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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가속 (3) >

"······나 안 될 것 같아."

"시연아!"

악마를 뒤로한 채 도망가는 도중. 하시연이 발걸음을 멈췄다.

"너희는 가서 교관님들께 도움을 청해. 나는 서율이랑 같이 도망칠 테니까."

"안 된다."

아직도 시퍼런 얼굴을 하고 있는 최지훈이 하시연을 만류했다.

"가면 너도 죽어. 노, 놈은 인간이 상대할 수 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끔찍한 기운을 지근거리에서 맞았기 때문일까.

최지훈의 표정은 짙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하시연이 입술을 짓씹었다.

"친구를 버릴 수는 없어."

"시연아. 서율이가 그랬잖아. 비장의 수가 있다고. 우리가 가면 방해만 될 거야."

김철진이 자못 침착하게 하시연을 말렸다.

"아까 지훈이가 말했잖아. 그건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나도 공감해."

하시연이 몸을 돌려, 강서율이 혼자 남은 방향을 바라봤다.

"그런 존재를. 서율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시연아."

"서율이는 우리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거야."

모두 내심 깨닫고 있는 사실이었다. 강서율이 얼마나 대단한 수를 숨겨 두고 있던지간에, 그 악마에게 이길 방법은 없다고.

하지만 모두 그 생각을 억지로 부정했다. 생존 욕구가 양심을 억눌렀다.

"그니까 너희는······."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궁-!

―크아아아아!

악마가 출현한 곳에서 맹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괴물의 포효소리가 들렸다.

하시연이 입술을 짓씹었다.

피가 새어 나올정도로 꽉.

정말 시간이 없다.

"너희는 가! 교관에게 자세한 정보를 알려! 분명 근처에 계실 거야!"

하시연은 그 말을 끝으로 쏜살 같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시, 시연아!"

뒤에서 모두가 하시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누구 한 명 하시연을 쫓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김철진과 최지훈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다리가 바닥에 붙은 것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시발!"

당연했다.

제아무리 정의롭고 싶다고 해도, 자기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법.

사자의 입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아기를 보고 있다고, 사자의 입안에 자신의 손을 넣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제발 살아 있어줘."

그리고 하시연은 그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자의 입안에 양손은 물론이고 자신의 상체까지 들이밀 사람이다.

자신의 상체를 지지대로, 아이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리라.

"제발··· 제발!"

하시연의 속도가 점점 빨라져 갔다. 그녀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됐는데. 적어도 나라도 같이 남았어야 하는데! 나 혼자서 남았어야 하는데!'

악마의 기세에 공포에 잠겨, 강서율을 혼자 그 자리에 두고 왔다는 사실에 깊은 후회를 안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악마의 포효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단순한 울부짖음에 전신이 딱딱하게 굳고, 공포로 이빨이 떨린다.

'이까짓거!'

하지만 하시연은 달렸다.

공포를 품고, 단순히 친구를 버릴 수 없다는 일념으로.

그것은 비단 강서율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냥 하시연이 꿈꿔 왔던 초인이 그런 존재이기에.

그녀의 신념이 그렇게 시키기에 그렇게 할 뿐이다.

―이! 이 새끼가아아!

이제 코앞이다.

강서율은 코앞에 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아아아!

그때까지만 해도, 하시연은 악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겨우! 겨우 나왔는데에! 어째서어!

'도착했어!'

이내 하시연의 눈에 강서율의 모습이 들어왔다.

"서율······아?"

백색의 사슬을 전신에 두르고, 악마와 혼자서 대치하는 강서율의 모습이.

"이만 들어가. 메피스토. 나중에 다시 보자고."

그의 전신에는 신성한 오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개 같은 새끼가아아아!

메피스토의 울부짖음과 함께, 강서율의 전신을 떠도는 백색 사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개의 사슬.

그것들은 각자 의지를 지닌 듯이 강서율의 주위를 맴돌았다.

"슬슬 1분인가. 좋아."

두 명은 서로를 응시하느라, 갑작스레 돌아온 하시연에 대한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대충 1년 정도 뒤에 보자."

강서율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손을 뻗었다.

촤라라라락-!

백색 사슬에 완전히 묶인 악마의 뒤로.

허공이 쩌억 열렸다.

―으아아아아아! 드디어! 드디어 나왔는데에!

그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보며, 하시연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듯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누가 악마 아니랄까 봐. 말이 험하네."

악마가 사라지면서, 강서율의 신체 주위를 부유하던 사슬도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저스트 1분."

강서율이 의미불명한 말을 했다.

"······사슬을 3개나 동시에 썼으니, 더럽게 아프겠지?"

츠츠츠츠츠츠츳!

"크으윽!"

그 순간, 그의 전신에 맹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강서율의 신체가 갸우뚱 기울어져 갔다.

"서율아!"

하시연은 순간의 도약으로 강서율에게 접근해, 그의 몸을 받았다.

"······하시연?"

고통에 잠식된 얼굴로 하시연의 이름을 부른다.

"너, 크으윽! 왜··· 여기에···."

"거, 걱정돼서 와, 와 봤는데. 아니 그보다 너 괜찮은 거야? 어디가 아픈 건데?"

"어, 언제부터 봤··· 크흡. 봤어?"

"······."

하시연이 입을 다물었다.

"······봤구나."

강서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하자."

강서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본 거. 못 본 걸···로 해 줄 수 있을까?"

고통을 참아내며 최대한 또렷하게.

"······왜? 이건 분명 재해급 사태야. 이 사태를 네가 해결했다는 걸 알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그래."

"······이유?"

"그래. 이유···. 크으읍!"

강서율의 전신을 잠식한 고통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말하지 말고!"

심상치 않은 강서율의 모습에 하시연이 당황했다.

"부, 부탁······. 끄으읍!"

"서, 서율아!"

강서율은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교, 교관님! 저쪽에 서율이랑 시연이가!"

저 멀리서 김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있었던 것인지, 3조원과 합류한 피진호 교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그는 하시연과 강서율 근처에 서서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

"하시연. 상황은? 재해 대책 본부에서 재해급 몬스터의 마력원이 감지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악마. 놈은 어디 있지?"

다른 조원들도 피진호를 뒤따라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주위는 너무도 고요했다.

"······라졌어요."

"뭐라고?"

"사, 사라졌어요!"

피진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라졌다고? 설마 필드 밖으로···!"

"아, 아뇨! 봉인이 완전히 해제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새하얀 사슬이 악마를 감싸더니, 다시 균열 안으로······."

"······뭐?"

하시연은 양심을 억누르고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게 정말이냐."

"네, 네!"

지금은 머리가 굳어서 뇌가 제대로 회전하지 않아, 이유를 모르겠지만. 강서율의 부탁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가. 다행이군."

피진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을 모르겠으나, 하시연의 말이 맞겠지.

그렇지 않으면 강서율과 하시연 두 명 다 살아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강원도 필드 사건은 무사히 종결 났다.

1만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악마라는 새로운 이슈를 남기고.

* * *

"선조님!"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지아의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여긴?"

병원으로 보이긴 하는데.

일단 학내의 의료실은 아닌 것 같다.

"신화 그룹과 연계된 병원이에요. 그보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 어. 아무렇지도 않아."

"다행이다······."

지아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 병원 검사는 어떻게든 막았어요. 선조님의 정체가 발각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 그, 그렇구나. 고마워."

그래서 부지 내 의료실이 아닌, 조금 멀리 떨어진 병원으로 온 거구나.

"진짜 몸에 이상은 없는 거죠?"

"응. 괜찮아."

그냥 심한 고통에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서기관의 속박' 세 개를 동시에 사용해서 그런가. 스파크도 세 배. 고통도 세 배였거든.

"그보다 일은 어떻게 됐어?"

메피스토를 봉인하는 모습을 하시연이 봤다.

그녀의 성정은 정직 그 자체다.

내가 숨겨 달라 부탁하긴 했지만, 거짓말을 못하는 그녀의 성격상 진실을 말했을 수도 있다.

"그냥. 조사나 하고 있죠.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사라진 의문의 악마. 라면서요."

"아. 그렇구나."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하시연은 내 말을 잘 들어 준 모양이다.

"근데 그거. 선조님이 하신 거죠?"

"······뭘?"

"악마를 다시 봉인한 거요. 선조님 혼자 자리에 남으셨다면서요."

확실히 나 혼자 남은 것도 맞고. 내가 봉인한 것도 맞긴 한데······.

"아, 아닌데?"

일단 부정해 봤다.

"에이. 누가 선조님 아니랄까 봐 겸손하시기도 하셔라. 괜찮아요. 저는 다 알고 있으니까."

그렇죠.

물론 나를 맹신하는 지아가 믿을 리가 없었다.

"진짜 감동했다니까요. 설마 선조님이 악마를 막기 위해 사관학교에 잠입하신 걸 줄은 몰랐어요."

응?

그게 그렇게 되나?

"진짜 대단하세요. 거기서 악마가 나올 거라는 정보는 대체 어떻게 얻은 거예요?"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나올 거라는 거.

몰랐다.

"역시 엘프족 비밀 결사의 힘인가요?"

"······응?"

엘프의 뭔 결사?

"아무튼 선조님. 선조님도 일어나셨으니, 저는 남은 뒤처리를 하러 가 볼게요. 학교에 보고도 해야 하고."

뭔가 폭풍처럼 말을 쏟아 내더니, 벼락 같은 속도로 일어났다.

"그럼 선조님 오늘 하루는 푹 쉬세요~"

"어? 어."

그리고 빛의 속도로 병실을 나간다.

"······."

나는 그저 멍했다.

대체 신지아의 머릿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나는 대체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까.

상상도 못하겠다.

아니, 상상하기 무섭다.

"······모르겠다."

나는 생각을 전환했다.

더 중요한 것.

왜 갑자기 메피스토가 등장했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최지훈이 흑철 대검을 봉인 회로에 꽂아 넣었으니까.'

그럼 최지훈은 왜 흑철 대검을 거기다가 꽂았는가.

'내가 하시연이랑 생각보다 빠르게 친해졌으니까?'

그것은 아마 질투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최지훈은 하시연에게 마음이 있다.

질투라는 검은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서 먼 곳에서 검을 휘둘렀고, 결국 흑철 대검까지 휘두른 것이겠지.

요컨대 내 행동에 의한 나비 효과라는 것이 된다.

"······실화냐."

대체 이 빌어먹을 스토리는 얼마나 꼬이려는 거야.

이건 너무하잖아.

내가 하시연이랑 조금 빨리 친해졌다고, 중반에 나와야 할 메피스토가 이 시점에 등장하는 게 말이야 방구야?

"하."

마치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 이상 스토리가 꼬이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미래를 바꾸는 건 적당히 하라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좆까라고 해."

미래를 바꾸는 걸 적당히 하라고? 개소리하지 마.

이미 미래가 바뀌는 건 기정사실이다. 이 소설의 시나리오를 끌어가야 할 주인공인 내가 변했으니까.

주인공이 달라졌는데, 스토리가 바뀌지 않는 소설 따윈 없다.

지금의 내게 미래의 지식을 사용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걸 포기한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나는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항상 선택할 것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스토리가 변화한다고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이번 일 같은 경우는 무려 '천사족의 특성'을 얻기도 했고.

"아. 무슨 특성인지 먼저 알아봐야겠구나."

다시금 생각을 전환했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떤 천사족 특성을 얻었느냐,

몇 개의 특성을 얻었느냐에 대한 것이다.

"제발 3개! 3개 주세요!"

서기관의 속박을 3개 동시에 사용했으니, 3개의 특성을 얻었을 확률이 크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신체를 확인했다.

"아오!"

그리고 실망했다.

가슴팍에 새겨진 천사의 문장은 녹색.

즉, 특성은 하나밖에 얻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같은 아이템이면 몇 개를 동시에 쓰던 상관없다. 이거구만."

뭐, 이런 특수한 경우가 또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나저나 무슨 특성이지?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천사족의 특성을 하나씩 떠올리며, 특성에 대한 실험을 해 보았다.

빛의 마력은 아닌 것 같고.

천벌 같은 것도 아닌 것 같고.

대천사의 통찰력도 아니네.

"······."

그러나 '포식자의 살의'를 얻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기억하는 특성들 중에서는 일치하는 게 없어 보였다.

"······아. 또 노가다 뛰어야 돼?"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특성 파악하는 거 진짜 쉬운 일이 아닌데.

그리고 기왕이면 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기 특성 같은 거 하나 주면 좀 좋아?

"에휴."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내가 모르는 엄청난 특성이 똭 하고 나올 지도 모른다.

나는 '포식자의 살의'를 알아볼 때와 마찬가지로, 천사족의 특성에 대해서 하나씩 떠올려 봤다.

일단 빛의 마력을 쓰고.

악마와 대립하고.

철저한 계급 사회에.

발키리 같은 전투 천사도 있고.

.

.

.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또 뭐 있더라. 아."

그러고 보니, 가장 간단한 특징을 까먹고 있었다.

"날개가 달렸지."

수납 가능한 편리한 날개.

대충 비둘기 날개 같이 생긴 거.

찌릿-

"앗 따거!"

그 순간, 가슴팍에 묘한 통증이 느껴졌다.

묘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쾅!

"서율아! 일어났다면서?"

병실의 문이 열리며 하시연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왔고.

촤아아악!

"걱정 많이 했······."

내 등에 천사의 날개가 쫙 펼쳐졌다.

"······."

"······."

망했다.

< 23화 가속 (3)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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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화 꼬인다 꼬여 (1) >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얻은 특성은 '천익(天翼)'이라 불리며, 천사족만의 고유 기관이다.

비행 기술 자체가 지극히 희소한 이 세계관 속에서 비행 수단을 얻었다는 것은 분명 좋아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천익은 마력의 순환을 돕는 기능도 있다.

아직은 마력을 보유하지 못한 고로 크게 의미 없는 기능이지만, 미래지향적으로 봤을 때 이번 특성은 '당첨'이라고 봐도 좋겠지.

"그, 서율아. 아니 서율 님? 질문하나만 해도 좋을까요?"

"······잠시만. 나 생각 좀 정리하고."

"아, 넵."

문제는 이 날개를 제 3자에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필 하시연이라는 비중 높은 조연한테.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일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에 대해서 빠르게 판단했다.

"좋아. 묻고 싶은 게 뭔데."

대충 예상은 간다.

내 정체에 대해서 묻겠지.

"혹시 서율 님은······."

"편하게 반말로 해."

"그치만······."

"존댓말 하면 대답 안 해 줄 거야."

"아, 넵. 아니 응."

뭔가 묘하게 기시감이 든다.

하시연이랑 누군가가 겹쳐 보이는 듯한 환상.

"저기, 서율이 너는······."

그 기시감이 무엇인지는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천사님이지?"

지금 하시연의 눈빛과 태도는 신지아가 처음 날 찾아왔을 때와 아주 흡사하다.

"······."

그렇지요.

당연히 날 천사라고 생각하시겠죠. 암요.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야?"

"넵! 아니 응!"

"······너도냐."

"응?"

절대 믿는 표정이 아니다.

언젠가 봤던 지아의 표정과 완벽히 똑같다.

"아니야. 네 생각이 맞아."

"역시!"

부정할 방법이 없었다.

비단 날개만이 문제가 아니다.

하시연은 내가 악마를 봉인하는 장면을.

'서기관의 속박'을 사용하는 모습을 봤다.

악마가 말하길 천사족만이 사용 가능하다고 했던 사슬을 다루는 내 모습을 말이다.

이미 하시연의 마음속에서 나는 '천사'로 각인되었을 터다.

내게 상태창이 없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진실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이상 저 인식을 바꿀 방법은 없다.

"일단 이번 일은 비밀로 해 줘."

"네! 알고 있습니다!"

"또 존댓말."

"아, 응! 죄송··· 아니 미안!"

괜히 걱정되네.

이러다가 다들 있는데서 '천사님!' 이라고 외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보다 들킨 김에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저한테요? 아니 나한테?"

"······너 진짜 존댓말 조심해라?"

"헤헤. 미안."

