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명성을 떨칠 신위 >
카르마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아직 오행종 유적에서 가져오지 못한 통천령보가 둘이나 되고, 동천보물도 있으며, 가면 갈수록 수련 성과를 현실화하는 것 역시 비싸질 터였으니까.
생각하며 그는 암기를 마친 서책들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미끼처럼도 이용해 먹을 수 있겠군.'
나중에 저것을 참고하여 맹점 없는 원력 수련법을 만들어 낸다면, 무림의 많은 세력이 '거래'를 위해 알아서 자신들의 상승무학과 비전절학을 싸 들고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그것들을 바탕으로 더 뛰어난 수련법을 만들어 내면 된다.
한유진은 웅장한 계획을 머릿속 한구석에 세우며 고분의 남은 구역을 살폈다.
작은 동산 크기의 금은보화, 세월에도 녹슬지 않은 예기를 품은 비범한 병장기들, 조금 누렇게 변색됐을 뿐 절로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화, 여러 빛깔의 옥을 조합하여 어느 위엄 넘치는 사슴의 모습을 환상적으로 조형해 낸 조각상 등.
이곳은 과연 탐욕이 일지 않을 수 없는 보물들로 가득했다.
금은과 보석 같은 것들은 몰라도, 특히 그 사슴 옥 조각상은 한유진으로서도 소유욕이 동할 정도였다.
"크흠."
괜히 헛기침하며 그는 그 조각상을 저물대에 넣었다. 여기서 가장 소유욕이 동하는 예술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고분의 주인이 황실 사람이었던 건가?'
금은보화의 몇 물건들에 새겨진 문양을 통해 알게 된 사실로, 신식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수 있다.
'배후의 음모자가 소문처럼 사도맹이라면 대략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알겠군.'
이 고분에 잠들어 있는 보물들은 도저히 한 세력이 그냥 독식하게 둘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한데도 이걸 미끼로 내걸었다면 뭔가 문제가 있어야 말이 된다.
수련법은 분명 천재적인 발상이 녹아들어 있으나 백에 구십구는 주화입마로 죽는 불완전한 물건이고, 보물은 일부 물건들에 황실의 인장이 찍혀있으니 추후 배탈이 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이 세계의 황실과 무림이 서로 관여하기를 꺼린다지만 이런 보물을 두고 황실이 양보할 리 없었다. 정도맹으로서도 떡하니 소유권이 드러난 보물들을 억지로 삼키지는 못할 터였고.
'정도맹주에게 한 번 언질을 주면 충분하겠지.'
하나 다 삼키지는 못하더라도 일부 빼돌리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황실에서도 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밖에 없을 테고 말이다.
생각하면서 그는 고분지의 남은 구역 처리를 위해 다시 지둔술을 펼쳤다.
* * *
한유진이 고분지의 모든 기관과 진법들을 무력화하고 구조를 대략 파악하여 알려준 지 사흘째.
탐사 혹은 발굴이라 불러야 할 작업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발동한 기관이나 진법의 흔적이 드러날 때마다 이것을 먼저 처리해 버린 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만 갔다.
꼭 진법사와 기관사 같은 전문가들이 아니더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것들을 '원래 방법대로' 해체하려 했다간 얼마나 많은 희생과 어려움이 뒤따랐을지를.
정도맹주는 매우 바쁠 것이 분명한 이 현장의 총책임자이면서도 상당한 시간을 한유진의 옆에서 보냈다. 현경의 고수이면서 신기막측한 능력까지 보여준 그를 반드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을 터였다.
그러나 한유진은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는 정도의 답변만을 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거진 쓸모를 다한 느낌이야.'
그 자신의 명성이 드높아질수록 정도맹의 도움을 받을 일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너무 정도맹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앞으로를 생각하면 딱히 좋지 않다.
계획했던 '거래'를 위해선 무림의 어느 분쟁에도 굳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중립적인 느낌이 유리할 것이다. 그래야 많은 세력들이 조금이라도 더 안심하며 접근해 올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아무리 중립적 태도를 취하더라도 암영마교 쪽과는 교류하기 힘들겠지.'
그가 음마고주를 처리하는 것으로 무림의 행보를 시작했다는 점도 있고, 현재 암영마교의 세가 너무 강력하여 정도맹과 사도맹을 동시에 위협하는지라 일종의 공적처럼 여겨지는 점도 있다.
무엇보다 그놈들의 행적을 보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 해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악랄함이 가득했다. 애초에 친해지고 싶은 종자들이 전혀 아니란 뜻이다.
차라리 수련을 어느 정도 끝마친 다음 놈들의 본거지에 쳐들어가서 '강제 거래'를 하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됐다.
물론 그러려면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무림 십대고수, 무림십존이라고도 부르는 이들 중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 놈이 바로 암영마교의 교주 '암영신마 천라진'이며, 알려지기론 무림에 둘밖에 없는 생사경의 고수였다.
여담으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 이는 윤회성불사의 방장이자 역시 생사경의 고수인 '혜각대사 백지담'이다.
현재 한유진은 탐사대 진영의 한쪽 구석에서 은미령의 시중을 받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겸사겸사 그녀에게서 암영신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거 실제로 확인된 이야기인가?"
"예, 은공. 사 년 전까지만 해도 원래 무림십존은 무림십이존이었습니다."
"흠······."
"물론 그 과정에 대해선 어느 정도 과장이 섞였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목격한 이들은 매우 적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는 생각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신식비술이 맞는 듯한데.'
생각건대 이 세계 현경 고수의 공격 능력은 법혼기 수사와 비슷할 것 같았다. 강기라는 기운을 화경 고수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격 측면에서의 이야기일 뿐, 그는 현경 고수와 싸우면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당장 지둔술만 제대로 이용해도 상대를 큰 곤경에 빠트릴 수 있었고, 상대의 수가 몇이든 얼마든지 치고 빠지며 유리하게 싸우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니 경계심이 드는 건 생사경 고수의 그 신식비술로 의심되는 힘뿐이었다.
만약 정말로 제대로 된 신식비술이라면 한 번 잘못 맞았다간 어이없이 죽을 수도 있다. 반대로, 그 비술을 쓸 기회만 주지 않는다면 현경 고수와 별다를 것 없이 쉽게 요리하다가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사경이 결단기급일 가능성은 없어.'
무림의 역사를 보았을 때 정사마 어느 한쪽에만 생사경의 고수가 존재했던 적이 꽤 있었다. 그러니 만약 생사경의 고수가 결단기급 강자였다면 그때 무림을 일통해 버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꼭 그런 정황적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법력이나 원력 같은 영기의 상위격 힘조차 못 다루면서 결단기급 능력을 갖춘다는 건, 가뜩이나 영기 부족한 이 세상에선 실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대략 그런 생각을 하던 때.
갑자기 야영지 한쪽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아 한유진의 시선이 절로 그쪽을 향했다. 조금 늦게 은미령과 서광가후도 이상을 눈치채곤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잠시 후.
야영지 외곽 구릉 위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적의 습···!!
이어 그렇게 외치던 중, 뒷덜미에 무언가가 퍽 박혀들어 피를 뿜으면서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 암영마교의 습격입니다-!!
뒤늦게 다른 몇 무인들이 허겁지겁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공을 담아 쩌렁쩌렁 외쳤다.
아마도 외부에 나가 있던 경계조 인원들이었을 텐데, 적을 발견한 즉시 여기까지 쫓겨 온 듯했다.
'끝까지 평화롭지 않을 거라면 슬슬 올 때도 됐지.'
한유진은 태평하게 생각했다. 그가 활약한 바람에 탐사 일정이 엄청나게 단축됐으니 만약 첩자들이 있었다면 자신들의 세력에 황급히 소식을 전했을 터다.
그러면 소식을 받은 쪽에서도 기존의 계획보다 훨씬 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당연했다.
- 전투를 대비하라-!!
정도맹주의 거대한 고함성이 일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렇게 정도맹측 인원들이 제각각 무장을 챙겨 나름의 질서를 갖추고 정렬하는 때.
구릉 너머에서부터 작고 새까만 무언가들이 무수히 치솟아 올랐다. 사람들이 그 정체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을 동반한 화살의 비가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대체 어떤 종류의 활을 쓰는 건지, 놀랍게도 습격 방향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한유진이 앉아 쉬던 장소에까지 화살이 십여 개 이상 날아들었다.
은미령과 서광가후가 놀라 대처하기도 전 한유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자금광휘가 그 화살들을 가볍게 튕겨냈다.
"가, 감사합니다 은공."
"감사합니다!"
한유진은 대충 손을 휘저어 그 인사를 받아주며 튕겨 나간 화살들을 살폈다. 마치 공예품 같은 느낌을 풍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철제 화살들이었다.
곧.
화살이 치솟았던 구릉 위쪽으로 수백에 달하는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부 같은 소속임을 드러내듯 검은색 무복을 입었고, 그중 상당수는 핏빛 요사스러운 장궁을 든 채로 재차 화살을 매기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무복 가슴팍과 팔뚝 등에 수놓아진 암영마교의 상징이 너무나 확연했다.
머릿수 자체는 정도맹측 인원보다 조금 부족한 듯했다.
하나 저들이 모두 전투원이라면 진법사와 기관사 등이 포함된 정도맹측에 비해 더 많다고 봐야 한다.
또한 저 정도 인원이 이렇게 도착할 때까지 전혀 소식이 없었다는 점도 가슴 한켠을 서늘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정도맹 내부에 첩자가 다수 있어 몇 중으로 펼쳐진 경계망을 아주 절묘하게 우회했거나, 혹은 좀 더 적극적인 협조를 받으면서 큰 허점을 만들어 파고들어 왔을 수 있다.
아니면 그냥 우직하게 밀고 들어왔는데 작전 수행 능력이 너무 뛰어났던 나머지 모든 소식 전파를 성공적으로 차단해 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저들이 정예일 거란 뜻이지.'
그렇지 않다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일 자체가 없었을 터다.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겠는가?
- 백화검존-!!
그때 암영마교 측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목 상태가 정상이 아닌 듯 매우 거친 음색이었지만 바로 그렇기에 은근히 살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길게 말하지 않겠소이다! 더 피를 보기 싫다면 더는 아무것도 건들지 말고 당장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사막의 도적 떼보다도 못한 놈들이, 감히 우리 정도맹을 상대로 위협을 가하는가?!
- 하하하···! 그러면 싸우겠단 말씀이오? 사실 나는 그편이 더 좋소이다! 지금 누가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거요?
말을 한 그 암영마교의 대표격 인물이 한쪽 손을 들어 보이자, 구릉지 위를 점거한 그의 수하들이 핏빛 장궁 시위를 당겨 조준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 대표격 인물 양옆으로 두 명의 사람이 더 나타나는 모습이었는데, 각각 노인과 노파로 딱 보기에도 전혀 실력이 뒤떨어지지 않는 이들이었다.
"아, 아무래도··· 암영마교의 장로들이 셋이나 온 것 같습니다!"
한유진의 곁에 있던 서광가후가 상황을 설명했다.
"장로라 하면, 다 현경 고수인가?"
"그렇습니다! 방금 맹주와 대화한 자는 광혈마도가 분명하고, 옆에 은적색 머리를 가진 노인은 육맥검마일 겁니다. 그리고 저 허리 굽은 노파는 아마 흑음노모일 것입니다!"
"흠."
덕분에 전력비를 얼추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앞서 살폈듯 머릿수는 상대측이 더 많다고 봐도 무방하고, 현경급 고수 역시 상대측이 한 명 더 많으며, 그 아래 화경급 고수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다.
확실히 첩자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딱 이곳의 전력을 압도할 수 있으면서 기동성에 방해가 되지 않는 수준으로 몰려온 것을 보면.
심지어 시기도 매우 적절했다. 중요한 보물들을 대부분 발굴해 내어 한쪽에 차곡차곡 정리해 놓은 마당이었으니까.
- 빨리 선택하시오! 우리라고 마냥 여유가 있지 않으니 머뭇거린다면 공격할 수밖에 없소!
슬쩍 살핀 정도맹주는 크게 갈등하는 기색이었다. 하나 한유진은 그가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싸우든 물러나든 둘 다 손해가 막심하다면, 스스로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는 싸우기를 택할 것이다. 그러면 그 즉시 이곳에 피바람이 몰아칠 터였다.
어차피 벌어질 싸움이라면, 그 자신의 계획을 위한 발판으로 삼지 않을 이유가 없다.
"너희는 멀찍이 물러나 있어라. 내가 신경 쓰일 일 없게 잘 숨어있으라는 뜻이다."
"예? 아··· 예, 은공!"
"은공, 설마···!"
서광가후가 조금 늦게 뜻을 이해하고 답한다. 반면 은미령은 그런 한유진을 급히 만류하려는 듯했다.
하나 무용이를 품에 안은 한유진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빠콰쾅-!!
터질 듯한 긴장감 가득하던 장내에 일순 뇌성벽력이 울렸다. 모두가 놀라 그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는 때.
오직 현경 고수들만이 다른 무언가를 감지하고 위쪽 허공을 쳐다봤다.
그곳에서 섬광과 함께 나타난 한유진이 풍둔술을 시전한 채 암영마교의 장로들을 노리며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가는 모습이었다.
- 웬 놈···!
여태 대화에 나섰던 광혈마도라는 자의 충혈된 시선이 급속도로 다가오는 한유진과 마주쳤다.
그 순간 한유진의 눈동자 속에서 자색 광망이 번뜩이고, 광혈마도의 초점이 풀리며 짧은 순간 몸이 굳었다.
"헉···!"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나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생사를 좌우하기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어느새 뻗어진 검결지에서 빛살처럼 쏘아진 경금검기가 광혈마도의 목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한 놈."
약간의 거리를 두고 허공에 오연히 멈춰 선 그가 나직하게 내뱉는 때.
비록 암영마교의 평판 때문에 세인들은 인정하기를 싫어하나 객관적인 실력만큼은 십대고수 반열에 올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런 무림 정상급 현경 고수의 머리가 비현실적으로 허공을 날았다.
강건한 신체가 목 절단면에서부터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뒤로 넘어간다. 자랑하던 도법을 펼쳐 보이긴커녕 무기를 뽑아 들지도 못한 모습이다.
한발 늦게 땅에 떨어져 구르는 머리통의 경악에 찬 두 눈동자가 유난히 돋보였다.
그리고 암영마교의 다른 두 현경 고수가 채 반응하기도 전 한유진에게서 두 번째 세 번째 법술이 연이어 펼쳐졌다.
61화.< 드래곤 하트 제련 시작 >
휘둘린 손에서부터 세 개의 작은 불씨가 떨어져 내린다 싶더니 한순간에 거대한 불새의 형상으로 화해 흑음노모에게 두 마리, 육맥검마에게 한 마리가 날아간다.
단지 나타난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열기가 휘몰아쳤다. 또한 불새들의 날갯짓에 화염이 폭발하자 그를 올려다보던 사람들은 하늘 전체가 화염으로 뒤덮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불지옥의 한복판에서 금빛이 번쩍이고 광혈마도를 참살했던 경금검기가 고속으로 쏘아진다. 동시에 자색 광망을 머금은 한유진의 눈이 언제라도 환몽심탈술을 펼칠 준비를 한 채 적을 주시한다.
"상대의 눈을 보지 마시오!"
그렇게 외친 건 육맥검마였다. 대체 이 짧은 시간 만에 무엇을 어디까지 짐작해 냈는지 실로 뛰어난 대처였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흑음노마는 짚고 있던 지팡이를 주무기로 사용했다. 허리 굽은 자세가 무색하게도 거의 잔상이 남을 듯한 속도로 움직이며 들이닥치는 두 마리 불새를 향해 연신 흑녹색 강기를 뿜어낸다.
그 강기가 마치 고목의 뿌리처럼 마구 갈라지며 사방을 점하는 모습은 꽤 대단했다.
하나 느낌처럼 나무 속성이라도 가졌는지 불새는 거의 저항이 없는 듯 그 강기의 그물을 모조리 불태우며 연신 짓쳐들어갔고, 흑음노마는 기겁하며 계속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피한 자리로 미처 도망치지 못한 암영마교의 인원들이 불새의 화염에 휩싸이자, 수십이 넘는 이들이 잿더미로 불타 무너져 내리는 공포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한편 육맥검마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한 마리 불새, 그리고 끔찍한 예기를 품은 채 날아드는 경금검기를 상대로 대단한 분전을 펼쳤다.
반 이상 그림자에 녹아드는 듯한 형상으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각기 다른 색채의 여섯 검강들이 쏘아져 나간다.
그것들은 제각각의 움직임을 선보이면서 날아드는 불새를 공격해 저지하거나 경금검기와 충돌하여 각도를 틀고 속도를 늦췄는데, 어째서 육맥검마라 불리는지 바로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그러는 사이 한유진은 놀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오연하게 허공에 뜬 상태로 낙뢰술을 준비하는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이, 특히 공격을 당하는 암영마교측 인원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허, 허공답보···!"
"허공답보다!"
몇몇 이들이 그렇게 경악에 차 외치기도 했다.
현경 고수조차도 사실 지금의 한유진처럼 허공에 오래도록 떠 있지는 못한다. 설령 그럴 수 있더라도 내공의 소모가 커서 싸우는 도중엔 절대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현경 고수들부터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싸우지 않았겠는가?
