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티원 '마스터'가 다른 파티의 '???'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파티점수가 100점 감소합니다."
락투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스터.
자신들을 균열의 탑으로 끌고 온 당사자가 죽어버렸다.
누구한테 죽은 걸까.
그래도 제법 한가락 하는 놈이었는데.
'별 상관은 없다만.'
다만 날아간 100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놈을 빼고 오는 게 맞았다.
하지만, 점수야 다시 올리면 그만.
그때였다.
휘이이이잉!
갑자기 한기와 함께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싹 마른 대지.
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관뿐인 이곳에.
'눈보라?'
마치 겨울처럼 말이다.
-99.9%
멸천자의 사도.
검은 팔라딘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중첩을 먹어치웠는데 어떻게?'
흑점을 이용한 무한 중첩의 버프.
그는 '흑점'의 축복을 받은 자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일 수 있었다.
하여 놈이 방심하고 있을 때 벌레술사와 토인족 전사의 힘을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과부하 200%"
"육체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최고의 사도 중 하나인 자신이, 육체의 한계까지 밀어붙여 능력치를 올렸다.
몇 성을 더 초월해야 얻을 수 있는 능력치를 말이다.
그 증거로 놈이 사용했던 '끔찍한 흉조의 눈'은 아예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거지?
단순히 막아내는 것만이 아니다.
흘리고, 붙이며, 공간 자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검술이······ 아니, 이건 평범한 검술이 아니다.'
멸천자의 사도로서 모든 무기술을 익히고, 상극인 교단의 힘을 이어받았다.
특히 그는 무기술의 달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기술은 전부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저 정체불명의 남자가 사용하는 검술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이건 검술이라기보단······.'
휘이익!
꽈르르릉!
해머를 휘두르며 검은 번개와 함께 내리꽂았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벌써 열 번이 넘는 공방이 이루어졌지만 단 한 차례도 닿지 못했다.
"검술 자체에 무언가가 깃들어있군. 너······ 뭐 하는 놈이지?"
이건 단순한 기술의 단계를 넘어섰다.
이 검술은, 단순히 '검술'로 치부할 수 없는 기술이다.
공간을 장악하고, 비틀어서 흘리며, 반사시키는 게 어떻게 일반적인 검술일 수 있나.
기술 자체에 격이 깃들었다.
정확히는 '헤아릴 수 없는 격의 존재'가 이 검술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흉내낼 수 없고, 이 세계에서 오직 한 명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검술.
더욱이 무서운 건.
"이게 전부가 아니로구나. 3단계가 끝이 아니야. 이 뒤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냐?"
아직 전부 보여준 게 아니다.
이 모든 건, 마지막으로 가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놈이 내보이지 않은, 혹은 아직은 내보일 수 없는 다음 단계가 있다.
검은 팔라딘은 멸천자의 가장 강력한 사도 중 하나이며, 이 세상의 모든 무기술을 섭렵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 역시 재미있는 놈이로군."
놈이 피식 웃었다.
검술이 파악된 건 처음 있는 일이라는 듯이.
하지만 덕분에 확실해졌다.
'지고하며 순수한 검술. 그래, 순수능력치만을 보는구나. 버프나 장비로 추가된 능력치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검술이야.'
중첩된 버프로 능력치가 올랐음에도 계속해서 막혔는지.
오직 서로의 '순수 능력치'만을 비교하는 검술이기에 그렇다.
저 검술에 깃든 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지극히 순수한 존재이리라.
허나.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확실하지.'
장점과 단점이 명확하다.
저놈 역시도 저 검술을 사용하면 마찬가지로 추가 능력치의 효과를 못 볼 테니.
자신과 같이 중첩형 버프의 사용자를 상대로는 유리할 수 있지만, 저보다 약한 다수를 상대할 땐 크게 효용이 없다.
그래서 처음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변신하여 발을 묶은 거고.
'무엇보다도 저 검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또한,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 있기에 완성되지 않았다.
완성되지 않았다면 필시 약점이 있을 터.
'저놈도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위험한 놈이다. 여기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만큼.'
여기서 더 성장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완성되어 버린다면 멸천자의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하여 검은 팔라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후우우우웅!
흑점이 커지고 무한하게 분열하기 시작한다.
마치 터질 듯이.
"'흑점폭발'을 사용합니다."
"과부하만큼 '흑점폭발'의 위력이 강해집니다."
"모든 과부하와 성마력을 사용해 지정한 범위에 폭발을 일으킵니다."
"사용후 100%의 확률로 사용자는 사망합니다."
자기희생 스킬.
생명력 만큼이나 순수한 능력이 또 있을까.
놈의 검술도 이 희생의 스킬만은 막아내지 못하리라고, 검은 팔라딘은 확신했다.
저 정체불명의 검술을 사용하고 있는 이상, 도리어 놈의 절대적인 방어력은 약해질 터!
"멸천자시여! 곧 곁으로 가겠나이다!"
곧이어 검은 팔라딘의 전신을 채운 모든 흑점이 폭발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
막을 수 없다.
저 멸천자의 사도는 내 능력을 어느 정도 꿰뚫어보는 데 성공했으므로.
내가 막지 못하리라 확신하며 자폭을 시도했다.
'저런 놈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빌헬름의 검술, 그 근원에 대하여 파악한 놈은 저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정체를 파악한 놈답게 성공적인 시도였다.
저 자폭은 빌헬름의 검술로는 막을 수 없는 종류가 맞았다.
'어둠화'를 사용한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죽음만 단축할 뿐이다.
하지만, 저놈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게 있었다.
"'마혈종 2군집'의 희생 스킬을 사용합니다."
"'불타오르는 피의 장막'이 시전됩니다."
바로 '마혈족의 왕'이 가진 능력.
놈이 희생 스킬을 사용한다면, 나 역시 희생 스킬로 받아치면 그만이다.
화르르르륵!
2군집.
500의 마혈종이 동시에 폭사하며 피가 흩뿌려진다.
그리곤 터져나간 피들이 한데 모여 내 앞에 거대한 피의 장막을 만들어냈다.
쿠르르르르릉!
폭사한 흑점이 피의 장막을 때리자 장막이 휘청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뚫리진 않는다.
당장이라도 뚫릴 듯이 위태롭긴 하지만 버텨내고 있었다.
'부족하군.'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저 멸천자의 사도가 가진 생명력은 한명분이 아니었다.
놈이 흡수한 생명은 수백, 수천··· 어쩌면 그 이상이었으니.
-내키진 않지만 멸천자를 잡는 일이라면 도와줄게. '겨울'을 사용해.
그때 다시 한 번 '겨울'이 말했다.
확실히 멸천자를 아는 태도.
북부에 봉인되어있었던 검이, 나도 모르는 멸천자를 어찌 알고 있는 걸까.
하물며 멸천자를 적대시하는 것만 같지 않나.
어쨌든, 도와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나는 '겨울'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겨울'을 시전합니다."
"모든 레벨의 영역에 '마지막 겨울'이 찾아옵니다."
*
후우우욱!
락투샤가 숨을 내뱉자 그 즉시 입김이 얼어붙었다.
'이건 단순한 눈보라가 아니로군.'
느닷없이 찾아온 겨울.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그저 차갑기만 한 게 아니었다.
'저주다. 일전에 겪었던 바알과도 같은 수준의.'
눈 자체가 저주다.
겨울의 저주를 불러일으킨 존재가 있다.
몸을 굼뜨게 만들고, 모든 저항을 약하게 만들며, 심지어 공격마저 약화시키는 강력한 저주였다.
하지만, 대체 누가?
누가 감히 이만한 겨울을 불러올 수 있단 말인가.
바알은 근처에 있는 자들에게 강력한 사자의 저주를 걸었다.
수련자의 산, 바알의 지척에서 느꼈던 저주의 위력을 지금 락투샤는 광범위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나 락투샤에게 큰 위험을 주진 못한다.
다소 까다로울지언정 버텨낼 수준은 된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게 문제일뿐.
'범위가······.'
이 눈보라는 영역에 걸쳐있다.
이 겨울은, 여기서만 찾아온 게 아니다.
허.
"체력이 낮은 마혈족 다수가 사망했습니다."
"영역의 탐사율이 90%를 넘겨 '영역 보스'가 등장했습니다."
어이가 없었다.
광범위하게 마혈족들을 죽이고 있다.
체력이 낮은, 혹은 상처를 입고 도망친 괴물들을.
그리하여 영역보스마저 등장하게 만든 것이다.
영역보스까지 잡아내진 못했으나, 그런 건 전혀 신경 쓸 게 되지 않는다.
"기여도 30점을 획득했습니다."
"파티 점수의 총합은 510점입니다."
"1위 파티의 점수 총합은 980점입니다."
미친.
엄청난 속도로 1위 파티의 점수가 오르고 있었다.
몇십 점 단위가 아니라 백 점 단위로 쑥쑥 오른다.
그렇다는 건.
'마스터를 죽이고, 이 겨울마저 소환해낸 자가 1위 파티에 있다.'
대체 누굴까.
누구이기에 이만한 위업을 보이는가?
영역을 넘어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일 수 있는 자.
'설마 백왕?'
혹시, 백왕은 아닐까.
백왕이 직접 균열의 탑을 올랐다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완전체의 백왕이라면 이만한 저주를 소환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백왕이 이 탑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놈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군.'
빠져나갈 수 없는 탑.
도망칠 곳이 없으니 그 용이주도한 백왕을 잡을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나.
자신보다 높은 레벨의 영역에 있겠지만, 영역을 걸친 이 저주를 보면 분명히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지금 락투샤는 또 다른 은혜를 입어, 레벨보다 더욱 높은 단계의 힘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검강마저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1위 파티의 점수 총합은 1,060점입니다."
······ 그런데, 정말 백왕이 맞는건가?
점수가 순식간에 천점을 돌파했다.
아무리 백왕이라 할지라도 이 점수의 차이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기껏해야 사주력과 함께 올랐을진대.
'이 영역에 있는 놈들을 전부 죽이고 보스를 잡는다.'
더 이상 추월시킬 순 없다.
하지만 영역보스가 나타났다고 바로 사냥할 순 없다.
이 영역에 있는 놈들을 전부 죽여 점수로 만들고, 그 뒤에 영역보스를 잡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곳이었다.
단순히 영역보스만 잡아서 점수를 올리는 건 한계가 있으므로.
락투샤가 영역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오호라. 너는······?"
거대한 대지의 용.
백왕 산하의 주력 중 하나.
강렬한 초록빛을 띠는 대토룡과 마주했다.
*
발테가 정신을 차렸을 땐, 세상이 새하얘진 뒤였다.
'무슨 일이······.'
괴물들에게 둘러싸인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또 정신을 잃었구나.'
이토록 나약해서야.
발테는 자신을 질책했다.
툭하면 정신을 잃어버리니 이래선 발전이 있을 수가 없었다.
"후계자님······?"
허나 질책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세상, 그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낯익었으니까.
란돌프.
그가 '겨울'을 들고 폭발을 막아냈다.
얼어붙은 피의 장벽, 그 반대편의 모든 것이 마치 정지한 듯 얼어있었다.
반대로 자신이 있는 벽의 안쪽은 따듯한 온기마저 느껴진다.
"아아······."
"이, 이게 대체······."
"설마 우리를 살려준건가?"
사람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겨울의 능력은 계약을 지배하는 것.
그들이 '대기자의 방'에서 탑의 주인과 했던 '계약'이 전부 무효로 돌아간 것이다.
버그 사용자를 죽이라는 그 저주가 말이다.
계약을 해지하고 폭발까지 막아주었으니 자신들을 살려준 것이라고 착각할 만도 했다.
그때였다.
"1위 파티의 '???'가 검은 팔라딘 '요르', 충뇌술사 '야타', 토인족 전사 '사르암'을 완전하게 살해했습니다."
"280점을 추가로 획득합니다."
"파티원 '세렝게티'가 영역보스를 죽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00점을 추가로 획득합니다."
"파티원 '롬멜'이 영역보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습니다."
"60점을 추가로 획득합니다."
"1위 파티의 점수 총합은 1,520점입니다."
세렝게티와 롬멜까지 점수를 올리는 데 한몫했다.
그리하여 1,520점.
다른 파티와는 단위 자체가 다른 점수합계를 달성한 것이다.
지이잉!
그러자, 모든 파티원의 앞에 황금색의 워프가 등장했다.
"'1위 파티'가 '군주 솔바렌'에게 도전합니다."
"'군주 솔바렌'의 전투력이 99.9% 감소합니다."
"'군주 솔바렌'이 당황합니다."
군주 솔바렌의 당황
대토룡과 대치하던 중, 락투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 백왕과 탑을 오른 게 아니었나?"
락투샤는 1위 파티가 백왕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백왕이라면 틀림없이 산하의 주력들과 탑을 올랐을 터.
하지만 '1위 파티가 도전합니다'라는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음에도, 대토룡은 여전히 자신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그 물음에 왜 답해야 하지?"
콰릉!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내리꽂힌 두 개의 번개.
그것은 마치 창의 형태로, 대토룡의 거대한 체구의 양옆에 세워졌다.
후우우우욱!
동시에 대지가 들썩이며 두 개의 창은 마치 강력한 자석처럼 주변의 땅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형태의 스킬······ 아니, 저건 무기다.
천둥과 대지를 아우르는 유일 등급의 무기가 분명하다.
어디서 갑자기 저런 걸 구한 걸까.
저 무기로 인해, 대토룡의 격이 몇 단계는 올라갔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자신도 흑천검으로 말미암아 검강을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1위의 파티가 백왕이 아니라고?'
그럼 누가?
누가 1,520점이라는 압도적인 점수를 거머쥔 거지?
흑왕은 탑을 오르지 않았으니, 남은 건 백왕뿐일진대.
말인즉슨, 이 겨울을 몰고 온 자가······ 생각도 못 한 제3의 인물이라는 소리다.
'제국? 그러나 이만한 격변을 보이려면 정말 황제나 되어야 가능하다.'
황제.
벌써 수백 년 이상 잠들어있는 그 존재는, 모든 게 베일에 가려 있는 자다.
하지만 백왕과 흑왕이 굳이 제국을 건드리지 않고 있는 건 모두 저 '잠든 황제'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굳어있었다.
물론, 진짜 이유는 그 둘만 알 테지만-
락투샤가 생각하기에도 황제가 깨어나지 않는 이상 이 점수는 설명이 안 된다.
아무리 제국에 내로라하는 강자가 많다 할지언정 자신보다 강하겠는가.
'아니면 그놈들인가?'
흑왕이 세력을 확장하려하자, 접근해온 이단들이 있었다.
하지만, 흑왕은 그들을 '잡종'으로 치부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모르는 세력이 탑에 올라 저만한 성적을 내었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바로 그 잡종들뿐이다.
"락투샤. 사왕은 죽었나?"
돌연 대토룡이 묻는다.
락투샤가 빤히 웃었다.
"내가 그 물음에 왜 답해야 하지?"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는 법.
사왕이 죽었을지, 아직 살아있을지 자신이 답해야할 의무가 없다.
쩌정!
대토룡의 주변을 맴도는 두 번개의 창이 미칠 듯이 요동친다.
"강제로 뱉어내게 할 수밖에 없겠군."
넘쳐나는 자신감.
대토룡의 저 오만한 태도를 보며 락투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네놈 따위가 내 입을 열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북방의 크람델은 주력들에게 있어서 안락한 곳이다.
안주할 수 있는 장소다.
하지만 남부는 다르다. 흑왕이 지배하는 그 지역들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강자만이 살아남기에 모두 잡초와 같았다.
온실 속의 화초가 어찌 잡초를 이길 수 있겠나.
스읏.
락투샤가 검을 들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만난 이상,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기에.
*
군주 솔바렌.
제1 영역의 주인이자 탑의 수호자인 그는, 도전자들을 절망으로 물들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수많은 종류의 무적기를 두루 갖췄기에 뚫리지 않는 철벽과도 같았으며,
타격이 쌓일수록 강해지는 성장의 특성까지 갖고 있었기에, 적어도 이 영역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시시하군.'
첫 파티의 도전.
나름 강한 놈들이었으나 제대로 된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그의 철벽을 뚫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일찍이 깨닫고는 빠르게 도망친 건 제법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무리하게 뚫으려고 했다면 도리어 군주 솔바렌은 강화되었을 테니.
'오랜 시간 잠들어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만족시킬 자가 없는 건가?'
그는 균열 속에서 셀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군주'라 불리기까지 균열의 존재들을 수없이 상대했으며 마침내 탑에게까지 인정받은 게다.
이후 다음 도전자가 나타날 때까지 솔바렌은 다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런데 그 기다림의 보답이 이래서야.
너무 기대 이하라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나를 약화시키는 방법까지 알려주었거늘.'
점수 총합 500점 이상일 시, 10점이 추가될 때마다 솔바렌은 1%의 전투력이 약화된다.
전투력은 곧 솔바렌의 무력과도 같았다.
솔바렌은 레벨이나 장비, 스킬 따위의 총합을 '전투력'으로 볼 수 있었기에.
'차라리 첫 도전자들이 다시 도전했으면 좋겠군.'
비록 도망쳤으나, 그들의 전투력은 꽤 인상적이었다.
가장 높은 놈은 40만의 전투력을 넘겼었으니까.
다만, 솔바렌의 무적기를 해결하지 못해 후퇴했을 따름이다.
만약 놈들이 점수를 조금 높여서 재차 도전한다면 꽤 재밌을 듯했다.
'그래봤자 내 철벽을 뚫지는 못할 테지만.'
하지만, 점수를 높이는 건 한계가 있다.
각자 주어진 레벨의 영역에서만 점수를 올릴 수 있는데, 영역보스마저 클리어하면 더 이상 점수를 얻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른 방법이라면 같은 레벨 영역대의 도전자들을 죽이는 것뿐.
물론, 그리하여 도전자들을 죽인들 군주 솔바렌을 이길 순 없다.
'자. 도전해보거라. 다음 도전자는 누구이냐?'
절망을 주는 자.
군주 솔바렌은 또 다른 도전자들에게 절망을 줄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자신을 상대하며 좌절하는 모습을 볼 생각에, 즐겁기 그지없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다음 파티가 '군주 솔바렌'에게 도전합니다."
"파티의 점수 총합은 1,520점입니다."
"'군주 솔바렌'의 전투력이 99.9% 감소합니다."
······?
"······?"
잠시, 군주 솔바렌의 사고가 멈췄다.
1층 영역의 설정 권한은 오직 군주 솔바렌에게 있다.
레벨별로 균열시켜, 얻을 수 있는 점수 총합은 아무리 높아도 1,000점이 한계다.
군주 솔바렌이 직접 그렇게 설정해놓았다.
그것을 넘어서는 점수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해서도 안 된다.
'1,520점이라고?'
그런데 뭐냐.
자신이 설정한 점수대를 훌쩍 넘어선 점수는?
버그인가? 잘못 본 걸까?
"점수의 총합에 따른 전투력 감소가 시작됩니다."
"999,999의 전투력이 최소값인 1,000으로 감소합니다."
"존재의 지탱을 위해, 크기가 줄어듭니다."
군주 솔바렌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철갑을 두른 철벽의 군주.
우람하기 그지없던 그의 다부진 몸집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투력이 낮아진 만큼 몸을 지탱하기 위한 힘이 부족한 탓이다.
'이건······.'
무언가가 잘못됐다.
그는 꿈을 꾸는 존재가 아니지만, 이건 필시 꿈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이처럼 급격한 전투력의 감소는 말이 안 된다.
저 점수는 더더욱 말이 안 됐다.
한데, 단순히 몸집만 작아진 게 아니었다.
"철갑이 사라지며 '약점'이 노출됩니다."
"철의 방패가 사라지며 '약점'이 노출됩니다."
"철의 투구가 사라지며 '약점'이 노출됩니다."
······.
"'철벽의 솔바렌' 스킬 레벨이 급감합니다."
"'무적의 솔바렌' 스킬 레벨이 급감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대폭 하락합니다."
미친.
그야말로 모든 게 떨어지고 있다.
철갑도, 철벽도, 무적기조차도.
이후 변한 솔바렌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절반 이하로 줄어든 육신과 약점이 그대로 노출된 맨몸의 상태.
이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훅하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지 않은가······.
'이건······ 무언가가 잘못됐다.'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대체 어느 놈이 자신의 설정을 뚫어내고 이런 상황을 연출했단 말인가.
