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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균열의 탑의 입장 조건 중 하나가 5인이 함께할 것이었다.

안에 무엇이 어떻게 존재할지 모르기에 우선 파티부터 제대로 짜야만 했다.

'세아는 확정이다.'

세아는 확실한 성력으로 다친 자들을 서포트할 수 있다.

축복으로 말미암아 신체를 강화시킬 수도 있고.

위험한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히 성녀 세아는 필수다.

'이자벨라와 세렝게티의 조합이면 괜찮은 그림이 그려질 것 같은데.'

강제로 위치를 바꾸고, 속박한다.

이 두 연계의 포텐을 생각하면 말이 안 나올 수준이다.

이자벨라를 데려가려면 세렝게티가 필수였다.

그러려면 우선, 세렝게티를 깨워야만 했다.

"······ 제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기사의 정원.

와이저 후작가의 성 내부에서 허드슨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허드슨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드렸다.

"이제 저주를 풀 수 있다."

지금이 적기였다.

겨울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오르며 성력 또한 올라갔으므로.

지금이라면, 저주를 완전히 풀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게······ 세렝게티가 제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너는 너다. 허드슨."

"그건··· 그렇습니다만······ 제 모습이······."

"그 모습도 너다. 세렝게티라면 알아줄 거다."

"그, 그렇겠죠?"

허드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당연한 반응이다.

아직 '변신'이 풀리지 않았으니까.

세렝게티의 모습 그대로였다.

처음 와이저 후작이 보곤 반쯤 기절할 정도였으니 말은 다했다.

'세렝게티가 아니라 허드슨이라는 걸 알고는 낙심이 컸지.'

세렝게티가 깨어난 줄 알고 눈물도 흘렸으니 얼마나 낙심했겠나.

그러나 이제는 진짜 세렝게티가 깨어날 때였다.

허드슨이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세렝게티가······ 드디어 완전하게 깨어날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

나도 해봐야 안다.

이어, 허드슨이 천천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 부탁 드립니다. 세렝게티를 깨워주십시오."

"일어나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니."

허드슨의 충정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세렝게티가 저주에 걸린 건 그의 탓이 아니다.

내가 계속 바라보자, 주춤거리며 허드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이후 나는 천천히 세렝게티를 바라보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를 대신해서 저주에 걸린 기사.

너무 늦었다. 너무 오래걸렸다.

그러니, 이제는 깨어날 때가 되었다.

"'별의 축복'이 '마왕의 저주'를 지워냅니다."

"성력이 충만합니다."

"'마왕의 저주'가 저항합니다."

"남은 '마왕의 저주'를 '어둠'이 집어삼킵니다."

"'어둠'의 레벨이 1 오릅니다."

"세렝게티에게 걸린 '마왕의 저주'가 완전히 상쇄되었습니다!"

"업적 '마왕의 저주를 해제한 자'가 추가됩니다."

"명예가 500 상승합니다."

"업적 '부활의 세렝게티'를 완료했습니다."

"명예가 300 상승합니다."

"'세렝게티'가 눈을 뜹니다."

*

마스터가 눈앞에 놓인 '균열의 탑'을 바라봤다.

웅장한 검은 탑이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크기.

입구도 수십, 수백 개는 될 것 같았다.

"흑왕께선 이 탑의 정복을 원하신다."

허나 그 크기에 압도될 틈도 없이, 마스터가 떫은 표정으로 옆을 바라봤다.

파티원 5명의 조건을 이루고자 그와 함께한 동료는 인간이 아니었다.

"락투샤. 이번에도 실패하면 너는 내가 직접 죽인다."

"······ 그럴 일 없다."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

설마 자신이 이런 괴물들과 함께 파티를 짜는 날이 올 줄이야.

소드마스터이자 오크 마스터인 락투샤.

그리고 그와 비견되는 동급의, 아마도 흑왕의 주측들.

그들은 락투샤가 '수련자의 산'에서 한 실패를 나무라고 있었다.

천하의 락투샤마저도 그들의 발언에 그저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인간. 너는 분명히 이 '탑'과 '히든 특성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것'도. 제대로 도움이 되어야 흑왕께서 너를 높게 살 거다."

다크 엘프가 마스터에게 말했다.

자신 따위는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위에서의 시선 그대로다.

···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

"걱정 마라. 나보다 더 이 '탑의 정체'에 대해 빠르게 깨달은 자는 없을 테니까."

재능과 히든 특성만이 아니다.

이 탑에는 더 깊숙하고 중요한 내용이 있다.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이 탑은······.

"그럼 입장하지."

락투샤가 앞장서서 균열의 탑으로 들어섰다.

잡념을 떨쳐낸 마스터도 따라서 들어갔다.

그러자.

"'균열의 탑'의 '입장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

"1층, 균열된 레벨의 영역"

"레벨에 따라 들어가는 영역이 나뉩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합산된 점수에 따라 마지막 '레이드 보스영역'이 열리고, 2층으로 향할 수 있는 여부가 결정됩니다."

"한 번 입장하면 층이 클리어 되기 전까지 퇴장할 수 없습니다."

유레카!

마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제거될 수 없으리라 생각한 바알이 제거되고, 이제는 걸어두었던 강력한 '저주'마저 해제된 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계의 절반을 담은 저주다. 일반적인 축복으로는 절대로 해제할 수 없는.'

빌헬름을 죽이고자 준비해둔 함정.

하지만, 그 저주에 당한 건 빌헬름이 아니었다.

빌헬름을 대신해서 희생당한 기사가 있었다.

분명히 그 기사에게 걸어둔 저주는 영원토록 지속할 예정이었다.

한데.

'저주가 먹혔다.'

절대 해제될 수 없는 저주가, 무언가에 먹혔다.

마계의 절반을 담은 저주는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

그걸 지우고, 먹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멸망의 조각.'

바알에게 숨겨두었던 것.

오직 그것만이 마왕의 저주를 먹어치울 수 있다.

그 깊은 어둠만이.

하면, 바알을 죽인 자가 자신의 저주를 해제했단 말인가?

확실히 귀찮아지긴 했다.

이는 또한 존재 모를 변수가 출현했다는 말이니.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거늘.'

마왕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예전이었다면 신경이 많이 쓰였겠지만.

지금은 도리어 흥미롭기만 하다.

더 강한 적수의 출현이야말로 이 '몸'의 한계를 실험해볼 기회.

-네놈······ '천상'이 두렵지 않느냐?

서광이 비치는 용.

신수라 칭해지는 천공의 용도 지금은 빛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고대에 존재한 용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 전해지던 '일곱 용신' 중 하나가.

-'천상'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네놈은 죽은 목숨이다. 감히 '수호자' 중 하나인 나를 건드리다니······! 그것도 죽은 인간의 몸으로!

"마왕님. 끌려온 놈 주제에 너무 시끄럽지 않습니까?"

두 번째 초열지옥의 왕 이세라.

반월의 뿔과 붉은 인간의 신체를 지닌 반인반용.

그가 쓰러진 채 힘을 잃은 용신의 몸통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러자 용신이 모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세라. '천상'과 '수호자'의 자식이었던 네가 나를 어떻게! 내가 너를 얼마나 어여삐 여겼거늘!

"역시 시끄럽군."

이세라가 손을 들자 거대한 헬파이어가 맺혔다.

촤아악!

지옥의 불길을 손에 두른 이세라의 손은 곧장 용신의 몸통을 관통했고.

두근! 두근!

힘차게 뛰는 용신의 심장을 꺼내들었다.

이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마왕에게 그 심장을 건넸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마왕님."

"나는 한 번도 너의 충정을 의심한 적이 없다, 이세라."

"······ 침략의 때에, 남은 수호자의 심장들도 바치겠나이다."

"음."

고개를 끄덕인 마왕이 흡족히 웃으며 심장을 건네받았다.

이후.

어그적!

어그적!

용신의 심장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그 순간.

화아악!

마왕의 새하얗던 전신에서 핏기가 돌며, '생명'이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훌륭하군.'

마왕은 흡족하게 웃었다.

죽은 몸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 몸에 깃든 수많은 잠재력과 힘, 그리고 자신의 권능이 합쳐지며.

또한 그는 예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

오랜 잠에서 깨어난 세렝게티는, 눈을 뜬 즉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쌍둥이 동생이 있었던가요? 아니면 언니?"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눈앞에 있었으니.

눈도, 코도, 입도, 뭐 하나 빠짐없이 똑같은 얼굴.

거울을 보고 있다고 의심할 정도로 빼닮았다.

허드슨이 땀을 삐질 흘렸다.

"그, 그게······."

"아니군요. 자세히 보니 조금 다르게 생겼습니다. 저보다 조금 더 못생겼군요. 보아하니 저를 놀리려고 도플갱어라도 데려온 듯싶은데 이거 하급 도플갱어 아닙니까? 쯧쯧."

그리고 오랜만에 깨어난 세렝게티는, 여전히 말이 많았다.

도플갱어라니.

아무래도 직접 밝힐 수밖에 없을 듯싶었다.

"······ 나 허드슨이야."

"하하하. 웃기는 도플갱어입니다. 허드슨이 여자가 됐다는 말입니까, 그럼?"

"이게 얘기하자면 긴데······."

"좋습니다, 도플갱어. 허드슨과 제가 처음 만난 곳이 어딘지 압니까?"

허드슨이 지체없이 답했다.

"성 내에서 장사하다가 처음봤지. 그때 너는 사기꾼을 쫓고 있었고······ 그게 나인 줄 알고 잡아갔잖아. 그때 진짜 죽는 줄 알았지. 공범 찾겠다고 날 고문했잖아."

"······ 허드슨이 제게 처음 고백한 장소는?"

허드슨은 작게 웃으며 말문을 텄다.

"시내 옆에 작은 언덕 위. 거기 달망울꽃이 참 예쁘게 폈었지. 어스름한 저녁이었고. 그때 고백하니까 놀란 네가 날 밀쳐서 언덕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지 아마? 조금 더 높았으면 확실하게 죽었을텐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찔하네."

"제가 처음으로 준 선물은?"

허드슨이 자신의 목을 손으로 훑었다.

"뼈 목걸이. 처음으로 사냥한 괴물의 뼈로 직접 만들었다면서 줬었지. 피냄새가 덜빠져서 비린내가 좀 심하더라. 그래도 좋아서 잘 착용하고 다녔었는데, 덕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었지. 내가 뭐 아이를 납치하고 죽인 뒤에 그 뼈로 목걸이를 만들었다나······ 그 뒤로 거래가 거의 다 끊겨서 힘들었던 거 같네."

"············ 허드슨?"

"응, 나야. 세렝게티."

"아아, 허드슨!"

와락!

몸을 일으킨 세렝게티가 허드슨을 와락 껴안았다.

그런데 지금 들은 이야기가 전부 실화란 말인가?

'참으로 다난다사한 사랑이었군.'

나를 비롯하여 듣고있던 사람들 모두가 잠시 넋이 나갔다.

저게 진정 사랑의 힘인가 싶을만큼 경이로운 이야기였으므로.

한참 껴안고있던 세렝게티가 문득 생각이 나선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여자가 된 거야? 이제 남자가 아닌 거야, 허드슨?"

"······ '외형 변형 물약'에 깊게 손을 댔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거야."

"괜찮아. 그런 변명 할 필요 없어. 난 허드슨이 여자여도 사랑하니까."

"나도 네가 남자라도 사랑하겠지만······ 변명이 아니야. 믿어줘. 진짜야."

"괜찮아. 정말 괜찮아."

툭. 툭.

세렝게티가 허드슨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 안 믿는 거 같은데.

허드슨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말을 좀 해달라는 듯이.

음. 확실히 이대로는 문제가 된다.

하여 나는 확실하게 진실을 말했다.

"세렝게티."

"아······ 예, 후계자님."

나를 보고 겨우 정신을 차린 세렝게티가 어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허드슨과 떨어졌다.

"몸은 좀 괜찮나?"

"예. 이젠 저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됐군."

남은 저주마저 '어둠'이 먹어치웠다.

이제 세렝게티에게서 저주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강력한 전력이자 나의 최측근이었던 기사.

그녀가 마침내 부활한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릴 때.

나는 진실을 말해주었다.

"세렝게티."

"예."

"허드슨은 완전무결한 여자가 됐다."

"······."

"성을 전환하며 이름도 바꿨다. 앞으로 '세이지'라 부르도록."

"아아······."

살짝 충격을 먹은 듯, 세렝게티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세이지······ 예쁜 이름이군요······ 이제 허드슨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세이지."

이름까지 바꿨다는 건 좀 심했나?

그때였다.

"세렝게티. 거짓말이야. 나 진짜 여자가 된 게 아니라고!"

"······ 그럼 후계자님께서 거짓을 말하셨다는?"

"어······ 아니, 그건······."

"실망이야. 자신의 과오를 덮으려고 거짓말을하는 사람이라곤 생각 안했는데. 우리의 미래는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자."

"······."

허드슨의 얼굴이 여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새하얗게 변했다.

*

겨우 오해를 푼 뒤, 허드슨과 세렝게티는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어 성밖으로 나가려던 도중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후계자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앤드류."

명예와 관련된 퀘스트를 주는 성직자 앤드류.

안 그래도 '악업'의 수치를 낮추고자 찾아가려 했었다.

앤드류는 '면죄부'를 무한히 복사할 수 있는 면죄부 담당이었으니.

"무슨 일 있나?"

"혹시······ '균열의 탑'에 오르시려거든, 저를 데려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균열의 탑을? 그대가 왜?"

"계시인지 모를 꿈을 꾸었습니다. 그곳에······ 안다사르의 상태를 호전시킬 무언가가 있을 것 같더군요. 그리고 제가 필요할 일이 있을 겁니다. 분명히."

안다사르.

앤드류의 딸이자, 한때 저주받은 흑마법서에 의해 엘드리치가 되었던 소녀.

이후 크람델의 사왕에게 흘러들어가 듀라한이 되었다.

다시 앤드류의 품으로 돌아오긴 하였으나, 아마 숨기는 데 급급해하고 있을 터.

여신교의 교단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즉시 앤드류는 파문이다.

'흠. 힐러 두 명은 필요없는데.'

필요한 인원은 다섯명.

당연히 나는 성녀 세아를 데려가려고 했다.

앤드류까지 끼면 힐러가 두명이 되는 상황.

힐러 둘은 필요 없다.

하지만, 묘하게 걸린다.

계시이자 꿈이라는 말이.

'앤드류 역시 고위사제다. 그가 꿈을 꾸었다면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심지어 여신의 가호까지 일으켰던 자다.

단순히 '계시'의 방향으로는, 세아보다 더 근접해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뭐, 뭐야!"

"드라이어드가 워프를 넘어왔다!"

돌연 듯 성 외부가 시끄러워졌다.

이에 바깥을 둘러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형제여! 괜찮은가!"

하이 드라이어드.

그가 성을 찾아온 것이다.

"여기 있음을 알고 있다! '신록'이 말해주었으니, 부디 얼굴을 보여다오! 괜찮은 걸 확인하기 전까진 떠나지 않겠다!"

여전히 우렁찬 녀석이었다.

*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파티가 정해졌다.

앤드류와 하이 드라이어드가 합류하며 두 자리가 채워진 것이다.

남은 두 자리는 세렝게티와 이자벨라로 채우려고 할 때.

"······ 제가 빠지겠습니다."

이자벨라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참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이곳으로 돌아오는 게 맞는 건지 조차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후계자님께 그런 무리를 시키지 않았습니까? 하마터면······."

"결과적으로도 나는 죽지 않았다."

오염원을 대신 먹어치운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로 인해 나는 열 다섯 번째 히든 특성을 개화했다.

따지자면 이자벨라는 내게 이득을 가져다준 셈이다.

"······ 후계자님을 위험케한 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괜찮다는데도?"

"죄송합니다."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자신의 감정을, 불현 듯 떠오른 기억들을 정리할.

하기야 초월하며 떠오른 그 기억들이 지금도 이자벨라를 괴롭히고 있을 터였다.

아무리 강인한 자라도 이겨내긴 힘을 테니까.

지금 자신이 나서봤자, 이런저런 생각들로 도움이 안 되리라 여긴 게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연히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필요하다면 주마. 하지만 오래 기다려주진 못한다."

"아······."

"탑을 내려올 때까지, 정리해놓도록. 아직 우리가 계약한 시간조차 다 지나지 않았으니."

"감사······ 감사합니다."

이자벨라가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탑을 오르지 않아도 이자벨라가 할 일은 많았다.

사막도시도 정비해야하고, 아이작이 돌아올 경우 맞이해줄 사람도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미궁도시를 담당하는 허드슨과 연계로 해야할 일이 많을 터였다.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누구로 한다.'

네 명은 정해졌다.

남은 건 한 명.

마침 떠오르는 한 명이 있었다.

"제, 제가요? 균열의 탑을요? 예? 같이요?"

