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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호남성 장사시 인근의 양형산.

"퉤, 쓰벌. 오늘 영업도 글렀구만."

"어쩔 수 없지. 지금 상황이 상황이잖여. 나라까지 무너진 마당에 겁도 없이 싸돌아댕기는 멍청이가 을매나 될까."

"그렇게 태평한 소리 늘어놓을 때야? 이러다 다 굶어 죽게 생겼다고! 이거 우리도 딴 데로 옮겨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아도 두목도 어디로 옮길지 고민인 것 같드라. 얼마 전에 소호채도 못 버티고 이사 간 걸로 생각이 많은 모양이여."

산을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산길 어귀에 뭉쳐 저들끼리 쑥덕거리는 대여섯 명의 무리가 있었다.

자칭 양형산의 산군이자 그릇된 세상을 질타하는 영웅호걸— 이라 하지만.

그냥 까놓고 말해 산적들이었다.

"아, 거. 입구 쪽에선 아직도 신호 없어? 오늘도 공치면 두목이 엔간히 지랄할 텐데."

"읎다. 아무래도 오늘도 그른 거 같다야."

"에휴, 요즘은 상행도 없고. 어디 돈 많은 호구 하나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좋겠네."

"낄낄낄— 실없는 소리 할 거면 그냥 디비 자라, 마! 이 화창한 하늘에서 뭔··· 응?"

바로 그때, 언제나처럼 화목하게 산의 평화를 지키던 그들에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쳐왔다.

"으힉?! 저, 저게 뭐여? 이쪽으로 온···!"

별생각 없이 하늘을 쳐다보다 뭔가를 발견한 이의 경악성을 시작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 하나둘 고개를 들던 그들의 눈앞에—.

후우우웅—!

갑자기 몰아치는 거센 광풍 속에서.

"오, 사람 발견."

하늘에서 웬 사람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어쩐지 듣기만 해도 나른해지는 듯한 태평한 목소리와 함께.

그리고 그를 마주한 순간, 산적들 사이에 일제히 같은 생각이 퍼져 나갔다.

'···정말 사람이 맞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금발에 녹안까지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땅에 색목인(色目人)이 드문 편이긴 하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저게 사람 귀여? 거기다 눈은···!'

'요··· 요괴?!'

하지만 그 외의 모든 부분에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완벽한 조형을 자랑하는 미형의 얼굴과 양옆에 삐죽 솟아오른 귀, 녹색 눈동자 안에 자리한 별 모양의 동공.

심지어 몸 주위엔 유형화된 바람을 두른 채로 하늘을 날아서 내려오지 않았던가?

이건 아무리 편견 없이 개방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이라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기사(奇事)였다.

"······."

"······."

산적들이 슬그머니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로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으나, 사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이고~!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대협!"

하늘에서 호구가 떨어지길 바랐던, 코에 커다란 점이 있는 산적이 가장 먼저 넙죽 엎드리며 구슬프게 외쳤다.

"귀하신 분께서 이런 보잘것없는 놈들에게···."

"뭐, 뭔가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늙으신 노모께서 저만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그 뒤를 따라 서둘러 바닥에 고개를 처박는 산적들.

밑바닥에서 오로지 생존 본능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이들답게 재빠른 상황 판단이었다.

다른 건 다 둘째 치고, 바람을 다루며 하늘을 날아오는 이적을 행한 이에게 생각 없이 대거리하는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음, 이거 이해가 빠른 분들이네요."

그런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늘에서 내려온 이방인, 해리스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 사람들과의 첫 조우에서부터 과하게 손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무엇보다 여기서 「제노글로시」가 활약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이거 꽝인 줄 알았는데 당첨이었잖아?'

이곳의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모든 언어에 「제노글로시」가 관여하고 있다는걸.

시스템의 자동 번역 기능은 정식으로 입장한 최초의 차원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무단으로 진입한 차원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없었으면 괜히 또 한스를 데려오고 언어를 새로 익히는 등,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었겠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제노글로시」를 얻었던 『무작위 기타 스킬 습득』에도 자연스럽게 다시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물론 50만 포인트라는 막대한 지출이 필요하긴 하지만···.

'아니, 아니지.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그에 뽑기의 유혹이 스멀스멀 차올랐으나, 지금 당장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럼 일단, 여러분의 본거지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사실 멀리서부터 그들을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에 있는 산채의 존재 또한 이미 파악한 지 오래였다.

그저 그들이 더 가까웠기에 이쪽으로 먼저 온 것일 뿐.

즉, 이건 그저 단순한 요식행위였다.

"그··· 무슨 일로 그런 누추한 곳에 방문하시려는 것인지 여쭈어도 될···."

"어허! 이 사람 참! ···헤헤, 물론입죠! 이쪽으로 따라와 주십쇼! 가장 빠르고 쾌적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눈치 없는 한 친구의 반문에 슬며시 그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감지했는지, 눈치 빠른 커다란 점의 산적이 다시 분위기를 살리며 곧바로 그를 안내해 주었다.

살짝 기분이 상할 뻔했는데 참으로 다행인 일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들에게.

그리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산채로 안내받은 그는 한순간에 모든 산적들을 휘어잡았고, 이내 그들을 심문해 본격적인 정보 수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신비고수 '해리수'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불과 한 시간 남짓이 지난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

#251

강환계 (3)

"흠, 그러니까 지도 같은 건 따로 없다는 말씀이시죠?"

"예, 예! 보시다시피 저희 같은 작은 산채에서 그런 건 가질 수도 없고 굳이 필요도 없습지요. 근방 산길이나 마을 위치 같은 걸 대충 표시해 놓은 게 있긴 한데, 그건 지도라기보단 그냥 조악한 낙서 같은 것인지라. 예에···."

양형산에 터를 잡은 산적 두목, 황림채주 공팔이 연신 굽실거리며 조용히 식은땀을 훔쳤다.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미청년을 앞에 두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상대를 우습게 보는 마음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아낙네나 지학(志學; 15세)도 되지 않은 아이가 상당한 경지를 이룬 경우도 드물지 않은 무림에서는 산적 또한 극한 직업이었다.

자그마한 산길 하나에 죽치고 앉아 푼돈이나 뜯는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리, 그리 크지 않은 산이라지만 산채까지 차릴 정도면 그래도 무공깨나 익혀야만 가능한 일.

하물며 지금은 천하를 통치하던 나라가 무너지고 세도가와 지역 군벌, 각지의 무력 단체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전국 시대가 아니던가?

당연히 공팔도 아슬아슬하게 일류에 턱걸이하는 수준의 무인이었건만···.

'요괴? ···아니, 신선인가? 젠장,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야!'

그런 그조차 감히 가늠할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는 저 청년이었다.

처음 부하들이 웬 희멀건 색목인 서생을 데려왔을 땐 이놈들이 몸값을 노리고 어디 귀한 집 자제를 잡아 왔나 싶었다.

그가 입은 옷의 양식은 분명 무복과 비슷하긴 한데, 그 재질과 박음질 상태가 영 범상치 않아 보였으니까.

'젠장, 눈과 귀를 봤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이 망할 놈들! 그런 괴물이었으면 빨리 좀 말해줬어야 할 거 아냐!'

단순히 색목인들 사이에서 나는 기형아인가 싶어 그냥 넘긴 것이 패착이었다.

그래서 부하들의 말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두목으로서의 위엄을 보이고자 대뜸 강하게 나갔었는데···.

오싹—

그 직후.

권태로움이 가득 담긴 그 별 모양 동공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그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공포를 맛볼 수 있었다.

'쓰벌, 또 그때 기억이···.'

혼자 생각에 잠긴 해리스 앞에 공손히 시립해 있던 공팔이 살며시 팔뚝의 소름을 쓰다듬었다.

하늘과 땅을 비롯한 천하 만물이 자신을 적대하며 노려보는 듯한 소름 끼치는 기분.

한평생 자연을 벗 삼아 산과 함께 살아왔다고 자부했건만, 그때만큼은 안방같이 편안했던 숲이 마치 맹수의 위장 속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이 바로 지금이었다.

"흐음··· 호남성, 호남성이란 말이죠. 거기다 전쟁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공팔의 자리였던 짐승 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은 해리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은 그 외양처럼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부드러운 미성이었으나, 공팔에게 있어선 염라대왕의 말씀이나 다름없었으니.

이후 그는 해리스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부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짜 내야 했다.

'진작 다른 데로 이사 갈 걸!'

그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존재가 적당히 만족하고 떠나갈 때까지.

***

후우웅—

마치 새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인영.

적당히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시 길을 나선 해리스였다.

'확실히 마지막 정보가 알려지고 10년이 넘게 지나서 그런가. 사전에 조사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한 것 같은데.'

이 땅을 통치하는 제국이 무너지고 각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십 년 이상 이어지며 굳어져 심각한 수준까지 치안이 악화된 상태였다.

각 지역의 성(省)급은 물론 현(縣) 단위까지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질 않았던 것.

'이곳 호남성도 마찬가지고 말이지.'

그나마 제법 시간이 지난 요즘은 초기처럼 대대적인 전면전이 그리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다.

대충 전황이 고착화된 상태에서 자잘한 국지전을 바탕으로 서로의 영역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상태라고 해야 할까.

그중 이곳 호남성에서 가장 큰 세력을 꾸린 것은 군문의 일원인 원강 장군의 군벌과 동정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수적 연합 동정십팔채(洞庭十八寨), 그리고 이 지역 정파들의 대표인 형산파(衡山派)였다.

'그들을 중심으로 각자의 이권에 따라 여러 군소 세력들이 달라붙었다고 했지. 대체 얼마나 개판이기에 수적들이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직접 가서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그래, 지금 해리스는 동정십팔채의 터전이라는 동정호로 향하는 중이었다.

행선지를 그곳으로 정한 것에 딱히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곳이 가장 가까웠기 때문일 뿐이니까.

'시간도 없는데 언제까지 외곽에서 깨작거리고 있어? 일단 덩치 큰 놈을 들이박은 다음 필요한 게 있으면 뜯어내면 되지!'

거기다 동정십팔채는 도적들의 소굴이었으니 딱히 양심에 찔릴 것도 없었다.

놈들도 그간 힘을 바탕으로 강제로 재물을 수금해 왔을 테니 역으로 털리더라도 어디 하소연하지도 못할 터.

'다른 차원의 존재인 정령의 힘을 투사하는 것도 그리 위력 저하가 크지 않아. 역시 500만 포인트짜리 『차원 장벽 완화』 덕분인가.'

거기다 해리스의 컨디션도 백 퍼센트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이 정도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단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세계수에서 멀어진 탓인지 그간 내면에 가득 차 있던 특유의 나태함이 제법 사그라들기도 했고.

'오? 또 하나 찾았네.'

그렇게 한동안 하늘을 가로지르던 도중.

해리스는 감각의 끄트머리에서 느껴진 존재감에 그쪽으로 방향을 틀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휘오오—

그의 눈에 들어온 곳은 어느 절벽 틈새의 얕은 자연 동굴이었다.

갈라지고 요철이 생겨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장소.

그곳에 내려선 그는 이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어떤 식물의 줄기를 잡고서 그대로 쑥 뽑아 들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어떠한 저항도 없이 깔끔하게 뽑혀 나온 사람 모양의 뿌리에는 흙 한 톨 묻어있지 않았다.

"이걸로 세 개째. 앞선 두 개를 합한 것보다 이거 하나가 더 나은데?"

해리스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살펴보았다.

이 풀뿌리는 소위 말하는 영약으로, 이 세계에 흐르는 기운인 '기'가 가득 담긴 신비로운 영초였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인형삼(人形蔘)인가? 신기하네. 진짜 뿌리가 사람처럼 생겼잖아?'

기본적으로 가볍고 자유로운 대신 뭔가를 계기로 뭉치면 밀도가 끝도 없이 올라가는 기의 특성 탓인지, 이 강환계엔 자연의 기운이 정도 이상으로 응집된 영물들이 많이 있었다.

다소 무겁고 끈적한 느낌의 마나가 기반 된 아우테리카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것들.

이 인형삼도 식물 주제에 영성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의 기운을 감출 수 있는 영초였으나, 말 그대로 일대의 자연을 자기 몸처럼 느끼는 하이 엘프 해리스에게 그것들을 찾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너무 많아서 좀 미묘하다 싶은 것들은 거르고, 그의 기준으로도 괜찮다 싶은 것들만 거두고 있는데도 벌써 셋이나 될 만큼.

'영산이 아니어서인지 깃든 기운이 그리 대단하다 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저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것들을 거둬들인 게 이 정도였다.

진짜 작정하고 각 지역의 이름난 영산들을 순회하면 대체 얼마나 많은 영약이 손에 들어올지···.

'음, 꼭 기억해 뒀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실행에 옮겨야겠군.'

그렇게 손에 넣은 것들은 모두 그의 성장에 적잖은 영향을 주게 될 테니까.

이후 다시 바람의 정령 파스칼을 불러 주변에 돌풍을 두른 그는 조금 떨어진 쪽의 산등성이를 슬쩍 일별하곤,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라 북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휘이잉—!

"흐억?! 저, 저건···."

철푸덕!

그리고 해리스의 시선이 닿았던 바로 그 산등성이에서.

우연히 그의 모습을 본 약초꾼 하나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입을 떡 벌렸다.

대단하다는 무림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봤지만, 그 과장된 이야기 속에도 저렇게 바람을 부리며 하늘을 자유롭게 노니는 존재에 대한 말은 없었다.

