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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

"일라이 왕국에 이렇게나 많은 군대가 모이다니······."

넬라 기사단장은 각 왕국에서 모여드는 병력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검의 원탁 회의이긴 하나, 어떤 일이 발생하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 보호 차원에서 군대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웅장한 군대의 숫자에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호레스는 느끼는 바가 달랐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조금은 불안한 감도 드는구려."

"예? 어째서 말입니까?"

"검의 원탁은 이제까지 교단이 소집을 했지만, 그 중심이 되는 건 항상 카르만이었소. 그거야 칼라 왕국이 최강 왕국이며, 모두 카르만을 대륙 최강자로 인정했기 때문이지. 만약 대륙이 위기에 빠진다면 그가 나서서 해결해 줄 거라 믿고 있었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소이까?"

검의 원탁은 카르만 중심이었고, 그가 늘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검의 원탁은 다를 것이다.

아슬란이 무려 대륙을 구원할 빛의 증표를 받았으며, 이번 회의를 교황이 소집한 이유도 아슬란을 중심으로 왕국을 화합하기 위함이었다.

"카르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검의 원탁에도 많소. 우리 왕을 지지하는 세력도 있겠지. 만일 두 세력이 여기서 반목을 한다면 어찌 되겠소?"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겠군요."

"그렇소. 이 아름다운 도시가 순식간에 불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

과연 그 말대로 벌써부터 충돌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흥. 아슬란이 빛의 증표를 받은 존재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이 대륙을 구원하실 분은 우리 국왕밖에 없지."

"맞아. 나는 다른 왕국 출신이지만, 카르만 님 말고는 다른 강자가 있을 리 없어."

몇몇 기사들이 나누는 얘기를 듣고 있던 알렉산더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무례더냐? 감히 우리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뭐, 우리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이건 명백한 사기극이다. 카르만 님 말고 대륙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슬란 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떠들기는. 너희가 그토록 우상시하는 카르만도 우리 아슬란 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해."

"뭐야?!"

호레스의 말대로 검의 원탁을 위해 전각 입구에 모인 기사 중 아슬란을 지지하는 세력과 카르만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말다툼이 일어났다.

일개 기사들끼리의 말다툼이면 괜찮으련만, 단장급이나 되는 간부들까지 열을 내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입구 쪽으로 향하는 길이 아수라장이 될 위기에 처했다.

"밑바닥에 있던 왕국이 운 좋게 올라온 주제에 감히 우리 칼라 왕국을 업신 여겨?!"

"언제적 칼라 왕국이란 말이냐. 우리 일라이 왕국이 대륙 최강이다!"

급기야 각자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기까지 했다.

분위기가 점점 극으로 치달으려 할 때.

"모두 들으십시오!"

목청이 큰 기사 하나가 나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빛의 증표를 받은 예언된 존재이시자, 악마들의 악몽이며, 공포의 대상이고, 대륙의 유일한 영웅이시자 일라이 왕국의 영광스러운 국왕이신 아슬란 님이십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구가 열리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위엄 넘치는 아슬란이 붉은 망토를 펄럭이면서 들어왔다.

* * *

'뭐야. 이놈들은 왜 만나자마자 싸우려고 들어?'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기사들이 서로 칼을 뽑아 들고 당장이라도 백병전을 펼칠 기세였다.

사실 여기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들이 왜 싸우는지 오고 가는 언성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를 지지하는 왕국과 그렇지 않은 왕국끼리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놈은 싸움이 나기를 바라는 건가?'

나는 저 끄트머리에 있는 카르만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저놈이 말 한마디만 해줬어도 기사들이 이렇게 칼을 뽑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다는 건 은근 전투가 벌어지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빛의 증표를 나한테 빼앗겨서 뭐 삐졌다 이거냐?

생긴 거랑은 다르게 속이 아주 좁아요.

"대륙의 유일한 영웅?"

그때 어느 기사 하나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우리에게 유일한 영웅은 카르만 님뿐이시다!"

"옳소!!"

"카르만 님이야 말로 우리의 영웅이시다!"

이 광신도 같은 놈들이 칼을 높이 들며 카르만의 이름을 외쳐댔다

하지만 고작 그것으로 날 주눅 들게 할 순 없었다.

왜냐하면-

"어리석구나."

태산보다도 높은 내 허세가 끓어 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왜 이곳에 불렀는지 정녕 모르겠느냐?"

나는 한 발 가볍게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쿵-!!

제왕의 군림보가 발동되면서 천지가 흔들렸다.

칼을 높이 들고 소리치고 있던 기사들은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했다.

"썩은 가지를 이곳에서 모두 정리하기 위함이다."

나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뎠다.

"내가 걷는 한 걸음은 너희의 걸음과 다르다."

쿵-!!

"내가 내뱉는 말 한마디도 그 무게부터가 다르지."

쿵-!!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내 양옆으로 사람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부할 수 없는 제왕의 위엄이 이들을 강제로 짓누르며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너희의 의견 따위에 관심이 있을 것 같은가?"

쿵-!!

그리고 마지막 발을 내디뎠을 땐.

"크헉!"

"크읍-!"

카르만을 제외한 모두가 내 앞에 쓰러져 무릎을 꿇었다.

불굴이라는 특성으로 간신히 그 힘에 버티고 있던 카르만 역시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니 선택해라."

나는 당장이라도 눈이 뒤집혀 실신할 것만 같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죽을 것인지, 아니면 화합의 이름으로 나를 따를 것인지."

111화

0.01초 소드마스터 111화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요동친다.

그저 몇 발자국 걸었을 뿐인데, 대체 어떤 힘을 발휘한 것인지 여기 있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아슬란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마치 놀라운 그의 힘을 경외하듯.

"아슬란."

불굴의 정신으로 끝까지 버티고 있던 카르만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놈이 이렇게 나오는 것인가.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의 무릎도 꺾일 것만 같았다.

그런 추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칼을 뽑아야 한다.

카르만은 천천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가 칼을 뽑으려는 순간.

"왕이시여."

뒤에서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황 레헤나였다.

그녀는 신성한 빛을 뿜어내며 아슬란에게 말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들이 아직 우매하여 무례함을 저지르는 것뿐입니다."

그런 레헤나의 말이 효과가 있는 것일까.

"······?"

이들 모두를 짓누르던 힘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레헤나는 정신을 차리고 각자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나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라할을 섬기는 빛의 후손들이여."

그 따뜻한 음성이 퍼짐과 동시에 레헤나의 몸이 위로 서서히 떠올랐다.

"우리는 빛을 섬기는 자. 그리고 빛의 예언을 따르는 자. 우리 레이어스 교단과 나, 교황 레헤나는 일라이 왕국의 국왕 아슬란을 예언된 빛의 기사로 인정하니, 그를 대적하는 자는 곧 빛의 뜻을 대적하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 교단을 배척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교황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그녀가 지지하는 사람은 곧 교단이 지지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러므로 예언된 영웅을 따라 이 대륙을 악으로부터 구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 우린 마땅히 예언을 따라 빛의 기사를 따라야 한다!"

부드러우면서 강렬한 그녀의 목소리가 왕궁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슬란은,

펄럭~

망토를 휘날리며 먼저 전각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환영 인사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모두 들어오도록."

당당하고 격조 있는 발걸음으로 안에 들어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은 잠시 주춤거리다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 *

삭막하고 숨 막히는 긴장감이 전각에 가득했다.

'원래는 평화와 화합의 목적으로 모인 거였는데.'

그래서 어떻게든 서로 다투지 않고, 분란 없이 만남을 가지려 했다.

테키나 족속을 막기 위해서라면 모든 왕국이 힘을 합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시작부터 재를 뿌려 버렸네.'

이놈의 허세가 그걸 가만 보고 있지 않았다.

평화는 무슨.

당장 내일 왕국끼리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그런데 내가 먼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카르만 저놈을 지지하면서 나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인 건 저놈들이 먼저였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내 허세가 이토록 날뛰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 지금부터라도 잘하면 되지.'

시작은 좀 험악했지만, 지금이라도 부드럽게 이끌어 가면 되지 않겠는가?

"아슬란."

그런데 불안하게 초장부터 카르만이 말문을 열었다.

"아까 밖에서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여기서 확인을 시켜줘야겠는데."

과연 그 불안감대로,

"확인이랄 것이 있느냐. 말 그대로다."

놈은 기어코 잠잠해진 내 허세를 다시 들끓게 만들었다.

"내 뜻을 따르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빛의 기사가 되었다고 해서 네가 대륙을 통치하는 정복자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런 시시한 자부심 따위가 아니다."

나는 회장에 모인 이들을 스윽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본좌가 진실로 너희를 정복하고자 했다면, 진작 그리했을 터. 내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성이 무너졌을 것이고, 내 손이 닿는 곳마다 피로 가득했을 것이다."

"······!"

"정녕 그것을 원하는 것인가?"

내 허세력이 끝을 모르고 폭발하는 중이었다.

"모든 왕국을 적으로 돌린다면 일라이 왕국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일라이 왕국의 힘은 필요하지 않다. 본좌의 힘만으로도 너희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테니."

"그 무슨······."

"시험해 보고 싶은가? 그럼 아무 왕국이나 말을 해보거라. 지금 당장 그 왕국으로 강림하여, 본좌의 말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증명해 줄 터이니."

"!?"

······이제 나도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저질러 버린 거, 나는 눈을 부릅뜨고 전각에 모인 이들을 노려보았다.

"······."

그러나 아주 다행스럽게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 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일 뿐.

하지만 카르만은 눈가를 꿈틀거리며 뭔가 제대로 터트릴 것처럼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그 숨 막히는 긴장감이 극에 달해 거의 폭발 직전까지 다다랐을 때.

"아슬란 님을 의심하는 건 이제 여기까지 하십시오."

레헤나가 중재자로 나섰다.

"300년 전, 대륙에 있는 모든 족속이 힘을 합쳐 마침내 악마들을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그 악한 세력을 완전히 소멸시키진 못했지요. 그리고 교단에는 라할의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그녀는 300년 전 그날 내려왔던 신탁을 이들에게 읊조렸다.

"빛의 선택을 받은 기사가 대륙을 어지럽히는 악을 몰아내고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리니, 그날 모든 민족이 그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레헤나의 목소리에는 교황의 위엄이 가득했다.

"그리고 보십시오. 아슬란 님은 빛의 증표를 받으신 분. 저분을 의심하고 따르지 않는 것은 라할의 뜻을 어기는 것이며, 이 대륙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그 존재는 마땅히 없어져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레헤나는 내게 정중히 청을 올렸다.

"아슬란 님. 부디 빛의 증표를 이들에게 보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난 그녀의 말에 따라 손을 펼쳤다.

그러자 성스러운 빛의 증표가 떠오르면서 전각 안을 밝혔다.

"오오-"

"저것이 바로 그 전설의······."

이들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바로 이것이 빛의 증표가 가진 힘이었다.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 그리고 온 왕국의 대표가 되어 악마를 막아낸다는 명분.

빛의 증표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빛의 증표도, 라할의 예언도, 하늘의 뜻도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곧 빛의 증표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무엇인가."

난 저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 스스로와 너희 왕국, 그리고 너희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다."

"······?"

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만 왕국이 악마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존폐의 위기에 섰을 때,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다. 하지만 본좌는 단신의 몸으로 그들을 도와 악마 군단을 몰아냈다. 지금껏 악마들에게 고통받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갔다. 너희는 모두 외면했지만 말이다."

"······."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말로써 너희와는 화합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난 힘을 써야 한다면 힘을 쓸 것이고, 누군가를 파괴해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리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힘을 과시하는 건,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가 되기 위함이었다."

"······."

"하지만 너희가 원하는 것이 영웅이라면-"

나는 천천히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내가 너희의 영웅이 되어 주겠다."

그것은 곧 포효 효과를 발휘하여 이들에게 퍼져나갔다.

"난 영웅이 아니다. 라할이 선택하였든 하지 않았든 내게는 상관없다. 또한 빛의 선택 역시 내겐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길을 자처하는 것은, 흩어져 있는 너희를 하나로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대체 왜······."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카르만이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서, 바라지도 않는 일이라면서,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왜냐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대륙을 구하기 위해서다."

내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다.

"난 너희와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 너희와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너희는 감히 내 뜻을 이해할 수 없다. 본좌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위해 나아가는지, 영원히 이해하지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나는 이 게임에서 탈출하길 원한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니 너희 자신을 위해, 너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내 뜻을 따라라. 그럼 어떤 악마의 공격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나 아슬란이 있는 한, 그 무엇도 너희를 파괴할 수 없을 테니. 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곳이든 내가 지켜주겠다."

모든 왕국의 힘이 필요했다.

"······."

다시 한번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줄곧 가만히 있던 만 왕국의 크라엘이 내게 물었다.

"선조들께서는 300년 전 테키나 족속을 몰아내고 봉인만 했을 뿐. 그들을 말살시키진 못했습니다. 그 당시 대륙 최강이자, 현재도 감히 그 힘을 견줄 수 없다는 라일라칸께서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당신은 해낼 수 있다는 겁니까?"

그 물음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허세가 정수리를 뚫고 치솟았다.

"그 시절에는 나 아슬란이 없었다."

"······!"

"이것이 내 대답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이름 아래 모여 싸울 것인지, 아니면 자멸할 것인지."

그리고 전각 밖을 나서며 말했다.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 * *

"······."

아슬란이 떠나간 자리는 마치 어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을 안겼다. 무엇 하나 결정된 것 없이 이렇게 나가 버린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여기서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하라고 비켜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따르지 않으면 자멸한다라. 그건 곧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겠다는 건가?"

"무슨 이리 극단적인······!"

그들은 아슬란을 따라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야 하는 것인지 갈팡질팡했다.

그때 크라엘이 말했다.

"아슬란 님의 말씀이 맞소."

"······?"

"그대들이 모두 우리를 외면했을 때, 나는 보았소. 빛으로 강림하여 그 수많은 악마 군단을 단신으로 쓸어 버리는 아슬란 님의 위용을. 그건 결코 인간의 힘이 아니었소. 그것을 아득히 초월한 무언가였지. 직접 그 경이로운 힘을 목격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오."

크라엘은 마치 그날의 일이 생생한 듯 눈을 반짝였다.

"우리 만 왕국은 아슬란 님을 전적으로 따를 것이오. 그분의 말씀대로, 우리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

이제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카르만이었다.

이들이 이토록 흔들리는 건 힘의 균형추가 되는 카르만이 있기 때문.

그는 말없이 아슬란이 떠나간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 명분이 되어 주겠다는 것인가, 아슬란?'

카르만은 오늘, 아슬란이라는 인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정복욕에 찌든 수많은 왕과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했거늘.'

빛의 기사라는 명분으로 아슬란이 왕국들을 복종시키고 대륙을 정복해 그들을 통치하려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카르만은 보았다.

아슬란에게는 정녕 이 왕국들을 굴복시킬 생각이 없음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도통 그 속을 알 수가 없구나. 저 사내가 정녕 무엇을 바라보는지도.'

그 놀라운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슬란은 대륙을 정복해 최강의 1인자가 되기보다는,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시 감히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신성하고 엄청난 '무언가'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카르만도 더는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빛의 증표에 어울리지 않는 사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어쩌면 빛의 증표는 그 어떠한 사심도 없이 정의롭게 그 힘을 쓸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것은 아닐까?

112화

0.01초 소드마스터 112화

깊은 밤.

달과 별들의 빛을 의지하여 이 어두운 밤을 보내야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여기 사람들은 양손으로 신성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램프를 들고 다니며 한자리에 모였다.

"오늘도 많은 분이 오셨군요."

이윽고 그들 앞에 아론이 걸어 나왔다.

"이 대륙의 평화와 빛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한 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론 역시 신성한 빛을 밝게 내뿜고 있는 램프를 들고 있었다.

"이 램프를 보십시오. 이번 검의 원탁 때문에 처음으로 일라이 왕국에 오신 분들에게는 이 램프가 굉장히 생소해 보일 수 있습니다. 다른 램프들과 달리, 이건 기름을 이용하거나, 혹은 촛대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신성한 빛이 이 안에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죠."

아론은 램프의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여 주었다.

"이곳에는 바로 성수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그 성수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성스러운 물입니다. 그리고 이 성수를 만들어내신 분은 우리가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섬기는 아슬란 님이 만드신 겁니다."

이 램프에서 나오는 불은 성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램프를 개발한 건 바로 라파엘이었다.

성수로 성스러운 불을 일으키는, 참으로 신비한 램프였다.

"오오······."

"과연······."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아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에서 나눠 준 램프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아슬란 님께서는 하늘이 인정한 예언된 존재이자 이 대륙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단 한번도 그 사실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떠벌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겸손함은 저 바다보다도 깊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 백성들을 사랑하고 아끼시는 마음처럼 말이지요."

아론이 애끓는 목소리로 말하자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도 감명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분께서 분노하시면 그 힘은 가히 하늘을 떨게 할 정도입니다. 그분이 내디디는 발걸음마다 땅이 갈라지고, 그분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창공이 열립니다. 그렇게 위대하고 대단하신 분께서 오늘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이름 아래 모인 자들은 절대 파멸되지 않을 것임을."

"오오······."

"그런 말씀을······."

아론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이 군중에게 숨기지 않고 말해 주었다.

"그분의 힘이라면 모든 왕국을 무릎 꿇리고, 그들의 군사력을 파괴하며, 백성들의 터를 충분히 재로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힘을 쓰기보다는 따뜻한 대화를 먼저 청하셨고, 따뜻한 손길을 먼저 베푸셨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악에서 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

아론은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이며 울먹거렸다.

"아슬란 님께서는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왕궁은 여전히 보잘것없이 낡았지만, 이곳 일라이 왕국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새것으로 바뀌었고,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오늘도 저 춥고 낡아 빠진 왕궁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허어-"

"어찌 그런······!"

"지금이라도 새로운 왕궁을 건설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옳소!"

격해진 군중의 반응에 아론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여러 차례 건의를 올렸지만, 그분께서는 한번도 윤허를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도 그러시겠지요. 한 푼이라도 더 백성들을 위해 쓰고자 말입니다."

"아아-"

"과연 성군이시구나······."

그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하나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 일라이 왕국 출신 말고도 다른 왕국 분들이 많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아슬란 국왕께서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으신 분입니다. 오직 이 대륙과 이 대륙에 있는 백성들만을 생각하시는 분임을 오늘 꼭 알아 가셨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아론은 앞에 있던 잔을 들었다.

"자, 모두 잔을 듭시다."

군중들도 램프를 내려놓고 잔을 높이 들었다.

"빛을 위하여."

그의 말에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아슬란 님을 위하여!"

그러고는 잔에 담긴 성수를 한번에 들이켰다.

"오늘 밤도 이렇게 모여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2부에서 뵙겠습니다. 오늘도 빛의 따뜻함과 아슬란 님의 용맹함이 당신들과 함께하기를."

"와아아-!!"

성 전체가 떠나갈 것만 같은 군중의 함성소리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기도회라는 것이군."

"예. 한번 기도회가 열릴 때마다 수십 만의 인파가 몰린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다른 왕국에서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올 정도로 그 인기가 엄청 나다고 들었습니다."

엘버스테인은 램프를 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웃음꽃이 활짝 핀 어른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교단에서는 딱히 제재를 안 하는 건가?"

"무려 교단의 교황이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습니까? 교황마저도 인정하는 기도회를 어떻게 교단이 탄압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구나. 아론, 그가 참으로 뜻깊은 모임을 만들어냈어."

아론이 처음으로 주최했던 이 기도회는 시간이 갈수록 그 위세가 커져 지금은 수십만 명의 신도들이 모이고 타 왕국에서 이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올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했다.

