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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태양 열차는 총 8개의 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정확히 중앙에 해당하는 네 번째 칸.

그러한 칸 안에서는 십수 명에 달하는 사인들이 긴장된 눈으로 다음 칸으로 이어지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콰앙! 콰앙!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울리는 폭음.

목표물이 있는 특등석에서부터 시작된 그 폭음이 점점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앞칸에 있던 자신들의 동료들이 목표물에 의해 역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

"목표가 이 정도로 강했었나? 분명 성녀가 아닌 그 후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조력자가 있는 것 같다. 아까 열차에 탄 그 남자겠지."

검은 머리에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내.

그자를 보며 제 발로 죽을 자리로 뛰어든다고 비웃었기에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내가 이토록 강했을 줄이야.

"이곳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가 먼저 친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 속에서 네 번째 칸을 지휘하던 사인이 입을 열었다.

그편이 더 승산이 높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런 사인의 지시에 따라 문 앞에 바싹 붙은 채 들어오는 목표물을 노릴 준비를 하는 나머지 사인들.

쾅! 쾅!

그러는 사이에도 점점 더 폭음은 가까워지고.

그에 따라 사인들의 긴장 또한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뚝!

문 앞까지 다가온 폭음이 갑작스럽게 멈췄다.

그와 함께 이어지는 정적.

'뭐지?'

그러한 정적 속에서 의문 어린 눈을 한 사인 중 몇몇이 문 쪽에 귀를 가져다 대는 찰나였다.

키이잉!

그런 그들의 귓가에 울리는 청명한 소음.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아앙!

문이 달린 열차의 벽면 자체가 박살 나며 그 안에서부터 터져 나온 충격파가 붙어 있던 사인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그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갈려 나가는 대부분의 사인.

저벅, 저벅.

그렇게 한순간에 사인들이 정리된 네 번째 칸 위로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사내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 사내는 시온이었다.

"허...."

경악 어린 표정을 지은 채 그런 시온의 뒤로 따라붙으며 혀를 내두르는 올리비아.

네 개의 칸을 돌파하며 계속해서 봐온 광경이었지만, 아직까지도 적응되지 않고 있었다.

방금 벽면과 함께 종이처럼 찢겨나간 마물들은 분명 약하지 않았다.

아니, 그 하나하나가 올리비아 자신의 가문에 속한 웬만한 정예 성기사보다도 강했다.

'그런 마물들을 저토록 쉽게 박살 낼 정도면....'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일까.

거기에 더해 생전 처음 보는 저 이질적인 기운과 투법(鬪法)은 사내의 모습을 더욱 인상 깊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키아아악!

아직 숨이 붙어 있었던 것일까?

조금 전의 충격파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두 명의 사인이 뒤쪽에서 올리비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 시온.

-너는 죽이겠다!

그사이 올리비아의 바로 앞까지 치달은 사인들이 그녀를 향해 마기가 응집된 손톱을 휘두르고.

마침내 그러한 사인들의 공격이 목표를 이루려는 순간, 화아아악!

시온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드러났다.

올리비아의 전신에서 터져 나오는 찬란한 신성의 빛과 함께 벼락처럼 뻗어진 그녀의 주먹이, 쩌억!

먼저 달려들던 사인의 심장을 박살 내었다.

그야말로 깔끔하기 그지없는 일격.

-...!

뒤쪽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나머지 사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 타닷!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은 올리비아가 안정된 호흡과 함께 특이한 스텝을 밟으며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뻗어지는 주먹.

그러한 올리비아의 주먹에는 어느새 빛을 의미하는 금색의 신성력이 응집되어 있었다.

그에 사인이 재빠르게 반응하며 방어술식을 펼쳤지만, 콰드드득!

올리비아의 주먹은 술식과 함께 그의 머리까지 한꺼번에 꿰뚫어 버렸다.

"후우...."

털썩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사인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호흡을 가라앉히는 올리비아.

'각성 전인데도 생각보다 강하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시온은 생각했다.

연대기 안에서 올리비아 브라이트는 두 가지 면에서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하나는 신성력 제어였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지금 보여준 신성투술(神聖鬪術)이었다.

지금까지 보여줄 일이 없었기에 세상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시기의 그녀는 이미 가문에서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어서 가죠. 이미 적들이 눈치챈 것 같으니 대비하기 전에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조금 전 먼저 치고 들어간다는 시온의 말에도 그녀가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았던 이유.

"그러지."

그렇게 말하며 앞서 걸어가는 올리비아에게 대답한 시온 또한 다음 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이어지는 전투는 훨씬 수월했다.

-뭐, 뭐야 뭐가 이렇게 강... 끄아아악!

상황의 파악과 마음의 정리가 완벽하게 끝난 것인지 올리비아가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니까.

둘 다 주먹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합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 맞는다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콰과과광!

시온이 범위 기술을 사용해 열차 칸 전체를 한 번 쓸고 나면 그 빈틈을 메우듯 튀어 나간 올리비아가 남아 있는 적들을 마무리한다.

마치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바퀴를 본다면 이러할까.

무겁게 사방을 잠식하듯 퍼져나가는 흑성하의 어둠과 반대로 찬란하게 일렁이듯 번져나가는 빛의 신성력.

그 둘이 뒤섞이며 이뤄내는 흑백의 향연은 아름다웠지만, 그 무엇보다 파괴적이었다.

쩌저저저저적!

그에 닿은 모든 것이 흔적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박살 났으니까.

콰앙!

그렇게 순식간에 세 개의 칸을 돌파한 시온과 올리비아가 기관실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열차 칸의 문을 망설임 없이 부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보다 족히 배는 많아 보이는 적들.

-...여기까지 오다니!

이제는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는지 사인들은 처음부터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빠르게 돌파하고 싶은데.'

그 생각과 함께 가라앉는 시온의 눈동자.

그런 시온의 눈이 바라보는 것은 앞을 가로막은 사인들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기관실이었다.

열차를 전복시키기라도 하려는 건지 기관실 안에서 느껴지는 우두머리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숫자가 많아서 주먹으로 처리하긴 시간이 걸릴 것 같고....'

그렇다고 이클락시아나 아그드바르를 꺼내기엔 정체를 들킬 우려가 있었다.

그때,

'저건....'

열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한 시온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터널이었다.

"지온?"

갑자기 멈춰 선 채 움직이지 않자 뒤쪽에서 올리비아가 시온을 불렀다.

그 부름에 대답하지 않은 채 한쪽 다리를 뒤로 쭉 뻗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인 시온이 양손을 한쪽 옆구리에 붙였다.

마치 검 없이 발도 준비를 하는 것 같은 자세.

"대체 갑자기 뭐 하는...."

그에 올리비아의 눈동자에 커다란 의문이 깃드는 순간, 키이이잉!

주변의 모든 기운이 어둠으로 치환되며 시온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그와 함께 진동하는 열차 칸 전체.

-마, 막아!!!

그 모습에서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사인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급하게 시온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터널 안으로 진입하는 열차와 함께 차단되는 시야.

덜컹!

그리고 1초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열차가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다시 돌아오는 빛과 시야 속에서 사인들은 볼 수 있었다.

-무슨....

어느새 그들의 뒤쪽에 서 있는 시온.

그런 시온의 손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검 형태의 무언가와 함께,

---------------!

그들을 전부 가로지르며 그어지는 한 줄기의 검은 선을.

곧이어,

쩌저저저저적!

그 선에 걸린 모든 것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당연하게도 사인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끝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이하는 그들.

쿠드드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열차 칸의 천장마저 비스듬하게 베어지며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당신...."

뒤에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시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된 그녀의 눈동자.

방금의 그 일격.

그 일격은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시야가 차단된 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올리비아 자신이 인지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단숨에 몇 단계의 수준을 뛰어넘은 것만 같은 일격.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고?'

실력을 감춘 게 그 정도였다면 본래의 힘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거기다가 남은 흔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 보여준 일격은 권격이라기보다는 검격에 가까웠다.

원래는 검을 사용하는 것일까?

도저히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올리비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처음과 같이 고요한 눈을 한 시온이 기관실을 향해 이제 마지막 칸인 기관실을 향해 접근하려 할 때였다.

꽈아아아앙!

고막을 찢는 듯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마치 탈선이라도 하는 것처럼 열차 전체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버러지 같은 녀석이 감히 내 계획을 망쳐!!!"

기관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그 안에서 케인달이 벼락처럼 시온을 향해 쏘아졌다.

잔뜩 일그러져 있는 그의 얼굴.

지금껏 단 한 번의 임무도 실패한 적 없던 그였기에 지금의 상황에 대한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케인달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기습으로 선공을 잡고 처음부터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 검은 머리 사내가 변수이자 이번 일을 망친 장본인이라는 것을.

혼자서 여기까지 뚫고 들어왔다는 것은 그 무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뜻일 터.

그렇기에 탐색 따위 할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콰아아아!

시온은 그렇게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사기를 흩뿌리며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사인을 바라보았다.

'예전 안겔로쉬 영지에서 상대했던 녀석과 비슷한 정도의 힘을 지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번 전투로 그때와 비교해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아볼 수 있을 터.

그 당시 시온 자신은 월식을 비롯한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들을 펼치고도 완벽하게 케자루스를 잡지 못한 채 리우시나의 도움을 받았었다.

'처음에는 월식을 사용하지 않고 가볍게 한 방.'

키이이잉!

그 생각과 함께 시온의 주먹에 휘감긴 흑성하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회전하더니 그대로 다가오는 케인달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한 가지.

시온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 한 방이,

투콰아앙!

케인달에게는 전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시온의 주먹과 부딪친 그의 상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45화

38장 빛의 교단으로(5)

"설마 한 방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시온은 상체가 완전히 터져 나간 채 바닥으로 쓰러지는 케인달의 시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자신이 안겔로쉬 영지에 갔을 때와 비교하여 확연하게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방금의 일격으로 머리와 심장, 그리고 핵까지 전부 터뜨렸기에 재생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재생할 가능성은 말이다.

'예전에 그 녀석도 재생이 아닌 부활을 했었지.'

그렇다면 똑같은 급의 사인인 이 녀석 또한 부활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했다.

"...죽은 건가요?"

마침 뒤쪽에서 다가오며 부활 주문과도 같은 말을 꺼내는 올리비아.

그런 그녀의 주문에 힘입기라도 한 것일까?

그 순간,

꾸드드득!

기괴한 소리와 함께 주변에 존재하던 다른 사인들의 시체가 분해되더니 하반신밖에 남지 않은 케인달의 시체로 모여들며 새로운 몸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예전 케자루스가 사용했던 술법.

그 술법을 이번에는 케인달이 사용하고 있었다.

"커헉!"

너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뒤 급하게 반생의 술을 사용한 탓일까?

몸을 재생하자마자 피를 한 사발 토해낸 케인달이 미친 듯한 속도로 물러나며 시온과의 거리를 벌렸다.

'대체, 대체!'

그의 눈 안에 어린 거대한 공포.

제대로 인지조차 할 수 없었다.

조금 전 그가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공격과 저 사내의 주먹이 맞닿고 그 순간, 의식이 사라졌다는 것뿐.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반생의 술이 발동된 후였다.

'강하다. 그것도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혼자 열차를 뚫고 이곳까지 왔기에 만만치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단 일격에 목숨이 날아갈 줄이야.

이 정도라면 일곱 하늘 바로 밑이라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케인달은 냉철하고 판단이 빨랐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탁!

그 생각과 함께 케인달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쩌저적!

열차의 천장에서 구멍이 뚫리며 그 위에 있던 사인들이 칸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목표가 도주할 걸 대비하고 미리 열차 위쪽에 대기시켜 놓았던 수하들이었다.

키아아악!

원래는 저 수하들과 함께 협공할 생각이었지만, 조금 전의 공방 후로 케인달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대로 도주한다.'

케인달은 수하들이 목표인 백금발의 여인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뚫린 천장의 구멍을 향해 솟구쳤다.

아마 목표물 혼자서는 사인들을 전부 상대할 수 없을 테니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 있을 터.

그 틈을 타 열차에서 뛰어내린다면....

하지만 그 순간,

촤르르!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덜컥!

열차에서 뛰어내리려던 케인달의 몸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느새 그의 발목에 감겨 있는 검푸른빛 사슬.

곧이어,

"어딜 가려고?"

나지막하다 못해 섬뜩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사슬의 반대쪽 끝을 움켜쥔 시온이 열차 지붕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여자는 어떻게 하고...!"

케인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당혹 가득한 목소리.

"너희 목표가 생각보다 더 강하거든."

그에 시온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순간,

화아아악!

-왜 이렇게 강... 끄아아악!

뚫린 구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막대한 신성력과 함께 사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윽!"

그 빛과 소리에 무언가가 실패했다는 걸 깨달은 케인달이 절망 섞인 신음을 토해내며 사슬이 묶인 발목을 스스로 잘라내었다.

그러고는 송곳처럼 뭉친 마기 수백 개를 시온을 향해 쏘아낸 후 필사적으로 열차 밖을 향해 몸을 던졌다.

아직 도주를 포기하지 않은 것.

하지만 그런 그의 움직임보다 시온이 훨씬 더 빨랐다.

"아직 내 말에는 대답을 안 했는데."

어둠과 함께 환영처럼 케인달의 바로 옆에 나타난 시온이 그의 옆구리에 왼 주먹을 꽂아 넣었다.

투콰앙!

포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주먹의 반대쪽으로 튕겨 나간 사인의 몸이 그대로 다시 열차의 지붕에 처박혔다.

'...벗어날 수가 없어!'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케인달의 눈동자.

이러다간 정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생존 본능을 커다란 외침으로 뒤바꿔 토해낸 그가 양손을 시온을 향해 뻗었다.

콰드드득!

그런 케인달의 두 손에서 터져 나온 사기가 주변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며 미친 듯이 부풀어 오르더니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변해 시온을 향해 쏘아졌다.

그가 가진 명(命)마저 소모하며 만들어낸 최후의 발악.

콰아아아!

예전 케자루스가 펼쳐냈던 마지막 일격보다도 배는 강한 힘을 품은 붉은 뱀이 오직 시온의 목줄기만을 노리며 나아간다.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타오르는 주변의 마나.

투웅!

그에 비해 다가오는 뱀을 향해 내질러지는 시온의 주먹은 무척이나 초라했다.

어떠한 힘도, 심지어 흑성하마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주먹.

그 모습은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기에 만약 올리비아가 봤다면 그대로 소리치며 달려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한 시온의 주먹과 케인달이 쏘아낸 뱀이 서로 맞닿는 순간, 쩌저저저저저적!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시온의 주먹과 닿은 부분부터 시작되어 순식간에 뱀 전체로 퍼져 나가는 거미줄 같은 금.

그러한 금을 따라 수백 개의 조각으로 갈라진 붉은 뱀이 그대로 박살 나며 사라진다.

그걸로도 모자라,

콰지지직!

공간을 타고 뻗어 나간 시온의 일격이 케인달의 하반신 전체를 지워버렸다.

"끄아아아악!"

그에 사인의 입에서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콰득!

어느새 바로 앞에 나타난 시온이 그의 가슴을 강하게 내리밟았다.

그와 함께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케인달의 비명을 자연스럽게 흘려넘긴 시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어."

사실 조금 전의 일격으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었지만, 굳이 살려둔 이유는 바로 머릿속으로 떠오른 의문 때문이었다.

"어째서 올리비아 브라이트를 노린 거지?"

연대기에서 올리비아는 이 시기에 습격을 받지 않았다.

아니, 대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마역에 의한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 내용이 바뀌었다는 뜻은 연관된 마물들의 움직임 또한 전부 뒤바뀌었다는 것일 터.

"...."

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시온을 노려보는 케인달.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듯 시온은 다음 질문을 던졌다.

"레제로에 존재하는 빛의 교 본단. 이번 일은 그곳과 관련이 있나?"

이 녀석들은 휴브리스에서 올리비아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굳이 그녀가 레제로로 향할 때를 노렸다.

그 말은 즉 이 습격을 빛의 교단에 숨어 있는 마물들이 계획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

"거기다가 왠지 이 습격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만약 그랬다면 이것보다 훨씬 쉬운 방법으로 올리비아를 처리했으리라.

그때,

"크하하하!"

시온에게 밟혀 있던 케인달이 광소를 터뜨렸다.

"설마 내가 네 말에 대답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냐?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그의 눈코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선혈.

"내가 너에게 해줄 말은 한 가지밖에 없다."

케인달의 눈동자가 슬며시 호선을 그린다.

"어디 한번 멸망 속에서 발버둥 쳐보아라, 인간."

그런 케인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그의 눈에서 완전히 빛이 사라졌다.

스스로 핵을 부숴 목숨을 끊은 것.

"멸망이라...."

시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점점 사라져가는 케인달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방금의 문답에서 케인달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온은 원하던 것을 어느 정도 얻은 상태였다.

자신이 말할 때마다 케인달이 보이던 미세한 반응.

