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마탑주님!"
갑자기 허겁지겁 방에 들어오는 부마탑주에 놀란 헬렌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청색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뭐? 이 정신 나간 퍼랭이들이!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갑작스러운 비보에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그녀가 창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밖에 모여든 푸른 옷의 무리들.
청색 마탑의 마법사들이었다.
"모두 소집해! 우리도 밖으로 나간다."
적색 마탑 전체 울려 퍼지는 경고음.
마탑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이 갑작스러운 이 경고음에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무슨 일이지?"
숙소에서 명상을 하며 마력 회로를 돌리던 시가레이트가 인상을 굳혔다.
밖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
창문을 열고 보니 푸른 마탑의 마법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젠장,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왜!"
뜬금없는 슌의 죽음과 그로 인해 의심받는 적색 마탑.
시가레이트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숨기고 있던 실력도 드러내며 헬렌 앞에 섰고 그녀가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막았다.
'다 해결되었다 생각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적색과 청색의 전쟁이 일어날 판이다.
이신과 같은 헬 난이도의 도전자인 시가레이트.
그 또한 델리그에서 적색 마탑을 우승시켜야 했다. 벌써부터 청색 마탑과 싸워서 적색 마탑의 전력이 감소된다면 이번 층의 클리어는 힘들어질 게 뻔했다.
'막아야 돼!'
* * *
'이번에야말로 변수는 없어야 한다.'
몰래 적색 마탑 근처로 숨어든 이신이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도 만약 일이 틀어진다면 정말 귀찮아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셰인! 이게 무슨 짓이지?"
쾅!
헬렌의 물음에 대한 셰인의 대답은 분노로 가득 찬 마법이었다.
그렇다고 헬렌을 상처 입힐 만큼 강한 마법은 아니었으나, 주변에 퍼지는 여파는 막을 수 없었고 그 덕에 주변 2급 이하의 마법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것을 본 헬렌이 잔뜩 열이 뻗쳤는지 마력을 끌어 올리는 탓에 주변 공기가 뜨거워졌다.
"정말 한번 해 보자는 거냐?"
"자기 마탑의 마법사들이 다치는 건 열이 받는가 보군."
"그거야 당연...."
"나도 마찬가지다, 감히 우리 수석 클라테를 건드려? 그것도 협력하기로 한 그날 밤에! 가족으로 협박까지 하면서!"
난데없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마력의 흐름이 흔들릴 정도로 헬렌이 당황했다.
"그게 무슨...!"
"나와라."
그때 마법사들 사이에 숨어 모습을 보이지 않던 청색 마탑의 수석 클라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은 불에 그을려 화상을 입었고 한쪽 눈은 이미 실명되어 버린 상태.
머리카락의 절반은 타 버려서 다 잘라야 할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걸 보고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뗄 건가!"
누가 보더라도 화염 마법에 당한 모습.
슌 그라미스 때와 같았다.
상대는 청색 마탑의 수석 클라테.
웬만한 마법사들의 실력으론 상대를 그렇게 만드는 게 불가능했다.
정말 적색 마탑의 소속이 아닌 이상.
'정말 우리 마탑의 누군가가 그런 건가?'
이쯤 되니 헬렌도 자신의 마탑에 간첩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찾기엔 너무 늦은 상태.
지금 상황을 보아선 청색 마탑의 오해를 풀기도 힘들어 보였고 전쟁은 불가피했다.
'상대는 핵심 전력 중 둘이 이미 당한 상태.'
원래라면 청색과 적색의 전력 차이는 청색이 아주 약간 우위에 있었겠지만, 지금이라면 적색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청색과 적색의 라이벌 구도.
이번 기회로 완전히 뒤엎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셰인만 제거한다면....'
나머지는 수석 클라테 선에서 모두 처리가 가능하다.
생각의 정리가 대강 끝나가자, 헬렌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우리가 그랬다면... 어쩔 건데?"
"이... 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눈알이 시뻘게질 정도로 핏줄이 튀어나온 셰인이 마력을 급격히 끌어 올렸다.
그에 맞춰 헬렌의 마력도 들끓고 있는 상황.
지금 가장 초조한 사람은 시가레이트였다.
'이제 막 2급에 올라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가 실력을 드러냈다 해서 모든 것을 보여 준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그가 실력을 다 보여 주었다간 이 참상의 범인이 자신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헬렌도 청색과 싸우려 마음을 먹은 것 같았고 분위기는 절정까지 치달은 상태.
'이렇게 된 이상 철저하게 청색을 짓밟고 승리한다.'
시가레이트는 자신이 합류하면 그래도 적색의 핵심 전력들의 피해는 막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청색은 여기서 무너진다. 적색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이신은 그냥 그대로 싸움이 이어질 것 같아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헬렌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가 옅어지는 것을 보고 방향을 바꾸었다.
헬렌의 예상외의 행동.
그 알 수 없는 변수가 이곳에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불과 물의 전쟁.
두 마탑의 전쟁이 셰인과 헬렌의 마법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제법 비등비등해 보이던 전장이 초장부터 미묘하게 비틀리는 게 보였다.
'저놈은....'
지난번 슌 그라미스의 강의에서 보았던 적색 마탑의 청강생.
적재적소에 마법을 정확히 사용해서 청색 마법사들의 전력을 야금야금 깎아 먹고 중요한 순간에 마법을 사용해서 승부를 뒤집고 있었다.
"저놈이군."
이신의 기억 속에, 전생의 마법 도시에서 저 마법사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저 정도 실력자를 못 봤을 리가 없으니....
'도전자겠어.'
헬 난이도에서 같은 도전자를 마주친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종종 도전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으니까.
아마 지구의 도전자는 아닐 것이다.
타 차원의 헬 난이도 도전자라면 만만히 볼 녀석은 아닐 게 분명했다.
은밀히 전장의 뒤쪽으로 이동한 이신이 뒤쪽에 대기 중인 청색 마탑의 마법사 하나를 기절시키고 옷을 뺏어 입은 채로 전장 안으로 들어갔다.
수십 가지의 마법이 난무하며 전장의 온도가 시시각각 변했다.
그 중심에 있는 셰인과 헬렌.
막상막하의 상황으로 보이지만 수석 클라테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견제에 셰인의 집중력이 조금씩 흔들리고 그 틈을 헬렌이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아이스 스피어(Ice spear)]
[워터 볼(Water ball)]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기본 마법들. 그러나 누구 손에서 나가느냐에 따라 또 달라진다.
적색 마탑의 수석 클라테가 셰인을 향해 마법을 사용할 때, 이상하게 기본 마법들이 그쪽으로 튀며 그 흐름을 끊어 댔다.
"젠장! 막아! 저런 마법들 정돈 너희들이 막으란 말이야!"
악에 받쳐 괴성을 질러 보지만 2, 3급 마법사들과 이신의 마법 사이에는 아득한 격차가 있었다.
이신의 어시스트 덕에 조금씩 기울어가던 전장의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쯤 되자, 적색에서 몸을 숨겨 마법을 쓰던 시가레이트도 청색 쪽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지? 청색 마탑에 내가 모르는 인물이 또 있던가?'
급격히 내려가는 전장의 온도.
한순간 적색 쪽 마법의 위력이 약해지고 그로 인한 피해가 속출했다.
'필드 마법? 클라테가 사용한 게 아니야, 2급과 3급 마법사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이신의 필드 마법을 눈치챈 건 시가레이트뿐만이 아니었다. 클라테급 이상은 전부 알아차렸다.
'누구지?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또 있었나?'
'헤밍웨이 님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마탑주님과 부마탑주님은 상대 마탑주와 부마탑주를 상대하느라 여력이 없어. 도대체 누가?'
그들의 의문은 그걸로 끝이었다.
청색은 어찌 되었든 이 유리한 상황을 이용해야 했고 적색은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셰인! 네가 감히 덤빈 이유가 있었구나!"
"시끄럽다!"
헬렌은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속으로 이를 악물었고 셰인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밸런스는 어느 정도 맞춰진 것 같고.'
슬슬 빠질 때였다.
지금이야 한창 싸움 중이라 자신을 찾을 여력이 없을 뿐이지 더 있다간 정체를 들킬 확률이 높았다.
2, 3급 마법사들 사이로 부상을 당한 척 몰래 빠져나온 이신이 외곽으로 이동했다.
도시의 안쪽은 이미 아수라장이었고 흑색 마탑으로 돌아가려면 외곽을 통해 삥 돌아가야만 갈 수 있었다.
화르륵!
펑! 치이익―
기습적으로 날아오는 화염구.
이신이 만들어 낸 물의 장막과 부딪히며 수증기를 발생시키고 사라진다.
"도전자인가?"
적색 마탑의 마법 복을 입은 마법사.
시가레이트가 이신을 쫓아와 물었다.
로브를 푹 눌러쓴 이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시가레이트는 상대가 아직까지 이신인지 알지 못했다.
"도전자? 그게 뭐지?"
목소리를 살짝 변조시킨 이신이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그럼 강제로 입을 열게 만들어야겠지."
도시의 외곽.
아무런 시선도 없는 들판 위로 불길이 번지듯 치솟는다.
한순간에 올라가는 열기.
어느새 사방에 퍼진 불길 속에서 불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사슬이 뻗어 나온다.
[아이스 포그(Ice fog)]
[워터(Water)]
[익스펜션(Expansion)]
연달아 이어지는 마력의 분화.
주변에 얼음의 안개가 끼고 입자 단위로 쪼개지는 마력들이 또다시 물로 성질이 변화하며 그대로 팽창한다.
이신의 마법에 불의 사슬들이 그대로 폭발하듯 사라지고 마법을 유지하던 시가레이트는 다급히 마력의 공급을 끊어냈다.
"큭!"
그 반동으로 오는 마력의 역류에 신음을 내뱉은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전혀 예상 못 한 마법의 조합.
경계의 수준을 높인 그가 주변에 불의 장벽을 일으켜 자신을 보호했다.
촤아아아―
들판의 풀을 타고 번지던 불들이 한순간에 꺼지고 주변엔 그 수증기로 습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이런 전장에서 냉기 마법사들은 그야말로 암살자보다 더 위험하다.
언제 주변의 수증기가 날카로운 비수로 변할지 모르니.
'어디냐!'
짙은 수증기의 안개 덕에 시야가 가로막힌 상황 속에서 시가레이트는 마력을 끌어 올려 주변을 경계했다.
1초.
3초.
5초가 지날 때쯤이 되어서야 시가레이트는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급히 마력을 퍼트려 주변을 훑었지만 마법사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썅!"
욕을 연달아 내뱉은 시가레이트가 어쩔 수 없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한편, 시가레이트를 피해 도망간 이신은 한숨을 내쉬며 흑색 마탑에 도착했다.
"또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게냐!"
레이먼드였다.
이 아저씨는 할 일이 없는 건지 왜 자꾸 여기서 마주치는지 알 수가 없다.
"내일 있을 시험 준비 때문에 바빴습니다."
"아, 그렇지. 내가 준 것은 봤냐?"
"예,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크, 큼! 그럼, 누가 준 건데. 알았다. 빨리 가서 준비나 해라."
"예."
흑색 마탑도 나름 적색과 청색의 싸움으로 시끄럽긴 했지만 워낙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그래도 조용한 편이었다.
애초에 배척받고 있기도 했고.
"시가레이트라...."
처음 슌의 강의에서 보았을 때는 딱히 특별함을 못 느꼈던 녀석.
전장에서의 그 실력과 잠깐이지만 자신과 맞붙었을 때 보여 준 능력은 그조차도 조금 놀랄 정도였다.
"좀 더 열심히 움직여라."
이신은 생각보다 일이 더 빨리 진행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2급 시험의 감독관을 맡은 레이나다. 시험의 내용은 각자 마법이 아닌 재료로 저주를 걸 수 있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시험장에 2급 시험을 보는 마법사는 고작 10명이 전부.
그중 하나가 이신이었다.
"제한 시간은 3시간이다. 그 안에 완성하면 내게 제출하면 된다. 그럼 시작."
흑마법의 근원은 저주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저주에 대한 이해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 시험은 그 저주에 대한 지식을 쌓고 공부하며 연구하는 것.
겉보기에는 허접해 보여도 흑색 마탑은 본질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신... 이신?"
마법사들의 신원을 확인하던 레이나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자식 그동안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드디어 만나네."
차분하게 시험을 수행하는 이신의 모습이 보였다.
며칠 전 3급 시험을 치고 더미에 남은 저주를 본 뒤로 짬이 날 때마다 저 녀석을 찾아다녔지만 매일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바빠 죽겠는데 시간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떤 걸 가져올지 궁금한데?'
제50화
[『빛을 보면 역류하는 액체』를 제조하였습니다.]
[『스킬 - 저주 제조술 Lv.1』을 배웠습니다.]
병에 들어간 검은색의 액체.
양이 많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벌써 다 만들었어?"
레이나는 제조를 끝낸 이신을 보고 다시 시간을 보았다.
고작 1시간 만에 만들어진 저주 액체.
이신이 제조하는 모습은 이미 레이나도 충분히 유의 깊게 살펴봤다.
수많은 제조법을 알고 있는 그녀도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제조법이었다.
"이건 어떤 저주 액체지?"
"이 액체를 먹게 되면 빛을 보고 마력을 일으키는 순간 역류가 일어납니다."
"뭐?"
빛을 보기만 해도 마력을 역류하게 만드는 저주라니.
레이나도 클라테의 지위까지 올라가면서 오랫동안 흑마법을 다뤘지만 이런 종류의 저주는 처음 보았다.
더구나 이런 저주 액체를 1시간 만에 만들었다니.
"일단 알겠어. 결과는 이 액체의 효과를 확인한 뒤에 알려 줄게."
"알겠습니다."
"아, 시험이 끝나면 내 방으로 찾아와."
"예."
이신이 시험장에서 나가자, 레이나가 복잡한 표정으로 검은 액체가 담긴 병을 만지작거렸다.
'이신....'
* * *
시험이 모두 끝나고 이신은 7층에 있는 레이나의 방으로 갔다.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레이나가 들어오라 말하자, 이신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와, 거기 앉아."
흑마법사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하얀 벽지에 매우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
이신은 레이나라는 이 마법사의 성격이 대강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우리 흑색 마탑의 화제의 마법사, 이신. 들어오자마자 청색 마탑에서 난리를 쳤다지?"
"난리는 아닙니다만."
"뭐, 지금 난 난리에 비하면 아니긴 해."
레이나가 마실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신의 맞은편에 앉았다.
"태평하십니다? 지금 마탑 둘이 사라지게 생겼는데."
"그 정도론 안 사라져. 물론, 이번 델리그에 참가는 못 하겠지만."
"왜 부르셨습니까?"
"너, 흑마법 배운 적 있지?"
"예, 잠깐 배웠습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에 레이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지난번 3급 시험에서 더미에 남은 저주의 흔적을 봤어."
그렇게 말하곤 다시 한번 이신의 표정을 보았지만 여전히 그는 태연했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군.'
만만치 않은 녀석이라 짐작한 그녀가 큼, 큼. 목을 풀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그건 단시간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엄청 짧은 단기간은 아니고... 그렇다고 오래 배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워낙 대단한 사람이 스승이다 보니까."
"대단한 사람? 그게 누구지?"
예상외의 말에 레이나에게 호기심이 생겨났지만 이신은 그녀의 호기심을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비밀입니다."
"쳇, 그럼 말이나 하지 말든가."
"물어봤잖습니까?"
"됐어. 뭐, 더 물어도 말해 줄 것 같지는 않네."
후릅.
차를 한 모금 마신 레이나가 슬쩍 이신을 보았다.
"이번에 제조한 그 저주 액체. 제조법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봐도 안 말할 거지?"
"스승한테 배웠습니다."
"에이씨, 그게 안 말해 주겠다는 거잖아. 알았다. 나가 봐."
"예."
딱히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를 주고받은 뒤 이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네 이름이 이신이지?"
그가 몸을 돌려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을 때, 그녀가 물었다.
"예."
"너...죽음의 통찰자라고 아냐?"
갑작스러운 물음.
이전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계속 들었지만 그때와 지금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압니다."
그때는 이신을 사기꾼이라 의심했다면,
"네가 죽음의 통찰자냐?"
레이나는 그를 진짜라 의심했다.
"...예."
* * *
"도대체가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왜 적색과 청색이 갑자기 이렇게 된 건가.
델리그도 몇 달 남지 않은 상태다.
이 시기에 두 마탑이 저렇게 죽자고 싸우게 되는 게 황색 마탑의 마탑주인 테리안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탑주님... 이건 기회입니다. 저희 황색 마탑이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요."
"그래... 청색 마탑과 적색 마탑은 이번 일로 금방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거야. 델리그는 거의 포기한 셈이 되겠지."
"맞습니다. 델리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부마탑주의 말처럼 이번 델리그는 지난 델리그에서 당한 망신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잠시 나갔다 오겠네."
"거기를... 가시는 겁니까?"
"그래."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두 사람이 헤어지고 마탑주는 황색 마탑이 있는 지역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사막으로 이동했다.
황색 마탑이 있는 지역의 남쪽에 존재하는 커다란 사막.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그곳으로 테리안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한참을 움직이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마력을 일으켜 어느 한 곳의 땅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모래가 주르륵 흘러내리며 그 안에서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에스타니아의 유적이...."
중얼중얼 긴 구결을 읊자, 문이 열렸고 그 안으로 그가 들어갔다.
테리안이 들어갔음에도 한동안 열린 채로 유지되는 문을 누군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을 향한 새로운 발자국이 또다시 모래 위로 새겨졌다.
테리안은 문을 통해 지하 깊숙이 들어가며 길게 이어진 통로를 따라 어딘가로 이동했다.
이미 여러 번 와 본 듯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발걸음은 곧 어떤 방 앞에서 멈췄다.
"에스타니아. 당신의 유물은 내가 제대로 사용해 주겠소."
문에 새겨진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
고대의 최고 마법 공학자였으며 그중에서도 골렘이라는 분야의 권위자였던 에스타니아.
그녀의 유물이 이 방 너머에 있었다.
쿠구구궁-
마치 거대한 기계 요새가 움직이듯 문이 열리자, 거대한 소음과 함께 공간이 살짝 흔들렸다.
그 안에는 거대한 골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리안은 품에 있던 구슬을 꺼내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먼지만 쌓여 있던 골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오오...여전히 대단하구나, 나의 골렘들아."
100기나 되는 골렘들의 위용에 테리안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테리안의 덩치에 수십 배는 큰 황색 골렘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골렘 한 기가 있었다.
거의 다른 골렘에 1.5배 정도 되는 크기의 은빛 골렘.
"너만 있다면 우리 황색 마탑이 델리그에서 우승하고 내가 델리거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구나."
이번 적색과 청색의 자멸은 황색 마탑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반드시 이 기회를 살려야 했다.
"이런 걸 숨기고 있었어?"
테리안의 귓구멍을 파고드는 서늘한 목소리.
깜짝 놀란 테리안이 눈을 부릅뜨고 음성이 들린 곳을 보았다.
흑색 마탑의 3급 마법사들이나 입는 검은색 마법 복에 보라색 머리카락.
그리고 검은 마력.
"너는...이번에 새로 흑색 마탑에 들어왔다던 그 녀석이로군."
테리안은 그 녀석을 단번에 알아봤다.
흑색 마탑에 유망주가 들어왔다는 소문과 청색 마탑의 3급 마법사들을 다 바보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어떻게... 쫓아온 거지?"
분명 황색 마탑을 나오기도 전부터 철저하게 주변을 확인하며 왔다.
자신의 마력 감각에도 전혀 걸리지 않을 실력자는 이곳 세이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저 마법사가 자신을 한참 상회하는 마법사이거나....
'아니면 무슨 꼼수를 썼겠지.'
전자일 리는 없으니 후자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인가.
또 어떤 꼼수를 부린 건가.