항상 이야기로만 듣던 기도회를 직접 참석한 엘버스테인은 왜 이것이 그토록 인기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슬란의 뛰어난 무용담과 그가 얼마나 백성을 아끼는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신앙심이 더욱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우리 왕국 백성들도 이 기도회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하거라."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엘버스테인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다 문득 저 뒤편에 보이는 왕국을 바라보게 되었다.

"일라이 왕국은 이토록 휘황찬란하게 바뀌었는데, 어찌 왕궁은 저리도 낡게 두시는 건지.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다. 아론의 말대로 백성들을 위해서만 돈을 쓰시겠다는 건가?"

엘버스테인도 한 나라를 이끄는 국왕이기에, 오직 백성들만을 위해 돈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오늘도 내가 얼마나 부족한 왕인지 깨닫고 가는구나."

그 역시 왕국에서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왕이었지만, 그는 항상 아슬란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부족함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매번 다짐한다.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는 아슬란을 닮아 가겠다고 말이다.

"우리도 얼른 2부 기도회에 참여하도록 하지."

"예, 왕이시여."

2부 기도회로 향하는 엘버스테인의 발걸음은 무척 가볍고 즐거웠다.

* * *

"흐음- 그래. 이 맛이야."

나는 의자에 푹 기대어 앉아 시원한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역시 마법 마사지가 최고라니깐."

이 의자에는 안마 기능이 마법으로 걸려 있어 밤마다 이렇게 마사지를 받는 게 최고의 낙이었다.

이렇게 안마를 받고 난 뒤에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으면 잠이 솔솔 온다.

"역시 돈은 딱 내 침소에만 쓰길 잘했다."

신하들은 몇 번이나 내가 왕궁을 리모델링해서 싹 바꾸자는 제안을 올렸다.

하지만 난 알고 있지 않은가.

왕궁을 리모델링 하는 데에 들어가는 돈이 엄청 나다는 것을 말이다.

그 돈이면 차라리 성을 하나 새로 짓는 게 나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낡은 곳에 생활할 생각은 없는 터라, 내가 지내는 이곳 침소와 집무실 안에 있는 가구들을 바꿔 놓았다.

"여긴 요리도 잘하지, 편의 시설도 잘되어 있지, 이 정도면 뭐 극락이지."

뉴튜브를 볼 수 있는 핸드폰만 있으면 딱인데, 그게 참 아쉬웠다.

"오늘도 한고비를 잘 넘겼으니, 쉴 자격이 있다."

오늘 최종 합의가 끝났다.

왕국끼리의 전쟁이 당분간 금지되고, 악마가 출몰하는 곳은 서로 도와 막아 내기로 말이다.

즉,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왕국이 연합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맹주는 바로 나였다.

"카르만이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는데."

어디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인지, 카르만은 순순히 이를 따랐고, 다른 왕국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이제 막아 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악마들을 다 막아 낸 이후에는 어떡하지?

그래도 게임이 안 끝나 버리면······?

"지금은 그런 생각하지 말자."

일단 놈들을 막아 내는 것이 중요하니까.

쿵-! 쿠쿵-!

그런데 그때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와 내 단잠을 깨웠다.

"이게 뭔 소리야?"

아론이 또 그 이상한 기도회를 열어 폭죽놀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소리가 가까웠다.

"왕이시여!"

그때 기사 하나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치, 침입자입니다! 누군가가 무단으로 왕궁을 침입해 지금 레드 드래곤 플레임과 싸우고 있습니다!"

"······뭐?"

아니. 세상 어떤 미친놈이 우리 왕궁에 침입해서 레드 드래곤이랑 싸우고 있는 거지?

나는 그 미친놈 면상을 보기 위해 천상의 눈동자를 켰다.

황금 불길의 눈동자가 왕궁 위로 만들어지면서 바깥 상황이 내게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직도 팔팔하구나, 늙은 마녀."

"건방진 놈. 그 긴 혓바닥을 오늘 내가 뽑아 주마."

엘티히와 레드 드래곤 플레임이 마법으로 지옥도를 펼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둘 다 뭐 하는 짓이지?"

전장의 포효가 담긴 목소리에 둘의 움직임이 멈췄다.

"윽-!"

"큭-! 어, 어떻게······."

두 놈 모두 몸을 떨며 마법의 힘으로 버티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감히 내 왕궁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그 말에 레드 드래곤이 억울하다는 듯 먼저 말했다.

"아니, 나는 그냥 평소처럼 맛있는 걸 먹고 있었을 뿐인데, 다짜고짜 이 늙은 아줌마가 나타나서 나를······."

"아줌마? 네가 정녕 오늘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나는 또 흥분하려 드는 엘티히를 진정시켰다.

"엘티히. 아무래도 나와 볼 일이 있어서 온 거 같은데, 그만 소란피우고 이쪽으로 오너라."

"······쯧."

엘티히는 두 손 가득 머금고 있던 마력을 푼 뒤 레드 드래곤을 힐끔 노려보았다.

"넌 이따 두고 보자."

"흥,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래도 둘 다 오래 살았다 보니, 서로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물론, 좋은 사이인 거 같진 않았다.

나는 얼마 안 있어 내 침소로 들어온 엘티히를 맞이했다.

"내 왕궁에서 허락도 없이 마법을 쓰다니. 무례하구나, 엘티히."

"그건······. 내가 미안하게 됐다."

엘티히는 자리에 앉으며 날 슬쩍 쳐다보았다.

"왜 그러지?"

"방금 그건 무엇이었느냐? 그 기이한 눈동자와 목소리. 몸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더군."

"그저 잡기술일 뿐이다."

"엘프의 여왕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고작 잡기술이라. 정말 너는 인간이 맞는지 가끔은 의심스럽구나. 레드 드래곤의 행동을 보아하니, 그놈은 여기서 네 애완동물 역할을 하는 거 같던데. 대체 어떤 인간이 드래곤을 애완동물로 삼는단 말이냐?"

"······여기 온 이유가 뭔지 얘기나 해라, 엘티히."

"내가 꼭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처럼 얘기하는군."

그 말에 나는 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

"야밤에 여인이 남자의 침소에 찾아왔다는 건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한 일이긴 하지."

"!?"

그러자 엘티히가 격분하듯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냐!"

"별 뜻은 없다. 사람들이 그렇게 본다는 거지."

"이,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그럴 의도로 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왠지 엘티히의 얼굴에 홍조가 끼는 것 같았다.

"흠흠. 오늘 네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것이다. 내 수하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건,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얘기이기 때문이지. 최근에 네가 빛의 증표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빛의 증표를 받으니, 엘티히가 왔다라.

나는 그녀가 왜 왔는지 알고 있었다.

이것 역시 스토리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 잘 알고 있군."

"그것 때문에 내가 여기 온 것이다. 빛의 증표가 나타났다는 건, 이 대륙에 큰 위기가 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거든. 그리고 이날을 위해 오래 전 준비했던 것이 있지. 오직 이 대륙에서 소수의 인물만 알고 있는······."

난 잔에 술을 천천히 따르며 엘티히의 말을 끊었다.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알고 있다, 엘티히."

"그래? 아니. 넌 모를 거다."

"라일라칸 때문 아닌가?"

그 말에 엘티히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그, 그걸 대체 어, 어떻게······."

"저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는 라일라칸을 깨우기 위해 날 찾아왔다는 걸 알고 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라일라칸의 후손들조차 모르는 일이다. 대체 너란 놈은······."

당연하지.

내가 이 게임을 얼마나 질리도록 플레이했는데.

빛의 증표를 받으면 일어나는 이벤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라일라칸의 부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잠들어 있는 라일라칸을 깨우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들끓어 오르는 내 허세가 그걸 곧이곧대로 얘기해 줄 리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며, 또한 모든 것을 깨닫는다. 이 대륙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거라 보느냐?"

"······."

엘티히는 말없이 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심취하면서 나는 술잔을 들이켰다.

'라일라칸. 드디어 네가 나올 때가 됐구나.'

게임 설정상 이 대륙 최강자를 뽑으라고 한다면 카르만을 먼저 뽑겠지만, 라일라칸이 깨어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의 특성은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대륙에 그보다 강한 자는 없기 때문이다.

113화

0.01초 소드마스터 113화

[라일라칸]

300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대륙 최강자라 불리는 사나이.

악마와의 대전쟁이 끝난 뒤, 그는 거의 신처럼 수많은 이들에게 떠받들어졌지만, 그 역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얼마 안 가 사망하고 만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빛의 예언이 있은 뒤, 라일라칸이 자발적으로 후일을 대비하고자 했음을 난 알고 있다."

"그게 의문이라는 것이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것이냐? 라일라칸의 후손이라는 저 카르만도 그 일을 모르고 있을 터인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래. 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했지.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는······. 더 캐묻지 않겠다."

당연히 모를 수가 없지.

라일라칸의 부활은 이 대륙에 있어서 엄청난 사건이니.

"라일라칸이 잠들어 있는 곳이 어딘지도 넌 알고 있겠구나."

"아스렐 섬에 있지 않느냐?"

"그래. 라일라칸의 무덤이 있는 곳이지. 그곳에서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

라일라칸은 최강자이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웃긴 캐릭터였다.

대전쟁이 끝난 뒤, 라할에게서 내려온 예언서를 받은 교단은 또 다시 악마가 침공할 것임을 예고했고, 그 당시 전쟁을 막았던 영웅들은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결론은 먼 훗날을 대비해 이 대륙 최고의 무기를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라일라칸은 스스럼 없이 자원했다. 자신이 몇백 년이든 잠이 들어 훗날 위기에 빠진 대륙을 구하겠다고 말이야."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라일라칸이 대륙을 사랑하는 마음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고 생각하겠지만.

'게임을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

사실은 다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오직 이 세계에서 라일라칸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

자신 이외에 이 세상에는 강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특성이다.

그렇기에 그는 한때 대륙의 모든 왕을 자신의 아래로 생각했고, 심지어 악마들도 자신의 아래라 생각했으며, 천계의 있는 자들도 자신의 아래로 여겼다.

오만함의 극치를 달리는 인물.

어디서 많이 본 인물이지 않은가?

'그런 건 아슬란이랑 비슷하지. 아니. 똑같다고 해야 하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슬란은 허세를 부리는 것이고, 라일라칸은 진짜 자신의 힘에 취해 오만함을 부린다는 것이다.

쥐뿔도 없는 아슬란에 비하면, 라일라칸은 정말로 자신의 말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특성에 걸맞게 수많은 사기적인 특성들이 한 데 집약되어 있는 놈이 바로 라일라칸이었다.

오히려 주인공 알렉산더보다 라일라칸의 특성이 더 좋으며, 그 어떤 캐릭터로 플레이를 해도 라일라칸은 절대 이길 수가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완전 게임 설정인 거지.'

이 대륙에서는 일대일로 라일라칸을 이길 수 있는 자가 없다.

그것이 바로 이 게임의 설정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을 수월하게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라일라칸의 존재가 꼭 필요했고, 그를 통해서 바빌론들을 잡고 나아가 악마들의 왕이라는 레메게톤을 죽여야 한다. 그는 이 게임 스토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이라는 것.

'그러니까 무조건 깨워야지.'

놈을 깨워서 골수까지 털어먹을 생각이다.

앞으로 맞부딪히게 될 강적이란 강적은 전부 라일라칸에게 몰아주면 된다.

어차피 오만함에 극치를 달리고, 자신보다 강한 적을 용납하지 않으며, 명예에 심취하는 놈이라 그런 싸움을 무척 좋아한다.

'제발 그만 좀 싸우고 싶다고 빌 때까지 싸우게 해주마.'

* * *

칼라 왕국의 함대가 항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상징적인 푸른 깃발이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고, 화창한 날씨가 오늘은 순항하게 될 것을 알려 주었다.

'라일라칸······. 그분이 살아 계셨다니.'

카르만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엘티히와 아슬란이 나타나 라일라칸에 대해 얘기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믿지 않았다.

이미 30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 사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대륙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잠들어 있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국에 있던 고대 서적을 뒤지고 나서야 그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렇게 라일라칸의 무덤으로 가고자 함대를 준비시킨 것이었다.

그의 무덤은 이 바다 너머에 있는 아스렐 섬에 있기 때문이다.

"카르만."

"왔군."

아슬란과 그의 호위 기사들.

그리고 엘티히가 이곳 칼라 왕국 항구에 당도했다.

"쓸데없이 함대를 많이도 준비했구나."

"가장 위대하신 선조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 정도의 예우는 차려야겠지."

수십 척의 함대.

수만 명의 군사.

이번 출정으로 칼라 왕국의 위엄을 온 대륙에 보여 주며, 동시에 라일라칸에게 얼마나 로크 가문이 막강해졌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너희들이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함선들을 골라 놓았으니, 타거라."

"그러지."

아슬란은 꽤 여러 기사를 데리고 왔다.

하지만 그중 눈에 띄는 건,

'어린아이?'

한 아이가 아슬란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인가?'

그러기에는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카르만은 금방 신경을 끊었다.

"그럼 출발한다."

"예!!"

모두 배에 올라탄 뒤, 카르만의 명령에 함선들이 돛을 높이 올리며 출항을 시작했다.

빠르게 물살을 가르면서 함대가 나아가니, 그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순풍이 불고 있으며, 바다도 매우 잔잔합니다. 오늘은 아주 훌륭한 항해가 될 것 같습니다, 왕이시여."

항해는 무척 순조로웠다.

무려 칼라 왕국의 함대가 바다를 가르고 있으니, 해적들은 감히 그 주변으로 얼씬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게 가면 금방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전망하던 중.

"음?"

"엇."

배 위로 휜 눈이 송송 내리기 시작했다.

"눈?"

"아니. 이 날씨에 눈이 온다고?"

그 광경은 무척 아름다웠으나, 기이했다.

이 따뜻한 계절에 어떻게 눈이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내리게 하는 것이 분명했다.

"······."

카르만 역시 자신의 손아귀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꽉 쥐며 하늘을 살펴보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아름답고 화창했던 날씨가 금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또한 그 안에서 불길한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이윽고,

"크롸라라라라-!!"

낙뢰가 내려치면서 바다가 흔들리고, 그 위로 두 날개를 넓게 뻗은 드래곤이 괴성을 질러댔다.

"으, 으아아악!"

"드, 드래곤! 드래곤이다!!"

온몸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고, 그 눈동자는 핏물보다 진했다.

아이스 드래곤, 프렐리온!

그 위험천만한 존재가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아, 아니. 대체 드래곤이 왜 이런 곳에!"

드래곤은 자신의 레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으며, 특히 바닷가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어찌된 경우인지 프렐리온이 바다 위에서 나타나 무서운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궁병 앞으로! 마법병도 준비하라!"

그러나 심하게 출렁이는 파도와 휘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그들은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더군다나 드래곤의 출현에 모두 우왕좌왕 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때 드래곤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감히 나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모두 이곳에서 영원한 얼음이 되어 죽을 것이다.]

그 목소리에 담긴 드래곤 피어가 더욱 병사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에 지지 않고 카르만이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동요하지 마라. 우리 칼라 왕국의 함대를 막는 것은 그 누구라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맞서 싸워라!"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제아무리 왕의 목소리라고 해도 이렇게 파도가 출렁이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에 모자라 드래곤까지 앞에 있다면 누구라도 정신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래곤은 이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가만있지도 않았다.

콰아아아-!!

"으아아악!!"

혹한의 브레스가 몰아치면서 함선이 얼어 버리고, 그 위에 있던 병사들 역시 기괴한 모습으로 얼어붙었다.

드래곤의 날갯짓에 얼음 송곳들이 날아 들어가 병사들의 몸을 뚫었으며, 그 위로 쏟아지는 거대한 고드름은 함선을 파괴시키기에 이르렀다.

"막아라!!"

"마법병들은 얼른 마법을 펼쳐 얼음을 녹여라!"

"하, 하지만 파도가 너무 거칠어 마법을 쓸 수가······으아악!"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혹한의 혼돈.

천하무적이라 자부하던 칼라 왕국의 함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침몰하고 있었다.

"크롸라라라-!!"

또 다시 들려오는 드래곤의 포효 소리.

그런데 이건 아이스 드래곤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

아이스 드래곤과 비슷한 덩치의 레드 드래곤이 괴성을 지르며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 으아아아!"

"또, 또 다른 드래곤이다!"

"이, 이게 대체!"

한 마리의 드래곤을 만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건만, 무려 두 마리의 드래곤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레드 드래곤은 인간을 공격하지 않고 아이스 드래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하늘 아래 두 개의 제왕은 없다는 듯이 말이다.

콰아아아-!!

두 마리의 드래곤이 거친 파도 위에서 서로를 향해 날개를 휘두르고 브레스를 날리며 지옥도를 펼쳤다.

그 덕분에 주변에 있던 배들이 파괴되는 중이었고, 파도는 더욱 거칠게 몰아쳐댔다.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

하지만 아이스 드래곤이 지형적으로 너무나 유리했다.

[감히 인간을 돕다니!]

프렐리온이 일으키는 마법에 반응하여 파도가 소용돌이치면서 거대한 회오리가 레드 드래곤을 덮쳤다.

"크롸롸라-!"

레드 드래곤이 물보라에 갇혀 저 바다 깊은 곳에 끌려가고 있을 때,

"어딜!"

퍼엉-! 퍼펑-!!

이번에는 엘티히가 나서서 아이스 드래곤을 저지하려 들었다.

그녀의 강력한 마법이 연달아 프렐리온을 공격했지만-

[이 물 위에서 고작 마법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엘프여!]

최강의 마법사라는 엘티히조차 지형적으로 유리한 프렐리온의 힘을 막아내긴 버거워 보였다.

결국 그녀도 프렐리온이 쏘아대는 브레스에 저 먼발치까지 날아가 그 생사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카르만은 어떻게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직접 찾아올 필요도 없다는 듯,

[네가 이들의 대장인가?]

프렐리온은 이 함선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꾸며진 카르만의 함선 위로 올라왔다.

"와, 왕이시여!"

"피하십시오!"

기사들이 소리치며 카르만을 지키고자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프렐리온은 씨익 웃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윽!"

"모, 몸이······!"

프렐리온이 내뿜는 드래곤 피어에 그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여. 너희가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 이미 죽은 목숨이다.]

프렐리온의 웃음소리가 낙뢰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지?'

카르만은 잠시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이제 칼을 뽑을 수 있는 건 자신 혼자뿐.

저 드래곤을 죽인다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리라.

스르릉-

칼은 뽑았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역시 드래곤 피어에 노출되어 발밑부터 몸이 얼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용없는 짓이다. 내 피어를 마주하는 생명체는 모두 영원한 얼음이 되어 버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만은 불굴의 정신으로 칼을 높이 들며 힘을 끌어모았다.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을 저 드래곤에게 날리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힘은?"

드래곤은 카르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놈이 바라보는 곳은 카르만이 아닌, 저 옆에 있는 다른 함선이었다.

프렐리온은 곧 카르만에게서 흥미를 잃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함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슬란?"

이 혼돈 와중에도 꼿꼿하게 망토를 펄럭이고 있던 아슬란이 있었다.

* * *

'시, 시방. 이게 대체 뭔 일이여.'

따스한 햇살과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항해를 나아가던 중,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갑자기 아이스 드래곤이 출현했다.

난이도가 극악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는 몰라도 하필이면 최악의 위치에서 최악의 상대를 만나고 말았다.

'온통 물밖에 없는 곳에서 아이스 드래곤이라니!'

이미 최강인 놈에게 최강의 무기까지 건네준 꼴이었다.

그로 인해 레드 드래곤조차 제대로 상대를 못 하고 저 밑에 수장되고 말았다.