'설마 영역에 있는 모든 도전자들을 도륙한 건가?'
5인의 파티.
그들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다른 도전자를 전부 도륙했어도 1,520점은 말이 안 되지만, 그나마의 가능성은 그뿐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러했다면.
'그러면 나를 죽일 수 없다.'
군주 솔바렌은 심호흡을 했다.
그래, 그런 경우라면 자신을 죽일 수 없다.
포기하고 돌아가거든 다시 재정비하면 된다.
지이이잉.
이윽고, 그의 눈앞으로 워프가 나타났다.
군주 솔바렌은 눈을 부라렸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확인하고자.
"도전한다고 해서 오긴 왔는데······ 으음."
가장 먼저 워프를 넘어온 건 사제다.
[31,050]
기껏해야 3만 대의 전투력.
허접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사제라서 전투 자체도 거의 불가능할 터.
어떻게 도전자들을 죽인 건지는 몰라도, 같잖다.
"형제여! 내가 왔다! 어디 갔는가?"
이후 나타난 건 드라이어드.
보아하니 하이 드라이어드인 것 같다. 그것도 신록의 축복을 받은.
[98,700]
사제에 비하면, 확실히 전투력도 높았다.
그러나 여전히 의아하다.
정말 저 조합으로 1,520점을 도달했다는 말인가?
"여긴? 아, 저 오우거처럼 생긴 놈이 솔바렌인가요? 생긴 건 정말 형편없군요."
은빛의 갑주를 입은 기사.
[115,600]
처음으로 10만을 넘긴 강자였다.
하지만 여전히 첫 도전자의 파티보다는 훨씬 약하다.
지이이이잉.
곧이어 남은 두 개의 워프가 진동을 일으켰고.
"아! 다들 여기 계셨군요."
창잡이가 나타났다.
[74,800~?]
음······?
이놈은 조금 애매하다.
특정 조건에서 더 강해지는 부류인 듯싶은데.
그래도 나타난 수치만 보자면 여전히 형편없다.
'어이가 없군. 대체 뭐지?'
설마, 탑의 오류인가?
이 정도의 놈들이 그 점수를 획득했다고?
그게 말이 되나.
오류가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렵다.
이어,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란돌프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자가 파티의 수장인가?
군주 솔바렌이 눈에 불을 켰다.
그러자.
[217,400~?]
으음.
이놈은 조금 강했다.
확실히 다른 놈들보다 월등하게 강했다.
수장의 자격은 있는 셈.
그래봤자 첫 파티만큼은 못하지만.
그때였다.
'뭐?'
솔바렌이 인상을 구겼다.
갑자기 놈의 머리 위에 떠오른 숫자가 하나씩 지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
그리곤 전부 물음표로 대체됐다.
······ 뭐가 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이 저놈이라는 것.
"'약점'이 노출됐대도 네놈들은 나를 죽일 수 없다."
군주 솔바렌에 당당하게 외쳤다.
그를 죽일 수 없는 이유.
군주 솔바렌을 죽이기 위해선, 다섯 개의 '약점'을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약점'의 해체를 위해선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그 조건을 알아내지 못하는 이상, 설령 알아낸다 하더라도······ 놈들은 자신을 죽일 수 없다.
그때, '사제'가 씽긋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악업'이 존재하면 공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호라.
식견이 상당한 사제인 모양이다.
그걸 보고 알아낼 줄이야.
하지만, 알아낸다 한들 '악업'을 지울 방법은 없다.
영역을 돌며 다른 도전자들을 살해했다면 엄청나게 높은 악업이 쌓여있을 터.
군주 솔바렌이 무적을 자처하는 이유다.
그걸 파악해냈다면 더욱 절망해라.
절대로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포기해라.
군주 솔바렌이 미소 지었다.
그 순간.
"······ 보십시오, 후계자님. 제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후아아앙!
사제의 손에서 면죄부가 무한하게 복사되기 시작했다.
정산시간
면죄부.
그것은 오직 '여신교'의 정규 사제만이 발급할 수 있다.
평생에 걸쳐 단 3번, 악업을 일정량만큼 지워주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
설령 교황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제아무리 면죄부라 할지라도 다수의 죄를 모두 지워주진 못한다.
'영역의 도전자들을 전부 도륙했다면 몇 장의 면죄부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처음, 사제의 손에서 면죄부 한 장이 튀어나왔을 때, 솔바렌은 생각했다.
음. 여신교의 사제였나보군.
딱 그 정도의 감흥.
그런데 면죄부가 두 장을 넘어, 세 장에 다다르자.
'여태껏 한 번도 면죄부를 발급해 본 적이 없는 사제인가?'
그걸 여기서 전부 사용한다고?
하지만 솔바렌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악업이 0이어야만 자신의 '약점'을 타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악업 0은 개인이 아니라 파티 전체를 의미한다.
저 3장으로 파티 전원의 악업을 0으로 만들 수 있을까?
휘아아앙!
'······.'
휘아아아앙!
'······.'
휘아아아아아아앙!!
찬란하고 거룩한 빛이 사제의 손에서 끊임없이 쏟아진다.
면죄부가 마치 복사되듯 무한하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뭐냐, 저건······.'
벌써 몇 번째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균열의 첫 군주인 그조차도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눈에 보이는 면죄부만 벌써 열 장이 넘어간다.
그것을 사용해 모두의 악업이 하나씩 지워지는 중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군주 솔바렌의 악업마저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무조건 3장이 끝 아니었나? 교황일지라도 마찬가지일 텐데.'
균열이 흡수한 지식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 있다.
하여, 확신한다.
교황이라 할지라도 3장 이상의 면죄부를 만들어내진 못하리라고.
그럼 저 사제는 뭐란 말인가.
교황도 하지 못할 기적을 이뤄내고 있다.
진짜 신의 사도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건······ 이건 상정하지 못한 일이다. 할 수 없는 일이고.'
탑의 1층.
균열된 레벨의 영역.
이곳의 모든 건 군주 솔바렌이 직접 설정한 것이다.
500점에 도전할 수 있고, 10점을 더 얻을 때마다 자신의 전투력이 1%씩 깎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파티가 500점 이상을 얻으려면 같은 영역의 도전자들을 죽여서 빼앗을 수밖에 없다.
그럼 자동으로 악업이 쌓이고, 군주 솔바렌의 공략은 물거품이 되는 식이다.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탑에 갇혀있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나의 공략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 또한 설정해놨으니.'
하지만, 다른 공략방법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을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건 모든 파티가 정확히 500점을 맞춘 뒤, 강철을 담금질하는 느낌으로 끊임없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이었다.
모든 도전자가 유대를 맺으며, 희생을 자처하며, 포기하지 않는 강철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두드리는 방법 말이다.
'그렇게 죽는다면 기꺼이 문을 열어 주리라 생각했거늘.'
군주 솔바렌.
그는 명예롭게, '군주'답게 죽고 싶었기에.
······ 하지만 이런 식의 방식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상정 못 한 점수로 도전하고 면죄부를 복사해 공략하는 방식은.
'얼마나 기대하고 고대했던가. 한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휘아아아아아아아앙!!!
*
"······ 강해졌군."
대토룡이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락투샤는 두 개의 창을 뚫고, 빠르게 다다라 마침내 자신의 가슴팍에 검강을 꽂아넣은 것이다.
"너는 크게 달라진 게 없군. 너만이 아니라, 다른 주력들 역시도."
락투샤가 대토룡의 가슴팍에 박힌 흑천검을 쥐며 말했다.
이어 흑천검을 빼내자 푸른 피가 주르륵 흐르며 대지를 적셨다.
지상에 내려와 푸른 피를 털어낸 락투샤는, 대토룡을 작게 비웃었다.
"백왕 또한 그럴 테지. 크람델에 안주한 순간부터 너희의 패배는 정해진 거다."
"크람델에서 버림받았던 네가······."
"내가 떠난 거다. 버림 받은 게 아니라."
락투샤의 표정이 굳었다.
옛적.
락투샤는 잠깐 크람델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어린 오크치고는 실력도 출중했기에, 주력의 자리에 욕심을 부렸다.
조금씩 세력을 일구자 이에 위협을 느낀 건지 강제퇴출을 당한 것이다.
이후 락투샤는 흑왕 산하에 들어가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너희들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내가 두려웠겠지. 하지만, 흑왕께선 평등하시다. 뛰어난 실력만 있다면 자신의 자리마저 내줄 생각을 하고 계시지."
그릇이 다르다.
백왕과 흑왕은.
백왕은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안주를 택했다.
변화를 싫어하고, 치고올라오는 자를 견제하거나 추방시킨다.
반면에 흑왕은 어떤가.
철저한 실력주의.
배경이 어떻든 간에 실력과 충성심만 있다면 모든 걸 감내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가 두려워서 퇴출 당한 것이라고?"
대토룡이 되물었다.
락투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아니면 내가 크람델에서 퇴출 당해야 할 이유가 있나?"
"강해지려는 너의 욕심이 모든 걸 무너트리고 있었다. '금지된 개조'와 '약물'에 손을 대지 않았나? 크람델에 그것들을 유통시켜 질서를 마비시키려 했던 걸 잊었나?"
대토룡이 무겁게 말했다.
락투샤는 크람델에서 퇴출당한 게 맞다.
하지만, 단순히 락투샤가 두려워서는 아니다.
락투샤는 크람델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쌓아온 크람델의 질서를 무너트리려고 했기에 퇴출당한 것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그냥 내가 무서웠다고 말해라. 겁쟁이들."
그러나 락투샤의 입장에서 그러한 이유는 납득이 어려웠다.
오크는 투쟁의 종족이다.
이기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모든 수를 쓰는 게 왜 나쁜 일인가?
그것들이 크람델을 도리어 강하고 부유하게 만드는 길이건만.
락투샤가 재차 외쳤다.
"지금 우리 둘의 상태를 봐라. 이게 내가 맞았다는 증거가 아니면 뭐냔 말이다."
"······."
락투샤는 이겼고, 대토룡은 패했다.
머지않아 대토룡은 죽음을 맞이할 터.
"이제 네 주력 중에 둘 남았군. 궁귀와 메두사."
사주력 중에 무려 둘이 해결됐다.
사왕도, 대토룡도 사라진다면, 과연 백왕은 어찌 나올는지.
또 꽁꽁 숨을까?
남은 주력들마저 모조리 죽이고 크람델마저 빼앗긴 뒤에도 숨어있을 수 있을는지.
그때 대토룡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오주력이 있다."
"오주력? 그 새로 주력이 됐다는 까마귀 왕 말이냐?"
아아.
맞다. 다섯 번째 주력이 최근에 나타났다.
오주력 란돌프였던가.
심연 미궁의 주인이자, 백왕이 직접 선포한 자.
하지만 락투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다른 주력들과 비교하여 얼마나 강하겠나.
"오주력은 다른 주력들과는 다르다. 백왕께서 직접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라고 인정한 괴물이니······."
"죽을 때가 되니 말도 안 되는 말을 지어내는군."
"그래. 지어냈다고 생각해라. 말도 안 된다고 여기거라. 과연 '오주력'을 직접 마주하고도 그런 생각이 들지 무척 궁금하군."
대토룡이 작게 미소 지었다.
오주력과 백왕이 마찰을 빚었을 때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 미친 까마귀가,
오늘따라 웬일인지 보고 싶었던 탓이다.
그새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매번 부딪히기만 했는데 막상 죽을 때가 되자 조금 생각이 바뀌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라. 그 오주력도 곧 만날 수 있을 테니."
서로 죽은 뒤 만나게 될 것이다.
대토룡도, 그 오주력 까마귀도.
다른 주력들과 백왕 모두가 나란히 만나게 될 것이었다.
대토룡은 침음을 흘렸다.
"락투샤. 마지막으로 알려다오. 사왕은 어찌 됐나?"
남부로 향한 뒤 소식이 끊긴 사왕.
죽었는지, 살아있는 건지 도저히 알 겨를이 없었다.
스읏.
락투샤가 흑천검을 쥐었다.
"사왕 말이냐?"
지이이잉!
찰나, 검강이 솟구치며, 대토룡을 죽일 준비가 완성됐다.
이후 바닥을 박차며 뛰어오른 락투샤가, 대토룡의 목을 향해 검을 뻗으며 말했다.
"사왕은 '절망'의 그릇이 됐다."
쿠우우우웅!
*
울부짖는 군주 솔바렌을 뒤로한 채, 모든 '약점'을 공략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성배의 성수와 면죄부의 콜라보레이션.
파티의 악업 0을 달성한 후, 전투력이 -99.9%가 된 군주 솔바렌을 잡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에.
"이럴 순! 이럴 순 없다! 탑이시여!"
구오오오오!
모든 약점을 공략당하자 군주 솔바렌의 전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타죽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군주 솔바렌의 존재감이 얕아지고 있었다.
더 이상 존재를 지탱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주 솔바렌은 제 죽음보다도 더 원통한 게 있었다.
"이런 '이레귤러'조차 걸러내지 못하는 이 무능하기 그지없는 탑이여······! 네놈들과의 약속을 나는 후회하노라!"
이레귤러.
그야말로 버그 사용자다.
정해진 규칙이 아닌, 자신이 멋대로 규칙을 만들어내는 자.
본래라면 이런 자는 탑이 알아서 걸러내기 마련이다.
아니면 탑이 알아서 처단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조차 못하는 건 무능하다는 증거.
무능하기 짝이 없는 탑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그때였다.
군주 솔바렌이 '탑'에 대한 욕을 하자.
쉬이이이이-!
촤라라라라락!
하늘이 열리고, 수많은 '깃털'이 쏟아지며, 군주 솔바렌을 훑고 지나갔다.
그렇게 솔바렌의 몸은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으로 나뉘어 이내 증발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솔바렌이 소멸하자 다시 하늘이 닫혔다.
'저건?'
······ 그리고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미간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찬란한 빛과 함께 열린 하늘.
저건 아마도 탑의 최상층일 것이기에.
마스터가 말했던 '엄청난' 것의 정체가 바로 저것인지.
'의지를 갖고 나타났다. 그리곤 직접 개입해 솔바렌을 소멸시켰다. 탑이 아니라 탑의 위에 있는 무언가다.'
탑의 주인은 결코 직접적인 개입을 해오지 않는다.
장난질은 칠 수 있을지언정, 저렇게 깃털을 쏟아내 죽이진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 하늘을 연 존재는 '층수'와 관계없이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의 존재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탑의 주인'보다도 더 위에 있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념은 길지 않았다.
머지않아 떠오른 수많은 문장들.
"'군주 솔바렌'의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
"'군주 솔바렌'을 완벽하게 공략했습니다."
"파티원 전원이 10,000SP를 획득합니다."
"파티원 전원이 '조각난 황금률의 조각(500h)'을 획득했습니다."
"파티원의 레벨 최대치(Max Level)가 1레벨씩 잠금 해제됩니다."
"파티에 참여한 종족은 인간, 드라이어드입니다."
"모든 인간과 드라이어드의 레벨 최대치가 1 올라갑니다."
"파티원 레벨 최대치와 종족 최대치가 더해져 '란돌프'는 현재 12레벨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군주 솔바렌' 공략에 가장 높은 기여를 한 '란돌프'가 추가로 50,000SP를 획득합니다."
"'군주 솔바렌' 공략에 가장 높은 기여를 한 '란돌프'가 추가로 업적점수 3,000점을 획득합니다."
"업적 '균열 탑의 이레귤러'를 획득합니다."
"명예 800점이 상승합니다."
······.
"'균열의 탑 2층'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균열의 탑 2층'의 입장 조건은 '5인 파티', '히든 특성 보유자'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공지사항'을 확인해주십시오."
······.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당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아이작
"균열의 탑 1층이 클리어되었습니다."
"1위 파티가 '군주 솔바렌' 레이드에 성공했습니다."
"균열의 탑 2층이 60일 뒤 개방됩니다."
"균열의 탑 1층 클리어 효과 : 클리어 파티에 참가한 종족(인간, 드라이어드)의 최대 레벨이 1 상승합니다."
"클리어한 파티는 추가로 1레벨이 더 상승합니다."
모든 이들의 눈앞에 돌연히 떠오른 메시지.
단순히 플레이어만이 아니라, 판게니아에 있는 자들이라면 동시에 이와 같은 글귀를 읽게 되었다.
"최대 레벨 상승······?!"
"설마 진짜 최대 레벨이었다고?!"
균열의 탑을 오르지 않았던 자들도 경악할 만한 내용.
종족을 불문하고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껏해야 숙련도 레벨 같은 것일 줄 알았건만.
종족의 최대레벨 상승은 곧 종족 자체의 강화를 이야기했다.
하물며 클리어한 파티는 추가적인 +1이 주어졌다.
말인 즉슨.
"······ 잘하면 대륙의 주인이 바뀔지도 모른다."
"이건······ 명운을 걸고 올라야할지도."
현재 대륙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가장 많은 땅을 보유하고는 있으나, '주인'이라 칭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기엔 대륙 곳곳에 강자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므로.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인간이 진정한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특히 제국이 움직인다면 지각변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최대 레벨이 상승했다고 당장 강해지진 않겠지만.
"2층은? 2층도 똑같이 최대 레벨 상승인가?"
"2층만큼은 반드시 우리가 클리어해야 한다."
종족 자체의 강화를 시켜주는 탑이 나타난 건 여태껏 전례가 없는 일.
당연히 균열의 탑 2층에 대한 관심은 지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조건이다.
"히든 특성 보유자라."
"히든 특성? 그게 뭐지?"
바로 히든 특성.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으니까.
그리고 설혹 알고 있더라도 5명을 모으는 건 힘든 일이었다.
"히든 특성 보유자를 어디서 구하라는 거냐?"
"설마 여러 종족이 함께 오르라는 건가?"
"1층도 인간과 드라이어드가 함께 클리어했다는 건데."
"으음, 입장 조건부터가 쉽지않군."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종족 전체를 뒤져서 고르고 고른 최정예가 아니라면 파티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판게니아의 모든 존재들이 '균열의 탑'에 관심을 가질 때.
"······ 저희도 움직이도록 하죠."
"여왕님. '결계'를 여시겠다는 말입니까?"
"예. 그전에 세계수의 인도에 따라, 바스락 숲의 하이 드라이어드와 자리를 가져봐야겠어요."
태초의 숲.
외부와 단절된 신비의 땅.
그곳의 엘프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균열의 탑 1층이 클리어되었습니다."
"모든 도전자는 강제로 퇴장됩니다."
락투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토룡의 목을 내리치던 그 순간, 갑자기 배경이 바뀐 탓이다.
'벌써 클리어했다고?'
도전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클러어됐단 말인가.
전투력이 낮아졌다한들 무적기는 그대로였을텐데.
한 번 부딪혀봤기에 확신할 수 있다.
전투력과는 별개로 군주 솔바렌을 잡는 건 무척이나 까다로운 일이라는 걸.
그런데, 레이드를 시작하자마자 얼마 안 있어 클리어 되어버렸다.
찝찝하기 그지 없는 결과.
게다가.
'쯧. 숨통을 완전하게 끊지 못했군.'
대토룡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지만, 숨이 멎는 것까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살아남긴 힘들 거다.'
허나, 그래봤자 생존은 불가하다.
흑천검에 당한 이상 재생할 수 없다.
게다가 목을 전부 쳐내지 못했을뿐, 반으로 갈라내어 치명상은 입혔다.
기껏해야 잠깐 숨 붙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때였다.
"마스터 녀석. 결국 아무런 도움도 안 됐군."
"음. 갑자기 튕겨나갈 줄이야."
탑의 입구로 속속들이 나타나는 흑왕의 측근들.
그들 역시도 지금 상황이 어이없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누가 클리어한 거지?"
"··· 백왕은 아니다. 레이드가 시작될 때 대토룡은 나와 대치하고 있었다."
다크엘프의 물음에, 락투샤가 답했다.
대토룡이라는 이름에 그들 전원이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오호라. 대토룡을? 죽였나?"
"흑천검에 치명상을 입었으니, 살아남긴 어려울 거다."
"죽은 걸 확인한 건 아니다?"
"······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걸 알텐데."
락투샤가 정색하자 다크엘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그렇다면 백왕 측 전력이 절반이 된 건가?"
"원래부터 주력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 목표는 오직 백왕뿐."
주력들이야 언제든 죽일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당연히 백왕이다.
백왕만 죽이면, 북부를 가진 것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오주력에 관해선 말할 필요가 없겠지.'