테리안은 이신이 자신을 한참 상회하는 마법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세이아에 있는 탑주들의 프라이드는 강했다.
"다 방법이 있지."
"네가 이번에 청색과 적색 마탑이 싸우게 만든 범인이로구나."
"그래."
순순히 수긍하는 이신의 대답에 테리안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상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예상은 했다. 이리 당당하게 나온다는 것은 상대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슌도 네 놈이 죽였겠군."
"그래."
"그럼 나도 여기서 죽일 건가?"
"그래."
"할 줄 아는 말이 '그래'밖에 없나?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지?"
"흑색 마탑이 델리그에서 우승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저런 뻔한 이유라니.
테리안은 인상을 굳히며 조심스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여기 골렘 군단이 안 보이는가? 혼자 이 녀석들을 뚫고 나까지 이길 수 있다 생각하느냐!"
테리안이 품에 있는 구슬에 마력을 불어넣자 100기의 골렘이 일제히 몸을 움직였다.
"넌 내 옷이 보이지 않나?"
"네 놈 옷이 뭐 어쨌다는 거지?"
테리안의 말에 이신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비웃었다.
그와 동시에 이신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그림자 공간 속에 잠들어 있던 이신의 언데드들이 그동안의 답답함을 토로하듯 괴성을 외치며 모습을 드러낸다.
"하프니스."
허공이 찢어지며 나타난 통로 속에서 유령과 같은 형태의 낫을 들고 있는 검은 사신이 나타났다.
- 불렀는가...통찰자여.
"칼렌과 언데드들을 꺼내."
- 알겠다.
하프니스의 낫이 허공을 가르자 결이 잘려 나가며 그곳으로 검은 포탈이 열리고 짙은 사기를 줄줄 흘리는 언데드가 걸어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지난 11층에서 봤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칼렌이 덜그럭거리는 뼈마디로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다행히 이 녀석은 사의 세계에서 잘 버티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골렘들의 숫자보다도 수 배는 많은 언데드들이 공간을 찢고 나오는 모습에 테리안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정체가 뭐냐... 어떻게 혼자! 이렇게 많은 언데드들을 부릴 수 있는 거지? 흑색 마탑의 마탑주도 이 정도는-."
"시끄럽네. 나와라, 군도."
팔찌를 통해 나타난 리자드맨 수호 전사 군도가 이신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주인님."
"메이, 워리. 군도와 같이 저 은빛 골렘을 맡아."
다른 황색 골렘들과 느껴지는 기도가 차원이 다르다.
이 많은 언데드들을 보고도 테리안의 여유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믿는 게 저 은빛 골렘이겠지.
"가라, 다 부숴 버려."
수천 평은 될 법한 커다란 지하 공간.
그곳을 가득 채우는 언데드들과 골렘들.
두 세력이 부딪혔다.
쿵! 팍! 퍼걱-!
테리안의 마력을 받은 골렘들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작은 크기의 스켈레톤들은 허무하게 뼈가 바스라지고 마디마디가 쪼개졌다.
그에 반해 스켈레톤의 공격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테리안은 예상대로 스켈레톤들이 골렘에게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크하하! 그래 봤자 해골들이지. 감히 골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언데드들의 강점은 그 짙은 사기와 찐득한 살기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에겐 그것만으로 상대의 전투력을 저하시키지만 골렘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전투 병기일 뿐.
더구나 단단한 몸체를 자랑하는 골렘들은 스켈레톤들에게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사계(死界) 소환]
평범한 지하실 속 아무것도 없는 공동이었던 유적 안이 검붉은 하늘로 뒤덮이고 황폐해진 검은 땅이 바닥 위로 나타난다.
"뭐, 뭐야!"
당황한 테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
언데드들이 내뿜었던 사기(死技)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기가 공간을 짓눌렀다.
공간 자체가 죽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변을 가득 메운 기분 나쁜 공기에, 테리안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사계(死界) 소환]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소환합니다.
# 언데드종을 제외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 언데드종의 능력치가 10% 증가합니다.
# 언데드종의 흉포함이 50% 증가합니다.
# 쿨타임: 72시간
죽음의 지배자의 클래스가 되며 생긴 클래스 스킬.
이신에 의해 소환된 사계가 전장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뒤바꿨다.
후우웅- 퍽! 콰직!
"카아아아악!"
골렘의 주먹에 팔 한쪽이 날아갔음에도 끝까지 다리로 매달려 칼을 박아 넣는 스켈레톤 워리어.
자신의 두개골이 부서져라 머리를 들이박는 스켈레톤 오크.
이미 쓰러진 골렘을 두고 흥분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몽둥이를 내리치는 스켈레톤 오우거 바크.
"도, 도대체 이게...무슨...!"
그저 멀쩡히 정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그런 공간 속에서 테리안은 점점 공포에 물들어 갔다.
제51화
실 끊어진 인형처럼 골렘들이 힘을 잃고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죽은 자들의 세계인 사계에 있는 것만으로 미쳐 버리는 게 정상이다.
그나마 테리안은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
그 정신력 하나만으로 지금 이곳에서 맨정신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마력으로 이 사기를 밀어내고 정신을 멀쩡히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마주치는 상황에 테리안은 그러한 기본적인 것도 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
"마탑주가 이러니...."
이신은 황색 마탑이 왜 흑색 마탑 다음으로 약하게 평가받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천재 마법 공학자인 에스타니아의 유물을 가지고도 보여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다.
이 정도가 그의 한계라는 뜻이었다.
"그만… 그만해라!"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신의 얼굴 위로 경멸의 감정이 스쳤다.
"자격이 없네."
이신의 검은 마력이 손바닥 위로 뭉치더니 테리안에게로 뻗어 나간다.
"안…돼...."
동태눈깔을 하고 있던 테리안의 시야가 검은 마력으로 뒤덮였다.
공포감이 성난 황소처럼 그를 거세게 들이박았다.
"으…어어...."
[딥 플레어(Deep Flare)]
검은 화염이 테리안을 불태웠다. 그의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을 먹은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툭.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검은 불꽃이 꺼지고 바닥으로 황색 구슬이 떨어져 이신의 앞으로 굴러 왔다.
골렘을 다루는 조종 장치였다.
그것을 살피던 이신은 인상을 찌푸렸다.
유물의 특정한 작동 패턴을 모르면 사용할 수 없게 잠겨 있었다.
"패턴을 기억해?"
이신은 죽어 혼이 되어버린 테리안에게 물었다.
테리안은 그것에 대한 기억을 잃은 듯, 고개를 저었다.
"쯧...."
혀를 찬 이신은 다시 유적 밖으로 나갔다.
* * *
흑색 마탑 안.
자신의 방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신은 노크 소리에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레이나가 검은 액체가 담긴 병을 흔들며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바빴니?"
"아니요, 뭐 하러 여기까지."
"그 죽음의 통찰자님이 합격하셨는데, 와야지."
표정은 여전히 재밌는 반응이라도 기대하는 듯 웃고 있었지만 이신은 전혀 반응해 주지 않았다.
"재밌습니까?"
"그래, 너무 재밌다. 난 네가 거기서 그렇게 대답할 줄은 전혀 몰랐거든."
지난번 레이나의 방에서 죽음의 통찰자냐고 그녀가 물어본 것은 그저 농담이었다.
근데 이신은 맞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믿지 않았다.
- 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 뭐 하러 물어봅니까?
그렇게 말한 이신은 그대로 나갔다.
레이나는 오히려 당당히 말하는 이신의 모습에 설마?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허무맹랑한 소문이 사실일 리도 없고 그런 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재미없는 놈. 일단 이거나 받아."
이신이 지난번 시험에서 제출했던 그 저주 액체.
그녀는 그 저주 액체에 대한 효과를 검증하고 꽤나 충격을 먹은 상태였다.
"나중에 그 제조법 알려 줄래?"
이신이 만드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것도 마력을 불어넣는 농도와 방식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신의 제조법이 필요했다.
"네, 뭐...."
"알려 준다고? 정말?"
진짜 알려 준다고 할 줄 몰랐던 그녀가 놀라 재차 물었다.
보통 자신의 비밀 레시피는 잘 공유하지 않는 법이라 기대 않고 한 번 던져 본 것이었는데 이신이 알려 준다 대답한 것이다.
"싫으면 마십쇼."
"아, 아니! 무슨 소리야? 좋지! 좋다고!"
다급하게 자신의 의사를 내비치는 레이나의 모습에 피식 웃은 이신이 책상 위에 있는 종이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뭐야?"
"레시피입니다."
"어?"
"달라고 할 거 같아서 미리 적어 놨습니다."
"어...고, 고마워."
레이나의 당황한 반응에 이신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보냈다.
합격 결과를 받았으니 이제 등록을 할 차례였다.
"네, 이신 님. 합격하신 거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여기 2급 마법복이구요, 여기 새로운 방 키예요. 2급 마법사는 4층의 숙소를 쓰니까 거기로 가시면 되세요."
"예."
그렇게 안내를 다 받은 뒤 이신이 다시 숙소로 올라가려 할 때, 익숙한 사람을 마주쳤다.
"2급 마법사가 됐구만? 축하한다."
레이먼드가 반갑게 웃으며 이신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소문 들었나? 청색 마탑이 완전히 무너졌더구만, 그 셰인이 죽다니."
청색이 무너지는 건 예상했던 일이다.
그쪽엔 시가레이트도 있으니.
"적색은 어떻게 됐죠?"
"그쪽 헬렌 마탑주도 거의 근 몇 년은 활동 못 할 정도로 다쳤다던데, 그래도 아직 전력이 꽤 남았는지 델리그 포기 의사는 안 보였고 청색은 델리그를 포기했지."
적색의 델리그 포기를 내심 기대하긴 했지만, 역시 그건 너무 큰 바람이었다.
그래도 헬렌이 전력에서 탈선했다면 나쁘지 않은 결과다.
"그렇군요."
황색 마탑의 마탑주 테리안이 죽고 며칠이 지났다.
그쪽 마탑에서 분주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내부 사정에 대해 공표하지는 않았다.
공공연하게 황색 마탑주의 실종 소식이 들리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마? 하는 생각이었고 이신은 생각보다 늦는 공표에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이신 님! 지난번 강의에서 너무 멋있었습니다!"
"저랑 같이 저주학에 대해 공부해 주실래요?"
"이번에 3급 마법사가 된 투나입니다! 이신 님의 소문을 듣고 지원하게 됐습니다!"
흑색 마탑에 들어오자마자 바깥을 떠돌아다녀서 그런지 흑색 마탑 내에서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었다.
밖과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흑색 마탑에서 강의를 듣고 이 안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
애초에 같은 마탑의 마법사라 그런지 적대적인 시선이 없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너무 호의적이었다.
"지난번 청색 마탑에서 그놈들 콧대 눌러 줬다는 소식에 통쾌함을 금치 못했어요."
"흑색 마탑에 이런 인물이 나오다니...존경합니다!"
그간 얼마나 무시를 당해 온 건지.
다른 마탑의 마법사들의 콧대를 눌러 준 것만으로도 이곳의 마법사들은 이신을 매우 좋아했다. 더구나 강의에서까지 뛰어난 모습을 보이니 존경하는 이들도 생겼다.
그리고 이신이라는 죽음의 통찰자와 이름이 같다는 걸로 그를 흑색 마탑의 미래라 하는 사람도 생겼다.
'이전까지 얼마나 사기를 당했으면....'
이신이라는 이름과 그에 걸맞은 실력을 보유했다는 걸로 이곳 마탑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요즘 우리 마탑의 초신성이 등장했다던데... 자네 아나?"
요즘 들어 잊을 만하면 마주치는 레이먼드.
이제는 안 마주치면 서운할 정도다.
"놀리지 마십쇼. 그리고 예전처럼 편하게 부르시고요."
"크흠... 미리 연습해 두는 거니 신경…끄게."
지난번 2급 강의에서 이신의 실력을 본 클라테가 '그는 조만간 클라테로 올라오겠군.'이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레이먼드의 반응도 이렇게 변한 것이다.
1급 마법사가 클라테에게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아무튼, 조만간 1급 시험을 볼 생각인가?"
"그래야겠죠."
"1급부터는 계열이 나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저주 계열과 소환 계열이 있다네."
이곳 흑색 마탑에선 저주 계열로 많이 치우쳐져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소환 쪽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도 꽤 있긴 했다.
저주는 시험에서 정해진 수준의 저주를 쓸 수 있으면 되고 소환은 시험에서 지정된 언데드를 소환할 수 있으면 된다.
지금까지 이신의 소환 능력을 보지 못한 탓에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이신이 당연히 저주 쪽으로 시험을 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저주 쪽으로 할 건가?"
"저는 둘 다 볼 생각입니다."
"...뭐?"
* * *
"이신!"
금색 마탑이 있는 북부 구역으로 간 이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베른이었다.
베른의 복장을 보니 저 녀석도 그사이 2급 시험에 합격한 듯했다. 마법복이 2급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이, 이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구해야 하는 재료가 있어서."
그 말에 베른이 주변을 한 번 훑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요즘 흉흉한 분위기 때문에 바깥에 사람이 많지 않았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요즘 마탑들 다 신경 곤두서 있어서 다른 마탑 구역에서 어슬렁거리다 봉변당한다? 뭐, 흑색 놈들은 돌아다니든 말든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그럼 너도 신경 끄지?"
그렇게 말하고 이신이 몸을 돌려 다시 볼일을 보러 가려 했다.
"베른,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이신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아, 아는 녀석을 만나서요."
날렵한 외모에 안경을 쓴 미남자.
금색 마탑의 수석 클라테 고든이었다.
"네가 다른 마탑에 아는 녀석이 있다고?"
목소리에서부터 담긴 의아함.
그럴 만도 한 것이, 베른은 워낙 다른 마법사들을 무시하다 보니 아는 녀석에게 인사를 하거나 하는 경우가 없었다.
"아, 혹시 이신이라는 그 마법사인가?"
이신의 검은 마법복을 본 고든이 물었다.
"예."
"죽음의 통찰자와 이름이 같다는 그 녀석이군."
"그게 뭡니까?"
"그런 게 있다. 아무튼 소문은 들었다. 그 정도 재능이라면 흑색 마탑을 갈 필요는 없어 보이긴 한데."
"금색 마탑을 갈 필요도 없죠."
뻔히 보이는 멘트.
이신은 고든의 저런 모습에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전생에 베른과 같이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인물.
그 가면을 알고 있는 이신으로서는 이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이 올라왔다.
"건방지군."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나랑 한 판 붙자. 그래서 금색이 나은지 흑색이 나은지 따져 보자고."
베른은 옳다구나 하며 말했지만 그 의도는 뻔했다.
그냥 지난번에 자신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 준 이신을 꺾고 자신이 더 낫다는 사실을 마법사들에게 알리고 싶을 뿐이다.
"그럼 심판은 내가 봐주지."
고든의 말에 이신은 베른의 제안을 거절하려다가 멈칫했다.
이곳 세이아에서 가장 강한 마탑을 꼽자면 금색과 백색이 단연코 언급된다.
그중 금색을 이러한 위치까지 올린 공신이 마탑주와 이 수석 클라테 고든이다. 그의 지위가 그저 수석 클라테일 뿐 실제 실력은 거의 마탑주에 근접한다.
지금 이 대련을 빌미로 베른과 고든을 끌고 가서 몰래 처리한다면 다음에 금색 마탑주를 처리할 때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고든이 죽을 경우 마탑주의 극도로 높아진 경계심에 다음 작전이 먹히지 않을 확률이 있다.
어쩌면 더 일이 꼬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
'역시, 기존의 생각대로....'
그때, 금색 마탑의 마법복을 입은 마법사 하나가 지나가던 중에 셋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베른? 아! 고든 님도 계셨군요!"
"무슨 일이지?"
"마탑주님이 저희 마탑 마법사들에게 알리라 하셔서요. 당분간 몸조심하면서 밖에 나돌아다니지 말고 마탑에만 있으라고."
그 말에 베른이 의아한 얼굴로 마법사에게 말했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여태 별말 안 하셨으면서."
"황색 마탑에서 공식적으로 마탑주가 죽었다고 공표했어. 암살이 맞는 것 같아. 델리그 참가 포기 의사도 선언했고."
갑작스런 공표에 두 사람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마탑주의 암살.
이건 크나큰 사안이었다.
아무리 황색 마탑의 마탑주라 해도 그 실력은 의심할 바가 아니었고 그가 죽었다는 건 다른 마탑의 마탑주들도 충분히 위험할 수 있다는 얘기이며 그 밑은 더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조만간 범인을 공표하겠다고 했어요."
"정말? 범인을 찾았대?"
"그건 나도 잘...."
금색 마탑 마법사의 말에 이신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범인을 말하겠다고?'
황색 마탑에서 단서를 찾을 일 따위는 없다.
유물의 위치는 마탑주만 알고 있을 테고 부마탑주는 끽해야 그 존재 정도만 알고 있을 테니까.
'설마, 마탑주가 그 위치를 말해 줬나?'
황색 마탑주의 성격을 생각하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설령 요즘 분위기 때문에 유적에 대한 언급은 했어도 들어가는 방법은 절대 말했을 리 없다.
'내가 그날 자신을 죽일 거라 상상도 못 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전혀 상정해 두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만약 혹시나 알아차렸다면....
그렇게 생각이 진행되자 이신의 눈이 눈앞에 두 사람에게로 꽂혔다.
"한 판 붙자고 했지? 그래. 붙자."
"진짜? 거절할 줄 알았는데, 좋아. 붙자고."
베른은 좋다고 이신의 말을 받아들였고 옆에 소문을 전달하러 왔던 마법사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마탑주님이 바로 들어오라 하셨는데...."
"걱정 마라, 우리가 아는 장소가 있으니. 거기서 대련만 하고 바로 들어가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마법사가 가려 할 때.
이신이 그를 붙잡았다.
"그쪽도 구경하실래요?"
"뭐? 이 사람은 왜?"
"그래도 우리 둘이 붙는데, 구경꾼이야 많으면 좋잖아."
그 말에 베른이 좋다고 박수를 치며 수긍했다.
"그렇지! 너도 구경해. 그리고 이 결과를 다른 마법사들에게 널리 널리 알리라고."
"어? 그, 그래...."
마법사가 수긍의 의사를 비치자, 이신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제52화
네 사람은 고든의 개인 훈련장으로 움직였다.
"여긴 내 개인 훈련장이다. 내가 마법을 써도 웬만하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내구성에서 아주 뛰어나니 마음껏 싸워도 된다."
이신과 베른이 훈련장에서 서로 마주 섰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베른과 자주 마주 볼 일이 전생에는 많았다.
전생에 15층에 올랐을 때, 금색 마탑으로 시작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이신은 마탑주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 베른은 이미 고든의 제자였다.
당시 먼저 금색 마탑에 들어와 있던 베른은 마탑주의 제자가 된 이신을 고든과 함께 수차례 견제했다.
이신이 15층에서 제일 고생을 했던 이유가 어찌 보면 이 둘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자신을 힘들게 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니 이신의 얼굴에 썩은 미소가 지어졌다.
'5개월 후 델리그가 시작할 즈음엔 꽤 대단한 마법사로 성장해 있겠지만....'
지금의 베른은 성장 잠재력만 높은 애송이일 뿐.
"자, 시작해라."
고든의 경기 시작 신호와 함께 베른과 이신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신의 발밑으로 생겨나는 물웅덩이.
그 안의 물들이 이신의 발에 달라붙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막아 봐."
자신만만한 도발과 함께 허공에 새겨지는 마법진.
마법진 위로 뇌기가 모인다.
"전격포."
후웅―
두꺼운 전격의 에너지가 모여 발사된다.
그대로 맞는다면 즉사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의 위력.
허나, 이신에겐 너무나도 익숙하고 뻔한 마법이었다.
아니, 오히려 퇴화된.
'닳고 닳도록 봤던 마법이지.'
희미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린 이신이 마력을 한곳으로 모았다.
