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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화 급상승 (1) >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머리 좋고, 판단력 좋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전위 역할이었다는 것까지 다 인정해. 솔직히 다시 봤어."

팀원 한 명이 내게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근데 혼자서 수호자를 상대하겠다는 건 아니지. 만약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겠는데, 내가 미쳤다고 자존심 때문에 수호자를 혼자 상대하겠다고 했겠는가.

"그냥 이게 최선이라 그런 거지."

"최선이라고? F랭크 혼자서 수호자를 처리하겠다는 무모함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 혼자 처리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맡는다고 했지."

"뭐?"

가짜라곤 해도 최소 C랭크는 될 텐데, 내가 무슨 수로 혼자 쓰러트리겠어.

"요컨대 미끼라는 거지."

"미끼?"

하지만 무기의 극의와 무기의 주인. 그리고 포식자의 살의를 이용한다면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다.

"나라도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거든."

"······그런 의미였어?"

그의 표정이 살짝 온화해졌다.

납득한 모양이다.

"아니, 근데 니 말대로라면 미끼 역할이 제일 중요한 거 아냐? 네가 쓰러지면 그땐 진짜 전멸이라는 건데. 아무리 봐도 신지아에게 붉은 해태를 혼자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좋은 의견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니. 지아보단 내가 나아."

"이유는?"

"간단해. 푸른 해태를 공략하기 위한 열쇠는 '화 속성'이거든.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염이라면 눈이 돌아가서 따라오지."

"그거랑 네가 미끼를 맡는 게 무슨 상관인데?"

나는 무언으로 쥐고 있는 창대에 마력을 집중했다.

화르르륵-!

그 순간 창대에 붉은 마력이 화염처럼 일렁였고.

"······미친?"

세 명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런 상관."

* * *

사관학교 통제실.

수많은 교관들이 각각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17조 전멸. 의무반 부탁드립니다."

각각의 모니터에는 가상 유적지를 공략 중인 팀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2조 공략 완료. 종합 평가 C+ 개별 평가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눈에 불을 켜고 화면을 응시중이다. 훈련에서 혹시 일어날 수 있는 불의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각 팀의 움직임을 평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21조 수호자 석암 스핑크스와 전투 시작했습니다."

모두 바삐 움직이는 와중.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보조 교관 한 명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어우. 석암 스핑크스? 되게 귀찮은 거 넣어 놨네. 저거 넣어 둔 교관님은 사탄이 분명해요. 그쵸?"

"글쎄."

피진호가 무던하게 대답했다.

가상 유적지 공략에서 등장하는 수호자는 해당 가상 유적지를 담당하는 교관들이 정해서 투입한다.

"저 정도로 사탄은 무슨. 내가 설정한 놈에 비하면 보너스 스테이지나 다름없는 것을."

보조 교관이 떨리는 눈으로 되물었다.

"피 교관님은 대체 어떤 수호자를 설정해 두셨길래······."

"궁금한가?"

"네. 엄청요."

"흠. 별 건 아니고."

피진호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태극 해태."

"······잘 못 들었습니다?"

"태극 해태라고 했다."

"그, 쌍둥이 수호자요?"

"그래."

"와. 진짜 사탄이 여기 계셨네."

"호들갑은."

"호들갑이 아니라······."

보조 교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때였다.

"7조! 태극 해태와 교전 시작했습니다!"

한 교관이 소리쳤다.

"태극 해태?"

"그걸 넣었어?"

"와. 어느 교관인지 몰라도 자비가 없네."

그 소리를 들으며 보조 교관이 능글맞게 웃었다.

"다들 저랑 똑같은 생각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피진호 사탄님."

"다들 과장이 심하군. 정보만 알고 있으면 쉬운 놈들인데."

"그 정보를 알면, 이라는 조건이 너무 빡세잖아요. 저희 교관들도 이번에 수호자 리스트에서 봐서 처음 안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사관생들이 태극 해태의 정보를 어떻게 알아요?"

"그럼 공부가 부족한 거지."

"와······. 진짜 악마다."

보조 교관이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피진호를 바라봤다.

"7조 사관생들만 불쌍하게 됐네······. 어디 그 불쌍한 사관생들이 누군지 구경이나 한번 해 볼······ 으잉?"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보조 교관의 눈이 부릅떠졌다.

"신지아에 강서율? 7조 설마 피진호 교관님네 반 애들이에요?"

"그래."

"······와. 나중에 어떤 원망을 들으시려고."

"글쎄. 오히려 감사받을 거 같은데."

"감사요? 왜요?"

피진호 교관이 픽 웃었다.

"수호자가 어려운 만큼 높은 가산점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아니, 그거야 공략에 성공했을 때 얘기······. 아. 신지아라면 가능한가?"

신지아 정도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뭐, 확실히 공략만 하면 대박이긴 하죠. 근데 그렇게 되면 신지아만 계 타겠네요."

태극 해태 공략에 막대한 공헌을 한 자에게는 막대한 점수가 부여될 게 분명하다. 아마 높은 확률로 신지아가 점수를 독점하게 되겠지.

"아니. 네 말을 빌리자면, 계를 타는 건 신지아가 아니라 강서율이 될 거다."

보조 교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강서율이 왜 나와요?"

"푸른 해태를 공략하기 위한 열쇠는 '화염'이니까."

"그게 강서율이랑 무슨 연관이······."

그때였다.

"오오오!"

"세상에!"

모니터 앞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화 속성 강기!"

"강서율도 속성 마력을 각성했어?"

"하시연에 이어서 두 번째야! 이번 1학년 왜 이래!"

피진호 교관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저런 연관이 있지."

보조 교관의 입이 쩍 벌어졌다.

"······헐. 대박."

모니터 너머.

강서율은 붉은 강기를 일렁이며 푸른 해태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서.

비록 회피에 전념한 전투였지만, 그 동작은 매우 깔끔하고 정교했다.

교관들의 입에서 연신 탄성이 흘렀다.

"이야. 1:3으로 나눈 것하며, 화 속성 마력으로 푸른 해태만 끌어내는 것 하며, 쟤네 태극 해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신지아일까요? 엄청난 지식량이군요."

모든 교관들의 주의가 7조의 전투 장면으로 쏠렸다.

"신지아는 명불허전이고. 다른 두 명도 나쁘지 않고. 마지막으로 강서율은······ 창도 잘 쓰네요?"

"여전히 훌륭한 솜씨긴 한데. 역시 능력치가 옥에 티군요."

보조 교관이 피진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강서율 사관생 창도 쓸 줄 알았어요? 단검이랑 활 전문 아니었나?"

"그래. 어제부터 다루기 시작했지."

피진호의 무던한 말에 통제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잠깐만요. 어제부터라고 했어요? 저게요? 저게 하루 만에 숙달된 창 솜씨라고요?"

화면 너머 강서율의 창 솜씨는 절대 초보자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능력치의 부족을 기술로 완전히 커버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추가로 강기도 어제 각성했지."

"······세상에."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강기를 각성한 것도 놀라운데, 저 숙련도가 고작 하루 연습한 숙련도라고?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피진호 교관의 말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은 세상 무엇보다 정확하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가끔 있다. 천재성이 늦게 개화하기 시작하는 학생들이. 내 아내가 그랬지."

피진호 교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하시연 사관생을 보면서 뭐라고 했었지?"

"네? 제가 뭐라고 했었나요?"

"대충 이번 학년의 1위는 하시연이나 신지아 둘 중 한 명으로 결정난 것 같다. 뭐 그런 말이었는데."

"아, 네네. 그랬죠."

"개인적으로 둘 다 1위는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2, 3위를 두고 다투게 되겠지."

"······그 말은?"

피진호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모니터 너머의 강서율을 바라보기만 할 뿐.

하지만 피진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교관은 없었다.

"······강서율."

강서율의 대한 교관들의 인식이 180도 달라진 순간이었다.

* * *

"7조! 종합 평가 A!"

우리는 무사히 가상 유적지를 공략했다.

"개별 평가 점수. 신지아 A. 혼자서 모든 공격을 담당했다. 특히 푸른 해태와 싸울 때, 화살촉을 들고 근접에서 싸운 것은 정말이지 훌륭했다."

과연 지아라고 해야 할까.

고득점을 받았다.

"서인량, 강호빈은 각각 B-다. 적재적소에서 필요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사이사이 잔실수가 많았다."

두 명은 만족한 모양새다.

하기야 B-면 상위 10%내에 들어갈 점수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강서율."

교관을 포함한 네 쌍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개인 평가 점수 A+!"

예스!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교관들도 잘 모르던 태극 해태의 정보를 알고 있던 지식의 방대함과 그 지식을 살린 훌륭한 전략. 마지막으로 화 속성 강기를 이용한 푸른 해태와의 1:1 교전까지. 훌륭했다."

우리 조의 평가를 담당한 교관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능력치가 낮은 게 아쉽군. 혼자서 푸른 해태를 쓰러트렸다면, 개별 점수 S였을 텐데 말이지."

"······하하. 다음에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입학 때와 비교하면 제법 능력치가 많이 오른 듯하니, 앞으로도 기대하겠다."

교관이 환히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상으로 가상 유적지 공략 훈련을 마치겠다!"

"수고하셨습니다!"

* * *

그날 밤.

기숙사 내의 카페에서는 두 명에 대한 화제로 소란스러웠다.

"들었어? 이번에 하시연 개별 평가 S 받았다는 거."

"황금 가고일을 혼자서 쓰러트렸다던데?"

한 명은 급격히 성장한 하시연에 대한 것이었고.

"그보다 놀라운 건 강서율이지. A+라면서?"

"크~ 이제 강서율한테 대시하면 얼굴과 실력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건가?"

"네 다음 옆에 있는 게 신지아."

"크윽. 이년이 비겁하게 팩트로 후리네."

다른 한 명은 강서율에 대한 것이었다.

"근데 진짜 대박 아니냐? 세계에 천 명밖에 없는 속성 마력 각성자가 같은 학년에만 두 명이라니."

"그것도 가장 범용성이 높은 빙(氷), 화(火)라는 게 더 소름이지."

"온갖 길드에서 하시연 잡으려고 난리라더라. 듣자하니 미국의 '더 원' 길드도 움직이고 있다던데."

"헐. 그 정도야?"

세계 1위 길드 '더 원'

신인은 받지 않기로 유명한 미국 소속 길드가 움직이고 있다는 말에 모두가 놀랐다.

"준수한 신체 능력을 지닌 이른바 마검사니까. 나 같아도 탐나겠네."

"크~ 조만간 랭킹 1위 바뀌는 거 아냐?"

"에이. 그래도 신지아는 힘들지 않을까?"

두 명은 뜨거운 감자였다.

"이야~ 다들 저렇게 극찬하시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래의 더 원 길드 소속 초인 하시연 님?"

카페의 구석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몰라아."

김철진, 하시연, 최지훈이었다.

하시연은 테이블에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엎어져 있어서 얼굴은 확인할 수 없으나, 귀는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야 부끄러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큭큭."

그 모습을 보며 김철진이 세상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하시연을 놀리는 건 김철진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그나저나 지훈이 너 골치 아프겠다?"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즐거움 중에는 최지훈에게 비아냥대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뜻이지?"

"강서율 말이야. 이번에 화 속성 강기까지 사용했다는데. 이거 완전히 처발리시는 거 아닌가 몰라?"

"개소리. 그래 봐야 놈이 F랭크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지."

"에엥? 그 F랭크한테 급소를 찔린 찐따라 잘 안 들리는데?"

김철진이 세상 띠꺼운 표정으로 비아냥댔다.

"······그건 조금 방심했을 뿐이다."

"풉. 눼에눼에 그러시겠죠."

"이······!"

최지훈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뭐라 반박하고 나설까 했지만, 김철진은 반응하면 더 좋아할 터.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쳇."

김철진이 흥이 식었다는 듯이 혀를 찼다.

"시연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지훈이랑 강서율이 붙으면 누가 이길 것 같아?"

"······나?"

하시연이 슬쩍 고개를 돌려서 한쪽 눈으로 김철진을 올려다봤다. 볼이 아직 불그스름하다.

주위 다른 사관생들의 넘치는 칭찬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표정이다.

"으음······."

하시연은 생각했다.

이기는 것은 분명 강서율이다.

저번에 넌지시 물었을 때, 이길 거라고 단언했으니 무조건 승리하겠지.

'봉인을 느슨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했으니까.'

랭킹을 올릴 필요가 있어서 조금 무리를 했다고 했다.

최지훈의 패배는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시연은 슬쩍 최지훈을 바라봤다. 은근한 기대심으로 가득 찬 표정.

그 표정을 앞에 두고 '서율이가 이길 것 같아!'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이.'

거짓말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그, 반반 아닐까?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뭐, 그리고 이 정도면 거짓말이라고 하기도 뭐하니까.

"반반······이라고?"

그러나 하시연의 그 말은 최지훈의 자존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내가 그딴 떨거지와 비교당한다고?'

그 말의 주체가 하시연이라는 사실에 더욱 자존심이 상했다.

'······강서율.'

최지훈의 속에서 질투와 자존심이 뒤섞여 질척한 어둠처럼 소용돌이쳤다.

수성 그룹의 힘을 이용해서 묻어 버리고 싶은 욕망이 치솟기도 했다.

"후."

하지만 참기로 했다.

그러한 행위는 하시연이 상당히 싫어하는 행위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용납지 못했다.

최지훈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3일만 참으면 될 얘기니까.'

랭킹전은 3일 뒤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본때를 보여 주지.'

최지훈의 눈에서 살벌한 빛이 흘러 나왔다.

한편,

그 시간 강서율은 피진호용 개인 단련실에서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성공했드아아아!"

입가에는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환호하고 있다.

"최지훈 넌 이제 죽었어."

강서율의 창 끝에서 붉은 강기가 은은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33화 급상승 (1)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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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화 급상승 (2)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오늘은 금요일.

강서율과 최지훈의 랭킹전이 있는 날이다.

"······사람이 뭐 이렇게 많아."

관중석에서 유화가 툴툴댔다.

관중석은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모두 강서율을 직접 보기 위한 것이었다.

"최지훈은 어차피 수성 그룹 후계자라 아무 의미도 없어. 강서율. 강서율을 집중적으로 봐."

"네!"

주위 스카우터들의 입에서 강서율의 이름이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었다.

"에휴."

강서율은 이미 당첨된 복권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화 속성 초인의 범용성과 활용성은 이로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힘을 드러낼 거면 적당히 하지 처음부터 속성 마력을 드러내는 게 어딨어.'

덕분에 유화의 기분만 꿀꿀했다.

강서율의 진가는 자신만 알고 있던 사실인데.

아니, 신지아도 포함해야 했던가.

물론 화 속성 마력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건 유화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힘을 얼마나 숨기고 있는 거야.'

상상도 안 간다.

피진호의 '신비를 보는 눈'까지 속일 정도니,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이 아닐까.

'과거를 암만 조사해도 수상한 건 찾을 수 없었고.'

유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의문스런 남자다.

유화는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경기장 중심의 강서율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뭐, 그래서 더 매력적인 거지만.'

비밀 많고, 능력 있고, 잘생기고, 젊은 남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무리다.

의심스럽긴 해도 비혼 길드의 은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관심의 한 가지 이유가 되겠다.

"시작한다! 길드장님께 보고 먼저 해!"

"카메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주위 스카우터들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유화는 허겁지겁 움직이는 사람들을 흘겨보며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강서율은 못 먹는 감인데, 괜히 사서 고생하네.'

저게 진짜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건가.

누군가가 유화를 부른 것은 그때였다.

"유화 길드장님도 스카우트 목적으로 오신 건가요?"

"······신지아?"

유화가 혀를 찼다.

이 넓은 관중석에서 어떻게 만나도 신지아랑 딱 만날 수 있는지.

"글쎄요."

"만약 그런 목적이라면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서율이는 졸업 후에 신화 그룹에 입사하기로 했거든요."

유화가 시선을 강서율에게 고정한 채로 비음을 흘렸다.

강서율이 신화 그룹에 입사한다고? 퍽이나.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신화 그룹은 강서율을 온전히 담을 만한 그릇이 못 된다.

"그럼 포기해야겠네요."

물론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니, 대충 대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여자는 침묵했다.

주위에는 온갖 스카우터들의 웅성거림만이 들려왔다.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유화가 넌지시 물었다.

"서율이요."

신지아가 무던하게 대답했다.

* * *

"1분 뒤에 시작하겠다. 양 측 마지막으로 장비를 체크하도록."

심판을 맡은 교관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와 최지훈에게서 떨어져 갔다.

교관도 마지막으로 마력 필드의 세이프티 설정을 확인할 생각인 것 같다.

경기장의 중심에는 나와 최지훈만 덩그러니 남았다.

"······."

최지훈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찌른다. 강렬한 눈빛. 내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넌 내가 그렇게 싫냐?"

"그래. 싫다."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최지훈이 날 싫어하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먼저 하시연이 내게 호의를 표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겠지.

선민의식이 남아 있는 그의 성격상, F랭크 떨거지에 불과할 내가 자꾸 주목을 받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내가 그렇게 의심스러워?"

"그래."

의심.

그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을 게 분명하다.

수성 그룹의 힘을 모두 동원해도 별 다른 정보를 찾을 수 없었을 테니 더욱 의심스러울 것이다.

나에 대한 의심과 질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섞여, 나를 사관학교에 잠입한 빌런이라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역지사지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판단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합리적인 의심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의문이 하나.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네가 날 의심하는 거랑 랭킹전이랑 무슨 상관이야?"

"······."

최지훈은 침묵했다.

"나랑 싸워 본다고 의심이 풀리는 것도 아닐 것이고."

계속 궁금했다.

대체 내 정체를 밝히는 거랑 랭킹전에서 나랑 붙는 게 무슨 상관인지.

"내 정체를 밝히겠다는 건 명목일 뿐이고. 그냥 나를 된통 후드려 패고 싶어서 그런 건가?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주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게 망신을 주는 게 목적일까.

"부정하진 않겠다."

"솔직하니 좋네."

최지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싸가지는 없지만, 정직하다.

말투나 분위기, 그리고 표정이 저래서 그렇지 마냥 나쁜 놈은 아니다.

"랭킹전 끝나고. 시간 있냐?"

"뭐?"

나는 장비를 적당히 확인했다.

단창, 단검, 갑옷 등의 훈련용 장비는 멀쩡하다.

무기의 극의도 문제없다.

다 이상 없구만.

"······무슨 생각이지?"

최지훈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별 생각 없어. 앞으로 최소 4년은 같이 생활해야 할 텐데, 계속 의심받는 것도 뭐하니까."

나는 픽 웃었다.

"얘기나 좀 하자고."

"······."

수성 그룹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악수 중의 악수다.

"대화로 풀면 좋잖아?"

인생에서 누군가와 척을 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인생이 피곤해진다.

"······."

최지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아. 그리고 남자답게 랭킹전 졌다고 속에 담아두는 건 없기다."

최지훈의 표정이 완전히 구겨졌다.

"그 말은 네가 이길 거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만한 미소로 답했을 뿐.

"······건방진 놈."

최지훈이 으르렁댔다.

"시간됐다! 강서율, 최지훈 사관생은 위치로!"

교관의 말과 함께 중앙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10, 9, 8]

최지훈이 검을 꺼내 쥐고, 가볍게 손목을 돌린다.

나도 오른손으론 단창을 움켜쥐었다.

[4, 3]

최지훈의 전신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오오!

관중석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최지훈의 몸에서 방사된 마력이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

마력의 청색빛으로 빛나는 신비로운 [마갑]이 최지훈의 전신을 감쌌다.

"······이야. 투구까지. 준비성 아주 철저하시네."

[2, 1]

[Start!]

다음 순간 최지훈의 신체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과연 103위다운 움직임이었다.

저번과 달리 방심도 하지 않고 있는 듯하니, 더욱 빨라보였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던 움직임이다.

나는 오른손엔 단창을 든 채로, 왼손으로 허리춤의 단검을 빼어 들었다.

시야가 온갖 바람으로 가득 찼다.

바람의 길.

나는 붉은 실선이 가리키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한 걸음.