'이럴 때 밥값 하라고 데려왔던 놈인데, 몇 대 때리지도 못하고 당하다니.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엘티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마법 역시 아이스 드래곤의 지형적 유리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아니.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물보라에 휘말려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

'엘티히도 늙었구나.'

물론, 젊은 엘티히가 왔었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이 바다 위에서만큼은 프렐리온이 가히 최강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어떡하지?'

때마침 드래곤은 저 대장 함선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라도 여기서 탈출을 하면 되지 않을까?

내게는 공간 이동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장소를 상상만 한다면 금방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있다.

문제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놔두고 가야 한다는 거잖아.'

아론, 알렉산더, 하리엘, 레바노스 등등.

내가 가진 최고의 네임드들을 전부 버려야만 한다.

'그래도 자기 앞가림은 알아서 잘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공간 이동을 써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쿠웅-!!

얼어붙은 바다 위에 더 이상 출렁이지 않던 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뒤에서 불길한 시선이 느껴졌다.

"와, 왕이시여!"

"저, 저런!"

부하들은 까무러치게 놀란 얼굴로 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거기서 난 직감했다.

프렐리온 이놈이 기어코 내 쪽으로 왔구나.

카르만 그놈은 뭘 하고 있기에 이놈을 붙잡아 놓지도 않고 있었던 거야?

[네놈이로구나, 인간. 너에게서 라할의 냄새가 난다. 그 역겹고도 가증스러운 힘의 냄새가 말이다.]

드래곤의 음성이 고막을 찢어발겨 놓는 것만 같았다.

또한 놈이 내뿜는 피어가 배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고 대항을 하고자 칼을 뽑아 든 내 부하들을 열려 놓고 있었다.

"아, 아슬란 님."

"피, 피하십······."

이미 몸 절반 이상이 얼어붙어 버린 아론과 알렉산더가 침통한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들 말대로 더 늦기 전에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신기하군.]

"······?"

[네놈 부하들처럼 너도 지금쯤 몸이 얼어 버려야 하는데, 왜 멀쩡한 거지?]

그거야 당연히 신성한 보호가 나를 몇 초 동안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꺼지면 수호의 방패를 켜지 않는 이상 나도 똑같이 얼어 죽을 것이다.

[역시 냄새가 난다 했더니, 기이한 힘을 가졌구나, 인간.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너 역시 이곳에서 죽는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바로 그때였다.

"건방지구나."

드래곤의 음성이 냉기에 얼어붙어 있던 내 허세를 일깨운 것이 말이다.

나는 천천히 등을 지고 있던 몸을 놈의 앞으로 돌렸다.

내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드래곤의 몸통과 두 다리였다.

"미물 따위가 감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니."

드래곤은 그 말이 웃겼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 크크크. 미물이라고 했느냐? 재밌는 놈이로군.]

나는 놈의 말을 무시하며 천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내려와라."

놈의 두 다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

그러자 앞으로 세차게 뻗어 나간 검강이 놈의 툭 튀어나온 배를 자르고 그 아래 있던 두 다리를 잘라 버렸다.

쿠웅-!!

[크헉!]

놈이 신음을 터트리며 철푸덕 배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 머리가 내 발 앞으로 떨어지면서 바닥이 움푹 내려앉았다.

나는 놈의 머리 위로 발을 올린 뒤, 흔들리는 놈의 붉은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올바른 눈높이가 되었구나, 미물이여."

114화

0.01초 소드마스터 114화

"······."

아직 파괴되지 않은 함선 위에서 모두가 바라보고 있었다.

거칠게 파도를 흔들던 폭풍우가 사라지고, 휘날리던 눈보라가 멎는 것을.

그리고 그 가운데-

[이, 이럴 수가. 어, 어떻게······.]

인간이 드래곤을 베고 그것의 머리를 밟은 채 서 있었다.

[가, 감히······. 인간 따위가······.]

하지만 아이스 드래곤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것의 분노를 보여 주듯, 사라졌던 폭풍우가 다시 몰아치려 하고 있으며, 잔잔해졌던 파도 역시 출렁이기 시작했다.

또한 휘날리는 눈보라는 일격에 베여 나간 아이스 드래곤의 배와 다리를 재생시키고 있었다.

[만물의 지배자이며, 하늘을 다스리는 제왕인 나 드래곤을 짓밟다니!]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뼈가 시리고 피부가 썰려 나갈 것만 같은 혹한의 분노가 느껴졌으며, 그것이 사방을 얼려 놓고 있었다.

그 위를 밟고 있는 아슬란의 발과 그 몸도 다 함께 얼음으로 만들려는 찰나.

"건방지구나."

콰직-!!

[크헉!]

아슬란의 발이 일어나려 하던 아이스 드래곤을 강하게 짓누르며 저 바다 밑바닥에 처박았다. 그로 인해 함선은 반 토막이 나 버렸다.

"누가 허락도 없이 감히 일어나라고 했지?"

아이스 드래곤, 프렐리온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늘의 제왕이며, 만물 위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는 것이 바로 드래곤이다.

불멸의 인생을 살면서,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감히 자신의 몸에 흠집조차 내지 못한 것이 바로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이 사내는, 자신의 몸을 칼로 가르고, 그 머리를 발로 짓밟아 버렸다.

이 치욕은 그 어디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 따위가 감히 이 몸을-!!]

그 치욕과 분노가 한 데 아우러져 폭발했다.

프렐리온은 저 바다 밑바닥까지 처박힌 몸을 일으키며 아가리를 벌렸다.

이대로 브레스를 날려 아직 저곳에 있는 건방진 인간의 몸을 얼려 버리고, 그 몸뚱이를 통째로 씹어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크롸라라라-!!

"!?"

쭉 뻗어 나가는 프렐리온 옆으로 붉은 불길이 일렁였다.

그리고 우렁찬 포효와 함께 레드 드래곤, 플레임이 나타났다.

콰직-!

플레임은 그대로 프렐리온의 목을 물어 버렸다.

[크아아악!]

몸부림을 쳐봤지만, 플레임은 절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이대로 숨통을 끊어 버리겠다는 그 의지가 여실히 전해졌다.

[이, 이놈이!]

프렐리온은 플레임과 함께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요동치는 그의 힘이 사방에 눈보라를 일으켰고, 사람들은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저 기괴하게 울려 퍼지는 드래곤의 울음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그리고 프렐리온은,

[······.]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초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슬란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프렐리온은 난생처음 죽음의 공포라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럴 수는······.]

아슬란은 천천히 검을 들었다.

"하늘을 어지럽히는 미물이여."

그 검끝은 프렐리온의 이마에 숨겨져 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푸른 보석으로 향했다.

"이제 사라져라."

푸욱-! 콰직-!

그 보석을 깨뜨리며 칼이 프렐리온의 이마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프렐리온의 숨통을 끊진 못했다.

"고작 인간의 검으로 이 몸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음흉한 웃음 소리를 내며 프렐리온은 입가에 브레스를 모았다.

그러나,

"알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드래곤을 죽이기 어렵다는 것을."

아슬란은 냉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힘이라면 말이지."

"······뭐?"

그리고 그가 검을 비트는 순간.

콰아아아-!!

드래곤 안에 있던 그 넘칠 듯한 힘과 생명력이 아슬란의 검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 지금 무슨 짓을-!"

"잘 보아라, 미물이여. 이것이 바로 네가 무시하던 인간의 힘이다."

발버둥을 치며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플레임이 목덜미를 강하게 붙들고 있어 빠져 나가지도 못하는 프렐리온이었다.

"크, 크아아악!! 안 돼!!"

그렇게 프렐리온에게 있던 힘이 전부 사라지면서 그곳에 남은 건 그저 얼어 있는 껍데기뿐이었다.

쿠웅-!!

플레임이 입을 열면서 빈 껍데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혹한의 제왕이라 불렸던 아이스 드래곤, 프렐리온.

영원불멸이라 여겨졌던 드래곤의 죽음은 플레임이게도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드래곤이 다른 드래곤을 죽이는 것도 무척 어려운데, 고작 인간이 드래곤을 죽일 줄이야.

플레임은 힐끔 아슬란을 쳐다보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왜 그러지?"

[흠흠.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방의 시야를 가로 막던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플레임은 어느새 아이의 몸으로 돌아왔다.

"끄응. 하필이면 싸워도 놈한테 유리한 바다 위에서 싸우는 통에 죽을 뻔했군."

하늘에서 싸웠다면 지금과는 결과가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 위라는 것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런데도 아슬란이 저놈을 쓰러뜨렸단 말이지.

"한 가지만 묻겠다, 아슬란. 대체 아이스 드래곤을 어떻게 죽인 거지? 드래곤은, 특히 아이스 드래곤은 이 바다 위에서 끊임없이 몸을 재생시킬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이건······."

기이한 일이었다.

아무리 아슬란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드래곤의 숨통을 이렇게 한번에 끊어 놓을 순 없다.

하지만 그 물음에 아슬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저 잡기술일 뿐이다."

"······."

무려 드래곤을 죽였는데, 그것이 잡기술이란 말인가.

그 당당함에 피식 웃음을 흘러나왔다.

"그래, 네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 상대가 아슬란이라면 왜인지 이해가 갔다.

저 사내는 매번 상상을 초월하는 힘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니까.

콰콰쾅-!!

"아니. 이번에는 또 뭐야."

파도가 출렁이는 폭발음에 플레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윽고 앙칼진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나와라, 드래곤! 이곳에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응?"

온몸에 날카로운 마력을 일렁이고 있던 엘티히는 눈을 껌뻑이며 함선 위로 천천히 내려왔다.

"이게 무슨······. 설마 드래곤을 네가 죽인 것이냐, 아슬란?"

엘티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빈 껍데기만 남은 드래곤의 몸통과 아슬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늦었군.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다, 엘티히."

"도, 도망이라니! 이놈이 내게 뿌려댄 더러운 마력을 떨쳐 내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놈을 죽인 네가 이상한 거라고."

말을 해 놓고도 이상했다.

아이스 드래곤에게 강한 공격을 맞긴 했으나, 엘티히는 금방 회복하고 여기까지 날아왔다. 그런데 그사이에 벌써 아슬란이 저놈을 죽였단 말인가.

"대체 너란 인간은······."

이 대륙 역사상 인간이 드래곤을 죽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아니. 그 어떤 종족도 드래곤에게 상처를 입힌 적은 있어도, 그것을 사냥하는 데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그 위대한 업적을 저 아슬란이 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슬란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망토를 펄럭이며 제 부하들에게 다가갔다.

"와, 왕이시여."

"몸은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아이스 드래곤이 죽자, 혹한의 속박에서 벗어난 그의 부하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다른 함선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얼어붙어 버린 몸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았다.

"일라이 왕국의 기사라는 자들이 이런 거 하나 버티지 못해서야."

"소, 송구합니다."

"다음에는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예!"

상대는 무려 드래곤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천운인 셈.

그런데도 각박한 아슬란의 태도에 엘티히는 혀를 내둘렀다.

저것이 단 한 번도 약자로 지내본 적이 없는 강자의 마음이라는 것일까?

* * *

"카, 카르만 님.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카르만과 그의 부하들은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다.

아이스 드래곤이 갑작스레 나타난 것도 그렇고, 저 아슬란이 드래곤을 쓰렸다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이 봤던 것이라고는 길길이 날뛰던 아이스 드래곤이 아슬란의 검에 의해 쓰러졌고, 그 머리를 짓밟혔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몰아친 눈보라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보라가 걷힌 뒤에야 아이스 드래곤의 시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아슬란이 드래곤을 죽인 것입니까?"

"······그래. 그런 것 같군."

"그,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아슬란은 대륙 역사상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입니다!"

드래곤 슬레이어.

늘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으나,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하고,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업적.

그것을 아슬란이 이뤄냈다.

그런데도 저자는,

"······."

기뻐하는 기색이나, 흥분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항상 그렇듯 꼿꼿하고 기품 있게 서 있을 뿐이다.

'그릇부터가 다른 것인가.'

어쩌면 아슬란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붙든 말든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언제든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룰 수 있는 업적일 테니.

'이렇게 함대를 끌어모아 온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는군.'

이토록 많은 함선을 이끌고 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라일라칸에게 가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카르만은 아슬란에게 칼라 왕국의 힘을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이 일궈 낸 이 왕국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뼛속 깊이 깨달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너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가는구나.'

그러면 그럴수록 아슬란의 놀라운 힘만 깨달을 뿐이었다.

카르만은 왠지 입맛이 씁쓸하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대체 아슬란은 얼마나 강한 것일까?

* * *

'아오. 발 시려워.'

설마 동상이라도 걸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뭔 똥폼을 부리겠다고 갑자기 아이스 드래곤 머리 위로 발을 올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발이 꽁꽁 얼어붙어 잘려나갈 뻔했다.

'플레임이 나서 주지 않았으면 진짜 위험했다.'

아이스 드래곤을 찰나의 괴력으로 저 바다 밑까지 처박았으나, 놈은 금세 몸을 회복해 일어났다.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 플레임이 나서서 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줬고 덕분에 기회가 생겼다.

'드래곤도 마기 포식이 되는 건 처음 알았네.'

마기 포식자.

이 능력은 오직 악마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능력은 드래곤도 악마의 일종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인지, 아이스 드래곤의 힘을 전부 빨아들였다.

찰나의 괴력도 전부 다 써버리는 바람에 아이스 드래곤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몰랐는데, 다행히 마기 포식으로 놈을 없앨 수가 있었다.

'찰나의 괴력이 있었어도 죽이긴 힘들었을지도.'

드래곤의 생명력은 굉장히 높다.

대악마들과 마찬가지로 드래곤은 끝없이 몸을 재생시키고 아무리 짓밟아대도 살아난다. 그래서 이 게임을 플레이할 때, 아무리 스펙업을 해도 드래곤을 잡는 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 별의별 영웅들과 마법들을 다 써 가며 잡아야 한다.

'그런데 난 그걸 한번에 해냈단 말이지.'

이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시스템적 오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내가 개죽음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마기 포식을 하면서 얻은 것도 있었다.

[혹한의 룬]

그건 바로 아이스 드래곤의 힘이자, 그 원천이 되는 능력이었다.

"저기 섬이 보입니다!"

잠시 스킬창을 확인하고 있을 때, 어느덧 함선은 라일라칸이 묻혀 있다는 아스렐 섬 근처에 도착했다.

드디어 대륙 최강자를 마주할 때가 온 것이었다.

115화

0.01초 소드마스터 115화

"ᛤᛪᚸᚹᚺᚼᚾᛟᛯᛡ."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둠의 문자와 언어로 주문을 외우고 있던 악의 사제들.

그들은 용암이 철철 흐르는 뜨거운 지옥 구덩이에서 악마들을 한 데 모아 놓고 의식에 열중했다.

"ᚸᚹᚺᚼ!"

그리고 주문의 끝에 다다르자 땅이 흔들리면서 사방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 불길은 마법진이 그려진 가운데 서 있던 악마들을 집어삼켰다.

"캬오오오!!"

동료들이 불에 타들어 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동료 의식이라는 게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약하면 잡아 먹히고, 강자가 오로지 약자를 짓밟으며 통치하는 것이 바로 테키나 족속의 진리였다.

"그분께서 깨어나신다. 맞이하거라. 영원한 불꽃의 지배자를."

이 의식을 주도하던 제사장의 말에, 모여 있던 모든 악마가 괴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무언가가 울부짖으며 제단 바닥을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크오오오-!!"

불길이 기둥처럼 솟아오르고, 그 밖으로 검은 두 뿔이 머리 위에 날카롭게 솟아오른 악마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용암으로 이루어진 검이 들려 있었으며, 검게 그을린 살가죽에는 온통 뜨거운 불길로 가득했다.

"······."

한바탕 크게 괴성을 지르더니, 곧 잠잠해진 그에게 제사장이 다가갔다.

"우리의 지휘관이 되시며, 위대한 분을 섬기시는 바빌론이시여. 당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300년입니다. 단탈리온 님."

"300년?"

그 말에 단탈리온은 제사장의 목을 붙잡았다.

"컥! 다, 단탈리온 님!"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이 구덩이에 처박아 놓고 있었다는 것이냐!"

"소, 송구합니다. 하지만 단단했던 봉인이 깨진 것이 최근이라, 저희도 방법이······."

"이런 쓸모없는 것들."

단탈리온은 제사장을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내 힘은 완전하지가 않다. 이대로 싸운다면 300년 전과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겠지."

악마들이 그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내 심장은 자신들을 영웅이라 일컫는 자들에게 강탈당하여 이 대륙 어딘가에 숨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느껴진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너희는 그곳으로 가서 내 심장을 찾아오너라. 그럼, 다시 한번 우리 테키나 족속이 대륙을 불로 뒤덮어 놓게 될 것이다!"

"캬오오오-!!"

악마들은 한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이들 모두를 이끌 수 있는 지휘관이자, 레메게톤의 수족이라 불리는 바빌론 중 하나인 불의 악마, 단탈리온의 부활이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선조들께서 잠드신 이곳, 아스렐 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스렐 섬은 역대 칼라 왕국의 왕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이곳에 최초로 묻힌 사람이 바로 라일라칸이었다.

그래서 라일라칸의 정기를 느끼고자 성지 순례하듯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곳 아스렐 섬 바깥은 아이스 드래곤의 서식지입니다. 어느 날부터 놈이 아스렐 섬 주변에 레어를 만들어 지나가는 배마다 공격을 해댔지요."

그랬던가.

아스렐 섬이 언제부터 드래곤의 서식지가 되었던 거지.

한번도 이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다.

아스렐 섬의 책임자, 호리에드는 주변을 둘러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모두 무사히 도착하셨군요. 물론, 함대에 피해가 있긴 했겠으나, 목숨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역시 그 드래곤을 카르만 님께서 물리치신 거겠지요?"

"······."

누구도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호리에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호칭은 오직 카르만 님에게만 어울리는 칭호이니 말입니다!"

같은 '호'씨라서 그런가.

저 양반도 눈치가 더럽게 없다.

"음? 부, 분위기가 왜 이래?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겐가?"

"······들어가지."

카르만은 힐긋 호리에드를 노려본 뒤 부하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인사 명령이 어떻게 내려올지 벌써 빤히 보였다.

"오오-"

"과연 여기가······."

아스렐 섬 안쪽에 들어서자 우리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무덤은 그 어느 무덤과 비교하기를 거부할 정도로 웅장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300년 전, 대륙을 구한 기사들의 거대한 석상들이 만들어져 있고, 그들이 마치 지하에 있는 무덤을 방어하듯 나열되어 있었다.

다른 왕들의 무덤에 비해 그 크기부터가 압도적인 라일라칸의 무덤.

엘티히는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하여튼, 이놈은 죽은 다음에도 허영심으로 가득하구나. 뭐,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죽은 게 아니긴 하다만."

엘티히 말대로 자신의 위대함을 여실히 드러내고자 이렇게 무덤을 크게 지은 거라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이 무덤을 설계한 것도 라일라칸이니까.'

누군가가 라일라칸의 영광스러움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이 무덤을 만든 것이 아닌, 라일라칸이 스스로 봉인되기 전에 자기가 직접 설계에 참여하여 건설한 곳이라는 것이다.

"대륙의 최강자였으며, 그 위대함은 하늘을 떨게 할 정도였던 라일라칸 님을 경외하고자 왕들께서는 자신들의 무덤을 최대한 겸손하게 만드셨습니다."

라일라칸이 너무 크게 만들어 버린 탓도 있어서 칼라 왕국의 선조들도 나름 크게 만들긴 했지만, 그에 비교하면 작은 수준이었다.

