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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2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4

보이지 않는 검이 지선을 습격했다. 차라랑. 다섯 고리가 차례로 검날을 긁으며 검로를 튕겨낸다. 회귀자는 천앵의 속도를 이용하여 곧장 지선의 목을 노렸으나.

지선은 막거나 피하는 대신, 고개만 살짝 기울이며 마주 주먹을 뻗었다.

칼과 주먹의 대결. 본래 한 수씩 교환하면 칼이 우세해야 정상이나, 정상적인 셈법은 상식을 벗어난 결투에서 통하지 않는다. 전제부터 다른 것이다.

검로에 귀걸이를 끼워둔 채 기공을 내뿜는 지선. 바람이 밀려날 정도의 반탄기공이다. 이러면 불안정한 자세로 휘두른 천앵은 기껏 해봐야 목에 생채기를 내는 게 전부다.

대신, 회귀자가 보호기공을 두른다고 한들, 저 주먹에 맞았다간 충격을 고스란히 받는다.

검을 든 건 이쪽인데, 손해를 보는 것도 이쪽이다.

"칫!"

회귀자는 목 대신 천앵을 잡아당겨 지선의 팔을 그었다. 고리 없는 왼팔을 길게 그으며 생채기가 일어난다. 한순간 그곳으로 비치는 피.

"흡!"

그러나, 지선이 간단히 힘을 주는 것으로 상처가 아문다.

아니, 아문다기보다는 전신의 근육과 기공으로 단숨에 압박한 것에 불과하지만.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지선의 주먹은 팔에 생채기가 난 대가를 자비 없이 수금했다. 굳은 손이 회귀자를 꿰뚫었다. 급히 회수한 천앵으로 막기는 했으나, 지선의 강맹한 주먹은 천앵 하나만으로는 막기 힘든 것이었다.

"크윽…!"

아껴둔 천앵의 공간을 풀어헤쳤음에도 충격이 가시지가 않아, 회귀자의 몸이 뒤로 부웅 떠올랐다.

날아가는 회귀자를 본 지선은 다시 손아귀를 펼쳤다. 만일 학습능력도 없이 다시 천장에 발을 디딘다면 이번에야말로 짓이기려는 의도였다. 그대로 땅에 떨어진다면 진동으로 공격하고.

그러나 회귀자의 판단은 천장도, 바닥도 아니었다.

천검기, 먹구름.

손잡이부터 천천히, 천앵이 하얗게 물든다. 하늘은 열망과 바람을 담는 광활한 공간. 뜨거운 열기는 자유로운 공기와 얽히고설켜 하늘로 이른다.

창공을 고고히 유영하는 구름은 그렇게 생겨났다.

천검기, 디딤구름.

하얗게 물든 검을 흩뿌렸다.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검끝이 허공에 형상을 이루었다. 희고 단단해 보이는 구름이었다. 마치 구름을 한 조각 떼어내어 통째로 압축한 듯, 벽돌처럼 보이는 새하얀 뭉치가 떠올랐다.

회귀자가 공중에서 몸을 빙글 뒤집고는 두 다리로 디딤구름을 디뎠다. 질감을 보면 다리가 폭 빠져야 할 것 같았으나, 디딤구름은 마치 대지를 대신하듯 회귀자의 단단히 몸을 받쳤다.

"하아…."

구름을 딛고, 무릎을 굽혔다.

건과 곤이 뒤집힌다.

회귀자는 거꾸로 선 채 몸을 웅크리고 자세를 잡았다. 천앵이 번쩍거렸다.

몸을 감는다.

힘을 담는다.

새하얀 디딤구름이 힘을 축적하면서 점점 어두워진다. 신선이 먹 묻은 붓을 들고 구름에 일필휘지 그림을 그리니. 새카맣게 새카맣게 점점 짙어진다.

하늘을 노니는 구름이 언제나 하얀 모습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폭풍우치는 날, 하늘이 분노한 때. 구름은 가끔 짓궂은 표정을 하고는 땅을 향해 노호를 토해낸다. 흰 구름이 새카맣게 물든 건, 하늘에 힘이 가득하다는 전조.

발판을 '만들어' 서자 지선은 대응할 타이밍을 놓쳤다. 지선이 다급히 대지술을 펼쳐서 콘크리트 벽을 잡아끌었으나.

조금 늦었다.

천검기, 천둥매.

벼락이 번쩍였다. 천둥이 울린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뒷북이 무저갱을 메웠다.

벼락이란 천지를 잇는 길. 그 힘이 강림한 뒤, 화들짝 놀란 나팔수가 반 박자 늦게 천둥으로 힘의 행진을 알린다. 그러나 천둥이 들렸을 때, 이미 천벌은 죄인에게 지엄한 심판을 내린 이후다.

그렇기에 천둥은 하늘에 울리는 뒷북이다. 들린 순간 늦었다.

흐릿하게 사라졌던 회귀자의 신형이 지선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벼락의 잔재가 이어졌다.

파츳, 파츳. 공기가 박자를 타고 들썩거린다. 그녀가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허공을 튀어오르는 전류의 길이 희미하게 보여주었다.

위협적으로 파짓거리는 소리, 몸을 둘러싼 정전기에 머리카락이 들썩거리고, 회귀자는 짧게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콰가강!!

먹구름과 회귀자 사이에 벼락이 일었다. 참격은 뒤늦게 벼락의 형태로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지선을 보호하던 콘크리트가 바싹 마르며 쩌적 갈라진다. 그 균열은 꼭 벼락을 닮아 있었다.

신속, 쾌속한 격검. 동시에 뇌격을 담은 불가피한 일격.

그러나.

"짜릿…하구…려!"

지선이 기운을 발아래로 흘려보내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대지는 태초 이래 수많은 벼락을 지냈다. 버티었다, 라고 표현할 수조차 없이. 벼락마저도 몸 안에 품었으니.

회귀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이었으나, 심장에 닿기에는 부족했다.

뇌격의 여파로 지선의 입가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리지만 그뿐. 고리 하나가 부서지고 팔과 어깨에 검흔이 새겨졌으나 그뿐.

검에 서린 뇌기는 흘려보내고 흡기공으로 근육으로 다잡으면, 상처는 언제 생겼냐는 듯 다물어진다.

그래, 수도 없이 갈라져도 언젠가 아무는 대지모의 육신처럼.

"칫."

회귀자는 시큰거리는 손목이 전하는 경고를 무시하고는 천앵을 들었다.

이미 길은 이어졌다. 천앵은 이곳에 있고 구름은 반대편에 있으니, 다시 잇기만 하면 된다. 벼락이 회귀자의 몸을 타고 흐르며 허공에 뜬 먹구림이 불길하게 쿠르릉거렸다.

벼락을 담은 발걸음이 땅을 딛기 직전.

"지룡."

극에 이른 곤(坤)이 땅을 다스렸다.

지선이 손을 치켜들자 콘크리트에서 흙먼지가 인다. 불가능한 일이다. 딱딱한 콘크리트가 어디 갈린 것도 아니고 어떻게 흙먼지를 일으킨다는 말인가.

하나, 지선(地仙)은 가능하다.

천장, 기울어진 탄탈로스를 이루는 콘크리트가 제 홀로 소용돌이친다. 아드득, 까드득. 서로 부딪히고 마찰한 콘크리트는 단숨에 흙과 먼지로 화했다. 태초의 모습으로 변한 콘크리트를 지선은 단숨에 끌어당겼다.

비틀린 콘크리트가 똬리를 튼 뱀처럼 솟아났다, 흙과 먼지로 된 구름이 그 주변을 뒤덮었다.

그렇게 나타난 대지의 권능은 꼭 땅에서 피어난 용처럼 보였다. 흙먼지로 이루어진 지룡은 단숨에 먹구름을 집어삼켰다.

땅에 너무 가까이 붙어있던 먹구름은 그렇게 사라졌다.

'치잇. 지룡. 다행히… 지금은 좀 크기가 작네.'

회귀 전, 지잔을 가진 채 땅 위를 거닐었던 지선은 두 마리의 지룡으로 커다란 신전을 감쌌다. 그 상태에서 안에 든 사람을 하나하나 물어서 빼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두 지룡을 이끈 채 진군하는 지선은 그야말로 역천을 꿈꾸는 땅뱀. 성황청에게 죄를 물으며 다가오는 저지할 수 없는 악몽.

그에 비하면 지금 지룡은 고작 한 마리에, 사람 하나 간신히 조일 정도로 작았지만.

'물론… 내가 버틸 수 있냐는 또 다르지.'

어쩌면 크기가 작아진 만큼 더 골치 아플 수도.

지룡이 지선을 감쌌다. 모래가 그녀를 수호하듯 소용돌이쳤다.

그에 맞서 회귀자는 천앵을 휘저었다. 벼락을 두른 구름이 그녀의 주위를 감쌌다.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뻗친다.

"간다."

"오라."

대화라고 하기 모호한 짧은 문답.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회귀자가 앞으로 뛰며 검을 휘둘렀다. 그에 맞서 지선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지룡이 아가리를 벌렸다.

평범한 대지술이 아니다. 지선의 권각과 연동하여 움직이는, 뱀처럼 흐르는 땅. 지선이 가볍게 주먹을 내뻗자, 콘크리트 용이 파도치며 회귀자를 덮쳤다.

그에 맞서, 회귀자는 가벼운 몸을 통통 튕기며… 지룡을 타고 달렸다.

가벼운 육체와 뛰어난 경신술, 더불어 경지에 이른 기공이 있어야만 가능한 묘기였다. 파도를 거스르지 않고 비스듬히 타듯, 천앵으로 비스듬히 긁으며 앞으로 미끄러졌다.

지선은 내심 감탄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검과 권각이 충돌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허공을 베어냈다. 궤적을 쫓을 수 없는 검이 고리를 베고, 권각을 비껴 흘리며 살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그러나 지룡을 두른 지선은 이전처럼 쉽게 맞아주지 않았다. 지룡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어서 공격이 영 닿지 않는다. 회귀자가 혀를 찰 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지룡이 아가리를 벌리고 뛰쳐나왔다. 그 속도는 똬리를 튼 뱀과 비슷했다. 똬리가 움찔하는 순간 이미 지룡의 머리는 쏘아졌다.

회귀자는 천반경으로 간신히 그것을 피했다.

'진짜, 천반경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내심 안도하며 회귀자는 드러난 지룡의 목을 베었다. 머리를 잃은 지룡은 다시 머리가 솟아날 때까지 방어에 전념했다.

체력과 집중력을 갉아먹는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단연 불리한 쪽은 회귀자였다.

'차라리 빠른 상대라면 천반경을 이용한 속도 싸움을 하겠지만…!'

상대는 대지처럼 굳건하다. 지선이라는 호칭이 헛되지 않다. 거기다 수십 년 단련한 바위처럼 단단한 육체는 가끔 베어도 껍데기만 긁은 것처럼 영 손맛이 없다.

그러나 회귀자는 한 대만 맞아도 치명상. 특히, 회귀 초창기인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연약할 때.

사선으로 크게 휘젓는 손. 공격답지 않은 공격이나, 이마저도 맞으면 곤란했다. 칼날을 대고 흘려내며 회귀자는 내심 불만을 토했다.

'회귀해서 단련해봤자 뭐해! 육체는 그대로인데! 칫, 그걸 써야 하나…?'

"뛰었구려."

라고 말하며, 지선이 주먹을 쥐었다. 회귀자는 대응하려고 했으나 공교롭게도 그 타이밍 두 발이 살짝 떠 있던 상태였다.

'아차!'

아직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는데, 공격을 받아내다가 그 반동에 몸이 떠버렸다. 방심한 것이다.

그리고 발을 단단히 붙이고 있던 지선은, 시체를 타고 흐르는 진동으로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공격을 준비했다.

"공간진(空間塵)."

쨍그랑.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기이하게 일그러진 기공이 세상을 공간째 붙잡는다.

'공간진?! 몸으로도… 할 수 있는 거였어?!'

이전 회차에서, 날아드는 화살과 총탄을 비껴내고 도망치는 적을 붙잡기 위해 세상을 어그러뜨렸던 오의.

'그게 대인전에서 쓸 수 있는 것이었다니!'

닿지 않았을 텐데, 회귀자의 몸이 딸려갔다.

극에 이른 건과 곤. 지선의 오른팔에 어마어마한 기력이 모여들었다. 성한 고리, 망가진 고리가 서로 공명하며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고리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꼭 매미가 우는 것 같았다.

그저 전신으로 내뻗는 흡착기공. 그것뿐인데, 몸이 뜬 회귀자는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 들어갔다.

떨쳐내려면 떨쳐낼 수야 있지만, 그래서야 늦다. 이미 기술에 걸린 상황, 회귀자가 할 수 있는 건 이를 악무는 것밖에 없었고.

그 위로 꽈배기처럼 몸을 한껏 비튼 지룡이 그 모든 힘을 쏘아냈다.

"튼튼하다면."

지선은 허공을 향해 짧게 주먹을 뻗었다. 몸을 단번에 풀어헤치며 뛰쳐나간 지룡이 회귀자를 물어뜯었다.

"캬…학!"

폐부를 쥐어짜이는 듯한 소리.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회귀자는 지룡에 휩쓸려 그대로 저 멀리에 처박혔다.

시체들 틈으로 시체 비슷한 모양의 형체가 뒹굴었다.

"살아남을 것이외다."

지선이 볼에 난 핏자국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화답하듯 그 아래에서 회귀자가 고통 섞인 비명을 질렀다.

"끄, 끄으으으…!"

"…튼튼하구려. 그래도 이미 만신창이. 이제 더 싸우지는 못할 터."

한마디로 평가를 마친 지선이, 몸을 돌려 정상으로 향하려는 때였다.

회귀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EP.133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5

간신히 몸을 일으킨 회귀자에게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죽이지… 않으려고 했어.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했어."

아무리 봐도 만신창이. 더는 싸울 수 없는 꼴을 한 회귀자였으나.

툭, 툭. 흐르는 피가 되돌아간다. 혈조술로 되돌이킨 것이다. 동시에 바람이 몸을 감싸며 흙먼지를 털었다. 한순간, 그녀의 몸이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건 겉모습일 뿐, 지룡에 직격당한 몸 안쪽은 상당한 타격이 누적되어 있다. 두 발로 서는 것도 힘들겠지만.

회귀자는 고통과 절망을 울분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그저. 잘하고 싶었어. 나밖에 할 수 없으니까.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의도가 좋으면, 진심으로 노력하면. 모든 게 좋아질 거로 생각했어."

회귀 초창기, 상황이 이전보다 점점 나아지는 게 보였을 때.

회귀자는 믿었다.

문제가 생기면 어디든지 나타나, 모든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반복하고 반복하다 보면 점차 나아질 거라고.

그리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데, 왜! 왜, 왜! 왜애애애!"

바꾸지 못한 미래. 움직이지 못하는 마음. 굳은 신념과 아집 혹은 고집.

부패한 단체, 악한 개인, 그 가운데 몇 없던 선한 이들은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죽어간다.

도와줄 것이라 믿었던 이들은 각자 다른 꿍꿍이를 숨겨두고 있고, 그 속에서 회귀자는 홀로 광대놀음을 할 뿐.

진정으로 도와줄 이는, 그 약속도 무색하게 다음 회차에서는 고개를 젓는다.

"왜 아무도 안 도와주는 건데에!!"

울분에 찬 회귀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에서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명멸했다.

온도를 보는 적안.

내려다보는 주안.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금안.

꿰뚫어 보는 녹안.

깊이를 보는 청안.

멀리 보는 남안.

힘을 보는 자안.

일곱 중 하나만 나타나도 세상을 진동시킬 마안, 칠색안. 그 일곱 가지 빛이 동시에 반짝인다.

섞인 것도 아니다,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일곱 개의 빛은 별개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명멸했으니.

회귀자의 눈동자에 광륜이 떠오르며 밤하늘 별처럼 반짝였다. 그 끝으로 흐르고 있는 건 눈물인지, 아니면 빛무리인지.

칠색안 전안 개안.

전륜천안(轉輪天眼).

일곱 마안이 모여야만 이룰 수 있는 권능이, 이치 너머의 것을 목도했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일단 한 번 죽어어어! 너를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 이후 고민해볼 테니까아아!!!"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일곱 개의 마안, 그 총의인 전륜천안이 보는 것은 가능성.

한때 운명안이라고 불렸던, 자신의 가능성을 재단하는 눈.

그 모호함과 불확실성, 그리고 운명에 집착하다가 파멸한 이들 때문에 점차 외면받다가 갈래갈래 찢긴 마안이나. 회귀자에게는 달랐다.

회귀자에겐 이미 가능성의 결실이 그녀의 회귀 숫자만큼 존재하므로.

자기 자신을 본다.

셰이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가져온다.

예언이 아니며, 예지도 아니다.

과거, 어느 회차에서 얻었던 힘. 그 회차에서 이룰 자신의 가능성을 읽고 관측하여, 잠깐이나마 그 힘을 재현한다.

대가는 수명이나.

회귀자에게는 차고 넘치는 것이다.

"천검기, 용오름!"

회귀자의 뒤로 폭풍이 몰아쳤다.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긴 기운이 난폭하게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단숨에 땅을 박차 날아오른 회귀자는 바람을 휘감은 거대한 참격을 날렸다.

"또 뛰었구려. 학습 능력이 없는 것인지…."

공간진으로 붙잡고, 지룡으로 물어뜯는다. 지선은 주먹을 움켜쥐고 비틀었다.

끼기긱.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지룡의 육신이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 기둥처럼 불길한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이야아아아아!"

"지룡."

용수철은 금속만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부러지지만 않는다면, 콘크리트 역시 용수철이 될 수 있다.

지선의 힘으로 움직이는 지룡은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다.

솟아난 땅의 용이 용트림하며 순식간에 회귀자의 코앞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하나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 회귀자는 지룡을 세로로 쪼개며 다가갔다. 폭풍을 휘감은 회귀자는 그대로 무방비 상태인 지선을 향해 천앵을 휘둘렀다.

지상에서 휘둘렀다면, 저 멀리 있는 구름마저도 쪼갤 듯한 기세.

촤악.

지선의 몸이 크게 베였다.

다물 수 없는 상처에서 피가 넘쳐흘렀다. 어깨부터 반대편 허리까지 긁어낸 치명상이었다.

그러나 회귀자는 일격을 가했음에도 방심하지 않고 곧장 수비태세를 취하며 이를 악물었고.

그 위로 지선의 발차기가 작렬했다. 회귀자의 몸이 공처럼 날아갔다.

직후.

뚝. 지선의 오른쪽 귀걸이가 갈라졌다. 그 상흔은, 지선의 몸에 난 상처와 똑 닮아있었다. 그렇게 부스러진 귀걸이가 땅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지선에 난 상처가 꿰맨 것처럼 딱 다물어졌다.

"미리 치른 장례…! 짜증 나! 왜 너는 죽을 지경이어도 그냥 살아나냐고!"

회귀자가 신경질을 부렸다.

회복도 아니고, 복원도 아니다. 그냥 상처를 잠시 미뤄두었을 뿐. 흙으로 부두인형을 만들어 충격을 잠시 옮겨두고 멀쩡한 몸을 '연기'하는, 더 싸우기 위한 기술, 미리 치른 장례.

말은 그렇지, 한참 싸우는 도중 저걸로 부활하면 억울하기 그지없다.

물론 어이없는 감정은 지선이 더 컸지만.

"…기이하구려. 예언은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보아도 익히지 않으면 기량을 올릴 수 없소이다. 헌데, 조금 전 그건, 기량 자체가 달라진 듯한…."

발차기에 당한 순간 앞으로 뛰어 타점을 흐렸다. 동시에 팔을 미리 뻗어서 다리를 짚으며 충격을 줄였다.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기공의 흐름은 이전과 또 달라진 것이었다.

기공도, 신체 능력도, 그 모든 게 이전에 비해 압도적이다. 지선은 그것을 느꼈다.

"다만. 한 치수 큰 옷을 입은 것처럼, 틈으로 흐트러진 기운이 줄기줄기 새는구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빌려온 힘은 오래 가지 못할 터."

"빌려오기는! 원래 내 기량이거든! 이거 없이 딱 3년만 더 있어도 너는 이겨… 지잔만 없다면!"

급속도로 소모되는 기력이 몸을 무겁게 붙든다. 그래도 회귀자는 여전히 울분으로 몸을 태우며 외쳤다.

"항복해! 말로 하는 건 지금이 마지막이니까-!"

"소인이 묻고 싶소이다. 위태로워 보이는데, 더 싸울 생각이외까?"

"웃기네! 미리 치른 장례 아니면 이미 한 번 죽었거든!"

"두 번은 더 죽여야 할 것이외다."

짤랑. 지선의 왼쪽 귀에 있는 흙인형이 흔들렸다. 여분의 목숨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의 목숨은 그녀 자신.

짧게 바라보고, 서로 의지를 확인했다.

회귀자는 다시 검을 처들고, 지선은 콘크리트를 몸에 둘렀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 싸움. 제한시간이 다 되기 전 회귀자가 지선을 쓰러뜨릴 수 있냐, 그것이 승패를 가른다.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지선을 올려다보던 회귀자는, 문득 저 너머 시체들의 산 정상에서 움직이는 사람 형체를 보았고.

어이가 없어서 넘어질 뻔했다.

회귀자는 눈을 부릅떴다.

'저건… 저기서 뭘 하는 거야?!'

불사자가 주먹을 휘둘러 시체 하나의 배를 꿰뚫었을 때, 그 시체는 쓰러지는 대신 멍하니 자기 몸을 헤집은 불사자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배를 꿰뚫린 시체의 입에서 힘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흙이다.

흙?

시체의 목소리에 다른 시체가 반응했다. 그 중얼거림은 시체와 시체를 타고 흐르더니, 이윽고 모든 시체가 일제히 '흙' 한마디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직후 그들의 고개가 삐걱 돌아갔다. 눈도 돌아갔다. 그리고 불사자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엇! 칼리스, 떨어져 있으시오!"

시체들의 파도에 삼켜지기 전, 불사자는 칼리스를 번쩍 들어 저 멀리 내던졌다. 느닷없이 내던져진 칼리스는 낙법을 취하며 데구르르 굴렀다.

그 이후, 불사자는 시체들의 파도에 휩쓸렸다.

"라쉬!"

칼리스의 비명은 시체들의 읊조림 아래 파묻혔다.

묻어, 묻어야.

넋을 기려야.

미친듯한 읊조림. 사명만이 남은 외침. 펑퍼짐한 옷을 입은 시체들이 목마른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칼리스는 이를 까득 물었다. 이미 그녀가 해결할 수 있는 숫자를 넘어섰다.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며, 칼리스는 티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조시여! 제발! 라쉬를 구해주세요!"

"…알았다. 잠시 기다려보거라."

마침 티르가 핏방울을 허공에 한가득 띄우던 도중이었다. 시체들 틈에서 불사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뭔가 이상하오!"

