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능력 각성
평범하게 낡고 비좁은 어느 원룸 안.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한유진은 습관처럼 메신저를 열었다가 '오늘 생일인 친구' 항목을 보게 됐다.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중학교 동창이자 그의 첫사랑이면서 짝사랑이었던 여자. 워낙에 예쁜 터라 인기가 대단했고, 졸업하던 날 용기를 내서 영화 보러 가자고 제안했지만 완곡히 거절당했던 기억도 난다.
"······."
그때 이후로 벌써 10년이 다 돼간다. 한 번도 연락해 본 적 없지만 상대도 번호를 바꿀 일 없었는지 메신저에선 여전히 친구 상태였다.
과거에 대한 향수가 저절로 손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렇게 프로필 사진들을 보던 한유진의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잘 사는 모습들뿐이었다.
어느 고급스러운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을 시작으로, 수영장 딸린 외국의 대저택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도 있고, 국내 유일 6성급 호텔에서 부모님의 생일파티를 연 사진도 보인다. 한유진 자신과는 평생 연이 없을 골프장에서 찍은 사진들도 제법 있고, 평범하게 찍은 듯한 사진에서도 값비싼 명품들이 적잖게 보인다.
'얘가 원래 이렇게 부자는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때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웬 남자랑 같이 찍은 사진인데 공교롭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같은 중학교 동창이면서 당시 꽤 친하게 지냈던 녀석이다. 고등학교에 막 입학할 즈음 녀석이 갑작스레 이능력을 각성하고는 헌터 전문학교로 들어가면서 자연히 멀어지게 됐다.
평범한 소시민과 이능력을 각성한 헌터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소득 부분에서부터 평판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따지기가 곤란할 정도로.
'둘이 사귀나 보네.'
그렇게 판단한 순간.
스스로 놀랄 만큼 이상하고 불편한 감정이 한가득 차올랐다.
스마트폰 화면을 끄면서 눈을 꾹 감은 한유진은 꽤 오랜 시간을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기심일 터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뒤섞였을 것이다. 특정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억울함 등도 포함됐을지 모른다.
사실 고등학생 때는 그에게 있어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멀쩡하던 가정이 파탄 난 시기였으니까.
말하자면 충분히 안타깝지만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가정사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서 집안 경제가 무너지고,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받다가 이혼과 함께 도망쳐 버리고, 덩그러니 남겨진 자신은 친척 집에 거둬져 눈칫밥을 잔뜩 먹다가 견디지 못하고 알바를 시작해 어렵사리 독립하고.
자연한 수순으로, 꽤 훌륭하던 학업성적은 그냥 평범한 정도로 떨어져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 취직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학자금대출을 받으면서 꾸역꾸역 다니고는 있지만, 요즘 사회 분위기를 보면 대학 졸업장은 있으나 마나 한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한때 그와 비슷한 처지로 동등하게 어울려 놀았던 중학교 동창생은.
이능력 각성이라는 엄청난 행운을 발판으로 인생에 황금대로가 펼쳐진 것 같다. 한유진 자신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그 말고도 다른 수많은 동창생들의 첫사랑 혹은 짝사랑이었을 여자와 사귀는 건 그 황금대로의 단편에 불과할 터다.
물론 녀석 나름대로의 고통과 어려움이 있어 때때로 눈물 흘리겠지만······.
'네가 명품 차에서 울 때 나는 자전거에서 울겠지.'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힘껏 패달을 밟으며 달려 나가도, 녀석이 가볍게 엑셀을 밟아 치고 나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 뒤꽁무니를 쳐다볼 수만 있어도 행운일 것이 분명하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
그 사실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가끔씩, 기습적으로 칼에 찔리듯 새삼 다시 느끼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힘이 빠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내가 너보다 못한 인간은 아니었을 텐데.'
적어도 같이 어울려 놀던 중학생 시절 때는 그랬다.
'나도 각성할 수만 있다면······.'
어릴 때부터 꿈이었고 나이가 들면서 시들긴커녕 더욱 강해지기만 했던 바람이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젠 거의 꿈에 불과했다.
통계적으로 봤을 때 누군가가 각성할 확률은 로또에 당첨되는 수준이며,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질수록 그 낮은 확률마저 급격히 감소한다.
그는 벌써 25살이었다. 이 나이에 각성했다는 사람은 정말로 거의 없고 대부분 10대 중반에 각성하는 게 보통이다. 그의 중학교 동창생처럼.
만약 각성한다면 어떤 능력을 각성하는 게 좋을까?
무기력하게 누워 그런 망상을 하던 한유진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바로 잘 준비를 했다. 밀린 과제 따위는 지금의 감정 상태 때문에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작은 행복을 찾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불공평함에 순응하고 체념하는 법을 모른다면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특정한 무언가는 아무리 간절하게 바라도 결코 닿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삶 아니던가.
잡념과 함께 반듯한 자세로 누운 그는 얼마 안 있어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수면이었다.
다만, 그 수면과 함께 벌어진 일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 * *
한유진은 새까만 공허 속 어느 미지의 장소에 서 있었다. 어떻게 서 있는지조차 모를 그런 장소였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는 저절로 눈앞의 '문'에 주목했다.
인지하려 할 때마다 천변만화하는 기이한 문이다. 중세 서양 느낌의 석문인가 싶으면 다음 순간 고대 동양 느낌의 나무문으로 변하고, 그에 어떤 감상을 떠올리려 하면 유리와 보석으로 만들어진 아주 낯선 스타일의 문이 보이는 식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움직인 한유진이 그것에 손을 댄 순간, 무수히 변화하던 문이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되며 은은하게 진동했다.
우우우웅······!
울려 퍼지는 공명음과 함께 고정된 모습은 바로 현대의 비상구 방화문이었다. 그 녹슨 방화문 표면에 은빛 반짝이며 떠오른 글자는 섬뜩하게도 '종말 후 지구'다.
그는 여전히 홀린 사람처럼 그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렇게 몇 걸음을 더 내디딘 직후.
"···헉!"
잠에서 깨어나듯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뒤를 돌아봤다.
분명히 문을 통과해서 왔을 텐데 보이는 것은 텅 빈 허공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광경은 인적이라곤 전혀 없이 수십 년 넘게 방치된 듯한 황폐한 도시의 모습이다.
"······."
한동안 그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 갑작스럽고도 초현실적인 상황에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꿈인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을 검증하기 위해 손등을 꼬집어 봤으나 생생한 고통이 느껴졌다. 피부로 와닿는 현실감이 너무나 선명해서 도저히 헷갈릴 수가 없다.
서서히 떨리기 시작하는 몸을 추스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를 봐도 버려진 지 족히 수십 년은 지난 듯한 도시의 모습뿐이다. 길가엔 버려진 차들이 널려있고 건물은 곳곳에 금이 가거나 무너져있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깨졌으며 금속엔 죄다 녹이 슬었다.
기이하게도 그 흔한 잡초조차 보이지 않아 마치 모든 생명체가 멸절해 버린 것 같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절로 소름이 돋아 움츠리던 한유진은 문득, 자신이 평소 즐겨 입던 운동복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히 잠들었을 때는 이런 복장이 아니었고 딱히 환복한 기억도 없는데 말이다.
'필름이 끊겼나?'
당장 떠오르는 것은 원룸 침대에서 잠들었던 기억과 웬 특이한 문이 존재하던 새까만 공간에 대한 기억뿐이다.
'잠깐······.'
자신이 그 문을 통해 이곳에 도착했음을 재차 상기한 순간, 몸이 떨렸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내가 각성한 건가, 설마?'
이능력이라면 지금 상황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아니, 그저 설명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외에는 어떤 가설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 무작정 좋아하기엔 문제가 꽤 있었다.
'종말 후 지구.'
분명히 이곳으로 들어서기 직전 문 표면에 떠오른 글자다.
이 황량한 도시가 정말로 종말해 버린 미래의 지구라면, 최우선으로 탐색해 봐야 할 문제는 원래 그가 살던 시공간으로 어떻게 돌아가느냐였다.
한유진은 자신이 통과한 그 문이 존재했을 자리를 빙빙 맴돌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저 허공만 보일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해가 저무는 시간인지 안 그래도 우중충하던 하늘이 더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 기이하게도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환절기?'
하나 아무리 환절기라도 이 정도 수준의 기온 변화는 비정상적이다. 완전히 밤이 되면 얼마나 더 추워질지 절로 두려워진다.
그러면서 함께 드는 생각은, 이 미래인지 평행 세계인지 모를 지구가 어쩌다 종말하게 됐는지였다.
'지금 몰입할 만한 화두는 아니야.'
일단은 체온을 지킬 방법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한차례 다시금 주위를 살핀 그는 건물 안에서 옷가지라도 얻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을 때.
문득 눈에 들어오는 건 폐허가 된 금은방이었다. 한데 그 안의 물건들은 세상이 멀쩡하던 때처럼 거의 흐트러짐 없이 유리 매대 안에 놓여 있었다.
상황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절로 멈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몇 분 정도 지체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반 이상 떨어져 나간 유리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이게 다 얼마지······?'
유리 매대 안쪽 가득한 금붙이들을 보면서 한유진은 많은 생각을 했다. 가격에 대한 것은 물론 이것들이 왜 이렇게 멀쩡히 남아있는가에 대한 것까지, 얕지만 다양한 생각이었다.
전쟁이나 전염병 따위가 종말의 이유는 아닌 모양이다. 만약 그런 유형의 종말이었다면 이 금붙이들이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유형의 종말이어야 이 금붙이들이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이처럼 보존될 수 있을까.
"······음."
잠시 더 생각하던 그는 유리 매대 구조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곧 어떻게 여는지를 파악하고 내용물을 잡히는 대로 꺼냈다.
그렇게 금목걸이를 여럿 걸치고, 금팔찌를 몇 개씩 착용하고, 열 손가락 전부 금반지를 끼고, 운동복 주머니에까지 금붙이를 가득 집어넣자 낮은 기온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열이 나는 기분이었다.
'일단은 이 정도만 챙기고, 다시 옷을 찾자.'
이제 어떻게든 추위를 버티고 돌아갈 길만 찾으면 된다. 지금 얻은 수확만으로도 생활이 활짝 펴기엔 충분하고, 만약 이 종말해 버린 세상을 다시 방문할 수 있다면 탐사를 계속 이어가면서 부자가 될 수 있을 터다.
꿈에서도 그리던 '경제적 자유'를 쟁취할 가능성이 보인다.
바로 그때.
작지만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저절로 움직인 고개가 금은방 한쪽 구석을 향한 순간, 그는 소리도 없이 들이닥치는 웬 칠흑색 손아귀를 목격했다.
콰드드득-!
무언가 찢기고 부서지는 섬찟한 소리와 함께 채 격통이 몰려올 새도 없이 의식이 흐려진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보이는 광경은 허공중에 흩뿌려지는 새빨간 핏물과 살점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한 것이 분명한 검은 인영의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암전됐다.
- 당신은 죽었습니다.
이어 무한한 어둠 속에서 신비로운 은빛 문자들이 떠올랐다.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2화. 능력 파악하기
얼떨떨하고 당혹스러운 기분은 한참을 기다려서야 가라앉았다. 하지만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면 실로 당연했다.
'죽었는데······ 안 죽은 건가?'
그렇게밖에 안 느껴진다. 또한 앞에 떠오른 은빛 문자 아래로 보이는 것은, 그가 금은방에서 탐욕에 차 수확했던 여러 금붙이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기에 한유진은 무심코 그것들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저절로 멈칫했다.
본능적으로 이 '수확물 선택'이 공짜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대가로 지불해서 얻는 방식인 듯했는데, 그 대가로 지불하는 무언가의 정체가 매우 특이했다.
이능력을 각성한 사람은 그것의 정체와 작동 원리를 저절로 일부 깨달을 수 있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팔다리 움직이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식이다.
만약 각성한 이능력을 스스로 전혀 파악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었다면 그야말로 재앙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지금 한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수확물 선택의 대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카르마.'
혹은 업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그래도 쉽게 표현해 보자면, 한 존재가 우주에 일으킨 변화의 총량이자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일종의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의 수확물 선택은 그 에너지를 아주 명확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일이었다.
몇 분이 지나도록 망설이던 한유진은 결국 뻗었던 손을 내렸다. 그런 중요한 에너지를 이런 금붙이 따위와 교환하기엔 아무래도 손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어.'
한 마리 물고기를 얻기보단 물고기 잡는 낚싯대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하루 배부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배부르게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려면 각성한 이능력의 정체를 본격적으로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뭘 좀 알아야 제대로 계획을 세우지 않겠는가?
하여 일단 이 장소를 벗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눈을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
잠시 가만히 있던 그가 베개 옆을 더듬어 스마트폰 화면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대략 6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직전의 경험과 시간비가 전혀 안 맞았지만, 기이하게도 매우 정상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각성한 이능력에 대해 본능적으로 조금 깨달았기 때문일 터다.