상체를 숙이고.

단검을 비스듬하게 휘두른다.

키기기기긱!

단검을 타고 최지훈의 장검이 흘러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압도적인 능력치의 차이로 왼팔의 근육이 미칠 듯이 떨려온다.

하지만 [바람의 길]과 [무기의 주인]의 시너지는 능력치의 차이를 잠시나마 극복했다.

티이잉-!

하지만 대가는 컸다.

내가 쥐고 있는 단검이 멀리 튕겨나간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최지훈의 목적이 내 단검을 날려버리는 것이었겠지.

원래대로 돌아 온 시야.

최지훈은 웃고 있었다.

근데 이걸 어쩌나.

애초부터 이 초격을 막은 후엔 단검을 놓아 버릴 생각이었는데.

최지훈의 신체는 밸런스가 붕괴되어 있다.

아마 내 단검을 멀리 날려버리기 위해 무리하게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마갑의 방어력을 믿고 한 행동 같은데.

그건 치명적인 실수다.

화르르륵-!

나는 오른손에 쥐고 있는 단창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 순간, 마력이 창 끝에 응집되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당황한 최지훈이 무게 중심을 뒤쪽으로 옮겼다.

완전히 무너진 신체 밸런스.

완벽히 기회를 잡은 나.

본래라면 절대 피할 수 없을 일격이었다.

하지만 능력치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나는 느리고.

최지훈은 빠르다.

이대로라면 내 창이 최지훈의 마갑을 뚫기도 전에 내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버릴 테지.

물론 그렇게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피이이잉-!

내 전신의 털이 바짝 섬과 동시에, 내 눈에서 맹수의 기세가 일렁였다.

포식자의 살의.

"크윽!"

순간의 경직.

무게 중심을 뒤로 옮겨 가던 최지훈의 신체가 어정쩡하게 멈췄다.

그것은 찰나였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 작은 틈으로 내 모든 것을 내질렀다.

파앙!

하지만 이변은 없었다.

최지훈의 [마갑]은 결코 103위에 머물 만한 특성이 아니었다.

강기의 힘을 빌어 마갑을 아주 조금 관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완벽히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끼기긱-!

마갑과 내 단창 사이로 거친 마찰음이 울렸다.

슬슬 경직이 풀리기 시작한 최지훈이 냉소했다.

"F랭크 떨거지가 내 마갑을 뚫을 수 있을 리가 없···?"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물들었던 최지훈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지이이잉-!

"내가 F랭크는 맞는데."

"······너!"

마갑과 단창의 접합부에서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떨거지는 아니거든!"

화르르르르륵!

내 창끝의 소용돌이가 완전히 형태를 갖추었다.

드릴 같은 형태의 강기.

화염 강기를 회전시켜, 관통력을 극대화한 형태.

스파이럴 스피어.

"흐으읍!"

나는 전신의 힘을 총 동원해.

파아아아앙-!

창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내 단창과 최지훈의 마갑이 부딪치며 귀를 찢는 충돌이 울렸다.

과연 마갑이라 불릴 만한 고강도의 마력 갑옷이었다.

쨍그랑-!

하지만 승리한 건 내 창이었다.

마갑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콰아아아앙-!

"커허어억!"

내 단창이 최지훈의 가슴을 꿰뚫었다. 충격으로 최지훈의 신체가 하늘을 날았다.

마력 필드의 세이프티 설정이 아니었다면, 즉사였겠지.

"허억··· 허억···."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숨을 골랐다. 전신이 아프다.

아마 이 공격이 실패했다면 패배한 건 나였겠지.

하지만 성공했다.

털썩-

최지훈의 신체가 바닥에 널브러지는 소리와 함께.

"승자! 강서율!"

[Finish!]

내 승리가 확정됐다.

"······짜식. 내가 단창을 들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지."

* * *

관중석은 아주 조용했다.

모두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도 않는다는 표정들이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소리쳤다.

"가, 강기를 회전시킨 거야?"

"말도 안 돼! 20세의 사관생이 그런 정밀한 운용을 할 수 있을 리가!"

관중석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길드장님! 강서율은 무조건 잡아야 합니다!"

"화 속성 강기만이 아니었습니다! 마력 컨트롤이······."

사방에서 전화를 붙잡고 침을 튀기며 강서율의 대단함을 피력했다.

고작 4초 남짓한 경기에 불과했지만, 그 4초는 모두를 매료시키기엔 충분했다.

"······저 정도면 그냥 힘을 숨길 마음이 없는 거 아니신가 몰라."

유화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강기는 그냥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대우를 받는다.

신체가 아닌 쥐고 있는 무기에 마력을 담는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강서율은 일반적인 강기가 아니라 속성을 담은 강기를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사실 여기서 강서율의 가치는 결정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유화는 강서율을 당첨된 복권이라 표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가치는 또다시 상승했다. 속성 강기에 더불어 강기를 변형시킨 것으로.

그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속성을 부여한 강기나, 강기의 형태 변형은 비단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두 기술을 사용하는 초인은 존재했다.

하지만 두 가지 기술을 동시에 사용하는 초인은 없었다.

"그렇다니까! 화 속성 강기에 변형을 추가했다고!"

"못 믿겠으면 영상 보낼 테니까, 빨리 확인해!"

"조건? 신인 최고론 어림도 없어! 그래! 그 정도라고!"

전대미문(前代未聞)한 초인의 등장에 모두 난리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 강서율이 아무 생각도 없이 저런 행동을 했을 리는 없고. 주목을 모으는 게 목적인가? 근데 왜?'

유화가 강서율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적당히 하셔도 됐을 텐데."

신지아가 한숨을 쉬듯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어요?"

그 중얼거림은 주위의 소란스러움에 묻혀서 유화의 귀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지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신화 그룹의 네임 밸류로도 몰려드는 스카우터들을 막는 건 힘들어졌다.

신화 그룹의 입김이 닿지 않는 기업들이 움직일 테니까.

오늘 강서율이 보여 준 모습은 그만큼 특별했다.

'아마 모든 나라가 움직이겠지.'

신지아는 다시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34화 급상승 (2)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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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화 급상승 (3) >

그날 밤.

나는 방에서 지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속성 강기에 형태 변화는 진짜 너무 가신 거 아니에요?"

지아가 웬일로 툴툴댔다.

"안 그래도 쏠리는 관심. 진짜 간신히 막고 있었는데······."

한숨을 푹푹 내쉰다.

"그야 국지전 출전 멤버가 돼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어느 정도 힘을 드러내실 거라곤 예상하긴 했지만요."

"······."

"유적지에서 속성 강기를 쓰는 것까지도 그러려니 했는데······. 진짜 형태 변환은 너무 갔잖아요······."

나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능력치만 더 드러내신다던가 하는 방법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왜 하필······."

"그, 그러게."

지아 입장에선 당연한 생각이다.

내게 숨겨진 힘 같은 게 진짜로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그냥 이 방법밖에 없어서 이렇게 했을 뿐이다.

희귀한 기술이라고 꽁꽁 감싸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현 상황에서 내 유일한 밥줄 스킬인데.

물론 이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설마 속성 강기나 형태 변화가 그렇게 희귀한 기술인 줄은 몰랐지."

오늘도 얼굴에 철판을 까는 수밖에.

이른바 '나 엘프라서 인간 세상에 대한 상식 잘 몰라YO-' 작전.

"그야 마나의 축복을 받은 엘프족에겐 쉬운 일이겠지만요······. 으. 진짜 이상한데서 상식이 부족하시다니까."

다행히 작전은 잘 통한 것 같다.

"다음부터는 저한테 상담이라도 한번 하고 행동해 주세요."

"알았어."

지아가 날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일족에선 뭐라고 하던가요?"

"······응? 일족?"

그러고 보니 저번에 얼핏 말했었지. 엘프족의 비밀 결사가 어쩌구 저쩌구.

"네. 선조님의 과거를 조작하고, 뒤에서 백업해 주는 조직이요. 단체명은 몰라서······."

"아, 아하! 그 조직 말이지!"

"네. 그 조직이요."

······무슨 조직인데 그게.

모르겠지만 일단 둘러대자.

"그냥 나 알아서 하라던데? 엘프라는 걸 들키지 않고 국지전에만 출전하면 상관없다고."

"와. 엄청난 자신감이네요."

"응?"

갑자기 무슨 자신감?

"선조님이 무슨 짓을 해도 그쪽에서 다 커버할 수 있다는 뜻 아니에요?"

"아, 응. 그런 거지."

······그게 그렇게 되나?

"아무튼 선조님. 조금 귀찮아지실 수도 있는데, 그거 다 자업자득이니까 알아서 하세요. 전 몰라요. 이미 제가 막을 수 있는 선을 떠났어요."

"······에이. 귀찮아 봐야 얼마나 귀찮겠어."

* * *

다음 날.

나는 지아의 으름장이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서율아! 혹시 졸업 후에 진로 정해졌어?"

"혹시 오늘 시간 있어? 같이 점심 먹을래?"

"서율아! 저녁에 같이 훈련하자!"

기숙사 로비에서 조식을 먹는 중.

갑작스레 몰려든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혹시 탈리스만 길드에 관심 있어? 우리 형이······."

"탈리스만은 무슨. 우리 혁명 길드로 와. 길드장님이 최고의 대우를······."

"네, 블랙 기업은 꺼지시구요."

"네, 다음 탈세에 걸린 3류 기업."

하루 사이에 엄청난 변화다.

분명 어제까진 신지아라는 금덩이 옆에 들러붙어 있는 돌멩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나?

하기야 화 속성 마력을 개방하고 난 뒤부터는 조금 다가오는 애들이 많아지긴 했었지.

근데 절대 이 정도는 아니었다.

"미, 미안한데 그런 건······."

"그러지 말고 한번 만나만 봐 주면 안 돼? 길드장님이 너 데리고 오면 보너······ 크흠."

다들 자기 얘기만 해서 뭐라 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핑핑 도는 느낌.

인파에 취한다고 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아주 잘 알겠다.

그러던 와중 인파 사이로 지아와 눈이 맞았다.

뭔가 눈으로 '거 봐요. 귀찮아 질 거라고 했죠?'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의사를 전했다.

'살려 줘.'

지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 번 미소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한데 서율이는 졸업 후에 신화 그룹에 입사할 예정이야."

순간적으로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니까 괜히 귀찮게 하지 말아 줄래?"

이 자리에서 신화 그룹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기업 및 길드는 없다.

"······에이."

"김 팍 새네."

"말했잖아. 처음부터 알고 접근한 거라니까."

"하긴. 신지아가 남자에 목 맬 리가 없을 거라곤 생각했어."

모두가 혀를 차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역시 신화 그룹.

네임 밸류가 대단하다.

모두가 사라지고, 나는 테이블에 그대로 엎드려 누웠다.

피곤하다.

그런 내게 지아가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교내에선 어떻게 도울 순 있는데, 거물들이 등장하면 그땐 진짜 어쩔 수 없어요. 그건 알고 계세요.

"끄응."

순간 괜한 짓 했나 싶은 후회로 가득 찼다.

* * *

그날 점심.

오늘은 유화와 점심 약속이 있다.

나는 조용히 학교 부지를 빠져나와 인근의 옥화당으로 향했다.

"어서와요."

방으로 들어서자 그때와 마찬가지로 유화가 여유롭게 날 반겼다.

"······안녕하세요."

나는 터벅터벅 걸어서 유화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화가 옅게 웃었다.

"되게 피곤해 보이시네."

"죽겠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귀찮게 굴던지.

정신이 다 없다.

F랭크 초인이 뭐가 그리 탐난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네.

"근데 사람들의 주목을 집중시키는 이유가 뭐에요?"

"?"

이건 또 무슨 신박한 헛소리지.

나는 죽은 고등어 같은 눈으로 유화를 바라봤다.

"아니에요? 되게 특이한 방법으로 힘을 드러내시길래, 화제몰이를 하는 게 목적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맞네. 유화 입장에선 저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비밀이에요."

나는 말을 지어내는 것도 귀찮아서 대충 둘러댔다.

"국지전에 출전하신다고 했으니까, 미끼 같은 느낌인가요?"

"네네. 그런 느낌이죠."

영혼이 빠진 대답이었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유화를 바라봤다.

"역시 그랬구나."

뭔가 고민에 잠긴 표정이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는 걸까.

"아. 죄송해요. 멍하니 있었네요."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유화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요리는 저번이랑 조금 다른 걸로 시켜 봤어요. 괜찮죠?"

내 눈에 활기가 돌아왔다.

아니, 광기라고 해야 하나.

"그럼요. 저 가리는 거 없습니다."

옥화당 is 뭔들.

* * *

누가 말했던가.

행복이란 건 그리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고.

공감한다.

행복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한민국 서울 옥화당이라는 식당.

즉, 이곳에.

"······세계 곳곳에 옥화당이 있다면 세계 평화가 찾아 올 텐데."

내 중얼거림에 유화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괜찮은 방법이네요. 실제로 효과 있을 것 같아요."

"그쵸?"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침묵을 즐겼다.

한옥 특유의 풀내음에 마음이 평온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 맞아.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유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맹호의 건틀릿 아직 잘 가지고 있어요?"

"······안 팔았어요. 잘 가지고 있다니까요."

금호가 장난감으로 잘 쓰고 있다. 저번에 보니까 물고 빨고 아주 난리가 났던데.

"그럼 진짜 돈이 목적은 아니었단 거네요."

유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고대 유물이 필요하시다거나?"

"음."

필요하긴 하지.

근데 필요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대 유물은 골동품.

그런 걸 어디다 쓰려고 하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다.

"글쎄요. 필요할 수도 있고, 필요 없을 수도 있고요."

나는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아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유화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뭔가 불안한데.

"뭔데요?"

"됐어요. 말 안 할래요."

유화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면서 장난스런 눈짓으로 나를 힐끔힐끔 바라본다.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다.

'안 들어도 되겠어요? 분명히 후회할 텐데요?' 라고 얼굴에 써 있다.

"······알았어요. 사실대로 말할게요. 필요해요."

"처음부터 그렇게 솔직하게 나오면 좀 좋아요?"

내 말에 유화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건데요?"

"아,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비혼 길드에서 '콜렉터'랑 거래가 있거든요."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제가 알고 있는 그 콜렉터요?"

콜렉터(Collector).

혹은 수집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네. 세상의 온갖 희귀한 것들을 모으는 것이 취미인 괴짜 수집가요."

그의 수집 목록 중에는 [고대 유물]도 존재한다.

만약 그의 유물 콜렉션을 몇 개 양도받을 수만 있다면······.

내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어떻게. 필요하다고 하시면 한번 자리 만들어 보고요."

유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유화와 헤어진 뒤, 나는 인근의 한적한 공원에 앉아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00% 확답은 드릴 수 없어요. 아시다시피 그 양반이 워낙 괴짜여야지. 그래도 노력은 해 볼게요.

유화는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다.

유화의 성격상, 불가능한 것을 내게 말할 리는 없다.

아마 내가 콜렉터를 만날 수 있을 확률은 반반 정도가 아닐까.

사실 만나도 문제다.

그 괴짜한테 고대 유물을 어떻게 받아낼 수 있을까.

그것도 고민해 봐야겠지.

우웅-

내 휴대폰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날아온 메시지였다.

"뭐야."

[오늘 밤 시간 된다]

그게 다였다.

누가 보냈는지도 없고, 내용에 두서도 없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누구한테서 온 건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최지훈이네."

뭐, 오늘 따로 약속도 없겠다.

만나는 게 좋겠지.

먼저 대화를 나누자고 한 건 나였기도 하고.

[어디서 볼까?]

나도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하게 답장했다.

[내 집.]

갑자기 집으로 오라고?

[니네 집이 어딘 줄 알고 가?]

[지금 네가 있는 곳을 알려 주면 차를 보내겠다.]

"웬일로 서비스가 좋으시네."

뭔가 평소 최지훈답지 않게 친절한 느낌이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지금 나 하늘서리 공원에 있으.]

* * *

최지훈의 집은 재벌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으리으리했다.

대문을 넘어서 리무진을 타고 5분을 들어가고 있는데도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지아네 집보다 10배는 큰 거 같은데."

지아네 집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그냥 차원이 다르네.

회사는 비슷한 규모라는 설정이었으니까, 그냥 단순히 경영인의 마인드 차이인가?

하기야 신화 그룹은 검소함을 추구하니까.

그렇게 총 10분을 이동하고서야 거대한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와."

저건 또 엄청나게 호화로운 건물이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웅장함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기사가 문을 열어 주곤 고개를 숙였다.

"아, 네.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리자,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내게 다가와 작게 목례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나는 조용히 비서의 뒤를 따라갔다. 저택 내부도 마찬가지로 휘황찬란했다.

다른 세상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련님은 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가 문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노크.

"도련님. 강서율 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비서가 문을 열었다.

"······응?"

뭔가 세상 화려한 방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평범하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

아주 평온하고 차분한 응대였다.

순간 '너 누구냐.'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제 나한테 쳐발리기도 했겠다.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닐까 했는데, 너무 차분하다.

"장 비서님. 둘이서 얘기할 수 있게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문 앞에서 다시 한번 상체를 숙였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시길."

그 말을 끝으로 방에는 나와 최지훈만이 남았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앉아라."

최지훈이 맞은편의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았다.

"······."

다시 정적이 흘렀다.

가슴에 싸늘한 비수가 아닌 어색함이 날아와 꽂히는 기분이다.

얘랑 무슨 화제로 얘기를 나눠야 할지를 모르겠다.

일단 이 자리는 최지훈이 품고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온 거니까,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겠지.

"그, 일단······."

그때였다.

"미안하다."

갑자기 최지훈이 이상한 말을 꺼냈다.

"······뭐라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착각이 아니면 미안하다고 들은 거 같은데.

"내가 오해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환청이 아닌 모양이다.

뭐지 이거.

이게 그 유명한 개꿀잼 몰카라는 건가?

내 동공이 당황으로 떨렸다.

"설마 네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뭐?"

당황이 경악으로 변했다.

지금 내 과거라고 했어?

내 동공이 세차게 진동했다.

내 과거.

그것은 즉, 원작 주인공 강서율의 과거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설마.

설마 그걸 지금 이 시점에서 찾아냈다고?

대체 어떻게?

"멋대로 뒤를 캔 것도 미안하다 생각하고 있다."

최지훈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가방에서 무언가 서류를 꺼냈다.

그리곤 내게 건넸다.

그 서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햇빛 고아원 인체 실험장 사건 보고서]

나는 이마를 짚었다.

설마는 사실이 되었다.

이게 왜 지금······.

< 35화 급상승 (3)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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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화 포섭 (1) >

최지훈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고 있는 강서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혐오감이 가득한 일그러진 표정.

'······인간으로서 생리적으로 혐오감이 들 수밖에 없는 사진들이니까.'

그뿐이랴.

강서율에게 있어서 저 보고서에 기재되어 있는 사진들은 트라우마 그 자체일 터.

저런 표정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이건 어디서 찾은 거야?"

강서율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래대로라면 이 실험에 대한 정보는 지금 유출되어선 안 됐다.

진리의 구명자는 서울 한복판에서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 명에 가까운 아이들을 실험 재료로 사용했다.

이 사실을 세간에 알릴 수는 없었던 정부는 이 사실을 완벽하게 은폐했다.

얼마나 완벽하게 숨겼으면, 원작의 신지아나 유화마저도 중반까지 감도 잡지 못했을 정도다.

그런 극비 정보를 최지훈이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그것이 제일 의문이었다.

"장 비서님께서 말해 주셨다."

"장 비서님이면 조금 전 나 안내해 주신 분?"

"그래."

"······수성 길드도 사건의 은폐에 한 몫 거들었었지. 이해했어."

강서율은 납득했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 중에 장 비서라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던 것이리라.

최지훈의 집요한 모습에 어쩔 수 없이 햇빛 고아원의 정보를 푼 것이 아닐까.

'최지훈이 내게 필요 이상으로 극심한 의심을 품었기에 일어난 나비 효과인가.'

진짜 징하다 징해.

강서율이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이 거칠게 올려 뒀다.

