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누가 규칙을 논해 (3)
맏며느리 강소심이 장 씨의 방에서 나오자, 그녀의 큰 시녀인 보주(寶珠)가 문을 나서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님, 주인마님께 말씀드렸습니까?”
“어머님께서 셋째 아씨 외출에 성화를 내시며 물건을 집어 던지시길래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말씀드릴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며칠 후에 어머님 기분이 괜찮아지시면, 그때 다시 기회를 봐야지.”
강소심은 장 씨의 분부를 떠올렸다.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분부를 어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그녀는 장 씨가 이런 작은 일로 구수운을 구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인의 가장 큰 염원은 바로 좋은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다. 한편 주인어른이 몸져누운 지금, 구수운을 누구와 혼인시킬지는 온전히 장 씨의 권한이었다. 그러니 이런 소사는 구수운에게 양보를 하며, 어르고 달랬어야 했다. 그랬다면 구수운이 매사에 주의하며 행동하진 않았을 것이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혼사를 두고 또 한 번 난장판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강소심네 친정어머니 또한 정실부인이었지만, 서출들을 대하는 수완이 상당히 훌륭했다. 서자들이 제 자식들의 지위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면서, 바깥사람들이 왈가왈부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친정어머니에 비해, 장 씨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조바심을 내었다. 지켜보는 사람까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강소심은 간혹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첩실이었다가 본처가 된 장 씨는 정당한 명분을 지닌 구수운보다 자신의 지위가 낮다고 생각한 탓에, 구씨 가문 재산을 전부 손에 쥐고도 매사 이 집 장녀를 이기려 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마님, 이만 돌아가시렵니까?”
보주가 물었다.
강소심이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아니, 잠시 곳간에 좀 들르지.”
셈을 해보니, 현재로선 자신이 귀염을 받는다고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강소심은 우선 장 씨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어쨌든 자신이 곳간의 열쇠를 쥐고 있어도 시어머니 장 씨의 분부에 따라 움직인다는 건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소란이 벌어져도 자신에게 불똥이 튀진 않을 것이다.
구씨 가문 안채 곳간에는 각종 값진 물건이 쌓여 있었다. 작게는 황금과 옥으로 만든 술잔부터, 크게는 황금 만 냥 값의 붉은 산호 병풍까지.
구씨 집안의 가주이자 구수운의 아버지인 구 나리가 직접 장 씨에게 선물한 게 아닌 이상, 곳간에서 가져온 물건은 반드시 원 상태 그대로 곳간에 돌려놓아야 했다.
정월(正月)에 구 나리의 넷째 부인이 비취와 진주로 만든 머리 장식을 친정에 가져갔다가, 머리 장식에 달려있던 삼백 냥짜리 진주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장 씨는 첩실에게 사비로 진주알을 메워놓으라 하였다. 그러나 일곱째 여식에게 몰래 은자를 다 줘버린 넷째 부인에게 삼백 냥이 있을 리 없었다. 넷째 부인은 결국 친정집 비단 가게에서 자수를 놓으며 아직도 돈을 갚고 있었다.
곳간이 있는 높다란 돌담 안으로 들어오니, 이곳을 관리하는 시녀 몇이 강소심에게 달려와 인사를 올렸다.
강소심은 시녀들을 일으켜 세운 뒤, 곳간 옆 방에 들어가 앉았다. 시녀들이 향긋한 차를 내어오자, 그녀가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마님, 점검 나오신 겁니까?”
이곳에서 주인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안 할멈의 며느리, 안순(安順)이었다.
곳간의 물품은 두 달에 한 번씩 점검하였다. 주인이 직접 할 때도 있었고, 지정된 시녀나 할멈이 점검을 마친 뒤 보고를 올리기도 하였다. 무작위 점검은 구수운이 곳간을 관리하던 시절 만들어 놓은 규율이었다. 강소심은 이 규율이 썩 괜찮은 것 같아, 지금까지도 이를 따르고 있었다.
구수운은 곳간 관리 조항부터 상벌(賞罰) 항목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글로 남겼다. 곳간 관리자도 이 규칙을 따라야 했고, 태어나 처음으로 곳간을 관리하는 강소심에겐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 규칙이 자신이 권한을 이행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까 봐 걱정한 장 씨는, 곳간에서 일하는 시녀를 교체하는 동시에, 구수운의 규칙도 주인어른이 곳간을 관리할 때 썼던 옛 규칙으로 교체하였다. 이제 장 씨가 곳간에서 물건을 빌리고 돌려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장 씨를 추궁할 수 없었다.
강소심은 안순이 가져온 장부를 쓱 훑어보며 물었다.
“오늘 바깥채에 연회가 없네?”
안순이 대답했다.
“예, 연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곳간을 봉쇄하고 전체 점검을 하도록 하지.”
강소심이 장부를 탁 덮었다.
“팻말 가져오게나.”
전체 점검은 모든 품목을 하나하나 점검하는 것이었다. 곳간을 봉쇄하면 바깥의 물건을 곳간에 들일 순 있어도, 곳간의 물건을 밖으로 가져갈 순 없었다.
시녀들에게 임무를 배정한 강소심은 정작 점검 임무를 보주에게 맡겼다. 이윽고 방 안에는 안순과 강소심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어머님께서 시키신 일이야.”
눈치가 훤한 강소심이 구시렁대는 안순의 속내를 모를 리 있나.
안순이 곧바로 웃음을 지었다.
“마님, 그럴 줄 알았습니다. 마님께서 아무 연고도 없이 곳간을 봉쇄하라 하실 리 없지요.”
강소심은 제 비위를 맞춰주는 안순의 행동에도 개의치 않아 했다.
“평소 셋째 아씨네에선 누가 물건을 가지러 오나?”
