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4

* * *

구름 한 점 존재하지 않는 맑고 투명한 하늘.

-....

타천사 베리알은 자신이 펼쳐낸 최후의 기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에 드러난 원래의 하늘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방금 그것은 시간을 잘라낸 것인가.

다가오는 시온을 인지한 그의 입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시온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천사의 입에 허망한 웃음이 어렸다.

일부분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시간에 간섭하는 것을 넘어서 지워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잘라낼 수 없는 것을 잘라내다니... 정말로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그 말과 함께 날개를 접은 천사가 눈을 감는 순간,

스르륵-

마침내 명이 다한 그의 몸이 황금빛 가루가 되어 조용히 하늘에 흩날렸다.

"...."

곧이어 그 장면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시온의 신형 또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그 아 아 아 아 아!

족히 도시 하나 정도의 크기를 가진 혈룡이 거대한 울음을 터뜨리며 숨결을 쏘아낸다.

하지만 그 숨결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못했다.

그 전에,

크 아 아 아 아 악!

그런 혈룡과 비슷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지닌 붉은 눈의 늑대에 의해 막혀 버렸으니까.

아니, 그것은 늑대라는 표현보다는 괴수라는 표현이 더욱 어울렸다.

세 쌍의 눈동자와 아홉 갈래로 갈라진 꼬리.

그리고 몸 여기저기에 돋아난 촉수들까지.

일반적인 늑대라고 보기엔 그 외형이 너무나 기이했으니까.

그리고,

"꺄하하하하하!"

괴수 위에 선 채 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한 여인.

바로 리우시나였다.

콰아아앙!

한 차례 울부짖은 괴수가 그런 그녀의 의지에 따라 다시 혈룡과 격돌한다.

그로부터 터져 나오는 무지막지한 여파.

"허어...."

그러한 여파를 흘려내며 격돌을 지켜보는 르네트의 입에서 기가 막힌다는 듯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뿐만 아니라 어느새 전장의 모든 존재가 전투를 멈추고 두 괴수의 격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저 둘의 승패에 따라 이번 전쟁의 승패 또한 갈리게 될 터.

그렇기에 더 이상의 전투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대체 저 여자의 힘은 어디까지인 거야?'

처음 혈괴 측 진영에서 저 혈룡이 나타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혈룡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대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혈괴들을 학살하던 붉은 눈의 여인이 악수의 군단을 전부 뭉쳐 저 늑대형 괴수를 만들어낸 후 곧바로 혈룡과 격돌했다.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그녀의 힘은 르네트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마치 지금까지 힘을 전부 사용하지 않았던 것처럼.

'몸에서 군단을 뽑아낸 것도 모자라 저런 괴물까지 상대하다니....'

심지어 점점 이쪽으로 승기를 가져오기까지 하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느껴지는 힘은 혈룡 쪽이 조금 더 우세했지만, 이런 전투가 처음이 아닌 듯 여인은 특유의 노련함과 뛰어난 제어 능력으로 천천히 혈룡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대체 누굴까?'

르네트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슬그머니 올라오는 의문.

생각해 보니 저 여인의 정체에 대한 단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척이나 희귀한 붉은 눈동자와 세계 제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혈마법 실력.

'그러고 보니 시온 황자의 측근 중에서도 혈마법사가 있던 것 같던데....'

설마 저 여인이 그 측근인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번 일도 시온 황자와 관련이 있다는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

하지만 르네트는 더 이상 그러한 의문들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그 아 아 아 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처절한 울음과 함께,

콰아아아아앙!

늑대 괴수에 의해 목 대부분이 뜯긴 혈룡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으니까.

더는 일어나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는 혈룡.

그런 혈룡의 눈에 어린 빛이 점점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스륵-완전히 사라졌다.

승리.

마침내 리우시나와 그녀의 악수가 승리한 것이었다.

....

갑작스럽게 정해진 승패에 잠시 이어지는 정적.

그러한 정적 속에서,

"이제 돌아가자."

혈마법사들과 르네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천살의 마녀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56화

43장 보상(1)

모든 전투가 마무리되고 하루가 지난 뒤.

저벅, 저벅.

은발의 여인은 레제로의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탕! 탕!

"어이! 석재 좀 더 가져 와! 이쪽부터 손 봐야겠어!"

"기다려! 여기는 기반이 무너졌어. 빨리 보수하지 않으면 2차 피해가 발생할 거야."

여인의 시야에 들어오는 도시 이곳저곳을 보수 중인 사람들의 모습.

그런 사람들의 낯빛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어제 일어났던 수많은 전투로 인해 도시는 거의 반파되다시피 했고 인명 피해 또한 무지막지했으니까.

레제로가 생기고 난 뒤 사상 초유의 사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도 많이 잃었을 테니.'

낯빛이 밝으면 그게 이상했다.

그리고 그렇게 낯빛이 어두운 건 도시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레인과 투르잔 또한 어제 이후로 입을 꾹 다문 채 넋이 나간 듯 멍한 눈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달랐다.

'아마 어제 보았던 마지막 전투 때문이겠지.'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 영역이 넘어가는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어제 도시의 하늘에서 일어났던 신화적인 격돌.

그 격돌이 저들에게는 영역 밖의 일이었으리라.

용사인 여인 자신조차 그 전투를 보는 동안 한 번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생각보다 더 충격이 컸나 보네.'

여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투르잔 쪽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레인보다도 더욱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거인.

세계 최강자 중 한 명이라 불리고 있었고 실제로도 정상급의 무력을 지닌 그였다.

그렇기에 겉으로 표를 내진 않지만, 자부심도 대단했을 테고.

그 자부심이 어제 이후로 철저하게 박살 났을 테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모습이었다.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으니까.'

어차피 저러한 충격은 나중에 사대공이나 마왕을 마주했을 때 느껴야 할 것들이었다.

그것을 이번에 미리 느꼈으니 다음에는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터.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좌절하고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었지만, 여인의 머릿속에 그런 걱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동료들이었다.

그렇기에 겨우 이런 걸로는 무너질 리 없었다.

'그나저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단 말이야.'

여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타천사 베리알을 격멸한 존재를 떠올렸다.

한 손에 검을 든 채 마치 노이즈라도 낀 듯 흐릿한 외관을 지닌 존재.

단지 그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찬물을 온몸에 끼얹은 것처럼 전율이 돋는다.

'분명 그 존재는 시종일관 베리알을 압도했어.'

중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타천사의 봉인이 전부 풀렸지만, 그러한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베리알이 마지막에 펼쳐낸 '무너지는 하늘'을 단번에 지워내던 그 힘이란!

그것은 용사인 자신이 이번 생 전체를 바쳐 매달려도 닿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경지였다.

'다시 이오와를 만나거나 신탁을 받게 된다면 한 번 물어봐야 하나?'

그 정도의 격을 가진 존재라면 분명 이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터.

그렇기에 정체를 알아야 하는 게 맞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얼마나 더 걸었을까.

"찾았다."

어느새 빛의 도시 중앙 광장에 도착한 여인이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시선 끝에 있는 사람은 광장의 중앙에서 신성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는 금발의 여인.

바로 미래의 성녀가 될 엘리시스 디자이어였다.

* * *

빛의 교 본단에 존재하는 개인 연무장.

보통 때라면 2급 이상의 고위 성기사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에 교단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외부의 인물이 서 있었다.

차분히 눈을 감은 채 심연보다 깊은 어둠을 주변으로 퍼뜨리고 있는 남자.

바로 시온이었다.

화아아악!

우주를 그대로 축소해 놓기라도 한 것일까.

어느새 연무장 전체를 가득 메운 어둠 속에서 그 숫자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성운, 성단, 은하를 이룬 채 찬란한 빛을 발하는 별들.

하지만 그 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스스-

반짝이는 별들 한가운데에서 나타나는 이질적인 느낌의 검은 별.

그런 검은 별이 주변에 존재하는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기 시작했으니까.

하나로는 모자랐던 것일까?

다른 곳에서도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빨아들이는 속도를 올리는 묵성(墨星)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렇게 총 다섯 개로 늘어난 검은 별들이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순간이었다.

후욱!

그러한 검은 별들과 그 바탕이 된 새카만 흑성하의 어둠이 모조리 시온의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곧이어 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눈을 뜨는 시온.

그런 시온의 눈 속에는 방금 모든 빛을 집어삼켰던 검은 별 다섯 개가 원을 그리며 휘돌고 있었다.

'이제 5성.'

시온은 자신의 안에서 새롭게 열리는 또 하나의 세계를 느끼며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크로노스의 물음을 이용하여 본래의 힘을 잠시 사용했던 탓이었을까?

시온은 타천사와의 전투를 끝마친 직후 자신의 흑성하가 5성에 다다르는 것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거의 부서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즉시 빛의 교 본단의 개인 연무장을 빌려 그 안에 틀어박혔고 조금 전에야 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올랐어.'

시온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어렸다.

아직 본래의 힘을 되찾으려면 한참 멀었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제국 내에서는 거의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

예전 시온 자신이 재현했던 이벨린 아그네스의 힘에 필적할 정도.

'이걸로 '인과의 탑'을 정복할 최소 조건은 갖췄다고 해야 하나?'

이제 정말로 나타날 시기가 코앞까지 다가온 다음 목표를 시온이 떠올릴 때, 퉁퉁!

연무장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시온의 말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사제 한 명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

"성하께서 전하를 만나 뵙길 원하십니다. 지금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그에 예상했다는 듯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시온이 곧바로 연무장을 나섰다.

봉인지를 탈환하기 전 시온 자신은 교단의 고위 인사들 앞에서 정체를 밝혔고 그렇기에 어찌 보면 이 만남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빛의 교단은 제국에 속해 있었고 때문에 제국의 지배자인 황족에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저벅, 저벅.

일정한 속도로 교단 최심층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사제.

시온은 그런 사제의 뒤를 따르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의 뛰다시피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

어제 일로 인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기 때문인지 그런 사람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대주교들을 비롯한 사도까지 죽었다고 했었나?'

아마 본래대로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리리라.

그리고 그것은 빛의 교단뿐만이 아닌 레제로 전체가 똑같을 터였다.

그때,

"'천멸자'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낸 건 있나?"

"그럴 리가. 어제 그 전투 이후로 곧바로 사라져 버린 존재를 어떻게 알아내겠는가."

시온의 귀로 주변을 지나가는 성기사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천멸자(天滅者).

봉인에서 풀려난 타천사를 격멸한 존재를 칭하는 말이었다.

누구는 빛의 신이 보낸 사자라고 했으며 누구는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했지만, 정확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중 누구도 천멸자가 시온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긴 짐작할 리가 없지.'

딱 맞춰 모습을 보이지 않은 부분이나 사용하는 힘이 비슷한 것 등 몇 가지 단서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의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힘과 격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으니까.

천멸자는 어느 정도 신성까지 획득했던 베리알을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 비해 시온 자신의 강함 또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주 안이었다.

애초에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

그때,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성하께서는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듯 걸음을 멈춘 사제가 앞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그에 시온은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스륵-

별다른 소음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건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자그마한 서재였다.

주인의 성격을 나타내듯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과 의자는 오래되었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그 밖의 물건들은 꼭 필요한 것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앉아 있는 한 명의 노인.

시온은 저 노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교황 시메온 자카리아스.'

세계에서 가장 큰 교세를 떨치는 빛의 교단의 지배자이자 루미너스의 대리자라고 불리는 존재.

"어서 오시지요, 시온 전하."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시온을 향해 자리를 권하는 교황.

그런 노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듯 주름들이 깊게 패어 있었다.

막대한 신성력으로 충분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은 것을 보니 무척이나 소탈한 성격인 것 같았다.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시메온이 권한 자리에 앉은 시온의 입에서 바로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에 교황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겉치레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화법은 그가 익히 들어왔던 시온 황자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으니까.

"제국의 황족이 빛의 교 본단에 방문했는데 마땅히 제가 나서서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통은 대주교나 특급 성기사 정도가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긴 하지만 시온 전하는 황족 중에서도 특별하시니까요."

아마 시온 자신이 루미너스에게 지정과 신탁을 받은 걸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일에 관해서도 얼굴을 보고 직접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시메온이 시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비록 결과적으로 타천사가 풀려나오긴 했지만, 시온 황자 덕분에 봉인이 풀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고 그 일에 마역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으니까.

더불어 교황은 시온 황자가 교단을 도와 봉인지를 탈환해 준 것 또한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말로만?"

그에 피식 웃은 시온이 교황을 향해 물었다.

"물론 아니지요. 전하께서도 만족하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보상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자신감 있게 대답하는 시메온.

그에 시온이 말하기 전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전에 빛께서 내리신 보상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빛의 신이? 신탁이 또 내려온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연무장에 계실 때 저에게 신탁을 내려 뜻을 전하셨지요."

그 말과 함께 시온을 바라보던 교황의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띠었다.

빛의 교가 창립된 이후로 지금까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 이렇게 직접 신탁으로 보상을 언급하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었으니까.

아니, 처음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시온 황자는 이미 그전에도 여러 신탁을 받았으며 여태까지 초대 교황밖에 경험하지 못했던 강림마저 겪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하나조차 구경하지 못하는 것들을 한 사람이 이토록 짧은 시간 만에 전부 겪을 수 있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잠시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떠올리던 교황이 다시 시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빛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약속한 것은 처음 무기가 존재했던 장소에 두었다.'라고."

"그렇군."

시메온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에서 처음 자신의 무기가 존재했던 장소.

그 장소는 오직 한 곳밖에 없었으니까.

"그럼 이제 너희 교단의 보상도 들어볼까?"

그 장소를 떠올리며 슬쩍 웃은 시온이 곧바로 다음 주제를 꺼냈다.

하지만 그 물음에 답을 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듯, 아니 망설이듯 잠시 시온을 바라보는 시메온.

곧이어 그런 그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온 전하, 죄송하지만 저희가 드릴 보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교황의 눈이 기이한 빛을 띠기 시작한다.

마치 예전에 보았던 1황자 루브리오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눈빛.

"말해봐."

그런 시메온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시온이 대답하는 순간,

"시온 전하, 당신이 '천멸자'십니까?"

교황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57화

43장 보상(2)

이어지는 정적.

시메온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역시나 빛의 교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루미너스의 넘치는 관심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교황은 생각했다.

한 존재가 이토록 신격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필멸자들과는 다른 무언가 특별한 게 존재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제국 최고의 혈통이나 세계를 뒤흔드는 개세(改世)의 운명을 지닌 정도로는 불가능했다.

역사상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았던 용사조차 한두 번 신탁을 받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렇다면 시온 황자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했다.

거기에 더해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 직접 고마움을 표하며 보상을 쥐여줄 정도로 엄청난 공로를 세웠다는 것도 틀림없었고.

그 두 가지를 종합해 봤을 때 나올 수 있는 결론이 바로 시온 황자가 천멸자라는 것이었다.

천멸자는 최강의 타천사인 베리알을 압도할 정도로 드높은 격을 가진 있었고 빛의 도시를 구원한 공로까지 세웠으니까.

'물론 엄청난 비약이긴 하지만.'

정말로 혹시나 해서 일단 말을 꺼내긴 했지만, 시메온은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요즘 엄청난 명성을 떨치고 있긴 하지만, 시온 황자는 불과 1년조차 안 되는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가의 수치라 불릴 정도로 떨어지던 자였다.

그런 자가 이토록 단시간에 다른 황족들을 제치고 유력한 황제 후보로 불리는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그것마저 뛰어넘어 천멸자와 같은 격을 이뤘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렇게 물은 건 자신들의 신이 이토록 시온 황자에게 관심을 쏟는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떨 것 같은데?"

나른한 눈빛을 한 시온이 슬쩍 웃으며 교황을 향해 되물었다.

그 모호한 대답에 잠시 흔들리는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던 시메온이 헛웃음을 한 번 흘린 후 입을 열었다.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요.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혼자서 결론을 내린 교황이 곧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저희 교단이 전하께 드릴 보상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건 저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기도 하지요."

"최고의 보상이라면?"

"이제부터 저희 빛의 교단은 시온 아그네스 황자 전하를 지지하도록 하겠습니다."

파격적인 말이었다.

지금까지 빛의 교단은 단 한 번도 교단의 사람이 아닌 외인을 지지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 황위 다툼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1황자 루브리오스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역사상 유래가 존재하지 않았던 일.

"너희는 이미 루브리오스를 지지하는 게 아니었나?"

그것은 분명 경악할 만한 일이었지만, 처음과 다를 바 없이 고요한 눈을 유지하던 시온이 시메온을 향해 물었다.

"그렇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1황자 전하도 지지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둘 중 한 명의 편을 들 때가 온다면 아무래도 전하 쪽으로 조금 더 기울 것 같군요."

"그 이유는?"

"당연히 교단에 더 이득이 되는 쪽은 루브리오스 전하입니다. 황위를 포기하고 빛께 모든 걸 바칠 정도로 헌신적이시며 특급 성기사 중 한 명이기도 하시니까요. 하지만...."

그 말과 함께 시메온의 두 눈동자에 조금 전과 같은 기이한 빛이 어렸다.

"빛께서 제일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존재는 바로 전하시지 않습니까."

1황자 루브리오스와 같은 눈빛.

그 눈빛은 틀림없는 광신(狂信)의 빛이었다.

"최고위 사제들조차 평생 단 한 번을 받기 힘든 신탁을 이미 여러 번 받으셨고 그걸 넘어 강림과 지정까지 겪으셨지요. 이런 분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과연 저희가 누구를 지지하겠습니까."

