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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잠시 강환계에 신경 쓰는 사이에도 아우테리카의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각자의 위치에서 수련과 업무를 수행하며 기반을 다지는 아바타들.

그리고 그 중, 최근 유독 폭력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가 하나 있었다.

"으으으···."

"끄흡— 하, 항복! 항복하겠소!"

"크하하핫—! 처음의 패기는 어디로 갔나? 고작 이걸로 증명이 되겠어? 자자, 다른 놈들도 사양하지 말고 한꺼번에 들어오라고! 카하핫!"

바닥에 쓰러져 끙끙 앓는 수십 명의 사람들과 그들 한가운데에 선 채 한 사내의 머리를 움켜쥐고 위풍당당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거한.

각자 무기를 움켜쥐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지금 저기에 술 취한 노숙자들처럼 뻗어있는 건 마을 최고의 전사들이고, 심지어 거한의 손에 머리를 잡힌 채 항복을 부르짖는 이는 그들 부족의 족장이자 인근 지역 최강의 대전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으응? 뭐야, 더 없어? 사양하지 말고 들어와! 확실히 지금까지 지나온 곳 중엔 제일 재밌는 것 같으니. 이참에 로보트 부족이 칼코스 제일이라 자칭할 만한지도 한번 보자고!"

"르바트예요, 할리 님."

"으음? 로보트가 더 강해 보이는데 말이지. 하여간 더 나설 놈들은 없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참관하고 있던 미스티가 조심스레 그의 발음을 정정했으나, 이미 흥이 차오르기 시작한 할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만한 야만 전사의 몸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광기 어린 패기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몇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으음, 할리 님?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다른 분들도 이제 전부 인정하신 것 같은데."

결국 미스티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지금의 이 소란은 미스티를 대동한 할리의 방문에 부족의 족장과 전사들이 그가 왕의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고 나서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동남쪽의 열대우림을 끼고 있는 덕에 다른 곳보다 좋은 입지를 가진 르바트 부족은 대대로 세력이 강성하며 자존심도 높았는데, 난데없이 처음 보는 이를 섬겨야하는 상황이 되자 작정하고 일을 벌였던 것.

그런데 앞서 할리가 말했듯, 사실 이런 푸닥거리를 한 게 이곳이 처음이 아니긴 했다.

아마 이들도 다른 부족들처럼 적당히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해서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만들 셈이었던 것 같은데···.

"···크흥! 흥이 식는군."

털썩—

"크윽!"

할리의 커다란 손에 잡혀있던 족장이 바닥에 널브러지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켰다.

실컷 두들겨 맞으며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타고난 강골인 그는 그 와중에도 억지로 몸을 꿈틀거리면서도 애써 고개를 들어 할리를 올려다보았다.

2.3미터가 넘어가는 근육질의 거구와 벌거벗은 상체에 각인된 휘황찬란한 문신.

그리고 빛을 등지고 있어 그림자가 드리운 이목구비 한가운데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적광과 녹광.

그저 가만히 서 있음에도 천하를 오시하는 것 같은 패도적인 위압감을 줄줄 흘리는 저 사내가 바로···.

'···새로운 투왕···. 과연 명불허전이로다.'

내심 탄성을 토한 족장이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실컷 당하고 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엔 거부감이나 분노는커녕 오직 짙은 경외와 존경만이 담겨있었다.

전사의 자존심상 무작정 숙이고 들어갈 수 없어 일단 들이박긴 했는데, 확실한 격의 차이를 체감하고 나니 이제 자신의 위치를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족장 하나만이 아니라 바닥을 기며 끙끙거리던 정예들도, 주변을 둘러싸고 그것을 바라보던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강함만이 최고의 가치인 남부 전사들.

그들의 눈에는 갑옷조차 입지 않은 맨몸으로 오러가 깃든 중병기를 튕겨내며,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으로 전사들을 어린아이처럼 제압하던 그 모습은 그야말로 지상에 강림한 투신 그 자체였다.

"···새로운 투왕께, 르바트의 족장 움페란테가 충성을 바칩니다."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충성을···!"

그리고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족장과 전사들이 할리의 앞에서 복종을 맹세하며 이곳에서의 일도 모두 마무리되었다.

"아가씨, 이걸로 남동부도 끝이지? 음, 그럼 한 절반쯤 돈 건가?"

"아이 참, 이제 그냥 미스티라고 불러주시라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와! 아무리 작은 마을은 무시하고 부족장들이 있는 곳만 들렀어도 그렇지, 이 짧은 시간에 벌써 절반이나 돌다니. 역시 할리 님은 대단하세요!"

"으하하—! 뭐, 주술의 도움도 톡톡히 한몫했지. 나랑 궁합이 썩 잘 맞는 것 같단 말이야!"

"구, 궁합이라니···. 아이~ 참! 할리 님도. 으히힛—."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미스티의 머릿속에서 자식은 몇 명을 낳을지에 대한 망상이 폭주할 때, 그러건 말건 할리는 다음 일정을 생각하며 턱을 긁적였다.

'그냥 투왕 즉위 관련 문제였다면 각지의 족장들을 중앙으로 소집하는 걸로 끝이었을 텐데.'

문제는 한창 발테온의 난이 휩쓸고 지나간 남부의 처지가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상황 수습은 물론 아직 그 잔당들이 남아 난동을 부리는 곳도 적지 않았으니, 조금이라도 일을 빨리 끝내기 위해선 이렇게 그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읏차—! 뭐, 그럼 후딱 가 볼까? 자, 다시 업히라고 아가씨."

"으힛, 역시 셋 정도가 좋···. 음? 네, 네? 네! 할리 님!"

그렇게 대주술사의 도움까지 받아 전속력으로 남부를 질주한 할리.

덕분에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일에 부족 연맹 전체를 순회할 수 있었으며, 이윽고 칼코스의 모든 부족이 인정한 진정한 '투왕'의 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간 분산되어 있던 남부의 권력이 그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기 시작했다.

***

작업복을 입은 한 금발의 청년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있었다.

먼지를 털고, 빗자루로 쓸고, 물걸레질하는 그 절도 있는 모습은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이 프로의 기세가 물씬 풍겼다.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져 청소에 심취해 있던 도중.

열심히 바닥을 닦던 그는 뭔가를 발견하고 멈칫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여기 얼룩이 생겼군. 주인님께서 아시면 경을 치실 텐데.'

판단과 동시에 조치는 즉각적으로 이뤄졌다.

작업복 앞치마에서 작은 병과 솔 등의 도구들을 꺼낸 그는 바닥의 얼룩에 병의 약품을 조심스레 떨어뜨리며 열심히 솔을 문질렀다.

사삭사삭사삭—

"후후후, 이 건방진 얼룩 녀석. 감히 이 몸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네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내겐 어림도 없다."

잔혹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피도 눈물도 없이 무자비하게 얼룩을 몰아붙였고—.

마침내 그것은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흐흐흐···."

마치— 과거의 그처럼.

"······."

바닥에 엎드린 그의 몸이 한순간에 멍하니 굳었다.

평소였다면 바로 일어나 다음 작업으로 넘어갔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사이먼~? 아직도 청소하고 있는 건가요?"

갑자기 들려온 여성··· 주인님의 목소리에 사내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셀 수 없을 만큼의 교육을 거친 그의 몸은 생존본능에 따라 저도 모르게 이미 행동을 옮기고 있었다.

"허업! 예, 예!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지금 갑니다!"

"정말이지. 이렇게 느려 터져서 대체 어따 쓴담."

후다닥 달려와 바닥에 넙죽 엎드린 사내.

그러나 그런 모습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그를 흘겨본 시아나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바닥에 넙죽 엎드린 사내, 아제리온 제국의 전(前) 황태자 사이먼 카르테 아제리온의 등을 뾰족한 힐로 콱콱 짓밟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이먼, 요즘 체벌이 없어서 풀어진 건가요? 아니면 오히려 이걸 원했던 건가? 응?"

"으힉! 아, 아닙니다. 주인님! 저, 저는··· 으허헉!"

"흐응~ 역시 그랬군요. 체벌을 포상으로 받아들이다니. 이런 몹쓸 노예를 봤나? 푸훗."

붉어진 얼굴과 가빠진 호흡.

사이먼은 반쯤 풀린 얼굴을 바닥에 파묻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젠 제국의 황태자였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모습이었다.

쿠르르릉—

그렇게 두 사람이 나름대로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순간.

"···이건?"

미미한 진동과 함께 갑자기 불사성이 살짝 흔들렸다.

평범한 이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세했으나, 명색이 불사의 군대 간부인 그녀는 확실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왕께서··· 기뻐하시고 있어?"

다만 그 이유만큼은 그녀도 미처 파악할 수 없었다.

채찍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던 시아나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으윽, 주··· 주인님···."

"아."

그때 그녀의 발밑에서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상관없겠지.'

무슨 일이 있으면 왕께서 알려주실 터.

그 전엔 그녀가 고민해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 시아나는 그저 지금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녀의 입가에 가학적인 미소가 맺히고.

잠시 쉬던 채찍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

불사성 심처.

불사왕의 개인 연구 공방.

[크흐흐흐— 드디어.]

그 중앙에서 어둠에 휩싸여 있던 한스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감정에 반응한 불사성이 호응해 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잡았다··· 이놈.]

비로소.

상당히 길었던 술래잡기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우우웅—

한스의 손에 들린 작은 금속 조각이 잘게 진동했다.

#260

술래잡기 (2)

역천의 서약.

그들과의 악연은 아우테리카 진입 첫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필 이세계에 막 발을 내디딘 한스가 처음 방문한 마을이 바로 그들의 비밀 거점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 '불사왕의 파편'을 숙성시키는 작업이 한창이던 찰나에.

'물론 내겐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었지만.'

첫 대면 후로도 그 역천의 서약 놈들과는 이런저런 일들로 계속해서 부딪혔다.

북부 산맥에서의 엘프 세실리 구출 사건부터 최근에 있었던 공화국에서의 오바이포 클랜 사태까지.

'그 대부분을 처리하긴 했는데···. 철저한 점조직 연합체라 연계된 놈들을 뿌리 뽑는 게 쉽지 않았지.'

한스는 눈앞에 떠오른 작은 금속 조각을 바라보며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이것은 놈들이 벌인 여러 수작 중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심연의 문 개방 현장에서 발견한 작은 단서였다.

목걸이의 줄로 사용된 가느다란 사슬의 일부로 추정되는 것.

[크흣— 그래, 이름이 테르말 가디아스라고 했나.]

자신의 모든 것을 대가로 바쳐 기어코 심연을 열고 광기의 숙주가 된 자.

당연하지만 놈에 대한 뒷조사도 이미 끝마친 지 오래였다.

남부에서 그 일을 벌인 주체인 대족장 발테온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 곧바로 정보 조직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사연이야 안타깝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그가 왜 심연의 문을 열고 대륙의 파멸을 획책했는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사건으로 소중한 것을 잃고 세상을 원망하는 이들이야 발에 챌 정도로 흔하지 않나.

다만 마침 그에겐 정말 세상을 위협할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 남들과 다를 뿐이었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인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에게 있었던 비극도 역천의 서약이 꾸민 수작이지 않았나 싶긴 한데.'

능력 있는 이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후에 접근해 타락시키는 것 또한 악의 세력의 전매특허이지 않던가.

물론 다 지난 이제 와서 따져봤자 아무 의미 없는 추측일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광기의 숙주가 되었고, 광기의 숙주는 혁명가라는 놈이 가지고 갔으며, 한스는 매개체를 통해 그 숙주가 있는 장소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추적해 왔으나 결국 그 종적조차 알 수 없었던 혁명가가 있는 곳을.

우우웅—

잘게 진동하는 금속 조각을 바라보던 한스가 다시 그것을 챙기고 연구실 밖으로 나섰다.

사전 준비는 모두 끝났으니 이제 놈을 추적하기 위한 의식을 최대한 빨리 시작하되,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하고 확실하게 놈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 귀찮은 놈이 또 어떤 수작을 부려놨을지 모를 일이었으니.

[나오셨나이까··· 왕이시여···. 소녀, 올리비아··· 위대하신 불사의 왕을 배알하나이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그의 앞에 밴시 퀸 올리비아가 스르륵 나타나 부복했다.

미리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불사성의 이상을 감지하자마자 만사 제쳐놓고 달려온 모양.

과연 그의 오른팔이라 할 만한 행동력이었다.

[그래. 때마침 잘 왔구나, 올리비아.]

[무엇이든 하명하소서···. 소녀, 신명을 바쳐 왕의 명을 이행하겠나이다···.]

생각해 보면 생각 이상으로 긴 시간이었다.

다수의 정보 조직을 거느리고 이 세상의 정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되면서 놈을 찾는 게 이리 오래 걸릴 것이라 예상치 못했었는데.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란 말이야.'

하지만 세상에 끝나지 않는 놀이는 없는 법.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으니 이제 그만 마무리 지을 때도 되었다.

[모든 간부들을 소집해라.]

물론 그의 사전에 '못 찾겠다 꾀꼬리' 같은 포기 선언 따윈 없었다.

이건 숨바꼭질이 아닌, 반드시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술래잡기였으니까.

전 차원 어린이들이 즐기는 놀이의 장르를 제멋대로 데스 매치로 바꿔버리는 한스였다.

***

아제리온 제국 황실에서 마침내 공식적인 공표가 떨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하고 기다리던 그것.

바로 사이먼 대신 라일리가 황태녀로 책봉된다는 소식이었다.

"음··· 하긴 이제 황실도 확실히 할 때가 됐지. 판이 이렇게까지 뒤집혔는데 언제까지 사이먼 황자님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하핫!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 황태녀 전하 만세!"

"실상 계승 경쟁은 끝났다고 봐야겠네요. 이거 참, 의외라고 해야 할지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이미 대세가 기운 지 한참 되었기에 그에 따른 반발은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이먼의 가장 큰 우군이자 라일리 습격의 배후였던 허먼하트 공작가가 그녀의 역공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실상 전면전만 벌어지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기에 그들은 가문의 보전에 전력을 쏟기에도 바빴던 것이다.

"이세아 프리스틴 자작··· 아니, 백작님께 선물이라도 하고 싶은데 어찌해야 한다. 하필 결사대로 활동하시는 중이라···. 일단 수도의 저택에 전달해 두면 되려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프리스틴 백작을 통해 선을 대는 게 최선이다. ···음? 잠깐, 차라리 이참에 황태녀 전하께서 황궁에 들이신 애인에게 미리 접근하는 것은···?"

덤으로 이세아도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되었으나, 다른 귀족들은 그것에 대해선 그러려니 하는 입장이었다.

사실 힘이 없던 시절의 라일리 휘하에서 공적까지 부족했기에 자작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지, 그녀가 계속 그 위치에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또 아마 백작에서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가 불사왕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면 후작위도 부족해질 위상을 가지게 될 것이고, 라일리 황태녀가 황위를 승계받은 후엔 무난하게 공작위까지 올라가게 되겠지.

귀족들이 그녀에게 선을 대고자 애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건 그녀가 지구로 돌아가지 않았을 때에나 생길 일이겠지만.

그리고.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제국의 정세가 요동치고 있을 때.

또 다른 거대 집단인 주신교단은 그 이상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해 있었다.

"···리에스타 님, 괜찮으십니까?"