이신의 지팡이에서 날아간 마력의 줄기가 높디높은 천장에 꽂혔다.
[피뢰(避雷)]
금방이라도 이신을 꿰뚫고 지나갈 것 같던 베른의 전격포가 그대로 휘어지며 방향을 선회해 이신이 날린 피뢰로 향했다.
"뭐, 뭐야?"
생전 처음 겪어 보는 마법.
당황한 베른이 다급하게 마력을 움직여 보지만 소용없다.
그대로 천장에 부딪혀 사라질 것 같던 전격은 천장에 찰싹 달라붙어 천장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네 마법, 그대로 받아 봐."
이신의 마력이 또 한 번 움직여 천장에서 파도치듯 움직이는 뇌기의 파동을 불러 모은다.
수석 클라테인 고든의 절기 중 하나가 전격포라면 마탑주의 절기는 낙뢰(落雷).
그리고 그건 과거 이신의 첫 번째 절기이자, 그의 주력 마법이었다.
[낙뢰(落雷)]
쿠구궁!
하늘에 먹구름이 끼듯 천장에 새겨진 뇌기의 구름들이 한 곳에 모여 땅으로 내리친다.
그 순간, 뒤에서 이신의 마법을 보던 고든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며 그가 마력을 뻗어 베른의 위로 뇌기의 막을 만들어 냈다.
훈련장의 사방으로 고든의 뇌기가 튀고 뇌기들은 서로 부딪혀 마찰을 일으켰다.
'저걸 그대로 맞으면 베른은 죽는다!'
마탑주의 진신 절기 중 하나인 낙뢰(落雷).
그것을 흑색 마탑의 마법사인 저 이신이란 녀석이 펼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도대체 저 녀석은 어떻게 저 마법을 사용하는 건지, 마탑주의 숨겨진 제자인지.
수많은 생각들이 그 순간 머리를 스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저걸 베른의 수준으로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저 마법이 마탑주의 낙뢰였다면 제때 반응하지 못하고 베른을 구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신이 쓴 마법은 약간의 딜레이가 있었고 그 덕에 고든이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허공에 생겨난 뇌기의 막.
그 위로 이신의 낙뢰가 떨어지고 뇌기가 맞부딪히며 막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급속도로 퍼지는 뇌기.
이신의 낙뢰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든의 막을 타고 흘러 마력을 따라 고든을 향하기 시작했다.
'설마! 나를 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고든이 다가오는 뇌전을 막으려 할 때.
어느새 검게 변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죽음의 사슬들이 그의 온몸을 묶었다.
'아니...!'
살아 있는 한 전혀 저항할 수 없는 그 죽음의 사슬에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이신의 뇌전에 그대로 심장을 관통당했다.
"크아아아아아아!"
온몸이 뇌기에 지져지며 몸을 부르르 떨던 고든이 그 와중에도 마력을 일으켜 방어를 해 보았지만 완전히 뇌기를 떨쳐 내는 것은 무리였다.
"크아아아악! 하악...하아...하아아...."
손발이 덜덜 떨리고 온몸의 근육이 바르르 떨리는 상태로 바닥에 엎드리듯 주저앉은 그가 핏발 선 눈으로 이신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베른과 구경하던 금색 마탑의 마법사는 깜짝 놀라 고든에게 달려갔지만.
"만지지...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 짜내며 다가온 이들을 밀어냈다.
"끄으윽...."
고통에 신음을 내뱉으며 그가 주먹을 움켜쥐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엄청난 정신력과 의지력이었다.
직접 공격을 했던 이신조차 놀랄 정도로.
기습적으로 관통당한 낙뢰를 맞고도 그 상황에서 마력을 일으켜 최대한 몸을 보호하고 버틴다는 게 일반적인 마법사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야! 뭐 하는 거야! 너 때문에 스승님이 다쳤잖아!"
고든의 모습에 잔뜩 화가 난 베른이 이신에게 다가와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멍청한 건지, 그런 척을 하는 건지.
이 상황에서도 그는 이신이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놔."
"윽!"
이신에게 손목을 붙잡힌 베른의 손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풀렸다.
힘 스탯이 100을 훌쩍 넘는 이신에 비하면 베른의 힘은 터무니없이 약했다.
우드득!
손목을 그대로 꺾인 베른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그 모습을 보던 금색 마탑 마법사는 덜덜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 살려 줘."
"...."
고든과 베른과는 악연이 있다지만 이 마법사는 아니다.
그저 만들어진 존재.
이렇게 아무 힘없고 죄 없는 이들이 저렇게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면 멈칫하게 되곤 한다.
최고의 악당이 되겠다 말했지만 그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세계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고든과 베른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이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기에 이 마법사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미안합니다."
이신은 그대로 몸을 돌려 훈련장을 나가는 문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천장에서 내리치는 벼락.
얇지만 강력한 벼락 세 줄기가 금색 마탑의 세 마법사들에게 떨어지고 그 위로 죽음의 사신이 나타난다.
- 일어나라....
* * *
청색과 적색에 이어 황색 그리고 금색까지.
연달아 이어지는 사건에 그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흔적을 찾고 있었다.
세이아의 중간계라고 할 수 있는 청색, 적색, 녹색 중에서 청색과 적색이 거의 괴멸하고 녹색만이 멀쩡히 남은 상황.
녹색 마탑의 마탑주는 자신의 경쟁자들이 무너졌음에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감만 점점 가속되고 있음을 느꼈다.
"청색과 적색은 서로 싸우다가 자멸, 셰인은 죽고 헬렌은 거의 몇 년은 누워 있어야 하고... 테리안은 암살에, 금색의 고든은 행방불명이라...."
자신의 방 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의 엄지를 물어뜯는 녹색의 마탑주 바론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한 단체... 아니, 한 사람의 짓이라면? 그럼 도대체 그건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화염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마탑주들을 죽일 수 있는 실력자.
적어도 그 정도 수준의 실력자이면서 화염을 다루는 사람은 헬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흐름이 이어진다면....'
이제 델리그가 거의 4달 정도 남은 시점에서 우승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은 백색 마탑.
금색의 마탑주 아스터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백색은 아직 전력이 멀쩡했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우승은 백색 마탑에서 가져갈 것이다.
'백색에서 화염술사를 비밀리에 키웠다면... 그래, 그 음흉한 아벨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인 바론이 자리에 앉았다.
'백색 마탑이 분명해.'
흑색도 전력은 멀쩡하지만 놈들의 실력으로 우승은 턱도 없으며 그들이 그런 대단한 화염술사를 키울 여력이 있을 리도 없다.
흑색 마탑이 멀쩡한 것도 백색이 범인이라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지던 두 마탑의 라이벌 관계.
아벨 그 자식이라면, 오히려 흑색을 멀쩡히 내버려 두고 델리거가 되어 흑색을 철저히 짓밟으려 할 게 분명했다.
띡.
바론이 책상 위 버튼을 누르자, 바깥에서 방문을 열고 부마탑주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바론 님."
"은밀하게 전령을 보내. 백색을 제외한 전 마탑에."
* * *
흑색 마탑의 거대한 시험장.
가운데에 있는 시험장을 주변으로 삥 둘러싸인 관객석.
시험장 위에는 클라테 한 명과 이신이 서 있었고 주변 관객석에는 수많은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앞에는 수석 클라테와 부마탑주가 이신의 시험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주 계열과 소환 계열 두 분야 모두를 시험 보기로 했고 첫 번째 시험은 저주시험이다."
수석 클라테가 자리에 앉아 설명을 시작했다.
1급 시험은 저주 혹은 소환 계열에서 자신의 분야를 정해 연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신은 둘 모두를 진행하는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를 시도한다고 했다.
그간 마탑 내 강의에서 이신이 보여 준 성과와 실력 그리고 두 가지 계열을 동시에 시험 보는 것하며 1급 시험이 끝나고 바로 클라테에 도전하겠다 하는 이신의 선언까지.
그 모든 것을 고려한 결과, 이번 1급 시험에 부마탑주와 수석 클라테까지 모두 모여 시험을 참관하기로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이렇게 단기간에 러너부터 클라테에 오르려 하는 사람은 이신이 처음이었고 이미 내부적으로 이신을 역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유망주라 칭하고 있었다.
"첫 번째 저주 시험은 클라테와의 대결이다. 서로에게 저주를 걸고 상대를 쓰러뜨리면 된다."
이신이 1급으로의 진급이 확실시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서 그가 클라테가 되냐 안 되냐가 마법사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그래서 1급 시험 자체의 난이도를 올리고 1급 시험과 동시에 클라테의 자격을 시험하기로 했다.
"저주는 어떤 걸로 할 건가?"
부마탑주 에단이 수석 클라테에게 물었다.
"흠... 혹시 자신 있는 저주가 있나?"
수석 클라테가 이신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호오, 자신감이 대단한데. 자네는?"
그의 시선이 이신에게서 클라테로 옮겨졌고 그 또한 굳은 표정으로 아무거나 괜찮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럼 기본적이면서도 정밀한 체크가 가능한 순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리든(Leaden)으로 하는 건 어떤가요?"
"리든이라...괜찮군."
레이나의 제안에 부마탑주인 에단이 동의했고 시험장 위에 있던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서로 저주를 걸고 먼저 무릎을 꿇는 이가 지는 거네."
목표물을 무겁게 만드는 저주인 리든.
그것을 서로에게 걸어 상대방을 무릎 꿇리면 이기는 대결이었다.
시험장 위, 이신과 클라테가 서로를 마주 보며 마력을 서서히 예열했다.
두 사람의 마력이 시험장 위를 넘실거린다.
"상관없다는 그 말, 후회하게 해 주지."
자신의 상대로 끝까지 여유를 부리는 모습에 기분이 상한 클라테가 경고하듯 말했다.
흑색 마탑에 들어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녀석.
자신과 놈의 경력 차이만 해도 십 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재능의 차이는 있어도 기본기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법.
리든은 요령이나 잔재주가 소용없다.
클라테인 데인은 이신을 전혀 봐주지 않고 그 차이를 절감하게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다.
"그럼 시작해라."
수석 클라테의 말에 시험장의 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흑색 마탑의 역사상 최초로 2급 마법사와 클라테가 벌이는 대결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손에 땀을 쥐고 그 대결을 지켜보았다.
제53화
이신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검은 마력이 움직였다.
그 죽음의 기운이 담긴 마력이 상대편 클라테를 향해 날아가고 그 위로 저주가 새겨졌다.
"큭!"
생각 이상으로 강한 저주의 위력에 놀란 클라테가 신음을 내뱉으며 힘들게 버텼다.
그와 동시에 이신도 클라테가 날린 저주에 맞아 그 저주를 버티고 있었다.
눈에 띄게 표정이 일그러진 클라테와 다르게 이신은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리던 죽음의 통찰자의 이야기.
이신의 검은 마력과 클라테에게서 쉽게 우위를 점하는 모습을 본 그들은 정말로 그가 죽음의 통찰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끄윽."
그건 이신을 마주한 클라테도 마찬가지였다.
또다시 2차로 저주를 맞은 그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표정이 점점 일그러진다.
고개를 들어 상대편을 보았지만 놈은 여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주변의 다른 마법사들은 이 대결을 보며 자신을 향해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클라테의 권위를 실추했다느니, 실력이 없는 마법사였다느니 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점점 평정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클라테는 최대한 정신을 붙잡고 저주를 발산했다.
서로 사이좋게 2방씩 리든(Leaden)을 맞은 상황.
클라테는 이신이 멀쩡한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침착하게 저주의 시전과 동시에 놈이 날리는 저주를 분석했다.
저주를 시전하는 속도, 위력, 범위....
'나와 비슷한 수준은 되는 것 같군.'
거의 동시에 저주를 날리고 비슷한 위력으로 맞는다.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3번째 저주를 날려야 할 때.
이대로 포기하면 평생 흑색 마탑에서는 놀림감이 될 수도 있었다.
3차로 날아오는 저주.
저주를 맞는 순간 이를 악문 클라테가 무언가 이상함에 눈을 번쩍 떴다.
'뭐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던 상황 속에서 문득 솟아오르는 수치감.
몸으로 느껴지는 저주의 무거움이 이번 3차에선 거의 느껴지지 않다시피 했다.
'이 개자식이!'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이신을 보았고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다만 그 전보다 조금 힘든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클라테는 차오르는 수치감에 버럭 화를 내려다가 주변에서 자신을 보는 마법사들의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그 경멸과 무시가 조금 옅어져 있었다.
그가 그렇게 얼떨떨한 상태로 저주를 이어 갔다.
4차, 5차, 6차, 7차.
연달아 이어지는 저주의 공방과 함께 자신을 보는 마법사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처음에 생긴 그 경멸이 이제는 놀라움으로, 그리고 환호로 바뀌었다.
이쯤 되자 이신을 향하던 기대감이 점점 클라테를 향해 변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잘 버티는 게 아닐까? 나도 모르게 저주의 위력을 절감시키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큭...그럴 리가 없지.'
헛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꾹 참은 그가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퍼지는 함성.
이신은 온몸을 부들거리며 서 있다가 주저앉았다.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전혀 연기라 생각할 수 없었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부마탑주는 이신에게 다가와 물었고,
"자네 끈기가 이렇게 대단한 줄은 처음 알았어."
"아, 아닙니다."
수석 클라테는 클라테를 일으켜 주며 말했다.
양쪽 모두에게 향하는 찬사.
클라테는 복잡한 얼굴로 이신을 보았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소환 시험은 충분히 쉬었다가...."
"바로 하겠습니다."
"괜찮겠나?"
"예."
에단이 재차 물어봄에도 이신은 단호했다.
"좋아, 자리를 이동하지."
저주 시험이 이뤄지는 곳과 다르게 소환 시험이 이뤄지는 시험장에는 철창이 달린 감옥 하나가 있었다.
"이번 시험의 주관은 이들이 하겠네."
수석 클라테가 세 명의 클라테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환 계열을 주력으로 연구하는 마법사들.
소환 계열은 흑색 마탑 내에서 비주류에 속했고 그쪽 분야를 연구하는 이들도 소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세 명이다.
마탑주, 부마탑주, 수석 클라테까지 전부 저주 계열이었으며 소환 계열의 명맥은 끊어진 지 오래된 상황.
소환 계열 클라테 하나가 나서서 시험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시험은 저 철창 안에 있는 홉고블린을 소환한 언데드로 물리치면 되는 시험이다."
그 말에 이신이 철창 안의 홉고블린을 보았다.
고블린 부락 전체를 이끄는 괴수.
신체 능력이 다른 고블린들에 비해 현저히 뛰어난 것도 있지만 녀석의 진짜 무서움은 고블린들과 다르게 뛰어난 지능과 교감 능력이다.
제멋대로인 고블린들을 한데 뭉치게 만드는 그 능력 때문에 홉고블린은 상당히 까다로운 괴수이다.
그러나 이곳의 시험은 홉고블린 하나만 상대하는 것.
"홉고블린 하나가 끝입니까?"
"그래, 너무 걱정 말게. 홉고블린을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미 저주 계열에서 클라테를 이기는 성과를 보였으니 충분히 참작될 것이라네."
클라테는 이신이 홉고블린이 부담스러워 물어봤다고 생각했고 이번 시험을 함께 주관하는 나머지 두 명의 클라테도 마찬가지였다.
클라테의 말을 들은 이신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무리 수준이 떨어진다 해도 이 정도일 줄이야....'
기껏해야 다른 부하들도 없는 홉고블린 하나.
그의 주력이 나설 필요도 없다.
이신의 주변으로 일렁이는 검은 마력이 땅으로 꺼지듯 사라지고 그의 그림자가 팽창하며 거대한 포탈을 만들어 낸다.
[그림자 공간]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이신의 주력 언데드들.
"나와라, 바크."
그중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적합한 스켈레톤이 포탈의 밖으로 나온다.
두꺼운 뼈마디들과 흉악한 두개골.
튀어나온 이빨들과 거대한 몸체.
검은 마력을 줄줄 흘리는 스켈레톤 오우거 바크가 나오자마자 괴성을 내질렀다.
크롸라라라라라락!
"아아악!"
"괴, 괴물이 나타났어!"
"무슨 짓을 한 거야?"
"말도 안 돼...."
경악에 빠진 마법사들이 소리를 꽥꽥 질러 댐에도 이신은 들리지도 않는 듯 그 자리에 서서 마력을 흘려보냈다.
"죽여."
바크의 손에 든 몽둥이가 위로 거칠게 올라갔지만 홉고블린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벌벌 떨었다.
이미 바크의 피어에 몸이 굳어 버린 홉고블린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후우웅―
퍼걱!
그대로 두개골이 부서지고 그 두꺼운 몸체가 단번에 뭉개지며 바닥에 처박혔다.
저주 실력에 마법사들이 놀란 것도 잠시.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벅. 저벅. 저벅.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굳어 버린 상황 속에서 갑자기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놀란 클라테 셋이 몸을 움찔했다.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시험을 끝마친 이신이었다.
"합격입니까?"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셋은 목에 모터라도 달린 듯 위아래로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 * *
클라테가 되며 흑색 마탑 내의 태풍의 눈이 되어 버린 이신.
그의 앞에 레이나가 걸어왔다.
"이젠 같은 클라테네."
"그러네요."
"말 편하게 해, 아! 아니지. 이제 곧 더 올라갈 테니 내가 존대를 미리 해야 하나?"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신이 정말로 존대라도 하라 할까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얼굴에 뻔히 드러나 이신이 피식 웃으며 말렸다.
"그냥 편한 대로 하십쇼. 신경 안 쓰니까."
"음... 그럴까? 하하! 맞긴 하지. 근데 진짜 대단해. 저번 시험은 나도 진짜 놀랐다구."
"소환 계열에 관심이라도 생겼습니까?"
"어? 어... 무, 무슨 소리야! 저주 하나만 파기도 바쁜데. 난 너처럼 괴물이 아니라고."
지난번 그 저주 액체의 레시피 때처럼 소환 계열에 대해 가르쳐 달라면 흔쾌히 가르쳐 줄 것 같아, 순간 혹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일 거 같아 레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나름 천재라는 소리 많이 들은 그녀지만 소위 괴물이라 불리는 진짜 천재 중에 천재들을 따라가려다가는 가랑이 찢어지는 법이다.
"다음에 저주에 대해서나 얘기 좀 해 보자고."
"그러죠."
레이나가 떠나고 이신은 새로 배정받은 7층의 방으로 가던 중 저번 소환 계열 시험의 주관을 맡은 세 명의 클라테를 만났다.
"아, 이신 클라테.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그러죠."
세 사람은 이신을 따라 방으로 와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왔다.
"와...."
"우리 방보다 훨씬 좋은데?"
"이신 클라테라면 그럴 수 있지. 암."
기존 클라테였던 자신들보다도 훨씬 좋은 방 안의 모습에 감탄을 내뱉던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이신 클라테. 소환 계열에 집중할 생각 없나?"
"맞아, 자네 정도의 실력이면 소환 계열의 최고가 될 수 있어! 최고의 네크로맨서가-."
딸그락.
차를 마시던 이신이 찻잔을 내려놓자 그 소리가 세 클라테에게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전 모든 흑마법을 다 다룰 겁니다."
"그건 너무 힘든-."
"그만. 더 말하게 하지 마십쇼."
이신의 매우 단호한 태도에 세 사람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지금 우리 소환 계열에 종사하는 마법사들은 매우 힘든 실정이야. 소환 계열의 유파는 모두 끊겼고 지금은 우리 스스로 발전해 가야 하는 상황이지."
"우린 자네 같은 천재가 필요해. 우리들의 막힌 길을 뚫어 줄 수 있는."
클라테들의 간절함이 그들의 떨리는 손끝에서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제가 모든 분야를 다 다룬다고 소환 계열을 소홀히 한다는 게 아닙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
"고맙네! 고마워!"
이신의 긍정적 대답에 기뻐하는 모습은 무슨 용돈이라도 받아 좋아하는 애들 같았다.