그 누구보다도 빛을 추앙하는 시메온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렇기에 그의 눈에서 망설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1황자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면 전하와의 경쟁을 포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 가지 약조를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그 약조에 대해서 교황은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루브리오스에게 직접 듣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감 있게 말한 이유가 이거였나.'

그런 시메온을 바라보며 시온은 생각했다.

언젠가는 손에 넣으려 했지만, 이렇듯 손쉽게 빛의 교단의 지지를 얻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루미너스가 자신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여러 가지 개입을 남발한 게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만약 저 말이 거짓이고 이들이 루브리오스의 편을 더 든다고 하더라도 괜찮은 조건이야.'

그래도 1황자와 격돌하기 전까지는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을 마친 시온이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네."

"만족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럼 내 쪽에서도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하지."

그 말에 의문으로 물드는 교황의 눈동자.

"선물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교단 내에 숨어 있던 마물들이 적발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나?"

"예,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직접 제거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설마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

시메온의 눈에 어린 의문이 놀라움으로 뒤바뀌었다.

"그럼 아직 교단 안에...."

"그것들을 솎아내주지."

그 말과 함께 차갑게 가라앉는 시온의 눈.

시온은 자신의 것이 된 교단 안에서 더는 마물들이 설치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 * *

빛의 교단의 전폭적인 협조 아래 마물 적출은 무척이나 빠르게 이루어졌다.

마역이 경계하는 곳 중 하나였기 때문일까?

저번 일로 인해 우두머리인 굴리후르와 휘하의 마족들이 대부분 쓸려나갔음에도 아직 본단에는 꽤 많은 마물이 남아 있었다.

시온은 그들 전부는 아니지만, 교단의 심층부까지 숨어든 마물들을 대부분 제거할 수 있었고 그때까지 걸린 기간은 단 3일뿐이었다.

그 후로 시온은 지체없이 교단을 빠져나와 황성으로 향했다.

빛의 도시에서의 일은 전부 끝이 났고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었으니까.

"안녕히 가시지요, 시온 전하. 항상 빛의 가호가 함께하시기를."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그런 시온을 마지막으로 마중한 것은 교황과 대주교들을 비롯하여 시온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몇 최고위 인사들뿐이었다.

그전에 올리비아가 시온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때가 되면 다시 볼 수 있었기에 굳이 만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곧바로 황성으로 복귀한 시온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어서 오세... 엥?"

침성궁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또 오셨네요오?"

바로 백성궁 지하에 존재하는 세계 최고의 보물 창고인 '별들의 꿈'.

시온은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맞이하는 창고지기 베일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다시 봐서 반갑기는 한데에... 왜 오신 거예요오?"

그런 시온의 곁으로 다가오며 호문클루스가 물었다.

한 번 이곳에 방문해서 무구를 들고 나간 황족이 황제가 되기 전 재방문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직계 혈족이라면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긴 했지만, 그래봤자 추가로 무구를 가지고 나가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저 손가락을 빨며 구경이나 하다 가야 하는데 다시 올 황족이 누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얻을 게 있거든."

"예에?"

그런 시온의 말에 베일라의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눈앞에 있는 황족은 예전에 분명 여기에서 검 하나를 가져갔으니까.

"황자님께선 이곳에서 더는 무구를 가져갈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시죠오? 물론 처음에 부러진 칼을 가져갔다고 해서 교환이나 반품해달라는 것도 안 돼요오!"

"그럴 생각 없어. 원래 내 것이었던 걸 가져가는 것뿐이니까."

루미너스가 말했던 '이클락시아가 제일 처음 있었던 장소'.

시온은 그 장소가 이곳 별들의 꿈일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네? 그게 무슨 말...."

그에 계속해서 의문을 표하는 베일라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시온은 창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찾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안쪽에 있나?'

그 생각과 함께 시온은 베일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일단 열어드리긴 하겠는데 이유라도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오."

저번과 마찬가지로 한숨을 폭 내쉰 창고지기가 손가락을 한 번 휘저었다.

그 순간,

화아아악!

공간이 열리며 나타나는 새로운 입구.

바로 별들의 꿈 중에서도 최고 등급의 무구들을 보관해 놓은 장소였다.

"이미 말했어."

그에 짧게 대답한 시온이 망설임 없이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곧이어 시온의 눈에 펼쳐지는 전설과 신화급 무구들의 향연!

예전에 비해 엄청난 성장을 이룬 시온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일까?

우우웅!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온갖 무구가 마치 구애라도 하듯 시온을 향해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허...."

수백 년간 창고를 지켜왔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보는 진풍경에 뒤따라 들어온 베일라가 입을 살짝 벌릴 때, 저벅, 저벅.

시온이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무기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며 걷는 시온.

중력창 아그누스.

시절궁 하프노스.

그리고 가장 커다란 울음을 터뜨리는 천락검 리그베다까지.

신화급 무기들마저 모조리 지나친 시온의 눈이,

'찾았다.'

마침내 빛을 발했다.

창고의 구석에 박힌 채 주변의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는 반쪽짜리 검신(劍身).

바로 멸광검의 나머지 부분이었다.

그 위치는 예전에 시온이 처음 이클락시아를 발견했을 때와 똑같았다.

"뭐야? 어째서 저곳에 저런 게...."

시온의 뒤를 이어 그런 검신을 발견한 베일라의 입에서 의혹으로 물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루 종일 창고만을 관리하기에 손톱만 한 보석 하나까지도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베일라로서도 저 검신은 맹세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분명 방금까지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그사이 어느새 검신의 앞에 도달한 시온이 한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스륵-

자연스럽게 그런 시온의 손안으로 잡혀 드는 이클락시아.

자신의 반쪽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일까?

우우우웅!

소환된 멸광검이 몸을 떨어대며 커다란 울음을 터뜨렸다.

그와 함께 이클락시아의 끝부분에서 거미줄 같은 선들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더니 박혀 있던 검신의 잘린 부분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

이어지는 결합, 그리고 터져 나오는 검은 빛.

"대, 대체...!"

베일라의 외침과 함께 사방으로 번져나간 빛이 마침내 창고 전체를 가득 채우고.

창고지기의 눈에 어린 경악 또한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후욱!

그러한 검은 빛이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다시 그녀의 시야가 돌아왔다.

그런 베일라의 시야에 비치는 것은 무심한 눈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시온과.

완벽한 검신을 이룬 채 시온의 손에 잡혀 있는 하나의 묵검(墨劍)이었다.

"자."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 창고지기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시온이 완전해진 이클락시아를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원래 이렇게 해서 하나이니 가져가도 상관없겠지?"

그런 시온의 물음에 베일라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인 하이~"

그렇게 이클락시아의 나머지 반쪽을 얻고 난 뒤 침성궁으로 복귀한 시온을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은 다름 아닌 리우시나였다.

원래 시온의 자리였던 서재의 의자에 앉아 반갑게 손을 흔드는 그녀.

"하이?"

"아, 주인은 모르나? 이거 내가 이번에 갔던 혈계에서 배운 인사법이야. 어때, 괜찮지?"

"그런 말도 배운 걸 보니 일은 잘 해결했나 보군."

"그럼, 내가 누군데."

시온의 말에 리우시나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여정에서 그녀는 시온의 지시를 완벽하게 수행한 것을 넘어서 자신의 혈마법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단서를 얻은 상태였다.

이미 끝이라고 생각했던 경지 위에 또 다른 경지가 있음을 안 탓일까.

마녀의 두 눈은 흥분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그런 그녀의 옆에서 티에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시온을 향해 인사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준 시온이 곧바로 그를 향해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있었던 특이사항은?"

"황성 안에서는 1황자가 전하를 찾던 것 빼고는 없었습니다. 다만 황성 밖에서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말해봐."

시온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티에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제국의 서쪽 외곽에서 하룻밤 사이에 거대한 탑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탑의 크기가 도시 하나만 하고 높이는 하늘에 닿을 정도라고...."

말하면서도 믿기 힘든 것인지 말끝을 흐리는 티에리.

'드디어 열리는 건가?'

그런 티에리의 보고를 들은 시온의 눈에 이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58화

44장 습격(1)

레제로 중앙 광장 근처에 존재하는 인적 드문 카페.

그러한 카페 안에는 은발의 여인을 비롯한 용사 일행, 그리고 맞은편에는 엘리시스를 필두로 한 라트 용병단이 앉아 있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잠시 맞은편의 엘리시스를 바라보던 여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담담하면서도 왠지 모를 그리움이 담긴 목소리.

그 알 수 없는 감정에 엘리시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지금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기에는 제가 너무 부족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해야 할 일이라면...."

"보답. 제가 꼭 자격을 증명하고 보답해야 할 사람이 있어요."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

그것도 어쩌면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구명지은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

말을 끝낸 후 곧바로 입을 다무는 엘리시스의 모습에서 굳은 의지를 보았기 때문일까.

여인은 더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 다음에라도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도록 해. 마음만 먹는다면 너의 신이 나에게 인도해 줄 거야."

"네, 이해해 줘서 감사해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던 엘리시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번 바라본 여인이 곧바로 몸을 돌려 카페를 빠져나갔다.

"동료 얻기 힘들다~ 그치?"

"다음에 다시 보았으면 좋겠군."

그런 여인의 뒤를 따르는 레인과 거인.

그렇게 그들이 전부 카페에서 나간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후아... 진짜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옆에 있던 라트가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있는데도 느껴지는 압박이 장난 아니던데?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제안을 거절한 거야 엘리?"

"멍청아, 자신들이 용사와 그 일행들이라잖아. 너 같으면 처음 보는 사람이 그렇게 소개하면서 같이 가자는데 믿고 따라가겠냐?"

"아니요."

그런 라트의 말에 엠버가 핀잔을 주자 엘리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믿어요."

은발의 여인을 본 순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이 바로 용사라는 것을.

특별한 근거나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꿈속의 목소리를 들을 때처럼 느껴지는 확신에 가까운 감각.

엘리시스는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닌 몸에 흐르는 천사의 피로 연결된 '누군가'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느껴지던 본능적인 이끌림까지.'

본래의 자신이었다면 여인이 함께하자는 말을 꺼낸 순간 수락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

"다만 정말로 먼저 해야 할 게 있기 때문이에요."

바로 시온 아그네스 황자 때문이었다.

예전 안겔로쉬 영지의 일 이후로 엘리시스의 마음속에는 항상 빚이 존재했고 그 빚을 갚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이었으니까.

'물론 어떻게 갚아야 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래도 시온 황자가 말했던 자격은 어느 정도 갖춘 것 같으니 이제는 그를 찾아가도 될 것 같았다.

이제 시온 황자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엘리시스의 눈동자 안에서 기대가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덜컥!

카페의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성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성기사들이 무슨 일이지?"

귓가로 들려오는 엠버의 중얼거림.

그때 잠시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던 성기사들이 엘리시스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엘리시스 디자이어 님 되십니까?"

곧이어 그녀의 앞에 멈춰선 성기사 중 한 명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예? 예...."

엘리시스의 대답에 더욱 밝아진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성기사.

"빛의 교단 3급 성기사 알폰스라고 합니다. 잠시 성녀 후보 자격으로서 교단으로 동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성기사의 입에서 고양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제국의 수도 휴브리스 근교에 존재하는 자그마한 호수.

그런 호숫가 바로 옆에 세워진 조그마한 카페 안에서 시온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쏴아아!

구름에 가려 어두운 하늘로부터 조금씩 쏟아지며 호수의 표면에 잔잔한 파문을 만들어내는 빗줄기.

시온은 화창한 날보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을 더 선호했다.

이런 날에는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기가 더 수월해지는 것 같았으니까.

거기에 이렇게 향 좋은 커피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였다.

"크, 먹을 때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괜찮단 말이야. 왜 진작 이런 게 있는 줄 몰랐을까?"

그런 시온의 옆에서 리우시나가 연신 탄산이 가득 들어간 에이드를 들이켜며 감탄을 내뱉었다.

예전 건국제에서 처음 맛본 이후로 중독이라도 된 것인지 그녀는 그 뒤로 물을 제외한 모든 음료를 마실 때 항상 탄산이 섞인 것만을 주문했다.

그런 탄산의 맛이 궁금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짹!

시온의 어깨에 앉은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서리 정령이 빨대를 하나 물고 오더니 리우시나가 마시던 에이드 컵에 꽂아 넣고 쪽 빨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째애액!

충격이라도 받은 듯 서리 정령이 눈을 크게 뜨며 날개를 위아래로 빠르게 휘젓기 시작했다.

마치 못 먹을 것을 먹은 것처럼 캑캑거리는 정령.

짹! 째재재잭! 째잭!

그렇게 한동안 캑캑대던 정령이 날개 끝으로 리우시나를 가리키며 따지듯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런 정령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게 왜 내 탓이야? 마시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마셔 놓고. 하여간 예전부터 성격 이상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깐."

자기랑 상관없다는 듯 뻔뻔한 얼굴을 한 리우시나가 에이드를 한 번 쪽 빨며 입을 열었다.

짹재잭!

"뭐? 내 성격이 더 이상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일까?"

짹짹!

"그래? 한번 물어볼래? 주인! 주인이 볼 때는 누가 더 이상해?"

짹!

그 말과 함께 약속이라도 한 듯 리우시나와 서리 정령의 고개가 동시에 시온에게로 홱 돌아갔다.

물론 시온의 입장에서는 오십보백보였다.

"더 이상 시끄럽게 하면 둘 다 빗속에서 싸우게 해주지."

"...."

그 말에 비로소 조용해지는 둘의 모습에 시온은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음 목적지인 '인과의 탑'이 세상에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시온이 이렇게 근교의 숨겨진 카페에 방문할 정도로 여유를 부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가봤자 어차피 들어갈 수 없으니까.'

인과의 탑이라 불리는 지상 최고의 던전을 만든 자들은 최대한 많은 존재가 안으로 들어오길 바랐다.

그렇기에 탑의 개방에 일종의 유예 기간을 두었다.

그쪽에 달라붙은 모험가들과 마법사들이 탑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아내고 그 정보가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될 때쯤 자연스럽게 열릴 터.

그때까지는 가봤자 손가락만 빨 테니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거나 다른 준비를 하는 게 나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실제로 연대기에서도 인과의 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정확히 일주일 후에 열렸던 것으로 시온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전에 이 녀석의 마지막 조각을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도 리우시나와 눈빛으로 무언의 다툼을 벌이고 있는 서리 정령을 바라보았다.

서리 여왕의 권능 조각은 이번에 향할 인과의 탑에서 무척이나 중요하게 쓰일 물건이었다.

시온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열쇠였으니까.

'더 이상 우로보로스 쪽에서 찾기를 기대하는 건 힘들어.'

이미 시온 자신에게 조각 세 개를 뺏겼기에 그쪽에서도 굳이 나머지 하나를 찾으려고 노력하진 않을 터.

티에리와 아일린에게 지시하는 등 다른 방법도 강구하고 있었지만, 단시간 안에 찾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조각의 위치에 대한 정보는 연대기에도 나와 있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굳이 전부 모으지 않아도 조각들이 열쇠 역할을 할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불완전하긴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시온은 고개를 돌려 황성 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인과의 탑으로 향한다면 황성을 또 비우게 되겠지만, 시온의 눈에 별다른 걱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재앙 토벌로 얻어낸 '세계 회의'의 주도권, 그리고 3황자 에녹과 4황자 우테칸을 격멸하고 탈취한 온갖 세력과 이권들로 인해 이미 황위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특별한 일없이 시간이 흐른다면 황위에 오르는 것은 시온 자신이 될 터.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 전에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정리는 완벽하게 해놓는 게 좋겠지.'

시온은 그 생각과 함께 2황녀 이벨린과 5황녀 디에나를 떠올렸다.

이 둘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것이 있었다.

'다만 루브리오스 쪽은....'

그때였다.

짤랑!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카페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로브를 쓴 한 명의 인영.

카페 전체를 통째로 빌렸기에 더는 손님이 없어야 정상이었지만, 그 인영을 바라보는 시온의 눈은 평온했다.

'드래곤도 말하면 온다더니.'

저 사람을 이곳으로 부른 것이 바로 시온 자신이었으니까.

"나는 따뜻한 우유를 넣은 홍차로 한 잔 주지."

시온을 향해 다가오던 인영이 그 말과 함께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태양 빛 같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수려하기 그지없는 얼굴.

바로 1황자 루브리오스였다.

* * *

"차 맛이 무척 좋구나. 수도에도 이 정도의 밀크티를 만들 수 있는 곳이 있었을 줄이야."

리우시나와 주인마저 밖으로 내보내고 둘밖에 남지 않게 된 카페 안.

잠시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찻잔을 기울이던 루브리오스의 입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온, 너는 밀크티가 우리 빛의 교단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날 보자고 한 이유부터 말하도록 해. 내가 잡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오랜만에 보았음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는 그의 말을 잘라내며 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와 함께 서로 마주치는 시온과 루브리오스의 눈동자.

그 순간, 1황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온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저번에 보았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압박감이 시온의 나른한 눈으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선황제가 살아 있었을 적 그의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에 대한 의문이 속에서 차올랐지만, 루브리오스는 그 의문을 억누르며 본론을 꺼냈다.

"...레제로에 있는 본단에 방문했었다지.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전부 전해 들었다. 정말 큰일을 해주었더군. 일단 다시 한번 교단을 대표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구나."

처음 그에 관한 이야기를 교단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루브리오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빛으로부터 지정을 받은 것부터 교단 안에 숨어 있던 마족들을 솎아내고 봉인지를 탈환한 것까지.

그 전부가 교단 전체를 뒤흔들 만한 내용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하나하나 몇 시간에 걸쳐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루브리오스는 일단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자, 자신이 시온을 찾아온 이유부터 말했다.