"아··· 그··· 네."

걱정스러운 얼굴의 하인리히가 조심스럽게 리에스타 성녀를 불렀으나 그녀는 이미 정신이 다른 곳으로 향한 듯 모호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언제나 생기 있었던 얼굴은 파리하게 질린 채였고 입가와 눈꼬리는 연신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곧 신전에 도착합니다. 미리 게이트를 준비해 달라 요청했으니 바로 이동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저희가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남은 곳은 저희가 없어도 알아서 대응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거인이 출몰하지 않은 지도 제법 되었고 말이죠. 놈이 나타나면 그때 바로 출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죠···. 예···."

항상 똑 부러지던 평소와 같지 않은 얼빠진 대답.

조용히 뒤를 따르는 일행들을 이끌고 도시를 가로지르던 하인리히가 흘깃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녀가 저렇게 당황하는 것은 처음 보는지라 조금 낯선 기분도 들었다.

불사왕과 엮일 때에도 저런 반응은 아니었는데···.

'하긴, 그럴 만도 한가.'

그는 외부에 나가 있던 그들에게 전해진 교단의 연락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담긴 파급력을 생각하면 저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내용이 바로—.

현 교황 하티아누스 2세의 임종이 머지않았다는 급보였으니.

'이미 몇 번이나 전조가 있었을 텐데···. 역시 교황 성하께서 일부러 알리지 말라 하신 거겠지.'

외부에 있는 그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칠까 우려해서.

그러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교황의 곁을 지키던 측근이 그들에게 연락해 온 것일 터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바로 게이트를 가동하겠습니다."

리에스타에겐 대신전의 모든 이들이 가족이나 다름없었지만, 어린 나이에 현 교황에게 입양되어 교단에 들어온 입장에서 그는 유독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보육원에서 자라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생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족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성자님.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행분들께선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인리히는 그녀가 로셀리아 대신전에 있을 때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교황의 문병을 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좋아하는 정원에 가는 것을 포기할지언정 그 일과만큼은 단 하루도 어기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 가끔씩 안부만 묻던 나랑은 다르게 말이지. 그러고 보니 난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뵌 게 정상 회의 때였나?'

물론 용사 파티로서 밖에 나돌아 다니느라 바빴단 핑계가 있었으나, 그래도 살짝 양심에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할아버지!"

"허허허,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리 급하게 들어오는고? 이제 시집갈 때 다 된 줄 알았더니 아직도 애구나."

"할아버지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교황에게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는 리에스타.

그에게 인사를 건넨 하인리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뒤쪽에 서서 기다렸다,

사실 마음 같아선 두 사람이 회포를 풀 동안 자리를 피해주고 싶었으나, 어째선지 당사자인 교황이 그에게 잠시 기다려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의 본격적인 대화는 간신히 진정한 리에스타가 얌전해지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크흐흠, 이거 성자님을 모셔놓고 실례를 범했군요."

"괜찮습니다. 저야 그동안 쌓여온 두 분의 유대를 이렇게 볼 수 있다니 영광이지요."

"허허허,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지만 하인리히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몸에 남은 마지막 생명력이 찬란하게 타오르는 중이라는 것을.

그것을 알아챈 건 리에스타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교황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잘게 떨렸다.

"내 이리 성자님을 청한 것은 마지막으로 꼭 전해야 할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전할 말씀··· 입니까?"

그의 말에 하인리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 순간 교황이 전할 말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으니.

그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교황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두근— 두근—

혼돈과 공허가 뒤섞인 심연의 경계 지역에서 거친 박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소리는 곧 공간의 뒤틀림에 이리저리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여전히 남아서 서서히 주변을 잠식해 나갔다.

"아아— 주이시여."

그 중심부에서 새어 나오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한 마디.

정말 사람의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일그러지고 깨져 있었으나, 그 안에 가득 담긴 광기와 광신은 듣는 것만으로도 대상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아득하기 그지없었다.

'나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구나.'

두 귀를 쫑긋거리며 세계의 소리를 엿들은 그 존재가 작게 한탄했다.

이제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서서히 접근하던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이 마침내 온전한 형상을 이루며 그를 옥죄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순 없다.'

비록 자신은 여기서 스러질지라도··· 그에겐 다음 세대의 '나'를 위해 씨앗을 뿌려둘 의무가 있었다.

그분의 사도가 된 그가 전대의 의지를 이어받은 덕분에 일을 수월히 진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이루지 못하는 건 아쉽긴 하다만 어쩔 수 없지. 다음이야말로 제대로 싹을 틔울 수 있도록 기꺼이 이 한 몸 거름이 되리라.'

꿈틀— 꿈틀—

광기의 씨앗과 하나가 된 그의 몸이 연신 움찔거렸다.

아직 새로운 육체가 제대로 안정되지 않아 생기는 현상.

죽음을 감지하고 최대한 서둘렀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었다.

'좀 더 빨리. 제대로. 확실하게.'

그렇게 강박에 휩싸인 그가 애써 육체를 통제하고 있을 때.

철퍽—

심연의 아래에서 올라온 무언가가 그의 몸에 부딪혔다.

[———!]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에 들어온 그것은.

가슴께까지 오는 키에 새하얀 몸뚱이를 가진 인간형의, 그가 지금까지 몇 번이고 맞이했던 존재였다.

"아아, 이번엔 좀 늦었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 반색한 그는 두 손을 뻗어 냉큼 그것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자, 그분의 은총 아래··· 너도 나와 하나가 되는 거다."

쩌억— 콰직!

한순간에 커다래진 입을 벌려 그것의 머리를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참극.

하지만 그는 부지런히 입을 놀려 남은 잔해까지 깔끔하게 먹어 치울 뿐이었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그는 처음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커진 것은 물론, 불안정했던 육체 또한 한층 더 완성에 가깝게 정련되어 있었다.

두근— 두근—

그리고 사방으로 다시 거친 박동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거 아쉽군. 이왕 이렇게 될 거, 시간에 쫓기지 않게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을. 계획들이 제대로 되기만 했더라면···."

가벼운 탄식을 내뱉은 그가 시선을 내려 꿈틀거리는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보았다.

지상의 불결한 존재들과 달리 아름답기 그지없는 깨끗하고 매끄러운 순백의 육체.

역시 아무리 봐도 이 모습이야말로 궁극의 인간, 신인류 그 자체였다.

'이제 다 됐다···.'

그렇게 역천의 서약의 설립자인 전(前) 혁명가.

현(現) '광기의 왕'이 세상에 나오기 위한 태동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261

술래잡기 (3)

성자와 성녀가 급히 귀환한 날.

하티아누스 2세는 그간 두문불출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과 교류를 가졌다.

한동안 떨어져 있던 리에스타와 쌓인 회포를 풀고, 인연이 있던 이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었으며, 그간 자주 마주할 수 없었던 후학들에게도 덕담을 건넸다.

그에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교황의 거처에 드나들게 되며 오랜만에 떠들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성녀를 비롯한 소수의 고위 관계자들 앞에서 피곤하다며 침상에 누운 그는···.

"허허허, 그럼 내 먼저 가 있을 테니 다들 천천히 오시오."

그 짧은 한마디와 함께, 이내 잠이 들듯 조용히 영면에 들었다.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서.

하지만 그런 커다란 사건에도 정작 대신전 내에 번진 슬픔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 하루 종일 가라앉아 있던 리에스타 성녀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잠깐 눈물을 훔치긴 했으나 이내 신색을 회복하곤 앞장서서 교황의 새로운 여정을 축복해 주었다.

'하긴, 명색이 대륙 최대 종교인 데다 고위층은 하나같이 광신도나 다름없으니 당연한가.'

신앙심 깊은 그들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끝이 아닌 주신께로 향하는 여정의 시작일 뿐이었으니까.

당장의 이별에 슬퍼하더라도 나중에 주신의 품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하인리히는 교황의 은밀한 전언을 떠올렸다.

바로 옆에 있던 리에스타조차 들을 수 없도록 그의 머릿속에만 전해졌던 인자한 목소리를.

'···뭐, 그리 대단한 말은 아니었지만. 기껏해야 한 마디가 전부였으니.'

단 한 마디.

그것이 귀천(歸天) 직전의 교황이 전한 신의 말씀이었다.

'겨우 그걸로 뭘 어쩌라는 건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론 왜 그렇게 애매한 건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편의상 신의 말씀이라 지칭했을 뿐,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복잡하고 방대한 의지의 일부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가까울 터였다.

그나마도 교황의 영혼이 서서히 육체의 틀에서 벗어나는 중이었기에 가능했을 테고.

일례로 자신은 명색이 주신의 성자인데도 아직도 처음과 별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지 않던가?

'지금은 괜히 신경 써 봤자 별 의미 없겠지. 어쨌든 뭔가를 허락한다는 게 나쁜 건 아닐 테니.'

그게 대륙적인 깽판을 치는 것에 대해선지, 신의 이름을 여기저기 팔고 다닌 것에 대해선지, 그것도 아니면 아우테리카에서의 장기 체류에 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보면 이제 와 굳이 눈치 볼 필요 없다는 허락이기도 했으니 이쪽으로선 환영이었다.

이제 슬슬—.

또 다른 빅 이벤트가 코앞에 닥친 상황이었으니까.

***

[크흐흐— 이거 어이가 없군. 어쩐지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더라니.]

불사왕 한스의 음산한 헛웃음과 함께 주변 대기가 거칠게 요동쳤다.

그가 있는 곳은 높게 치솟은 불사성의 한 첨탑 위.

매개체의 추적 의식을 위한 제단이 꾸려진 장소였다.

[설마 심연의 경계면에 숨어있었을 줄이야. 그곳은 도저히 생자가 버틸 수 있는 환경이 아닐진대.]

불사의 군대가 잠들어 있기도 했던 그 장소는 공기나 온기가 없는 건 물론, 시간과 공간까지 뒤섞인 혼돈의 영역이었다.

사실 언데드라 할지라도 자의적으로 움직이기는커녕 사고하는 것조차 힘든 세상인 것이다.

'보통이 아닌 놈이라곤 생각했지만, 이건 또 예상 이상이구나.'

하지만 감탄스러운 건 감탄스러운 거고, 이렇게 되면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놈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일부러 불사의 군대 간부진들까지 몽땅 불러 모아 준비시켜 놓은 상황이었는데···.

'나처럼 심연을 다룰 수 있다면 모를까, 이거 다른 놈들은 짐만 되겠군. 차라리 그냥 혼자 가는 게 낫겠어.'

하늘을 날아 첨탑에서 내려온 한스가 타오르는 안광을 빛냈다.

사실 그가 혼자 가더라도 별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간 혁명가를 처리하지 못한 건 숨은 위치를 찾지 못한 것 때문이지, 놈이 가진 무력 때문이 아니었으니.

제깟 놈이 아무리 강해봤자 설마 불사왕만 하겠는가?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준비했던 이유는 좀 더 확실하게 하려는 욕심이었을 뿐이다.

누가 뭐래도 놈은 여러 차례 세상을 뒤엎는 환란을 주도한 거물이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더 지체해 봤자 무의미한 시간 낭비겠지.'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한스는 이내 결정을 내리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전투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는 해 두되, 심연의 경계 안으로는 일단 자신 혼자 가는 것으로.

하지만 그러면서도 살마의 뒤를 이어 지구산 각성자들의 시체로 제작된 어비스 레버넌트들을 아공간에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심연을 잔뜩 들이부은 이 녀석들이라면 혹시 모르지. 설령 그 안에서 쓸 수 없다 해도 놈이 밖으로 도망쳤을 땐 제법 도움이 될 테고.'

그렇게 준비를 마친 그는 곧장 근방에 자리한 심연의 상흔으로 향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으니.

'찾았다.'

예민한 한스의 감각에 감지된 균열의 흔적.

그것은 활동을 멈춘 지 상당히 오래되어 굳게 닫혀있는 상태였으나, 심연의 힘을 다루는 한스에게 그 하나를 여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의 손끝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른 새카만 기운이 길게 뻗어 형체를 갖추고.

이내 날카롭게 벼려진 심연이 허공을 갈랐다.

찌지지직—

단숨에 찢어져 아가리를 벌리는 균열.

척 보기에도 불길하기 그지없는 어둠이 내부에서 거칠게 뒤섞이며 요동치고 있었다.

[크큭, 이거 참 흥미롭군. 그럼 어디, 이 몸을 귀찮게 한 버러지를 잡으러 가 볼까?]

그리고 가만히 그것을 관찰하던 한스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꿀렁꿀렁—

진입의 여파로 연신 꿈틀거리는 균열.

그러나 그것은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이리저리 비틀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순식간에 수복되며 다시 허공에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고 시치미를 떼듯.

***

한스가 균열 속 미지의 영역에 주저 없이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심연의 힘을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여긴 것이 컸고, 무엇보다 이상이 발생하면 그냥 소환 해제를 해 버리면 된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흐음, 이건?]

그래도 이 안에 있을 놈을 찾기 위해선 제법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자신이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섞인 시공간.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심연이 아니었으면 상당히 애먹었겠군.'

한스는 심연을 몸에 둘러 자신의 존재를 단단히 고정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쉴 새 없이 위치 좌표가 뒤틀리고 위상이 변화하는 기상천외한 공간.

사실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찾는다는 건 그냥 불가능한 일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호오— 이거··· 이용할 수 있겠구나.]

그에게 확실한 목적지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없었다면.

이곳의 환경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땐 망망대해나 다름없었으나, 확고한 표지석이 있다면 이만큼 편한 장소가 따로 없었다.

잘게 진동하는 금속 조각을 꺼낸 한스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한 걸음을 디디며—.

그가 원하는 위치.

매개체가 가리키는 곳에 단숨에 도달했다.

혁명가가 있는 바로 그 장소에.

'좋아, 이러면 거저먹는 거나 다름없··· 응?'

[허어?]

하지만 그 직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 밖의 광경이었다.

'잘못 온··· 건 아니겠지. 일단 저게 그 광기의 씨앗이라는 건 틀림없어 보이니.'

콰득— 콰드득—!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그의 귓가로 살벌한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의 바로 앞에서 커다랗고 새하얀 무언가가 열심히 입을 놀리며 분주한 식사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봐도 백색 거인이군. 이건 예상 밖인데.'

먹는 쪽도, 먹히는 쪽도.

아무리 봐도 그놈이 그놈이었다.

어쩐지 한동안 침공이 뜸하다고 생각했건만, 이런 곳에서 저들끼리 동족상잔을 벌이고 있었다니.

'잠깐, 저거 사이즈가···?'

그러던 와중,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그가 슬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엔 원근감이 뒤틀린 이 공간 때문인 줄 알았는데, 「심연의 눈」까지 사용해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 봐도 틀림없었다.

먹는 쪽의 덩치가 다른 쪽보다 1.5배 정도 더 크다는걸.

'···아무리 봐도 먹히는 놈이 작은 것 같진 않은데. 보통 거인이 30미터 정도였으니까···.'

약 45미터.

대충 추산해도 15층 빌딩이나 다름없는 크기였다.

거기다 평범한 몸이었던 지금까지의 거인들과 달리 놈은 단단하게 단련된 전사의 육체를 가지고 있어, 어마어마한 덩치와 시너지를 이룬 그 근육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뽐내고 있었다.

거기다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몸속에 깃든 어마어마한 양의 '광기'는 물론이고, 놈에게선···.