"네 생각이 맞아. 나는 햇빛 고아원 생체 실험의 유일한 생존자야."

햇빛 고아원.

강서율이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며, 14살 때까지 생활한 곳이기도 하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고아원처럼 보였겠지만, 그곳의 실상은 비인도적인 인체 실험장.

진리의 구명자가 운영하는 쓰레기들의 집합소였다.

"어떤 실험을 했는지는 말할 필요 없지?"

강서율이 테이블을 툭툭 치면서 비아냥대듯이 말했다.

"여기 다 적혀 있으니까."

"······."

최지훈은 무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 고아원에서 진행된 실험은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이종족과 인간의 유전자 융합 실험.

두 번째는 시스템 초월 프로젝트.

상태창이라는 세계의 근본을 뒤집어엎자는 개소리와 함께 진행된 프로젝트다.

"묻고 싶은 게 있다."

"해."

"네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 지나치게 낮은 능력치는······ 실험의 부작용 같은 건가?"

강서율이 한숨을 쉬었다.

"맞아. 난 시스템 초월 프로젝트의 실험체였거든."

소설 [S급 상태창]에서 주인공은 초반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상태창이 없는 존재라고 묘사된다.

그 이유가 바로 햇빛 고아원에서 벌어진 생체 실험 때문이다.

그 실험의 부작용으로 소설 시작 시점에서 원작 주인공에게 상태창이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 피알레 알로의 특성에 영향을 받아 상위 상태창인 S급 상태창을 개방하게 되는 것까지가 [S급 상태창]의 극 초반 스토리다.

지금의 강서율에겐 관계없는 얘기지만.

"······그렇군."

최지훈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최지훈의 마음속에서 강서율은 수상한 존재 그 자체였다.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최근 악마 재림 사건까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하시연에 대한 걱정과 질투심도 의심을 증폭시키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모든 의문이 풀렸다.

'실력과 능력치의 부조화는 부작용.'

그 외에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그의 과거와 접목하자 자연스레 해결되어 갔다.

악마가 재봉인된 것은 강서율의 말마따나 저 혼자 재봉인되어 사라진 것일 테지.

"······정말 미안하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되자, 최지훈의 마음속 의심과 질투라는 어두운 감정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남의 트라우마를 후벼 팠다는 죄책감만이 남았다.

"왜 그래. 싸가지 최지훈답지 않게."

강서율이 픽 웃었다.

최지훈은 재수 없는 싸가지다.

하지만 쓰레기는 아니다.

나름의 행동 원칙이라는 게 있는 소신 있는 싸가지라고 해야 할까.

"됐어. 이미 알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비밀이나 잘 지켜."

"물론이다."

강서율이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사지를 쭉 뻗었다.

"어쨌든 오해는 다 풀린 거지?"

"그래."

강서율은 빌런이 아니라, 빌런에 의한 피해자일 뿐이었다.

"랭킹전에서 진 걸로 보복할 생각도 없는 거고?"

"······그렇게 쪼잔한 성격 아니다."

강서율은 픽 웃었다.

"그럼 됐어. 네 성격상 어디 가서 내 비밀을 떠벌리고 다닐 것 같지도 않고."

강서율이 장난스레 웃었다.

"수성 그룹의 후계자님께 미움 받지 않게 됐다는 거에 만족하지 뭐."

최지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표정은. 왜? 이대로 쉽사리 용서 받으니려까 또 찝찝해?"

"······부정하진 않겠다."

강서율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이건 날로 먹을 수 있는 찬스!

"그렇게 미안하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던가."

"뭐든 말만 하도록."

마찬가지로 최지훈의 눈에서도 이채가 흘렀다.

찝찝한 기분을 털어낼 수 있는 기회였다.

"혹시 고대 유물 좀 구해 줄 수 있어?"

"고대 유물? 그 비싸기만 한 골동품을 어디다가 쓰려고 그러지?"

"이유는 묻지 말고. 구해 줄 수 있는지 없는지만."

최지훈의 뇌가 팽이처럼 회전했다.

'고대 유물은 이종족의 무구.'

분명 햇빛 고아원에서 진행된 실험 중에는 이종족 융합 실험도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직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최지훈은 호기심을 억지로 삼켰다.

이미 남의 트라우마를 억지로 후벼 팠는데, 여기서 또 무언가를 묻기는 뭐했다.

"구할 수 있다."

"이야. 역시 재벌은 달라. 쿨하네. 고대 유물이 한두 푼 하는 게 아닐 텐데."

"당연하다."

강서율이 감탄사를 흘렸다.

"몇 개나 구해 줄 수 있는데?"

"입수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다."

"입수 방식?"

강서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성 그룹의 이름을 대고 공식적으로 구하면 120억 선까지 구해 줄 수 있다."

"······120억이요?"

강서율은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해의 대가치고는 너무 큰 금액 아닌가?

"내 개인 회사 자금으로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돈이다. 무리하면 어떻게든 200억까진 융통할 수 있다."

"······진짜 다른 세상을 사시는 분이셨구나."

강서율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하지만 네 입장상, 공식적으로 고대 유물을 구하는 것은 피하고 싶을 터. 아닌가?"

"그건 그렇지."

회사의 이름을 대고 고대 유물을 구매한다면, 당연히 고대 유물을 강서율에게 지급했다는 기록도 남는다.

이것은 강서율이 원하는 바가 아닐 터.

"그럼 암시장을 이용해야 한다."

"언더 루트 말하는 거야?"

"그래."

언더 루트는 초인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뒷 세계 판매 시스템이다.

돈만 있으면 구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언더 루트를 이용하면 얼마까지 쓸 수 있는데?"

"20억 정도가 한계다."

"······충분히 많은뎁쇼?"

"언더 루트의 시세를 생각하면 하나 정도가 한계가 아닐까 생각한다만."

"하나가 어디야. 그럼 부탁해도 될까?"

강서율이 쾌재를 불렀다.

"종류는 아무거나 상관없는 건가?"

고대 유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음. 일단 드래곤족의 유물이 있으면 좋은데. 그건 힘들겠지?"

드래곤족의 유물은 희귀하다.

개수가 몇 개 없기도 하고, 미국이라는 거대 국가와 콜렉터라는 괴짜가 죄다 사들여서 시중에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노력은 해 보겠다만 크게 기대는 하지 말도록. 다른 희망 유물은?"

"2순위는 정령이나 요정. 정 안되면 엘프나······ 몽마 정도?"

"흠. 알겠다."

* * *

"도착했습니다."

"아, 늦은 밤에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현재 시간은 자정이 넘은 12시 30분.

기사님은 퇴근하신지 오래라, 장 비서라고 불리던 최지훈의 개인 비서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 줬다. 분명 장혁재라는 성함이셨지.

"죄송합니다."

돌연 장 비서님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마 내 과거를 멋대로 말해 버린 것에 대한 사과겠지.

"괜찮습니다."

60세의 어르신이 내게 고개를 숙이는 광경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최지훈 그놈 성격상. 진실을 말하지 않았으면 계속해서 의심했을 테고. 결과적으론 잘 해결됐으니까요."

처음에 햇빛 고아원에 대한 보고서를 내밀었을 땐 엄청 당황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쁠 건 없었다.

수성 그룹이라는 거대한 힘을 뒷배로 삼고 있는 최지훈과의 관계가 호전됐고.

고대 유물도 하나 얻게 됐다.

최지훈에게 마음속 빚을 하나 지우기도 했으니, 일타삼피라고 할 수 있겠다.

"감사합니다."

장 비서님의 푸근한 주름살이 넉넉한 미소와 함께 호선을 그렸다. 그와 동시에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만약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십시오."

정정하겠다.

일타삼피가 아니라 일타사피였다.

"감사합니다."

장 비서라는 인물은 수성 그룹의 현 회장인 최지훈의 아버지를 보조하던 수성 그룹의 핵심 인물이다.

그런 인물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명함이 오늘 얻은 것들 중 가장 큰 보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아 참. 마지막 도련님의 말은 마음속에 담아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내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 개소리를 마음에 담아두라고요?"

최지훈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고 하나 하지. 시연이는 내 거다. 관심 끄도록.

그런 대사를 실제로 들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했다.

진짜 손발이 사라지는 줄 알았다. 어우 지금 생각해도 오그라드네.

"시연 아가씨는 10년 전부터 제가 며느리감으로 점찍어 놨습니다."

장 비서님의 눈빛이 살벌한 빛으로 빛났다.

"······아, 예."

비서와 주인이 똑같다.

찰떡궁합이여 아주.

"애초에 연애는 별로 생각 없습니다."

지금 내게 연애는 사치다.

그럴 여유가 어딨어.

"그럼, 저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장 비서님은 그 말을 끝으로 리무진을 타고 사라졌다.

"으아. 피곤해."

머리를 너무 빡세게 굴려서 그런가. 묘하게 띵하다.

나는 터벅터벅 집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계획대로면 오늘 화령의 속삭임의 사용처랑 콜렉터를 어떻게 꼬실지 생각을 마쳤어야 하는데. 계획이 많이 꼬였다.

"······모르겠다."

일단 오늘은 너무 지쳤다.

그건 내일 생각하자.

끼이익-

오토락을 풀고 방문을 열었다.

내 전신에 소름이 돋은 것은 그때였다.

"귀가가 제법 늦는 편이신가 봅니다."

"!"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즉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오늘은 장비를 챙겨 나가지 않았다. 목에 걸려 있는 [무기의 극의]를 제외하고는 아무 장비도 없다.

"덕분에 3시간이나 기다렸지 뭡니까."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침입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키는 180정도.

날렵한 외견의 남성.

"악마 재림 사건의 최후 목격자 강서율. 맞죠?"

제법 듣기 좋은 미성이었으나, 그 음성은 짙은 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나를 죽일 생각이다.

"그 외에도 도플갱어의 체포 현장에 있었다는 정보도 있던데."

나는 스멀스멀 발걸음을 움직였다. 다행히 현관 근처에 장비 캐리어를 놔뒀다. 거기서 화령의 속삭임만 꺼내면······!

하지만 나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사람이 얘기를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큭!"

어느새 이동한 것인지,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노린 것인지, 내 장비 캐리어로 가는 길목을 완전히 차단했다.

현관으로 다시 뛰어나간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조금 전 남자의 속도로 보아 도망치는 건 무리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한 가지밖에 없다.

"······목적이 뭐지?"

일단 대화로 시간을 끈다.

"대화할 마음이 생기신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구름이 달빛을 막고 있던 것일까. 은은한 달빛이 남자를 비추었다.

검은 롱 코트와 검은 썬글라스.

그 외에도 온통 검은색으로 치장한 남자였다.

"먼저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남자는 젠틀하게 웃었다.

"저는 허미트라고 합니다. 본의가 아닙니다만. 진리의 구명자라는 단체에 몸을 의탁하고 있지요."

"······허미트?"

그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진리의 구명자가 왜 지금 이곳에 나타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상대가 은둔자, 허미트라면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있다!

나는 재빨리 당황을 숨기고.

거만하게 웃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허미트는 '서치 아이'라는 상태창을 열람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흐음. 갑자기 여유가 넘치······."

돌연 허미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더욱 오만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서치 아이라고 해도, 원래부터 없는 상태창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특성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중요했다. 이것만이 유일한 활로다.

"······."

허미트의 턱선에 식은땀이 흘렀다. 당황스럽겠지.

지금까지 그의 서치 아이가 통하지 않았던 상대는 오직 하나.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인해 특성 자체가 통하지 않았던 진리의 구명자 보스 '언노운'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치 아이가 통하지 않는 제 2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럼 허미트는 어떻게 생각할까?

요컨대 이런 거다.

"세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침입자."

지금 나는.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물었다."

그 공포의 대명사 '언노운'과 동격의 존재가 됐다.

< 36화 포섭 (1)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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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화 포섭 (2) >

환한 달빛이 비추는 어두운 방 안에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허미트의 표정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

허미트의 모든 행동 원리는 '서치 아이'를 기반으로 정해진다.

그 서치 아이가 먹통이 됐으니,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됐을 것이다.

게다가 서치 아이가 통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한 명.

진리의 구명자 보스 언노운 뿐.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물론 섣불리 움직이기 힘든 건 내 쪽도 마찬가지다.

일단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하긴 했는데.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나는 1초도 버틸 수 없다.

허미트는 국지전 이후 시나리오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빌런으로, S랭크 초인들마저 가볍게 처리하는 존재다.

화령의 속삭임을 사용한다 해도, 승률은 1%를 넘지 못한다.

제기랄.

대체 허미트가 이 단계에서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나를 노리고 찾아온 거지?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설마 도플갱어나 표일찬 사건에 내가 얽혀 있다는 정보가 진리의 구명자의 귀에 들어간 건가?

만약 그렇다면 골치 아파진다.

내가 세워 둔 계획이 송두리째 뒤틀린다.

······그렇다면 지금 우선시해야 할 것은 허미트의 목적을 알아내는 것.

나는 정신을 냉정하게 벼렸다.

"네 번째다. 다음은 없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 제일 거만한 캐릭터를 떠올렸다.

예전부터 가면을 쓰는 것은 특기였다.

"나를 찾아온 용건을 말해라. 침입자."

허미트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 전투가 벌어질 확률은 극히 드물다.

지금 높은 확률로 도주를 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도주하게 둘 수는 없다. 절대로.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 보도록."

고로 일단 그의 도주로를 봉쇄한다.

"······!"

허미트가 도주하면 나에 대한 걸 언노운에게 보고할 게 분명하다.

보스와 동일하게 상태창이 보이지 않는 자를 만났다면서.

그럼 높은 확률로 보스가 직접 움직일 것이다.

세계관 최강자가 직접 말이다.

그에게 눈도장을 찍히면 살아날 방법은 일단 없다고 보면 된다.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다행히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있다.

그걸 위해선 일단 허미트의 발을 묶어야 한다.

"왜 그러지? 쥐새끼처럼 도망가려는 줄 알았는데. 발이 지면에 붙기라도 한 건가?"

"······."

그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아마 내 자신만만한 말에 불안감을 느끼고, 도주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일단 급한 불은 껐다고 봐도 된다.

그럼 다음 단계.

"뭐, 좋아. 간만에 찾아온 밤손님. 너무 거칠게 대하는 것도 풍류가 아니지. 앉아라. 커피라면 내 주지."

"······!"

나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허점투성이의 움직임일 테지.

아니, 실제로 허점투성이다.

터벅. 터벅.

하지만 서치 아이가 통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이 깔린 이상,

그에게 있어선 내가 하는 행위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위협이고, 경이로움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기에 더 경계하겠지.

"이것도 두 번 말하게 할 생각인가?"

허미트가 쭈뼛쭈뼛 움직이며 의자에 앉았다.

"좋아.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군."

나는 필사적으로 떨림을 억누르며, 인스턴트 커피를 준비했다.

탁-

"마셔라."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올리고.

남은 한 잔은 내 입으로 가져갔다.

허미트도 뒤따라 바로 커피를 마셨다.

"거침없군. 내가 독이라도 탔으면 어쩌려고."

"당신 정도의 강자라면 굳이 독을 쓴다는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하진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흥. 개소리."

나는 코웃음을 치며 커피를 홀짝였다.

연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혀를 데일 뻔 했지만.

어찌어찌 잘 참았다.

"너 같은 놈들을 하루 이틀 본 줄 아느냐. 분명 독 탐지 특성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겠지."

허미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럼 마지막으로 기회를 한 번 더 주마. 나한테 무슨 용건이지? 침입자."

나는 커피잔을 내리며 허미트를 노려봤다. 동시에 '포식자의 살의'를 사용해서 그를 압박한다.

지금 내 실력으로는 아주 찰나의 압박이겠지만, 상관없다.

그가 난생 처음 겪어 보는 방식의 압박이라는 게 중요하다.

제아무리 허미트라 해도 초식 동물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은 없을 테니까.

"!"

허미트의 전신이 경직됨과 동시에, 이마에서 시작된 식은땀이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바닥으로 자유낙하했다.

꿀꺽.

허미트의 목에서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침묵 속에서 아주 크게 울렸다.

"조직에서 사, 사관학교에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허미트가 드디어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잠입하기 전. 원래 이 임무를 담당하기로 했던 도플갱어의 뒤를 캐는 도중. 도플갱어가 체포될 당시에 당신이 도박장에 출입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흠."

나는 턱을 슬쩍 들어 계속 말하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당신에 대해 조금 더 조사했고, 악마 재림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는 점과 비혼 길드장 유화와 사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는 정보까지 파악했습니다. 그 모든 걸 종합해 본 결과, 당신에겐 무언가 있는 게 아닐까. 라는 판단에 이르렀습니다."

이해했다.

"훌륭한 접근이군. 그래서. 오늘 온 건 그 조사를 위해서였다?"

"네. 만약 별 게 아니었다면, 목숨을 취한 뒤······."

허미트가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아마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말을 하며 긴장한 것이리라.

나는 더욱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으로 위장해서 사관학교로 잠입할 생각이었습니다."

허미트가 다시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이마에 흥건한 식은땀이 보인다.

그가 나를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반응으로 그가 평소 얼마나 언노운을 두려워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진실이군."

말의 앞뒤는 다 들어맞는다.

애초에 허미트는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어지간히 살고 싶은 모양이야."

거짓은 달콤하나, 그 대가는 죽음이다.

허미트의 말이다.

"근데 어쩐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내 정체를 알게 된 자를 살려 보낼 수는 없는데."

허미트가 다급하게 말했다.

"······감히 저 따위가 어르신의 정체를 어떻게 눈치 챘겠습니까."

"흠. 그것도 진실이군. 너는 내가 무엇인지 몰라."

"네. 그렇습니다."

숨겨진 정체가 없는데 어떻게 눈치를 채겠어.

"하지만 내게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

"······그건."

"분명 이곳을 벗어나면 네 보스······."

나는 힐끔 허미트를 바라봤다.

"언노운에게 보고할 텐데."

"!"

허미트가 헛숨을 삼켰다.

내가 보스의 코드 네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리라.

"그러면 좀 곤란해진단 말이지."

나는 최대한 감정을 지우고 허미트를 노려봤다.

다시금 '포식자의 살의'를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미트의 안색이 더 창백하게 변했다.

"저,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일은 평생 제 마음속에만 담아두겠습니다!"

"흠."

묘한 광경이다.

S랭크 초인들을 쌈 싸먹는 허미트를 F랭크 나부랭이인 내가 협박하고 있다니.

분명 원작에서도 허미트는 그 지나친 신중함이 발목을 잡아 죽게 됐었지.

"그, 그리고 지금 저를 죽이신다면 분명 조직의 눈이 어르신에게로 향할 겁니다!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알아서 잘 막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사실 죽이고 싶어도 죽일 방법이 없다.

만약 허미트가 '죽기 전에 반항이라도 해 보자!' 하며 몸을 비틀기만 해도, 나는 바로 끔살이다.

아마 형체도 남지 않겠지.

"네 말도 일리가 있어. 좋아. 살려 주지."

고로, 허미트는 살려 보낸다.

그 수밖에 없다.

"가, 감사합······."

"단."

하지만 그냥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냥 보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금제를 걸지."

나는 여유롭게 걸어, 현관의 캐리어를 향해 다가갔다.

"······금, 제?"

화르르륵-

캐리어를 열자, 매혹적인 붉은빛으로 빛나는 화령의 속삭임이 보였다.

"그건······. 정령족의 유물?"

"역시 눈은 좋은 것 같군."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대 유물, 화령의 속삭임을 손에 쥐었다.

화르르르르르!

"······허업!"

허미트의 헛숨 삼키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이 은은한 불꽃으로 가득 찼다.

"저, 정··· 정령!"

화령의 속삭임에는 세 가지 특수 효과가 있다.

[불의 지배자]

[화염의 아이]

[대정령의 맹약]

이 세 가지다.

그중에서 내가 사용할 건 [대정령의 맹약]

사실 이는 금제라기 보단 계약이다.

사용을 위해선 양 측의 동의가 필요하긴 하지만, 잘만 사용하면 금제와 같은 기능을 한다.

"대정령의 이름 아래 계약을 시행한다."

"대, 정령?"