"본단에 숨어 있던 마족들을 네가 전부 밝혀내고 정리했다지."

"맞아."

"그럼 혹시... 시온 너는 빛의 교단뿐만 아니라 황성 안에도 마물들이 숨어 있던 것을 알고 있었느냐?"

일단 질문을 하긴 했지만, 루브리오스는 시온이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자신의 막냇동생은 이미 수면 밑에서 그들과 전쟁을 치르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런 1황자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던 시온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

시온의 대답에 차갑게 굳어지는 루브리오스의 얼굴.

"그럼 나에게 말해다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1황자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어쩌면 제국 전체가 전복될 수도 있는 상황.

거기에 더해 그는 신성한 빛의 의지로만 가득 차야 할 제국에 불경한 마의 존재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루브리오스에게는 이 일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했다.

"그러지,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무엇이지?"

시온의 말에 의문 어린 눈으로 묻는 루브리오스.

그 순간,

"황위를 포기해, 그리고 내 밑으로 들어와."

예전 선황제의 장례식에서 그가 시온에게 했던 말.

그 말이 이번에는 시온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59화

44장 습격(2)

갑작스럽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말이었지만, 시온은 나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교황도 루브리오스가 스스로 경쟁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었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레제로와 빛의 교 본단에서 있었던 일을 1황자가 가감 없이 모조리 전해 들었다면 시온 자신이 루미너스에게 지정을 받은 것이나 강림을 겪었다는 것 또한 들었을 터.

그렇다면 교황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정도로 광신도인 그에게 틀림없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것이었다.

사실과는 좀 달랐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역사상 이만큼 빛의 관심을 받은 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루브리오스의 기준대로라면 신의 대리자로서 황위에 올라 세상에 빛의 뜻을 퍼뜨리는 존재는 자신이 가장 걸맞을 수도 있었다.

아마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리라.

실제로,

"...."

루브리오스는 시온의 말에 바로 거절의 답을 하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복잡해 보이는 그의 눈빛.

그렇게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그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은 대답해 줄 수가 없다."

1황자의 입에서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온의 생각대로 루브리오스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가 황위에 오르려는 제일 커다란 목적은 바로 제국의 국교를 빛의 교로 삼아 국민 전체가 루미너스를 섬기도록 하는 것.

정말로 본단으로부터 들은 것들이 사실이라면 시온이 오르는 게 맞을 수도 있었지만, 황제가 된 시온이 자신과 같이 빛의 뜻을 널리 퍼뜨릴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아직 그의 머릿속에는 황위에 어울리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유아독존적인 사고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일단 생각은 해볼 테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했으면 좋겠군."

여러 가지 생각들이 휘몰아치며 충돌하고 있었기에 이것이 할 수 있는 말 전부였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 믿어."

그런 루브리오스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시온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제안을 처음부터 곧바로 받아들일 거라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1황자의 마음을 안 것만으로도 괜찮은 성과였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그 말과 함께 찻잔을 한 번 기울인 시온의 입에서 나지막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무엇을 말이더냐."

"숨어 있는 마물들에 대해서 말이야."

"...내가 아는 것은 이번에 빛의 교단에서 드러난 마족들과 황성 안 빛의 교 지부에 숨어 있던 몇몇 마족들뿐이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녀석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처음에는 짐작이었지만, 빛의 교단에서 대규모의 마족들이 발견된 후 그것은 확신으로 바뀐 상태였다.

빛의 교단이 이 정도라면 제국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황성에는 틀림없이 그것보다 더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네가 목숨을 거둔 에녹과 우테칸, 그리고 아스칼론 가문까지도 마역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맞느냐?"

"그래도 꽤 알고 있네?"

그런 루브리오스를 바라보며 씩 웃은 시온이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그러자,

쩌적!

허공에 존재하는 수증기가 얼어붙으며 거대한 얼음판 하나가 생성되었다.

그러한 얼음판 위로 나타난 것은 제국 전역을 나타내는 지도.

"검게 표시되는 곳이 마역의 손길이 닿은 곳이야."

그 말과 함께 어둠으로 이루어진 검은 점이 지도의 황성 부분을 검게 물들였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계속해서 지도에 찍히기 시작하는 검은 점들.

아스칼론 가문, 오즈리마 가문을 비롯하여 황성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오대가문, 그리고 빛의 교단까지.

'역시....'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것인지 루브리오스의 눈에 그럴 줄 알았다는 빛이 어렸다.

이미 아스칼론 가문에 마수를 뻗쳤으면서 다른 오대가문을 건들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1황자의 눈은 곧이어 놀라움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검은 점이 찍히는 속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툭투두두둑!

순식간에 수도를 넘어 제국 전체로 뻗어 나가는 검은 점.

"...!"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검은 점은 결국 거인 대군락, 요정림, 수인해와 같은 외경 삼세까지 뒤덮고 나서야 뻗어 나가는 것을 멈추었다.

아니, 그것은 멈추었다고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

이미 지도 전체가 검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

충격을 받은 얼굴로 지도를 멍하니 바라보는 루브리오스.

심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마역에게 제국 전역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물론 완전한 지배가 아닌 단순히 손길이 닿은 곳을 표시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말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넌 대체 지금까지 어떤 싸움을 해왔던 것이더냐....'

그 생각과 함께 루브리오스는 경악 어린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허공에 띄운 얼음 지도를 지우는 시온.

그동안 철저히 숨겨 왔던 사실을 같은 황족에게 처음 밝히는 것이었지만, 시온의 눈에 동요는 없었다.

시온은 예전부터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이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게 루브리오스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유는 간단했다.

'루브리오스는 제국 전역에 소문이 날 정도로 엄청난 광신도니까.'

그 말은 즉 빛의 신 루미너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는 뜻.

그렇기에 마역 쪽에 현혹되었을 가능성 자체가 없었다.

더불어 연대기 안에서 유일하게 측근 중 마물이 존재하지 않았던 황족이 바로 1황자이기도 했고.

다만 지금까지는 적이 될 가능성이 더 컸기에 굳이 밝히지 않았을 뿐.

"...시온, 좀 전에 네가 했던 말 말이다."

잠시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런 시온을 바라보던 루브리오스가 무언가를 결정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장 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마음이 바뀌었다."

"뭐지?"

"제국에 스며든 마물들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협력은 물론이고 전적으로 너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겠다."

항상 모든 것을 주도하며 그 위에 군림해야 하는 그의 성향과 맞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만큼 그는 이 사태를 중대하게 여기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

그런 1황자의 말에 시온이 피식 웃으며 다 마신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을 때였다.

"그런데 말이다, 시온."

루브리오스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바깥에 있는 녀석들은 너의 손님인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현재 카페의 바깥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리우시나는 황성으로 돌려보냈고 카페 주인은 같이 퇴근시켰으니까.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 또한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인해 계속해서 파문을 일으키는 호수가 전부였다.

"난 널 찾아온 손님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하지만 그 말을 이해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되묻는 시온.

"우리 둘 모두의 손님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군."

적.

그 순간,

후욱!

창밖으로 비치는 빗줄기의 속도가 일순간 눈에 띌 정도로 느려졌다.

마치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 듯 천천히 떨어지는 빗줄기.

그 이상 현상에 루브리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찰나, 콰과과과과광!

거의 공중에 멈춰 있던 빗방울들이 전부 검게 물들며 부풀어 오르더니 그대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그 무지막지한 폭발에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카페 건물과 여파로 인해 진동하며 물을 쏟아내는 호수.

그런 호수의 진동이 사라지기 전,

스르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보랏빛 피부에 인간 형태를 한 수십 명의 괴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 괴인들의 몸에서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노골적인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확실하게 마무리하도록."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괴인, 아니 마족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파바밧!

그들 중 몇몇이 아직까지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폭발의 중심지를 향해 뛰쳐나갔다.

무척이나 신속하고 체계적인 움직임.

곧이어 그런 그들의 신형이 흙먼지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잠시의 정적.

그리고,

화아아아악!

안쪽에서부터 새하얀 빛의 폭발이 터져 나왔다.

콰앙!

곧이어 수그러드는 빛과 함께 흙먼지 안으로 진입했던 마족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맣게 탄 시체로 변한 채 튕겨 나왔다.

"버러지 같은 마족 녀석들이 감히...."

흙먼지 안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중얼거림.

그와 함께 태양 빛과도 같은 신성의 불꽃을 휘감은 루브리오스가 오만한 눈길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보는 순간 온몸이 떨릴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

"전원 공격."

그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던 마족들이 수장의 명령에 따라 1황자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쪽만 보면 안 될 텐데."

뒤쪽에서 들려오는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그그긋!

근처에 있던 마족 대여섯의 목에 미세한 실선이 그어졌다.

그 실선을 따라 몸통에서 분리된 머리들이 밑으로 힘없이 떨어진다.

투두둑!

그런 마족들의 머리가 바닥에 닿는 동시에 그 뒤에서 목소리의 주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불길한 어둠에 둘러싸인 채 마족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사내.

바로 시온이었다.

쐐액!

동료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던 것일까?

제일 가까이 있던 두 명의 마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시온을 향해 변형된 팔을 휘둘렀다.

위아래의 공간 전부를 점하며 피할 곳을 지워내는 공격.

그러한 공격들이 시온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

툭.

어느새 뻗어 나간 시온의 발끝이 밑에서 들어오는 마족의 공격을 살짝 건들었다.

그로 인해 경로가 틀어지며 위쪽으로 치솟은 마족의 팔이, 콰앙!

또 다른 마족의 팔과 맞부딪치며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두 마족의 팔이 봉쇄된 사이,

퍼버벅!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휘몰아친 흑성하가 그들의 머리를 곧바로 터뜨렸다.

그렇게 머리가 사라진 마족들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지기 전, 다른 마족들을 향해 튀어 나가는 시온의 신형.

그런 시온의 주위로 수백 개에 달하는 검은 점들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파파파팟!

그대로 흩어지며 사방으로 쏘아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조리 마족들의 전신에 틀어박히는 흑점들.

콰과과광!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런 흑점들이 폭발하며 마족들의 육신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지워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시온의 주변으로 만들어지는 커다란 공터.

"일단 움직이지 못하게 저지부터 해!"

순식간에 삼분지 일에 가까운 전력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전투를 지휘하던 우두머리 마족의 입에서 처음으로 다급함이 담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느려져라, 짓눌려라, 눈이 멀어라.

그 말에 따라 더욱 거리를 벌린 마족들이 시온을 향해 온갖 저주의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발동된 수많은 상태 이상 술식이 잠시 시온의 몸을 억누르는가 싶었지만, 망혼의 2단계.

망혼갑(亡魂鉀).

푸화하하학!

연기처럼 시온의 전신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갑옷 형태로 변하는가 싶더니 미친 듯이 타오르며 그러한 술식들을 모조리 살라 먹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시온의 오른손에 휘어 잡히며 주변의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용폭창.

그런 아그드바르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명뢰(冥雷).

짜자자자작!

시온에 의해 휘둘러지며 그 궤적에서 수십 줄기에 달하는 검은 벼락을 쏟아내었다.

빛과 같은 속도로 쏘아지는 벼락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관통당한 마족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소멸한다.

"왜 이렇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아 있는 마족들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두려움이란 감정이 어렸다.

자신들은 정예였다.

이번에 마역에서 새롭게 파견된 부대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정예.

'분명 그분께서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이렇게 압도적으로 밀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콰가가가각!

자신들이 쏘아내는 공격은 모조리 막히거나 튕겨 나오고 반대로 상대가 쏟아내는 공격들은 모조리 자신들의 급소에 틀어박힌다.

거기다가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상대가 한 명이 아니란 점.

반대편에서도,

투콰아앙!

온몸에 빛의 갑옷을 두른 금발의 남자가 사방으로 줄기줄기 신성을 쏘아내며 거의 비슷한 속도로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급속도로 줄어드는 마족들의 숫자.

그에 마족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릴 때,

'무언가 달라.'

시온은 옆쪽에서 달려드는 마족 세 마리의 심장을 일격으로 꿰뚫으며 생각했다.

그동안 수많은 습격을 받아왔지만, 이번의 습격은 다른 습격들과는 그 성격이 상이했다.

외곽이라고 하지만, 수도 안에서 마기를 숨기지 않은 채 습격을 자행한 것부터 시작해서 두 명의 황족을 동시에 노리는 과감함까지.

확실하지 않으면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이려고 했던 지금까지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비해 너무 약해.'

습격한 마족들 자체가 약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하고 체계적으로 잘 훈련되어 있었다.

다만 시온 자신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뿐.

어느 정도 자신의 무력을 짐작하고 있는 마역에서 굳이 이렇게 떨어지는 녀석들을.

그것도 '일곱 하늘'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이벨린과 비슷한 무력을 지닌 1황자가 있을 때 보낼 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버리는 패라는 거겠지.'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기에 확정할 수 없었지만 아마 그 주체, 아니면 주체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이 근처에 있을 확률은 높았다.

이 정도의 패를 의미 없이 소모할 리가 없었으니까.

스스스스-

쉼 없이 마족들을 학살하는 시온의 전신에서 은밀하게 뻗어 나온 흑성하가 빗속의 어둠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급속도로 확장되는 시온의 감각.

곧이어,

"찾았다."

시온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60화

44장 습격(3)

시온과 루브리오스가 전투 중인 곳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언덕.

"그사이 더 강해졌어...."

그곳에서 오마령 중 하나이자, 반마장군 세르키아는 질린 표정으로 전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시온 아그네스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마족 부대의 이름은 '보랏빛 죽음'.

무수한 상급 마족들과 상급에 거의 다다른 중급 마족들로만 이루어진 부대로써 마역에서도 널리 이름을 알릴 정도의 정예였다.

그런데 그런 정예 부대가 저토록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은 정말로 비현실적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

하지만 세르키아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어째서 보랏빛 죽음을 이렇게 소모하는 거지?'

저토록 차이가 크게 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저들만으로 시온 아그네스를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별다른 준비조차 하지 않은 채 저들만을 보낸 것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르키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이번 일의 지휘권은 그녀가 아닌 다른 자에게 있었으니까.

"우와~ 정말 강하잖아? 저 정도면 인간 중에 제일 강하다는 '일곱 하늘'에 필적한다고 해도 되겠는데?"

그런 세르키아의 옆에서 장난스럽게 감탄을 터뜨리는 쭉 째진 눈에 두 개의 뿔을 가진 남자.

바로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그런 남자에게 이번 일에 대해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세르키아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다는 게 맞았다.

오마령 중 하나인 그녀보다도 남자가 가진 지위가 더 높았으니까.

남자의 이름은 히셀러.

마역에서 사대공의 바로 밑에 존재하는 '여섯 발톱' 중 하나이자 이번에 시온 아그네스를 제거하기 위해 새롭게 파견된 존재였다.

"저 녀석이 그 시온 아그네스란 말이지?"

전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히셀러가 세르키아를 향해 물었다.

"...그렇습니다."

"재밌겠네. 정말로 재밌게 되었어."

기대와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마족의 눈동자.

히셀러는 자신의 예상보다 더 강해 보이는 시온 아그네스의 무력에 진심으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리고 그러한 상대를 처참하게 짓밟으면 짓밟을수록 더 짙은 쾌락을 느끼는 부류였으니까.

그때,

"그런데... 그 표정은 뭐야? 딱 봐도 내가 하는 일에 불만이 있는 표정인데."

잠시 세르키아 쪽으로 시선을 돌린 히셀러가 물었다.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솔직히 제대로 된 습격도 아닌데 마역에서도 꽤 이름 날리는 녀석들을 희생양으로 던져 놓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잖아, 그렇지?"

이미 머릿속을 모조리 읽혔기 때문일까?

"...."

더는 변명하지 않은 채 침묵하는 세르키아.

"뭐, 이해는 해. 사실 나도 조금 아깝긴 하거든. 그런데 말이야. 너희들이 그랬잖아. 저 시온 아그네스란 녀석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고. 실제로 오마령 중 둘이 당하기도 했고."

그런 세르키아를 향해 뱀처럼 웃으며 히셀러가 말을 이었다.

"그런 녀석을 상대로 어중간한 전력을 집어넣어 봤자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전멸해 버리거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예를 투입해서 확실하게 파악하는 게 낫지 않겠어?"

사실 그것 말고도 정치적인 이유가 조금 섞여 있긴 했지만, 히셀러는 굳이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하급자인 세르키아에게 일일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

인간뿐만이 아닌 같은 마족마저도 소모품으로 여기는 듯한 히셀러의 말에 세르키아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질린 빛이 어렸다.

그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녀와는 성향 자체가 전혀 맞지 않는 자.

'대체 마역에서는 어째서 이런 자를 보낸 것인지....'

그에 속으로 고개를 저은 세르키아는 어느새 고개를 돌린 히셀러를 따라 다시 시온 아그네스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전투는 거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콰과과광!

치솟는 섬광과 몰아치는 마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덮는 어둠.

그 속에서 마족들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고 이제는 한 자릿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어?"

그 전투를 바라보던 세르키아의 눈동자에 별안간 의문이 어렸다.

어둠에 휘감긴 채 마족들을 거침없이 학살하고 있던 시온 아그네스의 눈.

그 특유의 나른한 눈이 한순간 세르키아 자신의 눈과 마주쳤으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거리부터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자신들은 기척조차 완전히 숨긴 채 몇 겹으로 친 결계 안에 존재했다.

'착각인가?'

그에 세르키아가 고개를 기울일 때,

"설마 인지한 건가?"

그녀의 귓가로 살짝 놀라움이 담긴 히셀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준비해야겠는데?"

"예? 갑자기 무슨 준비를...."

"도망갈 준비. 오늘은 싸울 생각이 없거든."