창잡이 발테.

이로서 제법 벨런스가 맞는 파티가 완성됐다.

정말 어벤져스가 따로 없었다.

*

균열의 탑에 들기 전, 마지막 준비가 남았다.

"'업적상점'이 열렸습니다."

"'업적'을 통해 얻은 점수로 '업적상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명예의 전당 순위에 따라 '업적상점'의 목록이 변합니다."

"1순위, 란돌프님 '업적상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란돌프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업적점수는 4,500점입니다."

바로 업적상점.

메인 퀘스트 8을 밀며 새롭게 나타난 이권의 상점이다.

곧이어 상점의 목록이 떠올랐고.

'······ 대박이로군.'

나는 다시 한 번 유레카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완벽한 입장

"연합장님. 이번에 순위가 밀리면서 마스터의 손해가 클 것 같습니다."

한국의 영웅 연합.

연합장 박태우를 향해, 연합원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제주도 소실 사건에서 마스터의 정치질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정부차원에서도 제주도에서 물러나라 할 정도였으니.

하여, 영웅연합의 대부분은 마스터를 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연합장 박태우도 마찬가지였다.

"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독점하고 있던 '워프석'을 이제 팔지 못하게 되겠지."

업적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것중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워프석'이다.

워프를 짓거나, 수리할 때 반드시 필요로하는 저 워프석을 구할 수 있는 곳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 한정적인 공급원 중 하나가 마스터였고, 업적상점 1위를 달성하면 구매할 수 있는 워프석을 플레이어에게 팔아 그는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이다.

"도시에 있는 유적도 급매하지 않았습니까? 마스터도 재정적으로 많이 후달리나봅니다."

"이번 일로 크게 타격을 받은 건 확실하지."

"연합장님. 팬텀이 워프석을 싸게 내놓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글세. 그걸 풀 정도로 업적점수가 충분할지 모르겠군."

란돌프가 대단한 업적들을 세우긴 했지만, 메인 퀘스트 8을 밀며 쌓을 수 있는 업적점수에는 한계가 있다.

반면 마스터는 메인 퀘스트를 밀 수 있는 최대한으로 밀어서 여유가 있는 편이었고.

"그래도 500점은 있지 않겠습니까?"

"그간 해온 행적을 보면 그쯤은 있을 듯한데······."

500점보단 조금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점수로 굳이 워프석을 사서 플레이어들에게 팔 것 같지는 않았다.

팬텀의 행적을 보면, 돈보단 실리를 좇는 자였으므로.

박태우 연합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권 레벨을 올리겠지. 그게 가장 현명하니까."

"아쉽군요. 싸게 팔아준다면 좋을 텐데."

"설령 워프석을 산다고 해도, 싸게 팔지는 않을 거다."

팬텀은 그런 자다.

절대로 손해를 보고서 워프석을 팔 자가 아니었다.

그러자 연합원이 눈을 빛냈다.

"······ 저희도 이제 슬슬 '도시'를 먹을 물밑작업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판게니아에서 도시를 갖는 것.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연합은 판게니아에 거점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

워프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모두 도시를 지배할 시점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합장 박태우는 이것도 부정적이었다.

"2차 침략이 곧이다. 그 전에 '탑'을 오르는 정도가 최선이야."

"균열의 탑 말씀이군요."

그렇다.

균열의 탑.

모든 플레이어가 균열의 탑에 오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

공지사항이 두 개나 나타날 정도면, 탑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많다는 의미다.

'심연 미궁도 구제국의 땅이었지. 균열의 탑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박태우가 의지를 다졌다.

그러기 위해선 최강의 파티가 필요했고, 몇몇 '은둔자'들을 포함하여 거의 섭외가 완료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성적을 낸다.

연합이 강해져야, 한국이 강해지므로.

다시 제주도 소실 사건 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만 했으니까.

'··· 팬텀도 도전할테지.'

그리고 만약, 탑의 안에서 팬텀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일기에서 본 내용을 전해야 한다.'

김하나가 보여준 일기.

그 일기의 내용엔 묘한 내용이 몇 포함되어 있었다.

김하나는 일기를 쓴 자가 누구인지 절대로 말하지 않았지만.

박태우는 일기를 어느 정도 '이해'하여 '추론'할 수 있었다.

'민초. 그가 가장 위험한 자라는 걸.'

민트초코맛있어요가 팬텀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

"경이로운 점수로 명예의 전당 1순위를 거머쥐었습니다!"

"'업적상점'의 판매목록이 한 단계 올라갑니다."

"4,500점의 업적 점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불멸의 워프석(300)", "워프석(20)", "수호벽(11Lv) 레벨업(1,100)", "수호벽 지속시간 1초 증가(500)", "황금률 상점 목록 늘리기(1,000)", "황금률 상점 갱신 시간 단축하기(1,000)", "비밀경매장 동시 판매목록 증가(500)", "상태창 레벨업(10,000)"······.

목록을 보자 대박을 외친 이유.

업적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의 종류가 그 정도로 놀라운 탓이다.

'얻은 이권의 등급을 격상시킬 수 있을 줄이야.'

필요한 점수가 높기는 하지만 구매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좋은 상점은 단언컨대 없다.

심지어는 내가 지닌 4,500점의 점수로 구매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상태창 레벨업? 상태창의 레벨이 올라가면 뭐가 달라지는 거지?'

상태창이 무엇인가.

내 상태를 객관적인 수치로 표현화한 창이다.

그것의 레벨을 올린들 뭐가 달라진다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서 1만 점수를 필요로하는 걸 보아, 결코 중요도가 낮진 않아보였다.

'안 그래도 수호벽의 레벨을 올리고 싶었는데 잘됐군.'

수호벽은 내가 판게니아에 있을 때, 지구의 몸을 지켜주는 이권이다.

11레벨이면 1성(星) 이하의 공격을 30초간 무효화시키는 기능이었다.

이 또한 대단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완전한 안전을 장담하긴 어렵다.

"'수호벽'의 레벨이 12로 격상했습니다." -1,100점

"'수호벽'의 레벨이 13로 격상했습니다." -1,200점

"'수호벽'의 레벨이 14로 격상했습니다." -1,300점

"'수호벽'이 강화되어 빛나기 시작합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내게 당장 중요한 건 수호벽의 이권 레벨이니까.

입꼬리가 절로 말려올라갔다.

곧이어 내 앞으로 수호벽의 창이 떠올랐다.

[진(進) 수호벽(14Lv)]

★ 로그아웃 된 신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경고해줍니다.

★ 수호벽의 레벨에 따라 보호할 수 있는 강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 14레벨의 수호벽은 4성(星) 이하의 공격을 30초간 무효화합니다.

★ 진(進)의 형태로 강화된 수호벽이 신체를 더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진 수호벽이라.

극진멸참의 사강화 중 진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진(進)은 그 기능 자체를 극한으로 끌어올려주는 강화의 수식어.

'추가효과가 붙어서 나쁠 건 없지.'

아마도 레벨을 더 올리면 나머지 강화의 수식어도 함께 붙으리라.

하여간 4성 이하의 공격을 무효화시킨다면 적어도 지구에서의 몸은 어느정도 안전이 확보된 셈이다.

'남은 점수는 900점.'

문제는 남은 점수가 애매했다.

어지간한 이권들의 레벨을 올리는 데에는 최소 천 점이 필요했으니.

'불멸의 워프석과 일반 워프석이라.'

마스터가 독점하여 판매하고 있는 물건이 바로 워프석이었다.

그런데 불멸의 워프석은 또 처음 들어본다.

이번 퀘스트를 압도적인 점수로 밀어서 추가된 목록인 모양인데.

턱을 쓸며 불멸의 워프석에 관한 설명을 읽어보았다.

[불멸의 워프석]

★ 불멸의 워프석을 머금은 워프는 파괴되지 않습니다.

★ 불멸의 워프석으로 연결된 워프는 강제로 해제되지 않습니다.

★ 한 도시당 하나의 '불멸의 워프석'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보자마자 어깨가 들썩였다.

"······ 이것도 대박이군."

일반 워프석의 가격은 아무리 싸도 백만 골드를 훌쩍 넘는다.

하물며 여태껏 등장한 적 없는 불멸의 워프석.

이 기능을 확인한다면, 도시의 주인들이 침을 흘리며 달려들 것이다.

워프석의 업적점수가 20인데 비해 무려 300점을 필요로 하니, 단순 가격으로만 치환해도 천오백만 골드.

여기에 희소성을 더하면 가격은 배의 배로 뛸 것이다.

어쩌면 억단위가 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불멸의 워프석은.

'심연에 가라앉는 걸 어느정도 방지해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으므로.

심지어 워프를 강제 해제하여 가라앉히는 악질적인 수법도 방지해준다.

한 도시당 세 개를 설치 못하는 건 다소 아쉽지만.

'미궁 도시에 한 개, 그리고 하나는 팔아야겠군.'

아무리 미궁 도시가 구제국의 땅이라 해도, 이전에 쓴 골드가 너무 많았다.

도시의 재정과 빛의 옥좌를 생각하면 골드가 더 필요한 상황.

결정을 내린 나는 업적상점의 목록을 재차 띄웠다.

"'불멸의 워프석'을 두 개 구매했습니다." -600

"'불멸의 워프석' 한 개를 '비밀경매장'에 올렸습니다."

"경매시간이 7일로 설정되었습니다."

"시작가는 10,000,000G 입니다."

이 가치를 못 알아볼 사람은 없을 테니, 알아서 잘 팔리겠지.

이제 진짜로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아.'

······ 딱 하나 빼고.

"'황금률 상점'에 접속합니다."

"온전한 황금률 2개와 황금률 조각 2,355시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갱신된 황금률 상점의 목록을 불러옵니다."

*

세렝게티, 하이 드라이어드 롬멜, 발테, 앤드류, 그리고 나.

이하 다섯 파티원이 균열의 탑으로 향했다.

탑을 지척에 두고서, 앤드류가 침을 꿀꺽 삼키곤 말했다.

"······ 후계자님. 혹시 제 치유능력이 의심스러우십니까?"

돌연 듯 내가 '최상급 엘릭서'를 나누기 시작한 직후의 말이었다.

"믿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의 상황이 있을 수 있으니, 세 개씩은 챙기도록."

앤드류는 믿는다.

그의 사제로서의 능력은 발군이었다.

허나 탑 안에 뭐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이상, 담보는 필요하지 않겠나.

황금률 상점에서 '최상급 엘릭서'는 30시간에 팔렸고, 그걸 정확히 15개 구매하여 나누고 있는 것이다.

"각자 최상급 엘릭서 세 개라니······."

발테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엘릭서가 든 병을 받아들었다.

어지간한 토벌에서도 엘릭서를 챙겨가진 않는다.

한데, 세 개라니.

그야말로 호화스러움 그 자체.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것도 하나씩 챙겨가라."

"이건······ 뭡니까? 호루라기?"

세렝게티가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호루라기다. 오직 본인만 사용할 수 있으니 도난의 위험도 없지."

이 역시 갱신된 황금률의 상점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적어도 서로를 잃지는 않게끔.

잃어도 금방 찾을 수 있게끔 말이다.

"후계자님······."

"감동입니다!"

"저희를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 줄이야······."

"고맙다, 형제여."

······ 징그럽게들 왜 이래?

이토록 만반의 준비를 한 건, 안전 때문만은 아니다.

균열의 탑에서 층을 오르면 '레벨 제한 해제'를 할 수 있다는 대목이 너무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모두가 그 혜택을 보는 건 아닐 터.

파티 자체가 높은 성적을 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투자일 뿐이다.

"입장하지."

"예!"

세렝게티가 우렁차게 외쳤다.

곧이어 균열의 탑으로 발을 들이자.

"'균열의 탑'의 '입장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

"1층, 균열된 레벨의 탑."

"레벨에 따라 들어가는 영역이 나뉩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합산된 점수에 따라 마지막 '레이드 보스영역'이 열리고, 2층으로 향할 수 있는 여부가 결정됩니다."

······.

"'영원군주의 심장'이 발동합니다!"

"'균열된 레벨의 영역'이 해제되었습니다."

"'란돌프'는 1레벨 영역부터 입장이 가능합니다."

"'균열의 주인'이 인상을 찌푸립니다."

마혈왕의 권능

찬란한 영웅의 성좌.

모든 별빛을 담아, 유일등급의 보상을 완성시킨 그는 실로 만족하였다.

만족하였는데.

'그래도 끝을 못 본 것은 아쉽군.'

단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그건 진정한 '끝'을 못 본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공허함이 채워지며, 자신이 하지 못했던 선택을 보게 되었으니까.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대의를 위한 명분이라 포장했으나, 결국 나는 나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없었던 거다.'

본디 그는 영웅이었다.

성좌이기 전에, 한 세계의 기둥이라 불리었던 자.

찬란하며 아름다웠던 진정한 영웅.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의 생은 언제나 후회뿐이었다.

결국 지키지 못했고, 패배하며 스러진 비참한 말로를 걸었다.

세계를 지키려는 대의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나만이 세계를 지킬 수 있으리라 맹신했다. 그 결과 나는 나를 대신해 다른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보고싶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헌실할 수 있는 영웅을.

하지만, 볼 수 없었다.

그런 자는 없었다.

오랜시간 '찬란한 영웅의 성좌'로서 수많은 이야기를 접했지만 연거푸 실망만 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보았다.

'란돌프.'

수상쩍을 정도로 모든 걸 초월하여 해내는 집필자가.

자신의 죽음을 걸고 도박을 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저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오염원을 스스로 먹고 오염되어 '마혈왕'을 강림시키는 선택을?

아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발상조차도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자벨라의 마지막 뜻을 이어받아 도시를 심연에 가라앉혔겠지.

'더······ 보고싶군.'

그래서인가.

채워졌다 여겼는데, 채워지지가 않는다.

조금만 더 그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

그가 앞으로 해나갈 영웅의 일대기를 함께 그려보고 싶었다.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더 불태워서라도.

······ 그저, 보고싶었다.

-더 내놓을 게 있나?

별빛이 스러지며 사라지던 와중.

어둠 속에서 입 하나가 나타났다.

-보고싶다고 했지 않나. 그럼 더 내놓을 게 있어야지?

무엇을?

이미 모든 걸 바치지 않았던가.

······ 아.

아직 하나 있었다.

바치지 않은 게.

저놈에게 주지 않은 것이.

-여태껏 쌓아온 이야기라. 재밌군.

그가 보고 쌓아온 이야기가 책으로 휘감겼다.

이후 '입'의 안으로 들어갔다.

히죽!

한참이나 맛을 음미하던 '입'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

균열의 탑에 입장한 즉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1레벨의 영역.'

초원.

보이는 것은 초원이다.

잔디가 무성하며 나무가 곳곳에 자라있는.

영원군주의 심장으로 말미암아 조건을 깨부수고, 혼자 1레벨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균열이라는 게 정말 흩어놓는다는 말이었나보군.'

파티원들을 레벨에 따라 균열시켜놓는 것.

그래서 균열의 탑인 모양이다.

하지만 파티원들의 점수가 합산되어 마지막 레이드가 진행된다.

"5명의 파티원이 모은 점수가 500점을 넘어서면 '1층의 군주 솔바렌'과 격전을 치룰 수 있습니다."

"'군주 솔바렌'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 2층으로 향할 권리와 '레벨 제한 영역'이 한단계 해제됩니다."

"더 높은 점수를 획득시 '군주 솔바렌'의 전투력이 낮아집니다."

"더 많은 균열이 발생시 '군주 솔바렌'의 전투력이 높아집니다."

"현재 '군주 솔바렌'의 전투력은 999,999입니다."

전투력?

능력치나 성급 따위를 종합해서 전투력으로 나타낸 걸까?

확실한 건 여태껏 판게니아에 존재했던 탑들과는 느낌이 아예 달랐다.

'단순히 마혈왕을 제거해서 나타난 탑은 아니다. 마혈왕의 죽음은 일종의 방아쇠가 되었을뿐.'

생각해보면, 탑의 기원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판게니아에는 무수히 많은 '탑'이 있지만, 탑의 주인도 모두 다르며 그들이 내리는 시련도 제각각이었다.

어쩌면 마혈왕과 같은 존재가 죽거나, 한 세계가 사라질 때 탑이 떠오르는 건 아닐는지.

요르문간드가 경고할만큼 마혈왕은 엄청난 존재였으니 말이다.

'······ 확실히 1레벨 영역이라 그런가 사람이 없군.'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1레벨이 감히 탑을 오르려는 생각을 하겠는가.

파티를 짤 때도 1레벨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자살 희망자가 아니고선 1레벨에 탑을 오를 리가.

시이익.

쉬이이익!

그 순간 넝쿨이 길게 뻗으며 내 발을 묶었다.

초원 전체가 이런 넝쿨로 가득하다.

'식육식물들.'