정말로 자신이 각성했음을 점점 더 체감할수록, 기분이 붕 뜨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그는 미친 듯이 흥분하며 좋아하는 대신 가만히 누운 상태로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극한까지 몰입한 상태로 몇 시간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 * *
배가 고파 당이 떨어지면서 힘이 쭉쭉 빠지는 느낌이 들고서야 한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대략 새벽을 지나 창밖이 어슴푸레 밝아올 때였다.
라면으로 허겁지겁 식사를 때운 뒤 한쪽 컴퓨터 의자에 앉아 여태까지의 성과를 점검했다.
열심히 더듬어 파악해 낸 자신의 각성 이능력은 정말로 특별하고 놀라웠다.
마치 소설 속 차원이동처럼 다른 세상을 탐험할 수 있고, 직접 겪어본바 죽음조차 위험이 되지 않으며, 카르마를 소모함으로써 탐험의 성과를 현실로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그 다른 세상은 무작위로 선택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바람에 따라 선택되는 듯했다.
'그 종말 후 지구로 가게 된 건······ 내가 쉽고 빠르게 돈 벌기를 원한 탓이겠지.'
잠들기 직전까지 그는 헌터로서 풍요롭게 잘 사는 듯한 중학교 동창생을 부러워했다. 이능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 이능력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어서다. 사회적 명성은 덤이고.
확실히 그 종말해 버린 세상은 쉽고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사방에 널려있는 금붙이 등의 주인 없는 재화를 줍기만 하면 됐으니까.
단, 행운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며 기회는 위기와 함께하는 법이라.
쉽고 빠르게 돈을 벌려면 그에 비례하는 대가가 있기 마련이다. 이번 경우는 한순간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위험이 그 대가였던 것이고.
'심지어 그런 위험이 없었다고 쳐도, 결국 수확물을 선택하면서 카르마라는 대가를 치러야 해.'
요컨대 세상엔 공짜가 없다. 설령 무언가가 공짜처럼 보이더라도 찬찬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다음으로 알아낸 사실은 시간에 대한 것이었다.
능력을 통해 이동한 다른 세상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내든, 이곳에선 한숨 자고 일어날 시간밖에 흐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다른 세상에서 보낸 시간만큼 수명이 줄어들 터다.
'시간이 금이라는데 공짜일 리가.'
이 정도면 필요한 만큼은 파악했다.
이젠 이 능력으로 어떻게 삶을 풍요롭고 보람차게 만들지 고민할 차례였다.
'바로 이능력 각성을 신고하기엔 좀······.'
워낙 특이한 능력인지라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너무 지나치게 까발려지는 느낌이 드는 탓이었다.
이 각성한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걸 신고해서 헌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편이 훨씬 나아 보인다.
한유진은 한참을 의자에 앉아 고민했다. 컴퓨터를 켜 메모장 등의 도구를 활용하기도 했다.
정리하면 할수록 생각이 명료해지면서 선택지가 나타난다.
'크게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으로 나뉘겠지.'
예를 들어.
SF식 강력한 무기나 판타지식 마법이 깃든 도구, 혹은 마시면 초능력을 얻을 수 있는 물약 따위는 물질적인 것이다.
직접 SF식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설계도, 마법을 익힐 수 있는 수련법, 특별한 재료의 힘을 담아낸 물약 제조법 따위는 비물질적인 것이다.
정말로 그런 걸 얻을 수 있을지는 확인해 봐야겠지만······.
'완전히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헌터들의 주된 임무인 '균열 처리'에선 온갖 특별한 물건과 지식이 딸려 나온다. 지금 한유진이 떠올린 생각들은 대부분 그것들을 근거로 했다.
실제로 SF 느낌이 나는 사출무기가 발견되어 화제가 된 적 있고, 마법이라 불러 마땅한 힘이 깃든 물건은 아주 흔하게 나타나며, 그것을 다루거나 만드는 지식 등도 심심찮게 발견되곤 한다.
그것들이 유용한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일단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 능력이라면······.'
고민하면 할수록 한유진은 한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수확물 선택으로 물건을 가져올 수 있지만, 카르마를 써야 해.'
반면 지식은 그렇지 않다.
그가 경험하는 것이 곧 지식일지니, 필요한 것은 소모한 시간만큼의 수명뿐이다.
정말로 모르는 일이었다. 우연한 각성이 아닌 자력으로 이능력을 깨우치고 함양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게 될지도.
'설령 물건이라도 충분히 효율적이면 괜찮아.'
만약 그냥 복용함으로써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힘을 갖게 되는 물약이 있다면?
당연히 모든 카르마를 써서라도 현실로 가져와야 한다. 카르마야 다시 쌓으면 그만일 테니까.
일종의 투자인 셈이다. 큰 힘을 갖게 된다면 세상에 더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이는 곧 그만한 양의 카르마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냥 카르마를 아끼는 것도 미련하게 느껴졌다.
'돈을 그냥 은행 계좌에 처박아두는 꼴일지도.'
이에 대해선 좀 더 신중히 고민해 봐야겠다.
하지만 지금은 행동이 필요할 때였다. 고민도 경험을 바탕으로 해야지, 그냥 방구석에만 처박혀있으면 대부분 한낱 공상으로 그칠 뿐이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전혀 안 피곤했지만 그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자신의 능력을 발동시키려 했다.
조금 어려웠지만 한편으로는 또 어렵지 않은 느낌이다.
어느 순간.
그는 흡사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한순간에 잠들었다.
* * *
다시 그 공간이다.
사방이 암흑천지고 눈앞엔 온갖 형상으로 천변만화하는 문이 보인다. 하지만 다행히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몽롱하진 않다.
"아아, 아-."
시험 삼아 목소리를 내어본 그는 마치 먹혀들듯 사라지는 소리에 신기함을 느꼈다. 그것이 전혀 거슬리지 않고 매우 편안하게 느껴져 더욱 그랬다.
흡족할 만큼 이 신비로운 장소를 탐구해 본 한유진은 천변만화하는 문 앞으로 가 섰다. 그리고 이전에 계획했던 대로 자신의 바람에 집중하며 손을 뻗었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고 예의 공명음이 울려 퍼진다.
고정된 문의 형상은 상당히 판타지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치형이며 테두리는 금속으로 마감됐고 안쪽은 찬란한 색상의 수정들로 채워졌다. 중앙에 박힌 새까만 빛 윤기 나는 금속은 흡사 거꾸로 자라는 나무를 형상화한 것 같다.
"······."
그 화려한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보면 볼수록 오싹한 느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때 은빛 문자가 위쪽으로 떠올랐다.
- 악마 추종자들의 이카파 판게아.
뜻을 이해하면 자연히 놀라게 된다. 이 악마라는 게 여느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낭만 있고 멋질 리 없는 탓이었다.
오히려 악마가 왜 악마인지, 악마라는 존재가 얼마나 잔혹하고 사악한지, 그 추종자들어 얼마나 거리낌 없이 죄악을 저지르는지 보여줄 확률이 매우 높다.
'내가 이번에도 너무 쉽게 강해지기를 원했나······?'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들어가기엔 조금 아깝다. 이전에 경험했듯 죽음조차 무효화하는 능력을 가졌는데, 그냥 불길하다는 이유로 안 들어가면 꼼짝없이 현실의 대여섯 시간을 날리게 될 것이다.
고작 이 정도에 겁먹을 수는 없다.
결심한 한유진은 힘주어 문을 열었다.
그 안쪽으로 보이는 풍경을 채 감상기도 전, 그는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 저절로 몇 걸음 내딛게 됐다. 어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뒤돌아보자 문이 저절로 닫히고 환상처럼 사라지는 광경이 보인다.
'한 번 열면 돌이킬 수 없는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어차피 탐험하지 않으면 이 능력의 존재의의가 없으니 별문제는 아닐 터다.
생각하며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조금 적막하고 쓸쓸한 느낌의 숲속이었고, 그는 그 숲을 가로지르며 난 청회색 석재 타일 도로에 서 있었다.
도로의 상태를 보아 주기적으로 관리받는 듯했다. 아니면 미지의 힘이 깃들어 시간이 지나도 상태가 나빠지지 않는다든가.
'이 옷은 또 뭐지?'
마지막으로 살피게 된 자신의 모습은 꽤 이색적이었다. 거울이 없어서 생김새까지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몸에 걸친 의복은 어느 중세 판타지 게임 속 모험가 스타일이다.
하여 낯선 의복의 주머니 위치와 종류를 파악하고 신겨진 가죽 부츠의 질감을 테스트해 보고 있을 때였다.
"이건 또 뭐 하는 놈이야."
갑작스레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중년인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혀 낯선 언어였는데도 마치 한국어를 듣는 듯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은 적갈색 눈동자에 흥미로운 빛을 띤 채 그런 질문을 던졌다. 몸에 걸친 검은색 로브는 곳곳에 금실이 수놓아져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그는 딱히 대답을 원치 않는 듯했다.
"말하기 싫으면 됐다. 사실 그딴 건 별로 안 궁금하니까."
중년인의 적갈색 눈동자에서 언뜻 새빨간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힘을 원하느냐?"
실로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으로 느껴지는 물음이다.
잠시 망설이던 한유진은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종류의 힘을 얻게 되든, 죽음조차 무효화하는 자신의 능력이라면 괜찮으리라 믿었다.
중년인은 만족한 듯 씩 웃었다.
"대가는 알고 있겠지?"
"잘 모릅니다."
"모른다고? 그런데 여길 찾아왔어?"
어이없는 기색으로 잠시 웃은 그가 친절히 설명해 줬다.
"별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영혼을 조금 잘라서 바치고, 이삼십 년 정도만 혈액 제공자로 잠들어있으면 된다. 세례를 통과하면 육체도 영혼도 전부 강성해지니 크게 불편하진 않을 거다."
"···예?"
영혼을 잘라?
이삼십 년을 잠들어?
안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
영혼의 손상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이삼십 년을 잠들어 있으면 그만큼 수명이 깎이게 될 터다.
한유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3화. 뼈에 새기는 고난
한유진의 그런 반응에 중년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어 휘젓자 은백색 빛무리가 기묘하게 반짝인다. 직후 어마어마한 강풍이 몰아쳐 한유진을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나오려던 비명은 전신을 억죄는 듯한 감각에 막힌다. 몰아치는 돌풍의 소음이 흡사 천둥벼락처럼 거대해서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런 와중에도 한유진은 자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숲 위쪽을 가로지르고 있단 사실을 파악했다. 옆에서 중년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모습도 얼핏 보였다.
사람 하나를 이런 식으로 날려 보내면서 자신도 함께 허공을 날 수 있다니!
경악하는 사이 불현듯, 앞쪽에서 크고 화려한 궁전의 모습을 본 것 같다. 하지만 다시 확인하기도 전 그는 급속도로 가까워진 바닥과 부딪혀 한바탕 나뒹굴었다.
"허으윽······."
정말로 삶에서 손에 꼽을 만큼 아프다.
이런 속도로 추락했는데도 안 죽은 것이 기적이었다. 필시 중년인이 최소한의 보호조치를 해줬기 때문이겠지만.
"엄살 그만 부리고 일어나라."
서늘한 어조의 말에 한유진은 끙끙대던 것도 잊고 본능적으로 일어나 섰다. 한 번 무자비하게 다뤄지고 나니 그에 대한 두려움이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죽어도 그냥 현실에서 깨어날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도저히 침착할 수가 없다.
그런 한유진의 심경을 꿰뚫어 본 듯 약간의 비웃음을 흘린 중년인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잠깐 망설이던 한유진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크고 넓은 궁전의 홀과 복도는 온갖 방식으로 꾸며져 있어 매우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한유진은 그것들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여전한 몸의 통증과 그로 인한 두려움, 그리고 슬슬 피어오르기 시작한 수치심과 분노가 머릿속을 온통 휘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개 같은 놈이······.'
감히 말로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속에선 온갖 욕설이 맴돌았다. 그냥 지금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만으로도 악감정이 폭발한다. 마음 같아선 똑같이 고통받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다.
아니, 배 이상으로 두들겨 패줘야지만 마음이 풀릴 것 같다.
'내가 힘만 얻으면 반드시······.'
그렇게 자신의 감정에 매몰된 채로 얼마를 걸었을까.
도착한 장소는 이전까지처럼 화려하지 않고 조금 삭막한 느낌이 드는 복도였다. 그 복도의 끝에 달린 회백색 거대한 문은 어쩐지 답답한 느낌을 주면서 쉽게 여닫을 수 없을 것처럼 생겼다.
본능적인 불길함에 한유진이 멈칫거리는 때, 중년인은 거침없이 움직여 그 문을 열었다.
드러난 안쪽 풍경은 확실히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했다. 대략 마흔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음을 파악한 순간, 훅 풍겨오는 악취가 한유진을 저절로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
노숙자들을 모아놓아도 이 같은 악취는 안 날 듯하다. 똥오줌 냄새마저 뒤섞여 있어 그냥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병에 걸릴 것 같다.
