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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1 한잔 했어요

"선생. 문제가 생겼소."

불사자는 술 한 병을 들고 나에게 상담을 요청해왔다.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잔에 술을 따르더니, 혼자 인생의 무게를 짊어진 듯 무겁게 말했다.

"뭔데요?"

"다음 햇빛이 비치는 날, 이곳을 탈출할 거라고 했잖소?"

"그랬죠."

"흠. 선생은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하실 거요?"

갑자기 인생 상담?

결정해둔 건 없다. 일단 살고 봐야 하는 일이라, 탈출한 이후까지 고려하기에는 여유가 없어서.

나는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일단 제가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겠죠."

"군국 말이오? 그곳은 범죄자들에겐 관용이 없다고 하던데. 돌아가실 수 있겠소?"

"군국은 딱히 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관용 없잖아요."

"하하! 그건 그렇지! 나도 익히 아는 바요!"

"그리고 저는 원래도 범죄자였어요. 그러니까 걸릴 게 없다는 말씀."

"오, 그건 나도 미처 몰랐군!"

호탕하게 웃어젖힌 불사자는, 술 한 잔을 들이켜고는 용건을 꺼냈다.

"선생.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소. 칼리스가 말하길, 자기는 이제 군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던데."

"아마 그렇겠죠."

"중령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이오?"

"비밀결사에 소속되어 있었잖아요. 비밀결사에선 자기네들을 배신한 그녀를 살려두지 않겠죠. 돌아가자마자 암살당할걸요."

"흠! 군국도 귀중한 장교인 그녀를 보호하지 않겠소?"

"비밀결사가 중령님을 가장 쉽게 암살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요? 중령님이 군국 말고 다른 비밀결사의 명령을 받고 움직였다고 밀고하면 돼요. 그러면 바로 체포해서 사형당할걸요."

3레벨 시민, 대체하기에는 아까운 이들.

하지만 아깝다뿐이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군국은 체제의 수호를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며, 그에 반하는 이들을 잔인하게 숙청한다.

4레벨 시민이라도 그들의 뜻에 반한다면 단호하게 쳐낼 수 있는 게 군국이다….

물론 4레벨쯤 되면 구태여 군국의 뜻에 반대할 이유 없지만.

"거 참 빡빡하군! 늘 느끼는 거지만, 군국은 그 잣대가 너무 엄격하다오!"

군국으로 돌아가면 죽는다고 확언을 받자, 결심한 불사자는 나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것이 고난이라도 죽음보다는 낫겠지. 이렇게 된 이상, 군국을 떠날 때 그녀를 데려가야겠소."

"군국을 떠나시게요?"

"그래야겠지. 아니면 나는 몰라도 그녀는 죽을 테니. 나도 더는 환영받지 못할 테고."

"더는? 라쉬 씨는 처음부터 별로 환영받지 못하지 않았나요?"

"하하! 아픈 부분을 찌르는군! 어떻게 알았소?"

"군국은 규격 외 존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전쟁할 때 빼고는."

"하하. 군국도 참, 일관된 나라요."

불사자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한숨에서는 독한 술냄새와 함께 짙은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회귀자가 공급한 술은 정신이 맑은 채로 취한다는 귀중한 천라향주. 옛 제국의 재상들이 격무 도중 취하고 싶을 때 마셨다는 전설의 술이다.

이런 자리에서 뺄 수는 없지. 나도 내 앞에서 찰랑거리는 술을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흘러가는 알코올이 깊숙이에서 타오른다. 몸 안에서 타오르고 남은 맑은 주향이 전신에 스며드는 것 같다.

"크으. 죽인다. 이게 술이지."

역시, 회귀자의 간택을 받은 고급품. 나는 조금 꺾으려다 말고 잔에 든 액체를 전부 털어 넣었다.

탁, 하고 탁자 위에 내려놓자, 불사자도 기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에게 감사해야 하겠는걸! 군국의 독하고 쓴 맥주와는 차원이 다르오!"

"그딴 잡스러운 술과는 비교하지 마세요. 배급과 운송 효율을 늘린다고 잡스러운 맥주에다가 수분 압축 기술을 쓴 흉물이니까요."

나는 아직도 제식 맥주라 불리는 것이 왜 2레벨 사치품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치란 사치스러울 때 붙여야 하는 거잖아.

"물에 섞어 먹지 않으면 이게 맥주인지, 아니면 보리죽을 먹는 도중 누가 머리를 세게 한 대 때리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끔찍한 액체가 왜 사치품인 거죠? 효율주의의 폐해에요. 결과가 같다고 다 같은 게 아니라고요."

"하하하! 재미있는 표현이로군! 나도 놀라기는 했소. 어쩌다 술 한 잔마저 마음대로 못 마시는 나라가 되었는지!"

대작하며 오가는 술잔과 함께 이야기가 오갔다.

공유할 만한 추억이 없는 이들은 술자리에서 같은 것을 욕하며 서로 친분을 확인하기 마련이다. 나는 군국 뒷골목 거주민답게 신랄하게 군국을 깠고, 불사자는 내 말에 동의하면서도 자꾸 군국에 미련을 보였다.

내가 물었다.

"이 나라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면서 뭔 정이 그리 들었어요?"

"정이 든 게 아니오. 정이 안 들어서 아쉬운 것이지."

"정이 안 들었으면 훌훌 떠나면 되죠."

"그게 아쉽다는 거요. 나는 군국을 떠나도 군국이 별로 안 그리울 것 같소."

무슨 소리야. 당연한 말을. 지금 군국에 사는 사람들도 군국 그리워하는 사람 없을걸.

불사자는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중얼거렸다.

"나는 군국이 엄청나게 대단한 나라인 줄 알았소. 군국은 도시를 짓고 댐을 쌓고 길을 닦았소. 심지어, 땅을 강처럼 흐르게 하여 온 나라를 이었지."

"군국의 몇 안 되는 업적이죠."

"그에 반해, 우리 부족은 군국이 만든 커다란 콩을 심으면서 즐거워했을 뿐이오. 죽지 않는 이들이나, 그래서인지 한 점의 치열함도 없지. 나는 자꾸만 무언가를 세우려는 군국을 흠모했소."

잔이 부딪쳤다. 불사자는 잔을 쭉 들이키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의 시선이 조금 먼 곳을 향했다.

"우리 부족은 어릴 적부터 흙 섞인 물을 마시며 흙투성이 곡식과 고기를 먹으며 자라오. 그러다 성인식 날이 되면 그렇게 몸에 쌓인 기운을 어느 한구석으로 몰지. 그리고, 가장 흙과 가까운 부분을 잘라 대지모신에게 공양한다오."

자기 부족의 전통을 말하는 불사자에게서는 약간의 회한과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는 자기 오른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몸의 일부를 바쳐서 땅에 묻고 새로운 육신을 얻는다오. 나의 오른팔이 그것, 공양신이지."

오른팔이 제멋대로 뛰어다닌다 했더니, 뭔 이상한 짓을 했던 거구나.

정말 인간은 미친 짓을 태연히 저지른다니까.

"덕분에 불사성을 얻기야 했으나…. 그 탓인가. 우리는 정체되어버렸소. 군국은 철로 된 나라를 세우고 있는데, 우리는 기껏해야 심는 콩이 조금 달라진 것뿐이니. 나는 어릴 적과 다를 바 없는 광경이 지긋지긋해서 군국을 보러 왔지. 그런데."

불사자는 주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 군국을 상징하는 듯한 콘크리트의 빛깔이 그의 눈에 가득 담겼다.

"잘 모르겠소. 우리 부족을 떠올릴 때면 원망과 그리움을 느꼈으나. 이 나라에는…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소."

"감옥에 갇힌 데다가 전신이 찢긴 채 방치되었다면 그럴 수도요."

"하하. 아니오. 그런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않소."

그게 어떻게 사소한데.

불사자다운 관점으로 웃어넘긴 그는 남은 술을 잔에 다 털었다.

"여기 더 있어보았자 나아질 게 없을 것 같아 그런 듯하오. 마침 죄를 지어서 더 있지도 못하겠다, 볼 건 다 보았으니 이만 떠나야겠지."

그리고 단숨에 들이키고는, 확실하게 결단을 내렸다.

"나는 국경을 넘어 대모님에게로 갈 것이오. 칼리스에게도 따라오라고 권유는 해보겠지만, 과연 응할지는 모르겠군."

당연히 응하겠지. 애초에 그걸 노리고 말을 꺼낸 것일 테니.

불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로도 멀쩡히 걸었다. 그는 자기 모습에 놀라워했다.

"맛있는 술이라서 그런가! 이만큼 마셨는데도 취기만 올라올 뿐 정신이 말짱하군!"

"맑게 취하는 술, 천라향주잖아요. 마셔도 기분만 좋아지고 몸이 상하지 않는 술."

"세상에는 별 술이 다 있구려!"

"무슨 술인지도 모르고 마시자고 한 거예요?"

"내가 무얼 알겠소! 칼리스가 마시자고 해서 꺼내온 거지!"

엥. 칼리스가?

그런데 왜 나한테 들고 왔던 거야. 어디, 기억이나 읽어볼까.

대충 기억을 읽으니, 칼리스가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한 모양이다. 자기는 이제 갈 곳이 없다며 아련한 표정을 한 채, 착잡하니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가능한 같이.

불사자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술을 갖고 가다가.

"그런데 막상 꺼내오고 보니, 칼리스는 제 걸음도 못 가누는 부상자이지 않소! 들이키기 전에 잔을 뺏었지! 허, 큰일 날 뻔했소!"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넘어졌구나. 밤에 몰래 음식을 빼먹을 정도로 회복되었으면서, 누가 그렇게 아픈 척하래.

다만,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걸 그대로 저에게 갖고 온 거예요?"

"뚜껑을 땄으니 어쩔 수 없지 않소. 마셔야지!"

"왜 하필 저였죠?"

"어린 소년이나 맛도 못 느끼는 혈귀에게 갖다줄 수야 없지 않소! 짐승 아가씨들에게도 마찬가지니, 소거법으로 선생밖에 없지 않소! 마침 선생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네가 그러면 칼리스의 원한을 내가 사게 되잖아.

에고, 이래서 술 가져온 사람은 기억부터 읽어야 하는데. 나도 오랜만이라서 경계심이 좀 풀어졌나 보다.

나쁜 의도는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칼리스의 바람도 있으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찬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라쉬 씨. 저기 찬장에 약주도 하나 있어요. 화기가 가득한 술인데 온갖 부정한 기운을 무찌르고 몸을 낫게 한다는 약술이에요."

"오! 그런 신기한 술도 있소?"

"네. 그거면 환자가 마셔도 괜찮을 거예요."

"조금 일찍 알려주시지! 더 빨리 나았을 거 아니오!"

이미 다 나았다는 것도 모르는 채, 불사자는 냉큼 다가가 약주를 꺼내 들었다. 다른 잔을 챙긴 그는 고기 몇 점을 안주 삼아 챙긴 채 자리를 떴다.

"그렇다면 나는 가보겠소!"

나는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했다.

문명의 잔혹함을 실감해라, 야만인. 너는 이미 함정에 빠졌으니.

그나저나, 여기서 나간 이후라.

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일단 아미텐그라드의 뒷골목으로 돌아가, 내 숨겨둔 재산과 물건을 챙겨야겠지.

그다음에는 잘 모르겠다.

창대한 미래계획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니까. 심지어 고립된 무저갱에서 한참 있던 사람이 세상의 흐름을 예상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나가서 정보를 찾고, 그것을 기반으로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위험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술도 적당히 마셨겠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지랑 놀아줄 생각으로 마당으로 나섰다. 아지 줄 요량으로 닭고기 한 점 챙겨서.

그때 묘한 광경이 보였다.

"냐아-! 서라냐-!"

주간등이 비추는 공간 저 너머의 어둠.

그곳에서 나비가 지그재그로 도망치는 동그란 불빛을 쫓아 달려가고 있었다.

"냐아-! 제법 빠르다냐! 하지만 냐의 속도는 따라오지 못…? 냐?"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을 무언가 달려가나 싶더니, 나비가 탐조등의 불빛 위로 탁 내려앉았다. 의기양양한 외침을 내지르며 앞발로 빛을 짚는다.

그러나 실체 없는 빛은 발톱 사이로 새어나간 뒤 스르르 땅을 기어 도망갔다. 그러면 약이 바짝 오른 나비도 빛을 따라 뛰었다.

"냐! 냐! 제법 잽싸다냐!"

"멍멍!"

"냐앗! 멍청한 멍멍이! 비키라냐!"

이번에는 아지가 나타나 동그란 불빛을 밟았다. 물론 아지도 빛을 집지 못하고 지나친 사이, 동그란 빛은 다시 지그재그를 그리며 도망쳤다.

이상하네. 탐조등은 원래 물체를 쫓게 되어있는데. 왜 나비나 아지를 피해 다니는 거지?

뭔가 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감옥 외벽에 붙은 탐조등 위. 회귀자가 거기 가볍게 선 채로 빛을 움직이고 있었다.

회귀자가 스스로 아지와 나비랑 놀아주다니. 그것도 이런 놀이를.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인간 모습이라서 짐승처럼 못 다루겠다며. 드디어 생각이 좀 바뀌었나?

한참 빛을 움직이는 데 열중하던 회귀자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허둥지둥했다.

"아, 앗. 이건."

"웬일로 놀아주고 있어요?"

"아니, 그게."

'나비가 혼자 탐조등을 쫓고 있는데, 빛이 안 움직이길래….'

탐조등은 탈주자를 쫓기 위해 만든 것. 나비에게서 도망치기는커녕 나비를 따라잡으려고 든다. 나비가 불빛을 짚어도 불빛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이 지나면, 나비도 자기를 비추기만 하는 불빛에 질려서 되돌아오게 된다. 도망치지 않는 사냥감은 재미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실망한 모습이 안쓰러워서 자기가 직접 불빛을 움직여줬다? 그러다 보니 아지도 같이 놀게 되었고?"

"오해하지 마! 나는, 그냥, 맨날 마력초를 피우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죄를 지은 양 변명하는 회귀자.

누가 뭐래? 내가 뭔 오해를 한다고.

"셰이 씨, 잘했어요."

"뭐?"

"이야. 드디어 철이 들었네요. 그래요. 동물을 키우면 같이 보살필 생각을 해야죠. 맨날 독박으로 돌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후우.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요."

"거짓말하네. 눈가도 다 말라있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죠."

회귀자는 피식 웃으면서 빛의 방향을 조종했다. 나비와 아지가 쉽게 잡지 못하도록 탐조등을 움직이다가, 갑작스레 툭 내뱉었다.

"네가 준 통조림. 잘 쓰고 있어."

"간식이요?"

"그래. 좋아하더라. 비리기만 하고 맛도 없어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걸 왜 댁이 처먹어."

"맛만 본 거야! 짐승의 왕이든 뭐든, 일단 몸은 인간이잖아! 혹시나 못 먹을까 봐!"

"인간 먹으라고 만든 게 아닌데 먹으니까 비리지. 사람 먹는 밥 잘 먹는 건 개밥 먹는 아지밖에 없어요. 애초에 인간이 먹는 음식 먹이려는 게 이상한 거야."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쿵.

땅이 진동함과 동시에, 탐조등이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귀자는 이미 탐조등에서 손을 뗀 채였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조금 전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탐조등은 새로운 침입자를 감지하고는 그 흔적을 쫓았다. 사방팔방 흩어졌던 빛이 직선으로 움직이며 한곳으로 모인다.

그리고 선이 교차하는 지점, 그 끝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살구색 피부를 가진 장신의 여성이었다.

한 가닥으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뒤로 흘러내렸다. 귀에서 사람 인형 모양 귀걸이가 흔들렸다. 도사나 입을 법한 펑퍼짐한 옷을 입은 몸 아래로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이 흘긋 보인다. 다섯 개에 달하는 팔찌가 한 박자 늦게 찰랑거렸다.

"멍! 위험해!"

"냐냣! 냐가 먼저다냐!"

마침 빛을 쫓아온 두 짐승의 왕이 도착했다. 아지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방향을 비틀었으나, 놀이에 여념이 없던 나비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휘둘러지는 앞발. 그 궤적에는 한 명의 인간이 있다. 짐승의 왕의 돌격이라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재난과도 같은 공격.

그러나.

쿵.

나비의 앞발은, 그녀의 팔에 틀어막혔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팔을 들어올리는 것으로, 그녀는 나비의 일격을 견뎠다.

아니, 이것을 견뎌냈다고 할 수 있을까.

고양이가 거목에다 발톱을 긁는다고, 고목이 공격을 견뎌낸 것인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터다. 애초에 거목은 고양이의 발톱에 부러질 것이 아니니. 그냥 거기 있었을 뿐 고양이가 와서 긁은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거목과 같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인간을 피하느라 균형을 잃고 땅을 뒹굴었어야 하는 아지.

그러나, 아지는 지금 그녀의 옆구리에 잡혀있었다.

"멍멍?"

대롱대롱 매달린 아지가 의아해할 때.

"개의 왕, 고양이의 왕. 아무래도, 잘 찾아온 것 같군. 어머니 지모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어머니의 은혜 덕분에 이 지옥 속에서도 길을 찾았나이다."

나직한 기도문이 들려왔다.

나비도, 아지도. 그 강건한 육신에 붙잡힌 채로 얌전해졌다. 단신으로, 그것도 순수하게 신체능력으로 두 짐승의 왕을 받아낸,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위업이었다.

회귀자가 눈을 부릅떴다.

'어째서, 벌써 이곳에 온 거야? 분명 예정은 한참 뒤였을 터인데!'

겨드랑이에 끼인 아지가 몸부림을 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지를 내려놓았다. 아지는 폴짝폴짝 뛰어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멍! 안녕! 반가워!"

"반갑소이다, 개의 왕이여. 존재의 대표자에게, 지모신을 따르는 이가 인사드리겠소이다."

그녀는 아지의 앞에 꾸벅 고개를 숙였고, 아지도 그녀를 따라서 머리를 까닥였다.

"고양이의 왕이여…."

그러나 경계심이 강한 나비는 저 멀리 도망친 채로 낯선 이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나비를 보며 작게 미소 지은 뒤, 감옥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아, 눈 마주쳤다.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지나가는 나그네이외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구름.

쿵.

자신의 등장을 알리는 그 작지만 거대한 몸짓은 탄탈로스 전역을 흔들었다.

"이 만남 또한 지모신의 인도로 이루어진 터. 길손이 하루 대접받기를 바라오!"