실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나.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풍둔술을 펼친 한유진에겐 얼마든지 가능했고.
하여 그는 별다른 방해조차 받지 않으며 아주 여유롭게 낙뢰술 시전을 완료했다.
먼저 노린 것은 좀 더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흑음노모였다.
그 노파는 아직 제대로 된 공격을 한 번도 당하지 않았으나 화령조술의 열기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전부 그슬리고 피부가 벌겋게 익는 등 매우 낭패스러운 꼴이었다.
바로 그러는 때 한유진의 손가락이 그녀를 가리켰다.
빠콰콰쾅-!!
세상을 흑백으로 번쩍이게 만드는 섬광과 함께 벽력음이 일대를 뒤흔든다. 시전이 길었던 만큼 강력하게 펼쳐진 두꺼운 낙뢰가 흑음노모에게 정확히 내리꽂혔다.
- 끼아아아악-!!
하나 과연 무림의 정상급 고수라는 건지, 적중당하기 직전 노파는 귀신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전신으로 흑녹색 강기를 뿜어낸 상태였다.
어떤 본능적 감각에 따라 뿜어져 나온 그 강기의 파도는 우산처럼 장막을 드리워 간신히 낙뢰를 방어해 냈다. 사방으로 번개불꽃이 터져 나오면서 노파를 중심으로 반경 십여 미터가 새까맣게 물들어 초토화된다.
하나.
간신히 방어에 성공했다지만 이미 노파는 그것만으로 기력을 다 소진해 버린 듯했다. 뒤이어 날아드는 두 마리 화령조를 보며 그저 허탈하게 서 있을 뿐이었으니까.
푸화아악-!!
굳이 폭발을 일으킬 것까지도 없었다. 화령조 두 마리가 내려앉은 후 지나간 장소로 한 줌의 잿더미, 그리고 붉게 달아올라 반 이상 녹아내린 지팡이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 한유진을 노리고 날아든 육맥검마의 비검강 공격이 있었다. 잠깐의 틈새였을 뿐인데도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라는 이치를 실행하는 절묘한 한 수다.
하지만 뿜어져 나온 짙은 자금광휘에 약간의 파문만을 일으키며 모조리 막혀 버렸다. 현경 고수가 필살의 의지를 담았음을 생각하면 실로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 후퇴-!!
결국 육맥검마가 내공을 담아 고함쳤다. 동시에 그는 악명이 쌓일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 자신의 수하들 사이를 파고들어 도망치려는 모습이었다.
한유진은 주저 없이 세 마리 화령조를 움직여 그 암영마교의 인원들을 불태워 죽이도록 시켰다.
동시에 여태 실전에서 써본 적 없지만 틈틈이 조금씩 연습해 왔던 새로운 법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진중하게 들어 올린 손바닥 위로 경금의 금빛 기운이 찬란하게 응집되어 별처럼 빛난다. 그것이 어느 형체를 이뤄가다가 연꽃 같은 아름다운 형상으로 고정된 순간.
콰르릉-!
그의 신형이 번쩍이는 뇌전에 휩싸여 어딘가로 사라졌다.
뇌둔술을 통해 암영마교의 진영 반대편, 육맥검마가 도망치던 방향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그가 손바닥 위의 금련을 흘려보냈다.
"막아낸다면 그냥 보내주마."
나직한 어조였으나 기겁한 육맥검마에게는 더없이 뚜렷하게 들렸다.
직후 둥실둥실 떠 날아들던 금련이 급속도로 거대해지며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회전했다.
금련삼전만개(金蓮三轉滿開).
한 차례 금빛 연꽃이 활짝 피어나며 무시무시한 예기를 품은 경금검기들이 사방으로 폭발한다. 일순 세상 전체가 금빛으로 물들어 시야 가득 그 검기들이 들어차는 환각마저 인다.
육맥검마는 최선을 다해 그 경금검기의 파도를 버텨 냈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튕겨 흘려낼 수 있는 것은 흘리고, 도저히 못 피하는 것은 급소가 아닌 몸으로 받아내면서.
온 내공을 집중시킨 채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고 이화접목의 묘리를 최대한 살려 접촉했을 뿐인데도 그의 강기가 마구잡이로 찢겨나갔다. 그 안쪽의 보검이 빠르게 이가 나가고 균열이 생기며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했다.
하나 과연 그는 현경의 고수였으며 암영마교의 장로들 중 수위를 다툴만한 천재였다.
더는 전투를 지속할 수 없을 상태가 되었지만 기어코 살아남은 것이다.
하여 상대가 자신을 정말로 그냥 보내주지 않을까 싶은 기대에 젖는 그때.
삼분의 이 정도로 크기가 줄어든 금련이 한 차례 더 회전하며 두 번째 경금검기의 파도를 폭발시켰다. 첫 번째보다 조금 규모가 줄어든 모습이었으나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 순간 육맥검마는 깨달았다.
이 폭발이 아직 한 번이나 더 남았으며, 자신이 거기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으리란 사실을.
'이게··· 무슨··· 경천동지할··· 신공절학이란 말인가···!'
과연 교주라 해도 이것을 상대로 멀쩡할 수 있을까.
두려움 섞인 탄성과 한 줄기 의문을 떠올리며, 그는 덮쳐드는 금색 빛줄기들에 휩싸여 수십 이상의 육편 조각들로 화해 흩날렸다.
* * *
고분지에서의 전투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끝났다.
오로지 혼자의 힘만으로 암영마교의 정예부대를, 그것도 현경 고수 셋이 포함된 부대를 반 이상을 몰살하다시피 물리쳐 버린 것이다. 아마 무림의 온 역사를 뒤져봐도 이만한 신위를 보인 이는 없을 터였다.
하여 모두가 그를 생사경의 고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발굴을 마치고 정도맹으로 귀환할 때쯤.
한유진에겐 '금련무존'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지어져 있었다. 심지어 현장에 있던 이들 중 상당수는 '금련무신'이라 불러 마땅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조금 오글거린다고 느끼면서도 그는 자신의 별호에 만족했다. 어쨌든 별호가 붙었다는 건 이제 명성이 강호무림 전역으로 퍼질 일만 남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정도맹 입구에 도착한 즉시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정도맹주를 포함한 많은 핵심 인사들이 간절하게 붙잡았으나 그런 것에 발목 잡힐 그가 아니었다.
은미령과 서광가후는 원래 정도맹에서 갖고 있던 전투단원의 신분을 포기하며 그런 한유진을 따라가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흑호단 단주로서 반평생을 살아왔던 섬뢰검 독준성조차 미련 없이 감투를 벗겠노라 선언해 버렸다.
"허어······."
옆에서 보던 정도맹주가 탄식을 내뱉는 모습이었으나 감히 말리거나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진 못했다. 독준성은 오직 한유진을 향해 무릎 꿇은 채로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버틸 기세였다.
"그래, 자네도 같이 가지."
일단 데려가면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한유진은 흔쾌히 허락했다.
떠나기 직전 그의 시선이 경빈각이 있는 방향을 살짝 스쳤다. 그곳에서의 화려하고 풍요롭던 생활에 아쉬운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 탓이다.
'필요한 만큼은 즐겼으니까, 뭐······.'
그는 희미한 아쉬움마저 어렵지 않게 털어내곤 말을 몰았다. 그 뒤를 은미령과 서광가후, 그리고 독준성이 따랐다.
"정파와 사파 세력의 중간지점 느낌이 나면서, 별다른 세력권에 속하지 않은 지역이 있나?"
"중립적인 장소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렇다면 강북 지역을 먼저 살펴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강북이면··· 거기 윤회성불사와 가깝지 않던가?"
"맞습니다. 그래서 사파 세력권과 가까우면서도 분쟁이 적고 번화한 곳이기도 합니다."
과연 독준성은 경력에 어울리는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어디에 정착할지 논의하는 일이 순조로웠다.
이동하는 와중.
한유진은 고분지에서 펼쳤던 법술에 대해 되짚어보기도 했다.
실전에서 처음 펼친 법술이었던 만큼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예상보다 법력 소모가 엄청나서 하마터면 시전하고 있던 풍둔술마저 끊길 뻔했다.
'그럴 만도 하지.'
사실 그 법술의 본래 이름은 금련삼전만개가 아닌 금련구전(九轉)만개다. 아홉 번 순환하며 연속적으로 경금검기의 폭발을 일으키는 훨씬 더 수준 높고 강력한 법술이라는 뜻이다.
원래 결단기나 되어서야 무난히 펼칠 수 있을 것을 강제로 법혼기 경지에 맞게끔 조정하여 처음 펼쳤으니, 실수가 많은 것이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 만족스러운 성능이었다. 다른 중급 오행법술들도 서둘러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강북으로 향하는 여정에 있어 뭔가 부족하거나 고생스러운 점은 전혀 없었다.
한유진이 거리낌 없이 능력을 드러내며 정화술 등을 펼쳐준 것이 크게 한몫했고, 식삿거리가 마땅찮으면 영액주와 옥로주 등도 쉽게 베풀어줬으며, 편안한 휴식을 위해 어지술로 온갖 구조물을 만들어 내는 일도 주저하지 않은 덕이었다.
하여 어느 날 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서광가후가 총대를 맨 듯한 느낌으로 조심스레 묻기까지 했다.
"무존께서는 혹··· 선인(仙人)이십니까?"
별호가 생긴 탓인지 대협 대신 무존이라 부르기 시작한 채다.
그 질문에 한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수선의 지식이 없다지만, 겨우 법혼기 수사 주제에 선인을 자칭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쨌든.
강북 지역 옥한성에 도착해서는 독준성과 서광가후가 알아서 움직이며 앞으로 머물게 될 장원을 물색했다. 그 사이 한유진과 은미령은 객잔에 머물면서 편히 쉬었다.
두 남자는 한유진과 은미령의 사이가 곧 더 깊어지리라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으나, 막상 한유진 본인은 그에 대해 별 고민하지 않았다.
'지내다 보면 알아서 잘 되겠지.'
스스로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는 한 계속 이 정도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고, 은미령은 상당히 속 깊은 모습을 보이며 조금도 불편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며칠 후.
옥한성 외곽, 작은 산을 끼고서 만들어진 고즈넉한 장원이 한유진의 소유가 됐다.
챙겨온 재산의 대부분을 소모했지만 별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진득하게 수련하면서 무림에 어울리는 원력 수련법을 만들어 낼 차례로군.'
한 차례 장원 둘러보기를 마친 그는 매우 만족해하면서 미환진기를 설치했다.
그렇게 오직 정문으로만 멀쩡히 드나들 수 있게끔 조치한 후.
잠시 미뤄두었던 드래곤 하트 제련을 시작하기로 했다.
* * *
삼경조화결의 세 가지 단계를 쉽게 묘사하자면 대략 이렇다.
첫 번째 심경의 단계, 대상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교감한다. 통명어수결로 무용이와 연결된 일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기경의 단계, 대상과 기운적으로 연결되어 안정을 이룬다. 서로의 기운이 충돌하여 힘이 깎이거나 다치는 일을 막는다.
세 번째 체경의 단계, 대상과 물질적으로 합일한 듯 동기화한다. 상대의 의도나 움직임 등을 보고 이해하는 수준이 아닌, 마치 오감을 공유하듯 본능적 차원에서 느끼게 된다.
'그야말로 서로 간의 부조화를 해소하는 영적 동화작용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지.'
그는 눈앞에 자리한 드래곤 하트를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문제 될 요소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어.'
은폐 상태를 푸는 즉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퍼져 나가겠지만, 그것이 아주 빠르게 무림 전역으로 소문이 나겠지만.
그 자신의 명성이라면 감히 누구도 이곳에 욕심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설령 주제를 모르는 누군가가 욕심내더라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할 터였고.
지난 시간 동안 이 무림 세계의 수준과 구조를 충분히 파악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이 드래곤 하트의 제련에 문제가 생길 우려는 없었다.
'그럼······.'
은근히 두근거리기 시작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는 드래곤 하트의 은폐 상태를 해제했다.
그 순간.
실로 엄청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존재감이 폭발하여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62화.< 예상 밖 이득 >
새로 등장한 생사경의 고수 '금련무존'에 대한 소문은 아주 빠르게 무림 전역으로 퍼졌다.
생사경이라는 것만으로도 놀랍기 그지없는 일인데, 심지어 암영마교의 현경 고수 셋을 참살하면서 이름을 알렸으니 더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다.
소문은 보통 과장되기 마련인지라 그 이야기를 전부 믿지 못하는 이들의 수도 제법 되었다.
하나.
믿는 이들도, 믿지 않는 이들도, 전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소문이 무림을 강타했다.
바로 강북 지역의 옥한성 한 장원에 금련무존이 자리 잡고서는,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드는 개세절학을 수련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신공인지, 옥한성에 들어서기 전부터 그 기운의 파동이 느껴져 훈련받은 전투마가 놀라 날뛰고 기감이 예민한 자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라고 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많은 무림인들이 소문을 듣고 강북의 옥한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장원에는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선 그 주변만 어슬렁거리다가 원래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가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실로 경천동지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기세를 느꼈노라면서 말이다.
소문이 퍼질수록 더 많은 무인들이 호기심을 느끼며 몰려들었다.
누군가는 감히 금련무존에게 한 수 청하겠노라며 큰소리를 떵떵 치기도 했으나 막상 도착하고서는 더없이 공경한다는 듯한 태도로 장원 쪽을 향해 포권지례를 취하곤 물러날 뿐이었다.
심지어 무림십존의 일인인 흑산창존(黑山槍尊)마저 소문에 이끌려 옥한성을 방문했는데, 그는 금련무존을 만나고자 했으나 폐관 수련 중이라는 답변만 받고선 장원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당당한 십존의 일인으로서 체면을 구겼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특히 흑산창존은 정사지간에 위치한 성격 폭급한 인물로서 뭔가 난리를 쳤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자였다.
하나 이번에는 매우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알겠다며 물러났을 뿐이었다.
그가 말하기를, 같은 무인으로서 폐관 수련의 중요성을 잘 알기에 방해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했으나, 실은 장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감히 소란을 일으킬 수 없었으리란 게 세인들의 평이었다.
그렇게 강호무림 각지에서 무인들이 성지순례하듯 찾아오고 누군가는 아예 눌러앉기도 하는 때.
반대로 옥한성에서 물러나는 이들이 있었다.
세력권 애매한 이 지역에서 작은 군소 문파를 대리인 삼아 간접적인 지배권 다툼을 벌이던, 정파와 사파의 모든 세력이 전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손을 뗀 것이다.
이 옥한성 전체를 금련무존 한유진의 영역이라고 인정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딱히 그가 욕심 같은 걸 내비친 적도 없는데.
그간 암중으로 벌어지던 모든 종류의 다툼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자, 옥한성의 많은 상인들과 세가 등이 무슨 언질이라도 받은 듯 장원에 '선물'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연스럽게 독준성이 나서게 됐다.
그는 현지 세력을 이용하여 질서를 가다듬고 치안을 새롭게 확립하는 등, 과연 경력에 어울리는 일 처리로 단숨에 입지를 다졌다. 당연히 금련무존의 대리자 격으로서의 입지였다.
그렇게 강북 지역 옥한성 전체가 한유진의 소유가 됐다.
과연 '실력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던 무림의 격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 * *
삼경조화결을 통한 본격적인 드래곤 하트 제련을 시작한 지 대략 두 달째.
한유진은 계획 일부를 다시 세워야 할 만큼의 예상 밖 이득을 무려 세 가지나 체감하면서 더없이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먼저 첫 번째.
원래 그는 원영기까지 태극회원공을 수련한 다음 태을오행도경을 얻어 그것을 수련하고자 했다.
그래야 원력을 통한 육체와 영혼의 강화 효과를 전부 누리면서 원력대수라는 신통마저 깨우치는 것은 물론, 추후 태을오행도경을 통해 전혀 아쉬움 없는 성장이 가능할 터였기 때문이다.
한데.
아직 삼경조화결의 첫 심경 단계를 다 완성하지도 못했거늘 이미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기경 단계로 들어서면··· 내 법력 자체가 원력과 같은, 아니, 평범한 원력 이상의 효과를 띨 것 같다.'
즉.
태극회원공을 수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절반 이상 사라진 셈이었다.
그러니 태극회원공을 딱 결단기에 오를 때까지만 수련해도 괜찮게 됐다. 원력대수라는 신통만 체감하여 깨닫고 나면 더는 수련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다음 두 번째.
아마 기경 단계에서부터 본격적인 효과가 나타날 듯했고, 마지막 체경 단계로 들어서면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겠지만.
이 드래곤 하트 제련은 그의 수명을 배 이상 늘려줄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경지 상승에 따라 같이 늘어나는 방식으로 말이다.
'바람대로 내 체질마저 바뀌면서 나타나는 효과임이 분명해.'
수선의 재능을 결정하는 요소로는 단지 영근만 있지 않다.
체질도 재능의 한 종류인데, 특수한 공법이나 신통 수련에 유리한 체질을 영체(靈體)라고 부르고, 그보다 더 뛰어난 체질은 도체(道體)라고 부른다.