그보다 저건 아무리 봐도 무림인이라기보다는···.

"시, 신선? 아니, 신령님?"

너무 빨리 사라졌기에 확실히 보진 못했으나, 워낙 인상적이었던 만큼 그 존재의 머리가 찬란한 금빛으로 번쩍였다는 것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마치 하늘의 태양이 지상에 내려왔던 것처럼.

"···이럴 때가 아니지!"

약초꾼은 급한 마음으로 허겁지겁 신령이 승천한 장소로 이동해 그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아까 그건 분명 신령님께서 뭔가를 점지해 주신 것이 틀림없었으니.

"아!"

그리고 그는 인형삼에 몰린 기운의 영향을 받고 그 주변에 자라난, 해리스가 '수준 이하'라고 판단해 남겨두고 간 영초 몇 뿌리를 얻고 그대로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어흑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천지신명님! 이 정도면 우리 동이 약값을··· 드디어 그 아이를 살릴 수 있··· 크흡!"

힘든 처지에 어떻게든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위험한 산을 오르던 약초꾼.

어쩐 일인지 요 몇 년간 채취되는 약초들의 효능이 급격히 떨어진 탓에 앞날이 막막했던 그는 해리스의 무관심 속에서 간만에 큰 소득을 얻게 되었고.

그걸 바탕으로 비싼 약값은 물론 가족들에게 푸짐한 고깃국까지 먹일 수 있었다.

'도착이군. 과연, 이곳이 동정호인가? 무슨 호수가 바다 같아.'

그렇게 정작 본인은 모르는 사이, 금빛 후광을 머리에 두르고 하늘을 노니는 신령에 대한 이야기가 알음알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해리스를 강환계로 보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처음엔 그 이질적인 외모를 가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었다.

'이세계에서 가져온 마도구는 지구에서라면 모를까, 다른 성질의 기운이 가득한 타 차원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그건 돈 많은 이들이 전송에 대비해 긁어모았던 마도구가 정작 이세계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상식이 된 이야기였으며.

해리스도 본인이 직접 사용하는 능력이 아니라면 자신의 모습을 감출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령 궁수인 해리스에겐 그런 능력이 없지.'

그렇다면 복면이라도 써야 할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 모양의 비범한 동공을 감출 수 없었다.

이래저래 곤란하기 그지없는 상황.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문득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왜? 굳이 번거롭게 모습을 감출 필요가 있나?'

해리스는 무려 초월에 이른 강자, 강환계 기준으로 따지자면 현경의 고수였다.

대충 사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 무림에서 그만한 경지에 오른 이는 숨어있을 은거기인의 수를 후하게 잡더라도 고작 열 명 남짓.

그런 상황인데··· 왜 남의 눈치를 살피며 꽁꽁 싸매야 하지?

'그럴 필요 없지! 특이한 외모인데 지들이 뭐 어쩔 거야?'

그렇게 해서 지금처럼 그냥 당당하게 활동하게 된 것이었다.

무협 스타일의 의복은 지구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 무복을 준비하는 정도의 성의는 보였지만.

휘오오—

콰르르릉— 파지직!

"끄아악!"

"사, 살려···!"

하지만 막상 이제 와 보니, 역시 어떻게든 모습을 감출 방법을 찾는 게 낫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개성적인 외모에 정령술이란 특이한 능력까지 겹치다 보니 아무래도···.

"으아아—! 요괴다! 요괴가 쳐들어왔다!"

"마, 막아! 이 얼간이들아! 언제까지 소리만 지를··· 크어억!"

"히익! 저,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가까이 갈 수도 없는데!"

"나, 나무아미타불···. 요, 요괴야! 물렀거라!"

···이 모습을 마주한 이들이 보이는 반응이 생각 이상으로 과격했기 때문이었다.

고오오—

빠지지직—!

해리스를 중심으로 일대를 휘감은 어마어마한 폭풍.

그 인력에 끌려와 하늘을 뒤덮은 짙은 구름.

그리고 거기에 섞여 사방으로 스파크를 튀기는 뇌전까지.

지금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호풍환우(呼風喚雨)를 부리는 대요괴 그 자체였다.

'아니, 이건 외모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보니 이런 능력을 사용하는 이가 갑자기 쳐들어와 본거지를 때려 부수면, 그 외모가 어떻더라도 저런 반응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뭐, 이제 와선 어쩔 수 없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해리스가 다시 자신의 목표물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동정십팔채의 일각, 어룡채의 본거지.

그가 보일 강호행의 첫 번째 제물이 될 장소였다.

#252

닫힌 차원 (1)

동정호 인근의 허름한 어촌.

웅성웅성—

일을 접기에는 한참 이른 시간대였으나, 지금 마을 사람 중에 평소와 같은 일과를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지친 몸으로 배를 타고 나갔던 어부들은 서둘러 귀항했고, 그들의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물가로 향하면서 나루터는 때아닌 인파로 북적였다.

하지만 그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그 피골이 상접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았다.

바로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로 호수 저편을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다는 것.

"세상에 저게 뭐여?"

"허어,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어무니! 저거···!"

이 일대의 지배자인 어룡채의 수채가 있는 방향에서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이상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화창한 이쪽과는 달리 일대의 구름을 모조리 빨아들인 듯한 소용돌이 형상의 구름이 하늘에 두껍게 드리웠고.

제법 거리가 있는 이곳에서도 느껴지는 거센 폭풍이 그 경계를 두르듯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번쩍—

쿠르르릉—!

거기다 그 중심부에서 터져 나오는 천둥번개는 인간 본연의 공포심을 자극할 정도로 위압적이었으니.

두려운 눈으로 그 현상을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경외감에 마른침을 삼켜댔다.

"천벌이지, 천벌이야. 저 죽일 놈들 때문에 동정호의 용왕께서 노하신 게야."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등이 굽은 노인 하나가 냉담하게 그런 말을 툭 내뱉었다.

국가가 붕괴하면서 시작된 세력들 간의 영역 다툼, 그리고 그로 인한 수적들의 수탈과 횡포가 극에 달한 지금.

놈들에게 아들 내외와 손자를 잃고도 남은 가족을 위해 억지로 참아야만 했던 울분이 저 압도적인 광경을 보자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것이다.

"아이고, 어르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어휴— 영감,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술이라도 자셨소? 얼른 들어가 잠이라도 주무시구랴!"

그에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기겁해 그를 말리며 슬쩍 주위를 살폈다.

노인의 마음이야 이해한다지만, 이 마을은 실질적으로 어룡채가 통치하고 있는 곳.

괜한 말을 했다가 그 사실이 놈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한소리 뱉었던 노인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우묵한 눈으로 수채가 있는 방향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나였던 제국이 사실상 수십 개의 도시 국가로 쪼개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그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선 바로 저 수적들이 왕이었으니까.

'바라옵고, 바라옵나이다. 용왕이시여, 부디 저 인두겁을 쓴 악귀들에게 피의 철퇴를 내려주소서!'

그저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저 천인공노할 놈들에게 하늘의 심판이 있기를.

***

'딱히 대단한 놈들은 없네.'

주변에 폭풍과 번개를 두른 해리스가 난장판이 된 수채를 가볍게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활은 물론이고 다른 정령들까지 꺼낼 필요도 없었다.

이 정도 수적들을 때려잡는 것 정도야 그와 연결된 두 정령만으로도 충분했으니.

그리고 그건 이 어룡채의 채주를 상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다른 놈들에 비해선 압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래봐야 극의의 문턱도 밟지 못한 잔챙이일 뿐.

"끄흐으— 마,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술법으로도 불가능한데···! 설마, 진짜 전설 속의 요괴라도 된단 말인가···?"

와트의 전격에 지져진 놈은 이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정신이 나간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보를 뽑아내고자 일부러 죽이지 않고 제압만 했는데, 충격이 컸던 모양인지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겠어.'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자고로 오래된 전자 제품과 인간은 두들기다 보면 고쳐지기 마련이라 했다.

최신 제품들에 해당되는 소리는 아니라지만, 저놈은 딱 보기에도 옛날 사람이지 않은가?

'죽기 싫으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 음? 잠깐.'

그러다 문득, 해리스는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가만히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반추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좀··· 많이 과격해진 것 같은데?'

아무리 세계수의 권역에서 멀어진 영향이라고는 하나, 그걸 감안해도 생각 이상으로 난폭한 행보였다.

아우테리카에서의 그 느긋하고 태평하던 해리스라곤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흐음, 이것도 한번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네. 그전에 지금은 일단···.'

그런 자신의 변화가 내심 신경 쓰이긴 했지만 당장은 사로잡은 수적 두목을 심문하는 게 우선이었다.

고작 산 하나에 눌러앉아 있던 산적들보단 한 지역을 차지한 그에게서 훨씬 더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저희끼리 대화를 좀 나눠 볼까요? 평화적으로?"

그런 마음으로 어룡채주에게 다가간 해리스가 아직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온화하게 말을 건넸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으, 으윽··· 사, 살려주···."

어째서 그걸 마주한 상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

세 개의 차원에서 동시에 아바타를 운용하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었다.

바로 강환계의 시간 흐름이 아우테리카보다 조금 더 빠르다는 점.

대충 비교해 보니 아우테리카에서의 10일이 강환계에서는 10일하고도 8시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오래 있을 게 아니라면 그리 큰 차이는 아니지만 말이지. 그래도 약간의 시간이 더 생긴 건 나쁘지 않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룡채주를 심문하며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드르륵— 드륵—

나는 마우스의 휠을 움직여 모니터에 떠오른 강환계에 대한 정보를 다시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번에 알게 된 내용에 대해선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몰라 다른 '닫힌 차원'에 대해서도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마찬가지.

이내 추가 정보를 찾는 걸 포기한 나는 그 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사색에 잠겼다.

'강환계가 닫힌 차원이 되어버린 이유.'

그리고 무려 10년이 넘도록 이어진 전쟁의 원인.

또한 그 전, 강대하던 제국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비사(祕事).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어떠한 비밀까지.

'···아니, 벌써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다. 좀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해. 역시 고위층일수록 알고 있는 게 많겠지.'

호남성의 3강 중 하나인 동정십팔채의 수좌이자 화경의 고수인 총채주라면 자신에게 더 큰 확신을 줄 수 있을 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후우, 뭔가가 있을 거라 짐작하긴 했는데.'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건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무력이 중시되는 무림 타입의 이세계인 강환계에서.

그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기(氣)가 메말라가고 있다는 것은.

***

어룡채를 정리한 직후.

해리스는 놈들의 본거지에 있던 창고를 탈탈 털어 「아바타 클라우드」로 재화와 무공 비급 등을 챙기고 곧바로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서비스로 식량 같은 물자들은 인근 마을에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차피 수적들은 전부 죽거나 다시는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어 그걸로 뭐라 할 놈들은 남아있지 않은 상황.

물론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다른 수적채에서 알게 되면 놈들이 뭔가 해를 가할지도 몰랐으나, 그는 그렇게 되기 전에 일을 전부 끝마칠 자신이 있었다.

'이곳에서의 정보 전달 수단이라 해봐야 직접 가서 전달하는 것 아니면 전서구를 이용하는 게 전부지.'

그리고 그런 정보 전달은 처음 보는 동물들과도 쉽게 친해지는 하이 엘프 앞에선 무의미할 뿐이었다.

훈련된 본능마저 넘어서는 압도적인 친화력에 바쁘게 날아가던 새들마저 방향을 틀고 다가와 그에게 애교부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보다···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가는군. 이 땅의 실태가.'

모여 사는 사람이 많은 호수 인근인 만큼, 날아가며 보이는 지상의 모습에 이 세상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강환계의 위험도가 어째서 매우 높음이었는지도.

'끝나지 않는 전쟁과 몇 년째 계속되는 대기근. 거기다 지역끼리의 교류는 단절되었고 곳곳에는 역병이 창궐하며 도적 떼까지 날뛰니···.'

강자라면 그리 문제 되지 않을지 몰라도, 이 세계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에겐 그야말로 극악의 난이도라 할 수 있었다.

강해지기 위한 수련은커녕 이 세태에 휩쓸려 당장 생존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으니.

그런 지상의 모습에 해리스는 당당하게 하늘을 가로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단 하루—.

부지런히 움직인 해리스가 경로상의 모든 수적채를 때려 부수고, 동정십팔채의 총채주 교룡패도 진덕만과 마주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대체 뭐냐! 이 터무니없는 괴물은!"

"초, 총채주님! 저 바람 때문에 화살이 통하지 않습니다!"

"다가갈 수도 없소, 총채주! 이대로 가다간··· 끄어억!"

휘우웅—

파지지직—!

화르륵—!

이어진 그와의 싸움도 그리 어렵지 않게 끝났다.

이 인근에서야 그가 범접할 수 없는 최고수라고 하지만, 고작해야 천하백대고수쯤에나 이름 올리는 실력으로 해리스와 대적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

그래도 보다 원활한 주변 정리를 위해 불의 정령인 칼리까지 꺼내 들게 했으니, 그를 비롯한 동정십팔채의 정예들도 체면치레 정도는 했다고 봐도 되리라.

"···크윽, 대체 고인께선 누구시오? 어떤 연유로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난동을 부린단 말인가!"

"아, 전 해리수라 합니다. 잠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허! 그런 거라면 그냥···!"

"그리고 겸사겸사 청소도 하고 말이죠. 뭐, 어쩌겠습니까? 그간 쌓인 업보라 생각하시길."