계속 재잘재잘 설명을 해가며 우리를 안내하던 호리에드는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여기까지가 제 권한으로 안내해 드릴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입구부터는 철저히 출입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300년 동안 그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지요."

카르만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열어라."

"하지만 이곳은 라일라칸 님께서 출입을 금하신······."

"왕의 명령이다. 열어라."

"저도 왕의 명령을 따르고 싶으나, 이 문은 열쇠가 없습니다. 또한 아주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어 완력으로나, 마법으로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런 호리에드의 말에 카르만은 뒤를 바라보았다.

"누가 열어 보겠나?"

"저희가 열겠습니다!"

왕의 부름에 기사들이 나서서 각자 칼을 뽑았다.

그곳에는 소드마스터 미뉴엘도 있었다.

"흐아압-!"

그들은 우렁찬 포효와 함께 문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검들이 죄다 튕겨 나가면서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들은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며 문에 달려들었지만, 몇 번을 내리쳐도 문은 멀쩡했다. 대신, 그들의 손바닥만 찢어져 피가 나올 뿐이었다.

"마법은 마법으로 다스리면 될 일.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기사들이 안 되니, 이번에는 마법사들이 나섰다.

과연 인재풀이 짱짱한 칼라 왕국답게, 3명의 대마법사, 크라울리, 레비안, 티샤르가 나섰다.

"한번에 해보겠나? 아니면 각자?"

"나한테 맡기시게. 내가 단번에 열어 볼 테니."

크라울리는 마법진을 펼쳐 이 문에 새겨진 마법이 무엇인지부터 해독에 들어갔다.

그는 곧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했더니, 이렇게나 강력하고 난해한 마법들이 걸려 있을 줄이야."

"그 정도인가?"

"그래. 대체 얼마나 많은 마법이 고작 이 문 하나에 들어간 것인지 모르겠군."

"그만큼 라일라칸께서 아무도 들이기를 원치 않으셨던 거겠지."

사실은 그 반대였다.

누구도 들이기를 원치 않은 것이 아니라, 이 정도도 못 넘을 거면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라일라칸의 경고 같은 것이었다.

'대마법사 3명이 있어도 이 문은 못 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라일라칸이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이 좁은 통로에 이런 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즉, 마법으로 이 입구를 부숴 놓으려고 한다면 이 좁은 통로까지 폭삭 내려앉아 전부 다 함몰되어 버리게 설계를 해 놓았다는 것이다.

'파괴 마법으로 열려면 열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여기 통로가 무너지면서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생각보다 여기 여는 건 간단하잖아?'

이 문은 힘으로 열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엘티히만 있다면 이 문은 쉽게 열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다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이 바로 엘티히였기 때문이다.

엘티히와 더불어 여러 마법사가 만든 마법을 이 문에 걸어두었고, 그것을 열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엘티히 뿐이었다.

즉, 이곳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후손들보고 엿이나 먹으라는 라일라칸의 삐뚤어진 마음도 아주 조금은 있겠지만, 엘티히가 없으면 넘어올 자격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콰앙-! 콰쾅-!!

"그, 그만! 이러다 통로가 무너지겠다!"

마법 해독이 되지를 않으니, 냅다 파괴 마법을 갈겨 버린 대마법사 세 명은 통로가 지진 난 듯 흔들리자 마법을 멈췄다.

"후- 이걸 어떡하면 좋지?"

"파괴 마법을 무분별하게 썼다가는 통로가 무너질 것 같은데?"

"아무리 강한 파괴 마법을 써도 문이 열리지 않을 수도······."

그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나는 엘티히를 슬쩍 바라보았다.

과연 저것들이 어떻게 이 난관을 해쳐 갈지 지켜보는 재미라도 들린 것인지, 절대 앞으로 나서지를 않았다.

종국에는,

"정녕 방법이 없는가?"

"송구합니다. 너무나도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어 해독하는 데에 며칠이 걸릴 듯합니다."

"며칠?"

카르만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그는 칼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강력한 마법이라-"

그가 칼에 힘을 불어넣고 내리치는 순간.

콰직-! 콰콰콱-!!

문에 걸려 있는 봉인이 크게 스파크를 일으키며 튀어 올랐고, 통로는 파도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양옆으로 균열이 일면서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가는 통로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만. 이제 거기까지 하거라."

이러다 정말 다 무너지게 생기자, 보다 못한 엘티히가 나섰다.

"하여튼 인간들이란. 무조건 힘으로 몰아붙인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줄 아느냐?"

엘티히는 못마땅하다는 듯 카르만과 그의 부하들을 꾸짖었다.

"이 마법은 너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완력이나 파괴 마법으로 해제가 되지 않도록 내가 정말 강력한 마법을 이곳에다 심어 두었거든."

"이 봉인을 만든 것이 엘티히 여왕이란 말이오?"

"그래, 카르만. 네 힘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완력으로는 절대 이 문을 부술 수 없다. 너희 알량한 그 마법 실력으로도 말이지."

"······."

엘티히는 비웃음 젖은 입가로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문 앞에 걸어갔다.

거기까지 했으면 딱 알맞을 것을.

갑자기 엘티히가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슬란. 너라도 이 문을 부수기는 힘들 거다. 그만큼 정교한 마법이 들어간 문이거든."

그 말이 총의 방아쇠가 되어 잠잠해 있던 내 허세를 깨워 버리고 말았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뭐?"

나는 망토를 펄럭이며 엘티히 옆으로 다가갔다.

"이 세상 어떤 마법도 본좌의 힘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없다."

"자신만만하구나. 그럼 너도 카르만처럼 한번 도전을 해보려는 것이냐? 괜히 망신당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거라."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더욱 내 허세라는 불길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내가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닌, 네 마법이 내 힘에 도전하는 것이다."

"······?"

그리고 나는 냅다 문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그러자,

콰아아앙-!!

큰 굉음과 함께 문이 부서져 나가면서 막혀 있던 입구가 열렸다.

"······."

엘티히를 비롯해 이곳에 있던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뻥 뚫린 입구로 걸어가며 말했다.

"물론, 네 알량한 마법으로는 감히 내 힘을 버틸 수 없겠지만."

116화

0.01초 소드마스터 116화

부숴진 입구를 지나면 웅장한 라일라칸의 무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저 마법으로 떡칠된 입구를 무사히 열었다고 해서 안심할 순 없다.

이곳 무덤 곳곳에 함정이 설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무덤에 뭘 그리 숨길 게 많아서 이런 걸 설치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라일라칸의 무덤은 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수없이 와봤던 곳이라 어느 곳에 함정이 있는지 나는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 알고 있다고 해서 함정들을 돌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것들을 모조리 깨부술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함정을 돌파해 라일라칸을 만나러 갈 수가 있다.

'근데 왜 내가 앞장을 서고 있냐?'

어쩌다 보니 모양새가 그리 되었다.

엘티히가 가만 있던 나를 자극해서 허세가 날뛰는 바람에 문을 부숴 버리고 그대로앞장 서서 가게 된 것.

'이렇게 되면 함정을 내가 다 돌파해야 되는 거잖아?'

물론, 내가 직접 돌파할 생각은 없다.

내 뒤에 든든한 네임드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긴······.'

그때 눈앞에 보이는 긴 돌다리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왜냐하면 이곳이 첫 번째 함정이기 때문이다.

'중간 정도 가다가 갑자기 와르르 무너지는 곳이었지?'

이 함정이 악랄한 것이,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다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닌, 중간 정도 갔을 때 갑자기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이 다리가 무너지게 되면 저 끝이 보이지 않은 어둠의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왜 그러느냐, 아슬란?"

엘티히의 물음에 나는 꼿꼿하게 세운 허리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함정이다."

"뭐?"

"라일라칸은 꽤나 고약한 취미를 가지고 있군. 이런 같잖은 함정을 설치하다니."

"함정이 있다고?"

나는 다리 위로 발을 내디뎠다.

"잠깐. 함정이 있다면서 너는 왜······."

"그깟 함정이 날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

"그리고 이 함정은 바로 발동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거리를 지나야 발동이 되지."

내가 다리를 먼저 걸어 올라가자 내 부하들이 그 뒤를 따르려고 했다.

"너희도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오너라."

"아, 예."

그러면서 먼저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카르만 부하들이 나누는 얘기가 들려왔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에이. 라일라칸 님께서 왜 그런 짓을······."

"근데 아무리 봐도 함정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그럼 우리도 한번 걸어가 볼까?"

그렇게 몇몇이 다리에 발을 들이는 순간.

쩌적-! 콰콰콱-!!

"으헉!"

튼튼해 보였던 다리에 균열이 일어나고 무너져 내리면서 그들은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지, 진짜 함정이 있었잖아?"

"대체 왜 이런 함정이······!"

"저, 저길 봐!"

나는 망토를 펄럭이며 허공에 떠 있는 채로 그들을 한심하게 내려다 보았다.

망토에 깃든 비행술 덕분에 나는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고 있었다.

"사람 말을 잘 못 믿는 모양이군."

"······."

"먼저 가 있을 테니, 알아서들 걸어 오너라."

난 그들을 남겨두고 텅텅 빈 허공 위를 걸어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 * *

"아니. 대체 왜 이런 함정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러게나 말이오."

카르만 부하들의 말에 엘티히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라일라칸. 장난이 좀 심하구나.'

무덤 입구를 봉인하는 마법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이렇게 함정까지 만들었을 줄이야.

이건 엘티히조차 모르던 일이었다.

그런데,

'아슬란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정녕 그는 모르는 것이 없어 보였다.

엘티히의 마법이 들어간 문을 단번에 부숴 버린 것도 그렇고, 저번에 말했던 대로 자신은 이 세계에서 모르는 게 거의 없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 사실인 것일까?

엘티히조차도 알지 못했던 이 무덤의 함정을 아슬란은 속속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만 징징 대고 따라오기나 해라."

엘티히는 무너진 다리 앞에 발만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한심한 놈들을 위해 마력으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엘티히 님."

그들과 함께 다리를 건넌 엘티히는 다음 장소로 가는 길목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아슬란을 만날 수 있었다.

"왜 먼저 가지 않고?"

"이곳에도 함정이 있다."

"또?"

"그래. 저기 거대한 석상들이 보이나? 저 세 개의 석상이 함정이라 할 수 있지."

높게 솟아 올라와 저 천장까지 닿을 것처럼 보이는 세 개의 석상.

이것들이 정말 함정이란 것인가?

"그럼 내가 만든 봉인문을 쳐부셨듯이, 저것들도 다 부수고 가지 그랬느냐?"

"······그걸 내가 부숴 놓았다고 혹시 마음이 상하기라도 했는가?"

"허! 누, 누가 그런 걸로 마음이 상했다고!"

"그런 거라면 좀 더 단단하게 만들지 그랬나?"

순간 할 말이 없었다.

그 당시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최고의 봉인 마법을 그곳에 심어 놓았노라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저놈들을 직접 상대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토끼를 잡겠다고 이 무덤을 다 무너뜨릴 순 없지 않나?"

그 말은 즉, 고작 저런 걸로 힘조절을 잘못 했다가는 이 무덤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허세를 부린다고 눈살을 찌푸렸겠지만-.

'아슬란이라면.'

충분히 검강 한번으로도 이 무덤을 반으로 쪼갤 수 있는 사내이지 않은가.

저 드래곤을 일격에 베어 버리고 그 발로 머리를 짓밟은 남자다.

그러니 구태여 힘을 발휘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레바노스."

"예, 왕이시여."

"저 석상들을 부셔라."

"예!"

어느새 아슬란의 충직한 기사가 된 소드마스터 레바노스.

그는 명령에 따라 대검을 꺼내어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우득-!!

레바노스가 입구를 지나 가까이 다가오자 가만히 있던 석상들이 하나 둘 경직된 몸을 풀며 움직였다.

슈우우웅! 콰앙-!

놈들이 공격을 가하기 전에, 레바노스가 먼저 대검을 던져 그들을 공격했다.

대검이 저 거대한 돌덩이를 꿰뚫고 실타래처럼 길게 늘어져 몸을 묶어 버리는 등, 레바노스의 공격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콰콰쾅-!!

그렇게 연달아 가해진 공격에 의해 석상들은 그 덩치에 맞지 않게 너무나도 쉽사리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석상까지 깔끔하게 반토막을 내어 버리고 온 레바노스.

그를 바라보는 카르만 부하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모두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라이 왕국이 많이 성장하긴 했구나.'

대륙 최약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가 된 것 같았다.

아슬란을 따르는 저 부하들의 실력은 직접 않아도 알 수 있을만큼 느껴지는 기세가 대단했다.

"계속 가도록 하지."

그 이후에도 아슬란은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미리 알려 주고 부하들을 시켜 제거하는 등, 그 어떤 함정도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다.

라일라칸은 자기를 위해 무덤을 만든 것인지, 아니면 후손들을 죽이고자 함정 시설을 만들어 놓은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많은 함정을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이곳이다."

라일라칸이 묻혀 있는 무덤에 다다를 수 있게 되었다.

엘티히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무덤을 바라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래. 300년 전과 별 다를 바가 없구나."

이곳에 심어져 있는 마법 덕분에 잘 관리가 되어 있는 듯했다.

"이제 그만 라일라칸을 깨워라, 엘티히."

"그래야겠군."

엘티히는 손을 뻗어 무덤에 걸려 있는 마법을 천천히 풀었다.

"300년 전 나는 여러 마법사와 함께 이곳에다 라일라칸을 봉인했다. 그가 원했기에 했던 일이지. 하지만 인간이기에 봉인 마법을 쓴다고 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지."

엘티히의 손짓에 따라 무덤 위로 심장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멸의 삶을 산다는 레메게톤의 수족이자 악마들의 지휘관 바빌론. 그들 중 하나였던 단탈리온의 심장을 빼앗아 이 마법진에 사용했다. 그리고 이 심장의 힘이 라일라칸에게 다시 숨결을 불어 넣어 주게 될 것이다."

그 말과 동시에 심장으로부터 붉은 파동이 일어나 그 아래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붉은 기운이 하늘 위로 뻗어 나오면서 무덤 문이 열렸다.

그런데,

[드디어 찾았다.]

불길한 목소리가 저 아래에서 울려 퍼지며 검은 손아귀가 튀어 나와 심장을 움켜쥐었다.

[여기 있었구나.]

* * *

'뭐, 뭐야 이거. 왜 여기서 악마가 튀어 나와?'

이 무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엘티히의 설명이 끝난 뒤 무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라일라칸이 나와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것이 내가 수백 번 플레이를 하며 봤던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키에에엑-!!

캬오오-!!

악마들이 라일라칸의 무덤에 대량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아, 악마다!"

"막아라!"

당황한 기사들은 칼을 뽑아 들고 몰려드는 악마와 싸움을 벌였고, 엘티히는 저 밑자락에서 올라오는 웃음소리 몸을 잘게 떨었다.

그것은 곧 황소처럼 길게 뻗은 검은 두 뿔과 거대한 몸뚱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엘티히. 대륙의 마녀여. 마침 잘 왔구나."

"너는······ 단탈리온? 어떻게 네가 이곳에!?"

"흐흐흐. 300년 전 그 일을 난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오늘이야 말로 네놈들을 모조리 불에 태워 죽여 주마!"

대악마 중에서 그들의 대장 노릇을 한다는 바빌론!

불의 악마라 불리는 단탈리온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대체 왜 저놈이 여기에······.'

아무리 난이도 때문이라지만, 절대 이곳에서 등장할 리가 없는 놈이다.

그런데도 놈이 이곳에 나타났다.

이 모두를, 그리고 나를 죽이기 위해!

콰아아아-!!

높이만 20m에 달하는 상당한 몸뚱이.

그 몸에 걸맞는 대검까지.

놈이 한번씩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방이 불길에 휩싸였고, 악마들과 싸우던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숯덩이가 되어 버렸다.

콰아앙-!!

엘티히 역시 놈의 입에서 내뿜는 불길과 대검으로 인해 저 먼발치까지 밀려났다.

"흐압-!!"

잠시 보이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레바노스가 펄쩍 뛰어 날아올라 허점을 공략했지만-.

"간지럽구나."

단탈리온은 가볍게 손가락으로 레바노스를 쳐내며 저 벽에 처박아 버렸다.

"왕이시여!"

부하들은 내 곁으로 달려와 밀려오는 악마들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들도 알고 있었다.

백날 여기서 악마들을 막아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결국 저 거대한 악마를 쓰러뜨려야만 이 난관을 해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건 카르만 역시 알고 있는 일이었다.

스르릉-!

현존하는 대륙의 최강자라고 불리는 카르만.

마침내 그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고 단탈리온을 향해 번쩍 날아올랐다.

카르만이 허공 위로 날아올라 길게 칼을 직선으로 휘두르자,

스걱-!!

저 거대한 몸뚱이에 검격이 생겨나며 그대로 단탈리온을 베어 버렸다.

"컥-!"

과연 대륙 최강자답게 카르만의 무시무시한 일격이 단탈리온을 휘청이게 만들었다.

카르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속해서 검을 휘둘러 마구잡이로 단탈리온의 몸을 난도질했다.

설마 카르만이 저 단탈리온을 혼자서 이기는 건가?

······라는 기대도 잠시.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내 심장을 되찾지 않았다면 위험했겠어."

단탈리온의 상처 입은 몸이 금방 불길에 의해 회복되며 놈은 휘청이던 몸의 균형을 다 잡았다.

"하지만 역시 인간은 인간이구나."

그러고는 위에서 아래로 칼을 내리찍으며 카르만과 부딪혔다.

콰콰쾅-!!

그 무지막지한 힘에 카르만은 저 바닥에 굉음을 내며 처박히고 말았다.

그러면서 단탈리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양옆으로 칼을 휘둘러 거센 불길을 일으켰다.

"으아아악!"

"아, 아슬란 님!!"

폭풍처럼 일어난 불길에 의해 내 부하들이 전부 휩쓸려 날아가고 말았다.

과연 대악마들의 지휘관, 바빌론다운 힘이었다.

지금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 정도 인원으로는 도저히 바빌론을 이길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너로구나."

그때 내 위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멍청한 라할이 선택했다는 빛의 기사가 말이다. 네놈에게서 무척 역겨운 빛의 냄새가 난다."

놈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내 손에 처참하게 죽어 버리면 라할 그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 궁금하구나. 크하하!"

단탈리온은 검을 두 손으로 붙잡고 검끝을 아래로 내렸다.

이대로 내 몸을 산산조각 내버리기 위함이리라.

"죽어라. 그래도 라할이 선택한 기사이니, 내 최대한 힘을 써주지."

아니.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콰아아앙-!!

단탈리온이 두 손으로 잡은 검으로 아래를 내리 찍으면서 본능적으로 발동된 내 수호의 방패와 맞부딪혔다.

쿠쿠쿠쿵-!!

수호의 방패는 저 거대한 단탈리온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고, 놈은 어떻게든 이 방어막을 뚫고자 더욱 강하게 힘을 불어 넣었다.

그로 인해 땅이 갈라지고, 무덤 전체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피이이잉-!!

내 방어막이 반사하는 데미지는 커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탈리온이 들고 있던 검을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크헉-!"

결국 내 방패를 뚫지 못 한 단탈리온은 그 안에서 퍼져 나오는 힘에 의해 몸이 기우뚱 거리다 못 해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15초를 넘긴 내 방어막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어떻게······!"

쓰러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고 있던 단탈리온은 자신의 부러진 검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간 따위가 내 힘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진 않았다.

놈은 불길로 가득한 몸의 온도를 더욱 뜨겁게 올리며 소리쳤다.

"어디 한번 이 지옥불도 막아 보거라, 인간!!"

