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우리는 동네 국밥집에 왔다.
"여기 맛집이에요. 저희 여기 단골이거든요."
윤지은의 소개로 온 가게였다. 확실히 맛있다. 진한 국물이 밥과 잘 어우러진다.
국밥을 한 숟가락 뜬 윤서현이 중얼거렸다.
"뭔가, 뭔가 아닌데······."
"왜 너 국밥 좋아하잖아?"
"좋아하긴 하는데······. 왜 하필이면 국밥집······. 이따 집에가서 봐. 진짜."
윤서현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열심히 국밥을 퍼먹었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동생을 놀리던 윤지은이 나를 바라봤다.
"어때요? 여기 맛있죠?"
"네, 맛있네요."
나도 몰랐던 동네 맛집이다.
"동생을 구해주셨다길래 한 번 쯤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솔직히 깜짝 놀랐어요. 잘 싸우시던데요."
천리안으로 자볼과의 싸움을 봤다고 했지.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는 모습도 봤을 거다.
좋게 봐줬다면 나야 좋다. 무한의 궁사 윤지은 또한 언젠가 마족을 막을 핵심 인력이 될 것이므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던 윤지은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지한씨. 혹시 길드에 관심 없으세요?"
윤지은이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 은빛의 날개 부길드장 윤지은
"혹시 저희 길드는 어떤가요? 마침 일주일 뒤에 저희 길드에서 채용 시험을 보거든요. 거기에 참가해보시는 건 어때요?"
그리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얼마전 S급 게이트 공략을 끝내고 2위에 오른 '은날'이니까.
"지한씨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통과하실 거에요."
이렇게 바로 제안해 올 줄은 몰라서 나는 받아든 명함을 잠시 바라봤다. 은날은 확실히 훌륭한 길드다. 여러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겠지.
다만, 길드에 들어가게 되면 여러 제약이 생긴다.
'앞으로 돌아다닐 일이 얼마나 많은데, 길드 하나에 묶여 있을 순 없다. 그녀의 호의를 산 건 좋지만, 딱 거기까지.'
그게 설령 대한민국 2위 길드라고 해도 말이다.
나에게 있어선 용병이 활동하기엔 가장 최적의 포지션이었다.
길드에 들어가서 떵떵거리면서 살면 좋겠지만, 마족 놈들 막으려면 당장은 어렵다.
그때였다.
위이잉.
내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했다.
- 백묵
백묵이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네. 편하게 받고 오세요."
나는 밖에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통화 했던 게 바로 오늘 아침인데, 벌써 뭔가를 알아냈나.
- 여보세요. 지한씨? 찾았어요. 가장 먼저 찾아달라 하셨던 거요. 두 개 중에 하나를 먼저 찾았어요.
마기의 원천이 있는 위치. 내가 그에게 건네준 종이의 가장 상단에 적힌 것이었다.
- 비영 길드 '우진형' 맞죠?
"맞습니다."
그의 정체는 최하위 마족이다. 마기의 원천 운반자이기도 했다.
- 그 사람 비영 길드를 탈퇴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조사를 좀 해봤는데, 다음주에 열리는 은빛의 날개 헌터 채용 시험에 참가한다네요.
채용 시험?
아까 윤지은이 이야기했던 그거 말인가?
'잠깐만······.'
헌터 채용 시험? 우진형? 잊고 있던 기억의 퍼즐이 맞춰졌다.
'이거 우진형이 무슨 일을 벌이겠는데.'
비공식적인 자리라 큰 기사가 나오진 않았지만, 대형 길드의 채용 시험 도중 게이트 관련한 사고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분명히 있었다.
- 자연스러운 접촉을 원하시면 그 시험에 참가할 수 있게 도와드릴까요?
백묵이 친절을 보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아쉽네요. 일단은 여기까지에요.
백묵에게 의미 없는 호의는 없다.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건 내가 하는 게 낫다. 윤지은과의 관계도 중요하니.
일단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아 보인다.
-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우진형 그 사람 일정을 분 단위로 뽑아드릴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솔직히 그렇게까지는 필요는 없다만.
그대로 거절하려다가 마음을 돌렸다. 이건 백묵에게 마족의 존재를 미리 각인 시킬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면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아, 근데 추가 수당이 붙는데 괜찮으신가요?
"······."
- 어려운 건 아니고, C급 게이트 공략 하나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사실 나야 좋다.
게이트에 들어간단 건 스킬이나 포인트에 더불어 아이템 경험치를 쌓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이번 채용 시험에서, 우진형과의 전투는 피할 수 없을 거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준비 해두는 게 낫겠어.'
마족과의 전투 전의 대비.
그 대비는 확실하면 확실할수록 좋다.
"게이트 공략 날짜는 언제죠?"
- 3일 뒤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스테이지형이라 최소 이틀은 걸릴 거에요.
날짜도 좋다. 잘만하면 아이템 제작자 김건에게서 성장형 아이템을 받아갈 수 있겠다.
"멤버는 어떻게 됩니까?"
그냥 갈까 했지만, 백묵은 미친 빌런들을 섞어 짜준 전적이 있기 때문에 물어봤다.
- 어제 만나셨던 진세아양. 그리고 전위 딜러 하나랑 원거리 딜러 하나입니다.
"······진세아 말고 다른 사람들 이름 좀 알 수 있을까요?"
- 이름이요?
백묵은 의아해 하는 듯 하면서도 이름을 불러줬다.
- 김강민, 최유정입니다.
이름을 전부 들은 나는 몇가지 정보를 더 물었다. 사소한 질문이었다.
'오호.'
그 대답을 전부 들은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잘만하면 사기적인 스킬을 하나 배울 수 있겠는데.'
불러준 일행 중에 가장 중요한 건 김강민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김강민.
용들조차 마족의 개로 전락한 세계에서 그는 홀로 수 십 마리의 용을 죽이고, 그들을 다스리던 마족의 목까지 따낸 영웅이었다.
그가 가진 스킬 중에 마족을 죽이는데 특화된 기술이 있었다.
'영웅들이 너도나도 그 스킬을 배웠었지.'
최유정이란 이름이 살짝 걸렸지만, 그건 가서 확인할 일이고.
공략을 갈 이유는 차고 넘쳤다.
마족 우진형과의 싸움을 대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전화기 너머 백묵에게 말했다.
"가겠습니다."
* * *
국밥집 문을 다시 열고 들어가려는데, 윤지은과 윤서현의 말소리가 들렸다. 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인지 스킬 탓이었다.
"언니가 봤는데, 가능성 빵 퍼센트. 너 혼자 설레발친거라니까, 바보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기껏 만나서는 국밥집이 뭐야."
"얘는, 제일 잘 먹어 놓고."
"집에 가서 보자 진짜."
뭐, 그런 이야기였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매의 고개가 어색하게 나를 향했다. 윤지은이 아무 일도 없단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전화 끝나셨나요?"
"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네? 설마 다 들렸······."
"시험 참가 말입니다."
"아아, 그거요."
윤지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거 해보겠습니다. 채용 시험이요."
그 말에 윤지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정말요?"
"네, 생각해보니 길드가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지만. 마기의 원천을 위해서 채용 시험에는 참가해야 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역시! 탁월한 선택! 후회 안하실 거에요."
윤지은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 좋겠네. 언니."
옆에 있던 윤서현이 어이없단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멸망한 세계에서의 윤지은은 정의롭지만 한없이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여기선 그냥 친절하기만 하다.
* * *
집에 돌아오니 거의 새벽이었다.
그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인과 역전의 상점.'
소모품에 있는 모든 아이템을 전부 구매했다. 재물과 재능 획득의 물약. 둘 다 엄청난 효과였다.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
새로운 카테고리는 마기의 원천을 다 모아야 열 수 있다. 그렇다면 소모품 카테고리는 빈 채로 남는 건가?
그 의문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인과역전의 상점을 열었다.
『 소모품 카테고리의 아이템을 전부 구매하셨습니다. 』
『 등급업 : 해당 카테고리의 등급이 레어 등급으로 한단계 상승합니다. ( 일반 -> 레어 ) 』
일반이었던 소모품의 등급이 레어가 된단건가.
『 등급업을 축하드립니다! 첫번째 상품이 일시적으로 무료로 제공 됩니다. 』
'오.'
나는 짧게 탄성을 흘렸다.
『 인과역전의 상점 - 소모품(레어) 』
- 랜덤 무기 소환권(레어) : 1/1 ( 무료 ) [ 잔여 : 59분 ]
※헌터 등급 C 랭크 달성시 새로운 물품 추가
'뭐야, 아이템이 하나밖에 없네.'
상점이라기보단 보너스 보상에 가까웠다.
『 보유 포인트 : 2131 Point 』
내가 소유한 건 2000포인트.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고, 자볼을 잡은 덕에 꽤 많이 모였다. 그런데 구매할 아이템이 없다.
'고민 없이 포인트를 아낄 수 있으니까 차라리 나은가.'
이제 마기의 원천을 1개만 더 모으면 새로운 카테고리가 개방된다. 그때까지 포인트는 아끼는 게 낫다. C등급이 되면 물품이 추가된다고 하니 아껴두는 게 맞다.
나는 딱 하나 있는 무료 항목을 터치했다.
'이건 무료라니까 빨리 구매해야지.'
보아하니 59분 뒤에는 무료가 아니게 되는 것 같으니.
'구매.'
『 0 포인트를 소모하여 랜덤 무기 소환권(레어)를 구매하셨습니다. 』
『 C랭크 달성까지 소모품 카테고리에 아이템이 추가 되지 않습니다. 』
『 해당 소환권이 즉시 사용됩니다. 』
'아쉽네.'
소환권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행운 스킬이 더 높아진 뒤에 사용하려 그랬는데. 아쉽긴 해도 무료니까 불만은 없다.
찌이익.
빛과 함께 허공에 나타난 티켓이 반으로 나뉘었다.
『 스킬 '행운 Lv.2'가 발휘됩니다. 』
『 해당 스킬이 대량의 경험치를 얻습니다. 』
『 스킬 '행운 Lv.3'을 획득합니다. 』
메시지와 함께 붉은 섬광이 터져나왔다.
'유니크?'
붉은색이 의미하는 것은 유니크 아이템이다. 나는 재빨리 아이템을 확인했다.
'미친.'
세련된 철제 장식과 붉은 광택을 품은 한 자루의 도끼가 내 눈 앞에 있었다.
행운 스킬이 터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정보를 살피는 내 눈이 점차 커졌다. 그냥 유니크 템이 아니었다.
'성장형 무기잖아.'
그 특별함은 일반적인 방어구나 장신구와는 궤를 달리한다.
37화 드래곤 슬레이어(2)
그건 한 손에 딱 들어오는 크기의 도끼였다.
회백색의 도끼의 머리 부분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아이템 정보 』
- 이름 : 정령 파괴자 (성장형)
- 등급 : 유니크
- 레벨 : 0 / 100 ( 0% )
- 효과 : 공격력 30 ( + Lv당 0.3 )
- 추가효과 : 잠김
그 능력치는 압도적이다.
당장은 공격력이 30이지만, 무기 레벨 100을 달성하면 공격력이 무려 60이 된다.
'거의 레전더리 등급 수준의 공격력이잖아.'
회수의 창이 45, 영혼 포식자가 42인걸 감안하면 엄청난 강력함이다. 성장만 시킨다면 내가 가진 무기 중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와.'
거기에 더해 잠겨 있는 추가 효과까지. 이건 아이템 레벨이 100이 되면 개방되는 거겠지.
성장치를 최대로 만드는 건 경험치가 10만배인 나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무기는 100레벨이 됐을 때 스킬이 꽤 사기적인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성장형 무기는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 된다. 이걸 파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앞으로 있을 마족의 '제약'을 생각하면······.
내가 쓰는 게 백 배는 낫다.
100레벨이라는 경험치를 단숨에 채울 수 있기도 하고.
그때였다.
띠링.
- C급 게이트 공략 정보
백묵으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사흘 뒤에 공략할 게이트에 대한 정보였다.
'오.'
- 출현 마수 : 나무 정령 마수 '엔트', 목재 골렘
그 정보를 살피는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도끼와 나무라니, 이것보다 좋은 조합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 * *
사흘 뒤, 나는 사전에 공지된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어느 한적한 공사장이다. 그곳에 놓인 폐건물이 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무런 방어구 하나 없었던 이전과 달리, 가죽이 덧대어진 메탈 아머를 둘렀다. 갑옷보다는 보호구 같은 느낌이다.
방어력뿐만 아니라 기동성도 우수하다.
'예정보다 김건한테서 방어구를 빨리 받아서 다행이야.'
멸망한 세계의 또라이 제작자 김건.
그렇게 아이템을 못 만들겠다고 땡깡 부리다가도, 막상 불이 붙어선 홀린듯 이틀만에 장비를 내놨다.
듣자하니 어제까지 한숨도 안 자고 밥도 제대로 안 먹은 채로 아이템을 만들었단다.
나는 그걸 어제 하루 동안 소나무 마력 진액에 담궈 성장형 아이템으로 만들었다.
『 특별한 금속제 방어구(성장형) 』
- 부위 : 목걸이, 흉갑, 각반, 팔 보호대
- 레벨 : 0 / 100 ( 0% )
- 등급 : 일반
- 효과 : 방어력 + 10 ( + Lv당 0.20 )
그 성능 또한 출중하여 100레벨이 되면 30의 방어력을 가지게 된다.