온누리는 지모신의 품 안이며, 서로 발을 댄 이상 모두 이어져 있으니.

주인은 길손을 마다하지 말 것이며, 길손은 주인의 손발처럼 부지런해야 한다.

지모신의 독실한 신도가 옛 규율을 꺼냈다.

하지만, 애초에.

세상과의 모든 흐름이 끊긴 이곳, 그들의 지옥인 무저갱에 찾아올 이라면.

당연히 보통 신도는 아닐 터.

다행히, 저 지모신도의 기억을 읽기 전. 회귀자에게서 생각이 들려왔다.

'지모신의 대행자. 지선(地仙)!'

EP.122 대지모신은 모두의 곁에

어머니 대지모를 모시는 대지모신교에는 딱히 신전이랄 게 없다. 그들은 신체 위에 발을 디디고 서 있으니,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이 곧 접신이며 땅에 입을 맞추는 것이 세례인 셈이다.

그나마 가장 높은 산 중턱에 있는 대사원이나, 대지모의 형상이라 주장하는 바위 같은 게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징물일 뿐.

대지모신에게는 오직 신도만이 있으니.

그것이 지모신교의 교세가 흥한 이유이며, 동시에 쇠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모두 신도가 될 수 있기에 교세가 잡초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나, 자격 없는 이들이 독초처럼 그 명성을 좀먹기에.

그러나.

자격 없는 이들의 우행이 있음에도 명맥을 유지하는 건, 자격이 충만한 이가 그 몇 배나 분주하게 일하고 있기 때문.

떠받듦을 꺼리는 몇몇 지모신교도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제 역할을 하였으며, 손에 닿는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였으니.

그에 감명받은 만인들은 명망 높은 지모신교도를 선자(仙者)라 불렀다.

그리고 이번 대, 가장 유명한 선자라고 하면.

"지선! 지선이라니!"

상대의 정체를 알아챈 순간, 나는 즉각 뛰쳐나가 지선을 맞이했다.

"정말, 제가 진짜를 보고 있는 거 맞죠? 지선! 지선이죠!"

지선은 이러한 환호가 익숙한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과분하게도, 몇몇 고인께서 소인을 그리 부르고 계시외다."

"이야! 내 살아생전 지선을 보는 일이 생길 줄이야! 저기, 영광인데 혹 악수라도…."

"문제 될 것 없소."

지선은 흔쾌히 손을 내밀었고, 나는 황송하게 그 손을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꽉 들어차 있는, 숨을 죽인 고목과도 같은 손이었다. 토목공학 역사의 나이테와 다름없는 단단히 주름진 손을 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내 살가운 태도에 곁에 있던 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멍? 아는 사람?"

"알다마다, 이것아.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아는 거지만!"

전설로 회자되는 지모신교의 선자를 어찌 모를까.

25년 전, 군국이 왕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을 때. 목숨을 잃은 자도 많았고 목숨을 잃어야 할 자는 그보다 열 배는 많았다.

구체제의 요인들, 악덕이 쌓인 상인들, 그들과 결탁한 기사와 종자들, 뒤를 봐주며 콩고물을 얻어먹던 부패한 관료들까지.

전란을 겪고 허덕이던 군국은 이 모두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의 수탈에 신음하던 하층민들을 위한 일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군국은 해냈다.

역사상 다시 없을 대규모 토목공사. 군국을 밑바닥부터 쌓아 올린 대규모 사업은 산적한 여러 문제를 해결했다.

거기서 돋보인 것이 대지술사들.

흙과 모래를 다루는 데 이골이 난, 대지모신의 사도들이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한 덕에 성공해냈다.

이전까지는 민간신앙, 혹은 사교로 취급받던 대지모신 신앙은 그날 이후 양지로 떠올랐으며, 시민들은 지모신의 사도들을 추앙하였으니.

그중 가장 유명한 이가 바로.

"공병대대의 여신, 삽질의 수호자, 리버스 장의사, 곤곤래(滾坤崍), 불도자(不倒者)! 이 모든 호칭의 주인. 지선이라는 분이야!"

'잠시. 불도자라니. 그 이명까지 세간에 퍼졌던가?'

지선이 잠시 눈가를 움찔거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소리쳤다.

그러자 아지도 신바람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멍! 아는 사람!"

"인마. 너는 지선이 뭔지도 모르면서. 네가 왜 신나. 네가 군국 토목공학의 역사를 알아?"

"멍! 반가워! 반가워!"

쯧. 개에게 물어본 내 잘못이다.

지선은 굳고 확실한 발걸음으로 빛이 닿는 곳까지 걸어왔다. 그녀가 걸어올 동안, 심상찮은 기척을 느낀 티르가 관 위에 앉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티르는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휴, 아는 이냐?"

내가 소개하기 전, 지선이 먼저 티르를 향해 양손을 모았다.

"반갑나이다, 시조시여. 언제나 땅과 가까이 있는 시조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소이다. 지모신을 따르는 이로서, 가장 오래 묻힌 이에게 인사를 올리겠나이다."

"지모신의 사도인가?"

그것만으로도 티르의 경계가 옅어졌다.

눈을 마주치면 악수 대신 전쟁을 했던 성황청과는 달리, 포용적인 대지모신교는 흡혈귀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흡혈귀의 아군도 아니었지만, 사방이 어둠인 이들에겐 회색마저 밝아 보이는 법이다.

"내 과거 여러 도사와 교분을 나눈 적 있었다. 도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예를 갖춘 올곧은 이들이었지."

티르는 목소리를 낮추고는 선언했다.

"그중 몇몇과는 싸우기도 하였지만, 그건 그들이 먼저 공격하였기에 벌어진 일. 네가 나를 적대하지만 않는다면 나 역시 너를 공격하지 않겠다."

"하면,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다툼이 없을 것이외다."

지선은 허리를 숙이며 말했고, 티르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말이 통하는 자로다. 이번 방문자는 별다른 일을 벌이지 않을 것 같구나."

하하. 글쎄요.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삼킬 무렵.

"아니! 이 어찌 된 일이오? 귀인이 오셨구만!"

마침 뛰어 내려온 불사자와 칼리스도 지선을 보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특히 그 반응은 칼리스에게 더 두드러졌는데, 칼리스는 벗은 이후 한 번도 꺼내지 않던 장교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모자를 눌러 쓴 칼리스가 다급히 경례했다.

"충성! 칼리스 크리츠 중령입니다…! 준장님께서 이곳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준장?"

군국의 편제는 직관적이다. 소장, 중장, 대장 순으로 올라간다면, 준장은 다른 모든 장성보다 낮은 위치라는 뜻.

그 점을 상기한 불사자는 순수한 의문을 담아서 물었다.

"준장이라니? 그러면 지선께선 중장보다 낮은 지위란 말이오?"

"가만히 있어요, 라쉬! 준장은 명예직입니다. 일반적인 편제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그 힘과 공로를 인정받아야만 수여 받을 수 있는 회색 별입니다!"

부상자를 연기하고 있던 사실도 잊어버린 칼리스가 급히 불사자를 나무랐다. 지적 받은 불사자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대단하신 분이라는 거야 말하지 않아도 아오. 나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오. 군국이 설마 지선까지 포섭한 대단한 국가인가 해서!"

그 대답은 지선이 이어서 했다.

"대지모신의 뜻을 받드는 이들이 어찌 나서서 시체를 만들겠소이까. 소인이 그만한 감투를 쓴 것은, 어디까지나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함이외다."

"하하! 그러니까, 싸우지 않는 장군인 셈이로군! 훨씬 대단하구려! 반갑소, 귀인이여!"

호탕하게 웃어젖힌 불사자는 손을 내미는 대신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제안했다.

"지선이여! 이 역시 인연이거늘. 주먹을 맞대도 되겠소?"

주먹을 맞댄다는 건, 서로 주먹 끝을 살짝 맞댄다는 가벼운 게 아니다.

동시에 주먹을 휘둘러 부딪히자는, 서로의 믿음과 힘을 시험하는 야만적인 인사법. 신체에 무리가 가기에 지모신도들도 막상 하라고 하면 꺼리는 해묵은 예식이었다.

마찬가지였는지 지선이 내키지 않는 티를 냈다.

"토인. 대지모와 닮아가려는 이들이여. 이 만남은 대지모신께서 주관하셨으나, 이 땅은 맥이 이어져 있지 않은 터. 소인은 그런 식으로 그대의 기력을 쇠하게 하고 싶지 않소이다."

다만, 지선이 꺼리는 이유는 달랐다.

비록 상대가 불사자라도, 그 몸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자기 힘에 대한 압도적인 자신감과 몸에 밴 오만함을 담아. 지선은 그리 말했다.

"하하! 아쉽군! 힘을 견식할 기회였는데!"

정작 하수 취급을 당한 불사자도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흔쾌히 넘어가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지선은 이제 칼리스를 보았다.

"그리고, 중령이라 하였소이까."

"중령, 칼리스 크리츠. 그렇습니다."

"소인은 군국으로부터 감투를 받았으나, 오늘은 준장으로서 온 것이 아니외다. 어디까지나 지모신의 뜻을 따르는 사도로서 여기 왔으니, 군국의 예를 차릴 필요는 없소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몸에 익은 군대 물은 아직 빠지지 않았는지, 다시 각 잡힌 경례를 하는 칼리스였다. 지선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아직 인사를 나누지 않은 이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

회귀자와 눈이 마주치고는, 부드러운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회귀자 역시, 복잡한 적의를 품은 채로 지선을 마주했다.

둘은, 절대 섞일 수 없는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섰다.

물과 기름, 이라는 표현은 너무 온건하다. 둘은 서로 섞이지만 않을 뿐 누구보다도 평화롭게 떠다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영역에서 마주친 두 맹수.

한 번 부딪혔다간 사생결단을 내야 할 것을 알기에, 서로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연배가 있던 지선이었다. 지선은 정중하게, 하지만 회귀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전해 듣기는 했소이다. 무저갱 안에 아주, 뛰어난 검사가 한 명 있다고."

"나도, 듣기는 했어. 누구보다도 강한 지모신의 대행자가 있다고."

형식적으로 말이 오가고, 점차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맑은 하늘에서도 폭풍의 전조를 느낄 수 있듯,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심상치 않은 공기를 읽고 촉각을 곤두세우려는 때.

"우리가 손님을 너무 세워뒀네요! 지선 님! 일단 들어가시죠! 먼 길 피곤하셨을 텐데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나 나누죠!"

침묵의 장막을 찢고, 지선의 시야로 내가 끼어들었다. 생글거리는 미소에다가 존경에 찬 시선을 보내며 나는 어깨를 비스듬히 틀어 방향을 안내했다.

곧 시선을 거둔 지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외다. 무저갱은 소인에게도 기꺼운 땅이 아니라 배는 피곤한 것 같소이다."

"네? 큰일이네요. 지선 님의 이룬 위업에 대해 여쭈고 싶은 게 많았는데, 피곤하시다면 이걸 어찌 해야 하나…. 쉬게 해드려야 하나."

내 너스레에 지선은 쿡쿡 웃으면서 대답했다.

"금칠을 해주시는구려. 이야기라면 문제없소이다. 요즘은 제 자랑마저도 일하는 것으로 치오이까?"

"이야! 그렇다면야! 얼른 일하시러 가시죠! 미리 경고하는데, 일을 끝마치려면 한참은 걸릴 겁니다!"

"멍? 밥 먹으러 가? 바압!"

"너는 인마. 낄 곳 빠질 곳 좀 구분해! 침투력이 아주 송곳 같네!"

지선은 나의 인도에 따라서 건물로 향했다. 아지는 냉큼 나를 앞질렀고, 티르는 관을 타고 내 곁으로 붙었다. 불사자와 칼리스도 지선을 우러러보며 따라갔다.

"어? 그런데 칼리스. 몸은 다 나은 거요? 멀쩡해 보이는구려!"

흠칫.

"…조금, 무리를 했군요. 준장님께서 오시는 바람에."

"하하! 이만한 귀인이면 무리할 가치가 있지!"

복작거리는 무저갱은 이곳이 감옥인지, 여관인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내가 앞장서서 감옥 건물 안으로 이끄는 동안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회귀자는 따라올 생각도 않은 채로 지선의 뒷모습만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냐아아-."

외로이 선 회귀자의 곁으로 나비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자기 앞발을 할짝거리며 회귀자의 근처에 선 나비는, 꼬리를 부풀린 채로 사람들이 사라진 곳을 흘겨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이내 둘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EP.123 이명에는 이유가 있다

귀인이 있으면 조촐하게나마 잔치를 해야 하기 마련. 길손의 긴장을 풀고 먼 곳에서 온 소식을 반기는 그것은 인간의 오랜 예법이다.

지선을 식당에 모신 나는, 남은 음식을 모조리 꺼냈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모두 식탁에 낸 채로 지선을 맞이했다.

나는 기쁘게 건배를 외쳤다.

"다들 주목해주세요! 무저갱에 귀인이 오셨습니다! 공병대대의 여신, 삽질의 수호자, 리버스 장의사, 곤곤래, 불도자! 이 모든 호칭의 주인이신 지선 님이십니다!"

지선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자기 소개를 할 때는 그다지 마뜩잖은 얼굴이었다. 특히 마지막 두 이명을 들을 때 특히.

'…마지막 둘은 좀 빼주었으면 하지만. 그래도, 이 소개는 이것으로 끝일 터.'

그러나 이 방에는 호기심이 많은 12세기 소녀가 있다. 티르가 순수하게 궁금해하며 말했다.

"이명이 많구나. 그게 다 어떻게 얻은 것이더냐?"

"하하.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외다."

지선은 에둘러 답변을 거절했다. 그러나 지선이 대답하지 않아도 대답할 사람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

"대단하지는 않긴요! 하나같이 다 대단한 일밖에 없는데!"

지선처럼 유명하고 대단한 존재를 그냥 지나가던 길손 1로 취급할 수는 없지.

다른 누군가는 용납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한다. 나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선의 대단함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간단하게 설명해드리죠!"

"아니, 굳이."

"사양하실 필요는 없어요! 티르는 바깥 소식에 어두우니까. 미리 알려주지 않으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삐진단 말이에요!"

'…태고의 존재인 시조를 보고 삐진다고? 이자도 보통은 아니군.'

지선이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귀빈을 맞이하는 사회자처럼 그녀를 소개했다.

"지선께서는 군국에서 주도하여 시행한 국가 토목공사 대부분에 참가하셨습니다. 다만 나라에서 하는 것 중 제대로 되는 게 없죠! 참호 파고 목책 세우는 게 전부였던 당시의 공병대에게, 그만한 대규모 토목공사는 들인 인원만큼의 인원을 생매장하는 대규모 학살극이 될 뻔했지요! 패왕의 재림이 아닐까 걱정할 정도였어요!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게 바로!"

척. 나는 손을 공손히 들어 지선을 가리켰다.

"지선 님이십니다! 지선께서 휘하 대지술사를 이끌고 참가하신 덕에 군국은 길, 댐, 건물을 튼튼하게 지어냈습니다!

그뿐이랴! 몇 배나 튼튼한 콘크리트를 만드는 법, 그것을 다루는 법, 기반을 다지는 법, 수맥을 찾고 흙을 고르는 것까지! 그 모든 것을 알려주는 지선과 대지술사는 공병대대에게 있어서는 대지모신과 다를 바 없었죠! 그렇기에 공병대대의 여신!"

"호오. 지모신의 사도가 목수가 되다니. 흥미롭구나."

티르가 눈을 반짝이며 흥미롭게 듣다 보니, 지선도 더는 내 소개를 마다하지 못했다. 나는 여세를 이어서 설명을 계속했다.

"삽질의 수호자와 리버스 장의사 역시 그에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공병이 삽질을 하다가 땅에 파묻혔습니다. 공사판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몇몇 시민들은 대지모신이 자기 살을 파헤친 것에 분노하였다고 말하며 두려워했죠. 그때! 지선께서 대지술을 발휘하시니! 화산이 폭발하듯, 우물이 솟아나듯! 그의 몸이 땅속 깊숙한 곳에서 딸려 나온 겁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특히 티르의 리액션은 나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오오. 도사들이 비슷한 일을 하는 걸 본 적 있다. 그리하여서?"

"그날 이후, 공병대에서는 더 이상 삽질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삽질의 수호자. 거기에 더불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장의사와는 달리 산 사람을 땅 밖으로 끌어낸다고 하여 뒤집힌 장의사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게 바로 리버스 장의사!"

"훌륭하구나!"

티르가 감탄을 내뱉으며 지선을 다시 보았다. 지선은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제멋대로 부풀어 오른 소문일 뿐이외다."

'…대지모신이여. 이 불쌍한 딸에게 수치를 견딜 힘을 주소서.'

아무리 세간에 이름 높은 지선이라도, 12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티르에 비하면 꼬마. 무저갱과 연배가 비슷한 티르가 흥미를 보이니 차마 내 말을 끊지 못했다.

치트키를 쓴 나는 이어서 설명했다.

"곤곤래(滾坤崍)는, 지선이 힘을 쓰면 대지(坤)가 강물처럼 흘러간다(滾)고 하여 곤곤래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땅이 강물처럼 흘러?"

"그렇습니다. 시멘트라는 게 있거든요! 지선의 노하우로 군국은 양질의 시멘트를 양산해냈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옮기나 고민하는 도중, 또다시 나타난 지선! 대지술의 권능을 활용하여 시멘트를 흘려보냈으니! 그녀가 흘려보내는 시멘트는 일주일간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한때 군국이 운송하는 모든 시멘트보다 지선과 마도장교 한개 소대가 움직이는 양이 더 많았던 적도 있다고 했지.

또 그때 익힌 지식으로, 군국 7대 발명품 중 하나인 메타컨베이어 벨트가 생겨났고.

"그런 게 가능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그것이 가능하기에, 상식을 능가하기에 비로소 지선입니다! 명성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태연히 해내는 이.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추앙했다.

성황청이 등장한 이후 꾸준히 쇠락의 길을 걷던 지모신앙. 명맥만 간신히 남은 옛 신앙이 현시대에 부활하여 꽃필 수 있던 건 다 지선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소개가 끝나는 기색이 보이자, 지선은 내심 안도했다.

어딜. 아직 하나 남았다.

"그러면 불도자(不倒者)는 무엇이오?"

흠칫.

불사자의 질문에 잠깐 반응하는 지선.

나는 씨익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넘어지지 않는 자, 라는 뜻입니다."

"넘어지지 않는다?"