“셋째 아씨께선 곳간 열쇠를 넘긴 이후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주인마님께서 선물을 주실 땐 큰 시녀인 백하나 이등 시녀인 녹국이 와서 물건을 받아 갔습니다.”
안 씨 가족은 장 씨가 친정집에서 데려온 심복들이었기에, 장 씨와 구수운 사이의 불화를 모를 리 없었다. 장 씨의 맏며느리가 구수운에 관해 물어보니, 안순은 하나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 둘 뿐이던가?”
강소심이 담담하게 물었다.
“저는 둘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주인마님께서 셋째 아씨네 잡일 하는 계집을 벌하셨다고 저희 어머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름이 묵자라던데, 저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입니다.”
안순은 말이 유창한 여인이었다.
“벌한 것까진 아니고, 뺨을 한 대 때린 것뿐이야.”
강소심이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안순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명심해, 오늘은 누구도 곳간에서 물건을 가져갈 수 없어. 만약 바깥채 나리들께 급히 필요한 물건이라고 하면, 나를 찾아오도록 해.”
“예, 마님.”
안순은 강소심의 뒤를 따라 그녀를 배웅하였다.
강소심이 저 멀리 사라진 뒤, 안순이 믿음직한 시녀 하나를 불러 말했다.
“당장 안 할멈께 가서 어떻게 된 건지 알아 와.”
온화한 성격의 강소심은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중에 욕을 먹는 건 결국 안순 본인일 것이다.
곳간을 봉쇄하라고?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
구씨 가문의 다섯째 아들 구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곳간에서 귀한 장신구를 가져다가 제 시녀들에게 선물하곤 하였다. 평소 안순은 다섯째 나리에게 장신구를 전해줄 때마다 주인마님께 보고를 올렸다. 도련님을 벌할지, 아니면 눈감아 줄지는 온전히 주인마님이 결정했다.
안 할멈은 그녀에게 마님께서 자질구레한 몇십 냥짜리 물건들은 거의 신경 쓰지 않으신다고 귀띔해 주었다. 만에 하나 오늘도 다섯째 나리가 장신구를 내놓으라며 곳간을 찾았다가 곳간을 열어주지 않는다며 마님 댁에서 소란을 피우면, 과연 마님께서 제 아들을 욕하며 자신의 편을 들어주겠는가?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시녀가 알아 온 소식에 따르면, 마님께서 구수운에게 눈치를 주기 위해 곳간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속으로 계산을 마친 안순은, 해바라기씨 한 봉지에 찻주전자를 들고는 복도 아래에 앉았다.
이레 동안 목욕재계를 하려면 향과 다기(茶器), 그리고 머리 장식이 필요했다. 절은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절대 황금이나 은으로 만든 것을 가져가선 안 됐고, 반드시 소박하게 채비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호 아씨의 신분에 어긋나서도 안 되니, 옥기(玉器)가 가장 적당했다. 내일 바로 출발한다면, 오늘 구수운의 시녀가 옥기를 가지러 올 게 뻔했다.
오시(*午時: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가 막 넘었을 무렵, 누군가 문고리를 두드렸다.
문을 지키던 시녀가 고운 목소리로 누구인지 물었다.
“셋째 아씨를 모시는 백하야.”
시녀가 재빨리 안순을 바라보았다.
손짓으로 시녀를 부른 안순이 귓속말로 분부를 내렸다.
문 뒤에 선 시녀가 앙칼진 목소리를 내었다.
“오늘은 곳간을 봉쇄하고 전체 점검을 해서, 물건을 들일 수만 있어. 내일 다시 와.”
문밖에 긴 정적이 이어졌다.
문밖의 시녀가 눈치채고 돌아간 줄 알았던 안순은 어째서인지 의기양양했다.
바로 그때, 밖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지키던 시녀와 안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린 공용 물건이 아니라, 곳간에 보관해둔 셋째 아씨 물건을 가지러 온 건데, 그게 전체 점검이랑 무슨 상관이야? 우선 문이나 열어줘. 내가 관리하시는 분이랑 이야기해볼게.”
문이 열리고, 늘씬한 몸매의 시녀 둘이 문턱을 넘어섰다. 하나는 안순이 아는 백하였는데, 나머지 하나는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혹시 얘가 마님께 따귀를 맞았다던 그 묵자라는 계집인가?’
곳간을 관리하는 안순은 일등 시녀보다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일어나서 마중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이곳에서만큼은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방금 네가 말한 건가?”
곳간 관리자라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안순이 멸시하듯 턱 끝으로 낯선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 얼굴은 실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묵자야, 이분이 곳간을 관리하는 안 아주머니셔.”
백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채를 관리하는 여인은 바깥채의 집사와 직무가 동일했다. 가게나 사업상의 일을 관리하고, 집안 여인들을 대신해 실무를 보는 등, 안채에선 일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백하는 아는데, 너는 누구니?”
묵자의 말에 괜스레 마음을 졸이던 안순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저는 묵자라고…….”
묵자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안순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제 알겠다. 네가 바로 마님께 따귀를 맞았다던 그 묵자구나.”
안순의 말에 옆에 있던 시녀들이 시시덕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 별로 안 아팠던 모양이네. 이렇게 또 매를 벌러 온 것을 보니 말이야?”
백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백하는 이곳에 몇 번이나 왔었지만, 안순이 이토록 간사하고 냉정하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묵자는 다른 사람의 이목을 받기 싫어서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그녀가 살며시 턱을 끌어당기자, 두 볼 옆으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 누구도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웃음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가 무슨 말을 했길래 매를 벌었을까요? 제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안 아주머니께서 말씀해주시죠.”
바닥에 쌓인 해바라기씨 껍질을 보니, 한참 동안 그녀를 기다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