그 반응을 통해 시온은 자신의 짐작이 사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문답 자체가 대답을 듣고 싶어서가 아닌 그러한 케인달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무언가 냄새가 나는데.'

단지 신탁의 내용을 알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여정이었건만 생각보다 일이 커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레제로에 도착하는 대로 달의 눈과 접촉해 봐야겠어.'

뚫린 구멍을 통해 열차의 지붕으로 올라오는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하는 시온의 눈이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 * *

청성궁 꼭대기 층의 집무실.

"후우...."

그곳에 앉아 있던 5황녀 디에나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심란해 보였다.

"우테칸이 죽었다고...."

그 소식을 들은 지 벌써 일주일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디에나는 그 영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죽은 자신의 오라버니에 대한 애도 따위는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 정 같은 건 진작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것도 시온에게."

대체 괴수 군단을 처리하러 간 시온이 어떻게 우테칸을 죽이게 된 것일까.

무척이나 의문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이해되지 않는 건 따로 있었다.

"대체 어떻게 죽인 거지?"

거인 대군락.

그곳은 우테칸의 영역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 대군락에 자신의 친위대만을 이끌고 들어간 시온이 어떻게 우테칸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일까.

심지어 그 후로 시온은 단 일주일 만에 거인 대군락의 주요 부족 대부분을 자신의 휘하로 거둬들이기까지 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

"대군락으로 진입한 뒤 곧바로 4황자를 반대하는 쪽 거인들을 규합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다가 4황자 쪽 거인들과 전쟁을 치를 때 괴수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디에나를 향해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설마... 그 괴수들이 괴수 군단인가요?"

"그것까지는 파악되진 않았지만,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시온 황자 측에서는 이미 괴수 군단은 강철 요새에서 궤멸했고 대군락에 나타난 건 다른 괴수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거야 얼마든지 우길 수 있는...!"

그에 대답하던 디에나의 말이 멈췄다.

그와 함께 무언가를 깨달은 듯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눈동자.

만약.

정말로 만약.

'이 모든 게 시온이 의도한 것이었다면?'

괴수 군단을 선택하여 손에 넣고 일부러 대군락 쪽으로 보낸 뒤 우테칸을 유인해서 죽인 것이라면?

그 후에 이어진 거인 대군락의 장악까지 전부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이라면?

'아니, 그럴 리가.'

거기까지 떠올린 디에나가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털어내었다.

너무 심한 비약이었을뿐더러 그 모든 것을 계획하고 움직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그게 맞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시온은 대군락의 거인들을 손에 넣었고 앞으로의 경쟁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얻었다.

이 상태로 '세계 회의'까지 열리게 된다면 황위는 시온이 차지할 게 너무나도 명백했다.

'이대로는 안 돼.'

그 생각과 함께 무언가를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리던 디에나가 로이드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요정림에 방문하는 것을 서둘러야겠어요."

* * *

빛의 도시 레제로의 가장 거대한 열차역인 라 모르데.

역대 성자 중 한 명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라 모르데 안에서는 빛의 교 본단에서 파견된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척이나 다급해 보이는 그들의 얼굴.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지금 긴급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핸리슨 가문에서 오기로 한 영애는 어떻게 되었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들을 지휘하는 3급 성기사, 파인드리의 말에 옆에 있던 성기사 중 한 명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그에 파인드리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의 발단은 어제저녁 성녀 경합의 참가자 중 한 명인 크로스 가문의 영애가 실종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녀는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것을 수상히 여긴 빛의 교단이 곧바로 수색을 시작했지만, 이동 경로를 전부 뒤져도 그녀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성녀 경합의 참가자들 또한 하나둘씩 사라졌다는 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탑승했다고 알려진 열차들은 비어 있었고 도보나 마차, 그리고 말을 타고 이동한다고 알려진 사람들 또한 중간에서 모조리 그 흔적이 끊겨 있었다.

성녀 경합 참가자들의 동시다발적인 실종.

이 유래 없는 사태에 빛의 교단은 긴급 상황을 선포했고 그게 바로 파인드리를 비롯한 성기사들이 이곳에 나와 있는 이유였다.

"핸리슨 가문 말고 새롭게 도착한 참가자들은?"

"...없습니다. 지금 도시 안에 있는 참가자들은 전부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이거나 어제저녁 이전부터 도착해 있던 사람들뿐입니다."

그런 성기사의 말에 파인드리의 말이 더욱 일그러졌다.

성녀 경합이 열리지 못하게 된 건 그렇다 쳐도 참가자들의 실종은 그 사안이 무척이나 심각했다.

참가자 중에는 고위 귀족의 여식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고, 잘못하다간 그들이 사라진 책임을 자신들이 전부 짊어져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실종자들을 찾아야 한다. 혹시 모르니 이곳에 대기 인원들을 상주시키고 나머지는 전부 그들의 이동 경로를 다시 한번 역으로 추적...."

그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기에 파인드리가 굳은 눈으로 다른 성기사들을 향해 지시를 내리려 할 때였다.

"저기! 저기를 보십시오!"

옆에 있던 사제 중 한 명이 놀란 얼굴을 한 채 급하게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돌아가는 사람들의 시선.

"...!"

곧이어 그러한 사람들의 시야에 저 멀리 선로의 끝에서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덜컹! 덜컹!

열차.

그것은 열차였다.

수도 휴브리스에서 출발하여 이곳으로 들어오는 태양 열차.

그런데 그런 열차의 상태는 무척이나 처참했다.

한쪽 면이 사라지고 지붕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등 성한 칸이 존재하지 않았고 바퀴들 또한 수없이 빠져 있었다.

어떻게 움직이는지 신기할 정도.

실제로 그 수명이 다한 듯 열차의 속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저, 저건...!"

그러한 열차가 가까워짐에 따라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들의 눈동자가 더욱 커다랗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참가자... 참가자다. 성녀 경합의 참가자가 도착했다!"

반파된 열차의 기관실 지붕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명의 인물.

바로 시온과 그 옆에서 지친 표정을 짓고 있는 올리비아였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46화

39장 신탁(1)

빛의 도시 레제로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빛의 광장.

"와! 진짜 건물이 전부 하얀색이잖아? 대체 여기에 돈을 얼마나 들인 거야?"

사방을 감싸고 있는 경건한 분위기의 건물들을 바라보며 라트 용병단의 리더인 라트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생전 처음으로 빛의 도시에 방문해 본 그였고 이런 광경 또한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그 놀라움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그렇게 큰 소리 내면서 둘러보지 마.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촌뜨기처럼 보여서 쪽팔린단 말이야."

용병단의 또 다른 멤버인 엠버가 그런 라트의 옆에서 살짝 떨어지며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하하, 실제로 처음 방문했으니 촌뜨기 맞지 뭐. 조금 있다가 빛의 교 본단에도 가보자고. 안쪽을 견학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던데."

그 말에도 여전히 신나게 외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라트.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저은 엠버는 뒤쪽에서 말없이 따라오고 있는 엘리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엘리, 레제로에는 왜 오자고 한 거야? 이제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사실 그들이 빛의 도시에 있는 이유는 바로 엘리시스 때문이었다.

며칠 전부터 그녀는 레제로에 가고 싶다고 말했고 결국 라트와 엠버는 그런 엘리시스의 말을 따라 이곳에 온 상태였다.

물론 오자마자 이곳에서 의뢰를 받아 여비를 충당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음... 조금 나중에 말해줄게요."

엠버의 물음에 엘리시스가 살짝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사실 그녀 또한 왜 이곳, 빛의 도시에 와야 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 상태였다.

며칠 전 꿈속에서 누군가 '레제로'란 단어를 속삭였고 잠에서 깨자마자 그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강한 직감이 든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동료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난 알 것 같은데? 이번에 열리는 성녀 경합에 참가하려는 아니야?"

그때 구경을 끝내고 옆으로 다가온 라트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 제가 거길 어떻게 참가해요오...."

손사래를 치며 대답하는 엘리시스.

그도 그럴 것이 성녀 경합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재능이 특출나야 했다.

그녀와 같은 초보 사제에게는 꿈도 못 꿀 수준의 경합.

"왜 못해? 난 엘리 네가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보는데? 안겔로쉬 영지에서의 일 이후로 엄청나게 실력이 좋아졌잖아. 그만큼 노력도 많이 했고."

그런 엠버의 말에 고맙다는 듯 웃음 지은 엘리시스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온 황자....'

안겔로쉬 영지의 일이 언급될 때마다 항상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사실 그녀가 이토록 실력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바로 시온 황자 때문이었다.

빚진 목숨값을 갚기 위해서는 그에게 걸맞은 수준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렇기에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요원하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노력을 더 해야 다다를 수 있을는지....'

그에 엘리시스의 입가에 씁쓸함이 어릴 때였다.

"...어?"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저 멀리 수많은 인파 속을 걸어가는 한 명의 사내.

'시온... 황자?'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사내의 모습은 엘리시스가 예전에 보았던 시온 황자의 모습과 무척이나 흡사했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까지도.

타닷!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사내 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엘리? 갑자기 어디 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엠버의 부름.

그런 부름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엘리시스의 신경은 사내에게 쏠려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간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아...."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사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 * *

시온이 레제로에 들어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달의 눈과의 접촉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라 모르데 역에 모여 있던 성기사들에게 습격에 관해 증언해야 했지만, 올리비아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그전에 몰래 빠져나온 상태였다.

"시, 시온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보네."

시온은 쭈뼛거리며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달의 눈의 특급 정보원, 나리에를 보며 피식 웃었다.

몇 개월이 지난 후에 보는 것임에도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여전히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승진이라도 했나 보지?"

나리에의 주변을 한번 훑으며 묻는 시온.

분명 레제로의 지부장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녀밖에 없는 걸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예, 지부장으로 승진한 뒤 이곳으로 발령이 났어요."

"그렇군. 지시한 건 어떻게 되었지?"

그 대답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시온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본단 출입 건을 말씀하시는 거죠? '지온 하네스'란 이름으로 최고 등급 견학권을 예약해 두었으니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교단 내의 고위 인사 몇과 미리 이야기해 두었어요. 내부를 둘러보다 보면 그쪽에서 먼저 전하께 은밀하게 접촉해 올 거예요. 그들을 따라가시면 심층부까지 들어가실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그렇게 심층부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빛의 신이 신탁을 내리는 장소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거기서부터는 시온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었다.

'신분을 밝혀야 할 수도.'

사실 처음부터 신분을 밝히고 정식으로 본단에 방문했다면 이것보다 훨씬 수월했겠지만, 적들에게 위치가 노출될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시온은 이번 여정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소수에게만 신분을 노출할 생각이었다.

"추가로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그럼...."

그런 시온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는 나리에.

그때,

"그 추가 지시는 지금 바로 하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시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추가 지시라면 어떤...."

"너희가 알아봐 줘야 할 게 있어."

"빛의 교단 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묻는 나리에를 향해,

"아니, 다른 쪽."

시온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제국의 중심이자 세상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라 불리는 아그네스 제국의 황성.

그런 황성과 비견되는 건축물을 논할 때 항상 나오는 곳이 하나 존재했다.

바로 빛의 교 본단.

빛의 신의 광대한 신성(神聖)과 자비를 그대로 담아낸 듯 본단의 크기는 황성과 비견될 정도로 거대했고 그 외견은 예술품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온 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온은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붙은 사제, 루베토의 안내에 따라 그러한 본단의 내부를 견학하고 있었다.

"이곳 '빛의 회랑'은 신화와 빛의 교의 역사, 그리고 교단이 세워진 유래 등을 나타내는 그림들이 존재합니다."

그 말과 함께 회랑의 벽에 붙어 있는 수백 개의 그림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하는 루베토.

최고 등급 견학의 안내자답게 그의 말은 지루하지 않고 흥미로웠지만, 시온은 그런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며 주위를 살폈다.

빛의 교의 역사 따위엔 별로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애초에 견학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게 아니었으니까.

'나리에가 말한 자들은 언제쯤 오는 거지?'

사실 본단 안을 둘러볼 여유 정도는 존재했지만, 시온은 최대한 이 일을 서두르고 싶었다.

레제로로 오기 전 태양 열차에서 있었던 습격.

그리고 그와 연관되어있는 레제로의 마물들까지.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일이 터질 것처럼.

만약 정말로 시온 자신이 생각하는 일이 터진다면 도시와 교단은 혼란에 휩싸일 테고 신탁 장소까지 들어가는 게 훨씬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 전에 처리하는 게 낫겠지.'

물론 신탁 장소까지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빛의 신이 신탁을 내려줄지는 미지수였지만, 시온은 십중팔구 내려줄 것으로 생각했다.

예전 1황자 루브리오스에게 들었던 신탁의 내용.

오직 자신의 이름뿐이었기에 그 당시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것이었어.'

단순한 호명(呼名)이 아닌 부름.

그렇게 생각해야만 신탁의 내용이 이해가 갔다.

빛의 신은 자신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이 그림이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한 그림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걸 보고 착각했는지 루베토가 시온의 옆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이 그림은 빛의 도시 레제로가 탄생하게 된 유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설명.

"기록조차 전해지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 빛을 섬기던 천사 중 하나가 반기를 들었고 그에 빛께서는 다른 천사들을 보내 그 천사를 응징한 후 지상에 봉인하셨지요. 그 뒤로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봉인이 약해질 것을 염려한 빛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신탁을 내려 천사의 봉인지 위에 도시를 세우셨습니다. 그 도시가 바로...."

"이곳 레제로라는 거지?"

"오, 잘 아시는군요!"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이 내용은 플로시마르 연대기에도 적혀 있었으니까.

"물론 무척이나 오래되었고 현재로서는 증명할 수가 없기에 그리 정확한 유래는 아닙니다. 그저 여러 가지 설 중 하나일 뿐이지요."

루베토는 그렇게 말했지만, 시온은 이 유래가 사실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 밑에는 타락한 천사가 잠들어 있었고 빛의 도시 전체가 천사를 봉인하는 억제기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연대기에서는 마역에 의해 그러한 천사의 봉인이 풀리기 바로 직전까지 가지만, 결국 용사 일행에 의해 저지된다.

'만약 그대로 풀려났다면 제국은 마역과의 전쟁 전에 멸망했을지도.'

신에게 반역의 깃발을 들 정도의 천사라면 분명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권능을 지니고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어쩌면 이번에....'

그 생각과 함께 시온이 조금 전 나리에에게 추가로 한 지시를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였다.

"엇! 지온! 지온 맞죠!"

커다란 목소리가 옆쪽에서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시온의 눈에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한 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백금발의 머리칼과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지닌 미녀.

바로 올리비아였다.

"대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여기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시온을 향해 묻는 그녀의 얼굴은 커다란 목소리와는 달리 무척 피곤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까지 교단 내부의 접객실에서 태양 열차 습격에 관한 증언을 하다가 풀려나온 상태였으니까.

"증언은 끝난 건가?"

"아뇨. 아직 한참 남았고 지금은 중간에 잠시 쉬러 나온 거예요."

시온의 물음에 올리비아가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안이 무척이나 심각했기에 당연히 증언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행사인 성녀 경합과 관련되어 있었고 습격의 주체가 무려 마역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올리비아는 그러한 습격에서 살아남은 단 한 명뿐인 생환자였으니 그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 전체가 발칵 뒤집혔어요. 성기사들과 전투 사제들은 물론이고 이단 심문관들까지 대규모로 움직일 것 같아요."

제국 내에서 마물을 가장 혐오하는 집단 중 하나가 바로 빛의 교단이었다.

그런데 그런 마물들이 움직인 게 밝혀졌으니 이 정도의 대응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는 증언하느라 죽어나고 있는데 여기에서 여유롭게 교단 견학을 하고 계셨네요?"

옆에 서 있는 루베토가 견학을 담당하는 사제라는 걸 알아본 올리비아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물론 장난일 뿐 그런 그녀에게 진짜로 시온을 탓하는 마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조금 전에 시온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도 아직 사례를 하지 못했기에 마음에 걸렸을 뿐 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사실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저 얼굴을 보면 바로 풀리겠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올리비아는 지독한 얼굴 바라기였다.

"근데 진짜로 견학하려고 이곳에 온 거예요?"

"아니."

그런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저은 시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물어볼 것?"

그에 올리비아가 의문 어린 눈으로 되묻는 순간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다시 한번 회랑 안에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일단의 사제 무리.

그러한 사제들의 맨 앞에는 고위 주교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묘하게 격정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만나러 온 건가?'

그렇게 다가오는 사제들을 보며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그녀의 가문은 빛의 교단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신성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올리비아 자신이 교단 내부에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인사를 하러 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도 주교급까지 인사하러 오는 것은 처음 보는데.'

그사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숙이는 주교와 다른 사제들.

그리고 그 순간,

"모시러 왔습니다! 빛의 지정자시여."

올리비아는 그녀의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제들이 고개를 숙인 쪽은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정확히 옆에 있는 시온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체, 당신은....'