"공병대의 그 누구도, 지선이 넘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곳이 비탈이든, 바위산이든, 혹은 비가 와서 진흙으로 질척이는 땅이든. 지선께서는 언제나 두 다리로 걸었죠."

공사에 참여한 공병대원과 노역자들. 그 누구도 지선이 무릎을 땅에 댄 것을 본 적 없다.

두 발로 걷는 인간이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다른 짐승처럼 네 발로 걸어 다닐 때.

그녀는 언제나 두 발로 섰고, 두 발로 걸었다. 고목과도 같이 양다리를 박아넣은 채로 모든 일을 해냈다.

"심지어 어느 날, 공사하던 중 댐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약해진 균열이 부서지며 그 틈으로 물이 미친 듯이 새어 나왔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댐이 터져서 어마어마한 양의 강물이 하류에 있는 모든 이들을 덮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끔찍한 재난이지요. 그때."

이쯤 되면 모두 이어질 말을 예상했다.

동시에, 자기가 예상한 사실을 반신반의했다.

말로야 가능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내었다 하기에는 너무나도 웅장한 위업.

"그때 등장한 지선이, 두 다리를 굳건히 박아넣은 채 전신으로 둑을 막지 않았다면. 필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티르가 손으로 입을 가렸고, 불사자도 탄성을 토했다.

기대하면서도, 믿기 힘든 일. 인간이 불가능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 일어나는 카타르시스.

나는 모두의 감정을 읽으며, 그게 내가 한 일이라도 된 것처럼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흘러나오는 물을 몸으로 틀어막으며, 자기가 버티는 동안 보수하라 엄명을 내렸죠. 만일 그녀가 넘어진다면, 보수하는 이들도 다 휩쓸려 갈 만큼 위험한 상황!"

그러나, 그 시절 공사에 참여했던 이들은 술자리만 있으면 지긋지긋하게 그 일화를 말했다.

거기 있던 사람 그 누구도, 그녀가 넘어지는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고.

"그러나 공병대와 노역자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려와서 댐을 보수했습니다. 그녀가 댐이 되었던 만 하루 동안, 모두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공사를 완료했지요."

그렇게 외치는 내 눈은, 감동의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 든 채였다.

아아, 영원히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지선의 위업도 말하다 보니 결국 끝내야 할 때가 오는구나. 인간의 역사란 어찌 이리 짧고 아쉽단 말이냐.

나는 저물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대지를 상대로 한 정예부대가 되었습니다. 전설의 공병대대. 넘어지지 않는 부대, 불도자 공병대로."

내 말이 끝난 직후.

감명을 크게 받은 불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연호했다.

"불도자 공병대! 대단히 멋있는 이름이오!"

"그렇죠? 군국에서도 그 뜻을 높이 기려, 새로 만드는 장비에 불도자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하더라고요."

"크으. 사람이라면 이름을 남길 자리를 찾곤 하지. 비록 이명이지만! 지선은 어마어마한 위업을 이루었소!"

그렇게, 전설로 남은 공병대의 이야기를 다시 들은 당사자는.

'20년이 지나도… 떨쳐낼 수 없었군.'

씁쓸하게 술잔을 들이켰다. 누군가 읽었으면 슬퍼할 생각을 하며.

'이럴 줄 알았다면, 한 번은 넘어질 것을 그랬다.'

자기 전설을 부정하고자 하는 불도자, 아니, 지선을 위해 나는 잔을 높이 들었다.

"싸우자! 이기자! 불도자!"

"불도자라, 멋있구나…."

"불도자! 불도자!"

크게 감명받은 티르와 불사자는 연신 연호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아지조차 몸을 들썩이며 '멍! 도자!'를 외치고 있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경의와 응원을 받으며.

'다섯 번은… 넘어졌어야 했나 보다.'

넘어지지 않는 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건 연회는 계속되었다. 불도자라는 이명이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지선은 그녀를 향한 질문에 흔쾌히 대답했다.

공병대를 떠나고 무슨 일을 했는지, 후진 양성에 얼마나 힘을 썼는지. 지모신의 교리는 어떠한지.

영점을 맞추듯, 미묘하게 연관 없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본론에 다가가는 와중.

내가 그 앞장서서 포문을 열었다.

"그런데 지선 님처럼 귀하신 분이 이리 누추한 곳에는 왜 오신 거예요?"

모두가 기다린 소재였다. 티르야 모든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불사자와 칼리스마저도 궁금해 마지않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곳에 끼지 않은 채, 밖에서 그저 듣고만 있는 회귀자에게도.

탁.

본론에 다다르자, 지선은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인은 모든 지모신도들의 비원을 이루려고 왔소이다."

"모든 지모신도들의 비원?"

"그렇소이다. 과거, 대지모신께서 분노하였던 흔적이자, 모든 지모신도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인 무저갱. 패왕의 업에 의해 파묻힌 매장자들의 추악한 일면."

그리 말하며, 지선은 짧게 발을 굴렀다.

쿵.

극도에 이른 곤. 주어진 힘을 온전히 땅으로 내보내는 기공의 극의가 탄탈로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인위적인 지진을 일으킨 진원은, 확고한 의지를 담고 말했다.

"이 땅을 황무지로 만든 대지모신의 지옥, 무저갱. 그것을 없애기 위하여, 소인이 이 자리에 임하였소이다."

"무저갱을 없앤다고요?"

그래. 확실하다.

회귀자가 말했던, 무저갱을 없애기 위해 찾아온다는 사람이 바로 지선.

어째서 이토록 유명한 사람을 보고 역천을 꿈꾸는 땅뱀이니, 성황청의 악몽이니 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탄탈로스에 몇 개월 더 빨리 임한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불도자의 전설을 만든 분께서 말씀하시니, 왠지 이루어질 것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이제 이명은 그만 말해주시겠소이까?"

아차. 너무 건드렸나. 오케이.

EP.124 탄탈로스의 역사

나를 조용히 시킨 지선은 모두를 바라보며 물었다.

"탄탈로스가 어찌 생겼는지 아시오이까?"

앗, 기출문제다. 나는 냉큼 나섰다.

"마침 예습한 내용이네요! 티르, 말해줘요!"

"알다마다. 패왕의 학살 때문이 아니더냐? 생긴 이유는, 그 설이 몇 개로 갈리기는 하지만. 지모신이 분노하였다는 이유가 주된 것일 터."

답해놓고 칭찬을 바라듯 나를 바라보는 티르.

그러나 지선이 고개를 젓는 바람에 칭찬은 나중 일이 되었다.

"아니! 무저갱 말고, 탄탈로스 말이외다."

"탄탈로스? 혹 우리가 딛고 있는 이 건물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소이다."

"…그건 모른다. 모시겠다기에 내버려 두었더니, 눈을 떴더니 이곳이었다."

당연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탄탈로스는 무저갱에 만들어졌긴 했지만, 그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았다. 또 이곳에 있는 이들은 거짓말로도 상식이 풍부하다고 말할 수 없던 탓이다.

이 공간에서 답을 아는 유일한 존재였던 지선이 입을 열었다.

"대지가 무저갱으로 인하여 황량해진 뒤, 지모신께서도 지엄한 신이며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을 안 백성들은 그녀를 두려워하기 시작하였소이다. 더불어 매장자를 사칭하는 이들이 사방에 나다닌 탓에 사람들은 점차 지모신교를 꺼리게 되었지.

교세를 다시 세우기 위해선 지모신의 분노를 잠재우고 무저갱을 되돌려야 했소이다. 하여, 소인은 군국과 교섭을 맺었소이다."

군국이 쿠데타를 성공시킨 뒤.

그들은 죄인을 처벌하는 동시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기획했다.

다만, 군국에겐 그만한 공사를 일으킬 노하우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사라는 이름의 생매장이 자행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만한 인명을 죽일 수는 없었다. 패왕의 예도 있고, 그 자체로 인력자원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충성 대신 효율성을 숭상하는 군국은, 가장 손쉬우면서도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흩어져 지내던 지모신도를 한데 불러모은 것이다.

"군국의 공사에 도움을 준다면, 무저갱을 뒤덮을 '뚜껑'을 만들어주기로 한 게 그 약조이외다."

인구 대다수가 천신과 성녀를 믿는 현재, 지모신교와의 결탁은 민의는 물론 타국에도 반하는 행위였다.

물론 군국은 그딴 사소한 것을 신경 쓰는 나라가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고 박해당했던 지모신도들이 군국을 냅다 따랐을 리는 없다. 충분한 미끼가 없다면 말이다.

"무저갱을 없애는 건 모두의 숙원. 매장자의 업보를 매장하기 위해 전 세계에 흩어진 신도들이 모였소이다. 그들은 소인을 믿고 따랐지."

그리고 지금, 군국이 무엇을 미끼로 지모신도를 불러모았는지. 그 진실이 밝혀졌다.

"그러니까, 원래 탄탈로스는 무저갱을 뚜껑처럼 뒤덮을 예정이었다는 거죠?"

"그렇소이다. 본디 탄탈로스는 무저갱을 뒤덮어 대지모신의 분노를 덮어둘 뚜껑으로 만들어진 것이외다. 끓어오르는 냄비의 뚜껑을 덮듯, 그렇게 가린다면 분노도 잠잠해질 것이라… 우습게도, 소인은 그렇게 여겼소이다."

하긴, 메우기 힘든 구멍이 있으면 위를 덮을 생각부터 하기 마련이지. 누구나 할 법한 평범한 발상이다.

단, 그 구멍이 어마어마하게 커서 감히 시도할 생각을 못했을 뿐이다.

같은 발상도 규모에 따라서 실현 가능성이 달라진다. 무저갱은 너무 크고 깊었으며, 따라서 지금껏 그 누구도 무저갱 위를 뒤엎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만한 규모의 뚜껑을 만들 여력도, 기술도 없었으니.

…눈앞에 지선을 빼고 말이다.

지선은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5년에 걸친 군국의 대공사 동안 우리 모두 뼈가 가루가 되도록 일했고, 형제자매들도 여럿 쓰러졌소이다. 그럼에도 평생의 숙원을 위하여 모두 힘을 합쳤지. 형제, 자매, 아들딸. 모두 단결하여 고된 노동을 이어나갔소이다. 그렇게 약조한 일을 끝낸 뒤 우리는 군국에 요구하였고, 군국은 약조를 지켰소이다."

그렇게 축복을 받은 콘크리트로 무저갱의 지름보다도 더 큰 구조물을 만들어냈다고.

어마어마한 위업을 이룩한 장본인이면서도 지선은 책을 읽듯 무미건조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뚜껑을 완성한 뒤, 육장성 중 일인인 마장(魔將)이 친히 무저갱에 옮겨 그 위를 뒤덮었소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은 아득한 공허. 그것이 당장 뚜껑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자, 평생의 숙원을 이룬 줄 알았던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소이다. 드디어 먼 옛날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고,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만 같았는데…."

같았는데, 거기서 잠깐 목이 메 끝난 말.

그 이후 일어난 일을 나는 알고 있다.

어떤 레지스탕스 기술자에게서 읽어냈거든.

"그 위에 발을 디딘 순간, 땅이 무저갱 아래로 가라앉았군요. 무저갱의 저주는 고작 뚜껑 따위로 가려질 것이 아니라서."

"…누군가에게 들은 모양이구려. 하긴, 그 당시에는 비밀도 아니었으니."

삶에 몇 없던 처참한 실패를 되새기며, 지선은 힘없이 긍정했다.

"…정확하외다. 소인이 첫발을 내디디자, 그만큼 주저앉았지. 그때, 발밑이 꺼지는 듯한 절망감이란."

어려운 부분을 넘겨주자 지선의 입에서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 실망이,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5년간의 노고에도 보상 하나 없었던 게 어찌나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는지. 소인을 믿고 따라와 준 동료에게 할 말이 없었지…."

침잠한 감정, 핍박받던 이들을 이끈 이는 그 실패에 커다란 책임을 느꼈다.

말라비틀어진 목소리는 흙먼지가 가라앉은 듯 낮고 어두웠다.

"모두 크게 실망하여 방방곳곳으로 흩어지고, 소인 홀로 남아 끔찍한 실패를 되뇌고 있었소이다. 그러나, 다음 경치는 가파른 절벽에 이르러서야 보이는 법이니. 한참 무저갱을 바라보던 소인은 깨달았소이다. 우리가 뒤덮은 것은 뚜껑이 아니라 땅이었으며, 그 땅이, 무저갱의 근원에 도달할 열쇠라는 것을."

본래 무저갱 아래로 떨어져, 허수공간 속에서 무한히 낙하해야 할 콘크리트 구조물.

신기하게도 그건 발을 디디지 않으면 가라앉지 않았다. 다른 평범한 물건과는 달리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발을 디디지 못하는 땅은 의미가 없기에 그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실패에 미련을 가진 지선을 제외하고는.

"무저갱의 밑바닥에 도달하기 위해선, 인간이 이 대지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야 했소이다."

무한하기에 무의미한 공간.

그 속에서 의미를 갖추기 위해선 인간이 발을 디디고 역사를 쌓아가야 했다. 나고 자라고 죽으며 그 땅에서 살아갈수록 탄탈로스는 무저갱의 근원에 가까워졌다.

그렇기에 지선에겐 탄탈로스에서 지낼 사람이 필요로 했다.

"소인은,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무저갱의 근원에 닿기 위하여 홀로 무저갱에서 지내려고 하였소이다. 이 땅이 저 아래 도달할 때까지, 혹은 이 육신이 잠들어서 묻힐 때까지 계속."

"하지만 그건 너무 기약 없지 않나요?"

나는 질문을 조금썩 던지며 지선의 대답을 이끌어냈다.

"군국도 그리 말했지. 너무 기약 없는 일이라며, 그토록 귀중한 능력을 낭비하는 대신 군국에서 이곳을 감옥으로 삼겠다고 제안하였소이다. 죽어 마땅한 죄수가 많으니 그들을 가두는 지옥으로 만들겠다고. 그렇다면, 그들의 목숨도 보탬이 되는 셈일 테니."

"아, 그래서 군국이 자꾸 이곳으로 사람을 몰아넣었던 것이군요."

지선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모신의 지옥에 군국의 죄수를 넣다니. 어찌 보면 참… 불경한 짓이나. 소인은 그 제안을 따랐소이다. 순전히 소인의 욕심 때문에, 죄수들을 인간의 감옥이 아닌 지모신의 감옥으로 밀어 넣은 것이외다…."

무저갱은 대지모신이 만들었다. 그곳은 말 그대로의 지옥이 되어 지모신께 불경한 이들을 벌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껏, 사람들은 탄탈로스를 단순한 감옥으로만 여겨왔다. 지옥과 감옥, 마침 어감도 비슷하지 않은가.

여기서 놀라운 사실.

인간이 만든 탄탈로스는, 사실 감옥이 아니었다.

무저갱의 근원에 닿기 위해, 땅이라 속이려고 만든 구조물이 바로 탄탈로스.

신을 향한 인간의 기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탄탈로스를 만든 이가 바로 지선 님인거죠?"

"정확히는, 군국이 이 땅을 이용하기 위하여 설계하였던 것이지. 소인은 군국에게 제안하였을 뿐이외다."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저는 군국이 미친 나라라서 무저갱에다 감옥을 지은 줄."

테크트리가 이상하다 했더니, 약속에 대한 대가였구나. 하긴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감옥을 땅 밑에다 짓지는 않지, 암.

"그 내용은 대외비였으니, 오해하는 것도 무리도 아니외다."

후우. 목이 타는지 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켠 지선이 말했다.

"군국은 이 땅을 끌어올린 뒤 감옥을 만들었고, 소인은 그 값을 치르기 위해 군국에 투신해 일했소이다. 홀로 10여 년 간 크고 작은 공사에 참여했지. 그 뒤에는 무저갱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돌았소이다."

그리고 점차 들뜨는 목소리. 이야기가 점차 지금에 가까워질수록 지선의 얼굴이 밝아졌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나은 이의, 미래가 더 나을 것이라 기대하는 이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인의 귀에 탈옥 소식이 들려왔고, 소인은 탄탈로스를 다시 살필 요량으로 찾아왔소이다. 그리고 확신하였소이다."

숙원 달성을 목전에 둔 지선은, 마른 몸에서도 활화산 같은 열망을 보였다.

"근원에 충분히 닿았다고, 이제는 무저갱을 없앨 수 있다고."

감정을 담은 이야기엔 힘이 있다. 이제 그 누구도 지선의 말을 감히 의심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만한 힘이 있고, 노력을 해왔으며, 방법을 찾았다는 것을 모두 이해했기에.

이제 무저갱이 없어지는 건 기정사실이 되었다.

"잠깐만! 무저갱을 없애면 우리는 어찌 되오? 우리도 같이 사라지는 것 아니오?"

그 점에 대해선 지선이 확언했다.

"아니외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무저갱뿐. 따라서 이 땅은 본래의 모습, 그러니까 무저갱이 생겨나기 전, 패왕이 30만의 인명을 묻으려고 했던 커다란 구덩이로 돌아올 것이외다."

"흠! 그렇다면야! 나쁠 것 없군!"

만족한 불사자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칼리스가 급히 물었다.

"군국은, 준장님의 방문에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반응? 그것은 모르겠소이다. 소인은 이곳에 통보하고 들어왔을 따름이니."

잘 모르겠다는 말에 도리어 칼리스는 안심했다. 지선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통보하고 들어왔다면, 최소한 군국이 대응하기 전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지선의 행동이 돌발적일수록 칼리스의 탈출가능성도 올라가는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그러면 무저갱은 언제 없애실 건가요?"

"소인의 기력 문제도 있고, 이 땅도 조금 살펴보아야 하니. 모레 결행하고자 하외다."

내일모레면 이 지긋지긋한 무저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선언.

그 이야기를 듣자, 나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샘솟았다.

살면서 이 빌어먹을 세상이 마음에 든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나, 올라가서 햇빛을 쐴 생각을 하니 갑자기 지상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귓가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 게으른 몸을 질책하는 햇빛, 저 멀리 보이는 풍경까지.

스스로 풍광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한평생 함께한 그것들이 사실 간절했던 걸까.

"와아아! 탈출이다!"

나는 들뜬 기분을 여실히 드러냈다.

"어차피 밖에 나갈 거! 이제 다 의미 없다! 지선 님! 여기 있는 거 다 드세요!"

지선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리 주셔도, 소인은 작은 사람인지라 안에 품을 자리에 한계가 있소이다. 소인은 배가 부르오니, 나머지는 천천히 드시도록 하는 게 어떤가 하외다."

