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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오. 눈깔이야."

어제 그 난리를 한번 치고 나서 나는 눈병이라도 난 것처럼 눈이 따가웠다.

천상의 눈빛.

이 스킬을 어제 처음 쓰게 되면서 알게 됐다.

이건 나한테 적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하게 되고, 또 내가 방어를 하지 못하면 어떻게 죽는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리고 스킬의 부작용으로 따가움이 동반됐다.

"일시적으로 스텟이 상승되는 건 좋다만."

이렇게 눈이 따가운 채 있어야 하는 건 사절이다.

"그래도 스킬 하나는 기깔 나네."

그 어디든, 내가 잘 아는 장소라면 천상의 눈동자를 펼쳐 그들을 감시할 수 있고, 누군가 날 공격하려고 하면 천상의 눈빛이 발동되어 나를 지켜준다.

이 정도면 엘라의 팬던트가 충분히 밥값을 한다고 할 수 있었다.

"잠깐. 근데 천상의 눈동자가 어디까지 되는지 안 써봤잖아?"

어제 천상의 눈동자를 내 집무실 위로 띄운 게 전부였다.

그 눈동자를 다른 곳에 펼친다면?

거기다 이 옵션 효과에는 천상의 눈동자를 통해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걸 테스트해 봐야 하는데."

어디에다 이 사우론의 눈을 풀어볼까 고민하던 중.

"대기사단장님. 아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론의 목소리에 나는 퍼질러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는 굵어지고 따가워서 껌뻑 거리를 반복하던 눈동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들어와라."

"예."

아론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내게 아뢰었다.

"무슨 일이지?"

날 바라보는 아론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 깊어 보였다.

"샤나 왕국의 대마법사, 나타샤가 대기사단장님을 초대했습니다."

나타샤가 나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저번에 검의 원탁 회의 때 마주쳤던 여자 아니던가.

"나타샤가 나를 왜 초대한단 말이냐?"

"샤나 왕국에서 마법 축제를 연다고 합니다. 그때 각 왕국의 고위직을 초대하여 현재 이 대륙에 출몰하고 있는 악마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교단에서 발악하며 절대 악마가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어느 순간부터 악마들은 우리 왕국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다른 왕국에서만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뭐, 우리야 잘된 일이지만,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왜 악마들이 우리를 노리지 않는 것인지.

혹시 원기옥이라도 모아서 한번에 털어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마법 축제라.'

예전 같았으면 안 나가려고 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샤나 왕국의 마법 축제는 대륙에서도 굉장히 유명하다.

대마법사들의 나라, 샤나.

검의 왕국 '만'이 있다면, 마법에는 '샤나'가 있다.

'만' 왕국이 마법사를 일절 들이지 않는 것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으나, 여기 왕국의 기사들 역시 마법을 조금은 쓸 줄 안다.

'게임 플레이할 때도 참 신비스러운 왕국이긴 했지.'

모든 왕국에 마법이 깔려 있으며, 어디에 어떤 마법이 설계되어 있는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법 축제는 형식상이고, 실상은 검의 원탁 회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 초대장에 적혀 있는 대로, 검의 원탁 회의처럼 각 왕국의 사람들을 초대해 회의하고 외교를 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지금은 참석하는 게 맞겠지?'

마법 축제가 지금 열린다는 건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을 뜻한다.

잦은 악마들의 출몰에 위기감을 느낀 왕국들이 서로 힘을 합치고자 이런 대규모 축제를 열어 서로 만나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마침,

[샤나 왕국의 마법 축제]

-축제에 참여하십시오.

-보상으로 5골드를 받습니다.

골드 퀘스트까지 부여됐다.

일라이 왕국이 왕따 당해서 혼자 공격받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번 회의는 참석하는 것이 맞았다.

"알겠다고 전하거라."

"예. 여기 초대장을 놓고 가겠습니다. 자세한 일정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

나는 초대장을 스윽 살펴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게 함정은 아니겠지?"

그냥 게임을 하는 거였다면 별 의심 없이 갔을 것이다.

본래 스토리대로 게임이 진행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난이도가 극악이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나타샤 그년이 날 죽이려고 하는 거라면······."

나타샤는 스토리에 따라 둘로 나뉜다.

악마에게 넘어가거나, 아니면 주인공 일행에게 힘을 실어 주거나.

이번 스토리는 그녀가 어떻게 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만약 그녀가 악마와 손을 잡은 것이라면 괜히 잘못 갔다가 죽을 수도 있는 노릇.

"흠."

나는 잠시 고민하며 턱을 쓸어내렸다.

"천상의 눈동자를 시험 삼아 써 봐도 되잖아?"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난 곧바로 눈을 감고 샤나 왕국을 떠올렸다.

게임에서만 보던 그 신비스러운 왕국의 모습을.

그와 동시에 천상의 눈동자를 발현하자,

화아아아악-!!

불길이 치솟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내 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마법의 왕국, 샤나.

내가 게임에서 보던 모습과 얼핏 비슷해 보이긴 했지만, 그 속은 완전히 달랐다.

모든 것이 생생하게 보였고, 또렷했다.

이 눈의 좋은 점은 저 먼 곳까지도 명확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눈을 굴리며 왕국 안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축제 준비에 한창이긴 하네.'

적어도 마법 축제가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으헉!"

"꺄아아악!"

"저, 저게 뭐야!?"

그런데 그 아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자 성안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이윽고 마법사들이 몰려오며 그들은 갖은 마법을 펼쳐 내 눈을 향해 조준했다.

거기서 날아오는 파이어볼과 그 외 마법탄들을 바라보며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마치. 3D 안경을 끼고 있을 때 뭔가가 다가오면 깜짝 놀라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말이다.

"어후. 이거 너무 생생해도 문제네."

나는 얼른 천상의 눈동자를 꺼버렸다.

갑작스레 날아온 마법 공격에 너무 놀랐던 탓이다.

진짜 생생한 VR을 경험한 느낌이랄까.

"아, 근데 목소리를 테스트 안 해봤잖아."

그 참을성 없는 놈들이 갑자기 마법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정작 해야 할 걸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알게 된 건, 내가 모니터에서 봤던 그 장소만 떠올리면 천상의 눈동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 이번에는······."

샤나 왕국을 한번 더 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예의주시해야 할 곳에다 스킬을 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그런 곳이 딱 하나 있었다.

나는 쿨타임을 기다렸다가 그 장소의 모습을 떠올리며 천상의 눈동자를 켰다.

그러자,

화아아악-!!

이번에도 불길이 이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가 예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바로 레이어스 교단의 신전이었다.

"으, 으헉!"

"저, 저건!"

신전에 있던 사제들과 기사들, 그리고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왔던 일반 백성들까지.

그들 모두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치다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나는 가만히 그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정보를 확인해 봤지만, 악마로 보이는 것들은 없었다.

"라, 라할이시다!"

그때 어디선가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곧 메아리처럼 퍼져 나가면서,

"라할께서 오셨다!!"

"저건 라할의 눈동자다!!"

갑자기 하나둘 소리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정말 이 눈동자가 라할이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라할이시여!"

신전 안에 사람 중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긴. 황금빛 눈동자에 불길까지 치솟고 있으니, 내가 봐도 신의 눈동자가 생각할 만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해야 하는데.'

이 눈을 신전에서 뜬 이유는 이놈들이 또 악마와 작당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천상의 눈동자를 통해 목소리를 보내는 것도 테스트를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모두 절을 올리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두 듣거라.]

바로 그때였다.

잠잠하던 내 허세가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

[내가 항상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있느 그들을 향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

93화

0.01초 소드마스터 93화

"라할이시여!"

"라할이시여!!"

성전 안은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듯 기도를 하는 자가 넘쳐났다.

"대체 왜들 이러고 있는 것이냐?"

이제 막 성전으로 들어온 몇몇 장로는 이 상황을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못 보셨나 보구려. 라할께서 이 성전 위에 임재하셨었소!"

"라할이? 그게 무슨······."

"경전에 나온 대로 그분께서는 그 경이롭고 두려운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셨소. 그 신성한 눈빛을 마주하니, 마치 벌거벗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더군.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면박을 주고 싶다만, 이들의 표정을 보면 그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정말로 신의 모습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이들은 경외와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그 눈동자를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땅에 머리를 조아린 채 감히 일어나지도 못했다.

"라할께서는 우리를 항상 지켜본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계셨어."

"오오. 라할이시여.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재림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 많은 권세가부터 저 아래 밑바닥에 있는 백성까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고하고 기쁨으로 라할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었다.

"허. 이거야 원."

대체 저들이 무엇을 봤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그 상황을 직접 보지 못해 아쉬운 장로들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계속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의 할 일은 해야 하지 않소? 모두 들어가서 회의를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여러 제사장과 장로들이 모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강렬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회의장 분위기가 뜨거웠다.

"라할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그냥 눈동자만 나타나고 말았다면 이렇게까지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눈동자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온몸을 마비시키고 머릿속을 울리는 그런 목소리였다.

신의 목소리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토록 이들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 하는 것이었다.

"제 오랜 세월 제사장 일을 하면서 마음 한켠에는 의심도 있었습니다. 라할의 존재가, 그분의 빛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로 저는 보았습니다. 라할의 위대한 존재를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간증만 쏟아지고 있으니, 도무지 안건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흠흠. 일단 다들 알겠소. 모두 자중하시오."

대장로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자, 우리가 지금 제일 먼저 다뤄야 할 것은 바로 일라이 왕국의 아슬란에 관한 문제요. 알다시피 그는 무력으로 할라즈 왕국을 정복했소. 더는 이 대륙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단의 뜻을 철저히 무시했지!"

그는 준비된 각본대로 핏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오. 오직 교단에서만 만들 수 있는 성수를, 아슬란이 직접 만들 수 있다고 속여 자기 백성들에게 성수를 뿌리고 있소. 그 가짜 성수를 우매한 자들이 진짜인 줄 알고 믿고 있다는 것이 문제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뿐이오? 놈은 계속해서 대륙에 혼란을 주고자 악마가 존재한다 외치고 있으며, 온 왕국을 어지럽히고 있소. 이건 우리 교단에 대한, 그리고 라할에 대한 도전이요!"

대장로의 말에 방금 전까지 간증을 하던 장로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라할께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 무엇이?"

"그건 어쩌면 아슬란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닐까요? 우리 교단은 지금껏 너무 아슬란에게만 집착했습니다. 한 차례 그와 크게 부딪혀 기사단을 잃지 않았습니까?"

"예. 그리고 그가 주장하던 대로 대륙 곳곳에서 악마가 출몰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는 중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우린 그것을 거짓이라 부정할 것입니까!?"

"라할께서 그러한 우리의 행동을 바로 잡고자 직접 나타나신 게 분명합니다!"

대장로는 이런 장로들과 제사장들의 반응이 어이가 없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대장로와 같이 핏대를 세우며 아슬란을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 눈동자를 보고 난 이후, 완전 새사람이 되어 버렸다.

"교단에서는 끝까지 악마를 부정하고 있는데, 혹 누군가 악마와 결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라할께서 이 시기에 갑자기 나타나신 건 그것을 경고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내부 조사를 실시하여 누가 악마를 옹호하고 있는지 파헤쳐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를 이교도로 몰려는 것인가!"

"왜? 그쪽은 악마와 정말 결탁하고 있는 모양이지? 만일 그렇다면 빛의 심판이 떨어질 것이다!"

"뭐, 뭐라고!?"

이 이상은 회의 진행이 불가능할 것 같아 대장로는 상을 탕탕 치며 말했다.

"쯧. 그만! 다들 너무 흥분해 있군. 일단 머리들을 식히고 오는 게 어떤가? 오늘 회의는 잠깐 여기서 멈추도록 하지."

대장로 아르케인의 명령에 장로들과 제사장들은 옥신각신하며 회의장을 나갔다.

"후우- 이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오늘 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고 아슬란을 탄압하기 위해 모든 왕국의 힘을 모으는 것이 대장로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의견이 모이지 않으면 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대장로님."

그때 대장로파인 얀센 장로가 쭈뼛거리며 대장로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저도 방금 회의 때 나온 의견대로 아슬란 탄압은 이제 그만 멈추는 것이······."

"뭐, 뭐라? 자네도 설마 진짜로 라할이 재림을 했다고 믿는 건가?"

"대장로님은 못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이 눈으로 똑똑히 보고 귀로 들었습니다."

"정신 차리시게!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라할은 이미 소멸한 지 오래된 신이야. 우리가 이제 따라야 할 것은 어둠의 권좌란 말일세!"

"아닙니다. 라할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릴 지켜보고 계신단 말입니다! 대장로님께서도 속죄를 받으시고 다시 한번 그분을 믿으십시오!"

얀센은 그리 소리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드디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라할이······."

대장로는 혼란스러웠다.

* * *

"그, 그럼 가겠습니다. 대기사단장님!"

"부담 갖지 말고 와라."

열 명의 기사가 나를 포위한 채 검을 쥐었다.

그들 중 하나가 달려들기 전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혹시 힘을 과하게 쓰신다던가. 혹은 검강이라도 날리시는 날에는 저흰 다 죽은 목숨입니다!"

위급하면 쓰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건방지구나."

"예?"

"내가 너희 상대로 그 정도도 조절할 줄 모를 것 같으냐?"

"소, 송구합니다!"

"잔말 말고 들어오기나 해라."

"예!"

그들은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

[죽음의 위기를 감지했습니다.]

내 눈동자가 타오르는 통증을 새롭게 뜨였다.

그리고 홀로그램처럼 저들이 어떤 식을 움직이며, 어떤 공격이 나를 해할지 전부 다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이 순간만큼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 능력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뻐억-! 파바박-!

그러자 일시적으로 스텟이 상승한 내 몸은 마치 자동전투처럼 알아서 몸을 움직이며 내게 달려드는 기사들을 맨손으로 무력화시켰다.

10명이라는 숫자가 무색하게, 순식간에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채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이것이 바로 천상의 눈빛이 가진 또 다른 능력이었다.

홀로그램에서 봤던 대로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해내고 반격을 자동으로 해주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편한 능력이란 말인가.

"와아-"

"이야. 역시 대기사단장님!"

"엄청난 몸놀림이다!"

심지어 내게는 대악마 라이텐에게서 얻은 신속 능력도 있어 재빠른 몸놀림을 보일 수가 있었다.

'이 정도 실험했으면 됐겠지.'

일부러 훈련장까지 찾아와서 기사들과 가벼운 대련을 펼친 성과가 있었다.

이 정도면 실전에서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터.

단점이 있다면 이 능력을 사용하게 되면 눈동자가 황금 불꽃처럼 타오른다는 것이었다.

"대기사단장님! 제게도 가르침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때 갑자기 아론이 나섰다.

'아론은 좀.'

아무리 천상의 눈빛이라고 해도 아론은 나보다 스텟이 훨씬 높다.

더군다나 지금 나는 검도 없는 맨손이지 않은가.

이 눈깔만 믿고 싸웠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펄럭~

붉은 망토를 과하게 펄럭이며 몸을 돌리던 나는 이미 치사량에 달하는 허세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네 알량한 검술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보겠다. 오너라."

이런 모욕적인 언사가 또 좋다고 아론은 싱글벙글 웃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예! 이 부족한 놈을 마음껏 꾸짖어 주십시오!"

잠깐. 이건 계획에 없었던 일인데.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1분이 지나지 않아 천상의 눈빛이 발동 중이라는 것이다.

"제가 그동안 갈고 닦은 검술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론은 내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재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강렬한 죽음의 위기를 감지했습니다.]

아론 저놈이 잔뜩 흥분해 적당히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듯, 천상의 눈빛이 내게 경고했다.

그리고 놈이 어떤 검술을 날리는지도 미리 내 앞에 보여 주었다.

수십 번이나 검을 허공에 휘두르며 무엇이 진짜 공격인지 숨기다 그사이에 공격을 섞어 내가 차마 시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 검끝을 날리는 것.

이것이 아론이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었다.

촤아아아-!!

아론의 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차마 내 눈으로 좇아갈 수 없을 정도로 휘둘렀다.

대체 언제 저기서 진짜 공격이 날아 들어온다는 거지?

내 실력으로는 그걸 방어할 수 없을 텐······.

턱-!

"!?"

바로 그때.

언제 날아왔는지 모를 아론의 검끝이 얼굴에 닿기 전, 내 두 손가락에 걸리고 말았다.

'미친. 뭐, 뭐야.'

내가 의도해서 잡은 것이 아니다.

천상의 눈빛이 대신 내 몸을 움직여 방어를 해준 것이었다.

"와······."

아론은 멍하니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황금색 불길이 일렁이는 이 눈동자가 그리도 신기해 보였던 것일까.

나는 그 틈을 타 아론의 몸을 발로 차버렸다.

"윽!"

아론은 검을 놓친 채 뒤로 밀려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1분 동안 이어진 천상의 눈빛이 꺼졌다.

'이게 문제라니깐.'

이 능력은 진짜 말도 안 되게 좋은데, 지속시간이 1분밖에 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기사가 검을 놓치다니. 수치스럽구나, 아론."

"소, 송구합니다."

"무슨 검술인가 해서 봤더니, 고작 이런 걸로 날 넘어서려 했던 것이냐? 가소롭다."

나는 검을 아론 앞에 던지며 말했다.

"앞으로 내게 검술을 보이고 싶거든, 저 레바노스부터 꺾고 오너라."

멀찍이 자리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던 레바노스는 몸을 들썩였다.

아론은 전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꼭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저 뒤에 있는 레바노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휴. 이렇게 하면 당분간 안 덤비겠지.'

그렇게 안심하며 몸을 돌릴 때였다.

"저, 저도 가르쳐 주시면······."

그곳에서는 알렉산더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라할의 눈?"

에인소프 왕국, 카르팰 왕자, 아니. 이제는 왕이 된 카르팰은 들어온 보고에 미간을 좁혔다.

"예. 그로 인해 신전이 지금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슬란에 관한 건?"

"그쪽에서도 결국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라할이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지금 진행 중인 모든 걸 중단 시켰다고······."

"하!"

라할이라니.

웃기는 일이었다.

신화 속에서만, 그저 경전에서만 존재하는 상징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그가 갑자기 신전에 모습을 드러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면 아슬란을 공격하기 힘들어지지 않느냐?"

처음에는 아슬란을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친하게 지내려 했던 것이 카르팰의 목적이었다.

그의 힘을 검의 원탁에서 직접 마주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슬란이 할라즈 왕국을 정복하면서부터 일이 꼬여 버렸다.

"놈과 우리 왕국 간의 거리는 너무나도 짧다. 할라즈 다음으로 우리 왕국을 목표로 삼는다면······. 무척 힘들어질 터."

그래서 카르팰도 생존을 위해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믿었던 교단이 갑자기 저 자세로 나오고, 각 왕국끼리 힘을 모아 아슬란을 처단하고자 했던 계획도 어그러졌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인가."

카르팰은 저 멀리서 훈련 중이던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손짓하자, 그 먼 거리에서 순식간에 세 사람이 카르팰 앞까지 당도했다.

"너희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어쩌면 대륙 최강자일지도 모르는 자의 목을 베는 것이다."

그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할 수 있겠느냐? 눈으로 쫓기 힘든 너희의 발놀림과 검술이라면 단숨에 그의 목을 베어 버릴 수도 있을 터. 아슬란은 샤나 왕국 마법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날 것이다. 그때 놈을 노리면 된다."

"······마법 방어진이 펼쳐져 있다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카르팰이 음흉한 웃음 소리를 냈다.

"우리와는 다르게 아슬란은 행군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주변으로 보호 마법을 친 적이 없다고 한다. 보통 군의 지휘자라면 선두에 서지 않고 가운데에 서서 모두의 보호를 받는 것이 마땅하나, 그는 항상 선두에 있지."

어떤 보호 마법도, 방어 대책도 없이 선두에 서서 행군을 이끄는 아슬란.