흔들리는 올리비아의 눈동자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쪽을 향해 쏠리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별로 은밀하진 않은 것 같은데.'

그러한 시선들을 애써 넘긴 시온은 조금 전 나리에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47화

39장 신탁(2)

달의 눈 레제로 지부의 지부장실.

"으...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그곳의 커다란 의자에 몸을 절반쯤 파묻은 채 나리에는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아까 보았던 시온 황자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았음에도 시온 황자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카리스마는 여전히 버티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쪽은 어째서 알아보라고 하는 거지?'

나리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전 시온 황자가 내린 지시를 떠올렸다.

빛의 도시 외곽에서도 가장 끝에 존재하는 여섯 개 장소의 정찰.

겉보기에는 서로 아무런 연관성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장소들이었다.

관광지로서의 가치도 없었기에 인적도 무척 드물었고.

그렇기에 보통 사람이 보면 '왜?'라는 의문부터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장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반역한 천사의 봉인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곳들.'

빛의 도시 레제로의 탄생 유래 중 하나인 타락 천사 봉인설.

전 레제로 지부장으로부터 이 도시에 대한 모든 정보를 인수인계받은 그녀는 그 유래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들을 빛의 교단에서 비밀스럽게 관리한다는 것까지도.

'말하지도 않았는데 시온 황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의문이긴 하지만....'

왜 뜬금없이 그곳들을 조사하라고 했는지가 더 의문이었다.

차라리 지금 레제로에서 터진 성녀 경합 참가자들의 실종 사건에 관한 거라면 이해라도 되었을 터.

하지만,

'지금까지 보아 왔던 시온 황자는 결코 아무런 지시나 내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렇다는 것은 그곳들에 나리에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와 함께 그녀의 머릿속으로 엄습하는 불길함.

'분명 교단 측에서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때,

"지부장님!"

부서질 듯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몇 시간 전 시온 황자의 지시에 따라 봉인지들의 조사를 보냈던 정보원 중 한 명이었다.

그에 나리에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

"크, 큰일입니다!"

다급한 첫마디와 함께 정보원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보고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

나리에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 * *

빛의 교 본단 심층부로 향하는 복도.

"그러니까 방금 신탁이 내려왔는데 거기에서 내가 언급되었다는 건가?"

자신을 데리러 온 파울로 주교와 함께 그러한 복도를 걸으며 시온이 물었다.

조금 전 빛의 회랑에서 파울로와 사제들이 큰 소리로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자 주변의 시선이 전부 몰려들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올리비아와 작별을 고하고 이들을 따라나선 시온이었다.

"언급한 정도가 아니라 빛께서 직접 지온 님을 지정하셨습니다."

그에 아직도 신탁을 들은 여운이 남아 있었는지 파울로 주교가 눈 안의 격정을 지우지 못한 채 대답했다.

어찌 보면 지정이란 말이 이상할 수도 있었지만, 조금 전 내려온 신탁에는 그 말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신탁은 정확히 지온 하네스란 인물의 외적인 특징들을 언급했으니까.

그렇기에 곧바로 찾을 수 있었고.

'이런 신탁은 용사를 제외한다면 역사상 처음 있는 일.'

그렇기에 현재 신탁을 관리하는 대주교와 주교들이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유래가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이 지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일단 빛께서 지정하신 분을 성언의 방으로 데려가는 게 맞겠지.'

성언의 방은 바로 신탁을 내려받는 장소였다.

그때,

"혹시 달의 눈과 접촉한 적 있나?"

잠시 말없이 걷던 시온이 그를 향해 물었다.

"달의 눈? 그곳은 정보 길드 아닙니까? 최근에는 이용한 적이 없습니다만...."

그에 왜 물어보냐는 얼굴로 대답하는 파울로.

'역시 아니었나.'

사실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

은밀하게 접촉하기로 한 사람들이 그렇게 대놓고 소리를 지르며 시온 자신을 찾으러 올 리가 없었으니까.

지금 이 사제들은 그녀가 포섭한 고위 인사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거기다가 애초에 교단의 고위 인사라고 하더라도 신탁을 위조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편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덕분에 바로 신탁 장소로 향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빛의 신이 이런 신탁까지 내려 자신을 찾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가면 알 수 있겠지.'

그 생각과 함께 얼마나 안쪽으로 들어갔을까.

한 명 한 명의 무력이 황성의 정예 기사와 비견되는 고위 성기사들의 엄중한 경비를 넘어 시온은 마침내 성언의 방이라 불리는 신탁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네.'

방 안으로 들어서며 시온은 생각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하얀 벽들이 방의 사방을 메우고 있었고 중앙에는 빛의 신 루미너스를 상징하는 신상 하나만 있을 뿐 다른 어떠한 물건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수하다 못해 단출해 보이는 방 안.

그러한 방 안에는 교단의 고위 인사들이 한가득 모여 눈을 빛내고 있었다.

"드디어 모셔 온 건가?"

그중에서 머리카락은 없지만, 수염은 길게 기른 노인 한 명이 시온 쪽을 향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바로 빛의 교단에서도 단 여섯밖에 존재하지 않는 대주교 중 한 명인 베르디오였다.

"예, 이분입니다."

"오오! 처음 뵙겠습니다, 빛의 지정자시여. 베르디오라고 합니다."

시온을 향해 인사하는 노인의 태도는 무척 정중했다.

상대방의 신분을 알 수는 없었지만, 빛의 신이 직접 지정했고 그 말은 즉 적합성만으로는 교황이나 용사와 필적한다는 것이었으니까.

그에 고개를 슬쩍 끄덕인 시온이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나를 데려온 이유부터 듣고 싶은데."

신탁의 내용을 묻기 위해 왔지만, 그건 자신의 이유였을 뿐 이들의 이유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시온의 반응에 베르디오의 눈에 살짝 놀라운 빛이 어렸다.

아무리 갈무리 중이라고는 하지만 그를 비롯한 주교급 사제들의 몸에서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신성력의 압박이 상당할 터.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그 모든 압박을 흘려내고 있었다.

'역시 빛께서 지정하신 자라는 건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베르디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저희도 모릅니다. 빛께서 부르신 거니까요. 그러니... 직접 듣는 게 어떠십니까."

그 말과 함께 대주교의 시선이 성언의 방 중앙에 놓인 신상으로 향했다.

"그러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대답한 시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신상 앞으로 향했다.

아마 저 앞에 있어야지만 신탁을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따라 시온을 향해 집중되는 사제들의 시선.

그들의 눈에는 묘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저벅.

그사이 바로 앞에 도착한 시온이 걸음을 멈추고 신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반응조차 없는 신상.

'이게 아닌가?'

곧이어 그렇게 생각하는 시온의 눈에 의문이 어리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악!

어떠한 전조도 없이 신상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방 전체를 뒤덮고 그걸로도 모자라 교단의 심층부 전체로 뻗어나가는 빛!

소름 끼칠 정도로 막대한 신성을 담은 그 빛은 보는 사람의 눈을 한순간 멀어버리게 할 정도로 밝고 찬란했다.

"...서, 설마 이건!"

그 빛을 머리로 반사하던 베르디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평생을 교단에 바쳐 온 그로서도 처음 보는 신상의 격렬한 반응.

이것은 절대로 신탁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상위에 존재하는.

교의 역사상 지금껏 단 한 번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오롯하며 아득한 기적!

"가, 강...!"

그런 대주교의 입에서 다음 말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덜컥!

모든 것이 정지했다.

터져 나오던 빛의 세례도.

경악 어린 눈으로 입을 커다랗게 벌린 베르디오와 다른 사제들도.

대기와 마나의 흐름도.

그리고 공간의 움직임까지.

시간(時間).

지금 이 순간 이곳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이건....'

어찌 된 일인지 그렇게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온의 눈에 신상 옆에 서 있는 한 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아니, 여인이 맞는 건지도 사실 알 수 없었다.

태양을 그대로 녹여 만든 듯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기에 그렇게 생각했을 뿐.

말이 되지 않지만, 그러한 '존재'의 흐릿하게 보이는 얼굴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노인과 아이를 전부 담아내고 있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그 생각과 함께 슬쩍 웃는 시온.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시온은 눈앞의 존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시온 자신의 몸에 이토록 소름과 전율이 돋아나게 할 존재는 오직 불멸자들뿐이었고 그러한 불멸자 중에서 지금, 이 순간 모습을 드러낼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빛의 신 루미너스.

빛과 태양, 그리고 자비의 신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신.

'설마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는데.'

기껏해야 일방적인 통보와도 같은 신탁으로 몇 마디 들을 줄 알았건만, 강림을 할 줄이야.

이건 시온조차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편이 더 낫기는 했다.

그때,

-이 시간대에서는 처음으로 보는구나. 흑성의 황제여.

루미너스가 시온을 향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중성적인 목소리.

드드드드!

단지 입을 연 것만으로도 멈춰 있던 시간과 공간이 부서질 듯 진동한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아득한 격이었지만, 그것보다 시온의 신경을 쓰이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방금의 한 마디.

방금 루미너스가 내뱉은 한 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 시간대?"

-너도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았느냐. 지금 이 세상이 소설 속이 아닌 미래라는 것을.

그런 신의 말에 시온의 눈이 가라앉았다.

물론 전부터 그럴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루미너스의 입으로 그 말을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거기다가 나의 정체와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고.'

아무리 신이라고 하더라도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이토록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때,

-궁금한 게 있으면 혼자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 직접 물어보아라. 그러라고 이렇게 강림한 것이니까.

그런 시온을 보며 웃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루미너스가 입을 열었다.

-인과와 계약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전부 답해 주도록 하겠다. 우리는 어찌 보면 한배를 탄 사이니.

"한배? 그건 무슨 소리지?"

그에 머릿속의 생각을 접고 신을 향해 묻는 시온.

-둘 다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한배를 탄 것이지 무엇이겠느냐.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신을 마주 보며 피식 웃은 시온이 다시 질문했다.

"그렇군. 그럼 질문을 바꾸지. 어째서 내가 이곳에 있는 거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자 시온이 가장 알고 싶었던 내용이기도 했다.

그저 플로시마르 연대기를 읽고 난 후, 한 번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이 세상으로 이동되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간단하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이 세계의 미래가 멸망으로 끝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루미너스의 말에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윤회에 갇힌 필멸자들로는 절대로 뒤바꿀 수 없는 운명. 유일하게 그러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용사가 나타나긴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끝났지.

바로 플로시마르 연대기의 내용이자, 이 세계에 기록된 운명의 역사였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새로운 존재를 찾아야 했다. 세계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으면서도 아직 불멸에 이르지 않아 세상에 간섭할 수 있는 존재. 그러면서도 용사를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 '우리'는 현재와 미래, 그리고 과거까지 전부 뒤졌고 결국 가장 적합한 존재를 발견했지.

흐릿하게 보이는 루미너스의 눈동자 안에 끝없는 신성과 현기가 어린다.

-그게 바로 너였다. 황제여.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시온을 바라보는 빛의 신.

-아, 그리고 한 가지.

곧이어 그런 루미너스의 입에서,

-오해할까 봐 먼저 말하는데 우리가 너를 발견한 건 맞지만, 이 세계를 구하겠다고 한 건 네가 먼저 한 제안이었다.

파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48화

40장 흔들리는 봉인(1)

"조금 전, 정보 길드 소속으로 보이는 인간들이 봉인지 주변을 탐색하고 돌아갔습니다.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그래?"

마족으로 보이는 수하의 말에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사방으로 압도적인 마기를 흘려대던 사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사내의 이름은 굴리후르.

이곳 빛의 도시 레제로의 모든 마물을 통제하는 대신성(對神聖) 도시 특별 마령이 그의 정체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단이 마찬가지이지만, 그중에서도 빛의 신 루미너스의 교단은 마역에게 있어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렇기에 마역에서는 오마령에 포함되지 않지만, 그와 필적하는 마령급 존재 하나를 레제로에 파견했고 그게 바로 굴리후르였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그냥 놔둬. 이미 늦었으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굴리후르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70년.

무려 70년이란 세월 동안 이 역겨운 신성력이 가득한 빛의 도시에 머무르며 준비한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무슨 짓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저 의미 없는 발버둥일 뿐이야."

사실 십여 년 전부터 이 도시에 봉인된 타천사를 깨울 준비는 끝나 있었다.

타천사의 힘을 억누르는 핵심 봉인지 여섯 곳.

수십 년에 걸쳐 그 여섯 곳을 관리하는 빛의 교단 쪽 모든 인물을 마족으로 갈아치웠고 봉인도 거의 해제한 상태였다.

이제 풀려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

아니, 그 시간 또한 이제 하루조차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금 와서 빛의 교단이 이 사실을 알아내고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도시 안에 존재하는 마역 측 전력이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진작에 이렇게 해야 했다."

대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봉인을 풀어 혼란을 극대화하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지만, 굴리후르는 그 계획을 앞당긴 지금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도시를 멸망시킨 후 뜨고 싶었을뿐더러 계획을 실행하기에 가장 적기가 지금이라고 여겼으니까.

더 시간을 끌었다면 교단 측이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눈치를 챘을 수도 있었다.

"이제 곧이다. 이 빌어먹을 신의 도시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기대 어린 눈으로 레제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굴리후르.

그런 그의 눈에 비치는 빛의 도시는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내가 먼저 제안했다고?"

루미너스의 말에 시온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안은커녕 눈앞의 신을 만난 기억조차 시온에게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정확히는 네가 연대기 안으로 들어간 시점보다 조금 더 미래의 네가 '우리'에게 한 제안이지.

시간선이 조금 복잡하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알아들은 시온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왜 나는 너희에게 그런 제안을 한 거지?"

그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빛의 신이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인과율 때문에 알려줄 수 없느니라.

인과율(因果律).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불멸자들, 즉 신들이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단 하나의 장치였다.

빛의 신은 그러한 인과율의 소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유를 알려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자 이 모든 일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사실이라는 뜻일 터.

-그에 대해서 지금의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그 제안은 네가 우리 신들과 맺은 계약이자 내기이며 네가 가진 특별한 힘과 관련이 있다는 것뿐이다.

"특별한 힘이라면... 흑성하를 말하는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에 시온의 입에서 또 한 번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네가 가진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힘이자 원래는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힘. 어찌 이 세상에 그런 힘이 존재하는 것인지....

거기까지 말하던 루미너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온이 피식 웃었다.

"또 인과율 때문에 더는 말할 수 없는 건가? 물어보면 전부 답해주겠다고 하더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원래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너 때문에 이렇게 인과율이 부족하게 된 것이니라.

그 말과 함께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하던 빛의 신의 입에서 다시 중성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를 비롯한 신들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한 일은 총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용사 회귀.

"용사 회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용사는 네가 읽은 연대기의 용사와 동일 인물이긴 하지만, 이미 세계의 멸망을 한 번 겪고 다시 회귀한 상태이니라. 우리 쪽이 아닌 다른 쪽 신들이 진행한 일이지. 그렇기에 너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알고 있다.

그런 루미너스의 말에 시온의 눈동자 안에서 이제야 알겠다는 빛이 떠올랐다.

사실 그 전부터 이상하긴 했었다.

아무리 시온 자신에 의해 미래가 바뀌었다고는 해도 용사의 움직임은 플로시마르 연대기에 적혀 있던 것과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었다면 그 움직임이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그러면 너희 쪽이 진행한 일이 나를 이 몸에 집어넣은 것이고?"

-맞다. 그 일로 인해 나와 다른 신들이 지닌 인과율 대부분을 소모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죽어가는 그 몸에 넣는 게 전부였지만.

사실 회귀보다 환생 쪽이 인과율의 소모가 훨씬 적긴 했다.

하지만 시온 아그네스, 아니, 최초의 태제(太帝) 오르렐리온 칸 아그네스의 혼과 운명은 용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 신들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그렇기에 미래지식을 연대기의 형식으로 전달하고 계약의 기억조차 없는 과거 황제의 혼을 이미 운명이 다해 시체나 다름없는 시온 아그네스의 육체를 선택하고 나서야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 거였나.'

그 생각과 함께 머릿속으로 새롭게 얻은 정보들과 앞으로의 계획을 재정립한 시온은 루미너스를 향해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다른 것을 물어보지. 과거의 나와 마역은 무슨 관계였지?"

분명 시온 자신이 황제였을 때 마역이란 곳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대의 마족들은 영겁제 즉 자신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저주받은 아그네스의 핏줄'이라 부르며 증오하기까지 했다.

그 말은 자신이 연대기 속으로 들어오고 난 후의 원래 세계에서 어떠한 일이 발생했다는 뜻일 터.

하지만,

-...그것도 인과율 때문에 알려줄 수가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건 아까의 계약과 관련 있다는 것뿐.

빛의 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

그 말에 시온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노려보았지만, 루미너스는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울 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보다 신격이란 건 인과율의 제약을 심하게 받는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지금의 문답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지만, 아직 의문점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부 계약 문제와 같이 핵심적인 내용이었기에 물어봤자 인과율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고 할 게 뻔했다.

