이 관리인 백도운의 말에 동의합니다.]

지금까지 만나 본 마족의 권속은 2명이었다.

한 명은 신입 헌터들을 상대로 돈을 버는 헌터 사냥꾼.

한 명은 가족으로 구실 삼아 사람을 데려가는 쓰레기.

둘 다 영 마음에 들 수 없는 놈들이다.

"…너무 늦게 찾아온 건가."

"늦게 찾아와?"

"크라우드는 위험한 놈들이라고 경고해 줄 생각이었다."

"경고? 그쪽이 나한테?"

"물론 잘 보이고 싶은 건 그쪽이 아니라 그쪽 동생과 이태천이긴 하지."

그럼 그렇지.

근데 그거야말로 늦은 거 아닌가.

내 암살 의뢰를 맡아 놓고선 이제 와 잘 보이겠다?

전명환의 목을 넘기지 않는 이상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도 않던데."

내 중얼거림에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뭘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 반응들은 뭐지? 굉장히 기분 나쁜걸?"

"믿지 못하겠지만, 녀석들은 인간이 아니다. 마족이라는 녀석들의-"

"권속이라는 거? 알고 있는데."

"...!"

서지혁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옆의 최기정도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뭘 모르는 사람 취급한 게 이것 때문이었나.

"설마 알고 있었던 건가?"

"모를 건 또 뭐야, 벌써 두 마리나 죽였는데."

"허어, 이건 또 예상외로군."

아무래도 그들은 내가 그것들을 직접 상대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내가 그것들을 만나 본 적도 없으면서 치기를 부린 거로 생각한 걸까?

그런 거라면 사람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거다.

"오히려 잘됐어."

그리 말하면서 서지혁은 옆의 부하를 쳐다봤다.

최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드를 쓰고 있는 탓에 눈도 안 보였지만 시선을 교환한 거다.

"우리와 동맹을 맺자, 백도운."

"동맹? 설마 나와 천칭 길드가 동맹을 맺자는 소리는 아니지?"

"그 소리다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나 죽이려 해 놓고?"

"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라는 말도 있지 않나."

"양심 있어?"

"있으면 암살 의뢰 같은 걸 받았겠나?"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턱주가리 한 대 날리고 싶지?

[새싹은 관리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 새싹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제45화

"턱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 얼굴이군그래."

"잘 아네."

"그럼 거절인 건가?"

"당연한 소리를."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양심이란 게 없다고.

선이 무분별하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족속들이란 뜻이다.

그런 인간들과 어떻게 동맹을 맺겠는가?

동맹 맺어 봐야 배신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의심하기 바쁠 뿐이다.

서지혁은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너 때문에 크라우드와 싸우게 됐는데 너무한 처사 아닌가?"

"우릴 건드린 대가라고 생각해. 특히, 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거스름돈이 너무 큰데."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그리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최기정에게서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나도 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쉽게 됐군."

그는 제 부하를 잠깐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최기정이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았다.

바로 숙이는 걸 보면 자기도 이를 가는 소리가 그렇게 클 줄 몰랐던 것 같다.

"우리가 동맹을 맺는다면 크라우드 놈들을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텐데."

"아, 제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웬만하면 놈들을 죽이지 말아 주겠어?"

"뭐? 왜 그래야 하지? 설마 너도 백도희처럼 불살 주의인 거냐?"

불살 주의….

흔히 그렇게들 착각하곤 하지.

대한민국 최고의 힐러로서 아무리 악인이라도 죽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니까.

사실 그건 도희가 불살 주의라서가 아니다.

사람을 죽이면 힐링 스킬에 페널티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하얀 성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진실을 숨겨서 붙은 오해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아는 건 나와 태천이뿐이다.

태천이의 오른팔인 한재임도 모른다.

"뭔 개소리야? 정 죽일 거면 나한테 데려와."

"음?"

천칭 길드와 크라우드가 서로 견제하는 정도는 괜찮다.

신경 쓰다가 나를 잊어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서지혁이 놈들의 숨통을 끊는 건 조금 곤란하다.

"데려와라? 어째서지?"

"놈들의 숨통을 끊는 건 나여야 하니까."

서지혁이 그리 말하는 나를 몇 초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최기정에게 물었다.

그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내뱉어졌다.

"최기정. 그 여자가 그렇게 예쁜가?"

"…대장장이치고 미인이긴 합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실력이 평가 절하 받는 경향도 있고요."

"바보 같은 소리군."

"그러니까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100대 대장장이 안에 드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흠, 그래서 크라우드 놈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거였나. 얼굴 한 번 봐야겠군."

"…이봐,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놈들을 왜 직접 죽이겠다는 거지?"

"그야…!"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크라우드를 직접 죽이려는 건 녀석들이 퀘스트 대상이기 때문이다.

현재 처치한 수는 2마리로, 가장 좋은 보상을 얻으려면 아직 8마리를 더 잡아야 했다.

서지혁이 놈들을 처치하면 내가 퀘스트를 완료하는 데 방해가 된다.

녀석들이 몇 마리나 되는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죽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그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 줄 수가 없다는 것.

직접 죽이려는 이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 고민하는데, 서지혁이 피식 웃었다.

"좋다. 약속은 못 하겠지만 최대한 선처해 주지."

"…그래, 정말 고맙다."

"마스터."

"음?"

최기정이 서지혁을 부르더니 귓속말을 속삭였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떠나야 한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최기정이 떨어지자 그만 가겠다는 말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 말하기 전에 어딘가를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걸 알아차린 듯이.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가 봐야겠군."

"그래, 잘 생각했어."

빨리 꺼지라고 말하듯 손을 휙휙 저었다.

그 둘의 발밑에 순식간에 둥근 마법진이 그려졌다.

순간이동 마법이었다.

겨우 몇 초 만에 순간이동 마법을 발동한 거다.

최기정…. 생각보다 대단한 마법사인걸?

서지혁이 인사라도 나눌 생각인 듯 날 바라봤다.

"또 보자고."

"보기 싫은데?"

"동맹 건도 더 생각해 보고."

"싫다니까. 정 동맹을 맺고 싶으면 전명환 목이라도 갖고 오든가."

"하하, 그래, 그렇게 하지."

웃는 낯의 서지혁은 최기정과 함께 한순간에 사라졌다.

바닥에 그려졌던 마법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혼자 남은 나는 서지혁이 바라보던 곳을 바라봤다.

저녁노을이 진 산업단지 건물들만 보였다.

아마 그가 봤던 건 건물이 아니라 나를 미행하던 사람이었으리라.

도희와 태천이라는 사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알 수 있다.

"역시, 오늘 아침에 걸린 게 문제겠지?"

피로 젖은 옷이 도희의 걱정 스위치를 올린 듯하다.

늘 그렇듯 그 걱정은 사람을 붙이는 등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건물 쪽을 잘 살펴봐도 미행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보다 주변 시선을 세세하게 느끼는 새싹에게 물었다.

"새싹아, 혹시 시선 느껴져?"

[세계수 새싹은 관리인 백도운에게 아무런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새싹이도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혐오스럽거나 졸렬한 시선이 아니라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거리가 너무 멀거나.

물론,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데 나 혼자 바보짓을 하는 걸 수도 있다.

일단 확실히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해 봐야겠다.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용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