사람을 묶고, 끌어당겨, 잡아먹는 식물들이다.

1레벨에겐 굉장히 위협적이겠지만.

뚝! 뚜둑!

걷는 족족 넝쿨이 찢겨나갔다.

아무리 많은 넝쿨이 나를 감싸도 저것들로는 내 발길을 막을 수 없다.

'이런 식물들은 불과 냉해에 약하지.'

나는 '겨울'을 들었다.

그리고.

휘이이이이이이!

'겨울'이 찾아왔다.

*

"영역 전체가 얼어붙습니다."

"진행률 100%"

"3레벨의 영역 보스가 등장했습니다."

"3레벨의 영역 보스가 사망했습니다."

"총합 30 SP를 획득했습니다."

"황금률의 조각 10h를 획득했습니다."

"다음 영역으로 향하는 길이 열립니다."

"파티원 전체 점수 합산 285점"

"1위 - 란돌프(250)"

"2위 - 세렝게티(20)"

"3위 - 롬멜(15)"

"4위 - 발테(5)"

"5위 - 앤드류(0)"

"전체 3,788 파티 중 단독 1위입니다."

3층까지 발견된 사람은 없었다.

하여, 순식간에 치고 나갈 수 있었다.

'다들 분발하고 있군.'

앤드류야 사제이니 점수를 얻는 게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경우가 아니고선 다른 파티도 아직 제대로 점수를 얻지 못했으리라.

'13,788파티. 대략 육만 구천명 정도.'

정확히 68,940명이 균열의 탑에 도전하고 있다.

생각보다 많다.

플레이어만이 아니라, 판게니아의 존재들도 대거 도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레벨이 낮은 영역에선 보상도 적긴 하군.'

30 SP와 황금률 조각 10시간 어치.

1층과 2층, 3층을 돌파하며 얻은 최종보상이다.

하지만 이 레벨대에서 얻은 보상치곤 상당한 양이었다.

저레벨 구간에서 어떻게 저만한 보상을 얻겠는가.

'레벨을 더 높게 치고 올라가면 보상도 커진다.'

허나 바로 올라갈 순 없다.

아래 영역에서 샅샅이 훑으며 올라가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니까.

'SP는 쌓아둬서 나쁠 게 없지.'

빌헬름이 죽고 캐릭터를 생성할 때 160만 SP를 모조리 올랜덤으로 돌렸다.

덕분에 모든 재능을 Max레벨까지 올렸고, 13개의 히든 특성이 생성됐다.

심지어 '마혈족의 왕'을 얻으며 관련된 재능들도 Max가 찍혔다.

사실상 재능 부분에선 SP를 쓸 곳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하지만 SP는 '업적 상점'에서 업적 점수와 교환할 수 있었다.

게다가 딱 두개, 찍히지 않은 재능이 존재했다.

'진리탐구와 차원 이해력. 이 두 재능은 하나도 찍히지 않았으니.'

예컨대 '검은 피'를 비롯한 '피의 각성' 같은 재능들은 모두 찍혀있지만 저 두 개만은 하나도 찍히지 않은 상태였다.

SP를 모아서 업적점수와 바꾸거나, 저 재능들을 찍으면 될 터.

"사, 살려줘!"

"으아아아악!"

그때였다.

멀리서 퍼지는 비명소리.

분명히 사람의 목소리다.

4레벨 영역부터는 도전자가 있는 듯싶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무언가에 쫓기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마스터 이 개새끼야!!"

마스터?

설마 마스터도 균열의 탑에 도전한 건가?

하지만 그 두 사람보다도, 둘을 쫓고 있는 것들에 더 눈길이 간다.

'저건······?'

묘하게 익숙하게 생긴 형태의 괴물이었다.

사람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져, 날개처럼 펼쳐지며 수많은 돌기 같이 이빨이 튀어나온 괴물.

바로 마혈족이었다.

하지만 사막여왕과는 달리, 돌기도 작고 크기도 훨씬 작았다.

기껏해야 허벅지에 올까 싶을 정도.

우뚝!

조금 더 다가가자, 다수의 마혈족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킁킁! 킁!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돌려 내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해서일까?

"뭐, 뭐야?"

"안 따라오는데?"

도망치던 둘은 당황한 채 뒤를 돌아보다가 마혈족과 마찬가지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마혈족들이 우르르 내게 달려드는 걸 보며 다급히 소리쳤다.

"이봐요! 빨리 도망쳐요!"

"이 새끼들 물면 안 놓습니다!"

경고를 던졌지만, 나는 그저 가만히 서있을 따름이었다.

4레벨의 영역에 있는 마혈족들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나.

캬르르르!

키이이이이이!

마혈족들이 괴이한 목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나와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지척에 도달했을 때.

'······ 왜 이러는 거지?'

소형의 마혈족들이 나를 둘러싸곤 원형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무슨 의식이라도 하는 듯이.

샤아아아!

그리곤 동시다발적으로 나를 향해 입을 벌렸다.

마치 먹이를 원하는 아기새처럼.

적의는 없다.

다만 의아할 따름이다.

내 냄새를 맡고 모여든 걸 보면 동질감을 느낄만한 건덕지가 있다는 건데.

'히든 특성 때문에 그러나?'

가능성은 있었다.

나는 마혈족의 왕.

마혈족들이 제스스로 나를 알아볼 수도 있는 일이다.

허나, 무엇을 주라는 말인가.

'설마, 피?'

유일하게 떠오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피'다.

관련된 재능으로도 '피'를 이용한 것밖에 없으므로.

그 외엔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다.

시험삼아 '겨울'로 손가락을 따 핏방울을 맺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녀석에게 한 방울을 먹이자.

부르르르!

내 핏방울을 먹은 소형 마혈족이 몸을 미친 듯이 떨더니, 점점 크기가 커지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의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마혈왕의 첫 번째 가신'이 탄생했습니다."

"히든 특성 '비스트로드'가 발현됩니다."

"지배한 종이 한계를 돌파합니다!"

쩌적-!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린 마혈족은, 일반적인 마혈족과는 모습이 달랐다.

날개와 같이 펼쳐놓은 살점이 검은 망토처럼 변하고, 온 몸이 강철처럼 반질반질해졌다.

[Lv. 7]

4였던 것이 7레벨로 격상까지 하였다.

고작 피 한 방울에 말이다.

'피로 종속을 늘리는 게 마혈족의 왕이 가진 특성인가보군.'

마혈족만이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피'로 이 괴물들을 강화시키며 나를 따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법 흥미로웠다.

나는 남은 피를 소형 마혈족에게 먹였다.

그렇게 스무마리의 마혈족이 내 피를 먹고 종속되자.

"뭐, 뭐야 저건?"

"설마 사람이 아니라 보스몬스터······!"

그 장면을 처음부터 지켜본 두 사람이 경악하고 말았다.

공격당하는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피를 먹이더니 괴물들의 모습이 변하고, 심지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마치 왕을 대하듯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왕이시여.

허나, 나는 그 둘에게 관심이 없었다.

돌연히 들려오는 목소리.

-우리에게 더 많은 피를 하사하십시오.

-서열을 정해야 합니다.

-강력한 가신을! 동지를!

-더욱 많은 피를!

동등하게 한 방울씩만 먹이자, 이들의 서열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설마 더 많은 피를 먹이면 더욱 진화한다는 뜻인지.

마혈왕의 히든 특성으로 나의 피가 지배의 권한을 지녔대도, 내 피로 진화하는 건 아마 마혈족만 그러할 것이었다.

마혈족 자체가 마혈왕의 피로 강화되는 모양이었으니.

'나의 피로 진화하는 종족이라.'

실로 흥미로웠다.

희생 스킬

이십여가량의 마혈족들.

녀석들은 나의 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 사이의 '서열'을 원하는 중이었다.

더 많은 피를 먹은 순서대로 나의 충직한 가신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피 한방울로 3레벨이 올랐다.'

4레벨짜리가 단번에 7레벨이 됐다.

아무리 낮은 레벨의 구간이라도 3레벨을 올리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

'어디까지 올릴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피의 종속.

히든 특성 '비스트로드'가 발동되었다면 확실하게 내 '펫'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말.

적어도 이 녀석들이 나를 배신할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뚝! 뚝!

첫 번째 녀석에게 두 방울을 더 먹이자, 녀석의 몸이 재차 부풀었다.

"'마혈족 1'이 급속성장을 시작합니다!"

"'마혈족 1'이 '마혈종'으로 진화했습니다!"

부풀고, 커지며, 그제야 내가 아는 모습의 마혈족이 됐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사막여왕과 비슷한 외견.

[Lv.8]

7에서 8레벨로 단박에 올랐다.

고작 피 세 방울로 이만한 성장이라니.

아직 빈혈이 올 정도는 아니다.

하여 욕심을 부려보았다.

"'마혈종 1'이 급속성장을 시작합니다!"

"'마혈종 1'이 급속성장을 시작합니다!"

퍼어어엉!

연달아 두 방울을 더 먹이자, 마혈종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그륵! 그르르륵!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긴다.

폭탄에 맞은듯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크르!

크르를!

이윽고 떨어진 살점을 다른 마혈족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 아무래도 한계치가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다른 조건이 필요하거나.

무리하여 피를 먹이면 몸이 터져버린다는 걸 알았기에 적당히 조절했다.

한 마리는 레벨 9, 나머지는 레벨 8까지만 끌어올린 것이다.

동시에.

"'마혈종 무리(1)'가 완성되었습니다."

"우두머리 마혈종이 '불' 속성을 지녔습니다."

"'마혈종 무리(1)'를 제물 삼아 '억겁의 화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Hidden Tip : 우두머리의 속성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희생 스킬이 달라집니다."

"Hidden Tip : 마혈종의 한계를 늘리려면 마혈종이 '더 많은 임무'를 수행해야합니다."

그렇게 무리를 완성한 수간 또 다른 글귀가 떠올랐다.

'희생 스킬?'

제물로 삼는다는 것.

말 그대로 이 마혈종들의 생명을 담보로 스킬을 사용한다는 말이다.

희생 스킬은 매우 강력하며 까다롭기 그지없다. 레벨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만 한 번 사용하면 죽고야 마는 초강력의 스킬.

'마혈왕의 진짜 기능이 이건가 보군.'

마혈종들을 제물삼아 강력한 스킬을 사용하는 게 그의 진짜 권능인 듯싶었다.

예상컨대 '차원문'도 희생스킬로 만든 것일 수도 있었다.

사막여왕을 먼저 보내놓은 것도 그렇고.

'······ 오염원들이 마혈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그래서였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욱 흥미로워졌다.

마혈왕은 미리 사막여왕을 판게니아로 보내 '오염'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어 파이살메르 전체에 역병을 일으켜 인위적으로 '마혈족'을 늘렸다.

그리고 마지막 오염원을 희생시켜 자신이 강림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 외에 다른 조건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금 더 연구해봐야 알겠지만······.

'마혈종의 무리가 많아지고 강해지면 더 상위의 희생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마혈종의 무리를 강화하면, 차원이 다른 희생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의 속성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상이하다는 것.

'이 층에 있는 마혈족을 모조리 길들인다.'

무리를 늘려야 한다.

위의 층에도 마혈족이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반대로 없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최대한 모아봐야하지 않겠나.

-임무를 내려주십시오.

-저 인간 둘을 죽일까요?

-왕이시여! 살육을 벌이겠습니다!

-피를! 더 많은 피를!

한데, 이놈들은 피에 미쳐있었다.

저 멀리 도망치는 두 사람을 보며 군침을 흘려대는 중이었다.

'내 명령을 수행하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했지.'

고개를 끄덕이며 도망치는 두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잡아와라. 산 채로."

*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십시오, 나으리!"

패트, 마이트.

마혈종에게 잡혀온 즉시 두 남자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곤 슬쩍 둘이 시선을 엮으며 눈치를 보았다.

'이 괴물들을 지배하는 영역 보스가 분명하다니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사람처럼 생겼잖아.''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

그는 괴물들을 다스리고, 피를 먹여 진화시켰다.

외견은 분명히 사람인데, 하는 짓은 사람이 아니다.

"레벨 4짜리가 도전할 탑은 아닌 듯한데."

"마, 마스터에게 속아서 들어왔습니다! 어렵지 않다고, 돈도 많이 준다고! 개같은 새끼!"

······ 열정적으로 마스터를 욕하는 모습을 보며, 잠시 턱을 쓸었다.

마스터는 실험용 쥐의 역할을 할 자들을 모집해 대거 집어넣었다.

"그 마스터라는 자도 이 탑에 들어온 것이냐?"

"예! 분명히 자기도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웬 이상한 괴물들도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괴물들과 함께?"

마스터가 괴물들과 어울린다고?

플레이어로 파티를 짜서 공략하는 게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괴물과 파티를 맺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나처럼 시체 까마귀로 변하여 아예 속이는 것이면 모를까.

사람도 괴물을 혐오하듯, 괴물도 사람을 혐오하기 마련이었으니.

그때 옆에 있는 남자가 말했다.

"예, 예. 락투샤! 분명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오크와 다크엘프······ 나머지 둘은 망토를 깊게 눌러써서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강해보였습니다."

······ 락투샤?

설마 수련자의 산에서 보았던 그 소드마스터 락투샤?

'안 죽었었나?'

수련자의 산에서 부활한 바알.

그 바알과 맞서며 죽었으리라 예상했다.

부하들이 희생하여 혼자서라도 살아남은건지.

왜 락투샤가 마스터와 함께하고 있는 건지도 의아할 따름이었다.

'락투샤와 다크엘프······ 흑왕의 전력이군.'

흑왕의 전력이 마스터와 함께있는 이유.

아마도, 마스터가 흑왕에게 붙은 것이다.

뭘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탑을 올랐다는 건, 마스터가 이 '균열의 탑'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갖고 있다는 의미였다.

마스터는 실험을 좋아하기로 유명했으니까.

나도 모르는 정보를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기는 있었다.

'당시 보았던 락투샤의 레벨은 13. 당장 겹치진 않는다.'

균열된 레벨의 탑.

내 파티에서 가장 높은 레벨의 보유자는 세렝게티다.

1성, 그러니까 11레벨이다.

그러니 흑왕의 전력과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은 없을 터.

허나, 부딪힐 수는 있다.

내가 직접 13레벨의 영역까지 올라가면 말이다.

-왕이시여! 이제 먹어도 됩니까?

-피를! 살점을! 살육을!

-맛있겠다!

······ 두 남자를 둘러싸고 군침을 질질 흘려대는 마혈종들.

가만히 놔두면 골수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울 무지막지한 놈들이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남은 마혈족들을 모조리 산 채로 잡아와라."

우선 무리부터 늘리는 게 급선무였다.

*

패트와 마이트는 자신이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영역 전체로 퍼져나간 괴물들이, 다른 괴물들을 산채로 잡아온 것이다.

그러자 잡혀온 괴물들이 남자에게 조아리며 충성하기 시작했다.

'대체 저 남자 정체가 뭐야?'

괴물들이 본능적으로 따르는 존재라니.

하물며 남자는 자신의 피를 먹여, 괴물들을 강화시켰다.

그렇게 강화된 괴물의 숫자가 순식간에 100마리를 넘어갔다.

'······ 언데드를 다루는 사람은 몇 번 봤지만 저건 그런 차원의 수준이 아닌데.'

살아있는 괴물을 이끌고 강화시킨다.

죽어있는 언데드는 성장할 수 없지만, 저 괴물들은 끝도 없이 성장할 수 있다.

그것도 고작 피 한 방울로.

저런 불가사이한 존재는 처음봤다.

순간 뱀파이어가 떠오르긴 했으나 그것조차 초월했다.

심지어.

휘이이이잉.

······ 남자가 검을 드자, 눈보라가 불었다.

살점을 에일 듯이 차가운 눈보라는 순식간에 영역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리고.

"영역 전체가 얼어붙습니다."

"진행률 100%"

"4레벨의 영역 보스가 등장했습니다."

"4레벨의 영역 보스가 사망했습니다."

보지도 못한 영역 보스가 난데없이 사망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할 틈조차 없이.

"4레벨 영역이 클리어되어 강제로 '대기자의 방'으로 추방됩니다."

"균열의 탑 1층이 클리어되기 전까지, 나갈 수 없습니다."

두 남자는 강제로 튕겨나갔다.

발밑에 워프가 생성되며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둘은 보았다.

'뭐야. 저 워프는?'

괴물들을 다루는 남자의 앞에 생성된 황금색의 워프를.

자신들과 전혀 다른, 생전 처음 보는 색과 형태의 워프.

그것을 자유로이 넘는 남자의 모습을 말이다.

*

"총 45 SP를 획득했습니다."

"총 황금률의 조각 15h를 획득했습니다."

"다음 영역으로 향하는 길이 열립니다."