더는 건질 게 없다는 말.

거기다가 이제 슬슬 강림 시간이 다 되어 가는지 루미너스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시온은 멸광검 이클락시아를 꺼내 빛의 신을 향해 내밀었다.

"이 녀석의 반쪽은 어디로 간 거지?"

-계약의 증표로 우리 쪽에서 보관하고 있긴 하다만 필요하다면 다시 돌려줄 수는 있느니라.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주는 건 인과율의 소모가 극심하니....

거기까지 말하던 루미너스의 눈이 교단 건물 너머에 존재하는 빛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번 일을 해결해 주는 대가로 주는 게 좋겠군.

"이번 일이라면...."

-이 도시를 잘 부탁한다, 황제여.

이제는 희미해지는 것을 넘어서 깜빡이기 시작하는 빛의 신의 모습.

-그리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세상 끝으로 찾아왔으면 좋겠구나.

그런 루미너스의 입가에 흐릿한 웃음이 어리는 순간,

-그곳에서는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

신의 모습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강림!!"

그와 함께 다시 움직이게 된 사제들이 경악 어린 얼굴로 빛의 신상과 시온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어?"

그런 그들의 얼굴에 어린 경악이 의문으로 뒤바뀌었다.

방금까지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한 빛을 뿜어내던 신상에서 갑자기 빛이 뚝 끊겨 버렸으니까.

그것뿐만 아니라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아득한 신성 또한 완벽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마치 모든 일이 끝나 버린 것처럼.

자신들이 놓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교단 최고의 기적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순간이자 오롯한 빛을 직접 영접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그에 당혹스러운 얼굴로 대주교 베르디오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봉인지."

잠시 루미너스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서 있던 시온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예?"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시온을 바라보는 베르디오.

"타천사의 봉인지를 관리하는 자들은 어디에 있지?"

그런 대주교를 향해 시온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 * *

빛의 교단 심층부로 향하는 통로.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요! 어서 막아야 한다고요!"

달의 눈의 레제로 지부장이 된 나리에는 그곳에서 주교들로 보이는 사제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조금 전 들은 보고 내용을 교단에 알리고 대책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아니, 대책을 세울 시간도 없어.'

타천사의 봉인은 풀리기 직전이었다.

봉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정보원들이 그저 근처로 다가간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거기다가 주변에서는 거대한 마기마저 느껴졌다고 했다.

아무리 외곽이고 인적이 드물다고 해도 지금까지 눈치를 채지 못한 게 불가능할 수준.

'지금 당장 반역의 천사가 나타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원래대로라면 시온 황자에게 먼저 이 사실을 알려야 했으나 현재 빛의 교 본단의 심층부로 들어가 연락할 길이 없었고 그렇기에 일단 평소에 알고 지내던 교단 측 고위 인사와 접촉한 나리에였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그게."

그녀의 말을 들은 주교들은 그저 황당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타천사의 봉인지.

그에 대한 중요성은 교단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소에도 철저하다 못해 완벽할 정도로 관리에 신경을 쏟고 있었고.

그런데 그러한 봉인이 위험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심지어 어제 봉인지에 관한 정기 보고를 받은 그들이었기에 나리에의 말이 더욱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타천사의 봉인이 위태롭다고요!"

"어떻게 봉인에 대한 것을 알고 계시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만 대외비이니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하는 건 그만둬 주시죠."

그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리에가 큰소리로 외치자 주교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하는데도 이렇게 계속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말을 부정하는 동시에 교단이 봉인지의 관리를 소홀히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평소에는 침착하고 이성적이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거기다가 지금은 성녀 경합 참가자들이 마역에 의해 실종된 사건 때문에 교단 전체가 발칵 뒤집힌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자신들 또한 무척이나 정신이 없었고.

그 와중에 이런 말까지 들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말이라고요! 지금 성녀 후보 실종 사건을 조사할 때가 아니에요. 못 믿으시겠다면 봉인지에 사람이라도 한 번...."

"그만!"

답답하다는 듯 이어지는 나리에의 말에 주교 중 한 명이 마침내 폭발했다.

"더 이상 그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강제로 교단 밖으로 내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가 손을 들어 근처의 성기사들을 호출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의 귓가에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 목소리로부터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길함과 압박감에 주교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의 고개가 홀린 듯이 돌아갔다.

동시에 커다랗게 변하는 사람들의 눈동자.

"베, 베르디오 님!"

교단 최고위 인사 중 한 명인 대주교 베르디오가 다른 주교 수십 명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한 건 베르디오 대주교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대주교가 마치 상전을 모시듯 따르고 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

베르디오 대주교뿐만 아니라 새롭게 나타난 모든 고위 인사가 저 사내의 뒤를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교황과 사도, 그리고 성녀를 제외한다면 교단에서 제일 높은 직위를 지닌 대주교가 어째서 저 정체 모를 사내를 따르고 있단 말인가.

그렇게 의문과 놀라움으로 이루어진 정적 속에서,

"저 말이 사실이니까."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내, 시온이 가라앉은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49화

40장 흔들리는 봉인(2)

끄르륵!

"아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괴물의 공격을 피해낸 르네트가 곧바로 그녀의 무기를 휘둘렀다.

콰직!

그 일격에 급소가 터져 나가며 움직임을 멈추는 괴물.

그렇게 손쉽게 달려드는 괴물을 처리했지만, 르네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키아아아악!

방금 처리한 괴물과 똑같이 생긴 괴물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이쪽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X발! 끝도 없네!"

그런 괴물들의 파도를 바라보며 르네트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가 이런 상황에 처한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호이레' 마을 중앙에 갑자기 솟아나 마을 사람들 전체를 괴물로 뒤바꾼 뱀 혀 모양의 유적.

우연히 같이 다니게 된 붉은 눈의 여인에 의해 그러한 유적에서 다시 한번 붉은 빛이 터져 나왔고 르네트는 방비할 새도 없이 그 빛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하지만 그 전의 사람들처럼 괴물로 변하지는 않았지.'

그 대신 빛에 닿은 그녀를 비롯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혈계(血界)'라고 불리는 이상한 공간으로 이동되어 버렸다.

혈계는 르네트가 사는 본래 세계의 하위 세계 같은 개념이었고 혈귀족이라 불리는 종족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한 혈귀족은 현재 '혈괴(血怪)'라 불리는 괴물들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고 현재 르네트는 그 전쟁에 휘말린 상태였다.

물론 지금 그녀가 상대하는 혈괴들이 호이레 마을에 나타난 괴물들과 똑같은 개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체 왜 내가 상관도 없는 다른 세계의 전쟁에 휘말려야 하냐고...!"

새롭게 달려드는 괴물들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뒤 분통을 터뜨리는 르네트.

지금이라도 당장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일단 이 혈괴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통로'를 열 수 있는 유적이 혈괴 진영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이쪽이 유리하다는 건데."

그 중얼거림과 함께 르네트는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 그대로 전장을 지배하고 있는 붉은 눈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꺄하하하하!"

섬뜩한 광소와 터뜨리며 한순간에 수백의 혈괴를 지워버리는 그녀의 모습.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거기다가 그런 여인의 주변으로 끝없이 소환되며 주변을 잠식해 나가는 악수들의 군세는 압도를 넘어서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저 장면을 처음에 봤을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얼마나 고생했던가.

'딱 봐도 '일곱 하늘' 급에 해당하는 강자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건지 신기하단 말이야.'

'리나'라는 이름과 혈마법사들을 다스린다는 것밖에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아무튼 아이러니한 상황이네."

저 여인에 의해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지만, 반대로 저 여인에 의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전세도 우리 쪽으로 완전히 넘어올 것 같은....'

그 생각과 함께 르네트가 다시 전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저, 저기!"

자신들과 같이 싸우고 있던, 인간과 비슷한 모습에 붉은 피부를 지닌 혈귀족들이 갑자기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혈괴 쪽 진영 한복판을 가리켰다.

쿠드드드드드드!

정확히 그들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끝없이 치솟기 시작하는 무언가.

그것은 용이었다.

몸 전체가 혈괴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

그 아 아 아 아 아

그러한 혈룡이 전장을 굽어보며 울부짖는 순간, 거대한 기파가 터져 나오며 혈귀족 진영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아...."

털썩.

단지 그것만으로도 전의를 잃고 멍하니 혈룡을 바라보거나 제자리에 주저앉는 혈귀족들.

그만큼 혈룡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존재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미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르네트의 눈 또한 절망으로 물들었다.

승기를 다 잡아가는 와중에 저런 존재가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대체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규격 외.

혈룡을 본 그녀의 머릿속에서 처음 떠오른 단어였다.

예전 신화 속에 등장했던 괴물이 저러할까.

대적할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오직 한시라도 빨리 저 혈룡의 시야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

그런 르네트가 다급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이었다.

"...어?"

그녀의 눈에 리우시나가 오히려 혈룡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미치기라도 한 걸까?

아무리 저 마녀가 하늘급 무력을 지니고 있더라도 눈앞의 존재와 홀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째서 저 괴물을 향해 다가가고 있단 말인가.

그에 르네트의 두 눈동자가 의문으로 물들 때,

"그래, 지금까지 너무 싱겁긴 했어."

혈룡을 향해 다가가는 리우시나에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환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과연 너는 얼마만큼의 명을 지니고 있을까?"

그 기대 어린 중얼거림과 함께 천천히 붉은 용을 향해 한 손을 뻗어내는 마녀.

그런 리우시나의 손이 완벽하게 뻗어지는 순간,

쿠드드드득!

수만의 악수들이 그녀의 앞으로 모조리 모여들며 하나의 거대한 무언가를 이루기 시작했다.

* * *

빛의 교 본단의 심층부에 존재하는 소회의실.

그곳에는 열 명 남짓한 인원들이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앉아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빛의 교단 안에서도 막대한 권한과 영향력을 가진 초고위 인사들.

그리고,

"다 모였나?"

그러한 사람들의 한가운데에는 바로 시온이 있었다.

조금 전 주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나리에와 접촉한 뒤 시온은 곧바로 봉인지를 관리하는 교단 측 최고위 인사들을 전부 이곳으로 불러들인 상태였다.

그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저 강림한 빛의 신이 이에 관해 언급했다는 한마디면 충분했으니까.

거기다가 이미 빛의 지정자로 불리는 시온이었기에 더욱 쉬웠던 것도 있었다.

"그럼 시작하지."

시온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길 기다렸던 것일까?

"1급 성기사 파울로입니다. 정말로 빛께서 봉인이 위험하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사각턱에 강직한 인상을 지닌 중년의 남자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시온을 향해 물었다.

그는 봉인지를 관리하는 모든 성기사를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다.

"단순히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풀리기 직전의 상태지."

고요한 눈으로 파울로를 바라보며 대답하는 시온.

"그럼 일단 사람을 보내 확인한 뒤...."

"아니, 그럴 시간 없어. 지금 당장 봉인지별로 별동대를 구성해야 해."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성녀 경합 참가자들의 실종 사건으로 인해 가용 병력마저 적은 상태이고요."

그런 시온의 말에 이번에는 파울로의 옆에 앉아 있던 인자한 얼굴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바로 봉인지로 파견한 사제 전부를 관리하는 특급 주교 로제리였다.

"참가자 살해와 타천사의 봉인 해제. 둘 다 마역이 저지른 짓이야. 다른 점이 있다면 참가자 살해 쪽은 단지 시선을 돌리는 용도라는 거지. 그러니까 그쪽으로 병력을 투입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일 텐데."

그 말과 함께 시온은 구석 쪽에 앉아 있는 올리비아를 슬쩍 바라보았다.

성녀 경합 참가자 습격에 대한 증언과 혹시 모를 다른 변수를 대비해 그녀 또한 이곳으로 부른 상태였다.

'허... 대체.'

그런 시온을 멍한 눈으로 마주 보며 올리비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놀랄 기운도 없었다.

조금 전에는 주교급이 인사하며 데려가더니 이제는 교단의 초고위 인사들을 소집해 직접 비상 회의까지 열고 있었다.

거기다가 대체 왜 베르디오 대주교보다도 상석에 앉아 있단 말인가.

정말이지 그 정체와 행동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 말 사실입니까?"

잠시 입을 다문 채 시온을 바라보던 파울로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뜻이지?"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지온 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지온 하네스란 인물 자체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존재했다.

"조금 전에 저는 하네스란 가문을 조사했고 수도 어디에도 그런 가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온 하네스란 이름은 가명이란 뜻이지요."

"...!"

그런 파울로의 말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살짝 소란스러워졌다.

"아무리 빛의 부름을 받았다 할지라도 신분조차 불분명한 자의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거기다가...."

잠시 다음 말을 망설이는 듯 침묵하던 파울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빛께서 당신을 부르시고 직접 모습을 보였다는 것 또한 믿기 힘듭니다."

"파울로,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르디오 대주교가 일그러진 얼굴로 노성을 토해내었다.

지금 파울로가 한 말은 신탁에 관련된 모든 일을 관리하는 베르디오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파울로, 그 말은 심한 것 같네. 어서 정정하고 사과드리게나."

그에 옆에 있던 로제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속삭였지만, 파울로는 정정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빛께서 강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에서 저자를 제외하고 빛을 영접한 사람이 존재합니까?"

"...."

그 말에 침묵하는 사람들.

"없습니다. 그것은 즉 증명할 사람도 없다는 뜻이지요. 그렇기에 빛께서 내려오신 게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빛께서 봉인에 대해 언급했다는 말을 무작정 믿을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거기에 더해 파울로는 어제 봉인지를 지키는 성기사들로부터 전부 이상 없다는 정기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만약 저 지온이란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모든 부하가 거짓 보고를 했다는 것일 터.

상식적으로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걸 넘어서 불가능했다.

덕분에 파울로는 더욱 확신을 가진 채 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온 님이 빛의 지정을 받은 건 사실이고 말씀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으니 일단 진정하고 좀 더 확인을...."

그런 파울로를 말리고 상황을 중재하겠다는 듯 입을 연 로제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확실히. 나 같아도 믿을 수 없을 것 같긴 해."

시온이 슬쩍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건지도 모르는 녀석이 갑자기 봉인이 위험하다고 말하면서 명령을 내리고 있으니 말이야."

의문 어린 눈으로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훑는 시온.

어찌 보면 시간이 지체될 위기에 처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시온의 표정은 평온했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시온은 이 상황을 타개할 가장 간단한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미래 지식과 색적진.'

이 둘을 이용해 이 자리에 마족이 있으며 그 마족들이 두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 그만이었다.

저벅, 저벅.

지금까지 여러 번 사용했던 방법이긴 했지만,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이 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 정도 숫자라면 충분히 통제는 가능할 것 같고.'

그 생각과 함께 걸음을 옮겨 회의실의 중앙에 선 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럼 믿을 수 있도록 증명을 해주는 게 맞겠지."

"...지온 님?"

그 말을 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기에 베르디오의 입에서 의문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시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렇게 봉인이 풀리기 직전임에도 너희가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간단해. 봉인지를 관리하는 말단부터 가장 위쪽까지 전부 다 한통속이기 때문이지."

봉인지를 관리하는 최고위 인사들에게로 향하는 시온의 시선.

"지금 그게 무슨...! 그 말은 우리가 교단을 배신하고 일부러 봉인이 풀린 것을 숨기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에 파울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온을 향해 분노를 터뜨릴 때,

"아니, 배신은 아니야."

서서히 시온의 눈과 입이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설마...!'

그 모습에서 마력 열차 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린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순간이었다.

"너희들에게는 그게 맞는 행동이니까."

얼어붙을 것만 같은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콰직!

시온의 오른손으로 소환된 용폭창 아그드바르가 파울로의 옆에 있던 로제리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에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반응하기도 전,

쩌저저저저저적!

다시 한번 휘둘러진 시온의 창이 파울로를 제외한 봉인지 쪽 고위 인사들의 머리를 모조리 터뜨리기 시작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50화

40장 흔들리는 봉인(3)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두 눈으로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순간에 사라지는 빛의 교단 최고위 인사들의 머리.

"아...."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베르디오 대주교를 비롯하여 회의실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어떠한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한 눈으로 머리가 사라진 시체들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 얼마의 침묵이 흘렀을까.

"이 미친 살인마가!"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파울로였다.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시온을 향해 달려드는 성기사.

과연 빛의 교단 전체를 통틀어 오십 명조차 되지 않는 1급 성기사 중 한 명이라는 것일까.

화아아악!

그런 그의 검에서 터져 나오는 신성력은 회의실 전체를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하고 찬란했다.

거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시온의 앞까지 다가와 검을 내리긋는 파울로.

그 일격은 작은 동산조차 갈라버릴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했지만, 시온에게 닿지는 못했다.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완벽한 타이밍에 앞으로 내밀어지는 시온의 용폭창.

그그긋!

그런 아그드바르와 맞닿은 파울로의 검이 마찰 불꽃을 일으키며 창신(槍身)을 타고 옆으로 흘러내린다.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네."