'거의 유니크 수준이구만.'
엄청난 가성비다. 유니크 아이템으로 방어구를 맞추려면 몇 십억이 가볍게 날아가니까.
이제 남은 건 게이트에 들어가서 사냥을 하는 것 뿐.
다음 헌터 채용 시험을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채용 시험에서 있을 마족 우진형과의 전투를 대비해야 한다.'
놈은 채용 시험에서 일을 벌일 거다. 그 계획을 저지하는 것과 동시에 놈에게서 마기의 원천을 회수해야 했다.
'이것들만 전부 최대 레벨까지 올리면 방어력은 부족하지 않겠지.'
거기에 무패의 반지의 방어력 25를 더하면 왠만한 공격은 가볍게 받아낼 수 있다.
근처 철근에 걸터 앉아,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또 보네요."
"그래."
환세의 도둑 진세아였다.
지난번 게이트를 공략한지 딱 3일 됐다. 녀석도 뭔가 게이트를 돌아야하는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싶다.
"와, 방어구 맞췄어요?"
진세아는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내 방어구를 슥슥 훑어보더니 멈칫하곤 굳어진다.
뭐, 보이는 게 있나.
참고로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의 정보는 타인이 볼 수 없다.
근데 그런 게 아니었나보다.
"설마, 원래는 방어구도 안끼고 있었던 거에요?"
진세아는 경악스런 표정으로 날 올려다 봤다. 그러고보니 제대로 된 방어구 없이 다니긴 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진세아를 살폈다.
"그러는 너는 뭘 그렇게 치렁치렁 두르고 있는거야?"
3일 사이에 못보던 장신구가 좀 늘었다. 팔찌나, 목걸이 반지 같은 것들. 디자인이 심플해서 위화감은 없었지만.
내 지적에 진세아가 흠칫하면서 물러났다.
"도, 돈 주고 사, 산거거든요?"
말까지 더듬으면서 당황해 한다.
'절대강탈이었지.'
진세아 자신도 모르던 능력의 쓰임새를 내가 알려줬다. 그 덕에 어디선가 아이템을 구해 온 모양.
설마 진짜로 훔친 건 아니겠지.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물어본건데."
"윽······. 하여튼 제 능력은 비밀이니까, 말하지 마요."
"그래, 그래."
범죄와 관련된 스킬들은 보통 좋은 이야기를 못 듣는다. 무슨 일이 생겨도 금방 의심 받기 쉽상이다.
'진세아가 가진 도둑의 능력은 더더욱 그렇겠지.'
진세아와 대화를 하고 있자니 백묵에게 고용된 다른 헌터들이 도착했다. 먼저 온 건 김강민이었다.
그는 머리에 낡은 투구를 쓰고 있었다. 눈을 제외하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철제 투구였다.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더랬지.'
스킬로도 지워지지 않는 화상. 그런 게 있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마족에게 당한 상처일 거다.
마족의 존재는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해자가 없는 건 아니다.
"김강민입니다."
그는 몸을 살짝 돌려 등에 매고 있는 커다란 대검을 보여줬다. 투구와 무기까지 확인했으니 확실하다.
이 사람이 바로 미래의 드래곤 슬레이어다.
뭐, 그런 사실이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김강민이 가진 스킬.
'이 사람한테서 배워야 하는 스킬이 있다.'
그 스킬의 이름은 '데몬 헌트'다.
일시적으로 마기를 가진 대상에게 추가 데미지를 주는 기술이다. 미래의 영웅들이 모두 김강민에게서 스킬을 익혔을 정도로 중요도가 높은 기술이다.
'그러려면 김강민에게 호감을 얻는 게 중요하겠지.'
데몬 헌트는 현시점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는 기술이다. 때문에 잘만 하면 큰 대가 없이 배울 수 있을 거다.
그걸 위한 계획도 생각해왔다.
"이지한입니다."
"진세아예요."
각자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의 주무기를 보여줬다. 나는 도끼를 꺼냈다.
"엥, 도끼?"
의아해 하는 진세아. 대충 대답했다.
"바꿨어."
이걸로 각자의 포지션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근데 아직 안 온 사람이 하나 있었다.
"죄송해요! 늦었죠?"
원거리 딜러 최유정이었다.
"최유정이라고 해요."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서 지팡이를 보여줬다.
'이런.'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이 사람 빌런이잖아······.'
어김없이 빌런 하나를 끼워주는 백묵의 선택이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설마 했건만, 얼굴을 보니 확실히 기억난다.
미친 악령 조종사 최유정.
그녀는 정령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걸 사람을 죽이는 방향으로 사용하다보니 악령까지 다루게 됐다나.
'사람을 죽일수록 강해지는 빌런이었던가.'
빌런 중에서도 악질인 사람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억눌렸을 것들이 헌터가 되며 개방되는 탓일까.
하여튼 조심해야 했다.
'지난번에 만났던 빌런들보다 악질이니까.'
이 여자는 진짜 사이코패스다.
"전부 오셨으니 출발하겠습니다."
가볍게 다시 한 번 자기소개를 나눈 뒤 우리는 게이트를 향했다. 파티원들이 모두 들어가고 나서 나는 의심스런 눈으로 다시 게이트를 살폈다.
이런 건 확실히 해둬야지.
'······이번에는 평범한 게이트 같다.'
마기에 의한 변질도 없어 보이고.
내가 할 일은 명확하다.
아이템들의 레벨업을 하고, 김강민에게서 스킬을 배워오면 된다.
마지막으로 바깥을 살핀 나는 게이트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청량한 공기가 느껴지는 숲 속.
찌르르.
풀벌레 소리와 함께 반딧불이가 날아다닌다.
『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
『 1스테이지 - 엔트의 숲 』
『 공략 조건 : 나무 정령 엔트 40마리 사냥 ( 0 / 40 ) 』
이번 게이트는 스테이지형.
미션을 클리어해야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갈 수 있다. 보스를 만나기 위해선 미션을 달성해야만 한다.
"그럼 가시죠."
김강민이 대검을 맨 채로 앞장섰다.
* * *
유난히 거대한 나무가 많은 지형이었다. 이 안에 나무의 모습을 한 마수 엔트가 숨어 있을 거다.
엔트는 나무의 형상을 한 마수다. 나무랑 비슷해서 숨어 있으면 찾기 힘들다.
"혹시 엔트 상대법 알아요?"
두리번거리며 따라오던 진세아가 내게 물었다.
"때려 잡아야지."
"약점 같은데 없어요?"
"글쎄."
나도 직접 상대해 본 적은 없다. 월간 헌터나 인터넷에 떠도는 공략법을 알고 있을 뿐이고.
앞을 보며 걷고 있지만, 내 주의는 최유정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활동 시기가 상당히 이른 빌런이었다.
잘 나아가나 싶던 그때였다.
쿠구구구······.
나무 한 그루가 거대한 몸을 움직여 우리를 마주했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우리쪽으로 다가온다.
"뭐가 저렇게 커······."
진세아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하다.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면 나부터 가볼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새로 얻은 무기인 '정령 파괴자'를 들어 올렸다.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이다.
이걸 사용해 보고 싶었다.
"진짜 그거 쓰게요?"
진세아가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조용히해라. 다른 사람들이 괜히 불안해 하잖아.
타앗.
땅에서 뛰어 단숨에 도끼를 엔트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콰득!
도끼 머리가 엔트의 머리를 깊숙히 파고 들었다. 나무 그 자체가 움직이는 거다보니, 도끼가 효과가 좋다.
콰앙! 콰앙!
두 발을 더 먹여주고 엔트가 팔을 휘두를 때에 맞춰 뒤로 물러났다. 큰 상처는 아니지만 도끼 찍힌 자국이 두 개 생겼다.
"······어설프군요."
내 모습을 지켜보던 김강민이 그리 말했다. 틀린 평가는 아니었다. 도끼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김강민이 대검을 들어 올렸다. 검날 위로 회색빛의 기운이 감돌았다.
콰득! 쩌저적!
그가 휘두른 대검이 엔트의 몸통에 적중했다. 거목이 갈라지며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엔트도 만만치 않았다.
놈은 김강민의 대검을 움켜 쥐었다.
"크윽."
당황한 김강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엔트와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엔트는 뿌리를 땅에 단단히 박더니 김강민을 끌어 당겼다.
끌려나간 김강민이 바닥을 굴렀다.
크어어어!
대검을 던져 버린 엔트가 괴성을 토해냈다.
'엔트가 김강민을 이긴단 말이야?'
뒤이어 진세아가 단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엔트의 어그로를 끄는 건 성공했지만 나뭇가지만 잘라낼 뿐 별다른 데미지는 못 주고 있었다.
'잠깐 어쩌면······.'
불현듯 떠오른 생각.
콰직!
나는 도끼를 들고 옆에 있는 나무를 강하게 찍었다. 연거푸 그 짓을 반복했다.
"뭐, 뭐해요!"
뒤를 돌아 본 진세아가 경악했다. 최유정도 어이 없단 표정을 짓는다.
나도 굳이 이러고 싶진 않지만.
만약을 대비하자면 필요한 일이다.
아직 상대는 엔트 한 마리. 그래도 여유가 있다. 그리고 구경만하는 건 최유정도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은근슬쩍 묻어가네.'
쓰러졌던 김강민이 대검을 집어들고선 다시 전투에 가세했다.
'······확실한 위기 상황일수록 스킬을 얻기가 쉽다는 거.'
나는 진지하게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찍었다.
콰악!
좀 더 완력을 실어서, 나무를 베어내겠다는 느낌으로.
그렇게 수차례 시도하던 순간이었다.
내 앞으로 다수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스킬 '벌목 Lv.1'를 획득합니다. 』
『 스킬 '벌목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벌목 Lv.3'를 획득합니다. 』
···
..
.
『 스킬 '벌목 Lv.10'를 획득합니다. 』
예상했던 대로였다. 곡괭이로 마정석을 캐내면 그게 채굴이듯, 도끼로 나무를 패면 그게 벌목이지.
'좋았어.'
나는 곧바로 도끼를 들고 엔트를 향해 달려나갔다.
"으아아!"
다리를 붙잡힌 진세아가 엔트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또 이러네 이 녀석.
촤아악!
도끼를 휘둘러 그 줄기를 잘라냈다. 저항감 없이 줄기가 싹둑 잘려나갔다. 그 깔끔함에 속이 시원할 정도다.
"오오······."
진세아의 감탄을 뒤로하고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콰앙!
그대로 엔트를 향해 도끼날을 내려찍었다. 놈이 뒤로 물러서며 팔을 들어 올렸지만 어림 없다.
쩌저저적!
내려찍은 곳에서 균열이 생기더니, 놈의 팔이 장작처럼 시원하게 쪼개졌다.
더 이상 어설픈 도끼질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엔트에게 달려 들어 도끼를 연거푸 내리찍었다.
콰앙! 콰앙!
도끼가 휘둘러 질 때마다 엔트의 몸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만들었다. 나는 미친듯이 도끼를 내리쳤다.
"후우······."
엔트가 거의 목재 수준으로 분해되고 나서야 나는 도끼질을 멈췄다.
『 21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이계규율 : '칭호 - 초성장(超成長)'의 효과로 경험치를 두 배로 획득합니다. 』
『 특별한 금속제 방어구가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평균 Lv. 45 』
『 방어력이 9.0 만큼 추가 됩니다. ( 10 + 9.0 ) 』
『 정령 파괴자가 압도적인 양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Lv. 36 』
『 공격력이 10.8 만큼 추가 됩니다. ( 30 + 10.8 ) 』
뭐가 많이 뜨긴 했는데.
요약하면 아이템 레벨이 올랐다는 것.
엔트 한 마리를 잡았을 뿐인데 아이템 레벨이 이만큼이나 올랐다. 나쁘지 않았다. 근데 아이템이 많으니 경험치가 분산되는 것 같다.
'후우, 이거 좋네.'
정령 파괴자를 들어 올렸다. 도끼 날이 날카롭게 살아 있다. 특히 벌목 스킬과의 상성이 압도적으로 좋다.
"······내가 잘못 봤던 것 같군요. 이거 미안합니다."
내 활약을 지켜본 김강민이 멋쩍은 듯 말했다. 내 도끼질을 보고 어설프다고 한마디 했던 게 마음에 걸렸나보다.
"솔직히 갑자기 나무를 칠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만,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니. 예열이 필요한 기술이었던 거군요. 한 수 배웠습니다."
처음엔 농담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진지하게 하는 말인 것 같다. 오해를 너무 거하게 하시는데.
어쨌든 결과가 좋으니 모든 행동이 용서 받는 느낌.
"인상적인 도끼질이었습니다. 혹시 무슨 기술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 거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알려주시면······."
그냥 벌목이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
"궁금하시면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내 입장에선 오히려 김강민이 엔트에게 쉽게 쓰러진 게 의외였다. 실력 문제는 아닐 거다. 상성 차이겠지.
그때였다.
"저, 저게 뭐죠······?"
쿠구구구······.
주변의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리고 있었다. 저 멀리에 있는 나무들도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지 위로 미약한 진동이 느껴진다.