단탈리온은 검을 버리고 그 대신 주먹으로 용암보다 뜨거운 불을 일으켰다.

그것을 내 머리 위로 내려쳐 한번에 나를 터트릴 심산인 듯보였다.

'수호의 방패를 또 써봐야 하나?'

그렇다고 한들 놈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할 뿐, 결코 놈을 죽일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한의 룬]

-시전자의 힘에 비례하여 혹한의 능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불의 룬과 마찬가지로 내 힘에 비례하여 쓸 수 있는 혹한의 룬.

바로 어떤 것이든 얼려 버리는 아이스 드래곤의 능력이었다.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공격을 막아도 죽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죽는 거라면 마지막 발악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죽어라, 빛의 기사여!!"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단탈리온의 주먹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우리 둘의 주먹이 서로 맞닿는 순간.

쩌엉-!!

"······!?"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한기가 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 앞에는 한순간에 모든 불길과 함께 얼어 버린 단탈리온이 서 있었다.

내게 주먹을 내려치고 있는 자세로 말이다.

"이, 이럴 수가."

"저게 무슨······!"

그 장엄하고도 놀라운 광경에 악마들과 싸우고 있던 기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나 역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이는 이 거대한 얼음 석상에 잠시 넋을 잃었다.

'해··· 해치웠나?'

바로 그 순간.

콰직-! 콰드득-!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오늘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가, 감히······!"

단단하게 얼어 있던 얼음이 깨지면서 놈의 사악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단탈리온은 힘겹게 몸을 움직이며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얼음을 깨뜨렸다.

"감히 인간 따위가!!"

전보다 훨씬 약해진 불길.

갈라지는 목소리.

나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빌론 정도 되는 보스 몬스터에게는 항상 나타나는 현상.

게임을 너무 쉽게 끝내서는 안 되기에 플레이어들을 더 괴롭히고자 만든 개발자들의 장치.

바로 발악 패턴이었다.

'시발. 여기서 더 뭘 어쩌라는 거야?'

놈이 약해져 있는 것은 맞으나, 발악 패턴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말 있는 모든 걸 쥐어 짜내 싸우는 거라 놈의 공격에 스치기만 해도 사망이었다.

하지만 놈이 발악을 하는 것도 잠시.

촤아아악-!!

푸른 빛으로 둘러 싸인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오더니, 놈의 다리 밑부터 시작해 저 머리끝까지 베어 버렸다.

"억······."

눈으로 차마 쫓을 수 없는 그 빠른 검술에 단탈리온은 허무할 정도로 무릎을 꿇었다.

놈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너, 너는······."

"300년 전에 분명 죽였던 거 같았는데, 또 그 일을 반복하게 만드는군."

그는 단탈리온의 몸을 가르고 그 안에 쿵쾅 대고 있던 심장을 꺼내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단탈리온이 괴성을 지르며 그 몸이 녹아 내리고 말았다.

"죽는 순간도 그때와 똑같구나. 다시 보지 말자."

나는 단탈리온의 목숨을 단숨에 끊어 버린 사내를 쳐다보았다.

푸른 머릿결에 귀한 귀족 가문 자제 같은 얼굴.

그는 이 대륙의 최강자, 라일라칸이었다.

"저, 저분이 설마······."

"라, 라일라칸!"

단탈리온이 죽으면서 악마들도 함께 사라졌다.

기사들은 푸른 광채를 내뿜으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는 라일라칸 앞에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자신의 후손들이 아닌, 바로 나였다.

"미안하다. 네가 마무리를 지으려 했던 것 같은데, 내가 그 영광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군."

그는 내게 정중히 사과를 하다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이구나."

그러면서 내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300년 전에도 모든 존재 중에 나를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넌 다르구나."

지금껏 내가 마주한 라일라칸과는 확연히 다른 눈동자였다.

"날 죽일 힘을 가진 인간이라······. 네 이름이 무엇이냐?"

117화

0.01초 소드마스터 117화

라일라칸.

푸른 머릿결에, 푸른 눈동자.

천상천하 유아독존 특성의 주인이자, 대륙에서 감히 대적할 자가 없는 진정한 최강자.

늘 화면으로만 봤던 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있자니, 느낌이 이상했다.

'컴퓨터 화면으로 봤을 땐 진짜 잘생겼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제 아무리 대륙 최강자라고 해도 내 허세가 주눅들 일은 없었다.

"아슬란이다."

왜냐하면 이 허세는 드래곤이 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도 전혀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아슬란? 멋있는 이름을 가졌군. 본인이 가진 힘에 걸맞게 말이다."

그는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다른 자가 그런 이름을 가졌다면, 감히 어울리지도 않은 힘으로 허세를 부린다고 엄히 꾸짖었을 것이다."

라일라칸은 자신의 마력으로 만든 검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저것이 바로 라일라칸의 능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만물을 자신의 무기로 삼을 수 있는 특성.

길바닥에 있는 썩은 나뭇가지를 명검처럼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라일라칸의 능력이다.

"대륙을 수호하는 위대한 검이시여."

"라일라칸 님을 뵙습니다."

"대륙의 최강자를 뵙습니다!"

라일라칸 주변으로 칼라 왕국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카르만 역시 라일라칸의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너희는 누구냐?"

"칼라 왕국의 국왕, 카르만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뜻을 이어온 후손입니다."

"오호. 그렇다는 건 우리 가문이 왕가가 되었다는 것인가?"

"예. 썩어 빠진 폭군을 폐위 시키고 새로운 왕국을 일으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래······. 결국 그리 되었군."

라일라칸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라일라칸."

"엘티히."

엘티히는 못 마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덤에 이상한 함정들을 설치해 놓았더군."

"아! 그래. 괜히 이상한 놈들이 들어와서는 안 되니까."

"하마터면 너를 부활시켜 주려 하는 사람들을 죽일 뻔했다."

"뭐, 결과적으로 아무도 죽지 않은 것 같은데?"

"그거야 여기 있는 아슬란이 함정들을 미리 간파해 해체를 시켰기 때문이지."

"오. 그래?"

라일라칸은 다시 내게 관심을 보였다.

"신기하군. 당시 최고의 함정 설계자들이 만든 것들인데, 어떻게 그걸 쉽게 간파할 수가 있었던 거지?"

그러자 잠시 사그라 들었던 허세가 용솟음 치듯 올라왔다.

"내겐 그저 시시한 장난이었다. 그런 것들이 당대 최고의 함정 설계자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하하하! 드워프 장인들이 그 얘기를 들었다면 까무러치겠는데? 내가 봐도 살벌한 함정들이 꽤 있었는데 말이야."

"라일라칸. 지금 이게 재밌다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 엘티히. 하지만 난 이 친구가 아주 마음에 들어. 원래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이라고 하지 않나?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동류를 만난 것 같아 기쁘군."

동류라니.

네가 아슬란의 처참한 스텟을 보게 된다면 똑같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어떠냐, 아슬란. 내 옆에서 싸운다면 그보다 무한한 영광은 없을 터. 내 밑으로 들어와 함께 이 대륙을 구해 보겠느냐?"

확실히 라일라칸 옆에서 싸우면 죽을 일은 덜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본좌는 누구의 밑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한다면 생각은 해보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상대는 라일라칸이었다.

그런데도 이놈의 허세는 단 1g도 줄지를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서로 빈정만 상하고 앙금이 남을 만도 할 텐데, 라일라칸은 역정을 내는 대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너무나도 아쉽군. 네가 나의 후손이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나는 그만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돌아가겠다."

"응? 이대로 그냥 돌아가겠다고?"

"이제 막 봉인에서 풀려 났으니, 너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겠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도록 하지. 지금 당장 하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이니."

300년 만에 깨어났기 때문에 제 아무리 라일라칸이라고 해도 힘을 다시 되찾고 이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갈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자꾸 라일라칸이 내게 친근한 척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꺼림칙했다.

거기다 이대로 아슬아슬하게 허세로 줄타기를 했다가는 진짜 사고를 한번 크게 칠 거 같기도 했고.

'근데 잠깐.'

우리가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배가 있긴 한 건가?

* * *

"정말 가버렸군."

"저, 저런 건방진! 라일라칸 님께서 이렇게 돌아오셨는데, 그냥 혼자 돌아가 버리다니요!"

"저자의 무례에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원래 저렇게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작자입니다."

"거만하다라······."

칼라 왕국 신하들의 말에 라일라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건 거만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

"강자로써 갖는 특권 같은 거겠지. 품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걸 알 리가 없는 약자들은 때때로 그것을 거만함이라 표현하더군."

"······."

"나 역시 그런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지금 너희가 아슬란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할 말이 없어 침묵을 지켰다.

"일단 왕국으로 돌아가시지요."

"그래. 내 고향으로 가야지. 그립구나. 얼마나 많은 게 바뀌었을지 궁금하군. 그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라일라칸은 주변을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빛의 증표를 받은 기사는 어디에 있느냐?"

"······예?"

"저 무덤 문이 열리려면 엘티히의 마법이 필요하고, 동시에 빛의 증표를 받은 자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무덤은 절대 열리지 않아."

"그, 그것이······."

이들의 반응만 봐도 알겠다는 듯 라일라칸이 말했다.

"설마 그 빛의 증표를 받은 자가 아슬란이라는 것은 아니겠지?"

"······."

"너희 얼굴을 보아 하니, 내 말이 맞았구나. 아쉽군. 그래도 빛의 증표는 내 후손 중 하나가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자 한 기사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비록 빛의 증표를 받지는 못하였으나, 여기 국왕 카르만은 라일라칸 님의 뜻일 받들어 대륙 최강자가 되었습니다!"

"예. 국왕 카르만이야 말로 대륙에서 인정하는 첫 번째이자 최강의 소드마스터! 그 힘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

라일라칸은 고개를 돌려 카르만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는 곧 실망감이 어렸다.

"아가. 네가 정말 대륙 최강자가 맞느냐?"

카르만을 아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라일라칸이 유일할 것이다.

"그건······."

"아쉽지만 넌 이 대륙의 최강자가 아니다. 내 눈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거든."

"······?"

라일라칸은 본인의 푸른 눈동자를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이 눈은 상대방의 능력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상대가 나를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지. 그리고 카르만 너는 날 죽일 수 없다. 그럴 만한 능력이 없어."

"······."

"하지만 아슬란. 그자는 다르다. 그자에게서는 특별한 힘이 느껴져. 제 아무리 나라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힘 말이다. 그리고 그자를 이 두 눈으로 봤을 때, 머리가 아려올 정도로 요동을 치더구나.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죽음의 그림자였다."

지금까지 라일라칸이 상대와 싸워 매번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눈 덕분이었다.

상대방이 나를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이 전쟁이 나를 죽일 수 있는 없는지를 매번 살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누구도 자신을 죽일 수 있을 만한 위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라일라칸은 보았다.

아슬란이란 남자의 뒤에서 일렁이는 그 무시무시한 죽음의 공포를 말이다.

"나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는 존재가 이 대륙에 있다라······. 아주 적절한 시기에 깨어난 것 같아 다행이군."

"······."

"만일 네가 그자를 꺾는다면 그땐 너를 대륙의 최강자로 인정해 주마. 그전까지는 함부로 최강자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 말도록. 너무 한심해 보이지 않느냐?"

"······예."

라일라칸의 목소리에 담긴 서슬 퍼런 살기에 그들은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곧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 칙칙한 곳에 있을 거지? 오랜만에 깨어나서 그런지 배가 고프구나. 뭐라도 먹으면서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어봐야겠다. 마침 나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그 아름다운 외모를 잃지 않은 엘티히도 있지 않느냐?"

"죽고 싶으면 어디 더 지껄여 보거라, 라일라칸."

"후후. 까칠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아무래도 진짜 여기서 죽여야겠구나."

라일라칸과 엘티히가 서로 회포를 풀고 있을 때, 기사 하나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왕이시여."

"무슨 일이지?"

"지금 밖에서 큰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소란?"

"예. 그······ 일단 나와서 직접 보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엘티히가 파괴 마법을 발현해 라일라칸에게 날리기 직전.

그는 카르만에게 말했다.

"한번 나가보지.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아, 예."

"엘티히. 반가운 마음은 잘 알았으니, 그만 하고 따라와라."

"이익-!"

엘티히는 손을 부르르 떨며 화를 삭혔다.

그들은 모두 무덤 밖을 나와 아스렐 섬 항구로 나가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크롸라라라-!!"

"으, 으헉!"

레드 드래곤이 웅장하게 날개를 펼친 채 포효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아슬란?"

망토를 화려하게 휘날리며 꼿꼿하게 서 있는 아슬란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는 드래곤의 머리 위에 서 있었고, 부하들은 바들바들 몸을 떨며 간신히 드래곤 몸통을 붙잡아 균형을 잡는 중이었다.

아슬란은 무덤에서 나오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들어라.]

"으헉!"

"크읍-!"

아스렐 섬 전체를 울리는 목소리가 그들의 고막을 흔들고 몸을 짓눌렀다.

[함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카르만 너의 허락이 필요하다 하여, 배를 타지 않고 그냥 바다를 건너려고 한다.]

라일라칸 역시 그 목소리에 몸이 경직됨을 느꼈다.

그는 간신히 그 짓누름 속에서 벗어나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슬란. 너는 드래곤까지 다루는 것이더냐?"

그런 그를 근엄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아슬란이 그 이름을 불렀다.

[라일라칸.]

그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머리골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일라이 왕국으로 와라.]

라일라칸은 감히 자신을 내려다보며 거만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네 얘기를 들어주지.]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몸을 돌리자, 마치 주인이 이야기를 끝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잠잠하던 드래곤이 날개를 펼쳤다.

레드 드래곤은 킬킬 웃으며 온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 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크크. 잘들 있거라, 애송이들."

그리고 그것이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뜨거운 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크롸라라라-!!"

거기다 이어지는 드래곤의 포효에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슬란과 그의 부하들은 드래곤을 타고 저 바다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라일라칸은 이따금씩 드래곤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저 수평선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라, 라일라칸 님."

이윽고 그는 실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구나. 내가 정말로 적절한 시기에 눈을 뜬 것 같아 다행이다."

수많은 강적과 마주하며 그들과 싸워서 지금의 자리까지 온 라일라칸이었다.

하지만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껏 마주했던 그 누구보다도 아슬란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음을 말이다.

저 지옥의 왕조차 자신의 몸을 떨게 만들지 못했거늘.

"아슬란."

라일라칸은 제 손에 맺힌 식은땀을 매만졌다.

"정말 재미있는 사내로다."

누군가를 꺾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피가 이토록 끓어 넘치는 건 처음이었다.

118화

0.01초 소드마스터 118화

"꺄아아악!"

"도, 도망쳐!"

어둠에 빠진 대륙.

끊임 없이 출몰하는 악마 군단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짓밟아 놓았다.

오직 파괴만이 삶의 목적인 악마들은 그렇게 끝 없이 진격을 이어갔다.

"칼라 왕국의 위대한 기사들이여! 악마들을 쓸어 버려라!"

"겁 먹지 마라! 절대 도망치지도 마라! 맞서 싸우면 우리가 승리한다!"

칼라 왕국의 최전방에 있던 기사단은 비록 숫자는 적어도 서로를 격려하며 어떻게든 악마 군단의 진격을 막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 공포를 이기지 못 하고 도망을 치는 병사들이 점차 늘어났는데, 도망가던 그들의 발걸음이 중간에 멈추고 말았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적 앞에서는 결코 등을 보이지 않는 것이 기사이건만."

천공에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에 그들은 위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푸른 마력으로 하늘에 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너희는 기사라 불릴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 남자가 손을 뻗자, 푸른 마력의 검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으, 으아아악!!"

그 검들은 도망을 치고 있던 기사들을 순식간에 도륙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기사들은 두려움에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두려워 하지 마라. 나 라일라칸이 왔으니, 이제 너희가 패배할 일은 없다."

대륙의 최강자라 불렸던 소드마스터, 라일라칸.

그는 기사들 사이에 내려와 온몸에 가득한 푸른 마력의 빛을 발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선봉에 설 테니, 다들 알아서 따라오도록."

"······."

방금 전 라일라칸이 아군을 무참히 쓸어 버린 그 끔찍한 참상이 아직도 눈에 어른 거리고 있는 터라 그들 중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일라칸은 단신의 몸으로 악마 군단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그가 칼을 뻗는 순간.

콰콰콰쾅-!!

큰 마력 폭발이 일어나면서 앞에 있던 악마 군단의 진형을 완전히 부숴 버렸다.

촤아아악-!!

라일라칸이 칼을 가볍게 휘두를 때마다 뻗어 나가는 검강이 악마들의 몸을 갈랐고, 그야 말로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마치 장난감 다루듯, 악마들이 얼마나 달려들든 라일라칸은 그 크기나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건 전부 베어 버렸다.

"저, 저것이 정말로 라일라칸?"

"과연······."

기괴할 정도로 막강한 라일라칸의 모습에 병사들은 할 말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저 사내가 혼자서 악마들을 쓸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높이 칼을 들자,

콰지지직-!!

하늘 위로 신전의 기둥 같은 거대한 대검들이 만들어 지더니, 그것들이 일제히 지상으로 낙하하여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캬오오오!"

"키에에엑!"

오로지 전진만을 외치던 악마들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주춤 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일라칸은 그들이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끝까지 그들 안으로 파고 들어 그가 가진 모든 스킬을 쏟아 부었고, 마침내 이 군단을 움직이고 있던 대악마까지 쓰러뜨렸다.

"라, 라일라칸?! 어떻게 네놈이 이곳에!"

"넌 뭐지?"

"날 기억하지 못 하는 것이냐? 300년 전 그날 내가 너를······."

스걱-!

라일라칸은 상대가 하는 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고 목을 베어 버렸다.

"미안. 내가 곧 죽을 놈의 얼굴 같은 건 잘 기억을 못해서."

대악마를 죽이면서 튀어 나오는 마핵도 칼끝으로 꿰뚫어 버린 뒤 그 자리에서 터트리는 등, 그의 압도적인 무력을 아낌 없이 선보였다.

"라일라칸 님."

"아. 이제야 왔나?"

라일라칸을 따라 출정을 했던 기사단은 평야에 가득한 악마들의 시체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일인군단이 아니던가.

왜 그토록 선조들이 라일라칸을 칭송하며 그가 대륙의 구원자라고 강조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혼란의 시기에서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그 뒤를 따랐을 것이다.

"흠. 아직 힘이 좀 덜 돌아온 것 같군."

"이, 이게 말입니까?"

칼라 왕국의 대기사단장, 미뉴엘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아직 힘이 다 돌아온 게 아니라면, 대체 힘이 다 돌아왔을 땐 얼마나 더 큰 위력을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

한때 자신이 대륙 최강이라 자부했던 과거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현재 대륙에서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자들의 실력은 전부 어린 아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라면 이보다 절반의 힘으로 능히 이놈들을 쓸어 버렸을 거다."

"······그, 그렇군요. 과연 대단하십니다. 이 대륙 누구도 감히 라일라칸 님의 힘에 대적하지 못할 겁니다."

그 말에 라일라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예?"

"그날 아스렐 섬에서 너희도 보지 않았느냐? 아슬란, 그자를 말이다."

아슬란.

그 이름만 떠올리면 미뉴엘은 오금이 저려왔다.

검의 원탁 회의에서 자신을 손가락 하나로 날려 버린 것도 그러 하고, 그 이후에도 그가 보인 힘은 가히 범접 불가였기 때문이다.

그런 미뉴엘의 반응을 라일라칸이 눈치챘다.

"아슬란과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그, 그가 강한 것은 맞지만, 라일라칸 님에 비하면 한참 멀었습니다!"

