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아까는 한 게 없는 사람들은 먹을 자격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신의 차가운 음성에 표정을 굳힌 앨리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를 악문 그녀가 원래 굽던 고기를 이어 구우며 애써 저들을 외면했다.
"근데 나는 너랑 가치관이 달라서 말이지. 같은 동지끼리 나눠 먹는 게 좋잖아? 같이 먹자고."
등을 돌리고 고기를 굽던 앨리스의 손이 멈칫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들려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서로 적대적인 느낌을 유지했기에 그가 먼저 손을 내밀 줄은 몰랐다.
"크흠…됐어. 아무것도 안 한 내가 뭘 얻어먹겠어?"
"난 여러 번 권유 안 해. 싫음 말아."
이신의 매몰찬 말에, 앨리스의 살짝 상기되었던 얼굴에 급격히 그늘이 졌다.
'아니...한 번은 더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야?'
그녀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메리엘이 앨리스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앨리스 님, 그래도 같이 먹는 게 어때요? 이거 정말 맛있어요!"
"어? 어...뭐,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렇게 못 이기는 척 말끝을 흐린 앨리스가 이신을 향해 슬쩍 시선을 던졌다.
동시에 메리엘도 이신의 허락을 구하듯 그를 보았다.
"와서 먹어."
이신의 말을 듣고서야 몸을 돌린 그녀가 자신이 굽던 고기를 들고 와서 플레타 옆에 앉았다.
"그건 왜 들고 와?"
이신의 말에 움찔한 그녀가 고기를 놓던 것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가져온 것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아무 쓸모 없는 것이었다.
"어? 아, 그러게? 이걸 왜 가져 왔지?"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이 가져온 고기를 뒤에다 던져 버리는 모습에 이번엔 플레타가 움찔한다.
'열심히 손질한 건데....'
플레타는 급 시무룩해진 모습으로 애써 고기를 집어 먹었다.
이신이 손질해 구워 놓은 고기를 먹은 앨리스는 생각 이상의 맛에 순간적으로 놀라, 벌어진 입 사이로 새어 나오는 감탄사를 급하게 숨겼다.
"크, 큼... 괜찮네."
멋쩍은지 헛기침을 하던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은 이신이 메리엘을 슬쩍 보았다.
맛있게 고기를 먹고 있는 앨리스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메리엘, 어서 먹어."
"이신 님은 참 마음씨가 고운 것 같아요."
"곱기는, 서로 도우며 사는 거지."
애써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이신은 천진난만하게 웃는 메리엘을 보며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탑의 시스템이 만든 천사였다면 메리엘의 호감도가 올랐을 거라는 메시지가 떴을 거라고.
겉으로만 보아도 확연히 티가 나는 탓에, 굳이 메리엘의 감정을 알아내기 위해 수고를 더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좋아.'
신성 스탯을 얻기 위해선 메리엘의 호감을 얻어야 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앨리스에게 고기 몇 점 주는 거? 백 번, 천 번도 가능하다.
고개를 돌리니, 플레타가 남은 고기를 주섬주섬 줍는 모습이 보였다.
"플레타, 그거 챙길 필요 없어. 어차피 보관도 못 하니까."
"그래?"
코끝을 찌르는 피 냄새와 온몸의 피부를 적시는 습기가 불쾌감을 더한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그런지 주변에 체류하고 있는 무더운 공기가 이 안이 얼마나 답답한지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 당장 디베이거 카우의 고기를 가져가려 해도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상해 버릴 게 분명하다.
"이제 가야 돼."
앨리스의 말에 플레타와 메리엘의 시선이 이신에게로 옮겨졌다.
그것을 느낀 이신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출발 준비를 했다.
단순한 요리 하나로 인해 그룹 내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전까지 이 그룹을 앨리스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면, 이제는 그 권한이 이신에게로 조금 옮겨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신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정말 곧 탈출구에 도착하겠어.'
만약 직감이 맞다면 이대로 목적지에 도착하면 탈출구가 열려 있을 것이다.
그대로 탈출해서는 안 된다. 그건 이신이 원하는 탈출 방법이 아니기에.
이곳 미궁에는 세 가지의 탈출 방법이 있다.
첫 번째, 탈출구을 찾아 그곳에 도착한 뒤, 탈출구가 열리길 기다리는 것.
두 번째, 탈출구가 열린 곳을 찾을 때까지 계속 돌아다니는 것.
세 번째, 괴수들을 잡고 귀환석을 찾는 것.
미궁의 숨겨진 구역에는 보스급 괴물들이 있고 그놈들을 찾아 죽이면 귀환석을 얻어낼 수 있다.
이신은 단순히 빠른 탈출을 원하지 않았다.
며칠 더 늦더라도 확실한 업적을 남기고 가야 했다.
"어? 또 갈림길이네. 어디로…가지?"
플레타가 그 말을 하며 슬쩍 뒤를 보았다.
처음에는 앨리스를 보았지만 그 시선은 금세 이신에게로 옮겨졌다.
"왼쪽으로 가."
그녀는 분명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을 텐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원래라면 바로 그녀의 말을 따라갔을 플레타와 메리엘은 그 말을 듣고도 이신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의미를 내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뱉은 플레타가 왼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이 그룹 내에 형성된 거슬리는 공기.
앨리스는 그 미묘한 분위기에 짜증이 났지만 앞으로 하루 이틀은 이신에게 요리를 얻어먹어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래도 이신이 뜻대로 움직여 주니 아직은 이 그룹을 뒤집어엎을 필요는 없었다.
앨리스가 그러한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이신은 이미 그녀를 이용할 계획을 전부 세워 둔 상태였다.
'우선은 뜻대로 가 준다.'
이제 와서 방향을 돌린다 한들 의미가 없다.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이용해 줄 뿐.
"어? 저기?"
한참을 미궁을 돌아다니던 중 길을 가로막는 석상이 나타났다.
두꺼운 갑옷과 투구를 뒤집어쓴 기사 석상이었다.
"오? 기사네?"
"만지지 마!"
갑작스러운 앨리스의 외침에 깜짝 놀란 플레타가 손을 대려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는 시선들에 앨리스는 미궁에서 아무거나 막 건드리면 안 된다며 플레타를 말렸다.
"알겠습니다."
"지나친 생각 아닌가? 여태 뭘 건드린다고 뭐가 발동되고 그러진 않았는데."
그리 말하던 이신이 갑자기 손을 뻗어 석상을 만지려 했다.
그러자, 석상 바로 앞에서 자신의 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며 그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무형의 마력이 그의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았기 때문이었다.
'오호라.'
그의 시선이 석상을 향하고 있어서 앨리스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신은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표정 관리조차 제대로 못 한 채 이를 악물고 있을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망할 새끼!'
앨리스는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아직 이신의 정체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괜히 자신의 패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갑작스러운 이신의 돌발행동에 본능적으로 염동력을 쓰고 말았다.
이신의 표정을 보진 못했지만, 마법사인 그가 이 능력을 눈치채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이신에게 끌려가는 듯한 느낌에 얼굴 근육이 경직되어 포커페이스가 어려웠다.
"아, 하긴. 미궁에선 조심하는 게 좋긴 하지. 그냥 돌아가자."
하지만 몸을 돌린 이신은 이전과 똑같이 무표정했고 조금 전과 별다를 게 없었다.
'눈치 못 챈 건가?'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에 염동 능력을 발동했을 뿐이다.
바로 풀었으니 눈치 못 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런 놈이라면 눈치 못 챌 수도 있지. 그럼.'
앨리스는 속으로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석상이 가로막은 곳에서 되돌아간 뒤.
아무도 모르게 이신의 그림자에서 뻗어 간 검은 통로 위로 하나의 언데드가 튀어나왔다.
"저런…싸가지 없는.... 속으로 딴생각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구만."
혼자 투덜투덜 심기의 불편함을 드러내는 워리가 붉은 안광을 일렁이며 검을 들었다.
"하지 말라는 건 해 줘야 속이 풀리지."
커다란 석상 위로 새겨지는 붉은 선들.
워리의 검이 그 선들을 따라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휘둘러진다.
가가가각! 쿵!
석상의 몸이 거센 마찰음을 자아내며 반으로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깽판은 항상 재밌단 말이지."
* * *
기사 석상을 지나쳐 온 넷은 우여곡절 끝에 탈출 지점에 다다랐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이신과 앨리스뿐이었지만.
앨리스는 그간 식량 문제 때문에 이신에게 조금 숙이고 들어갔었지만 미궁의 끝에 다다를수록 점점 그녀의 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 그거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
"메리엘! 여기로 괴수들 시체 날아오잖아! 조심하라고!"
"넌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길도 다 내가 정하고 싸움도 안 하고. 요리만 잘하면 다야?"
원래라면 이신에게만 향하던 적대감이 플레타와 메리엘에게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바보 같은 플레타와 메리엘은 그저 그녀에게 휘둘릴 뿐이었고.
"마치 길을 다 알고 그랬다는 듯이 말하는데?"
"...."
대답하기 힘든 말은 이 악물고 무시하며 꾸역꾸역 움직였다.
'왜 굳이 저렇게까지 자신의 능력을 숨기는 거지?'
그녀가 외웠던 탈출 루트 중 하나에 운 좋게 걸린 것이든,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길을 알고 있는 것이든.
길잡이로서의 능력을 굳이 이렇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다.
'숨기는 게 많은 여자네.'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곧 이 동행도 끝날 테니.
넷이 코너를 돌자 일직선의 넓고 긴 길 끝에 이 지긋지긋한 미궁을 탈출할 수 있는 출구가 보였다.
드디어 탈출한다는 사실에, 이신을 제외한 세 사람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뻐했고 탈출을 위해 앞으로 가려던 순간.
쿠구구궁!
미궁의 벽면이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왠지 모르게 낯익은 기사들이 걸어 나왔다.
"뭐, 뭐야? 왜 저놈들이...?"
당황한 앨리스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한참 전에 마주쳤던 그 기사 석상.
그 기사들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기사들 수십이 탈출구 앞을 가로막았다.
손톱을 깨물며 초조함을 드러내는 그녀와 다르게 플레타와 메리엘은 싸울 준비를 갖췄다.
"괘, 괜찮아. 저놈들의 우두머리만 잡으면 나머지들은 무용지물이 되니까."
"누가 우두머리인가요? 제가 보기엔 다 똑같아 보이는데."
"놈들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봐, 거기에 금색으로 된 문양이 새겨져 있는 놈이 우두머리야."
앨리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풀었다.
'이것도 알고 있어?'
지도가 있다고 모든 함정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매번 함정이 같은 것은 아니기에.
이것도 운이 좋아 알고 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이신은 그게 아니라 확신했다.
"호오...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 플레타가 지긋지긋한 이 미궁을 탈출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간절히 탈출하고 싶은 듯한 그의 감정이 그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저 녀석도 어지간히 시달리긴 했나 보네.'
플레타와 메리엘이 먼저 기사들에게 맞부딪혔고, 이번엔 앨리스도 그 실력을 내보였다.
아무리 저 둘의 실력이 좋다 해도 기사 수십과 맞붙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너도 싸워!"
"그래."
전위에는 쾌속의 검술을 사용하는 플레타와 천족인 메리엘이.
후위에는 앨리스의 염동 능력과 이신의 화염 마법이.
처음으로 제대로 팀의 구성을 맞춰 협동으로 싸워 본 것임에도 제법 그 시너지가 좋았다.
"찾았다!"
플레타가 금색 문양의 기사를 찾았는지 억지로 기사들 사이를 파고들어 집요하게 놈을 노렸다.
뒤에서 앨리스가 염동 능력으로 받쳐주기까지 하니 우두머리 기사를 처리할 수 있었다.
"후우...."
"수고하셨어요! 정말 대단해요! 앨리스 님도 정말 잘 싸우시는군요?"
"하아...됐어. 난 이제 이 짜증 나는 곳을 빨리 나가야겠어."
앨리스가 메리엘을 무시하고는 기사들 사이를 곧장 지나쳐 지나가려 하는 그때.
탈출구의 앞에 또 다른 검은 포탈이 생겨났다.
쿵! 쿵! 쿵!
거대한 포탈 속에서 그 두꺼운 몸체를 드러내는 언데드.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 시꺼먼 마력을 흘리며 벨티아르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로브를 뒤집어쓴 메이와 시뻘건 안광을 일렁이는 워리, 차가운 한기를 내뿜는 슌까지.
고작 4기의 언데드였지만 그들이 내뿜는 위압감은 이전에 마주친 수십 기의 기사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뭐,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잔뜩 당황한 앨리스가 말까지 더듬으며 주춤했고 항상 미궁의 몬스터들을 마주쳐도 자신만만했던 플레타도 처음으로 이를 악물며 입을 다물었다.
메리엘은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며 힘을 끌어 올렸고.
"여기는 지나갈 수 없다."
쿠웅!
벨티아르가 자신의 거대한 대검을 땅에 내리찍으며 그 의지를 표명했다.
당황한 앨리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있을 때, 이신은 그 뒤에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좀 많이 당황스러울 거다.'
제62화
"악마종의 냄새가 나는군요."
새하얀 창대를 꼬나 쥔 메리엘이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생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천족이여."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이에요."
"나는 위대한 죽음의 지배자님 밑에서 새로 태어났다."
"...죽음의 지배자? 그것참 위험해 보이는 이름이군요. 당신의 주인은 어딨죠?"
메리엘의 물음에 벨티아르가 움찔하며 시선을 그녀의 뒤로 던졌다.
이신과 시선을 마주친 벨티아르가 다급히 시선을 거뒀다.
"너희들은 나의 주인님을 볼 자격이 없다.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겪게 될 것이다."
"네 놈들...미궁의 괴수들이 아니구나."
확신에 가득 찬 앨리스가 언데드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소리에 뜨끔한 메이가 급격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돌아갈 생각이 없는가 보군! 모두 죽어라!"
메이가 지팡이를 들어 땅을 찍자, 앨리스의 앞에 땅이 치솟으며 그녀를 향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 캐스팅 속도에 놀란 앨리스가 표정을 굳히고는 염동력으로 돌주먹을 휘감았다.
"언데드 주제에!"
언뜻 보면 여유가 있는 듯했지만 앨리스는 점점 강해지는 메이의 마력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식이 어딜!"
"넌 나랑 놀자고."
앨리스를 돕기 위해 몸을 돌리던 플레타는 자신에게 워리가 쇄도하자, 그 자리에서 검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칫!"
플레타는 혀를 찼다. 워리의 강한 힘 때문에 검을 빼내기 쉽지 않았다. 워리가 붉게 타오르는 안광으로 플레타의 눈을 직시했다.
서로의 시선이 맞부딪혔을 뿐이지만 플레타는 왠지 모를 거북함에 시선을 돌렸다.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모든 게 읽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플레타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마를 벌하는 건 저희 천족의 의무. 이 자리에서 그 끈질긴 생을 끝내 드리죠."
"크하하학! 와라! 이 검은 마력의 힘을 보여 주마."
콰아앙!!
대검과 창이 서로 맞부딪히며 커다란 굉음을 자아냈다.
'여태 보여 줬던 게 본 실력이 아니었군.'
뒤에서 그 모습을 보던 이신은 메리엘의 진면목에 혀를 내둘렀다.
저 벨티아르와 힘에서 호각을 보일 줄이야.
그때, 이신의 시선이 슌에게로 향했다.
빨리 공격 안 하고 뭐 하냐는 듯한 눈빛에 슌이 그제서야 다급히 마력을 끌어 올린다.
지팡이 끝에 새겨지는 얼음의 탄환.
동그랗게 모인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공회전을 하더니 이신에게로 쏘아졌다.
지난번 시가레이트의 홍염의 탄을 본 슌이 그 나름대로 마력의 흐름을 읽고 개발한 새로운 마법.
마치 그 마법에 대해 평가라도 받고 싶다는 듯, 슌은 마음껏 자신의 마법을 이신에게 선보였다.
화르륵! 치이이이익!!
지팡이 끝에 뿜어져 나온 불의 막, 그 겉면으로 또다시 덧씌워지는 실드.
관통력을 극대화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 이신은 곧장 그에 맞춰서 방어 마법을 발현했다.
여태 화염 마법만 보여 준 탓에 이번에도 화염 마법과 기본 마법만을 이용해 막을 생각이었다.
불의 막으로 얼음 탄환의 위력을 깎아내며 겹겹이 씌운 실드로 그 관통력을 줄이고.
[실피드 웹]
점액질의 거미줄이 얼음 탄의 회전을 급속도로 줄인다.
동시에 세 가지의 마법을 발현하는 신기를 선보였지만, 자신의 전투에 온 신경을 쓰고 있는 나머지 셋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치이이이이이- 파앙!
슌이 만들어 낸 회심의 탄이 작은 폭발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고작 기초 마법들의 연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슌은 주인과 자신의 마법적 역량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배우고 싶다.'
슌의 정광이 번뜩였다. 마력이 활화산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저 녀석...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적당히 몇 수 주고받는 것만 하면 될 것을.
슌의 기세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녀석의 마력이 점점 과열되고 있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신난 거였군.'
이신은 슌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동경하던 마법사와 마주했을 때, 자신의 모든 걸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마법사들의 마음.
그런 걸 모를 리가 있을까.
'그래, 마음껏 펼쳐 봐라. 한 수 가르쳐 주지.'
이신 또한 그에 맞춰 마력을 움직였다.
마력이 먼지처럼 흩어진다. 슌의 마력이 화수분처럼 끝도 없이 쏟아졌다.
바닥, 벽, 천장 할 것 없이 사방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뭐야? 갑자기 무슨?"
옆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플레타와 메리엘이 순간 싸움을 멈추고 슌을 보았다.
"미친...!"
앨리스도 마찬가지.
그녀는 슌에게서 느껴지는 마력 파장에 욕설을 내뱉었다.
"물은 무엇이든 변할 수 있습니다."
슌의 말을 들은 셋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엇이든 변할 수 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주변에 먼지처럼 휘날리는 슌의 마력들. 서서히 굳어지는 얼음의 파편들이 그들의 사각을 노리고 있었다.
"모두 조심하세요!"
메리엘이 다급히 외쳤다.
마력의 밀도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플레타와 앨리스는 그 외침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피할 방법이 없었다.
쩌저적!! 콰드득!!
다가올 암담한 미래를 예견하던 두 사람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 눈알을 바쁘게 굴렸다.
"...이게 무슨?"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사방에 가득 찬 얼음 알갱이들.
날카롭게 벼려진 수백 개의 고드름들이 이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이신이 흩뿌린 마력에 붙잡혀 모두 얼어붙어 있었다.
"듀얼...마법사?"
두 가지 속성을 사용하는 마법사다. 그것도 상당히 수준 높은.
앨리스는 눈으로 본 것을 믿지 않을 만큼 미련하지는 않았다.
저 고드름들이 향하는 대상이 자신이었다면? 혹은 플레타나 메리엘이었다면 어땠을까?
막을 수 있었을까?
그 답은 회의적이었다.
파가가가각!!