다수의 엔트들이 다가오고 있단 증거였다.
"왜 갑자기 몰려 오는거지?"
대검을 주워든 김강민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쓴 투구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만하다. 엔트 하나를 상대하는 데에도 그만큼 고전했으니.
'확실히 이상하네.'
엔트들은 개별 행동이 기본이다. 이렇게 많은 엔트들이 한 번에 움직이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뒤에서 잠자코 있는 최유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동료 최유정이 스킬 '정령 세뇌 Lv.5'을 사용합니다. 』
『 근처에 존재하는 정령형 마수들을 움직입니다. 』
11레벨 인지 스킬의 효과로 떠오른 메시지.
이럴 줄 알았다.
"어, 어떻게 해요? 저희가 저 놈들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을까요? 너무 위험해요."
당황한 척까지 하는 최유정.
헛웃음이 나오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 스킬 '간파 Lv.10'을 발휘합니다. 』
『 대상 최유정의 발언에 거짓이 섞여 있습니다. 』
'엔트도 나무 정령이었지.'
그리고 최유정은 정령 조종이 가능한 빌런이었고.
그녀가 의도적으로 엔트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우리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뭔가 해보겠다는 심산인 것 같은데.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런가요? 그럼 다 없애 버리면 되겠네요."
내 도끼는 엔트를 잡을수록 강해진다. 아직 벌목의 스킬 레벨은 10. 더욱 성장할 수 있단 의미다.
몰이 사냥을 하게 해준다면 고마울 뿐이다.
"그, 그게 가능할까요?"
불안한 척하지만, 일순 최유정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난 봤다.
나는 도끼를 어깨에 올린 뒤,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가능하죠."
몰아준 몬스터들은 내가 잘 받아 먹으마.
38화 드래곤 슬레이어(3)
악령 조종사 최유정.
그녀는 모든 상황을 자신의 손 안에 넣는 것을 좋아했다. 파티의 움직임을 쥐락펴락할 수 있단 지배감과 전능감이 그녀의 에너지였다.
'후후, 이번 게이트는 내 무대나 다름없겠어.'
특히나 이번 게이트의 출현 마수는 엔트.
엔트는 나무 정령이었다.
정령 세뇌 스킬을 가진 그녀가 판을 짜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자, 와라. 우선은 파티원들을 궁지로 몰아 넣는거야.'
그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한 틈을 타, 하나 둘 씩 목숨을 빼앗는 게 그녀의 목적이었다.
'사령을 다루려면 좀 더 많은 목숨을 빼앗아야 하니까.'
최유정은 다른 헌터를 살해할때마다 정령을 다루는 힘이 강해지는 걸 느꼈다. 최근에 마수를 조종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덕이다.
얼마전 새롭게 얻은 힘.
음습하면서도 끈적한 기운.
그걸 받아들인 후부터 그녀의 재능은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꺼림칙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건 자신의 본성이나 마찬가지니.
어쨌든, 정령 세뇌 능력 덕에 이번 공략은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계획대로 흘러갈 줄 알았건만······.
'뭐야? 저 놈?'
도끼를 쥐고서 엔트 하나를 박살 내는 남자. 이지한을 바라보는 최유정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저게 저렇게 쉽게 당할 게 아닌데?'
정령 세뇌를 통해 강화한 엔트다. 기존의 엔트보다 지능이나, 힘, 능력이 월등히 강하다.
더군다나 직접 조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차원이 달랐다. 그 탓에 김강민이나 진세아도 제대로 된 힘을 못내고 있었다.
'다른 둘은 꼼짝도 못하고 당했는데, 저 남자는 뭐야?'
콰아앙!
엔트의 팔이 바닥을 후려쳤다. 이지한은 가볍게 피하더니, 엔트를 밟고 올라가 대가리를 찍었다.
쩌저적!
엔트가 장작처럼 일시에 쪼개졌다. 최유정의 입이 저도모르게 벌려졌다.
'어떻게 된거야. 진짜 D급 맞아?'
백묵에게 받은 팀원 정보엔 분명 그리 나와 있었다. 이지한은 D급이라고.
솔직히 처음만해도 그런 것 같았다. 그의 행동은 허접했으니까.
엔트를 앞두고 갑자기 주변 나무를 베다니?
그 멍청한 행동에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참나, 준비운동이라도 했단거야?'
그런 놈이 손에 도끼를 쥐더니 돌연 엔트의 머리를 단번에 쪼갰다.
'빌어먹을, 엔트는 C급이라고, C급!'
자신이 직접 조종하니 아무리 못해도 C급 상위는 될텐데, 그걸 단번에 죽이다니. 분노로 입술을 깨문 최유정이 다시금 정령 세뇌를 발동시켰다.
"언니? 괜찮아요?"
"아, 응."
아차, 표정 관리를 못했다. 진세아의 물음에 최유정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가 파르르 떨린다.
'그래도 수를 늘리면 못 당하겠지.'
스스스······!
최유정의 정령 세뇌가 게이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멀리 떨어져 있던 엔트들이 이곳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를 거다.
"엔트들이 전부 여기로······! 어, 어떻게 해요?"
"도망가야하지 않을까요?"
최유정은 불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파티를 게이트 안쪽으로 몰아갈 계획이었다.
이후에 갈래갈래 찢어 놓으면 일이 수월해질 거다.
"아뇨. 잡죠."
그걸 방해한 건, 또 이 남자 이지한이었다.
"네? 미쳤어요? 스무 마리나 되는 엔트를 어떻게 한 번에 처리해요?"
"스무 마리요? 숫자가 파악이 되시나봅니다."
"대, 대충은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가만히 멍 때리지말고, 좀 도와주시죠."
말실수를 한 최유정을 향해 이지한이 비웃음을 흘렸다. 적어도 그녀에겐 그렇게 보였다.
'큭······.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죽여주마.'
마수를 조종할 수 있다는 건 큰 메리트다. 누군가를 죽여도 마수탓이 되니까.
다수의 엔트들이 숲을 너머 진격해 왔다. 이만한 수를 세세하게 컨트롤하는 건 불가능해도, 물량으로 커버가 될 거다.
쩌억! 쩌억!
수가 많아졌는데도, 이지한은 그 사이를 바람같이 휩쓸고 다니며 엔트들의 머리를 찍어댔다.
그 움직임과 파괴력이 어쩐지 더 늘어난 느낌이다. 그 뒤를 진세아와 김강민이 빠르게 따라 붙어 엔트의 목숨을 끊는다.
한 번 연계적인 플레이가 시작되자, 사냥은 불 붙은 듯 가속되었다. 그 움직임에 동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아닌데.'
불꽃 정령을 소환해 엔트를 공격하는 척 하는 최유정.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건 오히려 게이트 공략을 수월하게 도와준 꼴 아닌가. 몰이 사냥도 이런 몰이 사냥이 없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던 그때였다.
콰앙!
수 앞에선 장사 없다고 했던가. 주변을 둘러싼 엔트 중 하나의 팔이 이지한에게 직격했다. 정통으로 후려친 공격이었다.
'그래! 이거지!'
이지한은 땅에 격하게 튕긴 뒤 나무에 쳐박혔다. 그가 부딪힌 자리에 흙먼지가 치솟아 오르고 나무가 꺾일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이지한씨!"
"오빠!"
당황한 파티원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최유정은 속으로 조소했다. 꼴 좋다. 말도 안되는 무리를 하니까 그리 되는 거다.
'멍청한 놈.'
그런데.
벌떡.
나무에 쳐박혔던 이지한이 단숨에 일어났다. 몸을 툭툭 털고선 아무렇지 않게 도끼를 집어 들었다.
"후, 역시 템빨이 좋다니까."
뭐, 템빨? 겉보기엔 별로 대단해보이지도 않는 아이템들 뿐인데, 무슨 템이 저런 방어력을······.
타앗.
다시금 뛰쳐나가 엔트의 머리를 쪼개고 다니는 이지한. 그 거침없는 손놀림 앞에 엔트들이 통나무처럼 쓰러져나간다.
'대체 저게 어떻게 D급이라는거야?'
최유정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졌다.
* * *
『 특별한 금속제 방어구(성장형)의 레벨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
『 해당 방어구의 방어력 : 30 ( 10 + 20 ) 』
『 총 방어력 : 55 』
나는 흡족스런 표정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무패의 반지랑 방어구를 합쳐서 55의 방어력.'
거의 유니크급 방어구를 둘러야만 얻을 수 있는 방어력이었다. 그 효과도 이번에 확실히 봤고.
'만족스러운 사냥이었어.'
최유정 덕분에 몰이 사냥 한 번 제대로 했다.
『 도끼 정령 파괴자(성장형)의 레벨이 76에 도달했습니다. 』
『 현재 공격력 : 52.8 ( 30 + 22.8 ) 』
도끼의 레벨도 상당히 올랐다.
'이건 유니크 아이템이라 확실히 경험치를 더 많이 먹긴하나보네.'
다른 장비와 경험치를 나눠먹기도 했고. 그래도 단 한 번의 사냥으로 이만큼의 성장이었다.
『 스킬 '벌목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 효과 : 목재 파괴력 25% 증가 』
특히 벌목 같은 경우는 전투 스킬이 아닌데도 큰 도움을 받았다. 체인지 웨펀과 병합해서 사용하니 엔트들이 마른 장작처럼 부숴졌다.
『 1스테이지 클리어 ( 엔트 사냥 40 / 40 ) 』
『 잠시 후 2스테이지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됩니다. 』
"후, 어떻게든 되기는 됐습니다."
김강민이 근처의 그루터기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투구는 벗지 않는다.
진세아도 지친듯 바닥에 주저 앉았다.
대부분 내가 치명타를 날리긴 했어도, 일행도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김강민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순수하게 감탄했습니다. 백묵씨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히 뛰어나군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압도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드래곤 슬레이어보다 활약할 줄은 나도 몰랐다.
"오빠, 도끼질은 언제 배운거에요?"
"몰라."
"설마 원래 직업이 나무꾼?"
"그렇게 치면 넌······."
"쉿! 그거 비밀이라니까요."
진세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최유정을 슬쩍 봤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최유정.
"뭐, 무슨 문제라도?"
"아뇨. 딱히? 문제 없어요."
내가 묻자, 그녀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마수를 조종할 수 있으니 거리낄 게 없단 건지.
덕분에 사냥은 잘했다.
하루는 걸릴 엔트 사냥이 몇 시간만에 끝났다.
'엔트들은 원래 각자 영역을 지키느라 뭉칠 일이 없는데.'
그걸 최유정이 한 곳에 모아줘서 공략이 빨라졌다.
'그러면 다음 스테이지로 가볼까.'
우우웅······.
다음 스테이지로 향하는 게이트가 우리 앞에 생성되었다.
* * *
『 2스테이지 - 다크 엔트 』
『 공략 조건 : 보스 다크 엔트 처치 ( 0 / 1 ) 』
"일단은 휴식을 좀 취할까요?"
나는 숲을 조금 나아가다 멈춰섰다.
어쩌다보니 내가 앞장 서서 가고 있었다. 전투 끝나고 보니 자연스레 리더가 됐다.
한 번 쯤은 쉬어야했다.
보스와 싸우려면 힘을 제대로 비축해 놔야 한다. 나는 괜찮아도, 팀원들의 체력을 생각해야 했다.
우리의 적은 보스 하나가 아닐 수 있거든.
근처에 널린 게 나무였다. 나는 도끼로 나무 하나를 쓰러뜨렸다. 적당히 다듬어서 앉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
"와우."
"재주가 많으시네요."
모닥불까지 피우니, 완전히 캠핑장이다. 불을 싫어하는 엔트의 특성상 보스가 다가오진 않을 거다.
"받아 온 도시락이 있는데 드시겠습니까?"
김강민이 배낭에서 주섬주섬 도시락을 꺼내줬다. 차가운데다가 맛도 없다. 게이트니까 어쩔 수 없이 먹는거다.
다른 사람들도 깨작깨작 도시락을 삼키고 있다.
그때였다.
줄곧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최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시락은 먹지도 않고 내버려둔 채다.
"전 잠시 주변을 살피고 올게요."
"아, 예."
그러던가 말던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인데, 본색을 드러내주면 나야 좋다. 이 유정은 숲 너머로 사라졌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가져온 배낭에서 캠핑 용품을 꺼냈다. 지난번에 산 마법 배낭이라 큰 물건도 담을 수 있었다.
달칵.
모닥불 위에 삼각대를 놓고 냄비를 달자 주변의 시선의 집중됐다. 도시락이 맛 없으니 더욱 관심이 갈만하다.
"뭔가 만드시는겁니까?"
"네, 한 번 해보려고요."
냄비에 가져온 물을 부은 뒤 기다린다.
보글보글.
물이 끓기 시작할 때, 배낭에서 라면을 세 봉지 꺼냈다. 그냥 먹고 싶어서하는 게 아니다. 나름의 계산이 있다.
'게이트에서 요리를 한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행동이 게이트에서 높은 경험치를 받는다. 상황이 열악할 수록 스킬을 얻기가 쉬웠다.
그런 원리로 요리 스킬을 얻어보려는 요량이었다.
"라면?"