다만··· 락투샤는 오주력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토룡은 오주력이 백왕을 죽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시체 까마귀 주제에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살짝 거슬리긴 하지만, 대토룡이 자신을 흔들기 위해 지어낸 수작일 터.
"백왕 쪽이 아니라면 누굴까?"
"파티를 맺은 종족이 인간과 드라이어드라고 했다."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이로군."
모두가 1위 파티에 대한 정체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도중 락투샤가 말했다.
"60일 뒤에 2층이 열린다. 더 완벽하게 준비하고 공략해야 한다."
"하지만 필요한 인원이 5명이다. 한 명이 부족하지 않나."
"음, 한 명을 새로 구하기 전에는 도전할 수 없겠지. 그것도 반드시 '급'에 맞는 녀석으로 데려가야 할 텐데."
마스터 따위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급'이 맞는 완벽한 파티를 이룰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들 전원은 히든 특성의 보유자였다.
입장 자체는 어렵지 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2층에 입장하기 위한 조건은 두 개다.
5인을 이루는 파티 전원이 히든 특성을 보유할 것.
마스터가 죽어 4인이 된 이상 60일 뒤에 열린다 한들 즉시 도전할 수는 없다.
"그때쯤이면 '그릇'도 어느정도 안정화 되었겠지."
"아아, 녀석을 데려가면 되겠군."
그러나 이 또한 문제될 건 없었다.
딱 한명 기대되는 존재가 있었으니.
'절망의 그릇. 놈을 데려가면 2층은 확실히 클리어할 수 있겠지.'
락투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절망의 그릇이된 사왕을 데려간다면 2층 따윈 손쉽게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었기에.
*
나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클리어와 동시에 주어진 미칠 듯한 보상들.
재능을 올릴 수 있는 다량의 SP와 500시간 분량의 황금률의 조각, 업적 점수와 명예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앞선 보상들보다도 역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최대 레벨 2증가.'
12레벨까지 확장된 나의 레벨 한계선이다.
인간은 오직 10레벨까지만 올릴 수 있고, 그 이상의 강화를 위해선 별을 먹어 초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별을 먹지 않아도 12레벨까지 올릴 수 있다면 그 자체로 2성의 능력치를 갖게 되는 셈이었다.
'레벨이 정체되어 있는 자들은 신났겠군.'
별을 먹지 못하여 10레벨에 정체되어 있는 플레이어는 엄청나게 많다.
별의 개수는 정해져 있으니 조건을 만족해도 더 강해질 수 없었던 사람들.
그들 모두가 11레벨까지 순식간에 도달할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아닌 나였다.
'······ 언제 12레벨까지 올리지?'
이제 고작 8레벨.
이걸 올리는 데에도 수많은 역경을 헤쳐왔다.
경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니 12레벨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이다.
그래도 언젠가 닿을 수만 있다면······ 굴리고 있는 눈덩이는 더욱 커지 터.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레벨당 최대 능력치를 20% 더 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로써 2층의 클리어 경쟁은 훨씬 더 심해질 거다.'
확실한 건 60일 뒤 열리는 균열의 탑 2층의 경쟁이 더 심화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온갖 종족들과 강자들이 대거 참가하는 대격변의 시작되리라.
나 역시 미리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휘이이잉!
그때 돌연 빛줄기가 옆으로 쏟아졌다.
시선을 돌리자, 세렝게티의 몸이 빛나고 있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세렝게티도 놀라움에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쌓아둔 경험치가 터졌나 보군.'
세렝게티는 그럴 만한 경험을 쌓은 상태였다.
오랜시간 빌헬름의 최측근으로 지내며 온갖 경험을 섭렵했다.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새로운 별이 나타나지 않은 건, 그녀에게 맞는 별이 존재하지 않아서다.
별에도 상성이라는 게 있으니까.
나는 천천히 세렝게티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12Lv, ★]
···음?
잘못 봤나?
12레벨?
'단번에 2레벨이 올랐다.'
······ 쌓인 경험치가 좀 많았나 보다.
그래도 이건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12레벨에 도달할 만큼의 경험치가 쌓여있을 정도라면 진즉에 성각자가 나타났어야 했으니.
별의 상성을 따지는 것도 1레벨 수준이지 2레벨의 격차라면 억지로라도 맞는 별을 거머쥐어야 정상이었다.
최근들어 경험치를 축적했다면 또 모를까.
'마왕의 저주를 겪고 경험치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쌓인 건가?'
아.
그제야 조금 이해가 됐다.
마왕의 저주. 그 저주를 버티며 막대한 경험치가 쌓인 것이다.
가파른 세렝게티의 성장에 내가 다 흐뭇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후계자님."
레벨을 올려 들떠하던 세렝게티가, 한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거대한 용은 왜 저기 쓰러져있는 걸까요?"
"음."
안 그래도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다.
탑 밖으로 내보내졌다 한들, 이곳은 파티가 아니면 서로 만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멀지 않은 장소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용이 있었다.
'대토룡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백왕 산하의 주력 중 하나, 대토룡이.
멀지않은 곳에서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
포탈을 열어 미궁 도시로 향한 뒤, 성녀 세아가 대토룡을 치료했다.
기절한 대토룡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급한 상처를 치료해 당장 죽을 위기는 모면하였다.
이후 성으로 향하자, 허드슨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마중나왔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나, 허드슨?"
"큰일났습니다."
"큰일?"
다짜고짜 큰일이라니.
도시는 슬슬 외관이 갖춰지는 중이었다.
모든 게 성황리인 상황.
누가 공격이라도 해오는 게 아닌 이상에야 큰 일이라고 할 건 없었다.
꿀꺽!
허드슨이 침을 삼켰다.
"아이작이 기다리고있습니다."
"아이작이 돌아왔나?"
"예. 게다가 별을 먹고 초월한 상태입니다."
······?
잠깐.
집을 나간 게 아니라, 설마 별을 먹으러 간 거였나?
그런데 초월을 했다고?
'설마······.'
그럼 설마 아이작도 이자벨라처럼 기억을 떠올린 걸까?
하지만 아이작은 이자벨라와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게임사가 게임을 관리하는지 확인하고자 아이작 캐릭터로 저지른 수많은 악업들.
그것들 전부가 자신이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되면, 그 분노가 어디로 향하겠는가.
허드슨의 잔뜩 굳은 표정을 보건대, 어쩌면 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아이작이 돌아왔다고 큰일이 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자신을 움직인 게 나라는 걸 알았다면 이보다 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란돌프 님."
동시에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아이작.
그가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박현명 신상공개
무거운 목소리.
그 목소리만큼이나 잔뜩 굳어버린 표정.
하지만 눈빛에서 흐르는 분노만큼은 확실하게 읽혔다.
다짜고짜 나를 향해 쏟아내는 저 분노의 원인.
그 이유는 굳이 안 찾아봐도 훤했다.
[11Lv, ★]
······ 초월했으니까.
이자벨라처럼 초월하며 기억을 되찾은 게 분명하다.
게임의 캐릭터로 활용당하며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였던 기억을.
그리하여 저질렀던 무수한 악행들을 떠올린 것이다.
아이작이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 다짜고짜 왜 그랬냐고?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
단순히 육체를 빼앗긴 기억만이 아니라, 그 너머까지 알게 된 걸까?
내가 아이작을 움직였던 게이머임을 알아본 걸 수도 있었다.
초월하여 얻은 기억이 이자벨라보다 더 자세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아는지 나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무엇을 말이냐?"
하지만, 알아차렸다 한들 내가 손수 인정할 수는 없다.
인정하는 순간 그건 진실이 되고, 진실이 되면 결국 남은 건 파국뿐이었으니.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나 역시 단순한 게임이 아님을 알았다면 그렇게 플레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치미를 떼자 아이작의 표정이 더욱 살벌하게 변했다.
"제가 왜 이러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진짜 모르겠다.
초월하여 떠올린 기억 때문이라는 건 알겠는데.
게이머가 나라는 걸 알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초월한 것 때문이냐?"
하여 운을 던졌다.
그러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벨라를 통해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녀도, 저도, 숨겨진 기억이 존재한다는 걸······."
"그런 것 같더군."
"항상 궁금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란돌프 님께서 어떻게 크람델에 숨어있던 저를 찾아냈는지. 이자벨라와 마찬가지로 왜 굳이 저를 고용하려 한 것인지."
굳이 찾아내려고 찾아간 건 아니지만.
······ 이건 꽤 깊다.
깊게 들어왔다.
하나에 의문이 싹트자 모든 게 의아해진 것이리라.
이자벨라와 자신의 처지가 같다는 걸 알게 되며 나에 대한 의심을 시작한 것인지.
"란돌프 님은 처음 만남 때부터 저에 대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자벨라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성각자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진짜 성각자를 만나 보니 그 또한 거짓이었다는 게 확실해졌습니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이자벨라와 아이작을 만났을 때 나는 나를 성각자라 표현했다.
너희 둘에 대한 모든 걸 아는 건 내가 성각자이기 때문이라고.
너희가 숨겨둔 비밀을 알 수 있는 건 성각자라서 가능한 것이라고.
하지만, 진짜 성각자를 만나자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내뱉은 말들이 거짓임이 탄로 난 게다.
"글쎄, 데미갓 특성 던전에서 사실로 판명 난 이야기 아니었나?"
데미갓 특성 던전.
그곳 진실의 방에서 우리는 진실공방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분명히 내가 성각자가 맞느냐는 물음이 나타났고, 나는 긍정했다.
곧이어 데미갓 역시 진실로 받아들였다.
"예. 그래서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란돌프 님은······ '성각자'의 명부에 존재하지 않더군요."
성각자의 명부.
그런 것도 있던가?
그리고 그 명부를 아이작은 어떻게 보게 된 걸까.
"괜찮습니다. 성각자가 아닐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자벨라와 저는 같은 '신병'을 겪었습니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 저희를 고용하신 겁니까?"
신병.
이자벨라와 동명의 이름을 가진 데르시안 영애에게서 들었던 병의 이름이다.
그걸 아이작에게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대륙 전역에서 그 존재를 모르는 자가 훨씬 많은 병.
그 병을 겪은 둘을 내가 직접 고용했다.
이게 과연 우연이냐는 뜻이다.
"우연이다."
"'신병'에 걸린 자는 기억을 잃고 멋대로 몸을 조종당합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저는 이미 수많은 죄를 저지른 뒤였더군요. 그것도 모르고 전부 제가 한 짓인 줄 알고 그동안 얼마나······."
"아이작.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 왜 그러셨습니까?"
아까부터 묻는다.
왜 그랬냐고.
내가 거짓말을 한 이유를 묻는 건가?
자기 몸을 움직여 죄를 저지른 게 나냐고 묻는 거냐?
··· 불신의 눈초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나는 가만히 그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아이작이 이어서 감정을 담아 말했다.
"모든 걸 이미 알고 계셨으면서, 대체 왜······!"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이작은 내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확신하는 투였다.
둘이 신병을 겪은 걸 알고 있으며, 굳이 찾아가서 고용한 이유를 따져보자면 그건 내가 게이머여서라는 답밖에 안 나온다.
죄인. 이 둘을 조종한 플레이어.
그래서 이렇게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다짜고짜 검을 겨누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된 아이작의 말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왜 이자벨라를······ 데르시안 영애와 만나게 하셨습니까?"
······ 뭐?
*
데르시안 영애.
제국 경매에서 만난 그녀는, 내가 사신교의 간부인 걸 알곤 목숨을 구걸하고자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여 나는 그녀에게 살려주는 대신 몇 가지 요구를 했다.
데르시안 가문 내에 '신병'에 걸린 자에 대해 조사할 것.
이후 황금도시 아르카나에서 허드슨을 찾으라고 말이다.
'내가 균열의 탑에 오른 사이에 데르시안 영애가 허드슨을 찾아온 것이로군.'
시기가 묘하게 갈렸다.
하필이면 내가 탑에 오르고 있는 사이에 데르시안 영애가 허드슨을 찾은 모양.
게다가 가출한 줄 알았던 아이작 역시도 비슷한 시기에 돌아온 듯싶었다.
그 과정에서 이자벨라가 데르시안 영애를 만나버린 것이다.
같은 이름과 출신성분을 가진 두 여자가.
"이자벨라는 지금 어디 있지?"
"데르시안 가문으로 떠났습니다."
"데르시안 가문으로? 둘 다 말인가?"
"예."
아이작의 대답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이자벨라가 그곳으로 향하면,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가뜩이나 과거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던 이자벨라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확신하고 있을 텐데도 왜 굳이 데르시안으로 향한 걸까.
그때 아이작이 말했다.
"다시 찾아야 할 게 있다고 했습니다."
"되찾아야 할 것이라니?"
"저도 그게 정확히는 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떠나갔습니다."
그야 미치도록 괴로울 테다.
자신을 버린 곳을, 자신을 대체한 여자와 함께 간다는 게.
그러면서까지 되찾아야 할 게 무엇인지는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막 사막여왕의 자리를 탈환하지 않았던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의미다.
"그럼 아이작, 그대는? 이자벨라와 마찬가지로 기억을 떠올렸다면 이곳에 있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계약 기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단순히 그런 이유로? 나를 의심하던 것 아닌가?"
"······ 란돌프 님은 저를 세상 밖으로 꺼내주시고, 악업을 지워주신 은인입니다. 한 번도 의심은 한 적 없습니다. 그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며, 내가 '신병'에 걸린 너희 둘을 고용하고, 성각자가 아님에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게 좋다.
어중간하게 뭉갰다간 결국 의심이 폭탄이 되어 터질 뿐이었다.
그러자 아이작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성각자가 말하길, 란돌프 님은 정식의 성각자는 아니지만, 그 이상의 존재인 '별을 인도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별을 인도하는 자'라."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는 감정이 격해져서······."
"괘념치 않는다."
믿음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도리어 아예 더욱 큰 믿음을 갖게 됐다.
아이작이 화가 난 것은 이자벨라와 데르시안 영애의 만남을 내가 주선했다고 생각해서다.
가뜩이나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이자벨라, 아아작이 '무척이나 괴로워 보인다'고 말할 정도로 표정에 드러냈다면, 심장이 에일만큼 고통스럽다는 의미일 터.
그걸 옆에서 지켜봤으니 화가 날 만하였다.
아이작이 마저 말했다.
"게다가··· 이자벨라는 자신을 조종하던 자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건 다른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
초월하며 보게 되는 건 단순한 기억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이자벨라는 지구에서의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아이작은.
"··· 저는 그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박현명······ 그 세글자를 말입니다."
쿵!
동시에 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
'······ 초월하면 게이머의 정보를 하나씩 알게 된다.'
아이작은 자신을 조종한 자가 '박현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걸 알게 됐다.
이자벨라도 지구에서의 내 얼굴을 보았으니, 나에 대한 신상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는 셈.
지금은 지구 한정이지만, 나중에는 판게니아의 란돌프가 곧 박현명임을 알아차리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이미 어느 정도는 파악됐을 수도 있었다.
'제국에도 내 캐릭이 있었지.'
사신교에서 은빛 여우 가면을 쓴 녀석.
아마도 '뇌신강림'으로 추정되는 캐릭터가 제국에 있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들이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면 진실에 다다르는 건 순식간이리라.
'사신교는 신병에 걸린 자들을 모으고 있다. 그들을 초월시켜, 게이머를 찾아내기 위해서.'
천천히 턱을 쓸었다.
사신교가 '신병' 들린 자들을 찾아내 입교시킨 뒤 초월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싶었다.
게이머의 판게니아 아바타를 찾아내, 단죄라도 하려는 건지.
뭐가 됐든, 내가 해야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을 정도로 더 강해져야 한다.'
빌헬름보다도 더.
빌헬름의 수준에 만족하면 진정한 끝을 볼 수 없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완전무결하게 올라서려면 빌헬름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아니, 단순히 뛰어넘는 수준이 아니라, 압도할 만큼 더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나는 '황금률 상점'을 열었다.
"'황금률 상점'이 갱신되었습니다."
"현재 사용자 '란돌프'가 지닌 황금률 조각은 3,160h입니다."
3,160시간!
황금률의 조각이 미친 듯이 뻥튀기되었다.
천 단위의 조각을 가져본 적은 있어도, 3천 시간이 넘는 건 처음이다.
아무리 군주 솔바렌을 압도적으로 클리어했다 한들 이 수량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걸 가능케 해준 존재가 한 명 있었다.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당신을 정식 구독합니다."
"'란돌프'의 정식 구독료로 100일에 '황금률의 조각(700h)'이 책정되었습니다."
"지불이 완료되었습니다."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란돌프'의 첫 구독을 시작합니다."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이야기의 독점'에 관한 계약을 제안합니다."
"계약에 응하면 '란돌프'의 이야기는 오직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만이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추가적인 후원이 지원될 예정입니다."
"이 계약은 '지고한 겨울'로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처음 보는 종류의 계약.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
그가 직접 제안을 해 온 것이다.
허나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 '찬란한 영웅의 성좌'였던 그는, 존재력을 잃고 지고한 유일급의 보물을 남겼다.
자신의 모든 존재력을 쏟아부어 길을 안내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멸한 줄 알았건만, 다시 나타나선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되어 나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후 이렇듯 계약마저 걸어오며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전의 그 성좌인지 아닌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군.'
하지만 계약은 완전하게 성사되지 않았다.
물론, 계약의 조건은 입이 벌어질 만큼 엄청났다.
당장 수락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그러나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과연 내가 아는 그 성좌인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다.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거래에 응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엄청난 분량의 황금률 조각을 거리낌 없이 내놓은 것이다.
단순히 '구독료'라는 이름으로.
'구독이라. 존재력을 잃지 않고 나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기능 같은 건가?'
100일에 황금률의 조각 700시간.
하루에 7시간 꼴이다.
다른 성좌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수량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이전보다 확실하게 격이 달라진 모습.
'그냥 준다는 것마저 안 받을 수는 없으니.'
작게 웃고 말았다.
의심은 되지만 단순 구독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준다는 걸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쇼핑 타임이로군.'
어찌 됐든 쇼핑은 즐거운 법이니까.
이만한 조각의 수량이라면, 그야말로 살 수 없는 게 없을 테니!
진리 탐구, 차원 이해력
목 잘린 자의 별.
그것을 얻고, 초월한 순간, 아이작은 보았다.
오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기억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을 말이다.
마치 인형처럼, 꼭두각시가 된 양 거리낌 없이 온갖 짓을 일삼는 장면을 여과 없이 모두 눈에 담게 되었다.
'영락없이 내가 저지른 짓인 줄 알았다.'
아이작은 중간 몇 년간의 기억이 없다.
그저 다시 눈을 떴을 때, 다른 누군가로부터 자신이 행했던 일들을 들었을 따름이다.
처음에는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열 명이, 백 명이 같은 소리를 한다면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또한 갑자기 길을 지나다 암습을 당하질 않나,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듯이 원망을 쏟아내질 않나······.
결국 아이작은 그것들을 모두 '내가 했다'고 인정하며, 끊임없이 도망친 끝에 크람델에 도달한 것이다.
'사실은 내가 저지른 게 아니었다니.'
하여, 처음 느낀 감정은 '안도'였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 정말 조종당해서 저지른 짓이었다면, 동정의 여지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안도감은 다시 분노로 바뀌었다.
-박현명. 박현명···. 박현명······.
마치 메아리처럼 조종한 자의 이름이 들렸다.
박현명. 아이작은 그 세 글자를 머릿속에 꾹꾹 눌러담았다.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
'반드시 목을 그어주마.'
복수하기 위해.
이어 성각자를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죄인이라 불리는 플레이어와, 그들이 이 세계의 주민들에게 빙의하여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작도 그 '신병'이 걸린 자 중 한 명이기에 플레이어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라고 하였다.
-그대를 조종한 이세계의 존재는 아직 판게니아에 남아있다. 다른 누군가의 몸으로, 그대가 겪은 일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나를 조종한 놈이 다른 인간을 조종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정말 빌어먹을 놈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만약 '조종자'가 다른 인간을 조종하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잃었던 몇 년간의 기억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누구도 모르는, 모를 수밖에 없는 것들까지 상세하게.
'크람델에 있었던 나를 찾아내고, 내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위치와 정체, 과거까지 모든 걸 알고 있던 사람이 딱 한 명 있기는 있었다.
만약 그가 '조종자'라면 이 모든 이해에 일치한다.
'······ 란돌프 님.'