"!!!!!!!"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잠시 의문으로 물들었던 세르키아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본 순간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든 마족이 전멸하고 전투가 종료된 전장.

하지만, 세르키아의 눈빛이 요동치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쐐애애액!

시온 아그네스.

그의 신형이 정확히 이쪽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으니까.

등 뒤로 흩뿌려지는 어둠과 미친 듯한 속도로 인해 찢어져 나가는 대기.

"어, 어떻게...!"

세르키아의 입에서 당혹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 저 멀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그녀의 전신을 강하게 짓누르기 시작한다.

마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처럼.

직접 상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동안 수없이 당해왔기 때문일까?

두려움으로 물든 눈을 한 채 전의를 잃고 뒷걸음질 치는 세르키아.

"아쉽네, 저 힘을 오늘 맛보지 못한다는 게."

하지만 세르키아와는 달리 그런 압박감을 즐기듯 씩 웃은 히셀러가 허공에 손을 내리그었다.

쩌억!

그런 그의 손을 따라 갈라진 공간이 그대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변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보자고."

그렇게 시온을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끝낸 히셀러가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황급히 통로를 향해 몸을 밀어 넣는 세르키아.

'이미 늦었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온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거의 공간을 접다시피 하며 이동하고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마 제시간에 저곳까지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

그렇다면....

'작별 인사라도 성대하게 해줘야겠지.'

생각을 마친 시온이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오른팔을 활시위처럼 뒤쪽으로 당겼다.

꾸드드득!

그런 시온의 손안으로 주변의 어둠이 모여들며 하나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한다.

조여드는 공간과 요동치는 대기.

마침내 그러한 어둠이 완전한 창의 형태를 이루고.

공간과 대기의 진동 또한 최대치에 다다르는 순간,

---------------!

시온의 창이 앞으로 쏘아지며 그 궤적을 따라 세상에 한 줄기의 선이 그어졌다.

이미 완전히 닫혀버린 통로를 억지로 열어젖히며 그 공간의 틈 사이로 파고드는 창.

쩌저저저저적!

뒤늦게 그런 시온의 창이 지나간 자리에서 생성된 충격파가 주변에 존재하는 대기를 찢어발기며 퍼져나간다.

그로 인해 진동하는 대지와 터져 나가는 빗물.

그렇게 얼마나 여파가 이어졌을까.

"쥐새끼 같은 놈들이구나."

서서히 가라앉는 진동과 함께 시온의 옆으로 다가온 루브리오스가 입을 열었다.

"추적은 힘들겠지?"

시온을 향해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얼굴조차 인지할 수 없을 만큼 먼 곳에서 공간을 넘어 사라진 적들이었다.

추적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시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루브리오스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두고 보면 알겠지."

가능성이 담긴 말.

그런 시온의 눈은 조금 전 쏘아낸 창에 매달린 채 닫힌 공간 너머까지 연결된 암혼사에 고정되어 있었다.

* * *

시온이 있는 곳과 정반대 편에 존재하는 휴브리스의 외곽지역 공터.

쩌억!

그러한 공터의 허공이 열리며 그 안에서 두 명의 마족이 튀어나왔다.

바로 히셀러와 세르키아였다.

"크흐...!"

나오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을 진정시키는 세르키아와는 달리 히셀러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탄성이었다.

마치 닭살이라도 돋아난 것처럼 오돌토돌하게 일어난 그의 피부.

그것은 바로 시온 아그네스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다.

다가오는 시온 아그네스로부터 느껴지던 무시무시한 존재감.

그 존재감과 불길함은 마역에서 수많은 강자를 보았던 히셀러로서도 몇 번 느껴보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인간 중에서도 이런 기운을 가진 자가 있었을 줄이야.'

그렇기에 더욱 아쉬웠다.

오늘 제대로 겨루지 못한 채 그대로 물러난 것이.

"그냥 그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붙어볼 걸 그랬...."

그런 히셀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쩌저저저저적!

완전히 닫힌 통로를 한순간 찢어발기며 튀어나와 세르키아의 가슴과 히셀러의 오른팔을 동시에 꿰뚫어 버리는 한 자루의 검은 창.

그것은 두 마족이 제대로 인지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그대로 심장이 박살 난 것일까?

"커억... 커어억!"

세르키아가 피거품을 쏟아내며 쓰러진다.

"...."

마치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그런 그녀와 완전히 박살 난 자신의 오른팔, 그리고 그 원인이 되는 창을 멍하니 바라보는 히셀러.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키히... 키햐하하하!"

별안간 그의 입에서 커다란 광소가 터져 나왔다.

정말로 즐거워서 어찌할 수가 없다는 듯 끝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히셀러.

"이거 정말 골 때리는 놈이잖아!"

그렇게 얼마나 웃어 재꼈을까.

"시온 아그네스."

마침내 웃음을 그친 히셀러의 입에서 시온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마치 머릿속에 그 이름을 새기려는 것처럼.

그런 마족의 눈동자는 희열과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 * *

인과의 탑.

그에 대한 시온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처음 인과의 탑이 모습을 드러내고 일주일이 지난 후, 탑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을 강타했으니까.

그렇기에 현재 인과의 탑은 제국을 가장 뜨겁게 달구는 단어 중 하나였고 그곳으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물론 탑의 정체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었다.

하지만 지상 최대의 던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을 열광시키기 충분했다.

던전에는 항상 보물이 존재하기 마련이었고 그 크기나 위험도에 따라 그 가치가 올라갔으니까.

그렇게 탑이 열린 당일의 자정.

"정말로 이번에도 혼자 가시는 겁니까?"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황성의 외곽에서 티에리가 걱정 어린 얼굴로 시온을 향해 물었다.

"그래."

그에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온.

이번 일 또한 신분을 숨기고 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딱히 데려갈 사람이 없었다.

일단 리우시나는 외모야 바꾼다 쳐도 사용하는 힘의 개성이 너무나 강했고 루카스와 황혼 검단은 데려가도 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탑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전부 흩어질 테니까.'

시온이 기억하는 연대기의 내용대로라면 인과의 탑 1층의 시험은 개인별로 이루어졌다.

"수행원이라도 데려가는 게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런 시온을 향해 다시 한번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권하는 티에리.

한번 말하면 바로 수긍하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시온은 티에리가 이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저번에 있었던 마족들의 습격 때문이겠지.'

물론 실패로 끝났고 자신 또한 무사했지만, 티에리는 그 후로 더욱 주변의 경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번 일어난 습격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가 그 습격을 주도한 마족들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기도 했고.

'그 녀석들과 암혼사가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공간을 넘어서 이어졌기 때문일까?

그 과정에서 암혼사가 이상하게 변형되어 버렸고 그 때문에 단시간 내에는 추적이 힘든 상태였다.

아마 그에 대한 마무리는 인과의 탑에 다녀와서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일단 이쪽이 더 중요했으니까.

"아니, 혼자 가도록 하지. 정 필요하면 그쪽에 있는 달의 눈을 이용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부디 몸조심 하시길."

그에 더는 권유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는 티에리.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시온 전하."

그런 티에리의 옆에 서 있던 노기사 프레도 또한 고개를 숙인 채 시온을 배웅했다.

리우시나와 루카스는 이곳에 없었다.

이번에도 두고 간다고 하면 반발이 심할 게 뻔했기에 알리지 않고 나온 것.

그렇게 둘의 배웅을 뒤로한 채 시온은 천천히 황성을 나섰다.

스륵-

그런 시온의 걸음에 맞춰 주변의 어둠이 고요하게 일렁이기 시작한다.

멸광검 이클락시아.

크로노스의 다섯 물음에 이어,

시온 자신이 얻어야 하는 세 번째 신기.

그 신기가 바로 인과의 탑에 있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61화

45장 인과의 탑(1)

시온이 떠난 침성궁.

"정말 너무하잖아!"

그런 침성궁의 집무실에서 높은음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물론 그 외침의 주인공은 리우시나였다.

"아니, 이번에도 나를 놓고 간 거야? 그것도 몰래?"

잔뜩 성이 난 듯 도끼눈을 한 채 집무실 안을 돌아다니며 불평을 토해내는 마녀.

그래, 저번에야 리우시나 자신이 따로 할 일도 있었고 나름 커다란 진전도 없었으니 그리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과 결이 완전히 달랐다.

"네가 생각해도 이번에는 주인이 너무하지 않았어?"

이미 이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옆에서 평온하게 집무를 보던 티에리를 향해 리우시나가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리나 님뿐만 아니라 아무도 데려가지 않으셨잖습니까."

"짹짹이는 데려갔잖아!"

"...."

그 말에 티에리는 대답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아닌 정령에게까지 경쟁의식을 느낄 정도라면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을 것 같았으니까.

"분명 뜻이 있어서 그러셨을 테니 넘어가시지요, 실제로 지금까지 전하께서 하시는 모든 행동에는 마땅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막 집무실로 들어온 프레도가 그녀와 티에리에게 차를 건네며 허허롭게 말했다.

"내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많이 죽일 수 있게 해주겠다더니... 주인의 마음이 변했어...."

그 말과 함께 잠시 시무룩해하던 그녀가 별안간 다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직접 많이 죽일 일을 만드는 수밖에."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티에리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저번에 주인을 습격했던 녀석들 말이야. 그중에 수도복을 입은 여자가 한 명 있다고 했었지?"

그런 티에리를 마주 보며 묻는 그녀.

"예, 그렇습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는 티에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시온 그리고 1황자로부터 들은 정보로 종합하여 그 여인이 황성에 숨어 있던 마족 중 한 명이며 꽤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까지 알아낸 상태였지만, 그 위치를 추적하는 데는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으니까.

거의 모든 그림자를 동원해 수도 전체와 인근의 다른 도시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었지만, 마치 존재 자체가 사라진 듯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 무척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림자의 수장을 향해 리우시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왠지 그 여자 내가 알고 있는 녀석 같아서 말이야."

"예? 그거 정말입니까?"

"그래, 잘하면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티에리의 질문에 대답하는 마녀의 눈동자 안에서는 어느새 핏빛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 * *

서서히 동이 터오는 아침.

"...장난 아니네."

과거 북외 칠걸 중 한 명이자, 현 용사의 동료가 된 레인 드라니르의 입에서 질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의 앞쪽에는 구름 위까지 치솟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탑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단순히 거대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의 웅장함을 자랑하는 탑.

그러한 탑의 정체는 바로 얼마 전에 생겨난 지상 최대의 던전인 '인과의 탑'이었다.

하지만 레인의 눈이 질린 것은 탑 때문이 아니었다.

"저 녀석들이 전부 우리의 경쟁자라는 말이지?"

탑 주변으로 끝없이 모여드는 사람들.

마치 개미 떼를 연상케 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그러한 감정을 선사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모여든 사람들이 전부 일반인이 아닌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얼굴만 보고도 그 이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강자들 또한 수두룩했다.

최고 수준의 던전 탐사단, 백금 이상 등급의 용병들, 대륙 전역을 탐험한 모험가들까지.

"이거 입장하는 것도 빡셀 것 같은데?"

그에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레인이 중얼거릴 때,

"혀, 혈검이다!"

그녀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 끝에 있는 자는 피처럼 붉은 검을 허리에 찬 냉담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곧이어 그 남자를 발견한 레인의 눈에도 이채가 어렸다.

'혈검(血劍) 이운강.'

'일곱 하늘' 바로 다음 가는 강자들을 일컫는 '열두 바다' 중 한 명으로서 수인해 출신의 검사였다.

단순히 검이란 분야로만 따지면 제국 전체를 통틀어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

그런 혈검의 등장이 시발점이라도 된 것일까.

"저쪽에 폭풍왕도 왔다!"

"반대편에 강철혼까지!"

그 후로 다른 '열두 바다'들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놀라움을 토해내며 한층 더 소란스러워지는 탑 주변.

"저 탑 안에 있는 게 그 정도로 대단한가?"

그런 '열두 바다'들을 잠시 바라보던 레인이 의문 어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저들이 벌써 움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정점을 논할 수 있는 강자들.

물론 그 위로 '일곱 하늘'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거대 단체의 수장, 아니면 그와 비견되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 움직일 수 있는 최강자들은 저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려운가?"

그런 레인의 옆에서 투르잔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는 '일곱 하늘' 중 한 명이었지만, '하늘 산'에서 거의 나온 적이 없었기에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럴 리가."

거인을 향해 마주 웃으며 대답하는 레인.

실제로 그런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당혹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곧 탑이 개방될 거야."

그때, 옆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은발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3일 전, 인과의 탑이 그 속을 드러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 종일 열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중 탑이 열리는 시간은 동틀 무렵의 단 몇 분.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기에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미리부터 탑 주변에 모여 있던 것이었고.

"말해준 시련들의 내용은 전부 숙지했지?"

이어서 그런 여인의 입에서 물음이 흘러나오고,

"물론이다."

"달달 외웠으니까 그만 물어봐도 돼."

그에 투르잔과 레인이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구!

커다란 굉음과 함께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탑의 입구를 굳게 막고 있던 거대한 석문이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열렸다!"

"안쪽으로 진입해!"

그와 함께 사람들의 신형이 탑 쪽을 향해 쏘아졌다.

모든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탑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게 없었기에 조금 더 지켜보자는 부류 또한 존재했으니까.

그들은 탑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생각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타다닷!

역시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일까?

순식간에 사람들의 앞으로 치고 나가며 탑 안으로 사라지는 '열두 바다'의 강자들.

그 뒤를 따라 다른 사람들 또한 빠르게 던전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해."

굳이 빨리 진입할 필요가 없었기에 거의 끝쪽에 있던 은발의 여인이 투르잔과 레인을 향해 짧게 인사한 후 입구로 몸을 밀어 넣었다.

"늦지 마라."

여인을 따라 곧바로 사라지는 투르잔의 신형.

그 후 마지막으로 레인 또한 새카만 어둠만이 가득한 탑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

"...어?"

누군가를 발견한 레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있는 입구의 반대편 끝쪽에서 이제 막 탑 안으로 진입하는 한 명의 사내.

'지온... 하네스?'

새카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특유의 무심함이 느껴지는 얼굴.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그토록 다시 만나길 원했던 사내.

그에 자신도 모르게 레인이 그쪽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후욱!

탑의 어둠이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 * *

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둠이 완벽하게 시야를 가린다.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온은 서서히 걷혀 가는 어둠 너머로 드러나는 거대한 벽들을 바라보았다.

'시작되었나?'

연대기에서 묘사된 것과 똑같은 처음의 풍경에 시온의 입가에 슬쩍 호선이 그려졌다.

다행히도 바뀐 미래가 인과의 탑에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인과의 탑에 입장하셨습니다.

시온의 귓가로 딱딱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4기 도전자입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

시온은 이 목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시련 도우미.'

인과의 탑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시련을 극복하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였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정령.

이러한 '시련 도우미'가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인과의 탑은 다른 던전들과 그 성격이 다르니까.'

보통의 던전이 보물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인과의 탑은 반대로 보물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성향의 던전이었지만, 이곳의 유래를 알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의 멸망을 대비하여 신들과 고룡(古龍)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최후의 지원 수단.'

신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최대한 인과율을 줄이면서 인간들을 도울 방법을 강구하다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인과의 탑이었다.

시련을 대가로 하여 보상을 부여한다면 인과율의 소모를 그만큼 경감 할 수 있었으니까.

'즉 돌파한 시련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보상 또한 커진다는 이야기지.'

그렇게 시온이 생각을 정리할 때도 '시련 도우미'의 음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탑 안에는 각층마다 시련이 존재하며 그 시련을 돌파할 때마다 그 성과와 기여도에 따라 점수가 차등 지급됩니다.

-점수는 누적되며 높을수록 더욱 좋은 보상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1층의 시련은 고뇌의 미로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돌파하여 높은 점수를 획득하시기 바랍니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설명.

"...."

시온은 앞에 놓인 거대한 미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고뇌의 미로'라는 이름을 가진 시련은 제일 처음의 시련답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저 중간중간 나오는 몬스터를 처리하며 미로를 돌파하면 그것으로 끝.

'문제는 얼마나 빠르게 돌파하느냐겠지.'

연대기에서 용사는 일종의 지름길을 알아내어 제일 먼저 미로를 돌파한 후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했다.

연대기를 읽었기에 그 지름길을 알고 있었지만, 시온은 그 길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용사 또한 지름길로 갈 테니까.'

시온은 용사 일행이 자신과 같이 인과의 탑 안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루미너스의 말대로 정말로 용사가 회귀했다면 그녀뿐만 아니라 일행들 또한 그 지름길의 존재를 알고 있을 터.

그렇기에 가봤자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더 빠른 길이 있는데 굳이 그쪽으로 갈 필요도 없고."

그 말과 함께 시온은 한 손을 뻗어 허공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스륵-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러한 손안으로 잡혀 드는 이클락시아.

처음부터 완전한 모습을 이룬 채 나타나는 멸광검을 잠시 바라보던 시온이 검을 잡은 손목을 슬쩍 뒤틀었다.

키이이이잉!

그 순간 이클락시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검신을 중심으로 회전하더니 주변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여 어둠으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흑성하에 한해서라면 아그드바르보다 효율이 좋은 이클락시아가 그러한 어둠을 끝없이 증폭시킨다.

그그그그!

반복되는 압축과 증폭으로 인해 떨리는 검신.

그 떨림은 힘을 견디지 못해 지르는 비명이라기보다는 완전한 몸으로 맞이하는 첫 번째 검격에 대한 기대에 가까웠다.

자신의 손에까지 전해지는 떨림을 느끼며 시온은 이클락시아를 뒤쪽으로 쭉 당겼다.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부분 월식 2중첩.