개미처럼 바글거리는 시체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이미 갈가리 찢겼겠으나, 정작 불사자의 목소리는 멀쩡했다.

"생각보다 이들, 적의가 옅소! 어쩌면 우리를 공격하려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소…!"

그리고 불사자의 몸이 시체들 틈에서 솟구쳤다. 시체들은 관이라도 이고 가듯, 불사자를 머리 위로 떠받들고는 시체들의 산으로 걸어갔다.

불사자는 시체들 위에서 외쳤다.

"하하! 꼭 왕이 된 것만 같군!"

그리고 쾅, 티르가 튕겨낸 핏방울이 불사자의 아래쪽을 일거에 쓸었다. 선보다는 면에 가까운 공격. 시체들은 산산조각 나고, 지지를 잃은 불사자는 그 아래로 쿵 떨어졌다.

불사자가 엉덩이를 문지르는 무렵 티르가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남겨둘 이유는 없지. 어쨌건, 원혼은 곧 죽을 이들이 마지막에 외쳤던 단말마의 메아리에 불과하니. 미리미리 없애는 것이 도리어 자비이다. 그렇지 않느냐, 휴…."

라고 말하며 티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내가 있던 자리에는 내 겉옷을 두른 시체가 서 있었다.

티르는 고개를 갸웃했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아연실색했으며, 곧이어 경악했다.

"휴?!"

놀란 티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사라져버린 나를 찾을 때.

그때 나는 원혼 서린 시체의 위에 올라탄 채로 시체들의 산을 오르고 있었다.

EP.134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6

펑퍼짐한 옷을 입은 시체는 인간 형상을 어깨에 메는 데 익숙해 보였다. 비록 시체가 되었어도 여전히.

그렇게 나를 들고 산을 오른 지모신도의 시체는 나를 대종사의 유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 시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며 대종사의 유해 앞에 섰다.

가방을 끌러 술을 꺼냈다.

한 잔을 마셔도 얼굴이 붉은 꽃처럼 빨개진다는 백화홍주, 회귀자가 가져온 술 중 가장 비싼 술이며, 동시에 내가 가장 먼저 꿍쳐둔 술.

아깝지만, 대종사의 유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급이 맞지.

나는 백화홍주를 잔에 담아서 유해 곁에 뿌렸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뒤쪽으로 한 번.

그렇게 술을 뿌린 나는, 빈 잔을 쥔 채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발치에 잔을 내려놓고 술병을 살짝 기울였다.

첫 번째에 소리를.

두 번째에 향기를.

세 번째에 맛을.

그렇게 세 번 나눠서 잔을 따른 뒤, 그녀의 앞에 놔두고, 양손을 모은 채 일어나 대종사의 앞에 절했다.

살아있을 적을 기원하여 한 번.

돌아가신 것을 애도하여 한 번.

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들이켰다.

거나하게 취하는 술이 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나의 의식도 흐릿해졌다.

오만하기 그지없소이다.

강이 대지모신의 핏줄이고, 흙과 바위가 대지모신의 살점이라?

어림도 없는 소리.

지모신을 어머니로 모신다고 하여, 그들은 떼쓰는 막내아이처럼 고집을 부리고 있나니.

강은 피부 위를 흐르는 땀방울에 지나지 않으매, 흙과 바위는 부르튼 살갗에 불과하외다.

산은 몸에 난 자그마한 종기일 뿐이며, 지모신의 혈액은 그 흉진 상처 가장 깊이 난 것에서 가끔 모습을 드러낼 뿐이외다.

우리가 강물을 마시고 땅을 경작하기에, 그것이 너무나도 필요하고 중요하기에. 그것이 지모신께도 중요하리라 착각하는 것이라.

사실, 우리는 어머니 지모신에 비하면 개미조차도 안 되는 사소한 존재거늘.

지모신의 피는 화산 아래 흐르는 용암이며. 지모신의 살점은 그 뜨거운 용암을 품은 강철의 바다이외다.

본 적이 없다? 하, 당연하지 않은가.

피부 위를 기어가는 진딧물이 손가락 끝을 지평선으로 여기듯, 우리 역시 지모신의 살점을 감히 목도하지 못하리라.

아마 저 아래. 중심에는 지모신의 심장이 있겠지. 단, 그 모습은 모두가 상상한 것과 또 다를 것이니.

지모신의 신도들이여, 기억하라. 어머니 지모신은 자비로우나 우리는 그녀의 기대보다 훨씬 보잘것없으매.

인간은 지모신의 부르튼 껍질을 파헤쳐 먹을 것을 찾고, 몸에 흐르는 땀방울을 들이키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니.

지모신을 모시는 이들은 겸허함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하찮음을 깨달아야 한다.

위대하고 거대하신 지모신께서 우리를 굽어살피고 계실지, 아니면 무심하게 여길지는 모르나.

그 위에 기생하는 우리는.

천부당만부당.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존재는 아닐 터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불락산(不落山).

구름마저도 발아래에 둔 채, 세상의 십분지 일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대지의 최극단.

대종사는 그 정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오만한 것은 소인이었사옵니다."

너무 멀리 있으면 보이지 않듯, 너무 가까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지모신교는 고행이랍시고 산을 오르게 하였다. 높은 산을 오를수록 그 고행에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불락산을 정복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도전했고, 그에 비례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공기가 희박한 산 정상은 힘만으로 도달할 수 없다. 가벼운 몸, 작은 체구, 동시에 수준 높은 기공을 가진 이들일수록 유리하였으니.

이 모든 조건을 만족했던, 갓 가르침을 깨우친 소녀가 불락산 정상을 정복하였다.

그렇게 모든 지모신도의 염원을 달성하였으나.

소녀의 마음을 뒤흔든 건 그들의 칭찬이 아닌, 이 세상에 대한 놀라움이었을 뿐이다.

세상의 위대함을 목도하고, 자신의 겸허함을 깨달은 소녀는 도사의 지위도 마다하고 세상을 떠돌았다. 어머니 지모신에 대해 더 알기 위해 교류하고, 여행하고, 자기 자신을 시련에 빠뜨렸다.

용암 속에 몸을 담그기도, 그것을 퍼와서 용광로에 넣어보기도 하였다.

몇몇 도사는 그녀를 규탄했다. 지모신의 비밀을 파헤치는 그 행위는 교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며, 당장 멈추고 돌아오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렇게 부름을 받고 도사들의 앞에 선 소녀.

그녀는 도사들의 눈앞에서 땅을 갈라, 그녀가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날부로 소녀는 대종사라 불렸다. 지모신도 모두를 가르치는.

"…소인 따위가, 누군가를 가르칠 위치에 있지 않았던 것을."

그렇게 말을 거는 심상을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요즘엔 시체들이 자꾸 기대받지 않는 행동을 해서 큰일이라니까, 정말. 죽은 사람인데 심상으로 말도 걸어요."

고유마도는 개인의 심상을 발현시킨 것.

그런 고유마도를 발현시킨 사람 중, 한이 사무친 이들은 죽기 직전에 그들의 심상을 벼려 유품으로 남긴다. 그리고 유품을 쥐는 자를 시험한다.

일종의, 집착이 대단한 원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 세월에 부스러지지 않고 이토록 선명하게 남은 심상은 몇 없지만.

아마도 무저갱 밑바닥에 있어서 보존이 잘 되었나 보지.

"됐고. 시험을 치를 거면 빨리 치르든가."

내 말에 대꾸하듯, 대종사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소인은 이곳에 찾아오신 손에게 한 가지만 묻고자 하옵니다."

투명하고 슬픈 눈동자가 나를 마주한다.

지금 읽는 건 생각이 아니다. 이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책과 가깝다.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가진 채로 써 내려간 심상.

내가 다른 사람보다야 더 잘 읽겠지만, 그래도 별 차이 없을 것이다.

"소인의 미련에 대하여."

직후. 장면이 바뀌었다.

지옥이 눈앞에 있었다.

가장 멀리서 바라본 세상은 그토록 아름다웠으매, 가까이서 바라본 땅은 추악하고 참혹했다.

30만에 달하는 인간이 죽거나, 죽어가거나, 혹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명과 절규가 구덩이 안을 가득 메아리쳤다. 그보다 많은 신음과 단말마가 절규를 가렸다.

대부분은 패왕을 저주했으나, 악에 받친 몇몇은 세상 만물을 향해 원망을 내질렀다. 당연히 그 원망에는 이 구덩이와 구덩이를 만든 대종사, 그리고 그 주인인 지모신을 향해 있었다.

모시는 지모신이 욕보였음에도, 대종사에겐 분노조차 일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분노가 합당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참담한 시선을 보내던 대종사의 곁으로, 위풍당당한 풍채를 지닌 쾌남이 다가왔다.

"하하하! 대단한 힘이야! 혼자서 이만한 크기의 구덩이를 파다니!"

패왕.

멋들어진 수염을 기르고, 태산조차 부술 거력을 지닌. 이 시대의 패자.

갑옷을 차려입은 그는 크게 기꺼워하며 대종사에게 제안했다.

"이봐, 대종사! 우리 군에 종군할 생각은 없나!"

지금, 이 참상을 만들어놓고.

자신을 보고 종군하라고?

경멸과 혐오, 그리고 분노가 솟구친다. 그러나 높은 수양을 겪은 대종사는 그러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절제력은 있었다.

대종사가 대꾸했다.

"…지모신을 모시는 제가 어찌 살생에 관여하오리까."

"누가 이걸로 적을 무찌르라고 했나? 그건 기대도 안 해! 그리고 적을 무찌르는 데 땅 파는 힘 같은 건 쓸모도 없고!"

적을 무찌르는 데 잡다한 힘은 도리어 방해될 뿐이라고, 이 시대 최강의 사나이는 자신만만하게 손을 내저었다.

"내가 매장자라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을 싫어했던 건, 그놈들이 시체 치울 때마다 떽떽 시끄럽게 굴어서였지! 그 때문에 나와 내 귀중한 장병이 땅을 파느라 시간을 끌어야 했다고! 덕분에 미처 쫓지 못한 패잔병이나 놓친 승리가 한둘이 아니야!"

패왕에게서는 한 점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 느껴지는 것은 순수함.

세계 일통과, 그것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나가는 순수한 열망만이 가득했다. 그 발굽에 짓밟힌 이들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하지만, 대종사가 있다면야 땅 파고 시체들 장례 치러주는 건 한결 쉬워지겠지! 그러면 우리도 굳이 매장자들을 욕보일 필요 없고! 대종사도 명예를 지켜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닌가!"

누이 좋고, 매부가 좋다면.

그렇다면, 그에게 죽어갈 이들은?

그녀가 아껴준 시간 동안 패왕의 추격에 죽을 짓밟힐 민초들은?

애초에.

"애초에, 죽이지 않았으면 묻을 일 없지 않았겠습니까."

"뭘? 반란군을 죽이지 말라고?"

"그러하옵니다. 혹 패왕께서 살생을 멈춘다면…."

"대종사도 시시한 소리를 하는군. 좀 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얼굴을 찡그린 패왕은 더 듣기 싫다는 투로 대꾸했다.

"반란을 일으킨 자는 본보기로 처형한다. 이건 상식 아닌가! 죽기 싫다면 처음부터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이걸 모두에게 알려야지! 대종사는 전쟁과 군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어떻게 모른다고 할 수가 있을까.

이 전쟁 동안 그녀가 묻은 시체가 몇인데. 수습할 여력도 없는 전쟁터에서, 산적에게 습격당한 마을에서, 군벌이 학살하고 지나간 땅에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묻었는데.

"일단, 아직 일하는 중이니까 더 묻지 않겠네! 다 끝나거든 고민해보게!"

고민할 것이다.

지모신께 받은 이 힘. 산을 기울게 하고 땅을 가르는 힘으로.

패왕과 그의 군대를 무저갱 밑바닥에 빠뜨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장면이 멈추었다. 내 앞에는 새까만 지팡이가 놓였다. 땅의 검, 지잔이었다.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이 지팡이를 쥐어, 매장자로서 그저 사자의 넋을 기릴 것인지.

아니면 검으로 뽑아 들어, 지모신의 대행자로서 패왕을 벌할 것인지.

"참나."

역사의 한순간. 그 속에서.

"나를 시험하지 마라, 도망자."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멈춘 세상이 다시 움직인다. 숨기려던 과거를 억지로 비집고 읽는다. 의도하지 못한 상황에 심상이 당황한 듯 삐걱거렸다.

그 이후 있었던 일.

눈치 없는 짐승조차도 입을 다문 어둑한 밤.

자신이 만들어낸 참상을 다시 되새기고, 마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대종사는 다시 구덩이 앞에 섰다. 구덩이는 이전보다는 잠잠해져 있었다.

하지만 어두워서일까. 귀를 교란하는 다른 감각이나 소음이 없어서일까. 신음과 비명은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들려왔다.

고민은 길었다. 정말로 길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대종사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그리하여 먼저 해야 할 일을 하러 왔다. 구덩이를 덮고 죽은 이의 넋을 기리는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단, 문제가 있었다.

떨어진 이들이 죽지 않았다.

패왕은 칼을 닦을 기름조차도 아까워했고, 따라서 그들을 산 채로 밀어 넣었다. 30만 명을 다 던져넣은 뒤에 대종사에게 이제 그들을 묻으라고 명령했다.

매장자는 죽은 이들을 묻는 자다.

하지만 죽지 않은 이는 묻지 못한다.

다 묻은 지 반나절이 지난 지금, 거의 다 죽어가고는 있으나.

아직 죽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어차피 거기 빠진 순간부터 시체나 다름없어! 그냥 묻게! 그게 더 편하겠지! 대종사에게도, 포로에게도 말이야!'

패왕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연회 도중이었다.

대종사는 이를 악물고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민은 길었다. 너무나 길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대종사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아직 살아있는 포로를 묻을 것인가, 아니면 연회를 벌이는 패왕을 죽일 것인가.

패왕은 이 시대 최강의 전사.

그녀의 힘이 천지를 뒤집고 땅을 가르는 힘이라도, 패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이 땅 전체를 뒤집어야 한다.

필시 패왕만 죽지 않으리라. 그 휘하 장병 대다수가 휘말리겠지.

그렇다면 죽음을 또다른 죽음으로 뒤덮는 것은, 과연 옳은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대종사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기도했다.

아아. 지모신이시여. 왜 저를 시험에 들게 하나이까.

차라리, 더 고민할 수 없게 된다면.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버린다면-.

"죄송합니다."

푸욱.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대종사의 시간은, 이것으로 멈추어버렸기에.

"당신의 죄를 빼앗아가겠습니다."

등을 꿰뚫고 배를 통해 나온 건, 송곳처럼 날카로운 쐐기.

헛숨과 함께 피를 토해내는 대종사의 뒤로, 슬프게 침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죽음은 타산지석이 되어야 합니다. 패왕의 죄는 그를 몰락시켜야 합니다. 사람은 승왕의 승리를 추앙하며, 그의 덕을 칭송하고, 죄악을 구분해야 합니다."

고통과는 별개로 머리가 맑아졌다. 선명한 정신이 상대의 의중을 정확히 짚었다.

이것은 변명이었다.

그녀의 등을 찌른 이는, 죄책감에 휩싸여 변명하는 중이었다.

"하나, 대종사께서는 마신(魔神)이 되었으니. 그 누구도 마을을 휩쓴 폭풍의 죄를 묻지 않듯, 집과 생명을 삼킨 화마의 죄를 묻지 못하듯. 인간은 당신 앞에서 그저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거기까지 듣고서야, 대종사는 자신의 등을 찌른 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선…지자…."

천신의 사도들.

신이 너무 멀리 있기에 성세를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선지자를 중심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자들. 최근에는 승왕과 패왕 사이를 오가며 교세를 넓히려고 한다던….

어쩌면 그들의 음모일지도 모른다. 대종사는 분노와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어째서 이다지도 기쁠까.

이 선택의 순간에서, 어쩔 수 없이 죽음에 다다른다는 게.

곧 죽는 덕분에, 대종사에게는 한 가지 길밖에 남지 않았다.

"한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대종사가 끊어지듯 말했다. 선지자가 당혹스럽게 대꾸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부탁…입니다. 저를… 이대로… 저 아래… 묻을 수 있게."

못다 한 일을 해야 한다.

아직 죽지 않은 이를 위로하고, 죽은 이를 매장해야 했다.

죽음의 직전, 그녀는 대종사도, 지모신의 대행자도 아닌 한 명의 매장자였기에.

"당신을 찌른 건 우리의 상징이며, 보물입니다. 이것을 빼내면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며, 빼내지 않으면 우리의 흔적이 드러나게 됩니다."

"…제발… 안 되겠습니까…?"

선지자가 당혹해서 말했으나, 죽음을 목전에 둔 이의 부탁은 백 마디 말보다 더 무거웠다. 선지자조차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거렸다.

"아아.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선지자가 고민할 무렵이었다. 저쪽에서 횃불을 든 누군가가 걸어왔다. 혹여나 기어 올라오는 이를 막기 위해 배치된 경비병이었다.

연회에 참여하지 못해 잔뜩 성이 난 경비병은 침입자를 용서치 않으리라.

시간이 없었다. 선지자는 결단을 내렸다.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저를 축복하신 처음의 성녀시여. 못난 저는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고 맙니다…."

짧은 기도와 함께, 선지자는 그렇게 대종사를 구덩이 안쪽으로 밀었다.

시체 한복판에 떨어졌으나, 이상하게도 죽음의 한복판에서 그녀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살인보다는 죽음이 그녀에겐 편했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그녀의 앞에 수만 개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분노한 듯, 혹은 체념한 듯, 꺼져가는 생명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눈동자.

그들을 살릴 수 없다.

울분을 풀어줄 수 없다.

복수를 대신할 수도 없다.

매장자로 돌아온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들을 지모신의 가슴 속에 묻는 것뿐.

"대지모시여. 저 또한 당신의 가슴 속에 묻히나이다. 부디, 바라옵건대. 우리를…."

대종사는 양손을 모으고 그녀의 권능을 발휘했다.

세상에서 가장 처음, 지모신의 본모습을 보고, 그 안까지 알아내었던 대종사.

그녀는 최후의 마법을 발했다.

고유마도. 가이아 에고.

"…당신의 품에 품어주소서."

지모신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다. 한 명의 마법이 그녀에게 닿기 전에는.

이제, 지모신은 인간을 총애하게 되었다.

그날, 세상에는 무저갱이 생겼고.

인간은 대지술을 얻었다.

EP.135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7

아직 남아있는 백화홍주를 홀짝이며 심상을 관람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대종사가 죽기 직전에 쓴 최후의 대마법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와, 진짜로 특별했구나. 오만할 만하네."

"아아."

"무저갱은 지옥이 아니었구나? 천국이었지. 이 땅이 무저갱이 되어 사라지는 바람에, 누구도 찾지 못하게 되었고. 덕분에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와 30만을 매장했고."

"아아아…."

"하지만 30만 포로의 원망을 전부 외면하긴 어려웠나 봐? 그래서 선택하지 못한 물음을 담아서 유품으로 만든 건가. 거 참."

지잔은 아직 뽑히지 않았다. 검도, 지팡이도 아닌 그저 새까만 막대기였다.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지잔은 이 심상의 열쇠이자, 이 질문의 문제.

하지만 나는 독심술사, 동시에 중등학교 만년수석이었던 우등생.

문제를 풀지 않고 답을 읽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설문조사 치고는 배경이 참 거창하네."

정답이랄 것도 없었지만 말이야. 따지고 보면 대종사가 땅의 검 지잔이라는 사은품을 내걸고 만든 설문조사인 셈이다.

질문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이라, 심상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않으면 지잔은 힘을 허락하지 않겠지.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의도를 읽고 지잔을 들어올렸다. 새까맣고 장식 없는, 검인지 지팡이인지 모를 막대기.

대지술의 권능을 지닌 동시에, 사람에게 휘두른다면 무엇보다도 흉악한 무기가 될 땅의 검.

"아아, 아아아."

"지팡이인지, 검인지. 잘 모를 디자인이구나."

"어째서, 어째서…."

치부를 들키기라도 한 듯 흐느끼는 대종사, 아니, 정확히는 대종사의 심상이라 해야겠지만.

심상은 애써 만든 설문조사 종이를 찢고 사은품을 멋대로 만지작거리며, 이 시험의 진의를 파악하는 나를 보고는 절망하고 있었다.

"비록 비겁한 예언자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자기도 답을 내리지 못한 문제를 두고 산 사람을 시험하는 건 좀 선 넘지 않나? 아, 건방지다는 건 아니고. 말 그대로 생과 사의 선을 넘었잖아."

여전히 고개를 처박고 오열하는 심상을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품에 남겨둔 심상이라 하여도 죽은 자의 메아리에 불과하다. 내 말에 대답할 리 없는 것이다.

나는 지잔을 휘적휘적 저으며 말했다.

"이미 가신 몸이니, 인사는 필요 없겠네. 멀리 마중 안 나갈 테니까 안녕히."

그렇게 의식을 돌리려던 때.

"시험당하는 것은…. 소인이었사옵니까."

"아잇, 깜짝이야! 간 떨어질 뻔했네!"

대종사의 심상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요즘 시체는 정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니까. 왜 갑자기 깨어나서 말을 거는 거야? 설마 1300년 전 의식이 아직도 남아있어?

"무저갱이라서 그런가? 시체고 사념이고 묘하게 이상하단 말이야. 너무 보존이 잘 되어있고, 사념이 읽힐 정도로 명확하기도 하고."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대종사의 배를 뚫고 나온 십자가를 노려보았다.

"아니면 저 십자가 때문인가…."

그 존재 자체가 오리무중인 성황청의 권능. 어쩌면, 저건 지연된 예언처럼 1300년의 시간을 넘어서 나에게 물음을 전해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잠시 십자가를 뚫어지게 노려보았으나, 그래도 바뀌는 건 없다. 나는 무익한 일에 신경을 끄기로 하고 대종사에게 집중했다.

"그러면 일단 산 사람으로 취급해야 하나."

내가 깊은 고민을 하는 때. 절규하던 대종사의 심상이 고개를 들었다.

호수처럼 투명한 눈과 거기서 흐르는 한 줄기 강이 덧없다. 표정에서는 시간을 뛰어넘은 슬픔과 고뇌가 엿보인다.

대종사의 심상은 슬피 울며 나에게 애걸했다.

"소인은, 결국 선택하지 못하고 미루다, 결국 내몰렸사옵니다. 소인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도망친 끝에,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되었사옵니다. 소인은 그곳에서 도망치면서… 편해졌으나, 언제나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미련을 두고 있었사옵니다."

"후련하게 가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어요. 편하게 갔으면 그걸로 된 거지."

"그래도… 되는 것이옵니까? 소인이 죄로부터 도망쳐도 되는 것이었사옵니까?"

대종사의 단말마와 같은 외침에, 나는 그 눈을 마주하며, 희미하게 느껴지는 사념을 향해 말을 걸었다.

"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앞두고 도망치는 건 보장된 하나의 길이에요. 저는 도망치려는 자를 싫어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지."

"그렇사옵니까…."