나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악마를 봉인할 때, 자리에 있었으면 들었을 거야."

이번 일은 오히려 기회라고 볼 수 있다.

하시연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한 절호의 기회.

"1년 뒤에 다시 보자고 했던 말 기억해?"

"······응."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어?"

"대충 예상은 가."

하시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1년 뒤에······ 그 악마의 봉인이 완전히 풀린다는 거 아냐?"

"정확해."

내가 사용한 '서기관의 속박'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기간이 약 1년이다.

그때는 이번처럼 재봉인 같은 건 할 수 없다.

직접 쓰러트려야 한다.

원작대로라면 주인공 혼자서 다 쓸어버렸을 테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다.

동료를 만들어야 한다.

내 빈자리를 채워 줄 동료들을.

"나는 네가 나를 대신해서 놈을 쓰러트려 줬으면 좋겠어. 너도 대충 예상하고 있겠지만, 나는 이유가 있어서 힘을 드러낼 수 없거든."

하시연의 눈이 부릅떠졌다.

"내가 그 악마를?"

"그래."

"무리야. 고작 1년으로는······."

"아니. 가능해. 시연이 네가 날 믿어 준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어."

빙결 마력을 각성시켰던 것처럼,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서 하시연을 성장시킨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말은······ 서율이 네가 내 수련을 봐준다는 거야?"

"맞아."

하시연의 성장 포텐셜은 세계관 내에서 수위에 꼽는다.

원작의 주인공을 100이라고 쳤을 때, 신지아가 92. 하시연이 90. 김철진이 88. 놀랍게도 최지훈이 89다.

번외로 유화가 87, 피진호가 86이다.

"정말 가능할까? 1년 내에 내가 그 악마를······."

"가능해. 날 믿어."

지아를 포섭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일단 보류했다.

지아는 하시연과 다르게 성장하기 위한 조건이 정해져 있다.

그 조건을 달성할 수 있는 시점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이 이상 강해지기는 힘들다.

하지만 하시연은 다르다.

그녀에게 그런 제한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그녀에게 전하기만 해도 그녀는 상상하지도 못할 속도로 강해져 갈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불안으로 가득한 초반 시나리오를 큰 위험 없이 넘어설 수 있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스승이라는 포지션을 잡게 되면 거리낌 없이 그녀의 조력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추후의 유적지 공략에도 큰 힘이 될 것이고.

자연스레 내 성장 속도에도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이것이 현 상황에서 낼 수 있는 베스트 플랜이다.

"······알았어. 믿을게."

긴 고민 끝에 하시연이 마음을 정했다.

"고마워. 날 믿어 줘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이라 생각했던 변수는,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 * *

그날 밤.

무사히 퇴원을 마치고,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유화에게 전화가 왔다.

―또 한 건 하셨네요?

"뭐가요?"

―또또 시치미 떼신다. 이번 악마 출현 사건이요. 당신이 해결한 거잖아요.

"······아닌데요."

―네. 그럼 일단 그런 걸로 쳐요.

진짜 내 주위의 여성은 왜 이렇게 제멋대론지 모르겠다.

아니, 물론 내가 해결한 게 맞긴 한데, 좀 믿어 주면 어디가 덧나나?

―혹시 이번 일도 진리의 구명자 짓이에요?

"네?"

갑자기 분위기 진리의 구명자.

되게 뜬금없네.

"아닌데요."

―으음. 그런가요.

이번 일은 진리의 구명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아무튼 이번 사건. 당신한테 몰리려고 했던 언론은 제 선에서 막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진짜요?"

―네. 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정체를 감추고 싶어 하는 듯했으니까요. 괜한 짓은 아니었죠?

"그럼요. 고마워요."

어쩐지.

왜 기자들이 날 가만히 놔두나 했는데, 그런 이유였구나.

―엣헴. 저 이래 봬도 내조에 힘쓰는 여자거든요.

유화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최근 들은 말 중에 가장 참신한 개소리였다.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가 나설 것도 없었어요. 아마 신지아 고것이 한 짓이겠죠.

"아하."

어쩐지.

지아도 움직였구나.

―게다가 수성 그룹까지 움직였으니까요. 당신이나 하시연 사관생에 대한 정보는 완벽히 묻혔다고 보시면 돼요.

"수성 그룹까지 나섰다고요?"

―수성 그룹의 장남은 하시연 양이랑 친한 것 같았으니까요. 괜히 기자들한테 시달리는 게 보기 싫었던 게 아닐까요.

"음. 일리 있는 말이네요."

이유가 어찌 됐건 잘 해결된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계속 뭔가 일이 있어서 이걸 묻는 걸 까먹었는데요.

"네. 뭔데요?"

―당신이랑 신지아는 대체 무슨 사이에요?

"말했잖아요. 평범한 친구 사이라고."

―그 개소리를 제가 믿을 것 같아요? 제가 신지아 걔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는 쓰게 웃었다.

하기야. 나 같아도 안 믿겠네.

―뭐, 됐어요. 예상가는 게 있으니까.

"······또 무슨 망상을 하시는 거예요?"

왠지 불안하다.

―왜요? 궁금해요?

"신경은 쓰이네요."

대체 어떤 결론을 내린 걸까.

―그냥 뭐. 피알레 알로를 처치한 궁사가 당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

헐.

망상이 아니라 팩트였다.

―조용한 거 보니 제 생각이 맞는 모양이네요.

"아닌데요."

나는 무감정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만 하면 다 아니래. 얄미워 죽겠어.

유화가 툴툴댔다.

―발뺌해도 소용없어요. 이번 건 증거도 있어요.

"증거가 남았다고요?"

―어? 지금 인정하신 거예요?

앗.

실수했다.

보통 결백한 사람은 증거가 있다는 말에 이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코웃음치고 말겠지.

―진짜 묘한데서 허술하시다니까. 아무튼 저만 알 수 있는 심증 같은 증거긴 한데, 하나 찾았어요.

전화기 너머로 유화가 히죽대는 소리가 들렸다.

―사건 당시, 세계수 공원 인근의 CCTV를 모두 뒤져봤거든요. 외곽의 정지하지 않은 것들로요. 그랬더니 사건 직후, 세계수 공원에서 밖으로 뛰쳐나오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했지 뭐에요. 상처투성이 모습으로요."

그런 귀찮은 짓을 하셨어?

"······그거 참 엄청난 노가다를 하셨네요. 안 그래도 바쁘신 양반이."

그 누군가란 필히 나를 말하는 거겠지.

―궁금한 게 있으면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말했잖아요. 당신의 정체를 꼭 밝혀 주겠다고.

와 씨.

진짜 무섭네.

"······적당히 해주세요. 무섭네요."

―음~ 졸업 후에 당신이 비혼 길드에 들어온다고 약속해 주시면 적당히 하구요.

진짜 끝까지 여우같은 유화였다.

* * *

다음날 아침.

들끓는 순혈의 피 때문에 새벽같이 깨어난 나는 평소처럼 단련실로 향했다.

"강서율. 오늘은 좀 쉬지 그랬나."

단련실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피진호 교관이 내게 다가왔다.

"그냥 마력 밀도 때문에 정신을 잃었던 것뿐이라 괜찮아요. 그리고 훈련은 하루도 빼먹는 게 아니라고 배웠거든요. 어떤 교관님한테."

내 장난스런 말에 피진호 교관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누군지 몰라도 훌륭한 교관이군."

훌륭한 교관의 훌륭한 자화자찬이었다.

"그럼 봐주지 않고 굴려 주마."

"······조금만 살살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교관은 이렇게 생각한다. 힘들지 않으면 운동이 아니라고."

······교관의 미소가 무서웠다.

잠시 후.

"허어억. 허어억!"

"고생했다. 이따 교실에서 보자."

"고, 고생하셨습니다아."

나는 조져졌다.

"스트레칭. 잊지 말도록."

"예에."

그 말을 끝으로 교관은 단련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으음. 아무리 봐도 연기는 아닌 것 같은데······."

널브러져 있는 내게 하시연이 다가왔다. 쭈그려 앉아 내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소곤대며 묻는다.

"어제부터 계속 궁금했는데, 진짜 연기 맞아?"

이게 연기로 보이냐!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하기야 하시연의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가.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 모습은 연기라 하기엔 뭐하다.

지아는 어찌어찌 연기라고 믿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하시연은 희미한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냥 연기라고 잡아떼면, 추후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느낌이다.

"연기는 아냐."

그럼 양심을 잠시 내려두고, 시나리오를 하나 쓰는 수밖에.

"연기는 아니라고?"

"응."

나는 상체를 들고 하시연의 귓가에 소곤댔다.

"말했잖아? 나는 이유가 있어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아, 응."

"그걸 위해서 힘을 봉인하고 있어."

나는 슬쩍 가슴팍의 '천사 문신'을 보여 줬다.

이걸로 내 구라에 신빙성이 늘어날 터!

"아아!"

하시연이 납득의 기함을 토했다.

"단련은 주기적으로 힘을 쏟아내기 위해서 하는 거야. 안 그러면 봉인이 풀릴 가능성이 있거든."

"응. 이해했어."

즉석에서 짜낸 시나리오지만,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그럴싸한 거짓말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점점 죄책감이 옅어지고 있는 것 같다. 거짓말도 습관이라던데, 나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아 맞다. 이걸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그그. 서율아. 오늘 너 랭킹전 잡힌 거 봤어?"

"랭킹전? 아니 아직 안 봤는데."

슬슬 나올 때가 되긴 했지.

"그······."

하시연이 뭔가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이거 봐 봐."

하시연이 내게 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랭킹전 예정일이 띄워져 있었다.

[103위 최지훈 도전권 사용.]

[5월 15일. 오후 1시 30분.]

[랭킹 497위 강서율 VS 랭킹 103위 최지훈]

"······최지훈? 아니, 그보다 도전권?"

도전권.

1년에 딱 두 장 주어지는 랭킹전 대전 지목권이다.

그걸 벌써 쓰겠다고?

그것도 497위인 나한테?

그 중요한 도전권을?

이겨 봤자 아무 득도 없을 텐데?

"그, 진짜 미안해. 서율이 너가 너무 수상하다고. 직접 싸워 봐야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아놔.

그 싸가지가.

또 사람 귀찮게 하네.

아니. 잠깐만.

이거 잘 생각해보니까,

잘만 하면 초고속 랭킹 상승 가능하겠는데?

< 24화 꼬인다 꼬여 (1)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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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화 꼬인다 꼬여 (2) >

교실 내로 들어가자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중 유독 강렬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두 명.

한 명은 당연히 나를 죽일 듯이 바라보는 최지훈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나한테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는 신지아였다.

최지훈의 시선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잘 알겠는데, 지아는 또 왜 저래?

우웅-

그 순간, 스마트폰이 울렸다.

지아한테 온 톡이었다.

[처리할까요?]

······무슨 살인청부업자세요?

처리하긴 뭘 처리해.

[모가지만 깔끔하게 자르겠습니다.]

신지아가 방금 막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나찰 같은 눈빛으로 최지훈을 노려본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듯한 눈빛이다. 나는 다급하게 답장을 보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하지만 선조님에게 모욕감을 준 타지 않는 쓰레기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요! (단호한 토끼 이모티콘)]

모욕감.

확실히 상위 랭커가 하위 랭커에게 도전장을 사용하는 것은 모욕이라고 볼 수 있다.

초인 사관학교의 랭킹 시스템은 포인트제다. 랭킹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가산점이 붙는 식이다.

그렇기에 보통 도전권은 자기보다 높은 랭커, 혹은 비슷한 랭커에게 사용한다. 그게 이득이니까.

하지만 최지훈은 굳이 하위 랭킹인 내게 도전권을 사용했다.

103위가 497위를 이겨 봤자, 포인트는 거의 얻을 수 없다.

반대로 지면 막대한 포인트가 깎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도전권을 사용한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그냥 시비 거는 거다.

나는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싶어.

대충 이런 뜻이 담겨 있다.

나를 숭상하다시피하는 지아가 격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조금도 분노하지 않았다.

[놔둬. 자기가 도전권까지 사용해서 포인트를 바쳐 주시겠다는데. 잘 받아먹어야지.]

그도 그럴 게 얼마나 고마운가.

안 그래도 반년 내로 랭킹 10위권 내로 들어서는 게 목표였는데, 그 목표를 향한 지름길을 만들어 주신다는데.

[이기시려고요?]

[그래.]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 주신 능력만을 이용해선 이기기 힘드실 거예요.]

맞는 말이다.

지금의 나는 절대로 최지훈을 이길 수 없다.

내구를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는 특성인 '포식자의 살의'를 얻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최지훈이 마갑을 사용하면, 근력 F로는 어림도 없어요.]

저번 친선전과는 달리, 최지훈은 마력을 사용할 테니까.

마력을 이용해서 갑옷을 만드는 희귀 특성 '마갑'을 말이다.

[알고 있어.]

내 포식자의 살의는 상대의 신체를 경련시키는 것으로, 능력치 '내구'를 깎는 피어 계열 스킬이다.

마갑을 뚫을 방법은 없다.

지금은 말이다.

[그래도 랭킹전까진 아직 2주나 있잖아?]

[(깜짝 놀란 토끼 이모티콘)]

2주는 길다.

그사이에 방법을 찾으면 될 뿐이다.

[시나리오라는 거군요! 2주 동안 급격하게 성장했다는 시나리오!]

[그런 느낌이지.]

엄밀히 말하면 시나리오가 아니라 진짜 성장이지만.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힘을 드러내셔도.]

[그래. 이유가 생겨서 국지전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생겼거든.]

[(고민에 잠긴 곰 이모티콘)]

[혹시 그 악마의 출현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갑자기 왜 악마가 튀어 나와?

국지전에 튀어나오는 건 악마가 아니라 진리의 구명자 놈들이다.

뭐, 그놈이 그놈인가.

[그런 거지.]

[역시. 그럼 저는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을게요.]

[그래.]

그 말을 끝으로 톡이 끊겼다.

폰에서 시선을 뗐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 최지훈의 시선을 정확히 맞받아 쳤다.

그리곤 터벅터벅 내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네 정체를 까발려 주지."

서로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최지훈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해 봐."

나도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답해 줬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난 일주일간의 내 일과는 이렇다.

아침 5시 40분 ~ 7시 30분.

피진호 교관의 지옥 훈련을 소화한다.

8시 40분 ~ 18시 30분.

사관학교의 수업을 듣는다.

19시 ~ 21시.

하시연의 마력 수행을 봐 주며, 나도 가벼운 트레이닝을 병행한다.

21시 ~ 수면까지.

세워 둔 계획과 앞으로 겪어야 할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잊지 않게 정리해 둔다.

분 단위로 조금씩 변화는 있었지만 지난 일주일은 대충 이렇게 흘러갔다.

아주 규칙적인 생활이었다.

군대에서도 이렇게 규칙적으로 생활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

드디어 그간의 훈련 결과를 체크하는 날이다.

"후. 제발 딱 F랭크만 가자."

사관학교에 알려진 내 능력치는 F랭크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최저 기준치가 F랭크이기에 그랬을 뿐.

엄밀히 따지면 내 능력치는 랭크 외. F랭크 이하였다.

고로, 내 목표는 일단 모든 능력치를 F랭크급으로 올리는 것.

남들과 똑같은 스타트 라인에 서는 것이었다.

"제발."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부지 밖에 있는 개인 단련실이다.

이곳에는 정확한 능력치 체크를 할 수 있는 최신 기구들이 가득하다.

조정도 간단하다.

기구 옆에 달린 인터페이스 창을 조정하면 된다.

일단 근력부터.

나는 근력 단련 기구 앞에 서서 능력치를 입력했다.

[F(1/99)]

이러면 끝.

이 기구의 무게는 F랭크 근력에 최적화된 상태가 됐다.

다음은 이 기구를 들어 올리기만 하면 될 뿐.

들어 올리면 F랭크 달성인 거고.

못 들어 올리면 여전히 랭크 외인 거고.

나는 기구에 앉았다.

깊은 심호흡과 함께.

우주의 온 기운을 모아.