사실 이 미로에 용사의 지름길보다 더 빠른 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없으면 만들어내면 되지."

휘어지는 시온의 눈.

무언가 불길함을 감지한 것일까?

-부적절한 행동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부적절한 행동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뒤늦게 시련 도우미의 음성이 연속해서 시온의 귓가를 울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마침내 완벽하게 또 하나의 검날을 이루어낸 이클락시아가 앞으로 천천히 내밀어진다.

툭.

그렇게 내밀어진 멸광검의 검 끝이 미로의 벽면에 가볍게 닿는 순간, 쩌저저저저저적!

그런 검 끝에서부터 시작된 한 줄기의 검은 섬광이 일직선상에 존재하는 모든 벽을 갈라내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62화

45장 인과의 탑(2)

키르르륵!

놀 중에서도 최상위종이라 일컬어지는 금빛 갈퀴 놀들이 체계적인 진형을 이룬 채 은발의 여인을 향해 달려든다.

타닷!

그런 놀들을 향해 마주 달려가며 오른손에 쥔 검을 왼쪽 옆구리에 붙이는 여인.

곧이어 순식간에 그녀의 앞까지 치달은 놀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휘두르는 순간.

여인의 검이 수평으로 가볍게 그어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광경은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쩌저저저저적!

여인의 검이 그어지는 궤적을 따라 생겨난 은빛 섬광이 달려들던 금빛 갈퀴 놀 전부를 한 번에 갈라내었으니까.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한참을 더 나아가며 미로의 벽마저 갈라내는 섬광.

그렇게 달려들던 몬스터들을 모조리 처리한 여인의 신형이 순식간에 미로의 끝까지 치달았다.

-1층의 시련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런 여인의 귓가로 울리는 시련 도우미의 음성.

'거의 일직선으로 돌파했어.'

그와 함께 여인의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어렸다.

예상보다 더 빠르게 미로를 통과한 상태였으니까.

인과의 탑 1층의 시련인 '고뇌의 미로'를 통과하는 방법은 총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정석적인 루트를 따라 일반적인 몬스터를 처리하며 통과하는 것.

두 번째는 숨겨진 지름길을 찾아낸 뒤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강한 몬스터들을 돌파하며 통과하는 것.

물론 여인이 고른 것은 두 번째 방법이었다.

강한 몬스터들이라고 해봤자, 1층의 시련이었고 그렇기에 별다를 게 없었으니까.

'이 정도면 무조건 1위야.'

검을 한번 가볍게 털며 이어질 순위 전달을 기다리는 여인.

여인이 이토록 1위를 하려는 이유는 존재했다.

인과의 탑을 오르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최고 등급 보상.

여인은 처음부터 그 보상을 노리고 탑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으니까.

'원래는 그 위에 존재하는 특별 보상을 얻어야 하지만....'

그것은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특별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서리 여왕의 권능 조각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기에 예전에 조각을 얻기 위해 우로보로스를 찾아갔지만, 이미 누군가에 의해 모조리 털려 버린 후였다.

때문에 대체재로서 그다음인 최고 등급 보상이라도 얻어야 하는 상황.

'그러려면 무조건 1층에서부터 우위를 점해야 해.'

그 생각과 함께 여인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2위로 통과하셨습니다. 순위에 따라 기본 점수 10점과 추가 점수 9점이 지급됩니다.

그녀의 귓가로 들려오는 시련 도우미의 음성.

"...뭐?"

그와 함께 여인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었다.

* * *

-1위로 통과하셨습니다. 순위에 따라 기본 점수 10점과 추가 점수 10점이 지급됩니다.

귓가로 울리는 인공 정령의 목소리.

시온은 그 음성을 들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건 자신이 지나온 길을 따라 일직선으로 박살 나 있는 미로의 벽.

'뭐, 처음에 부수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뒤늦게 시련 도우미가 멈추라고 말하는 걸 무시하고 검을 휘두르긴 했지만, 그래도 인정은 해주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벽을 부수는 것 또한 참가자의 능력이었으니까.

'나쁘지 않네.'

시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른손에 들린 이클락시아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사용했기 때문일까?

완전체가 된 멸광검의 능력은 시온 자신의 예상보다 더 뛰어났다.

안정성과 미세 제어 능력도 눈에 띌 정도로 향상되었지만, 그것보다 놀라운 것은 흑성하의 증폭 효율이었다.

예전과 비교할 때 거의 두 배의 차이.

아마 이클락시아가 완전하지 않았다면 부분 월식 2중첩과 더불어 조금 전의 일격으로 이렇게 미로의 벽을 끝까지 뚫어내는 것은 힘들었으리라.

'2층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야.'

시온이 그 생각과 함께 손에 든 이클락시아를 다시 돌려보낼 때였다.

후욱!

탑으로 진입할 때 보았던 어둠이 다시 시온의 시야를 가렸다.

곧이어 그러한 어둠이 걷히며 드러난 곳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장소인 그리 크지 않는 공동이었다.

그와 함께,

-2층의 시련에 입장하셨습니다

시온의 귓가로 시련 도우미의 차가운 음성이 연이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른 참가자들과 힘을 합쳐 두 마리의 우두머리 몬스터를 처리하십시오.

-몬스터의 종류는 무작위입니다.

-기여도, 그리고 특별 상황 대처 능력에 따라 점수가 차등 지급됩니다.

-시련이 바로 시작됩니다.

그런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훅! 훅! 훅!

시온의 주변으로 1층의 미로를 통과한 사람들이 소환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추가로 나타난 사람들은 총 네 명.

'재미있게 되었네.'

그중에서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바라보는 레인 드라니르의 모습을 발견한 시온은 슬쩍 웃음 지었다.

이번 기회에 그녀가 예전과 비교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전에 먼저 정리부터 해야겠지만.'

시련 도우미의 마지막 음성을 떠올리며 시온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아무래도 이렇게 다섯 명이서 2층을 돌파해야 할 것 같군."

그동안 파악을 끝냈는지 빡빡 민 머리에 전신의 문신이 인상적인 거한이 주변을 살피던 것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까? 내 이름은 드숀이다. 나에 대해서는 한 번쯤은 들어봤겠지? 1층은 14위로 통과했다."

드숀 바이스.

전사와도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뛰어난 실력을 지닌 주술사로서 제국 남부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자였다.

실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일까?

그런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스며들어 있었다.

"저, 저는... 아델라라고 해요. 대지의 신을 모시는 사제예요. 미약하지만 치료와 지원 주문들을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런 드숀의 말에 대지를 닮은 갈색 머리에 유약한 인상의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그 뒤로 뚝 끊기는 음성.

"뭐, 나머지는 밝힐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그에 어깨를 으쓱한 드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하면 2층의 시련은 우두머리 몬스터 두 마리를 우리끼리 힘을 합쳐 잡는 것이다. 아마 그 몬스터들은 저 문 너머에 존재하겠지."

손가락을 뻗어 공동 한쪽에 존재하는 거대한 문을 가리키는 드숀.

"어차피 이대로 있어봤자 저 안에 어떤 종류의 몬스터가 있는지 알 방법은 없고, 시간은 시간대로 낭비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어서 안으로 들어갔으면 하는데."

그 말과 함께 드숀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생각이 없는 건가?"

장검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차가운 인상의 요정이 입을 열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지?"

그에 주술사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요정 쪽을 돌아봤다.

"생각이 없다고 했다. 아무런 준비조차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들이받으려 하다니. 네 목숨은 여러 개라도 되는 건가?"

"그럼 너는 저 문 안에 있는 몬스터들을 파악할 방법이라도 있다는 건가?"

"아니, 없다. 하지만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전력을 파악해 진형을 배치할 정도의 머리는 있지."

그런 드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시니컬하게 대답하는 요정.

"하, 파악은 무슨! 이름조차 밝히지 않는 주제에."

"그건 다른 사람들을 깔아보는 듯한 네 태도 때문이다만."

"저, 저기 일단 진정하시고...."

그 둘을 대지 신의 사제인 아델라가 중재하려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물론 네가 상황을 주도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네 기여도를 올리려는 속셈인 걸 모를 줄 알았나?"

점점 흉흉해져 가는 공기.

'정말로 똑같이 흘러가네.'

한쪽에서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레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눈앞에서 일어나는 다툼은 탑 자체가 의도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1층의 시련을 통과한 참가자 중 개성이 뚜렷하고 서로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들만 묶어 놓은 게 바로 지금의 다섯 명이었으니까.

거기다가 서로 꿀릴 게 없는 강자들이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탑에 입장하기 전 은발의 여인에게 들었던 내용.

'이 사람들을 규합하는 것부터가 시련이라고 했었지.'

아마 조금 전에 시련 도우미가 말한 '특별 상황 대처'가 바로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리라.

이곳에서 등장하는 우두머리 몬스터는 무작위였기에 탑의 정보를 알고 있는 레인으로서도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2층에서 추가 점수를 얻을 방법은 사람들을 규합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레인은 한쪽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검은 머리 사내를 흘깃 바라보았다.

지온 하네스.

예전 검은 숲 사건 이후로 홀연히 사라졌던 사내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역시 탑 앞에서 봤던 게 잘못 본 것이 아니었어.'

대체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이제 나타난 것일까.

당장 아는 체를 한 뒤 그동안 쌓아 놨던 질문 공세를 펼치고 싶었지만, 레인은 그 마음을 억눌렀다.

지금은 일단 눈앞의 상황을 정리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때가 된 것 같으니 슬슬 나서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돌려 다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레인.

이미 다툼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원래 가장 강한 사람이 상황을 주도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그 말에는 동의한다만, 그렇다고 그게 너라는 이야기는 아니지. 그리고 나는 1층을 13위로 통과했다."

"그래? 그럼 여기에서 누가 더 강한지 한 번 증명해 볼까?"

화아아아!

그 말과 함께 드숀의 전신에 새겨진 문신들이 빛을 발하며 주변으로 막대한 주력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군."

그에 차갑게 웃으며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는 요정.

그로부터 흘러나온 날카로운 예기가 주변의 대기를 베어낸다.

"우, 우리끼리 싸우면 안 돼요!"

일촉즉발로 치닫는 상황에 데일라가 다급하게 둘을 향해 외치고.

그런 사제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드숀과 요정이 서로를 향해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는 찰나였다.

"거기까지."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쩌저저저저적!

격돌 직전의 둘 사이로 한 줄기의 새하얀 벼락이 내리쳤다.

그런 벼락으로부터 터져 나온 무지막지한 뇌력(雷力)으로 인해 한순간 새하얗게 변하는 공동.

잠시의 시간이 지나 그러한 공동이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는 순간,

"무슨...!"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어느새 드숀과 요정의 사이에 위치한 채 둘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는 레인의 모습을.

"방금 분명 가장 강한 사람이 상황을 주도한다고 말했지?"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술사와 검사를 향해 씩 웃으며 입을 여는 레인.

"그럼 여기는 내가 지휘하도록 하지. 둘 다 불만 없지?"

"...."

레인의 말에 드숀과 요정이 반박하지 못한 채 침묵했다.

방금 그들이 서로를 향해 쏘아낸 공격은 전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공격이었다.

그런 공격을 중간에 끼어들어 가볍게 막아낼 정도라면 본신의 무력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지금까지도 레인의 전신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뇌력은 그들의 몸에 소름이 돋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대체 이 정도의 강자가 어디에서 갑자기....'

사실 인상착의를 보면 어느 정도 레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드숀과 요정은 그러지 못했다.

설마 그녀가 북외칠걸의 그 '레인 드라니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러기에는 너무나 큰 무력의 차이가 있었다.

"아, 참고로 나는 1층의 시련을 4위로 통과했어."

그렇게 자신의 1층 성적까지 밝히며 깔끔하게 서열을 정리한 레인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자, 그럼 이제...."

"이쪽 정리는 다 끝났나?"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고요한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던 시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아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귓가에 똑똑히 들리는 목소리.

'지온...?'

그에 자연스럽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넘기며.

저벅, 저벅.

시온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은 무척이나 느릿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시온의 모습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강제로 자신들의 시선을 잡아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한순간에 모든 이목을 가져오며 중앙까지 걸어 나온 시온의 입에서,

"그럼 다른 쪽 정리도 끝내고 시작하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의문으로 물드는 순간이었다.

콰직!

아무런 전조도 없이 휘둘러진 시온의 기가페르세스가 옆에 있던 사제 데일라의 몸을 수직으로 쪼갰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63화

45장 인과의 탑(3)

백성궁에 존재하는 1황자 루브리오스의 집무실.

그 안에는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루브리오스와 그의 앞에서 빛의 교 이단심문관 복장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결과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1황자의 물음에 이단심문관이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흠...."

그 말에 루브리오스가 불만족스러운 음성을 흘려내며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벌써 습격을 받은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직후부터 빛의 교의 이단심문관들과 그림자들을 대거 동원하여 습격을 가한 주동자들을 추적하고 있었지만, 성과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있었다.

"흔적 같은 것도 없었나?"

"그렇습니다.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이단심문관.

"마기는 다른 어떤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사악한 힘입니다. 그렇기에 일단 드러나기만 한다면 추적은 쉽습니다만... 마기 자체를 아예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쪽에서 철저하게 손을 쓴 것 같습니다."

그에 1황자의 손가락 리듬이 더욱 빨라졌다.

'추적을 포기해야 하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단심문관은 교단 전체를 통틀어 부정한 것들을 추적하고 말살하는 분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기관의 수장이었다.

그중에서도 마물 추적은 최고라도 일컬어도 모자랄 정도.

그런 자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게 옳았다.

'거기다가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해야 하니 걸리는 것도 많아.'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

하지만 결국 루브리오스의 입에서 추적을 중단하라는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습격을 당했을 때 느꼈던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으니까.

거기다가 그는 제국 내에 숨어 있는 마족들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번 일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오즈리마의 힘을 빌려야 하나? 아니, 아직 그곳은 안 돼.'

시온의 말대로라면 오즈리마 가문에도 마물들이 숨어 있을 터였고 연계한다면 이쪽 정보가 새어 나갈 우려가 있었다.

'대체 이 상황에서 시온은 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이냐.'

며칠 전 감쪽같이 황성에서 모습을 감춘 자신의 배다른 막냇동생을 떠올리며 루브리오스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루브리오스 전하!"

바깥에 있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시온 황자 측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뭐?"

의문으로 물드는 1황자의 눈.

지금 황성에 없는 시온이 어떻게 사람을 보냈단 말인가.

"일단 들여보내도록."

덜컥!

루브리오스의 허락과 동시에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한 명의 여인.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홍옥 같은 붉은 눈.

"안녕!"

바로 리우시나 블러드워커였다.

* * *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2층의 시련에 입장하자마자 시련 도우미가 했던 말.

-다른 참가들과 힘을 합쳐 두 마리의 우두머리 몬스터를 처리하십시오.

-몬스터의 종류는 무작위입니다.

-기여도, 그리고 특별 상황 대처 능력에 따라 점수가 차등 지급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마지막 말.

-시련이 바로 시작됩니다.

이미 핵심적인 단서가 이 말 안에 들어 있었다.

2층의 시련은 보스 몬스터를 죽이는 것.

그리고 시련이 바로 시작되었다는 건 그러한 몬스터를 죽여야 할 상황이 곧바로 만들어졌다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현재 이 공동에 있는 게 참가자들뿐이라는 건 오직 단 하나를 의미했다.

'참가자로 변장한 보스 몬스터가 있다는 말이지.'

흔히 괴수, 혹은 몬스터라는 말로 뭉뚱그려 칭하지만, 대륙에 존재하는 몬스터의 종은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그 능력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그렇기에 충분히 마족과 같이 인간으로 변장하는 몬스터가 존재할 수 있었다.

일단 거기까지 파악한 시온이 그다음으로 한 일은 다른 사람들이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동안 누가 변장한 몬스터인지를 골라내는 일이었다.

'이 시련을 만든 자는 인간과는 미세하게 다른 몬스터 특유의 행동거지나 사고방식 등으로 파악하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시온에게는 굳이 그렇게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방법 말고도 다른 방법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시련 도우미였다.

탑으로 들어온 모든 사람에게는 시련 도우미가 붙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몬스터에게까지 도우미가 붙을 리가 없었다.

즉 시련 도우미가 존재하지 않은 자가 바로 몬스터라는 말.

보통 사람이라면 그것을 알아챌 방법이 없었지만, 시온에게는 존재했다.

'서리 정령.'

둘 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게 아닌 만들어진 정령이었기 때문일까.

서리 정령은 인과의 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련 도우미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덕분에 그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낸 게 바로,

쩌억!

지금 시온이 기가페르세스로 쪼갠 대지의 사제 데일라였다.

털썩!

정확히 두 쪽으로 갈라진 채 땅바닥으로 쓰러지는 데일라의 시체.

보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광경에 잠시의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뭐...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그런 데일라의 바로 옆에 있던 드숀이 욕설을 토해내며 시온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그와 함께 잔뜩 경계 태세를 한 그의 온몸에서 막대한 주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스릉!

기다란 장검을 시온 쪽으로 겨누는 요정 검사와 등 뒤에 매고 있던 창을 뽑는 레인.

그중 예전부터 시온을 알고 있던 레인의 눈에 어린 당황은 다른 사람들보다 컸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짓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정말 저 떡대 주술사의 말대로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그때,

"질기네, 한 번에 죽이려고 일부러 반으로 갈랐는데."

그런 사람들의 경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여전히 갈라진 데일라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던 시온의 입에서 혀를 차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알 수 없는 말에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에 의문이 깃드는 순간이었다.

꾸드드득!

기이한 소리와 함께 두 쪽으로 갈라져 있던 시체가 합쳐지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다른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솟아나는 머리와 팔, 그리고 다리.