주위가 더욱 밝게 빛나며, 불의 고리가 내 머리위에 떠올랐다.

"하나. 나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다."

불의 고리가 두 개로 늘었다.

"둘.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고리가 세 개로 늘어남과 동시에, 회전했다.

"셋. 내 명령에 복종한다."

나는 화령의 속삭임을 허미트의 가슴팍에 댔다.

"동의하겠는가?"

"······."

허미트는 혼이 빠져나간 표정이다. 반항할 생각을 아예 접어 버린 듯하다.

"도, 동의합니다."

허미트는 떨리는 눈으로 대답했다.

화르르르르륵!

세 개의 화염 고리가 회전하며 허미트의 심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뜨거움은 느낄 수 없을 거다. 정령의 불길은 자신이 해하겠다고 정한 것만을 태운다.

"만약 계약을 어길 시. 불의 고리는 네 심장을 완전히 태워 버릴 것이다."

허미트는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모든 화염이 사라졌다.

"한 달 뒤. 다시 이곳으로 찾아 와라."

"아, 알겠습니다."

계약은 무사히 맺어 졌다.

"가라."

앞으로 30초가 지나면 화령의 속삭임에서 역류가 시작될 것이다. 그 전에 허미트를 보내야 한다.

허미트가 쭈뼛대며 창문 쪽으로 향했다. 아.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하나 더 있었다.

"만약 네가 내 말을 잘 따라 준다면."

내 말에 허미트의 움직임이 살짝 멈췄다.

"언노운이 네게 건 저주를 해결해 줄 수도 있다."

"······!"

허미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어떻게 그걸."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턱짓으로 어서 가라고 제스쳐를 취했을 뿐.

당황하던 허미트는 뭐라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 달 뒤에 뵙겠습니다."

이내 내 방에서 사라졌다.

* * *

강서율의 집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온 허미트는 인근 한적한 공원에 앉아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정령이라니."

허미트는 심장이 있는 부위를 만지며 생각했다.

분명 대정령의 계약이라고 했다.

그 말은 즉, 정령족 중에서도 우두머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령이 아직 생존해 있다는 것도 놀랐는데, 설마 그 이상의 존재라니.

'······그렇다면 내 서치 아이가 통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의 서치 아이는 지나치게 격이 높은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진리의 구명자 보스 언노운에게 통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언노운."

언노운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허미트는 비단 자기가 원해서 진리의 구명자에 속해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언노운의 저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듣고 있을 뿐.

마음속으론 그 누구보다도 언노운과 진리의 구명자를 저주한다.

'······만약 강서율. 그 자가 내 저주를 해결해 준다면.'

그때는 허미트 자신이 언노운의 심장에 비수를 꽃아 넣으리라.

* * *

나는 허미트가 사라진 후로도 10초 간 가만히 있었다.

혹시 주위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내 허미트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확신한 순간.

"으어."

전신의 긴장이 쫙 풀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만약 습격자가 허미트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사망이었다.

"어우."

화령의 속삭임을 킵해 둔 것이 진짜 신의 한 수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안심하길 약 5초.

파지지직-!

"으억!"

내가 쥐고 있는 지팡이.

화령의 속삭임에서 맹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Error! Error!]

이제는 익숙한 통증과 메시지.

나는 즉시 손을 놓아 버렸다.

"후."

다음 순간, 내 손등에 묘한 위화감이 발생했다.

손등에는 불의 정령을 상징하는 불길이 일렁이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다만, 색깔이 녹색이라 상당히 언밸런스하다.

잠깐, 손등?

아니, 손등은 좀 아니잖아!

이렇게 다 보이는 위치에 문신이 새겨지면 어떻게 하라고!

"······장갑이라도 끼고 다녀야하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문신을 숨기는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그냥 문신쟁이라고 해도 되고.

그건 좀 아닌가?

에이. 모르겠다.

일단 특성 파악이나 해야지.

"제발 좋은 특성 주세요."

나는 손등의 문신을 바라보며, 정령족의 특성에 대한 걸 떠올렸다.

< 37화 포섭 (2)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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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화 낭중지추 (1) >

주말은 순식간에 지나가.

오늘은 월요일이다.

일요일은 하루종일 집에만 쳐박혀 있었다.

새로 얻은 특성을 파악할 겸.

허미트와의 만남으로 바뀔 일들에 대해 생각할 겸.

최지훈과의 관계 변화가 일으킬 후폭풍에 대해 생각할 겸.

침대에 누워서 머리를 혹사시켰다.

일단 조직 내에서 허미트의 입지와 그가 일 처리하는 방식을 생각해봤을 때.

내 정보가 조직에 들어갔을 확률은 극히 드물다.

허미트는 일을 처리한 후에 보고서로 마무리하는 스타일이다.

일하는 과정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철저한 조직 내 아웃사이더라고 해야 할까.

애초에 조직에 들어가게 된 것도 언노운에 의해 강제로 들어간 것이니, 마음 둘 곳이 있을 리가 없다.

저주 때문에 절대 배신할 수 없다고 알고 있기에, 조직에서도 터치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의 일처리가 선 조치, 후 보고가 된 이유 중 하나다.

아무튼 여러모로 생각해 본 결과.

내 정보가 조직의 귀에 들어갈 확률은 0%에 수렴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거기에 대정령의 계약으로 허미트의 입을 막았으니,

앞으로도 허미트의 입에서 내 정보가 흘러 나갈 걱정은 없다.

걱정은커녕 허미트를 통해서 조직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으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할 수 있겠다.

잘만 하면 조직에 증오를 품고 있는 허미트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고.

······그걸 위해선 일단 언노운의 저주를 해결해야 하는데.

해결 방법은 알고 있지만, 지금 이 단계에서 어떻게 하긴 힘들단 말이지.

그럼 당장 허미트와의 관계는 유지하는 식으로 하고······.

"서율아."

"어?"

갑작스런 지아의 말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방금 공지 올라왔어."

"아. 교내 랭킹?"

그러고 보니, 오늘은 랭킹이 갱신되는 날이다.

"몇 위야?"

지아가 옅은 미소와 함께 내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내 이름 석 자와 함께 새로운 랭킹이 적혀 있었다.

[강서율]

[497위 -> 231위]

"······헐?"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가파른 변화가 아닌가 싶은데.

주위에 다른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다들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이다.

"대박."

"나 저렇게 빠르게 랭킹 오르는 거 처음 봐."

"다음엔 100위권 내로 진입하려나?"

아무리 그래도 100위권은······.

되려나?

이번에 얻은 불의 정령의 특성을 생각하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 설마 강서율도 재능충이었을 줄이야."

"그러게. 개부럽다."

"나도 속성 마력 가지고 싶다."

강서율 재능충 설까지 돌고 있다. 왠지 모르게 억울하다.

상태창도 없는 찐따인데 재능충이라니.

나는 쓰게 웃었다.

"야야."

"오. 대박."

돌연 교실이 조용해진 것은 그때였다.

"?"

무슨 일이지 싶어서 주위를 살폈다. 모두가 교실 입구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시선을 교실 입구로 옮겼다.

"······."

그곳엔 최지훈이 서 있었다.

그 뒤로 세상 재밌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철진과,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의 하시연이 따라 들어왔다.

"꿀꺽."

주위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힐끔 보니, 흥미진진한 표정들이다.

팝콘을 쥐어 주고 싶은 표정들.

"둘 다 시선 안 피하는 거 봐."

"신경전 쩐다."

"근데 강서율 쟤는 어쩌려고 수성 그룹 후계자한테 싸움을 걸었냐."

"어쩌긴. 강서율 졸업 후에 신화 그룹에 입사한다잖아. 그거 믿는 거겠지."

다들 소곤거리며 나와 최지훈을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흥."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코웃음을 친 최지훈이 당당한 걸음으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정확히는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내 근처의 자기 자리를 향해 이동하는 거였다.

"······."

돌연 최지훈이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주위에서 헛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대박."

"지금 한 판 할 건가 봐."

"하기야. 최지훈 자존심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긴 하지."

분위기가 더 뜨거워졌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남 싸움 구경이라고 했으니, 신나겠지.

고오오오오-

뭔가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져서, 옆을 보니 지아가 악마 같은 얼굴로 최지훈을 노려보고 있다.

진심 무섭다.

"으. 어떡해?"

"놔 둬 봐. 재밌을 거 같은데."

최지훈의 뒤에서 하시연과 김철진이 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강서율."

최지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위에서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울렸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도 이렇게 집중해서 안 볼 거 같은데.

"어."

근데 이걸 어쩌나.

너희들이 기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좋은 아침이다."

"그래. 주말에 잘 쉬었냐."

그 순간, 교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

지아가 쟤 뭐 잘못 먹었나~ 싶은 표정으로 최지훈을 바라봤고.

"······야. 너 어디 아프냐?"

김철진이 진지하게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

하시연은 나와 최지훈을 몇 번이나 번갈아 바라보더니.

"아!"

무언가 납득한 것인지 탄성과 함께 내게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쟨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 말을 끝으로 최지훈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장내에는 여전히 침묵이 가득했다.

"······저, 서율아.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최지훈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지아가 의아함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남자 대 남자로 대화를 좀 나눴지."

"대화? 저 싸가지랑?"

지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최지훈을 힐끔 바라봤다.

"무슨 대화를 했는데 쟤가 저래?"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김철진, 하시연을 포함한 반 친구들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그냥."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충 말을 흐렸다.

"세상 얘기?"

* * *

월요일 오전 과학 수업이 모두 끝나고. 오후는 하루 종일 실외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늘은 가상 몬스터와 1:1 전투 훈련을 할 예정이다."

담당 교관은 피진호.

"각자의 데이터를 분석해, 적당한 몬스터를 설정해 두었다."

피진호 교관이 호쾌하게 웃었다.

남들이 보기엔 호탕한 미소처럼 보일 테지만, 난 속지 않는다.

저건 단련 중 내가 괴로워할 때 주로 짓는 표정이다.

즉, 우리를 괴롭힐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물론 약점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정했으니, 제법 힘들 거다. 위기 극복 능력을 보는 훈련이라 보면 된다."

"아···."

"세상에."

거 봐.

우리 괴롭힐 생각에 신난 거 맞잖아.

"먼저 서수한 사관생. 입장 준비."

"네!"

"상대할 몬스터는 강철 집게다."

"······잘 못 들었슴다?"

서수한 사관생은 창을 사용한다.

다만, 아직 마력을 창에 두르는 경지엔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강철 집게의 특성은 찌르기 내성이 매우 높다는 것.

완벽한 역 상성이다.

서수한이 강철 집게를 이길 확률은 0%에 수렴할 것이다.

"이걸 말 안 했군."

당황하는 모두를 바라보며 피진호가 더욱 해맑게 웃었다.

"이번 훈련에서 이긴 사관생에게는 특별 점수가 부여된다. 그러니 열심히 해 보도록."

그 말과 함께 모두의 눈빛이 변했다. 특별 점수. 없던 의지도 샘솟게 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아 참. 하나 더."

미소가 더욱 환해지고 있다.

불안하다.

"이 훈련의 역대 합격률은 2.98%다."

"아."

"미친."

그 말과 함께 치솟던 의지가 순식간에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나 선배한테 들었는데, 진짜 약점을 제대로 찌른다더라."

"자만심 꺾는 게 목적인 훈련이라는 말도 있던데."

[강철 집게 생성 완료.]

[10초 후 가상 전투를 시작합니다.]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서수한 사관생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고 고통 받기 시작했다.

"그냥 이기지 말란 거네."

"씁."

사관생들은 일찌감치 의지를 잃었다.

하지만 내 의지는 오히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다.

"교관님."

나는 손을 들었다.

"왜 그러지?"

"특별 점수는 얼마나 부여되는 겁니까?"

"자신만만하군."

교관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네 랭킹이 231위였던가."

"네."

정확하시네.

"그럼 대충 170위까진 올라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많이요?"

"그만큼 어려운 훈련이라는 뜻이지."

피진호가 씨익 웃었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웃음.

대충 알겠다.

교관은 확신하고 있는 거다.

내가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나를 잘 아는 교관이니만큼, 내가 절대 이길 수 없을 만한 몬스터를 설정해 뒀겠지.

사악하다. 사악해.

"알겠습니다."

"표정에 변화가 없군. 숨겨둔 한 수라도 준비해 둔 건가?"

피진호가 오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나는 무언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서수한 사관생 리타이어.]

마침 서수한이 강철 집게에게 썰려서 퇴장했다.

"좋아. 그럼 다음 바로 강서율 사관생. 들어가도록."

"네."

나는 단창과 단검을 체크했다.

"상대할 몬스터는 태양 사자다."

그 말과 함께 웅성거림이 커졌다.

"헐. 대박."

"태양 사자면 그거지? 화염 면역에 높은 내구력과 지구력이 강점인 놈."

"와. 진짜 너무하네."

태양 사자.

역시 피진호라고 해야 할까.

나를 굉장히 잘 알고 있다.

내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몬스터를 집어넣어 두셨네.

"쉽겠네요."

"뭐?"

하지만, 그건 저번 주 금요일까지의 내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정한 몬스터일 뿐이다.

"1분이면 충분하겠어요."

나는 여유롭게 시설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으면서 오른손의 검은 장갑을 다시 꽉 당겨 착용했다.

당기는 중, 장갑 사이로 희미한 녹색 광채가 흘렀다.

[231위 강서율. 입장 확인되었습니다.]

"좋아."

불의 정령의 사기성을 보여 주지.

[태양 사자. 생성합니다.]

* * *

강서율이 사라진 뒤.

자리에 남은 사관생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자신감이래?"

"태양 사자를 어떻게 이겨. 상성에서 완전히 발리는데."

대화라기보단 뒷담화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리라.

"요즘 주위에서 띄워 준다고 기고만장해진 거 같은데."

"그래도 태양 사자는 아니지."

"너무 거만한데? 재수 없어."

안 그래도 밑을 깔아 주던 강서율이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고까웠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망신이나 당해라.

대다수의 사관생들의 생각이었다.

다만, 일부 사관생들은 달랐다.

"어떻게 생각해?"

김철진이 물었다.

"서율이가 확신 없이 저럴 성격은 아니잖아."

"그치."

하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의 수라도 준비해 둔 게 아닐까?"

잘은 모르겠지만, 강서율이 이긴다고 했으니 아마 이기는 건 기정사실일 것이다.

하시연은 그렇게 확신했다.

"지훈이 너는?"

김철진이 눈썹을 요란하게 까딱이며 물었다. 최지훈이 뭐라고 대답할지 기대하는 표정이다.

"이기겠지."

"······예?"

의외의 대답에 김철진이 벙쪘다.

"너 진짜 뭐 어디 아프냐?"

김철진이 죽기 직전의 노모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최지훈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개짓거리 하지 마라."

최지훈이 손을 피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넌지시 말했다.

"그냥. 놈의 실력을 인정했을 뿐이다."

"······와."

하시연과 김철진의 눈이 한껏 확장됐다.

"말도 안 돼. 그 최지훈이······ 철이 들었다고?"

"지훈아······."

이내 김철진은 절망한 표정으로.

하시연은 감동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들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신지아도 놀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 싸가지가 저렇게까지······.'

놀람과 동시에 존경심이 치솟았다.

'역시 선조님이셔.'

아마 최지훈과 척을 지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해, 행동으로 옮기신 거겠지.

하지만 설마 노답 최지훈의 마음을 저렇게까지 움직일 줄이야.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이게 바로 그릇의 차이라는 거겠지.

"에휴."

그러다 문득 한숨이 나왔다.

선조님은 태양 사자를 이길 거라고 선언했다.

그렇다는 것은 화 속성 마력이 아닌 다른 힘을 드러낼 거라는 얘기가 된다.

'······설마 다른 속성 마력을 사용하시진 않겠지?'

전승에 따르면 엘프는 이중, 삼중 속성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만약 강서율이 여기서 태양 사자의 약점인 수(水) 속성이나, 빙(氷) 속성 마력을 꺼낸다면······.

'······상상하기도 싫어.'

이중 속성을 지닌 초인.

주목도는 지금에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제발.'

신지아는 간절히 빌었다.

제발 강서율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기를.

[태양 사자 생성 완료.]

[10초 후에 가상 전투를 개시합니다.]

"시작한다!"

"못 잡기만 해 봐라. 바로 SNS에 박제한다."

"오. 나도 동참."

사관생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카운트가 흘러갔다.

[7, 6, 5]

그리고 5초가 된 그 순간.

화르르르르르륵-!

강서율이 각각 쥐고 있는 단검과 쌍창에서 화염이 맹렬하게 일렁였다.

"에이."

"뭐야."

모두가 실망했다.

뭐야 결국 화염이야?

태양 사자한테 무슨 화염이야.

기껏 한다는 게 강기 자랑이야?

망신이나 당해라.

등등의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했다.

[3, 2]

"어? 잠깐만."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소리쳤다.

"화염 색깔이······ 조금 이상한 거 같지 않아?"

< 38화 낭중지추 (1)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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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화 낭중지추 (2) >

나는 이번에 '화령의 속삭임'을 쥔 것으로 특성, '정령의 불길'을 얻었다.

불의 정령을 대표하는 특성이라 파악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불의 정령이 다루는 불꽃은 평범한 마력으로 구성되는 불꽃과는 그 격 자체가 다르다.

수많은 차이점들이 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을 하나만 딱 골라 말하자면.

태울 수 있는 것에 대한 범위 자체가 다르다는 것.

개념 자체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정령의 화염은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다.

[3, 2, 1]

화르륵-

카운트 와함께, 내 주위에서 반투명한 화염이 일렁였다.

정령족 특유의 정순한 화염을 나타내는 빛깔.

[가상 전투를 개시합니다.]

"크르르···."

카운트가 모두 끝나자, 태양 사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주위에서 일렁이는 화염을 보며 미소를 짓는 듯했다.

그야 그렇겠지.

태양 사자는 불을 먹이로 삼는 특수 몬스터니까.

내 정령의 불길은 특이한 먹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다.

"웃지 마. 짜샤. 정드니까."

어디 귀여움이나 품위나, 금호 발끝만큼도 못 쫓아오는 게 꼬리를 치고 있어.

나는 금호 일편단심이다.

나는 자세를 낮췄다.

다음 순간, 오른쪽 어깨에 미약한 통증이 일며 바람의 길이 펼쳐졌다.

태양 사자의 장점은 내구도와 지구력.

그리고 불에 대한 완벽에 가까운 내성이다.

굉장한 강점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밖에 장점이 없다는 거다.

사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느리고, 파워 자체도 그리 강하진 않다.

휘이잉-

나는 붉은 바람이 가리키는 길목을 확인했다.

그간의 단련이 헛되지 않았던 것일까. 바람의 길이 제시하는 길목이 제법 다양해졌다.

나는 놈에게 최단 시간 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그 순간, 내 마음을 읽은 바람의 길이 다른 루트를 모조리 선택지에서 지워 버렸다.

내 눈에 보이는 바람의 길은 이제 하나뿐.

"후우······."

짧은 심호흡과 함께 몸을 날렸다.

접근과 동시에 상체를 숙인다.

후웅-

놈의 앞발이 내 머리를 스치는 감각을 느끼며.

정확히 반 보 더 앞으로 나아갔다.

"크르르르!"

다시 총 여섯 개의 붉은 선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총 여섯 번 신체를 움직였다.

후우웅-!

과연 바람의 길이라고 해야 할까.

정확한 감지였고.

정확한 회피 루트였다.

"큭!"

다만 어떻게든 빠르게 접근하는 것에만 목표를 두었기 때문일까.

접근하는 덴 성공했지만,

신체 밸런스가 엉망이 됐다.

제법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크와아아앙-!"

맹수 특유의 사나운 울부짖음이 지근거리에서 들렸다.

이제 내 눈에 보이는 바람의 길은 오직 하나.

단창을 찔러 넣을 수 있는 짧은 루트뿐이었다.

지금 이 간격과 자세로 회피는 불가능하다.

포식자의 살의는 사용할 수 없다.

상대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몬스터.

시스템의 설정값에 의해 움직이는 놈이 기세에 움찔할 리가 없다.