여태 보아온 서책의 내용대로라면, 아주 특이하지 않고서야 영체 보유자는 천영근자와 비슷한 대우를 받고, 도체 보유자는 그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수선계에서 괜히 그런 대우를 해 주는 게 아닐 터이니 체질이 어떤 식으로 바뀌든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수명이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계산이 어려울 정도의 이득이었다. 각성 능력 활용에 아주 많은 여유가 생기지 않겠는가?
마지막 세 번째.
벌써부터 새로운 신통 하나가 개화할 조짐이 느껴졌다. 카사르녹스의 특성을 이어받은 환상을 다루는 종류의 힘이었다.
마치 지구 헌터들의 각성 능력처럼, 법술보다 훨씬 더 본능적 차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새롭고 유용한 수단이 추가되는 것이다.
환몽심탈술과도 모종의 상승효과를 일으킬 수 있을 듯해 역시 기대가 됐다. 벌써 환몽심탈술의 시전이 뭔가 편해진 느낌을 받고 있는지라 더욱 그랬다.
'이 정도는 되어야 드래곤 하트지.'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카사르녹스와의 만남은 아주 큰 기연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다른 어떤 드래곤 하트를 얻었더라도 지금처럼 만족스럽긴 매우 매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구우웅···!
순간.
껴안고 있던 커다란 드래곤 하트에서부터 마치 심작박동 같은 파동이 한 차례 일었다. 삼경조화결을 운용하던 한유진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곧 편안해지며 계속 수련을 이어갔다.
앞서 나열했듯.
예상 밖의 이득을 몇 가지나 얻을 정도로 이 드래곤 하트의 위격은 대단했다.
바로 그렇게 대단하기 때문에 정말로 아쉽게도, 제련을 하면서 일부 포기해야 하는 점이 분명 존재했다.
결단기를 위한 외단법의 그릇으로 삼으면서 연허기급의 모든 힘을 온전히 보존한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방금의 파동은 그렇게 일부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약간의 충돌이었다. 아무리 최상급 원석이라도 조각상을 완성하려면 깎아내 버려야 하는 이치인 셈이다.
'나 자신을 유지하기보단 이것의 보존을 우선시한다면 또 모를까······.'
요컨대 삼경조화결의 주 대상을 드래곤 하트가 아닌 그 자신으로 삼는 것이다.
당연히 고려할 가치가 없는 선택지였다. 비유하자면, 어느 대단한 명품 신발을 신기 위해 스스로의 발을 깎아내겠다는 미친 발상이었으니까.
하나 다행히도 이 물건은 처음 얻었을 때부터 아주 가벼운 연결이 가능했을 만큼 그 자신과 궁합이 좋았다.
'분명 그때 카사르녹스의 선언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아.'
덕분에 깎아내야 할 부분이 꽤 많이 줄어든 듯했으나, 그래도 과연 제련이 끝났을 때 어떤 모습일지 단언하긴 어려웠다.
한참 뒤.
해가 저물어갈 무렵 그는 오늘의 삼경조화결 수련을 끝냈다. 마냥 매달려서는 효율이 안 나오기도 하고 다른 할 일 또한 있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 밖으로 나선 그는 노을 진 하늘의 풍경을 감상하며 잘 관리된 정원을 거닐었다.
명문세가에서 자란 서광가후가 이런 부분으로 꽤 지식과 경험이 있어, 사람을 고용하여 장원을 장원답게 굴리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원력 무공을 좀 더 빨리 창안해 볼까.'
딱히 따라오라고 권유한 적 없고 보상을 언급한 적도 없다. 그러나 굳이 따라와서는 많은 방면으로 도움을 주는 이들에게 뭔가 베풀긴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베풂으로써 다른 쓸모를 만들어 낼 수도 있으니······.'
머릿속으로 몇 가지 부가적인 계획을 세우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찍! 찌직-!
여태 어디서 놀고 있었는지 모를 무용이가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는 그의 몸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신식에 감지됐을 때부터 녀석을 신기하게 보던 한유진이 물었다.
"너 그 옷은 어디서 난 거냐?"
딱 맞게 제작된 연한 푸른빛 옷을 걸친 모습이 매우 귀여우면서도 웃겼다. 이 무림 세계에서 애완동물에게 옷 입힐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찍직-! 찍!
"은미령이?"
무용한 녀석을 두 손으로 들고 옷 입은 모습을 살핀다. 코를 씰룩이면서 잔뜩 신이 난 듯한 느낌이 전해져와 한유진도 절로 웃게 됐다.
그러는 때, 뒤편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미령이었다.
그녀는 무용이를 찾아온 듯했으나 한유진을 발견하고는 바로 공손히 읍하며 인사했다.
"은공께서 나오셨군요. 저녁을 준비할까요?"
"아니, 오늘은 됐다. 이거 네가 만들었다던데······?"
무용이의 옷을 가리키며 묻자 그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게···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잘 어울려. 얘도 충분히 좋아하는 것 같고."
무용이를 몇 번 쓰다듬은 한유진이 녀석을 놓아주었다. 그에 녀석은 자신에게 큰 선물을 준 은미령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그렇게 녀석을 안은 은미령이 뭔가를 고민하다가 용기 내어 말했다.
"은공, 실은··· 제가 은공의 옷도 만들었습니다."
"내 옷을?"
반사적으로 되묻고 생각하니, 그는 여태 한 번도 옷을 갈아입은 적이 없었다. 각성 능력으로 문을 통과해 나온 그때의 유랑도사 차림 그대로였던 것이다.
당연히 법혼기 수사이자 정화술까지 익힌 그에겐 일체의 더러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 주변인들이 그를 보며 더욱 신비로움을 느끼곤 했으나.
새삼 평범했던 시절의 감수성이 살아나 버린 한유진은 은미령을 보며 말했다.
"한번 보자."
"···예! 은공."
그녀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한유진을 안내했다. 그가 거처 겸 수련실로 쓰는 건물과 그리 멀지 않은 장소였다.
잠시 기다려달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은미령의 손엔 잘 개어진 푸른빛 옷가지가 들려있었다. 지금 그녀의 어깨에 올라앉은 무용이에게 입혀진 것과 똑같은 색이었다.
받아 들어 어물술을 활용해 허공에 펼쳐보자, 그 즉시 마음에 쏙 들었다.
무복처럼 활동성 좋게 만들어졌으면서도 겉소매가 넓고 금실이 수놓아진 등 격조를 살렸다. 흰색과 진청색이 적재적소에 사용되어 느낌이 매우 고상했고, 특히 옷 전체에 걸쳐 과하지 않게 흐르듯 수놓아진 금련이 눈길을 끌었다.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예, 은공."
"대단한데? 재봉술에 이런 실력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
감탄하여 칭찬하던 한유진은 문득.
얼굴이 잔뜩 붉어진 은미령과 시선이 마주치곤 알 수 없게도 입을 다물었다.
원래도 예쁘다고는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미모라며 감탄했었으니 실로 당연한 사실이다.
하나 노을빛 아래, 정성 어린 옷을 선물 받은 상황에서 다시 보게 된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에 꽤 선명한 파문을 일으켰다.
"진심으로 고맙다."
"예, 은공······."
"이런 걸 받았으니, 나도 조만간 답례를 해 줘야겠군."
그는 허공에 펼쳤던 옷가지를 잘 수납하여 손에 든 채 웃었다.
"혹시 저녁 먹었나?"
"아직 안 먹었습니다."
"그럼 같이 먹지."
분명 아까는 됐다고 했었으나 그는 말을 번복했다.
그리고 은미령과 함께 움직이면서 속으로 원력 무공 창안을 좀 더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보답을 해 줌과 동시에, 무림의 여러 세력들이 '거래'를 위해 찾아오게끔 만들려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63화. < 가르침 하사 >
석 달.
한유진이 원력을 다루는 기초적인 무공심법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다.
무공의 기초이자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심법 창안에 걸린 시간치곤 매우 짧은 편이었으나, 참고할 수 있는 뛰어난 교보재들이 많았음을 고려하면 적당한 시간이었다.
기초에 충실한 회원공과 결함 없이 원력을 다루는 태극회원공 같은 수련법은 물론, 정도맹에서 본 여러 무공심법들이 머릿속에 있었으니 재료는 충분했던 셈이다.
하여 오늘, 그는 이곳 '금련장원'의 유지에 공이 큰 인물 순대로 자신의 거처에서 독대하고자 했다.
부름을 받고 온 독준성은 뭔가를 짐작한 듯 긴장했으면서도 기대에 찬 모습이었다. 스스로 최대한 자제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별 효과는 없어 보였다.
몇 가지 잡담, 그리고 옥한성 관리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먼저 나눈 후.
"네게 선택지를 주마."
한유진은 분위기를 잡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나는 지금껏 네가 익혀온 무공의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길이다. 하지만 성취를 이룬다면, 기본 이백 년 이상 살 수 있는 것은 물론 지금의 나와 비슷한 능력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독준성은 이 무림 세계식 표현으로 슬슬 통천을 바라보는 나이다. 50세가 다 되어간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론 수선의 길을 막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겠으나, 화경의 고수인 그는 육체와 영혼이 모두 강건하고 기를 다룬 경험도 풍부하여 아직 기회가 있었다.
신식으로 가늠한 그의 영근 재능이 한유진 자신보다 나았기에 더욱 그랬다. 진영근 중위권 정도로 느껴졌으니까.
"다른 하나는 심법만을 전환하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길이다. 성취를 이루기도 쉬울 테고, 일반적인 내력이 아닌 원력이라는 특별한 힘을 다룰 수 있게 되겠지. 하나··· 천운이 따라준다 한들 생사경이 마지막일 거다."
이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자의 길은, 생사경 이상의 성취가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백 년 수명과 능력 등은 첫 번째 성취에 불과하다. 두 번째, 세 번째 성취가 있으며, 만일 네가 거기까지 성장한다면 천 년 이상을 살 수도 있다. 한 손으로 태산을 눌러 부수는 일도 가능할 테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한유진이 이렇게 자신을 불러놓고 헛소리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독준성은 곤혹스러워했다.
"한 번 보고 싶으냐?"
"···그, 전자의 길에 대해서 말씀이십니까?"
"보여줄 테니 마음을 열고 저항하지 말아 보거라."
곧.
준비할 잠깐의 여유를 준 한유진이 환몽심탈술을 발휘했다.
드래곤 하트 제련 진행도에 따라 점점 더 활짝 피어가는 신통과의 상승효과에 힘입어, 또한 한유진의 당부대로 최대한 마음을 열고 저항하지 않기로 한 독준성의 태도에 힘입어.
한점의 부족함도 없이 펼쳐진 법술이 독준성에게 '수선계'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적당히 필요한 부분만을 편집하듯 만들어 낸 환상이었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 이해가 쉬울 터였다.
잠시 후.
환상에서 벗어나고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가 조금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 무존께선··· 진정··· 진정 선인이셨습니다."
경탄에 젖은 것 같기도 하고 충격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부정적인 쪽으로가 아닌 긍정적인 쪽으로였다.
"선인이라기엔 당치 않다. 또한 내가 보여주었듯 그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너는 선인이 되기를 꿈꾸다가 지금 가진 힘과 명예마저 잃을 수 있음을 명심해라."
"괜찮습니다."
충고에도 불구하고 독준성은 즉시 답했다.
그는 과연 화경의 고수다운 안광으로, 하나 단지 고수이기에 드러나는 것이 아닌, 일개 낭인 출신으로서 정도맹의 전투단 단주까지 올라선 집요함을 품은 인물다운 눈빛으로 한유진을 쳐다봤다.
"한낱 삼류무사만도 못한 처지가 되더라도, 저는 무존께서 보여주신 선도를 걷겠습니다. 그것이······ 후자의 길을 택하여 잠깐 만족하다가 평생토록 후회하는 일보다 나을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그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한유진은 그를 박세룡과 비슷한 인물 정도로 생각했다. 하나 보면 볼수록 다르다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독준성은 박세룡보다 훨씬 더 성장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권력은 그저 수단일 뿐 언제든지 내팽개칠 수 있는 자였다.
계산이 빠른 이성적인 성격과 경력에 걸맞은 노련함은, 그저 유능한 사람으로서의 면모일 뿐 결코 둘이 같은 부류라서가 아니었다.
"좋다."
한유진은 어째서인지 흡족한 마음이 되어 일찍이 이 무림 세계의 문자로 번역해 둔 회원공과 기초 법술 서책을 저물대에서 꺼냈다.
이렇게 대놓고 저물대를 사용한 적이 몇 번 없기에 독준성은 처음이 아님에도 매우 눈을 빛내며 신기해했다. 동시에 더욱 '수선자'에 대한 욕망이 치솟는 기색이었다.
"네 입문이 빠르다곤 할 수 없으나 결코 느리지도 않다. 이미 화경에 올랐을 만큼 재능이 부족하지도 않으니, 높은 확률로 지금의 내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스승님으로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처음 부탁드렸던 그때 당시부터 이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한유진은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일단은··· 그냥 선배님으로 불러라. 선도를 걷는 이들은 자신보다 경지 높은 수사를 보통 그렇게 칭하니까."
독준성은 잠시 침울해진 표정이었으나 빠르게 수습하곤 더없이 정중한 예를 취해 보였다.
"예, 선배님. 부단히 정진하여 반드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몇 마디 격려를 더해 준 한유진은 그를 내보냈다. 과연 무림인이 수선자로 전향해서 어떤 성과를 보여줄지 꽤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다음 차례로 부른 것은 서광가후였다.
그와의 대화도 독준성과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갔고, 예의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게 됐다.
하지만 역시 서광가후는 독준성과 다른 사람이었기에 반응도 달랐다.
"저는······ 무존께서 생각하시는 더 나은 선택지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수십 년을, 어쩌면 백 년 이상을 좌우할지도 모를 선택인데, 내게 맡기겠다고?"
"온전히 맡기고자 함이 아닙니다. 단지 저보다 훨씬 뛰어난 안목을 갖추셨을 고인의 조언을 얻고 싶을 뿐입니다."
대략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며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광가후의 영근 재능은······ 잘 쳐줘야 위영근 상위권이다.'
영기가 풍부한 세상이었다면, 하여 각종 영재와 영단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법혼기까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을 그런 재능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이 세상에선 아니었다.
비록 하위권이라지만 어쨌든 진영근자인 한유진 자신이, 이곳보다 열한 배 이상 영기 풍부한 원시림에서, 온갖 영기 깃든 음식을 먹으며 5년이 넘게 수련하고서야 법혼기에 올랐다.
물론 완벽축기를 노리지 않았더라면 그보다 훨씬 더 빠른 2년 정도 만에 법혼기에 올라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 2년을 기준으로 두고 가늠해 봐도, 서광가후가 법혼기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세월이 상당했다.
우선 영기 농도가 원시림의 1할에도 못 미치는 만큼 열 배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며, 영기 깃든 음식 따위도 없으니 최소 두 배가 더 걸릴 테고, 재능마저 위영근일 뿐이니 족히 세 배가 넘는 어려움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치면 무려 백 년이 훌쩍 넘어간다.'
설령 어찌어찌 겨우 수명이 다하기 전에 법혼기에 오르더라도, 5할 미만의 승화율밖에 이루지 못했을 테니 능력이 뛰어나지도 못할 터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냥 원력 무공을 대성하여 현경의 경지에 오르는 게 더 가능성 높아 보인다.
원력을 다루게 된 만큼 전투력도 여느 법혼기 수사보다 마냥 뒤처지진 않을 것이고 수명도 꽤 길 것이다.
"내 생각엔······."
하여 한유진은 그러한 점들을 간결하게 짚어줬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느낌 없이 장단점을 비교할 수 있게끔 말이다.
표정마저 살짝 찌푸리며 힘겹게 고민하던 서광가후가 곧 답했다.
"원력 무공을 익히겠습니다."
"좋다."
선택을 내렸으니 이제는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하늘의 별만 쳐다보다간 발밑의 꽃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내가 너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말하면서 그는 저물대에서 자신이 창안한 기초적인 원력 무공심법을 꺼내 건넸다. 이름은 아주 직관적인 '원력심공'이었다.
불현듯.
그 서책을 받아 든 서광가후가 부모나 스승에게나 하는 엎드려 절하는 예를 취했다.
제자로 받아달라는 무언의 압박이라도 되나 싶어 살짝 기분이 나쁠 뻔했으나, 곧 그런 게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엎드린 채 울고 있었다.
"제가 첫 만남에서 감히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를 저질렀음을 기억하실 겁니다."
"어허. 다 지나간 이야기를 왜 꺼내나? 그리고 그건 딱히 네 잘못만이라고 할 수 없다."
"바로 그렇게, 무존께서 드넓은 도량으로 제 목숨을 거듭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이렇게 신공까지 하사하셨으니··· 저는 이런 식으로밖에 제 감사함을 표할 수 없습니다."
울먹이면서도 그는 용케 말을 더듬거나 발음을 뭉개지 않았다. 바로 그래서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노력과 진심을 담은 것이 느껴졌다.
"무존께서 원하시는 한 평생을 다해 모시며 살겠습니다. 허락도 없이 무존을 주군처럼 여기는 제 건방짐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한유진은 어물술로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어깨를 토닥여 줬다.