기사로써 참으로 멋있게 보일 순 있겠으나, 카르팰처럼 지도자의 눈으로 봤을 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도 모르는데,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기습 공격에 무조건 면역인 것은 아니다.

"그를 지키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너희가 놈의 숨통을 한번 끊어 보거라. 그럼 너희 셋 중 하나는 대륙 소드마스터가 되는 것이다."

"!?"

카르팰의 달콤한 속삭임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란. 너의 오만함이 널 죽이게 될 것이다."

카르팰은 벌써부터 아슬란이 죽고 난 뒤에 일라이 왕국을 어떻게 할지를 구상하고 있었다.

94화

0.01초 소드마스터 94화

귀가 가렵고 오한이 드는 것을 보아하니.

'또 누가 날 죽이려고 작당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일상이었다.

"왜 그런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지?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이제야 눈치라는 것이 생겨서 다행이군. 알았으면 좀 가거라. 드래곤은 할 일도 없느냐?"

"그래. 없다. 아주 더럽게 없지. 오죽하면 멀쩡한 레어를 놔두고 새로운 둥지를 만들려고 했겠나?"

나태의 종족이라 불릴 만큼 드래곤은 하루 종일 레어에서 나오지 않거나, 배가 고파도 밖으로 기어 나오지를 않아 그냥 레어에서 굶어 죽어 나중에 그 뼈만 남게 되는 일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자식은 허구한 날 할라즈 성으로 놀러와 열심히 먹고 마시기를 반복한다.

다른 드래곤들과는 다르게 부지런하다고 해야 할지.

적어도 굶어 죽을 놈은 아니었다.

"그런데 너, 어디 좋은 곳으로 놀러 간다며?"

좋은 곳?

설마 샤나 왕국을 말하는 건가?

"마법 축제가 열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흥미가 생기더군. 그래. 기분이다. 이 몸이 특별히 같이 행차하도록 하지."

"거절한다."

"뭐, 뭣이?!"

다른 놈도 아니고 드래곤과 동행한다?

그건 온통 사건과 재앙을 몰고 다니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냥 조용히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괜한 말썽 피우지 말고."

"누가 보면 매일 난동이라도 피우는 줄 알겠네!"

"그러니까 그 자중하는 모습을 잃지 말고 있으라는 뜻이다. 만약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허튼짓을 해놓았다면 그 벌을 내리겠다."

"뭐, 뭐야? 벌? 감히 이 플레임 님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그래. 그 잘난 날개를 다 뜯어 주마."

"이, 이놈이······!"

플레임의 기세가 뜨겁게 타올랐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저 이상으로는 플레임이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후우. 아량 넓은 내가 참도록 하지."

언제 그랬냐는 듯, 플레임의 열기가 차갑게 식었다.

"대기사단장님. 모두 채비를 마쳤습니다."

"그래, 곧 나가도록 하지."

집무실을 나가니, 밖에는 기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 있던 플레임은 핀잔을 주듯 말했다.

"흥. 잘 다녀오든가, 말든가."

"잘 지키고 있거라. 샤나 왕국에는 대륙에서도 유명한 과자들이 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이 성을 잘 지켜만 준다면 그 과자들을 가져와 주지."

그 말에 플레임의 눈동자에 빛이 번쩍였다.

역시 먹을 거에는 사족을 못 쓰는 놈이었다.

* * *

"······저기 오는군."

일라이 왕국의 최고 권력자이자 대륙의 소드마스터, 아슬란.

그 카르만과도 필적한다는 강자이면서, 현재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기사들을 이끌고 샤나 왕국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형님. 역시 정보대로 아슬란 주변에 마법 보호막이 하나도 없소."

"그 카르만도 행군 중에는 항상 마법 보호막을 하고 다니는데, 아슬란 저자는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군. 저건 그냥 미친놈 아니오?"

슈벨은 제 동생들의 말에 입가를 비틀었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놈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것이 바로 우리 형제라는 것을 말이다."

슈벨 삼 형제는 암흑가에서 그 위명을 떨쳤던 자들이다.

그런 그들의 뛰어난 실력을 보고 카르팰이 정식으로 에인소프 왕국에 들여놓았고, 그들을 이용해 자신의 정적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런데······. 괜찮겠소? 상대는 그 아슬란인데."

"나도 뜬 소문으로 들은 건데, 아슬란이 최근에는 드래곤까지 굴복시켰다고 하오. 거기다 무슨 신의 눈동자를 가졌다는데······."

"풉. 지나가던 똥개가 웃겠구나. 드래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드래곤이라는 말에 슈벨은 확신했다.

"지금까지 아슬란의 위명은 너무 허황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 드래곤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인간이 드래곤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냐. 그 말은, 놈이 자신의 실력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이야기를 꾸몄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여태까지 아슬란이 이룬 성과를 보면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오."

"그것도 맞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다만, 그 최약국이었던 일라이 왕국이 지금은 에인소프 왕국을 위협할 정도이니. 그래서 국왕 카르팰이 우릴 보낸 것이 아니겠느냐?"

슈벨은 단검을 올곧게 잡으며 제 아우들에게 말했다.

"그러니 모두 필살의 의지로 놈의 숨통을 끊어라. 이 일격으로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걱정하지 마시오."

"상대가 누구든, 일격 싸움에서는 자신 있소. 심지어 상대는 보호막도 없지 않소이까?"

슈벨과 그의 형제들이 강한 이유는 바로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력에 있었다.

이들이 칼을 휘두르면 표적이 된 상대는 자신이 죽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목이 떨어져 버린다.

그 주변 사람들조차 표적이 무엇에 당했는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슈벨 형제는 유유히 자리를 떠나게 된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아 명성을 얻어왔다.

이번에는 저 소드마스터 아슬란의 목을 베어 그보다 더 높은 명성을 얻고자 했다.

"간다."

"알겠소!"

아슬란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그들은 응축하고 있던 기운을 폭발시켜 빠르게 튀어 나갔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모든 것이 동작을 멈추었고, 그 안에서 슈벨 형제만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죽어라, 이 우매한 놈.'

제 동생들이 먼저 양옆으로 날아 들어와 아슬란의 목덜미를 노렸다.

독이 가득 묻은 저 단검에 스치기만 해도 즉사였다.

그런데.

"······?"

단검이 닿으려 하는 찰나.

아슬란의 눈동자가 갑자기 황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설마 저것이 아우가 말했던 그 신의 눈동자라는 것인가?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아슬란은 가벼운 몸짓으로 날아 들어오던 단검 공격을 피해 버렸다.

'그걸 피했다고 끝이 아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슈벨이 항상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슬란의 심부를 향해 단검 끝을 조준하며 뻗어 나갔다.

하지만,

착-!

놀랍게도 그의 단검은 아슬란의 손끝에 걸리고 말았다.

그 순간 멈춰 있던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니!?"

"암살자다!!"

"대기사단장님을 지켜라!"

슈벨은 단검이 아슬란의 손가락에 붙잡힌 통에 허공에서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아슬란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눈동자로 바라보며 그를 내동댕이 쳐버려렸다.

"크악!"

"혀, 형님!"

동생들의 목소리에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모두 도망쳐라. 어서!"

이번 작전은 실패였다.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도망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아슬란은 저 둘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멈춰라."

그의 말 한마디에 제 형의 말을 듣고 도망치려 했던 두 아우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의 의지로 멈춘 것이 아니다.

어떤 강렬한 힘이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감히 그런 조잡한 실력으로 이 아슬란을 노렸다는 것이냐? 건방지구나."

그가 가볍게 손을 비틀자 동생들의 생명과도 같은 다리가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으아악!!"

저건 또 무슨 능력인 거지?

아슬란은 천천히 말을 앞으로 끌고 나가며 바닥에 쓰러진 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 두 아우를 내려다보았다.

눈동자에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황금 불길을 보고 그들은 더 큰 비명을 질러댔다.

"으, 으아아아아!"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아슬란은 그런 그 둘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죽이는 것조차 가치가 없는 놈들이구나. 이놈들을 포박해라."

"예!"

기사들은 그들을 일으켜 강제로 사슬에 묶어 버렸다.

포박을 당하는 와중에도 슈벨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행군을 이어가는 아슬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 *

'이, 이런 미친.'

손발이 오들오들 떨리고 심장 박동수가 미친 듯이 치솟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것을 티 내지 못했다.

'슈벨 형제가 왜 나를!'

대륙 최고의 암살자로 뽑히는 인물이 몇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슈벨 형제다.

스텟은 별거 없지만, 라이텐과 마찬가지로 초신속이라는 능력이 있어 그것으로 자신들보다 스텟이 높은 캐릭터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 버린다.

일격필살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놈들이라는 건데, 그놈들이 내 목숨을 노렸다.

'천상의 눈빛이 아니었다면.'

신성한 보호가 첫 일격을 막아 주긴 했겠지만, 두 번째로 이어진 일격은 결코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천상의 눈빛이 죽음의 위기를 미리 감지하고 자동으로 반응을 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후가 누구인지 물어도 쉽게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기사들이 고문을 하며 놈들의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래도 그냥 저냥한 암살자는 아니라는 듯 나름 지조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고문하지 않아도 누가 배후인지는 이미 알고 있잖아.'

슈벨 형제가 게임 내에서 유명한 건 바로 에인소프 왕국의 카르팰 때문이다.

마검사로도 불리는 놈은 슈벨 형제의 재능을 알고 그들을 기용해 자신의 정적을 모두 죽여 버린다.

심지어 자기 아비까지 죽여 왕 자리를 차지하는 등, 아주 지독한 새끼였다.

'그런데 나를 노렸다 이거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그렇다고 곧장 군을 일으켜 에인소프와 결전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사슬로 칭칭 묶여 있는 슈벨 형제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흠칫했다.

"카르팰이 보냈느냐?"

"······!?"

"안 봐도 뻔하지. 그놈이 너희를 이용해 제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뿐인가? 놈은 왕국 내에 있는 정적들을 다 너희의 칼로 죽이지 않았더냐?"

"그, 그걸 어떻게!"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고작 너희 같은 쓰레기들로 내 목숨을 노리려 하다니. 그 발상이 참으로 우습구나."

"······."

나는 옆에 있던 아론에게 말했다.

"저놈들의 목을 베어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역겨우니."

"예!"

"자, 잠시만! 으, 으아악!"

아론의 칼날에 슈벨 형제라는 악명 높은 암살자 형제가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카르팰 이 새끼를 어떻게 한다······.'

뭐라도 보복을 하긴 해야 겠는데, 대체 뭘 어떻게 갚아 줘야 하는 거지?

그리 고민을 하던 중.

"그걸 한번 해볼까?"

문득 재밌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 * *

"쯧. 아직도 연락이 없더냐?"

"예."

설마 실패인가.

밤이 이렇게 깊었는데도 슈벨 형제에게서 아무런 연통이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슈벨 형제로도 무리였던가?"

마법 보호막도 없이 다니는 아슬란을 노리기에는 슈벨 형제만큼 좋은 카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설마 그놈들이 붙잡혀서 배후를 불진 않았겠지?

"쓰읍- 그럼 곤란한데."

괜히 일을 크게 벌였다가 된통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그리 밤새 고민하다 카르팰은 침소에 들었다.

그렇게 잠에 들어 꿈속을 헤매고 있었는데,

"끄응······."

단잠을 깨우는 밝은 빛에 그는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대체 누구냐? 누가 이리도 불을 밝히고 있는 게야?"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시종들의 대답이 아닌, 비명소리였다.

"꺄아아아!"

"으, 으아아!"

거기서 카르팰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며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에게 나타난 것은 바로,

"으, 으헉!"

뜨겁게 타오르는 황금빛 눈동자, 항상 이야기로만 들었던 신화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라할의 눈동자였다.

[카르팰. 제 아비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찬탈자여.]

이 드넓은 침소를 가득 채운 저 눈동자에서는 목소리까지 흘러나왔다.

[감히 네놈이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그 목소리의 울림에 성 전체가 흔들렸고, 카르팰은 고막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아 괴로움에 몸부림을 쳐댔다.

"끄아아악!"

방어막을 쳤음에도 저 목소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네놈이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극악스러운 공포에 카르팰은 바지가 축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95화

0.01초 소드마스터 95화

"에인소프 왕국의 국왕, 카르팰은 이번 마법 축제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서신이 왔습니다."

"카르팰, 그 나대기 좋아하는 놈이?"

샤나 왕국의 대마법사이자, 이곳에서만큼은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는 나타샤.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맨살 곳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채 발톱에 직접 색을 바르고 있었다.

'끝없는 매혹'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그녀는 본능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색기를 내뿜었다.

매번 나타샤를 지켜보는 부하들도 그 성별을 가리지 않고 나타샤를 바라보며 침을 삼켜야만 했다.

"이상한 일이군. 그놈이 이런 자리에 빠지려 하지 않을 텐데?"

그녀가 고개를 들자 백옥 같은 피부의 쇄골이 드러났다.

그런 나타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부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을 이었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카르팰이 머무는 침소 안으로 황금빛 눈동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황금빛 눈동자? 잠깐. 설마 신전을 뒤집어 놓았다는 그 라할의 눈동자 말이냐?"

"예. 또한 거기서 나오는 목소리가 성 전체를 흔들었고, 카르팰만이 그 눈동자를 마주하며 결국 실신했다고 합니다."

"실신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왕족답게 자존심 강하고 음흉한 놈이 실신까지 했다라.

하지만 재밌는 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카르팰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말만 반복하며 혼자 방에 틀어박혀 떨고 있으며, 이런 말도 함께 했다 합니다."

"어떤 말을?"

"아슬란은 라할의 화신이라는······."

"뭐? 푸흡-!"

나타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궁전을 가득 채웠다.

"라할의 화신?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 내가 아슬란을 모를 줄 아느냐? 놈은 어떤 신의 피도 섞이지 않는 순수 혈통의 인간이다. 제아무리 요즘 아슬란의 명성이 드높아졌다고 해도 라할의 화신이라니. 카르팰 그놈, 제대로 맛이 가버린 모양이군."

나타샤는 발톱과 손톱에 골고루 바르고 있던 색이 마음에 든 것인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처럼 마법의 끝에 다다른 자는 자연스레 느끼게 되지. 이 세상에 간섭하고 있는 신들의 기운을 말이다. 하지만 다른 신들은 이따금 조금이나마 그 존재를 느꼈었지만, 단 한 번도 라할의 존재를 느낀 적은 없었어."

고대부터 내려오던 나타샤 가문은 신의 기운을 느낄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선조들로부터 그 기운을 전해 받은 나타샤였지만, 그들이 느껴왔던 라할의 기운을 이제껏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다.

"라할은 죽었다."

"네?"

"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 얘기는 틀린 것일 수도 있어. 타락한 신이라 불리는 '아마데르'도 결국 소멸되지 않았느냐? 그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신은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다. 라할 역시 마찬가지였던 게지. 그런데 라할의 화신? 지나가던 똥개가 비웃겠구나."

나타샤의 목소리에는 신에 대한 증오심이 물씬 풍겨 나왔다.

"이제 가자. 지금쯤이면 손님들이 다 모였을 테니."

"예."

나타샤는 전각을 나와 성대한 파티가 진행 중인 메인 홀로 이동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마저 매혹적으로 퍼뜨리던 그녀가 홀 안에 들어오자 그 달콤한 향기에 모두 이끌리듯 시선을 옮겼다.

"오오. 역시 대륙의 홍염이십니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우신지."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그들은 입에 침이 마를 새도 없이 칭찬하기 바빴다.

그만큼 나타샤의 외모는 감히 비견할 자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녀의 도발적인 옷차림은 사내들의 눈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나타샤는 도도한 얼굴과 발걸음으로 그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오늘도 이 자리에 참여해줘서 고마워요, 카르만."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바로 국왕 카르만이 있는 곳이었다.

"······초대해줘서 고맙소."

"그럼요. 제가 예전에 아주 귀여워하던 제자를 보는 건데. 어떻게 초대를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아카데미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마법을 가르친 그녀였기에 카르만 역시 오래 전 그녀에게 마법의 기초를 배웠었다.

나타샤는 가느다란 손으로 카르만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카데미 때도 당신보다 늠름한 사내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네요. 그때 차라리 확 유혹해볼 걸 그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호호호. 궁금하지 않아요? 제 모습이 밤에는 어떻게 변하는지."

"크, 크흠! 농이 지나치시구려."

"뭐, 싫다면 어쩔 수 없죠."

새침하게 돌아서는 나타샤를 바라보며 카르만은 잠시 놓고 있던 정신줄을 붙잡았다.

역시 매혹의 마법사답다.

천하의 카르만도 나타샤 앞에서 서면 정신을 다잡기가 힘들 정도였다.

"흐음- 그런데 그 녀석이 안 보이는구나."

"그 녀석이라고 하시면······."

"오늘 이 무대의 주인공 말이다."

그 말에 부하들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마치 그 말을 들었다는 듯,

"일라이 왕국 대기사단장, 아슬란 가드 베라크!"

입구에 서 있던 병사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아슬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

그토록 시끄러웠던 연회장에 일순 고요해졌다.

그저 들리는 것이라고는,

펄럭~!

화려하게 펄럭이는 아슬란의 붉은 망토와 격조 있는 그의 발소리뿐.

그는 부하들과 함께 홀 안으로 들어오며, 용맹하고 지조 있는 얼굴로 오직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이 수많은 사람이 오직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발아래라는 것을 표방하듯, 그의 오만하면서도 기품 있는 눈동자는 한 곳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과연 오늘 무대의 주인공답구나."

그 등장만으로도, 그 존재만으로도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내.

그것이 바로 저 아슬란이었다.

언제 봐도 흥분감에 몸을 달싹이게 만드는 놈이었다.

"아슬란. 어서 오너라. 이리도 자리를 빛내주니, 기쁘구나."

"······."

아슬란의 저 거만한 눈빛은 나타샤의 몸을 더욱 뜨겁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초대해줘서 고맙소."

"후후. 이제 스승에게 존대하는 것도 싫다는 것이냐?"

나타샤는 여전히 꼿꼿한 아슬란의 자세와 그 얼굴빛에서 드러나는 위압감에 미소를 지었다.

세상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 마치 드래곤을 닮은 듯한 저 두 눈동자는 모든 것을 굽어보는 것만 같았다.

정녕 이 세상에서 자신을 두렵게 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표현하듯이 말이다.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그리고 저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 역시 왠지 그와 잘 어울려 보였다.

나타샤는 매정하게 몸을 돌리는 아슬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더 어울리다 가거라. 이럴 때를 위해 축제를 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한 색욕을 뿌리며 아슬란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거칠 것 하나 없고,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 * *

'어후. 완전 괴물 소굴이 따로 없네.'

홀에 딱 들어서는 순간부터 괜히 왔다는 후회가 머릿속을 점령했다.

네임드가 득실거리는 이 끔찍한 장소.

'부담스럽게 왜 나만 쳐다보고 있는 거야.'

거기다 그들은 나 하나만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웃긴 건, 이 와중에도 병적인 허세와 심취가 팔팔하게 끓어 올라 아주 당당한 자세로 그들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겉과 속이 따로 노는, 그야말로 겉바속촉이 따로 없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발을 들이려고 했을까.'

그놈의 골드에 잠깐 눈이 멀어서 그만······.

'근데 이 할망구는 무섭게 왜 이래?'

나는 미간을 좁히며 내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나타샤를 쳐다보았다.

색욕의 마녀, 홍염의 대마법사, 유혹의 악마,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그녀는 대륙 최고의 미녀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미모를 가졌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100살 넘은 할머니로 보일 뿐.

오히려 이런 터치가 소름 끼칠 정도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 게임을 오랫동안 플레이 한 고인물이기에 잘 알고 있지 않던가.

그녀를 가까이했다가는 얼마 못 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많은 플레이어가 저 미모에 홀딱 넘어가서 죽곤 했지.'