"들어가라."
"······여기를 들어가라고요?"
거부의 뉘앙스를 가득 담아 반문하면서 한유진은 재차 안쪽을 살폈다. 정확히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거의 전부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서는 앉거나 누운 자세조차 정상이 아니다. 그나마 정상처럼 보이는 자들도 전부 기색이 음침하여 인생 막장의 느낌을 풍긴다.
"지저분해도 조금 참도록 해라. 세례일까지 며칠 안 남았으니까."
문득 한유진은 중년인의 이런 반응이 비정상적으로 친절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졌길래 이러는지 궁금하여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 그때.
마주친 눈동자 속에서 예의 그 새빨간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듯한 환영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번엔 단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야가 이상하게 왜곡되면서 중년인의 눈동자가 한없이 커지는 것 같다. 덩달아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환영 역시 커지면서 그만큼 선명해진다.
직후 미처 위기감을 느끼기도 전 그것들이 한유진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져 나뒹굴었다.
무언가를 사고하고 판단하려 할 때마다 새빨간 벌레들이 나타나 그의 뇌를, 생각을, 영혼을 파먹어 침묵시킨다. 그 무슨 행동을 하려 해도 머릿속에 온통 그 벌레들이 가득하다.
발버둥 치는 한유진을 내려다보며 중년인은 경멸 섞인 비웃음을 흘렸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세례에서 좋은 성과를 내면 그것이 네 힘이 될 테니까."
그리고 바람이 불어 한유진을 악취 가득한 공간으로 내던졌다. 문이 닫히고 장내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와중에도 그는 주변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이후로 시간이 흐른다.
발버둥조차 멈추고 거의 백치가 된 한유진은 머릿속 가득한 벌레들의 요동침에 따라 간헐적으로 몸을 떨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먼저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은 한유진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는데, 중년인이 직접 손을 써서 데려온 자인지라 조심하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한유진은 전혀 추론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 마침내.
중년인이 말했던 세례일이 되었다.
신입이 들어올 때를 제외하면 항상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마법사 느낌의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중년인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간소화된 느낌의 로브였다.
그들은 악취에 인상을 찌푸리고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대기하던 사람들을 이끌어 어딘가로 향했다. 한유진처럼 제대로 거동할 수 없는 자는 마법으로 허공에 띄워 직접 이송했다.
반 시간 정도를 걸어 도착한 장소는 드넓은 홀이었고, 그 홀의 중앙에 보이는 거대한 무언가가 온통 시선을 잡아끌었다.
전체적으로 탁한 검갈색인데 진보랏빛 은은한 휘광을 두르고 있어 매우 신비롭게 느껴진다. 백치 상태와 다름없는 한유진마저 그 구체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중년인이 장내를 책임지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구체를 멍하니 바라보는 한유진의 앞에 멈춰 서선 혀를 찼다.
"이놈부터 시작하지."
곧.
한유진은 마법적인 힘에 의해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홀 중앙의 검갈색 구체를 향해 걸어가게 됐다. 본능적인 불길함에 힘없이 들어 올려진 손이 구체 표면에 닿자 그것이 파문치면서 온갖 기이한 색채로 반짝인다.
직후 발생한 엄청난 흡입력이 그를 구체 속으로 빨아들였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머릿속 가득하던 벌레들의 환영마저 짓뭉개 부순다. 그는 저절로 비명 가득 울부짖으면서 오직 생존본능에 의해 몸부림쳤다.
하나 그다음 순간.
모든 저항을 멈추게 만드는, 초월적으로 압도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본다.
그것이 자신을 본다.
거대하고 또 거대해서 그 일부의 일부조차 인지할 수 없는 그것이 그를 내려다본다.
영혼이 짓눌려 으깨지다 못해 흙먼지로 부서져 내리는 것 같다. 동시에 한유진이라는 사람을 이루던 모든 영적인 구조가 함께 부서져 내린다.
오직 시선.
그것만이 남아 한유진을 누르고 또 눌러 아주 작은 점으로 만들고, 그 점조차 계속해서 눌리다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쯧."
그때 누군가 혀를 차며 완전히 껍데기만 남아 버린 한유진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그는 구체 밖으로 튕겨져 나와 널브러진 상태였고, 그 옆에 선 중년인은 상당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기 드문 순수한 영혼에 뭔가 한 수를 감춘 태도여서 기대했건만······ 그냥 순수한 쓰레기였군."
한탄한 그가 옆에 선 부하에게 명령했다.
"가져가서 혈액 제공체로 써라. 그래도 세례를 마친 몸뚱이이니 최대한 살려두도록 하고."
"예, 주교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가는 한유진의 죽은 눈동자가 뒤돌아서는 중년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담았다.
그리고 이어.
- 당신은 완전히 무력화되었습니다.
은빛 신비로운 문자들이 떠오르며 주위가 빠른 속도로 공허한 어둠에 잠겨 들었다.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 * *
"아아아아악···!!"
절규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한유진은 정신을 차렸다.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하고 수확물을 선택할 수 있는 바로 그 공간이다.
누워있다가 상체만 일으킨 자세로, 거칠게 호흡하던 그가 문득 치솟는 토기를 못 참고 엎드려선 위장이 튀어나올 기세로 구역질했다.
하나 의외로 그런 패닉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트라우마를 남기기에 차고 넘치는 일련의 기억들이 딱 견딜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빠르게 희미해진 덕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끔찍한 경험들인지라 완전히 평정을 되찾기에는 무리였다. 그저 간신히 상황을 파악하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으으···! 끄으으으윽······!"
자신에게 엄청난 고통을 선사했던 중년인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화산이 폭발하듯 차오른다. 오히려 너무 화가 나서 그 어떤 욕설이나 고함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죽여버릴 것이다.
반드시 죽여버릴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릴 것이다.
부서져라 이를 악문 채 몇 번이고 되뇌면서 다짐한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있고서야 간신히 진정했다.
"후······."
깊은 숨을 마지막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멍하니 허공에 떠오른 수확물을 쳐다봤다.
그저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는데도 수확물이랄 게 있었다. 바로 보기만 해도 흠칫 놀라게 되는 새빨간 벌레들의 환영이었다.
'운이 좋았다.'
끔찍한 감상을 주는 환영을 보면서 한유진은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 이 각성 능력이 뛰어나길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나는······.'
영혼이 부서지고 오랜 세월 '혈액 제공체'로 쓰이며 수명마저 크게 줄었을 것이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엄청난 트라우마가 남아 폐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새삼 자신의 능력 수준에 감사하면서 스스로의 안일함을 꾸짖게 된다. 끔찍한 감상을 주는 핏빛 벌레들의 환영을 억지로 쳐다보는 이유였다.
이번의 교훈을 뼈에 새겨야 한다.
더는 요행을 바라지 말고, 설령 완벽히 안전할 수 있더라도 매사 능력을 사용함에 있어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 한다.
이번 같은 일은 정말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겪는다면 그 기억이 희미해지는 효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부정적인 영향이 남을지 모른다.
그는 한참을 더 벌레 환영을 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잔뜩 지친 그는 낡았지만 매우 안전한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원하는 순간, 그는 이번에도 현실의 침대에서 눈 뜨며 깨어날 수 있었다.
"······."
멍하니 있다가 스마트폰을 통해 시간을 확인한다. 점심이 조금 지났을 때로 약 여섯 시간 정도가 흘렀다.
격렬한 싸움을 벌인 듯 심신 양면이 다 피곤했지만 그는 몸을 일으켜 최대한 충실하게 점심을 차렸다. 정말로 이 점심이 너무나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먹으면서 한 번 신중히 고민해 볼 요량이었다.
대체 어떤 바람을 가져야 안전하고 가능성 많은 세계를 성공적으로 방문할 수 있을지, 어떤 식이어야 이번 같은 위험을 철저히 배제할 수 있을지를.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더니.'
그는 불현듯 튀어나오는 한숨을 미처 막지 못했다.
정말로 쉽지 않았다.
4화. 말법의 선협 세계
한유진은 바로 다시 능력을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어떤 형태의 바람이 가장 좋을지를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다 먹은 후엔 괜히 밖에 나가서 산책을 했고,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기도 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동기 친구에게 연락했다.
- 저녁에 바쁨?
답장은 금방 왔다.
- ㄴㄴ 왜?
- 저녁 같이 ㄱ? 갈매기살 땡기는데
- 갑자기?
녀석은 조금 의아한 듯했지만 곧 수락했다. 사실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금방 흘러서 한유진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가다듬는 사이 약속 시간이 다 됐다.
음식점 앞에서 만난 동기 친구는 박희원이라는 녀석으로 이 대학에서 가장 친한 사이였다. 왜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고, 지금 한유진에게 중요한 것은 녀석이 헌터와 관련된 지식에 꽤 해박하다는 점이었다.
부가적으로는 만화와 장르 소설을 좋아해서 신선한 아이디어를 줄 수도 있을 듯하다.
'아님 말고.'
생각하며 한유진은 박희원과 함께 갈매기살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고 고기가 나올 때까지 근황 토크를 했다.
녀석은 며칠 전에도 그러더니 아직도 여자친구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다. 대충 위로와 조언을 해 주는 사이 고기가 나오고, 그것을 직접 굽기 시작하며 슬쩍 헌터에 대한 쪽으로 이야기를 유도했다.
"너 갑자기 각성하면 뭐 할 거냐?"
"뭐 하긴, 헌터 해야지."
"생각해 둔 능력은 있고?"
그에 박희원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내가 마음대로 정하는 거야?"
"망상 안 해봤어? 난 존나 하는데."
"아~ 당연히 해 봤지. 내가 너보다 많이 했을걸?"
이후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헌터에 대해, 그 업계에 대해, 각종 능력에 대해 잘 아는 녀석인 만큼,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고 사회적 위치와 영향력 등의 요소까지 더해가며 아주 흥미진진하게 떠들어 댔다.
새로운 관점을 더할 수 있어서 한유진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았다.
"너 판타지 소설 보잖아?"
"그치. 왜?"
"그런 소설 속 능력은 어떻게 현실에 없냐?"
"있는 것도 많은데, 없는 게 더 많지. 주인공한테 특별한 치트 하나 쥐여주는 게 여기선 거의 필수거든."
"어떤 치트?"
"일단 게임 같은 시스템으로 성장하는 종류가 많고······."
한유진도 장르 소설 쪽에 완전히 문외한은 아니다. 소설을 읽지는 않지만 그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웹툰은 몇 작품 본 적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장르 소설 마니아라고 할 수 있는 박희원보다는 견문이 부족했다. 덕분에 계속 아주 흥미진진한 태도로 경청할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라면 어떻게든 그런 소설 속 주인공의 '치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작은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다. 이건 요행을 바라는 게 아니라 목표를 세우는 일이다.
경청하다 보니 이야기는 배경이라는 소재에 이르렀다.
"요즘은 또 선협이 슬슬 알려지는 것 같더라고."
"선협? 무협 같은 거야?"
"같은 동양풍이긴 한데 좀 달라. 무협에 무인들이 나오면, 선협에는 신선들이 나오거든."
"웬 신선?"
한유진이 생각하는 신선은 금도끼 은도끼 동화에 나오는 그런 것뿐이다. 한데,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니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선협 세계관의 선(仙)이란 불멸자이자 초월자다.
여느 판타지 세계관의 신(God)이라고 봐도 된다.
따라서 그 선이 되기를 꿈꾸며 수련하는 이들을 수선자(修仙者)라 부르고, 이를 판타지로 치자면 마법사와 비슷하다.
다만 파워 밸런스가 미쳐 날뛰는 모양이었다. 무협 세계관의 정상급 고수가 하류 수선자를 이기기 힘들다고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런 게 요즘 유행이라고?"
"유행까진 아니고 슬슬 알려지는 단계 정도? 그냥 내 생각인데, 무협 좋아하던 독자들이 조금씩 선협으로 넘어가는 느낌이야. 맨날 비슷한 것만 보다가 이건 좀 새롭잖아."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적당히 맞장구쳐준 후 한유진이 문득 물었다.
"그럼 만약에, 현실에서 선협 능력 각성하면 어떻게 되냐?"
"어떻게 되긴."
박희원이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냥 신 되는 거지."
* * *
집에 돌아온 후.
한유진은 바로 잠드는 대신 인터넷으로 선협에 대한 내용을 찾았다. 앞서 박희원의 설명과 더해져 딱히 어렵지 않게 관련 지식을 쌓고 보강할 수 있었다.
'진짜 이런 느낌의 세계가 있을까?'
누군가에겐 한낱 공상일 뿐이겠지만 한유진에겐 매우 진지한 생각이었다.
존재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미래가 격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존재한다고 쳐도 엄청나게 위험하겠는데.'
개인의 힘이 어마어마한 세계관이기 때문인지 유독 도덕관념이 무너진 스토리가 많은 듯하다. 자신의 수행을 위해서라면 정말로 '무슨 짓이든' 하는 느낌으로.