이신의 손짓 한 번에 일련의 고드름들이 한 번에 부서지며 얼음 파편들이 바닥에 흩날렸다.
"...대단하네."
플레타의 감상은 그 정도였고 메리엘은 감탄사를 연신 흘렸다.
슌의 회심의 마법을 완벽히 막아낸 이신은 고개를 숙인 그를 향해 조언을 남겨 두었다.
"물은 천변만화하지. 하지만 그것에 매몰되면 얼음은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
"알겠...다."
그 답을 들은 이신의 시선이 빠르게 그 주변을 훑었다.
왜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냐고 질책하는 듯한 이신의 눈빛에, 메이와 워리, 벨티아르가 다급히 공세를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셋은 이신을 슬쩍 보았다.
그는 방금 그 마법을 막아낸 여파로 마력이 고갈됐는지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신 님이 아니었다면...저 괴물 같은 언데드에게 모두 죽었을 거야. 내가 해야 돼!'
'젠장, 이신도 마력이 고갈됐나? 다행히 저 해골 마법사 놈도 힘이 빠졌나 본데.'
'이 괴물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메이의 마법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강해졌다.
앨리스는 이제 마법을 막아내는 것도 버거워지고 있었다.
파앙!
메이의 돌덩이들을 잡아내던 염동력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풀려 버렸다.
허공에 멈춘 듯 떠 있던 돌들이 가속하며 앨리스를 향해 날아갔다.
"안 돼!"
그때, 눈을 질끈 감았던 앨리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샌가 이신이 자신의 앞을 가로 막고 서 있었다.
"어? 뭐, 뭐 하는 거야!"
꼼짝없이 저 돌무더기에 깔릴 거라 생각한 그녀는 이신의 어깨 너머로 날아오는 돌덩이들을 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내리치는 돌덩이들 몇 개가 멈칫하며 그 움직임을 멈췄지만 대부분의 돌덩이는 그대로 날아왔다.
파바바바바박!
그때, 플레타를 밀어붙이던 워리가 그를 쳐낸 뒤 이신의 등 뒤에 나타나 그 모든 돌을 쳐냈다.
플레타는 저 스켈레톤이 기습적으로 이신과 앨리스를 공격하려는 줄 알고 식겁했지만, 오히려 놈은 그 둘을 지켜내고 있었다.
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플레타는 물론이고 앨리스와 메리엘까지 상황 파악을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이유가 없었다.
도대체 저 스켈레톤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앨리스는 저 스켈레톤이 금방이라도 뒤를 돌아 이신과 자신을 저 검으로 찌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벨티아르와 메리엘의 싸움도 잠깐이지만 멈추며 한순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것은 셋뿐이 아니었다.
돌덩이를 날린 메이도, 그것을 쳐낸 워리도, 그것들을 옆에서 지켜본 슌과 벨티아르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 새끼야! 주인님 다치면 어쩌려고!'
'내가 알았어? 갑자기 주인님이 끼어드는 걸 어떻게 해?'
'그 정도도 컨트롤 못 해? 돌덩이들이 빗나간 척 다른 곳으로 쏘면 되잖아?'
'갑자기 그 경로를 바꾸는 게 쉬운 줄 알아? 이 돌대가리가 말이면 다 되는 줄 아나!'
'에이씨!'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눈빛으로 충분한 대화를 나눈 메이와 워리가 움직였다.
아주 잠깐의 정적 후.
땅을 박차고 뛴 워리가 그 공격의 방향을 메이에게로 바꿨다.
카앙!
무형의 실드와 검이 맞부딪혔다.
"생각해 보니 네 놈 맘에 안 들었다! 여기서 죽어라!"
너무 말도 안 되는 연기에 당황한 메이의 마력이 순간적으로 흔들렸지만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워리의 연기에 맞장구쳐주었다.
"그래! 이 돌대가리야...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
난데없이 일어나는 싸움.
여기저기서 마력이 점멸하고 둘의 격돌로 인한 폭음이 쏟아졌다.
안 그래도 점점 싸움이 힘겨워지던 와중에 지들끼리 싸우니 플레타는 옳다구나 하며 앨리스와 이신을 부축해 뒤로 빠졌고 메리엘은 어찌해야 하나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저 두 해골이 서로 싸우는 탓에 자신들에게 오는 부담이 줄기는 했지만, 나머지 둘도 만만치 않은 놈들이었고 나머지를 처리하려다가 저 둘이 다시 싸움에 합류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로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메리엘! 이 틈에 도망치자!"
"...알겠어요."
메리엘이 벨티아르를 노려보다가 뒤로 빠졌지만, 놈들은 쫓아오지 않았다.
"이신 님! 앨리스 님! 괜찮으신가요?"
"어, 난 괜찮은데...."
앨리스는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신을 보았다.
그의 안색이 매우 창백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신 님!"
"야! 너 괜찮아? 저 해골 놈한테 당한 거야? 몸도 안 좋은 놈이 어쩌자고 그런 짓을...."
"난...괜찮아. 우린 동료잖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만...."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내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이신의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도 동료를 위해 뛰어든 모습에 메리엘은 감동받아 울먹이기까지 했다.
"이신 님... 정말 감동이에요. 이런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인간분은 처음 봤어요."
"아니야...당연한 일인걸."
"이신 너...정말 멋진 놈이었구나?"
메리엘뿐만이 아니었다.
플레타는 정말로 이신에게 반하기라도 한 듯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앨리스도 쭈뼛쭈뼛 말을 선뜻 건네지 못했다.
"고마...워."
"아니야. 그래도 다행이다, 무사해서."
이신의 말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앨리스의 뺨.
그러나 이신은 그러든 말든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천족 메리엘에게서 깊은 호감을 얻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 천족과의 교감]
[호감도가 유지된 상태로 천족 메리엘을 위기에서 구하십시오.]
[보상 – 신성 스탯]
'좋았어.'
여태 그 긴 시간을 들여 번거로운 짓까지 한 보람이 있었다.
원래라면 이보다 더 공을 들여야 하는 것까지 고려했지만 생각보다 메리엘이라는 천사는 단순해서 호감도를 쌓기가 쉬웠다.
그제야 이신의 눈에 플레타와 앨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플레타는 부담스럽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고 앨리스는 얼굴이 새빨간 상태로 다른 곳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이 녀석들에게 신경을 쏟을 필요가 없다.
"이제 다시 출발-."
"잠깐만요! 움직이지 마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움직이던 이신은 갑작스러운 구속에 힘을 주지도 못하고 그대로 양어깨를 메리엘에게 눌린 채 바닥에 눕혀졌다.
"뭐야?"
"잠시만 그러고 계세요. 몸을 치료해 드릴 테니."
메리엘의 손끝에서 일어나는 신성력.
아무리 이신의 신체 능력이 좋다 하더라도 거의 이틀을 미궁 속에서 계속 움직였으니 꽤 피로가 쌓여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메리엘의 손끝에서 퍼지는 금빛의 신성력이 온몸의 구석구석을 안마라도 해 준 것처럼 피로가 풀리기 시작했다.
"음?"
"왜 그래?"
이신을 치료하던 중 갑자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메리엘을 보고 플레타가 물었다.
"음... 이신 님 괜찮으신가요?"
'아차.'
스스로 내부의 마력혈을 꼬아 일시적으로 몸이 안 좋아 보이게 만들었는데 히든 퀘스트를 받은 뒤로 이신은 그것을 풀어버린 상태였다.
근데 메리엘이 그를 치료하다가 생각보다 너무 멀쩡한 몸 상태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것.
이신은 다급하게 다시 몸의 상태를 악화시켰다.
"커허억...."
"이, 이신 님!"
"야! 괜찮아?"
"뭐야?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피를 토하며 숨을 헐떡이는 이신의 모습에 셋이 화들짝 놀라 이신의 상태를 체크했다.
"메리엘 씨!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어...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메리엘! 뭐 하는 거야? 상태가 더 악화됐잖아!"
"죄, 죄송해요! 이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해 볼게요!"
"이번엔 조심해!"
"네!"
앨리스의 연이은 당부에 한껏 심호흡을 한 메리엘이 다시 한번 치료를 시도했고 이번엔 별 탈 없이 이신의 안색이 좋아졌다.
"괜찮아요?"
"어, 덕분에 좋아졌어. 고마워."
자리에서 몸을 털고 일어난 이신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괴수들이 나타날 시간이다.'
일정 시간마다 발생하는 이벤트.
미궁에 오랜 시간 체류하는 도전자들에게 닥치는 괴수들의 웨이브.
어느 지점에서 소환되는 괴수들이 미궁을 돌아다니며 도전자들을 공격한다. 도전자들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미궁을 탐색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이 웨이브에서 반드시 업적 1등을 차지해야 한다.
그래야 1등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선 웨이브가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 그곳에서 괴수들을 처리하는 게 최고의 시나리오다.
"빨리 움직여야 돼. 곧 있으면 웨이브가 시작될 테니."
"어디로 간다는 거야? 어차피 어디에 있든 괴수들이 밀려올 텐데?"
"맞아. 차라리 탈출구랑 가까운 여기에 있는 게 낫지 않아? 그나마 미궁의 끝 쪽이니까 웨이브의 부담도 덜 할 거 같은데?"
앨리스와 플라테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신은 그 둘과 목적부터 다르니 이 대화는 애초에 성립되지가 않았다.
"난 괴수들을 피하려는 게 아니야."
"어? 무슨 소리야?"
"설마...."
앨리스는 경악한 표정으로 이신을 보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신이 지금 하려고 하는 짓은 미친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난 웨이브의 시작 지점으로 가서 모든 괴수들을 잡을 거야."
"그건 미친 짓이야! 그 많은 괴수를 어떻게 다 잡는다고!"
앨리스는 이신의 제안에 격하게 반대했지만, 나머지 둘은 그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재밌겠는데? 그놈들 다 죽이면 업적 보상도 쏠쏠할 거 같고."
"이신 님께서는 설마 다른 도전자들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모든 부담을 떠안으려고 하는 거예요? 정말 대단하세요!"
메리엘 혼자 큰 착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신은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해 주지 않았다.
"따라오기 싫으면 안 와도 돼. 난 갈 테니까."
이신의 단호한 말에 앨리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왜 고민을 하는 거지?'
그녀의 말대로 이건 정말 위험한 행동이다.
길을 찾는 능력이 있는 그녀가 굳이 자신을 따라와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와의 정 때문에 고민할 리는 없고.
"...나도 따라갈게."
제63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녀의 능력이라면 여기서 우리들과 헤어지더라도 미궁 탈출이 어렵지는 않을 거다.
혹여 웨이브를 피해 탈출이 힘들다 하더라도 그 시작 지점에 가려는 우리를 따라가서 겪을 어려움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아직 내가 파악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분명 있어.'
우선은 동행한다.
그리고 차차 파악하면 되겠지.
앨리스의 전투력 정도라면 크게 위협이 되지도 않을 테니.
"그래, 가자."
이신의 허락이 떨어지자, 플레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에 앨리스가 자신을 끌고 가고자 한다면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에.
앨리스 같은 미녀와 단둘이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동행이겠지만 플레타는 어느 순간부터 이신이라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이신의 파티는 이전보다도 더 순조롭게 움직였다.
이제는 파티의 주도권이 완전하게 이신에게 넘어갔고 앨리스도 그 전과 다르게 좀 더 협력적으로 변했다.
이신은 그녀가 왜 저렇게까지 갑자기 바뀌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틈틈이 그녀를 감시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가 자신을 종종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고개를 자꾸 돌리네.'
그만큼 켕기는 게 있다는 거겠지.
점점 더 이신의 경계심이 올라가는 와중,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음성에 파티원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쉿."
숨소리라도 들릴까 호흡조차 멈춘 그들이 벽에 딱 붙어 소리가 들리는 곳을 몰래 보았다.
"뭐지? 사람들인 거 같은데?"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다른 도전자들을 둘러싼 채 대치하고 있는 모습.
그들이 둘러싼 안쪽의 있는 이들도 도전자인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런 나쁜 짓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메리엘이 분노에 찬 음성을 내뱉었다.
자세히 보니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거의 만신창이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그나마 여자 둘은 괜찮았지만 남자는 거의 피 칠갑을 한 상태로, 툭 치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
앨리스는 그냥 지나가자고 했지만, 메리엘의 분노에 그 의견은 묵살되었고 결국 지켜보다 못한 메리엘이 갑자기 뛰쳐나갔다.
"뭐 하시는 건가요? 같은 도전자들을 그렇게 괴롭히는 건 옳지 않아요!"
"넌 뭐야?"
"오… 이쁜데?"
"정의의 사도 납셨군."
메리엘의 얼굴을 보고 한순간에 태도를 돌변한 남자들과 달갑지 않아 하는 여자.
이신도 메리엘과의 호감도 때문에 그냥 보고 넘어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얼떨결에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쩔 수 없지."
"이놈들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여성분들을 괴롭히는 거야? 기사도 정신이 부족하구만!"
플레타가 메리엘의 옆에 서며 그들을 다그치듯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던 앨리스는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부여잡고 뒤따라 걷다가 그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한 남자를 보고 굳어 버렸다.
'저…저 사람은....'
자신과 같은 세계에서 탑을 오르던 투견.
지하 세계에서 오로지 싸움을 위한 개로 키워진 괴물.
그녀의 걸음이 멈춰지고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안 돼...도망가야 돼."
앨리스의 중얼거리는 모습을 본 이신이 그녀를 붙잡았다.
"왜 그래?"
"저놈은…괴물이야. 못 이긴다고. 도망쳐야 돼."
자신의 양팔을 감싸 안고 떠는 그녀를 이신이 돌려세웠다.
무언가 트라우마라도 떠오른 듯 고장 나 버린 앨리스를 가만히 보던 이신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린 앨리스가 이신을 보았다.
"걱정 마. 적어도 너희들 다치는 일은 없을 테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어쩌면 허세에 불과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앨리스는 그 순간 치솟았던 공포가 한순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며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지만, 신기하게 공포와 불안은 사라졌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다시 그 투견을 보았다.
"끅...."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입가에 소름 돋는 미소를 띤 채.
"여기 엄청난 미인이 둘이나 있었군."
탐욕스러운 놈의 눈빛이 마치 자신의 몸을 더듬는 것처럼 불쾌했지만 아까와 같은 두려움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 노란 머리는 내 거다."
"개소리를 하네, 누구 맘대로?"
"크큭, 난 경쟁자가 없으니 편하네. 저기 잘생긴 놈은 내 거야."
마치 괜찮은 물건을 앞에 두고 경매라도 하듯 혓바닥을 놀려 대는 놈들을 보며 플레타와 메리엘이 분노를 쏟아냈다.
"이 더러운 것들이!"
"당신들은 천신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을 분들이시군요."
투견의 양옆에 있는 남자 둘과 플레타, 메리엘의 싸움이 시작되고 옆에 있던 여자가 이들의 싸움에 끼려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에 막혀 움직이지 못했다.
"뭐, 뭐야?"
"넌 나랑 놀자고, 이 한심한 년아."
어느새 공포감을 완전히 떨쳐낸 앨리스가 평소의 그 시크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건방진 년이로군."
가래라도 낀 듯 굉장히 거친 목소리가 앨리스의 귓가에 꽂혔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그녀의 마력이 흐트러질 정도로 투견에게 박힌 공포감이 강렬했다.
PTSD가 다시 도질 것처럼 몸이 가늘게 떨려 올 때, 이신이 그사이를 가로막았다.
"네가 여기 대장인가?"
"뒈지기 싫으면 비켜라…아! 말을 잘못했군. '조금이라도 더 이승의 공기를 맡고 싶으면'이 맞겠어."
그 말에 헛웃음을 흘린 이신의 지팡이 끝에 전격이 일렁인다.
후우웅- 파지직! 지직!
날카롭게 뻗어간 전격이 투견의 손등에 튀어나온 클로의 날에 튕겨져 날아간다.
그 짧은 순간에 이신의 마력을 캐치하고 마법을 쳐내는 반응 속도와 민첩함.
놈이 자신만만하던 그 태도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건방진 새끼가!"
땅을 박차고 대포처럼 쏘아진 투견의 클로가 이신을 찢어발길 것 같은 기세로 휘둘러지지만.
투웅! 콰앙!
허공에 생겨난 무형의 막에 한 차례 저지당하며 굉음을 자아냈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연달아 이신을 향해 내리쳤지만, 투견의 클로가 일정 범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
쾅! 쾅! 쾅! 쾅! 쾅! 쾅!
정면뿐 아니라 양옆과 위까지.
사방의 빈 공간을 찾아 두드렸지만, 그가 공격을 가하는 그 지점에 정확히 생겨나는 실드는 도저히 뚫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콰아아아앙!
실드가 기습적으로 폭발하며 투견에게 엄청난 양의 충격파를 쏟아냈다.
[투르가란의 체력을 빼앗았습니다.]
[체력이 1 상승합니다.]
"크허억... 크억!"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피를 뱉어 낸 투견이 이를 악물고 이신을 보았다.
"이런 말도…안 되는...."
"그런 되도 않는 힘으로 깝치고 다닌 거야?"
이신은 겉으로 전혀 티를 내지 않았지만, 매우 아슬아슬하게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실드라는 마법 자체가 기본 속성의 1위계 마법일 뿐이다.
물론, 이 마법이 술사의 능력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지긴 하지만 애초에 그리 대단한 술식이 필요하지 않은 만큼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하지는 않는다.
이신은 처음 한 번의 방어 후에 급격하게 그 전략을 바꾸었다.
실드를 넓게 펼치면 그만큼 방어력이 분산되고 마력량도 크게 소모된다. 한 겹의 실드로는 투견과 같은 도전자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
그렇기에 여러 겹의 실드에 마력을 때려 박아 처음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생각보다 쭉 떨어지는 마력량에 이신은 실드의 구성을 곧바로 바꿨다.
선택과 집중.
실드의 크기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그 방어력을 한 곳에 몰아넣는다. 그 후 여러 겹의 실드를 덧씌운 뒤 실드에 충격의 수용량을 늘리고 일정치에 달하면 그 충격량을 내뱉는 술식을 새겼다.
기존의 다른 마법사들이 들으면 경악하고 말릴 짓을 동시에 두 개나 한 것이다.
극단적으로 줄인 실드는 그 공격 범위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 맨몸으로 공격을 받아 내야 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눈으로 좇기도 힘든 극단적인 속도의 공격을 쫓아 그 공격 지점에 정확히 실드를 미리 가져다 놔야 한다는 소리였다.
더군다나 충격량의 수용치가 넘어가면 그대로 폭발하는 술식을 때려 박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큰 미친 짓이었다.
수용량의 한계치가 넘어가는 지점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면 술사도 반드시 휘말릴 수밖에 없는 그런 도박 수나 마찬가지인 술식이기 때문이다.
이신은 그런 극악한 난이도의 마법을 동시에 해낸 것이다.
대마법사라는 과거의 경지와, 마법이라는 분야에 한해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이신이 아니었다면 하지 못했을 신기에 가까운 마력 컨트롤.