저 아름다운 미모에 속아 나타샤에게 몸을 던지는 순간, 색욕의 노예가 되어 모든 정기를 흡수당하고 종국에는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 그녀의 이런 가벼운 스킨십도 내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언제 어떻게 정기가 빨려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난 빠르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나타샤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 축제에 앞서 열리는 회의에 다시 참석하도록 하지."

"흥.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손을 너무 매정하게 뿌리쳐서 기분이 상했던 것일까.

그녀의 눈동자가 악독하게 변했다.

괜히 불똥이 튈까 두려워 나는 얼른 이 숨 막히는 곳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쿵-!

둔중한 발소리와 함께 내 앞을 가로막는 덩치가 있었다.

"아슬란."

그는 다름 아닌 칼라 왕국의 국왕, 카르만이었다.

"인사도 없이 그냥 가려 했는가?"

"······오랜만이군."

내 오만한 대답이 신경을 건드린 것일까.

카르만 뒤에 있던 기사들이 먼저 역정을 냈다.

"국왕께 그 무슨 무례입니까!"

"말을 높이십시오!"

웃기는 놈들이다.

제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서로 왕국이 다르면 무조건 말을 높일 필요는 없다.

그저 칼라 왕국이 대륙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기에 저런 같잖은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다.

"네 부하들이 여전히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건 똑같구나."

"!?"

"지, 지금 뭐라고!"

부하들이 흥분하며 나서려고 하자 카르만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끼어들지 말거라."

"소, 송구합니다."

카르만은 힐끗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너 역시 건방진 건 똑같군. 감히 누구 앞에서 그렇게 혀를 놀리는 것이냐?"

그 흉포한 눈동자에 나는 속으로 움찔했지만, 허세는 기름을 부은 듯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상대가 누구든 내 태도는 항상 똑같다. 왜 너라고 다를 거라 생각하는 거지? 오히려 건방진 건 네가 아닌가?"

"뭐라? 네놈? 사람들이 네가 나와 필적하는 힘을 지녔다며 칭송한다고 해서 정말 그런 줄 알고 착각하는 것이냐?"

냉철해 보이기만 하던 카르만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투기가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특성 중 하나인 [위압]이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

숨이 턱 막히고 양어깨는 쇳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한번 허세에 사로잡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받아치며 그의 위압에 맞서 나도 혼돈의 피어를 발동시켰다.

쿠우웅-!!

혼돈의 피어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자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거렸다.

카르만 뒤에 있던 부하들도 신음을 토해내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

그러나 카르만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결코 바닥에 무릎을 꿇는 추태를 보이진 않았다. 그의 수많은 사기적인 특성 중 하나인 [불굴]이란 능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리라.

그는 내 피어에 대항하고자 더욱 강한 위압을 뿜어냈고 동시에 두 다리로 꼿꼿하게 버텨내기 위해 힘을 주자 이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이 콰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

그렇게 15초란 시간이 훌쩍 지나간 뒤.

내 피어가 사라지면서 카르만의 위압 역시 함께 사라졌다.

"우욱-!"

"크읍!"

여기저기서 토악질을 하는 사람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카르만의 이마에서 흐르는 한 줄기의 땀방울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대화는 충분히 한 것 같군."

96화

0.01초 소드마스터 96화

쾅-!

연회장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사람들은 간신히 숨을 쉴 수가 있게 되었다.

"바, 방금 전 그건 대체······."

"아슬란이 카르만에 필적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었군."

"필적? 방금 건 아무리 봐도 아슬란이 카르만을 압도한 것 같은데?"

"쉿! 목소리가 너무 커."

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멍하니 서 있는 카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카르만은 그런 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지?'

난생처음 겪어 보는, 가히 압도적인 힘이었다.

카르만은 보았다.

아슬란 몸에서 흘러넘치는 어마어마한 투지와 살기를.

마치 거대한 악마의 기운이 그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듯한 환상이 눈앞에서 펼쳐졌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슬란이 자신을 압도했다는 것을 말이다.

'아슬란이 저 정도였나?'

검의 원탁 회의에서 봤을 때만 하더라도 저 정도의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마 그사이에 힘을 더 키운 것일까?

그렇다는 건 이미 정점에 다다라 성장이 멈춰 있는 카르만과 달리, 아슬란은 여전히 성장 중이라는 뜻이었다.

"······."

카르만은 경직된 자세를 풀고 아슬란이 떠나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만약 저자를 자신의 손으로 잡는다고 한다면.

'목숨을 걸어야겠지.'

정말 오랜만에 식은땀이 나게 하는 존재가 나타난 것 같아 카르만은 차갑게 식어 있던 피가 뜨겁게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 * *

"호오-"

나타샤는 흥미롭다는 듯 혀를 할짝였다.

카르만과 아슬란의 구도라.

하긴. 이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둘의 대결을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전 그건 분명 아슬란의 우세로 보였다.

만약 거기서 카르만이 칼을 뽑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슬란이 정말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카르만을 쓰러뜨렸을까?

"흐흥. 이래서 아슬란이 좋다니까? 한시도 예측할 수 없도록 이런 지루한 파티에 긴장감도 넣어주고 말이야."

"하지만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예. 나타샤 님에게 보이던 행동부터 시작해 좋은 분위기에서 이어지는 파티를 완전히 망가뜨렸습니다."

"나타샤 님께서 얼마나 공들여 준비한 파티인데······! 저 두 사내의 치기 어린 기 싸움에 모두 엉망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나타샤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바로 아슬란이 노린 점이었다는 걸 정녕 모르느냐?"

"······네?"

"아슬란이 노린 거라고요?"

"그래. 너희는 아슬란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냥 검만 휘두를 줄 아는 기사? 아니. 그는 정치를 하는 자다."

부하들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일라이 왕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아랫사람들 역시 아슬란을 거의 왕처럼 받들고 있지. 아니, 거의 신처럼 떠받드는 중이다. 심지어 백성들마저 아슬란을 저 라할보다 더 높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나타샤도 항상 두 귀를 열어 놓고 대륙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듣고 있었다.

당연히 아슬란이 어떻게 국정을 운영하고, 일라이 왕국에서 영향력을 끼치는지 모두 들었다.

"아슬란은 매우 철저한 자다. 그의 사소한 움직임에도 다 뜻이 있지. 다 무너져 가는 일라이 왕국을 세운 것이 과연 운이겠느냐? 음모를 꾸미던 정적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힘을 모아 지금의 일라이 왕국을 만들어냈다. 그런 자가 단순히 치기 어린 마음에 기 싸움을 했겠느냐?"

"그럼 나타샤 님께서는 방금 전 행동도 아슬란이 다 계산적으로 움직인 거라는······."

"그래. 지금 이 연회장을 보거라.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 봐라. 모두 무슨 얘기를 하고 있지?"

부하들은 잠시 주변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아슬란 얘기뿐입니다."

"맞다. 전부 아슬란 얘기뿐이지. 검의 원탁회의 때도 이러했다. 일부러 상대를 도발해 자신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그날 며칠 동안 아슬란 이야기로 시끄러웠지. 그로 인해 그의 명성이 올라가고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이곳도 마찬가지야."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카르만보다 아슬란이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토론으로 시끄러웠다.

설마 아슬란은 정말 이것을 노렸다는 것인가?

"검의 원탁회의 이후로 아슬란은 카르만에 필적하는 힘을 지녔다고 말이 많았지.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됐느냐? 둘이 칼을 부딪쳐 싸운 것도 아닌데, 아슬란이 카르만의 위에 있다고 모두 시끄럽게 떠들고 있지 않느냐?"

"······놀랍군요. 설마 아슬란이 그 정도로 철두철미한 성정을 가졌을 줄은 몰랐습니다."

"한 나라를 쥐어흔들고, 그곳의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놈이다. 얼마나 영악하고 치밀하겠느냐?. 그놈이 침대 위에서는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일지 궁금해지는군."

"······."

나타샤는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잘 넘어오지 않는단 말이지. 혹시 내가 안 예쁜가? 말해 봐라. 내 얼굴이 너무 나이 들어 보이느냐?"

"그, 그럴 리가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예. 이 대륙에서 나타샤 님의 외모를 따라갈 사람은 없습니다!"

"호호. 그래. 너희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 말이 맞겠지."

하지만 아무리 얼굴이 예쁘고 매번 강렬한 색욕을 내뿜는데도 아슬란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경멸스러운 눈빛마저 보내기까지 한다.

그것이 나타샤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하리엘이 같이 왔었지······."

설마 하리엘에게 아직도 마음이 있는 건가?

하리엘이 아슬란 곁에 있다는 건 그녀도 그에게 마음이 분명 있다는 뜻일 터.

"둘이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는 얘기는 못 들은 것 같은데."

서로 눈치만 보면서 간을 보고 있는 건가?

답답해서야 원.

"흐음- 그렇다면······."

뭔가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 나타샤가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 * *

"어휴. 시발."

지정된 숙소로 들어오고 문이 닫힌 뒤에야 나는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와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카르만과 부딪히다니.

그냥 좋게 넘어갔어도 될 일을, 이놈의 허세가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사이만 험악해졌다.

"만약 그때 싸웠다면-"

보나 마나 결과는 뻔했다.

내가 가진 찰나의 괴력으로 카르만을 그 자리에서 베었다고 해도 그를 이긴 것이 아니다.

카르만의 무서운 점은 단순히 무력이 높아서가 아닌, 그가 가진 사기적인 특성들 때문이니까.

그는 불굴이란 능력으로 치명적인 데미지를 한번 흡수할 수가 있고, 만약 그 자리에서 몸이 반 토막 났어도 분신이라는 능력이 있어 그 몸을 죽여도 그것은 분신이라 다른 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괜히 대륙 최강이 아니지."

그래서 고인물들이 뉴비에게 이 게임을 추천할 때, 시작부터 먼치킨 캐릭으로 무쌍을 찍고 싶다면 카르만을 선택하라고 조언을 해 준다.

"나중 가서 저 카르만보다 더 세지는 알렉산더는 대체 얼마나 괴물인 거야."

그래서 이 게임은 무력이나 지력 수치보다는 그 캐릭터가 가진 특성이 더욱 중요했다. 스펙업을 한다고 내가 괜히 스킬 붙은 아이템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잘 빠져나왔다."

내가 연회장을 빠르게 나온 것도 카르만처럼 괜히 시비를 걸어 일이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무려 극악 난이도로 플레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언제 어디서 내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늘 조심해야 한다.

그렇기에 네임드가 득실거리는 장소를 벗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여기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건 좀 그렇겠지?"

마법 축제는 단순히 위정자들만의 축제가 아닌, 모든 마법사를 위한 축제였다.

각 왕국에 있는, 혹은 떠돌이 마법사들이 샤나 왕국에 모여 자신이 가진 마법의 힘을 뽐내고, 그들이 직접 만들고 개발한 마법 도구들을 공개한다.

거기서 마음에 드는 마법사가 있으면 자기 왕국으로 데려가는 권세가들도 있고, 아니면 어떤 마법사가 만든 도구가 마음에 들어 돈을 투자하는 경우도 있다.

즉, 마법사들에게는 크나큰 기회나 다름없는 축제라는 뜻이었다.

"쓸만한 마법사들이 좀 있으면 데려가고 싶은데."

플레이어들도 그래서 마법 축제에 참여해 여러 아이템을 얻거나, 마법사들을 스카우트해 국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하곤 한다.

나 역시 이 파밍 기회를 그냥 놓칠 순 없었다.

적당히 볼거리도 구경하면서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한번 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흠흠."

나는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들어오는 건 알렉산더였다.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가봐야겠다."

"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밖에는 알렉산더와 몇몇 기사들이 있었다.

보통 낮과 밤을 나눠 돌아가면서 내 호위를 맡기 때문에 아론은 숙소로 쉬러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런데,

"대기사단장님~! 혹시 밖으로 구경 가시나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들뿐만이 아닌, 라파엘도 있었다.

"저도 같이 가요!"

"······그러지."

라파엘도 마법사이니, 당연 이런 축제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리엘은?"

"아! 하리엘 언니는 잠깐 숙소에 있다가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나갔어요."

"누군가의 부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하리엘 언니를 보고 홀딱 반한 사내가 아니겠어요? 호호.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하긴. 하리엘 정도의 외모라면 남자가 꼬일 만도 하지.

그런데 하리엘이 보통 성격이 아니라서 웬만한 남자로는 그녀를 품을 수 없을 텐데.

거기다 그녀는 무려 교단의 검이니, 더더욱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니까.

"알겠다."

"어머. 혹시 하리엘 언니가 신경 쓰이시는 건가요?"

"······같이 나가기 싫으면 그냥 여기 있거라."

"아, 아니에요! 같이 갈래요!"

나는 라파엘과 함께 왕궁 밖을 나섰다.

시장통처럼 열린 축제는 곳곳에서 마법쇼가 벌어지고 있었고, 자신이 만든 마법 도구를 열심히 광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 이 빗자루로 말할 것 같으면, 마력 소모를 최소한으로 낮추고 동시에 속력은 최대한으로 높여 놓은 마법의 빗자루라 할 수 있소!"

"이 망토만 있다면 가벼운 마법과 함께 몸 전체를 숨길 수가 있지!"

"이 침낭을 쓰게 된다면 그 어떤 추위도 견딜 수 있고······!"

그중에는 사기꾼도 있을 테고, 진짜 쓸모 있는 마법사들도 있을 것이다.

난 조용히 그들을 구경하며 길을 가던 중, 라파엘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아! 저기 한번 가보실래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유독 화려하게 마법 조명이 달려있는 술집이었다.

"저곳에서 샤나 왕국의 특산물인 루옹 열매로 만든 술을 판대요! 꼭 한번 먹어 봐야 된다고요!"

루옹 열매 술이라면 나도 알고 있다.

연인과 키스를 하는 듯한 달콤한 맛이라던데······.

"흠."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라파엘과 같이 술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안에서 옥신각신거리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워워. 난 자네들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야."

"하지만 방금 네놈이 우리 국왕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느냐!"

"그냥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 오늘 연회장에서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 국왕 카르만을 압도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뭐야?! 이놈이 끝까지!"

저놈은 또 왜 저기서 가만히 있는 카르만 기사들을 건드리고 있어?

술집에는 아론과 몇몇 기사가 함께 있었다.

"화내지 말게. 두 분의 실력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지 않나. 오늘 일로 미뤄보건대, 조만간 두 분께서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실력을 가릴 것 같던데. 그때 가서 확인하면 되지 않나?"

가리긴 뭘 가려.

아론 저놈이 누굴 죽일 셈인가.

"흥! 거짓만 일삼는 너희 왕국의 대기사단장에게 우리 국왕께서 패배하실 것 같으냐?"

"뭐?! 거짓만 일삼아?"

"감히 누구보고 그런 소리를!"

칼라 왕국 기사의 도발에 우리 왕국 기사들이 역정을 냈다.

그러자 아론이 그들을 중재하며 나섰다.

"아아. 모두 그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싸우려고 온 게 아니야. 이렇게 서로 다른 왕국 기사들끼리 언제 또 술잔을 나눠 보겠나? 그런데 대체 우리가 어떤 거짓을 일삼는다는 거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아슬란이 드래곤의 레어를 박살 내고, 그곳에 있던 드래곤을 쳐죽인 것. 그리고 지옥으로 쳐들어가 직접 대악마에게 심판을 내린 것. 또한 라할의 화신으로 성수를 만들어냈다는 것! 이게 다 거짓말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흠······. 확실히 조금 와전된 것이 있긴 하군. 하지만 성수에 대한 건 절대 거짓이 아닐세."

"뭐, 뭐야? 대체 신전도 아닌데, 성수를 어떻게 만든다는 것이냐?"

아론은 씨익 웃으며 테이블 위로 올라가 술집에 있는 모두에게 병을 보여주었다.

"이곳에 자네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는 성수가 있지. 우린 이걸 매일 물처럼 마신다네. 아슬란 님의 축복을 떠올리면서 말이야. 왜냐하면 우리 일라이 왕국에는 이 성수가 폭포수처럼 샘솟거든."

"거짓이다!"

"어디서 속내가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야유를 퍼붓는 군중 속에 한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게 진짜라면 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겠지!?"

"음?"

"한 달 전 악마와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다. 마법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긴 하지만, 마기로 인해 점점 살이 썩어들어가고 있다. 성수로는 이 마기를 없앨 수 있다고 하던데?"

"아아-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론은 기사의 어깨에 나 있는 상처에다 성수를 부었다.

"크윽!"

그러자 상처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곧 그 연기가 황금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떤가?"

잠시 괴로워하던 기사는 아론의 말에 어깨 상처를 바라보았다.

"이, 이럴 수가. 마법으로도 치유가 되지 않았던 상처가······."

살을 썩게 만들던 마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점점 살이 아물고 있었다.

"이래도 내가 거짓을 말하는 거 같나?"

"······."

아론은 거기서 한술 더 뜨며 술잔을 들었다.

"이 술잔에 담긴 술을 잘 보시게."

그 투명한 잔에 성수를 몇 방울 넣으니, 술의 색깔이 황금빛으로 변하며 그 안에서 매혹적으로 찰랑거렸다.

"우, 우와아-."

"정말 성수였잖아?"

술집에 모여 있던 각 왕국의 기사들은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성수로 만든 술이다."

"!?"

아론이 그것을 꿀꺽꿀꺽 들이켜자 기사들은 군침을 삼켰다.

"크- 역시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천상의 맛이로군."

"나, 나도 한 모금만 주시오!"

"나도! 나도 맛보고 싶소!"

방금 전까지 의심으로 가득하던 기사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들은 아우성을 치며 제발 한 방울만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론은 성수가 들어 있는 병의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오직 아슬란 님을 따르고, 그분을 섬기는 자만이 이 성수를 마실 수 있다. 너희같이 정화되지 않는 부정한 자들은 감히 입에 댈 수 없어. 그러니 이 성수를 맛보고 싶다면 일라이 왕국으로 오너라. 그곳에서 아슬란 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목숨을 다해 그분을 따르겠다 맹세한다면 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오오-"

"역시 소문이 다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래. 전부 사실이다. 오히려 소문이 함축된 거 같더군. 그분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대하신 분이다! 그분의 업적을 내 오늘 여기서 밤이 새도록 얘기해주도록 하지!"

"오오오-!"

기사들은 술잔으로 테이블을 치며 아론에게 호응을 해주고 있었다.

그는 일라이 왕국에서 그러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똑같이 이들을 열심히 선동하는 중이었다.

"······."

왠지 아론이 점점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97화

0.01초 소드마스터 97화

"여기 어디쯤이었던 거 같은데······."

샤나 왕국은 모든 곳이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다.

곳곳에 마법이 심어져 있어 침입자에게는 지옥의 환상을 보여 주고, 손님에게는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누군가가 길을 잘 알려 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헤맬 수도 있는 곳이라 늘 조심해야 했다.

"여기다, 하리엘."

그때 뒤에서 들리는 고혹적인 목소리에 하리엘은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 옛날처럼 여심마저 흔드는 기운을 내뿜고 있는 나타샤가 있었다.

"이런, 내가 불러주지 않았다면 길을 잃을 뻔했구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타샤 님."

"그래. 그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넌 귀엽구나. 그 볼따구를 꼭 깨물어 주고 싶다니깐?"

"그, 그렇습니까?"

"호호. 당황하는 모습도 옛날이랑 똑같아."

나타샤는 하리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신전에서 그 잘난 라할의 축복을 듬뿍 받은 것인지, 머릿결이 무척 곱구나. 나와는 다르게 너에게는 청순한 매력이 있어. 그 녀석도 그것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것일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호호. 내가 말하는 그 녀석이라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네가 지금 주군으로 섬기고 있는 바로 그 녀석 말이다."

하리엘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래서, 넌 어떻지? 그 녀석이 널 좋아하는 만큼, 너도 그 녀석을 좋아하고 있나?"

"무, 무, 무슨 마, 마, 말씀이십니까!"