멀찍이 있던 진세아가 다가왔다. 라면이란 말에 김강민도 투구 너머로 두 눈을 떼지 않고 날 바라본다.
드래곤 슬레이어 김강민은 라면을 좋아한다. 그에게 '데몬 헌트' 스킬을 배우러 갔던 영웅들의 손에 라면이 하나씩 있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
끓는 물 위에 면을 넣고 스프를 풀자, 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온다.
동시에 메시지창이 쏟아졌다.
『 스킬 '기초 능력 Lv.11'을 발휘합니다. 』
『 일반 스킬의 획득 확률이 상승합니다. 』
『 스킬 '요리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요리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요리 Lv.3'을 획득합니다. 』
···
..
.
『 스킬 '요리 Lv.10'을 획득합니다. 』
희미한 금빛 기운이 라면 속으로 스며들었다. 신들린 듯 젓가락을 움직여 면발의 꼬들함을 살뒤, 적절한 시기에 그릇에 덜어냈다.
타이머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 타이밍이 느껴진다.
"와······."
그걸 지켜보던 진세아가 감탄을 흘렸다. 내가봐도 대단하다. 그냥 라면일 뿐인데 CF에 나오는 것 같은 완벽한 자태다.
'이게 스킬의 힘인가.'
라면의 향기가 침샘을 자극한다.
그대로 진세아에게 그릇을 건네기 직전, 조용히 말했다.
"저 사람 조심해. 최유정 헌터."
"왜요?"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된 진세아가 물었다. 이유는 빌런이니까인데.
"하여튼 조심해. 이제 먹어봐."
"근데 저 라면 별로 안 좋아하는데."
"······."
"그래도 잘 먹을게요."
배는 고팠는지 그릇을 가져갔다.
후릅.
"!"
한 젓가락을 넘긴 진세아의 눈빛이 변했다.
후릅, 후르릅.
내 눈치를 보면서 계속 맛을 본다. 라면 싫어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안좋아한다면서."
"······. 이상하네. 왜 이렇게 맛있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열심히 먹는다.
꿀꺽.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김강민이었다.
'아차.'
나는 재빨리 그릇에 라면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 살짝 퍼진 듯 보였던 라면에 내 손이 닿자 면발이 다시 탱글탱글해진다.
"감사합니다."
김강민이 투구 속으로 젓가락을 넣어 라면을 한 입 맛본다. 멈칫.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설마 뭐가 잘못 됐나.
"뭔가 이상한가요?"
"아닙니다. 허······. 너무 맛있습니다."
김강민은 허겁지겁 라면을 입에 집어 넣는다. 순식간에 한그릇을 해치우고선 고개를 들었다.
들뜬 목소리였다.
"제 평생 먹어본 라면 중에 최곱니다. 어떻게 끓이신겁니까?"
뭔가했는데, 그냥 감동한거였구만. 리액션이 좋으니 만들어 준 보람이 느껴진다.
근데 그렇게 맛있나. 슬쩍 한 숟가락 퍼먹어 봤다.
'와, 씨. 미친.'
이건 라면이 아니다. 예술 작품이다. 내가 끓였단 게 믿기지 않는 극상의 맛. 여운에 젖어 있는데 김강민이 내게 그릇을 내밀었다.
"저······. 혹시 한 그릇 더."
그 시선이 남아 있는 라면으로 향했다.
나는 한국자를 더 퍼서 그에게 건넸다. 그러다 우뚝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그냥은 안된다. 라면을 끓인 목적은 스킬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얼마든지 드리죠. 대신 부탁할게 있습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 * *
"데몬 헌트 말인가요? 있기야 있습니다. 근데 대단한 스킬이 아닙니다."
라면을 순식간에 해치운 김강민이 한결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몬 헌트.
마족을 상대할 때 추가적인 데미지를 입히는 스킬이다. 마족과 싸울 예정이라면 반드시 익혀두는 게 좋은 기술이다.
처음부터 익히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어딨는지를 몰랐으니.'
그래서 이번 만남을 기회로 삼는 거다.
"저도 얼떨결에 습득한 스킬이라서요. 적용되는 범위도 많지 않고······.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알려드리죠."
그 점을 노렸다. 알려줘도 크게 쓸모 없는 스킬이니 선뜻 라면하고 바꿔먹을 수 있는 거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김강민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 말했다.
"대신······. 라면 비법만 확실히 알려주시죠."
"아, 예. 물론이죠."
당연히 알려줘야지. 내가 끓인 맛이 나올진 모르겠지만.
나는 검을 쥐고 김강민의 앞에 섰다. 대검을 들어 올린 김강민이 물었다.
"그런데 제가 데몬 헌트 스킬을 가지고 있단 건 어떻게 아신건가요?"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 이럴 땐 대충 둘러대면 된다.
"지인한테 우연히 들었습니다. 제가 관련 던전을 공략해야 할 것 같아서요."
"흐음, 그렇군요. 친절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배우기가 어렵지는 않거든요. 마력을 다룰 수만 있으면요."
아하, 그런 조건이 붙는구나. 다행히 체인지 웨펀을 사용하면 마력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다.
그렇게 김강민이 대검을 후웅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저기요······."
사라졌던 최유정이 돌아왔다.
"자그마한 문제가 생겼는데."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혼자서는 안될 것 같아서요. 세아야 같이 갈래?"
"아녀. 라면 아직 다 안 먹었는데······."
"그러지말고, 여자끼리 할 말이 있어서 그래."
"······그러죠, 뭐."
진세아가 마지못해 최유정을 따라갔다. 나는 슬쩍 뒤돌아 본 진세아와 눈빛을 교환했다.
'조심해라.'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진세아 정도면 그냥 당하진 않을 거다. 미리 언질도 줬고, 최상급 위기감지 스킬도 있을테니.
진세아가 최유정을 따라가고, 김강민과의 수업이 시작 됐다.
"그러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해보세요. 우선은 검에 마력을 얇게 도포한다는 느낌으로."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검에 마력을 부여하려면 무기를 바꿔야 한다. 체인지 웨펀의 효과가 마력 부여였으므로.
김강민이 흥미로운 눈으로 보긴하지만, 별 다른 말은 안 했다. 이미 싸우다말고 나무를 찍는 기행을 벌여서 그런가.
"네, 바로 그거에요. 그 상태에서 몸에 힘을 빼고 저와 똑같은 자세를 취해주시면 됩니다. 눈 앞의 거대한 악을 쓰러뜨리겠다는 일념으로요."
자세와 마력의 운용 그리고 의지의 표명.
"맞아요. 그 느낌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30분째.
검 위로 새까만 기운이 코팅 되며 퍼져나갔다. 석유가 얇게 발린 것 같은 모양새.
『 레어 스킬 '데몬 헌트 Lv.1'을 전수 받습니다. 』
『 마(魔) 속성의 대상에게 3%의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
'됐다!'
다행이었다. 경우에 따라 지난번에 얻었던 재능환을 사용하려 했는데 의외로 금방 획득했다.
'재능 초월의 공간 덕인가.'
거기서 얻은 기초 능력의 효과였다.
그 덕에 일자베기보다 수월하게 스킬을 전수 받았다.
'일단 배우는 건 끝났고.'
다만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건 어렵다. 더불어 체인지 웨펀의 효과로 희미한 마력이 덧씌워졌을 때만 효과를 누릴 수 있다.
『 스킬 '데몬 헌트 Lv.1'을 발휘합니다. 』
'일단 한 번 스킬이 됐으면, 그 이후부터는 의식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다.'
스르륵
다시금 영혼 포식자가 검은색의 기운으로 코팅됐다. 이때 공격을 가하면, 마족에게 큰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
"네, 바로 그겁니다."
김강민은 의외로 가르치는 재주가 있었다. 신태양 녀석은 가르치는 재주는 영 꽝이다.
『 스킬 '데몬 헌트 Lv.2'를 획득합니다. 』
검은색 코팅을 유지한 채로 눈 앞의 나무를 베어냈다.
이어서 마력을 불어 넣을 때마다 코팅의 색이 진해졌다.
스륵!
희미했던 색에 칠흑 같은 어둠이 깃들어간다. 맹물 같았던 기운이 검은 물감을 탄 듯 빠르게 진해지는 게 느껴진다.
전수자가 근처에 있을 때 경험치가 압도적으로 빨리 오르는 탓이다.
『 스킬 '데몬 헌트 Lv.10'을 획득합니다. 』
그렇게 집중하다보니 순식간에 10레벨을 달성.
코팅의 색이 눈에 띄게 선명해졌다.
"······어떻게 하신겁니까?"
김강민이 멍한 표정으로 내 검을 바라봤다.
이런, 레벨을 올리는 것만 생각다보니 김강민을 신경 못썼다.
뭐라 말할까 고민하는데, 반쯤 벌려진 그의 입에서 한마디가 나왔다.
"천재······."
"······."
살다보니 천재소리를 다 듣네. 생전 처음 듣는 말이다.
하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긴 하겠다.
김강민은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물었다.
"이지한씨 정도 되는 분이 왜 길드에 안들어가시고 용병 생활을 하시는겁니까?"
"거기엔 사정이······."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하는 그때.
콰아아앙!
숲 뒤편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숨어 있던 엔트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뭐, 뭐죠?"
김강민과 내가 숲 너머를 바라보는 순간.
"사, 살려줘요!"
진세아가 울상을 지으며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근데 녀석의 손이랑 목에 처음보는 장신구가 치렁치렁 달려있다.
그 뒤를 쫓는 건 최유정이었다. 체면이고 나발이고 한껏 분노한 상태였다.
"이 빌어먹을 도둑년이! 죽여버리겠어!"
최유정의 지시에 화염 정령이 불을 내뿜었다.
39화 드래곤 슬레이어(4)
화르륵!
새빨간 불덩이가 도망치는 진세아를 노리고 날아왔다. 나는 그 방향을 향해 반사적으로 달려들었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10'을 발휘합니다. 』
『 교체한 무기에 미약한 마력이 깃듭니다. 』
검 끝에서 푸른 마력이 옅게 타오른다. 마력을 담은 영혼포식자를 그대로 휘둘러 불덩이를 튕겨냈다.
콰앙!
흙바닥이 치솟아오르며 먼지를 일으켰다. 큰 구덩이 하나가 생겼다. 아예 죽이려고 작정하고 던진 공격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위험하잖아요!"
김강민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 외침은 최유정에게 닿지 않는다.
"어머, 그러게요. 차라리 죽어버리지."
최유정의 눈에는 광기가 맺혀 있었다.
그 광기는 수많은 헌터를 집어 삼키고, 그녀의 목숨이 끊어지고나서야 사그라든다. 최유정이 빌런 중에서도 악질인 이유다.
저 사람은 국내 최대 빌런 조직 환령의 간부들도 손사레를 치는 미친 인간이다.
그녀가 죽인 일반인의 수가 가뿐히 세 자리수를 넘기니.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겁니까?"
상황을 모르는 김강민만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진세아가 손가락으로 최유정을 가리키며 분노했다.
"저 미친 여자가 날 죽이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진세아의 손에는 아까 최유정이 쓰던 지팡이랑 목걸이가 들려있다. 나는 진세아에게 물었다.
"두르고 있는 건 뭐야."
"정당방위죠."
"잘했다."
진심이었다. 진세아는 평소에 강탈 스킬을 숨기고 있다. 그런 스킬을 쓸 정도면 상당히 위험했단 의미.
게다가 저 빌런의 주무기를 빼앗았으니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쿠웅!
다른 나무들과 비교해 확연히 큰 키를 가진 엔트가 최유정의 뒤로 나타났다. 어두운 색을 지닌 엔트.
보스였다.
"운이 없군. 이런 때에 보스까지······."
김강민이 초조한듯 중얼거렸다. 근데, 잘못봤다. 운이 없는 게 아니다. 저 보스는 최유정이 불러낸 거니까.
그녀는 보스의 손 위로 올라탔다.
"보스가 왜······."
"최유정의 능력은 정령 조종입니다. 엔트도 나무 정령이니까요."
"그러면 아까 엔트들이 전부 몰려왔던 것도······?"
내 설명을 들은 김강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겠죠."
내색은 안했지만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다.
'빌런 치고 능력이 심하게 좋기는 하다.'
정령이라곤 해도 마수는 마수. 그걸 다루는 건 어렵다.
심지어 보스까지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다. 적어도 C등급 헌터가 할만한 일은 아니다.
『 스킬 '간파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인지 Lv.11'을 발휘합니다. 』
나는 최유정을 자세히 바라봤다. 보랏빛 기운이 희미하게 넘실거린다. 익숙하면서도 한없이 불쾌한 그 느낌.
'마기인가.'
마기는 마족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게이트 내의 마수들도 그 영향을 받듯이 인간임에도 마기를 소유하고 다루는 자들이 있다.
'빌런과 마기라.'
빌런이 될만한 자들한테 의도적으로 마기를 불어넣었단 이야기를 알고 있다.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 시대에 빌런들이 활개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
'일단 최유정이 마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
차라리 잘됐다. 그녀는 꼭 처리해둬야 할 악인. 먼저 본모습을 드러내준 게 차라리 낫다.
콰앙!
옆에서 달려 온 엔트가 김강민에게 부딪혔다. 그가 대검으로 막아냈지만, 나무의 체중 자체를 버텨낼 순 없었다.