"단, 죽음을 도피처 삼는 이들은 빼고요."

심상이 입을 텁 다물었다. 나는 대종사의 심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죽음이 좋은 도피처 같죠? 아무도 찾으러 오지 못하는, 그 잘못을 추궁하지 못하는, 가장 완벽한 면죄부라도 되는 것 같죠?"

심상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시간 너머의 벽은 내 독심술로도 뛰어넘지 못하니. 젠장, 빌어먹을 권능 같으니.

그래도 다른 평범한 사람처럼, 나는 적당한 공감능력을 발휘하여 읊조렸다.

"네, 맞아요. 세상에는 저승이 없는데 어떻게 죄를 추궁하러 오겠어요? 당신이야 편하죠."

실제로 존재하는 무저갱조차도 이 고생 이 난리를 해서 간신히 찾아왔다. 그럴진대 아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는다면? 그야말로 채무 불이행의 극한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 입장도 좀 생각해주세요. 웬걸, 채권을 받으려고 했더니 죽지 않으면 도착할 수 없는 곳에 있대! 채권자들 속이 어쩌겠어요? 받아내지 못한 것은 누구한테 청구하고요?"

가장 높은 산의 심상에서, 나는 손으로 저 아래를 가리켰다. 이곳과는 달리 가장 먼 낮은 땅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회귀자와 지선.

존재하나, 이 심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들.

"그러니까 지옥까지 따라왔잖아요. 당신이 미뤄둔 채무를 줍기 위해."

"아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한 대종사는 깊게 한탄했다. 차라리 미련을 갖지 못하고 소멸했으면 또 몰라도, 그 미련을 풀고 싶어서 심상을 남겼다면.

이렇게 될 건 예상했어야지.

설문지를 돌려서 그녀에게 내민다. 역으로 시험을 당한 대종사는 무겁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는 대종사를 내려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당신의 선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회귀자의 눈에서 반짝거리던 빛무리가 힘없이 점멸했다. 그 직후.

"크읏…!"

전륜천안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거센 탈력감. 잠깐 힘이 풀린 회귀자의 위로 무너진 콘크리트와 시체들이 쌓인다. 회귀자를 봉인하기 위한 작은 무덤이 생겼다.

싸움 자체는 회귀자의 우세였다. 회귀자는 연이은 공격으로 지선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수세에 몰린 지선은 더욱 강했다. 특히, 머리 위에 마음껏 끌어 쓸 수 있는 콘크리트가 한가득 있다는 점이 컸다. 차라리 하늘이 비어있는 지상이었다면 좀 더 대등하거나 우세한 싸움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선은 위기에 몰리려고 하면 탄탈로스의 콘크리트를 아낌없이 끌어와서 내다 꽂았고, 그 충격에 시체들의 산이 들썩거리며 쏟아졌다.

시체의 산사태였다.

아무리 산처럼 쌓였다고 한들, 그것을 이루는 원소는 단단한 흙이 아닌 죽어간 병사들의 시체. 이토록 거대한 충격에는 견딜 수 없다. 상대적으로 아래쪽에 위치한 회귀자는 그에 휩쓸리고 피하느라 기력을 소모했고.

그러다 결국 지선에게 닿지 못하고 기력이 다하고 말았다.

'…차라리, 시체의 산째 폭풍으로 날려버렸다면. 지선의 발판을 무너뜨렸다면…!'

왜, 그 생각이 힘이 다 떨어진 지금 떠오른 것일까.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해도 늦은 법. 지금 회귀자는 기분 나쁜 시체의 감촉 속에서 끙끙거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아니, 하나 더 있었다.

대종사의 유해 앞에서 몸을 일으키는 나의 모습. 그걸 지켜보는 것.

현실로 돌아온 내 코끝에 알싸한 백화홍주의 향을 느껴졌다. 시체의 산에서 나오는 혈향조차 우습게 가리는 최고가의 독주는 잠시 감각을 마비시키고 내 감정을 고조시켰다.

아아, 좋다. 이게 술이지.

신바람이 난 나는 지잔을 뽑아 들고는 무저갱이 떠나가라 외쳤다.

"다들 꼼짝 마! 이제부터 이 상황은 내가 집도한다!"

우뚝. 여기 있는 모두, 내 행동을 보고는 입을 딱 벌리고 동작을 멈추었다. 마치 왕이 된 것 같아서 만족스럽다.

이 압도적인 전능감. 모두가 나를 주목하며, 내 일거수일투족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쾌감.

내가 의기양양하게 지잔을 들자, 회귀자를 저 아래 묻어버린 지선이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평범한 이가 대종사의 유품을…?"

"왜 이런 거로 놀라고 그러세요? 산에 기어 올라가서 거기 있는 막대기 줍는 게 눈 색깔을 바꿔대는 것보다 덜 놀랍지 않아요?"

나는 먼저 오른 등산객이 꽂아 놓은 막대기를 회수한 거랑 다를 게 없다. 이게 30만 구의 시체가 쌓인 시체 산이라는 것과, 그 꼭대기에 있는 게 대종사의 유품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어디에나 있을 평범한 등산객인 것이다.

그러나 지선은 내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소이까. 휴즈 님.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외까?"

"수렵과 채집이요! 주인 없는 물건을 줍는 유서 깊은 행동이죠!"

지잔을 휘둘렀다. 묵직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움직이기 어렵지 않다.

좋아. 이 정도면 선언할 수 있겠군.

"지잔은 이제 제 겁니다.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죠."

"장난이 지나치시외다."

"제가 가끔 장난을 치기는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도 장난을 치지 않아요! 때와 장소는 구분한다고요!"

어이가 없네. 볼멘소리로 불만을 표한 뒤, 나는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기로 했다.

나는 대지와 동등한 자격을 갖춘 검을 받쳐들고는 외쳤다.

"자, 이 무대를 만들어주신 모든 매장자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말에, 펑퍼짐한 옷의 시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이제 몇 남지 않은 그들을 보며 나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역사에 기록된 매장자들. 패왕의 손에 죽은 분들. 사명감을 지닌 채 원혼이 되어, 1300년 동안 그저 시체를 쌓았던 분들."

30만의 시체와 함께 대종사가 사라지고 그 대신 무저갱이 나타나자, 그녀가 시체를 숨기고 도망쳤다 여긴 패왕은 나머지 매장자들을 무저갱 안으로 던져넣었다.

이게 역사에 알려진 패왕의 매장자 학살.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은 떨어지다가 어느 순간 이 무저갱 밑바닥에 도달했다.

매장자들을 맞이하는 건, 배를 관통당한 채 꺼져가는 목숨으로 넋을 기리는 대종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평소에 대종사를 흠모했던 이도, 그저 매장자라는 지위를 가장했던 이들도. 무저갱에 갇힌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고는 30만 장병의 넋을 기렸다.

죽기 전에는 몸으로, 죽은 이후에는 원혼으로.

"여러분이 이행한 의무는 전부 제가 목격하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중은 제 머리를 못 깎고, 매장자는 자기 시체를 묻지 못하는 법! 자격을 지닌 탓에 산 자의 배웅을 받지 못한 여러분 대신, 평범한 인간인 제가 당신들의 넋을 기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외친 나는 대종사의 유품을 높이 들었다. 원혼만이 남은 시체는 시선으로 지잔을 쫓았다.

죽은 뒤에도 사명을 잊지 않았던 모든 이들을 향해 나는 소리 높여 외쳤다.

"아직 살아있는 제가, 길을 가다 오래된 무덤을 발견하고는, 산 자의 의무에 따라 조촐하게나마 차례를 지내고 갑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모두 편히 쉬세요."

지잔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 직후.

시체들은 일제히, 실 끊어진 연처럼 쓰러졌다.

내가 아니라, 다른 평범한 이들이 추모했어도 안식을 찾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건, 오직 그들을 위한 예식뿐.

30만의 시체를 일일이 매장했던 그들은 지모신의 뜻을 따르는 매장자이기에, 누군가에 의해 매장되지 않고서야 차마 눈을 감지 못했던 것이니.

내가 그들의 눈을 감기고 다시 허리를 폈을 때.

나의 앞에는 지선이 서 있었다. 그녀는 조금 뻣뻣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소인 대신, 대종사와 그분을 따른 이들의 넋을 기려주셨구려."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게 이 지잔을 가진 자의 의무이니까요."

상쾌한 미소와 함께 건넨 대답에 지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EP.136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8

'…묘하게 나를 탓하는 것만 같군.'

그야 당연하지. 기분 나쁘라고 말한 거니까. 지선이라는 분이 시체를 보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쌈박질이었잖아?

그래도 수양 높은 도사답게 지선은 표정을 수습하고는 나를 향해 요청했다.

"그것은 지모신교의 대종사가 만들어낸 유품. 소인은 그것을 건네받기를 바라외다."

"싫은데요. 저는 유품의 시험을 통과했어요. 그러면 유사 이래로 존재했던, '주인 없는 물건 가장 먼저 줍는 사람이 주인!' 룰에 의해 이 지잔은 제 거잖아요."

갑작스레 생겨난 욕심 같기도, 혹은 정당한 선언 같기도 한 말이었다. 물론 지선에게는 전자로만 들렸겠지만.

"억지 부리지 마시외다. 불초 소인은 부족하나마 선(仙)자를 허락받은 지선. 모든 지모신도를 대표하여, 그것을 돌려받기를 청하외다."

"지선 님이야 말로 억지 부리지 마시죠? 저는 세상에서 제일 평범한 인간.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이건 제 것이라고요."

지잔이 부르르 떤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외치는 것 같다.

요즘 죽은 것들은 참 이상하다니까. 시끄러워서 한 대 꽁 때렸는데 내 손가락이 아팠다.

'눈앞에 있는 유품을 보고 갑자기 욕심이 동했나? 이래서 죄수의 성품은 믿을 게 못 되군.'

짧게 혀를 찬 지선은 나에게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다. 이게 안 통한다면 힘으로 가져갈 심산으로.

"소인은 이 근원에 닿기 위해 20년, 자그마치 20년 동안 일해왔소이다. 탄탈로스조차 소인이 만든 것이오, 이 땅에 직접 내려와 소인이 땅을 뒤집었으니. 소인의 공로가 가장 크외다."

"아, 지분으로 나누자? 지모신도보다는 모험가 같은 발언이네요!"

지선의 눈이 꿈틀거렸다.

모험가. 자칭 트레져헌터, 타칭 도굴꾼. 유품이나 보물을 찾아다니며 유해를 뒤집어 놓는 '모험가'라는 표현을 지모신도에게 쓰는 건 둘 중 하나다.

무지의 소치, 혹은 지금부터 서로 갈등을 빚어보자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계산된 도발.

"무저갱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했죠? 그러면 됐네요! 이 지잔을 든 제가 무저갱을 없앨게요! 그리고 이거 내가 가지고! 딸꾹! 이야, 횡재했네! 횡재했어!"

"혹 취하셨소이까?"

"아니요? 전혀 안 취했는데요? 끄윽 끅. 캬, 기분 상쾌하네! 여기서 이런 보물을 주울 줄은!"

들떠서 이것저것 주워삼는 나를 두고, 지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뻗었다.

"취하신 모양이로구려. 그렇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그렇게 내 손에 쥐어진 지잔을 낚아채려는 지선. 그녀의 손가락이 지잔을 움켜쥐려는 때.

빙글. 지잔이 살짝 뒤집히며 지선의 손을 동그랗게 밀어냈다.

밀릴 리 없다.

지선의 몸은 대단히 수준 높은 기공으로 가득 차 있으며, 걸음마다 대지술을 응용한 기공으로 대지에 흩뿌려 발밑에 뿌리를 박는다.

이게 그녀가 넘어지지 않는 이유.

경지에 이른 곤기공과, 그것을 수련하며 단단해진 감기공을 몸에 지닌. 그야말로 살아있는 고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목은 대지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리니.

'아니?!'

끼기기긱.

반동 없는 검, 지잔이 그녀의 팔을 자연스럽게 비껴낸다.

지잔은 나에게만 가벼운 검. 타인이 느끼는 지잔의 무게는 가히 태산과 같다.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세상에서 가장 큰 바위의 무게를 지닌 검이다.

힘 싸움? 그런 건 없다. 저항? 하지 못한다.

이 지잔을 들고 있는 한, 나는 '힘'에서 밀리지 않는다. 그들의 힘은 지잔의 무게에 삼켜지므로.

그렇기에 지잔은 반동 없는 검이다. 내 손에 있으면 지팡이이긴 하지만.

'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힘을 휘두르도록 허락받았다는 말인가…? 어째서?'

내가 간단히 팔을 떨쳐내자, 지선의 눈이 경악과 함께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내 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정말 지잔의 주인일 수도 있다는, 자격지심에서 생겨난 두려움.

지선은 한껏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휴즈 님이 어떻게 유품의 선택을 받았는지 모르나. 다시 한번 요청드리겠소이다. 소인에게 그것을 넘겨주시외다."

"이제 눈높이가 좀 맞네요. 어때.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셨어요?"

"하문하시외다. 소인은 언제나 경청할 준비가 되었소이다."

"아하하. 거짓말하지 마요. 자기만이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데 경청은 무슨. 소 귀에 경 읽기겠지."

말을 들어도 발끈하지 않는다. 이제 알아챈 것이다. 내가 가진 자격을.

그 앞에 콘크리트 건물이 있어도 쉽게 밀어내는 지잔은, 나에겐 고작 조금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체감상 안에 칼 숨겨뒀던 마술 지팡이와 비슷한 정도다.

나는 지잔을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요즘은 마법이 발달한 나머지 땔감 걱정도 없어서, 평범한 가정에서도 누가 죽으면 그냥 화장한다죠? 그런 시대에 시체를 몇이나 묻어봤어요?"

"…우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많이 묻어보았소이다."

"그런 것치고는 시체 다루는 일에 익숙하지 않던데요?"

"억지를 부리시는구려. 소인이 어찌 시체가 익숙하지 않다는 말이외까?"

이 시체들의 산 위에서도 태연한 모습을 보라는 듯 양팔을 펼치는 그녀에게.

나는 정확히 그 점을 지적했다.

"바로 그 점이요. 태연히 시체를 밟고 있는 거."

내뻗은 팔이 뻣뻣하게 굳는다. 지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라 하셨소이까?"

"어째서. 시체를 밟고 태연히 서 있을 수 있는 거죠? 어째서 시체로 된 땅에 기공을 흘려보내 태연히 몸을 지지하는 거죠? 어째서 시체 산을 뒤집어엎는 공격을 태연히 저지르는 거죠?"

회귀자는 시체를 꺼린다. 불사자의 잔해를 뒤집어쓰고는 몸이 잠깐 얼었을 정도다.

그래서 발을 디딜 때도 뒤집힌 탄탈로스를 박차거나, 디딤구름을 만들어서 발을 대거나 했다. 상대의 발밑을 무너뜨릴 생각은 쓰러지기 전까지 하지 못했다.

누구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체를 꺼리는 건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이니까.

"사람은 죽음을 싫어하니까. 그게 타인의 죽음이더라도. 따라서 우리는 시체를 꺼리고, 매장하며 가슴 속에 묻죠. 매장자들은 그 뜻을 받드는 사도들."

그에 비해 지선은.

"하아."

내 한숨에, 지선이 죄지은 학생처럼 움찔거렸다. 그녀의 귀로 내 준엄한 훈계가 꽂힌다.

"매장자로서는 셰이 씨 미만이에요."

비난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는, 담백한 진실로 된 훈계를.

"시체의 산을 보고도 가장 먼저 발을 내디뎠죠. 사명감이 남은 원혼을 보고도 그들을 알아채지 못했고요. 세상에나, 남이 만들어놓은 무덤을 뒤엎기까지."

"그것은…."

변명하려는 듯 입을 뗐지만 정작 하지 못하는 지선. 나는 담담하게 그녀를 평가했다.

"당신, 매장자로서는 실격이군요."

부끄러움과 수치. 그것과 동시에 반발심이 고개를 든다.

나는 지선이 발끈하기 전 양팔을 벌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하지만 괜찮아요! 시체 잘 묻어서 뭐하나요. 당신은 시체를 묻고 넋을 기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잖아요!"

거짓말이 아니다. 이 역시, 내가 품은 진심.

장례를 치른 횟수보다 만든 콘크리트 포대의 수가 백 배는 더 많을 거다.

묻은 이보다 살린 이가 몇 배는 더 많다.

그녀가 만든 건물과 시설은 지금도 군국이라는 나라의 근간을 지탱하는 중이다. 살면서 군국을 욕하는 이들은 보았어도, 지선을 탓하는 이들을 보지는 못했다.

'지선께서 댐보다 먼저 나라를 고치셔야 했는데.'

이런 장난스러운 원망만이 들려올 뿐.

나는 그런 지선을 향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표했다.

"저는 당신을 존경해요, 지선 님. 이건 거짓이 아니라고요. 죽은 자를 위한 무덤을 만드는 것도 대단하지만, 산 자를 위한 건물을 짓는 것에 비할까요? 당신의 손에 묻힌 공병들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당신 덕분에 살아난 공병들이 행복할까요?"

대답은 없었고, 생각은 깊었다. 나는 그 생각을 하나하나 읽으며 말했다.

"당신은 지모신교의 성세를 되찾기 위해 무저갱을 없애겠다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죠."

어쩌면, 그녀도 알고 있을 차가운 진실.

"무저갱을 없애도 지모신을 향한 신앙이 돌아오지는 않아요. 아무리 포장한다고 한들 그건 역사의 흐름이었으니까요."

성황청이 득세하고, 전쟁이 이어지고, 합동 장례식이 유행하고, 마법과 연금술이 발달하면서 땔감 걱정이 줄어든 시기.

사람들은 점차 매장 대신 화장을 선택했다. 성황청은 값싼 비용으로 장례를 대신 치러주었기 때문에, 묻을 땅도 관 짤 돈도 없는 가난한 이들은 성황청에 장례를 부탁했다.

그렇게 점차 매장자는 수요를 잃었다.

그 시기 승왕도, 패왕도 나란히 지모신교를 꺼린 이유가 뭘까. 그 전까지라면 몰라도, 대종사 이후 지모신교는 확실한 기적을 지니고 있었는데.

패왕은 귀찮아서라고 퉁 쳤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닐 터.

"그냥 죽음이 너무 많아진 거죠, 뭐. 땅도 좁고, 묻기도 힘들고, 전쟁하느라 바쁜데 매장자랍시고 신원 미상의 존재들이 돌아다니면 어쩌겠어요. 확실히 귀찮죠."

천신교는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포장하지만, 그냥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지금 지모신교의 성세가 잠깐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건 오래된 고집을 꺾었기 때문이죠. 어느 나라를 편들지 않겠다는 고집을 꺾고, 죽은 이들의 무덤 대신에 군국의 기반을 다진 덕분에."

군국이 그들을 불렀을 때, 지모신도들은 경계했다. 예로부터 종교가 나라의 부름에 응하는 건 금기였으며, 불려갔다가 싹쓸이를 당한 패왕의 예도 있었으므로 더욱 거부감이 심했다.

그러나 지선은 강행하여 군국과 지모신교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 딱딱한 군국이 명예직이라지만 별을 달아주었고,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모신도는 점차 인정을 받았다.

"정확히는, 지선 님이 열심히 일하신 덕분에. 당신이 살린 목숨이, 당신이 만든 시설이, 당신이 이룬 업적이 곧 성세라고요. 없어졌던 성세가 '돌아온' 게 아니라. 지금 새로이 '만들어진' 거예요."

낯부끄러울 정도로 한껏 칭찬을 건네준 뒤, 나는 살짝 몸을 틀어서 대종사를 보여주었다.

이 시체의 산 위에서 공손히 무릎을 꿇은 대종사는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홀로 외로이 죽어가며.

그에 반해, 묻는 자보다는 짓는 자에 가까운 지선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녀는 나아갈 뿐이다. 그렇기에 넘어지지 않으니.

"당신은 대종사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했지만, 정말 그래요? 1300년 전 지모신교의 대종사와, 지금의 당신. 무슨 공통점이 있죠?"

지모신교라는 이름만 같고, 쓰는 힘이 비슷할 뿐.

너무나도 다르다고. 나는 그 사실을 자각시켰다.

"그러니까. 휴즈 님의 말씀은 그것이로구려."

숨을 크게 들이쉰 지선은 대종사의 앞에서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소인은, 지잔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요. 평범한 모든 이들과 동등한 자격이 있는 거죠."

"그러니, 소인은 이 유품의 정당한 소유자가 아니라."

"주워야 하는 거죠.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좋소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내 입을 통해 자기 욕망에 진실로 마주하게 된 지선은.

"휴즈 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확실히, 소인은 지잔을 앞에 두고 보이지 못할 꼴을 보였소이다. 무덤을 더럽히다니. 왜 스승님께서 교만을 주의하라 경고하셨는지 알겠구려…."

한결 솔직해졌다.

"하나. 소인은 대지모신을 모시는 이. 대종사의 유품이자, 이 비사를 담은 그 증표가 필요하외다. 흩어진 신도를 모으고,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 성황청의 죄를 묻기 위하여."

그러니까, 본색을 드러냈다는 뜻이다.

"그걸 내놓으시오."

'주지 않는다면, 힘으로라도 가져갈 것이니.'

나는 크게 웃었다.

"아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당연하다. 행동하는 데 자격 따위는 필요 없다. 능력의 부족 말고 무엇이 한계를 결정짓는다는 말인가.

이미 죽은 이를 대변한다고? 감히 누가 그럴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대변한다고. 그것도 1300년 전의 일을.

"하하. 아주 좋아요. 저는 이런 솔직함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차라리 이렇게 말씀하셨어야죠!"

"허면. 주시겠소이까?"

"가져가세요!"

지잔이 든 손을 냉큼 내밀었다. 그러자 저 아래 시체와 콘크리트에 깔려 끙끙거리던 회귀자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주면 안 돼!"

아, 뭐야. 갑자기 억울하네.

네가 외친 탓에, 내가 네 말 듣고 마음을 바꿔서 안 주는 것처럼 보이잖아.

사실 아직 줄 생각 없었는데!

지선의 손아귀가 허공을 움켜잡았다. 내가 절묘하게 지잔을 움직여 그녀의 손을 피해낸 것이다. 힘 빠진 소리가 났다.

지선의 눈가가 움찔거렸고, 내 얼굴에는 환희가 깃들었다.

"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EP.137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9

지선의 손이 연달아 허공을 움켜쥔다. 나는 손끝을 살짝살짝 움직여 지잔을 낚아채려는 손길을 피해냈다.

'오른쪽, 왼쪽, 위쪽.'

그렇다면 나는 그 왼쪽, 오른쪽, 아래쪽. 아, 물론 상대 입장에서.

손이 헛되이 허공을 움켜잡거나, 손목에 지잔이 부딪히거나, 아슬아슬하게 지잔을 놓쳤다. 심리전에서 연전연패한 것이다.

아, 좋다. 나만 이기는 싸움. 이게 진짜 심리전이지.