"당황하는 것을 보아하니, 너도 결국 넘어갔구나. 하긴. 사랑을 위해 평생을 섬겨온 교단까지 버린 너이지 않느냐?"

"그, 그건 그, 그럴만한 사정이!"

"내게 숨길 필요 없다. 난 100년을 넘게 살아온 마법사이니까. 사람의 감정을 꿰뚫어 보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너도 참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때는 싫다고 피해 다녔던 녀석이 말이다."

"······."

하리엘은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나타샤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 왜 저를 부르신 겁니까?"

"흐응~ 왜일까? 그냥 오랜만에 제자가 보고 싶어서? 아니면······. 질투가 나서?"

"네?"

"오래 나이를 먹으면 말이다, 하리엘. 누군가는 현자가 되지만, 반대로 누군가는 더 고약해지기 마련이란다. 생각해 보거라. 그 고고한 아집과 탐욕이 100년이란 세월 동안 묵혀 있었다면, 그것이 얼마나 더 지독해져 있을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하리엘은 느낄 수 있었다.

나타샤에게서 흘러나오는 섬뜩하고 서늘한 기운을.

"안타깝게도 나는 전자가 아닌, 후자란다. 대륙의 이익이라든지, 왕국의 대의라든지 그런 건 솔직히 안중에도 없단다. 그저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 난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탐욕을 따라 살아왔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그건 변하지 않더구나."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윽!"

나타샤가 허락도 없이 하리엘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뜯어가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흐응. 향기로워라. 이렇게 얼마 되지도 않는 머리카락에서도 네 순수한 향기가 진하게 맡아지는구나."

머리카락 향기를 맡고 있는 나타샤의 광기 어린 행동에 하리엘은 소름이 돋았다.

"무슨 짓을 꾸미시려는 겁니까? 장난은 여기까지 하십시오."

"음. 조금 음흉한 짓을 해보려고.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난 탐욕을 따라 사는 여자란다. 그리고 지금 내가 몸이 뜨거워질 정도로 원하는 게 하나 있지."

"······?"

나타샤는 하리엘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건 바로 너를 애절하게 사모하고 있는 아슬란이란다."

"······에?"

순간 당황하여 하리엘은 말이 헛나왔다.

"아, 아슬란 님을요? 하지만 그분께서는 저를 사모하지 않는······."

"호호.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아슬란이 슬퍼하겠구나. 네게 마음을 고백한 그날 이후부터 그는 단 한 번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

"참으로 놀라운 정신력이지. 사내가, 그것도 왕국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작자가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순진한 너도 짐작할 순 있겠지?"

"그, 그게 저 때문이라고요?"

"그래. 지금도 아슬란이 여인을 가까이하더냐? 혼인은 했고?"

"······."

나타샤의 말에 하리엘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이상한 일이긴 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인물이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그는 혼인도 하지 않고 가족도 꾸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정말로-

'나 때문에?'

그 모습을 나타샤가 놓치지 않았다.

"나는 말이다, 하리엘. 그런 아슬란의 올곧은 마음을, 그가 지키고자 하는 그 순정을 갖고 싶다."

"······네?"

"내가 탐욕을 부리고 있는 건 아슬란이 가진 바로 그 마음이다. 그것을 철저히 부숴 버리고 짓밟으며 그가 내 아름다움에 푹 잠겨 버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게 무슨······."

"그렇게 하기 위해서 네 머리카락이 조금 필요했다. 이 못난 스승을 용서해라."

위협을 감지한 하리엘은 허리춤에 얼른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검이······."

허리춤에 항상 매달려 있던 두 단검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녹슬었구나, 하리엘. 그래도 한때 교단의 검이었던 아이가 이리도 무방비여서야. 아니면 나를 너무 믿었느냐? 넌 그게 문제다. 마음이 순수해서 사람을 너무 잘 믿어."

하리엘의 두 단검은 저 천장 위에서 두둥실 떠다녔다.

나타샤가 손가락을 튕기자 두 단검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도, 돌려주십시오!"

"싫은데?"

"······!"

하리엘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손바닥 안으로 신성한 힘이 모여들더니, 곧 황금빛을 내뿜는 검이 만들어졌다.

나타샤는 흥미롭다는 듯 그것을 살펴보았다.

"신성력으로 만든 검이라- 이건 귀하구나."

"어서 돌려주십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후후. 이 스승 앞에서 제자가 재롱을 떨어 보려는 것이냐? 어디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볼까?"

하리엘은 입술을 깨물며 나타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나타샤가 펼친 붉은 방어막에 부딪혀 부러지고 말았다.

"이, 이렇게나 쉽게······!"

"우리 귀여운 하리엘. 미안하지만,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가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란다."

그녀가 한번 더 손을 튕기자 바닥 아래에서 올라오는 붉은 사슬들이 하리엘의 양팔을 잡아당기며 묶어 버리고 두 다리마저 칭칭 휘감았다.

나타샤는 허공에 흩어지는 신성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빛의 마법이라는 건 참 신기하지 않으냐? 그 원천은 라할로부터 온다는데, 정작 라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란 말이지. 그런데도 빛의 마법은 여전히 작동을 한다라- 그렇다는 건 라할이 빛의 마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빛의 마법이 라할을 만든 것일까?"

"얼른 풀어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지금은 풀어 줄 수 없단다. 아! 물론 너와 아슬란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야. 그냥 내 지독한 욕망을 풀고 싶을 뿐이랄까? 호호. 그러니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여기 가만히 갇혀 있거라."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읍읍!"

나타샤는 하리엘의 입을 봉인한 뒤 머리카락을 가지고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갔다.

"조금만 기다려라, 아슬란. 너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주러 갈 테니까."

깔깔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 뒤로, 두 뿔이 달린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 * *

마법 축제에서는 정말 볼거리가 많았다.

신비한 마법 축제라는 것이 걸맞게 모니터에서만 봤던 것들이 실제로 펼쳐지니, 눈이 즐거웠다.

"이건 우리 마법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라파엘은 나와 함께 돌아다니며 여러 마법 도구를 찾아냈다.

모두 왕국 마법 연구에 도움이 되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흠. 모두 구입하거라. 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돈을 아끼지 않아도 된다."

"네!"

라파엘은 만세를 외치며 이것저것 왕국에 필요한 것들을 사들였다.

저것으로 조금 더 우리 마법 병단이 강해지고, 왕국에 쓸모 있는 것들이 생겨난다면 나도 돈이 아깝지 않았다.

"아이고 쌉니다, 싸요. 제가 특별히 개발한 것들을 한번 보고 가십시오~!"

잡화상처럼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딱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 없어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페드리드]

어떤 이름 하나에 발걸음을 멈췄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힘없이 바닥에 앉아 있는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어떤 노인이었다.

'은둔의 마법사, 페드리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겉모습으로 보면 형편없어 보이지만, 플레이어에게 쓸모 있는 아이템을 판매하는 캐릭터!

난 노인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인기척을 냈는데도 노인은 여전히 고개만 숙여댔다.

"노인장."

"······."

혹시 죽었나?

"이보시오, 노인장!"

그러자 내 뒤에 있던 기사가 호통치듯 그를 불렀다.

페드리드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손님이 온 것도 모르고."

아무래도 잠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페드리드가 내놓은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가 내놓은 물품은 총 5개.

그중 4개는 아무짝 쓸모도 없는 거였고, 나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룬의 원석]

룬의 원석?

아이템에 이식할 수 있는 그 룬의 원석인 건가?

"이걸 사고 싶은데. 얼마인가?"

노인은 끌끌 웃으며 대답했다.

"2억 골드입니다."

······죽일까?

말도 안 되는 금액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2억 골드라면 우리 왕국에서 1년 동안 거두는 세금의 절반이나 되는 금액이었다.

"양심 없는 가격이군."

그런 내 살기를 느낀 것인지 노인은 다시 말했다.

"그 원석은 룬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결코 사용할 수가 없지요. 심지어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조차 그 영험한 힘을 다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게 팔지 않겠다는 건가?"

"2억 골드를 주시면 팔겠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다 생각되신다면 그 원석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럼 싸게 넘기겠습니다."

그러자 라파엘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룬의 힘이라고요? 정말 여기에 룬의 힘이 깃들어 있어요?"

"허허. 속고만 살았나. 이 늙은이가 그런 걸로 거짓을 고하겠소?"

"그, 그럼 제가 한번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부터 해볼게요."

라파엘은 룬의 원석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그 안에다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원석이 붉게 타오르며 그녀의 힘을 강하게 거부했다.

"헉! 지, 진짜였잖아?"

라파엘이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룬은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그 사용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죠. 저 같은 마법사는 이 안에 있는 힘을 흡수하려고 했다가는 지금처럼 거부 반응이 일어나고요. 그래서 지금도 연구가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라파엘 정도나 되는 마법사도 룬의 원석을 흡수하지 못한다는 건가?

"전설에 의하면 선택받은 사람만이 이 힘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해요. 물론, 그게 진짜 전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가?

나는 전혀 몰랐던 이야기다.

룬의 원석은 플레이어들이 항상 파밍을 하면 흡수를 해왔던 아이템이기에 당연히 라파엘과 같은 캐릭터도 원석을 흡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룬의 원석은 개발자가 플레이어를 위해 만들어 둔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오직 플레이어만이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해둔 아이템.

문제는,

'설마 나도 거부하는 건 아니겠지?'

이 게임이 나를 플레이어로 인식하지 않고 아슬란으로 인식을 한다면 이 원석도 나를 거부한다는 뜻이 아닌가?

"흠."

나는 라파엘에게서 원석을 가져와 손에 쥐어 보았다.

[룬의 원석]

-흡수하기 전까진 어떤 힘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험을 해봐야 하는 것인가.

이 게임이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말이다.

나는 세게 원석을 쥐고 그 안에 있는 힘을 흡수하려고 했다.

그러자,

화르륵-!

원석이 강하게 저항하며 타올랐다.

"어맛! 거부 반응이에요! 얼른 원석을 내려놓으세요!"

룬의 원석은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즉, 이 게임은 나를 플레이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이 게임의 NPC 중 하나인 아슬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얼른 원석을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 강한 열기에 이미 피부를 뚫고 원석이 손바닥에 달라붙고 말았다.

'미쳐 버리겠네.'

불에 타는 고통이 제일 고통스럽다고 했던가.

그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손에서부터 번져 나가는 불길이 내 온몸을 태워 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병적인 허세가 작은 신음조차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기사단장님! 얼른 놓으세요! 아니면 그대로 부숴 버리세요!"

"룬의 원석은 인간의 힘으로 부술 수 없소. 그 어떤 것으로도 파괴가 불가능하지. 그렇기에 신비한 원석으로 불리는 것이오."

노인의 친절한 설명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화마는 내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남김없이 태워 버리고자 아가리를 벌렸다.

그 순간,

화아아악-!!

신성한 보호가 발동되어 그 맹렬한 불길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었다.

문제는 이 불길이 꺼지지 않으면 신성한 보호가 곧 꺼지면서 내 몸도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이렇게 허무하게?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탐욕은 항상 불길처럼 일어나 인간을 태워 버리기 마련이오. 안타깝지만, 당신의 명운도 거기까지인 듯하군."

바로 그때였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

"감히 누가 내 명운을 결정한다는 것이냐? 이깟 불길이 정녕 이 아슬란을 집어삼킬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이 뜨거운 불길보다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은 나의 허세였다.

"나의 죽음은 하늘도 감히 결정할 수 없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날 죽일 수 없다. 하물며 이깟 돌덩이 따위가 그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손에 들린 원석을 꽉 쥐었다.

노인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만두시오.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을 부술 수······."

하지만 그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콰콱-! 콰직-!

"!?"

내 손에 달라 붙어 있던 원석이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더니, 머지않아 부서지고 바스러지며 그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

그러자 내 몸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던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더니, 곧 내 안으로 파고들어 흡수되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넋을 놓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에게 말했다.

"가격 흥정은 이 정도면 되겠는가?"

98화

0.01초 소드마스터 98화

[불의 룬]

-마력 수치에 따라 불을 일으킬 수 있게 됩니다.

-여러 스킬과 혼합이 가능합니다.

불의 룬.

게임에서도 룬이라는 것은 플레이어 몸에 이식되어 사용된다.

설명에 있는 것처럼 다른 스킬에 혼합이 가능하고, 내 무기에도 룬을 입혀 능력 사용이 무궁무진한데,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건 마력을 써야 한다는 거지."

그건 바로 마력의 유무였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인간은 마력을 조금씩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이 수치로 나올 정도인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아슬란은 사실상 마력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다른 룬은 마력이 필요 없는 걸로 아는데."

이렇게 원소를 다루는 룬은 마력이 필수였다.

"그럼 나한테는 쓸모없는 능력 아닌가?"

나는 내 몸에 빨려 들어간 불의 룬을 발동시켜 보았다.

그러자 몸 안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입에서는 탄 맛이 나고 손가락 끝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파앗-!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는 감촉들과는 달리 일어나는 불의 크기는 매우 작았다.

그냥 손가락 끝에 불꽃이 올라와 일렁이는 것이 전부.

그마저도 얼마 안 가서 픽- 꺼져버리고 말았다.

"무슨 성냥이냐?"

성냥도 이거보단 오래 가겠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빨간 불길이 아니라 성 속성 영향을 받아 황금빛 불꽃이라는 거 정도?

"담배 같은 거 피울 때 편하긴 하겠네."

물론 내가 담배를 피지 않아서 그마저도 쓸모가 없어 보이긴 한다.

"잠깐. 근데 다른 스킬과 혼합이 가능하다고 했지?"

그렇다는 건 찰나의 괴력과도 같이 쓸 수가 있다는 뜻인가?

지금 내가 다양한 스킬을 찰나의 괴력가 섞어 쓰고 있는 것처럼 이것도 가능할지 않을까?

"오. 그럼 당장 여기서 해봐야······. 아니지."

그러나 이곳은 나의 왕국이 아니다.

마음대로 집무실을 부숴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불의 룬이 찰나의 괴력에 영향을 받아 그 크기가 무지막지하게 커져서 다른 곳에 피해를 주면?

그랬다간 외교 문제로 퍼지게 된다.

"그래도 궁금하긴 한데."

어디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한번 써봐야 하나.

그리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대기사단장님. 하리엘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하리엘의 방문에 잠잠하던 허세가 치솟으면서 나는 손가락 끝에 일렁이던 불꽃을 끄고 흐트러져 있던 자세를 다 잡았다.

그리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라."

"예."

하리엘은 문을 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딱딱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을 텐데, 뭔가 장난기 많은 소녀가 된 듯한 발걸음이었다.

그냥 기분 탓인가?

"무슨 일이지?"

"음. 꼭 일이 있어야만 와야 하는 건가요?"

"······?"

얘가 오늘 벼락이라도 맞았나.

왜 이래?

"그냥 대기사단장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생긴 것도, 목소리도, 말투도, 하리엘과 다를 바 없었다.

겉모습은 누가 봐도 하리엘이었으나, 내 눈은 일반적인 눈과 다르지 않던가.

"대기사단장님은 싫으신가요?"

"······."

이곳 캐릭터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머리 위에 떠 있는 정보.

그곳에서는,

[나타샤]

뭔가를 잘못 먹어도 한참 잘못 먹은 거 같은 이 여자가 하리엘이 아닌, 다른 캐릭터라는 것을 내게 알려 주었다.

"우리도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되지 않았나요? 대기사단장님도 제가 먼저 해주기를 기다렸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녀는 은근슬쩍 내가 가까이 다가와 마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걸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지?

"그러니까 이제 서로 솔직하게······."

그런 고민도 잠시.

"장난이 과하군."

그녀의 속삭임에 이성에게 느끼는 흥분감보다는, 강렬한 허세가 타올랐다.

"······네?"

"이따위 장난이 통할 거라 생각했는가? 나타샤."

내 말에 하리엘, 아니. 나타샤는 몸을 움찔거리며 애써 모른 척을 했다.

"호호. 무, 무슨 말씀을-."

"다른 이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이런 장난을 하면서까지 내가 스승으로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잘못 보신 거예요. 제가 어떻게 나타샤라는 거죠?"

"끝까지 밝히기 싫다면 이 검으로 그 가증스러운 몸뚱이를 갈라서 확인시켜 줄까?"

하리엘의 청순한 얼굴이 악마처럼 비틀어졌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리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옷을 그냥 걸치는 수준으로만 입고 나온 나타샤가 그곳에 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나타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좋은 눈썰미를 가졌어도 내 마법을 파악할 순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보아하니 변환 마법 물약을 마신 것 같은데. 하리엘은 어디에 있지?"

변환 마법 물약.

대마법사급만이 만들 수 있다는 신비스러운 물약.

변환을 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물약에 섞어서 마시면 된다.

일반 변신 마법과는 다르게 구분할 수 없으며, 상대의 진의를 꿰뚫는 스킬이 있어도 그 마법을 절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지속 시간은 하루.

다음날 또 변신을 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양의 포션을 마셔줘야만 한다.

이 게임을 플레이했던 고인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물약이었다.

"넌······. 보면 볼수록 놀랍군. 이 물약에 대한 정체도 알고 있다니."

물론, 이 게임 내에서는 물약에 대한 정체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밝혀지지 않았기에 다들 모르고 당하는 경우가 많다.

"신의 눈을 속일 순 있어도, 감히 이 아슬란의 눈을 속일 순 없다. 나타샤."

내 대답에 나타샤가 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허세에 절여진 내 대답이 그토록 웃겼던 것일까.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그래, 늘 그런 자신감이 나를 흥분케 만들었지. 지금도 그렇고."

"넌 아직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하리엘은 어디에 있지?"

"흐응~ 백마 탄 왕자님처럼 가서 하리엘을 구해 주고 싶은 것이냐?"

"말장난은 거기까지 해라. 여기서 하리엘을 내놓고 끝낸다면 옛정을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나타샤는 다시 한번 깔깔 웃으며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거 감격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차라리 여기 침소에 확 누워 버릴까? 이곳은 내가 너를 위해 별도로 준비한 곳이거든. 어때? 지금이라도 그 계집은 잊고 나와 함께 진홍빛 시간을 보내 보는 것이? 나와 손을 잡는다면 샤나 왕국은 앞으로 너를 따르게 될 것이다, 아슬란."

나타샤의 목소리에 마력이 흘러넘쳤다.

상대를 매혹하고,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 그녀의 마법이다.

내가 다른 캐릭터였다면 저 목소리에 넘어가 타는 갈증을 풀고자 그녀에게 매달렸겠지만-.

"마지막 경고다."

이 대륙을 통틀어 최고의 정신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병적인 허세를 뚫을 순 없었다.

"이곳에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하리엘을 데려오너라."

나를 유혹하던 나타샤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놈의 하리엘, 하리엘! 넌 그렇게 그 계집이 좋은 것이냐? 넌 대체 왜 내 유혹에 덤덤할 수 있는 거지? 이 대륙에 있는 그 어떤 남자도, 여자도 내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그런데 너는······!"

난 그런 나탸샤에게 얼굴을 맞대며 그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방금 전까지 나를 도발하고자 했던 그녀는 몸을 들썩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그런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나의 긍지는 그 어떤 것으로도 깨부술 수 없다. 그 어떤 사악한 마법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신념을 꺾을 순 없다."

"······."

"그것이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자와 나의 차이점이다."

병신 같은 허세를 부렸다.

"······."

나타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곧 체념하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품을 방법은, 너의 그 고고한 의지를 짓밟을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이냐?"

"건방지구나, 나타샤."

"뭐?"

"저 하늘의 신들조차 꺾지 못하는 것을 네가 어떻게 꺾는다는 것이냐?"

"······!"

"그만 돌아가라. 하리엘을 무사히 놓아준다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

나타샤는 결국 포기하듯 뒤돌아섰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면서 그녀는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아직 난 포기하지 않았다, 아슬란."

"······."