바로 란돌프.
자신을 찾아 1년간 고용한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스스로를 성각자라 칭했으며, 그 말마따나 그가 가는 곳엔 길이 생겼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듯이 그가 가는 모든 곳에 해답이 존재했다.
크람델 신비의 탑에서 만들어낸 불가해한 신화의 업적과 이후 일어난 수많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과업들.
왜 자신을 고용했는지 의아할 만큼 그는 세상에 맞서 홀로 포효하고 있었다.
-란돌프? 성각자 명부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이후 성각자는 '성각자 명부'를 보여주며, 란돌프의 말이 거짓임을 입증했다.
란돌프는 성각자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속인 것이다.
다만.
-허나 그대가 말하는 '란돌프'가 '별의 인도자'라면, '성각자'인 우리들보다 한 단계 위의 존재다. 그는 모든 '별'을 인도하는 인도자니까.
성각자가 아닌 별의 인도자라고 말했다.
'별의 인도자라는 말이 생소해서 성각자라고 표현한 건가?'
그럴 수도 있다.
만약 첫 만남에서 '별의 인도자'라 말했다면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을 거다.
-'별의 인도자'는 모든 '별'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 '별'의 안에 그대의 이야기가 섞여 있었을 수도 있지.
정말로 그런 걸까.
하긴, 란돌프가 '조종자'일 리가, '죄인'일 리가 없지 않은가.
란돌프는 죄인이 아니다. 죄인일 수 없다.
그가 판게니아를 대하는 태도는 진짜였다.
그래서 아이작은 납득했다.
그가 보여주는 기행들과 과업은 입이 벌어질 만큼 엄청나지만, 또한 그가 자신에게 베푼 '선의'가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란돌프 님은 나를 크람델 밖으로 꺼내주셨지.'
당시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괴물들과 섞여 사는 삶.
자신이 인간임이 들통나면 그 즉시 죽고야 마는 절벽 위의 삶이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곳에서 란돌프는 자신을 꺼내 주기만 한 게 아니라 '악업'을 지워주며 정상인의 인생을 살게 해주었다.
만약 란돌프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크람델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
'란돌프 님은 내게 있어 반드시 보은해야 할 은인이다.'
그래. 그러니까 란돌프는 절대로 조종자가 아니다.
절대로, 절대로 '죄인'일 수 없다.
자신이 증오해야 할 대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곳에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터.
'반드시 찾아내 주마, 빌어먹을 조종자여.'
아이작이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
"사용할 수 있는 황금률의 조각이 3,160h만큼 존재합니다."
"'온전한 황금률'로 이하 목록의 물건 중 하나와 교환할 수 있습니다."
"명예의 전당 1위의 특전으로 10개의 목록이 보장됩니다."
"갱신된 목록이 떠오릅니다."
······.
"알케미스트 특제 '거인의 물약' 200h (잔여 수량 : 1개)"
"변질된 신앙자의 탈리스만 500h (잔여 수량 : 1개)"
"충뇌술사의 벌레채집기 300h (잔여 수량 : 1개)"
"백왕의 이빨 1,000h (잔여 수량 : 1개)"
"용신의 닳고 닳은 염원구슬 1,500h (잔여 수량 : 1개)"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 600h (잔여 수량 : 1개)"
"'거인의 성휘' 신비 500h (잔여 수량 : 1개)"
"부패한 결정 500h (잔여 수량 : 3개)"
"영광의 휘석 500h (잔여 수량 : 2개)"
"미친 발톱 자국의 핵 100h (잔여 수량 : 2개)"
도합 열 개의 목록.
그것을 보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와 검은 팔라딘, 충뇌술사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 하나씩 떠 있었으니까.
'거인의 물약. 마스터를 거인화시킨 게 저건가 보군.'
나도 처음 보는 물건이다.
마스터의 숨겨진 비기가 바로 저것인 듯싶었다.
변질된 신앙자의 탈리스만은 대충 보아도 나와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다.
아예 신앙이 없는 내가 저 탈리스만을 사용한들 효과가 나올 리 없었으므로.
'벌레채집기. 충뇌화 할 수 있는 벌레를 채집하는 물건인가?'
마찬가지로 벌레를 다루는 직업이 아니면 그다지 흥미가 가는 물건은 아니었다.
'백왕의 이빨은 그대로고.'
갱신된 상점에 여전히 떠 있었다.
이걸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아직도 고민이었다.
대토룡의 상처를 보건대 거대한 검에 당한 것이다.
검기. 어쩌면 그것을 넘어선 검강에.
그를 이토록 몰아붙일 수 있는 검의 대가로 당장 떠오르는 건 락투샤 하나뿐이었다.
'흑왕을 견제할 수 있는 건 백왕뿐이니.'
사왕과 대토룡이 당한 지금.
다음 대상은 오주력인 나일 수도 있었다.
아직 나 혼자 흑왕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흑왕의 세력을 견제하려면 백왕이 필연적으로 강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짜로 줄 수는 없지 않은가?
"흐음."
그 밑의 물건들 역시 하나하나가 쓸모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한참의 고민 끝에 구매할 물건들을 선택했다.
"알케미스트 특제 '거인의 물약'을 200h에 구매했습니다."
"'용신의 닳고 닳은 염원구슬'을 1,500h에 구매했습니다."
"미친 발톱 자국의 핵 2개를 200h에 구매했습니다."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를 600h에 구매했습니다."
"남은 황금률의 조각은 660h입니다."
일단 여기까지.
도합 네 종류의 물건을 구입했다.
온전한 황금률을 사용하면 두 종의 물건을 더 구입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사용해서까지 구매하고 싶은 물건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거인화. 제법 흥미로웠지.'
마스터의 거인화는 상당히 흥미가 있었다.
이 물약으로 거인화를 하거나, 혹은 제조한 알케미스트를 알아낼 수 있다면 본전 이상의 값어치는 보장된 셈.
'염원구슬은 랭커의 필수템 중 하나다.'
또한, 염원구슬은 랭커라면 하나씩은 갖춰야 할 도구였다.
하물며 '용신'이라 이름 붙은 염원구슬.
닳고 닳았긴 했지만 충전만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다방면으로 유용할 터.
'미친 발톱자국의 핵. 히드라곤을 특수하게 진화시키는 핵.'
이동수단인 히드라곤도 슬슬 챙겨줄 때가 됐다.
내가 강해지는 것만큼이나 히드라곤 역시 강화되어야 더 고레벨의 사냥터에서 활보할 수 있을 것이니.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 앤드류의 딸 안다사르에겐 결국 이게 필요하다.'
앤드류가 탑을 오른 이유.
그가 없었다면, 군주 솔바렌의 공략은 단언컨대 불가능했다.
그는 계시를 읽었고 덕분에 레이드를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탑을 올라야만 했던 이유를 나는 이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왕에 의해 듀라한이 된 앤드류의 딸 안다사르는, 현재 무척이나 불안정한 상태.
그녀를 안정화시키려면 결국 다시 이 흑마법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다. 다시 흑마법서에 사로잡히진 않을 거야.'
무한정 복사되는 면죄부와 내가 가진 별의 축복이 존재하는 한, 예전처럼 흑마법서에 사로잡혀 무차별한 학살을 벌이진 않으리라.
하여튼 간에.
'황금률 상점은 이만하면 됐다. 남은 건 SP 사용과 업적 상점인데.'
1층을 클리어하며 얻은 SP는 7만여 가량.
이걸 전부 재능에 쏟아부으면 새로 개화한 재능 하나쯤은 맥스 레벨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업적점수 3,000점 또한 '수호벽'의 레벨을 올리는 등 쓸 수 있는 곳은 많았다.
'······ 생각해보니 비밀경매장에 올려둔 물건도 있었지.'
아.
워낙에 급박해 잠시 잊고 있었다.
탑을 오르기 전에 비밀 경매장에 올려둔 '불멸의 워프석'이 하나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안정적인 도시 재정을 위해 급전을 구할 생각으로 올려둔 그것 말이다.
"비밀경매장에 입장합니다."
"현재 판매된 물건이 한 가지 존재합니다."
"'불멸의 워프석'이 '????'에게 500,000,000G에 판매되었습니다."
"······?"
잠깐. 5억 골드?
예상을 훨씬 웃도는 금액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기껏해야 1억 골드 정도를 생각했건만.
'아무리 희귀해도 도시당 하나밖에 설치할 수 없는 건데.'
비밀경매장에선 판매하는 아이템의 설명이나 옵션 따위를 전부 보여준다.
그것을 봤다면, 5억 골드의 값어치까진 하지 않는다는 걸 알 것이었다.
대체 누가 산 걸까?
그때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구매자'가 남겨둔 메모가 존재합니다."
"'불멸의 워프석'을 3개 더 구매하고 싶소. 20억 골드에. 하지만 직접 만나서 거래하고 싶군. 판매를 희망한다면 '아슬란 상회'에서 '아슬란'을 찾으시오."
······ 아슬란 상회라.
대륙 3대 상회 중 하나다.
대륙의 경제를 휘어잡은 거대 상단이며 웬만한 왕국 뺨치는 전력을 갖춘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집단이었다.
그곳의 아슬란이면, 당연히 상단주의 이름이고.
'3개를 20억 골드에 사고 싶다. 직접 만나서.'
개당 5억 골드 이상을 쳐주겠다는 것이다.
20억 골드면 번성한 도시를 살 수 있는 금액이다.
내가 제국 경매에서 사용한 골드보다도 많았다.
하지만 의도가 걸린다.
직접 만나야 하는 이유.
······ 아슬란. 네임드 엔피시.
그는 플레이어가 확실하게 아니다.
다만, 판게니아에서 최소 수백 년을 살아온 인간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아르혼 제국의 건립과도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고.
'···· 아슬란은 플레이어와 함께하고 있다.'
아슬란은 플레이어가 아니지만, 비밀경매장은 플레이어만 이용할 수 있다.
말인즉슨, 아슬란은 플레이어를 이용할 줄 아는 자다.
죄인이라 불리며 금기시되는 자들을 몰래 다루고 있다.
아마도 플레이어의 특혜 등을 모조리 섭렵하고 있을 터.
잠깐의 고민.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시기상조다.'
3대 상회는 아직 건드리기 위험하다.
특히 아슬란 상회의 이명 중 하나가 '도시 사냥꾼'이다.
거기에 플레이어까지 다룰 줄 안다면 위험도는 더 커진다.
미궁 도시가 더 번성한 뒤라면 모를까, 지금 접선하는 건 여러모로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슬란이라.
이건 쓰기에 따라 후에 좋은 카드가 하나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천천히 나머지 작업을 이행했다.
"재능 '진리 탐구'의 레벨이 3으로 상승합니다."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히든 특성 '대현자'의 기능이 추가됩니다."
"재능 '차원 이해력'의 레벨이 3으로 상승합니다."
"입장할 수 없는 곳에 입장이 가능해졌습니다."
"펫 '헬'의 레벨이 1 상승합니다."
*
지옥 군주 이세라.
그는 마족들과 함께 2차 침공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다.
이세계를 침략할 워프도 완성된 상태.
멍청한 아흐람 따위 같은 실수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중이었다.
"······ 신기한 인간이로군. 너 정도의 인간이 내게 고개를 숙이다니."
그때, 웬 인간 한 명이 자신을 찾아왔다.
강자. 이세라가 감탄할 정도의 고수.
하지만 인간 중에 이런 자가 있던가?
이 정도 강자라면 이름은 들어봤을 법도 한데.
그것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최소 수백 년을 살아온 인간이다.
한데 처음 듣고, 처음 보는 이가 갑자기 이세라의 수하를 자처해온 것이다.
"나도 함께 '이세계'로 건너가게 해다오. 저 '침략의 워프'라면 가능할 테니."
"넘어가서? 뭘 할 작정이냐?"
"복수."
"복수?"
"죄인들을 쓸어버릴 거다."
이세라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걸 가능케 해준다면 너는 내게 무엇을 바칠 거지?"
"전부!"
"영혼까지 말이냐?"
"영혼, 그 이상까지 바치마."
"그럼 말투부터 고쳐야겠군."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아르혼 제국의 첫 황궁마법사이자 '황금률의 마법사'라 불렸던 '유니온'이 지옥군주 이세라 님께 모든 걸 바칩니다. 부디 저의 복수를 이행케 해주십시오."
아빠?
"······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앤드류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건넨 물건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엘드리치의 흑마법서.
과거, 그의 딸 안다사르를 '엘드리치'로 만든 물건이니까.
'빌헬름 캐릭터로 직접 정화작업을 벌였지.'
판게니아를 그저 게임으로 알았을 게이머 시절.
앤드류는 훌륭한 '명예 작업 퀘스트'를 주는 NPC였다.
앤드류의 퀘스트를 끝없이 진행하여 호감도를 끝까지 쌓으면 '엘드리치 정화'의 숨겨진 퀘스트를 주었는데, 그 엘드리치가 바로 자신의 딸 안다사르였던 것이다.
여신교 정규 사제의 딸이 리치라니.
발각 즉시 파문일 정도의 대사건이다.
하여, 앤드류는 자신의 비밀을 지켜줄 명예로운 자가 필요했다.
명예를 아는 자.
명예와 관련된 모든 퀘스트를 마무리 지은 자만이 닿을 수 있는 임무.
'하지만 정화작업 후 안다사르는 앤드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정화된 안다사르가 향한 곳은 크람델이다.
정화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언데드 상태였지만.
결국, 안다사르는 사왕에게 발견되어 듀라한이 됐다.
그 후 시간이 흘러 크람델에서 내가 망자왕 아흐람을 긴고아에 봉인하고, 듀라한이 된 안다사르를 앤드류의 품에 안기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앤드류. 안다사르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한 걸 알고 있다. 그대가 탑을 오른 이유 역시도 이걸 구하기 위해서였겠지."
"······."
문제는 안다사르의 상태.
사왕에게 문제가 생겨서일까?
급격하게 안다사르의 기운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그나마 남은 이지마저 잃어버린 채 평범한 언데드 괴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앤드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정말 맞는 방법일까요, 후계자님?"
"이미 한 번 겪었으니 어느 정도 내성은 있을 거다. 흑마법서에 쉽게 잡아먹히진 않겠지."
"설혹 성공한다 한들······ 결국 다시 엘드리치가 되는 거 아닙니까?"
"앤드류. ··· 듀라한보단 엘드리치가 낫다."
진지한 조언이었다.
목 잘린 듀라한.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만큼 지능이 낮다.
차라리 엘드리치가 되면, 높아진 지능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전부 찾을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대화는 될 테니.
예전처럼 흑마법서에 잡아먹히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보다 나와 그대가 있지 않나. 어떤 불의의 사태에도 대비할 수 있는."
"모, 모르겠습니다. 이게 정말 딸을 위한 일인지."
"······ 이건 딸을 위한 일이 아니다. 오로지 너 자신을 위한 일이다. 앤드류."
하지만, 정확히 짚고 가야 할 건 짚고 가야겠다.
나는 재차 앤드류의 떨리는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의 딸은 언데드가 됐다. 생명을 잃고, 죽은 상태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계속 질질 끌고 있는 건 전부 그대의 의지다. 그대의 욕심이고, 그대의 만용이다."
인간이었던 안다사르는 이미 죽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옆에 두고자 하는 건 오직 앤드류의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앤드류.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 그, 그건······."
앤드류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기야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것 자체가 처음일 것이다.
그는 언데드가 된 자신의 딸을 극구 숨기고 있었으니까.
이곳 '기사의 정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다사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나를 포함한 극소수뿐.
그야 죽은 딸에 대한 미련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언데드가 된 딸을 끝내 못 놓아주고 있는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 앤드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반드시 전해줘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딸의 어미와 관련된. 그걸 못 전해준 채로,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상태로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또 다른 이유가 확실히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안다사르는 현재 기억을 잃었다.
지금 전해줘봤자 의미가 없기에 기억을 떠올릴 때까지 옆에 두었던 게다.
내가 귀를 기울이자, 앤드류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다사르의 친모는 인간이 아닙니다. ······ 엘프지요."
"그대가 친부 아닌가?"
"예, 맞습니다."
"그럼······ 하프엘프?"
생긴 건 영락없이 인간이었건만.
나도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태초의 숲에 기거하는 엘프들.
그들은 극단적으로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간다.
엘프의 피가 다른 종족과 섞이는 걸 금기시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안다사르를 낳았단 말인가.
'금기란 금기는 모조리 저지르는 불법 사제였군.'
······ 앤드류.
여신교의 정규 사제이자 상급 사제.
청렴하며 믿음이 강한 인간만 이룰 수 있다는 그 자리에 올라선 사람치곤 저지른 금기가 너무 많지 않나.
게다가 이제는 면죄부까지 무한으로 복사할 수 있다.
여신교 본단에서 알게 되면 경을 칠 일.
앤드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친모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게 후회되나?"
"예. 안다사르는······ 계속해서 친모를 궁금해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알려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태초의 숲으로 돌아갔으니."
하지만 밝힐 수가 없었다.
죽었다고 하는 수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태초의 숲으로 돌아간 엘프를, 어찌하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태초의 숲은 인간의 피가 섞인 하프엘프를 절대로 받아주지 않을 터.
"기억만 되돌아오면, 그 사실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 안다사르를 듀라한으로 만든 자의 상황이 불확실해졌다. 제대로 된 마력 공급이 되지 않아서 불안정해진 거다."
"크람델의 사왕 말입니까?"
안다사르를 데려올 때 이미 전해준 사실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죽었거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 직면해있는 것 같다."
"사왕이나 되는 자가······."
"그러니 지금 안다사르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는 건 엘드리치의 흑마법서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 설령 그렇다 해도, 제가 어떻게 그걸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앤드류. 그대가 없었다면 어차피 탑도 클리어 못했을 거다. 게다가."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앤드류. 그에게 족쇄를 씌우는 건 전혀 아깝지 않다.
앤드류만이 아니다.
"안다사르는 미궁 도시의 훌륭한 수호자가 될 거다."
"······ 예?"
"엘드리치를 이곳에 숨겨두면 안 들킬 것 같나?"
"아니······."
"어차피 이 도시와 워프도 연결됐으니, 언제든 보러올 수 있을 터. 내가 생각해도 이만한 선택지는 없는 것 같군."
"그게······ 예?"
*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것뿐.
"'엘드리치의 흑마법서'가 '안다사르'를 잠식합니다."
아아아아아!
조용히 죽어가던 안다사르에게 흑마법서를 쥐여 주자, 예전과 같은 잠식이 일어났다.
흑마법서가 펼쳐지며 그곳에 적힌 수많은 글자들이 안다사르에게 빨려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라면 버티지 못하고 흑마법서에 완전잠식 당해야 정상일 터이나.
"'면죄부'가 '안다사르'의 악업을 정화합니다!"
"'면죄부'가 '안다사르'의 악업을 정화합니다!"
"'면죄부'가 '안다사르'의 악업을 정화합니다!"
"'면죄부'가 '안다사르'의 악업을 정화합니다!"
면죄부는 악업을 지운다.
엘드리치의 흑마법서는 강제로 잠식하는 대상자의 악업을 키워 '카오' 상태로 만든 뒤 의지를 빼앗는 책.
이 역시 앤드류 사제의 면죄부 무한 복사는 당해낼 수 없다.
하지만, 면죄부의 악업 지우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안다사르'의 '한계저주'가 '별의 축복'으로 무효화됩니다."
별의 축복!
별의 계승자가 되며 얻은 메인 스킬 중 하나.
별 할퀴기와 함께, 상대의 '한계 저주'를 지워내는 축복 스킬이다.
한계 저주란 말 그대로 '한계'를 두는 저주를 뜻한다.
사막여왕이 이자벨라에게 걸었던 '워프 이용 불가'의 저주나, 세렝게티를 영원히 잠들토록 할뻔했던 '마왕의 저주'가 그러하다.
이 역시 마찬가지.
다만, 만능은 아니라 '별의 축복'을 사용할 수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있는데, 다행히 지금은 전자의 경우였다.
모든 한계와 악업을 지운 안다사르를 잠식하긴 쉽지 않으리라.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가 안다사르에게 흡수되기 시작합니다."
"흡수를 완료했습니다!"
"'듀라한 안다사르'가 '아크 리치'로 진화합니다!"
······ 음?
나타난 결과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크 리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데미 리치, 마스터 리치는 들어봤어도 아크 리치라니.
그것도 아크(Arch)가 아니라 아크(Ark)다.