"후후. 내게 아부를 하려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너도 솔직하게 나와 아슬란 중에 누가 더 강할지 저울질 하기가 어렵지 않느냐?"

"그, 그건······."

"괜찮다. 내가 원래 누군가와 비교질을 하는 걸 무척 싫어하긴 하지만, 아슬란이라면 충분히 참작해 줄 수 있으니."

"그자를 그 정도로 높이 평가하시는 겁니까?"

검을 쓰는 자라면, 강함을 추구하는 자라면, 라일라칸이란 존재는 신에 가까웠다.

아니. 그들에겐 라할보다도 더 높은 자였다.

미뉴엘 역시 라일라칸은 어릴 때부터 숭배해 왔던 우상이었다.

그런 그가 아슬란을 저리도 높이 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줄곧 아슬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는 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참새가 드래곤의 뜻을 어찌 알겠느냐. 약자는 강자가 바라보는 풍경이 무엇인지 절대 알 수 없다."

"······."

"강자는 늘 자신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다른 것에는 일절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늘 같은 것을 바라보는 것이 강자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도 대륙 소드마스터 중 하나인데, 그냥 일개 기사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지만, 미뉴엘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악마들을 상대로 일인군단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준 것이 바로 저 라일라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아슬란은 이미 나에 대한 존재를 잊고 앞으로의 일만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강자가 갖는 자세일 테니."

라일라칸은 어느덧 해가 지고 있는 평야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언젠가는 누가 태양이 될지 결정지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 * *

"누가 또 내 욕을 하나."

나는 귀를 후비다 의자에 편히 기댄 채 헤실헤실 미소를 지었다.

"라일라칸이 그래도 빨리 깨어나서 다행이야."

스토리에 맞지 않게 내가 빛의 증표를 받으면서 심하게 이야기가 꼬였지만, 결과론적으로 라일라칸이 부활했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라일라칸은 거의 치트키 같은 존재니까."

개발자들이 라일라칸을 왜 만들었겠는가?

플레이어들이 보다 더 쉽게 게임을 깨라고 만든 것이다.

말 그대로 라일라칸은 합법적인 치트키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특성에 맞게 무시무시한 스텟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 라일라칸은 그야 말로 대륙 최강이었다.

악마 군단이 쳐들어와도 단신으로 쓸어 버릴 수 있을만큼 말이다.

"대악마도 그렇고 바빌론도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여러 네임드가 힘을 합쳐야 간신히 싸워 이길 수 있는 대악마.

그런 대악마보다 훨씬 강한 바빌론까지.

라일라칸은 일대일로 감당이 가능할만큼, 가히 최강이란 말이 부족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라일라칸은 싸우는 것도 좋아하잖아."

이게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라일라칸은 싸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그렇기에 가급적이면 많은 전투에 내보내는 것이 베스트라고 볼 수 있었다.

즉, 앞으로 일어날 모든 악마와의 전투에서 라일라칸이 나서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뒤에서 편하게 구경만 하면 된다는 거지."

그것이야 말로 내가 바라던 행복 게임 플레이였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도 있었다.

"만일 라일라칸을 앞에 세워서 테키나 족속을 전부 몰살 시킨다면 그 다음은?"

원래 게임 스토리에서는 영웅병에 걸린 라일라칸이 다시 언젠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는 대륙을 위해 다시 봉인에 들어간다.

그렇게 알렉산더가 온 대륙에 평화를 이끌어내며 끝이 나는데······.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메인 스토리가 이상하게 꼬인 지금, 앞으로 내용이 어떻게 될지가 의문이었다.

"거기다 혹시라도 실수해서 레메게톤이 깨어나기라도 하면······."

지옥의 왕, 레메게톤.

테키나 족속의 궁극적인 목표는 레메게톤을 부활시켜 대륙을 파괴하는 것이다.

300년 전 대전쟁에서 대륙 종족들이 레메게톤의 부활을 간신히 막아냈고, 지금도 우리는 레메게톤의 부활을 막아야 한다.

만약 레메게톤이 깨어나면 그땐 게임은 끝났다고 봐야 했다.

"아무리 라일라칸이 우리에게 있어도 레메게톤은 라할에 버금가는 신이니까."

라할이 빛의 신이라면, 레메게톤은 어둠의 신이기 때문에 그 차이가 너무나도 심하다. 아무리 쉬운 난이도로 게임을 플레이 해도 레메게톤이 부활하는 순간, 게임 난이도가 갑자기 지옥 모드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뭐, 지금은 라일라칸이 있으니,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레메게톤이 부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지 않고 모든 전투에 라일라칸을 앞세운다면 아주 수월하게 테키나 족속을 몰아낼 수 있게 될 터.

하지만-.

"대비를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게임의 고인물이었다.

그리고 레메게톤도 여러 번 상대해봤다. 일부러 놈을 부활시켜서 상대해 본적이 있을 정도. 그렇기에 레메게톤을 어떻게 상대해야하는지, 그 공략법 역시 알고 있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몇 번 한 뒤에 목소리를 높였다.

"밖에 있느냐?"

그러자 시종 하나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왕이시여. 부르셨습니까?"

"호레스를 불러와라."

"예."

얼마 지나지 않아 호레스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왕이시여."

이 노인네는 평소에 뭘 먹고 다니는지 아주 얼굴에 화색이 환하게 돌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젊어진 느낌이랄까?

"혈색이 좋아 보이는군. 관리를 잘 받고 있는 모양이지?"

"허허. 이렇게 왕께서 일라이 왕국을 잘 이끌어 주고 계시니, 저는 하루 종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입니다. 제 건강이 좋아진 건 국왕 덕분이지요."

그러니까 내가 나라를 잘 다스리니까 뒤에서 삥땅 치는 게 많아 가지고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인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무력 쪽에만 인재풀을 신경 썼나.'

호레스를 대신할 만한 인재가 없어서 쓰고 있을 뿐이지, 기회가 되면 언제고 갈아 치울 예정이었다.

"헌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드워프들이 어디에 정착을 해서 살고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드워프들 말입니까?"

"그래. 자스트라 영역 쪽은 호드족이 잘 꿰고 있으니, 그들과 함께 찾아 보거라."

드워프들이 가지고 있는 신비스러운 아이템 하나가 내게 꼭 필요했다.

물론 그들이 순순히 내줄지가 의문이긴 하지만, 그게 있다면 레메게톤을 상대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 하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드워프들을 갑자기 찾으시는 이유라면 혹······."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레스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영웅의 검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영웅의 검.

이 대륙을 구원할 수 있는 자에게 바친다는, 드워프가 만든 최고의 검이다.

하지만 일단 그걸 들기 위해서는 기본 스텟에서 무력이 90은 기본으로 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즉, 난 들 수 없는 검이었다.

"왕께서는 하늘이 인정한 영웅이시니, 당연히 그 검을 가지셔야겠지요."

그래서일까.

갑자기 단전에서부터 허세가 끓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호레스."

"아, 예. 왕이시여."

"본좌가 고작 그딴 검 하나에 집착할 것 같은가?"

"그, 그건······."

"본좌가 원한다면 이 손가락 하나로도 대륙을 반으로 쪼갤 수 있다."

"!?"

"그런데도 그따위 검이 내게 필요할 거라 생각하느냐?"

호레스는 얼른 내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소, 송구하옵니다. 제가 감히 주제넘은 말을 했습니다."

"잘 알았다면 얼른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오너라."

"예, 왕이시여."

이마에 식은땀을 주륵 흘리고 있던 호레스가 헐레벌떡 밖으로 나갔다.

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뭐? 손가락 하나로 대륙을 반으로 쪼개?"

왕이 된 이후 쓸데없이 허세 능력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더 장황하게 허세를 늘어놓는 것 같아 큰일이었다.

"이것도 병이다 병."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119화

0.01초 소드마스터 119화

"빛의 기사이시자, 대륙의 구원자이시며, 드래곤을 처단하시고, 드래곤의 복종을 받으신 위대한 일라이 왕국의 왕이시여. 당신의 종이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내게 붙은 수식어만 나열하면 반나절은 걸리는 것 같았다.

호드의 대족장, 막투르가 직접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그에 따라 뒤에 있던 호드들도 모두 예의를 갖추었다.

"오랜만이구나, 막투르."

나는 그들을 거만하게 내려다 보았다.

그 시선에 막투르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예, 왕이시여. 왕께서 매번 이루시고 있는 업적을 저희 호드들도 늘 듣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감축드립니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축하할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저희 호드는 늘 아이와 청년에게 아슬란 님의 위대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기고자 함입니다."

대체 내가 무슨 가르침을 줬는지는 모르겠다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는 신변 잡기를 멈추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어인 일로 왔느냐?"

"이번에 저희 호드에게 맡기신 일을 직접 보고드리고자 왔습니다."

내가 맡긴 일이라고 한다면······.

"드워프들 말인가?"

"예."

고작 드워프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하는 내용이라면 그냥 서신만 보내도 될 일이다. 그런데 굳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뜻했다.

"자스트라 숲을 넘어 조금 이동을 하게 되면, 드워프들이 살고 있는 영토, 알렘바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300년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던 드워프들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드워프는 대장장이 종족이라 불릴 만큼, 무기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최고의 종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 300년 전에 인간과 힘을 합쳐 무기를 공급하며 악마를 쫓아낸 공을 세웠다.

그런데 그들이 300년 동안 지켜왔던 터전을 버리고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분명 호드를 시켜서 탐색하면 늘 드워프들을 찾아냈는데.'

내가 굳이 호드에게 드워프를 찾으라고 명령했던 건, 항상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이 게임을 플레이 할 때 드워프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는 것이 꽤 중요했는데, 그 이유로는 영웅의 검은 둘째 치고, 드워프에게서 좋은 무기와 방어구를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장장이 종족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그들이 가진 제련 기술은 그 어느 왕국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이들의 도움을 받아 군사 장비를 업그레이드시켜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더군다나 내게 필요한 아이템을 그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찾으려는 것도 있었다.

'근데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잖아.'

드워프들을 찾아내려고 했더니, 놈들이 본거지를 옮겼다라.

무슨 유목 민족도 아니고 드워프처럼 엉덩이 무거운 놈들이 본거지를 옮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단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건-

'또 난이도 이슈냐?'

그것 말고는 달리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찾을 수 있겠나?"

"현재 그곳을 점거하고 있는 종족이 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는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곳을 점거하고 있는 종족이 드워프들을 쫓아내기라도 했다는 건가?"

설마 드워프들이 멸망이라도 당했다는 거야, 뭐야.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을 점거하고 있는 종족이 다름 아닌 뮤즈족이기 때문입니다."

뮤즈족?!

만약 이 허세가 내 몸 안에 똘똘 뭉쳐 있지 않았다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그래. 뮤즈족. 당연히 그 귀여운 놈들도 이 게임에 있겠지.'

워낙 거칠고 버라이어티한 삶을 살고 있는 터라, 그 종족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뮤즈족이 무엇인가.

그놈들은 아주 무시무시한 놈들이다.

전투적으로?

물론, 전투적으로도 위협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놈들이 위험천만한 종족인 이유는 바로,

'외모 때문이지.'

게임 세계든, 현실 세계든, 외모라는 것은 참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별로 능력도 없고 쓸모도 없는 캐릭터라고 해도 일단 외모가 무척 뛰어나면 다른 스펙은 보지도 않고 자신의 부하로 들이기 위해 플레이어들이 엄청난 노력을 하게 된다.

그에 있어서 뮤즈족도 마찬가지였다.

가히 그 귀여움은 이 게임을 통틀어 최강이라 불리며, 그 귀여움에 심장 폭행을 당해 뭣 모르고 붙잡으려고 달려들었다가 역으로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정도다.

'그런데 왜 그놈들이 드워프 땅에 있는 거지?'

막투르의 말대로 뮤즈족은 타 종족과 싸움을 벌이는 전투적인 민족이 아니다.

햄스터 같은 털뭉치 외모에 걸맞게 놈들은 초식을 즐기지, 결코 살육을 즐기진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뮤즈족을 우습게 보면 안 되는 것이, 놈들이 쓰는 공격은 죄다 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 덤볐다가는 맹독에 중독되어 죽기 일쑤였다.

"하여 그들을 공격해서 드워프에 대한 정보를 받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지 혜안을 듣고자 직접 오게 되었습니다."

워낙 호전성이 강한 종족이라 그런지, 드워프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뮤즈족을 공격하려 한다는 발상이 웃기기도 했다.

'뮤즈족이라······.'

솔직히 그 귀여운 놈들을 컴퓨터 화면이 아닌,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맞았다.

그래서 고민을 하고 있던 중,

[새로운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갑자기 내 앞에 정보창이 나타났다.

[영웅의 검]

-뮤즈족을 통해 사라진 드워프 종족을 추적하십시오.

-보상으로 5골드를 얻습니다.

뮤즈족이 나타난 건 역시 우연이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게임이 내 등을 떠밀고 있을 정도면.

거기다 퀘스트 이름이 영웅의 검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번 퀘스트는 드워프들이 만들었다는 영웅의 검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그들과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다. 충분히 대화로도 해결이 가능할 테니. 본좌가 직접 군을 이끌고 갈 것이다."

"예? 왕께서 직접 말입니까?"

"왕이시여. 차라리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가서 드워프의 뒤를 쫓겠습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기사들이 앞으로 나서며 내게 말했다.

"저희를 보내 주십시오, 왕을 대신하여 임무를 완수하겠나이다!"

"왕께서는 일라이 왕국의 태양이십니다! 부디 저를 대신 보내 주십시오!"

내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왕이 되려 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행동의 제약이 생기는 까닭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유이기도 했다.

왕이라는 존재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만일 불상사로 왕이 죽게 될 경우 왕국은 큰 혼란에 빠진다.

그렇기에 신하들은 내가 몸소 나서서 무언가를 하려는 걸 꺼려하는 것이다.

"너희들에게 묻겠다."

나는 왕좌에서 턱을 괸 채 신하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본좌가 직접 나서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답은 이미 나도 알고 있었다.

이들이 걱정하는 건 나의 안위였다.

그러나,

"왕께서는 일라이 왕국의 전부이십니다. 헌데, 만일 왕께서 봉변을 당하신다면 우리 왕국은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부디 왕을 대신하여 저희를 보내 주십시오. 왕께서 무너지시는 건 곧 일라이 왕국의 멸망입니다!"

왕을 생각하는 이들의 근심과 걱정, 그리고 충심은 내 허세를 뚫지 못했다.

오히려,

"건방지구나."

내 허세를 꿈틀거리게 만들 뿐이었다.

"내 가벼운 손짓은 하늘을 가르며, 내가 디디는 발걸음은 땅을 무너뜨린다. 헌데 누가 감히 본좌를 해할 수 있단 말이더냐?"

"······."

그 말에 신하들은 숨을 죽였다.

"본좌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존재도 감히 이 몸에 손을 대지 못한다. 이 대륙의 종족들이 그토록 믿고 따른다는 저 라할조차 내게 손끝 하나 닿을 수 없다. 그런데도 너희가 감히 본좌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더냐?"

이들의 침묵은 활활 타오르고 있던 내 허세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나는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는 아론을 불렀다.

"아론."

그러자 아론은 퍼뜩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예, 왕이시여!"

"너도 저들과 같은 생각인 것이냐?"

아론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누가 감히 왕을 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만 바라옵건대, 부디 소인이 왕을 호위하여 알렘바르로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역시 눈치가 빠른 아론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기사들도 얼른 말을 바꾸었다.

"소인들도 함께 가겠습니다!"

"왕께서 가시는 여정에 불편함이 없도록 보필하겠나이다!"

나는 왕좌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붉은 망토를 휘날렸다.

"뮤즈족에게 갈 것이다. 모두 채비하거라."

"존명!"

그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나는 조금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허세를 부리다가 나중에 내가 나서지 말아야 할 때 저놈들이 안 말리면 어떡하지?

왕이 된 이후에 더욱 심해진 허세 때문에 크게 일을 치르는 건 아닐지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하지만 속은 걱정과 근심으로 타들어 가고 있으나,

펄럭~!

이들에게 보이는 발걸음은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 * *

철컥.

'말은 손끝으로 하늘을 가르고, 발로는 땅을 무너뜨린다는 허세를 지껄였지만.'

막상 출정할 땐 우리 왕국 최고의 정예 부대를 데리고 나왔다.

군마부터 기사까지 전신이 철갑으로 이루워진 제 1 중갑병은 내가 만든 기마대 중 최강이었다.

날아오는 화살 공격은 아무렇지 않게 튕겨낼 수 있고, 마법탄 공격 역시 버텨내는 뛰어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긴 창에 두꺼운 방패까지 들고 있어, 만일 이들이 돌진하게 된다면 현존하는 왕국의 군대 중 과연 이들을 막을 수 있는 부대가 몇이나 될지 의문이었다.

"과연 왕께서 이끄시는 군대의 위세가 대단하군요."

막투르는 사뭇 두려운 눈빛으로 내 뒤를 따르고 있는 중갑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막투르의 말에 아론이 나를 대신해 말했다.

"만일 자스트라 영역에서 전투가 벌어져 왕께서 직접 나서신다면, 그날로 자스트라는 두 번 다시 생명이 살 수 없는 지옥도가 될 것이오."

"그, 그런······."

"그러한 불상사를 막고자 우리 기마대가 나서는 것이지. 적들에게는 차라리 우리가 나서는 것이 자비롭게 느껴질 것이오."

두 번 다시 생명이 살 수 없는 지옥도?

왠지 아론이 나보다 더 허세를 잘 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웃긴 건 막투르는 그 말이 정말 사실인 양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본인도 직접 왕께서 싸우시는 걸 옆에서 보았소. 그 파괴적이고 재앙 같은 힘은 아직도 떠올릴 때마다 몸이 전율을 일으키곤 하오."

"후후. 잘 알고 있군. 자. 이거 받으시오."

아론이 물병 하나를 건네자 막투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우리 군대에게만 보급이 되는 성수요. 우리 왕의 은총이기도 하지."

"서, 설마 이것이 그 유명한······!?"

"그대에게만 별도로 주는 것이니, 잘 챙기시오."

아론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막투르는 크게 감격한 얼굴로 얼른 물병을 챙겼다.

······아주 둘이 북 치고 장구 치고 잘 놀고 있는 듯하다.

"이곳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린 자스트라 숲을 넘어 뮤즈족들이 산다는 알렘바르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가 알렘바르입니다."

나는 일단 주변을 스윽 살펴봤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내가 이 중갑병들을 데려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푸슉-!

무언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와 행군을 이어가던 중갑병의 갑옷에 맞았다.

팅~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침이 바닥에 떨어졌다.

"······?"

그리고 그것이 마치 신호탄처럼 이어지면서,

푸슈슉-!!

사방에서 침들이 날아와 중갑병의 갑옷을 때렸다.

"적습이다!!"

"모두 방어 태세!"

"왕을 호위하라!!"

중갑병들은 내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쏜살같이 달려와 내 주변을 방패로 감싸 안았다. 하지만 가만 있어도 모자를 판에 이놈의 허세가 끝까지 헛소리를 지껄였다.

"치우거라."

"하, 하지만 왕이시여!"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기사들은 낮아진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언제 저 독침이 내 몸에 꽂힐지도 모르는데도 나는 이들의 보호 속에서 벗어나 주먹쥔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펼치는 순간.

화아아악-!!

강력한 염력이 돌풍처럼 발동되어 사방에 퍼져 나갔다.

날아오던 침들은 고스란히 왔던 방향으로 거슬러 돌아갔고, 수풀이 모두 꺾여 나가면서 여기저기서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엣쿵-"

두 손과 두 발이 달린 작은 털 뭉치 하나가 나무에 부딪혀 내 앞으로 튕겨 나왔다.