그리고 그건 한유진이 보기에 꽤 설득력 있었다.
'정말로 개개인이 그만큼이나 강해질 수 있는 세계라면, 수련을 위해 뭘 못하랴.'
약육강식의 논리가 그 이상 적나라하게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수련에 성공해서 힘을 키우기만 하면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계일 테니 말이다.
실제로 현실에서도.
2차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균열이 발생하고 이능력 각성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세계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빠졌었다.
어떤 종류의 충격이 어떤 갈등으로 발전하고 어떻게 해소되었는지는 전부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 충격과 갈등 중 '절대자의 출현'에 대한 우려가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한 개인이 과도한 힘과 권력을 손에 넣으면 언제든 재앙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례로는 수많은 제왕들과 독재자들의 행적을 들 수 있고.
그러니 선협 세계관의 분위기가 그렇게 위험하고 야만적인 것도 결코 무리한 설정은 아니었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도리도 논리도 소용없는 것이 현실이니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힘이라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일은, 그런 느낌의 세상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떻게 안전히 방문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단번에 성공하려 들면 안 된다. 괜히 서두르다간 지난번 같은 참사가 반복될 수 있다.
슬슬 잘 준비를 하면서 계속 궁리하던 한유진은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능성 있게 느껴져서 살짝이지만 들뜨게 된다.
잠시 후.
그는 침대에 누워 능력 발동을 시도했고, 전보다 더 수월하게 잠들 수 있었다.
* * *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
천변만화하는 문을 앞에 둔 한유진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바람'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계속 집중하는 상태로 뻗은 손에 문에 닿자, 은은하지만 전신을 울리는 공명음이 퍼져 나가며 문의 변화가 멈췄다.
나타난 것은 고대 동양풍으로 상당히 크면서 곳곳이 옥으로 장식된 나무문이다. 한데 전체적으로 심하게 낡았고 일부는 썩어서 금방이라도 부스러져 내릴 듯했다.
곧 은빛 문자들이 위쪽으로 떠올라 한유진의 시선을 끌었다.
- 말법 이후의 영원대륙.
'말법······.'
신기하게도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천지에 가득하던 영기(靈氣)가 대책 없이 스러져 선도(仙道)가 끊어지는 대재앙을 의미한다.
요컨대 수선의 종말인 셈이다.
한유진은 정말로 선협과 같은 세계를 방문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가장 위험한 건 바로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 사람들이 전부 죽어 없어진 상태의 세상이라면, 그러면서도 처음 방문했던 '종말 후 지구'처럼 미지의 위험이 잔류하지도 않는 세상이라면 목표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진짜로 이런 문이 고정되다니.'
물론 이 문 너머의 세상이 정말로 어떠할지는 살펴봐야만 안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힘주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
슬쩍 뒤돌아 문이 사라지는 광경을 확인한 다음 주위를 살핀다. 예상했던 것과 상당히 부합하게, 매우 황폐한 느낌 가득한 어느 산맥의 초입부였다.
보이는 것이라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의 모습뿐이다. 죽은 건지 산 건지 알 수가 없고, 자연히 다른 곤충이나 동물들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는다.
하늘은 딱히 구름이 끼지 않았는데도 잿빛으로 우중충하다. 땅은 오랜 가뭄에 시달린 듯 쩍쩍 갈라져 회생이 어려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살핀 자신의 복장은 어느 고대 동양의 무인(武人) 같았다. 시대적으로는 어울릴지 몰라도 너무 깔끔해서 주변의 황폐함과 크게 대비된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주변에 의식할 만한 생명체가 없다.
그는 최소한의 긴장만 유지한 채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유는 그 진입로에 '오행종'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큰 비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잔뜩 풍화되어 거의 흔적만 남은 글자였지만,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이계의 문자였지만, 그럼에도 한유진은 마치 한글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다.
필시 쓰고 듣고 말하는 데도 문제가 전혀 없을 거다.
'그놈하고 대화할 때도 그랬지.'
여전히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그 중년인을 잠시 떠올린다. 하지만 곧 한유진은 잡념을 털어버리고는 산을 오르는 데 집중했다.
너무 힘들어서 쉬었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몇 번 반복했을까.
마침내 그의 눈에 폐허가 된 종문 건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상태의 심각함이 절로 느껴졌는데, 인위적인 파괴가 벌어진 것 같진 않고 세월의 힘에 풍화되어 무너져 내린 듯했다.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선 한유진은 조심스럽게 혹시 모를 위험을 살폈다. 하지만 어디를 어떻게 봐도 그냥 폐허일 뿐이었다.
'······큰 기대는 말아야겠군.'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아직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설령 정말로 아무 수확이 없더라도 그냥 한 번의 수면을 흘려보낼 뿐이다.
오히려 홀가분해진 그는 이 오행종이라는 세력의 유적을 전체적으로 탐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해가 일찍 저물지 않아 강제로 쉬어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작정 탐사하기보단 일단 크게 한 번 돌아본 후 중요해 보이는 곳부터 탐사하는 게 낫다.
그런 생각이었는데, 마침 그의 눈에 '장서각'이라는 현판이 붙은 탑 형태의 건물이 들어왔다.
장서각.
무협 소설 등에서 보면 중요한 무공비급 따위가 보관되는 장소다. 아마도 이 세상의 장서각도 비슷할지 모른다.
호기심과 약간의 흥분을 품은 채 그는 건물의 다 썩어 너덜거리는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섰다. 훅 끼쳐오는 건조한 공기 속 먼지 냄새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내부는 그저 세월에 낡아 바스러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난동의 흔적이 없었다. 일정 간격을 두고 세워진 책장들은 상당수가 무너져 내린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서 있는 것도 보인다.
비교적 멀쩡한 어느 책장에 다가간 한유진은 그곳에 꽂힌 책들을 살폈다. 역시 대다수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그래도 한 책의 표지 글자가 눈길을 끌었다.
선도비사.
대충 선도의 비밀스러운 역사라는 뜻이다.
진짜로 선(仙)을 언급하는 책을 보게 되자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그는 매우 조심하면서 그 낡디낡은 책을 집어 들어 펼쳤다.
5화. 오행종 유적 탐사
책에 적힌 문자는 딱 봐도 표음문자가 아닌 표어문자였다. 또한 한자와 느낌이 살짝 비슷했는데, 보면 볼수록 그런 느낌은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이세계의 문자임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내용이다.
실제 역사를 담았다기보단 일종의 '카더라 썰'을 단편집처럼 담은 책이었는데, 곳곳이 세월에 손상되어 내용을 전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주 유익했다.
흥미로운 것은 물론 이 세계의 대략적인 구조와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덕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책을 조심히 돌려놓은 한유진의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선협과 닮은 세계라니.'
당연히 전부 같지는 않고 다른 점들이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선협 세계라 칭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다.
선(仙)이 되기 위해 수련하며 한없이 강해지고 장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나도 수련법을 얻고 익힐 수만 있다면······!'
치솟는 흥분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는 장서각 내부 탐사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방금 알게 된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한데 어쩔 수 없이 드는 잡생각도 있었다.
무한에 가까운 우주의 광활함을 고려했을 때, 수많은 이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지구의 장르 소설과 닮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 세계들의 존재가 어떤 우주적이고 불가해한 작용으로 지구 인류의 무의식에 영향을 끼치기라도 한 것 같다.
'아니, 잠깐······.'
한유진은 문득 더 그럴듯한 가설 하나를 떠올렸다.
지구에서 선(仙)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의외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읽은 선도비사 책의 내용에 따르자면, 이 세계의 수선 문명은 못해도 수만 년에서 어쩌면 수십만 년 이상 지속됐다.
누가 원조인지를 따지자면 이 세계가 원조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뜻이다.
'차원 충돌로 인한 균열 현상이 훨씬 옛날부터 미미하게라도 있었다면?'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균열 발생은 2차세계대전 이후지만, 어쩌면 그 이전부터 미처 기록되거나 발견되지 못한 균열 현상이 존재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이 세계의 문화 단편이 균열이라는 현상을 통해 고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것이 도교에 영향을 주어 선(仙)의 개념이 지구에도 나타나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우주의 비밀 하나를 알아낸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잠시 후.
기쁘기 짝이 없게도 한유진은 수련법이 담긴 책을 찾아냈다.
물론 세월의 힘에 잔뜩 풍화되어 있었지만, 대출 수요가 많았는지 무려 스무 권 넘게 비치되어 있었고, 책 자체도 처음부터 튼튼하게 만들어진 듯 비교적 멀쩡했다.
그 스무 권이 넘는 책들을 서로 대조하면서 읽으면 완전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터다.
책의 제목은 '회원공'으로 대충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뭔가 있어 보이지만 그렇게 막 엄청난 의미를 담은 것 같진 않다.
한유진은 바로 근처 바닥에 앉아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할 것을 각오했는데, 의외로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천재여서가 아니었다.
'내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 덕분에······.'
모든 문장을 조금의 오해도 없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심지어 회원공의 뼈대를 이루는 '법문(法紋)'을 파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법문이란 여느 판타지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룬(Rune)과 역할이 비슷하다. 그 자체로 신비한 효능을 품고 있어 범상치 않은 기원을 가졌음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형태가 매우 복잡한 것은 물론 중의적인 뜻을 품었고, 어떤 것은 마치 수차례 겹쳐 쓴 듯하여 원형을 파악하려면 해설본이 필요하며, 심지어는 각자의 상생상극이 존재하기까지 한다.
아마도 처음 수선을 접한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법문을 파악하는 일일 터다.
한데 한유진은 자신의 그 언어 이해 능력 덕분에 완전히 날로 먹을 수 있었다.
'천재가 아니지만, 천재와 다름없는 건가?'
안 그래도 흥분한 상태였는데 더 열이 오르는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뚜렷한 희망이 이토록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렇게 정신없이 책의 내용을 파악하던 중.
문득 느껴지는 배고픔에 잠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주위는 어두워지지 않았다.
'최소 몇 시간은 흐른 것 같은데······.'
생각하며 잠시 밖으로 나간 한유진은 잿빛으로 우중충한 하늘을 살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 어디서 구할 수도 없을 터다.
'위험이 전혀 없게끔 사람이 멸절한 세상을 원했더니, 나 역시 며칠 못 버티고 말라 죽게 생겼구나!'
역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무엇이든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세상에 없다는 말도 떠오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장서각으로 돌아가 상태가 좋은 회원공 책 두 권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탐사 활동을 재개했다.
아무리 가능성이 작아 보여도 그냥 말라 죽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싫기만 한 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손해였다. 뭔가 버섯 같은 거라도 찾아서 먹을 수 있다면 이곳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매우 길어질 테니까.
머릿속으로 대략 지도를 그리듯 큼직큼직하게 탐사를 진행한다. 그렇게 힐끗 보고 지나치는 장소가 매우 많음에도 이 오행종 유적은 도무지 끝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 넓었다.
슬슬 지쳐서 주저앉고 싶어질 때쯤, 한유진의 눈에 '연단전'이라는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일부 귀퉁이가 무너져 있었지만 석재가 많이 쓰인 터라 전체적으로는 무사한 모습이다.
'혹시······.'
무협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벽곡단' 따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 알만 먹어도 하루를 배고프지 않을 수 있다는 그런 거 말이다.
약간의 희망을 품고 들어서자 의외로 특별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마도 장서각 때처럼 문이 닫혀 있지 않아서인 듯하다.
내부 구조는 그리 복잡하지 않고 용도를 짐작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금방 약재들을 보관하는 장소를 찾아낸 그는 옥으로 만들어진 보관함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한쪽 구역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의 약재를 보관하는 듯했고, 다른 한쪽은 가공을 마친 둥그런 형태의 단약을 보관하는 듯했다.
문제는 내용물 중 멀쩡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단약으로 가공된 것들이 일부 형태가 보존되어 있었는데, 과연 약효마저 멀쩡할지는 모를 일이었고 그걸 시험 삼아 복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소를 옮겨 약재가 아닌 서책을 보관하는 곳을 찾은 그는, 상태가 멀쩡한 책 몇 권을 간신히 손에 넣고 빠르게 살펴봤다.
'영단······.'
단약의 정체를 알려주는 책도 있고, 이곳에 어떤 단약들이 무슨 용도로 만들어지고 보관되는지 알려주는 장부 성격의 책도 있다.
덕분이랄지 한유진은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그가 여태 탐사한 이곳 오행종 유적은 '외문' 구역에 불과했고, 핵심 인물들이 거주하는 '내문' 구역은 산 더 위쪽에 따로 존재했다.
'아직 반의반도 둘러보지 못했는데, 외문 구역이 내문 구역보다 더 넓은 건가······?'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다.
연단전을 마저 탐사한 그는 딱히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한 채, 그리고 책 한 권을 추가로 손에 넣은 채 밖으로 나왔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이 외문 구역을 마저 돌아볼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바로 내문 구역으로 향할 것인가.
이곳 어딘가에 물이 흐르는 옹달샘이라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그런 것이 있다면, 더 중요도가 높은 내문 구역에도 당연히 있을 법하다.