"도대체 그 오우거는 어떻게 스켈레톤으로 만든 건가?"
"나는 저 홉고블린도 언데드로 만드는 데 애를 먹었어, 만들고 나서도 다루기가 쉽지 않았지."
"언데드들은 최대 얼마나 조종할 수 있나?"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이신이 손을 내저으며 그들을 만류했다.
"제가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신이 간신히 그들을 진정시킨 뒤 밖으로 보내고 소파에 앉자마자 또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오세요."
이신과 지난 시험에서 저주로 맞붙었던 클라테였다.
"그때 왜 그랬죠?"
다짜고짜 묻는 물음에 이신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까닥이며 대답했다.
"무슨 소립니까?"
"다 알아요, 당신이 나 봐준 거."
"봐준 거라 생각합니까? 당신의 저주가 강해 내가 저주를 제대로 못 걸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온전히 그쪽의 성과고 그쪽이 만든 결과입니다."
단호한 이신의 태도에 더 묻고 싶었지만 클라테는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이신 클라테."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을 나서던 그가 나가기 전 한마디를 더 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문을 닫고 클라테가 나간 뒤 이신이 소파에 기대앉아 있으려 할 때, 또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이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근래 사람들이 하도 찾아와 제대로 할 일도 못 하고 머리만 지끈거리는 상황이었다.
메이나 워리라도 불러서 문 앞을 막아 버릴까 했지만 그건 참았다.
"들어오세요."
또 누구지? 하는 생각으로 열리는 문을 보고 있을 때 들어온 사람은 부마탑주 에단이었다.
'에단이 왜 찾아온 거지?'
이신이 의아함에 그를 바라보았다.
"차 좀 드시겠습니까?"
"고맙네."
테이블 위에 차를 갖다 놓자, 그것을 한 입 마시고 내려놓은 그가 지긋하게 이신을 보았다.
"자네... 부마탑주가 될 생각 있나?"
제54화
세이아의 서부 지하실.
그곳에 녹색 마탑주, 적색 부마탑주, 흑색 부마탑주, 금색 클라테가 모였다.
이번 비밀 회담을 주최한 녹색 마탑주 바론이 입을 뗐다.
"적색 마탑과 흑색 마탑, 금색 마탑의 마탑주들은 오지 못하는 상황이고, 청색과 황색은 얘기할 생각 자체가 없다고 하더군."
"그럴 만도 합니다. 청색은 거의 멀쩡한 이들이 없고 황색은 황색 마탑주 암살의 증거를 찾기 바쁘니."
"우리 금색 마탑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론은 금색 마탑에서 이런 자리에 클라테를 보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우선은 그냥 넘어갔다.
"이번 상황에 대해 다들 알겠지만 현재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은 백색, 녹색, 흑색 마탑이야. 그리고 이곳엔 백색을 제외한 녹색과 흑색 마탑의 사람이 와 있지."
"그렇다는 건 이번 사건의 배후를 백색 마탑이라 보는 겁니까?"
금색의 클라테가 물었다.
"그래, 솔직히 난 그렇게 봐. 이번 사건들의 목적이 뭐겠어? 곧 있을 델리그의 우승밖에 더 있겠나? 이대로 간다면 백색 마탑이 델리그에서 우승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야."
"그게 목적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뭐일 거 같지? 얘기해 봐, 에단."
에단도 혹시 몰라 그렇게 물었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백색이 이번 델리그에서 우승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후 전력 부분에서 나머지 마탑과 점점 격차가 벌어질 거야."
"맞습니다! 반드시, 이번 배후를 찾아내서 죽여야 합니다."
적색 마탑은 이번 일에 가장 먼저 휘말렸으며 청색 다음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었다. 헬렌은 사실상 은퇴나 마찬가지였고 수석 클라테도 회복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만큼 전력으로 칠 수 없다. 거기다 마탑의 마법사들도 많은 이들이 다친 상태.
그렇기에 적색 마탑은 범인 찾기에 혈안이었다. 찾아서 그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저도 동의합니다. 백색 마탑을 이대로 크게 두고 싶지는 않군요."
에단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저희 마탑의 내부 사정이 좀 있는지라 정리가 되는 대로 힘을 보태겠습니다."
"백색이라 어떻게 확신하죠? 여기 흑색이 진짜 범인일 지도 모르는데."
거의 백색 마탑에 대항해 연합하기로 정리가 되어 가는 상황에서 클라테가 태클을 걸었다.
초지일관 처음부터 삐딱한 태도를 일관했던 그의 모습에 적색의 부마탑주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아직도 금색이 예전의 금색인 줄 알아! 고든과 너희 유망주 베른도 다 죽은 마당에. 아직도 예전의 위세를 믿고 그따위 건방진 말투로 나불대면 네 주둥아리를 그대로 불태워 버리겠어."
"감히 클라테 주제에 이 자리에 낀 것도 짜증 나는데, 그따위로 말을 해? 진짜 죽고 싶은가?"
에단까지 불쾌한 듯 가세하자 금색의 클라테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지금의 금색 마탑은 고든과 베른이 죽고 난 뒤에 위세가 예전만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래, 지금 전력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에서 무슨 소리인가? 흑색을 의심할 거면 더 합당한 증거나 심증이라도 가지고 와서 그리 말해라."
"...알겠습니다."
클라테는 속에서 분노가 끓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리 자신이 금색 마탑의 마법사라고 해도 상대는 마탑주와 부마탑주들.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저희 금색 마탑은 이번 일에서 빠지겠습니다."
"뭐?"
"너! 지금 좀 뭐라 했다고 삐지기라도 한 거냐!"
다른 마탑의 항의에 금색 클라테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아닙니다.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오기 전부터 마탑주님께서 전달하라 명령하신 겁니다."
금색 마탑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겠다.
심증으로는 백색이 맞지만 혹시 모를 상황도 있으니 우린 고든과 베른의 흔적을 찾고 나서 판단하겠다.
라는 금색 마탑주의 전언에 바론은 그것을 듣고 알겠다며 수긍했다.
이미 예전부터 알던 금색 마탑주 아스터라면 딱 그런 반응일 것 같다는 생각이었고 이 클라테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나중엔 합류하겠지.'
바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비밀 회담을 끝마쳤다.
녹색, 적색, 흑색 마탑의 연합.
백색 마탑을 무너뜨리기 위한 연합이 시작되었다.
* * *
흑색 마탑.
이신의 언데드 소환술을 본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신의 강의를 듣고 싶어 했고, 결국 무수한 요청 끝에 결국 특별 강의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소환술에 대한 강의.
원래대로라면 클라테에 오르고 제대로 된 성과를 내거나 실적을 쌓은 뒤에야 강의를 할 수 있었겠지만, 이신은 클라테로 오르는 시험에서 보여 준 그 파급력이 대단했다.
부마탑주와 수석 클라테까지 큰 감명을 받았기에 이번 특별 강의가 성사되었고 이신도 그 강의를 수락했다.
흑색 마탑 내에서도 가장 큰 강의실.
수많은 청강 요청에, 마탑 내 가장 크고 좋은 강의실은 모처럼 자리가 가득 차는 기염을 토했다.
오히려 자리가 부족할 정도.
2급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1급에 이어 클라테들도 특별 강의를 듣기 위해 모였고 수석 클라테와 부마탑주까지 청강하기 위해 들어왔다.
수많은 마법사들 앞에서 떨 법도 하건만, 이신은 그 커다란 교단에 홀로 섰음에도 전혀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소환 계열 강의인데도 많이도 모였네.'
그동안 클라테 셋에게 흑색 마탑에서 연구하고 공부한 소환 계열에 대해 들어서 어느 정도 그 수준에 대한 파악을 끝낸 상태였다.
이미 강연에 대한 내용의 일부분은 클라테 셋에게 미리 시연한 상태.
그 반응을 미리 확인했기에 이신은 이번 특별 강의의 성공을 예감했다.
"특별 강의를 시작하겠다."
이곳에 부마탑주와 수석 클라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신의 아래이기에 편하게 말을 하기로 했다.
"소환술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이 계열은 전투에서 한계가 없다. 보통 마법사는 대량 살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막상 전장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매우 한정적이다. 화력은 강하지만 그만큼 방어는 약하니까. 다수를 맞이하면 그 난잡한 전장 속에서 마법사 혼자 살아남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그리고 그건 마법사를 제외한 다른 클래스들도 마찬가지다."
이신이 풍기는 여유로운 분위기, 이미 모든 걸 겪어 본 듯 확신에 찬 목소리, 이전에 보여 준 그의 뛰어난 마법 실력까지.
그저 당연한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도 그러한 요소들이 강의실에 있는 모든 이들을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시키게 만들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카리스마는 청중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흑마법사는 다르다. 저주도 좋은 계열이지만 소환술은 그것과 다른 큰 메리트가 있지."
교단과 관객들 사이에 넓은 공간.
그 위로 이신의 검은 마력으로 통로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스켈레톤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저 얄팍한 뼈로 이루어진 허약한 스켈레톤부터 보는 것만으로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스켈레톤 오우거까지.
거대한 스켈레톤 오우거가 선봉에 서고 그 뒤로 스켈레톤 아처, 메이지, 워리어가 도열했다. 스켈레톤들이 흉흉한 검은 오러를 줄줄 내뿜으며 섰다.
"단 한 가지의 예외. 그게 바로 흑마법사다. 소환 계열의 흑마법사, 네크로맨서. 적을 죽이고 그 시체로 언데드를 일으킨다. 그를 바탕으로 또 죽이고… 다시 일으킨다."
수십 마리의 언데드들이 줄줄이 내뿜는 사기(死氣)와 살기는 같은 공간에 있는 마법사들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고 동시에 흥분되게 만들었다.
공포감과 동시에 느껴지는 흥분감.
적으로 만났을 땐 무섭지만 아군이 되었을 때 혹은 권속이 되었을 때 그 무엇보다 든든하겠다는 상상이 그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군단은 계속해서 번영하지."
이신의 마력이 퍼지고 그의 언데드 군단이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악!"
"꺄악!"
"뭐, 뭐야? 이리로 오는 거 아니지?"
갑작스런 괴성에 패닉에 빠져 버린 마법사들. 이신은 언데드 군단의 위압감을 한껏 내보였다.
"이게 바로 일인 군단이라 칭해지는 네크로맨서다."
압도적인 언데드 군단의 모습과 마주보기만 해도 몸이 떨리게 만드는 위압감, 적도 아닌데 심장이 멈춰 버릴 것만 같은 사기(死氣).
"소환 계열의 흑마법사들이 약할 것이란 편견을 버려라. 그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는 게 바로 이 소환 계열이니까."
이신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듣는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은 눈앞의 언데드 군단을 보며 열망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그 소환의 비결을 알려 주겠다."
딱!
이신이 중지와 엄지를 튕기자, 강의실의 옆문에서 조교들이 시체 하나를 수레에 넣어 끌고 왔다.
"기존의 너희들이 사용하던 소환 방법은 근본부터 잘못됐다."
그 말에 마법사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건 '지배력'이다. 그저 뼈마디를 맞추고 연결시켜 억지로 일으키는 게 아니란 거지."
교단과 청중석 사이에 놓인 오크 전사의 시체.
이신은 기존에 꺼낸 언데드들을 모두 다시 그림자 공간에 집어넣었다.
"이건 오크 전사의 시체다. 현재 1급 마법사들은 그냥 오크도 일으키기 힘들어하는 실정이지. 왜 그럴까?"
이신은 가장 앞에 앉은 1급 마법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오크가 강한 개체이기 때문 아닐까요?"
"아니야."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이신이 그 옆에 마법사를 지목했다.
"오크들이… 반항해서...?"
잘 모르겠다는 듯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하자 주변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미 죽은 시체가 반항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답. 통찰력이 있는데?"
이신의 예상외의 답변에 마법사들이 놀라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가장 앞에 있던 에단과 수석 클라테도 마찬가지였다.
"오크들은 투쟁심이 강하지. 그리고 그건 강한 개체일수록 심해진다. 애초에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부터가 소환의 시작점이 잘못된 거다."
죽어 싸늘하게 식은 오크 전사의 시체 위로 일렁이는 혼.
이신의 눈엔 그 난폭한 혼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가장 먼저 마력에 새겨야 할 것은 그들을 억누르는 지배력이야. 몸은 죽었어도 혼은 남아 있지. 그 혼을 사로잡는 지배력, 강제력, 카리스마! 그것들이 이 소환술의 핵심이다."
이신의 검은 마력이 오크 전사의 위로 흘러갔다.
"네크로맨서는 그 누구보다 강인해야 한다."
혼을 억누르고 종속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마력으로 발현된다.
검은 마력을 마주한 오크 전사의 혼이 검은 마력에 담긴 그 강력한 지배력에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오래된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기 힘든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체에 묶인 혼이 떠나기 쉽기 때문이다. 알겠어? 우리는 이 시체가 아닌 그 시체의 혼을 먼저 종속시켜야 한다."
검은 마력에 담긴 강력한 지배력.
더구나 혼을 볼 수 있는 이신의 시선이 오크 전사의 혼과 마주쳤다.
"복종해라."
무슨 악마라도 본 듯 벌벌 떨던 오크 전사의 혼이 시체로 빨려 들어갔다.
"그다음은 시체의 부패, 뼈에 새기는 강력한 인력이다."
이신이 검은 마력을 흩뿌리자, 오크 전사의 시체 위로 그 마력들이 스며 들어가고, 동시에 시체의 살점이 그 자리에서 썩어 사라진다.
그그극- 으그득!
기이한 소음을 자아내며 뼈들이 서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검은 마력이 뼈에 강하게 새겨지자, 스켈레톤 오크 전사가 삐그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 기이한 광경에 마법사들이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크아아아아아!"
검은 마력에 영향을 받아 살아생전보다 더 흉포한 괴성이 용솟음친다.
검은 안광을 일렁이던 스켈레톤 오크 전사가 괴성을 내지르며 교단 위 교탁을 내리쳤다.
그러자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두부가 으깨지듯 교탁이 부서졌다.
그 모습을 본 마법사들에게 스켈레톤 오크 전사는 두려움을 심어 주기보다는 기대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너희가 만드는 스켈레톤은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으며 그 어떠한 괴물도 너희의 권속이 될 수 있다. 한계를 정하지 말도록. 질문 있나?"
이신의 시연과 연설에 빠져든 마법사들의 손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올라갔다.
제55화
강연이 끝나고 기존의 소환 계열을 담당했던 클라테 셋은 밀려드는 마법사들의 질문과 요청 세례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다음 강연의 일정은 언제인지.
소환 계열의 강의가 더 있는지.
저주 계열이었는데 지금이라도 소환 계열로 바꾸면 어떤지.
이신 클라테님과 면담을 할 수 있는지 등등.
자신들이 이신의 조교도 아니고 비서도 아닌데.
처음엔 이러한 일들에 조금 짜증 나기도 했지만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클라테 셋도 이미 이신의 저러한, 틀을 깨는 소환술을 보았고 그때 당시에 그들도 저 마법사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엔 두 번째 그것을 보는 것임에도 몸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열망과 흥분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들도 이러할 진데 처음 보는 저 마법사들은 어쩌겠는가?
이미 저주 계열에서 확실한 연구 성과를 보였던 몇몇 클라테들도 소환 계열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소환술을 지금 시작하면 어떻겠나?"
"이신 클라테는 저주와 소환 둘 다 한다지? 나도 한번 해 볼까? 어떻게 생각해?"
"저런 스켈레톤 오우거를 권속으로 삼으려면 어느 정도 되어야 하지? 자네들도 할 수 있는가?"
"오우거는 됐고 난 리자드맨 주술사를 권속으로 삼고 싶은데, 얼마나 걸릴까?"
그간 그들이 얼마나 소환 쪽에 관심이 없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질문들이었다.
클라테 셋은 저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 부어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클라테님! 물어볼 게 있어요!"
"저도 소환술을 배우면 이신 클라테님처럼 될 수 있나요?"
"30개체나 되는 권속들을 부리려면 언제쯤 가능하죠?"
"일인 군단 너무 멋있어요! 클라테님들도 가능하시겠죠?"
클라테들을 보내니 그 밑의 마법사들이 또 몰려든다.
소환 계열의 현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마법사들을 보며 난감함을 금치 못했다.
'나도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해!'
'제발, 이신 클라테! 와서 이놈들 좀 어떻게 해 보세요!'
* * *
"이신 클라테님, 클라테님에게 온 편지들입니다."
1층에 내려가니, 마탑의 직원이 이신을 불러 수십 개의 편지들을 박스에 담아 건네주었다.
헛웃음이 나오는 숫자.
편지들을 버릴 수는 없으니 방으로 가져간 이신이 그 편지들을 슬쩍 살펴보았다.
"시가레이트?"
편지의 겉 표면에 적힌 시가레이트라는 이름을 발견한 이신은 한 곳에 대충 쌓아 놓으려던 편지 사이에서 그 편지 하나만을 꺼내 펼쳤다.
오늘 밤에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남동쪽 공터로 와 달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가레이트는 한 번 만나 보는 게 좋을 듯했다. 이번 계획에서 가장 큰 변수는 시가레이트이니.
편지를 고이 접어 품에 넣은 이신은 약속 시간에 맞춰 공터로 나갔다.
이미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시가레이트가 보였다.
"나왔군."
"나를 왜 불렀지?"
"소문 들었다. 클라테가 됐다지? 이번에 뭐 대단한 강연을 했다는 말도 있던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빨리 본론을 말 안 하면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말에 시가레이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이신… 죽음의 통찰자...맞지?"
시가레이트가 죽음의 통찰자라는 이름을 매우 경계하는 듯한 모습.
타 차원의 도전자인 시가레이트가 이미 알고 있을 정도라면 고층 구간은 모르더라도 저층 구간의 도전자들 대부분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야 한다.
세계의 개척자 칭호의 효과가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다.
어디까지 자신의 소문이 퍼진 것인지.
"맞다면?"
"너도 도전자라는 거 다 알아. 설마 네가 진짜 그 '이신'인지는 반신반의했는데 흑색 마탑 내에서 너의 행보를 보고 확실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아무리 너라도 흑색 마탑의 전력으로 마탑 전부를 꺾고 우승은 꽤 힘들 거야. 나랑 손을 잡자."
갑작스러운 제안에 이신이 피식 웃었다.
자신과 싸웠던 마법사가 이신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는 모습.
시가레이트는 흑마법사인 이신이 그런 수준급의 물과 불 속성의 마법을 쓸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미 망해 버린 적색 마탑과 손을 잡을 이유는 없는데."
"적색은 망하지 않았어. 부마탑주도 멀쩡히 있고 클라테들도 많이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있으니까."
"자신감이 지나친데? 여기서 너를 죽이면 적색도 끝인가?"
이신의 도발적인 말에 경계심을 극도로 끌어 올린 시가레이트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순식간에 달라지는 주변의 공기.
확실히 시가레이트는 여태 봤던 다른 도전자들과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다.
1층에서 가르쳤던 박혜원이나 박주혁, 백현과 같은 녀석들과 비교하는 것도 우스울 정도로.
굳이 여기서 시가레이트와 붙을 필요는 없다.
곧 있을 백색 마탑과의 싸움에서도 시가레이트의 전력은 충분한 도움이 될 테니.
"그만하지. 우리 둘이 여기서 싸운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먼저 지는 척 손을 내미는 이신의 모습에 시가레이트도 마력을 풀었다.
"이번 사건의 범인에 대해 아나?"
"몰라."
"이번 일의 범인은 하나 혹은 둘이다. 강력한 화염술사와 냉기술사. 이 둘이거나 두 가지 속성을 수준급으로 다루는 하나겠지. 냉기술사는 나와 잠깐이지만 붙은 적이 있어. 거의 나와 호각의 실력자였다. 만약 화염술사도 그 정도의 수준이라면 솔직히 나 혼자선 꽤 벅차."