그렇게 모든 변화가 끝난 자리에는 사제 데일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근육질의 남성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 저건!"

그 모습을 본 드숀의 입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제귀! 어째서 복제귀가 여기에!"

그가 활동하는 남부의 오지에서 아주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최상급 몬스터.

복제귀는 평소에는 전혀 인간과 차이점이 없지만, 모습을 바꾸는 아주 짧은 순간에 특유의 기운을 방출한다.

예전 저 괴수에게 당해 일행 전부를 잃은 적 있던 드숀이었기에 그 기운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복제귀라면... 몬스터? 설마 처음부터!"

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했는지 무기 끝을 복제귀 쪽으로 향하는 레인과 요정 검사.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앙!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복제귀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런 복제귀가 다시 나타난 곳은 드숀의 바로 앞.

복제귀는 자신이 죽인 생물들의 능력을 완벽하게 복제한다.

그리고 이번에 복제귀가 복제한 능력은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초절정 권사의 모든 것이었다.

쩌어엉!

복제귀의 주먹이 앞으로 내질러지며 터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충격파.

"커헉!"

그 짧은 순간 반응하여 몇 겹의 보호막을 펼쳤음에도 드숀의 신형이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그런 주술사를 마무리 짓기 위해 곧바로 따라붙는 복제귀.

하지만 복제귀의 신형은 드숀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그 전에,

"어딜!"

양쪽에서 휘둘러진 레인의 창과 요정의 검이 정확히 급소를 노리며 들어왔으니까.

콰가가각!

그 둘의 공격이 닿기 직전, 공중에서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켜 그것들을 흘려낸 복제귀의 전신에서 칼날과도 같은 기운이 폭사했다.

쩌저저저적!

'생각보다 강해!'

뒤쪽으로 물러나며 그 기운들을 쳐내는 레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2층밖에 되지 않는 시련의 몬스터가 이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아무리 몬스터의 수준이 참가자들의 무력을 일정 부분 반영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용사에게 들었던 수준과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사실 그래도 죽이는 건 가능했지만, 문제는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빠르게 돌파해야 하는데.'

여기서 시간을 오래 끌게 된다면 받을 수 있는 점수가 낮아지는 것은 당연할 터.

파지지직!

그에 급해진 레인의 전신에서 한층 더 강한 뇌기가 터져 나오며 주변을 잠식하는 찰나였다.

우드득!

그녀와 요정 검사를 향해 달려들던 복제귀의 몸이 인간이라면 돌아갈 수 없는 각도로 꺾이는가 싶더니, 투확!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레인조차 순간적으로 놓칠 정도로 엄청난 속도.

그런 복제귀가 향하는 곳은 이제 막 몸을 추스르는 드숀이었다.

"...!"

아직 조금 전 있었던 격돌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 주술사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늦었어!'

그에 뒤를 쫓는 레인의 눈이 다급함으로 물들고.

"끼히히히!"

마침내 광소를 터뜨리는 복제귀의 주먹이 드숀의 머리를 터뜨리기 위해 쏘아지는 순간이었다.

"빨리 끝내고 넘어가지."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른한 목소리.

"끼히...?"

그 목소리에 의문 어린 눈을 한 복제귀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수직으로 실선이 그어지는가 싶더니, 쩌억!

그대로 다시 한번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 뒤에는 어느새 한 손에 검은색 사슬을 휘감은 채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온이 있었다.

곧이어 촤르륵 소리와 함께 뻗어나간 시온의 사슬이 그런 복제귀의 갈라진 몸뚱어리에 박혀 들었다.

콰과과과과광!

그러고는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키며 복제귀의 육신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조금 전처럼 재생하지 못하도록 아예 뿌리를 뽑아버린 것.

"어찌 이렇게 쉽게...."

그 모습을 본 요정 검사의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따라쟁이 군주'를 처치하셨습니다. 신속한 처치로 인해 추가 점수 2점이 부여됩니다.

그를 비롯한 사람들의 귓가로 시련 도우미의 음성이 울렸다.

-특별 상황 대처를 완벽하게 해내셨습니다. 추가 점수 10점이 부여됩니다.

그리고 시온에게만 울리는 또 한 번의 음성.

아무래도 처음에 말했던 '특별 상황'은 인물 간의 갈등이 아닌 참가자로 변해 숨어든 복제귀였던 것 같았다.

'하마터면 정말로 위험할 뻔했어.'

그렇게 상황이 종료된 후 복제귀의 시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레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참가자 중에 몬스터가 섞여 있었단 것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저 보스룸 안으로 들어갔다면 자신들은 뒤쪽에서부터 들어오는 공격에 전멸했을 수도 있었다.

'아마 사제로 위장한 것도 그걸 노린 것이었겠지.'

보통 전투 중에 사제의 위치는 제일 뒤쪽이었으니까.

생각만 해도 오싹해지는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레인은 지금 이 모든 일을 해결한 지온 하네스를 바라보았다.

"대체...."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이 인과의 탑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레인 자신조차 사제가 복제귀임을 알아채기는커녕 이 중에 몬스터가 섞여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

다른 사람들 또한 그녀와 비슷한 생각인지 요동치는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추론력과 판단력.

'그리고 그걸 단숨에 집행하는 결단력까지.'

만약 자신이었다면 사제가 몬스터라는 걸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망설이지 않고 죽일 수 있었을까?

아마 확신이 있기 전까지는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레인이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지온 하네스의 무력이었다.

'잠깐이긴 했지만, 세 명을 동시에 상대했던 복제귀를 이토록 간단하게 처리하다니....'

기습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절로 경계심이 들 정도의 무력.

처음에 보았을 때도 저 남자의 힘과 능력은 인상적이긴 했지만, 지금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거기다가 분위기 또한 완전히 달라졌어.'

예전의 지온 하네스는 앞으로 나서지 않은 채 뒤에서 지켜보는 관조자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이 상황 자체를 움켜쥔 채 주도하고 있었다.

대체 1년조차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것이 본모습이고 그때는 이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걸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

그로 인해 정적이 흐르는 공동 안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온을 향해 집중된다.

마치 지시를 기다리는 것만 같은 모습.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로 진입하지."

잠시 복제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시온이 그 말과 함께 한쪽에 있는 보스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시온의 뒤를 홀린 듯이 따르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어떠한 불만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64화

45장 인과의 탑(4)

저벅, 저벅.

공동의 한쪽에 존재하는 보스룸으로 통하는 문.

그곳까지 걸어가는 내내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앞서가는 시온의 등만을 바라볼 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시온의 정체에 대한 것과 보스룸 안에 있는 우두머리 몬스터에 관한 것들이었다.

'방금 처치했던 따라쟁이 군주가 현혹과 교란 쪽이었으니 저 문 뒤에 있는 몬스터는 무력 쪽에 치중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

그중 레인은 후자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전자를 생각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참가자들의 전력을 파악하지 않고 바로 들어가도 되나?'

조금 전 드숀과 요정 검사의 언쟁에서 굳이 한쪽 편을 들자면 레인은 요정의 쪽이었다.

아무리 빠르게 돌파하는 게 좋은 점수를 획득하기에 좋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정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게 맞았으니까.

그런데 시온은 아무런 질문조차 하지 않은 채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문 앞에 도달한 시온의 신형이 멈춰 섰다.

"안으로 들어가면 내 지시대로 움직여."

그와 함께 시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

곧이어 이루어질 전투에서 시온은 철저하게 다른 사람들과 연계하여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 시련 자체가 그걸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1층의 시련이 탑을 오를 최소한의 자격을 묻는다면 2층은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 잘 협력할 수 있는가를 묻는 시련이었다.

즉, 몬스터와 전투를 치를 때 협동이 잘 이루어질수록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 뜻.

'이왕 하는 거 완벽하게 해주지.'

이미 일행들의 전력은 조금 전 복제귀와의 전투 때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

자신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러한 침묵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을 파악한 시온은 곧바로 문을 밀었다.

구르릉!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것일까.

두꺼운 석문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그 안쪽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공동.

"...!"

그와 함께 시온의 뒤에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동시에 흔들렸다.

새로 나타난 공동의 크기가 원래 있던 곳보다 훨씬 컸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저건...!"

공동의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늑대.

그러한 늑대의 전신에서는 보기만 해도 움츠러들 정도로 기분 나쁜 연녹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연옥 불꽃 늑대...."

그 늑대의 정체를 알아본 요정 검사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옥 불꽃 늑대, 줄여서 연옥랑.

제국의 서부 극단에 존재하는 요정림마저 지나 더욱 서쪽으로 가게 된다면 '염옥(炎獄)'이라 불리는 지대가 나오게 된다.

바닥에는 검붉은 용암이 흐르며 대기는 사시사철 타오르고 있는 죽음의 대지.

일반적인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그러한 대지에는 그 환경에 적응한 극히 소수의 괴물만이 존재하는데 그들의 강함은 최상급 몬스터조차 아래로 볼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연옥 불꽃 늑대가 바로 그런 '염옥'의 괴물 중 하나였다.

그르르!

눈을 떠 시온과 다른 사람들을 인지한 연옥랑이 낮은 울음과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후욱!

그와 함께 늑대로부터 흘러나온 녹염이 더욱 강하게 번져 나오며 공동 전체를 후끈하게 달궜다.

그 열기로 인해 막혀오는 숨.

그에 숨을 고른 사람들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이제 시작될 전투를 준비할 때였다.

투확!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어둠과 함께 시온의 신형이 연옥랑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왜 갑자기 혼자서!"

그것을 보며 드숀이 당혹 어린 음성을 내뱉었다.

조금 전 자신의 지시를 따르라고 해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달려 나가는 시온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드숀의 얼굴에 어린 당혹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봉쇄 주술 준비.

시온의 목소리가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졌으니까.

파앙!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지시가 전해진 것일까?

차가운 눈으로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레인과 요정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든 채 양쪽으로 갈라져 튀어 나갔다.

그사이, 연옥 늑대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시온이 두 눈 가득 명안을 발동시키며 달려가던 방향을 90도 가까이 틀었다.

콰앙!

그와 거의 동시에 시온이 있던 자리에 꽂혀 드는 늑대의 거대한 앞발.

그로부터 일어나는 여파를 모조리 흘려낸 시온이 자신을 노린 연옥랑의 앞발을 그대로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타다닷!

거의 수직으로 서 있는 늑대의 앞다리를 두 다리로만 뛰어 올라가는 시온의 모습은 기예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크르릉!

마치 벌레를 쳐내려는 것처럼 그런 시온을 향해 연옥랑이 반대쪽 앞발을 휘둘렀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앞발을 인지하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다리를 오르는 시온.

마침내 그러한 발이 시온을 파리 잡듯 찍어 누르려는 순간, 덜컥!

무언가 걸리는 소리와 함께 시온의 바로 앞에서 연옥랑의 앞발이 정지했다.

시온의 지시에 따라 드숀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봉쇄 주술을 사용한 것.

"허어...!"

그 광경에 술식을 사용한 주술사의 입에서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전신에서 타오르는 녹염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항마력을 지닌 연옥랑에게 자신의 주술이 한 번에 통할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무언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딱 한 가지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늑대의 왼쪽 다리 두 번째 관절에서 밑으로 1m 정도 떨어진 부위.

시온이 머릿속으로 지정해 준 부위에 정확히 주술을 사용했다는 것뿐.

그곳은 바로 흑성하가 5성으로 오름으로 인해 한 단계 진화한 시온의 명안이 파악한 급소 중 한 곳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틈을 놓치지 않고 단숨에 연옥랑의 머리 근처까지 치닫는 시온의 신형.

콰드드득!

그런 시온의 손에서 풀려나온 거인파괴자가 사슬낫으로 변하며 늑대의 턱과 목 주변의 근육 중 일부를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동시에 그 안으로 깊숙하게 파고드는 암혼사.

크왁!

그에 고통 섞인 울음을 흘려 낸 연옥랑이 시온을 떼어내기 위해 온몸을 뒤틀었다.

아니, 정확히는 뒤틀려고 했다.

그 전에,

스가가각!

연옥랑의 왼쪽 뒷다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요정 검사가 검을 휘둘러 정확히 늑대의 발목 뒤쪽에 존재하는 주요 힘줄을 베어버렸으니까.

경직된 앞다리와 힘줄이 끊긴 뒷다리.

그로 인해 연옥랑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거기에 쐐기를 꽂아 넣듯.

"흐읍!"

늑대의 오른편에서 나타난 레인이 숨을 깊게 들이쉬는 동시에 새하얀 벼락을 최대치로 담아낸 창을 쏘아내었다.

쩌어어어엉!

백열하는 주변의 공간과 함께 터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폭음!

그런 레인의 일격에 적중당한 연옥 늑대의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한 채 왼쪽으로 쓰러졌다.

크아아아!

그에 분노 어린 울부짖음을 토해낸 연옥랑이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것보다 시온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어느새 늑대의 머리 바로 앞에 나타난 시온이 다시 사슬 형태로 변한 기가페르세스를 감은 오른 주먹을 끝까지 뒤로 당긴다.

꾸드드득!

그에 맞춰 검게 물들어가는 대기와 조여드는 공간.

그 모습에서 위기를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연옥랑이 쓰러진 상태 그대로 다급하게 시온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화르륵!

그러한 입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막대한 녹염!

이대로 간다면 연옥 불꽃 늑대가 가진 최강의 힘 중 하나인 '숨결'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지만, 시온의 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저 숨결은 자신에게 닿지 못할 테니까.

터업!

조금 전 거인파괴자가 파헤친 턱과 목 주변 근육으로 스며들었던 암혼사.

그러한 암혼사에 의해 강제로 관절이 닫히며 연옥랑의 입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물어진다.

시온은 알고 있었다.

연옥랑의 외피는 무척이나 단단하기에 외부의 충격으로는 급소를 노리더라도 숨통을 끊는 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였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충격을 가하는 것.

그렇기에 시온은 의도했다.

연옥랑이 숨결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도록.

늑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철저하게 짜여진 계획.

!!!!!!

완벽하게 걸려든 연옥랑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고.

마침내 응집을 끝낸 시온의 주먹이 그런 늑대의 위턱을 격하는 순간, 투콰아아아앙!

뿜어지지 못한 숨결이 연옥랑의 몸속에서 폭발하며 내부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 * *

아오오오오!

고통으로 범벅된 하울링과 함께 초록빛을 띤 불꽃이 공동 전체를 가득 메운다.

바위조차 한순간에 녹여버릴 정도로 엄청난 고온의 불.

"대체...."

그러한 불꽃을 막아내는 동시에 연옥랑에게 추가적인 공격을 가한 레인의 입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하루 동안 이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것일까.

그것도 그 대상이 모두 한 사람이었다.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빠르게 기우는 전세도 전세였지만, 그녀가 놀란 것은 바로 이러한 전세를 만들어낸 지온 하네스의 능력이었다.

정확히는 지휘 능력.

처음 저 사내가 자신의 지시를 따르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진형을 유지해라, 시선을 끌어라, 목덜미를 노려라 등등.

일반적인 지시 정도나 내릴 것으로 여겼을 뿐.

하지만 마치 메시지 마법처럼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지는 지온 하네스의 지시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달랐다.

-목표의 오른쪽 뒷다리 발목 20센티 밑 부분에 존재하는 힘줄 제거.

-3초 뒤 목표의 몸이 기울 때에 맞춰 왼쪽 옆구리를 전력으로 타격.

공격을 가하는 시간과 그 부위까지.

그 모든 것을 지정해 주고 있었다.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까지 맞춰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는 상대의 모든 움직임을 예측해야 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게 바로 전투였고 그렇기에 이런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게 맞아야 하는데....

지금 그 불가능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콰과과광!

지온 하네스가 시간과 함께 지시를 내리면 정확히 그 시간이 될 때 그 지시를 이행해야 할 상황이 만들어진다.

귀신이 곡할 노릇.

'미래를 알고 있기라도 하는 건가?'

레인의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더군다나 그 자신은 정면에서 연옥랑을 상대하는 동시에 다른 세 명에게 한꺼번에 그러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율이 올라올 정도의 지휘 능력.

거기다가 자신들의 전력은 언제 파악한 것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설마 조금 전에 있었던 복제귀와의 그 짧은 전투 때....'

요동치는 레인의 눈동자.

대체 저 사내의 능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그러는 와중에도,

쾅! 쾅! 쾅! 쾅!

마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그녀를 비롯한 사람들의 연격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크와아아아아!

그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는 늑대의 입에서 발악과도 같은 울음이 끝없이 터져 나온다.

그와 함께 연옥랑의 전신에서 터져 나와 사방으로 쏟아지는 무차별적인 공격.

하지만 그러한 공격에 맞는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전에 들려오는 시온의 지시에 의해 전부 막아내거나 피해냈으니까.

"세상에 이런 전투가 존재하다니...."

레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지 요정 검사가 검을 휘두르며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연옥 불꽃 늑대가 무엇이던가.

그의 고향인 요정림에서 두려움의 상징이라고까지 불리는 괴물 중 하나였다.

전래 동화처럼 그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

그런데 그러한 연옥랑이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형편없이 얻어터지고 있었다.

늑대가 약한 게 아니었다.

자신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저 검은 머리 사내의 실력과 지휘 능력이 너무나도 완벽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일방적인 사냥이 지속되었을까.

마침내,

쿠우우웅!

마지막 단말마와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연옥 불꽃 늑대의 거체가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더는 일어나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연옥랑.

사실 조금 전 시온에 의해 내부 전체가 박살 났을 때부터 이미 이 상황은 예정되어 있었다.

곧이어 점점 희미해지던 늑대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고.