고로, 내게 남은 선택지는 공격을 가하는 것뿐.

나는 그 즉시 단창을 찔러 넣었다.

피이잉!

단창과 가죽이 부딪쳤다고는 볼 수 없는 충돌음이 울렸다.

마치 쇠와 쇠가 부딪친 것 같은 소리.

당연하다.

내구력이 장점인, 그것도 화염에 완벽에 가까운 내성을 지닌 태양 사자의 피부를 내 나약한 근력으로 뚫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신체 밸런스가 붕괴되기까지 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하지만.

공격이 닿았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화르르르르르륵-!

내 단창에 일렁이던 반투명한 화염이.

두근, 두근,

마치 심장처럼 맥동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피잉-!

아주 짧은 반짝임과 함께.

"크르······르, 르."

태양 사자의 신체가 마력으로 변해 흩날리기 시작했다.

"······후우."

마력광을 내뿜으며 소멸하는 태양 사자를 바라보며,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성공했다.

[태양 사자 소멸 확인!]

[훈련 종료.]

[전투 시간 12초 03.]

그 말과 함께, 시설의 문이 열렸다. 나는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서자,

입을 쩍 벌린 상태로 나를 바라보는 사관생들이 보였다.

"······지금 뭐야?"

"그 자세에서 발한 찌르기로 태양 사자를 산산조각 냈다고?"

"미친."

다들 엄청나게 당황한 눈치다.

그야 그렇겠지.

그 태양 사자를 한 방에 보내 버렸으니까.

그것도 화염으로.

"교관님. 다음 사람 안 들여보내요?"

"아, 크흠."

마찬가지로 넋이 나간 표정이던 피진호 교관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헛기침을 했다.

"다음. 고학천 사관생. 들어가도록."

"네? 아, 네, 넵!"

나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지아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뭘 하신 거예요?"

과연 지아도 놀란 것인지, 한껏 커진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냥. 태워 버렸어."

"태웠, 다고요? 태양 사자를요?"

"그래."

"······대체 화력이 얼마나 높으면 그런 터무니없는 짓이 가능한 건가요?"

"글쎄다."

확실히 태양 사자는 화염에 절대적인 내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상대한 건 진짜 태양 사자가 아니라 마력으로 이루어진 가짜.

즉, 마나의 구성체다.

포식자의 살의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설정값에 의해 움직이는 마나 인형.

고로, 내가 한 것은 간단하다.

태양 사자를 구성하고 있는 '마나'를 일부 불태웠다.

그 결과 태양 사자는 형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됐고,

산산이 부서졌다.

이게 아까 말한 태울 수 있는 범위가 다르다고 한 부분이다.

만물의 모든 것을 태우는 정령의 불길은 물체만이 아닌, 마나마저도 불태운다.

물론 이건 훈련 시설의 빈틈을 노린 것이나 다름없다.

엄밀히 따지면 태양 사자를 쓰러트린 게 아니니까.

만약 걸린다면 특별 점수 부과는 백지가 될 테지.

하지만 걸릴 일은 없다.

마나 인형의 구조를 붕괴한다는 기상천외한 짓을 한 것은 내가 최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그 피진호도 자세히 파악하진 못한 것 같으니, 걸릴 일은 없다고 보면 된다.

이래서 사람은 머리를 잘 써야 한다니까.

그나저나 정령의 불길 이거.

예상하긴 했는데 진짜 너무 빡세다.

고작 1초 제대로 사용했을 뿐인데, 전신의 힘이 쫙 빠진다.

가성비가 너무 안 좋다.

물론 성능에 비하면 마력 소모량은 적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내 마력량이 너무 적어서 가성비가 최악처럼 보일 뿐.

아무튼 진짜 중요한 순간이 아니면 쓰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비장의 한 수로는 쓸 만하다. 당장은 그걸로 충분하다.

* * *

그날 밤.

초인 사관학교 내 SNS는 강서율에 대한 얘기로 불타고 있었다.

[강서율이 태양 사자 12초만에 보내버렸다는 거 김트루?]

[참트루. 보고 지렸음.]

[와 씨. 한쪽 발은 어정쩡하게 들려 있고, 상체도 완전히 기울어서 찌른 창에 태양 사자가 산산조각 날 줄 누가 알았겠음.]

이전부터 꼴찌의 반란이라고 종종 화제에 오르곤 했으나, 오늘만큼 핫한 적은 없었다.

[그 있잖아. 입학식 날. 강서율 능력치 조작 사건. 그거 트루 아니냐?]

[아. 성장 시나리오를 썼다? 주목 받으려고?]

[내가 볼 땐 킹능성 있다.]

지나칠 정도로 빠른 성장세에 음모론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능력치 조작은 아닐 걸? 움직임이 훤히 보이잖아. 강서율 진짜 엄청 느려.]

[아 그건 인정. 7살 어린 내 여동생이 더 빠를 듯.]

[강서율은 그냥 그거지. 반응 속도가 빠르다? 눈치가 빠르다? 진짜 적재 적소로 정확히 피하는 능력이 엄청나.]

물론 음모론은 음모론일 뿐.

대다수의 사관생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강서율의 나약한 신체 능력을 확인했다.

강서율의 능력치는 의심할 것도 없었다.

[내 생각엔 그 투명한 화염에 뭔가 있음.]

[와 이 새끼 존나 당연한 얘기 하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음. 그래서 그 투명한 화염이 뭐냐는 거지.]

그 SNS를 보는 것은 비단 사관생들만이 아니었다.

"흐음. 오늘도 한 건 하셨네."

교내 어카운트를 가지고 있는 소수의 외부인.

그중에는 비혼 길드의 길드장 유화도 속해 있었다.

"투명한 화염은 또 뭐람."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의문인 남자다. 검은 불꽃이나, 푸른 불꽃은 들어 봤어도.

반투명한 화염 같은 건 듣도 보도 못했다.

"대체 어디까지 주목을 모으려고 하는 건지."

유화가 SNS를 끄고, 시뮬레이터를 켰다.

특수한 화염은 보통 높은 화력을 자랑한다. 세계 랭킹 31위의 '다크 플레임'이 그 대표주자다.

그렇다면 강서율의 투명한 불꽃도 특별한 화력을 지녔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음. 태양 사자를 일격에 산산 조각 낼 정도의 화력값을 설정하면······."

유화가 유려한 손놀림으로 값을 입력해나갔다.

[시뮬레이터를 개시합니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오류?"

답을 낼 수 없다는 결과가.

유화의 넋이 나갔다.

"와. 시뮬레이터가 답이 없다고 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진짜 양파 같은 남자다.

까면 깔수록 새로운 게 나온다.

진짜 요즘 쉬는 시간마다 강서율에 대한 것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래서 여자들이 비밀스런 남자한테 호감을 느끼는 건가?"

유화의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 * *

그날 밤.

나는 간만에 하시연의 훈련을 봐주고 있었다.

"······이제 나 필요 없는 거 같은데?"

진짜 말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뭘 가르칠 게 없다.

저기 바다 건너 주머니 괴물도 얘보다 빠르게 진화하진 않을 거 같은데.

"에이. 나야 서율이 너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

하시연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부담스럽다.

"각인의 불길. 엄청 잘 쓰더라."

"어? 아, 응. 네가 양보해 준 덕분이지 뭐."

진짜 하시연 님 만만세다.

정령의 불길은 화(火) 속성 친화도가 없으면 사용할 수 없다.

만약 각인의 불길을 얻지 못했다면, 정령의 불길은 진짜 계륵이 됐을 것이다.

"근데 태양 사자 어떻게 처리한 건지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저 말만 오늘 벌써 10번째다.

지아는 금방 포기하던데, 얘는 진짜 불굴의 의지다.

하시연이란 캐릭터의 성격상,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상상 이상이다.

아마 최소 한 달은 이 질문을 할 것 같다.

"······다른 사람한텐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어? 말해 주게?"

하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왜 그럼 말해 주지 말까?"

"말해 주세요! 무덤까지 안고 가겠습니다!"

격한 반응이었다.

리액션이 살아 있다.

괜히 놀리고 싶은 욕구가 솟는다.

"진짜 비밀이야."

"응!"

그래도 뭐, 일단은 자중하기로 했다. 얘를 놀리는 건 나중에 더 여유로워지면 해도 된다.

"태양 사자를 태운 게 아니라. 그 태양 사자를 이루고 있는 마나 인형의 틀. 마나의 틀을 태운 거야."

"마나를······ 태워?"

하시연의 눈이 한껏 확장됐다.

"그,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했지 그럼."

"······와. 대박. 그럼 서율이 너한테 마법은 소용없다는 거네?"

"으음."

틀린 말은 아니다.

내 마력만 충분하다면 모든 마법을 불태울 수 있다.

그래.

마나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아. 괜히 본적도 없는 상태창이 보고 싶어질라 하네.

"아. 지금은 봉인 때문에 힘들겠구나. 마력이 내 조카보다 낮으니까."

"······."

그놈의 조카.

언제 얼굴이나 좀 보자.

맨날 비교당하니까 없던 원망까지 생기려고 한다.

"근데 서율아. 마력은 어떻게 태우는 거야?"

"응? 음······."

나는 대략적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에 마나가 있다는 것부터 확실히 자각해야 해."

"응."

나는 대충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아무렇게나 떠들었다.

평소처럼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평소라면 하시연 혼자서 '아! 그렇구나!' 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장면이다.

"으으음. 너무 어렵다."

하지만 이번엔 제아무리 천재 하시연이라고 해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지.

정령의 비기가 쉬울 리가 있나.

"쉬우면 누구나 다 쓰고 있겠지."

"그건 글치."

하시연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내 얘기를 곱씹고 있는 것이리라.

······이러다가 나중에 마나도 얼리고 이러는 거 아냐?

에이 설마.

우웅-

돌연 하시연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폰을 확인한 하시연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으. 나 가 봐야겠다. 과제 안 한 거 까먹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어느덧 10시다.

"아. 응. 들어가. 오늘 고생했어."

"응응! 서율이 너도 오늘 고생 많았어! 내일 봐!"

하시연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공원에 혼자 남은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원래 세계와 다르게 맑은 밤하늘이 선명하게 보인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땐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서서히 일이 풀려 가는 느낌이다.

이 기세라면 당장의 목표인 국지전에 참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고.

아. 국지전 하니까 떠올랐다.

국지전에서 벌어질 진리의 구명자 테러 사건.

진리의 구명자는 이번 습격을 위해서 많은 것을 준비한다.

그 준비의 핵심이 아이템 중 하나가 이 사관학교의 중추에 보관되어 있는 고대 유물, '세계의 뿌리'다.

이게 도플갱어가 사관학교에 잠입하려 한 이유다.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니까 허미트를 움직인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계획이라는 뜻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허미트마저 '세계의 뿌리'를 얻어 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다른 간부들까지 움직일 것이다.

낮은 확률이지만, 언노운이 직접 움직일 수도 있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최선은 허미트에게 '세계의 뿌리'를 넘기는 건데.

어차피 적들의 손에 넘어갈 거라면, 허미트에게 순순히 넘기는 게 낫다.

어차피 '세계의 뿌리'를 무력화 할 방법이 있기도 하고. 솔직히 주던 말던 별 상관없다.

그리고 허미트에게 넘기면서 은근 슬쩍 고대 유물, '세계의 뿌리'를 손에 쥐면 엘프 족의 종족 특성을 하나 더 얻을 수 있다.

정말이지 완벽한 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허미트한테 한 달 뒤에나 오라고 했단 건데.

어떻게 연락을 취하면 좋을까.

"······허미트."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왁. 깜짝이야!

내 바로 뒤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인사 올립니다. 어르신."

허미트가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39화 낭중지추 (2)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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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화 언더 루트 (1) >

고개를 숙이고 있는 허미트를 바라보며, 나는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나는 거만하고 오만한 캐릭터다.

나는 거물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세뇌했다.

"무슨 일이지?"

나는 달관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이걸로 대정령 코스프레 완료.

"꼭 드려야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 뵀습니다."

나는 가벼운 턱짓으로 계속 말할 것을 종용했다.

"저번에 제가 사관학교에 잠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그랬지."

"그 잠입의 목적이······"

허미트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사관학교에 잠입해야 하는 이유부터 시작해서, 세세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사관학교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세계의 뿌리를 일주일 내에 가져가지 않으면 더 귀찮아 진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대부분 내 예상대로였다.

"흠. 세 명이라."

일주일 내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세 명의 간부가 추가로 투입될 예정이라는 건 좀 의외였다.

심지어 나서는 간부들이 마에스트로, 알케미스트, 베가본드라니.

또라이 살인마 삼인방이잖아.

그 세 명이 사관학교에서 광소하는 모습을 살짝 떠올려봤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어우. 상상하기도 싫네.

"만약 그 셋마저 실패하면 어떻게 되지?"

"······그 경우엔 언노운이 직접 움직일 겁니다."

"오호. 그 엉덩이 무거운 쓰레기가 직접?"

겉으론 여유를 가장했으나, 속으론 엄청 당황했다.

진짜 언노운까지 움직인다고?

세계의 뿌리가 중요하긴 한 모양이다.

"그건 좀 귀찮겠군."

결국 예상했던 대로 세계의 뿌리를 허미트에게 넘기는 게 최선인 것 같다.

허미트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잠입 및 도둑질의 허가를 받기 위함일 것이다.

허미트의 머릿속에서 나는 절대적인 강자다.

내가 잠입을 막으면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어쩔 수 없지. 잠입을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허미트가 작게 목례했다.

"단, 조직에 가져가기 전에 일단 내게 가지고 오도록."

"어르신께··· 말입니까?"

"그래."

허미트가 우물쭈물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유야 뭐 간단하지.

세계의 뿌리는 엘프 족의 고대 유물이다. 기왕 넘길 거 특성 얻고 넘기면 좋잖아?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대충 말을 끼워 맞췄다.

"언노운 그놈한테 엿 좀 먹이고 싶어서."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라면 흔쾌히 협력하겠습니다."

허미트가 따라 웃었다.

"그나저나 이번 임무에 대한 건 언노운이 금제를 걸어두지 않은 모양이군."

허미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네. 이번 잠입 임무는 긴급 임무였기에. 추가적인 금제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허미트는 언노운에게 저주를 받은 상태다.

언노운이 제약한 바를 어길 시, 그 즉시 뇌가 뒤틀리고 심장이 터져 나가는 끔찍한 저주다.

"흠. 추가적인 금제를 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불쌍하군. 하필 언노운한테 걸리다니 말이야."

허미트의 입가에서 빠드득 소리가 났다.

과거 언노운의 일을 떠올리며 분노를 짓씹고 있는 것이리라.

"그 저주. 저번에도 말했지만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

"······."

허미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희망이 보이기도 하고, 불신이 보이기도 하는 표정.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정령의 불은 모든 것을 태운다."

나는 가볍게 손끝에 라이터 불 크기의 작은 화염을 피웠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정확히 말이야."

"그거랑 제 저주랑 무슨 상관이······."

"제법 현명한 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멍청한 놈."

나는 혀를 찼다.

"정령의 불길은 네 몸속에 똬리를 튼 저주만을 정확하게 태울 수 있다는 뜻이다."

"!"

허미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내 말은 사실이다.

정령의 불길은 언노운의 저주를 태워 버릴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불가능하다.

간단한 이유다.

마력이 부족하다.

언노운의 저주를 불태우려면, 최소 그 저주를 거는 데 사용한 만큼의 마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내 마력으론 어림도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마력만 충분하면 언제든지 풀 수 있다는 뜻이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허미트가 물었다.

"그때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날 잘 도우면 저주를 풀어 주겠다고."

그 순간이 오면, 허미트는 완전히 내 사람이 될 것이다.

진리의 구명자에게 깊은 증오를 품고 있는 최강의 전력이 되겠지.

"당신에게 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뜻이군요."

"정답이다."

그때까진 어떻게든 허미트를 잘 구슬려야지.

"······이해했습니다."

허미트의 눈에 강한 의지가 깃들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허락하마."

허미트가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어르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글쎄. 여러 가지가 있긴 한데."

살아남기.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원작 주인공보다 강해지기.

돌아가서 신이 형 죽빵 때리기.

그 외 기타 등등.

하지만 허미트는 내게 이런 걸 묻고 싶은 게 아닐 거다.

"진리의 구명자를 이 세상에서 지우는 것."

나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최우선 목표는 이거군."

"······."

허미트는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귀에 걸릴 듯이 승천한 입꼬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 * *

다음날 점심.

익히 알고 있는 지루한 좌학 수업이 모두 끝났다.

"야야. 오늘 비도 오고 왠지 전에 막걸리 끌리지 않냐?"

"아직 수업 안 끝났거든?"

"누가 지금 먹는대? 이따 저녁에 어떻냐는 거지~"

"흠. 콜."

사관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점심을 먹기 위해 교실을 나가고 있는 와중.

"저기 서율아. 이 부분 이해가 잘 안 가서 그런데······."

나는 지아한테 붙잡혀 있었다.

오늘 따라 학구열에 불타고 계신다.

실력 테스트 기간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가.

"음. 이 부분은······."

"서율아. 점심 안 먹어?"

하시연이 내게 다가왔다.

"응? 아. 먹어야지."

"따로 약속 없으면 같이 먹을래?"

"음."

나는 슬쩍 지아를 바라봤다.

표정이 뭔가 오묘하다.

하시연을 필요 이상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데.

"미안. 지아랑 같이 먹기로 해서."

둘이 무슨 일 있었나?

"둘이서 먹기로 한 거면 우리랑 같이 먹자."

하시연은 평소와 똑같다.

"나랑 서율이는 이 문제까지만 더 풀고 나갈 거라서."

착각이 아니었다.

지아의 말투가 평소보다 차갑다.

진짜 둘이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냐?

"문제? 뭔데?"

하시연이 천진하게 다가왔다.

"아. 이거구나. 이거 어렵지~ 나도 겨우 풀었어. 이거 마력 역류 범위 공식을 반쯤 비틀어서 대입하면 쉬워."

하시연이 펜을 하나 꺼내 지아의 노트에다가 풀이식을 술술 써 내려 갔다.

"······."

지아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갔다.

펜을 움직이는 하시연의 손과 얼굴을 힐끔힐끔 번갈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찬다.

"······아하."

그런 거였구나.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시연이 너 랭킹 2위까지 올랐지?"

"응? 아, 응. 운이 좋았지."

하시연이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칼을 왼손 검지로 배배 꼬았고.

지아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은 모양이다.

"됐다. 여기 이 공식을 비트는 법을 익히면 이런 유형 문제는 거의 다 풀 수 있어."

하시연이 지아에게 잘 보이도록 노트를 돌렸다.

지아가 분한 듯한 표정으로 수식을 훑었다.

내 예상대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지아가 하시연을 라이벌로 여기고 경계하고 있는 것뿐.

랭킹 1위를 빼앗길 거라는 위기감과 함께.

하기야. 하시연의 상승세가 워낙 가팔라야지.

요즘 SNS나 교관들 사이에서 '신지아 VS 하시연'에 대한 화제로 불타고 있기도 하고.

지아 입장에선 매우 신경쓰일 것이다.

진짜 여차하면 1, 2위가 뒤바뀔 수도 있다.

필기 시험 점수는 하시연이 더 높으니, 진짜 어떻게 될지 모르긴 하겠네.

그래서 지아 얘가 이렇게 필사적인 거구나.

지기 싫어서.

"됐지? 그럼 같이 밥 먹으러 가자. 당 떨어지면 공부 효율 떨어져."

하시연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지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문제집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웅-

돌연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최지훈?

얘가 웬일로 톡을 다 했지?

[오늘 밤 시간 되나?]

되게 뜬금없네.

"시연아. 잠깐만. 나 톡 하나만 하고."

"아, 응. 천천히 해."

[별 다른 예정은 없긴 한데. 왜?]

[오늘 밤 언더 루트가 개방된다.]

초인을 대상으로 하며, 오픈 주기가 비 정기적인 암시장.

언더 루트.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그렇다는 건?

[고대 유물 얻으러 가는 거야?]

[그렇다.]