이 정도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나머지 셋은 단순히 투견이 방심해서 허무하게 당했다고만 생각했다.
"개새끼가!"
"그냥 죽어라."
투웅!
콰지직!
이신의 지팡이 끝에서 쏘아지는 전격의 창이 투견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죽음에 이르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믿지 못하는 듯한 얼굴.
투견이 실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너희 대장 죽었다."
이신의 담담한 말에 치열했던 싸움터가 한순간에 차갑게 식어 버렸다.
* * *
"고맙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메리엘에게 치료를 받아 회복한 세 사람은 감사 인사를 하며 그대로 떠났고 죽어 버린 투견을 제외한 세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이런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 돼."
"아무리 그래도 항복한 사람들을 막 죽이는 건 좀...."
"그럼 이것들 살려 두게? 우리 죽이려 한 년놈들인데?"
앨리스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는 눈빛으로 플레타를 보았고 그 눈빛에 쫀 그가 슬쩍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죽이는 건 내키지 않네. 항복한 사람들이잖아."
"어…그…렇긴 하지? 내가 조금 과격하긴 했네."
이신의 말에 갑자기 태도를 확 바꿔 버리는 앨리스.
그 말을 듣던 메리엘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아니요, 이런 죄수들은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어?"
"여기가 천계였다면 합당한 벌을 내릴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그럴 수 없죠. 그러니 죽음으로 그 죄를 갚아야 합니다."
생각보다 강경한 메리엘의 말에 이신도 조금 당황해서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신은 메리엘의 호감도를 생각해서 살려 주자 말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메리엘이 더 이들을 죽이자는 의견을 내세운 것이었다.
"어...그럼 뭐...."
"자, 잠깐! 어떻게 무기 다 버리고 항복한 사람을 같은 인간끼리 죽이려고 해?"
"맞아! 살려 주면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나는 돌아가서 지켜야 할 가정이- 커억!"
갑자기 바닥에서 솟아오른 돌송곳이 세 사람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고 지나갔다.
역류하며 올라오는 피를 쏟아낸 셋이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입 안 가득 피를 울컥거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이런 류의 인간들이 하는 말을 믿을 만큼 이신은 삶을 짧게 살지 않았다.
메리엘과 의견도 같겠다, 망설임 없이 세 사람을 죽인 이신이 곧장 몸으로 돌려 움직였고 그 뒤를 따라 곧장 앨리스와 메리엘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조금 상황 판단이 늦은 플레타가 쓰러진 도전자들을 한 번 보고는 뒤늦게 그들을 쫓아갔다.
'근데 도대체 사용하는 속성이 몇 개야?'
앨리스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 * *
"근데 길을 정말 알고 가는 거 맞아?"
"그래."
앨리스는 그간의 전투로 인해 이신의 뛰어난 전투 능력은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지만, 미궁의 길을 찾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신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가 정말 제대로 알고 가는지는 확실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라도 능력을 써야 하기 때문에.
"난 한 번 본 건 절대 까먹지 않아."
"치."
앨리스는 그가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며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입가엔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남자들은 보통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허세를 많이 부린다지?'
이런 실력을 갖추고도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하려던 것도 그렇고.
아까 자신을 안심시켜 준 것도 그렇고.
이신은 자신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앨리스는 발그레한 볼을 애써 숨기며 이신의 뒤를 따라갔다.
"메리엘 씨, 여기가 많이 덥습니까?"
"음… 저는 그렇게 덥지는 않아요."
"근데 앨리스 씨 얼굴은 왜 저렇게 붉은 겁니까?"
"어디 아픈 게 아닐까요?"
자신의 뒤에서 다 들리게 말하는 둘의 대화에 앨리스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니까, 조용히 하고 가!"
제64화
웨이브의 시작 지점.
그곳에 도착한 이신 일행은 위험한 느낌이 드는 보랏빛 포탈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포탈은 크기를 점점 키우며 마력의 농도를 높여 가고 있었다.
"여기서 괴수들이 쏟아진다는 거지?"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않게 제가 최선을 다할게요!"
"후...결국 이렇게 됐네. 그래도 뭐 네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앨리스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이신을 보았다.
"아니, 여기는 너희 셋이 맡을 거야."
그러나 이신은 이곳에 있을 생각이 없었다.
반드시 가야만 하는 곳이 있기 때문에.
"걱정 마, 여기 포탈은 그렇게 괴수가 많이 나오지는 않으니까."
이신의 당부에도 앨리스와 플라테는 불안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너는 어디로 가는데?"
"우리끼리 여기를 막으라고? 안 돼! 난 네가 있어서...."
"부탁해."
그 말을 들은 앨리스가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느샌가부터 자신이 이신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른 포탈을 막을 거야."
"맞아요! 이신 님도 다 생각이 있으실 거예요."
메리엘까지 이신을 지지하고 나서자 앨리스와 플레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부터 앨리스를 유심히 관찰하던 이신은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다른 곳에 머무르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무언가 보는 것 같았는데.'
끝까지 그 의견을 따르지 않을 것 같던 앨리스가 허공을 아주 잠깐 응시하더니 갑자기 수긍하는 태도로 바뀌었다.
'도대체 무슨 능력이지?'
분명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태도를 바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단서를 보았을 텐데.
미래를 예측하거나 그에 준하는 능력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마...?'
몇몇 떠오르는 능력들이 있긴 했지만, 아직 섣불리 단정 짓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우선은 웨이브를 막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괴수들을 다 처리해도 이곳에 계속 있어. 이리로 올 테니까."
그렇게 말한 이신은 곧바로 다른 웨이브의 시작 지점으로 이동했다.
이곳과 그리 멀지 않지만 동시에 매우 먼 곳.
"여깄네."
그의 마력 감각권에 들어온 희미한 마력의 파장.
이곳을 특정하고 마력을 뻗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그러한 장치가 이곳에 숨겨져 있었다.
벽의 한 곳을 손으로 밀어내자 바닥에 구멍이 생기며 이신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공간을 이동하는 감각.
그 찰나의 감각이 사라지고 검게 변한 배경은 다시 미궁의 어느 곳으로 바뀌었다.
사람 혼자 서 있기에는 초라해 보일 정도로 커다란 공간.
사방엔 악취가 진동하고 바닥은 각종 시체의 잔해들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 급속도로 에너지가 모이며 검은색의 포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웨이브 종료까지 2:00:00]
검은 포탈에서 나오는 망자들의 군대.
짙은 어둠에 잠겨 시퍼런 안광을 불태우는 해골 기사가 해골마 위에 올라탄 채 망자들을 이끌고 포탈에서 나왔다.
"너는…."
"시체청소부 데클레인."
"…도전자인가? 이미 알고 왔군."
"그래."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리석은 놈이구나."
시체청소부라 불리는 데스나이트가 검은 마력을 줄줄 흘리며 검을 세웠다.
아직 놈의 병사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이 웨이브가 끝나는 2시간 동안 놈의 군대의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불어난다.
쿠웅― 쿵!
거대한 공간의 한쪽 벽면 일부가 열리더니 그 안에서 시체 더미가 쏟아졌다.
"일어나라 망자의 병사들이여."
몸을 뒤틀며 일어나는 괴수들.
언데드가 되어 영원한 죽음을 겪어야 하는 놈들의 절규가 들려온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이곳은 미궁의 시체들이 싸그리 모이는 곳.
시체청소부라 불리는 저 데스나이트는 언데드를 만드는 권능을 가진 언데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지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미궁 안에서 일정 기간 이상 탈출하지 못하면 맞닥트리게 되는 히든 보스이다.
이신은 그 마지막 웨이브를 홀로 막기 위해 온 것이었다.
"너도 나의 병사가 되어라."
[히든 스테이지 – 시체청소부 데클레인]
[미궁에 갇혀 배고픔에 시달리던 기사 데클레인은 주변의 시체들을 먹기 시작했고 그러다 결국 죽음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데스나이트가 되었습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정처 없이 미궁을 떠돌아다니던 데클레인은 외로움에 사무쳐 시체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는 죽음의 신에게서 언데드를 만드는 권능을 받아냅니다.
시체청소부가 된 데클레인을 이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시키십시오.]
시시각각 쏟아지는 시체의 파편들.
그러한 것들은 다시 조각조각 모여 언데드가 되고 데클레인의 병사가 되었다.
"혼자선...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 맞는 말이야."
은빛을 머금은 지팡이 위로 검은 마력이 휘감긴다.
후우웅-
단 한 번의 휘두름.
그 궤적을 따라 뻗어진 검은 안개가 언데드들을 뒤덮는다.
"아니! 인간이 어떻게 죽음의 힘을...!"
[검은 마력]
# 죽음 속성
# 언데드 종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가집니다.
[검은 마력이 지배력을 가합니다.]
으어어어어어어―
마치 석상처럼 굳어 버린 언데드들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괴성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언데드들에 대한 통제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된다."
죽음의 힘이 담긴 자신의 권능이.
절대 무너질 리 없다 생각한 그러한 힘이.
흔들리고 있었다.
쿵! 쿵! 쿵!
작은 스켈레톤 고블린부터 거대한 덩치의 디베이거 카우들까지.
하나둘 그 통제를 벗어나 이신을 향해 무릎 꿇기 시작했다.
[죽음의 지배자]
# 죽은 자들이 쉽게 두려워합니다.
# 죽은 자들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됩니다.
# 죽은 자들에게 쉽게 인정받습니다.
죽음의 지배자.
죽은 자들에 한해선 그 어떤 왕들보다도 강력한 지배자가 이 자리에 강림했다.
[데클레인에게서 은빛 갈기 늑대의 지배권을 빼앗았습니다.]
[죽음의 지배자 효과로 인해 은빛 갈기 늑대의 필요 지배력이 5에서 4로 감소합니다.]
[데클레인에게서 디베이거 카우의 지배권을 빼앗았습니다.]
[죽음의 지배자 효과로 인해....]
[데클레인의 지배력을 빼앗았습니다.]
[지배력이 1 상승합니다.]
[데클레인에게서 긴 다리 땅쥐의 지배권을....]
[데클레인에게서....]
자신의 권능이 고작 인간 따위에게 밀린다는 사실을 부정하던 데클레인이 해골마를 몰고 이신에게 돌진했다.
카앙!
"어딜 감히."
바닥에서 솟아오른 대검이 데클레인의 검을 막아내고,
"감히 죽음의 신님께 선택을 받은 나를 언데드 따위가!"
분노로 가득 찬 데클레인의 권능이 벨티아르에게 향하지만.
"나는 벨티아르. 죽음의 군단의 군단장이다."
벨티아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력은 그 권능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크윽...!"
이후 힘과 힘의 대결에서 밀려난 데클레인이 놀란 눈으로 벨티아르를 보았다.
"죽음의...군단?"
"그렇다."
당황에 빠진 데클레인의 검이 가늘게 떨리고 있을 때.
화아악―
파도처럼 솟아오른 이신의 검은 마력이 데클레인을 덮친다.
죽음이라는 공간에서.
"커허억...당…신은...."
이신은 그 누구보다 막강한 권력을 행할 수 있다.
데클레인의 어둠보다 더 칠흑 같은 검은 마력.
이 순간 이신은 지금까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죽음의 지배자]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검은 마력]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매몰될 것 같은 그러한 마력.
그 마력을 직접 마주하고 나서야 그 본질을 느낀 데클레인이 해골마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죽음의…지배자.... 모든 죽음을 통찰하는 통찰자."
"데클레인, 내 권속이 돼라."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당신은...살아 있는 인간이 맞습니까?"
이 뜬금없는 질문은 이신의 잠잠하던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신의 내면에 잠재된 가장 큰 고민의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
데클레인이 그러한 것을 알고 물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그에게 커다란 행운으로 다가왔다.
"...맞아."
"저는 이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지겨운 삶을 그만하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끝까지 발악해 봐. 마지막 기회를 주지."
원래의 생각과 다르게, 이신은 정말로 기회를 주려 했다.
[웨이브 종료까지 1:51:17]
"웨이브가 끝날 때까지 이곳으로 쏟아지는 모든 시체를 네 병사로 만들어."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데클레인의 쓸데없는 걱정에 이신은 피식 웃어 줄 뿐이었다.
놈은 자신의 마력 고갈을 생각하는 듯했지만, 검은 마력으로 지배권을 뺏는 방법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쿠구구구궁!
벽면의 일부가 열리며 후두두 쏟아지는 시체 더미들.
웨이브가 시작되고 그만큼 수많은 괴수가 죽어 나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쿵!
데클레인이 바닥에 검을 내리찍자, 그 죽음의 권능이 공간 전체로 퍼진다.
삐그덕거리는 스켈레톤들이 몸을 일으키고 시퍼런 안광을 쏟아낸다.
단 한순간에 생겨난 수백의 언데드들.
이 말도 안 되는 권능을 다른 도전자들이 보았다면 곧장 도망치려 했을 것이다.
"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최선을 다해. 그래야 조금은 할 만할 테니."
처음에는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데클레인의 이 말도 안 되는 권능은 정말 1인 군단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와라."
그림자 공간에서 하나둘 나오는 이신의 권속들.
이신의 마력에 영향을 받아 검은 마력을 줄줄 흘리는 언데드들을 데클레인의 언데드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죽음의 힘이 가진 절대성이 죽은 자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다.
[검은 마력이 지배력을 가합니다.]
[데클레인에게서 붉은 줄무늬 스네이크의 지배권을 빼앗았습니다.]
[죽음의 지배자 효과로 인해....]
[데클레인에게서....]
[....]
[데클레인의 지배력을 빼앗았습니다.]
[지배력이 1 상승합니다.]
그간 탑을 오르면서 혼돈의 스탯 강탈의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단순 피격과 타격의 회수가 늘어난다고 그만큼 스탯 강탈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혔을 때, 그만큼의 확률이 증가했다.
또한 각 스탯 간의 획득 확률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힘을 이용한 타격을 하면 힘을 강탈할 확률이 높고 마법을 이용하면 지력을 강탈할 확률이 높았다.
그 연구의 결과가 지금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나하나 그 지배권을 빼앗을 때, 낮은 확률로 오르는 지배력.
이것이 그 증거다.
'지배력을 대폭 올릴 수 있는 기회.'
이번 웨이브의 업적 점수 1등은 따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
"크허어억...."
만신창이가 된 채로 바닥에 검을 꽂고 그걸 지지대 삼아 버티고 있는 데클레인.
정말로 최선을 다해 이신을 이겨 보고자 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첫 번째 웨이브가 종료되었습니다.]
[첫 번째 웨이브의 순위를 산정합니다.]
[1위, 이신 – 32,407점]
[2위, 데칸 – 8,730점]
[3위, 베르세아 – 3,820점]
[....]
1위와 2위 간의 압도적인 점수 차이.
그도 그럴 것이 이신은 전체 웨이브를 모두 처리한 것과 마찬가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첫 번째 웨이브 랭킹 1위가 되셨습니다.]
[1위 보상이 지급됩니다.]
[실버 랜덤 카드를 획득합니다.]
시스템 창 위로 생겨난 실버 랜덤 카드를 잠시 옆으로 밀어 둔 이신이 데클레인에게로 갔다.
"데클레인."
"최선을...다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신의 지팡이 끝에서 뻗어지는 검은 마력이 데클레인을 감싼다.
[검은 마력이 시체청소부 데클레인의 지배를 시도합니다.]
[데클레인이 검은 마력을 받아들입니다.]
[데클레인이 당신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지배력이 상승합니다.]
[지배력이 상승합니다.]
[지배력이 상승합니다.]
전투하며 많은 지배력을 빼앗긴 탓에 격이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 생각보다 지배력이 많이 오르지 않아 아쉬웠지만 괜찮다.
이미 많은 지배력을 빼앗았기 때문에.
"하프니스."
- 지배자여.
"데클레인을 안식으로 돌려보내."
- 알겠다.
[데클레인에게서 검은 마력을 거둡니다.]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하프니스의 크기가 순식간에 팽창하고,
죽음의 낫이 데클레인을 사선으로 긋는다.
서걱―!
유령과도 같던 검은 선들이 죽음의 낫에 잘리고.
그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속박들이 풀려난다.
"고맙습니다. 주인...."
[데클레인이 안식으로 돌아갑니다.]
[『히든 스테이지 – 시체청소부 데클레인』을 클리어했습니다.]
[히든 스테이지 보상이 지급됩니다.]
[골드 랜덤 카드를 획득합니다.]
허공에 생겨난 실버 랜덤 카드와 골드 랜덤 카드.
랜덤 카드는 여태 탑을 오르며 쌓은 업적에 따라 그에 맞는 능력치의 카드가 무작위로 나온다.
그 종류는 스킬, 칭호, 스탯 이 세 가지가 있으며 브론즈와 실버는 이 중에 직접 고를 수는 없지만, 골드부터는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브론즈, 실버, 골드, 화이트, 블랙.
단계가 올라갈수록 나오는 능력도 상위급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골드와 실버는 딱 중간과 그 아래.
그러나 그 안에서도 괜찮은 능력은 많다.
'우선 실버부터.'
은색의 카드 뒷면을 누르니 카드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속도가 줄어들더니 카드의 앞면이 드러났다.
[『스킬 – 지휘자의 카리스마』를 획득합니다.]
[지휘자의 카리스마]
# 50 이상의 병력을 지휘할 때, 지배력이 10% 증가.
'좋아.'
마침 딱 좋은 스킬이 나왔다.
솔직히 마법 쪽 능력보다는 네크로맨서로서의 능력을 뒷받침할 능력이 필요하던 참이었으니.
다음은 골드 랜덤 카드.
이게 진짜다.
골드 랜덤 카드를 누르자, 휘리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카드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그리고는 점점 속도가 줄어들던 카드의 보상이 드러났다.
"어?"
제65화
웨이브를 끝내고 돌아온 이신은 녹초가 되어 바닥에 엎어진 셋을 보았다.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메리엘까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신!"
"야! 너!"
"힘들었나 보네."
이신의 말에 플라테가 그간의 울분을 터트리듯 한탄을 쏟아냈다.
"말도 마, 내가 밀려오는 놈들 막느라고...."
"야, 플레타. 너 이번 웨이브 순위 안 봤어?"
"힘들어서 아직 안 봤습니다만."
"어휴… 지금 봐봐."
앨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순위가 뭐 어쨌...."
말을 하다가 화들짝 놀란 플레타가 목이 부러질 것처럼 고개를 돌려 이신을 보았다.
6위에 올라간 자신이 1,850점이었는데, 이신은 3만 점이 넘어 있었다.
조금 전 자신도 그렇게 쎄빠지게 싸워서 간신히 1,850점을 얻었는데 3만 점이라니.
"도대체 무슨...?"
"이신 님, 어떻게 하신 건가요?"
"맞아, 뭘 어떻게 해야 3만 점이 넘는 거야? 여태 이런 점수를 얻었다는 도전자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들이 이신에게 답을 구했다.
웨이브를 안 막아 봤으면 모를까, 직접 겪어 본 이상 이 점수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열심히 막으면 된다."