그 말이 굉장히 매혹적이면서도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 * *

"후우-"

처소로 돌아온 나타샤는 오랜만에 파이프를 물고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 연기마저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은 그녀의 마력 때문이리라.

"하늘의 신들조차 꺾지 못해?"

언뜻 들으면 여느 남정네와 마찬가지로 잔뜩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슬란이라면······."

아슬란. 그 남자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그 무게부터가 다르다.

그러므로 저것이 허세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정말로 신들과 마주해 본 적이 있는 듯한 말투였지 않은가.

특히 그 신들조차 아래로 보는 어투에서 나타샤는 그것이 단순한 허세가 아님을 느꼈다.

"보면 볼수록 궁금하구나."

담배 연기는 더욱 자욱해져만 갔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흐읍-!"

그제서야 속박에서 벗어난 하리엘이 표독스럽게 나타샤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사람을 이렇게 묶어 놓다니!"

"그래. 미안해. 알겠으니까, 그만 돌아가."

"지금 이런 짓을 벌여 놓고 고작 그런 말로······!"

"그럼 어떡해? 돈이라도 줄까? 아니면 대가리라도 박아?"

"······."

"아, 맞다. 이것도 가져가야지."

그녀는 선심 쓰듯 무기도 돌려주었다.

하리엘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제 머리카락으로는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음, 글쎄. 네 모습으로 변장을 했었는데, 상대한테 전혀 안 먹히더라고."

"네에!?"

"아~ 근데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리 뛰어난 눈을 가지고 있어도 이 물약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심지어 이 물약의 정체는 또 어떻게 안 거야?"

나타샤는 생각할수록 궁금증만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그렇게 그 남자에게 자존심이 짓밟혔는데도 더욱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갈망을 느끼고 있었다.

하리엘은 나타샤가 혼잣말로 뭐라고 떠들어 대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눈? 물약?"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장난친 건 미안해. 사과할게. 앞으로 그럴 일 없을 거야. 약속."

뻔뻔한 나타샤의 행동에 하리엘은 할 말을 잃었다.

아카데미 때에도 저랬지.

저 여자는 항상 자기 마음대로였다.

"그래도 사과의 보상은 해줘야겠지? 이거 받아."

나타샤는 하리엘에게 병 하나를 던져 주었다.

"이게 뭡니까?"

"음~ 쉽게 말하자면 이성을 더욱 쉽게 매혹시킬 수 있는 향수라고나 할까? 무려 내 마력이 들어간 향수이니, 그 효과는 아주 확실해."

나타샤는 보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하리엘의 눈빛에 반짝이는 것을 말이다.

"너도 역시 여자긴 여자구나. 앙큼한 년. 아주 좋아라 하네."

"무, 무슨 마, 말씀입니까. 누, 누가 좋아했다고······."

"그래도 함부로 뿌려대진 마. 괜히 이상한 남자들만 꼬일라. 이제 그만 나가. 나도 좀 쉬자."

"······."

얼떨결에 하리엘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애지중지하며 향수를 챙기는 모습이 귀엽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심이 폭발했다.

저 녀석이 저 향수를 누굴 위해 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년은 되고 난 안 된다 이거지?"

빠직-!

물고 있던 파이프가 부러졌다.

끓어 오르는 화를 진정시키며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바로 그때 스멀스멀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의 욕망을 이대로 포기할 생각입니까?]

부드러운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

나타샤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그 음성에 반응했다.

"너 뭐야?"

[저는 당신의 소원을 이뤄주고자 있는 존재. 당신의 영원한 노예입니다.]

"저번부터 누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더니. 그게 너였구나?"

[하지만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 당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당신은 절 계속 놔두셨던 것이고요.]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귀찮았을 뿐이야. 그런데 네가 날 위해 뭘 해줄 수 있는데?"

그러자 그 목소리가 더욱 강렬하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모든 것.]

99화

0.01초 소드마스터 99화

샤나 왕국에는 총 3명의 대마법사가 있었다.

나타샤, 자하트, 카르티엘.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들과 이 왕국을 이끄는 사람은 바로 나타샤.

그녀의 뛰어난 마법 능력은 대륙에서도 인정하는 바이며, 나타샤의 마법 실력은 그 전설적인 엘프의 여왕, 엘티히와 맞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나타샤 님께서는 아슬란을 너무 아끼시는 것 같군."

"놈의 능력을 너무 높게 보는 것도 문제긴 해."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왕궁 안에서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자하트와 카르티엘이었다.

"이번 연회가 끝나고 나서 전부 아슬란 이야기로 시끄럽습니다."

"벌써부터 그와 접촉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자들이 보이더군요."

그것이 문제였다.

이번 마법 축제에서 당연히 주목을 받아야 하는 건 샤나 왕국이었다.

이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마법에 빠져 모두가 샤나 왕국과 나타샤 앞에 고개를 조아리길 바랐다.

하지만 정작 모든 관심은 아슬란이 가지고 가고 말았다.

항상 가십 거리가 넘쳐나는 저 고위층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아슬란 이름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대외적으로 샤나 왕국의 영향력을 늘리려 했던 우리의 계획이 어그러지게 된다."

현재 대륙 곳곳에서 악마들이 출몰하며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마법의 힘은 그 어떤 왕국들보다 강하나, 백병전을 해야 하는 보병의 힘이 매우 약하기 때문에 타 왕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래서 다른 왕국과의 교류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자 했던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마법 축제를 열어 환상적인 마법을 이들에게 선보이며 그들로 하여금 저절로 손을 내밀 수 있게 만들려 했던 것인데······.

"혹시 이것도 아슬란의 계획이 아닐까요?"

"뭐라?"

"나타샤 님이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매우 똑똑한 자라고. 일부러 제일 마지막에 연회에 등장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카르만과의 불꽃 튀는 경쟁으로 이들의 머리에 확실히 각인을 시켰습니다. 아슬란 자신은 결코 카르만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샤나 왕국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의도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갈등으로 아슬란은 확실하게 편을 갈라놓았다.

카르만과 아슬란은 영원히 친해질 수가 없는 사이.

그렇다면 다른 왕국들은 둘 중 누구를 선택해야만 이득을 볼 수 있는지 계산하고 있을 터.

그런 과정 속에서 아슬란은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과시하듯 연회장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게 전부 우리 샤나 왕국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법 축제는 사실상 우리 왕국을 드높이기 위한 축제. 그것을 망쳐 버리고 자신에게 모든 관심을 돌려놓은 건 아슬란이지요."

부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자하트와 카르티엘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슬란 그자가 그 정도로 치밀한 인간이었단 말인가.

"일단 자존심이 상하지만, 다른 왕국에 은밀히 연락을 넣어 보거라.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아야만 외곽 수비가 수월하게 가능해진다."

"알겠습니다."

그리 뜻을 정하고 이제 그만 왕궁을 나서려는 때였다.

"······?"

앞서 가던 자하트가 발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방금 무언가······."

카르티엘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똑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나타샤가 있는 곳이었다.

"자하트. 너도 나와 같은 것을 느꼈나?"

"그래. 사악하고도 익숙한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설마 나타샤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확실하다. 얼른 가보지."

그들은 빠르게 움직여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이건······?"

그들이 도착한 곳은 왕궁 안에 있는 나타샤의 침소.

그곳에서 응축된 마력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미 그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채였다.

"나타샤 님!"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거라 확신한 자하트가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발을 떼기도 전에,

콰아아아-!!

침소 위로 거대한 진홍빛 마력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뭐, 뭐야. 저건!"

응축되어 있던 마력이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높게 솟아오르며 그곳에서 진홍빛 마력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헉!"

"윽!"

마력에 노출된 마법사들은 제대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며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의 눈이 풀리고 입으로는 헛소리를 내뱉었다.

"나타샤 님······. 으헤헤······."

"저는 당신의······. 노예입니다. 크흐흐."

자하트와 카르티엘은 이 심상치 않은 마력을 제어하고자 자신들의 마력을 풀었다.

"이, 이건 분명히 나타샤 님의 마법일세."

"그래. 매혹 마법이야. 그런데 이토록 강력하다니."

그들은 부하들처럼 매혹에 걸리지 않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들이 풀어 놓은 마력도 붉게 변하며 그들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아, 안 돼."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던 자하트와 카르티엘도 부하들과 똑같이 눈이 풀리면서 실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괜히 시간만 버렸네."

불의 룬을 사용해 보고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나타샤의 방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지금이라도 어디 넓은 공터를 찾아봐야 하나.

그러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늦었는데.

"대기사단장님! 아슬란 님!!"

그때 소란스러운 하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설마 또 나타샤가 장난질을 하는 건가?

하지만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그 하리엘이 맞았다.

"괜찮으신가요?"

"그래."

"휴. 다행이다."

"나타샤가 널 풀어줬나 보군."

"아, 알고 계셨어요?"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를 단단히 해두었다."

하리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쭈뼛쭈뼛 내 눈치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저 혹시······. 다른 일은 없었는지······."

"다른 일?"

"네. 나타샤가 제 몸을 가지고 대기사단장님께 이상한 짓을 한 건······."

"이상한 짓?"

나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상한 짓이라면 정확히 어떤 것?"

"그, 그거 이, 있지 않습니까. 남녀 사이에 그······."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구나. 정확히 말을 해 보거라."

"아이참! 다 아시면서!"

나는 곧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뭘 우려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만, 별일은 없었다. 왜? 무슨 일이 있기를 바란 것이더냐?"

그러자 하리엘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 그럴 리가요! 괘, 괜찮으신 걸 확인했으니,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경직된 모습으로 서둘러 나가 버렸다.

하여튼 놀리는 맛이 있는 놈이라니깐.

그러다 문득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

지금까지 아슬란의 몸을 하고 있으면서 이토록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분명 타인 앞이라 병적인 허세가 자동으로 발동되면서 절대 감정적인 표현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하리엘 앞에서는 쉽게 웃고 있는 거지?

'이게 설마 내가 모르는 아슬란의 특성이 또 있는 건가?'

그것도 하리엘에게만 적용이 되는?

아니지. 이건 특성으로 치부할 게 아니라······.

"진짜 아슬란의 마음이라면?"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이 하리엘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그런 일련의 생각이 스쳐 지나갈 찰나.

"아, 아슬란 님!"

밖에서 또 다시 하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매우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나를 밖으로 불러내고자 계속 소리쳐댔다.

"지, 지금 밖에!"

무슨 일이지?

하리엘이 저렇게 당황할 정도라면 필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일 터.

아니나 다를까.

"······?"

깜깜한 밤인데도 불구하고 바깥이 온통 붉게 변해 있었고, 하늘에서 내리는 붉은 빗방울에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으윽-!"

하리엘은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 빗방울에서 나오는 붉은 마력에 잠식되어 눈동자마저 붉게 변하며 천천히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 왕궁에 있는 모든 이가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이 붉은 마력을 쏟아내는 원천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친."

나는 얼른 숙소 문을 닫아 버렸다.

난 이게 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이건 바로 나타샤의 붉은 마력 폭주.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사건 중 하나로, 보통 이 이벤트는 스토리 중후반쯤에 나온다.

거기다 전조 현상이 있기 때문에 마력 폭주가 일어나는 시기를 대충 추측할 수 있었는데, 이건 그 어떠한 전조도 없이 갑자기 벌어졌다.

"나타샤의 매혹 마법은 카르만도 못 견디는 걸로 알고 있는데."

불굴이라는 뛰어난 정신력을 가진 카르만 조차도 나타샤의 마력 폭주를 정신적으로 이겨내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직 이 마법을 풀 수 있는 건 엘티히 정도 되는 마법사나, 주인공인 알렉산더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 일단 여기를 벗어난 다음에 생각을 해봐야······."

아직 지붕이 날 지키고 있어 줘서 괜찮지만, 저 지붕도 얼마 가지 않아 뚫리게 될 것이다. 그전에 이곳을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스르르륵-.

마치 커튼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순간 내가 있던 방 안 풍경이 달라졌다.

온통 빨갛고, 정신 나간 사람들이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음산한 음성.

"아슬란."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나타샤가 있었다.

붉은 날개를 넓게 펼친 채, 두둥실 허공 위에 떠있던 그녀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건 모두 네가 초래한 일이다."

"······."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난 포기하지 않는다고."

이런 미친년.

내가 이래서 이년을 되도록 보고 싶지 않았던 건데.

"크으읍-"

누군가의 앓는 소리.

그것은 다름 아닌 카르만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칼을 지탱한 채 몸을 부르르 떨며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 뒤로는 알렉산더가 멍한 눈동자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 우리 게임의 주인공!

빨리 네 능력으로 이 마법을 좀 풀어 봐라.

그러나 알렉산더도 맛이 가도 한참 간 것 같았다.

"으헤헤. 나, 나타샤 님."

에라이 쓸모없는 새끼.

그리고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아론이었다.

"으으윽-!"

아론도 카르만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매혹을 버텨내고자 노력하는 것 같았다.

급기야 그는 허리춤에 있던 수통을 꺼냈다.

"아, 아슬란 님이 주신 이 신성한 힘으로 부정한 기운을 씻어 내리라!"

그러고는 수통 안에 담긴 성수를 벌컥 들이켠 뒤, 나머지 있는 것을 제 몸에 뿌려댔다.

"······."

저놈은 컨셉이 아니라 정말 저 성수가 만능이라고 믿는 거였구나.

그딴 게 통하는 거였으면 내가 진작 뿌렸지.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푸하-!"

성수를 뒤집어쓴 아론이 붉은 마력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닌가?

"역시 아슬란 님의 신성력은 위대하다!"

아론은 그 힘을 간증하듯 큰 목소리로 소리쳐댔다.

그것이 거슬렸던 것인지, 나타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붉은 마력의 해일이 아론을 덮쳤다.

"꾸웩!"

나타샤는 내게 말했다.

"이제 여기 있는 모두와 함께 너도 내 노예가 되는 것이다, 아슬란. 그러니 내게 굴복해라."

문제는 그 붉은 마력의 해일이 내게도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그것을 맞고 내 정신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와는 많이 다를게다. 이번에는 아무리 너라도 버텨내지 못할걸?"

그 말대로다.

나타샤의 마력이 내 정신을 산산조각내다 못 해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 끝 없는 갈망과 욕망이 점점 차오르면서 나는 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노예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소롭구나."

그 끄트머리에 남은 허세가 밀려오는 붉은 파도를 막아내며 꿈틀거렸다.

"이런 같잖은 유혹에 이 아슬란이 넘어갈 거라 생각했느냐?"

나타샤는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붉은 해일을 내게 쏘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듯, 나는 충만하게 허세를 부렸다.

"이런 건 내게 통하지 않는다. 나타샤."

그러자 나타샤의 얼굴이 사악하게 일그러지고, 그 뒤에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역시 선인장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래. 너는 끝까지 넘어오지 않는다는 거지? 그렇다면······."

나타샤는 곧 자신의 뒤로 붉은 창들을 만들어냈다.

"차라리 죽여 주겠어.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널 가지지 못하게 말이야."

저, 저 미친년이 기어코······!

과연 내가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까.

지금 허세로 버텨내고 있긴 하지만, 물리적 공격이 들어오면 그땐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먼저 공격을 날리고 싶어도 나 역시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깐. 분명 아론은-.'

그때 성수로 자신을 뒤덮고 있던 붉은 마력을 씻겨낸 아론이 떠올랐다.

그렇다는 건 내 안에 있는 성 속성 능력이 나타샤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일까?

"죽어라, 아슬란! 죽어서라도 내 곁에 남거라."

나타샤가 만들어낸 수백 개의 창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내 성 속성 능력이 저 붉은 마력에 효과가 있는 것이라면-

[불의 룬]

나는 거기서 마지막 도박을 걸었다.

* * *

"크으으-"

온몸의 신경이 다 끊어지고 간신히 붙잡고 있는 정신 줄을 이대로 놓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대로 놓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편해지리라.

그렇게 카르만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서서히 넘어가고 있던 중.

'······아슬란?'

그는 나타샤 앞에 당당히 서 있는 아슬란을 볼 수 있었다.

'넌······.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 거지?'

이 미친 듯한 타는 갈증.

몸을 끓게 하는 욕망.

이 모든 것이 나타샤가 만들어낸 붉은 마법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항상 그랬듯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이런 유혹 마법은 저자에게 정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인가?

대체 어떻게?

"죽어라!"

그것을 깨달은 나타샤도 질려 버렸는지, 이대로 아슬란을 죽이려 들었다.

바로 그 순간.

화아아악-!!

아슬란 몸에서 피어오르는 어마어마한 신성한 빛이 불길처럼 퍼져 나왔다.

그 불길은 사방에 있던 사람들을 뒤덮었고, 마침내 카르만에게까지 닿았다.

"!?"

하지만 일반 불길과는 달랐다.

몸에 달라붙어도 이 불은 사람을 태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붙어 있는 붉은 마력을 남김없이 태워 버려 이 뜨거운 욕망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건 대체······."

그로 인해 카르만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도 붉은 마력에서 해방되어 하나둘 정 신을 차렸다.

그리고 보았다.

이 거대하고 신성한 불의 폭풍을 일으키면서 제 몸도 밝게 빛내고 있는 아슬란을 말이다.

"······라할?"

그 말이 카르만의 입에서 절로 튀어 나왔다.

라할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만약 보게 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꺄아아아악-!!"

신성한 불길은 마침내 그 앞에 있던 나타샤까지 불태우며,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붉은 마력이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털썩-!

결국 붉은 날개를 잃고, 그 아름다운 자태까지 잃은 나타샤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아슬란은,

스르릉-!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들며 천천히 나타샤를 향해 걸어갔다.

"아, 아슬란."

나타샤는 힘을 다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런 부름에 답하지 않으며 아슬란은 검 끝을 세우고 그녀에게 점점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죽음을 직감한 나타샤가 애원하듯 소리쳤다.

"아슬란. 자, 잠깐. 안 돼!"

그리고,

푸욱-!

아슬란의 검은 주저 없이 상대의 몸을 관통해 버렸다.

100화

0.01초 소드마스터 100화

푸욱-!

상대방의 몸을 찌르고 등 뒤를 관통하는 감촉이 손잡이를 따라 내 몸 전체에 퍼져 나갔다.

"큭-!"

나는 짧게 신음을 내뱉으며 서서히 드러나는 그 형상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검디 검은 악마의 눈동자에 나의 허세가 불 같이 타올랐다.

"어둠 속에 숨어 있으면 이 눈을 피할 줄 알았느냐? 건방지구나."

"과연······.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가?"

물론, 처음부터 알진 못했다.

나타샤가 폭주하기 시작하고 그 뒤에 어렴풋이 이놈의 정보가 보였을 뿐이다.

[데이오르]

욕망의 악마, 데이오르.

그림자에 숨어 상대방을 조종하고, 그 욕망을 폭발시켜 파멸에 이르게 하는 악마였다.

본래 스토리를 따르자면 나타샤는 악마에 의해 타락하는 것이 아닌, 본인 스스로가 타락하여 악마와 손을 잡고 자신의 마력을 폭주시킨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악마에 의해 폭주를 한 듯싶었다.

만약 나타샤 뒤에 흐릿하게 나와 있던 정보창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이 칼은 저 악마의 심장이 아니라 나타샤의 목을 찔렀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이 칼로 날 죽일 순 없다. 나는 욕망의 잔재이며, 탐욕과 질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힘을 모아 살 수 있다. 네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인간의 탐욕이 가득한 이곳에서 날 죽일 순 없다는 것이다."

데이오르는 욕망을 먹고 사는 존재.

강한 욕망이 있는 곳에서 그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이들은 모두 욕망의 노예다. 대륙 최강이고 싶어 하며, 이 대륙에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하지. 난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욕망을 느낄 수가 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지? 너도 이들과 다를 바 없지 않나? 강자일수록 가지고 있는 욕망은 강한 법이니."

데이오르는 자신의 심장을 관통한 검을 붙잡았다.

"과연 너의 욕망은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지 한번 볼까? 상대의 욕망이 더럽고 기괴할수록 내 힘도 똑같이 강해지니까."