"어허! 내일모레 이곳을 탈출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남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죠! 내일 먹을 음식은 내일 새로 하기로 하고! 오늘 남은 음식은 탄탈로스 공식 짬통에 버리겠습니다!"

'지모신의 신도 앞에서, 대지의 과실을 버린다니…? 그게 무례인지 모르는 건가.'

지선이 살짝 인상을 찌푸릴 때 내가 탄탈로스 공식 짬통을 불렀다.

예로부터 먹다 남은 밥은 개의 차지였으니, 정승 댁 개는 때깔도 고왔지.

"아지야!"

"멍? 나?"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온 아지.

나는 식탁 빈 곳에 고기가 가득 든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올인을 외치는 도박사처럼 호쾌하게 밀어젖히며 말했다.

"그래! 오늘 이거 다 먹어!"

"멍! 무슨 일이람!"

아지는 즉각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처박고는 찹찹거렸다. 갓 조리된 담백한 고기 맛을 본 아지는 기쁘게 외쳤다.

"내일! 멍! 해가 서쪽에서 떠!"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이 음식은 해가 아니라 이분께서 주시는 거야! 고맙게 여기도록!"

"멍도자! 고마워!"

"…많이 드시길. 개의 왕이여."

지선은 차마 개를 나무라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EP.125 경사났네 경사났어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어지는 기쁜 일을 경사라고 부른다.

경사가 나면 사람들은 만인에게 자랑하고자 하며, 서로 축하하고 기쁨을 나누면서 더욱 우정을 돈독히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선께서 찾아오셨다는 경사를 축하받기 위해 창고로 향했다. 가는 도중 왠지 벽에 기댄 채 생각에 잠긴 회귀자와 인사한 뒤, 창고에 들어가 뚜껑이 닫힌 상자 앞에 섰다.

이 상자 안에는 어떤 불우한 존재가 갇혀있다. 나는 뚜껑을 열고 그 존재를….

"냣?"

야생의 나비가 나타났다. 비좁은 상자에 비집고 들어간 나비와 눈이 마주쳤다.

"네가 왜 거기 있냐?"

"너야말로 왜 냐의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냐?"

뭘 봐, 하는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는 나비. 나는 나비를 향해 손짓했다.

"네 엉덩이 아래 깔린 거 좀 꺼내게."

"냐?"

그러자 나비는 이 작은 상자 안에서도 용케 몸을 움직였다. 움찔움찔, 머리가 아래로 들어가고 꼬리가 위로 솟구치더니, 태아가 뱃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한 바퀴 구르고는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나비의 입에는, 철사로 묶인 채 움찔거리고 있는 골렘이 물려있었다.

"냐아. 가져가라냐. 이런 깡통 장난감, 냐는 필요 없다냐…."

문 채로 그리 말하니 골렘의 몸이 위아래로 덜컥덜컥 흔들렸다. 나는 나비의 턱을 간질여주고는 골렘을 꺼냈다.

나비는 살짝 치켜 올라간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냐아. 그 커다란 암컷, 위험한 냄새가 난다냐."

"네 몸에서 나는 마력초 냄새보다는 낫지 않을까."

"공물은 신성한 거다냐!"

내가 본 어떤 골초도 담배 보고 신성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중독된 거냐.

나비가 상자 안에서 투덜거렸다.

"그에 비해, 그건 뭔가 위험하다냐. 멍청한 멍멍이들은 이상함도 못 느끼고 꼬리를 흔들지만, 냐는 안다냐…. 냐는 속일 수 없다냐…."

지금까지 약에 조련되고 고양이 수인에게 속아서 휘둘린 녀석이 말은 잘한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네가 못 이기는 상대면 위험할 만하지. 그런 의미에서 여기 있는 사람 태반이 너한테 위험하지 않냐?"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 찌르자 나비가 하악질을 해댔다.

"냐학! 냐가 이 안에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거라냐! 아니었으면 당장 혼내줬을 거다냐…."

뚜껑을 닫자 소리가 잦아들었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좁아지자 만족스럽게 고롱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좁은 곳을 좋아하는 동물이라니, 참 신기한 생명체다. 어떤 골렘은 묶어두면 앓는 소리를 내는데 말이야.

나는 나비를 그대로 놔둔 채 골렘 조립을 시작했다.

먼저 스피커를 입에 다시 붙이고, 팔과 다리에 묶인 철사를 풀고, 눈을 가린 안대를 벗겨주었다. 그러자.

『…푸하!』

골렘이 부활했다.

오랜만에 감각을 되찾은 골렘은 웬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골렘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대충 무슨 일이 있는지 아시죠?"

『….』

"낄낄낄. 아시는구나. 지선께서 여기 오셨거든요?"

지상을 감시하고 있으면서 모를 리 없지.

그리고 지선이 왜 왔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통신병, 탄탈로스 관리자라 그런지 묘하게 아는 게 많은 것 같거든.

이 상황을 지켜보는 일밖에 할 게 없던 통신병을 향해, 나는 탄탈로스에 난 경사를 자랑했다.

"하하하. 이거 어쩌죠? 아무래도 우리, 곧 밖으로 나갈 것 같아요!"

『…으극.』

"심지어 이거 준장님이 직접 빼내 주시는 거네요! 키야. 이러면 합법 아니야?"

『부정! 천부당만부당합니다! 귀하와 같은 노역자는 반드시 군법에 의거한 형벌을 받아야 하며, 노역을 끝마치기 전에 근무지를 무단으로 이탈하는 것은 중죄입니다!』

"하지만 준장님이 무저갱을 없애주신다는데 어떻게 하실 거죠? 일개… 대위 주제에?"

『…으윽!』

"내려와서 막던가?"

『할 수만 있었다면!』

거 참 신기하단 말이지. 분명 골렘일 텐데 목소리 바리에이션이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 많다. 지금은 또 입술을 짓씹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단 말이야.

『그럴 일은 결단코 없지만! 설사 군 당국이 귀하를 석방한다고 하더라도! 본관은 귀하의 잔혹무도한 행위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잔혹무도한 짓을 얼마나 했다고. 골렘 가지고 논 거랑 대답 강요밖에 없었잖아.

그래도 이 골렘, 생각을 읽지 못하는 것치고 알기 쉬우니까.

내가 은근히 물었다.

"저, 관리자님. 혹시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보고 싶어요?"

그러자 골렘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원망을 쏟아부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이 대꾸했다.

『…가, 능하다면?』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학습이 인간만의 전유물은 아니나, 인간의 학습은 조금 빠르고 선험적인 부분이 있다.

지금껏 나에게 학습된 골렘은, 조금 주저했으나 그래도 이전보다는 빠르게 결정했다.

『…가,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요, 오빠?』

"네? 누가 당신 오빠입니까? 저란 사람이 오빠라는 말을 들으면 다 해주는 호구처럼 보여요?"

순간적으로 골렘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그 직후 처량하게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인간의 학습은 조금 빠르고 선험적인 부분이 있어서, 원래 있던 보상회로가 망가졌을 때도 그 사실을 빠르게 피드백한다.

이대로 부탁을 안 들어주고 다시 창고에 처박아도 재밌겠지만, 벌써 망가뜨리기는 아쉽지.

"맞아요! 저는 호구입니다! 자, 가시죠!"

골렘이 뭐라 하기 전, 나는 골렘을 안아들고 걸어갔다.

마당에는 음식과 물자가 상자에 차곡차곡 쌓여 정리되어 있었다. 식량 대부분은 통조림으로 저장했다. 군국의 통조림은 연금술만 쓸 줄 알면 재활용이 가능하기에, 우리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내가 좀 고생했지. 여기서 연금술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상자 안에서 통조림을 하나 꺼내 뜯었다. 그 안에는 꾹꾹 눌러담은 신선미 쌀밥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골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자. 이거 보세요. 우리는 짐을 챙기고 있어요. 이곳에서 탈옥했을 때, 우리를 먹여 살릴 것들이죠."

『…큿!』

눈으로 보니까 실감이 나는 모양이다. 나는 신음을 흘리는 골렘을 안고 걸어가며 우리에게 있었던 경사를 자랑했다.

"이게 다 누구 덕분일까요? 바로, 여기 오신 지선 님 덕분에!"

척. 나는 마당 한복판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지선을 가리켰다. 이 땅의 맥을 느끼고 있던 지선은 나와 골렘의 발걸음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아. 군국의 전령이오이까. 오랜만에 마주하는구려…. 그런데 소인이 그대를 무어라 불러야겠습니까?"

"휴즈라고 불러주세요! 아직 이름을 부를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야, 너, 인마, 이렇게 부르셔도 괜찮아요!"

"길손이 어찌 함부로 그러겠소이까. 실례를 무릅쓰고 그대를 이름으로 부르겠소이다."

"감사합니다! 아자, 지선 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어!"

지선에게 직접 이름을 불리다니. 인생업적이다. 도시에 있는 늙은 공병대원들한테 자랑하면 부러워 죽으려고 하겠지.

어쨌건. 나는 옆구리에 매단 골렘을 안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골렘은 황송한 듯이 다급히 경례했다.

『충성. 군국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본관은 탄탈로스를 감시 및 관리하고 있으며, 먼저 준장님의 복귀를 환영하는 바입니다!』

"고맙소이다. 다만, 소인은 복귀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무저갱을 없애러 왔을 따름이니."

『그에 관해 보고할 내용이 있습니다! 준장님, 무저갱을 없애는 것에 조금만 유예를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골렘이 제안하자 지선이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것은 군국의 의지오이까?"

『긍정. 군 당국은 무저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환경평가를 아직 치르지 않았습니다. 무저갱이 소멸할 수 있을지 확신도 없을뿐더러….』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소인이 몇 번이고 확인하였으니."

『…그에 더해 이로 인해 격변할 국제정세나, 교육생의 탈옥으로 인한 산발적인 문제나….』

"그 역시, 군국이 걱정할 문제는 아니외다. 무저갱이 사라지고 땅에 정기가 돌아오는 거야 지모신의 뜻이니 인간이 그에 맞추어야 할 것이며, 소인이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 안에 있는 이들은 무저갱에 있어선 안 될 정도로 선량하였소이다."

혹시 우리가 사악한 면모를 보였다면 한 방에 지모신 곁으로 보낼 생각이었나? 후우, 다행이다. 나 뭐 잘못한 건 없겠지?

"더불어, 군국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으니. 진정으로 악한 이들은 이미 탈옥하지 않았소이까? 소인을 책하기 전 스스로 되돌아봐야 할 것이외다."

『그렇다면, 최소한.』

연이은 책망에도 골렘은 꿋꿋하게 설득을 이어나갔다.

『…준장님을 따르던 신도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저갱이 없어지는 순간을 그들도 목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잠깐, 지선의 얼굴에 실금이 그어졌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지선은 깊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오이까?"

지선이 묻자, 그녀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착각한 골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1년,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당길 수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준장님께서는 군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신도들에게 연락하십시오. 군국 홍보부에서 준장님을 돕겠습니다.』

제 딴에는 아주 중요한 제안이라 생각하겠지만, 애석하게도 틀렸다.

지선은 별로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더 기다리게 하오이까. 그들을 가시밭길로 내몬 것이 소인이거늘. 그 처참한 실패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또다시 커다란 희망을 불어넣었다가,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지선의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맴돌았다.

"소인은 먼저 행동으로 나설 것이외다. 무저갱을 없앤 뒤, 그들에게는 지모신의 분노가 가라앉았다는 소식만 전할 것이외다. 그대들의 바람을, 너무 늦게 들어주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준장님.』

"이미 결심했소이다. 군국이 이후 무엇을 하더라도 상관없으니, 소인은 맡은 일에 임하겠소이다."

지선의 말은 굴러오는 바윗덩어리처럼 멈출 수도, 틀 수도 없어 보였다. 그 점을 깨달은 골렘은 가만히 지선을 보다가, 다시금 손을 올려 경례했다.

『…준장님께 무운이 깃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내가 군국 명령을 어기면 죽일 것처럼 굴더니, 지선에게는 무운이 깃들라네. 이거 사람 차별 아니야?

생각해보니 지선 정도면 차별대우를 받아도 되지. 인정.

더 말을 걸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골렘을 안아 들고는 감옥 안으로 향했다. 그동안 골렘은 힘없이 내 옆구리에 늘어져 있었다.

나는 골렘에게 말했다.

"어쨌건, 이제 아셨죠?"

『…무엇을 말입니까?』

"저는 근무지를 이탈한 게 아니라 근무지가 없어진 거예요. 그건 낙하와 점프만큼이나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요. 즉, 나는 이번 일에 관해서는 혐의 없음. 아시겠어요?"

『그리 말해보았자, 귀하가 낙성을 일으킨 공모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인 거 아니라니까.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장성을 해쳐요? 털끝 하나 건드리지도 못할 텐데."

『군국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귀하가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면 탄탈로스를 벗어난 이후 자수하여 수사에 응하십시오.』

"퍽이나 그러겠네요."

『…동감입니다.』

골렘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비록 회색 별이라지만, 준장님의 이름은 군국 전역에 드높습니다. 특히 군국에는 장성 장병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존경하는 분이 많지요. 그러니 경고하건대, 만에 하나라도 준장님을 다치게 해선 안 됩니다.』

"뭔 소리야. 우리가 왜 지선을 다치게 해요?"

『…혹시나 강조한 것입니다. 지금껏 이곳에 떨어진 이들은… 전부 안 좋은 결과를 맞이하였으니까요.』

"어이가 없네. 그럴 의지가 없는 건 둘째 치고, 그럴 능력도 없어요!"

딱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지.

그나저나, 이야기를 듣고 기억을 읽어봐도 지선은 회귀자의 기억으로 남을 만한 일을 저지를 위인이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둘 중 하나다.

회귀자가 사실 자기를 회귀자라고 믿는 정신병자라던가.

저 무저갱 밑바닥에 지선을 뿌리부터 뒤바꿀 엄청난 것이 숨어있던가.

지금이라도 첫 번째 가설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나, 내가 고민할 무렵이었다.

EP.126 미래 계획을 세워봤자

한참 고민하면서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옆구리에 끼인 채 매달려 가던 골렘이 기체의 손상이며 시야의 확보며 무언가 볼멘소리를 할 무렵.

마침 저편에서 커다란 관이 보이자 골렘이 말을 멈추었다. 동시에 관에 타고 있던 티르가 나를 발견하고는 냉큼 다가왔다. 티르의 권능으로 조종되는 관은 민첩하게 움직이다가 내 앞에서 매끄럽게 멈춰섰다.

티르가 관 위에서 뛰어내리며 말을 걸었다.

"휴! 채비는 다 하였느냐? 언제 나갈지 모르니, 어서 필요한 물건을 챙겨야 하렷다."

"공수래 공수거. 올 때도 맨몸으로 왔는데 갈 때 더 챙길 게 뭐가 있나요. 저는 식량만 조금 챙겼을 뿐이에요."

거짓말이다.

어제 요리하면서 회귀자의 향신료를 슬쩍했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는 것들이다. 팔면 돈깨나 나올 것이다.

거기에 식량과 식수는 물론, 의복패킷마저도 챙겼으니. 가방과 함께하는 나는 그야말로 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밖에 나가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느냐?"

현금화! 현물을 금으로 바꾸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강의 연금술!

이라고 할 수는 없어서 에둘러서 대답했다.

"글쎄요? 일단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이 골렘이 자꾸 저보고 범죄자라고 윽박질러서 예정에 없네요.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데요."

죽은 듯이 있던 골렘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티르는 별로 신경을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갈 곳이 없어? 옳아. 어디 매이지 않았다면, 나와 함께하기 쉬울 터.'

아니,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티르는 기쁨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도록 살짝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하구나…."

그러면서도 힐끔 내 표정을 살폈다.

'피차 갈 곳이 없는 건 매한가지니, 같이 다녀도 아무런 문제는 없겠구나. 헌데….'

"흠흠. 나 역시, 당분간은 정처 없이 세상을 견식할 예정이란다."

"에고야, 고생하시겠네요."

'…같이 다니기 위해서는, 무어라 권해야 좋을까? 어렵구나.'

티르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꾸만 다른 생각에 접어들었다.

"무엇이 힘들겠느냐. 먹을 것도, 마실 것도 필요치 아니하거늘."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잖아요. 사기당하거나 돈을 뜯기거나 하는 거 아니에요?"

'네가 알려주면 문제없을 터인데. 너는 사기를 쳤으면 쳤지, 당할 위인이 아니잖느냐.'

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내가 눈치채주기를 바라며, 티르는 자꾸만 주제를 맴돌았다.

"나에게 수작을 부릴 만큼 간 큰 이가 과연 있을까 싶구나."

"누가 사기를 그렇게 쳐요? 여관을 잡을 때 주인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1만 알케를 요구하면 어쩌려고요. 알케가 뭔지는 아세요?"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네가 가르쳐주면 되지 않느냐. 네 이야기는 나를 즐겁게 만드니, 나는 네가 설명해주는 걸 듣고 싶다.'

"기껏해야 한두 번 아니겠느냐. 처음 여행할 때는 그리 속아가며 배우기 마련이다. 그러다 좋은 동행을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세상을 알아가는 게 여행이잖느냐."

"그거 아세요? 좋은 동행이 가장 위험한 사기꾼인 거. 바가지 씌우는 상인은 돈이나 뜯지만, 동행을 자처하는 이들은 인생을 뜯어내려고 한다고요."

'네가 사기꾼이어도 괜찮다.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든, 전부 내어줄 용의가 있으니까.'

"사람과 함께하는 게 인생이거늘, 어떻게 인생을 뜯어낸다는 말이냐?"

"나쁜 동행은 사람을 꼬드겨서 다른 곳에 팔아넘기려고 하고요. 좋은 동행은 사람을 꼬드겨서 꿈을 좇게 하거든요. 그렇게 꼬드겨진 사람은 방랑자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되죠. 둘 다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에요."

'그렇다면, 너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좋은 동행이겠구나. 나의 꿈을 이루어줬으니까.'

"하는 행동은 낙천적인 주제에 바라보는 시선은 새삼 비관적이구나."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하늘을 나는 새는 땅을 내려다보고 땅에 붙박인 나무는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보니까요. 세상이 요지경이니 저라도 낙천적이어야죠."

'온갖 일에 능숙한 너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알량한 힘뿐.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너를 지키는 것밖에 없겠지만.'

"…휴."

"네?"

'유쾌한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세상에 해박한 너는 새로이 생겨난 것들을 설명해주거라. 그러면 나는, 밤하늘에 뜬 별을 헤아리며 지금은 잊힌 옛 일화를 말해주마. 서로 하염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닥불이 다 타들어 희미한 연기를 뿜을 때면 꾸벅꾸벅 잠들고.'