이신은 그들의 물음에 딱히 대답해 줄 필요를 못 느꼈다.
말해 주기도 애매하고.
"그게 뭐야! 도대체 어떻게 한 건데?"
앨리스는 이신의 태도를 보고 금방 포기한 모습이었고 메리엘은 '열심히 막으면 되는군요.'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플레타는 납득이 안 되는 듯 계속 달라붙어 귀찮게 했다.
"이따가 알려 줄게."
"진짜? 진짜지?"
"그래."
단순한 녀석이니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까먹을 것이다.
마지막 신성 스탯을 얻는 일만이 남았다.
이제 미궁을 탈출하기 위한 최종 보스를 처리하면서 두 가지를 한 번에 끝내면 된다.
"가자."
* * *
이신의 안내 덕에 순조롭게 이곳 페이네 미궁의 보스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족히 10m는 되어 보이는 크기의 거대한 문.
이 문 너머에 이곳 미궁을 탈출할 수 있는 최종 보스가 존재한다.
페이네 미궁에서 가장 강한 보스이며, 놈을 쓰러트리면 모든 탈출구가 열린다.
게다가 확정적으로 귀환석도 얻을 수 있으니, 다시 탈출구를 찾아 움직이는 번거로움은 겪지 않아도 된다.
"하아...이게 진짜 맞는 거겠지?"
자신의 머리를 쥐어 잡으며 갈팡질팡하는 앨리스.
여기 있는 보스의 힘을 아는 그녀로서는 이 결정이 맞는지 계속 헷갈렸지만 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이제 들어가는 건가요?"
전투 준비를 모두 마친 메리엘이 이신에게 물었다.
"잠깐."
급격하게 찌푸려지는 이신의 눈가에 나머지 셋이 순간 긴장하기 시작했다.
고요해진 그 장소에서 그들의 귓가에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오는군요."
"뒤로 오십쇼. 앨리스 씨, 메리엘 씨."
둘을 지키려는 듯 앞으로 몇 발자국 나선 플레타의 시선에 정체불명의 도전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꽤나 많은 도전자들이 몰려왔다.
10명은 되는 도전자들.
그중 대부분이 아까 투견과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선 남자가 이신의 일행을 발견하더니 멈칫하고 자신의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그리고는 혼자 다가왔다.
꽤 큰 덩치에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게 적대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먼저 온 분들이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데칸이라고 합니다."
첫 웨이브의 랭킹에서 2등을 차지한 녀석의 이름이었다.
이신과 그 점수의 차이가 많이 나기는 했지만 2위의 점수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
3위와 그 격차가 거의 5천 점이 날 정도로.
'먼저 선뜻 자신을 소개한다라...내가 그 랭킹의 1등인지 파악하기 위함인가?'
이곳은 미궁 내에서 가장 강한 보스가 있는 방의 문 앞.
애초에 이도 저도 아닌 도전자가 있을 확률이 적다.
데칸 정도의 실력자라면 상대에 대해 파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첫 웨이브에서 이신이라는 강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가 이신인지 떠보고 있다.'
속에 구렁이가 수백 마리는 기어 다니는 느낌.
"...반갑습니다."
"아하하,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전혀 싸울 생각이 없거든요."
양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 그의 시선이 이신에게서 메리엘에게로 옮겨졌다.
"여기 아름다우신 분의 소개를 좀 듣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아, 저는 메리엘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쪽은 앨리스 님, 여기는 플레타 님, 그리고...."
"여기 온 목적이 뭡니까?"
자신을 소개하려는 메리엘의 말을 끊고 이신이 데칸에게 물었다.
"저는 이곳의 보스를 잡으러 왔습니다. 근데 선객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럼 양보라도 할 생각입니까?"
"음... 그건 조금 곤란한데... 근데, 그쪽이 이 일행의 리더신가요?"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데칸.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데칸이 다 알고 있으니 그냥 말하라는 듯 시선을 보내오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신이 피식 웃자, 방긋 웃고 있던 그의 미소에 순간적으로 균열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자신의 포커페이스에 아주 능숙한 모습이었다.
"제가 이곳의 리더입니다. 정식으로 소개하죠. 이신입니다."
당당하게 자신을 밝히는 모습에 데칸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아! 그 첫 웨이브 랭킹 1위에 올라갔던...?"
"네."
이신의 대답에 데칸뿐 아니라 그 뒤의 일행들에게서도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 모습을 본 앨리스와 플레타가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이신 님의 그 능력이 뭔지 참 궁금하지만, 말씀해 주지 않으시겠죠? 그보다 제안할 게 있습니다. 이신 님은 여기 보스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그쪽은 뭐 알고 있습니까?"
"예, 저희 정보를 공유하죠. 그리고 보스를 협력해서 같이 잡읍시다. 저 안에 있는 놈은 아무리 이신 님이라도 쉽지 않을 겁니다. 동료들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요."
데칸은 이신 본인이 아닌 그 동료들을 걸고넘어졌다.
3만이 넘는 점수.
그 정도 능력이라면 아무리 보스가 강하다 하더라도 혼자 잡아낼 수도 있다.
혹여 그게 불가능하다 해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
"그럽시다. 힘을 합치죠."
"정말입니까?"
당연히 고민이나 거절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다음 수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너무 흔쾌히 승낙해서 데칸은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안 돼!"
그때, 뒤에 있던 앨리스가 플레타를 옆으로 밀치고 이신의 옆에 와 그를 말렸다.
"저 녀석, 이제 생각났어. 투견들의 왕이자, 지하 세계의 지배자. 데칸. 맞지?"
"무슨 소립니까? 전 그 사람이 아닙니다."
데칸은 순간 굳은 표정으로 발뺌을 했지만 앨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놈 쓰레기야. 지 밑에 있는 투견들도 항상 쓰고 버리는 게 일상인 놈이라고! 분명 뒤통수를 칠 거야."
"아닙니다, 이신 님. 전 그 사람이 아니에요."
"네가 직접 그 데칸이란 놈을 본 적이 있어?"
"어? 아니…. 그건 아닌데. 들어 본 적은 있어! 분명 저렇게 생겼다고...."
"그럼, 확실하지 않다는 거네. 근데 뭘 믿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단지 네 직감?"
생각과 다르게 이신의 싸늘한 반응에 당황한 앨리스가 쉽사리 그 대답을 내뱉지 못했다.
"네 직감이라면 실망이고, 아니라면 그 이유를 말해."
"...."
"또 말하지 않네. 여태 그랬듯이."
음성 하나하나에 담긴 그 차가움은 말을 할수록 점점 짙어졌다.
마치 그 끝에 다다르면 더 이상 이신이라는 인간과의 연이 끊어질 것처럼.
"나도 더 이상 너를 믿지 못하겠다."
이신에게서 나온 그 마지막 말에, 앨리스의 마지막 남은 벽이 무너졌다.
"하하하, 안타깝게 됐군요. 그럼 이신 님은 저희와-."
"말해 줄게."
그 말에 돌아갔던 이신의 고개가 다시 돌아왔다. 엘리스는 주변을 의식한 듯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난 상대의 거짓을 파악할 수 있어.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진실까지도."
"뭐? 고유능력?"
"응, [현자의 눈]이라는 능력이야."
그녀의 말에 이신의 눈이 미궁에 들어온 뒤로 가장 커졌다.
'현자의 눈이라고?'
생각해 뒀던 능력 중 가장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한 능력이다.
전생에 이 현자의 눈이라는 능력은 다른 녀석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가설이 맞았던 건가.'
고유능력의 강탈.
소수의 몇몇이 의심하고 있었지만 확신할 수 없었던 그 증거가 이곳에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절대 빼앗기면 안 된다.'
미래에 상대하게 될 최악의 적 중 하나인 녀석.
현자의 눈만 없었더라면 그렇게까지 골치 아픈 적으로 변모하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고유능력들 중에서도 최상위급의 능력.
앨리스가 거짓말을 했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현자의 눈이라는 고유능력을 아는 것부터가 자신이 쓰지 않으면 말이 안 되니까.
귓속말로 그 능력에 대해 들은 이신이 다시 데칸의 앞으로 갔다.
"아무래도 너보단 내 팀원을 믿는 게 맞는 거 같네."
"그년 말을 믿는 겁니까?"
급격하게 변하는 말투.
이미 이신의 분위기를 보고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 너보단 이 여자가 더 믿음직스러운데?"
"쯧."
데칸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바닥에서 가시가 치솟았다.
가시는 금방이라도 앨리스의 목을 꿰뚫을 것처럼 쇄도했지만 이미 그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이신이 가시를 얼리며 공격을 저지했다.
"칫."
아쉬움에 혀를 찬 데칸이 뒤로 빠지고, 급격하게 전투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고마워."
"뒤로 빠져 있어."
이신은 앨리스의 주변에 꼼꼼하게 마력 파장을 펼쳐 놓았다.
앨리스는 절대 죽어선 안 되는 인물이다.
그녀의 중요도는 현자의 눈 단 하나만으로 증명되었으니.
"다 죽여라."
데칸의 지시에 뒤에 있던 9명의 투견들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앨리스와 메리엘, 플레타가 투견들 여섯을 맡았고 데칸을 포함한 3명의 투견은 이신에게 붙었다.
온몸에서 가시를 뽑아내는 데칸과 근접전으로 치고 들어오려는 투견들의 공세를 막아내는 중에, 일행들이 있는 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메리엘!"
앨리스를 지키려다가 투견의 클로에 복부를 관통당한 메리엘이 푸른 피를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투견들의 상태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메리엘을 포함한 나머지 둘은 더 심각했다.
플레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었고, 앨리스는 능력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런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도망가세요, 제가 희생하겠어요."
힘들게 몸을 일으키는 메리엘의 창으로 신성력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메리엘!"
"메리엘 씨! 희생은 안 됩니다! 하려면 제가!"
"여러분을 지키는 게 천사의 의무. 전 제 사명을 다하겠어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신성력이 넘실거리고 있을 때.
그 앞으로 벼락이 내리친다.
콰과광!!
그 기습적인 뇌전은 단번에 메리엘을 공격하던 투견을 무력화시켰다.
눈을 까뒤집고 몸을 덜덜 떨던 투견 하나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신 님?"
억지로 데칸과 투견을 뚫고 오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이신이 메리엘의 앞에 섰다.
"희생은 용납 못 해."
"하지만...."
"당장 그 신성 마법 풀어."
"이…신...님...."
화들짝 놀란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난 듯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신성력이 한순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한 번 풀어 버리면 다시 사용할 때까지 꽤 긴 시간의 쿨타임을 기다려야 하는 신성 마법.
원래라면 절대 풀지 않았을 텐데, 이신의 단호한 명령에 메리엘은 그 신성 마법을 단숨에 풀어 버렸다.
[천족 메리엘을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히든 퀘스트 – 천족과의 교감을 클리어했습니다.]
[『스탯 – 신성』을 획득합니다.]
[신성]
순수하고 성스러운 기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힘.
# 신성력을 획득합니다.
# 회복 효과가 10% 증폭됩니다.
'드디어 얻었다.'
이것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이신은 새로 얻은 이 힘을 만끽할 새도 없이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내며 눈을 빛냈다.
데칸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이신이 방금 막 새로운 힘을 개방한 것을 눈치챈 것이다.
"빨리 죽여! 지금뿐이야!"
"아니, 지금도 늦었어."
이제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
퀘스트를 깨기 위해 힘 조절을 할 필요도, 메리엘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그래도, 언데드들을 꺼내는 건 조금 그렇지.'
"군도."
이신의 부름에 팔찌에서 마력이 뻗어 나와 군도가 소환된다.
"불렀는가! 주인!"
군도가 당찬 목소리로 이신의 앞에 섰다.
군도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처음 2층에 올라왔을 때 마주했던 그 리자드맨 수호 전사와는 완전히 달랐다.
"저 사람들을 지켜."
"알겠다."
그리고 전장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권속.
허공에 생성되는 피의 포탈 속에서 걸어 나오는 매혹적인 여성.
그 보석같이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를 본 플레타가 헤벌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릴리안."
이신의 차가운 음성에 릴리안이 매혹을 풀자, 플레타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플레타뿐만이 아니었다.
데칸을 제외한 투견들 전부가 정신을 못 차리고 매혹에 당한 모습.
저 중에는 지난 웨이브 랭킹 상위권도 있었는데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이 멍청한 놈들이! 정신 안 차려!"
데칸이 일갈을 내뱉음에도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
그가 이를 악물고 릴리안을 보았다.
이신만큼이나 위험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여자.
자신조차도 순간 흔들릴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위험함을 보았기에 그는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내가 자제했다고는 하지만…저 녀석은 대단한데?"
정말로 조금 감탄한 릴리안이 데칸을 뚫어져라 보았다.
마치 '네가 얼마나 내 매혹을 버틸 수 있는지 보겠어.'라고 말하는 듯.
"그만."
"칫. 간만에 재밌는 놈이랑 놀아 보려고 했는데."
정말 아쉬운 표정을 지은 릴리안이 매혹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하아...하아...."
단순 매혹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전부 지친 느낌.
육체적 방어력과 정신적 방어력은 크게 다르다.
매혹은 그런 정신계를 건드리는 능력.
데칸은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쿵!
그때, 힘이 빠진 것처럼 무릎을 땅에 박아 버리는 데칸.
"사, 살려 주십쇼!"
다짜고짜 그가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이신을 향해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제66화
데칸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에, 매혹에서 벗어난 투견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뭐 해! 이 새끼들아! 당장 엎드려!"
"예, 옙!"
데칸의 일갈을 들은 그들이 바닥에 고개를 처박자, 이신은 물론 메리엘과 앨리스, 플레타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하아....'
뱀파이어 퀸, 릴리안.
그녀가 기본적인 패시브로 달고 다니는 매혹.
이것 때문에 평소에 릴리안을 함부로 소환하지 못한다.
광범위 매혹이라는 능력은 발현될 때마다 마력이 너무 급격하게 소모된다.
아직까지도 릴리안은 권속으로 다루기에 조금 부담스러웠다.
'당분간은 아예 본체로 변하지 말라고 해야겠어.'
은근히 자기 멋대로 행동할 때가 많은 탓에 그녀를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데칸"
"예!"
자존심 따위는 애초에 없는 건지, 아니면 상황 파악을 너무 잘하는 건지.
"난 널 살려 줄 생각이 없어."
"제발... 커헉!"
이신의 손짓에 릴리안이 만든 피의 가시들이 투견들과 데칸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간 피를 맛본 릴리안이 인상을 구겼다.
"쯧, 천박한 맛이네."
사람의 피를 그 자리에서 뽑아 먹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만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릴리안의 그런 모습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릴리안 님! 저, 저, 저는! 플레타라고-."
"꼬맹아, 좀 더 크고 오렴."
플레타의 이마를 검지로 슬쩍 밀어낸 그녀가 피 안개에 휩싸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 어디 가셨지?"
아직까지도 그녀의 매혹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플레타를 무시한 채 이신은 앨리스와 메리엘에게 다가갔다.
그녀들은 이 상황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 현자의 눈이 전혀 통하지 않았어."
그럴 것이다.
앨리스에 비하면 그녀의 격이 현저하게 높을 테니.
현자의 눈이 통하려면 적어도 같은 선상에 서 있어야 가능하다.
"너를 제외하면 처음이야."
이신은 신격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현자의 눈이 통하지 않았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가 현자의 눈을 사용해서 진실을 꿰뚫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테니까.
"조금 전 그분은 누구인가요? 순간적으로 느꼈던 그 기세는 저희 대천사님과도 비견될 정도였어요."
"나도 몰라, 그녀는 내 힘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니까."
굳이 릴리안의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었다.
정보를 풀 필요도 없고, 그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귀찮아질 게 뻔하니.
더 이상 무언가를 알려 줄 생각이 없다는 태도에, 그들도 더는 묻지 않았다.
"이 방 너머의 보스는 나 혼자서 깰 테니. 나가 있어."
"그래도 혼자선 힘들 수 있어요."
"그래, 조금이라도 우리가 도우면...."
"아니, 지금 너희 상태를 봐. 메리엘도 치명상을 당한 상태라 회복이 어려워. 빠져 있어."
단호한 이신의 태도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들었다.
아직까지도 헤롱헤롱거리는 플레타를 끌고 그들이 방을 나가자, 이신은 죽어 나자빠진 데칸과 투견들의 시체 앞에 섰다.
하프니스를 불러 데칸을 일으켜 세웠다.
검은 마력을 흘리는 데칸은 살아 있을 때만큼의 힘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성장시킬 방법은 있었다.
지난 골드 랜덤 카드에서 얻었던 스킬.
[시체 강화]
# 시체를 소모하여 언데드를 강화합니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투견의 시체들.
그것들을 제물 삼아 스킬을 사용했다.
"시체 강화."
[물카의 시체를 이용하여 데칸을 강화합니다.]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데칸의 힘이 1 올랐습니다.]
[데칸의 민첩이 2 올랐습니다.]
[베르망고의 시체를 이용하여 데칸을 강화합니다.]
[데칸의 지력이 2 올랐습니다.]
[디베르고이안의 시체를 이용하여 데칸을 강화합니다.]
[데칸이 『스킬 – 철갑옷』을 획득했습니다.]
[데칸의 힘이 1 올랐습니다.]
[구캉의 시체를....]
[....]
9개의 시체 중 8개가 성공하고 1개가 실패했다.
꽤나 높은 강화 성공률.
애초에 투견들의 능력치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성공 확률이 높았던 것 같다.
데클레인이 있던 곳에서 사용했을 때는 성공률이 30%도 되지 않았으니.
[데칸]
# 힘: 151
# 민첩: 189
# 지력: 102
# 불굴: 21
언데드가 된 데칸의 능력치.
방금 전 [시체 강화]로 녀석의 능력치를 올렸다 하더라도 아직 원래의 능력치를 전부 되찾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능력치를 가지다니.
더구나 불굴이라는 스탯.
릴리안의 매혹을 버텼을 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그 수치가 높았다.
[불굴]
# 어떠한 역경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단순하지만 그 효용성은 단순하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릴리안의 매혹을 버텨 낸 것 또한 이 불굴의 힘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근접 계열 전투원들에게 있어서 거의 필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스탯.
생각보다 데칸의 능력이 더 괜찮았다.
이번에 데클레인에게서 많은 지배력을 빼앗은 탓에 그림자 공간의 여유도 충분했다.
'이제 저 안에 있는 녀석만 잡으면 되는 건가?'
이신은 곧바로 거대한 문을 밀어 열었다.
크기에 비해 너무나 쉽게 열리는 문.
그 안에 있는 거대한 석상들이 이신을 반겨 주었다.
그그그극-
총 10기의 거대 석상들이 일제히 이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 창, 도끼, 방패 등.
각종 병장기들을 들고 있는 석상들이 천천히 그 거체를 움직였다.
쿠웅!
이신이 들어왔던 거대한 문이 닫히자 석상들이 안광을 불태웠다.
석상들은 이신의 주력 마법인 뇌전이나 냉기 계열 마법과는 거의 상극이다.