의기양양하게 데이오르는 기운을 퍼뜨려 내 안에 있는 욕망을 빨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못 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이게 뭐야?"

그의 당황한 목소리가 떨려 왔다.

"분명 네게도 저들처럼 일그러진 욕망이 있을 터인데, 왜 이리도······!"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바라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여인도, 강한 힘도, 이 대륙을 정복하고자 하는 야망도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하고 신성한 사명 하나만을 가지고 있을 뿐."

"······!"

"그것은 욕망이 아니다, 악마여. 이것은 그저-"

이 게임을 클리어해 무사히 살아나고자 하는 본능뿐!

"이건 말도 안 된다. 너 같은 위정자는, 이 대륙을 떨게 하는 강자는, 반드시 비틀린 욕망이 그 안에 있어야 한다!"

데이오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쳐댔다.

하지만 난 위정자도, 이 대륙을 떨게 하는 강자도 아니다.

어쩌다 보니 재수 없게 이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온 한 명의 플레이어일 뿐.

"넌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악마여."

"이, 이럴 수는······!"

데이오르의 몸에 박혀 있는 검에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얼른 이 몸을 먹어 치우고 싶다는 이 강렬한 욕망을 그가 느낀 것일까.

"그러니 이제 조용히 내가 걷고자 하는 길의 일부가 되어라."

"아, 안 돼! 안 돼!!"

놈은 발버둥을 치며 발악했지만, 아가리를 벌린 포식자는 순식간에 놈의 몸을 먹어 치우고 그 안에 있는 어둠의 힘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

거친 비명과 함께 데이오르의 몸이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가 퍼뜨린 욕망의 힘도 황금빛 폭죽을 터트리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소멸되었다.

"아, 아슬란."

내 옆에 주저앉아 있던 나타샤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내 칼끝이 그 목으로 향했다.

"이번 일은 경솔했구나, 나타샤."

"······."

"한 왕국을 이끄는 대마법사라는 것이 고작 악마의 꾐에 넘어가다니. 그러고도 네가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나는 들고 있던 칼을 거두고 검집에 집어넣었다.

"반성하거라. 나타샤. 네가 나의 옛 스승이기에 오늘은 그냥 넘어가겠다만, 또 이런 일이 있다면 그땐 가차 없이 네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난 나타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나타샤의 욕망에 이끌려 이곳까지 몰려왔다 내 덕분에 정신이 풀린 자들.

그들은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누구 하나 감히 내 앞길을 막는 자가 없었다.

혹여라도 내가 가는 길에 서 있다면 얼른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난 그들의 시선에 강한 허세와 심취를 느끼면서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리고 저 입구에 다다르는 순간.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욕망의 악마, 데이오르 처치.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 * *

"나타샤 님."

"괜찮으십니까?"

"아, 그래."

나타샤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슬란이 떠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악마조차도 찾을 수 없는 욕망이라."

"네?"

"아슬란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을 먹이 삼아 힘을 키웠던 그 악마는 아슬란에게서 어떠한 욕망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인간이라면, 심지어 아슬란 정도의 위치가 되는 인물이라면 당연히 그 안에 욕망이 가득 쌓여 있을 터.

하지만 악마는 아슬란 안에서 욕망을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무언가를 보았고, 그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슬란은 그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일컬었다.

사명.

그게 대체 무엇이기에 아슬란은 자신의 욕망을 깨끗하게 버릴 수 있었던 것일까.

"내 꾐에 넘어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 투철하고 단단한 정신력은 오직 사명 때문이었단 말인가.

처음에는 하리엘을 위한 마음 때문인 줄 알았더니.

"흐흥. 그랬단 말이지."

하리엘이나 다른 여인 때문에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은 게 아니었다는 건가?

더군다나 그 악마와 아슬란의 대화를 유추해 봤을 때, 그는 홀로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며 제 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 외로운 자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는 틈이 언제든 생겨날 수도 있다는 뜻인가?

"나타샤."

쿵-! 발소리를 내며 성난 음성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고 있는 건 바로 카르만이었다.

"이 일에 정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머나. 아까 못 보셨어요? 이건 저도 피해자랍니다. 악마가 비겁하게 제 몸 안으로 들어와 그런 일을 꾸민 걸 대체 어떻게 막으라는 거예요?"

"넌 대륙 최고의 대마법사이지 않나? 그런데 고작 그런 악마 하나를 막아내지 못했다고?"

"제가 아무리 뛰어난 대마법사라고 해도 악마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요. 제가 아슬란처럼 악마를 죽이고 다니는 사람도 아닌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슬란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악마를 제대로 상대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다.

"여기서 잘잘못을 따질 게 아니라, 아슬란에게 달려가서 고맙다고 고개부터 조아려야 하지 않을까요, 카르만 님?"

"뭐라?"

"하마터면 우리 모두 큰일을 당할 뻔했는데, 아슬란 덕분에 살았으니까요."

카르만은 입술을 짓씹으며 몸을 돌렸다.

쿵쿵대는 발소리에 그의 감정이 어떤지 드러났다.

'아슬란.'

카르만은 나타샤의 매혹 마법에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아슬란은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런 타격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그는 신성한 불길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마법을 전부 풀어 주었다.

'대체 그 불길은······.'

따뜻하고 신성했던 그 불길.

그리고 아슬란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광채.

그건 마치 라할의 현신을 보는 듯했다.

'어쩌면 정말로-'

카르만은 잠시 말도 안 되는 일을 떠올렸다.

정말로 어쩌면 아슬란은······.

* * *

'식겁했다.'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던 허세가 차갑게 식으며 내려갔다.

원래는 나타샤의 폭주를 알렉산더가 막아야 하는 건데, 그 멍청한 놈도 똑같이 헤벌쭉 매혹에 넘어가 버리는 바람에 내가 나서게 되었다.

'차라리 데이오르가 폭주시킨 게 다행일 수도.'

순수하게 나타샤가 스스로 마력을 폭주시킨 거라면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 이어졌을 것이다.

데이오르 정도로는 나타샤의 마력 폭주를 일으키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해야 할까.

"아슬란 님!"

"대기사단장님!"

얼마 안 있어 내 수하들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차갑게 식고 있던 허세가 다시 끓어 올랐다.

난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한심한 놈들."

"······."

"내 수하라는 것들의 정신력이 이렇게나 형편없어서야."

저 카르만도 나타샤의 매혹에 넘어가는 마당에 이들이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하긴 했다.

"그래도 저는 대기사단장님의 성수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아슬란 님의 위대한 신성력이 담긴 성수를 들이붓는다면 그 어떤 악마의 마법도 버틸 수······."

"아론."

나는 한창 들뜬 채로 떠들어 대고 있는 아론을 부르며 말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아, 예······."

아론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씰룩이는 입술을 보니, 오늘 또 술집에 가서 사람들을 한껏 선동시킬 요량인 듯하다.

"대륙 최강자 곁에 있는 자들 역시 최강이어야만 한다. 오늘 같은 추태를 너희가 또 보인다면 그땐 그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터. 항상 정신을 단단하게 만들고, 육신을 단련해라."

"예!"

"알아들었으면 다들 물러가라."

나는 그들을 보내고 나서야 숙소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제야 쉴 수 있겠구나, 라고 안심했지만-

"이렇게 또 뵙는군요, 아슬란 님."

내 숙소에 불청객 한 명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 기분 나쁜 얼굴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테르카나]

인간이면서 악마를 돕는 조력자, 테르카나.

놈의 캐릭터 설정은 사이코패스라서, 인간이 악마의 손에 죽든 천계의 손에 죽든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멸망을 당하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거기다 놈은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따르기 때문에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더 악마에 가까운 놈이었다.

악마보다 더 악마다운 캐릭터라고나 해야 할까.

그런 놈이 지금 내 신성한 숙소에 마음대로 들어와 있었다.

"죽고 싶어서 온 것이냐?"

"아슬라 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몸은 그저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을."

"네 빈 껍데기를 조종하는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못 찾을 줄 아느냐?"

"그것 역시 알고 있기에 매번 심장을 부여잡으며 떨고 있습니다."

떨긴 개뿔.

오히려 이런 걸 스릴로 느끼며 즐거워 한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오늘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것일 뿐. 저는 당신과 절대로 척을 질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을 들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테르카나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공손한 자세를 보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항상 교만하고 오만하며 그저 자신의 욕망에 따라 대륙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제까지 그 어떤 플레이어도 테르카나를 잡아 죽인 적이 없다.

나 역시 수없이 게임을 플레이 해봤지만, 끝끝내 테르카나는 죽일 수가 없었다.

"저는 당신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그 전능함! 저 라할조차도 해내지 못 한 일을, 당신은 하고 계십니다. 오늘 일도 마찬가지였지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나타샤의 매혹을 당신은 이겨내셨습니다."

이건 처음 들어보는 대사였다.

테르카나가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놈이었나?

항상 재수 없게 말 몇 마디만 던져 놓고 사라지는 놈이라 플레이어들의 주먹을 울게 만든 놈이지 않던가.

"거기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찾아 헤매던 분을 드디어 만났다는 것을."

그리고 갑자기 테르카나는 내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저는 악마를 추종하고 그들을 이 대륙으로 끌고 오는 자. 하지만 그들을 이끌어야 할 왕은 잠들어 있으며, 현재 혼란만 가득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당신이라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바로 그때였다.

[새로운 메인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뜬금없이 여기서 게임을 끝낼 수 있는 메인 퀘스트가 나타났다.

[악마들의 왕]

-모든 악마의 왕이 되어 대륙을 정복하십시오.

-퀘스트를 완료할시 게임이 끝나게 됩니다.

그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퀘스트였다.

101화

0.01초 소드마스터 101화

'뭐, 뭐야. 이 퀘스트는?'

다른 것도 아니고 악마들의 왕이라니.

이건 장난이 좀 지나치잖아.

'이런 퀘스트는 한번도 본적이 없어.'

악마들의 왕이 되어 대륙을 멸망시켜야만 게임이 클리어 되는, 이런 막장 퀘스트를 누군가 받아 봤다는 얘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최초?'

하지만 무슨 수로 악마들의 왕이 되라는 거야?

"이 세상은 운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약자로 평생을 지내며 짓밟힐 운명이 있고, 또 누구가는 영웅이 되어 대륙을 구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악의 왕이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는 운명도 있습니다."

테르카나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저는 당신이 바로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그 힘과 냉철함, 그리고 모두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까지! 악마들의 왕이 되기에 딱 좋은 조건들이 아닙니까?"

놈은 내게 손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제 손을 잡으십시오. 저는 당신의 준비된 종. 당신이 명령만 내리신다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미친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나더러 지금 지옥으로 쳐들어가서 거기 있는 놈들과 싸우라는 건가?

말 같지도 않은 얘기였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허세 역시 테르카나의 말을 듣고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감히 너 따위가 내 종이 된다는 것인가?"

"······!"

"기사의 명예도, 긍지도, 그 자격도 없는 놈이 감히 이 몸의 종을 자처해?"

"그건······."

"악마들의 왕이라고 했느냐?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을 정녕 이루지 못할 거라 생각하느냐? 그런데 네놈은 건방지게 혀를 놀려 감히 나를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그 말씀은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겁니까?"

"그래, 너 따위의 도움은 내게 필요하지 않다."

그러자 테르카나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예상대로군요. 만약 당신이 저의 제안을 그냥 받아들였다면 오히려 제가 실망했을 겁니다."

그 와중에 이놈은 나를 시험하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그건 내 병적인 허세에 기름을 붓는 행위였다.

"결국 네놈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구나."

쿠웅-!!

나는 염력으로 테르카나의 몸을 짓눌렀다.

그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져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죽고 싶은 것이냐?"

"크으윽- 다,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건 분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난 기울어진 그의 머리 위로 발을 올렸다.

그런 뒤,

"알고 있다. 이건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콰직-!

그 뒤통수를 강하게 짓눌러 놈의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왠지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네놈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건 내겐 숨 쉬듯 쉬운 일이라고."

"소, 송구합니다. 제가 주제넘는 소리를 하고 말았군요."

"네놈의 주제를 알았다면 그만 꺼지거라. 너 같이 하찮은 놈을 죽이는 것조차 내게는 수치일 뿐이니."

"······."

내가 발을 치우자 테르카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곤죽이 되어 버린 면상이 참 보기 좋았다.

"그럼, 또 뵙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니.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놈은 연기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며 사라져 버렸다.

"······갔나?"

이놈의 허세가 방금 전 사라진 테르카나처럼 사르르 내려가는 것을 보니, 정말 떠난 듯싶었다.

"어휴. 진짜 정신 없네."

별 이상한 퀘스트를 다 받지 않나.

악마들의 왕이 돼서 대륙을 파괴해?

뭐 이딴 퀘스트가 다 있어?

그런데,

[메인 퀘스트 '악마들의 왕'을 시작합니다.]

[메인 퀘스트 '황제의 길'도 함께 이어 나갈 수 있습니다.]

분명 한사코 거절한 거 같았는데, 이놈의 시스템이 멋대로 퀘스트를 시작해 버리고 말았다.

* * *

"······역시 다르긴 다르군."

자신의 인형과 연결되어 있던 정신을 끊은 테르카나.

그는 힐끗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만났던 가짜들과는 완전히 달라."

그가 말하는 가짜들.

그들은 조금이라도 달콤하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해주면 아주 거만하게 웃으며 테르카나가 건네는 손을 붙잡았다.

자신이 가진 탐욕을 아낌없이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끝은 테르카나 역시 알고 있다.

끝없이 탐욕을 쫓다 결국 그 말로는 비참했고, 테르카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조롱하며 가지고 놀다 종국에는 질렸다는 듯 길거리에 가져다 버린다.

그것이 테르카나가 이 허무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탐욕을 일깨우는 내 능력에도 꿈쩍하지 않다니."

아슬란은 달랐다.

그는 끝까지 테르카나의 손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그 머리를 짓밟고 인생 최고의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왜일까.

"크흐흐."

테르카나는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오히려 좋아 죽을 것만 같았다.

드디어,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인물이 이 대륙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 너 같은 인물을 원했다."

아슬란 그자는 테르카나 고유 능력인 탐욕의 유혹에도 꿈쩍하지 않았고, 자신의 힘과 신념을 믿고 있었다.

테르카나는 보고 싶었다.

그런 그가 최후에는 망가지는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더 보고 싶은 건, 저 무저갱이라 불리는 지옥에 갇혀 있는 악마들의 왕을 쓰러뜨리고, 그 사악한 왕좌에 앉아 이 대륙을 호령하는 아슬란의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일을 빨리 진행해야겠군."

아슬란은 말했다.

테르카나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악마들을 무릎 꿇리고 그들 위에 설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가 행동하지 않으면 그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아슬란이 무엇을 보고 그 격조 있는 발걸음을 움직이는지는 전혀 알 수 없으나, 테르카나에게는 그를 움직일 능력이 있었다.

"반드시 널 그 왕좌에 앉히고 말겠어."

바로 잠들어 있는 지옥의 왕을 깨우고 이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아슬란도 어쩔 수 없이 그 악마들을 상대해야 할 터.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그는 그 모든 사악한 존재를 쓰러뜨려 악마들의 왕이 될 것이다.

나 테르카나가 그리되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에!

"크흐흐흐."

그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동굴 안에 짙게 울려 퍼졌다.

* * *

다음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라이 왕국으로 돌아가고자 짐을 꾸렸다.

내가 일라이 왕국으로 돌아간다는 소문이 벌써 퍼진 것인지, 나타샤가 직접 나와 나를 붙잡았다.

"아슬란, 왜 벌써 간다는 것이냐?"

너 같으면 이 소름 끼치는 곳에서 계속 있고 싶겠냐.

누구는 폭주해서 매혹 마법으로 사람들을 회까닥 돌게 하질 않나, 누구는 제멋대로 내 숙소로 들어와 이상한 메인 퀘스트를 던져 주지 않나.

'처음부터 여기를 오겠다고 한 게 내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고작 골드에 눈이 멀어 하마터면 아까운 목숨을 날릴 뻔했다.

"조금만 더 있다 가거라.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자들이 이곳에 아주 많다."

어느새 나타샤와 같이 다른 왕국의 사절단들이 그 뒤로 줄줄이 모여드는 게 보였다.

그곳에는 네임드 캐릭터들이 왕창 섞여 있었다.

그래서일까.

더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난 이미 내 행동을 뜻을 전했다. 악마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 악마를 이 손으로 직접 죽인 것을 저들은 똑똑히 보았다. 그럼에도 깨닫는 것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들의 시선에 내 허세는 단전에서부터 들끓어 올라 마침내 혀에 닿았다.

나는 망토를 펄럭이며 아까부터 콧노래를 부르고 있던 말을 천천히 움직였다.

"저들에게 전해라. 나 아슬란은 기사의 긍지와 명예를 아는 자들과 힘을 합친다고 말이다. 그런 자격조차 없는 자들에게는 응징만이 있을 뿐이다."

······나도 내가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슬란 님! 당신이 이 대륙의 구원자입니다!!"

그에 따라 하나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오직 당신만이 악마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시킬 수 있습니다!"

"부디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저희와 함께 싸워 주십시오!!"

그 환호성에 감명이라도 받은 것인지, 끝없이 달아오르던 허세에 나는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가볍게 쥐자,

"와아아아-!!"

"우리에게 응답하셨다!!"

어마어마한 함성이 성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 *

"테르카나인지 뭐라카나인지. 그놈은 대체 뭘 하는 것이냐?"

일라이 왕국의 국왕, 리베르트는 초조하게 침소 안을 돌아다녔다.

테르카나가 악마의 힘으로 아슬란을 몰아내 주겠다는 제안을 했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어떤 소원이든 들어 주겠다 했지만, 한번 침공이 실패하자 테르카나 그놈은 그 뒤로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기랄. 이대로 가다가는······."

이곳 왕궁에 자신의 편은 없었다.

모두가 아슬란 이름만 칭송하고 있으며, 백성들조차 아슬란을 따른다.

누구 하나 이곳의 왕인 리베르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있었다.

이미 잊혀버린 그 이름을 생소하게 느낄 정도였다.

"아슬란. 그놈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

리베르트는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이었다.

누가 언제 배신할지 모르기에 항상 눈치를 봐야만 했다.

대체 왕인 내가 왜 그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왕이시어. 루갈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오! 그래. 루갈. 어서 들어오너라."

그나마 믿을 거라고는 이 왕가의 핏줄 중 하나이자 자신의 조카인 루갈 뿐이었다.

"그래. 어찌 되었느냐?"

"왕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신하들을 모았습니다. 물론 숫자는 많지 않으나, 같이 힘을 합친다면 왕권을 다시 강하게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루갈은 일라이 왕국의 기사였다.

물론, 왕가의 핏줄이기에 황실을 지키는 호위기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들을 만나보러 가시겠습니까? 모두 왕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오냐. 그 충직한 신하들을 만나는 것을 내가 어찌 주저하겠는가. 루갈,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저는 오직 이 왕국을 찬란하게 만들고 싶을 뿐. 그러려면 왕가가 바로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얼른 가자꾸나."

루갈의 인도에 따라 리베르트는 자신과 뜻을 함께할 신하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12명의 신하가 모여 있었다.

"왕을 뵙습니다."

"그래. 아직 나를 따르는 자들이 이렇게나 있었다니."

"물론입니다. 어찌 왕을 배신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루갈은 왕을 상석에 앉혀 놓고 그들 앞에 서서 말했다.

"여기 있는 모두에게 묻겠소. 정녕 그대들은 대기사단장 아슬란을 처단하길 바라시오?"

그러자 그들이 한마음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그렇군. 그대들의 충정은 내 잘 알았소."

리베르트가 오랜만에 흡족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스르릉-

"나의 소중한 일라이 왕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갑자기 루갈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더니, 그대로 그중 하나의 목을 베어 버렸다.