"감사 인사는 충분히 받았으니 진정해라. 그렇게까지 비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 마음이 유지되는 와중 옆에서 소소하게 도와주기만 해도 나는 충분하다."
찍-! 찍!
방 한쪽에서 조용히 상황을 보던 무용이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런 녀석을 힐끗 본 한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정화술로 서광가후의 울음 자국을 지워줬다.
곧 다시 흘러나오는 눈물로 별 쓸모없는 행위가 돼 버렸지만 말이다.
"가서 따뜻한 차나 마시면서 진정해라. 겸사겸사 은미령도 불러오고."
"예, 무존······."
"그리고, 호칭도 앞으로 그냥 선배님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예······ 선배님······."
끝내 완전히 잠겨버린 목소리로 답한 그가 소매로 눈물을 닦더니 공손하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찍! 찌직-!
"음, 그래. 진심 어린 감사를 받으니까 나도 기분이 좋네, 좋아."
여전히 옷 입은 상태의 무용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고 있길 잠시.
은미령이 도착했다.
한유진은 다시 분위기를 잡고서 선택지를 제시했다.
"전자를 택하겠습니다."
별 고민하지도 않고 단호하게 선택하는 은미령의 모습에 그는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은미령의 영근 재능은 서광가후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딱 4할 승화율을 달성하여 법혼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과연 수명이 다하기 전에 해낼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아니, 불확실한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유가 있나?"
결국 그렇게 묻자, 은미령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나직한 어조로 답했다.
"제가 예전에 어느 서책에서 보기를, 선(仙)범(凡)이 유별하다고 하더군요. 은공께서는 선인이시니 범인에 불과한 저와 확실히 다르십니다."
"나는 선인이 아니다."
"하나 적어도 그렇게 되는 과정을 밟고 계시겠지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은미령이 말을 이었다.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거기에 담긴 뜻은 산처럼 확고했다.
"저 역시 은공의 뒤를 따르고 싶습니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후회할 것이 분명하니까요."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잠시 후.
속으로 탄식을 내뱉으며 한유진은 결국 수락하고야 말았다.
그는 독준성에게 준 것과 같은 내용의 서책들을 건네주며, 앞으로 '거래'하게 될 때 이 세계의 모든 영재를 최대한 끌어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 * *
세 '후배'들에게 선택지를 준 지 달포 정도가 흘렀을 때.
문득 한유진은 윤회성불사에 방문하겠노라 선언했다. 그에 독준성과 서광가후가 즉시 준비를 시작했고 은미령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한유진의 신기막측한 능력을 잘 아는 터라, 또한 윤회성불사가 그리 멀지도 않은 터라 여행 준비는 금방 끝났다. 장원이야 잠시 비워둬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 말이다.
그렇게 넷은 단출한 모습으로 옥한성을 떠났다.
어찌나 차림이 단출했는지, 금련무존의 얼굴 한 번 보겠다며 근처에 머물던 무인 중 누구도 그들의 외출을 알아보지 못했다.
급한 목적의 여행이 아니었기에 일행은 근처 풍광 좋은 명소를 찾아 구경하기도 했다.
하여 가까운 거리에도 불구하고 열흘 정도가 걸려서야 마침내 윤회성불사에 도착했다.
잘 정비된 산길을 올라 직접 보게 된 윤회성불사는 과연 유명세에 걸맞은 규모와 엄숙함을 갖춘 사찰이었다.
크고 아름다운 산악 지대에 걸쳐 고풍스러운 목조 건물들이 자연과 하나 된 듯 자리해, 실로 조화로우면서 존중을 불러일으키는 느낌이 있었다.
"가자."
잠시 멈춰 서서 구경하던 한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일행과 함께 윤회성불사 정문으로 향했다. 상당수의 참배객이 드나들고 있는 장소였다.
64화. < 윤회성불교의 신식비술 >
특별한 제지 없이 정문을 통과한 일행은, 꽤 주목을 받으면서도 진짜 정체를 고려했을 땐 별 주목받지 않는 상태로 평범한 참배객들을 따라 움직였다.
종교적 의미를 가진 몇 개의 문을 통과하고, 정성스레 만들어진 성인 불상에 참배하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불경 소리를 들으며 석탑 등을 둘러봤다.
'과연, 여기 승려들은 삭발하지 않는구나.'
머리를 아주 깔끔하게 위쪽으로 동여맸을 뿐이라 한유진으로선 조금 생경했다. 물론 그럼에도 종교인다운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일행은 한유진이 대체 왜 윤회성불사에 들르자고 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정말로 평범하게 참배만 하러 왔으리라곤 생각지 않는 모양이다.
확실히 그건 맞는 생각이었다. 다만 한유진은 자신들이 이렇듯 평범하게 행동해도 윤회성불사에서 충분히 알아보리라 생각했고, 누군가 찾아올 때까지 이곳의 정취를 좀 느껴 볼 심산이었다.
과연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잠시 후, 한 젊은 승려가 다가와선 독준성에게 말을 건 것이다.
"혹시, 섬뢰검 독준성 대협 되십니까?"
"그래."
"하면 이쪽 시주님께서··· 금련무존이십니까?"
"맞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그 젊은 승려는 놀람과 동경이 조금 섞인 기색으로 정중하게 합장하며 인사했다.
"방장 스님께서 만나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무림십존의 제일좌를 차지한 생사경의 고수, 혜각대사 백지담을 말함이다.
"갔다 올 테니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한유진은 무용이를 은미령에게 맡기며 말했다.
"예, 은공."
"예, 선배님."
옆에 있던 젊은 승려는 선배님이라는 호칭이 썩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나 그는 쓸데없는 질문 대신 한유진을 안내하는 일에 집중했다.
일반적인 참배객은 출입이 금지된 안쪽 구역으로 들어갈수록 고즈넉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깊어졌다. 특이하게도 사슴과 다람쥐 같은 산짐승들이 별 경계도 없이 사찰 내부를 돌아다니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확실히 독특한 정취로군······.'
지성 낮은 야생동물조차 이곳의 분위기에 감화된 듯한 모습이었다.
몇 분 정도를 더 걷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윤회성불사의 방장이 머무는 거처는 규모가 작지 않았으나 결코 화려하거나 위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큰 규모 역시 무언가 격식을 위해서라기보단 오직 실용적인 이유로 그렇게 만들어진 듯했다.
"어서 오십시오."
안내역의 젊은 승려가 합장하며 물러나는 때, 밖으로 나와 서 있던 한 늙은 승려가 한유진을 맞이했다.
눈처럼 흰 머리카락과 눈썹 및 수염 등이 무색하게도 바른 자세와 건장한 체구에서 매우 정정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가사복의 형태와 은은하면서도 중후하게 풍겨오는 기세를 보면 그가 누군지는 뻔했다.
"금련무존께서 이렇게 방문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혹 소승이 참배를 방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건 아닙니다."
상대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존중에 한유진도 정중히 답했다.
"방장님을 만나러 왔으니 딱 적절한 때에 불러주신 셈입니다."
"어떤 용건인지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생사경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소위 심검(心劍)이라고도 부르는 그 힘 말입니다."
"허어······."
그는 조금 의아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곤혹스러운 듯했다.
"금련무존께서도 이미 생사경에 오르시지 않았습니까? 소문의 반만 사실이어도 소승보다 더 높은 성취를 이루셨을 터인데······."
"싸움 실력만 따지자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나, 아쉽게도 저는 생사경이 아닙니다."
여전히 의아하면서도 곤란하다는 듯 한 차례 수염을 매만진 그가 물었다.
"이미 심안(心眼)을 다루시면서 어찌 생사경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이것 말씀이시군요."
신식을 특이하게 움직이며 한유진이 묻자, 혜각대사의 눈이 바로 그 신식을 따라 살짝 움직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걸 신식이라고 부릅니다. 아주 유용한 감각으로 잘 사용하고는 있지만, 이것만으로 상대의 생사를 좌우할 수는 없으니 어찌 생사경이라 하겠습니까?"
"으음···?"
이제야 그는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설마, 그저 개안만 했을 뿐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겁니다."
"그럴 수가······ 그건 마치······ 심법도 없이 내공을 깨우쳐 다룬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는 말하다가 어떤 감상을 받았는지 탄성을 냈다.
"실로 하늘이 내린 기재십니다. 대체 어떻게······ 허어······."
상대의 반응을 보던 한유진은 이 세계 생사경의 신식비술에 대해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신식비술에 신식을 개화하는 방법까지 포함된 모양이군.'
대체 어떻게 법혼조차 없이 신식을 개화하여 그것으로 적을 상대하는 비술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그는 오히려 이 세계가 더 신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곤란하기도 했다.
"제게 생사경의 비밀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혜각대사는 잠깐 탄식하듯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과연 예상대로의 답을 했다.
"이곳까지 몸소 발걸음하신 금련무존께는 실로 미안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저희 윤회성불사의 전승비전을 어찌 외부인에게 함부로 개방할 수 있겠습니까."
"염치도 없이 공짜로 알려달란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유진은 포기하지 않고 품에서 미리 준비해 둔 한 권의 서책을 꺼냈다.
바로 서광가후에게 전수해 준 원력심공이었다.
"이걸 한 번 보시지요. 제가 최근에 창안한 무공심법입니다."
어물술로 날아온 서책을 받아 든 혜각대사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그것을 펼쳤다.
그렇게 초반부를 살피다가 재차 눈을 감고 생각하고, 다시 눈을 떠 살펴보기를 두어 번 정도 반복한다.
그러다 마침내 서책을 덮으며 탄식을 흘렸다.
"원력······ 이게 정말 수련이 가능한 무공입니까?"
"당연하지요. 그 원력심공을 드릴 테니 제게 생사경의 비밀을 알려주십시오. 이 세상 어디에서든 그 어떤 방식으로도 유출하지 않겠노라 맹세하겠습니다."
이후로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포기하기 힘들 거다.'
한유진은 나름 자신이 있었다.
원력은 명백하게 영기의 상위격 힘이다.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공법서 초반부에 서술했으니, 결코 생사경의 비술보다 가치가 낮지 않음을 깨달았을 터다.
'욕심이 난다 한들, 감히 내게서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을 테고.'
그가 별 대책도 없이 생사경의 고수가 도사린 윤회성불사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여태 열심히 드래곤 하트 제련을 해 왔기에 일부 성과가 있었다.
바로 새 신통이 마침내 완전히 개화한 것이다.
아직 이름을 붙이진 못했으나 기대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신통이었다.
무려 환상과 현실을 일부 뒤섞어 대체할 수 있었으니, 아직은 극복할 수 없는 여러 제한에도 불구하고 특히 목숨을 구하는 쪽으로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또한 드래곤 하트의 심경 단계 제련이 완성되어 갈수록 신식을 포함한 정신력이 강해지기도 해서, 아무리 생사경 고수의 그 '심검'이 위험할지라도 한 번에 당하진 않으리란 믿음이 생겼다.
즉.
만약 혜각대사가 말도 안 되는 탐욕을 부린다면 그는 얼마든지 힘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잠시 후.
"우선 그 맹세와 더불어, 저희 윤회성불사가 먼저 금련무존께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평생 적대하지 않겠다는 맹세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혜각대사가 나직이 물어 왔다. 한유진은 기뻐하며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딱히 세력 같은 걸 넓힐 마음도 없고 싸움을 좋아하지도 않으니까요."
"허허······ 그러시군요. 음······."
엄숙하게 눈을 감았다 뜬 그가 말했다.
"부디 하루 정도 시간을 주십시오. 소승이 혼자 결정하기엔 사안이 무겁습니다."
"얼마든지요."
혜각대사는 원력심공 서책을 허공섭물로 돌려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일 결정이 내려지면 좀 더 자세한 논의가 있겠습니다만······ 그 비밀이 기대하시는 것만큼 대단치 않을 수 있단 점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심지어 형태가 워낙 특이한지라 아무것도 얻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형태가 특이하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그것은 내일 이야기를 들으시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들어와서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본론이 다 끝났음을 안 한유진은 웃으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에 혜각대사는 직접 하루 머물 숙소를 안내해 주겠다며 나섰고, 한유진은 그것까지 거절하진 않았다.
* * *
사찰에서의 조용한 밤이 지나간 후.
다행히 일이 잘 풀렸다.
윤회성불사가 거래에 응하기로 한 것이다.
재차 방장 혜각대사와 마주하게 된 한유진은 이번엔 처음부터 건물 안으로 초대받아 차를 대접받을 수 있었다.
한데, 그 향기를 즐길 새도 없이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 비밀이, 그림 한 폭에 담겨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 혜각대사가 말을 이었다.
"육도윤회도라 불리는데, 저희 윤회성불사의 승려 중 현경에 오른 이라면 누구든 관조하며 참오할 기회가 있지요. 하나, 막상 그것으로 깨달음을 얻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음."
거짓이 아닐 터였다. 역사를 봤을 때 윤회성불사에 항상 생사경의 고수가 있진 못했으니까.
'그림이라니.'
조금 우려되긴 했지만 한유진은 자신의 초월적 이해력을 믿었다.
"괜찮습니다."
하여 그렇게 답하면서 이번에도 미리 챙겨두었던 원력심공 서책을 품에서 꺼내 건네주는 때.
"또한 아셔야 할 부분이, 육도윤회도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모든 선대 고승께서 한결같이 말씀하시길, 저희 윤회성불교의 교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승도 같은 의견이지요."
"···그렇습니까?"
한유진은 깨달았다.
'어쩐지 거래에 순순히 응하더라니, 내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 여겼나 보군.'
교리와 어떤 식으로 연관이 있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영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을 탐구해 보실 시간을 충분히 드리고자 합니다."
혜각대사는 정갈한 태도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그사이 저희는 금련무존께서 주신 무공심법을 살피게 될 터이니, 만일 불법을 탐구하시다가 마음이 바뀌신다면, 다른 방식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문득, 한유진의 품에 안겨 찻잔 옆 다과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무용이를 향해 빙긋 웃었다.
"이쪽의 작은 도반(道伴)께선 이름이 어찌 되시는지 궁금하군요."
도반이란, 대략 같이 수행길을 걷는 벗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무용이라고 합니다."
"무용···?"
"자기 자신을 지킬 최소한의 무용을 갖췄으면, 하는 뜻이지요."
"허허, 그렇군요."
차마 쓸모없다는 뜻의 그 무용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한유진은 계속 식탐을 드러내는 녀석을 쓰다듬고는 자신의 몫으로 나온 다과 일부를 건네줬다.
용케 두 손으로 그걸 잡고 냠냠 갉아먹기 시작한 모습이 절로 마구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
하나, 막상 그 모습을 보던 한유진은 아주 희미하게 심란한 기색을 띠었다.
'역시 그냥 착각이 아니야.'
근래 들어 어쩐지 감정을 느끼는 일에 조금씩 무뎌지는 것 같다 싶더니만, 오늘 새삼 다시 보니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무심겁(無心劫), 결국 오고야 마는가.'
모든 수선자들이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또한 반드시 극복해 내야만 하는 수도삼겁(修道三劫)의 첫 번째.
언제 어떻게 오는지 알 수 없고, 해결하는 방법과 그에 걸리는 시간도 제각각이며, 수선 재능에 상관없이 누군가는 너무나 쉽게 해결해 버리지만 누군가는 끝내 꺾여버리고야 마는.
실로 '겁'이라고밖에 칭할 수 없는 큰 재앙이자 시련이 찾아들었다.
아무래도 드래곤 하트 제련으로 정신력의 급격한 성장을 이루면서 촉발해 버린 것 같았다.
심각한 문제지만, 지금 상황에서 깊이 빠져들어 생각할 화두는 아니다.
그는 무용이를 재차 쓰다듬어주곤 혜각대사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제안대로 하겠습니다. 한데, 충분한 시간이라면 어느 정도를 뜻하시는 겁니까?"
"금련무존께서 원하시는 만큼 머무셔도 좋습니다. 단, 육도윤회도는 석 달 이상 관조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저희 윤회성불사의 승려들에게도 적용되는 규칙으로, 자칫 심마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것은 누가 어떤 식으로 심마에 빠졌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윤회성불사의 치부라 볼 수도 있는 이야기였으나, 바로 그렇기에 거래에 성실히 임하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확실히 보통 그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며 한유진은 승낙의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65화. < 육도윤회와 감정 >
언제 끝날지 모를 사찰 생활을 하게 된 건 분명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하나 윤회성불사에서 마련해 준 거처는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역사 깊은 사찰에는 확실히 특유의 분위기가 깃드는 모양이었다. 무용이마저 낮은 영기 농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꽤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독준성과 서광가후는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옥한성의 장원을 오가며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사이 은미령은 정도맹의 경빈각에서부터 그래왔듯 한유진의 시중을 들었다. 그는 문득 그런 은미령의 세심한 시중이 매우 익숙해졌음을 깨달았다.
'현실로 돌아가면 허전할 게 분명하겠구나.'
그렇게 돌아갈 일을 떠올리니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기분이었으나, 오히려 복잡미묘해지는 감정 상태가 반가웠다.
그가 스스로 느끼며 생각해 낸 무심겁에 대응하는 첫 번째 방법은, 무뎌지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자극해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많은 수선자들이 비슷한 목적으로 속세의 삶을 경험한다고 했으니 분명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터다.