"······!"

그렇게 통성명도 마친 상태에서 평화로운 심문 시간이 이어졌다.

자존심 때문인지 총채주 진덕만이 처음에 조금 비협조적으로 나오긴 했지만.

어른들의 말씀을 떠올린 해리스가 번개의 정령 와트를 이용해 그를 열심히 '고쳐'주자, 결국 그도 마음을 고쳐먹고 열성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이래서 옛말에 어른들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것 없다고 하는 거겠지.

'하아, 골치 아프네.'

그리고 그를 통해 다시 강환계의 상태를 확인한 해리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지금 상황은 알량한 무력만 가지고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 싸움엔 우리의 생존이 걸려있소! 용맥(龍脈)을 확보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되어 잡아먹힐 것이 뻔한데 어찌 물러설 수 있을까!"

언제나 풍족하던 세상의 기운이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이 세상의 주요 세력들은 이미 그 이상 사태를 파악하고, 곧바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흐르는 에너지의 중심지이자 꾸준히 '기'가 뿜어져 나오는 분출구, 용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설령 그 과정에서 다른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기존 무인의 경지 상승은 물론 새로운 무인을 양성하고, 또 영약을 만들거나 내상을 다스리는 등 모든 일에 기는 필수 불가결. 우리도 좋아서 전쟁을 하는 게 아니오!"

그 에너지도 무한정한 것이 아니었기에 양보도, 타협도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 사막에서 몇 안 되는 오아시스를 두고 각 부족끼리 생존 경쟁을 벌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전쟁이 멈추지 않는 이유.

모두가 필사적이기에 더욱 처절한 비극의 연쇄였다.

"···아! 그런가. 당신, 이세계인이었군? 천살마제를 끝으로 이제는 모두 사라진 줄 알았거늘."

그렇게 한동안 울분을 토하던 진덕만이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정체에 대해 감도 못 잡았던 어룡채주를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퍼진 정보는 아닌 듯한데, 과연 위치가 위치인지 그는 이세계인에 대해서도 제법 잘 아는 듯 보였다.

'하긴, 차원이 닫히기 전까지만 해도 강환계는 각성자들이 제법 오래 활동한 차원이었지.'

그런데도 곧바로 연상하지 못했던 건 해리스의 힘이 이세계인들 기준으로도 워낙 이질적이어서 일 터.

일반적인 각성자들은 그리 강하지 않은 이능 하나만을 가지고 그 성장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무공을 익혀 두각을 드러냈을 테니, 아예 이계의 힘만을 이 정도로 사용하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을···.

"으음, 그러고 보니 비슷한 경우를 들어봤던 것 같은데. 터무니없는 헛소리라 여겼었건만, 혹시 그게 사실이었나?"

···텐데, 그의 혼잣말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한껏 예민해진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저 이야기를 결코 쉽게 넘겨선 안 된다고.

그리고 약발이 떨어졌는지 슬슬 다시 뻗대기 시작하는 진덕만을 좀 더 세심하게 고쳐주자, 그는 치를 떨며 잠시 멈췄던 말을 서둘러 다시 이었다.

"큭! 나도 자세한 건 모르오! 그저 우연히 전해 들었을 뿐이니···!"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아는 사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정보를 접한 게 20년도 더 지났을 때인 데다 관심도 없어서 그냥 흘려들었다고 하니까.

다만, 어쩐지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이 나라가 무너지고 갈라진 게 전부 그자 탓이라는 내용이었는데···. 크흠, 그러고 보니 세상의 기가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도 얼추 비슷하군."

왠지 그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253

닫힌 차원 (2)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집무실.

그곳에 놓인 업무용 모니터에서 온갖 정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지간한 동체시력으로는 단 한 줄도 읽지 못할 속도였지만···.

'이제 이것도 익숙해졌군.'

그 앞에 앉은 사내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태연하게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이잉—

한쪽 안구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과 함께, 눈에 비친 막대한 정보의 홍수가 고스란히 그의 머릿속에 투사되었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이 겪었다면 미쳐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일이었으나, 초월적인 정신 능력을 가진 그에게는 그저 가벼운 두뇌 트레이닝에 불과했다.

'이게 전부인가.'

과연 마도 공학의 정수가 담긴 궁극의 의안.

그 압도적인 성능에 힘입어 순식간에 방대한 양의 보고서를 모조리 뇌리에 입력한 사내, 율령자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순식간에 머릿속의 정보를 반추했다.

'···어디냐, 하회탈.'

그날 일본에서의 싸움 직후에 모습을 감춘 하회탈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놈의 뒤를 잇듯 하인즈라는 흡혈귀가 서울의 밤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지만, 그쪽은 닥터가 직접 관심을 두고 수를 쓰고 있었으니 그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역시 그때의 싸움으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거겠지.'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애초에 놈을 무력화하기 위해 작정하고 벌인 정신 테러였다.

그걸 맞고도 멀쩡했다면 오히려 억울하기만 할 터.

다시 눈을 뜬 율령자가 슬쩍 시선을 돌려 축 늘어진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하회탈에게 당한 여파로 한쪽 눈과 양다리에 이어 기능을 잃은 신체를 마주하자 가슴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회탈···.'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곱씹으며 원한을 되새기던 중—.

-삐비빅!

집무실 스피커에서 갑자기 통신 요청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이내 그 대상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왼손을 뻗어 상대와 연결을 승인했다.

-아, 아— 여기는 닥터. 귀하는 율령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닥터. 무슨 일이십니까?"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경박한 목소리.

그는 그것에 슬쩍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차분하게 응답했다.

-우햐햣~ 아, 회주가 다시 떠났다는 것을 알려드리려고 연락했습니다! 최대한 기다려 보려고 했는데 더는 힘들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일본에서 하회탈과의 충돌이 있고 나서 제법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회주는 놈이 다시 나타날 걸 대비하며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었는데, 그렇게나마 보낼 수 있었던 시간도 이제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스마일 마스크와 싸우며 생각 이상으로 '지구'의 이목을 끌어 버려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이왕 그렇게 된 거 조금 무리하더라도 놈을 확실히 잡아들이려 했건만···. 에잉~ 이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송구스럽군요. 제가 확실히 하지 못한 탓에, 회주께서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괜히 헛되이 낭비한 것 같아서."

솔직히 자신의 탓이 크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사안이 워낙 크다 보니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갈 수도 없었다.

철저하게 짜여있던 계획이 어긋난 만큼 번천회의 대계도 전반적으로 더 미뤄질 수밖에 없었으니.

-아아~ 세상에 뜻한 대로만 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을 택하면 되지요. 회주야 어디서든 알아서 잘할 테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그에 닥터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아는지 그에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일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불만을 토해낼 뿐.

-쯧, 그런데 역시 이 상황···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대체 언제까지 신들의 뜻대로 놀아나야 하는지!

그것은 일을 방해한 하회탈을 탓하는 것이 아닌, 회주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이유이자— 번천회의 존재의의에 대한 것이었다.

"이 정도 오차는 예상 범위이지 않습니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후— 그랬죠, 맞습니다! 아아, 그때가 기다려지는군요! 신이라는 불합리한 존재가 있으면 과학의 진보도, 새로운 발견과 발명도 무의미해지는 법! 인간 세상에서의 일은 인간끼리 해결해야 마땅한데, 어딜 감히 신 같은 게 끼어든단 말입니까아—!

웬일로 비교적 얌전하다 싶었건만.

아니나 다를까, 혼잣말하듯 빠르게 말하던 닥터의 목소리에 서서히 광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군.'

역시 이래야 번천회의 대표 광인이라 할 수 있겠지.

그에 율령자는 포기한 듯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이곤 적당히 그의 말에 맞장구 쳐 주었다.

그렇게 닥터의 흥분 가득한 열변이 한참 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열심히 떠들던 그는 자신의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혼자 씩씩거리더니, 이내 그 에너지를 연구에 쏟아붓겠다며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 버렸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 속.

"하아."

짧은 한숨을 내쉰 율령자가 눈을 감고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문득 하회탈과 처음 조우했을 때, 그 정신세계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귀환자들의 자유. 우리가 주도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

-우리는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유를 위해 투쟁해 왔지.

'자유라···.'

그때 그가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다만, 그 상대가 인간 권력자가 아닌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뿐.

물론 끝에는 결국 세계의 패권도 손에 들어올 테니 딱히 다르지 않기도 했다.

'대의를 위해선 희생은 불가피하다.'

테러 또한 그 대업의 일환으로 의식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였다.

계획대로 된다면 최종적으로 지구의 인구 절반 정도가 희생될 터.

하회탈은 그걸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했으나, 어차피 한 명이 할 수 있는 방해엔 한계가 있었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계획은 지금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으니까.

***

'번천회주, 설마 그놈인가?'

구체적인 근거도 맥락도 없는 추론이었지만, 어떤 특이점을 넘어선 예리한 직감이 선명하게 경고해 왔다.

지금 벌어진 사태의 원인이 바로 그자일 것이라고.

그에 좀 더 상세한 정보의 필요성을 느낀 해리스는 진덕만의 기억력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파지직—!

"으그그극—! 진짜 몰라! 모른다고!"

"음? 반말입니까?"

"아, 아니! 내 이 이상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온갖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했음에도 그에게서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순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은 그저 '제국 붕괴의 뒷면에 그런 비사가 있다더라'는 식의 근거 없는 소문이 전부일 뿐.

"그럼 그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크윽, 내 의형··· 장강수로채(長江水路寨)의 총채주에게 들었소! 그 양반도 어디서 들었다면서 술자리에서 우스갯소리처럼 한 말이라 출처는 모르지만!"

"장강수로채라···."

장강수로채.

그들은 동정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정십팔채와 같은 수적 연합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모든 면에서 상위호환인 거대 조직이었다.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물류의 중심은 수운(水運)일 수밖에 없었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장강을 기반으로 삼는 그들은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수로의 중요성을 아는 관에서도 엄격히 규제하고 나섰지만, 애초에 도적이라는 존재는 그런 통제를 피하는 데 도가 튼 이들이 아니던가?

'거기다 여긴 소수의 강자가 다수의 군대를 압도할 수도 있는 세계니까.'

넓은 장강을 이리저리 누비며 밀무역과 통행세 등으로 부를 축적해 관의 골칫거리가 되었던 수적들.

나라가 무너져 내리며 고삐가 풀린 지금, 그들은 수로를 독점하며 오히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기 전보다 더한 세를 떨치고 있었다.

"으음, 이거 곤란하군요."

그런 정보를 떠올린 해리스가 침음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문제는 그 장강의 물줄기가 어마어마하게 장대하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7일 남짓.

그 사이 장강 어딘가를 싸돌아다니고 있을 목표물을 잡아다 정보를 캐내기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아니,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서두르지 말자. 어차피 처음 목표는 정보를 수집한 다음 성장하기 적합한 환경을 마련하려는 것이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그게 수적들을 모조리 때려잡는 깽판기가 되어버렸지만.

당장 거기에 전력투구할 필요는 없었다.

"끄응···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소만. 뭔가 알고 싶은 게 있다면 고작 수적 나부랭이인 우리에게 이러지 말고, 보다 잘 알만한 이들을 찾아가 보는 게 어떻소? 저기 장강 너머 호북성 융중의 제갈세가라던가."

그때 진덕만이 앓는 소리를 내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자신에게 붙은 액운을 남에게 떠넘기려는 듯한 모습이긴 했으나, 확실히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제갈세가?"

"크흠,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많다는 이들이지. 황실 관리를 많이 배출하기도 했고 말이오. 또 기의 쇠퇴와 용맥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도 제갈세가에서 가장 먼저 알아냈다는 말이 있소."

확실히 그런 곳이라면 이 사태에 대한 내막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휘하의 여러 수채를 전전한다는 장강수로채주와는 달리 거점이 명확해 찾아가기 쉽기도 하고.

'흐음, 거기다 이름난 명문이란 말이지.'

이런 혼란 속에서는 사실상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장소 따윈 없을 터.

그런 상황이었으니 원활한 생활을 위해서는 현지 협력 업체의 도움이 필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아무 곳이나 선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럼, 일단 한번 가서 확인해 볼까?'

물론, 수적들이 모아둔 재물들은 모두 수거하고 나서.

***

동정호 인근의 허름한 어촌.

엊그제만 해도 죽지 못해 산다는 듯 암울한 분위기만이 감돌던 곳이었으나, 지금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찾아온 작은 희망에 한껏 들떠 있었다.

그들을 수탈하던 수적들이 천벌을 받은 건 물론, 그로 인해 텅 비었던 곳간이 채워지며 마음이 넉넉해졌던 것이다.

또 어떤 풍파에 사그라질지 모를 미약한 희망이었지만, 그것은 힘들게 살아온 이들이 당장 오늘을 버틸 힘이 되어 주었다.

"허어, 이건···."

그리고 그 작은 마을 어귀에.

낡고 헤진 도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들어서며 탄성을 토했다.

"뉘시오?"

그에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한 등이 굽은 노인이 그를 보며 경계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환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렇다 할 내객이 없었던 이런 작은 어촌에 갑자기 찾아온 외지인이라니.

어떻게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지 않은가?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어르신. 빈도(貧道)는 청관이라 합니다."

"···도사셨소? 여기엔 무슨 일로···?"

그러나 중년의 사내가 보인 공손한 인사에 노인의 경계심이 살짝 누그러졌다.