전신의 근육을 쥐어 짜 기구를 들어 올렸다.

"흐으······읍?"

내 입에서 힘빠진 소리가 났다.

다름 아니라, 너무 쉬워서.

힘을 빡 주기도 전에 기구가 훅 올라가 버려서 나온 소리였다.

······왜 이렇게 쉽지?

* * *

나는 개인 단련장 인근의 카페에 앉아서 멍하니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근력, 민첩, 체력을 비롯한 모든 육체 수치 모두 F랭크를 달성했다.

어안이 벙벙하다.

그간의 걱정이 무색해질 정도로 쉬웠다.

이게 들끓는 순혈의 피와 피진호의 지옥 훈련의 시너지인가?

그간의 지옥 같았던 나날들이 헛되지 않았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이 속도라면 E랭크, D랭크도 금방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도 차올랐다.

물론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건 안다. F랭크는 말 그대로 최저 수치일 뿐.

E랭크까진 어느 정도 할 만하다고 해도, D랭크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은퇴할 때까지 D~C랭크에 머물러 있는 초인들은 수없이 있을 정도니, 말 다한 것이다.

하지만 희망을 봤으니 됐다.

더욱 노력할 의지가 샘솟았다.

나는 세상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우웅-

스마트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유화]

유화에게 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지?

―이번에 수성 그룹 장남이랑 한판 한다면서요?

여보세요라고 말할 겨를도 없었다.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대."

―진호 오빠한테요.

"둘이 친하다는 거 나름 비밀 아니었나요?"

―이미 알고 있는 상대한테 숨겨서 뭐해요.

그건 그렇긴 하지.

―이번 랭킹전. 이길 거죠? 국지전이 참여하는 게 목표라고 하셨으니까.

"이겨야죠."

―이번엔 또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실지 기대되네요.

"또 보러 오시려고요?"

―그럼요.

······진짜 바쁜 거 맞아?

사실은 엄청 여유로운 거 아냐?

지금도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다거나.

―앗. 가 봐야겠다. 그럼 나중에 또 연락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유화는 통화를 끊어 버렸다.

진짜 심심해서 한 전화였나 보다.

아니, 심심하다기보단 외로워서 한 전화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가.

아직 유화의 마음 속에선 '김신우'의 배신이 가시처럼 박혀 있을 테니까.

아마 혼자 있으면 하루 종일 그 생각만 들 것이다.

유화의 성격상 최소 반년은 이어질 터.

하기야. 나같아도 그럴 것이다.

20년을 곁에서 함께한 사람이 사실은 배신자에 살인마였다니.

얼마나 충격이겠어.

"에휴."

그래도 어쩌겠는가.

배신자라는 걸 아는데 그냥 놔둘 수도 없고.

알아서 잘 이겨 내길 빌어야지. 실제로도 잘 이겨 낼 거고.

나는 남은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간만에 계획이 없다.

그럼 뭘 할까.

"흠."

한가하겠다.

금호나 보러 갈까.

마침 유적지에는 몬스터도 있을 테니, 실전 훈련도 병행할 수 있을 거고.

금호한테 한 마리씩 데려와 달라고 하면 위험한 일도 없을 거고

.

보는 눈도 없을테니, 이번에 얻은 날개로 비행 연습을 하기도 좋겠고.

* * *

"금호야아아~"

금빛의 안식처에 들어 온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쿠웅, 쿠웅, 쿠웅!

맹렬한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금호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다.

저 속도 그대로 들이 박으면 어쩌지, 싶었는데.

저번에 내가 조심하라고 했던 걸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서서히 속도를 줄인다.

"갸르릉."

그리고 내 앞에 서서 살며시 고개를 들이민다. 표정에 '왜 이렇게 늦게 왔어!'라고 적혀 있는 듯했다.

"미안. 형이 조금 바빠서."

나는 금호의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갸우."

금호는 좋다는 듯이 몸을 배배꼬았다. 아. 힐링된다.

이게 바로 금호 테라피인가.

"어우. 네가 여기서 나갈 수만 있으면 데려 나가고 싶다 진짜."

얼마나 좋아.

귀엽고 강하고.

덩치가 좀 문제긴 한데, 이 세계에 테이머라는 존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길들인 괴수라고 한 뒤에, 복종도 테스트를 통과하고 나면 문제 끝. 그 순간부터 금호는 내 펫으로 지정된다.

물론 얘가 유적지에 종속된 존재인 이상 무리한 얘기지만.

"금호야. 혹시 몬스터 한 마리만 이리로 데려올 수 있겠어?"

"크릉."

귀를 쫑긋 세운 금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더니, 고고한 자태로 몸을 돌렸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몬스터를 한 마리 데리고 올 테지.

그럼 그놈과 실전 훈련을 하면 된다. 위험하면 금호한테 도움을 요청하면 되고.

그걸 위해서 장비를 모조리 챙겨 온 것이다.

아. 기대된다.

A랭크 단검은 어떤 손맛일까.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변태 살인마 같네.

"크르르릉!"

저 멀리서 금호가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몬스터를 하나 데려온 것이리라.

그럼 슬슬 싸울 준비······를?

"······금호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금호를 보자, 나도 모르게 얼이 빠졌다.

"갸릉?"

"그거 뭐야?"

나는 금호의 입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확히는 금호가 입에 물고 있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금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 앞에 물고 있던 것을 내렸다.

"크릉."

그리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칭찬해 줘!'라고 써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귀엽다.

귀엽긴 한데······.

"······몬스터 '였던 것' 말고. 몬스터를 데려 오라고 한 거였는데."

육식 사슴을 저민 고기로 만들어 가져오면 어떡해.

"!"

내 말에 금호의 귀가 쫑긋 섰다.

예상치도 못했다는 표정으로 나와 바닥의 몬스터 '였던 것'을 번갈아 바라본다.

금호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못 당황한 모양이다.

"그르릉."

그리곤 눈앞의 저민 고기를 입으로 다시 물더니, 땅에 세웠다.

툭-

넘어진다.

다시 세운다.

툭-

또 넘어진다.

"······그릉."

쿠웅-!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에 화가 난 것인지 그대로 지면에 박아 버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몬스터 였던 저민 고기가 지면에 섰다.

뭔가 미묘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크릉."

그 모습을 보고 만족한 것인지 금호가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이제 됐죠? 그럼 칭찬해 주세요!'라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

"······자, 잘했어! 금호야!"

그 표정을 배신할 수가 없어서. 일단 칭찬했다.

"갸르릉."

내 말에 그제야 만족한 것인지 다시 내 몸에 얼굴을 부빈다.

"······입에 묻은 피는 좀 닦고 그러면 안 될까?"

이거 이래 봬도 처음 입는 장빈데.

나는 쓰게 웃으며 금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금호야. 이번엔 상처없이 한 마리만 데려와 줄래?"

< 25화 꼬인다 꼬여 (2)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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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화 두 번째 유적지 (1) >

푸욱-!

내 단도, '잠룡의 뿔'이 육식 사슴의 목덜미를 꿰뚫는 소리가 울렸다.

털썩.

숨을 멎은 육식 사슴이 바닥에 쓰러졌다.

"허억, 허억."

숨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사슴이라길래 만만하게 봤는데.

뭐 이렇게 쎄.

진짜 겨우 이겼다.

나도 지면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그러자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금호가 다가와서 내 얼굴을 핥는다.

"금호야. 형 죽겠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괜히 약한 척을 한번 해 봤다.

"갸릉!"

내 죽는다는 말에 금호가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마저도 귀엽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치명적인 귀여움이었다.

"장난이야."

나는 상체를 들어 올려 금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진짜 왜 이렇게 귀엽냐."

양손으로 녀석의 볼을 마구 부빈다. 그러자 신나서 갸릉갸릉 댄다.

나는 금호의 모피 감촉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육식 사슴.

금빛의 안식처에 서식하는 몬스터로 속도와 번식력이 장점인 몬스터다.

요컨대 금호의 먹이로 설정된 몬스터다.

그런 놈한테 1:1로 질 뻔했다.

그것도 A랭크 단검을 들고서.

심지어 바람의 길까지 썼음에도 말이다.

"아. 자괴감."

물론 변명은 있다.

이번 전투에선 포식자의 살의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용했으면 쉬웠겠지.

육식 사슴의 몸이 굳은 순간을 노려서 단도를 찌르면 끝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면 단검의 실험과 신체 능력의 실험이 안 되니까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이긴 게 어디냐. 그치? 금호야?"

나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고작 육식 사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처음 이 세계에 빙의했을 때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D+랭크로 추정되는 몬스터를 혼자서 이긴 거니까.

"그릉그릉."

금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이해 못한 것 같은데, 그냥 내 말이니까 긍정하고 보는 느낌이다.

하기야. 얘한테 육식 사슴은 먹이일 뿐이다. 그런 상대를 이겼다고 기뻐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금호야. 다음 훈련으로 가 볼까?"

나는 금호의 등에 올라 탔다.

"일단 수호자의 방으로 가자."

"갸릉."

잠시 후.

수호자의 방에 도착했다.

이 유적지에서 제일 넓고 천장도 높은 방.

이곳에서 비행 훈련을 할 예정이다.

"금호야. 만약 형이 떨어지면, 밑에서 받아 줘야 돼?"

"갸릉!"

금호가 맡겨만 달라는 듯이 대답했다. 믿음직스럽긴 한데,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알겠대.

촤아악-

나는 바로 천사의 날개를 펼쳤다. 금호가 놀란 눈으로 내 날개를 바라보고, 다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이 행동을 반복했다.

"그럼 날아 볼 테니까. 혹시 떨어지면 잘 부탁해?"

"!"

그제야 금호가 정신을 차렸다.

'그런 거였구나!'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금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날개에 전 신경을 쏟았다.

날개를 움직이는 법은 대충 알겠다. 날아오르는 법도 대충 알겠다.

나는 즉시 날개를 펄럭였다.

후웅-!

"워어!"

내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 가는 것이 느껴진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대충 2미터 정도 떠 있었다.

"오우."

뭔가 신나면서도 무서운 기분이다.

나는 고도를 더욱 높여 보았다.

이 유적지의 천장은 대략 8미터.

천장까지 가 보자.

내 몸이 날아올랐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비행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크으."

가슴이 벅차오른다.

인류가 처음 하늘을 날았을 때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비행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았다. 천사족의 비행 속도는 능력치에 따라 천차만별이라고 하였으니, 내 비행 속도가 빠를 리가 없었다.

그래도 기분 좋았다.

자유롭게 내 의지로 하늘을 나는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약 5분을 날았을까.

내 유유자적한 비행에도 끝이 찾아왔다.

날개를 움직이는 것도 결국은 근육, 즉 근력이다.

요컨대 내 근지구력에 한계가 찾아 왔다는 거다.

"왓!"

갑작스러웠다.

날개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뚝 멈춰 버렸다.

당연히 내 몸은 바닥으로 자유낙하했다.

이대로라면 큰 상처를 입겠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크르릉!"

다행히 밑에는 믿음직스러운 내 보호자. 금호가 대기하고 있다.

턱!

점프와 함께 내 몸을 공중에서 받고, 최대한 충격을 흡수하며 바닥에 착지.

내 몸에는 조금의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우. 금호 너 작용 반작용 법칙도 알아?"

"그릉?"

금호가 고개를 돌리며 갸웃했다.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

그냥 직감적으로 한 모양이다.

"아냐. 그냥 잘 했다고."

나는 금호를 껴안듯이 몸을 기대고는 미소 지었다.

비행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비행 시간은 약 5분이 한계였지만,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이점이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 * *

학교 인근에 있는 한 카페.

하시연, 김철진, 최지훈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연이 너는 사람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다. 강서율 그놈은 하나부터 열까지 수상하다."

최지훈이 차갑게 말했다.

"서율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니까."

하시연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최지훈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흑철 대검 사건부터 최근 악마 출현 사건까지.

강서율의 행보는 정상이라고 보긴 힘들었으니까.

"근거는?"

"그건······."

최지훈의 말에 하시연이 입을 다물었다. 하시연은 강서율의 정체가 천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둘만의 비밀이다. 최지훈이나 김철진에게도 말할 수는 없다.

"그, 그냥 감! 암튼 서율이 되게 착하다니까?"

고로, 이렇게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너희 둘 다 서율이 과거 조사해 봤잖아. 별 문제없었다면서?"

"평범했지. 고아원 출신이라는 거 말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즐겁게 지켜보고 있던 김철진이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의심스러운 거다."

최지훈이 말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놈의 활 솜씨와 단검술은 일품이다. 허나 그에 반해 놈의 과거에는 활이나 단검술을 배웠다는 기록이 일체 없었다."

그 사실이 최지훈의 의심에 불을 지폈다.

"아, 그건 나도 동의. 이상하긴 했지."

두 사람의 말에 하시연이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강서율의 비밀을 몰랐다면 자신도 수상하게 생각했을 테지.

지금은 아니지만.

"아, 아무튼 서율이는 나쁜 애가 아니야!"

"······또 얘기가 처음으로 돌아왔군."

최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가 안 된다.

돌하르방을 앞에 두고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무슨 근거를 대도 하시연은 결국 '서율이는 나쁜 애가 아니다.'라고 받아치며 끝난다.

'강서율 대체 시연이를 어떻게 구워 삶은 거냐.'

그럴수록 최지훈의 의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먼저 가 볼게."

돌연 하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갈 거면 데려다주지."

"응? 아냐.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학교로 돌아가야 돼."

"······약속? 이 시간에?"

"응. 암튼 이번 도전권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다음부턴 그러지 마. 서율이 진짜 좋은 애니까."

하시연은 그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카페를 빠져나갔다.

"이거 시연이가 강서율한테 폴 인 러브한 거 아닌가 몰라."

김철진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개소리."

"왜? 나는 가능성 있다고 보는데. 솔직히 악마 사건 때 멋있었잖아. 여긴 나한테 맡기고 먼저 가라!"

악마 사건.

그 두 마디 단어에 최지훈의 표정이 우울한 빛으로 물들었다.

악마의 두려움에 혼자 돌아가는 하시연을 막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부끄러움에 치가 떨렸다.

"김철진. 너는 정말 그 악마가 저 혼자서 재봉인 돼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나?"

"그렇겠지. 실제로 우리가 도망갈 때까지, 봉인 하나가 남아 있기도 했고. 봉인 해제가 완벽하지 않았던 거겠지."

김철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니라면 그 악마가 사라진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너. 설마 강서율이 그 악마를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 악마를 처리하려면 최소 10명의 S랭크 초인이 필요했을 거라던데. 그걸 강서율 혼자서 처리했다고? 말이 돼? 그것도 그 짧은 시간동안?

"······."

"임마. 정신차려. 시연이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건 알겠는데.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철진의 냉정한 말을 들으며, 최지훈은 생각했다.

정말 그런 걸까.

자신은 하시연에 대한 것 때문에 강서율을 억지로 나쁘게 보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부정은 못하겠다. 최지훈은 그만큼 하시연을 좋아하니까.

"아니."

고로, 이것은 단순히 아집일 수 있다.

"분명히 강서율에겐 무언가가 있다."

최지훈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 * *

금빛의 안식처에서 돌아와 기숙사 방에 복귀한 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하시연이 기다리고 있는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율아!"

저 멀리서 하시연이 손을 흔든다.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미소 짓는 모습이 자못 아름답다.

"일찍 왔네."

"제자는 항상 교관님보다 일찍 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디서 본 건지, 어설프게 경례 자세를 취한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설픈 경례는 교관을 화나게 한다는 건 못 배웠나 봐?"

"앗. 에헤헤."

하시연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뒤로 감췄다.

주위는 오늘도 한산하다.

그래서 이 변두리에 위치한 공원에서 훈련을 하는 거지만.

"오늘은 어떤 훈련이야?"

"응? 아. 오늘은 더 실전적인 사용법을 알려 주려고."

"실전적!"

최근에 하시연 때문에 어울리지도 않게 마력 공부를 하고 있다.

마력도 없는데 마력 공부라니,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는데. 어차피 언젠가는 얻어야 할 마력. 지금 공부하나 나중에 하나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고 있다.