탐사를 통해 무언가를 얻더라도 당연히 내문 구역에서의 성과가 훨씬 높을 터였다.
'가자.'
결심한 그는 대략 짐작한 바에 따라 한쪽으로 향했다. 아까 탐사하던 중 산 위쪽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했었는데, 어디로 향하는지 몰라 일단 그냥 지나쳤었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긋하지도 않은 걸음으로 이동한다. 아무것도 먹고 마실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해서인지 슬슬 갈증이 이는 듯했지만, 그래도 막 겁에 질리지는 않았다.
'죽어도 괜찮아.'
악마 추종자들의 이카파 판게아, 그 세계에서의 크나큰 실패가 일종의 내공으로서 쌓인 느낌이다.
'그렇게까지 끔찍하게 죽기도 쉽지 않아.'
설령 비슷하게 끔찍하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마구 휘둘리는 것과 스스로 미리 알고 각오한 상태에서의 체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한유진은 사실 내문 구역으로 가더라도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리라 여겼다.
그래서 이미 말라 죽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냥 다시 현실에서 깨어날 뿐이야.'
생각하는 사이.
그 위쪽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고는 따라 걸으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의 등산도 역시 쉽지 않았다. 배고프고 갈증이 나서인지 특히 더 그랬는데, 어쩔 수 없이 쉴 때마다 그는 챙겨온 회원공을 읽었다.
그렇게 회원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다 읽었을 때쯤.
한유진은 눈앞에 나타난 오행종의 내문 구역으로 짐작되는 폐허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고생해서 올라온 게 과연 헛걸음이 아니었다.
확실히 더 중요한 구역은 맞는 듯했다. 과거 이곳이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했을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장서각이 어디 있으려나······.'
외문 구역에서 회원공을 얻었으니, 이곳에서는 필시 더 상위의 공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꼭 공법이 아니더라도 유용한 법술 혹은 비술을 얻게 될지 모른다.
하다못해 그냥 이 세상의 여러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도 좋았다. 수선에 대한 상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터였으니까.
그는 이번에도 크게 돌아보면서 대략적인 구조부터 파악하려 했다. 한데, 그렇게 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특이한 지형을 발견했다.
마치 협곡 같은 지형이었다. 양쪽 절벽 면에는 일정 간격으로 동굴이 뻥뻥 뚫려 있고, 그 각각의 동굴들로 이어지는 계단이 반듯하게 나 있다.
'동부인가?'
선협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수선자들의 동굴형 수련 장소를 뜻한다. 앞서 읽은 선도비사 책에서도 동부에 대한 언급이 존재했다.
내문 구역의 동부라면 필시 중요한 인물들의 거처였을 터다.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한유진은 흥미와 기대감을 품고 가까운 동굴부터 탐사하기 시작했다.
조심히 계단을 올라 탐사한 첫 번째 동굴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가 온통 암흑천지라 입구 주변을 제외하고는 애초에 탐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
고민하던 그는 욕심을 버리고 각 동굴의 입구 주변부만 탐사하기로 했다. 괜히 장님 상태를 자처하다가 다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개의 동굴을 탐사했을까.
마침내 그는 어느 한 동굴 입구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해골······.'
사람의 것이 분명한, 동시에 이리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마치 백옥처럼 희고 윤기가 나는 특별한 해골이다. 먼지가 잔뜩 내려앉았음에도 그 빛깔이 가려지지 않았다.
이게 예술 조각품인지 진짜 사람의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배경적 상황과 근처에 떨어진 여러 소지품을 보면 예술 조각품일 리는 없었다.
'수선자는 뼈조차 특별해지는 건가.'
한유진은 조심하며 그 해골을 살피고 곁에 남겨진 소지품들도 살폈다.
검회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주머니 하나, 녹이 슬진 않았지만 빛깔이 매우 탁해진 동양풍 장검 하나, 마지막으로 한때 영롱한 빛을 띠었을 것 같은 비취색 호리병 하나였다.
6화. 수확물 선택
주머니는 입구가 꽉 조여진 채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았다. 장검은 이상하게도 날이 전혀 안 서 있었는데, 세월에 닳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듯했다.
마지막 호리병이 주워 드는 순간 안쪽에서 찰랑이는 소리가 나 한유진의 흥미를 크게 끌었다.
'아직까지 내용물이 남아있다고?'
호리병이 딱히 손상되지 않은 만큼 완벽히 밀폐되었다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게 조심하며 마개를 열어 본 한유진은 슬쩍 냄새를 맡았다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심하진 않지만 분명하게 썩은 냄새가 나서 도저히 마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갈증을 풀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마시면 배탈이 나서 되레 수분을 더 잃게 생겼다.
실망한 그는 남은 두 물건의 용도를 대략 짐작해 봤다.
하나는 딱 봐도 무언가를 보관하는 주머니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유명한 '저물대'일 수도 있었다. 판타지로 치자면 아공간 주머니 같은.
다른 하나는 날이 무디지만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가 맞을 터였다. 아마도 수선자의 힘인 '법력(法力)'을 통해서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별 고민하지 않고 세 가지 물건을 모두 챙겼다. 당장 쓸모는 없지만 이번 탐험이 끝났을 때 수확물로 선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내가 수선에 입문하고 나면 전부 사용할 수 있을지도.'
이 오행종이라는 세력이 얼마나 유명하고 강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세력의 내문 인사가 마지막까지 곁에 두었던 물건들이라면 필시 하찮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수확물을 주머니 등에 쑤셔 넣고 양손에 든 채로 한유진은 탐사를 재개했다. 여기서 추가 수확물이 나오면 상의를 벗어 보따리라도 만들 생각이었다.
한데 아쉽게도.
그 이후로는 별다른 수확 없이 협곡을 나서야 했다.
* * *
내문 구역은 처음 탐사를 시도했던 외문 구역과 비교해서 결코 작지 않았다.
하지만 의외로 금방 탐사를 끝낼 수 있었는데, 한유진이 유능하거나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길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이 오행종이라는 세력이 수선자들의 집단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내문 구역은 오행종 사람들 중에서도 실력 뛰어난 이들만이 거주했을 터다.
바로 그렇기 때문인지 길을 연결하는 데 매우 성의가 없었고, 그나마 연결되어 있던 것들도 세월의 힘에 닳고 무너져 내려 전부 끊어진 상태였다.
가파른 경사의 암벽 위쪽에 세워진 건물들이 대표적이다.
환경이 생기 넘치는 때였다면 확실히 선경 같은 운치를 더했을 그런 배치와 구조였지만, 지금은 그냥 보기에 험난할 뿐이었고 한유진은 올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또한 어떤 구역은 커다란 동굴 안으로 통하는 듯했는데, 입구가 무시무시한 크기의 바위로 막혀있어 중장비를 동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답이 없어 보였다.
어쨌든 그래서 내문 구역의 탐사는 금방 끝나게 됐다.
'나중에 실력이 되면 다시 와야겠구나.'
어차피 생명이 멸절한 세상인 만큼 누군가가 보물을 훔쳐 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다시 외문 구역으로 향한 그는 점점 더 심해지는 갈증과 굶주림을 참으며 탐사를 재개했다. 중간에 드디어 날이 저물기 시작해서 밤의 냉기를 막아줄 거처를 구하기도 했다.
실로 괴롭고 긴 밤이었다.
하루 종일 움직인 상황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으니, 이제는 갈증이 확실하게 고통의 단계로 올라섰다. 또한 이 황폐한 세상의 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춥고 어두웠다.
그는 혹시나 '종말 후 지구' 세상처럼 알 수 없는 위험이 닥쳐올까 무서워하기도 했다. 그런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설령 죽어도 그냥 현실에서 깨어날 뿐임을 알면서도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씨발······.'
마음속에 떠오르는 욕설을 내뱉을 힘도 없다.
반쯤 기절할 것 같은 상태로,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 싶은 상태로 얼마를 버텼을까.
마침내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한유진은 휘청이며 일어나 탐사를 이어갔다. 죽을 맛이었지만 움직이든 멈추든 결국은 죽게 되리란 사실을 받아들인 상태였기에 오히려 움직일 수 있었다.
다행히 성과가 컸다.
알고 보니 외문 구역은 매우 넓어서 장서각이나 연단전이 하나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 찾아낸 장서각에서 그는 새로운 도움 되는 책을 꽤 많이 수확했다.
주로 공법이 아닌 법술들이었고, 이 역시 회원공 책처럼 수가 많고 튼튼히 만들어진 덕에 상태가 비교적 좋았다. 또한 수선계의 상식과 이 오행종에 대한 정보가 담긴 책도 서너 권 손에 넣었다.
'여기가 내 무덤이다.'
한유진은 그렇게 결심했다.
계속 움직여서 다른 더 중요한 수확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겨우 하루 정도밖에 안 지났음에도 그는 수십 년 이상 중병에 시달린 사람처럼 매우 쇠약해졌음을 느꼈다.
단순히 이런 경험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하나 이곳의 '말법' 재앙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을 확률도 없진 않다.
먼저 읽기 시작한 것은 당연히 법술들이었다.
고급 법술은 하나도 없고 전부 수선자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기초 법술인 듯했는데, 과연 이 외문 구역의 장서각에 다수 비치되어 있을 만했고, 또한 바로 그래서 지금의 한유진에게 가장 유용했다.
아직 수선에 입문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고급 법술을 알아봤자 돼지목에 진주목걸이일 뿐이다.
어쨌든 법술의 수는 총 일곱이나 됐다.
적을 공격해 불태우고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화탄술.
외부의 물리적 영적 충격을 방어할 수 있는 옥피술.
빠른 이동과 짧은 비행이 가능해지는 풍운술.
부상과 질병 및 독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치유술.
물건을 원격으로 움직일 수 있는 어물술.
시력을 강화하고 영적인 것이 보이게 되는 영안술.
영적인 기운을 숨겨 남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은영술.
'공격, 방어, 회피, 치유, 유틸······ 생존에 필요한 건 다 있구나.'
적의 행동을 방해하는 군중제어 속성 법술까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기초에 속하지 않는 모양이다.
한유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법술서를 탐독했다.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는 와중에도 그는 스스로 놀랄 만큼의 집중력을 유지했다.
만약 이게 진짜 현실이었다면 결코 이러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그렇지 않았기에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며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한참 뒤.
법술서들을 한 번씩 전부 읽은 그는 이어서 수선계의 상식과 이곳 오행종에 대한 여러 잡설이 담긴 책을 집어 들었다. 그에게 있어 이런 정보들은 때때로 여타 법술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과연, 그런 생각이 틀리지 않아 한유진은 곧 유익한 정보를 얻었다. 바로 내문 구역에서 득템한 물건들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주머니는 정말로 그 유명한 저물대가 맞았다. 내부 용량이 그렇게 크진 않은 듯했지만 일단 아공간 주머니 비슷한 물건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할 수밖에 없다.
칼은 오행검이라는 이름의 중상급 법기로, 게임으로 치자면 매직 아이템이었다. 법력을 부여해 화,뇌,풍,수,토 오행의 속성을 자유자재로 끌어낼 수 있으며 공격과 방어가 모두 가능하다.
여기서 잠시 주목할 점은 이 수선 세계의 오행이 지구에서 흔히 알려진 화,수,목,금,토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곳의 오행인 화,뇌,풍,수,토는 물질의 다섯 상태를 상징한다. 꼭 그 자체가 아니더라도 아주 깊은 연관성을 가진 자연 현상으로서 말이다.
고체의 표상, 토(土).
액체의 표상, 수(水).
기체의 표상, 풍(風).
플라스마의 표상, 뇌(雷).
마지막으로 물질의 소멸에 동반되는 에너지의 표상, 화(火).
'이게 더 직관적으로 와닿긴 하는군.'
그리고 좀 더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지구 동양의 오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다소 낯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지막 호리병은 영액주병이라는 이름의 중급 법기였는데, 무려 생성한 내용물 한 모금으로 하루치 음식 섭취를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영미(靈米) 등의 제대로 된 수선자용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비교해 이득이 적어 별로 선호되지 않지만, 그래도 체내에 쌓인 불순물을 제거하여 수련을 돕는 효능을 가졌으며, 비상시 오랜 시간을 멀쩡히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한다.
한유진에게는 매우 유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제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가 될 터다.
수확한 모든 책을 한 번씩 읽어보게 된 그는 문득, 엄청나게 피로하고 괴로운 것을 느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몇 번씩 반복해서 읽으며 최대한 머릿속에 넣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어젯밤 추위에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떠올리면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잠깐만 쉬자.'
생각과 함께 한유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 당신은 죽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예의 은빛 문자들이 신비롭게 떠올랐다.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 * *
말하자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기절한 것처럼 자다가 밤이 찾아오고, 안 그래도 쇠약한 상태였는데 매서운 추위가 덮쳐들자 미처 깨어날 새도 없이 죽어 버린 모양이다.
'운이··· 좋은 건가?'