'그렇다면, 아예 손을…!'

연달아 심리전에 패배한 지선은, 아예 팔을 크게 휘둘러서 내 손 쪽으로 뻗어왔다. 지잔의 변화는 내 손에서 시작되니, 나의 손을 움켜쥐어 지잔을 빼앗을 참이다.

"어허. 반칙이죠."

지잔은 반동이 없는 검. 슬쩍 옆으로 쳐냈을 뿐인데 지선의 손이 그 두 배의 속도로 팅 밀려난다.

지잔을 잡는 방법은 오직 하나. 적절한 타이밍에 손아귀를 움켜잡는 것. 늦거나 빠르면 손이 튕겨나갈 뿐이다. 힘으로 받아내는 선택지 따윈 없다.

그렇기에 지선도 애를 먹는 것이고.

주먹을 까드득 쥐며, 지선은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소인이 이에 어울려주는 것은, 휴즈 님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였소이다."

"저도 알고 있어요."

"지잔을 들었다고 휴즈 님이 무적이 되는 것은 아니니. 더 다치기 전에 이쯤 하지 않겠소이까."

그건 맞다. 지금 지선의 머릿속에서는 나를 다짐육으로 만들 계획이 수십 가지가 넘게 있다.

예를 들어 머리 위 콘크리트를 연달아 내리찍거나, 내 발판을 터뜨려버리던가, 아니면 또 공간진 같은 기술로 나를 끌어당기던가.

아니. 애초에 그냥 작정하고 가까이 붙으면 나는 끝장이다.

지금이야 손끝을 까딱까딱이면 지잔이 휙휙 움직이니 어찌저찌 피하고 있는 거지,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내 손보다 빨리 움직이면 그날부로 내 장례식이다.

손에 쥔 게 카드였으면 모를까, 강철 지팡이라 속도를 못 따라가거든.

그러니 어떻게든 규칙이 있는 심리전으로 유도해야 한다. 나는 지잔을 연달아 내밀면서 지선을 약올렸다.

"아, 가져가라니까요. 왜 못 가져가고 그래요? 내가 꽁꽁 숨겼어, 아니면 죽어도 안 주겠대? 능력껏 가져가라니까?"

"…좋소이다. "

투쟁심이 솟아난 지선은 양 주먹을 쥐었다. 드디어, 양손을 쓰려는 모양인가!

'손은 눈속임. 기공으로 발아래를 흔든다.'

그러면서 발을 높이 든다. 발판을 흔들어 나를 날려보낼 셈이다.

내가 그 충격으로 지잔을 손에서 놓기만 하면 그 시험을 치르고 들 수 있으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지금은 내가 지잔을 들고 있다고 해도, 이 지잔이 나를 기억해서 다른 이에게 힘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없다.

지잔은 유품이고, 도구다. 나는 그냥 들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그러니까, 시험 문제를 다 적기 전까지는 절대 놓아서는 안 된다. 의도를 읽은 나는 손을 피하는 척, 지잔으로 지선의 다리를 걸었다.

'큭!'

아무리 불도자라고 한들, 대지 자체가 다리를 거는데 버틸 도리가 없다. 지선은 진각을 내지르는 대신 내가 휘두른 지잔을 밟고 뛰었다.

사람 한 명을 칼끝으로 날려 보낸 셈인데, 지잔 위에는 모기가 앉는 듯한 무게감뿐이다. 크, 이게 지잔인가. 힘이 세진 것 같아서 신난다.

"그렇죠. 당신은 넘어지지 않겠죠. 계속, 계속 나아가겠죠. 당신은 쌓아 올리는 자. 무너진 잔해에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자. 죽은 이를 돌보며 그들을 추억하는 건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요."

저 멀리 착지한 지선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지선을 마주하며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무저갱을 없애려고 한 건 명분 챙기기였죠. 나라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는 금기, 그것을 어길 명분. 군국과 공사하면서 실리는 꽤 챙기셨는데, 정작 무저갱을 없애지 못한 탓에 지모신교를 이끌 명분이 부족하셨잖아요?"

거기에다 이 지잔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대종사의 증표이자 땅의 권능 그 자체인 유품이 있는 이상, 대지모신교는 지선의 아래 결집할 것이다.

"그리고 지잔을 들고 성황청에 죄를 물으러 가야죠. 한 끼 줍쇼! 거 지금까지 많이 처먹지 않았습니까! 파이 좀 나눠먹읍시다! 완벽하네요!"

시도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꾹꾹 쌓여왔던 신도들의 울분을 풀고, 성황청과 대등해지니까.

지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정녕 방해하겠다는 것이외까?"

"방해 안 해요! 잡으라니까!"

"그렇다면."

지선의 몸에서 시작된 기공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다. 쿵, 한 걸음 내디디는 것으로 땅이 흔들렸다.

축지. 땅에 기운을 뻗고, 순식간에 잡아당겨 돌진하는 기술. 민첩함보다는 저돌성으로 돌진한 지선은 곧장 나를 향해 주먹을 뻗어왔다.

자아, 지잔으로 막으면….

'막으면, 주먹을 포기한다.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대신 걷어찬다.'

엥.

'지잔의 길이로는 막지 못하는 양방향. 둘 중 하나는 자기 몸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아, 진짜 싫어. 왜 자꾸 심리전을 몸으로 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나 같은 연약한 독심술사는 어떻게 하고.

이게 야만이지, 뭐가 야만이야. 내가 속으로 투덜거릴 무렵.

"흡!"

내 앞으로 긴 은발과 드레스가 휘날렸다. 아주 잠깐 나에게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낸 티르가 양팔을 들어 지선과 주먹을 맞댔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나는 눈을 감았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쾅.

죽은 시체가 다 들썩이는 거대한 충격파가 퍼졌다.

다시 눈을 뜨자, 지선의 몸을 가득 채웠던 흙빛 기운과, 티르의 새빨간 핏방울이 뒤섞여 원형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흙빛 기운은 그대로 땅에 가라앉고 핏방울은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티르에게로 되돌아왔다.

두 여자는 가까이서 주먹을 맞댄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지선이었다.

"…시조여. 공격하지 않겠다 하지 않았소이까."

티르가 대꾸했다.

"네가 먼저 적대하지 않는다면."

"소인은 당신께 적의를 표한 적이 없소이다만."

"그를 향한 적대가 곧 나를 향한 것이다."

티르는 그게 당연한 사실인 양 말했다. 지선이 나를 흘긋 보고는 대꾸했다.

"…나쁜 남자에게 걸리셨구려."

"…부정할 수 없구나. 동감이로다."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이어진 주먹질. 티르는 피하지 않았다. 양 눈에 피를 가득 몬 채로 지선의 주먹을 좇고는 그대로 맞받아쳤다.

순수한 힘과 힘의 충돌. 그리고 이어진 충격파. 티르의 몸이 살짝 뒤로 밀려났으나, 곧 다시 자세를 다잡고는 지선에게 몸을 들이댔다. 급소를 전혀 보호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전투 자체는 나의 우위. 근접전이 익숙하지 않은지, 시조의 힘은 어설프다. 그러나… 불리하다.'

지선은 시선을 티르의 팔에 한 번, 그녀의 몸에 한 번, 발밑에 한 번 시선을 던지고는 계획을 수정했다.

'손실이 크다. 교환이 성립하지 않아. 상대방에겐 아무런 피해가 없어. 거기다….'

아래는 시체 산, 위는 콘크리트 대지. 지금껏 이 땅은 지선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회귀자였을 때. 만일 상대가 티르라면, 아래 있는 시체의 산은 그야말로 흡혈귀를 위한 전장이다.

지금 티르의 혈조술은 자기 몸 근처의 피만 조종할 수 있지만, 지선은 그 사실을 모를뿐더러.

안다고 하더라도 이 땅이 티르에게 유리한 것은 마찬가지.

'떨쳐내는 게 빠르겠군.'

지선은 주먹을 내지르는 척하다가 그대로 몸을 숙여 달려들었다. 판크라치온이다. 허를 찔린 티르는 어긋난 자세에서도 즉시 발차기를 날렸다. 인간의 골격과 자세와는 관계없이 움직이는 듯한, 기이한 각도로 솟구치는 발차기는 주먹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강맹했다.

그러나 위력이 조금 다를지언정 지선의 계산 안쪽이었다.

핏, 지선의 피부가 찢겨나가며 피가 흐른다. 동시에 지선은 티르의 디딤발과, 그 아래 시체 뭉텅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냅다 위로 내던졌다.

"꺄앗!"

땅째로 날려버리는데 버틸 재간이 있을 리 없다.

후웅. 천장으로 날아가는 티르의 모습은 꼭 탄탈로스를 향해 거꾸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쿵, 하고 둔중한 충격음이 들렸다.

그렇게 티르를 날려 보낸 지선은 그 뒤에 있던 나를 향해 성큼 걸어왔다.

"어딜! 멈추어라!"

그때. 뒤에서 선혈의 파도가 그녀의 전신을 두들겼다. 시체와 함께 날아갔던 티르는, 역으로 시체에 있던 피를 쏘아내어 방심한 지선의 등을 노렸다.

콰과광. 어깨와 등, 그리고 다리에 붉은 주먹이 대포처럼 쏟아진다. 혈조술로 쏘아낸 기운. 시체의 산이 펑펑 터져나가며 구덩이가 파였다.

격심한 타격을 받은 지선이 신음을 흘렸다. 지선의 귀걸이가 부르르 흔들리다가, 파직하고 깨졌다.

'…후방을 비워둔 채 지잔과 대치할 수는 없다! 시간이 더 필요해!'

미리 치른 장례를 이용해 잠깐 기력을 되찾은 지선은 혀를 차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허공에 있는 문을 열어젖히듯 양손을 꽂아 넣고는 벌렸다. 끼긱끼긱, 불길한 소리가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들리는 동시에.

탄탈로스가 열렸다.

쩌억. 양쪽으로 갈라진 탄탈로스가 아가리를 벌리고 티르를 삼켰다. 지선의 의도를 읽은 티르가 급히 양손을 휘저었지만 그보다는 대지술의 속도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티르의 몸은 탄탈로스 저 안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구르르릉. 보이지만 않을 뿐, 안쪽에서 콘크리트를 헤집으며 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리 티르라도 땅속을 헤엄치는 건 처음이었기에 시간이 조금 걸릴 듯 싶었다.

티르를 잠깐 무력화시킨 지선이 헐떡이며 나를 보았다. 이제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방해물도 없었다.

"이제 그대를 지켜 줄 사람은 없소이다."

그러네? 맞는 말이라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드디어 마지막 시험을 해야겠네요."

"으아아아!"

그리고 때마침 저 아래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회귀자가 콘크리트 더미를 헤치고 나왔다. 한번 탈진한 뒤 회복한 채라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조금만, 버텨!"

자꾸만 늘어가는 적에 지선의 마음이 급해졌다. 지선이 나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말했다.

"소인은 그대의 시험에 응할 시간이 없소이다. 내놓으시오."

'이제 죽어도 모른다.'

여차하면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 지선. 그때 티르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었던 랄리온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지에게 시달리고, 나비에게 시달리고, 거기에다가 다음은 지선까지. 이 가혹한 대진표에 불만을 표할만한데도 랄리온은 두려움 없이 달려들었다.

지선이 랄리온에게 잠깐 붙들린 사이, 나는 도망치는 대신 지잔을 뒤로 크게 당겼다.

"아니요. 시험은 당신이 치르는 게 아니에요."

지선이 치를 시험은 없다. 그녀는 자기 힘으로 그저 나아갈 뿐이므로.

지금, 시험을 치러야 하는 대상은.

나는 고개를 돌려, 십자가에 박힌 채 무릎을 꿇은 대종사의 시체를 흘긋 보았다. 착각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무릎 꿇은 시체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떨어졌다.

"자. 미뤄둔 시험을 치를 시간이에요, 대종사."

시체의 생각은 읽을 수 없다. 저게 눈물인지, 아니면 착시인지는 몰라도.

이 지잔은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지선이 랄리온의 몸통을 깨부쉈다. 흩어지는 핏물 틈으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지잔을 던지기 직전, 지선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던지려고? 지금?'

정답.

'어디로?'

지선과 회귀자, 그 사이 어딘가.

'갑자기, 어째서?'

그야, 미뤄두었던 시험 때문에.

나는 씩 웃으며, 지잔을 저 멀리 내던졌다.

빙글빙글. 지팡이 같기도, 검 같기도 한 새까만 막대기가 허공을 난다. 누가 저 작은 막대기에 태산과 같은 무게가 있다고 예상할 수 있을까. 그런 대단한 물건도 하늘을 날아갈 때에는 평범한 지팡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궤적을 그렸다.

'나이스 패스… 치고는 너무 아슬아슬하잖아! 똑바로 던져!'

회귀자가 그걸 보고 착지점을 향해 달렸고, 지선도 곧장 땅을 박찼다.

'잡아도 시험을 치러야 한다! 바로 쓰지 못할 터! 하지만, 대지술을 다루는 나라면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아니, 몇 번을 말해.

당신 시험지 아니라니까.

-정녕, 이리하셨어야 했사옵니까….

십자가가 부르르 떤다. 그 끝에서 울린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요. 선택해요. 이번에는 쉽죠? 그저 당신의 힘을 쥘 이만 선택하면 돼요."

-아아…. 결국 죽어서도 도망치지는 못하였던 것이옵니까.

"도망치지 못한 게 아니죠. 당신이 남긴 거니까. 흔적을 남기길 원하지 않았다면 유품을 남기지도 않았겠죠."

-가혹하십니다. 정말 가혹하십니다….

날아가는 지잔이 부르르 떤다. 그 아래로는 회귀자와 지선이 달려들고 있다. 밑으로 내달리는 지선이 미묘하게 더 가깝다.

이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지선이 손에 넣을 것이다. 지모신교의 부흥을 위해 끝없는 투쟁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결국 부흥시킬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 자신이 죽을지 몰라도.

그에 비해, 회귀자는.

-정녕, 저 소녀가 미래를 보았다고. 죄악의 왕과 맞서려 한다고 하였사옵니까.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자유예요. 당신이 선지자에게 들었던 것처럼 보장되지 않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미래죠."

결국, 미루었던 선택이 다시 한번 도래했다.

더 나은 것을 꿈꾸는 선지자에게 맡기고 묻을 것이냐.

아니면, 전신에 새빨간 피를 묻혀서라도 앞으로 나아갈 것이냐.

-아아. 참으로 가혹하십니다.

과거의 대종사는 선택 아닌 선택을 했다. 우물쭈물하다가 선지자에게 살해당해, 기회조차 잃고 무저갱 속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정녕 이것이 훗날의 실수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결국 패왕의 장병을 묻지 못했다. 계속 내몰리기만 했을 뿐이다.

만일 그녀가 자기 의지로 패왕의 10만 장병을 묻어버릴 수 있는 굳은 심지가 있었다면 세상의 역사가 달라졌겠지만.

그럴 이였다면 30만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가슴 아파하진 않았겠지.

-저는… 죽음이 슬픕니다. 시체가 두렵습니다. 예정된 파멸이 끔찍하게도 싫습니다. 피에 젖은 흙 위에 지어질 찬란한 왕궁보다, 무덤에 핀 작은 꽃 한 송이가 더 좋습니다.

툭. 날아가던 지잔이 궤적을 비틀었다.

지선의 눈도, 회귀자의 눈도 커졌다. 이 작지만 확실한 뜻은, 순전히 지잔의 의지.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비상식적인 움직임.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약한 저 자신을 위해서.

그 끝에 지잔이 선택한 쪽은.

회귀자였다.

-저는 죽음을 묻겠사옵니다. 지모신의 품속에.

그 의지를 끝으로, 대종사의 배를 관통한 십자가가 밑동부터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시간을 고정하던 성황청의 보물이 사라진다. 지금껏 팽팽하게 감아둔 시간을 올올히 풀어헤치는 것처럼, 십자가 쐐기의 날카로운 날이 급속도로 녹슬며 시간 앞에 사그라진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흔적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안녕히 가세요, 초리네. 최초의 대지술사이자 최후의 매장자. 그리고 차마 신이 되지 못한 한 명의 인간이여. 당신의 의지는 죄와 함께 소급되었어요. 지금 당신의 선택 덕분에, 그때의 당신은 미련을 풀고 죄를 되찾았어요."

그때 못다 푼 한, 내리지 못한 선택은 오늘 이루어졌다. 이제 편히 잠들 수 있으리라.

"당신은 10만 장병의 죽음이 되지는 못했지만, 30만 포로의 넋을 위로한 좋은 매장자였어요. 지모신의 품 안에서 편히 쉬시길."

-감사합니다….

그렇게 점점 저물어가던 대종사의 의식이 수평선 너머에 잠기고.

못다 끝난 이야기는 시간을 넘어서 완성되었다.

EP.138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마무리

지잔이 셰이의 손에 들렸다.

본래 시험을 치러야 하나, 웬일인지 지잔은 심상을 보여주는 대신 침묵했다. 대신 무게를 온전히 회귀자에게 맡긴 채 가만히 숨을 죽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호재다. 셰이는 지금 지잔을 들 수 있다.

"지잔…!"

승리를 직감한 셰이였으나, 지선은 그리 생각지 않은 모양이었다. 셰이의 손아귀에서 지잔을 낚아채려는 듯 손아귀를 뻗으며 돌진해왔다.

그러나 셰이는 긴장하지 않았다.

지선의 손에서, 지잔은 산을 기울이고 땅을 가를 거대한 힘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선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카운터이기도 했다. 특성상 그녀 본신의 힘은 결코 지잔을 넘어설 수 없기에.

'이게 내 손에 있다면, 필승이야!'

힘의 차이를 보여야 한다. 저 넘어지지 않는 자가 포기하고 단념할 수 있도록.

셰이는 지잔을 내밀며 외쳤다.

"지선! 멈춰!"

지선은 발구름으로 답했다.

발밑이 흔들린다. 충격이 다가오기 전 셰이는 다급히 지잔을 땅에 박아넣었다. 대지를 타고 흐르던 진동이 지잔에 삼켜졌다.

그러나, 그러느라 무방비가 되었다. 텅 빈 상체로 지선이 다가왔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건 천앵뿐.

'이러면 어쩔 수 없어.'

셰이는 천앵을 쥔 채 자세를 낮췄다.

'베어서 진정시키자.'

본래 셰이는 이 세상 최후의 용사였다. 하늘의 검과 땅의 검을 동시에 쓰는 웨폰마스터. 그녀의 기량이 다른 이들에 비해 압도적인 건 아니었으나, 두 검의 힘을 그녀만큼 끌어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지잔과 천앵을 겹친다. 새카맣고 묵직한 중검 위에 얇고 날카로운 세검이 얹어진다. 대척점에 있다 여겨질 정도로 다른 두 검은, 검집을 만난 검처럼 하나가 되었다.

무게 없는 검, 천앵의 본질은 드높은 창공. 공간을 압축하여 벼려낸 얇은 세검.

반동 없는 검, 지잔의 본질은 굳건한 태산. 땅을 그러쥐어 뭉친 두꺼운 몽둥이.

지금껏 천앵만 사용하였으나, 창공은 대지가 있어야 바로 세울 수 있으며 땅은 하늘에 의해 변화하고 흐르니.

지잔이 상대 손에 들어갔다면 모를까. 셰이의 손에 쥐어졌다면. 멸망 직전 인류 최강의 전력이던 그녀에게 두 자루의 검 모두가 들어왔다면.

비록 지치고 힘든 몸이라 할지라도.

승리는 결정되었다.

지잔을 검집으로 삼아 천앵을 겹치고.

압축된 공간을 단숨에 뿜어낸다.

반동 없는 검, 지잔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포대. 천앵의 웅혼한 힘을 온전히 앞쪽으로 쏘아냈다.

천지검곤. 오의.

지평선 쪼개기.

평생 닿지 않을 것만 같은 평행선도 영원에 달하면 결국 하나가 된다. 최소한, 그리 보인다.

저 아득히 머나먼 곳. 그곳에는 하늘도 땅도 맞닿아 평화로운 선을 그린다. 아름답고, 장엄한. 태초부터 존재했을 하나의 직선.

그것을, 세로로 쪼갠다.

공간이 비스듬히 잘려나갔다.

지선의 오른팔도, 칠흑 같은 어둠도, 묵직한 공기도, 탄탈로스조차도. 벼락처럼 솟구친 참격을 버티지 못했다.

귀가 먹먹해졌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무저갱에서 아득히 멀리서 덮쳐오는 소리가 난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천장이 쪼개지고, 그 틈으로 하늘이 비쳤다.

해가 갓 저문 듯,

그 틈으로 잠깐 보이는 보랏빛 하늘. 빛이 어둠으로 바뀌기 직전에만 보여주는 번지는 듯한 유채색.

잠깐 난 틈으로 보였던 하늘은, 들썩이던 천장이 다시 내려앉으며 닫혔다.

"…하."

지선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툭, 뒤늦은 소리가 시쳇더미에서 들려왔다.

천앵에 베인 지선의 오른팔이었다.

주인을 놔두고 데구르르 굴러간 오른팔이 마침 툭 튀어나온 시체에 걸려서 멈췄다.

깊게 숨을 내쉰 셰이는, 전신에 찾아오는 탈력감을 숨기며 말했다.

"저항하지 마, 지선. 가만히 있겠다 맹세하면, 벤 오른팔은 붙여줄게."

사실 천앵에 남겨둔 여력도 없고, 꽂아 넣은 지잔을 다시 들어 올릴 힘조차 없지만.

원래 뻔뻔한 쪽이 이기는 싸움이다. 셰이는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깔끔하게 베였으니 처치만 잘하면 그대로 붙일 수…."

"어째서…!"

지선은 비통한 얼굴로 외쳤다.

"어째서, 어째서 미래는 전부 너희들의 것이냐…!"

셰이는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은 성황청에게 건네는 게 분명했으나, 정작 셰이도 찔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셰이가 오지 않았다면 지선이 지잔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황청에게 죄를 묻으러 홀로 진군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셰이는 그 미래를 없앴다.

예언이나 예지가 아닌 회귀라는 수단을 활용했지만, 이번 미래에서 셰이는 그녀의 미래를 빼앗아간 셈이다.

"한시라도 쉰 적이 없다! 내 목숨을 아끼지도 않았다…! 비록 타협하였을지언정, 정도를 어겨본 적 없다! 그럴진대, 그들은? 멋대로 대종사를 죽이고, 그 사실을 감추어서까지, 성세를 누리고, 올곧은 척…!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발악할 뿐이었거늘…!"

'어, 음. 그때 지선의 주장은 진짜였구나.'

솔직히 미안하고, 성황청이 너무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쩌랴.

성황청이 마냥 투명한 단체는 아니다. 회귀 동안 크고 작게 그와 관련된 셰이조차도 아직 그들의 내면을 다 안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랬을지언정, 멸망을 막기 위한 의지는 같았기에, 셰이는 그들의 편을 들었다.