사실 그런 측면에서 이런 고즈넉한 사찰 생활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나마 일행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당연히 그 일행에는 무용이도 포함됐다. 따지자면 녀석 덕분에 무심겁이 오고 있다는 걸 빠르게 알아채기도 했다.
녀석이 평소처럼 애교를 부리는데도 어쩐지 손이 늦게 나가서 쓰다듬어주게 됐었으니까.
'심각한 문제야, 음······.'
그는 자신의 품에 안긴 채 늘어져 졸고 있는 무용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자칫하면 더는 애니멀 테라피의 위대한 효능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니, 저절로 모골이 송연해지고 식은땀이 난다.
잠시 떠올랐던 잡념을 마무리하며 그가 다른 경전을 살폈다.
현재 그는 윤회성불교의 교리에 관한 서책들이 보관된 장경각에 있었다.
상당한 규모가 있는 건물로, 평범한 사람이라면 원하는 분야의 서책을 찾는 것만으로도 며칠 이상 걸리면서 기가 질리게 될 그런 장소였다.
하여 그러한 점을 우려했는지 윤회성불사에서 젊은 승려 한 명을 붙여주려고 했으나, 한유진은 정중히 거절하고선 혼자 살펴보기를 원했다.
초월적 이해력을 바탕으로 향상된 지능에 신식까지 더해진 그가 도움이 필요할 리 없다. 그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장경각의 모든 서적 제목을 살피고 내심 분류까지 마쳤다.
그리고 '육도윤회'와 관련된 경전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이 읽어 내려가는 것이지, 그냥 책장에 꽂힌 서책 앞에서 신식으로 훑어보고 지나가는 작업에 가까웠다.
원래도 서책 한 권 정도 읽기는 별로 안 어려웠는데 드래곤 하트 제련으로 정신력이 강화된 마당이다. 책 한 권 전체를 살피는 일이 평범했던 시절 책의 목차를 살피는 일처럼밖에 안 느껴졌다.
중간에 잠에서 깬 무용이에게 옥로주를 한 모금 주고 자신도 한 모금 들이켜 맛과 향취를 즐기면서 계속 작업을 이어가길 대략 한나절.
마침내 넓은 장경각을 한 바퀴 둘러보게 된 그는 밖으로 나가 근처를 가볍게 산책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산책만 한 일이 또 없다.
'육도윤회라······.'
당연히 이 세계 윤회성불교의 육도윤회는 지구의 것과 얼핏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특히 어느 부분이 가장 다른가 하면, 인간의 '기본 감정'과 연결 지어 육도윤회를 설명한다는 점이 그랬다.
행복의 세계, 천락도(天樂道).
기대의 세계, 인욕도(人欲道).
슬픔의 세계, 망혼도(亡魂道).
분노의 세계, 야수도(野獸道).
혐오의 세계, 기충도(奇蟲道).
절망의 세계, 심연도(深淵道).
그는 향상된 지능에 힘입어 대학교에서 한 번 들었던 심리학 교양 강의의 내용을 떠올려 냈다.
'폴 에크먼이었나? 그 사람도 인간의 기본 감정을 여섯 가지로 정의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도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놀람, 혐오였을 것이다.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얼굴 표정들을 실증적 근거로 제시해 현대 심리학의 주류로 인정받았고, 인공지능 등의 감정 분석 모델로까지 활용된다고 배웠던 것 같다.
'꽤 겹치는군.'
물론 이곳의 육도윤회에선 놀람이 기대로 대체됐지만, 서로 연관성이 있고 기대가 놀람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감정이란 점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두려움이 절망으로 대체된 것도 얼추 이해가 가고 기쁨이 행복으로 대체된 것 역시 그렇다.
'행복에는 당연히 기쁨, 즐거움, 애정 등이 포함될 테고······ 기대에는 희망, 탐욕, 믿음 등이 포함되는 것 같고······.'
마찬가지로 슬픔에는 상실감이나 외로움 등이, 분노에는 증오와 억울함 등이, 혐오에는 불쾌함과 경멸감 등이, 절망에는 두려움과 패배감 등이 포함될 것이다.
또한 그 감정들은 일종의 윤회라 볼 수 있는 흐름을 갖고 있었다. 정순이든 역순이든 어느 정도 말이 되는 느낌을 품고서.
문득.
커다란 나무 아래 멈춰 선 그는 상당히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다.
무심겁을 겪게 된 상황에서 하필 감정과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진 신식비술을 마주하게 됐으니, 실로 공교로울 수밖에 없다.
'이것마저 계산에 넣어져 이 세상의 문이 열린 건가, 설마?'
드래곤 하트를 안전하게 제련할 수 있는 환경과, 지구에 보급하여 카르마를 쌓기 딱 좋은 각성초와 무공이라는 지식에 더해, 그저 귀중한 정도를 넘어 무심겁에마저 도움이 될지 모를 신식비술까지.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좋아서 우려되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는 푸른 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봤다.
그러고 있자니 떠오르는 여러 잡생각들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얼마든지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 수도 있겠구나.'
각성 능력이 이토록 바람에 잘 부합하는 세계의 문을 열어줄 수 있다면, 틀림없이 '엄청나게 행복한' 세계의 문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지금 알게 된 육도윤회의 천락도 같은 세계의 문을 말이다.
십여 년 후에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른 세상에서 몇 년을 살든 현실에선 고작 하룻밤 정도만이 흐를 뿐이니 시간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한데, 그런 생각을 하는 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비웃음 같은 표정을 띤 상태였다.
'하늘과 땅을 포함한 세상 모두를 속일 수 있을지라도, 결국 나 자신을 속이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전부 무슨 소용일까.'
아무리 정교하고 환상적인 꿈을 꾸더라도 본인이 그것을 꿈이라고 인지한다면 그 결말이 어떨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내가 굳이 이 세계를 무자비하게 약탈하여 이득을 취하지 않는 것도, 결국 나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함이거늘.'
도심이라는 것을 꼭 어렵게만 여길 필요가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인 스스로의 선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되는 거다.
이건 좀 아닌데, 싶으면 안 하면 되고.
이건 괜찮지, 싶으면 해도 된다.
그러는 와중 당연히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할 일도 생기겠지만······.
'잘 알면서도 저지르지만 않으면 괜찮아.'
한동안 나름 철학적인 잡념에 빠져 시간을 보내던 그는, 지루해진 무용이가 하품하며 뒤척이는 것에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기분 전환을 마치고선 다시 장경각으로 향했다.
* * *
무정살왕 괴설.
그는 사파의 아주 유명한 살수 조직 '극야'의 수장이자 최고위 살수로서, 화경에 오른 무공을 오직 숨어서 적을 기습해 죽이고 도망치는 쪽으로만 갈고 닦은 두려운 자였다.
동시에 수련한 무공 '무정살검'의 영향을 받아 인간적인 감정이라곤 전혀 없이 살인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지독한 자였다.
그렇게 이십여 년 전 무림십존의 일인이던 어느 현경 고수의 다리를 잘라 은퇴시킨 전적마저 있었으니.
혐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살수 주제에 무려 왕(王)자가 들어간 별호를 얻으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무정살왕이 바로 오늘.
충분한 대가를 받아 살행에 나섰다.
살행을 벌일 장소가 그 대단한 윤회성불사였고, 주변에는 그 유명한 생사경의 고수 금련무존이 자리할 터였으나.
언제나처럼 인간 같지 않은 냉정함으로 가능성을 점친 그는 윤회성불사의 담을 넘었다.
막상 죽여야 할 대상이 아직 절정에도 이르지 못한 애송이라면 결코 실패할 리가 없다.
과연 그런 판단이 절대 과분하지 않다는 듯, 담을 넘어 움직이는 그의 신형은 유령보다도 은밀했다.
단지 어두운 곳을 찾아 조용히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밝은 달빛 아래를 지나면서도 어지간한 고수조차 모를 만큼 신형이 투명해진 채였고, 밟고 지나가는 아주 작은 잡초마저 흔들리지 않으며 공기보다도 무게감이 없는 모습이었다.
초상비를 가뿐히 뛰어넘는 답설무흔의 극치였다. 중간중간 어기충소의 묘리로 건물 지붕을 올라타는 움직임 역시 비현실적으로 은밀했다.
그렇게 무정살왕은 흡사 제집 마당을 가로지르듯 목적지에 도착했다.
불 꺼진 고요한 건물의 틈새로 그림자처럼 스며든 그가 유리알 같은 회백색 눈을 굴리며 목표물의 숙소를 찾는 때였다.
앞으로 나아가던 그가 일순 멈칫하며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표정이 전혀 없는 그는 어둠에 완전히 녹아든 모습으로 주위를 살폈다.
인형보다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경계 태세를 취한 그에게선 심지어, 사람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심장박동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멈춰 서서 경계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완벽하게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던 그의 정신에 아주 희미한 현기증 같은 느낌이 스쳐 지나간 탓이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을 경계했음에도 다른 이상이 감지되지 않았다. 그 의문의 현기증 비슷한 감각도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계속 이렇게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만두고 물러나거나 임무를 지속해야 한다.
기계 같은 차가움으로 그는 임무 지속을 선택했다.
여러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그 미지의 현기증은 그저 인간으로서의 불완전함일 뿐 위험 요소로 보기 어려웠다.
빠르게 건물 내부를 수색한 그는 금방 목표물을 찾았다.
'현백파의 청류백봉, 은미령.'
잠든 미모의 여인을 보고 그저 목표물이 분명한지를 판단한 무정살왕이 허리춤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당연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뽑혀 나온 검은 흡사 손잡이만 있는 듯 형체가 안 보였다.
무정유리검이라 불리며 백대 보검의 상위권을 차지한 무기다. 살수 조직 극야의 신물이자 상징이기도 했다.
그 검은 낭비 없는 움직임으로 잠든 은미령의 미간을 조용히 파고들었다.
그 과정에서 얼핏 드러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은, 사람의 두개골을 뚫고 뇌를 휘저으면서도 일말의 소음을 발생시키지 않았다. 그 어떤 기운의 여파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살기 또한 당연히 없었다. 무정살왕은 그런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딱 필요한 시간을 기다리다가 검을 뽑자, 구멍 뚫린 은미령의 미간에서 피와 뇌수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완벽하게 숨이 끊어졌다.
무림식 표현으로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을' 그런 모습이다.
그는 다시금 유령보다도 은밀하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이어 들어왔을 때보다 더 빠르고 수월하게 윤회성불사를 벗어났다.
이번에도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예측에 딱 부합하는 완벽한 살행이었다.
은밀하면서 빠른 경공술 극야무영보(極夜無影步)로 한참의 거리를 벌린 그는, 추적이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온갖 비밀통로를 거치며 여러 번 변장했다.
그런 식으로 무려 나흘간 숨고 빙빙 돌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를 반복했다. 실로 완벽에 완벽을 더하는 뒤처리였다.
마침내 살수 조직 극야의 숨겨진 본부에 들어선 그는, 절차에 따라 자신의 살행을 되돌아보고 이를 의뢰한 자의 장부와 대금 등을 확인했다.
의뢰자는 황실의 종2품 관리자인 무림조정사(武林調停使) 도무원이었다.
무정살왕은 이 의뢰의 숨겨진 내막에 대해 몇 가지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하나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었고 굳이 자세히 알아볼 생각 또한 없었다.
"그러면 넌 이제 쓸모가 없구나."
바로 그 순간.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무정살왕이 즉시 반응했다.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터져 나오며 가히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무정유리검을 뽑아 휘두른다.
사출된 검기는 그의 주변 사방을 헤집어 찢으면서 적의 공격을 대비했고, 그 사이 무정살왕의 신형은 마치 허깨비처럼 투명해지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를 행했음에도, 어느샌가 천장에 붙어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사방으로 굴리는 그의 바로 옆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불쌍한 놈이로다. 스스로 무심겁 같은 상태를 자처해선 의미도 없이 그저 남을 죽여 살아간다는 목적만 남은 꼴이라니."
다시금, 무정살왕의 검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일시에 수 번 이상 찌르고 베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치명적인 위치로만 검날이 지나가는, 오로지 상대를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한 검술이었다.
이어 재은신하며 위치를 바꾸는 그에게 여전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엔 반대편 옆쪽이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조차 없군. 이건 뭐··· 너무 기괴해서 놀릴 마음도 안 생기네."
직후.
그가 다시 반응하기도 전.
시야 전체가 마구잡이로 일그러지며 깨져 나간다 싶더니 곧 익숙한 풍경이 드러났다.
바로 그 살행을 위해 방문했던 윤회성불사의 건물 내부였다. 그 자신은 잠입한 위치에서 조금 걸어간 모습으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몇 걸음 앞에 절대로 마주해서는 안 될 생사경의 고수, 금련무존이 자리한 채로.
"그래도 그건 좀 웃겼어. 대라신선이 와도 못 살릴 거라니, 여기 사람들은 진짜 그런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가공스러울지를 전혀 몰라."
위명에 걸맞지 않은 소탈한 태도로 그가 웃었다.
하나 무정살왕은 여전히 인형 같은 무표정과 시선으로 눈을 굴리며 기회를 살필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넌 그냥 죽는 게 축복이겠다. 잘 가라."
직후 금빛이 번쩍였다.
무정살왕은 마지막 순간까지 살 수 있을지를 고민했으나, 곧.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드는 광경을 보며 마침내 체념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66화. < 선각한 해탈자의 그림 >
황실의 종2품 관리자, 무림조정사(武林調停使) 도무원.
그자가 은미령의 암살을 사주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나 짐작해 보자면, 개인적인 은원이나 은미령 본인 때문은 아닐 듯했다.
'종2품이면 결코 낮은 직급이 아니야. 그런 사람이면 은미령 정도의 후기지수와는 엮이기조차 힘들지.'
한유진의 짐작대로 종2품은 현실 지구의 차관급과 같다.
'현백파와 관련된 문제라기에도, 은미령이 비록 유명하다지만 역시 그냥 후기지수일 뿐이니 설득력이 낮아.'
결국 가장 확률 높아 보이는 추측은 하나만이 남는다.
'나 때문이로군.'
금련무존이라는 생사경의 고수를 화나게 만들어서 뭔가를 이루려 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뛰어난 살수를 고용했다지만 어쨌든 암살이라는 사실 자체를 가릴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으니······.
'만약 일이 놈들 생각대로 흘러갔다면, 나는 배후가 따로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살수 조직들을 가만 놔두기 힘들었을 거다. 그리고 대부분의 살수 조직은 사파 소속이고.'
황실 입장에선 무림의 세력이 분열되어 싸울수록 이득일 수밖에 없다.
'혹은, 다른 누군가와 이익이 겹쳐 황실의 그 관리자도 의뢰를 받아 움직였을 뿐일지도.'
금련무존이 사파와 부딪혀 저절로 정파 소속처럼 여겨지게 될 때, 둘이 싸우는 와중 이득을 보는 세력은 암영마교도 있다.
신통과 환몽심탈술의 조합으로 무정살왕에게 의뢰한 자를 알게 된 덕에 여러 가지를 짐작해 보기가 매우 편해졌다. 과연 짐작이 맞을지는 나중에 빚을 받으러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렇다.
'황실이 나를 먼저 건드렸으니 나중에 대가 요구하기가 마음 편하겠군.'
황실비고에는 어떤 무공비급들이 있을지 실로 기대가 되는 부분이었다.
무정살왕에 대해서도 사실 상당한 흥미가 있었다.
생포하기엔 너무 기괴해서 위험하게 느껴지는 놈이라 죽여 버렸지만, 나중에 살수 조직 극야를 찾아가서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생겼다.
감정과 연관된 신식비술을 깨닫고 난 후 놈들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 과정에서 무심겁을 극복할 어떤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그러려면······ 내가 육도윤회도에서 성공적으로 뭔가를 얻어야겠지.'
생각하며 그는 마지막으로 장경각을 한 바퀴 둘러봤다.
무정살왕의 습격이 있던 날로부터 대략 보름.
육도윤회와 관련된 경전은 전부 기억하고 가능한 만큼 이해했으며, 그렇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부가적인 교리들도 전부 머릿속에 넣었다.
진심으로 윤회성불교에 귀의할 것이 아닌 한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사실 귀의한 이들 중에서도 지금 자신만큼 많은 교리를 아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지 한유진은 꽤 궁금했다.
'때가 됐다.'
마침내 그는 확신하며 장경각을 나섰다.
육도윤회도의 비밀을 파헤쳐 볼 시간이었다.
* * *
방장 혜각대사는 홀로 찾아온 한유진을 친히 안내했다.
무정살왕의 잠입에 경계가 뚫렸다는 미안함과, 그것을 트집 잡지 않는 상대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직접 나섰을 것이다.
육도윤회도는 사찰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진법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근처에는 무공비급들이 보관된 장서각 또한 있어 얼마나 중요한 장소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법륜전이라는 편액 걸린 건물은 상당한 높이를 자랑하는 모습이었다. 설명대로라면 층수가 나눠진 것은 아니고 그만큼 그림이 크다고 했다.
안내를 마친 혜각대사는 매일 정해진 시각 식사를 전달해 주겠다고 말했다.