물론 이런 시대엔 도사건 스님이건 위험한 건 매한가지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예를 차릴 정도면 당장 악심을 내보이진 않을 테니까.

"그것과 관련해서 어르신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그리고 노인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 도사, 청관이 이내 고개를 돌려 호수 저편을 바라보았다.

"혹시, 저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바다 같은 넓이를 자랑하는 동정호 안의 작은 섬.

얼마 전까지 이 일대를 지배하던 어룡채의 수채가 있던 장소였다.

"오호! 역시 도사님이라 한 번에 알아보시는 모양이구려. 허헛, 동정호의 용왕께서 수적 놈들에게 천벌을 내리셨다오!"

"용왕··· 말입니까?"

노인이 언제 경계심을 내보였냐는 듯 반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청관에게 그날 보았던 그 장엄하면서도 신비로웠던 광경에 대해 늘어놓았다.

하늘을 뒤덮은 소용돌이 모양의 짙은 구름과 일대를 감싸며 휘몰아치던 어마어마한 폭풍.

거기에 뇌신이 강림한 듯 연신 지상에서 터져 나오던 천둥번개까지.

그 허풍 같은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한 청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다시 어떠한 흔적이 짙게 남은 섬 쪽으로 향했다.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도 노인의 말을 그저 허풍으로 치부했을 터였다.

그 정도로 그 이상 현상에 대한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었으니.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곳에 남아있는 어마어마한, 그리고 이 세상의 기운과는 명백히 이질적인 흔적들을.

'···역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노인은 동정호의 용왕이 천벌이 내렸다고 하지만 아마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용왕이건 신선이건 요괴건, 그들은 어쨌든 이 세계에 속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을 테니까.

청관은 자신의 질문에 답해준 노인에게 공손히 감사를 표하고는 서둘러 마을을 떠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등짐에서 제구(祭具)들을 꺼내 간이 사당(祠堂)을 구축한 후, 그 중심에 앉아 부적 한 장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며 조용히 주문을 읊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화르륵—

갑자기 부적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주변에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부적은 타들어 가기는커녕 조금의 그을음도 없이 처음 그대로 빳빳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빈도 청관이 아뢰옵니다."

그리고 그 도사, 모산파(茅山派)의 술사 청관이 경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호남성 동정호에서 이계의 힘을 지닌 이세계인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이곳과는 한참 떨어진 강소성의 본산으로 보내는 전언을.

#254

닫힌 차원 (3)

휴버트 상회 상회주 집무실.

"···그럼 광물 유통 건은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상회주님."

"그래, 보고할 사안은 그게 끝인가?"

"네! 당장 급한 건 여기까지입니다. 뭔가 추가로 지시하실 사항이라도?"

업무 보고를 마친 디아나가 결재받은 서류를 챙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곱게 정리해 한 곳으로 땋아 내린 머리에 단정하고 격식 있는 옷차림까지.

이젠 어딜 어떻게 봐도 훌륭한 비서로 성장한 그녀였다.

"아니, 아까 그걸로 충분해. 따로 일이 생기면 그때 호출하도록 하지."

"아, 네! 그럼 전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알아서 조치하고 추후에 보고하도록. 오늘은 잠깐 혼자 집중하고 싶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품에 한 아름의 서류를 끌어안은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이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달칵—

그렇게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게 된 휴버트.

그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작은 미소를 머금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역시 굉장히 유능하단 말이야? 어지간한 일은 알아서 처리하니 일도 편해졌고. 아직 나이가 어려서 경험이 부족한 게 흠이지만, 사실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니까. 아니, 오히려 나보다 훨씬 낫다고 봐야지.'

사실 휴버트가 가진 상재는 딱히 대단할 게 없었다.

다른 아바타를 통한 금력과 무력, 권력과 정보력 등이 워낙 사기적인 데다, 거기에 어느 정도의 행운까지 더해져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뿐.

그에 반해 디아나가 가진 재능은 진짜배기였다.

무려 「분석」 스킬이 보장한 '천재적인 상재'가 아니던가?

'지금도 저 정도 수준인데 거기에 제대로 된 정보까지 쥐여 준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정보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휴버트의 선견지명에 그저 감탄을 토하기 바빴으나, 그의 비서직을 맡게 된 디아나가 보인 반응은 달랐다.

오로지 직관만으로 해리스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물론, 그의 짧은 지시에 담긴 의도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더 효율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던 것이다.

'디아나를 비서로 올린 후부터 확실히 업무 효율이 말도 안 되게 올라갔어. 거기다 신뢰도 또한 더할 나위 없으니.'

제대로 밀어주기만 한다면 휴버트 상회의 위상을 몇 단계는 끌어올려 줄 인재였다.

처음엔 그 후각에만 관심 있을 뿐이었거늘, 별생각 없이 산 주식이 몇 배 이상으로 불어나는 것을 본 것처럼 흡족해졌다.

'그럼 어지간한 일들은 디아나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난 슬슬 이쪽 일에 집중해 볼까.'

그가 따로 혼자 하고자 했던 업무.

그것은 상회와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있는 이 세계에 관련된 것조차 아니었다.

후두둑— 투욱!

휴버트의 팔목에 걸려 있던 아공간 마도구에서 나온 한 무더기의 서적들이 옆쪽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와 동시에 은은한 묵향(墨香)이 확 퍼져 나갔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으로 만들어져 제본된, 그 표지부터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가득한 이계의 책자들이었다.

그렇게 「아바타 클라우드」로 전해 받고 따로 담아뒀던 것들이 모두 꺼내지고, 마침내 준비를 마친 그는 그중 가장 위에 있는 책 하나를 집어 들고 곧바로 「분석」을 사용했다.

-사파로 분류된 철괴방의 독문 비급. 외공과 병행하여 수련하면 전신 세포로 기가 순환하며, 신체의 성장을 북돋고 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진다. 추후 육체를 매개로 기를 수발하는 데에는 유리해지나, 일정 경지 이상으로 성장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종합 등급 : C-

-주요 특징 : 다소 낮은 습득 난이도, 빠른 성장 속도, 높은 외공 숙련, 다소 낮은 내공 숙련, 낮은 성장 한계

'꽝이군.'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며 대충 내용을 살핀 휴버트가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반대편 자리로 옮겨 놓았다.

수련자를 적당히 써먹을 만한 수준으로 빠르게 끌어올리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그런 어설픈 능력은 딱히 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으니.

이어서 그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룡채를 시작으로 동정호에 자리한 다수의 수채와 총채주까지 털어 확보한 서적들이 그 성향과 효용성에 따라 하나둘 분류되어 갔다.

'흠, 과연···. 정파 무공들의 비율도 굉장히 높은데?'

이레귤러라 할 수 있는 해리스에게 무방비로 본거지를 습격당한 탓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려서 그렇지, 역시 한 성(省)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던 세력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주변 군소 정파에게서 털어온 것으로 보이는 비급의 수도 상당했던 것이다.

'거참, 이거 너무 기대가 컸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수준은 대체로 고만고만했다.

지금까지 그의 성에 차는 무공이라곤 동정십팔채 총채주인 진덕만에게서 뜯어온 '교룡도법(蛟龍刀法)(A-)'과 '경파악랑심결(鯨波鰐浪心訣)(A)'을 비롯한 서너 개가 전부.

수적들이 약탈해 수집한 비급의 숫자는 백을 훌쩍 넘어갔지만, 그 대부분은 D급 이하의 별 볼 일 없는 것들이었다.

'어휴, 도적놈들이 그럼 그렇지. 어쩐지 애들이 영 부실하더라니 다 거품이었나 보네.'

그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휴버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도적놈들이 주변 일대를 지배하던 거대 세력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어쨌든 그의 성에 차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뭐 하나만이라도 걸리라는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가던 와중.

그의 손이 유독 낡아서 표지의 제목도 남아있지 않은 고서로 향했고—.

"음? 이건?"

이내 그것의 상세 정보를 확인한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나타낸다고 알려진 여덟 가지 상을 다루고자 하는 비원이 담긴 절세 비급. 천지 만물과 끝없는 조화를 추구하며 합일을 이루면 무한정의 내공을 바탕으로 물질세계에 간섭할 수 있게 된다. 단순히 무재뿐만이 아니라 철학과 만물에 대한 깊은 궁구를 필요로 하기에 익히는 것이 지극히 난해하다.

-종합 등급 : S

-주요 특징 : 매우 높은 습득 난이도, 느린 성장 속도, 다소 높은 외공 숙련, 매우 높은 내공 숙련, 매우 높은 성장 한계

무려 S급으로 판정된 무공이 튀어나와 버린 것이었다.

'···이게 진짜로 나오네?'

사실 불만스럽게 투덜거리긴 했으나 비급들을 살피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바로 「분석」 스킬이 판별하는 등급이 굉장히 짜다는 것.

그 기준으로 종합 등급 C급이면 군소 방파에선 적전제자나 전수받는 귀한 절기 취급이었고, A급은 대문파에서조차 몇 안 되는 손꼽히는 비전이나 다름없었다.

'천살마제를 제외하면 한스가 상대한 강환계 출신들이 익힌 무공은 높아봐야 B등급 정도 되려나.'

그래서 흔히 말하는 '천마신공' 같은 이름난 절세 신공 정도는 되어야 S급 이상의 판정을 받지 않을까 싶었는데···.

솔직히 쓸 만한 A+급 정도만 나와도 만족하려 했건만, 이건 기대 이상의 수확이었다.

'심지어 이건 총채주가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군. 일개 수적 두목의 창고에 이런 게 처박혀 있었다니.'

아무리 표지가 마모되었다 한들 무공을 익혔다는 인간이 이런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런 찝찝한 마음으로 책자를 펼쳐 안의 내용을 살펴본 그는—.

곧 왜 이것이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런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늘과 땅의 자리가 정해지고, 산과 연못의 기운이 통···며, 천둥과 바람이 서로 부딪히고, ···과 불이 서로 쏘지 않으니 팔괘(八卦)가 어우러져···

-건(乾)은 머리가 되고 곤(坤)은 배가 되며, 진(震)은 발이 되고 ···은 다리가 된다. 감(坎)은 귀가 되고 이(離)는 눈이 되며, 간(艮)은 손이 되고 태(兌)는 입이···.

'뭔 소리야 이게.'

가만히 책장을 넘기던 휴버트의 입가가 비틀렸다.

다른 비급엔 난해한 내용을 최대한 풀어 쓰려는 노력이라도 엿보였었는데, 이건 그냥 대놓고 뜬구름 잡는 소리만 가득 담겨 있었다.

심지어 오래된 데다 보관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아 몇몇 글자는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지기까지 했으니.

수적 두목이 어떤 경로로 이걸 손에 넣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그도 몇 페이지 정도 읽다가 곧바로 때려치워 버렸을 것이다.

그나마 인체 도해를 비롯해 무공서에나 있을 법한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비급들이 있던 책장에라도 꽂힐 수 있었겠지.

'A급 비급들도 이 정도로 난해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서책을 몇 번이나 뒤적인 휴버트가 다시 처음부터 진지하게 비급을 읽어 내렸다.

그 내용을 이루는 강환계의 문자는 「제노글로시」를 통해 즉시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 무공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거기에 내재된 함의(含意)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무림계 귀환자의 기억은··· 그래, 그나마 없는 것보단 낫겠구나. 거참, 이게 무슨 암호 해독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참고할 만한 기억들이 다수 있었으니 시간만 투자한다면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접한 무림계 최고수라 할 수 있는 천살마제의 기억이 온전했다면 더 좋았을 텐···.

"···아니, 잠깐."

그러나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스킬이란 사용자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방향성과 가능성이 변화하고, 그렇게 발달한 능력도 숙련도에 따라 한계치가 달라진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언어와 관련된 모든 제약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초능력, 「제노글로시」.

그리고 「감정」의 상위호환으로 어떤 것을 파악하는 데 뛰어난 활용성을 보여준 스킬, 「분석」.

그는 망설이지 않고 두 스킬을 동시에 발동하며 그것에 모든 정신력을 쏟아부었다.

'강환계에서 얻은 첫 수확이다.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겠지.'

기껏 뭔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다른 차원으로 갔는데 여기서 물러나면 너무 꼴사납지 않겠는가?

그렇게 여유분의 정신력 리소스까지 몽땅 털어 넣자 「신경과민」이 활성화되며 그의 사고가 끝도 없이 가속했다.

츠츠측—

두뇌가 맹렬히 회전하며 끝도 없이 에너지를 태워댔다.

처음엔 단조로웠던 「분석」과 「제노글로시」의 연결이 점차 단단해지며, 단순히 문맥의 뜻이 아닌 그 안에 내포된 의미까지 어렴풋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문장에 담긴 저술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뭉개진 단어를 유추하며 전체적인 문장을 추론했다.

하지만, 역시 아직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 보자.'

휴버트는 어느새 손에 쥐어진 VIP 마켓 성장의 비약 한 병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재차 작업을 이어갔다.

과연 비싼 값을 하는지 약발이 돌자 작업의 진행도가 무서울 정도로 폭증하기 시작했다.

'이 상태가 7일이나 지속된단 말이지?'

그러나 이 일을 끝마치는 데엔 7일까진 필요도 없으리라.

암호를 풀어나가듯 비급의 난해한 문장들을 파헤친 지 반나절 가량이 지났을 때—.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암호 해석」를 획득합니다."

새로운 스킬을 얻음과 동시에 그간 빡빡하게 진행되던 작업이 한순간에 뻥 뚫려버렸으니까.