"파티원 전체 점수 합산 420점"

"1위 - 란돌프(330)"

"2위 - 세렝게티(50)"

"3위 - 롬멜(20)"

"4위 - 발테(10)"

"5위 - 앤드류(10)"

"전체 13,754 파티 중 단독 1위입니다."

"파티 2위의 점수 총합은 180점입니다."

"파티 3위의 점수 총합은 120점입니다."

독보적인 점수로 층을 오른다.

파티의 숫자가 줄어든 걸로 보아 전멸한 파티도 있는 모양.

'확실히 레벨대비 강한 게 유리하군.'

나를 제외하면, 세렝게티 역시 상당한 점수를 거머쥐었다.

1성이지만 거의 2성에 가까운 실력의 소유자.

그녀를 막을 11레벨 영역의 존재는 거의 없을 것이기에.

'마혈종들도 워프를 넘어올 수 있다.'

5레벨의 영역.

워프를 넘자, 내 주변으로 다른 마혈종들도 함께 전이되었다.

하물며 그 숫자가 백이십에 다다랐다.

"'마혈종 무리(6)'가 완성되었습니다."

"우두머리 마혈종(6)이 '어둠' 속성을 지녔습니다."

"'마혈종 무리(6)'를 제물 삼아 '사무치는 어둠장막'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혈종 대무리(1)'를 제물 삼아 '불타오르는 재앙'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무리를 넘어, 100마리를 넘기자 '대무리'가 완성되며 대단원의 희생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불타오르는 재앙이라.

이름만 들어도 그 파괴력이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아직 이 단계에서 사용하긴 아깝다.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제게 피를 하사해 주십시오!

이윽고 마혈종의 우두머리(1)가 내게 말했다.

불의 속성을 지녔으며 처음 우두머리가 된 녀석.

몇몇 임무를 수행하며, 한계가 늘어난 건지.

나는 피 한방울을 우두머리(1)에게 하사했다.

그러자.

부르르르!

힘차게 몸을 떨던 우두머리(1)의 몸집이 조금 더 커지고, 전신에 이펙트 마냥 '화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Lv. 9]

레벨도 한 단계 상승했다.

허나, 변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혈종 무리(1)'를 제물 삼아 '억겁의 대화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두머리가 강화되자 '억겁의 화염'이 '억겁의 대화염'으로 변한 것이다.

과연. 우두머리의 성질과 레벨에 따라 제물로 넘기는 스킬 역시 강화된다.

어디까지 강화될지 내가 더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궁금점은, 머지않아 해결될 것이었다.

끼룩!

키르륵!

······ 5레벨의 영역에도 마혈족이 있었으니까.

4레벨의 영역에 있던 녀석들보다는 조금 큰 녀석들로.

"모조리 산 채로 잡아와라."

나는 녀석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기 있는 마혈족도 모조리 지배하겠노라고.

하늘이 내린 기회

지이잉-!

락투샤의 대검에 강렬한 기운이 맺힌다.

검기가 아닌, 정형화된 검강의 형태.

'다 먹어치우거라, 흑천검.'

먹물처럼 새까만 검이 검강을 머금은 채 휘둘러지자.

콰르르르르릉!

대지가 갈라지며 거인 마냥 거대한 마혈족의 무리가 풍비박산 난다.

닿는 족족 수천, 수만의 조각으로 찢어지고 갈라지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이윽고.

"초대형 마혈족 무리를 소탕했습니다."

"점수 3점을 추가로 획득합니다."

"파티원 점수합산 429점"

"1위 - 락투샤(100)"

"2위 - 세인트(99)"

"3위 - 폐인(98)"

"4위 - 살루만(97)"

"5위 - 마스터(35)"

"전체 13,311 파티 중 2위입니다."

동시에 떠오른 정산표.

하지만 락투샤는 이 점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도 2위라니.'

파티원들 끼리의 순위는 엎치락뒤치락 중이다.

그러나 전체 파티의 순위에선 1위와 아직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

1위의 점수는 480점.

이것도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점수가 오르는 폭이 느려져서 이만큼이나 따라온 것이었다.

'마스터. 이 녀석은 도움이 안 되는군.'

마스터만 제대로 했다면 거의 비슷하거나 더 높았을진대.

마스터가 점수의 평균치를 너무 많이 깎아 먹었다.

과연 놈이 도움이 되는지 의구심이 생기는 수준.

하지만 마스터보다도 더욱 눈길이 가는 건 역시 1위 파티의 정체일 것이다.

'1위 파티는 뭐 하는 놈들이지?'

초반의 폭주는 말이 안 될 지경이었다.

두 배가 넘는 점수 차이를 내면서 미친 듯이 달려나갔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점수가 오르는 폭이 느려졌다.

그런데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게 더 놀랍지만.

'백왕? 아니면 제국인가?'

조금의 이해라도 가능해지려면 그 둘밖에 없다

백왕이나 제국이 대대적으로 나선 경우.

하지만 아무리 그 둘이라도 초반의 속도는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다

'백왕 쪽은 우리의 전력에 미치지 못한다.'

락투샤는 확신하고 있었다.

백왕. 북방의 주인인 그 노괴물은 이빨이 빠졌다.

예전의 신위는 사라지고 겁쟁이가 되어 뒷방에만 있는 신세.

하물며 그를 따르는 주력들도 자신의 무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흑왕님의 은혜로 검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자신뿐만이 아니다.

측근들은 모두 강력한 은혜를 입어, 몇 단계나 강해졌다.

다른 주력들의 무력수위가 사왕에 준한다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자신들의 압승이다.

사왕.

백왕의 산하 주력 중 하나인 놈을 통해 확인했으니까.

대범하게 남쪽에 침범해온 그 약해빠진 언데드놈.

'남은 주력들이 사왕의 수준이라면 더 볼 것도 없지.'

그러니 백왕 측의 전력은 아닐 터다.

'그럼 제국인가?'

남은 건 제국이다.

인간들이 세웠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곳.

비축해놓은 보물과 숨겨진 초월자가 셀 수 없이 많다는 건 파악해놓은 상태다.

하물며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것들이 섞여있다는 사실도.

특히 '황제'에 관해선 흑왕이 직접 조심하라 할 정도였으니.

'누가 되었든······.'

쯧쯧.

작게 혀를 찬 락투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흑천검을 들어.

'만나면 벨뿐이다.'

콰르르르르릉!

달려드는 초대형 마혈족을 향해 다시 한 번 휘둘렀다.

*

난데없이 솟아오른 '균열의 탑'은 모든 판게니아인과 플레이어들의 초대형 관심사였다.

플레이어 톡 역시 같은 이야기가 게시판을 달구고 있었다.

-랭커 중엔 누가 도전했는지 아는 사람?

-그라시아나 마스터는 들어가지 않았을까?

-심연 미궁은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는데 여긴 정보가 없어서 답답하네

하지만 '심연 미궁'과 달리 한 번 들어가면 층이 클리어 될 때까지 퇴장할 수 없다는 조건에, 도전을 망설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여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황.

누가 도전했고,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레벨 제한 해제'가 설마 10레벨 뚫어주는 건가?

-지금은 그쪽이 가장 유력한데.

-11레벨은 인간 아닌 괴물만 가능 한 거 아님? 성녀처럼 아예 인간이 아닌 존재라거나.

-그럼 층을 클리어한 파티만 레벨제한이 올라가는 거야?

-그러지 않을까?

-그럼 인간만 좋은 거 아님? 괴물들은 어차피 레벨제한 없잖아?

-ㄴㄴ종마다 설정된 레벨 제한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는 거 같음

모든 종에 레벨 제한은 있다.

인간은 10으로 낮을 뿐이며, 그래서 별로 인한 초월만이 더 강해질 수 있는 길인 것이다.

하지만 별의 개수는 정해져있다.

자격을 갖췄음에도 10레벨에서 멈춰있는 인간도 무궁무진하다는 소리.

인간을 탈피하여 다른 종이 되는 게 아닌 이상에야 10레벨을 넘게 올리진 못한다.

만약 그러한 '제한'을 뚫어주는 거라면.

-대박이네...

-결국 1성 초월시켜준다는 거랑 다를 게 없네 그럼?

-레벨이 아닐 수도 있음. 깨봐야 아는 거지

-아, 씨 답답하네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답답하면 네가 들어가보던가ㅋㅋㅋ

-어, 누가 레이드 시작한다

-이건 심연 미궁 때랑 같네

-도전자 흑왕, 마스터?

-설마 그 남부의 흑왕?

-미친. 실화냐?

-그런데 마스터는 뭐냐?

-우리가 아는 그 마스터는 아니겠지 설마?

-???

*

"'군주 솔바렌'의 레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도전자 '흑왕, 마스터', 파티 점수 500점"

"'군주 솔바렌'의 전투력이 낮아지지 않습니다."

"'군주 솔바렌'의 전투력은 999,999입니다."

6레벨의 영역을 쓸어담던 중 떠오른 글귀에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점수가 역전됐군.'

꽤 점수차이가 나는 상황이었건만.

한 순간에 2위 파티가 다량의 점수를 획득하며 치고나간 것이다.

'영역레벨 보스라도 잡은 건가?'

보스를 잡고 정확히 500점을 맞춘 뒤에 도전한 것 같은데.

너무 느긋하게 올라가고 있었던 걸까?

'모든 마혈족을 지배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히든 특성 마혈족의 왕.

그로 인한 마혈족의 지배.

이건 내게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하나의 군단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특성이었으므로.

하물며 지배하면 지배할수록 그 위력은 배가 된다.

무리가 많아져도 강해지고, 특정 마혈종이 강화되면 더욱 강해진다.

그렇게 6레벨의 영역까지 올랐을 때 내가 지배한 마혈종의 숫자는 500에 다다랐다.

-왕이시여!

-우리의 영원한 지배자시여!

-피를!

-더 많은 피를!

문제는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피를 갈구하는 녀석들도 많아지고 있다는 것.

'빈혈이 오는군.'

한 방울씩 내어도 오백방울이다.

자연재생력이 높아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빈혈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마혈종 군집(1)'이 완성되었습니다."

"'마혈종 군집(1)' 우두머리의 속성은 '별'입니다."

"'마혈종 군집(1)'을 제물로 바쳐 '유성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무리를 넘어, 군집을 완성한 것이다.

게다가 특수한 '속성'을 지닌 마혈종도 찾았다.

'일반적인 속성 외에도 특수한 속성을 지닌 마혈종이 있다.'

특수한 속성의 마혈종은 특수한 스킬을 사용케 해준다.

유성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메테오와 비슷하지 않을는지.

불속성의 대마법사가 초월하여 얻을 수 있는 최강의 스킬 중 하나가 바로 메테오였다.

'희생 스킬을 쓰지 않아도, 이 자체로 군단이다.'

최소 레벨 7이 넘는 마혈종이 500이다.

작은 도시 하나는 쑥대밭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전력이었다.

그때였다.

"'6레벨의 영역'의 보스가 등장했습니다!"

"'6레벨의 영역'의 보스를 쓰러트렸습니다!"

키아아아악!

6레벨의 영역보스.

거대한 맘모스가 등장한 즉시 살해당했다.

마혈종들은 맘모스의 피와 살점을 뜯어먹으며 포식을 즐겼다.

··· 조금 잔인하긴 하군.

마혈종은 전부가 정말 피에 굶주린 놈들이었다.

"파티 점수 총합이 500점을 돌파했습니다."

"'군주 솔바렌'에게 도전하시겠습니까?"

"파티원 전원이 동의할 시 다음 순번으로 레이드가 시작됩니다."

"현재 '흑왕, 마스터'가 도전 중입니다."

흑왕, 마스터.

마스터가 흑왕의 무리에 합류한 건 확실한 것 같았다.

문제는 저들이 군주 솔바렌을 쓰러트리느냐는 것인데.

'쉽진 않을 거다.'

이런 종류의 던전을 수없이 깨본게 나다.

500점에 도전할 수 있다고, 정확히 500점으로 도전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랬다간 온갖 버프로 강화된 보스를 마주하게 될 테니.

하지만 확신은 못한다.

흑왕의 무리가 모두 락투샤만큼 강하다면, 가능성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군주 솔바렌'의 레이드가 실패했습니다."

"'군주 솔바렌'의 전투력은 999,955입니다."

··· 참담한 결과였다.

'겨우 44밖에 못 깎았다고······?'

순간 나도 잘못 본 건가 싶었다.

락투샤가 포함된 흑왕의 무리가 겨우 전투력 44를 깎았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나와 달리, 다른 파티는 얻을 수 있는 점수의 총합에 한계가 있다.

자신의 레벨을 담당하는 영역밖에 깰 수가 없으니까.

아무리 레벨이 높은 영역이라 획득할 점수가 많다고 해도 기껏해야 한 명당 200점 안팎일 것이다.

'이건······ 모든 파티가 도전해야 깰 수 있는 보스로군.'

그제야 어느 정도 파악이 됐다.

군주 솔바렌은 하나의 파티로 깨라고 만들어놓은 보스가 아니라는 걸.

저건 탑을 오르는 수많은 파티가 수없이 두드려야 겨우 깰 수 있게 만들어놓은 괴물이다.

재도전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정비하는 데 시간이 걸릴 터.

'··· 오히려 좋다.'

허나, 나는 오히려 좋았다.

군주 솔바렌이 그 정도로 강하다면, 나 역시 그만큼 강해져서 도전하면 그만이었으니.

"'군주 솔바렌'의 레이드 도전을 거절했습니다."

"더 높은 점수의 획득에 도전합니다."

*

"뭐 그딴 괴물이······!"

마스터가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질렀다.

마스터는 운좋게 영역 보스를 해치웠고, 그로 인해 500점을 달성하며 1위와 점수를 역전시켰다.

거기까진 좋았다.

좋았는데.

'그걸 정말 깨라고 만들어놓은 거냐?'

군주 솔바렌.

별거 아닌 놈을 줄 알았으나, 흑왕의 무리도 생채기 하나만 겨우 남겼을 따름이다.

아니, 애초에 공격이 거의 먹히질 않았다.

'무적기를 쓸 줄이야.'

쉴 새 없이 무적기를 써대니 틈이 없다.

그나마 생체가 하나 남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결국, 흑왕의 무리는 해산을 결정했다.

계속 싸워봤자 시간만 손해라고 여긴 것이다.

점수를 더 높여서 저 무적기의 시간을 줄이는 게 관건이라 본 게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레이드 실패 직후.

마스터는 다른 영역으로 소환되었다.

대기자의 방이라 불리는 곳에.

동시에.

"대기자의 방에 도전자 100명이 모이면 '보너스 게임'이 시작됩니다."

"게임의 승리자는 아직 클리어되지 않은 레벨 영역에 도전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현재 대기방에 도전자 23명이 모였습니다."

자신의 앞에 떠오른 문장들을 보며 마스터는 미소를 지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도리어 다른 흑왕의 무리들보다도 자신이 더 높은 점수를 낼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2성의 초월자인 자신이, 더 낮은 영역 도전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있었다.

이곳 대기자의 방은 필시 영역 레벨을 끝낸 자들이 모여있을 것일 터.

'100명이 모두 모일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겠군.'

23명이면 아직 한참이었다.

영역을 정복하고 보스를 잡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한데.

"현재 도전자 28명이 모였습니다."

"현재 도전자 39명이 모였습니다."

"현재 도전자 53명이 모였습니다."

"현재 도전자 71명이 모였습니다."

······

"현재 도전자 100명이 모두 모였습니다!"

"현재 대기방의 도전자가 100명을 초과했습니다."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대기방의 도전자가 늘어나는 것 아닌가.

마스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앞에 검은 그림자들이 마구잡이로 생성되고 있었으니까.

100명은커녕 보이는 것만 해도 200명이 족히 넘는다.

'뭐냐, 이건.'

마스터

"뭐, 뭐야? 뜬금없이 클리어라니?"

"우린 도망치기 바빴는데······."

"영역보스가 나타나자마자 사라졌다고?"

"여긴 또 어디야?"

대기방으로 소환된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저레벨의 영역을 클리어한 이후 이곳에 강제로 소환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영역이 워낙 갑작스럽게 클리어된 탓에,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대기방의 사람들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마스터는 턱을 쓸었다.

대기방의 인원이 미친 듯이 늘어나고 있다.

200명을 넘어 300명, 어쩌면 그 이상까지도.

게다가 대기방에 소환된 사라들은 그림자의 형태로만 판별될 따름이었다.

'하나의 영역이 클리어되고 소환된 정도의 숫자가 아니다. 훨씬 많은 영역이 동시다발적으로 클리어되고 있는 거다.'

하지만 여전히 의아함은 남았다.

모두가 자신의 레벨에 맞는 영역에 들어갔을 터.

영역에 분포된 도전자의 숫자도 모두 다르고, 같은 레벨이라 할지라도 외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나기 마련.

이토록 동시에 모든 영역이 클리어되는 건 불가능하다.