하나 당연히 한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기간이 다 될 때까지 아무도 저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좋습니다. 하나 내부에 작은 종이 있을 터이니, 급한 일이 생기신다면 주저 없이 울리도록 하십시오."
"배려 고맙습니다."
뭔가 수단이 있겠거니, 하는 기색을 띠는 혜각대사와 마주 인사한 후 한유진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 관리를 잘했는지 내부는 깔끔했다. 그림은 윤회성불교의 상징이 수놓아진 상아색 비단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과연 크기가 상당했다.
높이만 해도 10미터 이상이었고 폭도 7미터가 넘었다.
한유진은 중앙에 마련된 포단에 앉아 잠시 마음을 안정시키고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쳤다 싶은 때, 그림을 가리고 있던 비단천을 어물술로 떼어내 한쪽에 개어놓았다.
마침내.
육도윤회도(六道輪廻圖)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김새를 파악할 수 없는 어두운 형체의 누군가가, 벌려진 양팔 사이에 여섯으로 나뉘어 순환하는 세계를 품고 있는 형상이다.
어두운 형체의 이는 검청색 의복에 금색과 흰색 구름이 수놓아진 옷을 걸쳤고, 그 색채가 단일하지 않아 위와 아래에 걸쳐 농도가 변하는 모습이다. 배경에는 산맥이 자리한 듯했으나 자세히 보면 산이 아닌 다른 무언가인 듯하다.
그 형상의 머리 위쪽으론 빛을 품은 또 다른 무언가의 형상이 어른거리는데, 얼핏 인간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하며 우주의 어느 천체 같기도 하다.
여섯으로 나뉘어 순환하는 세계는 윤회성불교의 교리에 나온 천락도, 인욕도, 망혼도, 야수도, 기충도, 심연도다. 마치 모자이크 같은 느낌을 풍기지만 조금만 집중해서 보아도 그것이 무한한 세계를 억지로 구겨 넣어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유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력으로 신식으로 동원해 그 그림을 살폈다. 영안술을 발휘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어째서인지 오히려 방해되리란 직감이 들어 그만뒀다.
그의 시선이 저절로 육도윤회의 첫 번째이자 가장 드높은 행복의 세계로 향한다. 이어 기대의 세계로, 이어 슬픔의 세계로, 그렇게 분노와 혐오와 절망의 세계로 흘러간다.
'천락, 인욕, 망혼, 야수, 기충, 심연.'
마치 원소를 설명하는 화,뇌,풍,수,토의 오행과 같다. 분명하고 절대적인 무언가라기보단 표상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중.
어느 순간.
흐름을 따라 움직이던 한유진의 의식 속, 어떤 한 세계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곧이어 나머지 다섯 세계의 모습들도 윤곽을 형성해 갔다.
동시에 오감을 자극하는 무수한 이미지들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잠겨들기를 반복했다.
한없이 푸르고 맑은 하늘, 은은한 금빛을 품은 아침 안개, 싱그러운 초목과 색색의 꽃이 피어난 평원, 우아한 뿔과 갈기 등을 뽐내며 휴식을 취하는 동물들, 나무 위 작고 귀여운 새들의 노랫소리, 맑디맑은 비취빛 강물과 그 속의 알록달록한 물고기들, 구름을 껴안은 채 초목으로 우거진 높고 아름다운 암석 봉우리들.
견고하고 웅장한 회색빛 성벽, 그 속의 화려한 궁전과 저택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로 구성된 도시, 깔끔한 거리 위 얼굴 없는 자들의 활기차고 번화한 시장, 곳곳의 그림자 드리워진 골목들에서 안광처럼 섬뜩한 빛을 발하다가 사라지는 무언가들, 배경음처럼 들려오는 희망과 탐욕에 찬 웅성거림.
사방을 아스라이 물들이는 푸른빛 안개, 완전히 텅 비어 공허하기 짝이 없는 잿빛 하늘,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모를 희미하고 음울한 불빛, 말라비틀어진 고목들 사이의 황량한 대지, 흐르는 빛에 따라 짙게 깔려 흐느끼듯 움직이는 그림자들, 미약한 바람에 실려 오는 애처로운 속삭임과 탄식성.
거칠디거친 들판과 지나치게 우거진 숲, 뇌광을 번뜩이는 먹구름이 흉포하게 휘몰아치는 하늘, 굉음과 용암이 터져 나오는 바위산, 영원히 메아리칠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전율스러운 포효성, 사방 어딘가에서 끝없이 흘러와 대지를 적시는 붉고 뜨거운 핏물, 그 위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며 자라나고 쓰러지길 반복하는 독성 가득한 식물들.
늪처럼 끈적이고 쉽게 뭉개져 달라붙는 대지, 흐늘거리는 식물의 잎과 벌레의 둥지와 거미줄 등으로 온통 가려진 하늘, 뒤엉켜 꿈틀거리면서 점액질 웅덩이를 헤엄치는 벌레들, 뇌를 갉아 먹는 듯 질척이는 무수한 소음들, 모든 것이 썩어 무너져가는 악취의 축축함과 답답함.
그 무엇도 분간할 수 없을 짙디짙은 어둠, 향하는 모든 길을 가로막는 날카롭게 녹슨 장벽, 매 걸음마다 덜컹이며 불안하게 기울어지는 울퉁불퉁한 바닥, 혹한의 돌풍 속 실려 오는 공포에 젖은 비명들, 장벽 너머 쇠사슬을 끌며 기어다니는 무언가들의 고통 어린 신음, 불규칙한 시간 간격으로 귀청을 찢으며 내리치는 벼락, 그 섬광에 언뜻 드러나는 핏빛 하늘.
정말로 그 세계들에 방문해 본 적 있는 것처럼 생생하기 그지없다.
바로 그렇기에 그림을 주시하던 한유진은 어느샌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이걸··· 이걸 대체 어떻게 관조해서··· 신식비술을 얻었다는 거지···?'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육도윤회도의 가공할 마력에 휩쓸려 허우적대면서도 그는 한 줄기 의문을 피워내며 위험을 가늠했다.
이건 결코 무림 세계 수준의 물건이 아니다.
필시 수선계의 물건, 혹은 그와 비견되는 수준을 갖춘 세계의 물건이다.
다행히 어떤 영성도 없는 그저 한 폭의 그림일 뿐이라, 이 정도 격을 보여주면서도 영성 없는 그림일 뿐이라는 점이 한편으론 매우 소름 끼치지만.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그는 주의를 돌려 이 버겁기 짝이 없는 감각의 폭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 그렇게 회피해 버리는 순간.
두 번 다시 이 정도 몰입에 빠져들 수 없으리란 사실도 직감할 수 있었다.
망설이는 와중 불현듯 혜각대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석 달 이상 관조하면 심마에 빠질 수 있다며 들려줬던 이야기들이다.
지금 보니 기간이 문제가 아닌 듯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그런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두려워진다.
바로 그때 두 번째 이변이 발생했다.
떠올랐다가 잠겨들어 사라지길 반복하는 무수한 이미지들에 섞여, 그나마 있던 여유를 모조리 앗아가는 강렬한 감정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천락도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는 우주 만물을 얻고 궁극의 진리를 깨달은 것마냥 행복했다.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과 우정 등의 모든 긍정적 감정이 영원토록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차례, 인욕도의 이미지가 떠오르자 그는 즉시 평범한 인간으로 추락해 버렸다.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못하며 환경에 적응해 결국 소소한 행복을 찾고, 그러다 일이 좀 잘 풀리는가 싶으면 허황된 믿음을 바탕으로 탐욕에 젖었다가 끝내 좌절로 빠지길 되풀이했다.
망혼도의 이미지가 떠오를 땐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공허하여 한없이 비탄스럽고 슬플 뿐이었다. 세상이 전부 무가치하게 빛바래져 그 어떤 방식으로도 이 상실감을 채울 수 없고 애통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것이 야수도의 이미지가 떠오르자 세상 전체를 불태워 죽이고 싶은 억울함과 분노로 폭발했다. 닥치는 대로 찢어 부수고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씹어 죽여 삼켜도 이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증오를 조금도 잠재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기충도의 이미지가 떠올랐을 땐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온갖 것들이 다 불쾌하고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무한한 역겨움에서 영원히 벗어나길 원하면서 연신 돋는 소름과 치솟는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마지막 심연도의 이미지는 모든 것을 끝없는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우주의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는 두려움이 좌절과 패배감으로 확장되며 그냥 전부 자비롭게 끝내달라는 간절한 체념으로 화했다.
그렇게 완전히 체념하자 곧 다시 천락도의 이미지가 떠오르며 역으로 우주 만물을 얻고 궁극의 진리를 깨달은 극도의 행복이 도래했다.
무심겁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이건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감정의 재앙적 폭풍이었다.
하여 결국 포기하려던 때.
문득.
그 인간의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감정을 표상화한 육도윤회를 품에 안은 어두운 형체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선각자(先覺者)이자 해탈자(解脫者).
그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시선이 마주친 게 아니었다.
그 초월적인 느낌을 풍기는 존재의 시선을 빌려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세상의 번뇌와 미혹에 얽매여 괴로움으로 발버둥 치는 일개 중생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그 순간부터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느껴지던 모든 육도윤회의 감각과 감정의 흐름을 남의 일처럼 관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될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이 육도윤회도에서 무엇을 진정으로 보고 느껴야 할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차원이라는 바탕 위 원소로 구성되어 유지되는 세상 속.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운명과 운명을 개척하는 삶과 죽음의 순환 아래.
- 여余가돈오頓悟해오도悟道직견直見하니아속我屬우주宇宙중中유일有一가可한영원永遠불멸不滅절대絶對불변不變함이오직오롯한정신精神일지라.
언뜻.
그런 어느 드높고 위대한 존재의 상념이 머릿속에서 범종 소리처럼 울려 퍼진 듯했다.
67화.< 새로운 신통 각성 >
한유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육도윤회도는 진실로 '그림'이었다.
그림의 형태를 빌린 어느 대단한 지식의 전승이라거나 특별한 기능이 숨겨진 도구 같은 게 아닌.
정말로 감상을 위해 작가적 색채를 담아 만들어진 순수한 예술 작품이라는 뜻이다.
초월적 이해력을 가졌음에도 머릿속에서 울린 상념이 완전하게 해석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야만 딱 필요한 만큼의 이해를 제공하면서 작품 본연의 느낌을 가장 잘 살릴 수 있었으니까!
벅차게 경험한 육도윤회의 흐름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했다. 이 그림을 그린 존재는 자신이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해석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는지를 감상자에게 보여주고 싶었음이 분명하다.
신식을 개화하고 그것으로 공방 능력까지 갖추게 되는 건, 모두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필요한 부산물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반쯤은 본능적인 직감에 따라.
그는 끝없이 윤회하는 육도의 이미지들 속에, 그것들에서 떠오르는 감각과 감정들 속에 자신만의 것을 녹여 넣기 시작했다.
작가의 화풍 위에 무작정 덧칠하는 것이 아니었다. 감상자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해석을 더한다는 느낌으로였다.
천락도의 행복에 한유진이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행복이 녹아든다.
우선 비록 고등학생 때 풍비박산 나며 상당 부분 빛바래져 버렸다지만, 그럼에도 행복했었음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기억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시절 평범하게 하교하던 중 우연히 집 앞에서 마주친 엄마가 활짝 웃으며 두 팔 벌려 안아주던 모습과, 술에 취해 퇴근하던 길에 난데없이 가족을 불러내선 길거리 어묵과 붕어빵을 사주며 껄껄대던 아빠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
개인적인 행복이라고 볼 수 있는 기억들도 있었다.
수학여행에서 첫사랑이던 여자애와 버스 옆자리에 앉아 꽤 긴 시간을 웃고 떠들었던 한때, 친구와의 내기를 계기로 힘써 공부하여 인생 처음 모든 과목을 90점 이상 달성했던 성취의 순간, 친척 집에 얹혀살다가 더는 눈칫밥을 먹기 싫어 시작했던 아르바이트 직장에서 상당한 칭찬과 함께 받았던 첫 월급 등.
사소하지만 그의 삶을 구성함으로써 결코 하찮다고는 말할 수 없을 기억들도 물론 존재했다.
게임에서 이겼거나 좋은 아이템을 먹었을 때,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쏘다니던 당시의 햇살, 평범하게 날씨 좋고 선선하던 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걷던 산책로의 풍경 등.
또한 갑작스레 각성한 이능력으로 미래를 그리며 두근거리던 심장박동 역시 빼놓을 수 없을 터다.
이렇게까지 삶을 자세히 돌아본 적 있었나 싶을 만큼, 사진첩을 뒤적이거나 메신저의 과거 기록 따위를 뒤져보는 일보다 훨씬 더 깊고 진한 농도로 추억에 젖어든다.
당연히 삶에서 행복만이 있진 않았다.
인욕도의 기대에 녹여낼 감정이 어린 기억들도 충분했다. 아니, 충분한 정도를 넘어 되레 이쪽이 훨씬 더 많았다.
근거 부족한 자신감으로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고, 때로는 닿기 어려운 가격의 물건이나 음식 따위를 보며 한숨 쉬기도 했으며, 경제적 자유라는 찬란한 꿈을 위해 도박 같은 방법으로 주식에 뛰어들었다가 손해를 본 적도 있다.
그럼에도 결국 꺾이지 않은 채 언젠간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꾸역꾸역 작은 행복에 만족하며 살아갔었다.
희미하지만 삶의 전반에 걸쳐 일상이자 평범함으로써 한가득 자리하는 풍경들이다.
망혼도의 슬픔에 녹여낼 감정의 기억으론, 딱히 드물지 않은 사연이라지만 그 자신에겐 삶이 통째로 무너지는 듯한 사건이었던 가정의 파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 사건은 야수도의 분노에도, 기충도의 혐오에도, 심연도의 절망에도 녹아들기 충분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비통함과 상실감, 어떻게 자식을 버릴 수 있느냐는 분노와 증오, 그런 이들이 자신의 부모라는 것에 대한 혐오와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비합리적인 경멸, 이 세상에 더는 확실한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으리라 여겨지던 두려움과 절망감.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만큼 강렬할 수밖에 없는 기억들이다.
소소하게는 무용이 녀석을 입양하려 했을 때 녀석이 도망쳐 버린 순간 느껴졌던, 흡사 칼에 찔린 듯했던 그 감각도 추가할 수 있을 터다.
야수도의 분노에는 악마 추종자들의 이카파 판게아에서 겪었던 충격적인 죽음으로 인한 복수심을 녹여 넣기도 좋았다.
당시 경험했던 놀람과 고통과 절망 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그 주범에 대한 잉걸불 같은 증오를 느낄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희미해지곤 있다지만 완전히 꺼지려면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기충도의 혐오에는 마찬가지로 그 세계에서 겪은 정체 모를 벌레 마법에 대한 충격이 매우 잘 어울렸다.
그는 지금까지도 그것보다 더 괴이하고 끔찍한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 과연 인간성을 포기하고 악마를 추종하는 놈들은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심연도의 절망에는 역시 그 세계에서 '세례'를 받으며 느껴졌던 압도적인 시선에 대한 감상을 빼놓을 수 없다.
영혼이 짓눌려 으깨지다 못해 흙먼지로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던, 그렇게 아주 작은 점으로 화했다가 끝내 사라져 버리는 듯했던 느낌은 여전히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종말 후 지구에서의 체험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모든 귀신들이 인간의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는 불가사의한 오오라를 두른 듯했고, 정장 입은 귀신과의 추격전을 떠올리자면 지금도 절로 등골을 타고 전율이 흐른다.
무엇보다, 원희.
그저 공포스러운 정도를 넘어 거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으로 두려웠던 그 존재는, 법혼 승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자주 환각으로 출현했을 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감정이란 주관적인 것.'
그의 경험들이 누군가에겐 하찮기 짝이 없을지라도, 당시 느꼈던 감정들의 진실성만은 부정될 수 없다. 설령 앞으로 더 강렬하고 충격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한들 마찬가지다.
그는 그렇게 육도윤회도를 감상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해석을 완성해 나갔다. 당연히 작가의 본래 화풍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으면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은땀 범벅이었던 한유진은 어느샌가 평온해진 모습이었다.
* * *
법륜전에서 나왔을 때는 무려 한 달 하고도 보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한유진으로선 겨우 사나흘 정도로밖에 안 느껴졌던 시간인지라 꽤 놀라웠다.
그가 나왔다는 소식을 빠르게 전달받았는지, 잠시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쉬고 있으려니 방장 혜각대사가 나타났다.
"아직 기간이 남았는데, 성취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한유진은 부정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전을 미리 공부해야 한다던 조언 덕에 수확이 좀 있었습니다."
"허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제 확실히 저를 압도하시는 진정한 무림지존이 되셨겠군요."
혜각대사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그는 다시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드는 마음이 있어 진중하게 요청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방장님의 육도윤회를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막 출관하셨는데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으로 충만한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모르니 준비를 철저히 하십시오."
비무라기보단 견식하게 해달라는 요청에 가까웠고, 혜각대사 또한 생사경의 고수로서 자신의 육도윤회를 본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할 터였다.