뭐, 나름 재밌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중간한 소설 속 지식과 이곳의 전문적인 지식 사이에 교집합이 생겼을 때는 묘한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

"그 전에 일단 테스트. 지금까지 만들었던 조형물 중에 아무거나 5개 만들어 봐."

"그 정도야 껌이지!"

하시연이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스으으···

스산한 바람과 함께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고작 일주일 사이에 엄청난 숙달이다.

"완성!"

딱 3초 사이에 다섯 가지 빙결 조형물이 허공에 떠올랐다.

"형태도 제법 안정됐네."

"노력했으니까!"

하시연이 자신의 알통을 강조하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노력하니까 떠올랐다.

"혹시 몰라서 묻는데. 너 또 원거리 마력 방사 훈련 같은 거 한 건 아니지?"

"아, 안 했는데?"

눈이 파르르 떨린다.

내 시선을 피하기까지 한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했네. 했어."

"아, 아주 조금만? 시간 날 때······."

내 그럴 줄 알았다.

"네 재능은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니라니까."

하시연의 마력은 특별하다.

세계에 천 명밖에 없다는 속성 마력을 타고났다는 의미로 특별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하시연은 그 천 명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특별하다.

아니, 특이하다고 해야 할까.

"말했지? 네 마력은 오로지 네 반경 3미터 내에서만 정상적으로 발동된다고."

"응."

하시연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속성 마력에 근거리 특화라는 묘한 특성까지 붙어서 네 마력에 대한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거라고도 했고."

"······응."

덕분에 하시연은 정식적인 마력 구동과는 아예 다른 구동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마력을 움직일 수도 없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하시연을 바라봤다.

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불안한 거다.

"기껏 최고의 마법사가 될 자질을 타고 났는데, 사정거리가 3미터라니. 그런 게 어딨어. 뭐 대충 이런 거 생각하고 있었지?"

"!"

하시연의 어깨가 떨렸다.

"거 참 날 믿으라니까."

하시연의 재능은 특이하다.

그것은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한 말이다.

"응. 믿고는 있는데······."

불안해서 그러지.

그렇게 말을 흐렸다.

"좋아. 그럼 마침 기본 훈련도 끝났겠다. 오늘 네 재능이 얼마나 사기인지 알려 줄게."

하시연의 마력은 '빙결'과 '근거리 특화'라는 이중 특성이다.

그 두 가지가 합쳐지면 얼마나 사기적인 시너지를 내는지.

지금의 하시연은 아직 모른다.

"단언컨대 3미터 내로 접근만 하면 네가 이기지 못할 사람은 없어."

"······빈말이라도 고마워."

"빈말 같아?"

내 말이 빈말인 줄 아는 모양인데. 진심이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미래의 하시연.

그녀는 미래에 이렇게 불린다.

빙결여제(氷結女帝)

라고.

"아, 그리고 이거 다 알려 주면 내일은 실전 훈련이 있을 거야."

"실전? 어디서?"

"적당한 유적지가 있거든."

"······유적지?"

"응."

고대 유물.

[화령(火靈)의 속삭임]이 잠들어 있는 유적지.

하시연과 함께라면 그곳을 공략할 수 있다.

< 26화 두 번째 유적지 (1)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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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화 두 번째 유적지 (2) >

"와! 생성됐어! 특성!"

얼음덩어리로 가득한 한적한 공원의 중심에서 방방뛰는 하시연을 보고있자,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그 유명한 재능충인가.

"대박! 대박! 일주일 만에! 아하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기쁠만도 하지.

나라도 기쁘겠네.

"어때? 내 말이 맞았지?"

"응! 근거리 특화! 빙결 속성! 다 맞아!"

이 세계의 특성 및 스킬은 생성에 몇 가지 법칙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특성 및 스킬로 등록시키기 위해선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사용법을 숙달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등록 기간은 평균 1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걸 하시연은 고작 일주일 만에 이뤄낸 것이다.

이게 재능충이 아니면 뭐겠는가.

"알았으면 앞으로 내 말 더 잘 들어. 괜히 의심하지 말고."

"넵! 알겠습니다!"

또 그 어설픈 경례.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더니, 군대 위문 공연에서 걸그룹이 경례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외모는 걸그룹 뺨 칠 정도로 예쁘다는 게 조금 다른가.

"혹시 괜찮으면 특성이 어떤 이름인지 물어봐도 돼?"

"응. 어차피 서율이 넌 다 알고 있을텐데 뭐."

하시연의 눈이 허공을 훑는다.

그러다 한 곳에 멈춰 은은하게 미소 짓는다. 그 위치에 이번에 얻은 특성이 있는 거겠지.

"특성 빙결의 성역."

내가 알고 있는 그 특성이다.

"자세한 효과도 읽어 줄까?"

"응? 아냐. 그건 실례지. 이름만 알면 됐어."

어차피 자세한 건 다 알고 있다. 아니, 하시연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저 능력의 응용법까지 아주 훤히 꿰고 있을 정도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마력도 아슬아슬하지?"

"······응."

뭔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특성의 자세한 활용법은 내일 유적지에서 알려줄 테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고."

"진짜? 활용법까지 알려주는 거야?"

"그럼. 말했잖아. 나만 믿으라고."

"와아······."

하시연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눈을 직시한다.

부담스럽다.

이해는 간다.

속성 마법은 세계에 천 명 정도밖에 없는 희귀 속성.

심지어 개개인별로 장단점도 달라서, 숙달시키려면 혼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활용법까지 교수해준다고 하니, 기쁘지 않을 리가 있나.

"서율아. 나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아?"

"글쎄."

기뻐하고 있는 건 아주 잘 알겠다.

"지훈이한테 감사하고 있어."

"······응?"

갑자기?

"그 날. 지훈이가 너한테 흑철 대검을 던지지 않았으면 이렇게 관계가 생기지도 않았을 거 아냐."

"······그날 나 죽을 뻔했는데?"

"에이. 내가 서율이 니 실력을 아는데, 엄살은."

······내 실력이요?

네가 피하라고 외치지 않았으면 진짜 죽었을 실력 말하시는 건가?

"아무튼 서율아. 진짜 고마워."

"고맙긴. 나도 목적이 있어서 도와주는 건데."

고대 유물도 대신 얻어주실 거고, 빌런 퇴치도 대신 해주실 거고, 미래의 악마도 대신 퇴치해주실 거고.

나야 말로 고맙지.

"아무튼 오늘 훈련은 종료. 너 이따가 들어가서 추가 훈련하지 마라? 근력 트레이닝도 좀 오늘은 좀 자제해."

"으, 응? 무, 물론이지! 가서 씻고 바로 자려고 했어!"

"······."

구라다.

내가 말 안했으면 100% 단련실로 향해서 바벨을 열심히 들고 있었을 거다.

하시연은 상당히 심각한 중증의 운동 중독자다. 하루라도 운동을 못하면 온몸이 근질근질 거린다나.

"내일 봐서 오늘 푹 안 쉰 것 같으면 훈련 취소할 거야."

하시연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아, 아으. 그럼 가볍게 스쿼트만 하고 자면 안 될까?"

"응. 안 돼."

"그럼 푸쉬업만! 맨몸! 가볍게! 땀만 딱 흘릴 정도로!"

"응 돌아가."

"조깅!"

"그냥 자."

"사, 산책이라도."

"산책이란 이름의 크로스핏 할 거잖아."

"······으으. 진짜 안 돼? 체력은 아무 지장 없는데."

얘도 진짜 징하다.

"안 돼. 오늘은 마력 회복에 전념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쉬는 것도 훈련인데, 얘는 그걸 모른다. 아니, 아는데 실천하질 못한다.

"······아라써."

입술을 삐죽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한다.

뭐, 이 정도면 진짜 안 하겠지.

"그럼 내일 아침 10시에 교문 앞에서 보자."

나는 몸을 돌리고 손을 휘휘 흔들며 발걸음을 옮겼다.

"기숙사로 가는 거 아냐? 어디가?"

"나? 나는 단련실 가서 운동해야지."

"······응?"

"운동한다고."

순간 적막이 흘렀다.

뭔가 싶어서 돌아봤는데, 하시연이 용사에게 배신당한 히로인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배신자! 혼자만 그러는 게 어딨어!"

"풉."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배신자! 배신자! 그냥 확 이두만 커버려라!"

"뭐야 그게."

하시연의 칭찬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을 들으며 나는 길을 나아갔다.

* * *

다음날.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5시에 잠에서 깼다.

두근, 두근.

피가 전신을 돌며 심장이 세차게 박동한다.

수인족의 피를 얻은 후로부터 알람이 필요없어 졌다.

하루에 5시간 정도밖에 못자지만, 피곤하거나 한 일은 없다.

수인족의 피는 회복력 향상.

근육량을 비롯해 피로 회복의 향상에까지 큰 도움이 된다.

한 3일 정도는 안 자도 버틸 수 있을 거다.

물론 잠은 안 자도 훈련은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해줘야 한다. 안 그러면 폭주한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유적지 공략이 있으니까, 가볍게 땀만 빼야겠다.

가볍게 세면세족을 마치고 머리를 말리는 중.

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이 이른 시간부터 누구지?

혹시 하시연인가, 싶어서 머리를 덜 말린 채로 폰을 들었다.

"······유화?"

유화가 이 시간부터 웬일이지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오늘 약속 없죠?

뭔가 다급한 목소리였다.

―없죠? 그쵸? 없다고 해줘요.

뭔가 애절하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아쉽게도 오늘은 중요한 선약이 있네요."

오늘은 유적지 공략이 있는 날이다.

―미뤄요.

"안 돼요."

―왜요! 전 저번에 엄청 중요한 약속도 미뤘는데!

"······별 약속 없었다면서요."

정보 판매를 위해 갑작스레 호출한 날을 말하는 거다.

―사실 있었어요. 그니까 당신도 오늘 약속 좀 미뤄줘요.

뭔가 심상치않다.

무슨 일인데 이러지?

유화가 이럴 정도면 분명 심각한 일이겠지.

"무슨 일인데요?"

나도 덩달아 심각해져서 물었다.

―······오늘 12시에 신화 그룹이랑 미팅 있어요.

자못 비장한 말투였다.

"그래서요?"

―근데 협상 대표로 나오는 게 신지아에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요?"

―이번에 협상을 체결하지 못하면 비혼 길드가 꽤나 힘들어져요.

"하면 되잖아요. 둘이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지아가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 감정을 섞는 애도 아니고."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뭔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걸렸어요.

"뭐요?"

깊은 한숨 소리.

―당신 과거를 캐다가 신지아 그것한테 걸렸다구요!

"······예?"

순간 벙쪘다.

―당신 말대로 공적인 자리에 사적인 감정 끌어 들이는 애는 아니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그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 그냥 앞 뒤 꽉꽉 막혀서 협상 거절한다고만 하던가요."

―네. 정확하시네요. 혹시 당신이 시켰어요?

"그럴리가요."

그래도 대충 상황은 알았다.

지아의 성격은 이성적이며 냉철하다.

다만, 내가 얽히면 성격은 180도 바뀌어 아주 불 같은 성격으로 변한다.

공적인 자리에 사적인 감정?

마구 섞는다.

순도 100% 감정적에 몸을 맡긴 채 행동할 거다.

유화가 내게 해를 입혔다고, 혹은 입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유화의 제안이 신화와 비혼 양측에 도움이 되는 제안이라고 해도, 코웃음치며 거절할 게 분명하다.

"그런 상황이면, 회장님한테 직접 연락하면 되잖아요."

―그 딸바보한테요? 자기 딸이 알아서 했을 텐데 왜 자기한테까지 연락하냐고 뭐라 할 걸요?

"······그렇겠네요."

내 생각이 짧았다.

유화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니까 좀 도와줘요. 지금 신지아 설득할 수 있는 협상 카드는 제가 생각하기엔 당신밖에 없어요.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정은 알겠는데, 그래도 중요한 약속이라 취소하긴 힘들어요."

유적지 공략은 중요하다.

당장 다음주에 있을 최지훈과의 랭킹전에서 이기기 위해선 지금 당장의 전력 상승이 필요하다.

이번 유적지 공략이 마지막 기회다.

―······.

수화기 너머로 툴툴대는 소리가 들린다.

삐진 모양이다.

―됐어요! 흥이다! 다음부턴 약속 잡을 때 1주일 전부터 비서랑 예정 잡은 뒤에 연락해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만나······

"대신, 지금 지아한테 미리 연락해둘게요. 유화 씨는 제 지인이니까 잘 봐달라고."

―······기는 하는데. 서율 씨는 그런 흔하디 흔한 사람들과는 다르죠! 그럼요! 언제든지 연락해요!

태세 전환이 벼락보다 빠르다.

자못 귀여운 태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럼 됐죠?"

―네! 그럼요! 이런 이른 아침부터 실례했어요.

목소리에 흥얼거림이 감돈다.

그렇게 좋을까.

"고마우면 다음에 옥화당에서 밥 한 끼 더 사요."

그날 이후 일반적인 음식에서 맛을 느낄 수 없는 몸이 됐어.

―예. 날짜 잡아 둘게요.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 묻어 나온다.

그렇게 좋을까.

"그럼 전 아침 단련이 있어서. 나중에 다시 연락해요."

―네. 서율 씨.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뭔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오전 9시 50분.

교문 앞에 도착했다.

"서율아~"

저 멀리서 나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캐리어를 들고 있는 하시연이 보인다.

캐리어엔 하시연이 사용하는 실전 장비가 가득 담겨있을 것이다.

"어제는 푹 쉰 것 같네."

"응. 어떤 배신자님이 신신당부를 하셔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잤어."

"······표현 참 맛깔나네."

이를 악물고 열심히 잤다니.

뭐야 그게.

"그래서, 어디로 갈 거야?"

"의정부쪽."

"의정부 어디?"

"옥염의 대지."

"······어디라고?"

하시연의 얼굴이 굳었다.

"옥염의 대지라고."

"그, 내가 생각하는 거기?"

"맞을 걸?"

"금지 구역 말하는 거 맞지?"

"맞네. 거기야."

하시연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거기 있는 유적지를 우리 둘이 깬다고?"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하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치? 다른 사람들도 있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옥염의 대지를 둘이서······."

"너 혼자 깰 건데?"

"······예?"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그냥 안내자.

공략하는 건 하시연 혼자다.

"너 혼자 깰 거라고. 네 훈련이니까."

하시연은 넋이 나간 듯 떨리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뭔가를 잘못 들었다 싶은 표정이다.

"걱정 마. 너 혼자서 충분히 깰 수 있으니까."

하시연의 능력과 내 지식이라면 오늘 안에 깨고 자정 전에 복귀할 수 있다.

"그래도······."

아직도 겁먹은 표정이다.

그럴 만도 하다.

금지 구역은 위험한 곳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을 테니까.

저렇게 주눅든 상태면 안 해도 될 실수도 만들어서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걱정 마. 정 안되면 내가 봉인을 풀면 되니까."

"아!"

하시연의 안색이 밝아졌다.

내가 봉인을 푼다는 말에 한순간에 안심한 모습이다.

근데 미안해서 어쩌나.

나한테 봉인 같은 건 없는데.

오히려 지금 이 상태가 봉인을 푼 상태인데.

······아 자괴감 든다.

"그럼 바로 가자."

그래도 하시연이 자신감을 되찾았으니 됐나.

"아, 응!"

우리는 의정부, 금지 구역 '옥염의 대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27화 두 번째 유적지 (2)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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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화 두 번째 유적지 (3) >

"근데 금지 구역에 그렇게 막 들어갈 수 있어? 지키는 사람없나?"

옥염의 대지 인근에 도착하자, 하시연이 내게 물었다.

"음. 경비가 있긴 한데. 많지도 않고. 몰래 들어가는 것 정도는 가능해."

옥염의 대지는 금지 구역치고는 안전한 축에 속한다.

구역 내로 침입하지만 않으면 위협은 없다시피하다.

그렇기에 경계가 허술하다.