김강민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엔트 정령이 날카로운 가지를 들어 내리찍었다. 자칫하면 치명상이 될 수도 있었다.
"대검 아저씨!"
카앙!
진세아가 뛰쳐나간 가지를 막아냈다.
야, 아저씨는 너무 하잖아. 그래도 이십대 후반일텐데.
"그래, 차라리 전부 죽어버려!"
돕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엔트들이 내 주변으로 포위망을 형성했다. 거기에 더해 최유정의 소환한 바람정령이 에어커터를 쉴 새 없이 날리고 있었다.
막아내고, 피해내고 정신이 없다.
"특히 너······. 꼴도 보기 싫은 새끼. 넌 각오하는 게 좋을거야."
최유정이 나를 바라보며 윽박질렀다. 아이템은 진세아한테 빼앗겨 놓고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한단 말인가.
나는 왼편에 있는 엔트 한 마리의 몸통에 도끼를 꽂아넣었다.
『 스킬 '벌목 Lv.11'을 발휘합니다. 』
콰드득!
그대로 몸통이 쪼개지며 길이 생겨났다. 반으로 나뉜 몸통을 밟고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어딜 도망가려고!"
최유정의 독기 서린 외침.
엔트 세 마리가 일시에 나뭇가지를 뻗어왔다.
마력으로 날카롭게 벼려낸 가지다.
"도망은 무슨."
나는 다시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가각! 카각!
내 몸 근처에 닿는 나뭇가지들에게서 푸른 불꽃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상처로 이어질 기미는 없다.
지금 내 방어력은 어지간해서는 뚫을 수가 없거든.
나는 편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쩌억! 쩌억! 쩌억!
썩은 나무를 뜯어내듯 가볍게 엔트 세 마리를 눕혔다. 그 모습이 꽤 인상 깊었는지 엔트들이 최유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주춤거리기까지 한다.
나는 최유정을 바라봤다. 어느새 말이 없어져 있었다.
"이제부턴 정당 방위입니다."
콰앙!
다시금 엔트 한 마리가 바닥에 누웠다. 내 주변에 벌목해야 할 나무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 * *
"정당방위? 건방지게 어딜······."
음습한 마기가 최유정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피부에 보랏빛 핏줄이 돋아나고 눈가에 붉은 빛이 맺히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광폭화의 증상이었다.
마기의 영향을 받은 존재가 도달하게 되는 종착점. 미래의 많은 마수들이 저런 모습이었다.
파아아!
그녀의 주변으로 두 마리의 정령이 동시에 소환되었다. 불덩이와 날카로운 바람 칼날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쏘아졌다.
'저건 맞으면 안 되겠는데.'
마법이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였다.
"저건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 김강민이 앞으로 나왔다.
"네?"
지금까지 죽만 쓰고 있어서 만류하려고 했지만,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갔다. 김강민의 대검에 한가득 담긴 마력이 화염 폭풍과 격돌했다.
콰아앙!
바람 칼날과, 불꽃이 김강민의 몸을 세차게 두드렸다. 김강민은 멈추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검을 휘둘렀다.
"크아아아!"
파앙!
김강민의 기합과 함께 마법이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그래, 이게 드래곤 슬레이어지.'
김강민의 특성 중 하나인 '마법 저항'이었다. 드래곤들의 각종 브레스를 견디며 싸울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좋았어.'
그가 어그로를 끌어 준 덕분에, 나는 단숨에 최유정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다크 엔트 위에 올라탄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정령 마법 몇 개가 나를 향해 날아왔지만 전부 일자베기로 베어냈다.
"이, 이 미친!"
최유정의 손짓을 따라 다크 엔트가 손을 내질렀다.
콰앙!
의미 없는 공격이었다. 보법으로 피한 뒤 도끼로 다크 엔트의 손을 내리쳤다. 깊게 패이기는 했지만 그 뿐이다.
심하게 단단하다. 일반 공격으론 안 되겠다.
나는 재빨리 손 위에 올라탔다. 공략법은 이전에 만났던 골렘보다는 간단할 것 같다.
- 역(逆) 일자베기
바닥에 꽂은 영혼 포식자를 그대로 끌고 위로 올라갔다. 길쭉한 선이 다크 엔트의 몸에 새겨졌다.
크어어어!
다크 엔트는 고통스러운 듯 거체를 비틀었다. 그 흔들림 속에서도 최유정은 정령 마법을 난사해대고 있었다.
"죽어, 죽어!"
바람 칼날과 불덩이가 번갈아 날아왔다.
나는 엔트를 차고 뛰어 올랐다.
콰아앙!
빗나간 마법이 다크 엔트의 몸을 타격했다. 그 고통에 다크 엔트의 몸이 심하게 기울었다.
"으아악!"
최유정 또한 무게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10'을 발휘합니다. 』
어느덧 내 오른손에는 창이 들려 있다. 공중에서 최유정을 조준한 뒤, 힘을 실어 그대로 던져냈다.
"막아, 막으라고!"
그녀의 말에 바람의 정령이 앞으로 나왔다. 마력이 담긴 창을 그대로 맞은 정령은 그대로 산화했다.
'이런.'
정령을 하나 없애긴 했지만, 힘 없이 떨어지는 창.
나는 바닥에 착지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화염 세례가 덮쳐온다.
퍼버버벙!
"그래, 그거야!"
화염 덩어리들은 나를 직격했다. 내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령 마법은 일반 마법보다 위력이 강하다. 거기에 마기가 섞였으니, 제대로 맞았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런 계산이었을 거다.
최유정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맺히는 그 순간.
나는 멀쩡한 모습으로 자세를 잡았다.
"뭐, 뭐야? 어떻게?"
『 무패의 반지 : 100레벨 추가 능력 '방어막 Lv.10'을 발휘합니다. 』
『 적의 공격을 무시합니다. 』
뭐긴, 템빨이지.
방어막 덕분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볍게 받아낼 수 있었다. 공격을 받아냈으니, 이제 내차례다. 회수 스킬을 발동해 창을 내 손으로 가져왔다.
스윽!
나는 경악하는 최유정을 향해 오른손의 창을 조준했다. 아까와는 달랐다. 왼손에 도끼를 들고 있었으니까.
『 정령 파괴자 : 100레벨 추가 능력 '근력 레벨 추가'를 발휘합니다. 』
『 해당 아이템 착용시 근력 Lv.1이 추가됩니다. 』
여기에 붙은 추가 능력은 차원이 다르다. 무려 근력의 레벨을 한단계 올려주는 옵션. 어째 이름과는 다른 옵션이 붙었지만.
오히려 좋다.
『 스킬 '근력 Lv.12'를 획득하셨습니다. 』
『 추가효과 : 근력이 초인의 영역에 도달합니다. 』
콰득!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며 힘줄이 돋아났다. 12레벨에 달한 근력 스킬에 의해 내 팔뚝이 비대하게 부풀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힘의 파동이 내 팔을 타고 흘렀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창을 던졌다.
파아앙!
귓가가 찢어질 듯한 파공음과 함께 창이 쏘아졌다. 창이 가로지르는 공간 너머로 푸른 마력의 실선이 그어졌다.
그 앞을 화염 정령이 막아섰다. 그러나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 정령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콰앙!
그 다음 창의 앞을 막아선 건 다크 엔트의 손이었다. 강철보다 훨씬 단단한 그 손 앞에 창이 멈춰서는 듯 하였으나.
그건 잠시뿐이었다.
쩌저저적!
두꺼운 거목의 손등에서 시작된 균열이 전체로 뻗어나간다. 균열은 이내 다크 엔트의 몸 전체를 잠식해 나갔다.
『 스킬 '벌목 Lv.11'을 발휘합니다. 』
나무를 도끼로만 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산산조각이 난 다크 엔트의 손. 너덜너덜하게 갈라진 몸체가 서서히 기울어간다.
촤아악!
창은 최유정의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히익!"
그 풍압에 최유정이 비틀거렸다.
이제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단숨에 바닥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이, 이 새끼가!"
최유정의 앞으로 마기가 응축되더니 구체의 방어막을 형성 됐다.
그녀가 믿고 있었던 최후의 보루.
그러나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차분히 검을 휘둘렀다.
- 일자베기
마기로 이루어진 방어막이라면 오히려 고맙다.
이제는 최적의 상대나 마찬가지.
데몬 헌트를 배웠으니까.
『 스킬 '데몬 헌트 Lv.10'을 발휘합니다. 』
『 마(魔) 속성의 대상에게 30%의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
검은빛으로 코팅된 영혼 포식자가 한줄기 검은 선을 그어냈다. 오로지 마기를 가진 적을 섬멸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
칼날 위로 덧씌워진 검은 코팅이 불완전한 마(魔)를 찢어 발겼다.
그걸로 충분했다.
마기로 빚어낸 방어막이 유리장처럼 깨지며 산산히 흩어졌다.
허공으로 솟구치는 마기의 조각들 사이.
"무슨?!"
최유정의 경악한 표정이 보였다.
그러나 내 검은 멈추지 않는다. 망설임 없이 마(魔)의 존재를 베어낸다.
서걱—!
그걸로 끝이었다.
* * *
"허우······."
"으아······."
바닥에 엎드린 김강민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진세아도 바닥에 드러누워선 꼼짝 않고 숨만 쉰다.
격한 전투였다. 내가 최유정과 일대일을 하는 동안, 뒤쪽에선 엔트들과 박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옆에 걸터 앉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최유정 헌터는······. 빌런이었던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냥 빌런도 아니고 미친 빌런이었다.
바닥에 누운 진세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본다. 뭐라 말하고 싶지만 기운이 없어 참는단 표정이었다.
어떻게 미리 알았냐, 뭐 그런 걸 물어보고 싶은 거겠지.
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이럴 땐 모른 척하는 게 상책이다.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입니다. 이지한씨 덕분입니다."
몸을 일으킨 김강민이 담백하게 말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본 김강민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산산조각이 난 나무들이 이곳저곳에 널려있다. 그 수가 주변을 빼곡히 채울 정도다.
"정말로요. 이지한씨가 아니었으면 저희 모두 죽었을겁니다."
쓰러진 진세아도 조용히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동의한단 의미인가.
'최유정이 내 생각보다 너무 강했어.'
C급 헌터가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마수들을 부리는 건 마족이나 할 법한 짓이다. 마기의 힘이 그만큼 위험하단 의미기도 하다.
일개 헌터에게 그만한 능력을 부여하다니.
'벌목 스킬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네.'
본래는 전투 스킬도 아닌데, 정말 마지막까지 요긴하게 잘 썼다.
『 2스테이지 클리어 ( 보스 엔트 처치 1 / 1 ) 』
『 잠시 후 바깥으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됩니다. 』
포탈이 생기기는 했지만 모두 바깥으로 나갈 힘이 없어 쳐다보기만 한다. 잠시 쉬도록 놔두자.
나는 보상을 정산해야 했다.
'이제 아이템 레벨은 모두 채웠다.'
진짜 마족과의 전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리 최하위 마족이라고 해도 최유정보다는 훨씬 강하겠지.
나는 메시지창을 슥슥 내렸다.
『 스킬 '데몬 헌트 Lv.11'을 획득합니다. 』
『 마(魔) 속성의 대상에게 33%의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
『 추가 효과 : 마(魔) 속성 저항력 1% 』
'오.'
전수자 김강민이 옆에 있어서 그런건가. 최유정과의 싸움에서 바로 레벨 11에 도달했다.
이건 마족과의 싸움에서 큰 무기가 될 거다.
다음 메시지도 중요했다.
『 1112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엔트와 다크 엔트를 모두 잡고 획득한 포인트였다. 자그마치 1천 포인트 가량. 그만큼 때려 잡았으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아쉽지만 이번에는 이계의 규율이 작동하지 않았다.
근데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 영혼 포식자가 마(魔)의 기운을 흡수합니다. 공격력 + 3 ( 5 / 5 ) 』
『 영혼 포식자의 현재 공격력 : 45( 30 +15 ) 』
어쩌다보니 마기 스택이 전부 쌓였다. 특수레어 등급의 무기가 지금은 유니크급의 무기가 되었다.
우우웅.
『 도검이 마기를 충분히 흡수했습니다. 』
『 해당 아이템의 등급이 한단계 올라갑니다. ( 특수 레어 -> 유니크 ) 』
특수 레어였던 아이템이 유니크가 된다.
'등급이 올라갈 줄이야.'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주변에서 생겨난 붉은 빛이 영혼 포식자를 감싸기 시작했다.
잠시 기다리면 새로운 모습의 영혼 포식자를 볼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메시지에서 때아닌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파지직.
『 이계 규율이 '영혼 포식자'의 존재 타당성을 검토합니다. 』
『 해당 아이템의 인과적 특이점이 관측 한계를 초월합니다. 』
파직, 파지직!
터져 나오는 스파크의 강도가 더욱 강해진다.
'왜 이래?'
그러고보니 그랬다.
영혼 포식자는 내 특성 무재조정으로 생겨난 아이템.
내가 20레벨이 도달했을 때 받은 것이었다.
팔목을 감싸고 있던 금빛 팔찌가 이내 영혼 포식자를 감싸기 시작했다.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원형의 고리가 그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 이계 규율이 해당 아이템의 정보에 관여합니다. 』
『 해당 아이템의 정보를 이계 규율에 따라 해석 및 편집 합니다. 』
'큭.'