노아의 방주의 이름이 바로 아크(Ark)였다.
하지만 리치의 이름 앞에 붙을 종류의 것은 아니지 않나.
리치가 되면 필연적으로 악업이 쌓여, 성스러운 방주를 뜻하는 '아크'와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설마 별의 축복과 앤드류의 무한 면죄부가 이런 변화를 만든걸까?
"아······."
앤드류가 두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서서히, 안다사르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떨어진 목이 붙고, 창백하던 피부에 조금씩 생기가 일어나고 있다.
"안다사르······!"
생전 안다사르의 모습 그대로 변하자, 앤드류가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곤 재빨리 달려가 안다사르를 안았다.
이윽고 앤드류의 품에 안긴 안다사르가 눈을 떴다.
"아··· 빠?"
"나, 나를 알아 보겠니? 아아,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긴······ 어디에요?"
"아빠의 집이란다. 이제 괜찮은거니? 오오, 맙소사!"
영락없는 죽은 자의 소생이다.
그렇게 둘은 한참이나 해후를 나눴다.
하지만, 나는 앤드류처럼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Lv. 12]
순식간에 12레벨로 격상한 안다사르는 이미 평범한 인간이라 할 수 없는 탓이다.
물론 단순히 레벨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고종이자 고요한 요람의 주인인 '아크 리치'는 생전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전의 기억을 갖고만 있을뿐 진정한 생전의 인간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크 리치'는 인간의 기억을 가진 리치일 뿐이며, 인간을 연기할 수는 있으나 감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크 리치'가 존재하는 주변영역은 '고요한 요람' 특성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정기를 흡수하지 못할시 형태를 잃고 폭주합니다.]
······ 그녀에 대한 설명이 계속해서 보인다.
'진리탐구로 대현자의 기능이 추가됐다는 게 이건가보군.'
재능, 진리탐구.
필요한 포인트가 막대하여 3레벨까지밖에 못 올렸다.
그런데도 히든 특성 '대현자'에 기능이 추가됐다고 하였다.
그게 이건가보다.
그나저나 지고종에, 고요한 요람의 주인이라.
예사롭지 않은 설명.
곧이어 또 다른 문장들이 추가됐다.
['아크 리치'의 종족특성은 3~6개 사이의 무작위 히든 특성을 지니며, 최대레벨은 15입니다. 생전의 재능에 따라 관련된 '대마법사'의 클래스와 함께 모든 속성에 50% 면역을 갖습니다. 만약 '아크 리치'의 마스터가 '아크 리치'보다 약하다면, '종속'의 관계가 뒤바뀝니다.]
[현재 '아크 리치'의 마스터는 '란돌프'입니다.]
쿨럭!
이어진 설명을 보곤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진짜로 괴물이 따로 없었다.
살벌한 재능에 영역 특성까지.
히든 특성도 다수 지닌 데다, 최대 레벨이 말이 안 되는 수준이다.
클래스도, 속성 면역도,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
'······ 미쳤군.'
그 모든걸 확인하곤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체다.
어디 하나 모난 곳 없는, 심지어 미래까지 확실하게 보장되어있는 절대 완전체!
투자한 보람 이상이다.
미궁 도시의 수호자로 이보다 더 적합한 존재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나를 마스터로 인식하고 있다.'
무엇보다 안다사르는 정상적으로 나를 마스터로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식은땀이 절로 나는 순간이었다.
만약 지금이 아니라 예전 황금률 상점을 막 열었을 때 안다사르를 아크 리치로 만들었다면, 영락없이 내가 종속될 뻔했으니까.
"······ 감사합니다, 란돌프 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할지요! 아아아!"
첫 번째 설명을 봐서인지.
차마 저 아크리치가 안다사르를 연기하는 리치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저토록 기뻐하는데 찬물을 끼얹을 수가 있겠나.
그냥 묵묵히 들어만 줄 따름이었다.
그러길 오분여 즈음.
"후, 후계자님! 빨리 오셔야할 것 같습니다!"
바깥에서 급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등을 돌려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다.
"······ 무슨 일이냐, 허드슨?"
문을 열자, 허드슨이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와이저 후작의 성에서 세렝게티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할 허드슨이 왜 이곳에?
이윽고 내 앞까지 미친듯이 달려온 허드슨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
큰일이라니.
아이작을 해결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큰일이란 말인가.
허드슨의 큰일이라는 저 소리가 이젠 호환마마보다 무서울 지경이다.
내가 표정을 굳히며 바라보자 허드슨이 더욱 다급하게 외쳤다.
"에, 엘프 장로가 찾아왔습니다! 지금 후계자님을 데려가려고 워프 앞에 모여있습니다······!"
············ 잠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엘프 장로가 뭐?
나를 찾아왔다고?
월계수 엘프 아우릴
엘프.
판게니아에서 가장 신비한 종족이라 불리는 게 바로 그들이다.
어쩌면 제국의 황족들보다도 더욱 폐쇄적이며, 은밀하기에 엘프에 대한 정보 역시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게이머 중에선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루고, 달성했다 생각하는 나조차도 엘프와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을 정도였으니.
'엘프 장로가 왜 나를?'
당연히 의아할 수밖에.
바깥으로 나오는 일 자체가 없는 그들이 지금 이곳에 있다는 소리다.
심지어 워프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과 엮일 일이 없다.
'엘프족의 장로라······.'
특히 엘프족의 장로와 엮일 일은 더더욱 없었다.
장로. 한 마을을 대표하는 장이다.
하지만 엘프는 마을 단위가 아닌 '태초의 숲'에만 뿌리를 내렸기에, 그곳의 장로라 하면 태초의 숲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력자라는 말이었다.
그 정도의 지위를 가진 자가, 숲을 벗어나 혐오하는 인간의 도시로 왔다.
그것도 나를 만나기 위해서.
대체 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말 안 하던가?"
도저히 감이 안 잡혀서 묻자 허드슨이 답했다.
"바스락 숲을 언급하긴 했습니다. 바스락 숲에 있는 신록의 진짜 주인과 만나겠다고요."
"바스락 숲이라면 롬멜이 있을 텐데."
"롬멜이 신록의 주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흠."
천천히 턱을 쓸었다.
신록의 진짜 주인이 나라는 걸 알고 찾으러 왔다는 뜻이다.
이미 한 번 바스락 숲에 다녀왔다는 의미고.
"엄청난 기세였습니다. 세렝게티도 한발 뒤로 물러날 정도로."
"······ 세렝게티가?"
"예."
이건 조금 의외였다.
지금 세렝게티의 무력은 압도적이다.
12레벨에 1성을 달성했으니, 인간계에선 적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세렝게티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도시는 여전히 고요하다.
적어도 무력을 사용해 부딪히고 있지는 않다는 말.
"마스터. 적인가요?"
그때였다.
앤드류의 품에 안겨있던 안다사르가 나를 향해 말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슬픈 눈과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오뉴월의 눈보라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순식간에 돌변한 태도.
연기라면 정말 엄청난 수준이다.
감정 없는 인형. 고요한 요람의 주인, 아크 리치 안다사르.
"아크리치 '안다사르'가 '고요한 요람'의 적용을 요청합니다."
"'고요한 요람'을 '기사의 정원'에 적용하시겠습니까?"
"적용할 경우 안다사르가 '고요한 요람'을 이곳에 만들어냅니다."
"'고요한 요람'은 요람에 있는 자들의 정기를 빨아들이며, 안다사르를 강화합니다. 요람에 있을시 안다사르는 '고대종'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돌연히 그녀가 전투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고요한 요람.
그건 안다사르 고유의 영역 스킬이었다.
그 안에선 '고대종'의 모습으로 변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렝게티, 아이작, 안다사르, 그리고 나까지.
작은 소도시쯤은 간단하게 먹어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이만한 전력이라면 만에 하나의 사태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적은 아닌 것 같군."
적대하며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도시가 조용하진 않았을 테니까.
세렝게티도 그냥 한발 물러나기만 했을 뿐이다.
만약 엘프에게 적의가 있었다면 세렝게티부터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자 지켜야 할 장소이므로.
허드슨이 숨을 진정시킨 뒤 물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일단 만나보도록 하지."
"후, 후계자님. 저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그때, 앤드류가 불쑥 끼어들었다.
엘프들이 찾아왔다는 말.
어쩌면 아내가 그곳에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앤드류의 두 눈가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물론, 먼 과거에 떠나간 엘프 아내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지만.
"같이 가지."
그래도 저 애틋한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닌지라 가볍게 승낙했다.
*
"······ 장로님. 정말로 이곳에 '신록의 주인'이 있을까요? 그것도 드라이어드와 함께 탑을 오른?"
열 명의 엘프가 워프 앞에서 '신록의 주인'을 기다리던 중.
엘프 장로를 향해 아우릴이 물었다.
아우릴이 보기에 이곳의 인간들은 너무나도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비단 이곳 인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스락 숲'의 롬멜 역시도 아우릴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여왕님께서 말씀하셨잖니. 필시 대단한 자들이라고."
엘프 장로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하자 아우릴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돼요. '균열의 탑'을 오르는 게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저 혼자서도 오를 수 있었을걸요?"
"그 탑은 단순히 힘이 세다고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란다."
"그냥 우리끼리 하면 안 돼요? 뭐 하러 더러운 인간을······."
"쉿. 예의 없이 굴면 안 된다고 말했지?"
"칫.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그나마 저 인간 여자는 조금 쓸만한 것 같지만, 나머지는 죄다 형편없는걸요."
엘프들이 인간의 도시를 찾은 이유.
그것은 엘프 여왕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균열의 탑을 오른 자들과 접촉하라는.
그리하여 가장 먼저 바스락 숲의 롬멜을 찾았고, 여기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인간의 도움 따윈 필요 없는데.'
하지만 백 번을 양보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의 도움을 받아 함께 탑을 오르라니.
더럽고 냄새나는 인간과 파티를 맺으라는 말인데,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올라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와아··· 엘프는 전부 여자인가?"
"아름답다······."
"듣던 것보다 더 아름답군."
"마, 말도 제대로 안 나올 정도로군."
보라.
자신들을 지켜보며 침을 줄줄 흘리는 인간들.
풍기는 냄새도 코가 막힐 듯이 지독하기 그지없다.
인간은 씻지도 않는 걸까?
저런 것들과 대체 어떻게 엮이란 말인가.
두 눈에 가득 찬 욕망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넋을 잃은 채로 무방비하게 틈을 보이는 중이다.
'더러워!'
아우릴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왕님의 명이 아니었다면, '월계수의 전사'인 아우릴이 태초의 숲을 벗어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바깥세상이 조금 궁금하긴 했는데, 이래서야.
특히 인간이란 종은 듣던 것보다 더 끔찍했다.
'전부 덜떨어진 건 아니지만.'
딱 한 명.
덜떨어진 인간들 중에서도, 덜 덜떨어진 인간이 있었다.
세렝게티라고 했던가?
이곳 영주의 딸로 보이는 여자는 아우릴이 느끼기에도 제법 괜찮은 실력자였다.
다른 인간들과 달리 끔찍한 냄새도 풍기지 않고, 욕망을 감출 줄 아는 절제도 지닌 듯싶었다.
하지만.
'절제일 뿐이지. 엘프의 눈에는 욕망이 보이니까.'
결국, 인간은 추악한 욕망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우릴의 눈에도 세렝게티의 욕망이 보였다.
다른 자들처럼 대놓고 드러내진 않으나 그들보다 훨씬 큰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욕망의 덩어리가 열 배는 더 컸다.
분홍색.
저건 색욕이다.
얌전한 척, 절제하는 척하면서, 엄청난 색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더러워.'
아우릴은 쯧쯧 혀를 찼다.
인간이란 족속들은 어쩔 수 없는 걸까.
"후계자님."
"후계자님이시다!"
그때였다.
사람들의 소란과 함께 나타난 인간이 있었다.
두 남자와 한 여자.
'저 여자는 인간이 아닌데?'
아우릴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것과 함께하고 있었으니까.
'괴물. 그것도 엄청나게 추악한 괴물.'
보는 즉시 소름이 돋았다.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저 여자는 인간과 거리가 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몇 개의 냄새가 섞여서 난다.
그건 아주 위험한 존재의 냄새였다.
'감정이 없어?'
무엇보다 욕망이, 감정이 없었다.
무색.
허나 생명체라면 모두가 크든, 작든 욕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인간은 그중에서도 가장 욕망적인 존재.
그럼에도 욕망이 없다.
이런 경우는 하나뿐이다.
'시체. 언데드!'
아우릴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아우릴뿐만이 아니다.
같이 온 '월계수의 전사들' 모두가 저 여자를 보곤 공격 태세를 취했다.
엘프는 언데드와 천적이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은 공간에 함께할 수 없다.
혐오의 수준을 넘어선 적대감.
보는 것만으로 강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인간들의 무리 안에 왜 언데드가 있는 거지?
"성대한 환영식이로군."
······ 막 도착한 남자 한 명이 공격 태세를 취한 엘프들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함께 온 다른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아루웬············?"
엘프 장로의 이름을 부르며,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
앤드류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지금 워프 앞에 서 있는 엘프.
그녀는 분명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내 아루웬이었다.
자신과 안다사르를 버리고선 태초의 숲으로 돌아간 여자.
매정하게 편지 한 장만 남겨둔 채로 사라졌다.
편지의 내용은 별게 없었다.
그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말. 그게 다였다.
한참을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했다.
태초의 숲으로 가보려고 했지만 안다사르가 눈에 밟혀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생 다신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왜 이곳에?'
허.
란돌프를 찾아온 엘프 장로가 설마 자신의 아내였던 아루웬일 줄이야.
그러나 아루웬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안다사르에게 향해 있었다.
'아아.'
그와 동시에 앤드류는 세상이 핑 도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딸이 언데드가, 리치가 된 걸 그녀 역시도 알아차린 것만 같아서.
만약 그렇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으니.
*
잠시의 소강상태.
저 사제복을 입은 인간이 어떻게 장로님의 이름을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언데드는 자연을 거스르는 존재.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야 해.'
그보단 언데드가 더욱 거슬렸다.
아우릴은 모든 언데드를 없애도록 교육받았다.
엘프 여왕의 아래에서 직접 수업했으며, '월계수의 전사'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강의 전사.
그렇기에 더더욱 언데드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아마도 인간인 척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숨어있는 것 같은데.
아우릴의 양쪽 발에 날개처럼 월계수 잎이 돋아났다.
"아우릴······!"
쐐에에엑!
장로가 말릴 틈도 없이, 바람을 타며 순식간에 달려 나간 아우릴이 허리춤에서 오래된 나뭇가지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나뭇가지 위로 거룩한 검의 형상이 입혀졌다.
언데드는 이 검 앞에 단번에 스러지리······!
까앙-!
팔목이 순간 저릿하게 울리며 아우릴이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선 탓이다.
"엘프들은 원래 이렇게 예의가 없나?"
환영식을 운운했던 남자.
그가 겨울처럼 시린 검을 들고 자신을 튕겨낸 것이다.
'검강?'
검의 주변으로 은은하게 비추는 저건 분명히 검강이었다.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자, 혹은 7단계 이상의 강력한 전사만이 사용 가능한 비기와도 같은 것.
설마 인간 중에서 저 단계에 진입한 자가 존재할 줄이야!
'아.'
언데드에 정신이 팔려, 남자를 관찰하지 못했다.
안일했다.
월계수의 전사로서 저질러선 안 되는 실수였다.
그런데.
"뭐······ 야?"
"저, 저건······ 저런 게 있을 수 있는 거야?"
"아우릴······ 도망쳐!"
겨울을 쥔 남자.
인간들이 후계자라 부르던 남자를 본 엘프들이, 갑자기 몸을 벌벌 떨며 경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우릴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몸이 돌처럼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뭐, 뭐야······ 저 욕망은······!'
남자에게서 보이는 욕망의 형태.
저런 건 정말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히든 특성, 대자연의 하이 드루이드
흑왕.
전신이 새카만 흑색의 사자왕.
백왕과 상당히 닮은 모습을 하고 있으나, 색깔만은 확연하게 대비되는 그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어!"
"다 쓸어버려!"
"개미 새끼들한테 지지 마라!"
"귀찮은 지네 놈들!"
절벽의 아래.
그곳에선, 거대한 벌레들이 서로 영역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남만에 서식하는 충류의 괴물들.
본래 보잘것없었으나, 흑왕의 '은혜'로 말미암아 높은 지능을 획득한 뒤로 끊임없이 서로를 증오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흑왕이시여. 저놈들은 아직도 결판이 안 난 겁니까?"
그 뒤로 다가온 다크엘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크엘프를 비롯한 균열의 탑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음, 최강의 벌레를 만드는 게 쉽지만은 않구나."
흑왕은 어깨를 으쓱했다.
고독(蠱毒)
남만의 한 종족은 온갖 종류의 벌레들을 항아리 안에 가둬, 그중 가장 마지막에 살아남은 벌레로 독을 만드는 관습을 지녔다.
그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최강의 벌레 괴물을 만들고자 하였는데, 지능이 높아져서인지 전쟁이 지지부진해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부여한 '은혜'가 문제인 모양.
흑왕은 턱을 쓸며 말했다.
"'대현자'를 부여한 게 실수였나보다. 차라리 '돌연변이'를 부여해볼 걸 그랬나?"
"그랬다간 다 죽어버리지 않겠습니까?"
"한 마리쯤은 적응해서 살 법도 하지 않느냐? 물론, 그런 경우는 여태껏 없었다만······."
흑왕은 '은혜'를, '히든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그중 가장 까다로운 히든 특성 중 하나가 돌연변이였다.
돌연변이를 부여하면 죄다 버티질 못하고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현자보다는 나았을 것 같다.
결국 최강의 한 마리를 가리고자 한다면, 그만한 도박수는 던져야 하지 않았을지.
흑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탑을 오른 건 다섯 명.
그런데 지금 보이는 건 네 명뿐이다.
"마스터는 죽었나 보군."
"예. 처음부터 그런 쓰레기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습니다."
도움이 안 되는 놈이었다.
놈의 감언이설을 믿고 같이 탑을 오른 게 최악의 선택이었다.
결국 혼자 죽어버린 뒤 1위 파티에게 점수만 몰아주지 않았나.
"어찌 됐든 실패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흑왕은 그들 전체의 실패를 이야기했다.
결국 실패는 실패다.
누가 잘못했든 파티 단위로 움직여서 나온 결과다.
이건 그들 모두의 실패와 같았다.
그러자 다크엘프의 눈동자가 진동했다.
"그, 그게······ 흑왕이시여. 알 수 없는 방해자가 있었습니다. '버그'를 쓰는 놈이······."
"버그라······."
"분열된 영역을 혼자서 이동하는 놈입니다. 탑의 관리자도, 1층의 군주도 상정하지 못한 존재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대토룡을 죽였습니다."
맨손으로 돌아온 건 아니다.
1위 파티에 대한 추측과, 백왕 산하의 대토룡을 죽였다.
흑왕이 그제야 조금 흥미로운 눈빛을 던졌다.
"대토룡을? 누가 말이냐?"
"······ 락투샤입니다."
"그래? 정말로 대토룡을 죽였나?"
흑왕의 시선에 락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천검에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절대로 살 수 없을 겁니다, 흑왕이시여."
"죽은 걸 본 것은 아닌가 보구나."
"······."
"쯧쯧. 대토룡은 살아있다."
"······ 예? 그럴 리가······ 없습니다."
락투샤가 당황했다.
검강을 입힌 흑천검에 당했다.
생명체라면 절대로 살 수 없는 치명상과 함께.
한데, 직접 본 것도 아닐진대 흑왕은 대토룡을 살아있다고 말한다.
대체 무슨 근거로?
흑왕이 손가락을 올려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거인.
세계를 뒤덮을 것만 같이 큰 저것이 바로.
"'절망'이 보이느냐?"
"······ 예, 흑왕이시여. 잘 보입니다."
절망.
사흉 중 하나이며, 흉신 바알과 달리 이름 그 자체가 이명이었던 존재.
다른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흑왕의 은혜를 입은 그들에겐 보기 싫어도 보인다.
현재 사왕과 융화 중이며, 깨어나면 감히 흑왕 최고의 패가 되리라 확신하는 괴물.
"백왕과 처음부터 함께한 네 명의 주력들은 서로 심상이 이어져 있다. 대토룡이 죽었다면, 필시 반응이 있었을 테지."