"미래를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모든 게 허용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전쟁의 불씨가 되니까 그 죄조차 물어서는 안 된다고? 당치 않은 소리! 우리는, 그저 정해진 미래에 굴복해야 하는가…!"

피를 토하는 듯한 참혹한 절규였다. 회귀자는 적당히 그 심정에 공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나 절규하든, 가만히 놔두었을 때 세상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그렇게 감정을 쏟아낸 지선은 힘빠진 듯이 중얼거렸다.

"죽여라."

그래서 회귀자는 얼굴을 찡그렸다.

"싫어. 너 죽으면 세상 개판이 나."

"성황청이 타격을 입어서? 그것 때문에, 세상이 무너진다고? 정녕 그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네가! 네가 죽어서 개판이 난다고!"

회귀자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너의 추종자나, 군국 시민이나. 흩어졌던 지모신도들이나! 네 복수를 하겠다든지, 아니면 더는 협력하지 못하겠다든지! 어째서 성황청은 그런 뜻 높은 사람을 처참하게 죽였냐고 따지기도 하고!"

괜히 지선의 죽음이 전쟁의 불씨가 된 게 아니다. 일단 그녀는 명목상이나마 군국 준장이었고, 군국민들의 영웅이기도 하였으며, 지모신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

"제발, 죽을 거면 혼자 조용히 죽어! 너 같은 거물이 순교자처럼 죽으면, 그때부터는 이제 아무도 못 말리게 된다고!"

회귀자의 일갈에, 지선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이제는, 그러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나는 자격을 잃었으니. 대종사께서는 결국… 나를 인정하지 못하신 거겠지. 나는 그저… 우리가 있을 공간을…."

"딴 건 모르겠고. 너희가 있을 공간이라면 내가 멸망을 막은 뒤에 만들 테니까. 그때까지 목숨이나 붙여 둬."

"큭큭…."

지선은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잘려나간 어깻죽지를 기공으로 다잡으며, 시체의 산을 느릿하게 거슬러 올랐다.

"오른팔 가져가야지! 붙여준다니까!"

"거기 두어라."

지선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내가 나아간 길이며, 이뤄낸 것이다. 되돌아가지 않겠다. 허물지 않겠다.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여간, 고집은…."

"그리고…."

지선이 힘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종사께서는 너에게 힘을 맡기셨으니, 네가 그 의무를 이어받아라, 대전사."

"그러니까 대전사 아니래도."

지선은 대꾸하지 않고 비척거리며 시체의 산을 올랐다. 그 모습은 꼭 고난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고행자 같았다.

셰이가 지선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였다.

쿠르릉. 머리 위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셰이는 급히 고개를 들었다. 비스듬한 천장, 탄탈로스의 대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혹시 무너지나?'

셰이가 긴장한 채 지잔의 손잡이를 꽉 쥐었을 때.

저쪽 균열에서 티르칸쟈카가 콘크리트 땅을 헤치고는 튀어나왔다. 시체의 산 아래 착지한 티르칸쟈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휴! 휴는?"

다행히 천장이 무너지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셰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까 봤을 때는 멀쩡했어."

"다행이구나…! 어디 있느냐?"

"아까 산 정상에서 이 지잔을 던졌어, 지금 안 보이는 걸 보니 뒤로 넘어졌나 본데. 그 자식, 도대체 뭐하던 놈이야…."

천앵을 튕겨낸 것? 우연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은신술을 간파한 것? 심리전으로 그게 되었다고 치자.

"애초에 뭔가 이상해. 네 심장을 고친 것… 그리고 이 유품, 지잔의 봉인을 푼 것. 지잔의 시험을 치른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 녀석이 건넨 지잔은."

이전 회차, 셰이는 지잔을 잡고 그 심상 속에서 시험을 치렀다. 30만 명의 생매장이 이루어지는 순간, 눈앞에 주어진 지잔. 거기서 이루어진 선택.

셰이가 택한 방법은 간단했다.

지잔을 뽑아 들고는 패왕을 습격했다.

심상 속이지만 패왕은 만인지적.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회귀자는 수련이라 생각하며 성공할 때까지 패왕에게 도전했고.

결국, 심상이 준비한 패왕의 강함이 다 소모되고 나서야. 더 내세울 게 없던 지잔은 마지못해 힘을 빌려주었다. 내재한 대지술의 권능을 쓸 수는 없었지만, '무기'로서는 완벽한 성능을 보였다.

셰이는 그 성능에 충분히 만족했으나….

"지금 느껴지는 이 힘은, 대지술이야."

지금, 셰이는 확신했다. 지잔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도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일단은 무력화시켰어. 저기, 정상에 무릎을 꿇고 있네…."

구르르릉.

다시 머리 위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이 그들의 어깨를 때렸다. 셰이는 입을 탁 다물고 천장을 올려보았다.

"저기, 티르칸쟈카. 아무래도 천장이 조금 이상한데…. 왠지, 아까보다 더 기운 것 같지 않."

우르릉.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균열이 땅끝을 향해 질주하는 말처럼 내달린다. 우르릉, 쿠릉. 천둥 비슷한 소리가 울리며 천장에 벼락 모양의 상흔이 새겨졌다. 부스러진 콘크리트가 빗방울처럼 쏟아지고, 무너진 잔해가 우박처럼 떨어진다.

천장이 무너지고 있다.

하긴, 지선이 아낌없이 끌어다 쓰고, 티르칸쟈카가 저 안을 헤집고, 최후에 셰이가 쓴 기술이 대지를 쪼갰다. 이 난리를 피웠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하다.

셰이가 급히 외쳤다.

"티르칸쟈카! 떨어지는 잔해를 잡아줘!"

"이 모든 대지를 그림자로 지탱하는 건 무리다! 휴, 어디 있느냐? 어서 내 곁으로…!"

"아니! 나를 도와줘. 이 천장을 날려버리게! 이 땅덩이가 떨어지게 두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셰이는 곧장 디딤구름을 만든 뒤 땅을 박차 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지잔을 양손으로 든 뒤, 머리 위로 들어 점차 가라앉는 천장에 갖다 댔다.

"그 검으로 천장을 들어 올릴 셈이냐? 무리다!"

"아니, 돼!"

"…된다니? 어떻게?"

"이 지잔은 엄청난 무게를 지닌 검이야! 비록 이렇게 생겼지만, 탄탈로스와 비견될 정도로 무거울걸!"

"그런데 너는 어떻게 들고 있느냐?"

셰이는 권능에 대해 설명하는 무익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게 이 지잔이 좋은 이유래!"

"요새는 별 신기한 검도 있구나…."

티르칸쟈카가 신기한 듯이 중얼거렸다. 사실 티르칸쟈카 탄생 1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유품이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아. 대지술을 쓸 수 있는 지금. 이 땅 통째로 들어 올리겠어! 지금이라면 가능해…!"

흘긋 살피니, 저 멀리 나비와 아지가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라쉬와 칼리스, 나비와 아지는 반대쪽 벽에 바짝 붙어있어서 잔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큰 덩이는 내가 치울게. 작은 것들만 부탁해!"

"오냐!"

비스듬한 천장이 내려앉으며, 테두리에 있던 조명 대부분이 깨지고, 긁히고, 부서졌다. 빛이 점차 사라졌다.

그에 비례하여 사방에서 수많은 흑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곁으로 어둠이 몰려들더니, 하나같이 거대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림자는 빛의 위치에 따라 크기를 달리한다. 몸의 세 배 되는 그림자를 뒤덮은 거대 흑기사들이 명령에 따라 떨어지는 잔해를 받아냈다. 사람 머리만한 콘크리트 조각이 그림자에 닿자 물에 잠긴 듯 느려졌다.

"좋아, 간다!"

건곤류, 땅기둥.

그렇게 검을 휘두르려던 셰이는, 문득 팔을 멈췄다.

분명 지잔의 무게는 태산과 같을 텐데, 태산에게도 탄탈로스의 무게는 유의미한 모양이었다. 회귀자의 손에 까마득한 무게가 실렸다.

지잔이 나아가지 않았다.

"으읏…!"

탈진한 몸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부족한 기력이 비명을 토했다.

그래도 회귀자는 이를 악물고는 힘을 끌어냈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지만, 회귀자의 기공은 이럴 때 힘을 발휘한다.

몸에 동작을 새겨서, 억지로라도 움직이게 하는 기공, 천반경.

천반경, 공격식. 세로 베기.

"이이이잇!"

회귀자가 검을 휘둘렀고, 그 의지에 지잔이 호응했다.

탄탈로스를 이루는 땅은 축복받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것. 대지술이 새겨진 결과이니.

그것이 콘크리트임에도 지선이 손쉽게 대지술을 쓸 수 있었던 이유.

따라서, 지잔을 든 이는 이 탄탈로스를 움직일 수 있다.

대종사의 마지막 남은 한 줄기 의지가 메아리쳤다. 그 직후.

투우우우웅.

따지자면, 그건 손가락을 튕겨 강철로 된 문을 튕겨내는 듯한 묘기. 평범하게는 절대 불가능할 일.

하지만 이 땅의 특수성과, 지잔의 힘. 그리고 탄탈로스의 설계.

그 모든 게 맞물린 덕에, 셰이의 시도는 성공했다. 셰이는 지잔을 휘둘러 탄탈로스를 '날려버렸다.'

비스듬한 천장이 점점 멀어진다. 테두리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던 조명이, 이 대지가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반짝이는 조명이 점차 작아졌다.

지형지물이 한 인간의 힘에 의해 솟아났다. 비스듬한 천장이 멀어지며, 잠깐 평형을 되찾았다가, 이번엔 반대쪽으로 기우뚱거린다.

그렇게 점차 뒤집어지던 탄탈로스의 대지는 이윽고 점차 넘어가기 시작했다. 거의 다 부서진 인공적인 조명이 빛무리를 흩뿌리며 사라지고.

그 틈으로 하늘이 찾아왔다.

EP.139 다시 보이는 하늘

무저갱이 사라지고 땅이 뒤집혔다. 그날, 땅은 바닥을 되찾고 하늘은 무저갱 안쪽을 비추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의 하늘은 빛보단 어둠에 더 가까웠지만, 세상 만사는 상대적인 법.

무저갱의 끝없는 암흑에 비하면 조명이나 다를 바 없어,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하늘을 되찾았음을 느꼈다.

지잔 하나로 천장을 들어 올린 셰이는 그대로 탈진해서 뒤로 넘어갔다. 힘을 다한 디딤구름이 사라지며 셰이의 몸이 거꾸로 떨어졌다.

티르칸쟈카가 어둠으로 그녀를 받았다. 힘없이 달싹이는 셰이를 보고는 급히 물었다.

"휴는?"

셰이는 조금 서러웠다. 땅을 밀어올렸는데, 그에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에 대해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끙끙거리며 어떻게든 대답했다.

"…찾아야지. 그 녀석이라면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무언가를 하기엔 몸 상태가 너무 나빴다. 셰이는 상체를 들어 올리려다 말고 다시 풀썩 쓰러졌다. 무언가 말하려고 해도 끊어질 듯한 신음만이 입으로 새어 나왔다.

그제야 셰이의 상태를 확인한 티르칸쟈카는 조금 미안한지, 랄리온의 등에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말했다.

"힘들었겠구나. 셰이, 너는 좀 쉬고 있거라. 내가 찾아보마…."

그때였다. 천장이 무너질까 봐 숨을 죽이고 있던 라쉬와 칼리스는 안전이 확보되자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티르칸쟈카는 그들에게 급히 물었다.

"마침 잘 왔다. 혹 휴가 어디로 갔는지 보았더냐?"

라쉬가 대답했다.

"선생 말이오? 먼저 올라간 것 아니오?"

"먼저 올라가? 하늘이 땅으로 막혀있었거늘… 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휴가 어찌 올라간다는 말이냐?"

"그야 모르지!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먼저 올라가 있겠다고 손짓했던걸!"

"손짓했다고?"

티르칸쟈카는 고개를 들어 무저갱 위쪽을 쳐다보았다.

천장이 사라진 무저갱은, 아니, 이제 무저갱이 아니게 된 구덩이는 하늘을 되찾았음에도 꽤 깊었다. 시체 산의 정상에 올라도 지상에 도달하려면 비행에 준하는 상승을 해야 할 것이었다.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티르칸쟈카에게 라쉬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그렇소! 그 이후 사라져서 어떻게 올라갔는지 확인하진 못했지만! 선생이라면 무슨 방법이 있지 않았겠소? 짐승 아가씨들처럼 천장에 매달려 올라갔을 수도!"

마침 지상에서 아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비의 울음도 뒤따랐다. 두 짐승은 오랜만에 맞이한 지상에 기뻐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저 둘은 무저갱 반대편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천장에 붙어있다가, 날아가는 천장을 붙잡은 채 지상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짐승의 왕이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휴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지. 한 가닥 실에 매달려 올라갔을 수도."

"그러지 않겠소? 아니라면, 이곳에 있는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이오? 선생이 장난을 좋아한다고 해도 설마."

그래도 뭔가 하늘을 날아가는 그의 모습은 상상이 안 가서 티르칸쟈카는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다. 휴는 산 뒤편에 있을 수도 있다. 내 그곳으로 가서 찾아보마."

"거, 가시는 김에 지선께 물어보시오. 그분이라면 더 잘 알 수도 있지 않소?"

라쉬가 시체 산 정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지선이 대종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아까 하지 못한 추모를 지금이라도 하려는 듯 몹시 경건한 자세였다.

한쪽 팔을 잃은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건 티르칸쟈카의 관심사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감히 시조를 적대했으면서 팔 하나로 끝났다면 거의 자비를 베푼 것과 다름없다.

"내 살펴보마."

티르칸쟈카는 냉큼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방금 대지가 뒤집어지고 무저갱이 오랜 속박에서 풀려났음에도 그건 지선과는 하등 관계없는 일처럼 보였다. 머리와 어깨에 콘크리트 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채, 지선은 한 손으로 힘겹게 술잔을 세우고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티르칸쟈카가 다가왔다.

먼저 티르칸쟈카는 시체의 산 반대편을 확인했다. 뒤쪽에는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잠시 두리번거린 티르칸쟈카는 이젠 지선에게 물었다.

"여기 보아라. 휴가 어디 갔는지 아느냐?"

지선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의 행방을 어찌하여 소인에게 묻소이까."

"네가 가장 마지막에 그를 본 이가 아니더냐. 묻는 말에나 답하거라."

"조금 전까지, 우리는 서로 다투었소이다."

"승패가 명확하게 갈렸을진대, 패자는 승자의 뜻에 따라야 하는 법. 너는 더욱 성실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큭큭. 촌극이로군…."

짧게 헛웃음을 지은 지선은, 힘겹게 술잔을 놓고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올라갔소이다."

"어떻게?"

"밧줄이 있었소이다. 탄탈로스에 밧줄을 박아넣은 뒤, 천장이 뒤집힐 때 그것을 잡고 올라갔소이다."

"사실이렷다?"

"소인이 거짓을 고할 이유가 있소이까?"

말을 끝낸 지선은 평온하게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모든 것을 다 놓고 초연해진 그 모습에 티르칸쟈카도 더 묻지 않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도 없이 어디를 갔다는 말이냐?"

"말없이 나섰다면, 떠난 것이 아니겠소이까?"

"떠나?"

"이곳에 계속 있다간, 군국의 추격을 받게 될 터이니. 그것을 피하여."

그때였다.

사방이 요란스러워졌다. 동시에, 낯익은 빛무리가 동그랗게 사방에서 비쳐왔다. 혼란에 빠져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땅이! 땅이 솟아났습니다!"

"지진이…!"

"사방에 시체가 가득…!"

"하늘에서 온갖 잡동사니가 떨어집니다! 소령님, 대피해야 합니다!"

"진정해라!"

성난 목소리에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그 가운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목소리 하나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상 사태가 발생하면 자리를 사수한 채, 최소한의 인원을 돌려서 보고한다! 이게 우리 탐색부대의 철칙 아닌가!"

"예!"

"알았다면 다들 자리를 지켜! 무저갱에서 그때 그 악마 같은 녀석들이 또 나오지 않게 막아야 한다!"

지휘관의 목소리에 일사분란하게 흩어지는 발소리. 이윽고, 그들은 무저갱 테두리에서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동그랗게 잘린 하늘에 사람 그림자가 들썩이는 모습은 꽤 위압감이 있었다.

"칫, 안쪽이 안 보인다! 탐조등을 가져와!"

병사들은 어두컴컴한 구덩이 안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들이 탐조등을 찾을 때였다.

"오! 군인들이구려!"

"…칫. 라쉬, 잠시 몸을 숨기겠습니다."

"어? 아, 그렇군! 몸을 숨겨야 한다고 했지!"

칼리스가 모습을 숨기는 사이, 티르칸쟈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탈진한 채 골골대는 셰이, 짐승의 왕은 이미 밖으로 나간 데다 인간의 싸움에 끼어들 것 같지 않고, 불사자는 죽지만 않을 뿐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는다.

'휴를 찾아야 하건만.'

하지만 무저갱 안에는 보이지 않으니. 아마 밖에 나갔을 것이다.

군국에 발각당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먼저 모습을 숨긴 것일까. 칼리스처럼.

'그렇다면, 머지않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겠지.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활로를 뚫는 것.

깊게 숨을 내쉰 티르칸쟈카는 어둠으로 계단을 만들고는 터벅터벅 걸어 올랐다.

마침 다가온 동그란 탐조등이 그녀를 비추려고 했다. 빛이 닿기 직전, 티르칸쟈카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 끝을 꾹 누른 뒤 튕겼다.

쨍그랑, 쨍그랑.

동그란 빛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순간, 조명이 일제히 깨져나갔다. 탐조등을 움직이던 군인들이 뒤로 나자빠졌다.

지휘관이 외쳤다.

"뭔가! 뭔가 접근하고 있다! 다들, 사격태세!"

그렇게 어둠을 두르고 지상으로 걸어오른 티르칸쟈카가 마주한 것은, 물경 삼백에 이르는 군세.

그들은 수십 대의 차량을 몰고 온갖 장비를 대동한 채, 티르칸쟈카와 대치하고 있었다.

무저갱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긴 은발에 새빨간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 군국의 군인들 모두 한순간 얼이 빠졌으나 잠시.

끝없는 땅속에서 솟아난 기이하도록 아름다운 존재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는 각자의 무기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티르칸쟈카 역시 내심 긴장했다.

저들의 무기가 어떤지, 기량은 어떠한지.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가 없던 예전이었다면 일단 격퇴하고 보았겠으나, 지금 그녀의 심장은 뛰고 있었으며 뒤에는 탈출하지 못한 이가 남아있다. 잃을 것이 있다.

'대화를 먼저 시도할까.'

타협을 모르던 시조는, 심장을 얻은 뒤 조금이지만 상실의 두려움을 느끼고는 한 걸음 다가갔다.

물론 티르칸쟈카의 긴장감은 군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통신병! 상황을 보고하라! 통신병!! 제길, 저 땅이 뒤집힌 뒤로 연락이…!"

실 끊어진 연처럼 쓰러진 골렘을 붙잡고 소리치던 지휘관은 골렘을 내던지고는 이를 악물었다.

"대령님! 어찌합니까?"

"어찌하긴! 원칙대로 처리한다!"

이럴 때 있는 게 원칙이라며, 지휘관은 확성기를 빼앗아 들고는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군대다!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일개 개인이 군대를 이길 수는 없다!"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 외침.

그 외침을 들은 티르칸쟈카가 한층 긴장했다.

그녀가 아는 군대는 두 종류였다. 한 명 한 명이 평범한 농사꾼에게 무기나 쥐여줘서 머릿수나 채운, 힘 빼기 위한 용도의 떨거지 군대와.

한 명 한 명이 정예로 이루어져,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잘 드는 칼 같은 군대.

당연히, 티르칸쟈카가 연상한 것도 후자였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그녀에게는 탄탈로스에 들어왔던 이들의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지선, 중장, 대령. 강함이 어느 정도 수위에 이른 이들. 그들만 보다 보니, 약한 이들은 얼마나 약한지 그만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평균의 함정이었다.

"대화를 나누자."

드물게도, 세상을 공포로 물들였던 시조는 저자세로 나왔다. 역사 속의 시조 티르칸쟈카가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다만 불운하게도, 이건 잠깐 겁에 질렸던 부대에게 쓸데없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이 불운은 군부대의 것이었다.

지휘관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항복하라, 교육생! 네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려라!"

"말도 안 되는 소리…."

"명령에 따라라! 따르지 않으면 발포할 것이다!"

타다당.

경고성 사격이 티르칸쟈카의 발치에 꽂혔다. 충분한 위협을 담은 공격에, 자연히 그녀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자신이 있나 보구나. 이 나를 상대로…."

생전 처음 보는 무기들. 티르칸쟈카를 감싼 수많은 총구들. 그리고 똑같은 옷을 입은 군국의 군인들을 보고.

진심으로 임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마."

지금은 해가 지고 난 다음 밤. 그림자가 가득한 대지는 흡혈귀의 공간이다. 붉은 눈이 어둠을 시야에 넣으며 권능을 발휘했다.

사방팔방에서 흑기사가 몸을 일으킨다. 그림자는 그들의 기지요, 병참이니. 그 숫자는 물경 천.

느닷없이 전세가 역전되자 병사들이 당황했다. 지휘관도 혼비백산한 얼굴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쏴! 쏴라!"

투두두두두.

명령에 따라 포화가 불을 뿜었다. 총탄의 비가 흑기사를 찢었다.

그러나 어둠에서 솟아난 흑기사는 총탄을 견뎌내거나, 혹은 흘려내고는 전진했다. 어둠을 치우기에 총탄은 너무 작았다.

인간을 상대로는 어느 정도 유효했을 총탄은 흑기사에겐 농민들이 휘두르는 도리깨보다도 나약했다.

"쓰, 쓰러지지 않습니다!"

"적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지휘관이 다급히 외쳤다.

"아, 알겠다! 이건 환각이다. 실체가 없는 거다! 다들 자리를 지켜! 총탄을 낭비하지 말고…!"

그때, 접근하던 흑기사 하나가 병사를 덮쳤다.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었다.

지휘관이 급히 말을 번복했다.

"다들 뭉쳐! 서로 등을 맞대고 화망을 좁혀라! 그리고 장비! 빨리 조명을 가져와서 비춰!"

병사들은 지휘관을 원망하며 그 명에 따랐다.

EP.140 완벽한 계산

비명과 함께 점차 줄어드는 상대 세력. 굉음과 불꽃을 내뿜고는 있으나, 정작 흑기사들의 손실은 경미하다.

공세에 비해 피해가 적자 도리어 의아한 건 티르칸쟈카였다.

"…음? 무슨 일이지?"

섣불리 칼을 휘두르는 대신, 발목이라도 잡으려고 몸을 던지게 했는데.

상대는 그것을 떨쳐내지도 못한 채 바닥을 뒹군 것이다. 조금 전까지 위협적인 공격을 연달아 쏘던 병사는 접근을 허용하자마자 땅을 굴렀다.