한순간 거세게 솟아난 빛.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다행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잠시 기다리자 빛이 점차 잦아들었다.
'대체······.'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영혼 포식자가 아니었다.
'뭐냐.'
정보를 확인하는 내 눈이 커졌다.
'돌았군.'
그 한마디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40화 마기의 원천 회수(1)
영혼 포식자가 사라진 자리에 생겨난 것은.
흉악한 크기의 대검.
드래곤 슬레이어가 가진 대검보다 훨씬 크고 묵직한 대검이었다.
『 유니크 대검 '이계규율:마족 학살자'를 획득하셨습니다. 』
『 아이템 정보 』
- 이름 : 이계 규율 - 마족 학살자
- 분류 : 대검
- 등급 : 유니크
- 효과 : 공격력 60, 마(魔)속성을 상대할 때 공격력 + 40
- 제한 : 이계 규율을 따르는 자에 한하여 사용 가능
'이······. 뭐, 이런 미친 아이템이 나오냐.'
조건부이긴하지만, 마족을 상대할 때 이 대검의 공격력은 100.
도끼 '정령 파괴자'의 공격력이 60인 걸 생각하면 거의 두 배다.
'······.'
영혼 개방을 못 사용하게 된 건 아쉽다만. 마족 한정으로 최강의 무기를 손에 넣었으니 괜찮다.
'공격력 100이면 레전더리급을 뛰어 넘는데.'
이걸 들고 마족의 면전에서 일자베기를 사용한다면······.
그 파괴력이 짐작도 안 간다.
'이계 규율······. 도대체 어떤 힘인거냐.'
영혼 포식자가 마기를 전부 흡수한 순간 이계 규율이 나타났다. 시스템 상에서의 아이템 변화를 거부하듯 치고 들어온 것이다.
'이런 능력이라면 불사의 마족이 마계왕에게 반기를 들만도 하다.'
미국 전역을 공포로 몰아 넣은 군단장 불사(不死)마족. 놈은 1인자의 자리를 노리다 마계왕에게 살해 당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이계 규율은 그만큼 강력한 능력이었다.
'아직 모든 게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이건 본래라면 불사 마족의 손에 들어갔어야 할 힘. 특성도 아니고, 스킬도 아닌 그 외의 무언가.
이걸 내 손에 넣은 건 우연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걸로 미래는 한층 더 크게 바뀐다.'
그것이 불러올 결과는 자명했다. 모든 흐름이 내게로 쏟아지고 있다.
처억.
나는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본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손에 착 감겨왔다.
'무게는 적응 좀 해야겠네.'
자유자재로 휘두르려면 연습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마기의 원천을 찾을 수 있는 채용 시험까지 앞으로 4일.
시간은 충분했다. 내 경험치는 10만배니까.
나는 대검을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파티원들을 향해 손뼉을 짝 쳤다.
"슬슬 정리합시다."
"아고고······."
진세아가 앓는 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나무 쪼가리가 되어 쓰러진 엔트 사이에서 마정석을 수거했다.
게이트에서의 주 수입원은 마정석이다.
1층에서 모아온 것들과 합치니 꽤 많은 양이었다. 김강민이 미리 가져 온 자루 속에 마정석을 쓸어 담았다.
"이것들은 백묵씨가 현금으로 바꿔서 나눠주신다고 했습니다."
백묵이 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이유는 유령 길드의 유지 때문일 거다. 길드는 주기적으로 게이트를 공략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최유정씨에 관해선······. 제가 잘 설명하겠습니다. 관련 증거도 확보해 놨으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결국 빌런 하나를 처리한 셈이 되었다. 어찌보면 진세아 덕이기도 했다. 귀찮은 짓 하지 않고 빌런의 본성을 끄집어 내줬으니.
"이제 완전히 지쳤어요······."
"그래, 고생했다."
그런데 진세아 이 녀석 꽤 강철멘탈이다. 빌런에게 살해 당할 뻔 했는데도 끝까지 자기 할 일을 해냈다.
역시 최후의 11인은 떡잎부터 다른건가.
우리 일행은 정리를 마치고 게이트 바깥으로 나왔다. 공사가 중단된 폐건물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다시는······. 백묵 아저씨 추천 안 받아."
진세아가 학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내 쪽으로 고개가 획 돌아간다.
"어쩌다보니까 또 오빠 덕분에 살았네요."
"그래, 감사해라."
"폰 좀 줘봐요."
"싫어."
"그럼 어쩔 수 없죠."
척.
진세아는 능숙한 솜씨로 주머니에 있는 내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비밀번호까지는 못 풀거라고 생각해서 놔뒀는데.
이내 잠금까지 풀어 버린다. 어깨 너머로 비번을 훔쳐봤나보다.
이 녀석 도둑 맞다.
'비밀번호 바꿔야겠네.'
진세아는 이것저것 화면을 두드리고 나서야 내게 폰을 돌려줬다.
"여기요."
별 건 아니고 연락처 교환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김강민에게도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아."
나중에 쓸모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드래곤 슬레이어니까.
전화번호를 다 입력한 김강민이 고개를 들었다. 투구 너머로 그의 진지한 눈빛이 보였다.
"라면 끓이는 방법 꼭 보내주십쇼."
아, 그러고보니 아직 안 알려줬네.
"그거 사실 제 손맛입니다."
"네?"
일단 이걸로 게이트 공략은 종료였다.
* * *
백묵의 사무실.
서울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넓은 창.
백묵은 고급스런 의자에 앉은 채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 온 건 그때였다.
"백묵님, 김강민 헌터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벌컥.
문이 열리고, 낡은 투구를 뒤집어 쓴 김강민이 걸어들어왔다.
"가지고 오셨나요?"
"네, 여기에 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김강민이 탁자 위에 올려 둔 건 조그마한 기계 장치였다. 게이트 내부의 상황을 촬영할 수 있는 특수 장비였다.
김강민이 말을 덧붙였다.
"이지한, 그 헌터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최유정도 문제였지만, 이지한 헌터가 아니었다면······.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그런가요? 이제 가봐도 좋아요."
백묵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알겠습니다."
김강민이 나가고나서, 백묵은 기계장치를 작동 시켰다. 빔 프로젝터처럼 방사된 빛이 벽면에 영상을 만들어냈다.
'최유정이 빌런이었다라.'
그런 기질이 보이기는 했다만, 능력이 좋아 써먹을 데가 있다고 여겼던 건데. 그새 사고를 쳤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더 대단한 걸 건졌다.
영상을 확인하는 백묵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지한.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야.'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분명히 F급 헌터였다. 아무런 재능이 없어 바닥을 전전하는 밑바닥 인생.
백묵은 비슷한 부류의 인간을 수 없이 보아왔다.
헌터로서의 재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 대부분이 그렇게 희망 속에서 목을 매다가 스러져간다.
그런데 이지한 이 사람은 달랐다.
'그런 가망 없는 인간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사람의 인성?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백묵에게 그건 평가요소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어.'
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능력만큼은 정확하게 알아본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지한 헌터. 내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야.'
불과 몇 주전에 백묵이 마주했던 이지한과 지금의 이지한은 마치 딴사람 같았다. 철저하게 자신의 목적을 숨기고 목표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야수.
그게 이지한에 대한 백묵의 평가였다.
'근데 갑자기 전투하다 말고 나무는 왜 치는거지?'
영상을 보던 백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이해하기 힘든 구석도 있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혼자서 엔트 수십 마리를 쪼개 버리는 무위.
누가 이 사람을 D급 헌터라고 생각하겠는가.
'굉장한데.'
그 최유정이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죽었다.
'숨겨진 천재가 여기에 있었어.'
현재 매스컴에서 떠오르는 신태양? 그런 놈과 비교할 게 아니었다.
이지한의 움직임에는 날 것 그대로의 무언가가 있었다. 투박한 듯 하면서도 완성되어 있는 그런 맹수의 느낌.
백묵은 그런 감각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겠어.'
영상을 전부 확인하고나니, 백묵의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럴 게 아니었다.
백묵은 비서를 불렀다.
"이번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 있지? 나도 참관한다고 전해줘. 그 근처 일정은 전부 취소하고."
"직접 보시게요?"
"그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봐야겠어.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
다른 헌터들과 이지한의 무엇이 다른지.
그 재능의 모든 것을 직접 눈에 새기고 싶어졌다.
* * *
집에 도착하자마자, 계좌로 2500만원이 입금 되었단 알림을 받았다.
잠시 뒤, 백묵의 문자와 함께 3000만원이 또다시 입금 되었다.
문자 내용은 이러했다.
- 최유정이 빌런 이었을 줄은 몰랐네요. 제 불찰입니다. 가능하다면 나중에 또 따로 사례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백묵이 이런 사람이 아닌데.'
한마디 하려는 참이긴 했다. 내 힘이 부족했다면 파티가 전멸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근데, 백묵이 선뜻 먼저 문자와 돈을 보내왔다.
자긴 모르는 일이라며 은근슬쩍 발뺌할 줄 알았건만. 무슨 꿍꿍이인지.
우선 적당히 답장을 보냈다. 만나는 시기는 당장은 아니다. 채용 시험 이후로 일정을 잡았다.
어쨌든 이후로는 파티원을 내가 골라낼 수 있을 거다. 더 이상 빌런과 게이트를 같이 공략하는 일은 없어한다.
'그건 그렇게 하고.'
나는 계좌에 찍힌 잔액을 확인했다.
도합 5500만원.
보상금이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나, 게이트 하루 공략하고 이만한 금액이다.
그것도 C급 게이트에서.
상위 게이트로 올라갈 때마다 벌어들이는 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하는데.
내가 꿈꿨던 헌터의 삶 그대로였다. 이번 한 번으로 땜빵을 뛰며 힘들게 살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사정이 나아졌다.
그런데 어쩐지 만족스러운 기분이 안든다.
'더 강해져야 한다.'
물론 돈은 좋다만.
마족들의 계략에 세계가 멸망한다면 전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아무리 날고 기던 헌터들도 마족들의 손아귀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절망감과 무력감을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다.
'멸망한 세상에선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비참하니까.'
그러려면 마지막까지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대검을 꺼내들었다. 그 크기에 비해서 방 안이 비좁게 느껴졌다.
'여기서 훈련하는 건 어렵겠고.'
그 전까지 대검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할 예정이었다. 트레이닝 센터에서 가장 싼 곳을 빌려야겠다.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까지 4일.
최하위 마족 우진형은 분명히 마기의 원천을 들고 나타날 거다.
'무조건 손에 넣는다.'
마족 놈들의 프로젝트를 막기 위해선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세계에 마기를 흩뿌린다는 놈들의 작전.
이건 놈들의 야욕을 저지하는 첫걸음이 될 거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채용 시험 당일.
나는 트레이닝 센터를 빠져나왔다. 스킬은 못 얻었지만 괜찮다. 이 망할 재능은 초월 공간을 거쳤어도 커버가 안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대검만큼은 손에 익혀뒀다.
택시를 타고 곧장 은빛의 날개 길드가 있는 건물을 향했다.
차창 너머로 은빛 구형태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은빛의 날개 길드를 표시하는 날개 마크가 새겨져 있다. 소규모 경기장 하나가 통째로 은날이 소유였다.
'시험은 여기서 치뤄지는 거랬지.'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하나가 가진 재력을 새삼 느낀다. 이번 채용 시험은 비공식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경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내부의 데스크에서 환한 미소로 날 맞이해주었다.
"이지한 헌터님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집 구석에서 찾아낸 헌터증을 내밀었다. 거기엔 여전히 F급이라고 나와 있었다.
"잠시 등급 측정이 있겠습니다."
직원이 특수한 전자기기를 내게 가져다대었다. 현 시점에서 레벨까지 측정하는 도구는 없다. 다만, 등급만큼은 확실히 체크 된다.
"D등급 확인했습니다. 해당 정보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네, 괜찮습니다."
"이걸 착용해주세요."
나는 직원이 건네 준 명찰을 찼다. 마법이 걸려 있어 심사위원들이 해당 헌터의 등급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이제 대기실에서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직원이 안내해준 복도로 이동하던 때였다. 뒤쪽에서 들린 직원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우진형님 맞으신가요?"
인간을 가장한 최하위 마족 우진형.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저 녀석인가.'
길게 찢어진 눈과 귀와 입술의 피어싱이 눈에 띈다. 나는 우진형의 얼굴을 기억했다. 특이한 인상이라 헷갈리는 일은 없다.
『 스킬 '간파 Lv.11'을 발휘합니다. 』
『 알 수 없는 이유로 대상의 간파에 실패합니다. 』
혹시나 시스템적으로 마족이란 걸 확인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해봤는데.
'역시 구별은 안되나.'
아직은 정체를 숨기고 있는 마족을 알아낼 정도로 내 감각이 뛰어나지 않다.
그래도 당장은 상관 없다.
놈이 마족이란 건 확실한 정보니까.
내 시선을 느낀 우진형이 날 바라봤다가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일단 생김새는 파악했으니, 들어가 있을까.'
나는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은 넓게 펼쳐진 트레이닝 룸이었다. 역시 대형 길드답다.