전신에서 타오르던 녹염 또한 전부 사그라드는 순간,

-2층의 시련을 완벽하게 돌파하셨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점수가 차등 지급 됩니다.

-4기 참가자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셨습니다. 추가 점수 3점이 지급됩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귓가에 시련 도우미의 음성이 들려왔다.

-완벽한 협동을 이루셨습니다. 추가 점수 2점이 지급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서 끝이었지만,

-막대한 기여도로 인해 추가 점수 10점이 지급됩니다.

-완벽한 지휘로 인해 추가 점수....

시온의 귓가로는 계속해서 인공정령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2차 시련까지 55점 이상을 달성하셨습니다. 비밀 시련으로 향하는 첫 번째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그런 정령에게서 들려온 마지막 말에 시온은 슬쩍 웃음 지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65화

45장 인과의 탑(5)

수도 휴브리스 중심부에 존재하는 거대한 저택의 침실.

그러한 침실의 침대에는 오마령 중 하나이자 반마장군이라 불리는 세르키아가 누워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저택 자체가 유사시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마역의 은신처 중 한 곳이었으니까.

저번 시온 황자를 습격한 이후로 황성의 눈들과 빛의 교의 이단심문관들이 자신들을 추적하고 있었고 그 추적을 피해 온 곳이 바로 이 저택이었다.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으랴.

그토록 눈을 부릅뜨고 찾던 대상이 수도 한복판의 저택에서 버젓이 존재하고 있음을.

실제로 황성의 눈은 그녀의 꼬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끄으으!"

그에 반해 침대에 누워 있는 세르키아의 상태는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저번에 시온이 던진 창에 심장이 꿰뚫리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탓에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창이 박혔을 때 세르키아의 몸속으로 침투한 흑성하가 끊임없이 그녀의 마기를 살라 먹으며 더욱 상태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그때,

철컥!

침실의 문이 열리며 뱀처럼 째진 눈에 두 개의 뿔을 가진 남자가 들어왔다.

바로 '여섯 발톱' 중 하나인 마족 히셀러였다.

"어때, 몸은 좀 괜찮아졌어?"

천천히 침대를 향해 걸어오며 히셀러가 물었다.

세르키아는 알고 있었다.

히셀러의 저 질문은 정말로 세르키아 자신의 몸 상태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애초에 그에게 자신은 별다른 가치가 없는 소모품일 뿐이었으니까.

막말로 자신이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저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라.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래? 잘됐네."

실제로 세르키아의 상태는 조금만 유심히 봐도 그 대답이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지만, 히셀러는 눈치채지 못한 채 가볍게 넘기고 있었다.

"시온 아그네스는 어디에 있는지 파악됐어? 저번에 황성 안에 없는 것을 확인했다며."

"아직입니다. 저들의 눈을 피해서 움직여야 하기에 이쪽의 제약이 많은 상황입니다."

"빨리 다시 만나고 싶은데...."

그 대답에 불만족스럽다는 얼굴로 히셀러가 중얼거렸다.

저번 강렬했던 첫 대면 이후로 히셀러의 머릿속에는 온통 시온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여섯 발톱' 중 하나가 된 이후로 멈춘 것이나 다름없던 그의 심장을 다시금 뛰어오르게 만든 자였으니까.

그렇기에 어서 빨리 그 사지를 찢고 심장을 뽑아 그가 보는 앞에서 먹어 치우고 싶었다.

"거기다가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도 너무 따분하단 말이지.... 아!"

무료함이 깃든 눈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히셀러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우리가 습격했을 때 시온 아그네스 옆에 있었던 금발 머리 남자 말이야."

"1황자 루브리오스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1황자란 녀석도 우리를 찾고 있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흠...."

그 대답에 잠시 근처에 있던 창문의 창틀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마족의 입에서 하나의 물음이 흘러나왔다.

"그 녀석은 얼마나 강하지?"

* * *

2층의 시련을 끝마친 뒤 3층의 시련으로 향하는 문은 곧바로 열리지 않았다.

-3층의 시련이 준비 중입니다. 잠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시련 도우미의 음성과 함께 연옥랑의 시체가 완전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을 뿐.

시온은 이렇듯 3층의 시련이 곧바로 열리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3층의 시련을 치르기 위해서는 참가자들 전원이 모여야 하니까.'

통칭 '4기'라 불리는 참가자들이 전부 2층의 시련을 돌파하거나 실패할 때까지는 이곳에서 기다려야 하리라.

그때,

"오랜만이야."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고개를 돌린 시온의 눈에 복잡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볼 뿐 다가오지 않는 다른 참가자들과는 달리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레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원래는 진작 말을 걸려 했지만 틈이 나지 않아 이제야 처음으로 시온에게 말을 걸게 된 그녀였다.

"나 기억하고 있지?"

"이름 정도는."

사실 이름뿐만 아니라 그녀에 대한 정보 대부분을 알고 있었지만, 시온은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괜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으니까.

"예전에 봤을 때와 비교해 많이 달라졌던데?"

"너야말로."

레인의 말에 시온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역시 용사의 동료 중 한 명이라는 건가?'

처음 봤을 때 레인의 수준은 그저 한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연옥랑과의 전투에서 보여주었던 힘과 느껴지는 기운으로 추측해 봤을 때 지금 그녀의 수준은 '일곱 하늘' 바로 밑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장.

가장 먼저 각성하기도 했고 용사의 곁에 오래 머물며 그녀의 운명을 나눠 받은 덕분이리라.

안부 인사는 이 정도로 되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사실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잠시 침묵하던 레인의 입에서 본론으로 들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지?"

"검은 숲의 마녀."

그와 함께 차갑게 변하는 그녀의 얼굴.

사실 그동안 어떻게 이렇게 강해진 것인지부터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등등, 눈앞의 남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그중 최우선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검은 숲에서의 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마녀와 싸우다가 정신을 잃었어. 하지만 잃기 직전에 당신이 내 앞을 막아섰던 것은 기억해. 대체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걸 물어보는 이유는 마녀의 행방을 알고 싶어서겠지?"

"...맞아."

마치 자신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에 흔들리는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던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어째서 마녀의 행방을 알려고 하는 거지?"

그런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시온이 물었다.

"죽여야 하니까."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는 대답.

"이유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그 새끼가 내 친구들을 전부 죽였다는 걸."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차디찬 이성을 뚫고 분노가 차오른다.

물론 지금 그 마녀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레인 자신이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실제로 저번에 만났을 때도 상대가 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마녀를 죽여야지만, 이 미칠 듯한 분노가 사그라들 것 같았으니까.

그때,

"한심하군."

잠시 레인을 바라보던 시온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한심하다고 했다."

"대체 지금 뭐라고...!"

그에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레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분노 어린 외침이 미처 완성되기 전,

"한 가지만 묻지."

시온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정말로 마녀가 네 동료들을 죽였나?"

"...!"

"대답하지 못하겠지. 네 동료들을 죽인 건 마녀가 아닌 정화교에 빠져 너를 배신한 친우들이었으니까."

명백한 사실이자, 지금까지 레인이 외면하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안을 죽인 건...!"

"그때 마녀에게 죽지 않았다면 네 손으로 직접 처형했겠지."

"...."

"넌 그저 상실과 실패로 인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야. 단지 검은 숲의 마녀가 그에 가장 적합했을 뿐."

신랄하고 직설적인 말.

그리고 동시에 오직 그 전후 사정을 알고 있던 시온만이 해줄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아니야... 애초에 마녀가 없었다면 정화교도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이런 일도...."

시온의 말을 부정하듯 중얼거리는 레인.

시온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반박하지 않아도 지금 하는 말이 억지라는 것은 그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지금까지는 저 분노가 강해지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겠지만....'

이제는 바로잡아야 할 때였다.

어쩌면 나중에 리우시나와 레인이 같이 싸워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만약 그때도 저렇다면 무척이나 곤란할 터.

그때,

-3층의 시련으로 이동합니다.

귓가에 울리는 시련 도우미의 음성.

그와 함께,

스륵-

시온을 비롯하여 공동 안에 있던 사람들의 몸을 처음 탑을 들어왔을 때 보았던 어둠이 감싸기 시작했다.

"다음에 볼 때는 한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직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인을 향해 무심한 어조로 말하는 시온.

그런 시온의 목소리가 끝나는 순간,

후욱!

사람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 *

-당신의 현재 순위는 1위입니다.

-1위 특전으로 3층의 시련에서 시작하는 위치를 지정하실 수 있습니다. 지정하시겠습니까?

다음 장소로 이동되기 전 시온의 귓가로 울린 시련 도우미의 음성이었다.

"그래."

그와 함께 3층의 시련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기도 전 기다렸다는 듯 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실제로 기다리고 있던 게 맞기도 했다.

이 특전은 '비밀 시련'으로 향하는 두 번째 조건을 빠르게 만족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장치였으니까.

"위치 지정은 지형이 아닌 사람들을 기준으로 하지."

그 말에 이어서 시온의 입에서 하나의 명칭이 흘러나오는 순간, 스륵-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걷히며 시야가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시온의 시야에 비치는 것은 마치 산속처럼 사방을 메운 풀과 나무들, 그리고 주변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다른 수많은 참가자였다.

'제대로 보내줬네.'

그중에서 일단의 무리를 발견한 시온이 슬쩍 웃음 지을 때, -3층의 시련에 입장하셨습니다.

시련 도우미의 설명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명옥(命玉)을 획득하십시오.

-명옥을 다섯 개 이상 획득한 참가자는 다음 시련으로 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획득합니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가장 많은 명옥을 획득한 상위 스무 명의 참가자들에게 추가 점수가 차등 지급됩니다.

-명옥은 3층 곳곳에 숨겨져 있는 유적에 존재합니다.

-참가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명옥이 지급됩니다.

그러한 도우미의 설명이 끝나는 순간,

팟!

시온을 비롯한 사람들의 머리 위에 1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아마 가지고 있는 명옥이란 것의 개수를 표시하는 것이리라.

'바로 시작되려나?'

여전히 한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시온은 생각했다.

3층의 시련은 2층과는 그 성향이 완전히 달랐다.

2층이 연대와 협동을 중시했다면 3층은 처음부터 참가자들 간의 경쟁을 유도했으니까.

3층의 시련을 만든 초월자들은 그 전의 두 시련을 만든 초월자들과는 달리 참가자 전부가 아닌 우월한 일부에게 시련의 보상을 몰아주길 원했다.

그렇기에 이번 시련에서 참가자들이 대거 탈락하는 것은 예정된 일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때,

"아무래도 이번 시련은 명옥이란 걸 얻기 위해서 유적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은데 여기 있는 사람들끼리는 협력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서로 눈치를 보며 상황을 파악하던 사람들 중에서 거대한 장검을 등 뒤에 멘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의 인원이 연계한다면 금방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2층과 같이 이번 시련 또한 서로 협동한다면 어렵지 않게 돌파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3층은 무척이나 넓었고 그만큼 숨겨진 유적들의 숫자도 많을 터였다.

추가 점수에 대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올라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라.

하지만 한 가지.

기사가 착각한 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다 똑같은 생각일 거라 여긴 것.

"굳이 유적을 찾으러 갈 필요가 있나?"

뒤쪽에서 들려오는 묘하게 들뜬 목소리와 함께,

푸욱!

한 자루의 얇은 검이 기사의 가슴을 뚫고 앞쪽으로 튀어나왔다.

"바로 눈앞에 명옥들이 널려 있는데 말이야."

그러한 검을 쥔 자는 눈구멍에 푸른 귀화가 타오르는 해골 문신을 목 옆에 새긴 남자였다.

"커, 커억!"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에서 솟아난 검과 남자를 번갈아 보던 기사의 숨이 끊어진다.

팟!

그와 함께 기사를 죽인 남자의 위에 떠 있던 숫자 1이 2로 바뀌었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요동치고.

바뀐 숫자를 본 남자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어리는 순간, 스가가가각!

"끄아아악!"

그와 똑같은 해골 문신을 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움직이며 주변에 있던 다른 참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사, 살해 전단!"

그 해골 문신이 무엇인지 알아본 일부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이 담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살해 전단 머더리스

이제는 사라진 재앙 중 하나인 살해 교단으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상상을 초월한 잔혹성과 광기로 제국 전역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범죄자 집단이었다.

그 움직임이 신출귀몰하고 '열두 바다'중 한 명이 수장일 정도로 그 무력 또한 엄청났기에 제국에서도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집단.

"대체 왜 저들이 이곳에 다 같이...!"

"도, 도망쳐!"

처음부터 완전체를 이룬 채 나타난 범죄 집단의 모습에 두려움에 물든 사람들이 반항할 생각조차 못 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한다.

"어디로 도망가는 거야?"

스가가각!

"아아악!"

그런 사람들의 뒤를 쫓아가며 학살을 이어가는 살해 전단.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유적을 찾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야... 음?"

그러한 살해 전단 단원 중 한 명의 눈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도망치지 않은 채 제자리에 서 있는 사내가 들어왔다.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일까.

"키히!"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기에 광소를 터뜨린 단원이 사내를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그렇게 단원이 바로 앞에 도달할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는 사내.

"도망치지 않았으니 아프지 않게 죽여줄게."

마침내 단원이 그런 사내를 향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 공격은 사내에게 닿지 못했다.

"그거 고맙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사내로부터 터져 나온 이질적인 어둠이, 콰직!

그 전에 그의 전신을 완전히 집어삼켰으니까.

콰득, 콰득, 콰드드득!

"...?"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섬뜩한 소리에 학살을 멈춘 살해 전단의 인원들이 사내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굳이 유적을 찾을 필요 없다는 말."

그런 그들을 마주 보며 사내, 시온이 불길하게 웃음 짓는 순간,

"그 말에는 나도 동감하는 바야."

단원을 집어삼킨 어둠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며 주변 공간을 모조리 잠식하기 시작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66화

45장 인과의 탑(6)

영원의 탑 3층의 시련.

연대기에 의하면 이 시련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된다.

찾기도 어렵고 보이지도 않는 유적.

그에 반해 바로 눈앞에 있는 참가자들.

둘 중 어디에서 명옥을 얻는 것이 더 나을까.

인간의 도의를 조금만 버린다면 후자가 훨씬 빠르고 편리했고 그렇기에 유혹에 넘어가는 자들 또한 많았다.

'아예 처음부터 참가자들만을 노리고 움직이는 녀석들도 상당했고.' 그리고 그중에서 제일 많은 인명을 학살한 집단이 바로 '살해 전단 머더리스'였다.

우연인지 아니면 탑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뿔뿔이 흩어진 다른 자들과는 달리 머더리스는 전부 한곳에 뭉친 채로 3층의 시련에 소환되었고, 덕분에 처음부터 엄청난 이점과 힘을 가지게 된다.

살해 전단은 그 힘과 이점을 오직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데 활용했고 결국 그들만으로 참가자 중 4분의 1을 죽이는 기염을 토해내게 된다.

그리고 조금 전.

시온이 특전을 사용하여 자신이 소환될 위치를 지정한 곳이 바로 그러한 '살해 전단'의 옆이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비밀 시련으로 가는 두 번째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니까.'

첫 번째 조건이 2층의 시련까지 55점의 점수를 달성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조건은 참가자 중 가장 먼저 100개의 명옥을 모으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도 그리 쉽지 않았지만, 두 번째 조건에는 거기에 한 가지 제약이 더 붙었다.

만약 참가자를 죽여 명옥을 취할 시 그 참가자가 다른 자를 죽이거나 공격한 전적이 있을 것.

그렇기에 이 제약을 충족시키면서 가장 빠르게 명옥을 모을 수 있는 위치가 바로 살해 전단 옆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감당할 수 있는 무력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앞으로의 시련에서도 살아 있어 봤자 아무런 장점이 없는 녀석들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시온은 자신을 바라보는 머더리스의 단원들을 마주 보며 씩 웃어 주었다.

그 웃음이 도발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당한 단원의 복수라도 하려는 것일까.

"죽여!"

살기 어린 외침과 함께 시온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는 몇몇 단원들.

그렇게 다가오는 적들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던 시온의 전신에서 이질적인 어둠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후욱!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한순간 놓쳐버린 시온의 모습에 달려들던 단원들이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퍼억!

가장 앞에 있던 단원의 머리가 없이 박살 났다.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뇌수와 그 사이에서 환영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시온.

그런 시온의 위에 표시된 명옥의 숫자가 2로 뒤바뀐다.

과연 최상위의 무력을 가진 범죄자 집단이라는 것일까.

"이 새끼가!"

그 짧은 찰나에 반응한 다른 단원이 시온을 향해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키이잉!

검 전체를 뒤덮으며 타오르는 새빨간 마나.

단원의 드높은 수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격이 시온의 목 바로 앞까지 들이닥친 찰나, 퉁!

밑에서부터 올라온 시온의 손이 다가오는 검의 검면을 슬쩍 건드렸다.

그 가벼운 접촉으로 인해 궤도가 뒤틀리며 위쪽으로 솟구치는 단원의 검.

망설임 없이 그로 인해 생겨난 틈으로 파고든 시온이 미리 당겨두었던 반대쪽 주먹을 내지른다.

"...!"

그에 시온의 주먹을 피하고자 검을 버리며 바닥으로 몸을 굴리는 단원.

하지만 그 순간.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시온이 내지른 주먹의 방향이 급속도로 꺾이는가 싶더니,

"뭣...!"

콰직!

경악으로 물든 눈을 한 단원의 머리통을 그대로 박살 내었다.

"심장부터 터뜨려 주지!"

그사이 뒤쪽에서 새롭게 나타난 창사 한 명이 드러난 시온의 빈틈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앞의 두 동료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당하는 것을 보았는지 처음부터 전력이 실려 있는 창사의 공격.