***

"흐읍, 후우—."

깊은 심호흡과 함께 주변의 기운이 해리스의 폐부로 빨려 들어왔다.

하이 엘프라는 종족 특성과 초월에 이른 친화력으로 반쯤은 강제로 움직이던 자연의 기운이 전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그의 뜻에 따라 순응하고 있었다.

'그렇군. 대충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네.'

그렇게 강환계의 법칙에 따라 이 세상의 기운과 좀 더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던 해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버트가 새로 습득한 「암호 해석」은 생성 직후부터 비약의 영향을 받아 빠르게 성장을 거듭했고, 자연스럽게 해석 작업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또 그 결과는 강환계에 있는 해리스가 곧바로 실증에 나섰으며, 그건 다시 휴버트의 분석에 도움을 주는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무유팔괘비공··· 이거 해리스랑 상당히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번 방문에서는 적당히 자리를 잡고 추후에 영향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밑 준비만 하려고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수확을 얻은 것 같았다.

아직 비급의 해석이 다 끝나지 않아 확실하진 않지만, 그것을 확실하게 익혀 기존의 힘과 조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 시너지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어쩌면 그걸로 지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넘어설 수 있을지도.'

해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세계수라는 신적인 존재의 도움으로 벽을 넘은 그 순간, 자신은 이미 성장의 한계에 도달해 버렸다는 것을.

물론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초월이라는 것도 그 세계의 최강자 중 하나가 되었다는 방증이었으나, 그래도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때마침 방문한 차원에서 마침 그가 필요로 하던 기연을 접하게 되었다.

이게 과연 우연일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건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지만···.

그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한번 묻겠소. 본 가의 영역에는 무슨 용무로 오셨소?"

지금은 다수의 무인이 잔뜩 기세를 돋우며 각자 뽑아 든 무기로 그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동정호를 떠난 지 약 하루.

해리스는 목표로 했던 융중산의 제갈세가에 당도해 있었다.

#255

제갈세가 (1)

호북성 융중산.

이곳은 일대를 지배하는 강호인 제갈세가가 터를 잡은 곳이자 용맥 중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땅이기도 했다.

사실 애초에 용맥이라는 것도 풍수지리에 포함된 것이다 보니, 이름난 세력의 본거지는 대부분 그런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이 강성한 세력을 바탕으로 좋은 땅을 차지했든, 좋은 땅에 있었기에 세력이 커졌든 선후야 제각각이겠지만.

덕분에 그들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추가로 용맥을 확보하는 전쟁을 벌이는 한편으로 본거지를 지키는 것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거기다 제갈세가는 진법과 술법 쪽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이름 높은 명문가였으니.

그들이 자리한 융중산 주변의 방비는 그야말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그랬었는데···.'

금일 제갈세가의 외곽 경비를 총괄하는 천기수호대 2대주가 검을 그러쥐고 눈앞의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융중산에 펼쳐진 일곱 개의 진법 중 여섯 번째인 대라금쇄진(大羅禁碎陳) 내부.

이미 세가 내부로 침투한 적을 상정한 마지막 진법을 제외하면 사실상 최후 저지선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융중산 전체에 펼쳐진 가문이 자랑하는 진법이··· 그들이 자신만만하게 여겨왔던 방비가 한순간에 여기까지 뚫려버린 것이다.

일견 명성에 걸맞지 않은 추태라 할 수 있었으나, 당연히 그들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미친, 하늘을 통해서 진법을 파훼하고 곧바로 여기까지 왔다고?'

애초에 진법이라는 것 자체가 특정한 기물이나 자연 지형을 이용하는 것이다 보니 지상의 적을 상대하는 것에 특화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제갈세가는 거기에 술법까지 섞어 공중에 대한 대책도 어느 정도 세워뒀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자유롭게 하늘을 노닐며 아예 산 하나를 통째로 넘어오는 상대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아무리 여기가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 해도 그렇지···!'

처음 산 초입에서 침입이 감지되었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 순식간에 그곳을 돌파한 침입자가 두 번째 진법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비상 소집령이 내려졌는데···.

상대의 진입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여기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세가의 다른 이들이 전투 준비를 모두 마칠 때까지 그들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하는 상황.

이를 악문 2대주가 손에 쥔 검병을 꽉 움켜쥐며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경고요. 본 가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범한 이유를 밝히시오."

아무리 대라금쇄진이 그들을 보조해 준다 해도 저런 정체불명의 고수를 상대로 경거망동은 금물이었다.

되도록 대화로 시간을 끌면서 상대에 대해 파악하는 게 최선.

그런데 뜻밖에도 그 침입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답해왔다.

"아, 이거 실례했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해리수, 귀가에 잠깐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방문했습니다."

"···세간에선 보통 허가받지 않은 방문을 침입이라 부르오만."

"오! 그렇습니까? 척 봐도 아시겠지만, 제가 이곳 사람이 아닌지라. 하하하!"

그 뻔뻔한 대답에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한눈에 봐도 외지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외양이긴 한데, 그래도 그런 기본적인 걸 문화의 차이라고 우기려 드는 건 좀···.

'아니, 아닌가? 외지인은커녕 아예 인간도 아닌 거 같고. ···요괴라서 인간의 문화를 진짜 모르는 건가? 이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합리적인 의심이 들자 2대주의 표정에 혼란이 어렸다.

상대가 무작정 침입해 들어왔을 땐 확실한 적이라고 생각했건만, 정작 그 침입자의 태도가 저렇게 태평하다 보니 그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정녕 그렇다면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손님맞이에는 응당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 그 정도는 따라 주시겠지요?"

그의 판단은 일단 적당히 상대의 말을 받아주며 실리를 취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판단은 상부가 할 테고 그의 임무는 여기서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었으니까.

"이거 제가 너무 실례한 것 같군요. 그럼 그렇게 할까요?"

무사들이 한껏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시원한 수긍.

금발 녹안에 긴 귀를 가진 불청객, 해리스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영향력을 키우는 게 목적인데 굳이 모든 세력과 날을 세울 필요는 없지. 수적들이야 내 기준에서 자격 미달이었지만, 제갈세가는 주변을 그리 수탈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물론 원활한 관계 구축을 위해 이쪽의 힘을 살짝 보여준다고 지금의 소란이 만들어지긴 했으나, 이 정도야 어디에나 있는 흔한 자기 PR이지 않은가?

그리고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해리스는 곧장 세가로 난입하려던 자신을 강제로 지상으로 내려오게 만든 진법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이게 진짜 제대로 된 진법인가. 대단한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 일대와 자신은 물론 무사들 하나하나에 연결된 기운의 흐름에 한껏 매료된 상태였다.

톱니바퀴처럼 철저하게 계산대로 흐르는 그 자연의 기운은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느껴질 정도.

그리고 그런 감상을 느낀 것은 전혀 다른 차원—.

아우테리카의 불사성에 있는 불사왕도 마찬가지였다.

[흐음, 이거 흥미롭구나. 해리스만 한 강자를 강제로 억압할 정도라···. 이제 보니 앞서 지나온 다섯 개의 진법도 이곳과 연계되어 그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군. 진법이란 게 이 정도였나?]

골방에서 홀로 연구를 진행하던 한스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읊조렸다.

지구에서 접한 후 「마도의 길」에 편입된 '진법'은 여러모로 범용성이 좋아서 그도 자주 애용하는 수법이었다.

마법진을 그리거나 제단을 꾸리면서 살짝 가미하기만 해도 효과가 극적으로 증폭되었으니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역시 그가 가진 지식수준으로는 강환계 제일인 제갈세가의 절진을 완전히 돌파하는 건 무리였다.

그나마 저기까지 파훼하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해리스라는 능력자가 공중이라는 취약점을 노렸기에 가능했던 것일 뿐.

[하긴, 저만한 세력이라면 그런 비전 몇 개 정돈 있겠지. 크흐흐··· 이거 참, 굉장히 탐나는구나.]

일단 뭐든지 배워두면 쓸모가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술법에 대한 욕심이 그득한 한스가 개인적인 욕망을 불태우고 있을 때.

여전히 해리스는 진법 내에 흐르는 기운의 운행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까 이 진법, 무유팔괘비공의 팔괘(八卦)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기운에 민감했던 해리스는 무공을 접하면서 이 세상의 기운에 더욱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세상에 흐르는 기운을 이용해 온갖 자연의 조화를 부리는 이 진법의 극치는 매우 훌륭한 교보재나 다름없었다.

'기의 성질과 그 운행, 거기에 포함된 이 세상의 법칙,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기공···.'

뭔가 머리가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에 해리스가 다시 무유팔괘비공의 요결을 떠올리며 기를 조금씩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감각을 통해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유받는 휴버트 또한 자연스럽게 분석 방향을 선회하며 그를 보조했다.

'그래, 생각해 보니 가진 조건이 서로 다른데 굳이 정석대로 따를 필요가 없었어.'

이 세상에서 무공이란 힘을 추구하게 된 인간들이 태생부터 특출난 존재들을 흉내 내면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던 맹수부터 시작해 약하더라도 생존력만큼은 뛰어난 초식동물의 움직임까지.

그리고 그것은 동물을 넘어 폭포와 벼락 등의 자연 현상을 담기 시작했고, 마침내 달과 태양 같은 우상은 물론 죽음과 풍요 등의 추상적인 개념마저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유팔괘비공이 추구하는 것은 천지 만물··· 즉, 자연과의 조화. 내가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 부분은 필요 없으니 과감하게 버린다.

그는 불완전했던 무유팔괘비공을 다시 운용하며, 자연과의 조화에 관한 요결을 「자연 동화」와 「자연의 부름」 등에서 비롯된 압도적인 친화력으로 대체했다.

고오오오—

사방에서 막대한 자연기가 몰려오며 진법을 구성하던 흐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앞에 선 무인 대표가 뭐라 외치는 것이 느껴졌으나, 지금 그에게 그런 것 따윈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필요 없는 단계를 건너뛰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만 취했다.

이미 휴버트가 전체적인 분석은 전부 끝내놓은 상태였던지라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조화. 과한 것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함께 성장한다.'

몰려온 기운이 해리스의 몸으로 밀려들며 단전 부위에 자그마한 내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과부하가 걸린 육체가 삐거덕거렸지만, 이미 초월에 올라 정기신(精氣身)을 완성한 해리스는 그 모든 것을 빠르게 수용하며 순식간에 적응했다.

그리고 마침내.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자연지체」를 획득합니다."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무유팔괘비공(改)」을 획득합니다."

뭔가를 얻는 건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리라 생각했거늘, 뜻하지 않은 기회에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일에 소득을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해리스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연지체」를 습득한 것과 동시에 자신에게 더 다양한 종류의 정령들과 연을 맺을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을.

'···이거 참, 아우테리카로 돌아간 뒤가 기대되는데.'

요동치는 기운을 갈무리한 해리스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어쩌면 정말, 머지않아 준신격이나 다름없는 정령왕까지 소환할 수 있게 될지도.

"아!"

그리고 그제서야 주위에 신경이 미친 해리스는 황급히 사방을 둘러보다가, 식은땀이 가득한 굳은 얼굴로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무사들을 보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크윽,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아— 하아—."

그야 그럴 수밖에.

자신만의 세계에 심취하는 동안 그 기운의 유동을 버티지 못한 결계··· 아니, 진법이 기어코 무너져 버렸으니 오죽하랴.

'곤란하군. 고의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순순히 기다리는 척하다가 난데없이 난동을 부리며 진법을 부순 괴한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이쯤 되면 대놓고 선전포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아예 무력으로 점거하고 말을 듣게 하는 것도···.'

그렇게 과격해진 해리스의 사고가 점점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무렵.

"···무유팔괘비공. 설마 천기문의 후예이시오?"

묵직하고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미 사방을 둘러싸기 시작한 인파를 감지하고 있던 해리스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았다.

뒤쪽에 몇몇 무사들을 거느린 채, 눈을 감고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 나오는 노인을.

"헛! 태상가주님?"

그에 여태 해리스를 상대하던 무인 대표가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노인은 그에 답하지 않고 침중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연지기를 다루며 현상을 이끄는 비의···. 기문진법과 상극인 무공이었지. 진법 구성의 기본인 기운의 흐름을 마음대로 뒤바꿔 버리는 공부였으니."

그 말에 해리스가 멈칫했다.

과연 명성 높은 제갈세가라 해야 할까.

무공의 이름과 효능까지 정확하게 아는 것을 보니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허허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자에게 무량선자와 제자가 목숨을 잃으며 맥이 완전히 끊긴 줄 알았건만. 거기다 이 정도 수준이면··· 능히 현경(玄境)이라 할 만하구려."

그의 말이 끝나자 주변의 공기가 한순간에 경직되었다.

어마어마한 기운의 유동을 느끼고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는 했으나, 가문의 큰어른이 공언하고 나서니 느껴지는 무게감이 또 달랐던 것이다.

아무리 현경이 상대라도 세가에 남은 마지막 절진을 이용하면 이기진 못해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는데, 하필 상대는 그들의 장기인 진법과 상극의 능력을 가진 자.

즉, 이대로 부딪치면 무조건 필패라는 소리였다.

"이거 참, 귀빈이 오셨는데 노인네가 쓸데없이 말이 많았구려. 그래, 대협께선 본 가엔 무슨 용건으로 방문하셨소?"