자살 지망자가 아닌 이상에야 금지 구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없으니까.

"······진짜 우리 둘이 들어가는 거지?"

하시연이 어정쩡한 철조망을 바라보며 물었다. 철조망 건너편은 대지의 색깔부터가 다르다.

시뻘겋다. 흡사 마그마를 연상시키는 색깔이다.

"너무 걱정 마. 가자."

우리는 가뿐하게 철조망을 넘었다. 후끈한 열기. 폐로 들어오는 공기의 질부터가 다르다.

묘하게 사우나 같은 느낌이네.

"잠시만 지형 좀 살피고."

"응."

나는 주위를 살폈다.

반쯤 붕괴한 산맥의 꼭대기에 유적지의 입구가 있다고 했는데. 어디 있으려나.

"저긴가?"

찾았다.

진짜 말 그대로 반쯤 붕괴한 산맥이었다.

붕괴돼서 내부의 모습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흡사 지옥을 연상시키는 그 끔찍한 내부가 말이다.

"······설마 우리가 갈 곳이 저기야?"

내 시선을 쫓아 산맥을 바라본 하시연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응. 저기야."

"나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

"응. 안 돼."

나는 싱긋 웃었다.

* * *

한편, 신화 그룹 건물 내부의 접견실.

신지아와 유화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서율이 뒷조사는 왜 하신 건가요."

살벌한 공기를 뚫고, 신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궁금한 게 있다고 몰래 뒤를 캐나요?"

유화는 당당했다.

"몰래라뇨. 서율 씨한테 당당하게 '당신의 과거를 캐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조사한 건데."

신지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서율이한테 미리 말했다고요?"

"네. 적당히 하라곤 하셨어도, 하지 말라곤 안 하시던데."

신지아의 눈이 의문으로 좁혀졌다. 유화와 강서율이 어떤 관계인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유화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화제를 전환했다.

"궁금한 게 풀리셨으면 슬슬 본제로 넘어가 볼까요?"

유화가 서류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일단 이번 협약은 비혼 길드에게도, 신화 그룹에게도 도움이······."

"그 얘긴 됐어요."

신지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유화의 말을 끊었다.

참으로 단호했다.

유화의 눈이 당황으로 떨렸다.

'강서율 거짓말쟁이! 말 잘 해 준다고 했으면서! 또 듣지도 않고 거절하려고 하잖아!'

괜히 강서율이 원망스러웠다.

"신지아 씨.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하시―"

"맺어요. 협약."

"―지 마시······ 네?"

"비혼 길드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요. 신화 그룹에도 득이 되는 얘기니까."

유화의 표정이 멍해졌다.

넋이 나가 버린 모습이다.

'······이렇게 쉽게?'

그간 몇 번을 얘기해도 들어주는 척도 안 하더만!

강서율 문자 한 방에 듣지도 않고 수락하신단다.

'아 짜증나.'

뭔가 기쁘면서도, 억울했다.

"협약 얘기는 이걸로 끝이죠? 그럼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신지아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유화의 심연까지도 엿보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유화 씨는 대체 서율이랑 무슨 관계죠?"

대체 어떤 사이길래, 강서율이 잘 봐달라는 문자를 보낸 걸까.

유화의 눈에서도 이채가 흘렀다.

'아하.'

왜 이렇게 얘기를 서두르나 했더니만. 신경쓰이는 게 따로 있어서 그랬구나.

뭔가 신지아의 표정이 평소보다 다채롭고, 감정적이다.

한번 속을 떠 볼까?

"서로의 은밀한 비밀까지 공유하고 있는 사이라고 할까요."

"······은밀한 비밀?"

신지아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역시!'

평소의 냉정한 신지아답지 않게 생각이 겉으로 훤히 드러난다.

유화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신지아 씨도 익히 알고 계실 비밀이에요."

지금이라면 유의미한 반응이 나올 것 같다.

"피알레 알로 사건을 해결한 영웅이 사실 강서율이라는 비밀."

신지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서율이가요? 그럴 리가요."

유화의 말이 자신의 속을 떠 보기 위함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챘기 때문이다.

'선조님과 내 관계를 듣고 대충 찔러 보는 거겠지.'

아니면 강서율의 과거를 캐다가 무언가 미심쩍은 것을 찾았다거나. 아무튼 지레짐작일 확률이 높다.

"서율이. 활을 잘 쏘긴 하지만. 능력치가 많이 낮거든요."

자못 완벽한 표정 연기였다.

"흐음. 그런가요."

유화가 오묘한 표정으로 답했다.

하지만 속으론 환호하고 있었다.

유화는 조금 전 신지아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내 추측이 맞았어.'

원래부터 90% 이상 확신하고 있었지만, 방금 그 반응으로 100% 확실해졌다.

역시 세계수 테러 사건을 해결한 건 강서율이다.

신지아는 그것을 알고 있기에 강서율에게 호의를 표하는 것이다.

죽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모자라, 원수까지 갚아 준 거니까.

그리고 피알레 알로를 강서율이 처리했다는 것은······.

'피알레 알로도 단독범이 아니라 진리의 구명자 소속 빌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되는데.'

모두 정황 증거일 뿐이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딱딱 들어맞고 있다.

'확실해.'

강서율은 진리의 구명자에게 원한을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진리의 구명자에게 극심한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일까.

대체 어떤 과거가 있길래 이렇게 완벽하게 은폐한 것일까.

'제일 수상한 건 역시 강서율이 살았던 고아원인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린 햇빛 고아원.

강서율의 과거에서 그나마 수상한 부분이라고 한다면 그곳밖에 없었다.

'그쪽을 좀 더 파 볼까?'

* * *

옥염의 대지 중추.

산맥의 꼭대기에 존재하는 유적지 '화염의 쉼터'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저길 들어갈 생각이야?"

하시연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한 눈빛이다.

이해는 한다.

"그래야겠지?"

솔직히 나도 불안해 죽겠으니까.

뭐야 이거.

일단 마그마가 보인다.

그리고 마그마가 보인다.

마지막으로 마그마가 보인다.

마그마밖에 안 보인다.

지옥의 가마가 있으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진짜 저 안에 유적지가 있긴 해?"

"있을······ 걸?"

"불안하게 왜 의문형이야···?"

설정이 변한 게 아니라면 분명히 있을 거다.

"일단 들어가 보자."

"들어갈 방법은 있고?"

"있지."

촤라라락-

나는 날개를 폈다.

"아."

하시연이 놀란 토끼 같은 눈으로 내 날개를 바라본다.

"날아갈 거야."

유적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날아가거나, 화염에 대한 절대적인 내성을 지니는 수밖에 없다.

"불편해도 5분만 참아."

나는 하시연을 안아 들었다.

별 감흥은 없었다.

하시연도 나도 두꺼운 장비를 입고 있는 상태라, 딱딱한 감촉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나저나 더럽게 무겁네.

"꽉 잡아. 혹시 모르니까. 떨어지면······ 알지?"

"아, 응!"

내 장난스런 으름장에 하시연이 떨리는 눈으로 내 목을 꽈악 안았다. 전력으로 말이다.

"켁켁! 야! 숨! 숨 막! 크헙!"

"아, 미안."

하시연이 서서히 힘을 풀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서율이 너 진짜 힘 약하구나."

추가로 디스까지 당했다.

사실 디스가 아니라, 내 힘을 묶고 있을 봉인에 대한 감탄이었겠지만,

봉인 같은 건 없으니 결국 디스나 다름없다.

"그니까 조심해. 비행 중에 이랬으면 둘 다 끽이었어."

"응. 조심할게."

"그럼 간다."

나는 날개를 쫙 펼쳤다.

그리고 가볍게 비상.

아이템으로 능력치의 보조를 받고 있으니, 10분 정도는 날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와아. 가까이서 보니까 더 이쁘다."

하시연이 내 등 뒤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목소리가 뭔가 몽롱하다.

힐끔 바라보니 눈동자가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내 날개에 아주 흠뻑 빠진 모양이다.

"관찰하는 건 상관없는데, 만지지는 마. 여차하면 추락할 수도 있어."

"아, 응. 알고 있어."

그렇게 약 5분이 흘러.

우리는 마그마 지옥을 넘어 유적지 입구에 도착했다.

"진짜 유적지였구나."

척 보기에도 유적지 같아 보이는 조형물과 작은 문이 우릴 반겨 줬다.

"역시 천사님이라 그런가. 이런 숨겨진 유적지도 다 알고. 대단하다."

순수한 눈빛이 나를 응시한다.

"그러고 보니 서율이 너는 몇 살이야?"

"응?"

갑자기 뜬금없네.

"기록에 의하면 천사족의 수명은 몇 천 년이라고 하던데."

"아."

그렇구나.

잘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의문이었다.

"비밀이야."

"에이. 쩨쩨하게. 나이 알려주는 게 뭐 어때서."

"됐고. 일단 집중해. 여기부터 진짜 시작이니까."

"아, 응."

내 진지한 말에 하시연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그럼 연다?"

나는 문을 열었다.

"흐으읍!"

아니, 열려고 했다.

"저기. 서율아?"

문이 안 열린다.

내 근력이 낮아서 그런가, 열릴 기미조차 안 보인다.

"뭐하는 거야?"

"아니, 그게, 저."

부끄러움에 얼굴에 열이 솟구친다. 하지만 여기서 당황할 순 없다. 나는 힘이 봉인된 천사라는 설정이니까!

"지, 지금 내 근력으론 열기 힘드네. 시연이 네가 좀 열어 줄래?"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아, 응. 알겠어."

하시연이 대수롭지 않게 문에 한 손을 가져다 댔고.

끼이익-

한 손으로 아주 손쉽게 문을 열었다.

"됐지?"

"······그래."

빌어먹을 능력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문이 완전히 열리고.

문 너머의 풍경을 본 순간,

"어?"

"응?"

우리는 당황했다.

"그, 서율아. 또 마그마밖에 없는데?"

"······그러게?"

문을 열었더니, 문 안은 또 마그마 지옥이었다.

말인즉, 또 날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 이런 묘사가 있었던가?

그냥 똑같은 비행 씬이라서 스킵한 건가.

아니면 아직 입구가 아닌 건가?

"자."

돌연 하시연이 내게 양팔을 벌렸다.

다시 안아 달라는 의미이리라.

"음. 좀만 쉬자."

"벌써?"

근데 아쉽게도 지금 당장은 못 날아간다.

"지금 비행할 힘이 없어."

힘이 달려서 도중에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

"어? 비행하는 데도 힘이 들어?"

"그럼. 날개를 움직이는 것도 근육인데."

"아. 내가 너무 당연한 걸 물었구나."

하시연이 머쓱한 듯이 웃었다.

"음. 되게 뜬금없는 질문이긴 한데. 날개는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응?"

별 걸 다 궁금해하네.

"음. 일단 날개뼈 부근에······."

나는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선에서 날개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사실 그냥 느낌적인 느낌으로 움직이는 거라, 대충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말하는 것뿐이었다.

"아. 그런 거구나. 음. 그런 식이라면······."

그런데 하시연에겐 대충인 이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응.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뭘?"

"보면 알아."

하시연이 득의양양하게 웃더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스으으-

뜨거운 공기에 확연한 냉기가 감돈다. 기분 좋다.

"형태는 이랬고. 움직임을 생각해서······."

뭔가 중얼중얼 거리며 집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식으로 조형하면······."

쩌저저저적-!

"됐다!"

"······."

하시연의 등 뒤로 얼음의 날개가 생겼다. 마치 내 날개를 그대로 얼음상으로 만든 듯한 디테일한 조형.

아까 비행 중에 내 날개를 계속해서 관찰했기 때문인가.

엄청난 완성도였다.

"역시 특성으로 등록되니까 정밀도랑 완성도가 천지차이네."

고개를 돌려 그 날개를 이리저리 바라보던 하시연이 다시금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럼 다음. 움직임은 이렇게 하고. 부족한 기능은 마력으로 채워 넣는 식으로······."

촤아아아악!

하시연의 얼음 날개가 세차게 펄럭였다.

"우왓!"

그리고 다음 순간.

"됐다! 됐어! 으히히!"

"······헐."

하시연은 공중을 날고 있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얼음 날개를 제 날개인양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다.

정말 미친 재능이었다.

아니, 아무리 근거리 특화 특성이 붙으면서 위력, 컨트롤, 활용도에 보정치가 붙었지만.

한 번에 얼음 날개까지 만든다고? 심지어 비행까지 해?

"······허허."

그 모습을 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안전한 고도와 안전한 지대에서 약 3분을 활강한 하시연은 서서히 내 앞에 내려섰다.

"응. 됐어. 이 정도 마력 소비량이면 30분 정도는 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곤 내게 양손을 쭉 뻗어 내밀었다. 아까와 비슷한 동작이었으나, 그 뜻은 완전히 달랐다.

"서율아. 안겨."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서율아?"

이런 재능충 같으니라고······.

< 28화 두 번째 유적지 (3)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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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두 번째 유적지 (4) >

하시연 재능충 버스는 순항 중이었다. 탑승감이 끝내준다. 리무진이 따로 없다.

"쉽다 쉬워~"

내 앞에서 하시연이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고 있다.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정말 둘이서 유적지를 공략하는 거 맞냐고 불안에 떨던 여자가 맞나 싶다.

"여기 되게 좋다. 쉽고. 경험치도 많이 주고."

하시연이 몸을 빙글 돌려 나를 바라본다.

"고 랭크 몬스터니까. 당연히 많이 주지."

"얘네가? 고 랭크 몬스터라기엔 너무 쉬운데."

"말했잖아. 너랑 상성이 잘 맞아서 그렇다고."

"얼음에 약하다는 걸 감안해도 너무 쉬워서 그렇지."

이 유적지 '화염의 쉼터'는 누구나 다 예상하듯이 화염 속성의 던전이다. 약점은 수 속성. 그 중에서도 빙결 속성에 굉장히 약하다.

"네 근거리 특화 특성까지 겹쳐서 이중으로 상성빨을 받아서 그래."

"근거리 특화는 왜?"

하시연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만약 이 유적지 공략에 다른 빙결 속성 마법사가 나섰다고 가정해봐. 어떨 거 같아?"

"그야 나처럼 쉽게 잡겠지. 그냥 빙창(氷槍)으로 찌르면 죽는데."

하시연이 주위에 1미터짜리 빙창을 만들어서 손에 쥐었다.

진짜 특성 등록의 힘인지, 하루 사이에 숙련도가 격이 달라졌다.

"아니. 아마 고생 깨나 했을 걸?"

"어? 왜?"

"주위 환경을 봐."

내 말에 하시연이 주위를 살핀다. 간간이 마그마가 들끓고, 여기저기에 불길이 치솟고 있다.

상당히 뜨겁다.

사전에 유화에게 부탁해 구비해둔 온열 내성 코트가 없었다면 전신에 화상을 입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 환경에서 빙결 마법이 제대로 작동할까?"

"아!"

눈치 챈 모양이다.

"그래. 평범한 빙결 마법이라면 생성된 즉시 녹기 시작할 거야."

"근데 나는 왜······?"

"네 빙결 마법은 녹지 않거든."

하지만 하시연은 다르다.

3미터 범위 내에서라면 그 어떤 외부 간섭도 통하지 않는 근거리 빙결 특화 마법 '빙결의 성역'

하시연의 빙결 마법은 녹지 않는다. 그렇기에 얼음 날개도 녹지 않은 것이다.

이 유적지는 하시연에게 한없이 무력하다.

"내 특성에 그런 효과도 있었구나."

"말했잖아. 3미터 범위 내에서 싸운다면 너를 이길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거 진심으로 한 말이었어······?"

"당연하지."

"그, 그렇구나."

내 단호한 대답에 하시연이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베베 꼬았다.

"자. 궁금한 거 다 풀렸으면 슬슬 다시 출발하자. 오늘 안에 돌아가야지. 여기서 잘 순 없잖아."

"알았어!"

우리는 다시 길을 나아갔다.

* * *

그렇게 약 4시간이 흘러.

유적지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벨업! 와아! 하루만에 2단계나 올랐어!"