[오케이 콜.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돼?]

* * *

"입장권이 확인되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언더 루트.

정부에서 알면서도 터치하지 않는 법에 저촉되는 암시장이다.

돈만 제대로 지불한다면, 깔끔한 일처리와 뒤끝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내부는 평범한 백화점 같은 느낌이었다. 명품 백화점 같다고 해야 하려나.

아무리 봐도 암시장 같은 느낌이 아니란 말이지.

"장 비서님.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맡겨 주십시오."

최지훈이 한 걸음 물러서고, 장 비서님이 앞장섰다.

나는 제일 뒤에서 조용히 쫓아가는 중이다.

"언더 루트에서 고대 유물을 취급하는 브로커는 총 두 명입니다. 둘 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장 비서님이 내게 물었다.

"네. 기왕 온 거. 둘 다 만나보는 게 낫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장 비서님을 따라 한참을 이동했다. 그렇게 약 10분을 걸었을까.

[4FD-231G8F]

그런 코드를 간판에 띄운 가게에 도착했다.

장 비서님은 망설임 없이 가게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 켁. 꼰대잖아."

대략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남자였다.

인상은 좋네.

보험 팔이 같은 거 하면 잘 하게 생겼네.

"아버지 친구한테 꼰대가 뭐냐. 여전한 버르장머리 하고는."

장 비서님이 혀를 찼다.

"아버지 보려고 온 거면 오늘은 안 계슈."

남자가 적당히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무슨 날파리 쫓는 것 같은 제스쳐다.

"오늘은 손님으로 온 거다."

"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얼라 둘 데리고 오셨네."

손님이라는 말에 남성의 눈빛이 달라졌다.

"두 도련님은 뭘 사려고 오셨나?"

시설은 전혀 암시장답지 않은데, 가게 안의 인물은 전형적인 암시장 주인 같은 느낌이다.

되게 언밸런스하네.

"고대 유물을 보려고 왔다."

최지훈이 말했다.

"고대 유물? 그 골동품을 사서 뭐에 쓰시려고."

"언더 루트에서 사용처까지 말해야 하나?"

"크으~ 할 말 없게 만드시네."

주인이 이마를 짚고 옅은 웃음을 흘렸다.

"우리 가게에서 판매하는 고대 유물은 일단 두 개가 있수다."

"두 개면 두 개지 일단은 뭐죠?"

"······보면 압니다."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슈. 안쪽에 있으니까."

우리는 남자를 따라 조금 이동했다.

"하나는 망치. [장인의 숨결]이라 불리는 드워프 족의 유물이요."

"가격은?"

"가격은 딱 17억 받겠수다."

탁-

남자가 캐리어를 바닥에 내리며 말했다.

"다른 하나는······."

주인장이 묘하게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캐리어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드래곤 족의 유물 [마나에 새긴 송곳니]요."

< 40화 언더 루트 (1)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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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화 언더 루트 (2) >

드래곤의 유물.

미국이라는 초 거대 국가가 선조로 삼고 있는 최강의 이종족답게 프리미엄이 붙어 있는 고대 유물이다.

숫자 자체도 그리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유물들은 미국에서 거대 자본을 들여 모조리 사들였기에, 사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뿐이랴.

드래곤의 유물을 모으는 것은 비단 미국 정부만이 아니다.

콜렉터.

그 괴짜 수집가도 유독 드래곤의 유물을 모으는 것에는 열을 올린다.

덕분에 정규 루트, 언더 루트 할 것 없이 드래곤의 유물은 매물 자체가 0에 수렴한다.

그런 드래곤의 유물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얼마죠?"

내 눈이 탐욕으로 물드는 건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다.

"비싸지.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어?"

"······."

순간 얼이 빠졌다.

내가 있는 곳이 용산인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

용팔이신가?

"농담이야. 농담.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껄껄."

주인장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가격은 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0억만 받지."

"?"

20억?

드래곤의 유물이 그거밖에 안 한다고?

······가짜인가?

"워워. 진정해. 사기는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도련님들. 내가 미쳤다고 장 아저씨 앞에서 사기를 치겠어?"

주인장이 양손을 쫙 펼쳐 진정하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설명할게."

그리곤 자리에 앉아 캐리어를 열며 이어 말했다.

"언더 루트에서 고대 유물은 평균적으로 10억~20억 사이에 시세가 형성되어 있어. 그건 알지?"

도난 방지를 위한 것일까.

캐리어에는 여러가지 보안 장치가 되어 있었다. 푸는 데만 한 세월은 걸리겠네.

"다만 드래곤의 유물은 별도지. 미국이랑 콜렉터 나리께서 경쟁을 붙으신 덕분에 말이야."

드래곤의 유물은 최소가 100억 단위인 걸로 알고 있다.

진짜 부자들의 돈지랄이란······.

"근데 이건 왜 20억일까."

주인장이 마지막 봉인 해제 버튼에 손가락을 올리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글쎄요."

"간단한 이유야. 생긴 게 좀 에바거든."

캐리어가 기계틱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돌?"

안에는 웬 돌덩어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진짜 계곡에 가면 어디에나 떨어져 있을 것 같은 외견이다.

"이게 드래곤의 유물이라고?"

최지훈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그래. 믿기 힘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고. 정보 공개는 오픈 설정으로 되어 있으니까."

최지훈과 장 비서님이 날카로운 눈으로 돌덩어리를 살폈다.

물론 나는 보는 척만 했다.

상태창 그런 거 몰라요.

"······확실히 착용 제한에 드래곤족이 있군."

"네. 진품입니다."

최지훈은 몰라도 장 비서님까지 고개를 끄덕인 걸 보니, 진품은 맞는 모양이다.

"근데 착용 제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이유가 뭐지?"

주인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안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효과가 없는 거야."

"없다고?"

"그렇지. 그래서 20억밖에 안 하는 거고."

주인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긴게 그따구고, 효과도 없으니. 미국 정부에서도 콜렉터 나으리도 살 생각이 없는 것 같더라고."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미국은 나라의 품위가 떨어진다고 거절했을 테고.

콜렉터는 미적 센스가 아예 없다고 거절했을 테지.

"뭐, 아까 일단이라고 말한 것도 그것 때문이고. 이런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를 살 사람이 있을 리가 없······."

"사겠습니다."

어머 이건 꼭 사야 해.

"······산다고?"

"네."

"이 쓰레기를?"

"네."

쓰레기라뇨.

내게는 보물 같은 아이템이다.

외관이나 성능은 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착용 제한에 '드래곤족'이라고 적힌 게 중요하지.

다른 건 필요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멍한 표정의 최지훈을 바라봤다.

"20억 이하까진 된다고 했지?"

"너, 설마?"

나는 싱긋 웃었다.

"응. 나 저거 사 줘."

"······진심인가?"

최지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 * *

"······설마 그딴 돌덩어리를 사는데 20억을 쓰게 될 줄이야."

기숙사로 이동하는 리무진 안에서 최지훈이 허탈한 듯이 중얼거렸다.

"강서율. 이걸로 너와 나 사이에 빚은 없는 거다."

"그럼그럼."

나는 마나에 새긴 송곳니가 들어 있는 캐리어를 가슴에 꽉 껴안고 있었다. 설마 드래곤족의 유물을 얻게 되다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어떤 특성을 얻을지 상상하자, 얼굴이 자연스레 풀어진다.

"······이해할 수가 없군."

최지훈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우웅-

주머니에 넣어 둔 폰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유화]

유화가 이 시간에 웬일이지?

나는 캐리어를 내리고 폰의 잠금을 풀었다.

[콜렉터랑 약속 잡았어요.]

좋은 일은 연달아 찾아 온다고 했던가.

유화가 한 건 한 모양이다.

[고생하셨어요.]

[했죠... 고생...]

많은 의미가 담긴 듯한 '...'이었다.

[내일 오후 7시 30분인데. 괜찮죠?]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그, 장소는 아직 미정이에요.]

미정?

[정해지면 주소랑 위치 보내 둘 게요. 아직 이 양반이 확답을 안 줘서.]

눈앞에 한숨을 쉬고 있는 유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짜 엄청 고생하고 있나보네.

하기야.

그 괴짜를 상대하는 게 좀 쉬운 일이겠어?

[그럼 정해지면 연락 주세요.]

[알겠어요. 그럼 내일 봐요.]

그 말을 끝으로 톡은 끊겼다.

* * *

자정이 지나서야 기숙사에 도착했다.

"으아."

오늘 오후 운동을 아예 못해서 그런가. 피가 들끓는다.

내일 아침에 빡세게 해야겠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옆에 놓아 캐리어를 향해 걸어갔다.

캐리어를 가로로 눕히고, 주인장이 알려 준 순서대로 캐리어의 보안을 풀어 나갔다.

"······생각보다 쉽네."

볼 때는 되게 복잡해 보였는데, 그냥 차례대로 버튼만 누르면 되는 거라 설명서가 있으니 엄청 쉬웠다.

치이익-

이내 기계틱한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완전히 오픈됐고.

"오오."

내부의 20억짜리 돌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평범한 돌덩어리 같은 외견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도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그것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았다.

"······마나의 주인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발 좋은 거 주세요."

드래곤은 마나의 창조주다.

당연히 마나와 관련된 수많은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신체 능력은 수인족의 특성으로 서서히 올라가고 있지만 마력은 제자리 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성장이 완전히 멈췄다.

덕분에 각인의 불길도, 정령의 불길도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나 다름없다.

"하느님 천지신명님! 창조신··· 님은 필요없고! 아무튼!"

창조주라고 말하려다가 급히 말을 돌렸다.

이 세계의 창조주는 김신이다.

내가 그 형한테 왜 기도를 올려?

괜히 부정 탈라.

"암튼 제발 마나 특성 주세요!"

나는 양손으로 돌덩이를 쥐었다.

그때였다.

쩌적-

"응?"

쩌저적-

돌덩어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무슨 짓을 해도 이 돌덩이에는 흠집도 낼 수 없다고 그랬는데.

균열은 점점 커져 갔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싶어 손을 놓을까 하다가,

문득 세계수의 가호를 얻었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세계수에 잠들어 있던 세계수의 가호가 나라는 이단분자에게 반응하여 모습을 나타냈었다.

만약 이 현상도 그와 비슷한 것이라면?

지금 마나에 새겨진 송곳니가 원래 모습을 되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쩌저저적-

그 와중에도 균열은 점점 커져 갔다. 그렇게 균열이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고.

치이잉-!

"으억!"

이내 돌덩이들이 완전히 박살나 흩날렸다.

다행히 완전히 가루가 되어서 파편이 신체에 박힌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눈에 돌 가루가 들어가서 따갑다.

"으."

눈물과 함께 동공의 이물질을 흘려내고, 다시 눈을 떴다.

"······헐?"

내가 쥐고 있던 돌덩이는 '오브'로 변해 있었다.

그것도 부유의 종족 드래곤을 상징하듯, 화려한 금색으로 빛나는 오브로 말이다.

"와. 미쳤나."

미적 센스가 없다시피한 내가 봐도 엄청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외견이었다.

동그란 금빛 바탕에, 수려한 문장들이 새겨져 조화를 이루고 있고. 틈틈이 형형색색의 보석들이 박혀 있다.

미국이 공개한 드래곤의 유물들 중에서도 이것보다 아름다운 건 본 적 없는 거 같은데.

"대박인데?"

근데 이건 대체 뭘까.

오브 형태의 유물.

상태창을 볼 수 없으니 알 수가 없다.

기억 속에도 없다.

그럼 소설에 나온 적 없는 고대 유물이란 말인데.

아니 이렇게 효과가 좋은데 소설에 안 나왔다고?

이렇게 사기인데?

내 주위에 들끓는 마나량만 봐도 이게 얼마나 사기적인 아이템인지 알 수 있었다.

못해도 [고대 유물/A+랭크]는 될 거 같은데.

"······에이."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라고.

뭔가 아깝다.

이 정도 효과의 유물이라면 추후 큰 도움이 될 텐데.

이걸 그냥 특성 획득 용도로 날려 버리다니.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츠츠츠츳-!

마침 1분이 지났다.

[Error!]

에러 메시지가 뜨는 것과 동시에 손을 놓아 버린다.

이제 다음은 신체 어딘가에 통증이 발생하고, 문신이 새겨질 터.

이번엔 어디냐.

찌릿!

아니나 다를까 등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다행히 사람들 눈에 훤히 보이는 곳에 새겨지진 않았다.

나는 마나에 새긴 송곳니를 캐리어에 다시 넣고, 세면장으로 향했다. 거울을 등지고 고개를 돌린다.

"와우."

등에는 녹색 드래곤이 새겨져 있었다.

근데 뭔 문신이 이렇게 커?

지금까지의 문신들과는 배 이상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게 드래곤의 클라스라는 건가?

"······근데 이거 누가 보면 형님이라고 하겠네."

등에 용문신이라니.

그래도 다행이다.

불의 정령처럼 훤히 보이는 손등에 새겨진 게 아니니까.

나는 다시 상의를 입고 침대로 돌아왔다.

문신의 위치는 파악했으니, 다음은 특성을 파악할 차례다.

"좋은 거 나와라······. 제발!"

나는 하나씩 드래곤 족의 특성을 복기했다.

* * *

다음날 아침.

나는 퀭한 눈으로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어젯밤.

결국 특성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한숨도 안 자고 온갖 쌩 쇼를 다 했는데도 문신에 반응이 없었다.

진짜 이럴 때면 상태창이 너무 그리워진다.

[특성 목록] 이라고 뜰 거 아냐.

"에휴."

일단 확실한 건 마나의 주인은 아니다.

마나의 주인을 얻었다면, 어제 마력을 운용할 때에 공기 중에 가득한 마나들이 내게 반응했어야 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용언' 같은 규격 외 특성도 배제.

그 외에도 내가 알고 있는 특성들은 모조리 부적합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꽝 특성을 뽑았을 확률이 높다는 게 된다.

실망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되겠지.

하지만 이럴 수도 있을 거라곤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가 운이 좋았던 것뿐.

그리고 어차피 이번 드래곤족의 고대 유물은 불로소득(不勞所得) 같은 거다.

내게 손해는 없다.

이러다가 또 '들끓는 순혈의 피'나 '포식자의 살의'처럼 내가 모르지만 쓸 만한 특성이 툭 하고 튀어나올 수도 있는 거고.

특성을 확실히 파악할 때까진 실망하긴 이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나에 새겨진 송곳니의 가치는 이걸로 끝이 아니다.

"흐흐."

내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 * *

그날 오후 7시 30분.

"결국 옥화당이야?"

약속 장소는 옥화당이었다.

이제는 익숙한 종업원과 인사를 나누고, 유화가 기다리는 방으로 안내 받았다.

똑똑-

문에 작게 노크.

"들어와요."

방 안에는 적어도 70세는 넘어 보이는 영국 신사와 유화가 앉아 있었다.

돌연 영국 신사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에잉. 중요한 얘기가 있다는 사람이 고작 저런 핏덩이였어?"

와우.

저 괴팍한 성격.

콜렉터, 에일 크리스가 확실하다.

"저, 에일 어르신··· 그런 말은···."

"뭐가? 핏덩이 맞구만. 얼굴만 잘생긴 핏덩이. 호스트 하면 잘하겠네."

초면에 참 막말하시네.

뭐, 콜렉터의 성격이 괴팍한 건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별 신경은 안 쓴다만.

그보다 한국어 되게 유창하네.

한국인인 줄.

"그래도 초면에······."

"쯧."

유화가 좌불안석이다.

자기 주선으로 만들어진 자리 분위기가 아주 개판이니, 그럴 만도 하지.

괜히 고생하네.

"흠. 그래. 내 유화 양의 체면을 생각해서 얘기는 들어 주지."

전혀 얘기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생각이 분명하다.

"나 바쁜 사람이야. 5분 줄 테니, 용건만 간단히 하라고."

이야.

아직 문 앞에 서 있는 사람 상대로 되게 쏘아 붙이시네.

아무리 온건한 나라고 해도 살짝 기분 나쁘려고 하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뭐가?"

"제가 무슨 제안을 할 줄 알고 그렇게 막 나오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군요."

나는 여유롭게 걸어서 유화의 옆, 콜렉터의 맞은편에 앉았다.

"흥. 듣도 보도 못한 너 같은 핏덩이가 하는 제안이야 사실 들을 필요도 없지."

콜렉터가 콧방귀를 꼈다.

이 사람 성격이 괴팍한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한층 더 진화했는데?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마침 유화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 오늘 낮에 한국 정부랑 협상이 잘 안 됐어요. 그 뒤로 좀······."

"아하."

그래서 오늘따라 한층 더 괴팍하시다는 거구만. 그럼 더 잘 됐지.

"이제 시간 3분 남았네."

아직 1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2분이 지나셨단다.

투정 부리는 것 같아서 귀엽네.

"저······."

"괜찮아요."

나는 나서려는 유화를 만류했다.

"3분도 필요 없어요. 10초면 충분하거든요."

나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캐리어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장비 운반 캐리어?"

그리고 익숙한 동작으로 보안 장치를 해제했다.

치이익-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캐리어가 열렸고.

"허어업!"

동시에 콜렉터의 입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 이건. 이건!"

눈동자가 사방으로 떨리기까지 한다.

"어, 어떻게. 이걸 어떻···!"

말문이 막힌 콜렉터를 바라보며,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캐리어에 든 것은 당연히 '마나에 새겨진 송곳니'다.

안 그래도 드래곤의 유물이라면 눈이 돌아가는 콜렉터인데.

이런 아름다운 외견의 유물을 보면 어떻게 될까.

"이래도 제 제안이 형편없을 것 같습니까?"

"······끄응."

갑과 을이 뒤바뀐 순간이었다.

< 41화 언더 루트 (2)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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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화 거래 (1) >

"어, 얼마면 되겠나? 내 즉시 현금을 준비하지!"

조금 전까지 꼬장꼬장한 눈으로 날 흘겨보던 노인이 맞나 싶다.

"글쎄요. 어떤 분께서 저 같은 핏덩이랑은 할 얘기도 없다고 하셔서."

나는 과장스럽게 웃었다.

"미국 정부랑 얘기를 좀 나누러 가 볼까 하는데."

내가 일어나는 모션을 취하자 콜렉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이보게. 내가 또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다고 그러나. 우리 얘기 좀 합세."

미국 정부.

아마 오늘 한국 정부와의 협상이 결렬됐단 것도 미국 정부가 끼어 있을 것이다.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드래곤의 유물이 하나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것의 인수를 위한 협상이 있었던 거겠지.

그 협상에서 결국 미국 정부가 승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머리끝까지 짜증이 올라와 있는 상태인 거고.

근데 이걸 어쩌나?

짜증 낼 사람을 잘 골랐어야지.

"글쎄요. 얼굴만 잘생긴 호스트 핏덩이랑 무슨 얘기가 더 하고 싶으신지 모르겠네요."

"아니, 그건······."

"아. 5분 다 지난 거 같은데. 슬슬 나가······."

"무슨 소리인가! 아직 4분 59초 정도 남았네! 자. 우리 얘기하세나."

옆에서 쿡쿡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유화의 웃음 소리였다.

지금 이 격변한 상황이 자못 재미있는 모양이다.

"흠흠."

유화가 곧바로 표정을 관리했다.

지금 콜렉터에게 밉보일 수는 없다는 걸 자각했나 보다.

나는 패닉에 빠져 있는 콜렉터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유화를 바라보며 눈에 힘을 줬다.

"?"

빨리 중재하라는 신호였다.

유화를 좀 도와줄 생각이었다.

콜렉터랑 얘기가 잘 안 풀리고 있다는 거 같아서, 이 기회에 콜렉터한테 점수나 따라고.

"아!"

바로 내 뜻을 눈치 챈 유화가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서율 씨? 어르신도 반성하고 계신 거 같은데."

콜렉터의 지진난 동공이 유화를 향했다. 무언가 한 줄기 광명을 본 신도의 표정이다.

"그, 그래! 일단 유화 양 말대로 우리 앉아서 얘기나 좀 나누세."

나는 유화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화 씨의 얼굴을 봐서 이번만 참는 겁니다."