그는 한유진이 준비가 된 듯하자 나직한 불호를 읊으며 합장했다.
직후, 그의 두 눈에서 여섯으로 나뉘어 순환하는 육도윤회의 환영이 떠오르는 동시에, 그 눈을 마주한 한유진의 머릿속에서도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그림에서 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마주하는 자의 감정을 쥐고 흔들어 마침내 굴복시킬 수 있을, 과연 생사경의 고수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그런 한 수다.
천락도, 인욕도, 망혼도, 야수도, 기충도, 심연도의 이미지들이 떠오르고 잠겨들길 반복하며 사방에서 불음이 메아리치는 듯하다. 동시에 무릎 꿇고 귀의하여 이 모든 감각과 감정의 파도를 벗어던지는 해탈에 이르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하나 한유진이라는 상대를 굴복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었다.
'내 해석과는 많이 다르구나.'
혜각대사는 육도윤회의 그림을 철저히 교리에 따라 해석했을 것이다. 가능한 한 믿고 따라야 할 성인의 발자취이자 가르침으로 여긴다는 점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육도윤회도에도 내 초월적 이해력이 발동했던 게 분명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이 선각한 해탈자의 순수한 그림 작품임을 알아채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당연히 그런 깊은 몰입을 경험하지도 못했을 터다.
잠깐 상념에 빠져있으려니 곧.
그의 정신을 제압하려던 육도윤회의 환영이 씻은 듯 사라졌다. 혜각대사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힘을 거둔 것이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그는 마치 같은 반열에 오른 고승을 대하듯,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정중한 예를 취해 보였다. 한유진도 덩달아 마주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 더 한담 같은 대화를 나눴다.
핵심지를 빠져나올 때까지 혜각대사의 안내를 받은 후 작별하여 숙소로 향하던 그가 이번 수확을 정리했다.
'육도윤회를 신통의 차원으로 얻었다.'
단지 신식비술을 원했을 뿐인데, 그보다 더 뛰어날 수밖에 없는 신통을 깨우쳐 버렸다.
상대의 감정을 손바닥 보듯 읽을 수 있게 됐고, 방금 혜각대사가 펼쳤던 것처럼 감정을 조작하려 시도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신통으로 각성한 만큼, 그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낄수록 기대 이상으로 강력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무심겁을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지연시킬 수는 있을 듯하지만······ 과연 겁이로구나.'
다행히 몇 가지 생각해 둔 바가 있어 마냥 답답하지는 않다.
무용이를 보고 일행을 볼 생각에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숙소 건물에 도착했다.
하루이틀 정도만 더 머물면서 뒷정리를 한 후 이곳을 떠날 계획이었다.
* * *
옥한성의 금련장원으로 돌아온 일행은 바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한유진은 드래곤 하트 제련을 다시 시작하여 예의 가공할 존재감과 기세를 옥한성 밖으로까지 뿜어냈고.
독준성은 원래 익혔던 무공을 주저 없이 무너트리면서 회원공 수련에 박차를 가했으며.
서광가후와 은미령도 각자의 원력심공과 회원공 수련에 매진했다. 수련하다가 막히는 점이 생기면 한유진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찾아와 공손히 가르침을 구하기도 했다.
무용이는 기특하게도 수련에 매진하는 한유진과 은미령을 포함한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장원 내부와 근처 외부를 돌아다니며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았다.
작은 짐승일 뿐이라지만 입문기급 능력을 갖췄고 특히 도망치는 쪽의 법술을 많이 전수해 주었으니, 화경 이상의 고수가 마주치자마자 작정하고 살초를 펼치지 않는 한 위험은 없을 터였다.
그런 평온하면서도 충실한 나날의 와중.
한유진은 독준성을 시켜 작은 밑작업을 펼쳤다.
바로 '거래'에 대한 일이었다.
독준성이나 서광가후가 일정한 수련 성과를 내면 비무행(比武行)을 시켜 무림 전역으로 확실하게 소문을 퍼뜨릴 계획이 따로 있었지만, 그 전에 미리 기름칠하듯 사람들을 혹하게 만들어 놓으면 더 좋을 터였다.
이미 자신이 옥한성에서 어마어마한 개세절학을 수련하고 있다는 소문이 강호무림에 파다한 상황 아니던가?
'이 절학의 기초를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비급, 수령이 높은 영식, 생사경의 비밀 등과 거래한다는 소문이 나면, 분명히 많은 관심을 끌 수 있을 거다.'
과연 그 예상은 잘 들어맞았다.
단지 잘 들어맞는 수준을 넘어, 그저 소문일 뿐인데도 벌써부터 옥한성을 방문해 의사를 타진하는 세력이 나타날 정도였다.
비록 명문세가나 대문파들이 아닌 비교적 역사가 짧고 강성함이 작은 세력들이었지만 한유진은 그들을 문전박대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그들이 가져온 대가가 너무 수준 미달이라 거래는 한 번도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하나 중요한 건, 금련무존이 직접 거래에 나타남으로써 소문이 허황되지 않은 진실임을 알렸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무림 전체가 은근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68화.< 성공적인 거래 시작 >
금련장원은 거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아무 때나 개방되지 않는다. 그래야 수련에 방해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어중이떠중이를 걸러내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비록 한겨울이라지만 하늘은 푸르고 맑아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이 그나마 온기를 더해주는 날.
바로 금련장원의 문이 열리는 날이었다. 강호무림 곳곳에서 꽤 이름을 날린 세력들과 나름의 자부심을 가진 명성 있는 개인들이 아침부터 장원 앞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명불위전이로군."
대략 명성이나 명예에 거짓이 없다는 뜻을 가진 지구의 명불허전과 같은 표현이다.
다름 아닌 장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대한 이야기로, 그 중얼거림을 내뱉은 중년 남성은 강서 지역보다 더 서쪽에 자리한 꽤 먼 곳에서 온 철혈문의 부문주였다.
그는 절정에 이른 고수로 충분히 한 지역에서 명사로 존경받거나 직접 세력을 꾸려도 이상하지 않은 자다.
하나 이곳에 와서 소문의 기세를 직접 겪어보니, 스스로의 실력에 절로 의심이 들면서 누리던 명예와 지위에 회의감마저 생기는 듯했다.
정과 사를 가리지 않고 스물에 가까운 세력의 인원들이 모여있음에도 사소한 말다툼조차 벌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금련무존의 어마어마한 위세를 느끼고 있노라면, 소속된 세력도 없이 일류경 정도밖에 안 되면서 이곳을 찾아온 몇 낭인들을 비웃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자신들이 그들과 별다를 바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는 탓이었다.
잠시 후.
시간이 되자 문이 열리면서 소문의 청류백봉 은미령과 옥면검룡 서광가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에 그 둘은 그저 현백파와 서광세가라는 배경에 힘입어 유명세를 좀 얻었을 뿐인 일개 후기지수에 불과했다. 용봉이라는 별호가 살짝 과분한 감이 있었다는 뜻이다.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금련무존이라는 생사경 고수의 첫 무림출도를 함께하여 지금까지도 함께 생활하고 있으니, 또한 소문에 의하면 직접 무공에 대한 가르침마저 받고 있다 하니 반쯤은 금련무존의 제자와 같은 신분이 된 셈이다.
세가 출신인 서광가후는 몰라도 이미 현백파의 제자 신분인 은미령의 경우는 사실 충분히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당연하게도 무림의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당사자인 현백파조차 가만히 있는 상황이거늘, 누가 감히 이를 지적하여 트집 잡겠는가.'
아예 제자라고 확정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아닌 상황이니 지켜볼 여지는 충분하다. 또한 은미령은 원래부터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만큼 금련무존과 다른 관계로 이어질 여지가 차고 넘쳤다.
현백파는 도가적 사상을 잇긴 하지만 제자들의 결혼을 막지 않는다. 막기는커녕 장려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수고가 많습니다."
절정 혹은 초절정에도 이른 고수들이 서광가후와 은미령에게 포권지례를 취해 보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심지어 그중에는 화경에 오른 이도 있었다.
그에 서광가후와 은미령 역시 마주 예를 취하며 아주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사람들이 안내받은 장소는 별원이라고 할 수 있을 어느 야외의 정원이었다. 아무리 날씨가 좋고 찾아온 이들 대다수가 무림고수라지만 이 겨울날 사람들을 밖에서 대접하려 하다니 좀처럼 이해가 안 가는 처사였으나.
그 별원에 들어선 순간 뚜렷하게 느껴지는 온기에 그들은 은근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법인가.'
철혈문의 부문주도 내심 감탄했다.
무공과 진법의 지식은 별개인 관계로, 별 세력도 없는 금련무존의 정원에 이런 진법이 있다는 건 금련무존 본인이 진법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 소문이 설마 진짜였나.'
이 장원에 침입해 보려던 멍청이가 정말로 아예 없지는 않았을 터다.
한데도 누군가가 성공적으로 담을 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불손한 목적으로 담을 넘으면 갑작스러운 안개에 휩싸여 한나절이 넘게 헤매게 된다는 괴이한 소문마저 있었다.
만약 그것이 금련무존의 진법이라면 전부 설명이 되는 일이었다.
다들 마련된 자리에 앉자, 이곳에 고용되어 일하는 복장 단정한 잡역인들이 다과를 차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략 분위기가 마련되었을 때쯤 금련무존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성 자자한 금련무존을 실제로 직접 본 사람의 수는 의외로 많지 않다. 오히려 이곳 옥한성이 아닌 정도맹 쪽으로 가면 장보도 고분지 탐사와 관련되어 직접 본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어쨌든.
직접 보게 된 금련무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젊은 느낌이었다. 몸에 걸친 푸른빛 의복이 아주 잘 어울려서 더욱 그런 듯했다.
철혈문 부문주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가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반로환동했다기엔, 아예 늙은 적이 없는 듯한······ 아니지. 내가 저만한 고수의 무엇을 알겠는가.'
그때 자연스럽게 이목을 끈 금련무존이 말했다.
"모두 수고를 마다치 않고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강호무림을 진동시키는 실력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였다.
몇 마디 더 의례적인 인사를 한 그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듯했다.
"거래를 위해 가져오신 물건들을 꺼내주십시오. 만일 타인의 이목을 피하고자 하신다면 회연이 끝난 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이미 세간에 알려진 거래 방식이다.
조금 독특하면서 남의 이목이 쏠린다는 점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모든 과정이 공개된다는 점에서 의외로 안심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설령 오늘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더라도 자리를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다음 기회가 또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시작을 알린 금련무존은 직접 움직여 첫 번째 자리부터 방문해 짧은 인사를 곁들이며 둘러보기 시작했다.
거래도 거래지만, 생사경의 고수와 친분을 나눌 수도 있는 자리인지라 다들 매우 적극적이었다.
철혈문 부문주는 같은 탁자에 앉은 일행들과 몇 마디 의논하고는, 거래하기 위해 가져온 철혈문의 무공비급을 올려놓았다.
문주만이 익힐 수 있는 핵심 비전을 제외하면 최상의 무공이었다. 실로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이곳에 온 여러 세력들이 꺼내놓는 물건들을 보자 되레 살짝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 흑운파 놈들이··· 지금 설마 멸광참혼검법을 들고 온 건가?'
흑운파는 사파 소속으로 비록 역사가 짧긴 하나 강성함이 여느 명문세가 못지않다. 그들이 꺼내 놓은 핵심 무공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무림의 유명한 상단 세력 명보상회에서 꺼내 놓은 커다란 옥함도 심상찮았다. 저런 식으로 보관할 물건이라면 필시 수령이 천 년이 넘은 영초일 것이 분명하다.
철혈문 부문주가 한창 자신감이 사라져가고 있을 무렵.
마침내 금련무존이 그들의 자리에 방문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명망 높으신 금련무존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개가 포함된 몇 마디 한담을 더 나눈 후 금련무존이 정중하게 철혈문의 무공서를 봐도 되겠냐고 물었고, 부문주는 당연히 허락했다.
무공서를 들고서는 과연 도리가 있게 초반부만을 조금 살펴본 금련무존이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여태 이 자리까지 오며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기에 다른 자리에서 은근히 주시하던 이들의 시선이 뚜렷하게 쏠린다. 철혈문 부문주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괜찮은데······?'
그때 금련무존, 한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행동으로는 비급의 초반부만을 살폈지만 사실 집어들기 전부터 신식으로 전체 내용을 두 번 이상 샅샅이 훑고 필요한 만큼 다 이해했다.
철혈문은 중소문파치곤 역사가 제법 깊었으며 내실도 상당히 알찬 듯했다.
무엇보다 황실 군부 출신의 인물이 초대 문주여서인지 무공의 특성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공방의 균형이 있고 대부분의 동작이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이뤄져 실전성이 높다. 특히 무림인의 무공이면서도 단체 전투를 염두에 둔 흔적도 있어 더욱 마음에 든다.
'철혈문의 최고 무공은 아니겠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런 부분이 존재하는 거겠지.'
철혈문의 최고 무공이라고 해 봤자 나중에 얻게 될지 모를 태양문이나 현백파나 운해파 등의 상승절학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수준이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특별함을 갖춘 편이 오히려 한유진에겐 더 좋았다. 이들이 알고서 이런 무공을 가져온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거래합시다."
그가 말하자 장내가 일순 크게 동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으로 이뤄진 거래였다.
"저, 정말이십니까?"
"예. 초대 문주께서 군부 출신이셨다니 과연, 제가 보고 배울 점이 있을 듯합니다."
무려 생사경의 고수가 그렇게 말해 주며 품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 든다.
그 서책의 표지에 적힌 '원력심공'이라는 웅혼한 글씨가 철혈문 부문주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었다.
실은 이렇게 방문하면서도 정말로 거래에 성공할 수 있을지 별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 감사합니다, 무존···!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감사를 표하실 일이 아닙니다. 저도 좋은 거래를 할 수 있어 매우 흡족하군요."
그는 원력심공을 내어주며 대신 철혈문의 강무혈기검법을 챙겼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유출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물론입니다. 이렇게 귀한 물건을 어찌 쉽게 유출하겠습니까?"
"혹여나 이 거래와 관련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면, 망설이지 말고 저를 찾으십시오."
만일 금련무존의 신공절학을 탐내 그와 정당하게 거래한 철혈문을 누군가가 공격한다면, 바로 직접 나서서 응징해 주겠다는 공식적인 약속이었다.
'어쩌면···?'
문득 이 약속을 이용해 볼 수 없을까 고민하던 철혈문 부문주는 얼른 그 위험한 발상을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감히 생사경의 고수를 속여 이용해 먹으려다간 역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상대는 무려 그 암영마교의 장로 셋을 한자리에서 죽여 없앤 무시무시한 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소문 속 금련무존의 그 '금련'을 직접 겪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오늘은 과연 좀 특별한 날인 듯했다.
철혈문 부문주가 놀라워했던 흑운파의 핵심 무공이 거절당한 상황에서, 명보상회의 이들이 두 번째로 거래에 성공했다.
그들은 가져온 모든 옥함 속 내용물을 다 건네준 뒤 원력심공을 얻고서 환희에 젖은 모습이었다.
표정 관리에 능숙할 상인이면서도 입술 끝을 주체하지 못하고 파들파들 떠는 것이, 부유하지만 무공의 근본이 약할 수밖에 없는 상회 조직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이후로는 남은 세력이 몇 없고 낭인들이 대부분인지라, 다들 두 번의 거래가 이뤄진 것이 끝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거래합시다."
한 낭인이 가져온 어느 짐승 가죽으로 만들어진 비급을 살핀 금련무존이 충격의 발언을 했다.
그 낭인은 잠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니 거의 땅에 엎드리려고 했다.
"가, 감사합니다 무존···!"
"어허, 왜 엎드리려고 하십니까."
허공에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일류경의 무인이 엎드리려는 것을 가볍게 제지하는 모습에 다들 재차 놀란다. 허공섭물로는 저 정도 힘을 발휘하기 힘든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비급을 받으십시오."
"무, 무존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그때 낭인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무림에서 흔하진 않지만 간간이 목격할 수 있는, 제자로 받아달라고 할 때의 바로 그 분위기다.
하여 뒤편의 몇 이들이 반사적으로 혀를 찰 뻔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때.
"식객으로··· 이 장원에서 식객으로 지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상과 다른 부탁에 금련무존마저 조금 흥미를 드러냈다.
"원력심공을 받는 대신 말입니까?"
"예! 저는··· 그걸 받아봤자 지킬 자신도 없고, 혼자서 익힐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머물며 섬뢰검 독준성 대협께 가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족합니다!"
한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안 될 건 없겠지.'
상대 낭인이 가져온 것은 아주 특이하게도 사냥꾼의 무공이었다.
사람이 아닌 곰과 호랑이와 멧돼지 따위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으로, 지구 헌터들이 주로 괴물을 상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을 터였다.
무공의 수준이 마냥 낮지도 않았고 말이다.
"일단 일이 년 정도만 지내봅시다. 그 후에 어떻게 할지는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고, 어떻습니까?"
"감사합니다, 무존!"
낭인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엎드리려 하면서 한유진을 수고롭게 만들었다.
이후로는 별 이변 없이 회연이 순조롭게 끝났다. 소수의 몇 이들이 별실에서 따로 거래하기를 원했지만 딱히 거래가 이뤄진 징후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어쨌든 하루 만에 세 번의 거래가 이뤄졌다.