그로 인해 드러난 성기사의 빈틈을 향해 시온이 망설임 없이 반대쪽 주먹을 꽂아 넣었다.

쩌어어엉!

그 순간 터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파와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진 파울로의 신형이 회의실의 벽에 처박힌 채 다시 나타났다.

그대로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지는 그의 몸.

시온은 일단 파울로를 살려두었다.

외곽의 봉인지들과 타천사의 육신이 잠들어 있는 도시 중심부 광장까지.

총 일곱 군데를 동시에 타격해야 했기에 전력은 한 명이라도 많은 게 좋았으니까.

'거기다가 봉인지의 최고 관리자 중 유일한 인간이기도 하고.'

시온 자신을 제일 많이 의심하고 몰아간 파울로가 마지막 남은 인간이라는 게 의외였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마 상황이나 사람을 파악하는 눈이 전혀 없기에 마역 측에서도 그냥 놔둔 것 같았다.

"지정자님!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러는 와중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은 베르디오가 당혹과 경악이 뒤섞인 얼굴로 시온을 향해 외쳤다.

어째서 빛의 지정을 받고 강림까지 겪은 자가 교단의 인물들을 죽이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보면 알아."

짧게 대답한 시온이 바닥에 빠른 속도로 색적진 하나를 새긴 뒤 곧바로 아그드바르를 그 중심에 꽂아 넣었다.

화아아아악!

그와 함께 색적진으로부터 흘러나온 빛이 용폭창을 거치며 순식간에 증폭되더니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회의실 전체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시온에 의해 머리가 사라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

끼아아악!

그러한 시체들이 소름 끼치는 괴성과 함께 몸을 일으키며 기괴하게 변해가는 장면을.

"저, 저건!!!"

그 모습에 베르디오를 비롯한 사람들의 눈동자가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마족.

시체들이 변화한 존재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분명 마기였다.

대체 어째서 빛의 교 본단의 심층부에 마족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렇게 사람들이 다시 한번 충격으로 물드는 사이,

파앙!

색적진에서 아그드바르를 뽑아 든 시온의 신형이 마족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그런 시온의 눈은 처음과 다를 바 없이 고요했다.

'전부 상급인 것 같은데.'

원래대로라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색적진이었기에 상급 마물까지 탐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용폭창의 증폭, 그리고 방금의 일격으로 인해 마족들의 신체와 핵이 불완전해졌고 덕분에 정체를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대체 넌...!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완벽하게 마족으로 변모한 로제리가 당황 가득한 얼굴로 소리치며 다가오는 시온을 향해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독액을 쏘아내었다.

치이익!

표면에 닿는 대기조차 모조리 녹여내며 나아간 독액이 살아 있는 것처럼 활짝 펴지더니 그대로 시온의 전신을 뒤덮는다.

아니, 정확히는 뒤덮으려 했다고 하는 게 맞았다.

그 전에,

쩌저저적!

시온의 창끝에부터 시작된 서리 정령의 냉기가 독액을 모조리 얼려 버렸으니까.

콰드득!

그렇게 얼어붙은 독액의 중심부를 꿰뚫으며 계속해서 나아간 시온의 창이 그 너머에 있는 로제리의 상체 전부를 단숨에 박살 낸다.

이번에는 완벽하게 숨이 끊어진 듯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는 마족의 하체.

그사이,

-저 녀석이라도 죽여야 한다!

도망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린 다른 마족들이 모조리 시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신경 써야 할 존재는 시온뿐만이 아니었다.

"흐읍!"

숨을 크게 들이켠 올리비아가 거칠게 전신에서 신성력을 뿜어내며 마족 중 하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미 시온과 같이 한 번 전투를 치른 적이 있던 그녀였기에 이렇게 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고 덕분에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콰아앙!

그런 올리비아와 마족의 격돌로부터 터져 나오는 굉음.

"전부 지정자님을 도와 저 마족들을 멸해라!"

그 굉음으로 인해 마침내 정신을 차린 베르디오 대주교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불같은 지시가 토해내었다.

그에 따라 다른 사제들과 성기사들 또한 전투에 참여하며 접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채앵! 채앵!

"감히 더러운 마족 놈들이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빛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심판하겠다!"

승기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과연 교단 최고위 인사들이라는 것일까.

회의에 참석한 인물 한 명 한 명이 뿜어내는 신성력은 거대하기 그지없었고 마족들의 마기를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베르디오 대주교의 신성력은 특히나 압도적이었다.

화아아악!

그가 기도문을 읊을 때마다 최고위 신성 주문들이 물밀듯이 쏟아졌고 그에 마족들은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녹아내렸다, -이 역겨운 빛의 종놈들이!! 끄아아악!

그렇게 마지막 남은 마족마저 소멸하며 전투가 끝이 난 후, 털썩!

사라져 가는 마족들의 시체를 잠시 바라보던 베르디오 대주교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란과 착잡함으로 물들어 있는 그의 눈동자.

그 감정은 시온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일어난 마족들과의 전투로 인해 시온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파악한 상태였으니까.

그렇기에 시온에 대한 의심 또한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어떻게 로제리가...."

교단의 최고위 인사들.

그것도 지금까지 수십 년간 같이 지내왔던 자들이 마족이었다는 사실은 베르디오로서도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순식간에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그의 얼굴.

시온은 용폭창의 소환을 해제한 채 베르디오가 감정을 추스르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봉인지."

대주교의 입에서 한층 진정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정말로 여섯 곳의 봉인지가 전부 마물들에게 점령당했고 타천사의 봉인 또한 풀리기 직전이라는 말입니까?"

"조금 전에 이미 말했어."

그에 잠시 무거운 눈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베르디오가 근처의 주교 중 한 명을 향해 말했다.

"지금 당장 성녀 경합 참가자 실종 사건에 투입된 전력들을 불러들이고 본단에 있는 가용 가능 전력들도 전부 집합시키도록. 지금부터 빛의 교단은 봉인지 탈환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다."

시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엄청난 위기였다.

정말로 봉인이 풀려 반역의 천사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면 레제로의 멸망은 확실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어떻게든 봉인이 풀리기 전에 막아야 했다.

"교황 성하께는 내가 직접 말씀드리겠다."

"알겠습니다."

그 말에 대답한 주교가 다급한 표정으로 회의실에서 빠져나갈 때,

"이번 탈환에 투입되는 모든 전력의 지휘 권한은 내가 갖도록 하지."

시온이 베르디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그것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그에 베르디오가 곤란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무리 빛의 지정을 받고 강림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본 지 하루조차 되지 않은 사이였다.

거기다가 신분조차 불분명했고.

그렇기에 이런 대규모 교단 전력의 지휘 권한을 맡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빛께서 지정하긴 하셨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지온 님은 교단에 귀의하지 않은 외인이십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전부 빛께 모든 것을 바친 몸. 그렇기에 아그네스 황가를 제외한 외인의 명을 따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 잘됐네."

그에 웃으며 대답하는 시온.

대주교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분명 자신은 거절의 뜻을 전했는데 왜 잘되었다고 한단 말인가.

그때,

스스스-

시온의 얼굴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지금까지 걸려 있던 외모 변환 마법이 해제되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이동하는 이목구비와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어가는 머리카락.

그리고 마침내 그런 시온의 얼굴이 완벽하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순간,

"!!!!!!"

베르디오와 올리비아를 비롯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입이 다시 한번 벌어지기 시작했다.

* * *

레제로의 외곽에 존재하는 버려진 작은 고성(古城).

"이제야 눈치챈 건가?"

그러한 고성 안에서 이마에 난 두 개의 뿔이 인상적인 마족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이름은 데르칼.

바로 이곳 고성에 존재하는 타천사의 봉인을 총괄하는 마족이었다.

"정말 느리기 짝이 없군."

조금 전 수하 마족으로부터 빛의 교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지만, 데르칼의 표정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지금 움직여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텐데 말이야."

이제 정말로 곧이었다.

타천사의 봉인이 완전히 풀리고 이 도시가 멸망할 때까지 남은 시간이.

'물론 그 전에 교단 측에서 이곳에 들이닥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고성 안에 존재하는 마족들의 전력은 상당했고 그렇기에 이길 수는 없어도 봉인이 풀리기 전까지 버티는 건 가능했다.

거기다가 이곳은 봉인지였다.

때문에 적들은 봉인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제약 또한 많을 터였다.

여러모로 유리한 조건.

"그분과 우리가 몇십 년에 걸쳐 준비한 일이다. 절대로 실패하면 안 돼."

조금 전 자신에게 이곳을 맡기고 도시의 중심부로 떠난 직속상관 굴리후르를 떠올리며 그렇게 중얼거린 데르칼은 고성의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곳은 전부 막혀 있기에 교단의 전력이 들어올 데는 오직 저곳 하나뿐.

그렇기에 그는 성의 지하에서 봉인핵을 제어하는 인원들을 제외한 모든 마족을 정문 앞에 대기시켜 놓은 상태였다.

"언제쯤 오려나."

기대 어린 눈으로 중얼거리는 데르칼.

봉인이 풀리기 전까지 오지 않는 게 제일 좋긴 했지만, 그는 그 전에 교단 측 전력이 이곳에 도달하길 바라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재미가 없었으니까.

그때,

"음?"

무언가를 발견한 데르칼의 입에서 의문성이 흘러나왔다.

바닥에 존재하는 자그마한 돌멩이들.

달칵달칵!

그중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전혀 흔들릴 이유가 없는데도 흔들리는 돌멩이를 바라보며 마족이 눈썹을 살며시 찌푸릴 때, 그러한 돌멩이의 흔들림이 서서히 주변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근처에 존재하는 다른 돌멩이들과 기물들을 넘어서 바닥과 벽, 그리고 성 전체로 뻗어 나가는 흔들림.

"뭐, 뭐야!"

그 이상 현상을 눈치챈 마족들의 눈에도 동요가 어린다.

공간.

성안의 공간 전체가 마치 두려움에 질린 것처럼 미친 듯이 떨어 울리고 있었다.

이 기이한 상황에 데르칼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감각이 엄습했다.

"전부 밖으로 나...!"

그에 마족의 입에서 다급한 지시가 흘러나오려고 할 때였다.

파직!

공기 중에 생겨나는 자그마한 스파크.

그것을 본 데르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

-------------------!

시야 전체가 백열했다.

신이 지상을 향해 천벌을 내린다면 이러할까.

마족들을 비롯한 모든 것이 새하얀 빛 속으로 사라지며 세상이 완벽한 묵음으로 물든다.

그리고 그것보다 한 박자 더 늦게.

백열된 세상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폭발과 충격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새하얀 빛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난 뒤 드러난 광경에서 더 이상 고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바닥에 붙어 있는 약간의 잔해가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 고성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

그렇게 완벽하게 박살 난 성 한복판으로,

저벅.

쏘아낸 일격의 여파로 인해 아직까지도 부르르 떨고 있는 검은 창을 쥔 한 명의 사내가 천천히 내려섰다.

권태로운 눈동자와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어둠.

바로 시온이었다.

"전부 지워."

그런 시온이 초토화된 성 밑으로 환하게 드러난 봉인핵과 살아남은 마족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순간, 화아아아악!

뒤이어 들이닥친 교단의 최정예 전력이 찬란한 빛의 세례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51화

41장 타천사(1)

시온은 봉인이 풀리기까지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문부터 뚫고 들어가는 정석적인 전략이 아닌 처음부터 적의 본거지 자체를 날려 버리는 전략을 선택했다.

어차피 봉인지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핵은 지하 깊숙한 곳에 있었고 한 번의 충격 정도는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전략은 꽤 잘 먹힌 것 같았다.

봉인지를 감싸고 있는 성과 함께 적들의 전력 절반을 날려 버렸고 동시에 봉인 핵마저 한 번에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막아라... 막아!!"

남아 있던 마족들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시온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온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마물들이여,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져라!"

"빛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그전에 같이 온 빛의 교단 측 전력에 의해 모조리 가로막혔으니까.

콰과과과광!

순식간에 전장으로 변하는 봉인지.

콰직!

'확실히 정예 병력이긴 한가 보네.'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족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은 시온은 전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곳을 지키는 마족들은 강한 편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기사들과 전투 사제들의 공격에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쓸려나가고 있었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교단 측 전력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광경.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자는 바로 파울로였다.

"감히 지금까지 날 속여오다니!"

의식을 되찾은 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시온에게 사죄한 뒤 자청하여 이번 작전에 투입된 상태였다.

회의실에서는 이성을 잃었기에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일까.

쩌저저저적!

배신감에 물든 얼굴로 마족들을 학살하는 그의 모습은 확실히 그때보다 뛰어났다.

'생각보다 더 금방 끝나겠어.'

그에 그렇게 생각하며 시온이 조금 더 속도를 올릴 때,

'젠장... 젠장할!'

조금 전 시온의 일격에서 살아남은 마족 데르칼은 모습을 숨긴 채 욕설을 토해내며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혹으로 물들어 있는 그의 얼굴.

이런 식으로 습격을 가해올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성 전체를 통째로 날려 버릴 줄이야.

'핵이 부서질 수 있다는 건 생각하지 않은 건가?'

덕분에 정문에 모여 있던 수하들은 전멸했고 봉인 해제를 위해 만들어 놓은 술식 또한 반파된 상태였다.

거기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어째서 저자가 여기에!'

교단의 전력을 지휘하고 있는 자가 바로 그 '시온 아그네스'라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처음 봤지만, 짙은 회색빛 머리카락과 여러 외모적인 특성으로 인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대로면 위험하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바로 봉인이었다.

지금 이 속도라면 분명 봉인이 완전히 해제되기 전에 전멸할 게 분명할 터.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핵을 파괴한다.'

핵을 파괴해도 봉인을 풀 수는 있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정식으로 해제하는 것보다 타천사의 힘이 약해지기에 지금까지 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그대로 다시 봉인이 재구축 되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데르칼이 벽에 녹아든 상태로 봉인 핵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스-

전장을 지나쳐 순식간에 핵 근처까지 치닫는 데르칼.

은신은 그의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고 때문에 데르칼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실제로 전장의 그 누구도, 심지어 시온 아그네스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됐다.'

그리고 마침내 바로 앞까지 도달한 데르칼이 망설임 없이 핵을 부수기 위해 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툭-

뻗어지던 그의 팔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잘려 나가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마족의 입에서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찰나,

"뭐 하려고?"

그의 귓가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어째서 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단 말인가.

분명 방금까지 저곳에 서 있는 걸 확인했는데.

그에 하얗게 질린 얼굴의 데르칼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스륵-저 멀리 있던 시온의 모습이 환영처럼 사라지는 동시에, 콰지지직!

그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 * *

빛의 도시 레제로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광장.

"후...."

그곳에서 엘리시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번에 이곳에서 시온 황자의 모습을 본 뒤로 그녀는 도시에 머무르는 시간 대부분을 이곳 광장에서 보내고 있었다.

때문에 일행과 떨어지기까지 했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온 황자의 그림자조차 다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엘리시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쉬움 가득한 중얼거림.

만난다고 하더라도 딱히 할 것도, 그렇다고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저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게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걸까?'

엘리시스가 아는 시온 황자는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신분까지 숨긴 채 비공식적으로 움직이는 중이라면 분명 그럴 만한 사정이 존재할 터.

그때,

"음?"

그녀의 눈에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기사?'

바로 성기사들이었다.

갑옷에 음각된 문양을 보아 꽤 높은 직급에 있는 것 같은 성기사들은 마치 전투를 치르기 직전처럼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성기사들이 광장 중심부에 존재하는 신상 앞에 멈춰 섰다.

"지금부터 이곳의 출입을 통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곧이어 그중에서 가장 상관으로 보이는 성기사 한 명이 의문 어린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광장 안에 계신 분들은 신속하게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기에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은 채 내보내려 한단 말인가.

"혹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아직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 중 한 명의 물음에 성기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나가라고 하시면...."

더욱 짙어지는 의문에 다른 사람들 또한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할 때,

'저 사람은....'

엘리시스는 그들이 아닌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장의 중심부에서 좀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는 한 남자.

방금 성기사들이 등장했을 때 우연히 발견하게 된 저 남자에게서 그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마른 것을 빼고는 아무런 외적인 특징이 없었지만, 그런 남자가 주는 느낌은 무척이나 기괴했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불결하면서도 역겨운.

그러면서도 소름 끼치는.

그래, 마치 몇십 년 동안 썩은 하수구의 악취를 느낌으로 표현한다면 이러할 것 같았다.

거기다가,

'왜 심장이....'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를 봤을 때부터 엘리시스는 자신의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의 몸속에서 흐르고 있던 신성력마저 요동치고 있었다.

그에 엘리시스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릴 때였다.

씨익!

성기사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입가에 불쾌한 웃음이 어렸다.

그로부터 본능적인 섬뜩함을 느낀 엘리시스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는 찰나였다.

퍼버버벅!

남자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머리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터져 나갔다.

그러한 시체들로부터 퍼져 나와 사방으로 튀는 선혈과 뇌수.