게다가 이곳은 일반 마법보다는 흑마법이 어울리는 전장.
그의 그림자 공간에서 언데드들이 나오고, 하프니스를 이용한 사의 세계에서 검은 포탈이 열렸다.
족히 백이 넘어가는 언데드들.
# 죽은 자들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됩니다.
[죽음의 지배자 효과로 인해 워리의 필요 지배력이 38에서 27로 감소합니다.]
[죽음의 지배자 효과로 인해 메이의 필요 지배력이 35에서 25로 감소합니다.]
[죽음의 지배자 효과....]
[....]
이신의 권속들인 워리, 메이, 벨티아르 등과 함께 쏟아지는 일반 언데드 병사들.
# 50 이상의 병력을 지휘할 때, 지배력이 10% 증가.
또 한 차례 늘어난 지배력에 전보다 많은 언데드들이 그의 군단에 배속되었다.
구궁.
석상과 비슷한 크기의 언데드는 그나마 벨티아르와 바크 정도.
검을 든 석상이 거대한 검을 내리치자, 언데드 둘이 한순간에 으깨졌다.
언뜻 보아도 심상치 않은 위력의 석상들.
그중에서도 가운데 투구를 쓴 기사 모양의 석상은 그 힘이며, 민첩함이며 다른 석상에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사계 소환].
지금은 전력을 아낄 때가 아니다.
원래라면 이곳의 보스를 혼자 처리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쿠웅!
벨티아르의 주먹에 맞은 석상 하나가 날아가 벽에 박혔다.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투.
그 속에서 날아온 석상의 조각을 이신이 마르티르를 꺼내 쳐냈다.
- 싸우시는 건가요? 주인님.
"그래,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 마법은 잘 안 통할 것처럼 보이는데요."
"맞아, 마법은 안 쓰려고."
- 그럼 어떻게 싸우시게요?
"이거 들고 싸우면 되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이신의 모습에 식겁한 그녀가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나도 검술은 제법 배웠다고."
그렇게 말하곤 마르티르를 꼬나 쥔 이신이 석상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 * *
처참하게 부서진 석상의 파편들 사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이신이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이신이 보스의 방 안에 들어가고 싸움이 시작되면서 그 진동을 느낀 일행들은 일찌감치 문 앞에서 그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석상의 조각들.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안쪽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이신!"
"괜찮아?"
"이신 님."
"괜찮아. 받아, 귀환석이야."
푸른색의 돌을 셋에게 하나씩 주었다.
석상 하나당 한 개, 그중 보스인 기사 석상은 3개의 귀환석을 가지고 있었다.
12개의 귀환석이 나왔지만 각각 하나씩 쓰고 남은 8개는 그냥 이곳에 두고 갈 생각이었다.
"미쳤네...진짜, 저 석상들을 혼자 다 처리했다고?"
"너, 진짜 정체가 뭐야? 내 고유능력이 안 먹히는 것하며...."
"이신 님은 혹시 신혈…이신가요?"
메리엘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이신에게 물었다.
고작 16층.
그것도 인간이 이러한 능력을 보여 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천계에서 제법 뛰어난 전사였던 자신과도 아득한 격차를 보여 주고 있으니, 이대로 탑을 더 오르면 정말 대천사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경한 생각까지 들었다.
"신혈? 그게 뭡니까?"
"그러게."
두 사람은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했으나, 이신의 표정은 신혈이라는 단어를 듣고 조금 굳어진 상태였다.
"아, 아니에요! 제가 실수를...."
"아니야. 난 인간이야."
"정말요? 정말 평범한 인간인가요?"
"그래."
이신은 메리엘의 반응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천성이 착하디착한 메리엘조차 무의식적으로 인간이란 종을 무시하고 있었다.
애초에 인간이란 약하고 하등한 종족이라는 게 상위급 종족들의 일반적 인식이다.
"인간은 잠재력이 많은 종이야. 느리지만 스스로 깨우치고 발전하기도 하지."
"그렇군요.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것 같아요."
메리엘은 이신을 보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앨리스."
"응?"
"이후 층에서 내가 너를 만날지 안 만날지는 몰라."
"어? 어...."
"우리 차원에 지금 문제가 생겨서 21층부터 29층까지 연락이 불가능해. 그니까 몸조심해. 절대로 네 능력에 대해 어디 말하지도 말고, 드러내지도 마. 어떤 상황이 생기더라도."
난데없는 이신의 말에 당황한 앨리스가 주춤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신이 그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이곳에 나가면 적어도 30층까지는 몸을 사려. 그리고 30층에 도착하면 나한테 메시지를 남겨."
"어… 알겠어."
앨리스를 20층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래선 제대로 된 성장을 하기 힘들다.
과거에 현자의 눈을 빼앗은 그 녀석을 만나려면 적어도 30층 이후가 될 테니, 그 위험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앨리스에게 당부를 마친 그가 귀환석을 움켜쥐었다.
"다들 수고했어."
"어? 나, 나한테는 할 말-."
"17층으로."
귀환석이 빛남과 동시에 사라지는 이신.
메리엘과 앨리스. 그다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플레타는 입을 삐죽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남은 그녀들과 대화라도 하려고 했지만, 이미 둘 다 이신이 가는 것과 동시에 귀환석을 사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후웅- 후웅-
멍하니 홀로 남은 플레타도 중얼거리며 귀환석을 사용하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16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엄청난 업적! 다수의 신들이 도전자님을 주목합니다!]
[소수의 신들이 도전자님과 대화를 원합니다.]
[242,800점을 달성했습니다.]
[242,80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8,300 올랐습니다.]
[마력이 15,980 올랐습니다.]
[힘이 7 올랐습니다.]
[민첩이 8 올랐습니다.]
[지력이 15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20 올랐습니다.]
[신성이 1 올랐습니다.]
한동안 대화 요청이 없던 신들이 무슨 일인지 갑자기 대화 요청을 원했다.
여태 대화 요청에 한 번도 승낙한 적이 없는지라 신들도 한동안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요청을 한다는 것은 이번 스테이지에서 무언가 그들을 자극할 만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자의 눈, 아니면 데클레인이겠지.'
현자의 눈에 대한 정보를 받은 건 나뿐이고, 신들은 그 고유능력에 대해 궁금할 테니까.
만약 그렇다면 앨리스에게도 대화 요청을 했겠지만 그녀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미리 당부를 해 두었으니 눈치 빠른 그녀라면 그 뜻을 잘 파악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근데 데클레인 때문이라면....'
죽음의 신의 권능.
그것을 압도하는 나의 능력이 그들의 엄청난 궁금증을 자극했을 것이다.
솔직히 데클레인이 사용한 권능은 죽음의 신의 아주 자그마한 편린 정도겠지만, 그것을 찍어 누른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그것도 고작 16층의 도전자가.
그것도 인간이.
"대화 요청?"
[신들의 대화 요청에 응하시겠습니까?]
"개소리. 네놈들이 그렇게 궁금하면 인과율을 소모해서 현신해. 그럼 알려 주지."
이러한 말에도 신들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것이 소중한 놈들이니까.
"그나마 신 같은 건, 죽음의 신 하나뿐이네. 신 같지도 않은 것들."
제67화
17층
[17층에 입장하셨습니다.]
[헤르만 사원을 무너트리십시오.]
넓은 평야에 세워진 오래된 사원.
푸른 하늘과 산뜻한 공기. 오래되어 부식된 돌과 여기저기 껴 있는 이끼들까지.
마치 지구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친숙한 세상이다.
"헤르만 사원?"
"저 승려들을 잡으면 되는 건가?"
이신뿐만 아니라 주변에 수많은 도전자들이 커다란 사원의 주위로 워프 됐다.
여러 도전자들이 합심해서 헤르만 사원을 무너트려야 한다.
그러나 협력과 동시에 경쟁은 기본이다.
벌써 움직이기 시작한 도전자들도 있었다.
사원 주변을 청소하는 승려들을 향해 도전자들이 다가갔다.
"그대는 누구인가?"
"뭐긴 도전자들이지."
"사원은 지금 손님을 받지 않는다네. 돌아가시게."
"싫다면?"
도전자의 도발적인 말에, 대화를 하던 승려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빗자루질을 하던 승려들 모두의 눈빛이 한순간 돌변했다.
"불청객이었군."
그저 맨손에 빗자루 하나 들고 가벼운 천으로 된 옷만 걸치고 있는 승려들.
그들이 사원의 가장 아래 계급이라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
파바바바박!
연속으로 이어지는 기습적인 연계 공격에 도발을 하던 도전자가 당황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다 죽여!"
같은 무리에 있던 도전자들이 합류했지만 수는 승려들이 더 많았다.
금세 밀리기 시작한 도전자들은 사원 밖으로 물러섰다.
"무슨 승려들이 뭐 이렇게 세?"
"아직 초입 아니야?"
"젠장할, 저 안에 있는 놈들은 얼마나 더 세려고?"
승려들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입력값인 로봇처럼 물러나는 도전자들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사원의 경계 밖으로만 나가면 괜찮은 것이었다.
"거기! 은색 지팡이 들고 있는 마법사분! 이쪽으로 와서 같이 합류하죠?"
"그래, 거기서 혼자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마법사 혼자 뭐 어쩔 거야? 저기 승려 하나만 붙어도 마법 하나 제대로 못 쓰고 도망 나오겠구만."
어떻게 또 비슷한 놈들끼리 모인 건지.
세 명은 주변에 보이는 유일한 인간인 이신을 불렀지만 이신은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야! 내 말 안 들려?"
계속되는 무시에 짜증이 난 남자 하나가 이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 할 때, 이신이 멈춰 있던 발걸음을 뗐다.
주변에 있는 도전자들은 모두 파악했다.
도전자들 대부분 지성이 높은 인간들이었지만 엘프, 수인족, 오크, 트롤 등등 여러 이종족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출난 마력 파장을 풍기는 이 하나가 감각에 잡혔다.
이미 그는 사원 안으로 진입한 상태.
너무 여유 부리다가는 사원의 방장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이신은 다른 도전자들을 무시하고는 사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대도 불청객인가?"
그런 이신의 길을 막으며 승려가 물었다. 하지만 이신은 그를 무시한 채 옆으로 지나가려 했고 승려는 이신의 어깨를 붙잡고는 그를 막았다.
그 모습을 보던 다른 도전자들은 무모해 보이는 이신의 행동에 곧 승려에게 얻어맞고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사원엔 아무나 들이지 않는다네."
"비켜."
강력한 손아귀 힘이 이신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승려의 손을 밀어내고 그를 지나쳤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멈칫한 승려가 다시 이신을 잡으려 할 때.
그의 그림자에서 솟구친 검이 그와 승려 사이를 가로막았다.
"뭐, 뭐야? 저건?"
"언데드?"
"네크로맨서였어?"
도전자들이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뿜는 언데드.
붉은 안광이 일렁이는 언데드의 검 위로 검은 마력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당신은...."
"넌 나랑 놀자고."
가볍게 휘둘러지는 워리의 검을 피한 승려가 잔뜩 굳은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워리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승려들.
그중 두 명의 승려가 이신을 붙잡으려 하자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땅을 박찬 워리가 다시 한번 이신의 등 뒤에 섰다.
"나랑 놀자니깐?"
그 말에 곧장 이어지는 합공이 워리를 압박하려 했지만 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승려들의 합공을 피하고 막아냈다.
이렇게 진을 치고 이어지는 연계의 합공은 워리의 능력과 완벽한 상극이다.
흐름을 꿰뚫는 워리의 적안에는 공격의 모든 경로가 훤히 보였다.
"크헉!"
서걱-! 쿵!
"카아악!"
"커억...."
하나둘 쓰러지는 승려들.
검에 베이고 복부가 찔리고 팔이 떨어져 나감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친...."
"저게 소환수라고?"
"네크로맨서가 저렇게 강해? 내가 본 놈들은 기껏해야 고블린들이나 멍청한 오크 놈들 몇 마리 소환하는 게 전부였는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던 그들은 순간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전 이신에게 자신들이 했던 말들이 떠오른 것이다.
"저분이 여기 깰 때까지 조용히 있자."
"그럽시다."
"그래."
워리가 승려들을 막고 있을 때, 이신은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 안에도 승려들은 있었으나 다만 그들 사이에는 다른 옷차림의 중이 있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것이오?"
"그냥 들어왔습니다."
그 말에 살짝 뜬 눈으로 이신을 살피던 그가 기운을 끌어 올렸다.
상대방이 사원 밖에 있는 승려들을 모조리 쓰러트리고 온 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이신의 옷에는 어떠한 전투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승려들의 무예를 가르치는 이판승인 자신도 밖의 승려들과 다수로 싸우면서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자신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상대가 자신보다 몇 수는 위라는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막으시오."
"상황 판단이 빠른데."
이판승은 셋, 승려는 일곱이다.
총 열 명의 중들이 이신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위기감은 없었다.
이들보다 몇 배는 강한 놈들 열을 불과 얼마 전에 쓰러트렸는데, 이런 중들은 전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바크, 군도."
그림자 공간에서 나오는 스켈레톤 오크와 팔찌의 마력으로 소환되는 리자드맨 수호 전사.
두 거대한 괴수의 위압감은 정신적 수양을 많이 했던 승려들조차도 움찔하게 만들었다.
"사술을 쓰시는군요."
"막아 봐."
후우웅- 쿵!
기습적으로 내려치는 바크의 몽둥이에 바닥이 금이 갔다.
이어지는 군도의 주먹이 승려 하나를 날려 보냈지만 이내 이판승의 공격에 살짝 뒤로 밀려났다.
이신은 이번에도 또다시 둘에게 이 자리를 맡기고 다음 방으로 넘어가려 했다.
이곳에는 이판승이 셋이나 있기 때문에 솔직히 저 둘로 이긴다고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사원 밖에서 곧 올 워리를 생각하면 이 정도 전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방으로 넘어가자, 이번에는 이판승 열여섯이 더미를 치며 수행을 하고 있었다.
'갈수록 많아지네.'
"벨티...음?"
이번에는 벨티아르를 이용해 이곳을 막으려 할 때, 다른 쪽 입구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신은 다급히 마력 파장을 갈무리하고 기둥 뒤로 숨었다.
묘족 하나와 인간 둘 그리고 엘프.
네 명으로 이루어진 파티 하나가 다짜고짜 들어와 이판승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6 대 4의 싸움.
더구나 일반 승려도 아닌 전원이 이판승이다.
저들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음에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싸움을 걸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있다는 뜻.
이곳 16인의 이판승이 있는 이 방은 고작 4명의 도전자들이 깨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이번 스테이지에 들어온 도전자만 거의 40명 가까이 된다. 그들 중 상당수가 협력하지 않으면 깨기 힘든 곳이 이곳인데, 저 4명은 제법 손쉽게 전투에서 이기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실력을 선보이는 엘프 검사.
아까 이신의 감각에 걸렸던 이였다.
이판승들이 진을 구축하려 할 때마다 절묘하게 파고들어 그 연계를 막아내고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꽂아 버리는 검격에, 부상을 당한 이판승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저 정도 검술이면 거의 워리에 뒤지지 않을 정도인데?'
아닐 수도 있다.
검에 대해선 그리 해박하지 못하니까.
다만, 그의 절묘한 마력 운용과 효율성은 워리 못지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판승 하나를 검격으로 베어 낸 엘프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이신이 있는 방향으로 뛰더니 마력을 끌어 올렸다.
기둥을 통째로 베어 버리는 검기.
그 위력적인 검격에 잘려 나간 기둥이 바닥에 쓰러지고 그와 동시에 일어나는 먼지 사이에서 이신이 걸어 나왔다.
"다짜고짜 이렇게 살수를 뿌릴 줄은 몰랐는데?"
이신은 꽤 놀란 상태였다.
자신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망설임 없이 죽이기 위한 일격을 날리는 결단력도 대단했다.
그의 마력을 정밀하게 캐치하고 있지 않았다면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를 위력의 검격이었다.
엘프 검사의 마력 파장을 느끼자마자 크기를 극도로 줄인 실드를 겹쳐 세우고, 꼬아 낸 실드로 유기적인 연결을 만들어 충격을 분산시켰다.
그럼에도 그 실드가 전부 깨질 뻔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죽음에 대한 감각은 이신에게 다시 한번 경각심을 심어 주었다.
솔직히 탑에 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위협적인 적들이 없어져 그 경각심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근데 이번에 엘프가 그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대단한데?'
놀란 것은 엘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검격을 막은 게 고작 실드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뛰어난 방어 마법을 펼친다 하더라도 반드시 뚫어낼 자신이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한 검격이었다.
근데 그것을 막아낸 게 고작 실드라니.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숨어 있던 것도 모자라, 고작 1위계 공용 마법인 실드를 이용해서 자신의 비전절기를 막아낼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이판승이 16명이든 32명이든 두렵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눈앞의 도전자는 두려웠다.
"뷔엘라, 무슨 일이야?"
싸움의 전세가 다 기울어진 상태에서 이판승들을 마무리 지은 묘족의 여자가 엘프에게 다가와 물었다.
"여기 괴물이 숨어 있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 그 긴장감을 한껏 표출하는 뷔엘라.
예리하게 바짝 날이 선 모습에, 묘족 여자는 뷔엘라에게 더 이상 말조차 걸기가 힘들었다.
잘못 건들면 자신이 베어질 것 같은 느낌.
"방금 그 기술은 뭐였지?"
이신의 물음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 뷔엘라.
그는 그 물음이 자신을 놀리는 거라 생각했다.
"나를 기만하지 마라."
"그런 적 없어."
"고작 실드로 막아낸 기술 따위가 뭐가 궁금하냔 말이다!"
그의 울분에 이신은 입을 다물었다.
엘프가 생각 외로 다혈질이었다.
먼저 공격해서 막아냈을 뿐인데 그것에 화를 내고 있다.
'죽이고 싶지는 않은데.'
아무리 못해도 데칸 급, 그 이상의 실력자.
뛰어난 도전자들은 남겨 두어야 한다.
이 탑이란 곳은 아무리 뛰어나도 언제 죽어 자빠질지 모르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인적 자원은 귀중하다.
"방금 그 기술. 그 기술엔 2퍼센트의 부족함이 있어."
"뭐...?"
제68화
"마력의 정제술. 엘프 특유의 마력 운용법."
서로 대치 중이던 상황 속에서, 갑작스러운 기술의 조언은 극도의 긴장감을 끌어 올리던 뷔엘라의 맥을 풀리게 만들었다.
'뭐 하자는 거지? 일부러 방심을 유도하는 건가?'
전투에 대한 긴장감이라곤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상대의 분위기와 더불어 엘프의 마력 운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뷔엘라는 잠깐 그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아주 훌륭한 마력 운용법이야. 물론,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베어 내는 것을 극대화한 마력 정제는 대단했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일족의 마력 정제술을 알지 못하는 이상,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걸 한 번에 파악할 정도로 마력 운용에 정통한 마법사라는 뜻.
고작 17층인 저층에서, 그것도 상위종도 아닌 인간이 그럴 리가 없다.
'정체가 뭐지?'