"프흣, 설마 정말로 이곳까지 올 줄이야···. 그래, 역시 불사왕 네놈이었구나."

한스가 유심히 관찰하던 놈의 얼굴이 그에게로 향했다.

무저갱이 담긴 듯한 새카만 한 쌍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이죽거리는 거인.

눈, 코, 입, 귀.

그 어디에서도 봉인은 보이지 않았다.

[네놈이 그 혁명가란 망종이냐? 이거 참 의외의 몰골이로구나. 광기의 씨앗을 이용해 거인의 육신을 입은 건가?]

"푸흐흐— 어떠냐, 불사왕? 아름답지 않느냐? 이 몸이야말로 인간의 신께서 공들여 빚으신 완전한 인간, 이 세상의 신인류이니라!"

[인간의 신···?]

그 낯선 단어에 한스가 의문을 품는 순간.

과거 백색 거인의 정신 공격을 받은 직후, 의식의 기저에 가라앉았던 어떤 찌꺼기가 이 공간에 가득한 심연과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던 것들이 저희들끼리 얽히며 하나의 정보로 탈바꿈했을 때.

그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저 거인, 자칭 혁명가라는 놈이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그 난리를 부렸던 건지.

[허! 이거 어이가 없군. 타락하여 심연으로 유폐된 신과 그 종자인가?]

"푸크큭— 그래,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 어쩌다 이 세계에 흘러들어왔을 뿐인 네놈은! 우리의 창조주이자 어버이께서 저 차디찬 심연 밑바닥에서 고통받고 계시는데, 자식 된 도리로 어찌 가만있을 수 있단 말이냐! 아아— 신이시여! 이 무능한 피조물을 용서하소서!"

쿠르릉—!

주절주절 떠들다 갑자기 급발진하는 거인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주변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 안에 담긴 무지막지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영역을 잠식해 나갔다.

'흐음.'

하지만 그 기세 앞에서도 한스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가 이세계인이라는 것을 확신하듯 떠드는 놈의 말에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하느라.

하지만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만, 딱히 상관없나? 어차피 이 자리에서 바로 없애버릴 거기도 하고.'

놈이 뭐라 떠들던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래서 그냥 편한 마음으로 대놓고 놈을 찔러보았다.

[호오— 그 말은 즉, 이 몸께서 이세계인이라는 것이냐?]

"아아? 숨길 셈이냐?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소용없다. 이 공간은 그분의 권능이 극대화되는 곳. 이렇게 코앞에서 대면하고도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은가!"

'권능이라.'

덕분에 또 하나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놈에게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겠지.

그렇게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거인··· 혁명가가 낮게 조소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끄흐흐흐— 오만하구나 불사왕이여. 그깟 말 몇 토막에 정신이 팔려 내게 시간을 주다니!"

뿌드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인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확실히 그 말대로, 놈에게서 뿜어지는 기도는 물론 육신까지 조금 전과는 달리 한층 안정되어 있었다.

아까부터 이런저런 정보들을 툭툭 내준다 싶더니 그걸로 포식한 거인을 소화할 시간을 벌고 있었던 모양.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구나.]

"음?"

하지만.

한스도 그것을 모르고 놈을 방치한 게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놈을 바로 처리하는 것보다 정보를 우선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 뿐.

왜냐하면···.

[그래 봐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그와 저 거인은 결코 대등하지 않았으니까.

겨우 그 정도 시간을 더 준다고 해 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놈이 품고 있는 기운은 절대 만만치 않았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지.'

대륙에 강림한 절망이자, 살아있는 이들의 공포이며, 죽음을 지배하는 화신.

[격의 차이를 보여주마, 잡종.]

세상을 오시하는 자타공인 아우테리카 최강.

화아악—!

불사왕 한스의 몸에서 폭사된 죽음이.

혼돈으로 물든 세상을 뒤덮으며, 서서히 접근하던 놈의 영역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262

광기의 왕 (1)

평범한 체구의 검은 인영과 15층 빌딩만 한 크기의 하얀 거인.

그것에는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표현조차 한참 부족했다.

애초에 싸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그 규격 차이는 누구라도 거인의 우세를 점칠 수밖에 없을 정도였지만···.

막상 이 현장에서 저 둘을 보게 된다면 그 생각도 자연스럽게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오오오—

그도 그럴 것이.

그 작은 체구의 인영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거인의 기세를 밀어내고 세상을 뒤덮어 가는 모습에는.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저것은 산 자가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폭력.

세상의 죽음 그 자체라고.

'아아, 이거 기분 최고군.'

그렇게 사방으로 뻗쳐나가는 검은 기운의 중심부.

그 한가운데에 고고하게 자리한 한스는 어느 때보다도 충만한 힘에 만족감을 느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실 그는 온전한 불사왕이 된 후로 만족스럽게 싸워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일본에서 있었던 번천회주와의 충돌이 최선을 다한 싸움이라 볼 수 있었으나, 그때는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전력을 쏟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다 아우테리카에서의 전투는 대부분 시나리오의 일부인 데다, 심지어 정신이 완전히 나갔을 때조차 하인리히를 죽일 수 없다는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던가?

실상 아우테리카에선 전력을 다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지상과 심연 사이의 경계.

모든 것이 뒤틀리고 뒤섞인 혼돈의 영역.

혁명가 놈은 이 공간에서 자신이 가진 권능의 힘이 극대화된다고 했지만.

그건 한스도 마찬가지였다.

쿠드드득—

폭력적인 기세가 거침없이 내달린다.

그 여파에 주변 공간이 비틀리고, 심연과 뒤섞인 죽음이 사방으로 이빨을 들이밀었으며.

그것은 그대로 거인이 있던 장소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푸크크큿! 아아— 그래, 이래야 불사왕이지! 세상의 종말로 안배된 존재라면 그 힘에 마땅한 오만 또한 갖추고 있어야 마땅한 법!"

하지만 그 압도적인 위력 시위를 마주하고도 거인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검붉은 기운을 발산해 죽음을 뿌리친 그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나며 몸을 한껏 웅크리곤.

곧바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아아아앙!

그 직후, 한스의 코앞에서 발생한 충격에 공간이 뒤틀렸다.

상이한 두 기운이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었다.

[호오? 제법이군.]

"끄흐흣, 이제 시작이다!"

콰드득—!

거인의 손톱이 한스의 주변을 감싼 장벽을 대번에 파고들었다.

다섯 개의 첨단에 모인 검붉은 광기가 검은 죽음을 찢어발기며, 동시에 다른 손이 재차 휘둘러졌다.

쿠우우웅!

강맹한 충격파와 함께 퍼져 나가는 폭음.

그 한 번의 공격에 주변의 흐름이 뒤엉키며 반경 수백 미터가 한꺼번에 뒤집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한참 떨어진 장소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덩칫값은 한다고 생각하면서.

[푸흐— 그래, 이거 재밌겠구나.]

하지만 별다른 위기감은 없었다.

그저 명색이 같은 심연 출신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생각뿐.

오히려 놈이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면 더 실망했을 것이다.

'물론···.'

본인이 말했던 대로, 격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말은 지켜야겠지만.

한스는 사방을 잠식한 자신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그의 근원인 심장이 이 세상의 밑바닥에 있는 심연과 공명을 일으키며 평소 이상의 반응을 이끌었다.

그 결과.

-끼야아아악—!

-끄아아아!

-크르륵— 끄륵—

기묘한 귀곡성과 함께.

기운이 퍼진 영역 내의 모든 '죽음'이 한꺼번에 반응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사(凍死), 분사(焚死), 익사(溺死), 폭사(暴死), 역사(轢死), 압사(壓死), 병사(病死) 아사(餓死)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죽음이 공간을 비집고 나와 형상을 이루며 세상에 현현했다.

언데드도, 유령도, 악마도 아닌 추상적인 무언가.

그 실체를 이룬 죽음이란 개념의 홍수 속에서.

[그럼 이제— 함께 결정해 보자꾸나.]

그들을 지배하는 왕, 불사왕이 선언했다.

[너의 죽음을.]

어리석은 자의 사형 집행을.

***

두 번째 심연의 문이 열리고 광기가 끌어올려졌을 때.

그 대부분은 불완전한 소환의 여파로 온전히 나오지 못하고 세상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중 일부분, 중심핵이 되는 파편 하나만이 의식을 집행한 이의 몸으로 파고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혁명가가 입은 육체의 근간이 된 광기의 씨앗이었다.

"푸키카칵!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만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이거 도저히 안 되겠는데? 프크크큿!"

때문에 광기는 세상에 혼란을 준다는 목적에는 더없이 적합했으나, 단일 개체로서의 파괴력은 조금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보완하려고 심연의 거인들까지 이용하긴 했는데, 역시 그것만으론 불사왕을 상대로는 한참 부족한 모양이었다.

'광기는 죽음에 비하면 다소 격이 떨어지기도 하고 말이지.'

콰아앙—

다시 검은 기운과 검붉은 기운이 맞부딪치며 일대의 공간이 깨져나갔다.

하지만 소득은 전무.

실소를 지은 혁명가는 시커먼 기운을 흘리며 여유롭게 물러나는 불사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상대에게서 뻗어 나오는 기운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고, 귀로는 적의에 담긴 의도를 엿들을 수 있었으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공간의 흐름 일부를 조작해 자신에게 유리한 판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콰드득— 화르륵!

그때, 그의 왼쪽 어깨를 물어뜯은 일그러진 형상의 무언가가 한순간에 타올라 잿더미가 되었다.

그 아가리에 물린 그의 신체 일부분과 함께.

동시에 오른쪽 옆구리가 난도질 되어 뜯겨 나갔으며, 왼쪽 발가락들이 뭔가에 압착된 듯 짜부라졌다.

그런 과정들이 아까부터 계속··· 쉴 새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공격의 흐름을 읽고 회피해도, 그 의도를 엿듣고 대응해도.

사방을 뒤덮은 죽음과 거기서부터 파생된 현상은 부지불식간에 다가와 그의 몸뚱이를 물어뜯고 사라졌다.

마치,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물론 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광기로 육체의 능력을 끌어올리고, 재생력을 한껏 북돋웠으며, 세상의 흐름을 뒤틀어 공간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전부 별 소용이 없었다는 게 문제지. 아아— 신이시여! 이 몸의 무능함을 용서하소서!'

거기다 신체의 수복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는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지금도 그분의 권능 덕분에 아직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게 아니었으면 무리할 정도로 끌어낸 광기 때문에 이미 본능만 남은 괴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쉽게 말해.

그에겐 더 이상 남은 가능성이 없었다.

우우웅—

설상가상, 불사왕의 공격은 단순히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주변을 둘러싼 대마법진들.

쿠르르릉—!

모든 획과 도형이 짙은 심연으로 이루어진 그것들이 발동하며, 그가 피할 수 없도록 일대의 광범위한 공간을 한꺼번에 뒤틀어버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랬듯이.

이곳이 경계의 세상이 아니었다면 이미 왕국 하나 정돈 거덜 냈을 만한 경천동지한 싸움이었다.

[과연, 과할 정도로 튼튼하구나.]

하지만 그 와중에도 거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소 심각한 손상을 입고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으나, 그나마도 시간이 좀 주어진다면 회복할 수 있을 터.

그리고 상황이 그렇게까지 되었을 때, 혁명가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한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푸흐흐, 그렇게 된 거였나? 어째 후각이 도무지 돌아오지 않더라니···."

허공에 혀를 날름거리다 입맛을 다시며 뇌까리는 백색 거인.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네가 그놈을 데리고 있었구나."

감각에 집중하며 여러 차례 손속을 나누다 보니 깨닫게 된 것이었다.

불사왕과 그자 사이에 인연이 닿아있다는 것을.

그것도 보통 인연이 아닌 듯 상당히 진한 연결이었다.

'권능이 강화되는 이 공간이 아니었다면 힘들었겠지. 차라리 가진 게 후각이었다면 더 빨리 알 수 있었을 텐데. 아! 신이시여!'

어쨌든 결과적으로 정보를 얻었으니 다행이었다.

이제 남은 건 어떻게든 지상으로 넘어간 뒤에 후각을 회수하고 모든 봉인을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설령 불사왕이라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콰아앙—!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이어지는 에너지의 격류에 금방 끊어져 버렸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그가 뭘 알아냈든 상황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슬슬 재생력이 떨어져 만신창이가 된 거인의 육체와 달리, 불사왕은 여전히 패도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건 상관없다.]

막대한 기운이 움직이며 다시 파괴의 신비를 엮어냈다.

그 와중에도 사방에 퍼진 죽음은 여전히 거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차피 넌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서 죽을 테니까.]

그 선언에 거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 공간에서 벗어나 원하는 곳으로 넘어가는 건 짧은 시간에 가능한 게 아니었다.

불사왕이 그 시간을 기다려 줄 리가 만무한 일.

결국 눈앞에 놈이 있는 한 자신은 봉인을 풀러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지만···.

평정을 유지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한스의 생각도 복잡해진 상태였다.

혁명가가 말한 후각이란 단어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이가 있었던 것이다.

'디아나.'

영혼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후각을 가지고 있던 소녀.

능력도 좋고 그 능력의 기원이 궁금해서 곁에 두고 계속 지켜보던 참이었는데···.

'혁명가와 관련 있는 능력이었나? 아니, 정확히는 유폐된 신과 관계된 것이겠군.'

지금은 심연에 처박혀 있지만 신은 신.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아까 말한 권능도 그것이겠군. 저놈이 가진 건 후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인가? 그렇다면···.'

슬슬 싸움이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한스는 마무리를 위해 거인을 몰아붙이면서 머릿속으로는 차분하게 새로 입수한 정보를 정리했다.

그렇게 곧 상황이 끝나리라 낙관하던 순간.

"XX된 XXX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이변이 발생했다.

두근—

알림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거센 박동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세계의 흐름을 모조리 뒤틀어 버릴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자연스레 사방을 점유하고 있던 죽음이 흩어지고 준비 중이던 마법진들 또한 산산이 깨져나갔다.

[큭? 이건 무슨···!]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은 이상 현상이었다.

한스는 애써 기운을 수습하며 거인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견제했으나···.

두근—

그 노력이 무색하게 연달아 울리는 박동에 주변의 모든 좌표와 위상이 헝클어져 버렸다.

심연을 둘러 육체를 고정하고 있음에도 휩쓸려 버릴 것 같은 강맹한 파동.

한스는 자연스럽게 그것의 근원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상의 까마득한 아래에 있는 곳.

그중에서도 심연의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누군가의 고동이었다.

'미친···! 설마 이렇게 개입할 수 있을 정도라고?'

아무리 이곳이 지상보단 심연에 가까운 경계면이라곤 하지만, 오랜 세월 유폐되었던 존재가 이렇게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줄이야!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끌려가는 것을 느낀 한스가 이를 갈았다.

그렇게 그가 간신히 버티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 고심하고 있을 때.

"아아— 나의 주이시여! 당신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감격에 겨운 듯 양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린 혁명가가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어딜!]

그에 바닥의 인력을 애써 무시한 한스가 다시 놈에게 날카롭게 벼려진 죽음을 쏘아 보냈으나.

'썩을! 이 무슨 거지 같은 경우가!'

쉴 새 없이 뒤틀리는 공간에 그의 공격은 허상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무리한 대가로 몸이 덜컥 아래로 한 단계 내려간 건 덤이었고.