생각보다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는 모습.
거만해 보일 정도로 자신감 넘치던 모습과는 조금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너도 도전자라면 헬 난이도가 어떤 곳인지 알겠지. 우리 둘 중 하나는 이번 층을 클리어하지 못할 테지만 힘을 합치면 둘 다 실패하는 일은 벗어날 수 있어. 저 세력을 꺾고 마지막에 적색과 흑색이 붙는 게 어때?"
"내가 범인일 거란 생각은 안 해?"
"네가 범인일 리가 없지. 고작 15층의 마법사가 불과 물 속성을 수준급으로 다루는 것도 모자라서 흑마법을 그렇게 잘 다룬다고? 대마법사도 아니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시가레이트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이신이 지난 청색 마탑의 강의에서 물 속성 마법을 수준급으로 사용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뛰어난 컨트롤을 보여준 것일 뿐 고위 마법을 보여 준 것은 아니었다.
베른도 언급했듯이 그 정도는 자신도 보여 줄 수 있다 했으니.
"그래서 힘을 합치자?"
"그래."
"좋아, 당분간 동맹을 맺자고."
"백색을 무너트리고 그 도전자인지 탑의 인간들인지 모를 그놈들을 모두 죽인 뒤에 붙는 거야."
이신과 시가레이트가 서로 손을 맞잡으며 동맹을 체결했다.
서로가 다른 마음을 품은 채로.
* * *
흑색 마탑의 내부.
이신의 방으로 부마탑주가 또 찾아왔다.
"생각은 끝났나?"
"예."
"그래, 이제는 얘기할 때가 됐어. 곧 백색을 공격하는데 우리 마탑도 힘을 보태야 하네. 마탑주는 흑색 마탑의 성장에 관심이 없어. 자신의 마법 능력 상승만을 꾀할 뿐이지."
지난번, 부마탑주는 이신에게 지금의 마탑주를 끌어내리자는 제안을 했다.
이미 마탑 내의 절반 이상이 부마탑주의 영향력 안에 들어왔고 이번에 마탑 내의 핵심 인물이 되어 버린 이신의 존재는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이신이 거절하면 이 모든 거사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을 정도로.
"대답해 보게. 마탑주를 처리하고 내가 마탑주가 되고 자네는 단번에 부마탑주가 되는 걸세. 같이 흑색 마탑의 부흥을 꾀하는 거야. 자네와 나라면 가능해."
어떻게든 이신의 동의를 얻고 싶어 하는 모습.
이신이 간절한 에단의 눈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함께하죠."
* * *
여태 에단이 이런 거사를 미루고 있던 것은 첫째로 마탑 내부의 영향력을 확실히 하기 위해.
둘째는 비밀에 감춰진 마탑주의 실력이 정확히 파악이 안 되기에.
셋째는 외부의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지금에 와서는 다 해결되었다.
이미 영향력을 절반 이상 확보한 상태에서 이신의 합류로 마탑 전체의 신임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마탑주가 아무리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폐관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신의 합류로 확실히 잡을 자신이 생겼다.
더구나 외부의 델리그도 마탑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걱정의 범위에서 벗어난 상태.
지금이야말로 마탑주를 끌어내리고 마탑의 내부를 공고히 하여 마탑을 성장시킬 때였다.
"마탑주님 접니다. 문 좀 열어 주십시오."
이신과 수석 클라테까지 불러 함께 올라온 에단이 마탑주의 방문을 두들겼다.
한동안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던 곳.
그전까지 그가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열지 않으면 강제로 부수고 들어간다.'
에단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안쪽에서 마탑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은 열려 있으니."
생각보다 순순히 그들을 들여보내 주는 것에 의아해하는 에단.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문을 열고 방을 들어가니 마탑주가 자리에 앉아 여유로이 세 사람을 맞이했다.
"왜 왔지? 내가 말할 때까지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금 바깥의 상황은 알고 있습니까?"
약간의 책망이 섞인 말투.
그 말속에는 마탑주가 지금껏 마탑의 마법사들을 챙기지 않은 원망이 담겨 있었다.
"알고 있다. 다른 마탑들이 지금 난리라지."
"하, 이 안에 박혀 있는데도 알 건 아시는군요."
"...."
"그걸 아는 인간이 저희 마탑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겁니까!"
에단이 울분을 터트리며 말하자, 마탑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창문 너머를 보았다.
"너는 우리 흑색 마탑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나?"
"압니다, 약하기 때문이죠."
"그래, 그래서다. 그래서 내가 강해져야 했다."
에단뿐만이 아니었다. 마탑주인 라키아의 목소리에는 그와 다른 막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혼자 강해지면 답니까? 마탑엔 당신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아니, 내가 강해져야 한다. 우리 흑색 마탑이 정체되기 시작한 건 예전 선조들의 명맥이 끊겨 버린 후로 점점 심해졌지. 내가 그 한계점을 높여 놔야 했다. 내가 하지 못하면 다른 이들은 더 올라가지 못하니까."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당신이 뚫어 놓은 그 길의 시작점조차 쫓아가지 못하는 마법사들이 대부분입니다! 당신이 하는 말은 그저 합리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감정이 격해진 에단이 라키아를 향해 지팡이를 겨눴다.
"난 내가 틀렸다 생각하지 않아, 에단."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만 마탑주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죽든지."
에단의 지팡이 끝에 마력이 모이고 그가 이신과 수석 클라테에게 눈짓했다.
"네가 강하다는 거 안다. 예전에는 우리 둘이 비슷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달라."
그에 맞춰 라키아도 마력을 끌어 올렸다.
둘의 마력이 맞부딪혔다. 자신만만하던 에단의 얼굴이 굳어졌다.
"큭!"
에단이 신음을 내뱉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마력이 너무도 허무하게 밀려났다.
에단이 마탑을 돌보는 사이, 라키아의 경지가 한 단계 오르며 두 사람 사이에 큰 격차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그걸 느낀 라키아의 입가에 희미한 씁쓸함이 감돌았다.
동시에 이신의 그림자 공간이 펼쳐지며 메이가 일어섰다.
"어딜!"
메이를 통해 라키아를 공격하리라 생각한 수석 클라테가 기습적으로 이신을 공격했지만 메이의 마법에 막혔다.
에단이 이를 악물며 수석 클라테를 노려보았다.
"역시, 배신할 생각이었나?"
"전 처음부터 마탑주님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때, 땅 밑에 생성되는 또 다른 통로들.
그곳에서 워리와 칼렌까지 튀어나왔다.
그 소환수들에게서 느껴지는 진득한 사기에 라키아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고 수석 클라테는 칼렌의 마법을 받아내기에 급급했다.
"하하하! 그래! 우리에겐 이신이 있지. 라키아, 당신도 오늘로 끝이다."
기고만장해진 에단의 마력이 모여 라키아에게 향할 때, 중간에 끼어든 워리가 붉은 안광을 일렁이며 그 마법을 검으로 잘라냈다.
"어, 어떻게? 아니! 그보다 이게 무슨 짓인가!"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에단이 이신을 향해 소리쳤지만 이신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긴, 다 뒈지기 싫으면 조용히 하세요."
"뭐, 뭐?"
"약한 놈들끼리 힘을 합칠 생각은 안 하고 서로 죽이려 하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신이 릴리안을 불러냈다.
허공에 붉은 피가 갑자기 모여들더니 그 안에서 차원이 다른 격을 가진 존재가 걸어 나왔다.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피부에 보랏빛의 머리카락.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미녀가 붉은 보석을 박은 듯한 눈동자로 세 사람을 보았다.
"하등한 것들이."
순식간에 치솟는 강대한 위압감.
숨이 덜컥 막혀 버린 듯 조여 오는 압력에 세 사람이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버티는 라키아와 다르게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에단과 수석 클라테의 모습에 이신이 손짓으로 릴리안을 멈췄다.
'격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마력이 쭉쭉 빠져나가네.'
마력량이 이렇게나 늘었음에도 릴리안의 사용은 아직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허억... 허억...."
"하아아...."
충격에 빠진 세 사람이 멍하니 땅을 바라보았다.
"다 죽기 싫으면 손잡으세요."
제56화
중부에 있는 백색 마탑.
그곳으로 수많은 마법사들이 몰려들었다.
녹색, 적색,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모여 만든 녹적흑 연합.
그 연합의 마법사들이 한데 모여 백색 마탑을 향해 움직였고 바론은 이러한 연합의 선두에 서며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백색 마탑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전력상으로 연합이 우위에 있으니, 이 싸움이 끝나기만 한다면 가장 강한 세력은 녹색이 될 것이 뻔했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백색을 쓰러트리고 자신이 델리그의 델리거가 되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다른 마탑들의 불참이었다.
황색 마탑은 자신의 마탑주를 죽인 범인을 밝힌다더니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청색은 아예 그럴 상황이 아니었으며 금색도 여전히 같은 태도였다.
흑색과 적색만이 적극적으로 백색을 치려는 상황.
'확실히 이길 수 있겠지?'
백색은 지난 델리그에서 우승한 마탑이었고 그 이후로 초기에만 왕성한 바깥 활동을 했을 뿐, 가면 갈수록 내부의 사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 음흉한 아벨이라면 무언가 비밀무기를 감추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황색 마탑의 마탑주가 죽고 금색의 고든, 청색의 헤밍웨이와 청색의 슌 그라미스까지 죽었다.
이러한 수많은 강자들을 처리한 마법사가 백색에 있다면 쉽지만은 않은 싸움이 될 게 뻔했다.
"걱정이 많아 보이는데."
라키아가 표정이 좋지 않은 바론을 보며 말했다.
"괜찮아, 그보다 그간에 상당한 성취를 얻었다면서...기대하겠어."
"그런 줄 알았지...근데 세상은 넓고 뛰어난 이들은 많더군."
"답지 않게 겸손한 척은."
녹색, 흑색의 마탑주와 적색의 부마탑주가 선두에 서서 연합을 끌었고 그들은 백색 마탑의 앞에 도착했다.
세 가지 색의 옷을 입은 마법사들이 뒤로 도열해 있었고 그 안에는 이신과 시가레이트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까지는 동맹이야."
"그래, 알았다."
불안한 듯 확답을 받아 내는 시가레이트에게 대강 대답해 준 이신이 백색 마탑에서 나오는 마법사들을 보았다.
백색 마탑의 마법사들 사이에서 백색 마탑의 마탑주가 앞으로 나왔다.
"결국 이렇게 모였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앞선 사건들의 범인이 아니야."
"아벨, 그렇게 부정해도 소용없어. 아니라는 증거라도 가져오든가."
바론의 말에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듯 아벨이 격정적으로 울분을 쏟아냈다.
"증거가 어딨나! 계속 마탑에만 있었는데."
"정황상 범인은 아벨 너밖에 없어."
갑작스럽게 끼어든 라키아를 슬쩍 본 아벨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는 닥쳐! 난 아니야, 난 범인이 흑색 마탑 출신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아벨 님, 흑색 마탑에서 어떻게 그럽니까? 자신들도 성과를 못 내서 빌빌거리고 있는데."
"크, 큼!"
적색 부마탑주의 적나라한 말에 불편한 듯 라키아가 헛기침을 했고 아차 싶었던 부마탑주가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안 통하네.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래, 숨겨 둔 그 마법사를 빨리 내놓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큰코다칠 테니까."
바론이 마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라키아와 부마탑주도 곧장 싸울 준비를 했다.
바론의 바람 마법.
마력에 대한 감각이 좋지 않다면 시야에 보이지 않는 바론의 마법에 당하기 쉽다.
쉬이익―!
긴장을 유지한 채로 적들을 유의하고 있었음에도 갑자기 들리는 바람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로브 자락이 잘려 나갔다.
"흐익!"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의 칼날이 목으로 향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를 떠올리며 클라테 하나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은밀하게 날아오던 바람의 칼날은 아벨에 의해 다음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아벨의 실드에 막혔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비겁한 수를 쓰는 건 여전하군."
"다 전략이다."
시답지도 않은 말을 건네는 사이, 아벨은 마력을 움직여 이 상황을 반전시킬 마법을 시전 했다.
[섬광탄]
그의 지팡이에서 뻗어 나간 빛의 구가 녹적흑 연합의 위에서 빛을 점점 더 강하게 발하더니, 한순간 눈이 멀 정도로 강한 빛을 발산하며 폭발했다.
자칫 눈이 그대로 실명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빛의 세기.
이신은 곧장 마력을 펼쳐 빛을 굴절시키는 막을 세웠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 완벽한 차단은 불가능했다.
"큭!"
"다들 눈감고 마력 파장을 펼쳐!"
부마탑주들과 수석 클라테들이 다급히 외쳤지만 너무도 급작스러운 공격에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1급 이하의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클라테조차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이신의 도움으로 실명은 면했을 뿐.
"공격해!"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백색 마탑의 공격.
빛의 화살과 점 포인트 레이저들이 날아와 연합의 마법사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섬광탄에 시야가 가려진 잠깐 사이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그때 연합 진영에서 병 하나가 날아와 백색 진영 위에서 터졌다.
"뭐, 뭐야?"
검은 액체가 안개처럼 촤악 퍼지고 공기 중에 섞여 둥둥 떠다니는 작은 입자 가루들이 백색 마법사들의 호흡기로 빨려 들어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이 액체 가루가 가져올 변화를 판단하기 위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고 왠지 모를 불안감에 성급해진 아벨이 대규모 마법을 시전 했다.
[빛의 파동]
"이것도 막아 봐...크윽!"
빛의 파동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가며 녹적흑 연합의 마법사들을 쓸어버리려 할 때, 갑작스러운 마력의 역류가 아벨의 몸에서 발생했다.
'뭐지?'
자신의 마법을 눈으로 보는 순간, 마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버틸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듯이 마력이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겉으로 티를 낼 수 없었던 아벨은 이를 악물며 마법을 취소했다.
"모두 마법 사용을 멈춰라!"
수석 클라테의 외침에 백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황급히 마법 사용을 멈췄다.
'제기랄, 조금 전 그 검은 액체 때문인가?'
분명 흑색 마탑에서 뿌린 것이 분명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위력의 광범위 저주 액체라니.
강력한 빛을 보는 순간 마력의 난폭성이 심해지고 컨트롤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흑색 마탑이 언제 이런 물건들을 만들어 낸 거지?'
처음 겪어 보는 종류의 저주라 대처가 미흡하긴 했지만 그 해결책을 찾아내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이 저주를 지우는데 10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젠장....'
아벨은 이를 악물고 몸 안에 들어온 그 액체의 잔재를 태웠다. 하지만 이미 상대 진영의 마법사들은 반격 준비를 거의 다 끝마친 상태였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아벨!"
"이런 비겁한 놈들이!"
[어둠의 각인]
그간 마탑 안에 처박혀 마탑의 마법사들을 내팽개치며 개발한 라키아 고유의 마법.
그의 지팡이 끝에서 생겨난 마력이 짙은 어둠으로 변하며 아벨의 심장에 박혀 불길한 마법진을 그린다.
"크윽!"
어둠의 각인에서 뻗어 나간 마력이 마력혈을 봉인하듯 감싸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마력혈에 들어온 마력들이 밖으로 다시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곳에 고여 어둠에 사로잡혔다.
"당분간 마력을 움직이기 힘들 거다."
"바론!"
"생각보다 일이 쉬워지는군."
바론이 무력해진 아벨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마법을 시전하려 할 때,
쿠구궁!
먹구름 낀 하늘에서 바론의 위로 강렬한 벼락이 내리꽂힌다.
바론도 알고 있는 익숙한 마법.
낙뢰.
기습적으로 내리꽂힌 뇌전에 담긴 힘은 쉬이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바람의 막을 기어코 비집고 들어온 뇌전이 바론의 어깨에 꽂혔다.
"커윽...."
바람의 막과 항시 몸을 보호하던 바람의 갑옷으로 위력은 급감했지만 그럼에도 완벽한 차단은 불가능했다.
저릿한 어깨를 매만지던 바론이 이를 악물고 낙뢰를 쏘아 보낸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금색의 옷을 입고 있는 금색 마탑의 마법사들.
그 선봉에 마탑주 아스터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스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바론, 그만해라. 넌 지금 방향을 잘못 잡고 있어."
"뒤늦게 나타나서 무슨 소리야!"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바론이 아스터를 향해 소리쳤다.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적인 아벨을 처리하려면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근데 아스터가 방해한다면 아벨을 처리하는 게 매우 힘들어진다.
더구나 금색 마탑이 백색 마탑에 합류하게 되면 이길 확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젠장, 뜻대로 되는 게 없군.'
"바론, 그리고 아벨 너도 잘 봐라. 우리가 싸워야 하는 적이 누군지를."
아스터가 품에서 하얀 구슬을 꺼내고 그곳에 마력을 주입하자, 구슬에서 빛이 뻗어 나와 허공에 하나의 영상이 나타났다.
"저게 뭐야?"
"어? 저 사람은...."
"고든? 그리고 저건 이신 클라테잖아?"
화면 속 고든과 베른 그리고 이신이 같이 있는 모습이 나타나자 마법사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잘 봐라."
화면 속 영상이 재생되었다.
시작은 이신의 낙뢰가 막 내리치고 있는 장면이었다. 뇌기의 막으로 그것을 막은 고든을 죽음의 사슬이 나와 몸을 속박했다. 저항할 수 없었던 고든이 심장을 관통당해 쓰러졌다.
그 후 세 명의 금색 마탑의 마법사들은 모두 이신에 의해 죽고 언데드가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영상을 보던 모든 마법사들이 혼란에 빠졌고 그건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상 하나로 이번 사건의 범인이 이신이라는 것쯤은 바보가 아니라면 당연히 알 수 있었으니까.
"이건 고든이 자신의 훈련장에 숨겨 놓은 비상 영상기억장치다. 그리고 그걸 내가 어제 찾아냈지."
그 이야기를 듣자 이신은 그때 고든의 뇌전이 사방으로 뿌려지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트리거였나?'
고든은 이미 자신을 이 일련의 사건들의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자신의 훈련장에서 붙자고 한 것이 분명했다.
설마 자신이 그렇게 쉽게 당할 것이라 예상은 하지 못했겠지만.
'한 방 먹었군.'
"이제 알겠나? 이 멍청한 것들아."
아스터의 마력이 치솟아 하늘에 고여 있던 뇌전을 움직였다. 이전에 바론에게 떨어진 벼락보다도 더 강력한 뇌전이 이신에게로 떨어졌다.
'어쩔 수 없나.'
이미 영상이 켜진 순간, 이신은 모든 상황을 대비해 마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피뢰]
낙뢰가 떨어지고 이신의 피뢰가 그 전격을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피뢰에 모인 전격이 다시 저주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아벨에게로 날아갔지만,
콰앙―! 파지직!
땅에서 솟아오른 대지의 벽이 부서지며 전격을 흩어 버렸다.
"네 놈이 범인이구나. 이신."
아스터의 전격을 무위로 만들어 버린 마법의 주인이 금색 마탑의 마법사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황색 마탑의 부마탑주.
그가 아스터의 영상기억장치를 보고 마탑주의 복수를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었다.
'일이 꼬이는데.'
그때, 이신의 마력 감각에 잡히는 한줄기의 마력이 라키아의 근처에서 느껴지고,
후우웅- 파앙―!
기습적으로 쏘아낸 바론의 공기포가 라키아의 마력과 부딪혀 허공에서 폭발한다.
연이어 라키아를 덮치는 화염의 파도가 에단의 [딥 월]에 막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일로 오십쇼!"
에단의 다급한 외침에 라키아가 흑색 마탑의 진영으로 이동하고 이신과 에단의 뒤로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뭉쳤다.
흑색 마탑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적색과 녹색이.
정면에는 백색, 우측에는 금색의 마법사들이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번거로워졌어.'
백색과의 싸움에서 녹색과 적색의 마법사들 전력이 어느 정도 감소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대부분 멀쩡한 상태였고 백색도 여전히 건재했다.