여태 움직이지 않고 금련장원을 주시하던 엉덩이 무거운 세력들을 조금 더 들썩이게 만드는 일이었다.
* * *
거래 활동은 예상보다 훨씬 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처음 시간을 투자하여 제대로 잘 만들어 낸 명성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었다.
첫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뤄진 지 반년 정도가 흐른 지금.
한유진은 거의 장서각을 만들어도 될 만큼의 무공비급과 상당한 양의 수령 높은 영식을 손에 넣었다.
실로 오랜만이라는 느낌을 받으며 연단술을 발휘한 그는 각각 독준성과 서광가후와 은미령에게 줄 영단들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냈다.
덕분이랄지 독준성은 훌륭하게 입문기 수사가 되어선 대략 1할에 살짝 못 미치는 법혼 승화까지 이뤄냈다.
영단의 도움을 항상 받을 수 없으며 갈수록 승화가 어렵고 느려진다는 점을 고려해도, 수명이 다하기 전엔 충분히 법혼기 승격을 도전할 수 있을 그런 속도였다.
기초 법술들도 어설프게나마 몇 가지 펼칠 수 있게 되어 스스로 무공을 무너트리며 발생했던 전력의 공백도 일부 메워졌다.
하지만 일부일 뿐이었다.
원래 법술을 익히기란 실로 지난한 일이며, 익힌 것을 능숙하게 만들기란 더더욱 지난하다.
괜히 많은 수사들이 법기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다. 같은 영기를 소모하면서도 법술보다 훨씬 빠르고 확실한 공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독준성은 초월적 이해력 같은 게 없으니, 법기 없이는 이래저래 부족한 점이 많은 게 당연했다.
하여 한유진은 지금까지도 매우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는 그를 위해 오행검을 빌려줬다.
무려 중상급 법기인 만큼 이 무림 세계에서는 법혼기에 오른 후에도 엄청나게 유용할 것이다.
여담으로, 그는 한유진이 식객으로 받아 준 낭인을 수하처럼 잘 부려 먹었다. 낭인도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이서 자주 받게 된 가르침에 아주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서광가후는 원래부터 익히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원력심공을 받았기에 실력이 날로 일취월장했다. 심법의 창시자인 한유진의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 있기에 더욱 그런 듯했다.
여전히 일류경에 머무르곤 있었지만 절정의 경지가 머지 않았다. 일단 절정경에 오르기만 하면, 영기의 상위격 힘인 원력의 효능으로 거의 초절정 경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화경의 고수를 상대로도 잠깐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반면 은미령은.
무인에서 입문기 수사로 변하는 부분에서부터 많이 헤매고 있었다. 당연히 법혼 승화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한유진은 저절로 이들과의 인연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단지 도심과 연관된 문제만이 아니라 무심겁에도 영향이 있을 고민거리였다.
69화. < 깨달음과 약속의 이행 >
각성 능력으로 방문할 수 있는 세계들, 거기서 얻은 인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나중에 모든 것이 초기화된 상태로 다시 방문할 수 있으니 가짜라고 여겨야 할까? 현실의 인연만이 진실된 것이고?
'하지만 이게 가짜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그는 자신의 각성 능력을 시뮬레이션 같다고 여기지만 정말로 시뮬레이션이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었다.
이곳이 어느 가능성의 한 갈래로서 엄연히 실재하는 우주 속 멀쩡한 세상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단지 자신은 이 우주의 시공간을 조금 더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래서 그가 이 세상에서 효율만을 따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만약 정말로 다 가짜일 뿐이고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공기처럼 덧없다면, 그냥 산속에 틀어박혀 드래곤 하트 제련을 마친 다음 전부 힘으로 쓸어버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왜 귀찮게 명성을 쌓고 거래 같은 걸 하겠는가? 쳐들어가서 싹 다 죽이고 비급을 취하면 될 일을 말이다.
꼭 그런 식으로 이득만 취할 필요 있겠는가?
길 가다 갑자기 짜증이 좀 나면 지나가는 사람을 열 갈래 백 갈래로 찢어 죽여도 상관없을 테고, 내키는 대로 협박을 일삼으며 주지육림을 즐겨도 문제가 아닐 터다.
모조리 다 가짜에 불과하니까!
PC게임 속에서 지나가는 NPC를 죽이고 마음대로 방화 약탈 따위를 저지르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냥 현실감이 좀 많이 뛰어날 뿐이거늘!
'······그렇게 행동한다면 잠깐은 통쾌하고 효율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현실로 가져갈 수 있는 이득 외엔 모든 것이 다 공허해져 버릴 것이다.
다시는 무용이와 같은 존재를 만날 수 없을 것이고, 은미령과 서광가후와 독준성 같은 이들과의 인연도 그저 쓰잘머리 없는 시간 낭비 사족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순간적이고 본능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일과 실질적 이득을 얻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수선자로서 기나긴 수명을 가졌음에도, 그 무수한 경험과 내적 성장의 기회를 그냥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려야 할 터다.'
선을 넘는 순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리려 하는 순간 자신의 어마어마한 죄악을 마주해야 할 테니, 그 어느 겁보다도 끔찍한 심마로 들이닥쳐올 가능성이 지대하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훗날 이 모든 게 가짜가 아니었음을 깨닫기라도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설령 가짜라고 판명이 난다 한들, 더 먼 훗날 진선기에 올라 지구와 같은 세계를 마음대로 부수고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 문득 지구마저 가짜 같다고 느껴 버린다면.
더 나아가선 우주마저도 가짜 같다고 느껴 버린다면 그때는 어찌 되겠는가?
무가치하게 여겨왔기에 무가치해질 수밖에 없음이다.
'그 우주에 속한 자기 자신마저도.'
즉.
각성 능력으로 방문하는 세계에서 도심을 지킨답시고 행동하는 일들을 결코 족쇄라고 여겨선 안 되었다.
이것은 족쇄가 아니다.
풍랑에도 버틸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닻이다.
'진짜와 조금도 구분할 수 없는 가짜라면, 이곳에서의 내 경험은 분명한 가치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불현듯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현실과 완전히 같은 몽환이라면 그것은 과연 진짜인가 가짜인가? 대체 무엇을 두고 진짜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모종의 절대적인 기준이 정녕 존재할 수 있는가?'
그 순간.
한유진은 실로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깨달음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록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의 드래곤 하트 심경 단계 제련이 앞으로 막힘없이 쭉쭉 진행되어 나갈 것임을 저절로 직감했다.
그저 위격이 너무 높은 물건인지라 원래 오래 걸리고 갈수록 힘들어지는 줄 알았더니, 실은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한 동시에, 점점 더 빠르게 무겁고 두꺼워지는 듯하던 무심겁의 감각이 눈에 띄게 약해졌음을 느꼈다.
감정과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진 육도윤회 신통을 깨우쳤을 때도 얻지 못했던 효과였다.
"하하하······."
살짝 허탈해하면서도 비할 수 없이 많은 시원함을 담아 그가 웃었다. 그러면서 좌선하고 있던 방을 나섰다.
길을 찾은 자 특유의 확신이 담긴 발걸음이었다.
* * *
외부적으로는 전혀 시끄럽지 않았지만, 금련장원 내부에서는 대단히 크고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
사실 당장에만 시끄럽지 않을 뿐 이 사실이 흘러 나간다면 외부에도 적잖은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 그런 일이었다.
한유진이 독준성과 서광가후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간 막상 베풀기는 주저하지 않으면서 계속 거리를 두던 태도를 드디어 거둔 것이다.
독준성은 마침내 염원이 이뤄졌다는 것처럼 뛸 듯이 기뻐했고 서광가후 역시 예전 무공을 하사받았던 때처럼 엎드려 울었다. 육도윤회 신통을 깨달은 한유진은 그 둘의 감정이 전혀 가식적이지 않음을 느끼면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은미령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의아함이 생길 법도 했지만, 셋 중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독준성과 서광가후는 일이 역시나 그렇게 되는구나 싶은 기색일 뿐이었고, 은미령은 수련이 막히는 와중 답답했던 것도 잊고 오히려 은근히 좋아했다.
일반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엔 남녀관계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전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든 인간관계엔 맥락이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은미령 같은 미인이 오랜 시간 곁에서 꼼꼼히 챙겨주며 옷까지 만들어주는 등 정성을 보이는데,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기란 실로 어려웠다.
단지 그 호감이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감정이 아니었기에 거리를 두기 수월했을 뿐이다.
여담으로, 사실 한유진은 애초에 그런 '불같은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작은 호감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점점 더 크고 깊어짐에 따라 상대가 그만큼 소중해지는 경험만을 해 봤을 뿐, 무슨 첫눈에 반해 버린다거나 잠깐이라도 못 보면 죽을 것 같다는 등의 감정은 자신에겐 천성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어쨌든 은미령은 그가 호감을 갖기 충분한 상대였다.
무슨 대단한 능력을 갖췄다거나 유일무이한 이득을 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아름다운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고 잘 배려하고 챙겨주면서 같이 있으면 전혀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 대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더는 후환을 두려워하며 애매한 고립을 자처하지 않기로 한 만큼, 그는 조금이지만 분명하게 달라진 태도로 은미령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겨울이 찾아왔을 때.
그는 드래곤 하트의 심경 단계 제련을 마치고 두 번째 기경 단계 제련으로 들어섰다. 깨달음을 얻기 전과 비교하면 가히 놀라운 속도였다.
하지만 겨울과 함께 찾아온 별로 유쾌하지 못한 다른 소식이 있었으니.
달리는 말보다 빠르다는 소문이 채 퍼져오기도 전, 거지꼴을 한 소수의 이들이 금련장원을 찾아와선 피를 토하는 기세로 복수를 간청해 왔다.
철혈문이 암영마교에 의해 멸문당했다.
* * *
암영마교는 강동의 깊은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 철혈문이 자리한 지역과는 거의 정 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바로 그래서 철혈문이 암영마교의 목표가 되었을 수도 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테니 전혀 대비가 없었을 것은 물론, 그만큼 추후 아니라며 잡아떼기도 편했을 테니까.
중소문파치곤 제법 역사가 깊은 철혈문의 갑작스러운 멸문 사태는 강호무림을 진동시키기 충분한 큰 사건이었다.
흉수에 대해서는 명확한 물증이 없었으나 꽤 많은 이들이 암영마교를 의심했다.
철혈문의 원래 상황과 각종 여건 등을 고려했을 때, 무엇보다 금련무존과의 거래까지도 함께 고려했을 때 동기가 충분하고 그럴 능력마저 있는 세력이 몇 없었기 때문이다.
암영마교와 금련무존의 악연은 유명하다. 암영마교 입장에선 어차피 거래는 불가능하고 이미 적대적인 관계이니, 그와 거래한 상대 중 만만한 놈을 털어먹어도 상관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렇게 소문이 파다하고 정도맹이 들썩이며 사도맹도 은근히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피는 와중.
한유진은 벌써 강동 지역 깊은 곳까지 들어가 암영마교 본단을 눈에 담고 있었다.
분명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제법 기후가 따뜻했다. 그래서 눈이 내린 흔적이 전혀 없었고 여름에는 얼마나 덥고 뜨거울지를 익히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의외로 이런 지역이 사람 살기에 별로 좋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암영마교 같은 집단이 세를 불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살기 좋은 곳이었다면 초창기부터 견제가 극심했을 테니까.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들이 현재 정도맹과 사도맹을 동시에 위협하고 있을 만큼 강성하다는 점이었다.
과연 그 위세만큼이나 암영마교 본단의 화려함은 대단했다.
여느 도시만큼이나 거대한 성 같은 모습으로, 흑색 돌들을 사용해 건축된 웅장한 성문과 양옆으로 뻗어나가는 두텁고 견고한 성벽이 지켜보는 이를 짓누르는 듯하다.
숲과 산맥을 끼고 절묘하게 만들어진 터라 군대를 상대로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느낌이다. 성문 양옆으로 조각된 경건함과 흉악함이 공존하는 그들의 신앙 속 신령인지 괴물인지 모를 존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래서 감히 내 얼굴에 똥칠할 생각이 들었나 봐. 간이 아주 배 밖으로 나와서는 말이야."
찍-! 찌직!
품속 무용이가 아주 지당한 말씀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린다. 언제서부턴가 이런 모습을 많이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한유진과 대화할 때의 서광가후를 보고 배운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조만간 방문해 주려 했는데······ 알아서 명분을 마련해 줬으니, 나도 좀 더 과감하게 손 써도 되겠지."
이것은 정당한 복수다. 자신과의 거래로 인해 화를 입은 이들을 위해 마땅히 해 줘도 되는 일이다. 예전에 약속한 바가 있는 만큼 더더욱.
마침 때가 좋았다. 드래곤 하트 심경 단계 제련을 완료함으로써 여전히 법혼 초기임에도 실력이 확 늘었으니까.
수사에게 있어 정신력의 강화란 곧 법력의 모든 효율성이 증가된다는 뜻이다. 법술의 속도와 위력과 정교함 등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육도윤회 같은 신통이 특히 강화될 수 있다.
또한 여지껏 마냥 드래곤 하트 제련에만 매달리지도 않았다. 이전에 금련삼전만개를 시험해 보고 아주 만족했던 그는 몇 가지 다른 중급 오행법술을 꾸준히 연습해 왔다.
"가자."
무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천천히 은영술을 풀며 앞으로 나아갔다.
곧.
당연하게도 성문과 성벽을 지키고 있던 이들에게 발각당했다. 하나 별다른 경계의 기색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혼자인 채 당당히 다가오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더 다가가자 갑자기 분위기가 백팔십도 돌변하는 모습이었다.
- 그, 금련무존이다!
누군가가 내공을 담아 성 안쪽으로 고함치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어찌 알아봤나 싶던 한유진은 문득 품속의 무용이를 쳐다봤다.
"네가 나보다 더 유명한 모양이다."
찍! 찍-!
무림에서 이런 동물을 안고 다니는 사람은 굉장히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찔리는 구석이 있는 암영마교 측에선 그런 금련무존의 특징을 알려 혹시 모를 사태를 미리 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철혈문의 생존자들에게 환몽심탈술과 육도윤회를 써서 일의 진상을 다 파악했다.
물증은 전혀 없었지만 이들이 범인이라는 게 너무나 명백했다.
원래 한 세력을 멸문시키면서 생존자 한 명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명확한 증거만 없으면 괜찮다는 식으로 손을 썼으니······.
인과응보의 순리에 따라, 오늘 그 일을 후회하게 될 차례였다.
끼이이이이익······!
고작 그 한 명이 다가오는 일 때문에 거대한 성문이 빠르게 닫히는 모습이었다. 또한 성문과 성벽 위로 인원이 증강되면서 예전 고분지에서도 본 적 있는 핏빛 장궁을 든 이들이 시위를 당겨 조준하는 모습이었다.
한유진은 그 모든 것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 태연히 걸어갔다.
- 위명이 자자한 금련무존께서 예까지 무슨 일이시오?!
그렇게 누군가가 성문 위에서 나타나며 외쳤다. 상당한 실력자임이 분명하게도 목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듯했고 그 본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또한 최소 화경급이었다.
아마도 정문이라는 상징적 장소를 책임지고 지키는 어느 고위층 인사일 것이다.
바로 그때, 화경 고수는 아래쪽에서 충분히 다가온 한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한유진의 눈동자 속에서 육도윤회가 나타나 순환하기 시작했다. 하나 순환하는 육도와 달리 막상 신통에 당한 고수가 보게 된 세계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혐오의 세계, 기충도.
"자결해라."
한유진의 그 말은 나직하면서도 모두의 바로 옆에서 말하듯 뚜렷하기 그지없었다.
화경 고수는 실로 표현키 힘든 해괴한 얼굴이 되더니 갑작스레, 허리춤의 검을 뽑아선 스스로의 목을 주저 없이 날려 버렸다.
치솟는 피와 함께 방금 전까지 전의로 가득했던 표정의 머리가 허공을 난다.
뒤로 넘어가 쓰러지는 몸통과 함께 떨어져 구르는 그 머리의 표정과 눈빛에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가 가득했다.
그사이 더 가까이 다가온 한유진이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빠콰콰쾅-!!
쿠르르르릉···!!
마른하늘에서 갑작스러운 날벼락이 내리쳐 세상 전체를 흑백으로 번쩍이게 만든다.
그 내리친 벼락과 들어 올린 한유진의 손이 맞닿아 이어진 채, 연신 굉음과 뇌전불꽃을 터뜨리면서 거대한 용(龍)의 형상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늘에선 흉포하게 회오리치는 진회색 구름이 생성되어 급속히 범위를 넓혔다.
뇌룡출요호운(雷龍出搖呼雲).
뇌전계 중급 오행법술로, 위력이 결코 이전에 펼쳤던 금련삼전만개보다 못하지 않다.
대략 법술 시전을 마친 한유진이 점점 더 흉포해지는 먹구름에 명령을 내리듯 손으로 성문을 가리켰다.
그 순간.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무시무시한 섬광과 굉음이 폭발하며 재앙이 떨어져 내렸다.
70화. < 암영마교의 비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