그것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뮤?"

120화

0.01초 소드마스터 120화

"뮤뮤~"

하얀 털뭉치가 작게 울음을 터트리자 기사들이 창을 뻗으며 말했다.

"왕이시여.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 건방진 몬스터들을 단숨에 쓸어 버리겠나이다."

나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올렸다.

"모두 창을 내려라. 우린 이들과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이래서 중갑병을 데려온 것이다.

뮤즈족의 몸통이 작고 귀엽다고 해서 절대 이들이 나약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놈들은 독침을 발사해 적들을 무력화 시키는 데에 무척 뛰어나기 때문.

심지어 방금 전처럼 매복을 하다가 공격이라도 하면 순식간에 부대 하나가 전멸을 당한다.

하지만 이들의 독침을 튕겨내는 중갑병에게는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었다.

"라파엘. 네가 나설 차례다."

"네."

라파엘이 마법 주문을 외우자 그 아래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뮤즈들은 환하게 빛나는 그녀의 마법이 신기했던 모양인지 탄성을 내질렀다.

"뮤~"

주문을 끝낸 라파엘이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내게 말했다.

"다 됐습니다."

"고생했다."

나는 뮤즈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뮤즈들이여. 우린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단지, 너희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다."

내 말을 알아들은 뮤즈들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인간이 우리 언어를 할 줄 안다뮤!"

"신기한 인간이다뮤!"

갑자기 이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건 모두 라파엘의 마법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짧게 설명해 줘도,

"어떻게 인간이 우리 언어를 쓰는 거지뮤?"

"생긴 건 인간이지만, 우리 종족인 모양이다뮤!"

이놈들은 전혀 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짜증이 확 솟았겠으나,

'귀엽다······.'

저 미친 듯한 귀여움에 짜증이 솟구치다가도 금방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놈들이 내게 폴짝폴짝 다가와 말했다.

"신기한 인간. 우리 족장님에게 안내해 주겠다뮤."

그래. 차라리 그러는 게 대화하기가 빠를 것 같았다.

"그렇게 하도록."

그러자 뮤즈들은 갑자기 폴짝 날아올라 기사들의 몸에 달라붙었다.

"뮤뮤~!"

"엇!"

"흐억!"

화들짝 놀란 기사들이 움찔거렸다.

뮤즈들은 상대방을 친구라고 인식하게 되면 거리낌 없이 다가와 저렇게 머리나 어깨 위로 올라간다.

"귀, 귀엽다."

"정신 차려! 이놈들이 언제 돌변해서 공격할지 몰라."

"이 작고 소중한 아이들이 공격은 무슨!"

"맞아. 이런 냉정한 녀석!"

기사들은 금세 뮤즈들의 귀여움에 푹 빠져 버렸다.

저것이 뮤즈의 무서운 점이었다.

저 귀여움 하나로 금방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

괜히 뮤즈를 붙잡아 애완동물처럼 파는 행위가 만연한 것이 아니었다.

"환영한다뮤~!"

"인간들이다, 인간!"

숲을 지나 안쪽 깊숙이 들어가 보니, 뮤즈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나왔다.

저 작은 털 뭉치에 어울리게 이들이 짓고 사는 집들도 하나 같이 작았다.

아니. 바람만 불면 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모래성들이 있는 느낌이랄까.

우리는 뮤즈들의 격한 환영 인사를 받으며 마을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들의 족장이 있었다.

"영차~ 영차~"

뮤즈들은 몸으로 탑을 쌓아 족장이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고, 그 덕분에 나와 비슷한 눈높이로 족장이 두 발로 서게 되었다.

"뮤즈들의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한다뮤."

한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고 털 뭉치 속에 있는 코 밑으로 길게 수염이 난 족장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뮤드렐]

뮤즈들의 족장, 뮤드렐.

예전에 게임을 하면서 몇 번 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저렇게 지팡이를 의지하며 동글동글한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 귀여워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인간들이 이곳까지는 무슨 일인가뮤?"

"원래 이곳에 터전을 잡고 있던 드워프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는가?"

"드워프?"

뮤드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흠- 드워프에 대해서는 우리도 알지 못 한다뮤. 이곳에 드워프가 살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뮤. 우린 그저 먹을 것을 찾아 옮겨 다닌 것뿐이다뮤."

뮤즈족은 어느 곳을 정복하거나, 싸움을 일으키는 종족이 아니다.

뮤드렐이 말한 것처럼, 이들은 늘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닌다.

"이곳에는 먹을 게 많은 모양이지?"

"그렇다뮤. 반들 나무가 이곳에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뮤."

그 이야기에 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보기 드물다는 반들 나무가 이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라.

그것도 드워프들이 살고 있던 곳에?

'반들 나무는 독성이 강해서 대부분 불에 태워 없애 버릴 텐데.'

반들 나무는 아무리 길어봐야 1m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나무다.

하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던가.

그 안에 무시무시한 맹독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잘못 만지기만 해도 중독 상태가 될 정도로 위험했다.

그러나 여기 뮤즈족에게는 반들 나무가 최고의 음식이었다.

뮤즈들은 몸에 맹독을 품고 있어서 독에 면역이다. 그렇기에 반들 나무를 이 종족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반들 나무~!"

"반들 나무!!"

반들 나무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양팔을 높이 들며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뮤즈들이었다. 그만큼 이들은 반들 나무를 사랑한다. 아니. 숭배한다.

실제로 반들 나무 석상을 만들어 섬기는 풍습이 있다.

"반들 나무가 어디에 산처럼 쌓여 있는지 한번 볼 수 있겠나?"

"물론이다뮤. 그대는 우리의 손님이니, 특별히 반들 나무를 대접해 주겠다뮤!"

뮤드렐은 흔쾌히 우리를 반들 나무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마을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는,

'뭐야. 완전 밭이잖아?'

정말 뮤드렐의 말대로 반들 나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뮤즈들이 열심히 톱질하며 반들 나무를 잘라 쌓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반들 나무만 이곳에다 심어 체계적으로 밭을 꾸린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인간. 우리가 너를 환영한다는 뜻이다뮤. 우리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반들 나무를 주겠다뮤."

잠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뮤즈들이 내게 잘라 놓은 반들 나무를 내밀었다.

그러자 저 뒤에서 라파엘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요!"

그녀는 빠르게 내게 다가와 말했다.

"반들 나무는 치명적인 독이 들어 있어요. 한 입만 먹게 되도 죽을 수 있다고요."

그 말에 영차영차 톱질을 하고 있는 뮤즈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기사들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놈들이 감히!"

"우리들의 왕을 시해하려 들다니!"

역정을 내며 그들이 무기를 꺼내 들자 친근하게 그들 위로 올라타 있던 뮤즈들이 화들짝 놀라며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댔다.

나는 이 귀여운 뮤즈들이 탕후루처럼 꼬치에 줄줄이 찔리기 전에 기사들을 저지했다.

"호들갑 떨 필요 없다. 뮤즈들은 그저 나를 환영하는 마음에 자신들이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주는 것뿐이다. 어찌 이들의 마음을 거절할 수 있을까."

"하, 하지만 왕이시여. 라파엘의 말대로 그곳에는 무시무시한 맹독이······!"

난 내게 첨언을 하는 기사를 힐끗 노려보았다.

"그깟 맹독이 감히 본좌를 해할 거라 생각하느냐?"

"······."

나는 뮤즈들이 조심스레 건네는 반들 나무를 받아 들었다.

사실 나도 예전부터 궁금했다.

대체 이 맹독 가득한 반들 나무가 뭐기에 뮤즈들이 저토록 열광을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만독지체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설마 이 독은 만독지체에서 예외라고 죽는 건 아니겠지?'

문득 그런 불안감이 들었지만, 한번 끓어 오른 허세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똘망똘망한 뮤즈들의 시선에 난 망설임 없이 반들 나무를 입에 집어넣었다.

"······!"

그리고 반응이 왔다.

치명적인 맹독이 아닌,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맛있는 반응 말이다.

어렸을 적 봤던 만화에서 맛있는 걸 먹으면 뒤에서 파도가 치고 우주여행을 가는 등 아주 난리 부르스를 떠는데, 그것이 처음으로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아삭아삭하고 달콤하며, 자극적이기까지 한 이 형용할 수 없는 맛의 결정체.

나는 그제서야 왜 뮤즈들이 반들 나무를 이토록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천상의 맛이라니.

"와, 왕이시여. 괘, 괜찮으십니까?"

기사의 물음에 나는 잠시 놓았던 정신 줄을 붙잡았다.

이 허세조차도 잠시나마 잊게 만들 정도로 굉장한 맛이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이따위 맹독으로는 본좌를 어찌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나는 나머지 있던 반들 나무까지 남김없이 싹 해치웠다.

"신기하다뮤. 다른 종족은 우리가 주는 반들 나무를 먹고 쓰러지기 일쑤였는데, 너는 괜찮은 모양이구나뮤."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먹으라고 줬다는 건가?

그냥 순수한 건지, 아니면 영악한 건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린 이제 가족이다뮤!"

"뮤뮤-!"

족장 뮤드렐의 외침에 뮤즈들은 한목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작은 아이들과 가족이라니.

뭔가 거창하면서 이상했지만, 뮤즈들과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지.

이렇게 된 김에 한 마리만 왕국으로 데려가서 키워 볼까?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저 앞에 수풀이 흔들리더니, 무기를 든 기마대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고 우리 기사단은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적이다!!"

"모두 전투 준비!"

"왕을 호위하라!"

그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겁을 먹은 뮤즈들이 사방으로 숨어들었고, 기사단은 엄한 목소리로 상대에게 외쳤다.

"소속을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위대하신 아슬란 님의 진노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 군의 위세에 상대가 바짝 겁을 먹은 것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주춤거렸으나,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을 정리하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곧 들려왔다.

"어머나~ 이게 누구세요? 아슬란 님 아니신가요?"

보라색 부채를 흔들며 요염하게 천천히 말을 타고 나타난 여인.

"비올레타?"

바로 대륙 최고의 상단 가문인 샤를렌의 가주, 비올레타였다.

"제가 그렇게 저희 가문으로 오시라는 청을 드려도 눈길 한번 주지 않으신 분이 요즘 어디서 뭘 하고 계시나 했더니, 여기서 뮤즈들이랑 계셨군요."

아니. 저 여자가 여기에 왜 온 거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어모으시는데, 이번에도 역시 뮤즈족의 마음을 얻으신 모양입니다. 호호."

그러다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심어 놓은 듯한 이 반들 나무들.

그리고 그 반들 나무를 따라 정착지를 옮긴 뮤즈족.

무언가 딱딱 들어맞지 않은가?

"비올레타."

"네, 왕이시여."

"여기엔 무슨 일로 온 거지?"

비올레타는 마치 나를 유혹하듯 짧게 부채를 흔들며 대답했다.

"음~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혹시 궁금하시다면 저와 동행을 하시겠습니까? 아슬란 님과 함께 밤길을 걷는다면 그것보다 안전한 건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나는 비올레타의 말장난을 들어 줄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살짝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타고 있던 말이 강하게 콧김을 내뿜으며 말발굽으로 세게 땅을 때렸다.

나는 차갑게 비올레타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비올레타."

그와 동시에 혼돈의 피어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억!"

"으악!"

그러자 비올레타 곁에 있던 기사들이 먼저 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그 뒤에 있던 병력도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목숨이 아깝다면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 모습에 크게 당황해하는 비올레타는 더 이상 그 눈동자에 유혹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두려움이 가득해 보였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지?"

121화

0.01초 소드마스터 121화

"으그극-!"

"크읍-!"

이가 갈리고 몸이 떨리며, 시야는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다.

샤를렌 가문이 엄청난 금액을 들여 만든 백색 기사단.

날고 긴다는 최고 수준의 용병들을 끌어모아 여느 왕국 기사단 부럽지 않은 강한 무력의 부대를 만들었지만, 지금 그들은 말 위에서 떨어져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샤를렌 가문에서 진행하는 경매장에서 딱 한번 아슬란을 마주했을 뿐.

이런 야생에서 그를 마주하는 건 처음인 비올레타는 지금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돈을 처발라 만든 이 최고의 기사단이 왜 쓰러져 있는 것인지, 왜 아슬란은 이곳에 있는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혹한처럼 차가운 눈동자에 몸이 시려올 정도였다.

"끄어억-!"

그렇게 기사들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를 것만 같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비올레타가 소리쳤다.

"그만! 이제 그만 하세요!"

그녀의 말이 통하기라도 한 것일까.

거짓말처럼 모든 압박이 사라지고 기사들은 그제서야 숨을 쉬며 토악질을 해댔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힘을······!'

일인군단이라는 말이 있다.

바로 그것이 딱 저 아슬란에게 어울리는 수식어가 아닐까.

혼자서 이 많은 이들을 위압만으로 짓눌러 버렸으니 말이다.

"이제 말할 마음이 생겼나?"

잠시나마 자신의 기사단이 그 어떤 왕국보다 뛰어나다 생각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대륙 최고의 상단을 이끄는 샤를렌 가문의 명예가 짓밟히게 놔둘 수는 없는 법.

샤를렌 가문이라고 하면 한 왕국의 왕이라도 일단 숙이고 보는 최고의 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그녀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당당하게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

저 얼음장처럼 차가운 아슬란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저절로 고개가 내려갔다.

"우리 상단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라져 그것을 조사하려고 나온 거예요."

"사람들이 사라져?"

"예, 그것도 무려 2,000명에 달하는 인부들이 한꺼번에 사라졌어요.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는 일이라 여기까지 나온 거였고요."

아슬란은 잠시 말없이 물끄러미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여기다 반들 나무를 심은 것이 너희들이었군."

"그건······."

"반들 나무를 미끼로 뮤즈족을 잡으려고 했나? 아니. 분명 그러려고 했겠지."

"······."

다 알고 있구나. 저 남자는.

대체 언제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것일까.

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것일 터.

"맞아요."

그렇기에 비올레타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아슬란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거짓을 말한다면 그가 순식간에 자신과 이곳에 있는 모두의 목을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비올레타는 최대한 당당하게 나갔다.

"이곳에다 나무를 심은 건 우리가 맞습니다. 왕께서 알고 계시는 대로 뮤즈족을 붙잡아 팔려고 했던 것도 맞고요. 뮤즈들은 꽤 비싼 가격에 팔 수 있거든요."

귀족들 사이에서 뮤즈에 대한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산을 다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뮤즈를 애완동물로 사려는 귀족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

그렇기에 샤를렌에서 뮤즈족을 추적해 버들 나무로 그들을 유인한 다음 한꺼번에 붙잡으려 했던 것이다.

"꽤나 공을 들인 작업이었답니다. 그리고 유종의 미를 거둘 때가 되었을 시기에 갑자기 2,000명이 넘는 인부들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비올레타는 슬쩍 아슬란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덤덤한 얼굴.

"그곳으로 안내해라."

"네?"

"너희 인부들이 사라졌다는 곳 말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닌가?"

"아, 네."

의외의 결정이었다.

그냥 알아서 해결하라고 무시할 줄 알았더니.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문제였다.

"그리고······. 뮤즈족을 잡아서 내다 팔겠다는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것이다."

"예?"

"우리 일라이 왕국과 뮤즈족은 서로 동맹을 맺었거든."

"······."

"만일 이를 여길 경우, 샤를렌 가문은 본좌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비올레타는 앞서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감히 그 누구도 샤를렌 가문을 저따위로 협박하는 곳은 없었다.

만약 샤를렌 가문이 마음먹고 돈줄을 끊어 버리면 해당 왕국의 경제가 박살이 나는 건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경매장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샤를렌 가문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저 사람은 라할 앞에서도 저럴 위인이지.'

흔들림이 없고 꺾이지 않는 신념으로 무장한 아슬란이기에, 지금까지 들어온 보고를 들어만 봐도 그는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또한 샤를렌 가문이 여기서 정말 아슬란의 말을 어기게 된다면······.

'진짜 죽을 수도 있겠지?'

방금 전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기사단을 전투 불능으로 빠지게 만든 아슬란이지 않은가. 그가 샤를렌 가문을 멸문시키기 위해 강림한다면 누구도 그를 막지 못 하리라.

상상만 해도 끔찍한 그 광경을 잠시 떠올린 비올레타는 고개를 흔들며 아슬란의 뒤를 얼른 따라갔다.

"아슬란 님~"

전보다 훨씬 더 코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였다.

꺾이지 않는 인물이라면, 차라리 그를 샤를렌 가문의 우산으로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남자라면.'

자신의 미래를 맡겨도 후회하지 않을 남자라고 여겼다.

* * *

'에라이. 욕심은 드럽게 많아 가지고.'

나는 내 옆에 달라붙기 시작한 비올레타를 힐끔 쳐다보았다.

왠지 이런 숲에 반들 나무가 저렇게 많이 심겨 있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이런 무식한 규모라면 샤를렌 가문이 끼어 있는 게 아닐까 예상했었는데, 과연 비올레타가 이번 일의 범인이었다.

'저 귀여운 뮤즈들을 내다 팔려고 하다니.'

라고 비난을 하기에는 나도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몇 번 샤를렌 가문을 통해 뮤즈를 구입한 다음 펫처럼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엄히 경고했으니 샤를렌 가문도 쉽게 뮤즈들을 건드리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뮤즈들을 납치해 팔려고 한다면······.

'어쩌긴 뭘 어째.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어야지.'

샤를렌 가문이 쥐고 흔드는 자금력에 일라이 왕국이 휘청이고 싶지 않다면 가급적 저들과 싸우지 않는 게 좋았다.

그래서 저들이 대놓고 뮤즈들을 잡아가도 솔직히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혹시라도 블랙 마켓에 뜨면······.'

그때 나도 몰래 하나 사보기나 할까.

"이곳입니다."

나름 철저히 구상을 해놓았던 것인지, 비올레타는 뮤즈족이나 다른 종족에 들키지 않게 몰래 진지를 건설해 놓았다.

2,000명이 넘는 인부들을 지원하기 위해 따로 보급로를 만들었을 정도로 얼마나 이번 일에 공을 들였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하긴.

뮤즈의 가치는 시장에서도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으니, 이 정도는 아깝지도 않았겠지.

"보시다시피 진지가 무너지고 곳곳에 전투한 흔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건 시체 하나, 그 핏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비올레타 말대로 그 점이 이상했다.

진지가 처참하게 박살이 나 있는데도 시체 하나 찾아볼 수가 없고, 그 흔한 핏자국도 없다니.

인부들이 자기들끼리 진지를 부순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

그리고 전문가가 아닌 내가 봐도 이건 인부들이 의도적으로 부순 게 아니라, 어떤 무리가 공격해 망가진 것처럼 보였다.

"······라파엘."

나는 라파엘을 불렀다.

"예, 왕이시여."

"엘프에게는 잔상 마법 능력이 뛰어나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터."

"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

각 종족마다 비밀스러운 능력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당연히 엘프도 숨기고 있는 능력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잔상 마법이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잔상처럼 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언어가 통할 수 있게 마법을 부리는 것도 그 기원이 바로 엘프였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만, 지금은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본좌가 언제 모르는 것이 있더냐? 어서 마법을 펼쳐 보거라."

"아, 네!"

라파엘은 내 명령에 따라 마력을 펼쳤다.

그러자 그 아래에 생성된 마법진이 퍼져나가면서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잔상처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곳에 인부들이 있었고······. 그러다 누군가가 침입했습니다."

침입을 한 자들은 다름 아닌,

'드워프?'

잔상 속에서는 키가 작은 드워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 뒤로 테키나 족속으로 보이는 악마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와 인부들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당황한 그들은 각자 무기를 들고 저항해 봤지만, 파도처럼 밀려오는 군세에 속절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 남자가 불길해 보이는 검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검은 갑옷에 검은 투구.