거기다 금색 마탑의 합류에 황색 마탑의 부마탑주까지.
'그리고....'
주변의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까지도 적이 될지 모른다.
이신은 어찌 되었든 이번 사건의 범인이었으니까.
"자네, 왜 그랬나?"
그때, 그에게 다가온 에단의 물음에 이신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그가 아주 잠깐 동안 에단을 기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지금 그걸 물을 게 아니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나?"
라키아가 그 물음을 정정했다.
이신은 그들이 자신을 제물로 바쳐 이 상황에서 흑색 마탑을 구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키아와 에단의 표정은 그것과는 상당히 멀었다.
그저 이 안 좋은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만을 생각하는 모습.
이신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신을 원망하거나 불만을 가진 표정을 지은 사람은 없었다.
"난 자네를 믿네. 항상 그랬듯이 계획이 있겠지?"
레이먼드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난 은혜를 잊는 파렴치한은 아니야. 최선을 다해 돕지."
이신과 1급 시험에서 대결을 했던 클라테가 결의를 다짐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고,
"자네에게 배운 소환술을 쓸 때가 됐구만.
"저번 강연에서 그랬지. 다수를 이길 수 있는 마법사는 흑마법사뿐이라고."
"그게 바로 소환 계열이지! 이번에 우리가 보여 주겠네!"
소환 계열의 종사자인 클라테 셋이 열의를 불태우며 언데드들을 일으켰으며,
"넌 죽음의 통찰자잖아. 보여 주라고. 네가 그 이신이라는 것을."
레이나가 활짝 웃는 얼굴로 이신의 지팡이에 자신의 지팡이를 툭 갖다 댔다.
다른 이들은 그녀의 말을 그저 사기를 올리기 위한 농담으로 치부하는 듯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이전과 다른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보다도 우리 마탑의 마법사들이 자네를 더 의지하는 것 같구만. 허허."
라키아가 웃으며 이신의 옆에 서서 중얼거렸다.
"자네는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했던 건가? 하마터면 마탑주님과 싸우다가 우리 마탑의 마법사들을 힘들게 할 뻔했군."
에단이 지팡이를 꽉 쥐며 희생을 각오한 모습으로 마력을 끌어 올린다.
"방법은 없습니다."
이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마법사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 불씨를 더 불태우겠다는 의지만이 깃들었을 뿐.
그 모습에 흐뭇한 웃음을 지은 이신이 앞을 본 상태로 옆의 라키아와 에단에게 묻는다.
"제가 원망스럽진 않습니까?"
"원망은 무슨, 흑색 마탑에 들어온 이상 자넨 한 가족인데. 근데, 마탑주에게 너무 막대한 건 아닌가? 저번에 그건 좀 너무하긴 했네."
긴장이라도 풀려는 듯 농담을 던지는 라키아.
"난 자네가 원망스러워."
그때, 에단이 끼어들듯 말했다.
"진작에 좀 오지 그랬나? 그럼 우리 마탑의 마법사들이 조금이라도 더 성장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이어지는 에단의 말과 함께 이신의 검은 마력이 사방에 검은 포탈을 만들어 냈다.
"그럼 원망할 필요 없겠네요."
"무슨 소린가?"
검은 포탈에서 이신의 스켈레톤들이 걸어 나왔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저희 마탑의 마법사들이 엄청나게 성장한 걸 볼 수 있을 테니까요."
화르륵! 파앙―!
그때 이신의 스켈레톤이 불길에 휩싸여 뼈마디가 불타고 온몸이 조각조각 흩어졌다.
"마지막 이야기는 다 나눴나? 배신자?"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
분노에 휩싸인 시가레이트가 적색 마법사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제57화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야! 공격해!"
적색 마탑의 부마탑주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치자, 잠시 소강상태였던 전투가 갑작스럽게 다시 시작되었다.
아스터에게 공격받고 몸을 추스르던 바론은 라키아만을 노리고 마력을 움직였다. 그를 처리해야 지금 무력화된 아벨을 전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파앙!
전조 없이 터지는 공기의 폭발.
라키아는 바론을 상대하기에도 바쁜 상황 속에서, 자신을 노리는 다른 마법사들의 견제를 받아내야 했다.
"죽어라!"
녹색 진영에서 바람의 칼날이 쏟아졌다.
견제로 날아오는 마법이 점점 신경에 거슬릴 즈음, 난데없이 나타난 스켈레톤 하나가 바람의 칼날을 막아냈다.
"마탑주님은 우리가 지킨다!"
뒤에 있던 클라테의 소환수였다. 그가 소리치자, 소환 계열 흑마법사들의 사기가 용솟음쳤다.
이신 클라테가 말하지 않았던가?
대규모 전투에서는 흑마법사가 최고라고.
"언데드를 소환해!"
"쪽수가 딸리면 소환하면 되지!"
"우리가 바로 일인 군단이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언데드들.
하나하나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 숫자를 늘려 주는 것만으로도 마법사들의 사기를 늘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자네에겐 존재 자체로 주변인들의 불안감을 없애는 힘이 있어."
라키아가 마력을 공간 전체로 퍼트리며 이신에게 말했다.
"잠깐만 시간을 끌어 주게. 그간 내가 허투루 시간을 보낸 게 아니란 걸 보여 주지."
"예."
라키아의 마력이 불길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쓰게 둘 것 같나!"
바론이 악을 지르며 라키아를 방해하려 했지만 검은 포탈에서 튀어나온 메이의 마법에 의해 좌절됐다.
그리고 완성되는 라키아의 마법.
[패닉 스테이션(Panic Station)]
광범위 필드 저주 마법.
이런 대규모 전투에 그 무엇보다도 효과가 좋은 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판단력을 저하시키고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저주.
클라테 이상에게는 통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곳에는 1급 이하의 마법사들이 대부분이고 그 마법사들이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클라테라도 집중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라키아는 그것을 노렸다.
"뭐 하는 거야!"
"왜 나를 공격해?"
"끄악!"
"막아! 이놈들 막으라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적들의 진영.
클라테까지는 어찌어찌 저주 마법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그 밑의 많은 마법사들은 이미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클라테들도 그 마법사들을 신경 쓰느라 저주의 저항에 실패하는 이들이 생겼다.
쿠구궁!
그때 라키아에게 내리치는 낙뢰.
하늘에서 내려오는 전격의 창을 적안의 검사가 나타나 베어냈다.
"젠장할, 아직도 제대로 안 베어지네."
그 강력한 마법을 손쉽게 베어 버린 워리가 불만스러운 듯 검에 잔류한 전격을 떨쳐내며 투덜거렸다.
쾅!
"읏!"
쾅! 쾅! 쾅!
연달아 내리치는 낙뢰를 계속 베어낼 수는 없었다. 몸을 던져 간신히 낙뢰를 피해낸 워리는 마지막 한 방을 쳐내려다가 튕겨진 전격에 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크윽!"
한쪽에선 메이가 바론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고전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 황색 부마탑주에게 달려든 군도 또한 돌주먹에 맞고 튕겨 나가고 있었다.
라키아는 필드 마법을 지속하느라 대응이 잘 안 되는 상태.
에단은 적색의 부마탑주와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지만, 주변에서 계속되는 견제에 점차 밀리고 있었다.
칼렌은 백색의 부마탑주을 맡고 있었지만 이신의 시기적절한 도움이 없었다면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
확실히 적 진영 마법사들의 공세가 너무 거셌다.
흑색 마탑의 전력이 원래 약한 것도 있었지만 적들의 전력이 너무 강한 게 컸다. 이대로 가다간 금세 진영이 무너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상황.
다시 한번 상황을 반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테리안, 고든, 슌 그라미스."
검은 그림자 속에서 비적비적 걸어 나오는 스켈레톤 메이지들.
각기 황색, 금색, 청색의 로브를 걸치고 있는 언데드들이 검은 안광을 일렁이며 적들을 마주했다.
"너... 너 이새끼가!"
언데드가 되어 버린 테리안을 본 황색의 부마탑주가 군도를 튕겨내고 이신에게 마법을 날렸다. 하지만 땅 밑에서 솟아오른 돌벽에 허무하게 막혔다.
"마…탑주님...?"
얼이 빠진 모습으로 언데드가 되어 버린 마탑주를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후웅― 파지직!
고든이 날린 전격포가 아스터의 낙뢰와 맞부딪히며 사라졌다.
까득-
아스터가 턱이 빠질 듯 강하게 이를 갈며 언데드가 된 고든을 노려보았다.
"멍청한 놈...."
적색 마탑의 부마탑주는 슌 그라미스가 날리는 물대포를 받아내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개자식이! 죽은 사람들을!"
적색의 부마탑주가 복잡한 표정으로 슌 그라미스를 상대했다. 확실히 살아 있을 때보다는 그 마법적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지만 중요한 건 죽은 마법사들을 상대한다는 것이다.
'마법사들이 동요하고 있다....'
죽음이 이 지독한 전쟁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는 것. 자신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이러한 것들이 마법사들에게 혼란을 주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저건 너희들이 아는 마법사들이 아니라고!"
고든의 절기인 전격포.
그것을 마주한 금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동요했고 그것은 곧 전투의 집중을 깨트리는 원인이 되었다.
"이 멍청한 놈들이!"
그리고.
"커헉...."
언데드가 된 테리안의 마법에 복부를 관통당한 황색 마탑의 부마탑주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모습이 마법사들의 눈에 포착되었다.
"마…탑...주...니임...."
자신이 모시던 마탑주의 손에 죽어 버린 부마탑주.
그리고 생겨나는 또 다른 언데드.
"일어나라."
죽어 버린 육신의 살점이 부패하고 그 안에서 검은 마력으로 뭉쳐진 스켈레톤 메이지가 일어난다.
검은 안광을 일렁이는 스켈레톤 메이지.
"저, 저거 봐...."
"언데드가...됐어."
"주, 죽으면 우리도 저렇게 되는 거야?"
여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두려움.
명예롭게 마탑을 위해 싸우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생각했던 그들은 이 기괴한 전투에 그 의지를 점점 상실해 가기 시작했다.
"나, 난 못 해!"
"이건… 아니야. 흑마법사들이 저런 놈들인 줄 난 몰랐다고!"
급기야 전선에서 이탈하려는 이들까지 생겨나려는 그때.
강렬한 에너지의 파동이 조금 전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황색의 부마탑주를 덮쳐 그 자리에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뭐야?"
"그대로 사라졌어."
이신의 드넓은 마력 감지를 뚫고 또다시 한 줄기의 섬광이 허공을 가르고 뻗어 온다.
조금 전 막 일어났던 황색 부마탑주의 스켈레톤을 녹여 버린 섬광.
그것을 반사적으로 감지한 이신이 마력을 뻗어 고든 앞에 실드를 겹겹이 덧씌웠다.
후웅― 콰아앙―!
화마에 휩쓸릴 정도의 강력한 에너지 포가 겹겹이 싸인 이신의 실드를 계속해서 녹였다.
기어코 수십 겹의 실드를 벗겨 내고서 고든의 몸체를 녹여 버리고 사라지는 에너지 포.
이신은 차게 식어 버린 눈빛으로 그 에너지가 뻗어 나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라키아의 어둠의 각인을 푼 아벨이 이글이글 끓는 눈빛으로 이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조금 전 어둠의 각인을 풀어내고 곧장 [섬광포]를 연달아 쏘아낸 아벨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신의 실드를 뚫고 고든을 지워 버릴 만큼의 위력.
어둠의 각인을 처음에 박아 놓지 않았다면 전투가 훨씬 힘들어졌을 것을 절감하게 되는 위력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신에게 아벨이 회복할 시간을 줘선 안 된다는 경각심을 새겨 주었다.
'아벨이 이 시기에도 이 정도일 줄이야....'
연달아 절기를 전력으로 쏘아낸 뒤 반동이 온 지금 아벨을 죽여야 한다.
은나무 지팡이 위로 검은 마력이 휘감기고, 그것들이 하늘 위로 치솟음과 동시에 전장에 새겨진 공포감이 그 마력에 스며들며 힘을 더해 준다.
"이건...."
그 마력의 흐름을 느낀 아스터가 경악에 찬 얼굴로 중얼거리는 사이에, 검게 물든 뇌전이 한데 뭉쳐 땅으로 내리친다.
[흑뢰(黑雷)]
백색 진영의 마법사들과 수석 클라테, 부마탑주까지.
아벨을 지키기 위해 빛을 뿜어 보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죽음의 벼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그 빛들은 그들의 공포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듯 어둠에 물들어 죽음의 벼락의 힘을 더 키워 주었다.
콰과광!!
하늘에서 내려온 죽음의 선고.
홀로 그 심판을 맞이하던 아벨은 그대로 뼈째 증발하며 사라진다.
"아, 안 돼!"
"마탑주님!"
"아벨!"
다른 마법사들의 경악에 찬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렸지만, 그들은 지금 아벨을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흑뢰는 고작 하나의 목표물을 저격하기 위한 마법이 아니기에.
"크헉!"
"크하아악! 아아악!"
"살려…줘...!"
땅을 타고 퍼지는 죽음의 뇌전이 주변 마법사들에게 퍼지고 그들의 공포감을 자극했다.
단 한줄기의 벼락일 뿐이지만 백색 진영의 마법사 전체가 초토화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완벽하게 뒤집어진 분위기에, 화염의 구체가 공간을 뚫고 이신에게 날아갔다.
이신이 커다란 마법을 사용하면서 생길 빈틈을 계속해서 기다리던 시가레이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을 발현했다.
흑뢰를 사용한 직후 생기는 단 한 순간의 빈틈.
그의 마력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몸의 마력혈이 잠깐 지쳐 있는 그 순간. 시가레이트의 [홍염]이 마법사들과 언데드 사이를 뚫고 섬전과도 같이 뻗어 온다.
내심 흑뢰 자체를 시가레이트가 막지 않을까 했던 이신의 생각과 다르게 시가레이트는 이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다.
죽음의 통찰자라는 그 대단한 위명.
여기저기 퍼져 있는 수많은 소문이 전부 사실이라 생각지는 않지만 그중 절반만이 사실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이다.
시가레이트는 그가 범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전쟁 중에 이신을 기습할 상황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흑뢰라는 말도 안 되는 마법을 펼친 직후, 지금이 최고의 적기라는 것을 직감했다.
후우우웅―
화르륵!
도저히 화염계의 마법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불의 탄환이 이신의 심장에 적중하기 직전.
콰앙―!
이신의 몸속에서 튀어나온 붉은 피가 모여 방패를 이루고 전장의 사방에 뿌려진 수많은 피가 연이어 모여 두꺼운 벽을 만들어 냈다.
하이네스 가문의 비전인 홍염.
닿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릴 수 있다고 자부하는 홍염의 탄이 붉은 피를 증발시키는 듯했지만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하며 사라졌다.
만약을 대비해 대기시켜 놓았던 릴리안의 방어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이번엔 크게 다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협적인 마법.
이신의 옆에 나타난 릴리안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시가레이트를 보았다.
"이번 불꽃은 제법 뜨거웠어? 아가야."
매혹적인 미소를 날리며 말하는 릴리안의 그 치명적인 모습을 본 마법사들이 그 자리에 멍한 얼굴로 굳어 버렸다.
반면에 이를 악물고 릴리안을 노려보는 시가레이트.
그의 표정에는 자신의 마법이 허무하게 막혀 버렸다는 충격과 그로 인한 공포 그리고 분노가 공존하고 있었다.
"릴리안, 시가레이트를 맡아 줘."
"알겠어, 주인. 우리 불쏘시개 같은 아가와 조금 놀아 볼까?"
"피를 사용하는 종족... 뱀파이어인가?"
뱀파이어에게 상극이라 하면 빛 마법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도 화염계가 있다. 피는 불에 닿는 순간 타서 사라져 버리기에.
그러나 눈앞의 뱀파이어는 너무나 여유롭게 자신의 홍염을 막아냈다.
그렇기에 더욱 충격이었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할 필요 없어. 시가레이트."
난데없는 이신의 말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제 더 질질 끌 생각이 없어서."
이신은 릴리안이 등장하고 급속도로 떨어지는 마력을 보며 더 이상 지체되다간 마력의 고갈로 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은나무 지팡이의 마력 저장량이 아니었다면 전쟁을 생각할 엄두도 안 났을 것이다.
[사계 소환]
죽음의 세계.
망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세상이 이곳 세이아에 강림했다.
검붉은 하늘과 황폐한 땅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고 그저 분위기만으로 압도되는 그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마법사들이 굳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았다.
"몸이… 이상한데?"
"마력이 느려졌어."
"저, 저게 뭐야?"
짙어지는 사기와 더욱 흉포해지는 언데드들이 마법사들을 덮친다.
이제 이 길었던 전쟁을 마무리 지을 때가 왔다.
제58화
참혹한 전장이 이신의 눈에 담겼다.
수백의 마법사들이 싸우고 그만큼 많은 이들이 죽어 생명을 잃었다.
이번 층의 목표는 델리그에서 우승하는 것이었지만 델리그까지 기다리기에는 그에게 시간을 단축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
그렇기에 어려운 길을 선택했고 그걸 위해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세이아에 있는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죽었고 피해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아스터는 죽기 직전의 상태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바론은 워리의 칼에 심장이 뚫려 죽었다. 시가레이트는 피 칠갑을 하고 각혈을 하며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어떻게...어떻게 그 많은 속성 마법을 그런 경지까지 쓸 수 있는 거지? 그것도 흑마법사가?"
"세상은 넓고 뛰어난 사람은 많은 법이야. 너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이라 생각하면 마법은 더 발전하지 않아."
까드득-
얼마나 분한지 이를 가는 소리가 이신에게까지 들렸다.
그그그극-
바닥을 긁는 그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피가 그 자취를 남기고 그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크흐윽...."
"뭐가 억울하다고 울지?"
"억울한 게 아니야... 그저 내가 바보 같아서 그래....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항상 나를 칭송해 왔고 그러다 보니 점점 거만해졌어. 내겐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 근데 너무 나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게 너무 머저리 같네."
쿵! 쿵! 쿵! 쿵! 쿵!
주먹이 뭉개질 때까지 바닥을 미친 듯이 내리치는 그 모습을 이신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으아아아아아아!"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우는 모습을 보니 과거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이신의 표정이 굳었다.
좌절은 누구나 한다.
그중에서도 이신은 많은 좌절을 겪었다.
스스로 무너져 괴성을 내지르는 시가레이트의 모습 위로, 이신은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쯧."
여기서 이 녀석을 죽이고 가는 게 어쩌면 나중을 위해 좋을지도 모른다. 이 마법사가 복수심을 품고 칼을 갈지도 모르니.
다만, 저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화염 마법을 구사하는 실력과 헬 난이도를 도전하는 대범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모습.
적이 아니었다면 밑에 두고 가르치고 싶을 만큼 괜찮은 녀석이었다.
이런 마법사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역시 악역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신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현재 살아남은 마탑주는 라키아를 제외하고 아스터가 유일하다.
옛 스승이었지만 그건 너무 오래전 일이었고 그 당시의 아스터는 여기 있는 아스터가 아니었다.
이신의 지팡이가 정신을 잃은 그를 향했다. 그리고 뻗어 나간 뇌전이 그의 마지막 남은 숨을 끊었다.
[세이아의 흑색 마탑을 제외한 모든 마탑이 델리그의 참가 자격을 잃었습니다.]
[흑색 마탑이 델리그에서 우승하였습니다.]
[라키아가 제17대 델리거가 됩니다.]
[15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경이로운 업적! 다수의 신들이 도전자님을 주목합니다!]
[250,300점을 달성했습니다.]
[250,30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6,300 올랐습니다.]
[마력이 19,000 올랐습니다.]
[힘이 6 올랐습니다.]
[민첩이 7 올랐습니다.]
[지력이 20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20 올랐습니다.]
[『칭호 - 7대 원소의 계승자』를 획득했습니다.]