그사이 하시연의 레벨이 두 단계 올랐다.

"······축하해."

물론 나는 그런 거 없다.

레벨업은 내게 있어 유니콘 같은 존재다.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거.

"어? 서율아. 저기 문! 저게 수호자의 방이야?"

하시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맞네."

척 보기에도 '여기에 보스가 살고 있어요.'라고 주장하는 듯한 웅장한 문.

"그럼 이제 끝이라는 거네?"

"그렇지."

"우음. 아쉽다."

"뭐가 아쉬워?"

"이런 꿀 사냥터. 앞으로 또 없을 거 아냐."

아하.

경험치 오르는 맛에 취하셨구만.

"아쉬워하지 마. 어차피 화염 속성 몬스터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어."

"하긴. 그것도 그렇네."

하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진짜 수호자도 나 혼자 잡을 수 있어?"

"응. 수호자도 결국 빙결 속성에 약한 건 똑같거든. 대충 빙창 10자루 정도 꽂아 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일걸?"

"으음. 10자루면 꽤 빡센 거 같은데."

"그야 수호자는 수호자니까."

이곳의 수호자 '용암 도마뱀'은 거구에 맞지 않는 날렵함과 용암 브레스의 파괴력이 특징이다.

"뭐, 이상한 실수만 안 하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거야."

내 말에 살짝 불안으로 물들어 가던 하시연의 표정이 완전히 풀렸다.

"서율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를 100% 신뢰하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지금까지 한 게 있는데 믿는 게 당연하지.

"그럼 준비됐으면 바로 들어가자. 입장하자마자 용암 브레스 날아올 거니까, 바로 피할 준비하고."

"응. 알고 있어."

나는 단검, '암룡의 뿔'을 꺼내 쥐었다. 그 순간 바람의 길이 발동됐다. 만약을 위한 보험이다.

이걸로 준비 완료.

"그럼 가자."

끼이익-

우리는 수호자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화르르르륵-!

저 멀리서 용암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우리는 좌우로 갈라져서 브레스를 피했다. 화끈한 열기가 공기를 타고 느껴진다.

"1번!"

내 외침과 함께 저 멀리서 다시 용암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엔 나를 향한 브레스다.

나는 바람의 길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화르르륵-

"아놔."

신발 끝이 약간 불탔다.

이거 비싼 건데.

그래도 피했으니 됐다.

"2번!"

다시 용암의 붉은빛이 점멸했다.

이번엔 놈에게 접근하는 중인 하시연에게 용암 브레스를 뿜었다.

하시연은 아주 스마트한 움직임으로 놈의 브레스를 피했다.

"오케이 3번 끝! 재충전까지 약 15초!"

"확인!"

이게 용암 도마뱀의 공략 방법이다.

용암 도마뱀은 세 번의 브레스를 연달아 뿜고 난 뒤, 15초가량의 충전 시간을 지닌다.

그 사이에 공격하고, 충전이 완료되면 회피에 전념한다.

아주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공략법이었다.

쩌저적-!

어느새 용암 도마뱀의 지척까지 달려간 하시연이 양손에 얼음의 창을 쥐어 들었다.

도마뱀의 반격을 모두 완벽하게 피하고, 거슬리는 꼬리에다가 빙창을 정확히 꽂아 넣는다.

"키리리리리릭!"

용암 도마뱀의 울부짖음이 수호자의 방에 울려 퍼졌다.

여기까지 5초.

결국 놈은 도망을 선택했다.

본연의 날렵함을 이용해서 지면을 박찬다.

"하아압!"

하지만 괜히 초격을 꼬리에 꽂아 넣은 게 아니다.

꼬리의 감각 이상은 놈의 움직임을 어그러트렸고.

쩌저적-! 푸욱!

"키에에에엑!"

그 작은 틈을 하시연은 놓치지 않았다.

"나이스."

이걸로 오른쪽 앞발도 무용지물.

여기까지가 약 12초.

"일단 피해!"

"응!"

내 외침과 함께 하시연이 자리에서 이탈했다.

용암 브레스는 가까운 거리에서 피하기 힘들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야 한다.

화르르르륵-!

정확히 3초 후.

용암 도마뱀의 입에 다시 화염이 일렁였다.

또 3연속 브레스 패턴이다.

1번.

2번.

3번.

정확히 세 번의 브레스가 끝나고.

"다시 15초! 공격!"

"응!"

하시연이 다시 달려들었다.

동시에 그녀가 쥐고 있는 검에 얼음이 코팅되기 시작했다.

한쪽 다리도 빼앗았겠다.

괜히 시간을 주지 않고 이번에 승부를 볼 요량인 것 같다.

좋은 판단이다.

후우웅-

그때였다.

바람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완전히 폐쇄된 수호자의 방.

하시연과 용암 도마뱀의 움직임에 따라서 움직여야 할 바람이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리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

그 바람은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설마!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

그곳에는 또 한 마리의 용암 도마뱀이 입 안에 용암을 머금고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어째서 용암 도마뱀이 두 마리가······!

당황스러웠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저 위치에서 브레스가 쏘아지면 하시연은 절대 피할 수 없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다행히 놈은 아직 상황을 살피고 있다. 하시연을 확실히 마무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브레스가 다른 한 마리의 용암 도마뱀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모습이다.

이러면 아직 기회는 있다.

지금 이 위기를 찬스로 바꿀 절호의 기회가!

나는 빠르게 등에 매어 둔 활, '엘리시움 보우'를 꺼내 쥐었다.

지아가 준비해 준 엘레시움 보우.

이 활의 특수 효과는 아주 심플하다.

"집중."

활의 중앙에 장식되어 있는 엘리시움이라는 보석에 저장되어 있는 마력을 화살에 실어서 발사할 수 있다.

요컨대 일회용 파괴력 증폭 효과다.

지잉-

화살촉에 마력이 집중됐다.

그리고 타이밍을 기다렸다.

용암 도마뱀의 입에서 용암 브레스가 쏘아지기 직전인 그 타이밍을!

화르르르륵!

지금!

나는 즉시 화살을 쏘았다.

쒜에에에엑!

일촉즉발의 상황.

내 화살은 정확히 용암 도마뱀의 아가리에 명중했다.

콰아아악!

위력이 증폭된 화살이라고 해도, 내 힘으로는 용암 도마뱀의 두꺼운 가죽을 뚫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걸로 됐다.

애초부터 내 목적은 꿰뚫는 게 아니었으니까.

충격으로 용암 도마뱀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화르르르르륵-!

그와 동시에 용암 브레스가 엉뚱한 방향으로 쏘아졌다.

"빙고!"

다름 아닌, 다른 한 마리의 용암 도마뱀이 서 있는 장소로.

"키에에에에엑!"

용암 도마뱀이라고 비단 용암에 완전한 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용암 브레스를 뿜기 위해 내부 구조는 그럴지언정, 외부의 가죽까지 면역은 아니다.

용암 브레스의 강력한 파괴력은 놈들 자신에게도 유효하다.

화륵, 화르륵!

"키에···에에, 엑···"

털썩-

하시연의 연이은 빙결 마법에 안 그래도 힘을 잃어 가던 용암 도마뱀이 결국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시연이 넋이 나간 얼굴로 놈의 녹아 버린 시체를 바라보다가.

"앗."

아직 한 마리가 남았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어깨를 움찔 떨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척-

미소와 함게 엄지를 척 치켜들고는 '얼음 날개'를 펼쳤다.

그리곤 남은 한 마리의 용암 도마뱀을 향해 날아올랐다.

"살았다······."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얌마! 너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

천장에서 하시연의 외침이 들렸다.

그나저나 왜 용암 도마뱀이 두 마리나 있는 거지?

이번에야말로 설정이 변한 건가?

나는 하시연과 남은 한 마리의 용암 도마뱀의 전투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 * *

전투는 하시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진짜로오 죽는 줄 알았다아아아······."

하시연이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미안."

"응? 서율이 네가 왜 미안해?"

"두 마리가 있을 거라고 예상 못해서. 위험할 뻔했잖아."

이번 일은 전적으로 내 실수다.

저번 금빛의 유적지 사태를 생각하며, 최악을 넘어선 최악을 가정했어야 하는데.

"됐어. 결과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뭐."

"그래도 내가 안일했던 탓에······."

돌연 하시연이 내 입을 막았다.

"괜찮다니까."

그리곤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어차피 위험하면 봉인을 풀 생각이었다며. 난 하나도 걱정 안했어."

"······."

그래서 더 미안한 거다.

내게 봉인된 힘 같은 건 없으니까.

"그보다 빨리 보상이나 챙겨서 돌아가자. 나 배고파."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 그러자."

우리는 수호자의 방을 지나 더욱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와아."

제단 위에는 붉은 스태프가 놓여 있었다.

정령족 중에서도 불의 정령만이 다룰 수 있는 고대 유물 '화령의 속삭임'

제법 아름다운 스태프였다.

스태프 위에 특이한 형태의 시뻘건 화염까지 일렁이고 있어서, 그 신비로움이 배가되고 있었다.

"엄청 이쁘다."

하시연이 감탄했고.

"······진짜로?"

나는 경악했다.

"서율아 왜?"

"아니, 이게. 와. 이건 또 뭐지?"

물론 화령의 속삭임을 보고 경악한 것은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화령의 속삭임 위에서 일렁이는 특이한 붉은 불꽃.

내 기억이 맞으면 저것은 단순히 이펙트가 아니다.

엄연한 아이템의 일종이다.

"각인의 불길······."

2년 후부터 두각을 드러낼 진리의 구명자 소속 빌런.

'불의 악마' 내셔를 상징하는 아이템, 각인의 불길.

"이게 왜?"

그것이 제단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 29화 두 번째 유적지 (4)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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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화 무기의 주인 (1) >

의문을 뒤로한 채, 우리는 일단 옥염의 대지를 빠져나왔다.

지금은 의정부 인근의 공원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음. 각인의 불길이랬나? 그거 서율이 너 써."

멍하니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하시연이 뜬금없는 말을 해 왔다.

"어? 이거 진짜 좋은 건데?"

나는 하시연에게 고대 유물 화령의 속삭임과 화염의 불길에 대해서 모두 털어 놓았다.

"괜찮아. 어차피 내 빙결 마력과는 상극이라 쓰지도 못하고.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와."

나는 멍하니 하시연을 바라봤다. 은은한 달빛을 머금고 미소 짓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 그리고 고대 유물도 가져 가. 이유는 마찬가지~"

그렇게 말한 하시연은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세상에.

진짜 욕심이란 게 없는 건가?

"······천사야?"

"푸흡. 뭐래. 천사는 너구!"

아니, 진짜.

이 삭막한 세상에 이런 천사 같은 마음씨를 지닌 사람이 아직 남아 있다니.

하시연의 성정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놀랍다.

"아. 근데 각인의 불길. 봉인된 상태로 쓸 수 있어?"

"아마도."

[각인의 불길]은 랭크가 지정되지 않은 특수한 일체형 장비다.

한번 착용하면, 소유자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해제할 수 없는 귀속형 장비기도 하다.

효과는 아주 심플하다.

착용자의 마력 속성을 '화(火)'속성으로 바꿔 주는 것.

속성 마력 자체가 희귀한 이 세계관에서 후천적으로 마력의 속성을 바꿀 수 있는 몇 안 되는 특수 아이템이다.

심지어 착용 조건도 없다.

성능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

D랭크 초인이었던 내셔를 최상위 빌런의 자리에까지 올려 준 아이템이니까.

후반부 스토리에서 내셔를 죽이고 획득한 각인의 불길을 누가 가지냐는 것으로 싸움까지 일어났을 정도다.

"근데 서율이 너. 지금 마력이 아예 없다면서. 그거 착용해도 의미 있어?"

"그러게. 그게 문젠데."

하시연의 말처럼 내게는 마력이 아예 없다.

그리고 각인의 불길은 마력의 성질을 바꾸는 아이템이다.

과연 각인의 불길이 마력이 없는 내게 정상적으로 작용할까?

"흠."

"일단 착용해 봐. 만약에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봉인을 풀면 사용할 수 있을 거 아냐."

물론 내게 봉인 같은 건 없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추후 마력을 얻게 되면 사용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래. 일단 착용해 보면 알겠지."

나는 캐리어를 열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화령의 속삭임과 각인의 불길.

그중에서 나는 각인의 불길에 오른손을 가져갔다.

화륵-!

다음 순간, 각인의 불길은 내 오른손을 타고 내 심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어. 그냥 따뜻해."

조금 뜨겁다거나 그런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온천에 몸을 담근 것처럼 포근한 느낌밖에 없다.

그렇게 점점 작아져 가던 각인의 불길은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내 심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어때?"

"······모르겠어."

근데 차이점을 모르겠다.

그냥 평소랑 똑같은데?

마력이 없으니 뭐가 달라졌는지 아예 모르겠다.

"으음. 역시 마력이 없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건가?"

"그런 것 같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없는 건 없는 거고.

그리고 없으면 얻으면 되고.

"근데 내가 생각해 봤는데. 봉인을 조금만 느슨하게 하면 되는 거 아냐?"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허술한 봉인이 아니라서."

"아. 그렇구나."

그나저나 이 봉인이라는 설정으로 언제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걸까. 슬슬 양심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는데.

뭐랄까.

거짓말이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달까.

예를 들면 이런 거 거짓말도 자연스레 나온다.

"근데 안 그래도 봉인을 개선할 방법은 알아보고 있어. 천사의 힘은 숨기되, 능력치는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게."

"아. 진짜?"

"응. 언제까지고 F랭크에 머물 수는 없으니까."

"아하."

이걸로 내가 갑작스레 강해져도 개연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완벽한 거짓부렁이었다.

"아무튼 양보해 줘서 고마워. 이 화 속성 마력은 추후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에이. 내가 더 고맙지. 덕분에 레벨도 2단계나 올랐고. 빙결의 성역이라는 특성도 얻었고."

하시연이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 속 어둠이 씻겨나가는 듯한 해맑은 미소였다.

힐링되는 기분.

"앗. 저기 택시 왔다."

마침 저 멀리 공원 입구에 택시가 보였다.

"으아. 돌아갈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울상을 지었다.

"왜? 배가 그렇게 고파? 뭐 좀 먹고 갈까?"

하시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바벨 잡고 싶어서."

"······예?"

"오늘 어제 못한 상체 해야 되거든."

"······."

뭔가 방금 전까지 씌워져 있던 콩깍지가 순식간에 벗겨진 기분이다.

운동 중독자 무섭다.

"사실 오늘도 무리했으니 운동은 쉬라고 하고 싶은데."

택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하시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무슨 유령처럼 끼기긱 대며 고개를 돌렸다.

"잘 못 들었슴다?"

"오늘도 쉬는 게 좋을 것 같―"

타다다닥-!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게로 달려들어 내 어깨를 붙잡고 울먹인다.

"제발요. 알아서 자제할게요. 이틀 연속은 운동 금지령만큼은······."

"어? 어, 그게."

그 모습이 너무도 애잔해서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에이. 내일 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겠지.

"알았어. 오늘은 적당히 하는 걸로 합의―"

"하느님 천지신명님 강서율 님! 감사합니다!"

하시연이 내게 덥썩 안겼다.

그렇게 좋을까.

방방 뛰면서 소리친다.

문제는 나를 꽉 껴안은 상태로 그러고 있다는 것.

"컥, 커헙! 야! 숨막···! 아프···!"

"으아아. 미안 나도 모르게."

내 새된 비명에 그제야 정신 차린 하시연이 내게서 떨어져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네 근력이 내 조카 이하인 걸 자꾸 까먹네. 헤헤."

"쿨럭."

크리티컬 히트!

내 마음에 강렬한 데미지가 추가됐다.

심장을 후벼 파는 한 마디였다. 조카보다 못하다니!

"됐어. 일단 택시나 타자."

"아, 응."

우리는 택시를 향해 이동했다.

"흥흐흥~"

앞서가는 하시연은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지, 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벤치 프레스~ 어제는 하지 못한 벤치 프레스~"

······가사는 못들은 걸로 하자.