거기서 깨어났으면 괜히 더 고생하다가 죽었을 테니 결과적으로 이득인 듯하다.
상념을 접으며 그는 눈앞에 떠오른 풍성한 수확물들을 살폈다.
하나하나 소모되는 카르마의 양을 살피던 한유진은 점점 표정이 활짝 폈다. 생각 외로 책을 선택하는 데 드는 카르마의 양이 매우 적었던 것이다.
'책에 적힌 지식 정도는 그냥 반복적인 경험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애초에 이 능력을 발동하는 데 드는 소모 값이 별거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딱 그런 수고를 더는 정도로만 카르마가 소모되는 것도 합당하다.
덕분에 그는 부담 없이 모든 책을 수확물로 선택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선택하려 손대기 직전 미처 몰랐던 기능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무려 추가적인 카르마를 소모함으로써 수확물의 상태를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었다!
'이거지······! 바로 이래야지······!'
환호에 겨워 잠시 격정적인 몸부림을 친 그가 책을 모두 선택했다. 당연히 상태를 멀쩡하게 복원하면서였다. 애초에 소모되는 카르마가 적었던 만큼 복원에 추가 소모되는 카르마도 감수할 만했다.
방금 만들어진 것처럼 멀쩡해진 고대 동양풍 서책들이 그의 옆으로 이동해 차곡차곡 쌓인다. 한유진은 본능적으로 그것들이 현실에서도 나타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어 그는 아직 선택하지 않은 남은 세 가지 물건을 살폈다.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무려 오행종의 내문 인사가 마지막까지 갖고 있던 아주 유용한 물건들이다. 원상태로 복구할 수도 있게 된 만큼, 미래를 위한 투자 개념으로라도 얻을 가치가 있다.
'그래, 이건······ 이건 투자야. 돈을 그냥 은행 계좌에 처박아두기만 할 수는 없어.'
가뜩이나 막 성장을 시작하려는 때다. 초기에 투자할수록 성과가 좋은 것은 상식 아니던가?
하여 그는, 무려 갖고 있던 카르마의 절반이 넘는 양을 과감히 소모했다.
저물대와 오행검과 영액주병이라는 생존 필수 법기들을 얻었다. 후련함을 느끼면서 마침내 여유를 찾았을 때.
"······."
그는 현실의 침대에서 눈 뜨며 깨어났다.
상체를 일으키자 침대 주변으로 깔끔하게 놓여있는 수확물들이 보인다. 그 어두운 공간에서 봤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내 이 각성 능력은······ 도대체 뭐지?'
그 초현실적 광경을 보자 여태 잠시 미뤄두었던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헌터들 중 이런 식의 능력을 가졌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어딘가에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흔치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람에 부합하는 이세계를 탐험할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 죽든 악영향이 남지 않으며, 그곳에서의 수확을 현실로 가져올 수도 있다.
꽤 오래 침묵하던 한유진은 금방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지금 당장 고민하기엔 아는 것이 너무 적어 결론을 내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힘들었던 탐험을 막 마친 터라 정신적으로 매우 피곤했다.
그는 불현듯 물이 마시고 싶어져 침대를 벗어났다.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고생한 느낌을 떨쳐버릴 때였다.
7화. 원시림 속 수련 시작
마침 주말이었기에 한유진은 이틀 정도를 능력 사용 없이 푹 쉬었다.
능력 사용의 코스트가 가벼운 것과는 별개로, 정신력의 소모는 그리 빠르게 회복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또한 수확물로 가져온 책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찼다.
'너무 연속으로 다른 세계를 방문하니까 현실이 조금 붕 뜨는 느낌이야······.'
아직도 가끔 자신이 각성했다는 사실이 안 믿긴다. 이계의 언어로 적힌 수선 공법과 법술을 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랬다.
여담이지만, 수확물로 이 책들을 선택했을 때 관련 언어의 지식과 이해력이 함께 딸려온 느낌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을 터다.
어쨌든.
한유진은 쉬면서 몇 번 정도 회원공 수련을 시도했는데,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딱 영기를 느끼는 것만 성공해 보고 싶었다.
사실 조금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내 영근(靈根) 자질은 과연 뭘까.'
영근이란 쉽게 말해 영기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영기는 보통 세상천지에 가득하다고 말하는데, 정확한 근원을 따지자면 현실과 반쯤 겹친 상태로 존재하는 우주적인 힘의 흐름, 혼원계(混元界)에서 온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혼원계와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영근인 셈이다.
'그리고 이 재능에는 등급이 존재하지.'
영기 감응력이 얼마나 좋으냐에 따라 천(天)영근, 진(眞)영근, 위(僞)영근 순으로 등급을 나눈다. 그리고 만약 이 감응력이 아예 없다시피 한 범인이라면 무(無)영근이다.
한유진은 천영근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진영근이기만 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수선계의 상식대로라면 천영근과 진영근은 수행 속도 차이가 최대 열 배까지도 날 수 있지만, 천영근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영근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과욕이다.
진영근만 되어도 위영근의 처지보다는 열 배 이상 낫다.
'따지자면 천영근과 위영근은 수행 속도 차이가 백 배까지도 날 수 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진영근이길 바라게 된다. 위영근이면 설령 자신의 각성 능력으로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다 쳐도 엄청나게 고생할 것 같았으니까.
한유진은 자신이 무영근일 가능성은 아예 치지도 않았다.
영기는 지구식 표현으로 마나(Mana)인데, 모든 이능력 각성자는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마나란 본디 멜라네시아 등 태평양 여러 섬에 분포하는 민족들의 전통문화적 개념이다. 그 유명한 마오리(Maori)족 역시 마나를 믿는 민족 중 하나고.
어쨌든, 이 마나라는 개념이 초자연적 힘의 대표 격 명사가 된 계기는 1950년대에 초히트를 친 SF소설에 쓰이면서다.
소설이 얼마나 히트했는지, 첫 균열 발생과 함께 이능력 각성자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불가사의한 힘을 선보이기 시작했을 때, 미국인들 거의 전부가 그 힘을 마나라고 불렀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져 국제 표준까지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그냥 기(氣), 혹은 내공(內功)이라고 부르지.'
아무튼 모든 이능력 각성자는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게 상식이다. 한유진 자신이 무영근일 가능성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슬슬 정신이 분산됨을 느낀 그는, 침대에 드러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습관처럼 메신저를 열어 봤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각성 계기일 수도 있는 그 중학교 동창생의 프로필을 재차 확인한다. 그렇게 사진을 넘겨 보고 있자니, 뭐라 콕 집어 표현하기 힘든 음습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내가 무슨 능력을 각성했는지 알면 너희 둘 다 놀라서 자빠지겠지.'
그 둘이 한유진 자신에게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안다. 그럼에도 모종의 복수를 행한 것처럼 통쾌한 기분이다.
뭐 어떤가? 어차피 혼자서 하는 생각일 뿐인데.
메신저를 끈 한유진은 이어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집중해서 방문하는 곳은 당연히 헌터와 이능력을 주제로 하는 사이트였다.
한때 그도 이런 사이트를 자주 방문했던 적 있다. 간절히 바라지만 결코 일어날 리 없다고 여기는 행운, 이능력 각성을 동경하고 질투하면서.
- 마약 빨고 힐 주면 쾌락 버프 추가됨?
- 근데 마약 후유증도 힐로 치료되냐?
- 저거 보면 각성 능력 최고봉은 힐러임
- 헌터가 벼슬이지 ㅅㅂㅋㅋ
- 약쟁이 힐싸개 이x민 현재 상황.jpg
언제나처럼 삶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뻘글들의 향연이 보인다.
마약을 하다 검거된 어느 헌터에 대한 화제가 주된 떡밥인 듯했다. 그리고 옹호하는 뉘앙스의 글은 하나도 없이 전부 증오에 차서 비난하고 까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어쩐지 한유진에게는 그 글들이 마약을 했다는 잘못에 대한 성토라기보단, 운 좋게 이능력을 각성한 헌터에 대한 질투와 시기를 분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묘하게도 거기서 자존감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 자신 역시 그런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터다.
불과 며칠 전 뼈저리게 느꼈듯.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
막상 그 불공평함의 수혜자가 되니 이토록 삶이 밝고 희망차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조금 쉬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의욕이 풀 충전된 느낌이다. 그는 바로 컴퓨터 의자에 앉아 계획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의 수월한 선도 입문을 위한 계획이었다.
이곳에서 계속 수련하는 것보단 영기가 훨씬 더 풍부한 세상에서 수련해야 그만큼 유리할 터다. 물론 그 수련 성과를 현실로 가져오는 데 카르마가 소모되겠지만, 어쨌든 가져올 수 있으리란 느낌적인 확신이 있었고 그럴 만한 가치도 있었다.
왜 그런가 하면.
똑같이 수명을 쓰더라도 자신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이 지구 세계의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소모되는 카르마는 독학 시 발생할 수 있는 주화입마 등의 위험을 배제하는 값으로, 동시에 좋은 수련 장소를 임대하는 값으로 치면 그만이다.
'정말로 좋을지 나쁠지는 봐야 알겠지만, 최소 몇 번은 시도하면서 견적을 내야 해.'
생각하며 한유진은 다시 계획 점검에 집중했다.
* * *
수면과 함께 한유진은 그 어둠 가득한 공간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제 이곳을 '대기 장소'라고 부르기로 했다.
'역시 안 되는구나.'
먼저 확인한 것은 잠들기 직전 곁에 두었던 생존배낭의 존재 여부였는데, 안타깝게도 예상했던 것처럼 이 장소에 가져오지 못했다.
하지만 또 다른 예상처럼, 지난번에 수확물로 선택했던 물건들은 전부 이곳에 그대로 있었다.
문을 넘을 때 가져갈 수 있고, 설령 그곳에서 분실하거나 훼손하더라도 다음번 다시 멀쩡해진 상태로 이곳에서 볼 수 있을 터다.
마치 자신이 죽음을 경험하더라도 멀쩡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각성 능력에 대한 이해를 더하면서, 한유진은 전방의 천변만화하는 문으로 다가가 천천히 손을 댔다.
우우우웅···!
예의 공명음이 울려 퍼지며 문의 형상이 고정된다. 마치 제대로 된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 듯, 대충 돌덩이가 쌓이고 무성한 덩굴식물로 가려지기만 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본 한유진은 문득 떠오르는 걱정이 있었다.
'원시인 거적때기를 입혀주는 건 아니겠지?'
여태까진 각 세상에 방문할 때마다 그곳에 어울리는 의복으로 갈아입혀졌다. 그러니 이 '원시 세계'에 어울리는 복장이 과연 어떨지 걱정되는 것도 당연하다.
잠깐 떠오른 잡념을 털어내며, 그는 아직 내용을 다 외우지 못한 책 몇 권과 저물대, 오행검, 영액주병을 챙겼다. 이후 마음의 각오를 다진 채 드리워진 덩굴식물 따위를 치우며 문을 넘었다.
벌써 여러 번 경험하는 차원이동이다.
그는 사라지는 문을 일견하곤 제법 익숙하게 주위부터 살폈다.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어느 깊은 숲속이다. 문명의 흔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고, 하늘의 햇빛마저 일부 가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어두운 느낌을 준다.
복장은 다행히 원시인 거적때기가 아니었다. 매우 현대적이고 실용성 넘치는 탐험가 복장이다. 다용도 허리띠까지 있어 저물대와 오행검을 매달아 놓을 수도 있었다.
'좋아, 아주 좋아.'
감탄하며 두 물건을 허리띠에 차고 나머지를 손에 든 그는 은신처부터 찾으려 움직였다. 이 원시 세계에선 다른 사람의 악의를 걱정할 필요 없지만 야생의 위험이 존재한다.
'그리고 생기 넘치는 만큼 먹을 것도 많겠지.'
선도에 입문하여 영액주병을 사용할 수 있기 전까지, 구차하게나마 굶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괜찮다.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면 그만이니까.
긴장과 흥미를 동시에 품은 채 그는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며 이동했다. 무작정 나아가는 게 아니라 나무들 사이로 얼핏 보이는 어느 암벽 지형을 향해서였다.
그렇게 잠시 후.
미처 암벽에 도달하기도 전, 그는 커다란 나무 밑에 뿌리가 드러나며 형성된 토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 크지 않아 사람 한 명이 들어가면 꽉 찰 듯했다.
'이거다.'
오래 방치된 느낌이지만 주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데 크기가 별로인 것을 보면 있다고 해도 그리 큰 위협이 될 것 같지 않다.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은 그는 오행검을 사용해 열심히 토굴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 크기는 아무래도 은신처로 쓰기에 많이 부족했다.
작업은 몇 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오행검뿐만이 아닌 두 손까지 이용해서 마구 땅을 파고, 그렇게 생겨난 흙더미를 주변에 골고루 뿌려 처리하고, 마침내 대략 완성된 토굴 바닥에 근처의 마른 나뭇잎 따위를 가져와 깔고.