"아아······."
락투샤가 탄식을 흘렸다.
살아있다니.
자신의 공격을 받고, 어떻게 살아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살아 있을 리 없는 대토룡이 살아있다. 그게 가능하다면 '버그' 사용자가 관여했을 터. 그의 얼굴을 보았느냐?"
"······ 못 봤습니다. 다만, 인간과 드라이어드의 파티였음은 확실합니다."
"그래? 그럼 엘프들이 접촉했겠군."
"태초의 숲속 엘프들이 말입니까?"
흑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떠오른 균열의 탑.
그 클리어 보상을 확인한 이상, 엘프들이 움직이지 않을 리 만무했다.
특히 '드라이어드'라면 숲을 매개로 살아가는 존재.
세계수의 가호를 받는 엘프들이라면 훨씬 쉽게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흑왕이시여. 엘프들은 외부와 접촉을 꺼리지 않습니까?"
"세계수가 죽어가고 있으니 달리 방법이 없을 거다."
"세, 세계수가······?!"
태초의 숲 중심에 존재하는 세계수.
이름 그대로 세계를 감쌀 듯이 뿌리를 뻗은 거대한 나무다.
엘프의 상징이자 생명과도 같은 그것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계수가 죽으면 창공의 대륙들이 심연으로 꺼진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게 세계수이건만.
흑왕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해주었다.
"세계수와 엘프는 하나다. 세계수가 죽어가고 있다는 건 엘프들도 죽어가고 있다는 뜻. 엘프들은 너무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태초의 숲에서만 수백, 수천 년을 살았다.
고이고 고여 썩어버린 게다.
오직 '맥스 레벨'을 올려, 한계 돌파를 시도해야만 연명할 수 있다.
락투샤가 긴장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럼······ 엘프들이 접촉했다는 건······."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탑을 오르려고 할 것이다.
아마도 '버그 사용자'와 함께.
흐음. 흑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재밌는 놈이 나타났나 보군."
탑이 인정하는 버그 사용자라.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애당초 관리자가 정해놓은 규칙을 깰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 없으므로.
그런데, 규칙을 깨고 자신의 측근들을 재친 채 압도적으로 탑을 클리어한 놈이 있다.
'규칙을 깬다. 히든 특성······ 가능한 경우라면 그뿐인데.'
탑의 규격을 넘어서는 기능은 오직 히든 특성뿐이다.
하지만, 흑왕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히든 특성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부여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격을 넘게 해준다.
하지만, 탑의 규칙을 깨는 히든 특성이라······.
'천상, 그도 아니라면 운영자.'
그나마 한 가지 가능성의 수는 천상.
유일하게 부여할 수 없는 히든 특성인 그것.
하지만 천상은 결코 몸에 익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조차 아니라면 정말 운영자뿐일 거다.
대체 누굴까.
고오오.
그때였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전쟁이 끝났다는 뜻이다.
흑왕이 다시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고, 언제 고민을 했냐는 듯 밝게 미소 지었다.
"오호, 드디어 탄생했구나. 개미의 왕. 너희의 동료가 말이다."
*
"······ 아."
아우릴이 단말마를 흘렸다.
왜 못 봤을까.
저만한 '욕망'이라면 처음부터 보여야 정상이거늘.
'너무 커서······.'
그렇다.
세상을 휘어잡을 듯 거대하기 그지없었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주하며 대치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저 말도 안 되는 욕망의 크기를.
그러나 그저 욕망이 크다 하여, 엘프들이 이처럼 경악할 리는 없었다.
'욕망이······ 살아있어······?'
움직인다.
저 거대한 욕망이.
수백, 수천 명의 욕망을 합쳐놓은 것만 같은 그것이.
물결치며 마치 하나의 존재처럼 형상화하더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게 있다는 말은 엘프 여왕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우릴! 물러나세요! '욕망'에 전염되기 전에!"
아루웬.
엘프 장로인 그녀가 크게 외쳤다.
엘프는 욕망적인 존재를 싫어한다.
그들의 욕망이, 엘프를 더럽히기 때문이다.
엘프를 전염시키고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일어나게 하는 탓이다.
예컨대······ 인간과 자식을 낳는 일과 같은 일들을.
하지만 '월계수의 전사'가 욕망에 전염될 일은 없다.
문제는 저 남자다.
"먼저 공격해놓고 이제는 병균 취급이로군."
저 남자의 욕망은 다른 인간들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건 무슨 욕망이란 말인가?
얼마나 강렬한 욕망을 지녔기에 저처럼 거대하며, 마치 살아있는 듯 형상화까지 한다는 말인가!
저 남자야말로 엘프의 천적이다.
저 남자가 태초의 숲에 발을 들이면, 그 순간 엘프는 멸망하리라.
빠드득!
아우릴이 입을 강하게 물었다.
그러자 입안이 터지고 피가 흐르며, 마침내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월계수'의 주인이시여!"
촤르륵!
아우릴의 전신에서 월계수가 돋아났다.
마치 날개처럼. 투구처럼. 갑옷처럼.
진정한 월계수의 전사가 된 것이다.
아우릴이 검을 들었다.
검은 더욱 길고, 뾰족하게 다듬어져 남자를 노리는 중이었다.
쐐에에엑-!
"쯧."
작게 혀를 찬 남자가 '겨울'을 들었다.
동시에.
까앙!
"······ ?!"
단 한 차례의 검격에, 아우릴의 전신이 튕겨 나갔다.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손목이 저릿하다.
월계수의 전사로서 완벽한 모습을 갖춘 자신보다, 저 남자가 강하단 건가?
세렝게티라 불린 여자와 크게 차이도 안 나 보이건만.
깡! 깡! 까아앙!
전광석화와 같이 움직였으나 흠집도 내지 못했다.
마치 그는 자신의 움직임을 모두 읽는 것만 같았다.
아우릴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속 시간이······!'
각성과도 같은 기술.
당연히 지속시간은 짧을 수밖에 없다.
빠르게 30여 합을 더 나눴을 때, 아우릴의 각성은 풀려버렸다.
'말도 안 돼! 각성한 나보다 더 강한 인간이 있을 리가 없잖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다.
여왕이 말하길, 인간 중에선 적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지금 버젓이 자신의 앞에 있었으니까.
"아······."
자신보다 강한 인간이.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다. 무기를 다루는 기술 역시도 자신이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닿지 않는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곧이어 아우릴의 각성이 풀리자, 다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툭.
그 상태에서 남자가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왔다.
"머, 멈추세요!"
"아우릴! 안 돼!"
엘프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아우릴은 아무런 반항도 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남자의 손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제, 제발······ 멈춰······."
겨우 입을 열어 멈추라 빌었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툭!
이윽고 남자의 손이 아우릴의 머리에 닿았다.
그 찰나.
스아아아아아아!
거대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욕망'이 아우릴을 전염시키기 시작했다.
진저리쳐질 정도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욕망이 해일처럼 아우릴의 전신을 덮쳐온 것이다.
*
나는 가만히 아우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자지러지듯 엘프들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 내 취급이 너무하군.'
이래서야 병균보다 더 끔찍한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를 본 엘프들이 저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여 반 장난식으로 머리에 손을 얹은 것이다.
그러자.
['란돌프'의 욕망이 엘프 '아우릴'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히든 특성 '대자연의 하이 드루이드'가 엘프 '아우릴'의 '월계수'를 지배합니다.]
···음?
내가 엘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욕망의 전염과 함께 진화한 히든 특성인 '대자연의 하이 드루이드'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신록의 주인
엘프 족장 아루웬.
그녀는 난데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그 탓에 아우릴이 달려나가는 걸 제지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둘이 격돌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 욕망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었다.
보는 순간 알았다.
저 남자에게서 보이는 욕망은 엘프에게 치명적이라는 걸.
상극의 수준이 아니라, 치사량에 달하는 욕망이다.
엘프들을 전염시키고 변형시키는 나쁜 욕망.
하지만 저 정도 수준의 욕망이 존재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살아 움직이는 욕망이라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장로 역시도 처음 보는 것.
새까맣기 그지없는 욕망이, 살아 움직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아.'
하지만 그러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각성.
월계수의 축복을 받는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가능하다.
'월계수의 전사는 여왕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는 전사들.'
엘프의 전사에는 단계가 있다.
그중 월계수의 전사는 6단계. 엘프 여왕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로만 구성된 강자들이었다.
그리고 월계수의 전사 중에서도 아우릴은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
적어도 인간 중에선 적수가 없으리라 여겨지는 단계였다.
'검강. 7단계의 전사······!'
그럴진대.
인간의 검에서 검강이 돋아났다.
검강은 오직 7단계 이상의 전사들만 발현할 수 있는 비기.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전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무기였다.
7단계부터는 세계수의 전사라 칭해지며 당연히 엘프 중에서도 극소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 중에선?
글쎄, 레벨 제한이 10에 불과한 인간들이 검강의 단계에 어찌 진입하겠는가.
하물며 세계수와 같은 지고한 존재의 축복조차 받지 못한 인간이 말이다.
오로지 그들이 더 강해질 방법은 여신의 시체를 이용한 한계돌파의 방식.
토악질 나올 만큼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방법이다.
'당연히 7단계에 진입한 전사는 인간 중에선 없을 줄 알았는데.'
저만한 욕망을 지녀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쟁취한 검강은 아닐 것이다.
'단순히 실력의 대결로 향한다면 아우릴이 질 리가 없어.'
아우릴은 노력형의 천재다.
같은 월계수의 전사 중에서도, 실력 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만약 저 인간 남자가 그릇된 욕망으로 검강을 손에 넣은 것이라면, 아우릴을 상대하긴 벅찰 터였다.
'······.'
그럴 터였는데.
··· 저건 뭐지?
월계수로 각성한 아우릴의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낸다.
마치 아우릴의 공격을 전부 읽기라도 한 듯이.
둘이 검을 나눈 지 채 30합이 지나지 않아, 아우릴의 각성은 끊겨버렸다.
저게 아우릴의 유일한 약점이다.
각성의 시간이 다른 엘프들에 비교해서도 지극히 짧다는 사실이.
월계수의 잎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게.
월계수의 축복을, 월계수의 재능을 제대로 지니지 못해서다.
"아, 안 돼!"
각성이 끊긴 아우릴은 다시 욕망의 영향권에 사로잡혔다.
움직이지 못한 채로, 남자가 그대로 손을 뻗은 것이다.
그 순간.
구오오오오오.
욕망이, 아우릴을 덮쳤다.
입을 벌려 그대로 아우릴을 삼켜버렸다.
"아우릴!"
"안 돼!"
엘프들이 깊게 탄식을 흘렸다.
아루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저 욕망을 아우릴은 감당하지 못할 테니.
'이럴 줄 알았으면 세계수의 전사를 대동했을 텐데······!'
실책이었다.
하지만, 저런 인간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 인원으로도 충분하다고,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고 자신하며 태초의 숲을 나온 그 순간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욕망을 컨트롤할 수 있는 건 오직 세계수의 전사뿐.
그들과 함께했다면 이런 사태가 오는 건 막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건.
"뭐, 뭐야?"
"아우릴의 월계수가······!"
"자, 자라나고 있어?"
욕망에 먹혀버린 아우릴의 상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월계수의 어린잎이 갑자기 급속성장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어떻게?
고작 머리 위에 손을 올린다고 월계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존재는 세계수와 세계수의 수호자인 여왕뿐이다.
그러나 여왕조차도 저 정도의 '급속성장'을 만들어낼 순 없었다.
하물며 아우릴은······ 월계수의 성장이 극히 느렸던 부류.
여왕조차도 어찌하지 못한 성장을, 어떻게 저 남자가?
"신록의 주인······."
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저 남자가 바로 '바스락 숲'에 존재하는 신록의 주인이라는 것을.
자신들이 찾고 있던, 여왕이 직접 명하여 찾으라 하였던, '균열의 탑'을 오른 인물 말이다.
대체 인간이 무슨 방법으로 신록의 주인이 되었나 궁금했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저건······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신록이 직접 주인이라 인정할 정도의, 보다 상위의 존재였다.
'저런 걸 할 수 있는 종족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어······!'
드라이어드도, 엘프도, 인간조차도 아니다.
전설 속의 종족.
모든 자연의 주인이라 일컬어지는 그들 중에서도 보다 격이 높은 존재만이 저런 기적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사라진 종족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오직 전설로만 화자 되는 종족이었다.
대륙이 천공에 떠오르기도 전에 있었으나, '멸망'에 의해 전부 사라졌다고 알려졌다.
"아아!"
아우릴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월계수는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않았으니까.
오로지 재능의 영역이라 여기고 있었으므로.
반쯤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었건만.
그러나 지금 아우릴은 기적을 경험하고 있었다.
평생 자라지 않았던 월계수의 잎이 전신에서 자라나는 중이었다.
누구보다도 화사하게, 아름답게.
아우릴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천천히 머리 위에서 손을 떼었고.
동시에 자라나던 월계수의 잎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안돼······."
탄식을 흘려낸 아우릴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평생 노력해도 닿지 못했던 잎의 성장이다.
그것을 눈앞에서 보고, 경험했는데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갈망.
그것은 어느 감정보다도 우선시되는 욕망이다.
아우릴은 지금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엘프에게 있어선 금기시되는 일.
언제나 자연과 함께 초연해야만 하는 것이 엘프인 탓이다.
아우릴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욕망에 사로잡혀도, 성장할 때 느꼈던 그 감각을 잊을 수가 없어서.
평생을 염원했던 그 순간의 감각이 지금도 뇌리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 아우릴, 멈추세요."
하지만, 아우릴의 갈망은 닿지 못했다.
아루웬.
엘프의 장로인 그녀가 발을 떼어 지척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욕망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손을 뻗어 제지한 것이다.
이어 아루웬은 남자를 바라보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제 아이가 결례를 끼쳤습니다."
"자, 장로님!"
"어떻게 저런 인간에게······!"
엘프들은 경악했다.
인간 따위에게 엘프가 고개를 숙이다니!
그것도 엘프의 장로나 되는 이가.
하지만 아루웬은 엘프들의 반응을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경건한 표정으로 말할 따름이었다.
"부디 아우릴의 실수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래만 주신다면 제 목이라도 내놓겠습니다, 드루이드님."
"······!"
"······ 드루이드?!"
그 말을 들은 엘프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드루이드라니!
그들은 자연계열의 최상위 종족이자,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전설 속의 존재들 아닌가!
"흠."
아루웬의 말에 남자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남자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아루웬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제야 아루웬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남자는 일반적인 드루이드가 아니다.
남자가 보인 기적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혹시······ 하이 드루이드이십니까?"
하이 드루이드!
드루이드들을 이끄는 수장.
그 역시 '멸망'과 맞서며 스러졌다 알려져 있었다.
대자연을 다루며 만물과 공존하는 자연 그 자체가 바로 하이 드루이드였다.
눈앞의 남자는, 헤아릴 수도 없는 먼 옛적 사라진 하이 드루이드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모두의 눈이 남자의 입으로 향했다.
잠시 후, 남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
"아······!!"
아루웬이 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인다고 끝날 문제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드루이드. 그중에서도 하이 드루이드라면, 지금의 실수는 단순히 자신 하나의 목으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게다가 하이 드루이드라면 저런 거대한 욕망을 갖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자연을 넘어 만물에 간섭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게 하이 드루이드였으므로.
감히 말하건대 욕망의 화신과도 같은 것이다.
사실 대자연만큼이나 욕망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목을 내놓겠다고?"
"원하신다면······!"
아루웬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드루이드라면 세계수와도 통할 수 있는 자.
어쩌면, 지금 말라가고 있는 세계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 하나쯤이야 기꺼이 내놓으리라.
"자, 장로님!"
아우릴 역시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저지른 실수입니다. 목을 내놔도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조용히 하세요, 아우릴. 제대로 말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장로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세요!"
아우릴 역시도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언데드를 보고 달려 나간 자신의 죄가 맞았으니까.
이런 다혈질적인 성격 탓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잎의 성장이 늦은 것도 있었다.
"부디 장로님 말고 제 목을······!"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같이 온 엘프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의 목을 자르라며 앞다퉈 나섰다.
진귀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평생 보기도 힘든 엘프들이, 하나같이 인간의 앞에서 용서를 빌고 있었으니까.
'어찌한다.'
······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나는 턱을 쓸며 고민했다.
이들을 어찌해야 할지.
내가 가진 히든 특성 '대자연의 하이 드루이드'가 이들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곤 장로가 직접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앤드류가 목놓아 이름 불렀던 장로의 목을 진짜로 가져갈 수도 없었다.
그보단 실리를 취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나는 '겨울'을 들어, 아우릴의 목에 갖다 대었다.
"자비를 보여 실수를 저지른 자만 단죄할 것이다. 너의 목을, 생명을 내놓도록."
"기꺼이······!"
아우릴이 몸을 떨며 수긍했다.
이 참사는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다.
상대가 하이 드루이드라면, 자연계열 최상위의 존재다.
자연에 속한 자라면 그저 따라야 하는 지도자.
아우릴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런데 이어진 남자의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생명을 내놓겠다 했으니, 내 노예가 되어라."
"············?"
최종 콘텐츠
'노예?'
아우릴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귀가 좋은 엘프의 특성상 잘못 들을 리가 없다는 사실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노예라니.
종. 소유물. 모든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한 물건과도 같은 신세.
차라리 죽을지언정 인간의 노예로 부려질 순 없는 노릇이건만.
특히나 아우릴은 엘프로서의 긍지가 하늘까지 닿아있었다.
상대가 하이 드루이드라도 마찬가지다.
그냥 따르는 것과, 노예가 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기에.
"······ 예. 그걸로 노여움이 풀리신다면."
"자, 장로님······?!"
하지만 대답은 아우릴이 아닌 아루웬 장로에게서 나왔다.
'아우릴. 고개를 끄덕이세요.'
게다가 저 눈빛.
노예가 되어서라도 목숨만은 부지하라는 뜻이다.
아우릴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루웬 장로와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아······.'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누군가의 노예가 되기는 죽기보다 싫은데.
승낙하지 않으면 장로님의 목부터 날아갈 지경이다.
다 같이 죽느냐, 저 남자의 노예가 되느냐.
아우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되······ 되겠습니다······."
"무엇이 되겠다는 거죠?"
확인사살과 다를 바 없는 말.
아우릴은 아루웬 장로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그러나 이제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어찌 됐든 다짜고짜 검을 들이민 건 자신이었으니.
"노······ 예가······ 흑!"
*
엘프는 희귀한 종족이다.
워낙에 폐쇄적인 탓에 알려진 것도 거의 없거니와, 그들이 '세계수'와 소통하는 방식은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애당초 세계수가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으므로.
'세계수는 천공에 떠오른 대륙을 지탱하는 뿌리 중 하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세계수가 세계의 근원이 되는 기물 중 하나라는 걸.
심연에 가라앉았던 대륙을 떠올리고 연결하게 한 건 두 여신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대륙이 유지될 리가 없다.
세계수는 떠오른 대륙을 지탱하는 뿌리 중 하나.
'그러니 세계수를 지키는 엘프들은 대륙을 지탱하고 있다 봐도 무방하지.'
이것도 빌헬름을 플레이할 때 종장에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종장에 가서야 알게 됐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엘프는 최종 콘텐츠와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엘프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는 이유다.
최대한 우호적으로, 아우릴을 노예로 부리며 비밀을 파헤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리라.
최종 콘텐츠.
내가 아직 겪지 못한, 혹은 업데이트되지 않은 뒤의 이야기.
빌헬름이 죽은 뒤 '멈춰있던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게 나는 이 업데이트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빌헬름이라는 마지막 게이머의 캐릭터가 죽으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콘텐츠가 업데이트되고 있다.'
게이머일 시절 보았던 동시접속자의 숫자는 항상 0 아니면 1이었다.
내가 접속할 때는 1을 유지했으나, 이는 사실 모든 게이머가 플레이어가 되어있던 것이다.
이게 업데이트를 막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다.
마왕을 죽였으나 결국 죽이지 못한 것처럼, 게이머의 캐릭터 자체에 락을 걸어 모두가 플레이어가 됐을 때 업데이트가 진행되도록 하지 않았을는지.
'내가 예상보다 오랫동안 빌헬름으로 플레이한 탓에, 업데이트가 늦어졌다······.'
그야말로 없데이트였다.
긴 시간 동안 아무런 콘텐츠도 나온 게 없었다.