"...?"

영문도 모른 채 그러한 선혈을 뒤집어쓴 근처의 사람들이 의문 어린 눈을 하는 순간, 콰자자자자자작!

질식할 정도의 거대한 마기와 함께 남자의 몸에서 지네의 그것처럼 생긴 수십 개의 다리가 튀어나오며 아직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괴, 괴물... 괴물이다!!!"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비명들이 신호라도 된 것일까?

남자의 주변에 숨어 있던 수많은 마족이 모습을 드러내며 남아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그로 인해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하는 광장.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면 되려나?"

그러한 광장을 바라보며 남자 아니, 대신성 도시 특별 마령 굴리후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봉인지가 아닌 이곳 빛의 광장에서 사람들을 학살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제 곧 이곳에서 소환될 타천사의 힘을 빠르게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오랜 봉인으로 인해 천사의 힘은 약해져 있었고 그 힘을 회복시키려면 루미너스의 신성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신성력을 얻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이 도시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레제로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거의 모두가 빛의 신을 섬기는 신도지.'

그렇기에 모든 사람의 몸속에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이 존재했고 그것은 타천사에게 훌륭한 양식이 될 터였다.

그때,

"학살을 막고 저 역겨운 마족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라!"

광장 중심부에 있던 성기사들이 굴리후르와 다른 마족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을 감싸는 찬란한 빛의 갑옷과 주변으로 번져 나가는 막대한 신성력.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굴리후르의 눈에는 여유가 넘쳤다.

"너희들만으로는 그러기 힘들 텐데."

이곳 중앙 광장은 다른 봉인지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그 중요도가 낮았다.

그렇기에 이곳으로 파견된 저 성기사들의 수준 또한 다른 곳보다 떨어질 터.

그에 비해 이쪽은 굴리후르 자신을 비롯한 최정예들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그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생각대로,

콰아아앙!

마족들과 격돌한 성기사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밀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빛이시...! 아아악!"

마족들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둘씩 목숨을 잃어가는 성기사들.

"자발적으로 신성력 공급원이 되어 주겠다니 너무 친절한 거 아니야?"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는 듯 굴리후르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외칠 때,

'도망가야 해!'

그 전투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한 엘리시스가 광장 밖으로 몸을 돌렸다.

성기사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긴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저 전투에 끼어들기에는 엘리시스 자신의 수준이 너무나도 형편없었으니까.

분명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방해만 될 터.

거기다가,

두근! 두근!

계속해서 빨라지는 심장의 박동과 요동치는 신성력으로 인해 몸 상태 또한 좋지 않았다.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적은 너무나 강하고 자신은 너무나 무력하다.

그녀의 눈에 어리는 짙은 절망과 패배감.

그렇게 학살당하는 주변 사람들을 외면한 엘리시스가 광장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으아앙! 엄마아! 엄마아아!"

그녀의 시야에 죽은 엄마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이 비쳤다.

이제 막 세 살이나 되었을까.

무척이나 어려 보이는 아이.

"인간의 새끼는 무척이나 시끄럽군."

그 울음소리가 거슬렸던 것일까?

근처에 있던 마족 중 하나가 그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어 마기의 탄환을 쏘아내었다.

투웅!

아이의 머리를 노리며 빠르게 나아가는 탄환.

하지만 그 탄환은 아이에게 닿지 못했다.

카앙!

그 전에 아이 앞을 가로막은 누군가가 펼친 보호막에 의해 튕겨 나갔으니까.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젠장."

자그마한 욕설을 내뱉는 엘리시스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저 마족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을.

하지만 탄환이 쏘아지는 것을 인지한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여 버렸다.

"버러지가 버러지를 막아 주기도 하네?"

꾸드드득!

그런 엘리시스를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린 마족이 다시 손끝으로 마기를 응집시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느껴지는 힘의 크기는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응집되는 마기를 보면서도 엘리시스는 아이의 앞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저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 그 탄환도 겨우 막아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켜야 해.'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아니, 외면하기 싫었다.

이런 아이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 시온 황자에게 보답할 자격을 어떻게 갖출 수 있겠는가.

엘리시스의 두 눈에 어리는 굳은 의지.

쿵! 쿵! 쿵! 쿵!

그 의지에 반응하듯 그녀의 심장과 신성력이 더욱 강하게 박동하고.

"사이좋게 심장을 뚫어주지."

마침내 마족의 손에서 훨씬 더 강대하게 변한 마기의 탄환이 쏘아지는 순간이었다.

후욱!

엘리시스가 바라보는 세상이 느려졌다.

아주 천천히.

대기를 갈라내며 다가오는 마기의 탄환과 동심원을 그리며 주변으로 느리게 퍼져나가는 충격파.

그렇게 급속도로 가속된 인지와 사고(思考) 안에서 엘리시스의 머릿속으로 과거 그녀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엘리, 넌 그 누구보다 특별하단다. 그것을 잘 기억하렴.'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지만, 동시에 그 의미를 알 수 없던 말.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말과,

'너는 특별해. 그 특별함을 잘 떠올려봐.'

뒤이어 떠오른 시온 황자의 목소리가 서로 겹치는 순간, 두근!

깨달음으로 인해 최고조에 이른 심장의 박동과 함께,

파아아아아앗!

그녀의 안에서 요동치던 신성력이 등 뒤로 뻗어 나오며 한 쌍의 찬란한 날개를 이루기 시작했다.

* * *

"이미 해제되어 있었나?"

같은 시각.

이제 막 전투가 마무리된 고성의 봉인지.

"일이 재밌게 흘러가네."

그곳에서 나리에가 보낸 정보원에게 무언가에 대한 보고를 받은 시온이 서늘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보상을 추가로 받아야 할 수도 있겠어."

그런 시온의 눈은 봉인 핵이 아닌 저 멀리 있는 도시의 중심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52화

41장 타천사(2)

"크으으! 이 빌어먹을!"

레제로의 중앙 광장에서 빛의 교단과 전투를 치르고 있는 굴리후르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과는 달리 일그러져 있는 그의 얼굴.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점점 전투의 흐름이 그의 뜻과는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분명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이 전투의 승기는 완벽하게 굴리후르 자신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니, 그걸로도 모자라 일방적으로 성기사들을 학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승기의 방향이 모호해지더니 이제는 확실하게 빛의 교단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단 하나뿐이었다.

'저 여자!'

굴리후르는 입술을 강하게 씹으며 성기사들의 뒤쪽에 서 있는 금발의 여인을 노려보았다.

저 여인이 교단 진영에 합류한 뒤로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조금 전 광장 전체를 환하게 물들일 정도의 신성과 함께 마족 하나를 소멸시키며 등장한 저 여인의 능력은 그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사실 여인 자체의 무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아아아악!

저 여인의 등 뒤로 펼쳐진 신성의 날개에서 터져 나오는 온갖 보조 술식.

하나하나가 최고위 신성 주문 급에 해당하는 보조 술식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며 이곳의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강해진... 끄아아악!"

날개로부터 뻗어 나온 빛에 닿은 마족들의 능력은 극도로 줄어들고 반대로 성기사들의 힘은 한계까지 증폭된다.

타다다당!

마기를 머금은 공격은 신성으로 이루어진 벽에 의해 전부 차단되고, 콰가가가각!

빛을 담은 공격들은 더욱 날카로워진 채 마족들의 급소에 모조리 적중한다.

부상을 입어도 몇 초도 되지 않아 흔적조차 남지 않고 치유되는 성기사들의 상처.

신성 증폭, 표적 유도, 활력 부여, 급속 치유, 마기 차단 등....

족히 십수 개가 넘어가는 보조 주문들이 단 한 순간조차 끊기지 않은 채 모든 성기사의 육신에 때려박히고 있었다.

'이런 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한 명의 인원, 그것도 뒤에서 지원하는 포지션이 전장의 흐름 전체를 뒤바꾼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그 불가능한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서포터가 있다면 저러할까.

거기다가 여인으로부터 전해지는 느낌 또한 이상했다.

마치 인간이 아닌 무언가.

그래, 천사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

"저 여자를 죽여!"

그에 마족들이 여인을 죽이기 위해 계속해서 달려들고 있었지만,

"지켜라! 저 사제를 지켜야 한다!"

여인이 이번 전투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아챈 성기사들이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어떻게든 마족들을 막아야 해.'

그런 성기사들과 마족들을 바라보며 여인, 엘리시스는 몸 안의 신성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래야지만, 더 이상의 희생을 없앨 수 있어.'

그와 함께 일어난 그녀의 의지가 황금빛 날개를 거치며 최상급 신성 술식으로 변환된다.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

분명 조금 전의 각성으로 인해 처음으로 얻게 된 빛의 날개였지만, 화아아아악!

엘리시스는 그러한 날개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마치 그 이전부터 무수하게 다뤄왔던 것처럼.

실제로 그녀는 빛의 날개를 신체 일부처럼 느끼고 있었다.

더불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엘리시스의 안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신성력은 그 모든 보조 술식을 뒷받침하기 충분했다.

그런 엘리시스와 성기사들을 하늘 또한 도우려고 하는 것일까?

"이 쳐죽일 마족 녀석들이! 감히 도시 한복판에서 학살을 벌이다니!"

분노 어린 외침과 토해내며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베르디오 대주교가 데려온 지원군들과 함께 성기사들 쪽으로 합류하며 마족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중앙 광장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그가 성녀 경합 참가자들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다 뒤늦게 복귀한 전력들을 모조리 이끌고 온 것.

그렇게 지원군이 합류함에 따라,

콰과과과광!

승기가 교단 쪽으로 완전히 넘어오며 일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런 개 같은 녀석들이...!"

그에 굴리후르의 입에서 짓씹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가 다른 오마령과 같은 급의 힘을 가졌다고 하지만, 저 정도의 전력을 상대로 버틸 수는 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흐른다면 굴리후르 자신을 비롯한 모든 마족이 전멸할 것은 자명할 터.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였다.

지금 당장 이곳에 반역의 천사를 소환하는 것.

사실 굴리후르는 광장으로 오기 전에 이미 봉인지 중 한 곳의 봉인을 풀어낸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타천사를 소환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

다른 봉인지의 봉인을 풀지 못한 상태에서 소환하게 된다면 천사의 힘이 제한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것을 따질 여유 따위는 없다.'

거기다가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것을 보아 다른 봉인지들의 마족들 또한 봉인을 해제하는 데 실패한 것 같았으니 더는 지체할 이유 또한 없었다.

파앙!

생각을 끝마침과 동시에 광장 중앙의 신상을 향해 쏘아지는 굴리후르의 신형.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해요!"

그 움직임에서 불길함을 느낀 엘리시스가 커다랗게 외치며 그의 앞을 가로막는 신성의 벽을 만들어내었다.

그런 엘리시스가 느낀 감정이 전해진 것일까.

"저 마족을 저지해라!"

베르디오 대주교와 다른 전투 사제들 또한 하던 것을 멈추고 굴리후르를 향해 모든 화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광!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굴리후르의 몸에 모조리 틀어박히는 막대한 신성 주문.

하지만,

"크하하! 이미 늦었다!"

그로 인해 일어난 폭발 속에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살아남은 굴리후르가 튀어나오며 그대로 신상 앞까지 치달았다.

방어와 회피를 포기하고 오직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에만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것.

콰아앙!

그런 굴리후르가 단숨에 신상의 상반신을 박살 내더니 품 안에서 미리 챙겨두었던 봉인 핵을 꺼내 들었다.

"안 돼애애!!!"

그 모습에서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직감한 베르디오가 다급하게 외치며 앞으로 뛰쳐나가는 찰나, 콰드득!

굴리후르가 손에든 봉인 핵을 망설임 없이 반파된 신상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아아아아아악!

그러한 핵으로부터 터져 나와 순식간에 광장, 아니, 도시 전체를 뒤덮기 시작하는 거대한 빛.

그 빛은 무척이나 기이했다.

밝지도, 찬란하지도 않았으니까.

음울하면서도 차가운.

마치 빛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특성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뚝!

광장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동작이 일시에 정지했다.

그것은 그들의 자의가 아니었다.

압력(壓力).

마치 공간 자체가 굳어버린 것처럼 상상을 초월한 압력이 그들 모두를 짓누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손가락 하나, 눈썹 하나 꿈틀거릴 수가 없었다.

그저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

그리고 다음 순간.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반파된 루미너스의 신상 옆에서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볼품 없는 나신을 드러낸 채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한 명의 남자를.

마치 너무나도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남자는 손으로 눈을 가리지도 그렇다고 깜빡이지도 않은 채 멍하니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태양을 바라보는 남자의 등 뒤에서,

스륵-

하나둘씩 무언가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날개였다.

그 날개들의 모습은 천사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 저 날개들은 너무나도 검고 사악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으니까.

드드드득!

한 장씩 날개들이 펼쳐질 때마다 가중되는 압력과 그로 인해 희미해져 가는 사람들의 의식.

'아아....'

그런 사람들이 속으로 절망적인 비명과 내뱉는 것과 함께 마침내 일곱 쌍에 달하는 날개들이 전부 하늘을 가리듯 펼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 아니, 반역의 천사의 시선이 서서히 지상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 * *

"결국 나타났나?"

달의 눈과 접촉하기 위해 다른 병력들을 먼저 보낸 뒤 홀로 이동하던 시온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시온의 눈은 음울한 빛으로 물든 도시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빛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반역의 천사.'

그 천사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리라.

하지만 시온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어찌 보면 지금 이 상황은 예정되어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었어.'

여섯 곳의 봉인지를 전부 탈환하고 다시 봉인을 재구축한다는 작전.

사실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

전력의 우위는 이쪽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봉인지가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작전을 실행한 시기가 너무 늦은 상태였다.

성을 통째로 날려 버리고 시작한 시온 자신조차 아슬아슬하게 막았는데 다른 곳은 더욱 어려웠을 터.

'그 이전에 한곳의 봉인이 이미 풀려 있었기도 했고.'

조금 전 달의 눈의 정보원을 통해 들은 내용이었다.

풀린 시기를 짐작해 보면 시온 자신이 막 빛의 도시에 도착했을 때쯤이라고 했다.

즉 아무리 빨리 움직였어도 실패했다는 것.

그렇다고 나머지 봉인지들을 탈환한 게 헛고생까지는 아니었다.

그만큼 타천사의 힘이 제약될 테니까.

'문제는 힘이 제약되었더라도 저들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건데....'

애초에 반역의 천사는 과거 신에게 반기를 들 정도로 초월적인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 아니 필멸의 영역이 아닌 신화의 영역이라는 말.

그렇기에 레제로의 멸망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둘 수야 없지.'

이 도시가 사라지게 된다면 시온 자신이 앞으로 실행할 계획에 막대한 차질이 생기게 될 뿐만 아니라 이클락시아의 나머지 반쪽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

"이 값은 따로 톡톡히 청구하도록 하지."

시온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를 향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와 함께,

파삭!

시온의 손목에 있던 신기 크로노스의 다섯 물음 중 세 번째 물음에 해당하는 보석이 부서져 내렸다.

그 순간,

후욱!

주변의 공기가 뒤바뀌며 신의 권능이 시온의 전신을 무겁게 감싸기 시작했다.

크로노스가 시간의 신이었기 때문일까?

그의 세 번째 물음 역시 시간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의 가치는 동등한가.

대상이 타인이었던 저번과는 달리 자신을 향해 던지는 물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오'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물음으로부터 비롯된 신기의 권능이 그러한 답을 내놓고 있었으니까.

시간 재현.

사용자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바탕으로 하여 사용자의 시간 중 그 가치가 제일 높았을 당시의 시간을 재현하는 것.

물론 저번과 마찬가지로 시온이 설정한 제일 중요한 가치는 바로 무력이었다.

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변화하기 시작하는 세계의 법칙.

그그그그그그!

저번과는 달리 공간과 시간이 서로 뒤엉키며 세상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미친 듯이 요동치며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크로노스의 다섯 물음.

그 모습은 마치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억지로 받아내는 것만 같았다.

드드드드!

그렇게 점점 커져가던 세상의 진동이 마침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뚝!

모든 것이 정지했다.

예전 빛의 신 루미너스가 강림했을 때처럼.

흔들리는 나뭇잎.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가루.

대기의 흐름을 타고 이동하는 마나까지.

그렇게 완벽하게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스륵-

세계를 집어삼킨 흑성의 황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53화

42장 압도(1)

빛의 도시 레제로로 가는 방법은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마력 열차, 또 하나는 도보.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더 효율적이고 편리한 마력 열차를 통해 레제로로 들어왔지만, 아직 도보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있었다.

그렇게 레제로로 향하는 인적 드문 길목 중 한 곳.

그곳에서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거인이 빛의 도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곳이 레제로인가?"

그중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을 걸친 채 머리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거인이 도시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거인의 이름은 투르잔.

'일곱 하늘' 중 하나이며 '강철 산맥'이란 이명을 지닌 현시대 최강자 중 한 명이었다.