"모두 비슷한 상황인 것 같군요. 각자 몇 레벨의 영역에 있었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상황을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여, 마스터는 연기를 했다.

우선 이유는 알아봐야했으니까.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말문을 틀었다.

"저는 7레벨 영역이었어요!"

"저는 8레벨이었습니다."

"5레벨요."

예상대로 레벨의 분포는 골랐다.

가장 높은 건 마스터를 포함한 12레벨이지만, 그를 제외하면 8레벨이 가장 높은 듯싶었다.

'아래 영역에서부터 차례대로 클리어되고 있다. 단순히 난이도 차이인가?'

영역이 마구 섞여있지 않은 걸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기야 레벨이 낮을수록 난이도가 낮은 건 당연한 일.

순서대로 클리어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보라가 치면서 클리어됐습니다."

"저도요!"

"커다란 마혈족들이 나타나서 작은 마혈족들을 납치했어요."

"'그 남자'··· 그 남자가 마혈족들을 부려 영역보스를 죽였습니다."

뭔가가 이상하다.

모든 레벨의 영역이 두 가지의 방식으로 클리어되었다는 말.

눈보라, 혹은 마혈족을 이끄는 정체불명의 남자.

하지만 분신술이라도 쓰는 게 아닌 이상, 자신의 레벨대의 영역에서만 활동하는 게 가능할진대.

그때였다.

"너무 많은 대기방의 도전자로 인해 게임이 변경되었습니다."

"'O/X 퀴즈쇼'가 시작됩니다."

"가장 많은 퀴즈를 맞춘 도전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갑니다."

"도전자들끼리 더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첫 번째 퀴즈입니다."

"현재 '버그 사용자'가 탑에 존재하고 있다. O/X"

갑자기 퀴즈라니.

허나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던전이나 탑은 그 주인에 따라 내용물이 완전히 다르다.

그저 균열 탑의 주인이 이러한 성향일뿐.

'버그 사용자가 있다.'

그리고 마스터는 확신했다.

앞선 대화들로 미루어보건대 레벨 영역을 무시하는 자가 있다.

그야말로 버그성 플레이다.

곧이어 허공에 O와 X가 떠올랐다.

마스터는 고민하는 척하다가 O로 향했다.

"두 번째 퀴즈입니다."

"만약 '버그 사용자'가 존재한다면, 나는 '버그 사용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O/X"

이어진 두 번째 퀴즈.

마스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퀴즈라고?'

이건 더 이상 퀴즈가 아니었기에.

*

"영역 전체가 얼어붙습니다."

"진행률 100%"

"9레벨의 영역 보스가 등장했습니다."

"9레벨의 영역 보스가 사망했습니다."

"총합 120 SP를 획득했습니다."

"총합 황금률의 조각 75h를 획득했습니다."

"다음 영역으로 향하는 길이 열립니다."

"파티원 전체 점수 합산 850점"

"1위 - 란돌프(580)"

"2위 - 세렝게티(100)"

"3위 - 발테(80)"

"4위 - 롬멜(60)"

"5위 - 앤드류(30)"

"전체 13,788 파티 중 단독 1위입니다."

"파티 2위의 점수 총합은 580점입니다."

"파티 3위의 점수 총합은 520점입니다."

점수를 획득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나는 쏜살같이 10레벨의 영역에 도달했다.

10레벨의 영역까지 쉬지 않고 돌파하자 파티점수 합산 850점에 다다른 것이다.

"'군주 솔바렌'에게 도전하시겠습니까?"

"점수 총합에 따라 솔바렌의 전투력이 35% 줄어듭니다."

그리고 점수 총합이 올라갈수록, 솔바렌의 전투력도 약화됐다.

대략 10점당 1프로 정도.

이론상 1,500점에 다다르면 솔바렌의 전투력이 0%가 된다는 말.

'잘하면 0%가 가능할수도 있겠군.'

9레벨의 영역을 모두 돌파하며 내가 얻은 점수만 580점이다.

10레벨, 그 이상에 도달하면 천 점에 가까운 점수를 모으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터.

'현재 내 수준은 능력치만 따져도 13레벨에 다다른다.'

유일급 검 '겨울'이 모든 능력치 10을 올려준 덕에, 단순히 능력치만 따지자면 13레벨에 가까운 미친 보정이 완료됐다.

물론 비슷한 수준에서 정상적으로 레벨을 올리거나, 초월한 자들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다 한들 쉽게 패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이 초월하며 얻은 초월성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수가 내겐 있었으니까.

'어둠을 피우는 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마혈종의 두 번째 군집이 완성됐다.'

이제는 군단이라 불러도 될 수준의 숫자가 워프를 함께 넘어왔다.

자그마치 천 마리가 넘는 마혈종이.

네크로맨서도 이만한 군단을 이끌기 쉽지 않다.

정말 사왕 수준이 아니고선 천 단위의 언데드를 어떻게 부린단 말인가.

"뭐, 뭐야?"

"마혈족? 조금 다른데?"

"도망쳐!"

10레벨의 영역에는 과연 사람이 제법 있었다.

워프를 넘어온 즉시 마혈종 무리를 발견한 도전자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단 두 명을 제외하고.

휙! 휘휘휘휘휙!

붉은 갑주와 투구를 쓴 채, 미친 듯이 창을 휘둘러대는 남자.

그는 마혈종 군단에게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건······ 발테로군.'

단번에 알아봤다.

버서커 세트를 착용하고 창을 휘두를 남자는 발테 말고는 없다.

수련자의 산에서 데려온 녀석.

한데, 발테는 누군가와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과연 '버그 사용자'의 '파티원'답군. 10레벨에 이만한 수준이라."

여유롭게 창을 피해내며 감탄을 자아내는 남자.

처음보는 남자지만, 문제는 그의 레벨이었다.

"Lv.12"

12레벨의 초월자가 왜 10레벨의 영역에 있는 걸까.

바위 같이 단단한 피부.

대륙 남부의 주민인 토인족이다.

강철처럼 단단한 피부 덕에 토인족의 전사는 모두 맨손의 격투를 사용하며 날렵한 몸짓으로 적을 토벌하는 강자였다.

그가 발테의 창을 피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음? 설마 '버그 사용자'? 이거 운이 좋군."

토인족의 남자가 여유롭게 미소를 머금었다.

마혈종 군단을 보고서도 유유자적하다.

이 정도는 혼자서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지.

"창술사여. 너에겐 흥미가 식었다. 단번에 끝내주마."

토인족의 전사가 주먹을 쥐곤 그대로 일격을 뻗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꽝! 꽝! 꽈앙!

빠르게 연격을 쳐내자 공기가 터지며 폭발이 일었다.

이에 발테의 갑옷이 찌그러지며 주춤 뒤로 밀려났다.

"호오. 이걸 버텨?"

하지만 발테는 연격을 맞고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갑옷 역시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그리곤 예상하지 못할 순간에.

촤자자자작!

발테가 역공을 시작했다.

창술은 점차 매서워져간다.

연달아 창을 휘두를 때마다 더욱 부드럽고 강력하게 압박해나갔다.

그렇게 10연격이 다다르자.

'난무.'

마치 수십, 수백개의 창으로 공격당하듯 폭발적인 난무가 펼쳐졌다.

저 수많은 창들 전부가 진짜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는 창술사의 오의, 난무!

"으음······! 생각보다 귀찮은 놈이군!"

토인족의 전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죽을만큼 위협적이진 않지만 생각보다 귀찮기 짝이없다.

쾅! 콰아앙!

이어 난무가 끝난 뒤 몇 번이나 공격을 가했음에도, 발테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토인족의 전사가 기겁하며 말했다.

"네놈 설마 의식이 없는 거냐?"

······ 그렇다.

발테는 진즉부터 의식이 없었다.

수련자의 산에서 오랜시간 '무의식 영역'의 수련을 해온 발테는, 의식하고 있을 때보다 무의식일 때가 훨씬 더 강했다.

그래서 '버서커 세트'와 찰떡궁합이었고.

자신이 죽거나 상대가 죽을 때까지 발테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계속 놔두면 위험하다.'

아무리 그래도 2레벨의 차이는 크다.

특히 10레벨을 넘어선 순간부터의 차이는 보다 극명했으니.

직접 손을 쓰려는 순간.

"'버그 사용자'다!"

"'버그 사용자'가 저기 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맛살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자,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레벨대로 분포된 자들.

그중에는 12레벨의 강자도 몇몇 포함되어있었다.

게다가, 그 가운데엔 익숙한 얼굴도 한 명 보였다.

"저놈이 우리의 점수를 모조리 빼앗아 갔다! 탑을 오르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솔바렌의 첩자가 틀림없다!"

마스터.

제국 경매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해간 놈.

놈은 돼지로 변해서 사신교의 의심을 피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균열의 탑 10레벨 영역에 나타나선, 나를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 놈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걸까.

'균열탑의 주인.'

그나마 의심되는 건 균열 탑의 주인뿐이었다.

영원 군주의 심장으로 조건을 제거하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만든 길을 걷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터.

그래서 클리어된 영역의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으로 보낸 모양인데.

'나를 버그로 인식하고 있군.'

어쨌든, 균열탑의 주인이 나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 건지는 확실해졌다.

신비의 탑에서 신비를 얻을 때와는 다르게 내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도리어 나를 적대하고, 억지로 제거하려 들고 있었다.

'저들의 상태도 정상적이진 않다.'

나를 바라보는 자들의 알 수 없는 적대감.

두 눈에 불을 켠 채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단순히 영역을 클리어하고 점수를 빼앗았다고 보일 수 없는 적대감이었다.

어찌해야 할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히든 특성 '어둠을 피우는 자'가 발동합니다."

"넓은 영역에 '어둠(4Lv)'이 펼쳐집니다."

"'끔찍한 흉조의 눈(10Lv)'이 뜨여집니다."

*

저 멀리 보이는 남자.

마혈족의 무리 가운데에 있는 저자가, 버그 사용자다.

반드시 제거해야 할 방해물.

'마혈족 자체는 별게 없다. 전력은 우리가 더 강해.'

마스터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현재 보이는 마혈족은 숫자만 많을뿐이다.

레벨은 기껏해야 7에서 8레벨 정도이리라.

반면 여기는 12레벨의 초월자만 넷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나선다면 제아무리 버그 사용자라도 목숨을 부지하긴 어려울 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인데······.'

멀리서 보이는 버그 사용자의 얼굴이. 그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

머지않은 과거에 만난 것만 같은 느낌.

그런데, 갑자기 버그 사용자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스터가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렸다.

'저 모습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사고 역시도 정지해버렸다.

하지만, 이내 마스터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너, 넌······!!"

경악하며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절로 분노가 치밀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둠 속에서 언뜻 비추는 황금색 염소의 얼굴.

비록 그 당시 검은색 탈과 색깔은 다르지만, 틀림없었다.

저놈은 제국의 경매에서 보았던······ 사신교의 일원이 분명했다.

자신을 돼지로 만들고 모욕을 주었던 그 빌어먹을 사신교의 일당 말이다.

'최강'의 넷 vs 란돌프

'역시 제국에서도 탑을 오르고 있었구나!'

경추를 타고 전기가 흐르는 기분.

버그 사용자이자 1위 파티의 정체는 제국, 사신교다.

저 남자가 사신교를 대표하여 균열의 탑을 오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날의 치욕은 절대로 잊을 수 없지.'

제국의 특급 경매에 설레며, 팔 수 있는 모든 유적을 급하게 처분했다.

그리하여 골드를 싸 들고 제국에 입성했으나 돌아온 건 치욕뿐이다.

그들은 죄인을, '플레이어 의심자'를 모아둔 채 시험을 진행한 것이다.

마스터는 통에 든 가루의 정체를 얼추 파악하곤 어릴 적의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나는 그날······ 돼지가 됐다.'

허나, 마스터는 인간조차 아닌 짐승이 됐다.

돼지로 변하여 꿀꿀 울어대자 제국의 귀족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신교도 마찬가지다.

그 비웃는 눈빛들.

특히 저놈, 황금 가면을 쓴 놈과 함께 자신을 내려다보던 저놈의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살기 위해, 도망치기 위해, 마스터는 굴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스터다. 세계의 정점에 군림할.'

빠드드득!

이를 갈았다.

자신은 과거의 나약한 돼지가 아니다.

마스터.

그 이름처럼 모든 것의 주인이며 만물의 위에 설 존재가 자신이었다.

자신을 비웃던 자들?

전부 죽였다.

저놈도 마찬가지다.

"모, 몸이 안 움직여!"

"어어? 나는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데?"

영역스킬이라.

그것도 '혼란'을 입히는 영역 스킬이다.

길게 뻗은 어둠.

이 안에 있는 자들은 육체의 자유를 잃게 된다.

사신교의 일원답게 참으로 음습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영역 자체를 파괴하면 될 뿐이지.'

마스터가 오른손을 들었다.

이 '어둠'은 아래에서부터 장악해온다.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진 눈. 저 불길한 흉조의 눈이 모두 떠지면 완전히 장악되고 조종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약자들은 순식간에 사로잡히지만, 초월자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눈이 전부 뜨이기 전에는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콰지지직-!

마스터가 주먹을 뻗자 공간이 마치 유리창처럼 깨져나간다.

공간의 균열은 점차 넓어지며 '어둠'의 영역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별을 먹고 계승한 공간 파괴술.

영역 사용자들의 천적이 바로 그였다.

"우, 움직인다!"

"아니야! 다시 '어둠'이······!"

마스터의 주변 사람들이 신체의 자유를 되찾았다.

그런데 순식간에 깨져나간 영역 위에 새로운 어둠이 물길처럼 흘러내려왔다.

'내가 파괴시킨 효과는 영구적일텐데.'

마스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스터가 한 번 파괴한 영역 스킬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한데, 저 '어둠'은 끈질기게 복구되고 있었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단순한 스킬이 아닌가보군.'

단순한 스킬이 아니라 자신처럼 별을 먹고 계승한 권능일 경우.

별의 권능은 오로지 별의 권능만으로 상쇄할 수 있으니까.

이 어둠의 영역 자체가 놈이 지닌 별의 권능이 틀림없었다.

하.

괴물 같은 녀석.

반경 1km이상의 영역 전부를 지배하는 권능이라니.

이런 권능을 내리는 별이 있던가?

'다수를 상대하는데는 훌륭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파악은 했으니까.

다수를 전부 동원해서 저 괴물을 잡는 건 포기한다.

대신, 소수정예로 움직이면 그만.

2성.

혹은 12레벨의 최강자들이 이곳에만 넷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초고속으로 12레벨의 영역을 클리어한 최강자들이.

'지면 충돌.'

마스터가 자세를 낮춰 지면을 때렸다.

쿠르르르!

그러자 지면이 깨지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바로 12레벨의 강자들이 있는 곳까지.

"음!"

곧이어 몸의 자유를 되찾은 그들이 전방에서 '놈'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 어둠을 최대한 빠르게 몰아내야만 한다는걸 본능적으로 깨우친 탓이다.

"멸천의 가호!"

망치를 든 팔라딘이 가호를 부르짖었다.

동시에 마스터를 비롯한 네 명의 머리 위로 구름과 같은 흑점(黑點)이 생성됐다.

"기생해라! 멸뇌충!"

전신을 가리는 긴 옷을 입은 남자의 소매에서, 전기를 머금은 벌레 수천마리가 튀어나왔다.

이윽고 벌레들은 흑점에 모였고 이내 작은 번개구름이 완성되었다.

쿠릉! 쿠르릉!

번개구름에서 튀어나온 번개는 끊임없이 네 명을 때렸다.

바로 저 조합이 12레벨의 영역을 최단기간에 클리어한 수법이었다.

흑왕의 부하들보다도 더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었던 이유.

"'멸천뢰' 1중첩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합니다."

"과부하 10%"

"'멸천뢰' 2중첩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4 상승합니다."

"과부하 20%"

끊임없이 버프를 중첩시키는 무한의 축복.

몸에 엄청난 과부하가 걸리지만, 단시간에 초월적인 힘을 내게 만들어준다.

두 스킬이 합쳐져 미칠 듯한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콰릉!

"'멸천뢰' 5중첩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과부하 50%"

순식간에 모든 능력치가 10이 올랐다.

여기에 장비와 다른 버프들을 합치면, 그들의 능력은 훨씬 더 증폭된다.

그 어떤 괴물이라 할지라도 이 공격을 감히 받아낼 수 있겠는가.

'죽어라, 사신교의 괴물아.'

마스터가 다시 한 번 파괴술을 사용했다.

토인족의 전사는 높게 올린 발을 내리찍었고, 번개처럼 화한 벌레의 사용자는 놈을 감싸안았다.

'흑점'의 팔라딘 역시도 그대로 '놈'의 머리통을 날렸다.

한데.

"······ 음?"

"통과했다고······!"

그들의 모든 공격이 동시에 '놈'의 몸을 통과했다.