그리고 한순간에 그런 주변의 반응을 파악한 해리스가 가만히 턱을 쓰다듬으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태상가주라 함은 전대 가주를 뜻하는 것이었으니 그 권한도 막강할 터인데, 그런 이가 '귀빈' 등을 운운하며 먼저 숙이고 손을 내미는 상황이었다.

이러면 처음 생각했던 관계보다 더한 우위에 서게 되는 셈.

아주 좋은 시작이었다.

"아핫— 몇 가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또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어서 말이죠. 참, 그래서 말인데···."

이 상황에선 말만 부탁이지 사실상 강요나 다름없었다.

물론 앞으로의 원활한 인연을 위해선 과하게 선을 넘은 것을 요구하는 건 안 되겠지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도 될까요? 이거 너무 오래 밖에 세워두는 것 같은데. 손님 대접이 영···."

기회가 오자마자 곧바로 거만하게 돌변한 성격 나빠진 해리스였다.

#256

제갈세가 (2)

"으음—."

인터넷을 통해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수집하던 도중.

시원하게 스트레칭을 한 나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 나쁘지 않긴 한데···. 역시 성격이 너무 과격해진 것 같단 말이지."

좌충우돌 강환계를 누비던 이세계의 하이 엘프 해리스.

그는 기어코 제갈세가의 정식 초대를 받아 그 본거지로 입성할 수 있었다.

첫 만남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지금은 제법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접받게 된 것이다.

'정확히는··· 저쪽에서도 어쩔 수 없이 대접해 줄 수밖에 없는 걸 테지만.'

현경의 고수는커녕 화경에 이른 이조차 없는 제갈세가가 지금의 위치에 오른 건 그들의 술법과 진법이 그만큼 독보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단 주변 환경을 이용해 현상을 왜곡하는 기문진 뿐만 아니라, 가문의 무사들과 술사들이 한데 어우러져 펼치는 합격진은 화경의 고수조차 상대할 수 있다고 알려졌으니.

'물론 상대가 현경쯤 된다면 철저하게 준비해 둔 기문진의 도움이 필수겠지. 그나마도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용도로나 써먹을 수 있을 테고.'

그게 거만하게 나오는 해리스에게 그들이 꼼짝도 할 수 없는 이유였다.

물론 힘이 전부인 세계에서 이미 자신의 무력을 증명한 강자에 대한 예우 차원도 있을 터.

그러나 정작 그 당사자인 나는 해리스의 그런 변한 모습을 쉽게 받아넘길 수 없었다.

"으음, 역시 주변 환경 탓인가."

해리스는 선천적인 태생 때문이든 후천적인 스킬 때문이든 주변 환경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개체였다.

그런 녀석이 세상의 기운이 점차 메말라가는 곳에 떨어졌으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지도.

'그래도 당장 큰 문제는 없으니 상관없겠지. 어차피 조만간 다시 아우테리카로 보낼 생각이었으니까.'

해리스가 강환계로 전송된 지 이제 곧 5일째였다.

주어진 시간에서 어느새 벌써 절반이나 지나가 버린 것.

그동안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여기저기서 신나게 깽판 친 것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이 정도면 제법 성공적인 스타트라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시스템창을 뒤지다 흥미로운 것 하나를 발견했다.

강환계로의 진입을 순조로이 마친 직후에 생긴 변화로 보였는데···.

『물품 구매 -상세 보기』

└아우테리카

└강환계

카르마를 지불해 각 세계의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게 해주는 항목.

이전에는 아우테리카의 물건들만 구입할 수 있었던 그 하위 목록에 어느새 강환계 이름이 추가되어 있었다.

'역시 이렇게도 되는구나.'

그걸 본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정식으로 할당된 세계인 아우테리카만 해당되는 건 아닐지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시스템이 그리 융통성이 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곧바로 '강환계' 목록에 들어가서 나열된 상품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만년설삼에 음양과, 공청석유··· 이름만 봐도 뭔가 있어 보이는 것들이 한가득이군.'

처음 눈길을 끈 것은 다양한 종류의 영약들이었다.

그 수준과 성질, 용법이 천차만별인 귀중한 보물들.

강환계의 무림인들이 봤다면 눈이 돌아가서 달려들었을 테지만···.

'어차피 천부적인 영약 사냥꾼 해리스가 있으니까 당장은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사실 지금 있는 융중산에서도 은근히 느껴지는 영약의 기척이 몇 군데 있었다.

거기다 그 크기 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게 큰 데다 영험함으로도 이름 높은 무당산이 바로 지척에 있지 않던가?

'용맥 치고도 상당히 기운이 강한 곳이었지. 다른 곳이랑 다르게 아직까지 기운이 제법 풍부하기도 했고. 그런 곳에서 자란 영약이라···.'

나는 제갈세가로 향하면서 멀리서 스치듯 봤던 영산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적당히 자리 잡고 난 후엔 그것들을 수거하러 가는 재미도 제법 쏠쏠할지도.

그 외에도 상점 목록에는 대환단이니 자하신단이니 하는 이름난 환약들도 꽤 많이 있었다.

심지어 몇몇 문파의 무공 비급과 무림계의 마도구라 할 수 있는 신병이기까지 없는 게 없을 지경.

거기다 어마어마한 가격의 물건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만인동혈보옥(萬人童血寶玉) (1,190,000)』

『영원빙하의 만년빙정(萬年氷精) (780,000)』

『999년 묵은 이무기의 불완전한 여의주 (1,530,000)』

『······』

아직 강환계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이름들이었다.

그 가격만큼 가치가 높은 물건이리라는 건 자명한 노릇.

'이무기가 실존하기는 했었군. 그럼 용도 있으려나?'

그러나 흥미롭기는 해도 지금 단계에서 신경 쓸 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당장은 이런 게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자신이 지금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물품 구매』에 원하는 조건을 입력해 그에 해당하는 목록들을 따로 출력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한번 쭉 훑어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구매와 「아바타 클라우드」로의 전송을 반복했다.

***

땅—! 따앙—! 땅!

'음? 이건 무슨 소리지?'

밖에서의 용무를 보고 작업실로 들어서던 자오닉이 미간을 찌푸리며 귀를 기울였다.

당연히 망치로 금속을 두들기는 소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의아하게 여기는 점은 좀 더 디테일한 부분이었다.

"허어···?"

하지만 아무리 집중해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뭔가에 홀린 듯 소리가 들려오는 작업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까앙—! 치이익—!

단조에 이어 담금질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벌거벗은 상체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하워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열정과 패기가 물씬 느껴지는 기특한 광경.

"이게··· 대체···?"

하지만 자오닉의 시선은 곧바로 그를 지나쳐 오직 한 곳에 못이 박힌 듯 틀어박혔다.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 입이 떡 벌어지고 목구멍에선 저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무, 뭐냐? 저 금속은? 어? 저런 게? 으응···?"

고장이라도 난 듯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떠듬 내뱉는 드워프 거장.

그는 살아생전 본 적도 없고,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던 이질적인 금속을 보고 혼란에 빠졌다.

"아, 오셨습니까?"

그 인기척에 작업을 마무리한 하워드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반겼으나, 자오닉은 그런 태평한 인사를 받아줄 정신이 아니었다.

그간 하워드가 북부 산맥에서 구해왔다는 희귀 광물을 이용할 때도 그러려니 여겼던 그였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명실상부 툴크 왕국 제일 상단으로 성장한 휴버트 상회라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저건 달라.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야. 저런 게 이 세상에 있었다고?'

지금 하워드가 다루고 있는 금속.

저것은 불과 금속의 축복을 받은 드워프로서 세상의 모든 금속에 통달했다고 자부했던 그조차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냥, 저런 게 존재한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명백히 눈앞에 있는데 무작정 부정할 수는···.

"크흐흠! 이번에 휴버트가 북부 산맥에서 새로 구했다면서 보내준 금속인데 말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자오닉의 머릿속이 흐트러져 갈 때.

가볍게 헛기침을 한 하워드가 아공간에서 다른 금속 덩어리를 꺼내며 슬쩍 그에게 건네주었다.

'저런 게 더 있다고?'

그런 속마음과는 다르게 본능적으로 움직인 그의 손은 어느새 그것을 받아들고 있었다.

'아!'

그리고 그 금속이 손에 닿는 순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느꼈던 감정은 절대 착각이 아니라는 걸.

"이게··· 대체 뭐냐? 어째서 이런 게 이 세상에 있는 거지?"

멍하니 그런 말을 흘리면서도 그는 무의식중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뚫어져라 노려보며 손으로 겉면을 쓰다듬는다. 손가락을 튕겨 진동을 느끼고 공명음을 듣는다.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혀를 내밀어 맛을 보고 쩝쩝거리다, 급기야 입 안에 넣어 아작아작 씹기까지 하니···.

'어우, 저게 뭐 하는 짓이람.'

그 모습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하워드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물론 평생을 금속과 함께 살아온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의 손에 들린 저것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금속이자, 강환계에서도 귀하다는 '만년한철(萬年寒鐵)'이었으니까.

'그래도 역시 드워프는 드워프네. 단번에 그걸 알아보고 말이야.'

하긴 자신도 느꼈던 것을 그가 느끼지 못할 리 없었으니 당연할 테지만.

하워드는 아직도 정신을 놓고 금속을 탐닉하는 자오닉을 바라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계의 법칙이 깃든 마도구는 다른 세계에서 적용되지 않는다.'

그 사실은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물질 자체가 가진 물성이 변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추가로 뭔가 특별한 신비를 담을 순 없겠지만, 만년한철은 그냥 그 자체로도 최고의 금속이라 할 수 있지.'

오히려 이세계의 신비를 거부하는 특성을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단단하기는 더럽게 단단한데 마법의 효과마저 무시하는 절대 불괴의 갑옷이라던가.

'굳이 전체를 만년한철로 만들 필요도 없어. 적당한 두께로 겉에 두르기만 해도 충분할 테니.'

당연히 물질의 성질이 달라 다루기 어렵고 필요한 곳에 적용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거야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 않나.

방법이야 찾다 보면 어떻게든 나오는 법이었다.

자신은 창조에 있어선 불합리하다 느껴질 정도의 사기성을 타고난 종족, 드워프 장인이었으니까.

"세상에. 이게··· 이게 북부 산맥에서 나왔다고? 대체 그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부, 불사왕인가? 놈이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때, 드디어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한 자오닉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만년한철 외에도 현철(玄鐵)이나 운철(隕鐵) 등 다른 금속들도 많이 남아 있는데···.

'음, 그건 천천히 풀자.'

아직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일도 많은데, 지금 다 보여줬다간 놀라 쓰러져 버릴 테니.

***

해리스가 강환계에 진입한 지 5일이 지나 6일째가 되던 날.

잠시 제갈세가의 영역인 융중산을 떠났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다시 돌아왔다.

"해 대협, 갑자기 어딜 다녀오시는··· 음? 그분은··· 누구십니까?"

그 옆에 처음 보는 누군가를 데리고서.

그에 세가의 정문에서 외출했던 해리스를 맞이한 천기수호대 2대주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렇지 않아도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 때문에 부아가 치미는 상황이었는데, 이젠 외지인까지 제멋대로 안으로 들이다니.

"아, 아직 전달받으시지 못한 모양이군요? 지인을 데려오겠다고 말하고 나갔는데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군요."

정확히는 수발을 들던 이를 통해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휑하니 나가버린 것이었으나, 한층 뻔뻔해진 해리스는 표정 변화 없이 능청스레 대꾸했다.

"그럼 이만 들어가도 될까요? 어서 빨리 이 친구를 소개하고 싶어서 말이죠."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아! 이제 됐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곤란한 얼굴로 말을 잇던 그는 곧 안쪽에서 은밀하게 전해진 전음(傳音)으로 허락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더는 그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지라 그는 얼른 입구에서 비켜서며 무언으로 재촉했다.

얼른 그들이 안으로 사라져 버리기를.

하지만 상대는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해리스와 함께 온 청년이 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다가왔던 것.

그러고는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그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폐를 끼쳐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무사님."

"···아닙니다. 저야 명받은 대로 움직일 뿐이지요."

상대가 그렇게 예를 차려오자 2대주 또한 거기에 맞춰 포권으로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

앞선 불청객과 같은 일행이라 그와 동류일 거라 지레짐작했거늘, 생각 외로 상식은 있는 이라 생각하며.

"인사가 늦었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그리고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무복을 걸치고 허리엔 고풍스러운 한 자루의 검을 찬, 어느 명가의 자제처럼 보이는 청년이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하승훈이라 합니다."

헤스페론의 가명으로도 사용했던 이름, 하승훈.

해리스에 이어 강환계로 투입된— 개체명 '휴고'의 새로운 가명이었다.

#257

제갈세가 (3)

이제 이세계 시간으로 5일마다 사용할 수 있도록 성장한 특전, 「이계전송진 소환」.

그에 쿨타임이 되자마자 강환계로 넘어온 휴고는 해리스의 주선을 받아 곧바로 제갈세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음, 이거 짜릿짜릿하군.'

느긋하게 세가 내를 산책하던 그는 주변에서 은근히 전해져오는 경계심 섞인 적의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저들 입장에선 굴욕이나 다름없을 테니 저런 반응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해리스가 좀 더 부드럽게 접근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너무 과격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그만큼 반감도 커진 것일 터.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관계부터 회복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며칠 후에 해리스가 떠나고 나면 강환계에서의 일은 이젠 하승훈이 된 휴고가 전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제갈세가 측에서 섣불리 수작을 부려 오진 않겠지만, 앞으로의 원활한 작업을 위해선 관계 개선이 필수였다.