"맞아. 딱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 그런데 표정이 왜 이래? 별로 가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옆에서 걷고 있던 레인 드라니르가 그런 거인의 꺼림칙한 얼굴을 보며 물었다.

"나는 빛의 신을 믿지 않으니까."

"신이 있는 건 확실한데 믿지 않는다고?"

"존재한다고 전부 믿어야 하는 건 아니지."

"...뭔 말이야?"

그에 레인의 얼굴이 아리송하게 변할 때, 투르잔이 앞에서 걷고 있는 은발의 여인, 용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지금 저 도시로 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곳에 새로 맞이할 동료가 있어."

"동료?"

"그래, 이제 곧 각성할 때가 되었거든."

그렇게 대답하며 여인은 회귀 전 파티의 보조와 치유를 담당하던 엘리시스 디자이어를 떠올렸다.

과거 그녀의 사기적인 치유 능력과 보조 능력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위기를 넘겼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시스를 대체할 만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필수적으로 일행으로 들여야 하는 동료였다.

'사실 모든 동료가 그렇지만.'

여인은 되도록 회귀 전과 똑같이 일행을 구성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 자신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회귀 전에 보고 겪었던 수많은 희생과 죽음이 전부 헛되이 될 것만 같았으니까.

'아직은 어긋난 게 조금 있긴 하지만....'

여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저번에 일행으로 들이지 못했던 티르안 프리하르덴을 떠올릴 때였다.

"!!!!!!!!"

약속이라도 한 듯 여인을 비롯한 세 명의 고개가 동시에 저 멀리 보이는 레제로의 하늘을 향해 돌아갔다.

도시의 중앙으로부터 뻗어 나와 그런 하늘을 어둡게 물들여 가는 음울한 빛.

그런 빛을 바라보는 세 명의 눈동자 또한 경악과 당혹으로 물들어 간다.

"저건...."

도시에서 꽤 거리가 있는 이곳까지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권능의 힘.

그 힘에 잠시 굳어 있던 여인의 눈에 더욱 커다란 의혹이 어렸다.

"어째서 지금...!"

저 힘은 분명 그 '존재'의 것이었다.

타천사 베리알.

빛의 신 루미너스를 상대로 반역을 일으켰으며 그 벌로 도시에 봉인되어 있던 존재.

지금으로부터 1년 후에나 등장해야 할 존재가 어째서 이 시기에 튀어나온단 말인가.

"어서 도시로!"

다급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친 여인의 신형이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속도로 앞을 향해 튀어 나갔다.

그런 여인을 따라 나머지 둘 또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 * *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천사로부터 흘러나오는 압력에 의해 모두가 움직임을 멈춘 광장.

저벅.

그렇게 정적이 흐르는 광장 안을 일곱 쌍의 검은 날개를 지닌 천사가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아아....'

절망으로 물든 사람들의 신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한 채 안에서 맴돌 때,

"크흐... 크흐하하하하!"

돌연 광장 안에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사가 웃는 것은 아니었다.

반파된 신상 옆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기대어 서 있는 한 명의 마족.

바로 굴리후르였다.

"오랜만에 햇빛을 보니 어떠한가 천사여. 내가 바로 네 봉인을 푼 장본인이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천사를 보며 굴리후르가 희열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수십 년 동안 준비했던 계획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이제 이 도시를 멸망시키고 마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자, 이제 나와 같이 이 역겹기 그지없는 빛의 도시를 박살 내도록 하지."

그런 마족의 머릿속에는 타천사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 거란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자신과 타천사 둘 다 빛의 신을 극도로 증오하며 이 도시를 멸망시키고 싶어 한다는 공통점까지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천사, 베리알의 말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내가 왜 역겹기 그지없는 마족의 말을 들어야 하지?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일반적인 사람의 정신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신성이 담긴 목소리.

"...뭐?"

그에 굴리후르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한테 말 걸지 말아라. 그 역한 냄새가 내 몸에 배는 것 같으니.

다시 한번 이어지는 혐오 깃든 목소리와 함께,

파삭!

아무런 전조도 없이 굴리후르의 상반신 전체가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뒤이어,

파사사사삭!

주변에 있던 다른 마족들의 몸 또한 굴리후르와 똑같은 형태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보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는 광경.

그리고 그것은 빛의 도시 레제로에 수십 년 동안 암약했던 굴리후르의 허무한 최후이기도 했다.

-이 도시, 그리고 빛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지우는 건 오롯이 나 홀로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니.

그 말과 함께 사라진 굴리후르에게서 시선을 뗀 베리알이 다시 엘리시스를 비롯한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였다.

화아아아악!

광장의 하늘 전체를 뒤덮으며 빛의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비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타천사에게 타격을 주는 동시에 사람들을 짓누르던 압력을 중화하는 신성의 비.

그와 함께,

"막아라! 저 존재가 절대로 도시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인원들이 광장을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베르디오 대주교가 데려온 지원군보다도 훨씬 강하고 많은 인원.

바로 봉인지 여섯 곳을 타격했던 정예 병력과 교단에서 추가로 보내온 전력들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인정한 것일까?

그들 중에는 현재 교단 안에 존재하는 다른 대주교들을 비롯하여 단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사도마저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이미 풀려난 베리알로 인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동시에 어떻게든 저 타천사를 막아야 한다는 필사적인 의무감도 존재했다.

"오오! 지원군이 왔다! "

그 사이, 잔여 압박마저 전부 털어낸 기존의 인원들 또한 새로운 지원군과 합류하며 타천사를 향해 최상위 신성 주문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과광!

'이 정도라면...!'

어느새 다시 빛의 날개를 펼친 채 그들을 지원하던 엘리시스의 눈에 빛이 어렸다.

반역의 천사 베리알의 힘은 강력했다.

그로부터 느껴지는 존재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

하지만 빛의 교단 또한 도시의 모든 전력을 쏟아부은 상태였다.

거기다가 그녀가 볼 때 저 천사는 어딘가 불완전해 보였다.

마치 봉인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처럼.

그렇기에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엘리시스는 생각했다.

아주 잠깐은.

"빛이시여, 저에게 힘을!"

교단에서 대주교와 필적하는 지위를 지니며 단 다섯밖에 존재하지 않는 특급 성기사 중 한 명이 비척거리는 타천사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진다.

그런 그의 전신을 갑옷처럼 뒤덮는 걸 넘어서 광장을 잠식한 베리알의 권능마저 밀어내는 신성의 빛.

마치 공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순식간에 타천사의 앞에 나타난 성기사가 처음부터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상급 마족조차 가볍게 박살 낼 수 있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일격.

하지만 그 일격은 베리알에게 닿지 못했다.

그 전에,

툭-

마치 파리를 쫓듯 가볍게 들어 올려진 타천사의 손가락 하나에 막혔으니까.

투콰아아앙!

뒤늦게 검과 손가락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충격파.

"...!"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광경에 특급 성기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 퍼억!

조금 전 굴리후르와 마찬가지로 그의 머리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퍼버버버벅!

뒤따라 달려들던 정예 성기사들 수십의 머리가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반역의 권능이다! 저 권능을 차단해야 한다!"

그 힘이 무엇인지 눈치챈 대주교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에 남아 있던 사제들이 전부 신성 방어 술식을 펼쳤지만, 그리 소용은 없었다.

마치 점을 찍듯 허공에 손가락을 가볍게 누르는 베리알.

그런 천사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파동 하나가 동심원을 그리며 광장 전체로 퍼져 나간다.

콰자자자작!

그러한 파동에 닿는 순간 모조리 유리장처럼 부서져 나가는 신성 술식.

아니, 술식뿐만 아니라 파동에 닿은 모든 것이 박살 나고 있었다.

사람들마저도.

그렇게 순식간에 줄어드는 교단의 전력을 보며 이대로는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전능하신 빛이여! 이 비루한 종이 당신의 권능을 빌리겠나이다!"

사도 칼레미슨이 앞으로 나서며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신성 주문을 펼쳐내었다.

광신현현(光神顯現).

간접적인 힘인 신성력이 아닌 루미너스의 신성 중 일부를 직접 자신의 몸을 통해 재현하는, 오직 사도만이 펼칠 수 있는 주문이었다.

그렇기에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부담이 심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콰아아아!

칼레미슨에 의해 이 땅에 실현된 루미너스의 기적이 순식간에 베리알의 전신을 감싼다.

효과가 있는 것인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떠는 타천사.

그에 사도를 비롯한 주변의 사제들이 주먹을 불끈 쥘 때였다.

-아아,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어머니의 힘이로구나.

그 말과 함께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린 베리알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순간 타천사의 전신을 감싼 빛이 한순간에 검게 변색 되는가 싶더니, 푸확!

칼레미슨의 전신이 핏덩이가 되어 터져 나갔다.

교단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력의 소유자인 사도.

그런 사도의 너무나도 허무한 죽음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찰나, 드드드드드!

날개를 활짝 펼친 타천사로부터 퍼져 나온 어마어마한 압력이 다시 한번 주변의 모든 것을 사정없이 짓누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그에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듣는 베리알의 얼굴에 만족감이 어린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의 종들이여.

그의 입에서 천천히 흘러나오는 무감정한 목소리.

-너희가 이룩한 모든 것이 멸망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아라.

그러한 말이 끝나는 순간,

투웅!

베리알로부터 흘러나온 하나의 울림이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부름이었다.

자신의 군대를 소환하기 위한 부름.

그러한 부름에 따라,

쩌억!

도시 곳곳의 공간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한쪽밖에 존재하지 않는 검은 날개를 등에 단 괴인들이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옛날 베리알을 따라 빛의 신 루미너스에게 대항했던 역천(逆天)의 군세.

그 군세 중 일부가 이곳에서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뭐, 뭐야 이 괴물... 커억!"

"꺄아아악!"

"시, 신이시여... 끄아아악!"

콰지지직!

그리고 순식간에 도시 전체에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두려움에 질려 가만히 선 채 괴인에게 찢겨 나가는 남자.

아이와 함께 도망치다 심장이 뚫린 채 쓰러지는 여인.

신성력을 일으키며 대항하다 목이 뽑혀 나가는 사제.

"아아...."

여전히 천사가 뿜어내는 압력에 짓눌린 채 그 지옥도를 바라보는 엘리시스의 눈에 짙은 무력감이 어렸다.

재해(災害).

그래, 저것은 재해였다.

필멸의 존재라면 절대로 맞설 수 없는 재해.

그만큼 자신들과 저 일곱 쌍의 검은 날개를 가진 천사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존재했다.

도저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버틸 수 있는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저런 것을 인간이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일곱 하늘'들이 온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바뀌지 않으리라.

그때,

-천사의 아이로구나.

널브러진 사람들의 시체들로부터 루미너스의 신성력을 빨아들이던 베리알이 문뜩 엘리시스 쪽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흡수하면 더욱 빠르게 힘을 회복할 수 있겠어.

곧이어 웃으며 그녀를 향해 한 손을 뻗는 타천사.

그런 베리알의 손끝으로 타락한 신성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결국 보답을 하지도, 지키지도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엘리시스의 눈에 어린 무력감 뒤로 짙은 절망이 나타나고.

-너의 피는 내가 잘 쓰도록 하마.

마침내 베리알의 권능이 그녀의 심장을 향해 쏘아지려는 순간이었다.

------------------!

잠시.

아주 잠시 모든 것이 멈추었다.

세상의 시간이 전부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

베리알을 포함한 도시의 모든 존재의 눈이 천천히 하늘로 향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한 것도.

미리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들었을 뿐.

그리고 그곳에는.

'그'가 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외모도 알 수 없었다.

보이는 건 오직 흐릿한 실루엣과 검을 쥐고 있다는 것뿐.

하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아득한 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아...."

그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초월적인 존재감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러르듯 바라보며 멍한 목소리를 흘려내는 것뿐.

그때,

스륵- '그'가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움직이듯.

아주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검.

그와 함께,

'저건....'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타천사의 머릿속에서도 미친 듯이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정말로 위험하다.

갑자기 나타난 저 존재가 무엇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검이 밑으로 내리그어지는 순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점점 하늘로 향하는 '그'의 검 끝.

드드드드드!

그에 반응하여 도시, 아니 세계가 뒤틀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마찰(摩擦).

세상의 모든 것에는 마찰이 존재한다.

세계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자, 제일 작은 단위의 구성 요소를 공유하고 결합하여 한 존재가 그 존재로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힘.

그렇다면 만약 그러한 마찰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화륵!

마치 표적을 겨냥하듯.

베리알을 비롯한 도시 안에 존재하는 모든 역천 군세의 몸에서 작게 어둠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안 돼... 안 돼!!!

마침내 무슨 짓을 벌이는 것인지 알아챈 것일까?

파아아아아앙!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동공이 확장된 베리알이 다급한 외침을 토해내며 '그'를 향해 미친 듯이 쇄도했다.

타천사를 따라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하는 역천의 군세.

하지만 그 순간 이미.

-멈춰어어어!!!!!

완벽하게 들어 올려진 '그' 아니, 황제의 검은 내리그어지고 있었다.

개념부정(槪念否定).

세상에서 오직 영겁제 오르렐리온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유 권능.

흑성하의 극에 달한 황제가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법칙마저 베어내고 얻어낸 최강의 힘.

마침내.

그런 황제의 검 끝이 완전히 밑으로 향하는 순간,

서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역천 군세의 마찰이 소멸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54화

42장 압도(2)

찬란한 빛도.

불길한 어둠도.

흘러나오는 소음도 없었다.

그저,

파스스-

도시 곳곳에서 하늘에 서 있는 '그'를 향해 치솟던 역천의 군세.

그 군세를 이루고 있던 십수만에 이르는 검은 날개의 괴인들만이 가루가 되어 흩날릴 뿐.

"...."

그 경악마저 뛰어넘은 초월적인 광경에 모든 도시의 사람이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사라지는 군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면서도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윤회의 굴레에 묶여 필멸의 운명을 지닌 존재들인 자신들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광경.

신화 속에서 묘사되던 신벌이 이러할까.

'그런데...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엘리시스는 이 모든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존재를 보며 생각했다.

어마어마한 격의 차이 때문에 존재의 흐릿한 형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형상에서 왠지 모를 낯익음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저런 존재를 자신이 알 리가 없었기에 엘리시스의 눈에 의문이 어릴 때,

'힘이 전부 재현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늘에서 흩어지는 역천의 군세를 바라보던 시온은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펴며 그렇게 생각했다.

방금 시온 자신이 펼쳐 낸 것은 오직 흑성하가 8성에 다다라야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의 부정이었다.

세계의 근본이 되는 법칙 자체를 뒤틀고 재구성할 수 있어야지만 펼쳐낼 수 있는 초월기 중 하나.

그러한 개념부정을 발동하여 마찰을 지움으로써 타천사 베리알과 그의 군세 전부를 지워냈지만, 시온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존재했다.

'완벽하게 발동되지 않았어.'

이클락시아를 밑으로 내리긋는 순간 그 사실을 바로 인지할 수 있었다.

크로노스의 힘이 담긴 신기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일까?

'그래서 아직 저 녀석이 살아 있는 거겠지.'

그 생각과 함께 시온이 타천사가 소멸한 곳을 바라볼 때였다.

쩌저저저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허공이 일그러지며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부터 타락한 신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러한 신성이 뭉쳐 들며 만들어지는 하나의 형상.

꾸드드득!

바로 베리알이었다.

"커헉! 허억, 허억!"

다시 모습을 이루자마자 눈을 부릅뜬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타천사.

그의 뒤에 달려 있던 일곱 쌍의 날개 중 두 쌍은 사라진 상태였다.

곧이어 그런 베리알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조금 전까지 자신의 군세가 존재하던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뭐가....

완벽한 소멸.

비록 일부라고 하지만 과거 자신을 따라 신에게마저 대항했던 역천의 군세가 검을 내리긋는 동작 한 번에 지워져 버렸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온몸에 전율이 돋으며 생전 한 번 흘리지 않았던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른다.

그만큼 조금 전 타천사가 보고 겪었던 일격은 압도적이었다.

이미 반신의 격에 근접한 베리알 자신조차도 막아내기는커녕 피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소멸해 버렸으니까.

그럼에도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는 단지 방금의 일격이 닿기 직전 반역의 권능 중 하나인 '순간 회귀'를 발동시켰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두 쌍의 날개를 제물로 바쳐야 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완벽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곧이어 그런 베리알의 눈이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시온에게로 향했다.

-대체 뭐냐, 넌... 어떻게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자가 이러한 일격이 가능한 거지?

사실 운명의 굴레를 벗어난 존재들인 불멸자, 즉 신들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었으나 타천사는 눈앞의 존재가 신격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신들은 초월적인 힘과 권능을 지닌 만큼 많은 제약에 얽매인다.

그렇기에 세상에 이토록 직접적인 개입을 할 수가 없었다.

예전 베리알이 신격에 오르지 못했는데도 루미너스와 맞설 수 있었던 이유.