몇 헌터들이 미리 도착해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은빛의 날개에 들어가기 위해 실력을 갈고 닦은 헌터들.
나는 근처 의자에 걸터 앉았다.
'준비는 끝났다.'
갑옷의 레벨은 전부 Lv100.
무패의 반지와 도끼 정령 파괴자도 Lv.100이다.
마족을 상대하기 위한 기술 데몬 헌트.
거기에 더해 대검 마족 학살자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저기에 있는 헌터들과 내 목적은 완전히 다르다.
은빛의 날개?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 < D등급 > 한계 돌파 퀘스트 』
- 목표 : 마기의 원천 회수 ( 2 / 3 )
- 클리어 보상 : 레벨당 능력치 증가량 1.3배, 지정 스킬 한계 레벨 2증가, 인과역전 상점 NEW 카테고리 개방, 특성 무재조정 신(新) 특수효과 개방
내 목적은 마지막 마기의 원천 회수.
그리고 레벨업이다.
41화 마기의 원천 회수(2)
대한민국 2위 은빛의 날개.
헌터 채용 시험.
비공식임에도 불구하고 다목적 경기장의 관중석엔 사람이 꽤 있었다. 각종 길드의 관계자들과 후원자들이다.
"조그맣게 하는 거 아니었어? 비공식이라면서."
윤서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중석의 사람들을 살폈다.
"그랬는데, 우리 길드장이 꼭 관계자들한테는 보여주고 싶다더라."
윤지은이 동생의 말에 대답했다. 대중은 몰라도 길드 관계자들에겐 은빛의 날개의 저력을 알리고 싶다는 길드장의 독특한 방침이었다.
"그보다, 왜 여기까지 따라왔어?"
"헌터 협회 관계자로서 공정한 시험이 진행되는지 확인차 나온 거 뿐이거든요?"
윤서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윤지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한씨는 너한테 관심 없다니까."
"이제 나도 알아. 그래도 구경은 할 수 있잖아. 궁금해서 그래."
윤지은이 쓴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동생의 오해 덕에 제대로 된 인재를 발굴하긴 했다.
이번 채용 시험에는 이지한 헌터가 참가한다. 그러나 참가 자체는 구실에 불과했다.
'이지한 헌터의 능력을 우리 은날 사람들도 봐야해.'
그의 능력은 며칠 전 게이트 브레이크 때 두 눈으로 확인했다.
윤지은 그녀는 은빛의 날개 길드의 부마스터. 이지한은 사실상 뽑힌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는 그걸 넘어 이지한의 잠재력까지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면 나는 내 자리로 가볼테니까, 여기서 잘 보고 있어."
"그래, 그래."
윤서현은 팝콘까지 꺼내서 냠냠 먹기 시작했다. 윤지은이 미간을 찌푸렸다. 채용 시험은 행사나 다름 없었기에 그리 이상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러다 살찐다."
동생에게 한마디 해주는 그때였다. 윤서현이 반대편 좌석을 가리켰다.
"어, 저 사람 수호길드 그 사람 아니야? 동영상으로 봤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신태양?"
"응, 신기하네. 연예인 본 것 같다."
윤서현은 그러고나서 다시 팝콘을 먹는데 열중했다.
'신태양······.'
한창 사냥에 열중한단 이야기는 들었는데, 시간을 내서 시험까지 참관하러 왔을 줄이야.
윤지은은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이지한이라는 대어를 낚았으니까. 그에게는 분명 신태양 이상의 잠재력이 있다. 이번 채용 시험으로 수호 길드도 알게 되겠지.
한편, 그 반대편 좌석.
신태양은 영 불만스런 표정으로 경기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왜 다른 길드 채용 시험까지 제가 봐야하는 거에요? 가뜩이나 수련할 시간도 부족한데."
"도움이 될 거다."
옆자리에 앉은 수호 길드의 부마스터가 그런 볼멘소리를 일축했다. 그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같은 시기에 활동할 헌터들이다. 너만한 능력을 지닌 사람은 없더라도, 그들의 수준을 파악해두면 도움이 될 거란 말이다."
"글쎄요. 전 조금도 관심이 없어서요."
신태양의 머릿속에는 당장 수련을 거듭해서 강해질 생각 뿐이었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행사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나중에 유명해지면 이런 행사에 꼭 참석해야 하는 건가. 그래, 그때를 대비한 예행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덜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신태양이 열심히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 이번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에 지원한 24명의 헌터들이 입장합니다.
줄지어 입장하는 헌터들.
각자 테스트용 무기 하나씩 쥐고서 걸어나온다. 대부분 추천을 받아 시험을 보는 거라던데, 확실히 어중이 떠중이는 아닌 느낌이다.
그런데 그 사이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 본 그곳에는 이지한이 있었다.
'스, 스승님? 왜 여기에?'
그러고보니 스승님은 길드가 없으셨다. 충분히 다른 길드에 지원해도 이상하지 않은 실력이긴 했다.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했는데.
대한민국 2위 길드인 은날이라면 또 납득이 간다. 아니지, 차라리 수호 길드로 오시지.
눈을 빛내며 이지한에게 집중하는 신태양.
그런 신태양을 바라보며 수호길드의 부마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짜식, 관심 없다고 하더니 막상 시작되니 엄청난 집중력이군. 다음에도 종종 데려와야겠어.'
그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맺혔다.
* * *
"이번 시험은 은빛의 날개 신입을 채용하는 일종의 경연대회 입니다. 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지만, 많은 길드 관계자가 현장에 와 있으니······."
시험 시작 전 간단한 안내사항을 전달 받았다.
"시험용 무기를 챙기는 것도 잊지 말아주세요. 마지막으로 입장 전에 이름과 번호를 확인한 뒤 팔찌를 착용해주시면 됩니다."
전자 시계처럼 생긴 장비.
마정석을 활용한 기술로 만들어진 아이템이었다. 헌터들은 시계를 차고 안내에 따라 경기장으로 향했다.
총 24명의 헌터들.
통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여자애가 나란히 걸어 온다. 한껏 찌푸린 얼굴.
내 시선을 느꼈는지, 진세아의 고개가 내게로 향했다.
"응?"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밝아진다.
"대박, 오빠 혹시 스토커?"
환세의 도둑 진세아였다. 스토커라는 말 치곤 반가운 얼굴이다.
'······얘는 또 왜 여기에 있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영웅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진세아 녀석은 영웅 협회에 들어갈 거라고 자기 입으로 그랬었다. 지난 D급 게이트 공략 때 했던 개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거든.
진세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어쩔 수 없이 나왔거든요? 집에서 하도 뭐라구 해서······. 하여튼 잘됐네요. 오빠. 저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하나 줄어서."
줄줄이 이야기하던 진세아가 내 눈치를 살폈다.
"근데 진짜 은날에 들어가게요?"
들어갈 생각 없다.
그리 대답하려는 찰나, 경기장에 도착했다. 조명이 눈부시다.
스피커를 통해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에 오신 헌터 여러분 환영합니다!
뻔한 환영 인사가 이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유명한 길드 관계자들이 여럿 보였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들도.
'신태양 저 녀석까지······.'
원래 다들 이곳에 모일 예정이었던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신태양만큼은 내가 불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신태양의 길드 진출이 빨라진 이유는 나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내 앞쪽에 서 있는 우진형을 바라봤다. 녀석은 두리번 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최하위 마족. 마기의 원천을 소유한 마족이다.
'이번 시험에서 녀석은 분명히 일을 벌인다.'
내 정보는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으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다.
'헌터를 죽이고 그 힘을 흡수하기 위해서랬지······.'
최하위 마족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진형의 몸부림.
S급 헌터들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이곳에서 대형 사고를 낸다는 것부터가 제정신은 아닌 놈이다.
그의 이런 행동은 완벽한 독단.
'그런만큼 파고들 틈이 있다.'
당장이라도 놈을 후려쳐서 마기의 원천을 빼앗고 싶지만, 그랬다간 내가 붙들려 가겠지.
기다려야한다.
놈이 게이트를 열 때까지.
- 그러면 첫번째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자의 설명이 끝나자, 뒤쪽에서 하얀 로브를 걸친 남성 하나가 걸어나왔다. 순하게 생긴 인상의 그는 은빛의 날개 길드의 S급 헌터다.
여명의 소환사 김지훈.
그는 보석이 달린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경기장 위로 거대한 원 하나가 생기더니, 복잡한 술식이 새겨진다. 웅장한 규모의 마법진 안에서 빛이 샘솟았다.
크르르······.
소환 된 것은 한 마리의 검은 사자였다. 보스급 마수로 불리는 다크 라이온. 놈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검은빛의 갈기를 휘날리는 소환수의 크기는 10m가 넘는다.
압도될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오오······."
"저게 소환수라니······."
관중석에서 감탄이 터져나왔다.
- 첫번째 시험은 레이드입니다. 24명의 지원자분들께서 협력하여 마수를 공략해주시면 됩니다.
진행자의 말과 함께 경기장의 전광판에 정보가 표시되기 시작했다.
『 기여도 순위표 』
1위 - - -
2위 - - -
3위 - - -
- 각 헌터들의 활동량이나, 가한 데미지 등을 전광판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급해 드린 태블릿 PC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다크 라이온을 조종하는 소환사 김지훈의 손목에도 우리의 것과 비슷한 시계가 있었다. 그가 보란듯이 손목을 흔들었다.
- 이 모든 게 하이텍트사와의 협조하에 이뤄낸 은날의 기술입니다.
이번 채용 시험, 신입을 뽑는 것 뿐 아니라 길드 관계자들에게 은날의 기술력을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한 모양.
'예전의 나였다면 눈이 돌아가서 감탄했겠네.'
하나 같이 신기술들 뿐이다.
현시점에서 헌터의 레벨이나 스킬까지 확인하는 장비는 없다. 고작해야 등급을 알아낼 뿐.
그런 부족한 부분을 다양한 기술로 커버하겠다는 심산이었다.
- 그러면 시험 시작입니다!
진행자의 마지막 말과 함께 다크 라이온이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이 역시 뛰어난 소환사가 있는 은빛의 날개에서만 할 수 있는 시험 방식.
"제가 전위를 맡겠습니다!"
"타이밍 맞춰서 공격 버프 보조할게요!"
헌터들이 삼삼오오 모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 시험의 시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우진형의 움직임만을 주시했다.
* * *
처음에는 다크 라이온의 기세에 헌터들이 밀려났다. 놈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를 때마다 경기장 바닥에 깊은 자국이 새겨졌다.
거기에 더해 입에서 불을 뿜어대기까지 했다.
"지금이에요. 움직여요!"
"쉴 새 없이 몰아붙입시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자 헌터들이 다크 라이온을 조금씩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헌터들을 앞장 서서 지휘하는 이가 있었다.
B급 헌터 문주명.
"그래요, 그겁니다. 후위 딜러들 이제 공격하세요!"
구심점이 생기니 헌터들도 헤메이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계속해서 기록되고 평가된다.
『 기여도 순위표 』
- 1위 : 문주명 213,234
- 2위 : 진세아 204,310
- 3위 : 김시온 152,220
※ 가한 데미지, 활동량, 영향력등을 종합한 수치입니다.
마족인 우진형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보스도 공격하는둥 마는둥이다.
그는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오빠, 빨랑 공격해요! 이러다가 내가 1등 하겠어요!"
옆에 있는 진세아가 나를 재촉했다. 아까부터 나를 응원한다는 명목하에 옆에서 쫑알댄다. 심지어 본인은 2위다.
'눈도장은 찍어둘 필요는 있겠지.'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앞으로의 용병 활동에 있어서 최소한의 실력의 보증은 필요하다.
D급 헌터라는 범주 안에서의 능력 증명은 나쁠 게 없다.
스윽.
나는 지급 받았던 창을 들어 올렸다.
우진형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때였다.
"!"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우진형의 손아귀에서 음습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그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험에 응하는 헌터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스르르
그렇게 내보내진 마기는 다크 라이온에게 흘러 들어갔다.
크어어어어!
다크 라이온의 근육이 꿈틀 거리기 시작했다. 확연하게 달라진 다크 라이온의 몸놀림에 매달려 있던 헌터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뭐, 뭐야?!"
"두번째 페이즈인가?"
콰아앙!
광포해진 다크 라이언의 발길질 한 번에 뭉탱이로 쓸려 나갔다.
"크아악!"
"조심해 다시 온다!"
"잠깐만! 살려줘!"
"진짜로 이게 첫번째 시험이라고?"
그럴리가.
관중석 위의 소환사 김지훈의 얼굴이 창백해진 게 뻔히 보인다. 그는 당황한 기색으로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소용 없었다.
다크 라이언의 통제는 이미 그의 손을 벗어나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 사실을 알리면 좋았으련만,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지 쉽사리 결단을 못 내린채. 혼자 애쓰고 있다.
'저건 처리해야겠어.'
주위에 높은 등급의 헌터는 많다만.
이러다간 그 헌터들이 이상함을 눈치채기도 전에 사고가 나겠다.
콰아아앙!
설상가상으로 우진형의 주변에서 큰 폭발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주변을 새까맣게 뒤덮을 정도의 규모다.
마기로만 이뤄진 전례없는 안개.
그것이 경기장 내부를 덮어가기 시작한다.