'이 세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정보를 수집하고 영향력을 키우는 데에 여기만큼 조건이 좋은 곳이 또 없지.'

특출난 강자는 없으면서도 집단으로서의 힘은 여느 세력 못지않고, 세상이 어지러워진 후에도 다른 정파 세력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확장이 용이하다.

'거기다 아는 것도 많고 유능하기로 이름 높은 가문이기도 하니, 안정적인 환경에서 무공을 익히는 데에도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사실 해리스는 운이 좋아서 무유팔괘비공을 자기 식대로 흡수했을 뿐, 제대로 무공을 익혔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그에게는 한 번쯤 '정석대로' 그것을 익혀보는 경험이 꼭 필요했다.

그래야 이후 무공이라는 힘을 어떻게 활용할지 견적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역시 뭔가 선물이라도 해야 하려나?'

자고로 선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

때마침 동정십팔채에서 털어온 재물도 잔뜩 쌓여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이만한 세가가 고작 그런 금품 따위에 넘어갈 것 같진 않았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그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럼 역시 영약이나 신병이기 같은 돈과 권세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게 좋을 텐데···.

"실례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앞으로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아? 이곳은···."

그렇게 생각에 잠겨 하염없이 세가 내부를 거닐던 도중.

휴고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앞을 막아선 여성 무사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세가의 여인들이 머무는 거처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하 소협."

"···이런,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실례를 범했군요. 바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넋 놓고 걷다 보니 어느새 금남의 구역까지 와버린 모양.

괜히 이런 데서 얼쩡거리다 안 그래도 낮은 호감도를 더 깎아 먹을 수는 없었다.

그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돌아서서 떠나려던 그의 귓가에 문득—.

구역 안쪽 먼 곳에서 주고받는 여인들의 대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래서 아가씨께선 좀 어떻···.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

'음?'

그것은 짧은 몇 마디에 불과했으나.

그는 어떤 직감에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청각을 곤두세웠다.

지금껏 지구에서 본체의 수발이나 들던 휴고였지만, 그것이 그가 능력 없이 무력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순수하게 스테이터스에 때려 박은 카르마만 해도 400만에 가까울 지경인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아무리 귀환자들이 가진 무력의 핵심이 각자의 세계에서 비롯된 신비와 스킬이라고는 해도, 그 압도적인 수치는 그의 육체를 어떤 특이점 이상으로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그의 감각 또한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고.

거기에 「신경과민」의 집중과 「다재다능」의 보조까지 더해졌으니, 무방비하게 떠드는 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 정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필 불청객들 때문에 뒤숭숭한 상황에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시다니. 이를 어찌해야 좋을꼬.

-이번에 가져온 영약으로는 보름도 채 버티지 못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약재에 내성이 생기신 것도 있지만, 영약의 전반적인 약효 자체가 줄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어허! 입조심하지 못할까? 어딜 경망스럽게!

-···죄송합니다. 하지만 뭔가 대책이 필요한···.

"···하 소협?"

그렇게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그의 앞을 막아섰던 무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간다고 해 놓고 왜 아직도 그러고 있냐는 듯.

순수한 육체 능력만으로도 초인에 가까운 휴고와는 달리, 청각을 북돋기 위해선 따로 내공을 운용해야 하는 그녀는 그가 엿들은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그만. 하하핫!"

그에 휴고는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뜻하지 않게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흐음, 제갈세가는 의술로도 상당히 이름 높다고 들었는데. 그걸로도 치유하지 못한 환자가 있단 말이지?'

거기다 아가씨라는 호칭을 봤을 때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여식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가주의 직계일지도 모르고.

어찌 됐든 중요 인물이라는 것만은 틀림없으리라.

'제갈세가에서조차 고치지 못한 불치병이라···.'

휴고는 가볍게 턱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굴렸다.

"좋아."

그리고 마침내 어떠한 것에 생각이 미친 그는.

입가에 한줄기 미소를 그린 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휴고가 세가를 거니는 동안 해리스는 눈을 지그시 감은 제갈세가의 태상가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하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제공받는 것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가 이곳에 찾아온 가장 큰 목적이 정보 수집이었으니 그것도 당연한 일.

그리고 그렇게 얻은 정보는 상당히 유용한 것이었다.

'22년 전에 황궁을 습격해 참변을 일으킨 날개 달린 이방인. 그가 황제를 시해하고 황궁 터에 자리하고 있던 대륙 최대 규모의 용맥, 용심(龍心)을 뜯어가 버렸다?'

역시 제갈세가는 황궁에도 끈이 있었는지 상당히 많은 걸 알고 있었다.

황실이 완전히 몰락한 이상 굳이 함구할 필요도 없는지라 해리스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주기도 했고.

'번천회주. 역시 그놈이 이곳에 왔었군.'

해리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예상만 하던 것과 확신을 얻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어째서 놈이 그렇게 강했는지도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는가!

'나처럼 차원을 넘나드는 건 기본. 하나의 세계를 파멸로 이끌었으니 그렇게 얻은 카르마도 상상 이상이겠고. 거기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것까지 뜯어갔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놈이 이런 식으로 다녀간 세상이 한둘이 아니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아니, 침착하자.'

하지만 그런 혼란도 잠시.

압도적인 정신 능력치 덕에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제 이 세계에 번천회주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또 힘을 얻기 위해 놈이 선택한 방법이 강환계의 파멸이라는 것 또한 명백하고.

그래.

그렇다면—.

'내가 그 반대로 한다면?'

어쩌면 놈을 방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세계에서 얻을 건 다 얻은 놈이 이미 손을 털고 떠났다면 아무리 용 써봤자 별 소용없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경우에도 카르마라는 수확은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만약, 이 강환계에 가해진 수작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면?

놈이 무언가를 위해 계속해서 빨대를 꽂아두고 이용하는 중이라면?

'그놈이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그 생각대로 되게 놔둘 수는 없지.'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놈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변수가 될 수 있었다.

딱히 세상의 구원자가 될 생각은 없었건만···.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이 세계부터 최대한 안정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제갈세가의 도움이 필수.

해리스는 최대한 성질을 억누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큰 도움이 되었군요."

"허허,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구려. ···그런데, 이 노부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만."

"···그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것을 알아내려고 이렇게 정보를 모으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자는 제 원수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흐음—?"

그는 태상가주에게서 골치 아픈 질문이 나오기 전에 먼저 선수 쳐서 대답했다.

사실 번천회주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도 사실이기도 했고.

'괜히 똑똑한 사람 질문에 답하다가 내 밑천만 털릴라.'

사실 지금까지 한 대화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정보가 넘어갔을 테지만, 그렇다고 거기다 멍석까지 깔아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가볍게 헛기침한 해리스는 그것을 위해 슬슬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이거 신세를 졌는데 뭔가 보답이라도 하고 싶군요. 진법을 부순 것도 그렇고, 본의 아니게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기도 했으니까요."

"허허, 보답이라···."

"마침 제게 영약 몇 뿌리가 있습니다. 작은 성의이니 이거라도 받아주시지요."

어차피 그에게 영약이야 뒷산에서 쑥 캐오듯 채취할 수 있는 거니 아낄 것도 없었다.

조만간 무당산에 방문해서 한번 싹 쓸어올 생각이기도 했고.

"오, 그런 거라면 감사히 받도록 하겠소."

그에 태상가주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성의를 표한다기에 보인 의례적인 반응일 뿐 그다지 기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해리스가 슬그머니 본론을 꺼내 들었다.

"물론 그런 것보다는 제가 데려온 아이··· 하승훈이 더 대단하겠지만요. 하핫!"

"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눈을 감은 노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였다.

해리수라는 이 절대고수라면 모를까, 별다른 내력도 느껴지지 않았던 그 청년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아, 그 아이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물론 근골과 오성도 매우 뛰어나지만요."

어차피 해리스는 곧 떠날 사람.

그런 만큼 이참에 이들과 협력해 나갈 휴고의 입지를 키워두는 게 합리적이었다.

물론 거기엔 아주 약간의···.

"바로, 어떤 병이든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지요."

···약이 좀 쳐져 있었지만.

***

이세계에서 제작된 마도구는 기운의 체계가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의 힘을 빌려오는 신성력은 어떨까?

'명색이 신의 힘인데 고작 그런 거에 영향을 받을 리가.'

물론 지구에서처럼 차원을 넘어서면 그 위력이 약해지는 등의 문제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원인은 힘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끌어오기 위한 통로에 제한이 걸리면서 생기는 출력 저하에 가까웠다.

신성력이 아예 발동하지 않는 건 아니란 소리.

그렇기에 이런 시도 또한 가능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휴고는 앞에서 안내하는 시비의 뒤를 따라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그가 한 번 발길을 돌렸던 곳의 내부.

가문 여인들의 거처가 있어 외간 남성은 발을 들일 수 없는 일종의 성역이었다.

물론 그도 곧바로 이곳에 초대받은 건 아니었다.

아무리 해리스의 호언장담이 있었다고 해도 그의 말만 믿고 함부로 움직이기엔 그들 사이에 신뢰가 부족했으니까.

처음엔 정중한 부탁을 동반한 진위 확인이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시험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정도로 극진한 태도였고, 그렇게 이틀간 경상자부터 시작해 부상자와 질병에 걸린 이들까지 다양한 환자를 접하게 되었다.

물론 이쪽이 내세운 방식도 그리 쉽게 남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정작 치료한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어차피 제갈세가 쪽에서도 진위 확인이 목적이었던지라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서로 원하던 대로 되기도 했으니.

"으음."

휴고는 침상에 누운 이를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흑단같이 검은 머릿결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열댓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

애처로울 정도로 야윈 데다 호흡도 느리기 그지없어, 얼핏 보면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도 보이는 여자아이가 마치 시체처럼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럼,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차피 보다 원활한 공조 작업을 위해 하는 쇼였으니 더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침상의 소녀에게 다가간 휴고는 곧바로 그녀의 이마를 향해 손을 내뻗었고.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그 손에 쥐어진, 이 세계에서는 생소한 모양의 성표가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화악—

저쪽 차원의 성자님께서 가득 담아주신 신성력을 뿜어내면서.

#258

제갈세가 (4)

쪼르르—

찻주전자에서 흘러내린 찻물이 찻잔에 담기면서 은은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화려하지 않고 정갈하면서 고풍스럽게 꾸며진 실내.

그야말로 학사의 거처라는 말이 절로 연상되는 방 안에서 손수 차를 우려낸 노인, 제갈세가의 태상가주 제갈군악이 천천히 찻잔을 들어 그 향을 음미했다.

"으음."

이미 시력을 잃은 지 오래였으나 다도를 행하는 그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군더더기조차 없었다.

긴 수양을 거친 그에겐 이 정도 일상생활쯤은 큰 무리 없이 행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이 있었기에.

'해리수··· 그리고 하승훈.'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 예민한 감각은 누군가를 파악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이번에 갑자기 찾아온 이방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세계인들이라···. 이번 방문객들은 여러모로 상식 이상이군.'

하지만 그런 제갈군악에게도 그 두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싯적에 몇몇 이세계인들과도 교류를 가져본 적이 있는 그였으나, 그때 겪었던 이들과는 그 성향과 행동 양식, 그리고 가진 능력 등 모든 부분에서 너무나 판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둘 모두 악인과는 거리가 먼 데다 딱히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지. 아니, 오히려 호의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비록 해리스의 태도가 다소 무례하기는 했지만, 그만한 수준의 강자가 오만한 거야 그리 흠잡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저쪽에서 먼저 관계 회복을 위한 의사를 표현해 온 것이다.

그에게 하승훈이 가진 치료 능력에 대해 의도적으로 흘림으로서.

'혜미의 상태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만.'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으나 제갈군악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의도대로 움직여 주었다.

그것이 화해와 협력을 위해 그들이 먼저 내민 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직 많은 것이 의문이긴 하나.'

해리스와 대화하면서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이 혼란의 원흉이라 추측되는 그 날개 달린 이방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자에 대해 말해줬을 때 보인 적의도 진짜였으니···.

'흐음, 역시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군.'

당장 추가적인 대응은 불필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권장.

그것이 바쁜 가주를 대신해 이방인들을 상대하게 된 태상가주의 1차 소견이었다.

"허허헛, 그리고 하나뿐인 손녀딸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말이지. 벌써 차도를 보이고 있다 했던가? 괜히 이 노구가 갔다가 탈이라도 날까 봐 참고 있었거늘. 이거 오랜만에 손녀 얼굴을 볼 수 있겠구나."

정적인 공기 속에서 다도를 즐기며 생각을 정리하던 제갈군악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맺혔다.

가문의 큰어른으로서 모든 일에 있어 세가가 최우선이었지만, 그 또한 아픈 손녀를 걱정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한 명은 신비 문파 천기문의 맥을 이은 현경의 고수. 다른 하나는 가문은 물론 외부에서 초빙한 명의들조차 포기한 환자를 살린 의선(醫仙)··· 아니, 신의(神醫)라니. 이 정도면 그들과 연을 맺은 게 오히려 이득이 아닌가?'

물론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득실을 따지게 되는 것은 그들 일족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

신성력을 통한 치료는 만능이 아니었다.

물론 무려 성자님이 직접 부여해 준 것인 만큼 그 효능이 확실하긴 했으나, 중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한 번, 휴고가 '아가씨'에게 신성력 치료를 시작한 지 사흘째.