뷔엘라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신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음...그 기술의 이름이 뭐지?"
"...파절검(波切劍)이다."
"물결을 베어 내는 검이라. 제법 어울리는 작명이네."
고개를 끄덕이는 이신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기술을 선보이는 제자 앞 스승의 모습과도 같았다.
"물결을 베어 내기 위해선 흐름을 파악해야 하지. 자연의 흐름, 그것을 느끼고 잡아내는 건 재능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해. 그런 점에서 엘프들은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넌 최고의 재능을 가졌을 테고."
뷔엘라는 어느새 이신의 담담한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너의 마력 정제술은 이러한 흐름에 올라타기 위해서 아주 적합한 마력 운용법이야. 엘프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운용법이 없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뭐가 문제란 거지?"
"근데. 너한텐 안 어울려."
"뭐?"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검에는 어울리지 않아."
그 말에 잠깐 가라앉았던 뷔엘라의 감정의 소용돌이가 다시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헛소리하지 마라! 단 한 번 본 네놈이 무엇을 안다고!"
"그럼 또 한 번 휘둘러 봐. 정말 전력을 다해서. 그렇게 너의 믿음이 대단하다면 증명해 보라고."
까득-
이신의 도발에 턱이 부서져라 이를 갈던 뷔엘라가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처음 본 도전자가 다짜고짜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데 화가 나지 않을 검사는 없었다.
그만큼 일족의 마력 정제술은 그의 근본이나 다름없었고 그것을 버리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가르침의 장이 되어 버린 헤르만 사원의 안에서, 엘프의 옆에 있던 묘족과 인간 둘은 벙찐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뷔엘라조차 그들과 비교하기 힘든 강자인데, 그보다 더한 이가 있다.
자칫하다 저 남자에게 밉보여 죽이려 들기라도 하면 자신들은 뭘 하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것이 뻔했다.
"또?"
"물러나."
갑자기 둘이 다시 부딪히려는 모습에 기겁한 셋은 이 전투에 끼어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이 끼어들더라도 이 싸움에 영향이 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말 후회하게 해 주지."
거칠게 치솟는 그의 마력에 조금 전과 다른 분노가 담겼다.
'그래, 이거지.'
반드시 눈앞의 적을 찢어발기겠다는 의지.
그러한 그의 결의가 검에 모여들었다.
[파절검(波切劍)]
후우웅- 콰아아아아—!
휘몰아치는 마력의 격류가 이신을 덮쳤다.
이번에는 이신조차도 정말 긴장해야 할 정도로.
'하란다고 무작정 공격만 퍼붓네.'
연습과 실전은 다른 법.
이신은 헛웃음을 지으며 은밀하게 검은 마력을 펼쳤다.
그림자 공간 속에서 메이가 그의 뒤로 튀어나왔다.
메이는 망설임 없이 검을 내지르는 뷔엘라를 향해 마법을 날렸다.
"큭...!"
난데없이 마력의 파도가 뷔엘라를 덮쳤고, 분노에 휩싸여 목표 하나에 모든 정신을 쏟아붓던 그는 휘두르던 검을 거두지도 못한 채 무방비하게 메이의 마법에 맞고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커허억!"
얼마나 내상이 심한 건지, 입 밖으로 피를 몇 차례나 뱉어냈다.
"뷔, 뷔엘라! 괜찮아?"
"이런 비겁한! 검을 펼쳐 보라고 해 놓고 뒤에서 기습을 해?"
"이래서 흑마법을 쓰는 것들은!"
뷔엘라의 동료들이 그를 부축하며 이신을 향해 독설을 뱉어 댔다.
"정정당당 좋아하는 동료들이네. 그럼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붙어 볼까?"
그러한 이신의 말에 입을 앙다문 그들은 더 반박하지 못했다.
할 말은 더 있었으나 또 말했다간 저 미친 네크로맨서와 정말 일대일로 붙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끄으윽...."
"맷집이 좋네."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던 뷔엘라가 핏발 선 눈으로 이신을 보았다.
그러나 이내 곧 체념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움켜쥔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던 뷔엘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릴 때부터 내가 듣던 말이 있다, 이 불같은 성격을 죽이라고. 엘프들은 언제나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이야. 근데 허무하게 죽게 되는군."
"누가 죽인다는 거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뷔엘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이신은 그런 그에게 관심이 사라진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를 뭐 엄청 대단한 엘프로 생각하나 본데, 너 정도는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여. 그리고 네가 뭔데 혼자 너의 죽음을 판단하는 거야?"
자신을 잔뜩 무시하는 말투에 뷔엘라의 가라앉아 있던 성질머리가 다시 붕 뜨기 시작했다.
"엘프치고는 이성적인 면이라곤 전혀 없는 다혈질 성격에, 검을 휘두를 줄만 알지 막상 공격은 피하지도 못하는 머저리 아닌가?"
까드득- 까득-
점점 그 하얗던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분노에 지배되어 가는 모습에 옆에서 그를 케어하던 동료들도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만…해라...."
"싫다면?"
"이…망할…자식이...."
이미 큰 내상을 입었을 텐데도 그의 몸에서 마력이 움직임이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마력의 흐름을 관찰하던 이신은 그의 몸 곳곳에 망가진 마력혈의 악화가 멈춘 것을 발견했다.
'이건....'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 가속화되는 마력의 움직임.
눈의 핏줄이 모두 터지기라도 했는지 시뻘게진 그의 눈을 본 이신은 확신했다.
'...설마, 버서커?'
그렇다고 하기엔 방금 기습했을 땐 그런 전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후우웅—!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기습적인 올려 베기.
간발의 차로 몸을 돌려 피해낸 이신은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방금 각성한 건가?'
버서커라는 특성은 정말 극히 소수만이 타고나는 재능이다.
일격 필살의 한방으로 죽이지 않는다면 정말 그 몇 배는 강한 적을 상대할 각오를 해야 할 정도로 미친 특성.
지금은 이제 막 각성을 시작했기 때문에 완벽한 버서커는 아니겠지만, 뷔엘라가 이번 스테이지를 클리어한다면 아마 90% 이상의 확률로 버서커 클래스를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짜 전 차원에서 명성을 날릴 만한 강자의 반열에 오를 기반을 얻는 것이다.
온몸의 정신을 집중하여 뷔엘라의 검을 피해 내고 있었지만 현재 신체 능력으로는 점점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잘못 불러내면 권속을 잃는다.'
지금 이 상태의 뷔엘라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워리와 메이조차도 부족하다.
'릴리안.'
붉은 포탈을 통해 나타난 릴리안의 혈마법이 뷔엘라의 검을 막아냈다.
마치 늪에 빨려 들어가듯, 검은 허공에 생긴 피의 웅덩이 속으로 들어갔다가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으아아아악!"
촤아악!
그러나 그것마저 힘으로 빼낸 그가 방금 혈마법을 쓴 릴리안을 보았다.
"버서커라니, 너 정말 맛있는 피를 가졌구나."
싱긋 웃는 그녀가 손짓하자, 주변에 쓰러진 이판승들의 피가 몰려들어 커다란 드릴과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닿는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모습.
[파절검(波切劍)]
허나, 광폭화를 시작한 뷔엘라의 파절검도 그에 못지않았다.
카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양쪽이 그 반동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안색이 나빠지는 건 이신이었다.
[마력이 15,200 소모됩니다.]
[마력이 6,780 소모됩니다.]
[마력이....]
아무리 지금의 마력이 수십만이라 하더라도 이 속도로 줄어드는 것은 안 된다.
버서커는 지치지도 않고 피곤해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을 뿐.
이러한 전투는 의미가 없었다.
마력 소모가 두 배는 빨라지더라도 빨리 이 전투를 끝내야 한다.
[아이스 포그(Ice fog)]
[일렉트릭 체인(Electric chain)]
[밤(Bomb)]
한순간에 급격히 낮아지는 전장의 온도.
살 알갱이들이 뷔엘라의 주위로 모이고 그 알갱이들을 타고 전격의 줄기가 움직인다.
치지지직!!
"크윽...."
잠깐의 멈칫거림과 동시에 신음을 흘리긴 했지만 뷔엘라는 버텨냈다.
그러나 이후에 터지는 뇌전의 얼음 알갱이들이 그의 살갗을 파고들어 그의 근육들을 갈라냈다.
"크아아아...."
아주 잠깐 느려지는 그의 움직임에 맞춰 릴리안이 마지막 타격을 꽂았다.
"꺼어억...."
바닥에 쓰러진 뷔엘라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내 기억 속에 없다는 건 일찍이 죽었다는 거겠지."
이 정도의 실력자가 이름을 떨치지 못했을 리는 절대 없다.
그렇다는 건 평생 각성하지 못하고 살았다던가, 그 다혈질의 성격 때문에 일찍 객사한 것이겠지.
[신성한 치유]
이전 층에서 얻어낸 신성력.
그것으로 17층에서 약간의 포인트를 주고 스킬을 구매했다.
고작 2의 신성 스탯으로 쓸 수 있는 신성 마법은 거의 없었지만 이것만으로도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치료를 대강 끝낸 이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주변에서 몸을 바들바들 떨며 지켜보던 셋을 눈짓으로 불렀다.
"예? 저, 저희요?"
"그래, 와서 얘 지켜."
"그러다 깨서 또 회까닥하면 어떡합니까?"
"안 그럴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 너희한테 선택권이 있는 거 같아?"
그렇게 말하며 차디찬 눈빛을 보내는 이신의 모습에 놀란 그들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워리."
아까 이판승과 승려들을 처리하고 돌아온 워리를 불러 뷔엘라를 지키게 한 뒤 이신은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언제까지고 뷔엘라가 깰 때까지 옆을 지키고 있을 순 없기 때문에.
'깨면 알아서 오겠지.'
정신 차리면 깨달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큰 기연을 얻었던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의구심도 커질 것이다.
"이번엔 사판승인가?"
이판승과 사판승이 각 10명씩 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바깥의 소란은 알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대단한 실력이군."
"이 이상은 가지 못하네."
"막아 보던지."
"혼자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검은 마력이 발산하고 언데드들이 방 안에 들어선다.
이신은 구태여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직접 보여 주면 될 뿐이니.
쿠웅!
커다란 대검을 역수로 쥐며 땅에 박아 넣은 벨티아르가 거센 함성을 내지른다.
"죽음의 군단이여, 저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라."
"쉽진 않을 걸세."
근접 격투술을 주로 연마한 이판승들과 기공을 주로 다루는 사판승들은 아주 익숙하게 서로 합격진을 이루며 언데드들을 하나둘 부쉈지만.
"연계는 이쪽도 가능하단 말이지."
승려들과 똑같은 전투 자세를 취하는 언데드들이 나타나며 그들의 합격진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특하도다!"
이판승들만 있을 때와는 또 완전히 달랐다.
사판승의 합류는 그들의 부족한 연계를 완벽하게 메꾸고 있었기 때문에.
이신의 주력 권속들을 제외한 언데드들은 그들에게 크게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사계 소환]
이신의 권능에 가까운 스킬이 발현되기 전까지는.
제69화
헤르만 사원에 나타난 사계(死界).
짙은 살기 속에서 이판승과 사판승들이 언데드 군단에 밀리고 있을 때.
그 사이를 뚫고 날아오는 한 줄기의 기공이 정확히 이신을 향했다.
쿠웅!
이신이 만들어 낸 실드가 녹아내림과 동시에 기공이 흩어졌다.
그가 기공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애꿎은 승려들은 건드리지 말고 나와 얘기하세."
"주지승입니까?"
"그렇다네."
갑작스러운 주지승의 합류.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주지승이 멋대로 자신의 방에서 나와 이런 행위를 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뭐지?'
무언가 바뀌었다.
조금 전 주지승이 날린 기공 또한 이상했다.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위력이었다.
차갑게 굳어진 이신의 눈이 그를 관찰하듯 보았다.
그러나 주지승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죠."
그 말과 함께 치열하게 벌어지던 전투가 전부 멈췄다.
"따라오게."
뒤에서의 기습은 생각하지 않는지, 주지승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예상치 못한 상황.
분명 이신은 이 스테이지에서 특별히 다른 무언가를 한 적이 없었다.
히든 스테이지라도 생겼다면 시스템 메시지가 떴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사원의 중앙.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투박한 방 안에 주지승과 이신이 멈춰 섰다.
주지승은 여전히 뒤 돌아 있는 상태였고 이신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자네는 이곳에 왜 왔는가?"
담담하고 차분한 음성.
그러나 그 안에 왠지 모를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방장을 죽이러 왔습니다."
이신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가 이미 다 알고 물어본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사라진 주지승이 이신의 앞까지 다가왔다.
쿠웅!
주지승의 주먹이 이신의 실드를 때렸지만 실드는 단 한 겹도 깨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는지 그의 연계는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졌다.
쾅! 쾅! 쾅!
열심히 실드를 피해 술사를 직접 가격해 보려 하지만 역부족.
금세 공수의 위치가 바뀌었다.
쿠궁! 쿵!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이 주지승을 노리고 떨어졌다.
그러나, 주지승은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역시나.
이신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주지승의 실력이 이전보다 월등히 상승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일단 그를 잡으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이신은 제대로 마법을 연계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의 숫자가 점점 많아질 뿐 아니라, 허공에서 전조 없이 터지는 공기의 폭발이 주지승의 발을 묶었다.
쿠궁!!
"크억...."
날렵하게 마법을 피하던 것도 잠시뿐.
금세 낙뢰에 직격당한 주지승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안으로…들어가시게."
"이번엔 방장 차례입니까?"
"방장님이 기다리고 계시네."
"당신을 죽이고 가도 됩니까?"
이신의 싸늘한 말에 주지승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죽고 싶지는 않나 봅니다?"
주지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전생의 주지승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도전자들을 막아내다가 쓰러졌었다. 목숨을 구걸하지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근데 도대체 무엇이 이번 스테이지를 변하게 만든 것인가?
"대답이 없군요."
이신의 은나무 지팡이가 무릎을 꿇고 있는 주지승을 향했다.
마력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하는 순간,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이신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주지승을 건들지 말라고.
'허.'
주지승은 죽여도 그만, 안 죽여도 그만이다.
그가 방장에게 가라고 한 시점부터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죽이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방장이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서 연기한 것이었다.
근데 정말로 방장이 그를 지키기 위해 움직일 줄이야.
이신은 속으로 혀를 차고는 마력을 거두고 주지승을 지나쳐 걸어갔다.
"…살려…주는 건가?"
"예."
그 말을 끝으로 주지승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력하게 적을 보내야 하는 그의 원통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생긴 이 모든 의문들.
다음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방장의 모습을 보자,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 싸움이 끝나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란 것을.
"왔는가."
"왜 저를 기다린 겁니까?"
"어차피 올 게 아니었나?"
"맞습니다.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알고 있네. 아무튼 주지승을 살려 줘서 고맙군. 내가 자네를 바로 데려오라고 했건만, 멋대로 행동하다 죽을 뻔했으니...그가 없다면 이 사원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을 걸세."
단순 자신이 나이가 들어 후계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기엔, 방장은 아직 살날이 한참이나 많아 보였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듯한 말투.
이제 벌어질 싸움에서 자신이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뭐지?'
이 스테이지에 들어오기 전에도 17층에 대한 정보는 커뮤니티로 어느 정도 확인했다. 전생에 탑에서 보았던 방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근데 지금 눈앞에 있는 방장은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군."
"당신, 죽음을 예감하고 있군요."
"난 이길 걸세. 그리고 이 사원을 지킬 생각이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무언가 비틀려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방장은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근데 왜 방금 그런 말을 한 겁니까?"
"만약을 대비한 거라네."
"내가 아는 방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신은 본능적으로 이 대화를 더 이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안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야 한다고.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자네가 아는 방장들과 나는 다른 사람이라네."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신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제가 누구를 말하는 거라 생각하고...."
"나와 같은, 동시에 다른 방장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이신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복제된 가짜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고 왜 하필 이번 스테이지의 방장만이 변한 것인가?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얼굴이군."
"그렇습니다."
"나를 이긴다면 아는 선에서 얘기해 주겠네."
뒷짐 지고 있던 한 손을 앞으로 내보이며 그가 자세를 잡았다.
일변하는 분위기.
그 또한 무술이라는 분야에서 천재의 반열에 든 승려이다.
아까 전과는 다른 주지승의 실력을 생각하면 방장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상대와의 전투에 돌입하자, 느껴지는 이상함.
'신격의 효과가 안 나타나?'
자신보다 신격이 낮은 이에 한하여 모든 능력치의 10% 증가.
여태 탑을 오르며 당연하게 느껴져 왔던 그 힘이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신격이 있다고?'
이신의 고민은 방장으로 인해 이어지지 못했다.
투웅-
스프링이 튕기듯 그 자리에서 도약한 방장이 기의 덩어리들을 쏟아 냈다.
쾅! 쾅! 쾅! 쾅!
사원 전체가 흔들린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위력.
은밀하게 펼쳐진 이신의 마력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며 사방에 전격을 내뿜었다.
필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신체의 봉인 때문에 아직까지도 6위계 이상의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이러한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물망 같은 전격의 줄기들이 사방에서 방장을 덮쳤지만 그것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던 그의 몸 위로 무수히 많은 얼음의 알갱이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아이스 포그(Ice fog)]
공기 중에 생성된 수분을 타고 더욱 광범위해진 전격.
그러나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방장의 마력에 의해 올라간 온도는 주변에 만들어진 얼음 알갱이들을 한순간에 증발하게 만들었다.
콰아앙!!
그와 동시에 일직선으로 질주하는 방장의 기공이 이신의 실드를 찢어발길 것처럼 쇄도했다.
저번처럼 한 곳에 집중하여 실드를 펼치는 편법은 기공을 막는 데는 쓸 수 없었다.
결국 넓게 펼쳐진 이신의 실드가 기공에 터져 나갔다.
[10,7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윽...."
이신의 로브 앞섬이 기공에 찢어지고 그 여파로 가슴팍이 붉게 물들었다.
실드로 대부분의 충격을 상쇄시켰음에도 이 정도의 피해라니.
쉴 틈을 줄 생각이 없는지, 방장이 다시 한번 쇄도해 왔다.
쿠웅!
바닥에서 솟구치는 돌벽이 방장의 주먹을 막아내며 바스라졌다.
이신의 주력 마법인 뇌전 계열은 방어보단 공격에 치중되어 있는 계열.
방어에 특화된 대지 계열의 마법은 이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고 실드처럼 말도 안 되는 응용을 하기에는 리스크가 컸다.
속성의 상성 차이를 보아도 이점이 없는 상황.
어설픈 대지 계열 방어 마법보다는 실드를 다시 한번 개조해서 적절하게 이용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던 찰나.
우우웅―
이신의 감각에 위험천만한 마력의 에너지가 잡혔다.
방장의 주먹에 빠른 속도로 모여드는 마력.
조금 전의 기공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의 기술이었다.
'자칫하면 죽는다.'
죽음에 대한 감각이 급속도로 치솟아 오른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죽음에 대한 감각인가.