"푸흐흐— 불사왕이여. 갈 길 없이 흘러들어온 차원의 유랑자여. 그분의 은혜를 입고도 그 뜻을 거스른 이단이여."

그렇게 한스가 서둘러 육체를 고정하며 그 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중하던 찰나.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거인이 만신창이가 된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분의 의지가 나와 함께하는구나. 아무래도 너는 내 죽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끄끄끅!"

그 말을 끝으로 안면을 뒤틀며 가래 끓는 듯한 웃음을 흘리던 놈은 이내 세상의 흐름을 비집고 나온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놈이 향한 목적지가 어딘지는 뻔했다.

[크흐, 이 건방진 놈이 감히···!]

그에 후속 조치를 하기 위해 서둘러 정신을 집중하던 한스는,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끌려들어 가는 몸을 느끼고 신경질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젠장, 안 그래도 할 게 많은데 귀찮게!'

이곳에 계속 있어봤자 쓸데없이 정신력만 소모되는 상황.

한창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지금 괜히 드잡이질할 시간은 없었다.

'당신도 다음에 두고 보자고.'

늪에 빨려 들어가듯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던 한스의 몸이.

어느 순간 그 자리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

툴크 왕국의 북쪽 국경, 북부 산맥과 인접한 강철의 성채 인근.

찌지지직—

그곳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 저게 뭐야?"

"잠깐··· 저거 설마?"

"비상! 비상! 빨리 윗선에 보고해!"

성채와는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건만,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균열이 발생했다.

아니, 이상은 단순히 균열이 생기는 정도에서 끝이 아니었다.

쫘좌자자작—!

마치 천을 좌우로 잡아 찢듯 과격한 소음과 함께 균열이 뜯겨 나가고.

쿠웅!

그 안에서 나온 순백의 몸체를 가진 거대한 거인.

"끄흐흐— 아아, 찾았다!"

광기의 왕이 지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263

광기의 왕 (2)

툴크 왕국 아오니아 백작령 최북단에 위치한 강철의 성채.

이곳은 악명이 자자한 북부 산맥에서 넘어오는 마물들을 막기 위해 지어진 왕국의 최전방 요새였다.

평소엔 특이 소재 채취와 사냥 등을 위해 산맥에 진입하는 이들의 거점이 되어주며, 주기적인 정찰을 통해 실시간으로 이상 상황을 파악하는 정찰 기지이기도 했다.

특히 광기 사태로 몬스터들의 준동이 거세진 데다 마물의 대대적인 침공까지 겪은 후엔 추가 증원까지 이어져 철옹성이나 다름없는 방비를 갖추게 된 곳이었는데···.

"끄으윽! 내 다리··· 내 다리가!"

"허억, 허억···."

"빨리빨리 움직여! 부상자들 수습이 먼저다!"

그런 곳이 지금은 아비규환이 되어있었다.

곳곳에 널브러진 부상자들이 고통에 신음했고, 주인을 잃은 팔다리와 처참하게 짓뭉개진 시신들도 적지 않았다.

후두둑—

몬스터의 준동을 맞이해 더 높고 단단하게 보강되었던 성벽 한편이 볼품없이 무너져 내렸으며, 그 파괴의 현장은 요새 안쪽의 시가지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어서 포션을!"

"이쪽이다! 빨리 단장님을 모셔라!"

그리고 횡액을 맞은 것은 이곳 강철의 성채 방어를 총괄하는 총책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스터의 경지를 목전에 두었다고 평가받으며 아오니아의 제1 기사단을 통솔하는 백작령 최고의 기사.

하지만 무너진 성벽의 잔해 아래에서 꺼내진 그의 몰골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전신이 만신창이인 것은 물론 한쪽 팔까지 잃은 중년 사내가 부하들의 응급처치를 받고 후속 조치를 위해 신속하게 이송되었다.

"끄으··· 놈은···?"

"엇! 단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그러던 와중.

기사로서 단련된 강인한 생명력에 포션으로 응급처치까지 받았기 때문인지 도중에 정신을 차린 그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천천히 눈을 뜬 그는 난장판이 된 주변의 모습에 다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가 정신을 잃은 뒤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백색 거인···.'

놈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었다.

아무렴 불사의 군대와 더불어 대륙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은 주범 중 한 축인데 기사단장인 그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듣던 것과 달랐다. 덩치도 훨씬 더 컸고, 얼굴의 칠공도 봉인되어 있지 않았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강함은 그간 소문으로 들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온갖 마법적 결계로 강화된 성벽을 끼고 버티면 그래도 시간 정도는 끌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정말 어림도 없는 착각이었다.

대형 마물들을 상정해 높고 두텁게 지어진 성벽은 놈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았고, 기사단장인 그와 휘하의 기사들은 놈에게 이렇다 할 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만한 수준이라니. 원래는 얼마나 괴물이었단 거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전신이 상처투성이였던 거인.

하지만 놈이 보인 위용은 지금 살아있는 게 용하다 여겨질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일단 지급으로 상황을 전파했습니다. 단장님께선 이만 쉬시지요."

"끄흐— 한심하구나···. 놈의 돌파를 허용한 것도 모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누워만 있는 꼴이라니···."

"그건 재해였습니다. 애초에 그런 괴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유명한 성자님이 아니라면···."

"···신전에는?"

"거기도 곧바로 연락을 취했습니다."

"···후우, 제발 피해가 크지 않아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놈은 왕국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었다.

결국 교단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소리.

이제 관건은 성자가 이끄는 결사대가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적은 피해로 버틸 수 있느냐였다.

"주신이시여···."

그 한마디를 끝으로, 애써 버티던 기사단장은 곧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사태를 겪은 강철의 성채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그곳을 그 지경으로 만든 흉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차로도 불과 하루 거리에 불과한 장소.

북부의 대도시 타라크로.

***

불길하다.

갑자기 느껴진 그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이 치밀어 오르며, 저도 모르게 초조해져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디아나 님? 괜찮으십니까?"

"아?"

무의식중에 손톱을 깨물던 소녀, 디아나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움찔하곤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그럼 그 일은 그렇게 처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애써 정신을 차리며 마저 업무 지시를 마친 그녀.

그에 직원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분주하게 흩어졌다.

"디아나 님께서 오늘은 어디가 편찮으신 모양이군."

"그보다 아까부터 병사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던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잠깐 성벽에 갔다 왔는데 거기도···."

저들끼리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각자의 일을 하는 상인들.

하지만 도시 외곽의 창고 구역에 시찰을 나온 디아나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깊게 심호흡하며 자신의 가슴에 한 손을 올렸다.

두쿵— 두쿵— 두쿵—

여전히 전에 없이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에 호흡마저 가빠지고 있었다.

딱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닌데도.

'갑자기 왜 이러지? 이건 마치···.'

과거, 그녀의 고향인 아잔투에서 뭔가 '엄청나게 위험한 물건'의 냄새를 맡았을 때와 비슷했다.

한동안 계속해서 피해 다니다가 아저씨를 위해 찾아다니기도 했던 물건.

아니, 사실 그것보다 더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실재하는 무언가에 실시간으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기분이었으니까.

'아저씨가 붙여준 흡혈귀 호위들도 확실히 숨어있고, 이 창고 지역은 우리 상회 소속의 용병들이 바글바글한 곳이야.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인··· 읍?'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며 원인을 분석하던 찰나.

디아나는 갑자기 확 느껴진 어떤 냄새에 저도 모르게 코를 틀어막았다.

"우윽, 이건?"

머리가 띵할 정도로 위험한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상인으로서 몬스터의 부산물도 자주 접하면서 거기서 풍기는 냄새에도 제법 익숙해졌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것은 그런 것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갑자기 어디서?'

그녀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한쪽으로 돌아갔다.

너무 진한 냄새 탓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순 없었으나, 대략적인 방향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도시 외곽인 이곳에서도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곳.

디아나의 고개가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송골송골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 정체불명의 냄새가.

점점.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있는 바로 이곳으로.

왜애애애앵——

땡땡땡땡—!

때를 맞춰 요란한 경보음이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역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긴 한 모양.

'일단 돌아가자. 최대한 빨리.'

그에 상단 사람들을 이끌고 서둘러 이동하던 그녀는.

콰아아앙—!

갑자기 사방을 뒤흔드는 충격에 비틀거리다 호위가 잡아주고서야 간신히 바로 설 수 있었다.

"뭐야, 갑자기!"

"성벽의 방호 방벽이 발동했어! 외부 공격이다!"

"일단 디아나 님부터 모셔! 곧바로 상회 본부로···!"

그 갑작스러운 이변에 곳곳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휴버트 상회의 일행뿐만이 아니라 근방의 다른 이들도 혼란에 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상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쿠웅—! 콰앙—! 콰드드득—!

연달아 이어지는 충격파와 함께.

성벽 쪽에서 날아온 돌덩어리들이 주변에 가득한 창고 건물들과 부딪치며 요란한 굉음을 터트렸다.

쿠르릉—

초토화되는 외곽 지역.

무너져 내리는 건물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서, 성벽이 무너졌다!"

"자, 잠깐. 저, 저게 뭐야?"

"어, 저, 그··· 설마. 거, 거인···?"

아직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원근감을 무시하는 거대한 존재.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기는 백색 거인 하나가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입가에 기괴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아, 아."

"으으···."

상인, 일꾼, 용병, 병사 가릴 것이 없이 그 존재와 눈이 마주친 이들 모두가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압도적인 포식자를 마주한 가련한 어린양처럼.

"끄끄끅끅, 찾 았 다—!"

희열이 담긴 거인의 한마디.

그리고 그 직후.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이 타라크 외곽을 덮쳤다.

***

사고가 뚝뚝 끊긴다.

머릿속이 뒤엉켜 제대로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있었지?

평소와 같이 집을 나와 상회에 출근했고, 점심을 먹고 외곽 창고에 시찰을 나갔다.

그리고 업무를 지시하다가··· 뭔가를 느꼈으며.

'아! 그리고···.'

엄청나게 거대한, 새하얀 거인이 나타났다.

그 시선에 모두가 굳어버렸고, 이어진 목소리에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은···.

'난··· 어떻게 된···?'

그렇게 의문을 품은 직후.

디아나는 그제야 어떤 냄새를 의식하고 코를 움찔거렸다.

굉장히 따뜻하고 익숙한 향기.

그 덕분인지 빠르게 돌아오기 시작한 의식에 눈을 번쩍 뜬 그녀는.

"으윽!"

얼굴을 때리는 세찬 바람에 다시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안고 있는 이의 품 안으로.

"이제 정신이 드나?"

그러자 굉장히 익숙한, 언제나처럼 침착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상회주님? 이게 어떻게 된···."

그 차분한 목소리에 덩달아 진정된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어서 살며시 눈을 뜬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아?"

이내 입을 떡 벌리며 연신 눈을 끔벅였다.

고오오오—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초원과 나무.

그들은 하늘을 나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디아나를 양손으로 안아 든 휴버트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가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모습을 흘깃 내려다본 휴버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당히 아슬아슬했지. 놈이 타라크에 도착하는 게 예상보다 더 빨랐어.'

놈이 경계에서 사라진 직후부터 바로 준비하고 움직였음에도 하마터면 늦을 뻔했다.

또 하필 그때 디아나가 외부 시찰을 나갔던 것도 한몫했고.

그런 상황에서 그가 빠르게 그녀를 회수해 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하나의 물건 덕분이었다.

바로 한창 하워드가 제작 중이던 갑옷.

'만능 전투용 전신 슈트 Mk.1 (시제품)'이 그것이었다.

지금은 아직 미완성인지라 파츠 몇 개를 엮은 부분 갑옷일 뿐이었지만.

"저기, 상단주님. 그 갑옷은···?"

마침 그것을 눈치챈 디아나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의문을 표했다.

그만큼 슈트는 일반적인 갑옷에 비해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매끈하고 유려한 외관과 그 겉면에 새겨진 복잡한 회로.

심장 부위의 핵을 중심으로 발광하는 빛이 마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회로를 따라 쉴 새 없이 유동했고, 그것은 발바닥과 허리 뒤쪽으로 이어져 맹렬한 불꽃으로 변해 밖으로 분사되었다.

"최근 제작 중인 마도구다. 아직 시제품이지만, 덕분에 늦지 않을 수 있었지."

「아바타 클라우드」로 슈트를 제공받은 휴버트가 그것을 이용해 일촉즉발의 상황인 디아나를 재빨리 낚아채고 도주한 것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 너무 무리해서 이번 일이 끝나면 폐기해야 할 정도로 재료 수명이 깎여 버렸지만. ···뭐, 실전 데이터를 얻었다 생각하면 그 정도는 싼값이겠지.'

여기에 들어간 소재들의 가격을 생각하면 일회용으로 사용하기엔 아깝기 그지없었으나, 그 거인 놈의 이목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거인, 거인은 어떻게 됐죠?"

멍하니 있던 디아나도 마침 그 생각을 했는지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야 슬슬 정신이 제대로 잡히는지 눈빛도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아, 그 거인."

휴버트가 디아나를 데리고 도망친 직후, 놈은 즉시 도시에서 관심을 거두고 곧바로 그들을 쫓아왔다.

카르마 상점을 통해 구한 최상급 마정석 핵까지 폭주시킨 덕분에 일시적으로 거인에게서 벗어날 순 있었지만, 당연히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따라붙은 거인은 불과 십여 초 만에 그들의 등 뒤로 육박했고—.

"운이 좋았지. 마침 놈을 상대할 수 있는 이가 근처에 있었으니."

직후, 그 앞을 막아선 이에게 발목을 잡혀 다시 그들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일이 확실하게 끝나기 전까진 디아나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놔야지.'

그놈의 반응을 봤을 때 그녀의 존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 같았으니까.

그것이 당장 여유가 생겼음에도 휴버트가 계속해서 비행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같은 시간.

그 여유를 만들어 준 이는 한창 바쁜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콰아앙—!

타라크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서 재차 폭음이 터져 나왔다.

"크으! 뭐냐 대체! 어떻게 여기에 있지? 네놈은 분명 남쪽에 있었을 터인데!"

거칠게 포효한 거인이 울분을 토했다.

그의 계획을 망친 이 중 하나가 또다시 자기 발목을 잡고 있었으니 그런 반응도 당연한 것이었다.

"크하하핫! 이거 특대형이구만! 이런 걸 놓칠 순 없지!"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할리는 광소를 터트리며 다시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에게는 한 번 이동한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영웅의 발자취」가 있지 않던가!

처음엔 쿨타임도 길고 거리도 그리 멀지 않은 특전이었으나, 계속해서 영웅의 행보를 밟아나간 하인리히 덕분에 이제는 같은 대륙 내에서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미스티에게 대충 상황을 설명하고 오느라 좀 늦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스와의 싸움으로 생긴 손상은 물론 그 공간에서의 추가 강화 효과가 생각보다 더 컸는지, 심연의 경계에서 맞붙었을 때보다 놈의 기세가 확연하게 줄어든 상태였던 것이다.

'날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니 그 권능이라는 것도 약해진 모양이고.'

물론 당장 발목을 잡을 수 있을 뿐, 아무리 그래도 할리가 혼자 이길 수 있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마 이대로 계속 가다간 결국 패배하고 말겠지.