"고작 흙잡, 아니, 흑기사 하나도 견뎌내지 못해…?"

티르칸쟈카가 어찌 알까. 군국이라도 일반병은 평범한 병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는 제공되나, 기공을 유의미하게 다룰 수 있는 건 장교급밖에 없다.

어쨌건. 티르칸쟈카는 주먹을 연달아 쥐었다 피고는 명령했다.

"…덮쳐라."

이제 흑기사는 압박 없이 냅다 뛰어서 병사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화망에 갈려나가는 몇몇이 있었으나, 흑기사는 끊임없이 소환할 수 있는 시조의 가장 기초적인 권능이었다.

물량이 전선을 압박했다. 병사들의 공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대로 가면 밀린다. 전황을 파악한 지휘관은 군장을 착용한 채, 커다란 전투 도끼를 손에 들고 나섰다.

"나를 엄호해라! 본체를 처리하겠다!"

지휘관이 겁도 없이 티르칸쟈카의 앞으로 달려 나왔다. 흑기사가 그를 저지하러 달려들었으나, 잠깐 집중된 병사들의 총탄과 그의 도끼 앞에 스러졌다.

빗나간 총탄 몇몇은 지휘관의 등으로 날아와 꽂혔지만. 그것을 버티기 위한 기공이며 군장이다. 지휘관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는 더욱 돌진했다.

육중한 몸체를 가진 강철인간이 다가오는 모습. 기세만은 웅장하다.

티르칸쟈카는 그와 맞서서 주먹을 들으려고 하다가… 문득 든 생각에 휘두르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받아라! 나의 도끼를!"

그 위로 지휘관의 거대한 도끼가 떨어졌다. 티르칸쟈카는 주먹으로 그것을 받아냈고.

폭.

살갗만 조금 찢은 채로 멈추었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도끼는 손가락 사이에 정확히 끼어 있었다. 검지와 중지, 그 사이를 반 치 쯤 파고 들어간 게 지휘관의 업적이었다. 지휘관은 다급히 기공을 끌어올려 빼내려고 했지만,

"흠. 무슨 자신감으로 나에게 도전하는가 하였더니. 필부의 만용이었던 것인가."

뚝. 티르칸쟈카가 주먹을 돌려서 도끼날을 우그러뜨린 뒤, 그 목으로 손을 뻗었다. 군장까지 착용한 거구가 소녀의 손에 번쩍 들렸다.

"…너는 그나마 쓸만하구나. 그러나 정예…는. 아니었던 거로 하겠다."

티르칸쟈카가 손을 내던졌고, 강철 갑주를 입은 지휘관의 거구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의 몸은 자동마차 위에 떨어져 루프를 풀썩 주저앉혔다.

"컥…!"

"소령님! 으아아!"

그 뒤를 휩쓴 것은 그림자의 군단. 무수한 흑기사들이 병사들을 차곡차곡 접어서 내던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의 산이 작게 쌓였다. 무저갱 안에 있는 산을 미니어쳐로 만든 듯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병사들의 산.

일을 끝마친 티르칸쟈카는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 특별할 것은 없구나."

"오오! 다 정리하셨구려!"

마침 칼리스와 함께 구덩이 바깥으로 나온 라쉬가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그 뒤로는 셰이를 등에 태운 랄리온이 지친 듯 푸르릉거리며 나타났다.

지선을 제외하면, 안에 있던 인물은 다 나타난 것이다. 티르칸쟈카가 다시 주위를 살폈다.

그럴수록 그녀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휴는? 보지 못하였느냐?"

"못 봤소! 이곳에는 없었단 말이오?"

"보이지 않는구나…. 도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설마."

이쯤 되면 깨달을 수밖에 없다. 티르칸쟈카의 머리로 아주, 아주 불길한 상상이 스쳤다.

혹시, 그는 자기 의지로 이곳을 떠난 게 아닐까.

모두가 묘하게 들떠 있던 상황에서, 혼자만 평소와 같았던 그다.

같이 다니자는 티르칸쟈카의 제안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에둘러 대답했다.

그때 자기를 지켜줄 수 있냐고 물었던 것은, 은근한 긍정이 아니었던 것인가.

흐려지는 표정을 본 라쉬가 칼리스를 바라보았다. 칼리스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고, 라쉬는 입을 딱 벌리고는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에이, 설마 그러겠소! 어딘가에서 쫓기고 있겠지!"

"…그러하겠지? 하면, 어디로?"

"일단 주변 한 바퀴를 뱅 돕시다! 정 안 되면 불을 피워서 선생을 부르면 되지 않소! 낮이 되면 한결 찾기 쉬울 거요!"

티르칸쟈카는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구덩이와, 그 구덩이를 들어낸 듯한 탄탈로스가 대지에 늘어져 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구조물에 현실감이 없을 정도다.

만일 저 콘크리트 구조물 뒤쪽에, 안쪽에 숨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만일, 떠났다면….

불길한 상상에 지끈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티르칸쟈카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정녕, 촌극이었소이다."

지선이 말을 끝내고는 대종사의 시체 주위로 술을 뿌렸다. 독한 백화홍주가 정확히 내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왔다.

아차. 코에 들어갔어. 켈록켈록.

"어찌하여 그들을 따돌리려고 하였소이까?"

술 묻은 입술을 핥으며, 나는 시체더미 아래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을 톡톡 두드려 대충 턴 나는 대종사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대로 가다간, 저들을 따라갈 것 같아서요."

"그것이 어때서?"

"저는 비겁한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범하게 유추 가능한 사람이거든요."

멀어지는 생각이 느껴진다.

나는 멀리 흩어지는 그들의 기척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저거 따라가면, 저는 틀림없이 죽어요."

자그마치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싸움이다.

지선과의 싸움. 솔직히 말해서, 만일 지선이 나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달려들었다면?

나는 죽었다. 티르나 회귀자가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사이, 지잔을 들고도 죽을 수 있었다.

생각을 읽는 능력은, 전투에서 상당한 도움은 될지언정, 존재하는 확고한 격차를 없앨 수는 없다.

달려오는 강철을 쳐낼 수 없다. 피해내도 따라붙으면 그만이다. 어떻게든 옷을 붙잡고 내치거나, 사방에 가득 기운을 쏘아내면. 나는 버틸 수 없다.

독심술로는 어디까지나 할 수 있는 범위만 할 수 있게 될 뿐. 진짜 초인들은 나와 다른 세상에 산다.

나는 손에 쥔 카드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저는 태생이 뒷골목이에요. 사람들 틈에 숨어서 조용히 나다니는 게 어울린단 말이에요. 이렇게, 강대한 적에게 정면으로 나서는 건…. 제 몫이 아니에요."

지선이 지잔을 빼앗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면.

충분한 적의로 무장한 채 나를 공격했다면.

나는 그것으로 죽으니까.

"허. 그런 이가 내 앞을 막는다?"

쪼르륵.

내가 했던 것처럼 사방에 술을 뿌린 지선은, 술잔을 세 번에 나눠 다시 채웠다.

"죽는 것을 그리 두려워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소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인간도 동물이에요. 죽음을 두려워한다고요."

"그런 이가, 비록 지잔을 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인의 앞에 선단 말이오?"

나는 피식 웃었다.

"옮아서 그래요. 지선 님을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

아지나 나비처럼, 불사자나 칼리스처럼 저쪽 한구석에 처박혀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게 살아가고자 하는 생명의 의무였으며,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참냐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서로 부딪치고 소용돌이치는데.

나를 죽이려고 드는 것보다 더 질이 나쁘다.

내가 스스로 죽게끔 만든다.

목숨보다 더한 감정, 목숨을 써서라도 이루고 싶은 사명, 목숨조차 굴레에 잡힌 존재까지.

이들은 죽음에 대해 너무 무감각하며, 동시에 나까지 바꾸어버린다.

"차라리 무저갱이 아니었다면, 가끔 마주치는 사이였다면 모르겠는데. 너무 나쁜 바람이 들었어. 오랫동안 말이야."

계산은 끝냈다.

티르는 좋은 의미로 지고지순하고, 나쁜 의미로는 꽉 막혀있다. 내가 멀어지고자 하는 의도를 보이면, 슬퍼할지언정 그것을 따를 거다.

회귀자는 나에 대해 궁금해하겠지. 하지만 내 정체보다 중요한 일이 남아있으니, 그것 때문에라도 나를 쫓지 못할 거다. 의문은 다음 회차로 넘기고 현재를 나아갈 거다.

아지? 나비? 짐승의 왕들은 짐승답게 제 갈 길 갈 거고.

불사자는 사소한 것에 매일 성격은 아니며, 칼리스는 그를 따라 군국을 떠나겠지.

회귀자는 내 정체를 의심스러워하고, 다음 회차에서는 캐물을 수도 있겠으나, 그뿐이다. 그건 다음 회차의 내가 알아서 넘겨야지.

덧붙여 회귀자는 아군에게 무른 성격이다. 전 회차에서 아군이었던 티르에게 보였던 태도를 보면 그건 자명하다. 이번 회차에서 서로 우호를 나눈 이상 좋게좋게 넘어갈 수도 있다.

"저들은 저 없이도 잘 지내겠죠. 적당히 아름다운 이별이에요."

"허. 휴즈 님도 예언자였소이까?"

"그럴 리 없잖아요. 그랬으면 여기 잡혀 오지도 않았지."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갑자기 눈앞에 닥친 운명에는 저항하지 못한다. 그때 일어났던 체포처럼.

하지만 나는 독심술사. 사람의 심리를 읽고 행동원리를 유추하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단지, 사람 마음을 좀 잘 알 뿐이에요."

아쉬울지언정, 확실한 이별이 될 것이다.

이제 다시 원상궤도로 돌아가야지.

"완벽한 계산이에요."

EP.141 완벽?한 계산?

황무지를 맴돌던 셰이와 티르칸쟈카, 칼리스, 불사자는 무저갱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캠프를 만들었다.

막 뛰쳐나온 탈옥수답지 않게, 여기 있다고 광고하듯 새빨간 불을 크게 밝힌 캠프였다. 제발 누군가 찾아와달라고 애걸하는 듯했다.

사방에 빛을 비추며 모닥불에 둘러 앉은 그들은.

지금, 깊은 슬픔 속에 잠겨있었다.

티르칸쟈카는 하염없이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그녀에게서 울컥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셰이는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모닥불을 다스리는 척했다. 천앵을 모닥불 속으로 찔러넣을 때마다 불꽃이 활활 솟구쳤다.

칼리스와 불사자는 오늘만큼은 거리를 두고 앉았다. 둘은 서로 처음 본 사이처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 배려 아닌 배려에, 티르칸쟈카는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괜찮다."

그렇게 말하며, 정작 이어지는 말은 모두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내가 부담스러웠겠지. 나는 시조 티르칸쟈카. 모든 흡혈귀의 시조이자, 피를 탐하는 괴물…. 이런 내가, 누구에게 받아들여질 리 없거늘."

그렇게 말하던 티르칸쟈카는 문득 얼굴을 찡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을 좀먹는 벌레가 있어, 그것을 빼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러나 고통의 근원이 잡힐 리 없다.

모든 피가 자기 의지에 따르는 흡혈귀는 처음 겪는 형이상학적인 고통에 몸부림쳤다.

인상을 찡그리는 티르칸쟈카와, 그녀를 보며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는 일원들.

티르칸쟈카는 젖은 숨을 내쉬며 셰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보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거라. 정녕 그게 사실이느냐?"

"어, 어?"

느닷없이 지목당한 셰이는 겁을 집어먹었다.

차라리 적이라면 맞서 싸우겠지만,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러한 문제는 셰이에겐 너무 가혹했다. 셰이가 꿀꺽 침을 삼키며 힘겹게 대답을 고르려는 때였다.

다행스럽게도 티르칸쟈카의 주제는 다른 것이었다.

"…죄악의 왕이란 이가, 정녕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것."

"아, 어! 그래. 내가, 그…."

회귀한다, 라고 말하려던 셰이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지금에 만족하고 있는 이들은 회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불안해한다. 셰이가 그리는 다음 회차에 그들의 행복이 없을까 봐.

그 순간, 셰이는 그들의 행복을 인질로 잡은 셈이 된다. 그들은 셰이에게 매달려왔다. 미래에도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똑같은 행복을 손에 쥐여달라고.

종말을 막아야 하는 셰이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이것이 셰이가 회귀 사실을 함부로 밝히지 않는 이유였다.

밝혀봤자 성황청의 예지를 겪었다고 치부된 적도 많았고.

'만일, 지금 내가 회귀 사실을 밝히면. 믿어줄 것 같지만….'

셰이는 조심스럽게 티르칸쟈카를 살폈다.

지금 티르칸쟈카는 되찾은 감정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회귀를 바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금 느낀 이 감정, 이 고동 모두가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셰이는 말하려다가 꿀꺽 침을 삼키고는 말을 돌렸다.

"…응. 예지로 본 거야."

"네가 직접 말이냐? 남자인 네가?"

"아, 아니! 내가 아는, 예언자가 하나 있는데! 걔가 좀 넓게는 못 봐도 세세하게는 잘 알아서! 성황청 소속은 아니래! 믿을 만한 사람이야!"

급히 말을 바꾸는 셰이였다. 티르칸쟈카는 셰이를 살짝 미심스럽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느냐."

의심은 그쳤는지, 아니면 의심할 겨를도 없는지.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티르는 문득 말을 꺼냈다.

"내 너를 돕겠다."

"…어? 정말?"

"그 예언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황청은 언제나 자기 유리한 대로 예언을 이끌곤 했지. 허나, 이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고 싶지는 않구나."

"으음, 고맙긴 한데. 그래도 괜찮겠어?"

셰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엇이 괜찮은지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 대상은 이 분위기 속에 녹아있으므로.

티르칸쟈카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는 세상이 멸망해도 자기를 지켜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답하였지."

"그 녀석이 그런 말도 했어? 언제?"

"무저갱을 나가기 전에. 만일, 네가 아는 그 예언이 참이라면,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너를 도와야 하는 셈이다. 기실, 그게 아니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이 눈으로 확인해야 하지 않겠느냐."

티르칸쟈카의 말은 기뻤으나, 그 뒤에 녹아있는 그의 그림자에 셰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쩜 저리 수상한 사람이 다 있을까. 세계 멸망? 그가 세상이 멸망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 녀석, 정체가 뭐야? 성황청 소속이라도 돼? 으으, 수상해. 언제 한번 꼭 붙잡고 물어야 하는데…."

중얼거리는 셰이의 귀로 티르칸쟈카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아."

그림자의 여왕이 내쉰 한숨에 모닥불이 불길하게 흔들렸다. 티르칸쟈카는 반짝거리는 은발을 어깨 뒤로 넘기며 셰이를 꾸짖었다.

"너는 정말 이기적이구나."

"어?"

"휴에게 받은 도움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도 휴를 두고 수상하다, 캐내야 한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더냐."

"…어?"

티르칸쟈카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건 적을 향한 적의나, 구차한 이에게 보내는 경멸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철없는 자식에게 보내는 차가운 시선과 비슷했다.

"처음에 내 거처에 발을 들이밀었을 때도. 그 뒤, 나에게 혈조술을 배울 때도. 이후 교육이라면서 우리를 가르칠 때도. 휴에게 배려를 받는 쪽은 너였다."

"어…."

콩깍지, 아니야?

이렇게 툭 말하려다가 간신히 참은 회귀자는, 대신 입을 다물고 티르칸쟈카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왜 혼나야 하는 거지?'

머릿속으로 의문을 품고서.

그동안 티르칸쟈카는 쌓인 말을 다 풀어냈다.

"나를 시의적절하게 도발하고, 대화가 끊이지 않게 이어가고, 주책을 부리고, 자극을 주었으나. 결과적으로 너에게 득이 되었다. 위태롭던 네 긴장을 풀어주고, 이 무저갱에 활기를 주고, 우리 모두를 안팎으로 휘저었지. 휴의 노고가 적지 않거늘, 너는 어째서 의심스럽다고만 하느냐?"

그러나 가끔, 외부인의 시점으로 봤을 때는 조금 다른 게 보이는 법이다.

13번의 회귀를 거치고 벌써 14번째. 조금씩 달라지던 세상을 관찰하느라 바쁜 셰이에겐, 이 와중에도 타인의 시야로 세상을 보라는 요청이 버겁다.

그러나 티르칸쟈카의 설교에 셰이는 잠깐 다른 관점을 떠올렸다.

"나를 도왔다고?"

"지금도 그러하다. 만일, 휴가 정녕 죄악의 왕에 대해 알고 나에게 그러한 다짐을 받았다면. 그것 또한 너를 위해 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런…가?"

필터를 하나 끼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셰이는 그가 했던 행동 하나하나를 되짚었다.

결과적으로 지잔은 셰이의 손에 들어왔다. 그가 지선을 상대로 시간을 끌다가 내던진 덕분이다.

마지막 순간, 지잔이 이쪽을 선택하듯 궤적을 비틀긴 했지만. 그 역시 그의 작품이 아닐까.

그 전에, 에본 중장이 쳐들어왔을 때. 그는 대령을 공격하고 이쪽에 힘을 보탰다. 나중에 칼리스를 치료하면서 들어보니, 중장이 아지를 폭주시키는 것을 그가 막았다고 했다.

아지에게 워낙 친절했던 그라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나… 그 역시도 도움이다.

그리고 핀레이 때. 그는 앞장서서 티르칸쟈카를 탈환하고, 시조의 심장을 되살렸다. 덕분에 시조는 언제 어느 때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티르칸쟈카가 그에게 집착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차라리 이게 낫지 않은가. 피를 흩뿌리며 진군하는 것보다야.

"어라?"

셰이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티르칸쟈카는 코웃음을 쳤다.

"어이가 없더구나. 그토록 도움을 받았으면서, 아무도 돕지 않는다고? 세심한 배려 속에 젖어있으면서도 가장 도움에 목말라하며, 그를 의심한다니. 정녕, 그래야겠느냐? 너에게 도움을 주었던 휴를 그대로 받아주면 안 되겠느냐?"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이, 조금씩 의미를 가진다.

정말인가? 사소한 도발에 발끈하게 하는 것도. 수련하던 그녀를 끌고 와서 수업을 듣게 하던 것도. 매번 셰이와 티르칸쟈카 사이에서 서로를 밀고 당기며 장난스레 분위기를 주도했던 것도?

"…도움?"

"휴가 없었다면, 네가 나와 이리 같이 말을 나누고 있었겠느냐? 혹은 이들과 함께 평온히 앉아있었겠느냐? 지모신교의 도사는? 어찌 되었겠느냐?"

만일, 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무저갱에서, 셰이는 어떻게 살았을까?

사실, 사는 것 자체는 문제없다. 셰이에게 고독은 익숙했다. 폐관수련도 몇 번 했으니, 아마 별일 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 모닥불을 피우고 모여서 앉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서로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을 끝내고, 곧장 떠났겠지.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까.

"그…런, 가? 나를… 도왔어? 왜?"

"천성이겠지. 개의 왕도, 나도, 그리고 너도. 명확한 악의를 가진 이가 아니라면 다들 돕지 않았느냐."

"어…."

아무리 의심스러운 부분을 떠올려봐도, 결과적으로 돌이켜보면 셰이에게 도움이 되기만 했다. 의심만 한 거품 걷어내면 안에 있는 것은 달콤한 과실뿐이었다.

'도운…거네. 그러게.'

셰이는 솔직하게 인정했고, 동시에 조금 기뻤다.

그녀의 마음을 무언가가 톡톡 건드렸다.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을 하나를 건드렸더니 다른 쪽에서 진동이 전해지듯, 나는 아직 이어져 있으며, 서로 붙잡고 있겠다는 안도감.

선한 이도 많이 만났다. 도움도 꽤 받았다. 다투었을지언정, 공통된 목표를 앞에 두고 협력한 이도 많았다.

친구라고 부를 이는 회귀를 거듭하며 사라졌으나 동지는 여럿 있었기에, 셰이는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사실 의무감과 부채감까지 더하여 그녀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이건.

앞으로 내미는 게 아니라, 팽팽 잡아당기는 호의가 아니라.

한껏 풀어주는 듯한…. 편안함이.

"그으, 그렇구나."

잠깐 말을 흐린 셰이는 천반경으로 평정을 되찾았다.

무안한 듯이 시선을 피하고 있자, 티르칸쟈카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말없이 모닥불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캠프를 메웠다.

침묵의 끝에 셰이가 입을 열었다.

"티르칸쟈카. 미안한데. 심장을 되살렸을 때."

"…또."

"아니아니!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어서!"

미간이 좁아지는 티르칸쟈카를 향해 손을 내저은 셰이가 말을 이었다.

"그의 능력, 아주 조금이지만 알 것 같기도 해."

"무엇이냐?"

"유품."

셰이는 옆에 고이 뉘어 놓았던 지잔을 들었다. 아무런 장식도, 손잡이도, 무늬도 없는 길고 뭉툭한 몽둥이.

"이토록 강력한 존재의 유품에는 시험이 있기 마련이야. 시험을 어떻게 치르냐에 따라 해방되는 힘이 달라."

그리고 셰이는 지잔을 땅에 댄 다음, 손목을 이용해 톡 들어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잔에 닿았던 땅. 그것이 빠르게 자라는 죽순처럼 솟아올랐다.

"그런데 그가 건넨 유품에는 시험이 없었어. 동시에 모든 힘이 해방되어 있었지. 원래는 '몽둥이'으로서의 힘만 해방되었는데… 지금은 미약하지만 이 검을 매개로 대지술도 쓸 수 있어."

"흥미롭구나… 헌데, 그것과 나의 심장과는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이냐?"

"호문클루스의 딜레마. 그것을 우회하는 방법은 하나야. 바꾸는 사람이 자기 자신일 것."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그것은 최소한 자연스럽다.

호문클루스 딜레마에 빠진 경우와 달리, 조정이 별달리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티르칸쟈카의 심장은 대단히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는 네 살아있을 적 기억을 유품으로 만든 것 같아. 네가 이미 죽었다는 점을 이용해서."

셰이가 날카롭게 추리했다.

"그는 아마 유품의 힘을 끌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을 거야. 이 지잔도 그렇고. 네 심장도 그렇고.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유품…."

티르칸쟈카는 자기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그가 심장에 박아넣었던 한 장의 카드. 그건 아직 살아있던 시절 그녀의 기억을 벼린 유품이었던 것인가.

"일리가 있구나. 그 이후, 휴는 제 자신을 잃었으니…."

티르칸쟈카는 가만히 가슴에 손을 모은 채 중얼거렸다. 셰이도 지잔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확실히, 그 녀석의 힘이 있으면, 조금 더 편해질 것 같긴 한데."

그러나 세상은 넓다. 훌쩍 떠나버린 사람을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셰이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 녀석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갈 작정인지도 몰라. 생각해보니 정말 아무것도 몰랐네…."

"…휴가 밝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누구도 모를 것이다."

"응? 선생은 자기가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라쉬의 폭탄선언은 역으로 모든 소음을 앗아간 것만 같았다.