"!?"

"루, 루갈 공!!"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루갈은 묵묵한 얼굴로 그 옆에 있는 신하를 찔렀다.

"으아아악!"

"루, 루갈 공!"

"죽어라. 이 일라이 왕국을 썩게 만드는 간신들아."

"미, 미친! 저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잠긴 문은 열리질 않았다.

"감히 어딜 가는 것이냐?"

그에게 대항하는 기사도 있었지만, 루갈도 허투루 훈련을 해왔던 것이 아니기에 아주 깔끔한 검술로 이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리베르트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루갈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왕이시어. 저는 일라이 왕국이 우리 왕가에 의해 다시 찬란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왕권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지금 이 나라를 변화시킨 것이 누구입니까?"

"루, 루갈. 왜, 왜 이러는 것이냐?"

잔뜩 겁을 먹은 리베르트 앞에서 루갈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바로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이 왕국을 찬란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왕권을 강화하고 왕가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제 뜻은 여전히 같습니다. 다만, 그 왕이 잘못되었을 뿐."

"루, 루갈! 저, 정신 차리거라! 너도 왕가의 핏줄이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저는 그저 일라이 왕국을 사랑하는 한 명의 백성일 뿐. 그깟 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루갈이 칼끝을 날카롭게 세웠다.

"기사의 긍지와 명예를 우선시하며 그 신성한 정신을 앞세우시는 아슬란 님께서는 결코 왕좌에 앉으려 하지 않으시겠지요. 왜냐하면 당신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 말입니다."

"루갈! 그, 그놈은 우리 왕가를 멸망시키고 일라이 왕국을 통째로 삼키려 드는 자다! 그런 자의 편을 들겠다는 것이냐!?"

"예. 그것이 이 왕국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

"그런고로 왕이시여."

루갈은 천천히 리베르트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 죽어 주십시오."

102화

0.01초 소드마스터 102화

"너희는 오로지 왕가의 명맥 유지만을 외치고, 아슬란 님의 새로운 왕국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나는 같은 왕가의 핏줄이자, 이 일라이 왕국의 백성으로서 너희를 심판하겠다."

루갈은 자신의 기사단을 이끌고 왕가의 사람들이 사는 왕궁 자택으로 쳐들어갔다.

루갈처럼 열렬하게 아슬란을 지지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왕가의 최고 권력을 주장하는 자들을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루, 루갈 이놈!!"

"네가 우리 왕가를 배신하다니! 대체 아슬란이 뭐기에!"

"그분은 우리 왕국의 유일한 빛이자, 구원자이시다. 그분의 앞길을 방해하는 너희는 그저 이 왕국을 좀 먹는 존재일 뿐."

"이놈!! 왕께서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미 리베르트 왕은 죽었다."

"!?"

"너희도 그 어리석은 왕의 뒤를 따르게 해주지."

루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왕가의 사람들을 베어냈다.

"꺄아아!"

"으아악!"

왕궁은 온통 비명으로 가득해졌다.

* * *

"이게 대체 무슨······!"

왕궁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호레스와 넬라 기사단장.

두 사람은 심장에 칼이 꽂힌 채 죽어 있는 리베르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놈이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그게······. 확인된 바로는 루갈 기사단장이라고 합니다."

"루, 루갈? 정녕 루갈 공이 이런 짓을 벌였다고?"

루갈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는 왕가의 인물.

리베르트에게 자식이 없는 관계로, 만일 그가 죽으면 루갈이 다음 왕 자리를 이어받아야 되지 않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왕실의 일을 거부하며 기사단장의 임무를 충실히 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왜 이런 끔찍한 짓을?

"지금 루갈 공은 어디에 있지?"

"기사단을 이끌고 왕가의 사람들이 있는 왕궁 내부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토록 소식이 늦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루갈은 왕가의 사람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를 왕실 기사단장으로 세웠다.

즉,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루갈이 작정하고 정보를 차단해 버리면 알려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루갈 공이 이런 짓을 꾸밀 줄은······!"

"리베르트 왕과 무슨 갈등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모르겠소. 평소 루갈 공의 행실을 미뤄 봤을 때, 아무리 감정적으로 격동을 해도 이런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닐 것이오. 그리고 보시오. 여기 흔적만 봐도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소. 더군다나 기사단을 이끌고 왕가의 저택으로 갔다는 것은······."

분명 계획적으로 일을 벌인 것이리라.

대체 언제부터 루갈은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어서 루갈 공의 뒤를 쫓도록 합시다!"

"예!"

넬라는 호레스와 함께 기사단을 이끌고 왕실 저택으로 향했다.

"아아-"

입구에서부터 진동하는 피 냄새에 호레스는 짧게 탄식을 터트렸다.

아니나 다를까.

"······전부 죽였구나."

저택 안은 시체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누군가를 찔러 죽이고 있던 루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루갈 공!"

넬라의 외침에 루갈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가책도 있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다는 듯, 당당해 보였다.

"오셨구려, 넬라 단장."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우리 일라이 왕국을 좀 먹으며, 앞길을 방해하는 자들을 처단했을 뿐이오."

왕가의 저택이 모두 불에 타고 있었으며, 그 안에 생존자는 없는 듯했다.

"저들은 그대의 가족이기도 하오. 그런데 어찌 이리도 끔찍한 짓을! 하늘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실 라할이 두렵지 않소이까!"

"라할이라- 후후."

루갈은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이미 라할의 현신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거늘. 대체 누구를 두려워한단 말이오?"

"뭐, 뭐라고요?"

"넬라 단장. 그대들도 알겠지만, 나는 항상 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했소. 한때는 나도 국왕이 되어 이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려고 했지. 그래서 어리석은 리베르트 왕이 후손을 낳지 못하게 몰래 약을 타서 먹여왔지."

"!?"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다.

역시 리베르트에게 자식이 없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아슬란 님이 다 무너져가는 왕국을 바꾸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난 이후부터 생각이 달라졌소. 나는 왕이 될 그릇이 아니라고 말이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 왕국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그날 깨달았소."

그는 진득하게 피가 묻어 있는 칼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바로 내 손에 피를 묻혀 그분의 길을 여는 것. 그것이 나의 운명이었소. 그분께서는 신성한 기사의 긍지와 명예를 아시는 분. 그런 분이 절대 스스로 칼을 들어 이들을 죽이지 않을 것임을 난 알고 있었소. 그렇기에 내가 운명을 따른 것이오."

루갈이 말하는 운명.

그것은 바로 자신이 대신 피를 흘려 아슬란을 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난 한 치의 후회도 없소. 이것으로 나의 운명은 완성이 되었고, 일라이 왕국의 무궁한 영광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날 것이오."

루갈이 언뜻 보면 미친 사람처럼 보이긴 했지만, 호레스와 넬라는 그런 그를 손가락질할 수 없었다.

은연중에 그들이 바라던 일을 루갈이 대신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끝을 냅시다. 내 운명의 마지막은 그대들의 손에 맡기겠소이다."

"루갈 공······."

"자, 검을 드시오, 넬라 단장. 내가 죽어야 이 운명이 완성될 것이니. 나는 왕 자리를 꾀하여 반란을 일으킨 폭도이며, 그대들은 그러한 폭도를 막은 충신들이오. 반드시 그리되어야만 하오."

루갈이 자세를 잡고 넬라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넬라도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스걱-!!

넬라의 검이 정확하게 루갈의 몸을 베어 버렸다.

털썩-

루갈은 곧 칼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넬라 단장. 부디 그분을 잘 보필해 주시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넬라는 눈물을 머금으며 루갈의 목을 쳐버렸다.

"······."

맥없이 쓰러지는 루갈을 호레스와 넬라는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 * *

왕궁으로 돌아온 나는 충격적인 보고에 순간 정신이 나갈 뻔했다.

"······그리하여 반란을 주도한 폭도 루갈은 넬라 기사단장에 의해 저지당했으며, 그 자리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루갈.

거의 만날 일도 없고, 존재감도 거의 없는 캐릭터.

내가 그를 왕실 기사단장으로 내세운 건 그의 특성 때문이었다.

왕가에서 그나마 사람 노릇을 하는 인물인데, 그 특성이 무려 [정의로움] [올곧음] [충직함]이었다.

즉, 사람을 배신할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스텟은 별 볼 일 없어도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에 그를 왕실 기사단장으로 세웠던 것인데, 그런 놈이 반란을 일으켜?

'아무리 난이도가 있다고 해도.'

이 세계에 오랫동안 갇히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건, 캐릭터에게 부여된 특성은 난이도와 상관없이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루갈은,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다.'

분명 뭔가가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지금 이들이 내게 숨기고 있다는 강한 직감이 왔다.

그래서일까.

"호레스."

"예, 대기사단장님."

아주 강렬한 허세가 용솟음치며 내 몸을 가득 채웠다.

"정녕 루갈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왕을 죽이고 왕가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반란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번 묻겠다. 그가 정말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냐?"

"······그, 그건."

바로 그 순간.

쿠웅-!!

혼돈의 피어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전각에 모인 모두에게 임했다.

"크헉!"

"으악!"

수십 명의 신하와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들을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피어에 압도되어 감히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나는 거만하게 손으로 턱을 괸 채, 호레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내게 무어라 말을 하고 싶어도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15초라는 짧은 시간이 지나가고.

"으헉!"

"크읍-!"

그들은 참았던 숨을 뱉어내며 바닥에서 몸부림을 쳐댔다.

그들에게 섞여 있던 레바노스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숨을 헐떡이며 놀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시선은 오직 호레스에게만 향해 있었다.

"끝까지 솔직하게 답하지 않는다면, 이곳에 모인 너희를 전부 죽여 버리겠다."

"!?"

멈출 줄 모르고 끓어 오르는 내 허세에 저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묻겠다. 루갈이 정녕 반란을 일으킨 것이냐?"

그에 대한 물음에 호레스가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엎드린 채 소리쳤다.

"대기사단장님. 루갈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뭐라?"

호레스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주었다.

루갈, 그런 놈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을 만큼 존재감 없이 충실하게 왕실 기사단장 노릇만 하던 놈이, 설마 그런 일을 꾸밀 줄은 전혀 몰랐다.

"그는 자신의 죽음과 왕가의 몰락이 아슬란 님을 위한 일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루갈의 특성이 설마 이런 식으로 작동할 줄은 몰랐다.

그냥 충직하게 자신의 일만 할 줄 알았는데, 자신의 신념에 따라 망설이지 않고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다니.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 한 일이었기에 대처도 할 수 없었다.

"국왕을 죽인 것이 정녕 나를 위한 일이라고?"

"리베르트는 호시탐탐 대기사단장님의 등 뒤에 비수를 꽂을 넣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왕국과 내통하고, 또한 악마와도 손을 잡아 왕국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려고 까지 했습니다! 어찌 그런 자를 살려 둘 수 있단 말입니까!"

리베르트는 탐욕이 있는 자였다.

그래서 내 뒤를 한 번쯤은 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늘 조심했었는데, 호레스가 그를 유심히 관찰하며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믿었고, 저희 역시 그가 틀렸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거친 방법이긴 하였으나, 왕가의 핏줄이 아닌, 아슬란 님이 이 왕국의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건 저희 모두가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곧 호레스를 따라 전각에 모인 모든 신하와 기사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부디 왕이 되어 주십시오!"

"왕이 되어 주십시오, 아슬란 님!"

"저희 왕국을 이끌어 주십시오!"

나는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나더러 더럽혀진 왕좌에 앉으라는 것이냐! 감히 너희가 내 긍지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냐!"

"기사의 긍지보다, 그 명예보다 앞서는 것이 바로 왕국의 미래입니다.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찌 긍지와 명예를 논할 수 있겠나이까!"

"부디 왕이 되어 일라이 왕국을 이끌어 주십시오!"

그들은 모두 한마음 한목소리로 외쳐댔다.

"감히 아슬란 님을 기만하고, 이 일을 묵과한 죄는 전부 이 늙은이에게 돌리십시오. 하지만 이 피를 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슬란 님은 반드시 왕이 되셔야 합니다. 지금 왕좌는 비어있고, 아슬란 님 말고는 그 자리에 감히 앉을 사람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아슬란 님이야 말로 하늘에서 내려준 대륙의 구원자이며 우리 왕국의 영웅이십니다! 왕의 자리는 하늘이 점지해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호레스의 말에 아론이 거들며 나섰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한심한······!"

나는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황제의 길']

-일라이 왕국의 왕이 되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이 시스템까지 지랄이었다.

하지만 나는 퀘스트를 거부했다.

그러자,

-일라이 왕국의 왕이 되십시오.

'싫다.'

-일라이 왕국의 왕이 되십시오.

'싫다니깐!'

시스템에 이어 이번에는 내 등 뒤에서 저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일라이 왕국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앞뒤로 내게 왕이 되라 소리쳤다.

메인 퀘스트 황제의 길을 부정하며, 왕이 될 기회마저 일부러 져버렸다.

그 이유는 이 게임을 조금 더 수월하게 클리어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왕이 되어 버린다면 나는······.

-일라이 왕국의 왕이 되십시오.

"왕이 되어 주십시오, 아슬란 님!!"

103화

0.01초 소드마스터 103화

"흐음. 할라즈 성에서만 최고의 음식을 파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내가 우물 안 개구리······. 아니. 둥지 안 드래곤이었군."

플레임은 오늘도 어린아이 모습을 한 채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할라즈 성에서만 음식을 먹었던 터라 다른 성의 음식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자신이 시간 낭비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가 할라즈 성보다 맛있다는 건······. 다른 왕국은 더 맛있다는 걸까?"

"음하하. 그럴 리가 있겠느냐, 꼬마야."

그때 누군가가 플레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일라이 왕국의 음식은 가히 대륙 최고라 할 수 있다. 위대하신 우리 아슬란 님 덕분에 온 대륙에 있는 실력자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기 때문이지. 그들이 가져온 새로운 고기와 향신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음식의 맛을 풍미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단다."

"······."

"거기다 아슬란 님의 뛰어난 외교로 다른 왕국에서는 값비싸게 돈을 줘야 살 수 있는 재료들을 이곳에서는 싼값에 구매할 수가 있지. 또한 다른 왕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재료도 이곳에는 아주 가득하다. 특히 엘프족의 별미라는······."

"어이."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플레임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감히 누구 머리 위에다 손을 올리고 있는 것이냐?"

"으응? 하하하! 우리 꼬마의 패기가 대단한걸?"

"이 손을 얼른 내리지 않는다면 그 팔을 몸통에서 뜯어 주마."

플레임의 위협적인 살기에 남성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식당 안으로 들어와 소리를 쳐댔다.

"지금 이 역사적인 날에 여기서 밥을 먹고 있을 때인가! 모두 나가세! 새로운 왕께서 탄생하는 날이니까!"

"뭐?"

"그게 오늘이라고?!"

"이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그러자 식당 안에 있던 손님들과 직원들, 그리고 주인까지 하던 것을 멈추고 밖으로 우르르 튀어 나갔다.

"다들 왜 저러는 거지?"

플레임은 저들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방금 전 그의 머리에 감히 손을 올렸던 남성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꼬, 꼬마야. 넌 아무래도 다른 왕국에서 온 모양이구나."

"뭐?"

"저들이 저리 바삐 나간 건 오늘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날이라서 그렇단다."

"새로운 왕?"

"그래. 아무튼, 흠흠. 나도 이만 나가볼 테니, 너도 어서 나오너라. 이런 역사적인 광경을 놓쳐서는 안 되니까."

남성은 그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레스토랑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플레임도 궁금증이 생겨났다.

"왕이야 매번 바뀌는 건데, 왜들 저리 난리인 거야?"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기에 플레임도 밖으로 나가 인파 속에 섞여들었다.

어느새 성안에 있는 백성이 모두 모여 왕궁 입구에 다다랐다.

그들은 얼른 자신들이 기다리는 새로운 왕이 저 왕궁 성벽 위에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백성들이여!"

어디서 많이 본 영감이 나와 목청을 높이며 소리쳤다.

이름이 뭐였더라.

호 뭐시기였는데.

"모두 맞이하거라. 우리 왕국의 검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며, 찬란한 빛으로 앞을 인도해 주시는 너희의 새로운 왕······!"

그는 들끓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외쳤다.

"아슬란 님이시다!!"

"!?"

아슬란이라는 이름에 플레임은 몸을 들썩였다.

아슬란 그놈이 왕이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가 몸을 들썩인 건 단순히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와아아아-!!"

"아슬란 님!!"

어마어마한 백성들의 함성에 플레임은 귀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 함성소리는 아슬란이 저 성벽 위로 나타나면서 더욱 심해졌다.

"와아아-!!"

"아슬란 님 만세!!"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그가 이 왕국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있는지 이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슬란이 드디어 왕이 되었다고 기뻐하는 자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실신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할라즈 성에서도 느끼긴 했지만, 아슬란이 이 정도의 인기를 끌고 있을 줄은 몰랐다.

"······."

잠시 묵묵히 백성들을 둘러 보고 있던 아슬란.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모두 들으라.]

진하게 울려 퍼지는 음성에 함성을 지르던 군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것을 보고 플레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이건.'

아마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저 아슬란이 뿜어내고 있는 목소리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이 깃들어 있는지를 말이다.

[본좌가 왕이 된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만약 저 목소리를 살상용으로 사용하고자 했다면 능히 이곳에 있는 자들을 순식간에 죽였을 것이다.

[항상 그랬듯, 너희 곁에 있을 것이며, 너희를 지키고 이 왕국의 미래를 찬란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하지만 아슬란은 저 목소리로 이 모두를 격동시키고 있었다.

[그저 믿고 따르라. 나 아슬란이 너희와 늘 함께할 것이다.]

과연 저 힘이 가진 효과를 보여 주듯,

"우와아아아-!!"

"아슬란 님!!"

백성들은 그 어느 때보다 격동하며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함성을 질러댔다.

문제는,

"으읍-!"

이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플레임마저 피가 뜨겁게 타오르며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 고작 인간 따위가······!"

다른 것도 아닌, 그 무엇보다도 뛰어나고 우월한 드래곤의 감정을 흔들어 놓다니.

결국 활활 타오르는 그 뜨거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플레임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피이이잉-!!

"!?"

"헉!"

"뭐, 뭐야?"

작은 몸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플레임.

그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성벽 위에 거칠게 내려앉자 함성을 지르던 백성들이 얼어붙었다.

플레임은 뿌연 연기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잠시 아슬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길조차 줄 필요가 없다는 듯, 무심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저놈은 언제 봐도 거만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저놈을 싫어할 수가 없단 말이지.'

플레임은 두 날개를 양옆으로 넓게 뻗으며 포효했다.

"크롸라라라-!!"

그러자 잠시 얼어붙어 있었던 백성들도 다 같이 손을 높이 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

"아슬란 님 만세!!"

"일라이 왕국 만세!!"

일라이 왕국의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결국 그리되었단 말이냐?"

"예. 아슬란이 일라이 왕국의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레이어스 교단의 교황, 레헤나.

그녀는 기도를 올리고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레헤나 곁에 머무는 신성한 빛은 항상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았다.

또한 그 빛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미모 역시, 저절로 신앙심을 갖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슬란. 신을 부정하지만, 빛의 힘을 쓰는 자. 그자가 이제는 왕의 권력까지 가졌구나."

교단에 있어서 아슬란은 결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쓰는 빛의 힘은 늘 의문만을 남기고 있었고, 그것이 진짜인지는 직접 이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샤나 왕국에서도 그 신성한 힘을 보였다고 하던데······. 그자가 대륙에서는 영웅으로 칭송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냐?"

"일라이 왕국 백성들은 그를 영웅으로 내세우며, 오히려 그가 라할의 현신이라는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종교적인 모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대륙의 중심이 되던 레이어스 교단이 지금은 그 신뢰를 잃어 가고 있다.

그 이유에는 아슬란이 있었다.

그가 교단을 무시하고, 또 출몰하는 악마를 처단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인 것이었다.