꽈아앙!

그대로 통과한 공격은 서로 맞부딪히며 강렬한 파공음을 낳았다.

마지막에 겨우 힘을 제어하여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데에서 끝났지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공멸했을 것이다.

'설마 무적기?'

마스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팔라딘과 뇌전의 남자가 말했다.

"무적기는 아니다."

"음. 회피스킬이다. 게다가 한 번 사용하면 강제 지속시간이 있는."

역시 눈썰미가 좋다.

이런 자들이 대체 어디서 나온건가 싶을 만큼.

"비겁한 새끼. 언제까지 도망칠 셈이냐?"

토인족의 전사는 화가 잔뜩 난 상태로 '놈'에게 헛발질을 해댔다.

"'멸천뢰' 7중첩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4 상승합니다."

"과부하 70%"

문제는 멸천뢰다.

이 역시 강제성이 있는 버프였다.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는 말이다.

"저런 류의 회피스킬은 약점이 있기 마련이지."

"틀림없이 '빛'과 관련된 속성이 약점일 거다. 벌레들이 말해주는군."

"그런가? 빛이여."

화아아악!

팔라딘의 전신에 빛이 솟구친다.

흑점을 사용하는 어둠의 팔라딘인 줄 알았건만.

상극인 '빛'의 속성도 사용할 수 있을 줄이야.

이어 빛을 머금은 팔라딘이 '놈'에게 거대한 해머를 휘두르려는 순간.

쩌어어억!

······ 다시 한 번 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 영역은 깨진 게 아니었나?"

"이건 '영역'이 아니라 저 그림자 같은 놈 자체가 건 저주다."

"쯧, 단순히 회피의 기능만 있는 게 아니로군."

"하지만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파악했다. '끔찍한 흉조의 눈', 상당한 레벨의 저주다. 저놈보다 능력치의 합이 높아야 버틸 수 있다."

"말인 즉, 놈의 능력치 합이 나보다 높다? 멸천뢰 7중첩을 사용한 상태보다도?"

"그래도 여럿을 동시에 묶어서 그런지 약화됐다. 조금만 올리면 될듯한데."

이놈들 진짜 뭐하는 놈들이지?

이 상황에서도 유유자적 서로 떠들고 있다.

특히 저 벌레술사.

저자의 스킬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능력은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그럼 조금 무리할 필요가 있겠군."

주르르륵.

팔라딘이 혀를 깨물었다.

그러자 피가 흐르곤 증발하며 '멸천뢰'에 스며들어갔다.

콰릉! 콰릉! 콰르르릉!

"멸천자여! 저의 성혈을 바치나이다!"

"'멸천뢰' 12중첩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4 상승합니다."

"과부하 120%"

"육체가 한계를 벗어난 과부하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영구적인 능력치 손실을 입습니다."

이 미친놈들이 멋대로 멸천뢰를 12중첩시켰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흉조의 눈이 떠지는 게 멈췄다.'

도리어 눈이 감기고 있었다.

몸의 제어권한이 돌아오고, 기운이 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한다.

때마침 '놈'의 몸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회피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나간다는 뜻이다.

벌컥! 벌컥!

마스터는 품에서 물약 하나를 꺼내 들이마셨다.

그 순간.

"알케미스트 특제 '거인의 물약'을 섭취했습니다."

"히든 특성 '거인의 항마력'과 융화됩니다."

"'전설의 거인'으로 화(化)합니다!"

아끼고 아낀 비장의 수.

마스터의 몸이 순식간에 불어나며 거인으로 변했다.

영역 전체를 파괴시키고, 저놈을 단번에 묵사발 내기 위함이다.

이윽고 지속시간이 전부 지나자.

"······ 생각보다 까다로운 놈들이군."

'놈'이 처음으로 말했다.

히죽!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

뭐하는 놈들일까.

저 팔라딘과 벌레술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히든 특성 보유자들이다. 그것도 최소 두 개 이상의.'

팔라딘은 상극의 속성을 지니게 해주는 '허무'를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벌레술사 역시도 '대현자'와 자체적인 관찰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고, 상대를 파악하며, 저주를 풀어내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저 정도의 버프 중첩은 엄청나게 무리가 갈 텐데.'

버프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특히 저런 특유의 '강제 중첩 버프'는 단시간에 엄청난 무력을 선사하지만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것을 미련없이 사용하여 '끔찍한 흉조의 눈'에 저항할 줄이야.

영구적인 능력치 손실을 감당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처음 보는 자들.

저 토인족의 전사도 꽤 인상적이지만, 이 둘에 비하진 못한다.

하물며 팔라딘이 사용하는 스킬들은 상당히 복합적이었다.

어느 교단에서 나온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른 교단들의 권능 따위가 섞여있다. 그게 가능한건가?'

교단마다 시그니처가 있다.

예컨대 저 흑점. 팔라딘이 만들어낸 검은 구름 같은 흑점은 어둠의 성기사단 '발로그 교단'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빛의 폭발.

저렇게 번지듯 빛이 폭발하는 건 여신교의 시그니처였다.

서로 상극이며, 적대하는 두 교단의 시그니처가 한 몸에 존재하다니.

저런 경우는 듣도보도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피를 이용한 추가적인 버프가 있었지.'

어둠과 빛이 전부가 아니었다.

멸천자에게 바치는 성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멸천자라.

내 기억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심지어 빌헬름의 기억 속에도 없다.

신흥 종교이면서, 발로그 교단과 여신교의 시그니처를 함께 갖고 있는 팔라딘이라.

'재밌군.'

이건 꽤 흥미가 짙다.

아무래도 알아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양파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수가 튀어나오고 있으니.

'어둠을 피우는 자'만으로는 여기까지일 듯싶었다.

물론, 어둠을 피우는 자는 아직 성장의 단계다. 그러니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제대로 상대해줘야겠구나.'

어둠을 피우는 자가 들어간다.

다시금 인간의 형태를 되찾은 나는, '겨울'을 들었다.

콰르릉!

동시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들.

나 역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빌헬름의 검술 '천지개벽'의 '개'를 시현합니다."

여태껏 이 몸으로는 시현할 수 없었던 빌헬름의 세 번째 기술.

세상을 여는 검!

그것이 내 몸을 통해 발휘되었다.

운영자

'흉조의 눈이 사라졌다.'

마스터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회피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나고, 변신마저 풀렸다.

그러자 사람들을 묶어놓은 어둠이, 흉조의 눈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무리 강력한 권능이라도 한계가 있는 법.'

백명에 다다르는 인원.

하물며 '최강'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네 명의 발을 무한정 잡아둘 수 있는 스킬이나 권능 따위는 없었다.

기운이 다해서 변신과 스킬이 풀렸다고 보는 게 타당하리라.

놈도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으으음!"

몸에서 활력이 넘친다.

힘이 끓어 넘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 힘을 분출할 곳이 필요하다.

마스터는 거인화하여 있는 힘껏 놈의 얼굴에 '영역 파괴술'을 시전했다.

쿠우우우우우우웅-!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

마치 세상 전체가 찢기고 부서지는 것 같다.

마스터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의 수이자 숨겨둔 비기.

이걸 정면에서 맞고 살아남을 자는, 단언컨대 없다.

쩌적!

쩌저저적!

주먹의 끝에서 시작된 균열은 순식간에 하늘 전체를 덮었다.

세계 전체가 깨진 유리창이 된 것만 같은 효과.

하지만 이 '파괴술'의 무서운 점은 대규모의 파괴가 아니다.

"······ 오호라."

팔라딘이 작게 감탄했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강렬함에. 파괴력에.

균열된 조각들이, 검게 파괴된 영역이 한곳으로 모인다.

검은 선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터질 듯이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일점으로 모인 저 조각들의 파괴력은 배가되기 마련.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도망치길 포기한 거냐?'

마스터는 작게 비웃었다.

이만한 대규모의 파괴를 보고서 전의를 상실한 걸까?

하기야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돌연히 나타난 거인이 세상을 부수려 든다면 누구든 당황하며 멈춰설 것이었다.

비록 반사적으로 검을 들기는 하였으나, 변신 상태로도 한계에 부딪힌 주제에 이 파괴술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분쇄되어 죽어라.'

대 영역 파괴술.

마스터는 파괴된 균열이 모인 곳에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앙-!

벽을 치듯 허공을 때리자, 모여있던 균열된 선들이 놈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천, 수만 개의 '검은 선'은 마구잡이로 지상을 쓸어버렸다.

쾅! 쾅! 콰아아앙!

닿는 족족 모든게 쓸려나간다.

반경 수백미터를 모조리 증발시키는 위력.

땅이 파이고 영역 자체가 삭제되니 인간 따위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다.

아무리 '놈'이 사신교에서 나온 강자라한들 결국 인간.

아니, '놈'이 신이라고 할지라도 버티지 못할 터.

"나는 마스터다. 네놈들의 머리 끝에 설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이다!"

사방에 퍼진 흑먼지.

그 가운데에서 마스터는 포효했다.

감히 제국 따위가, 사신교 따위가 자신에게 그런 굴욕을 주었다.

그 굴욕을 이제 갚을 시간이었다.

"네놈을 시작으로 전부 쓸어주마. 아무도 내 위에 군림할 수는······."

"아직 안 죽었다."

그때, 팔라딘의 목소리가 마스터의 고막을 때렸다.

마스터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신조차 죽이리라 자신하는 대 영역 파괴술을 맞고 안죽었다고?

게다가 능력치가 급상승하며 파괴력은 더 올라갔다.

그런데도 버틸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 미친.'

마스터는 경악했다.

있을 리가 없는데, 있었다.

정면으로 맞고도 죽지 않은 인간이.

아니, 맞은 게 아니다.

흑먼지가 걷히며 나타난 '놈'의 모습.

'놈'의 검 앞에 검은 선들이 이리저리 꼬인 채로 뭉쳐져 있었다.

마치 둥그런 막 안에 갇힌 듯이 벗어나지 못한 채로.

대 영역 파괴술 자체를 가둬버린 것이다.

그 상태로, '놈'이 말했다.

"마스터. 나는 항상 궁금했다. 대원정에 참가하지도 않는 놈들이 어떻게 '영웅'이라 불리며 으스대는지."

"······?"

갑자기 저놈은 뭐라는 거냐.

대원정? 영웅?

저놈은 제국 사신교에서 나온 녀석이 아니었나?

사신교와 제국은 대원정 자체를 참가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곳에서 나온 자가 입에 담을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의 위업을 가로채고, 자신이 한 일인양 떠들며, 모든 이야기를 왜곡시켰다. 그 판을 짠 게 누구인지 나는 정말 궁금했다."

위업을 가로채고 판을 짜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대원정. 영웅. 위업. 왜곡······.'

아.

순간, 마스터는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몇 되지 않는다.

특히 대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도망치지 않았던 자들은 전부 죽었으니까.

그리고 도망쳤던 자들은 모두 대원정 초입에서 두려움에 등을 돌렸다.

그러니 '대원정의 이야기가 왜곡됐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마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해보면, 다른 플레이어들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는 일이다.

마스터가 대원정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걸 아는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직 플레이어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 플레이어였구나!'

부르르르!

그제야 마스터는 몸을 잘게 떨었다.

플레이어를 혐오하며 몰살시키려는 사신교의 중추에, 플레이어가 있었다.

하!

그러면서 플레이어가 아닌척 자신을 그렇게 내려다본 건가?

진심으로 웃기는 놈이었다.

그때, '놈'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지금 너를 보니, 너는 그만한 그릇이 안돼. 이토록 정교하게 판을 짤 수 있는 놈이 아니야. 그럼 누굴까?"

"네놈······ '죄인'인 주제에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타차원 커뮤니티'의 주인인 너야말로 죄인 아닌가?"

"······!"

타차원 커뮤니티.

그것을 언급했다는 건 제스스로 플레이어라고 말한 거나 다름이 없다.

이 정보를 사신교에서 알게되면 저놈의 죽음은 확정이었다.

촤아아아악!

그 순간, 강력한 전기로 이루어진 장막이 '놈'을 덮쳤다.

"정신 차려라! 놈은 시간을 끌 생각이다!"

아.

팔라딘의 목소리에 마스터는 재차 각성했다.

그들은 모두 멸천뢰의 12중첩 버프로 과부화된 상태.

시간을 끌면 영구적인 능력치 손실과 함께 몸이 가루가 될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서 시간을 끈 게 분명했다.

"멸천의 망치여!"

꽈아아아아앙!

거대화한 팔라딘의 망치가 놈의 머리를 때렸다.

하지만 전기의 장막도, 멸천의 망치도.

"······."

모두 '놈'을 공격하지 못한 채, 허공에 묶여있었다.

"저건······ 무엇이냐."

벌레술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태껏 모든 걸 파악해낸 그였지만, 지금 저 '검술'만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기에.

공격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피하는 것도 아닌, 그 자체로 묶어두다니.

마치 저 공간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일정 공간의 시간을 다루는 검술이라니. 그런 게 가능한건가?'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동시에, 벌레술사가 기겁하며 이맛살을 구겼다.

"아······! 피해라!!"

멈춰있던 시간이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쩌어어엉!

꽈아아아아앙-!

균열된 선들이, 전기의 장막이, 멸천의 망치가.

전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다가왔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컥······!"

"끄어억!"

"흐읍!"

시전자들에게 그대로 돌아간 것들을 닿은 즉시 폭발을 일으키며 그들을 날려보냈다.

말 그대로 반사였다.

자신이 사용한 무력을 그대로 돌려받은 게다.

당연히 막을 수도 없다.

'내 공격을 튕겨냈다고?'

바닥에 처박힌 채, 거인화가 풀린 마스터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 영역 파괴술.

전설의 거인이 되어 펼쳐낸 공격을, 막는 수준이 아니라 돌려보냈다.

심지어 더 강화된 공격으로 얻어맞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게 가능한 플레이어가 있을 리가······.'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모조리 꿰고 있는 게 마스터다.

그라시아를 제외하면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플레이어는 없다.

은둔자들?

물론, 명예의 전당 보상을 포기하며 은둔한 채 살아가는 강자들도 있기는 있었다.

마스터가 파악하지 못한 강자들 역시 상당수가 은둔자들이었으므로.

하지만 그 은둔자들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심지어 모든 능력치가 급상승해있는 지금, 자신의 공격을 튕겨낸다?

'4성 이상의 강자가 아니고서야.'

아무리 적게 쳐줘도 4성, 14레벨은 되어야만 한다.

판게니아의 미친 괴물들이나 달성할 수 있는 레벨이 14였다.

플레이어중에는 없다.

만약 있다면.

'버그 사용자.'

······ 그야말로 버그 사용자.

마음대로 버그를 사용하며 모두를 농락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버그 사용자라고만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너······ 운영자냐?"

마스터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선 '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운영자.

그에 대한 소문이, 한때 돌았던 적이 있다.

게임 판게니아를 만든 운영자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소문이.

물론, 판게니아는 대륙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다. 두 여신에 의해 떠받쳐진 이 세계는 결코 가짜가 아니다.

하지만, '게임 판게니아'는 다르다.

여신들이 어떻게 지구의 게임을 만들겠나.

그 구성을 창조해낸 '운영자'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게임과 판게니아를 엮고 이어낸 자가 있다.

그는 한 명일 수도 있고, 다수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 '운영자'를 봤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판 전체를 읽고 있는 존재.'

운영자란 그런 존재다.

게임 중기까지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던 '히드라곤의 혼'을 비롯한, 수많은 '등장한 적 없는 아이템'들을 두른 자.

존재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들을 갖고 있는 자!

대륙 전체를 아무런 제약없이 돌아다니며, 심지어 '심연'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고도 알려진 자가 있었다.

판 전체를 꿰뚫는 자가 아니라면 결코 불가능한 이적의 행위들.

당연하게도 플레이어들은 그를 '운영자'가 아니냐며 의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은 운영자가 틀림없다.'

마스터는 확신했다.

운영자라면 대원정에 대한 이야기도, 지금과 같은 압도적인 위력도 보이는 게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 저놈이 착용한 것들.

특히 저 검.

얼음으로 이루어진 저 빙백의 검은 여태껏 등장한 적 없는 '유일급' 수준의 검이 확실했으니.

게다가 '균열의 탑'이 '버그 사용자'라고 확정지을 정도다.

마음대로 층을 오르는 모습을 보라.

일개 플레이어가 가능한 수가 아니다.

"운영자가··· 어째서 '균열의 탑'을 오르는 거냐?"

만약 운영자가 개입했다면 '균열의 탑'이 등장한 것 자체가 '이벤트'일 터였다.

일전 심연 미궁처럼 말이다.

그러나 기획한 이벤트라면 왜 탑은 그를 버그 사용자라 낙인 찍었을까.

왜 탑은 운영자를 제거하려고 하는 거지?

"내가 운영자라고?"

그러자 '놈'이 피식 웃었다.