이번 계획한 탐사를 위해 그는 마이튜브 등에서 열심히 부시크래프트(Bushcraft) 지식을 쌓았다.
비록 도구를 가져오진 못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조난당한 처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대략 완성된 은신처의 입구를 가릴 돌덩이까지 근처 암벽 지형에서 구해온 그는, 최소한 자다가 그냥 비명횡사하진 않겠다는 판단이 들고서야 식수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당연히 소지하기 불편한 물건들은 임시 은신처에 둔 상태로였다.
정말 운 좋게도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졸졸 흐르는 샘물을 만났다. 근처에는 먹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버섯마저 있었다.
'이게 그냥 다 순수 운빨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그가 이런 환경조건을 강하게 바라면서 문을 고정시킨 덕 같다.
상념과 함께 샘물을 조금 마신 그는 버섯의 상태를 살폈다. 조심히 피부에 살짝 접촉시켜 보고 카더라 썰에 따라 세로로 잘 찢어지는지도 확인하는 그때, 일부 벌레가 파먹은 듯한 흔적이 보여 조금 마음이 놓였다.
생각건대 독버섯이라면 이런 식으로 벌레에게 먹히지 않았을 터다. 내성을 가진 아주 특이한 벌레일 가능성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버섯 일부를 채취한 그는 은신처로 돌아와 앉았다. 그제야 시급한 조치들을 전부 완수했다는 생각에 여유가 찾아들며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잠시 휴식하며 정신을 회복한 그는, 버섯의 독성 확인을 위해 아주 미량의 조각을 입에 넣어 맛보다가 삼켰다.
그리고 더는 버섯에 신경 쓰지 않고 편안히 앉아 회원공 수련을 시작했다.
강한 바람에 따라 넘어오게 된 세상인 만큼, 이곳의 영기는 필시 아주 풍부할 터였다.
8화. 선도 입문
수선자의 수련 경지는 매우 엄격히 구분된다. 각 경지 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능력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런 능력의 차이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각 경지마다 넘어야 할 고난이 있고 다음 경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과제가 있다. 아주 힘들고 아주 오래 걸리고 아주 어려운.
영기 감응 역시 그런 관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길디긴 수선계의 역사상 이 첫 번째 관문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가떨어졌는지를 안다면 누구라도 기겁할 것이다.
그런데.
한유진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영기를 느끼는 데 성공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 느낌에 집중하면 할수록, 희미하던 감각이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뚜렷해지면서 등골을 타고 전율이 흘렀다.
이전엔 대체 왜 몰랐는지 의아할 만큼, 선명하고 농도 짙은 영기가 사방 가득하다. 한 번 깨닫자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그런 감각이었다.
질량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니다. 시원하거나 혹은 따뜻한 듯 느껴지지만 실제 온도는 없다. 끌어당겨 폭신하게 마구 주무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촉감은 존재치 않는다.
매 호흡에 농후한 영기가 빨려 들어와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착각이 들다가도, 그것이 전혀 거슬리지 않고 폐를 통해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전신의 피로를 씻어내는 듯한 시원함에 절로 황홀해진다.
어떤 한 헌터가 처음으로 마나를 느끼는 순간을 '세례'라고 표현한 적 있다. 각성한 이능력이 무엇이냐에 따라 마나를 느끼게 되는 시점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헌터들은 대부분 그 표현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이젠 한유진도 그 표현에 아주 격렬히 동의할 수 있었다.
종교의식의 세례가 죄악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가졌듯, 이 세례는 사람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는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이제 나는 입문기 수선자다.'
수선자의 경지는 입문기를 시작으로 법혼기, 결단기, 원영기, 화신기, 합체기, 도겁기, 진선기로 향한다.
여기서 지금 당장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정보는 앞으로 어떻게 법혼기에 오를 수 있느냐였다. 지금 상태로는 사실 진정한 수선자라고 부르기 조금 애매하기 때문이다.
입문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영혼(靈魂)을 법혼(法魂)으로 승화시키는 일이다. 그를 완성해야만 비로소 법혼기에 오르며 법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진정한 수선자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입문기 수사가 그냥 범인과 같다는 말은 전혀 아니었다.
한유진은 주변의 영기를 끌어당겨 모은다는 느낌으로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들어 올렸다. 그 의념이 담긴 행동에 정말로 주변 영기가 천천히 모여들어 구체의 형상으로 화했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마치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다.
형용할 수 없는 색채를 가진 듯 느껴지는 그것을 보던 한유진은 곧, 알고 있는 기초적인 법문을 하나 그려내며 조금 더 위쪽으로 띄워 올렸다.
화르륵-!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한 줄기 불덩이가 나타나 요란하게 흔들린다. 그 선명한 불꽃의 열기가 그렇게 기꺼울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생전 처음으로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하하하하······!"
저절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곳이 안전지대였다면 아마 미친 듯이 광소했을지도 모른다.
고작 불덩이를 하나 만들어 냈을 뿐인데 마치 신이라도 된 듯한 전능감이 차오른다. 아마도 앞으로 더 위대해질 수 있다는 찬란한 희망 때문일 터다.
잔뜩 흥이 차오른 그는 불덩이를 없애며 양손을 주위로 휘둘렀다. 그에 영기가 호응하며 난데없는 돌풍이 몰아치고, 애써 깔아놓았던 은신처의 마른 나뭇잎 등이 마구 흩날리며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켁···! 쿨럭···!"
그 흙먼지 부스러기를 들이켜 버린 한유진이 기침을 하며 서둘러 난리를 잠재웠다. 그마저도 영기를 이용하자 내부가 금세 잠잠해지는 것이 실로 묘하고 대단했다.
어쨌든.
덕분에 진정할 수 있게 된 그는 잠잠해진 은신처에 앉아 마음을 다스리며 생각했다.
'영기만 다뤄서는 일반적인 헌터와 다를 게 없지.'
아니, 단지 그 정도가 아니라 부족하다. 자신의 각성 능력은 전투 등의 일에 직접 써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본격적인 법혼 승화를 준비해야 한다.
눈을 감고 집중한 채 그는 회원공의 법결을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깊이 호흡했다.
수사가 가장 편하게 영기를 체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단이 바로 호흡이다. 그렇게 호흡을 통해 체내로 들어온 영기는, 이전처럼 마구잡이로 퍼져 나가는 대신 일정한 경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경로를 그리는 것만이 아니다. 법결이란 법문을 그리는 방식이자 순서이고, 법문은 그 자체로 불가사의한 효능을 품은 신비의 결정체다.
바로 그렇게 수선자의 육체와 영혼을 단련하고 향상시킨다.
요컨대 공법 수련이란 여느 장르 소설에서 나오듯 외부의 에너지를 몸 어딘가에 축적하는 행위가 아니다.
'무의미하지.'
그렇게 아무리 열심히 쌓아봤자 소모하면 소모하는 대로 없어질 뿐이다. 결국 외부의 자원에 불과한 탓이다.
'영혼은 자체적으로 영기를 생성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힘이다.
쓰면 쓸수록, 단련하면 할수록, 영혼은 더 많은 영기를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생성해 낼 수 있다. 마치 운동을 열심히 하면 더 강한 힘을 더 폭발적으로 오래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운동할 때 많은 음식과 여러 운동기구 등이 필요하듯, 영혼을 단련할 때도 외부의 풍부한 영기와 좋은 법결이 필요하다.
'잔뜩 힘을 쓴 다음 회복할 때도 마찬가지지.'
제대로 먹고 쉬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운동기구를 정확하게 사용했어도 근육이 붙지 않는다. 오히려 혹사당한 몸이 골병들 수 있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한껏 영력을 뿜어 사용했다면 반드시 외부의 영기를 통해 자양하고 돌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쇠약해지지 않고 단련이 되는 것이다.
처음이라 아무래도 서투른 것이 당연했지만, 그래도 한유진은 크게 흔들리지 않으며 열심히 회원공 수련을 이어갔다.
바로 여기서 회원공의 오묘한 점이 드러났다.
그야말로 초보자를 위한 수련공법이었다.
약간의 실수 정도는 완전히 무해하게끔 만들어졌고, 그렇게 안전성에 신경 쓰면서도 육체와 영혼의 단련 속도가 느리지 않다.
각 공법에 최소 두 개는 포함되기 마련인 법술도 꽤 괜찮았다. 아니, 오직 수련만을 놓고 보자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하나는 모든 오염과 부정한 기운을 씻어낼 수 있는 '정화술'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흔들림을 방지하고 집중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청심술'이었다.
그때 장서각에서 수확한 법술서 중 그 흔한 '청소술'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정화술이 한 단계 더 격 높은 법술이기 때문이다.
체내의 불순물까지 녹여 없앨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청심술의 집중력 향상 효과야 말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나중에 어떤 법결로 전환하든 손해가 없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점이었다.
덕분에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외부의 상황마저 잊고 마치 석상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 *
눈을 떴을 땐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진 한밤중이었다.
깊은 원시림의 한복판에서 처음 맞이하는 밤이다. 아무리 입문기 수선자가 되었어도 다룰 수 있는 법술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라 조금 긴장된다.
'내가 이렇게까지 집중할 수 있었다니.'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산새 소리, 더 멀리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짐승의 하울링과 울부짖는 소리까지.
일단 시야가 온통 깜깜하니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불을 피우는 행위가 아니라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안술이었다. 어떤 짐승을 끌어들일지 알고 함부로 불을 피우겠는가? 이곳은 안전한 지구가 아니다.
회원공에 포함된 청심술로 정신을 가라앉히고 집중력을 높인다. 그 후 머릿속에 든 지식에 따라 조심히 눈으로 영력을 집중시켰다.
기초 법술에 불과하고 사용되는 법문 역시 별 위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워낙 예민하고 중요한 신체 기관인지라 긴장감이 장난 아니었다.
다행히 그런 긴장과 걱정이 무색하게도 금방 성공할 수 있었다.
'오······.'
첫 시도였던 만큼 조금 불완전하게 발동한 듯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온통 깜깜하던 시야가 확 트였다.
대낮처럼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변을 살피기에는 무리가 없다.
'이게 법술의 힘이구나.'
단순히 어둠만 꿰뚫어 보게 된 것이 아니었다. 각 사물에 포함된 영기의 농도까지 얼핏 시선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만약 근처에 유령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그 위치와 형태가 선명하게 보였을 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 위험한 생명체에겐 아주 잘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선도에 입문하여 공법 수련을 시작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기운이 존재하지 않겠는가?
'은영술부터 익혀야겠다.'
자고로 살아남는 데 가장 중요한 기술은 첫 번째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로 잘 도망치는 것이다.
잘 때리고 잘 막는 것은 중요도 순위에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일단 싸운다는 행위 자체가 큰 위험을 동반하니까.
조금 막막하게 느껴지던 원시림 생존기가 법술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흥미진진한 게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중해서 은영술 법술을 시전해 보려던 때.
바스락-
외부에서 여태 들리던 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어떤 이질적인 소음이 났다. 꽤 근처였던 터라 한유진은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손이 허리춤의 오행검을 잡아든다. 그러면서 후회되는 점이 있었다.
'영기를 다룰 수 있게 됐으면 이 법기부터 시험해 보는 건데······!'
하다못해 은영술이라도 먼저 익혔다면 지금 숨죽이고 가만히 있는다는 선택지라도 존재했을 터다.
멍청하게 좋다고 회원공부터 수련할 게 아니었다.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그는 제대로 된 날조차 없는 오행검을 꽉 쥐고 은신처 입구를 지켜봤다.
입구를 대충 막아둔 돌덩이가 그렇게 부실해 보일 수 없었다. 처음 구했을 때는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그때의 안일했던 자신을 한 대 패주고 싶은 심정이다.
죽어도 그저 현실에서 깨어날 뿐임을 알지만, 그렇다고 마구 죽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고통은 생생하니까.
덜그럭-!
바로 그 순간 입구를 막은 돌덩이가 크게 흔들렸다. 언제 바로 앞까지 접근했는지 전혀 소리를 못 들었기에 화들짝 놀랐다.
영안술을 통해 얼핏 돌 위쪽으로 보인 것은 시커먼 짐승의 발이었다.
'진짜 들켰구나!'
경악과 한탄이 뒤섞여 머릿속을 휘몰아치는 때.
꽤 고생해서 옮긴 기억이 무색하게도 돌덩이가 훅 뒤쪽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이어 외부와 통하는 구멍에서 나타난 것은, 샛노란 눈동자를 빛내는 원숭이 같은 생김새의 짐승 얼굴이었다.
그것이 오행검을 힘껏 꼬나쥔 한유진과 눈이 마주치고는 징그럽게 웃어 보였다. 안쪽으로 턱 내뻗는 손아귀 끝에 달린 발톱들이 무시무시하게 억세고 날카로워 보인다.
바로 그때 한유진은 죽기 살기로 오행검에 영력을 불어넣으며 내질렀다.
불어넣어진 영기가 '중상급 법기' 오행검의 기능을 일깨운다.