"카하핫—! 어디 한 번 놀아보자고!"

"오냐! 네놈부터 죽여주마, 야만인!"

하지만 그는 그 점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 시각.

타라크에 파견된 뱀파이어들의 거처에서 혈문(血門)이 열렸고.

동시에 신전의 게이트에서 신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264

광기의 왕 (3)

거대한 주먹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마치 산사태를 연상케 했다.

쿠우우웅—!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충격파는 대번에 주변 공간을 찢어발기며 일대에 엄청난 지진을 발생시켰다.

대지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기고 사방으로 흙먼지가 비산했으며 거센 폭풍이 주위를 휩쓸었다.

그것은 단 일격에 발생한 현상이자.

평범한 주먹질에서 이어진 결과였다.

"크하하핫! 이거 스릴 넘치는구만!"

하지만 그에 맞서는 이는 그 위용에도 위축되지 않고 곧바로 움직였다.

최대한 덩치를 부풀려 거인의 허벅지까지 오는 높이인 15미터 정도의 크기가 된 할리.

콰드득!

전신을 검붉은 비늘로 감싼 채 야수처럼 달려든 그는 곧바로 날카로운 손톱으로 거대한 팔뚝을 헤집었다.

그에 그 단단한 근육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새하얀 피가 한순간에 주변을 물들였으나.

퍼어억—!

콰앙!

거인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팔을 휘둘러 뒤로 빠지려던 그를 후려쳐 버렸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어마어마한 반응속도로.

"귀찮게 하는구나, 야만인. 네놈이 날고 기어봐야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짜증 난다는 듯 으르렁거리는 거인.

어느새 놈의 팔에 났던 상처는 순식간에 수복되어 있었다.

물론 할리도 체내에 저장된 광기 덕분에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힘의 총량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는지라 그 교환비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거기다 놈의 감각이 너무 예민해서 작은 체구와 속도의 우위를 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이쪽이 어떻게 변칙적으로 움직이든 기다렸다는 듯이 대응해 오니.'

한스로 싸울 때는 전방위적인 압박과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렀기에 체감하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몸싸움으로 맞상대하다 보니 놈이 가진 권능의 사기성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던 할리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놈을 이길 수 없으리란 걸.

'역시 최대한 도시에서 멀어지길 잘했군. 그게 아니었으면···.'

할리와 혁명가가 일대일로 맞붙은 지 고작 일 분 남짓이 지났으나, 이미 주변 일대는 폭격이라도 맞은 듯 황폐해져 있었다.

끔찍한 물리력의 여파에 뒤틀린 대지가 비명을 질렀고, 오러와 광기 등이 섞인 에너지의 충돌에 주변 기운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래도 좀 더 떨어질 필요가 있겠는데. 타라크는 휴버트의 거점 도시인데 실수로라도 망가지게 둘 순 없지.'

지금도 족히 5킬로미터 이상은 떨어져 있었지만, 상황을 보니 이 거리로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휴버트가 좀 더 멀리 도망쳤다면 좋았을 텐데.

거인이 방심한 틈을 타 디아나를 낚아채고 도주했을 때 생각보다 일찍 따라잡힌 게 컸다.

그 비싼 슈트를 폭주시킨 덕분에 순간 속도가 초음속까지 치달아 따로 보호 마도구까지 사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하핫! 확실히 쉽지 않구나! 그동안 나왔던 놈들처럼 그냥 덩치만 큰 건 아닌가 봐?"

"허! 어딜 감히 그놈들과 나를 비교···!"

그때, 여유롭게 대답하던 거인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그러고는 번개처럼 몸을 돌리며···.

휘우웅—!

그 거대한 팔뚝을 허공에 휘둘렀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폭풍에 이젠 몇 포기 남지 않은 일대의 수풀이 거세게 휘날렸다.

그리고 그 직후.

"쯧, 이것까지 알아차릴 줄이야. 성가시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존재부정」을 사용해 은밀하게 기습부터 하고 보려던 성혈의 뱀파이어 하인즈 2세.

그가 태연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혀를 찼다.

그에 거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고 입을 열려던 순간.

두 번째 이변이 일어났다.

파아앗—!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찬란한 빛이 허공을 수놓았고.

"여기 있었구나. 주신의 뜻을 거스르는 악종."

그 섬광과 함께 나타난 한 사내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신성한 빛의 아우라가 넓게 퍼지며 요동치는 인근의 기운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축복 : 도약」을 이용해 합류한 주신교단의 성자, 하인리히였다.

자연스럽게 세 방위에서 거인을 둘러싸는 초월자들.

그에 가늘게 뜬 눈으로 잠시 침묵하던 거인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크핫! 잡종 야만인에 이어 뱀파이어 군주에다 주신교단의 성자까지? 이거 정말··· 음?"

하지만 빈정거리려던 거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말을 멈춘 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더니 고개를 휙 돌려 할리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 시선은 다시 하인즈 2세에게, 이어서 하인리히 쪽으로 향했고···.

"···뭐냐, 네놈들?"

이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의문을 담아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목소리를 툭 내뱉었다.

확신은 없었다. 그에겐 그런 쪽에 적합한 권능인 후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만은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물론—.

"크하하핫! 내가 바로 남부의 패왕 할리 님이시다!"

"후, 어차피 죽을 놈. 귀찮으니 곱게 사라져라."

"주신의 뜻을 거스르고 세상을 어지럽힌 이단. 지금 이 자리에서 처단해 주마."

'그들'에게 그 의문을 풀어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

콰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공간을 울렸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뿌연 흙먼지가 치솟았고, 그 진원지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으며···.

"여파가 온다! 대응 준비!"

"결계를 강화해!"

그것은 약 10킬로미터는 떨어진 타라크의 성벽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쿠르르릉—!

공간을 일그러뜨리듯 대기를 압축하며 밀려드는 충격파와 도시 전체를 감싼 채 한층 선명해지는 방호 결계.

강맹한 여파에 잠시 위태롭게 흔들리던 결계는 마법사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곧 안정을 되찾았고, 그렇게 몇 번째인지도 모를 위기가 다시 무사히 지나갔다.

"후우— 간담이 서늘하군."

그에 타라크 북서 방면의 성벽을 지키던 기사 하나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성벽 위에 있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사라져 버렸다.

앞으로도 이만한 파동이 얼마나 더 밀려들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으니까.

"젠장, 성벽이 부서지지만 않았어도 지금보단 더 나았을 텐데! 보수는? 아직인가? 마법사들은 뭐래?"

"일단 간이 구축식을 마련해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고는 하는데, 이 상황에서 결계를 완전히 복구하는 건 무리랍니다! 그래도 완전히 무너지진 않은 덕분에 이렇게라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썩을, 그나마 저렇게 떨어진 곳에서 싸워주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저런 괴물이 시내에서 날뛰었다면···."

농담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깨끗하게 증발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사는 한창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법사들을 일별하고는 이 사태의 원인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쿠웅—!

그때, 다시 한번 발원지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이번 규모는 앞서보다 작은 편이었기에 이제 와서 호들갑 떨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앓는 소리를 내는 동안 오러를 끌어올려 시력을 강화한 그는 굳은 얼굴로 저편의 격전지를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군. 저게 대체···."

"하, 하하··· 미친···."

그리고 멍하니 그곳을 응시하는 것은 그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성벽에 배치되었으나 마법사처럼 따로 할 일이 없는 다른 기사들도 식은땀을 흘리며 넋을 놓고 그 장관을 바라보았다.

시야를 가릴 나무고 언덕이고 모조리 깎여나간 저편에.

상당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 체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초대형 거인이 있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악한 기세에 마치 덩치가 수백 미터는 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괴물.

그것은 존재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한 움직임에 대기가 요동쳤으며 내지르는 공격 하나하나는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주변에 파괴를 전파한다.

심지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에 막대한 부하가 가해지고 있었으니, 애초에 정상적인 싸움이란 것이 성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

사실 기사들도 거리와 방호 방벽에 더해 나름의 경지가 뒷받침되었기에 이렇게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이미 일반 병졸들은 저 거인을 본 순간부터 전부 나가떨어진 지 오래였다.

쿠르릉!

그렇게 최소한의 관람 자격을 갖춘 이들 앞에선 지금.

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전설과도 같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이건 너무 현실성이 없는데."

"푸흐흐— 대단하단 소리는 많이 들어봤다만, 이건 오히려 소문이 축소되었군. 우물 속에서 살고 있었어···."

절대 범접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초대형 거인과 대등하게 맞서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를 밀어붙이는—.

마치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세 존재.

구세주처럼 나타난 용사이자 주신교단의 성자, 이웃 나라 탈리아에서 지원 온 것으로 보이는 뱀파이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마, 용인 할리인가? 이곳을 떠난 지 제법 되었다고 들었는데."

"할리? 할리라고? 강철의 성채 방어전 때 엄청난 활약을 했다고 듣긴 했다만···. 정말 저 붉은 거인이 그 할리란 말인가?"

"으음, 용인에 대해 알려진 게 워낙 적으니···."

전신을 검붉은 비늘로 두르고 날카로운 손발톱과 이빨로 무장한 커다란 생명체.

비록 체구는 백색 거인의 허벅지께밖에 오지 않을 정도였으나, 그는 그에 터프하게 맞서며 정면으로 놈을 잡아놓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좀 더 확실하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할리가 거인의 한쪽 다리를 향해 대호처럼 달려들었다.

거인은 그것에 즉각 반응해 오히려 그를 걷어차려고 했으나, 절묘한 타이밍에 생겨난 다수의 핏빛 사슬에 팔 하나가 휘감기며 일시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그 순간 면전에 나타난 하인리히가 빛의 기둥에 휩싸인 성검을 휘둘러 그의 눈가를 베어가자, 놈은 고개를 뒤로 젖혀 그것을 피할 수밖에 없었고···.

콰앙—!

곧바로 이어진 할리의 통렬한 바디 태클이 처음 목적대로 거인의 다리 한쪽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중심이 흔들려 휘청거린 거인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동안, 재차 뱀파이어와 성자의 공격이 그 몸뚱이를 난도질했다.

"크아악—! 이 버러지들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거인의 괴성.

그 후에 이어진 연계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어찌 그렇게 합이 잘 맞나 감탄이 나올 정도로 차근차근 거인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그렇게 서서히 숨통을 조여 가듯 거대한 괴물을 사냥해 나갔다.

"아름답군요···. 저것이야말로 합격술의 궁극이라 할 만합니다."

"허어— 적어도 저 뱀파이어는 따로 합을 맞춘 적도 없을 텐데, 어찌 저리 호흡이 잘 맞는단 말인가? 그만한 경지에 오른 이들끼리는 서로 마음이라도 통하는 것인가?"

"끄흐흠, 보기만 하는데도 속이 울렁거리는군. 결계가 아니었다면 일반인들은 떼로 죽어 나갔겠어."

그 한 호흡을 수천수만분의 일로 나눠서 맞춘 것 같은 정밀한 합공에 기사들이 한창 경탄을 토하는 동안.

할 일 없는 그들과는 달리 마법사들은 그야말로 전쟁과도 같은 악전고투를 치르고 있었다.

"마정석! 아직 멀었어? 얼른 가져와! 되는 대로!"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 여기가 무너지면 시민들이 몰살당한다고!"

"교대! 로카펠리 마탑 빠지고 테뉴어 마탑이 중심에 들어간다! 서둘러!"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파괴의 물결에서 도시를 지키고자, 영지 소속은 물론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소집되어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실시간으로 갈려 나간 이들의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가실 무렵.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군요. 제가 조금 도와드리겠습니다."]

한창 아등바등하던 그들의 머릿속에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틀어박혔다.

그 안에 정제된 마력 운용이 어찌나 고절한지 절로 탄성이 나올 수준의 기예였다.

"어?"

"잠깐, 이건 누구···!"

그에 당황한 마법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든 순간.

쩌저저적—!

성벽의 표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영역을 넓혀 무너진 성벽이 있는 부분까지 뒤덮었고, 이내 기묘한 파장을 발산하며 끊어졌던 방호 방벽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빙결 마법을 매개로 방벽의 회로를 강제로 덧씌웠다고?!"

"이 거대한 성벽의 회로를 모두 파악했다는 건가!"

"그보다 이 마력량은 뭐야? 이 정도 수준이면 단순한 대마법사가 아니잖아? 설마···!"

그렇게 다른 의미로 혼란에 빠진 마법사들의 머리 위 상공.

원격으로 도시 방어에 한 손 거든 대마법사 이세아는 자신의 옆에 떠 있는 일행들과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만한 싸움에 저희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괜히 저분들께 방해가 되는 건 아닐는지."

"일단 성자님을 보조하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도록 하죠. 지금처럼 하늘을 이용한다면 위험은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해리스 등장 이전 엘븐 킹덤 최강자였던 하이 엘프 리디아와 교단 제일의 신성력을 가진 성녀 리에스타.

교황의 장례 기간 동안 대신전에 머물던 용사 파티 전원이 하인리히의 뒤를 이어 급하게 도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추가 지원군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지상에 또 다른 강자들이 모여든 곳이 있었으니.

"역시 하이 로드! 교단의 성자에게도 꿇리지 않으시는군요!"

"아아— 이 한목숨, 하이브리드의 영광을 위해 바치리라!"

"으음, 거인의 피는 이용할 수 없을 터인데. 이거 곤란하군."

바로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을 비롯한 하이브리드의 진혈급 뱀파이어 다수와···.

"후후후, 너희들은 괜히 무리하지 말고 보조나 하거라. 모처럼 재밌어 보이는 상대로구나."

"예! 브리키 님!"

또 한 명의 성혈급 뱀파이어, 브리키까지 타라크에 도착해 있었다.

혁명가 하나를 확실하게 족치기 위해서.

#265

광기의 왕 (4)

거인의 복부를 베고 심장까지 노리던 빛의 궤적이 거대한 손에 가로막혔다.

직후, 하인리히의 신장보다 큰 다섯 개의 손가락이 공기를 꿰뚫으며 그를 움켜쥐려 했으나.

파앗—

순간적으로 빛에 휩싸인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허탕을 친 거인이 이를 갈았지만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그는 즉시 몸을 돌리며 반대편 손을 휘둘렀고.

쿠우웅—!

그것은 거칠게 쇄도해 오던 할리의 육탄공세와 맞부딪쳐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었다.

"크하하핫! 어딜 보나, 친구? 나랑 놀자고!"

압도적인 질량이 기반된 에너지의 충돌에 대기가 흔들리고 지반이 뒤틀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공격의 연쇄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리꽂히는 정령 화살과 마법은 집요하게 거인의 얼굴을 폭격하며 예민한 감각을 교란했으며.

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다수의 진혈 뱀파이어들은 순식간에 그 몸뚱이를 뜯어내고 이탈하길 반복했다.

"끄으, 이 귀찮은 버러지들!"

꾸구국—

그런 정신없는 연계가 이어지는 와중.

거인의 시선이 다시 다른 이들에게 돌아가려는 조짐이 보이자, 할리는 냉큼 그 거대한 팔을 전신으로 틀어쥐며 움직임을 봉쇄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몸집의 차이가 워낙 극심했기에 그로 인해 발생한 틈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잠깐의 여유는 다른 이들이 태세를 재정비하고 놈의 허점을 노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스윽—

일시적으로 거인의 신경이 흐트러진 찰나.