셰이와 티르칸쟈카는 반 박자 늦게 되물었다.

"뭐?"

"…무어라?"

라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대작하면서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니면 그마저도 거짓인지 모르겠소! 어쨌든 말은 한 적 있지!"

"아니, 그건 됐고. 뭐라고 했는데?"

"자기는 이미 범죄자라면서, 딱히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더군!"

셰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있던 곳? 그곳이 어디지?"

그 대답을 할 사람도 마침 이 자리에 있었다. 크게 헛기침한 칼리스가 또박또박 보고했다.

"그는 아미텐그라드 13-3구역에서 사기 도박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구속되었으니, 그에게 은닉해둔 재산이 있다면 회수하러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기도박? 정말 사기도박으로 잡혀 온 것 맞아?"

"제가 본 관련 문서에 거짓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저도 감찰관 자격으로 온 터라 그 이상의 보안 레벨을 가진 문서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달리 말하면, 더 높은 보안문서에는 다른 정보가 있을 수 있다는 뜻.

그건 셰이에겐 꽤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의 소재를 알았고, 그의 행방도 드러났다.

남은 문제는 하나뿐이었다.

싫다고 그들을 떠난 사람을 찾아 군국 한복판으로 들어가도 될 것인가.

"아우우우우."

그때였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아지가 작고 길게 울었다. 말 없던 짐승의 왕이 입을 열자, 모두 말을 멈추고 아지를 바라보았다.

아지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채로 말했다.

"나, 가야 해."

"어디로?"

"인간의 나라. 나와 약속한 나라."

아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호의를 담은 커다란 눈망울에 별빛이 비쳤다. 그 모습은 홀로 밤하늘 별을 보며 감상에 빠진 듯했다.

'이런데 어떻게 개처럼 대하냐고.'

셰이가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아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약속을 지켰어. 이제, 그들이 약속을 지킬 차례야."

"그들이 누구야?"

"인간들의 나라. 많은 인간을 가진. 나, 거기 가야 해."

"거기는 어딘데?"

물어보면서 셰이는 아차 싶었다. 인간이 멋대로 붙인 도시의 이름을 과연 아지가 알까? 셰이는 아지의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개'다운 표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걱정했다.

"아미텐그라드."

다행스럽게도 그 걱정은 기우였다. 아지는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한 의지를 담으며, 흘러가는 별을 바라보았다.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래. 나, 그곳에서 약속을 찾을 거야."

티르칸쟈카와 셰이는 서로를 보았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안다.

그가 얼마나 필요한지도 안다.

마침, 갈만한 구실도 생겼다.

"나는 추하게 나를 두고 떠난 이의 뒤를 쫓지 않을 것이다. 다만, 마침 가는 길이 같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티르칸쟈카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눈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에는 군국을 싹 뒤엎어야겠어. 겸사겸사 그 녀석에 대한 비밀도 알아내면, 뭐, 좋겠지."

셰이도 팔을 빙글빙글 돌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두 여자의 눈빛이 모닥불 너머로 이어졌다.

EP.142 안녕, 탄탈로스

"…완벽한 계획이라. 그런 것치고는."

술잔을 따른 지선이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아쉬운 표정을 하고 있소이다만."

"네?"

"어찌하여, 자기가 내쳐놓고도 아쉬워하고 있소이까. 미련이 남았소이까?"

조금 드러났나.

쳇, 지선. 독심술사의 표정을 읽지 말라고. 생각을 읽는 건 내 전문이라는 말이야.

"뭐, 조금요."

사람은 흥청망청 사치를 부리는 인간을 경멸하는 척하면서도, 내심 그들을 부러워한다. 자기가 저지를 수 없는 행동을 태연히 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사치는 꼭 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에게 소중한 것일수록 그 사치의 가치가 올라가니.

특히,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라면… 부러움을 넘어, 매혹되기까지 하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그들과는 달리 정말 쉽게 죽으니까. 더 조심해야 한다고요."

"말로는 목숨이 아깝다 하나, 도리어 이해할 수가 없구려. 휴즈 님. 소인이 여쭙겠소이다."

대종사를 향해 두 번 절을 마친 지선은, 고개를 퍼뜩 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잔잔히 가라앉은 그 눈에는 의도와 감정이 몰아치고 있었다.

"소인은 대종사께 선택받지 못하였으나, 휴즈 님은 대종사께 선택을 강요하였소이다. 덕분에, 소인은 팔 한 짝과 함께 명분마저도 잃었으니. 그동안의 노고가 수포로 돌아간 셈이외다."

지선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런 소인이 왜 휴즈 님을 살려두어야 하오리까?"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살기와 함께 날아온 물음. 나는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였지.

괜히 죽일 이유가 없기도 하고.

원래 목표는 무저갱의 소멸이었잖아?

나는 대종사의 넋을 달래준 사람이라고.

많은 이유가 떠올랐지만, 나는 그중에서 상대가 가장 좋아할 내용을 골랐다.

"저를 살려두시면, 언젠가는 성황청을 까발려드릴게요."

"…허."

잠시 힘이 풀렸는지, 잘린 어깻죽지로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그토록 의외의 제안이었다.

지선은 하나뿐인 팔로 자기 어깻죽지를 감싸고는, 고개를 숙여 큭큭 웃었다.

"…진심으로?"

"그럴 일이 일어날 거라고 장담은 못 해요. 예언자가 아닌 우리는 서로 눈앞의 일밖에 못 보잖아요. 하지만 언젠가, 성황청의 치부를 발견하면. 이 파멸의 조동아리를 써서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어드리죠."

"혹하는구려. 그게 이뤄진다면 말이지만."

"원한다면 새끼손가락 걸까요? 아, 팔 한 짝 없으신 분에겐 좀 곤란한가."

구덩이 위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제압되었던 병사들이 병력을 추스르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선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도와드려야겠구려."

"저 혼자 알아서 나갈게요. 밀고하지만 말아 주세요."

직후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일제히 무저갱 언저리로 달려왔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 시체들 틈으로 몸을 숨겼다.

탐조등이 사라진 탓에 그들에겐 희미한 조명이 전부였다. 안쪽으로 조명을 내던진 그들은 무저갱이 숨겨두었던 시체들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아아악! 시체다!"

"내가 안다. 이곳은 패왕의 매장지! 그들의 시체가 남아있던 게 틀림없다…!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있어!"

지휘관이 외쳤다.

"사다리를 내려라!"

"저, 저 안쪽으로요?"

"그래! 탐조등이 없는 이상, 우리는 직접 내려가서 확인해야 한다! 그나저나 방금 말대꾸 한 놈 누구냐? 언제부터 정당한 명령에도 말대꾸를 했지?"

병사들은 냅다 사다리를 내렸다. 지휘관은 얼빠진 병사를 향해 고함치며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꼼꼼히 탐색해라! 시체 밟는 걸 두려워하지 마! 밟는 것도 두렵다면 시체 만드는 일은 더 못하겠군…! 그러니까 아까 그토록 무력하게 당했겠지만!"

'자기도 무력하게 당했으면서….'

근처 병사가 지휘관을 흘긋 보면서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생각은 생각으로만 그쳤다.

그렇게 랜턴의 빛으로 탐색을 계속하던 그들은 이윽고 시체 산 정상에 도달했다. 지선을 알아본 지휘관은 냅다 그쪽으로 달려갔다.

"충성! 황야 탐색대의 케이오신 소령입니다! 준장님을 뵙습…! 에구머니나! 세상에! 준장님, 팔이…!"

병사들이 도달하자, 대종사 앞에 경건하게 무릎 꿇고 있던 지선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신경 쓸 것 없소. 경미한 피해요."

"그럴 리 없잖습니까…! 일단, 응급처치부터!"

좋아. 지금이다.

다들 시선이 그쪽에 팔린 틈에, 나는 그들이 내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후방에 남았던 이가 나를 향해 희미한 빛을 비추며 물었다.

"이봐, 무슨 일이야?"

나는 짐짓 급한 척 외쳤다.

"준장님께서 중상을 입으셨다! 의무병! 빨리 의무병을 불러!"

"의무병? 그들은 지금 부상자를 돌보고 있는데."

"이 멍청한! 준장님의 오른팔이 없어졌다! 이대로면, 이 나라를 쌓아 올린 지선께서 실혈사하겠어! 너는 우리에게 그런 오명을 씌울 셈이냐! 빨리, 부상자를 돌보던 의무병을 싹 다 부르라고!"

내 기세에 눌린 장교는 궁시렁거리며 물러나서 의무병을 불렀다. 그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돌아와서는 따져 물었다.

"야, 그런데 너는 누군데 반말이냐? 내가 부대장인데…."

그러나 이미 그 자리에 나는 없었다. 부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빈 자동마차가 사방에 가득하다. 황야를 순찰하기 위한, 두꺼운 바퀴가 특징적인 차량이다. 나는 콧노래와 함께 바퀴를 하나하나 터뜨리며 걸어갔다.

바퀴 바깥쪽은 튼튼하지만, 안쪽은 비교적 말랑말랑하단 말이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자동마차가 한쪽으로 주저앉았다.

눈여겨본 자동마차에 올라탄 나는, 안쪽에다 내 배낭을 던진 뒤 시동을 걸었다. 드르륵. 바퀴와 운전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체가 거칠게 진동한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페달을 밟았다.

가면서 다른 바퀴는 다 터뜨려놨으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더라도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슬쩍 보니 그럴 정신도 없는 것 같지만.

"자자. 일단 한 건 했고."

도로 없이도 굴러가는 좋은 차지만 군용이라는 게 흠. 이걸 타고 도로로 접어들면 온갖 의심을 사겠지. 적당히 가다가 버려야 한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마침 시야에 땅 위로 올라온 탄탈로스가 보였다. 시야가 가려지도록, 탄탈로스를 끼고 돌며 속도를 만끽했다.

"자아. 이제는 뭘 할까…."

사실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 비정한 세상은 돈이 없으면 신분마저 얻지 못한다. 다른 나라를 가든, 아니면 신분을 세탁해서 몸을 숨기든. 그 과정에서 돈을 먹으려고 드는 것이다.

돈이야말로 요즘 세상의 산소라고 할 수 있다.

일단 군국의 수도, 아미텐그라드 뒷골목으로 가서 내 숨겨둔 재산을 챙겨야지. 자산을 현금화도 해야 하고.

그리고 알아볼 것도 있고.

좋아. 결정은 났다. 목적지를 정했으니, 지금은 그저 경치를 즐기자.

지형지물과 비교될 정도로 커다란 구조물이 내 왼쪽 시야를 가득 메웠다. 층 하나 정도 되는 콘크리트 바닥과, 그 위에 처참히 부서진 감옥 건물이 을씨년스럽다.

나는 가까이 보이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감상에 잠겼다.

저 건물에서 온갖 일이 있었지. 먹고, 자고, 아지랑 놀아주고, 가끔 싸우다가, 다시 늘어지게 자고.

음, 이렇게 생각하니 별일 없었네.

하지만 그 별일 없음의 집합이 곧 살아간다는 것 아닐까. 삶에 그토록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게 비로소 진정한 삶이 아닐까.

부서진 감옥은 이제 몸 대신 내 마음을 붙잡으려는 듯하다. 다시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내 추억 한 점을 영원히 가두고 있을 것이다.

안녕, 탄탈로스. 내 특별한 경험이 담긴 장소여….

쾅.

그러다가 무언가와 부딪혔다. 위아래로 크게 덜컥인 자동마차가 시동을 멈추었다. 운전대에 머리를 박은 나는 운전석 문을 열며 재빨리 외쳤다.

"아, 씨! 운전 똑바로 해!"

반사적으로 외쳤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근처에는 부딪힐 만한 다른 물건도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뭐에 부딪힌 거지? 이상한 거라도 밟았나?

차량 뒤로 돌아간 나는 이상한 물건을 발견했다.

"뭐야, 이 표지판."

땅속에서 솟아난 표지판이 중간부터 힘없이 꺾여있었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기시감은 있는데, 막 떠오르지 않네. 나는 한참 끙끙거리다가 기억을 상기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다. 나를 호송하던 경관. 그들이 이 표지판을 보고는 멈췄지? 길의 끝을 알렸던 표지판이다.

분명 여기서 통신병 목소리가 들려왔고, 경비병들이 그 명령에 따라 나를 아래로 내던졌지.

"흠. 그러고 보니 에델파이트의 에비앙 경위였던가. 깜빡하고 있었네."

감히 나에게 강철봉을 휘둘러? 그때를 떠올리니 뼈가 시린다. 억눌러둔 원한이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좋아. 아미텐그라드로 돌아가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생겼다. 일단 에델파이트에 들러서 경위를 조지자.

내가 다시 차에 타려는 때였다. 표지판 근처, 땅이 격자 모양으로 갈라진 모습이 보였다. 탄탈로스가 뒤집혔을 때 지반이 갈라졌나, 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인위적이었다.

혹시?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격자 모양으로 갈라진 땅을 잡고 뜯어냈다. 땅은 한 겹 피부처럼 손쉽게 들렸다.

역시, 가짜 땅이었군. 탄탈로스가 무너지면서 그 충격에 드러난 건가.

그렇게 벗겨낸 곳에는 흉하게 찌그러진 네모난 금속 구조물이 있었다.

건물보다는 상자에 가까운 디자인이었다. 땅속에 숨겨둔 상자가, 기울어진 탄탈로스가 땅에 충돌할 때 그 충격에 밖으로 빠져나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뭐야? 보물이라도 숨겨놨나?"

크기만 보면 커다란 방 같아 보이는데, 사람이 이런 데 살 리 없지. 누가 땅속에서 묻혀있는 금속 상자에서 살아? 분명 안에 뭔가를 숨겨뒀을 거야.

오랜만에 수렵과 채집 본능이 발동했다. 나는 꼬챙이를 뽑아 들고 상자 위에 올라섰다. 텅, 하고 속 빈 금속의 소리가 들렸다.

"선물상자를 확인하는 건 언제나 즐겁지."

뭐가 있으려나. 나는 휘파람을 불며 찌그러진 틈으로 꼬챙이를 찔러넣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들쑤셔도 상자를 열 수가 없었다. 자물쇠는 아무리 들쑤셔도 반응이 없었으며, 찌그러진 틈으로 꼬챙이를 찔러넣었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나는 혀를 차며 꼬챙이를 집어 던졌다.

"칫. 사람 마음을 읽으면 뭐해. 자물쇠의 마음을 못 읽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자물쇠를 맨땅으로 딴 적이 없구나. 열쇠를 훔치거나 비밀번호를 알아내거나 했지.

쳇. 이대로 가기엔 뭔가 아쉬운데…. 어떻게 할까.

거대한 충격에 찌그러진 강철. 비틀린 이음새로 안쪽이 들여다보인다.

흠. 나에게 조금만 더 힘이 있거나, 내가 더 무거웠으면 이걸 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한 번만 시험해볼까."

나는 강철 상자에 양손을 올렸다.

본래 심상이 지모신에게 닿아야만 쓸 수 있었던 지모신교의 대지술이다. 그렇기에 오직 지모신도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종사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난 지금이라면 아마 나도 쓸 수 있을 거다. 제식마법이나 기초적인 기공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지선과 대종사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있어, 땅은 흐른다. 그 안에 사는 생명부터 시작하여 자연의 위대한 흐름에 의해 천변만화로 움직이는 존재다. 본래 수십 년, 수천 년 동안 이루어져야 할 대지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기술이 대지술.

강철이라지만 그건 대지에서 비롯된 것. 나는 미약하게 느껴지는 감각을 움켜잡으며, 강철 문을 향해 대지술을 시전했다.

"흐읍!"

와장창.

문짝이 주저앉았다. 내 몸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땅으로 떨어졌다. 봉변을 당한 나는 딱딱한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아야야."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난 내 눈에 보인 건 생활감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아니, 이걸 생활감이 있다고 봐야할까, 없다고 봐야할까.

"진짜 방이었네."

누군가 이 상자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좁은 상자 안 가득한 가구는 하나같이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좁은 공간에서 갇힌 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 넘치는 생활감은 도리어 한 편의 부조리극 같은 느낌을 주었다.

"세트, 럭스."

어쨌든 여기서도 주워갈 수 있는 뭔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제식마법으로 어두운 내부를 비추며 나아갔다.

"어라."

그렇게 탐색을 계속하던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EP.143 경관의 지옥 -(상)

에델파이트의 에비앙 경위. 그는 군국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에델파이트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였다.

초등시민학교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먼 곳에 있는 중등군사학교에 진학했다. 전원 기숙사제인 그 중등학교에서 혹독한 시험을 통과한 그는 노력 끝에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고등사관학교에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원한다면 군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에비앙은 굳이 경찰이 되기를 택했다.

말이 경찰이지, 사실 헌병대의 하부조직이다. 군국에서 경찰이 되는 건 자기 출셋길을 스스로 가로막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나, 군인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장점이 있었다.

충분히 직급이 높아지면 자기 근무지를 정할 수 있다는 것.

오직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그리고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에비앙 경위는 험난한 경찰 생활을 버티고는 그 결실을 이뤘다.

에델파이트의 작은 파출소. 오늘도 만족스럽게 근무를 마친 에비앙 경위가 서류를 정리하는 도중이었다.

『에델파이트의 에비앙 경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비앙 경위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누구십니까? 근무시간 끝났는데."

『내가 누군지 알면 너는 항거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매 순간 숨 쉬는 게 지옥으로 변모하고, 겁먹은 쥐처럼 구멍에 숨어들고 싶겠지. 차라리 모르는 게 더 행복한 일 아닐까?』

장난치고는 과했다. 에비앙 경위는 눈살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몇 년 동안 손에 익은 강철봉이 들려있었다.

"뭐야? 무슨 장난질이냐?"

『장난? 장난이라. 차라리 장난이었다면 너는 행복했겠지. 큭큭. 에비앙 경위. 내일부터 너는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기대하고 있도록.』

"감히 경관을 위협하다니!"

분노한 에비앙 경위는 문을 박차고 나서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둠에 잠긴 을씨년스러운 거리만이 그를 반길 뿐이었다.

불온한 기운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에비앙은 어젯밤 순찰을 계속했고, 으슥한 곳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마을은 애석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날 이상한 일이라고는 자처해서 야근하는 에비앙 경위뿐이었다.

그가 밤 동안 한 일이라고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싸돌아다니던 말괄량이 엘리를 집에 돌려보낸 게 전부.

다시 말해, 엘리가 싸돌아다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엘리가 에비앙 손에 걸려서 집에 돌아간 게 더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제 그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에비앙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길을 걷던 때였다. 저쪽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에비앙은 바로 그쪽으로 뛰어갔다.

"누가 자동마차를 훔쳐 갔어!"

"웃기는 소리 마! 이쪽은 어제 창고에 보관해둔 연금원단이 사라졌다고!"

에델파이트의 주민이 두 패거리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에델파이트에는 두 가지 주요 시설이 있다.

하나는 커다란 여관이고, 다른 하나는 자동마차 정비소다.

에델파이트의 입지는 좋은 편이었다. 지형적으로 바로 위쪽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무저갱 황무지만 아니었다면 이보다 몇 배나 더 큰 교통의 요지가 되었으리라.

어쨌건 군국은 유사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 여관과 정비소를 지었다.

여관과 정비소는 군국의 자산이었고, 이 마을의 주민들은 주기적으로 여관과 정비소에 노역하러 불려가곤 했다.

처음 주민들은 안 그래도 바쁜 일상 속에서 노역을 강요하는 이 시설을 마뜩잖아했다.

하지만 마냥 싫어하기에는 여관과 정비소가 너무 으리으리해 보였다. 이런 변방에서 군국이 지은 커다란 시설은 꼭 신시대의 상징 같았다. 주민들은 몇 년 동안 노역을 계속하며 조금씩 시설에 정이 들었다.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건 좋지만, 덕분에 문제가 생겼으니.

도시 중심에 위치한 여관과, 먼 도로에 홀로 세워진 정비소. 둘은 들어선 위치도, 요구하는 기술도 서로 달랐고. 따라서 주민들은 점차 노역하러 가는 곳만 가게 되었다. 두 종류의 주민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 결과, 에델파이트 주민들은 두 패로 갈라지게 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오, 에비앙 경위! 마침 잘 오셨소! 이놈들 좀 혼내주시오!"

여관 측 주민이 그를 반겼다. 에델파이트의 유일한 경관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에비앙은 여관 쪽 태생이었기 때문이다.

에비앙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인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십시오."

"정비소 놈들이 여관 창고에 있던 연금원단을 훔쳐 갔소!"

에비앙이 다가오자 조금 주눅이 들었던 정비소 측이 다시 반박했다.

"무슨 모함을! 우리가 너희 연금원단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고 훔쳐 간다는 말이냐!"

"너희야말로! 우리보고 차 운전할 줄도 모른다고 거들먹거리던 놈들이, 차 없어진 걸 왜 우리에게서 찾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 마을 출신인 에비앙은 대충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여관과 정비소는 그 성격이 다른 만큼 주민들의 모습도 다르게 바꾸어 놓았다.

기술과 손재주가 필요한 정비소에서 경력을 쌓은 이들은 은연중에 여관 측 사람을 깔보기 시작했다. 처음 주민 대다수가 속해있는 여관 측은 코웃음을 쳤지만, 실제로 그들의 아이들이 시민학교에서 두각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기에 여관 쪽은 점차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겉으로는 깔보면서도 아이들이 정비소에서 노는 것을 말리기는커녕 적극적으로 권장할 정도였으니.

최근, 에비앙 경위라는 에델파이트의 자랑이자 여관에서 태어난 경찰만 없었다면. 그들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리라.

어쨌든 세상 모든 잘못이 서로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이 두 시설에 문제가 생겼다.

여관의 연금원단이 사라졌다.

정비 중이던 자동마차가 사라졌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중이다.

이야기를 듣던 에비앙 경위의 뇌리에, 어제 있었던 의문의 목소리가 떠오른 것도 자연스러우리라.

"외부인의 소행 아닙니까?"

"하지만 어제 이 여관에 찾아온 이는 한 명뿐이오! 그녀는 여전히 여관에 머무르고 있어!"

"외부인이 있으면 그부터 의심해야죠. 이곳에 먼저 잠입한 것일지도 모르는데!"

여관 측 주민이 턱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 대단하신 분이었는데… 대위였나. 임무를 끝마치고 수도로 가는 중이라던데."

"방금 제가 한 말은 잊어요. 싹, 다!"

말만 우리 여관이고 우리 정비소지 사실 군국의 자산. 대위라면 자동마차와 연금원단을 제 것처럼 챙길 수 있다. 횡령하면 대위라도 처벌받겠지만, 이 마을 주민을 다 합쳐도 그럴 권한이 없다.

덧붙여 자기를 의심한 에비앙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것도 가능하다. 에비앙은 대위에게 걷어차이기 싫었다.

"그렇다면 연금원단이나 자동마차가 자기 스스로 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들어온 사람, 나간 사람 없이?"

"그… 것이."