'오히려 잘됐어.'
처억.
나는 보급창을 바닥에 버리고 인벤토리에서 회수의 창을 손에 쥐었다. 다른 한 손에는 도끼를 쥐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도끼 '정령 파괴자'를 장착하여 근력 레벨이 1 상승합니다. 』
『 스킬 '근력 Lv.12'를 발휘합니다. 』
나는 연기 너머로 보이는 다크 라이온의 붉은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 스킬 '간파 Lv.11'를 발휘합니다. 』
콰아앙!
내 손을 떠난 창이 다크 라이온에게 적중했다.
크어어어!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연기 너머로 울려퍼졌다. 급한 불은 껐다. 경기장이 이 꼴이 됐으면 나머진 은날에서 알아서 하겠지.
창을 회수하고서 우진형에게로 따라 붙었다. 간파 스킬 덕분에 검은 안개 속 우진형의 움직임이 쉽사리 파악된다.
"크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우진형의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검 마족 학살자를 꺼내들었다.
'아직 아니다.'
놈은 분명히 게이트를 만들어 낼 거다. 이곳에 있는 헌터들을 모두 데려가기 위해서. 놈의 무덤은 그곳이 되어야 한다.
그 편이 나도 안심하고 놈을 죽일 수 있고.
띠링.
검은 안개를 밝히는 푸른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그 내용만큼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지만······.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마기의 원천 : 특수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근처 B등급 이하의 존재를 게이트 내부로 끌어들입니다. 』
나는 이걸 기다렸다.
"이거 뭐라는거야?"
"어떻게 된 거에요? 이것도 시험이에요?"
"뭔가 이상합니다, 다들 가만히 있어요!"
스스스······.
다른 헌터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검은 연기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대기로 퍼져나가는 연기.
그것들이 전부 사라진 바깥은 더 이상 경기장이 아니었다.
"여기는······?"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평원이건만,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마기의 끈적이는 기운이 한데 뭉쳐 하늘을 맴돌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무너진 성 하나.
이곳은 게이트의 내부였다.
'우진형은 없군.'
마족이니만큼 시작 지점 자체가 다른 모양. 아마 저 성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
대검을 꺼내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스, 스승님! 괜찮으신가요?"
"응?"
"위험해 보여서 바로 뛰어들었는데, 갑자기 끌려 올 줄은 몰랐네요."
고개를 돌리니 신태양이 심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관중석에 있던 놈이 언제 온 거야.
녀석만 있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지한씨,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이 메시지는······."
윤서현도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왔으면 손에 팝콘 상자를 그대로 들고 있다.
"이 사람들 뭐에요?"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그 둘을 바라보는 진세아까지.
내가 묻고 싶다.
왜 다 여깄냐.
42화 마기의 원천 회수(3)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사고였다.
폭발하듯 경기장을 뒤덮는 검은 연기.
그 전조는 있었다.
다크 라이온의 폭주.
채용 시험을 그르치고 싶지 않다는 소환사의 독단적 판단에 그 전조는 묻혀 버렸다. 그렇기에 뒤이어 연기가 터져나왔을 때도.
"무슨 일이······."
은빛의 날개 길드원들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거야?"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원래 이러는 거야?"
관중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것이 시험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이지한을 바라보고 있던 신태양만큼은 달리 생각했다.
'뭔가 이상해.'
며칠 전, 게이트에서 마주했던 기분 나쁜 기운.
그것이 경기장을 완벽히 뒤덮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였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신태양은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었다.
"스승님!"
"야, 무슨 짓이야!"
수호 길드 선배가 말릴 새도 없이 연기 속으로 신태양이 뛰어들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윤서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건······.'
이전에 마주했던 불길한 느낌. 심상치 않은 검은 연기에 그녀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이상해. 언니한테 확인을······.'
B등급에 오르며 새롭게 배운 스킬 순간이동.
그게 있다면 확인은 쉽다.
윤서현은 먼저 윤지은에게로 이동했다.
심사위원석도 한바탕 난리였다. 윤지은이 윤서현을 확인하고선 달려왔다.
"서현아!"
"언니, 어떻게 된······."
"부탁할게!"
"응."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윤서현은 윤지은과 함께 순간이동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배경이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이게 대체······."
그 불길한 기운에 윤지은이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마기의 원천 : 특수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근처 B등급 이하의 존재를 게이트 내부로 끌어들입니다. 』
푸쉬이!
갑작스레 검은 연기가 미친듯이 줄어 든다. 시간을 역으로 돌리듯 순식간에 수축하는 연기. 그것이 사라진 자리가 휑하니 비었다.
"서현아?"
윤지은이 주변을 살폈을 때, 윤서현은 사라져 있었다.
S랭크인 윤지은과 몇 A급 헌터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뿐. 상정 외의 상황에 윤지은의 눈동자가 미친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관중석 구석에서 그 모든 걸 지켜보던 남자.
"호오."
백묵이었다. 선글라스를 벗는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전대미문의 사고가 발생했지만, 그것은 백묵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이지한 이외에는 관심도 없었기에.
'이거야 원.'
경기장 외벽에 부딪힌 채 쓰러진 다크 라이온.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지만 백묵은 정확히 보았다.
창 하나가 날아와 소환수의 머리를 꿰뚫는 것을.
그가 봤던 영상 속 이지한이 사용하던 창이었다.
- 현재 상황을 파악 중에 있습니다. 길드 관계자 분들은 일단 자리에서······.
은날 관계자들이 속속히 경기장 내부로 뛰어들고,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어수선한 경기장을 바라보는 백묵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알면 알수록 재밌는 사람.'
줄곧 이지한의 움직임만을 쫓았던 백묵이기에 알 수 있었다.
검은 연기가 치솟은 발원지는 한 헌터였다. 그런데 이지한은 처음부터 그 원인이 되는 우진형만을 마크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이지한의 요청에 의해 우진형에 대한 정보를 캤었다.
'분명히 뭔가 있단 말이야.'
S급 헌터인 자신조차 감지하지 못한 사고였다.
재능? 그런 것을 초월한 범주의 능력이었다. 천재? 그런 말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짐작하기도 어려운 무언가가 이지한에게는 있다.
'이지한. 이거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 생각하는 백묵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 * *
마족.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생물의 정점.
인류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한다면, 마족은 인류의 머리 위에 위치하는 셈이었다.
정점.
그 두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시스템을 손에 넣은 헌터들조차 마족의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숱한 천재들조차 마족들이 가져 온 멸망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마기를 사용해 게이트를 주무르고, 마수들을 강화하여 조종한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말했다.
어쩌면 이 시스템은 마족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듯이.
마족이란 종족은 모든 차원을 손에 넣을 자격을 가진 게 아닌가.
그러니 포기하고, 순리에 따르자고.
예언가라도 되는 양 소리쳤었다.
'난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멍청한 소리다. 마족이라 해도 전지전능한 건 아니다. 인류에겐 그들의 침략을 막을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 중 하나가 지금 내 손에 쥐어졌다.'
불길한 기운이 맴도는 어두운 하늘.
마족이 점유하는 마(魔)의 권역.
나는 그 아래에 있다.
우선은 스무명 가량의 헌터들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역시 우진형은 없군.'
게이트로 넘어오는 것과 동시에 마족 우진형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시작 지점 자체가 다른 거다. 마기의 원천은 마족에게 있어 성유물과 같다. 게이트의 지배권이 대부분 그에게 있다고 봐야한다.
"게이트? 제약? 이것도 시험인건가요?"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은빛의 날개 관계자 계신가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헌터들이 각자 소리쳤다. 그런 그들의 주의를 불러 모으는 문주명 헌터.
그는 상황 파악이 빨랐다.
"다들 정신차리세요! 이건 시험이 아닙니다. 저흰 지금 게이트에 끌려 들어 온 겁니다!"
소환수와 싸울 때도 중심이 되어서 다른 헌터들을 이끌었던 자였다. 그가 통솔력 있게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이리로 모이세요. 최대한 빠르게 게이트를 공략해야 합니다."
그의 말에 헌터들이 정신을 차리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대 방향으로 오는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는 내 쪽으로.
"왠지 오빠랑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은 기분."
"스승님, 이 꼬맹이는 뭡니까? 스승님한테 왜 친한 척을······."
"꼬, 꼬맹이? 저기요, 아저씨. 나한테 죽고 싶어요?"
진세아와 신태양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윤서현 헌터도 은근슬쩍 내게로 다가왔다.
"큰일이네요. 갑자기 끌려 들어올 줄은 몰랐어요."
나를 포함한 4명이 따로 떨어져 나오게 됐다. 그걸 아니꼽게 바라보던 문주명이 소리쳤다.
"거기 뭐하는 겁니까? 이리 오라니까요. 한시라도 빨리 뭉쳐서 게이트를 공략해야 해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들 전부가 날 바라본다.
'맞는 말이다. 여기가 평범한 게이트였다면 말이지.'
일단 모여 있는 건 좋은 판단이다. 하지만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나는 잠깐의 고민 뒤에 입을 열었다.
"저흰 따로 가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나중에 후회하셔도 소용 없습니다."
일반적인 게이트라면 나도 그 무리에 합류했을 거다.
그러나 여긴 변칙 게이트. 그 중에서도 마족이 존재하는 게이트다. 20명이 넘는 헌터들과 함께 움직이는 건 오히려 독이다.
나는 내게로 보여든 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생각났다. 수호 길드 느끼남! 오빠, 이 사람은 신경쓰지말고 저쪽으로 가죠!"
"느, 느끼남? 이 꼬맹이가······. 스승님, 정말 데려가실겁니까?"
"저기, 여러분. 일단 싸움은 멈추죠. 지금 심각한 상황이거든요?"
공간술사 윤서현, 환세의 도둑 진세아, 미래의 검성 신태양.
이 3명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조합이라면······.'
그때였다.
"저, 저게 뭐에요? 뭔가가 나와요!"
"몬스터?"
헌터들이 가리킨 방향에서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땅이 들썩이고 있었다.
덜그럭, 덜그럭.
뼈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초원을 가득 메운다. 땅을 파고 나온 수백 기의 해골 병사들이 천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일반 스켈레톤 병사가 아니군.'
놈들의 뼈를 이룬 색깔은 회색. 그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일반 스켈레톤보다 높은 등급이다.
해골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헌터들의 안색이 굳어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B급 헌터 문주명이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일단은 진형을 갖추고 무기를 들어요!"
그 말에 헌터들이 각자 인벤토리에 소지하고 있던 냉병기를 꺼내들었다. 20명이 넘는 헌터.
"수에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의 전투력이 더 뛰어나니까요."
등급은 다양했지만 평균적으로 C등급이 넘는 헌터들이 이 자리에 있다. 본래 게이트 공략에 필요한 5명을 훌쩍 넘겼으니.
전력상으로는 우위가 맞다.
문제는 이곳에 마족이 존재한다는 것.
『 마도(魔道)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고착화 금지 : 게이트 내부의 모든 존재는 동일 종류의 무기를 3초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
마기의 원천과 더불어 두 개의 제약이 이 게이트 내부에 존재한다.
"으윽! 뜨거워!"
"이게 뭡니까?"
고착화 금지 제약이다.
헌터들이 손에 쥔 무기가 벌겋게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듯한 작열감에 몇 헌터들이 무기를 떨어뜨렸다.
처음 겪는 상황에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침착하던 문주명조차 당황하며 무기를 떨어뜨렸다. 그러는 사이 해골들의 무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덜그럭, 덜그럭.
놈들의 손에 무기는 없었다. 그러나 회색의 해골들은 많은 수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적이다. 그냥 두고 볼 순 없다.
나는 신태양에게 말했다.
"저것 좀 막아봐."
"네, 3초면······. 충분하겠네요."
신태양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렇게 해골들 사이로 뛰어든 녀석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파아아!
푸른 실선이 일대를 뒤덮었다. 누에 고치를 연상케하는 그 속, 무수하게 방사된 청색의 선이 해골 병사들을 남김 없이 조각냈다.
콰아앙!
산산조각이 난 채로 솟구치는 백기의 해골 병사들. 공중으로 치솟은 뼛조각이 비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 일으키는 기술이었다.
"와우."
진세아가 짦게 놀랐다.
신태양은 검을 납도하고선 내가 있는 쪽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고착화 금지라.'
잠깐 생각해보면 극복하기 어려운 제약은 아니다.
나는 문주명을 향해 말했다.
"다들 순서대로 번갈아가며 무기를 들면 됩니다. 그러면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큭, 그 정도는 저도 알았습니다. 근데 그쪽은 그래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해골 병사들은 땅을 뚫고 끊임 없이 솟아나온다. 여기서 농성하는 것엔 의미가 없다.
"저희는 보스를 잡고 오겠습니다."
"하, 저 놈들을 전부 뚫고요? 그럴 바에는 같이······."
"아뇨, 바로 갈겁니다."
나는 윤서현 헌터의 어깨를 잡았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해골 병사들을 사냥하며 체력을 낭비할 이유는 없다. 나 혼자였으면 무식하게 뚫었겠지만.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공간이동이 가능한 윤서현이 있는데, 뭐하러 그러겠는가.
"저 멀리 보이는 성으로 가죠. 우리 네 명은 이동할 수 있죠?"
"물론이죠."
윤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