그리고 불길한 기운을 퍼뜨리고 있는 대검 하나.

놈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그 안에 있던 악의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인부들을 쓸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땅에 박으니, 온 천지가 흔들렸다.

저 검에 담긴 악한 힘을 이 정체불명의 남자가 사용하는 듯 보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아니?!"

"저, 저런!"

그 남자가 검을 높이 들자 그것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인부들의 시체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흘린 피와 살점들까지 남김없이 빨아들이며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

이곳에 전투 흔적만 있고 왜 시체나 핏자국이 남아 있지 않은 건지 여기서 의문이 풀렸다.

'마검······?'

저건 틀림없이 마검이다.

누군가의 영혼과 그 육신을 빨아들이는 것만 봐도 마검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근데 갑자기 마검이라니?'

설마 테키나 족속의 짓인가?

그런데 잔상에서 나타난 몬스터들의 생김새가 낯이 익지 않는다.

테키나 족속에서 나온 몬스터들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이다.

거기다 드워프들이 초반에 등장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드워프들이 마검을 만든 건가?'

하지만 드워프가 마검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단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이제까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드워프가 만든 마검을 본 적도 없었다.

'일이 엄청 복잡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드워프, 마검,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정체불명의 한 남자.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흐름으로 스토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 이후로는 흔적을 쫓기가 어렵습니다."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상위 마법이라 그런지, 라파엘은 숨을 몰아쉬며 마법을 거두어들였다.

"왕이시여. 방금 그건······."

나와 함께 같은 광경을 본 기사들이 말끝을 흐렸다.

"그래. 마검이다."

"마, 마검이라니!"

"대체 누가 저런 끔찍한 검을-!"

마검이라는 존재를 이야기 속에서만 들어 보았지, 실제로 그것을 마주하게 된 기사들은 충격에 빠진 듯했다.

'마검을 다룰 정도면 엄청 세겠지?'

마검을 끼고 다니는 그 검은 갑옷의 남성.

닿는 것마다 일단 먹어 치우고 보는 마검을 다룰 정도라면 분명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을 게 뻔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갈까.'

만약 이대로 계속 드워프를 쫓는다면 반드시 놈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았다.

이 수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빨아들인 놈인데, 지금은 또 얼마나 제물을 흡수하고 있을지, 그 힘이 얼마나 강대해지고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라일라칸이라도 불러야 하나.'

아마 이런 일은 펄쩍 뛰며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드워프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서 그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라도 드워프를 찾긴 해야 했다.

그럼 일단 작전상 후퇴를 했다가 정보를 더 모은 다음에 라일라칸을 데려간다면······.

"모두 두려워하지 말거라."

바로 그때였다.

아론이 방금 전 광경에 웅성거리고 있는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대체 그깟 마검이 얼마나 두렵다고 이리도 소란을 떠는 것이냐?"

저 정도 마검이면 두려워하는 게 맞지, 인마.

이놈이 또 뭔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이러는 거지?

"우리에게는 위대하니 왕, 아슬란 님이 계신다. 빛의 증표를 받으신 그분은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어둠과 악에 대항하시는 분이다. 그런 분이 저런 마검을 가만두고 볼 것 같으냐!?"

"······?"

그러자 기사들이 동요한 마음을 잠재우며 소리쳤다.

"옳소!!"

"우리 왕께서 함께하시는 한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저 마검은 아슬란 님의 힘에 비하면 보잘것없지!!"

"왕이시여. 당장 저 마검을 파괴해 악을 처단해 주십시오!!"

아론의 말 몇 마디에 갑자기 사기가 하늘을 뚫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얼른 가서 마검을 없애 버리자고 아우성을 쳐댔고, 나는 이들을 선동한 아론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

그러자 놈은 아주 당당하게, 자신이 정말 큰일을 했다는 것처럼 뿌듯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요즘 들어 아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드는 것 같았다.

122화

0.01초 소드마스터 122화

드워프들은 어디에 숨어 버린 것인지, 결국 놈들의 행방을 찾아내진 못했다.

또한 그 마검을 가지고 살육을 벌였던 정체불명의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준! 발사!"

콰콰쾅-!!

드워프들의 소재를 찾는 동안 나는 잠시 할라즈 성에 머물렀다.

귀여웠던 뮤즈족이 눈에 아른 거렸지만, 반들 나무로 이어진 독성처럼 치명적인 동맹을 맺었으니, 곧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재 개발을 완료한 새로운 신무기 성능을 시험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조준! 발사!!"

콰콰콰쾅-!!

연신 터져 나오는 폭발음에 시연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중에는 샤를렌 가문의 비올레타도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녀는 오늘도 어김 없이 부채를 흔들면서 말했다.

"폭발을 일으키는 랜스라. 저런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비올레타의 말대로 여기 있는 모두가 처음 보는 신무기였다.

기사들이 쓰는 길쭉하고 두꺼운 창, 랜스.

그 안에다가 마력석과 칼루탄을 합성해 폭발을 일으키는 구체를 쏘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10발을 쏘면 안에 있는 보석을 바꿔줘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재장전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반동을 견딜 수 있는 든든한 하체를 가지고 있는 기사라면 누구나 저 랜스를 활용해 적을 터트려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개발을 빨리하길 잘했다.'

한때 할라즈 왕국을 섬겼다가 지금은 나를 섬기고 있는 대마법사 켈린과 라파엘이 있으니, 개발이 한층 더 빠르게 이루어졌다.

저 랜스에서 뿜어져 나가는 마력탄은 테키나 족속에게도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줄 것이다.

"일라이 왕국에는 인재들이 참 많군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저런 대단한 걸 만들어낸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켈린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비올레타 가주는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구려."

"뭐라고요?"

"저 버스트 랜스를 만든 건 우리가 아니오. 바로 여기 계신 아슬란 님이시지."

"네에-?!"

"마력석과 칼루탄을 합성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버스트 랜스를 최초로 기획하신 분이 바로 우리의 왕이시오. 우린 그저 시키는 대로 만들기만 했을 뿐."

비올레타와 샤를렌 가문 사람들은 나를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왕께서는 실로 대단하시군요. 저런 무기까지 직접 개발을 하시다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 게임을 많이 플레이해 봐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켈린과 라파엘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무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너희의 지혜와 지식이 아직 부족하여 본좌가 말을 아끼는 것일 뿐. 그 가르침을 전부 받으려고 한다면 정녕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이놈의 허세는 한시도 가만 있지를 못하고 지껄여댔다.

가관인 건 이 헛소리를 들은 자들의 반응이었다.

"과연······."

"빛의 증표를 받은 분은 달라도 한참 다르시구나."

"왕께서 가지신 지혜를 우린 영원히 헤아리지 못할 겁니다."

그러면 나는 또 이들의 찬사와 시선에 심취를 즐기면서 이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게 된다.

"발사!"

콰콰쾈쾅-!!

버스트 랜스 시범을 성공적으로 끝낸 기사단은 내게 예를 차려 인사했다.

이 정도면 바로 실전에 투입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칼루탄과 성수를 섞은 투석기 공격으로 먼저 악마들을 무력화시킨 다음, 그대로 돌진하여 버스트 랜스를 발포한다면 순식간에 악마 군단을 쓸어 버릴 수 있으리라.

'이제 슬슬 악마 군단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해 올 테니······. 대비를 해야지.'

악마 군단의 무서운 점은 머릿수를 앞세운 공격 작전이라는 것이다.

마치 성난 파도가 몰아치듯, 놈들은 상대가 대처하지 못하도록 빠르게 접근해 적을 짓밟아 버린다.

그동안 아군이 짓밟혀 죽는다고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돌진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놈들의 전법이었다.

하지만 이 버스트 랜스는 뛰어난 폭발력으로 그런 악마 군단의 전진을 막아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악마 군단을 상대하기 전에 이 무기를 개발해 놓는 것이 게임의 정석이었다.

"보면 볼수록 일라이 왕국의 영향력이 가히 대단합니다. 악마에게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던 할라즈 성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고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저를 놀래켜 주시는군요. 이제 또 놀랄 만한 게 과연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그런 비올레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쿠웅-!!

무언가가 내려앉으면서 지붕과 성벽이 다 함께 흔들려 이곳 객석이 들썩일 정도였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저들은 당황하며 무언가가 천천히 지붕 위를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윽고 그것이 지붕에서 내려와 지상에 내려앉았다.

콰앙-!!

그 짧은 동작만으로도 천지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런 소란을 벌인 것은 다름 아닌-

"쯧. 여긴 착지하기가 더럽게 힘들다니깐."

레드 드래곤 플레임이었다.

"꺄아아악-!"

"으, 으아악!"

일라이 왕국 사람들은 이제 익숙해서 플레임을 봐도 놀라지 않았지만, 샤를렌 가문 사람들은 달랐다.

레드 드래곤이 일라이 왕국과 함께한다는 것을 이들도 이미 알고 있을 터. 그러나 그것을 말로 듣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천지 차이였다.

"뭐냐, 이 꽥꽥 소리만 지르는 여자는. 풍겨오는 냄새나 몸짓을 보아하니, 너를 유혹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은데?"

플레임의 말에 비올레타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나는 계속 장난을 쳐대는 플레임을 차갑게 불렀다.

"플레임."

내 부름에 플레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를 얼굴에서 싹 지워 버렸다.

"내가 시켰던 건 어떻게 됐지?"

"그렇지 않아도 내 부하들과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플레임의 부하들이라고 하면 키루를 포함한 자쿤들이었다.

우리 왕국이 가진 최강의 공중 부대라고 해야 할까.

사실 지상군보다 저 공중 부대가 더 믿음이 갔다.

왜냐하면 무려 레드 드래곤이 선두에 있으니까!

"드워프들이 어디서 정착을 하고 사는지 알아냈다. 예전에 내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더군."

역시 이들을 보내기 잘한 것 같았다.

걸어 다니면서 찾는 것보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찾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기 떄문이다.

"지도를 가져다주면 특정할 수 있겠나?"

"뭐, 대충은?"

내가 눈짓을 하자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자스트라 경계 안을 그린 지도를 가져왔다.

플레임은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참 대충 만든 지도로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 자스트라 경계가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 무엇이 있고, 또 어떤 몬스터가 서식하는지 알 수 없다.

이건 매 게임마다 바뀌는 설정이라서 복잡하다.

하지만 큼지막한 지형들은 그대로라서 고인물들은 대충 특정만 하면 어디가 어디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이쯤일 것이다. 이곳에 큰 화산이 하나 있는데, 그 열기가 너무 강해서 함부로 접근하기도 어렵겠더군. 드워프 놈들이 아주 작정하고 이 안에 숨은 것 같았어."

플레임이 발톱 끝으로 가리키는 곳과 덧붙이는 설명을 듣고 드워프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나는 바로 알 수가 있었다.

'리베리엄 화산인가?'

자스트라 영역 끝 부분에 있다고 알려진 리베리엄 화산.

그쪽에 숨은 거라면 왜 지상군이 드워프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이해가 간다.

일단 드워프들 말고도 여러 종족이 자스트라 영역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하는 게 어렵기도 했고, 무엇보다 리베리엄 화산은 생명체가 살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워프들이 그곳에 들어가 살고 있다라-

뭐, 온도가 뜨거워서 불 조절은 따로 할 필요 없겠네.

"잠시 확인을 해봐야겠군."

나는 눈을 감은 뒤 천상의 눈동자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내 온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솟아 나오며 주변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아, 아니!?"

"저것이 바로 라할의 빛인가!"

샤를렌 가문 사람들의 호들갑에 아론이 호통을 쳐댔다.

"왕께서 신성한 힘을 사용하고 계실 땐 모두 정숙하시오. 저 경외스러운 힘이 진노로 바뀔 수도 있으니."

"······!"

아론 덕분에 그들은 얼른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나는 천상의 눈동자를 리베리엄 화산으로 보내 그곳에서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까앙-! 까앙-!

"어서 빨리들 움직여!"

"여기서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열심히 담금질하며 무기를 만들고 있던 드워프들.

대체 누구를 위해 저렇게 대량으로 무기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 화산에서 끓어 오르는 열기 덕분에 대량 제작이 가능한 듯 보였다.

"으허헉!"

"저, 저게 뭐야!"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무기 제작에 열을 올리던 드워프들은 내가 만들어낸 눈동자를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

저 작은 몸뚱이로 모두 두 발을 높이 든 채 쓰러져 있으니, 왠지 귀엽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이놈들이 여기서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다,

"······."

그날 잔상에서 보았던 마검의 주인을 보게 되었다.

놈은 내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하더니, 갑자기 비틀거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뭐지? 내가 뭘 위해를 가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아, 아슬란······."

그러고는 놈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뒤를 두둥실 떠다니는 채로 따라다니던 마검을 붙잡았다.

"아슬란-!!"

급기야 놈은 눈동자를 향해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댔다.

콰콰콰콱-!!

보통의 힘으로는 절대 베어낼 수 없는 천상의 눈동자였지만, 저 마검에 담긴 사악한 힘 때문인지, 아니면 이놈이 더럽게 센 것인지 내 눈동자가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놓치지 않고 놈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카릴리페]

-타락한 마검의 주인.

타락한 마검의 주인?

거기다 카릴리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이 게임을 수천 시간 동안 플레이하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모르는 네임드가 있을 수 있다고?

"아슬란-!! 아슬란-!!"

콰직-! 콰득-!

놈은 말로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며 눈동자를 짓밟고 또 짓밟았다.

그렇게 천상의 눈동자와 연결되어 있던 정신이 끊겨 버렸다.

"······."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분노였다.

그리고 그 분노가 향한 곳은 바로 나.

'아니. 대체 왜 나한테?'

생전 본적도 없는 놈이, 심지어 게임에 등장인물도 아닌 놈이 왜 나한테 그런 분노를 품고 있단 말인가.

그렇게 끔찍하고 강한 힘을 가진 놈이 말이다.

'억울하다, 억울해!'

이놈의 게임은 하면 할수록 억울해서 살 수가 없다.

* * *

"아슬란-!!"

카릴리페의 분노가 담긴 괴성에 드워프들은 겁을 먹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마기가 이들을 질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분노를 결코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때 독사 같은 목소리로 누군가가 그에게 겁도 없이 다가갔다.

"테르카나."

카릴리페는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포탈을 열어라. 놈을 찾아가서 죽일 것이다."

"그건 안 됩니다."

"뭐야?"

"카릴리페 님도, 그리고 저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슬란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쩌면 라일라칸에 버금갈지도,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감정적으로 움직였다가는 그동안의 수고가 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테르카나를 노려보던 카릴리페였지만, 그는 곧 화를 삭였다.

"네 말이 옳다. 아슬란의 사지를 뜯어 버리고, 놈의 뼈를 씹어 먹으려면 더 강한 힘이 필요해."

"후후. 그러실 줄 알고 제가 만찬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테르카나의 손짓에 포탈이 열렸다.

그 포탈 안에는 한 마을이 보였다.

"당신의 힘을 더욱 강력하게 해줄 제물들입니다."

"좋아."

카릴리페는 음흉한 웃음 소리를 내며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마검이 번뜩이듯 마기를 뿜어내었고, 얼마 가지 않아 비명 소리가 가득 들려오기 시작했다.

123화

0.01초 소드마스터 123화

"꺄아아악-!"

"으아악!"

콰득-!

습격을 받은 마을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카릴리페는 무심한 눈동자로 그들을 내려다보다 검을 들었다.

그러자 검에서 기괴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저들의 시체를 마력처럼 빨아 들이기 시작했다.

"······테르카나."

"예, 마검의 주인이시여."

"대체 언제까지 이런 나약한 놈들을 잡아 죽여야 한단 말이냐?"

불만이 참 많아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야 안정적으로 영혼을 수급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변수를 생기지 않게 하고 안전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변수? 그까짓 것들은 내가 다 부숴 버릴 수 있다."

"예.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악마가 대륙의 힘을 무시하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무작정 쳐들어오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당했지요.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

"바로 아슬란을 말하는 겁니다."

"!?"

그렇지 않아도 아슬란의 이름만 나오면 그 분노를 주체하지 못 하는 카릴리페였다.

그런 그의 성질을 알고 있기에 얼른 테르카나가 진정시켰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그 분노를. 그렇기에 그 뜨거운 마음을 풀어 드리고자 제가 그 검을 당신에게 바친 것이 아닙니까?"

"이제 난 놈을 잡을 준비가 되었다."

"저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아슬란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대체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가졌는지 가늠조차 되지가 않지요. 그러나 카릴리페 님도 이제 강해지셨습니다. 조금만 더 큰 힘을 모은다면, 아슬란을 향한 복수를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얘기는 새로운 만찬을 준비했다는 건가?"

"예. 이번에는 이런 시시한 놈들이 아닌, 오랜만에 피가 끓어 오르는 전투를 만끽하실 수 있을 겁니다."

뱀 같은 테르카나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이젠 폐허가 된 마을에 울려 퍼졌다.

* * *

"참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구나."

오메르 왕국의 왕, 엘버스테인.

그는 예전과 확연히 달라진 성 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엘버스테인이 폭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오메르 왕국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으며, 당장 다음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는 이들도 속출하였다.

"그때 만약 일라이 왕국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큰일이었을 겁니다."

오메르 왕국의 군사, 가일의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일라이 왕국은 어려운 오메르 왕국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무역의 활로를 열어 지금의 경제 상태를 만들도록 도와주었다.

만약 그때 도움이 없었다면 오메르 왕국은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래. 그동안 우리는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정작 군사력에는 돈을 투입하지 않았다."

엘버스테인은 왕국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조금씩 자금 투입을 하며 바꾸고 있긴 하다만-.

"일라이 왕국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

"왕이시여. 일라이 왕국의 군사력은 현재 대륙 최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습니다."

"후후. 당연한 일 아닌가? 무력 대륙 최강자이신 아슬란 님이 다스리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분이 항상 말씀하신 대로, 최강자가 이끄는 군대는 최강이 될 수밖에 없지."

아슬란 밑에서 싸웠던 그 짧은 경험.

하지만 그것이 엘버스테인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버렸다.

그는 아직도 아슬란을 자신의 주군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분께서도 힘이 필요하실 거다. 앞으로 다가올 대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군은 강해져야 한다. 난 조금이라도 그분의 힘이 되어 드리고 싶다."

"왕의 뜻은 소신도 잘 알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군사력에 힘을 준다면 일라이 왕국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왕국에 뒤쳐지지 않을 만큼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래. 얼른 그리되어야겠지.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우리 왕국을 악마들의 발에 짓밟히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예."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발견한 새로운 광물에 관한 건 어찌 되었지? 아슬란 님께 보고는 드렸나?"

"아! 그것이······."

그리 얘기를 나누면서 이제 그만 왕궁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쿠쿵-! 쿠쿠쿵-!!

갑자기 검은 구름이 밀려 들어오고, 그 위로 내리치는 뇌격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에서 생겨난 여러 개의 포탈이 흉측하게 생긴 악마 군사들을 비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와, 왕이시여. 저건!?"

"종을 울려라! 저건 필시 악마 군단이다!"

엘버스테인은 칼을 뽑아 들며 하늘에 열린 포탈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음허한 기운을 내뿜으며 내려오는 검은 갑주의 남성이 보였다.

"······!"

바라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던 남성은 자신의 뒤를 두둥실 따라다니는 검을 붙잡았다.

그러자 엄청난 살기가 사방에 퍼져 나가며 주변을 검게 만들었다.

"대체 저놈은······."

위험을 감지한 엘버스테인의 손이 부르르 떨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