자신의 추측이 맞아서일까.

아니면 가소로워서?

이윽고 '놈' 몸을 숙이고, 고개를 낮췄다.

그리곤,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말했다.

"나는 '팬텀'이다."

란돌프가 팬텀이다

······ 뭐라고?

순간 마스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운영자라고 철석같이 믿었건만.

'팬텀?'

··· 팬텀이라니.

판게니아에서 그렇게 불리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누구보다도 많은 캐릭터를 육성했으며, 모두가 불가능하다 확신한 신화적인 업적들을 두루 달성한 자.

대원정을 일으킨 기사왕 빌헬름마저도 팬텀의 캐릭터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팬텀'은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아무와도 교류하지 않았으며 그가 육성한 캐릭터가 정확히 몇 개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럴진대.

"거, 거짓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내심은 부정했다.

그럴 수밖에.

눈앞의 남자가 팬텀이라면, 결국은 '란돌프'라는 소리.

빌헬름 캐릭터가 죽은 뒤 플레이어가 되며 이름을 바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자가 팬텀이라 할지라도 이 단기간에 '최강'이라 자신했던 넷을 이렇게 뭉개버리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메인 퀘스트를 밀며 명예의 전당 1위의 자리를 모조리 휩쓸고 있다지만 이건 '선을 넘은' 강함이었다.

백 보, 천 보, 아니, 전부 양보한다 해도 3성을 넘어서는 무력임은 틀림없었다.

'빌헬름이 죽은 지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1년이 뭐냐.

이제 반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이거늘.

설령 1년이라고 해도 믿지 못했을 텐데 그걸 반년 조금 넘는 시간에 다 따라잡고, 넘어섰다고?

3성이 넘는 무력을 이 단기간 만에?

치트키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그게 가능할까?

그러니까 란돌프일 리 없다.

눈앞의 남자는, 절대로 팬텀일 리가 없었다.

"믿지 못하는군."

"네놈이 팬텀이라면······ 빌헬름의 '그 별'만큼은 반드시 찾아내서 가졌을 거다. 하지만, 너는 '그 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직 레벨 10을 못 찍어서."

"······?"

"내 레벨은 8이다."

"············ 뭐?"

마스터가 기함했다.

지금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레벨 8?

아직 10레벨을 찍지도 못했고, 그래서 초월하여 별의 능력도 쓸 수 없다?

"농담도 작작······."

"'성운을 마시는 별', 10레벨에 도달한 뒤 특수한 성각자를 통해야만 찾을 수 있는 그 별. 10레벨을 찍지 못해서 찾지 못하고 있을뿐이다."

"······!!!"

마스터가 두 눈을 부릅떴다.

성운을 마시는 별. 그 이름마저도 놈은 알고 있었다.

마스터가 가지려고 했지만, 빌헬름에게 빼앗겼던 그 별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단 두 명밖에 모르는 별의 이름을 눈앞의 남자가 알고 있었다.

······ 그럼 정말로 팬텀이라고?

빌헬름의 전신이며, 수많은 캐릭터를 육성한.

셀 수 없이 많은 빌드를 짜고, 자신보다도 더욱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이 세계 유일의 게이머가, 이 남자라고?

"'마스터'의 '지배자'의 능력이 발동합니다."

"'마스터'가 상대에게 정보공개를 요청합니다."

그래. 자신있다면 어디 한 번 보여봐라.

마스터는 괜히 마스터인 게 아니다.

상대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상대가 동의해야 하지만,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면 보여줄 수도 있을 터.

'보여줄 리 없겠지.'

지금 말한 모든 게 거짓말일 테니까.

저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을 다 믿어주는 것도 힘든 일이다.

놈도 자신이 이런 능력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을 테지.

어디 한 번 거절해봐라. 실컷 비웃어 줄테니까.

"상대가 일시적으로 '마스터'에게 '정보공개'를 허용했습니다."

······ 동의했다고?

정보공개.

평소에는 비공개이나, 마스터는 다른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오픈하게끔 동의를 구할 수 있다.

물론 어지간하면 하지 않는 짓이다.

서로가 플레이어인 것도 감추는 판국이니.

게다가 정보를 공개하여 보이는 건 바로 '상태창'이기 때문이다.

모든 약점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창.

그것을 보여주는 경우는 상대를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예컨대 마스터가 길드원을 길드로 받거나, 누군가를 굴복시킬 때.

그런데 지금 눈앞의 남자가 그 '정보공개'에 동의한 것이다.

동시에.

<상태창>

이름 : 란돌프

직업(Class) : 별의 계승자

직업(Class) : 지고의 검성

<능력치>

레벨 : 8

힘 : 127(102+25)

체력 : 125(100+25)

민첩 : 126(101+25)

지능 : 125(100+25)

성력 : 138(113+25)

<부가 능력치>

자연 재생력 : 315%

전체 관통력 : 12.8%

저주 관통력 : 15%

저주 반사 : 30%

저주 유지시간 증가 : 30%

<특이사항>

1 : '별의 계승자 - 별 3개(모든 능력치+15)' 보유

2 : '초월한 바알 세트'와 육체가 융합되어 관련 능력치가 추가되었습니다. 다시 해당하는 부위에 새로운 장비를 착용할 수 있습니다.

3 : '영원의 란돌프' 효과로 순수능력치가 보정되었습니다.

4 : '바알의 핵(멸망의 조각)'을 심장에 보유하고 있습니다.

5 : '망자의 왕' 스킬로 힘(2)과 민첩(1) 성력(3)이 오른 상태입니다.

6 : 지고의 유일급 '겨울' 사용자(모든 능력치 + 10)

······.

"이게······ 무슨······."

절로 목소리가 떨린다.

마스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상태창이 정말 존재하는 상태창인지 자체가 의심스러웠던 탓이다.

란돌프라는 이름부터,

두 개의 클래스.

레벨 8.

레벨의 한계를 한참 웃도는 능력치.

별을 이미 세 개 보유하고 있으며, 저 '바알'관련 문구까지도.

'바알의 핵?'

모든 의아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의아한 건 바알의 핵이다.

괴물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게 핵이었다.

그것을 왜 란돌프가 갖고 있지?

그것도 심장에?

'설마······.'

아니다.

아닐 것이다.

수련자의 산에 나타난 바알.

그 바알은 끝내 심연에서 완성되며 제주도를 침범했다.

이후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알'의 존재에게 먹혔다고 알려져 있었다.

'검은 알의 수호자.'

··· 또한, 살아남은 제주도민 대다수는 다 '검은 알의 수호자'라 불리는 존재의 그림이나 사진을 꼭 품에 한 장씩 갖고 다녔다.

그 수호자는 마치 사신과도 닮아있었다.

그리고 사신을 다루는 자들은 제국의 사신교뿐.

'아······.'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놈은, 란돌프는 분명히 사신교의 간부다.

사신교의 간부는 사신을 다룰 수 있다.

그렇다면 바알을 해치운 '검은 알의 존재'가 바로 란돌프란 뜻이다. 저 상태창에서 보이는 글귀들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게 많다.

상식을 넘어서는 강함.

특히 8레벨에 순수능력치가 100을 넘는 게 말이 되나?

캐릭터의 단일 능력치는 1레벨당 최대 10으로 정해져있었다.

특수한 경우로 더 올릴 수는 있지만, 20이나 차이가 나진 않는다.

두 개의 클래스 역시 마찬가지다.

대체 무슨 짓을 해야 저런 상태가 될 수 있는 거지?

잠시 후, 마스터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란돌프'의 히든 특성이 '마스터'에게만 일시적으로 공개됩니다."

히든 특성.

만약 이러한 변수를 창출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히든 특성뿐일 것이다.

마스터가 알고 있는 히든 특성은 총 7개.

여기에 탑을 오르며 하나를 더 얻을 수 있으리라 예상하고는 있다.

'하지만 히든 특성은 하나를 갖는 것도 어렵다.'

존재를 알고 있는 건 8개이지만, 마스터가 갖고 있는 히든 특성은 고작 두 개일 따름이었다.

허나 상대가 팬텀이라면 한 다섯 개 정도는 갖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내 떠오른 창을 보며.

"이, 이게 무슨······?!"

마스터는 전례 없는 경악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활성화된 히든 특성(15)>

[허무]

[손재주]

[올 마스터]

[웨폰 마스터]

[거인의 항마력]

[하이 드루이드의 대자연]

[영원군주의 심장]

[비스트 로드]

[황금의 은총]

[천상(天上)]

[돌연변이]

[대식가]

[대현자]

[영원의 란돌프]

[마혈족의 왕]

······ 말도 안 되는 개수였으니까.

란돌프에게 적용된 히든 특성이, 무려 15개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의 두 배가 넘는 숫자.

현실감이 결여된 상태창의 상태에 마스터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거짓일 리는 없다.

자신의 능력.

'정보 공개'를 통한, 상대가 허락하여 보이는 상태창에 거짓은 있을 수가 없으므로.

'괴물······.'

이해할 수 없던 모든 것들이, 저 히든 특성들로 인한 것이라면.

란돌프는 상식 밖의 괴물이었다.

누구도 재단할 수 없는 존재.

법칙을 벗어난 이레귤러 말이다.

"이제 좀 믿음이 가나보군."

"······."

마스터는 전의를 상실했다.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능력치 자체는 예상보다 낮았지만, 저건 단순히 능력치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괴수가 아님을 깨달았다.

바알을 죽였다면 그 이상의 강자라는 의미.

······ 팬텀.

오직 팬텀만이, 이런 이적을 가능케 하리라.

그리고 팬텀이 자신에게 '상태창'을 보게 허용했다는 건.

"······ 살려다오."

자신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팬텀은 결코 남에게 자신의 정보를 오픈하지 않는다.

절대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의 상태창을 본 자신을, 살려둘 리 없었다.

보면 안 될 것을 본 자의 최후는 모두 같다.

팬텀을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몇 번이나 고민해보았다. 한데, 이해할 수가 없더군. 너 역시도 내가 짜고 올린 '빌드'를 이용했을 텐데. 왜 나를 배신한 거지?"

"배신······ 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왜 대원정을 실패하게 만들었냐는 말이다. 마왕을 죽여야 세상에 평화가 온다는 건 너도 알고 있었을 거다.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도."

필사적으로 도와줘도 부족한 판국에, 대원정의 실패를 바랐다.

마스터를 포함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어왔다.

마스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린······ 중독자니까."

"중독자?"

"게임이 클리어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게임 중독자들이니까······."

판게니아의 플레이어가 되며 그들은 힘을 손에 넣었다.

현실과 판게니아를 오가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마왕을 죽여 게임이 클리어되면 어떻게 될까.

다시 판게니아로 못 오게 되는 건 아닐는지.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재차 돼지의 삶으로 돌아가는 게 너무나도 무서웠다.

하여, 대원정에 참가하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마왕에게 정보를 건넸다?"

"······ 마왕에게 정보를 건네다니. 나, 나는 그런 짓은······."

하지만 참가하지 않았을 뿐이다.

마왕에게 정보를 건네?

대체 무슨 정보를 말하는 건가.

쯧. 그가 작게 혀를 찼다.

"역시 네놈은 아닌가보군. 처음부터 느꼈지만, 그럴 만한 그릇이 안 돼."

"······."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의 뒤에서 이 모든 판을 짠 게 누구냐?"

스으으.

목 끝에서 느껴지는 한기.

그 한기에 마스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란돌프는 자신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대로 침묵한 채 죽을 것이냐, 아니면 실낱같은 희망에 걸어볼 것이냐.

마스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건······."

민트초코맛있어요

"그, 그건······ 팬텀······."

팬텀?

마스터의 말을 듣곤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건 무슨 소리인가.

저들이 나를 '팬텀'이라고 부르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게이머 시절 이미 팬텀이라 불리며 유명했으니.

하지만, 마스터가 말하는 건 내가 아닌 다른 팬텀을 의미하는 것일 터.

"나를 사칭한 자가 있다는 말인가?"

"모, 모른다. 놈은 플레이어이면서 플레이어가 아닌 존재였다. 그 외엔 아무것도······."

"거짓말이로군. 너는 정체 모를 자의 말만 듣고 움직일 놈이 아니야."

쩌적!

겨울이 마스터의 목을 살짝 베었다.

동시에 목 주변의 피부가 얼기 시작했다.

조금씩 '겨울'이 마스터를 좀먹어가고 있었다.

마스터는 나름대로 신중한 놈이다.

어느 정도의 확신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 확신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는 뒤로 미뤄두더라도, 정체 모를 자의 말만 믿고서 얼굴마담을 할 놈은 결단코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놈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말해라. 누군지."

"마, 말하면 살려줄 거냐?"

"당연하다마다."

"네 상태창을 본 나를 살려준다고······?"

불신의 눈초리.

상태창을 본 이상 살아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게 왜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지.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네놈 따위를 죽여서 내가 득을 볼 게 없지 않느냐?"

"상태창만이 아니다. 네 얼굴도······."

"보았다? 확신하나? 이게 내 본모습이라고?"

"······."

마스터가 입을 꾹 닫았다.

이미 한차례 변신을 하였으니, 지금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제국에서의 내 모습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제국에선 바바리안처럼 행동하고 있었지.'

그땐 진짜 바바리안처럼 웃통도 벗고 있었으니.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믿어도 이상할 게 없다.

무엇보다.

"그리고 네가 본 것을 말한들 누가 믿을까?"

"그건······."

마스터가 망설였다.

당연한 것이다.

나라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8레벨에 거의 3성에 다다르는 능력치를 지녔고, 15개의 히든 특성을 지닌 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꿈꿨냐며 타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팬텀. 플레이어이되 플레이어가 아닌 자.'

게다가 나도 궁금했다.

팬텀을 사칭하며, 플레이어이되 플레이어가 아닌 자라니.

마스터와 다른 '자칭 영웅'들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채 이 모든 판을 짠 흑막이 있다.

대원정을 방해하고자 마왕에게 정보를 건넬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

'마왕과 접선할 수 있는 존재라는 소리겠지.'

마왕은 대원정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나를 잡고자 마계의 절반을 갈어넣어 함정을 준비해놨으니까.

만약 세렝게티가 별의 권능으로 위치를 바꿔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다면, 나는 마왕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도 잡히지 않는다.

마계에 틀어박힌 마왕과 따로 접선할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을까?

'지옥의 군주들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마왕은 오직 여덟지옥의 군주들만 알현할 수 있다.

다른 마족들은 감히 마왕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덟 군주가 플레이어일 리는 없고, 팬텀을 자칭하지도 않을 테니, 외부의 누군가라는 뜻일진대.

'정말 운영자라도 되지않는 이상에야.'

그 정도로 마왕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처럼 정석으로 마계를 정벌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제국의 황제쯤이나 되면 만나줄까?

아무리 낮게 잡아도 백왕이나 흑왕급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흑막을, 마스터는 분명히 알고 있다.

"정 믿기지 않으면 계약을하지. 네가 나에 대해 발설하지 못하도록하는 금제를 걸겠다. 그만하면 나도 안심이 되어서 굳이 죽이진 않을듯한데."

"······ 정말이냐?"

"정말이고말고. 기사왕 빌헬름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마."

"빌헬름······ 신의의 왕."

"그래. 믿음과 의리빼면 시체인게 빌헬름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마스터의 두 눈이 격하게 떨렸다.

빌헬름의 대서사를 안다면 믿지 않을 수 없는 유혹.

마스터는 허드슨과 비슷할 정도로 판게니아에 심취해있다. 이곳의 자신을 진정한 자신이라 생각하는 것이.

빌헬름을 두고 본인 입으로 '신의의 왕'이라 떠드는 걸 보면 확실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면, 네가 원하는 방식의 '계약'을 진행해도 좋다. 그럴 방법이 있다면 말이다만."

"······ '혼의 맹약'을 하지. 그럼 믿겠다."

혼의 맹약?

'겨울'로 계약을 걸 생각이었는데, 따로 생각한 게 혼의 맹약이라.

마스터가 중요한 사람들을 지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 그것이었다.

그가 끼고있는 '혼의 반지'를 이용해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

서로가 조건을 거는 등가교환의 계약이라 한 번 맺으면 거부할 수 없다.

"그렇게 하지."

나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말의 고민 없는 모습을 보곤 마스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이어 그가 터진 입술을 매만지며 피를 닦아내곤, 혼의 반지 위에 흘렸다.

"피 한방울을 이 반지 위에 뿌려라. 이후에 서로가 원하는 조건을 하나씩 말하고 악수하면 계약이 완료된다."

손을 작게 꼬집어 상처를 낸 뒤, 거침없이 피 한방울을 반지 위에 뿌렸다.

이윽고 반지에서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게 피해를 주지 말 것. 이게 내 조건이다."

마스터가 먼저 조건을 말했다.

정말 미치도록 살고 싶나보다.