"햇빛을 싫어하는 나는 동이 트기 전에 그늘로 숨어들 것이다. 그러면 아침 해가 떠오른 뒤 너는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양산을 들추고 그늘 속에 웅크린 나를 찾아다오. 가끔은 다른 이와 도란거리고, 가끔은 짓궂게 나를 놀리고. 그러면서도, 이전과 다름없는 하루가… 계속된다면."

중간부터 생각이 말로 튀어나오고 있다. 그러나 티르는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혹은 그러기를 바라는 것처럼 아련히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의 삶과 그다지 다를 게 없구나. 처음 네가 나를 깨우러 온 순간부터, 나가기 전인 지금까지…. 하나같이 즐거웠다."

'어쩌면, 나는 아직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티르는 여기 생활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가끔 떨어지는 표류물이 말썽을 부리기는 하지만, 그것을 빼고 본다면 이 무저갱만큼 안락하고 조용한 공간을 찾기 힘들 것이다. 하루하루를 견디며 다음 날 살아남기 위해 오늘을 노력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이 무저갱은 천국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영원히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 모든 일에 끝이 있듯,

만일 밖으로 나간다면.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티르에게 물었다.

"티르. 혹시 저 지켜줄 수 있겠어요?"

티르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흠칫 고개를 들고는 대답했다.

"물론이다."

"어떤 위험이 와도?"

"무엇이 두렵겠느냐."

"만일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의 존재가 저를 노리면요?"

"그러면, 내 목숨이 다해서라도 그를 막겠다."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죽는 건 그리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을 잃는 게 더욱… 끔찍하였지."

한 번 죽어본 경력이 있는 사람의 말은 무게가 달랐다. 이래서 사람들이 경력직을 찾는 것인가.

어쨌건 마음은 참 고마워서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고마워요, 티르. 든든하네요."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듣는 모양이구나. 지모신의 사도를 대할 때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여도 믿을 것처럼 굴더니.'

내 가벼운 태도가 불만이었는지, 티르는 볼을 부풀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는 그 지모신의 도사를 대단히 떠받드는 모양이나."

무시무시한 기세로 나에게로 다가온 티르는, 그 발걸음에 비해 소심하게 옷소매를 꾹꾹 당기며 말했다.

"기억하거라. 나는 그 도사보다도 훨씬 유명하며, 견주기 힘들 정도로 오래되었음을."

그야 그렇지. 아무렴 지선이라도 하더라도, 흡혈귀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홀로 성황청을 견제해낸 티르만 하겠나.

뭐, 그와는 별개로.

"오래된 건 그다지 자랑은 아니지 않나 싶네요."

"정말, 한 마디 지는 일이 없구나!"

"그만큼 편하다는 뜻이죠. 제가 지선 님에게는 이런 소리 못하잖아요. 티르처럼 애칭으로 부르지도 않고."

"...!"

티르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잠시였다.

한껏 들뜬 티르는 이내 놓고 온 물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내 채비가 아직 부족한 듯싶구나. 잠시 있거라. 짐을 더 챙기도록 하겠다."

'나 홀로 떠난다면 음식도, 잘 곳도 필요치 않으나. 온전히 살아있는 휴는 먹을 것이 많이 필요하겠지. 잘 곳은… 흠, 정 안 되면 나의 관에서, 같이 자면 되니….'

거기까지 생각한 티르는 갑작스럽게 얼굴을 붉히더니, 머리가 다 흩날리도록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 내가 무슨 망측한 생각을! 휴를 관에서 재우고, 나는 밤을 지새우면 되지 않느냐!'

잠깐. 그러면 내가 꼭 어르신을 침대에서 몰아낸 것 같잖아.

그보다 왜 여관을 잡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노숙은 힘들고 위험하다고.

티르는 관 안에 짐을 하나라도 더 챙겨넣기 위해 자리를 떴다. 티르가 충분히 멀어지고 난 뒤, 내 옆구리에서 죽은 척 늘어져있던 골렘이 고개를 들었다.

『…귀하는 도박으로 체포된 것 아니었습니까?』

생각해 보니 깨어 있었지? 생각이 읽히지 않아서 그런가, 다른 사람이랑 함께 있으면 깜빡깜빡한단 말이야.

그나저나 내 죄목은 왜? 나를 잡아온 주제에 날 놀리나?

"제 죄목은 에이비 대위가 더 잘 알지 않아요? 아시는 대로에요."

『혹시 본직은 호스트였습니까?』

"참나. 군국에 호스트바가 얼마나 있다고."

호스트바는 대타로밖에 안 뛰어봤다. 별로 인기 있지는 않았지. 거기는 외모로 모든 것을 다 해먹는 비정한 동네라서.

"자자. 이제 바깥나들이는 충분히 했죠?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군국이 무저갱과 그 안의 죄수를 이용할 계획이라는 건 대충 알았다. 뭘 할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높은 확률로 전쟁이겠지. 나라 이름부터 군국이잖아.

만일 그렇다면, 전쟁까지 남은 시간은 대강 1년 남짓인가? 대충 회귀자가 예상한 시기인가 보네.

뭔 일이 나겠구나.

"후. 빨리 나라를 뜨든가 해야지. 해안선을 따라서 쭉 올라갈까? 저 멀리 연방까지 도망가면."

『…조금 전, 범죄자의 출국계획을 들은 것 같습니다만.』

아아, 맞다. 아직 골렘 있었지. 진짜로 가만히 있으면 깜빡깜빡한다니깐.

"오해예요, 오해…."

내가 뱉은 말을 주워담는 도중이었다.

"…이봐. 잠깐만."

어둠속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회귀자였다.

지선이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회귀자는 이제야 결심을 끝마친 것으로 보였다. 긴 속눈썹 사이로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할 말이 있어. 잠시."

지금껏 누군가의 앞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존재한다는 사실만 힐끗힐끗 드러내던 그녀가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나서는.

내 겨드랑이에 낀 골렘과 그걸 소중히 껴안은 나를 보고는 김이 샜는지 인상을 썼다.

"그나저나 그 골렘은 애착인형이라도 돼? 왜 자꾸 들고 다니는 거야?"

응, 이라고 대답하려는데 골렘이 먼저 말을 끊었다.

『애착인형이라니? 본관은 귀하의 폭언에 반박을….』

그러나 세상에서 군국에 대한 인내심이 가장 부족한 회귀자였다. 회귀자는 골렘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를 쏘아보냈다.

"됐고. 골렘. 연결 끊을래, 아니면 끊어줄까?"

『…끊겠습니다.』

"그럼 가. 지금 당장."

추욱.

골렘이 힘있게 늘어졌다. 뻣뻣한 팔다리가 흔들거렸다. 슬쩍 보니, 눈 부분에 해당하는 수정구가 데굴데굴 움직였다.

EP.127 계획은 깨지라고 있는 것

생각을 읽지 못하는 내가 보더라도, 싱크로를 끊은 척 연기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 민감한 회귀자에겐 어떨까.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회귀자가 천앵을 손으로 쥐었다.

"알았어. 정 못 끊겠다면 내가 끊어줄게."

『…!』

툭.

이번엔 진짜로 연결을 끊은 애착인형이 힘없이 늘어졌다. 짧은 팔다리가 중력에 따라 덜렁거렸다.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애착인형을 붙잡고 오열했다.

"안돼애애애앳! 내 애착인형이이이이이이!"

"자기 인형 이름을 애착인형이라 짓는 사람이 어디 있어? 호들갑 떨지 말고."

하지만, 앞으로 있을 진지한 이야기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풀어야 하는걸!

내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귀자는 무게를 잡았다.

"부탁이 있어."

"내일은 해가 반대쪽에서 뜨려나. 셰이 씨가 진지하게 부탁을 해오다니. 뭔데요? 들어나 봅시다."

나는 이미 상대의 생각을 다 읽었고, 어떤 말을 할지, 왜 하는지도 다 아는데.

이 눈앞의 상대는 그 말을 전하기 위해, 평생에 없는 말주변을 쥐어짜며 나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의미가 없냐고? 아니, 의미가 있어서 문제다.

이러면 나는 회귀자의 바람에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잖아. 거절하기 힘들다고.

"이번에, 지선의 인도 아래 모두 무저갱의 근원에 도달하게 되면."

회귀자는 불과 몇 시간 전 지선이 받은 환대를 기억했다. 이곳의 대부분이 지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 하루종일 설명할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저번 회차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지금의 회귀자는 아무런 연고도 전적도 없는 뜨내기일 뿐이었다.

'상대는 명망 높으면서 모두에게 인자하기로 소문 난 지선이야. 훗날 재앙으로 기억되는 그녀라면 몰라도,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나보다 훨씬 유명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겠지.'

회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얼마나 대단하고 위험한 사람인지.

재앙의 전조를 알리는 역천의 땅뱀, 지선의 강력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땅의 검, 지잔의 원주인이자. 성검대와 성녀에게 패배하여 목숨을 잃은 비극의 주인공. 동시에 성황청 몰락의 시발점이 된 성황청의 악몽.

땅의 검에 더해진 그녀의 대지술은 땅을 가르고 산을 기울게 하는 힘을 지녔다. 군대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회귀 초반이라 준비 기간이 짧았던 것을 고려하더라도, 아직 단 한 번도 1:1로 승리를 거둔 적 없다.

그러나 지금, 그 불가능에 도전해야 했다.

"아마도, 나는 지선과 싸우게 될 거야. 그러니까."

두렵기도 했으나,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어쨌건 이번 회차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선 회귀자는 그녀를 쓰러뜨려야 했다.

그래야 지선의 계획과 증오를 알아내고, 정보를 얻은 뒤. 어떻게 대응할지 정할 수 있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결과뿐이다. 수련하겠답시고, 자존심을 채우겠답시고 뻗댈 필요 없다.

회귀자에게 필요한 건, 지선을 상대로 한 승리. 그뿐.

하지만.

"도와…."

달라고 말하기 전, 회귀자는 말을 삼키고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 편을 들까. 아마도, 나는 아닐 거야. 버리는 회차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곳에서 그 누구의 마음도 얻지 못했으니까.'

회귀자는 지금껏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있었다.

흡혈귀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시조를 암살하는 대신 설득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성공했다. 그 시기, 다가오는 위협에 맞서기 위해 단결해야 했으며, 회귀자는 상처받은 시조와 공감대를 나눌 힘과 자격을 갖추었다.

레지스탕스와 협력한 적 있었다. 성공했다. 군국의 약점을 기묘하게 찔러 들어가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날뛴 덕분에 군국을 무너뜨렸다.

비록 그들이 나라를 만족스럽게 운영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니, 도리어 더 끔찍하였으나… 어찌하였든, 그때 회귀자는 정치적으로 가장 든든한 배경을 얻었다.

그러나 회귀하면 그 모든 게 끝이다.

실패만 끝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이루어낸 작은 성공마저도 종언을 고한다. 하수구로 물이 빨려 들어가듯, 아름답게 가꾸었던 작은 왕국마저도 사라진다.

아무리 열심히 쌓았던, 얼마나 공을 들였던.

정이 얼마나 들었던.

'지금 부탁할 수 있는 건, 모두의 한복판에 있는 이 남자밖에 없어. 하지만, 과연 그가 나를 도울까?'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성공은, 드는 노력에 비해 잃을 것이 너무 컸다. 심지어 만나는 시점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었다.

그게 가장 두드러진 경우가 이번 회귀였다.

상처 입지 않은 티르는 회귀자에게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짐승의 왕은, 예전 회귀자가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자연히 회귀자의 관심사는 관계보단 힘과 무기로 향했다.

도구는 손에 쥐면 배신하지는 않으니까.

도구는 정이 들어도 금방 떼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관계를 등한시한 대가일까.

'돕진 않더라도, 최소한 나를 부정하지는 말아주었으면.'

그게 실패를 걱정해서인지, 아니면 상처받기 싫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내가 그녀와 싸울 때, 아무도 끼어들지 못하게 해줘."

회귀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의지를 담아 나에게 부탁했다.

나는 바람을 읽는다. 간절하고 절박한 부탁일수록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일종의 직업병이 있다. 아니, 능력의 부작용이라 해야 하나.

하지만 바람이 언제나 한쪽으로 부는 건 아니다. 가끔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바람이 불며, 둘은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아웅다웅하며 다투곤 한다.

누군가를 무찔러 달라는 바람은, 필연적으로 마파람에 스러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끼어들지 말라는 부탁이라면.

"네? 저희가 왜 끼어들어요?"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나는 회귀자의 부탁에 응했다.

"왜 싸우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알아서 잘 해결 보세요. 이왕이면 좋게좋게 넘어가시고요."

"…안 말려?"

"성인끼리 싸우는 데 뭘 말려. 아, 혹시 미성년자세요? 왠지 좀 작더라."

"그, 그럴 리 없잖아! 성인이 된 지는 한참 지났다구!"

'그, 지금 내 나이가 열아홉 맞지? 회귀 시작하고 천앵이랑 물건 몇 개만 챙긴 뒤 곧바로 무저갱으로 뛰었으니까…!'

사실, 미성년자여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러면 더욱 문제 없네.

오히려 문제는 따로 있다. 물건 몇 개를 챙겼는데 그만한 보물이 튀어나오나? 도대체 다 챙기면 얼마나 많다는 거야.

어쨌든.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둘 다 성인이면 뭐, 말 다 했지. 심지어 둘 다 엄청나게 강하잖아요? 그렇다면야 사이에 껴서 새우등 터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끼어드는 게 바보 아닐까요?"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지선 님, 좋으신 분이니까 살살 하세요. 저분도 셰이 씨를 죽이려고 들지 않을 테니… 뭐야? 사실 대련이잖아? 대련이라면 지금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아, 아니. 싸움 자체는 진지한 거니까…."

"그래요? 뭐, 사정이 있나 보지."

애초에 끼어들 생각 없던 나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부탁이라면 편하지. 나는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생각일 거예요. 티르도 남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타입 아니고, 아지야 인간끼리 싸우면 틀어박혀 있을 거고. 라쉬 씨는 칼리스 지키려고 여념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가?"

"아, 설마 나비가 끼어들기 바라는 건 아니죠? 그러면 당신 진짜 나쁜 사람이야. 누가 싸울 걸 바라고 고양이를 키워!"

"안 바라! 그리고 나비는 내가 키우는 게 아니야! 잠깐 보살피는 거지!"

어찌 되었건 결론은 났다. 회귀자는 한결 안도한 기색으로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 그거면 충분해."

"그나저나, 조금 불쾌하네요."

"또 뭐가."

"아무렴 우리도 지난 세월 동안의 인연이 있지. 설마 둘이 갑자기 치고 받고 싸우는데 느닷없이 지선 님의 편을 들겠어요? 달려들어서 '감히 명망 높은 지선 님을 습격하다니! 죽어랏!' 이러면서 다짜고짜 공격하겠어요?"

회귀자는 어물쩍거리다가 대꾸했다.

"…아니야?"

너, 해본 적 있구나. 느닷없이 끼어들어서 '감히 내가 아는 사람을 공격해!' 이러면서 싸움을 건 적 있구나.

당한 사람은 진짜 억울하겠다. 이래서 회귀자란.

"당연히 아니죠. 아무리 당신이 오른팔만 보면 눈이 돌아가서 자르려고 드는 꼴을 보였다고 한들, 분위기를 못 읽고 계속 겉돌기만 하던 외톨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들."

"…욕이지, 그거?"

"그래도 어리숙한 면은 있을지언정, 나름 문제가 생겼을 때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서 해결하려고 했다는 걸 아니까요. 다른 사람에게 아예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할 일이죠."

"욕이야, 칭찬이야?"

"따지고 보면 반반? 어쨌든."

나는 회귀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자기 몸에 손대는 걸 지극히 싫어하는 회귀자였으나, 흔쾌히 수락한 내가 고마운 건지 가느다란 어깨를 꼭 잡고 흔들 때도 가만히 있었다.

아니면 닿아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정이 든 것일 수도 있고.

"나름 3개월의 시간이 의미는 있었다고요."

그러고 보면 처음 무저갱에 떨어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아직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누가 쳐들어오고, 떨어지고, 싸우고. 정말 크고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사이 간극이 고작 1개월밖에 없다니.

나도 그렇지만, 회귀자도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아직 3개월밖에 안 지났구나. 그토록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상하다. 감상은 똑같은데, 왜 얘가 말하니까 놀려주고 싶지.

내가 말했다.

"3개월밖에, 라니요? 3개월이면 한 학기예요. 한 학기면 셰이 씨가 초등학교 졸업에서 중등학교 중퇴로 거듭날 시간이라고요."

"너는 진짜 끝까지!"

발끈한 회귀자는 빽하고 소리쳤다.

"더러워서 다음에는 졸업하고 올게! 기다려 봐. 진짜!"

"다음? 다음이 어딨다고."

'아차. 내가 회귀한다는 사실을 밝힐 수는….'

아니, 너 회귀 초에 열여덟이라며. 그러면 회귀해도 못 가는 거 아니야? 중등학교 졸업 이후잖아?

내 지적도 잠시, 회귀자는 아주 독특한 대책을 마련했다.

"신분은 속이면 그만이야!"

"아니, 중등학교 가려고 신분을 속여요?"

"하면 돼! 나는 변장술에도 일가견이 있거든!"

'천반경 축골공이랑, 아가르타의 가면을 쓰면 좀 빨리 자란 남학생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

그게 된다는 것보다, 그걸 하려는 생각을 했다는 게 더 신기하다.

"가능하고 말고 문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좀 문제가 아닐지."

"닥쳐! 너만 아니어도 이럴 일 없었어!"

"그 이전에 당신이 초등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면?"

"중등군사학교는 개나 소나 다 가는 곳이잖아! 그딴 걸로 뻗대지 말란 말이야!"

"개랑 소도 가는데 왜…?"

"야아아!"

이것이 이 사회에서의 방어 불가 기술. 너에게 천앵이 있다면 나에게는 교육제도가 있으니. 맛이 어떠냐, 초졸.

회귀자를 한껏 놀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알아낸 사실은 없었다. 지선에게 무슨 내막이 있었는지는, 회귀자도 이전 회차에서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저 아래 닿기 전까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제발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이곳이 무저갱이라는 것도 잊고, 나는 그렇게 지모신에게 기도했다.

EP.128 진심 밥상뒤집기

쿵, 쿵.