수없이 떠오르는 메시지를 잠시 밀어 둔 이신이 시가레이트의 앞에 앉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당연히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 생각한 시가레이트는 난데없이 나타나는 이 스테이지의 종료 메시지를 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 왜라는 한 글자에 담긴 뜻은 여러 가지였지만 이신이 대답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내 맘이야."
예상외의 말에 한동안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신을 바라보던 시가레이트가 혼자 헛웃음을 내뱉고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강자의 변덕이라도 되는 건가?"
"그럴지도."
"다음에는 다를 거다."
"그래."
피 칠갑이 된 상태로 몸을 덜덜 떨던 시가레이트가 우물쭈물하더니 이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그를 떠나보낸 이신이 몸을 돌려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에게로 갔다.
전쟁에선 이겼지만 그것을 기뻐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죽어 버린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을 보며 스테이지의 클리어 메시지를 받는 것이 마냥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한쪽 팔을 잃고 쓰러진 레이나, 마력을 억지로 끌어 쓰다 마력혈이 망가진 에단, 마력의 과도한 사용으로 탈진한 라키아까지.
멀쩡한 마법사가 없었다.
처음 흑색 마탑에 왔던 날 마주쳤던 1급 마법사 레이먼드.
그는 아직 온기가 사라지지도 않은 시체가 되어 차디찬 바닥에 누워 있었다.
레이먼드의 시체 앞에 선 이신은 마르티르에 손을 잠시 올렸다가 다시 뗐다.
- 주인님, 이들은....
"나도 알아."
이대로 레이먼드를 살린다면 한순간의 만족감은 느낄지라도 이어지는 허망함에 더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 세계는 내가 떠나는 순간 폐기될 테니까.
이러한 것들 하나하나에 목을 매면 내 감정만 더 쉽게 닳을 뿐이다.
'나는 감정 없는 인형이 아니다.'
탑의 그 수많은 층들을 올라가다 보면 감정이 닳고 생명에 대한 감각이 점점 사라진다.
지구의 그 어떤 인간들보다 많은 층을 올라가 보았던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살아 있다."
이신은 중얼거리며 그 말을 되뇌었다.
죽을 뻔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고 그 이상으로 많은 죽음을 겪었지만 이신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순간마다 자각하려 노력했다.
'나는....'
욱신거리는 몸뚱이와 지끈지끈한 관자놀이가 나라는 인간이 살아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불망각의 구]
이것을 얻게 된 건 과연 우연일까?
아님 필연일까?
문득 이신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신 클라테."
멍하니 사색에 빠져 있던 이신에게로 라키아가 힘든 몸을 질질 끌고 와 그 자리에 앉았다.
"마탑주님."
"고맙네."
화아악―
라키아의 말과 함께 일변하는 배경.
넓은 들판과 산들산들한 바람이 부는 대지 위로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풀을 매만지고 있다.
"고마워."
그 자리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본다면 그가 풀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풀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풀들 사이에 있는 검은색의 정령.
밤에만 나타나는 이 정령은 언뜻 이 푸른 풀밭과 어울리지 않는 듯 이질적으로 보였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정령은 이 세계에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되는 녀석들은 아니었으니까.
"어둠이 있기에 빛도 있는 거야. 실망하지 마."
어둠의 정령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알고 있었다. 어둠의 정령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을.
우우우우웅―
그때, 세상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무언가 일어날 것이란 예감이 들었고 그걸 지각하는 순간 온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겁에 질려 손발이 떨리고 몸이 경직되어 도망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 어둠의 정령이 그의 몸을 안정시키고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을 진정시켜 주었다.
빨리 도망가라는 듯 어둠의 정령이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같이 가! 나 혼자는...."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것 같은 허공이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고 그 안에서 살아생전 처음 보는 괴물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어둠의 정령이 자신을 진정시켜 준 것도 한순간일 뿐.
괴물이 보였음에도 두려움에 경직된 몸 때문에 남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가오는 괴물을 가로막는 정령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둠과 동화되듯 검은 안개가 생겨나고 그 안에 집어삼켜진 남자는 어둠의 정령이 눈앞의 괴물에게 뭉개져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괴물은 그를 보지 못하는 듯 그대로 사라졌지만 남자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이지 못했다.
배경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커다란 원탁을 둘러싼 7명의 인간과 그들의 옆에 하나씩 존재하는 명계의 존재들.
그곳엔 조금 전 어둠의 정령을 눈앞에서 잃고 오열하던 남자도 있었다.
"이곳을 침범한 이들은 마족이라는 악마들입니다. 여러분들의 힘으로는 그 악마들을 물리칠 수 없어요. 저희의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하얀빛으로 뒤덮인 정령이 명계의 정령들을 대표해 그들에게 말했고 인간들은 동의했다.
또다시 변하는 배경.
아까 전 그 평화롭고 생기 넘치던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사라질 것 같은 세상 속.
여러 개의 머리로 거대한 책을 들고 있는 악마가 7명의 마법사를 마주하고 있다.
"겁을 먹고 있구나."
상대의 마음을 읽는 악마, 단탈리온의 음성에는 여유로움이 담겨 있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일곱의 마법사들은 각기 다른 원소를 이용한 마법으로 단탈리온을 압박했지만, 놈은 마치 미래라도 보는 것처럼 그들의 마법을 철저히 파훼했다.
그래도 그중 유일하게 그 마음을 읽지 못하는 마법사가 있었는데 그건 검은색의 옷을 입고 있던 어둠 원소의 마법사였다.
"온통 검기만 하구나!"
단탈리온이 마법사들에게 반격을 할 때마다 어둠 원소의 마법사가 방해했고 단탈리온은 처음으로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맞이해 당황에 빠졌다.
단탈리온의 대표적 능력인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이 봉쇄된 채 그의 머리 하나마저 잘려 나가자, 놈은 허공에 몸을 던져 사라졌다.
황폐해진 땅과 오염된 대기는 빠르게 가속되는 세상 속에서 점차 다시 정화되기 시작했다.
한 달이 마치 1초와 같이 지나가는 세상 속에서 폐허가 되었던 도시는 다시 번창하고 그곳을 대표하는 7개의 거대한 마탑이 각 구역에 생겨났다.
인간들은 다시 올 악마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마법을 발전시켰고 정령들에게 받은 원소의 힘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그 노력을 조금씩 계속해서 갉아먹었다.
인간들은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마탑들 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이들을 대표하는 지도자를 일시적으로 만들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델리그라는 대회를 만들었다.
대회가 생기고 처음에는 그러한 의도대로 잘 작용하는 듯했으나, 단 하나의 어긋남으로 모든 것이 망가지는 것처럼 델리그는 그들의 세상을 일그러트릴 발판이 되었다.
마법사들 사이의 경쟁과 불화, 모멸과 질시.
마탑들 간에 서열이 생기고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의 마법을 망가뜨리고, 결국 정령들이 남겨 준 힘을 모두 잃어버리는 데까지 고작 수백 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결국 정령의 존재까지 잃어버린 인간들은 다시 돌아온 마족의 침공에 대항할 수단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명계마저 그들을 포기했으며 힘을 회복한 단탈리온은 그 세상을 철저히 유린했다.
마법 도시 세이아를 대표하던 7개의 마탑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사라졌으며 그 가운데에는 단탈리온을 위시한 성이 세워지는 굴욕이 새겨졌다.
그리곤 과거의 회상이 끝났다.
죽음의 통찰자.
죽음을 통찰하는 이 능력은 대상이 죽게 된 그 삶의 궤적을 보여 준다.
라키아, 아스터, 아벨, 바론, 테리안.
그리고 이곳에 없는 헬렌과 셰인까지.
각 마탑의 계승자이며 현재 마탑을 대표하는 마탑주들이다.
조금 전 보았던 그 세상은 이들의 궤적이 아니다.
이 마법사들보다도 훨씬 더 이전의, 원류로 돌아가는 죽음의 원인이었다.
'설마....'
죽음이란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국한된 것이 아닌가?
방금 내가 본 것은 이 도시, 이 세계가 죽게 된, 그 원인을 보여 준 것일까?
[죽음에 대한 이해도가 증가합니다.]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메시지.
처음 불망각의 구를 얻게 되고 수많은 죽음을 기억하며 보았던 그 이후로 처음 보는 문구였다.
[죽음의 통찰자가 강화됩니다.]
[죽음의 통찰자(眞)]
당신은 사실 죽음의 신이 아닌가요? 아니라면 죽음의 신이 만든 아바타?
#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 죽은 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 죽은 자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윽!"
갑자기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지고 그 범위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어둡고 차가운 무언가가 감각을 하나하나 찌르는 것 같은 느낌.
속이 울렁거리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죽음....'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곳은 전쟁터였고 수많은 마법사들이 죽어 덧없게 사라진 공간이었다.
그 모든 죽음들이 피부를 뚫고 세포 하나하나를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사방에 깔린 짙은 죽음의 기운들.
이제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 도시가 세워지기 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죽었는지.
라키아를 지나친 이신이 텅 빈 땅 위에 멈췄다.
이곳에 새겨진 수많은 죽음들과 달리 매우 이질적인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테리안."
이신의 부름에 마력을 바닥으로 쏟아낸 테리안이 이신의 앞에 있는 땅 구덩이의 수십 미터를 한 번에 파냈다.
땅을 파내고 나니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뛰어든 이신은 안에 새겨진 강대한 마력의 결계를 힘으로 부수고 그 위에 착지했다.
거의 진이 1층에 만들어 놓은 결계의 수준이었다 해도 무방할 만큼 대단한 결계였지만, 세월이 흘러 그 힘이 점점 일그러지다 못해 깨지려 하고 있었다.
결계를 깨자 폭주하듯이 쏟아지는 마기.
[단탈리온의 아홉 번째 머리(레플리카)를 발견했습니다.]
섬뜩한 눈으로 이신을 바라보는 머리.
그 눈에서 일렁이는 마기가 이신의 머리를 관통하여 침투했다.
[단탈리온의 아홉 번째 눈을 보았습니다.]
[아홉 번째 눈이 기억을 조작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단탈리온의 권능 중 하나인 기억 조작.
마기가 기습적으로 이신을 덮쳤지만, 그 권능은 이신에게 통하지 않았다.
"뭐야?"
제59화
16층
이질적인 죽음의 기운에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단탈리온의 머리가 이곳에 봉인되어 있었다.
만들어진 세계가 아닌 원세계에선 단탈리온이 이곳을 다시 침공하는 데 성공했으니 레플리카가 있을 거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힘을 잃지 않고 누군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기억 조작의 권능.
아마 이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왔었다면 저 기억 조작에 당해서 과거의 참상을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시퍼렇게 뜬 눈으로 이신을 노려보고 있는 단탈리온.
그 눈빛 속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 머리는 처음 권능을 발휘한 이후로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운이 좋았네."
기억 조작의 권능이 아닌 다른 권능이었다면 꽤나 곤란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불망각의 구 덕분에 기억 조작의 권능에 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걸로 한 번 더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불망각의 구의 힘은 적어도 마계 군주급 이상이라는 것.
잊혀신 신의 편린인 불망각의 구.
신이란 건 잊혀지는 순간 그 힘을 대부분 잃어버리게 된다. 자체적으로 초월의 격을 쌓고 신이 된 놈들은 그러한 것이 덜할 테지만.
이신은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불쾌감을 주는 단탈리온의 머리를 향해 마력을 뻗었다. 주변에 있는 돌덩이들이 가시처럼 튀어나와 단탈리온의 아홉 번째 머리를 두부 으깨듯 짓뭉갰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단탈리온의 머리가 부서졌다. 동시에 그 안에 고여 있던 마기들이 흩어져 사라졌다.
[『히든 스테이지 – 단탈리온의 잔재』를 해결하셨습니다.]
[추가 보상이 생깁니다.]
[신격의 파편을 획득합니다.]
[『칭호 – 마계 군주의 머리를 부순 자』를 획득합니다.]
[단탈리온과의 적대치가 최대로 올라갑니다.]
[마계로 갈 경우 단탈리온의 군단을 마주칠 확률이 높아집니다.]
"신격의 파편을 여기서 얻게 될 줄이야."
지난 3층에서 게른을 잡고 얻었던 신격의 파편.
[신격의 파편]
신격을 여러 개로 쪼개 놓은 파편입니다. 모든 파편을 모은다면 하나의 제대로 된 신격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몇 개의 파편을 모아야 하는 건지.
만약 모으게 된다면 알아서 합쳐지는 것인지.
그리고 그 신격이 그저 스탯 상의 신격 1이 오르는 건지, 진정한 의미의 신격을 얻게 해 준다는 건지.
너무나 불친절한 메시지에 이신은 한숨을 내쉬며 신격의 파편을 품 안에 넣었다.
'단탈리온과의 적대라....'
솔직히 이러한 페널티를 생각하면 그렇게 좋다고 할 수 없는 보상이었다.
단탈리온은 마계의 군주고, 이 탑의 세계 안에서 왕급으로 취급되는 엄청난 강자.
더구나 그 세력 또한 만만치 않은데, 어찌 되었든 탑을 오르다 보면 적어도 한 번은 마계에 가게 될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단탈리온의 군세 전체와 맞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칭호.'
[마계 군주의 머리를 부순 자]
마계 군주의 머리를 부수다니? 정말 그 담력에 찬사를 보내 드리고 싶네요!
# 마족들이 일정 확률로 두려워합니다.
# 하급 마족의 능력치를 15% 하락시킵니다.
# 중급 마족의 능력치를 10% 하락시킵니다.
# 상급 마족의 능력치를 5% 하락시킵니다.
[7대 원소의 계승자]
7대 원소의 정령들이 인정한 계승자입니다.
# 7대 원소의 정령들에게 쉽게 호감을 얻습니다.
# 7대 원소의 숙련도가 빠르게 증가합니다.
# 7대 원소의 정령들을 만날 때, 상위 정령을 만날 확률이 높아집니다.
이번 스테이지에서 얻은 두 가지의 칭호.
마계나 명계에 가게 된다면 큰 도움이 될 능력들이었다.
'나쁘진 않네.'
특히 7대 원소의 계승자.
아무리 이신이 대마법사의 지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모든 속성의 마법을 마스터하는 건 큰 무리가 있었다.
그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뇌전과 어둠.
부로는 화염, 냉기를 주로 쓰긴 하지만 주력 마법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 밖의 다른 속성의 마법들도 웬만한 마법사들보다는 수준급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최상급의 마법사들 수준으로 가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만한 재능이 필요한 법.
7대 원소의 계승자의 능력은 이미 죽음의 통찰자로 보았다.
일반 사람 중에서도 재능이 뒷받침된 이들이겠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단탈리온을 막아낸 것은 엄청난 성과였다.
그것만으로 이 계승자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증명이 된 셈.
마기가 빠져나가며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부러진 단탈리온의 머리를 보던 이신이 구덩이 위로 올라갔다.
이번 전투에서 꽤 많은 언데드들을 잃었지만, 어차피 데리고 갈 수 있는 언데드는 한정적이고 나머지는 사의 세계에 집어넣거나 버리고 갈 수밖에 없다.
사의 세계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언데드들이 그 세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래도 건진 건 있네.'
슌 그라미스.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 녀석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언데드이다.
지배력을 30이나 소모해야 할 정도로.
성장한 메이에게 지배력이 35가 필요한 것을 감안하면 슌의 잠재력을 이 시스템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테리안은 사의 세계로 보내야겠네.'
솔직히 여기에 있는 마법사들의 시체 하나하나의 가치가 대단하지만, 현재 능력으로는 이들 모두를 데리고 갈 수가 없다.
아벨이 있었다면 슌이 아니라 아벨을 데려갔을 테지만 흑뢰에 완전히 지워져 버린 아벨을 언데드로 일으킬 수는 없으니.
아스터도 뛰어난 마법사지만 잠재력으로 따지면 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이미 나라는 뇌전술사가 있는 상태에서 굳이 아스터를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하프니스."
- 불렀는가....
"저 녀석들 모두 언데드로 만들고 사의 세계에 집어넣어."
이신은 그나마 가치가 있는 마법사 몇몇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의 세계에서 살아남아 칼렌처럼 그 역량을 키운다면 혹시 모른다.
"16층으로."
이곳에서 할 일을 모두 끝낸 이신이 빛에 휩싸이며 16층으로 이동했다.
오자마자 이신이 확인한 것은 메시지와 커뮤니티였다.
혹시나 아이소시아의 메시지와 커뮤니티 차단이 풀어졌을지도 모르기에 매번 확인해 보지만 여전히 녀석들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 나 20층인데 오늘도 1층의 언더모스트 도전자들 한 팀 올라갔다. 난 무서워서 못 올라가는 중.
└진짜 제발 무사했으면...
└언제쯤이면 29층이 뚫리려나?
└이제 언더모스트 도전자들이 많이 갔으니까 곧이지 않을까?
└뭔 소리야, 지금 각국에서 전부 연합했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그래도 걔네들 다 씹어 먹는 게 한국 랭커들인데? 업적 차이를 봐라. 비교가 되냐?
└아이소시아가 어떤 곳인지 몰라? 29층 도전자가 21층 도전자랑 만날 수 있는 곳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근데 아직 모르는 거잖아? 솔직히 아이소시아가 폐쇄되고 그 이후로 나온 사람이 없는데 진실은 모르는 거지.
└그 음성 파일이랑 영상 못 봤냐? 29층에서 한국인들이랑 그 연합 사람들 다 배신당하고 털리는 거 못 봤냐고.
└그래도 언더모스트 도전자들 계속 올라가는데? 이번에 8명 올라갔으니까 벌써 100명이 넘었나?
└피셜에 따르면 적은 1000명도 넘는다는데 가능하냐?
└걱정 마라, 이신님 있잖아. 이신님 올라가면 다 정리될걸?
└고건 인정.
└맞지맞지. 이신님 아래 모두 평등하리라.
└근데 모르지 이신님이 한국인도 아니고 그냥 버리고 올라갈 수도 있잖아?
└설마...그딴 불길한 소리하지 마라!
└이신님은 명예 한국인이야. 네가 뭘 알아?
└너 간첩이지? 이 새끼야! 감히 이신님을 모욕해?
└저놈 신상 캐! 조사 들어간다.
커뮤니티는 아직까지도 아이소시아에 대한 이야기로 불타오르고 있다.
특히나 갑자기 뿌려진 영상과 음성 파일 때문에 더더욱.
그 영상에선 마왕성에서 클리어 직전에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한국인들을 배신하고 그 연합을 공격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음성 파일에는 각국의 몇몇 이들이 한국을 잡아야 한다며 아이소시아의 폐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
그 이후로는 메시지고 커뮤니티고 다 끊어지고 아이소시아에서 30층으로 올라오는 도전자들도 없으니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신은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돌려보며 흘러나오는 정보들이 있나 확인했다.
'아직까지는 뭐가 없네.'
16층에서 다음 스테이지의 시작까지 이틀 정도가 남은 상태.
이신은 그동안 다음 스테이지의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이틀이 지나고.
16층의 스테이지가 시작되었다.
[16층에 입장하셨습니다.]
[페이네 미궁에서 탈출하십시오.]
양옆과 위아래, 뒤까지 꽉 막힌 거대한 공간.
유일하게 갈 수 있는 방향은 앞이 전부이다.
주변을 보니 자신과 같은 곳에 소환된 이는 세 명.
검을 든 가벼운 복장의 남자 한 명과 보라색 머리의 딱 붙는 옷을 입은 여자 그리고 하얀색 천을 두른 옷을 입고 창을 든 노란 머리의 여자까지.
그러나 노란 머리의 여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천족?'
등에 달린 한 쌍의 하얀 날개.
분명 천족의 날개이다.
다른 두 사람도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란 듯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저 천사의 정체를 모르는 것 같았지만 여자는 대충 눈치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천...사?"
여자의 물음에 환한 미소를 지은 천사가 대답했다.