심지어 한번은 교단의 군대와 부딪혀 그들을 쓸어 버린 적도 있으니, 당연히 교단의 명성이 과거에 비할 바 없이 추락했다.

"성물을 가져와라."

"예?"

"아슬란. 그자를 만나야겠다."

"하, 하지만 성물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장로들의 회의를 거쳐야 합니다."

"난 이 교단의 교황이다. 그런데 내가 왜 그들의 명령에 따라야 한단 말이냐? 어서 가져와라."

"······."

교황의 명령에 사제들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교단에서 거의 죽은 사람처럼 성전에 박혀 있는 채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던 교황, 레헤나.

그녀의 눈길이 향한 곳은 이 앞에 놓여 있는 거대한 라할의 동상이 아닌, 바로 일라이 왕국이었다.

* * *

[당신은 일라이 왕국의 국왕입니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

결국 저질러 버렸나.

나는 이제 대기사단장이 아닌, 일라이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그러면서 바뀐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왕으로서의 기품이 올라갑니다.]

[지위의 영향으로 매력과 명예가 상승합니다.]

[특성이 바뀌게 됩니다.]

기품, 매력, 명예가 상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려 한 나라의 왕이지 않은가.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 특성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특성 '중후한 매력'이 '제왕의 카리스마'로 바뀌게 됩니다.]

[특성 '군림'이 '천상의 군림'으로 바뀌게 됩니다.]

[특성 '자긍심'이 '서사적 자긍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지위와 특성의 영향으로 '사기 증진'이 더욱 원활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이 특성들만 바뀐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게 치명적으로 작용한 특성 변경은 바로······.

"쩝쩝쩝."

"······."

쩝쩝대는 소리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왕궁 안으로 들어와 성대하게 차려진 만찬을 즐기고 있던 플레임.

그는 곧 내 시선을 느꼈는지, 먹던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리 보느냐?"

"······할라즈 성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왜 여기에 왔지?"

"흠, 그야 더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지."

"음식은 칼라 왕국이 훨씬 맛있다고 들었다. 거길 가서 실컷 즐기고 오는 건 어떤가?"

"후후. 어림도 없지. 이미 성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들었느니라. 그 어떤 대륙에서도 일라이 왕국의 음식을 따라갈 순 없다고."

누가 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거야.

플레임을 칼라 왕국으로 보내서 거길 한바탕 뒤집어 놓을 수 있었는데.

아깝게 됐다.

"그래도 결국 왕이 되었군. 하긴. 이상한 일이긴 했어. 난 네가 당연히 왕인 줄 알았거든. 어쩌면 순리대로 일이 흘러간 것이겠지."

"네 입에서 순리라는 말이 나오다니."

"크크. 내가 그래도 너보다는 수백 년을 더 살았다. 무시하지 마라, 아슬란."

알겠으니까 얼른 좀 가라.

너만 있으면 또 뭔 일이 일어날까 봐 심장이 쿵쾅대니까.

"여기 일라이 왕국. 참 마음에 들었어. 내 둥지가 할라즈 성 쪽에 있어서 아쉬울 정도야. 아니지. 이참에 여기 주변에다 새로운 레어를 까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저번처럼 또 부숴 줄까?"

그 말에 플레임이 눈을 치켜떴다.

"또 그랬다가는 진짜 가만 안 둬!"

"그러니 허락도 없이 그딴 걸 만들 생각은 하지 마라."

"······젠장. 둥지를 만드는데 허락까지 받아야 하다니.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이라도 잘 알았으니 다행이군.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알겠다고. 잔소리는-"

"왕국에 있는 것은 좋으나, 괜한 말썽은 피우지 말거라. 본좌가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순간 나도 모르게 또 그 단어가 튀어 나가고 말았다.

플레임도 그것을 눈치챈 것일까.

"크크크. 본좌라······. 틀린 말은 아니지. 천하의 드래곤을 상대하고도 멀쩡한 놈이니, 적어도 이 대륙의 인간 중에서는 너보다 강한 놈은 없을 거다."

본좌.

내가 말을 꺼내 놓고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이게 전부 다 왕이 되면서 뒤바뀐 특성 때문이었다.

[특성 '병적인 허세'가 '극단적인 허세'로 바뀌게 됩니다.]

[특성 '심취'가 '자아 과잉'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라지도 않은 특성 업그레이드였다.

가뜩이나 병신 같은 허세가, 극단적인 허세로 바뀌면서 더 근엄한 병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나 말투였다.

평소보다 더 근엄하게 목소리가 바뀌었고, 스스로를 본좌라 칭하기까지 하는 말기 증상까지 다다랐다.

더군다나-

"고작 인간뿐이겠는가."

"뭐?"

"온 대륙에 있는 종족을 통틀어 감히 본좌의 위에 있는 것은 없다."

"······."

허세를 부리는 것까지 한 층 더 업그레이드되어 버렸다.

104화

0.01초 소드마스터 104화

내가 일라이 왕국의 왕이 된지도 어느새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나날이었다고 해야 할까.

마치 폭풍전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왕을 뵙습니다."

"위대하신 왕을 뵙습니다."

내가 잠시 밖으로 나가면 왕궁 안을 거닐던 기사들과 신하들이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그들이 나를 부르는 칭호는 대기사단장이 아닌, 바로 '왕'.

이 게임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직업을 가졌었다.

당연히 왕도 해봤고, 제국의 황제도 해봤다.

하지만 그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냥 게임 속 직업일 뿐이니,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상 속에서 나는 왕이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한 책임감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어쩐다.'

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는 메인 퀘스트를 완료해야만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쉬운 메인 퀘스트를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주인공 알렉산더를 도와 테키나 족속의 진격을 막고 대륙을 구하는 것.

그것이 이 게임을 상징하는 엔딩이기도 하고, 제일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나와야 할 엔딩 퀘스트는 안 나오고 황제가 되어 대륙을 정복하라거나, 지옥왕이 되어 대륙을 파괴하라는 퀘스트만 나오고 있으니······.

'이건 억까야.'

이건 개발자가 의도적으로 날 궁지에 내모는 것 같았다.

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없도록 말이다.

"으아악!"

차가운 공기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잠시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들리는 비명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 소리가 나오던 곳을 바라보고 있자 얼마 안 있어 기사 몇몇이 누군가를 밧줄로 묶어 데려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소란이냐?"

내 물음에 그들은 몸을 숙이며 답했다.

"위대하신 왕을 뵙습니다. 첩자를 잡아 고문실로 데려가는 중입니다."

"첩자?"

"예. 놈이 훈련장에 돌아다니고 있는 키루를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여 부하들과 함께 제압해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붙잡힌 놈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왕이시여! 저는 첩자가 아닙니다. 대체 제가 왜 붙잡혀야 한단 말입니까!"

"닥쳐라! 네놈이 입고 있는 복장은 신입들이 입고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는 건 키루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는 것일 텐데도, 네놈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긴.

오밤중에 푸른 빛을 번쩍이며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사파이어 자쿤을 보면 놀랄 법도 하지.

그러나 우리 기사들은 워낙 그런 키루의 모습을 많이 봐와서 전혀 놀라지 않는다.

즉, 키루를 본적이 없는 첩자 놈들만 그것을 보고 놀란 반응을 보인다는 것.

그렇기에 이토록 쉽게 첩자를 색출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가서 어떤 놈이 첩자를 풀었는지 소상히 알아 오라."

"예."

이런 방식으로 키루가 첩자를 잡는 일이 꽤 있었다.

그리고 이건 키루 뿐만이 아니었다.

"으, 으아아아!!"

"꺄아아악!!"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거센 바람과 함께 플레임이 그 육중한 몸통으로 내 앞에 쿵! 착지했다.

"아슬란."

드래곤의 묵직한 음성이 사위를 갈랐다.

플레임은 자기가 붙잡아 온 놈들을 내 앞에 던져 놓았다.

"요즘 따라 여기 왕국에 쥐새끼들이 많은 거 같군."

"······이놈들도 널 보고 비명을 질러댔나?"

"그래. 겁먹은 모습이 귀여워 한입에 먹어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키루와 마찬가지로 플레임도 왕국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는 첩자들은 드래곤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라며 발작해대다 이렇게 붙잡혀 오는 경우가 요즘 많아졌다.

물론 우리 왕국에 드래곤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막상 드래곤을 눈앞에서 보면 오금이 저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훈련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을 느끼도록 설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왕국을 경계한다는 것이겠지."

"후후. 강대국이 겪어야 하는 불편함 같은 건가? 아무튼 오늘 공적을 세웠으니, 내일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오도록 하지."

플레임은 날개를 펄럭이며 훨훨 날아가 버렸다.

나는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첩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드, 드래곤이라니."

"대, 대체 여긴 어떻게 되어 먹은······."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 것도 귀찮아서 나는 뒤에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방금 붙잡혀 온 놈과 똑같이 이놈들도 고문을 받으며 누가 감히 내 왕국에 첩자를 보낸 것인지 알아낼 작정이었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겉은 얼음물에 들어가도 멀쩡할 것처럼 생겼지만, 사실 안은 나약한 놈이기에 이런 추위에 잘못 노출되면 감기에 걸려 고생을 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그전에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왕이시여."

그때 아론이 다가와 내게 정중한 예의를 갖췄다.

"보고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말하라."

"교황이 할라즈 성을 지났다고 합니다."

그 말에 관자놀이에서부터 통증이 느껴졌다.

교황, 레헤나.

내가 교단이랑 한바탕 싸웠어도 가만히 있던 게 갑자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는 스토리에 따라 아예 안 나올 때도 있던데.'

교황 레헤나는 폐쇄적인 인물이다.

교단의 얼굴이 되어야 하는 교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게임적으로 알려진 이유로는, 자신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 라할보다 더 숭배를 받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은둔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물론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고 성물 역시 교황과 함께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성물이었다.

레이어스 교단의 성물.

라할이 레이어스 교단에 약속의 증표로 남겨 주었다는 성물은 순금으로 덧씌워져 있는 동상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황금으로 만들어진 막대에 끼워 네 명이서 어깨에 메고 운반을 해야만 했다.

워낙 신성한 물건이라 항상 신전에만 머물러 있었고, 허락받지 않은 자가 그것을 만질 시에는 라할의 진노가 내려와 그 몸을 불살라 버린다고 알려져 있다.

'얘기만 들으면 순뻥처럼 느껴지겠지만······.'

성물의 힘은 진짜다.

그걸 멋모르고 만졌다가는 어마어마한 힘이 가해져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그리고 이 성물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이 성물이 스토리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알렉산더에게 말이지.'

성물에는 한 가지 비밀스러운 힘이 있는데, 바로 빛의 기둥이라는 것을 떨어뜨려 상대가 라할에게 선택을 받은 영웅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가 있게 한다.

그리고 이 빛의 기둥은 오로지 알렉산더에게만 적용이 됐다.

아무리 내가 신성력을 쌓고 인덕을 쌓으며, 온갖 백성들에게 명성을 얻어도 알렉산더가 아니면 절대 빛의 기둥을 통한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럼 이걸 알렉산더에게 써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아도 황제 퀘스트, 그리고 지옥왕 퀘스트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알렉산더가 성물을 통해 영웅으로 인정을 받고 이 대륙을 구원하기 위한 길이 열린다면?

'그렇게만 되면 새로운 메인 퀘스트가 뜨게 되겠지?'

머리에서 바쁘게 돌아가던 계산기가 멈췄다.

나는 근엄한 목소리로 아론에게 말했다.

"교황의 길을 막지 말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아론도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교단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는 했어도 상대는 교황이다.

레이어스 교단을 싫어하는 사람도 교황만큼은 인정할 만큼, 이 게임 내에서 교황의 명성은 무척 높다.

또한 그녀가 현재 운송 중인 것은 무려 성물.

만일 그것을 이곳에 가져와 힘을 개방한 뒤 알렉산더에게만 써준다면······.

'이 지긋지긋한 게임도 이제 안녕이다!'

* * *

교황 레헤나와 그의 성기사들은 할라즈 성을 넘어 일라이 왕국이 있는 곳으로 행군을 이어갔다.

그녀는 주변을 스윽 살펴보다 옆에 있던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이상하구나."

"예? 어떤 것이 말입니까?"

"내가 밖으로 자주 나가는 일이 없긴 하다만, 보통 내가 나오면 항상 왕국에서는 호위병들을 보냈다. 하지만 일라이 왕국 영토에 들어서니, 전혀 그런 것이 없구나."

"······."

"심지어 기사들의 표정도 많이 안 좋아 보이고."

그녀의 말에 기사단장이 우물쭈물 거리다 대답했다.

"교황님. 아슬란과 일라이 왕국은 교단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성기사들은 아슬란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최정예 성기사단이 아슬란에 의해 도륙을 당했으니까요."

"나도 그 얘기는 들었다. 아슬란이 단신으로 그 많은 군대를 휩쓸었다지?"

"예. 부끄럽지만, 그로 인해 아슬란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 깊은 곳까지 자리 잡았습니다."

악마도 두려워하지 않고, 교단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각오하는 성기사들이 고작 인간 하나를 극도로 두려워 한다라.

늘 강직한 성기사들의 모습만 보다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게 되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이곳이 바로 일라이 왕국입니다, 교황님."

그리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느새 교황은 일라이 왕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성안에 있는 백성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교황?"

"또 교단이야?"

"이번에는 또 뭘로 우리 왕을 괴롭히려고!"

교단의 대주교만 방문해도 그 성의 백성들은 한동안 난리가 날 정도로 환대를 한다. 하물며 교황이 방문하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교황을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살벌한 눈초리를 보내기까지 했다.

때로는 살기까지 느껴져 교황을 호위하던 성기사들이 칼을 뽑아 들고 경계를 설 정도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크롸라라라라-!!"

"!?"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어마어마한 포효에 교황은 하마터면 타고 있던 마차에서 떨어질 뻔했다.

"이, 이 목소리는 설마······."

땅을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저 푸른 하늘을 새빨갛게 만들어 버리는 붉은 비늘.

하늘의 제왕이자 대륙의 재앙이라 불리는 레드 드래곤이 날갯짓을 하며 성으로 내려와 앉았다.

"드, 드, 드래곤이다!!"

"모, 모두 전투 준비!!"

드래곤의 출몰에 깜짝 놀란 성기사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고 대형을 갖췄다.

"모두 대피하시오!"

그리고 바깥에 가만히 서 있는 백성들을 향해 얼른 피하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얼른 피하라니깐!"

"여기 있다가 다 죽고 싶은 것인가!"

오히려 성기사들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괜찮소. 우리 플레임 님은 일반 백성을 해치는 나쁜 분이 아니오."

"맞아요. 우리 왕국의 왕을 섬기는 분이라고요!"

"······?"

백성들의 기이한 반응에 기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드래곤이 나쁘지 않다고? 심지어 왕을 섬겨?

하나 같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드래곤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존재이지 않던가.

그런데 어째서 이들은······.

"뭐야? 네놈들은."

사뿐히 내려앉아 백성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냠냠 먹던 플레임은 성기사들이 내뿜는 살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런 살기를 보내고 있는 거야?"

성이 난 드래곤이 둔중한 발걸음으로 성기사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으, 으어······."

그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에 성기사들은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뭣들 하느냐!! 당장 대형을 갖춰라!"

기사단장의 외침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는 드래곤 주변을 빠르게 포위했다.

교황도 힘을 보태고자 이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신성력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일전에 들은 적이 있어.'

레드 드래곤이 할라즈 성에 한 번 출몰했다가 일라이 왕국에도 나타났다고 말이다.

아슬란이 왕으로 취임을 할 때도 레드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 이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무척 의심스러워 거짓 정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허황된 줄로만 알았던 정보들이 사실은 다 진실이었던 것일까.

여기 백성들은 저 드래곤이 아니라 오히려 신성한 교단에게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호오. 이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여기서 한번 해보자는 것이냐?"

드래곤의 붉은 기운이 서서히 끓어 오르고 있었다.

과연 대륙 최강의 종족답게 흘러나오는 기운이 무시무시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성기사들이 명령만을 기다리며 드래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그만.]

사방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공간을 울리다 못 해 하늘과 땅을 뒤흔들어 놓는 그 엄청난 음성이었다.

삐이이-!!

그 한 마디에 귀가 먹먹해지고 두 개 골이 흔들려 기사들은 차마 제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린 채 두 귀를 막고 무릎을 꿇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으, 으아악!"

"크악!"

그건 기사단장도 마찬가지였다.

심부를 파고드는 그 목소리에 숨이 막혀 오는지 신음을 토하며 간신히 말 고삐를 붙잡고 버텨내는 중이었다.

교황도 신성력으로 그 강압적인 힘을 버텨내고 있을 뿐.

대체 이 힘이 누구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앞을 보라.

저 대륙 최강이라는 드래곤마저 몸을 떨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였다.

펄럭~

휘날리는 붉은 망토와 함께 바람을 타고 있는 은빛 머리칼.

성기사들과는 다르게 이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던 백성들이 그 존재를 보고 일제히 소리쳤다.

"왕께서 오셨다!!"

"아슬란 님이시다!!"

"와아아아-!!"

감히 저 드래곤 머리 위를 밟고 있는 사람이 그 아슬란?

교황 레헤나는 자신을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아슬란과 눈을 마주쳤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그녀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105화

0.01초 소드마스터 105화

'이렇게 극적인 연출을 하려고 한 건 아니다만.'

뒤바뀐 허세 때문인가.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느새 드래곤 머리 위에 서 있었다.

"아슬란······."

감히 인간 따위가 드래곤 머리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언짢았던 것인지, 플레임이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백성들이 있는 성에서는 난동을 피우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플레임."

드래곤을 하찮게 내려다보며 꾸짖었다.

"내 말이 우스웠던 것이냐?"

"······."

플레임은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펴고 잠잠해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저 아래 성기사들 사이에 있는 교황을 바라보았다.

"일라이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교황이여. 하지만 네놈도 마찬가지다. 감히 본좌의 영토에서 허락도 없이 칼을 뽑다니. 건방지구나."

"네, 네놈? 지금 교황님께 그 무슨 무례를······!"

입은 갑옷을 보아하니, 여기 성기사들의 단장 같았다.

나는 단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무례라 했는가? 원한다면 진짜 무례가 무엇인지 본좌가 친히 보여주지."

바로 그 순간.

화르르륵-!!

불의 룬이 발동되면서 내 몸 전체에 작은 불길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찰나의 괴력을 쓴 것이 아닌, 오로지 내 힘만으로만 쓰는 불꽃이기 때문에 불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다.

딱 온몸에 불이 살짝 붙은 것만큼 보여 줄 수 있는 거랄까.

그런데,

"호오. 결국 싸우는 것이냐, 아슬란?"

내 발밑에 있던 플레임이 함께 붉은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하면서 사방으로 흉흉한 기운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히, 히익-!"

"으헉!"

성기사들은 깜짝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고, 내게 입을 놀리던 기사단장도 얼굴이 굳어 버려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발밑이 뜨거워져 플레임의 기운에 내가 잡아 먹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였다.

"그만두세요!"

다급한 외침에 한창 끓어 오르던 플레임의 기운이 멈췄다.

교황은 마차에서 내려와 우리와 성기사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싸움은 멈추도록 하세요. 우린 피를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어차피 싸우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거 같다만. 그럼 왕궁까지 따라와라."

나는 다시 천천히 몸을 위로 띄우면서 플레임에게 말했다.

"저놈들이 왕궁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허튼짓을 하는 거 같거든, 얼마든지 태워 버려라, 플레임."

"흐흐. 그런 거라면 쉽지."

플레임은 음흉하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내 뒤를 따라오는 성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으어······."

"히익."

바짝 겁을 먹은 성기사들은 뒤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플레임이 자꾸 신경이 쓰여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플레임은 그런 그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뭣들 하고 있느냐. 꾸물대지 말고 얼른 움직여."

기선 제압은 아주 확실하게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