아주 뻔한 연극이었다.

"오오."

하지만 콜렉터는 유화에게 깊은 감사를 안게 됐을 터.

이러면 됐다.

어차피 콜렉터와 거래할 수밖에 없는 이상, 이게 최선이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유화와 짧게 눈을 맞췄다.

유화가 슬쩍 미소 지었다.

흡족한 표정이다.

"그래. 학생··· 그러니까. 크흠."

그러고 보니 아직 자기소개도 안했지.

"강서율입니다."

"그래. 강서율 학생. 내게 할 제안이란 게 뭔가."

내게 말하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마나에 새겨진 송곳니를 바라본다. 그렇게 좋을까.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이 고대 유물을 어르신께 팔려고 합니다."

"사겠네!"

즉답이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얼마면 되겠나? 내 돈은 원하는 만큼 주겠네."

진짜 전 재산이라도 내어 줄 기세다. 근데 아쉽게도 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돈은 됐습니다. 대신 물물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물물 거래?"

콜렉터의 국적은 영국.

그런 그와 100억이 넘는 금액을 주고받는다면, 반드시 기록에 남는다.

그럼 마나에 새겨진 송곳니의 입수처가 언더 루트라는 것은 금방 밝혀질 것이다.

다음은 자연히 마나에 새겨진 송곳니가 어떻게 이런 변모를 이루었는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겠지.

그럼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에일 크리스. 대가로 당신의 고대 유물 콜렉션 중에서 몇 개를 받고 싶습니다."

"······흐음."

그렇기에 미국 정부와 거래한다는 안은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와의 거래는 무조건 기록에 남으니까.

"의외로군. 너 정도 나이대의 학생이 고대 유물을 필요로 할 일이 있나?"

콜렉터의 눈이 기업가의 눈으로 변했다. 내 심연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

"······오호라. 거래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싶다는 말이렷다?"

예리하다.

그래. 은퇴는 했지만 명색이 한 대기업의 오너였다 이 말이지.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흠."

에일의 표정에 조금 여유가 돌아왔다.

"마나에 새겨진 송곳니. 내가 지금까지 봤던 유물들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유물이야. 이걸 얻기 위해서라면 내 웬만한 건 다 내어줄 수 있지."

내게 명확한 거래 의사가 있다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리라.

"근데 그건 알아야 해. 거래 기록에 남기지 않게 물품을 거래하려면, 단시간 내에 너무 많은 걸 내줄 수는 없어."

"알고 있습니다."

나도 안다.

고대 유물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 하에 거래가 이루어진다.

정식으로 구매한 건 입출 내역이 확실하게 남고, 이 물품들을 일정 주기마다 확인한다.

이건 고대 유물로 해외로 빼돌리는 걸 막기 위함인데.

뭐, 언더 루트를 통해서 다들 조금조금씩 빼돌리고 있다.

아무튼 이것 덕분에 한 번에 대량의 고대 유물을 외부로 빼돌리기는 힘들다.

적발을 피하기 위해 서류를 조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너무 많은 조작을 하면 꼬리를 잡힐 확률이 높다.

심지어 에일 크리스의 집은 영국이다.

즉 고대 유물이 바다를 건너와야 한다는 건데. 그럼 몰래 거래하기는 더 골치 아파진다.

"기밀 유지가 꼭 필요한가?"

"네. 이유는 묻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고대 유물은?"

"그쪽에서 몰래 밀출입 가능한 유물의 리스트를 주신다면, 그 중에서 선택하죠."

"흠."

에일 크리스가 오묘한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네."

"지금 자네의 제안대로라면, 내가 당장 줄 수 있는 거라고 해 봐야 고대 유물 2~3개가 끝일세.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자네에게 아주 큰 손해라는 것도?"

"물론입니다."

본 모습을 되찾은 마나에 새겨진 송곳니의 가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장 눈앞의 콜렉터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모든 게 의문이야."

콜렉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네는 극히 평범한 사관생이야."

"제 뒷조사까지 하셨습니까?"

조사한 것치고는 내 이름도 기억 못하고 있더만.

"그래. 유화 양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푸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거든."

에일이 유화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런데 자네는 평범해도 너무 평범했어. 물론 최근에 뜨거운 감자가 됐긴 하지만, 내게 흥미로운 제안을 할 거라곤 도저히 생각이 들지 않더군."

그렇군.

그래서 초면에 그렇게 막 대한 거였구나. 내 이름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거고.

처음부터 기대감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의문이라고 해 봐야 유화 양과 어떻게 접점이 생겼나. 신화 그룹의 신지아와 어떻게 친해졌나. 그 정도였지."

"······그래서 호스트나 하라고 하신 거군요."

"크흠. 그거야 농담이었고."

얼굴로 여자 뒤나 후리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평범한 20세 사관생이 이런 고대 유물을 지니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이런 판까지 만들었다라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콜렉터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대체 자네는 뭔가?"

나와 콜렉터의 눈맞춤은 1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 졌다.

"······앞서 말씀드렸죠. 이유는 묻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콜렉터가 이렇게 나올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연륜이란 게 있는데, 당연히 의심하겠지.

"그리고 이유가 중요합니까?"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나는 움직이는 것을 선택했다.

"중요한 건 당신은 이 고대 유물이 필요하고. 저는 당신이 지닌 고대 유물이 필요하다는 거죠. 틀립니까?"

"흠. 반박할 말이 없군."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하기 위해서.

지금까진 어찌어찌 잘 해결은 됐지만, 이미 허미트까지 튀어 나온 상황이다.

진짜 국지전까지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안 간다.

막말로 갑자기 언노운이 튀어 나올 수도 있는 노릇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선 보험을 많이 들어 놔야 할 필요성이 있다.

털어 버릴 수 있는 유물은 털어 버리고, 찾아 온 기회는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에일 어르신은 미국 정부와는 다르게, 나중에 입 싹 닫거나 하진 않으실 것 같아서요."

"큭큭. 미국 대통령 놈이 좀 낯짝이 두껍긴 하지."

콜렉터가 웃음을 터트렸다.

"요컨대, 당장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나중에 도움을 좀 받고 싶다. 이건가?"

"맞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이제 좀 신뢰가 가는군."

콜렉터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거래하지. 이런 제안을 거절할 만큼 바보가 아니라서."

그리곤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도 따라 일어나 그의 손을 붙잡았다.

"모든 수속은 이쪽에서 하겠네. 자네는 추후 장비를 받아 갈 준비만 하면 되네."

"그럼 그 전에 일단 마나에 새겨진 송곳니를 반입할 준비부터 하시죠."

나는 캐리어를 닫아 에일에게 내밀었다.

"화끈하군. 내가 먹고 튀면 어쩌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에일 크리스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죠."

"큭큭. 잘 알고 있군."

제법 호의적인 눈빛이었다.

"그럼요."

콜렉터는 괴팍하다.

하지만 제법 의리가 두터운 인물이다. 자신이 마음을 준 사람에게는 조금 손해를 봐도 너그럽게 봐주는 면이 있다.

그런 그에게 빚을 하나 지워 뒀다는 것은 아주 컸다.

장기적으로 고대 유물을 얻을 수 있는 공급처가 생겼다고 봐도 좋다.

"아무튼 리스트는 내일 내로 작성해서 보내 주지. 언더 루트에서 몰래 사들인 것 위주로 밀수입하면, 제법 괜찮은 것들을 보낼 수 있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껄껄!"

에일 크리스가 내가 건넨 캐리어를 들고 호탕하게 웃었다.

* * *

그날 밤.

기숙사 방에 도착한 나는 유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저희 쪽 제휴도 잘 끝났어요.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아까 유화에게 분위기를 환기 시킬 기회를 준 거라고 해 봐야, 진짜 사소한 일이다.

―그래도요. 오늘 한국 정부랑 일이 잘 안 풀려서, 다른 얘기는 듣지도 않고 돌아간다고 했었거든요. 서율 씨가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내 덕을 보긴 했네.

"그럼 다음에 밥이나 한 끼 더 사요."

옥화당은 진리다.

아니, 진리가 옥화당이다.

―밥 되게 좋아하시네. 아예 옥화당 무료 식사권을 만들어 드려야 하나.

유화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같이 먹어야 맛이지."

혼밥할 곳은 아니지.

―어? 혹시 지금 작업 거는 거예요? 저 쉬운 여자 아닌데.

자못 장난스런 음성이었다.

나도 받아 쳐 줬다.

"와. 유화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자의식 과잉이시네요."

―서율 씨는 그렇게 안 봤는데 상당히 진지하시네요. 농담이랑 진담 구별 못하시고.

찰나의 정적 후.

나와 유화는 동시에 웃었다.

부드러운 분위기가 이어 졌다.

"아무튼 오늘 자리 주선해 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수화기 너머로 유화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빚을 좀 갚을 생각이었는데. 빚이 더 늘었네요. 아휴.

"그 빚. 나중에 다 받아 낼 겁니다."

―······와. 나 지금 소름 돋았어. 그 말 제가 태어나서 들어본 말 중에 제일 오싹했던 거 알아요?

"오버가 심하시네."

―아니, 진짜로요.

그 후로 시답잖은 얘기들이 오갔다.

―하아암.

유화의 목소리가 점점 나른하게 늘어져 간다.

―대체··· 당신의 정체는, 뭘까요?

누가 들어도 잠들기 직전의 몽롱한 목소리였다.

뭔가 뭐든 다 들어주고 싶은 마력을 지닌 목소리.

"어떻게든 파헤쳐 주겠다면서요?"

근데 단언할 수 있다.

저거 설계 들어간 거다.

"그리고 졸린 척하면서 은근슬쩍 묻지 마세요. 연기인 거 다 아니까."

유화가 남과 통화하면서 침대에 누워 있을 리가 없잖아?

―······진짜 얄미워 죽겠어.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 유화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그럼 그렇지.

―그럼 끊어요. 저 씻으러 가야 되니까.

"네. 잘 자요."

진짜 끝까지 여우같다니까.

방심을 못하겠어.

나도 스마트폰을 침대 구석에 던져 버리고는 나도 그대로 대자로 뻗었다.

이걸로 고대 유물이 최소 두 개는 손에 들어 온다.

콜렉터가 귀국한 직후 바로 준비를 하고, 배를 통해서 한국으로 들어온다 치면.

대충 2주 정도인가?

최소한 다음 랭킹전 전까진 얻을 수 있겠네.

그럼 어제 얻은 미지의 드래곤족 특성까지 포함하면 총 세 개.

아니지.

허미트가 가져 올 세계의 뿌리까지 생각하면 최소 네 개. 새로운 특성을 얻는 건가.

좋네.

슬슬 성장에 가속이 붙는구만.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나저나 허미트는 언제 오려나.

사관학교 내부의 지도를 건네 줬으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텐데.

······사실 이미 작업을 끝내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 아냐?

에이 설마.

아니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나는 작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허미트."

"부르셨습니까."

으억! 깜짝이야!

침대 옆에서 무언가가 일렁이며 나타났다. 무슨 귀신이 나타나는 줄 알았다.

진짜 놀랐네.

속으로 '너! 언제부터 있었어!' 라고 묻고 싶었지만, 겨우겨우 참아 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이곳에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일부러 부르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나는 필사적으로 놀람을 삼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자 허미트가 들고 있는 거대한 캐리어가 보였다.

"음?"

저거 설마······.

내 시선이 캐리어로 향하자 허미트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바로 아시는군요. 세계의 뿌리. 무사히 훔쳐 왔습니다."

"······와우."

예상했던 것보다 수 배는 빠른데?

이건 뭐, 허미트의 뛰어난 솜씨를 칭찬해야 하나.

한국 초인 사관학교의 부실한 경비를 욕해야 하나.

아니, 둘 다인가?

"고생했다."

아무튼 개이득이다.

< 42화 거래 (1)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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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화 거래 (2) >

세계의 뿌리를 건네받은 직후, 나는 허미트에게 10분 정도 자리를 비워 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는 대충 붙였다.

언노운에게 엿먹일 겸 세계의 뿌리에 수작질을 좀 할 거라고.

허미트는 감탄한 표정으로 방에서 멀어졌다.

대정령의 계약으로 묶여 있으니 내 명령을 어기고 내 방을 훔쳐보고 있진 않을 터.

나는 가뿐한 몸놀림으로 캐리어를 열었다.

캐리어 안에는 약 2미터는 돼 보이는 산삼이 들어 있었다.

아니, 진짜 농담이 아니라 생김새가 산삼이다.

이거 지팡이라고 하던데.

나는 세계의 뿌리를 조심스레 쥐어 들었다.

"······진짜 심마니 코스프레 같은데?"

내 키를 넘는 거대한 산삼을 지지대로 삼고 있는 대박난 심마니.

이거 들고 전장에 서면 평생 흑역사로 남을 거 같다.

세계의 뿌리의 효과는 공기 중에 있는 마력을 저장하는 것이다.

요컨대 천연 마력 탱크라는 거다.

주인 없이 방치되어 있던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마나가 쌓였다. 아주 정순한 마력을 품고 있다.

언노운이 주목한 것은 수천 년이나 마력이 쌓였다는 부분이다.

물론 그 마력을 직접 이용하려는 건 아니다.

제아무리 언노운이라고 해도, 고대 유물을 사용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이 마력을 폭주시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지난 수차례의 생체 실험으로 방법을 찾았다.

이게 폭발하는 것이 테러의 첫 시발점이다. 그 가공할 위력의 폭발에 의해 수십만 명 단위의 사람들이 사망하게 된다.

이걸 막을 방법은 총 두 가지.

첫 번째는 국지전 테러 당시 폭주 자체를 막는 방법이다.

제법 많은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언노운의 허를 제대로 찌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은 혹여 변수가 발생하면 대처하기 힘들다는 것.

테러 현장이 바뀐다거나 하는 변화가 발생한 순간 막을 수 없다.

두 번째는 지금 세계의 뿌리에 저장되어 있는 마력을 모조리 사용해 버리는 방법.

이러면 언노운의 목적 그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

단점은 작전의 핵을 잃은 언노운이 어떤 새로운 작전을 세울지 모른다는 것.

작전의 변화 자체가 내게는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둘 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어서 더 고민된다.

"으음."

내 고민은 약 10초가량 이어 졌다.

"······그냥 다 쓰자."

두 번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아무리 봐도 지금 추세로 보면, 변수가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폭탄을 순순히 적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다.

나는 세계의 뿌리를 쥐고, 마력을 집중했다.

마력의 사용은 찰나여야 한다.

한국 전체에 깔려 있는 경보 장치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이 기숙사에 있는 사관생, 교관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본래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이 세계의 뿌리라면 가능하다.

세계의 뿌리의 특수 스킬 중에는 [고속 영창]이라는 스킬이 있다.

긴 쿨타임을 지닌 특수 스킬이지만, 효과는 아주 뛰어나다.

마법 사용에 있어 모든 준비 동략 생략.

이걸 이용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걸리지 않고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

웅, 웅, 웅.

세계의 뿌리가 미세한 진동을 반복했다.

쓸 마법도 정했다.

아니, 애초에 쓸 수 있는 마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자연의 풍요]

시전자를 중심으로 일정 범위의 토양 및 식물들에게 축복을 거는 마법.

과거 장로 엘프가 종족의 번영을 기원하며 만든 아티펙트다운 평화로운 힘이다.

나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았다.

마력의 발현은 찰나.

피이이잉!

누구도 느끼지 못할 스피드로 마법이 발현했다.

다만, 너무 광대한 마력을 일순간에 쏘아냈기 때문일까.

쿠구구구구구궁-!

사방이 마구 흔들리며, 지진이 일어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으어억!"

"지, 지진!"

"뭐, 뭐야! 재난 경보 없었잖아!"

아니, 진짜 지진이 났다!

밖에서 당황한 사관생들의 음성이 크게 울렸다.

"······아."

사방이 떨리는 와중.

나는 조용히 침대에 앉았다.

조졌다.

세계의 뿌리가 지니고 있던 마력량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모양이다.

이거 내일 핫토픽에 100% 실리겠네.

"······존나게 닥치고 있어야겠다."

지진이 멎을 때까지 닥치고 있자. 아니, 지진이 멎은 후에도 닥치고 있자.

* * *

허미트는 적당한 거리에서 강서율의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세계의 뿌리에 수작질이라니.

아니, 그 전에 언노운이 세계의 뿌리를 어떻게 쓸 줄 알고 미리 수작을 부려 둔다는 걸까.

세계의 뿌리의 사용처는 아직 허미트도 모른다.

정확히는 언노운밖에 모른다.

하지만 강서율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정령족이라는 건 확실한데······.'

허미트는 자신의 심장 부근을 움켜쥐며 생각했다.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다.

마냥 착하게 살았다곤 할 수 없지만, 나름의 소신을 지키며 일선은 넘지 않았었다 자부한다.

하지만 언노운을 만나고 모든 것이 변했다.

자신은 살인마가 됐다.

언노운이 말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언노운이 말하는 대로 행동한다.

의지가 없는 인형이나 다름없다.

이미 그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 줄기 동아줄이 내려왔다.

그 동아줄의 이름은 강서율.

자신에게 새로운 금제를 건 자.

그 동아줄이 희망인지 새로운 절망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현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라는 것은 확연했다.

하지만 정말 강서율을 믿어도 되는 걸까.

그가 나중에 제 2의 언노운이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허미트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모르겠군."

결국 답은 없었다.

그렇게 씁쓸한 미소를 띠고 있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구궁-!

"!"

대지가 거세게 흔들렸다.

'경보는 없었는데?'

마력의 유동도 느끼지 못했다.

이상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저건?"

대지와 함께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기숙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꽃?"

꽃이 피고 있다.

기숙사를 중심으로 세상을 모두 뒤덮겠다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몽환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와 동시에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그 순간, 허미트의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기숙사의 중심에서 시작된 꽃들의 만개.

그 직전에 발생한 지진.

그 중심에 있는 건 다름 아닌 강서율이다.

"······!"

그 순간 허미트의 전신에 소름이 올라왔다.

어느덧 허미트의 근처까지 피어 오른 꽃망울이 닭살처럼 오돌토돌 솟은 피부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하하······."

다시 봐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광경이다.

한국의 경보 장치에도, 자신의 기감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은밀한 마력 운용을 한 것도 놀라운데.

이 마법의 범위와 효과를 보라.

"······생명을 피워 냈어."

이런 마법은 난생 처음 본다.

허미트는 몸을 180도 돌려 기숙사를 등졌다.

꽃은 저 멀리 끝없이 뻗어나가고 있다.

'이런 대규모 마법을··· 이렇게 은밀하고, 빠르게?'

경외심.

허미트의 마음속에 강서율에 대한 경외심이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언노운에게 품고 있는 질척한 공포와는 아주 조금 다른 감정이 말이다.

* * *

「긴급 속보! 서울에 발생한 '만개 현상'의 원인을 규명한다!」

「한국의 경보 장치의 빈 틈? 지진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경보 장치!」

다음날.

아니나 다를까 한국 언론은 난리가 났다.

국가적인 비상이라느니, 무언가 악재가 몰려올 징조라느니. 악마의 출현도 앞으로 다가올 큰 대 재해를 앞둔 전조현상이라느니.

아주 소설가들 납셨다.

지금 이 상황은 비상은커녕 축복이다.

이 땅의 토지는 더 비옥해졌고, 생명체들이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했다.

공기도 맑아졌으니 진짜 천혜의 보고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와. 나 어제 지진 멎고 기숙사 밖에 나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너무 달라서 기숙사 채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줄 알았자너~"

"······망상충 아웃."

교실의 분위기도 비단 인터넷이나 언론과 다르지 않았다.

다들 어젯밤 지진과 속칭 '만개 현상'에 대한 얘기로 불타고 있었다.

아. 괜한 짓 했나?

갑자기 급 후회된다.

어젯밤.

세계의 뿌리에 저장되어 있는 마력은 대부분 털어 버렸다.

텅 비어 버린 세계의 뿌리는 허미트가 가지고 조직으로 돌아갔고.

그걸 받으면 언노운은 짜증 꽤나 날 거야?