"아시는군요? 맞아요. 저는 하급 천사 메리엘이에요."
"천사? 정말? 당신이 천사입니까? 와... 전 처음 봅니다!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정말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메리엘을 구경하는 남자.
그 모습에 기분 나빠 표정이 굳을 법도 한데, 메리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환한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난 앨리스야."
"전 플레타입니다."
보라색 머리의 매혹적인 분위기를 가진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고 그 옆에 있던 검을 든 남자도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곤 셋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이신."
이름을 듣고도 셋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하고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현재까지의 반응으로 봐선 저들이 이신이라는 이름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근데 두 분 다 상당한 미인이시군요. 이렇게 만나게 된 거 탈출까지 잘해 봅시다! 이 플레타! 아리따운 여성분들을 지키는 기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는 앨리스의 모습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플레타가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을 어필하고 있었다.
"플레타 님의 말처럼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해요! 이 미궁은 쉽게 탈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그래. 다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한 가닥은 할 테니."
"맞습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쇼! 제가 있으니. 하하하!"
네 사람이 모두 합의를 한 뒤 유일한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선 플레타의 뒤에서 따라가던 이신은 그녀의 펄럭이는 날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천족을 만나다니....'
적어도 30층은 넘어가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10층 구간에서 만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원래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천족은 무조건 목표 지점까지 데리고 가야만 한다.
신성 스탯.
천족을 만난 이상, 이 스탯을 공짜로 얻을 기회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
더구나 이런 미궁 속이라면 더더욱.
"음...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제 직감으로는-."
"왼쪽으로 가야 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향을 정하는 이신의 모습에 플레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뭘 알고 있습니까?"
"이곳의 길을 알고 있어."
의외의 말에 세 사람 모두 놀란 듯했지만, 앨리스의 반응만 미묘하게 달랐다.
'뭐지?'
그 찰나의 미묘한 차이.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나 본 이신이 아니었다면 눈치채기 힘들었을 표정 관리였다.
"와! 그럼 일이 쉬워지겠는데? 이신 씨 말만 들으면 이번 스테이지도 쉽겠습니다."
"이신 님 덕분에 희생이 줄어들겠어요."
"그걸 믿어? 지금 처음 본 남자인데?"
두 사람과 다르게 이신의 말에 반대하는 앨리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당신이 길을 안다는 건 어떻게 믿지?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패를 쉽게 내보인다는 게 오히려 더 의심스러운데?"
날카로운 앨리스의 지적에 플레타와 메리엘도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난 못 믿겠어. 오른쪽으로 갈 거야."
그녀의 반대 제안에 플레타와 메리엘도 고민에 빠진 모습.
"이 사나이 플레타. 그래도 홀로 여인을 보낼 수는 없지. 나도 앨리스 씨를 따라갑니다."
앨리스 쪽으로 붙은 플레타를 보며 메리엘이 더 고민에 빠졌다.
"으음... 모두 같이 가면 안 되나요?"
"저 사람이 이쪽으로 오면 말리진 않겠지만 난 저쪽으로 가진 않을 거야."
단호한 앨리스의 모습에 고민하던 메리엘이 혼자 남은 이신을 보고 그쪽으로 향하려 할 때.
"내가 그쪽으로 갈게. 뭐, 벌써 분열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신이 순순히 그 의견을 꺾었다.
"좋아요! 다 같이 가면 좋잖아요! 제가 온 힘을 다해 지켜 드릴게요!"
제60화
페이네 미궁은 워낙 복잡하고 함정이 많은 곳이라 생환율이 높지 않고 탈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도전자들이 올라가기 시작하며 미궁의 정보를 취합하는 이들이 생겼고 그것들이 하나하나 모여 지도가 만들어졌다.
덕분에 지구의 도전자들은 대부분 16층에 도전하기 전에 지도를 구해서 움직인다.
도전자들의 생환율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지도이긴 하지만 정확도가 100%인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지도를 봐도 길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미궁이 너무 크다 보니 출발 지점만 수백이고 탈출 지점 또한 수십이다.
거기다 탈출 지점의 탈출구가 전부 열리는 것도 아니라 일부만이 열리며 그것도 랜덤으로 정해진다.
또한 미궁 내부의 함정 트리거들이 작동하게 되면 탈출구의 입구가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그렇다 보니 지도가 있어도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여자 분명 뭔가 있다.'
지금껏 길을 가며 앨리스와 의견 대립이 몇 번 있긴 했지만 마음이 맞을 때도 있었다.
무언가 명확한 탈출구를 정해 두고 가는 모습.
확신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하하하! 먹을 걸 왜 가져옵니까? 그전에 탈출하면 되지! 메리엘 씨는 괜찮습니까? 안 그래도 너무 말랐는데 잘 챙겨 먹어야죠!"
"저는 괜찮아요. 천족은 배고픔을 느끼지 않거든요."
"와! 그래요? 부럽습니다!"
"미궁은 힘든 곳이라고 들었는데 재밌는 거 같아요. 가끔 괴수들 잡는 것도 재밌고요."
"메리엘 씨는 아름다우시고 싸움도 잘하고, 천사들은 다 그런가요?"
다가올 고생은 생각지도 않은 채, 잔뜩 상기되어 있는 둘.
'쯧.'
뒤에서 천천히 그들을 따라가던 이신은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16층의 길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기억하고 있다.
한 번 본 것은 절대 까먹지 않는 이 능력 덕에, 현재 어디쯤 왔는지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앨리스도 길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
'이대로 가면 이틀 내로 탈출한다.'
그녀는 이곳에서 최단 경로의 탈출구를 향해 한 치도 틀림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적당히 모르는 척 연기하면서.
지도를 완벽하게 숙지할 수 있는 능력자이거나, 길을 찾는 능력을 가진 게 분명했다.
다만 의심스러운 것은 탈출구가 닫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왠지 모르게 반드시 열려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는 것.
'이대로 갈 수는 없지.'
쿠오오오오―!
쿵! 쿵!
그때, 갑자기 전방에서 들려오는 괴성.
'이 소리는....'
디베이거 카우.
일명 미친 소라 불리는 괴수의 울음소리였다.
쿵! 쿵! 쿵!
벽을 타고 흘러오는 진동과 지진 난 듯 흔들리는 땅.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괴수인가?"
"다들 조심하세요!"
"걱정 마십쇼! 이 플레타가 그대들을 지켜 줄 테니."
쿵! 쿵! 쿵! 쿵! 쿵!
점점 커지는 소음.
이건 잔뜩 흥분한 디베이거 카우가 그대로 벽을 들이박으면서 달려오는 소리였다.
'연달아 다섯 번.'
벽이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5마리의 디베이거 카우가 오는 게 분명하다.
이전까지는 소형 괴수들만 마주쳤었는데 실력을 보일 것도 없이 플레타와 메리엘의 창칼에 한순간에 모두 쓰러져 그들의 실력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디베이거 카우 다섯이라면 저들의 실력을 파악하기 충분하다.
"당신, 뒤에만 있지 말고 이번엔 좀 같이 싸우지?"
살짝 격양된 음성. 빨라진 말투.
플레타의 뒤에 있던 앨리스가 따지듯 이신에게 말했다.
"그럼 너도 좀 싸워."
인상을 와락 찌푸리는 그녀가 대꾸도 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긴 일직선 길 끝의 코너 위에 가 있었다.
곧 있으면 들이닥칠 디베이거 카우들이 나타날 코너.
놈들의 무지성 몸통 박치기에 치이지 않고 대처하기 위해선 이러한 긴 복도의 길 앞에서 놈들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디베이거 카우가 중형 괴수들이라 하지만, 그래 봤자 이신이 데리고 있는 바크나 벨티아르 하나만 소환하더라도 대처하기에는 쉽다.
놈들의 공격 패턴은 그저 큰 덩치와 무게로 인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게 전부.
그에 대응 가능한 탱커 하나만 있으면 저 녀석들 수십이 달려들어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플레타와 메리엘이 그런 탱커 유형의 전투원들은 아니기에.
앨리스는 실력을 드러내야만 할 것이다.
"옵니다!"
코너에서 튀어나와 몸을 벽에 박아 버리는 다섯 마리의 디베이거 카우가 그 육중한 몸을 돌려 이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저 특별할 것도 없는 단순한 공격의 패턴이었지만 큰 덩치와 빠른 속도, 압도적인 힘을 생각할 때 마주하는 이들은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투웅!
플레타가 왼손의 엄지로 허리춤의 검을 튕기듯 빼냈다.
순간적으로 변하는 기세.
플레타에게서 이전까지의 가벼웠던 모습은 사라지고 살벌한 무게감이 생겨났다.
차분한 그의 눈동자가 다가오는 놈들을 빠르게 훑었다.
'저 속도를 저지해야 한다.'
검을 꽉 움켜쥔 플레타가 왼쪽의 디베이거 카우에게 달려든 뒤, 땅을 박차고 놈의 머리 위로 뛰었다.
평소엔 가벼울지라도 검을 들었을 땐 무거워야 한다.
그게 플레타의 신조였다.
"하압!"
생각을 마친 플레타가 검을 휘둘렀다.
푸른 검기가 디베이거 카우의 두꺼운 피부를 가르며 한쪽 눈을 가르고 지나갔다.
서걱- 촤악!
눈알이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동시에 검을 약간 비틀어 휘두르자, 핏물이 반대편 눈으로 들어갔다.
"크오오오오오!"
한쪽 눈은 시력을 잃고 반대쪽은 핏물 때문에 뜰 수가 없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디베이거 카우가 괴성을 내지르며 방향을 돌렸다.
"크아아아아!"
"카아아아악!"
쿵! 콰앙!!
디베이거 카우들이 서로 부딪히며 한순간에 대열이 무너졌다. 세 마리의 디베이거 카우가 그대로 나자빠졌다.
추진력을 잃은 디베이거 카우는 다 잡은 먹이일 뿐.
이어지는 베기가 밀려난 디베이거 카우의 가죽을 뚫고 정확히 다리의 힘줄을 끊어내며 단번에 두 마리의 괴수를 무력화시켰다.
'상대법을 바로 캐치한 건가?'
뒤쪽에서 그 모습을 보던 이신은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플레타가 세 마리의 카우를 맡는 동안 메리엘도 나머지 두 마리의 카우를 순조롭게 처리하며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둘 다 탱커 같은 전투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압도적인 공격력과 순발력으로 디베이거 카우를 찍어 눌렀다.
상성을 넘어선 실력 차이.
딱 그 정도의 전투.
이신은 제법 수준 높은 둘의 실력에, 인정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
그런 이신을 보던 앨리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번에도 자신과 함께 이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신은 그런 앨리스의 시선을 본 체도 하지 않고 무시했다.
플레타는 자신의 실력을 미인들 앞에서 뽐낼 수 있어서 불만이 없었고 메리엘은 그저 바보같이 선한 성격으로 인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성격들을 단번에 파악한 앨리스는 그 둘을 보기 좋게 이용하는 중이었고.
"플레타, 진짜 멋있는데?"
"하하하! 좀 멋졌습니까?"
"응! 그리고 메리엘도 고마워. 무서웠는데 덕분에 살았어."
"아니에요. 힘 있는 자가 돕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처음과 다르게 완벽하게 돌변한 태도.
앨리스의 저러한 생존 방식에 대해서 뭐라 할 생각도 없고 나쁘게 보지도 않는다.
그저 사람들마다 다 살아가는 방식은 다른 법이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도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너는...이번에도 편하게 가네?"
"그쪽도 만만치 않게 안락해 보이는데?"
"나는 길을 다 안내하고 있잖...!"
말을 하다 말고 멈칫하는 앨리스.
"길을 안내하고 있던 거였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것도 안 할 거면 조용히 방해나 하지 말아."
자신의 말실수를 알아챈 그녀가 인상을 굳히며 이신을 노려보다 시선을 거뒀다.
'방해라....'
그녀의 말을 곱씹던 이신이 피식 웃으며 디베이거 카우의 시체가 있는 쪽으로 갔다.
그 모습을 보던 앨리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디베이거 카우는 워낙 가죽이 질기고 근육이 단단해서 손질이 어렵다고 들었는데, 그게 가능만 하다면 고기 맛은 정말 좋다고 했어."
"그렇습니까?"
"그럼 잠시 식사 시간을 가질까요?"
"어? 벌써 밥 먹을 시간인가? 근데 이거 앨리스 씨가 손질할 수 있습니까? 이 허약한 손으로 어떻게 이런 무지막지한 놈을?"
"내가 어떻게 해?"
"에? 그럼 이놈을 어떻게 먹습니까?"
앨리스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플레타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주 찰나에 앨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펴졌다. 밝은 미소를 띤 그녀가 플레타를 향해 말했다.
"플레타가 해 줄래? 내 힘으론 도저히 못 해서...."
"아... 근데 이 녀석을 도축할 검이 없습니다."
"그 검 있잖아? 그걸로 하면 되지."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당황한 듯한 모습의 플레타.
그가 자신의 검과 앨리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아....'라는 많은 의미가 담긴 신음을 내뱉었다.
"이건 제 정신이 담긴 검입니다. 고작 괴수들을 요리하려고 만든 검이...."
"플레타, 부탁해. 응? 나 배고파."
똘망똘망한 눈으로 플레타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는 앨리스에, 안절부절못하던 플레타가 결국 그녀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승낙했다.
"고마워! 역시 플레타밖에 없어."
환한 미소로 기뻐하는 앨리스가 플레타를 껴안자, 얼굴이 잔뜩 시뻘게진 그가 그대로 굳어 버린다.
"메리엘도 같이 먹자, 이거 잡는데 고생했잖아."
"저는 배고픔을 느끼지 않아 괜찮습니다."
"근데 맛은 느끼잖아."
"아…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요리를 할 줄 몰라서...."
"괜찮아. 고생했는데 같이 먹어야지."
"그럼 고맙게 잘 먹겠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한 메리엘이 고개를 돌려 조금 떨어져 있는 이신을 향해 손짓했다.
"이신님도 같이...."
"아니,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같이 먹어? 고생이란 고생은 우리가 다 하는데. 같이 가서 길 뚫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래도 같이 동행하는 분인데 서로 도우면서-."
"메리엘. 인간들에겐 인간들만의 규율이 있는 거야. 너의 착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알겠지?"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당황한 메리엘이 아리송한 얼굴로 이신을 바라보았다.
"난 괜찮아. 알아서 먹어. 내 건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
"하, 그렇다네? 그니까 신경 쓰지 말자고."
이신까지 이렇게 말하니 더 이상할 말이 없던 메리엘이 고개를 끄덕이곤 가만히 있었다.
플레타는 처음 해 보는 도축 일에, 힘겹게 고기의 가죽을 자르며 고기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앨리스는 짜증 났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없기에 그냥 보고 있었다.
대충 잘라 굽기만 해도 먹을 수는 있기에.
그때 한쪽에 쓰러진 디베이거 카우 옆에 다가간 이신이 허리춤에 달고 있던 칼을 꺼내 들었다.
"허, 폼으로 달고 다니던 검 아니었나?"
그 모습을 보던 앨리스가 비웃음을 지으며 '어디 어떻게 발버둥을 치나 볼까?' 하는 얼굴로 이신을 구경했다.
순백색의 검.
어디 왕실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기품이 느껴지는 검이다.
여태 검집에 들어가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신이 꺼낸 모습을 보니 예사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설마… 대단한 실력자라도 되는 건가?'
앨리스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보통 검과 지팡이 둘 다 들고 다니는 놈들은 어설프게 이도 저도 아닌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니, 거의 다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어디 고위 가문의 자제라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신의 손에 들린 검이 망설임 없이 디베이거 카우의 속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 주, 주인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촤악! 서걱! 그그극―
거침없이 고기의 손질을 시작하자, 마르티르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 아악! 꺄아! 저는 누구 하나 제대로 베어 본 적이- 꺄아악!
"시끄러워. 이놈은 죽었으니까 벨 수 있잖아?"
- 아니 그래도! 아악!
로브를 입고 지팡이까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주력이 마법사일 거라 생각했던 앨리스는 저 두꺼운 가죽을 무리 없이 잘라내는 모습에 입을 떡 벌린 채로 굳어 버렸다.
"대단해요! 이신 님!"
"와... 어디서 그렇게 배운 거야? 대단한데?"
도축용 칼도 아니고 도축하기에 불편한 기다란 검으로 쭉쭉 도축하는 모습에 메리엘과 플레타가 감탄을 내뱉었다.
탑을 오르다 보면 필수적인 기술 중 하나가 고기를 손질하는 기술이다.
언제 어디서 밥을 굶게 될지 모르고 식량을 어떻게 보충해야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마법사였지만 기본적인 고기 손질 정도는 이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신이 디베이거 카우를 손질하는 모습을 보며 이를 아드득 갈던 앨리스는 플레타가 손질한 고기를 보았다.
제법 결대로 자르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지방을 분리하거나 피를 빼는 등의 기술 같은 건 전혀 모르는 탓에 고기가 많이 상해 있었다.
대충 보아도 이신이 만들어 낸 고기와 그 질의 차이가 현저하게 났다.
'그래도 저 녀석은 고기를 굽지는....'
딱! 화르륵!
그가 중지와 엄지를 튕기자, 모아둔 디베이거 카우의 기름과 가죽 위로 불길이 타올라 간이 모닥불이 만들어졌다.
마르티르에 두꺼운 고깃덩이를 끼운 상태로 그 위에 올려놓자, 육즙 가득한 고기가 금세 만들어졌다.
겉은 바삭하고 살짝 벌어진 고기 사이로 흐르는 육즙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침샘이 고이게 만들 정도.
- 아악! 뜨거워요! 주인님!
"지옥 불에 닿아도 끄떡없는 녀석이 무슨."
- 아아아. 흐윽... 너무해요. 주인님.
마르티르의 투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이신이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식사에 관심이 없다던 메리엘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서 먹어."
"네? 정말요? 제가 그래도 될까요?"
"그래, 네가 잡은 거잖아. 그 정도 권리는 있지."
"감사해요!"
메리엘이 후다닥 다가와 이신이 마르티르로 자른 고기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고기 맛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고 그 모습을 보던 플레타도 먹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기 서린 앨리스의 분위기에 눌려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플레타! 이게 뭐야! 고기가 다 상했잖아!"
"아, 아니… 그래도 열심히...."
"아이씨! 불은 왜 이렇게 약한 거야!"
원래라면 고기를 구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았을 테지만 그녀가 가져온 장비는 이신의 마법처럼 자유자재로 화력을 조절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신만큼 고기를 굽는 스킬도 없으니, 맛의 차이는 확연했다.
어떤 건 질기고, 어떤 건 덜 익었고.
고기를 먹던 앨리스가 짜증이 난 듯, 굽던 고기를 집어 던졌다.
그 모습을 본 이신이 잔뜩 기가 죽은 플레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플레타, 너도 이쪽으로 와서 먹어."
"어?"
"너도 잡느라 고생했잖아. 먹을 자격이 있지."
"어, 어... 그럴까?"
앨리스의 눈치를 보던 플레타가 슬금슬금 이신의 곁으로 가 고기를 먹었다.
"와! 내 고향에서 먹던 최고급 고기 요리를 먹는 거 같은데? 너 클래스가 혹시 요리사야?"
"그건 아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뒤통수가 뜨겁다는 것을 눈치챈 플레타의 얼굴이 경직됐다.
"저... 앨리스 씨도 같이 먹으면 좋지 않을까?"
"그걸 왜 네가 판단해? 먹고 싶으면 자기가 와서 말하겠지."
이신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멈칫한 플레타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자존심에 아무 말 않던 앨리스가 너무 자극적인 고기 냄새에 참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이대로 자존심을 부리는 건 너무 손해였다.
먹을 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이삼일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혼자 이 맛없는 음식들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줘."
"뭐라고?"
까드득-
모닥불이 타는 소리인지, 이빨이 갈리는 소리인지.
이신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같이…먹자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듣던 이신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제6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