아예 피해 자체를 주는 행동을 삼가라니.

죽이지 말라고 했다면 죽기 전까지 고문했을텐데.

제법 머리를 잘 굴렸다.

하여, 나도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 함구할 것."

화르르르륵!

반지의 빛이 더욱 크게 번져나간다.

마스터가 손을 내밀었다.

나 역시 마스터의 손을 붙잡았다.

동시에.

"'혼의 맹약'이 완료되었습니다."

반지에서 쏟아진 붉은 빛이 내 전신에 스며들며 계약이 성사됐다.

자. 해달라는 건 다 해줬으니, 이제 남은 건 약속의 이행뿐이다.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과연 마스터는 약속을 지키려고 할까?

"······ 어느날이었다. 자신을 '팬텀'이라 소개하며 내게 다가온 자가 있었다."

마스터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신의에 찬 내 모습과 거침없이 허용하는 내 행동을 보곤, 마음이 열린 건지.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이 대원정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도 말해주었지. 마치 메시아처럼······ 그가 말한 미래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과연.

마스터가 그 정체불명의 존재를 믿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미래를 읽는 자라······ 미래시하면 떠오르는 건 백왕이다.

하지만 백왕도 자신의 위험에 대해서만 어렴풋이 느낌적으로 파악할뿐이다.

자세한 미래를 읽어내진 못했다.

"그 덕분에 나는 유적도시 룬델라의 주인이 됐다. 여러 이득도 취했지."

"접근한 시기가 생각보다 오래전인가보군."

"대략 1년 반 전이다. 내가 플레이어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하여간에······."

꿀꺽!

마스터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그리곤 계속해서 말헀다.

"그는 유독 대원정을 강조했다. 절대로 참가해선 안 된다고. 빌헬름이 죽어야만 '멈춰있던 것'이 다시 시작된다고······."

"멈춰있던 것?"

작게 이맛살이 구겨졌다.

그 흑막은 빌헬름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빌헬름이 죽어야만 멈춰있던 것이 시작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도 그게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여러 모습으로 변하여 가끔 나를 찾아왔다."

"변신을 했다는 건가?"

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변신의 수준이 아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메시지를 내게 전해왔다. 한 번은 플레이어의 모습으로, 한 번은 판게니아인의 모습으로, 한 번은 괴물의 모습으로······."

"아예 다른 존재가 됐다? 단순한 변신이 아니란 말이냐?"

"그래. 상태창을 보는 '정보 공개'는 오직 플레이어에게만 걸 수 있다. 분명히 처음 봤을 땐 플레이어였는데, 이후에는 플레이어가 아니더군."

"동일인물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동일인물이다. 그러한 느낌을 주는 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 리가 없으니."

마스터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 플레이어임을 확인했다면, 이름도 봤을 텐데?"

상태창을 확인했다면 이름을 알 것이다.

내 상태창을 보고 내가 란돌프임을 확신했 듯이.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봤다. 그때······ 상태창에 표시된 이름은······."

마스터가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먹은 듯 입을 열었다.

"분명히 '민트초코맛있어요'였다."

"······? 민트초코?"

잠깐. 민트초코라니?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름에 고개를 갸웃한다.

'민트초코맛있어요'는 대표적인 은둔자였으니까.

팬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존재.

하지만 일전 '심연 미궁'에서 라일리에게 도전했다가 후퇴한 바가 있지 않던가.

알려진 바로 '민트초코맛있어요'는 영환술사'다.

강시를 다루는 자.

마찬가지로 다른 시체로 마스터에게 접근한 건 아닐는지.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할 놈은 아니지.'

그러나 죽은 강시와 살아있는 것을 구분하지 못할만큼 마스터가 멍청이는 아니다.

그럼 '민트초코맛있어요'는 여러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자인건가?

하지만 플레이어가 아닐 때도 있었다면······.

"추측컨대······ 그는 여러 캐릭터에 빙의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다만······ 플레이어가 아닐 때는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단순히 내 능력이 부족해서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

마스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키우던 가장 강한 캐릭터가 죽으면, 그 캐릭터에 빙의한다.

이후 1레벨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당연히 마지막으로 플레이어했던 한 캐릭터에게만 빙의할 수 있었다.

한데, 다수에 캐릭터에 빙의할 수 있는 자라.

······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상상이상으로 위험한 놈이다.

캐릭터가 죽으면 현실의 몸도 죽는 패널티가 놈에겐 없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또, 그는 이 '탑'에 대해서도 말했다."

"균열의 탑에 대해서?"

"정확히 이름을 지칭하진 않았지만, 아마 맞을 거다. 빌헬름이 죽고나면 '탑'이 솟아오를 거라고 했으니까. 또 그 탑의 꼭대기에 '천상계'가 존재한다고 했지."

천상계.

설마 천상인이 사는 장소를 말하는 건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내용이었다.

마스터가 대화를 이어나갔다.

"심연과 반대되는 곳. 천상에 오를 수만 있다면, 엄청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그래서 흑왕의 무리들과 탑을 올랐던 거로군."

"그래. 아무튼, 내가 아는 내용은 이게 전부다. 진짜 팬텀이여."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스터 나름대로 신의를 지킨다고 지킨 것이다.

계약이 묶여있으니, 어차피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게다.

"나도 너에 대해 함구하겠다. 서로가 이제 갈 길을 가면 될 것 같군."

"서로가 갈 길이라. 그래. 그래야지."

동의한다.

우리는 서로가 가는 길이 너무 달랐기에.

나는 천천히 '겨울'을 들었다.

그리고 심장을 옥죄던 '붉은 빛'을 베었다.

동시에.

"'지고의 겨울'이 하위 계약을 베어냅니다."

"'혼의 맹약'이 파기되었습니다."

마스터의 두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지, 지금 뭐하는······?!"

락투샤

지고의 겨울이 가진 진정한 능력.

그것은 '계약'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이냐면, 고등급의 계약조차도 이처럼 베어내어 내 마음대로 무효화시키는 게 가능하다.

"혼, 혼의 맹약을 어떻게······!"

혼의 맹약도 마찬가지.

서로가 '계약'이라는 이름 아래에 묶여있다면 피해 갈 수 없다.

일그러진 마스터의 표정과 거칠게 흔들리는 눈빛.

마스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맹신하고 있던 게 사라졌을 때의 모습.

그야말로 겁에 질린 토끼와도 같았다.

······ 제국에서 놓쳤을 땐 얼마나 아쉬웠던가.

"패, 팬텀. 아니, 빌헬름!"

"지금 나는 빌헬름이 아니다."

피식 웃으며 답했다.

빌헬름이 기사왕이며 신의를 아는 자라 불리었던 건, 내가 그런 콘셉트로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로 지고지순하게 명예만 좇는 이었다면 '아이작'이란 캐릭터를 생성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판게니아의 운영자가 게임을 관리하는지 확인해보고자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니까.

반면에, 마스터는 콘셉트에 잡아먹혔다.

허드슨은 그래도 현실과 판게니아를 구분은 했지만, 마스터는 혼연일체(渾然一體)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너는 명예를 아는 자가 아니었나······?"

"나는 명예를 모른다."

마스터의 표정에 당황이 서린다.

전부 들어주는 척, 명예를 아는 척 연기했을뿐이다.

맹약까지 걸었으니 그야 믿었을 테지.

서로에게 건 조건도 별게 없었으므로.

'내가 만약 흑막에 대해 말하라는 조건을 걸었다면 딱 거기까지였겠지.'

하지만 나는 그저 '내 정체를 함구하라'는 조건만 내걸었을 뿐이다.

그런 조건이라면 흑막에 대해 답할 필요가 없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마음을 열고, 묻지 않았던 부분까지 술술 털어놓은 것이리라.

애당초 나는 계약을 지킬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다.

"부, 분명히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다 말하지 않았더냐! 살려다오, 제발······!"

"너는 선을 넘었다."

아무리 뒤에서 마스터를 조종한 자가 있다 한들, 그간 마스터가 보인 행위는 분명히 선을 넘었다.

대원정의 방해, 스피커 노릇을 하며 진실을 왜곡시킨 것.

빌헬름의 업적을 나눠먹고 영웅이라 으스댄 것.

마스터가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도 모를 내가 아니다.

뿐만인가.

놈은 오직 자신의 명성을 위해 제주도를 포기하라 말했다.

바알의 토벌에 참가하지도 않은 주제에.

하지만, 위에 열거한 사실들보다 무엇보다 더욱 악질적인 행위는, 그가 행한 수많은 '실험'이었다.

'허드슨이 모두 알아냈지.'

허드슨은 대원정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정보를 찾아냈다.

특히 8영웅이라 일컬어지던 자들, 그중 마스터의 악행에 대한 것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놈이 행한 악행들은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놈은 온갖 실험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왔다.

특히 '히든 특성'에 관한 실험으로.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해 탑을 오르게 만들지 않았나.

제대로 준비조차 갖추지 않은 사람들을.

들어오면 십중팔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넣었다.

"맹약! 맹약을 다시 맺자! 조건을 바꾸겠다. 너의 노예가 되라면 되고, 개가 되라면 개가 되어주마. 그러니······!"

마스터가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며 오열했다.

그리곤.

스으으으윽!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고, 나를 향해 찔러왔다.

불의의 기습.

의기양양해진 눈빛.

후.

나는 내심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이렇게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촤아악!

툭!

양쪽 팔리 잘려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아악···! 내, 내 팔이······!"

기습이 실패한 마스터가 절단된 양팔을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보다도 삶에 대한 의지가 더욱 큰 모양.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마스터가 말했다.

"아, 아직 말하지 않은 게 많다! 나를 살려두면 더 쓸모가 있을······!"

툭!

데구르르.

마스터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잘려나간 머리가 팔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기 때문이다.

······ 정말 끝까지 추악한 놈이다.

더 이상 말을 섞기가 싫을만큼.

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썩는 기분이었다.

이어, 마스터의 숨통이 완전하게 끊긴 순간.

"플레이어 '마스터'를 살해했습니다."

"점수 100점을 획득합니다."

"악업이 60 상승합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127h)'을 회수했습니다."

"경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120SP를 획득했습니다."

"두 개의 별이 대륙 전역으로 흩어집니다."

"마스터가 지닌 신화 등급 이하의 모든 장비가 증발합니다."

"유일급의 재료는 '황금률 상점'에 무작위로 등록됩니다."

"명예의 전당에서 '마스터'의 이름이 삭제됐습니다."

"업적 '하이랭커 살해자'를 획득했습니다."

"유적도시 '룬델라'의 후계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적도시 '룬델라'의 계승 조건을 갖췄습니다."

놈은 아낌없이 주고선 사라졌다.

유적도시 룬델라. 마스터가 세력을 일구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었던 도시.

'제대로 된 후계자도 지정해놓지 않았을 줄이야.'

얼마나 욕심이 많은 놈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혼자 다 해먹으려고 후계자 하나 지정해놓지 않았다.

물론 그 덕분에 룬델라가 손에 들어왔다.

남은 건 직접 도시로 가, 도시의 주인이 됐음을 선포만 하면 되는 일.

-으으! 더러워! 이 녀석 피는 너무 더러워!

'겨울'이 말했다.

그간 입을 꾹 닫고 있었지만, 마스터의 피가 녀석의 입을 열게 만든 것이다.

-조심해! '멸천자'는 까다로운 놈이니까.

게다가 걱정까지 해준다.

웬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겨울은 '멸천자'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 멸천자께서 말씀하셨다. 네놈은 위험한 놈이라고."

그곳엔, 검게 물든 팔라딘이 있었다.

벌레술사도, 토인족의 전사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마스터를 처리하는 사이에, 저놈이 다 먹어치운 것이다.

정확히는 놈이 만들어낸 '흑점'이.

발로그 교단의 상징인 그 흑점은 생명을 빨아먹는 특징을 지녔으니까.

"재밌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멸천자이니 뭐니 하는 이름도 처음 듣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모르던 것들이 하나, 둘씩 튀어나오는 기분이다.

마스터의 말마따나 '멈춰있던 것들이 다시 움직이고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아는 판게니아의 지식은 수박 겉핥기뿐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났다.

'끝난 게 아니다.'

끝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고 여겼는데.

'이제 시작이다.'

알고보니 이제 시작이었다.

시작.

참으로 듣기 좋은 울림이 아닌가.

게다가 민트초코맛있어요도 단순한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뭐하는 놈일까.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걸까?

아니, 아니다.

놈은 아직 나를 제대로 모른다.

알고 있었다면, 이딴 식으로 뒤에서 판을 놓진 않았을 거다.

어쩐지 처음부터 닉네임이 마음에 안 들더라니.

'내가 먼저 찾아내주마.'

술래잡기.

참고로, 술래는 나다.

*

"'명예의 전당'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동시에 수많은 플레이어의 앞에 떠오른 글귀.

그걸 본 플레이어들은 난리가 났다.

-지금 뭐임?

-내가 뭘 잘못봤나

-마스터 죽었냐 설마?

-전당 순위에서 갑자기 사라졌는데?

-심연 간 거 아니냐

-ㄴㄴ마스터 균열의 탑 올랐을 걸 사람들 모집하는 거 봤음

-균탑 오르다가 죽은거?

-누구한테?

'플레이어 톡' 역시 마찬가지.

갑자기 마스터의 이름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마스터의 명성이 떨어졌어도, 그는 2성의 초월자.

제 목숨은 필사적으로 지키는 게 그였으므로.

-마스터가 원수진 게 한, 둘이냐

-탑의 괴물한테 죽었을 수도 있고

-그럼 '룬델라'는 누가 가짐?

-어, 그러네. 거기 후계자가 누가 있던가?

-없을걸? 마스터 그 욕심쟁이가 후계자를 두겠냐

-설마 빈도시 됨?

-있어도 마스터만큼 무섭진 않지. 먹히는 건 순식간임

-와, 씨. 대박이네. 룬델라 알짜배기 도시잖아

-또 전쟁나겠네

빈도시가 됐다는 것.

주인이 없는 도시는 항상 전쟁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설령 후계자가 있어도, 마스터가 아닌 이상 의미가 없다.

수많은 세력들이 룬델라를 갖고자 몰려들 건 자명한 일.

-마스터가 죽었으면 이제 6영웅인가?

-그러게. 막심도 죽었고 마스터도 죽었으면 이제 6영웅이네

-빌헬름 빼면 사실상 5영웅ㅋ

-설마 진짜 마스터가 죽었을까? 바퀴벌레보다 질긴 게 마스터 아니냐

-워낙에 원한 스택이 많이 쌓여있어서 뭐

-근데 누가 영웅들 살해하고 다니는 거 아님?

-누가 굳이 그런 짓을 함?

-팬텀이?

-음. 팬텀이 그랬으면 남은 영웅들 똥줄 좀 타겠네

-이미 지리고 있을듯ㅋㅋㅋㅋㅋ

······.

끊이지 않는 게시글들.

"······ 진짜 큰일 났네."

그것을 보며 6영웅, '흑요'가 심각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흑요뿐만이 아니다.

-집합하지(루시퍼)

-그래. 아무래도 회의가 필요할 듯싶은데(다크스타)

-장소는?(반희)

-항상 모이던 곳으로(루시퍼)

-그라시아는? 이번에도 빠지나?(반희)

-··· 가마(그라시아)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의 내용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떠올라 있었다.

젠장.

그라시아가 웬일로 회의에 오는 거지?

마스터의 죽음이 그에게도 심각하게 다가온 걸까?

그렇다면 이 회의, 절대로 빠질 수 없다.

'아무도 날 안 찾아.'

하지만, 이중에서 흑요를 찾는 이는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녀는 그간 마스터라는 줄을 타고 있었으므로.

지금 그녀의 신세는 끈 떨어진 연과 다를 게 없다.

하물며 박쥐 같은 흑요를 좋아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흑요가 핸드폰의 자판을 쳤다.

-나도 참가할게(흑요)

-넌 안 와도 되는데(반희)

······ 짜증 나는 년.

반희는 항상 그녀에게 이런 반응이었다.

꼴에 여자라고 같은 여자를 견제하기라도 하는 건지.

-마스터가 남겨둔 실험 일지나 정보들, 다 어디 있는지는 나만 알고 있는데? 정말 안 가도 돼?(흑요)

-너도 참가해라, 흑요(루시퍼)

흑요가 진땀을 흘리며 겨우 미소를 되찾았다.

마스터가 얼굴마담이고, 그라시아는 영웅놀이에 별 관심이 없다.

다크스타는 촐랑대며, 반희 자기 영역에서 여왕놀이를 즐기는 관심종자였다.

반면 루시퍼는 뒤에서 영웅들을 지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실질적인 우두머리 말이다.

그가 허락했다면, 참가해도 된다는 소리.

'됐어. 살았어.'

차례대로 영웅들이 죽어간다.

이 뒤는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똘똘 뭉쳐야 살 수 있다.

흑요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