인식의 틈을 파고든 하인즈 2세가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의 팔뚝 위쪽 허공에.

스카칵—!

그의 등장과 동시에 피의 칼날이 채찍처럼 허공을 갈랐다.

또한 같은 타이밍에 지상에서 출발한 브리키의 공격이 타격 지점의 반대쪽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그것은 어느 한쪽의 공격만이었다면 깊은 상처로 끝날 수준이었지만, 종속 관계의 의념 공유를 이용한 합공은 순간적으로 더없는 시너지를 일으켰고—.

쿠웅!

마침내.

수차례나 난도질당했던, 그 버스만 한 크기의 왼쪽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크아악! 이 벌레 같은 것들이!"

그에 이성을 잃은 거인이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주변 공기가 밀려나며 일대에 태풍이 휘몰아치고.

그의 감정에 반응한 듯 그곳을 중심으로 사방의 광기가 그에게 빨려들기 시작했다.

'크흐흐— 빌어먹을, 답이 안 보이는군. 그래, 이 자리가 내 죽음이로구나.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자신이 직접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혁명가는 그렇게 체념하는 한편 최후의 대안을 실행하기 위한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순 없지. 내 이 한 몸 바쳐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이 되리라.'

그렇게 뭔가를 결심한 그는.

광기로 가득 찬 거인의 몸속에서— 겨우 자신을 지탱해 주던 무언가를 스스로 끊어버렸다.

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 온전한 '광기'로 거듭나기 위해.

***

어느새 거인의 뒤쪽으로 이동한 하인리히.

그는 놈이 무슨 짓을 하건 말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양손으로 단단히 틀어쥔 성검을 고요하게 치켜들었다.

우우웅—

성녀로부터 온갖 버프와 신성력을 지원받아 10미터 이상으로 날카롭게 치솟은 「축복 : 광검」.

그는 그 빛의 기둥에 「공간 베기」의 힘을 담아, 어쩐 일인지 반응이 굼뜬 놈의 발목을 그대로 썰어버렸다.

쿠우웅—!

발목이 잘려 나간 거체가 무너져 내리며 산사태와 같은 충격이 주변을 휩쓸었다.

레이드 파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각자의 방법대로 넘어진 거인의 약점인 머리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기어코 쓰러진 코끼리의 숨통을 끊으려는 하이에나들처럼.

'이거, 재생 속도가···.'

하지만 공격을 쏟아붓던 이들은 곧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실시간으로 빨려 들어간 광기 탓에 끝도 없이 치솟은 거인의 회복량이 어느새 피해가 누적되는 속도를 넘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

결국 광기가 골수까지 치민 듯, 일말의 이성조차 찾아볼 수 없는 포효가 터져 나오고.

그 몸을 짓누르던 육중한 무게의 할리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모두 멀리 튕겨져 나갔다.

"큭, 또 무슨 짓을?"

"잠깐, 저거···!"

고오오오—

그 직후, 거센 폭풍이 휘몰아치며 놈을 중심으로 거대한 붉은 소용돌이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농도의 광기 그 자체.

세상에 퍼진 모든 광기가 밀집하며 빨려 들어가는 압도적인 장관이 사방을 뒤덮었다.

"크으으— 캬악!"

"크, 크윽··· 하이 로드···!"

"정신 침식이···."

그런 짙은 기류 속에서.

당연하지만 그것을 접한 이들에게도 점차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들 최소 극의 이상의 강자들이었지만, 이만한 농도의 광기 속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주신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보호해 주소서!"

물론 성녀가 포함된 용사 파티는 서둘러 신성력의 가호를 받아 그것을 떨쳐낼 수 있었으나, 지상에 있던 뱀파이어들은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영역 밖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태생상으로도 반쯤은 마물이나 다름없던 그들은 광기의 영향을 더욱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뿐만이 아니군. 이 짙은 농도의 기운이 다른 에너지를 방해하고 있어.'

견제 삼아 몇 차례의 공격을 날려봤으나, 그 모두가 주위를 감싼 거센 격류에 휩쓸려 반감되거나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런 약해진 공격으론 안 그래도 지금 재생력과 방어력이 극도로 치솟은 놈에겐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뿌드득—! 우득!

그렇게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놈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폭풍의 중심에서 웅크린 채 주변의 기운을 받아들이던 거인의 몸에서 뭔가 비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려 나갔던 팔과 발이 순식간에 재생하고, 징그럽게 꿈틀거리던 근육이 증식과 압축을 거듭했으며, 그 와중에도 육체는 계속해서 점차 커지고 있었다.

[끄흐흐흐— 크키카카학!]

이젠 조금의 이성도 느껴지지 않는 비웃음이 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광기의 양을 넘어서면서 결국 전대 불사왕들처럼 자아가 먹혀버린 것처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 아무리 2페이즈라고 해도 그렇지.'

어지간한 이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설령 접근하더라도 이 공간에선 공격력이 극도로 떨어져 놈의 단단한 외피를 뚫기 힘들어진다.

또 만약 그 몸에 피해를 주더라도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으로 순식간에 회복해 버리니···.

'현실에서 변신 중 무적 상태가 무슨 말이야!'

그에 「공간 베기」까지 사용해 몇 차례 광검을 휘둘러보던 하인리히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저 거인의 육체는 언데드와는 달리 신성력에도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나마 심연의 일부인 광기에 우위를 가지는 기운이었기에 위력 저하가 크지 않아 조금 기대했었는데.

거기다 곤란한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페이즈를 맞아 실시간으로 진화하고 있는 거인도 골치였지만, 방금 다른 아바타를 통해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세상에 퍼진 광기의 흐름이 이곳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따라, 지금 이곳을 향해 대륙 차원의 마물 대이동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북부 산맥과 인접한 타라크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 건 물론이고, 그 외의 수많은 도시도 큰 피해를 보게 될 터였다.

'젠장. 최대한 빨리 놈을 처치해야 하는데.'

하인리히가 짧은 한숨을 토했다.

이제 더는 수단이고 뭐고 가릴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만약을 위해 계속 아껴두고 있었던 최후의 수단까지 꺼낼 수밖에···.

'응? 잠깐, 이건···.'

하지만 그 방법을 사용하기 직전.

뭔가를 깨달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 한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오오—

그곳은 이 이상 사태의 중심이자.

쉴 새 없이 빨려 들어가는 붉은 소용돌이의 종착지였으며.

세상의 모든 광기를 집어삼키는 거인이 있는 곳···의 바로 옆이었다.

'어? 이거 어쩌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웅크린 거체의 옆에 멀뚱히 붙은 채 덩달아 광기의 수혜를 받고 있는 할리였다.

***

"카핫! 아아— 이거 알딸딸하구만!"

얼떨결에 거인의 옆에서 같이 광기 샤워를 맞게 된 할리는 사방에서 밀려 들어오는 그 짙은 에너지에 취해 깊게 심호흡했다.

그동안 그가 빨아들였던 것이 기체와 같았다면, 지금 이것은 액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응축된 농도였다.

'이거 굉장하군.'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광기의 폭군」을 이용해 대기 중의 광기를 체내에 축적하던 할리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는데···.

할리는 슬쩍 시선을 돌려 웅크린 백색 거인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거대한 흰 생명체는 여전히 전신 이곳저곳을 꿈틀거리며 광기를 수습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로 옆에 그가 있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으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자신감인가?'

아니면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거인의 몸에 있는 광기의 씨앗은 이전 심연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대다수가 갈려 나간 파편의 일부.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강제로 끌어모아 하나가 되는 과정이 그리 간단할 리 없지 않나?

푸욱— 촤악! 콰드득!

그리고 그 추측은 실컷 거인의 몸을 찢고 뜯고 때려 부수면서 확신이 되었다.

주변에 가득한 광기까지 이용해 전력으로 공격을 이어갔음에도 놈은 같은 자세로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할리도 같은 광기를 사용하니 위력 저하는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일반적인 거인들보다 훨씬 단단하면서 어떤 깊은 상처를 내든 1초도 채 되지 않아 깔끔하게 사라져 버린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놈이 재생할 틈도 없이 두개골을 부수고 약점을 꿰뚫을 극강의 공격력이 필요한데, 지금 상태로는 그의 아바타들과 힘을 합치더라도 힘들어 보였다.

···아니, 힘들었을 터였다.

일반적인 환경에서라면.

'하지만 여기에서라면 다르지.'

할리는 주변에 가득한 에너지를 바라보며 사납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리곤 지체할 것도 없이, 곧바로 「광기의 폭군」으로 주변 광기를 되는대로 끌어들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오랜만에 다른 아바타들의 리소스까지 총동원해 아예 주변의 흐름 일부를 자신에게로 비틀었다.

고오오오—

이내 주변을 감싼 소용돌이의 핵이 일시적으로 두 개가 되었다.

전 대륙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광기를 끌어모으는 거인과 달리, 그는 도착 지점의 일부를 손보는 데만 전력을 다하면 되었기에 훨씬 효율적으로 힘을 운용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마치 반발하듯 거인의 몸이 몇 번 꿀렁거렸으나, 당연히 할리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뿌드득— 빠득!

막대한 에너지의 집중에 그의 몸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가 순식간에 회복했다.

사실 육체의 질만 따지자면 그의 「궁극의 진화 생명체」가 백색 거인보다 딸릴 이유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 이제 대등한 입장이구나.'

몸속 가득 충만한 에너지를 느끼며 할리가 가볍게 목을 비틀었다.

이어서 다음 단계.

그는 풍족한 에너지를 한꺼번에 태우며 「투왕의 각인」에 쏟아부어 모든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 광기가 뒤섞인 「생체 오러」를 자신의 신체 일부에 한계 이상으로 집중했다.

바로.

상어처럼 돋아난 이빨에.

빠직—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밀집되자 한껏 강화된 몸이었음에도 이빨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깨져나갔지만.

그 손상은 이어진 재생력에 조금씩 수복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계속되는 파괴와 재생.

또 그 과정이 이어질수록 「궁극의 진화 생명체」는 부서졌던 이빨의 강도를 점차 진화시켜 나갔다.

기어코 집중된 에너지를 버틸 수 있을 수준까지.

'좋아,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할리가 가진 최강의 공격력.

그것은 바로 「폭식」에서 비롯된 치악력이었다.

그 덕분에 일전엔 드래곤의 비늘조차 과자처럼 씹어먹을 수 있지 않았던가?

물론 단순히 그것만으론 거인의 두개골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달랐다.

카득— 카득—!

턱을 움직여 이빨을 몇 차례 맞부딪친 할리.

단지 그것뿐인데도 공간의 일부가 찢겨나가며 허공에 가느다란 실금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어, 잘 차려진 밥상처럼 얌전히 웅크리고 있는 거인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에 맞춰 폭풍을 헤치고 다가온 하인리히와 하인즈 2세도 준비를 마치고 자세를 잡았다.

"크하하핫! 자— 착하지, 친구? 얌전히 있으라고."

거인이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것 같았지만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변형을 거쳐 극도로 발달한 할리의 턱이 크게 찢어지며, 어마어마하게 밀집된 광기와 「생체 오러」가 깃든 검붉은 이빨이 날카롭게 빛났다.

"금방 끝나니까!"

번뜩이는 빛의 검과 핏빛 송곳이 두개골의 한 지점에 틀어박히고.

이어서 예리한 이빨이 그대로 그곳을 파고들었다.

콰드드득—!

그것은 고작 몇 차례 만에 단단한 방어력을 꿰뚫고 들어가.

마침내 그 안에 숨어있던 광기의 씨앗까지 닿았다.

그리고—

'잘 먹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광기의 왕'이다.

#266

광기의 왕 (5)

아우테리카 차원의 가장 밑바닥.

한 세상의 찌꺼기가 모여서 고인 차원의 쓰레기통.

심연.

그곳은 살아있는 존재는 물론 형태와 개성을 갖춘 어떠한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장소였다.

시간과 공간은 물론 추상적인 개념과 현상까지 뒤섞여 흐르는 혼돈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곳.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었으니.

그런 끔찍한 공간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고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존재가 있었다.

꿈틀—

심연 깊은 곳에 가라앉아 파묻힌 그것이 신경질적으로 몸부림쳤다.

주변 환경에 반쯤 동화된 상태에서도 빛이 바래지 않은 그 존재의 움직임에 주변의 흐름이 뒤틀리며 공간 전체가 거세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 정도 난리쯤은 심연에선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그것은 바깥세상에 그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한동안 몸부림치던 그 존재의 움직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뜻대로 되지 않은 일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긴 했지만, 겨우 그런 일 하나에 일희일비하기엔 그는 너무 오랜 세월을 존재해 왔다.

쿠르르—

움직임을 완전히 멈춘 그것은 다시 조용히 침잠했다.

비록 나름대로 공들여 왔던 일이 실패하면서, 또 충동적으로 개입까지 시도하느라 상당한 침식을 허용하긴 했으나,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그에게 좌절은 일상이었다.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기회 또한 계속해서 찾아올 터.

그가 할 일은 그 순간이 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고 제때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것은 다시 조용히 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찾아올 그날을 위해.

***

타라크 시 북서 방면을 뒤덮었던 검붉은 소용돌이가 서서히 흩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에 퍼진 광기의 흐름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 격류의 세기와 밀집도가 줄어들면서 평소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수준까지 농도가 떨어진 것이었다.

'광기를 완성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이렇게 하는 게 안전하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흐름에 홀린 마물들 때문에 다시 대륙이 엉망이 되어버릴 테니.

사실 지금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혁명가의 각성 시도부터 처리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여 분 남짓.

나름대로 빠르게 사태를 수습했으니 대부분의 마물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을 테지만, 관성적으로 계속 이동하거나 이미 서식지의 경계가 흐트러진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피해는 인근 거주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겠지.

'···뭐, 이 정도로 끝난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최근 각 지역의 경계 수준을 생각하면 그만한 소요 정도는 일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수습할 수 있을 터였다.

이쯤 되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으그극— 어우, 이거 속이 영 더부룩하구만. 몸도 뻐근하고!"

마침내 주변을 휩쓸던 폭풍이 완전히 사라져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온 할리는 서서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거인의 사체에 기댄 채, 갑작스러운 힘의 유입에 부하가 걸린 몸을 스트레칭 하듯 쭉쭉 뻗었다.

눈은 바로 앞에 떠오른 시스템창을 바라보면서.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광기의 씨앗」을 획득합니다."

그가 강탈한 것이 시스템의 공증을 받아 스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역시 아직 불완전한 상태의 핵이기 때문인지, 불사왕 수준은커녕 그리 특별한 능력이랄 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세상의 광기를 마음대로 끌어올 수 있다는 점과, 그 자체로 막대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는 것 정도?

'아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지. 거기다 당장 할리가 품은 격 자체도 상당히 오른 것 같고 말이야.'

그 격을 제대로 담기 위해 지금도 계속해서 「궁극의 진화 생명체」가 성장하며 육체를 진화시키는 중이었다.

나중에 직접 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거인화 했을 때의 최대 크기도 전보다 훨씬 커졌을 터.

게다가 풍족한 에너지가 뒷받침된 할리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는 이번에 직접 겪어보지 않았던가?

사실상 그에게 거대한 에너지 탱크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또 나중에 씨앗이 완전히 발아하면 능력이 어떻게 진화할지도 모를 일이었고.