파아앗—

앞서와 마찬가지로 성표에서 새어 나온 부드러운 빛이 자연스럽게 치유 대상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 광경은 첫날과 완전히 똑같았지만 그때와 확실하게 달라진 것도 있었는데···.

"으응, 신기하네요. 뭔가 내공과는 다른 느낌. 뭐랄까, 좀 더 따뜻하게 감싸 안으면서 포용하는 듯한···."

바로 그 당사자인 제갈세가의 금지옥엽, 제갈혜미가 깨어있다는 것이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이틀 차 치료 때 정신을 차린 그녀.

시체처럼 창백했던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깃들었으며, 그 피부도 전과는 달리 확연한 생기를 품고 있었다.

온갖 영약을 사용하고도 간신히 연명하는 게 고작이었던 과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극적이라 할 수 있는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이번이 겨우 세 번째 치료일 뿐인데.

'효과가 있는 건 다행이지만, 뭔가 신성력에 반응하는 게 다른 질병들이랑은 다른데? 아니, 이거 정말 병이긴 한 건가?'

하지만 정작 치료를 행하는 휴고는 알 수 없는 기분에 미묘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뭔가가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단순히 매개체를 통해 신성력을 옮길 뿐 세례도 받지 않은 그의 감각으로는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인리히가 직접 이 자리에서 확인한다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물론 그건 무리였으니 당장은 장기적인 변화를 살피면서 그 추이를 간접적으로 체크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상황을 보아하니 이 치료가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래도 일단 회복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여기서 기존의 시술까지 병행하면 그 기한이 더 줄어들지도 모르지.'

다소 속물적인 생각이지만, 어찌 보면 그 기간 동안 제갈세가와 유대를 더 돈독하게 다질 수 있을 테니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계속해서 신성력을 공급해 줘야 하는 하인리히가 조금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하아,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거의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전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거든요. 그냥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치료 과정에서 제갈혜미와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평소 방 안에서 누워만 있던 그녀는 그 사실에 한이 맺혔는지, 외부인이라 할 수 있는 그에게 정말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덕분에 통성명한 지 고작 이틀째에 휴고는 본의 아니게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위로 오빠만 셋이 있는 막내라던가, 친어머니가 자신을 낳고 돌아가셨다던가, 자긴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혼란을 초래한 저주받은 아이라던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 거의 대부분이 자신에 대한 비관과 자조였으나, 그중 유독 그를 신경 쓰이게 하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흐음, 실례지만 제갈 소저.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에엑? 숙녀의 나이를 물으시는 건가요? 으으— 하 공자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세심함이 부족하신 것 같···."

안 되겠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또 언제까지 혼자 떠들지 모른다.

그에 휴고는 과감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제가 알기로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건 22년 전의 그 사건 때문이라 했던 것 같은데, 아닙니까?"

"네? 맞아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요."

"그럼 소저의 나이가 스물둘이라는 겁니까?"

"또, 또. 굳이 그렇게 따져야 하나요? 그냥 대충 넘어가시지, 공자도 참."

그는 장난스럽게 볼을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이는 그녀를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외양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렇고, 역시 아무리 봐도 열댓 살도 되지 않은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렸을 때부터 아팠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한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 데다 사실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 신경 쓰이는 부분은, 하필 그녀가 태어나던 해에 이 세계의 근간이 흔들리는 대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우연?'

진짜 저주 같은 것 때문일 리는 없겠지만, 어쩌면 그 사건과 그녀의 병세가 뭔가 연관이 있는 건···.

"그러고 보니 공자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제갈혜미가 천진한 목소리로 그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언제 삐진 척을 했냐는 듯 그 얼굴엔 다시 생글거리는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스물셋입니다."

그에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왠지 연하라고 하면 더 말려들 것 같아서 일부러 높여 불렀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구의 나이는 여전히 스물이었지만 그도 이세계로 진입한 지 이제 3년 차로 접어들고 있었으니까.

실질적으로는 스물셋이라고 할 수 있었고, 다수의 분신으로 같은 기간 내에 보내는 시간의 밀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보다 더 쳐줘야 할지도 몰랐다.

"아! 제 또래셨네요? 뭔가 더 나이가 많으실 줄 알았는데. 에헤헷."

이건 삭아 보인다고 돌려 까는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헤실헤실 웃는 모습을 보니 별다른 의도는 없는 모양이었다.

역시 상대하기 피곤한 여자였다.

"흐암— 합!"

그때, 무방비하게 하품하던 그녀가 놀라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하품이었는지, 잠시 그대로 굳은 그녀는 이내 동그란 눈으로 슬며시 이쪽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피곤하신가 보군요. 오늘 치료도 끝났으니 이만 주무시지요."

"아, 아니! 별로 안 피곤한데요? 저 완전 멀쩡한데요?"

"고집부리지 마십시오. 휴식도 회복을 위해 필요한 과정입니다. 말하는 것도 체력을 많이 소모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에 휴고는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슬슬 일어날 기회를 보던 순간이었는데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으우우··· 내일도 와 주시나요?"

"당연하지요. 당분간은 매일 올 생각입니다."

"···알겠어요, 그럼."

그러자 시무룩해진 제갈혜미가 꾸물거리더니 다시 침상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에게 보이기엔 과한 친밀감이었지만 그녀 입장에선 그가 생명의 은인일 테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편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대상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고.'

가족도, 가문 사람도 아닌— 그녀가 지나온 삶과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

그녀가 했던 말들을 떠올려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내일 봐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휴고는 새로운 인연과 함께 강환계에서 순조롭게 자리를 잡아 나갔다.

***

한바탕 전투가 벌어진 듯 난장판이 된 전장의 한구석.

우우웅—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마주 잡은 한 사내의 주위로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어떤 움직임도 없이 그저 가만히 기도하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그 엄숙한 모습은 보는 이의 숨을 턱 막히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 모습을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역시 하인리히 님! 잠시도 기도를 쉬지 않으시네요.'

바로 주신교단의 성녀인 리에스타였다.

또 한 차례 출몰한 백색 거인을 토벌한 직후.

자신이 맡은 구역의 희생자들을 돕고 돌아온 그녀는 오늘도 틈이 나는 대로 기도를 올리고 있는 하인리히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이거 저도 질 수 없죠!'

그의 몸에서 불길처럼 일어나는 신성력에 그녀의 마음속에도 신앙의 열기가 옮겨붙은 듯했다.

그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같은 자세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전투에 이어 인근에 막 초광범위 치유 성법을 사용한 후인지라 피로가 상당했으나, 주도적으로 전투를 이끌고 뒷수습까지 도왔던 하인리히도 저렇게 신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녀가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경건한 신성력이 도도하게 흐르는 공간 속.

성자와 성녀는 나란히 앉아 주신께 기도를 올렸고—.

'음, 이 정도면 됐나?'

오늘도 하인리히는 강환계로 보낼 신성력을 성공적으로 리필할 수 있었다.

***

"여기도 있네. 이거 진짜 노다지잖아?"

자신의 팔뚝만한 커다란 식물 뿌리를 집어 든 해리스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곳은 제갈세가가 있는 융중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무당산.

강환계에서도 거대 집단에 속하는 무당파가 자리하고 있는 영산이었다.

'물론 지금은 내 텃밭일 뿐이지만.'

아직까지 기운이 풍부한 이곳에 와보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캐온 영약들에 깃든 기운이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았던 이유를.

'제갈세가에서도 그랬었지. 영약들의 전반적인 약효가 떨어지고 있다고.'

그게 전부 주변 기운에 너무 민감한 나머지 세상의 기가 말라가는 것에 영향을 받아서였다.

아마 용맥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남은 다른 영약들도 대부분 비슷한 상태일 터.

그만큼 용맥산(産) 영약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우리 휴고가 먹을 것들은 항상 최상급이어야지!'

영약이라는 것도 많이 먹다 보면 내성이 쌓여서 효과가 줄어들 텐데, 괜히 잡스러운 것들로 그 한계를 채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아이에겐 정말 엄선한 식재료들만으로 꽉꽉 눌러 담아 먹여도 모자랄 판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곳에서 캐낸 영약들을 제갈세가에 넘긴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군. 적당히 생색도 낼 수 있었고.'

그렇게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인 해리스는 분주하게 날아다니며 눈에 띄는 영약들을 하나둘 수거해 나갔다.

시간도 없는데 괜히 마찰이 생겨 귀찮아질까 봐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남들의 이목을 피한 것은 덤이었다.

'물론 지금이 아니라도 기회가 될 때마다 올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휴고가 당장 쓸 것들 정돈 미리 챙겨두는 게 좋겠지.'

그런 마음으로 채집을 이어가다 보니 그 양이 생각 이상으로 불어나고 있었으나, 원래 이런 건 부족한 것보다는 넘치는 게 나은 법이었다.

정 다 못 쓰겠다 싶으면 선심 쓰듯 다른 이들에게 뿌려도 되는 일이었으니.

'음, 일단은 이 정도면 되겠군. 그럼 이제 슬슬···.'

해리스가 강환계로 진입한 지 10일 차가 되던 날.

그가 다시 아우테리카로 돌아가기 직전에 있었던 참된 노동의 순간이었다.

#259

술래잡기 (1)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실내 단련 시설.

끼기긱— 끼긱—

그곳에선 평소 이상의 심상치 않은 금속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덜컹— 쿠웅!

"후욱, 후우—!"

그리고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에 닿는 소리와 함께, 또 한 차례의 루틴을 마친 나는 땀범벅이 된 채 김이 풀풀 솟아오르는 몸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한 감탄을 토해냈다.

"이거 대단한데? 총량에 비하면 극히 일부일 텐데도 이 정도 수준이라···."

그렇게 감탄을 토하던 나는 방금까지 사용하던 운동기구를 내려다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은 힘 조절이 미숙했는지 손잡이 부분이 살짝 우그러지고 비틀려 있었다.

"으음, 역시 더 튼튼한 게 필요하겠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일반적인 기구는 초인이 육체를 단련하는 데에는 그리 맞지 않았다.

당연히 그 특성상 기본적인 강도도 굉장히 튼튼한 편에 속했지만 그래봐야 일반인들 기준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었으니.

'이참에 그냥 싹 다 하워드의 수제품으로 교체해야겠군. 마침 새로 입수한 재료들을 다루는 연습도 할 겸 이것저것 만들어 보고 있었으니 잘됐네.'

이 갑작스러운 본체의 성장은 휴고를 강환계에 보내기 직전에 행했던 『고유스킬 강화 (1,300,000)』가 원인이었다.

사실 처음엔 휴고를 그곳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다재다능」으로 여러 잡일에 능해 본체 곁에 두면 굉장히 편했던 데다가, 새 차원에 가는 것이니만큼 새로운 기분으로 신규 아바타를 뽑아 파견할 심산이었으니까.

'130만짜리 강화는 물론 연이은 140만짜리에서도 아바타 개체수 증가가 안 나오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그렇게 당연히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 연달아 빗나가면서 결국 나는 생각지도 못한 두 가지 능력을 얻는 대가로 휴고를 떠나보내야만 했고.

그 첫 번째가 바로 지금 그의 육체를 강화하고 있는 「개체 투영」의 파생 능력이었다.

이것은 온전히 하나의 개체 정보를 그대로 덧씌우는 「개체 투영」과는 별개로 아바타가 가진 힘의 일정 부분을 빌려오는 식으로, 명확한 쿨타임이 없어서 힘의 소모가 크지 않은 평상시라면 하루 종일 유지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상시 강화형 패시브 스킬이 추가되었다고 보면 되겠군.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그 대상이 되는 아바타가 「개체 투영」처럼 한 번에 한 개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지.'

가히 사기적이라고 봐도 무방한 능력이었지만, 아쉬운 점은 그렇게 빌려올 수 있는 힘의 총량이 온전한 「개체 투영」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능력은 어떻게든 발전시킬 수 있는 법. 여기에 추가적인 강화가 더해지고 숙련도도 더 높아진다면, 어쩌면···.'

어쩌면.

한스의 흑마력과 하인리히의 신성력, 할리의 육체 능력에 혈마법과 정령술까지 동시에 사용하는— 그런 끔찍한 혼종이 탄생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진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거기다 다른 능력도 상당히 쓸 만하고 말이지.'

문제라면 이렇게 빨리 마를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카르마 잔고에 있었다.

골드 드래곤 해츨링 호루스를 만들고 남은 포인트가 200만 정도였다.

그 후 제피아 공화국 사태를 겪으며 한 차례의 폭등이 있었고, 곳곳에 빨대를 꽂아놓은 덕분에 다시 300만을 조금 넘을 정도로 불어났었는데···.

'이걸로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하게 되었군.'

다음 강화에 필요한 포인트는 150만.

아무리 연금처럼 곳곳에 꽂아놓은 카르마 빨대가 많다지만, 꾸준한 지출인 '성장의 비약'이 있으니 뭔가 큰 사건이 없다면 달성하는 데 상당히 오래 걸릴 수치였다.

"뭐, 내가 언제부터 그런 걸 걱정했다고."

남들이 100만도 힘들어할 때 1000만이 넘는 포인트를 모은 나였다.

내게 카르마란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쌓이는 것일 뿐이었으니—.

'어디 보자. 대충 마무리된 강환계 쪽은 이제 숨 고르기에 들어간 상황이니까···.'

내 관심이 다시 나의 텃밭인 아우테리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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