하지만 내가 플레이어가 된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마침내 모든 게이머가 플레이어로 각성하며 '시작'된 것이다.
'멸천자도, 균열의 탑도 본래는 없던 것이었으니까.'
없던 게 생기고, 존재하지 않던 자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레벨의 제한이 확대되고 더욱 강력한 자들이 출현하는 중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나.
빌헬름의 죽음이 업데이트의 방아쇠가 되었다는 말 아니겠는가?
하물며.
'태초의 숲과 엘프는 그간 스토리상으로만 존재하되,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이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너무나도 이상하다.
오랜 시간 플레이하면서도 엘프는 본 적이 없다.
태초의 숲에 들어갔다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연결된 워프도 없어.'
분명히 존재하는 곳이라면 최소 3개의 워프가 이어져 있고, 어딘가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 자체가 아예 없었다.
아무리 세계수가 대륙을 지탱하는 뿌리라지만 위의 '규칙'은 천공의 대륙이라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
그런데 종장에 가서나 겨우 언급될 정도였다.
그것도 세계수에 관한 이야기이지, 엘프나 태초의 숲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물론 내가 모르는 도시와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여신의 지도에도 연결된 워프가 없었지.'
나는 모든 도시의 이름과 워프 연결지점을 알고 있다.
일명 '여신의 지도'라 칭해지는 아이템을 갖고 있었으니.
존재하는 모든 도시와 워프를 볼 수 있는 그 지도상엔 '태초의 숲'과 연결된 워프의 지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 이번에 새로 업데이트 된 거다.'
그러니 만약에, '업데이트' 된 것이라면?
정말로 최종 콘텐츠와 관계가 있다면?
'무조건 내가 먼저 먹어야지.'
선점해야 한다.
반드시.
어쩌면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일 수도 있었다.
"······ 하이 드루이드시여. 저희와 함께 '균열의 탑'을 오르지 않으시겠습니까?"
성의 내부.
손님을 맞이하는 화려한 방 안에 앉아, 아루웬 장로가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를 찾은 용건이 아무래도 '균열의 탑'과 관계된 모양.
나는 상석에 앉은 채 여유 있게 입을 열었다.
"균열의 탑을 함께 올라야 하는 이유가 내게 있나?"
"저희가 도움이 될 겁니다."
"도움이 된다? 글쎄, 내 옆으로 오지도 못하는 것들이 말이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루웬 장로는 겨우 인내하고 있지만, 다른 엘프들은 저 멀리 떨어져서 겨우 나를 바라만 보는 중이었다.
가까이 오지도 못하는 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2층을 클리어하겠나.
1층도 정말 버그 수준의 플레이로 겨우 클리어한 건데 말이다.
영원군주의 심장과 면죄부 무한 복사가 없었다면 클리어는 꿈도 못 꿨을 터.
후룩.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로, 잔을 들어 밀크티를 마셨다.
그러자 아루웬이 입술을 잘게 깨물며 말했다.
"··· 저희 엘프는 '욕망'을 볼 수 있습니다. 하이 드루이드님의 '욕망'이 너무나도 거대해 쉽게 다가가지 못할 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욕망. 욕망이라.
그러나 내가 가진 욕망이 다른 사람에 비해 비대하다 생각하진 않는다.
저들이 대체 내게서 무엇을 본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단순히 욕망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나저나.
"시간이 없는데 시간을 투자해라? 리스크가 너무 크군. 내게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어."
균열의 탑 2층은 고작 60일 이후 열린다.
그 시간까지 적응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놈들과 함께하라는 건 시간 낭비일 따름이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엇을 원하냐고?
그야 내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태초의 숲과 연결된 워프 지점들."
"······ 예?"
"말해봐라. 태초의 숲은 어느 도시와 연결되어있나?"
내 물음에 아루웬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허나, 이 지점만 확인하면 모든 게 확실해질 것이다.
폐쇄적인 엘프들이 워프 지점을 더 늘릴 리는 없을 테니.
"그, 그건 말할 수······."
"없다? 그럼 이 거래도 없던 걸로 하지."
강하게 나갔다.
균열의 탑을 클리어하자마자 바스락 숲을 찾고, 나를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급한 건 엘프 쪽이었다.
아니면 균열의 탑이 엘프들과 연결되는 콘텐츠의 시작점일 수도 있고.
하여간 당장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다.
아루웬은 입을 꾹 다물고 고민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알테미아··· 입니다."
"알테미아?"
"······ 예."
"흠."
잔을 내려놓고, 턱을 쓸었다.
이건 또 예상 외였다.
왜냐하면 '알테미아'라는 도시명을 처음 들어보는 탓이다.
'이것도 신규 도시인가 보군.'
아직 등장하지 않은 땅.
역시 엘프는 새로운 콘텐츠들과 연관이 있나 보다.
내가 몰랐던 이름을 속속 말하는 걸 보면.
"그리고? 알테미아 하나뿐이 아닐 텐데?"
"··· 발망산, 팔란티어."
반쯤 포기한 듯 아루웬이 연거푸 이름을 꺼냈다.
그나마 이중 하나는 귀에 익다.
'발망산!'
그곳은 내가 아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발망산은 '태초의 숲'과 연결된 워프 지점이 없었다.
없는 게 생겨났다.
이제는 확신이 든다.
'··· 신규 콘텐츠가 업데이트 되고 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그간 밀렸던 일정이, 마치 장맛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어쩌면 나로 인해 할 수 없었던 1년 넘는 시간의 업데이트 분량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해일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이거······.
'대박이다.'
아무래도 이 엘프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게 분명했다.
아니, 그냥 황금알이 아니라 다이아몬드 알을 낳는 거위일 수도 있었다.
이들을 통해 해금된 신규 콘텐츠를 나 혼자 독식할 수 있다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메인 퀘스트의 후반부를 나 혼자 만끽할 수 있다면?
'진짜 대박이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이제 저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한 명. 아우릴을 데려가지."
"······ 아우릴도 강하지만, 더 단계가 높은 전사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아우릴의 레벨은 13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한 전사가 있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우릴 한 명이면 족하다. 그게 싫으면 없던 걸로 하마."
내가 완전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동료가 아니라면 쉽지 않은 길이다.
군주 솔바렌을 겪어보니, 균열의 탑은 자신들이 무조건적으로 유리한 조건들만 설정해놓는 사기적인 장이었다.
그런 곳에 다른 엘프를 데려갔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보단 말 잘 듣는 노예가 낫다.
"··· 알겠습니다."
그래도 아루웬은 수긍이 빠른 편이었다.
내가 하이 드루이드임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
하지만 궁금한 건 이 하나뿐이 아니었다.
"아루웬 장로. 혹시 앤드류 사제를 알고 있나?"
"······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안다사르는?"
"그 역시······ 처음 듣습니다."
음.
역시나.
앤드류 사제가 아루웬 장로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리고 안다사르를 발견했을 때, 그녀에게서 느껴진 감정은 '낯섦'이었다.
하지만 앤드류 사제는 분명히 아루웬 장로를 알고 있다.
안다사르를 낳은 아내라는 게 아마 아루웬 장로일 것이다.
그러나 엘프가 이번에 새로이 업데이트 된 거라면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남편을 갖고, 아이를 낳는 건 불가능하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걸까.
'······ 이 부분은 감이 안 잡히는군.'
······ 모르겠다.
하지만 신규 콘텐츠가 업데이트 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태초의 숲과 엘프들 역시도 새로 나왔을 확률이 높았다.
발망산에 워프가 연결되어 있었다면 내가 진즉 알고 있었을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소문만이 무성했던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이제 본격적으로 톱니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퍼즐을 맞춰 나가다 보면 필시 답이 나올 테다.
"저······ 하이 드루이드님."
그때였다.
불현듯 아루웬 장로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더 물어볼 게 남았나?"
"그게······ 실례가 안 된다면······."
"···?"
의아하게 쳐다보자, 아루웬 장로가 한참을 뜸 들이며 말했다.
"제 머리도 만져주시겠습니까?"
"·········?"
세렝게티의 결혼식
아루웬 장로는 엘프들과 함께 다급히 워프를 넘어갔다.
모종의 목표는 이뤘으나,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확실하다. 하이 드루이드야.'
아루웬 장로 역시 6단계 '월계수의 전사'였다.
그것도 모든 '월계수 잎'의 성장을 이룬 완전체의 전사.
그런데 란돌프가 머리에 손을 얹는 순간, 더 성장할 수 없던 잎이 더 찬란하게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여왕님께 전해야돼.'
마음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를 태초의 숲으로 데려가고 싶지만 아직 해결해야할 문제가 남았다.
엘프 여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는 게 먼저였다.
섣불리 데려갔다간, 다른 '하이 엘프'들에게 빌미를 줄 수도 있으니.
하이 드루이드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계수만 되돌아오면 여왕님의 권세 역시 돌아온다.'
세계수가 약해지며 여왕 역시 약해졌다.
여왕이 약해지자, 태초의 숲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허나 균열의 탑을 오르거나 하이 드루이드를 통해 세계수를 회복시킬 수만 있다면 다시 여왕의 힘은 되돌아올 것이고, 이 혼란 역시 종식될 것이다.
문제는 그 전.
아직 세계수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의 일.
'이건 기회야.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
게다가 아우릴을 옆에 붙여줬다.
아우릴은 성장가능성이 무한한 아이다.
월계수의 잎을 거의 피워내지도 못한 주제에 월계수의 전사들 중에서 세 손가락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였으니까.
만약 그 아이가 잎을 모두 피우낼 수만 있다면······.
'7단계. 아우릴이라면 그 이상의 전사로도 성자할 수 있을 거야.'
7단계 이상은 오직 '하이 엘프'들에게만 허락된 경지다.
세계수는 순수한 '하이 엘프'만을 선택하여 축복했다.
일반 엘프들이 7단계에 오르는 일은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정도.
아우릴은 비록 일반 엘프지만, 그 재능만큼은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수준이라 확신했다.
게다가 아우릴은 여왕님을 충실히 따르는 심복.
그와 함께 탑을 올라 한계를 확장하거든, 현재 세가 급격하게 약해진 여왕에게 크게 보탬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워프를 넘어 얼마나 길을 떠났을까.
"생각보다 늦었군."
"······ 다크엘프?"
검은색 피부의 다크엘프 무리가 그녀들을 막아섰다.
아루웬은 인상을 찌푸렸다.
다크엘프는 엘프와 적대적인 종족.
허나, 이 루트는 오직 자신들만이 알고 있는 길이었다.
절대로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또 기울인.
그런데 이 길을 어떻게 알고 매복하고 있었을까.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말하거라. 누구를 만나고 왔지?"
단검을 꼬나쥐며 50명이 넘는 다크엘프가 그녀들을 둘러쌌다.
'루트가 노출됐다. 누가 배신한거지? 그것도 다크엘프를 부리면서?'
다크엘프와 동조한 배신자가 있다는 말이다.
엘프와 적대적인 다크엘프와 한 배를 탄.
다만.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는 모른다.'
저들은 자신이 누구를 만났는지 모르고 있다.
'균열의 탑'과 관련된 사항은 여왕과 함께한 엘프만 안다.
외부로는 특별한 수행을 위해 잠시 떠난다고 알려져있다.
적어도, 자세한 사항을 아는 자는 아니라는 의미다.
저들은 오직 자신들이 오가는 이 길목만 알고 있었다.
"··· 더러운 다크엘프들에게 대답해줘야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요."
모른다면, 끝까지 잡아뗀다.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하이 드루이드의 존재를 입에 담을 수는 없다.
아루웬 장로가 함께온 엘프들을 둘러봤다.
그러자 엘프들 모두가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쯧. 자비를 베품에도 멍청하긴. 어디, 죽기 직전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봐야겠군."
스윽!
스슥!
다크엘프 무리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
엘프들이 떠나간 직후.
앤드류 사제는 멍한 얼굴로 워프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아루웬이 맞는데.'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이름을 불렀을 때도 분명히 반응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안다사르도 마찬가지.
'그녀가 확실한데······.'
왜 자신을 못 알아본 걸까.
하지만 말을 걸어볼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진짜로 자신을 잊었을까봐.
그리고 안다사르를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해 할 말이 없어서였다.
"알테미아, 발망산, 팔란티어."
"······ 란돌프님?"
갑자기 다가온 란돌프가 앤드류 사제에게 말했다.
세 개의 이름. 그게 무엇인지 몰라 바라보자, 란돌프가 어깨를 으쓱하였다.
"'태초의 숲'과 연결된 도시의 이름들이라더군."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해주시는 겁니까?"
"알고는 있어야할 것 같아서 말이다."
"······."
앤드류의 눈빛이 흔들렸다.
태초의 숲과 연결된 워프지점은 극비 중의 극비.
그것을 자신에게 말해줬다는 건 신뢰의 증거다.
또한 저 도시 중 한곳으로 가면, 아루웬이 있는 태초의 숲으로 향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안다사르를 보자마자 혐오하며 공격해온 엘프다.
저곳에 갔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진심입니다."
"균열의 탑 2층을 공략할 때 안다사르를 데려갈 것이다."
"예······?"
순간 앤드류 사제의 표정에 당황이 서렸다.
엘프들이 찾아온 이유는 함께 균열의 탑을 오르기 위해서다.
1층을 클리어한 란돌프는 2층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을 테니.
이는 즉, 엘프가 있는 곳에 안다사르를 데려가겠다는 말이었다.
"엘프들 중에선 아우릴과 간다. 물론 '겨울의 계약'을 했으니, 안다사르를 공격하진 못할 거다."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걱정말도록. 그리고 실은, 그대에게 부탁할 게 있다."
"··· 말씀만 하십시오."
앤드류 사제가 묵직하게 답했다.
란도프에게 입은 은혜가 한, 두 개가 아니다.
그가 무리한 부탁을 해오더라도 앤드류 사제는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발망산'으로 가서 '태초의 숲'과 연결된 워프를 확인해다오."
"알겠습니다."
앤드류 사제가 고민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망산은 험지 중의 험지.
가는데 시간도 상당히 소모될 테지만, 여신교의 정규 사제인 앤드류에겐 나름대로 쉬운 길이었다.
그곳과 연결된 땅들이 모두 여신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발망산을 찾으라 부탁한 것도 이러한 이유일 터.
'확인만 하자. 확인만······.'
앤드류 사제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워프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다.
자신이 '태초의 숲'으로 향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었다.
"그럼 란돌프님은 탑을 오를 준비를 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 전에 해야할 게 있다. 그대도 떠나기 전에 해야할 일이 있고."
"그게 뭡니까?"
"공동주례."
"······ 누가 결혼합니까?"
이곳 '기사의 정원'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앤드류 사제가 주례를 보는 일은 꽤 흔했다.
하지만 최근 온갖 사건들이 연류되어 결혼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졌건만.
그 와중에도 사랑이 싹이 튼 걸까?
그러나 란돌프가 직접 이런 부탁을 해온 건 의외였다.
앤드류 사제가 궁금해하는 눈빛을 던지자, 란돌프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허드슨과 세렝게티가 한다더군."
"예에······?"
"와이저 후작이 허락했으니, 진행은 빠를수록 좋을테지."
"그, 그 둘이 진짜······ 예?"
이럴수가!
설마 그 고집불통 와이저 후작이 이 결혼을 허락할 줄이야.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상인나부랭이는 상종도 안하던게 와이저 후작 아닌가.
'미친.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기적이 일어났다.
*
허드슨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진짜로 저주가 풀렸다.'
제국에서의 저주가 드디어 풀렸다.
세렝게티의 모습이 아닌, 본래의 허드슨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허드슨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결혼이라······.'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결혼이란 두 글자.
하지만, 자신이 꺼낸 말은 아니었다.
-세렝게티! 봐봐, 드디어 돌아왔다고!
-축하해! 그럼 우리, 슬슬 식 올릴까?
······ 직구도 이런 직구가 없다.
게다가 민망하게도 세렝게티가 먼저 프로포즈를 해왔다.
심지어 와이저 후작의 허락도 받아놨다면서.
란돌프님에게 주례도 부탁 해놨다면서.
모습이 바뀌어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세렝게티는 이미 몇 발이나 앞서서 자신과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허드슨은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하. 아직 말을 못했는데.'
아직 자신이 이세계의 인간이 아님을 말하지 못했다.
비록 지구에서의 몸은 회복 되었을지언정, 이곳에서 자신은 '죄인'이다.
이 사실을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차라리 평생 숨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 말하자."
그러나 이대로 숨기고 평생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말하자. 말하는 거다.
굳게 결심한 허드슨이 세렝게티의 방을 찾았다.
똑. 똑.
주먹을 쥐고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응? 허드슨?"
발소리만 듣고도 자신임을 알아본 세렝게티가 문을 열었다.
······ 자욱한 땀자국.
이 와중에도 맨몸 운동중이었구나.
"실은 말할 게 있어."
"말? 무슨말?"
"나 사실······."
"사실?"
허드슨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 죄인이야."
"내 마음을 뺏어간 죄인?"
"아니······ 그게 아니고······."
"걱정마. 식은 일주일 뒤에 진행될 거니까. 내가 다 준비해놨으니 허드슨은 따라만 와."
"잠깐. 일주일이라고······?"
허드슨은 경악했다.
빨라도 뭐가 이렇게 빠르단 말인가.
결혼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거였나?
"허드슨은 부모님이 안 계시잖아. 상견례는 필요 없을거고, 몸만 오면 돼. 저주도 풀렸겠다, 더 시간 끌 필요가 없잖아?"
"아니······ 나는 아직 입을 옷도······."
"그것도 이미 준비해놨어. 대원정 전에."
"······ 대원정 전에 이미 준비해 놨었다고?"
미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대원정이면 반년도 더 전의 일이다.
살아 돌아오거든 그 즉시 식을 올릴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야 자신도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다.
"왜? 뭐가 걱정이야? 설마 나랑 하기 싫은거야?"
세렝게티의 표정이 급속히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놔두면 그녀는 끝없이 망상할 것이다.
숱하게 겪어왔기에 허드슨은 재빨리 양손을 저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난 너뿐이야. 너무 좋아서 그래."
세렝게티의 표정이 언제 어두워졌냐는 듯 화사하게 피어났다.
"그치? 그럼 우리 밥먹으러 갈까?"
"어······ 어어······."
이게 아닌데.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니니.'
허드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7일 후, 결혼식 당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빠른 진행에 허드슨은 정말 눈코땔 새 없이 바빴다.
'결국 제대로 말 못했다······.'
하물며 자신이 플레이어임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했다.
말을 할 타이밍이 도저히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날 이후 세렝게티를 볼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도 말이다.
'이게 맞는걸까?'
이렇게 흘러가듯 결혼해도 괜찮은걸까?
가장 중요한 비밀을 숨긴 채로?
그러나 고민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이 되었으니.
결혼식장.
모두가 모여있는 장소에서.
'아······.'
드레스를 입은 세렝게티를 본 순간, 모든 고민이 한꺼번에 날아갔기 때문이다.
너무 아름다웠으니까.
말문이 막힐만큼, 아름다웠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행복도 잠시.
['세계의 침식률'의 진행속도가 급격히 빨라집니다.]
[침식률이 20%를 달성했습니다.]
[지구로 마계의 2차 침공이 시작됩니다.]
[공격당했습니다!]
[30초 안에 로그아웃하지 않을 시, 사망합니다.]
2차 침공 시작
"허."
집무실의 안.
와이저 후작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세렝게티. 자신의 딸아이 때문이다.
-후작님. 아니, 아버지. 저, 허드슨과 결혼하겠습니다.
당연히 결사반대했다.
세렝게티가 어떤 아이이던가.
하나뿐인 딸. 가문의 무남독녀가 아니던가.
아무리 허드슨이 란돌프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은 상인 나부랭이일 뿐이다.
고작 상인에게 세렝게티를 넘겨줄 순 없었다.
-허드슨과의 결혼을 계속해서 반대하신다면.
-반대한다면? 죽기라도 할 테냐?
고작해야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질을 부리려는 거겠지.
죽을 위기를 겪었으니, 다시 한번 생명을 건다면 허락하리라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와이저 후작은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얻었다. 세렝게티의 어린 투정 정도야 웃으며 받아넘길 수 있다.
-빌마임 가에 시집가겠습니다.
-뭐······? 그건 죽어도 안 된다!
하지만 빌마임 가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빌마임. 빌마임이라니!
와이저 후작과 대립각을 이루는 천하의 쌍놈들 아니던가!