아까 전 뷔엘라의 파절검이 그저 다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드는 정도였다면.
방장의 이 기술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기술이었다.
"멸공파(滅攻波)."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험한 마력의 덩어리가 허공을 뚫고 뻗어 온다.
미친 듯이 박동하던 이신의 심장이 그 찰나의 순간 느려졌다.
항상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탑을 올랐었다.
오래간만에 느껴지는 이 위기감이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매일을 치열하게 마법을 연마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살기 위해서,
가족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서,
탑을 오르기 위해서.
어떻게든 성장해야 했고,
끊임없이 발전해야 했다.
'한동안 너무 잊고 살았다.'
그때의 그 감각을.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이신의 마력만이 빠르게 가속했다.
지끈거리다 못해, 깨질 것 같은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의 연산이 이어지고, 마법이라는 분야에 눈부신 재능을 가진 그의 직관이 빛을 발한다.
대지 계열과 화염 계열의 융합.
단순한 속성의 융합을 넘어선 새로운 방식의 결합.
'상상력의 개화.'
뭉개지고 일그러진 돌덩이들이 가열되고 다시 뭉쳐지고를 반복하며 새로운 성질로 변한다.
[실드(Shield)]
[플레이트(Plate)]
단단하기 그지없는 그의 실드 위로 덧씌워지는 강철.
[스틸 플레이트 실드(Steel plate shield)]
콰아아아아― 쿠웅!!
방장의 멸공파가 발현되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만들어진 원소의 결합이.
이신의 손에서 창조된 새로운 강철 계열 마법이 멸공파를 막아내며 그 의무를 다했다.
[2개의 원소를 결합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칭호 – 마법의 개척자』를 획득합니다.]
[『칭호 – 강철의 마법사』를 획득합니다.]
"아니!"
멸공파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가 놀란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조금 전, 기공으로도 상대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혔기에 이번 멸공파로 반드시 치명타를 먹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는 마법으로 그 멸공파를 완벽하게 막아낸 것이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철의 방패는 멸공파를 막아내고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지만, 술사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어떻게 고작 인간이, 신의 권능을...."
"권능?"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방장.
이신은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했는데 정말 신이 개입했을 줄이야.
이를 악문 그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낙뢰]
가쁜 숨을 내쉬는 방장의 위로 두꺼운 벼락이 떨어져 내린다.
쿠궁!! 치이익!!
"크허어어어억!"
온몸이 전격에 마비되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
마력을 둘러 낙뢰를 막으려 해 보았지만 멸공파의 반동으로 여의치 않았다.
쿠궁!
"크허억!"
쿠궁! 쿠궁! 쿠구궁!
"으…어억...."
두 번째 낙뢰까지도 방어를 해 보았지만 이후 떨어진 세 번의 낙뢰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맨몸으로 버텨 내야 했다.
거의 반 시체가 되다시피 한 방장의 앞에 이신이 다가갔다.
"내가 이겼으니 약속 지켜. 어떤 망할 신이 널 이렇게 만든 거지?"
"축…복…신...."
"뭐?"
그 망할 신이 개입했다니.
애초에 축복의 신이 이렇게 스테이지에 깊게 개입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신이었던가?
고작 이제 막 17층에 올라온 도전자 하나를 제거하기 위해 인과율을 소모할 정도로 축복의 신은 대담한 놈이 아니다.
"또… 있…다...."
"또 있다고?"
제70화
"파멸...의…신...."
"파멸의 신?"
매우 위험해 보이는 신명(神名).
전생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신명이었다.
전생에서는 80층을 넘어가고 나서야 신에 대해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00층에 오를 때까지 그 이름을 못 들어 봤다는 것이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가…내게 깨달음을...커억...!"
거세게 피를 토하는 방장.
울컥거리는 핏물 때문에 더 말을 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신성한 치유]
심각해 보이는 상태 때문에 신성력을 이용해서 그를 치료했다.
그랬음에도 그의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나마 말하기가 조금 편해진 정도.
"고맙…네."
그의 온몸의 혈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
이건 낙뢰를 맞은 영향이 아니다.
조금 전, 자신의 능력에서 한참이나 벗어나는 멸공파를 쓴 대가였다.
'신격이 사라지고 있다.'
한시적인 힘이었던 건가?
멸공파는 신격이 없으면 발현조차 힘들 정도의 기술.
그를 지지해 주던 신격이 사라지니 그 반동 또한 심해지는 것이었다.
"자네를…죽이면...사도로 만들어 준다고...."
까득-
신들의 역겨움에 이가 갈렸다.
과연 그들이 방장을 사도로 삼았을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방장의 재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신들의 눈에는 한참이나 못 미친다.
애초에 사도로 만들 정도의 인간이었다면 이런 스테이지의 인형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파멸의 신은 몰라도, 축복의 신은 그럴 능력이 없다.
스테이지 내의 인물을 사도로 만들고 세계선을 확장시키는 건 죽음의 신 정도 되는 급이나 가능한 일이다.
방장은 이용만 당했을 뿐이었다.
"이제…이 세계는…사라지는 건가...."
"...알고 있던 겁니까?"
"...내가 사라지더라도...이곳의 사람들은 살리고 싶었네...."
"애초에 살 생각이 없었군요."
방장은 애초에 멸공파를 쓰는 시점에서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했던 것이다.
신들이 전해 준, 자신을 지켜 주던 그 힘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이신을 죽이고 빠르게 다른 도전자들을 처리한다면 이 사원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애초에 사도 따위엔 관심도 없었고 신들을 믿지도 않았던 게 분명하다.
'이 새끼들이.'
애초에 이 스테이지의 운명은 방장의 목숨에 달려 있다.
그가 죽는 순간 이 세상도 끝이다.
방장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신들에게 속은 것이었다.
"미안…하네...."
급속도로 약화되던 그의 몸이.
희미하게 살아남아 있던 생명의 불씨가 꺼졌다.
[17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놀라운 업적! 다수의 신들이 도전자님을 주목합니다.]
[175,000점을 달성했습니다.]
[175,00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4,200 올랐습니다.]
[마력이 13,300 올랐습니다.]
[힘이 4 올랐습니다.]
[민첩이 7 올랐습니다.]
[지력이 13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12 올랐습니다.]
[헤르만 수양복을 획득합니다.]
차게 식어 버린 그의 시체 위로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
그 죽음 안에 존재하는 삶의 궤적이 이 세상 위로 덧씌워졌다.
화아악―
여느 때처럼 평화롭던 헤르만 사원 위로 포탈이 생겨난다.
포탈에서 나온 사도와 신도들이 사원에 침입했다.
꿈틀꿈틀거리던 사도의 오른손이 날카로운 날을 세우며 칼로 변했다.
"안진 방장은 어딨지?"
"당신들은 누구-."
서걱! 툭.
칼질 한 번에 허무하게 떨어지는 승려의 머리.
"됐다, 내가 찾지."
오른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사도가 허겁지겁 뛰쳐나오는 승려들을 보았다.
"이곳에 온 목적이 뭡니까."
"안진 방장. 그에게 전해라, 최대한 빨리 나오지 않는다면 이곳의 전부가 죽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한 그가 양손에 예리한 날을 세웠다.
"나왔으니, 용건을 말하시게."
그때, 승려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던 안진이 푸른색의 근육 덩어리가 뭉친 것처럼 생긴 사도를 바라보았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강하게 느껴지는 압박감.
도저히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네가 안진 방장인가?"
"그렇다네."
"힘을 숨긴 건가, 아니면…."
퉁. 파앙―!
땅을 박차고 안진에게 쇄도한 사도가 주먹을 내질렀다.
안진과 사도의 충돌이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 냈지만 날아가는 건 안진뿐이었다.
쿵!
"…이게 전부인 건가."
"크윽...."
"그렇다면 실망이 크군."
다시 쇄도하는 사도.
그에 맞서는 안진.
둘의 대립이 연달아 이어지지만 싸움의 형세는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쿨럭!"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진 안진이 핏발 선 눈으로 눈앞의 사도를 보았다.
괴물이었다.
단 한 번의 유효타도 먹이지 못할 정도의 괴물.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쓰디쓴 패배였다.
"쓸데없는 발걸음을 했군. 넌 그저 재료 정도가 적당하겠어."
푹-! 촤악!
다시 칼날로 변한 그의 손이 안진의 머리를 꿰뚫고 피를 흩뿌리며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다시 돌아온 배경.
이신의 눈앞에는 그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쓰러진 안진이 있었다.
"개새끼들."
이번 스테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신들에게 강제로 그 삶을 강탈당하고 탑의 인형으로서 사용되어야 하는 인생.
안진은 그저 그들에게 사도로서의 재능이나 자격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것이다.
지구의 인간들뿐만이 아니었다.
전 차원의 수많은 종족들이 신들의 횡포에 휘둘리고 있었다.
"너!"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이신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친 몸을 이끌고 찾아온 뷔엘라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혼자 방장을 죽였군."
"...."
"이번에 너 덕에 깨달은 것이 많다. 진짜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겠더군. 고맙다."
그는 진심으로 이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뷔엘라."
"왜 그러나?"
이신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져 있었고 그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대화의 방]
이신과 뷔엘라의 주변으로 퍼지는 무형의 막이 그 둘을 감쌌다.
[도전자 이신이 대화의 방을 사용하였습니다.]
[도전자 뷔엘라가 대화의 방에 초대됩니다.]
[대화의 방 안에서의 대화는 그 어떤 존재도 엿들을 수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대화의 방이라는 아이템 사용에, 당황한 뷔엘라가 놀란 눈으로 이신을 보았다.
"넌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신? 갑자기 무슨-."
"말해."
"음... 신이라...."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턱을 잡고 생각에 빠진 그가 말을 이어 갔다.
"우리 엘프 부족도 믿는 신이 있었다, 부족장님은 항상 말하셨지. '그 신이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그 신이 보살펴 주기에 우리 부족이 안전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무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이 말을 하면서 점점 씁쓸하게 변해 갔다.
"어릴 때만 해도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지만...결국 우리 부족은 멸종했다. 다른 종족의 습격으로 말이지, 신이 정말 우리를 지켜 주고 있었다면 그렇게 멸종했을까? 신이 지켜 주고 있는데, 고작 그런 놈들에게?"
차분하게 과거를 회상하던 그의 음성에 점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신이란 놈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근데 멍청한 우리 부족 어른들은 죽음의 직전까지 신께 기도하고 있었지! 이런 머저리 같은! 족장님의 도움으로 나만이 살아날 수 있었다. 정말 운이 좋았지."
평온에서 분노로.
그리고 다시 분노에서 슬픔으로.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난 그 이후로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이란 존재 자체도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 나는 믿지 않아."
그의 말이 끝나 갈 때쯤, 이신의 굳어졌던 표정은 풀려 있었다.
"맞아, 신이란 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야. 그저 우리보다 조금 뛰어난 존재일 뿐이지."
"근데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거지?"
"난 신을 죽일 거다."
"뭐?"
갑작스러운 이신의 선언에 이번에는 뷔엘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래."
아무리 자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한들, 신이라 칭해지는 존재가 대단한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다.
탑의 시스템으로 자신에게 이러한 보상을 주고 어딘가에서 도전자들의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만 해도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신의 권능을 받은 적 있어?"
"말했지 않나? 난 신을 믿지 않는다고. 난 오롯이 나의 능력만을 믿는다."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어때, 내 신살의 계획에 동참하는 게?"
그의 제안에 뷔엘라는 선뜻 그러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너무 터무니없는 목표이기 때문이었다.
"큭."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보던 이신이 비웃었다.
"뭐가 웃기지?"
"쫄았나?"
이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뷔엘라의 눈이 뒤집혔다.
'끝났네.'
"쫄다니! 무슨 그런 천박한 말을! 이 뷔엘라가...."
한동안 그가 열변을 토해내는 것을 잠잠히 듣던 이신은 참다못해 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
"그래서, 동참하겠다는 거야?"
"아하하하! 당연하지! 신 따위, 탑을 조금만 더 오르면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좋아, 계약하자고."
그의 품속에서 꺼내진 하나의 두루마리.
하마터면 아까 방장의 기공에 망가질 뻔했지만 다행히 보호 마법 덕택에 망가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두루마리를 허공에 던지자 그 안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처럼 뻗어 나와 이신과 뷔엘라의 발밑에 그려졌다.
"계, 계약?"
"걱정 마, 강제로 노예계약을 맺을 생각은 없으니까."
[마력의 계약서]
갑: 이신
을: 뷔엘라
1. 갑과 을은 탑의 공략이 끝날 때까지 서로 해를 입히지 않는다. 다만, 탑의 시험으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한시적으로 1번 조항은 무효화된다.
2. 을은 갑이 신살을 행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협조해야 한다.
3. 을은 갑이 탑을 공략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협조해야 한다.
4. 을은 계약의 내용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위의 네 가지 사항을 지키지 않을 시, 마력을 전부 잃게 된다.
이신과 뷔엘라의 앞에 각각 떠오른 마력의 계약서.
"이게 노예계약이 아니라고?"
"그래, 그냥 서로 신을 죽일 때까지 협조하자는 조건일 뿐이야."
"누굴 바보로 아는가!"
말도 안 되는 계약 내용에 분개한 뷔엘라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내가 왜 대화의 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뭐?"
"이 이야기를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야. 근데 내가 너를 뭘 믿고 그냥 보내? 계약을 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널 없앨 수밖에."
급속도로 치솟는 이신의 검은 마력이 공간을 뒤덮었다.
'아까 보여 줬던 게 전력이 아니었어?'
검은 마력에서 느껴지는 짙은 사기와 압박감.
더구나 지력 스탯이 얼마나 높은 건지, 자신의 마력과 비교하여 그 순도와 밀도 또한 차원이 달랐다.
"진짜…죽일 건가?"
"그래."
"강제로 노예계약 맺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노예계약이 아니니까."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이신이 뷔엘라를 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연기를 하는 건지.
뷔엘라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게 아니라고?"
"그래."
"네크로맨서들은 이런 식으로 권속을 늘리나?"
"...."
"아! 드디어 알았다, 넌 네크로맨서인 척하는 마법사였어.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군. 그런 말도 안 되는 마법 실력에 그렇게 강한 권속을 부릴 수 있을 리가-."
쿠궁! 치이익!!
갑작스럽게 내려치는 낙뢰를 감지한 뷔엘라가 다급하게 몸을 움직여 그것을 피해냈다.
바닥에 선명하게 새겨진 뇌전의 흔적.
"말이 많네. 안 하겠다는 거지?"
"무, 무슨 소리를! 신 정도야! 내가 죽일 수 있다 하지 않았나! 계약, 하지. 한다고!"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신과 뷔엘라가 마력의 계약으로 묶입니다.]
[대화의 방의 지속시간이 끝났습니다.]
[대화의 방이 사라집니다.]
새하얀 피부가 붉게 보일 정도로 시뻘게진 뷔엘라의 얼굴이 막이 사라지며 드러났다.
그에 반해, 이신은 아주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좋아. 넌 나랑 같이 20층까지 올라간다."
"좋긴 뭐가 좋나!"
제71화
개입
18층의 세계.
19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안 되겠다. 너 옷 갈아입어."
뷔엘라와 같이 길거리를 걷던 이신은 쏟아지는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뷔엘라의 외모 때문에 어딜 가든 시선이 모여드는 탓에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너 너무 옷이 휘황찬란해."
"이게 뭐가 휘황찬란하지? 그건 옷이 아니라 내 외모가 화려한 거다."
엘프들의 외모가 기본적으로 뛰어나기는 하다.
인간들의 미의 기준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족들에게 엘프는 아름다운 존재다.
그리고 그러한 엘프 중에서도 뷔엘라는 더 화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신도 꽤나 잘생긴 편이었지만, 뷔엘라의 옆에 있으니 그 외모도 빛이 바랬다.
"너무 주목받아 봤자 좋을 거 없어. 이거 입어라."
"이게 뭐지?"
이번 17층을 클리어하고 받은 옷인 헤르만 수양복을 뷔엘라에게 건네주었다.
사원에 있던 승려들이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승복.
매우 투박하면서 심플한 디자인의 갈색 옷이다.
"이걸 어떻게 입으라는 건가!"
자신이 입고 있던 옷과 비교하니 너무 후줄근하게 보이는 옷이었다.
언뜻 보면 거지들이 걸치고 다니는 옷과 비슷해 보일 정도.
헤르만 수양복을 받아 든 뷔엘라가 질색했다.
"헤르만 수양복이야. 입으면 훈련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테니, 입어."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헤르만 수양복]
헤르만 사원의 방장이 수양할 때 입던 승복입니다.
# 착용 시, 신체 능력치 50% 감소
# 착용 시, 스탯 성장력 80% 증가
# 착용 시, 마력 감응도 50% 감소
# 착용 시, 정신력 30% 증가
# 착용 시, 집중력 30% 증가
"...괜찮네?"
스탯 성장력이 80%나 증가하고, 정신력과 집중력이 30%씩 증가한다.
이건 대놓고 훈련 효율을 극대화한 것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마력 감응도가 50%나 감소해서 그 훈련의 난이도는 급격히 증가하겠지만 그만큼 마력 컨트롤을 수련시키기엔 최적이었다.
다만, 전투 시에 착용하고 있으면 전투력이 절반 이상 감소하여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주변에 다른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추잡한 옷을 입을 수 있나?
뷔엘라는 혼자 있는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입고 싶지가 않았다.
"입어."
"싫다."
"입어."
"이런 걸 도대체 어떻게 입나!"
"입어. 마지막이다."
어느새 이신의 목소리에 한기가 서렸다.
"...알겠다."
한숨을 푹 내쉰 뷔엘라가 옷을 갈아입으러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사이, 이신은 커뮤니티를 확인했다.
앨리스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메시지가 온 지는 꽤 된 상태.
17층 시험 스테이지에 오르기 전에 보낸 게 분명했다.
'아직 스테이지 안인가?'
앨리스의 메시지는 제쳐 두고, 아이소이아에 올라간 언더모스트의 도전자들이 보낸 메시지가 있나 확인해 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최대한 버텨라.'
"나, 왔다."
잠깐 커뮤니티를 둘러보고 있는 사이, 벌써 옷을 다 갈아입고 온 뷔엘라가 어색한 얼굴을 하며 걸어왔다.
"어머, 어머. 저런 옷을 입어도 잘생겼네?"
"역시, 옷은 중요하지 않아."
"쿠륵! 우리 대족장에게 데려다 놓으면 좋아하겠군!"
"안 그래도, 대족장의 심기가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이참에 우리 부족원의 수를-."
화아악―
뷔엘라의 몸에서 솟구치는 마력의 파동.
이신의 조언을 들은 후, 난폭하게 바뀐 그의 마력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맹렬하게 휘날렸다.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요 근처에 아주 질기고! 단단한! 트롤들 어디 없나? 근육 채로 썰어 가지고-."
"쿠룩! 그러고 보니 우리 대족장은 엘프를 별로 안 좋아했지."
"쿠루룩! 맞다! 생각해 보니, 부족원들도 너무 많다."