나는 그런 그녀를 뒤따라가며 생각했다.

이번 유적지 공략에도 조금 변수가 있었지만, 얻은 건 많았다.

무려 각인의 불길을 얻었으니까.

다만, 이번에도 의문이 남았었다.

어째서 용암 도마뱀이 두 마리였던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각인의 불길이 그 유적지에 있었던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아까부터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리고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신이 형 때문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S급 상태창]의 소설 의 내용들.

그중에서 내셔가 등장한 장면들에 이 일에 대한 정답이 있었다.

분명히 다른 간부와 대화를 나누는 씬이었지.

「이거? 도마뱀 새끼들 줘 패서 얻었지. 위험했어. 한 마리는 어떻게 처리했는데, 다른 한 마리는 처리하지 못했지.」

도마뱀 새끼들.

분명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살았냐고? 뭘 물어. 당연히 동료 새끼들을 제물로 바치고 튀었지. 각인의 불길만 챙겨서! 크하하하!」

대사가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뉘앙스였다.

이번 일은 이 두 마디 대사로 모든 게 설명된다.

용암 도마뱀이 두 마리나 있었던 이유도.

이곳에 각인의 불길이 있는 이유까지도.

내셔는 동료들과 이곳. '화염의 쉼터' 공략에 나섰을 것이다.

한 마리는 겨우 잡았지만,

결과적으로 공략에 실패한 것이리라.

그들에겐 하시연 같은 존재 자체가 치트키인 초인이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내셔는 동료들을 배신. 미끼로 삼은 후에 이곳에서 각인의 불길을 훔쳐서 도주한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년 후에 있을 일이겠지.

이게 진실이다.

다행히 소설의 설정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도 내가 변한 것으로 인한 나비 효과의 일종이었다.

이번 일로 변한 건 크게 두 가지.

첫 번째.

이번 일로 내셔라는 빌런은 소설 속에서 아예 사라졌다.

그의 힘은 각인의 불길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

그 강력한 힘을 내가 손에 넣었다.

마력이 없기에 당장은 사용할 수 없지만, 마력을 얻기만 하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말이다.

이번 일이 앞으로 어떤 변수로 돌아올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애시당초 지금의 나는 내 손으로 계속해서 변수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어차피 변할 미래, 내가 쥐고 있는 미래의 정보들이 의미를 잃기 전에 최대한의 득을 보기 위함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내게는 그것밖에 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미래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아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바뀌고 있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건 자명한 이치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일로 미래가 나쁘게 변하진 않았을 거라 믿고 있다.

당장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주인공인 나 자신이 강해졌고, 강력한 빌런이 소멸했다.

둘 다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니 미래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한다.

"서율아. 캐리어 줘. 트렁크에 싣게."

나는 하시연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느덧 택시 앞까지 도착한 모양이다.

"아, 오케이."

우리는 택시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 * *

다음날 아침.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5시 30분에 기상했다.

내 혈관을 돌고 있는 수인의 피가 '어서 훈련하러 가요!'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감각이다.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 가벼운 세면세족을 마치고 단련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화령의 속삭임을 얻기 위해서 유적지 공략에 나선 건데, 정작 화령의 속삭임은 캐리어에 처박아둔 채였다.

각인의 불길에 정신이 팔려서, 마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것만 밤새도록 고민했다.

당장 고민해야 할 건 '화령의 속삭임'을 지금 사용할까, 말까에 대한 것이었는데.

아예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흠."

뭐, 지금 고민하면 되지.

어떡할까.

일단 화령의 속삭임을 획득한 이유는 이번 랭킹전에서 최지훈을 이기기 위한 종족 특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무슨 특성을 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뭐라도 하지 않으면 최지훈의 마갑을 뚫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목적을 생각하면 당장 사용하는 게 낫겠지만.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고대 유물을 막 써 버리기는 좀 아깝다.

그도 그럴 게 화령의 속삭임은 [고대 유물/A-랭크]의 고랭크 아이템이다.

아마 화령의 속삭임을 쥐고 있는 1분 동안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써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이건 하시연과 엮인 이후, 즉 '화염의 쉼터'를 공략할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계속해서 고민했던 일인데.

아직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둘 다 매력적인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고민을 계속하겠지.

지금 쓸까? 묵혀둘까? 같은 고민들 말이다.

딜레마다.

이럴때 딱 새로운 고대 유물 하나만 얻으면 좀 얼마나 좋을까.

아. 과거 백화점에서 뱀파이어 로드의 송곳니를 우연찮게 쥐었을 때, 1분간 꽉 쥐고 있었어야 됐는데.

아니지. 그랬으면 CCTV에 찍힌 영상이 남아서 괜한 주목을 끌었을 가능성이 높다.

언론에서 1만 년 만에 재림한 뱀파이어! 같은 기사를 냈을 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부정하면 '그 집단'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그래서 고대 유물을 눈에 띄게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에휴."

아무튼 여러모로 딜레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서 걷다 보니, 어느샌가 단련실에 도착했다.

"모르겠다."

일단 단련이나 하자.

땀을 한번 쫙 빼고 나면 또 새로운 생각이 나겠지.

나는 마음을 비우고 단련실에 들어섰다.

"여전히 빠르군."

단련실에 들어서자마자, 피진호 교관이 나를 반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주말엔 잘 쉬었나."

"네. 잘 쉬었습니다."

아뇨. 전혀 못 쉬었습니다.

유적지에서 여러모로 혹사해서요.

"흠. 딱 보니 주말에도 훈련에 열중한 모양이군. 근육이 꽤나 많이 피폐해졌어."

그러나 '신비를 보는 눈'을 지닌 피진호를 속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등 근육이······ 이건?"

돌연 피진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무언가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다.

"마력?"

"네?"

피진호가 들뜬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양쪽 어깨를 움켜쥐고 나를 빤히 응시했다.

"심장에서 시작되는 이 움직임. 역시! 마력이군! 그것도 일반적인 마력과는 다른······. 이건 화 속성 마력!"

피진호의 표정이 환희로 물들어 갔다. 반면 나는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설마 그의 눈이 각인의 불길까지 파악할 수 있을 줄이야!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네. 각인의 불길이 좀 대단하긴 하죠.

"하아."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피진호가 탐욕에 눈이 멀어 내 각인의 불길을 빼앗으려 하진 않을 테니까.

"사실 주말에―"

"벌써 씨앗이 개화하기 시작했단 말인가! 20세의 나이에!"

"······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개화가 어쩌고 저째요?

"대단해! 정말 대단해! 으하하하!"

어······.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 30화 무기의 주인 (1)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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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화 무기의 주인 (2) >

점입가경(漸入佳境)

내가 놓인 상황을 아주 잘 나타내는 사자성어가 아닐까.

상황이 계속 골때리게 돌아간다.

신지아는 나를 엘프라고 착각하고 있고.

하시연은 나를 천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화는 저 둘의 착각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어찌 됐건 내가 힘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화의 오해야 내가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이니 그렇다 쳐도,

신지아와 하시연의 경우는 완전히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

오해를 풀고 싶어도 풀 방법이 없었다.

그 둘의 오해를 풀려면 내 비밀인 '상태창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오해를 풀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들의 착각이 내게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군요."

그러나 피진호의 착각은 저 세 명의 경우와 조금 달랐다.

그의 오해. 내가 [무기의 주인]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은 굳이 내게 상태창이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풀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오해를 풀지 않으면 미래의 내게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피진호의 오해를 푼 것이다.

"그날. 네가 손에 쥐었던 목걸이의 이름은 무기의 극의."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착용 제한은 단 하나. 무기의 주인 특성을 지닌 자."

실수라고 해야 할지, 함정에 빠졌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피진호를 얕봤다고 해야할지.

"네가 무기의 주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명명백백(明明白白)하다."

이 세계의 아이템 착용 제한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능력치, 종족, 특성.

그중 능력치의 제한을 무시하는 특성은 간간이 존재해 왔다.

하지만 종족 제한과 특성 제한 자체를 무시하는 특성만큼은 역사상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신지아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나를 엘프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것이 이 세계의 상식이니까.

"한동안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이었다. 적당히 훈련을 도와주기만 하면서 서서히 신뢰를 쌓고, 그 후에 다시 얘기를 해 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기의 주인이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했다면 얘기는 다르지. 조용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번에 무기의 극의를 손에 쥔 것도 똑같다.

내가 그 목걸이를 손에 쥔 순간, 나는 [무기의 주인]을 소유한 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이번 각인의 불길을 습득한 일까지 겹쳐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무기의 주인은 본격적으로 개화함과 동시에 소유자의 마력이 개방된다고 한다.

[무기의 주인]의 페널티로 마력 자체가 없기에 콱 틀어 막혀 있던 혈관이 완전히 뚫린다고.

그리고 각인의 불길은 내 전신을 타고 흐르며 혈관의 불순물을 태웠다. 자연스레 마력이 움직일 수 있는 길이 형성됐다.

그 깨끗해진 혈관을 보고 피진호는 생각한 것이다.

'아. 개화가 시작됐구나.' 하고.

"만난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교관을 믿는 게 힘들 거라는 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믿어 다오."

이 착각을 불식시킬 방법은 없다. 내가 무슨 변명을 한다고 해도 피진호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겠지.

결국 신지아, 하시연의 경우와 비슷한 상황이 됐다.

내게 상태창이 없다는 비밀을 모두 털어 놓지 않는 이상, 피진호의 오해를 풀 방법은 없다.

"20살의 젊은 나이에 개화하기 시작한데 더불어. 개방한 마력도 속성 마력이라니. 강서율. 너는 내 아내를 아득히 뛰어넘는 천재가 분명하다."

내가 모든 비밀을 털어 놓는다 한들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의 피진호는 아내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신(新) 웨폰 마스터의 등장. 아니, 그녀를 뛰어 넘을 신예의 등장에 흥분을 금치 못하고 있는 상태다.

지금 저 상태라면 내가 무슨 변명을 늘어놓는다 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부탁이다. 내가 너의 페이스 메이커가 될 수 있게 해다오."

피진호가 고개를 숙였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네. 교관님 말이 맞습니다. 저는 무기의 주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될 대로 되라.

이 상황에서 오해가 하나 추가된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이렇게 된 이상 피진호 교관의 극진한 트레이닝이나 받아 보자.

"믿어 줘서 고맙다."

피진호가 내 어깨를 움켜 쥐었다.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힘으로.

"그 신뢰에 반드시 보답하마."

강한 힘이 느껴지는 강철과도 같은 눈동자가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한다.

"그럼 더 늦기 전에 다시 단련실로 돌아가서 아침 훈련을 시작하지."

피진호는 몸을 돌렸다.

"내일부터는 공용 단련실이 아니라, 내 개인 단련실로 오도록. 위치는 추후 전달하겠다."

어깨 너머로 힐끔 보인 피진호의 옆 얼굴은, 환희로 물들어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피진호 교관의 정식 제자가 됐다.

* * *

화려함의 끝을 달리는 휘황찬란한 방에서 클래식이 흘러 나오고 있다.

그 방의 중심에서 한 남성이 의자에 기울여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냉철한 눈빛. 정돈된 머리와 옷가지. 그의 표정은 깊은 분노로 잠식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 남성의 발치에 한 여성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은 거칠다.

"1분 49초."

눈을 감고 있던 남성이 서서히 눈을 뜨며 발치의 여성을 비스듬이 내려다 본다.

"네 욕심이 내 계획을 1분 49초나 지연시켰다."

마치 길가의 개미를 바라보는 듯한 무심한 눈빛.

"죄, 죄송합니다! 부, 부디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여성이 무릎을 꿇은 상태로 상체를 숙였다.

"용서. 흠. 용서라."

남성의 눈빛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한낱 개미새끼가 내 완벽한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는데. 너라면 용서할 수 있겠나?"

"무, 물거품이라뇨!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계획이 아주 조금 지연됐을 뿐이지 물거품이라고 하······!"

그러나 여성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촤아아아악-!

"내 계획은 악보. 너희들은 모두 악보 위의 음표다. 내 지휘 아래 완벽하게 움직여야 하는 의무가 있지."

여성의 머리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나는 불협화음을 용서하지 않는다. 절대로."

남성의 손에는 여성의 피가 한가득 묻어 있었다.

"쯧. 음표는 음표답게 내 명령대로만 움직이면 될 것을."

남성이 혀를 차며 손에 묻은 피를 바닥에 털어 냈다.

"밖에 누구 있나."

"네."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 왔다.

"치워라."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성은 다시 클래식의 잔잔한 음율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 초인 사관학교 잠입은 누가 할지 정해졌나?"

"네. 알렌 님이 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오호. 허미트(Hermit)인가."

은둔자 허미트.

결국 그가 움직이기로 한 모양이다.

"보스께서 큰 결심을 내리셨어."

남성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은둔자라면 믿을 만하다.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

남성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그 모습에 부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시체와 선혈을 모두 정리한 부하가 고개를 숙이며 읊조렸다.

"엘 페르제 에넌 도르마."

남성이 의자에 기대 누운 채로 적당히 손을 흔들었다.

"엘 페르제 에넌 도르마."

* * *

월요일 수업이 모두 끝났다.

"서율아! 같이 저녁 먹자!"

하시연이 내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마침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잘 됐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

피진호 교관과 선약이 있다.

"선약?"

"응."

나는 하시연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얘기가 길어질 수도 있어서 오늘 훈련을 봐 주긴 힘들 것 같아."

"응. 괜찮아. 오늘은 신체 단련 위주로 하지 뭐."

"쏘리."

"괜찮다니까. 그럼 내일 봐."

그 말을 끝으로 하시연은 교실 밖으로 나갔다.

교실 문 앞에는 김철진과 최지훈이 대기하고 있었다.

"무슨 얘기 했어?"

"응? 그냥 저녁 같이 먹자는 얘기."

김철진과 하시연이 먼저 교실을 나섰고.

"······."

최지훈은 3초 정도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내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뭐,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상관없지만.

나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피진호에게 온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이곳으로 와라. 너에게 전해 줄 게 있다.]

문자에는 지도가 하나 첨부되어 있었다.

아마 아침에 피진호가 말했던 개인 단련실이라는 데가 여기겠지.

나는 지도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아마 저기 같은데."

대충 10분 정도 걸었을까.

목적지로 보이는 건물에 도착했다. 되게 세련되어 보이는 건물이다. 단련실이라기보단 연구실 같은 외견.

"왔군."

교관은 건물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와라. 물건은 안에 있다."

"네."

나는 교관을 따라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건물 내부도 상당히 세련됐다. 인테리어도 인테리언데, 뭔가 굉장해보이는 최신식 장치들이 많았다.

교관 전용 단련실이라 그런가.

학생용 단련실이랑 되게 다르네.

"여기다."

교관이 No.4라고 적힌 방 앞에 멈춰 섰다.

"앞으로 단련은 여기서 할 예정이니, 위치를 잘 기억해두도록."

"네. 알겠습니다."

아마 여기가 교관에게 배정된 훈련 룸인 모양이다.

교관이 문 옆의 인증 시스템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인증되었습니다.]

치이익-

문이 서서히 열리고, 방 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와우."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SF영화 속 우주선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일단 먼저 출입자 데이터에 네 생체 코드를 등록해야겠군. 여기에 손을 대고 가만히 서 있도록."

"아, 넵."

나는 피진호 교관이 가리키는 곳에 손바닥을 댔다.

[생체 코드 등록중. 10%··· 19%···]

[100%]

"됐다. 떼도 좋다."

순식간이었다.

"앞으로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곳을 사용해도 좋다. 이 방의 자세한 사용법은 차차 알려 주마."

"어? 진짜요?"

이 시설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그래. 24시간 언제든지."

"와······."

대박이다.

이 정도 시설을 개인적으로 빌릴려면 얼마나 들까.

상상도 안 간다.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군."

내가 너무 촌놈처럼 두리번 거렸기 때문일까.

교관이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화하게 날 바라봤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받아라.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첫 선물이다."

교관이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것도 되게 SF틱한 생김새다. 여기 뭐가 들어 있으려나.