'그보다··· 역시 놈이 말했던 그 권능이라는 건 없네.'

그것이 조금 아쉽긴 했다.

이번 기회에 디아나와 혁명가가 가진 그 불가사의한 감각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빼앗을 순 없다는 건가? 하긴, 유폐된 신과 관련된 권능 같았으니.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혁명가가 죽은 이상 이젠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

그는 혁명가와 심연의 경계에서 싸웠을 당시에 한스가 겪은 그 존재의 개입을 떠올리다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만 심연에 갇힌 신을 꺼내는 작업이 그리 쉬울 리 없었다.

그런데 그런 오랜 세월 공들인 대작전을 이리 완벽하게 박살 내 놨으니, 적어도 그가 이 세상에 남아있는 동안 그 신이라는 작자와 또 마주할 일은 없지 않을까?

"성자님!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아, 괜찮습니다. 다 성녀님께서 지원해 주신 덕분이지요."

"오랜만이에요, 할리 씨. 아깐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못 나눴네요. 가장 앞장서서 싸우셨는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으하하핫! 아, 이 몸이야 언제든 튼튼함 그 자체지! 이거 참, 오랜만에 친구 좀 만나러 왔다가 저런 놈이랑 마주칠 줄은 나도 몰랐구만! 카하핫!"

그렇게 잠시간 일이 무사히 마무리된 직후의 여운을 즐기고 있자, 상황이 모두 끝난 것을 감지한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흐응~ 나보곤 아이들을 데리고 뒤로 빠지라더니. 결국 혼자만 재미를 보셨군요, 하이 로드?"

"흠, 다행히 전부 무사한가 보군."

"그래도 다들 진혈은 되는 아이들이니까요? 뭐, 살짝 조짐을 보이던 아이도 몇 대 때려주니 깨끗하게 나았고 말이죠? 우후후."

어쩐지 유독 몇몇이 초췌해 보이더라니 그것 때문이었나.

그래도 별다른 희생이 없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하긴··· 놈을 상대하는 데 고전했던 것도 그 압도적인 덩치와 어우러진 맷집과 재생력 때문이었지, 아바타 삼인방을 비롯해 성녀와 브리키까지 포함된 초월급 강자 다섯이 버거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전투 내내 시종일관 우위를 점하며 압도하기도 했고.

두두두두—

다그닥 다그닥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것은 함께 싸웠던 용사 파티와 하이브리드의 뱀파이어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쪽, 탈리아 시가 있는 방향에서 말과 마차를 탄 다수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슬쩍 그쪽을 바라본 하인리히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턱을 쓰다듬었다.

'마스터급 기사와 정예 기사단··· 툴크 왕실에서 파견된 건가? 거기다 저긴··· 피카올 대신전의 도노반 추기경이 직접 왔다고? 팔라딘과 대주교들까지 데리고?'

그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사태를 전해 듣고 급히 달려온 원군들이었다.

이 땅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왕국의 정예 부대는 물론, 이온 대륙 서부를 관장하는 피카올 대신전의 강자들까지.

심지어 과거 성검의 시험을 치르면서 안면을 익혔던 도노반 추기경은 대신전의 책임자 신분이었다.

팔라딘 출신이라고 듣긴 했는데 설마 이런 자리에까지 직접 나올 줄이야.

'확실히, 일찍 왔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됐을 전력이군.'

물론 이미 상황이 종료된 마당엔 한참 늦은 뒷북이라 할 수 있었으나, 사실 곧바로 아바타를 보낸 그가 빨리 대응한 거지 그들의 파견이 늦었다고 볼 순 없었다.

마지막에 있었던 할리의 활약 덕분에 생각 이상으로 전투가 빨리 끝난 것도 한몫했고.

'뭐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어찌 보면 딱 적절한 타이밍이기도 했다.

쿠르르릉— 쿠쿵—!

아직 이번 일이 전부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히히히힝—

푸르릉— 푸힉!

"워! 워! 뭐야, 갑자기!"

"헛? 저기, 저쪽에!"

"이건, 설마···!"

슬슬 근처까지 다가와 인사말을 나누려던 이들이 긴장하며 말고삐를 휘어잡았다.

뭔가에 겁을 먹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말들과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 갑작스러운 이상 상황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돌아갔다.

쿠구궁— 찌지지직—!

그 이상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굳이 찾으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일어난 시각적 효과가 도저히 그것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거인이 쓰러진 곳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

그 허공의 공간이 깨진 유리처럼 금이 가 있었다.

순식간에 몰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는다.

이어서 요란한 뇌성과 함께 검은 벼락이 내리쳤다.

스산한 바람이 일대를 휘감고, 날씨에 맞지 않은 서리가 내려앉았다.

"하마(下馬)! 방진을 갖춰라!"

"성기사들 앞으로!"

"주신께 아뢰옵나이다. 당신의 자녀들께 은총을 베푸시어···."

그에 근처까지 접근했던 병력이 곧바로 전투를 준비하며 기세를 드높였다.

그 반응은 거인과 싸우고 마음이 풀려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발생한 이상 현상의 중심.

마치 유리가 깨진 듯 사방으로 금이 간 공간 한가운데.

파지직— 파차창—!

그것이 화려하게 깨져 나가며.

사방을 자욱한 흑마력이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큭, 이거 오랜만이구나. 빛의 기사,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지금 저기 쓰러져 있는 거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절대 악이자, 이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진정한 흑막.

대륙의 공포이자 인류의 절망,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죽음의 현신.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

불사왕이 이 자리에 강림했다.

뒤에는 흉흉한 기세를 뿜어대는 무수히 많은 언데드들을 거느린 채.

***

역천의 서약의 설립자이자 리더, 혁명가.

그는 아우테리카의 어둠에 숨어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려던 흑막이자, 심연에 유폐된 악신의 부활을 꿈꾸는 이단이었으며, 다수의 강자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위용을 선보인 초대형 거인이었다.

사실 악역 배우에 불과한 불사왕 한스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이 세상의 최종 보스라 할 만한 존재였는데···.

'뭐, 일이 쉽게 풀리면 좋은 거지만.'

그런 존재가 맞이한 최후는 조금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했다.

마지막 순간에 뭔가를 할 것처럼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던 거인.

하지만 놈은 그 뭔가를 제대로 선보이기도 전에 할리에게 두개골이 박살 나 버렸고.

그대로 광기의 씨앗을 강탈당하며 허망하게 퇴장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사실 지금도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짜내려 가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면 놈의 그 안일한 뒷마무리가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복선을 깔았으면 회수해야 하고, 뭔가 의미심장한 모습을 보였으면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은 심각한 프로 의식의 결여였다.

'하여튼 요즘 흑막들은 근성이란 게 없어요.'

물론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 허무한 최후와는 별개로 놈은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라 할 수 있었다.

무려 이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인 광기의 숙주이자, 용사를 비롯한 다수의 초월급 강자와 싸우면서도 당당하게 맞섰던 괴물이 아닌가?

당연히 이대로 찝찝하게 퇴장시키기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준비했다.

[아아— 과연 제법이로구나. 이번 건 상당히 공들여 준비한 선물이거늘.]

그 가련한 거인의 배역을 완벽하게 만들 마지막 쇼를.

"역시 네놈의 짓이었나, 불사왕!"

[받은 게 있으니 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쉽군. 저걸로 나라 하나 정도는 없애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거인에게 부여된 역할은 불사왕이 보낸 비밀 병기.

일명 중간 보스였다.

[용사여, 빛의 기사여. 나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남부에서 네가 이 몸의 심장에 그 저주받을 성검을 꽂아 넣던 순간을.]

"그래서, 복수라고 말할 셈이냐?"

[크흐흐— 그럴 리가. 그저 기꺼울 뿐이다. 나의 대적자가 그렇게까지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음에.]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이어지는 이 만남 시나리오는.

[그런데 용사, 알고 있는가? 그날로부터 곧 일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아아— 별거 아니다. 그저···.]

'안방극장 : 마왕과 용사'의 종막으로 향하는 시작이었다.

[더 기다리기엔 조금 지루해져서 말이지.]

이야기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267

디펜스 게임 (1)

이온 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이름 없는 작은 섬.

"요란하게도 움직이는군."

절벽의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선 한 30대 사내가 바닷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칙칙한 금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곤에 찌든 금안으로 하염없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짙게 담긴 깊은 눈빛으로.

'최근엔 좀 잠잠한가 싶었건만.'

사내의 눈길이 향한 방면에 있는 대륙.

한동안 정신없이 몰아치던 광기의 소용돌이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이번엔 그보다 더한 죽음의 기운이 번져들고 있었다.

기운의 발원지는 이 섬과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에게 그런 거리의 제약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가 바로 한때 세계의 수호자라고까지 불렸던 최강의 종족이자—.

그중에서도 긍지 높은 골드 일족의 엘더 드래곤, 슈리하트겐이었으니까.

"불사왕···."

종족의 원수인 그 끔찍한 심연의 괴물을 떠올린 그가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일족의 번영과 쇠퇴, 그리고 멸망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삶 그 자체였던 그에게 불사왕의 존재는 역린과도 같았으니.

하지만 슈리하트겐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집어삼키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는 성질난다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전에는 일족의 명맥이 자신의 대에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일족의 마지막 후예를 지키고 가능한 많은 것을 전수하기 위해서.

'어차피 지금의 내가 간다고 큰 도움이 될 리도 없고.'

지그시 눈을 감은 그는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변함없이 막대한 기운이 담긴 드래곤 하트.

하지만 대전쟁의 후유증으로 생긴 어긋난 흐름은 그것을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으로 만들었다.

평소라면 그가 가진 압도적인 마력 지배력을 이용해 억지로 눌러놓을 수 있었으나, 격렬한 전투가 발생했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고, 전투도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퇴물이지.'

그런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허망하고 비참한 최후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더욱 기꺼운 것이었다.

용신께서 일족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후예를 보내주셨다는 것이.

그리고 그의 성장에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슈리하트겐이 절벽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온갖 결계로 감싸인 섬 안에서도 유독 빽빽하게 마법진이 설치된 곳에 그가 있었다.

그에게 찾아온 깜짝 선물과도 같은 존재.

골드 일족의 해츨링 호루스가.

우우웅—

마법진 내부, 수련장 일대의 기운이 공명한다.

이내 압도적인 친화력에 이끌린 다양한 기운들이 빛무리의 형태로 현현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불, 물, 바람, 대지 등의 속성력을 비롯해 다른 방식으로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마나까지 몰려들며 그 중심에 있는 이를 감싸고 휘몰아쳤다.

"응약!"

진지하게 눈을 감은 채, 혀 짧은 기묘한 기합을 내지르는 대여섯 살짜리 꼬마에게로.

"···대단하군."

그리고 절벽 위에서 호루스의 수련 장면을 바라보던 슈리하트겐은 이미 몇 번이나 내뱉었던 감탄을 재차 토해냈다.

용언을 비롯한 언령의 기본은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투영해 현상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주변 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지배력과 의지를 표출할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신비였는데···.

'선천적인 재능인가? 상정했던 것보다 성장 속도가 훨씬 빠르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비정상적일 정도야.'

호루스는 고작 유아기인 해츨링(Hatchling)의 몸으로 이미 그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 그 수준만 따지자면 벌써 한참 전에 아동기의 차일드(Child)급을 넘어섰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제대로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 정도라니···.'

수천 년을 살아온 노룡인 슈리하트겐조차 이해할 수 없는 성장 속도였다.

이대로 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청소년기인 쥬브나일(Juvenile)의 수준까지 다다를지도.

"아아— 감사합니다, 드라카리온이시여."

역시 이건 용신의 가호가 함께한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멸종해 가는 드래곤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기신 그분께서 친히 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위대한 재능을 내려주신 것일 터.

'저 아이가 짊어진 짐을 덜어줄 수 있도록, 내 죽기 전까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리라.'

그렇게 재차 다짐한 직후, 다시 대륙이 있는 방향을 일별한 그는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려 수련장 쪽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조금 전부터 수련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호루스에게 조언이라도 해 주기 위해서.

'아직 어리니 그럴 수도 있지. 물론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수련은 정신을 한데 모으는 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 호루스가 미묘하게 딴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진 원인이.

그가 조금 전까지 신경 쓰던··· 바다 너머에서 발생한 사건에 있다는 것을.

***

한창 영웅들과 거인의 싸움이 진행되었을 때.

심연의 경계에서 소환을 해제한 직후, 곧바로 불사성으로 귀환했던 한스는 계속해서 기회를 노리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는다면 곧바로 개입해서 놈을 족치기 위해서.

그의 존재가 바로 하인리히가 떠올렸던, 만일을 대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지.'

그런 의미에서 그가 개입하기 전에 혁명가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썩 만족스러운 전개였다.

덕분에 또 한 차례 상당한 악명을 떨쳤을뿐더러, 이렇게 다음 시나리오를 위한 밑밥까지 깔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인정하마. 빛의 기사, 하인리히. 넌 그동안 굉장히 잘해 주었다. 이 몸의 예상을 아득히 웃돌 정도로.]

심연의 경계로 떠나면서 미리 준비시킨 덕분에, 이미 한참 전부터 만전의 상태였던 불사의 군대를 뒤에 거느린 채.

그들을 이끄는 왕이 오만하게 선언했다.

[설마 그 '예언'이 이렇게까지 거슬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내게 주신의 뜻이 함께하는 한, 네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을 거다. 불사왕."

[크크큭— 대단한 자신감이로구나. 그래, 그래서 준비했다.]

싸늘한 긴장감이 장내를 뒤덮는 가운데.

지옥에서 새어 나온 듯한, 소름이 절로 돋는 웃음을 흘린 그가 천천히 한 손을 옆으로 뻗었다.

[보너스 스테이지를.]

그리고는.

따아악—

흑마력이 가득 담긴 손가락을 튕기자.

그 울림을 타고 사방으로 기묘한 파동이 퍼져 나갔다.

파지직— 빠직!

그 여파로 그가 등장했던 공간의 균열이 깨져 나가며 크기를 더욱 부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케헤에엑!]

달그락— 달칵!

[끄워억—]

척— 척— 척—

그리고 그 안에서, 가지런히 정렬한 불사의 군대가 발을 맞춰 쏟아져 나왔다.

수십, 수백, 수천, 일만···.

그것은 만 단위에 도달하면서부터 증가세가 서서히 줄어들었으나.

크기도, 형태도, 성질도 제각각인 언데드들이 하나같이 짙은 죽음의 기운을 두른 채, 흑마력을 풀풀 풍기며 진열을 갖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어마어마한 압박감과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공격을 방어하는 걸 넘어 오히려 침공하는 족족 궤멸시키기 일쑤. 거기다 그 예언을 적극 활용하며 각 나라의 군대를 움직여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대비하게까지 만드니.]

그렇게 불사의 군대가 대열을 갖춰 진군하는 와중에도 한스의 말은 태연하게 이어졌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금방 지루해지지 뭔가? 이쯤에서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애초에 내기를 받아주었던 것도 더한 재미를 위해서였는데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아아, 별거 아니다. 단지···.]

그 중심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대화를 나누는 불사왕과 용사.

앞으로 나선 하인리히가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그의 뒤에 모인 이들은 서둘러 전투를 준비하며 이어질 싸움에 대비하고 있었다.