뷔엘라의 혼잣말을 듣고 눈알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던 트롤 둘이 서로 만담을 주고받으며 자리에서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뷔엘라를 보며 쑥덕거리던 이들도 갑자기 저마다 바쁜 일이 떠올랐는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 망할 것들이 뭐? 대족장한테 나를 데려가? 맘 같아서는 확!"
"다혈질이 더 심해졌네."
"심해진 게 아니라 그동안 참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지. 화는 참으면 병이 된다는 걸."
"병이라도 걸려서 그렇게 허약한가?"
"뭐? 내가 허약해? 약하다고? 내가? 내가 약하면 도대체 누가 강한... 망할 새끼."
말을 하다 말고 욕설을 연달아 뇌까리던 그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 자식은 갈수록 성격이 더 난폭해지는 거 같네.'
처음 볼 때만 해도 나름 점잖은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는데.
괜한 짓을 한 건가 싶은 이신은 뷔엘라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혼자 도시의 중앙 광장으로 갔다.
광장 가운데 있는 포탈과 그 옆에 지루한 얼굴로 앉아 있는 남자.
이신은 그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뭐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다른 놈한테 물어, 귀찮으니까."
"저 포인트 많습니다."
"그래? 얼마나 있는데?"
거의 드러눕다시피 뒤로 젖혀져 있던 남자가 이신의 말에 눈을 힐끔 뜨며 말했다.
'변한 게 하나도 없네.'
귀차니즘이 매우 심하고 거지 같은 행색과 다르게 포인트를 매우 밝히는 관리자.
그의 가벼워 보이는 언사에 속아 당하는 도전자가 한둘이 아니다.
"정보 살 정도는 있습니다."
"흐음...좋아, 단순히 다음 층에 대한 정보는 5천 포인트. 그 이상이 알고 싶다면 2만 포인트. 그리고…너와 관련된 정보는 10만 포인트다."
제법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지만 저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범위일 뿐이다.
그가 '다음 층에는 인간이 있다.'이 한 마디만 정보랍시고 던져도 5천 포인트를 잃는 것이다.
'쯧.'
속으로 혀를 찬 이신은 질질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에 대한 정보를 사고 싶습니다."
"...어떤 신 말이지?"
"파멸의 신."
기묘한 감각이 이신의 피부를 스쳤다.
어느새 둘 사이에 펼쳐진 기막.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관리자가 만든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게 얼마나 비싼 정보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얼마면 됩니까."
"최소 200만-."
"드리겠습니다."
"뭐, 뭐? 200만이 있다고?"
황당한 표정으로 관리자가 이신을 보았다.
태연한 이신의 얼굴을 보니, 허세는 아닌 것 같았다.
"미친놈인 줄은 알았지만... 진짜 미친놈이었군."
"드립니까?"
"에이씨, 말이 200만이라는 거지! 파멸의 신에 대한 정보는 내 권한 밖이다."
"200만인데?"
"...내가 아무리 포인트에 미친놈이라지만...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냐?"
그의 말에 이신의 눈이 느리게 가라앉았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관리자는 이신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나도 소멸시킬 수 있는 신이니, 그만해라.'라고.
'그 정도의 신이었나?'
그가 호의를 보였으니 파멸의 신에 대해 캐묻는 것은 이쯤 하는 게 좋다.
이신은 고민에 빠졌다.
무엇을 묻는 게 좋을 것인가?
"축복의 신. 이건 가능합니까?"
이번에도 역시 그의 표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조금 전과 다르게 곧바로 불가능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100만."
[1,000,000p를 지불하였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해지는 100만 포인트에, 관리자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도 18층에서 이런 거금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도전자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뭘 말할 줄 알고 이렇게 선뜻 돈을 건네지?"
"제게 호의적인 신들도 있습니다."
"날 협박이라도 하는 거냐?"
급격히 치솟는 그의 기세에도 이신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쯧, 겁먹는 척이라도 좀 해 봐라."
그도 진심은 아니었는지 재미없다는 얼굴을 하며 기세를 거뒀다.
"잘 들어라, 두 번은 안 말할 거니까."
"전 한 번 들은 건 안 까먹습니다."
"재수 없는 새끼. 지금 너를 두고 신들의 의견이 갈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너를 이대로 탑에 오르게 두면서 성장시켜야 한다는 그룹."
치익!
"쓰읍! 하—."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든 그가 그것을 입에 물고 불을 피워 길게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저 흔히들 보이는 담배 피우는 모습이었지만, 관리자의 얼굴에는 매우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너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그룹. 이 두 개로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
"그렇습니까?"
"생각보다 태연하군. 아무튼, 대다수는 전자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고 후자는 소수야."
누구를 맘대로 키우겠다는 건지.
이신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호의적인 신들이 대다수군요."
"아니, 그 극소수에는 매우 강한 신이 있다. 그 하나로 대다수의 신들의 영향력을 압도할 수도 있지. 혹시나 말하지만, 그 신에 대한 발언은 내 권한 밖이야."
"알겠습니다. 이게 끝입니까?"
스읍, 하.
또다시 복잡해진 그가 담배를 깊게 들이마신 뒤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성질이 급하구만. 이제부터가 중요해."
"예."
"그 소수의 그룹에 축복의 신이 들어가 있다."
축복의 신에 대한 물음에 이러한 답을 준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20층을 넘어가기 전에 너를 반드시 죽일 계획을 짜고 있다."
이신의 눈이 차게 식었다.
"이미 17층을 지나왔으니 너도 알겠지. 이미 그 계획은 시작되었다는 걸."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러나 안진 방장을 이용한 개입이 실패하고 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21층에 오르기 전에 죽이겠다라....'
앞으로 남은 시험 스테이지는 18, 19, 20.
이 모든 스테이지에 개입한다는 것은 정말로 그들의 세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층일수록 탑에 개입하는 건 많은 인과율을 소모하기 때문에.
물론, 간접적으로 편법을 이용하는 것 같았지만 17층에서의 일을 생각한다면 방심할 수 없었다.
정말 죽을 수도 있을 정도의 한 수였다.
언제 어디서 목을 노리는 비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겁먹지는 않을 것이다.
위험이 예고되어 있다고 해서 고개 숙일 생각도 없다.
그들이 스테이지에 개입할수록 그만큼 리스크도 큰 법.
신들의 손아귀 위에서 놀아나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
다시는 그들 앞에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이신!"
어느새 기막은 사라져 있었고 관리자는 그 모습을 감췄다.
뷔엘라가 볼일을 다 마쳤는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스테이지 시작도 얼마 안 남았는데, 배 좀 채우고 가자고."
고기를 뜯으며 해맑게 웃고 있는 뷔엘라.
앞으로 다가올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아무런 걱정이 없는 모습이다.
'괜히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네.'
뷔엘라 정도라면 신들이 준비한 비수의 궤적을 한 번 비틀 정도는 될 것이다.
제72화
18층
[18층에 입장하셨습니다.]
[교회의 타락한 교황을 처치하십시오.]
도시의 남부 구역에 소환된 도전자들.
이신과 뷔엘라 역시 그곳에 같이 소환되었다.
도전자들이 나타났음에도 도시의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자신들의 할 일만 하고 있다.
"타락한 교황을 처치하라니...교황이면 저기 있는 건가?"
뷔엘라는 도시의 한 가운데 가장 높이 솟아오른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는 말 함부로 하지 마."
"음? 무슨 말 말인가?"
"교회의 사람에 대해 잘못 말하면 매장당하니까."
"알겠다."
이신의 경고에 뷔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악!"
그때, 어떤 남성의 비명에 둘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 사람이 여럿에게 핍박당하고 있는 모습.
남자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팔과 다리로 다른 이들의 발길질을 최대한 막고 있었다.
"이 자식이! 감히 사제님을 모욕해?"
"네가 살아가는 것도 이 교회의 은총 때문인데!"
"하지만 사제님이 집에 다녀간 후로 내 여동생이...!"
"시끄러워!"
"다 네놈들이 문제지! 사제님이 무슨 문제야!"
퍽! 퍽! 퍽! 퍽!
억울한 듯 남자가 소리쳐 보지만 주변 그 어느 시민들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 새끼들이!"
"잠깐."
그 모습을 보던 뷔엘라가 열이 잔뜩 뻗쳐 뛰쳐나가려는 것을 이신이 막았다.
"왜 막는가!"
"저거 봐라."
주변에는 이신과 뷔엘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저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다른 도전자들 몇몇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중 한 무리의 도전자 셋이 시민들을 밀쳐내고 얻어맞는 남자를 구해냈다.
"뭐 하시는 거예요?"
"괜찮아요?"
"이 사람 말도 듣지 않고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남자와 그를 구해 준 도전자들을 향한 차가운 시선들.
도전자들은 생각은 단순했다. 그들은 시민들이 힘이 없어 함부로 나서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뭐, 뭐야?'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남자 하나를 구해 준 것으로 그 도전자들은 전부 이 도시의 배척 대상이 되어 버렸다.
한순간에 변해 버린 주변의 분위기. 싸늘한 공기가 그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저, 저기요. 다들 왜 그래요? 이 사람이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건가요?"
그들의 외침에 그들을 노려보던 시민 하나가 소리쳤다.
"여기 불신자들이 있다! 이 도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쓰레기들!"
"신을 모독하는 놈들이에요!"
"무서워요! 빨리 잡아가 주세요!"
한 사람이 소리치자 투명한 물속에 물감이 번지듯 그들의 아우성은 점점 커져 갔다.
"죽어라!"
"쓰레기 새끼들!"
"나가! 뒤져!"
순식간에 번진 광기와 맹목적인 적의는 굳이 그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아도 그들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덜덜 떨던 한 여자 도전자는 다리의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척! 척! 척! 척!
그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다가왔다.
"너희들인가? 감히 교회를 모독한 것들이?"
"아니요! 저희는 그런 짓을...."
도전자들이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그 말을 믿어 주지는 않았다.
"저놈들이에요! 저놈들이 사제님을 모욕했어요!"
"맞습니다! 빨리 잡아가 주십시오!"
"신성 모독자들!"
시민들의 그 기괴하리만치 역겨운 행태에 뷔엘라는 물론, 도전자들 대부분이 찌푸려지는 인상을 억지로 감췄다.
그들 역시 저들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당장 이 불신자들을 끌고 가라!"
18층까지 오른 도전자들이라면 도망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그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포박되어 끌려갔다.
성기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주변 시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시민을 보는 뷔엘라의 눈빛에 경멸이 물들기 시작했다.
"너 자신을 적당히 숨길 줄도 알아라."
"저걸 보고 넌 어떻게 그리 태연할 수가 있지?"
이미 많이 봤으니까.
전생에 자신도 뷔엘라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 때문에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어차피 저들이 지금 끌려간다 하더라도 곧바로 사형을 당하지는 않는다.
사형의 집행일은 따로 정해져 있으니.
'어쩌면 일부러 연기한 것일지도 모르지.'
몸을 덜덜 떨던 여자는 옷 속에 감춰진 꼬리까지 떨고 있지는 않았다.
"움직이자."
남부 구역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수많은 광신도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때마다 움찔움찔하는 뷔엘라를 컨트롤하는 것도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후...."
계속해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뷔엘라.
그때, 양손에 수갑을 찬 상태로 끌려가는 이들이 보였다.
얼굴은 천을 덮어 놔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몸을 보면 대부분이 여성들로 이루어진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빨리 와! 이것들아!"
대놓고 노예 부리듯 데리고 다님에도 다른 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망할 도시 같으니라고. 저거 저대로 두고 봐야 하나?"
"우선, 몰래 따라가 보자."
둘은 은밀하게 저들을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움직이더니 커다란 마차와 함께 인간 하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넘겨주나 본데."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그때, 마차에서 익숙한 복장의 인간이 내려왔다.
교회의 사제였다.
"노예들은 잘 데려왔나?"
"아이고 사제님! 그럼요!"
노예들을 데리고 온 남자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 천 좀 치워 봐. 얼마나 괜찮은 것들인지 좀 봐야겠군."
천을 들어 올리기 전부터 사제의 얼굴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알겠습니다요!"
노예상이 천을 걷어 올리자, 드러나는 노예들의 모습.
그 얼굴을 본 뷔엘라의 마력이 갑자기 들끓었다.
"호오…고것들 참 이쁘게 생겼군."
뾰족한 귀에 천성적으로 타고난 아름다운 외모.
노예상이 데려온 이들은 엘프들이었다.
아직 엘프들의 기준에서는 성인조차 되지 않은 소녀들.
그 소녀들을 보며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사제를 보자, 뷔엘라의 이성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이 개 같은 것들이!"
어느새 뷔엘라의 몸이 마차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검이 거세게 휘둘러지는 순간, 마차의 뒤편에서 튀어나온 성기사가 뷔엘라의 검을 막아냈다.
카앙―!
서로의 검이 거세게 부딪히며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냈다.
이런 일은 종종 있어왔던 일이기에 성기사는 이번에도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상대의 검격이 생각 이상이었다.
"도와주겠네!"
사제가 신성력을 뿜어내며 성기사의 검에 신성 마법을 걸어주었다.
하지만 사제의 신성력이 더해짐에도, 승부의 추는 다시 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캉! 캉! 캉!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뷔엘라의 검에는 정교함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흥분했네.'
이신은 몸을 숨긴 상태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뷔엘라는 현재 헤르만 수양복을 입어 전투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태, 더구나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나 있기에 이성적인 전투를 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버서커의 힘을 사용하면 수양복을 입은 의미가 없다.
"젠장! 이 거지 엘프 놈은 뭐야!"
"크윽! 거지라고 무시하면 안 되겠습니다!"
사제와 성기사는 당황한 듯 점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이는 꼴과 너무나도 상반되는 실력.
감정적으로 휘두르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담긴 검술의 묘리는 성기사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어지간히 잘 버티는구나!"
광전사처럼 휘몰아치는 그의 검에 마력이 깃들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의 흐름에 성기사도 그에 맞춰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조심하십시오!"
"저 미친놈은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야!"
난폭하게 요동치는 그의 마력이 검신에 모이기 시작했다.
"파절검."
가로막는 모든 걸 찢어발길 것 같은 기세의 검격이 성기사를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성력을 끌어모은 성기사가 신성 마법을 발현시켰다.
황금빛 방패와 파절검이 맞부딪히며 거센 파열음을 자아냈다.
"크하하하! 다 죽어라!"
마치 악역과도 같은 대사를 내뱉는 뷔엘라가 다시 한번 마력을 쏟아붓는 순간.
"커헉!"
마력이 역류하며 그 흐름이 한순간에 깨지듯 사라졌다.
"크아아악!"
갑자기 혼자 고통스러워하며 괴성을 내뱉는 뷔엘라를 보며 어리둥절해하던 사제와 성기사는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을 불러야 합니다."
"저 개자식 두고 보자!"
다급히 마차에 올라탄 둘이 그 현장에서 사라졌지만 뷔엘라는 마력 역류를 제어하느라 그들을 쫓을 여력이 없었다.
"하아...하아...."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던 그가 허공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들을 보며 욕을 내뱉었다.
헤르만 수양복 때문에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헤르만 수양복 때문에 그들을 놓쳤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화를 내야 하는지.
그때, 그의 옆으로 다가온 엘프들이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해요."
"흐윽! 꼼짝없이 죽는 줄 알고...."
"정말 감사합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부족 아이들이 생각나서 홧김에 저지른 일이었는데 이렇게 감사 인사를 받으니 뿌듯했다.
놈들을 놓치긴 했지만 이들을 구했으니 그걸로 된 게 아닌가.
"쯧, 그런 놈들 하나 못 잡아서 이러고 있는 꼴은."
"이 수양복만 아니었어도 눈 감고도 이길 수 있었다!"
"수양복을 입고도 이겼어야지."
"그건 실수를...."
"실수도 실력이야. 그래서 이 녀석들은 이제 어떡할 건데?"
"어떡하긴, 어디 숨겨 주면...."
"퍽이나, 또 안 잡히면 다행이지, 어디다 숨겨 줄 건데?"
그것까진 생각하지 않았는지, 그제야 고민에 빠진 뷔엘라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평범해 보이는 행색의 여성이 굳은 얼굴로 엘프들을 살폈다.
"아직 건들지는 않은 것 같네요."
"당신은 누구지?"
뷔엘라가 어느새 검을 들어 그녀의 목에 가져다 댔다.
"전 교회와 척을 진 사람이라고 해 두죠. 저희가 이 엘프들을 숨겨 드리죠."
"내가 너희를 어떻게 믿고?"
이신의 싸늘한 음성에 그녀가 그를 보았다.
"죽음의 통찰자, 죽음의 지배자라는 이명(異名). 당신 맞죠?"
"...."
"당신 소문은 전해 들어서 알고 있어요. 이름은 이신, 은색 지팡이와 순백색의 검을 들고 다니는 마법사이자 네크로맨서."
"그래, 잘 아네. 근데 이건 모르고 있나 보네? 난 내 뒷조사하는 놈들을 안 좋아한다는 걸."
이신의 검은 마력이 스멀스멀 그녀를 향해 움직이며 그녀를 압박했다.
당장이라도 너 따위는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살기를 가득 담아.
전투 능력은 별 볼 일 없는지, 한순간에 창백해진 그녀가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이신을 보았다.
"우리 마스터가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 해요!"
그 말에 이신이 마력을 풀었다.
애초에 그녀를 죽일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쉽게 보이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하아...하...."
"좋아, 마스터는 어딨지?"
"저를 따라오시면 돼요."
"그래, 우선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넓게 펼쳐 놓은 마력 파장에 잡히는 일련의 무리.
이신은 입가를 비틀었다.
"우리가 저지른 일은 먼저 해결해야지. 안 그래? 뷔엘라?"
"그렇지."
"설마…교회의 성기사들을 상대하실 생각이신가요? 그건 안 돼요! 한둘이 아닐 거라구요!"
그녀는 다급하게 이신을 말렸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지금 오는 교회의 성기사들을 이긴다 해도 그다음 또 몰려올 놈들, 그 이후에 또 올 놈들까지 생각하면 교회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는 의미니까.
"걱정 마. 너희는 이 엘프들만 숨겨 놔."
"그래, 나도 아까 봐준 거다. 본 실력만 낼 수 있으면 그깟 성기사들 열이 와도 이길 수 있다!"
그들은 진심으로 성기사와 사제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말리고 싶었지만 그녀로선 그들의 고집을 꺾기가 힘들었다.
"일부러 아까 그 성기사와 사제를 놓아주신 거군요? 당신들을 찾아오게 만들려고."
그녀의 심정은 착잡했다.
이신이라는 마법사의 성정이 어떤지 지금에서야 제대로 알게 된 느낌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이 피해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진작에 접선을 했어야 했어.'
자신의 판단 실수가 이런 여파를 불러왔으니, 마스터에게 문책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너희 마스터를 보기 전에 실력을 보여 주는 것도 괜찮겠지. 잘 봐 둬, 교회의 성기사들이 얼마나 별거 없는 놈들인지."
제7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