"감사합니다."

나는 상자를 덥썩 받았다.

근데 이거 어떻게 여는 거지?

"열어 봐라. 중간에 그 버튼을 누르면 열린다."

"아하."

상자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상자가 무슨 트랜스포머처럼 변신하기 시작했다.

아니, 변신이라기보단 봉인이 풀리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가.

"······이거 설마."

완전히 개봉된 상자에는 목걸이가 하나 들어 있었다.

"그래."

교관이 착용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생김새의 목걸이.

"무기의 극의. 내 아내의 유품이자, 웨폰 마스터를 상징하는 목걸이다. 그건 이제 네 거다."

당황하는 나를 보며, 교관이 웃었다.

"그 목걸이는 분명 네게 큰 도움이 될 거다. 착용해 봐라."

"······하지만."

"유품이라고 해서 너무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없다. 주인을 찾아간 것뿐이라 생각해라."

주인이 아니기에 죄송한 것이다.

내게 무기의 주인이란 특성은 없으니까.

"어서."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네. 감사히 쓰겠습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곤 목에 걸었다.

무언가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이다.

목걸이의 효과인가?

"잘 어울리는군."

교관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이 창을 들어 보도록."

무기 선반에 놓여 있는 두 자루의 창을 꺼내서 한 자루를 내게 넘겼다.

"창이요?"

갑자기?

나는 교관이 건넨 창을 이리저리 살폈다.

"창은 처음인가?"

"네. 처음 쥐어 봅니다."

"그렇군."

창은 진짜 난생 처음 들어 본다.

근데 뭔가 손에 익는 기분이다.

그때였다.

"한번 막아 봐라."

"네?"

후우우욱!

돌연 교관이 창을 내질러왔다.

갑작스러웠다.

"!"

하지만 더 갑작스러운 건 내 몸의 움직임이었다.

내 손이 난생 처음 다루는 창대를 아주 자연스럽게 움켜 쥐었고. 움직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끼기기긱! 팅!

"······어?"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피진호 교관의 찌르기를 흘려내고 있었다.

"하하하! 설마 처음부터 바로 반응할 줄이야!"

돌연 피진호 교관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이 광경을 내 아내가 봤으면 억울하다고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겠어."

교관이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 창을 가리켰다.

나는 서서히 피진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화염 속성 강기 같은 건 처음 봤다."

"······."

내 창은 붉은 마력을 두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이거."

내 가슴팍의 목걸이, '무기의 극의'도 마찬가지로 아주 붉게 빛나고 있었다.

< 31화 무기의 주인 (2)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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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화 무기의 주인 (3) >

강서율이 창을 내질렀다.

마치 보이지않는 상대와 싸우기라도 하는 듯.

베고, 흘리고, 찌르고를 반복했다.

강서율의 움직임은 우아하고, 정교했으며, 아름다웠다.

"······천외천(天外天)"

무아지경으로 창을 휘두르는 강서율을 바라보며 피진호는 전율했다.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단검술이나 궁술에 한해서는 천재로서의 면모를 뽐내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무기에 관해서는 초보자나 다름없었다.

저번주 금요일 수업까지만해도 분명히 그랬다.

"미치겠군."

피진호는 10년 가까이 교관을 하면서 천재라 불리는 초인들을 수도없이 봐 왔다.

그 중에는 현재 세계 랭킹 100위에 속해 있는 S랭크 초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올 정도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진심 어린 소름이 돋은 적은 오늘이 처음이다.

강서율을 천재라 표현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비하가 아닐까?

무심코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천외천(天外天)

하늘 위의 또 다른 하늘.

무기의 주인이 개화하기 시작한 강서율은 천재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 넘고 있었다.

"하하."

저 모습이 오늘 처음 창을 쥔 자의 모습이라고 말하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겠지.

'나라도 못 믿을 테니까.'

저건 괴물이다.

피진호의 아내도 천재였지만, 절대 저 정도는 아니었다.

'민지가 개화한 후에 저 영역에 들어서기까지 대충 1년 정도 걸렸던가.'

마침 한창 연애를 할 때라 잘 기억하고 있다. 강민지는 24세에 저 경지에 다다랐다.

'강기를 다룰 수 있는 '만개'의 영역에 들어서기까지 3년.'

도합 4년이 걸렸다.

하지만 강서율은 어떤가.

'길어야 사흘.'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설마 개화(開花)를 뛰어 넘고 만개(滿開)로 넘어갈 줄이야.'

무기의 주인은 3단계의 성장 과정이 존재한다.

1단계.

발아(發芽)

싹이 나다.

무기의 주인이 소유자의 신체를 특성을 사용하기에 걸맞는 신체로 벼리는 기간이다.

피진호의 아내 강민지의 경우는 23년이었다.

이 시기에는 능력치에 막심한 페널티가 부여된다.

무기의 주인이 신체 동화를 위해 모든 힘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는 몇몇 무기의 숙련도에만 보정치와 성장 가속도가 붙는다.

강민지의 경우에는 검과 창이었고. 강서율의 경우에는 단검과 활이 되겠지.

2단계.

개화(開花)

꽃이 피다.

본격적으로 성장이 가속화되는 단계다.

이 시기부터 능력치에 걸려 있는 페널티가 사라지고. 모든 무기 숙련도에 막대한 보정치가 붙는다.

이 과정에서 마력이 성장하기 시작하며, 마력이 완전히 성장하면 마지막 3단계로 넘어간다.

3단계.

만개(滿開)

꽃이 활짝 피다.

이 단계부터 마력을 무기에 두르는 '강기'를 사용할 수 있다.

앞선 20년간의 세월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막대한 마력을 무기에 담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크기, 강도, 예리함을 비롯한 모든 것을 사용자가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

지금 강서율이 사용하는 것처럼, 창대에 두른 마력을 예리하게 하여 검처럼 벨 수도 있고.

강기만을 길게 늘여서 찌르기의 리치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도 있다.

전성기의 강민지는 강기의 길이를 10미터 이상 늘릴 수 있었다.

'민지를 상대할 때는 전투의 상식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지.'

그 자유분방하고 유연한 공수의 전환은 상대함에 있어 까다로움 그 자체였다.

'······마치 소싯적의 민지를 보는 것 같군.'

희미하지만, 화염처럼 일렁이는 붉은 강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이리저리 창을 휘두르는 강서율.

신난 얼굴까지도 판박이다.

"민지야······."

강서율을 바라보던 피진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 * *

그날 밤.

"으어어. 죽겠다."

나는 침대에 뻗어 버렸다.

너무 신났다.

창을 휘두르는 게 너무 즐거워서 자제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대박이네."

특성 제한 아이템에 그런 기능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설마 '무기의 극의'를 착용하는 것으로 '무기의 주인'을 사용할 수 있게 될 줄이야.

"크으. 대박. 진짜 대박."

특성 제한이 걸린 아이템만의 법칙인 것일까.

무기의 극의를 착용하고 있을 때만 특성이 적용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근데 뭐 고대 유물처럼 시간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목걸이를 계속 차고 있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긴 한데, 그정도는 단점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조금이지만, 마력도 얻었고."

내가 강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히 [무기의 주인]의 효과였다.

피진호가 말하길.

무기의 주인이 개화하면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아마 이번에 무기의 주인을 얻게 된 것으로 마력을 획득한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거기에 '각인의 불길'이 시너지를 일으켜 화 속성 강기가 된 것이다.

"개꿀. 진짜 개꿀."

고대 유물을 통해 종족 특성을 모으는 게 최곤 줄 알았더니, 특성 제한 아이템을 모으는 게 최고였다.

문제는 특성 제한이 걸려 있는 아이템이 엄청나게 드물다는 건데.

뭐, 구할 방법이야 지금부터 찾으면 되는 거니까.

"아. 좋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 * *

다음날 아침.

오늘의 수업은 가상 유적지 공략이었다.

랭킹에 점수가 반영되는 훈련이라 반드시 고득점을 따야 한다.

랭킹 10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처음이네. 서율이 너랑 같은 조가 된 건."

지아가 신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게."

남은 두 명의 팀원이 다가왔다.

"어? 뭐야. 진짜네. 4인 파티인데 궁사 둘이 같은 조야?"

"궁사가 많이 남나?"

두 명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잠깐만. 서율이 포지션이 전위인데?"

"아. 혹시 단검 쓰려고 하는 건가?"

"으음······."

두 명이 애매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이해는 간다.

현재 사관학교에서 내 평가는 '뭐, 생각보다는 하네.' 정도다.

다만 이것도 대인전에 한정된 얘기일 뿐.

대 괴수전에서는 또 얘기가 다르다.

"쟤 괴수 가죽 뚫을 수는 있나?"

"아오. 괜한 짓하네. 그냥 멀리서 활로 어그로나 끌지."

"에이 그래도 뭐, 신지아가 있으니까 낙제는 안 하겠지."

대인전은 기술로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다.

하지만 괴수전은 기술만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다.

괴수전에서 중요한 건 능력치다.

괴수의 가죽을 뚫으려면 높은 근력이 필요하고, 짐승 특유의 불규칙한 공격을 피하려면 높은 순발력이 필요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전위에 서겠다고 하니까, 다들 난색을 표하는 게 당연하다.

"좋게 생각하자. 쟤 단검도 나름 잘 쓰잖아. 저번에 보니까 내구를 무시하는 기술도 있는 것 같았고."

"그래도 F랭크로 전위는 아니잖아. 에휴 한 명 없는 샘 쳐야겠네. 아. 짜증······ 히익!"

돌연 조원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왜? 더 얘기해 보지."

지아가 환하게 마소 지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다.

다만 눈은 연쇄 살인마 저리가라 할 정도로 살기등등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옆에서 보고만 있는데도 등골에 오한이 달린다.

진짜 무섭다.

당장 살인이라도 할 법한 분위기다.

지금의 지아를 말릴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됐어. 틀린 말도 아니고."

지아의 시선을 내 몸으로 가로막으며 말했다.

지아만 볼 수 있는 각도에서 '좀 자제해.'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쯧."

지아가 나만 보이는 각도로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공략 전부터 괜히 사기를 깎는 말은 자제 부탁해."

"어, 어. 알겠어."

"미안."

다행히 상황은 원만하게 수습됐다. 하지만 두 팀원의 눈빛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지금은 지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굽히고 가겠다는 느낌이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다음! 7조!"

마침 우리 조가 가상 유적지에 들어설 차례가 됐다.

"마지막으로 장비를 확인하도록. 1분 후에 바로 출발하겠다."

"네!"

우리는 대답과 함께 7조의 장비를 보관해 두고 있는 대형 캐리어를 열었다.

"아 맞다. 아까 너희 말 중에 틀린 말이 없다고 했잖아? 조금 정정할게. 잘 생각해보니까 틀린 말이 하나 있네."

"뭐?"

"나. 오늘 단검 쓸 생각 없어."

바람의 길은 뛰어난 특성이다.

하지만 몬스터와 지근거리에서 단검으로 치고박기엔, 내 능력치가 너무 부실하다.

리스크가 너무 크다.

"단검을 쓸 생각이 없다고?"

"어."

"그럼 뭘······ 창?"

나는 캐리어의 끄트머리에 있는 훈련용 장창을 꺼내 들었다.

* * *

가상 유적지에 들어온 뒤로 약 2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불만으로 가득했던 팀 내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유들유들하게 변했다.

내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했기 때문이리라.

"아. 죽겠다."

"진짜 유적지도 이렇게 빡센가?"

"몰라. 가 본 적 없어서."

훈련용으로 만들어진 가상 유적지라고 해도, 유적지는 유적지.

난이도는 상당하다.

오히려 훈련용으로 안전하게 설계됐기 때문에 더욱 난이도가 높았다.

마력 필드의 세이프티 설정 때문에 중상을 입을 일은 없으니까.

"정지."

수색과 원거리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지아가 모두에게 정지 사인을 보냈다.

"몬스터?"

"응. 두 마리. 수호자로 보이긴 하는데······."

지아의 눈빛이 날카로워 졌다.

"난생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야."

지아는 학술적인 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지아가 모르는 몬스터가 있다고?

"어떻게 생겼는데?"

"사자랑 비슷한··· 그래. 해태 같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해태?"

두 마리의 해테.

바로 떠오르는 몬스터가 있었다.

"혹시 한 마리는 붉고 한 마리는 파래?"

지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맞아. 어떻게 알았어?"

"두 마리의 해태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태극 해태]밖에 없었거든."

"오우."

다른 두 명의 팀원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지아는 존경심 가득한 눈이다.

"그럼 저 앞에 있을 수호자가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도 알고 있어?"

"알긴 아는데······."

아오. 어떤 사탄 같은 교관이 한 짓이지? 어떻게 1학년 수업에 [태극 해태]를 수호자로 넣을 생각을 한 거야.

"왜? 공략이 좀 까다로워?"

"까다로운 수준이 아니야. 이건 그냥 꽝을 뽑은 게 아닌가 싶은데······."

"어느 정도길래?"

지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세 명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태극 해태. 붉은 해태와 푸른 해태로 나뉘어 있는 쌍둥이 수호자."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붉은 해태의 특성은 근거리 데미지 흡수. 푸른 해태의 특성은 원거리 데미지 흡수."

"잠깐만. 흡수? 설마 피를 회복한다는 말이야?"

지아가 놀란 토끼 같은 눈으로 말했다.

"정답."

이게 태극 해태의 무서운 점이다. 섞여서 싸우다 보면, 근거리던 원거리던 역 속성에게 튀는 경우가 반드시 발생한다.

"아마도 저 수호자는 잡으라고 넣어 둔 게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려고 넣어 둔 거지."

"아!"

정보가 하나도 없는 희귀한 쌍둥이 수호자와 갑자기 조우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걸 보려는 거겠지.

"확실히 그런 특성이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싸웠으면 엄청 골치 아팠겠네."

"그러게."

두 명의 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최대한 버티는 식으로?"

입장 전에는 불만 가득한 눈초리를 향해 오던 두 명이었지만, 2시간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흠."

이제는 내게 오더를 맡길 정도다. 실력은 딱히 보여 준 적이 없으니, 내 두뇌를 신뢰하는 거겠지. 이런 면에서 필기 수석이라는 입장이 도움이 된다.

"잠깐만 생각 좀 해 보고."

"아, 응."

가상 유적지 공략을 비롯한 학교의 모든 시험은 '랭킹'에 반영된다.

반년 내에 랭킹 10위 내에 들어서기 위해서 지금 조금이라도 랭킹을 올려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네.

"잡자."

태극 해태를 처리한다.

그것도 내가 최대한 눈에 띄는 방식으로.

"······어? 잡자고?"

"그래."

"어떻게?"

"간단해. 두 마리를 완전히 분할시키면 돼."

"근거리 팀과 원거리 팀으로 두 명씩 나누자는 거지? 근데 그러면 궁사랑 마법사 조합이 위험하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가드가 하나는 붙어야 할 것 같은데."

"음."

나는 슬쩍 조용히 경청 중인 지아를 바라봤다. 내 시선을 느낀 지아가 나를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안에서 제일 강한 건 지아다. 아마 전위가 없어도 문제없이 붉은 해태를 처리할 수 있을 터다.

저게 '진짜'라면 모르겠지만, 엄연히 마력으로 만들어진 가짜일 터.

지아라면 혼자서 처리할 수 있을 확률이 높다.

다만 그렇게 될 경우 주목을 받는 것은 지아가 된다.

내 평가는 '신지아에게 잘 업혀간 사관생A'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랭킹은 쥐똥만큼 오르겠지.

그것은 내 목적과 반한다.

"그럼 3:1로 나누자."

"3:1? 신지아 혼자서 붉은 해태를 맡는 식으로?"

"아니."

그럼 뭐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너희 셋은 붉은 해태를 담당해 줘."

팀원들이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우리 셋이?"

"그래."

"서율이 너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지아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 나는······."

나는 가슴팍의 [무기의 극의]를 꽉 쥐었다.

"혼자 푸른 해태를 맡을게."

< 32화 무기의 주인 (3) > 끝

ⓒ 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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