그에 베리알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물들었지만, 이어지는 황제의 말은 그의 의문을 채워주지 못했다.

"대답할 이유가 있나?"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공간 자체가 두려움에 떨 듯 진동한다.

조금 전의 개념부정으로 인해 세계 자체에 시온의 아득한 격이 새겨졌기에 일어나는 일.

-...뭐?

"이제 다시 시체가 될 텐데."

-이 사지를 뽑아 죽일 녀석이이이!

살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신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시온의 말에 베리알이 거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저 존재가 조금 전과 같은 검격을 펼쳐낸다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거리를 좁힌 후 공격을 쏟아부어 사용할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후아아아앙!

그런 타천사의 등 뒤로 활짝 펼쳐지는 다섯 쌍의 날개들과 양손에 어리는 반역의 권능.

그로부터 느껴지는 힘은 가히 작은 도시 하나 정도는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났다.

"...."

그렇게 공간을 접으며 다가오는 베리알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시온이 들고 있던 이클락시아를 가볍게 앞으로 내밀었다.

가히 천지를 진동시키며 다가오는 타천사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찌르기.

금방이라도 베리알이 일으킨 권능의 파도에 휘말려 사라질 것 같았지만, 격돌한 순간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스륵-

처음에는 타천사의 손을 둘러싼 반역의 권능이.

그 뒤로 손끝부터 시작하여 손바닥, 팔, 어깨, 그리고 이어지는 날개의 일부분까지.

그 모든 것이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워진다.

부정(否定).

흑성하란 존재를 정의하는 가장 정확한 개념이자 세상에서 오직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권능.

8성에 다다른 흑성하는 그러한 부정의 권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는 데 충분했다.

-끄아... 끄아아아악!

단순히 신체가 아닌 존재 자체와 그에 따른 운명의 일부가 사라지는 고통에 베리알의 입에서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타천사는 그 비명을 끝까지 내지르지 못했다.

툭-

마치 수면 위를 찍듯 가볍게 베리알의 명치에 닿는 시온의 손가락.

그 순간,

파앙!

손가락이 닿은 부분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구멍이 뚫리는 가슴과 함께 타천사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과과과과과광!

빛의 도시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건물을 박살 낸 후 외곽 끝에 존재하는 봉인지 중 하나에 처박힌 채 다시 나타나는 그의 신형.

뒤늦게 그런 베리알과 시온 사이로 한 줄기의 선이 그어지더니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닿는 모든 것을 지워낸다.

-끄으으윽!

숨이 끊어질 듯한 신음을 토해내며 타천사가 겨우겨우 처박힌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그런 그의 눈에,

후욱!

단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는 것만으로 도시 중앙에서 이곳까지 도달한 시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흑성하로 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 자체를 부정한 것.

그에 위기를 느낀 베리알이 다급하게 날개를 휘저으며 주변으로 자신의 권능을 흩뿌렸다.

쩌저저저저적!

그러한 권능에 반응하여 뒤집힌 공간 안에서 튀어나온 수만 개에 달하는 타천의 창들이 오직 시온만을 노리며 쏘아진다.

그렇게 바로 앞까지 다가온 창들을 바라보며 검을 쥐지 않은 한쪽 손을 부드럽게 올리며 움켜쥐는 황제.

----------------!

그 순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쏟아지던 창들과 뒤집힌 공간들, 그리고 흩뿌려진 베리알의 권능까지 모조리 지워진다.

-이게 뭔....

연이어 두 번을 보면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타천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멍한 목소리와 함께, 콰아아아앙!

마침내 시온의 신형이 그의 바로 앞에 도달하며 너무나도 일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저건...."

이제 막 동료들과 함께 도시로 진입한 은발의 여인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 흔들리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역의 천사 베리알.

빛의 교단을 비롯하여 도시 전체를 멸망으로 몰아넣고 있어야 할 그가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 존재에 의해서.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

"...저 존재는 대체 뭔가? 신격이라도 되는 건가?"

그런 그녀의 옆에서 투르잔이 질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일곱 하늘' 중 하나인 그조차 지금 도시의 하늘에서 벌어지는 두 초월적인 존재의 공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격이라는 것만을 느끼고 있을 뿐.

"모르겠어."

그에 여인은 여전히 시선을 하늘을 향해 고정한 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이미 한 번 이 세상의 끝을 보고 다시 돌아온 그녀로서도 맹세코 처음 보는 존재였으니까.

베리알은 타락하기 전, 빛의 신 루미너스를 가장 가까이서 섬기던 최상급 천사 중 하나였고 타락한 후에는 반역의 권능까지 새롭게 얻어 더욱 강해지기까지 했다.

이미 그 격은 윤회의 굴레를 반쯤 벗어 던진 반신에 이를 정도.

'그런데 그런 베리알을 압도한다고?'

저런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대체 누구지?'

회귀 전에 단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에 전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이곳에 왜 나타났는지, 어째서 타천사와 맞서는지 또한 당연히 짐작할 수 없었고.

"아무리 베리알의 봉인이 완벽하게 풀리지 않았다고 해도 저렇게 찍어 누를 정도라면...."

거기까지 중얼거리던 여인은 정체를 짐작하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녀가 생각해도 너무나 비약이었으니까.

'일단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봐야겠어.'

그렇게 생각을 마친 여인이 동료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때, -어째서, 어째서!!

베리알의 입에서는 당혹을 넘어 절박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리고 날개 중 절반이 뜯겨나가는 등, 이미 그의 몸은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그런 타천사의 눈은 절망과 의문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바로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이고 있는 저 존재의 권능에 관련된 것이었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단 말이냐!

차라리 압도적인 힘으로 베리알 자신을 찍어눌렀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저 존재로부터 번져 나오는 이질적인 무언가.

그 무언가에 닿은 자신의 힘과 권능이 마치 원래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흐르는 대기와 마나, 공간과 시간.

그리고 운명과 세계의 법칙까지도.

저 무언가에 닿는 세상의 모든 것이 지워지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어떠한 제한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런 종류의 권능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어느 정도 신성을 획득한 베리알 자신으로서도 전혀 그 원리와 유래를 짐작할 수 없었다.

가슴속 깊은 곳을 가득 메우는 두려움.

-대체 무슨 수를 쓰는 거냐!

그 두려움을 털어내듯이 커다랗게 외친 타천사로부터 터져 나온 권능이 주변의 공간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콰드드득!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성질을 거꾸로 뒤집는 '반역의 권능'에 의해 대기를 타고 흐르던 마나가 거대한 파도로 변한 채 사방에서 시온을 덮쳤다.

하지만,

후욱!

역시나 시온에게 닿기 전 완벽하게 지워지는 파도.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파도를 이루는 마나를 타고 타천사에게까지 도달한 시온의 흑성하가 남아 있는 그의 날개마저 부정하기 시작한다.

-끄으으윽!

애초에 지금의 베리알이 시온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권능과 영겁제의 권능 간의 상성은 너무나도 좋지 않았으니까.

힘을 이용해 실컷 성질을 뒤바꿔 봤자 그 자체를 부정하면 그뿐.

'본래의 힘만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 생각과 함께 타천사의 눈에 짙은 안타까움이 어렸다.

저 존재가 사용하는 권능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완벽하게 힘을 되찾은 상태였다면 충분히 버티며 승리를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불완전하게 봉인이 풀린 지금 그것은 그저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저벅, 저벅.

세상을 이루는 근간마저 지워내는 부정의 권능을 전신에서 피워올리며 다가오는 황제.

-...지금 네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흔들리는 눈으로 그러한 황제를 노려보던 베리알이 짓씹듯 입을 열었다.

-봉인이 완전히 풀렸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테니.

그렇게 타천사가 말을 끝마칠 때였다.

"그래?"

신기로 인해 힘을 되찾은 후 전투를 치르는 내내 줄곧 권태로웠던 황제의 눈동자 안에서 처음으로 흥미의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 한번 보여 줘봐."

그와 함께 서서히 황제의 입가에 어리는 웃음.

그 웃음에 담겨 있는 감정은 명백한 기대였다.

-...뭐?

"그 결과란 걸 말이야."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말에 의문으로 물드는 타천사의 눈동자와 함께.

어느새 한 손을 들어 올린 시온이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그 순간,

파삭!

도시에 남아 있던 모든 봉인지의 봉인이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155화

42장 압도(3)

"뭐야, 갑자기 왜!"

레제로에 존재하는 여섯 곳의 봉인지 중 한 곳.

그곳에서 교단의 사제들과 함께 거의 풀려 있던 봉인을 다시 재구성하던 달의 눈 레제로 지부장 나리에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파삭!

이제 마무리 작업만 하면 끝나는 봉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봉인의 중심을 이루는 봉인 핵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당혹으로 물드는 나리에의 눈동자.

"어째서 봉인이!"

교단의 사제들 또한 비슷한 감정이었는지 패닉 상태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때,

"...어?"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책을 찾지 못하던 나리에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들어왔다.

봉인 핵이 박살 나며 생겨난 가루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위쪽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다른 봉인지들 또한 이곳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기라도 했는지 그쪽의 하늘에서도 반짝이는 무언가가 하늘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루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왜, 왜 저곳으로!"

미지의 존재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타천사 베리알이었다.

막을 새도 없었다.

정말로 순식간에 타천사의 전신으로 흡수되는 가루들.

그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지켜보던 모든 사람의 눈이 요동칠 때, -지금... 뭐 하는 거지?

그 장본인인 베리알은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벙한 빛을 띠는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리가 코앞이었다.

베리알 자신이 아닌 저 존재의 승리가.

이미 자신은 전투 능력 상당 부분 상실했고 의지 또한 사그라지고 있었다.

과장을 보태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되는 상황.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모든 봉인을 해제한단 말인가.

물론 정석적인 해제가 아닌 봉인핵을 파괴하는 것이었지만, 힘이 조금 깎이는 것일 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봉인이 풀리면 결과가 달라질 거라며."

그런 타천사를 바라보며 황제가 웃는다.

"그 기회를 너에게 주는 거야. 그 달라진 결과를 나에게 보여줄 기회."

사실 시온으로서도 이쪽이 더 나았다.

후환을 남기지 않은 채 타천사를 완벽하게 소멸시키려면 봉인을 전부 풀어 진력(眞力)을 사용하도록 만들어야 했으니까.

처음에는 그 힘을 알 수 없었기에 봉인한 채 싸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편이 더 재밌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시온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질 때,

-너....

베리알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노가 극에 이르게 되면 오히려 차분해진다고 했던가.

지금 베리알의 상태가 그랬다.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완벽한 무시.

눈앞의 존재는 그저 자신을 놀잇감으로 여기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굴욕감이 차오르며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자신은 베리알이었다.

과거 루미너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섰으며 모든 타락자의 추앙을 한 몸에 받는 존재.

설사 신격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자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말로 후회하게 해주마.

까드드득!

그런 베리알의 전신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반역의 권능이 한 차원 더 진화하며 세계에 그 존재를 각인시키기 시작한다.

역천(逆天)의 권능.

과거 빛의 신을 상대하기 위해 베리알이 도달했던 최종 권능이자, 오직 가장 먼저 타락한 천사에게만 주어지는 힘.

아직 제대로 다룰 수 없는 권능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완전히 힘을 되찾은 베리알의 존재감으로 인해 빛의 도시 전체가 진동하고 그로 인해 바라보던 사람들의 동요 또한 심해지기 시작한다.

-보아라, 나의 진정한 힘을.

그런 사람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베리알이 오직 시온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재생된 모든 날개를 펄럭이며 한 손을 앞으로 뻗어 내었다.

힘을 아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최대치로 발휘된 역천의 권능이 그런 타천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황제와 그 주변의 공간을 완벽히 뒤덮는 순간이었다.

덜컥!

무언가 걸리는 소리와 함께 시온을 둘러싼 세계의 법칙 자체가 반대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땅으로 끌어당기던 중력이 하늘로 밀어내고.

확장되던 공간은 조여들며.

흐르던 시간은 거슬러 올라간다.

역천괴리(逆天乖離).

존재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작용을 하는 세계가 타천사의 권능에 의해 뒤바뀌며 반대로 시온의 존재 자체를 지우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대응조차 하지 않다니. 너무 자신의 힘을 과신했구나.

자신이 펼쳐낸 '역천괴리'에 걸려 세계 자체에 고정된 시온을 바라보며 비웃음 짓던 베리알이 지체 없이 시온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이것은 다시 없을 기회였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베리알의 신형이 시온의 앞에 도달하는 찰나였다.

"이게 전부라면...."

그의 귓가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타천사의 눈이 요동쳤다.

지금, 이 순간에 절대로 들리지 않아야 할 목소리였으니까.

분명 베리알 자신의 기술은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그렇다면 뒤집힌 세상의 괴리 속에 갇혀 말을 하기는커녕 인지 능력조차 상실해야 할 텐데 어떻게 이 목소리가 들려온단 말인가.

그에 자신도 모르게 돌아가는 타천사의 고개.

그런 그의 시야에 초승달을 그리듯 휘어져 가는 시온의 눈이 들어왔다.

곧이어,

"실망인데."

타천사가 황제의 눈동자 속에서 휘돌고 있는 무한한 검은 별을 인지한 순간, 쩌저저저적!

괴리된 공간을 타고 거미줄 같은 금이 퍼져나가더니 그대로 시온을 감싼 베리알의 권능 전체가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

당혹으로 물드는 눈동자와 벌어지는 입.

역천괴리는 저토록 쉽게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권능을 이용해 압박하는 게 아닌 세상을 이루는 근간 요소 자체에 간섭하는, 베리알이 가진 최고의 기술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타천사가 경악을 전부 표출하기도 전,

서걱!

어느새 휘둘러진 황제의 검이 베리알의 상반신과 함께 그가 가진 명(命)을 한꺼번에 베어내었다.

그에 한 번 더 죽음을 맞이하는 베리알.

그로부터 이어지는 잠시의 정적 후,

-끄으... 끄아아아아아!

가진 신성 중 일부를 바치고 '순간 회귀'를 사용해 되살아난 타천사가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비명 토해내었다.

그로 인해 요동치는 공간과 함께,

투확!

베리알의 신형이 더욱 높은 하늘 위로 솟구쳤다.

거의 태양에 닿을 듯 끝없이 올라가는 그의 신형.

그렇게 시온과 도시가 점으로 보일 정도로 솟구친 베리알이 반쯤 이성을 잃은 눈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이 찢어 죽일 새끼가아아아!

오직 시온에 대한 증오밖에 남지 않게 된 외침과 함께 들어 올린 그의 양손으로 음울한 빛이 뭉쳐 들기 시작했다.

방금 이루어진 단 한 번의 격돌로 인해 베리알은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과 저 존재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단 한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으로 힘을 쏟아부어 그 벽을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

가진 모든 역천의 권능과 미래로 이어지는 운명까지 모조리 갈아 넣었기 때문일까?

콰드드드드드득!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격의 발현에 세상이 요동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너를 포함한 도시 전체를 날려주마!

그 발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손안에서 터져 나오며 레제로의 하늘로 뻗어 나가는 권능의 빛.

그리고 마침내 그 빛이 도시의 하늘을 완벽하게 뒤덮는 순간, 낙천(落天).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시야의 끝에서 끝까지.

보이는 모든 곳의 하늘이 붕괴하며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세계가 종말을 맞이한다면 이러할까.

"아아...."

"피, 피해야 해!"

"대체 어디로...."

"빛이시여, 제발...."

압도를 넘어서 그 이상의 무언가에 다다른 광경에 엘리시스를 비롯한 도시의 모든 사람이 움직이지조차 못한 채 절망에 물든 목소리를 토해낸다.

멸망이란 두 글자가 그대로 형상화된 재앙.

하지만,

"이건 좀 재밌네."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시온의 눈에는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타천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만들어낸 저 재앙은 시온으로서도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본래의 힘을 되찾은 지금의 육신이 찌릿찌릿해질 정도.

그렇기에 황제는 기뻤다.

세상을 집어삼킨 뒤로 느끼지 못했던 긴장과 활력.

그것들을 지금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우웅!

그 감정에 반응하듯 밑으로 늘어진 이클락시아가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는 사이에도 닿는 세계를 모조리 붕괴시키며 점점 더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하늘.

마침내 그런 하늘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스륵-

시온의 검이 아주 천천히 올려 그어지기 시작했다.

과거 황제는 생각했다.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운명의 뿌리를 이루는 관념인 시간.

그러한 시간을 베어낼 수는 없을까?

전체가 아닌 일부분.

끝없이 흐르는 시간의 일부분을 베어낼 수만 있다면.

그 속에 담긴 운명 또한 부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그러한 황제의 바람이 담겨 있는 기술.

시멸참(時滅斬).

마침내 이클락시아가 완벽하게 올려 그어지고.

그런 검 끝이 무너져 내리는 하늘로 향하는 순간,

-----------------------!

반역의 천사가 만들어낸 낙천의 재앙.

그 재앙이 존재했던 시간 자체가 세상에서 지워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