지선께서 오신 뒤, 가끔 무저갱을 거닐다 보면 땅이 흔들리곤 했다. 지선께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발을 구를 때마다 탄탈로스는 새로이 심장이 생긴 것처럼 맥박을 가졌다. 생명과는 가장 동떨어진 무저갱에 나타난 인위적인 박동이었다.

그렇게 부산스럽고 요란한 탈출 준비를 마치고, 그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던 무렵.

"준비가 끝났소이다!!"

무저갱이 다 울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선의 부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우리는 즉시 움직였다.

티르는 커다란 관을 이끌고 향했고, 불사자는 상자에 식량과 식수를 가득 담고 등에 멨다. 칼리스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불사자가

"부상자에게 짐을 들게 할 수는 없지! 주시오. 짐은 전부 내가 들겠소!"

이러는 바람에 어쩌지도 못하고 자기 가방까지 맡긴 것이다.

아지는 사람들이 모이자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는데, 입에는 원반이 물려있었다. 이 망할 강아지는 인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개겠지만.

나비는 짐을 챙기기는커녕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너는 이따가 봐라.

그렇게 탈출할 준비를 마친 사람이 다 모였을 때.

"다 모였소이까?"

주간등의 빛이 비치는 네모난 마당. 그 한복판에 지선이 서 있었다.

들어왔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흙인형이 매달린 귀걸이를 끼고 팔에는 다섯 개의 고리를 찬 채 고목처럼 굳건히 서서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의 곁에는 방금 만든 듯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었는데, 빨랫대처럼 생긴 그것의 용도를 쉬이 짐작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두리번거릴 즈음, 면면을 확인한 지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소인의 계획을 설명하겠소이다."

이게 과연 설명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지만 말이다.

"소인은 이 탄탈로스를 뒤집을 계획이외다."

모두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뜻이지? 왜? 어떤 의미로 뒤집는다는 거지? 복장이라도 뒤집어 놓나?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군국 역사와 함께하는 공구리의 화신이었고, 자기 설계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능력이 있었다.

"소인이 알아본바, 이 감옥에는 충분히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살아온 터라 무저갱의 밑바닥에 닿을 자격을 얻었소이다."

군국이 감옥 안으로 꾸준히 사람을 밀어 넣어 죽인 덕분에 이 땅의 역사가 패왕의 학살에 닿을 정도로 충분히 채워졌노라고, 지선은 에둘러 말했다.

"그리하여 무저갱의 밑바닥에 닿았어야 했지만, 이 땅과 무저갱의 밑바닥은 별개의 땅이외다. 도달하기 위해선 이 두 땅을 하나로 합쳐야 할 필요성이 있었소이다."

충분히 역사를 쌓아 같은 공간에 도달하여도, 서로 다른 층에 있어서 만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해결 방법이….

"지선이여. 그렇다면 구멍을 파서 아래쪽으로 내려가야 하오?"

"그렇지 않소이다. 이 공간에서 거리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 우리는 마지막, 밑바닥이 없는 땅에 진정한 의미로 도달하여야 하외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었다.

왜냐면, 생각을 읽어도 믿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선은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펼쳤다. 그리고는.

"이 땅을, 순수한 의미 그 자체로. 반 바퀴 돌려서 뒤집을 생각이외다."

그 말과 함께 손바닥을 휙 뒤집었다. 손등이 위를 향하도록.

땅을 손바닥처럼 뒤집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지선은, 우리 모두 멍하니 있을 때 옆에 있는 구조물을 톡톡 두들겼다.

"이것은 소인이 만든 지지대이외다. 어지간해서는 부서지지 않을 테니, 소인이 이 땅을 뒤집을 동안 밧줄로 몸을 묶어두면 되겠소이다."

"아니, 그것을…."

"일단 소인의 말을 따라주시기를 간곡히 요청하외다. 단단히, 몸이 뒤집혀도 멀쩡하게끔."

지선이 간곡히 청하자 우리는 일단 의문을 접어두고는 지지대에 몸을 묶기 시작했다. 온갖 짐과 사람이 열매처럼 대롱대롱 매달렸다. 불사자가 칼리스를 묶어서 매는 사이, 나는 밧줄을 들고 아지에게 다가갔다.

"아지야, 이리 와."

"왈왈! 나, 구속 싫어! 자유 좋아!"

저번에 쇠사슬에 묶인 기억 때문일까. 아지는 묶이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나는 조곤조곤 아지를 타일렀다.

"후회하지 말고. 이 땅 뒤집힌단다. 몸을 고정하지 않으면."

"멍! 내 속이 다 뒤집혀!"

"어디서 배우는 건지 어휘력이 점점 느네…."

아지는 맹렬히 짖으며 자꾸만 내 손을 피했다. 내가 곤경에 빠져있자 티르가 제안했다.

"그냥 두거라. 짐승의 왕이라면 발톱을 박아넣고 버틸 것이며, 혹여나 떨어질 것 같으면 내가 어둠으로 부여잡도록 하겠다."

"그래야겠어요. 이 짐승 놈을 아주 그냥."

아슬아슬 손이 안 닿는 곳까지 도망친 아지와 신경전을 벌이며 으르렁거리던 때. 조용히 있던 회귀자가 문득 나비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티르칸쟈카. 조금 있다가 나비가 뛰쳐나오면, 나비도 붙잡아 줄 수 있어?"

"문제 될 것 없다. 꼭 짐승의 왕이 아니더라도, 그 누가 떨어져도 붙잡아주마. 셰이, 너도 그리해주겠다."

"나는 괜찮아. 나는 기공으로 땅에 발을 붙여서 거꾸로 설 수 있고, 혹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늘을 날 수 있으니까."

왜? 왜 너는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릴 수 있는데? 하늘은 어떻게 나는 건데? 나랑 똑같은 인간인데 쟤만 조금 이상하지 않아?

티르가 나를 향해 제안해왔다.

"휴, 내 관도 공중에 떠오를 수 있단다. 빛이 비치지 않아야만 가능하지만, 무저갱에서는 상관없는 일이지. 혹 괜찮으면 같이 이 위에 타겠느냐?"

"아니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땅이 뒤집히는 경험을 해보겠어요."

"그러느냐…."

"그리고 티르도 조심하세요. 지선 님 말 들어보니까 땅에 매여 있어야 할 걸요? 티르도 너무 떠오르지 말고 땅 잘 붙잡고 있으세요. 안 그러면 영영 이별하게 되는 수가 있어요."

내 말에 티르는 다급히 어둠으로 지지대를 붙잡았다.

그렇게 모두가 대비를 끝마치고 지선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확인한 지선은 깊게 숨을 내쉬고는 나긋하게 손을 휘저었다.

나비가 날개를 휘젓는 것만 같은 부드러운 손짓. 그러나 손가락이 공기를 낚아챌 때마다 땅이 요동친다. 단단해야 할 콘크리트가 지선의 힘에 도토리묵처럼 진득하고 느리게 휘저어졌다.

"…대지술."

회귀자가 중얼거렸다.

지모신의 권능이라 불리는, 그녀의 사도만 쓸 수 있는 권능. 군국의 땅을 처음부터 끝까지 뒤엎은 그 힘이 지선에게서 발휘되고 있었다.

그렇게, 대지술로 땅을 단단히 다진 지선은.

"시작하겠소이다."

크게 발을 굴렀다.

쿠우우웅.

지선의 발끝에서 폭발한 기운이 탄탈로스 전역으로 퍼졌다. 이 정도의 충격이라면 발밑이 깨져나가야 정상이나, 극의에 이른 곤(坤) 기공과 그것을 보조하는 대지술은 힘을 탄탈로스 전역에 균등하게 퍼뜨렸다.

그래서일까. 그만한 충격을 받았음에도 지선의 발밑은 멀쩡했다.

"오오. 대지술로 땅을 뒤집으시려는 모양이오!"

불사자는 기적을 눈앞에서 보는 사람처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만, 그의 곁에 있던 칼리스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이빨을 딱딱거렸다.

뭐,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어마어마한 힘에 겁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지.

"무, 무언가 붙잡을 것이라도…."

"그렇군. 쉽게 죽는 이들에겐 두려울 수도! 혈귀께서 어둠으로 잡아줄 것이니 심려치 마시오! 혹 잡을 게 없다면 내 손을 빌려주겠소!"

손을 내뻗은 불사자. 칼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잡다가, 다시 충격이 이어지자 새된 비명과 함께 잡아당겨 그의 품에 안겼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불사자는 의아해했다.

"흠. 내가 이리 가까이 묶었던가? 자칫하다가는 서로 부딪히겠군! 미안하오, 잠깐 껴안겠소!"

"부탁드립니다…!"

불사자는 팔을 단단히 칼리스의 허리에 감고는 잡아당겼다. 둘은 완전히 밀착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게 불사자의 품에 안긴 칼리스는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아무래도 칼리스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티르가 잠시 저 광경을 보더니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휴, 혹시 너도 어디 부딪히지 않겠느냐?"

"제 근처에는 아무도 안 묶여 있는데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그렇게, 앞으로 일어날 일도 모른 채 사담을 나누던 잠시.

쿠우우우우우웅.

아까보다 훨씬 둔중하고 커다란 충격이 흘렀다. 지지대가 흔들리자 그 아래 매달린 내 몸도 부르르 떨렸다.

무언가 현실감 없는 진동에 신기해하고 있을 무렵.

"어? 지선께서는 어디 가셨소?"

불사자는 방금 지선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에 있어야 할 지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허허. 급한 용무가 있으셨던 모양이군!"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곧 다시 나타났다.

지선이 하늘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낙하, 그리고 충격.

거대한 지진이 탄탈로스 전역을 뒤흔들었다. 대지술과 곤마저도 충분치 못한지, 지선의 발밑에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균열이 생겨 있었다.

진동이 퍼졌다가, 무저갱 벽에 부딪히고 다시 돌아오는 것까지 느껴진다. 자연재해에 버금갈 규모의 힘이다. 일개 인간이 해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꺄아…!"

칼리스의 이번 비명은 진심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공포와 두려움을 느낄 만큼 비상식적인 힘.

"…하하. 미쳤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내 몸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땅이 기울고 있다.

"미친. 이게 돼?"

몸이 지진기록계라도 된 것 같다. 진동을 느낀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릴 무렵.

직후, 지선은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떨어질 때와 비슷한 충격이 탄탈로스를 울렸다. 뛰어올랐을 뿐인데, 대지가 움푹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극의에 달한 곤. 경지를 이룬 감."

기운 땅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회귀자는 냉정하게 이 상황을 파악했다.

'떨어지는 순간 땅 전체에 충격을 흩뿌리고, 자기 몸을 향하는 반작용을 역이용하여 다시 뛰어오르는 거야.'

생각을 읽은 덕분에 이해는 했다. 하지만 가끔, 읽어도 내가 뭘 읽었나 의아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지선은… 커다란 고무공이나 마찬가지.'

그게 왜 되냐고 그러니까.

인간의 몸은 고무가 아니고, 저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는 게 정상이며.

무엇보다.

땅은 왜 진짜로 뒤집히는데.

쿠구구구구우우우우우우우웅.

"멍! 멍멍! 지진이다 멍!"

"냐하아! 냐하아악!"

아지와 나비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두 짐승의 왕은 각자 안전해보이는 곳에서 발톱으로 땅을 그러쥔 채 몸을 납작 엎드렸다.

꼴좋다, 짐승 자식들. 누구는 묶이고 싶어서 묶였는 줄 아나.

그러거나 말거나. 지선은 다시 뛰어오르고, 다시 땅을 내리찍었다. 방아를 찧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그럴 때마다 탄탈로스는 점점 기울었다. 정말로 두려움에 떠는 칼리스가 불사자를 꽉 부여잡고, 아지와 나비는 무저갱이 떠나가라 짖고 있는 동안.

쿵.

그렇게, 어느 때보다도 높게 뛰어오른 지선이 땅을 내리찍었을 때.

퍼석, 하고.

탄탈로스가 떨어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던 콘크리트 테두리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지선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이제 뒤집힐 것이외다! 다들 꽉 잡으시기를!"

굳이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모두 각자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붙잡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지선이 마지막으로 공중으로 뛰어올랐을 때.

끼기기긱.

몸이 흔들린다. 세상이 기울어진다. 아니, 내가 기울어지는 것일지도.

탄탈로스는 받침대에 받쳐진 쟁반. 한쪽을 손가락으로 누르면, 견디다 못한 받침대가 부스러지고. 쟁반은 뒤집혀 땅을 향해 떨어지고는 만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탄탈로스의 건물이 왜 한쪽에 쏠려있던 건지 깨달았다. ㄴ자로 된 건물에 마당만 넓더라니, 왠지 대칭이 아니더라.

처음부터 이러려고 만든 거구나.

구구구구구궁.

마지막 충돌. 인간이, 대지와 충돌했다. 평범한 상황이었으면 우리를 그것을 추락이라 불렀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선은 이 대지와 동등한 입장에서, '충돌'했다.

후웅.

땅이 뒤집힌다. 지선은 이제 뛰어오르는 대신, 곤 기공으로 단단히 땅에 발을 붙였다.

지선의 힘이 없어도 이미 속도가 붙은 채였다. 거기다 탄탈로스, 감옥의 무게까지 더해지니, 뒤집히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개 짖는 소리. 고양이 우는 소리. 사람이 비명 지르는 소리와, 온갖 생각들이 다 들려오는 가운데.

바람이 불었다.

무저갱에 존재할 리 없는 바람이, 아래쪽이 뚫리며 다시금 불기 시작한 것이다. 공허가 만들어내는 틈으로 공기가 빨려들어간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조금 전까지 내가 디디고 섰던 땅은 경사진 벽이 되었고, 감옥 건물은 절벽에 난 요철이 되었다. 그럴 일은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일 밧줄이 끊어진다면, 나는 건물 벽에 떨어져 발을 디디고 설 수 있을 거다.

감옥 건물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커다란 물탱크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며 저 아래로 떨어진다. 건물은 마치 잔해를 토해내는 것처럼, 책상이나 집기, 상자와 의자 같은 게 창문과 구멍으로 쏟아졌다.

그러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감옥은 중간부터 으적 부러졌다. 4층짜리 건물이 3층이 되어가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떨어질 것이 다 떨어지고 난 뒤, 마지막으로 부러진 건 높이 섰던 주간등이었다.

지금껏 무저갱을 비추고 있던 인공 조명. 감히 태양을 흉내 냈던 그 주간등은 가운데에서부터 부러져 무저갱 저 아래로 떨어졌다. 감옥을 다 비추었던 조명도 무저갱의 어둠 속에서는 희미한 촛불과 같았다.

그렇게, 사방이 어둠에 잠겼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속도가 붙은 땅은 더더욱 뒤집혔다. 몸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멍멍!"

"냐냥!"

"으아아악!"

개와, 고양이와, 인간의 비명이 삼중주를 이룬다. 당연히 마지막은 내 것이다.

나는 손을 위로 뻗어, 지지대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거꾸로 뒤집혔다가 지지대와 부딪히면 그것도 곤욕이므로.

그렇게 사방을 가득 메운 어둠 속에서, 오직 비명과 생각만이 들리는 무저갱에서.

처음부터 뒤집힐 것이 전제된 대지가 제 역할을 다한 순간.

세상이 비틀어지더니.

찰박.

내 발이 땅에 닿았다.

EP.129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1

무저갱의 밑바닥에는 물이 있다.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조금 끈적한 질감의 물이다.

내가 직접 겪어서 아는 거다. 반박하려면 무저갱 밑바닥 밟아 보든가.

그렇게 세기의 대발견을 했지만, 그래도 사실보다는 사람이 중요한 법. 일단 인원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새카만 어둠을 향해 외쳤다.

"다들 무사하십니까! 번호! 하나!"

"둘!"

바짝 긴장한 칼리스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역시 군인. 아직 군대 물이 덜 빠졌구만.

"셋이오!"

다음은 상황을 잘 받아주는 불사자였다. 그걸 끝으로 고요가 찾아왔다.

조금 늦게 회귀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멀쩡해. 아지도, 나비도, 티르도."

아니, 진짜.

"와, 여기서 번호를 안 불러? 눈치 더럽게 없네, 진짜! 분위기 안 맞춰요?"

"굳이 숫자를 말할 필요 없잖아! 다 멀쩡한 것만 알면 되는 거 아니냐구!"

그렇게 따지만 나도 독심술로 사람 다 읽고 있으니까 굳이 확인할 필요 없지!

짐승들이야 뭐.

"머, 멍…."

"냐하아…."

살아있으니까 됐네. 그렇지. 짐승의 왕이 그리 쉽게 떨어질 리 없지.

나는 회귀자를 윽박질렀다.

"우리가 안 보이니까 안심하기 위해서 확인하는 거 아니냐고요. 참나, 진짜. 우리가 바보라서 번호를 매기는 줄 알아."

"기다려 봐. 내가 확인해볼 테니까…. 칠색안 오색, 청안 개안."

순간적으로 푸른 빛이 회귀자의 눈동자에 맴돌았다. 나는 혼자 사기 기술로 시야를 확보한 회귀자를 마뜩잖게 보았다.

"칠색안 개안 같은 거 꼭 입으로 말해야 해요? 너무 유치하지 않아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함이야! 좀 말로 하면 어때서!"

"아니, 넷도 말 못 하는 주제에 칠색안 오색이라는 낯부끄러운 말은 잘만 하네. 중등학교 2학년이 걸린다는 그 병인가? 근데 중등학교도 안갔는데."

"야! 주위를 살펴야 하니까 좀 조용히 해!"

발끈한 회귀자가 한껏 쏘아붙이고는 깊이를 보는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자, 어디. 이번에도 시점을 좀 훔쳐서 볼까. 네가 보는 것을 나에게도 보여봐라.

나는 그렇게 회귀자가 지금 보는 광경을 읽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뒤집힌 탄탈로스. 감옥 건물은 비탈 아래 처박혀 있고, 밧줄에 매달린 우리는 용케도 거꾸로 매달려 축축한 땅을 디디고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발을 디디고 있던 땅이 천장으로 바뀐, 말 그대로 천지가 뒤집힌 모습은 현실감이 없어서 꼭 우리가 추상화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만 보면 탄탈로스가 기울어지다가 밑바닥에 부딪혔나 싶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조금 전까지 저 아래 보였던 아득한 공허를 설명할 수가 없다.

애초에 밑바닥이 있었다면 거꾸로 뒤집히지 않고 기울어지는 선에서 멈추었겠지. 분명, 땅이 뒤집힌 순간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무저갱에 밑바닥이 없는 것은 뒤집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일지도.