진형을 갖추고, 주문을 읊으며, 무기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조금, 난이도를 올리려는 것뿐이니.]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 속, 불사왕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간부 중 일부가 군세를 이끌고 서서히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두두두두—

그들에게 설정된 우선 목표인.

타라크 성을 향해서.

"뭣?! 놈들이 성으로 향한다!"

"그쪽 성벽은 이제 한계예요!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돌격! 놈들의 예봉을 꺾는다!"

그 위압적인 언데드의 물결에 당황한 이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불사왕을 앞에 둔 용사 파티는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다른 이들을 믿고 맡길 수밖에.

[크크큭, 물론 처음 했던 약속대로 로한 공국 방면을 통한 전면전은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지.]

"하!"

공격지 선정 또한 이전처럼 무작위.

그저 침공의 방식이 조금 바뀔 뿐이었다.

전 대륙에 걸친 산발적인 습격에서, 한 지점에 집중한 대대적인 웨이브 형식으로.

[아, 추가로. 시간이 지날수록 침공 규모는 계속해서 커질 것이다.]

그러니 더 막을 수 없게 되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을 거라고.

허공에 떠오른 불사왕이 용사 파티를 내려다보며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오늘은 기념비적인 첫날이기도 하니. 가볍게 인사나 하고 끝내도록 할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간적으로 증폭되는 어마어마한 흑마력.

그리고 이어서.

콰아앙—!

거인과의 격전지였던 곳에서 재차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시나리오의 페이스를 끌어올리기 위한 막바지 디펜스 게임이 시작되었다.

***

푸쉬익—! 콰카가각!

증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금속에 땅이 갈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으윽!"

"이런, 괜찮나?"

한동안 길게 이어지던 소음이 서서히 멎자, 이내 젊은 남녀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예, 예에··· 괜찮아요. 상회주님."

"흐음, 별로 괜찮은 것 같지 않군. 역시 아직 충격 흡수 장치가 미흡한가. 이쪽을 좀 더 보강할 필요가 있겠어."

거인을 피해 타라크에서 도망쳤던 휴버트와 디아나.

그들은 특제 슈트의 힘을 빌려 빠르게 남하하다가 기체에 이상이 생겨 막 지상의 한 언덕에 불시착한 참이었다.

놈의 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너무 무리해서 운용한 탓인지 기어코 슈트가 퍼져 버렸던 것이다.

"으으··· 그보다 저, 토할 것 같아요···."

"저쪽에서 하면 될 것 같군. 등을 두들겨 주는 게 좋겠나?"

"아, 아뇨··· 그냥, 제가 알아서 할 게요우웁!"

하던 말도 마치지 못한 디아나가 근처의 수풀로 허겁지겁 달려간 직후.

그 너머에서 아름답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가볍게 주변을 경계하던 휴버트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이런 비행은 난생처음이었을 테니까.'

거기다 디아나는 특별한 후각을 가졌을 뿐, 신체적으로는 그냥 평범한 소녀이지 않은가.

보호 마도구로 고속 비행의 충격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고는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 해도 대견한 일이지.'

만약 한창 날아가던 도중, 그의 품 안에 안긴 채 실례라도 했다면···.

'으음, 정말 다행이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자신의 몸을 두른 슈트의 금속 파츠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급히 착지하면서 바닥에 두 줄의 깊은 고랑이 생긴 것과는 달리, 금속 부츠의 바닥 면에는 작은 손상도 없었다.

하지만 멀쩡한 것은 외형뿐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인가. 이건 재활용도 못 하겠군."

휴버트는 자신의 「분석」에 비친 결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체의 잠재력을 한계까지 끌어낸 탓인지 하워드가 「장인의 혼」까지 사용해 내부에 심은 신비는 물론, 재료가 가진 고유 특성마저 완전히 고갈되어 있었으니까.

그 귀한 희귀 금속들이 몽땅 잡철이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성능은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다음 건 좀 더 신경 써 볼까.'

내심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가 이젠 고철이 된 슈트를 벗어 아공간에 정리하고 있자, 수풀 너머로 사라졌던 디아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뒤집어진 위장과 한바탕 악전고투를 치렀는지 한층 해쓱해진 얼굴로.

"···실례했습니다, 상회주님."

"몸은 좀 괜찮나?"

"네, 이제 좀 나아졌어요···."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이었기에 휴버트는 굳이 말을 잇는 대신 조용히 포션을 건넸다.

고작 멀미에 쓰기엔 과하다 볼 수 있었지만 이정도야 그에겐 푼돈에 불과했다.

그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국 조용히 감사를 표하며 그것을 받고 그대로 들이켰다.

지금 상황에서 기력이 빠진 채로 있어봤자 짐 덩어리가 될 뿐이었으니.

"저희, 이제 어떻게 하죠?"

"으음."

이후 안색이 조금 회복된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보이는 것이라곤 나무와 언덕뿐.

하늘을 날아 직선으로 이동했기에 마차가 다니는 길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근처의 도시로 이동하지. 음, 이 근방이면 리오나르 시가 있겠군."

"와··· 벌써 거기까지 내려왔나요? 으으, 역시 그 속도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요오···."

처음엔 만약을 대비해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너무 과했던 것 같기도 했다.

적당히 멈춰서 인근 도시에서 대기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것도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지만. 어디 보자, 그럼 이쪽 방향으로···.'

그렇게 난데없는 하이킹을 즐기게 된 휴버트와 디아나.

그 시각.

그들이 떠나왔던 타라크 인근은 실시간으로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268

디펜스 게임 (2)

전쟁터가 되어버린 타라크 성의 외곽 지대.

콰아아앙—!

촤아악!

그 전장 곳곳에서 흑마력과 신성력, 오러와 혈마력 등 가지각색의 기운이 뒤엉키며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덜그럭— 덜그럭!

[크에엑—!]

끊이지 않는 물결처럼, 언데드 간부들의 통솔하에 질서정연하면서도 거칠게 진군하는 불사의 군대가 타라크 성벽으로 치달았고.

그에 맞서서 거인을 상대하기 위해 왔던 이들은 성벽에 합류하여 도시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주신의 이름으로 부정한 존재들을 정화하리라!"

"망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불꽃처럼 타오르는 신성력을 흩뿌리는 도노반 추기경을 위시로 팔라딘 하나와 대주교 둘이 포함된 주신교단의 지원 부대와.

"빨리빨리 움직여!"

"무리하지 마라! 피해를 줄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성벽의 수비병들을 채근하며 동분서주하는 왕실에서 급파된 마스터급 기사와 그가 이끄는 최정예 기사단.

"역시 언데드들은 피가 없어서 상대하는 게 영 비효율적이군요."

"···그런데 거인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도시 방위까지 저희가 개입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곳은 저희 땅도 아닌데."

"하이 로드께서 뜻이 있으시겠지. 인근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시려는 것 아니겠나."

게다가 무려 성혈인 하인즈 2세와 브리키, 그리고 다섯의 진혈이 포함된 최강의 소수 정예인 하이브리드의 뱀파이어들까지.

그 지원군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대단하긴 했으나, 만 단위를 넘어서는 언데드 군세를 정면에서 막아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밖에 나가 있던 그들이 적당히 침공의 예봉만을 꺾고 곧바로 성벽에 합류한 것도 그 때문.

장기전이 될 싸움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치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렇게 성벽을 수비하는 이들 중에서도 탈리아 왕국에서 온 뱀파이어들은 유독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실상 그들은 그동안 적이나 다름없던 종족이었으니까.

["확실히 노선을 정한 거니? 인간들 쪽에 붙어서 불사왕에게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쪽으로?"]

그렇게 한창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주변에서 은근한 시선이 쏟아지던 와중.

적당히 언데드들을 상대하던 브리키가 슬그머니 하인즈에게 다가오며 의념을 통해 말을 걸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 하던 존대가 어느새 다시 반말로 돌아왔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그녀에게 바랐던 것도 딱 그 정도였으니.

그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가볍게 허공을 그어 접근하는 언데드 한 무더기를 일거에 소거하면서.

["그래, 어차피 불사왕과 우리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또 정상 회의에도 참여하며 세상의 전면에 나선 이상, 대륙에 우리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선 지금까지처럼 소극적인 태도는 한계가 있지."]

추가로 이렇게 툴크 왕국에 먼저 은혜를 베풀어 둬서 그들이 다른 왕국들과 연대하는 것도 견제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좋은 방책이었다.

그 과정에서 은근히 휴버트 상회를 더 밀어줄 수도 있을 터.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 이 정도 수준이면··· 적당히 아슬아슬하게 막을 수 있겠군.'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애초에 그에겐 진심으로 타라크를 함락시킬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거인과 싸울 때도 최대한 도시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자신의 손으로 거점을 망가뜨리는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위기를 조장하는 이유는,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좀 더 대륙적인 긴장감을 끌어올리기 위함에 있었다.

'슬슬 요즘 약발이 떨어졌는지 벌어들이는 카르마도 줄었고 말이야.'

물론 여전히 불사왕이 저지른 짓으로 알려진 피해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직접적인 언데드의 침공뿐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일어나는 몬스터의 범람과 거인의 출몰까지 그 한 축을 이루고 있으니 당연한 일.

문제는 그것과는 별개로 사람들이 반복되는 지금 상황에 너무 익숙해졌다는 것에 있었다.

'그 때문에 용사 파티와 하인리히가 활약해도 그러려니 하는 기조가 생겼어. 뭔가 확실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상태에서 더 나아가 모두가 힘을 합쳐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한데 모인 인류의 힘으로 불사왕과 용사가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리는 게 미리 예정되었던 종막.

안방극장의 클라이맥스였다.

'혁명가를 처리함으로써 그동안 사사건건 귀찮게 하던 변수도 원천 차단했으니, 앞으로 일을 진행하는 데도 큰 무리는 없겠지. 물론 페이스를 끌어올린다고 해도 그렇게 금방 끝나진 않겠지만.'

사실 막바지 작업을 시작한다 해도 엔딩까지 이르는 데는 아직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지금부터 위기감을 고조시켜 간다고 해도, 명색이 극의 절정인데 어설프게 마무리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서서히 빌드업을 쌓으며 모두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불사성이 있는 북부까지 길을 열어 한스와 대면하는 데까지··· 대충 반년 정도 걸리려나?'

진짜 작정한다면 이 혼란을 더 오래 끌면서 완전히 본전을 뽑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한도 끝도 없이 폭주하며 세상을 망가뜨리기에는 슬슬 눈치가 보이고 있었다.

저기 위쪽에 있는 분들.

지금까지 그를 여러모로 지지해 주었던 후원자님들에게.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나도 좀 더 적극적으로 해 볼까?"]

그렇게 하인즈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브리키가 납득한 듯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그리고 그 직후.

그녀의 의념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고오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언데드가 몰려오던 전방에 거대한 핏빛 기류가 휘몰아쳤고.

스카카카칵—!

그것은 그대로 적 병력을 휩쓸며 한순간에 수백에 달하는 수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대로 뻥 뚫려버리는 언데드 군세 사이의 통로.

브리키는 언데드와 상성이 그리 좋지 않은 뱀파이어였지만, 성혈씩이나 되는 존재에게 그런 사소한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으헛! 이··· 이건?"

"으음, 설마 이 정도였다니."

그 신위에 적잖이 놀랐는지 성벽에서 언데드에 대응하던 다른 이들의 긴장한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지금은 아군인 상황이라지만 오랜 세월 뿌리박힌 선입견이라는 게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이 자리엔 또 하나의 성혈이 있지 않던가?

"호오, 과연."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뱀파이어들의 활약에 오히려 타오르는 듯한 호승심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으니—.

"뱀파이어들이 개심하고 협조하기로 한 건 기꺼운 일이나, 주신교단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이대로 뒤처질 수는 없는 법이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게다가 상대는 그 언데드들이 아닙니까?"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제단을 준비하겠습니다."

바로 성자인 하인리히의 중재 전까지 오랜 세월 뱀파이어와 날을 세웠던 교단의 일원들.

도노반 추기경과 함께 피카올 대신전에서 넘어온 최정예들이었다.

그들은 한순간에 의기투합하며 곧바로 한자리에 모여 신성 주문을 위한 간이 제단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내 추기경이 주도하는 가운데 일제히 기도문을 읊기 시작하자.

우우웅— 콰아아—!

전장 한복판에 이적이 펼쳐졌다.

찬란한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리며 일대의 언데드들을 일제히 소거하고, 그 여파가 사방으로 퍼져 공간을 침식하던 죽음의 기운에 제동을 걸었다.

연이어 펼쳐진 압도적인 장관.

"와아아아—!"

"사, 살았다! 이길 수 있어!"

그에 사색이 된 표정으로 굳은 몸을 애써 움직이던 병사들의 사기가 서서히 치솟았다.

끔찍한 외견을 한 시체들의 진군에 한껏 겁에 질려 있었는데, 드디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보이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쉽진 않겠지만 말이야.'

잠시 흐트러졌던 죽음의 기운이 다시 맹렬하게 치솟는 군기(軍氣)를 타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곳곳에 배치된 데스나이트와 리치 등의 고위 언데드는 물론, 후방에 있던 간부들까지 직접 나서서 대처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달려드는 놈들을 부지런히 처치하면서도 날카롭게 전황을 파악하던 하인즈 2세가 언데드 군세 깊숙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진을 휘저으며 한껏 날뛰던 핏빛 기류가 멈춰 선 곳이었다.

'지금 나까지 자리를 비우면 성벽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일단 조금 지켜볼까.'

당연히 불사의 군대도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이 자리에 있는 전력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곤 해도, 명색이 그들은 전 세계와 맞서 싸우고 있는 최강 최악의 무력 집단이 아닌가?

[뱀파이어인가.]

[이거 참, 삼백 년 전처럼 숨어있지 않고 잘도 기어 나왔군.]

[케히히— 성혈의 뱀파이어! 이거 귀한 소재가 굴러들어 왔구나!]

더구나 이번 작전에는 그간 두문불출하던 고위 간부들도 상당수 동원된 상태였다.

둠 나이트 드렉슬러, 제너럴 스파르토이 트레브, 아크리치 켈리파 등의 간부들이 군세를 파고든 브리키를 둘러싸고 기세를 높였다.

불사왕에게 종속되며 더욱 짙어진 죽음의 힘이 주변을 잠식한 기운과 공명해 강하게 연결되었고.

언데드인 탓에 서로가 서로의 매개체가 된 그들의 흑마력이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음, 이거 너무 신냈나?"

그에 「정제혈정」으로 강해진 힘을 믿고 자신만만하게 적 진영에 파고들었다가 가로막힌 브리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일대일이라면 이 자리의 누구와 싸우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으나, 저들의 기세를 보아하니 그렇게 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듯했으니까.

콰아앙—!

그렇게 불사의 군대 진영 한복판에서 간부들과 성혈의 뱀파이어가 충돌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주신교단의 신성력과 죽음의 기운이 연신 엎치락뒤치락했고, 어떻게든 버티던 성벽에서의 싸움도 점차 격화되기 시작했다.

폭음, 기합, 비명, 주문, 괴성 등···.

온갖 소음이 뒤섞이며 전장이 점점 난장판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어떻게든 성벽만은 사수하던 하인즈 2세는.

'이 정도면 슬슬 끝내도 될 것 같네.'

딱 생각한 대로의 상황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한 개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