하지만 그런 창사의 창은 시온에게 닿지 못했다.

뒤조차 돌아보지 않은 채 내밀어진 시온의 손가락.

그 손가락 하나에 의해 가로막혔으니까.

투콰아앙!

조금 뒤늦게 창끝과 손가락 끝이 맞닿은 부분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충격파.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듯 창사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온다.

한순간 음속조차 뛰어넘는 속도로 휘둘러지는 창의 끝부분을.

그것도 보지도 않고 정확히 찍어낸다고?

그야말로 경악을 뛰어넘어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괴물적인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경악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상태 그대로 창사를 향해 다가가는 시온.

쩌저저적!

그런 시온의 손가락을 견디지 못한 창사의 창이 맞닿은 부분부터 세로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의 손가락이 강기로 뒤덮인 무쇠 창을 쪼개며 나아가는 장면을 과연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창사.

그사이 마침내 창을 전부 갈라내며 창사의 앞에 도달한 시온이, 콰직!

지체없이 그의 심장을 박살 내었다.

그렇게 숨이 끊어진 창사의 시체가 바닥으로 채 쓰러지기도 전, 툭!

발끝으로 땅을 가볍게 찬 시온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단원의 앞에 나타났다.

그에 본능적인 위기를 느낀 덥수룩한 수염의 단원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넣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쩌어어엉!

거의 동시에 그러한 방패 위로 틀어박히며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내는 시온의 주먹.

"버텼...!"

그 충격으로 인해 전신이 떨리면서도 방패에 막혀 멈춘 시온의 주먹과 양옆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동료들을 본 단원의 눈에 안도감이 어리는 순간이었다.

쩌저저저적!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어둠과 함께 단숨에 방패를 박살 낸 시온의 주먹이 그대로 단원의 머리까지 꿰뚫었다.

이어서,

콰득! 콰드드득!

양옆에서 달려들던 다른 단원들까지 전부 일격에 정리하는 시온.

그 모습은 수월하게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이들의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무척이나 높다고 봐야 했다.

이 몸에 들어온 후로 지금까지 상대한 모든 무력 집단을 통틀어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였으니까.

단지 예전과 비교하여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시온을 감당하기에는 조금 모자랐을 뿐.

"다 같이 달려들어!"

악에 받친 외침과 함께 지켜보던 다른 살해 전단의 단원들 대부분이 한꺼번에 시온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위, 위험합니다!"

그 모습에 근처에서 전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참가자들이 시온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이러면 나야 더 편하지."

하지만 정작 시온은 다가오는 살해 전단을 보며 웃고 있었다.

강하게 움켜쥐어지는 주먹.

투확!

그와 함께 점화(點火)되듯 터져 나온 흑성하가 시온의 주먹을 감싼 채 미친 듯이 휘몰아친다.

서서히.

그런 주먹을 위쪽을 향해 들어 올리는 시온.

"막아!"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낀 살해 전단이 더욱 속도를 올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마침내 시온의 주먹이 하늘을 향해 완전히 뻗어진다.

아니, 그것은 뻗어졌다기보다는 꿰뚫었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렸다.

쩌적!

그런 시온의 주먹에 의해 꿰뚫린 채 부서지는 공간.

그리고,

----------------!

그러한 공간 안에서부터 터져 나온 검은 파도가 다가오던 살해 전단을 모조리 휩쓸기 시작한다.

파야(破夜).

흑성하가 5성으로 올라섬에 의해 사용할 수 있게 된 암해(暗海)의 다음 단계.

마침내 진정한 범위기라 불리는 흑성하의 첫 번째 기술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스스스-

비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검은 파도에 닿은 모든 살해 전단의 단원이 피거품으로 변해 흩어진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란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광경.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

그 전설 속 한 장면과도 같은 광경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입을 벌린 채 침묵한다.

그러한 정적의 한가운데 서 있던 시온이,

"이제 나오는 건가?"

무언가를 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순간이었다.

--------!

저 멀리서부터 시작된 두 줄기의 은빛 선이 시온이 있는 곳을 향해 음속조차 아득히 초월한 속도로 그어졌다.

콰아아아아앙!

그리고 일어나는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폭발과 충격파.

그로 인해 주변에 존재하던 나무들이 모조리 박살 나는 동시에 바닥의 흙과 자갈이 일제히 비산한다.

곧이어 그러한 흙먼지가 걷힌 자리에는.

끼기기긱!

어느새 기가페르세스를 휘감은 시온의 주먹과 두 자루의 칼을 맞대고 있는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눈 바로 밑에 존재하는 해골 문신과 가늘고 기다란 팔다리.

시온은 이 사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음양도귀(陰陽刀鬼) 드란 시드리어.

'열두 바다' 중 하나이자 살해 전단 머더리스의 리더.

마침내 그가 그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너, 뭐 하는 녀석이냐?"

맞대고 있는 칼에 더욱 힘을 준 드란이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며 짓씹듯이 입을 열었다.

"널 죽일 녀석."

그런 그를 바라보며 대답한 시온의 입가에 웃음이 맺히는 순간, 쩌저저적!

거인파괴자와 맞닿아 있던 드란의 칼 중 하나에 거미줄 같은 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 *

영원의 탑 3층의 외곽 지대.

그곳에서는 두 명의 남녀가 나무와 풀이 빽빽하게 들어찬 밀림 지대를 빠르게 돌파하고 있었다.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과 머리카락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거인.

바로 레인 드라니르를 제외한 용사 일행이었다.

"레인은 찾지 않아도 되나?"

여인의 옆으로 붙으며 투르잔이 물었다.

"찾아야 해,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

그에 속도를 더 올리며 대답하는 여인.

지금 여인이 향하는 곳은 바로 살해 전단 머더리스가 소환된 장소였다.

그 이유는 한 가지.

바로 그들이 본격적인 학살을 저지르기 전 막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마지막 시련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 3층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것을.

영원의 탑을 만든 초월자들은 이 시련에서 참가자들이 분열하여 서로 죽이길 바라는 동시에 특별한 누군가가 그러한 자신들의 뜻을 꺾고 참가자들을 통합하길 원했다.

회귀 전에 여인은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마지막 시련에서 죽을 뻔한 위기를 여러 번 넘겨야 했다.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살해 전단부터 막아야 해.'

비록 1위를 하지 못해 특전은 받지 못했지만, 살해 전단이 소환된 장소는 알고 있었다.

곧바로 투르잔과 접촉한 덕분에 전력 또한 충분했기에 여인은 망설임 없이 머더리스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명옥을 찾는 일은 그 후로 미뤄도 늦지 않아.'

어차피 자신은 유적들의 위치를 완벽하게 꿰고 있었을뿐더러 이 시련에 숨겨진 비밀 조건마저 대부분 알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늦게 시작하더라도 얼마든지 이번 시련에서 순위권에 들 자신이 있었다.

'그래봤자 다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비밀 시련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없을 테지만....'

잠시 그에 대해 생각하던 여인은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털어 내었다.

이미 얻을 수 없는 것을 떠올려봤자 아쉬움만 남을 뿐 아무런 이득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을 제치고 1층과 2층에서 1위를 거머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그때,

"저곳인가?"

그녀의 옆에 있던 투르잔이 저 멀리 앞쪽에 있는 한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곳은 정확히 여인이 가려 했던 장소였다.

여인이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투르잔이 그 장소를 가리킬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콰과과과광!

그곳에서부터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설마 이미 학살이 시작된 건가?'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여인은 알 수 있었다.

그 폭음이 학살이 아닌 전투로 인해 터져 나온 것이란 걸.

"누군가... 머더리스와 싸우고 있어?"

여인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알기로 살해 전단의 근처로 소환된 참가자 중에는 그들을 상대할 정도의 힘을 지닌 개인이나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누구지? 한 명인가? 아니면 단체?'

그 생각과 함께 더욱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여인.

그렇게 얼마나 더 가까워졌을까.

우뚝!

갑자기 여인의 신형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건...!"

그와 함께 흔들리는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며 놀란 듯이 중얼거리는 여인.

"갑자기 왜 그러는가."

그에 옆에서 같이 멈춘 투르잔이 물었지만,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여인의 시선은 앞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콰아아앙!

폭발과 함께 전장에서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어둠.

저 어둠을 보는 순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고.

기감이란 분야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자신조차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모호했지만.

저 어둠으로부터 느껴지는 힘.

"어째서 여기에...."

그 힘은 분명 빛의 도시 레제로에서 보았던 '천멸자'의 그것이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67화

45장 인과의 탑(7)

쩌적! 쩌저적!

그어진 금을 따라 점점 부서지는 자신의 도를 보며 드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몇 겹의 마나로 감싸인 칼이 한 번의 격돌로 인해 이렇게 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서도 재빨리 검을 떼어내며 거리를 벌리는 드란.

하지만,

파앙!

칼을 휘두를 거리를 주지 않겠다는 것일까?

그가 물러나는 속도보다 시온이 더욱 빠르게 따라붙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검푸른 사슬에 휘감긴 시온의 주먹이 드란의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진다.

키이이잉!

그에 반응하듯 무섭게 회전하며 힘을 더하는 거인파괴자.

초근거리에서 쏘아지는 일격이었기에 검으로 쳐낼 간격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몸을 왼쪽으로 90도로 틀어 시온의 일격을 피해낸 드란이 그 반동을 이용해 거리를 벌린 뒤 왼손에 쥔 푸른 칼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쩌저저적!

그러한 칼이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얼어붙는 대기.

바로 그가 가진 두 개의 전설 등급 무기 중 하나인 '음도(陰刀) 프리즈'의 위력이었다.

시온은 그렇게 왼쪽에서 다가오는 검을 바라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칼과 주먹의 대결에서 간격을 벌리는 것은 스스로 불리함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서걱!

마치 땅으로 꺼지듯이 밑으로 몸을 기울인 시온과 그런 시온의 머리카락 몇 올을 잘라내며 지나가는 드란의 칼.

쿠웅!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드란의 품으로 파고든 시온이 왼쪽 다리를 크게 내디뎌 진각을 밟는 동시에 그 힘을 고스란히 담아낸 주먹을 내질렀다.

이미 몸의 균형이 어긋나 있었기에 피하기는 늦었다고 여긴 것일까.

오른손에 있는 '양도(陽刀) 이그니'를 역수로 부여잡은 드란이 자신의 가슴 앞까지 재빠르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일어나는 충돌.

쩌어어어엉!

순간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커다란 폭음과 함께 터져 나온 충격파가 닿는 모든 대기를 찢어발긴다.

그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폭산하는 대지.

"무슨...."

그와 함께 드란의 입에서 의문 어린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시온의 주먹과 부딪친 양도의 표면에 조금 전보다 더욱 선명한 금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겨우 두 번의 부딪침에 전설급 무기가 이렇게 된다고?'

도저히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저 주먹에 휘감긴 검은 사슬에 특별한 무언가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그 생각을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어느새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칠 정도로 이질적인 어둠을 두른 시온의 반대쪽 주먹이 그의 머리를 노리며 쏘아지고 있었으니까.

거의 공간을 뛰어넘는 듯한 속도로 다가오는 시온의 주먹에 눈동자가 흔들린 드란이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꺾었다.

쩌저저저적!

그런 그의 뺨을 슬쩍 스치고 간 시온의 주먹이 뒤쪽의 허공을 때리며 공간 자체를 찢어 발긴다.

그 무지막지한 위력에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자세를 바로잡은 드란이 뒤쪽으로 몸을 튕겨 거리를 벌렸다.

그와 동시에,

스가가가각!

한 치의 지체도 없이 휘둘러지는 쌍도.

그러한 두 개의 칼로부터 터져 나온 얼음과 불의 세례가 사방을 모조리 휘감으며 시온의 급소들을 노린다.

아까와는 달리 시온은 그렇게 물러나는 드란과의 거리를 좁히지도, 그렇다고 그의 공격을 피하지도 않았다.

대신 오른 주먹을 슬쩍 뒤틀었다.

그러자,

촤르르륵!

그동안 손에 감겨 있었던 기가페르세스가 풀려나오더니 사슬낫 형태로 변하며 양쪽에서 다가오는 드란의 쌍도와 동시에 충돌했다.

쩌어어어엉!

터져 나오는 굉음과 함께 반대편으로 튕겨 나가는 사슬낫과 쌍도.

드란이 그 격돌로 인해 얼얼해진 손의 충격을 미처 털어버리기도 전, 촤르르륵!

튕겨 나가던 거인파괴자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공중에서 방향을 꺾더니 그대로 그의 전신을 노리며 짓쳐 들었다.

"뭐, 이런...!"

그래도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머더리스의 리더라는 것일까.

한순간 완전히 뒤바뀐 무기와 패턴에 당혹 어린 음성을 내뱉으면서도 회수한 음양도를 휘둘러 쏟아지는 공격들을 모조리 쳐내는 드란.

쩌저저저저정!

그로 인해 허공에 무수한 섬광이 마찰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허...."

그러한 공방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바라보는 사람들.

그중에는 살해 전단의 단원도, 전단이 아닌 사람도 존재했지만, 그 누구도 끼어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들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희미한 잔상과 허공에서 끝없이 터져 나오는 격돌음뿐이었으니까.

시간(時間).

이 시간이란 것은 동등하지 않으며 특히 그 차이는 무력적인 부분에서 도드라졌다.

삼류의 기사는 인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찰나의 시간 동안 일류의 기사는 공격을 눈으로 보고 머리로 판단한 후에 움직인다.

살아가는 시간의 밀도 자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이 무슨...!'

그러한 시간의 차이를 시온을 상대하는 드란 또한 점점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한계가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빨라지는 적의 움직임과 그에 비해 점점 어지러워지는 자신의 손발.

거기에 더해 자신의 공격은 내질러지기도 전에 차단당하고 상대방의 공격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어디서 갑자기 이런 녀석이 나타난 거지?'

도무지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열두 바다 중에서도 상위를 차지하는 머더리스의 수장을 이토록 수월하게 상대하는 자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드란은 그러한 자들을 전부 알고 있었고 그중에서 눈앞의 남자와 같은 특징을 지닌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비슷한 힘을 지닌 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 같은....'

변수(變數).

그것도 홀로 판 전체를 뒤집을 만한 커다란 변수였다.

그그그긋!

"넌 누구지?"

자신의 쌍검과 검푸른 사슬을 맞대고 있는 시온을 노려보며 입을 여는 드란.

"아까 말했잖아. 널 죽일 녀석이라고."

그런 드란을 마주 보며 시온이 씩 웃는 순간,

콰가가가각!!

거인파괴자가 미친 듯이 진동하며 드란의 쌍도를 동시에 파고들었다.

시온이 이토록 드란의 칼을 쉽게 부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음양도의 검신은 금속이 아닌 불과 얼음의 정령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만큼 신비를 부정하는 흑성하에 취약했으니까.

결국,

콰직!

드란의 쌍도 중 하나인 '프리즈'가 완전히 부러지며 그 자리를 시온의 기가페르세스가 채웠다.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는 동시에 시온의 공격을 피해 뒤로 몸을 튕기는 드란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이대로 가다간 진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눈앞의 검은 머리 남자는 이 전투에서 자신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더 이상 승기가 기울어진다면 되돌릴 수 없을 터.

그 전에 어떻게든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눈을 빛낸 드란이 그대로 양팔을 활짝 펼치며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드드득!

그의 이마에 돋아나는 핏줄과 충혈되는 눈동자.

그와 함께 주변의 대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러한 진동이 최대치에 이르는 순간,

콰아아아아!

그가 쥔 쌍도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열기와 냉기가 뿜어지며 주변의 공간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메우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잠식하며 그 안에 있는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불과 얼음의 길.'

현재의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기술이자 아직 완성하지 못한 기술.

'일곱 하늘'과 '열두 바다'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무력으로만 나뉘는 게 아니었다.

영역(領域).

바로 주변의 공간을 완전히 잠식하여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였다.

'불과 얼음의 길'은 그러한 '공간 잠식'을 불완전하게나마 펼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술이었다.

얼마 전부터 '하늘'로 향하는 길을 엿볼 수 있게 된 드란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창안해 낸 고유기.

"단숨에 짓이겨 주마."

자신의 의지로 뒤바뀌는 세상.

그로부터 비롯된 전능감에 환하게 웃음 지은 드란의 신형이 곧바로 시온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불과 얼음의 길'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푸화하하학!

그런 드란의 움직임에 맞춰 열기와 냉기로 가득 찬 공간 전체가 그에게 가장 유리한 형태로 변화한다.

그에 힘입어 찰나보다도 짧은 시간에 시온의 바로 앞까지 도달하는 드란.

그런 그가 영역의 힘이 고스란히 담긴 이그니를 수직으로 내리그으려는 순간이었다.

"마침 잘됐네."

그동안 가만히 서 있던 시온이 드란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나도 비슷한 걸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런 시온의 눈동자 안에서 휘몰아치던 다섯 개의 검은 별이 새카만 빛을 발하는 순간, 흑성하 5성.

암역(暗域).

덜컥!

무언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멈추는 드란의 움직임과 함께 주변의 명도가 급속도로 낮아졌다.

마치 세상 전체에 검은 물감을 풀기라도 한 것처럼.

"아...."

드란의 눈이 멍해졌다.

아무리 힘을 줘도 한 치조차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잠식한 공간을 살라 먹으며 뻗어나가는 어둠.

그 어둠은 불완전한 자신의 영역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너는 이미...."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하늘에 닿았구나."

드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탄식과도 같은 목소리.

그리고 그 순간,

콰직!

암역의 권능을 머금은 채 천천히 뻗어진 시온의 손이 그의 심장을 박살 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