그렇게 알아보기 쉬운 천장을 다 살핀 회귀자가 밑바닥으로 시선을 던질 때.

"…어?"

무언가가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기에, 그건 커다란 산처럼 보였다. 기울어진 탄탈로스보다 조금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으나 분명 정상과 능선이 존재하는 산이었다.

이 무저갱 아래 존재하는 완만한 산. 찰박거리는 물.

…그리고 발에 닿는 기이한 질감.

깊이를 보는 눈, 청안은 사소한 질감을 잘 구분하지는 못했으나…. 저 산을 이루는 구성요소는, 그런 청안으로 봐도 무언가 이질적이었다.

왜 보이는 바위에 하나같이… 손가락과 발가락처럼 보이는 다섯 개의 돌기가 달려있는가.

아, 아니다. 저건 바위가 아니다. 손가락처럼 보이는 돌기도 아니다.

이건.

"아우우우우우!"

아지가 울었다. 땅에서 펄쩍 뛰며 박쥐처럼 뒤집힌 탄탈로스에 발톱을 박고 달라붙었다. 땅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도 않다는 듯 맹렬히 짖으며 급하게 사람들이 묶인 지지대를 붙잡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울음에 대답해주지 못했다.

그러기엔, 이 땅을 가득 메운 것에 압도되었으므로.

"…피, 구나. 이게 전부…."

굳이 전문가의 평가가 없어도 깨달았다. 지금 내 코는, 어느샌가 풍겨 온 혈향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이걸 피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칼리스. 가만히 있으시오. 무언가 이상하오."

불사자조차도 불길함을 느끼고 중얼거리던 때.

사라진 주간등 대신 야간등이 켜졌다.

저 멀리 땅을 파고든 채 처박힌 감옥이 희미하게 빛났다. 건물 곳곳에서 켜진 야간등의 흐린 빛이었다. 동시에 탈주자를 색출하기 위해 감옥 벽면에 붙어있던 탐조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샛노란 탐조등은 대지가 뒤집힌 것도 모르는 채, 충실하게 감옥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 형체를 쫓아 이리저리 흔들렸다….

동그란 빛이 미친 듯이 떨렸다.

미친 듯이.

"아아…."

누군가 탄성을 내질렀다.

어둠을 동그랗게 비추는 샛노란 빛, 그건 공포에 빠진 사람의 동공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빛은 산 전체를 조망하고 싶은 것처럼 지그재그로 흔들렸다. 동그란 빛이 정처없이 방황했다.

그렇게 빛이 비치는 영역 전부. 하나도 빠짐 없이.

사람 형체가 있었다.

"30만의 학살, 패왕의 업…. 시산과 혈해로구나."

오로지 큰 수로만 도달할 수 있는 참극이었다.

30만, 30만에 달하는 인간을 산 채로 구덩이에 내던졌다. 처음에 땅에 부딪힌 사람은 즉사했을 것이다. 아마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그만한 낙하를 겪었으면 죽었겠지. 어쩌면 1만까지는 그렇게 죽었을 수도.

사람이 충분히 쌓인 뒤, 고저 차는 줄어들고 아래가 살더미로 푹신해질 무렵.

그게 언제인지는 모른다. 아마 그 누구도 모를 거다. 그때 사람들을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던 패왕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았겠지. 떨어뜨린 순간 생사여부를 신경 쓸 필요 없는 목숨이었을 테니까.

어쨌건. 그때.

누군가는 산 채로 시체의 산 위를 굴렀을 거고, 누군가는 미처 벗어나기 전에 위에서 쏟아지는 시체에 깔렸을 거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꺾였을지 모른다. 머리가 깨지고 비틀어진 팔다리에 고통스러워했을 테지. 30만을 던지는 도중 몇몇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끔찍한 몰골이 되었을지도.

아우성과 비명, 절망과 공포. 떨어지는, 혹은 떨어뜨리는 사람을 향한 적의와 분노, 저주와 애원.

그렇게 하나, 하나, 하나, 하나.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사람이 쌓였다.

그렇게, 30만이 쌓이며. 시체들의 산은 단순히 쌓인 시체 이상이 되었다.

겉으로는 시체의 산이나, 그건 어디까지나 바깥에서 보이는 광경.

쌓이고 쌓인 시체는 그 높이만큼의 압력을 만든다. 겉과는 달리 안쪽에 파묻힌 시체들은 형태도 알아보지 못하게 뭉개졌다. 그 피부와 옷 틈으로 걸러진 핏물이 쥐어짜이며 새로운 수원을 만들어냈다. 짓이겨진 육신에서 피보다는 체액에 가까운 액체가 흘러 얕은 바다를 이루었다.

왠지, 피치고는 소리가 맑더라니.

30만이라는 죽음만이, 그만한 규모의 학살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때, 방황하며 지그재그로 달려나가던 탐조등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직후 모든 탐조등이 가장 '사람다운' 형체를 발견하고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 끔찍한 시체들의 산 정상. 그 극점을 다섯 개의 빛이 조명했다.

벌레도 없으며, 곰팡이도 피지 않는 무저갱.

세상 모두와 격리된 공간에서 썩지도, 부스러지지도 않은 채.

1300년 동안 이어진 시산혈해의 꼭대기에.

한 여인이, 그 정상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끔찍한 죄악을 참회하듯, 죽어간 모든 시체를 애도하듯. 손바닥을 펼쳐 무릎 위에 얹은 채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지모신의 매장자가 취할 법한 자세에, 지선의 옷과 닮은 펑퍼짐한 사제복. 그녀의 오른손 손목에는 여섯 개의 고리가 차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길게 풀어 헤쳐져 있었는데, 바람이 없어서인지 부스스하지 않고 옅은 윤기마저 나고 있었다.

그 시체의 손바닥 위에는 새까만 지팡이가 가로로 뉘어있었는데, 누가 보더라도 지모신의 도사 같은 모습이었다-

-배를 관통하고 있는, 십자가 쐐기를 제외하고는.

"십자가? 성황청의 상징이 왜 저기에…?"

숙적의 상징을 발견한 티르가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지모신의 지옥인 무저갱에 어째서 십자가가 있는지. 그 십자가가 왜 무덤의 극점에, 한 여인의 배를 꿰뚫고 박혀 있는 건지.

그 대답은 지선에게서 나왔다.

"오래전, 우리 지모신교에는 대종사가 있었소이다. 처음으로 대지술을 사용했다던, 모든 지모신도의 대종사."

찰박, 찰박.

새카만 어둠 속 모두가 멈춘 곳에서, 지선은 홀로 걸어갔다. 피 찰박이는 소리가 발자국으로 남았다.

"패왕이 30만의 시체를 묻을 매장자를 불러모았을 때, 그곳으로 향한 매장자 대부분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지모신의 이름을 더럽히려는 떨거지였소이다. 시체를 노리고 맴도는 시체매 같은 비겁하고 비열한 놈들이었소이다…. 일부 제외하면 말이외다. 가짜 매장자들이 지모신을 모욕하는 일을 막기 위해, 대종사께서는 동료들과 함께 직접 그곳에 임하셨소이다."

몇몇 헌신적인 지모신도 덕분에, 자격 없는 다수의 행패가 가려졌다. 그건 지금뿐만 아니라 그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승왕과 패왕이 서로 싸우던 시기는 지모신도의 성세가 가장 흥하던 시절이었다. 떨거지도 많았으나 참된 매장자도 많았고, 그들은 자격 없는 이들보다 부지런히 움직여서 전란을 겪은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게 그 시절 지모신앙이 유지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패왕은 시체를 위한 예식을 요구하는 지모신앙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지모신앙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싶어했을 정도로.

"소인은 지모신의 사원인, 가장 높은 산 중턱의 동굴을 방문하여 그 사실을 알아냈소이다. 대종사의 흔적은 그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외다."

만일 자격 없는 이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려고 했다면, 패왕은 그 매장자들을 죽이면 안 되었다.

부장품을 몸에 걸치고 타인의 죽음으로 배를 불리는 모습을 온 천하에 보여야, 학살에 대한 분노를 지모신교에 떠넘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패왕은 그러지 않고 매장자를 전부 죽였다. 그가 제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는 폭군이어서, 도 틀리지는 않겠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포로를 묻은 누군가가 부장품을 마다했다든지. 누구도 비난하기 힘들 정도로 숭고한 모습을 보였다든지.

"다만, 얼뜨기 시체매들 따위가 사흘 만에 30만이 묻힐 거대한 구덩이를 파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소인이 가장 잘 알고 있소이다."

공사의 규모에 비해 모인 매장자의 수는 적었고 기한은 너무 촉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패왕이 그의 장병을 썼겠느니, 그렇게 추측했을 뿐.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종사께서 방해하였기에. 시체 냄새를 맡고 온 시체매들보다 먼저, 그녀의 권능으로 죽을 이들을 위한 무덤을 만들었기에. 대종사께서 모든 시체를 홀로 매장하였기에. 패왕은 자기 업보를 그대로 받게 되었소이다.

그리하여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된 패왕은…. 대종사를 비롯한 다른 매장자를 무참하게 살해하였소이다. 책임을 떠넘기지 못하게 된 그에게 있어, 세상을 떠돌아다닐 매장자들은 그의 추악함을 노래할 전령이나 다름없었으니."

그게 지선이 찾아낸 무저갱의 비사였다.

지금껏 지선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그녀만큼 지모신앙에 깊숙이 관련된 사람은 흔치 않았으므로.

"하지만, 아니었구려. 패왕은 대종사를 죽이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이 순간, 무저갱 속에서 나타난 대종사. 그것도 십자가에 등을 찔린 채로.

그 시절 당시 천신교는 이간질할 가치도 없는 잡스러운 신앙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눈앞에 나타난 광경이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녀를 죽이고, 모든 역사를 잊히게 만든 건 천신의 앞잡이들. 미래를 엿보는 비겁한 예언자들이었소이다. 승왕의 편에 서서, 패왕의 몰락을 부추긴 이들. 그들이었구려…. 우리를 몰락시키고, 대종사를 죽이며, 욕보인 곳이."

저 시체의 산은 패왕의 작품일지 모르나.

이 무저갱과 더불어, 시체들의 산 위에 대종사가 십자가에 박혀 죽은 것은 다름 아닌 성황청의 작품이라는 것을.

EP.130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2

간단한 결론이었다. 무저갱에 이른 건 그들이 처음이며, 이 광경은 누군가 조작할 수 없는 흔적이다.

즉, 지모신의 도사이자, 대종사라 불리던 이를 성황청이 살해했다는 것.

군국의 역사도, 불사자의 민간 설화도 틀렸다.

티르의 이야기가 가장 진실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역시, 시간이 가장 역사를 크게 왜곡시키는 요소였던 건가.

아니면 군국이 역사책을 만들 때 참고한 자료 그 모두에 성황청의 입김이 들어갔을 수도 있고.

허탈한 듯, 분노한 듯, 대지 깊숙이 잠든 화산처럼 모든 울분을 안에 담은 지선은 터벅터벅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럴 줄 알고 있었소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껴지는 덧없는 존재감…. 발에 땅을 붙이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의 냄새. 미래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죄악을 정당화하려는 끔찍한 족속들만이 풍기는 것이지."

지선의 앞을 막은 사람은 당연하게도 회귀자였다.

회귀자는 푸르고 붉은 눈을 빛내며 지선을 마주하고 섰다. 지선의 잔잔한 미소가 한층 인자하게 바뀌었다.

"이러한 비사를 들었음에도 나를 막을 셈이오까, 소년?"

비장한 각오를 두르고 지선을 마주하고 선 회귀자는, 그녀답지 않게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는 물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무엇이오?"

"만일 이곳에서 그녀의 '유품'을 챙기고 지상으로 올라간다면."

시체들의 산 정상, 여인이 손에 고이 들고 있는 새까만 지팡이.

그것을 가리킨 회귀자는 다시금 지선에게 물었다.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거야?"

지선은 묻지 않았다. 그 지팡이가 무엇이며, 회귀자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며, 고개만 끄덕였을 뿐.

"당연한 것 아니겠소이까."

새삼 당연한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지선은 미소를 한층 키우며 대답했다.

"성황청에 그 죄를 묻고자 하외다."

담담한 선언. 종교라는 개념에 한하여, 명실상부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단체. 온갖 비사와 신비를 손에 넣은 집단, 성황청.

그들을 향한 지선의 선전포고에, 회귀자는 다시 되물었다.

"과거의 일이잖아."

"현재의 성사이외다."

"여럿이 죽을 거야."

"그들이 죽인 만큼 죽지는 않을 것이외다."

"너도 결국 죽을 거고."

"두렵지 않소이다."

이정도로는 설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회귀자도 알고 있었다. 대신, 회귀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만일 그 일이, 더 커다란 비극으로 이어져도?"

지선은 코웃음을 쳤다. 회귀자의 질문은 지선에게 고뇌를 던지는 대신 결심만 단단히 하게 만들 뿐인 것처럼 보였다.

"…또 그 잘난 미래. 마치 직접 보고 온 것처럼 말하는구려. 기이한 일이외다. 남자는 성녀가 될 수 없을 터인데."

누구한테 들었나 보군, 그리 중얼거린 지선은 별달리 묻지 않았다. 더 커다란 비극이라는 말에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회귀자가 절박하게 말했다.

"불과 몇 년 뒤에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나."

"그렇소이까."

"성황청이 무너져도, 지모신교와 흡혈귀의 시대가 와도. 그는 나타나. 아니, 오히려 더 강력해진 채로 더욱 빠르게 세상에 임하지."

"그런가 보오."

무심한 대꾸. 다급해진 회귀자는 사람들이 불안해할까 봐 꼭꼭 숨겨두었던 사실을 고백했다.

"죄악의 왕. 마신의 힘을 사역하며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는 심판자. 성황청의 성녀도, 마도연방의 마왕도, 제국을 수호하는 검성도. 그의 앞에서는 일초지적도 안 돼. 전 인류가 힘을 합쳐도 이기지 못할 강대한 존재야."

"마신이라. 성황청이 좋아하는 이름이로구려."

"그건 세상의 모든 악덕으로부터 태어나. 명성이 드높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선이 성황청과 전쟁을 벌인다면. 홀로 성황청에게 타격을 입히고 장렬하게 전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전쟁의 불씨가 돼. 세상은 전란에 휩싸이고, 그 속에서 죄악이 피어나고. 혼란 속에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놈들이 나타나. 그리고 그 가운데…."

죄악의 왕이 태어난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절망과 악덕을 머금고서.

회귀자는, 미래에 있을 끔찍한 재앙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지만.

"어쩌라고."

"…어?"

지선의 말 한마디에 멍청하게 반문한 할 따름이었다. 의아한 듯 되묻는 회귀자를 향해, 지선은 아주 맑고 결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쩌라고, 라고 되물었소이다."

찰박.

그녀의 발이 시체를 디뎠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응고와 퇴적 비슷한 현상을 거친 시체는 다져진 흙처럼 단단하여 그녀의 몸을 흔들림 없이 지탱했다.

"비극을 막기 위해서 박해를 저질렀다면, 그 저항마저도 견뎌낼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외다.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조차 억누른 채 다음으로 나아가, 다가오는 재앙마저 무찌를 힘이 없다면. 애초에 저질러서는 안 되었을 것이외다. 그들이 그린 미래에는 우리가 없었으니."

그렇지 않았더라도, 지선은 넘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녀는 불도자. 넘어지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자.

누군가 가로막는다고 하여, 그녀를 멈출 수는 없을 터이니.

"그런 뜻이 아니야! 서로 싸우기보단, 협력해서 위기를 이겨내야 한다고…!"

"나를 막기 위해 대전사를 보냈다면, 그럴 자신이 있다는 소리일 터."

"아냐! 나는 굳이 너를 막을 생각은 없어! 네가 땅의 검, 지잔(地潺)을 가지되 힘을 쓰지 않겠다고 하면, 나는 저걸 양보할 용의가…!"

그 말을 들은 직후. 지선은 흉신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양-보-라-고-!"

목에 핏대가 솟아났다. 꽉 쥔 주먹에서 바위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휙, 손을 흩뿌리자, 다섯 개의 고리가 찰랑거리며 거친 쇳소리를 냈다.

그렇게, 지선은 토해내는 심정으로 외쳤다.

"저건 우리의 것이매! 우리의 땅이며, 우리의 무덤일지니! 성황청의 대전사 따위가! 무슨 권리로 대종사의 유품을 양보하는가--!"

구르르릉.

그녀의 고함이 시체의 산과 비스듬히 기울어진 탄탈로스에 부딪혀 퍼졌다. 어찌나 우렁찼는지, 발밑의 시체가 들썩일 정도였다.

"미래가 너희 것이라고 오만하게 굴지 마라! 혹여나 내가 없는 미래에서 저것을 너희가 차지했다고 한들! 그것이, 너희에게 자격을 주지 않을 것이니-!"

콰득.

지선이 주먹을 움켜쥐어 팔을 당겼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다섯 개의 고리는 하나가 되어 오른팔을 빈틈없이 감쌌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진 지선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회귀자를 노려보며 외쳤다.

"검을 들어라, 대전사! 나는 나아갈 것이다! 옛 무덤에 묻힌 그녀의 유품을 들고, 성황청의 죄를 묻겠다! 나는 지모신의 사도이자, 지모신의 이름과 함께 죽어가는 이들의 절규다! 이 물음을 땅에 묻고자 한다면, 나를 죽이고 무저갱에 묻어라--!"

설득에 실패했다. 이번 회차의 회귀자 역시 그녀를 막지 못했다.

이제는 익숙한 열패감. 회귀자는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러다 마침 비탈 아래에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설득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래. 저 녀석이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럴 리가.

나는 어디까지나 바람을 들어주는 자. 불도자의 맹풍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심지어 나도 몰랐다고. 저 안에 얼마만큼의 울분이 있는지, 열망이 있는지는 알았지만. 저토록 격렬한 증오가 나타날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단 말이야.

나는 독심술사이지, 예언자가 아니니까.

한숨을 내쉰 회귀자가 힘 빠진 듯 느릿하게 말했다.

"미래는,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 없어. 언제나 내 적이었지. 아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나를 조지려고 드는."

회귀자는 손을 위로 뻗어서 검을 쥐었다. 언제나 그녀와 함께 했던 하늘의 검, 천앵.

이날만을 위해 아끼고 아꼈던 압축된 공간. 그 빗장을 풀며, 회귀자는 요동치는 힘을 손에 휘어잡았다.