기껏 사관학교 침입에 허미트라는 고급 인력까지 들였는데,

얻은 게 쓸모없는 고대 유물 하나라니.

언노운의 이를 가는 모습을 생각하자, 슬며시 올라오던 후회의 감정이 쏙 들어갔다.

그래.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계의 뿌리를 그대로 넘겼을 경우 발생할 리스크가 너무 컸다.

어차피 발생할 변수라면, 위험을 낮추는 게 베스트인 법.

"진짜 무슨 일 나려는 거 아냐?"

"악마 재림 사건에, 만개 현상에, 갑작스런 지진에. 어우."

······물론 조금 생각이 얕았다는 것에 대한 반성은 하고 있다.

다음부터 더 신경 써야지.

"다들 자리에 앉도록."

어수선한 교실의 분위기를 잘라내며, 피진호 교관이 들어 왔다.

오늘 아침 훈련 시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교관들 사이에서도 긴급 회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괜히 나 때문에 다들 고생하시네.

입가가 씁쓸해졌다.

"어제 발생한 일에 대한 건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조사 결과, 오히려 이로운 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로운 현상이요?"

"그래. 서울 인근의 토지가 모두 비옥해지고, 공기가 맑아지는 등. 악영향은 일체 없었다."

"오오."

"나쁜 일이라고 해 봐야, 교관들의 수면 시간이 줄었다는 것 정도다."

피진호 교관의 농담에 교실에 옅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언론에선 악마 재림 사건과 연관 지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전문가들이 볼 땐 전혀 상관없는 사건들이라고 하니까."

"네!"

모두의 힘찬 대답을 들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사건으로 번지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럼 공지는 이걸로 마치겠다. 아. 그리고 혹시 몰라 말해 두지만, 오늘 수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교관의 말에 다시 교실이 떠들썩해졌다.

"오오."

"크~ 드디어. 내 진정한 실력을 발휘할 때가 됐나."

"아. 제발 저놈이랑은 같은 팀 안 되게 해주세요."

"팀 모의전 평가 점수가 얼마나 됐더라?"

반응은 각양각색이었으나, 공통적으로 모두 훈련을 기대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당연히 나도 기대 중이다.

오늘 훈련은 5:5 팀 모의전.

제법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훈련이다.

여기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100위 초반까진 갈 수 있을 터.

"팀은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밸런스에 맞게 배치했다. 바로 공지하겠다."

교탁 위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아아!"

"오오!"

동시에 탄식과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흠. 확실히 제법 밸런스가 잘 맞는 구성이네.

한 조만 빼고.

"아~ 교관님. D조 오버잖아요."

"강서율이랑 하시연이 같은 조는 아니죠."

"화빙 조합 에반데."

우리 조.

D조만 빼고 말이다.

랭킹과 수학적인 수치만을 이용한 배치일 테니, 저렇게 나오는 건 당연하다.

나는 흔하디흔한 176위 F랭크 초인일 뿐이니까.

"A조 신지아도 문젠데. D조가 진짜 에반데."

"팀 뽑기 운 무엇······."

근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인 모양이다. 다들 난리 났다.

다들 재배치를 요구한다는 눈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런 반응이 나올 건 교관도 예상하고 있었을 터.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이번 모의전에서 강서율은 '궁수' 포지션이다. 사수가 좀 부족해서 말이지."

그 순간 사방에서 '아~' 하며 납득했다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궁사 포지션이면 쌉인정이지."

"황금 밸런스였네."

참으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아니, 지금 황금 밸런스라고 말한 놈. 얼마 전 가상 유적지 공략에서는 활이나 들지 웬 창이냐고 투덜댔던 놈이잖아.

"그럼 강서율은 쩌리라고 보면 되겠네."

"그럼 역시 하시연이 문젠데. 어떡하지?"

"신지아는 또 어떻고."

이제 다들 나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다.

"······쩝."

뭔가 서운하다.

아니, 물론 이해는 한다.

내 장점은 화 속성 강기와 그 운용력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을 기반으로 둔 단검술과 단창을 이용한 약점을 찌르는 전투가 일품이라는 평가다.

이런 평가를 받게 되자,

초반에 극찬을 받았던 내 궁술이 오히려 계륵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근데 강서율 활도 잘 쏘잖아. 무시하면 안 되는 거 아냐?"

"됐어. 쟤 근력으로 우리 내구 못 뚫어."

일반적인 강기는 화살에 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 강기 쓰면 되잖아."

"······너 진짜 활에 관심 없구나? 활에 담는 강기랑. 창이나 검에 담는 강기랑은 그 성질이 완전히 달라."

"아~ 그거 어디서 들은 거 같다."

근거리 강기와는 다르게 원거리 사출용 강기는 시전자의 신체에 떨어진 뒤에도 유지되어야 한다.

고로, 강기의 운용법 자체가 아예 다르다.

"근데 화살 들고 근거리에서 찌르러 오면 어떡해?"

"······에이. 아무리 그래도 쟤 피지컬이 신지아도 아니고. 화살 하나로 난리칠 수 있는 깜냥이냐?"

"고건 인정. 그럼 진짜 깍두기라는 거네."

나는 주위 사관생들의 신랄한 평가를 들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말이야.

"다들 날 너무 무시하네."

어깨를 으쓱하자, 슬쩍 옷의 틈새 사이로 오른쪽 어깻죽지의 세계수 문신이 보였다.

녹색도, 적색도 아닌.

'흑색'으로 변한 세계수의 문신이 말이다.

······내가 화살에 강기를 실을 수 없다는 건 누가 정했는데?

"다 죽었어."

나 세계의 뿌리 1분간 쥐고 있던 남자야! 어?!

이거 [무기의 주인]과 [바람의 살(虄)]의 시너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하게 해 줘야겠구만.

< 43화 거래 (2)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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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화 새 특성 (1) >

먼지 하나 없는 금빛으로 치장된 화려한 방.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것에 맞춰 웅장한 클래식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허미트인가."

그 중심에서 클래식에 귀 기울이고 있던 남자, 마에스트로가 말했다.

그 순간 그의 뒤쪽에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더니, 허미트가 나타났다.

"임무는?"

"완료했다."

허미트가 캐리어를 살짝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좋아. 역시 알렌 벨벳이야. 일 처리가 깔끔해."

마에스트로가 허미트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허미트는 망설임 없이 캐리어를 마에스트로에게 건넸다.

"좋아. 세계의 뿌리가 확실하군."

익숙한 손놀림으로 캐리어를 확인한 마에스트로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고생했다. 이건 내가 보스께 잘 전해드리지."

"알겠다."

그 말을 끝으로 허미트는 다시 안개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마에스트로의 기감에 걸리는 인기척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면 볼수록 참 마음에 드는 친구란 말이지."

필요한 말만 딱딱 하는 성격.

깔끔하고 무감각한 일처리.

역할이 주어지면 기계처럼 행동하는 게 마치 악보 위의 음표 같지 않은가.

'아니. 실제로 보스의 음표 같은 존재인가.'

마에스트로는 캐리어를 바닥에 적당히 내려 두고,

다시 긴 의자에 다리를 쭉 뻗어 누웠다.

"앞으로 반."

마에스트로의 입가가 사나운 호선을 그렸다.

* * *

단체 모의전이 진행중인 배틀 필드를 보고 있는 사관생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강서율 활 들면 별 볼 일 없다고 했던 새끼들 알아서 다 머리 박자."

그러던 중 사관생 한 명이 장난치듯이 말했다.

"1번! 박.상.진! 머리 박겠습니다!"

"2번! 지.석.현! 이하 동문!"

이어 그의 친구 두 명이 연달아 머리를 박았다.

자못 우스꽝스런 장난에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만 강서율 창보다 활이 더 무서운 거 같냐?"

"쟤 진짜 뭐지?"

"강기 특화 특성이라도 발현한 건가?"

"아니, 활에까지 강기를 담을 수 있는 범용성 높은 개사기 특성이 있다고?"

"있으니까 쓰고 있겠지. 그게 아니면 뭔데?"

"그건······."

"그건?"

"나도 모르지."

"······아오 이걸 확!"

홀로그램 너머의 강서율의 모습은 아주 느릿했다.

F랭크다운 움직임으로 달리고,

F랭크다운 움직임으로 느릿하게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화살만큼은 절대 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냥에 몰두하는 한 마리의 매처럼 아주 매서웠다.

"와 씨. 무슨 유도탄인가?"

"그보다 불화살 관통력 실화? 나무를 그냥 꿰뚫네."

강기를 품은 화살은 두 가지 특징이 생긴다.

첫 번째 특징은 마력이 스며들어 있기에, 평범한 화살과는 다른 궤도로 날아간다는 것이고.

두 번째 특징은 격이 다른 파괴력이다.

"못 들어봤어? 원래 일류 궁사들은 근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들 하잖아."

"아. 들어본 거 같다."

마나를 품은 화살은 일반적인 화살과는 궤를 달리한다.

"와. 화 속성까지 더해져서 그냥 미친놈이 따로 없네."

"강서율 선 넘는데?"

심지어 강서율의 화살에 담긴 것은 일반적인 강기도 아니다.

화 속성 강기.

여기에 더해서 [바람의 살(虄)]이라는 엘프족 궁사들이 지니고 있던 특성까지 더해졌다.

지금 강서율이 화살은 절대 F랭크 초인의 파괴력이 아니다.

맨몸에 명중시킨다면 4랭크 차이를 넘어서 내구 C까지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다.

"또 쏜다!"

쒜에엑!

마침 강서율이 쏜 화살이 B조의 후방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초인에게 날아갔다.

"오!"

속도 자체는 평범했지만, 그 궤도가 심상치 않았다.

휘이익!

강서율의 손에서 쏘아진 화살은 숲 지형을 크게 빙 돌아 B조원들의 사각을 노리고 쇄도했고.

퍽!

정확히 관자놀이를 타격했다.

화살에 직격 당한 초인이 하늘을 날아, 바닥에 널브러졌다.

[B조 진하늘 리타이어!]

만약 훈련용 활과 화살이 아니었고, 배틀 필드의 세이프티 설정이 아니었다면 즉사였을 테지.

"대박! 이걸로 강서율 2킬!"

이걸로 B조는 두 명이 탈락했다.

"진짜 무슨 화살이 뱀처럼 꺾이냐?"

"확실하네. 강서율 강기 특화 특성 발현한 거야."

"화 속성 마력은?"

"속성 마력은 선천적인 게 강하다고들 하니까, 원래 지니고 있었는데 지금까진 마력이 없어서 눈치 채지 못했던 모양이지."

"오올? 그럴싸한데?"

그 말에 주위의 사관생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신지아만큼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아예 막 나가시는구나.'

속성 강기에 형태 변환에 추가로 장거리 강기 운용까지 더해졌다.

누구는 하나도 못써서 안달 난 기술들인데 혼자서 다 쓰고 계신다.

저건 그냥 자중할 마음이 아예 없는 거다.

'하기야. 기왕 이렇게 된 거 괜히 능력치를 드러내는 것보단 강기 특화 특성을 얻었다는 걸로 해두는 게 낫긴 하지.'

게다가 이미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데, 여기서 뭘 더 드러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아니, 조금 더 귀찮아지긴 하겠다. 이제는 원거리 초인이 부족한 길드까지 본격적으로 뛰어 나설 테니까.

"에휴."

신지아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숨은 사관생들의 웅성거림에 완전히 묻혔다.

'아무튼 랭킹은 확실히 오르시겠네.'

신지아가 쓰게 웃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토요일 오전이 되었다.

지난 삼 일간, 새로 익힌 엘프족의 특성 '바람의 살(虄)'을 공개한 일 때문에 고생 깨나 했다.

사람들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몰려서 당황스러웠다.

뭐, 그래도 원거리 공격 수단을 얻었으니 됐나.

실전에서 엘리시움 보우와 함께 쓰면 비장의 한 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세 개."

지금은 한참 훈련에 힘쓰는 중이다.

"모, 못합니다!"

"할 수 있다. 네 근육은 아직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통은 토요일에는 혼자서 훈련을 하지만, 오늘은 피진호 교관이 당직이라, 학교에 있는 김에 훈련을 봐 주고 있다.

덕분에 죽을 것 같다.

"마지막!"

"끄으으읍!"

나는 하체에 있는 힘껏 힘을 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말 끝―

"하나만 더!"

―이 아니었다.

죽겠는데 뭘 하나 더야!

에이! 빌어먹을 신비를 보는 눈!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했겠지!

"끄어어어!"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어났다. 이제 정말······.

"진짜 라스트!"

라스트는 개뿔!

마지막이 라스트지!

영어로 한다고 달라?

"으으."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짜 악마가 따로 없다!

몰라 하나 더 해!

"끄아아악!"

나는 악을 지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어났다.

"오케이 쉬어!"

피진호 교관이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내 전신에 가해지던 압력이 사라졌다.

"허어어··· 쿨럭, 커헉 커헉."

거세게 숨을 쉬다가 사레 들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라."

"그···게, 마음, 대···로 커허어업."

이 최첨단 운동 기구들은 진짜 사람을 한계까지 쥐어짜는 데 특화되어 있다.

엄청난 기술력이다.

덕분에 죽을 것 같다.

"흠. 그나저나 훈련량 대비 근육 성장이 너무 더디군."

피진호가 의아한 듯 턱을 쓰다듬었다. 기분 탓일까. 왠지 의심으로 가득 찬 것 같은 눈초리다.

설마 걸린 건가?

"민지랑 조금 다른 타입인 모양이군. 특성 쪽에 성장도가 몰려 있는 건가."

다행히 내 정체에 대해서 의심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뭐, 좋다. 그래도 꾸준히 늘고 있으니까. 이대로 2주만 있으면 E랭크에 진입할 수도 있겠어."

"저, 정말입니까?"

E랭크라니!

상상 속에서나 꿈꿔 왔던 랭크가 아닌가!

"뭘 그렇게 놀라지? 늘어나는 능력치로 얼추 예상하고 있던 거 아닌가?"

아차. 너무 좋아했다.

"아, 저는 서서히 성장이 느려질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고들 했고요."

"그야 평범한 트레이닝은 그렇겠지. 신체가 훈련에 익숙해지니까. 같은 몬스터를 계속해서 잡는다고 경험치가 무한히 증가하는 게 아닌 것과 같다."

"아하."

내 필사적인 변명이 통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 몸이 트레이닝에 익숙해질 날은 절대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다."

"······와아. 너무 기쁘다."

소울 리스.

내 음성엔 영혼이 없었다.

"안 기쁜가? 그럼 훈련 강도를 더······."

"너무 기쁩니다! 제 트레이너가 피진호 교관님이라서 행복합니다!"

자동 반사였다.

살기 위한 발악이었다.

이 이상 훈련하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

"농담이다. 이 이상 훈련해 봐야 오버 트레이닝밖에 안 된다. 오히려 근손실을 불러오지."

"······휴."

나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럼 오늘 훈련 고생했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네. 스트레칭 30분 이상 하고, 내일 훈련은 쉬라는 거죠? 알고 있습니다."

피진호가 픽 웃었다.

"잘 알고 있군. 아. 그리고 하나 더."

피진호 교관이 내게 자신의 폰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네?"

나는 갸웃한 채 교관의 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강서율 랭킹 변동 123위.]

"2자리수로 갈 날이 멀지 않았군."

원래 랭킹 변화는 매주 월요일에 일괄적으로 공지된다.

오늘은 토요일.

이 랭킹표는 아마 교관만 먼저 받는 랭킹 공지인 모양이다.

날 배려해서 미리 보여 주는 거겠지.

"······많이 올라왔네요."

"그래. 역대 가장 빠른 상승률이지."

역대 최고구나.

그건 좀 뿌듯하네.

"아. 그리고 강기 말이다만."

"아, 네."

"몇 번이고 봤는데, 역시 내가 가르칠 건 없더군. 오히려 네가 나보다 능숙해서 배워야 될 정도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육체 단련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는 가슴팍의 [무기의 극의]를 손으로 쥐며 대답했다.

역시 이 특성 제한 아이템이 제일 사기다. 무기의 주인 특성을 페널티 없이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니.

"마지막으로 부지 안이나 밖이나 돌아다닐 땐 조심하도록. 스카우터들한테 둘러싸이면 귀찮아진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엊그제 잠깐 바깥에 나갔다가, 스카우터들한테 둘러 싸여서 귀찮아 죽을 뻔했다.

"좀 적당히 하지 그랬나."

교관도 지아랑 똑같은 얘기를 한다.

억울하다.

아니, 랭킹을 올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는데 그럼 어떡하라고.

"뭐, 네 치밀함을 생각하면 알아서 잘 판단해 행동한 거라고 생각한다만."

피진호 교관이 몸을 돌려 개인 훈련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월요일에 보자."

"네. 교관도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교관이 떠나고.

스트레칭을 마친 나는 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땀에 절은 옷을 벗고, 샤워기 앞에 서자 전신 거울에 옷과 마찬가지로 땀에 흠뻑 젖은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근육이 붙긴 붙었네."

남자가 운동 후 가장 신날 때는 거울을 보며 펌핑된 근육을 볼 때라고 했던가. 공감한다.

"오오. 좋아좋아."

당장 내가 신나 있거든.

나는 이리저리 자세를 취하며 근육을 감상했다.

이게 참 내가 말하기도 뭐한데, 얼굴까지 잘생겨서 웬만한 조각상 뺨따구를 때릴 정도란 말이지.

그렇게 나르시시스트로 전직해 가기 직전.

"······아."

문득 등 전체에 새겨진 드래곤족의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하. 이건 진짜 어쩌면 좋냐."

얻은 지 벌써 4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획득한 특성에 대한 실마리가 없다. 감도 못 잡겠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기는 했는데."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이야.

나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날 점심.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쓰고.

최대한 인적이 없는 곳을 살펴가며 은밀하게 발걸음을 서둘렀다.

목적지는 금호가 기다리고 있는 금빛의 안식처.

이번 주 내내 너무 피로에 쩔어서 힐링 타임을 가질 생각이었다.

평소대로라면 1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30분이나 들여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삥 돌았다.

"휴."

그 결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금빛의 안식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쿵, 쿵, 쿵!

금빛의 안식처에 한 걸음 발을 내딛은 순간,

저 멀리서 힘찬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금호야아아~"

저 멀리서 금호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내 안면의 근육이 자연스레 풀어졌다.

아. 멀리서 얼굴만 봤는데도 벌써 힐링되는 기분이야.

"캬우우웅~"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금호가 빠르게 속도를 줄이며 내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갸르릉~"

그리곤 내 얼굴에 자신의 머리를 부빈다.

"미안 형이 좀 많이 늦었지?"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끙끙 소리를 내며 내게 애교를 부린다.

나는 금호의 찬연히 빛나는 털을 쓰다듬었다.

비단 같은 털결. 진짜 이 감촉을 그대로 재현해서 팔면 순식간에 억만장자가 될 텐데.

"옳지 옳지. 육식 사슴 많이 먹었어? 먹었다고? 잘했어."

진짜 모든 고민 걱정이 싹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파악하지 못한 드래곤족의 특성? 뭐 어때~ 언젠간 찾을 수 있겠지~

"아, 행복해."

진짜 금호 데리고 나가고 싶다.

방에 두고 하루 종일 쓰담쓰담하면서 자고 싶다.

귀여움과 전투력 그리고 내 멘탈 케어까지 세 가지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만능 금호.

"뀨우우."

계속해서 금호와 부비부비 하고 있자니,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얘 데리고 나갈 방법 어디 없나?

이 유적지의 귀속만 어떻게 하면 되는데.

"금호야. 너도 이 형이랑 밖에 나가고 싶지?"

"갸릉."

"그래. 빨리 같이 나가서 형이랑 같이 살자. 형이 방법을······."

나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등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발생했다.

"?"

그래.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해도 반응조차 없던 드래곤족의 특성이 말이다!

벙쪄 있는 와중, 내 양손에 희미한 마력광이 빛났다.

각인의 불길에 의해 붉게 변색되지 않은 순수한 마력.

그것이 내 손을 따라 금호에게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 44화 새 특성 (1)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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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새 특성 (2) (여기까지 무료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