그런 천하의 버릇없는 놈들과 한 상에서 밥을 먹는다 생각하니 벌써 속이 안 좋은 기분이다.
-이미 그쪽과도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여기.
-······.
편지 한 장.
빌마임 가의 가주 인장이 찍힌 그것을 보곤 와이저 후작은 사색이 됐다.
필체 역시 빌마임 가 가주의 것이 맞았으니.
내용은 당연히 혼인에 관한 것이었고.
-내, 내 허락도 없이······.
-빌마임 가의 가주는 대머리지만 야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대머리지만 상인 나부랭이 따위보다는 낫겠지요.
-너······ 진짜로······?
-허드슨과 식을 올리지 못할 바엔, 빌마임 가에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평생 아버지 욕만 들으며 살겠군요.
상상을 초월한, 생각지도 못했던 수.
자신이 도망갈 길 자체를 없애고 승부수를 띄웠다.
그제야, 와이저 후작은 세렝게티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허허."
어이는 없지만, 와이저 후작에 한정하여 기가 막힌 발상이다.
빌마임 가와는 백 년이 넘도록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관계.
그곳에 가겠다는 건, 단순히 생명을 던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검밖에 모르는 녀석인 줄 알았거늘.'
성장했다.
검밖에 모르던 무식이가 이제는 제대로 된 협박도 할 줄 안다.
심지어 협박만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허드슨 이력서라.'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해왔을까?
수많은 종이들.
그 아래 적힌 허드슨의 이력을 보며 와이저 후작은 다시금 경악하고 있었다.
「황금도시 아르카나 카지노 '허드슨'의 주인」
「'아르카나 의회' 명예 고문위원」
「정보상회 '별과 밤'의 실질적인 단장」
「'블러드 폴' 출신. 그중 10인 중 1인」
······.
「'미궁 상단' 발족」
「'미궁 은행' 출범」
「'미궁 도시' 재정, 재무담당 '허드슨'」
「'란돌프'가 가장 크게 신뢰하는 자」
보고서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허드슨.
'이놈 정체가 뭐야?'
이력서에 적힌 대로라면 이놈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다.
어둠에 잠긴 채 시장을 조종하는 어둠의 손 그 자체.
정보를 사고파는 '별과 밤'은 그 업계에서 항상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이고, 심지어 '블러드 폴'의 출신이라면······.
'이걸 알려줬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건 필시 허드슨이 이야기해준 게 아니다.
세렝게티.
녀석이 직접 알아낸 것이다.
세렝게티는 생각보다 허드슨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 적힌 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를 만큼.
'란돌프가 가장 크게 신뢰하는 자.'
게다가 마지막 부분.
저것을 '이력'이라 할 수 있을까?
허나, 란돌프에 대해서 안다면 저 또한 이력이 될 수 있다.
'함께 다니는 자들보다도, 허드슨을 신뢰한다?'
와이저 후작은 턱을 쓸었다.
란돌프는 기사형의 인간이다.
당연히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우는 자들에게 더 정이 갈 터.
허드슨은 상인의 기질을 살려 도시를 담당하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란돌프와 함께하는 시간은 적다.
그런데도 '가장 크게 신뢰한다'고 세렝게티는 확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사실일까?
'사실이겠지.'
세렝게티는 란돌프를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다.
녀석이 그렇게 보았다면, 그럴 터였다.
하물며 결혼식에 대한 세렝게티의 준비력에 와이저 후작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덧 미래를 믿고 맡겨도 될 만큼 성장해 있었다.
'검을 제외하고 이 정도로 진심이었던 게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든다.
그 아이의 몰랐던 부분을 이제야 발견한 것만 같아서.
"벌써 그 아이가··· 허헛."
결혼.
결혼식이라.
허나 세렝게티는 이미 혼기를 넘겼다.
"시기는 아무래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그러니 식을 올리는 건 빠를수록 좋으리라.
나머지는 이제 누구를 부르느냐인데.
'긴급으로 죄다 불러야겠구나.'
돈은 많이 들겠지만, '긴급'으로 호출한다면 모두 모이는 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모든 친인척들과 관계자들의 축복 속에서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맞이하게 해주리라.
아비로서 해줄 수 있는 건 그뿐이었으니.
*
허드슨의 두 눈가가 미칠 듯이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렝게티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었건만.
지금 떠오른 메시지들은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신랑이 신부를 보고 아주 넋을 잃었나 보군."
"괜찮은 한 쌍이야."
"세렝게티! 어미를 쏙 빼닮았구나."
아아······.
식장에 모인 수많은 하객들.
그들은 모두 와이저 후작의 친인척들이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 200명이 넘는 하객들이 지금 허드슨과 세렝게티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허드슨이 부른 하객은 스무 명이 될까 말까 했지만 와이저 후작 덕분에 사람이 꽉 찼다.
그야말로 성대하기 짝이 없는 결혼식.
이보다 축복받은 결혼식이 어디 있을까.
[6Lv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수호벽(7Lv)'의 남은 시간 24초]
[24초 안에 로그아웃 하지 않을시, 사망합니다.]
문제는 그 와중에도 지구에서의 몸은 공격받고 있다는 것.
··· 허드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이 지닌 수호벽의 레벨은 고작해야 7.
7레벨 이하의 공격을 30초 방어하는 기능이다.
만약 더 강한 공격이 들어오거나, 30초가 지나거든, 허드슨은 죽는다.
'어떡해야?'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 결혼식장을 벗어나, 로그아웃 하는 것 말이다.
2차 침공이 시작되어 안전지대가 있을까 싶지만 최대한 안전한 곳을 찾아 다시 로그인 한다면······.
'불가.'
불가능하다.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두가 자신을 '죄인'이라 확신하게 되리라.
세렝게티가 자신을 '죄인'으로 아는 것과, 와이저 후작과 그의 친인척들 모두가 알게 되는 건 하늘과 땅의 차이다.
결혼은커녕 사신교에 신고되어 죽을 운명이었다.
혐오하며 자신의 시체에 침을 뱉고 혀를 차겠지.
[7Lv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수호벽(7Lv)'의 남은 시간 19초]
[19초 안에 로그아웃 하지 않을시, 사망합니다.]
"왜 가만히 있지?"
"너무 굳은 거 아니야?"
"하하. 긴장했나 보군."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그나마 화장으로 얼굴의 낯빛은 가렸지만, 표정이 너무 굳어버린 탓에.
···점점 공격은 거세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진짜 죽는다.
당장이라도 로그아웃 해야 된다.
세렝게티와의 결혼을 포기하느냐, 목숨을 걸고 진행하느냐.
허드슨이 겨우 고개를 들어, 란돌프를 바라봤다.
하지만 란돌프를 바라본다고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란돌프는 현재 한국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였다.
반면 자신은 영국에 있다.
그것도 고립된 외딴섬에.
성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괜찮은 걸까?
[7Lv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수호벽(7Lv)'의 남은 시간 14초]
[11초 안에 로그아웃 하지 않을시, 사망합니다.]
"상인이라 기사 가문에 압박을 받은 건 아닐까?"
"하긴 여기 모인 기사 출신만 백 명이 넘으니."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자 허드슨의 태도를 은연히 비판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기사 가문 출신들답게 남자답지 못한 허드슨의 태도가 답답한 자들 역시 많았기 때문이다.
[7Lv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수호벽(7Lv)'의 남은 시간 8초]
[4초 안에 로그아웃 하지 않을시, 사망합니다.]
8초.
이제는 뒤가 없다.
답이 없다.
'어떻게 해야······.'
콰르릉!
그 순간이었다.
식장 바깥에서 번개가 휘몰아치며.
쿠르르릉!
"히, 히드라곤이 나타났다!"
"평범한 히드라곤이 아니야!"
"맞서 싸워라!"
바깥의 병사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히드라곤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날 리 없다.
그럴 이유가 있다면, 그건 란돌프가 소환했을 뿐.
"대피하십시오!"
"건물이 무너집니다!"
허드슨이 란돌프를 쳐다봤다.
란돌프는 혼란의 틈에서 어느덧 자신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로그아웃하도록."
"그, 그러면 란돌프 님께서······!"
"나는 괜찮다. 한국은 아직 안전하다."
한국은 아직 공격당하지 않았단다.
허드슨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아······! 감사합니다!"
['수호벽(7Lv)'의 남은 시간 1초]
[1초 안에 로그아웃 하지 않을시, 사망합니다.]
['허드슨'이 '로그아웃'했습니다.]
*
한국.
모든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왔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고 지진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저, 저게 뭐야······?"
그리고 바깥으로 나온 사람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하늘 위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바다가······!"
그뿐만이 아니다.
삼면의 바다가 들썩이며 거대한 쓰나미가 덮쳐오고 있었다.
예고되지 않은 천재 이변.
플레이어들 역시도 갑작스러운 침공에 너 나 할 것 없이 당황하고 말았다.
"저, 저걸 어떻게 막아야 돼?"
"마족은 어디 가고?"
"한국을 침공한 건 '황금률의 마법사'라는데?"
"설마 하늘에 떠 있는 저게···?"
하지만 마족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황금색의 지팡이를 쥔 남자가 하늘에 두둥실 떠 있을 뿐이었다.
남자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운석은 더 빠르게, 해일은 더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휘이잉!
파사삭!
쾅! 콰콰쾅!
그러나 운석들이 닿기 전에 수많은 검에 의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라시아!"
"그라시아다!"
"그라시아가 왜 한국에?"
로그아웃한 그라시아가 황금률의 마법사에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떨어지는 운석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범위가 너무 넓다.'
그라시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천 개의 검을 모두 방출했으나 역부족이다.
해일 역시도 그가 모두 막기엔, 너무 범위가 넓다.
결국 몇몇 운석이 그라시아의 방어선을 넘어 지상으로 다가갔고, 해일 역시도 주변의 도시들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였다.
"아아······!"
머지않아 일어날 일은 참사 그 자체.
사람들이 끔찍한 참사를 그리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응······?"
"뭐, 뭐야?"
하지만, 예상했던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그들의 앞에 생겨난 거대한 '장막'이, 떨어진 운석과 해일 모두를 막아버린 것이다.
*
갑자기 떠오른 거대한 장막을 보며, '황금률의 마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냐, 이 거대한 '수호벽'은?"
무한의 인벤토리
"···'영웅회'를 탈퇴하겠다."
마스터가 죽은 뒤, 영웅회의에서 그라시아는 말했다.
영웅회. 처음 '8영웅'으로 시작한 이 모임을 탈퇴하겠다고.
"··· 그라시아. 네가 얻은 이권들을 전부 포기하겠다는 거냐?"
"그렇다, 루시퍼. 전부 내놓으마."
루시퍼.
실질적인 이 모임의 수장격 존재.
영웅회를 만들고, 마스터를 앞에 세운 채 뒤에서 조종한 자!
그가 무겁게 말하자, 그라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포기하겠다고.
'대원정에 참가한 적도 없는 내가 이곳에 드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애초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대원정은커녕 마족과 제대로 부딪혀본 적도 없는 그가 마계를 정벌한 영웅이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정정하지 않았다.
그로 인한 이득들을 은연중 포기하지 못한 것이었다.
욕심 때문에.
결국 이 거대한 거짓말에 자신 역시 동조한 셈이다.
"'서약'을 잊은 건 아닐 테지?"
"잘라가거라."
그라시아가 오른팔을 내밀었다.
영웅회의 탈퇴를 위해선 신체 부위 하나를 내놔야만 한다.
물론 처먹은 게 있으니, 기꺼이 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을 공표할 것이다. 대원정을 이끈 건 오직 '빌헬름'뿐이라고."
"··· 그래서 네가 얻는 게 뭐지?"
루시퍼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딴 사실을 공표해봤자 그라시아가 얻을 게 없다.
팔만 잘리고, 거짓된 삶을 살았다며 욕만 먹을진대.
"명예."
"설마 네 스스로의 그 알량한 명예 말이냐?"
"그렇다."
그라시아는 인정했다.
오로지 이 선택은 자신의 당당함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스스로의 당당함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내가 나에게 당당하지 못하면,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자신이 더 강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당하지 않아서. 명예롭지 않아서.
그라시아는 명예롭길 바라지만 언제나 불명예를 쥐고 있었다.
이게 그의 한계를 막아섰다.
이것이, 별들이 그를 피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아쉽군."
루시퍼가 피식 웃었다.
···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놈.
그라시아 역시도 루시퍼가 정확히 뭘 하는 놈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루시퍼가 천천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간다면 말리진 않으마. 팔도 자르지 않겠다. 다만, 진정으로 아쉽구나. '이것'을 모두와 함께 나눌까 싶었는데."
······ 품에서 꺼낸 것은 동강 난 누군가의 신체.
본 순간 알았다.
저건······ 여신이 아닌 다른 '신의 신체'라는 걸.
······ 특별한 '별'이라는 것을.
*
황금률의 마법사 유니온.
이세라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후, 침식률을 가속화하여 마침내 그는 지구로 향할 수 있었다.
"이곳이 죄인들의 땅."
아아. 공기부터 탁하기 그지없는 이곳이 바로 죄인들의 땅이다.
볼품없는 마나(Mana)로 가득한 척박한 대지.
이곳은 자신이 복수해야 할 죄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으로 그들을 박살 내면 좋을까?
좌아악!
유니온이 손을 휘두르자, 직사각형 모양의 물품 저장고가 나타났다.
"인벤토리(inventory), '황금 메테오 지팡이'."
무한한 인벤토리에 저장되어있던 황금색의 지팡이가 흘러나와 유니온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바다를 가르는 폭풍'."
이번에는 소모품이다.
번개 모양의 룬을 바다를 향해 쏘아내자 거대한 해일이 일어났다.
"스킬 '메테오', 인벤토리 '마나 회복 엘릭서 100%'."
스킬을 쓰자 하늘에서 운석들이 미친 듯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어 인벤토리에서 파란색의 물약을 꺼내 꿀꺽, 꿀꺽 마신 유니온은 재차 지팡이를 휘둘렀다.
"스킬 '메테오', 인벤토리 '마나 회복 엘릭서 100%'."
"스킬 '메테오', 인벤토리 '마나 회복 엘릭서 100%'."
그는 황금률의 마법사.
몸을 빼앗겨 자유를 잃었던 시절, '죄인'이 행했던 모든 행위를 마찬가지로 따라 할 수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인벤토리는 보안상의 약점이 있었지.'
먼 옛날.
죄인들은, 모두 인벤토리를 갖고 있었다.
무한한 인벤토리에 물건을 저장하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
하지만 그것은 보안상의 약점이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플레이어들에게 무한의 인벤토리가 주어지지 않는 이유다.
그리고 유니온은.
'나는 모든 인벤토리를 다룰 수 있다.'
그때 당시 존재했던, 모든 인벤토리의 모든 내용물을 꺼내 쓸 수 있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보물창고.
이만하면 이 정도의 땅덩어리는 단번에 파괴되리라.
휘이익!
퍼어엉!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수많은 검들이 운석을 부수기 시작했다.
"······ 오호. 검성이로군."
보자마자 알았다.
저건 검성의 스킬, 천검이다.
클래스 '검성'의 계승자가 이번 대에도 나타난 모양.
꽤 얻는 조건이 까다로워서 갖기 힘든 클래스인데, 제법 괜찮은 실력자인 듯했다.
"인벤토리, 올 브레이커."
물론 그래봤자 자신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황금률의 마법사이자, '무한한 인벤토리의 주인'인 자신에게는.
검성은 분명히 훌륭한 클래스이지만, '제대로 된 히든 클래스'는 아닌 탓이다.
곧이어 인벤토리에서 흉측하게 생긴 커다란 가위가 나타났다.
싹둑!
가위가 입을 닫자, 한꺼번에 검들이 잘려 나간다.
6등급 이하의 모든 무기를 자르고 파괴해버리는 8등급의 무기, 올 브레이커.
검강을 씌우지 않는 한 6등급 이하의 무기는 가차 없이 파괴한다.
게다가 '천검'으로 사용한 검들 대부분이 6등급 이하였다.
나타난 검성은 그 모습을 보며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다.
"검성을 이은 죄인이여. 더 보여줄 게 없느냐?"
유니온은 즐거웠다.
죄인들을 농락하고, 지옥에 빠트리는 게.
이 세계를 모조리 불태울 생각에.
결국 검성은 자신이 쏟아낸 수많은 메테오를 막아내지 못했다.
꽈릉!
이어 떨어진 메테오가 지상을 불바다로 만들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떠오른 거대한 장막을 보며, '황금률의 마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냐, 이 거대한 '수호벽'은?"
푸른색의 장막이 운석과 해일을 막았다.
이건 분명히 수호벽이었다.
여신의 이권 중 하나.
그런데 너무 크고, 단단했다.
"인벤토리, 현자의 눈."
작은 눈 하나가 그의 앞에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현자의 눈'이 관찰한 내용이 나타났다.
[진(進) 수호벽]
과연.
이름만 보이지만 그만하면 충분했다.
이건 특정 레벨 이하의 모든 공격을 무효화하는 수호벽이다.
하지만 수호벽은 단순히 레벨을 올린다고 강화되지 않는다.
그런데 진의 형태로 강화되어, 광범위한 범위의 공격을 차단해버린 듯싶다.
처음 보는 형식, 형태.
게다가 이는 곧 유니온의 공격이 저 수호벽의 레벨보다 낮다는 의미였다.
"인벤토리, 저장된 경험치 물약."
하지만 괜찮다.
저장해놓은 경험치는 많았으니까.
본래 그의 격을 담아둔 경험치 물약.
차원을 넘어올 때 균형을 맞추고자 잠시 낮춰둔 것이다.
애초에 그는 차원을 넘는 걸 허락받지 않은 존재.
괜히 더 높은 레벨로 차원을 넘어왔다간 균형에 의해 튕겨 나갈 수도 있는 탓이다.
꿀꺽! 꿀꺽!
쉴 새 없이 마시자 곧 그의 앞에 '레벨업했습니다'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인벤토리, 극진멸참 장벽을 꿰뚫는 활."
자.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
극도로 강화된 극진멸참의 활.
장벽을 대상으로 할 때 1레벨의 추가 공격을 가하는 활이다.
그것의 활시위를 쥐고, 놓자.
꽈르르르릉!
"······ 또?"
이상한 일이다.
도합 두 레벨이 상승한 것과 같은 일격일 터인데, 이번 공격도 막힐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수호벽의 레벨이 대체 몇이기에?
애초에 이 정도로 높게 올릴 수가 있는 것이었나?
"······ 재밌는 놈이로구나."
아무래도 엄청난 죄인이 이 아래에 숨어있는 모양이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검성이 빛의 검을 쥔 채 달려들고 있었다.
"인벤토리, 절대자의 방패."
꽈앙!
하지만 검성은 절대자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니온은 이 특이한 수호벽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 수호벽의 주인이 계승한 클래스가 뭘지 궁금하긴 하군.'
죄인들이 가진 클래스는 모두 원형이 존재한다.
예컨대 저 검성의 클래스는 라일리를 흉내낸 것.
하지만 이 고레벨 수호벽의 주인은, 필시 저 검성과도 궤가 다른 클래스를 이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어쩌면 자신이 오매불망 찾고 있는 '클래스'의 보유자일지도 모르는 일.
그러니.
"기다려볼까?"
강제로 부수려면 부수지 못할 것도 없으나.
억지로 깨부수진 않아도 될듯하다.
앞으로 십여 초만 기다리면 어차피 수호벽은 깨질 테므로.
기다렸다가, 수호벽의 주인과 마주하면 될 일이었다.
그 찰나였다.
쩌적! 쩌저적!
유니온이 표정을 굳혔다.
수호벽의 지속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듯했다.
침략의 시작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붕괴의 소리.
그 안에서 '균형 수호자'의 목소리 역시 들려온 탓이다.
'쯧. 레벨을 올렸더니 귀신같이 알아채는군.'
저장된 경험치로 힘을 수복하자 '균형 수호자'가 움직였다.
차원을 넘어온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거라.'
아무래도 저 수호벽의 주인은 다음에 봐야겠다.
그러나 유니온의 입가에 미소가 짙게 걸렸다.
어찌 됐든 가장 맛있는 과실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됐으니까.
이는 곧 언제든 원할 때 과실을 따서 먹을 수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인벤토리, 무한의 텔레포트 북."
지이이이잉!
유니온이 여유롭게 열린 포탈의 안으로 발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