"정정 하나만 할게. 나는 성황청의 대전사 따위가 아니야. 살면서 신에게 기도해본 적도 없고, 신이 뭔가를 들어준 적도 없어. 서로 싸우고 저주했으면 몰라도."

'처음에는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두 번째는 신기한 능력을 얻게 되어 기뻐했고, 세 번째에는 들떴지.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줄 알았어. 하지만, 이 특별함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짧게 자조한 회귀자는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아득한 무저갱이 요동쳤다.

기울어진 천장과 시체들의 산. 그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무저갱이 하늘을 되찾고 바람을 다시 불러온 듯했다.

고오오오.

바람의 울음소리가 시체를 타고 흐르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그 울음은 이윽고 한 점으로 수렴하여 회귀자의 검으로 빨려들어갔다.

회귀자는 어마어마한 힘을 검에 두르며 외쳤다.

"씨발! 그래도! 세상이 멸망하는 건 막아야 하잖아!"

회귀자가 시체로 된 바닥을 박찼고, 지선은 천천히 오른발을 뒤로 뺐다. 그녀의 발 뒤편으로 땅이 단단히 다져지며 지선의 몸을 단단히 받쳤고.

보이지 않는 검과 다섯 개의 고리가 충돌했다.

EP.131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3

"…혹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성황청과 연관이 있었나."

회귀자를 바라보는 티르의 눈에 짧게 적의가 스친다. 반사적인 적의다.

그야말로 피에 사무치고 뼈에 새겨진, 본능과도 같은 혐오감과 적대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만일 티르가 아직까지 심장이 멈춘 상태였다면 지선과 합세하여 회귀자를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순수하였다. 무얼까."

지내왔던 시간이 길다. 보여줬던 모습이 많다.

그동안 회귀자로부터 적의나 경멸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어설픈 친근감에 헛웃음을 지었을 뿐.

3개월. 티르에게 있어서는 찰나와 같은 시간이나, 심장이 새로이 뛰게 된 그녀에게는 충분히 감명 깊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티르는 저 싸움에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거 봐, 회귀자.

네가 뭘 걱정했는지는 알겠는데, 안 끼어든다니까.

마침 칼리스와 함께 피바다에 착지한 불사자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흠! 뭔가 바람과 구름 같은 하늘의 힘을 쓰기에 천신과 관련이 있는 줄 알았거늘!"

"성황청이 가진 권능은 천신의 것이 아니다. 천신은 인간에게 그 어떤 힘도 내려주지 않았으니."

살면서 그 누구보다도 성황청과 많이 부딪힌 티르의 말에는 그만한 확신이 담겨있었다. 티르는 핏빛 눈동자로 보이지 않는 검을 좇으며 말했다.

"그들은 천신의 신도라 자칭하면서도, 신보다 처음의 성녀를 더욱 떠받드는 이들. 그 이후 성녀라 불린 것들은 하나같이 예언자나 선지자의 이명으로 불리었지."

"어라? 생각해보니 그렇군! 그렇다면 도리어 대단한 것 아니오? 신의 권능 없이 이만한 성세를 만들었다는 뜻이니!"

"시간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시계상(時界相)의 권능이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지. 흥, 비겁한 족속들…."

심장이 뛰고 나서도 앙금은 여전한지, 티르는 명백한 경멸을 담은 채로 중얼거렸다.

"어쨌건, 셰이가 예지자일 리는 없다. 처음의 성녀가 십자가 쐐기에 박힌 뒤, 성녀는 오직 여자만이 될 수 있으니. 만일 성별을 속이고 있던 게 아니라면…. 아니라면...?"

문득 든 생각에 티르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으르르르르!"

박쥐처럼 지지대를 붙잡고 매달린 아지가 맹렬히 짖었다. 인간의 시체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아지에겐, 이 땅 전체가 지뢰밭이나 다를 바 없이 보이겠지.

이미 시체이니 밟거나 깨부숴도 별로 문제는 없겠지만 싫어하는데 구태여 내려오게 할 필요도 없을 거다.

"그래. 너는 거기 있어라. 싫으면 내려오지 말고…."

"으르르르르르르!"

그러나 아지가 짖는 건 단순히 시체가 싫어서만은 아니었다.

시체들 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들썩거렸다. 움직임을 감지한 탐조등 중 하나가 재빨리 움직여 그것을 비추었다.

덕분에 나는 펑퍼짐한 옷을 입은 시체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다지 고맙진 않았다.

죽음은 생의 정지이며 세상과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비자발적인 행위.

따라서 죽어 세상으로 돌아간 시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야 한다. 그렇게 피부부터 갉아먹히며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즉, 지금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저 시체는, 절대로 시체로서 권장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거다.

"염병하네, 정말."

무덤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행동 1순위, '다시 일어나기'를 해버린 시체를 보고 나는 얼굴을 구겼다.

"원혼인가. 하긴, 30만이나 된다면 원혼이 한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티르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지모신앙과 매장자가 필요한 이유이자, 한때 성세를 누렸던 까닭이 이것이다.

가끔 한 맺힌 시체에는 잔류 사념이 깃들고, 그건 죽은 몸을 움직이거나 변형시키고는 했다. 죽기 직전에 발휘되는 원시적인 신체 매개 마법이라고나 할까.

물론 잔류 사념 따위가 살아있는 인간보다는 강할 수 없기에 대다수는 그대로 퇴치되었다. 그래도 어쨌든 다시 움직이는 시체를 또 치우는 건 대단히 불쾌하고 불편하였기에, 사람들은 매장자에게 대가를 지불하며 매장을 부탁하곤 했다.

살아있는 사람도 나오지 못하는 땅속에서, 잔류사념은 잠깐 들썩이다가 사라질 뿐이었으므로.

"하찮은 것이다. 잠시 기다려라."

물론, 죽지 않은 채 묻혔다가 시체와 가장 가까운 몸으로 세상에 나타난 세계 최악의 원혼 시조 티르칸쟈카에겐 하찮을 뿐이었다.

"내 직접 힘을 쓸 필요도 없겠구나."

티르가 손을 휘저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한 형체가 번뜩였다. 그 순간 푹, 하고 원혼 서린 시체의 배를 찢고 새카만 검이 나타났다.

흑기사였다.

흑기사가 칼을 빼낸 뒤 오금을 걷어차자, 시체는 풀썩 무릎을 꿇었다. 흑기사는 그대로 시체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서걱, 날아간 머리가 탐조등의 빛이 닿는 범위에서 사라졌다.

나는 흑기사의 활약에 손뼉을 쳤다.

"와! 흑기사! 시즌 1호 활약이네요! 전투력 측정기에 월급도둑이라는 오명은 벗을 수 있겠어요!"

"…아무렴, 흑기사가 고작 원혼 따위에게 지겠느냐."

생각해보니 흑기사도 일종의 원혼이네. 티르에게 죽은 기사들의 념. 그러니 일개 병사보다는 기사가 강하겠지….

라고 생각할 때. 턱, 하고 무언가가 흑기사의 발목을 붙잡았다. 흑기사는 새까만 투구를 아래로 향하다가, 발을 낚아채는 손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 위로 나타난 건 수많은 손. 개미떼처럼 흑기사의 몸 위를 기어가는 손가락이 그 어둠을 뜯고 꼬집고 긁었다. 전신이 구속당한 채 몸부림치던 흑기사는 그대로 가닥가닥 끊어져 가루가 되었다.

탐조등의 불빛 아래, 오직 손만이 가득했다.

모두가 잠시 말을 잃은 그때. 나는 차가운 얼굴로 아까 했던 말을 번복했다.

"취소. 1구 처리 후 소멸은 기사 치곤 상당히 초라한 전적이네요. 앞으로는 흑기사 말고 흑잡졸 어때요? 아니, '흑'자는 너무 강해 보이니 대신 흙잡졸이라고 하죠."

"지금 말장난할 때느냐? 일단 내 곁에 붙어라. 위험하지는 않으나, 무언가 심상치 않다."

티르의 말에 보태듯, 탄탈로스 전역에서 경고음이 울려퍼졌다.

왜앵-.

인위적으로 조합해낸 날카로운 소음이 귓가를 찔렀다.

탐조등은 더 이상의 추적을 포기했다. 그러기에는 사람의 형체가 너무 많았으며, 움직이는 대상도 한둘이 아니었다.

대신, 탐조등은 매섭게 울면서 점점 크기를 키워갔다. 화살처럼 날카로웠던 빛이 퍼지며, 동시에 탄탈로스의 테두리에서 빛이 솟아났다.

제대로 된 조명은 주간등 하나뿐인 줄 알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탄탈로스의 테두리에 숨겨져 있던 자그마한 조명이 일제히 솟아났다. 하나하나만 보면 주간등보다 훨씬 어두운 빛이지만.

테두리에서 솟아난 조명이 일제히 켜지자, 무저갱 전역에 눈부신 빛이 도래했다.

낮은 천장, 사방을 둘러싼 광원에서 쏘아내는 그림자 없는 빛.

덕분에 이제 시체들의 산이 똑똑히 보였다.

옷과, 살점과, 팔과 다리, 가끔 보이는 머리로 이루어진 산. 둥근 굴곡을 지닌 인간이 쌓이고 쌓여 동그란 능선을 이룬 광경은 이제 끔찍함을 넘어 질 낮은 예술품을 보는 것 같은 불쾌함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불쾌함을 느끼기도 잠시, 더욱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시체의 산 테두리, 걸러진 핏물의 바다.

그 혈해의 해안선을 따라, 펑퍼짐한 옷을 입은 시체들이 일제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을.

가히 군대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원혼. 그것을 앞에 두고 티르는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밝구나. 그림자를 다루기 어렵다. 대신."

찰박거리는 핏물이 그녀의 부름을 따라 솟아올랐다.

비록 심장이 뛴 뒤 혈조술이 몸 밖으로는 잘 표출되지는 못하지만, 이토록 가까이에 있는 피는 다룰 수 있다.

티르는 새빨간 핏빛 구슬을 허공에 띄우며 말했다.

"내 곁에 붙어있거라, 휴."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자, 피의 파도가 부채꼴로 일어나 시체를 일거에 쓸어버렸다. 원혼이 서린 시체는 시체조차, 아니,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티르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왜냐면, 그녀는 원혼 서린 시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혹여나 내가 상처라도 입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너는 내가 반드시 지켜주마."

너무 든든하네. 나는 엄지를 치켜들며 외쳤다.

"흑장미가 흑기사보다, 아니, 흙잡졸보단 낫네요!"

"너는 정말 긴장감이 하나도 없나 보구나!"

저편에서는 칼리스와 불사자가 원혼이 서린 시체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불사자는 연달아 주먹을 휘둘렀으며, 그때마다 시체들이 부서지거나 하늘을 날았다.

그러나 상성이 좋지 않았다. 불사자가 지치지 않는다고 하나 그에게는 두 손밖에 없다. 가끔 주먹 한 방으로 세 구의 시체를 치운다고 한들, 그 틈에 수십이 더 몰려드니 점점 밀려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면 더욱 소극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불사자가 외쳤다.

"칼리스! 내 곁에 붙어있으시오!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되오!"

"아니요! 저도 참전하겠습니다!"

"부상자가 참전은 무슨! 나는 지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저것들은 한주먹 거리도 안 되오!"

그러자 칼리스가 냅다 소리쳤다.

"멍청이! 그거 다 연기였습니다! 슬슬 눈치를 좀 채십시오!"

"엇?"

불사자가 머뭇거리는 시간이 곧 시체들이 다가오는 거리가 되었다. 입술을 깨문 칼리스는 군장 패킷을 생체 단말에 끼워 넣었다.

"콜 투 암스!"

철컥, 철컥.

연금광과 함께 왼팔을 감싸는 강철 건틀릿. 군장을 장착한 칼리스는 마침 다가오는 시체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시체의 골통이 깨지며 이빨이 튀어 나갔다. 칼리스는 오른손으로 이빨을 낚아채고는 신속하게 건틀릿 손등에 난 홈에 끼웠다.

그리고 그것을 겨누며 외쳤다.

"세트, 리, 리, 리, 파스칼, 건!!"

본래라면 증기를 내뿜어야 할 홈. 그러나 대신 압축된 공기가 이빨을 격렬하게 밀어낸다.

투웅.

일종의 바람총. 쏜살같이 날아간 이빨이 다가오는 시체의 머리를 맞추었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시체의 목이 뒤로 살짝 꺾였다.

그러나 그뿐. 시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어왔다.

"큭! 규격이 안 맞습니다! 무게도 부족하고…!"

"이빨이니 그렇지 않겠소?"

"죽은 지 오래되어서인지, 이빨이 무르고 연금저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간이 연금술!'

칼리스가 오른 주먹을 꼭 쥐었다가 펴자, 연금술로 변형된 이빨이 나타났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두께 하나만은 일정했다.

칼리스는 크기가 꼭 맞게 갈려 나간 이빨을 홈에 끼우고 쏘아냈다. 후욱. 아까보다도 저 조그만 바람 소리.

"건!"

그렇게 날아간 이빨은 다가오던 시체의 오른 발목을 그대로 꿰뚫었다. 다가오던 시체가 발목을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보조하겠습니다!"

"어, 음. 무리하지 마시오?"

지금까지 괴물들 틈바구니에 있어서 빛을 발하지는 못했지만, 준비된 장교는 정밀하게 설계 된 전쟁수행기계다. 이 정도는 해주지 않으면 군국이 곤란하지.

물론.

아무리 그래봤자.

"천검기, 천둥새!"

"지모신이시여!"

저기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번쩍.

벼락이 몰아친다. 천앵으로부터 시작된 샛노란 전격이 지선을 향해 떨어진다.

그러나 지선은 몸을 낮추고 뛰는 것으로 벼락을 피했다. 속도는 벼락에 비하면 느렸으나, 벼락은 대지와 하나가 된 지선을 추적하지 못했다.

쿵. 지선이 발을 구르자, 진동이 시체를 타고 흘렀다. 그것들은 파문처럼 퍼지다가 회귀자의 발밑으로 수렴하더니, 곧 그 지점에서 시체가 폭발하여 솟구쳐올랐다.

회귀자를 향해 투포환 비슷한 속도로 날아든 시체.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빙글 돌아가는 팔이 정확히 회귀자의 옆구리를 노렸다. 회귀자는 가볍게 몸을 띄운 뒤 시체를 사뿐히 밟고 한 번 더 도약했다.

'칫. 벌써 시체들의 대지에 적응했나. 발밑에 땅이 없으니 내가 유리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 땅은 흙과 바위로 된 대지가 아니니 유리할 것이다, 그리 생각했소이까?"

지선은 회귀자의 생각을 간파했다.

"대지는 본디 지모신의 신체. 아래 사소한 것이 있다고 한들, 그건 전부 대지에서 비롯된 것. 소인은 땅을 구분하지 않으니!"

"잘났어, 정말…!"

투덜거린 회귀자는 거꾸로 된 천장에 착지했다. 경지에 이른 기공은 기울어진 천장에서도 그녀의 가벼운 몸을 땅처럼 걸을 수 있게 했다.

지선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지만, 회귀자만큼이나 민첩하지는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대지술은 대지에 발을 디뎌야 쓸 수 있으니….

그게 오해라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땅에는 하늘 역시 없으니. 거대한 대지가 천장이 되었다고 해서 그대의 편이 아닐 터!"

단호하게 말하며 지선은 허공에 손가락을 박아넣었다. 손가락 끝에 힘줄이 돋았다.

겉모습만 보면, 그녀가 마임을 하고 있다고 여겼으리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힘을 들이는 기색이었으니.

그렇지만 그건 마임이 아니었다. 마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있는 척하는 거지만.

"분노를!"

지선의 힘은 실제로 발휘되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붙잡은 듯한 손이 휘둘러진다. 그 동시에, 천장에 있던 콘크리트 대지가 격자 모양으로 잘려나가며 네모난 블록이 회귀자를 습격했다. 발이 닿지 않았음에도 대지가 그녀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지잔이 없어도 이 정도라니!'

이걸 거꾸로 솟아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어쨌건 네모나게 연마된 단단한 콘크리트가 회귀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급히 뛰어서 직격을 피했음에도 충격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치잇…!"

발을 대는 그 어디든 안전하지 않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저 멀리 내리 앉는 회귀자.

그에 반해 지선은 처음 발을 디뎠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걸어갔다.

"맥이 빠지는구려, 대전사여. 능력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적의가 없는 것인가? 어찌하여 둘 중 하나를 갖추지 못한 채 소인의 앞길을 막는 것인가? 사명감? 아니면, 이것이 원하는 미래를 향한 유일한 길이외까?"

지선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회귀자를 바라보았다.

"싸우지 않을 거라면 비키길 바라외다. 소인은 적의 없는 이와 싸우고 싶지 않으니."

회귀자가 대꾸했다.

"…네가 맞닥뜨릴 그들도, 적의는 없을 거야."

"그런 이들은 알아서 피하겠지. 소인은 오직 죄를 물으려 함이라. 그들이 숨긴 악덕에 대해 낱낱이 밝히고 사죄해야 할 터이외다."

"그렇다고 비켜서지는 않을 거야. 그들에게도 성지를 지킨다는 사명감이 있을 테니. 너처럼, 말이야."

사명감과 사명감의 충돌. 그것의 다른 이름은 선도 악도 없는 순수한 비극이 아니겠냐고.

회귀자는 없는 말주변으로도 어떻게든 그런 뜻을 담아 말했다.

지선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으나, 고민은 짧았다. 그녀의 안에서 결론은 이미 나온 상태였다.

"…그렇다면, 치우고 갈 뿐이외다."

"그러니까, 내가 못 가게 하려는 거야. 너는…. 그래. 넘어지지 않을 테니까. 다른 모두를 넘어뜨려서라도."

그것이 미래를 지키기 위한 회귀자의 사명이었다. 회귀자는 다시 검을 들었다. 마음을 다잡은 듯, 이제는 검 끝 하나 떨리지 않았다.

결심한 상대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던 지선은 자기 감정을 정돈하며 담담하게 선언했다.

"소인은 저 위로 올라가, 대종사의 유품을 쥘 것이외다. 이는 바위가 굴러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니, 앞에 서려면 그만한 각오를 갖추길."

명백히 회귀자를 노린 발언. 애매한 태도를 보일 바에야 확실하게 정하라는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선포였다.

"부수지 않고는 막을 수 없을 것이외다."

그렇게, 넘어지지 않는 자는 시체들의 산을 올랐다.

정상을 향해 올곧게.

EP.132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