그저 날도 없는 검 형태의 몽둥이에 불과하던 표면으로 복잡하고 정교한 법문 금제가 떠올라 공명하고, 그 흘러나오는 빛이 일시에 작열하는 화염으로 돌변해 쏘아진다.
폭음 따위는 전혀 없었다.
마치 환상처럼, 어마어마한 열기가 몰아쳐 그가 내지른 궤적에 따라 원숭이 같은 생김새의 짐승 머리통을 꿰뚫었다.
그리고 뒤편으로 부챗살처럼 퍼져 나가며 걸리는 모든 것을 한 줌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9화. 첫 전투
격렬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몸에서 힘이 쫙 빠진다. 게다가 뭐라 표현하기 힘든 영적 탈력감이 더해져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다.
끓어오르던 열기는 다행히도 원시림이 품은 밤의 냉기에 빠르게 가셨다. 그리고 숲의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뿜어졌던 화염의 성질이 원래 그런 건지, 불길은 번지지 않고 스스로 꺼졌다.
다만 문제는 지독한 탄내가 코를 마비시킬 정도라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지?'
한유진은 25살의 나이로 당연히 군복무를 마쳤다. 그리고 군대에서 배우기를, 산중의 밤에선 담배 태우는 향 같은 이질적인 냄새가 엄청난 범위까지 퍼져 나간다고 했다.
이곳의 지독한 탄내는 필시 숲 사방 넓은 범위로 퍼져 후각이 발달한 모든 야생 짐승들에게 맡아졌을 것이다.
조금 허둥지둥하며 밖으로 나온 그는 머리가 뚫려 죽은 짐승의 정체를 확인했다.
얼굴 생김새가 원숭이 같다 싶더니만, 몸도 전체적으로 원숭이 같았다. 엄청나게 근육질이고 손톱과 발톱이 맹금류처럼 억세고 날카로워 보인다는 점을 빼면.
게다가 팔꿈치와 무릎, 그리고 배와 가슴과 옆구리 등에 딱딱한 각질이 나 있는 모습이 마치 갑옷이라도 차려입은 느낌을 준다. 털조차 억세기 그지없어 어지간한 충격은 그냥 흡수해 버릴 듯하다.
'키는 대략 2미터 정도 되려나······.'
틀림없이 인간 헬창과 붙여놓으면 헬창이 몇 초 만에 끔살당할 것 같은 스펙이다. 그 인간에게 방어구와 무기를 들려줘도 마찬가지일 터다.
요컨대 이건 짐승이라기보단 괴물이었다.
'내가 이런 괴물을 죽였다니.'
총탄을 맞아도 터프하게 달려들 것 같은 녀석인데 오행검의 불길 앞에선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황망한 와중에도 잠시 감탄하던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열심히 생각했다.
혹시 이 녀석이 숲의 이 구역을 지배하던 놈은 아닐까. 이놈을 죽였으니 지금 자신은 안전한 게 아닐까.
아니면 지금 바로 움직여서 근처의 다른 은신처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지독한 탄내가 오히려 자신의 움직임과 기척을 가려줄 수 있지 않을까.
그때 한유진은 빠른 생각 정리를 위해 회원공의 청심술을 동원했다.
법술이 펼쳐지자 흔들리던 정신이 즉시 안정된다. 집중력이 향상되면서 어지럽게 느껴지던 것들이 뚜렷한 모습을 드러낸다.
'요행심을 버려라.'
이전의 경험에서 깨우쳤던 교훈을 떠올리자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이놈이 숲의 이 구역을 지배하던 놈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설령 맞더라도 다른 구역의 포식자가 호기심에 찾아올 확률이 존재한다.
야생 짐승들의 기민함과 교활함을 얕봐선 안 된다.
게다가 다른 곳으로 도망쳐도 소용없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어떤 식으로 발각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놈은 나무뿌리 밑 구덩이에 꼼짝도 않고 있었던 자신을 마치 훤히 보이는 것처럼 찾아왔다.
명백하게 사냥을 위해서, 행여나 목표물이 도망칠까 소리까지 죽이면서.
'더 올 거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이 숲의 원주민이자 사냥꾼인 짐승들이 틀림없이 올 것이다.
한유진은 잠시 풀어졌던 긴장을 조이며 전력으로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시 구덩이로 들어가진 않았는데, 경계할 방향이 줄긴 해도 퇴로가 막혀 버리는 탓이었다.
이 판단이 옳은지 틀린지는 결과가 말해 줄 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계속 영안술을 펼친 상태로 그는 주위를 세심하게 경계하며 열심히 호흡했다. 정확히는, 영기를 들이마셔서 육체와 영혼의 탈력감을 최대한 회복했다.
동시에 손에 쥔 오행검의 구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방금의 사용은 죽기 살기로 막 다룬 것에 불과하니, 기본적인 사용법을 알아야 이후의 싸움에서 더 효율적인 전투가 가능할 터였다.
'쉽게 죽어주진 않을 거다.'
죽어도 그냥 현실에서 깨어날 뿐임을 알지만, 어쩌면 일단 죽었다가 추후 다시 이곳을 방문하는 게 여러모로 편할 수도 있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러기 싫었다.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단 다소 감정적인 판단이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느낌이었다.
조금 어렵고 무섭다 하여 쉽게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건 어디를 어떻게 봐도 도망 아니겠는가? 매번 고난이 닥칠 때마다 도망칠 생각부터 해서야 쓰겠는가?
행운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고 기회는 위기 속에서 나타나는 법이라.
'오늘 내가 승리한다면, 그때야말로 숲의 이 구역이 내 것이 되는 거다.'
오행검과 함께라면 마냥 불가능하지 않을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유진의 기대, 혹은 걱정은 배신당하지 않았다. 어두운 숲 곳곳에서 샛노란 안광들이 나타나 그를 노려보기 시작한 것이다.
영안술의 힘으로 수풀 사이에 숨은 그것들의 모습을 본 한유진이 입술 한쪽을 부자연스럽게 올리며 웃었다. 반쯤 우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씨발······ 무슨 혹성탈출이냐, 이 원숭이 새끼들아?"
다행히 힘도 어느 정도 회복했고 오행검의 구조도 아주 기초적인 수준으로는 파악했다.
그에게 부여된 초월적인 언어 이해력이 법기의 법문 금제마저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덕이었다.
한유진의 중얼거림을 일종의 도발로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원숭이 괴물들이 하나둘씩 수풀 밖으로 몸을 드러내며 위협적으로 근육을 부풀렸는데, 그 수가 총 일곱이었다.
그렇게까지 많진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많다. 놈들이 일대일 토너먼트로 싸워줄 리 없으니 아마도 승산이 희박하다.
하나.
그럼에도 한유진은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
죽음의 대가가 그냥 현실에서 깨어날 뿐이기에 쉬이 포기하고 도망칠 생각을 먹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가벼운 대가만이 기다리기에 한없이 무모해질 수도 있다.
"선빵 필승-!"
한유진은 용감하게도 그렇게 고함치며 가장 가까운 원숭이를 향해 오행검을 겨눴다.
빠쾅-!!
그 즉시 오행검의 표면에 떠오른 법문 금제가 번뜩이고 굉음을 터뜨리며 한 줄기 뇌전이 쏘아졌다.
아니, 쏘아졌다고 느낀 순간 이미 적중해서 그 원숭이 괴물을 감전사시킨 상태였다. 놈의 털이 모조리 거멓게 타 곤두서고 팔다리가 미친 듯이 경련하면서 뒤로 넘어간다.
일곱이었던 적이 여섯으로 줄었다.
"감히 만물의 영장 인간한테 덤벼?! 이 빌어먹을 짐승 새끼들이···!"
- 쿠와아아아아악-!!!
기선을 제압하려던 한유진의 고함을 일거에 잡아먹는 어마어마하게 묵직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한 원숭이의 그 포효를 시작으로 남은 다섯 마리가 합세하여 포효를 내지르자 거의 고막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목청 좋다라는 놀람 섞인 감탄을 뱉어낼 새도 없이, 놈들이 사방에서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흡사 기마병 군단이 돌진하듯 땅이 울리면서 순식간에 들이닥쳐 오는 모습이 어지간한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박력 넘친다.
한 대만 후려맞아도 몸이 박살 날 것이 분명한바, 한유진은 반사적으로 오행검의 방어 기능을 활성화하며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법문 금제가 모양을 바꿔 번뜩이고 뿜어져 나온 찬란한 금빛이 얼핏 커다란 종의 형상을 취하며 그를 뒤덮어 보호한다.
떠엉-!!
가장 먼저 접근해 온 원숭이 괴물의 전력을 담은 주먹이 종을 후려치고 굉음이 터져 나온다. 정말로 튼튼하기 짝이 없는 실제 종을 후려친 듯한 소리였다.
- 쿠와아아악-!!
잔뜩 흥분한 원숭이 괴물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미친 듯이 주먹과 발을 휘두르며 금빛 종 방어막을 두들긴다. 정신없이 터져 나오는 굉음에 그 안쪽 자리한 한유진의 두 귓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이··· 무식한 새끼들이···!"
약간의 흔들림밖에 없는 방어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마치 모종의 확신이 있다는 듯 계속해서 방어막을 두들겼다. 자신들의 두 손과 발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멈출 기세가 아니다.
까가가각-!!
그 억센 손톱이 빠져라 방어막 표면을 긁는 소음에 안 그래도 고막을 다친 한유진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바로 그런 반응을 기다렸던 것처럼, 놈들이 울부짖으면서 긁는 공격을 패턴에 추가했다.
한유진은 그때 확신했다.
이 괴물 새끼들은 정말 유인원 그 이상으로 흉포하면서도 똑똑하고 교활하다는 사실을.
자신들이 죽어 나가면서도 그에 대한 공격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순간 미친 듯이 분출되던 아드레날린의 흥분을 뚫고 한 줄기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꼼짝없이 이대로 이 원숭이 괴물들의 손발톱에 갈기갈기 찢겨 죽는 건가 싶다.
그것이 걷잡을 수 없는 공황으로 번지기 직전.
여전히 유지되던 청심술의 효능이 머릿속에 찬물을 붓는 듯했다. 동시에 타오르는 것은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대한, 그렇게 겁을 먹게 만든 원숭이 괴물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 뜨거우면서 차가운 정신이 유지되는 감각은 실로 새롭고 놀라웠다.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베테랑 중의 베테랑, 백전노장의 정신이 아닐까 싶다.
부릅뜬 눈으로 방어막을 계속해서 두들기는 원숭이 괴물들을 노려본다. 동시에 오행검에 집중해서 다른 기능을 발동해 보려 시도했다.
한계까지 영기를 쥐어짜낸 영혼이 비명을 지르고 덩달아 신체 역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다리가 후들거린다. 쌍코피가 터져 나오는 느낌이 너무나 선명하다.
그가 선도에 입문한 지 불과 반나절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아야 했다.
'워낙 영기가 풍부한 곳이라 지금껏 버틸 수 있었구나!'
그 와중 부가적인 깨달음 하나를 더하며 그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는 느낌으로 오행검의 손잡이를 꼬나쥐었다.
중상급 법기의 방어막이 어디 그냥 묵묵히 공격을 막아내는 기능만 있겠는가? 아주 많은 경우에서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일진대 말이다.
추가로 불어넣어진 영기가 또 다른 법문 금제를 발동시킨다. 찬란한 금빛을 뿜어내던 검이 공명하며 울린 그 순간.
종 모양의 방어막이 급격히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아니, 단지 흩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전부 날카로운 칼날의 형상을 취하며 사방을 물샐틈없이 찢어발겼다.
시끄럽던 포효성과 타격음이 일거에 구슬픈 비명으로 치환됐다. 뼈와 살이 절단나고 쪼개지는 참혹한 소리가 한 차례 울려 퍼지고 대량의 핏물이 터져 나와 마구 휘날린다.
묵직한 덩어리들이 아무렇게나 땅에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간 뒤.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조용해진 숲 한복판에서, 온통 핏물을 뒤집어쓴 채 한유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이겼다······ 혹성탈출 개새끼들아······."
그 선언인지 뭔지 모를 중얼거림을 끝으로 그는 기절하듯 뒤로 넘어가 쓰러졌다.
물론, 다행히 죽은 게 아니었다. 너무 지나치게 힘을 소모해서 더는 서 있지조차 못할 상태였을 뿐이다.
아마도 다른 더 강한 포식자가 오진 않을 거다. 만약 그랬다면 그 원숭이 괴물들이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우면서 싸우진 않았을 터다.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의 한유진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은 설령 그런 불행함이 닥쳐와 죽어도 괜찮을 듯한 기분이었다.
불가항력 아니겠는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아쉽게 죽었을 뿐, 어쨌든 도망치진 않았으니 개운하게 침대에서 깨어나면 될 일이다.
"흐흐흐······."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진한 성취감과 승리의 희열 속에서 그는 바보처럼 연신 웃음을 흘렸다.
10화. 법술 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