주민들이 난감해하며 시선을 피하던 중, 누군가가 에비앙을 향해 손짓했다.

"에비앙, 잠깐 이리 와보거라."

여관 측의 대표, 베른이 에비앙을 불렀다. 손짓으로 불린 에비앙은 살짝 불쾌한 티를 내며 대꾸했다.

"베른 씨. 최소한의 경의를 갖춰주십시오. 저는 이곳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위입니다."

"내가 조카를 부르는데도 경의가 필요하다고?"

베른이 조금 거들먹거리며 대답했다.

예전 에비앙의 아버지가 마을에서 뛰쳐나간 뒤, 대신 후견인이 되어 에비앙을 보살폈던 작은 아버지 베른. 이 마을의 촌장이나 다름없던 그는 조카인 에비앙이 경위로 돌아온 뒤 나날이 입지가 높아지고 있었다.

정작 에비앙은 그가 꺼림칙했지만, 그렇다고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처벌할 수도 없다. 에비앙은 경관이었다.

"그야 당… 하아, 아닙니다. 무슨 일이죠?"

에비앙이 다가가자, 베른이 소리 죽여 말했다.

"엘리와 데브가 사라졌어."

"네에?"

엘리는 여관 제일의 말괄량이고, 데브는 정비소의 괴짜였다. 이 마을의 갈등 속에서 자란 두 청소년은 서로를 보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런데 그 둘이, 동시에 사라지다니?

"우리는 서로 걱정하고 있어. 엘리가 실수로 데브를 목 졸라 죽이고 연금원단을 훔쳐서 달아난 건지, 아니면 데브가 엘리를 스패너로 두들겨 팬 뒤 겁에 질려 도망쳤는지. 둘 중 하나겠지."

"엘리가 어떻게 운전을 하며, 데브가 어떻게 연금원단을… 아, 잠깐."

"그래. 둘은 서로서로 시설에 숨어들며 숨바꼭질을 하곤 했지 않나. 우리와는 달리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어. 적을 탐색하는 정찰병처럼 말이야.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

에비앙이 이마를 짚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능성이 충분해서.

동기도 있고, 그만한 악의도 있으며, 주민을 곤란하게 한 경력도 있다. 그 둘이라면 진짜로 서로를 잡아먹었을지도 몰랐다.

"그 둘은 어젯밤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 있었단 말입니다! 제가 직접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보지. 집에서는 그날 저녁 이후 본 적이 없다던 걸."

"젠장. 그렇다면 둘 중 누구든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잡으러 갈 생각이니?"

"그래야죠! 둘 다 살아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에비앙이 성큼성큼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갔다. 주민들은 경관에 대한 묘한 기대감과 더불어, 혹여나 자기 쪽 아이가 저질러버린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에비앙은 마침 그를 기다리던 시설 관리자와 마주했다.

"에비앙 경위. 행정보급관 베르오 하사입니다. 연금원단은 고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요 보급품목입니다. 잃어버리고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기술관 찰레 하사입니다. 자동마차는 고가입니다. 조속히 해결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일이 당국에 보고되면 도시 전체에 징벌적 노역형이 떨어질 겁니다."

"마침 여관에 찾아온 장교가 있습니다. 부상을 입어서 정양하는 중이나, 혹 이 일이 그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각 시설의 담당관들이 정중하게 에비앙을 다그쳤다. 만일 에비앙의 직급이 더 높지 않았다면 저 쓴소리는 소리로만 끝나지 않았으리라.

에비앙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오후 재고 관리 안에만 돌아오면 될 거 아닙니까! 기다려 봐요! 아, 그리고 찰레! 제가 쓸 수 있는 마차가 있겠습니까?"

"하나 남았습니다만."

"공무집행을 위해 하나 빌리겠습니다! 되죠?"

"승인합니다."

에비앙은 자동마차에 시동을 걸고 마을 주위를 크게 훑었다. 가장 최근에 난 바퀴자국은 두 개였다. 대위가 타고 온 것, 그리고 이곳에서 나가는 것.

알기 쉬워 다행이었다. 에비앙은 그렇게 마차의 흔적을 쫓았다.

무저갱 황야는 넓다. 만일 둘이 뭣도 모르고 언덕을 넘어 무저갱 황야로 진입했다면, 에비앙은 다 포기하고 에델파이트로 돌아가서 당국의 판결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에비앙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춘 자동마차를 발견했다. 에비앙은 근처에 자동마차를 세운 뒤, 곧장 내려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눈에는 이 멍청한 일을 저지른 철부지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했다.

"흑, 흑…."

그러나 점차 엘리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에비앙은 겁을 집어먹었다. 혹시 엘리가 무심코 데브를 죽이고 도망친 게 아닐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에비앙이 다른 마을 출신이었다면 엘리를 비정하게 잡아가서는 자기 경력에 자랑스레 한 줄 추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마을 출신이었고, 가능하면 마을이 평안하기를 바랐다. 말괄량이는 감옥이 아니라 마을에 있을 때 가장 활기찬 법이다.

침을 꿀꺽 삼킨 에비앙이 덮치듯 운전석을 열어젖힐 때였다. 그는 운전석에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히, 히익! 에비앙 형!"

"데브?"

운전석에는 데브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엘리는 조수석에서 훌쩍이는 중이었다. 둘이 무사함을 확인한 에비앙은 괘씸함을 느끼며 데브의 귀를 붙잡고 끌어내렸다.

"이 싸가지야. 누가 자동마차를 훔치래?"

"아, 아니! 이건 훔친 게 아니라, 시범 운행이에요! 다 고쳐졌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찰레 씨가 말해서! 확인할 겸, 운전이나 해보려고!"

"찰레에게 말하고 갔니?"

"아니요? 깜짝 놀라게 하려고. 아, 아!"

에비앙이 데브의 귀를 앞뒤로 흔들며 소리쳤다.

"갈 거면 혼자 가지! 그러면 의심이라도 덜 했을 거 아니냐! 왜 애먼 엘리를 끌고 온 거야?"

"내가 끌고 왔나! 자기가 숨어들어왔는데! 거기다 마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울고불고하는 통에 난감했단 말이에요!"

억울하게 외치는 것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데브의 뺨을 후려치려던 에비앙은 한숨을 내쉬며 엘리에게 말을 걸었다.

"엘리,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말없이 도망치면 어떻게 하니? 아주머니가 기다린다. 돌아가…."

"흑, 못… 돌아가요…! 죽을 거야!"

"죽기는 무슨. 경찰인 내가 있는데 누가 너를 죽인단 말이냐?"

"아니요! 정말, 죽을지도 몰라…! 저, 발견했단 말이에요…!"

울먹이던 엘리가 눈을 꾹 감고는 소리쳤다.

"…시체를!"

이곳에서 의외의 제보를 받은 에비앙의 눈이 커졌다.

"뭐엇?!"

차는 두 대였고, 운전할 수 있는 사람도 둘이었다. 에비앙은 엘리를 태운 채 자초지종을 들었다.

평소처럼 말괄량이 짓을 하려던 엘리는 무언가 기묘한 글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계속 돌아다닌 결과, 이 평화로운 변방 마을이 숨긴 끔찍한 흔적을 발견했다…. 바로 파묻힌 뼛조각을….

에비앙이 물었다.

"잠깐만. 뼈가 있을 리 없는데. 최근에 돌아가신 분들 다 화장했잖아."

"흑…!"

에비앙은 혀를 찼다. 패닉에 빠진 아이를 다그쳐봤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는 경관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헌병이 아니었다.

"시체가 있으면 나한테 알려야지. 왜 입을 다물고 있었니?"

"하지만, 에비앙 아저씨는…."

그리고 다시 입을 꾹 다무는 엘리. 에비앙이 답답한 듯이 다그쳤다.

"내가 못 미더워? 엘리, 경위는 도박으로 딴 게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헌병대에 아래에서 범죄자들을 귀신처럼 잡아넣어야 진급하는 게 경위야. 우습게 볼 게 아니라고!"

군국은 군정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모든 의료 행위는 군사 병원에서, 토목공사 역시 공병단이 도맡아 하며, 수사는 헌병이 한다.

행정병이 일반 시민들의 행정을 집행하며, 공장조차도 기술개발국에 소속되어 돌아간다.

군경은커녕 사업체마저도 군사정권과 분리되지 않은, 군인의 나라인 것이다.

아주 특수한 몇몇 것들을 제외하곤, 모두 군국의 것.

"에델파이트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위 자 붙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군국에서 일부러 소속을 분리해서 그렇지!"

한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이가 부패하는 일을 막기 위해, 군국은 소속을 분리하여 던져놓았다. 그렇기에 에비앙은 경력이나 직급에 비해 그리 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가진 권한에 비해 지위가 높다는 뜻이 된다.

"…흑."

하지만 에비앙이 너무 친숙하기 때문일까. 엘리는 통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을 부라리던 에비앙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도 못 미더우면 여관에 대위님이 계시니까 그분에게 말씀드리던가. 나보다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이니, 너라도 만족할 수 있겠지."

엘리가 질겁했다.

"여, 여관은 안 돼요. 그러면 저는 죽을 거예요…!"

"아니, 왜. 여관에서 시체가 발견되기라도 했니?"

"히익!"

"…너는 어디 가서 범죄 저지르지 마라. 진짜."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왜 엘리는 계속 입을 다물었을까. 에비앙에게는 말하지 못하겠다면서 투덜거리던 것일까.

혹시.

"어디서 발견했는데? 베른 씨?"

"히이익!"

사람이 많이 소속된 여관 측 대표이자, 실질적 이 마을의 촌장과 다름없는 이.

심지어 에비앙의 등장 이후 더 권위가 높아진 그의 작은아버지, 베른.

그의 집에서 시체가 나오다니.

차라리 베른이 잘못을 저질렀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를 처벌해서 권위를 꺾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체가 나오기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살인 사건은 또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에비앙은 경찰이었고, 이 마을의 치안을 담당했다. 살인 사건의 단서를 잡았는데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중대 사건을 무시하고 넘어간다면, 그가 군국으로부터 처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거기에 더해 이 마을 전체에 심각한 페널티가 내려올 수도 있었다.

그건 막아야 했다.

"반드시, 범인을 찾으마."

에비앙이 굳게 결심했다.

EP.144 경관의 지옥 -(하)

에델파이트로 돌아온 에비앙은 마을 사람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훌쩍 뛰쳐나가서 집 나간 아이들, 그것도 자동마차를 타고 도망친 둘을 곧장 데리고 오는 경관은 꼭 요술쟁이처럼 보였다.

엘리와 데브를 향해 벼르고 벼르던 시선을 보내는 어른들은 에비앙이 그들을 놓아주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오랜만에 매타작을 벌일 심산인 듯했다.

그러나 에비앙은 그보다 먼저 소리쳤다.

"잠시만요. 연금원단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쟤네가 훔친 것 아니었소?"

"아니오. 연금원단을 빼돌린 이는 따로 있습니다."

일단 그렇게 시선을 끈 에비앙은 곧장 베른의 집으로 향했다. 중간까진 말없이 따라가던 베른이 급히 물었다.

"잠깐. 왜 내 집으로 향하는 거니?"

"제보가 있었거든요. 그것을 찾으러 갑니다. 동행해주시죠."

"…후. 그렇구나."

베른은 한숨을 내쉬고는, 만사 다 포기한 표정으로 에비앙의 뒤를 따랐다.

엘리가 직접 증언할 필요도 없었다. 어젯밤 그녀가 파헤친 흔적은 명확했고, 뒤덮은 흔적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에비앙은 삽을 가져와서 그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거기에서 뼈를 발견했다. 에비앙은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흔적을 살폈다.

주위로 주민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세상에…. 정말 베른 씨 밭에 뼛조각이…."

"최근에 죽은 사람이 있던가…?"

"있다면 모를 리 없지. 다 화장했잖아?"

심각한 표정으로 뼈를 살펴보던 에비앙은, 곧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동시에 겁 먹은 주민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최근의 것이 아니군요. 어림잡아 30년 내외…. 그때 묻힌 시체입니다."

관찰을 끝마친 에비앙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한, 그 시기 사라진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죠. 제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를 홀로 두고 마을에서 도망갔다고 알려진, 단 한 사람. 베른 씨가 직접 나서서 증언한 탓에, 모두가 그렇게 믿어버렸던."

에비앙이 베른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읊조렸다.

"제 아버지."

베른은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에비앙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피도 눈물도 없던 냉철한 경찰로 돌아왔다.

"베른. 당신을 살인 및 시체유기 혐의로 체포합니다."

마을이 수군거렸다. 이번 웅성거림은 전에 비할 바 없이 컸다.

조카가 작은아버지를, 경찰이 촌장을 끌고 가고 있다. 베른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호송당하는 중이었다.

마을의 어른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그러면 베른 씨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말에는 에비앙이 대꾸했다.

"판결은 제가 내리는 게 아닙니다. 저에겐 그런 권한이 없으니. 다만, 죄인이 인정했고 전후가 확실하면 군정 판사에 의해 약식판결이 내려올 수 있습니다."

"판결? 살인죄 판결은…."

"계획 살인은 사형입니다."

에비앙이 차갑게 말했고, 마을에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누군가가 외쳤다.

"에비앙! 그는 네 작은아버지야!"

"무슨 상관입니까! 경찰 앞에는 죄인만이 있을 뿐입니다!"

에비앙이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공무집행방해는 죄질에 따라 3년 이하의 노역형에 처해 질 수 있습니다. 다들 비키십시오!"

노역형의 무게는 보통이 아니다.

공장, 광산, 교육대, 병참.

그런 곳에 소속되어, 자는 시간 이외에는 개처럼 부려먹히는 것이 노역형. 6개월 노역형을 지내고 오면 3년의 골병이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제야 에비앙의 권위에 대해 조금이나마 실감한 이들이 신음을 흘리며 물러났다. 에비앙은 군국의 경위답게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기며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그러나, 그를 가로막은 어떤 한 여인 앞에서. 에비앙은 경위의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에비앙."

"어머니?"

흐느끼며 다가온 에비앙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았다. 옷깃을 잡는 그녀의 손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를, 나를 잡아다오."

"네? 무슨 말씀을."

"…나다. 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이야…."

"뭐가요?"

아무리 에비앙이라도 홀어머니를 뿌리치고 갈 수는 없었다. 기껏 세운 권위가 무색하게 그는 어쩔 줄 몰랐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의 입에서 숨겨진 비사가 흘러나왔다.

"…네 아버지는, 멀리서 시집온 나를 마구잡이로 때리고는 했단다. 그 당시 촌장의 맏이였던 그를 누구도 막지 못했지…."

"네?"

"난폭한 그는, 내가 너를 가졌을 때도 손찌검을 했단다. 그러다 마침 돌아온 베른과 언쟁이 생겼고, 결국 싸우던 끝에, 그만…."

"네?"

"그 시체는, 내가 직접 묻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너에겐 말하지도 못하고, 마을을 뛰쳐나갔다고 거짓말했지…."

어머니의 입으로 들은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워낙 난폭한 나머지 인망이 없던 에비앙의 아버지였다. 마을을 뛰쳐나갔다는 설명에도 사람들은 납득했다.

사실, 의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없다고 나쁠 일이 전혀 없으므로.

마침 군정이 들어서며 어수선해지기도 했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를 대단한 양 치켜세웠지만. 진실로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

어머니도 공범이었던 셈이다. 에비앙은 넋이 나간 얼굴로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보았다.

군국은 가혹하다. 어떤 사정이 있든, 법에 어긋나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 에비앙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나 에비앙은 차마 자기 손으로 이들을 가둬놓을 수가 없었다. 파출소에 앉은 채로 고민하던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위가 여관에 묵고 있다고 했지…."

에비앙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이럴 때는 윗선에 보고라도 해야 했다. 에비앙은 힘없이 여관을 향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에비앙 경위는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간 뒤 대위에게 보고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던 금발의 장교는, 이야기를 다 듣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딘가에서 들은 적 있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확인했습니다. 다만,"

에비앙은 눈을 감고 판결을 기다렸다.

에비앙 역시 직급으로는 꿀리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민'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것. 대위부터는 까마득한 신분이다.

군국을 움직이는 '군인'들. 적용되는 규칙 자체가 다른 괴물들. 지닌 권한부터 가진 힘까지 에비앙과 차원이 다르다.

'어떻게 될까. 어쩌면 상부에 밉보일지도.'

그러나 이어진 말은 에비앙을 놀라게 했다.

"25년, 군정 이전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담당 수사관의 재량에 맡기고 있습니다."

"네?"

살인사건인데, 재량? 에비앙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시효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군국에 시효란 없습니다. 다만, 재량만이 있을 뿐입니다."

대위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그것만이 자기 의무인 것처럼.

"적용을 유연하게 해야 집행이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군정 이전에 벌어진 일은, 검거하지 않아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 시기는 행정공백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군국이야 노역자가 늘어나면 좋다. 할 일은 많은데 일손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효 따위는 만들지 않는다. 재량도 크게 준다. 체포하면, 그대로 노역에 임할 수 있도록.

심지어 법이 소급 적용도 된다.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죄를 저질러도 수틀리면 잡혀간다.

하지만 군정 이전의 행정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므로, 그때 일어난 일을 묻을지 추궁할지는 에비앙의 재량이다.

"어째서 저는 그걸 몰랐죠?"

"시효 같은 건 알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죄를 저지른 이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국은 그런 지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리지 않습니다. 비록, 수사관이라도."

덜 체포하면 문제지만, 더 체포해도 손해가 없다. 그야말로 군국다운 행보였다.

그 사실을 이해한 에비앙은 황망한 얼굴로 대위에게 경례를 붙이고는 물러났다.

"충성. 쉬시는 도중에 죄송했습니다. 그러면 소관은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닫히는 문 사이로, 대위의 작은 한숨이 들려왔다.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겁니까."

"…군국은 왕국시절 범죄를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베른 씨."

정작 운 좋은 사람은 어머니를 체포하지 않게 된 에비앙이었지만, 에비앙은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베른을 풀어주었다.

수갑 패킷을 벗게 된 베른이 팔목을 문지르며 침통하게 말했다.

"…미안하다. 뭐라 말해도, 나는 네 아버지를…."

"시끄럽습니다."

에비앙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실, 그가 베른을 싫어하게 된 계기는 또 하나 더 있었다.

홀어머니와 베른, 둘은 가끔 에비앙을 놔둔 채 쑥덕거리곤 했다. 그를 향해 죄책감 어린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어린 에비앙은 그때 멋모를 질투심 때문에 베른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게 사실 아버지에 관한 일이었다면….

"수고하셨습니다, 에비앙 경위."

그때 행정보급관 베르오 하사가 다가왔다. 에비앙은 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베르오 하사. 편의를 봐주어서 고맙습니다. 대위님이 없었다면 저도 곤란했을 겁니다."

"대위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그저 모두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우. 어쨌든. 이걸로 일단락되었군요."

"일단락?"

아직 문제가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목소리였다. 베르오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용건을 꺼냈다.

"…그래서, 되찾은 연금원단은 어디 있습니까? 한 시간 뒤에 재고정리를 해야 합니다만."

에비앙은 곧장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마을은 좁았고, 방금 이곳저곳 들쑤셨던 터라 범인은 금방 찾았다. 급전이 필요했던 이웃집 말포트 아주머니가 사실대로 고백해왔다.

왜인가 하니, 사실 여관 측 사람들 중에서는 연금원단을 조금씩 잘라 빼돌리는 게 관행처럼 되었다고 했다. 단, 마침 엘리가 도망가는 바람에 일이 커졌고, 이 일도 드러나게 되었다고.

이 일에 연루된 크고 작은 수십 명을 가둘 공간은 없었기에 에비앙 경위는 일단 근신을 명령했다. 일을 끝마친 에비앙은 탈진해서 파출소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후우. 수십 년 동안 생길 일이 하루에 다 생긴 것 같군…."

-그리고 나는, 파출소 벽에 기대 그의 혼잣말을 듣고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야 당연하지. 내가 다 들쑤시고 다녔는걸.

이런 한적한 시골 마을에는 베일에 싸인 사건이 몇 개 있기 마련이고, 나는 그의 주변부터 차근차근 기억을 읽어 그를 위한 무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수십 가지 단서를 마을 곳곳에 흩뿌려두었다.

거기서 실제로 쓰인 건 몇 개 안 되지만, 가장 큼직한 사건을 건져냈으니 충분히 만족했다.

"최악의 하루였다…. 정말 지옥 같았어."

그게,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경관의 지옥이다.

그나저나 제법 잘 견뎌냈군, 에비앙 경위. 나름 공을 들여 준비한 선물인데 말이야.

"훗, 다음에 지나갈 때까지 그 견장, 잘 관리하고 있으라구."

이번에는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서 큼직한 것밖에 못 건드렸다. 아직 불륜 사건과 밭에서 호박을 훔쳐가는 범인의 정체 사건도 남아있는데 말이야.

그리고 사실 네 어머니와 베른 사이의…. 흠흠. 이건 여기까지 하고.

뭐, 어쨌건. 이거면 충분하지. 혹여나 다음에 에델파이트 근처를 또 지날 땐, 또 다른 지옥을 보여줄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내가 내심 웃으며 경찰서 앞을 스쳐지나갈 때였다.

'…뭐지. 저 남자는. 못 보던 실루엣인데.'

탈진한 상태였던 에비앙 경위는, 갑자기 강철봉을 꼬나쥐고는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아니, 잠깐만. 왜 그래.

나는 아무런 잘못 없이 길 가는 사람 1이었잖아. 그런데 왜 느닷없이 강철봉을 들고 잡으러 오는 거야? 증거도 뭣도 없잖아?

하지만 여기서 겁먹고 달려가는 놈은 삼류. 일류 범죄자인 나는 의심을 받더라도 태연히 행동한다.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걸음걸이를 일정하게 하고 걸었다.

증거도 혐의도 없으니, 적당히 의심하다가 그만두겠지….

"거기. 멈춰라."

뭐야? 어째서 나를 정확하게 짚은 거지?

원래는 여기서 멈춰야 한다. 그리고 태연하게 대꾸하며 의심을 피해야 한다. 초보처럼 냅다 도망치면 자기 죄를 인정하는 꼴.

하지만 왜일까. 에비앙 경위에게서 느껴지는 이 묘한 확신은…!

'언제 봤던 범죄자의 뒷모습과 닮았어. 내가 헷갈릴 리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내 감은 틀리지 않아.'

아니, 틀릴 수도 있잖아.

일단 지금은 안 틀렸지만! 그렇게 확신하다가 애먼 사람 잡을 수도 있다고! 백 명의 억울한 사람은 만들어도 한 명의 범죄자를 놓치지 말라는 군국의 모토를…!

잘 지키고 있네.

'일단 제압하고 시작한다.'

좋아. 도망가자.

나는 냅다 뛰었다.

"거기 서라!"

에비앙이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며 강철봉을 머리 위로 빙빙 돌렸다.

저물어가는 노을이 붉었다. 하루 새 오랜 비밀을 가득 푼 에델파이트에 다시금 어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